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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15 장 강해 | [하루 한 장] 요한복음15장_나는 참 포도나무요 490 개의 새로운 답변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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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4 (목) [하루 한 장]“나는 참 포도나무요” (요15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요한복음 15장은 아주 유명한
포도나무 비유장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의 실제 분위기는
비장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합니다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결단의 촉구입니다
예수님만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율법도, 행위도, 선행도,
유대인이라는 혈통도 다 아무것도
아니고 가짜 포도나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열매를 많이 맺을 거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 묵상의 삶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품고
읽고 따르고 묵상할 때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대로 구하는 모든
기도가 응답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신비입니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전화 051-204-0691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교회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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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 주석 – 요한복음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요한복음 제 15장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거짓에지는 그 농부라 – 여기 “참”이란 말의 헬라 원어 대조되는 “참”이 아니고, 불완전에 대조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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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1/11/2021

View: 4521

[요한복음 15장 강해] 51. 포도나무 (내 안에 거하라)

요한복음 15장 1~8절. ​.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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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9/19/2021

View: 5422

제75과: 요한복음 15장

소개. 지상 성역의 마지막 날 저녁, 구주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드신 후 사도들에게 자신은 참포도나무이며 제자들은 그 가지라고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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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8/5/2021

View: 7222

[요한복음 15장 주석 강해설교] 포도나무의 비유(요 15:1-27)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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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rn153.tistory.com

Date Published: 11/13/2021

View: 9530

헬라어 요한복음 15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우리가 이 기쁨을 가져야만 (1) 우너망, 불평, 의심을 이기며, (2) 담력, 용기, 인내를 가지고 이 세상 모든 난관과 환란을 이기며, (3) 모든 수고로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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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12/23/2021

View: 847

두란노

요한복음 15장과 16장은 예수님의 긴 ‘고별강화'(Farewell discourses, 13~17장) 한 가운데 위치한다. 여기서는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15:1~16), 제자들에게 닥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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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12/18/2022

View: 8811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15장 – HANGL NOCR – 한글 신기관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거짓에지는 그 농부라 – 여기 “참”이란 말의 헬라 원어 대조되는 “참”이 아니고, 불완전에 …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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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8/11/2021

View: 2361

[요한복음 15 – 문제와 해설]

요한복음 15 장. 1.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신단다. 큰 일 났다. 빨리 열매를 맺어야할 텐데….. 잘리기 전에 빨리 열매를 맺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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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khong.org

Date Published: 2/16/2021

View: 6431

요한복음 15장 해석

요한복음 15장 해석. 15.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분과 아버지와의 관계, 제자들과 그분과의 관계에 대한 사항을 충분하고도 명백하게 전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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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studynoteblog.wordpress.com

Date Published: 9/16/2021

View: 1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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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요한복음15장_나는 참 포도나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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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한 복음 15 장 강해

  • Author: 홍융희
  • Views: 조회수 9,534회
  • Likes: 좋아요 240개
  • Date Published: 2020. 6. 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MNX–ymKkPA

요한복음 15장 주석

요한복음 제 15장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거짓에지는 그 농부라 – 여기 “참”이란 말의 헬라

원어 대조되는 “참”이 아니고, 불완전에 대조된 “완전”, 그림자에 대조된 “실

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택한 백성)을 가리키는 비유이

다(시 80:8-15; 겔 15:1-8, 19:10-14). 그러므로 랍비 문학에서도 말하기를, “실물 중

에 가장 낮은 것(포도나무)이 식물계의 왕인 것처럼,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가장 낮아

보여도 장차 메시야 시대에는 세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점령한다”고 하였다(Lev.R.

36:2 참조). 예수님이 이런 랍비 문학에서 이 비유를 인용하신 것은 아니지만 참고할

만한 말이다.

예수님은 참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을 성립시키신다. 이런 의미에서 그 자

신이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본래 참 포도나무가 아니며,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실 열매를 맺는 포도

나무와 같으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포도나무)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

서만 비로서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은, 또한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중보자(中保者)되신 관계

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에게 전적으로 의뢰하여야 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신자의 의뢰

심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일체 될 정도까지 깊어져야 한다. 그에게는, 독자적 의지

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의지가 있을 뿐이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이런 이상적 신앙

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이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우리 본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포도원의 농부라고 하였으며, 그가 가지들을

깨끗하게 하신다고도 하였다(2 절 끝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생활은 하

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 그러나 인간 편의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

간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성경은 많이 말씀한다. 마 11:12; 빌 2:12 참조.

그러나 위에 말한 일체 관계는 범신론적(汎神論的) 일체를 말함이 아니니, 인격과

인격의 관계이면서 다만 신자 편에서 그리스도에게 종속하여 순종하는 관계를 말함이

다. 2세기의 이단자 뫄타누스(Montanus)는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하나님 아버지)요,

말씀(그리스도)이요, 성령이다”라고 하였다(Epiphanius, Haereses . . ).

이런 그릇된 사상에서는 신자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구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것은 잘못이다. 신자는, 은혜를 많이 받아 그리스도에게 접근할수록 자기의 죄를 깨달

으며, 주님과 자기와의 구분을 더욱 밝히 깨달아 안다.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로 세우신 이는, 하나님 아버지이

시다. 그가 우리의 중보자를 영원 전에 세우시고(벧전 1:2), 그를 마침내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가 중보자를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듬이요 내 기

뻐하는 자라”고 하셨다(마 3:17). 그리고 변화산에서는 말슴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

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도 하셨다(마 17:5). 하

나님께서 신임하시고 세우신 중보자를 인간이 불신임할 것인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

=====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 여기 이른바 “내가 일러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전도의 말씀, 곧, 복음이며, 오늘날은 성경 말

씀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어떠한 작용으로 그렇게

된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신자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혹은 하나님의 말

씀)이 은혜의 방편(方便)이라는 교리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은혜

의 방편으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행각해 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슴”이란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바 성경에 기록된 말슴 곧, 복음

과 율법을 의미한다. 성경이란 책은 완전히 하나님의 말슴을 기록한 것이다. 이 말슴

은 언어, 혹은 문자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로 되었다

는 것이, 그것의 하나님 말씀 자격과 효능(效能)을 상실시키지 않는다. 헬만 바빙크

(Herman Bavinck)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사람의 말은, … 그 사람과 그 말과

의 시간적, 혹은 장소적 거리에 따라서 효력의 다소가 좌우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

씀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언제자 그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말씀과 함께 현

림(現臨)하시어 계시다. 그는, 언제나 그의 전지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시고 그 말씀과

함께 임하신다….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에게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

나 성령에게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성경 전체가 성령으로 영감되었고, 계속하여 성령

으로 말미암아 보관되며, 능력 있게 되는 것 만큼, 거기서 섭취하여 전파되는 부분적

말씀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Kmpen, J. H. Koke

1911, pp. 502-503).

바빙크(Bavinck)는, 또한 하나님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에 대하여, 성경이 말한 것

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곧, (1)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라고 함(롬 1:16;

고전 1:18, 2:4, 5, 15:2; 엡 1:13). (2) 생명 있고 영존하는 말씀이라고 함(밸전

1:25). (3)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함(히 4:12). (4) 영이며 또 살리라는 것이라고

함(요 6:63). (5) 어두운데 비취는 빛이라고 함(벧후 1:19). (6) 마음에 심는 씨(생명

있는)라고 함(마 13:3). (7) 좌우에 날 선 예리한 검이라고 함(히 4:12), (8) 믿는 자

들 속에 역사하는 말씀이라고 하였다(살전 2:13).(Gereformeerde Dogmatiek. , pp.

501-504).

바빙크(Bavinck)는, 성경 말씀의 능력과 생명의 역사에 대하여 비유하기를, 손이

일하지 않을때에도 일할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

말씀에 능력이 마술적으로 붙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말씀과 관계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바빙크

(Bavinck)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개혁자들은, 성경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

를 무인격한 마술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늘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

도와 연락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은 무인격한 능력이 아니며, 늘 말씀과 함께

하시며, 말씀으로 활동하게 하시되 늘 같은 모양으로 역사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 말씀(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역사하여 혹은

회개시키가며, 혹은 강팍케 하시며, 혹은 일어나게 하시며, 또 혹은 넘어지게도 하신

다. 그가 이 말씀으로 역사하시되,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하시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

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Kampen J.H Kok 1911, p. 503).

=====15:4-6

이 부분에 사용된 어귀들중, “거하라”는 말(* )은 “머물라”는 뜻이

니, 이미 있는 자리에 머물라는 뜻이다. 5절의 “있으면”이란 말도 헬라원어에서는 꼭

같이 “머물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여기 “머물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택

하여(16절) 은혜 주신 그 자리에서 그들이 떠나지 않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그리스도 박까에서 그를 믿으려고 자율적으로 찾아 가는 자가 아니고 벌써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 인도된 자니, 그는 거기 멀물러 있으려고 순종의 걸음을 걸을

자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것은, 인간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6:44).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시는데, 우리는 그저 순종 할 뿐이다. 순종

이란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과 그의 말씀을 지킴이다. 만일 누가, 하나님께서 나의 구

원을 다 이루어 주시는 것인 만큼 나는 순종 할 것 없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한다

면, 그것은, 자기를 무생물 혹은 하등 동물로 취급하는 오착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

원을 이루셨으나, 우리로서 할 일은 그에게 순종함이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시므로 구속(救贖)의 큰 사업을 완성하셨다(히 5:8-9).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그 아래 말

씀이 알려주느가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속에 가진 자이다. “내 말이 너

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의 왕좌를 점령하였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주님의 말슴을 그의 대리(代理)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 권위를 높이

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살아 계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거한 생활의 유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약에 참여한 자로서

신종(信從)하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신분

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쓸 수 있고, 또한 성령께서 그런 신자의 의지를 성

화(聖化)시켜 주님의 뜻대로만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 곧,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

광만 위하여 기구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상반절에서 벌써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생활이,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되어 있다. 신자가 주님과 연합한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의 계약

행위, 곧, 선택이 그 기본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순종이 그 실현이다. 그러므로 그것

은, 외부적 생활에서만 근근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얕은 경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계약과 생명에서 움직이는 내면적인 경건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무엇이든

지 응답 받는다는 진리는, 요한이 그 시선에서도 말씀한 바 있다. 곧,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요일 5:14). 기도 응답을 받는자들은 저렇게 내면적인 경건의 소유자

들이다. 기도 응답을 많이 받은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고(신

34:10), 히스기야는, 기도 하여 자기의 병을 고침 받았다(사 38:2-5; 왕하 20:5-6).

그는 기도하여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파멸시켰는데(왕하 19:14-19, 35), 하나님

앞에서 자백한대로,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할 만큼, 경건하였다.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사도들을 위시하여 일반 신자들 전체에게

허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져 주시는 대

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이다. 히 4:14-16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

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

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

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다. 약 5:17에 말하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비가 아니로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큰 죄인들도 회개하며 기도하면 응

답을 받는데, 구약 시대에도 그러하였고(대하 33:10-13), 신약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

다. 눅 18:13-14에 말하기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

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

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

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

니라” 하였고, 계 3:19-20에는 말하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

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가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

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다.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 실과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것을 찍어 버릴 수 밖에 없다. 실과 나

무를 심는 자는 목재를 쓰려고 심지 아니하고 열매를 따려고 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자는 나무와 같이 찍힘을 받을 위태로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자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행실을 바로 행함

이고(갈 5:22-23), 또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함이다. 잠 11:30에 말하기를, “의인

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고 하였다. 사람의 영혼은 귀하

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셧다(마 16:26). 예수

님게서 사람의 영혼이 귀하다고 하신 이유는, 그들이 세상 문화를 건설하기 때문이 아

니다. 그들의 영혼을 귀하다고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겠기 때문이다. 다

시 말하면, 그에게 여호와으 빛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잠 20:27에 말하기를,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등불

이 되게 하는 운동, 곧, 전도 운동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의인 99명보다 회개하는

한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눅 15:17).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

라 – 이 귀절부터 15절 까지는, 신자들끼리의 연합의 배경을 말해 준다. 곧, 신자들

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속죄 사업

을 담당하시게 하신 것을 말함이다. 5:20-21 참조.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이것

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이루실 속죄 사업을 가

리킨다. 사람들이 이런 사랑에 거하는 것은 기븐 일이요, 괴로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그들의 갈망하는 보금자리인데 그들은 왜 거기서 떠날 것인가? 거기 거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계명(신자들끼리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킴이다.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

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땅 위에서나

어디서든지 완전히 하신다(10:17-18, 12:43-50, 14:31). 그것이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방법이다. 그와 같이 신자도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하므로 그의 사

랑 안에 거하게 된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신자가 주님의 사랑에 거

하는 방법은, 신비주의자들처럼 그의 사랑의 취미에 집중하여 즐기는 것이 아니고, 그

의 계명을 지킴, 곧, 생활로 그 사랑을 나타냄이다”라고 하였다(Jezus vraagt niet

een mystick zwelgen in liefdegenot, Maar activiteit, liefd toonen. – Het

Heil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 1950, p. 346).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

려 함이니라 – 여기 이른 바 “이것”이란 말은, 윗절에서 가르친 내용을 가리킨다. 곧,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므로 그리스도와 사랑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 사랑을

받으면 그들에게 기쁨이 넘친다.

“내 기쁨”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기뻐하시는 기쁨을 가리킨

다.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서 그렇게 기뻐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16:22). 우리가 이 기

쁨을 가져야만 (1) 우너망, 불평, 의심을 이기며, (2) 담력, 용기, 인내를 가지고 이

세상 모든 난관과 환란을 이기며, (3) 모든 수고로운 사랑의 책임들을 꾸준히 이행(履

行)하게 되며, (4)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 여기서는, 10절에 말한 바 그리스도의 “계명”이 무엇임을 밝힌다. 바리새인들이 계

명을 지키는 동기는 남을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자기 자신을 남들에게 종교가로

나타내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계명을 오해한 것이다. 계명의 목적은 사랑이다.

사랑만 이루묘가 그것은 완성된다. 롬 13:8-10 참조.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은 새로운 계명이면서도 실상은 옛 계명이다(13:34; 요

일 2:7-8). 사랑은 이렇게 영원토록 변치 않는 진리이다(고전 13:13). 고데이

(F.Godet)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15-1-11 까지는, 계명의 첫 부분(하나님과 연합해

야 될 것)을 가르치시고, 12-17절까지는, 그 둘째 부분(사람을 사랑해야 될 것)을 가

르치신다”고 하였다.

성경은, 신앙 사상이 같은 형제들기리의 분리(分離)를 정당하게 여기지 않고 연합

을 고조한다. 예를 들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밖에, “몸과 지체”의 비유(엡

1:22-23, 3:6, 4:15-16). “성전과 돌들”의 비유(벧전 2:5)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인

간에게서 반응을 부족하게 받으시더라도 사랑을 계속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

랑은 상대방에게서 반응(서로 사랑함)이 있으므로 계속된다. 사랑을 받는 자도 같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인격이니 사랑을 행해야 된다.

여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행은, 신자가 그 속 사람의 영적 충동으로만 취

할 행동인가? 그에게도 외부적 성질이 있는 계율들의 제재가 필요한가? 그렇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만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됐으므로, 무엇에게 얽매인 바 없

어도 자발적으로 선을 힘쓸 자요 자유자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부터 감심으로 하나가

의 종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주님의 뜻을 자세히 알아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외부적 표준으로 있는 율법을 상세히 알야야 되며, 지켜야

된다. 그는, 이 율법을 폭군의 엄한 명령과 같이 생각하지 않늘다. 그 율법은 실상 은

혜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사랑하는 목자의 음성이다. 그것은 은혜의 한 방면이다. 그

러므로 기독자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율법이나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는 사실은, 은혜

의 원칙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은혜의 부요를 가져오는 거룩한 생활을 위

한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계명의 목적과 정신이 사랑하는 의미에서 “계명”이란 말을 단수(單

數)로 썼다(* ).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인 복수적 율례들이 이제부터

신자와 관게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그의 시선에서 계명이란 말을 복수로도 사용

하였다(요일 3:22, 5:2).

신비가들은, 내적 생명에 흥미를 가지고 외부적인 율법 조문들을 무시한다. 그러므

로 그들 중에는 반율법주의 경향이 많다(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 p.

499). 그들은 외부적인 신앙 규율, 곧, 성경도 사실상 무시한다. 16세기의 자유 형제

파(Brethren of free Spirit)나 17세기의 란텔과(Ranters)는 그렇게 잘못 움직였다

(R.A. Knox, Enthusiasm, p. 173). 이렇게 신비가들은, 외부적 계율들보다 자기 마음

에 온다는 영적 감동을 표준으로 삼기 때문에 도덕상 오착이 많다. 그들은 옳지 않은

일을 해 놓고라도 그것을 계시 받아서 하였다고 하면서 통과하려 하였다.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큰 사랑으로 희생하실 것을 가리킨 말슴이다. 그

는, 자기의 사랑이 얼마나 큰 사실을 설명하여, 윗절(12절)의 내용과 같이 신자들로

하여금 남들을 사랑하게 하려 하신다. 그리스도의 무한히 큰 사랑을 받은 우리들로서,

어찌 남들을 사랑할 마음이 없으랴? 요일 4:11 참조.

예수님게서 신자들을 “친구”라고 하신 것은, 그 앞에 죄인이요 원수 되었던 자들을

속죄의 사망으로 사랑해 주신다는 뜻이다. 롬 5:6-10 참조. 우리를 사랑하심은, 다만

우리의 보통 유익을 위한 일반적인 적선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여 죽기까지

하셨으니, 다시 사신 뒤에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은 또 얼마나 클 것이가? 이렇게

신자들은 예수님의 친구 되는 큰 축복을 받았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친구였다(사

41:8).

=====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 여기 이른바 “나의 명하는대로

행함”은, 그가 그 제자들더러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순종함이다. 믿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받은 증표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믿는 형제를 참으로 사랑할 수 없다(요일 4:7-21). 이 귀절 뜻은, 그리

스도의 계명을 순종하는자가 그리스도의 친구 된 자격, 곧, 그 속죄의 사랑을 받은 자

격을 발휘한다는 의미이다.

======15:15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

라 – 그리스도께서, 이때까지 구속에 관한 모든 진리를 그 제자들에게 전하여 주셨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에게 깊이 감취었던 오묘한 진리였다(벧전

1:10-11).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

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

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 그들이 사도로 세움 받은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인 만큼, 그들의 일은 유력해진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배경이기 때문에 그들은 영

적 과실을 맺고, 그들이 과실을 맺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가 응답된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없는 외식자의 기도를 응답하싶 않는다(마 3:7-8, 5:23-24, 6:14-15).

이 말씀(16 절)은, 주님과 신자가 연합하게 되는 것(1절 이하에 있는 말씀)이 전연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성립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 위에 있는

15-16절 말슴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내막을 보여 준다. 그가 이 내막을

신자들에게 알려 주시는 이유는, 신자들로 하여금 서로끼리 사랑하게 하른 것이다. 인

간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랑을 근거하여서만 남을 사랑할 수 잇다.

18-27 – 이 부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핍박 받을 사도들(신자들)자게 대하여, 몇

가지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1) 그 핍박은 결국 예수님을 미워하는 일이니(18 절).

그들로서는 주님께서 받으시는 미움에 동참함이 영광이다(행 5:41). (2) 그들이 핍박

받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증표이니(19절), 핍박 받음은 그들이 선택을 받아 구원

얻은 증표이다(빌 1:28), (3) 주인이 핍박을 받으셨으니 종 된 자로서 그것을 면할 수

없다(20절). (4) 핍박자들의 악행은 하나님에게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행동이

며 따라서 무서운 죄악이니, 불쌍히 여길 대상이다(21-22). 눅 23:24 참조. (5) 신자

를 핍박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두려운 일이다(23-24). 하나

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지식적 과오가 아니고 윤리적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미워

하는 부패한 인간성을 원인으로 한 것이다. (6) 그것은 율법에 기록된대로 되는 일이

니, 핍박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줄 믿고 안심할 따

름이다(25 절). (7) 그리스도에게 대한 성령님의 증거가 사도들과 함께 하실 것이므

로, 그들은 핍박을 이길 수 있다. 벧전 4:14에 말하기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

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였다.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예수님은, 이때까

지 그 사도들의 받을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제 그는 그들의 받을 미움에 대하

여 말씀하신다. 그들이(일반 신자들도) 예수님에게서는 사랑을 받으나 세상에서는 미

움을 받는다. 그들이 핍박을 받으면, 예수님은 그 사건에 있어서 그들보다 먼저 영적

으로 박해를 받으시는 셈이 된다. 그 만큼 그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밀접하다.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세상이 그들을 사랑할 경우는 한 가지 조건 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의 근원이 그냥

세상에 속하고, 따라서 그들의 생활은 세상의 소유물이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사랑

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과 반대되는 조건이 있는 까닭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그

들을 택하신 까닭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세상에게서 미움 받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

다. 그리스도와 세상 죄악은 이처럼 서로 반대된다(7:7).

=====15: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

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 13:16 참조. 이 귀절 말씀은, (1) 기독 신자가 핍

박 받을 것이 필연적이니 피할 수 없다는 것과, 또한 (2) 도덕적 처지에서도 그것을

받음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 여기 “지킨다”는 말은 트집 잡는다는

뜻이다.

=====15:21,22

하나님에게 대한 핍박자들의 무지가 사도들을 핍박하게 되엇다. 그러나 그 무지는

무죄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자게 증거하셧는데도 불구하

고, 그들이 불신앙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좋을 번 하였다.(Bengel).

=====15:23,24

참 신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미워함이고(18 절), 그리스도를 미워함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큰 죄라는 의미에서 이 귀절들은 말씀한다. 그리스도를 믿

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 속은 자이다. 그리스

도와 하나님 아버지는 일체이시다(10:30). 이 점에 있어서 벴겔(Bengel)은, 미움과 불

신앙과의 관련성을 지적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에게 대한 사랑은 신앙과 동반하나

증오는 불신앙과 동반한다”라고 하였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 여기 이른바, “아무도 못한 일”이란 것은,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들을 가리킨다.

10:25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적들)은 너무도 위대하며, 그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완전히 계시한다(5:17,36, 14:9,11). 그러므로 그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은, 다만 지식적 과오가 아니고 더덕적 반역이다.

=====15:25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

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이 말씀은 시 35:149의 인용이거나, 혹은 시 69:4의 인용이다.

시편을 “율법”이란 이름 아래 넣어 말하는 것은 그 때의 풍속이었다(10:34). 그 때에

는 사람들이 구약 초두의 부분 곧, 율법으로써 구약 전체의 명칭을 삼앗던 것이다.

=====15:26,27

이 세상 사람들이 사도들(신자들)을 미워해도(18-25). 그들은 성령님의 능력을 받

으므로 세상에서 물러서지 않고 도리어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

다. 여기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증거는 실상 일체이다. 성령은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증거하실 것이다

(Wikenhauser, Schlatter).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친히 목도한 사

실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사도의 자격이다(고전 9:1; 행10:41). 그러나 그들이 와 같

은 자격으로만 증인이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참

으로 증거하게 되었다. 행 1:8

[요한복음 15장 강해] 51. 포도나무 (내 안에 거하라)

4절을 다시 보아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네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과실을 맺는 것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꼭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한다.

내가 안에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 특별히 노력해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나를 구원해 주신 분, 예수님은 몸이고, 예수님은 내 지체고. 우리는 이미 예수 안에 있지만.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 나는 이미 예수 안에 있다. 그 관계를 기초해서 예수 안에 거하기를 노력하는 우리의 수고가 필요하다.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리라.

예수 안에 거하지 않는 삶은 무엇일까? 예수님을 내 맘 밖에 서두게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내 마음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다. 한참 잊어버리고 있다가 필요할 때 찾는다. 예수 안 사는 사람은 언제나 같이 거하며 먹고 마시는 삶이다. 나무로 말하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삶이다.

유대 나라에서는 식탁이 배고픔을 채우는 그 이상이다. 사랑과 존경을 나누는 자리, 사랑을 나누는 자리다. 내가 너희 안에 들어가서 먹고 마신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도 지니는 것이다.

예수 안에 사는 생활을 하려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말씀과 기도가 들어있다. 5절이랑 비교해보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왜 7절에서는 ‘내가’가 내 말로 바뀌는 것인가?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놓치기 쉽다. 말씀은 내 손에 들고 있는 현실적인 증거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내 맘에 모신다는 것은 그 말씀을 묵상하면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담고 묵상하면, 시냇가의 심긴 나무처럼 풍성한 사람이 된다. 말씀을 마음에 담으면, 그 삶이 예수 안에 있는 삶이다.

본 헤퍼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삶에서 우리고, 삶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 사랑하는 자의 말은 잊지 못한다. 사랑하는 자의 말은 분석하지 않는다. 그 마음을 담고 살 뿐이다. 말씀을 즐거워 하라.” 영혼의 영양분 있는 양식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튼튼히 세워준다. 인격의 과실, 생활의 과실이 우리를 ‘다르다’라고 말하게 한다.

7절을 다시 보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주님의 말씀을 붙잡으면, 우리는 원하는 대로 구해야 한다. 이것 참 중요하다. 기도는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해야 한다. 말문이 열린다. 그때는 기도가 된다. 무엇이든지 말하는 기도가 된다. 말씀을 묵상하고 살아계신 주님과 교제하면서 그 마음을 읽고 ‘무엇이든지 주님께 아뢸 수 있는 기도’가 된다.

예수님 안에 거하려면 이러한 기도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신앙생활은 삭막한 사막이 아니다. 할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피곤한 생활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행복하다. 재밌다. 나를 사랑하셔서 죽는 주님을 붙잡고 기도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깊은 생명의 교류가 생성된다.

자양분을 얻는다. 지혜를 얻는다. 생명을 유지하고 과실을 얻기 위해서.

어떠한 어려움 때문에도 자포자기하지 않는다. 말씀으로부터 능력을 얻기 때문이다. 생활이 쪼들려도 오만상을 찌푸리고 보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우리가 얼마큼 말씀과 기도에 기울이나, 매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읽는 게 쉬운가? 주님 앞에 무엇이든지 털어놓는 것이 쉽나? 잘 안된다. 마귀가 오만 수단을 다 이용해서 말씀을 마음에 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내 안에 거하라”라는 명령을 노력과 결단으로, 대가로 인식해야 한다. 어떠한 대가를 지불할 것을 각오가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기도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그러므로 내 안에 거하라, 이는 가만히 앉아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두 손을 높이 들고 어머니의 옷자락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처럼, 그러므로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어머니를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놓는 것처럼 살겠는가?

결단해야 한다.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시다. 그분께는 우리 모든 문제를 풀고도 남을 답을 가지고 계시다.

제75과: 요한복음 15장

요한복음 15:1~11 예수께서 자신이 참포도나무라고 설명하시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칠판에 다음 단어들을 적는다. 성공적이다, 불행하다, 기쁘다, 무감각하다, 보람이 있다, 비생산적이다, 결실이 풍부하다, 생산적이다, 풍성하다, 실패하다.

학생들에게 지금으로부터 60년 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고 상상해 보게 한다.

이 단어들 중 여러분의 삶을 묘사하는 말이었으면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지

포도나무의 그림을 칠판에 그린다. 학생들에게 이 그림을 각자 수업 공책이나 경전 학습 일지에 비슷하게 그려 넣으라고 할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면 결실이 풍부하고, 생산적이며,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포도나무의 비유를 사용하셨다고 설명한다.

한 학생에게 요한복음 15장 1~5절을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한다.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눈으로 따라 읽으면서, 이 비유에 나오는 각 요소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포도나무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칠판에 그린 포도나무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적는다.)

