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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 장 주석 | [하루 한 장] 로마서10장_자기 의를 세우려고 18220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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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8. 19 (수) [하루 한 장]“자기 의를 세우려고” (롬10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로마서 10장은 9장에 이어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신앙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 이들이 돌아와
구원 받기를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은 문제는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그것이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심과 야망에 매여서
결국 하나님의 열심에는 반하는
불순종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른 채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애쓰는 건
모든 인간이 꿈꾸는 바이지만
죄에 물든 인간이 율법을 다 지켜
자기 의를 세우는 건 환상입니다
불가능한 꿈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자기 의를 세우려는
모든 사람은 헛된 야망에 빠져
자기 인생을 갉아먹고 남도
망치는 나락에 떨어집니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의 의를 붙잡읍시다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성민가족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mp3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분홍목사의 사역 신청 문의도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051-204-0691 (담당 : 성민교회 박지선 간사)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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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protected]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분홍목사 홍융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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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로마서 10 장 주석

  • Author: 홍융희
  • Views: 조회수 5,473회
  • Likes: 좋아요 155개
  • Date Published: 2020. 8. 1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bu0s9q98V5U

로마서 10장 주석

로마서 제 10장

=====10:1

형제들아 – 1:13 주석을 보라.

내 마음에 원하는 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구절은 ‘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 )이다. 여

기 쓰인 ‘멘'(* , ‘한편’)은 주로 ‘데'(* , ‘그러나’, ‘또 한편’)와 같이 쓰여

서 달리 내용을 구별할 때나 반대되는 내용이 전개될 때 사용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데’와 상관없이 쓰여서 내용이 계속됨을 나타낸다. 즉, 본문은 9:33에 이어진 것으로

‘내 마음’을 표현한 ‘에메스 카르디아스'(* )의 ‘에메스'(‘나

의’)는 ‘무'(* , ‘나의’)보다 더 강한 표현이다. 이는 바울의 안타까운 심경(心

境)을 드러낸다. ‘원하는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키아'(* )는 단순

히 ‘바라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라는 표현이라기보다 ‘기뻐하는 것’의 표현이다. 이

단어에서 바울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 ‘구하는 바’의 헬라어 표현은 ‘데에시스'(* ),

즉 ‘간구하는 것’이며 이는 ‘기도하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

)와 구별되는 강한 표현이다(엡 6:18). 따라서 본문에 쓰인 ‘내'(에메스) ‘원하

는 바'(유도키아), ‘구하는 바'(데에시스)등은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간절한 호소와

간구를 담은 강한 어조의 표현들이다.

구원을 얻게 함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 소테리안'(*

)으로 구원을 향한 마음이 목적이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에 담

겨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 확실히 언급했지만 동시에 동족에 대한 안

타까움과 슬픈 마음 또한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열망

은 행 13:46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은 신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10:2

내가 증거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로'(* )는 공적(公

的)인 책임감과 엄숙함을 내포한 단어이다(Cranfield).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

엘의 열심을 개인적인 감정에 앞서 엄숙히 공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 ‘하나님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우'(* )

는 목적격, 소유격으로 ‘하나님을 위한’이나 ‘하나님에 대한’으로 해석해야 한다. ‘열

심’을 표현하는 헬라어 ‘젤론'(* )은 특히 ‘하나님의 영광’이나 ‘성전’, ‘율

법’에 대해 충성하는 그런 열심을 나타낸다(왕상 19:10, 14;왕하 10:16;시 69:9).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성전, 율법들에 대해 대단한 열성을 가졌다. 바울 역시 유

대교에 심취했던 사람으로(갈 1:14) 누구보다 유대교에 열성이었으므로(행 26:5) 이스

라엘의 열심에 대해 바르게 판단할 수 있었으며 동정하는 마음에서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 이는 하나님께 열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열

심이 비난받은 이유이다. ‘지식’을 나타내는 헬라어 ‘에피그노시스'(*

)는 ‘지식’을 표현할 때 일반적으로 쓰이는 헬라어 ‘그노시스'(* )보다

훨씬 강조된 표현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 하나님이 실제(實在)하는

것 이상은 몰랐다. 즉 그들은 구원을 주는 지식(1:17)을 결여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지식이 결여된 그들은 보아도 참으로 알지 못했으며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막 4:12). 그들의 완고한 마음과 고집은 오히려 우매하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

로막았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데 도리어 방해가 되었던 것

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 즉

구원을 주는 지식에 의해서 수반되어야 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10:3

바른 지식이 없는 유대인들이 추구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였다.

원인을 이끄는 문장 서두의 ‘가르'(* , ‘왜냐하면’)는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는 2절 후반부의 설명을 이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 ‘하나님의 의'(*

, 투 데우 디카이오쉬넨)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으로서의 ‘의’라기보다 그리

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이뤄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신약에서 나오는 ‘의’

(Righteousness)는 주로 계약 관계를 전제로 한다. 계약을 수립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계약에 인간을 참여케 하시고 그 중간에 그리스도를 두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

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그것을 믿는 인간들을 ‘의롭다’하시기로 계약을 수립하

신 것이다. 따라서 이 계약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예수를 믿음이다. 하나님

의 자비하심은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다. 그

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길을 불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믿기를 거부

했던 것이다. 여기서 ‘모르고'(* , 아그노운테스)는 ‘하나님의 의’

에 대해 지식이 없었으므로 기인된 ‘오해’를 의미한다(Meyer).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바른 지식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의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

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오해였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 ‘세우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사이'(*

)는 ‘세우다’, ‘정하다’, ‘확증하다’의 뜻이 있다. 즉 ‘하나님의 의’에 맞서 ‘자신

의 의’를 세워 불순종한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힘써’로 번역된 헬라어 ‘제툰테스’

(* )는 현재 분사형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계속 애써 온 것을 나

타낸다.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칭의’의 근원이며 이유이다. 즉, 의를 이루

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란 말은 뒤에 나오는 ‘율법의 마침’을 한정시키

는 말로 ‘율법의 마침’은 그 목적이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

는 유대인을 넘어서서 ‘모든 믿는자’들, 모든 민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즉 그리스도의

의는 공평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유대인일지라도 멸망을 받

으며 반면에 이방인일지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실로 ‘의'(*

, 디카이오쉬넨)은 율법으로나 인간의 행위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공

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칭의의 의를 끝까지 불신한 것이다.

율법의 마침 – 혹자는 여기서 ‘율법'(* , 노모스)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일반적인 법이나 원리를 의미한다고 한다(Meyer, Sanday and Headlam). 또 혹자는 본

문의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특히 9:31)에

서 볼 때 여기서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침’을 가

리키는 헬라어 ‘텔로스'(* )는 (1) 문제의 종결(end), 종료(termination) 혹

은 (2) 목적(aim), 의도(intention), 목표(goal)등 양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종결시켰다는 의미이다(13:10;Calvin, Erasmus, Lenski, Murray, Harrison). (2)는 그

리스도께서 율법의 실제 의미이며 목적과 의도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Hendriksen,

Cranfield). 그 중 (1)이 더 타당하다고 보는데 이유인즉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

향하는 그림자로서 그 역할을 하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實體)로 인해 그 기

능이 종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진행되는 어떤

과정에서 역사상에 주어졌던 것이고 이제 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다

는 의미이다.

=====10:5

모세가 기록하되 – 레 18:5에서 인용된 것으로 모세의 말이 인용된 것은 모세가 유

대인의 율법을 세운 자였기 때문이다. 이기에서 모세는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하나님의

율례’라는 표현을 통하여 구약 여러 부분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느 9:29;겔 20:11,

13, 21) 또한 신약에 넘어와서도 그 사상을 계승되고 있다(7:10;마 19:17;눅 10:28;갈

3:12). 하지만 문제는 누가 과연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있다.

연약한 인생 중에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3:9-18). 오직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율법

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시고(8:3, 4) 자기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신 유일한

분이시다(히 5:8, 9). ‘기록하되’를 가리키는 헬라어 ‘그라페이'(* )는 6,

8절에 나오는 ‘말하되’의 헬라어 ‘레게이'(* )와 의도적으로 대조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레게이’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한 반면 ‘그라페이’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6절 주석 참조).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 – ‘말미암은’의 헬라어 ‘에크'(* )는 ‘…에서 나온’이라

는 뜻으로 그 출신을 나타낸다. ‘율법에서 난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는 의이다.

이는 9:31, 32에 나오는 ‘행위에서 나온 의의 법’을 말한다. 율법은 행함을 요구하며

죄를 알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판결을 받는 길이었다(레

18:5;겔 20:11, 13, 21;눅 10:28). 따라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며 행할 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罪性)은 율법을 완전히 수행할 수 없다. 결국 이스라엘은

의의 법을 좇아 갔지만 법이 요구하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9:31). 유대교의 구원

교리에 따르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면 율법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야 한

다고 보았다. 이렇게 율법을 성취하여 그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이 보장되고, 하나님으

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게 된다고 보았다(Strack-Billerbeck). 그러나 율법은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법에 대한 약속을 하셨고(렘 31:33) 오순절의 성

령 보내심으로 성취되었다(욜 2:28ff.).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

은 믿음이고, 믿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과 부활

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믿는 자들의 의가 되셨기 때문이다.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 본 구절은 앞절(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대조를

이루어 상대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나타났음은 바울의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며 기독론적(christological)인 가르침

의 기본 구조이다(Ridderbos). 그리스도의 죽음은 종말론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며 의롭다하는 판결의 표시이다. 옛 시대(old aeon)와 옛 사람이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심판을 받았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의롭게 했다.

이같이 말하되 – ‘믿음에서 난 의’를 의인화시켰다. 이런 수사법은 바울 당시 철학

적 연설을 할 때 종종 쓰였다. 의인화 용법으로써 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대

조하여 ‘믿음에서 난 의’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 본 구절은 70인역(LXX)의 신 30:12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본 구절은 구약적 문맥에 비추어 보면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롭다하

심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늘에 오르는 것은 (1) 사람으로서 불가

능할 뿐 아니라, (2) 이런 교만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승천하심을 믿지 않는 데서 나오

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율법으로 의를 구하려는 자들의 교만함과

그들의 망상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근본 핵심은 버리고 자신들의 유

전과 행위를 통해 하늘, 즉 의에 이르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마음에…하지 말라 – ‘하지 말라’의 헬라어 ‘메 에이페스'(* )

는 ‘말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믿음을 통한 의’는 율법을 통해 의를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셨고 이것

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를 부인하였다. 이는 하

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정치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해 그들 중에 오

셔서 생명을 주셨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10:7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 ‘음부'(* , 아뷩손)는 6절의 ‘하늘’

(* , 우라논)과 그 높고 깊음에서 대조를 이룬다. 음부의 헬라어 ‘아뵤소

스'(* )는 히브리어 ‘테홈'(* ) 대신 사용된 말이다. ‘테홈’은 ‘물들

의 깊음'(창 1:2)이나 ‘바다의 깊음'(시 107:26)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본문

의 의미는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인 ‘땅의 깊은 곳'(시 71:20), 즉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스올'(* , Sheol)을 의미한다(시 139:8;암 9:2;Murray, Hodge, Cranfield). 음

부에 내려가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당하신 죽음을 믿지 않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無效)로 하는 것이며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 ‘모셔 올리는’의 헬라어 ‘아

나가게인'(* )은 부활을 언급할 때 쓰인다(히 13:20). 이스라엘 중에

이스라엘인들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은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받

아들이지도 않았다.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 앞에서 부정적인 진술을 계속하였지만, 이제는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바울이 언급하고자 하는 주제로 돌아 온다.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 신 30:14의 인용인

데, 70인역에는 ‘심히’에 해당하는 ‘스포드라'(* )가 있으나 본문에서는 생

략하였다. 구약의 문맥에서는 율법을 통해 드러난(reveal)은 혜로운 면이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기의 말씀대로

그들의 입과 마음에 두어 율법을 암송하며 묵상하였던 것이다(시 1:2). 여기서 ‘말씀

이 가깝다’는 것은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마음에 선물로서 그리스도

의 영이 와 계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율법은 상대적 위치인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입

과 마음에 있다는 표현으로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가는 불가능성과 대조하면

서 구원받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밝히 드러낸다.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 이 부분은 인용구에 바울이 첨가시킨 삽입구이

다. ‘전파하는’의 헬라어 본문 ‘케륏소멘'(* )는 ‘가르치다’, ‘설교

하다’, ‘선포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사도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복음의 말씀

을 뜻한다. ‘우리가 전파하는’이라는 한정구는 ‘말씀이 멀리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견해에 있어서 바울이 모세와 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전파된 말씀은 유대인에게나 이

방인에게나 은혜의 말씀으로 구약에 계시된 약속의 말씀, 즉 믿음의 말씀이다. 여기서

‘믿음의 말씀’은 복음의 내용 그 자체이다(Calvin, Cranfield). 그리고 이 말씀은 믿

음을 요구하는 말씀임을 뜻한다(Cranfield). 바울이 신 30:14에 나오는 ‘말씀’을 칭의

(justification)와 같게 본 것은 그리스도가 그 말씀의 실체이며 실제적 의미이기 때

문이다.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 ‘네 입으로’, ‘네 마음으로’는 8절의

‘네 입에’, ‘네 마음에’와 병행을 이룬다.

예수를 주로 – 이는 ‘예수는 주이시다'(Jesus in Lord)란 말이다.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는 헬라 세계에 있어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나 노예

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호칭이었다. 또한 신비 종교(Mystery Religion)

의 신들이었던 이시스(Isis)나 오시리스(Osiris)에게도 사용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통

치자에게 이 명칭을 붙였다. 특히, 하나님의 칭호 ‘야웨'(* )는 칠십인역에서

항상 ‘퀴리오스’로 번역했다. 즉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에 해당

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예수가 주’라는 고백은 교회 최초의 신앙 고백의 형태로서(행 2:36;고전

12:3) 예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고백에는 경배의 대상이며 승천

하신 구주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 ‘살리신’의 헬라어 ‘에게이렌'(* )는

‘일으키다’라는 말로서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 아파르케)가 되셨다는 뜻이다(고전 15:2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서 부활하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부활을 소망케하는 종말론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하

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로 높이심으로 하

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의 주되심을 시인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의 다시 사심을 고백했고 믿었던 것

이다(빌 2:9-11).

네 마음에 믿으면 –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에 믿는 것은 불가 분리의 관계이

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마음에서 믿는 만큼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 신

앙 고백을 전제한 것으로서 외식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입->마음의 순서는 인용문

신명기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10절에서는 그 바른 순서, 즉 마음속에 믿는 것과 입으

로 고백하는 자연적인 순서로 말한다.

구원을 얻으리니 – 헬라어 본문 ‘소데세'(* )는 미래형으로 종말론적 구

원(eschatological salvation)을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의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 입으로 시인하게 하며 구원에 이르게 한다.

=====10:10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마음’-‘입’,

‘믿는 것’-‘시인하는 것’은 문장에 있어서 균형을 유지한다. 또한 ‘의에 이르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은 본문에서 역으로 사용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다. 본절은 본서의

주제가 되는 1:16, 17의 구절을 기억시키는 내용으로서 믿고 시인함이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한다. ‘믿어’와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에타이'(*

)와 ‘호몰로게이타이'(* )는 수동태로서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 있

음을 나타낸다. 즉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시인에 이

르게 됨을 나타낸 것이다(고후 5:14-15). ‘의에 이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얻

어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

인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이며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람 앞에서 주 예수를 입으

로 시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을 아무 두려움 없이 공언하는 것이다(마 10:32;막

8:38;눅 12:8). 특히, 시인(是認)은 지적인 확인을 넘어 생활의 차원에서 삶으로 고백

되어져야 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강요당하고 핍박받을 때 주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시인은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 때 직면하게 되는 구체적 탄압과 고

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구원을 정직하게 표명(表明)하는 차

원까지도 의미한다.

=====10:11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 9:33과 같이 사 28:16로

부터 인용된 구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더 강조된 형태로 인용되었다. 즉 ‘저를 믿

는자’란 말 앞에 ‘누구든지’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Hendriksen). 이렇게 강조된 것은

앞에 언급된 4-10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바

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구원이 유대 민족에게만 독점되어지고 또한 이방인에

게 있어서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에게만 국한시켰던 것을 확장시켜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자에게 허락되어졌음을 선포하고 있다(Godet).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부끄러움을 당

하지 않는다는 이 문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그 어떤 종족이든지 차별을 받지 않고 똑

같이 적용되어진다. 설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어떤면에 있어서는 ‘차별'(*

, 디아스톨레)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다

(3:22). 그런데 바울은 실제로 그의 서신서에서 유대인의 우선권에 강조점을 두고 있

었고(1:16;2:9, 10),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Covenant) 아래서는 이스라엘이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3:1, 2:9:4, 5). 그러나 이는 구원 경륜의 순서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특권을 받은 것을 나타낼 뿐이다. 구원에 있어서는 유대인과 헬라

인, 기타 이방인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Dunn).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 바울

은 구원이 유대인과 헬라인 그외 모든 이방 민족에게 차별이 없는 분명한 이유를 ‘한

주께서'(the same Lord)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Lenski).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주'(* , 퀴리

오스판톤, Lord of all)로 묘사하고 있는데 만일 유대인이 하나님을 주님(Lord)으로

믿고 있다면 그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주님이 되어야만 한다

(3:29, 30). 이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구세주(救世主)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동일하

다.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 기타 이방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다(Dunn).

더구나 주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부르는 모든 자를 부요하게 하신다.’ 이는

주님의 부요함을 말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의 보편적이고 동일한 은혜가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의미이다(Godet). 여기서 ‘부요하시도다’는 헬라어로 ‘플루

톤'(*

)인데 능동적인 개념으로 ‘자비하다’와 ‘은혜롭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Calvin). 이것은 주님의 구원의 은혜와 그 능력은 무한하여 그가 부르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려는 선한 뜻은 결코 약화되거나 다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그리

스도를 믿는 자는 부요하신 주 하나님께(시 50:10-12;학 2:8;엡 3:8;계 5:12)속하여

항상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됨으로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2:4;9:23;요

10:10;고후 8:9;엡 2:7).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앞절에서 말한 내용을 더욱 강력하게 확증하고 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사실은 이미 구약성경 욜 2:32에

예언되어 있었다(Godet).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구

원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고 하였다(Calvin). 요엘에 의해 약속된 하나님의 이 말

씀을, 베드로는 예수님 승천 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

을 설명하면서 인용하였다(행 2:16-21). 바울도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요엘서의 ‘여호

와'(Jehova)를 ‘주'(Lord)와 동일시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는 ‘예수 그리스

도’를 가리킨다(Alford, Harrison). 실제로 70인역(LXX)에는 언제나 ‘야웨’를 관사가

없는 ‘퀴리오스'(* )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구약에서의 ‘야웨’가 곧 그리스도 예수와 동일한 하

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주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증거가 되

게 하며 또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구

원 사이에 완전한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Dunn).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란 주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자 곧 주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자

는 하나님의 칭의(justification)를 받아 구원 받은 자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10:14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바울은 이제 복음을 확장하여 범세계

적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Bruce). 그래서 그는 믿음과의 관

계에서 제일 먼저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양자간에는 밀접한 연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Calvin). 주는 신뢰하고 믿을 만한 분이며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결국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를 부

르는 일이 믿음의 첫걸음임을 가리킨다. 여기서 ‘어찌 부르리요'(How then shall they

call on, KJV, NIV)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포스 에피칼레손타이'(*

)로 ‘에피칼레손타이’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다’의 뜻을 가진

‘에피칼레오'(* )의 3인칭 복수 부정과거 중간태로서 가정법으로 쓰여

졌다. 이는 ‘그들을 부를 수 없다’라는 의미이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 바울은 두번째로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그리스

도에 대하여 듣는 것으로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도 ‘포스'(* ,

‘어떻게’)를 사용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표현법을 쓰고 있다. 그는 이러한 논리적인 논

증을 통해 믿음은 지식에 근거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은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하려면 먼저 그 복음을 들어야함 한다. 한편 초대 교회 당시 대부분 사람

들의 복음 전수(傳受) 방법은 메시지를 ‘듣는 것’이었다. 비록 소수의 교회가 바울의

서신을 받기는 하였지만 신약성경이 문자와 글로 읽을 수 있는 기록으로 갖추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복음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구두(口頭)로 전달되어야

했다. 이같은 일은 성경의 전 시대에 걸쳐 일반적으로 계속 행해져 내려왔다

(Harrison). 왜냐하면 전파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과 신앙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 전파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전형적인 방법이 되었다(Calvin).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세번째로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사도나 전도자의 직책

을 중요시하고 있다(Bruce).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증언함으로 그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전파자’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케륏손토스'(*

)로 ‘케륏소'(* , ‘전파하다’, ‘가르치다’)의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여기서 ‘전파자’라는 말 앞에 관사가 없는데 이는 어떤 특별한 직책에 있는 사도들이

나 전도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파하는 모든 자'(someone preaching, NIV)를 의

미한다(Lenski). 헬라어 ‘케륏소'(* )는 ‘전파하다’, ‘알리다’의 뜻인데

이것은 왕이나 사령관의 메시지를 공개하여 알리는 전령의 행위로서 전령은 왕이 명령

한 이외의 말을 가감할 수 없었으며 단지 왕의 명령을 자신의 음성으로 대언(代言)하

는 역할만 하였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LXX) 많이 사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

지자들이나 사도들 역시 이 말이 깊은 의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메시야에

대한 전파나 종말론적인 언급(사 61:1;막 1:4, 7, 14, 38, 39;눅 4:18, 19;행

20:25;28:31)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 단어를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의 견

지에서 사용하였다(갈 2:2;골 1:23).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바울은 전도자가 복음을 전한 것은

이미 그 이전에 누군가가 그 전도자에게 ‘보내심’의 권위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

고 있다(Hendriksen). 즉 전도자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권위는 그 선포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명령과 위임이라는 점에 있다(Bruce). 여기서 ‘보내심’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포스탈로신'(* )은 ‘아포스텔로'(* , ‘보내

다’)의 부정과거 수동태 가정법으로 ‘사도'(* , 아포스톨로스)란 단

어가 이 동사에서 파생되었다(Robertson).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인간은 보다 높은 권위 아래 존재하며 (2) 보내심을 받은 자의

메시지는 그 자신이 아니라 보내는 자에 의해서 주어진다. 이러한 두 가지면에서 예언

자들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었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다(요

3:34;7:16). 이것은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진다. 모든 성도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서 그가 세우시지

않은 복음 전파자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궁극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예수의 복음 전

도자로서 전세계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며 그 결과로 전파된 말씀을 듣고 열방

들이 기뻐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Godet).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 바울은 다시 한번 바벧론 포로 생

활 동안 황폐되어 있었던 예루살렘 도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선

지자 이사야의 말로써 그 자신의 이야기를 확증하고 있다. 이 말씀은 사 52:7의 인용

구절로서 원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가까왔다는 기쁨과 평화의 선포였다. 그러나 신약

에서는 복음의 전달로 해석한다. 이스라엘이 바벧론왕 고레스 치하(治下)에서부터 구

출을 받은 것은 모세에 의하여 애굽왕 바로의 치하에서 구출을 받은 것처럼 죄와 사망

으로부터 구출받는,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질 보다 완전하고 큰 구원을 예

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유대 민족이 바벧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리

라는 메시지가 기쁜 소식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 안에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있다는

메시지는 그보다 훨씬 더 기쁜 소식인 것이다.

=====10:16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 유대인들은 전파된 복음을 대부분 믿지

않았다. 바울은 이것을 완곡어법(litotes)을 사용하여 말하고 있다. 즉 그들 중 일부

만이 복음에 순종하였다는 의미이다(사 53:1;고전 10:5).

이사야가 가로되…누가 믿었나이까 – 바울은 사 53:1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스라엘

의 불순종을 확증하고 있다. 바울이 앞절에서 인용한 사 52:7과 본절에서 인용한 사

53:1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고난받는

종에 의한 구원의 메시지가 거부되리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말

씀은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의 불신앙을 예언하는 구절로 널리 사용되었으며(11:8) 친

히 예수께서도 공생애 동안 사역하시면서 그 백성이 그를 메시야로 믿지 않는다는 사

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하기도 하였다(Bruce). 그리고 역사는 그 예언을 확증해 왔

다(고전 1:23). 혹자(Calvin)는 이사야가 이 말을 한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빛을 우리 안에 조명해 주실 때에야 비로소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

졌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한 특별 계시에 의하여 구원은 내적으로 소명받은 자, 즉

선택 받은 자에게 국한되는 것을 보여준다(Calvin).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바

울은 결론적 접속사 ‘그러므로'(* , 아라;so then, KJV)를 사용하여 그의 논리를

결론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는 믿음에 대해서 결론짓기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

서 온다고 정의한다. ‘들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코에스'(* )로 ‘듣는 행

위'(act of hearing)나 ‘들려 오는 것'(that which is heard)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앞절(16절)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할 때 ‘전하는 바'(아코에)와 동일하게 사용

되었다. 그러나 앞절과 차이점은 전자는 수동태로 ‘들려진 말'(was heard)의 의미로

쓰여진 반면에 본절에서는 능동태로 메시지를 ‘들음'(hearing)의 의미로 쓰여졌다

(Hendriksen). 또한 바울은 구원얻는 신앙 곧 믿음은 듣는 행위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

리스도의 말씀으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

, 레카토스 크리스투)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다

(Harrison). 따라서 바울은,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에

근거한다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 바울은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불신앙에 대한 이스라엘의 변명의 소지를 철저히 차단시키고 있다. 즉, 이스라엘이 그

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는 가능성

을 차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믿음을 얻게 되는 ‘들음'(hearing)의 기회가

이스라엘에게는 가장 확실하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가 듣

지 아니하였느뇨'(* , 메 우크 에쿠산)는 ‘그들이 듣지 못

했는가 ?'(새번역, 공동번역; Did they not hear ?, NIV)라는 의미가 좀더 적절하다.

여기서 헬라어 ‘메’와 ‘우크’는 부정을 강조하여 ‘그들이 듣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렇지 ?’라는 말이다(Dunn, Lenski). 결국 바울은 유대인들이 결코 듣지 못해서, 즉 전

도를 받지 못해서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은 아니라고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그 소리가…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 바울은 그의 이러한 논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시 19:4을 인용하면서 복음 전파의 편만성(遍滿性)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

을 복음이 전세계에 완전히 전파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바울이 시편의 말씀

을 인용한 초점은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즉, 복음 전파는 궁극적으로 전세

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당시나

초대 교회 시대에 복음이 매우 신속하게 편만히 전파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5:22-24;요 12:19;행 2:41, 47;4:4;17:6;빌 1:12, 13;골 1:6).

=====10:19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 바울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듣기는 했지만 깨닫지 못했으므로 거부했다는 반문이 나올 수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반박을 예상하여 앞절에서의 ‘들음'(hearing)에 관한 질문에서 전환하여 이제

‘앎'(knowing)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여기서도 앞절에서와 같이 헬라어 부정불

변사 ‘메'(* )를 사용하여서 부정적인 대답을 암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

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주어졌지만 거절한 것처럼 복음의 의미와 불신앙의 결과가 무

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절하였다(Lenski). 그러므로 바울

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복음에 대한 앎의 부족이나 깨달음의 결여로 비롯되었

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Harrison). 결국 이 말씀이 암시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그들이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으려 하는 마음이 없었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Hendriksen).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 이는 신 32:21의

인용으로 이 구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의 노래 중 일부인데,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

들의 불신앙에 대한 예언으로 많이 인용되었다(11:11).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의 사악성을 질책하였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켰으

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질투를 야기시키는 어떤 일을 추진하게 된 것이

다. 그 일은 미련한 백성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백성 아닌 자'(*

, 에프 우크 에드네이)와 ‘미련한 백성'(* , 에프

에드네이 아수네토)은 다같이 이방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단절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들

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었고 또한 어리석은 민족들이었다(Bruce).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용을 베푸셔서 그가 친히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존귀하게 하심으

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시켰다.

=====10:20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 바울은 이스라엘이 불순종에 대해 변명할 수 없

도록 이전의 증거보다 더욱 강력한 증거를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역설하고

있다. ‘매우 담대하여’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포톨마'(* )로 ‘담대한

태도를 취하다’의 뜻을 지닌 ‘아포톨마오'(* )의 현재 능동태 직설법

으로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온다.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나타났노라 – 이 말씀은 사 65:1의 인용으로 분

명히 앞절(신 32:21)에서 선포된 내용을 더욱 강하게 확증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

이다.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한 백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기까지 이스라엘이 불순종

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철저한 불순종을 증거하고 있다. 바

울은 이방인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어 정의하기를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은 자들’이라 하였다(Dunn). 그는 이방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틀에 박힌 멸

시와 배척, 자기 우월주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던 이방

인들마저도 복음을 듣고 순종하여 구원이 임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

라엘은 불순종함으로 구원을 거절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께 구하지도

문의 하지도 않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가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통해

서 자신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대로 구원을 베풀 수 있는 주권적인 능력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Hendriksen, Calvin).

=====10:21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 – 앞절에서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로 복

음을 순종한 사건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사 65:1)을 통해서 인용하였다. 이번에는

역설적으로 사 65:2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강조하여 지적하고 있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스 라온 아페이둔타 카이 안틸레곤타'(*

)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

을 병행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페이둔타'(* )는 이스라엘의 불신

앙을 나타내는 것이고 ‘안틸레곤타'(* )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결과로 나타나는 완악한 행동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까지 포함하고 있

다(Lenski). 이처럼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

회가 없었다거나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원래부터,

즉 모세와 선지자들의 시대에서부터 완악하고 반역적인 기질이 있었으며 이러한 기질

로 인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서 기인한 것이다(Harrison). 하나님을 향한 이러

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을 예수께서도 탄식하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

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

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7, 38)고 책망하고 있다.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함에도 불구하고 하

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베푸셨는가를 탄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종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홀렌 텐 헤메란'(* )

은 시간의 범위를 나타내는 목적격으로 ‘매일'(Michel), ‘지속적으로'(Cranfield)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다(Dunn). 또한 ‘손을 벌렸노

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여세페타사 타스 케이라스'(*

)로 부성애(父性愛)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의 품에 정

답게 안아 주기 위해서 손을 벌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인내와

사랑의 손을 벌리고 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눅 15:20).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

엘이 그에게 돌아와 그를 사랑하고 순종하게 하려는 뜻을 가지고 끊임없이 그의 백성

을 찾고 또 손을 뻗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참히 거절하고 말았다(Harrison).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自招)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은 완전한 이스라엘의 책임인 것이다.

헬라어 로마서 10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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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포이 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 카이 헤 데에시스 프로스 톤 데온 휘페르 아우톤 에이스 소테리안

개역개정,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새번역,1 ㉠형제자매 여러분, 내 마음의 간절한 소원과 내 동족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내 기도의 내용은, 그들이 구원을 얻는 일입니다. / ㉠그, ‘형제들’

우리말성경,1 형제들이여, 내 마음의 소원과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 형제 여러분, 내 마음의 소원,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는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영어NIV,1 Brothers, my heart’s desire and prayer to God for the Israelites is that they may be saved.

영어NASB,1 Brethren, my heart’s desire and my prayer to God for them is for their salvation.

영어MSG,1 Believe me, friends, all I want for Israel is what’s best for Israel: salvation, nothing less. I want it with all my heart and pray to God for it all the time.

영어NRSV,1 Brothers and sisters, my heart’s desire and prayer to God for them is that they may be saved.

헬라어신약Stephanos,1 αδελφοι η μεν ευδοκια της εμης καρδιας και η δεησις η προς τον θεον υπερ του ισραηλ εστιν εις σωτηριαν

라틴어Vulgate,1 fratres voluntas quidem cordis mei et obsecratio ad Deum fit pro illis in salutem

히브리어Modern,1 אחי חפץ לבבי ותפלתי לאלהים בעד ישראל אשר יושעו׃

성 경: [롬10: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 형제들아 – 1:13 주석을 보라.

󰃨 내 마음에 원하는 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구절은 ‘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이다. 여기 쓰인 ‘멘'(*, ‘한편’)은 주로 ‘데'(*, ‘그러나’, ‘또 한편’)와 같이 쓰여서 달리 내용을 구별할 때나 반대되는 내용이 전개될 때 사용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데’와 상관없이 쓰여서 내용이 계속됨을 나타낸다. 즉, 본문은 9:33에 이어진 것으로 ‘내 마음’을 표현한 ‘에메스 카르디아스'(*)의 ‘에메스'(‘나의’)는 ‘무'(*, ‘나의’)보다 더 강한 표현이다. 이는 바울의 안타까운 심경(心境)을 드러낸다. ‘원하는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키아'(*)는 단순히 ‘바라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라는 표현이라기보다 ‘기뻐하는 것’의 표현이다. 이 단어에서 바울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 ‘구하는 바’의 헬라어 표현은 ‘데에시스'(*), 즉 ‘간구하는 것’이며 이는 ‘기도하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와 구별되는 강한 표현이다(엡 6:18). 따라서 본문에 쓰인 ‘내'(에메스) ‘원하는 바'(유도키아), ‘구하는 바'(데에시스)등은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간절한 호소와 간구를 담은 강한 어조의 표현들이다.

󰃨 구원을 얻게 함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 소테리안'(*)으로 구원을 향한 마음이 목적이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에 담겨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 확실히 언급했지만 동시에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픈 마음 또한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열망은 행 13:46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은 신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마르튀로 가르 아우토이스 호티 겔론 데우 에쿠신 알 우 캍 에피그노신

개역개정,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새번역,2 나는 증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성경,2 내가 그들에 대해 증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성경,2 나는 그들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한 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입니다.

영어NIV,2 For I can testify about them that they are zealous for God, but their zeal is not based on knowledge.

영어NASB,2 For I bear them witness that they have a zeal for God, but not in accordance with knowledge.

영어MSG,2 I readily admit that the Jews are impressively energetic regarding God–but they are doing everything exactly backwards.

영어NRSV,2 I can testify that they have a zeal for God, but it is not enlightened.

