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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행전 3 장 | 사도행전 3장 상위 143개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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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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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

사도행전 3. … 제 3 장 …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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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9/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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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사도행전 3. 3. 1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2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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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1/29/2022

View: 4649

2020/09/10(목) “사도행전 3:1-10” / 작성: 김광욱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3장은 초대 교회에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사도들이 권능을 받고 기적과 표적을 행하며 말씀의 열매를 맺으며 부흥하는 가운데 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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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2/17/2021

View: 4309

사도행전 3장 1절-10절 큐티: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

사도행전 3장에서 누가는 기도(1절)와 치유의 기적을 연결시키고 있다. 사실 누가는 누가복음에서도 이미 예수님께서 기도로 치유하는 사건을 여러차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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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7/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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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7월 16일. 사도행전 3장. – 하늘품은교회

사도행전 3장. 그리스도만 의지할 때 교회는 가장 강력하다. 1. 3~4장은 2장과 같은 패턴으로 기적이 일어나고, 베드로가 설교하며,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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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poom.or.kr

Date Published: 4/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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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장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 Pensées – Tistory

사도행전 3장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오순절 성경 강림은 놀랍고 기이하게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고, 상상도 못했던 방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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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392766.tistory.com

Date Published: 9/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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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4 은과 금보다 값진 선물 (사도행전 3장 1-10절)

20180404 은과 금보다 값진 선물 (사도행전 3장 1-10절) … 베드로와 요한도 제 구시, 즉 오후 3시가 되자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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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pcgl.org

Date Published: 10/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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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장 주석 – 사도행전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사도행전 제 3장 … (3) 해질 황혼 무렵에 또 한번의 기도 시간이 있었다. … 아울러 사도들이 예수의 승천직후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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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6/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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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장
사도행전 3장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사도 행전 3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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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maV62T5HQ7Q

사도행전 3

베드로와 요한이 못 걷게 된 이를 고치다

1 1)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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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줄 아노라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20/09/10(목) “사도행전 3:1-10” / 작성: 김광욱

[본문] 사도행전 3:1-10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행1:3). 하나님 나라의 일에는 사도들에게 사명을 주신 것과 앞으로 일어날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예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한 두 가지 위임명령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28장 18-20절의 말씀입니다. 그 핵심 내용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것이고,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위임명령은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임하실 때에 권능을 받는다는 것과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권능을 받아 신비로운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 일은 오순절에 제자들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외국어를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이 있은 다음, 성령님에 의해 말씀의 권능이 사도 베드로에게 임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사람 3천 명은 마음이 찔려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초대 교회에서 기적과 표적이 많이 나타나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구제하고, 모이기에 힘쓰고, 성찬과 애찬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함으로 구원 받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갔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교회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통로가 되기 때문에 악한 세력의 공격을 받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성령님의 권능으로 기적과 표적과 말씀의 능력이 나타났지만, 외부의 박해와 내부의 갈등이 존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3장은 초대 교회에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사도들이 권능을 받고 기적과 표적을 행하며 말씀의 열매를 맺으며 부흥하는 가운데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약 40세의 장애인이 걷게 되는 기적의 사건이 나옵니다. 이 기적은 초대 교회가 외부 공격을 받는 발단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성전에 올라갈새(1-3절)]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제 9시 오늘날 시간으로는 오후 3시에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갈새’는 원문에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완료되지 않고 계속 진행되는 동작이나 습관적인 동작을 뜻합니다. 즉 사도들은 습관적으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성전에 올라갔던 이유는 당시 사람들처럼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도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했다고 나옵니다. 성전은 제사드리는 곳이지만 기도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처럼 시간을 정해서 습관적으로 기도 생활을 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사도들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그 시간에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성전의 출입문 중 하나인 미문 앞 입구로 나왔습니다. 그가 성전 문 입구로 나갔던 이유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날마다 성전에 나가서 구걸했던 이유는 먹고 살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로 육체노동을 통해 벌이했던 고대 사회 특성상 걷지 못한 사람이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처럼 어려웠을 것입니다.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이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게 구걸하였는데 때마침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구걸을 하였습니다. 걷지 못하는 장애인은 그날 하루 돈 몇 푼이라도 동냥을 받아야지만 먹고 살아갈 수 있었기에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을 볼 때마다 간절히 구걸하였을 것입니다. 이때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그 사람의 말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4-6절)]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구걸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을 주목하였습니다. 구걸하는 사람은 양반다리의 자세로 허리를 세워 앉지 않고 몸을 엎드려 손을 벌려 동냥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형식적인 적선을 위해 그 사람에게 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며 그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려고 했습니다.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걷지 못하는 장애인은 적선해 줄 사람이 보라고 했으니 무엇을 얻을까 기대하며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궁핍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베드로는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습니다.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은과 금, 그리고 그를 도울 수 있는 돈이 없었습니다. 몇 푼의 돈이 있었을지라도 적은 돈을 그에게 적선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을 주고 싶었습니다. 사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성령님이 임하실 때 임할 권능을 이미 경험했던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이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임하기를 원하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설령 은과 금이 있어서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었던들 그 사람이 그것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돈이 떨어지면 또다시 성전 문 앞으로 갔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여 건강한 몸으로 자발적 경제 활동을 하게 만들어, 그가 다시는 성전 앞에서 동냥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그것보다 더 값진 것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치유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7-10절)]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사도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능이 사도 베드로의 손을 통해 그 사람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손은 하나님의 손이 된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 사도 베드로의 손을 잡고 일어났을 때 겨우 몸만 지탱한 것이 아니라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 걸을 수 있었고 발과 발목의 힘으로 뛰기까지 했습니다. 이사야 35장 6절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35: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당시 장애인을 부정하게 여겼기에 성전 안으로 한 번도 들어가지 못했던 그가 성전으로 들어갔을 때 얼마나 감개무량하였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였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은 육신의 치유와 비교할 수 없는 영적 치유를 받았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손이 되어 세상에서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되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전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나눔 물품보다 더 값진 선물을 전달해 드리는 사람이 되십시다.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성전 미문 안팎에서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이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들의 반응이 10절입니다.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성전에 정기적으로 기도하러 다닌 사람은 성전 미문을 통과할 때면 변함없이 구걸하는 그 사람을 보았을 것입니다. 구걸하는 사람이 약 40세 정도였고 꽤 오래전부터 구걸을 해왔다면 성전출입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얼굴과 차림새를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가 뛰는 모습을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랐다고 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놀라다’는 말이 두 번 나오지만 원문에서 서로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첫째 ‘놀랍게’는 놀라움으로 인해 마비가 될 정도라는 표현입니다. 둘째 ‘놀라니라’의 원형은 ‘엑스타시스’입니다. 잘 알려진 단어, 영어 ‘엑스터시’의 어원이며 ‘황홀경’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놀랐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약 40년 동안 선천성 하반신 장애로 살았던 사람이 걷고 뛰고 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극도의 놀라움으로 몸이 마비되거나 정신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장애인이 치유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엑스터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이지 않겠습니까? 약 40년 동안 걷지 못한 사람이 육체의 치유와 비교할 수 없는 영혼의 치유를 받도록 하나님의 손이 임하셨습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손이 될 것을 이미 예수님께서 예고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육체적 영적 치유가 예루살렘에서 그치지 않고 땅끝까지 이어가도록 제자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구걸했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은 금은으로 장식된 높이 약 23미터나 되는 웅장한 성전 문과 대조적이었습니다. 아무리 금은으로 장식된 성전 문을 통해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더라도 하나님의 원대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영적 상태는 초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초라하고 영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도 예수님 안에서 영적 치유를 받게 되면 영적으로 찬란한 새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문제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능함을 잊지 마십시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의 손이 되었듯이 오늘 하루 우리 주변에 영적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볼 때 그들이 주님을 영접하도록 하나님의 손이 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영적으로 초라하고 참 자유를 누리지 못했던 저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복과 구원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밑바닥 인생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잊지 않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손이 되게 하시옵소서.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도움보다 더 값진 구원의 손이 임하도록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손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성전 미문 앞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이 구걸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사도 베드로가 구걸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4. 내 주변에 손을 내밀어 잡아줄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봅시다.

