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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의 방패 | 2020-09-25 | 불화살 공격과 믿음의 방패 | 이찬수 목사 | 분당우리교회 특별새벽부흥회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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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5
분당우리교회 특별새벽부흥회
불화살 공격과 믿음의 방패 (에베소서 6:16)
이찬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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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갑주를 취하라10-믿음의 방패

이 모든 영적전쟁에서 마땅히 싸우며 승리하기 위해, 바울은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에 이어 네 번째 영적 무장으로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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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믿음의 방패(I) / 김성수 목사 – 다음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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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장 16절 믿음의 방패 – 네이버 블로그

에베소서 6장 16절 믿음의 방패 … 즉,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허리띠를 동이고, 하나님의 의로 우리의 호심경(흉배)을 붙이고 나아가 평안의 복음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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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 믿음의 방패 – 광성교회

이 믿음을 방패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악한자들이 화전 즉 불화살로 공격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막는 방패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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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방패 – 진리와 사랑 (TLT)

현대에 재현해본, 고대 로마 보병 방패 스쿠툼의 예. 믿음의 방패. 하나님의 전신갑주 4. 하나님의 전신갑주(완전무장)에 나열된 무기 가운데 네 번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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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6) : 믿음의 방패 (엡 6:10-20) – 기멀전

군사 용어, 위치적인 용어인데, 이 말씀을 믿음의 방패는 언제나 너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맨 앞에 두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다른 모든 영적 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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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방패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요? – 묵상노트

요한일서 5:4/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옛날에는 군인들이 싸움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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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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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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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갑주를 취하라10-믿음의 방패

이미지출처:http://www.larp.com/legioxx/Stephenson1.jpg

에베소서 6:13-16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믿음의 방패 -믿음으로 막아서는 전방위적 방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나누고 있는 이 시즌, 나의 치부를 덮고 사람의 눈을 가리려 했던 나아만의 갑옷은 벗어지고 우리를 진정 자유케하는 신령한 전신갑주가 무장되길 축원합니다. 치열한 영적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이 시국,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말씀과 진리로 우리를 보호하며 성령으로 깨어 이기는 자로 서게 할 것입니다. 이 모든 영적전쟁에서 마땅히 싸우며 승리하기 위해, 바울은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에 이어 네 번째 영적 무장으로 믿음의 방패를 말합니다. 전신갑주의 근간이 되는 허리를 조이고, 의로 심장을 덮으며, 평안으로 전투화를 신었다면, 이 모든 채비 위에 믿음의 방패를 들라는 것입니다. 전투가 시작되며 전진하거나 후퇴할 때, 또는 그 자리를 버티고 견뎌야 할 때 사방에서 날아오는 적의 공격을 막아주는 것은 방패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두 가지 종류의 방패로 싸웠는데, 적진이 뚫린 후 공격을 가하는 기동대들이 드는 작고 둥근 방패와 턱 아래로부터 전신 대부분을 가릴 수 있는 큰 싸이즈의 방패입니다.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보고 있는 본문의 방패는 당시 ‘문짝’과 같은 단어로 혼용되었던 후자의 방패로, 이는 잘 말린 나무위에 질기고 튼튼한 가죽을 여러 겹 덧대어 화살을 막을 뿐 아니라 화공전이 벌어질 때 물에 적시면 불로부터 병사들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방패는 나무나 철처럼 뚫어지는 무장이 아닙니다. 거추장스럽고 무겁다고 스스로 내려놓거나 버릴지언정, 우리가 붙잡아 들고 있는 한 사방에서 날아오는 모든 불화살을 막아내는 보호의 무장인 것입니다.

<믿음의 세 가지 기반 -성부, 성자, 성령을 믿는 믿음>

우리의 전신을 전방위적으로 보호하는 이 믿음은 쉽게 말하자면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경의 모든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음을 말합니다. 이는 성부 하나님을 믿음에서 시작되는데,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신실하심을 온전히 동의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어떠하든 온전함과 신실함으로 열방을 운행하고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 오직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오늘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 이 믿음입니다. 아버지는 우리 삶의 주관자시며, 나라와 열방을 이끄시는 한 분 되십니다. 그의 신실하심을 바라봅시다. 그를 신뢰함으로 오늘 주어진 자리를 지키며 감당하는 믿음을 보입시다. 두 번째는 성령을 믿음입니다. 사도행전의 성령님은 지금도 치유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의 믿음이 부어지길 축원합니다. 초자연적인 하늘의 역사는 오늘도 성도의 삶에서 일어나는 하늘의 증거일 것입니다. 상황과 환경을 넘어 기대할 수 없는 때,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믿음으로 실체를 취하는 자 되길 축원합니다. 마지막은 성자를 믿음입니다. 이는 말씀과 진리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가짜는 더 화려하고 친숙하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덮고 보호하도록 구합시다. 십자가를 믿는 믿음, 보혈을 믿는 믿음을 취하십시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의 이름은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입니다. 아들을 믿는 이 믿음은 구원과 생명의 역사를 보게 할 것입니다.

<믿음이 부어지며 자라는 방식 -선물, 들음, 경험>

우리는 어떻게 이 믿음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에베소서 2장은 믿음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 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상황과 환경이 흔들릴 때마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믿음없음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구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말씀과 같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주님은 믿음의 주체시며, 공급자 되십니다. 또한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 사건은 들음에서 나는 믿음을 보게 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기적이 일어나도 믿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졌다면, 이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말씀의 작용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진리를 경험할 때 부어지며 자라납니다. 요17:3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구체적인 음성을 들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계시하신 성경 이외의 또 다른 말씀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과 교통하는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과 교통하며 그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삶을 살아갈 때,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때로는 광야와 홍해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곳에서 우리는 길을 열고 바다를 가르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살아계시며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길 축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 자라날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를 드는 행위와 원수의 공격 방식>

그렇다면 믿음의 방패를 들라는 바울의 말과 연결되는 실제적 행위는 무엇일까요? 이는 믿음을 주장하고, 붙들고, 선포하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의 말씀과 언약을 주장하고 붙드는 것은 방어적 믿음입니다. 이는 전략상 후퇴할 때나 그 자리를 버티고 견뎌야 할 때 우리가 들어야 할 방패입니다. 한편 전진해야 하는 자들은 선포와 하나님을 기대함의 방패를 들어야 합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계시록 12장은 어린 양의 피와 증언하는 말씀으로 원수를 이긴다 합니다. 보혈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선포하고 기대합시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또한 기억할 것이 원수가 공격하는 통로와 방법입니다. 마귀는 세가지 무기로 성도를 공격하는데, 그것은 두려움과 의심과 말입니다. 계21:8은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자로, 두려워하는 자들을 가장 먼저 언급합니다. 두려움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말씀은 계속해서 강하고 담대하라 명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은 타협하고, 그렇기에 변질되며, 결국 배도하게 될 것입니다. 마귀의 두 번째 무기는 의심입니다. 고후4:4은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한다 합니다. 믿음이 부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영적 존재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상숭배가 많았던 가계는 복음의 빛을 가리는 공격이 큽니다. 상황에 따라 영적 전쟁하며 기도로 믿음을 구하고, 또 받길 축원합니다. 마귀의 마지막 무기는 우리의 말입니다. 말은 틈을 만듭니다. 부정적인 말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말만 들리게 합시다. 또한 믿음의 고백을 합시다. 말을 통하여 원수가 틈타지 못하도록 믿음의 방패를 세워야 합니다. 이 한 주간 삶의 모든 영역에 믿음의 파수가 있길 축원합니다. 모든 두려움과 의심을 버리고, 믿음의 방패로 막아서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시도록 그를 기대합시다.

