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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행전 4 장 | 사도행전 4장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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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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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제공 : CGNTV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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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

사도행전 4. … 제 4 장.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 앞에 서다.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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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5/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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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사도행전 4 · 14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 15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 16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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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1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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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 KLB –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됨 – Bible Gateway

4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말하고 있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왔다. 2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고 예수님의 경우를 들어 죽은 자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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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2/20/2021

View: 9907

사도행전 4장 1-37절 말씀 묵상 – 복음뉴스

사도행전 4:1-37 말씀 묵상’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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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ogeumnews.com

Date Published: 11/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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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장 주해와 강해 – Pensées

사도행전 4장 주해와 강해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이 제사장들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의회에 앞에서 변증 하게 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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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392766.tistory.com

Date Published: 1/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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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2(토) “사도행전 4:1-12” / 작성: 김지현

[찬송가] 91장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사도행전 4장은 앞선 3장의 치유 사건과 베드로의 설교와 연결되지만 그 대상이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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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0/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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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장 주석 – 다음카페

도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으며, 깊은 신앙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 하심아래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 보다 중요시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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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1/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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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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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사도 행전 4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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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4a3qZIIeH_A

사도행전 4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 앞에 서다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1)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ㄱ)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2)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2)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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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3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세나 되었더라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24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행전 4장 1-37절 말씀 묵상

사도행전 4:1-37 말씀 묵상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사도행전 4:18‭-‬20).

“Then they called them in again and commanded them not to speak or teach at all in the name of Jesus. But Peter and John replied, “Which is right in God’s eyes: to listen to you, or to him? You be the judges! As for us, we cannot help speaking about what we have seen and heard.”(Acts 4:18‭-‬20).

교회에 대한 최초의 박해는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에게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 전부터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던 사두개파 사람들과 패역한 제사장, 성전 관리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귀에 거슬리는 말이었던 것입니다(1-3).

이튿날 아침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었고, 가야바는 당시의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권위로 판결을 좌우하곤 했습니다. 또한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서 심문할 죄를 발견할 수가 없었으나 권위를 잃지 않기 위해 ‘무슨 권위와 뉘 이름으로 그런 혼란을 일으켰느냐’라고 물을 뿐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애를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비유했습니다(11). 집 모퉁이의 머릿돌은 승리하신 예수님, 곧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박해하여 복음 전파를 막으려 했으나 베드로는 오히려 이것을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8-12).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학문이 없고 평범한 사람들인 줄 알았다가 그들의 담대한 증거에 무척 놀랐습니다(13). 산헤드린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임은 물론 병 나은 사람까지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조용해졌습니다. 그러한 사실들이 공회원들을 당혹하게 했을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책잡을 것을 발견치 못했던 것입니다(14-17).

관원과 장로들은 사도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옳다고 말하였으며, 또 자신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답변했습니다(18-20).

박해받는 교회는 오직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이러한 성령 충만은 복음을 더욱 담대히 전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교회를 하나되게 하였습니다(24-31).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32). 성도는 모든 물건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나의 소유는 하나님이 나에게 위탁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주님은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를 증거하도록 담대함을 주었습니다(33).

주께서 주신 오늘!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낙심치 말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적용: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나누어 보세요.

사도행전 4장 주해와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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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장 주해와 강해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이 제사장들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의회에 앞에서 변증 하게 되고,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경고를 듣게 됩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풀려나 사도들은 교회 공동체로 합심하여 기도합니다. 믿는 무리들이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서로 물건을 통용합니다. 구브로의 바나바가 소개되면 4장이 마무리됩니다.

4장 구조

1-4절 사도들이 잡히다

5-12절 사도들의 변증

13-22절 사도들의 두 번째 변증

23-31절 풀려나 합심하여 기도하다

32-37절 하나 된 공동체

4장 주해와 강해

1-4절 사도들이 잡히다

4: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아직 성전에서 베드로가 설교합니다. 방금 전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을 베드로가 고쳤고, 사람들이 놀라워 베드로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베드로는 기회를 틈타 복음을 전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듣기 싫어하던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1절) 사도들을 붙잡아 옥에 가둡니다. 이들은 로마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들의 권력과 욕망을 채우는 자들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가장 유대적이어야 할 제사장 그룹인 사두개인들은 가장 교묘하게 반유대적이며 반민족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세족적인 존재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유물론적 사고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바리새파와 다르게 이들은 오히려 돈과 권력에 눈이 먼 자들이었습니다.

‘이르러’는 에페스테산(ἐπέστησαν)으로 ‘기습했다’ ‘들이닥쳤다는 뜻입니다. 이 관리들은 거룩한 곳의 관리를 맡은 자들입니다. 제사장들은 성전 제사를 관장하는 이들로 레위인들에서 최고의 서열에 속하는 제자장 그룹입니다. 성전 맡은 자는 경비대장으로 동일한 단어로 치안 판사나 관리를 말합니다. 이들은 친 로마적이라 예루살렘 안에서 불안한 정서나 분위기가 보이면 그것을 안정시키는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4: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이 사도들을 싫어한 이유는 두 자기입니다. 하나는 예수에 대해 가르친 것, 둘째는 예수의 부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은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두개인 그룹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뿐 아니라 유물론적 사고를 가진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은 가당치도 않는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신학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을 사도들이 행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발짝 하듯 사도들을 기습한 것입니다.

‘싫어하다’ διαπονούμενοι는 짜증 나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후에 등장하는 가르치다의 디다스케와 선포하다의 카탕켈레인에 대한 반응이다.

4: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사도들은 현행범으로 붙들립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 뭔가를 할 수 없어 곧바로 구류해 둡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문의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과 베드로의 설교가 단지 몇 분이 아니라 거의 6시간 넘게 흘러갔음을 말합니다.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누가는 사도들이 붙잡힘과 더불어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오천명의 남자들이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어린아이와 여성들까지 합하면 적어도 만 명을 넘어갈 것입니다. 위협과 위기의 순간이 계속되지만 공동체는 계속하여 성장합니다. 2장 47절에서 구원 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신다는 모호한 표현을 썼다면 4장에서는 남자의 수가 오천이라는 명확한 수치를 표시합니다.

5-12절 사도들의 변증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이튿날 유대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71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의회나 그의 비슷한 수준의 모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관리들, 장로들, 서기관들로 구성된 유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이들로 제사장들에게 학문적 조언을 하는 이들입니다. 서기관들은 일반적으로 바리새인들이 맡았습니다. 안나스는 이전 대제사장이며, 가야바는 현 대제사장입니다. 가야바는 빌라도 재임 시기에 재임합니다. 이들은 성전의 실질적인 권력자들입니다.

4: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들은 권위에 대해 물었습니다. 예전 주님께도 동일하게 권위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대답하지 않아 주님도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 21장 23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또 하나는 누구의 이름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권위와 존재 자체입니다. 권위와 이름은 동일한 맥락에서 봐야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 성전을 관리하고 있는 누가 사도들에게 가르칠 권한을 주었느냐는 협박이자 경고입니다. 베드로는 3장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습니다.(3:6) 이들은 알고 있었고, 어떤 면에서 그렇기에 그들을 가둔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시 묻는 이유는 공적으로 모든 가르침을 금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여 변증 하기 시작합니다. 누가는 성령 충만을 통해 예수의 영이 임했음을 강조합니다. 행 1:8에서 예수님은 승천하기 전 성령의 임함을 예언하고 그로 인해 온 세상에 ‘증언’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그 일을 행합니다. 베드로는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을 부릅니다. 관리는 공직 관료이고, 장로들은 권위적 측면에서 말하여 관리와 장로는 유대 지도자들을 총칭합니다.