5. 그 사람에게 힘이신 하나님의 손이 되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작성: 김광욱)

사도행전 3장 1절-10절 큐티: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

사도행전 3장 1절-10절 본문

베드로와 요한이 못 걷게 된 이를 고치다

(행 3: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 와 요한 이 성전에 올라갈새

(행 3: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 3:3) 그가 베드로 와 요한 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행 3:4) 베드로 가 요한 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행 3: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행 3:6) 베드로 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행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사35:6 , 행14:10

(행 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행4:16 , 행4:21

(행 3: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행3:2

사도행전 3장 1절-10절 말씀묵상

3장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서 구걸하던 한 앉은뱅이를 치유한 사건을 소개한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복음이 지리적으로 확산되며 전파될 것을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이야기했는데, 오늘 본문이 바로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 전파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보통 하루 세번의 기도시간을 갖는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런 유대인의 기도습관에 따라서 오후 3시에 기도하러 올라갔다. (1절)

[참고] 유대의 하루 개념은 우리와는 달라서, 본문에서 제구시라고 되어있는 것은 오후 3시를 말한다.

유대인은 하루를 오후 6시부터 시작하는데, 이유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실 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5, 8, 13, 19, 23, 3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저녁이 시작되는 오후 6시를 하루 시작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낮 시간이 시작되는 오전 6시가 유대시간으로는 0시가 된다. 그래서 유대시간의 제구시는 오후3시를 말한다.

사도행전 3장에서 누가는 기도(1절)와 치유의 기적을 연결시키고 있다.

사실 누가는 누가복음에서도 이미 예수님께서 기도로 치유하는 사건을 여러차례 밝혀주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치유를 위해 기도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물론 기도하면 치유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치유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만, 응답되지 못하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리 기도해도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치유되지 않는 것 조차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야 하는 상황들이 있고, 이런 현실은 우리를 답답하고 힘들게 한다.

그러나 믿음의 행보는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것, 내 안에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것이다.

회복의 소망, 회복의 역사 앞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일이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기도를 부탁했지만 그는 잠들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베드로는 기도의 용사가 되었다. 베드로처럼 정기적인 기도시간을 확보해야겠다.

바쁘다고, 피곤하다고 말하기 전에 기도함으로 바쁨을 여유로, 피곤함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해야겠다.

미문은 성소(성전)로 들어가는 10개의 문 중에서 은과 금으로 장식되어 있어 가장 아름다운 문으로 알려져 있는 문이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인데, 그 성전 바로 앞에 앉은뱅이가 남루한 옷차림으로 구걸하고 있었다. (2절, 3절)

가장 아름다운 문 앞에서 얼마나 극단적인 대조인지!

그런데 왜 하필 이날 이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치료했을까?

베드로와 요한은 적어도 규칙적으로 성전 기도에 참여하였고, 구걸하는 앉은뱅이는 날마다 미문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과거에 분명 앉은뱅이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시간에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을까?

베드로와 요한은 아마 날마다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면서 마음에 안타까움을 품고 날마다 성전에서 기도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이것은 분명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앉은뱅이가 다른 장소가 아닌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이유는 적어도 그곳에서는 자신을 불쌍히 여길 사람이 있기 때문이며, 그들의 동정을 통해 배부른 하루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전은 앉은뱅이에게 근본적인 치료를 제시해주지 못했고, 일시적인 처방에 그칠 뿐이었다.

실제로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온전히 치유되는 것,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 태어날 때부터 얻은 비참한 과거를 구속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그곳에서 구걸하였지만 아무도 그에게 근본적인 치료를 제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작은 동전 하나 던지는 것으로 내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며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교회를 찾는다. 교회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오늘 필요한 것만 주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치료를 주어야 할 것이다. 물론 물질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편안한 잠이나 진정한 사랑을 만들어줄 수는 없다. 뒤틀리고 왜곡된 세상에서 제자들은 작은 자에게 관심을 갖고 기도했던 것이다.

우리가 오늘 보고 듣는 많은 것들, 어떻게 듣고 느끼고 반응하며 판단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겠다.

6절에 보면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외쳤다. 원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비하할 때 사용하는 단어였다고 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처형한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은 부활시켜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

출신과 배경을 중요시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출신과 배경은 조롱과 천대받을만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분은 조롱하고 천대하는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앉은뱅이를 일으키셨다.

마지막으로 7절 이하에서 누가는 앉은뱅이에 대한 치유가 갑작스러우며 완벽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 사건이 인간의 의학으로는 불가능한 하나님의 역사임을 말한다.

적용

1. 정기적인 기도시간 확보하기

2. 주변의 안타까운 상황들을 모른 척 하지 않고, 위해서 기도하기

3. 하나님의 주권에 의지하며, 기도로 할 일을 하기

매일말씀묵상. 7월 16일. 사도행전 3장. > 매일말씀묵상

(아래 관련 링크 클릭하여 드라마 바이블을 들으면서 묵상하면 더욱 도움이 됩니다. )

사도행전 3장. 그리스도만 의지할 때 교회는 가장 강력하다.

1. 3~4 장은 2 장과 같은 패턴으로 기적이 일어나고 , 베드로가 설교하며 ,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들어오는 영적 추수의 사건을 보여줍니다 .

2. [ 기적 (1~10)]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나이 사십의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된 이 사건은 예루살렘을 뒤흔들어놓았습니다. 날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자였는데 , 마침 구 시 ( 오후 3 시 ) 기도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으로 가던 요한과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를 고쳤습니다 . 이제 성령의 능력이 제자들과 함께 하고 ,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일들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 교회가 가진 능력은 은금이나 칼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입니다.

3. [ 설교 (11~26)] 베드로는 일어난 기적을 보고 놀라서, 솔로몬 행각에 모인 많은 무리에게 이 일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12). 이것은 모든 시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의 일관된 태도였습니다. 초점을 자신들에게 맞추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기적을 보고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거부하여 죽인 바로 그분입니다. 베드로는 생명의 주(생명의 수여자)를 죽였다는 모순어법을 사용합니다(15). 생명의 수여자가 어찌 죽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을 뿐 아니라 그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들이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4. 생명의 주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죽였다면 , 이제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베드로는 촉구합니다 (19). 그렇게 하면 그들은 세 가지 복을 얻을 텐데 , 죄 사함을 받고 , 영혼이 회복되며 (19), 하나님께서 만유를 회복하실 때 예정하신 주님을 ‘ 그들을 ( 너희를 ) 위하여 ’ 다시 보내주실 것입니다 (20~21). 죄 사함, 영적 갱신, 그리고 우주적 회복이라는 구약의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음으로 우리가 갈망해야 할 복이 바로 이러한 복입니다.

5. 베드로의 설교는 그 모든 약속의 중심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구약성경을 통해서 증거합니다 . 그리스도는 모세가 말했던 ‘나 같은 선지자’였고, 사무엘 이후 모든 선지자가 말했던 그 분이십니다. 이 설교의 청중은 소위 언약의 자손들입니다. 베드로는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언급합니다(창 12:1~3).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아들을 먼저 보내신 이유입니다.

6.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보는 초대 기독교의 모습은 , 은이나 금이 아닌 ,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능력을 성령 안에서 의지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 베드로가 증거한 말씀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촉구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으로서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증언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외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을 때 ,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때 가장 강력한 교회가 됩니다 .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는 그리스도 외에 , 그리고 복음 외에 너무 많은 것을 가졌고 , 가지려고 합니다 . 그러니 힘을 잃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가진 교회가 되었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로 배불러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들을 찾기까지 합니다.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셔서, 금이나 은이나 권세가 교회의 능력이 아니며, 교회의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에 있음을 저희로 분명하게 깨닫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 있게 증거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도행전 3장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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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장 강해

사도행전 3장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오순절 성경 강림은 놀랍고 기이하게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고, 상상도 못했던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토록 놀랍고 기이하게 일어납니다. 사람의 생각을 뛰어 넘고, 사람들의 이성을 초월하여 역사하십니다. 하지만 언제나 말씀하셨고, 약속하셨던 것들입니다. 다만 그 말씀에 마음에 두지 않음으로 이해할 수없고, 생각하지 않음으로 기이하게 보일뿐입니다. 3장에서는 교회가 대중 앞에서 소개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합니다.