향기 나무

믿음의 방패(I)

(김성수 목사)

(엡 6:13-17)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믿음의 방패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여러분, 지금 저희가 왜 하나님의 전신 갑주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는지는 잘 확인하고 계신 거죠? 우리에게는 대적들이 있고 하나님은 그 대적들의 공격을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굳게 서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13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서 ‘행한 후에‘라고 번역이 된 ’카텔가조마이‘는 ’완수하다, 수행하다, 성취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분명 무언가 완수하고 성취해야 할 어떤 것이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렇게 성도가 완수하고 성취해야 할 그 것을 잘 완성해 내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13절에 ’서기 위함이라’에서 ‘서다’라는 단어는 ‘히스테미’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붙잡다, 고정하다, 이룩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신 구원이라는 선물을 이 시간으로 제한 된 공간 속에서 우리의 이성과 육신을 가지고 경험하며 맛보며,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기 위해, 다른 말로 꼭 붙들고 고정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마귀의 공격을 허락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훈련소에서 ‘모의 전투’라는 것을 합니다. 그리고 ‘을지훈련’이나 ‘화랑 훈련’ 같은 가상 전투 훈련도 합니다. 그러한 가상 전투 훈련은 병사들이 실전에서 용사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가상 적군’을 부대로 투입시켜서 전술과 전략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경계를 소홀히 하거나 그 가상 적군들에게 당해서 작전 상황실에 모의 수류탄이 들어오면 그 부대는 징계를 받게 되지요. 마귀는 그렇게 우리 성도들의 훈련과 성숙을 위해 구속사 속에서 ‘가상 적군’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영적 전쟁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확정이 된 사람들의 성숙을 위한 싸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고지를 점령한 승리자들로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신 갑주의 내용이 방어 무기 일색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싸워서 쟁취해 내야 할 것이 있어서 전신갑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싸움은 이미 하나님께서 다 치르시고 승리하셔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신 것이고, 우리는 그 승리의 전리품을 잘 지키는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히스테미’‘고정하다, 확고히 붙잡다’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마귀의 공격은 단순히 우리로 범죄 하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범죄를 하게 만들거나 의심, 타락, 절망 같은 것을 불어넣어서 우리가 우리 주님이 이루신 승리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그 것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들며 불안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은혜의 선물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데에 최종적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이 마귀를 잘 이기고 있는 모습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실제로 죄로부터 자유 함을 누리고 거룩한 생명을 잘 누리고 있는 상태가 영적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겠지요? 그러면 그 전쟁에서 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여전히 범죄하고 다투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절망하는 삶이 바로 영적 전쟁에서 지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 전쟁에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지금 그 영적 전쟁에서 이기고 계신 분이신 지, 아니면 ‘전신 갑주‘고 뭐고 다 팽개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계신 분이신 지 잘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정리를 하면 우리가 지금 싸우고 있는 영적 전쟁은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하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허락하신 ‘구원‘이라는 것을 믿으며 누리며 경험해 나가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그 싸움에서의 우리의 역할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냥 무턱대고 하나님께 다 맡기고 난 멍청하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싸움이 아닌 것입니다. 구약의 이런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세요.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퍼부으셔서 애굽에게 항복을 받아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에게 허리띠를 띠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어서 이 애굽을 나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소리를 듣고 ‘이왕 할 거면 끝까지 다 해주세요. 난 하나님께 다 맡겼으니까 하나님이 날 들어서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 가나안까지 집어넣어 주세요.’ 이게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까? 어떤 것이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지요? 요단강이 아직 갈라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건너라고 하시니 건너겠습니다.’하고 건너는 것이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다 갈라서 마른땅처럼 뽀송뽀송하게 만들어 주시기 전까지 전 절대 못 움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의 의미를 너무 안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어떻게 결론을 맺으실 것을 알기에 난 그 것을 굳게 믿고 그렇게 실행에 옮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서 가나안으로 옮기실 때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원망하고 죄를 짓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광야에서 다 죽여 버리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구원을 하시려고 할 때 인간이 반응을 안 하면 그 구원은 취소시키신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들은 반드시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들의 손발을 움직이게 해서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은 그러한 성도들의 구원의 여정을 다중 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전혀 무시하고 강제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도록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성령의 빛을 비추시고 좋은 것을 좋은 줄로 알도록 깨우치시고 하나님의 복됨을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동의와 간절한 열망과 주관적 의미의 믿음을 만들어 내시는 ‘설복’을 통하여 하나님을 따르도록 하십니다. 따라서 복음의 빛에 비추임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반드시 손발을 움직여서 그들의 인생 동안에 해야 할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네 번째 장비인 믿음의 방패에 대해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 역정에 보면 주인공 크리스찬이 겸손의 골짜기를 지날 때 무저갱의 사자 아볼리온이 다가오지요. 그 때 크리스찬이 겁을 먹고 돌아서서 도망가려고 할 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아차 내 가슴에는 흉배가 있고 내 손에는 방패도 있지만 내 등에는 갑옷이 없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크리스찬은 아볼루온과 맞서기로 했습니다. 아볼루온이 다가와서 ‘너는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그 때 크리스찬이 ‘나는 멸망의 성에서 살다가 그 성을 떠나 지금은 시온 성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볼루온이 ‘그럼 넌 내 밑에 있던 놈 아니냐? 다시 내게로 돌아와라. 안 그러면 너를 여기서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을 합니다. 그 때 크리스찬이 ‘난 이미 참된 왕에게 나를 바쳤기 때문에 너에게 돌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볼루온이 크리스찬에게 불화살을 쏟아 붓지요. 크리스찬이 방패를 들어서 다 막아냅니다. 존 번연이 바로 이 에베소서 6장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 장면을 쓴 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믿음의 방패‘라는 구절 앞에 ’모든 것 위에‘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허리띠나 의의 흉배나 평안의 신을 신고 구원의 투구를 썼더라도 ‘믿음’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나머지 모든 것을 기초로 하고 그 위에 ‘믿음의 방패’를 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믿음’이라는 방패는 아주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바울이 살던 시대의 로마 군인의 방패는 ‘스쿠툼‘이라 불렀는데 가로가 0.7미터 세로가 1.2미터였습니다. 그러니까 웬만한 덩치의 군인은 조금만 숙이면 그 방패 안에 자기 몸을 다 감출 수 있었습니다. 그 방패는 나무판에다가 가죽을 붙이고 앞면은 철판으로 덮여있었습니다. 그 방패는 각개 전투를 할 때는 너무 커서 들고 싸우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럼 어떨 때 주로 썼느냐 하면 불화살이나 불창이 날아 올 때 그 걸 막는 것이 ‘스쿠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믿음의 방패’를 언급하면서 ‘악한자의 화전을 막기 위해’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화전’이 바로 불화살입니다.

전쟁에서 ‘화전’은 주로 먼 거리에서 본격적인 공격에 앞서 공격의 길을 닦는 목적으로 쏘는 불화살이나 불창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의 방패로 막아야 하는 것은 마귀가 우리를 향해 툭툭 던져 보는 그러한 공격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참소, 의심, 악한 생각, 잡념, 불순종, 배반의 마음, 탐욕과 악의, 두려움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절대 원치 않는 것인데 가끔 불쑥 불쑥 우리 마음에 나타나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이 있지요? 바로 그게 마귀가 던지는 화전들입니다. 그걸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마귀가 그러한 화전으로 파상 공격을 해 올 때 믿음으로 무장이 되어 있지 못한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지요.

