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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대 성 풍속 | 재미로보는 독특한 성풍습 몰아보기. 고려시대, 신라시대, 이누이트족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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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무새의 초상> 파천황(破天荒)의 성 풍속 – 엠디저널

“화랑세기” 필사본에 등장한 마복자(摩腹子)제도가 실제로 신라 시대에 존재한 성 풍속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마복자란 임신 중인 아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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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mdjournal.kr

Date Published: 4/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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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의 기절초풍할 섹스 풍속도 – 블로그

번역한 <화 랑세기>는 신라의 성풍속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등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가들이 담아낸 ‘진 한’ 성풍속도 10점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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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10/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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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성문화. 색공, 마복자 등 신라만의 독특하고 파격적인 …

신라시대에는 신라만의 독특한 성풍습이 있었는데요. 바로 색공이나 마복자 등 여러가지가 있었죠. 파격적이고 개방적이었던 신라시대의 성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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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atamguatam.tistory.com

Date Published: 8/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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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보는 독특한 성풍습 몰아보기. 고려시대, 신라 … – YouTube

고려시대, 신라시대, 이누이트족의 독특한 성문화에 대한 이야기 몰아보기 입니다재미있게 봐주세요구독과 좋아요, 알림설정은 큰 힘이 됩니다 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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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outube.com

Date Published: 4/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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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비사 – 신라시대의 분방한 성문화

이를 주장을 일삼은 어떤 고대사학자는 “파천황(破天荒)의 성풍속”이라 했다. 신라시대가 제아무리 성문화가 개방되었다고 해도, 이 정도일 수는 없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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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istorylibrary.net

Date Published: 12/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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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대 성 풍속 | 재미로보는 독특한 성풍습 몰아보기. 고려 …

“화랑세기” 필사본에 등장한 마복자(摩腹子)제도가 실제로 신라 시대에 존재한 성 풍속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마복자란 임신 중인 아내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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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ppa.covadoc.vn

Date Published: 4/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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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뒤흔든 12가지 연애 스캔들 – 예스24 블로그

이 두사람이 문란한 성 풍속과 근신혼이 담겨져 있는 내용을 책으로 썼을 … 안 사실은 지금보다 신라시대의 성문화가 훨씬 개방적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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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yes24.com

Date Published: 1/29/2021

View: 4605

신라의 성문화는 ‘여성상위’였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중국의 예속을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난다”면서 신라의 풍습을 평했다. 신라의 자유분방한 성풍속을 웅변하는 고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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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leekihwan.khan.kr

Date Published: 10/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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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3 신라 시대 성 풍속 Quick Answer

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신라인의 기절초풍할 섹스 풍속도 : 네이버 블로그 번역한 <화 랑세기>는 신라의 성풍속을 적나라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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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ewathai27.com

Date Published: 1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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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신라 시대 성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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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신라 시대 성 풍속

  • Author: 사건탐구 과거탐구 S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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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ikes: 좋아요 7,939개
  • Date Published: 2022. 3.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_apH-zHERr8

<들무새의 초상> 파천황(破天荒)의 성 풍속

[엠디저널]‘파천황’이란 요샛말로 ‘엽기’에 해당하며 ‘세상에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파천황의 성 풍속이란 것도 우리의 잣대에 집착한 것일 뿐 기준을 바꾸어 설정하면 자연스럽게 용융된 관습일 수 있고 더구나 문화적 기준이라는 것도 시대와 종교, 종족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출신인 대만의 전업 작가 왕일가(王溢嘉)는 “성(性)과 문명(文明)”이라는 저서에서 인류 문명의 발달을 종족 보존과 쾌락이라는 두 가지 성적 측면에서 탐구하고 욕망의 그늘과 문명의 잔혹함을 서술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 제18 왕조 아메노피스 4세는 파라오를 자처했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그의 친 어머니 ‘티티’였고, 두 번째 아내는 사촌 누이 ‘네프리티티’ 그리고 다섯 번째 아내는 친딸이었다. 근친혼은 고대 잉카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은 동복의 여동생이나 누나를 아래로 맞이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등장한 마복자(摩腹子)제도가 실제로 신라 시대에 존재한 성 풍속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마복자란 임신 중인 아내를 상관이나 왕에게 바쳐 낳은 아들을 말한다. 그러나 제도가 파천황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있다. 신라는 근친혼이 용인된 사회로 당시 남자들은 이모, 고모, 사촌과 결혼했다. 하지만 모친을 범한 흉노를 비판한 삼국사기의 한 대목을 주목한다면 근친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나 친 자매만은 예외였다는 사실(史實)이 설득력을 지닌다.

남태평양 멜라네시아 트로브리앤드 섬 원주민들은 결혼 전에 부모 면전에서 거리낌없이 섹스를 하고 뉴기니아의 매린드아님(Marind Anim)족은 동성애와 여성 윤간이 제도화되어 있다. 또한 출산이나 결혼, 가족이나 부족 동맹과 같은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한 여성이 여러 파트너와 섹스를 한다. 인도 남쪽 말라바 해안의 나야라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한 여자가 여러 남편을 거느리는 이른바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사회이며, 네팔도 일처다부제이긴 하나 한 여자가 시댁 형제들을 모두 남편으로 거느린다는 점이 다르다. 강력한 그리스 군대의 힘도 사회적으로 인정된 동성애에서 비롯되었다.