4: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는 위기를 기회로 사용합니다. 질문을 받고 답을 주면서 지금이야 말로 예수를 선전할 기회로 생각합니다. 먼저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로 평가합니다. 이사야는 오래전 종말의 때에 저는 자가 사슴처럼 뛰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병자에게 행한 일은 종말론적 사건이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일임을 의도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사 35: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건강’을 뜻하는 ‘휘기에스’는 손상이 없는 신체적 건강을 뜻합니다.(BDGA) 이것을 율법적으로 흠이 없어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병자를 온전하게 한 사람이 누구냐? 바로 너희들이 십자가에서 못 박고 죽였지만 하나님이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 치유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통한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유대 지도자들의 재판은 자신들이 받아야 합니다.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건축자의 버린 돌은 시편 18:22를 인용한 것으로 메시아에 대한 거부를 암시합니다. 건축자는 유대지도자들일 수 있고, 하나님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맥상 유대 지도자들이 더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버린 돌의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3: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사람들은 버렸지만 하나님은 인정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 이름만이 사람을 구원할 것입니다. ‘다른 이름… 주신 일이 없다’ 즉 유일하다는 여호와께 사용하는 표현으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입니다. 이제 그 여호와의 구원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베드로는 선언하는 것입니다.

13-22절 사도들의 두 번째 변증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3절에서 두 가지 반응이 확연합니다. 하나는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이고, 다른 하나는 학문 없는 범인인데 말을 너무 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응할 말이 없어진 것입니다. 담대함의 파레시안은 사도행전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로 ‘거침없이 공개적으로 말하는 자유민의 특징'(존슨)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선처를 구하지 않고, 지도자들의 억압에 굴하지도 않았습니다.

학문 없는 범인은 말 그대로 학식 없는 사람을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또는 정식적인 학업 과정을 밟지 않은 일반 사람들입니다. 문맹율이 현저히 높았던 당시에서 범인은 일반 사람들을 말한다. 당시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글을 읽고 쓰고 공부했습니다. 심지 그는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였습니다. 이건 단지 예수의 제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아는 공식 공부가 아닌 예수를 따름으로 그에게 공부를 했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더 할 말을 잃게 만든 것은 베드로가 치유한 사람이 바로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명백한 증인이 앞에 있기에 지도자들은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러한 명백함 앞에서도 그들은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고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악입니다.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공회원들은 의논합니다. 표적이 나타났음이 분명하고, 부인할 수 없음에도 그들은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도록 사도들은 위협하기로 합니다. ‘유명한(그노스토스 γνωστός)은 ‘잘 알려지기 적합한’ ‘알려질 수 있는’의 의미로 특이하고 분명한 사건입니다. 너무나 명백함에도 그것을 강제적으로 억제하려는 지도자들은 완악 그 자체입니다. 그들은 모여서 부당하고 황당한 결정을 내립니다. 이 소문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사도들을 위협하여 막자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입 단속하고, 대중매체를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베드로는 명백하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와 협박에 순응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너희’와 ‘하나님’을 대척점에 두고 선택할 대상으로 설정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절대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관리들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놓아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놓아준 이유는 ‘백성들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은 백성들의 눈입니다.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할 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악도 죄도 짓는 악행자들입니다.

23-31절 풀려나 합심하여 기도하다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풀려난 사도들은 함께 모였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당한 일들을 교회에 말하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초대교회는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한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아픔과 사연을 공유합니다. 존슨은 동료라는 표현이 ‘초대교회가 얼마나 자신들을 서로 의지가 되는 친구들의 공동체로 보았는지 강조’한다고 말합니다.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기도의 대상은 대주재이며,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분입니다. 신약은 구약과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제 다윗의 시편인 시편 2편을 인용하여 세상의 관리들의 어리석을 지적 합니다. 그들은 서로 연합하고 마음을 모읍니다. 악을 위해서는 말이죠. 거짓과 연합하고, 악과 연대하는 세상의 관리들입니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위협을 감해 달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죠. 타협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입니다. 또한 치유의 기적과 표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 기적들은 ‘예수이 이름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손’은 의지와 능력을 말합니다.

32-37절 하나 된 공동체

이 부분은 초대교회가 어떠한 공동체를 이루었는가를 말해 줍니다. 그러나 이것이 초대교회의 전부는 아닙니다. 누가는 성령을 받은 후 그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믿은 자들이 한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였다는 말이며, 자신의 견해와 생각이 주님께로 맞추어졌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그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의 물건을 서로 통용합니다. 자기의 소유로만 생각하지 않은 것이죠. 하지만 다른 서신서를 보면 초대교회가 모두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변화는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들은 내부적으로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외부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행 1:8이 실현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루살렘 안에서만 증인입니다.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곧 그렇게 될 것입니다.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서로의 소유를 통용함으로 가난한 자가 없어졌습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바울은 후에 일반 교회는 연보를 통해 공평해진다고 역설합니다.

고후 8: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고후 8:14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 8:15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의 본 이름은 요셉입니다. 그는 레위족인데 특이하게 요셉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도 자신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갖다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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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2(토) “사도행전 4:1-12” / 작성: 김지현

[본문] 사도행전 4:1-12

[찬송가] 91장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사도행전 4장은 앞선 3장의 치유 사건과 베드로의 설교와 연결되지만 그 대상이 달라집니다. 3장이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였다면 4장은 제자들을 반대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기 위하여 습관적으로 성전에 올라가던 중,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을 고친 사건을 통해 모여든 사람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는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이들에 의한 핍박으로 연결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체포(1-4)] [(1-3)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유대인 지도자들은 사도들 즉, 베드로와 요한의 가르침이 못마땅하였습니다. 그들이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을 걷게 만든 기적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모습을 이제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이르러’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적대적인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베드로와 요한이 군중에게 설교하고 있던 것을 중단시키는 행동을 묘사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는 과정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관련되어 나타납니다. 먼저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들은 성전, 특히 제사에 관한 일과 유대인의 명절 예식 그리고 성전세 등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가진 유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로 ‘성전 맡은 자’입니다. 성전 맡은 자는 성전의 치안과 질서 유지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책임지고 있었으며, 성전 내에서 대제사장 다음가는 2인자에 해당하는 요직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를 체포한 것도 바로 이들이었습니다(눅 22:52-54). 마지막으로 ‘사두개인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의 관료 계층을 구성하는 제사장 문중에 속한 사람들로, 이들 중 대부분이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행동은 세 가지입니다. 먼저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칠 자격이 제사장들에게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선포한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다는 선언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부활의 선포가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는 단순히 예수님이 부활하셨음 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바로 하나님의 궁극적 회복역사의 시작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전자는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관련된 문제이고, 후자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제사장들이 십자가형을 통해 죽인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심각한 실책을 통렬히 질책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로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을 당장은 처치하지 못하고 옥에 잡아 가둡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았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사도행전의 기자 누가는 1절에서 의도적으로 종교 지도자들과,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있는 백성들을 분리합니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대적할 때, 백성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4절은 이야기의 흐름을 중단하고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믿는’으로 표현된 단어는 ‘사실이고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 그리고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을 맡기다, 믿다, 신뢰의 대상에 전적인 헌신과 함께 신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자가 많았는데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투옥된 것은 분명한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것을 증인으로서의 삶을 위한 또 하나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고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모여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합니다.