믿음이 뭡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내가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믿음의 방패’를 들라는 명령은 뭘 어떻게 하라는 명령일까요? ‘믿음의 방패’를 들라는 명령은 믿음을 만들어서 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 안에 부어 넣으신 ‘믿음’을 행사하라, 발휘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믿음의 내용에 관해서는 조금 있다가 자세하게 보겠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믿음의 방패로 ‘악한 자의 화전을 소멸하라‘고 하지요. 거기서 ’소멸하다‘’스벤뉘미‘라는 단어는 ’즉시 꺼버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화전으로 우리를 공격해 올 때 우리는 하루 이틀 그 공격에 노출되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미 마귀의 의도대로 헛되이 분노하고 헛되이 범죄하고 불안하고 두려움에 시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이 좋지 않은 생각이고 이상한 생각이라도 별 의심 없이 그저 자기 생각이려니 하면서 그 것을 수용합니다. 그리고 그 것을 곰곰이 되 씹습니다. 한참 그런 생각에 몰두해 있으면 결국 그 사람은 공연히 분노하거나 누구를 미워하거나 좌절과 낙망에 빠지거나 또는 더러운 생각을 깊이 받아들여 더러운 행동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골 3:10) “1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성령을 통해 우리의 지식까지도 새롭게 창조해 놓으셨고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우리 안에서 솟아 나오는 생각들은 아름답고 선한 것들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연 의심과 허무함과 절망과 좌절의 생각들이 튀어나오는 것은 바로 그 것이 ‘악한 자의 화전’이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 것이 바로 우리의 것인 양 속이는 것입니다. 그 내용으로 구체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우리의 대적의 실제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실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16절에 나오는 ‘악한 자‘’포네로스‘는 실존하는 인격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실존하시는 인격체로 믿는다면 악의 실체에 대해서도 실존하는 인격체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지은 찬송가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가사를 잘 보면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원래 영어 찬송가는 ’이 땅에 마귀 가득 차’입니다. 루터가 볼 때는 이 땅에 실존하는 인격체인 마귀들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또 그게 사실이고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주기도문을 통해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거기서 ‘악’이 바로 ‘악한 자’라고 했지요? 주님께서도 마귀들이 우리 성도들을 얼마나 집요하게 공격할 것인지를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그런 기도를 다 가르쳐 주셨겠습니까? 루터는 실제로 마귀하고 밤을 새워 자기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논쟁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진지하게 논쟁을 주고받았는지 나중에는 진땀이 나고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논쟁을 했다고 합니다. 루터가 그 논쟁의 마지막에 마귀더러 ‘그래 난 그런 사람이야. 네가 말한 것처럼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거룩한 마귀야 나를 위해 기도해 주렴’ 루터의 말에 따르면 마귀는 자기를 조롱하는 말이나 비아냥대는 말을 무척 싫어 한답니다. 그건 뭐 성경에 나오는 말이 아니니까 믿거나 말거나 여러분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하여튼 루터는 마귀를 비아냥대면서 겨우 겨우 하루의 논쟁을 마쳤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귀는 실재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귀의 실존에 대해 너무 무지하며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늘 자기에게 실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마귀가 어떻게 우리에게 화전을 던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마귀가 흔하게 사용하는 화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하려고 할 때 집중이 잘 되십니까? 꼭 마음먹고 기도만 하려고 하면 온갖 잡생각이 다 들지요? 집에 가스 불은 끄고 왔나? 오늘 저녁은 뭘 해 먹을까? 우리 아이는 왜 그렇게 말을 안 들을까? 갑자기 생각지도 않던 잡생각들이 몰려들지 않습니까? 저는 예전에 청년 부 때 새벽 기도를 하는데 새벽기도 시간 내내 떠나지 않고 저를 괴롭히는 생각이 ‘혹시 사찰 집사님이 내가 여기 있는 줄 모르고 기도 다 끝내고 나만 남겨두고 문 잠그고 가면 어떻게 하나’ 이 생각하느라고 괜히 소리 높여 기도하고, 일부러 부스럭거리고 그러느라고 기도를 못 했습니다.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저를 덮는 거지요. 결국 이렇게 기도하려면 뭐 하러 기도는 하러 나오니? 그렇게 자신에게 실망하고는 새벽기도를 그만 두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먹고 성경을 읽으려고 펴면 꼭 그 때 잡생각이 들지요. 그렇게 잡생각 5분만 하다보면 피곤해서 잠이 들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성경을 펴면서 잠이 드는 분도 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무슨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미처 다 읽지 못하고 ‘태초에 천지를, 태초에 천지를’에서 머무르다 결국 곤히 잠이 들어 버리지요. 여러분 신문이나 잡지를 보시면서 잡생각 해 보신 적 있으세요? 그 땐 너무나 정신이 또렷또렷하지요? 완전히 ‘달고 오묘한 그 잡지‘ 아닙니까? 청소년들이 성경 공부하느라고 밤은 못 새워도 포르노 사이트 서핑하면서는 3박 4일도 꼬박 새운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하고 누구 험담하면서 잡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그럴 땐 너무나 집중이 잘되지요? 그런데 왜 꼭 기도만 하려고 하면, 성경만 읽으려고 하면 잡생각이 떠나질 않습니까? 그게 바로 우리의 대적이 살아서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몽’ 같은 드라마 볼 때는 초롱초롱 밤을 새우는 데 설교 시간만 되면 잠이 오는 사람들 있지요? 그것도 마귀의 화전인 것입니다. 이번에 시애틀에 집회를 갔을 때 참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이 곳 LA에 계신 분들도 참 고생들 많이 하시지만 그 곳에 계신 분들은 거의 하루에 12시간에서 16시간씩 일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어떤 분은 16년 만에 처음으로 토요일을 쉬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집회에 참석하시겠다고… 그 중에 장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셔요. 그런데 설교시간에 조셨던 모양이에요. 그러면서 저에게 ‘목사님 설교 시간에 조는 사람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처음부터 졸겠다고 마음먹고 조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들은 머리가 앞으로 끄덕 끄덕 숙여 진답니다. 그런데 졸지 않으려고 애는 쓰는데 정말 불가항력 적으로 조는 사람들은 머리가 뒤로 넘어간 대요. 그러면서 자기 머리가 뒤로 넘어가는 거 보셨냐고 애교스러운 변명을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오랫동안 끊었던 ‘중독, 집착‘ 이런 것들을 다시 저지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저는 술을 아주 즐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전혀 술 생각이 없어요. 왜냐하면 술로써만 해결되었던 내 마음속의 공허가 이제 다른 것으로 해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끔 옛 날에 마셨던 그 술맛과 냄새가 뇌 속에서 재생이 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목사가 말씀 준비하다가 술 생각에 입맛을 다시고 있는 모습. 상상만 해도 웃기지요? 그러한 것들이 바로 사단의 화전인 것입니다. 그 때 믿음의 방패가 없으면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마귀는 그렇게 우리에게 화전을 던져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아 난 정말 참 신앙인이 아닌가봐. 어떻게 내게는 기도와 성경이 이렇게 멀기만 할까?’ ‘그래 내가 무슨 성경을 읽어’ 이렇게 절망하고 기도와 말씀 공부에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지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그렇게 마귀가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을 방해 할 때 ‘아냐 이건 내 생각이 아니야. 난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어 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성경을 폈다. 그런데 지금 실존하는 마귀가 나에게 화전을 쏘고 있는 거야. 난 이렇게 무너질 수 없다’ 그러면서 주기도문이라도 열심히 외우라고 합니다.

두 번째로 마귀가 자주 쓰는 화전이 ‘의심’과 ‘터무니없는 생각들’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에게 찾아와서 ‘의심과 불신’을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이나 마틴 루터 같은 훌륭한 목사님들도 자주 자기의 구원에 대한 의심을 가지셨다고 하는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내가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진짜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는 건가?’‘괜히 있지도 않은 하나님 믿는다고 아까운 청춘만 낭비하는 건 아닌가?’ 마귀는 이런 의심과 불신을 마구 불어넣습니다. 멀쩡하게 신앙생활 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의심이 들지요? 그게 마귀의 화전인 것입니다. 그리고 어떨 때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불경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이상하게 예수님에 대한 욕도 막 나오고 그러지 않습니까? 저도 예전에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며칠 동안 하루 종일 예수님에 대한 입에 담지 못할 욕이 머릿속에 맴돌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정말 절망했지요. ‘내가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 맞다 면 어떻게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경한 욕이 머릿속에서 하루 종일 맴 돌 수가 있단 말인가?’ 하면서 정말 절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책을 읽다보면 그 훌륭한 분들이 똑같은 경험들을 다 하셨더라고요. 그게 바로 마귀의 화전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또 마귀가 자주 쏘는 화전이 상상력의 화전입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속에 어떤 광경도 그려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욕과 욕망의 상상을 실제로 어느 정도 현실화도 시켜 줍니다. 마귀는 성도의 마음속에 갑자기 욕정을 불어넣고 그 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과 가능성도 넌지시 던져 줍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 근거 없는 열정과 희망에 사로잡혀서 흥분을 하게 되고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게도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이런 내가 무슨 그리스도인이냐’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마귀는 물리적인 박해를 가함으로 화전을 쏘기도 합니다. 마귀는 장기간 혹은 단기간의 국가적 박해 혹은 집단적 박해를 가해서 성도를 무너뜨리려고 시도를 합니다. 역사상 기독교를 핍박했던 악한 통치자들이 다스리던 시절에 살았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정말 그들의 믿음 생활을 도저히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그러한 핍박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믿음의 방패를 높이 들고 그 화전을 이겨내었습니다.

(벧전 5:8-9)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보세요. 마귀의 공격이 ‘고난’으로도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 믿음의 방패를 높이 들라는 것이지요.

(요일 5:4-5)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렇게 마귀의 화전이 쏟아질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방패’인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더러 믿음을 만들도록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안에 부어진 믿음을 얼마나 발휘하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부어지는 마귀의 화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들은 믿음도 없는 불신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마귀는 절대 불신자들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냥 놔둬도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공격합니다.

(벧전 1:12)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우리 성도들은 우리에게 당연히 마귀의 화전이 쏟아질 것이라는 것을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때 믿음을 발휘할 수 있는 자만이 그 화전에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믿음을 발휘하면서 살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한 답이 데살로니가 후서 3장에 나옵니다.