일본 군마현에서는 매년 1월 14일 밤에 도조신제라는 풍작을 기원하는 행사 때 농가 부부가 공물을 바친 화로 주변을 나체로 돌면서 성교 의식을 거행했다. 남편이 남근을 흔들면서 노래하면 아내는 자신의 성기를 손으로 때리며 남편을 따라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화로 뒤에서 실제로 성 행위를 했다. 이런 풍습은 1920년대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남미 과테말라 원주민들은 예식으로 난교를 한다. 술에 취한 남성들은 딸이나 여동생, 어머니, 첩을 가리지 않고 무분별한 성적 교합을 가진다. 고대 페루에서는 매년 12월 연회를 개최한다. 연회 개시 5일전부터 소금 섭취와 성교를 금지하다 연회 날이 되면 남녀가 함께 나체로 모여 먼 언덕까지 달리기 경주를 했다. 경주 도중 여성을 따라 잡은 남성이 즉석에서 그녀와 성적 교류를 감행했다. 도교주의자들은 정액의 생동적 에너지를 살리기 위해 10회 성교에서 2~3차례만 사정하라고 가르친다. 호흡 운동이나 명상을 동원하여 사정 욕구를 극복하면서 장시간 성교를 지속하는 카레짜(Karezza)를 권장하고 있다.

이디오피아의 신혼부부는 두 명의 증인 앞에서 성교를 치루며 처녀막 파열 여부를 확인한다. 증인들이 신부의 양 발을 잡아 주면 신랑이 서둘러 성교를 한다.

인도의 한 지역에서는 친정어머니가 출가할 딸의 처녀막을 미리 터뜨리기 위해 남근 모양의 물건 위에 쪼그려 앉도록 했다. 신부가 흘린 첫날밤의 피는 맹독성으로 신랑을 죽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돈 있는 집안의 딸은 처녀막 파열을 위해 덕망이 높은 사제(司祭)나 전혀 면식이 없는 외부 손님과 첫날밤을 지내게 했다. 13세기 캄보디아 승려들은 친찬(Tchin-Chan)이라는 의식에서 돈을 받고 곧 혼인할 처녀의 처녀막을 파열시키는 보시를 했다. 호주의 피크강변의 아룬타(Arunta)부족의 성인 남자들은 젖가슴이 부풀고 음모가 나기 시작한 여자 아이의 팔다리를 붙잡고 질을 크게 벌리는 의식(Vulva Cutting Ceremony)를 열어 식전에 참석한 모든 남성과 성교를 해야 했다. 그녀와 약혼한 남자는 의식에 참여할 수 없고 의례가 끝나면 그녀를 약혼자에게 데려가 혼인식을 거행했다.

2세기경 인도의 마누 법전에는 미망인의 재혼을 금지했다. 힌두교에서는 젊은 미망인을 위험한 존재로 여겨 남편이 죽으면 아내를 화형시크는 써티(Sutee, Sati)라는 풍습이 있었다. 이 풍습은 영국이 지배하던 1829년 폐지되었다.

기원전 18세기경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에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일생에 걸쳐 한번은 미리타 신전에서 성직자나 참배객에게 몸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전 참배를 위해 들른 낯선 남자가 은전을 무릎에 던져 동침할 의사를 밝히면 밖으로 나가 함께 자야 했다. 그래야만 신전에 대한 봉사의 의무가 없어지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신전 여자는 남성을 선택할 권리가 없고, 던져진 은전은 신전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은전을 받지 못하면 받을 때까지 신전에 머물러야 했다.

포나프(Ponape)섬의 여인들은 성적 관심을 유발하기 위해 그들의 성기를 보여준다. 음순이 클수록 성적으로 더 매력적이라고 여겨 남성들에게 음순을 물어 당겨주도록 요구했다.

동아프리카 케냐의 고원지대 키유크족은 성인이 되기 위해서 강간을 해야 한다. 강간하지 못한 남자는 용사가 아니며 키유크족의 여성과 결혼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은 성년 의식을 치르기 위해 떼 지어 강간할 대상을 찾아 이웃 종족의 마을을 급습하기도 한다.

정정만(성칼럼니스트) [email protected]

<저작권자 © 엠디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신라인의 기절초풍할 섹스 풍속도

신라인의 기절초풍할 섹스 풍속도 아름다운성 https://blog.naver.com/mansank/120136769092 책마을]〈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

-신라인의 기절초풍할 섹스 풍속도-

신라, 알고보니 엽색(獵色)왕국? 박창화가 일본 궁내성 도서관에서 필사하고,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교수(55, 한국고대사)가

번역한 <화 랑세기>는 신라의 성풍속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신라의 문장가 김대문이 7세기 말 편찬한 화랑에 관한 전기 로 원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책은 신라인들의

에로세계를 파격 적으로 보여준다. 왕에게 섹스 서비스, 즉 생공(生供)을 하는 여인집 단이 있었다는 것도 하나의 예다.

사다함의 애인이었던 미실이란 여 인은 진흥, 진지, 진평 3대 황제를 섹스로 섬긴다. 이 여자들은 진골 정통(眞骨正統)이거나

대원신통(大元神通) 출신이었다.

하지만 주류 고대사적 시각을 대표하는 서울대 국사학과 노태돈 교 수는 이를 정사(正史)로 수용할 수 없다고 진작 의문을

던졌다. 진위 논쟁의 계기를 마련한, 1989년 발견된 <화랑세기> 발췌본과 95년 나 온 필사본을 두고 노 교수는 위작이라

주장했고 역자인 서강대 이종 욱 교수는 진본이라 맞섰다. 문제의 필사본은 1989년 부산에서 발견 된 32쪽짜리 발췌 필사본과

1995년 공개된 162쪽짜리 필사본 두 가 지가 있다.

