Skip to content
Home » 용서 의 뜻 | ‘믿는 사람이 용서해야지!’ 근데 그게 잘 안돼요ㅣ김기석 목사ㅣ잘잘법 Ep.67 상위 75개 답변

용서 의 뜻 | ‘믿는 사람이 용서해야지!’ 근데 그게 잘 안돼요ㅣ김기석 목사ㅣ잘잘법 Ep.67 상위 75개 답변

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용서 의 뜻 – ‘믿는 사람이 용서해야지!’ 근데 그게 잘 안돼요ㅣ김기석 목사ㅣ잘잘법 Ep.67“?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https://sk.taphoamini.com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https://sk.taphoamini.com/wiki/.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잘잘법 :잘 믿고 잘 사는 법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319,771회 및 좋아요 7,498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용서 의 뜻 주제에 대한 동영상 보기

여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세요!

d여기에서 ‘믿는 사람이 용서해야지!’ 근데 그게 잘 안돼요ㅣ김기석 목사ㅣ잘잘법 Ep.67 – 용서 의 뜻 주제에 대한 세부정보를 참조하세요

“주님은 우리가 용서하길 바라셔”
“네가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해”
옳은 말처럼 들리긴 하지만
그 말은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용서해야한다는 당위와
그럴 수 없음 사이에서
우리가 찢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잘못이 있는데도
마치 없었던 것처럼 여기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여러분의 후원과 기도가 잘잘법 제작에 큰 힘이 됩니다.
후원하기 https://bit.ly/2VMN6tf​​​​
쉬운후원 https://bit.ly/2WcMSMl​​​​
후원문의 02-2650-7004
온전한 신앙과 삶을 찾아가는 의미 있는 이 여정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구독’과 ‘좋아요’ 눌러주세요~

용서 의 뜻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용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용서(容恕, Forgiveness)란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감정과 태도의 변화를 통한 의도적이며 자발적인 과정이며, 쌓여가는 공격적인 마음을 가지고 복수와 같은 …

+ 여기를 클릭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4/20/2021

View: 7615

용서 – 나무위키:대문

사전적 의미는 다른 사람이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너그럽게 봐준다는것을 의미한다.[1] 반대되는 개념은 복수라고 생각하기 …

+ 여기에 더 보기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6/15/2022

View: 7234

용서란 무엇인가? | 성경 질문 – JW.ORG

용서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너그럽게 봐주는 행위입니다. 성경에서 “용서”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떠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 여기에 표시

Source: www.jw.org

Date Published: 8/16/2021

View: 1271

용서의 의미 – 새마갈노

오늘 우리는 용서에 대해 생가해보고자 합니다. 용서(容恕)라는 말은 논어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용(容)자는 여기서는 “담다”라는 뜻으로 쓰인 말입니다.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www.eswn.kr

Date Published: 8/11/2021

View: 4692

용서의 의미 – 브런치

한자어 용서容恕는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을 동정하고 그 사람(또는 그 상황)을 받아들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의 어원. 이번에는 forgive …

+ 여기에 표시

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11/24/2022

View: 6454

용서란? – 치과신문

여여(如如)가 부처의 마음 상태이고 경지를 의미한다. 진정한 용서란 국어사전적인 행동에 대한 정의가 아니고, 한자 뜻이 의미하는 내면적인 마음 …

+ 여기에 표시

Source: dentalnews.or.kr

Date Published: 7/11/2021

View: 1679

용서(容恕)의 의미에 관한 노트 – 순례자의 여로에서

한자의 용서(容恕)에서 容은 ‘담다’를, 恕는 ‘같은 마음’이어서 문자적으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국어사전에 …

+ 여기를 클릭

Source: ockam.kr

Date Published: 7/23/2021

View: 6398

容恕(용서)의 한자적 의미 – 네이버 블로그

따라서 恕(서)의 전체적인 의미는 상대의 입장에 서서 마음(心)을 같이(如)한다는 데서 ‘용서하다’ ‘동정하다’ ‘헤아리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 여기에 표시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0/5/2022

View: 4032

용서 |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구함 – Church of Jesus Christ

주님께 용서를 구함. 죄는 무거운 짐이다. 그것은 죄의식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고뇌를 가져온다.

+ 여기에 보기

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8/19/2022

View: 2146

진정한 용서란 어떤 것인가?

다른 말로 기본적으로 용서란 불미했던 사건이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를 원상으로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그 사건을 청산하여 잊는 절차가 아니라 가해자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whyjesusonly.com

Date Published: 12/20/2021

View: 1739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용서 의 뜻

주제와 관련된 더 많은 사진을 참조하십시오 ‘믿는 사람이 용서해야지!’ 근데 그게 잘 안돼요ㅣ김기석 목사ㅣ잘잘법 Ep.67. 댓글에서 더 많은 관련 이미지를 보거나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용서해야지!’ 근데 그게 잘 안돼요ㅣ김기석 목사ㅣ잘잘법 Ep.67
‘믿는 사람이 용서해야지!’ 근데 그게 잘 안돼요ㅣ김기석 목사ㅣ잘잘법 Ep.67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용서 의 뜻

  • Author: 잘잘법 :잘 믿고 잘 사는 법
  • Views: 조회수 319,771회
  • Likes: 좋아요 7,498개
  • Date Published: 최초 공개: 2021. 4. 2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c7WbDHRo3Q8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용서(容恕, Forgiveness)란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감정과 태도의 변화를 통한 의도적이며 자발적인 과정이며, 쌓여가는 공격적인 마음을 가지고 복수와 같은 부정적인 정서을 버리는 것이다.[1][2] 용서는 용납과 다르다. 차이점들이란 행위의 잘못을 보지못하고, 용서의 필요성을 알지 못하고, 가해자가 행동에 대한 책임을 갖지 않고 변명하며, 가해자가 의식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망각이나, 법관과 같은 사회의 대표에 의해서 인지된 가해를 허락하는 사면이나, 그리고 관계 회복이라는 화해와는 다르다.

어떤 상황속에서 용서는 부채, 융자, 채무 혹은 다른 요구들 때문에 모든 요구들에 대해 무죄임을 선언하고 포기하는 법적 용어이다.[3][4]

심리학 개념이나 덕으로 용서의 이점은 종교 사상, 사회과학, 의학에서 탐구되어 왔다.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을 위하여 쓰여지는 용어이다.[5] 가해자 편의 책임에 관계없이 또 어떤 회생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연구 [ 편집 ]

행동과 관련된 용서에 대한 과정들 연구가 많아지고 있다.[6]

위스콘신 대학교의 로버트 앤라이트(Robert Enright) 박사는 국제 용서 연구소( International Forgiveness Institute)를 창립하고, 용서연구의 주도적인 역학을 하고있다.[7] 최근 연구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더욱더 용서를 잘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오랜 연구는 일반적으로 신경질적이며 노여움을 하는 사람들은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도 다른 사람들보다도 용서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특히 이러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피해를 준사람을 피하기를 원하고 2년 반 후에는 복수를 원하기도 한다고 한다.[8]