(살후 3:1-3) “1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여기 보시면 사도 바울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기술을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전부 악한 자의 화전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는가? 바로 그 앞에 보시면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악한 자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게 뭡니까? 기도입니다. 기도는 믿음이 깊은 사람일수록 더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발휘가 크면 클수록 마귀도 더 거센 공격으로 달려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매일 기도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이 담고 있는 내용에 관해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간 믿음에 대해서 여러 번에 걸쳐 설교를 했습니다만 오늘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에는 당연히 두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그 믿음의 대상인 ‘실체’가 있어야 합니다. ‘실체’가 없는 믿음은 ‘환상이나 상상’이라고 하지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믿음의 대상인 실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실체인 대상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계시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보이지 않는 실체가 계시 화되어 어떤 존재에게 믿겨 지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믿음에는 그 믿음의 대상인 ‘실체’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 실체가 자신을 계시하는 ‘계시‘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계시를 통해 그 믿음의 대상인 실체를 ’실존하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은 ’신념이나 지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믿음‘은 나의 신념이나 결심, 지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이 세상의 중심에 놓고 오직 ’나‘만을 믿으며 ’나‘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이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예수라는 것을 계시를 통해 사실로 알게 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입으로 삶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믿음의 발휘‘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표현하면 ’믿음의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에게 믿음의 발휘를 도출해 내는 그 계시는 어떻게 주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어집니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입을 통해 직접적인 계시를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완성이 된 후에는 그 성경 말씀만으로 족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라는 직분 자체를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믿음을 발휘하며 살기 위해서는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 믿음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직통 계시를 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벽에다가 글을 쓰시기도 하셨습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의 아들인 벨사살 왕의 잔치에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서 벽에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쓰시지요? 그렇게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전한 사람들을 ‘선지자’‘예언자’라고 부릅니다. 거기서 ‘예언자’는 ‘미리 예(豫)’자가 아니라 ‘맡길 예(預)’ 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단순히 앞일을 예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을 ‘예언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 중에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라고 하는 사람들 있지요? ‘하나님께서 오늘은 신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고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신장에 문제가 있으신 분들은 거기다 손을 대시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고치시겠답니다.‘ 이러는 사람들 있지요?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직통 계시를 받았다’라고 하는 자들은 100% 가짜입니다. 그 사람들 사실은 무당입니다. 그러니까 절대 속지 마세요.

예전에 어떤 시사 프로그램에 어떤 무당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부산에 사는 무당인데 얼마나 용한지 부자들, 정치인들이 줄을 잇는 그런 유명한 점집이었습니다. 보통 큰 굿 한 판에 5 천만 원 정도를 받고, 액땜을 하는데 2억에서 4억 정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사기전과 5범이었고 또 지명수배 되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복채를 현찰로 받았습니다. 수사관들이 그 집을 들이닥쳐서 수색을 하는데 커다란 이민 가방 몇 개에 만 원 짜리 현찰이 수북했습니다. 그 집안에서 현찰이 수십억 원이 나왔습니다. 심지어 불상 안에도 만 원짜리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웃긴 것은 그 사기꾼한테 4억을 뜯긴 사람이 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니 그 사기꾼이 액땜을 하려면 굿도 굿이지만 실제로 그 액운을 가진 당사자가 영험한 신과 함께 그 액운이 다 가실 때까지 그 신에게 봉사하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공갈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우매한 사람이 그 무당에게 매를 맞으면서 식모살이를 하면서도 찍 소리 못하고 일만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떤 수모를 당한다 할지라도 이 액운만 나가면 난 행복해 질 거야‘ 이런 어처구니없는 희망을 품고 몇 년째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자기의 액 땜, 자기의 행복, 자기의 출세‘ 이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앞일에 대한 예언에 관심을 갖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 것을 주겠다고 하는 자에게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그 사람 손에 달려 있으니 그 상대방의 말에 꼼짝을 못하지요. 무당들이 점치러 오거나 굿하러 온 사람에게 존대 말 하는 거 보셨어요? 전부 반말입니다. 오늘 날 교회에서 그 무당 짓거리를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고 하면 일단 교인들이 그 앞에서 꼼짝을 못합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사람들한테도 아무한테나 반말 지꺼리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사람한테 기도 받기 위해 줄을 섭니다. 여러분 성경의 예언은 절대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언자들이 한 예언 중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은 그런 경우에라도 단순히 인간의 앞날, 인간의 길흉화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미리 약속하시는 것을 ‘예언(預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 15:12-17)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아들 하나 없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4백 년 동안 종살이 할 것이고 그 후에 큰 재물을 가지고 애굽을 나올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 약속은 분명하게 이루어졌지요. 성경은 이러한 것을 ‘예언‘이라 하는 것입니다.

(출 6:3-9)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

보시면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기 위해 모세를 보내시고 그 언약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면 평생 종살이하게 내버려두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출애굽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은 반드시 성취라는 결과를 품고 있습니다.

(신 18:15-22)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19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20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21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22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그러니까 진짜 선지자들, 진짜 예언자들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어야 합니다. 이 모든 예언의 말씀 전체를 ‘계시’라고 하고 그 것이 사실로 믿어지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마귀의 화전을 막을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잘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의 내용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발휘하는 것을 ‘믿음의 발휘, 믿음의 방패’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계시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다음 시간에 조금 보충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 우림과둠밈

메모 :

에베소서 6장 16절 믿음의 방패

에베소서 6.16 믿음의 방패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사도는 십자가의 군병이 마피아와 같은 사탄 마귀를 대적하기 위하여 전신갑주를 취함에 있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라고 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 위에”(en pasin)란 이미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그리고 평안의 복음으로 준비한 신을 말한다. 즉,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허리띠를 동이고, 하나님의 의로 우리의 호심경(흉배)을 붙이고 나아가 평안의 복음으로 우리의 신을 단단히 고정하여 땅위에 든든히 서야한다고 말한 뒤에, 사도는 이것들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방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피고 이 방패가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는 기능을 한다고 하였는데, 이 불화살과 방패의 기능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상고하기로 하자.

그러면 우리는 사도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analabontes ton thyreon tes pisteos)라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pisteos)과 방패(thyreon)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살펴보자. 첫째, 믿음이란 무엇인가? 칼빈은 믿음에 대하여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근거로 삼은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다.”라고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정의를 하였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믿음은 성령의 역사이며, 또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적인 인식인 동시에 그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이다. 사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믿음이 없다면 불안해서 조금도 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가령 압력솥에 밥을 한다고 할 때 이 솥이 터지지 않을 것이라 믿지 않는다면, 비행기를 타면서 안전하지 못하다고 믿는다면,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떨어질 수 있다고 염려한다면 아마 아무것도 사용하거나 이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별 큰 신경을 쓰지 않고 편안히 이들을 이용하는 것은 이것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둔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마찬가지다. 성도가 만약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적인 인식은 물론 그에 대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것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어찌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도는 이러한 믿음이 바로 방패가 된다는 것이다. 방패는 전쟁을 함에 있어 우리의 신체를 보호하는 장비 중의 장비이다. 로마 시대에 전장에 나가는 군사들은 자기의 몸을 거의 감출 수 있는 방패를 들고 나갔는데, 비록 위에서 본 허리띠와 호심경(흉배)과 신도 필요하지만 이것들 위에 방패를 주문한 것은 바로 방패가 갖는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사도는 믿음이 없이는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의도, 그리고 믿음이 없이는 평안의 복음이 준비될 수 없는 것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하기 위한 것임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믿음장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봉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했던 것이다.

성도가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다시 말하면 위에서 말한 “믿음의 방패”를 지니고 있을 때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en ho dynesesthe panta ta bele tou ponerou ta pepyromena sbesai)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panta ta bele tou ponerou ta pepyromena)이란 두 말할 것 없이 마피아인 사탄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사용하는 각종의 궤계들을 총 망라한 것이다. 사탄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며,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속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정결하게 됨은 물론 하나님의 의와 성화의 의를 이루어가려 할 때에 유혹과 좌절, 그리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려 하는 그의 간계들이 바로 이와 같은 불화살일 것이다. 그런데 믿음의 방패는 이와 같은 불화살을 소멸케(sbesai)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화살이 날아온다고 하더라도 이 방패로 막고 있기 때문에 몸에 상처를 입힐 수 없는 이치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사도는 이와 같은 말을 함에 있어, “이로써 능히”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믿음의 방패는 불화살을 소멸하는 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능히”(dynesesthe/ to have power) 소멸시키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마치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파괴하듯이 그렇게 파워 있게 모든 것을 소멸케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성도에게 믿음이야 말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지 않는가? 바로 믿음이 우리 신앙인의 요체(要諦)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도는 로마서에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8:37)라고 한 것이다.(이하 계속/ 구모영씀)

생명의 말씀

2006. 3. 19.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115)

본문 : 엡 6:16

제목 : 믿음의 방패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지상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고 합니다.

사탄이 우리를 끊임이 없이 공격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 형편을 아시고 무기를 주셨는데 그것을 전신갑주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힘들게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너무나 값진 삶을 살면서도 오히려 그 신앙생활마저도 힘들어 하고 지쳐서 쓰러지고 하는 것이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전신갑주라는 무기를 알지 못하고 사용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강하게 살기를 원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특별하게 주신 이 전신갑주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행복해지시기를 원하시면 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전신갑주의 네 번째 무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무기는 뭐라고 했습니까

진리의 허리띠라고 했습니다.

두번째는 의의 흉배이고 세번째는 복음의 신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네번째의 무기는 믿음의 방패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라고 했습니다.