[공회 앞에 선 베드로와 요한(5-12)] [(5-7a)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세 부류의 사람들이 이 공회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먼저는 ‘관리들’입니다. 이들은 6절에 열거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대제사장 문중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대제사장의 문중은 그들의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힘을 합하면 공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로들’입니다. 원로 관료들로 제사장들과 부유한 일반인들로 구성된 엘리트 유대인 집단입니다. 마지막으로 ‘서기관들’은 율법 전문가들입니다. 공회는 칠십명의 구성원과 현재의 대제사장이 모였습니다. 부를 소유하고, 학식이 높고, 예루살렘에서 막강한 힘을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이제 제자들도 이 공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6절은 대제사장의 문중과 관련하여 네 명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안나스는 로마 총독에 의해 임명된 첫 번째 대제사장입니다. 그의 다섯 명의 아들 또한 후에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로 예수님과 사도들, 스데반을 심문할 때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안나스 이후 18년 동안이나 대제사장 직을 수행했을 만큼 로마 총독의 마음에 들었던 존재입니다. 안나스는 원로 대제사장으로, 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 예수님의 재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민족을 위하여 죽음의 형벌을 내린 자에게, 이제 다시 그 사람만큼이나 영향력 있을법한 존재들이 나타났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받으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발걸음을 눈으로 보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나도 따라가겠노라는 심정으로 공회 앞에 섰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7b)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할 때 들으셨던 말과 유사합니다.

[(누가복음 20:2)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님을 대적하고 심문하였던 그들이, 이제 동일하게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재판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 부당한 판결을 내렸고, 결국 주님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정의로움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똑같은 운명을 당해야 하는지, 자신들 역시 로마 정부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에 무능력하고 겁에 질려있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감히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8-10)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지금 심문이 진행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에게 도움을 준 ‘착한 일’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유익을 끼치는 행위는 감사의 대상이지 심문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공회의 엄중한 질문 앞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베드로는 공회가 심문할 때 표현했던 ‘누구의 이름으로’에 정확하게 맞추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을 일으킬 때 사용했던 표현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와도 동일한 표현입니다.

이와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동시에 언급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선언하며 당시 가장 부유하고, 지성적이었으며, 막강한 힘을 가진 이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이름의 놀라운 능력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사도들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그들이 친숙히 아는 구약의 본문을 상기시키는 이야기입니다.

[(시편 118: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지만 열방에게 버림받은 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있는 가운데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악한 포도원 소작인 비유의 결론으로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0:17-18)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이 비유를 통해서 고난 받으실 뿐 아니라 그 후 부활하여 이스라엘 집의 모퉁잇돌이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부활로 인해 실현되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 모두 이루어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들이 깨지고 가루가 되어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위기에 처해 있는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종교 다원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기독교를 향하여 편협하고, 배타적이고, 교만하다고 손가락질 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타협과 양보를 보이며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도 있는 것처럼 주장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가 두 가지 이상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진리는 교회가 정한 것이 아닌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가르침입니다. 교회가 인기를 위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다양성을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은 구원은 오직 한 길뿐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늘 반대에 부딪힐 가능성이 있습니다. 구원 얻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선언은 결국 더 많은 반대와 핍박을 불러옵니다. 예수님에 관해 더 이상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는 명령을 거부하자 사도들은 더 많이 체포되고 매질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증인 된 우리는, 눈물 흘리더라도 끝까지 그 길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손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단 하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힘과 능력으로 인하여 오늘도 승리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끝까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쁨을 얻는 주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코로나19를 비롯한 우리를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상황 가운데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늘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살아가게 하여 주옵시고, 세상을 향한 바른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은 누구의 이름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하였습니까?

3.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4. 유일한 구원의 길이시며, 힘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전하는 손이 되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김지현)

사도행전 4장 주석

사도행전 제 4장

=====4:1

사도들이… 말할 때에 – ‘말할 때에’로 번역된 헬라어 ‘랄룬톤'(*

)은 부사적 분사 용법의 형태로서 ‘그들이 아직도 말하고 있는데’라는 뜻이다. 따

라서 사도의 설교가 행해지고 있는 동안에 성전 가운데서 사태가 급변한 것을 소개하

고 있다. 한편 본절에서 누가는 뵨음 전파에 대한 최초의 반대 셰력이 누구였던가를

밝히고 있다.

제사장들 – ‘호이 히에레이스'(* )라고 표현된 그들은 산헤드린

에속한 권력자들로서 성전에서 모든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성직자들이었다. 이들은 이

날 오후 예배를 맡은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당시 종교 체제로

부터 아무런 합법적 권위도 받지 않은 자들이 성전에서 많은 군중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였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에 앞장섰으며, 복음에 대하여 언제나 적대자 노릇을 하였다(마 26:3, 4).

이때도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자 나타난 것이다. 당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

은 로마 정부와의 협력하에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쥐고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현상

유지에 급급하였고 그들의 기득권을 침해할 것같은 사람들이 나타나면 거침없이 대적

하였다.

성전 맡은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스트라테고스 투 히에루'(*

)는 문자적으로 ‘성전의 장'(Captain of the temple)이

란 뜻이며 성전 수비대(守備隊)의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어떤 학자는 성전 맡은 자는

안토니아 성에 주둔하는 로마 군대의 장교였다고 한다(Lightfoot). 그러나 역사가 요

세푸스에 의하면 제사장 가운데서 임명된 사두개파 출신이 맡고 있었다(5:24, 26)고

하며 어떤 학자는 성전수비대가 레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Lenski). 렌스키

의 견해를 따르면, 그 우두머리인 ‘성전 맡은 자’도 레위인이었을 것이고, 이는 율법

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은 사두개파

출신인 래위인들로 구성되었을 것이고, 로마 정부의 영향력을 크게 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성전 맡은 자'(수비대장)는 대제사장다음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

으며(Schuerer Bruce), 누가복음에서는 복수인 ‘스트라테고이(* )가

사용되었다(눅 22:4, 52).

사두개인들 – 하스몬 왕가의 후예들이었다. 하스몬 왕가의 사람들은 맛다디아와 유

다와 요나단및 시므온(B.C. 168-134)을 메시야 시대의 개척자들로 보아왔으며, 그 열

조들이 시작했던 바를 자신들이 이어가고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사두개파 사람들은

레위 지파 출신의 제사장들을 포함한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서 고대의 정통성

을 주장하였고,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하는 종교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세속적이고 현

세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에 대한 발전적인 견해나 천사

나 마귀에 대한 사색적(思索的)인 고찰 또는 부활 교회에 대한 것들은 반대했다(23:8;

막 12:18-27). 그리고 그들은 나라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신성한 간섭을 바라는 것

과 장차 오실 메시야를 기대하는것은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를 배척하였

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시대가 이미 마카비 시대의 영웅들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또한 그 시대는 자기들의 감독하에서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중이라고

그들은 믿고있었기 때문이다. 곧 사두개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란 하나의 이상(idea)

이었을 뿐이며 어떤인격적 존재 자체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정치적인 지도자들과

지배적인 지주들로서 마카비 통치 시대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인 권력을 이양받았던 자

들이었고, 또한 실세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와의 협

력과 현상 유지를 강조했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의 제사장들은 사두개인적인 관념을

갖고있었다. 따라서 성전을 지키는 경비력은 완전히 레위 지파 사람들이 담당하고 있

었다. 사두개파 사람들의 강세로 인해 대제사장이나 성전 수비대장은 언제나 고위 직

급의 사두개인이 맡고 었었다.

이르러 – ‘에페스테산'(* )로 표현된 이 말은 어떤 사태를 진압

하기 위하여 적의에 찬 마음을 가지고 급작스럽게 몰려왔다는 것을 뜻한다. 외견상으

로는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의 의도는 매우 종교적인 것이었고 악하였다(눅 20:1;24:4).