연구 결과는 용서를 하는 사람들이 분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보다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산다고 한다.[9] 첫 번째 연구하는 방법에는 사람들이 용서를 할때 심장 혈관 및 신경계의 기능을 증진시킨다고 한다.[10] 또 위스콘신 대학교의 연구에서는 용서하는 사람들이 질병에도 적게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용서가 적은 사람일수록 건강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11]

스탠포드 대학교의 프래드 루스킨(Fred Luskin) 박사는 용서배우기(Learning to forgive)라는 저술을 통하여 용서는 용서의 효과를 통하여 학습된다고 한다. 그는 삶의 기술(a life skill)로서 용서를 가르치기 위하여 매년 8월 첫번째 주일에 용서의 날 세계용서연맹(the Worldwide Forgiveness Alliance on Forgiveness Day)로 정하였다.[12] [13]

그는 북아일랜드 분쟁에 의해서 살해된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과 개신교들의 가족들을 연구하였는데 분노를 덜 하며, 상처를 잘 감당하며, 그리고 더 낙관적인 사람들이 여러 상황 속에서 용서를 더 잘하며, 더 동정적이며 자긍심이 많다고 한다. 그의 연구는 스트레스를 감소시키며 활력을 증가시키는 연구를 보여준다.[14]

종교적 관점 [ 편집 ]

유대교 [ 편집 ]

유대교에서는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면 용서를 주라고 한다(Mishneh Torah, Teshuvah 2:10).

기독교 [ 편집 ]

주기도문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슬람 [ 편집 ]

바하이 신앙 [ 편집 ]

아시아 [ 편집 ]

불교 [ 편집 ]

힌두교 [ 편집 ]

자이나교 [ 편집 ]

기타 [ 편집 ]

대중적 인식 [ 편집 ]

관계속에서 용서 [ 편집 ]

용서의 단계:

용서와 건강 [ 편집 ]

비판 [ 편집 ]

독립변수와 종속변수.[15]

자기 용서 [ 편집 ]

죄, 후회로, 양심의 가책, 비난, 수치, 자기혐오.

치료 모형 [ 편집 ]

책임, 양심의 가책, 복구 및 갱신.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참고 문헌 [ 편집 ]

Balancing the Scales of Justices with Forgiveness and Repentance , Randall J. Cecrle, 2007, ISBN 1-60266-041-7

, Randall J. Cecrle, 2007, ISBN 1-60266-041-7 The Power of Forgiveness , Marcus G. 2011, Sapients.Net

, Marcus G. 2011, Sapients.Net Radical Forgiveness: Making Room for the Miracle , Colin Tipping, 1997, ISBN 0-9704814-1-1

, Colin Tipping, 1997, ISBN 0-9704814-1-1 Forgiving and Not Forgiving: Why Sometimes It’s Better Not to Forgive , Jeanne Safer, 2000, ISBN 0-380-79471-3

, Jeanne Safer, 2000, ISBN 0-380-79471-3 Forgiveness: a Philosophical Explor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by Charles Griswold. ISBN 978-0-521-70351-2.

ISBN 978-0-521-70351-2. Hein, David. “Regrets Only: A Theology of Remorse.” The Anglican 33, no. 4 (October 2004): 5-6.

33, no. 4 (October 2004): 5-6. Hein, David (2007). “Austin Farrer on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The Anglican Digest》 49 (1): 51–54.

Konstan, David, Before Forgiveness: The Origins of a Moral Idea (Cambridge/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Cambridge/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Kramer, J. and Alstad D., The Guru Papers: Masks of Authoritarian Power, 1993, ISBN 1-883319-00-5

ISBN 1-883319-00-5 Lampert, K.(2005); Traditions of Compassion: From Religious Duty to Social Activism. Palgrave-Macmillan; ISBN 1-4039-8527-8

ISBN 1-4039-8527-8 Fred Luskin, Ph.D. Forgive for Good: A Proven Prescription for Health and Happiness (Harper, 2002)

(Harper, 2002) Murphy, J. and Hampton, J. Forgiveness and Merc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Norlock, K. Forgiveness from a Feminist Perspective (Lexington Books, 2009).

(Lexington Books, 2009). Pettigrove, G. Forgiveness and Love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Schmidt D. (2003); The Prayer of Revenge: Forgiveness in the Face of Injustice; ISBN 0-7814-3942-6

ISBN 0-7814-3942-6 Toxic Parents: Overcoming Their Hurtful Legacy and Reclaiming Your Life , Susan Forward, 1990.

, Susan Forward, 1990. The Railway Man: A POW’s Searing Account of War, Brutality, and Forgiveness, Eric Lomax,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너그럽게 봐주는 행위입니다. 성경에서 “용서”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떠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비교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니, 우리의 죄도 용서해 주십시오.” (누가복음 11:4) 그와 비슷하게,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드실 때도 용서하는 것을 빚을 탕감하는 것과 같은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8:23-35.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분한 마음을 ‘떠나가게’ 하고 자신이 입은 상처나 손실을 보상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참된 용서의 바탕이 비이기적인 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랑은 “해를 입은 것을 기억해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고린도 전서 13:4, 5.

용서한다는 말은 ···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용서의 의미

주일설교문(20. 9. 13) 성령강림 후 열다섯 번째 주일(마태복음 18장 21~35절)

▪ 용서와 용서 받음.

오늘은 창조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영을 부어 주시어 창조계가 새롭게 힘을 얻게 되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창조질서보전 운동에 더욱 힘을 내야겠습니다. 지난 태풍으로 고리, 월성 원전이 8기나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없다고는 하지만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기후 비상행동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어 다행이긴 합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마태 공동체가 전하는 18장의 말씀입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께 묻습니다. 자신에게 죄 지은 자를 일곱 번이나 용서를 해야 합니까? 그 때 예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씩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선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주인에게 용서를 받은 큰 빚(1만 달란트)을 지은 사람이 자신에게 아주 작은 빚(300데라리온)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은 모습을 보고 주인은 큰 빚을 지은 자에게 책임을 묻고 그를 다시 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네가 용서하면 하늘도 너를 용서한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환대의 법칙이 적용되었습니다. 네가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 서(恕)

오늘 우리는 용서에 대해 생가해보고자 합니다.

용서(容恕)라는 말은 논어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용(容)자는 여기서는 “담다”라는 뜻으로 쓰인 말입니다. 곧, 용서는 서(恕)를 용(容)하는 것입니다. 서(恕)는 “용서하다”라는 뜻입니다.

공자의 제자 여러 명이 모였습니다.

그 중에 자공(子貢)이라는 제자가 공자님께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평생을 두고 마음에 담아 실천할 만한 좌우명 하나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지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공자님이 “있고 말고” 하며 천천히 일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恕)니라” 라고.

이 서(恕)가 바로 용서(容恕)입니다. 서(恕)자는 같을 여(如)자 밑에 마음 심(心)자가 붙었습니다. 자기를 용서함같이 다른 사람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마음이 서(恕)입니다.