헬라어신약Stephanos,2 μαρτυρω γαρ αυτοις οτι ζηλον θεου εχουσιν αλλ ου κατ επιγνωσιν

라틴어Vulgate,2 testimonium enim perhibeo illis quod aemulationem Dei habent sed non secundum scientiam

히브리어Modern,2 כי מעיד אני עליהם שיש להם קנאה לאלהים אך לא בדעת׃

성 경: [롬10:2]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 내가 증거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로'(*)는 공적(公的)인 책임감과 엄숙함을 내포한 단어이다(Cranfield).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열심을 개인적인 감정에 앞서 엄숙히 공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 ‘하나님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우'(*)는 목적격, 소유격으로 ‘하나님을 위한’이나 ‘하나님에 대한’으로 해석해야 한다. ‘열심’을 표현하는 헬라어 ‘젤론'(*)은 특히 ‘하나님의 영광’이나 ‘성전’, ‘율법’에 대해 충성하는 그런 열심을 나타낸다(왕상 19:10, 14;왕하 10:16;시 69:9).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성전, 율법들에 대해 대단한 열성을 가졌다. 바울 역시 유대교에 심취했던 사람으로(갈 1:14) 누구보다 유대교에 열성이었으므로(행 26:5) 이스라엘의 열심에 대해 바르게 판단할 수 있었으며 동정하는 마음에서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 이는 하나님께 열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열심이 비난받은 이유이다. ‘지식’을 나타내는 헬라어 ‘에피그노시스'(*)는 ‘지식’을 표현할 때 일반적으로 쓰이는 헬라어 ‘그노시스'(*)보다 훨씬 강조된 표현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 하나님이 실제(實在)하는 것 이상은 몰랐다. 즉 그들은 구원을 주는 지식(1:17)을 결여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지식이 결여된 그들은 보아도 참으로 알지 못했으며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막 4:12). 그들의 완고한 마음과 고집은 오히려 우매하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았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데 도리어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 즉 구원을 주는 지식에 의해서 수반되어야 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아그노운테스 가르 텐 투 데우 디카이오쉬넨 카이 텐 이디안 디카이오쉬넨 제툰테스 스테사이 테 디카이오쉬네 투 데우 우크 휘페타게산

개역개정,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새번역,3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을 씀으로써,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말성경,3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쓰면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성경,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어NIV,3 Since they did not know the righteousness that comes from God and sought to establish their own, they did not submit to God’s righteousness.

영어NASB,3 For not knowing about God’s righteousness, and seeking to establish their own, they did not subject themselves to the righteousness of God.

영어MSG,3 They don’t seem to realize that this comprehensive setting-things-right that is salvation is God’s business, and a most flourishing business it is. Right across the street they set up their own salvation shops and noisily hawk their wares. After all these years of refusing to really deal with God on his terms, insisting instead on making their own deals, they have nothing to show for it.

영어NRSV,3 For, being ignorant of the righteousness that comes from God, and seeking to establish their own, they have not submitted to God’s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3 αγνοουντες γαρ την του θεου δικαιοσυνην και την ιδιαν δικαιοσυνην ζητουντες στησαι τη δικαιοσυνη του θεου ουχ υπεταγησαν

라틴어Vulgate,3 ignorantes enim Dei iustitiam et suam quaerentes statuere iustitiae Dei non sunt subiecti

히브리어Modern,3 כי את צדקת אלהים לא ידעו ויבקשו להקים את צדקתם ובעבור זאת לצדקת אלהים לא נכנעו׃

성 경: [롬10:3]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바른 지식이 없는 유대인들이 추구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였다. 원인을 이끄는 문장 서두의 ‘가르'(*, ‘왜냐하면’)는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는 2절 후반부의 설명을 이끈다.

󰃨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 ‘하나님의 의'(*, 투 데우 디카이오쉬넨)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으로서의 ‘의’라기보다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이뤄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신약에서 나오는 ‘의'(Righteousness)는 주로 계약 관계를 전제로 한다. 계약을 수립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계약에 인간을 참여케 하시고 그 중간에 그리스도를 두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그것을 믿는 인간들을 ‘의롭다’하시기로 계약을 수립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계약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예수를 믿음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길을 불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믿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여기서 ‘모르고'(*, 아그노운테스)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 지식이 없었으므로 기인된 ‘오해’를 의미한다(Meyer).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바른 지식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의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오해였다.

󰃨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 ‘세우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사이'(*)는 ‘세우다’, ‘정하다’, ‘확증하다’의 뜻이 있다. 즉 ‘하나님의 의’에 맞서 ‘자신의 의’를 세워 불순종한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힘써’로 번역된 헬라어 ‘제툰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계속 애써 온 것을 나타낸다.

텔로스 가르 노무 크리스토스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판티 토 피스튜온티

개역개정,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새번역,4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마침이 되셔서,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의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말성경,4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사람들이 의에 이르게 하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가톨릭성경,4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영어NIV,4 Christ is the end of the law so that there may be righteousness for everyone who believes.

영어NASB,4 For Christ is the end of the law for righteousness to everyone who believes.

영어MSG,4 The earlier revelation was intended simply to get us ready for the Messiah, who then puts everything right for those who trust him to do it.

영어NRSV,4 For Christ is the end of the law so that there may be righteousness for everyone who believes.

헬라어신약Stephanos,4 τελος γαρ νομου χριστος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παντι τω πιστευοντι

라틴어Vulgate,4 finis enim legis Christus ad iustitiam omni credenti

히브리어Modern,4 כי המשיח סוף התורה לצדקה לכל המאמין בו׃

성 경: [롬10:4]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칭의’의 근원이며 이유이다. 즉, 의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란 말은 뒤에 나오는 ‘율법의 마침’을 한정시키는 말로 ‘율법의 마침’은 그 목적이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는 유대인을 넘어서서 ‘모든 믿는자’들, 모든 민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즉 그리스도의 의는 공평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유대인일지라도 멸망을 받으며 반면에 이방인일지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실로 ‘의'(*, 디카이오쉬넨)은 율법으로나 인간의 행위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공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칭의의 의를 끝까지 불신한 것이다.

󰃨 율법의 마침 – 혹자는 여기서 ‘율법'(*, 노모스)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일반적인 법이나 원리를 의미한다고 한다(Meyer, Sanday and Headlam). 또 혹자는 본문의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특히 9:31)에서 볼 때 여기서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침’을 가리키는 헬라어 ‘텔로스'(*)는 (1) 문제의 종결(end), 종료(termination) 혹은 (2) 목적(aim), 의도(intention), 목표(goal)등 양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종결시켰다는 의미이다(13:10;Calvin, Erasmus, Lenski, Murray, Harrison). (2)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실제 의미이며 목적과 의도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Hendriksen, Cranfield). 그 중 (1)이 더 타당하다고 보는데 이유인즉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그림자로서 그 역할을 하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實體)로 인해 그 기능이 종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진행되는 어떤 과정에서 역사상에 주어졌던 것이고 이제 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모위세스 가르 그라페이 텐 디카이오쉬넨 텐 에크 투 노무 호티 호 포이에사스 아우타 안드로포스 제세타이 엔 아우토이스

개역개정,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새번역,5 모세는 율법에 근거한 의를 두고 기록하기를 ㉡”율법을 행한 사람은 그것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 ㉡레 18:5

우리말성경,5 모세는 율법으로 인한 의에 대해 기록하기를 “율법을 행한 사람은 그것으로 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레18:5

가톨릭성경,5 모세는 율법에서 오는 의로움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실천하는 이는 그것들로 살 것이다.”

영어NIV,5 Moses describes in this way the righteousness that is by the law: “The man who does these things will live by them.”

영어NASB,5 For Moses writes that the man who practices the righteousness which is based on law shall live by that righteousness.

영어MSG,5 Moses wrote that anyone who insists on using the law code to live right before God soon discovers it’s not so easy–every detail of life regulated by fine print!

영어NRSV,5 Moses writes concerning the righteousness that comes from the law, that “the person who does these things will live by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5 μωσης γαρ γραφει την δικαιοσυνην την εκ του νομου οτι ο ποιησας αυτα ανθρωπος ζησεται εν αυτοις

라틴어Vulgate,5 Moses enim scripsit quoniam iustitiam quae ex lege est qui fecerit homo vivet in ea

히브리어Modern,5 כי משה כתב על דבר הצדקה מתוך התורה אשר יעשה אתם האדם וחי בהם׃

성 경: [롬10:5]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모세가 기록하되 – 레 18:5에서 인용된 것으로 모세의 말이 인용된 것은 모세가 유대인의 율법을 세운 자였기 때문이다. 이기에서 모세는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하나님의 율례’라는 표현을 통하여 구약 여러 부분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느 9:29;겔 20:11, 13, 21) 또한 신약에 넘어와서도 그 사상을 계승되고 있다(7:10;마 19:17;눅 10:28;갈 3:12). 하지만 문제는 누가 과연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있다. 연약한 인생 중에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3:9-18). 오직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시고(8:3, 4) 자기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신 유일한 분이시다(히 5:8, 9). ‘기록하되’를 가리키는 헬라어 ‘그라페이'(*)는 6, 8절에 나오는 ‘말하되’의 헬라어 ‘레게이'(*)와 의도적으로 대조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레게이’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한 반면 ‘그라페이’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6절 주석 참조).

󰃨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 – ‘말미암은’의 헬라어 ‘에크'(*)는 ‘…에서 나온’이라는 뜻으로 그 출신을 나타낸다. ‘율법에서 난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는 의이다. 이는 9:31, 32에 나오는 ‘행위에서 나온 의의 법’을 말한다. 율법은 행함을 요구하며 죄를 알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판결을 받는 길이었다(레 18:5;겔 20:11, 13, 21;눅 10:28). 따라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며 행할 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罪性)은 율법을 완전히 수행할 수 없다. 결국 이스라엘은 의의 법을 좇아 갔지만 법이 요구하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9:31). 유대교의 구원 교리에 따르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면 율법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율법을 성취하여 그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이 보장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게 된다고 보았다(Strack-Billerbeck). 그러나 율법은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법에 대한 약속을 하셨고(렘 31:33) 오순절의 성령 보내심으로 성취되었다(욜 2:28ff.).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은 믿음이고, 믿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과 부활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믿는 자들의 의가 되셨기 때문이다.

헤 데 에크 피스테오스 디카이오쉬네 후토스 레게이 메 에이페스 엔 테 카르디아 수 티스 아나베세타이 에이스 톤 우라논 퉅 에스틴 크리스톤 카타가게인

개역개정,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새번역,6 그러나 믿음에 근거한 의를 두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마음 속으로 ‘누가 하늘에 올라갈 것이냐’ 하고 말하지 말아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 ㉢신 30:12

우리말성경,6 그러나 믿음으로 인한 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속으로 ‘누가 하늘로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이것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입니다.) 신30:12

가톨릭성경,6 그러나 믿음에서 오는 의로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 누가 하늘로 올라가리오?’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영어NIV,6 But the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says: “Do not say in your heart, ‘Who will ascend into heaven?'” (that is, to bring Christ down)

영어NASB,6 But the righteousness based on faith speaks thus, “DO NOT SAY IN YOUR HEART, ‘WHO WILL ASCEND INTO HEAVEN?’ (that is, to bring Christ down),

영어MSG,6 But trusting God to shape the right living in us is a different story–no precarious climb up to heaven to recruit the Messiah,

영어NRSV,6 But the righteousness that comes from faith says, “Do not say in your heart, ‘Who will ascend into heaven?'” (that is, to bring Christ down)

헬라어신약Stephanos,6 η δε εκ πιστεως δικαιοσυνη ουτως λεγει μη ειπης εν τη καρδια σου τις αναβησεται εις τον ουρανον τουτ εστιν χριστον καταγαγειν

라틴어Vulgate,6 quae autem ex fide est iustitia sic dicit ne dixeris in corde tuo quis ascendit in caelum id est Christum deducere

히브리어Modern,6 והצדקה אשר מתוך האמונה כה אמרת אל תאמר בלבבך מי יעלה השמימה הלא זאת היא להוריד את המשיח׃

성 경: [롬10:6]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 본 구절은 앞절(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대조를 이루어 상대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나타났음은 바울의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며 기독론적(christological)인 가르침의 기본 구조이다(Ridderbos). 그리스도의 죽음은 종말론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심판이며 의롭다하는 판결의 표시이다. 옛 시대(old aeon)와 옛 사람이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심판을 받았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의롭게 했다.

󰃨 이같이 말하되 – ‘믿음에서 난 의’를 의인화시켰다. 이런 수사법은 바울 당시 철학적 연설을 할 때 종종 쓰였다. 의인화 용법으로써 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대조하여 ‘믿음에서 난 의’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 본 구절은 70인역(LXX)의 신 30:12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본 구절은 구약적 문맥에 비추어 보면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늘에 오르는 것은 (1) 사람으로서 불가능할 뿐 아니라, (2) 이런 교만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승천하심을 믿지 않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율법으로 의를 구하려는 자들의 교만함과 그들의 망상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근본 핵심은 버리고 자신들의 유전과 행위를 통해 하늘, 즉 의에 이르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 네 마음에…하지 말라 – ‘하지 말라’의 헬라어 ‘메 에이페스'(*)는 ‘말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믿음을 통한 의’는 율법을 통해 의를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있다.

󰃨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셨고 이것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를 부인하였다. 이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정치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해 그들 중에 오셔서 생명을 주셨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에 티스 카타베세타이 에이스 텐 아뷔쏜 퉅 에스틴 크리스톤 에크 네크론 아나가게인

개역개정,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새번역,7 또 ㉣’누가 ㉤지옥에 내려갈 것이냐’ 하고 말하지도 말아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 ㉣신 30:13 ㉤또는 ‘깊은 곳’

우리말성경,7 혹은 “‘누가 지옥에 내려가겠느냐?’ 하지도 말라.” (이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입니다.) 신30:13

가톨릭성경,7 또 말합니다. “‘ 누가 지하로 내려가리오?’ 하지 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모시고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영어NIV,7 “or ‘Who will descend into the deep?'” (that is, to bring Christ up from the dead).

영어NASB,7 or ‘WHO WILL DESCEND INTO THE ABYSS?’ (that is, to bring Christ up from the dead). ”

영어MSG,7 no dangerous descent into hell to rescue the Messiah.

영어NRSV,7 “or ‘Who will descend into the abyss?'” (that is, to bring Christ up from the dead).

헬라어신약Stephanos,7 η τις καταβησεται εις την αβυσσον τουτ εστιν χριστον εκ νεκρων αναγαγειν

라틴어Vulgate,7 aut quis descendit in abyssum hoc est Christum ex mortuis revocare

히브리어Modern,7 או מי ירד לתהום זאת היא להעלות את המשיח מן המתים׃

성 경: [롬10:7]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 ‘음부'(*, 아뷩손)는 6절의 ‘하늘'(*, 우라논)과 그 높고 깊음에서 대조를 이룬다. 음부의 헬라어 ‘아뵤소스'(*)는 히브리어 ‘테홈'(*) 대신 사용된 말이다. ‘테홈’은 ‘물들의 깊음'(창 1:2)이나 ‘바다의 깊음'(시 107:26)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본문의 의미는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인 ‘땅의 깊은 곳'(시 71:20), 즉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스올'(*, Sheol)을 의미한다(시 139:8;암 9:2;Murray, Hodge, Cranfield). 음부에 내려가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당하신 죽음을 믿지 않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無效)로 하는 것이며 부인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 ‘모셔 올리는’의 헬라어 ‘아나가게인'(*)은 부활을 언급할 때 쓰인다(히 13:20). 이스라엘 중에 이스라엘인들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은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알라 티 레게이 엥귀스 수 토 레마 에스틴 엔 토 스토마티 수 카이 엔 테 카르디아 수 퉅 에스틴 토 레마 테스 피스테오스 호 케뤼쏘멘

개역개정,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새번역,8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 ㉥신 30:14

우리말성경,8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말씀이 네 가까이 있으니 네 입 속에 있고 네 마음속에 있다”라고 했으니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신30:14

가톨릭성경,8 의로움은 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영어NIV,8 But what does it say? “The word is near you; it is in your mouth and in your heart,” that is, the word of faith we are proclaiming:

영어NASB,8 But what does it say? “THE WORD IS NEAR YOU, IN YOUR MOUTH AND IN YOUR HEART”– that is, the word of faith which we are preaching,

영어MSG,8 So what exactly was Moses saying? The word that saves is right here, as near as the tongue in your mouth, as close as the heart in your chest. It’s the word of faith that welcomes God to go to work and set things right for us. This is the core of our preaching.

영어NRSV,8 But what does it say? “The word is near you, on your lips and in your heart” (that is, the word of faith that we proclaim);

헬라어신약Stephanos,8 αλλα τι λεγει εγγυς σου το ρημα εστιν εν τω στοματι σου και εν τη καρδια σου τουτ εστιν το ρημα της πιστεως ο κηρυσσομεν

라틴어Vulgate,8 sed quid dicit prope est verbum in ore tuo et in corde tuo hoc est verbum fidei quod praedicamus

히브리어Modern,8 אבל מה היא אמרת קרוב אליך הדבר בפיך ובלבבך הוא דבר האמונה אשר אנחנו מבשרים׃

성 경: [롬10:8]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 앞에서 부정적인 진술을 계속하였지만, 이제는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바울이 언급하고자 하는 주제로 돌아 온다.

󰃨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 신 30:14의 인용인데, 70인역에는 ‘심히’에 해당하는 ‘스포드라'(*)가 있으나 본문에서는 생략하였다. 구약의 문맥에서는 율법을 통해 드러난(reveal)은 혜로운 면이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기의 말씀대로 그들의 입과 마음에 두어 율법을 암송하며 묵상하였던 것이다(시 1:2). 여기서 ‘말씀이 가깝다’는 것은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마음에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영이 와 계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율법은 상대적 위치인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입과 마음에 있다는 표현으로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가는 불가능성과 대조하면서 구원받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밝히 드러낸다.

󰃨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 이 부분은 인용구에 바울이 첨가시킨 삽입구이다. ‘전파하는’의 헬라어 본문 ‘케륏소멘'(*)는 ‘가르치다’, ‘설교하다’, ‘선포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사도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복음의 말씀을 뜻한다. ‘우리가 전파하는’이라는 한정구는 ‘말씀이 멀리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견해에 있어서 바울이 모세와 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전파된 말씀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은혜의 말씀으로 구약에 계시된 약속의 말씀, 즉 믿음의 말씀이다. 여기서 ‘믿음의 말씀’은 복음의 내용 그 자체이다(Calvin, Cranfield). 그리고 이 말씀은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임을 뜻한다(Cranfield). 바울이 신 30:14에 나오는 ‘말씀’을 칭의(justification)와 같게 본 것은 그리스도가 그 말씀의 실체이며 실제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호티 에안 호몰로게세스 엔 토 스토마티 수 퀴리온 예순 카이 피스튜세스 엔 테 카르디아 수 호티 호 데오스 아우톤 에게이렌 에크 네크론 소데세

개역개정,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새번역,9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말성경,9 만일 당신의 입으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9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영어NIV,9 That if you confess with your mouth, “Jesus is Lord,” and believe in your heart tha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you will be saved.

영어NASB,9 that if you confess with your mouth Jesus as Lord, and believe in your heart tha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you shall be saved;

영어MSG,9 Say the welcoming word to God–“Jesus is my Master”–embracing, body and soul, God’s work of doing in us what he did in raising Jesus from the dead. That’s it. You’re not “doing” anything; you’re simply calling out to God, trusting him to do it for you. That’s salvation.

영어NRSV,9 because if you confess with your lips that Jesus is Lord and believe in your heart tha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you will be saved.

헬라어신약Stephanos,9 οτι εαν ομολογησης εν τω στοματι σου κυριον ιησουν και πιστευσης εν τη καρδια σου οτι ο θεος αυτον ηγειρεν εκ νεκρων σωθηση

라틴어Vulgate,9 quia si confitearis in ore tuo Dominum Iesum et in corde tuo credideris quod Deus illum excitavit ex mortuis salvus eris

히브리어Modern,9 כי אם תודה בפיך אשר ישוע הוא האדון ותאמין בלבבך אשר האלהים העירו מן המתים אז תושע׃

성 경: [롬10:9]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 ‘네 입으로’, ‘네 마음으로’는 8절의 ‘네 입에’, ‘네 마음에’와 병행을 이룬다.

󰃨 예수를 주로 – 이는 ‘예수는 주이시다'(Jesus in Lord)란 말이다.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헬라 세계에 있어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나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호칭이었다. 또한 신비 종교(Mystery Religion)의 신들이었던 이시스(Isis)나 오시리스(Osiris)에게도 사용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통치자에게 이 명칭을 붙였다. 특히, 하나님의 칭호 ‘야웨'(*)는 칠십인역에서 항상 ‘퀴리오스’로 번역했다. 즉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예수가 주’라는 고백은 교회 최초의 신앙 고백의 형태로서(행 2:36;고전 12:3) 예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고백에는 경배의 대상이며 승천하신 구주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 ‘살리신’의 헬라어 ‘에게이렌'(*)는 ‘일으키다’라는 말로서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아파르케)가 되셨다는 뜻이다(고전 15:2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부활을 소망케하는 종말론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로 높이심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의 주되심을 시인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의 다시 사심을 고백했고 믿었던 것이다(빌 2:9-11). 네 마음에 믿으면 –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에 믿는 것은 불가 분리의 관계이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마음에서 믿는 만큼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 신앙 고백을 전제한 것으로서 외식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입->마음의 순서는 인용문 신명기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10절에서는 그 바른 순서, 즉 마음속에 믿는 것과 입으로 고백하는 자연적인 순서로 말한다.

󰃨 구원을 얻으리니 – 헬라어 본문 ‘소데세'(*)는 미래형으로 종말론적 구원(eschatological salvation)을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의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 입으로 시인하게 하며 구원에 이르게 한다.

카르디아 가르 피스튜에타이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스토마티 데 호몰로게이타이 에이스 소테리안

개역개정,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새번역,10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말성경,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 구원에 이릅니다.

가톨릭성경,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영어NIV,10 For it is with your heart that you believe and are justified, and it is with your mouth that you confess and are saved.

영어NASB,10 for with the heart man believes, resulting in righteousness, and with the mouth he confesses, resulting in salvation.

영어MSG,10 With your whole being you embrace God setting things right, and then you say it, right out loud: “God has set everything right between him and me!”

영어NRSV,10 For one believes with the heart and so is justified, and one confesses with the mouth and so is saved.

헬라어신약Stephanos,10 καρδια γαρ πιστευεται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στοματι δε ομολογειται εις σωτηριαν

라틴어Vulgate,10 corde enim creditur ad iustitiam ore autem confessio fit in salutem

히브리어Modern,10 כי בלבבו יאמין האדם והיתה לו לצדקה ובפיהו יודה והיתה לו לישועה׃

성 경: [롬10:10]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마음’ – ‘입’, ‘믿는 것’ – ‘시인하는 것’은 문장에 있어서 균형을 유지한다. 또한 ‘의에 이르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은 본문에서 역으로 사용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다. 본절은 본서의 주제가 되는 1:16, 17의 구절을 기억시키는 내용으로서 믿고 시인함이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한다. ‘믿어’와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에타이'(*)와 ‘호몰로게이타이'(*)는 수동태로서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시인에 이르게 됨을 나타낸 것이다(고후 5:14-15). ‘의에 이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얻어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이며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람 앞에서 주 예수를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을 아무 두려움 없이 공언하는 것이다(마 10:32;막 8:38;눅 12:8). 특히, 시인(是認)은 지적인 확인을 넘어 생활의 차원에서 삶으로 고백되어져야 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강요당하고 핍박받을 때 주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시인은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 때 직면하게 되는 구체적 탄압과 고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구원을 정직하게 표명(表明)하는 차원까지도 의미한다.

레게이 가르 헤 그라페 파스 호 피스튜온 엪 아우토 우 카타이스퀸데세타이

개역개정,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새번역,11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 ㉦사 28:16(칠십인역)

우리말성경,11 성경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고 말합니다. 사28:16

가톨릭성경,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영어NIV,11 As the Scripture says, “Anyone who trusts in him will never be put to shame.”

영어NASB,11 For the Scripture says, “WHOEVER BELIEVES IN HIM WILL NOT BE DISAPPOINTED.”

영어MSG,11 Scripture reassures us, “No one who trusts God like this–heart and soul–will ever regret it.”

영어NRSV,11 The scripture says, “No one who believes in him will be put to shame.”

헬라어신약Stephanos,11 λεγει γαρ η γραφη πας ο πιστευων επ αυτω ου καταισχυνθησεται

라틴어Vulgate,11 dicit enim scriptura omnis qui credit in illum non confundetur

히브리어Modern,11 כי הכתוב אמר כל המאמין בו לא יבוש׃

성 경: [롬10:1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 9:33과 같이 사 28:16로 부터 인용된 구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더 강조된 형태로 인용되었다. 즉 ‘저를 믿는자’란 말 앞에 ‘누구든지’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Hendriksen). 이렇게 강조된 것은 앞에 언급된 4-10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구원이 유대 민족에게만 독점되어지고 또한 이방인에게 있어서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에게만 국한시켰던 것을 확장시켜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자에게 허락되어졌음을 선포하고 있다(Godet).

우 가르 에스틴 디아스톨레 유다이우 테 카이 헬레노스 호 가르 아우토스 퀴리오스 판톤 플루톤 에이스 판타스 투스 에피칼루메누스 아우톤

개역개정,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새번역,12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우리말성경,12 유대 사람이든 이방 사람이든 차별이 없습니다. 동일하신 주께서는 모든 사람의 주가 되셔서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십니다.

가톨릭성경,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영어NIV,12 For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Jew and Gentile–the same Lord is Lord of all and richly blesses all who call on him,

영어NASB,12 For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Jew and Greek; for the same Lord is Lord of all, abounding in riches for all who call upon Him;

영어MSG,12 It’s exactly the same no matter what a person’s religious background may be: the same God for all of us, acting the same incredibly generous way to everyone who calls out for help.

영어NRSV,12 For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Jew and Greek; the same Lord is Lord of all and is generous to all who call on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2 ου γαρ εστιν διαστολη ιουδαιου τε και ελληνος ο γαρ αυτος κυριος παντων πλουτων εις παντας τους επικαλουμενους αυτον

라틴어Vulgate,12 non enim est distinctio Iudaei et Graeci nam idem Dominus omnium dives in omnes qui invocant illum

히브리어Modern,12 ואין הבדל בזה בין היהודי ליוני כי אדון אחד לכלם והוא עשיר לכל קראיו׃

성 경: [롬10:12]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이 문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그 어떤 종족이든지 차별을 받지 않고 똑같이 적용되어진다. 설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어떤면에 있어서는 ‘차별'(*, 디아스톨레)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다(3:22). 그런데 바울은 실제로 그의 서신서에서 유대인의 우선권에 강조점을 두고 있었고(1:16;2:9, 10),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Covenant) 아래서는 이스라엘이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3:1, 2:9:4, 5). 그러나 이는 구원 경륜의 순서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특권을 받은 것을 나타낼 뿐이다. 구원에 있어서는 유대인과 헬라인, 기타 이방인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Dunn).

󰃨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 바울은 구원이 유대인과 헬라인 그외 모든 이방 민족에게 차별이 없는 분명한 이유를 ‘한 주께서'(the same Lord)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Lenski).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주'(*, 퀴리오스판톤, Lord of all)로 묘사하고 있는데 만일 유대인이 하나님을 주님(Lord)으로 믿고 있다면 그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주님이 되어야만 한다(3:29, 30). 이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구세주(救世主)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동일하다.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 기타 이방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다(Dunn). 더구나 주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부르는 모든 자를 부요하게 하신다.’ 이는 주님의 부요함을 말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의 보편적이고 동일한 은혜가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의미이다(Godet). 여기서 ‘부요하시도다’는 헬라어로 ‘플루톤'(*)인데 능동적인 개념으로 ‘자비하다’와 ‘은혜롭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Calvin). 이것은 주님의 구원의 은혜와 그 능력은 무한하여 그가 부르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려는 선한 뜻은 결코 약화되거나 다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요하신 주 하나님께(시 50:10-12;학 2:8;엡 3:8;계 5:12) 속하여 항상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됨으로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2:4;9:23;요 10:10;고후 8:9;엡 2:7).

파스 가르 호스 안 에피칼레세타이 토 오노마 퀴리우 소데세타이

개역개정,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새번역,1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 ㉧욜 2:32

우리말성경,13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욜2:32

가톨릭성경,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영어NIV,13 for,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영어NASB,13 for “WHOEVER WILL CALL UP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영어MSG,13 “Everyone who calls, ‘Help, God!’ gets help.”

영어NRSV,13 For,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shall be saved.”

헬라어신약Stephanos,13 πας γαρ ος αν επικαλεσηται το ονομα κυριου σωθησεται

라틴어Vulgate,13 omnis enim quicumque invocaverit nomen Domini salvus erit

히브리어Modern,13 כי כל אשר יקרא בשם יהוה ימלט׃

성 경: [롬10:13]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앞절에서 말한 내용을 더욱 강력하게 확증하고 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사실은 이미 구약성경 욜 2:32에 예언되어 있었다(Godet).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고 하였다(Calvin). 요엘에 의해 약속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베드로는 예수님 승천 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설명하면서 인용하였다(행 2:16-21). 바울도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요엘서의 ‘여호와'(Jehova)를 ‘주'(Lord)와 동일시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Alford, Harrison). 실제로 70인역(LXX)에는 언제나 ‘야웨’를 관사가 없는 ‘퀴리오스'(*)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구약에서의 ‘야웨’가 곧 그리스도 예수와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주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증거가 되게 하며 또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구원 사이에 완전한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Dunn).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란 주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자 곧 주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자는 하나님의 칭의(justification)를 받아 구원 받은 자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포스 운 에피칼레손타이 에이스 혼 우크 에피스튜산 포스 데 피스튜소신 후 우크 에쿠산 포스 데 아쿠소신 코리스 케뤼쏜토스

개역개정,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새번역,14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말성경,14 그런데 그들이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부르겠습니까? 듣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전하는 사람이 없이 어떻게 듣겠습니까?

가톨릭성경,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영어NIV,14 How, then, can they call on the one they have not believed in? And how can they believe in the one of whom they have not heard? And how can they hear without someone preaching to them?

영어NASB,14 How then shall they call upon Him in whom they have not believed? And how shall they believe in Him whom they have not heard? And how shall they hear without a preacher?

영어MSG,14 But how can people call for help if they don’t know who to trust? And how can they know who to trust if they haven’t heard of the One who can be trusted? And how can they hear if nobody tells them?

영어NRSV,14 But how are they to call on one in whom they have not believed? And how are they to believe in one of whom they have never heard? And how are they to hear without someone to proclaim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4 πως ουν επικαλεσονται εις ον ουκ επιστευσαν πως δε πιστευσουσιν ου ουκ ηκουσαν πως δε ακουσουσιν χωρις κηρυσσοντος

라틴어Vulgate,14 quomodo ergo invocabunt in quem non crediderunt aut quomodo credent ei quem non audierunt quomodo autem audient sine praedicante

히브리어Modern,14 ועתה איך יקראו אל אשר לא האמינו בו ואיך יאמינו באשר לא שמעו את שמעו ואיך ישמעו באין מגיד׃

성 경: [롬10:14]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바울은 이제 복음을 확장하여 범세계적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Bruce). 그래서 그는 믿음과의 관계에서 제일 먼저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양자간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Calvin). 주는 신뢰하고 믿을 만한 분이며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결국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를 부르는 일이 믿음의 첫걸음임을 가리킨다. 여기서 ‘어찌 부르리요'(How then shall they call on, KJV, NIV)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포스 에피칼레손타이'(*)로 ‘에피칼레손타이’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다’의 뜻을 가진 ‘에피칼레오'(*)의 3인칭 복수 부정과거 중간태로서 가정법으로 쓰여졌다. 이는 ‘그들을 부를 수 없다’라는 의미이다.

󰃨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 바울은 두번째로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는 것으로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도 ‘포스'(*, ‘어떻게’)를 사용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표현법을 쓰고 있다. 그는 이러한 논리적인 논증을 통해 믿음은 지식에 근거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은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하려면 먼저 그 복음을 들어야함 한다. 한편 초대 교회 당시 대부분 사람들의 복음 전수(傳受) 방법은 메시지를 ‘듣는 것’이었다. 비록 소수의 교회가 바울의 서신을 받기는 하였지만 신약성경이 문자와 글로 읽을 수 있는 기록으로 갖추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복음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구두(口頭)로 전달되어야 했다. 이같은 일은 성경의 전 시대에 걸쳐 일반적으로 계속 행해져 내려왔다(Harrison). 왜냐하면 전파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과 신앙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 전파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전형적인 방법이 되었다(Calvin).

󰃨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세번째로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사도나 전도자의 직책을 중요시하고 있다(Bruce).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증언함으로 그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전파자’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케륏손토스'(*)로 ‘케륏소'(*, ‘전파하다’, ‘가르치다’)의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여기서 ‘전파자’라는 말 앞에 관사가 없는데 이는 어떤 특별한 직책에 있는 사도들이나 전도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파하는 모든 자'(someone preaching, NIV)를 의미한다(Lenski). 헬라어 ‘케륏소'(*)는 ‘전파하다’, ‘알리다’의 뜻인데 이것은 왕이나 사령관의 메시지를 공개하여 알리는 전령의 행위로서 전령은 왕이 명령한 이외의 말을 가감할 수 없었으며 단지 왕의 명령을 자신의 음성으로 대언(代言)하는 역할만 하였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LXX) 많이 사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이나 사도들 역시 이 말이 깊은 의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메시야에 대한 전파나 종말론적인 언급(사 61:1;막 1:4, 7, 14, 38, 39;눅 4:18, 19;행 20:25;28:31)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 단어를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의 견지에서 사용하였다(갈 2:2;골 1:23).

포스 데 케륔소신 에안 메 아포스탈로신 카도스 게그랖타이 호스 호라이오이 호이 포데스 톤 유앙겔리조메논 타 아가다

개역개정,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새번역,15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 ㉨사 52:7

우리말성경,15 또 보냄을 받지 않았으면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기록되기를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사52:7

가톨릭성경,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영어NIV,15 And how can they preach unless they are sent? As it is written, “How beautiful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영어NASB,15 And how shall they preach unless they are sent? Just as it is written, “HOW BEAUTIFUL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LAD TIDINGS OF GOOD THINGS!”

영어MSG,15 And how is anyone going to tell them, unless someone is sent to do it? That’s why Scripture exclaims, A sight to take your breath away! Grand processions of people telling all the good things of God!

영어NRSV,15 And how are they to proclaim him unless they are sent? As it is written, “How beautiful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헬라어신약Stephanos,15 πως δε κηρυξουσιν εαν μη αποσταλωσιν καθως γεγραπται ως ωραιοι οι ποδες των ευαγγελιζομενων ειρηνην των ευαγγελιζομενων τα αγαθα

라틴어Vulgate,15 quomodo vero praedicabunt nisi mittantur sicut scriptum est quam speciosi pedes evangelizantium pacem evangelizantium bona

히브리어Modern,15 ואיך יגידו אם אינם שלוחים ככתוב מה נאוו רגלי מבשר שלום מבשר טוב׃

성 경: [롬10:15]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바울은 전도자가 복음을 전한 것은 이미 그 이전에 누군가가 그 전도자에게 ‘보내심’의 권위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있다(Hendriksen). 즉 전도자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권위는 그 선포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명령과 위임이라는 점에 있다(Bruce). 여기서 ‘보내심’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포스탈로신'(*)은 ‘아포스텔로'(*, ‘보내다’)의 부정과거 수동태 가정법으로 ‘사도'(*, 아포스톨로스)란 단어가 이 동사에서 파생되었다(Robertson).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인간은 보다 높은 권위 아래 존재하며 (2) 보내심을 받은 자의 메시지는 그 자신이 아니라 보내는 자에 의해서 주어진다. 이러한 두 가지면에서 예언자들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었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다(요 3:34;7:16). 이것은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진다. 모든 성도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서 그가 세우시지 않은 복음 전파자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궁극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예수의 복음 전도자로서 전세계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며 그 결과로 전파된 말씀을 듣고 열방들이 기뻐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Godet).