1-10절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11-26절 베드로의 설교

1. 1-10절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우리는 이제 놀라운 한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성령 충만의 사건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알렸습니다. 이제 성령의 오심을 통해 성령의 다른 이름인 ‘예수의 영’이 교회를 주도하게 될 것임을 드러냅니다. 성령 충만을 통해 제자들은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 즉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를 드러내고, 예수가 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 첫 시작은 예수께서 하셨던 치유와 회복을 제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제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갑니다. 제 구시는 로마 시간으로 현재의 오후 3시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제 삼시 제 육시, 제 구시에 기도했고, 많게는 다섯 번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베드로가 성전에 올라간 시간은 제 구시로 유대인들에게 정해진 기도시간입니다. 그 때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을 메고 와서 성전 미문(美門)에 두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한 일입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뜻을 가진 미문에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구의 사람이 그 입구에서 구걸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전에 기도하러가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았고 구걸합니다.(3절) 베드로와 요한은 구걸하는 소리를 듣고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을까 싶어 베드로와 요한을 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그 사람에게 외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

단순하고 명료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곧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선정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은 찬송’(8절)합니다.

2. 11-26절 베드로의 설교

사도행전 초기는 베드로가 심각할 정도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도행전보다 복음서의 기록연대가 늦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의 저작 연대를 알아내기는 힘듭니다. 그럼에도 사도행전이 누가복음 이후에 기록되었고, 요한복음 이전에 기록된 것은 분명합니다.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사도행전은 AD 70-80년 즈음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이 시기는 마태복음의 연대와 비슷하거나 빠른 시기입니다. 복음서는 비록 베드로가 부각되기는 하지만 확연히 부각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요한복음의 경우는 베드로의 입지가 의외로 작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사도행전초기에 베드로를 유난히 강조하는 걸까요? 그것은 사도행전이 복음서의 저술 목적보다 교회의 신학적의 주도권에 대한 이해를 주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사도행전은 초기에는 베드로가 주도적인 인물로 등장하지만 중간 이후 베드로는 사라지고 등장하지 않으며 일반 사도들이 나오다 13장 이후 사도 바울에게 복음의 주도권이 넘어가 버립니다. 누가는 베드로의 권위를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련느 것으로 보입니다. 즉 초대교회 초기는 베드로가 강력한 권위를 가진 존재였다는 것이고, 이후 점점 다른 사도들과 바울에게 넘어가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분석해 봅시다.

1) 12-16절 예수의 이름이 낮게 했다

사건의 발달은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11절) 그로 사람들은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완전히 치유된 것으로 보고 놀라 사도들이 있던 솔로몬 행각으로 달려가 모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보고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먼저는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은 ‘우리의 개인의 권능과 경건’(12절)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럼 어떻게 이 사람이 나았을까요? 베드로는 13-16절에서 이유를 설명합니다. 결론부터 말해 봅시다. 이 사람이 나은 이유는 ① ‘그 이름이’ 낫게 했습니다. ② 두 번째는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낫게 한 것입니다. 장애를 치유한 주최는 예수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실제로 예수의 이름으로 걷게 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맥락적 의미에서 본다면 앉은뱅이의 믿음이 아니라 ‘베드로의 믿음’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이 표현을 통해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소망하는 그 메시아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영화롭게 하다’(13절)의 표현은 성육신과 고난, 그리고 부활과 승귀까지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들은 ‘증인’입니다. 증인이라는 표현은 1:8에서 강조한 ‘증인이 된다’는 표현의 확증입니다. 2장에서 기다렸던 성령이 임했고, 그로인해 제자들은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땅 끝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너희가 죽였도다.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의 이유가 ‘그들’ 즉 유대인들에게 있음을 선포합니다. ‘너희’(13절)는 단순히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있는 유대인들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말하며,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후일의 이방인들까지 포함합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15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죄로 인해 예수께서 죽으셔야만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2) 17-26절 구약에서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

17-26절까지는 구약에서 예언했던 그 메시아가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임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고난 받으실 것을 예언했습니다.(18절) ‘모든 선지자의 입’은 선지서와 시편뿐 아니라 구약 전체를 아우르는 표현으로 받아도 됩니다. 성경에서 미리 예언했지만 ‘너희들’이 그것을 알지 못해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니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라’(19절)는 것입니다. 마만약 그렇게 한다면 ‘새롭게 되는 날’(19절 하) 너희들에게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20절)실 것을 들려줍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새롭다’는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새롭다’는 표현을 21절에서 ‘만물을 회복하실 때’로 바꾸어 말합니다. 그 증거로 22절에서 모세의 말을 인용합니다. 신명기 18:15,18,19입니다.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신 18: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신 18:19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결국 ‘그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선지자의 말은 유대인들이 믿는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첫번째 논증입니다.

두 번째 증거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다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24절)도 예수를 증언합니다. 특히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었음을 설명합니다.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 ‘복’(26절)을 주시려는 것은 대속제물로 돌아가신 예수의 십자가 사건임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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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4 은과 금보다 값진 선물 (사도행전 3장 1-10절) – 코너스톤장로교회

유대인들은 하루 세번 정해진 시간에 기도했습니다. 오전 9시에 한 번, 정오에 한 번, 또한 오후 3시에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제 구시, 즉 오후 3시가 되자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누구라도 기도하러 올라가는 길에는 마음이 너그럽고 경건하기 마련입니다. 이를 잘 아는 앉은뱅이는 늘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시간을 맞추어 성전 미문에 앉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이 동정심을 갖고 던져주는 동전을 받아 먹고 사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3절 말씀을 보니 이 사람이 날마다 앉아서 구걸하는 장소는 미문 즉 ‘아름다운 문’이라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지금 너무도 경건하고 거룩한 장소와 반대로 가장 불쌍하고 처량한 인생을 사는 앉은뱅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후 3시가 다가오자 많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매일 같은 장소에 앉아 구걸하는 이 앉은뱅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불쌍해서 몇 번 도와줬는데 그것도 한 두 번이죠. 다들 눈을 피하고 모른 채 그를 지나갑니다. 때마침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이 앉은뱅이가 앉은 미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가는 것을 깨닫고 그들에게 구걸했습니다. “여보시오. 한 푼만 도와줍시오.” 이 앉은뱅이를 본 베드로와 요한은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우리를 보라’라고 말했습니다.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기도하러 가기 바쁜데 이 두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다. 앉은뱅이도 혹시 이들이 기도응답이라도 받아 기분 좋아 적선이라도 하려나 보다 하고 기대감을 갖고 ‘과연 얼마나 많은 돈을 주려나?’하고 생각하며 베드로와 요한을 처다 보았습니다.

드디어 베드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앉은뱅이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그를 일으켰습니다. 곧 온 이스라엘이 놀라게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앉은뱅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본 적 없습니다. 그런 이 사람의 발과 발목에 힘이 돌아왔습니다. 그는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걸었고 뛰어다녔습니다. 유대인의 법에 의하면 육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은 부정하게 여겨져 성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평생 성전 입구에만 있었을 뿐 성전 안은 들어가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랬던 이 사람이 다리가 낫자, 성전에 들어가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8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행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태어나서 평생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사람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니 얼마나 신이 낫겠습니까? 아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숨이 차 오르도록 방방 뛰어다녔을 겁니다.