=====4:2

백성을 가르침과…싫어하여 – ‘싫어하여’에 해당하는 혤라어 ‘디아포누메노이'(*

)는 ‘심히 격노하고 크게 불안해 하였다’는 뜻이다. 종교

지도자들이 이러한 태도를 보인 이유는 (1) 사도들이 자기들의 교리와는 반대되는 혁

신적인 가르침을 공공연하게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위협적이었다. (1) 부활 교리를 전하

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했다고

했는데 이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한 역사적 사건 자체를 의미하

는 것이고,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예수'(* )는 ‘예수

안에서’, ‘예수에 의해서’, ‘예수를 기초로 하여’라는 뜻으로서 예수께서 그의잔에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로서 부활하셨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증거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과 예수를 계획적으로 죽인 제사장들에게 도전적이고 충격적인 선언이

아닐 수없었다.

=====4:3

저희를 잡으매 –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사회적으로 범죄

한 사람에 대해서는 형을 집행할 권리를 갖고있지 않았지만, 성전의 거룩함을 더럽히

는 등의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최고형까지 언도할 수 있었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 당시 랍비의 법에는 해가 지면 어떠한 심문이나 재판을 못

하게 되어있었다. 그런고로 의회가 모일 수 없었고 어떤 송사도 제기할 수 없었기 때

문에 재판에 회부(回附)하지 않고 감금시켜 놓은 것이다.

=====4:4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는

‘남자’의 헬라어 ‘안드론'(* , ‘남자들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의 문제이

다. 이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엄격히 말해서 여자와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그때 개심한 사람 가운데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한 남자의 수만

을 가리킨다(Mayer, Lenski, Robertson, Bruce, McGarvey). (2) 여자를 포함하여 개종

한 모든 사람의 수로 생각한다(Spence, Hekiett). 이 가운데 (1)의 견해가 더욱 타당

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남자'(* , 아네르)라는 표현은 ‘사람'(

* , 안드로포스)과는 달리 여자를 제외한 남자의 경우에만 한정되어

사용되기 때문이다(마 14:21). 둘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천명이 되었더라’는 숫자

에 대한 것인데, 그 견해들을 살펴보면 (1) 바로 그때 믿게 된 수효를 가리킨다

(Jerome). (2) 지금까지 믿게 된 예루살렘 신자들의 총수라 본다(Lenski, Joseph H.

Mayfield). 여기서 (2)의 견해를 택하는것이 더욱 자연스러운 것은 ‘되었더라’의 원어

‘에게네데'(* )가 부정 과거로서 단지 역사적인 사실만을 나타내기 때문

이다. 그리고 2:41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날 믿은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

했는데 거기서 ‘더하더라’를 가리키는 헬라어 ‘프로세테데산'(*

)은 미완료 동사로서 베드로의 설교 결과로서 일어나는 어떤 과정을 나타내준다. 따

라서 삼천 명의 군중이 반드시 한꺼번에 믿었다고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본절의

오천 명이란숫자도 2:41에 나타난 삼천 명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예루살롑 신자의 총수

라고 보는 견해가 더 자연스럽다(6:7;16:5). 아무튼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박해 속에서도 게속 확장(擴張)되어가는 복음의 능력이다.

=====4:5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모였는데 –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을 가리킨다

(23:14;막 14:53;눅 22:2). 산헤드린 공회는 그 당시 나라의 원로원이자 최고 법원으

로서 극형을 제외한 모든 사건에 대하여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관원(* , 아르콘타스) – 이 말은 종종 대제사장이란 용어와 동의어

로 쓰인다(23:5).

장로들(* , 프레스뷔테루스) – 장로들은 모세가 백성의 재

판 처리를 위해 ‘덕과 경험을 지닌 자’를 세운데서 시작된 족속의 우두머리들로서 이

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대표하여 의사 결정을 하던 집단이었다(출 3:16;4:29;민 11:16,

17).

서기관들(* , 그람마테이스) – 바리새인들로 구성된 율법 교사

들로서 율법과 구약성경을 해석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산헤드린 공회

에 대한 자세한 것은 4:5-22 주제 강해 ‘산헤드린 공회’를 참조하라.

=====4:6

대제사장 안나스 – 예수를 정죄하기 위한 재판 회부에 개입하였던 퇴임 원로이다.

A.D. 7-15년까지 9년 동안 대제사장직에 있었으나 그는 그 후에도 계속하여 큰 영향력

을 행사하였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배후(背後)에서 실제적인 세력을 행사했던 인물

로 나타난다(요 18:13-24).

가야바 – 안나스의 사위로서 A.D. 18-36년까지 18년 동안 대제사장직에 있었으며,

산헤드린 공의회 의장이었다. 따라서 대제사장의 실제적인 직무는 가야바에 의해 수행

되었다.

요한과 알렉산더 –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수가 없으나 서방 본문이 제시해

주는 바에 의하면, 요한은 기원후 36년에 가야바를 대신하여 대제사장직에 오른 안나

스의 아들 요나단이라고 추측된다.

대제사장의 문중 – 사두개인의 가문으로 초기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주동하였다.

대제사장의 가문이 여기에 언급된 것은 산헤드린공회에서 그들이 의사 결정권을 어느

정도 행사할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4: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의 재판 모습을 보여준다. 긴 옷을

입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들이 높은 단상 위에 반원형으로 둥그렇게 앉았고, 피고는 낮

은 마루 바닥위에 서서 심문을 받는 형태이다. 이것은 법정의 외적인 분위기로도 피고

를 압도(壓倒)하려는 것임을 보여준다.

너희가(* , 휘메이스) – 이말은 헬라어 문장에서는 맨 끝에 나온다. 그뜻

은 ‘너희 같은 백성'(people like you)으로서 무지하고 멸시받는 계층을 가리키는 경

멸조의 표현이다.

무슨 권세 – ‘어떤 종류의 능력이냐’는 뜻으로서 사도들이 어떤 마술적인 주문을

통한 악령의 힘을 사용하여 이적을 행한 것(신 13:1-4)이라는 저의를 그들이 갖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런 질문은 종교적으로 위법인 것을 암시하는 유도성을 가지

고 있다.

뉘 이름으로 – 어떤 사람의 권위를 배경으로 위법을 행하고 있는지 심문하고 있다.

산헤드린에 있어서 예수의 이름은 지독히 불경스러운 이름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자

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고, 이것은 신성 모독죄에 해당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이 질문은 사도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려는 계략이었다. 만일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이라고 한다면, 이단 사실을 퍼뜨리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대답을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범죄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사도들이

어떻게 대답하든지 정죄하려는 악한 속셈을 가지고 간교한 질문을 한 것이다. 이들이

문제삼은 것은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낫게된 사실이 아니라 사도들이 그 일을 행했던

방범과 수단이 무엇이었느냐는 점이었다. 그 일이 하나님 나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는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 일을 행한 방법과 수단을 가지고 시비하며 파헤치는 것은

시기심이 가득한 교권주의자들의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일찍이 예수께서도 대졔사장들

로부터 이와 유사한 질문을 받았으나 그들의 간계를 미리 아시고 지혜릅게 대처한 바

있었다(마 21:23-27). 본절에서도 대적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사도들을 처치할 구실

을 마련하기 위해 애매한 질문 공세를 폈다. 그러나 사도들은 심문당하는 자로서의

자세를 취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의 터무니없는 속섬을 은근히 책망함과 아울러(9

절) 이를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다(10-12 절).