가지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가지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적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포도나무이고 우리가 가지라면, 그 열매가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해야 할 의로운 일과 행동을 나타낼 수 있다. 열매에 의로운 행위라고 적는다.)

1절에 농부[husbandman]라는 단어가 나온다고 언급한다.

농부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포도원을 돌보는 사람)

1~2절에 따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농부와 같은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참포도나무[예수 그리스도]를 심으셨으며, 나머지 모든 것들은 거기에서 양분을 얻는다고 설명한다.)

나무에서 꺾은 작은 가지 하나를 반원들에게 보여 주고, 이 가지에서 열매를 따서 먹을 수 있게 되는 때가 되면 얼마나 기쁘겠는지를 설명한다. 반원들에게 언제쯤 이 가지에 열린 열매를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본다.

왜 이 가지에서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할 것인가? (나무에서 꺾였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양분을 얻지 못한다.)

한 학생에게 요한복음 15장 4~5절을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한다.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눈으로 따라 읽으면서, 구주께서는 가지에서 열매가 자라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구주께서는 가지에서 열매가 자라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가?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이 가지는 구주로부터 분리되거나 절단된 사람과 같은가?

학생들에게 4~5절에서 거하다[abide, abideth]는 단어가 나오는 각 부분마다 표시를 해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이야기해 준다. 이 성구들에 사용되었듯이 거하다라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굳건히 남고 영원히 속해 있으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제프리 알 홀런드, “내 안에 거하라”, 리아호나, 2004년 5월호, 32쪽 참조)

5절에 따르면 구주 안에 거하는 것, 즉 구주께 단단히 연결되어 있을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미완성 문장을 칠판에 쓴다. 계명을 지킬 때, 우리는 구주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고 …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계명을 지키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도록 도우시는 한 가지 방법을 반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 학생에게 다음 글을 소리 내어 읽으라고 한다.

“사람들이 선행을 행할 힘과 도움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자기 죄를 회개함으로써, 주님의 은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렇지 않고 선행이 그들 자신에게만 맡겨진다면, 그것은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은혜란 곧 남자와 여자가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에 영생과 승영을 얻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Bible Dictionary, “Grace”)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계명을 지키도록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강화해 주시는가?

요한복음 15장 6~8절에 대한 요약으로, 구주께서는 당신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꺾인 가지와 같다고 가르치셨음을 설명한다. 꺾인 가지는 시들어 죽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더하는 의로운 일들을 한다.

우리는 구주 안에 거하기 위해, 즉 그분에게 단단히 연결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 학생에게 요한복음 15장 9~11절을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한다.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눈으로 따라 읽으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가르치셨으며 그들은 어떤 축복을 받게 되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가르치셨는가?

계명을 지킬 때, 어떻게 우리는 구주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게 되는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은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가 그분들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그분들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축복들을 충만하게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니파이전서 17:35; 교리와 성약 95:12; 130:20~21 참조]

11절에 따르면,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 안에 거하며 의로운 일을 행하라고 가르치셨는가?

학생들에게 11절에서 읽은 것을 바탕으로, 칠판에 적은 미완성 문장을 어떻게 하나의 원리로 완성하겠는지 이야기해 보라고 한다. (학생들의 표현을 사용하여, 칠판에 적은 문장을 다음 원리가 반영될 수 있게 완성한다. 계명을 지킬 때, 우리는 구주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고 충만한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왜 구주 안에 거하면 충만한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학생들에게 아는 사람 중에 구주 안에 거하여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떠올려 보라고 한다. 몇몇 학생에게 자신이 떠올린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사람이 왜 이 원리에 대한 좋은 모범인지 설명해 달라고 한다. 또한 학생들에게 자신이 구주 안에 거함으로써 어떻게 기쁨을 얻었는지를 나눠 달라고 할 수도 있다.

학생들에게 자신이 구주께 단단히 연결되고, 그렇게 해서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 보라고 한다.

[요한복음 15장 주석 강해설교] 포도나무의 비유(요 1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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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의 비유(요 15:1-27)

1-8절, 포도나무의 비유

[1-2절]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을 ‘극상품 포도나무’로 표현하셨다(사 5:2).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신약교회인 우리들을 ‘그 가지들’로, 하나님을 ‘그 농부’로 비유하셨다. 그는 이 비유에서 열매에 대해 강조하셨다. 포도나무의 가치는 열매에 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쓸모가 없고 제거될 것이다. 주께서는 열매를 강조하신다.

예수께서는 포도나무 가지들을 두 종류로 나누신다. 하나는 열매를 맺는 가지요, 다른 하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이다. 그것은 그가 곡식 비유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신 것과 같고, 또 가라지 비유에서 곡식과 가라지를 나누신 것과도 같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를 농부가 잘라버리듯이,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열매를 맺지 않는 자들을 제해버리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잔가지를 치듯이 깨끗케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열매는 선한 인격과 행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선행과 서로 사랑하는 삶을 가리킨다.

[3-4절]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그의 사랑과 그의 의(義)와 그의 생명 안에 거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는 말씀은 한마디로 연합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이다. 이것은 성도들이 거듭날 때 이루어진다. ‘거하라’는 원어(메이나테 단순과거 명령법) 는 반복적, 계속적 행위보다 어떤 단순한 행위를 가리킨다. 성도의 중생(重生)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은 단번에 이루어진다. 우리가 선한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깨끗케 하셨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죄사함을 받았다.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중생은 죄씻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으로 죄씻음을 받아 새 생명이 시작될 때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성도가 열매를 맺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죽어버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듯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못하면 죽은 가지에 불과하고 결코 거룩하고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래서 주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고 중생한 자들 곧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만 거룩하고 선한 인격과 삶의 열매, 곧 거룩과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5-6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말씀은 예수님 믿는 자들에게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예수님 믿는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중생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그러나 주께서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메논)(현재분사)”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현재 주님과의 교제를 강조하신 것 같다. 성도가 열매를 맺으려면 과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만족하지 말고 현재 주님과 밀접한 교제를 힘써야 한다. 과거에 포도나무의 가지이었어도, 현재 끊어진 가지라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현재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 성도가 거룩하고 선한 열매를 맺으려면 현재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히 교통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연합과 교통은 날마다 말씀의 묵상과 기도, 성령의 감동과 인도, 믿음과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주님과 밀접히 교제하는 성도는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가 우리의 의와 생명이 되며 또 선행을 위한 힘과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즉 그가 중생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으면, 그는 죽은 가지처럼 말라지고 버린 바 되고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께서는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그의 말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으로 표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는 자는 그 복음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자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되어 그의 영이 그 속에 계시고 그의 말씀이 그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복된 약속이 있다. 그것은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이다. 기도 응답은 구원받은 성도의 특권이다(요 14:13-14). 그러나 성도도 죄 가운데 있으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밀접히 교제하며 선한 열매를 맺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을 때 기도 응답의 특권은 더욱 효력을 나타낼 것이다. 요한일서 3:21-22,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8절]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그런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주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표현하시면서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16). 성도들이 세상에서 행하는 선한 행위들, 사랑의 행위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또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그렇게 좋은 열매들이 많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이 증명될 것이다(NASB, NIV). 주께서는 앞에서도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3:35).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참 포도나무이시며 우리는 그 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듯이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킨다. 이것은 두 가지 뜻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중생(重生) 곧 거듭남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과 분리되었었다. 그러나 사람이 주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새 생명을 얻었을 때, 하나님과 연합하게 된다. 중생은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람은 회개하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또 하나는 현재의 믿음과 순종이다. 성도는 믿음 없이 행하지 말고 또 말씀을 거역하지 말고 항상 믿음과 순종으로 삶으로 주님과 연합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다.

둘째로, 주께서는 우리가 주 안에 거할 때 몇 가지 약속을 주셨다. 첫째, 그는 우리에게 열매를 많이 맺게 하실 것이다. 열매는 선한 행위를 가리킨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이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디도서 3:14,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열매를 많이 맺는 길은 중생하여 주님과 연합하고 믿음과 순종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둘째, 주께서는 우리에게 기도 응답을 약속하신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체험할 것이다.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일서 3:21-22,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셋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표를 가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우리가 그의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요 13:35). 선한 행실은 주 예수의 제자된 표이다.

9-27절,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9-11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는 그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베푸신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거절하지 말고 받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 그의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 또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그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할 것이다. 불순종은 슬픔을 가져오지만, 순종은 풍성한 기쁨을 가져온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이다(갈 5:22).

[12-15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주의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종으로 여기지 않고 친구로 여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놀라운 말씀이다.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다니! 종은 주인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지만, 친구는 안다. 예수께서는 친히 희생적 사랑을 보이실 친구이시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다. 이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때이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일진대, 우리는 그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6-17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주께서 그들을 택하신 목적은 서로 사랑하는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많이 맺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바울도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우리로 선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증거했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선한 일은 서로 사랑하는 것을 포함한다.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실 것이다.

[18-21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실상 세상은 그들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미워하고 핍박하였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고 핍박한 까닭은 그들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택함을 받아 구별된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했던 그들은 예수께 속한 제자들도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는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듯이,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크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주께서 받으신 것과 같은 미움과 핍박을 받을 것이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은, 결국, 그들이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2-25절]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상은 까닭 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였는데, 바로 이 일에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고 그것을 핑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씀하셨고 아무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확실하고 풍성한 증거가 드러났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한 것은 큰 잘못이며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었다.

[26-27절]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미워하고 핍박하지만, 그를 증거할 자들이 있다. 첫째는 주 예수께서 보내실 성령이시다. 보혜사 즉 위로자와 변호자로 오신 진리의 영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하였다(고전 12:3). 둘째는 예수께서 세우신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이다. 그들은 주께서 전도 활동을 시작하실 때부터 그와 함께 지냄으로써 그의 은혜로운 말씀들을 다 들었고 그의 능력의 기적들을 친히 다 본 자들이다. 또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은 자들이다. 이제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증인들이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들로서 서로 사랑하라는 그의 계명을 힘써 지키자.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는 그의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그의 사랑을 받은 자들, 그의 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백성임이 분명해질 것이다. 또 그때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기쁨을 충만히 누릴 것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될 것이며, 또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때 낙심치 말아야 한다. 악한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세상이 주님을 미워하고 핍박했다면, 우리도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때 낙심치 말고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자.

셋째로,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성령님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이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또한 진리의 영이시다. 그는 친히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신다. 또 사도들은 처음부터 주 예수를 따랐던 자들, 곧 증인들이다. 그들의 글들이 오늘 우리 손에 있는 신약성경이다. 성령님과 신구약성경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이다.

[여호수아 8장 하나님 말씀] 아이성을 정복함(수 8: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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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요한복음 15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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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 에이미 헤 암펠로스 헤 알레디네 카이 호 파테르 무 호 게오르고스 에스틴

개역개정,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새번역,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우리말성경,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다.

가톨릭성경,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영어NIV,1 “I am the true vine, and my Father is the gardener.

영어NASB,1 “I am the true vine, and My Father is the vinedresser.

영어MSG,1 “I am the Real Vine and my Father is the Farmer.

영어NRSV,1 “I am the true vine, and my Father is the vinegrower.

헬라어신약Stephanos,1 εγω ειμι η αμπελος η αληθινη και ο πατηρ μου ο γεωργος εστιν

라틴어Vulgate,1 ego sum vitis vera et Pater meus agricola est

히브리어Modern,1 אנכי הגפן האמתית ואבי הוא הכרם׃

성 경: [요15:1-2]

󰃨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거짓에지는 그 농부라 – 여기 “참”이란 말의 헬라 원어 대조되는 “참”이 아니고, 불완전에 대조된 “완전”, 그림자에 대조된 “실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택한 백성)을 가리키는 비유이다(시 80:8-15; 겔 15:1-8, 19:10-14). 그러므로 랍비 문학에서도 말하기를, “실물 중에 가장 낮은 것(포도나무)이 식물계의 왕인 것처럼,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가장 낮아 보여도 장차 메시야 시대에는 세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점령한다”고 하였다(Lev.R. 36:2 참조). 예수님이 이런 랍비 문학에서 이 비유를 인용하신 것은 아니지만 참고할 만한 말이다. 예수님은 참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을 성립시키신다. 이런 의미에서 그 자신이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본래 참 포도나무가 아니며,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실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와 같으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포도나무)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서만 비로서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은, 또한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중보자(中保者)되신 관계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에게 전적으로 의뢰하여야 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신자의 의뢰심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일체 될 정도까지 깊어져야 한다. 그에게는, 독자적 의지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의지가 있을 뿐이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이런 이상적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이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우리 본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포도원의 농부라고 하였으며, 그가 가지들을 깨끗하게 하신다고도 하였다(2 절 끝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 그러나 인간 편의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성경은 많이 말씀한다. 마 11:12; 빌 2:12 참조. 그러나 위에 말한 일체 관계는 범신론적(汎神論的) 일체를 말함이 아니니, 인격과 인격의 관계이면서 다만 신자 편에서 그리스도에게 종속하여 순종하는 관계를 말함이다. 2세기의 이단자 뫄타누스(Montanus)는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하나님 아버지)요, 말씀(그리스도)이요, 성령이다”라고 하였다(Epiphanius, Haereses . . ). 이런 그릇된 사상에서는 신자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구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잘못이다. 신자는, 은혜를 많이 받아 그리스도에게 접근할수록 자기의 죄를 깨달으며, 주님과 자기와의 구분을 더욱 밝히 깨달아 안다.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로 세우신 이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가 우리의 중보자를 영원 전에 세우시고(벧전 1:2), 그를 마침내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가 중보자를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듬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다(마 3:17). 그리고 변화산에서는 말슴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도 하셨다(마 17:5). 하나님께서 신임하시고 세우신 중보자를 인간이 불신임할 것인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

판 클레마 엔 에모이 메 페론 카르폰 아이레이 아우토 카이 판 토 카르폰 페론 카다이레이 아우토 히나 카르폰 플레이오나 페레

개역개정,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새번역,2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 ㉠’손질하다’와 ‘깨끗하게 하다’의 그리스어 어원이 같음(카타이로)

우리말성경,2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자르실 것이요,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깨끗하게 손질하신다.

가톨릭성경,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

영어NIV,2 He cuts off every branch in me that bears no fruit, while every branch that does bear fruit he prunes so that it will be even more fruitful.

영어NASB,2 “Every branch in Me that does not bear fruit, He takes away; and every branch that bears fruit, He prunes it so that it may bear more fruit.

영어MSG,2 He cuts off every branch of me that doesn’t bear grapes. And every branch that is grape-bearing he prunes back so it will bear even more.

영어NRSV,2 He removes every branch in me that bears no fruit. Every branch that bears fruit he prunes to make it bear more fruit.

헬라어신약Stephanos,2 παν κλημα εν εμοι μη φερον καρπον αιρει αυτο και παν το καρπον φερον καθαιρει αυτο ινα πλειονα καρπον φερη

라틴어Vulgate,2 omnem palmitem in me non ferentem fructum tollet eum et omnem qui fert fructum purgabit eum ut fructum plus adferat

히브리어Modern,2 כל שריג בי אשר איננו עשה פרי יסירנו ואשר יעשה פרי יטהרנו להרבות את פריו׃

에데 휘메이스 카다로이 에스테 디아 톤 로곤 혼 렐랄레카 휘민

개역개정,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새번역,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 ㉡’손질하다’와 ‘깨끗하게 하다’의 그리스어 어원이 같음(카타이로)

우리말성경,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인해 이미 깨끗해졌다.

가톨릭성경,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영어NIV,3 You are already clean because of the word I have spoken to you.

영어NASB,3 “You are already clean because of the word which I have spoken to you.

영어MSG,3 You are already pruned back by the message I have spoken.

영어NRSV,3 You have already been cleansed by the word that I have spoken to you.

헬라어신약Stephanos,3 ηδη υμεις καθαροι εστε δια τον λογον ον λελαληκα υμιν

라틴어Vulgate,3 iam vos mundi estis propter sermonem quem locutus sum vobis

히브리어Modern,3 אתם כעת מטהרים בעבור דברי אשר דברתי אליכם׃

성 경: [요15:3]

󰃨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 여기 이른바 “내가 일러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전도의 말씀, 곧, 복음이며, 오늘날은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어떠한 작용으로 그렇게 되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신자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편(方便)이라는 교리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행각해 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슴”이란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바 성경에 기록된 말슴 곧, 복음과 율법을 의미한다. 성경이란 책은 완전히 하나님의 말슴을 기록한 것이다. 이 말슴은 언어, 혹은 문자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로 되었다는 것이, 그것의 하나님 말씀 자격과 효능(效能)을 상실시키지 않는다. 헬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사람의 말은, … 그 사람과 그 말과의 시간적, 혹은 장소적 거리에 따라서 효력의 다소가 좌우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언제자 그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말씀과 함께 현림(現臨)하시어 계시다. 그는, 언제나 그의 전지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시고 그 말씀과 함께 임하신다….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에게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나 성령에게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성경 전체가 성령으로 영감되었고, 계속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관되며, 능력 있게 되는 것 만큼, 거기서 섭취하여 전파되는 부분적 말씀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Kmpen, J. H. Koke 1911, pp. 502-503). 바빙크(Bavinck)는, 또한 하나님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에 대하여, 성경이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곧, (1)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라고 함(롬 1:16; 고전 1:18, 2:4, 5, 15:2; 엡 1:13). (2) 생명 있고 영존하는 말씀이라고 함(밸전 1:25). (3)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함(히 4:12). (4) 영이며 또 살리라는 것이라고 함(요 6:63). (5) 어두운데 비취는 빛이라고 함(벧후 1:19). (6) 마음에 심는 씨(생명 있는)라고 함(마 13:3). (7) 좌우에 날 선 예리한 검이라고 함(히 4:12), (8) 믿는 자들 속에 역사하는 말씀이라고 하였다(살전 2:13).(Gereformeerde Dogmatiek. , pp. 501-504). 바빙크(Bavinck)는, 성경 말씀의 능력과 생명의 역사에 대하여 비유하기를, 손이 일하지 않을때에도 일할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 말씀에 능력이 마술적으로 붙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말씀과 관계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바빙크(Bavinck)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개혁자들은, 성경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를 무인격한 마술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늘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와 연락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은 무인격한 능력이 아니며, 늘 말씀과 함께 하시며, 말씀으로 활동하게 하시되 늘 같은 모양으로 역사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 말씀(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역사하여 혹은 회개시키가며, 혹은 강팍케 하시며, 혹은 일어나게 하시며, 또 혹은 넘어지게도 하신다. 그가 이 말씀으로 역사하시되,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하시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Kampen J.H Kok 1911, p. 503).

메이나테 엔 에모이 카고 엔 휘민 카도스 토 클레마 우 뒤나타이 카르폰 페레인 앞 헤아우투 에안 메 메네 엔 테 암펠로 후토스 우데 휘메이스 에안 메 엔 에모이 메네테

개역개정,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새번역,4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말성경,4 내 안에 머물러 있으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가톨릭성경,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영어NIV,4 Remain in me, and I will remain in you. No branch can bear fruit by itself; it must remain in the vine. Neither can you bear fruit unless you remain in me.

영어NASB,4 “Abide in Me, and I in you. As the branch cannot bear fruit of itself unless it abides in the vine, so neither can you unless you abide in Me.

영어MSG,4 “Live in me. Make your home in me just as I do in you. In the same way that a branch can’t bear grapes by itself but only by being joined to the vine, you can’t bear fruit unless you are joined with me.

영어NRSV,4 Abide in me as I abide in you. Just as the branch cannot bear fruit by itself unless it abides in the vine, neither can you unless you abide in me.

헬라어신약Stephanos,4 μεινατε εν εμοι καγω εν υμιν καθως το κλημα ου δυναται καρπον φερειν αφ εαυτου εαν μη μεινη εν τη αμπελω ουτως ουδε υμεις εαν μη εν εμοι μεινητε

라틴어Vulgate,4 manete in me et ego in vobis sicut palmes non potest ferre fructum a semet ipso nisi manserit in vite sic nec vos nisi in me manseritis

히브리어Modern,4 עמדו בי ואני בכם כאשר השריג בל יעשה פרי מאליו אם לא יעמד בגפן כן גם אתם אם לא תעמדו בי׃

성 경: [요15:4-6]

이 부분에 사용된 어귀들중, “거하라”는 말(*)은 “머물라”는 뜻이니, 이미 있는 자리에 머물라는 뜻이다. 5절의 “있으면”이란 말도 헬라원어에서는 꼭 같이 “머물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여기 “머물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택하여(16절) 은혜 주신 그 자리에서 그들이 떠나지 않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그리스도 박까에서 그를 믿으려고 자율적으로 찾아 가는 자가 아니고 벌써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 인도된 자니, 그는 거기 멀물러 있으려고 순종의 걸음을 걸을 자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것은, 인간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6:44).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시는데, 우리는 그저 순종 할 뿐이다. 순종이란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과 그의 말씀을 지킴이다. 만일 누가,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다 이루어 주시는 것인 만큼 나는 순종 할 것 없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무생물 혹은 하등 동물로 취급하는 오착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으나, 우리로서 할 일은 그에게 순종함이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시므로 구속(救贖)의 큰 사업을 완성하셨다(히 5:8-9).

에고 에이미 헤 암펠로스 휘메이스 타 클레마타 호 메논 엔 에모이 카고 엔 아우토 후토스 페레이 카르폰 폴륀 호티 코리스 에무 우 뒤나스데 포이에인 우덴

개역개정,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새번역,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말성경,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그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가톨릭성경,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영어NIV,5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 he will bear much fruit;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영어NASB,5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he who abides in Me and I in him, he bears much fruit; for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영어MSG,5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When you’re joined with me and I with you, the relation intimate and organic, the harvest is sure to be abundant. Separated, you can’t produce a thing.

영어NRSV,5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Those who abide in me and I in them bear much fruit, because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헬라어신약Stephanos,5 εγω ειμι η αμπελος υμεις τα κληματα ο μενων εν εμοι καγω εν αυτω ουτος φερει καρπον πολυν οτι χωρις εμου ου δυνασθε ποιειν ουδεν

라틴어Vulgate,5 ego sum vitis vos palmites qui manet in me et ego in eo hic fert fructum multum quia sine me nihil potestis facere

히브리어Modern,5 אנכי הוא הגפן ואתם השריגים העמד בי ואני בו הוא יעשה פרי לרב כי בלעדי לא תוכלון עשות מאומה׃

에안 메 티스 메네 엔 에모이 에블레데 엨소 호스 토 클레마 카이 엨세란데 카이 쉬나구신 아우타 카이 에이스토 퓌르 발루신 카이 카이에타이

개역개정,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새번역,6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그는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우리말성경,6 누구든지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쓸모없는 가지처럼 버려져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은 모아다가 불 속에 던져 태워 버린다.

가톨릭성경,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영어NIV,6 If anyone does not remain in me, he is like a branch that is thrown away and withers; such branches are picked up, thrown into the fire and burned.

영어NASB,6 “If anyone does not abide in Me, he is thrown away as a branch and dries up; and they gather them, and cast them into the fire and they are burned.

영어MSG,6 Anyone who separates from me is deadwood, gathered up and thrown on the bonfire.

영어NRSV,6 Whoever does not abide in me is thrown away like a branch and withers; such branches are gathered, thrown into the fire, and burned.

헬라어신약Stephanos,6 εαν μη τις μεινη εν εμοι εβληθη εξω ως το κλημα και εξηρανθη και συναγουσιν αυτα και εις πυρ βαλλουσιν και καιεται

라틴어Vulgate,6 si quis in me non manserit mittetur foras sicut palmes et aruit et colligent eos et in ignem mittunt et ardent

히브리어Modern,6 איש אשר לא יעמד בי השלך כשריג החוצה וייבש וילקטום וישליכום אל תוך האש והיה לבער׃

에안 메이네테 엔 에모이 카이 타 레마타 무 엔 휘민 메이네 호 에안 델레테 아이테사스데 카이 게네세타이 휘민

개역개정,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새번역,7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말성경,7 만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가톨릭성경,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영어NIV,7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영어NASB,7 “If you abide in Me, and My words abide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done for you.

영어MSG,7 But if you make yourselves at home with me and my words are at home in you, you can be sure that whatever you ask will be listened to and acted upon.

영어NRSV,7 If you abide in me, and my words abide in you, ask for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done for you.

헬라어신약Stephanos,7 εαν μεινητε εν εμοι και τα ρηματα μου εν υμιν μεινη ο εαν θελητε αιτησεσθε και γενησεται υμιν

라틴어Vulgate,7 si manseritis in me et verba mea in vobis manserint quodcumque volueritis petetis et fiet vobis

히브리어Modern,7 והיה אם תעמדו בי ודברי יהיו בכם ככל חפצכם תשאלו ויעשה לכם׃

성 경: [요15:7]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그 아래 말씀이 알려주느가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속에 가진 자이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의 왕좌를 점령하였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주님의 말슴을 그의 대리(代理)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 권위를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살아 계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거한 생활의 유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약에 참여한 자로서 신종(信從)하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신분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쓸 수 있고, 또한 성령께서 그런 신자의 의지를 성화(聖化)시켜 주님의 뜻대로만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 곧,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여 기도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상반절에서 벌써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생활이,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되어 있다. 신자가 주님과 연합한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의 계약 행위, 곧, 선택이 그 기본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순종이 그 실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적 생활에서만 근근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얕은 경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계약과 생명에서 움직이는 내면적인 경건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무엇이든지 응답 받는다는 진리는, 요한이 그 시선에서도 말씀한 바 있다. 곧,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요일 5:14). 기도 응답을 받는자들은 저렇게 내면적인 경건의 소유자들이다. 기도 응답을 많이 받은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고(신 34:10), 히스기야는, 기도 하여 자기의 병을 고침 받았다(사 38:2-5; 왕하 20:5-6). 그는 기도하여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파멸시켰는데(왕하 19:14-19, 35), 하나님 앞에서 자백한대로,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할 만큼, 경건하였다.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사도들을 위시하여 일반 신자들 전체에게 허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져 주시는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이다. 히 4:14-16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다. 약 5:17에 말하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비가 아니로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큰 죄인들도 회개하며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데, 구약 시대에도 그러하였고(대하 33:10-13), 신약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눅 18:13-14에 말하기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였고, 계 3:19-20에는 말하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가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다.

엔 투토 에돜사스데 호 파테르 무 히나 카르폰 폴륀 페레테 카이 게네스데 에모이 마데타이

개역개정,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새번역,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말성경,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제자가 되고 이것으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가톨릭성경,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영어NIV,8 This is to my Father’s glory, that you bear much fruit, showing yourselves to be my disciples.

영어NASB,8 “My Father is glorified by this, that you bear much fruit, and so prove to be My disciples.

영어MSG,8 This is how my Father shows who he is–when you produce grapes, when you mature as my disciples.

영어NRSV,8 My Father is glorified by this, that you bear much fruit and become my disciples.

헬라어신약Stephanos,8 εν τουτω εδοξασθη ο πατηρ μου ινα καρπον πολυν φερητε και γενησεσθε εμοι μαθηται

라틴어Vulgate,8 in hoc clarificatus est Pater meus ut fructum plurimum adferatis et efficiamini mei discipuli

히브리어Modern,8 בזאת נכבד אבי בעשותכם פרי לרב והייתם לי לתלמידים׃

성 경: [요15:8]

󰃨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 실과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것을 찍어 버릴 수 밖에 없다. 실과 나무를 심는 자는 목재를 쓰려고 심지 아니하고 열매를 따려고 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자는 나무와 같이 찍힘을 받을 위태로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자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행실을 바로 행함이고(갈 5:22-23), 또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함이다. 잠 11:30에 말하기를,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고 하였다. 사람의 영혼은 귀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셧다(마 16:26). 예수님게서 사람의 영혼이 귀하다고 하신 이유는, 그들이 세상 문화를 건설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영혼을 귀하다고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겠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여호와으 빛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잠 20:27에 말하기를,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등불이 되게 하는 운동, 곧, 전도 운동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의인 99명보다 회개하는 한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눅 15:17).