󰃨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 바울은 다시 한번 바벧론 포로 생활 동안 황폐되어 있었던 예루살렘 도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로써 그 자신의 이야기를 확증하고 있다. 이 말씀은 사 52:7의 인용 구절로서 원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가까왔다는 기쁨과 평화의 선포였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복음의 전달로 해석한다. 이스라엘이 바벧론왕 고레스 치하(治下)에서부터 구출을 받은 것은 모세에 의하여 애굽왕 바로의 치하에서 구출을 받은 것처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출받는,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질 보다 완전하고 큰 구원을 예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유대 민족이 바벧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리라는 메시지가 기쁜 소식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 안에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있다는 메시지는 그보다 훨씬 더 기쁜 소식인 것이다.

알 우 판테스 휘페쿠산 토 유앙겔리오 에사이아스 가르 레게이 퀴리에 티스 에피스튜센 테 아코에 헤몬

개역개정,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새번역,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주님, 우리가 전하는 소식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 ㉩또는 ‘기쁜 소식’ ㉪사 53:1(칠십인역)

우리말성경,16 그러나 그들 모두가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주여,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사53:1

가톨릭성경,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영어NIV,16 But not all the Israelites accepted the good news. For Isaiah says, “Lord, who has believed our message?”

영어NASB,16 However, they did not all heed the glad tidings; for Isaiah says, “LORD, WHO HAS BELIEVED OUR REPORT?”

영어MSG,16 But not everybody is ready for this, ready to see and hear and act. Isaiah asked what we all ask at one time or another: “Does anyone care, God? Is anyone listening and believing a word of it?”

영어NRSV,16 But not all have obeyed the good news; for Isaiah says, “Lord, who has believed our message?”

헬라어신약Stephanos,16 αλλ ου παντες υπηκουσαν τω ευαγγελιω ησαιας γαρ λεγει κυριε τις επιστευσεν τη ακοη ημων

라틴어Vulgate,16 sed non omnes oboedierunt evangelio Esaias enim dicit Domine quis credidit auditui nostro

히브리어Modern,16 אך לא כלם שמעו לקול הבשורה כי ישעיהו אמר יהוה מי האמין לשמעתנו׃

성 경: [롬10:16]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 유대인들은 전파된 복음을 대부분 믿지 않았다. 바울은 이것을 완곡어법(litotes)을 사용하여 말하고 있다. 즉 그들 중 일부만이 복음에 순종하였다는 의미이다(사 53:1;고전 10:5).

󰃨 이사야가 가로되…누가 믿었나이까 – 바울은 사 53:1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확증하고 있다. 바울이 앞절에서 인용한 사 52:7과 본절에서 인용한 사 53:1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고난받는 종에 의한 구원의 메시지가 거부되리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의 불신앙을 예언하는 구절로 널리 사용되었으며(11:8) 친히 예수께서도 공생애 동안 사역하시면서 그 백성이 그를 메시야로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하기도 하였다(Bruce). 그리고 역사는 그 예언을 확증해 왔다(고전 1:23). 혹자(Calvin)는 이사야가 이 말을 한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빛을 우리 안에 조명해 주실 때에야 비로소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한 특별 계시에 의하여 구원은 내적으로 소명받은 자, 즉 선택 받은 자에게 국한되는 것을 보여준다(Calvin).

아라 헤 피스티스 엨스 아코에스 헤 데 아코에 디아 레마토스 크리스투

개역개정,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새번역,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 ㉫또는 ‘그리스도의 말씀’.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나님의 말씀’

우리말성경,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납니다.

가톨릭성경,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영어NIV,17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영어NASB,17 So faith comes from hearing, and hearing by the word of Christ.

영어MSG,17 The point is, Before you trust, you have to listen. But unless Christ’s Word is preached, there’s nothing to listen to.

영어NRSV,17 So faith comes from what is heard, and what is heard comes through the word of Christ.

헬라어신약Stephanos,17 αρα η πιστις εξ ακοης η δε ακοη δια ρηματος θεου

라틴어Vulgate,17 ergo fides ex auditu auditus autem per verbum Christi

히브리어Modern,17 לכן האמונה באה מתוך השמועה והשמועה על ידי דבר אלהים׃

성 경: [롬10:17]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이스라엘의 유기]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바울은 결론적 접속사 ‘그러므로'(*, 아라;so then, KJV)를 사용하여 그의 논리를 결론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는 믿음에 대해서 결론짓기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고 정의한다. ‘들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코에스'(*)로 ‘듣는 행위'(act of hearing)나 ‘들려 오는 것'(that which is heard)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앞절(16절)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할 때 ‘전하는 바'(아코에)와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앞절과 차이점은 전자는 수동태로 ‘들려진 말'(was heard)의 의미로 쓰여진 반면에 본절에서는 능동태로 메시지를 ‘들음'(hearing)의 의미로 쓰여졌다(Hendriksen). 또한 바울은 구원얻는 신앙 곧 믿음은 듣는 행위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 레카토스 크리스투)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다(Harrison). 따라서 바울은,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에 근거한다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알라 레고 메 우크 에쿠산 메눈게 에이스 파산 텐 겐 엨셀덴 호 프동고스 아우톤 카이 에이스 타 페라타 테스 오이쿠메네스 타 레마타 아우톤

개역개정,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새번역,18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그들은 들은 일이 없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에 ㉬”그들의 목소리가 온 땅에 퍼지고,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 퍼졌다” 하였습니다. / ㉬시 19:4(칠십인역)

우리말성경,18 그렇다면 내가 묻겠습니다. 그들이 듣지 못했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음성이 온 땅에 퍼졌고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라고 했습니다. 시19:4

가톨릭성경,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영어NIV,18 But I ask: Did they not hear? Of course they did: “Their voice has gone out into all the earth, their words to the ends of the world.”

영어NASB,18 But I say, surely they have never heard, have they? Indeed they have; “THEIR VOICE HAS GONE OUT INTO ALL THE EARTH, AND THEIR WORDS TO THE ENDS OF THE WORLD.”

영어MSG,18 But haven’t there been plenty of opportunities for Israel to listen and understand what’s going on? Plenty, I’d say. Preachers’ voices have gone ’round the world, Their message to earth’s seven seas.

영어NRSV,18 But I ask, have they not heard? Indeed they have; for “Their voice has gone out to all the earth, and their words to the ends of the world.”

헬라어신약Stephanos,18 αλλα λεγω μη ουκ ηκουσαν μενουνγε εις πασαν την γην εξηλθεν ο φθογγος αυτων και εις τα περατα της οικουμενης τα ρηματα αυτων

라틴어Vulgate,18 sed dico numquid non audierunt et quidem in omnem terram exiit sonus eorum et in fines orbis terrae verba eorum

히브리어Modern,18 ואמר הכי לא שמעו אמנם בכל הארץ יצא קום ובקצה תבל מליהם׃

성 경: [롬10:18]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이스라엘의 유기]

󰃨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 바울은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불신앙에 대한 이스라엘의 변명의 소지를 철저히 차단시키고 있다. 즉,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믿음을 얻게 되는 ‘들음'(hearing)의 기회가 이스라엘에게는 가장 확실하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메 우크 에쿠산)는 ‘그들이 듣지 못했는가 ?'(새번역, 공동번역; Did they not hear ?, NIV)라는 의미가 좀더 적절하다. 여기서 헬라어 ‘메’와 ‘우크’는 부정을 강조하여 ‘그들이 듣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 ?’라는 말이다(Dunn, Lenski). 결국 바울은 유대인들이 결코 듣지 못해서, 즉 전도를 받지 못해서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은 아니라고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 그 소리가…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 바울은 그의 이러한 논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시 19:4을 인용하면서 복음 전파의 편만성(遍滿性)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복음이 전세계에 완전히 전파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바울이 시편의 말씀을 인용한 초점은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즉, 복음 전파는 궁극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당시나 초대 교회 시대에 복음이 매우 신속하게 편만히 전파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15:22-24;요 12:19;행 2:41, 47;4:4;17:6;빌 1:12, 13;골 1:6).

알라 레고 메 이스라엘 우크 에그노 프로토스 모위세스 레게이 에고 파라젤로소 휘마스 엪 우크 에드네이 엪 에드네이 아쉬네토 파로르기오 휘마스

개역개정,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새번역,19 내가 다시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습니까?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들로 너희의 질투심을 일으키고, 미련한 백성들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내겠다.” / ㉭신 32:21

우리말성경,19 내가 다시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했습니까? 먼저 모세가 말하기를 “내가 백성이 아닌 자로 너희를 시기하게 하고 내가 미련한 백성으로 너희를 분노하게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신32:21

가톨릭성경,19 나는 또 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우선 모세가 말합니다. “나는 민족도 아닌 무리를 너희가 시기하게 하고 어리석은 민족에게 너희가 분노하게 하리라.”

영어NIV,19 Again I ask: Did Israel not understand? First, Moses says, “I will make you envious by those who are not a nation; I will make you angry by a nation that has no understanding.”

영어NASB,19 But I say, surely Israel did not know, did they? At the first Moses says, “I WILL MAKE YOU JEALOUS BY THAT WHICH IS NOT A NATION, BY A NATION WITHOUT UNDERSTANDING WILL I ANGER YOU.”

영어MSG,19 So the big question is, Why didn’t Israel understand that she had no corner on this message? Moses had it right when he predicted, When you see God reach out to those you consider your inferiors–outsiders!– you’ll become insanely jealous. When you see God reach out to people you think are religiously stupid, you’ll throw temper tantrums.

영어NRSV,19 Again I ask, did Israel not understand? First Moses says, “I will make you jealous of those who are not a nation; with a foolish nation I will make you angry.”

헬라어신약Stephanos,19 αλλα λεγω μη ουκ εγνω ισραηλ πρωτος μωσης λεγει εγω παραζηλωσω υμας επ ουκ εθνει επι εθνει ασυνετω παροργιω υμας

라틴어Vulgate,19 sed dico numquid Israhel non cognovit primus Moses dicit ego ad aemulationem vos adducam in non gentem in gentem insipientem in iram vos mittam

히브리어Modern,19 ואמר הכי ישראל לא ידע הנה כבר משה אמר אני אקניאכם בלא עם בגוי נבל אכעיסכם׃

성 경: [롬10:19]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이스라엘의 유기]

󰃨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 바울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듣기는 했지만 깨닫지 못했으므로 거부했다는 반문이 나올 수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반박을 예상하여 앞절에서의 ‘들음'(hearing)에 관한 질문에서 전환하여 이제 ‘앎'(knowing)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여기서도 앞절에서와 같이 헬라어 부정불변사 ‘메'(*)를 사용하여서 부정적인 대답을 암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주어졌지만 거절한 것처럼 복음의 의미와 불신앙의 결과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절하였다(Lenski). 그러므로 바울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복음에 대한 앎의 부족이나 깨달음의 결여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Harrison). 결국 이 말씀이 암시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그들이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으려 하는 마음이 없었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Hendriksen).

󰃨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 이는 신 32:21의 인용으로 이 구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의 노래 중 일부인데,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예언으로 많이 인용되었다(11:11).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사악성을 질책하였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켰으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질투를 야기시키는 어떤 일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 일은 미련한 백성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백성 아닌 자'(*, 에프 우크 에드네이)와 ‘미련한 백성'(*, 에프 에드네이 아수네토)은 다같이 이방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단절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었고 또한 어리석은 민족들이었다(Bruce).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용을 베푸셔서 그가 친히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존귀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시켰다.

에사이아스 데 아포톨마 카이 레게이 휴레덴 엔 토이스 에메 메 제투신 엠파네스 에게노멘 토이스 에메 메 에페로토신

개역개정,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새번역,20 또한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게 이렇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나를 찾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만나 주고, 나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나타났다.” / ㉠사 65:1(칠십인역)

우리말성경,20 또 이사야가 아주 담대하게 말하기를 “나를 찾지 않는 자들을 내가 만나 주고 내게 구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다”라고 했습니다. 사65:1

가톨릭성경,20 이사야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나를 찾지도 않는 자들을 내가 만나 주었고 나에 관하여 묻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를 드러내 보였다.”

영어NIV,20 And Isaiah boldly says, “I was found by those who did not seek me; I revealed myself to those who did not ask for me.”

영어NASB,20 And Isaiah is very bold and says, “I WAS FOUND BY THOSE WHO SOUGHT ME NOT, I BECAME MANIFEST TO THOSE WHO DID NOT ASK FOR ME.”

영어MSG,20 Isaiah dared to speak out these words of God: People found and welcomed me who never so much as looked for me. And I found and welcomed people who had never even asked about me.

영어NRSV,20 Then Isaiah is so bold as to say, “I have been found by those who did not seek me; I have shown myself to those who did not ask for me.”

헬라어신약Stephanos,20 ησαιας δε αποτολμα και λεγει ευρεθην τοις εμε μη ζητουσιν εμφανης εγενομην τοις εμε μη επερωτωσιν

라틴어Vulgate,20 Esaias autem audet et dicit inventus sum non quaerentibus me palam apparui his qui me non interrogabant

히브리어Modern,20 וישעיהו מלאו לבו לאמר נמצאתי ללא בקשני נדרשתי ללוא שאלו׃

성 경: [롬10:20]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이스라엘의 유기]

󰃨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 바울은 이스라엘이 불순종에 대해 변명할 수 없도록 이전의 증거보다 더욱 강력한 증거를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역설하고 있다. ‘매우 담대하여’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포톨마'(*)로 ‘담대한 태도를 취하다’의 뜻을 지닌 ‘아포톨마오'(*)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온다.

󰃨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나타났노라 – 이 말씀은 사 65:1의 인용으로 분명히 앞절(신 32:21)에서 선포된 내용을 더욱 강하게 확증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한 백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기까지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철저한 불순종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이방인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어 정의하기를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구하지도 않은 자들’이라 하였다(Dunn). 그는 이방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틀에 박힌 멸시와 배척, 자기 우월주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던 이방인들마저도 복음을 듣고 순종하여 구원이 임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불순종함으로 구원을 거절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께 구하지도 문의 하지도 않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가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통해서 자신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대로 구원을 베풀 수 있는 주권적인 능력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Hendriksen, Calvin).

프로스 데 톤 이스라엘 레게이 홀렌 텐 헤메란 엨세페타사 타스 케이라스 무 프로스 라온 아페이둔타 카이 안틸레곤타

개역개정,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새번역,21 또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고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 하신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 ㉡사 65:2(칠십인역)

우리말성경,21 그러나 이스라엘에 관해서는 “내가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라고 했습니다. 사65:2

가톨릭성경,21 그러나 이스라엘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

영어NIV,21 But concerning Israel he says, “All day long I have held out my hands to a disobedient and obstinate people.”

영어NASB,21 But as for Israel He says, “ALL THE DAY LONG I HAVE STRETCHED OUT MY HANDS TO A DISOBEDIENT AND OBSTINATE PEOPLE.”

영어MSG,21 Then he capped it with a damning indictment: Day after day after day, I beckoned Israel with open arms, And got nothing for my trouble but cold shoulders and icy stares.

영어NRSV,21 But of Israel he says, “All day long I have held out my hands to a disobedient and contrary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21 προς δε τον ισραηλ λεγει ολην την ημεραν εξεπετασα τας χειρας μου προς λαον απειθουντα και αντιλεγοντα

라틴어Vulgate,21 ad Israhel autem dicit tota die expandi manus meas ad populum non credentem et contradicentem

히브리어Modern,21 ועל ישראל הוא אמר פרשתי ידי כל היום אל עם סורר ומרה׃

성 경: [롬10:2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이스라엘의 유기]

󰃨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 – 앞절에서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로 복음을 순종한 사건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사 65:1)을 통해서 인용하였다. 이번에는 역설적으로 사 65:2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강조하여 지적하고 있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스 라온 아페이둔타 카이 안틸레곤타'(*)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을 병행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페이둔타'(*)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나타내는 것이고 ‘안틸레곤타'(*)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결과로 나타나는 완악한 행동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까지 포함하고 있다(Lenski). 이처럼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거나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원래부터, 즉 모세와 선지자들의 시대에서부터 완악하고 반역적인 기질이 있었으며 이러한 기질로 인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서 기인한 것이다(Harrison).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을 예수께서도 탄식하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7, 38)고 책망하고 있다.

󰃨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베푸셨는가를 탄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종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홀렌 텐 헤메란'(*)은 시간의 범위를 나타내는 목적격으로 ‘매일'(Michel), ‘지속적으로'(Cranfield)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다(Dunn). 또한 ‘손을 벌렸노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여세페타사 타스 케이라스'(*)로 부성애(父性愛)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의 품에 정답게 안아 주기 위해서 손을 벌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인내와 사랑의 손을 벌리고 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눅 15:20).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에게 돌아와 그를 사랑하고 순종하게 하려는 뜻을 가지고 끊임없이 그의 백성을 찾고 또 손을 뻗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참히 거절하고 말았다(Harrison).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自招)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은 완전한 이스라엘의 책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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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장 헬라어 주석 강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롬 1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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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10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성육신 하셔서 죄인들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롬 10:4-10)

4절 텔로스 가르 노무 크리스토스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판티 토 피스튜온티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칭의’의 근원이며 이유이다. 즉, 의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란 말은 뒤에 나오는 ‘율법의 마침’을 한정시키는 말로 ‘율법의 마침’은 그 목적이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는 유대인을 넘어서서 ‘모든 믿는자’들, 모든 민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즉 그리스도의 의는 공평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유대인일지라도 멸망을 받으며 반면에 이방인일지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실로 ‘의'(디카이오쉬넨)은 율법으로나 인간의 행위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공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칭의의 의를 끝까지 불신한 것이다.

율법의 마침 – 혹자는 여기서 ‘율법'(노모스)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일반적인 법이나 원리를 의미한다고 한다(Meyer, Sanday and Headlam). 또 혹자는 본문의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특히 9:31)에서 볼 때 여기서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침’을 가리키는 헬라어 ‘텔로스’는 (1) 문제의 종결(end), 종료(termination) 혹은 (2) 목적(aim), 의도(intention), 목표(goal)등 양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종결시켰다는 의미이다(13:10;Calvin, Erasmus, Lenski, Murray, Harrison). (2)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실제 의미이며 목적과 의도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Hendriksen, Cranfield). 그중 (1)이 더 타당하다고 보는데 이유인즉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그림자로서 그 역할을 하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實體)로 인해 그 기능이 종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진행되는 어떤 과정에서 역사상에 주어졌던 것이고 이제 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5절 모세스 가르 그라페이 텐 디카이오쉬넨 텐 에크 투 노무 호티 호 포이에사스 아우타 안드로포스 제세타이 엔 아우토이스

롬 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10:5

모세가 기록하되 – 레 18:5에서 인용된 것으로 모세의 말이 인용된 것은 모세가 유대인의 율법을 세운 자였기 때문이다. 이기에서 모세는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하나님의 율례’라는 표현을 통하여 구약 여러 부분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느 9:29; 겔 20:11, 13, 21) 또한 신약에 넘어와서도 그 사상을 계승되고 있다(7:10; 마 19:17; 눅 10:28; 갈 3:12). 하지만 문제는 누가 과연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있다.

연약한 인생 중에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3:9-18). 오직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시고(8:3, 4) 자기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신 유일한 분이시다(히 5:8, 9). ‘기록하되’를 가리키는 헬라어 ‘그라페이’는 6, 8절에 나오는 ‘말하되’의 헬라어 ‘레게이’와 의도적으로 대조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레게이’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한 반면 ‘그라페이’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6절 주석 참조).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 – ‘말미암은’의 헬라어 ‘에크'(* )는 ‘…에서 나온’이라는 뜻으로 그 출신을 나타낸다. ‘율법에서 난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는 의이다. 이는 9:31, 32에 나오는 ‘행위에서 나온 의의 법’을 말한다. 율법은 행함을 요구하며 죄를 알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판결을 받는 길이었다(레 18:5; 겔 20:11, 13, 21; 눅 10:28). 따라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며 행할 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罪性)은 율법을 완전히 수행할 수 없다.

결국 이스라엘은 의의 법을 좇아갔지만 법이 요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9:31). 유대교의 구원 교리에 따르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면 율법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율법을 성취하여 그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이 보장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게 된다고 보았다(Strack-Billerbeck).

그러나 율법은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법에 대한 약속을 하셨고(렘 31:33) 오순절의 성령 보내심으로 성취되었다(욜 2:28 ff.).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은 믿음이고, 믿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과 부활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믿는 자들의 의가 되셨기 때문이다.

6절 헤 데 에크 피스테오스 디카이오쉬네 후토스 레게이 메 에이페스 엔 테 카르디아 수 티스 아나베세타이 에이스 톤 우라논 투트 에스틴 크리스톤 카타가게인

롬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 본 구절은 앞절(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대조를 이루어 상대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나타났음은 바울의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며 기독론적(christological)인 가르침의 기본 구조이다(Ridderbos).

그리스도의 죽음은 종말론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심판이며 의롭다하는 판결의 표시이다. 옛 시대(old aeon)와 옛사람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을 받았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의롭게 했다.

이같이 말하되 – ‘믿음에서 난 의’를 의인화시켰다. 이런 수사법은 바울 당시 철학적 연설을 할 때 종종 쓰였다. 의인화 용법으로써 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대조하여 ‘믿음에서 난 의’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 본 구절은 70인 역(LXX)의 신 30:12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본 구절은 구약적 문맥에 비추어 보면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늘에 오르는 것은 (1) 사람으로서 불가능할 뿐 아니라, (2) 이런 교만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승천하심을 믿지 않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율법으로 의를 구하려는 자들의 교만함과 그들의 망상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근본 핵심은 버리고 자신들의 유전과 행위를 통해 하늘, 즉 의에 이르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마음에…하지 말라 – ‘하지 말라’의 헬라어 ‘메 에이페스’는 ‘말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믿음을 통한 의’는 율법을 통해 의를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셨고 이것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를 부인하였다. 이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정치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해 그들 중에 오셔서 생명을 주셨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7절 헤 티스 카타베세타이 에이스 텐 아뷧손 투트 에스틴 크리스톤 에크 네크론 아나가게인

롬 10: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10:7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 ‘음부'(아뷧손)는 6절의 ‘하늘’ (우라논)과 그 높고 깊음에서 대조를 이룬다. 음부의 헬라어 ‘아뷧소스’는 히브리어 ‘테홈’ 대신 사용된 말이다. ‘테홈’은 ‘물들의 깊음'(창 1:2)이나 ‘바다의 깊음'(시 107:26)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본문의 의미는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인 ‘땅의 깊은 곳'(시 71:20), 즉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스올'(Sheol)을 의미한다(시 139:8;암 9:2;Murray, Hodge, Cranfield). 음부에 내려가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당하신 죽음을 믿지 않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無效)로 하는 것이며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 ‘모셔 올리는’의 헬라어 ‘아나가게인’은 부활을 언급할 때 쓰인다(히 13:20). 이스라엘 중에 이스라엘인들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은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8절 알라 티 레게이 엥귀스 수 토 레마 에스틴 엔 토 스토마티 수 카이 엔 테 카르디아 수 투트 에스틴 토 레마 테스 피스테오스 호 케륏소멘

롬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 앞에서 부정적인 진술을 계속하였지만, 이제는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바울이 언급하고자 하는 주제로 돌아온다.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 신 30:14의 인용인데, 70인 역에는 ‘심히’에 해당하는 ‘스포드라’가 있으나 본문에서는 생략하였다.

구약의 문맥에서는 율법을 통해 드러난(reveal) 은혜로운 면이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기의 말씀대로 그들의 입과 마음에 두어 율법을 암송하며 묵상하였던 것이다(시 1:2).

여기서 ‘말씀이 가깝다’는 것은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마음에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영이 와 계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율법은 상대적 위치인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입과 마음에 있다는 표현으로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가는 불가능성과 대조하면서 구원받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밝히 드러낸다.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 이 부분은 인용구에 바울이 첨가시킨 삽입구이다. ‘전파하는’의 헬라어 본문 ‘케륏소멘’는 ‘가르치다’, ‘설교하다’, ‘선포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사도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복음의 말씀을 뜻한다. ‘우리가 전파하는’이라는 한정구는 ‘말씀이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견해에 있어서 바울이 모세와 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전파된 말씀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은혜의 말씀으로 구약에 계시된 약속의 말씀, 즉 믿음의 말씀이다. 여기서 ‘믿음의 말씀’은 복음의 내용 그 자체이다(Calvin, Cranfield). 그리고 이 말씀은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임을 뜻한다(Cranfield). 바울이 신 30:14에 나오는 ‘말씀’을 칭의(justification)와 같게 본 것은 그리스도가 그 말씀의 실체이며 실제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9절 호티 에안 호몰로게세스 엔 토 스토마티 수 퀴리온 이에순 카이 피스튜세스 엔 테 카르디아 수 호티 호 데오스 아우톤 에게이렌 에크 네크론 소데세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 ‘네 입으로’, ‘네 마음으로’는 8절의 ‘네 입에’, ‘네 마음에’와 병행을 이룬다.

예수를 주로 – 이는 ‘예수는 주이시다'(Jesus in Lord)란 말이다.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헬라 세계에 있어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나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호칭이었다. 또한 신비 종교(Mystery Religion)의 신들이었던 이시스(Isis)나 오시리스(Osiris)에게도 사용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통치자에게 이 명칭을 붙였다. 특히, 하나님의 칭호 ‘야웨’는 칠십인 역에서 항상 ‘퀴리오스’로 번역했다. 즉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예수가 주’라는 고백은 교회 최초의 신앙 고백의 형태로서(행 2:36; 고전 12:3) 예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고백에는 경배의 대상이며 승천하신 구주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 ‘살리신’의 헬라어 ‘에게이렌’는 ‘일으키다’라는 말로서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아파르케)가 되셨다는 뜻이다(고전 15:2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부활을 소망케 하는 종말론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로 높이심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의 주되심을 시인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의 다시 사심을 고백했고 믿었던 것이다(빌 2:9-11).

네 마음에 믿으면 –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에 믿는 것은 불가 분리의 관계이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마음에서 믿는 만큼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 신앙 고백을 전제한 것으로서 외식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입-> 마음의 순서는 인용문 신명기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10절에서는 그 바른 순서, 즉 마음속에 믿는 것과 입으로 고백하는 자연적인 순서로 말한다.

구원을 얻으리니 – 헬라어 본문 ‘소데세’는 미래형으로 종말론적 구원(eschatological salvation)을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의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 입으로 시인하게 하며 구원에 이르게 한다.

10절 카르디아 가르 피스튜에타이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스토마티 데 홀몰로게이타이 에이스 소테리안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10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마음’-‘입’, ‘믿는 것’-‘시인하는 것’은 문장에 있어서 균형을 유지한다. 또한 ‘의에 이르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은 본문에서 역으로 사용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다. 본절은 본서의 주제가 되는 1:16, 17의 구절을 기억시키는 내용으로서 믿고 시인함이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한다.

‘믿어’와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에타이’와 ‘호몰로게이타이’는 수동태로서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시인에 이르게 됨을 나타낸 것이다(고후 5:14-15). ‘의에 이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얻어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이며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람 앞에서 주 예수를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을 아무 두려움 없이 공언하는 것이다(마 10:32;막 8:38; 눅 12:8). 특히, 시인(是認)은 지적인 확인을 넘어 생활의 차원에서 삶으로 고백되어야 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강요당하고 핍박받을 때 주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시인은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 때 직면하게 되는 구체적 탄압과 고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구원을 정직하게 표명(表明)하는 차원까지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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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헨리주석1055-로마서 10장

로마서 10장

Ⅰ.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 10:1-11

이 부분에서의 사도의 의도는 율법의 의를 능가하는 믿음의 의의 높은 탁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득하기 위한 바울의 시도이다.

1. 유대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고백함(1,2)

여기서 그는 그들에 대하여 선한 소원을 품으며 선한 증거를 한다.

[1] 선한 소원 즉 그들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소원(1절): 비록 바울이 그들을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지만 그래도 그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는 이것이 ‘그의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였다고 말한다. 그의 소원의 강도와 진실함은 그것이 ‘그의 마음의 소원’이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그것은 흔히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만 비는 좋은 소원들처럼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실한 소원이었다. 기도의 정수는 마음의 소원이다. 냉랭한 소원은 거절을 당할 뿐이다. 그는 이 소원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것은 곧 그의 기도였다. 원하고 바라기만 한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2] 그가 선한 소원을 품는 이유가 되는, 유대인들에 대한 선한 증거(2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바울에게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적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실이 증거 하는 대로 그들을 칭찬한다. 사랑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한 선의로 해석하도록 가르친다. 우리는 악한 사람들에게서조차도 그들의 칭찬할만한 점은 후대할 수 있어야 한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그들의 복음에 대한 반대는 율법을 존중한다는 원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세상에는 맹목적이고 오도된 열심이 있는데 유대인들의 열심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2. 유대인들의 치명적인 과오(3)

그들의 열심은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렇게 열심으로 위하는 그 율법을 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된 메시야가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았어야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분명코 메시야라는 충분히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밝은 빛에 대해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서 율법에 대한 그들의 열심이 맹목적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3절에서 더욱 자세하게 설명한다.

[1] 그들의 불신앙의 성격: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불신앙이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불순종이다.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참 신앙에는 복종이 절실히 요구된다.

[2] 그들의 불신앙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부지이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의를 덧입어야 하는지를 생각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생각했다면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처럼 자기들의 행위에 의한 칭의를 결코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는 자기들의 의에 대한 자만이다. 그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즉 자기들의 행위의 공로로 만들어내는 의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3. 그러한 잘못의 어리석음(4-11)

[1] 복음에 대한 율법의 보조역할(4절). 그리스도는…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의 의도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율법의 용도는 의를 이루기 위하여 사람들의 주의를 그리스도에게로 돌리는 것이었다. (1) 그리스도는 의식법의 완성이시기 때문에 그 법의 마침이 되신다. (2) 그리스도는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셨기(8:3) 때문에 도덕법의 마침이 되신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한 복종에 이르게 하여 칭의를 얻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제 율법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율법을 불이행한데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완전한 보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써 율법의 목적이 이루어졌고 그러므로 우리는 또 다른 방법으로 칭의를 얻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해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믿는 모든 자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다.

[2] 율법을 능가하는 복음의 탁월성.

1)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란 어떤 것인가? 그는 이것을 5절에서 설명한다. 그 의의 취지는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것이다. 그 의는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있는 의로서 다만 완전한 복종에 의한 의 밖에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점에 대해서 그는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레 18:5). 여기에서 전제되고 있는 행함이란 약간의 불이행이나 위반이 없는 완전하고 흠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새롭고 산 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그처럼 끈질기게 이러한 칭의와 구원의 길에 집착한다는 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어리석음인가?

2)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어떤 것인가?(6절) 그는 이것을 신명기에서 모세가 한 말로 묘사한다. 그는 그 말을 신명기 30:11-14에서 인용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①그 의는 결코 어렵거나 까다롭지 않다. 이 칭의와 구원의 길에는 우리를 낙망시킬 구렁텅이나 매듭이 없으며 우리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난관도 따르지 않는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한 일들을 알아보기 위해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가지 않고도 의롭다 하심을 받고 또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모셔오기 위해 음부에 내려갈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기 위해 음부에 내려가겠느냐?”(7절).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하늘에 계시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무덤에 계셨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근거 없는 난관들을 생각하고 스스로 당황해 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다. 결코 구원이 우리에게서 그처럼 아득하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② 오히려 그 의는 아주 간단하고 쉽다. 말씀이 네게 가까와(8절). 그리스도는 네게 가까이 계신다. 그 말씀이 네게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바로 네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행해져야 할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루어져 우리가 쉽게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은 자기들이 모든 것을 해야만 했었다.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레 18:5). 그러나 복음은 그 일의 대부분이 이미 이루어졌고 그러므로 구원이 속히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즉 구원이 바로 우리 문 앞에 이르렀다는 것을 밝히 드러낸다. 그 말씀이 우리 입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말씀을 매일 읽고 있다는 말이다.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매일 그 말씀을 생각하고 있거나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믿음의 말씀이다. 그러면 무엇이 그 믿음의 말씀인가? 우리는 그 말씀의 대의를 9,10절에서 보게 된다. 우리에게 약속된 것은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복음이 나타내 보이고 제공하는 것은 바로 구원이다. 그리고 그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이는 그리스도로서 그는 끝까지 구주이시다. 그는 어떠한 조건으로 구원하시는가? 구원의 조건으로서 두 가지가 요구된다. 첫째는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그와의 관계와 그에 대한 신뢰를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를 지지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시인하는 것을 매우 강조하셨다(마 10:32,33). 특별히 이 세상에서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과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때에 사람들 앞에서 예수와 기독교를 시인하는 것이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바로 초대 교회 시대의 상황이 그러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것이다. 만일 마음속에 믿음의 능력이 없다면 입으로 하는 신앙 고백은 흉내에 불과할 뿐이다. 특별히 우리의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 조항인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진실된 동의를 해야 한다. 이 사실이 10절에서는 순서가 뒤바뀌어 더욱 설명되는데 그 이유는 먼저 마음에 믿음이 있어야 다음에 입으로 믿을 만한 시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먼저 믿음에 관해서 생각해보자. 사람이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은 지각의 동의를 의미하는 것 이상으로 의지의 동의를 포함하는 말이다. 이 믿음이 의에 이르는 것이다. 믿음에는 칭의의 믿음과 성화의 믿음이 있다. 다음으로는 고백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을 말하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약속의 조건을 성취하기(마 10:32)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우리의 자격에 기초를 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함으로써 이 기초 위에 구원을 세우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구원의 조건을 간단히 요약해본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과 몸을 드려야 하는데 마음으로 믿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영혼을 드려야 하고 입으로 시인하는 일에 있어서 몸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그는 이사야 28:16을 인용한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11절). 이런 자는 자기가 믿는 그리스도를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으로 믿는 자는 입으로 시인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자기의 소망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주 예수께 그와 같은 신뢰를 둔 자기의 확신을 어떠한 이유로든지간에 결코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1-4 The Jews built on a false foundation, and refused to come to Christ for free salvation by faith, and numbers in every age do the same in various ways.

The strictness of the law showed men their need of salvation by grace, through faith.

And the ceremonies shadowed forth Christ as fulfilling the righteousness, and bearing the curse of the law.

So that even under the law, all who were justified before God, obtained that blessing by faith, whereby they were made partakers of the perfect righteousness of the promised Redeemer.

The law is not destroyed, nor the intention of the Lawgiver disappointed; but full satisfaction being made by the death of Christ for our breach of the law, the end is gained.

That is, Christ has fulfilled the whole law, therefore whoever believeth in him, is counted just before God, as much as though he had fulfilled the whole law himself.

Sinners never could go on in vain fancies of their own righteousness, if they knew the justice of God as a Governor, or his righteousness as a Saviour.

#5-11 The self-condemned sinner need not perplex himself how this righteousness may be found.