▪ 벌레 이야기

용서를 생각하면 이청준의 <벌레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소설인데 이 소설이 토대가 되어 영화 <밀양>이 나왔습니다. 벌레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던 알암은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로 여타의 취미생활을 갖지 못하다가, 최근에 학원까지 다닐 정도로 주산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알암은 유괴를 당합니다. 그 와중에 알암의 엄마는 온갖 노력을 다하며 자식의 무사귀가를 염원하고, 이웃인 김 집사의 권유로 기독교 신자가 되어 하나님이 자식을 무사히 되돌려주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유괴 80여일 만에 알암은 재개발 건물의 지하에서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범인은 다름 아닌 주산 학원의 원장으로 밝혀졌고, 그 또한 자신의 범행 일체를 자백하며, 사형수가 됩니다. 아들이 참혹하게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면서 깊은 슬픔에 잠긴 그녀는 신앙심을 버리고 범인에 대한 원한과 저주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아이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김 집사의 설득에 다시 하나님을 믿고 범인을 용서하기로 마음먹기에 이릅니다.

그녀는 심사숙고 끝에 자식의 살해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로 면회를 갑니다. 그러나 그녀가 어렵게 살해범을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면회를 간 것과는 달리 유괴 살해범인 주산학원 원장은 수감 생활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를 받았다며 평온한 자세로 그녀를 마주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그녀는 또 다른 고통과 함께 아주 깊은 절망감을 느낍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를 했단 말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고통 속에 힘겹게 살아가던 중, 살해범이 사형집행을 앞두고 남긴 유언, 즉 자신은 너무도 평온하며, 다만 유족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라는 말을 라디오를 통해 들은 후 약을 먹고 자살하고 맙니다.

▪ 하나님의 소환

벌레 이야기는 용서라는 주제를 설정하고 하나님을 소환합니다. 하나님은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가 아이의 생존을 요청하는 기도에 소환됩니다. 하지만 아이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어머니는 결국 실망하여 하나님을 부정하지만 다시 어머니는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평정을 찾고 살인자를 용서하러 감옥을 찾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살인범은 감옥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며 기쁨에 차 있는 모습을 보고 다시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절규합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한단 말인가? 하나님이 뭔데 나한테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를 용서해”라며 하나님을 거부하고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용서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피해 당사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한단 말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소환하여 너무나 쉽게 용서를 거래하는 모습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에서는 너무나 쉽게 용서가 판매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용서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영화 <미션>

1750년, 남미의 오지로 선교활동을 떠난 ‘가브리엘 신부’ 일행. 그들은 신비로운 폭포 절벽 꼭대기에 사는 원주민 과라니족의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이들과 함께 교감하는 데 성공합니다. 한편, 악랄한 노예상 ‘멘도자’는 우발적으로 자신의 동생을 살해하게 되고, 죄책감과 절망에 빠져 죽으려하는 그에게 ‘가브리엘’ 신부는 함께 원주민 마을로 선교활동을 떠날 것을 권합니다. ‘멘도자’는 자신이 사고팔던 과라니족의 순수한 모습에 진심으로 참회하며 헌신적으로 신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낙원에서의 평화도 잠시, 과라니족의 마을이 포르투갈 영토로 편입됨에 따라 원주민들은 위기에 처하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무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멘도자’와 비폭력의 원칙을 지키려는 ‘가브리엘’신부는 각자의 방식을 선택하기에 이릅니다.

이 영화에서 감동적인 장면 두 개가 생각납니다. 하나는 멘도사가 동생을 살해하고 죄책감에 죽으려할 때 가브리엘 신부의 권유로 과라니족 선교에 참여하게 되고 그는 과라니족을 노예로 팔아넘긴 것을 회개하며 자신의 몸에 동아밧줄로 큰 짐을 지고 큰 폭포를 오르는 장면입니다. 짐이 무거워 몇 번이고 넘어지고 떨어져도 그 짐을 지고 과라니족에게 가고 그들이 직접 그 짐의 밧줄을 끊어줌으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용서가 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멘도사가 마을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들고 나설 때 장면입니다.

로드리고 멘도사 신부 : 신부님! 축복을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가브리엘 신부 : 아니오. 만약 그대가 옳다면 신의 축복은 필요없을 것이오. 그리고 만약 틀렸다면 나의 축복은 소용이 없소. 만약 무력이 옳은 것이라면 이 세상에 사랑이 설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난 이 세상에서 살아갈 기력을 얻지 못할 것이오. 로드리고, 나는 당신에게 축복을 해줄 수 없소.

그리고선 자신의 목에서 십자가 목걸이를 벗어 멘도사 신부의 목에 걸어줍니다.

결국 가브리엘 신부도 멘도사 신부도 죽습니다. 그 들의 방법은 달랐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과라니족을 사랑한 것은 분명합니다. 멘도사는 자신이 잡아 노예로 팔았던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 과라니족의 영혼 속에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 용서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용서받는 다는 것이 무엇진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 손양원 목사

6.25 때 지리산 밑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자신의 두 아들이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곧바로 이 공비들이 잡혔지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용서해 준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 손양원 목사입니다. 용서만 해 준 것이 아니라 이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입적하여 자기 자식과 똑같이 사랑한 거룩한 이야기가 널리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절대로 가식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진심으로 마음을 비우고, 사랑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용서란 그런 것입니다.

너무 쉽게 용서하려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용서가 때로는 상대방을 새롭게 하고 자신을 자유케 합니다. 그럴 땐 지체하지 말고 용서하십시오.

▪ 용서의 계절

새롭게 주어지는 시간 시간을 알뜰하고 / 성실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쓸데없이 허비한 /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함께 사는 이들에게 바쁜 것을 핑계 삼아 /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못하고

듣는 일에 소홀하며 건성으로 지나친 /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내가 어쩌다 도움을 청했을 때 / 냉정하게 거절한 /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다른 사람에게 남의 흉을 보고 때로는 / 부풀려서 말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전달하고

그것도 부족해 계속 못마땅한 눈길을 보낸 /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감사보다는 불평을 더 많이 하고 / 나의 탓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말을

교묘하게 되풀이한 /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 나도 그렇게 했으니까요.

사소한 일로 한 숨 쉬며 실망하며 / 밝음 웃음보다는 우울을 전염시킨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 나도 그렇게 했으니까요.

+++++++++++++++++++++++++++++++++++++++++++++++++++++++++

가을은 용서(容恕)의 계절입니다.

유대교의 세 번 용서를 베드로는 일곱 번 예수는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랍니다.

하지만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도 있습니다. 성령을 훼방한 죄입니다.

생명파괴로 창조주를 모독한 죄, 진리를 훔쳐 조소거리로 만든 죄,

참 사람으로 사는 길을 가로 막은 죄, 가짜뉴스로 진실을 호도한 죄,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위장한 죄. 하나님 행세를 하는 가증한 죄입니다.

이제 용서할 사람은 용서하고 용서 못할 사람은 용서하지 않으렵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가 아닐까요.

우리 이제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평화

저작권자 © 새마갈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용서의 의미

어리석은 사람은 용서하지도 않고 잊지도 않습니다.

순진한 사람은 용서하고 잊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되 잊지 않습니다.