물론 <화랑세기>에는 이런 성 풍속도만 있는 것은 아니다. 540∼681 년 화랑의 우두머리였던 풍월주 32명에 대한 전기를

담고 있다. 성 풍속도는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의 계보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자 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일 뿐이다. 하지만

사학계의 대다수 학자는 그 토록 성적으로 타락한 나라가 어떻게 천 년을 지탱할 수 있는가 하 는 물음을 던지면서

<화랑세기>를 위작이라고 주장, 사료로 인정하 지 않고 있다. 반대로 이 교수를 비롯한 일부에서는 조선의 유교적 가치관

즉 그런 윤리적인 이유로만 <화랑세기>를 위작으로 본다면, 당연히 패륜을 일삼는 <고려사>의 기록도 위작으로

보아야 한다고 반박해왔다.

<화랑세기> 때문에 학계의 이단아 취급을 받아온 이종욱 교수가 < 화랑세기> 필사본을 바탕으로 신라인의

섹스풍속을 재구성한 <화랑 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김영사)를 내놓았다. 화랑들과 그 주변의 기절초풍할만한

섹스행각이 주내용이다. 이 교수의 역사관은 20세기 초부터 화장실, 목욕, 섹스 등의 일상사로 역사지평을 넓힌 프랑스

아날학파의 역사관과 비슷하다.

우선 ‘마복자(摩腹子)’라고 불리는 흥미로운 인간들이 있다. 마(摩) 는 문지르다는 뜻으로, 마복자는 배를 맞춘 아들 정도로

해석된다. 신하나 부하가 임신한 자기 아내를 왕이나 상관에게 바쳐 난 아들이 다. 1세 풍월주였던 위화랑 조에서부터 이런

이들은 부지기수였다. 신라 법흥왕의 신하 비량공은 왕비를 사모했다. 왕은 왕비와 신하의 만남을 막지 않았다. 신하와 왕비 두

남녀는 왕비의 뒷간에서 정사를 즐겼고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또 아들을 낳으니 그가 신라의 대 표적 화랑인 사다함이었다.

신라 사람 미생은 색을 탐해 돌아다니다 당두의 집에 찾아가 그의 처와 관계하곤 당두의 처를 첩으로 삼고자 집으로 불렀다.

그러자 미생의 누나 미실이 이를 알고 미생을 나무랐 고 미생은 여인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 여자가 미생을 잊지 못해 스스로

미생을 찾아왔다. 여인은 미생의 아들 셋을 낳았고 이들을 당 두의 아들로 삼으니,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아름답다 하였다.

그런데 요즘 식 가치관으로 본다면 도대체 무엇이 아름답다는 말인 가. 이에 대해 저자는 “삼국시대에 ‘성’(性)은

다산(多産)을 기원 하는 신앙과 숭배의 대상이었고 신라인의 경우 이같은 성 관념이 일 상생활과 관습에까지 투영되었다”며

“신라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화랑세기>의 성 풍속도가 현재의 관점에서는

문란하기 그지 없지만 인류학적으로 보자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신라는 처첩을 분명히 구분한 일부일처 사회였으 며 신분차별은 극심했다고 지적한다. 지금까지 놀이와

유희의 공간으 로만 알려졌던 포석정은 문노를 비롯한 나라의 중요인물의 화상이 있었고 길례를 행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었다는 주장도 이채롭 다.

화랑도 사이에서는 뇌물도 오간다. 세종은 아내인 미실을 기쁘게 하 려고 처남인 미생공을 전방화랑으로 삼으려 했으나 문노가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미실이 낭도들에게 뇌물을 주어 미생공의 지위를 높혀주자 이해에 밝은

자들이 많이 따랐다.

아직까지 학계는 이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 화랑세기>가 진작(眞作)이라면 우리의 고대사는

180도 달리 씌어져 야 한다.

남성학 강의] 춘화(春畵)는 조상의 성문화 자료다

김재영〈신세기비뇨기과 원장〉

얼마 전 모 여성지가 별책 부록에 조선시대의 춘화를 원본 그대로 게재했다. ‘에로틱 스타일, 에로틱 섹스’ 라는 제목이 달린

이 부 록엔 김홍도, 신윤복 등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가들이 담아낸 ‘진 한’ 성풍속도 10점이 실렸다. 여기에 현대미술계의

거장 피카소가 그린 춘화까지 최근 선보여 그 어느 때보다 춘화에 대한 관심이 고 조되고 이에 따른 논쟁이 일고 있다.

여성지에 게재된 춘화들은 모자이크 처리 없이 남녀의 은밀한 부위 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고 성행위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작품이 대 부분이다. 심지어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 남녀 두 쌍이 각각 그룹 섹스를 벌이는 그림까지 있다.

우리나라에서 춘화의 역사가 시작된 건 조선시대다. 조선시대 관리나 역관들이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오면서 몰래 갖고 들어온

것이 춘화 의 주된 유통경로다. 당시 북경의 책방에서는 우리나라 사신들이 책 을 고르는 척하면서 미적미적 시간을 때우면

은밀히 소맷자락을 끌 어당겨 깊숙이 보관하고 있던 춘화를 내밀었다고 한다. 밀수된 춘화 는 사대부를 포함한 양반사회에 빠른

속도로 널리 퍼졌고, 그 영향으 로 화가들이 춘화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춘화는 흔히 포르노그라피로 치부된다. 그러나 인물화나 풍경화와 마 찬가지로 옛사람들의 문화나 질병까지도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얼굴에 담긴 반점이나 낯빛으로 춘화의 모델들이 어떤 질병에 걸렸 는지를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춘화를 단순히 포로노물이라고 죄악시하고 단죄하기보다는 옛 조상들의 성문화를 엿보는 역사자료로 여기는 발상의

전환도 한 번쯤 시도해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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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성문화. 색공, 마복자 등 신라만의 독특하고 파격적인 성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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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에는 신라만의 독특한 성풍습이 있었는데요.