When we speak of looking upon Christ, and receiving, and feeding upon him, it is not Christ in heaven, nor Christ in the deep, that we mean; but Christ in the promise, Christ offered in the word.

Justification by faith in Christ is a plain doctrine.

It is brought before the mind and heart of every one, thus leaving him without excuse for unbelief.

If a man confessed faith in Jesus, as the Lord and Saviour of lost sinners, and really believed in his heart that God had raised him from the dead, thus showing that he had accepted the atonement, he should be saved by the righteousness of Christ, imputed to him through faith.

But no faith is justifying which is not powerful in sanctifying the heart, and regulating all its affections by the love of Christ.

We must devote and give up to God our souls and our bodies: our souls in believing with the heart, and our bodies in confessing with the mouth.

The believer shall never have cause to repent his confident trust in the Lord Jesus.

Of such faith no sinner shall be ashamed before God; and he ought to glory in it before men.

Ⅱ. 복음 전파의 중요성 10:12-21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으며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점에서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골 3:11). 차별이 없음이라(12절).

1. 모든 자에게 동일하신 하나님(12)

한 주께서 모든 삶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유대인들에게 더 친절한 어떤 하나님이 계시고 이방인들에게는 덜 친절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은 ‘여호화로라 여호화로라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이로라’고 선포하셨을 때 그는 그 말씀으로써 그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하나님이셨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찾는 모든 피조물에게 어떤 하나님이시며 또한 앞으로도 어떤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것을 나타내셨다. 그는 그를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에 있어서 관대하고 풍성하신 분이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행해야 하는 어떤 일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다. 곧 우리가 그를 불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기도로써만 그의 은혜를 끌어낼 수 있을 뿐이다.

2. 모든 자에게 동일한 약속(13-21)

누구든지…부르는 자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여기서는 실제적인 모든 신앙으로 표현되고 있다. 기도 생활을 제외한다면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겠는가? 이렇게 그를 부르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저 구하기만 하면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는 이 사실을 더 설명하기 위해 다음의 몇 가지를 살펴보고 있다.

[1]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어야 했던 절실한 필요성(14,15절): 이것이야말로 유대인들이 그처럼 맹렬하게 바울에게 분노를 터뜨렸던 일이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그 약속이 미치는 범위 안으로 데려오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14절).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고서는 그들이 기도로써 그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믿음의 은혜는 기도의 의무를 이행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믿음의 은혜 없이 올바로 기도할 수 없다.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히 11:6).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그것에 동의할 수 있으려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계시가 우리에게 알려져야 한다. 우리가 선천적으로 그 계시를 갖고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누군가가 그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말해 줘야 한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15절). 사람이 자기를 보내는 왕으로부터 신임장과 명령을 받지 않고서 어떻게 대사로서 활동할 수 있겠는가? 사역자를 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대권에 속하는 일이다. 하나님만이 사람들에게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을 주시고 그들에게 이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실 수 있다. 그러나 이 자격과 적성의 문제가 각자의 판단에 맡겨져서는 안 된다.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아주 유능한 판단을 내린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들과 그와 같은 자격과 적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자들을 따로 세울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자들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따로 세움을 받은 사람들은 보냄을 받은 자로서 설교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2]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환영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구원의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15절). 이 점에 대해서 그는 이사야 3:7을 인용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평화의 복음이다. 평화란 일반적으로 모든 좋은 것에 대하여 표현되는 말인데 여기서도 그런 의미로 표현된다. 그것은 ‘좋은 일에 대한 좋은 소식'(한극 개역 성경에는 ‘좋은 소식’이라고만 되어 있음-역주)이다. 복음의 일이란 좋은 일이며 사실 가장 좋은 것이다. 이제까지 하늘로부터 땅에 전해진 것 중 가장 좋은 소식이다. 사역자들의 활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좋은 소식을 저하는’것이다. 평화를 전하는(원문의 뜻은 이렇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설교자들은 복음 전도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일을 위해 얼마나 기꺼이 받아들여져야 하겠는가? 아름답도다…자들의 발이여. 다시 말해서 그들은 참으로 환영 받을 만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그들의 발(그들의 생활과 대화)이 아름다워야 한다. 사역자들의 생활의 성결함이 곧 그들의 발을 아름다움이다. 아름답도다.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보기에 아름답다는 것이다. 메시지를 환영하는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사랑하기 마련이다.

[3] 그는 이 모든 것에 대적하는 반대에 대해 답변한다(16절).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16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 순종치 않았다는 말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 중 훨씬 더 많은 무리가 여전히 불신앙과 불순종 가운데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가 그것을 알고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복음을 전하였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전파된 말씀이 믿음을 일으키는 통상적인 수단이라고 가르친다(17절). 그러므로 비록 복음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다 믿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래도 일단 믿는 삶들은 그 이전에 이미 들은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17절). 믿음의 시작이나 진전, 그리고 능력은 들음에 의해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말씀이라고 불린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다. 그러나 그 믿음은 말씀에 의해서 생긴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것은 사람의 미혹하는 지혜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돕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복음을 듣고도 믿으려고 하지 않은 자들은 그들이 들었다는 사실로 인해서 용서받을 수 없었다(18-21절).

1)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었다(18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들은 복음을 들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소문을 들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단순히 혼잡한 소리가 아니라 그들의 말이 세상 끝까지 이른 것이다. 사도들이 받은 명령은 이와 같다.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하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그들이 지칠 줄 모르고 부지런히 일하였기 때문에 그 명령에 놀라운 성과가 따랐다. 사도들에게 방언의 은사가 그처럼 풍성하게 부어졌던 것은 바로 이 일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2) 유대인들도 역시 복음을 들었다(19-21절). 그는 이 사실에 대해 구약의 두 성경 구절에 호소한다. 이방인들이 부름을 받아 들어오리라는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그들은 틀림없이 모세와 이사야의 글로부터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먼저 한 구절은 신명기 32:21에서 인용되었다. 내가…너희를 시기나게 하며(19절). 그들은 복음을 제공받았으나 거절하였다. 그럴지라도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먼저 제공을 받았고 이방인들은 그저 찌꺼기만을 받았다. 만일 한 쪽이 받지 않으면 다른 쪽이 받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점이 유대인들을 시기나게 만들었다. 여기서 이방인들은 ‘내 백성이 아닌자’와 ‘미련한 백성’이라고 불린다. 세상의 기지와 지혜를 아무리 많이 갖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미련한 백성이라는 것이다. 이방 세계의 상태가 그러했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되신 것이다. 이방인들이 은혜 안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를 우리는 특별히 사도행전 22:22에서 잘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이 그처럼 격노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악함을 보여주는 실례였다. 하나님은 종종 사람들의 죄 자체가 그들에 대한 형벌이 되도록 하신다.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의 정욕으로부터 나오는 맹렬한 격노에 사로잡혀 있는 것 보다도 더 무서운 재앙은 없다.

다음으로 다른 구절은 이사야 65:1,2에서 인용되는데 이사야는 거기에서 매우 담대하게 말하고 있다. 충실하다는 인정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매우 담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결심한 사람들은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지간에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사야는 이방인을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예방적인 은총과 호의에 대해 담대하고 솔직하게 말한다(20절). 구하라 그리하면 찾으리라는 이러한 처방은 우리에게나 해당되는 규칙이지, 종종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도 찾은 바 되시는 하나님께는 해당되지 않는 규칙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복음의 빛을 보내심으로써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상황이 아니었는가? 우리가 그를 찾지 아니하였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 때야 말로 우리가 종종 무한한 감사와 함께 기억하게 되는 사랑의 때가 아니었는가? 또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강퍅함과 사악에 대해 담대하고 솔직하게 말한다(21절). 그들에게 쏟으신 하나님의 선하심은 지대한 것이었다.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21절). 여기서 하나님의 제의는 이것이다. ‘내가 내 손을 벌렸노라’ 즉 생명과 구원을 제공하였다는 말이다. 손을 벌리는 행위는 듣기를 요구하거나 받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몸짓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손을 벌린 채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었다. 화해를 제안하는 표시로서 ‘내 손을 벌렸노라.’ 그러니 와서 악수를 하고 친하게 지내자는 말씀이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그에게 우리의 손을 내미는 일이다. 이러한 제의를 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내는 이것이다. ‘종일’ 그는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기다리신다. 그는 오래 참으시나 언제까지나 참으시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저지른 악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이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치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거스려 말하고 그것에 대하여 다투었다. 유대인들은 그 부르심을 반박하고 모독적인 말을 하였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인간의 악함으로 인해 손상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나타내 주는 것이며, 인간의 악함이 하나님의 선하심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사악함의 정도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12-17 There is not one God to the Jews, more kind, and another to the Gentiles, who is less kind; the Lord is a Father to all men.

The promise is the same to all, who call on the name of the Lord Jesus as the Son of God, as God manifest in the flesh.

All believers thus call upon the Lord Jesus, and none else will do so humbly or sincerely.

But how should any call on the Lord Jesus, the Divine Saviour, who had not heard of him? And what is the life of a Christian but a life of prayer? It shows that we feel our dependence on him, and are ready to give up ourselves to him, and have a believing expectation of our all from him.

It was necessary that the gospel should be preached to the Gentiles.

Somebody must show them what they are to believe.

How welcome the gospel ought to be to those to whom it was preached! The gospel is given, not only to be known and believed, but to be obeyed.

It is not a system of notions, but a rule of practice.

The beginning, progress, and strength of faith is by hearing.

But it is only hearing the word, as the word of God that will strengthen faith.

#18-21 Did not the Jews know that the Gentiles were to be called in? They might have known it from Moses and Isaiah.

Isaiah speaks plainly of the grace and favour of God, as going before in the receiving of the Gentiles.

Was not this our own case? Did not God begin in love, and make himself known to us when we did not ask after him? The patience of God towards provoking sinners is wonderful.

The time of God’s patience is called a day, light as day, and fit for work and business; but limited as a day, and there is a night at the end of it.

God’s patience makes man’s disobedience worse, and renders that the more sinful.

We may wonder at the mercy of God, that his goodness is not overcome by man’s badness; we may wonder at the wickedness of man, that his badness is not overcome by God’s goodness.

And it is a matter of joy to think that God has sent the message of grace to so many millions, by the wide spread of his gospel.

로마서 10 장 주석 | [하루 한 장] 로마서10장_자기 의를 세우려고 최근 답변 18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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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8. 19 (수) [하루 한 장]“자기 의를 세우려고” (롬10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로마서 10장은 9장에 이어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신앙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 이들이 돌아와

구원 받기를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은 문제는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그것이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심과 야망에 매여서

결국 하나님의 열심에는 반하는

불순종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른 채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애쓰는 건

모든 인간이 꿈꾸는 바이지만

죄에 물든 인간이 율법을 다 지켜

자기 의를 세우는 건 환상입니다

불가능한 꿈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자기 의를 세우려는

모든 사람은 헛된 야망에 빠져

자기 인생을 갉아먹고 남도

망치는 나락에 떨어집니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의 의를 붙잡읍시다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성민가족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mp3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분홍목사의 사역 신청 문의도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051-204-0691 (담당 : 성민교회 박지선 간사)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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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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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로마서 10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아델포이 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 카이 헤 데에시스 프로스 톤 데온 휘페르 아우톤 에이스 소테리안 개역개정,1 형제들아 내 마음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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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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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0장주석. 롬10:1-13 하나님의 의와 구원

로마서10장주석. 롬10:1-13 하나님의 의와 구원 ·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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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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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헨리주석1055-로마서 10장 – 네이버 블로그

매튜헨리주석1055-로마서 10장 · 1. 유대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고백함(1,2) 여기서 그는 그들에 대하여 선한 소원을 품으며 선한 증거를 한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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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의에 대한 바울의 강론(2)(로마서 10:1-11) 본장의 이 부분에서 사도의 목적은 율법의 의와 신앙의 의 사이의 큰 차이와 율법의 의에 비해 신앙의 의가 그지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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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로마서 10 장 주석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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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020.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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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장 주석

로마서 제 10장 =====10:1 형제들아 – 1:13 주석을 보라. 내 마음에 원하는 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구절은 ‘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 )이다. 여 기 쓰인 ‘멘'(* , ‘한편’)은 주로 ‘데'(* , ‘그러나’, ‘또 한편’)와 같이 쓰여 서 달리 내용을 구별할 때나 반대되는 내용이 전개될 때 사용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데’와 상관없이 쓰여서 내용이 계속됨을 나타낸다. 즉, 본문은 9:33에 이어진 것으로 ‘내 마음’을 표현한 ‘에메스 카르디아스'(* )의 ‘에메스'(‘나 의’)는 ‘무'(* , ‘나의’)보다 더 강한 표현이다. 이는 바울의 안타까운 심경(心 境)을 드러낸다. ‘원하는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키아'(* )는 단순 히 ‘바라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라는 표현이라기보다 ‘기뻐하는 것’의 표현이다. 이 단어에서 바울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 ‘구하는 바’의 헬라어 표현은 ‘데에시스'(* ), 즉 ‘간구하는 것’이며 이는 ‘기도하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 )와 구별되는 강한 표현이다(엡 6:18). 따라서 본문에 쓰인 ‘내'(에메스) ‘원하 는 바'(유도키아), ‘구하는 바'(데에시스)등은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간절한 호소와 간구를 담은 강한 어조의 표현들이다. 구원을 얻게 함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 소테리안'(* )으로 구원을 향한 마음이 목적이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에 담 겨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 확실히 언급했지만 동시에 동족에 대한 안 타까움과 슬픈 마음 또한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열망 은 행 13:46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은 신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10:2 내가 증거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로'(* )는 공적(公 的)인 책임감과 엄숙함을 내포한 단어이다(Cranfield).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 엘의 열심을 개인적인 감정에 앞서 엄숙히 공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 ‘하나님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우'(* ) 는 목적격, 소유격으로 ‘하나님을 위한’이나 ‘하나님에 대한’으로 해석해야 한다. ‘열 심’을 표현하는 헬라어 ‘젤론'(* )은 특히 ‘하나님의 영광’이나 ‘성전’, ‘율 법’에 대해 충성하는 그런 열심을 나타낸다(왕상 19:10, 14;왕하 10:16;시 69:9).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성전, 율법들에 대해 대단한 열성을 가졌다. 바울 역시 유 대교에 심취했던 사람으로(갈 1:14) 누구보다 유대교에 열성이었으므로(행 26:5) 이스 라엘의 열심에 대해 바르게 판단할 수 있었으며 동정하는 마음에서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 이는 하나님께 열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열 심이 비난받은 이유이다. ‘지식’을 나타내는 헬라어 ‘에피그노시스'(* )는 ‘지식’을 표현할 때 일반적으로 쓰이는 헬라어 ‘그노시스'(* )보다 훨씬 강조된 표현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 하나님이 실제(實在)하는 것 이상은 몰랐다. 즉 그들은 구원을 주는 지식(1:17)을 결여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지식이 결여된 그들은 보아도 참으로 알지 못했으며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막 4:12). 그들의 완고한 마음과 고집은 오히려 우매하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 로막았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데 도리어 방해가 되었던 것 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 즉 구원을 주는 지식에 의해서 수반되어야 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10:3 바른 지식이 없는 유대인들이 추구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였다. 원인을 이끄는 문장 서두의 ‘가르'(* , ‘왜냐하면’)는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는 2절 후반부의 설명을 이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 ‘하나님의 의'(* , 투 데우 디카이오쉬넨)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으로서의 ‘의’라기보다 그리 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이뤄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신약에서 나오는 ‘의’ (Righteousness)는 주로 계약 관계를 전제로 한다. 계약을 수립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계약에 인간을 참여케 하시고 그 중간에 그리스도를 두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 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그것을 믿는 인간들을 ‘의롭다’하시기로 계약을 수립하 신 것이다. 따라서 이 계약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예수를 믿음이다. 하나님 의 자비하심은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다. 그 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길을 불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믿기를 거부 했던 것이다. 여기서 ‘모르고'(* , 아그노운테스)는 ‘하나님의 의’ 에 대해 지식이 없었으므로 기인된 ‘오해’를 의미한다(Meyer).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바른 지식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의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 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오해였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 ‘세우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사이'(* )는 ‘세우다’, ‘정하다’, ‘확증하다’의 뜻이 있다. 즉 ‘하나님의 의’에 맞서 ‘자신 의 의’를 세워 불순종한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힘써’로 번역된 헬라어 ‘제툰테스’ (* )는 현재 분사형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계속 애써 온 것을 나 타낸다.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칭의’의 근원이며 이유이다. 즉, 의를 이루 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란 말은 뒤에 나오는 ‘율법의 마침’을 한정시키 는 말로 ‘율법의 마침’은 그 목적이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 는 유대인을 넘어서서 ‘모든 믿는자’들, 모든 민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즉 그리스도의 의는 공평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유대인일지라도 멸망을 받 으며 반면에 이방인일지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실로 ‘의'(* , 디카이오쉬넨)은 율법으로나 인간의 행위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공 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칭의의 의를 끝까지 불신한 것이다. 율법의 마침 – 혹자는 여기서 ‘율법'(* , 노모스)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일반적인 법이나 원리를 의미한다고 한다(Meyer, Sanday and Headlam). 또 혹자는 본 문의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특히 9:31)에 서 볼 때 여기서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침’을 가 리키는 헬라어 ‘텔로스'(* )는 (1) 문제의 종결(end), 종료(termination) 혹 은 (2) 목적(aim), 의도(intention), 목표(goal)등 양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종결시켰다는 의미이다(13:10;Calvin, Erasmus, Lenski, Murray, Harrison). (2)는 그 리스도께서 율법의 실제 의미이며 목적과 의도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Hendriksen, Cranfield). 그 중 (1)이 더 타당하다고 보는데 이유인즉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 향하는 그림자로서 그 역할을 하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實體)로 인해 그 기 능이 종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진행되는 어떤 과정에서 역사상에 주어졌던 것이고 이제 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다 는 의미이다. =====10:5 모세가 기록하되 – 레 18:5에서 인용된 것으로 모세의 말이 인용된 것은 모세가 유 대인의 율법을 세운 자였기 때문이다. 이기에서 모세는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하나님의 율례’라는 표현을 통하여 구약 여러 부분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느 9:29;겔 20:11, 13, 21) 또한 신약에 넘어와서도 그 사상을 계승되고 있다(7:10;마 19:17;눅 10:28;갈 3:12). 하지만 문제는 누가 과연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있다. 연약한 인생 중에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3:9-18). 오직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율법 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시고(8:3, 4) 자기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신 유일한 분이시다(히 5:8, 9). ‘기록하되’를 가리키는 헬라어 ‘그라페이'(* )는 6, 8절에 나오는 ‘말하되’의 헬라어 ‘레게이'(* )와 의도적으로 대조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레게이’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한 반면 ‘그라페이’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6절 주석 참조).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 – ‘말미암은’의 헬라어 ‘에크'(* )는 ‘…에서 나온’이라 는 뜻으로 그 출신을 나타낸다. ‘율법에서 난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는 의이다. 이는 9:31, 32에 나오는 ‘행위에서 나온 의의 법’을 말한다. 율법은 행함을 요구하며 죄를 알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판결을 받는 길이었다(레 18:5;겔 20:11, 13, 21;눅 10:28). 따라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며 행할 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罪性)은 율법을 완전히 수행할 수 없다. 결국 이스라엘은 의의 법을 좇아 갔지만 법이 요구하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9:31). 유대교의 구원 교리에 따르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면 율법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야 한 다고 보았다. 이렇게 율법을 성취하여 그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이 보장되고, 하나님으 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게 된다고 보았다(Strack-Billerbeck). 그러나 율법은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법에 대한 약속을 하셨고(렘 31:33) 오순절의 성 령 보내심으로 성취되었다(욜 2:28ff.).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 은 믿음이고, 믿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과 부활 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믿는 자들의 의가 되셨기 때문이다.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 본 구절은 앞절(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대조를 이루어 상대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나타났음은 바울의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며 기독론적(christological)인 가르침 의 기본 구조이다(Ridderbos). 그리스도의 죽음은 종말론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며 의롭다하는 판결의 표시이다. 옛 시대(old aeon)와 옛 사람이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심판을 받았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의롭게 했다. 이같이 말하되 – ‘믿음에서 난 의’를 의인화시켰다. 이런 수사법은 바울 당시 철학 적 연설을 할 때 종종 쓰였다. 의인화 용법으로써 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대 조하여 ‘믿음에서 난 의’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 본 구절은 70인역(LXX)의 신 30:12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본 구절은 구약적 문맥에 비추어 보면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롭다하 심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늘에 오르는 것은 (1) 사람으로서 불가 능할 뿐 아니라, (2) 이런 교만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승천하심을 믿지 않는 데서 나오 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율법으로 의를 구하려는 자들의 교만함과 그들의 망상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근본 핵심은 버리고 자신들의 유 전과 행위를 통해 하늘, 즉 의에 이르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마음에…하지 말라 – ‘하지 말라’의 헬라어 ‘메 에이페스'(* ) 는 ‘말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믿음을 통한 의’는 율법을 통해 의를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셨고 이것 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를 부인하였다. 이는 하 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정치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해 그들 중에 오 셔서 생명을 주셨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10:7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 ‘음부'(* , 아뷩손)는 6절의 ‘하늘’ (* , 우라논)과 그 높고 깊음에서 대조를 이룬다. 음부의 헬라어 ‘아뵤소 스'(* )는 히브리어 ‘테홈'(* ) 대신 사용된 말이다. ‘테홈’은 ‘물들 의 깊음'(창 1:2)이나 ‘바다의 깊음'(시 107:26)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본문 의 의미는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인 ‘땅의 깊은 곳'(시 71:20), 즉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스올'(* , Sheol)을 의미한다(시 139:8;암 9:2;Murray, Hodge, Cranfield). 음 부에 내려가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당하신 죽음을 믿지 않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無效)로 하는 것이며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 ‘모셔 올리는’의 헬라어 ‘아 나가게인'(* )은 부활을 언급할 때 쓰인다(히 13:20). 이스라엘 중에 이스라엘인들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은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받 아들이지도 않았다.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 앞에서 부정적인 진술을 계속하였지만, 이제는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바울이 언급하고자 하는 주제로 돌아 온다.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 신 30:14의 인용인 데, 70인역에는 ‘심히’에 해당하는 ‘스포드라'(* )가 있으나 본문에서는 생 략하였다. 구약의 문맥에서는 율법을 통해 드러난(reveal)은 혜로운 면이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기의 말씀대로 그들의 입과 마음에 두어 율법을 암송하며 묵상하였던 것이다(시 1:2). 여기서 ‘말씀 이 가깝다’는 것은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마음에 선물로서 그리스도 의 영이 와 계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율법은 상대적 위치인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입 과 마음에 있다는 표현으로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가는 불가능성과 대조하면 서 구원받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밝히 드러낸다.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 이 부분은 인용구에 바울이 첨가시킨 삽입구이 다. ‘전파하는’의 헬라어 본문 ‘케륏소멘'(* )는 ‘가르치다’, ‘설교 하다’, ‘선포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사도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복음의 말씀 을 뜻한다. ‘우리가 전파하는’이라는 한정구는 ‘말씀이 멀리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견해에 있어서 바울이 모세와 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전파된 말씀은 유대인에게나 이 방인에게나 은혜의 말씀으로 구약에 계시된 약속의 말씀, 즉 믿음의 말씀이다. 여기서 ‘믿음의 말씀’은 복음의 내용 그 자체이다(Calvin, Cranfield). 그리고 이 말씀은 믿 음을 요구하는 말씀임을 뜻한다(Cranfield). 바울이 신 30:14에 나오는 ‘말씀’을 칭의 (justification)와 같게 본 것은 그리스도가 그 말씀의 실체이며 실제적 의미이기 때 문이다.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 ‘네 입으로’, ‘네 마음으로’는 8절의 ‘네 입에’, ‘네 마음에’와 병행을 이룬다. 예수를 주로 – 이는 ‘예수는 주이시다'(Jesus in Lord)란 말이다.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는 헬라 세계에 있어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나 노예 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호칭이었다. 또한 신비 종교(Mystery Religion) 의 신들이었던 이시스(Isis)나 오시리스(Osiris)에게도 사용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통 치자에게 이 명칭을 붙였다. 특히, 하나님의 칭호 ‘야웨'(* )는 칠십인역에서 항상 ‘퀴리오스’로 번역했다. 즉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에 해당 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예수가 주’라는 고백은 교회 최초의 신앙 고백의 형태로서(행 2:36;고전 12:3) 예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고백에는 경배의 대상이며 승천 하신 구주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 ‘살리신’의 헬라어 ‘에게이렌'(* )는 ‘일으키다’라는 말로서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 아파르케)가 되셨다는 뜻이다(고전 15:2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서 부활하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부활을 소망케하는 종말론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하 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로 높이심으로 하 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의 주되심을 시인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의 다시 사심을 고백했고 믿었던 것 이다(빌 2:9-11). 네 마음에 믿으면 –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에 믿는 것은 불가 분리의 관계이 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마음에서 믿는 만큼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 신 앙 고백을 전제한 것으로서 외식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입->마음의 순서는 인용문 신명기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10절에서는 그 바른 순서, 즉 마음속에 믿는 것과 입으 로 고백하는 자연적인 순서로 말한다. 구원을 얻으리니 – 헬라어 본문 ‘소데세'(* )는 미래형으로 종말론적 구 원(eschatological salvation)을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의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 입으로 시인하게 하며 구원에 이르게 한다. =====10:10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마음’-‘입’, ‘믿는 것’-‘시인하는 것’은 문장에 있어서 균형을 유지한다. 또한 ‘의에 이르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은 본문에서 역으로 사용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다. 본절은 본서의 주제가 되는 1:16, 17의 구절을 기억시키는 내용으로서 믿고 시인함이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한다. ‘믿어’와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에타이'(* )와 ‘호몰로게이타이'(* )는 수동태로서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 있 음을 나타낸다. 즉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시인에 이 르게 됨을 나타낸 것이다(고후 5:14-15). ‘의에 이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얻 어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 인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이며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람 앞에서 주 예수를 입으 로 시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을 아무 두려움 없이 공언하는 것이다(마 10:32;막 8:38;눅 12:8). 특히, 시인(是認)은 지적인 확인을 넘어 생활의 차원에서 삶으로 고백 되어져야 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강요당하고 핍박받을 때 주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시인은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 때 직면하게 되는 구체적 탄압과 고 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구원을 정직하게 표명(表明)하는 차 원까지도 의미한다. =====10:11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 9:33과 같이 사 28:16로 부터 인용된 구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더 강조된 형태로 인용되었다. 즉 ‘저를 믿 는자’란 말 앞에 ‘누구든지’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Hendriksen). 이렇게 강조된 것은 앞에 언급된 4-10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바 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구원이 유대 민족에게만 독점되어지고 또한 이방인에 게 있어서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에게만 국한시켰던 것을 확장시켜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자에게 허락되어졌음을 선포하고 있다(Godet).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부끄러움을 당 하지 않는다는 이 문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그 어떤 종족이든지 차별을 받지 않고 똑 같이 적용되어진다. 설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어떤면에 있어서는 ‘차별'(* , 디아스톨레)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다 (3:22). 그런데 바울은 실제로 그의 서신서에서 유대인의 우선권에 강조점을 두고 있 었고(1:16;2:9, 10),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Covenant) 아래서는 이스라엘이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3:1, 2:9:4, 5). 그러나 이는 구원 경륜의 순서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특권을 받은 것을 나타낼 뿐이다. 구원에 있어서는 유대인과 헬라 인, 기타 이방인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Dunn).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 바울 은 구원이 유대인과 헬라인 그외 모든 이방 민족에게 차별이 없는 분명한 이유를 ‘한 주께서'(the same Lord)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Lenski).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주'(* , 퀴리 오스판톤, Lord of all)로 묘사하고 있는데 만일 유대인이 하나님을 주님(Lord)으로 믿고 있다면 그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주님이 되어야만 한다 (3:29, 30). 이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구세주(救世主)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동일하 다.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 기타 이방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다(Dunn). 더구나 주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부르는 모든 자를 부요하게 하신다.’ 이는 주님의 부요함을 말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의 보편적이고 동일한 은혜가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의미이다(Godet). 여기서 ‘부요하시도다’는 헬라어로 ‘플루 톤'(* )인데 능동적인 개념으로 ‘자비하다’와 ‘은혜롭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Calvin). 이것은 주님의 구원의 은혜와 그 능력은 무한하여 그가 부르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려는 선한 뜻은 결코 약화되거나 다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그리 스도를 믿는 자는 부요하신 주 하나님께(시 50:10-12;학 2:8;엡 3:8;계 5:12)속하여 항상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됨으로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2:4;9:23;요 10:10;고후 8:9;엡 2:7).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앞절에서 말한 내용을 더욱 강력하게 확증하고 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사실은 이미 구약성경 욜 2:32에 예언되어 있었다(Godet).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구 원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고 하였다(Calvin). 요엘에 의해 약속된 하나님의 이 말 씀을, 베드로는 예수님 승천 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 을 설명하면서 인용하였다(행 2:16-21). 바울도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요엘서의 ‘여호 와'(Jehova)를 ‘주'(Lord)와 동일시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는 ‘예수 그리스 도’를 가리킨다(Alford, Harrison). 실제로 70인역(LXX)에는 언제나 ‘야웨’를 관사가 없는 ‘퀴리오스'(* )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구약에서의 ‘야웨’가 곧 그리스도 예수와 동일한 하 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주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증거가 되 게 하며 또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구 원 사이에 완전한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Dunn).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란 주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자 곧 주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자 는 하나님의 칭의(justification)를 받아 구원 받은 자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10:14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바울은 이제 복음을 확장하여 범세계 적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Bruce). 그래서 그는 믿음과의 관 계에서 제일 먼저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양자간에는 밀접한 연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Calvin). 주는 신뢰하고 믿을 만한 분이며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결국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를 부 르는 일이 믿음의 첫걸음임을 가리킨다. 여기서 ‘어찌 부르리요'(How then shall they call on, KJV, NIV)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포스 에피칼레손타이'(* )로 ‘에피칼레손타이’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다’의 뜻을 가진 ‘에피칼레오'(* )의 3인칭 복수 부정과거 중간태로서 가정법으로 쓰여 졌다. 이는 ‘그들을 부를 수 없다’라는 의미이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 바울은 두번째로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그리스 도에 대하여 듣는 것으로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도 ‘포스'(* , ‘어떻게’)를 사용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표현법을 쓰고 있다. 그는 이러한 논리적인 논 증을 통해 믿음은 지식에 근거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은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하려면 먼저 그 복음을 들어야함 한다. 한편 초대 교회 당시 대부분 사람 들의 복음 전수(傳受) 방법은 메시지를 ‘듣는 것’이었다. 비록 소수의 교회가 바울의 서신을 받기는 하였지만 신약성경이 문자와 글로 읽을 수 있는 기록으로 갖추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복음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구두(口頭)로 전달되어야 했다. 이같은 일은 성경의 전 시대에 걸쳐 일반적으로 계속 행해져 내려왔다 (Harrison). 왜냐하면 전파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과 신앙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 전파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전형적인 방법이 되었다(Calvin).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세번째로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사도나 전도자의 직책 을 중요시하고 있다(Bruce).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증언함으로 그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전파자’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케륏손토스'(* )로 ‘케륏소'(* , ‘전파하다’, ‘가르치다’)의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여기서 ‘전파자’라는 말 앞에 관사가 없는데 이는 어떤 특별한 직책에 있는 사도들이 나 전도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파하는 모든 자'(someone preaching, NIV)를 의 미한다(Lenski). 헬라어 ‘케륏소'(* )는 ‘전파하다’, ‘알리다’의 뜻인데 이것은 왕이나 사령관의 메시지를 공개하여 알리는 전령의 행위로서 전령은 왕이 명령 한 이외의 말을 가감할 수 없었으며 단지 왕의 명령을 자신의 음성으로 대언(代言)하 는 역할만 하였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LXX) 많이 사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 지자들이나 사도들 역시 이 말이 깊은 의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메시야에 대한 전파나 종말론적인 언급(사 61:1;막 1:4, 7, 14, 38, 39;눅 4:18, 19;행 20:25;28:31)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 단어를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의 견 지에서 사용하였다(갈 2:2;골 1:23).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바울은 전도자가 복음을 전한 것은 이미 그 이전에 누군가가 그 전도자에게 ‘보내심’의 권위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 고 있다(Hendriksen). 즉 전도자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권위는 그 선포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명령과 위임이라는 점에 있다(Bruce). 여기서 ‘보내심’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포스탈로신'(* )은 ‘아포스텔로'(* , ‘보내 다’)의 부정과거 수동태 가정법으로 ‘사도'(* , 아포스톨로스)란 단 어가 이 동사에서 파생되었다(Robertson).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인간은 보다 높은 권위 아래 존재하며 (2) 보내심을 받은 자의 메시지는 그 자신이 아니라 보내는 자에 의해서 주어진다. 이러한 두 가지면에서 예언 자들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었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다(요 3:34;7:16). 이것은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진다. 모든 성도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서 그가 세우시지 않은 복음 전파자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궁극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예수의 복음 전 도자로서 전세계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며 그 결과로 전파된 말씀을 듣고 열방 들이 기뻐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Godet).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 바울은 다시 한번 바벧론 포로 생 활 동안 황폐되어 있었던 예루살렘 도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선 지자 이사야의 말로써 그 자신의 이야기를 확증하고 있다. 이 말씀은 사 52:7의 인용 구절로서 원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가까왔다는 기쁨과 평화의 선포였다. 그러나 신약 에서는 복음의 전달로 해석한다. 이스라엘이 바벧론왕 고레스 치하(治下)에서부터 구 출을 받은 것은 모세에 의하여 애굽왕 바로의 치하에서 구출을 받은 것처럼 죄와 사망 으로부터 구출받는,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질 보다 완전하고 큰 구원을 예 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유대 민족이 바벧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리 라는 메시지가 기쁜 소식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 안에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있다는 메시지는 그보다 훨씬 더 기쁜 소식인 것이다. =====10:16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 유대인들은 전파된 복음을 대부분 믿지 않았다. 바울은 이것을 완곡어법(litotes)을 사용하여 말하고 있다. 즉 그들 중 일부 만이 복음에 순종하였다는 의미이다(사 53:1;고전 10:5). 이사야가 가로되…누가 믿었나이까 – 바울은 사 53:1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스라엘 의 불순종을 확증하고 있다. 바울이 앞절에서 인용한 사 52:7과 본절에서 인용한 사 53:1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고난받는 종에 의한 구원의 메시지가 거부되리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말 씀은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의 불신앙을 예언하는 구절로 널리 사용되었으며(11:8) 친 히 예수께서도 공생애 동안 사역하시면서 그 백성이 그를 메시야로 믿지 않는다는 사 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하기도 하였다(Bruce). 그리고 역사는 그 예언을 확증해 왔 다(고전 1:23). 혹자(Calvin)는 이사야가 이 말을 한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빛을 우리 안에 조명해 주실 때에야 비로소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 졌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한 특별 계시에 의하여 구원은 내적으로 소명받은 자, 즉 선택 받은 자에게 국한되는 것을 보여준다(Calvin).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바 울은 결론적 접속사 ‘그러므로'(* , 아라;so then, KJV)를 사용하여 그의 논리를 결론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는 믿음에 대해서 결론짓기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 서 온다고 정의한다. ‘들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코에스'(* )로 ‘듣는 행 위'(act of hearing)나 ‘들려 오는 것'(that which is heard)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앞절(16절)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할 때 ‘전하는 바'(아코에)와 동일하게 사용 되었다. 그러나 앞절과 차이점은 전자는 수동태로 ‘들려진 말'(was heard)의 의미로 쓰여진 반면에 본절에서는 능동태로 메시지를 ‘들음'(hearing)의 의미로 쓰여졌다 (Hendriksen). 또한 바울은 구원얻는 신앙 곧 믿음은 듣는 행위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 리스도의 말씀으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 , 레카토스 크리스투)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다 (Harrison). 따라서 바울은,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에 근거한다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 바울은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불신앙에 대한 이스라엘의 변명의 소지를 철저히 차단시키고 있다. 즉, 이스라엘이 그 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는 가능성 을 차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믿음을 얻게 되는 ‘들음'(hearing)의 기회가 이스라엘에게는 가장 확실하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가 듣 지 아니하였느뇨'(* , 메 우크 에쿠산)는 ‘그들이 듣지 못 했는가 ?'(새번역, 공동번역; Did they not hear ?, NIV)라는 의미가 좀더 적절하다. 여기서 헬라어 ‘메’와 ‘우크’는 부정을 강조하여 ‘그들이 듣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렇지 ?’라는 말이다(Dunn, Lenski). 결국 바울은 유대인들이 결코 듣지 못해서, 즉 전 도를 받지 못해서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은 아니라고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그 소리가…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 바울은 그의 이러한 논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시 19:4을 인용하면서 복음 전파의 편만성(遍滿性)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 을 복음이 전세계에 완전히 전파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바울이 시편의 말씀 을 인용한 초점은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즉, 복음 전파는 궁극적으로 전세 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당시나 초대 교회 시대에 복음이 매우 신속하게 편만히 전파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5:22-24;요 12:19;행 2:41, 47;4:4;17:6;빌 1:12, 13;골 1:6). =====10:19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 바울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듣기는 했지만 깨닫지 못했으므로 거부했다는 반문이 나올 수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반박을 예상하여 앞절에서의 ‘들음'(hearing)에 관한 질문에서 전환하여 이제 ‘앎'(knowing)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여기서도 앞절에서와 같이 헬라어 부정불 변사 ‘메'(* )를 사용하여서 부정적인 대답을 암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 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주어졌지만 거절한 것처럼 복음의 의미와 불신앙의 결과가 무 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절하였다(Lenski). 그러므로 바울 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복음에 대한 앎의 부족이나 깨달음의 결여로 비롯되었 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Harrison). 결국 이 말씀이 암시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그들이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으려 하는 마음이 없었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Hendriksen).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 이는 신 32:21의 인용으로 이 구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의 노래 중 일부인데,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 들의 불신앙에 대한 예언으로 많이 인용되었다(11:11).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의 사악성을 질책하였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켰으 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질투를 야기시키는 어떤 일을 추진하게 된 것이 다. 그 일은 미련한 백성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백성 아닌 자'(* , 에프 우크 에드네이)와 ‘미련한 백성'(* , 에프 에드네이 아수네토)은 다같이 이방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단절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들 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었고 또한 어리석은 민족들이었다(Bruce).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용을 베푸셔서 그가 친히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존귀하게 하심으 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시켰다. =====10:20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 바울은 이스라엘이 불순종에 대해 변명할 수 없 도록 이전의 증거보다 더욱 강력한 증거를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역설하고 있다. ‘매우 담대하여’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포톨마'(* )로 ‘담대한 태도를 취하다’의 뜻을 지닌 ‘아포톨마오'(* )의 현재 능동태 직설법 으로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온다.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나타났노라 – 이 말씀은 사 65:1의 인용으로 분 명히 앞절(신 32:21)에서 선포된 내용을 더욱 강하게 확증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 이다.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한 백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기까지 이스라엘이 불순종 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철저한 불순종을 증거하고 있다. 바 울은 이방인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어 정의하기를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은 자들’이라 하였다(Dunn). 그는 이방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틀에 박힌 멸 시와 배척, 자기 우월주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던 이방 인들마저도 복음을 듣고 순종하여 구원이 임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 라엘은 불순종함으로 구원을 거절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께 구하지도 문의 하지도 않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가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통해 서 자신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대로 구원을 베풀 수 있는 주권적인 능력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Hendriksen, Calvin). =====10:21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 – 앞절에서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로 복 음을 순종한 사건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사 65:1)을 통해서 인용하였다. 이번에는 역설적으로 사 65:2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강조하여 지적하고 있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스 라온 아페이둔타 카이 안틸레곤타'(* )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 을 병행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페이둔타'(* )는 이스라엘의 불신 앙을 나타내는 것이고 ‘안틸레곤타'(* )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결과로 나타나는 완악한 행동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까지 포함하고 있 다(Lenski). 이처럼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 회가 없었다거나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원래부터, 즉 모세와 선지자들의 시대에서부터 완악하고 반역적인 기질이 있었으며 이러한 기질 로 인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서 기인한 것이다(Harrison). 하나님을 향한 이러 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을 예수께서도 탄식하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 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 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7, 38)고 책망하고 있다.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함에도 불구하고 하 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베푸셨는가를 탄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종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홀렌 텐 헤메란'(* ) 은 시간의 범위를 나타내는 목적격으로 ‘매일'(Michel), ‘지속적으로'(Cranfield)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다(Dunn). 또한 ‘손을 벌렸노 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여세페타사 타스 케이라스'(* )로 부성애(父性愛)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의 품에 정 답게 안아 주기 위해서 손을 벌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인내와 사랑의 손을 벌리고 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눅 15:20).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 엘이 그에게 돌아와 그를 사랑하고 순종하게 하려는 뜻을 가지고 끊임없이 그의 백성 을 찾고 또 손을 뻗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참히 거절하고 말았다(Harrison).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自招)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은 완전한 이스라엘의 책임인 것이다.