-토마스 사즈-

대상을 동정하고 받아들이는 일

용서는 ‘얼굴 용容’과 ‘용서할 서恕’라는 단어가 결합하여 이룬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 모두 ‘용서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용容은 집 안에다가 항아리를 들여놓은 모양을 본떠 만든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담다. 받아들이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恕는 ‘같다.’라는 의미를 가진 여如와 ‘마음’이라는 의미를 가진 심心을 결합해서 만든 단어인데요. 이 단어는 ‘남의 입장을 헤아려 동정하다. 사랑하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내 마음인 양 바라보고 아끼는 것이 동정이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두 마음을 같게 하다.

한자어 용서容恕는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을 동정하고 그 사람(또는 그 상황)을 받아들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의 어원

이번에는 forgive의 어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forgive는 용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영어 단어입니다.

forgive는 ‘for’라는 어원과 ‘ghabh’라는 어원을 결합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어원 for은 ‘떨어진 곳, 다른 곳, 건너편, 완전히, 전적으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원 ghabh는 ‘주거나 받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원 for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곳’ 그리고 ‘완전히’. 그래서 forgive의 근본적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방향은 총 네 가지입니다.

-다른 곳에 주다.

-다른 곳에서 받다.

-완전히 주다.

-완전히 받다.

forgive의 어원을 설명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다른 곳에 주다.’라는 문장을 활용해 forgive를 해석합니다. 분노 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다른 곳에다가 버리는 것이 용서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forgive는 수용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편에서 우리에게 닥쳐 온 것들을 우리가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또한 용서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어원 for을 ‘완전히, 전적으로’라고 해석하는 편을 좋아합니다. 용서는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전적으로 내려놓아야 가능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우리가 우리 눈앞에 벌어진 상황들을 완전히,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용서는 개인적인 생활과 집단적인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쭉 그랬습니다. 일어난 갈등들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관계가 지속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마음

어느 날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죽을 때까지 실행할 만한 한 마디 말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공의 질문을 받은 공자는 자공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건 서恕다.”

이 대화는 『논어』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공자가 말한 서恕는 용서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공자는 ‘타인을 자신처럼 여기는 마음’으로서의 서恕를 말하였습니다.

공자가 말한 서恕는 용서를 가능하게 만드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용서의 조건이자 바탕입니다.

용서는 물리적인 행위인 동시에 마음의 작용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마음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저 사람도 나처럼 행복해지고자 하는 보통의 사람이구나.’ 하는 동정의 마음입니다.

나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힌 사람은 내 눈에 사람이 아닌 무엇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이때 서恕의 마음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합니다. 사람을 연민하게 합니다. 결국 이것은 사람의 사람다움을 이해하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용서는 대상을 거스름 없이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용서는 단순한 망각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용서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을 다 잊어버리는 게 용서일까요. 그것들을 없던 셈 치는 게 용서일까요. 상처를 무작정 외면하는 게 용서일까요. 그 모두는 용서가 아닙니다.

흔히 잊어버리는 게 용서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용서는 단순한 망각이 아닙니다. 용서는 그보다 더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내 발로 내 상처에서 벗어나는 것이 용서입니다. 나에게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지만 내가 거기에 더 이상 사로잡혀 있지 않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을 가장 먼저 이롭게 하는 행위입니다.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을 가장 먼저 자유롭게 해 주는 행위입니다.

용서는 합리화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우리가 상대를 마음으로 이해해야만 상대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는 이해이지 합리화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잘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잘못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건 용서가 아닙니다.

‘나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그 사람’이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하고 그 사람을 내 마음에서 이만 내려놓는 것이 용서입니다. 내가 나에게 벌어진 상황과 더 이상 다투지 않는 것이 용서입니다.

내가 그 사람 편을 들어 주는 건 용서가 아닙니다.

그 누구도 이미 일어난 사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가해는 가해로 남아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우리를 그 가해의 순간에 가둡니다. 그런 반면 용서는 우리를 그곳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용서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용서하기 그리고 용서받기》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용서(容恕)는 한자어이며 국어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해석을 보면 행위에 대한 설명이고 행위를 하는 주체자의 생각이나 마음에 대한 내용은 담고 있지 않다. 한자 ‘容恕’를 풀어서 보면 ‘容’은 외적으로는 얼굴이나 용모를 의미하고 내적으로는 속내 혹은 속에 든 것을 의미한다. ‘恕’는 如(한결같음)와 心(마음)으로 구성되어있다. 한결같은 마음이 ‘용서할 서(恕)’이다. 즉 상대를 보아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단계를 의미한다. 특히 如(한결같음)는 공(空)과 같이 일체 동요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여여(如如)가 부처의 마음 상태이고 경지를 의미한다.

진정한 용서란 국어사전적인 행동에 대한 정의가 아니고, 한자 뜻이 의미하는 내면적인 마음에서 상대를 보고도 흔들리지 않는 무심한 경지에 들었을 때가 진정한 용서다. 즉 꾸짖거나 벌하지 않는다고 용서가 된 것이 아니다. 영어로 forgiveness 역시 for(멀리)와 give(주다)로 ‘마음 밖에 내 보내다’ 즉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의미로 한자 의미와 유사하다. 상대를 보고 마음에서 분노든 미움이든 억울함이든 어떤 동요도 일어나지 않아 비로소 용서가 된 것이다.

요즘 연예계와 스포츠계에서 학폭이 연일 폭로되고 있다. 학폭을 당한 피해자는 결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사건들을 때가 되어 밝히게 되는 것이다. 당시에는 힘이 없었거나 어떤 상황이 마음이 배제된 국어사전적 용서를 강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내면으로 들어간 사건은 평생을 두고 유사한 사건이나 상황을 만나면 생각나고 그때마다 분노하거나 저주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가해자는 기억못하는 하찮은 일일 수도 있으나 피해자는 마음에 큰 상처로 남는다. 마치 아이들이 장난삼아 돌을 던지지만, 개구리 입장에서는 죽고 사는 문제인 것과 같다.

살다 보면 용서 못 할 사람을 만난다. 필자도 몇 명을 만났었다. 그들을 만나거나 생각할 때마다 분노가 올라왔었다. 어떤 때에는 야비하고 비열하고 나쁜 놈이니 착한 사람들을 위해 사회에서 제거해달라고 매일 기도를 드린 때도 있었지만, 신은 그런 일에 별로 관여하지 않거나 대부분 답변하지 않았다. 반대로 더 잘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악하게 살고있는 그들 삶이 썩은 고기를 찾는 벌레들처럼 불쌍해 보였다. 그 후로 그들을 생각해도 분노가 올라오지 않고 평정심이 유지되었다. 그들이 행하였던 악행들이 더이상 필자 마음을 흔들지 않았다. 그들을 용서한 적이 없지만, 그들은 더 이상 마음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이 죽었을지 여전히 악하게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관심 밖이니 더는 알지 못한다. 만약 필자가 용서하려 노력했다면 용서하려는 마음과 분노하는 마음이 충돌하여 아직도 마음에서 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용서는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얼마나 포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삶을 보는 눈이 달라져야 나쁜 놈이 불쌍한 사람으로 바뀐다. 성경에서 용서는 일곱 번을 일흔 번 하라고 가르친다. 금강경에서는 팔다리를 다 잘려도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용서는 행동이 아니라 내면의 마음의 상태이다. 결코 강요나 설득에 의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자는 20~30년 지난 일들을 왜 이제야 밝히느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피해자 내면에 들어간 피해 기억은 시간이 멈추어져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동일한 상황을 만나면 다시 떠오르기 때문이다. 마음 문제에는 시간 경과가 영향을 주지 못한다. 가해자가 용서를 빌어도 피해자가 용서를 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용서하지 못하고 피해 사건을 계속해서 마음속에 안고 사는 것 역시 지속적으로 피해를 당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해자의 사과와 용서를 구하는 행동은 피해자에게 심리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의미 있다.