바로 색공이나 마복자 등 여러가지가 있었죠.

파격적이고 개방적이었던 신라시대의 성문화 이야기 입니다.

고대로 가면 갈수록 성에 대해서는 관대 했던것 같은데요.

예전에 소개해드린 고대 로마 성문화나 고대 그리스 성문화만 보더라도 상당히 개방되있었고 성을 음란한 무언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드렸던것 같습니다.

오늘은 신라시대의 개방되어있고 관대한 성문화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신라시대때 왕족이나 귀족들의 성생활은 굉장히 자유분방했다고 하죠.

신라의 고분(古墳)에서 출토된 성행위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해놓은 토우들이나 목재로 만든 거시기등을 보면 신라인들의 개방된 성생활을 느낄수 있습니다.

신라시대에는 남녀가 서로 눈맞아 성관계를 맺는건 정말 허다한 일이었고 동성동본은 기본에 조카와 결혼하는 경우나 고모나, 이모, 사촌 관계에도 결혼했을 정도로 근친결혼은 흔했죠.

신라 왕족인 성골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근친혼은 너무나도 활발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풍월주 ‘양도’공은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달랐던 누나인 ‘보량’과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양도는 이부형제와 결혼하는 풍습을 썩 내켜하지는 않았었죠.

그러자 양도의 어머니는 “신라에는 신라의 도가 있는데, 어찌 중국의 도를 따르려 하느냐?” 라며 그를 꾸짖었고 그렇게 양도와 보량은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중국의 유교적인 가치관이 신라에 들어오고 있었는데 양도의 어머니가 한 말은, 중국에는 중국것이 있고 우리 신라에는 우리만의 가치관이 있다라는 뜻이었죠.

그리고 만약 형이 죽으면 형수였던 여인을 동생이 아내로 삼았던 형사취수(兄死娶嫂) 사례도 있었는데요.

이는 북방의 기마민족이었던 흉노족의 풍습이랑 비슷하죠.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는 김용수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동생보다 먼저 사망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죽기전에 동생인 김용춘에게 아내였던 천명공주와 아들 김춘추를 맡겼다고 하죠.

동생 김용춘은 형수였던 천명공주를 아내로 삼고 조카였던 김춘추는 아들로 삼았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삼국유사에는 문무왕시절 지방 관리가 찾아온 손님에게 아내를 동침하도록 바치는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신라의 독특한 성풍습 중 하나는 바로 ‘마복자’라는 풍습인데요.

배를 문지르면 아버지가 된다는 의미로 마는 문지르다 또는 부비다의 의미였고 복은 배를 뜻했죠.

바로 배를 문지르면 아버지가 된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이 풍습은 임신을 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하면 그 남자가 임신한 아기의 아버지가 된다는 독특한 풍습이었죠.

신분이 낮은 사람의 아내가 임신을 하면 신분이 높은 사람과 아내가 성관계를 하도록 했고 그렇게 뱃속에 태아는 신분이 높은사람의 자식이 되어 태어나서도 친자식 처럼 보살펴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출생한 아이를 ‘마복자’라고 불렀고 일종의 대부제도와 같다고 볼수 있죠.

마복자들은 그렇게 친아버지의 신분보다는 더 높은 지위를 얻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복자와 좀 다르지만 비슷하고 독특한 성풍습도 있었는데요.

바로 ‘색공’이라는 풍습이었죠.

신라인들은 성(性)을 색(色)이라 표현했었습니다.

색공은 색(성)으로 받들다라는 의미로 신라의 왕들에게 색(성)을 바치는 색공지신이라는 신하가 있었죠.

그들의 임무는 왕과 왕족들에게 자식을 낳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색공지신들은 색공의 대가로 신분을 상승시키기도 했죠.

그 유명한 미실 또한 색공지신 이었는데요.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이 세명의 왕에게 색을 바쳤던 여인이 바로 미실이었죠.

미실은 진흥왕에게 색공을 하여 왕궁에 살았었는데 진흥왕의 아들이던 동륜태자의 죽음에 관련되어 궁에서 쫓겨난적이 있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때 미실은 남편 세종과의 관계에서 아이를 임신했는데 미실과의 잠자리를 잊지못한 진흥왕이 그녀를 다시 궁으로 불렀고 임신한 미실과 잠자리를 가진 진흥왕은 미실의 복중 태아를 마복자로 삼았죠.

그렇게 훗날 진흥왕의 마복자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하종’으로 전군(殿君)의 지위에 봉해졌고 미실 또한 왕에게 색공을 해서 황후궁의 전주가 되었으며 그녀의 지위는 황후와 같았다고 합니다.

이 일화만 봐도 색공과 마복자가 다 들어가있는 재미있는 일화이죠.

색공에 대한 이야기는 또 있는데요.

미실에게는 미생이라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어느날 ‘당두’라는 남자의 아내가 예쁘다 하여

그 집으로 가서 그 아내를 불러 관계를 가졌죠.

이후 미생은 그 여자를 첩으로 삼으려고 집으로 들였는데 그 여자의 남편이었던 당두는 미생의 누나인 미실에게 찾아가 “아이가 아침저녁으로 어미만 찾고 있습니다. 색공만 하는 첩이 되게 해주십시오” 라며 하소연하자, 미실은 미생을 꾸짖고 그 여자를 당두에게 돌려보냈다고 하죠.