헬라어 로마서 10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반응형 아델포이 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 카이 헤 데에시스 프로스 톤 데온 휘페르 아우톤 에이스 소테리안 개역개정,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새번역,1 ㉠형제자매 여러분, 내 마음의 간절한 소원과 내 동족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내 기도의 내용은, 그들이 구원을 얻는 일입니다. / ㉠그, ‘형제들’ 우리말성경,1 형제들이여, 내 마음의 소원과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 형제 여러분, 내 마음의 소원,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는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영어NIV,1 Brothers, my heart’s desire and prayer to God for the Israelites is that they may be saved. 영어NASB,1 Brethren, my heart’s desire and my prayer to God for them is for their salvation. 영어MSG,1 Believe me, friends, all I want for Israel is what’s best for Israel: salvation, nothing less. I want it with all my heart and pray to God for it all the time. 영어NRSV,1 Brothers and sisters, my heart’s desire and prayer to God for them is that they may be saved. 헬라어신약Stephanos,1 αδελφοι η μεν ευδοκια της εμης καρδιας και η δεησις η προς τον θεον υπερ του ισραηλ εστιν εις σωτηριαν 라틴어Vulgate,1 fratres voluntas quidem cordis mei et obsecratio ad Deum fit pro illis in salutem 히브리어Modern,1 אחי חפץ לבבי ותפלתי לאלהים בעד ישראל אשר יושעו׃ 성 경: [롬10: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 형제들아 – 1:13 주석을 보라. 󰃨 내 마음에 원하는 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구절은 ‘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이다. 여기 쓰인 ‘멘'(*, ‘한편’)은 주로 ‘데'(*, ‘그러나’, ‘또 한편’)와 같이 쓰여서 달리 내용을 구별할 때나 반대되는 내용이 전개될 때 사용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데’와 상관없이 쓰여서 내용이 계속됨을 나타낸다. 즉, 본문은 9:33에 이어진 것으로 ‘내 마음’을 표현한 ‘에메스 카르디아스'(*)의 ‘에메스'(‘나의’)는 ‘무'(*, ‘나의’)보다 더 강한 표현이다. 이는 바울의 안타까운 심경(心境)을 드러낸다. ‘원하는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키아'(*)는 단순히 ‘바라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라는 표현이라기보다 ‘기뻐하는 것’의 표현이다. 이 단어에서 바울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 ‘구하는 바’의 헬라어 표현은 ‘데에시스'(*), 즉 ‘간구하는 것’이며 이는 ‘기도하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와 구별되는 강한 표현이다(엡 6:18). 따라서 본문에 쓰인 ‘내'(에메스) ‘원하는 바'(유도키아), ‘구하는 바'(데에시스)등은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간절한 호소와 간구를 담은 강한 어조의 표현들이다. 󰃨 구원을 얻게 함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 소테리안'(*)으로 구원을 향한 마음이 목적이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에 담겨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 확실히 언급했지만 동시에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픈 마음 또한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열망은 행 13:46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은 신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마르튀로 가르 아우토이스 호티 겔론 데우 에쿠신 알 우 캍 에피그노신 개역개정,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새번역,2 나는 증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성경,2 내가 그들에 대해 증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성경,2 나는 그들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한 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입니다. 영어NIV,2 For I can testify about them that they are zealous for God, but their zeal is not based on knowledge. 영어NASB,2 For I bear them witness that they have a zeal for God, but not in accordance with knowledge. 영어MSG,2 I readily admit that the Jews are impressively energetic regarding God–but they are doing everything exactly backwards. 영어NRSV,2 I can testify that they have a zeal for God, but it is not enlightened. 헬라어신약Stephanos,2 μαρτυρω γαρ αυτοις οτι ζηλον θεου εχουσιν αλλ ου κατ επιγνωσιν 라틴어Vulgate,2 testimonium enim perhibeo illis quod aemulationem Dei habent sed non secundum scientiam 히브리어Modern,2 כי מעיד אני עליהם שיש להם קנאה לאלהים אך לא בדעת׃ 성 경: [롬10:2]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 내가 증거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로'(*)는 공적(公的)인 책임감과 엄숙함을 내포한 단어이다(Cranfield).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열심을 개인적인 감정에 앞서 엄숙히 공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 ‘하나님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우'(*)는 목적격, 소유격으로 ‘하나님을 위한’이나 ‘하나님에 대한’으로 해석해야 한다. ‘열심’을 표현하는 헬라어 ‘젤론'(*)은 특히 ‘하나님의 영광’이나 ‘성전’, ‘율법’에 대해 충성하는 그런 열심을 나타낸다(왕상 19:10, 14;왕하 10:16;시 69:9).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성전, 율법들에 대해 대단한 열성을 가졌다. 바울 역시 유대교에 심취했던 사람으로(갈 1:14) 누구보다 유대교에 열성이었으므로(행 26:5) 이스라엘의 열심에 대해 바르게 판단할 수 있었으며 동정하는 마음에서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 이는 하나님께 열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열심이 비난받은 이유이다. ‘지식’을 나타내는 헬라어 ‘에피그노시스'(*)는 ‘지식’을 표현할 때 일반적으로 쓰이는 헬라어 ‘그노시스'(*)보다 훨씬 강조된 표현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 하나님이 실제(實在)하는 것 이상은 몰랐다. 즉 그들은 구원을 주는 지식(1:17)을 결여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지식이 결여된 그들은 보아도 참으로 알지 못했으며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막 4:12). 그들의 완고한 마음과 고집은 오히려 우매하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았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데 도리어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 즉 구원을 주는 지식에 의해서 수반되어야 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아그노운테스 가르 텐 투 데우 디카이오쉬넨 카이 텐 이디안 디카이오쉬넨 제툰테스 스테사이 테 디카이오쉬네 투 데우 우크 휘페타게산 개역개정,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새번역,3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을 씀으로써,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말성경,3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쓰면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성경,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어NIV,3 Since they did not know the righteousness that comes from God and sought to establish their own, they did not submit to God’s righteousness. 영어NASB,3 For not knowing about God’s righteousness, and seeking to establish their own, they did not subject themselves to the righteousness of God. 영어MSG,3 They don’t seem to realize that this comprehensive setting-things-right that is salvation is God’s business, and a most flourishing business it is. Right across the street they set up their own salvation shops and noisily hawk their wares. After all these years of refusing to really deal with God on his terms, insisting instead on making their own deals, they have nothing to show for it. 영어NRSV,3 For, being ignorant of the righteousness that comes from God, and seeking to establish their own, they have not submitted to God’s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3 αγνοουντες γαρ την του θεου δικαιοσυνην και την ιδιαν δικαιοσυνην ζητουντες στησαι τη δικαιοσυνη του θεου ουχ υπεταγησαν 라틴어Vulgate,3 ignorantes enim Dei iustitiam et suam quaerentes statuere iustitiae Dei non sunt subiecti 히브리어Modern,3 כי את צדקת אלהים לא ידעו ויבקשו להקים את צדקתם ובעבור זאת לצדקת אלהים לא נכנעו׃ 성 경: [롬10:3]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바른 지식이 없는 유대인들이 추구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였다. 원인을 이끄는 문장 서두의 ‘가르'(*, ‘왜냐하면’)는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는 2절 후반부의 설명을 이끈다. 󰃨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 ‘하나님의 의'(*, 투 데우 디카이오쉬넨)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으로서의 ‘의’라기보다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이뤄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신약에서 나오는 ‘의'(Righteousness)는 주로 계약 관계를 전제로 한다. 계약을 수립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계약에 인간을 참여케 하시고 그 중간에 그리스도를 두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그것을 믿는 인간들을 ‘의롭다’하시기로 계약을 수립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계약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예수를 믿음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길을 불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믿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여기서 ‘모르고'(*, 아그노운테스)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 지식이 없었으므로 기인된 ‘오해’를 의미한다(Meyer).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바른 지식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의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오해였다. 󰃨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 ‘세우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사이'(*)는 ‘세우다’, ‘정하다’, ‘확증하다’의 뜻이 있다. 즉 ‘하나님의 의’에 맞서 ‘자신의 의’를 세워 불순종한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힘써’로 번역된 헬라어 ‘제툰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계속 애써 온 것을 나타낸다. 텔로스 가르 노무 크리스토스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판티 토 피스튜온티 개역개정,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새번역,4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마침이 되셔서,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의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말성경,4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사람들이 의에 이르게 하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가톨릭성경,4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영어NIV,4 Christ is the end of the law so that there may be righteousness for everyone who believes. 영어NASB,4 For Christ is the end of the law for righteousness to everyone who believes. 영어MSG,4 The earlier revelation was intended simply to get us ready for the Messiah, who then puts everything right for those who trust him to do it. 영어NRSV,4 For Christ is the end of the law so that there may be righteousness for everyone who believes. 헬라어신약Stephanos,4 τελος γαρ νομου χριστος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παντι τω πιστευοντι 라틴어Vulgate,4 finis enim legis Christus ad iustitiam omni credenti 히브리어Modern,4 כי המשיח סוף התורה לצדקה לכל המאמין בו׃ 성 경: [롬10:4]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칭의’의 근원이며 이유이다. 즉, 의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란 말은 뒤에 나오는 ‘율법의 마침’을 한정시키는 말로 ‘율법의 마침’은 그 목적이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는 유대인을 넘어서서 ‘모든 믿는자’들, 모든 민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즉 그리스도의 의는 공평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유대인일지라도 멸망을 받으며 반면에 이방인일지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실로 ‘의'(*, 디카이오쉬넨)은 율법으로나 인간의 행위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공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칭의의 의를 끝까지 불신한 것이다. 󰃨 율법의 마침 – 혹자는 여기서 ‘율법'(*, 노모스)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일반적인 법이나 원리를 의미한다고 한다(Meyer, Sanday and Headlam). 또 혹자는 본문의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특히 9:31)에서 볼 때 여기서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침’을 가리키는 헬라어 ‘텔로스'(*)는 (1) 문제의 종결(end), 종료(termination) 혹은 (2) 목적(aim), 의도(intention), 목표(goal)등 양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종결시켰다는 의미이다(13:10;Calvin, Erasmus, Lenski, Murray, Harrison). (2)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실제 의미이며 목적과 의도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Hendriksen, Cranfield). 그 중 (1)이 더 타당하다고 보는데 이유인즉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그림자로서 그 역할을 하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實體)로 인해 그 기능이 종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진행되는 어떤 과정에서 역사상에 주어졌던 것이고 이제 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모위세스 가르 그라페이 텐 디카이오쉬넨 텐 에크 투 노무 호티 호 포이에사스 아우타 안드로포스 제세타이 엔 아우토이스 개역개정,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새번역,5 모세는 율법에 근거한 의를 두고 기록하기를 ㉡”율법을 행한 사람은 그것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 ㉡레 18:5 우리말성경,5 모세는 율법으로 인한 의에 대해 기록하기를 “율법을 행한 사람은 그것으로 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레18:5 가톨릭성경,5 모세는 율법에서 오는 의로움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실천하는 이는 그것들로 살 것이다.” 영어NIV,5 Moses describes in this way the righteousness that is by the law: “The man who does these things will live by them.” 영어NASB,5 For Moses writes that the man who practices the righteousness which is based on law shall live by that righteousness. 영어MSG,5 Moses wrote that anyone who insists on using the law code to live right before God soon discovers it’s not so easy–every detail of life regulated by fine print! 영어NRSV,5 Moses writes concerning the righteousness that comes from the law, that “the person who does these things will live by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5 μωσης γαρ γραφει την δικαιοσυνην την εκ του νομου οτι ο ποιησας αυτα ανθρωπος ζησεται εν αυτοις 라틴어Vulgate,5 Moses enim scripsit quoniam iustitiam quae ex lege est qui fecerit homo vivet in ea 히브리어Modern,5 כי משה כתב על דבר הצדקה מתוך התורה אשר יעשה אתם האדם וחי בהם׃ 성 경: [롬10:5]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모세가 기록하되 – 레 18:5에서 인용된 것으로 모세의 말이 인용된 것은 모세가 유대인의 율법을 세운 자였기 때문이다. 이기에서 모세는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하나님의 율례’라는 표현을 통하여 구약 여러 부분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느 9:29;겔 20:11, 13, 21) 또한 신약에 넘어와서도 그 사상을 계승되고 있다(7:10;마 19:17;눅 10:28;갈 3:12). 하지만 문제는 누가 과연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있다. 연약한 인생 중에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3:9-18). 오직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시고(8:3, 4) 자기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신 유일한 분이시다(히 5:8, 9). ‘기록하되’를 가리키는 헬라어 ‘그라페이'(*)는 6, 8절에 나오는 ‘말하되’의 헬라어 ‘레게이'(*)와 의도적으로 대조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레게이’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한 반면 ‘그라페이’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6절 주석 참조). 󰃨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 – ‘말미암은’의 헬라어 ‘에크'(*)는 ‘…에서 나온’이라는 뜻으로 그 출신을 나타낸다. ‘율법에서 난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는 의이다. 이는 9:31, 32에 나오는 ‘행위에서 나온 의의 법’을 말한다. 율법은 행함을 요구하며 죄를 알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판결을 받는 길이었다(레 18:5;겔 20:11, 13, 21;눅 10:28). 따라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며 행할 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罪性)은 율법을 완전히 수행할 수 없다. 결국 이스라엘은 의의 법을 좇아 갔지만 법이 요구하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9:31). 유대교의 구원 교리에 따르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면 율법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율법을 성취하여 그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이 보장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게 된다고 보았다(Strack-Billerbeck). 그러나 율법은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법에 대한 약속을 하셨고(렘 31:33) 오순절의 성령 보내심으로 성취되었다(욜 2:28ff.).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은 믿음이고, 믿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과 부활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믿는 자들의 의가 되셨기 때문이다. 헤 데 에크 피스테오스 디카이오쉬네 후토스 레게이 메 에이페스 엔 테 카르디아 수 티스 아나베세타이 에이스 톤 우라논 퉅 에스틴 크리스톤 카타가게인 개역개정,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새번역,6 그러나 믿음에 근거한 의를 두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마음 속으로 ‘누가 하늘에 올라갈 것이냐’ 하고 말하지 말아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 ㉢신 30:12 우리말성경,6 그러나 믿음으로 인한 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속으로 ‘누가 하늘로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이것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입니다.) 신30:12 가톨릭성경,6 그러나 믿음에서 오는 의로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 누가 하늘로 올라가리오?’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영어NIV,6 But the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says: “Do not say in your heart, ‘Who will ascend into heaven?’” (that is, to bring Christ down) 영어NASB,6 But the righteousness based on faith speaks thus, “DO NOT SAY IN YOUR HEART, ‘WHO WILL ASCEND INTO HEAVEN?’ (that is, to bring Christ down), 영어MSG,6 But trusting God to shape the right living in us is a different story–no precarious climb up to heaven to recruit the Messiah, 영어NRSV,6 But the righteousness that comes from faith says, “Do not say in your heart, ‘Who will ascend into heaven?’” (that is, to bring Christ down) 헬라어신약Stephanos,6 η δε εκ πιστεως δικαιοσυνη ουτως λεγει μη ειπης εν τη καρδια σου τις αναβησεται εις τον ουρανον τουτ εστιν χριστον καταγαγειν 라틴어Vulgate,6 quae autem ex fide est iustitia sic dicit ne dixeris in corde tuo quis ascendit in caelum id est Christum deducere 히브리어Modern,6 והצדקה אשר מתוך האמונה כה אמרת אל תאמר בלבבך מי יעלה השמימה הלא זאת היא להוריד את המשיח׃ 성 경: [롬10:6]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 본 구절은 앞절(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대조를 이루어 상대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나타났음은 바울의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며 기독론적(christological)인 가르침의 기본 구조이다(Ridderbos). 그리스도의 죽음은 종말론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심판이며 의롭다하는 판결의 표시이다. 옛 시대(old aeon)와 옛 사람이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심판을 받았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의롭게 했다. 󰃨 이같이 말하되 – ‘믿음에서 난 의’를 의인화시켰다. 이런 수사법은 바울 당시 철학적 연설을 할 때 종종 쓰였다. 의인화 용법으로써 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대조하여 ‘믿음에서 난 의’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 본 구절은 70인역(LXX)의 신 30:12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본 구절은 구약적 문맥에 비추어 보면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늘에 오르는 것은 (1) 사람으로서 불가능할 뿐 아니라, (2) 이런 교만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승천하심을 믿지 않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율법으로 의를 구하려는 자들의 교만함과 그들의 망상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근본 핵심은 버리고 자신들의 유전과 행위를 통해 하늘, 즉 의에 이르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 네 마음에…하지 말라 – ‘하지 말라’의 헬라어 ‘메 에이페스'(*)는 ‘말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믿음을 통한 의’는 율법을 통해 의를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있다. 󰃨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셨고 이것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를 부인하였다. 이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정치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해 그들 중에 오셔서 생명을 주셨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에 티스 카타베세타이 에이스 텐 아뷔쏜 퉅 에스틴 크리스톤 에크 네크론 아나가게인 개역개정,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새번역,7 또 ㉣’누가 ㉤지옥에 내려갈 것이냐’ 하고 말하지도 말아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 ㉣신 30:13 ㉤또는 ‘깊은 곳’ 우리말성경,7 혹은 “‘누가 지옥에 내려가겠느냐?’ 하지도 말라.” (이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입니다.) 신30:13 가톨릭성경,7 또 말합니다. “‘ 누가 지하로 내려가리오?’ 하지 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모시고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영어NIV,7 “or ‘Who will descend into the deep?’” (that is, to bring Christ up from the dead). 영어NASB,7 or ‘WHO WILL DESCEND INTO THE ABYSS?’ (that is, to bring Christ up from the dead). ” 영어MSG,7 no dangerous descent into hell to rescue the Messiah. 영어NRSV,7 “or ‘Who will descend into the abyss?’” (that is, to bring Christ up from the dead). 헬라어신약Stephanos,7 η τις καταβησεται εις την αβυσσον τουτ εστιν χριστον εκ νεκρων αναγαγειν 라틴어Vulgate,7 aut quis descendit in abyssum hoc est Christum ex mortuis revocare 히브리어Modern,7 או מי ירד לתהום זאת היא להעלות את המשיח מן המתים׃ 성 경: [롬10:7]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 ‘음부'(*, 아뷩손)는 6절의 ‘하늘'(*, 우라논)과 그 높고 깊음에서 대조를 이룬다. 음부의 헬라어 ‘아뵤소스'(*)는 히브리어 ‘테홈'(*) 대신 사용된 말이다. ‘테홈’은 ‘물들의 깊음'(창 1:2)이나 ‘바다의 깊음'(시 107:26)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본문의 의미는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인 ‘땅의 깊은 곳'(시 71:20), 즉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스올'(*, Sheol)을 의미한다(시 139:8;암 9:2;Murray, Hodge, Cranfield). 음부에 내려가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당하신 죽음을 믿지 않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無效)로 하는 것이며 부인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 ‘모셔 올리는’의 헬라어 ‘아나가게인'(*)은 부활을 언급할 때 쓰인다(히 13:20). 이스라엘 중에 이스라엘인들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은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알라 티 레게이 엥귀스 수 토 레마 에스틴 엔 토 스토마티 수 카이 엔 테 카르디아 수 퉅 에스틴 토 레마 테스 피스테오스 호 케뤼쏘멘 개역개정,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새번역,8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 ㉥신 30:14 우리말성경,8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말씀이 네 가까이 있으니 네 입 속에 있고 네 마음속에 있다”라고 했으니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신30:14 가톨릭성경,8 의로움은 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영어NIV,8 But what does it say? “The word is near you; it is in your mouth and in your heart,” that is, the word of faith we are proclaiming: 영어NASB,8 But what does it say? “THE WORD IS NEAR YOU, IN YOUR MOUTH AND IN YOUR HEART”– that is, the word of faith which we are preaching, 영어MSG,8 So what exactly was Moses saying? The word that saves is right here, as near as the tongue in your mouth, as close as the heart in your chest. It’s the word of faith that welcomes God to go to work and set things right for us. This is the core of our preaching. 영어NRSV,8 But what does it say? “The word is near you, on your lips and in your heart” (that is, the word of faith that we proclaim); 헬라어신약Stephanos,8 αλλα τι λεγει εγγυς σου το ρημα εστιν εν τω στοματι σου και εν τη καρδια σου τουτ εστιν το ρημα της πιστεως ο κηρυσσομεν 라틴어Vulgate,8 sed quid dicit prope est verbum in ore tuo et in corde tuo hoc est verbum fidei quod praedicamus 히브리어Modern,8 אבל מה היא אמרת קרוב אליך הדבר בפיך ובלבבך הוא דבר האמונה אשר אנחנו מבשרים׃ 성 경: [롬10:8]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 앞에서 부정적인 진술을 계속하였지만, 이제는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바울이 언급하고자 하는 주제로 돌아 온다. 󰃨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 신 30:14의 인용인데, 70인역에는 ‘심히’에 해당하는 ‘스포드라'(*)가 있으나 본문에서는 생략하였다. 구약의 문맥에서는 율법을 통해 드러난(reveal)은 혜로운 면이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기의 말씀대로 그들의 입과 마음에 두어 율법을 암송하며 묵상하였던 것이다(시 1:2). 여기서 ‘말씀이 가깝다’는 것은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마음에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영이 와 계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율법은 상대적 위치인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입과 마음에 있다는 표현으로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가는 불가능성과 대조하면서 구원받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밝히 드러낸다. 󰃨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 이 부분은 인용구에 바울이 첨가시킨 삽입구이다. ‘전파하는’의 헬라어 본문 ‘케륏소멘'(*)는 ‘가르치다’, ‘설교하다’, ‘선포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사도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복음의 말씀을 뜻한다. ‘우리가 전파하는’이라는 한정구는 ‘말씀이 멀리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견해에 있어서 바울이 모세와 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전파된 말씀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은혜의 말씀으로 구약에 계시된 약속의 말씀, 즉 믿음의 말씀이다. 여기서 ‘믿음의 말씀’은 복음의 내용 그 자체이다(Calvin, Cranfield). 그리고 이 말씀은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임을 뜻한다(Cranfield). 바울이 신 30:14에 나오는 ‘말씀’을 칭의(justification)와 같게 본 것은 그리스도가 그 말씀의 실체이며 실제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호티 에안 호몰로게세스 엔 토 스토마티 수 퀴리온 예순 카이 피스튜세스 엔 테 카르디아 수 호티 호 데오스 아우톤 에게이렌 에크 네크론 소데세 개역개정,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새번역,9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말성경,9 만일 당신의 입으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9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영어NIV,9 That if you confess with your mouth, “Jesus is Lord,” and believe in your heart tha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you will be saved. 영어NASB,9 that if you confess with your mouth Jesus as Lord, and believe in your heart tha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you shall be saved; 영어MSG,9 Say the welcoming word to God–“Jesus is my Master”–embracing, body and soul, God’s work of doing in us what he did in raising Jesus from the dead. That’s it. You’re not “doing” anything; you’re simply calling out to God, trusting him to do it for you. That’s salvation. 영어NRSV,9 because if you confess with your lips that Jesus is Lord and believe in your heart tha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you will be saved. 헬라어신약Stephanos,9 οτι εαν ομολογησης εν τω στοματι σου κυριον ιησουν και πιστευσης εν τη καρδια σου οτι ο θεος αυτον ηγειρεν εκ νεκρων σωθηση 라틴어Vulgate,9 quia si confitearis in ore tuo Dominum Iesum et in corde tuo credideris quod Deus illum excitavit ex mortuis salvus eris 히브리어Modern,9 כי אם תודה בפיך אשר ישוע הוא האדון ותאמין בלבבך אשר האלהים העירו מן המתים אז תושע׃ 성 경: [롬10:9]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 ‘네 입으로’, ‘네 마음으로’는 8절의 ‘네 입에’, ‘네 마음에’와 병행을 이룬다. 󰃨 예수를 주로 – 이는 ‘예수는 주이시다'(Jesus in Lord)란 말이다.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헬라 세계에 있어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나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호칭이었다. 또한 신비 종교(Mystery Religion)의 신들이었던 이시스(Isis)나 오시리스(Osiris)에게도 사용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통치자에게 이 명칭을 붙였다. 특히, 하나님의 칭호 ‘야웨'(*)는 칠십인역에서 항상 ‘퀴리오스’로 번역했다. 즉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예수가 주’라는 고백은 교회 최초의 신앙 고백의 형태로서(행 2:36;고전 12:3) 예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고백에는 경배의 대상이며 승천하신 구주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 ‘살리신’의 헬라어 ‘에게이렌'(*)는 ‘일으키다’라는 말로서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아파르케)가 되셨다는 뜻이다(고전 15:2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부활을 소망케하는 종말론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로 높이심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의 주되심을 시인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의 다시 사심을 고백했고 믿었던 것이다(빌 2:9-11). 네 마음에 믿으면 –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에 믿는 것은 불가 분리의 관계이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마음에서 믿는 만큼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 신앙 고백을 전제한 것으로서 외식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입->마음의 순서는 인용문 신명기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10절에서는 그 바른 순서, 즉 마음속에 믿는 것과 입으로 고백하는 자연적인 순서로 말한다. 󰃨 구원을 얻으리니 – 헬라어 본문 ‘소데세'(*)는 미래형으로 종말론적 구원(eschatological salvation)을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의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 입으로 시인하게 하며 구원에 이르게 한다. 카르디아 가르 피스튜에타이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스토마티 데 호몰로게이타이 에이스 소테리안 개역개정,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새번역,10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말성경,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 구원에 이릅니다. 가톨릭성경,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영어NIV,10 For it is with your heart that you believe and are justified, and it is with your mouth that you confess and are saved. 영어NASB,10 for with the heart man believes, resulting in righteousness, and with the mouth he confesses, resulting in salvation. 영어MSG,10 With your whole being you embrace God setting things right, and then you say it, right out loud: “God has set everything right between him and me!” 영어NRSV,10 For one believes with the heart and so is justified, and one confesses with the mouth and so is saved. 헬라어신약Stephanos,10 καρδια γαρ πιστευεται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στοματι δε ομολογειται εις σωτηριαν 라틴어Vulgate,10 corde enim creditur ad iustitiam ore autem confessio fit in salutem 히브리어Modern,10 כי בלבבו יאמין האדם והיתה לו לצדקה ובפיהו יודה והיתה לו לישועה׃ 성 경: [롬10:10]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마음’ – ‘입’, ‘믿는 것’ – ‘시인하는 것’은 문장에 있어서 균형을 유지한다. 또한 ‘의에 이르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은 본문에서 역으로 사용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다. 본절은 본서의 주제가 되는 1:16, 17의 구절을 기억시키는 내용으로서 믿고 시인함이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한다. ‘믿어’와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에타이'(*)와 ‘호몰로게이타이'(*)는 수동태로서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시인에 이르게 됨을 나타낸 것이다(고후 5:14-15). ‘의에 이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얻어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이며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람 앞에서 주 예수를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을 아무 두려움 없이 공언하는 것이다(마 10:32;막 8:38;눅 12:8). 특히, 시인(是認)은 지적인 확인을 넘어 생활의 차원에서 삶으로 고백되어져야 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강요당하고 핍박받을 때 주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시인은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 때 직면하게 되는 구체적 탄압과 고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구원을 정직하게 표명(表明)하는 차원까지도 의미한다. 레게이 가르 헤 그라페 파스 호 피스튜온 엪 아우토 우 카타이스퀸데세타이 개역개정,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새번역,11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 ㉦사 28:16(칠십인역) 우리말성경,11 성경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고 말합니다. 사28:16 가톨릭성경,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영어NIV,11 As the Scripture says, “Anyone who trusts in him will never be put to shame.” 영어NASB,11 For the Scripture says, “WHOEVER BELIEVES IN HIM WILL NOT BE DISAPPOINTED.” 영어MSG,11 Scripture reassures us, “No one who trusts God like this–heart and soul–will ever regret it.” 영어NRSV,11 The scripture says, “No one who believes in him will be put to shame.” 헬라어신약Stephanos,11 λεγει γαρ η γραφη πας ο πιστευων επ αυτω ου καταισχυνθησεται 라틴어Vulgate,11 dicit enim scriptura omnis qui credit in illum non confundetur 히브리어Modern,11 כי הכתוב אמר כל המאמין בו לא יבוש׃ 성 경: [롬10:1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 9:33과 같이 사 28:16로 부터 인용된 구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더 강조된 형태로 인용되었다. 즉 ‘저를 믿는자’란 말 앞에 ‘누구든지’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Hendriksen). 이렇게 강조된 것은 앞에 언급된 4-10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구원이 유대 민족에게만 독점되어지고 또한 이방인에게 있어서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에게만 국한시켰던 것을 확장시켜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자에게 허락되어졌음을 선포하고 있다(Godet). 우 가르 에스틴 디아스톨레 유다이우 테 카이 헬레노스 호 가르 아우토스 퀴리오스 판톤 플루톤 에이스 판타스 투스 에피칼루메누스 아우톤 개역개정,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새번역,12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우리말성경,12 유대 사람이든 이방 사람이든 차별이 없습니다. 동일하신 주께서는 모든 사람의 주가 되셔서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십니다. 