미국 정신과의사 토마스 사즈는 ‘어리석은 자는 용서하지도 잊지도 않는다. 순진한 자는 용서하고 잊는다. 현명한 자는 용서하나 잊지는 않는다’라고 하였지만, 평온한 자는 마음에 가해자가 없어 용서할 것조차 없다.

순례자의 여로에서 :: 용서(容恕)의 의미에 관한 노트

용서(容恕)의 의미에 관한 노트

1. 용서 의미

(1) 용서의 사전적 의미

한자의 용서(容恕)에서 容은 ‘담다’를, 恕는 ‘같은 마음’이어서 문자적으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국어사전에 나오는 뜻대로 용서를 ‘놓아 줌,’ ‘죄를 면하여 줌,’ 또는 ‘꾸짖지 아니함’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2) 영어의 용서 forgive 의 어원적 의미

forgive에서 for 는 ‘전적으로(completely),’ give(고대 영어 giefan)는 ‘주다’를 뜻하여 forgive는 ‘전적 시여 또는 완벽하게 주는 것’을 뜻한다.

라틴어 “perdonare”나, 독일어 “vergeben” and 프랑스어 “pardonner” 모두 영어 의 풀이와 같은 뜻을 담고 있다.

그리하여 이 용서의 의미가 ‘유보 없이 전적으로 주는 것(to give completely, without reservation,’ ‘벌주고자 하는 욕망도 힘도 포기한’ 의미로 발전하였다.

2. 논어에 나오는 恕

공자의 제자 여러 명이 모였을 때, 그 중에 자공(子貢)이라는 제자가 공자님께 여쭈었다. “선생님, 평생을 두고 마음에 담아 실천할 만한 좌우명 하나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공자님은 “그것은 바로 서(恕)니라” 라고 곧 대답하시면서 ‘상대방이 원 치 않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덧 부쳤다.

子貢이 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잇가 子曰 其恕乎인저 己所不欲을 勿施於 人.

공자의 그의 제자 사이의 질문과 응답은 차원 높은 혜안적인 통찰이 나와 있 다. 그러나 용서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 덧부친 말도 부정적 어휘가 사용되어 있어서 소극적이다.

3. 용서의 신학적 의미

(1) 아담 타락 이래 인간은 죄인으로 전락되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의인은 없나 니 하나도 없나니”(롬 3:11; 시 14: 1-2)에서 보듯이 인간에게는 죄인이라는 낙 인이 찍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용서의 길을 마련하셨다. 흔히 ‘잘못은 인 간이 저지르지만,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 (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이라는 격언이 이를 압축하여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2) 히브리어에서 용서를 두고 세 개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즉, ‘kipper(덮다),’ ‘nasa(죄책을 짊어져 없이하다),’ ‘salah(용서하다)이다. ‘나사’는 하나님이나 인간 의 용서에 사용되었으나 나머지 두 개의 단어는 하나님의 용서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헬라어에서는 4 개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곧, ‘apolyein(ἀπολύω, 마 5;31; 눅 6:37), charizesthat(χαρίζομαι, 눅 7:21, 엡 4:32), paresis(πάρεσις, 롬 3:25 ‘간 과함), 및 aphesis 이다. 마지막 단어 aphesis(ἄφεσις)가 신약성경에서 가장 일반 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서를 두고 사용되고 있다.

(2) 용서의 원천-엡 1:7

죄 용서를 주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고후 12:13; 골 2:1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ἄφεσις)을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죄 용서는 그리스 도의 보배로운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온다(히 9:22, 26; 롬 4:25).

본문에서 ‘죄 사함 ἄφεσις’ 는 “해방, 면제, 용서”를 뜻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칭의 메시지이다. 엘렌 화잇 여사는 죄 용서를 ‘오로지 하나님 께서만 하시는 용서’로 진술하고 있다(SC 37; 9T 63). 이 하나님의 용서는 인류 모두에게 주어진 객관적, 보편적 칭의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는 인간 편의 죄의 자복, 회개라는 조건이 달려 있다(눅 17:3-4).

“죄인을 위하여는 한 길 밖에 없다. 신실한 회개와 죄의 고백,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이 용서를 가져달 줄 것이며”(2T 293).

용서의 조건성은 인간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3) 인간 사이의 용서-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 안에서 너희 를 용서함 같이 하라.” -> “서로”에 비추어 용서는 상호적이어야 한다.

용서는 자기에게 잘못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태도, 물론 상대방의 죄된 행동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정죄하는 태도를 버리고 잘못하였음에도 불구 하고 친절하게 대하여 주는 것이다.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 아니다. 이 용서는 공동체 내 안식, 관계 회복 및 치유를 일으킨다.

“용서라는 것은 피해자의 의도적인 노력이다. 그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 다.”(안교 교재 제3기 제7과))

용서는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다.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계속해서 그 잘못을 저지르도록 묵인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란 우리의 억울함과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 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서로 용서하는 일을 랍비들의 3회에서 7회로 확대 제안하였지만, 그리스 도께서는 70번의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여 그 범위를 무제한으로 확대하셨다. 햇볕이나 비를 의인이나 악인에게 골고루 내려주시는 예를 제시하기도 하셨고, 심 지어는 원수까지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마 7:12). 이는 공자님의 부정적 언어로 제시한 己所不欲 勿 施於人을 넘어선 적극적이고 긍정적, 진취적이어서 유교 윤리를 뛰어 넘는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4) 주기도문에 나오는 용서기도

마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 옵고”(6:12)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셨으니 우리도 형제의 죄를 용서하여야 한다.

“사하다”는 ἀφίημι (aphie-mi)는 “내보내다, 버려두다, 용서하다. 가게하다, 보 내버리다, 취소하다, 탕감하다, 용서하다”의 뜻이다.

누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 시고”(12:4 ).

(5) 주의 기도문의 용서기도에 있어서 선행성 이해

두 기도문의에서 하나님의 사죄와 인간의 사죄 중에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가?

㉠ 마 6:12 마태의 기록은 분명히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근거로써 제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용서에는 인간의 용서라는 선행적 조건성을 함축하고 있다.

㉡ 눅 12:4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이 번역에는 마치 “우리가” 용서의 주체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 점이 있어 보여 2인층 단수 능동태인 αφες의 주어 “주께서” 또는 “당신께서”가 잘 안 보인다.