그리고나서 미생은 당두를 관직에 오르도록 도와주었고 그 은혜를 고맙게 여긴 당두는 색공을 하러 미생집에 가는 아내에게 미생에게 갖은 아양을 떨어서 사랑을 받아라고 했다고 합니다.

당두의 아내가 미생에게 색공을 바치자 당두가 관직에 나갈수 있었고 이후 재산도 많이 모았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 두 일화에서 나오는 미실은 신라 최고의 요부라고 일컬어지는데요.

미실의 남성편력은 가히 신라 최고의 요부라고 불릴만할 정도로 대단했었습니다.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의하면 신라의 왕 3명과 동륜태자 그리고 동생 미생공을 포함한 풍월주 4명까지 총 8명의 남자를 자신의 성 노리개로 삼았다고 하죠.

그만큼 미실의 미모는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전의 색공이던 옥진에게 방중술을 배웠다고 하고 또한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남자를 홀리는 춤과 노래까지 배웠다고 하죠.

덕분에 진흥왕은 미실과 한번 잠자리를 가진 후부터는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는 또 다른 성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신라 22대왕인 지증왕은 거시기의 크기가 약 45cm에 달했다고 합니다.

지증왕과 잠자리를 가졌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다 고통을 참지못해 혼절해버린 탓에 그는 밤마다 혼자 쓸쓸히 보냈다고 하죠.

그러다보니 그는 각지로 신하들을 보내 자신의 거시기를 감당해줄만한 여인을 찾았는데요.

한 신하가 어디를 지나가다가 독특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개 두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의 양끝을 물고 으르렁 대는것을 본것이죠.

그래서 신하는 길을 지나던 백성에게 저 똥을 싼사람이 누군지 물어봤고 백성은 묘랑부 상공의 딸이 싼똥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곧장 그 집을 찾아가 그 똥을 싼 상공의 딸을 봤는데 키가 7척 5촌 (약 225cm) 이나 되는 거구의 여인이었죠.

그렇게 궁으로 데려온 그 처녀는 과연 지증왕과 찰떡 궁합이었고 그녀는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35대왕이던 경덕왕의 거시기도 8치(24cm)나 됐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죠.

신라시대의 개방적이고 관대했던 성풍습은 이에 그치지 않습니다.

신라하면 생각나는 화랑은 귀족의 자제중에서도 용모가 빼어난 남자들만 모아 문무를 겸비하도록 수행을 시키던 곳인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 화랑 안에서는 워낙 잘생기고 예쁜 남자들만 모아놓다보니 동성애가 빈번했다고 하죠.

조선시대의 학자 이익은 자신이 쓴 성호사설에 화랑은 남색집단이라며 동성애 행위를 비판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또한 법흥왕은 사찰마다 공중목욕탕을 만들었었는데 이 목욕탕은 다 남녀혼탕이었다고 하죠.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는 화랑들의 대장이었던 풍월주 32명의 전기를 쓴 책인데요.

이 화랑세기에는 풍월주들의 전기도 기록되어 있었지만 더 흥미로운건 신라 왕족들과 귀족들의 성풍습도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었죠.

1980년 부산에서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된 이후 계속해서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학계의 쟁점이 되어왔습니다.

하지만 원본 화랑세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죠.

옛날 유럽에서도 왕가의 재산이나 권력유지를 위해서 근친혼을 즐겨했다고 하는데 신라시대 역시도 왕족의 유지를 위해 근친혼이 성행한걸 보면 과거에 생각이나 행동들은 어느나라든 다 비슷했던것 같네요.

색공이나 마복자같은 풍습은 신라만 가지고 있던 굉장히 독특하고 재미있는 성풍습 같기도 하죠.

근친상간, 색공, 마복자, 동성애, 남녀혼탕 등 굉장히 개방적인 성풍습을 가지고 있던 신라의 성문화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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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의 분방한 성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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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대한남성과학회 간행 기관지인 《

건강한 성 행복한 삶》 2017년 15권 1호(간행일 2017-07-21) ‘성칼럼 :

화랑세기 비사 – 신라시대의 분방한 성문화’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고문으로 아래서 원문 PDF를 제공한다. 내가 이곳에 전재하는 원고는 이 학회 제출본이라, 혹 최종 간행본의 그것과 차이가 있을 수도 있음을 밝혀둔다.

http://www.andrology.or.kr/pdf/2017_01/01.pdf

화랑세기 필사자 남당 박창화

화랑세기 비사 – 신라시대의 분방한 성문화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역사전문 언론인

“어머니와 아들이 간음한 흉노보단 낫다”

“아내를 얻을 때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음은 구별을 두터이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노(魯)나라 공작이 오(吳)에 장가들고, 진(晉)나라 후작이 성이 같은 네 첩을 취한 일을 진(陳)나라 사패(司敗)와 정(鄭)나라 자산(子産)이 매우 나무랐다. 신라의 경우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이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형제의 자식과 고종·이종 자매까지도 모두 들여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은 각기 그 풍속이 다르다 하나 중국의 예법으로 따진다면 이는 커다란 잘못이라고 하겠지만 흉노(匈奴)와 같은 데서 그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간음하는 짓이 이보다는 더욱 심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가 신라 제17대 왕으로 내물니사금(奈勿尼師今·재위 356~402)이 즉위한 사실을 적으면서 그에 붙인 편찬 총책임자 김부식의 역사 평론이다. 이를 풀어보면 결국 동성동본, 요즘 민법 기준으로 보면 근친상간을 비판하는 논조다. 그렇지만 김부식은 그것을 옹호하기도 한다. 중국의 예법으로 보면 비판받을 일이겠지만, 외국에서는 풍속이 다르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어머니와 아들이 간음하는 흉노보다 신라는 그래도 낫다고 말한다.