가톨릭성경,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영어NIV,12 For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Jew and Gentile–the same Lord is Lord of all and richly blesses all who call on him, 영어NASB,12 For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Jew and Greek; for the same Lord is Lord of all, abounding in riches for all who call upon Him; 영어MSG,12 It’s exactly the same no matter what a person’s religious background may be: the same God for all of us, acting the same incredibly generous way to everyone who calls out for help. 영어NRSV,12 For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Jew and Greek; the same Lord is Lord of all and is generous to all who call on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2 ου γαρ εστιν διαστολη ιουδαιου τε και ελληνος ο γαρ αυτος κυριος παντων πλουτων εις παντας τους επικαλουμενους αυτον 라틴어Vulgate,12 non enim est distinctio Iudaei et Graeci nam idem Dominus omnium dives in omnes qui invocant illum 히브리어Modern,12 ואין הבדל בזה בין היהודי ליוני כי אדון אחד לכלם והוא עשיר לכל קראיו׃ 성 경: [롬10:12]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이 문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그 어떤 종족이든지 차별을 받지 않고 똑같이 적용되어진다. 설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어떤면에 있어서는 ‘차별'(*, 디아스톨레)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다(3:22). 그런데 바울은 실제로 그의 서신서에서 유대인의 우선권에 강조점을 두고 있었고(1:16;2:9, 10),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Covenant) 아래서는 이스라엘이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3:1, 2:9:4, 5). 그러나 이는 구원 경륜의 순서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특권을 받은 것을 나타낼 뿐이다. 구원에 있어서는 유대인과 헬라인, 기타 이방인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Dunn). 󰃨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 바울은 구원이 유대인과 헬라인 그외 모든 이방 민족에게 차별이 없는 분명한 이유를 ‘한 주께서'(the same Lord)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Lenski).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주'(*, 퀴리오스판톤, Lord of all)로 묘사하고 있는데 만일 유대인이 하나님을 주님(Lord)으로 믿고 있다면 그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주님이 되어야만 한다(3:29, 30). 이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구세주(救世主)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동일하다.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 기타 이방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다(Dunn). 더구나 주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부르는 모든 자를 부요하게 하신다.’ 이는 주님의 부요함을 말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의 보편적이고 동일한 은혜가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의미이다(Godet). 여기서 ‘부요하시도다’는 헬라어로 ‘플루톤'(*)인데 능동적인 개념으로 ‘자비하다’와 ‘은혜롭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Calvin). 이것은 주님의 구원의 은혜와 그 능력은 무한하여 그가 부르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려는 선한 뜻은 결코 약화되거나 다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요하신 주 하나님께(시 50:10-12;학 2:8;엡 3:8;계 5:12) 속하여 항상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됨으로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2:4;9:23;요 10:10;고후 8:9;엡 2:7). 파스 가르 호스 안 에피칼레세타이 토 오노마 퀴리우 소데세타이 개역개정,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새번역,1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 ㉧욜 2:32 우리말성경,13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욜2:32 가톨릭성경,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영어NIV,13 for,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영어NASB,13 for “WHOEVER WILL CALL UP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영어MSG,13 “Everyone who calls, ‘Help, God!’ gets help.” 영어NRSV,13 For,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shall be saved.” 헬라어신약Stephanos,13 πας γαρ ος αν επικαλεσηται το ονομα κυριου σωθησεται 라틴어Vulgate,13 omnis enim quicumque invocaverit nomen Domini salvus erit 히브리어Modern,13 כי כל אשר יקרא בשם יהוה ימלט׃ 성 경: [롬10:13]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앞절에서 말한 내용을 더욱 강력하게 확증하고 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사실은 이미 구약성경 욜 2:32에 예언되어 있었다(Godet).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고 하였다(Calvin). 요엘에 의해 약속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베드로는 예수님 승천 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설명하면서 인용하였다(행 2:16-21). 바울도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요엘서의 ‘여호와'(Jehova)를 ‘주'(Lord)와 동일시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Alford, Harrison). 실제로 70인역(LXX)에는 언제나 ‘야웨’를 관사가 없는 ‘퀴리오스'(*)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구약에서의 ‘야웨’가 곧 그리스도 예수와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주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증거가 되게 하며 또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구원 사이에 완전한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Dunn).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란 주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자 곧 주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자는 하나님의 칭의(justification)를 받아 구원 받은 자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포스 운 에피칼레손타이 에이스 혼 우크 에피스튜산 포스 데 피스튜소신 후 우크 에쿠산 포스 데 아쿠소신 코리스 케뤼쏜토스 개역개정,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새번역,14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말성경,14 그런데 그들이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부르겠습니까? 듣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전하는 사람이 없이 어떻게 듣겠습니까? 가톨릭성경,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영어NIV,14 How, then, can they call on the one they have not believed in? And how can they believe in the one of whom they have not heard? And how can they hear without someone preaching to them? 영어NASB,14 How then shall they call upon Him in whom they have not believed? And how shall they believe in Him whom they have not heard? And how shall they hear without a preacher? 영어MSG,14 But how can people call for help if they don’t know who to trust? And how can they know who to trust if they haven’t heard of the One who can be trusted? And how can they hear if nobody tells them? 영어NRSV,14 But how are they to call on one in whom they have not believed? And how are they to believe in one of whom they have never heard? And how are they to hear without someone to proclaim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4 πως ουν επικαλεσονται εις ον ουκ επιστευσαν πως δε πιστευσουσιν ου ουκ ηκουσαν πως δε ακουσουσιν χωρις κηρυσσοντος 라틴어Vulgate,14 quomodo ergo invocabunt in quem non crediderunt aut quomodo credent ei quem non audierunt quomodo autem audient sine praedicante 히브리어Modern,14 ועתה איך יקראו אל אשר לא האמינו בו ואיך יאמינו באשר לא שמעו את שמעו ואיך ישמעו באין מגיד׃ 성 경: [롬10:14]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바울은 이제 복음을 확장하여 범세계적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Bruce). 그래서 그는 믿음과의 관계에서 제일 먼저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양자간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Calvin). 주는 신뢰하고 믿을 만한 분이며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결국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를 부르는 일이 믿음의 첫걸음임을 가리킨다. 여기서 ‘어찌 부르리요'(How then shall they call on, KJV, NIV)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포스 에피칼레손타이'(*)로 ‘에피칼레손타이’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다’의 뜻을 가진 ‘에피칼레오'(*)의 3인칭 복수 부정과거 중간태로서 가정법으로 쓰여졌다. 이는 ‘그들을 부를 수 없다’라는 의미이다. 󰃨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 바울은 두번째로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는 것으로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도 ‘포스'(*, ‘어떻게’)를 사용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표현법을 쓰고 있다. 그는 이러한 논리적인 논증을 통해 믿음은 지식에 근거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은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하려면 먼저 그 복음을 들어야함 한다. 한편 초대 교회 당시 대부분 사람들의 복음 전수(傳受) 방법은 메시지를 ‘듣는 것’이었다. 비록 소수의 교회가 바울의 서신을 받기는 하였지만 신약성경이 문자와 글로 읽을 수 있는 기록으로 갖추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복음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구두(口頭)로 전달되어야 했다. 이같은 일은 성경의 전 시대에 걸쳐 일반적으로 계속 행해져 내려왔다(Harrison). 왜냐하면 전파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과 신앙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 전파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전형적인 방법이 되었다(Calvin). 󰃨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세번째로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사도나 전도자의 직책을 중요시하고 있다(Bruce).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증언함으로 그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전파자’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케륏손토스'(*)로 ‘케륏소'(*, ‘전파하다’, ‘가르치다’)의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여기서 ‘전파자’라는 말 앞에 관사가 없는데 이는 어떤 특별한 직책에 있는 사도들이나 전도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파하는 모든 자'(someone preaching, NIV)를 의미한다(Lenski). 헬라어 ‘케륏소'(*)는 ‘전파하다’, ‘알리다’의 뜻인데 이것은 왕이나 사령관의 메시지를 공개하여 알리는 전령의 행위로서 전령은 왕이 명령한 이외의 말을 가감할 수 없었으며 단지 왕의 명령을 자신의 음성으로 대언(代言)하는 역할만 하였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LXX) 많이 사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이나 사도들 역시 이 말이 깊은 의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메시야에 대한 전파나 종말론적인 언급(사 61:1;막 1:4, 7, 14, 38, 39;눅 4:18, 19;행 20:25;28:31)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 단어를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의 견지에서 사용하였다(갈 2:2;골 1:23). 포스 데 케륔소신 에안 메 아포스탈로신 카도스 게그랖타이 호스 호라이오이 호이 포데스 톤 유앙겔리조메논 타 아가다 개역개정,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새번역,15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 ㉨사 52:7 우리말성경,15 또 보냄을 받지 않았으면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기록되기를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사52:7 가톨릭성경,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영어NIV,15 And how can they preach unless they are sent? As it is written, “How beautiful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영어NASB,15 And how shall they preach unless they are sent? Just as it is written, “HOW BEAUTIFUL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LAD TIDINGS OF GOOD THINGS!” 영어MSG,15 And how is anyone going to tell them, unless someone is sent to do it? That’s why Scripture exclaims, A sight to take your breath away! Grand processions of people telling all the good things of God! 영어NRSV,15 And how are they to proclaim him unless they are sent? As it is written, “How beautiful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헬라어신약Stephanos,15 πως δε κηρυξουσιν εαν μη αποσταλωσιν καθως γεγραπται ως ωραιοι οι ποδες των ευαγγελιζομενων ειρηνην των ευαγγελιζομενων τα αγαθα 라틴어Vulgate,15 quomodo vero praedicabunt nisi mittantur sicut scriptum est quam speciosi pedes evangelizantium pacem evangelizantium bona 히브리어Modern,15 ואיך יגידו אם אינם שלוחים ככתוב מה נאוו רגלי מבשר שלום מבשר טוב׃ 성 경: [롬10:15]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바울은 전도자가 복음을 전한 것은 이미 그 이전에 누군가가 그 전도자에게 ‘보내심’의 권위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있다(Hendriksen). 즉 전도자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권위는 그 선포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명령과 위임이라는 점에 있다(Bruce). 여기서 ‘보내심’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포스탈로신'(*)은 ‘아포스텔로'(*, ‘보내다’)의 부정과거 수동태 가정법으로 ‘사도'(*, 아포스톨로스)란 단어가 이 동사에서 파생되었다(Robertson).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인간은 보다 높은 권위 아래 존재하며 (2) 보내심을 받은 자의 메시지는 그 자신이 아니라 보내는 자에 의해서 주어진다. 이러한 두 가지면에서 예언자들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었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다(요 3:34;7:16). 이것은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진다. 모든 성도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서 그가 세우시지 않은 복음 전파자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궁극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예수의 복음 전도자로서 전세계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며 그 결과로 전파된 말씀을 듣고 열방들이 기뻐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Godet). 󰃨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 바울은 다시 한번 바벧론 포로 생활 동안 황폐되어 있었던 예루살렘 도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로써 그 자신의 이야기를 확증하고 있다. 이 말씀은 사 52:7의 인용 구절로서 원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가까왔다는 기쁨과 평화의 선포였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복음의 전달로 해석한다. 이스라엘이 바벧론왕 고레스 치하(治下)에서부터 구출을 받은 것은 모세에 의하여 애굽왕 바로의 치하에서 구출을 받은 것처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출받는,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질 보다 완전하고 큰 구원을 예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유대 민족이 바벧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리라는 메시지가 기쁜 소식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 안에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있다는 메시지는 그보다 훨씬 더 기쁜 소식인 것이다. 알 우 판테스 휘페쿠산 토 유앙겔리오 에사이아스 가르 레게이 퀴리에 티스 에피스튜센 테 아코에 헤몬 개역개정,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새번역,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주님, 우리가 전하는 소식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 ㉩또는 ‘기쁜 소식’ ㉪사 53:1(칠십인역) 우리말성경,16 그러나 그들 모두가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주여,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사53:1 가톨릭성경,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영어NIV,16 But not all the Israelites accepted the good news. For Isaiah says, “Lord, who has believed our message?” 영어NASB,16 However, they did not all heed the glad tidings; for Isaiah says, “LORD, WHO HAS BELIEVED OUR REPORT?” 영어MSG,16 But not everybody is ready for this, ready to see and hear and act. Isaiah asked what we all ask at one time or another: “Does anyone care, God? Is anyone listening and believing a word of it?” 영어NRSV,16 But not all have obeyed the good news; for Isaiah says, “Lord, who has believed our message?” 헬라어신약Stephanos,16 αλλ ου παντες υπηκουσαν τω ευαγγελιω ησαιας γαρ λεγει κυριε τις επιστευσεν τη ακοη ημων 라틴어Vulgate,16 sed non omnes oboedierunt evangelio Esaias enim dicit Domine quis credidit auditui nostro 히브리어Modern,16 אך לא כלם שמעו לקול הבשורה כי ישעיהו אמר יהוה מי האמין לשמעתנו׃ 성 경: [롬10:16]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 유대인들은 전파된 복음을 대부분 믿지 않았다. 바울은 이것을 완곡어법(litotes)을 사용하여 말하고 있다. 즉 그들 중 일부만이 복음에 순종하였다는 의미이다(사 53:1;고전 10:5). 󰃨 이사야가 가로되…누가 믿었나이까 – 바울은 사 53:1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확증하고 있다. 바울이 앞절에서 인용한 사 52:7과 본절에서 인용한 사 53:1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고난받는 종에 의한 구원의 메시지가 거부되리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의 불신앙을 예언하는 구절로 널리 사용되었으며(11:8) 친히 예수께서도 공생애 동안 사역하시면서 그 백성이 그를 메시야로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하기도 하였다(Bruce). 그리고 역사는 그 예언을 확증해 왔다(고전 1:23). 혹자(Calvin)는 이사야가 이 말을 한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빛을 우리 안에 조명해 주실 때에야 비로소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한 특별 계시에 의하여 구원은 내적으로 소명받은 자, 즉 선택 받은 자에게 국한되는 것을 보여준다(Calvin). 아라 헤 피스티스 엨스 아코에스 헤 데 아코에 디아 레마토스 크리스투 개역개정,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새번역,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 ㉫또는 ‘그리스도의 말씀’.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나님의 말씀’ 우리말성경,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납니다. 가톨릭성경,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영어NIV,17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영어NASB,17 So faith comes from hearing, and hearing by the word of Christ. 영어MSG,17 The point is, Before you trust, you have to listen. But unless Christ’s Word is preached, there’s nothing to listen to. 영어NRSV,17 So faith comes from what is heard, and what is heard comes through the word of Christ. 헬라어신약Stephanos,17 αρα η πιστις εξ ακοης η δε ακοη δια ρηματος θεου 라틴어Vulgate,17 ergo fides ex auditu auditus autem per verbum Christi 히브리어Modern,17 לכן האמונה באה מתוך השמועה והשמועה על ידי דבר אלהים׃ 성 경: [롬10:17]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이스라엘의 유기]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바울은 결론적 접속사 ‘그러므로'(*, 아라;so then, KJV)를 사용하여 그의 논리를 결론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는 믿음에 대해서 결론짓기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고 정의한다. ‘들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코에스'(*)로 ‘듣는 행위'(act of hearing)나 ‘들려 오는 것'(that which is heard)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앞절(16절)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할 때 ‘전하는 바'(아코에)와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앞절과 차이점은 전자는 수동태로 ‘들려진 말'(was heard)의 의미로 쓰여진 반면에 본절에서는 능동태로 메시지를 ‘들음'(hearing)의 의미로 쓰여졌다(Hendriksen). 또한 바울은 구원얻는 신앙 곧 믿음은 듣는 행위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 레카토스 크리스투)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다(Harrison). 따라서 바울은,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에 근거한다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알라 레고 메 우크 에쿠산 메눈게 에이스 파산 텐 겐 엨셀덴 호 프동고스 아우톤 카이 에이스 타 페라타 테스 오이쿠메네스 타 레마타 아우톤 개역개정,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새번역,18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그들은 들은 일이 없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에 ㉬”그들의 목소리가 온 땅에 퍼지고,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 퍼졌다” 하였습니다. / ㉬시 19:4(칠십인역) 우리말성경,18 그렇다면 내가 묻겠습니다. 그들이 듣지 못했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음성이 온 땅에 퍼졌고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라고 했습니다. 시19:4 가톨릭성경,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영어NIV,18 But I ask: Did they not hear? Of course they did: “Their voice has gone out into all the earth, their words to the ends of the world.” 영어NASB,18 But I say, surely they have never heard, have they? Indeed they have; “THEIR VOICE HAS GONE OUT INTO ALL THE EARTH, AND THEIR WORDS TO THE ENDS OF THE WORLD.” 영어MSG,18 But haven’t there been plenty of opportunities for Israel to listen and understand what’s going on? Plenty, I’d say. Preachers’ voices have gone ’round the world, Their message to earth’s seven seas. 영어NRSV,18 But I ask, have they not heard? Indeed they have; for “Their voice has gone out to all the earth, and their words to the ends of the world.” 헬라어신약Stephanos,18 αλλα λεγω μη ουκ ηκουσαν μενουνγε εις πασαν την γην εξηλθεν ο φθογγος αυτων και εις τα περατα της οικουμενης τα ρηματα αυτων 라틴어Vulgate,18 sed dico numquid non audierunt et quidem in omnem terram exiit sonus eorum et in fines orbis terrae verba eorum 히브리어Modern,18 ואמר הכי לא שמעו אמנם בכל הארץ יצא קום ובקצה תבל מליהם׃ 성 경: [롬10:18]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이스라엘의 유기] 󰃨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 바울은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불신앙에 대한 이스라엘의 변명의 소지를 철저히 차단시키고 있다. 즉,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믿음을 얻게 되는 ‘들음'(hearing)의 기회가 이스라엘에게는 가장 확실하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메 우크 에쿠산)는 ‘그들이 듣지 못했는가 ?'(새번역, 공동번역; Did they not hear ?, NIV)라는 의미가 좀더 적절하다. 여기서 헬라어 ‘메’와 ‘우크’는 부정을 강조하여 ‘그들이 듣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 ?’라는 말이다(Dunn, Lenski). 결국 바울은 유대인들이 결코 듣지 못해서, 즉 전도를 받지 못해서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은 아니라고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 그 소리가…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 바울은 그의 이러한 논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시 19:4을 인용하면서 복음 전파의 편만성(遍滿性)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복음이 전세계에 완전히 전파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바울이 시편의 말씀을 인용한 초점은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즉, 복음 전파는 궁극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당시나 초대 교회 시대에 복음이 매우 신속하게 편만히 전파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15:22-24;요 12:19;행 2:41, 47;4:4;17:6;빌 1:12, 13;골 1:6). 알라 레고 메 이스라엘 우크 에그노 프로토스 모위세스 레게이 에고 파라젤로소 휘마스 엪 우크 에드네이 엪 에드네이 아쉬네토 파로르기오 휘마스 개역개정,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새번역,19 내가 다시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습니까?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들로 너희의 질투심을 일으키고, 미련한 백성들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내겠다.” / ㉭신 32:21 우리말성경,19 내가 다시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했습니까? 먼저 모세가 말하기를 “내가 백성이 아닌 자로 너희를 시기하게 하고 내가 미련한 백성으로 너희를 분노하게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신32:21 가톨릭성경,19 나는 또 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우선 모세가 말합니다. “나는 민족도 아닌 무리를 너희가 시기하게 하고 어리석은 민족에게 너희가 분노하게 하리라.” 영어NIV,19 Again I ask: Did Israel not understand? First, Moses says, “I will make you envious by those who are not a nation; I will make you angry by a nation that has no understanding.” 영어NASB,19 But I say, surely Israel did not know, did they? At the first Moses says, “I WILL MAKE YOU JEALOUS BY THAT WHICH IS NOT A NATION, BY A NATION WITHOUT UNDERSTANDING WILL I ANGER YOU.” 영어MSG,19 So the big question is, Why didn’t Israel understand that she had no corner on this message? Moses had it right when he predicted, When you see God reach out to those you consider your inferiors–outsiders!– you’ll become insanely jealous. When you see God reach out to people you think are religiously stupid, you’ll throw temper tantrums. 영어NRSV,19 Again I ask, did Israel not understand? First Moses says, “I will make you jealous of those who are not a nation; with a foolish nation I will make you angry.” 헬라어신약Stephanos,19 αλλα λεγω μη ουκ εγνω ισραηλ πρωτος μωσης λεγει εγω παραζηλωσω υμας επ ουκ εθνει επι εθνει ασυνετω παροργιω υμας 라틴어Vulgate,19 sed dico numquid Israhel non cognovit primus Moses dicit ego ad aemulationem vos adducam in non gentem in gentem insipientem in iram vos mittam 히브리어Modern,19 ואמר הכי ישראל לא ידע הנה כבר משה אמר אני אקניאכם בלא עם בגוי נבל אכעיסכם׃ 성 경: [롬10:19]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이스라엘의 유기] 󰃨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 바울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듣기는 했지만 깨닫지 못했으므로 거부했다는 반문이 나올 수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반박을 예상하여 앞절에서의 ‘들음'(hearing)에 관한 질문에서 전환하여 이제 ‘앎'(knowing)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여기서도 앞절에서와 같이 헬라어 부정불변사 ‘메'(*)를 사용하여서 부정적인 대답을 암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주어졌지만 거절한 것처럼 복음의 의미와 불신앙의 결과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절하였다(Lenski). 그러므로 바울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복음에 대한 앎의 부족이나 깨달음의 결여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Harrison). 결국 이 말씀이 암시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그들이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으려 하는 마음이 없었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Hendriksen). 󰃨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 이는 신 32:21의 인용으로 이 구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의 노래 중 일부인데,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예언으로 많이 인용되었다(11:11).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사악성을 질책하였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켰으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질투를 야기시키는 어떤 일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 일은 미련한 백성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백성 아닌 자'(*, 에프 우크 에드네이)와 ‘미련한 백성'(*, 에프 에드네이 아수네토)은 다같이 이방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단절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었고 또한 어리석은 민족들이었다(Bruce).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용을 베푸셔서 그가 친히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존귀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시켰다. 에사이아스 데 아포톨마 카이 레게이 휴레덴 엔 토이스 에메 메 제투신 엠파네스 에게노멘 토이스 에메 메 에페로토신 개역개정,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새번역,20 또한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게 이렇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나를 찾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만나 주고, 나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나타났다.” / ㉠사 65:1(칠십인역) 우리말성경,20 또 이사야가 아주 담대하게 말하기를 “나를 찾지 않는 자들을 내가 만나 주고 내게 구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다”라고 했습니다. 사65:1 가톨릭성경,20 이사야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나를 찾지도 않는 자들을 내가 만나 주었고 나에 관하여 묻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를 드러내 보였다.” 영어NIV,20 And Isaiah boldly says, “I was found by those who did not seek me; I revealed myself to those who did not ask for me.” 영어NASB,20 And Isaiah is very bold and says, “I WAS FOUND BY THOSE WHO SOUGHT ME NOT, I BECAME MANIFEST TO THOSE WHO DID NOT ASK FOR ME.” 영어MSG,20 Isaiah dared to speak out these words of God: People found and welcomed me who never so much as looked for me. And I found and welcomed people who had never even asked about me. 영어NRSV,20 Then Isaiah is so bold as to say, “I have been found by those who did not seek me; I have shown myself to those who did not ask for me.” 헬라어신약Stephanos,20 ησαιας δε αποτολμα και λεγει ευρεθην τοις εμε μη ζητουσιν εμφανης εγενομην τοις εμε μη επερωτωσιν 라틴어Vulgate,20 Esaias autem audet et dicit inventus sum non quaerentibus me palam apparui his qui me non interrogabant 히브리어Modern,20 וישעיהו מלאו לבו לאמר נמצאתי ללא בקשני נדרשתי ללוא שאלו׃ 성 경: [롬10:20]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이스라엘의 유기] 󰃨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 바울은 이스라엘이 불순종에 대해 변명할 수 없도록 이전의 증거보다 더욱 강력한 증거를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역설하고 있다. ‘매우 담대하여’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포톨마'(*)로 ‘담대한 태도를 취하다’의 뜻을 지닌 ‘아포톨마오'(*)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온다. 󰃨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나타났노라 – 이 말씀은 사 65:1의 인용으로 분명히 앞절(신 32:21)에서 선포된 내용을 더욱 강하게 확증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한 백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기까지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철저한 불순종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이방인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어 정의하기를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구하지도 않은 자들’이라 하였다(Dunn). 그는 이방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틀에 박힌 멸시와 배척, 자기 우월주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던 이방인들마저도 복음을 듣고 순종하여 구원이 임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불순종함으로 구원을 거절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께 구하지도 문의 하지도 않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가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통해서 자신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대로 구원을 베풀 수 있는 주권적인 능력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Hendriksen, Calvin). 프로스 데 톤 이스라엘 레게이 홀렌 텐 헤메란 엨세페타사 타스 케이라스 무 프로스 라온 아페이둔타 카이 안틸레곤타 개역개정,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새번역,21 또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고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 하신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 ㉡사 65:2(칠십인역) 우리말성경,21 그러나 이스라엘에 관해서는 “내가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라고 했습니다. 사65:2 가톨릭성경,21 그러나 이스라엘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 영어NIV,21 But concerning Israel he says, “All day long I have held out my hands to a disobedient and obstinate people.” 영어NASB,21 But as for Israel He says, “ALL THE DAY LONG I HAVE STRETCHED OUT MY HANDS TO A DISOBEDIENT AND OBSTINATE PEOPLE.” 영어MSG,21 Then he capped it with a damning indictment: Day after day after day, I beckoned Israel with open arms, And got nothing for my trouble but cold shoulders and icy stares. 영어NRSV,21 But of Israel he says, “All day long I have held out my hands to a disobedient and contrary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21 προς δε τον ισραηλ λεγει ολην την ημεραν εξεπετασα τας χειρας μου προς λαον απειθουντα και αντιλεγοντα 라틴어Vulgate,21 ad Israhel autem dicit tota die expandi manus meas ad populum non credentem et contradicentem 히브리어Modern,21 ועל ישראל הוא אמר פרשתי ידי כל היום אל עם סורר ומרה׃ 성 경: [롬10:2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이스라엘의 유기] 󰃨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 – 앞절에서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로 복음을 순종한 사건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사 65:1)을 통해서 인용하였다. 이번에는 역설적으로 사 65:2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강조하여 지적하고 있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스 라온 아페이둔타 카이 안틸레곤타'(*)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을 병행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페이둔타'(*)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나타내는 것이고 ‘안틸레곤타'(*)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결과로 나타나는 완악한 행동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까지 포함하고 있다(Lenski). 이처럼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거나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원래부터, 즉 모세와 선지자들의 시대에서부터 완악하고 반역적인 기질이 있었으며 이러한 기질로 인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서 기인한 것이다(Harrison).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을 예수께서도 탄식하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7, 38)고 책망하고 있다. 󰃨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베푸셨는가를 탄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종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홀렌 텐 헤메란'(*)은 시간의 범위를 나타내는 목적격으로 ‘매일'(Michel), ‘지속적으로'(Cranfield)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다(Dunn). 또한 ‘손을 벌렸노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여세페타사 타스 케이라스'(*)로 부성애(父性愛)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의 품에 정답게 안아 주기 위해서 손을 벌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인내와 사랑의 손을 벌리고 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눅 15:20).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에게 돌아와 그를 사랑하고 순종하게 하려는 뜻을 가지고 끊임없이 그의 백성을 찾고 또 손을 뻗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참히 거절하고 말았다(Harrison).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自招)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은 완전한 이스라엘의 책임인 것이다. 728×90 반응형