누가는 ἀφίημι의 2인층 단수 2aorist 능동태 명령법, αφες를 사용하고 있다. 따 라서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시역>

“우리에게 우리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그 때에 진실로 우리도 우리에게 죄를 지 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겠나이다.”

<원문>

και αφες ημιν τας αμαρτιας ημων και γαρ αυτοι αφιεμεν παντι οφειλοντι ημιν.

이 본문에 나오는 και γαρ를 ‘그리고 진실로’로 번역 이해가 가능하다. ‘γαρ’는 ‘then, indeed, since, for’를 뜻한다.

2인층 단수인 “주께서”가 주어가 되어 용서의 원천이 되고 인간 용서에 선행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용서의 선행성이 명확하여지기 때문이다.

容恕(용서)의 한자적 의미

容恕(용서)의 한자적 의미

상대를 포용하고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용서가 가능하다. 작게는 부부간의 대화단절, 크게는 국가 간의 대립이 지속되면 서로를 원수(怨讐)로 여기며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 마련이다.

얼굴 容(용)의 구성은 집 면(宀)과 골 곡(谷)으로 짜여 있다. 갑골문에 그려진 宀(면)은 지붕뿐만 아니라 양 벽면을 길게 늘어뜨려 그려내고 있어 깊숙하고 은밀한 내부모양을 암시하고 있다. 주로 사람이 주거하며 사는 집을 뜻한다. 谷(곡)의 아래 입 구(口)자는 물이 흐르는 여울 가운데 놓인 돌이나 바위(石)를 의미하며 위에 쓰인 겹쳐진 ‘八’의 형태는 돌 양옆으로 비켜 흐르는 물살의 모습을 본뜬 것이다. 따라서 시냇가 가운데 놓인 바위(口)와 그것을 비켜 흐르는 물살(겹친 八)을 상형, 골짜기를 회화적으로 그려낸 글자로 산과 산 사이에 위치한 ‘계곡’을 뜻한다. 따라서 容(용)의 전체적인 의미는 사람 및 각종 가재도구를 받아들이는 집(宀)과 온 산의 작은 여울의 물을 받아들이는 텅 빈 계곡(谷)의 수용성을 유추하여 ‘받아들이다’가 본뜻이었으나, 하나의 작은 우주인 사람에 빗대어 눈 코 귀 입이 있는 ‘얼굴’은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 등 몸의 정상적인 활동을 위해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기에 ‘얼굴’이라는 뜻으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용서할 恕(서)의 구성은 같을 여(如)와 사람의 심장을 상형한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졌다. 초기글자인 갑골문에도 보이는 如(여)는 여자 여(女)와 사람의 입모양을 상형한 입 구(口)로 구성되었다. 女(여)는 무릎을 꿇고서 두 손을 모아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을 그려낸 상형글자이다. 모계사회 때 만들어진 글자로 당시에는 남자보다는 여자가 중심이 되어 제사를 주도하게 되었는데, 이후 부계사회로 넘어오면서 여자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남게 되었다. 이에 따라 如(여)의 의미는 시대적인 변천에 따라 여러 가지 뜻이 파생되었다. 갑골문에 새겨진 최초의 의미는 무릎을 꿇고서 두 손을 모아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女)이 소원하는 말(口)과 ‘같이’ 이루어달라는 데서 ‘같다’는 뜻이 발생했다. 그러다 모계사회가 무너지고 남자 중심의 유교가 널리 유행하면서 여자(女)는 삼종지도(三從之道)에 따라 부모 남편 자식의 말(口)에 따라야 한다는 데서 ‘따르다’는 뜻도 파생하였다. 따라서 恕(서)의 전체적인 의미는 상대의 입장에 서서 마음(心)을 같이(如)한다는 데서 ‘용서하다’ ‘동정하다’ ‘헤아리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容恕란 상대의 입장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함께 함을 말한다. 요즘 부부간의 갈등이 심화돼 가슴에 한을 묻고 사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화해는 상대와 대화로써 풀어야 되지만, 용서는 타인에 관계없이 자신의 가슴 안에서 할 수 있다. 용서란 가슴에 쌓인 한을 녹이는 자기 자신을 위한 ‘치료약’인 셈이다.

진정한 용서란 어떤 것인가?

진정한 용서란 어떤 것인가?

[질문]

요즘 배우 송혜교씨가 출연한 영화 “오늘” 에 대해 생각하다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 영화는 용서란 무엇인가? 전적인 용서가 가능한가? 등 묵직한 담론을 다룬 영화입니다. 영화 속에서 “가해자로부터 사과 받지 않은 용서가 과연 진정한 용서인가?”란 질문이 대두됩니다. 저도 이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다 하나님의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 용서에서도 분명 먼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시인하고 회개 할 때 구원 받을 수 있기에 사과가 있어야 진정한 용서가 되는 원리가 맞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죄인은 전혀 모르는데 피해자인 사람이 그 죄인을 용서했다고 용서가 된 것일까요?

[답변]

영화에서 묘사된 용서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일단 가해자 쪽에선 아무런 사과의 말이 없었는데도 피해자만 용서한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그 용서의 방안이 자기 혼자만의 심정적 용서인지, 직접 만나서 용서한다는 뜻을 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크게 상관없을 것입니다. 질문의 주제는 피해자만의 용서가 참 용서인지 묻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야말로 성경적인 용서입니다. 아니 그 전에 용서란 반드시 피해자가 하는 것입니다. 가해자가 보상하고 사죄한 것으로는 용서의 필요조건일지언정 충분조건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놓고 피해자의 처분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사죄를 넘치도록 해도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피해자가 독단으로 했던, 심정적으로만 했던, 사죄 전에 먼저 했던, 어쨌든 진정으로 했다면 이미 용서는 용서인 것입니다. 용서는 전적으로 피해자가 해야 한다는 너무나 간단명료한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의 가장 기본

세상에서의 용서는 가해자가 반드시 자기가 끼친 모든 손해에 대해 피해자에게 보상을 한 후에 진정으로 반성하며 사죄하는 고백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물론 가해자 쪽의 형편이 어려워져 현실적 보상이 불가능한 경우는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가해자의 반성 사죄가 정말로 진심인지 여부입니다. 또 그 진심을 피해자가 충분히 납득, 이해하여 받아들이면 용서가 성립됩니다.

우선 사죄가 진심이어야 함은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사죄에도 이런 저런 모습으로 가식, 과장, 위선이 개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현실적 위치와 신분과 관계 등을 감안하고 또 자기 이해타산을 따져서 일단 빌고 보자고 들 수 있습니다. 거기다 주위 사람들의 강요에 의한 사죄도 종종 있지 않습니까?