=====4:8

성령이 충만하여 –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특별한 상황에서 주어진 것이다(마

10:9-20). ‘충만하여’를 가리키는 ‘플레스데이스'(* )는 특별한 순간

의 영감을 가리키는 부정과거 수동태의 용법이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 이것은 당시의 권세자들을 인정하며 존경과 예의를 갖추

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령 충만은 이처럼 지극히 정상적인 예의를 깨뜨리지 않고 위협

적인 재판정에서라도 담대한 증거를 시작하게 하였다. 이 양자를 다 갖추기란 하나님

의 영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4:9

착한 일에 대하여…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 그들의 지위에 합당한 경의를 표하

면서도 분명하고 단호하게 질문의 주지(主旨)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되묻는 베드로의

담대함을 본다. 여기서 ‘착한 일’로 번역된 혤라어 ‘유에르게시아'(*

)는 ‘친절하고 선한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서 이 표현 속에 사도가 행했던일에 대한

변호가 포함되어 있고, ‘착한 일에 대하여’ 심문하는 자들이 모순을 가지고 있음을 암

시한다.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너희 앞에 섰느니라 – 사도는 여기서 거부

할수 없는 엄연한 사실 다섯 가지를 증거한다. (1) 너희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중대한 사실을 선포할 때마다 자주 쓰는 권위있는 명령형이다. 그 대상을 분명히 지적

하고 있는데, 이는 증거하는 내용의 중대성과 사실성을 암시한다. (2) 너희가 십자가

에 못박은 예수. 사도는 여기서 ‘너희가’ 그런 일을 행한 죄인들이라고 지적하고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그들이 바로 죄인이라

는것이다. 산헤드린은 모든 흉한 책략으로 저질렀던 만행을 은닉하려고 하지만, 사도

는 그들의 면전에서 거침없이 폭로하며 힐책하고 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너회’가 죄인 취급하여 죽였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그

를 죽인 자들을 심판했다는 것이다. 이 증거야말로 부활을 믿지 않은 사두개인들의 큰

반발을 일으킬 만한 것이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공의회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

닐수 없다. 그러나 사도는 그들 앞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키셨다고 담대히 확신

에 차서 중거하였다. (4)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그

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케 된 것을 증거했다. 이것은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

로 이 일을 행했느냐'(7절)는 산헤드린의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다. 너희가 십자

가에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그예수께서 지금 살아계셔서 이 능력을 베푸셨

다는 것이니 저들의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만드는 선포가 아닐 수 없다. (5) 건강하

게 되어 너희앞에 섰느니라. 이상의 변론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다. ‘섰느니라’

의 헬라어 ‘파레스테켄'(* )은 현재 완료 능동태로서 ‘계속 서있

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사도들 옆에 서 있는 고침받은 자의 생생한 모습 때문에 저들

은 힐책할 수도 없고, 그 사실을 부인할 수도없게 되었다. 우리는 이상의 증언을 통해

사도의 증언에는 위대한 복음 진리의 핵심이 담겨 있음을본다(2:14-36;3:15, 16).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이것은 시 118:22의

인용으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이다. 전에 예수께서도 자신을 가리켜서 이 말

씀을 인용하셨다(마 21:42;막 12:10;눅 20:17). 즉 건축자들에게는 쓸데없다고 버림받

은 돌과 같이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멸시당하고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

사 자기 우편에 두시고, 권능과 영광을 홀로 차지하게 하셨으며 만민을 구원하는 기초

로 삼았으니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된 셈이다.

다른 이로서는…주신일이 없음이니라 – 사도는 이제 예수 외에 그 어떤 이름으로

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선포한다. 즉 산헤드린 공회원들 역시 예수에 의해서 구원

을 받지 않으면 구원 얻을 길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니 사도의 증거는 매우 혁신적이었

다. 이 구절은 불변의 진리로서 다음의 두 가지 교훈을 제시향다. (1) 예수 그리스도

만이 유일 무이한 구세주이시다는 사실이다. 예수 외에 사람의 죄를 대신해 줄 수 있

는 의롭고 거룩한 신인(神人)은 없다. 오직 예수만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셔서 살아계시는,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야이심을 사도는 친

히 목격하고 확신했던것이다. (2) 여기서 ‘구원’의 헬라어 ‘헤 소테리아'(*

)는 단순히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고친 것과 같은 육적 구원 뿐만 아니라 죄와

그 세력 그리고 죄의 형벌인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즉 메시야로 말미암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중에는 이 구원

을 받지 않아도 될 대상은 아무도 없다.

=====4:11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이것은 시 118:22의

인용으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이다. 전에 예수께서도 자신을 가리켜서 이 말

씀을 인용하셨다(마 21:42;막 12:10;눅 20:17). 즉 건축자들에게는 쓸데없다고 버림받

은 돌과 같이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멸시당하고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

사 자기 우편에 두시고, 권능과 영광을 홀로 차지하게 하셨으며 만민을 구원하는 기초

로 삼았으니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된 셈이다.

=====4:12

다른 이로서는…주신일이 없음이니라 – 사도는 이제 예수 외에 그 어떤 이름으로

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선포한다. 즉 산헤드린 공회원들 역시 예수에 의해서 구원

을 받지 않으면 구원 얻을 길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니 사도의 증거는 매우 혁신적이었

다. 이 구절은 불변의 진리로서 다음의 두 가지 교훈을 제시향다. (1) 예수 그리스도

만이 유일 무이한 구세주이시다는 사실이다. 예수 외에 사람의 죄를 대신해 줄 수 있

는 의롭고 거룩한 신인(神人)은 없다. 오직 예수만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셔서 살아계시는,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야이심을 사도는 친

히 목격하고 확신했던것이다. (2) 여기서 ‘구원’의 헬라어 ‘헤 소테리아'(*

)는 단순히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고친 것과 같은 육적 구원 뿐만 아니라 죄와

그 세력 그리고 죄의 형벌인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즉 메시야로 말미암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중에는 이 구원

을 받지 않아도 될 대상은 아무도 없다.

=====4:13

기탄없이 말함 – 헬라어로 이 말은 ‘모든’을 의미하는 ‘판'(* )과 ‘연설’을

뜻하는 ‘레시아'(* )의 합성어인 ‘파르레시안'(* )으로서

‘모두 남김없이 자유롭고 대담하게 말하였다’는 뜻이다. 사도는 그태도와 말에 있어서

확신에 차서 이처럼 기탄없이 예수를 증거하였다. 공회원들은, 죄인으로 서 있으면서

도 자신있게 변론하는 사도의 태도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학문 없는 범인 – 이는 랍비들의 학교에서 전문적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

키는 말로서,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평범한 사람을 의미향다.

=====4:14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 이 말은 그들이 사도의 증거에 대하여 반박할 만한 아무런

수단을 강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13절과 본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본래 학문 없는 범인이었던 사도들이 기탄없이 말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2) 예

수와 함께 있던 예수의 제자들임을 알았기 매문이다. (3) 무엇보다도 이전에 앉은뱅이

였던 자가사도가 말한 것들에 대한 산 증거로서 그들의 목전에 당당히 서 있었기 때문

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이 그들이 궁지에 몰려 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이다. 이는 일찍이 예수께서 하신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면박할 수

없는 구제와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5)는 약속이 성취된 것이며 주께서

살아 계셔서 복음을 전하는 그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여준다(마 28:18-20).

=====4:15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 ‘공회'(* , 쉬네드리온)는 그 재판과 심

문이 진행되었던 법정을 말한다. 공회원들은 사도의 변증에 대해 답변할 마땅한 고소

거리를 찾지 못하여 그들끼리 의논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을 밖으로 나가

도록 명하였다.