이 놀라운 기적의 광경을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왔던 많은 유대인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자기들 앞에서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가 바로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그 사람인 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 앉은뱅이가 일어났지?” 유대인들은 알지 못했지만 오늘 성경을 읽은 우리는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병이 낫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을 주었더라면 그는 잠시 동안은 기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일이 되면 또 다시 남의 손에 의지하여 옮겨진 후 구걸해야 하는 비참한 인생을 계속 살아야 했습니다. 걸을 수만 있다면 천만금을 주고서라도 부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앉은뱅이는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일말의 믿음도 가능성도 갖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이 아니라 앉은뱅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주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사람을 온전케 하였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한 사람의 인생을 이처럼 파멸에서 생명으로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구원하는 힘이 있습니다. 제 아무리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 되었던 이 사람처럼 비참한 운명에 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 이름 앞에 변화되지 못할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치료 못하실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이 이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4:13)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이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이 무슨 마법의 주문처럼 사용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가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더해졌기에 그들의 기도가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 생명의 이름, 능력의 이름, 소망의 이름, 예수가 함께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은과 금보다 더 값진 선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이 하루 이 놀라운 구세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으며,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모든 연약함과 죄악에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행전 3장 주석

사도행전 제 3장

=====3: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 3시를 가리킨다. 단 6 : 11 ; 9: 21에 의하면 경건한 유대

인들은 하루에 제 삼 시(오전 9시), 제 육시(12시), 그리고 본문에 나타난 제 구 시

(오후3시)를 정해놓고 세번의 기도를 하였다. 물론 이것은 구속력있는 율법 규례가 아

니라 나의 종교적 관습이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하루 구분법에 의하면 제 구 시는

해가 기울기 시작하여 저녁시간이 되어가는 오후 예배 시간을 의미한다(출 29:39). 요

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공식적 기도시간은 (1) 이른아침. (2)제 구

시, 즉 오후 예배 시간인 이 때공중 기도를 드리는 순서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

다고 한다.(3) 해질 황혼 무렵에 또 한번의 기도 시간이 있었다. 오늘날도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인간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권장할 만한 방법이라

하겠다.

베드로와 요한 – (1) 함께 어업에 종사한 동업자 였다 (마 4 : 18, 21 ; 눅 5:

10). (2) 세례요한의 때부터 메시야를 고대하던 자들이었다(요 1: 37, 42) (3) 개심

후 함께 사도직을 받은 동료 였다( 1: 13 ; 마 10 : 2). (4) 특별히 예수께 인정받고

사랑을 입은자들이었다 (마 26 : 37 ; 눅 8 : 51 ; 9 : 28). (5)예수께서 수난 받으실

때에 행동을 같이하던 친밀한 친구였다(눅 22 : 8 ; 요 18 : 16). (6)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한 동역자 였다(8 : 14). 성질이 급하고 정열적인 베드로와 조용하고 차분

한 요한은 성격적으로 많은차이가 있었지만 이 두사람은 모든면에서 함께 행동하였다

(눅 22 : 8 ; 요 13 : 24,25 ; 18 : 16,17 ; 20 : 2). 따라서 이들은 12제자의 선봉장

(先鋒將)으로 가장 중심 역할을 했으며 지도자 (lwader)로 부각된 인물들이었다.

성전에 올라갈새 – ‘ 올라갈새’를 가리키는 헬라어 ‘아네바이논'(*

)은 미 완료 시제로서 ‘그들이 올라가고 있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현재 진행중인

어떤 동작 및 과정을 아주 시각적으로 인상깊게 그리고 생생하게 묘사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갔으까? 여기서 칼빈

(Calvin)은 말하기를 ‘ 유대인의 율법 의식을 따라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다기

보다는 그 시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므로 복음을 전파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

여서 올라갔다’는 표현은 단순히 성전의 위치가 지형상 높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근

본적으로 종교상의 경건한 측면에서 비롯되어 나온 말이다(11 : 2 ; 18 : 22 ; 눅 18

: 10 ; 요 7 : 14). 아울러 사도들이 예수의 승천직후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은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욱 24 : 49)고 하신 예

수의 명령과 또 그들의 사명이 ‘예루살렘에서 부터 시작되리라'(1 : 8)는 말씀과도 일

치 되는것이다.

=====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 – ‘카이 티스 아네르 콜로스 에크 코일리아스 메트로스 아

투'(* )

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리고 그의 어머니 태에서 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 하나’

가 된다. 이것은 그가 중간에 사고로 다친것이 아니고 태어날때 부터 40세(4 : 22)가

되는 지금까지 하체가 마비된 고통을 지닌것을 보여줌으로써 나을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임을 시사한다.

사람들이 메고 오니 성전에 들어가는…구걸하기 위하여 – 그는 일하여 생계를유

지할 수 없으므로 동냥하여 살아가야 했다.더욱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

이므로 매번 다른 사람에 의해 운반되어져야 하는 불쌍하고 비참한 걸인(乞人)이었나.

한편 운반하는 사람들이 그를 구태여 성전 문 앞에 둔 이유는무엇일까 ? 유대교에서

는 남을 구제하는 일이매우 큰 덕목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이 성전에 올라오는 사

람들은 그 거지들에게 동전을 던져줌으로써 하나님의 상을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

것을 잘 아는 걸인들이 성전이나 전각 입구에앉아 구걸하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걸인

들에게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가는 사람들을 만날수 있는 성전 문앞이야말로 동냥

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고 또한 유대인들은 남을 구제하여 하나님의 상을 얻기

위해 성전 문에 걸인이 있는것을 싫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 미문(the Beautiful Gate) 이라는 이름은 외관상으로 장

엄함과 화려함을 지녔기 때문에 붙여진 듯하다. 그런데 이 미문이 예루살렘

성전의 어느 문을 가리키는지는 학자들간에 의견이분분하다. 이방인의 뜰로 들어가는

성전 동편의바깔 문인 슈산 문(Meyer, Alfird), 또는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통하는 니가노르 문(Knowling, Alexander) 의 양설이 주로 언급되나 후설이 보다 유력

하다. 기원 후 5세기 이래로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바깥 뜰 동쪽에 위치하

여 있고 또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그대로남아 있던 동문 혹은슈산문(그 문이 수산

궁전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을 본문의 미문으로 동일시하여 왔었다. 그

러나 유머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와 미쉬나(Mishnah)의문서인 ‘미도트

‘(Middoth 1 : 3, 4 : 2. 3 : 성전규모와 그 건축 종사자들에 대한 기록)의 기록에의

하면 니카노르 문(Nicannor Gate)과 동일시하고있다. 이 문은 아름답고 값진 고린도산

황동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문으로서 가치상으로 볼 때 은으로 도금되고 금으로 장식된

것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요세푸스는 말한다.

두는 자라 – ‘두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티둔'(* )은 미완료 과거

형으로서 매일매일 반복되어 앉혀지는 습관적인 동작을 가리킨다.

=====3:3

구걸하거늘 – 그는 여전히 자기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평상시 방법대로 구걸

한다.그런데 ‘구걸하거늘’을 가리키는 헬라어 ‘에로타'(* )는 미완료시제

로서 구걸의 행위가 다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가운데 손을 내밀고 무엇을 받으려

는 그때의 정황을 잘 묘사해 주는 누가의 표현법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간절하고도

정중하게 한 푼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표현이다. 아무튼 그는 무엇을 구해야 진정한

삶을 얻게 되는지를 알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지지않은 가련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종들을 향해서도 물질적인 적선(積善)을 구하고있는 것이다.

=====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 혹자는 베드로가 혼자서 말했음과 걸인이 한꺼번에

두 사람을 주목하지는 않았을 것임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본문의 기적 행위가 베드로

한 사람에 의해서 되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요한으로더불어’라는 표현은 후대

에 와서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한다(Hanechen). 그러나 이는 별 호소력이 없는 주장으

로 본문에 있는 그대로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행동을 취한 것이며 이 기적행함에도

똑같이 주님의 종으로서 성령의 능력따라 행한 것이다. 단지 여기서 베드로가 말한

것은 행동파적인 기질이 있어 그의 적극적인성격을 반영한다. 지난날 12제자와 함께

있을때도 베드로는 언제나 제자들의 대변자(代辯者)역할을 서슴없이 하였었다(마 16 :

13 -16). 따라서 여기서는 누가 앞에 나서서 직접적으로 활동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

니며, 주님께서 크신능력으로 당신의 종들을 통해 놀라운 이적을 베푸신 사실에 초점

이 있을진대, 요한 역시 베드로와 똑같이 이 기적의 사건에 참여한 것이다(J.

Calvin, Lenski). 동시에 행동파 베드로와 사색가 요한이 함께 보조를 맞추는 모습이

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동역의 모습이다.