카도스 에가페센 메 호 파테르 카고 휘마스 에가페사 메이나테 엔 테 아가페 테 에메

개역개정,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새번역,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우리말성경,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

가톨릭성경,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영어NIV,9 “As the Father has loved me, so have I loved you. Now remain in my love.

영어NASB,9 “Just as the Father has loved Me, I have also loved you; abide in My love.

영어MSG,9 “I’ve loved you the way my Father has loved me. Make yourselves at home in my love.

영어NRSV,9 As the Father has loved me, so I have loved you; abide in my love.

헬라어신약Stephanos,9 καθως ηγαπησεν με ο πατηρ καγω ηγαπησα υμας μεινατε εν τη αγαπη τη εμη

라틴어Vulgate,9 sicut dilexit me Pater et ego dilexi vos manete in dilectione mea

히브리어Modern,9 כאשר אהבני אבי אהבתי אתכם גם אני ואתם עמדו באהבתי׃

성 경: [요15:9]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이 귀절부터 15절 까지는, 신자들끼리의 연합의 배경을 말해 준다. 곧, 신자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속죄 사업을 담당하시게 하신 것을 말함이다. 5:20-21 참조.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이루실 속죄 사업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이런 사랑에 거하는 것은 기븐 일이요, 괴로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그들의 갈망하는 보금자리인데 그들은 왜 거기서 떠날 것인가? 거기 거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계명(신자들끼리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킴이다.

에안 타스 엔톨라스 무 테레세테 메네이테 엔 테 아가페 무 카도스 에고 타스 엔톨라스 투 파트로스 무 테테레카 카이 메노 아우투 엔 테 아가페

개역개정,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새번역,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우리말성경,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고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영어NIV,10 If you obey my commands, you will remain in my love, just as I have obeyed my Father’s commands and remain in his love.

영어NASB,10 “If you keep My commandments, you will abide in My love; just as I have kept My Father’s commandments and abide in His love.

영어MSG,10 If you keep my commands, you’ll remain intimately at home in my love. That’s what I’ve done–kept my Father’s commands and made myself at home in his love.

영어NRSV,10 If you keep my commandments, you will abide in my love, just as I have kept my Father’s commandments and abide in his love.

헬라어신약Stephanos,10 εαν τας εντολας μου τηρησητε μενειτε εν τη αγαπη μου καθως εγω τας εντολας του πατρος μου τετηρηκα και μενω αυτου εν τη αγαπη

라틴어Vulgate,10 si praecepta mea servaveritis manebitis in dilectione mea sicut et ego Patris mei praecepta servavi et maneo in eius dilectione

히브리어Modern,10 אם תשמרו את מצותי תעמדו באהבתי כאשר שמרתי גם אני את מצות אבי ועמדתי באהבתו׃

성 경: [요15:10]

󰃨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땅 위에서나 어디서든지 완전히 하신다(10:17-18, 12:43-50, 14:31). 그것이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방법이다. 그와 같이 신자도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하므로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신자가 주님의 사랑에 거하는 방법은, 신비주의자들처럼 그의 사랑의 취미에 집중하여 즐기는 것이 아니고, 그의 계명을 지킴, 곧, 생활로 그 사랑을 나타냄이다”라고 하였다(Jezus vraagt niet een mystick zwelgen in liefdegenot, Maar activiteit, liefd toonen. – Het Heil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 1950, p. 346).

타우타 렐랄레카 휘민 히나 헤 카라 헤 에메 엔 휘민 에 카이 헤 카라 휘몬 플레로데

개역개정,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말성경,11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가톨릭성경,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영어NIV,11 I have told you this so that my joy may be in you and that your joy may be complete.

영어NASB,11 “These things I have spoken to you so that My joy may be in you, and that your joy may be made full.

영어MSG,11 “I’ve told you these things for a purpose: that my joy might be your joy, and your joy wholly mature.

영어NRSV,11 I have said these things to you so that my joy may be in you, and that your joy may be complete.

헬라어신약Stephanos,11 ταυτα λελαληκα υμιν ινα η χαρα η εμη εν υμιν μεινη και η χαρα υμων πληρωθη

라틴어Vulgate,11 haec locutus sum vobis ut gaudium meum in vobis sit et gaudium vestrum impleatur

히브리어Modern,11 את אלה דברתי אליכם בעבור תהיה שמחתי בכם ותמלא שמחתכם׃

성 경: [요15:11]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 여기 이른 바 “이것”이란 말은, 윗절에서 가르친 내용을 가리킨다. 곧,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므로 그리스도와 사랑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 사랑을 받으면 그들에게 기쁨이 넘친다. “내 기쁨”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기뻐하시는 기쁨을 가리킨다.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서 그렇게 기뻐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16:22). 우리가 이 기쁨을 가져야만 (1) 우너망, 불평, 의심을 이기며, (2) 담력, 용기, 인내를 가지고 이 세상 모든 난관과 환란을 이기며, (3) 모든 수고로운 사랑의 책임들을 꾸준히 이행(履行)하게 되며, (4)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하우테 에스틴 헤 엔톨레 헤 에메 히나 아가파테 알렐루스 카도스 에가페사 휘마스

개역개정,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새번역,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말성경,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가톨릭성경,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영어NIV,12 My command is this: Love each other as I have loved you.

영어NASB,12 “This is My commandment, that you love one another, just as I have loved you. ”

영어MSG,12 This is my command: Love one another the way I loved you.

영어NRSV,12 “This is my commandment, that you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2 αυτη εστιν η εντολη η εμη ινα αγαπατε αλληλους καθως ηγαπησα υμας

라틴어Vulgate,12 hoc est praeceptum meum ut diligatis invicem sicut dilexi vos

히브리어Modern,12 הנה זאת מצותי כי תאהבון איש את אחיו כאשר אהבתיכם׃

성 경: [요15:12]

󰃨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 여기서는, 10절에 말한 바 그리스도의 “계명”이 무엇임을 밝힌다. 바리새인들이 계명을 지키는 동기는 남을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자기 자신을 남들에게 종교가로 나타내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계명을 오해한 것이다. 계명의 목적은 사랑이다. 사랑만 이루묘가 그것은 완성된다. 롬 13:8-10 참조.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은 새로운 계명이면서도 실상은 옛 계명이다(13:34; 요일 2:7-8). 사랑은 이렇게 영원토록 변치 않는 진리이다(고전 13:13). 고데이(F.Godet)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15:1-11 까지는, 계명의 첫 부분(하나님과 연합해야 될 것)을 가르치시고, 12-17절까지는, 그 둘째 부분(사람을 사랑해야 될 것)을 가르치신다”고 하였다. 성경은, 신앙 사상이 같은 형제들끼리의 분리(分離)를 정당하게 여기지 않고 연합을 고조한다. 예를 들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밖에, “몸과 지체”의 비유(엡 1:22-23, 3:6, 4:15-16). “성전과 돌들”의 비유(벧전 2:5)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반응을 부족하게 받으시더라도 사랑을 계속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상대방에게서 반응(서로 사랑함)이 있으므로 계속된다. 사랑을 받는 자도 같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인격이니 사랑을 행해야 된다. 여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행은, 신자가 그 속 사람의 영적 충동으로만 취할 행동인가? 그에게도 외부적 성질이 있는 계율들의 제재가 필요한가? 그렇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만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됐으므로, 무엇에게 얽매인 바 없어도 자발적으로 선을 힘쓸 자요 자유자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부터 감심으로 하나가의 종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주님의 뜻을 자세히 알아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외부적 표준으로 있는 율법을 상세히 알야야 되며, 지켜야 된다. 그는, 이 율법을 폭군의 엄한 명령과 같이 생각하지 않늘다. 그 율법은 실상 은혜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사랑하는 목자의 음성이다. 그것은 은혜의 한 방면이다. 그러므로 기독자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율법이나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는 사실은, 은혜의 원칙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은혜의 부요를 가져오는 거룩한 생활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계명의 목적과 정신이 사랑하는 의미에서 “계명”이란 말을 단수(單數)로 썼다(*).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인 복수적 율례들이 이제부터 신자와 관게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그의 시선에서 계명이란 말을 복수로도 사용하였다(요일 3:22, 5:2). 신비가들은, 내적 생명에 흥미를 가지고 외부적인 율법 조문들을 무시한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는 반율법주의 경향이 많다(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 p. 499). 그들은 외부적인 신앙 규율, 곧, 성경도 사실상 무시한다. 16세기의 자유 형제파(Brethren of free Spirit)나 17세기의 란텔과(Ranters)는 그렇게 잘못 움직였다(R.A. Knox, Enthusiasm, p. 173). 이렇게 신비가들은, 외부적 계율들보다 자기 마음에 온다는 영적 감동을 표준으로 삼기 때문에 도덕상 오착이 많다. 그들은 옳지 않은 일을 해 놓고라도 그것을 계시 받아서 하였다고 하면서 통과하려 하였다.

메이조나 타우테스 아가펜 우데이스 에케이 히나 티스 텐 프쉬켄 아우투 데 휘페르 톤 필론 아우투

개역개정,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새번역,13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우리말성경,13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가톨릭성경,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영어NIV,13 Greater love has no one than this, that he lay 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영어NASB,13 “Greater love has no one than this, that one lay 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

영어MSG,13 This is the very best way to love. Put your life on the line for your friends.

영어NRSV,13 No one has greater love than this, to lay down one’s life for one’s friends.

헬라어신약Stephanos,13 μειζονα ταυτης αγαπην ουδεις εχει ινα τις την ψυχην αυτου θη υπερ των φιλω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13 maiorem hac dilectionem nemo habet ut animam suam quis ponat pro amicis suis

히브리어Modern,13 אין לאיש אהבה יתרה מתתו את נפשו בעד ידידיו׃

성 경: [요15:13]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큰 사랑으로 희생하실 것을 가리킨 말슴이다. 그는, 자기의 사랑이 얼마나 큰 사실을 설명하여, 윗절(12절)의 내용과 같이 신자들로 하여금 남들을 사랑하게 하려 하신다. 그리스도의 무한히 큰 사랑을 받은 우리들로서, 어찌 남들을 사랑할 마음이 없으랴? 요일 4:11 참조. 예수님게서 신자들을 “친구”라고 하신 것은, 그 앞에 죄인이요 원수 되었던 자들을 속죄의 사망으로 사랑해 주신다는 뜻이다. 롬 5:6-10 참조. 우리를 사랑하심은, 다만 우리의 보통 유익을 위한 일반적인 적선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여 죽기까지 하셨으니, 다시 사신 뒤에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은 또 얼마나 클 것이가? 이렇게 신자들은 예수님의 친구 되는 큰 축복을 받았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친구였다(사 41:8).

휘메이스 필로이 무 에스테 에안 포이에테 하 에고 엔텔로마이 휘민

개역개정,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새번역,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우리말성경,14 너희가 만일 내 계명을 지키면 너희는 내 친구다.

가톨릭성경,14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영어NIV,14 You are my friends if you do what I command.

영어NASB,14 “You are My friends if you do what I command you.

영어MSG,14 You are my friends when you do the things I command you.

영어NRSV,14 You are my friends if you do what I command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4 υμεις φιλοι μου εστε εαν ποιητε οσα εγω εντελλομαι υμιν

라틴어Vulgate,14 vos amici mei estis si feceritis quae ego praecipio vobis

히브리어Modern,14 ואתם ידידי אתם אם תעשו את אשר אני מצוה אתכם׃

성 경: [요15:14]

󰃨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 여기 이른바 “나의 명하는대로 행함”은, 그가 그 제자들더러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순종함이다. 믿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받은 증표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믿는 형제를 참으로 사랑할 수 없다(요일 4:7-21). 이 귀절 뜻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순종하는자가 그리스도의 친구 된 자격, 곧, 그 속죄의 사랑을 받은 자격을 발휘한다는 의미이다.

우케티 레고 휘마스 둘루스 호티 호 둘루스 우크 오이덴 티 포이에이 아우투 호 퀴리오스 휘마스 데 에이레카 필루스 호티 판타 하 에쿠사 파라 투 파트로스 무 에그노리사 휘민

개역개정,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새번역,15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15 나는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주인의 일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주었으니 친구라고 부르는 것이다.

가톨릭성경,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영어NIV,15 I no longer call you servants, because a servant does not know his master’s business. Instead, I have called you friends, for everything that I learned from my Father I have made known to you.

영어NASB,15 “No longer do I call you slaves, for the slave does not know what his master is doing; but I have called you friends, for all things that I have heard from My Father I have made known to you.

영어MSG,15 I’m no longer calling you servants because servants don’t understand what their master is thinking and planning. No, I’ve named you friends because I’ve let you in on everything I’ve heard from the Father.

영어NRSV,15 I do not call you servants any longer, because the servant does not know what the master is doing; but I have called you friends, because I have made known to you everything that I have heard from my Father.

헬라어신약Stephanos,15 ουκετι υμας λεγω δουλους οτι ο δουλος ουκ οιδεν τι ποιει αυτου ο κυριος υμας δε ειρηκα φιλους οτι παντα α ηκουσα παρα του πατρος μου εγνωρισα υμιν

라틴어Vulgate,15 iam non dico vos servos quia servus nescit quid facit dominus eius vos autem dixi amicos quia omnia quaecumque audivi a Patre meo nota feci vobis

히브리어Modern,15 לא אקרא לכם עוד עבדים כי העבד איננו ידע את אשר יעשה אדניו כי אם אמרתי ידידי אתם כי כל אשר שמעתי מאת אבי הודעתי אתכם׃

성 경: [요15:15]

󰃨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 그리스도께서, 이때까지 구속에 관한 모든 진리를 그 제자들에게 전하여 주셨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에게 깊이 감취었던 오묘한 진리였다(벧전 1:10-11).

우크 휘메이스 메 엨셀렠사스데 알 에고 엨셀렠사멘 휘마스 카이 에데카 휘마스 히나 휘메이스 휘파게테 카이 카르폰 페레테 카이 호 카르포스 휘몬 메네 히나 호 티 안 아이테세테 톤 파테라 엔 토 오노마티 무 도 휘민

개역개정,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말성경,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해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계속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가톨릭성경,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영어NIV,16 You did not choose me, but I chose you and appointed you to go and bear fruit–fruit that will last. Then the Father will give you whatever you ask in my name.

영어NASB,16 “You did not choose Me but I chose you, and appointed you that you would go and bear fruit, and that your fruit would remain, so that whatever you ask of the Father in My name He may give to you.

영어MSG,16 “You didn’t choose me, remember; I chose you, and put you in the world to bear fruit, fruit that won’t spoil. As fruit bearers, whatever you ask the Father in relation to me, he gives you.

영어NRSV,16 You did not choose me but I chose you. And I appointed you to go and bear fruit, fruit that will last, so that the Father will give you whatever you ask him in my name.

헬라어신약Stephanos,16 ουχ υμεις με εξελεξασθε αλλ εγω εξελεξαμην υμας και εθηκα υμας ινα υμεις υπαγητε και καρπον φερητε και ο καρπος υμων μενη ινα ο τι αν αιτησητε τον πατερα εν τω ονοματι μου δω υμιν

라틴어Vulgate,16 non vos me elegistis sed ego elegi vos et posui vos ut eatis et fructum adferatis et fructus vester maneat ut quodcumque petieritis Patrem in nomine meo det vobis

히브리어Modern,16 לא אתם בחרתם בי כי אם אנכי בחרתי בכם והפקדתי אתכם ללכת ולעשות פרי ופריכם יקום והיה כל אשר תשאלו מאבי בשמי יתן לכם׃

성 경: [요15:16]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 그들이 사도로 세움 받은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인 만큼, 그들의 일은 유력해진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배경이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 과실을 맺고, 그들이 과실을 맺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가 응답된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없는 외식자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는다(마 3:7-8, 5:23-24, 6:14-15). 이 말씀(16 절)은, 주님과 신자가 연합하게 되는 것(1절 이하에 있는 말씀)이 전연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성립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타우타 엔텔로마이 휘민 히나 아가파테 알렐루스

개역개정,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말성경,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가톨릭성경,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영어NIV,17 This is my command: Love each other.

영어NASB,17 “This I command you, that you love one another.

영어MSG,17 “But remember the root command: Love one another.

영어NRSV,17 I am giving you these commands so that you may love one another.

헬라어신약Stephanos,17 ταυτα εντελλομαι υμιν ινα αγαπατε αλληλους

라틴어Vulgate,17 haec mando vobis ut diligatis invicem

히브리어Modern,17 את אלה אני מצוה אתכם למען תאהבון איש את אחיו׃

성 경: [요15:17]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 위에 있는 15-16절 말슴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내막을 보여 준다. 그가 이 내막을 신자들에게 알려 주시는 이유는, 신자들로 하여금 서로끼리 사랑하게 하른 것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랑을 근거하여서만 남을 사랑할 수 있다. 18-27 이 부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핍박 받을 사도들(신자들)들에 대하여, 몇 가지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1) 그 핍박은 결국 예수님을 미워하는 일이니(18 절). 그들로서는 주님께서 받으시는 미움에 동참함이 영광이다(행 5:41). (2) 그들이 핍박 받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증표이니(19절), 핍박 받음은 그들이 선택을 받아 구원 얻은 증표이다(빌 1:28), (3) 주인이 핍박을 받으셨으니 종 된 자로서 그것을 면할 수 없다(20절). (4) 핍박자들의 악행은 하나님에게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행동이며 따라서 무서운 죄악이니, 불쌍히 여길 대상이다(21-22). 눅 23:24 참조. (5) 신자를 핍박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두려운 일이다(23-24).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지식적 과오가 아니고 윤리적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부패한 인간성을 원인으로 한 것이다. (6) 그것은 율법에 기록된대로 되는 일이니, 핍박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줄 믿고 안심할 따름이다(25 절). (7) 그리스도에게 대한 성령님의 증거가 사도들과 함께 하실 것이므로, 그들은 핍박을 이길 수 있다. 벧전 4:14에 말하기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였다.

에이 호 코스모스 휘마스 미세이 기노스케테 호티 에메 프로톤 휘몬 메미세켄

개역개정,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새번역,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우리말성경,18 “만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했다는 것을 알라.

가톨릭성경,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영어NIV,18 “If the world hates you, keep in mind that it hated me first.

영어NASB,18 “If the world hates you, you know that it has hated Me before it hated you.

영어MSG,18 “If you find the godless world is hating you, remember it got its start hating me.

영어NRSV,18 “If the world hates you, be aware that it hated me before it hated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8 ει ο κοσμος υμας μισει γινωσκετε οτι εμε πρωτον υμων μεμισηκεν

라틴어Vulgate,18 si mundus vos odit scitote quia me priorem vobis odio habuit

히브리어Modern,18 אם העולם שנא אתכם דעו כי אתי שנא ראשונה׃

성 경: [요15:18]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예수님은, 이때까지 그 사도들의 받을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제 그는 그들의 받을 미움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들이(일반 신자들도) 예수님에게서는 사랑을 받으나 세상에서는 미움을 받는다. 그들이 핍박을 받으면, 예수님은 그 사건에 있어서 그들보다 먼저 영적으로 박해를 받으시는 셈이 된다. 그 만큼 그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밀접하다.

에이 에크 투 코스무 에테 호 코스모스 안 토 이디온 에필레이 호티 데 에크 투 코스무 우크 에스테 알 에고 엨셀렠사멘 휘마스 에크 투 코스무 디아 투토 미세이 휘마스 호 코스모스

개역개정,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새번역,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여 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으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아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말성경,19 만일 너희가 세상에 속해 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으로 여기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내가 세상에서 너희를 택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가톨릭성경,19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영어NIV,19 If you belonged to the world, it would love you as its own. As it is, you do not belong to the world, but I have chosen you out of the world. That is why the world hates you.

영어NASB,19 “If you were of the world, the world would love its own; but because you are not of the world, but I chose you out of the world, because of this the world hates you.

영어MSG,19 If you lived on the world’s terms, the world would love you as one of its own. But since I picked you to live on God’s terms and no longer on the world’s terms, the world is going to hate you.

영어NRSV,19 If you belonged to the world, the world would love you as its own. Because you do not belong to the world, but I have chosen you out of the world–therefore the world hates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9 ει εκ του κοσμου ητε ο κοσμος αν το ιδιον εφιλει οτι δε εκ του κοσμου ουκ εστε αλλ εγω εξελεξαμην υμας εκ του κοσμου δια τουτο μισει υμας ο κοσμος

라틴어Vulgate,19 si de mundo fuissetis mundus quod suum erat diligeret quia vero de mundo non estis sed ego elegi vos de mundo propterea odit vos mundus

히브리어Modern,19 אלו מן העולם הייתם כי אז אהב העולם את אשר לו ויען כי אינכם מן העולם כי אם בחרתי אתכם מתוך העולם לכן העולם ישנא אתכם׃

성 경: [요15:19]

󰃨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세상이 그들을 사랑할 경우는 한 가지 조건 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의 근원이 그냥 세상에 속하고, 따라서 그들의 생활은 세상의 소유물이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과 반대되는 조건이 있는 까닭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택하신 까닭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세상에게서 미움 받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세상 죄악은 이처럼 서로 반대된다(7:7).

므네모뉴에테 투 로구 후 에고 에이폰 휘민 우크 에스틴 둘로스 메이존 투 퀴리우 아우투 에이 에메 에디옼산 카이 휘마스 디옼수신 에이 톤 로곤 무 에테레산 카이 톤 휘메테론 테레수신

개역개정,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새번역,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그의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또 그들이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

우리말성경,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높지 않다’고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했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이요, 사람들이 내 말을 지켰으니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가톨릭성경,20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영어NIV,20 Remember the words I spoke to you: ‘No servant is greater than his master.’ If they persecuted me, they will persecute you also. If they obeyed my teaching, they will obey yours also.

영어NASB,20 “Remember the word that I said to you, ‘ A slave is not greater than his master.’ If they persecuted Me, they will also persecute you; if they kept My word, they will keep yours also.

영어MSG,20 “When that happens, remember this: Servants don’t get better treatment than their masters. If they beat on me, they will certainly beat on you. If they did what I told them, they will do what you tell them.

영어NRSV,20 Remember the word that I said to you, ‘Servants are not greater than their master.’ If they persecuted me, they will persecute you; if they kept my word, they will keep yours also.

헬라어신약Stephanos,20 μνημονευετε του λογου ου εγω ειπον υμιν ουκ εστιν δουλος μειζων του κυριου αυτου ει εμε εδιωξαν και υμας διωξουσιν ει τον λογον μου ετηρησαν και τον υμετερον τηρησουσιν

라틴어Vulgate,20 mementote sermonis mei quem ego dixi vobis non est servus maior domino suo si me persecuti sunt et vos persequentur si sermonem meum servaverunt et vestrum servabunt

히브리어Modern,20 זכרו את דברי אשר דברתי אליכם העבד איננו גדול מאדניו אם רדפו אתי גם אתכם ירדפו אם שמרו את דברי גם את דברכם ישמרו׃

성 경: [요15:20]

󰃨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 13:16 참조. 이 귀절 말씀은, (1) 기독 신자가 핍박 받을 것이 필연적이니 피할 수 없다는 것과, 또한 (2) 도덕적 처지에서도 그것을 받음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 여기 “지킨다”는 말은 트집 잡는다는 뜻이다.

알라 타우타 판타 포이에수신 에이스 휘마스 디아 토 오노마 무 호티 우크 오이다신 톤 펨프산타 메

개역개정,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새번역,21 그들은 너희가 내 이름을 믿는다고 해서, 이런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21 그들은 너희가 내 이름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런 모든 일들을 너희에게 행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톨릭성경,21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어NIV,21 They will treat you this way because of my name, for they do not know the One who sent me.

영어NASB,21 “But all these things they will do to you for My name’s sake, because they do not know the One who sent Me.

영어MSG,21 “They are going to do all these things to you because of the way they treated me, because they don’t know the One who sent me.

영어NRSV,21 But they will do all these things to you on account of my name, because they do not know him who sent me.

헬라어신약Stephanos,21 αλλα ταυτα παντα ποιησουσιν υμιν δια το ονομα μου οτι ουκ οιδασιν τον πεμψαντα με

라틴어Vulgate,21 sed haec omnia facient vobis propter nomen meum quia nesciunt eum qui misit me

히브리어Modern,21 אבל כל זאת יעשו לכם בעבור שמי כי לא ידעו את שלחי׃

성 경: [요15:21,22]

󰃨 하나님에게 대한 핍박자들의 무지가 사도들을 핍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무지는 무죄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에게 증거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불신앙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좋을 번 하였다.(Bengel).

에이 메 엘돈 카이 엘랄레사 아우토이스 하마르티안 우크 에이코산 뉜 데 파로파신 우크 에쿠신 페리 테스 하마르티아스 아우톤

개역개정,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새번역,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해 주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 죄를 변명할 길이 없다.

우리말성경,22 만일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죄가 없었겠지만 그들은 이제 자기 죄를 변명할 길이 없다.

가톨릭성경,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들의 죄를 변명할 구실이 없다.

영어NIV,22 If I had not come and spoken to them, they would not be guilty of sin. Now, however, they have no excuse for their sin.

영어NASB,22 “If I had not come and spoken to them, they would not have sin, but now they have no excuse for their sin.

영어MSG,22 If I hadn’t come and told them all this in plain language, it wouldn’t be so bad. As it is, they have no excuse.

영어NRSV,22 If I had not come and spoken to them, they would not have sin; but now they have no excuse for their sin.

헬라어신약Stephanos,22 ει μη ηλθον και ελαλησα αυτοις αμαρτιαν ουκ ειχον νυν δε προφασιν ουκ εχουσιν περι της αμαρτιας αυτων

라틴어Vulgate,22 si non venissem et locutus fuissem eis peccatum non haberent nunc autem excusationem non habent de peccato suo

히브리어Modern,22 לולא באתי ודברתי אליהם לא היה בהם חטא ועתה לא יוכלון להתנצל על חטאתם׃

호 에메 미손 카이 톤 파테라 무 미세이

개역개정,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새번역,23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까지도 미워한다.

우리말성경,23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도 미워한다.

가톨릭성경,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내 아버지까지 미워한다.

영어NIV,23 He who hates me hates my Father as well.

영어NASB,23 “He who hates Me hates My Father also.

영어MSG,23 Hate me, hate my Father–it’s all the same.

영어NRSV,23 Whoever hates me hates my Father also.

헬라어신약Stephanos,23 ο εμε μισων και τον πατερα μου μισει

라틴어Vulgate,23 qui me odit et Patrem meum odit

히브리어Modern,23 השנא אתי ישנא גם את אבי׃

성 경: [요15:23,24]

󰃨 참 신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미워함이고(18 절), 그리스도를 미워함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큰 죄라는 의미에서 이 귀절들은 말씀한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 속은 자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는 일체이시다(10:30). 이 점에 있어서 벴겔(Bengel)은, 미움과 불신앙과의 관련성을 지적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에게 대한 사랑은 신앙과 동반하나 증오는 불신앙과 동반한다”라고 하였다.

󰃨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 여기 이른바, “아무도 못한 일”이란 것은,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들을 가리킨다. 10:25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적들)은 너무도 위대하며, 그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완전히 계시한다(5:17,36, 14:9,11). 그러므로 그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은, 다만 지식적 과오가 아니고 도덕적 반역이다.