서로 의논하여 – 공회가 심문하려 했던 피고들이 대담하고 확신에 차서 자신들의

무죄를 변론하고 증거를 내세우자, 이제 피고를 회의실에서 내보낸 후 심의(審議)에

들어간 모습이다. ‘의논하여’에 해당하는 혤라어 ‘쉬네발론'(* )

은 미완료 과거 능동태이다. 따라서 공회원들이 주도적으로 회의를 따로 소집하여 계

속해서 의논을 거듭했음을 보여준다. 즉 배심원들의 논리와 결정을 거쳐 판결을 내리

는데 많은어려움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4:16

유명한 표적…우리도 부인해 수 없는지라 – 그들이 곤경에 처하게 된 이유를 말해

준다. ‘유명한 표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노스톤 세메이온'(*

)은 ‘알려진 표적’이란 뜻으로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고침받은 사건을 말한

다. 예루살롑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이 나타난 사실은 부인

할 수 없는 것이었다.

=====4:17

腔좋 증거가 있었으므로, 결국 법적으로 심문할 근거를 찾지 못한 그들이 택한 결정

은 사도들을 위협하여 더이상 아무에게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

었다. 그들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지 못한 것은 백성의 여른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권력의 자리에 앉은 자들은 민심의 동향에 민감하다. 예수께서 유일한 구주라는 것과

친히 살아 계심을 부인할 수 없도록 증거가 보여정고, 사도 베드로의 증언에 의해서

그런 예수를 죽인 죄가 그들에게 있음이 백일하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

정은 자기들의 교세만을 고수하고자 하는 부당한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그 양심이 마비되었는가를 시사해 준다.

=====4: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가르치지도 말라 –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뿐 아니라,

오직 자기들의 교권(敎權)을 유지하기에만 급급한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을

볼 수 있다.

=====4:19

하나님 앞에서…옳은가 판단하라 – 이스라엘의 최고 법정 산헤드린의 위협에 굴하

지않고 공회의 결정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사도들의 단호한 태도는 실로 대담한 도전이

다.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용기가 생긴 근거를 살펴보면, (1)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나온것이었다. 사도들은 앉은뱅이가 일으킴을 받는 표적을 통하여 부활

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직접 확인하였고,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

었기에 이처럼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믿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

하였다(히 11:38). (2) ‘하나님 앞에서'(* , 에노피온

투 데우)라는 사도들의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항상 하나님의 임재, 즉 하나님의 면전

에 서 있다는 신전 의식에서 나온것이었다.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확신하며 하나님 앞

에서 산다는 의식이 사도들에게 용기를 준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재해 계시는 앞에

서 과연 너희 말을 순종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옳은

지 판단해보라고 한 것이다. ‘퍼단하다’의 헬라어 ‘크리노'(* )는 ‘분석하고

분별해 보다’는 뜻이다. 사도들은 공회원들의 양심에 호소하며, 그들이 ‘의'(*

, 디카이온)를 떠나 불의하게 판결을 내리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4:20

우리는…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 타협할 수 없는 사도들의 확고 부동한 입장을

공회앞에 재천명하는 이 구절은 원어상으로 보면 두가지 강조 어법이 돋보인다. (1)

이중 부정으로 강력한 긍정을 표현하는 어법을 사용함으로 반드시 말해야 한다는 강력

한 의지를 표시했다. (2) 동사와 주어를 뒤바꾸어 쓰면서, 지시대명사인 ‘우리는'(*

, 헤메이스)을 사용하여 ‘우리’에 강조점을 두었다. 즉 목격자로서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이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살아나신 부활 사건을 의미향다. 이처럼 사도들은 인간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가 충돌할 때 자신들이 보고 듣고 확신하는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편을 택했다. 이것은 생명을 건 각오를 한 것이다.

=====4:21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다시 위협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 공회원들

은 의회의 결정이 피고인들로부터 공개적으로 거부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들은 속

수 무책이되자 고작 우격다짐식으로 협박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들이 ‘벌할 도리를 찾

지 못했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사도들을 징벌할 방도가 도무지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저들이 택한 것은 다시 위협하는 일뿐이었다. ‘다시 위협하였다'(*

, 프로사페일레오)는 것은 ‘더욱더 위협하였다’는 의미인데, 공회의 일차경

고가 무시되었기 때문에 재차 가중한 위협을하였음을 의미한다. 공회가 이런 방법을

택할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누가가 밝힌대로 ‘백성을 인하여’이다. 이는 기적이 가져온

효과를 보여준다. 즉 사도들이 행한 표적을 목격한 군중들의 열기는 대단했으니 나아

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에까지 이르렀다. 때문에 공회는 사도들을 처벌해야 하는

것과 백성의 반응 사이에서 전전긍긍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의 마음을 잃지 않

고 환심(歡心)을 사기 위해 늘 애쓰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공회는 어

쩔수 없이 사도들을 다시 위협하여 석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회원들은 하나님

과 진리보다는 자기들의 교권 유지를위해 대중을 더 무서워하는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

이었다.

=====4:22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 누가는 고침받은 앉은뱅이의 연령을 ‘사십

세이상'(* , 플레이오온 텟세라콘타)이라고

명시함으로써 고침받은 자가 날 때부터 만성적인 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3:1)을 강

조하고 있다. 이처럼 오랫동안 앉은뱅이로서 정상적인 삶을 살지도 못하다가 전혀 기

대하지도 못했던 기적이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발생하였기 때문에 모든백성은 놀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4:23

그 동류에게 가서 – 여기서 동류란 다른 사도들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복음 전파

를 통해 더하여진 그 이외의 제자들을 포함하는 것인지 정확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 무리가 오천 명이나 되는 믿는 자(4:4) 전체라기 보다는 좀더 작은 무리였으리라는

것이다(Marshall). 또 ‘프로스 투스 이디우스'(* )라

는 말이 ‘그 자신의 사람들'(요 13:1), ‘자기 백성'(요 1:11)등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무리'(말 3:16)등과 연관됨을 생각할 때 이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신앙의 공동체요 동질적인 유대(紐帶) 아래 맺어진 교회로 볼

수 있겠다.

=====4:24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 여기서는 기도의 방법에 있어서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1) 무리가 영감을 받아 모두 한 목소리로 기도했는가? (2) 인도자의 기도

를 따라서 반복했는가?(Alfold) (3) 이미 작성된 기도를 사용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확실치 않으니 ‘소리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넨'(* )이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되었다는 점과 일반적으로 공중 기도나 대표 기도가 전 회중을 대표하는

것을 볼때 이부분은 한 사람이 대표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나머지 무리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통해 한 마음으로 연합되어 그기도에 동의한 것으로 이해된다. 저자

누가도 그런 의미에서 핍박으로 인한 교회의 일치된 기도를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의

증거라고 강조한듯하다(Marshall, 1:14;15:25;롬 15:6).

대주재여 – 이의 헬라어 ‘데스포타'(* )는 ‘주'(Master)라는 뜻으로

70인역에는 25회 가량 사용되었으나 신약성경에는 자주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다. 이는

아마도 이 말이 갖고있는 독단적이고 무력적인 의미 때문인 듯하나, 고대 헬라인들은

‘통치자’나 ‘왕’ 또는 주종 관계에서 ‘주인’을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를 강조하는 ‘절대 통치자’의 의미가 강하다(눅

2:29;계 6:10).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칭호는 박해의 위기에 서 있는 교회가 첫째, 하

나님을 천지를 지으시고 만유를 다스리시는 통치가로믿는 믿음을 가졌고 둘째, 그분의

통치 아래에있는 교회를 세상이 해치지 못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신앙으로 그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4:25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 본문은 사본상으로는 해석이 난해한 구절이다. 그 이유는

‘의탁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을 통하여’, ‘-에 의해서’)가 어떤

사본에는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필사자에 의한 실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Robertson). 또한 특별히 이 말은 ‘입'(* , 스토마토스)과 관련해서

사용될 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 축자 영감적인 의미를 띠고 있음을 나타낸

다. 결국 이 구절은 선지자 다윗을 통해 장차 일어날 큰 일을 예언케 하신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제자들의 확신을 보여준다.