주목하여 가로되 – 원문상으로는 ‘주목(注目)하여’의 헬라어 ‘아테니사스'(*

)란 말이 맨 처음에 나온다. 그리고 ‘데'(* ,그리고’) 이하는 걸인이

마흔살이 되는 지금까지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였어도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일이 전개됨을 보여 준다. 또 ‘아테니사스’ 란 말은 바라보는 대상을 향한

집중된 응시를 의미하며1 : 10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를 ‘자세히 쳐다 보다’로 번역된

말과 같은 동사다(눅 4 : 20). 그렇다면 왜 주목하여 보았을까 ? (1)13 : 9에서와같이

사도가 집중적인 웅시의 동작을 취한 것은 이제 이적을 일으키기 전에 필요한 내적인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이다. (2)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된 이 사람을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으로 쳐다봄으로써 걸인으로 하여금 사도를 주시하게끔 하기위해서다. 즉 인격과

인격의 접촉을 갖기 위해서이다. (3)내재하시는 성령의 지도와 그 역사하심을 따라 행

동하던 사도들은 불쌍한 앉은뱅이의 구걸을 받자 자신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특

별하신 감동에 의해서 그를 주목하는 행동을 취한 것이다(Calvin). 여기서(1) 의 견해

는 성경의 기적을 이적 설화로 취급하는 비판자들이 주로 내세우는 주장으로서 받아들

이기가 어렵고 (2)와(3)의 주장은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따라서 신비주의자들의 주장

처럼 본문의 ‘주목하여’라는말은 사람 마음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 본다거나,어떤 상황

의 내막을 발견하기 위하여 취하는 소위 투시 동작이 아님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Lenski).결국 주님이 그들을 감동시켰을 때에 그들은 이 동냥하는 걸인에게 눈을 고

정시킴으로 그 걸인이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게 유도한 것이다.

우리를 보라 – 이의 헬라어 ‘블려손 에이스 헤마스'(*

)는 병들거나 아픈 것이 없이 영원히 사는 천국 복음에 대해 전파하는사도들

에게 단지 한 푼의 돈을 동냥하는 걸인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단호하고 권위

있는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명령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이제 앉

은뱅이가 돈 몇 푼을 구하는 상태에서 떠나 하나님의 은혜를소원(訴願)하도록 요구한

말이다. 즉 자신에게 신기하고도 이례적(異例的)인 하늘의 축복을 소망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3:5

바라보거늘 – ‘에페이켄'(* )은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서 단순히 쳐

다보는 것이아니라 그의 주의를 사도들에게 집중하는 것을 생동감있게 묘사한 말이다.

그리고 이 단어 앞에’눈을'(* ,투스 오프달무스)이란 단

어를 첨가하면 더욱 생동감있는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걸인이 무슨 마음으

로 또는 왜 쳐다보았을까에 대해서는 다음과같은 견해가 있다. (1)자기에게 동냥을 주

려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주기 위하여 바라보았다. 따라서 그 걸인은 자기

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고 단순히 쳐다본 것이다(Haenchen). (2)보통

몇 푼을 던져주고 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유별나게 ‘우리를 보라’고까지말한 그들에게

이제 이 걸인은 ‘평상시보다도 더많은, 뭔가 대단한 것을 얻는가 보다’라고 생각하여

주의를 집중하여 쳐다본 것이다(Lenski).(3) 기적을 일으킬 만한, 즉 고침을 받을 만

한 믿음의 눈으로 쳐다보았다(E.M. Blaiklock). 그증거로 병고침받은 자들에게는 대개

믿음이 있었다는 점과(막 6: 34,36) 그가 고침을 받은 후 즉시 하나님을 찬미한 것

을(8절) 제시한다.따라서 베드로가 그의 믿음을 보았다는 것이다.그러나 당사자의 믿

음과 관계없이 주님의 일방적인 주권에 의해 병고침을 베풀어 준 사례들을 생각할 때

(요 9 : 1-12) 이 견해는 설득력이 약하다 하겠다. 따라서 걸인의 신앙 행위는 기적이

일어난 후에 생긴 것이라고 보나 렌스키의 견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취할 수 있겠

다.

=====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앉은뱅이에게 보기드문 기대감을 잔뜩 불러 일으켜

놓고 베드로가 한 이 말은 은과 금을 구하던 걸인으로하여금 허탈감에 빠지게 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곧 이어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했기 때문에 낙담할 시

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제 베드로의 이선언을 통해서

돈 몇 푼이 아닌 자신의 처지에대한 근본적인 해결의 빛을 기대하는 희망의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할 수있겠다. 따라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

니”라고 곧바로 선언되는 베드로의 선포는 앉은뱅이로 하여금 어떤 신기한 기대감(期

待感)을갖게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은과 금은 내게 없다”베드로의 선언속에서 우리는

(1)물질의 소유에 초월해 사는 사도들의 청빈함을 엿볼 수 있으며 예수의 말씀대로

금이나 은이나 돈을 가지고다니지 않았다는 것과(마 10 : 9) (3)혹 물질이있었다고 하

더라도 ‘믿는 사람의 필요를 따라’교회 공동체에서 공동 관리하였다(2 : 44, 45)는추

측을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문자적으로 이 구절을 적용하며 사도들에게 물질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주님의 뜻따라 앉은뱅이에게 은이나 금과

는 비교가 안 되는하늘의 능력을 그에게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의 차원에

서 그렇게 선포한 것이다.한편 본 구절이 궁핍한 자들에 대한 물질적 구제를 금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또 교회의 역할이 물질적 도움보다는 영적 구원에 집중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말씀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본문의 앉은뱅이 또한 육신의 치유를 경

험한 사람이다(7절). 다만 본 사건은 사도들의 궁극적 관심사가 신체보다는 영적 치유

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이름으로 – 사도들이 소유한 최고의 보물은 나사렛 예

수 그리스도였다. 그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위하여 걸인이 구하던 은과

금,즉 세상의 보화들을 배설물로 여겨버린 자들이었다(빌 3 : 8). 여기서 ‘이름으로

‘라고 표현한 것을 먼저 주목해 보자.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

및 본질 즉 그 사람의존재를 대표해 주는 것이었다(주제 강해 창 25:19-16 ‘이름 짓기

‘ 참조). 그러므로 여기서 이름이란 그 사람 인격(人格) 전체를 대표하는 말이다. 따

라서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이나 신앙심 가지고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믿는 예수의 능력과 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생명의 근원이 되신 예

수께서 크신 능력을 베푸셔서 병자를 낫게 하신다는 것을 선언하고있다. 이 사실은 12

절과 16 절에서 더 뚜렷이 증거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사렛’이라는 수식

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사적 예수인 나사렛 예수와 부활하신 신앙의그

리스도를 분리한다(Martin Keil, Bultmann).그러나 역사적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

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 될 수 없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

: 46)는 말이 암시해 주듯 당시 나사렛은 천한 지방으로 간주되었기에 주님께서 나사

렛에서 성장하셨다는 것은 언제나 유대인들의 경멸과 조롱의 내용이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대망의 메시야였으며 그분

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권세를 가지고 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베푸심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걸으라 – ‘페리파테이'(* )란 말은 시작과 계속의 개념을 가진

현재 명령형으로서 ‘걷기 시작하라. 그리고 지금부터 계속 걸으라’는 뜻이다. 이 명령

은 주님이 뜻을 선포하는 말씀이므로 놀라운 권능을 동반하는 권위있는 선언이다. 그

리고 앉은뱅이가 이 말을 믿었다는 문자적인 기록은 없지만 사도의 말에 항변(抗辯)

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순응한 것을 보아 그가 베드로의 권위있는 명령을 듣고

믿었음알수 있다. 따라서 사도의 이 명령과 함께 성령의크신 역사가 순간적으로 불쌍

한 걸인에게 임하게되었다. 다시 말해서 사도의 이 ‘걸으라 ‘는명령과 함께 성령이

얼어붙은 영혼을 혼들어 놓았던 것이다. 40년동안 말라 붙어 있던 하반신에 창조주의

생명의 기운이 불어 넣어짐으로써 치유의 은혜가 임하는 순간이었다.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 ‘잡아 일으킨다’는 말은 신유(神癒)를 베푸는 자의 신

비한 능력을 치유받는 환자에게 전달해 주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뜻을

따라 자신이 선포한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의심없이 믿고 확신하여 손수 불구자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걸인의 편에서 보면 베드로의 명령에 대한

그의 믿음과 순종을 엿볼 수 있으며 이러한 그의 믿음을 더욱 복돋아 주기 위하여 오

른손을 잡아 일으킨 것이 된다(John Joseph H. Mayfield).