역으로 따져 용서에서 쉽게 간과하는 측면이 있는데 피해자도 반드시 진심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의 가장 핵심이자 기초되는 내용은 한마디로 앞으로 복수를 결코 하지 않겠다는 진실한 마음입니다. 간혹 여러 가지 정황과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용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가해자의 사죄에 일차 감정적 반응으로, 그 사죄가 진심인지 과장이었는지 불문하고, 용서했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억울하고 괘씸해질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용서하지만 나중에 다른 일로 혹은 이와 동일한 경우가 생기면 반드시 받은 만큼 되돌려 줄 테다”는 생각이 눈곱만큼이라도 들면 아무리 첫 용서의 장면이 감동적이었다 해도 참 용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죄할 때에 현실적, 정신적 손해를 반드시 보전해야 하는 뜻도 피해자가 복수하고자 하는 시도를 막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수는 않겠지만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다거나, 가해자를 내 사전에서 지워버리겠다는 것들도 역시 온전한 용서는 아닙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는 격언대로 용서로 인해 두 사람의 사이가 이전보다 더 좋아지던지 최소한 동일해져야만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게 되면 사죄나 용서 둘 다 순전히 현실적, 타산적 필요에 의해서 사람들 앞에서 그런 척 시늉만 낸 것입니다. 부부가 속으로는 미워하고 각 방을 쓰면서도 자녀들 앞에서는 사이좋은 척 웃고 지내는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용서의 진짜 본질

가해자가 손해를 배상하고, 피해자는 복수할 의도가 없다는 용서에서의 가장 기본적 요소를 곰곰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손해 배상은 용서 받아야만 할 사건을 실제로도 종결짓자는 의미를 지닙니다. 더 이상 그 사건을 문제 삼지 말아달라고 간구하는 셈입니다. 복수 하지 않겠다는 것도 이미 그 사건은 종결 났기에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새로운 혹은 이전과 같은 관계로 회복하겠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기본적으로 용서란 불미했던 사건이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를 원상으로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그 사건을 청산하여 잊는 절차가 아니라 가해자인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건보다 사람 중심이어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습니까?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건은 다 해결되었어도 여전히 그 사람이 미우면 용서 안 해주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말하자면 상할 대로 상해진 내 체면, 위신, 자존심은 억만금을 주어도 회복할 방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변상과 사죄를 충분히 받았기에 용서한다고 선포했어도, 물론 그 당시로선 상당한 진심이 포함된 용서였지만, 그 사건을 다시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분통이 터지고 억울한 마음이 솟구칠 수도 있습니다.

용서를 몇 번이나 해주어야 하는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18:21,22)

베드로로선 세상 사람들은 세 번까지 용서해주는 것도 대단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선 그 곱절에다 하나 많으면서 완전수인 7번까지 용서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겠는가 여겼던 것입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합니다.

70의 7곱 배인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뜻입니까? 일곱 “번이라도”라고 했으므로 실은 그럴 정도로 아무 제한 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했으므로 동일한 잘못을 70번 반복하고, 또 그렇게 7곱 종류의 죄를 범해도 용서해주라는 뜻입니다. 숫자로만 따져도 현실적으로는 우리 모두에게 불가능한 용서 같습니다. 한마디로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용서하려면 잘못된 사건들은 전혀 문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 사람을 다시 진정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큰 잘못이 있어도, 또 아무리 많이 자주 범했어도, 나에게 너무나 큰 손해와 상처가 남아 있더라도,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용서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용서는 손해 배상이나 사죄를 안 받아도 이뤄져야 하며, 아니 사실은 그것과 무관하게 이뤄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종들과 회개하는 임금의 비유로 천국을 설명하면서 용서에 대한 가르침의 결론을 이렇게 내렸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 초점은 “중심으로 그 형제를” 용서하는 데 있습니다. 사건의 종류, 피해의 정도, 보상의 크기, 사죄하는 태도 등에 따라 용서를 차별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 형제, 그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을 거푸 범한 잘못을 용서하기란 절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용서하기 이전에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지부터 진짜로 심각하게 따져 봐야 합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에 여러 구체적 뜻이 있겠지만 일단은 이혼까지 갈 수는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서로 타협 용서하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끝까지 용서하는 근본 이유도 무엇입니까? 오로지 자식이니까, 그 관계는 죽을 때까지 소멸될 수 없으니까, 때로는 자식이 원수보다 더 미울 때도 있지만 결국은 용서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주로 부모 쪽에서 먼저 일방적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의 용서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성경은 신자에게 예수님이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용서하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용서를 베풀었습니까? 당신께 죄인된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온 자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피해자이고 죄에 빠진 인간이 가해자입니다. 그런데 가해자가 예수님께 회개하며 먼저 용서를 빌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이 먼저 일방적으로 용서를 베풀었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용서를 본받아야할 가장 핵심적 부분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8,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0,11)

가해자가 진심으로 사과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용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용서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가해자의 회개하는 진심이 가감 없이 전해진다면 또 모든 배상이 완료되었다면 어지간히 완악한 자가 아니고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해야할 일이 있다는 자체로 이미 평소에 가까운 사이기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아예 먼 사이거나 모르는 자라면 용서라는 개념 자체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가해자 쪽의 보상과 사과가 충분이 이뤄져서 용서했다면 엄밀히 따져서 피해자 쪽에서 사랑으로 행한 측면은 거의 없습니다. 더 큰 용서는 가해자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신자를 두고 가르치신 그대로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3-48)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지금껏 유대 율법사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도덕적 하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할만한 자, 문안할만한 자만 그렇게 하는 것은 이방인에게도 예사라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과 문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을 위해 먼저 일방적으로 사랑하셨듯이 신자라면 원수까지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고 합니다.

질문자께서 하나님께 먼저 회개해야 구원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회개 자체가 인간의 공로가 됩니다. 구원에서 예수님의 공로 외에 인간의 자격, 조건, 공적, 의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로 믿음만 필요합니다. 또 우리의 영이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날 때에 비로소 진정한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 회개로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의 중생의 씻음이 선행되었기에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예에서 보듯이 우리에게 예수 믿고 회개할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도 하나님이 먼저 용서해주셨던 것입니다.

용서로 천국을 실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45)

예수님이 신자가 원수까지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먼저 그래야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회개와 마찬가지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구원의 전제조건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다워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원수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도성 니느웨가 진노의 심판 대신에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을 요나는 끝내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요나를 이렇게 견책했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4:10,11)

한 마디로 정죄와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분께서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심판할 자를 심판합니다. 인간은 인간을 결코 미워하지 말고 오직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다 같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도 하지만 모두가 죄 아래 있는 연약하고 어리석고 흠결 많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가해자가 나한테 진정으로 용서를 빌고 있지 않는 바로 그 모습으로 내가 다른 이에게 대할 가능성은 상존(常存)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용서를 몇 번이나 해야 하는지 물은 것은 용서의 방법과 태도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숫자로 물었으니까 일단은 숫자로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대로 490번의 숫자에는 숫자적 의미가 전혀 없었습니다. 구체적으로 70번 동일한 잘못 X 7의 다른 종류의 잘못은, 아니 7번의 동일한 잘못 X 70 개의 다른 종류의 잘못이라 쳐도, 어지간히 믿음이 좋아도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베드로가 7이라는 완전 숫자로 물었으니까, 예수님은 더 나아가 꽉 찬 숫자 10을 곱한 위에 다시 완전 수자 7을 보탰습니다. 한 마디로 숫자에 관계없이 천 번이든 만 번이든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관해서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평생에 짓는 죄가 어디 만 번뿐이겠습니까?