매튜헨리주석1055-로마서 10장

로마서 10장 Ⅰ.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 10:1-11 이 부분에서의 사도의 의도는 율법의 의를 능가하는 믿음의 의의 높은 탁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득하기 위한 바울의 시도이다. 1. 유대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고백함(1,2) 여기서 그는 그들에 대하여 선한 소원을 품으며 선한 증거를 한다. [1] 선한 소원 즉 그들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소원(1절): 비록 바울이 그들을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지만 그래도 그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는 이것이 ‘그의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였다고 말한다. 그의 소원의 강도와 진실함은 그것이 ‘그의 마음의 소원’이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그것은 흔히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만 비는 좋은 소원들처럼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실한 소원이었다. 기도의 정수는 마음의 소원이다. 냉랭한 소원은 거절을 당할 뿐이다. 그는 이 소원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것은 곧 그의 기도였다. 원하고 바라기만 한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2] 그가 선한 소원을 품는 이유가 되는, 유대인들에 대한 선한 증거(2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바울에게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적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실이 증거 하는 대로 그들을 칭찬한다. 사랑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한 선의로 해석하도록 가르친다. 우리는 악한 사람들에게서조차도 그들의 칭찬할만한 점은 후대할 수 있어야 한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그들의 복음에 대한 반대는 율법을 존중한다는 원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세상에는 맹목적이고 오도된 열심이 있는데 유대인들의 열심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2. 유대인들의 치명적인 과오(3) 그들의 열심은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렇게 열심으로 위하는 그 율법을 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된 메시야가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았어야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분명코 메시야라는 충분히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밝은 빛에 대해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서 율법에 대한 그들의 열심이 맹목적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3절에서 더욱 자세하게 설명한다. [1] 그들의 불신앙의 성격: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불신앙이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불순종이다.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참 신앙에는 복종이 절실히 요구된다. [2] 그들의 불신앙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부지이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의를 덧입어야 하는지를 생각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생각했다면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처럼 자기들의 행위에 의한 칭의를 결코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는 자기들의 의에 대한 자만이다. 그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즉 자기들의 행위의 공로로 만들어내는 의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3. 그러한 잘못의 어리석음(4-11) [1] 복음에 대한 율법의 보조역할(4절). 그리스도는…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의 의도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율법의 용도는 의를 이루기 위하여 사람들의 주의를 그리스도에게로 돌리는 것이었다. (1) 그리스도는 의식법의 완성이시기 때문에 그 법의 마침이 되신다. (2) 그리스도는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셨기(8:3) 때문에 도덕법의 마침이 되신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한 복종에 이르게 하여 칭의를 얻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제 율법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율법을 불이행한데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완전한 보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써 율법의 목적이 이루어졌고 그러므로 우리는 또 다른 방법으로 칭의를 얻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해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믿는 모든 자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다. [2] 율법을 능가하는 복음의 탁월성. 1)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란 어떤 것인가? 그는 이것을 5절에서 설명한다. 그 의의 취지는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것이다. 그 의는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있는 의로서 다만 완전한 복종에 의한 의 밖에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점에 대해서 그는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레 18:5). 여기에서 전제되고 있는 행함이란 약간의 불이행이나 위반이 없는 완전하고 흠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새롭고 산 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그처럼 끈질기게 이러한 칭의와 구원의 길에 집착한다는 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어리석음인가? 2)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어떤 것인가?(6절) 그는 이것을 신명기에서 모세가 한 말로 묘사한다. 그는 그 말을 신명기 30:11-14에서 인용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①그 의는 결코 어렵거나 까다롭지 않다. 이 칭의와 구원의 길에는 우리를 낙망시킬 구렁텅이나 매듭이 없으며 우리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난관도 따르지 않는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한 일들을 알아보기 위해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가지 않고도 의롭다 하심을 받고 또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모셔오기 위해 음부에 내려갈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기 위해 음부에 내려가겠느냐?”(7절).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하늘에 계시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무덤에 계셨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근거 없는 난관들을 생각하고 스스로 당황해 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다. 결코 구원이 우리에게서 그처럼 아득하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② 오히려 그 의는 아주 간단하고 쉽다. 말씀이 네게 가까와(8절). 그리스도는 네게 가까이 계신다. 그 말씀이 네게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바로 네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행해져야 할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루어져 우리가 쉽게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은 자기들이 모든 것을 해야만 했었다.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레 18:5). 그러나 복음은 그 일의 대부분이 이미 이루어졌고 그러므로 구원이 속히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즉 구원이 바로 우리 문 앞에 이르렀다는 것을 밝히 드러낸다. 그 말씀이 우리 입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말씀을 매일 읽고 있다는 말이다.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매일 그 말씀을 생각하고 있거나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믿음의 말씀이다. 그러면 무엇이 그 믿음의 말씀인가? 우리는 그 말씀의 대의를 9,10절에서 보게 된다. 우리에게 약속된 것은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복음이 나타내 보이고 제공하는 것은 바로 구원이다. 그리고 그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이는 그리스도로서 그는 끝까지 구주이시다. 그는 어떠한 조건으로 구원하시는가? 구원의 조건으로서 두 가지가 요구된다. 첫째는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그와의 관계와 그에 대한 신뢰를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를 지지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시인하는 것을 매우 강조하셨다(마 10:32,33). 특별히 이 세상에서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과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때에 사람들 앞에서 예수와 기독교를 시인하는 것이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바로 초대 교회 시대의 상황이 그러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것이다. 만일 마음속에 믿음의 능력이 없다면 입으로 하는 신앙 고백은 흉내에 불과할 뿐이다. 특별히 우리의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 조항인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진실된 동의를 해야 한다. 이 사실이 10절에서는 순서가 뒤바뀌어 더욱 설명되는데 그 이유는 먼저 마음에 믿음이 있어야 다음에 입으로 믿을 만한 시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먼저 믿음에 관해서 생각해보자. 사람이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은 지각의 동의를 의미하는 것 이상으로 의지의 동의를 포함하는 말이다. 이 믿음이 의에 이르는 것이다. 믿음에는 칭의의 믿음과 성화의 믿음이 있다. 다음으로는 고백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을 말하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약속의 조건을 성취하기(마 10:32)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우리의 자격에 기초를 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함으로써 이 기초 위에 구원을 세우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구원의 조건을 간단히 요약해본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과 몸을 드려야 하는데 마음으로 믿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영혼을 드려야 하고 입으로 시인하는 일에 있어서 몸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그는 이사야 28:16을 인용한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11절). 이런 자는 자기가 믿는 그리스도를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으로 믿는 자는 입으로 시인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자기의 소망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주 예수께 그와 같은 신뢰를 둔 자기의 확신을 어떠한 이유로든지간에 결코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1-4 The Jews built on a false foundation, and refused to come to Christ for free salvation by faith, and numbers in every age do the same in various ways. The strictness of the law showed men their need of salvation by grace, through faith. And the ceremonies shadowed forth Christ as fulfilling the righteousness, and bearing the curse of the law. So that even under the law, all who were justified before God, obtained that blessing by faith, whereby they were made partakers of the perfect righteousness of the promised Redeemer. The law is not destroyed, nor the intention of the Lawgiver disappointed; but full satisfaction being made by the death of Christ for our breach of the law, the end is gained. That is, Christ has fulfilled the whole law, therefore whoever believeth in him, is counted just before God, as much as though he had fulfilled the whole law himself. Sinners never could go on in vain fancies of their own righteousness, if they knew the justice of God as a Governor, or his righteousness as a Saviour. #5-11 The self-condemned sinner need not perplex himself how this righteousness may be found. When we speak of looking upon Christ, and receiving, and feeding upon him, it is not Christ in heaven, nor Christ in the deep, that we mean; but Christ in the promise, Christ offered in the word. Justification by faith in Christ is a plain doctrine. It is brought before the mind and heart of every one, thus leaving him without excuse for unbelief. If a man confessed faith in Jesus, as the Lord and Saviour of lost sinners, and really believed in his heart that God had raised him from the dead, thus showing that he had accepted the atonement, he should be saved by the righteousness of Christ, imputed to him through faith. But no faith is justifying which is not powerful in sanctifying the heart, and regulating all its affections by the love of Christ. We must devote and give up to God our souls and our bodies: our souls in believing with the heart, and our bodies in confessing with the mouth. The believer shall never have cause to repent his confident trust in the Lord Jesus. Of such faith no sinner shall be ashamed before God; and he ought to glory in it before men. Ⅱ. 복음 전파의 중요성 10:12-21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으며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점에서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골 3:11). 차별이 없음이라(12절). 1. 모든 자에게 동일하신 하나님(12) 한 주께서 모든 삶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유대인들에게 더 친절한 어떤 하나님이 계시고 이방인들에게는 덜 친절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은 ‘여호화로라 여호화로라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이로라’고 선포하셨을 때 그는 그 말씀으로써 그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하나님이셨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찾는 모든 피조물에게 어떤 하나님이시며 또한 앞으로도 어떤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것을 나타내셨다. 그는 그를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에 있어서 관대하고 풍성하신 분이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행해야 하는 어떤 일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다. 곧 우리가 그를 불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기도로써만 그의 은혜를 끌어낼 수 있을 뿐이다. 2. 모든 자에게 동일한 약속(13-21) 누구든지…부르는 자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여기서는 실제적인 모든 신앙으로 표현되고 있다. 기도 생활을 제외한다면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겠는가? 이렇게 그를 부르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저 구하기만 하면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는 이 사실을 더 설명하기 위해 다음의 몇 가지를 살펴보고 있다. [1]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어야 했던 절실한 필요성(14,15절): 이것이야말로 유대인들이 그처럼 맹렬하게 바울에게 분노를 터뜨렸던 일이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그 약속이 미치는 범위 안으로 데려오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14절).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고서는 그들이 기도로써 그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믿음의 은혜는 기도의 의무를 이행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믿음의 은혜 없이 올바로 기도할 수 없다.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히 11:6).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그것에 동의할 수 있으려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계시가 우리에게 알려져야 한다. 우리가 선천적으로 그 계시를 갖고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누군가가 그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말해 줘야 한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15절). 사람이 자기를 보내는 왕으로부터 신임장과 명령을 받지 않고서 어떻게 대사로서 활동할 수 있겠는가? 사역자를 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대권에 속하는 일이다. 하나님만이 사람들에게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을 주시고 그들에게 이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실 수 있다. 그러나 이 자격과 적성의 문제가 각자의 판단에 맡겨져서는 안 된다.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아주 유능한 판단을 내린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들과 그와 같은 자격과 적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자들을 따로 세울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자들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따로 세움을 받은 사람들은 보냄을 받은 자로서 설교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2]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환영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구원의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15절). 이 점에 대해서 그는 이사야 3:7을 인용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평화의 복음이다. 평화란 일반적으로 모든 좋은 것에 대하여 표현되는 말인데 여기서도 그런 의미로 표현된다. 그것은 ‘좋은 일에 대한 좋은 소식'(한극 개역 성경에는 ‘좋은 소식’이라고만 되어 있음-역주)이다. 복음의 일이란 좋은 일이며 사실 가장 좋은 것이다. 이제까지 하늘로부터 땅에 전해진 것 중 가장 좋은 소식이다. 사역자들의 활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좋은 소식을 저하는’것이다. 평화를 전하는(원문의 뜻은 이렇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설교자들은 복음 전도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일을 위해 얼마나 기꺼이 받아들여져야 하겠는가? 아름답도다…자들의 발이여. 다시 말해서 그들은 참으로 환영 받을 만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그들의 발(그들의 생활과 대화)이 아름다워야 한다. 사역자들의 생활의 성결함이 곧 그들의 발을 아름다움이다. 아름답도다.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보기에 아름답다는 것이다. 메시지를 환영하는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사랑하기 마련이다. [3] 그는 이 모든 것에 대적하는 반대에 대해 답변한다(16절).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16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 순종치 않았다는 말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 중 훨씬 더 많은 무리가 여전히 불신앙과 불순종 가운데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가 그것을 알고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복음을 전하였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전파된 말씀이 믿음을 일으키는 통상적인 수단이라고 가르친다(17절). 그러므로 비록 복음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다 믿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래도 일단 믿는 삶들은 그 이전에 이미 들은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17절). 믿음의 시작이나 진전, 그리고 능력은 들음에 의해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말씀이라고 불린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다. 그러나 그 믿음은 말씀에 의해서 생긴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것은 사람의 미혹하는 지혜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돕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복음을 듣고도 믿으려고 하지 않은 자들은 그들이 들었다는 사실로 인해서 용서받을 수 없었다(18-21절). 1)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었다(18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들은 복음을 들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소문을 들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단순히 혼잡한 소리가 아니라 그들의 말이 세상 끝까지 이른 것이다. 사도들이 받은 명령은 이와 같다.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하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그들이 지칠 줄 모르고 부지런히 일하였기 때문에 그 명령에 놀라운 성과가 따랐다. 사도들에게 방언의 은사가 그처럼 풍성하게 부어졌던 것은 바로 이 일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2) 유대인들도 역시 복음을 들었다(19-21절). 그는 이 사실에 대해 구약의 두 성경 구절에 호소한다. 이방인들이 부름을 받아 들어오리라는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그들은 틀림없이 모세와 이사야의 글로부터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먼저 한 구절은 신명기 32:21에서 인용되었다. 내가…너희를 시기나게 하며(19절). 그들은 복음을 제공받았으나 거절하였다. 그럴지라도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먼저 제공을 받았고 이방인들은 그저 찌꺼기만을 받았다. 만일 한 쪽이 받지 않으면 다른 쪽이 받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점이 유대인들을 시기나게 만들었다. 여기서 이방인들은 ‘내 백성이 아닌자’와 ‘미련한 백성’이라고 불린다. 세상의 기지와 지혜를 아무리 많이 갖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미련한 백성이라는 것이다. 이방 세계의 상태가 그러했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되신 것이다. 이방인들이 은혜 안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를 우리는 특별히 사도행전 22:22에서 잘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이 그처럼 격노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악함을 보여주는 실례였다. 하나님은 종종 사람들의 죄 자체가 그들에 대한 형벌이 되도록 하신다.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의 정욕으로부터 나오는 맹렬한 격노에 사로잡혀 있는 것 보다도 더 무서운 재앙은 없다. 다음으로 다른 구절은 이사야 65:1,2에서 인용되는데 이사야는 거기에서 매우 담대하게 말하고 있다. 충실하다는 인정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매우 담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결심한 사람들은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지간에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사야는 이방인을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예방적인 은총과 호의에 대해 담대하고 솔직하게 말한다(20절). 구하라 그리하면 찾으리라는 이러한 처방은 우리에게나 해당되는 규칙이지, 종종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도 찾은 바 되시는 하나님께는 해당되지 않는 규칙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복음의 빛을 보내심으로써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상황이 아니었는가? 우리가 그를 찾지 아니하였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 때야 말로 우리가 종종 무한한 감사와 함께 기억하게 되는 사랑의 때가 아니었는가? 또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강퍅함과 사악에 대해 담대하고 솔직하게 말한다(21절). 그들에게 쏟으신 하나님의 선하심은 지대한 것이었다.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21절). 여기서 하나님의 제의는 이것이다. ‘내가 내 손을 벌렸노라’ 즉 생명과 구원을 제공하였다는 말이다. 손을 벌리는 행위는 듣기를 요구하거나 받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몸짓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손을 벌린 채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었다. 화해를 제안하는 표시로서 ‘내 손을 벌렸노라.’ 그러니 와서 악수를 하고 친하게 지내자는 말씀이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그에게 우리의 손을 내미는 일이다. 이러한 제의를 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내는 이것이다. ‘종일’ 그는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기다리신다. 그는 오래 참으시나 언제까지나 참으시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저지른 악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이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치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거스려 말하고 그것에 대하여 다투었다. 유대인들은 그 부르심을 반박하고 모독적인 말을 하였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인간의 악함으로 인해 손상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나타내 주는 것이며, 인간의 악함이 하나님의 선하심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사악함의 정도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12-17 There is not one God to the Jews, more kind, and another to the Gentiles, who is less kind; the Lord is a Father to all men. The promise is the same to all, who call on the name of the Lord Jesus as the Son of God, as God manifest in the flesh. All believers thus call upon the Lord Jesus, and none else will do so humbly or sincerely. But how should any call on the Lord Jesus, the Divine Saviour, who had not heard of him? And what is the life of a Christian but a life of prayer? It shows that we feel our dependence on him, and are ready to give up ourselves to him, and have a believing expectation of our all from him. It was necessary that the gospel should be preached to the Gentiles. Somebody must show them what they are to believe. How welcome the gospel ought to be to those to whom it was preached! The gospel is given, not only to be known and believed, but to be obeyed. It is not a system of notions, but a rule of practice. The beginning, progress, and strength of faith is by hearing. But it is only hearing the word, as the word of God that will strengthen faith. #18-21 Did not the Jews know that the Gentiles were to be called in? They might have known it from Moses and Isaiah. Isaiah speaks plainly of the grace and favour of God, as going before in the receiving of the Gentiles. Was not this our own case? Did not God begin in love, and make himself known to us when we did not ask after him? The patience of God towards provoking sinners is wonderful. The time of God’s patience is called a day, light as day, and fit for work and business; but limited as a day, and there is a night at the end of it. God’s patience makes man’s disobedience worse, and renders that the more sinful. We may wonder at the mercy of God, that his goodness is not overcome by man’s badness; we may wonder at the wickedness of man, that his badness is not overcome by God’s goodness. And it is a matter of joy to think that God has sent the message of grace to so many millions, by the wide spread of his gospel.

[로마서 10장 헬라어 주석 강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롬 10:4-10)

반응형 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10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성육신 하셔서 죄인들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롬 10:4-10) 4절 텔로스 가르 노무 크리스토스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판티 토 피스튜온티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칭의’의 근원이며 이유이다. 즉, 의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란 말은 뒤에 나오는 ‘율법의 마침’을 한정시키는 말로 ‘율법의 마침’은 그 목적이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는 유대인을 넘어서서 ‘모든 믿는자’들, 모든 민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즉 그리스도의 의는 공평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유대인일지라도 멸망을 받으며 반면에 이방인일지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실로 ‘의'(디카이오쉬넨)은 율법으로나 인간의 행위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공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칭의의 의를 끝까지 불신한 것이다. 율법의 마침 – 혹자는 여기서 ‘율법'(노모스)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일반적인 법이나 원리를 의미한다고 한다(Meyer, Sanday and Headlam). 또 혹자는 본문의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특히 9:31)에서 볼 때 여기서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침’을 가리키는 헬라어 ‘텔로스’는 (1) 문제의 종결(end), 종료(termination) 혹은 (2) 목적(aim), 의도(intention), 목표(goal)등 양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종결시켰다는 의미이다(13:10;Calvin, Erasmus, Lenski, Murray, Harrison). (2)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실제 의미이며 목적과 의도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Hendriksen, Cranfield). 그중 (1)이 더 타당하다고 보는데 이유인즉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그림자로서 그 역할을 하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實體)로 인해 그 기능이 종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진행되는 어떤 과정에서 역사상에 주어졌던 것이고 이제 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5절 모세스 가르 그라페이 텐 디카이오쉬넨 텐 에크 투 노무 호티 호 포이에사스 아우타 안드로포스 제세타이 엔 아우토이스 롬 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10:5 모세가 기록하되 – 레 18:5에서 인용된 것으로 모세의 말이 인용된 것은 모세가 유대인의 율법을 세운 자였기 때문이다. 이기에서 모세는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하나님의 율례’라는 표현을 통하여 구약 여러 부분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느 9:29; 겔 20:11, 13, 21) 또한 신약에 넘어와서도 그 사상을 계승되고 있다(7:10; 마 19:17; 눅 10:28; 갈 3:12). 하지만 문제는 누가 과연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있다. 연약한 인생 중에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3:9-18). 오직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시고(8:3, 4) 자기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신 유일한 분이시다(히 5:8, 9). ‘기록하되’를 가리키는 헬라어 ‘그라페이’는 6, 8절에 나오는 ‘말하되’의 헬라어 ‘레게이’와 의도적으로 대조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레게이’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한 반면 ‘그라페이’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6절 주석 참조).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 – ‘말미암은’의 헬라어 ‘에크'(* )는 ‘…에서 나온’이라는 뜻으로 그 출신을 나타낸다. ‘율법에서 난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는 의이다. 이는 9:31, 32에 나오는 ‘행위에서 나온 의의 법’을 말한다. 율법은 행함을 요구하며 죄를 알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판결을 받는 길이었다(레 18:5; 겔 20:11, 13, 21; 눅 10:28). 따라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며 행할 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罪性)은 율법을 완전히 수행할 수 없다. 결국 이스라엘은 의의 법을 좇아갔지만 법이 요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9:31). 유대교의 구원 교리에 따르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면 율법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율법을 성취하여 그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이 보장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게 된다고 보았다(Strack-Billerbeck). 그러나 율법은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법에 대한 약속을 하셨고(렘 31:33) 오순절의 성령 보내심으로 성취되었다(욜 2:28 ff.).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은 믿음이고, 믿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과 부활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믿는 자들의 의가 되셨기 때문이다. 6절 헤 데 에크 피스테오스 디카이오쉬네 후토스 레게이 메 에이페스 엔 테 카르디아 수 티스 아나베세타이 에이스 톤 우라논 투트 에스틴 크리스톤 카타가게인 롬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 본 구절은 앞절(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대조를 이루어 상대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나타났음은 바울의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며 기독론적(christological)인 가르침의 기본 구조이다(Ridderbos). 그리스도의 죽음은 종말론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심판이며 의롭다하는 판결의 표시이다. 옛 시대(old aeon)와 옛사람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을 받았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의롭게 했다. 이같이 말하되 – ‘믿음에서 난 의’를 의인화시켰다. 이런 수사법은 바울 당시 철학적 연설을 할 때 종종 쓰였다. 의인화 용법으로써 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대조하여 ‘믿음에서 난 의’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 본 구절은 70인 역(LXX)의 신 30:12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본 구절은 구약적 문맥에 비추어 보면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늘에 오르는 것은 (1) 사람으로서 불가능할 뿐 아니라, (2) 이런 교만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승천하심을 믿지 않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율법으로 의를 구하려는 자들의 교만함과 그들의 망상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근본 핵심은 버리고 자신들의 유전과 행위를 통해 하늘, 즉 의에 이르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마음에…하지 말라 – ‘하지 말라’의 헬라어 ‘메 에이페스’는 ‘말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믿음을 통한 의’는 율법을 통해 의를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셨고 이것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를 부인하였다. 이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정치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해 그들 중에 오셔서 생명을 주셨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7절 헤 티스 카타베세타이 에이스 텐 아뷧손 투트 에스틴 크리스톤 에크 네크론 아나가게인 롬 10: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10:7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 ‘음부'(아뷧손)는 6절의 ‘하늘’ (우라논)과 그 높고 깊음에서 대조를 이룬다. 음부의 헬라어 ‘아뷧소스’는 히브리어 ‘테홈’ 대신 사용된 말이다. ‘테홈’은 ‘물들의 깊음'(창 1:2)이나 ‘바다의 깊음'(시 107:26)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본문의 의미는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인 ‘땅의 깊은 곳'(시 71:20), 즉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스올'(Sheol)을 의미한다(시 139:8;암 9:2;Murray, Hodge, Cranfield). 음부에 내려가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당하신 죽음을 믿지 않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無效)로 하는 것이며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 ‘모셔 올리는’의 헬라어 ‘아나가게인’은 부활을 언급할 때 쓰인다(히 13:20). 이스라엘 중에 이스라엘인들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은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8절 알라 티 레게이 엥귀스 수 토 레마 에스틴 엔 토 스토마티 수 카이 엔 테 카르디아 수 투트 에스틴 토 레마 테스 피스테오스 호 케륏소멘 롬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 앞에서 부정적인 진술을 계속하였지만, 이제는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바울이 언급하고자 하는 주제로 돌아온다.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 신 30:14의 인용인데, 70인 역에는 ‘심히’에 해당하는 ‘스포드라’가 있으나 본문에서는 생략하였다. 구약의 문맥에서는 율법을 통해 드러난(reveal) 은혜로운 면이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기의 말씀대로 그들의 입과 마음에 두어 율법을 암송하며 묵상하였던 것이다(시 1:2). 여기서 ‘말씀이 가깝다’는 것은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마음에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영이 와 계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율법은 상대적 위치인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입과 마음에 있다는 표현으로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가는 불가능성과 대조하면서 구원받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밝히 드러낸다.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 이 부분은 인용구에 바울이 첨가시킨 삽입구이다. ‘전파하는’의 헬라어 본문 ‘케륏소멘’는 ‘가르치다’, ‘설교하다’, ‘선포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사도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복음의 말씀을 뜻한다. ‘우리가 전파하는’이라는 한정구는 ‘말씀이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견해에 있어서 바울이 모세와 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전파된 말씀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은혜의 말씀으로 구약에 계시된 약속의 말씀, 즉 믿음의 말씀이다. 여기서 ‘믿음의 말씀’은 복음의 내용 그 자체이다(Calvin, Cranfield). 그리고 이 말씀은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임을 뜻한다(Cranfield). 바울이 신 30:14에 나오는 ‘말씀’을 칭의(justification)와 같게 본 것은 그리스도가 그 말씀의 실체이며 실제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9절 호티 에안 호몰로게세스 엔 토 스토마티 수 퀴리온 이에순 카이 피스튜세스 엔 테 카르디아 수 호티 호 데오스 아우톤 에게이렌 에크 네크론 소데세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 ‘네 입으로’, ‘네 마음으로’는 8절의 ‘네 입에’, ‘네 마음에’와 병행을 이룬다. 예수를 주로 – 이는 ‘예수는 주이시다'(Jesus in Lord)란 말이다.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헬라 세계에 있어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나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호칭이었다. 또한 신비 종교(Mystery Religion)의 신들이었던 이시스(Isis)나 오시리스(Osiris)에게도 사용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통치자에게 이 명칭을 붙였다. 특히, 하나님의 칭호 ‘야웨’는 칠십인 역에서 항상 ‘퀴리오스’로 번역했다. 즉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예수가 주’라는 고백은 교회 최초의 신앙 고백의 형태로서(행 2:36; 고전 12:3) 예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고백에는 경배의 대상이며 승천하신 구주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 ‘살리신’의 헬라어 ‘에게이렌’는 ‘일으키다’라는 말로서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아파르케)가 되셨다는 뜻이다(고전 15:2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부활을 소망케 하는 종말론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로 높이심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의 주되심을 시인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의 다시 사심을 고백했고 믿었던 것이다(빌 2:9-11). 네 마음에 믿으면 –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에 믿는 것은 불가 분리의 관계이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마음에서 믿는 만큼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 신앙 고백을 전제한 것으로서 외식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입-> 마음의 순서는 인용문 신명기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10절에서는 그 바른 순서, 즉 마음속에 믿는 것과 입으로 고백하는 자연적인 순서로 말한다. 구원을 얻으리니 – 헬라어 본문 ‘소데세’는 미래형으로 종말론적 구원(eschatological salvation)을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의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 입으로 시인하게 하며 구원에 이르게 한다. 10절 카르디아 가르 피스튜에타이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스토마티 데 홀몰로게이타이 에이스 소테리안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10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마음’-‘입’, ‘믿는 것’-‘시인하는 것’은 문장에 있어서 균형을 유지한다. 또한 ‘의에 이르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은 본문에서 역으로 사용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다. 본절은 본서의 주제가 되는 1:16, 17의 구절을 기억시키는 내용으로서 믿고 시인함이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한다. ‘믿어’와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에타이’와 ‘호몰로게이타이’는 수동태로서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시인에 이르게 됨을 나타낸 것이다(고후 5:14-15). ‘의에 이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얻어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이며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람 앞에서 주 예수를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을 아무 두려움 없이 공언하는 것이다(마 10:32;막 8:38; 눅 12:8). 특히, 시인(是認)은 지적인 확인을 넘어 생활의 차원에서 삶으로 고백되어야 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강요당하고 핍박받을 때 주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시인은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 때 직면하게 되는 구체적 탄압과 고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구원을 정직하게 표명(表明)하는 차원까지도 의미한다. 반응형

메튜 헨리 주석, 로마서 10장

10:1 의에 대한 바울의 강론(2)(로마서 10:1-11) 본장의 이 부분에서 사도의 목적은 율법의 의와 신앙의 의 사이의 큰 차이와 율법의 의에 비해 신앙의 의가 그지없이 탁월함을 보여 주어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유도하고 설득하려는 데 있다. 곧 거부한 자들의 어리석음과 죄를 들어 내 보여 주고 하나님께서 그런 거부자들을 배척하시는 게 정당하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것이다. Ⅰ.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에 대한 애착과 그 이유를 고백하고 있는데(1,2절) 그의 소원과 증거가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 1. (1) (2) 2. 잘 되기를 바라는 소원(1절)이다. 이들이 구원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곧 그들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멸망과 파괴로부터 구원 받을 뿐 아니라 그들의 머리위로 넘실거리는 영원한 진로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 말은 그들이 확신을 받으면 돌아설 수도 있다는 듯을 내포한다. 이들이 불신앙 가운데 구원받기를 믿음으로 기도할 그는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이 비록 이들에게 불리한 것을 전파해 왔지만 그는 아직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바라시는(벧후 3:9), 곧 죄인들이 죽는 걸 바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같이 자비롭다. 우리 자신이 구원이 해결되었으면 마음으로 타인의 영혼의 구원을 진심으로 소원하며 기원하려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이것을 그는 자신의 “마음에 원하는 바와……구하는 바”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 말이 암시하는 몇 가지를 살펴 보자.그의 소원의 강도와 진실성. 그것은 “그의 마음의 원하는 바”였다. 입술로만 반지르하게 떠들어대는 형식적인 얘기가 아니라 진정한 소원이었다. 이것이 그의 기도 이전에 오는 점을 유의하자. 기도의 정수는 마음의 소원이다. 시큰둥한 소원에는 거절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온갖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영혼의 숨결을 불어 넣어야 한다.하나님께 이 소원을 올리는 일. 그것은 자기 마음의 소원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기도였다. 마음에 소원이 있을지라도 이것이 하나님께 제출되지 않으면 기도가 될 수 없다. 바라고 소원하는 것, 그것만으로는 기도가 아니다.자신이 잘되었으면 하는 소원의 이유로서 제시되는 유리한 증거(2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다.” 불신 유대인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바울에게 둘도 없는 지독한 원수들이지만 그러나 그는 진실에 입각해서 이들을 좋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못된 원수라도 선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도 우리에게는 일종의 축복이다. 사랑은 남을 최상으로 여기며 그들의 말과 행동을 높이 평가해 주라고 가르친다. 악인들에게 있어서도 칭찬할 만한 점이 있으면 이걸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다”. 그들이 복음에 반대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믿는 율법에 대한 존경 때문이다. 맹목적으로 오도된 열심이란 있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백성과 사역자들을 박해하고 내쫓으면서 “여호와에게 영광이 있기를”(사 66:5)하고 떠들던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아니 이들은 그들을 죽여 놓고도 하나님께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요 16:2). Ⅱ. 여기에 불시니 유대인들이 죄책을 갖는 치명적인 잘못이 있으니 이것이 그들의 멸망이었다. 그들의 열심은 “바른 지식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새번역).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이 그렇게도 열성을 부리는 율법을 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약속된 메시아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일단 끝장을 고백했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그분이 새로운 종교와 새로운 예배 방법을 도입하셨으니 옛 것은 자리를 물러나는 게 마땅하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셨으니 그의 메시아됨에 대해서 더 없이 확실하게 증거해 보여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를 알려거나 소유하려 들지 않고 환한 빛에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율법에 대한 열성은 맹목적이었다. 이것을 그는 3절에서도 계속해서 입증하고 있다. 1. 2. (1) (2) 그들의 불신앙의 성격.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곧 복음의 조건에 순응하지 않았으니 복음에 제시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갖는 칭의의 배려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신앙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불복종이요 무죄라고 선언하는 복음의 선포에 대한 도전이다. “복종치 아니하였다.” 참 신앙에 있어서는 복종이 절실히 요구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첫 교훈은 우리 자신들의 부정(否定)이었다. 교만한 마음이 값없이 거저 오는 은혜를 보고 만족해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없다. 우리는 “빈민”으로서(sub forma pauperis) 뭘 간청하기를 싫어하기 마련이다.그들의 불신앙의 두 가지 원인.하나님의 의에 대한 무지. 이들은 죄를 싫어하시고 처벌하며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를 이해하지도 믿지도 고려해 보지도 않았다. 곧 우리들이 그분 앞에 나서려면 어떠한 의를 덧입고 나가야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다. 그랬더라면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를 보상하겠다는 생각에서 복음의 제안을 도전하거나 스스로의 행위에 의한 칭의를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제 지정되고 계시된 하나님의 칭의-방법을 모르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이 이것을 몰랐던 것은 이걸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발견될까봐 아예 눈을 감아 버리고 어두움이 좋아 거기에 묻혀버린 것이다.그들 자신의 의에 대한 교만한 기만. “자기 의를 세우려고,” 곧 자신들의 계략과 수단, 자신들의 행위와 의식 율법 준수에서 얻어지는 의인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는 바라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자신들의 실천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데 입고 나타날 의를 이루기에 충분하다고 그것에만 의존하였다. 이들은 바울과 함께 이것에 대한 의존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의의가 아니라”(빌 3:9, 새 번역). 이 교만한 예를 또 우리는 바리새인에게서 볼 수 있다(눅 18:10, 11:14 비교). Ⅲ. 그는 여기서 이 실수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고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고 영원한 의를 들여 오셨는데도 아직도 율법에 의한 의만 구하고 있으니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 모르겠다.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1. (1) (2) 2. (1) (2) [1] 복음에 대한 율법의 보조 역할(4절). “그리스도는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 율법의 목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도덕법의 임무는 상처를 더듬어 찾아내는 것이요 의식법은 이 치료의 그리자 역할을 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양자에 종지부를 찍으셨다(고후 3:7 참조; 갈 3:23, 24 비교). 율법의 소용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가리켜 보여 주는 데 있다.그리스도는 의식 율법의 마지막이다. 그가 그것의 완성이기에 그는 그것의 마침표다. 실체가 오면 그림자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구약 시대에 제정된 제물, 예물, 결례는 모두 그리스도를 상징으로 보여 주며 그를 가리켜 보여 주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죄를 없이할 수 없다는 그 무능력이 단번에 드림으로 죄를 없이할 수 있는 제물의 필요성을 스스로 발견한 것이다.그리스도께서 율법이 할 수 없던 일을 해내셨으며(8:3) 율법의 위대한 목적을 달성하셨다는 점에서 그는 도덕법의 마지막이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들을 완전 순종에로 이끌어 거기서 의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제는 죄의 권세와 본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는 이 율법의 종지부다. 율법이 폐한 것도 아니요 율법 시달자의 의도가 좌절된 것도 아니며 오직 우리의 율법 불이행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이루신 완전 보상에 의해서 그 목적이 달성된 것이요 우리는 칭의의 다른 길에 접어 들게 된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의를 위한 곧 칭의를 가져오려는 율법의 목적 달성 그 자체다. 그러나 그것은 “믿는 온갖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말이다. 우리가 믿는 순간 곧 복음의 조건에 우리가 동의하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상에 관련이 지어지며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 의롭게 되는 것이다.율법에 대한 복음의 우월성. 그는 양자의 구조적 차잇점을 들어 입증하고 있다.율법에서 오는 의는 무엇인가? 이것을 그는 5절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강령은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하는 식이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보다 더 낫고, 보다 더 유효한 의를 가리켜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관계를 떠나서 율법 자체만을 놓고 볼 때 (불신 유대인들의 태도가 바로 이것이었다.) 거기에는 저 완전한 순종이 아니고서는 인간을 의롭게 해줄 충분한 의가 전혀 없다. 이것을 위해 그는 성경을 인용하고 있다(레 18: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갈라디아서 3장 12절도 보자.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살 것이다.” 이 얼마나 즐거운 소식인가! 즐거워하라. 가나안 땅에서 뿐 아니라 그 가나안이 모형으로 보여주고 상징하는 저 하늘 나라에서 살 것이다. 예상된 행동은 완전하고 무흠해야 하며 한오라기의 불이행이나 거역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시내 산에서 주어진 율법으로 말하면 비록 그것이 순수한 행위 언약은 아니었다 해도(그렇다면 당시 구원 받을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그래도 그것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고 은혜를 환영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 더욱 효과적이도록 하려고 거기에는 행위 언약의 엄격성과 공포가 섞여 있는 것이다. 이제는 유대인들이, 새로운 생명의 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서도 어려울 뿐 아니라 인간 본성의 타락으로 인하여 불가능하게 된 이 방식에 의한 칭의와 구원에 아직도 집착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우매가 아닌가?믿음에서 오는 의는 무엇인가?(6절 이하) 이것을 그는 “둘째 율법”인 신명기에 있는 모세의 말을 인용해서 묘사하고 있는데 거기보면 첫 번째 율법 주신 데보다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계시가 더욱 명확히 들어나 있다. 그는 이것을 신명기 33장 11-14절에서 인용하며 다음 몇 가지 사항을 보여 주고 있다.그것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칭의와 구원의 길 그 자체에는 우리를 암담하게 하는 그런 불가사의나 매듭이나 극복키 어려운 난제가 담겨 있는게 아니라 글자 그대로 고속도로다(사 35:8). 그것을 찾아 어디로 올라갈 필요도 – 그것은 하늘 높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찾아 어디로 내려갈 필요도 – 그것은 땅속 깊숙히 있는 것이 아니다. 없다. 첫째, 우리는 거기 있는 기록을 들여다 보고 신의 경륜의 비밀을 조사하려고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거기서 모셔 오기 위해 그리로 올라가지 않고도 또 그에게 특사를 보내지 않고도 의롭게 되고 구원받을 수 있다. 둘째, 우리는 무덤에서, 곧 죽은 자의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모셔 오려고 깊숙히 내려갈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음부(a[|dhj)에 내려가셨다는 게 죽은 자의 상태에 들어 가셨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니 요나의 비유를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계셨던 것도, 그리고 지금은 하늘에 계시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들을 환상적인 난제를 가지고 괴롭히고 어리둥절하게 할 필요가 없으며 또 그리스도의 구원의 방법이 비실제적이요 계시의 목적이 단지 우리를 흥미진진하게 하는 것밖에 안 되는 따위의 해괴망측하고 육적인 생각을 만들어 내서는 안된다. 정말이지 구원은 우리들에게서 수억 만리 던 곳에 비치된 무엇이 아니다. [2] 그것은 아주 간단하고 쉽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흔히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바라 보자, 그리스도를 영접하자, 그리스도에게서 영양을 섭취하자고 말하는 것은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나 음부에 있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하는 게 아니라, 약속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 말씀에 계시되고 제시된 그리스도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대에게 가까이 있다는 건 말씀이 그대에게 가까이 있다는 말이니 정말 그렇다. “말씀이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이것을 이해하고 믿고 그대의 것으로 하는 데 있어 어려운 게 하나도 없다. 그대가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네 속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바로 여기서 그대의 증거를 찾아야지 하늘 기록에서 뒤질 필요가 없다. “그것이 네 입에 있고”(그렇게 되도록 하겠노라고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사 59:21), “네 마음에 있다”(렘 31:33). 우리를 위한 조치는 이미 모두 우리들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내려 오셨으니 우리는 그를 모시러 올라갈 필요가 없다. 그는 이미 음부에서 일어 나셨으니 그를 어떻게 올라 오시도록 할 것인가 하고 수다를 떨 필요가 없다. 이제 할 일은 하나도 없다. 남은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일뿐이다. 우리 마음과 입을 살피는 것 이것뿐이다. 율법 시대에 살던 자들은 스스로 모든 걸 해내야 했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이미 이 일의 대부분이 성취되었음을 발견하고 있다. 곧 의와 구원이 아주 간단명료하게 지름길에 놓여 있으며, 아니 우리 문전에 와 있는 것이다. 말씀이 우리에게 가까이 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입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그것을 날마다 읽는다는 말이요 그것이 우리 마음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그것을 날마다 생각하고 있다는, 아니 생각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곧 믿음의 말씀이라.” 복음과 그 약속이다. 그것이 믿음의 말씀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그것이 언제고 상대하는 믿음의 대상 곧 우리가 믿는 말씀이기 때문이요, 그것이 믿음의 교훈으로서 믿음을 명령하고 믿음을 칭의의 위대한 조건으로 삼기 때문이요, 그것이

메튜 헨리 주석, 로마서 10장

10:1

의에 대한 바울의 강론(2)(로마서 10:1-11)

본장의 이 부분에서 사도의 목적은 율법의 의와 신앙의 의 사이의 큰 차이와 율법의 의에 비해 신앙의 의가 그지없이 탁월함을 보여 주어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유도하고 설득하려는 데 있다. 곧 거부한 자들의 어리석음과 죄를 들어 내 보여 주고 하나님께서 그런 거부자들을 배척하시는 게 정당하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것이다.

Ⅰ.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에 대한 애착과 그 이유를 고백하고 있는데(1,2절) 그의 소원과 증거가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

1.

(1)

(2)

2.

잘 되기를 바라는 소원(1절)이다. 이들이 구원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곧 그들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멸망과 파괴로부터 구원 받을 뿐 아니라 그들의 머리위로 넘실거리는 영원한 진로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 말은 그들이 확신을 받으면 돌아설 수도 있다는 듯을 내포한다. 이들이 불신앙 가운데 구원받기를 믿음으로 기도할 그는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이 비록 이들에게 불리한 것을 전파해 왔지만 그는 아직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바라시는(벧후 3:9), 곧 죄인들이 죽는 걸 바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같이 자비롭다. 우리 자신이 구원이 해결되었으면 마음으로 타인의 영혼의 구원을 진심으로 소원하며 기원하려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이것을 그는 자신의 “마음에 원하는 바와……구하는 바”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 말이 암시하는 몇 가지를 살펴 보자.그의 소원의 강도와 진실성. 그것은 “그의 마음의 원하는 바”였다. 입술로만 반지르하게 떠들어대는 형식적인 얘기가 아니라 진정한 소원이었다. 이것이 그의 기도 이전에 오는 점을 유의하자. 기도의 정수는 마음의 소원이다. 시큰둥한 소원에는 거절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온갖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영혼의 숨결을 불어 넣어야 한다.하나님께 이 소원을 올리는 일. 그것은 자기 마음의 소원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기도였다. 마음에 소원이 있을지라도 이것이 하나님께 제출되지 않으면 기도가 될 수 없다. 바라고 소원하는 것, 그것만으로는 기도가 아니다.자신이 잘되었으면 하는 소원의 이유로서 제시되는 유리한 증거(2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다.” 불신 유대인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바울에게 둘도 없는 지독한 원수들이지만 그러나 그는 진실에 입각해서 이들을 좋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못된 원수라도 선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도 우리에게는 일종의 축복이다. 사랑은 남을 최상으로 여기며 그들의 말과 행동을 높이 평가해 주라고 가르친다. 악인들에게 있어서도 칭찬할 만한 점이 있으면 이걸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다”. 그들이 복음에 반대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믿는 율법에 대한 존경 때문이다. 맹목적으로 오도된 열심이란 있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백성과 사역자들을 박해하고 내쫓으면서 “여호와에게 영광이 있기를”(사 66:5)하고 떠들던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아니 이들은 그들을 죽여 놓고도 하나님께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요 16:2).