발과 발목이 – 앉은뱅이가 치유될 때의모습을 설명하기 위하여 누가가 사용하

고 있는 특수한 단어들은 한결같이 의학적 성격을 띤 용어들로서 그의 전직이 의사였

음을 여실히 드러낸다(Kowling). ‘발’의 헬라어 ‘바세이스'(* )는 ‘발바

닥’ 또는 ‘발꿈치’를 가리킨다. 그리고 ‘발목’의 헬라어 ‘스퓌드라'(* )는

‘ 복사뼈’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두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타난 의학적용

어이다(Henry Alford).

곧 힘을 얻고 – 이것은 앉은뱅이가 걷지 못한 근본 이유가 발과 발목에 힘이 없었

기 때문임을 말함과 동시에 이제 당장 발과 발목에 기이한 힘이 생겨 정상으로 돌아옴

을 뜻한다. 그리고 일순간에 앉은뱅이가 치유받것은 생명의 근원이 되신 주님의 능력

으로 말미암아 일반 법칙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적이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3:8

뛰어 서서 걸으며 – 본 구절에 대한 헬라어 ‘여살로메노스 에스테 카이 페리에파

테이'(* )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는 뛰어 일어나 똑바로 섰다. 그리고 계속해서 걸어 돌아다녔다’는 뜻이

다. 여기서 미완료 시제를 사용한것은 사도가 그에게 명령한 그대로 일어나 걷고뛰기

시작했으며 또한 계속해서 걸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는(1)베드로의 말이 허

풍(虛風)을 떠는 빈 발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실재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받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생생하게 입증하는것이며 따라서 나사렛 예수 그리

스도의 살아계심과 그 능력의 놀라움을 증거하는 것이다. 더나아가 이 기적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던바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사35 : 6)라는 메시

야의 시대가 실제로 도래하였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표적(sign)이 된 것이다. (3)40여

년 동안 불구의 앉은뱅이 신세로 침상을떠나지 못했던 그가 이제 고침을 받음으로 말

미암아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기쁨을 기운차게 표시한 것이다.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 앉은뱅이였던 그가 꿈만 같은 놀라운 기적의

은혜를 입어 걷게 되자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맨처음 들어간 곳은 성전이었다. 이

는 자신의치유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자로서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다. 여기서 ‘뛰기도'(leaping up)의 헬라어 ‘할레스다이(*

) 뛰어 오르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는 모습으로 마치 놀란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어 다녔다는 뜻이다. 또는 오랫동안 새장 안에 갇힌 새가 풀려나 창공을 날아가듯

이, 혹은 개집에 매여 있던 개가 풀려나 사방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듯이 신바람난 모습

을 묘사한 것이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시 100 : 4)라는 시인의 노래는 새롭게 얻은 몸으로 그야말로 기쁨이 충만하여 사도

의 뒤를 따라 성전에들어가는 이 사람에게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고있다.

하나님을 찬미하니 – 동전 몇 닢을 구걸하던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체험함

으로써 육신의 치료를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받게 되었으니 성

전에 가서 하나님을 찬미함은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다. 이렇듯 찬송은 은혜를 입은

자가 마음에서부터 드리는 지극한 감사의 표현이고 입술의 제사임을 본다(히 13:15).

=====3:9

모든 백성이…보고 – 기적은 그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그를 둘

러싸고있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앉은뱅이였던 자가 걷고 뛰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획실한 증거가 되었다. 그 앉은뱅이 걸인은 수 년 동안의 구걸로 인해 이미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따라서 그의 신원(身元)이나 치유 사실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3:10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 ‘기이히 여기며’의 헬라어는 ‘담보스'(*

)로 어떤 행위를 보고 감정적인 면에서 느끼게 되는 탄복이나 충격적인

놀라움 또는 거룩한 두려음등을 말한다. 그리고 ‘놀라니라’의 ‘에크스타시스'(*

)는 뜻하지 않은 사건을 접했을 때 정상적인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

리고 망연자실(茫然自失)해진 상태를 말한다(막 1 : 27 ;10 : 24, 32 ; 14 : 33 ; 16

: 5,6 ; 눅 4 : 36). 이처럼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며 정신을 차릴 수없을 정도

로 심히 놀라게 하는 것은 기적의 결과로 나타나는 첫단계의 모습으로서 기적 자체가

갖는 영향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와같은 놀라음의 반응이 그 이적을 일으

키신 분께 대한 믿음과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서, 그 이적이 시사하

는 바인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서도 단지 그 이적에대한 놀라움과 두

려움을 표할 수도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적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방편이다(출4

: 2-9 ; 요 11 : 40- 42 ;롬 15 : 18, 19)

=====3:11

나온 사람이… 붙잡으니 – ‘붙잡으니’의 헬라어 ‘크라툰토스'(*

)는 어깨에 매달렸다는 뜻이며 이는 (1)많은 사람들에게 베드로

와 요한을 통해서 이런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고 (2)사도를 향한 애착과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고(3)사도들이 자기를 그냥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동이다.

솔로몬의 행각이과…모이거늘 – 솔로몬 행각은 (1)성전 바깥 뜰 동편 끝에 있는

기다란 집채 곧 회랑(回廊)으로 교사들이 자유롭게 강론하던 곳이었다. (2)대중 집회

를 할 만한 장소로서 초대 교인들이 이곳에서 자주 집회를 가졌음을 알 수있다(5 :

12). (3)예수께서 이곳에서 설교하신일도 있었다(요 10 : 23). 아무튼 기적으로 인

하여 많은 군중이 사도들 주위에 몰려들었다는 것은 기적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그

자체에 목적이있지 않고 사도들로 하여금 기적을 베풀어 주신분에 대해 중거케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보게 한다. 왜냐하면 기적 때문에 크게 놀라서모인 군중들

은 이제 하나님 나라와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생생하게 듣게 되었기때

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클레이(Barclay)는,’기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모이게 하

기 위해서 종을 치는 것과 같은 역활을 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했다.

=====3:12

백성에게 말하되 – 걸인이 고침받게 된 기적은 (1)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2) 그들

을 사도들 앞에 모이게 했고 (3)이제 사도들로 하여금 기적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

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여기서 ‘말하되’를 가리키는 헬라

어 ‘아페크리나토'(* ))는 어떤 일에 대한 답변으로 경위(經緯)

를 설명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이는 기이한일을 보고서 그 일에 대한 설명을 바라는 사

람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할 기회를 얻게 되었음보여준다. 따라서 본절 이하는 2 : 14에

나타난 오순절 이후의 베드로의 설교에 이어 두번째 설교로서 본절은 그 서론에 해당

한다.

이스라엘사람들아 – 설교를 듣는 대상을 호칭하는 표현으로서 의미 심장하고 중대

한 선포를 할 때 베드로가 자주 쓰는 표현이며(1 :16; 2: 14, 22) 그들이 율법과 약속

을 받은 선민임을 상기시킨다.

왜 기이히 여기느냐…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기이히 여긴다’는 말에 대해서는

10 절 주석을,그리고 ‘주목하다’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4절주석을 각각 참조하라. 사

람들의 잘못된 관심을 책망하면서 설교의 서론으로 주의를 환기시키는질문이다. 즉

(1)사도 자신들의 어떤 특별한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고친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

며 그러므로 자기들을 눈여겨 보지 말라는것이다.(2)과거에 하나님의 수많은 능력을

체험한 이스라엘 사람들로서 왜 이 일을 기이히여기느냐는 것이다. 이는 곧 그 이적의

동인(動因)이 하나님께 있음을 상기시키는 말이다.(3)결국 사람들의 관심과 주의를 오

직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표현이다.자기들은 단지 예수 그

리스도의 심부름꾼인 도구들일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기가 믿음이 좋고 대단한 영력

(靈力)이 있어서 이적적 권능을 행사하는 것처럼 은근히 자신을 강조하여 모든존경과

영광을 다 받으며 기적과 그로 인해 모든 군중들을 지극히 인간적으로 이용하는 종교

적영웅주의자들, 즉 거짓 선지자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관심

을 끌어 인기주의로 자기를 나타내는 일에는 흥미가 없는 사도들은 오직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이 기적의 실체가 되시는 나사렝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또한 그

로 인해 자기들의 죄를 꼐닫게하여 이들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할 수 있을까에만 관

심을 집중하였다. 이것이 기적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절에서 사

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목

도한다.