악한자의 화전이 있다고 했습니다.

화전(火箭)이란 불화살을 말합니다.

악한자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불화살을 쏘아 댈 때 그것을 방어할 수 있는 무기가 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1.믿음의 중요성

요즘 야구 때문에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숙적 일본을 두 번씩이나 이기고 미국도 이기는 기적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선수들이 하나같이 뭉쳐서 이런 기적을 만든 데에는 김인식 감독의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김인식 감독의 야구를 “믿음의 야구”라고들 합니다.

두견새가 울지 않을 때 쓸모없다고 버리거나 인위적으로 울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울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 준다는 것입니다.

선수들이 잘못하거나 실수를 할 때 화를 내고 나무라기보다는 그 선수가 가진 기량을 믿고 좀 더 기다려 줌으로 그 선수가 기회를 만나면 큰일을 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이 믿음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믿음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이 믿음을 우리가 의인이 되는 기준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갈수록 세상에 믿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나 자신도 남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는 생각도 많이 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5:33-35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라고 하셨습니다.

헛맹세는 하지 말고 맹세를 했으면 꼭 지켜야 된다고 하는 것이 율법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맹세를 강하게 해도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맹세를 많이 하지만 사실은 그 맹세를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말은 하지만 그 말대로 되어지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일들이 사람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남을 속이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할 일은 서로에게 믿음을 가지는 것이고 나 자신도 남에게 믿음을 주도록 노력을 하는 일일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인 경우에는 어쩔 수 없겠지만 할 수 있는 일에 있어서는 진심으로 대해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 속에 너무나 중요한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나도 적당히 속이면서 살자라고 생각을 하면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속이는 일은 곧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된다는 것을 알고 진실되게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 사이의 불신이 얼마나 큰 불행을 자초하는지를 심각하게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가까운 사이일 수록 부부간이나 부모자식간에 형제간에 이 믿음이란 너무나 소중한 것임을 늘 기억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2.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믿음이 중요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이 믿음을 의의 기준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는 것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특별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의의 기준으로 삼으시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다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의 주인이 되심을 믿는 믿음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믿음도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셔서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는 믿음도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칭찬을 받거나 마음의 소원을 이룬 경우들이 많습니다.

어떤 이방여인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자기의 딸의 병을 고쳤습니다.

어떤 소경은 예수님께서 능히 고쳐 주실 줄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오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다는 기사도 마태복음 9장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랑하는 딸의 병도 고쳐 주었고 믿음으로 친구의 중풍병도 고쳐 줄 수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자기 자신의 눈을 뜬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성도들도 믿음으로 부자가 되기도 하고, 믿음으로 성공을 하기도 하고, 믿음으로 병을 고치기도 하고, 믿음으로 능력을 행하기도 하고, 믿음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믿음들이 하나하나 다 중요한 믿음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이런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 즉 의인이 되는 믿음 하나님께서 의의 기준으로 정하신 믿음은 꼭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것은 다 믿으면서도 이 대목은 잘 믿지 않으려 하거니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른 것에는 믿음을 가지려고 애를 쓰는데 십자가에 대한 믿음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다른 것은 다 인정을 하고 믿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창조하신 주인이시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주를 다스리시고 인간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심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셔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사하여지고 의로운 사람이 되고 천국백성이 된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생각으로 우리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답답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모진 고난을 참으시면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다고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의인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믿을 수 없는 것 믿으라고 하지말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나 응답을 해 주셔서 이 세상에서나 행복하게 잘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의 기준으로 삼는 믿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 사실을 믿기 위해서 성부하나님께 관한 믿음이나 성령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또 앞서 살펴보았던 여러 가지의 믿음들이 기초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믿음의 방패

이 믿음을 방패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악한자들이 화전 즉 불화살로 공격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막는 방패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믿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이 믿음은 모든 악한 세력들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방어해주는 방패가 된다는 것입니다.

1)사람들의 공격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내가 너의 악함을 아는데 너같은 것이 교회에 다닌다고 의로운 사람이 되느냐

괜히 의로운 체 선한 체 하지말고 똑바로 살아라 라고 비웃으며 우리를 공격합니다.

교회에 가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지말고 착하게 살아라고 충고를 합니다.

사실 착한 사람 행세를 하고 살기가 참 어렵습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 듣고 살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 줄 몰랐습니다.

성질도 함부로 못 내고 욕심도 못 부리고 내 것도 마음대로 챙기지 못하고 이리 손해보고 저리 손해보고 남들이 하지 않는 궂은일은 다 도맡아서 해도 사람 좋다는 말 쉽게 듣지 못합니다.

어떤 때는 아이고 착한 사람 말 듣는 것 포기하고 아무렇게나 살자 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악한 사람이라는 말 듣고 살 바에는 악하게 내 이익이나 챙기면서 살자 라고 생각이 많이 듭니다.

잘한 일들은 많이 놔두고 열 중에 한 두 개 잘못한 것만 가지고 트집을 잡고 그럴 수가 있느니 없느니 라고 공격을 합니다.

그럴 때 내가 안 그랬느니 원래는 착한 사람이니 변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내 스스로가 착한 사람임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의 보증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오해를 하고 아무리 나의 약점을 지적을 하고 공격을 해 온다고 해도 우리에게 십자가가 있는 한 우리는 의인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나 자신의 공격

때로는 나 자신도 나를 공격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 양심이 소리를 칩니다.

야 이 나쁜 놈아 네가 그렇게 살고도 천국 가기를 바라느냐 라고 자신을 괴롭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서 후회하고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깨끗하게 씻어졌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자신의 양심의 공격에 방패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사탄의 공격

사탄은 고소자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한 모든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고자질을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보혜사 성령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변호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보고 우리를 변호해 주십니까

우리의 믿음을 보고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가지고 변호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방패로 가지고 있는 우리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는 없습니다.

그것이 불화살과 같은 강한 무기라고 해도 이 방패를 뚫고 우리를 공격하여 넘어뜨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이 믿음은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능히 방어해 줄 수 있는 강력한 방패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를 공격하여 죄인으로 망하게 할 수 있는 세력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을 꼭 가지시고 방패로 삼으시고 승리하시는 강한 용사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방패

현대에 재현해본, 고대 로마 보병 방패 스쿠툼의 예.

믿음의 방패

하나님의 전신갑주 4

하나님의 전신갑주(완전무장)에 나열된 무기 가운데 네 번째로, 파울은 믿음의 방패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이 모두에 덧붙여 믿음의 방패를(τὸν θυρεὸντῆς πίστεως 톤 튀레온 테스 피스테오스) 들면, 그것으로 악한 자의 불화살들을 모두 꺼트릴 수 있습니다.”(엪 6’10,11. 사역)

여기 ‘이 모두에 덧붙여’ 또는 ‘이 모든 것에 더하여’는 다른 해석들도 있다. 전체 무장이 아직 채 포함되지 않은 가운데(아직도 5. 구원의 투구, 6. 성령의 검, 7. 간구와 성령 안에서의 기도가 남아있음) 왜 ‘이 모든 것 위에’라는, 다소 결론적인 말이 나왔냐는 것.

그래선지 상당수의 번역은 이렇게도 되어 있다.:

“모든 상황 속에서 믿음의 방패를 취하시오. 악한 자의 불화살들을 죄다 꺼트릴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선 추후 설명하겠다.

그러나 파울의 이 말, ‘이 모든 것에 더하여’는 한 순간 착각이나 실수로 한 말이거나 오착된 말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이 튀레오스(라틴어 스쿠툼=scutum) 즉 큰 방패는 전신을 넉넉히 덮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방패의 보호대상은 주로 앞서 말한 몸의 부위들이다. 이미 해당 부위 자체의 방어무기들 위에다 곱으로 겹쳐, 전체적으로 막아주기 때문이다.

1.

튀레오스/스쿠툼 즉 큰 방패의 이런 중복적 내지 복합적 기능은 아주 명료하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고대 로마 군의 방패 사용 방식을 살펴 보면, 매우 흥미롭다. 로마 병사들은 방패를 개인 호신용은 물론 단체방어에도 다양하게 활용했다. 즉 앞 뒤 옆 동료 군인들끼리 서로 방패를 모두 연결하여, 예컨대 적의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이나 창, 돌 등을 막는 거북등(라틴어 ‘테스투도’) 역할을 하곤 했다. 심지어 위로 적의 전차(병거) 바퀴가 굴러가도 아래서 막아내기도 했다. 물론 평소에 그런 위험하고 고된 훈련을 하기도 했다.