춘추전국시대 중국은 주 왕실을 중심으로 제후국들이 명목상 이 주 왕실을 종주국으로 받드는 모양새였지만, 실상 각기 다른 왕국을 경영했다. 주 왕실은 성이 희씨(姬氏)였고, 그 제후국 중 노(魯)나라와 오(吳)나라, 그리고 진(晉)나라 역시 같은 성씨였다. 중국 예법에 의하면 희씨인 노나라 공작이 같은 희씨인 오(吳)나라 왕실 여자를 취할 수 없고, 진(晉)나라 후작 역시 성씨가 같은 네 첩을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이런 동성간 결합을 단순히 성씨가 같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일 역시 심하기 짝이 없다. 애초 주 왕실의 천자가 형제나 자식들을 제후들로 분봉한 이래 이때는 이미 수백 년이나 경과한 뒤였다. 나아가 근친간 결혼이 광범위하게 허용된 신라는 그래도 흉노에 비해서는 낫다는 김부식의 언급도 교정할 대목이 적지 않다. 그가 말한 흉노 사회의 어머니와 아들간 간음은 실상은 생모를 아들이 아내로 맞이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죽으면서 그 후궁이나 첩을 그 아들이 거둔 일을 말한다. 실상 이런 일은 고려사회, 특히 그 왕실에서는 광범위하게 있었다.

그렇다면 하필 이 대목에서 김부식은 이런 말을 했을까? 그것은 내물왕을 둘러싼 계보 때문이다. 이에 의하면 내물왕은 할아버지가 구도(仇道) 갈문왕이며, 아버지는 각간(角干)을 역임한 말구(末仇)라는 사람이다. 어머니는 김씨로 휴례 부인(休禮夫人)이라는 사람이다. 왕비 역시 김씨인데 신라 제13대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라고 한다. 언뜻 이에서 별로 문제가 될 만한 소지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바로 내물왕의 왕비가 미추왕의 딸이라는 데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추니사금(味鄒尼師今)은 아버지가 김알지 후손인 구도다. 내물왕 할아버지라는 바로 구도 갈문왕을 말한다. 그러니 신라사에서는 김씨 첫 왕인 미추는 구도와는 형제다. 둘 중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떻든 내물왕은 할아버지 형제의 딸을 아내로 맞은 것이며, 이를 김부식은 비판한 것이다.

이른바 화랑세기 모본母本

화랑세기가 폭로한 “파천황의 성문화”

역사, 그 중에서도 현대와는 더욱 거리가 먼 고대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현재에 대한 상대화에서 무엇보다 의미를 찾는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지금의 도덕과 철학이 유사 이래 아득한 옛날부터 그리했다는 착각에 살곤 한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를 조금만 옮겨도 사정은 딴판이라, 예컨대 지금에는 패륜이라 해서 법적으로도 단죄될 일들이 그때는 당연한 것으로 통용되던 시대를 마주한다.

이와 관련해, 요즘 성문화를 개탄하는 목소리가 많은 줄로 알지만, 이것만 해도 무대를 신라시대, 혹은 고려시대, 혹은 더 내려 조선시대 초기만 해도 그 개탄하는 성문화에 견주어 훨씬 더 개방적인 시대였음을 알게 된다. 신라시대가 이러했음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근자에 새로이 공개된 화랑세기(花郞世紀)를 보면 더욱 그러한 모습을 엿보게 된다. 이 화랑세기는 삼국사기 김대문(金大問) 열전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 3년(704), 지금의 경기도지사 정도에 해당하는 한산주 도독(漢山州都督)을 역임한 그가 저술한 책 중 하나로 이름을 들이민다.

삼국사기에서는 그때까지 이 책이 전해진다 했지만, 후대에 망실된 것으로 간주됐다. 그러다가 1989년과 1995년 두 차례에 걸쳐 그것을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라는 사람이 필사했다는 두 종류 판본이 공개되기에 이르렀다.(그림1)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갑자기 출현했기에 그것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전재한 것인지, 아니면 박창화(그림2)라는 사람이 그 이름을 빌려 지어낸 역사소설인지를 두고 한국고대사학계에서는 논쟁이 치열하다. 필자는 다각도로 그것을 분석한 결과, 위서(僞書)일 수 없으며, 신라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지어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화랑세기는 필사본 공개 이전에는 제목만으로도 역대 화랑들의 전기물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실제 공개된 화랑세기를 보니, 화랑 중의 화랑, 우두머리 화랑인 풍월주(風月主)의 전기임이 드러났다. 세기(世紀)라 했으니, 역임 순서대로 풍월주들의 행적을 정리했을 것이니, 실제 모습을 드러낸 화랑세기는 초대 위화랑(魏花郞) 이래 마지막 신공(信功에 이르기까지 역대 풍월주 32명의 전기를 순차적으로 싣고 있었다.

역대 풍월주들을 보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겨우 한두 번 이름만 들이미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아예 존재가 처음 알려진 이도 있다. 그런가 하면 사다함(5세)이며 (김)유신(15세), (김)춘추(18세), (김)흠순(19세), (김)양도(22세)처럼 널리 알려진 인물도 풍월주를 역임한 것으로 드러난다. 훗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가 풍월주를 지냈다는 사실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김흠순은 김유신의 친동생으로서 형을 도와 신라의 삼국통일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런 내용을 담은 화랑세기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의 근거는 여러 가지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이 이에서 드러나는 ‘문란한 성풍속’이었다. 이를 주장을 일삼은 어떤 고대사학자는 “파천황(破天荒)의 성풍속”이라 했다. 신라시대가 제아무리 성문화가 개방되었다고 해도, 이 정도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랑세기가 폭로한 신라의 성문화는 어떠했기에 현대에 대한 상대화를 사명으로 내세워야 하는 역사학자들까지 경악케 했을까? 나아가 과연 그에 드러나는 신라 성문화는 과연 무분별하기만 한가?