=====3: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 이는 본래 출애굽기에서 최초로 사용된 표현

이며(출 3 : 16, 15 ; 4 : 5) 이 표현을 사용한 의도는25, 26절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즉 이 말은 유대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이라는 실감을 가지게하는 표현이며 이 같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도 많이 사용되

었다(마 22 : 32 ; 막 12 : 36). 더 나아가 자신들이 율법과 예언에서 멀리 떨어진

새로운 종교를 말하고 있는것 이 아니라 구약의 바탕 위에서 구약의 완성자이신 예수

에 관한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여기서 ‘종’을 나타내는 헬라어는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는 ‘휘오스'(* )가 아니라 ‘파이스'(* )이다. 따라서 이

종의 의미는 일찍이 이사야가 예언했던 고난의 종을 말한다(사 42 : 1-9 ; 49 : 1-13

; 53 : 1-12).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구속자로 오셔

서 세상로부터 배척과 수욕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셨음에도 불구

하고 한 마디의 항변도 없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 즉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 모든 일을 감당하는 예수의 낮아지신 신분과그 직무를 말한 것이다(2:7). 예수와

종을 직접 함께 언급한 곳은4 : 27,30 등이며, 고난받은 종에 관한 암시적언급은 8 :

32, 33 ; 막 10 : 45 ; 14 : 24 ; 벧전 2 : 22-24등에도 나온다. 그린데 이 종 예수

를우리 조상의하나님이 이제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롭게 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에 대해 두 견해로 엇갈린다. (1) 예수에 의해 일어난 기적으로 말

미암아 예수께서 영화릅게 되셨다(Haencgen). (2) ‘에돝사센'(* )

은 부정 과거로서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그가 종으로서 죽었지만 하나님이 3일 만

에 부활시키고 승천케 하셔서 이제 하나님 우편에 앉히기까기 그를 높이신 사실을 말

한다(F. F. Bruce, Lenski).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왜냐하면 이로

써 베드로는 예수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구약성경

인용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는 이어서 유대인들의 죄악을, 즉 그들이 이

예수를 어떻게 배척했는가를 담대하게 지적한다.

넘겨주고 – 이의 헬라어 ‘파레도카테’ (* )는 예수를 십자가

에 못박도록 로마인, 즉 이방 통치자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던 것을 말한다(사 53

:12).

부인하였으니 – 이는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함을 발견하고 놓아주고자 했으나 저희

가 바라바를 택하고 예수를 부인하여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사실에 대한

지적이다(눅 23:13-23). 사도는 그들의 죄를 깨우치기 위해 통렬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죄의 무서움과 심각성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비앞에 두손

들고 나올수 있기 때문이다.

=====3:14

거룩하고 의로운자 – 사도는 계속하여 예가 어떤 분이었던가를 증거하면서 동시

에 그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흉악했던가를 대조용법을 통해서 신랄하게 지적한다.

여기서 ‘거룩한자'(* , 호 하기오)는 ‘하나님의아들’을 가리키는 용어

이다(막 1 : 24; 눅 1 :35; 요일 2 : 20).그리고 ‘의로운 자'(* , 호

디카이오스)란 모든 블의에서 완전히 떠나서 절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뜻이다(7 :

52 ; 22 : 14 ; 사 53 : 11 ; 렘 33 : 15 ; 요일 2: 1).따라서 ‘거룩하고 의로운 자’

란 구약에서말하는 메시야의 칭호이다.

살인한 사람(* , 안드라 포네아).이는 거룩하고 의로운 자와

대조적으로 묘사되어 그들의 사악한성격을 더욱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다. 이 사람은

바라바를 가리킨다. 그는, 유월절 사면(赦免)의 관례에 따라 총독 빌라도가 예수와 바

라바 둘 중하나를 석방해 주겠다고 유대인에게 제의했을 때 유대인들의 선택에 의해

풀려난 죄수였다(마 27 :15-16). 이 사람에 대해서(1)마27 : 16에는 유명한 죄수로,

(2) 막15 : 7에는 민란(民亂) 중에 살인하여 포박된 자들 중 하나로, (3)요18 : 40 에

는 강도로 각각 언급되어 있다.

=====3:15

생명의 주 – 본절은 베드로 설교의 절정으로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강조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예수께 집중시키고 있다. ‘생명의주’의 헬라어 ‘호 아르케고스 테스

조에스'(* )란 ‘생명을 주관하는자’, ‘생명의 근원

‘, ‘구원의 원천’ 등을 뜻하는말로서 살인자 바라바와 절대적으로 대조됨과 동시에

그들이 저지른 죄의 극악성을 계속하며강조한다(요 5 : 26 ; 10 : 28 ; 14 : 6).

죽였도다 – 살인자는 놓아주고 오혀려 생명의 주는 죽였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만

한 일인가 ! 특히 원문상으로는 ‘너희들이’라는 ‘휘메이스'(* )를 강조하

여(14절)그들의 죄를 정면으로 지적하고 공격하고 있다. 즉 ‘너희들이 예수를 죽인 죄

인들이요 살인자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오순절 전

까지만 해도 두려워 숨어 지내던 비겁한 하도들의 이 담대한 증거를 보라!

하나님이…살리셨으니 – 유대인들은 ‘거룩하고 의로운자’를 죽였지만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셨으니 이는 (1)유대인들이 저지른 모든 불의와 그 행위에 대한 하

나님의 심판의 예고이며 (2) 예수가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표

었다. 따라서 구약에서 부터 예언된 메시야임을 온 천하에 선포한것이다.(요 16: 20;

롬 1:4).(3)죄의 세력과 그로 인한 모든 결과들에 대한 승리, 즉 구속 사역의 완성을

의미하므로 예수께서 죄와 사망을 이기신 생명의 주이심을 입증하신것이다.(4)하나님

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유의 주로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셨

다는 표이다(빌 2 : 5 – 11).

우리가 이일에 증인이로라 – 사도들의 담대한 증가와 무엇보다도 사도들 곁에 온

전한 사람으로 서 있는 고침받은 그 사람이 부인할수 없는 생생한 증인이 된것이다.

따라서 그 기적사건은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했다(부활)는 표가 될뿐만 아

니라 사도들이 지금 증거하는 그 내용이 참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여기서 ‘증

인’의 헬라어 ‘마르튀스'(* )는 사실에 근거하여 진술해야 함을 강조하는

법정적(法廷的)술어이다.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예수로 말미암아난 믿음이 – 이제까지 유대인들 앞에서 예

수를 증거한 사도는 이제 결론적으로 앉은뱅이가 고침받게 된 그 능력의 근원을 대구

법으로 표현된 삼중적 묘사로서 엄숙하게 되풀이해서 강조하고있다. 사도는 이 표현에

서 무엇을 전달하고 있는가? (1)자신들이 이 사람을 고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 밝

히고 있다(12절).(2) 그 이름(* , 토 오노마)곧 저희들이 죽인 그 예수

께서 지금 무덤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고 다시 살아나셔서 이 사람을 낫게 했다는 선

언이다. 왜냐하면 이름이란 그 사람의 인격과 그 사람자신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따라

서 이는 하늘에 앉으셔서 지금도 살아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활동의 계속

성을 진술한 말이다.(3)예수께서 하늘에서 계속 역사하시되 성도들의믿음을 통하여

일을 하시는 것을 말한다. 즉 그의몸된 교회와 지체된 믿는 자를 통하여 친히 능력을

베푸시는 것을 아울러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믿으므로’는 헬라어 ‘에피'(* )

를 써서 믿음의 기초 위에서 역사함을 말했으며 ‘예수로말미암아 난 믿음이’에서의

믿음은 ‘디아'(* )를 써서 그 믿음이 예수를 통하여 얻어지는 믿음임을 말했다.