주님은 용서의 방법이 아닌 용서의 본질에 관해 가르친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사건 대신에 사람을 용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선 눈을 감으시고, 실은 십자가 보혈의 의로 덧입혀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보시지만, 죄인인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았기에 어떤 잘못이 있어도 끝까지 용서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은 그 용서의 개념을 최후의 심판에까지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하라고 하신 후에 심판하는 왕과 종의 비유를 들었습니다.(마18:23-35) 이 또한 용서하지 않으면 구원 대신에 심판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 각각 중심으로 너희 형제를 용서하라”(33,35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렇게 하면 이 땅에서부터 성도들에 의한 하나님의 왕국이 더 확대된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도 예수님이 원수된 우리를 사랑해주셨기에 바로 그런 사랑을 우리도 우리 원수에게 베풀라는 것입니다. 실감나게 말하면 부부 사이에 상대의 허물과 결점을 먼저 일방적으로 품어주고 사랑하면 그 가정은 천국으로 화할 것 아닙니까?

스스로 자기부터 용서하라.

아이러니하게도 용서받지 못한 자보다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자가 더 괴롭습니다. 현실에선 가해자들에게 사죄할 마음이 거의 없는 까닭은 자기 잘못을 쉽게 깨닫고 용서를 빌 자 같으면 처음부터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순전히 자기 책임이 아니고 쌍방의 과실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용서를 빌긴 빌어야겠는데 보상할 여유가 없다든지 체면과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속으로 회개하고 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가해자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는 채, 어쩌면 굉장히 회개하고 있는데도, 단지 사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계속 용서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솔직히 말해 갈수록 상대가 더 괘씸해서 분노만 늘어납니다. 거꾸로 자신의 심령이 용서를 못하는 자신에게 묶이는 것입니다.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해 사단에게 빌미를 줄 뿐 아니라 상대를 저주하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복수할 마음이 스며듭니다. 말하자면 가해자나 피해자 중에 누가 더 의로운지 분간이 안 갈 단계가 됩니다. 예수님은 심중으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나 마찬가지라고 했지 않습니까?

진정한 용서란 궁극적으로 자기가 자신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용서하지 못하고 계속 미워하고 있는 자신의 영혼의 비참함을 하나님 앞에 스스로 꺼내놓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가해자의 사죄가 없어도, 혹은 여전히 원수 상태인 그를 비로소 사랑하고 또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의 용서는 현실적 보상은 물론 진정한 사죄의 고백 없이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심중에서만 용서해도 용서인 것입니다. 아니 심중에서 먼저 진정한 용서가 있어야만 합니다. 자신부터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용서하고 그런 바탕에서 자기와 상대를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똑 같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인식이 확실히 들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죄를 보지 않고 죄인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용서란 이전과 동일한 혹은 더 좋은 관계로의 회복을 최종 목표로 합니다. 단순히 인간 사회에서 구겨진 자존심을 서로 세워주고 체면치레 하는 정도라면 용서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용서는 이해 타산적 요식 행위에 불과합니다. 법정에 가서 서로 얼굴 붉히고 시간적 재정적 손해 보는 일만 막자고 타협한 것입니다.

또 가해자가 모든 손해를 충분히 보상하고 진정으로 사죄하여 용서를 받았다 칩시다. 가해자도 죄 많은 인간인지라 돌아서서 지나고 나면 다른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피해자의 용사 받는 태도에서 괘씸하거나 섭섭한 점을 발견했을 수도 있고, 혹은 그렇게까지 굽히고 들어가지 않아도 됐는데 싶어서 괜히 손해 본 기분마저 들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가해자가 보상과 사죄도 하기 전에 피해자가 무조건적으로 진정으로 가해자를 용서했다고 칩시다. 어떤 불순한 동기나 앙금이 내포되지 않는 가해자의 진정한 회개를 앞당기게 될 것입니다. 진짜로 예수님처럼 용서한다면 누가 그 사랑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가해자의 참 회개가 선행되면 바람직하고 피해자의 용서도 잇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피해자 쪽에서 먼저 일방적으로 베푸는 용서는 더더욱 가해자의 참 회개를 부를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가해자가 계속 잘못을 모르고 있거나, 무시하거나, 그 반대로 혼자서만 이미 반성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라도 피해자는 진정한 용서가 심중에 이뤄졌다면 가해자를 먼저 찾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여러 정황과 그 예상되는 반응까지 심사숙고해야 하겠지만 피해자가 용서하겠다고 하는데 완강하게 반대할(?) 가해자는 없을 것입니다. 끝까지 전혀 사죄할 생각이 없고 자기가 오히려 잘했다고 우긴다면 신자로선 하나님과 자신 앞에 자기가 할 바는 다한 것입니다. 전도자들이 방문한 자의 집을 위해서 복을 빌어주지만 받을 태세가 안 되어 있다면 그 복은 빈 자에게 돌아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무조건 신자더러 일방적으로 먼저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강권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솔직히 너무나 벅차고 감당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온전하신 것 같이 우리도 온전해지기 위해 날마다 피 흘리기까지 노력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또 우리 모두가 능히 그러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더더욱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의 십자가 긍휼과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나부터 용서해 주시고 또 나에게 상대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과 힘을 부어달라고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용서의 순서와 방법과 태도가 문제가 되기 시작하면 사실은 그 자체로 이미 참 용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에서 요체는 사건보다 사람을 용서하되, 이전보다 더 좋거나 같은 관계로 이어져야 하며,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원수 같은 존재였다가 무조건 용서 받았기에 우리도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으며,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계명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천국을 확장하기 위해서 그래야 하며, 무엇보다 자신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참 용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용서의 이런 본질을 제대로 알고 진심으로 그대로 시행하겠다면, 가해자의 사죄나 피해자의 용서에서 그 순서와 방법과 태도를 하등 문제 삼을 것 없지 않겠습니까?

11/3/2011

키워드에 대한 정보 용서 의 뜻

다음은 Bing에서 용서 의 뜻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필요한 경우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의 다양한 출처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유용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믿는 사람이 용서해야지!’ 근데 그게 잘 안돼요ㅣ김기석 목사ㅣ잘잘법 Ep.67

  • 기독교
  • 신앙
  • 지혜
  • 신학
  • 목사
  • 신학자
  • 설교
  • 명설교
  • 궁금증
  • 하나님
  • 예수님
  • 기독교방송
  • 성경
  • 말씀
  • 기도
  • 김기석
  • 믿음
  • 힐링
  • 복음
  • 용서
  • 화해
  • 형제
  • 이웃
  • 손절
  • 의절
  • 아이콘택트

‘믿는 #사람이 #용서해야지!’ #근데 #그게 #잘 #안돼요ㅣ김기석 #목사ㅣ잘잘법 #Ep.67


YouTube에서 용서 의 뜻 주제의 다른 동영상 보기

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믿는 사람이 용서해야지!’ 근데 그게 잘 안돼요ㅣ김기석 목사ㅣ잘잘법 Ep.67 | 용서 의 뜻,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See also  닌텐도 Ds Lite 게임 다운 | 중고로 산 닌텐도 Ds Lite 2대. 그런데 Tt칩이? 16507 좋은 평가 이 답변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