에이 타 에르가 메 에포이에사 엔 아우토이스 하 우데이스 알로스 에포이에센 하마르티안 우크 에이코산 뉜 데 카이 헤오라카신 카이 메미세카신 카이 에메 카이 톤 파테라 무

개역개정,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새번역,24 내가 다른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그들 가운데서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내가 한 일을 보고 나서도, 나와 내 아버지를 미워하였다. /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고서도 미워하였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음

우리말성경,24 내가 만일 아무도 행하지 못한 일을 그들 가운데서 행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와 내 아버지를 미워했다.

가톨릭성경,24 일찍이 다른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들을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 나와 내 아버지까지 미워하였다.

영어NIV,24 If I had not done among them what no one else did, they would not be guilty of sin. But now they have seen these miracles, and yet they have hated both me and my Father.

영어NASB,24 “If I had not done among them the works which no one else did, they would not have sin; but now they have both seen and hated Me and My Father as well.

영어MSG,24 If I hadn’t done what I have done among them, works no one has ever done, they wouldn’t be to blame. But they saw the God-signs and hated anyway, both me and my Father.

영어NRSV,24 If I had not done among them the works that no one else did, they would not have sin. But now they have seen and hated both me and my Father.

헬라어신약Stephanos,24 ει τα εργα μη εποιησα εν αυτοις α ουδεις αλλος πεποιηκεν αμαρτιαν ουκ ειχον νυν δε και εωρακασιν και μεμισηκασιν και εμε και τον πατερα μου

라틴어Vulgate,24 si opera non fecissem in eis quae nemo alius fecit peccatum non haberent nunc autem et viderunt et oderunt et me et Patrem meum

히브리어Modern,24 לולא עשיתי בתוכם את המעשים אשר איש זולתי לא עשה לא היה בהם חטא ועתה ראו וישנאו גם אתי גם את אבי׃

알 히나 플레로데 호 로고스 호 엔 토 노모 아우톤 게그람메노스 호티 에미세산 메 도레안

개역개정,25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25 그래서 그들의 율법에 ‘그들은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고 기록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말성경,25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것을 이루려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했다.’ 시35:19;시69:4

가톨릭성경,25 이는 그들의 율법에 ‘그들은 까닭없이 저를 미워하였습니다.’라고 기록된 말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다.

영어NIV,25 But this is to fulfill what is written in their Law: ‘They hated me without reason.’

영어NASB,25 “But they have done this to fulfill the word that is written in their Law, ‘THEY HATED ME WITHOUT A CAUSE.’

영어MSG,25 Interesting–they have verified the truth of their own Scriptures where it is written, ‘They hated me for no good reason.’

영어NRSV,25 It was to fulfill the word that is written in their law, ‘They hated me without a cause.’

헬라어신약Stephanos,25 αλλ ινα πληρωθη ο λογος ο γεγραμμενος εν τω νομω αυτων οτι εμισησαν με δωρεαν

라틴어Vulgate,25 sed ut impleatur sermo qui in lege eorum scriptus est quia odio me habuerunt gratis

히브리어Modern,25 אך למלאת דבר הכתוב בתורתם שנאת חנם שנאוני׃

성 경: [요15:25]

󰃨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이 말씀은 시 35:149의 인용이거나, 혹은 시 69:4의 인용이다. 시편을 “율법”이란 이름 아래 넣어 말하는 것은 그 때의 풍속이었다(10:34). 그 때에는 사람들이 구약 초두의 부분 곧, 율법으로써 구약 전체의 명칭을 삼았던 것이다.

오탄 엘데 호 파라클레토스 혼 에고 펨프소 휘민 파라 투 파트로스 토 프뉴마 테스 알레데이아스 호 파라 투 파트로스 에크포류에타이 에케이노스 마르튀레세이 페리 에무

개역개정,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새번역,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 / ㉣’변호해 주시는 분’ 또는 ‘도와주시는 분’

우리말성경,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거해 주실 것이다.

가톨릭성경,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영어NIV,26 “When the Counselo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out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영어NASB,26 “When the Helpe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at is the Spirit of truth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영어MSG,26 “When the Friend I plan to send you from the Father comes–the Spirit of Truth issuing from the Father–he will confirm everything about me.

영어NRSV,26 “When the Advocate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comes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on my behalf.

헬라어신약Stephanos,26 οταν δε ελθη ο παρακλητος ον εγω πεμψω υμιν παρα του πατρος το πνευμα της αληθειας ο παρα του πατρος εκπορευεται εκεινος μαρτυρησει περι εμου

라틴어Vulgate,26 cum autem venerit paracletus quem ego mittam vobis a Patre Spiritum veritatis qui a Patre procedit ille testimonium perhibebit de me

히브리어Modern,26 ובבוא הפרקליט אשר אשלחנו לכם מאת אבי רוח האמת היוצא מאת אבי הוא יעיד עלי׃

성 경: [요15:26,27]

󰃨 이 세상 사람들이 사도들(신자들)을 미워해도(18-25). 그들은 성령님의 능력을 받으므로 세상에서 물러서지 않고 도리어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다. 여기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증거는 실상 일체이다. 성령은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증거하실 것이다(Wikenhauser, Schlatter).

󰃨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친히 목도한 사실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사도의 자격이다(고전 9:1; 행10:41). 그러나 그들이 이와 같은 자격으로만 증인이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참으로 증거하게 되었다. 행 1:8

카이 휘메이스 데 마르튀레이테 호티 앞 아르케스 멭 에무 에스테

개역개정,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새번역,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우리말성경,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내 증인들이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27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영어NIV,27 And you also must testify, for you have been with me from the beginning.

영어NASB,27 and you will testify also, because you have been with Me from the beginning.

영어MSG,27 You, too, from your side must give your confirming evidence, since you are in this with me from the start.

영어NRSV,27 You also are to testify because you have been with me from the beginning.

헬라어신약Stephanos,27 και υμεις δε μαρτυρειτε οτι απ αρχης μετ εμου εστε

라틴어Vulgate,27 et vos testimonium perhibetis quia ab initio mecum estis

히브리어Modern,27 וגם אתם תעידו כי מראש הייתם עמד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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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과 16장은 예수님의 긴 ‘고별강화’(Farewell discourses, 13~17장) 한 가운데 위치한다. 여기서는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15:1~16), 제자들에게 닥칠 핍박(15:17·16:4), 보혜사의 오심(16:5~16:15), 해산의 기쁨(16:16~24), 제자들의 믿음과 예수님의 격려(16:25~33)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의 말씀은 아마도 집을 나와서(요 14:31) 길 가는 도중에 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부분의 말씀은 17장의 기도와 함께 저녁식사 후에 야외에서 하신 말씀이 된다.1

포도나무와 가지(15:1~17)

15장 첫 부분의 말씀은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상징(symbol)’이나 ‘풍유(allegory)’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상징의 각 부분이 각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2 먼저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말씀하신다(1절). 여기서 ‘참(alバthinバ)’이 가지는 의미는 보통의 포도나무가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참 생명을 가져다주는 포도나무란 뜻이다.3 따라서 예수님은 문자적 의미에서의 포도나무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참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원’으로 비유하고 있다(사 5:1~7, 시 80:8~14, 렘 2:21).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이고 그 제자들이 가지이며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하고 있다. 농부의 바람은 포도나무 가지가 과실을 많이 맺는 것이다(8절).

그래서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신다(2절). 여기서 ‘제해 버린다(airo?’는 것은 ‘잘라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완전히 단절되는 것을 뜻한다.4 그리고 ‘깨끗케 한다(kathairo?’는 단어는 필로(Philo)에 의해 ‘가지치기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있지만(De Somn. II.64), 포도 재배와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된 용어는 아닌 듯하다.5 이 단어가 ‘가지치기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예를 신약의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여기 2절의 ‘깨끗케 하다’는 단어는 3절의 “깨끗하니라(katharoi)”는 말씀과 연관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2절에서는 ‘가지치기’라는 문자적 의미보다는 3절에서의 ‘깨끗함’과 같은 영적 의미가 주로 부각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6 우리는 예수님이 일러 주신 말씀과 성령으로 깨끗케 되었다(3절; 엡 5:26, 딛 3:5).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신다(4절).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가운데 있음을 의미한다(계 3:20, 요일 2:27~28). 예수님은 이것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4하).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자기 스스로 과실을 맺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아 과실을 맺게 된다. 이 진리를 예수님은 다시 강조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5절) 여기서 비로소 제자들이 ‘가지들(klバmata)’임이 분명하게 선언되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과실을 많이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과실을 맺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버림을 당하고 만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6절). 원문에 보면 ‘던지웠다(eblバthバ)’와 ‘말라졌다(exバranthバ)’로 되어 있다. 즉, 아오리스트(aorist, 부정과거) 시상이 사용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을 때 일어날 상황을 이미 일어난 것으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것은 강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갈라디아서 5장 4절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고(katバrgバthバte) 은혜에서 떨어졌다(exepesate)”가 된다. 곧 미래에 닥칠 위험을 이미 일어난 것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우리가 과실을 맺는 구체적인 방법 중의 하나로서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과실을 맺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것 곧 기도가 뒤따라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도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가리키는 구체적 표현이며 실천적 행동이다. 따라서 기도는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사람들이 그치지 말고 계속해야 할 사항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미 있는 열매를 맺는 것은 기도 응답을 통해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자기 힘으로 스스로 이룬 것들 중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별로 없다. 그저 잡초나 쓸모없는 것들만 맺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가 농부 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열매를 맺으려면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야고보도 말하기를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하였다(약 4:2).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함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이다. 여기의 ‘말’은 헬라어로 ‘레마타(rhバmata)’인데 단수인 ‘레마’의 복수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또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무시한 신비주의적 연합이 아니라 객관적인 말씀에 따른 생활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혹자는 ‘레마’와 ‘로고스’를 구별하여 ‘레마(rhバma)’는 내게 와 닿는 주관적인 말씀이며 ‘로고스(logos)’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구분을 알지 못한다. 물론 ‘레마’는 어원상 ‘말해진 것(what is said, das Gesagte)’을, ‘로고스’는 그냥 ‘말(the word, das Wort)’을 뜻하는 정도의 뉘앙스 차이는 있으나, 두 단어는 동의어로서 성경에서 호환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일례로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는 ‘로고스’가 사용되었으나 7절에서는 ‘레마’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 의미상의 차이는 없고, 둘 다 객관적인 예수님의 말씀을 뜻한다.

그리고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신다(8절). 여기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제자가 아닌 사람들이 제자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실을 많이 맺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이상한 논리가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여기의 ‘제자가 된다’는 말은 ‘제자로서 합당한 자가 된다, 참 제자가 된다’는 의미이다(cf. 마 5:45).7

이이서 8~12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또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임을 말해 준다. 이 사랑은 세속적인 사랑이 아니라 거룩한 신적 사랑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9절). 즉, 이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이타적이며 자기희생적인 사랑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는가? 그 답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0절).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은 단지 기도와 묵상과 같은 개인적 경건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그의 계명을 적극적으로 지키는 생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12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곧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11절). 예수님께서 사랑의 계명을 주신 목적은 제자들에게 부담을 주거나 율법의 멍에를 씌우려 함이 아니다. 오직 그들에게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다. 이 기쁨은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며 거룩한 기쁨이다. 그리고 이 기쁨은 가만히 앉아서 명상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정적인 기쁨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능동적인 기쁨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사랑의 가장 큰 형태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친구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13절).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실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친구들’이라는 복수가 이것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목숨을 버려 사랑하신 희생적인 사랑이다(요 10:11).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향하여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신다(14절). 여기서 ‘친구(philoi)’의 개념은 ‘가까운 자, 친근한 자’이다. 이것은 친밀한 교제, 동등한 지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종(douloi)’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종은 주인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 친구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들은 것을 제자들에게 다 알게 하셨다(15절). 이러한 정보의 교류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존귀한 자로 보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성도들을 존중히 여겨야 하며 귀하게 대우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 사이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셨다(16절).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친구 관계는 아무런 목적 없는 친교 관계가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진 사명 관계이다. 그것은 곧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이다. 또한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다. 따라서 우리가 과실을 맺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맺어야 할 과실은 곧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17절). 따라서 형제 사랑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목적이요,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맺어야 하는 열매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랑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며 핵심이다(마 23:37~40, 7:12, 요 13:34, 요일 3:23).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마음속의 체험이 제일 중요한 줄로 알고 늘 체험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는 뜨거운 찬양만 있으면 신앙이 부흥하는 것처럼 열광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그러나 생활 속의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다른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세상의 핍박(15:18~16:4)

이어서 예수님은 세상이 그의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곧 핍박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다. 그 때 제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이 제자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미워하였다는 사실이다(18절). 곧 예수님을 미워하였기 때문에 또한 그의 제자들을 미워한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 몇 가지를 말씀하신다(18~21절).

첫째는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9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더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하였을 것이다.”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 ‘비현실적 조건문(unreal condition)’인데 사실이 아닌 것을 가정하여 말하는 것이다.8 그래서 사실은,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세상에서 예수님의 택함을 입었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과 ‘세상에 속한 자들’ 사이에 근본적인 구별이 있음을 알 수 있다(요일 4:4~6, 5:18~19). 그래서 이 두 그룹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고 한 말(요 13:16)을 기억하라고 하신다(20절).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였고 또 미워하기 때문에 그의 종 된 제자들도 당연히 미워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세상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핍박하는 근본 이유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보내신 자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21절). 여기서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지 지식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믿지 않는다’, ‘섬기지 않는다’의 뜻에 가깝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들어오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세상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다(22~27절).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22상). 이것도 비현실적 조건문이다. 실상은 예수님이 오셔서 저희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죄가 있으며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다. 물론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한 유대인들에게 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보고 그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고 배척한 그 분명한 죄책은 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듣고도 배척했기 때문에 도무지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23절). 이것은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를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요 사신(使臣)이다. 따라서 그를 환영하는 자는 그 보내신 자를 환영하는 것이요, 그를 미워하는 자는 또한 그 보내신 자를 미워하는 것이다(마 10:40, 요 14:7,9~11, 요일 5:10).

예수님은 이어서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고 말씀하신다(24절). 예수님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놀라운 이적들을 많이 행하셨다(요 14:11, 5:3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그들에게 충분한 증거가 주어졌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도리어 하나님의 아들과 그 보내신 자를 미워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불신앙과 미움 배후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었음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곧 성경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25절). 바로 그들이 믿고 신봉하는 율법에(시 35:19, 69:4) 이런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이런 핍박이 임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단지 인간들 사이의 관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차원이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그리스도)과 마귀 사이에 일어나는 영적 전쟁에 관한 것인데 우리의 행위에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단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미움을 당하는 일이 많이 있다. 그 이유는 그 배후에 하나님과 하나님 믿는 것을 싫어하는 마귀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간단히 ‘증거’에 대해 말씀하신다(26~27절). 예수님을 증거할 자는 보혜사 성령과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여기서 갑자기 증거에 대해 말씀하시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증거하셨다는 말씀(22절)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은 예수님의 증거를 보고 듣고도 믿지 아니하였으며 또 미워하였지만,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 후에 보내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예수님을 증거하실 것이다(26절; 요 14:16~17, 16:13).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할 것이다(27절). 증인이란 자기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보고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cf. 행 1:21~22).

보혜사(保惠師)로 번역된 ‘파라클레토스(Paraclバtos)’의 의미에 대해서는 법정적 의미에서의 ‘중재자, 대언자(intercessor, advocate)’로 보는 견해와(cf. 요일 2:1),9 넓은 의미에서의 ‘위로자(comforter)’로 보는 견해가 있다.10 요한복음 14~16장의 문맥에서 볼 때 ‘파라클레토스’는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보호하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자, 곧 ‘위로자’ 또는 ‘보혜사’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보혜사는 ‘하나님’이 보내실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14:16,26), ‘예수님’이 보내실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요 15:26, 16:7, 행 2:33). 이 둘은 다 맞는 말이다.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으로부터 나오신다(계 22:1; 겔 47:1과 계 21:22). 이 성령은 또한 ‘진리의 영’으로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성령은 자신이 진리이시면서(요일 5:7, 2:27) 또한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요 16:13, 14:26).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이 말을 하신 목적을 말씀하신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요 16:1). 여기서 ‘실족하다(skandalizomai)’는 말은 원래 돌에 걸려 넘어지다는 뜻인데 ‘죄를 범하다’, ‘믿음에서 떨어지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환난이나 핍박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믿음에서 떨어진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앞으로 닥칠 핍박에 대해 미리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서 핍박을 당할 때 꿋꿋하게 서게 하기 위함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만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2절) ‘출회(黜會, aposunago?os)’란 회당에서 쫓아내는 것을 말한다(cf. 요 9:22, 12:42).11 이것은 유대인들과의 교제를 단절하는 것을 말하며 사회적, 종교적인 고립을 의미한다. 이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할 때가 오리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유대인들은 예수 믿는 자들을 이단(異端)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런 이단을 처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믿었다(행 24:5,14). 그래서 회심 전의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심지어 죽이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행 7:58, 8:1,3, 22:20, 26:9~12). 본문 2절의 원문은 좀더 강한 표현이 사용되어 있다. 우리말 번역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하나님께 바쳐 드리는 예배’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바쳐 드린다(prosphero?’는 동사는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서 죽이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제물을 잡아 바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세상이 이런 악한 일을 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3절).

그러고 나서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을 말한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4상).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될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참됨을 믿게 될 것이며, 또한 그들이 당하는 환난과 핍박을 참고 견디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고 말씀하신다(4하). 예수님이 너무 일찍 말씀하셨더라면 제자들의 마음이 혼란해지고 믿음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핍박에 대한 말씀은 어느 정도 믿음이 자란 제자들에게 줄 수 있는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과 늘 함께 계실 때에는 미래에 대해 너무 일찍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을 떠나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닥칠 일들에 대해 미리 말씀하시고 당부하시는 것이다.

보혜사의 오심(16:5~15)

예수님은 이어서 자신의 떠나가심과 보혜사의 오심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제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신다(5절). 여기서 ‘간다(hupago?’는 것은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cf. 요 13:36, 14:5). 그래서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는지 묻는 이가 없고 도리어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다(5절하).12

하지만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신다(7절). 왜냐하면 예수님이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오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혜사가 오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결정적으로 유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 그런가? 보혜사가 오시면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이며 그들 속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요 14:16~17). 그래서 제자들은 보혜사 성령을 통해 예수님과 더욱 밀접하고 지속적이며 내면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보혜사 성령을 통해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을 따라 오순절 날의 성령 강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으로 힘 있게 전파돼 나갈 것이다. 이런 구속사적 섭리가 이루어지려면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셔야만 했던 것이다.

보혜사 성령이 오실 때 그는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8~11절). 그 책망하시는 대상은 세 가지다. 첫째는 죄에 대하여, 둘째는 의에 대하여, 셋째는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 ‘죄(罪)’에 대하여라 함은 세상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9절).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증거하신 이후로는 그를 믿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큰 죄이다. ‘의(義)’에 대하여라 함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니 그들이 다시 그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10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로서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사셨으며 의 자체이셨다. 그런 유일한 의가 이제 하나님께로 다시 가시니 이 세상에는 의가 없게 되었다. 곧 이 세상은 의가 하나도 없는 죄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성령이 오시면 이 세상에 의가 없음을 꾸짖고 책망하실 것이다. 물론 이 말의 다른 측면은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의이시므로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께로 나와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판(審判)’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11절). 예수님의 부활, 승천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은 실패하고 패배하였다. 그의 권세는 결정적으로 꺾이고 말았다(히 2:14, 요일 3:8).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있음을 선포하며,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전파하실 것이다(행 17:31, 24:25). 따라서 예수님이 가신 후에 오신 보혜사 성령의 세상 책망은 모두 다 복음 전파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복음은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다(행 2:37~39).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이 오실 때 하실 사역에 대해 말씀하신다. 먼저 그는 제자들(믿는 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13절). 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진리이다. 예수님이 진리이시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다 진리이다(요 14:6, 8:45~46, 17:17). 이 진리는 영지주의에서처럼 객관적인 철학적, 우주적 지식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산 지식이며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진리이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그가 자기 스스로로부터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이 성부와 성자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 없는 성령의 사역은 범신론적으로 흐르고 말며 기독교와 상관없는 주관주의 종교나 철학으로 흐르고 만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은 성부, 성자의 사역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그리고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장래 일들’을 알리실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장래 일들(ta erchomena)’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본 바, 그의 영적 왕국의 미래 상태’로 보거나(칼빈), ‘전체 기독교 방식(the whole Christian way)’으로 보는 것13 등은 어려움을 피해가는 주석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장래 일들’은 문자 그대로 앞으로 올 일들을 가리킨다. 물론 성령은 점쟁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점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미래의 심판과 구원,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 천국과 지옥을 빼고서 생각할 수 없다. 성령이 오실 때 이러한 종말과 심판에 대해 확실하게 증거하실 것이며 그 가운데서 구원의 길을 제시하실 것이다. 실제로 오순절 날에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성령은 베드로를 통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19~21; cf. 욜 2:30~32). 이것은 성령이 강림하셔서 증거하신 말씀이다. 곧 장래 있을 종말의 징조를 말한 후에 구원을 말하였다. 또한 사도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고 증거하였다(행 17:31). 또 벨릭스 총독 앞에서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증거하였으며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였다(행 24:15,25). 그리고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일어날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 주었다(살전 4:13~18, 살후 2:3~12 등). 그리고 사도 요한은 성령에 감동하여 이 세상 역사의 진행과 종말에 대해 보고들은 바 내용을 그의 계시록에서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 모든 것들은 말하자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 성령이 오셔서 알게 해 주신 ‘장래 일들’이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점쟁이들처럼 개인의 길흉화복에 대해 점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관련된 전세계적이고 우주적 종말에 대한 전망을 소유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영 곧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14절). 성령은 자기 영광을 나타내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되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고 계신다. 그러나 아무리 성령, 성령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 곳에는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다. 아무리 분위기가 뜨겁고 힘차게 찬송을 부른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없다. 이로써 참된 성령의 역사와 거짓 역사를 구별하게 된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유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것을 취하여서 제자들에게 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 것을 취하여 자기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을 취하여 사람들에게 전한다. 따라서 성령은 뒤로 숨고 그리스도만 나타나게 된다. 이어서 나오는 15절은 이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앞에서 ‘내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아버지에게 있는 것은 다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신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 완전한 공유가 실현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고전 3:23).

해산의 기쁨(16:16~24)

예수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진다. 여기서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떠나가심의 슬픔과 기쁨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것을 해산에 비유하시면서 잠시 해산의 고통이 있겠지만 그것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셨다(16절). 여기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이 세상을 떠나가심에 대해 말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제 육신의 눈으로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후반부의 말씀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에 대해 부활 후에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것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14 물론 이렇게 생각해 볼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곤란한 점이 많다. 부활 후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간헐적이고 불연속적이었다. 그리고 그 때는 아직도 제자들 중에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해산의 기쁨이 임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곧 하늘로 떠나가셨으니 또 다시 보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러한 것은 제자들에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여기의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리라”는 말씀은 오순절 날의 성령 강림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아 보인다.15 무엇보다도 앞의 문맥이 예수님의 떠나가심과 보혜사의 오심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는가? 16장 7절 이하에서 계속 보혜사가 오시면 어떤 일이 있을 것인가에 대해 말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여기의 이 말씀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제자들에게 오시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여 서로 문의하며 말하였다(17~18절).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친히 설명해 주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절). 제자들이 곡하고 애통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잠시나마 악의 권세가 승리하고 불의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기뻐하며 즐거워한다(계 11:10 참조). 제자들은 고통스러워하겠지만 그 고통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이다. 여기서 개역판의 ‘근심’은 ‘고통’으로 번역해야 정확하다. 원어 ‘뤼페(lupバ)’는 막연한 근심이 아니라 적극적인 고통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고통’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이다. 이 기쁨은 물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승천과 이어서 성령 부어 주심을 통해 이 기쁨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해산의 고통과 출산의 기쁨에 비유하신다(21절). 여기서도 ‘근심하나’는 ‘고통을 가지나’로 번역해야 정확하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단지 ‘근심’하는 정도가 아니라 ‘고통’을 겪는다. 왜냐하면 해산의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환난(thlipsis)’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이처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이어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시면, 그래서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전파된다면 십자가의 고통은 더 이상 고통스럽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자랑스러운 면류관, 영광스러운 경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은 이제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영광스러운 흔적을 가진 어린양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으며(계 5:6), 하나님 보좌 앞의 네 생물과 24 장로들과 천군 천사들로부터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는 것이다(계 5:8~14).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2절). 예수님이 제자들을 다시 ‘보시리라’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말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제자들에게 다시 오시고 그들과 함께 하신다. 물론 이것을 예수님의 부활로 보는 주석가들이 많이 있지만,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몇 가지 중요한 문제에 걸리고 만다. 여기서는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이 장애가 된다. 곧 예수님의 부활 후 40일간의 제자들에게 이러한 기쁨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말씀도 부활 후 현상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곧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23절상). 여기서 ‘묻다(ero?ao?’는 동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을 여기서처럼 ‘질문하다’로 볼 수도 있고, 이어서 나오는 ‘구하다(aiteo?’와 동의어로 볼 수도 있다. 즉, ‘기도하다’의 의미로 볼 가능성도 있다. 후자의 의미로 본다면, 23절의 의미는 그 날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기도할 것이라는 것이 된다.16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사실에 맞지 않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전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였다(마 6:6,9, 7:11, 눅 18:11,13). 따라서 여기의 ‘에로타오’는 ‘아이테오’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묻다, 질문하다’의 의미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 날에 제자들이 아무 것도 묻지 아니한다는 것은 진리의 영이 오셔서 그들 안에 거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들이 진리를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요 16:13). 이는 곧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친다”(요일 2:27)는 말씀과도 상통하는 말씀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힘주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23절하). 여기서 ‘내 이름으로’를 어디에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여기 있는 개역한글판의 번역과 같이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는 것은 성경의 용례에 비춰볼 때 부자연스럽다. 다른 곳에서는 한결같이 ‘구하다’에 연결되고 있다(요 14:13,14, 15:16, 16:24,26). 따라서 여기서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이어서 나오는 24절이 바로 “내 이름으로 구하다”로 되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여기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아버지께로 가신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말씀하시며, 이런 문맥에서 제자들에게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24절에서는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러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여태까지 아무 기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직 예수님께서 구속 사역을 다 이루지 못하셨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예수님 이름의 권세가 강조되어 있으며(cf. 빌 2:9~11), 그 이름의 권세를 힘입어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을 말한다. 그렇게 기도할 때 우리가 받게 될 것인데, 그 목적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4하). 기도 응답의 기쁨은 순수한 기쁨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다.