따라서 이는 믿음의 근원적 출처 또한 주님이라는 사실, 즉 믿는 자를 통한 그리스도

의 직접적인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하겠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믿으므로 예수로 말미

암아 난 믿음이 고침을 받게 했다는 것과,예수께서 낫게 하셨다는 말은 서로 상충되는

말이아닌 것이다. 한편 여기서 말한 믿음이 누구의믿음을 가리키느냐에 대해서는 다음

과 같은 견해가 있다. (1) 앉은뱅이의 믿음을말한다(Stanley D. Toussaint). (2)베드

로와 앉은뱅이의 믿음이다(Meyer, Lenski, Matthew Henry) (3) 베드로와 앉은뱅이의

믿음이다(Lighfoot, Cavin).이 중 한 견해만 배타적으로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왜냐하

면 이 치유 사건에는 먼저 두 사도의 믿음이 주도적으로 작용했으며, 이 앉은뱅이가

치유받은 후에 하나님을 찬양한 것으로 보아 그의믿음 또한 전혀 배제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3:17

형제들아 – 12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아’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죄를 날카롭고도

준엄하게 꾸짖던 사도는 이제 ‘형제들아’라고 부드러운 어조로 따뜻하게 부르면서 간

절한 권면의성격을 띤 호소를 함으로써 그의 설교의 새로운 국면을 시작하고 있다.

너희가 알지 못히여서 -죄에 대해 핑계댈 수 없도록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무섭게

지적한 사도는 이제 상처를 싸매주는위로를 한다. 즉 청중으로 하여금 회개하여 하나

님의 은혜를 받는 자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죄의 정상(情狀)을 참작하는 말

을 하면서 격려한다. 저들이 조금도 용서받을 길이 없음을 알고 자기들의 죄에 대한

형벌의 두려움만 생각하여 짐짓 절망해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일단 그들의 범죄

의 원인을 무지 때문이었다고 진단해 준 것이다(눅 23 : 34 ; 딤전 1 : 13 ; 벧전 1:

14).

너희 관원들도 – 13, 14절에서 일반 대중의 우매 무지(愚昧無知)한 죄를 낱낱이

지적한 사도는 이제 관원들, 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한다.예수께 대한 지독한 시기심으

로 백성을 충돌질하고 선동한 이들의 죄는 훨씬 더 컸다(마 27 : 18).

=====3:18

그러나 하나님이…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 일반 대중과 관원들의 죄를 빠뜨리

지않고 추적한 사도는 단순히 죄를 폭로하고 들추어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러나’

(* ,데)라는 강조 접속사를 사용하여 이 모든 것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의 성

취라는 측면을 증거한다. 다시 말해서 구약성경에서 분명하게 예언된 바, 즉 그리스

도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받아 친히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경론이 이루어지리라는

그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이 무지 속에서 저지른 일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게 했다. 그 계획이란 다름아니라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바

메시야의 수난에 관한것이다(2 : 23 ; 17 : 3 ; 26 : 22, 23).구약성경에 메시야가 고

난 당하리라는 사실이 직접 언급된적은 없다. 다만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종에 관한언

급이 나오며(사53장)또 메시야의 고난에 관한 예표론적 예언이 선지서와 시편에 등장

한다(시22, 69편 ; 렘 11 : 19 ; 단 9 : 26 ; 슥 13 :7).

=====3:19

회개하고 돌이켜 – 눅 13: 1-19 주제강해 ‘회개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3: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히여…예수를 보내시리니 – 어떤 학자들은, 본절을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메시야가 되시기로 정해졌다는 의미로이해한다. 그러나 이는 본문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오히려 본절은, 재림하실 예수께서 이미 메시야로 오셔서 그 사역을

완수하신 바로 그분임음 가르친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 시대의 도래

는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이느냐의 여부에 달려있었다는 것이다.

=====3:21

만유를 회복하실 때 –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의 입을빌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고 부패하게 된 이 세상을 여인의 후손을 통해 회복하리라고 예언하셨다

(창 3 : 15). 여기서 회복이란 ‘아포카타스타세오스'(*

)로소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1)땅 에서 모든 죄

와 불의를 제거함(고전 15: 24 – 28).(2)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그 지으신 본래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상

태에 이르게 함(엡 1 : 10).(3)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된 복스러운 상

태(계21 : 1)로 만듦. 이 회복은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하여 이미 시작되었으며 주께

서 재림하실 때에 온건히 완성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뿐만아니라 죄로 인하여

탄식하는 만물도 그리스도의 두번째 나타나심을 고대하는 것이다(롬 8 : 19 -21).

=====3:24

또한 사무엘 때부터…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 베드로가 소개하는 아브라

함, 모세, 사무엘 등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 참다운 지도자로 추앙(推仰)했던 조상

들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첩경은 이 믿음의 조상들과 그리

스도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밝히는 것임을 베드로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모세와 사무엘 및 그 이후의 모든 선지자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그들 모두가 예수 그리

스도를 증거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모세의 경우처럼 선지자 사무엘이 정확하게

예수에 대하여 적용될 수 있는 어떤 예언을 한 사실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사

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였고 그의 나라와 관련된 예언을 남겼다(삼

상 13 : 14 ; 15 : 28 ; 16 : 13 ; 28 : 17). 그리고 다윗 왕국에 관련된 그의예언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로 말미암아 궁극적 성취를 보게 되었다. 또한 삼하7 :

12-16에 기록되고 있는 다윗 자손에 관한 나단 선지자의 예언은 메시야와 연관성을 지

닌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또한 그 예언이 예수에 의해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던 것으

로 여겨진다(13 : 22 , 23 , 34 ; 히 1 : 5)

=====3:25

너희는…언약의 자손이라 – ‘너희”에해당하는 ‘휘메이스'(* )가 강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제 바로 ‘너희’

가 그 약속의유업을 받을 자녀들로서 그 언약의 후계자, 상속자로 택함받았다는 사실

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아브라함에게…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하나님

은 그 후손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으며 또한 그 후손을 통해 지상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12: 3 ; 18 : 18 ; 22 : 18 ; 26 : 4 ; 갈 3 : 8).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를 메시야로 위임한 것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주

신 약속을 동일시하고 있다(창 12 : 1-3). 따라서 여기서 ‘씨’의 헬라어 ‘스페르마

‘(* )는 갈 3 : 16에서 설명되었듯이, ‘여럿을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한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즉 그들

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씨로서 모든 족속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주려고 왔다는 의미이다(롬10 : 15 ; 딤전 1 : 11).

=====3:26

너희게게 먼저 보내사 – 헬라어 성경에서는 “너희에게 먼저’라는 뜻의 ‘휘민 프

로톤'(* )이란 말이 문장 처음에 나와 강조되고 있다. 왜냐하

면 하나님의 구원 게획의순서가 첫째는 유대인이었고 그리고 그 유대인들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롬 1 : 16)) 유대인들은 본문의 진술대로 하

나님의 특별하신 주권적 은혜에 의해서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언약의 자손이요, 씨

를 가진자손들이었기에 구원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따

라서 사도는 이 큰 축복과 특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롬 1 : 16 ; 2 : 10 ; 11 : 1).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 하나님께서 종을 먼저

보내신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힌다.즉 19절의 반복으로 각인이 회개하여 악

함을 버리고 그리스도께 돌아올 것을 호소하는 것으로 사도의 간절한 설교는 끝을 맺

는다(겔 3 : 19 ; 18 : 27 ; 33 : 14 ; 욘3 : 10).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 하나님의 은

혜를 받게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했기 때문이다. 본장의 주석을 마감

하면서 한 가지 분명히 밝힐 것은 본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앉은뱅이가 고침받는 기적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앉은뱅이의 치유 기적 자체만 강조하여 논한다면 우리는 나

무는 보고 정녕 숲은 못보는 근시안적인 안목을 가진 자가 되고 말것이다. 왜나하면

기적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표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장에서는 그 기

적이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의 전

(全)구속 경륜(求續經綸)을 설명하면서 증거한 베드로의 훌륭한 설교에 초점이 모아짐

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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