어찌히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 시 2:1의 인용으로서

메시야에 대한 예언 말씀이다. 여기서 ‘열방’의 헬라어 ‘에드네'(* )는 복수로

서 유대인들을 뺀 그 이외의 이방 나라를 의미하며, ‘족속'(* , 라오이)은 복

수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한다. ‘분노하다’라는 동사의 헬라어 ‘에프뤼앝산'(*

)은 부정과거 능동 직설법으로 ‘말'(horse)이 콧김을 내쉬듯 거만한 태도

를 보이는 것’과 관련된 의미로서 그리스도를 소멸시키려는 이방인들의 꿈이 거만하고

헛된 것임을 보여준다. ‘경영하다’란 둥사의 헬라어 ‘에멜레테산'(*

)은 ‘멜레테'(* , ‘신경쓰다’)라고 하는 말에서 유래됐으며 ‘실행에 옮

기다, 주의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4:26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 군왕은 헤롯왕을, 관원은 로마의 총독 빌라

도를 지칭하는 듯하다. 여기서 ‘나서며’라고 하는 ‘파레스테산'(*

)은 ‘정렬하여선’이란 뜻으로 진을 치고 대열을 지어 싸움일으킬 태세를 갖춘 상태를

말한다. 이는 ‘함께모여’라는 표현과 병행(竝行)해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

를 대적하고 그 나라를 파괴하려는 큰 흑암의 세력이 연합하여 반역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4:27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합동하여 – 신약성경에는 여러 명의 헤롯 왕이 등장한

다. 예수 탄생시 통치자인 헤롯 대왕(마 2:1;눅 1:5). (2)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왕위

를 게승해 유대 사마리아 등의 분봉왕이었던 아켈라오(마 2:22). (3) 아켈라오뒤에 왕

이 되어서 교회를 박해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죽었던 헤롯 아그립바1세 등이다. 본문

의 헤롯은 B.C. 4-A.D. 39년까지 갈릴리와 베뢰아를 통치하던 분봉왕으로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인 헤롯 안티파스이다(마 14:3). 한편 눅 23:12에는 헤롯과 빌라도가 원수였

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고 예수를 죽이는 데에 ‘친구가 되었다’고 기록

되어있다. 본절에서도 원수들간의 연합이 실제로 발생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연합은 이미 다윗의 입을 통해 예언된 바였다.

거룩한 종 예수를 – ‘종’의 헬라어 ‘파이스'(* )는 때때로 ‘아들’, ‘어린

아이'(마 2:6;눅 2:43)등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주로 부자(父子) 관계에 중점을 둔 용

어이다. 특히 ‘거룩한’이라는 형용사가 ‘종’을 수식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종’이 보

통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로서 신성을 가지

고 있는 동시에(눅 1:35) 종으로 낮아져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를 표현한다(사 42:1;52:13).

=====4:28

하나님의 권능 – ‘권능’에 사용된 헬라어 ‘케이르'(* , 손)는 두 가지 의미

를갖는다. (1) 19:26에서처럼 ‘손으로 만들어진 신(神)’이라고 할 때의 ‘손'(hand)을

뜻하거나(마 12:10) (2) 주로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하나님

의 ‘능력’, ‘권능’등을 의미한다(7:50;눅 1:66). 또한 (2)에 대해서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그들의 계획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고

하는 그의 ‘역사하시는 손’으로의 의미와(Hammond) 둘째는 욥 13:26에서처럼 그의뜻과

계획을 미리 기록해 놓았다는 ‘기록하시는 손’으로서의 의미이다(Matthew Henry). 앞

뒤의 연관된 부분들을 블 때 두번째 해석 즉, ‘기록하시는 손’으로서의 해석이 지지되

는데 이는 누가가 이 사건을 구약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

다.

예정하신 – ‘미리 결정하다’란 뜻의 ‘프로오리센'(* )은 초월자

로서 인생의 운명과 만물의 법칙을 제정하시고 그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전지 전능

하심을 보여준다. 이 단어는 누가와 바울에 의해서만 사용되기는 하지만, 베드로 역시

같은 사상을 갖고 있었음이 틀림없다(2:23;벧전 1:2, 20). 이는 성경의 전체 사상이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누가는

주와 교회에대한 핍박이 오히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

은 성취되어 간다는것을 증언하고 있다. 본문의 제자들 역시 대적들의 악한 계획이 수

포로 돌아가고 결국에 대적들은 패배하고 말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에 의

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Marshall).

=====4:29

하나님의 권능 – ‘권능’에 사용된 헬라어 ‘케이르'(* , 손)는 두 가지 의미

를갖는다. (1) 19:26에서처럼 ‘손으로 만들어진 신(神)’이라고 할 때의 ‘손'(hand)을

뜻하거나(마 12:10) (2) 주로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하나님

의 ‘능력’, ‘권능’등을 의미한다(7:50;눅 1:66). 또한 (2)에 대해서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그들의 계획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고

하는 그의 ‘역사하시는 손’으로의 의미와(Hammond) 둘째는 욥 13:26에서처럼 그의뜻과

계획을 미리 기록해 놓았다는 ‘기록하시는 손’으로서의 의미이다(Matthew Henry). 앞

뒤의 연관된 부분들을 블 때 두번째 해석 즉, ‘기록하시는 손’으로서의 해석이 지지되

는데 이는 누가가 이 사건을 구약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

다.

예정하신 – ‘미리 결정하다’란 뜻의 ‘프로오리센'(* )은 초월자

로서 인생의 운명과 만물의 법칙을 제정하시고 그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전지 전능

하심을 보여준다. 이 단어는 누가와 바울에 의해서만 사용되기는 하지만, 베드로 역시

같은 사상을 갖고 있었음이 틀림없다(2:23;벧전 1:2, 20). 이는 성경의 전체 사상이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누가는

주와 교회에대한 핍박이 오히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

은 성취되어 간다는것을 증언하고 있다. 본문의 제자들 역시 대적들의 악한 계획이 수

포로 돌아가고 결국에 대적들은 패배하고 말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에 의

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Marshall).

=====4:29

痔 발생하는 상황예 관하여’라는 의미이다. 앞에서(24-28)는 그들이 처한 악한 형편

과 상황들을 하나님께 고하고 나서, 본절예서는 그들 자신에게 적용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 이처럼 상황을 고하고 나서 구체적인 간구를 하는 형태의 기도는 초대 교회 성

도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으며, 깊은 신앙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하감하옵시고 – 이에 해당하는 혤라어 ‘에피데'(* )는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본다’는 뜻이다. 특히 이 단어는 방해하거나 응분의 처벌을 내릴 목적으로 지켜보

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제자들이 당하는 위협에 대하여 하나님께 의탁(依託)하는

것은 결국 (1)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섭리자요 감찰자이시며 (2) 교회는 그의 통치

하심아래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주옵시며 – 이들은 처해 있는 위기의 상황에서 그 대적들

이 망하게 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핍박의 상황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계속적

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할편 ‘주옵소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스'(* )는 제2부정과거 능동태 명령법으로 ‘지금 즉시 주옵

소서’라는 의미이며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 절박하게 요구할때 사용되는 표현 형태이

다. 이는 결국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서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을 어떤 일

보다 중요시했음을 보여준다.