제자들의 믿음과 예수님의 예언(16:25~33)

이어서 예수님은 14장부터 계속된 말씀의 마무리를 하신다. 우선 25절에서는 “이것을 비사(比辭)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되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비사’란 원어로 ‘파로이미아(paroimia)’로서 좁은 의미의 비유(譬喩, parable)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모든 종류의 비문자적인, 비직접적인 말을 가리킨다(요 10:6, 16:29).17 “때가 이르면”이란 역시 성령 강림을 가리킨다. 성령 강림 이후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밝히 드러났으며 분명하게 전파되었다. 특히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의 비밀이 분명하게 해설되었다(롬 16:25~26, 엡 3:2~3). 따라서 이 사실 또한 여기의 “때가 이르면”을 예수님의 부활 후 40일간의 현현으로 보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어서 예수님은 또 다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 때에는 제자들이 직접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항상 간구하시지만(롬 8:24), 우리는 이제 기도에 있어서 더 이상 남을 의지하는 연약한 어린아이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직접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당당한 권리가 주어져 있다(엡 3:12, 히 4:16, 롬 5:2).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27절은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고 말한다. 여기에 사용된 ‘사랑하다’는 동사는 모두 ‘필레오(phileo?’인데, 이것은제자들과 예수님 사이, 그리고 하나님과 제자들 사이의 친근한 관계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제자들을 친히 사랑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그만큼 자기 아들을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28절). 이것은 더 이상 비유를 사용하지 않은 분명한 말씀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제야 분명히 이해했다는 듯이 대답하였다.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믿삽나이다”(29~30절). 그러나 제자들의 이 대답은 모호하다. 정말로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사실을 알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후의 제자들의 행태를 볼 것 같으면 그 답은 부정적이다. 하지만 이 때 제자들은 막연하게나마 예수님에 대해 무엇인가 깨닫고 믿은 것 같다. 제자들의 대답을 보면 아마도 이들은 예수님의 전지하심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확실히 알고 믿게 되었다는 의미 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고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요 2:24~25).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은 사람처럼 의존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 곧 신적인 존재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제자들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하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31절). 때늦은 믿음과 작은 믿음에 대한 탄식이 숨어 있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표출하지 않으셨다. 그나마 이제라도 믿는다고 고백하니 다행이라는 마음도 섞여 있었으리라.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그리 밝지 않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곧 예수님을 혼자 두고 달아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32절상).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도 작았고 연약하였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혼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신다(32절하). 하나님은 예수님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돌아가셨을 때에도,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항상 예수님과 함께 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부르짖음도(마 27:46) 하나님이 예수님을 완전히 버리셨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고통을 다 보고 계셨지만 잠시 못 본 척, 고통에 처하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의미이다(cf. 시 22:1~2).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끊임없는 교통과 부자 관계는 예수님의 사역의 원천이었으며 고난을 견뎌내는 저력이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 말을 하신 목적을 말씀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33절상). 제자들을 책망하려거나 불안케 하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것이다. 이 평안은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요 예수님 안에서 얻을 수 있는 평안이다(요 14:27).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절). 이것은 제자들에게 주시는 격려의 말씀이다. 세상에서는 환난이 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미워하는 마귀의 세력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 위축되지 말라고 격려하신다. 여기서 ‘담대하라’는 것은 인간적인 용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적인 용기와 의리를 내세우며 큰 소리 쳤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다. 따라서 여기서 ‘담대하라’는 것은 믿음에 의한 용기를 말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고 예수님이 악한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을 확신하는 믿음이 있을 때 참된 용기가 생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내가’가 강조되어 있다. 예수님과 세상을 대비하시면서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이다.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는 악한 세상을 의미한다(요 15:18~19, 16:11, 엡 2:2, 요일 2:15~17, 5:19 등).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다’고 하신다. 여기서 ‘이기셨다(neniko?a)’는 단어의 시상은 완료이다. 이것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세상을 이기셨는데 그 결과가 지금도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을 이미 세상을 이기셨고 그래서 지금 ‘이긴 자’로서 권세를 가지고 계심을 말한다. 세상 임금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 16:11, 완료). 예수님은 이미 강한 자를 결박하셨기 때문에 그 졸개들인 귀신들을 마음대로 쫓아내신다(마 12:29, 계 20:2).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힘입어 세상을 이긴다. 그 이김의 비결은 믿음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 속하게 만들며 예수님 안에 있게 하고 그 안에서 이기게 하기 때문이다(요일 4:4).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에서 어떠한 환난을 당하더라도 낙심하지 말며 위축되지 말아야 하며, 예수님을 믿으므로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메시지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당부를 제자들이 처음에는 지키지 못하였다. 예수님이 잡혀서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제자들은 다 달아나고 말았다. 그러나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셨을 때 그들에게 기쁨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었다. 제자들은 또 다시 낙심하여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 그러나 오순절에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이 오셨을 때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으며 사자처럼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다. 대제사장들도 산헤드린 공회도 더 이상 그들을 저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령 강림 이후에 충만하게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다. 세상을 이기시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신 영광의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다. 이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또한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음을 믿고, 또 우리에게 기도의 권세를 주셨음을 믿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믿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구하는 믿음이다.

주(註)

1. Cf. F. W. Grosheide, Het heilig evangelie volgens Johannes, II,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50, p.332f.

2. 변종길, “요한복음에 나타난 비유의 핵심”(「그말씀」 1998년 7월호) 참조.

3. F. L. Godet, Commentary on the Gospel of John, I, Grand Rapids: Zondervan, repr. of 1893 ed., p.259에 나오는 설명 곧 “그것은 정상적인 나타남을 불완전한 실현과 대비시킨다(It contrasts … the normal appearance with the imperfect realization)”는 설명은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4. Grosheide, Johannes, II, p.335 n.3.

5. C. H. Dodd,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3 (repr.1992). p.136.

6. Cf. L.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Rev. ed., Grand Rapids: Eerdmans, 1995, p.594f.

7. Cf. Grosheide, Johannes, II, p.344.

8. M. Zerwick, Biblical Greek, Rome: Editrice Pontificio Istituto Biblico, 1963, §313.

9. D. E. Holwerda, The Holy Spirit and Eschatology in the Gospel of John, Kampen: J. H. Kok, 1959, pp.26~64.

10. 예를 들면 Grosheide, Johannes, II, p.361 n.3.

11. 예수님 당시에 출회(黜會)가 어떻게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후대에 두 종류의 출회가 있었는데, 하나는 30일간의 ‘일시 출회(nidli)’이며 다른 하나는 ‘영구 출회(cherem)’이다. 예수님 당시에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떠한 형태이든 출회가 시행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Cf. Morris, John, p.434 n.36.

12. 요 13:36에서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은 것은 그냥 이 지상의 어떤 장소로 가시는 줄로 생각하고 물은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미에서의 질문은 아니었다. Cf. Grosheide, Johannes, II, p.367.

13. Morris, John, p.622.

14. Morris, John, p.623.

15. 예를 들면, Grosheide, Johannes, II, p.380.

16. Grosheide, Johannes, II, p.385.

17. ‘파로이미아(paroimia)’는 원래 ‘격언, 잠언(Sprichwort)’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요한복음에서는 ‘숨겨진 말(die verhullte Rede)’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W. Bauer, Griechisch-Deutsches Worterbuch, 5. Aufl., Berlin/New York: W. de Gruyter, 1971).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15장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거짓에지는 그 농부라 – 여기 “참”이란 말의 헬라 원어 대조되는 “참”이 아니고, 불완전에 대조된 “완전”, 그림자에 대조된 “실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택한 백성)을 가리키는 비유이다(시 80:8-15; 겔 15:1-8, 19:10-14). 그러므로 랍비 문학에서도 말하기를, “실물 중에 가장 낮은 것(포도나무)이 식물계의 왕인 것처럼,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가장 낮아 보여도 장차 메시야 시대에는 세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점령한다”고 하였다(Lev.R. 36:2 참조). 예수님이 이런 랍비 문학에서 이 비유를 인용하신 것은 아니지만 참고할 만한 말이다. 예수님은 참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을 성립시키신다. 이런 의미에서 그 자신이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본래 참 포도나무가 아니며,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실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와 같으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포도나무)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서만 비로서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은, 또한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중보자(中保者)되신 관계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에게 전적으로 의뢰하여야 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신자의 의뢰심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일체 될 정도까지 깊어져야 한다. 그에게는, 독자적 의지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의지가 있을 뿐이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이런 이상적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이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우리 본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포도원의 농부라고 하였으며, 그가 가지들을 깨끗하게 하신다고도 하였다(2 절 끝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 그러나 인간 편의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성경은 많이 말씀한다. 마 11:12; 빌 2:12 참조. 그러나 위에 말한 일체 관계는 범신론적(汎神論的) 일체를 말함이 아니니, 인격과 인격의 관계이면서 다만 신자 편에서 그리스도에게 종속하여 순종하는 관계를 말함이다. 2세기의 이단자 뫄타누스(Montanus)는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하나님 아버지)요, 말씀(그리스도)이요, 성령이다”라고 하였다(Epiphanius, Haereses . . ). 이런 그릇된 사상에서는 신자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구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잘못이다. 신자는, 은혜를

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

=====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 여기 이른바 “내가 일러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전도의 말씀, 곧, 복음이며, 오늘날은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어떠한 작용으로 그렇게 된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신자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편(方便)이라는 교리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행각해 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슴”이란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바 성경에 기록된 말슴 곧, 복음과 율법을 의미한다. 성경이란 책은 완전히 하나님의 말슴을 기록한 것이다. 이 말슴은 언어, 혹은 문자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로 되었다는 것이, 그것의 하나님 말씀 자격과 효능(效能)을 상실시키지 않는다. 헬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사람의 말은, … 그 사람과 그 말과의 시간적, 혹은 장소적 거리에 따라서 효력의 다소가 좌우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언제자 그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말씀과 함께 현림(現臨)하시어 계시다. 그는, 언제나 그의 전지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시고 그 말씀과 함께 임하신다….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에게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나 성령에게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성경 전체가 성령으로 영감되었고, 계속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관되며, 능력 있게 되는 것 만큼, 거기서 섭취하여 전파되는 부분적 말씀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Kmpen, J. H. Koke 1911, pp. 502-503). 바빙크(Bavinck)는, 또한 하나님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에 대하여, 성경이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곧, (1)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라고 함(롬 1:16; 고전 1:18, 2:4, 5, 15:2; 엡 1:13). (2) 생명 있고 영존하는 말씀이라고 함(밸전 1:25). (3)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함(히 4:12). (4) 영이며 또 살리라는 것이라고 함(요 6:63). (5) 어두운데 비취는 빛이라고 함(벧후 1:19). (6) 마음에 심는 씨(생명 있는)라고 함(마 13:3). (7) 좌우에 날 선 예리한 검이라고 함(히 4:12), (8) 믿는 자들 속에 역사하는 말씀이라고 하였다(살전 2:13).(Gereformeerde Dogmatiek. , pp. 501-504). 바빙크(Bavinck)는, 성경 말씀의 능력과 생명의 역사에 대하여 비유하기를, 손

쁘신 뜻대로 이 말씀(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역사하여 혹은 회개시키가며, 혹은 강팍케 하시며, 혹은 일어나게 하시며, 또 혹은 넘어지게도 하신다. 그가 이 말씀으로 역사하시되,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하시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Kampen J.H Kok 1911, p. 503).

=====15:4-6

이 부분에 사용된 어귀들중, “거하라”는 말(* )은 “머물라”는 뜻이니, 이미 있는 자리에 머물라는 뜻이다. 5절의 “있으면”이란 말도 헬라원어에서는 꼭 같이 “머물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여기 “머물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택하여(16절) 은혜 주신 그 자리에서 그들이 떠나지 않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그리스도 박까에서 그를 믿으려고 자율적으로 찾아 가는 자가 아니고 벌써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 인도된 자니, 그는 거기 멀물러 있으려고 순종의 걸음을 걸을 자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것은, 인간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6:44).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시는데, 우리는 그저 순종 할 뿐이다. 순종이란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과 그의 말씀을 지킴이다. 만일 누가,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다 이루어 주시는 것인 만큼 나는 순종 할 것 없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무생물 혹은 하등 동물로 취급하는 오착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으나, 우리로서 할 일은 그에게 순종함이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시므로 구속(救贖)의 큰 사업을 완성하셨다(히 5:8-9).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그 아래 말씀이 알려주느가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속에 가진 자이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의 왕좌를 점령하였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주님의 말슴을 그의 대리(代理)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 권위를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살아 계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거한 생활의 유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약에 참여한 자로서 신종(信從)하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신분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쓸 수 있고, 또한 성령께서 그런 신자의 의지를 성화(聖化)시켜 주님의 뜻대로만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 곧,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여 기구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상반절에서 벌써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생활이,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되어 있다. 신자가 주님과 연합한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의 계약 행위, 곧, 선택이 그 기본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순종이 그 실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적 생활에서만 근근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얕은 경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계약과 생명에서 움직이는 내면적인 경건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무엇이든지 응답 받는다는 진리는, 요한이 그 시선에서도 말씀한 바 있다. 곧,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요일 5:14). 기도 응답을 받는자들은 저렇게 내면적인 경건의 소유자들이다. 기도 응답을 많이 받은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고(신 34:10), 히스기야는, 기도 하여 자기의 병을 고침 받았다(사 38:2-5; 왕하 20:5-6). 그는 기도하여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파멸시켰는데(왕하 19:14-19, 35), 하나님 앞에서 자백한대로,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할 만큼, 경건하였다.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사도들을 위시하여 일반 신자들 전체에게 허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비가 아니로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큰 죄인들도 회개하며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데, 구약 시대에도 그러하였고(대하 33:10-13), 신약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눅 18:13-14에 말하기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였고, 계 3:19-20에는 말하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가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다.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 실과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것을 찍어 버릴 수 밖에 없다. 실과 나무를 심는 자는 목재를 쓰려고 심지 아니하고 열매를 따려고 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자는 나무와 같이 찍힘을 받을 위태로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자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행실을 바로 행함이고(갈 5:22-23), 또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함이다. 잠 11:30에 말하기를,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고 하였다. 사람의 영혼은 귀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셧다(마 16:26). 예수님게서 사람의 영혼이 귀하다고 하신 이유는, 그들이 세상 문화를 건설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영혼을 귀하다고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겠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여호와으 빛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잠 20:27에 말하기를,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등불이 되게 하는 운동, 곧, 전도 운동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의인 99명보다 회개하는 한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눅 15:17).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이 귀절부터 15절 까지는, 신자들끼리의 연합의 배경을 말해 준다. 곧, 신자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속죄 사업을 담당하시게 하신 것을 말함이다. 5:20-21 참조.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이루실 속죄 사업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이런 사랑에 거하는 것은 기븐 일이요, 괴로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그들의 갈망하는 보금자리인데 그들은 왜 거기서 떠날 것인가? 거기 거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계명(신자들끼리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킴이다.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땅 위에서나 어디서든지 완전히 하신다(10:17-18, 12:43-50, 14:31). 그것이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방법이다. 그와 같이 신자도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하므로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신자가 주님의 사랑에 거하는 방법은, 신비주의자들처럼 그의 사랑의 취미에 집중하여 즐기는 것이 아니고, 그의 계명을 지킴, 곧, 생활로 그 사랑을 나타냄이다”라고 하였다(Jezus vraagt niet een mystick zwelgen in liefdegenot, Maar activiteit, liefd toonen. – Het Heil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 1950, p. 346).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 여기 이른 바 “이것”이란 말은, 윗절에서 가르친 내용을 가리킨다. 곧,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므로 그리스도와 사랑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 사랑을 받으면 그들에게 기쁨이 넘친다. “내 기쁨”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기뻐하시는 기쁨을 가리킨다.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서 그렇게 기뻐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16:22). 우리가 이 기쁨을 가져야만 (1) 우너망, 불평, 의심을 이기며, (2) 담력, 용기, 인내를 가지고 이 세상 모든 난관과 환란을 이기며, (3) 모든 수고로운 사랑의 책임들을 꾸준히 이행(履行)하게 되며, (4)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 여기서는, 10절에 말한 바 그리스도의 “계명”이 무엇임을 밝힌다. 바리새인들이 계명을 지키는 동기는 남을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자기 자신을 남들에게 종교가로 나타내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계명을 오해한 것이다. 계명의 목적은 사랑이다. 사랑만 이루묘가 그것은 완성된다. 롬 13:8-10 참조.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은 새로운 계명이면서도 실상은 옛 계명이다(13:34; 요일 2:7-8). 사랑은 이렇게 영원토록 변치 않는 진리이다(고전 13:13). 고데이(F.Godet)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15-1-11 까지는, 계명의 첫 부분(하나님과 연합해야 될 것)을 가르치시고, 12-17절까지는, 그 둘째 부분(사람을 사랑해야 될 것)을 가르치신다”고 하였다. 성경은, 신앙 사상이 같은 형제들기리의 분리(分離)를 정당하게 여기지 않고 연합을 고조한다. 예를 들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밖에, “몸과 지체”의 비유(엡 1:22-23, 3:6, 4:15-16). “성전과 돌들”의 비유(벧전 2:5)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반응을 부족하게 받으시더라도 사랑을 계속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상대방에게서 반응(서로 사랑함)이 있으므로 계속된다. 사랑을 받는 자도 같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인격이니 사랑을 행해야 된다. 여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행은, 신자가 그 속 사람의 영적 충동으로만 취할 행동인가? 그에게도 외부적 성질이 있는 계율들의 제재가 필요한가? 그렇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만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됐으므로, 무엇에게 얽매인 바 없어도 자발적으로 선을 힘쓸 자요 자유자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부터 감심으로 하나가의 종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주님의 뜻을 자세히 알아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외부적 표준으로 있는 율법을 상세히 알야야 되며, 지켜야 된다. 그는, 이 율법을 폭군의 엄한 명령과 같이 생각하지 않늘다. 그 율법은 실상 은혜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사랑하는 목자의 음성이다. 그것은 은혜의 한 방면이다. 그러므로 기독자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율법이나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는 사실은, 은혜의 원칙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은혜의 부요를 가져오는 거룩한 생활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계명의 목적과 정신이 사랑하는 의미에서 “계명”이란 말을 단수(單數)로 썼다(* ). 그러나 그것은

도덕상 오착이 많다. 그들은 옳지 않은 일을 해 놓고라도 그것을 계시 받아서 하였다고 하면서 통과하려 하였다.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큰 사랑으로 희생하실 것을 가리킨 말슴이다. 그는, 자기의 사랑이 얼마나 큰 사실을 설명하여, 윗절(12절)의 내용과 같이 신자들로 하여금 남들을 사랑하게 하려 하신다. 그리스도의 무한히 큰 사랑을 받은 우리들로서, 어찌 남들을 사랑할 마음이 없으랴? 요일 4:11 참조. 예수님게서 신자들을 “친구”라고 하신 것은, 그 앞에 죄인이요 원수 되었던 자들을 속죄의 사망으로 사랑해 주신다는 뜻이다. 롬 5:6-10 참조. 우리를 사랑하심은, 다만 우리의 보통 유익을 위한 일반적인 적선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여 죽기까지 하셨으니, 다시 사신 뒤에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은 또 얼마나 클 것이가? 이렇게 신자들은 예수님의 친구 되는 큰 축복을 받았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친구였다(사 41:8).

=====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 여기 이른바 “나의 명하는대로 행함”은, 그가 그 제자들더러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순종함이다. 믿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받은 증표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믿는 형제를 참으로 사랑할 수 없다(요일 4:7-21). 이 귀절 뜻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순종하는자가 그리스도의 친구 된 자격, 곧, 그 속죄의 사랑을 받은 자격을 발휘한다는 의미이다.

======15:15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 그리스도께서, 이때까지 구속에 관한 모든 진리를 그 제자들에게 전하여 주셨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에게 깊이 감취었던 오묘한 진리였다(벧전 1:10-11).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 그들이 사도로 세움 받은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인 만큼, 그들의 일은 유력해진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배경이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 과실을 맺고, 그들이 과실을 맺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가 응답된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없는 외식자의 기도를 응답하싶 않는다(마 3:7-8, 5:23-24, 6:14-15). 이 말씀(16 절)은, 주님과 신자가 연합하게 되는 것(1절 이하에 있는 말씀)이 전연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성립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 위에 있는 15-16절 말슴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내막을 보여 준다. 그가 이 내막을 신자들에게 알려 주시는 이유는, 신자들로 하여금 서로끼리 사랑하게 하른 것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랑을 근거하여서만 남을 사랑할 수 잇다.

18-27 – 이 부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핍박 받을 사도들(신자들)자게 대하여, 몇 가지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1) 그 핍박은 결국 예수님을 미워하는 일이니(18 절). 그들로서는 주님께서 받으시는 미움에 동참함이 영광이다(행 5:41). (2) 그들이 핍박 받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증표이니(19절), 핍박 받음은 그들이 선택을 받아 구원 얻은 증표이다(빌 1:28), (3) 주인이 핍박을 받으셨으니 종 된 자로서 그것을 면할 수 없다(20절). (4) 핍박자들의 악행은 하나님에게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행동이며 따라서 무서운 죄악이니, 불쌍히 여길 대상이다(21-22). 눅 23:24 참조. (5) 신자를 핍박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두려운 일이다(23-24).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지식적 과오가 아니고 윤리적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부패한 인간성을 원인으로 한 것이다. (6) 그것은 율법에 기록된대로 되는 일이니, 핍박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줄 믿고 안심할 따름이다(25 절). (7) 그리스도에게 대한 성령님의 증거가 사도들과 함께 하실 것이므로, 그들은 핍박을 이길 수 있다. 벧전 4:14에 말하기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였다.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예수님은, 이때까지 그 사도들의 받을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제 그는 그들의 받을 미움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들이(일반 신자들도) 예수님에게서는 사랑을 받으나 세상에서는 미움을 받는다. 그들이 핍박을 받으면, 예수님은 그 사건에 있어서 그들보다 먼저 영적으로 박해를 받으시는 셈이 된다. 그 만큼 그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밀접하다.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세상이 그들을 사랑할 경우는 한 가지 조건 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의 근원이 그냥 세상에 속하고, 따라서 그들의 생활은 세상의 소유물이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과 반대되는 조건이 있는 까닭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택하신 까닭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세상에게서 미움 받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세상 죄악은 이처럼 서로 반대된다(7:7).

=====15: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 13:16 참조. 이 귀절 말씀은, (1) 기독 신자가 핍박 받을 것이 필연적이니 피할 수 없다는 것과, 또한 (2) 도덕적 처지에서도 그것을 받음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 여기 “지킨다”는 말은 트집 잡는다는 뜻이다.

=====15:21,22

하나님에게 대한 핍박자들의 무지가 사도들을 핍박하게 되엇다. 그러나 그 무지는 무죄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자게 증거하셧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불신앙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좋을 번 하였다.(Bengel).

=====15:23,24

참 신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미워함이고(18 절), 그리스도를 미워함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큰 죄라는 의미에서 이 귀절들은 말씀한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 속은 자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는 일체이시다(10:30). 이 점에 있어서 벴겔(Bengel)은, 미움과 불신앙과의 관련성을 지적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에게 대한 사랑은 신앙과 동반하나 증오는 불신앙과 동반한다”라고 하였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 여기 이른바, “아무도 못한 일”이란 것은,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들을 가리킨다. 10:25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적들)은 너무도 위대하며, 그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완전히 계시한다(5:17,36, 14:9,11). 그러므로 그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은, 다만 지식적 과오가 아니고 더덕적 반역이다.

=====15:25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이 말씀은 시 35:149의 인용이거나, 혹은 시 69:4의 인용이다. 시편을 “율법”이란 이름 아래 넣어 말하는 것은 그 때의 풍속이었다(10:34). 그 때에는 사람들이 구약 초두의 부분 곧, 율법으로써 구약 전체의 명칭을 삼앗던 것이다.

=====15:26,27

이 세상 사람들이 사도들(신자들)을 미워해도(18-25). 그들은 성령님의 능력을 받으므로 세상에서 물러서지 않고 도리어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다. 여기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증거는 실상 일체이다. 성령은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증거하실 것이다(Wikenhauser, Schlatter).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친히 목도한 사실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사도의 자격이다(고전 9:1; 행10:41). 그러나 그들이 와 같은 자격으로만 증인이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참으로 증거하게 되었다. 행 1:8.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거짓에지는 그 농부라 – 여기 “참”이란 말의 헬라 원어 대조되는 “참”이 아니고, 불완전에 대조된 “완전”, 그림자에 대조된 “실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택한 백성)을 가리키는 비유이다(시 80:8-15; 겔 15:1-8, 19:10-14). 그러므로 랍비 문학에서도 말하기를, “실물 중에 가장 낮은 것(포도나무)이 식물계의 왕인 것처럼,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가장 낮아 보여도 장차 메시야 시대에는 세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점령한다”고 하였다(Lev.R. 36:2 참조). 예수님이 이런 랍비 문학에서 이 비유를 인용하신 것은 아니지만 참고할 만한 말이다. 예수님은 참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을 성립시키신다. 이런 의미에서 그 자신이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본래 참 포도나무가 아니며,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실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와 같으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포도나무)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서만 비로서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은, 또한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중보자(中保者)되신 관계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에게 전적으로 의뢰하여야 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신자의 의뢰심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일체 될 정도까지 깊어져야 한다. 그에게는, 독자적 의지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의지가 있을 뿐이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이런 이상적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이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우리 본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포도원의 농부라고 하였으며, 그가 가지들을 깨끗하게 하신다고도 하였다(2 절 끝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 그러나 인간 편의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성경은 많이 말씀한다. 마 11:12; 빌 2:12 참조. 그러나 위에 말한 일체 관계는 범신론적(汎神論的) 일체를 말함이 아니니, 인격과 인격의 관계이면서 다만 신자 편에서 그리스도에게 종속하여 순종하는 관계를 말함이다. 2세기의 이단자 뫄타누스(Montanus)는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하나님 아버지)요, 말씀(그리스도)이요, 성령이다”라고 하였다(Epiphanius, Haereses . . ). 이런 그릇된 사상에서는 신자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구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잘못이다. 신자는, 은혜를

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

=====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 여기 이른바 “내가 일러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전도의 말씀, 곧, 복음이며, 오늘날은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어떠한 작용으로 그렇게 된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신자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편(方便)이라는 교리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행각해 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슴”이란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바 성경에 기록된 말슴 곧, 복음과 율법을 의미한다. 성경이란 책은 완전히 하나님의 말슴을 기록한 것이다. 이 말슴은 언어, 혹은 문자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로 되었다는 것이, 그것의 하나님 말씀 자격과 효능(效能)을 상실시키지 않는다. 헬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사람의 말은, … 그 사람과 그 말과의 시간적, 혹은 장소적 거리에 따라서 효력의 다소가 좌우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언제자 그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말씀과 함께 현림(現臨)하시어 계시다. 그는, 언제나 그의 전지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시고 그 말씀과 함께 임하신다….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에게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나 성령에게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성경 전체가 성령으로 영감되었고, 계속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관되며, 능력 있게 되는 것 만큼, 거기서 섭취하여 전파되는 부분적 말씀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Kmpen, J. H. Koke 1911, pp. 502-503). 바빙크(Bavinck)는, 또한 하나님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에 대하여, 성경이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곧, (1)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라고 함(롬 1:16; 고전 1:18, 2:4, 5, 15:2; 엡 1:13). (2) 생명 있고 영존하는 말씀이라고 함(밸전 1:25). (3)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함(히 4:12). (4) 영이며 또 살리라는 것이라고 함(요 6:63). (5) 어두운데 비취는 빛이라고 함(벧후 1:19). (6) 마음에 심는 씨(생명 있는)라고 함(마 13:3). (7) 좌우에 날 선 예리한 검이라고 함(히 4:12), (8) 믿는 자들 속에 역사하는 말씀이라고 하였다(살전 2:13).(Gereformeerde Dogmatiek. , pp. 501-504). 바빙크(Bavinck)는, 성경 말씀의 능력과 생명의 역사에 대하여 비유하기를, 손

쁘신 뜻대로 이 말씀(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역사하여 혹은 회개시키가며, 혹은 강팍케 하시며, 혹은 일어나게 하시며, 또 혹은 넘어지게도 하신다. 그가 이 말씀으로 역사하시되,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하시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Kampen J.H Kok 1911, p. 503).