Ⅱ. 여기에 불시니 유대인들이 죄책을 갖는 치명적인 잘못이 있으니 이것이 그들의 멸망이었다. 그들의 열심은 “바른 지식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새번역).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이 그렇게도 열성을 부리는 율법을 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약속된 메시아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일단 끝장을 고백했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그분이 새로운 종교와 새로운 예배 방법을 도입하셨으니 옛 것은 자리를 물러나는 게 마땅하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셨으니 그의 메시아됨에 대해서 더 없이 확실하게 증거해 보여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를 알려거나 소유하려 들지 않고 환한 빛에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율법에 대한 열성은 맹목적이었다. 이것을 그는 3절에서도 계속해서 입증하고 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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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불신앙의 성격.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곧 복음의 조건에 순응하지 않았으니 복음에 제시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갖는 칭의의 배려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신앙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불복종이요 무죄라고 선언하는 복음의 선포에 대한 도전이다. “복종치 아니하였다.” 참 신앙에 있어서는 복종이 절실히 요구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첫 교훈은 우리 자신들의 부정(否定)이었다. 교만한 마음이 값없이 거저 오는 은혜를 보고 만족해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없다. 우리는 “빈민”으로서(sub forma pauperis) 뭘 간청하기를 싫어하기 마련이다.그들의 불신앙의 두 가지 원인.하나님의 의에 대한 무지. 이들은 죄를 싫어하시고 처벌하며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를 이해하지도 믿지도 고려해 보지도 않았다. 곧 우리들이 그분 앞에 나서려면 어떠한 의를 덧입고 나가야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다. 그랬더라면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를 보상하겠다는 생각에서 복음의 제안을 도전하거나 스스로의 행위에 의한 칭의를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제 지정되고 계시된 하나님의 칭의-방법을 모르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이 이것을 몰랐던 것은 이걸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발견될까봐 아예 눈을 감아 버리고 어두움이 좋아 거기에 묻혀버린 것이다.그들 자신의 의에 대한 교만한 기만. “자기 의를 세우려고,” 곧 자신들의 계략과 수단, 자신들의 행위와 의식 율법 준수에서 얻어지는 의인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는 바라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자신들의 실천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데 입고 나타날 의를 이루기에 충분하다고 그것에만 의존하였다. 이들은 바울과 함께 이것에 대한 의존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의의가 아니라”(빌 3:9, 새 번역). 이 교만한 예를 또 우리는 바리새인에게서 볼 수 있다(눅 18:10, 11:14 비교).

Ⅲ. 그는 여기서 이 실수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고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고 영원한 의를 들여 오셨는데도 아직도 율법에 의한 의만 구하고 있으니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 모르겠다.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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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음에 대한 율법의 보조 역할(4절). “그리스도는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 율법의 목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도덕법의 임무는 상처를 더듬어 찾아내는 것이요 의식법은 이 치료의 그리자 역할을 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양자에 종지부를 찍으셨다(고후 3:7 참조; 갈 3:23, 24 비교). 율법의 소용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가리켜 보여 주는 데 있다.그리스도는 의식 율법의 마지막이다. 그가 그것의 완성이기에 그는 그것의 마침표다. 실체가 오면 그림자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구약 시대에 제정된 제물, 예물, 결례는 모두 그리스도를 상징으로 보여 주며 그를 가리켜 보여 주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죄를 없이할 수 없다는 그 무능력이 단번에 드림으로 죄를 없이할 수 있는 제물의 필요성을 스스로 발견한 것이다.그리스도께서 율법이 할 수 없던 일을 해내셨으며(8:3) 율법의 위대한 목적을 달성하셨다는 점에서 그는 도덕법의 마지막이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들을 완전 순종에로 이끌어 거기서 의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제는 죄의 권세와 본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는 이 율법의 종지부다. 율법이 폐한 것도 아니요 율법 시달자의 의도가 좌절된 것도 아니며 오직 우리의 율법 불이행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이루신 완전 보상에 의해서 그 목적이 달성된 것이요 우리는 칭의의 다른 길에 접어 들게 된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의를 위한 곧 칭의를 가져오려는 율법의 목적 달성 그 자체다. 그러나 그것은 “믿는 온갖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말이다. 우리가 믿는 순간 곧 복음의 조건에 우리가 동의하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상에 관련이 지어지며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 의롭게 되는 것이다.율법에 대한 복음의 우월성. 그는 양자의 구조적 차잇점을 들어 입증하고 있다.율법에서 오는 의는 무엇인가? 이것을 그는 5절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강령은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하는 식이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보다 더 낫고, 보다 더 유효한 의를 가리켜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관계를 떠나서 율법 자체만을 놓고 볼 때 (불신 유대인들의 태도가 바로 이것이었다.) 거기에는 저 완전한 순종이 아니고서는 인간을 의롭게 해줄 충분한 의가 전혀 없다. 이것을 위해 그는 성경을 인용하고 있다(레 18: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갈라디아서 3장 12절도 보자.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살 것이다.” 이 얼마나 즐거운 소식인가! 즐거워하라. 가나안 땅에서 뿐 아니라 그 가나안이 모형으로 보여주고 상징하는 저 하늘 나라에서 살 것이다. 예상된 행동은 완전하고 무흠해야 하며 한오라기의 불이행이나 거역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시내 산에서 주어진 율법으로 말하면 비록 그것이 순수한 행위 언약은 아니었다 해도(그렇다면 당시 구원 받을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그래도 그것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고 은혜를 환영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 더욱 효과적이도록 하려고 거기에는 행위 언약의 엄격성과 공포가 섞여 있는 것이다. 이제는 유대인들이, 새로운 생명의 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서도 어려울 뿐 아니라 인간 본성의 타락으로 인하여 불가능하게 된 이 방식에 의한 칭의와 구원에 아직도 집착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우매가 아닌가?믿음에서 오는 의는 무엇인가?(6절 이하) 이것을 그는 “둘째 율법”인 신명기에 있는 모세의 말을 인용해서 묘사하고 있는데 거기보면 첫 번째 율법 주신 데보다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계시가 더욱 명확히 들어나 있다. 그는 이것을 신명기 33장 11-14절에서 인용하며 다음 몇 가지 사항을 보여 주고 있다.그것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칭의와 구원의 길 그 자체에는 우리를 암담하게 하는 그런 불가사의나 매듭이나 극복키 어려운 난제가 담겨 있는게 아니라 글자 그대로 고속도로다(사 35:8). 그것을 찾아 어디로 올라갈 필요도 – 그것은 하늘 높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찾아 어디로 내려갈 필요도 – 그것은 땅속 깊숙히 있는 것이 아니다. 없다.

첫째, 우리는 거기 있는 기록을 들여다 보고 신의 경륜의 비밀을 조사하려고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거기서 모셔 오기 위해 그리로 올라가지 않고도 또 그에게 특사를 보내지 않고도 의롭게 되고 구원받을 수 있다.

둘째, 우리는 무덤에서, 곧 죽은 자의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모셔 오려고 깊숙히 내려갈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음부(a[|dhj)에 내려가셨다는 게 죽은 자의 상태에 들어 가셨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니 요나의 비유를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계셨던 것도, 그리고 지금은 하늘에 계시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들을 환상적인 난제를 가지고 괴롭히고 어리둥절하게 할 필요가 없으며 또 그리스도의 구원의 방법이 비실제적이요 계시의 목적이 단지 우리를 흥미진진하게 하는 것밖에 안 되는 따위의 해괴망측하고 육적인 생각을 만들어 내서는 안된다. 정말이지 구원은 우리들에게서 수억 만리 던 곳에 비치된 무엇이 아니다.

[2]

그것은 아주 간단하고 쉽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흔히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바라 보자, 그리스도를 영접하자, 그리스도에게서 영양을 섭취하자고 말하는 것은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나 음부에 있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하는 게 아니라, 약속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 말씀에 계시되고 제시된 그리스도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대에게 가까이 있다는 건 말씀이 그대에게 가까이 있다는 말이니 정말 그렇다. “말씀이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이것을 이해하고 믿고 그대의 것으로 하는 데 있어 어려운 게 하나도 없다. 그대가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네 속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바로 여기서 그대의 증거를 찾아야지 하늘 기록에서 뒤질 필요가 없다. “그것이 네 입에 있고”(그렇게 되도록 하겠노라고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사 59:21), “네 마음에 있다”(렘 31:33). 우리를 위한 조치는 이미 모두 우리들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내려 오셨으니 우리는 그를 모시러 올라갈 필요가 없다. 그는 이미 음부에서 일어 나셨으니 그를 어떻게 올라 오시도록 할 것인가 하고 수다를 떨 필요가 없다. 이제 할 일은 하나도 없다. 남은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일뿐이다. 우리 마음과 입을 살피는 것 이것뿐이다. 율법 시대에 살던 자들은 스스로 모든 걸 해내야 했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이미 이 일의 대부분이 성취되었음을 발견하고 있다. 곧 의와 구원이 아주 간단명료하게 지름길에 놓여 있으며, 아니 우리 문전에 와 있는 것이다. 말씀이 우리에게 가까이 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입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그것을 날마다 읽는다는 말이요 그것이 우리 마음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그것을 날마다 생각하고 있다는, 아니 생각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곧 믿음의 말씀이라.” 복음과 그 약속이다. 그것이 믿음의 말씀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그것이 언제고 상대하는 믿음의 대상 곧 우리가 믿는 말씀이기 때문이요, 그것이 믿음의 교훈으로서 믿음을 명령하고 믿음을 칭의의 위대한 조건으로 삼기 때문이요, 그것이 믿음을 가져 오고 이루는 일상적인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의 말씀이란 무엇인가? 그 강령이 곧 복음의 요약이 간단명료하게 9,19절에 나타나 있다. 몇 가지 살펴보자.

첫?, 우리에게 약속되어 진 것. “네가……구원을 얻으리라.” 복음이 보여 주며 제시하는 것은 구원이니 죄책과 진노에서의 구원이요, 영혼의 구원이요, 영원한 구원이니 그 원 저자는 그리스도시니 끝까지 구세주이시다.

둘째, 어떠한 조건 하에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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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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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구원의 조건이 요구되고 있다.”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공공연하게 그를 우리의 왕과 구주로 모시고 관계를 유지하며 이 세상의 유혹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내 것으로 하며 사시사철 그의 곁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시인하는 문제를 대단히 강조하셨다(마 10:32, 33). 이것은 많은 은혜의 소산이요 자기 부정,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경멸, 굳은 용기와 각오를 분명히 선을 그어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이 더더욱 힘들고 귀했던 것은 초대 교회 당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고백은 곧 부동산, 명예, 지위, 자유, 생명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귀히 여기는 모든 것을 몰수당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며.”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건 한낱 비웃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고백의 뿌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계시에 남김없는 동의에 묻혀 있어야 한다. 특별히 그의 부활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기본 조항이요, 그것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보상을 만족한 것으로 받아들이셨다는 완전한 증거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보다 상세한 설명이(10절) 이번에는 앞뒤가 바뀌어 따르고 있다. 왜냐하면 먼저 마음의 고백이 있어야 입의 고백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믿음에 관해서 : “마음으로 믿어”. 이것은 이해의 동의를 벗어나 의지의 동의로서 내면적이요 마음을 다하는 진실하고 강력한 동의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면 믿음이 아니다. 이것이 “의에 이르는 것”이다. 여기에 칭의의 의가 있고 성화의 의가 있는 것이다. 믿음은 양자에 다 걸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칭의의 조건이자(5:1) 우리의 성화의 뿌리요 샘이니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그것에 이해서 진행되는 것이다(행 15:9).고백에 관해서, “입으로 시인하여.” 이것은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요(15:6) 박해받을 때 타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길을 내 것으로 삼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입을 만드셨기 때문에(출 4:11) 우리의 입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건 당연하니 특별히 어려운 때에 당신의 백성에게 “구재와 지혜”를 주시마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눅 21:15). 온갖 입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받을 영광의 일부이기도 하다(빌 2:11). 이것이 “구원에 이르게”하는 것은 그것이 그 약속 조건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10:32). 믿음에 의한 칭의가 구원에 대한 우리의 자격의

기초가 되지만 우리는 시인하므로 이 기초 위에 집을 지으며 우리 것으로 된 그것을 마침내 완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구원의 간략한 조건이 여기 들어 있는 것이다. 자신을 영혼과 몸을 다 해 하나님께 드리고 바치는 데 있어서 마음으로 믿는 가운데 우리 영혼을 드리며 입으로 고백하여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이다. 이 것을 행하라. 그러면 그대가 살 것이다. 여기에(11절) 그는 이사야 28장 16절을 인용하고 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ouv kataiacunqh,setai).

[1] [2]

그런 사람은 그가 신뢰하는 그리스도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으로 믿는 사람이 입으로 고백하는 걸 부끄러워할 리 없다. 사람들도 하여금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는 것은 죄악스런 수치다(막 8:38). 믿는 자는 서두르지 않는다. 믿는 자는 그가 본분을 다하는 길에서 마주치는 어려움을 피해 달아나려고 서두르지 않으며 멸시받는 종교를 수치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소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목표에 있어서 실망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부끄러워해서 안된 건 우리의 임무요, 또 그걸 수치로 여기지 않게 될 것이라는 건 우리의 특권이다. 주 예수에게 맘 푹 놓고 쉬는 믿음을 가진 자는 그걸 후회할 건덕지가 결코 없을 것이다.

로마서 10장

이 문서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인상 깊었던 내용 및 개인적으로 반추한 것들을 기록한 노트입니다.

4절: “The meaning of the word [end] depends on what is connected with it. The end of evils, or of life, is their termination; the end of a promise is its fulfillment; the end of a command, its performance or obedience; the end of faith is salvation. In such instances, the general idea is the result, or the effect, or the consequence. Now the law may be viewed as an economy, comprising the whole Jewish law, not perfect, but introductory; in this view Christ may be said to be its end — its perfection or “its landing place.” But we may also regard the law in its moral character, as the rule and condition of life; then the end of the law is its fulfillment, the performance of what it requires to attain life: and Christ in this respect is its end, having rendered to it perfect obedience. This last meaning is most consistent with the words which follow, and with the Apostle’s argument. The first view is taken by Chrysostom, Beza, Turrettin, as well as Calvin; the second, by Mede, Stuart, and Chalmers. There is really not much difference in the two views; only the sequel of the verse, “for righteousness to every one who believes,” and the opposite sentiment in the next verse, “the man who doeth these shall live in (or through) them,” seem to favor the latter view.” — John Owen, footnote in Calvin’s Commentary on Romans

5-8 절: 모세는 율법을 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보였다 (5절). 그러나 모세는 자신이 전한 그 율법을 완전히 지킴을 통해서 얻는 의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했다고 사도는 6절에서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인용된 말씀은 신명기 30장 11–14절을 빌려 온 것이다. 거기를 보면 모세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라고 말한다. ‘이 명령’이란 무엇인가? 결국 율법이 전체로서 가르치는 것이다. 그 율법 곳곳에 산재해 있는 복음의 사실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것을 최종적으로 요구한다. 당장 같은 신명기 30장 6절에서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즉, 생명을 얻게 하는 마음의 할례는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것이지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님을 모세는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우리의 의가 누더기 옷과 같다는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더하여 볼 때, 여기서 모세가 말하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일 수 밖에 없다고 사도는 증거하는 것이다. 율법은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단으로 결코 주신 것이 아니다. 의를 사랑하며, 동시에 의에 다다르지 못한 자신을 보며 그리스도께 피하도록 하시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의를 가지고 우리에게 주실 것을 믿으라는 것이며,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속하실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는 것은 곧 복음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 사도는 모세가 “바다”라고 표현한 것을 “무저갱”이라고 바꾸어 말했는데, 그는 모세가 말하고자 한 의도를 파악한 것이며, 이는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나오는 “바다”의 의미를 이해하게 해 주는 중요한 재료를 준다.)

“Christ’s ascension into heaven ought indeed fully to confirm our faith as to eternal life; for he in a manner removes Christ himself from the possession of heaven, who doubts whether the inheritance of heaven is prepared for the faithful, in whose name, and on whose account he has entered thither. Since in like manner he underwent the horrors of hell to deliver us from them, to doubt whether the faithful are still exposed to this misery, is to render void, and, as it were, to deny his death.” (Calvin, Commentary on Romans)

8절에서 사도는 다시 한 번 모세가 말한 ‘말씀’은 믿음의 말씀임을 재언급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전파한다고 말함으로써 모세가 전한 말씀이 복음의 말씀임을 강조한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의 주어는 6절에서 말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다. 복음의 말씀은 이렇게 가깝게 우리를 초청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에게 구원의 분명한 길을 보여 줌과 동시에 말씀 밖에서 무엇을 찾아서는 안 됨을 보여주고 있다.

9-10절: 9절에서 말한 바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은, 바로 전 절에서 인용한 모세의 말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에서 나타난 순서를 적용한 것이다. 이처럼 표면적인 것을 먼저 언급하고 더 깊이 감추어진 것을 나중에 이야기 하는 것은 성경에서 종종 나타나는 서술법이다. 물론 논리적인 순서는 마음으로 믿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그 논리적인 순서를 10절에서 적용하고 있다. 10절에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구원의 완성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데에 이른다는 것이지, 구원의 시작일 수는 없다; 왜냐면 구원의 시작에 해당하는 칭의는 마음으로 믿을 때라고 이미 적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총쳬적인 것으로서, 마음에서 시작에 입으로 시인하는 열매까지 맺게 하신다.

“But let them see what answer they can give to Paul, who at this day proudly boast of some sort of imaginary faith, which, being content with the secrecy of the heart, neglect the confession of the mouth, as a matter superfluous and vain; for it is extremely puerile to say, that there is fire, when there is neither flame nor heat.”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1-13절: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는 요엘 2장 32절 말씀을 인용했다. 이미 하나님의 선택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 바울은, 요엘서의 말씀을 온 인류의 창조자 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적용 시키고 있다.

14-15절: 그러므로 이방인인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요, 믿은 것은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요, 들은 것은 전파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물론 여기서 사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반적인 방법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 역시 하나님 나라에 초청을 받았으며, 또한 바울의 이방인을 향한 소명은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라는 증거를 바울은 역설(力設)하는 것이다.

“This passage is taken from Isaiah 52:7. This is a striking instance that the Apostle quotes not from the Septuagint, when that version materially departs from the Hebrew, as is the case here. Though it appears to be a version of his own, he yet gives not the original literally, but accommodates it to his own purpose: he leaves out “on the mountains,” and adopts the plural number instead of the singular, both as to the participle “announcing” or evangelizing, and as to the word “good.” The words peace, good, and salvation, in Hebrew, seem to refer to the same thing, according to the usual style of the Prophets.

The words of Paul, as rendered by Calvin, coincide more with the Hebrew, than as they are rendered in our common version. The verb εὐαγγελίζω, is often used simply in the sense of announcing, publishing, declaring or preaching, as in Luke 3:18; 4:43; Acts 5:42, etc.; and in this sense it exactly corresponds with בשר, which means the same, though the other idea of the Greek verb, that of evangelizing, has been wrongly given to it; for it is applied to the announcing of bad as well as of good news.” (John Owen, footnote in Calvin’s Commentary on Romans)

16절: 그러나 역으로 말씀을 들은 것이 곧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님을 바울은 상기시키고 있다. 이사야서 53장 1절의 인용이다. 이사야 53장 1절에서는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고 묻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역사해야 믿음이 생김을 이사야 선지자도 증거하고 있다.

17절: 17절 이후는 14-16절의 부연으로 볼 수 있다. 확실한 증거를 위해 이사야서를 인용하고 있다. 그 시작으로서 17절은 14-16절의 요약이자 요점이다; 즉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택하심이 임한 증거이다.

18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는 것은 바울의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그들”은 이방인을 말하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지 아니하였잖은가?”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인용한 말씀은 시편 19편 4절이다. 이 시편 말씀은 실상 일반 계시를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상 바울 만이 이방인으로 가야할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필요를 깨달은 누구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19절: 이번에는 바울이 묻는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이스라엘이”, 즉 구약의 교회가, “알지 못하였는가?” 아니다! 모세가 친히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향해 손을 펴실 것임을 전했다. 인용된 말씀은 신명기 32장 21절이다.

20절: 이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더 강하게 얘기하였다. 이사야 65장 1절 말씀이다.

21절: 이사야 65장 2절의 인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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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장 헬라어 주석강해] 복음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척(롬 10: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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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10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복음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척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주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배척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이 거룩한 백성이라고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선민의식이 투철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아들인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음에도 영적으로 둔감하여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율법주의 신앙에 매여있으면 복음을 전해주어도 배척하게 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복음을 전해줄 때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시간 영적인 눈이 열려서 복음을 밝히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척(롬 10:16-21)

16절 알르 우 판테스 휘페쿠산 토 유앙겔리오 헤사이아스 가르 레게이 퀴리에 티스 에피스튜센 테 아코에 헤몬

롬 10: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0:16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 유대인들은 전파된 복음을 대부분 믿지 않았다. 바울은 이것을 완곡어법(litotes)을 사용하여 말하고 있다. 즉 그들 중 일부 만이 복음에 순종하였다는 의미이다(사 53:1;고전 10:5).

이사야가 가로되…누가 믿었나이까 – 바울은 사 53:1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확증하고 있다. 바울이 앞절에서 인용한 사 52:7과 본절에서 인용한 사 53:1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고난 받는 종에 의한 구원의 메시지가 거부되리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의 불신앙을 예언하는 구절로 널리 사용되었으며(11:8) 친히 예수께서도 공생애 동안 사역하시면서 그 백성이 그를 메시아로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하기도 하였다(Bruce).

그리고 역사는 그 예언을 확증해 왔다(고전 1:23). 혹자(Calvin)는 이사야가 이 말을 한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빛을 우리 안에 조명해 주실 때에야 비로소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한 특별 계시에 의하여 구원은 내적으로 소명받은 자, 즉 선택받은 자에게 국한되는 것을 보여준다(Calvin).

17절 아라 헤 피스티스 엑스 아코에스 헤 데 아코에 디아 레마토스 데우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바울은 결론적 접속사 ‘그러므로'(아라; so then, KJV)를 사용하여 그의 논리를 결론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는 믿음에 대해서 결론짓기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고 정의한다. ‘들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코에스’로 ‘듣는 행위'(act of hearing)나 ‘들려오는 것'(that which is heard)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앞절(16절)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할 때 ‘전하는 바'(아코에)와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앞절과 차이점은 전자는 수동태로 ‘들려진 말'(was heard)의 의미로 쓰인 반면에 본절에서는 능동태로 메시지를 ‘들음'(hearing)의 의미로 쓰였다(Hendriksen). 또한 바울은 구원 얻는 신앙 곧 믿음은 듣는 행위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레카토스 크리스투)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다(Harrison). 따라서 바울은,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에 근거한다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18절 알라 레고 메 우크 에쿠산 메눈게 에이스 파산 텐 겐 엑셀덴 호 프동고스 아우톤 카이 에이스 타 페라타 테스 오이쿠메네스 타 레마타 아우톤

롬 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 바울은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불신앙에 대한 이스라엘의 변명의 소지를 철저히 차단시키고 있다. 즉,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믿음을 얻게 되는 ‘들음'(hearing)의 기회가 이스라엘에게는 가장 확실하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메 우크 에쿠산)는 ‘그들이 듣지 못했는가?’ (새번역, 공동번역; Did they not hear?, NIV)라는 의미가 좀 더 적절하다.

여기서 헬라어 ‘메’와 ‘우크’는 부정을 강조하여 ‘그들이 듣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라는 말이다(Dunn, Lenski). 결국 바울은 유대인들이 결코 듣지 못해서, 즉 전도를 받지 못해서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은 아니라고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그 소리가…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 바울은 그의 이러한 논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시 19:4를 인용하면서 복음 전파의 편만성(遍滿性)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복음이 전 세계에 완전히 전파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바울이 시편의 말씀을 인용한 초점은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복음 전파는 궁극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당시나 초대 교회 시대에 복음이 매우 신속하게 편만히 전파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15:22-24; 요 12:19; 행 2:41, 47; 4:4; 17:6; 빌 1:12, 13; 골 1:6).

19절 알라 레고 메 우크 에그노 이스라엘 프로토스 모세스 레게이 에고 파라젤로소 휘마스 에프 우크 에드네이 에피 에드네이 아쉬네토 파로르기오 휘마스

롬 10: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서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10:19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 바울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듣기는 했지만 깨닫지 못했으므로 거부했다는 반문이 나올 수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반박을 예상하여 앞절에서의 ‘들음'(hearing)에 관한 질문에서 전환하여 이제 ‘앎'(knowing)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여기서도 앞절에서와 같이 헬라어 부정불변사 ‘메’를 사용하여서 부정적인 대답을 암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주어졌지만 거절한 것처럼 복음의 의미와 불신앙의 결과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절하였다(Lenski). 그러므로 바울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복음에 대한 앎의 부족이나 깨달음의 결여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Harrison). 결국 이 말씀이 암시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그들이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으려 하는 마음이 없었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Hendriksen).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 이는 신 32:21의 인용으로 이 구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의 노래 중 일부인데,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예언으로 많이 인용되었다(11:11).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사악성을 질책하였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켰으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질투를 야기시키는 어떤 일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 일은 미련한 백성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백성 아닌 자'(에프 우크 에드네이)와 ‘미련한 백성'(에프 에드네이 아수네토)은 다 같이 이방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단절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었고 또한 어리석은 민족들이었다(Bruce).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용을 베푸셔서 그가 친히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존귀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시켰다.

20절 헤사이아스 데 아포톨마 카이 레게이 휴레덴 토이스 에메 메 제투신 엠파네스 에게노멘 토이스 에메 메 에페로토신

롬 10: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10:20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 바울은 이스라엘이 불순종에 대해 변명할 수 없도록 이전의 증거보다 더욱 강력한 증거를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역설하고 있다. ‘매우 담대하여’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포톨마’로 ‘담대한 태도를 취하다’의 뜻을 지닌 ‘아포톨마오’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온다.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나타났노라 – 이 말씀은 사 65:1의 인용으로 분명히 앞절(신 32:21)에서 선포된 내용을 더욱 강하게 확증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한 백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기까지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철저한 불순종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이방인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어 정의하기를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은 자들’이라 하였다(Dunn).

그는 이방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틀에 박힌 멸시와 배척, 자기 우월주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던 이방인들마저도 복음을 듣고 순종하여 구원이 임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불순종함으로 구원을 거절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께 구하지도 문의하지도 않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가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통해서 자신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대로 구원을 베풀 수 있는 주권적인 능력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Hendriksen, Calvin).

21절 프로스 데 톤 이스라엘 레게이 홀렌 텐 헤메란 엑세페타사 타스 케이라스 무 프로스 라온 아페이둔타 카이 안틸레곤타

롬 10: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10:21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 – 앞절에서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로 복음을 순종한 사건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사 65:1)을 통해서 인용하였다. 이번에는 역설적으로 사 65:2를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강조하여 지적하고 있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스 라온 아페이둔타 카이 안틸레곤타’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을 병행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페이둔타’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나타내는 것이고 ‘안틸레곤타’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결과로 나타나는 완악한 행동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까지 포함하고 있다(Lenski).

이처럼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거나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원래부터, 즉 모세와 선지자들의 시대에서부터 완악하고 반역적인 기질이 있었으며 이러한 기질로 인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서 기인한 것이다(Harrison).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을 예수께서도 탄식하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7, 38)고 책망하고 있다.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베푸셨는가를 탄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종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홀렌 텐 헤메란’은 시간의 범위를 나타내는 목적격으로 ‘매일'(Michel), ‘지속적으로'(Cranfield)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다(Dunn). 또한 ‘손을 벌렸노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여세페타사 타스 케이라스’로 부성애(父性愛)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의 품에 정답게 안아 주기 위해서 손을 벌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인내와 사랑의 손을 벌리고 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눅 15:20).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에게 돌아와 그를 사랑하고 순종하게 하려는 뜻을 가지고 끊임없이 그의 백성을 찾고 또 손을 뻗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참히 거절하고 말았다(Harrison).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自招)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은 완전한 이스라엘의 책임인 것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신앙 사건(단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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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장 짧은 설교] “믿음이란?”(롬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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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10장 짧은 설교 중에서 믿음이란 설교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믿음이란?”(롬 10:17)

♠명제 : 믿음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목적 : 선택받은 자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선물로 받는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이해하여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이해가 되면 믿고 자신의 판단 기준에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은 성경을 평생 읽어도 모두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믿어지게 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실 때에 믿어지고 이해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해가 우선이 아니라 믿음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는 성경이 하나님이 쓰신 책이라는 것을 믿어야 만이 그다음에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지식과 철학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믿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믿음은 어떻게 생기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실 때에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은 것도 나의 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허락해 주셨기 때문에 성경이 믿어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게 됩니다.

그럼 믿음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은 구원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믿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자신이 생각한 것이 절대적인 믿음인 줄 알고 착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낸 믿음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살면 그렇게 된다고 말을 합니다. 세상에서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살라고 독려합니다. 물론 그렇게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믿음을 갖고 긍정적으로 살면 뜻을 이루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야차르’의 믿음입니다. 구원에 관한 믿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흙으로 빚은 육체와 정신적인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야차르’의 믿음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될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살면 자신의 목표한 일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열심히 자신의 ‘야차르’의 믿음을 가지고 목표를 세워 긍정적으로 살았더니 큰 재벌을 이룬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야차르’의 믿음도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언이니

하나님은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에 관해서 나열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믿음을 가졌던 모든 사람들의 인물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구약은 아직 계시가 완성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보편적 믿음을 말합니다. 물론 구약에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보편적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고 계시가 완성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보편적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보편적인 믿음을 가지고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보편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신비한 체험을 하여 환상이나, 환청을 들으면 이것이 믿음의 근거가 되어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믿음은 보편적인 믿음입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 얻는 믿음과 세상의 보편적 믿음을 구분해야 합니다. 보편적 믿음은 ‘야차르’의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라’의 속사람이 믿는 믿음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이 믿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속사람인 ‘바라’의 몸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 얻는 믿음이 무엇일까요? 선택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라’의 믿음입니다. ‘바라’의 믿음은 특별계시인 성경의 말씀을 듣고 믿는 믿음입니다. ‘야차르’의 믿음은 세상 사람들도 얼마든지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일반계시를 보고 믿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인간의 의지로도 믿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일반계시의 믿음을 가지고 구원받았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야차르’의 몸이 받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바라’의 속사람이 믿는 믿음을 통해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 오는 믿음입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바라’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생기지 않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듣지 않고 ‘바라’의 속사람의 믿음이 생겼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하나님은 보편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는 일반적 은총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지 않아도 자신의 의지로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창세전에 선택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라’의 믿음을 주셨습니다. 속사람이 온전하게 되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특별은총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구원 얻을 믿음입니다.

롬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속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즐거워하되’ συνηδομαι(쉬네도마이 4913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포, 단수, 1인칭) ~와 함께 기뻐하다, 만족하다, 라는 뜻입니다. 보편적인 믿음으로는 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이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법입니다. 겉 사람은 율법에 매여 있지만 속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즐거워하며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합니다. 보편적인 믿음인 ‘야차르’의 믿음은 주님의 십자가 복음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속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겉 사람의 것을 많이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할 때에 속사람이 주님의 법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 속사람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속사람은 십자가 복음을 기뻐하고 좋아하지만 겉 사람은 세상의 권력과 재물과 권세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좋아한다는 것은 선택된 믿음을 가지고 구원받은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세상에서 재물이 부족해도 권력이 없어도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지금 현재입니다. 성경은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속사람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현재 육체의 환경이나 형편에 상관없이 주님 한분으로 족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 얻을 믿음을 주셔서 속사람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기뻐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속사람이 기뻐하는 것은 ‘야차르’의 육체의 믿음으로는 가질 수 없는 기쁨입니다. ‘야차르’의 몸은 세상에서 좋은 집을 가지면 잠시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속사람이 갖는 기쁨은 주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야차르’의 육체가 가진 것이 없어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날마다 낡아지기 때문입니다. ‘야차르’의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은 이 땅에서 호령하면서 많은 재물과 권력을 가지고 살기는 합니다. 하지만 속사람의 믿음이 없기 때문에 결국 ‘바라’의 몸은 비참한 상태로 계속해서 낡아지게 되어 마지막은 지옥의 불 못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바라’의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은 비록 이 세상에서 ‘야차르’의 몸은 고생스럽게 살아도 속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기 때문에 마지막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잘못된 ‘야차르’의 보편적 믿음을 가지고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세상에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한다면 이 사람은 절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율법의 행함으로 믿는 믿음은 ‘야차르’의 믿음입니다. 나의 행위로도 얼마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라’의 믿음은 나의 행위는 전혀 필요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이루신 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믿는 믿음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1%도 들어가지 않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럼 보편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행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선택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편적 믿음과 선택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보냈던 열두 명의 정탐꾼들입니다. 이 중에 열 명은 보편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두 명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선택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민13: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열두 명의 정탐꾼들이 사십일 동안 정탐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갈렙은 정탐한 내용을 백성들에게 보고하는데 우리가 올라가서 가나안 땅을 취하자고 말합니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된 땅이기 때문에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선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을 능히 이겨서 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선택받은 백성들은 ‘바라’의 믿음을 가지고 천국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곳이라고 생각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길이 없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보편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민13: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보편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열 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올라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가나안 땅의 백성들을 우리가 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우리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라고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보편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환경을 먼저 생각하고 보게 됩니다. 보편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천국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셨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환경을 탓하게 됩니다. 그 환경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거룩하게 생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의를 내세워 다른 사람들까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천국을 악평하는 자들입니다.

선택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어 마음에 확신을 주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히6: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하나님은 창세전에 선택된 백성들에게 천국을 기업으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파기하지 않으시고 뜻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택받은 자들에게 천국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맹세로 보증하셨습니다. 우리는 보편적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선택적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자신의 행위의 의의 믿음으로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선택적 믿음인 ‘바라’의 믿음을 하나님이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야차르’의 믿음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속사람이 변화를 받아 구원받은 믿음인 ‘바라’의 믿음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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