로마 군인의 방패의 모양은 더군다나 파울의 이런 서술에 걸맞다. 그들의 이 큰 방패 튀레오스는 한 개의 대문을 연상시킬 정도로 네모나고 , 크고 넓적했다. 아니나다를까, 튀레오스는 문이라는 뜻의 튀라(θυρα)에서 비롯했다. 실제로 지상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대 로마 방패의 고고학적 유물이 있다 > https://bit.ly/2Pc1aJr

로마군대는 전쟁 때 이 큰 방패를 병사끼리 연결하여 거대한 보루나 다리 같은 역할을 하는 도구로 삼기도 했다. 그만큼 쓸모가 다양한 방어무기였다. 이 큰 방패는 주로 탄탄한 나무 판 위에 무두질한 동물 가죽을 여러 겹 발라서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이 가죽판을 물로 적셔두면, 날아오는 적의 불화살촉의 불꽃을 꺼트릴 수 있었다. 파울이 한 말이 바로 이 뜻이다!

[물론 금속 방패도 있었다. 또 로마군대가 네모난 스쿠툼만 쓴 것은 아니다. 큰 방패를 쓸 수 없는 기마병 등 특수한 경우에 타원형이나 둥근 방패도 썼으나, 일반 보병들에겐 스쿠툼이 주로 쓰였다. 슐로모는 예루샬렘 성벽에다 금방패를 줄줄이 널어두곤 했다. 이 금방패는 적이 쳐들어올 때는 햇빛을 반사하여 교란시키는 작전에 쓰이기도 했단다. 금방패는 나중에 적에게 뺏겨 놋방패로 대체됐다.]

우리의 믿음이 곧 방패!

왜 믿음에 “젖어있는” 방패가 필요한가?

영적 싸움에서 방패는 우리의 믿음이다. 로마 군병들은 물리적인 방패를 썼지만, 우리의 방패는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 삶에 지대한 역할을 해 내며, 특히 영적 싸움에 결코 없어선 안 될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마귀는 늘 유혹과 두려움 같은 불화살을 쏘아댄다. 화살은 그것 자체로서도 치명적일 수 있지만, 불꽃을 당기면 몸에 큰 상처와 함께 화상을 입힐 수도 있고, 옷이나 몸, 주변이 타 들어가기까지 한다. 불화살 하나가 잘못 날아들 경우, 자칫 산불을 일으켜 온 삼림을 살라버리고 건물 전체를 태워버릴 수 있는 위험요인이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길을 일으키는 예는 복음뿐만 아니라, 유혹과 정욕, 단죄(정죄)의식, 겁과 위협과 두려움 같은 파괴적 요소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불화살을 마귀는 우리에게 수시로, 무시로, 불시에 늘 쏘아댄다고 생각해 보라. 마치 성 위에서 성 아래로 새카맣게 마구 쏘아대는 적군의 화살처럼 말이다. 얼마나 위험하고 취약한(vulnerable) 상황인가? 우리의 영토, 나의 영역에 언제 날아들지 모르는 그 불화살은 큰 파괴와 심지어 패배와 멸망을 가져올 수도 있다.

주님은 사도 파울의 이 계시를 통해 알려주신다. 마귀의 이 불화살을 막는 길은 오직 우리의 믿음뿐임을!

믿음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믿음의 유무(有無) 여부가 우리 삶과 죽음을 가를 수도 있을 만큼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왜 그럴까? 왜 믿음이 그렇게도 중요한지, 살펴 보자.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히 11’6). 우리에게 제일 불안한 요소는 우리가 자칫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면, 나에게 이보다 더 안타까울 노릇은 없다. 부모님께 아침 인사를 드리려는데, 왠지 나를 기뻐하시지 않고 달가워하시지 않는다면, 그 날 하루가 즐겁거나 달갑지 못할 수 있다.

왠지 내가 주님께 기쁨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하루 종일 우울해질 수도 있다. 그러기에 이것은 반드시, 급히 해소돼야 하고 해결해야 할 요소다. 그 요소란, 믿.음. 없.음.–바로 그것이다.

급속히 믿음을 되찾아야 한다. 가장 먼저 할 일이 그것이다. 그것이 지금 나의 영적인 방패다! 믿음을 되찾아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그래야만 마귀의 불화살을 막을 수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믿음은 어떤 것인가? 히 11’6에 따르면,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이 바로 지금 살아계심을 믿는 것이며, 둘째로, 그분을 찾는 이들에게 미스타포도테스(보상자)이심을 믿는 것이다. 기억하라: 이 두 가지가 바로 영전에도 적용됨을~. 하나님이 지금 살아계심을 믿어야 원수 마귀의 악한 검과 불화살을 막을 힘도 생긴다. 또 하나님을 찾는 이들에게 그 믿음의 대가로서 보상과 승리를 안겨주심을 믿어야 한다. 이 진리를 믿지 않는 이상, 우리는 껍데기 군인일 뿐이요, 그야말로 마귀의 불화살을 맞아 그냥 맥없이 전사 위기에 처해질 뿐이다.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인생 최악의 상황에서, 의인이 살 길은 오직 믿음뿐이며 그의 주님은 강한 산성이시라는 진리를 믿었다. 그는 한 때 유약해져 벽에다 잉크병을 내던지기까지 분노하며, 마귀의 위협에 항거했다. 그러나 그가 홀로 방에 앉아 거대한 원수들 생각에 한없이 졸아들고 나약해져 있을 때, 그의 아내 폰 보라가 홀연히 검은 상복을 입은 채 그의 방에 나타났다. 어디 장례식에 가려느냐고 묻자, 아내는 “아뇨. 하지만 당신이 마치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처럼 행동하시니, 나도 당신과 함께 슬퍼하고 싶었어요!”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을 뿐더러, 그 분을 찾는 이들에게 보상자되심을 함께 믿어야 한다. 즉 우리를 마귀와 그 졸개들로부터 지켜주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만 믿으면서, 그것이 대단한 믿음인 양 생각하기도 한다. 그 이상은 믿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래선 안된다! 우리는 성경에 약속된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

그게 가능하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믿어보지도 않고 포기하겠는가? 아니 믿어보지 말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불가능이란 없다고 선언하셨다. 그렇다면 그런 분을 신으로 믿는 우리에게도 불가능이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귀와 그 군대는 우리 앞에 패배해야 맞는 말이다.

승리는 내 것일세!

2.

이제 크게 두 번째로, 이 믿음의 방패는 모든 상황에서 늘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련다. 해당 성구가 그런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고 일부 학자들은 상기시킨다. 이것도 “틀렸다. 그게 아니다”라고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손해 볼 게 없기 때문이다.

자, 그럼 왜 그런가? 왜 모든 상황에서 이 방패를 지녀야 하는가? 그야 당연하게도, 원수의 화살과 창과 칼은 때를 가리지 않고 불시에 습격해오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원수는 가끔 작전상 미리 예고하면서 겁을 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예고 없이 화살을 날리거나 창을 던진다.

그래서 영적 싸움에서 이기려면, 늘, 언제나, 항상, 무시로, 믿음의 방패를 지녀야 한다. 수시로 내 방패를 점검해야 한다. 늘 대비해야 한다. 마귀의 불화살이 날아올 때마다 그때 그때, 바로 바로 믿음으로 물리쳐야 한다. 믿음으로 자타에 대한 정죄와 유혹과 위협과 겁과 두려움의 불을 제때 막아 꺼트려야 한다.

우리 방패를 늘 진리 말씀의 ‘물’로써 적셔두어야 옳다. 그래야만 마귀의 불화살이 날아드자마자, 그 불씨를 꺼버릴 수 있다.

3.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마치 고대 그리스나 알렉산데르 당시 마케도니아의 팔랑스(phalanx: 밀집방진=密集防陣), 또는 로마군의 레기온(legion: 방패막이 밀집보병대)처럼 우리도 크리스토(=그리스도)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룬, 같은 신자로서 함께 밀집(密集) 차원으로 뭉쳐 함께 원수 마귀를 대적할 수 있다는 진리다.

고대 그리스/마케도니아가 사용했고, 로마도 배워 적용한 팔랑스(phalanx=밀집방진)

우리도 함께 크리스토님의 몸된 교회로서 밀집방어진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 이것은 표면적인 크리스천들의 정치적인 연합전선이나 시위 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흔히 영적 싸움이기보다 혼적/심적 차원의 정치전이기가 더 쉽다. 믿음 없이 임하는 교인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아니 믿음이 개재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서로의 방패를 한데 얽고 엮은(locked) 상태의 로마 보병 밀집방진

우리의 방패들을 서로 락킹(locking)하는 영적인 밀집 방진 또는 연합전선은 오직 진리 말씀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로 뭉침을 가리킨다. 그래서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처럼 “뜻을 정하여”, 함께 금식하며 함께 기도해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말이다. 그리고 정한 뜻을 서로 지켜야 옳다.