=====15:4-6

이 부분에 사용된 어귀들중, “거하라”는 말(* )은 “머물라”는 뜻이니, 이미 있는 자리에 머물라는 뜻이다. 5절의 “있으면”이란 말도 헬라원어에서는 꼭 같이 “머물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여기 “머물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택하여(16절) 은혜 주신 그 자리에서 그들이 떠나지 않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그리스도 박까에서 그를 믿으려고 자율적으로 찾아 가는 자가 아니고 벌써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 인도된 자니, 그는 거기 멀물러 있으려고 순종의 걸음을 걸을 자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것은, 인간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6:44).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시는데, 우리는 그저 순종 할 뿐이다. 순종이란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과 그의 말씀을 지킴이다. 만일 누가,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다 이루어 주시는 것인 만큼 나는 순종 할 것 없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무생물 혹은 하등 동물로 취급하는 오착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으나, 우리로서 할 일은 그에게 순종함이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시므로 구속(救贖)의 큰 사업을 완성하셨다(히 5:8-9).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그 아래 말씀이 알려주느가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속에 가진 자이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의 왕좌를 점령하였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주님의 말슴을 그의 대리(代理)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 권위를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살아 계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거한 생활의 유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약에 참여한 자로서 신종(信從)하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신분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쓸 수 있고, 또한 성령께서 그런 신자의 의지를 성화(聖化)시켜 주님의 뜻대로만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 곧,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여 기구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상반절에서 벌써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생활이,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되어 있다. 신자가 주님과 연합한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의 계약 행위, 곧, 선택이 그 기본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순종이 그 실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적 생활에서만 근근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얕은 경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계약과 생명에서 움직이는 내면적인 경건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무엇이든지 응답 받는다는 진리는, 요한이 그 시선에서도 말씀한 바 있다. 곧,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요일 5:14). 기도 응답을 받는자들은 저렇게 내면적인 경건의 소유자들이다. 기도 응답을 많이 받은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고(신 34:10), 히스기야는, 기도 하여 자기의 병을 고침 받았다(사 38:2-5; 왕하 20:5-6). 그는 기도하여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파멸시켰는데(왕하 19:14-19, 35), 하나님 앞에서 자백한대로,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할 만큼, 경건하였다.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사도들을 위시하여 일반 신자들 전체에게 허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비가 아니로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큰 죄인들도 회개하며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데, 구약 시대에도 그러하였고(대하 33:10-13), 신약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눅 18:13-14에 말하기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였고, 계 3:19-20에는 말하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가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다.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 실과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것을 찍어 버릴 수 밖에 없다. 실과 나무를 심는 자는 목재를 쓰려고 심지 아니하고 열매를 따려고 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자는 나무와 같이 찍힘을 받을 위태로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자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행실을 바로 행함이고(갈 5:22-23), 또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함이다. 잠 11:30에 말하기를,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고 하였다. 사람의 영혼은 귀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셧다(마 16:26). 예수님게서 사람의 영혼이 귀하다고 하신 이유는, 그들이 세상 문화를 건설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영혼을 귀하다고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겠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여호와으 빛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잠 20:27에 말하기를,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등불이 되게 하는 운동, 곧, 전도 운동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의인 99명보다 회개하는 한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눅 15:17).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이 귀절부터 15절 까지는, 신자들끼리의 연합의 배경을 말해 준다. 곧, 신자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속죄 사업을 담당하시게 하신 것을 말함이다. 5:20-21 참조.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이루실 속죄 사업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이런 사랑에 거하는 것은 기븐 일이요, 괴로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그들의 갈망하는 보금자리인데 그들은 왜 거기서 떠날 것인가? 거기 거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계명(신자들끼리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킴이다.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땅 위에서나 어디서든지 완전히 하신다(10:17-18, 12:43-50, 14:31). 그것이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방법이다. 그와 같이 신자도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하므로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신자가 주님의 사랑에 거하는 방법은, 신비주의자들처럼 그의 사랑의 취미에 집중하여 즐기는 것이 아니고, 그의 계명을 지킴, 곧, 생활로 그 사랑을 나타냄이다”라고 하였다(Jezus vraagt niet een mystick zwelgen in liefdegenot, Maar activiteit, liefd toonen. – Het Heil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 1950, p. 346).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 여기 이른 바 “이것”이란 말은, 윗절에서 가르친 내용을 가리킨다. 곧,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므로 그리스도와 사랑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 사랑을 받으면 그들에게 기쁨이 넘친다. “내 기쁨”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기뻐하시는 기쁨을 가리킨다.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서 그렇게 기뻐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16:22). 우리가 이 기쁨을 가져야만 (1) 우너망, 불평, 의심을 이기며, (2) 담력, 용기, 인내를 가지고 이 세상 모든 난관과 환란을 이기며, (3) 모든 수고로운 사랑의 책임들을 꾸준히 이행(履行)하게 되며, (4)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 여기서는, 10절에 말한 바 그리스도의 “계명”이 무엇임을 밝힌다. 바리새인들이 계명을 지키는 동기는 남을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자기 자신을 남들에게 종교가로 나타내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계명을 오해한 것이다. 계명의 목적은 사랑이다. 사랑만 이루묘가 그것은 완성된다. 롬 13:8-10 참조.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은 새로운 계명이면서도 실상은 옛 계명이다(13:34; 요일 2:7-8). 사랑은 이렇게 영원토록 변치 않는 진리이다(고전 13:13). 고데이(F.Godet)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15-1-11 까지는, 계명의 첫 부분(하나님과 연합해야 될 것)을 가르치시고, 12-17절까지는, 그 둘째 부분(사람을 사랑해야 될 것)을 가르치신다”고 하였다. 성경은, 신앙 사상이 같은 형제들기리의 분리(分離)를 정당하게 여기지 않고 연합을 고조한다. 예를 들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밖에, “몸과 지체”의 비유(엡 1:22-23, 3:6, 4:15-16). “성전과 돌들”의 비유(벧전 2:5)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반응을 부족하게 받으시더라도 사랑을 계속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상대방에게서 반응(서로 사랑함)이 있으므로 계속된다. 사랑을 받는 자도 같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인격이니 사랑을 행해야 된다. 여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행은, 신자가 그 속 사람의 영적 충동으로만 취할 행동인가? 그에게도 외부적 성질이 있는 계율들의 제재가 필요한가? 그렇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만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됐으므로, 무엇에게 얽매인 바 없어도 자발적으로 선을 힘쓸 자요 자유자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부터 감심으로 하나가의 종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주님의 뜻을 자세히 알아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외부적 표준으로 있는 율법을 상세히 알야야 되며, 지켜야 된다. 그는, 이 율법을 폭군의 엄한 명령과 같이 생각하지 않늘다. 그 율법은 실상 은혜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사랑하는 목자의 음성이다. 그것은 은혜의 한 방면이다. 그러므로 기독자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율법이나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는 사실은, 은혜의 원칙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은혜의 부요를 가져오는 거룩한 생활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계명의 목적과 정신이 사랑하는 의미에서 “계명”이란 말을 단수(單數)로 썼다(* ). 그러나 그것은

도덕상 오착이 많다. 그들은 옳지 않은 일을 해 놓고라도 그것을 계시 받아서 하였다고 하면서 통과하려 하였다.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큰 사랑으로 희생하실 것을 가리킨 말슴이다. 그는, 자기의 사랑이 얼마나 큰 사실을 설명하여, 윗절(12절)의 내용과 같이 신자들로 하여금 남들을 사랑하게 하려 하신다. 그리스도의 무한히 큰 사랑을 받은 우리들로서, 어찌 남들을 사랑할 마음이 없으랴? 요일 4:11 참조. 예수님게서 신자들을 “친구”라고 하신 것은, 그 앞에 죄인이요 원수 되었던 자들을 속죄의 사망으로 사랑해 주신다는 뜻이다. 롬 5:6-10 참조. 우리를 사랑하심은, 다만 우리의 보통 유익을 위한 일반적인 적선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여 죽기까지 하셨으니, 다시 사신 뒤에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은 또 얼마나 클 것이가? 이렇게 신자들은 예수님의 친구 되는 큰 축복을 받았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친구였다(사 41:8).

=====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 여기 이른바 “나의 명하는대로 행함”은, 그가 그 제자들더러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순종함이다. 믿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받은 증표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믿는 형제를 참으로 사랑할 수 없다(요일 4:7-21). 이 귀절 뜻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순종하는자가 그리스도의 친구 된 자격, 곧, 그 속죄의 사랑을 받은 자격을 발휘한다는 의미이다.

======15:15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 그리스도께서, 이때까지 구속에 관한 모든 진리를 그 제자들에게 전하여 주셨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에게 깊이 감취었던 오묘한 진리였다(벧전 1:10-11).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 그들이 사도로 세움 받은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인 만큼, 그들의 일은 유력해진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배경이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 과실을 맺고, 그들이 과실을 맺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가 응답된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없는 외식자의 기도를 응답하싶 않는다(마 3:7-8, 5:23-24, 6:14-15). 이 말씀(16 절)은, 주님과 신자가 연합하게 되는 것(1절 이하에 있는 말씀)이 전연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성립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 위에 있는 15-16절 말슴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내막을 보여 준다. 그가 이 내막을 신자들에게 알려 주시는 이유는, 신자들로 하여금 서로끼리 사랑하게 하른 것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랑을 근거하여서만 남을 사랑할 수 잇다.

18-27 – 이 부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핍박 받을 사도들(신자들)자게 대하여, 몇 가지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1) 그 핍박은 결국 예수님을 미워하는 일이니(18 절). 그들로서는 주님께서 받으시는 미움에 동참함이 영광이다(행 5:41). (2) 그들이 핍박 받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증표이니(19절), 핍박 받음은 그들이 선택을 받아 구원 얻은 증표이다(빌 1:28), (3) 주인이 핍박을 받으셨으니 종 된 자로서 그것을 면할 수 없다(20절). (4) 핍박자들의 악행은 하나님에게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행동이며 따라서 무서운 죄악이니, 불쌍히 여길 대상이다(21-22). 눅 23:24 참조. (5) 신자를 핍박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두려운 일이다(23-24).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지식적 과오가 아니고 윤리적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부패한 인간성을 원인으로 한 것이다. (6) 그것은 율법에 기록된대로 되는 일이니, 핍박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줄 믿고 안심할 따름이다(25 절). (7) 그리스도에게 대한 성령님의 증거가 사도들과 함께 하실 것이므로, 그들은 핍박을 이길 수 있다. 벧전 4:14에 말하기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였다.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예수님은, 이때까지 그 사도들의 받을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제 그는 그들의 받을 미움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들이(일반 신자들도) 예수님에게서는 사랑을 받으나 세상에서는 미움을 받는다. 그들이 핍박을 받으면, 예수님은 그 사건에 있어서 그들보다 먼저 영적으로 박해를 받으시는 셈이 된다. 그 만큼 그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밀접하다.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세상이 그들을 사랑할 경우는 한 가지 조건 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의 근원이 그냥 세상에 속하고, 따라서 그들의 생활은 세상의 소유물이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과 반대되는 조건이 있는 까닭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택하신 까닭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세상에게서 미움 받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세상 죄악은 이처럼 서로 반대된다(7:7).

=====15: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 13:16 참조. 이 귀절 말씀은, (1) 기독 신자가 핍박 받을 것이 필연적이니 피할 수 없다는 것과, 또한 (2) 도덕적 처지에서도 그것을 받음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 여기 “지킨다”는 말은 트집 잡는다는 뜻이다.

=====15:21,22

하나님에게 대한 핍박자들의 무지가 사도들을 핍박하게 되엇다. 그러나 그 무지는 무죄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자게 증거하셧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불신앙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좋을 번 하였다.(Bengel).

=====15:23,24

참 신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미워함이고(18 절), 그리스도를 미워함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큰 죄라는 의미에서 이 귀절들은 말씀한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 속은 자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는 일체이시다(10:30). 이 점에 있어서 벴겔(Bengel)은, 미움과 불신앙과의 관련성을 지적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에게 대한 사랑은 신앙과 동반하나 증오는 불신앙과 동반한다”라고 하였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 여기 이른바, “아무도 못한 일”이란 것은,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들을 가리킨다. 10:25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적들)은 너무도 위대하며, 그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완전히 계시한다(5:17,36, 14:9,11). 그러므로 그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은, 다만 지식적 과오가 아니고 더덕적 반역이다.

=====15:25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이 말씀은 시 35:149의 인용이거나, 혹은 시 69:4의 인용이다. 시편을 “율법”이란 이름 아래 넣어 말하는 것은 그 때의 풍속이었다(10:34). 그 때에는 사람들이 구약 초두의 부분 곧, 율법으로써 구약 전체의 명칭을 삼앗던 것이다.

=====15:26,27

이 세상 사람들이 사도들(신자들)을 미워해도(18-25). 그들은 성령님의 능력을 받으므로 세상에서 물러서지 않고 도리어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다. 여기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증거는 실상 일체이다. 성령은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증거하실 것이다(Wikenhauser, Schlatter).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친히 목도한 사실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사도의 자격이다(고전 9:1; 행10:41). 그러나 그들이 와 같은 자격으로만 증인이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참으로 증거하게 되었다. 행 1:8.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 사도들에게 무엇보다도 서로간의 사랑이 요청되고 있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건설하게 하려는 뜻에서인데, 이것은 각자가 자신의 일만 하고 각 개인이 자신의 일을 공동체(common pool)에 가져오지 않는 것 보다 더 큰 장애물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이 서로 간에 형제로서의 교제를 키워 나가지 않을 경우 어떤 대집단을 세울 수는 있지만 그 집단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요 결코 교회(Church)가 세워질 수는 없다.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전투 무장을 시킨 다음에 인내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복음이 전파될 경우 세상이 왈칵 뒤집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건한 교사들이 세상의 증오를 피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미리 예고하시는 것은 전투가 발생했을 경우 그들이 풋나기 신병들처럼 원수를 보기도 전에 겁을 집어 먹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결코 새롭거나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할 것이 아니라는 점을 경고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본을 통해서 그들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이것은 그가 세상의 미움을 받는데 그의 인격을 대표하는 우리는 세상의 총애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기노스케테)를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편을 택하지만 명령법으로 보는 것도 반대하지 않는다. 어느 경우나 의미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단어가 더 어렵다. 곧 그가 제자들 보다 앞선다는 말은 시간에 대해서나 직위에 대해서 다 적용될 수 있다. 전자의 견해, 곧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보다 먼저 세상의 미움을 받았다고 보는 견해가 더 지배적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 곧 그들보다 훨씬 뛰어나시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증오를 면할 수 없었으니 그의 사역자들 역시 동일한 운명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는 견해를 택한다. 이것은 1장 27절과 30절에 있는 “내 뒤에 오는 사람이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내 앞에 계심이라”하는 말과 동일한 내용이다.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 그들이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것은 그들이 거기서 구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또 다른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행복과 영광이요 이것을 위해서 그들은 파멸에서 구출을 받았다.

‘택하다’에는 ‘구별한다’는 뜻이 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이 세상의 일부였는데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그들이 멸망 받은 나머지 사람들과 구별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에 나타나나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시는 세상이란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되지 않은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제 17장에 가서 더 자세하게 볼 수 있겠지만 그는 여기서 교회와 세상을 대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롬12:8)는 바울의 권고와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덧붙이는 말씀의 내용은 우리에게 올바르고 적합한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는 가운데 아무도 세상을 기쁘게 하려 하거나 그것의 타락에 굴복하지 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보는대로 세상의 일부인 악인들이 증오를 받을 뿐 아니라 저주를 받고 있으며 이런 면에서 사실 세상은 그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식의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육적인 관점의 지배를 받고 있는 지상적인 사람들은 죄를 진정으로 증오할 수 없으며 오직 그들 자신에게 얼마나 편리한가, 아니면 손해를 끼치느냐에 따라서 그것을 처리할 뿐이다. 그리스도의 의도는 세상이 자체 내에서 서로 반란을 일으킨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오직 세상이 신자들에게서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문제라는 점을 제시하고자 하셨을 뿐이다. 이 한 귀절에서 재세례파에서는 자기들이 대다수의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결론을 내리는데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모른다. 세상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것은 그들은 뭐든지 혼란스러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요, 세상에 속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그가르침을 싫어하는 것은 그들이 정치적인 질서가 그대로 건전하게 남아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15:20

내가……한 말을 기억하라 – 이것도 “너희들은……기억하고 있다”하는 식의 직설법으로 읽을 수 있지만 의미상의 차이는 별로 없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명령법이 더 나은 것 같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증오를 사는 것은 그가 그의 제자들에 비해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말씀에 대한 확증이기도 하다. 종들의 상태가 그의 주인의 상태보다 더 나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과 동시에 그의 가르침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에게 속하는 가르침이 인간들의 멸시를 받는 것을 보는 것보다 경건한 자들에게 더 큰 슬픔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끔찍한 것이요 제 아무리 건장한 마음이라도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나님의 아들 자신도 그에 못지 않은 오만의 저항을 받으셨다는 점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가르침이 인간들에게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볼 때 별로 놀랄 필요가 없다. 그는 이 가르침을 가리켜 그의 것이며 동시에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역과 관계된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스승이지만 그는 그가 처음 교사가 되어 가르치신 그의 가르침이 후에 사도들에 의해서 전파될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다.

15:21

그러나 사람들이……하리니 – 세상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그 복음 자체에 대하여 그렇게도 맹렬한 분노로 대적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그 이유를 사람들이 맹목적인 무지에 이끌려 파멸의 길을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고의적으로 하나님에게 반기를 들려 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세상이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며 무지하기 때문에, 이 무지와 어리석음이 세상에 가득차서 그리스도께 대적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행동의 이유를 항상 명심하는 가운데 선한 양심의 증거에서 위로를 받아야겠다. 세상은 눈먼 가운데 멸망하고 말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빛을 허용하셨다는 점에서 우리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증오는 우둔한 마음에서 생기며 그만큼 하나님은 알려지지 않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겠다. 내가 자주 말한대로 불신앙은 맹목적(blind)이다. 이것은 불경건한 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는 지식이 혼잡하고 당장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 이어 충분하게 설명한 바 있다.

15:22

내가 와서……아니하였더면 – 유대인들이 복음을 미워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그는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이것 때문에 그들의 죄책이 가벼워지는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그들은 마치 빛을 볼 수 밖에 없게 되자 눈을 감아 버린 사람들처럼 악의적으로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그들이 당신의 아버지를 모르고 있다면 왜 그들의 무지를 치료하지 않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들이 아예 순응할 수 없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가능한지를 왜 시험해 보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그리스도에게 제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답은 이것이다. 곧 그가 선하고 신실한 교사의 직무를 수행했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성공하지 못한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악으로 인하여 올바른 마음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우기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자신들에게 제공될 때 그것을 배척하거나 또 그것이 알려지게 될 때 거기에 자발적으로 반기를 드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려 주고자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서운 재앙이 이런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의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그들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격려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불경건한 자들의 악의 앞에서 굴복하지 않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곧 우리에게 이러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미 전투 도중에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죄가 없었으려니와 –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으로 그들에게 불신앙 이외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뜻을 비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어거스틴도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그의 견해도 이와 비슷하다. 곧 그는, 신앙은 모든 죄악을 용서하고 도말하는 만큼 정죄받는 유일한 죄는 불신앙이다 하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불신앙이 인간으로 하여금 사망의 정죄에서 구원받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을 뿐 아니라 모든 악의 샘과 원인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 말은 옳다. 그러나 이 모든 추리는 본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타나 있는 ‘죄’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주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무지를 결코 핑계로 내세울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악하게 배척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혐의 받아 오던 한가지 범죄를 용서할 경우 그를 가리켜 정직하고 의롭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용서가 한가지 죄악에만 국한되는 것은 그것 때문에 복음을 멸시하고 증오하는 유대인들의 무지에 대한 핑계가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불신앙은 사람들을 정죄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 또 제기된다. 어떤 광신자들은 이 귀절에서, 그리스도의 오심 전에 죽은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계시하시기 전까지 신앙이 없었으며 의심 가운데 지내고 있었다는 잘못된 추리를 한다. 이것은 그들의 양심만으로 그들을 정죄하는 데 충분

하다는 성경 귀절이 수 없이 많은데도 이것을 무시하는 태도나 다름없다. 바울은 “사망이 모세 때까지 세상에서 왕노릇 하였다”(롬5:14)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롬2:12)하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에 분명히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제공된 생명을 알면서 고의적으로 배척했기 때문에 그들의 죄책을 더 이상 가볍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허용하는 핑계 때문에 그들의 죄가 완전히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범죄의 심각성을 완화할 뿐이다. 이것은 “주인이 뜻을 알면서 그것을 무시하는 자는 더 심한 매를 맞을 것이다”라는 말씀 그대로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어떤 사람에게 용서를 약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완고하게 배척한 그의 원수들을 정죄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사면이나 자비의 여지가 추호도 없다는 점을 뚜렷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는 그의 오심 자체만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과 관련해서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곧 그들의 죄책이 그의 육체적 임재에만 관련된 것이라면 그렇게 중하지 않았겠지만 그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멸시는 핑계의 여지를 전혀 허락치 않았다.

15: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 이 유명한 귀절에서 그는 누구든지 복음의 가르침을 증오하는 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을 드러 내는 셈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복음에 대해서는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선한 예배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속으로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는 자들인 만큼 쓸데 없는 짓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가르침의 빛을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의 위선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한다”(요2:20)는 귀절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5:23)하는 귀절을 참고하기 바란다.

15:24

내가…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 여기서 말하는 ‘일’속에는 그가 그의 거룩한 영광에 대해서 보여 주신 모든 실예가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곧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많은 기적, 성령의 능력, 그리고 다른 실예를 통해서 보여주셨으며 그 결과, 제 1장에서 취급했듯이, 독생자의 위엄이 그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간혹 그는 모세나 다른 선지자들에 비해 더 많고 큰 기적을 베풀지 않았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다들 아는 그대로이다. 곧 그리스도의 기적이 더 뛰어난 것은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봉사자가 아니라 그들의 주인(Author)이였기 때문이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기적을 베푸시면서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권위 및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셨다. 여기서 말씀하는 ‘일’의 범주에는 그의 신성을 드러내 보여 준 하늘의 영적인 능력에 대한 모든 증거가 포함된다.

지금은……미워하였도다 – 이것은 그의 원수들이 명백하게 신령한 것으로 드러난 그의 능력을 멸시하고 있는 만큼 그들이 여기서 발뺌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곧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게서 그의 신성을 공개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단지 유한한 인간을 상대하고 있었다는 핑계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 귀절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곰곰히 살피는 가운데 거기서 그에게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깨달아야 하며 그것을 그에게 돌려야 한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사를 모호하게 하거나 그것을 천대하는 자들은 하나님에게 배은망덕한 자들이요 악의적인 자들이다.

15:25

그러나 이는……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 자연에 어긋나는 것은 믿어지지 않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증오하는 것보다 더 이치에 어긋나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어찌나 큰 악의에 젖어 있던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나님을 미워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시편 35장19절의 인용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이 지금 성취되고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똑같은 일이 다윗에게 일찌기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들 민족의 오만한 악의를 질책하는 의미에서 인용되고 있다. 곧 이 악의는 그들의 조상 대대로 끊임없이 계속 전해 내려오고 있는 죄악이라는 뜻에서 이것이 인용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너희들은 아무 까닭없이 다윗을 증오했던 조상들에 비해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하고 말슴하신 것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시편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지자들의 전체 가르침은 율법에 대한 일종의 보충이요 모세의 사역은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율법’이라는 말은 그들을 높이 평가하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명칭을 들어서 그들을 보다 더 통렬하게 찌르는 뜻에서 사용된 말이다. 이것은 마치, “그들에게는 상속을 통해 전수되어 오는 율법이 있어서 그들의 행동이 거기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하는 말씀과 같다.

15:26

보혜사……오실 때에 –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아니 교회 자체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복음을 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당부하시고 나서 성령의 증거와 그런 사람들의 불경건한 광포를 대조시키고 있다. 그들의 양심이 이러한 사실의 지지를 받을 경우 그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우리는 “세상이 너희들에게 반기를 들면서 법석을 피울 것이다. 너희들의 가르침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저주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들에게 허락되어 그의 증거를 통해서 너희들을 확고하게 할 경우에는 그 어떠한 공격도 너희들의 신앙의 확고성을 파괴할 수 없을 것이다”하는 식으로 새겨 들을 수도 있다. 사실 온 세상이 사방에서 미쳐 날뛸 때 우리에게 한가지 든든한 보호가 있다면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진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무시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 이 진리가 인간의 판단에 굴복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하루에도 수백번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숱한 요란 속에서 우리 자신 어디에 서야 하는가를 유위해야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용하신 것들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하는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고전2:12). 이 한가지 증거만 가지면 세상이 하나님의 진리를 흐리게 하거나 파괴하려고 내세우는 장애물을 무엇이든지 분산시키고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누구든지 이 영을 부여 받은 사람은 결코 세상의 증오나 멸시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온 세상을 상대로 승자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람들의 그럴듯한 의견에 매달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마치 자주 하나님의 성소를 떠나듯이 이리저리 방황한다면 비참하게 계속 배회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신자들이 잘 알고 있듯이 하늘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내적이요 은밀한 증거(interius et arcanum Spiritus testimonium)와 항상 연관지어 생각되어져야 한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신앙을 그리스도 안에 유지 시키고 정착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구원의 어느 부분이라도 다른 곳에서 구하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명칭을 사용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북돋워 주시는 가운데 그것이 시험에 굴복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를 가리켜 ‘진리의 영’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에 응용될 수 있는 것이다. 곧 성령의 증거가 없이는 인간은 온 사방으로 떠돌아 다닐 수 밖에 없으며 어느 곳에서도 정착할 수 없지만, 그가 말씀하는 곳에서는 그는 인간의 마음에서 모든 의심과 기만의 공포를 제거해 주신다.

15:27

너희도……증거하느니라 – 그리스도의 의도는 성령의 증거란 사도들만 개별적으로 소유하거나 그들만 독자적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성령의 도구가 되어 그의 입노릇을 하면서 이것을 널리 퍼뜨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이 들음을 통해서 오지만 그 확실성은 성령의 인치심과 보증에 의존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의 강퍅함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믿음이란 전도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외적인 전도를 무시하고 은밀한 계시와 (엔도우시아스무스;은혜의 선물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광신자들도 많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양자를 하나로 묶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지성을 깨우쳐 주고 리의 마음에 인을 치시기 전에는 믿음을 가질 수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구름 저편에서 오는 환상이나 말씀을 찾아 헤멜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있어서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는 말씀이 (신30:14,롬10:8) 우리의 온 의식을 하나로 묶어 사로잡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입에서 네 후손의……떠나지 니하리라”(사59:21)고 이사야 선지가 잘 표현한 그대로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라는 귀절이 덧붙여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들이 전파하는 내용에 대한 목격자로서의 사도들을 더욱 신임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이것은 요한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하고 말하고 있는 그대로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것을 다 구비시켜 주셔서 복음에 대한 완전한 확신으로 부족 사항이 전혀 없도록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5장 해석

15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분과 아버지와의 관계, 제자들과 그분과의 관계에 대한 사항을 충분하고도 명백하게 전달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들은 그들이 그분께 기대고 있던 식탁에서 일어남에 뒤이어 있었고, 성안으로 그분과 함께 가고 있다. 이때 그들에게 그분의 마지막 그리고 중대한 말씀이 전달되고 있다.