=====4:30

손을 내밀어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텐 케이라 에크테이네인'(*

)은 누가의 관용적 표현으로 ‘그 손을 펴사’

또는 ‘그 손을 펴심으로서’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내밀어’라는 동사의 주어가 인격적

이어야 하는 점을 고려할 때 적당한 해석은 ‘당신이 당신의 손을 내밀어’가 된다. 즉

이 말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눙력과 권능으로 당신의 손을 내밀 때에 이적이 행해짐

을 나타낸다.

표적과 기사.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이아 카이 테라타'(*

)는 ‘하나님의 능력(손)에 의해 되어지는 모든이적’을 뜻하는 것으로서

앞절의 ‘손을 내밀다’에 연결되는 종속 목적의 의미로 보는게 타당하다(Knowling,

Page, Wendt). 병고침이나 예수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모든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일임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특히 ‘표적과 기

사’라는말에서 생각해야 할 중요점은 (1) 예수의 병고침이나 이적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의 메시야되심과(요 10:25) 하나님의 나

라의 도래가 드러났다는 점과, (2) 사도들에게 주어진 ‘표적과 기사’를 그들의 사도권

에 대해 인정하시는 표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14:3)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 기도가 끝나자마자 즉각 일이 발생하고 있

다. ‘진동하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살류데'(* )는 두 가지 뜻으

로 쓰인다. (1) 바람에 의해 흔들리는 상태(마 11:7). (2) 지진에 동반된 진동 상태

(16:26). 본문은 두번째 의미로 봄이 타당하다. 모인 곳이 지진이 일어날 때와같이 흔

들린 것은 주로 구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현현(顯現)에 대한 표징(사 6:4)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성령이 충만하여 – 신약에서는 주로 세가지 의미의 ‘성령 충만’을 언급한다. (1)

한 사람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한 일시적인 충만(8절;13:9). (2) 스데반이나

일곱 집사처럼 그 사람의 생애를 특정짓는 영구적인 의미(6:3). (3) 엡 5:18에서와

같은 계속적인 성령 충만. 여기서 ‘충만하다’라는 동사는 헬라어 ‘에플레스데산'(*

)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 (1)과 같은 의미로 특별 사역을 위한 일시적

충만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위기에 처해서도 담대히 말씀을 증

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4:32

믿는 무리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 플레두스 톤 피스튜산톤'(*

)은 문자적으로 ‘믿는 자들의 그 무리’라는

뜻이다. 누가는 ‘무리’라는 용어를 두 가지로 사용하고 있다. (1) ‘무리’ 또는 ‘거주

민 전체'(2:6;14:1, 4). (2) 종교적 공동체(6:2). 여기서는 두번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누가는 여기서 ‘믿는'(* , 피스튜산톤)이라는 과

거 분사를 사용해서 이 무리가 같은 신앙을 갖고 있음을 강조한다. 뒤이어 나타나는

무리의 일치는 외적인것에 의함이 아니요, 바로 같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공동의

신앙에 의한 것이었다.

한 마움과 한 뜻이 되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카르디아 카이 푸쉬케 미아’

(* )에서 ‘엔'(* )은 미완료 3인칭단수

로 나타난다. 이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각각 이기보다는 막 12:30에서처럼 전인

격적인 일치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하여 한 몸을 이룬 교회가 그

신앙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통용하고 – ‘코이나'(* )는 풍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주로 ‘친교’, ‘교

류’, ‘분배’등으로 번역되며, 여기서는 특별히 재물을 소유하는 면보다는 그것을 사용

하는 면에서 통용(通用)했음을 시사한다. 각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갖고 있었으나 그

것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공동체의 필요를 느꼈을 때 언제라도 드릴 수 있었던 것

은 하나님나라의 능력이었고 동시에 하나님 은혜의 결과였다. 누가는 여기서 교회가

갖는 교제의 독특성을 가르쳐 준다. 즉 먼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여 그분과 거룩한

고통을 하게 되면 자연히 성도간에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된다는 것이다.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 ‘증거하다’의 헬라어 ‘아페디

둔'(* )은 ‘돌려주다, 빚을 갚다’라는 의미이며 법적인 채무를 이행

한다는 뜻이 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한 것은 빚진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직무를 수행한 것이다(1:22). 한편 사도들이 전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핵심

이었고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그 예수가 바로 ‘오실 메시야’였음을 밝히는 것이었

다. 사도들은 사두개인들과 산헤드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서 증거했다.

=====4:34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 초대 교회의 구성원들이 각기 다른 신분과 지위를 가진 사

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태에 이른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중에는 빈곤한

자가 결코 없을 것이라는 구약의 약속(신 15:4)이 초대교회 내에서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팔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폴룬테스'(* )는 현재 능동태 분

사형으로 계속되는 진행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는 자신의 소유를 파는 행위가 교회의

궁핍한 자들이 생길 때마다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 각 사

람의 소유는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그것을 팔아야 할 필요를 느끼기 전까지만 자신에

게 위임되어 있는 하나님의 것이었다. 즉 자신의 소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요

따라서 이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청지기 의식이 초대 교회성도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4:35

사도들의 발 앞에 – ‘발 앞에’의 헬라어 ‘파라 투스 포다스'(*

)의 표현법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1) 사도들이 강단 위에 앉아

있다는 표현이다(Lenski, Weststein). (2) 세상 재물에 대한 경멸의 표현이다(Henry).

(3) 이는 소유물에 발을 올려 놓으므로 그 소유나 처분권(處分權)을 획득한다는 법률

적 용어이다(E. Haenchen, Marshall). 여기서는 세번째 해석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

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또다른 직무 중 하나는 그런 재물들을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분배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4:36

바나바 – 본명은 요셉이었고 사도들로부터 ‘바나바’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아마도

이것은 그의 성격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는 레위인으로서 구브로에 거주했는데 당시

구브로에는 유대인들이 소수로 모여 살았다(11:29). 본절에서 누가는 ‘바나바’란 이름

의 뜻을 ‘권위자’즉 ‘휘오스 파라클레세오스'(* )로 말

하고 있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문자적으로 ‘예언자’ 또

는 ‘선지자의 아들’이란 뜻이다(고전 14:3). 바나바는 ‘선지자’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

다(11:23;13:1). (2) ‘위로 혹은 권면의 아들’이란 뜻이다(Robertson, Mayfield). 이

중 후자의 입장이 더욱 지지된다. 왜냐하면 ‘권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시스’

(* )의 주된 개념은 ‘용기를 북돋움'(encouragemant)이라는 의미

가 강하기 때문이다(9:31;13:15). 여기서 누가가 특별히 바나바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

은 이유를 살펴보면, (1) 그의 소유를 팔아 교회 공동체에 내어 놓음에 있어서 아주

뛰어난 믿음의 행위를 보였기 때문이었고 (2) 계속된 교회의 발전에 있어서 그가 중

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며(11:24)) (3)믿음을 갖게 된 첫 레위인으로서

복음에 대해 유대인이 가진 편견(偏見)의 큰 벽을 허물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4:37

팔아 값을 가지고 – 여기서 ‘값’의 헬라어 ‘토 크레마'( )가 일반

적으로 쓰이는 복수 형태로 되어 있지 않고 단수로 되어있는 이유는 이것이 그 돈의

총액을 의미하기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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