또 강력한 힘을 지닌 우리 입술에 진리를 담아, 함께 원수의 세력을 구축할 믿음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함께 마귀를 꾸짖을 때 더 강력한 힘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것이야 말로 마치 한데 끼어맞춘 레고조각들처럼 우리 각자의 믿음의 방패를 잠금(lock)하여 모은, 하나의 거대한 방패진으로서 적군을 대항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 영적 싸움에 깨인 교회들은 그렇게들 하고 있다.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 교회들은 배워서 실천해야 옳다. 배워야 산다. 그래야만 이 위험한 지구촌 영계에서 천국민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믿음의 방패! 참 치명적으로 중요한 무기다.

오늘도 원수 마귀가 불시에 갑자기 날리는 불화살에 대비하여 우리의 믿음으로 거뜬히 막아내자!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6) : 믿음의 방패 (엡 6:10-20)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6) : 믿음의 방패 (엡 6:10-20)

우리는 영적 전쟁에 대하여 계속 주일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로 “믿음의 방패”입니다. 이 성경이 기록될 당시 로마 군인의 방패는 두 종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실전에서 쓰이는 방패였고, 다른 하나는 축제 때나 군사들이 행렬할 때 쓰이는 전시용 방패였답니다. 전시용 방패는 “아스피스” 라고 하고 실전용 방패는 “뒤레오스”라고 하였답니다.

전시용 방패는 그 크기가 손과 그 주변을 덮는 정도였지만 실전용 방패는 문처럼 네모로 생긴 방패였습니다. ‘뒤라’ 즉 문짝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이 방패의 높이는 약 1.2미터이고 폭은 70센티미터가 다 되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몸을 완전하게 다 막는 방패입니다. 두 겹의 나무를 함께 붙여서 처음에는 천으로 감고 그 다음에는 가죽으로 덮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테두리는 금속 테를 둘렀다고 합니다.

왜 그런 무기가 필요했겠습니까? 찌르는 칼과 던지는 창, 쏘는 화살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은 전쟁이 일어나면 미사일을 쏘고, 전투기로 폭격을 하지만 고대 전쟁에서는 화살을 쏘고 창을 던졌습니다. 특히 불화살을 쏘았습니다. 서로 군인들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멀리에서 적을 죽이고, 적진을 불태우기 위해 불화살을 쏘았습니다. 바울 당시의 로마 군사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화살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일반 화살, 둘째는 타르를 화살촉에 붙여서 불을 붙여 쏘는 불화살, 셋째는 그냥 일반 화살 같으나 그 화살촉에 화약이 있어서 화살촉이 목표물에 맞는 순간에 터지면서 불이 붙는 화살이 있었다고 합니다. 불화살은 단지 인명만 살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진을 완전히 불태우기 위한 무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신 전쟁에 사용되었던 이 방패와 불화살을 통해 영적 전쟁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악한 자의 불화살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한 불화살이 아닙니다. 악한 자가 가지고 있고 악한 자가 사용하는 불화살입니다.

이 불화살을 핸드릭슨은 “고난, 고뇌. 박해, 기근, 의심, 욕정, 탐욕, 허영, 시기” 등이라고 주석했습니다.

존 스톳트는 “우리의 양심에 불을 붙이는 참소, 의심, 낙담, 불순종, 배반, 탐욕, 악의, 두려움”등이라 했습니다.

로이드 존즈는 “예배 드릴 때 성경을 읽을 때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산란한 마음, 불경견한 생각, 그리스도에 대하여 모독적인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 그릇된 상상력을 갖게 하는 것, 정욕과 욕망을 거대한 열기로 불태우고 흥분시키는 것, 선량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혹한 시련을 당하게 하는 것” 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사탄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불화살들입니다.

그러나 나누어 설명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영적으로 죽이기 위해 사탄이 사용하는 불화살입니다.

화살을 본질적으로 생명을 해치기 위해 쏘는 것처럼 사탄이 쏘는 불화살은 첫째가 우리의 영적 생명을 해치기 위한 것입니다. 단순한 육신적 죽음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세가지 의미로 쓰여집니다. 첫째는 육적 죽음입니다. 둘째는 영적 죽음입니다. 셋째는 영원적 죽음입니다. 육적 죽음은 사람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영적 죽음은 하나님과 사람의 영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영원적 죽음은 사람이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을 영적으로 죽이기 위해 불화살을 쏘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간의 아들이라고 불화살을 쏩니다. “예수는 사생자, 예수는 없다. 예수는 결혼했다. 예수는 신화다”

“아마도 신은 없을 것이다. 이제 걱정을 멈추고 인생을 즐겨라”라고 말합니다. “나쁜 소식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좋은 소식은 우리가 신을 원치 않는다는 것”라고 말합니다. 신은 인간의 산물이니 자유롭게 살려면 신을 믿지 말라고 외칩니다. ‘신은 죽었다’고 선포한 니체가, 데이비드 흄, 버트런드 러셀, 장-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볼테르,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5살 따 떠난 아버지가 목사였던 니체가 이 불화살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흄은 두 살때,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쓴 러셀은 네 살때, 사르트르는 15개월에 각각 아버지를 떠나보냈고,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그가 17세 때 자살했습니다. 20세기 말 저널리스트인 러셀 베이커는 자서전에서 5살 때 아버지가 숨을 거두자, “하나님이 저를 정말 사랑하신다면 왜 아버지를 죽게 하셨나요?”라고 물으며 이 불화살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오늘날도 삶의 현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 속에서 불화살을 맞고 쓰러지고 있습니다. 영화 한편 보고, 책 한권 읽고, 사건 하나 보고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못하게 만들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을 지라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단은 “너희 모습을 보라 네가 믿는다면 그 모양 그 꼴로 사느냐?” 불화살을 던져 회의를 가지게 합니다. “믿는 사람들을 보아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그 모양 그 꼴로 살겠느냐 다 사기야.” 불화살을 던집니다. 기도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도록 불화살을 던집니다. 승리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사죄의 확신을 갖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인도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도록 불화살을 던집니다.

하나님은 의지할 존재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너 스스로 결단하고 너 스스로 책임지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기 위해 이런 불화살이 마음에 떨어지면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오릅니다.

둘째는 복된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사탄이 사용하는 불화살입니다.

엡2장 1-3절에서 이미 사탄이 사용하는 불화살의 도구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가 사용하는 도구는 외적으로는 세상 풍속이고 내적으로는 육체의 욕심입니다. 이것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유혹과 핍박입니다. 때로는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 유혹을 하고 때로는 우는 사자로 나타나 핍박을 합니다.

이 불화살이 마음에 떨어지면 회의가 생깁니다.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낙심합니다. 절망합니다. 우울증에 빠집니다. 삶의 의욕을 상실합니다. 자살 충동이 생깁니다. 행복을 잃어 버립니다. 감정이 폭발합니다. 제 정신이 아닙니다. 이성을 잃게 됩니다. 이 불화살을 가정에 떨어뜨려 폭탄 같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아버지가 비정상이 되어 폭력의 폭탄을 휘두르고, 아내가 비정상이 되어 정욕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교회에 떨어 뜨려 교회가 소란해지고 온갖 종류의 악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정상적인 예배가 불가능하여 지고 정치꾼과 이단들이 판치는 교회가 되어 버립니다. 마치 불의 혀같이 비방의 불화살, 거짓의 불화살이 난무하여 교회가 싸움판으로 변해 버립니다.