1. 주님께서는 그분과 아버지, 그분과 제자들은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어야 한다고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지금 그분은 그 관계의 본성을 예증하시고 있다. “나는 진정한 포도나무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그분과 아버지, 그분과 제자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소개된 주제들 중 가장 아름답고 교훈적인 예증이다. 창세기의 시작에서 주님이 그분의 교회에 생명을 주시어 유지 존속 되게 하시는 분으로 교회와 더불어 현존하심이 동산 한가운데 심어져 있는 생명의 나무를 수단으로 비유적으로 묘사되었다. 동시에 그분의 자녀들이 자기들을 영원히 살게 하는 과일을 먹는 것, 또는 그들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려 시도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도 묘사되고 있다. 인간은 지식의 나무의 것을 먹음으로 생명의 나무에 대한 자기들의 권리를 상실했다. 주님께서는 뱀의 머리를 짓부수는 여인의 후손으로서, 그분의 자녀들의 권리를 회복시키는 분으로서 오셨을 때 그분은 영혼의 중앙에 사랑이라는 생명의 나무를 새로이 심으시기 위해 오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낙원으로서 갱신되어지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세상 안에서 입으셨고 신성화하셨던 인성이야말로 진정으로 생명의 나무이다. 이 인성 안에서, 이 인성을 통하여 교회와 교인은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 “진정힌 포도나무”로서 자신을 보이신 주님께서는 그분이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와 서 있는 관계를 설명하신다. 농부와 포도나무의 관계같이 아버지와 아들은 상응되는 관계로 정립되고 있다. 그리고 그분의 교회와 그분과의 관계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로 상응되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농부와 포도나무의 관계인 것은 그 시작에서나 그 발전과정에서나 공히 같은 관계에 있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듯, 인성은 신성으로부터 탄생되었다. 주님의 신성이 인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성이 완전히 신성화 되는 것까지 모든 과정을 지휘하면서 돌보심은 마치 농부가 포도나무를 가꾸는 것과 같다. 추상적, 또는 내적 의미에서 포도나무는 그분의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상징하고, 농부는 그분의 신성한 선의 측면에서의 주님을 예징하고 있다.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 위에, 또는 그 진리를 통해 작동하심은 비유 전체를 망라해 취급되고 있다. 먼저 신성한 선이 인성 자체에 있는 신성한 진리에, 그 다음 주님의 몸의 멤버에 있는 신성한 진리에 작용하는 순서로 서술되어 있다.

2. 그러나 인성이 그 주체가 되어진 신성의 작업이 더 세세하게 언급되고 있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가지를 그분은 가져가신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모두 각각의 가지, 그분은 그것을 깨끗이 하신다. 그러면 그것은 더 많은 열매를 산출하신다.” 우리가 이 비유를 주님 자신에 관련시켜 먼저 생각해 본다면, 가지들은 동정녀 어머니로부터 출생한 그분의 인성에 소속된 인간의 애착들이다. 주님이 입으신 타락된 본성이 뿌리로부터 자라 오른 것들은 그것을 자라게 한 뿌리와 속성이 비슷할 수밖에 없다. 열매가 없었던 인간 본성의 모든 애착은 제거되어졌다. 그리고 열매를 맺었던 모든 애착은 자연적이고 불완전한 것이 숙청되어 더 많은 열매, 더 풍부할 뿐 아니라 더 완전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제거되고 깨끗해지는 과정을 수단으로 주님의 인성은 점진적으로 완전해지셨고, 진정한 포도나무-주 구세주의 신성한 인성에 접목되어 가지가 된 이들 안에서 구원의 열매를 생산하기 위해서 정의 자체를 만드셨다. 이런 의미들은 비유의 두 번째 가는 의미를 생각해보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두 번째 의미의 응용에서 포도나무는 주님 자신인 영광의 몸이 아닌 천국과 교회에 의해 형성된 그분의 신비로운 몸에 대한 예징(type)이다. 주님이 이렇게 이해된다 해도 그분은 여전히 제일가는 분이시다. 그 이유가 천국과 교회는 그것들을 조립한 근원적인 것들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천사와 인간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았던 것, 즉 그들 안에 있는 주님의 것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천국과 교회는 인간이라는 수용체들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받았던 신성한 사랑과 진리로 구성된다는 말이다. 비록 주님의 선물과 그 선물을 받는 그릇은 분리될 수 없다 해도 그것들은 구별되어질 수는 있다. 다시 말해서 그 그릇에 담긴 주님 만에 속하는 선함과 진리에 속한 모든 것으로 구별될 수 있다. 주님의 몸의 멤버가 된 이들은 진정힌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다. 그러나 진정한 포도나무의 모든 가지들이 진정한 포도나무 가지는 아니다. 그들이 천국과 교회와의 어떤 연결을 가지고 있는 한 그들은 뿌리로부터 자양분을 얻는 가지가 되어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천국과 교회와 어떤 연결을 가지고 있고, 이를 통해 주님과 연결되고 있다. 인생 초기에 모든 사람 각각은 천국과 연결되어 있고 교회와도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각기 순진의 상태와 심정이 단순한 상태에 있는 동안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위의 상태를 지나가되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들은 포도나무와의 연결이 잘리워진다. “나에게 붙어있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를 그분은 쳐내신다.” 열매 없는 가지들은 나무에게는 방해물일 뿐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 외에도 열매를 맺는 가지들의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한 열매를 생산하지 않는 가지들은 포도나무의 쥬스(juice)들을 죄를 위한 영양분으로 돌려놓음으로 악한 열매를 생산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그 자체를 위해서, 다른 가지들을 위해서라도 쳐내야만 한다. 그러나 열매가 아무리 작더라도 열매를 맺고 있는 가지라면 포도나무와의 연결이 계속 존속되고, 그 가지의 불완전함을 깨끗하게 해서 더 열매를 가져 올 수도 있다. 포도나무는 그 나무 가지가 아무리 넓게 퍼져 있다해도 모든 가지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농부는 모든 가지가 유지 존속되기를 바라고 있다. 따라서 가지들이 그 자체 뿐 아니라 다른 가지에 무익하고 해를 줄 때 만에 한해서 그 가지들은 잘라진다. 자기들의 불순물을 기꺼이 잘라내는 이들, 개혁이라는 잘라내는 과정을 기꺼이 수락하는 이들, 그래서 거듭남이라는 완전해지는 과정에 진입하는 이들은 유지 존속되어 그들을 성장하게 한 줄기(stem), 접목되었던 줄기로서 포도나무와 조화를 이룬다.

3.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면서 제자들을 그분 자신이신 진정한 포도나무의 가지들로서 이 비유를 응용하시고 있다. “지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했던 말을 통해 깨끗해 있다.” 순수해짐(purification)은 진리를 수단으로 결과되는데, 성경에서 물로 상징되어 있다. 아마 주님께서는 방금 전에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모두는 아니다” 라고 말하셨을 때인 제자들의 발을 씻는 행동, 즉 의미 있고 상징적인 행동을 암시하고 있으신 듯 여겨진다. 그분의 진리로 순수해지는 효력은 그분의 피가 순수하게 하는 권능이 있다는 것으로도 역시 묘사되어진다. 예수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분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씻으셨던” 바로 그분이시다 (요한계시록1:5). 그리고 저 수많은 군중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고,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말이를 빨아 희게 만들었던” 바로 그들이다 (계시록7:14, 히브리9:14, 요한1서1:7). 주님의 말씀이 순수해지게 한다. 그분의 말은 인간을 가르치고 악을 금하는 쪽으로 그들을 인도하며 회개의 일을 수행하게 한다. 주님의 말이 순수해지는 일을 결과한다는 것, 그분의 말은 그분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이다는 것, 이 진리 안에는 구속하심과 신성화 하심의 주님의 일들의 권능과 공적이 포함되어 있는바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함이 있다. 이것은 특출한 의미에서 그분의 피로 의미되고 있다. 이 피는 죽은 자의 피가 아니라 살아있는 신성한 몸의 피로서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바깥쪽 상징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주님의 피는 깨끗하게 할뿐 아니라 살아있게 하고 살아있도록 생명을 주시고 있다. 이 피란 사랑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이다. 그 이유가 우리의 죄로부터 피로 우리를 씻으신 그분은 “우리를 사랑했던” 그분이기 때문이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그리고 나는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 자신으로부터 열매를 맺을 수 없듯,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너희는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분과 제자들 사이에 존속하는 관계의 본성을 주님께서는 여기서 매우 극명하게 묘사하시고 있다. 가지는 그 가지의 생명 전체, 결과적으로 가지가 열매 맺는 능력까지 포함되는 모두가 포도나무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은혜를 입고 있다. 참으로 가지는 잎을 통하여 대기로부터, 그리고 뿌리를 통하여 땅으로부터 자양분을 끌어당긴다. 그러나 영양이 공급되는 그 자체의 힘은 그 가지가 포도나무와 연결되어 있는 것에 전적으로 기인되는 것이다. 참으로 예징(type)과 대형(antitype) 사이에 차이가 있듯, 자연계의 포도나무와 그 가지는 자발적이고 선택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나 영적인 포도나무와 가지는 자유 의지(free will)를 소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정한 포도나무로서의 그분 안에서 가지로 있기를, 그리고 모든 사람이 열매 맺는 살아있는 가지이기를 원하시고 있다. 그분의 교회의 멤버들은 그들이 포도나무와 연결되어 살든지 살지 않든지를 선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열매 맺을 것인지 열매 맺지 않을 것인지도 선택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내 안에 머물러라. 그리고 나도 너희 안에 머물겠다” 라고 말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권면의 말씀이다. 따라서 이 말씀이 보내지는 이들에게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하는 자유가 없다면 권면의 말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호소하심, 죽음보다는 생명을 선택하라는 호소, 생명은 생명 자체이신 그분과 연결된 채 남아있음으로서만 존속된다는 것, 그분으로부터 고집스럽게 떨어져 나가 피할 수 없는 결과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생명의 근원에 남아 있는 게 유리하다고 제자들에게 호소하신 것이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그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열매는 포도나무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열매를 생산하는 것은 가지의 직능이요 그 씀씀이 이다. 모든 종교는 삶에 연결되어 있고 종교의 생명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하게 되는 요점은 선을 행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아니라 선함 자체이신 그분의 권능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선을 행함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인간들은 주 예수와의 영적 연결이 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선들은 실제의 선이 아닌 가상의 선(apparent good)이다. 다시 말해 가상적인 선은 그것을 받은 상대방에게는 선일는지 모르나 그것을 행한 당사자에게는 선이 아니다. 이 선은 선함의 어떤 동기로부터 실제로 행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주님의 영으로부터 행해진 게 아니라 인간 자신의 영으로부터이다. 이와 같은 선은 그 선의 본성 측면에서 일시적일뿐아니라 그 선이 존속되는 동안에도 일시적이다. 그 선을 행하도록 자극한 동기는 세상 속에 있는바, 세상과 더불어 끝난다. 그것은 천국에로 들어갈 수 없다. 포도나무에서 잘리워지는 열매 없는 가지는 내던져져서 시들고 말 것이다. 그것의 심판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심판과 같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여 아무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다” (마가11:14).

5. 농부의 일, 그리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할 필요성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님께서는 이제 그분이 사용하신 형상의 의미를 설명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는 자, 그리고 내가 그 사람 안에 머무르는 자, 동일한 사람은 많은 열매를 산출한다. 그 이유가 나 없는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시기 위해 고용한 언어는 그분의 본성과 권능에 관한 가장 빼어난 생각을 주고 있다. 무한하지 않았던 존재는 이 언어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없었다. 이 언어는 예수가 영적으로 살아있고 행동하는 모든 것의 힘과 영적 생명이시다는 것외 무엇을 더 함축할까? 그들은 그분의 생명으로 살고 그분의 힘으로 행동한다. 그분 없이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언어는 이런 생각, 즉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이 그분의 본보기를 모방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단지 따라감으로 획득되어진다는 생각과는 일치되지 않는다. 그분의 제자들이 생명을 가지는 것은 예수께서 계셨었고 행하셨던 것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그분이 계시고 행하시는 것으로부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분을 본보기로서 뒤돌아보는 것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힘-모든 권능을 가지신 오직 한 분으로서 그분을 찾고 있어 그분 안에 머물음으로 해서 영원한 생명에로 열매가 맺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생명은 그분으로부터 파생된다는 것, 그리고 그들 안에 그분의 생명이 있어야 한다. 그들은 포도나무에 접목되어야 하고 그 나무의 뿌리로부터 그들의 자양분을 끌어들여야 한다. 열매를 맺음만이 아니라 열매를 더 많이 맺음이 참 포도나무와 연결되어 살아 있는 결과이다. 제자들이 더 많이 받게 되면 그분께서는 더 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분은 선한 모든 일들 안에 충만해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이 우리 안에 머물음으로 해서 우리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한편,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영적이고 천적인 것 어느 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나 스스로 행위자의 영혼을 풍부히 할 수 없고, 우리의 심정 안에 정의와 평화라는 주님의 왕국을 건설할 수 없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는 인간에게 나타나거나 명백히 보이게 만들지는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후, 즉 선을 행하기 위한 지상적인 모든 동기들이 죽어질 때, 진리는 밝혀질 것이고, 영혼은 벌거숭이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나 없이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6. 지금 우리는 참 포도나무로서 주님 안에 머무르지 않은 결과를 배운다. “만일 사람이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는 가지 같이 내던져지고, 시들며, 사람들은 그것들을 그러모아 불에 그것들을 내던져 태운다.” 열매가 없는 것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도 없다. 이 구절에서 말해지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머물지 않으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분 안에 머물지 않는 것에 대해서이다. 주님께서는 누구로부터서도 그분이 머무시는 것을 철회하지 않으신다. 오로지 인간이 머물지 않음으로 인해 밖에 버려지는 것이다. 주님 안에 머물지 않는 명목상의 제자들은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분리된 신앙과 사랑을 원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밖에 내던져져 시들어지는 가지 외에 더 다른 운명이 남아 있지 않다.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 하느님의 영광도 타인의 선을 위해 더 이상 생명 있고 번성하여 열매 맺는 것이 없을 경우 사람들이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버리는 것밖에 더 합당한 게 없다. 모은다(gathering)란 세부적인 것들을 하나의 전체로서 가져다 놓은 것을 표현한다. 주님께서는 전 인류의 애착들을 하나의 사람이라는 형상으로 되게 하기 위해 통일하신다. 그분은 그분의 나라 안으로 정의로운 자들을 모으신다. 마치 농부가 밀을 곳간에 모으는 것과 같다. 천사들은 뽑은 자를 천국 이쪽에서 저쪽 까지 사방으로부터 모은다. 사악한 자들의 애착이 그 애착을 통치하는 사랑을 수단으로, 그 사랑 주위에 모두 모일 때 사악한 자들은 모아진다. 그리고 그들을 통치하는 사랑이 완전하게 주도권을 쥐어 악의 욕망으로 명백히 나타날 때 사악한 자들은 불에 던져 진다. 그리고 그들이 배웠었던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이 살라질 때, 모든 생각과 애착 에 불이 붙여질 때, 그래서 미워함, 복수심, 무자비한 모든 것의 바람으로 태워질 때 사악한자는 불에 타는 것이다.

7. 위와 반대되는 경우를 주님께서 계속 말하신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고, 너희가 바라는 것을 묻는다면, 그것이 너희에게 행하여 질 것이다.” 주님 안에 머무는 이들은 그들이 묻는 것이 무엇이든 받게 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주님 자신이 묻기를 바라는 그들에게 영감을 주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될 때 그는 신성한 의지에 동의할 수 있는 것밖에 더 이상은 물을 수 없다. 그는 주님이 뜻하시는 것을 뜻한다. 참으로 그는 주님의 의지로부터 행동한다. 그 이유가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신성한 본성을 구성하는 신성한 속성들의 사랑 안에 있는 것외 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과 신앙 의 상태를 확증함이 주님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 과 사랑 안에서 묻는 그 사람은 주님이 수여하시되 기뻐하시게 되는 것을 달라고 한다. 영적 수준의 마음을 지닌 자는 영적인 것만을 집중적으로 요구하고, 그런 요구야말로 그런 사람에게 가장 합당하다. 만일 그가 시련 또는 고뇌로부터 해방되기를 구한다면 그는 주님 자신이 물으셨던 것같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여 신성한 뜻에의 복종을 구한다. 우리 같은 인간의 경우 주님이 그분의 기도에서 달성했던 완전해진 높이에 도달 가능해질 자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주님이 그러하셨던 것을 자신의 분량껏 성실히 바래고 노력하는 가운데 있다면 그의 기도들은 주님의 기도의 본성에 참가할 것이다. 그래서 그가 받는 대답들은 예수께서 받으셨던 것 같은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네가 뜻하는 것을 물어라” 라고 표현하셨 듯 참된 제자의 바람이나 뜻하고자 하는 것에는 할당된 한도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무엇을 뜻하든지 구하라”는 말의 밑그림이 우리를 가르치는바, 주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이 물어야 하고 또한 열심히 자주 묻기를 바래시고 있다는 것이다. 신성한 뜻인즉, 인간은 높은 데로부터의 영적인 선물을 게으르게 기다리지 말고 그들이 뜻한 것을 획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애원하는 의지가 묻는 것은 무엇이든 획득한다는 약속은 주님 안에 머무는 이들에게만 주어진다는 것, 그 사람 안에 주님의 말이 머물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곰곰이 되새겨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때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문다. 우리가 그분께 순종할 때 그분의 말이 우리 안에 머물고 있다. 그분의 사랑을 통해 주님은 기도의 영을 주시고 그분의 말을 통해 그분은 기도의 주제를 가르치신다.

8. 그러나 기도의 목적은 받는 것 뿐 아니라 행동하는 쪽으로 인도한다. “이점에서 나의 아버지는 신성화 되신다. 하여 너희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러면 너희는 나의 제자들 일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어떤 방법에서 많은 열매를 맺는 제자들을 수단으로 아들보다는 오히려 아버지께서 신성화 되실 까? 우리가 아는바, 주님은 아들이실 뿐아니라 아버지이시기도 하다. 사랑 측면에서는 아버지이시고, 지혜 측면에서는 아들이시다. 인간의 일들이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이루어질 때, 다시 말해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어질 때 아버지는 인간의 그 일 안에서 신성화 되신다. 그 다음 신성한 사랑은 그것들을 수행하는 제자 안에서 신성화 되신다. 그 이유가 제자들이 사랑의 열매인 선을 행한 만큼 하느님의 사랑은 제자의 심정 안에서 드높여진다. “그렇게 해서 너희는 나의 제자일 것이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진리를 배워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선을 행함은 진리를 취득하게 하는 쪽으로 인도한다. 사랑과 진리는 서로를 완전해지게 한다. 우리가 더 사랑하면 우리는 더 많은 신앙을 가진다. 우리가 심정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더 드높일수록 우리는 하느님의 진리를 이해성 안에서 더 명백히 보게 된다. 우리가 아버지를 더 영광되게 할수록 우리는 아들에게 더욱 신실한 제자가 되어있을 것이다.

9.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듯, 나는 너희를 사랑했다, 너희는 내 사랑 속에 계속 있거라.” 주님의 인성이 지닌 중재하는 특성이 여기서 놀라웁게 드러나 있다. 주 예수는 아버지와는 구분된 인물(person)로서 아버지에게 중재하는 일을 맡고 있는 것으로 너무나 흔하게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주님의 중재인 같은 일은 실지로 인간을 지도하고 있다. 쌍방에 필요한 것은 일치되는 것 뿐이다. 하느님은 인간에 수여하시려는 구원의 선물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오직 필요한 것은 그 선물을 받을 수 있게 인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육을 입으시기 전에는 하느님의 선물이 인간에게 교통될 수 있는 적당한 매체가 없었다. 주님이 입으시고 신성화 된 인성은 지금 이와 같은 매체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직접 건너갈 수 없었던 구원의 선물이 지금은 주님의 인성을 통해 오고 있다. 신성한 사랑은 주님의 인성 안에서 인간이 되어간다.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 안에 숙박되어진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그분을 사랑하시고, 아들이 인간을 사랑하신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그분의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이런 언어로, 즉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했다는 말로 묘사되고 있다. 신성한 사랑이 주님의 인성에서 역사된 똑같은 방법으로 인간의 마음에서도 작업되고 있다. 우리 주님의 말의 글자적 의미에 따른다면, 아들은 아버지 사랑의 대상(object)이고, 인간은 아들 사랑의 대상이다. 만일 우리가 영적 생각에 일치시켜 말한다면, 아들이 아버지 사랑의 주제가 된 것 같이, 인간은 아들 사랑의 주제가 되었다 인바,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진리를 표현한 셈이다. 이를 다른 말로 말한다면, 인간은 주님께서 신성화 하신 것을 수단으로 그것과 똑같은 과정과 방법에서 거듭나진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심정 안으로 내려오는 매체를 설비하실 목적에서 하느님이 육을 입으셨다는 것, 이 위대한 진리는 그 얼마나 경이로운지! 따라서 주님의 권면, “너희는 내 사랑 안에 계속 있어라”는 말씀은 그 얼마나 중요한가!

10. 지금 우리의 주님은 어떻게 그분의 사랑 안에 계속 머무를 수 있는가를 가르치신다. “만일 너희가 내 명령들을 지킨다면,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의 명령들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문 것과 같다.” 우리의 주님께서 말하시는 명령들은 구속의 일에 관련되어 아들에게 지운 어떤 특별한 명령들이 아니고, 주님께서 완성하시기 위해 지상에 오셨던 영원한 법들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명령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것들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말들을 단순한 글자적 의미에서 가져본다면, 우리는 그 의미들로 이런 유용한 교훈,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 계속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의 명령들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을 배운다. 그분은 불순종하는 자가 아닌 순종하는 자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만일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겠다는 것을 되돌려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고 여기서 말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는 그분의 명령들을 지켜야만 한다고 말하시고 있을 뿐이다. 물론 상호적인 사랑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사랑함과 행동함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이것이 저것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둘 중에서 순종은 그것 홀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쁘게 되돌리지 않을 경우 참된 순종은 없다. 기쁘게 행동된 것은 그만큼 애착 있게 행동된 것이다. 우리의 주님께서 이 구절을 통해 되풀이해서 가르치시는 교훈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분께서는 순종이 사랑을 놓는 기초이다는 것, 이 기초 없이 사랑은 실재의 존재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고 있다. 심정 안에 있는 사랑은 하느님의 옥좌이고, 생활 안에 있는 순종은 그분의 발판이다. 심판과 공의는 그분의 옥좌를 받친다. 이것들이 있지 않은 심정이라면 그분의 지배도 끝나야만 한다. 이미 살핀바 같이 영적 의미에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은 그분의 사랑의 주제요,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무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보건대 우리가 더욱 더 명백히 보게 되는 것은, 만일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겠다면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명령들은 사랑의 법들이다. 이 법들은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진행되고 있고 우리를 그 사랑으로 인도하도록 고안되어져 있다. 그리고 사랑으로 인도될 때, 사랑 안에 우리는 보존된다. 우리가 지옥을 피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신성한 정의가 요구하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 신성한 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게 아니라 우리가 천국을 얻기 위해 신성한 사랑이 우리에게 행하기를 바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신성한 명령은 죽음의 법이 아니라 생명의 법이다. 이런 점에서 역시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모형이시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 마치 그분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문 것 같이 되기 위해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를 바래신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행하도록 요구되는 것을 볼 수 있는 큰 사람(the Man)이시다. 그분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 주님은 그분의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시고 있다. 그분은 법 전체를 완성하셨다. 주님이 아버지의 명령들을 행함으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문 것은 모든 법이 사랑의 법이였기 때문이었다. 영원하고 변경될 수 없는 정의와 질서의 법을 그분의 인성에 새기심으로 그분은 질서 자체와 정의 자체가 되셨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문다. 그 이유는 그분이 스스로 신성한 사랑이 바랐던 모든 것, 신성한 지혜가 요구했던 모든 것을 실제화 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겠다면 우리는 각자의 분량 껏, 수준 껏 주님의 명령들을 행해야 한다.

11. 주님의 계명이 생명의 법이라는 것, 그것을 획득하는 수단이 순종이다는 것은 이제 주님께서 발음하신 단어들로부터 더 명백해 진다. “이런 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했었던 것은 나의 기쁨(joy)이 너희 안에 남고, 너희의 기쁨(joy)이 충만해질 런지 몰라서 이다.” 주님의 기쁨은 그 기쁨이 주님 자신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분 자신의 완전함으로부터, 그리고 그 완전함을 인간의 후손들에게 나누어주심으로부터 발생하는 복됨이다.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남아 있기 위해 우리는 그분의 완전함을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이로부터서만 우리는 그분의 복됨을 어느 정도라도 가지기 때문이다. 주님이 말하시는 기쁨은 그분이 구속의 일을 성취하시어 발생된 특별한 기쁨이다. 인간 종족에 대한 사랑은 주님으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세상에 오도록 자극했던 사랑이다. 그리고 신성한 기쁨은 신성한 사랑이 실제화 하려 결심했던 의도의 열매였다. 이 기쁨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누어주시고 우리 안에서 보존되기를 바라시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 자신이 그것을 획득했던 수단 외의 방법으로는 우리에게 나누어 줄 수 없는 기쁨이다. 이런 신성한 기쁨을 가지시기 위해 오셨던 그분은 슬픔의 사람이 되셨었다. 그분은 인간성이 견뎌낼 수 있는 모든 슬픔을 견뎌내셨고 시험을 이겨내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안에 그분의 기쁨이 머물게 하겠다면 그분처럼 우리도 그분의 슬픔을 건너가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의 기쁨이 충만 되게 하겠다면 우리는 악마와 세상과 육과의 싸움에서 그것들을 확실히 정복해야만 한다. 물론 주님께서 정복하셨던 만큼 우리도 정복한다는 것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정복하심을 뒤쫓느라 꾸준히 분투해야 하고 그것만으로도 족할는지 모른다. 참으로 우리의 완전은 완전을 향해 계속 가고 있는데 존재한다. 충만된 우리의 기쁨은 계속 증가하고 있는 그 충만 속에 존재한다.

12. “이것이 나의 명령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듯,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우리의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주셨던 새 명령이다. 그래서 제 13장 34절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런데 이 구절에 소개된 것은 의무감 같은 것을 표현해 주시려는데 있다. 즉 지금 주님께서는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수단으로 그분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강조하시고 있다. 주님을 사랑함은 이웃을 사랑함 안에서 모습을 명백히 보인다. 그렇다.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은 이웃을 사랑함이다. 우리에게 밝혀지고 주어진 바로서의 주님의 사랑은 그분의 창조물의 사랑이다. 그리고 우리 안의 이 사랑은 그 사랑의 본성을 수단으로 서로 사랑하도록 우리를 자극하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정도에 이르기까지 서로 사랑하도록 자극한다.

13. 사랑은 그것이 수여한 이익, 뿐만 아니라 그것이 만드는 희생을 수단으로 보여지게 되어있다. “사람이 자기 친구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려 놓는 것 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다.” 만일 우리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모방을 위한 본보기를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 안에서 가지고 있다. 그분은 그분의 친구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적들을 위해서도 그분의 생명을 내려 놓으셨다.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로마서5:7,8). 그러나 예수는 여느 인간이 아니셨고 특별한 사람(the Man)이셨다. 가장 위대하게 완전함에서의 인간성이 그분 안에서 구체화되었고 본보기화 되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여느 인간이 해낼 수 없는 것을 하셨고 그분은 친구뿐만 아니라 적들을 위해서도 죽으셨다. 이 구절에서 그분이 위와 같은 그분 자신의 품성에 관한 두드러진 점, 즉 경이롭고 비길데 없는 사랑을 과시하고자 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분만이 인간의 모든 사랑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 즉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려놓도록 자극하는 사랑에 제자들의 마음이 향하게 하신다.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내려 놓으셨다. 그들 심정 속의 적개심은 아직은 온전히 극복된 상태와는 너무나 멀리 있었다. 아직 주님은 크나큰 적, 계속 인류를 붙들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인간 마음을 속박해 놓고 있는 악마를 완전하게 정복하시지 않았다. 지금 그분의 신성한 일 안에서 자기들의 주님을 따라왔던 이들에게, 세상이 미워했던 그분, 즉 어둠의 모든 권세가 병합해서 대들고 있는 그분에게 친구가 되는 만큼에서 제자가 된 이들에게 말하시고 있는 것이다.