화랑세기에 나타난 양도良圖 관련 계보도

아버지가 세 명인 풍월주 김양도

백제·고구려 멸망 뒤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직접 지배 야욕을 노골화하면서 당과 일전을 겨루기 시작한 무렵인 문무왕 재위 9년(669) 여름 5월, 신라는 각간 흠순(欽純)과 파진찬(波珍飡) 양도(良圖)를 사죄사절단으로 보낸다. 이 중 김유신 동생인 김흠순은 무사 귀국하지만, 김양도는 당나라 서울 장안의 옥에 갇혀 있다가 사망하고 만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장군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김양도의 죽음은 양국 외교관계를 최악의 국면으로 몰고 간다. 물러설 곳이 없는 신라는 마침내 칼을 빼들고 당과 격전에 나선다.

화랑세기를 보면 그가 제22세(世) 풍월주를 지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양도는 진평왕 32년(610), 아버지 모종(毛宗)과 어머니 양명(良明)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이미 총명함을 드러낸 그는 17세 풍월주를 지내는 염장(廉長)을 따라 화랑에 들어가 33살 때인 선덕왕 11년(642)에 풍월주에 취임해 4년을 일했다.

이에서 드러난 그의 계보에서 특이한 점은 아버지가 3명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생물학적 아버지는 모종(毛宗)이지만, 17세 풍월주 염장과 16세 풍월주 출신인 보종(寶宗)의 아들이기도 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그림3)

이에는 그 어머니 양명(良明)이 개입한다. 양명은 보명이라는 여인이 진평왕을 섬겨 낳은 딸로서 처음에는 보종과 결혼했다. 이런 상태에서 양명은 모종과 사통(私通)해 양도를 낳았다. 그래서 양도는 한동안 친아버지가 보종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친아버지인 모종을 숙공(淑公), 다시 말해, 아재비라 불렀다. 보종은 이런 양도를 양자의 일종인 사자(嗣子)로 삼았다. 그렇다면 염장과 양도의 관계는 어떠하기에 부자(父子) 관계가 성립할까?

염장은 보종이 16세 풍월주로 재임할 때는 그 넘버 2인 부제(副弟)로 있었고, 17세 풍월주를 이어받았다. 한데 양도의 어머니 양명은 모종에게서 양도를 낳기 전에는 염장과 사통해서 장명(長明)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따라서 장명은 양도에 대해 아버지는 다르고, 어머니는 같은 이른바 이부동모형(異夫同母兄)이었던 것이다. 염장과 양도 사이에 부자 관계는 양명 및 그 아들인 장명을 고리로 해서 생겨났다.

염장에게서는 장명을, 모종에게서는 양도를 각각 낳은 양명은 정식 남편인 보종에게서도 딸 하나를 두는데 보량(寶良)이 그 주인공이다. 보량은 양도보다 5살이 많은 누나였다. 요컨대 보량-장명-양도로 순서가 이어지는 자식들은 아버지는 각기 다르지만 어머니는 같은 이부동모(異夫同母) 형제자매였다. 이러한 복잡한 사통 관계는 그림으로 제시한다. 이를 보면 양도는 모종을 친아버지로 하고 보종과 염장에게는 일종의 양아들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모종과 보종, 염장은 여자들을 공유해 마치 스리섬(threesome) 비슷한 섹스를 하기도 하고, 또 서로에 대해서는 동성애 애인이기도 한 모습을 보인다.

한데 양도는 아내가 바로 누나 보량이었다.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는 같은 형제자매간 근친혼이다. 양도는 동기간 근친혼을 극히 싫어했다. 보종과 양명이 밀어붙이는 누나 보량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장면을 화랑세기 는 “공은 본디 동기간에 결합하는 풍습을 싫어해서 따르지 않으려 했다. (어머니인) 보량이 그 때문에 병이 생겼다”고 한다. 결국 부모의 설득에 못 이겨 누나와 결혼하게 된다. 그의 어머니는 이 결혼을 주선하면서 근친혼을 “신국(神國)의 도(道)”라고 했다.

화랑세기 관련 족도族圖인 소위 <상장돈장>

임산부를 바치는 사람들

화랑세기에 보이는 신라 성 풍속 중 압권은 이른바 마복자(摩腹子) 제도다. 화랑 집단에서 남편이 자기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상관에게 받치는 습속을 말한다. 이는 비단 화랑 집단에서만이 아니라 신라 사회 전반에 걸쳐 있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간다. 이 제도는 정리하면 이렇다.

임신한 아내를 상관에게 바친다. 이때 산 꿩을 예물로 장만해 가져간다. 그 아내를 상관이 거두어 며칠 혹은 몇 달 안에 총애를 얻으면 물러난다. 물러날 때 남편은 다시 재물을 가져가 상관에게 바친다. 이를 사함(謝函)이라 한다. 감사의 뜻을 담은 예물 박스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임신한 아내가 아들을 낳으면, 아내는 석 달 만에 다시 상관에게 들어간다. 이때는 양과 돼지를 예물로 바치니 이를 세함(洗函)이라 한다.