14. 예수께서는 그분의 친구들인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이 무엇이든 행한다면 너희는 나의 친구들이다.” 만일 친구로서의 사귐이 사랑을 수단으로 형성되고 단단해진다면, 사랑처럼 친구 관계도 고결한 행동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구세주와 그분의 제자 사이에 친구로서의 사귐의 묶음에는 어떤 특이함이 있다. 친구들은 서로가 상호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상호적인 은의, 신세를 지는 관계(obligation)로 묶여져 있다. 이 은의는 그들 서로를 명백히 보이고 유지존속되게 하는 사랑처럼 일반적으로 동등하다. 그러나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의 친구됨은 제자들만을 존중히 여기는 조건 위에 놓여 있다. “만일 너희가 내가 명하는 것은 무엇이든 행한다면 너희는 나의 친구들이다.” 그분은 곧 이런 조건들의 저자요 대상이시다. 제자들만이 그 조건에 복종해야 한다. 참으로 주님 편에 있는 수단은 질서의 법들이고, 이 법에 따라 제자들과의 친구됨은 행동된다. 그러나 이 법들은 그분 자신에서 근원된 것이고 그분 자신이다. 그 이유가 신성한 법은 신성한 지혜에 대한 또 다른 이름, 신성한 사랑의 법으로서 지혜가 작동하는 형식밖에 더 아니다. 그분의 지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법이고, 그들은 이것을 그분으로부터 받게 되고 그들이 순종해야 하는 법이다. 그분이 그들에게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 행한다면 그 제자들은 그분의 친구들이다. 그분이 그들에게 수여하시기로 약속하는 모든 축복의 조건이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임을 꾸준히 상기하도록 자극을 주시고 있다는 점은 우리 역시 그 대목에 시선을 집중해볼 가치가 있다. 다음 절에서 주님이 말하시는 종이든 친구이든 모두 순종이란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둘 다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요구된다. 둘 사이에 유일한 차이는 그들의 순종의 품질을 구별지어주는 총명과 동기에 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친구라 불리웠다 (이사야 41:8). 그 이유가 그는 주님 사랑을 원리로 삼는 이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와 일치해서 사도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친구라 불린 것은 그가 일을 가지고 그의 신앙 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2:22-23).

15. 주님께서 계속 이으신다. “이후로부터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이유가 종은 그의 주인이 하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를 친구들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가 내가 나의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모든 것을 나는 너희에게 알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종이라는 수준에 있어왔다. 지금 그들은 친구라는 수준으로 승격되었다. 종은 의무감에서, 또는 보상 때문에 주님에게 순종하는 이들이다. 친구는 이해타산이 없는 사랑으로부터 또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사람이다. 의무라는 견지로부터의 순종은 영적인 노예상태이다. 사랑의 느낌으로부터의 순종은 영적 자유이다. 제자가 첫 상태에서 둘째 상태로 건너갔을 때, 그는 더 이상 종이 아닌 하느님의 친구이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이런 상태와 수준 사이에 있는 차이의 바탕을 설명하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어떤 종이 충직한 종이 되기에 앞서 그는 주인의 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 법을 그가 순종해야만 하는 권위적인 명령으로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는 주인의 뜻을 알고 있으나 그 법을 강력히 실시하는 이유와 목적을 모르고 있다. 이유와 목적은 보다 더 높은 상태에 소속되어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것을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모든 것을 나는 너희에게 알게 해 주었다”는 말로 서술하시고 있다. 주님께서 아버지라는 단어를 들추어 말하실 때는 언제든지 그 말은 그분의 인성과 구별되는 인성에 내재하는 신성을 두고 하시는 말이다. 또는 그분의 지혜와 구별되는 신성한 사랑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제자들에게 알게 만드는 것은 그분이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그들과 교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의 법과 메시지를 받는 것이다. 주님은 사랑으로부터 언제나 말하시지만 그분이 말하는 상대방들은 언제나 사랑 가운데서 그분의 말을 듣고 순종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모든 것을 나는 너희에게 알려 주었다” 라고 말하시고 있다. 이것은 성령에 관한 선포, “그가 (모든)진리로 너희를 인도할 것이다”는 것과 비슷하다. 제자의 충만됨은 주님의 충만됨의 형상이다. 위 주님의 표현이 함축하는 바, 우리의 친구로서의 그분은 그분께서 그분의 친구라 부르는 이들에게 한정 없는 그분의 사랑 속에서 그분의 모든 마음을 밝히 알게 하시고, 그들을 그분의 가장 깊고 은밀한 생각들의 저장고로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비밀은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시편 25:14).

16. 우리가 종의 신분에서 친구의 신분으로 승격되는 조건 뿐만 아니라 원인은 주님 쪽에 있다.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선택해서, 임명하여, 너희는 가서 열매를 산출하라 했다. 그리고 너희의 열매는 남을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 안에서 아버지에게 묻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은 그것을 너희에게 줄런지 모른다.” 열 둘이 주님에 의해 사도 신분으로 뽑혔고 복음을 전파하여 노동의 열매로서 영혼을 그분께 가져오도록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단순한 제자들이 아닌 사도로서의 제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계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럽다. 그분의 연설의 용어와 일반적 의도는 공적인 삶과 품성보다는 오히려 기독인에 더 관계되고 있다. 우리가 그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려는 것은 이런 빛 가운데 있다. 주님의 말들은 모든 제자들에게 참되다. 그들이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그들을 선택하셨다. 그들의 구원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고 운영되었으며 완전해졌다. 그 일은 그들의 동의와 협조 없이 행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일의 저자요 대행자이신 반면, 그들은 그 일을 받는 그릇이요 재대행자일 뿐이다.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사랑한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함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원인을 생산한다. 우리가 그분을 뽑은 게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뽑았다. 그리고 우리를 뽑았을 뿐 아니라 우리를 임명하셨다.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뽑아주셨고 그분의 지혜로 우리를 임명하셨다. 우리가 심정에 그분의 사랑을 받을 때 우리는 뽑혀진 사람이다. 우리가 이해성에 그분의 진리를 받을 때 우리는 그분이 임명한 사람이다. 그 이유가 우리의 애착은 그분의 사랑과 결합함에 도달되고 우리의 생각은 천국적 질서의 상태로 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제자들을 선택했고 임명했으며, 그들이 나가서 열매를 맺도록 하셨고, 그들의 열매가 없어지지 않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시고 있다. 주님의 바람과 의도란, 그분의 제자들이 선한 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선함으로 인도하는 길인 진리와 일치되는 삶을 수단으로 “나가야” 한다. 정의와 성실의 삶 안에서 그들의 사랑과 신앙 을 명백히 나타내 보임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들은 신실한 신앙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견지하고 있음으로 “그들의 열매는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그분의 제자들이 해내서 그들이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한 것은 무엇이든 아버지께서 해 주시기를 주님은 바라시고 있다. 14장 13절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묻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이 그것을 해 주시겠다고 이미 말하셨다. 이 구절의 경우, 그분께서는 아버지가 그것을 해 주시리라고 말하시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아들로부터 받는다는 것은 그분의 지혜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원하는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은 제자들의 입술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올려놓고 아버지께 접근하라는 것은 확실히 아니고, 주님의 겸허의 영과 그분의 헌신의 영인 온유함으로 채워진 심정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구하라는 것이다.

17. “이런 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한번 더 반복된 이 교훈은 그 얼마나 감명적인지! 이것, 주님의 새 계명, 서로 사랑하는 것, 그분이 그를 사랑하셨듯 사랑하는 것, 이 사랑을 수단으로 모든 사람은 그분의 제자임을 알게 된다는 것은 모든 주님의 가르침의 대상(object)이요 모든 그분의 명령들의 목적(end)이다. 그래서 신성한 선생님은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가르쳐 제자들에게 이 교훈을 인상 깊게 해놓으려 하셨다. 기독인의 의무에 관한 어떤 교훈도 이 계명을 습득하는 것보다 더 어렵지 않다. 그 당시 제자들에게 이 교훈이 반복적으로, 지엄하게 인상지위 놓여야 할 필요가 있었던 그 이상으로 그 이후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도 그 필요성은 더욱 더 요구되고 있다. 이 사랑의 얼마나 적은 양, 주님이 제자들을 사랑했던 양의 얼마나 적은 양으로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던가! 자기들 앞에 본보기와 그분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는 제자들이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서로 다투지 않았던가! 그분을 믿노라 고백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웃의 복지에는 아랑곳없이 자아 이익에 몰두했던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이기를 바래고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분을 사랑함과 서로 사랑함이 명백히 보여질 수 있는 참된 방법만으로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보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받는 한편,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도록 경고되고 있다. 주님은 선한 자에게 있어서는 사랑해야할 최고의 대상이 되지만 사악한 자에게서는 미워해야할 최고의 대상이다. 그분은 위로와 격려의 교훈으로서 이런 사항을 제자들에게 주신다.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하기에 앞서 그분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이를 적절히 이해해서 차분히 생각해보면 위 말씀은 진실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씀이다. 세상이 제자를 미워함은 그에 앞서 주님께서 미움을 당해왔던 것보다는 덜 위험하다. 그분은 적들과 보복자를 잠잠하게 하셨다. 이렇게 그분이 그것들을 정복한 이후의 세상의 미워함은 만일 악의가 더하지 않다 해도 덜 위험해 있다. 이것을 그분의 연설의 뒷부분에서 가르치시고 있다. 거기서 그분은 세상을 극복한 이래 제자들이 기운을 내도록 권면하시고 있다. 세상의 미워함이 이러할진대 제자들은 그 미워함을 견뎌내어야 한다. 그러나 견딤은 소극적 수단일 뿐이다. 기독제자는 모든 박해를 개선의 수단으로 바꾸어야 한다.

(참고: 18절은 원서에서 생략되어 있음)

19. 세상의 반대는 세상 속에 있지 않은 이들이 예상해야 한다. “만일 너희가 세상 속에 있다면, 세상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세상으로부터 선택했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이 인간이 세상의 일원으로 세상 안에 있는 한 그는 세상으로부터 달갑지 않은 대우를 받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세상적인 인간은 서로가 미워하고 피해를 입힌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그들이 세상적 원리에서 서로 반대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적 목표와 이익추구에서 경쟁하기 때문에서이다. 세상이 세상 속에 있지 않은 이들을 미워함은 원리 수준에서 발견되고 기어이 적대관계를 생산하고야 만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의 말은 영적 의미에서 보면 그것은 제자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서로 반대되는 원리로서 이해되어진다. 위 주님의 말을 개인 차원에 응용하면 세상이란 우리 본성 중 세상적인 부분, 즉 자연적 생각과 자연적 수준으로 기우는 경향성을 지닌 자연적 마음이다. 그리고 제자들이란 거듭나는 동안 획득되어지는 영적 원리들이다. 애당초일 경우 우리의 영적 원리조차도 자연적 마음 안에 존재하고 있다. 인간이 거듭 나아가는 생활을 진척해갈 때 영적 원리들은 자연적 마음으로부터 영적 마음으로 승강된다. 그러면 그 원리들은 세상으로부터 가려내진 것이고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세상이 그 원리들을 미워한다.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천국과 세상 사이에는 서로간에 반대하고 다툼이 있다. 이 다툼은 세상이 정복될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그 정복은 지금 있지 않는다. 새 삶의 단계에서, 특히 주님의 이 시기가 관계되는 단계에서 미워함과 박해는 극에 달할 정도로 왕성하다.

20. 다툼이 계속되는 동안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과 본보기로부터 위로를 끌어당겨내고 강건해짐도 끌어낸다. “종은 자기 주인보다 더 위대하지 않다 라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말을 기억하라. 만일 그들이 나를 핍박했다면, 그들은 너희 역시 핍박 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내 말함을 지켰다면, 그들은 너희의 것 역시 지킬 것이다.” 영적인 기억은 내적 삶에 속한 것이다. 영적으로 기억함은 우리가 지식으로 획득했던 진리들을 원리로서 재생산 한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하셨던 말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종은 그의 주인보다 더 위대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13장 16절 에서의 강연에서 말하셨었으나 지금 그분께서는 유대인들이 그분을 박해하듯 그들도 박해하리라는 경고의 말을 추가해 놓고 있으시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체험하신 박해를 피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그분의 바깥쪽 적들로부터 감당한 박해 같은 종류는 오늘날 시대의 많은 제자들에게 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겪으신 내향의 박해는 모든 시대에 있는 그분의 제자가 견뎌내야 하는 박해이다. 내향의 박해란 시험들이고 이 시험을 주님이 특별히 언급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것을 피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시험들은 그들이 순수해지고 구원되는 과정에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실감할 것으로 예상되는 주님의 체험의 또 다른 행복한 부분도 있다. “만일 그들이 내 말을 지켰다면 그들은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 제자들이 파견되어지는 세상에는 두 부류, 즉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박해하고 미워하는 부류, 그리고 주님과 제자들이 가져다주는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부류로 구성되어있다. 주님의 박해를 나누어 가지는 이들은 그분의 성공 역시 나누어 향유한다. 이것이 우리로 힘을 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과 우리의 영적 삶에 관련하여 이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자연적 상태에 있을 경우, 우리는 종을 주인 위에, 자아를 하느님 위에, 세상을 천국 위에, 자연적 수준을 영적 수준 위에, 지식을 선함 위에 놓는다. 우리는 거꾸로 된 위와 같은 질서를 개정해야 하고, 종이 그의 주인보다 더 나을 수 없다는 것을 먼저 배우고 기억해야 한다. 마음과 삶에 소속된 모든 문제에서 종을 그의 주인에게 종속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박해로 의미된 그런 환난의 주체가 되어 있었어야 한다. 이 박해가 오는 세상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세상,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의 대상이 되는 세상이다. 세상을 사랑함이 극복될 때, 한 때는 반대의 위치에 놓였지만 세상은 주님과 그분의 말을 청종하도록 설득될 것이고 구세주를 인정하고 그분의 말들을 지킬 것이다. 자연적 마음 속의 적개심이 제거될 때, 자연적 마음은 영적 마음에 종속되고 순종하게 된다. 모든 생각은 신성한 권위에 종속되도록 가져다 놓여 모든 것은 그렇게 종속됨을 지원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주님을 따라야 한다. 그 이유가 그분은 싸움을 수행하셨기 때문, 그리고 반역적인 인간 본성에 있는 모든 반대되는 것을 극복하시어 그것들을 그분의 영원한 신성과 완전한 하모니를 이루게 하셨기 때문이다.

21. “그들은 모든 이런 것들을 내 이름의 위함 때문에 너희에게 행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나를 보낸 그분을 모르기 때문이다.” 제자라는 측면에서 보면,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어서 초래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음은 그들이 실제화하고 본보기화 했던 그들 주인의 원리 때문이었다. 우리에 관련해보면, 우리의 영적 삶과 체험에서 우리가 겪는 내향의 박해는 주님을 위해서이다. 우리 자신의 악과 잘못들 쪽에서 반대하는 제일가는 최말단에 해당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진리이다. 여기서 말해지는 미워함과 박해는 제자들에게 직접 향해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제자들이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았던 원리들이다. 따라서 이런 원리가 미움을 받고 반대에 부딪칠 때, 주님이 미움을 받고 반대되는 것이다. 세상이 주님 자신에게 그것을 가했듯이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때,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미워하고 박해한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만큼, 즉 우리 안에 주님 사랑을 가지지 않은 만큼 우리는 그분의 진리에 자연적인 미움을 가진다. 주님의 진리는 그분의 사랑이 파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는 사랑으로부터 진행되는 것, 마치 태양의 빛이 태양의 열에서 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빛을 미워하는 바, 그 이유는 빛이 그들의 악을 명백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설사 우리가 새 삶에 진입해 있다 해도 우리의 부패된 근성이 우세해 있는 만큼 우리는 빛을 미워하는데, 그 이유는 진리가 진행되어 나오게 하는 신성한 사랑에 관한 실제적인 지식을 너무나 적게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아들에 행하는 바, 그 이유는 우리가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22. “만일 내가 오지 않고 그들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죄를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자기들의 죄에 변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를 두고 유대인들이 만일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와서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죄 없이 살아 갔을텐데 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우리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들이 그분을 개인적으로 미워하거나 박해하는 죄를 짓지는 않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들이 그분을 개인적으로 미워한 이유는 그들이 말씀이 육이 되신 분으로서, 참 빛으로서의 그분의 품성의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미워했기 때문에서이다. 그들의 지식은 그들이 단죄 받는 원인이었다. “이것이 단죄이다. 빛이 세상에 왔는데 사람들의 행위가 악해서 어둠을 사랑한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세상을 단죄하시러 오신 게 아니라 그분을 통해 세상이 구원받도록 하시려고 오시었다.” 그러나 마음씨 고운 사람에게 해당되는 구원은 그 반대되는 품성의 소유자에게는 단죄이다. 그들을 단죄하는 것은 빛이 아니라 빛에 반대됨이다. 빛의 본성은 대상을 명백히 알게 만드는 것이다. 어둠은 악을 덮고 변명해댄다. 이 어둠은 고집부려 있어진 잘못의 어둠이 아니라 본의 아닌 무지의 어둠이다. 빛이 올 때 인간은 그들의 죄에 대한 구실을 가지지 못한다. 변명할 수 없다. 악이 자연적인 경향성으로서 의지 가운데 있고, 이해성 안에 있는 진리로 간파되지 않고 판결 받지 않고 있는 한 그것은 단죄되지 않는다. 빛이 와서 악을 명백하게 만들어 주는 데에도 악을 계속 사랑하여 행하고 있는 사람은 죄를 짓고 단죄될 수밖에 없다.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나의 아버지 역시 미워한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아버지를 몰랐기 때문에 그분을 미워했다고 말하셨다. 지금은 그분을 미워하는 가운데 아버지도 미워한다고 말하시고 있다. 하느님을 사랑함을 지니지 않은 이들이 그분의 진리를 미워하듯, 하느님의 진리를 미워하는 이들은 그 진리를 밝히 알게 하는 그분의 사랑을 미워한다. 사랑과 진리는 하나이다. 사랑은 진리의 생명이고 진리는 사랑의 빛이다. 따라서 전자를 사랑할 수 있으면서 후자를 미워할 자는 없고, 전자를 미워하면서 후자를 사랑할 자도 없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는 그분의 뜻과 지혜이다. 하느님의 지혜를 미워하는데 하느님의 뜻을 사랑할 자는 없다. 그분의 지혜를 미워함도 없이 주님의 뜻을 미워할 자는 없다. 진리는 빛이다. 하느님을 사랑함을 미워함 없이 하느님의 빛을 미워할 자 역시 아무도 없다.

24. “만일 내가 어느 누구도 행한 적이 없는 일들을 그들 사이에서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죄를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나와 나의 아버지 둘 다를 보았고, 미워했다.” 지금 주님께서는 그분의 일에 관해, 마치 이전에 그분의 말씀들에 관련해 언급하셨던 것같이, 그분의 일을 보고서도 여전히 불신앙자로 남은 것이 유죄인 것같이 말하신다. 주님의 일은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지혜가 관계되는 것같이 그분의 말과도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은 의지가 바깥쪽으로 뻗어 나온 것이고 말은 생각이 뻣어나온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본성, 그분 자신의 무한한 사랑의 본성을 공개하시는 것에 관해 말하시고 있다. “내가 한 일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무시는 아버지가 하신 일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만일 내가 일찍이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들을 그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았다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하고 말하신다. 그분의 일은 다른 사람들의 일만큼 탁월하였고, 그분의 본성이 그들의 일 속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분이 하셨던 위대한 기적만큼 큰 기적을 행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일까지도 했었다. 그러나 주님의 일 안에 있는 위대함은 다른 사람의 어떤 일에도 없었다. 그분은 일을 그분의 이름으로 하셨고, 다른 사람들은 그분의 권능을 수단으로 기적을 행했다. 물론 기적을 목격한 이들에게는 그런 차이점을 갖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그분의 말씀들 같이 권능과 함께 존재했다. 그래서 그분의 바깥쪽, 눈에 보일 수 있는 일들은 여느 사람들의 것같지 않게 유한한 모든 권능과 대행인을 초월하는 가시적인 일들과 내향의 일을 동반했다. 구속함과 신성화 하심의 주님의 일은 병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산 자로 일으키시는 그분의 일과 동시에 있었다. 이런 일들은 더 위대한 일들을 동반하고 표현해주었다. 구속의 일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완전히 회복시켜주는 것이었다. 과거 자유의지는 어둠의 권세가 다소 우세함으로해서 부분적으로 파괴되어있었다. 그래서 이 상태는 선한 것을 선택하지 않고 악을 거절하지 않아도 변명 없이 인간을 방치했다. 인간이 완전한 자유의지를 소유할 때 선한 것을 선택 않고 악을 거절 않는 것은 죄이다. 그리고 인간이 예수의 말을 듣고 그분의 일을 보는데 회개 않고 믿지 않을 때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심정으로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이해성에서 하느님의 지혜를 거절하는 것이다.

25. “그러나 율법에 씌여 있는 말, 즉 그들은 원인 없이 나를 미워했다는 말이 성취될런지 모르는 때가 오고 있다.” 이 인용문은 시편 35편19절, 69편4절에 씌어있다. 그러나 인용 자체는 그것이 주님의 예언임을 우리로 확실히 해두게 하는 것뿐이다. 유대인들이 미워해대는 것을 주님에 관련해보는 한, 참으로 정당한 원인이 없었다. 그 원인은 그들 자신 안에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미워함의 모두는 거룩한 분에 대한 것이었다. 원인이 덜 정당할수록 미워함은 더 깊어진다. 유대인들은 위 예언이 그들이 감내해야 한다는 필연성 때문에 주님을 미워하지 않았다. 선견(fore sight)에 선-지명(fore-appointment)이 함축되고 있지 않는다. 개인적 차원인 우리 자신에 관련해 생각해 볼 때, 이것이 “그들의” 율법에 씌어 있다고 말하시는 그 속에 충만된 영향력을 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를 단죄하는 법은 우리들의 것이다. 신성한 법은 그 법이 우리에게 밝히 알려지고 그 법 안에서 훈육될 때까지 우리를 단죄하는 일이 없다. 우리가 모르는 법은 우리의 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법이 아니다. 법이 없는 곳에 법위반도 없다. 그러나 신성한 법이 우리의 법이 되었을 때, 우리가 주님을 미워한다면 그것에는 그러해야 할 까닭이 전혀 없다. 그 이유가 법은 하느님이 모든 순수함과 자비이시다고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존재의 품성을 미워하는데는 정당한 이유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유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이런 까닭 없는 미워함까지도 우리의 법에 씌어있다. 만일 우리가 이유도 없이 미워한다면 그것은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법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 법이 말하는바, 만일 우리가 악하다면 우리는 이런 까닭 없는 미워함을 흠모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의 심정 안에 있는 악 자체는 우리 자신의 불순함으로부터 어떤 이유도 없이 순수한 것을 미워만 할뿐이다.

26,27. 새롭고 더 희망 있는 어떤 것들의 상태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 “위안자가 와질 때, 그를 나는 아버지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이는 아버지로부터 진행하는 진리의 참 영과 다를 바 없는데, 그가 나에 관해서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 역시 증언할 것인데, 그 이유는 너희가 시작으로부터 나와 함께 있어왔기 때문이다.” 성령의 하강, 그것의 본성과 결과들이 오순절 때에 기적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처음부터 주님과 함께 있었던 이들의 증언은 세상에 위대하고 유익한 변화를 생산했다. 제자들이 “평화의 줄로 성령과 하나된 것을 간직함으로 하나의 몸과 하나의 영이었는 한 (에페소4:3-4), 예수의 원인은 번성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잘못들과 악에 대적하려고 하나 되어 노력하는 대신 그들은 교리의 요점들을 가지고 그들 사이에 분쟁이 오갔을 때, 기독교신앙의 힘은 교회 내에서, 세상에서도 기울고 말았다. 그래서 기독인의 마음을 나뉘게 해서 급기야 냉담한 두 개의 단체로 분리하게한 분쟁의 요점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즉 성령은 아버지로 진행되는 것이냐 또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이냐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개혁하지 않은 교회의 두 큰 종파 사이의 차이점이 되는 요지이기도 하다. 라틴 또는 로마-카톨릭교회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진행되어 나온다는 견해를, 그리스교회는 아버지로부터서만 진행된다는 견해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두 인물(person)이라고 간주하는 한, 위 논쟁의 의문을 정착시키는데는 곤란한 점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이 주님이라는 인물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을 뜻한다고 이해할 때 이 주제에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쉽게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영(the Spirit)이 아버지로부터 직접 진행되고 아들을 통하지 않는 견지는 이런 견해와 똑같다. 즉 인간의 말과 행동은 그의 영혼으로부터 진행될 뿐 그의 육체를 통하여 나오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본문의 주님의 언어는 특별한 시선을 받을 만하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진행되는 것으로 하느님의 영을 말하시나 그분이 그것을 보낼 것이라고도 말하시고 있다. 아들이 성령을 보낸다고 말해질 때, 그럼에도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진행된다고 말해질 때, 이 사항이 우리를 가르치는 바, 하느님의 영이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진행되는 한편,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인성을 수단으로 구원과 거듭남이라는 하느님의 영의 사명에 보내지고 있는 것, 주님의 인성은 주님이 육안에서 명백히 보인 덕택으로 소유하게된 구원의 모든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신성과 인성이라고 부르든지, 신성한 사랑과 지혜라고 부르든지, 우리가 알게 되는바는 아버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는 근원지(from) 측면에서의 주님 안에 있는 원리이고, 아들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는 수단(by) 측면에서의 원리이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하느님의 영을 보내지 않고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하느님의 영을 보낸다. 주님의 인성은 무한하고 영원하게 활동하고, 이 신성한 영을 내보내고 있으며, 특히 그분의 인성이 지니는 모든 효능을 그 영에 부여하고 있어, 인간을 구세주처럼 만들기 위해, 즉 그분이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듯 인간도 거룩해지게 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의 신성한 인성 안에 있는 그분의 영이 계시 속의 진리들의 협동함을 수단으로 그분의 영의 작업이 후원 받을 때, 인간 마음, 만일 그 마음이 하고 싶을 경우, 주님의 영에 의해 새로워지는 것을 위해 설비된 모든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주제를 우리 개인의 경험에 관련해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그 속에 있는 실용적인 진리를 볼 수 있기도 하다. 주님께서 부패된 우리의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어둠의 권능을 복종시키고, 우리의 영적 마음으로 신성화되어 승강하셔서, 지금 천국적인 질서의 상태로 가져다 놓였을 때, 그 다음 그분의 영은 오순절 때같이 풍부하게 내려오시어 우리가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획득했던 선과 진리들을 채운다. 마치 과거 그 영이 사도들을 가득 채워서 그들이 새 혀로 말하게 하는 것과 같다. 하느님의 영의 증언과 말씀의 증거가 주님의 구속함과 구원하심 안에서 공표되어 하나가 될 때, 그것들은 세상에서 한번 결과 되었던 것같이, 뿐만 아이라 그것들이 우리의 심정과 마음 안에서 역사 되었던 것같이, 그분은 우리 안에서 영광되시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완전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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