도대체 이런 일이 가능할까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일종의 양자 시스템이랑 비슷하다. 상관과 그의 아내를 바친 남편은 이를 통해 결속체를 이룩하며, 그에서 난 아들은 상관의 양자가 된다. 상관으로서는 부하와 부하의 아들, 그리고 부하의 아내까지 자기 사람으로 거느리게 되는 것이다.

신라 토우 장식 장경호長頸壺

아들을 낳고자, 남자 셋을 동시에 들인 선덕여왕

독특한 신분제 사회인 신라에서는 성골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누구나, 혹은 다수가 왕이 될 수 있으면, 그 사회는 그만큼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이에 신라는 성골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엄격히 제한했다. 하지만 이것이 제발을 묶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진평왕을 끝으로 남자로는 성골이 씨가 말라버린 것이다. 신라에 진평왕을 이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2명이 나란히 배출된 이유가 이에서 말미암는다. 이를 끝으로 김춘추가 즉위함으로써 성골왕 시대는 영원히 종말을 고하고, 마침내 진골이 왕위에 오르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아직 여자 성골이 남아있던 선덕여왕 시대, 신라는 이 성골 여왕에게서 성골 왕자를 얻고자 무지막지한 노력을 기울인다. 선덕은 즉위와 더불어 용춘이라는 남자를 지아비로 삼았다. 하지만 이에서도 왕자를 낳지 못하자, 신하들이 논의한 결과 흠반(欽飯)과 을제(乙祭)라는 두 남자를 더 왕의 잠자리에 들였다. 세 남자를 동시에(실제로는 차례로) 들여 왕자 생산을 돕도록 한 것이다. 이를 화랑세기에서는 삼서지제(三婿之制)라 했다.

하지만 이 실험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선덕여왕이 원천에서 불임이었거나, 지나치게 고령이 아니었나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선덕여왕을 신라 사람들이 성조황고(聖祖皇姑)라 불렀다 하는데, ‘조(祖)’나 ‘고(姑)’ 같은 단어로 보아 고령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해서 선덕왕 사후 왕위는 이제 남녀를 통틀어 오직 한 명 남은 성골인 선덕왕의 사촌동생 진덕(眞德)으로 넘어간다. 진덕 역시 아들을 두지 못했다.

아들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 여인에게 남자 3명을 시봉케 하는 이런 습속을 현재의 우리가 언뜻 동의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천 수 백년 전을 거슬러올라가는 신라시대에는 전연 다른 맥락이 된다. 현재의 윤리를 잣대 삼아 신라시대를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음 보위를 이을 왕자 생산의 절박함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라 앞서 본 대로 양도의 어머니처럼 한 여인이 세 지아비를 동시에 거느리거나, 임신한 아내를 상관에게 바치는 일은 무분별한 성 풍속이 아니라, 그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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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대 성 풍속 | 재미로보는 독특한 성풍습 몰아보기. 고려시대, 신라시대, 이누이트족 상위 296개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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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성문화는 ‘여성상위’였다.

“신라의 경우 같은 성씨는 물론 형제의 자식이나 고종·이종 자매까지 아내로 삼았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중국의 예속을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난다”면서 신라의 풍습을 평했다.

신라의 자유분방한 성풍속을 웅변하는 고고학·역사학 자료는 많다. 예컨대 보량이라는 여인은 제22대 풍월주(화랑도의 수장·재임 637~640)인 양도공을 사랑했다.

그러나 둘은 어버지는 다르지만 어머니(양명공주)가 같은 남매사이였다. 양도공이 남매간의 혼인을 ‘오랑캐의 풍습’이라며 꺼렸다. 그러자 어머니가 아들을 껴앉고 말했다.

“신국(神國·신라)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 어찌 중국의 예로 하겠느냐.”(<화랑세기>)

경주 미추 왕릉 지구 계림로 30호분에서 출토된 토우장식 장경호. 다양한 성풍속이 보인다.

신라의 자유로운 성풍습을 ‘신국의 도’라 한 것이다. 특히 성에 관한 한 여성 상위였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미실은 임금 3명(진흥·진지·진평)과 태자 1명(동륜), 풍월주 4명(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을 성의 노리개를 삼은 여인이었다.

정식 남편인 세종은 죽을 때까지 정절을 지켰고, 사다함은 지독한 상사병에 시달린다. 미실은 ‘남자를 녹이는’ 방사술을 배웠고, 진평왕에게는 ‘신국의 도(성교육)’를 가르쳤다.

<삼국유사> ‘김현감조’는 “탑돌이 하던 김현이 여자와 눈을 맞춘 후 구석진 곳에서 통정했다”고 기록했다. “다리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이냐”고 한 처용가와,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고 한 서동요 역시 당대의 성풍속도를 웅변해준다. ‘돌기 달린 목제 남근’(안압지)과 ‘성 묘사 토우들’(미추왕릉·계림로 30호 고분군 등)도 ‘남녀상열지사’의 유물들이다. 엉덩이를 치켜든 여인, 그리고 과장된 남근을 들이미는 남자, 그리고 그 남성을 돌아보며 희죽 웃는 여인….

경주 황남동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남녀 인골. 30대 귀족여성과 20대 남성의 인골이 포개진채 확인됐다.

최근 경주 황남동 적석목곽분(5세기)에서 30대 귀족여성과 20대 남성의 인골이 완전히 포개진채로 발견됐다. 금은 장신구·말갖춤새 등을 갖춘 여성과 달리 남성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몸종 혹은 마부였을까. 그러나 여성 주인공 바로 옆에 남성을 순장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저 남자는 저 지체높은 여성의 애인이었을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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