사탄은 신앙인의 삶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불화살을 오늘날도 계속 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욥과 같은 불치의 병이 불화살일 수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와 같이 말씀에 대한 의심이 불화살일 수도 있습니다. 밧세바를 범한 다윗과 같이 정욕이 불화살일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같이 자신만 살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것이 불화살일 수도 있습니다. 게하시나 아간 같이 물질적인 욕심이 불화살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의 인기를 시기하는 사울같이 자존심. 시기. 질투가 불화살일 수도 있습니다. 소돔땅을 바라보는 롯의 아내처럼 호기심이 불화살일 수도 있습니다. 민족을 이끌어 갈 것을 생각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다가오는 두려움이 불화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순식간에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게 우리에게 불화살을 던집니다. 고난. 박해, 고통, 고뇌, 기근, 의심, 욕정, 탐욕, 허영, 시기, 참소, 배반, 낙담, 불순종, 악의, 두려움, 불경건, 불필요한 잡념, 그릇된 상상력, 등 각가지 불화살을 사람과 때와, 연령 상황에 적합하게 던집니다. 그런데 이런 불화살에는 공통적인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이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8:44)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보십시오. 처음부터 아담을 유혹할 때부터 거짓을 이용합니다.(창3장 참고) 예수님을 유혹할 때는 어떻습니까? 거짓을 이용합니다.(마4장 참고) 거짓 지식을 넣어 줍니다. 거짓 감정을 넣어 줍니다. 거짓 의지를 넣어 줍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사울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2. 이 불화살을 격퇴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움켜잡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의 방패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 위에”라고 수식어를 붙이고 있습니다. 앞에 나온 세 가지 방어 장비는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은 띠고, 붙이고, 신는 것입니다. 유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쟁하는데 고정적인 것으로 필수적인 것입니다. 꼭 착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전쟁에 승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 위에’는 ‘중요성에 있어서 모든 것 위에’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군사 용어, 위치적인 용어인데, 이 말씀을 믿음의 방패는 언제나 너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맨 앞에 두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다른 모든 영적 무기가 제대로 사용되려면 믿음의 방패가 언제나 든든히 맨 앞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모든 것 위에 또’ 다시 말하면 ‘이미 언급한 갑주의 세 부분 위에 또’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고정된 무기를 말씀했는데 방패와 같은 유동적인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정된 무기를 말씀하시면서 사도 바울은 가진다(having)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움직일 수 있는 무기를 말씀하시면서는 취하라(taking)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방패를 취하고”(taking), “구원의 투구를 취하고”(taking),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taking)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꽉 쥐어야 합니다.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믿음의 방패로 거짓된 사탄의 불화살을 소멸시켜 버려야 합니다. 믿음의 방패는 방패인데 모든 불화살을 소멸시킬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불량 믿음이면 불화살을 소멸할 수 없습니다. 그 불화살을 맡고 산산 조각이 나 버립니다.

성경에 보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딤전 1:19-20). 사단이 쏘는 불화살을 맡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였는데 그 불화살로 완전히 산산 조각이 되고 먼지 가루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영적 전쟁터에서 불화살을 이기지 못하는 가짜 믿음의 방패를 성경은 세 가지 말씀합니다.

첫째는 역사적 믿음입니다. 성경의 말씀이나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일 때 자기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사탄과의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듣고도 행지 않는 믿음(마7:26) 귀신도 믿고 떠는 것과 같은 믿음(약2:19)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이론적으로만 아는 믿음은 실제 영적 전쟁터에서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영적 전쟁터에서 파선되어 버리는 불량 믿음입니다.

둘째는 이적적인 믿음입니다. 이것 역시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이적이 일어 날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자기를 통하여 이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믿음(마17:20,막16:17,18)이나 자기에게 이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마8:5-13,요11:22)

이런 믿음은 참된 구원을 받은 신앙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지만 구원을 못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마7:22-23)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참된 믿음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롯 유다 이적을 행하였을 것입니다(마10:1-8). 그러나 제갈 길로 갔습니다(행1:25)

셋째는 일시적인 믿음입니다. 일시적인 믿음도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마13:20-22) 말씀을 곧 받되 염려와 근심으로 결실치 못한 자입니다. 히 6:4-6에서는 “성경은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하여 다시 회개케 할 수없는 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딤전1:19은 “어떤 이들이 오히려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고”라고 했고, 딤후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 바울 버리고 떠나 버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백전백승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역사적인 믿음은 지성에 자리를 두나 주님께로 향한 회개의 눈물이나 사랑과 감사와 같은 감정이 결여 되어있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결여된 믿음입니다. 일시적인 신앙은 단순이 감정에만 자리잡은 신앙으로 지적 의지적 결단력이 부족한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성령임의 중생시키는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영적 진리들을 깨닫고 거기에서 부터 주님께로 향한 뜨거운 회개의 눈물과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주님께 대한 사랑이 용솟음치게 되게 되며 한 걸음 더나아가 이제는 자기의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주님의 거룩하신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적 결단이 이루어진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전인격의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갈2:20) 지식에 가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골3:9-10) 믿음의 대상을 분명하게 앎입니다.(딤후1:12,욥19:25)

성경에 대한 지식이 깊어지면 질수록 그만큼 신앙도 확고해 집니다. 그리고 알게된 복음이 얼마나 타락한 우리에게 적합한가를 깨닫고 기쁨과 감사와 감격으로 복음의 진리에 찬동합니다. 감정적 찬동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제 과거에 자신의 모든 수단 방법을 의지하고 살던 것을 던져버리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이 믿음을 통해 우리가 어떤 경우도 보호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능치 못할 일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부요함에도 처하고 가난함에도 처할 수 있지만 어떤 환경에도 일체의 만족한 삶의 비결을 깨닫고 사는 것입니다. 지금 보이지않고 지금 잡히는 것이 없지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믿음으로 모든 난관을 해쳐나가면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라는 말을 확신하고 모든 사탄의 전략과 전술을 오직 믿음으로 이기고 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노아(히11:7)도, 아브라함(롬4:16-20)도, 모세(히11:23-29)도, 갈렙(수14:6,12)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단:16,17)도, 백부장(마8:5-10)도, 혈루증 앓는 여인(막5:25-34)도, 바디매오(막10:46-52)도, 빌립보의 감옥의 바울도(행16:25-34) 이 믿음을 통해 승리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3. 사단의 불화살을 믿음의 방패로 소멸하기 위해 군사된 우리가 평소 믿음의 방패를 어떻게 준비하여야 합니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평소 로마 군인들은 이 방패를 잘 관리한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군대에 가면 매일 무기를 잘 관리해 놓고 있습니다. 총포를 전쟁이 일어날 시 최상급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 군인들의 할 일 중의 하나입니다. 당시 방패는 나무 위에 가죽으로 덮은 것인데 보통 여섯 겹의 짐승 가죽으로 만든 후 열처리를 적당히 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볍고 철판처럼 단단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방패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곧바로 문제가 생겼답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로마 병사들은 언제나 저녁 잠들기 전에 방패를 관리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먼저 방패에 올리브 오일을 바른 후 헝겊으로 방패를 문질러 주었답니다.

그러면 먼지가 닦여 나가고 방패에 오일이 스며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헝겊으로 문지르면 방패가 오일을 골고루 빨아 담게 되고 반들반들해지고 탄력성이 뛰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만일 이처럼 관리하지 않으면 방패는 곧 말라비틀어져 창이나 칼, 방망이나 불화살의 공격을 받으면 그 충격으로 가루처럼 부서져 버린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괜찮게 보이는데 실전에서는 불량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전쟁에 나가기 직전에 꼭 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물에다가 방패를 흠뻑 적셔두는 일이었답니다. 약 10시간 이상 물에다 방패를 담가 놓았다고 합니다. 전장에서 적이 쏘는 불화살을 방패로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해 놓으면 방패에 떨어진 불화살은 물기 때문에 곧 꺼지고 화살의 불은 더 이상 다른 곳으로 퍼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마 바울은 당시 방패의 이런 기능을 알고 이 말씀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이 믿음을 방패로 비유한 의미를 좀 더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믿음도 준비되어야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방패만 있다고 저절로 승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믿음도 전쟁에서 이길 만한 믿음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할 수 밖에 없는 준비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수적입니다. 전장에서 불량하지 않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방패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째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기름으로 닦아 놓는 방패처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의 방패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종종 성령은 기름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어 거듭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라고 말씀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실 때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게 되고 진정한 믿음, 참된 믿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로 믿음을 받았다면 실제 삶의 전쟁에서 백전백승하는 믿음을 가지려면 성령 충만을 해야 합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내 생각을 지배하고, 내 감정을 지배하고, 내 의지를 지배하고, 내 삶 전체를 지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단의 불화살이 떨어진다고 해도 성령 충만하면 성령님이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영적 전쟁터에서 인격적으로 성숙하여 승리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은사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달란트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동시에 주는 것입니다. 그 달란트를 잘 개발하면 경쟁 사회에서 승리하여 무엇인가를 성취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은사는 믿은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12:8-10)”라고 말씀합니다.

내 달란트로 하지 못하는 일이 성령의 은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믿음의 방패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평소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단은 계속해서 성령 충만하지 못하도로 방해합니다. 돈 충만, 욕심 충만, 쾌락 충만, 자아 충만, 물질 충만하도록 유혹을 합니다.

둘째는 전쟁에서 불화살을 소멸하기 위해 물에 잠가 놓는 방패처럼 우리가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무장한 믿음의 방패를 가져야 합니다.

로마 군인들이 불화살을 소멸시키기 위해 가죽 방패를 물 속에 담가 놓았다가 그것을 가지고 나갑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하려면 말씀에 충만히 잠겨야 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거듭나는 방법을 질문했을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은 세례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반적인 진리를 보면 그것은 타당성이 없습니다. 우리가 물세례를 받는다고 반드시 거듭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물은 성령세례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뒤에 나오는 성령도 같은 내용인데 예수님이 한 가지 요소를 반복해서 설명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물이라는 것은 거듭남의 요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6)”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물과 말씀을 동일하게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거듭나 믿음을 가지게 되는가를 성경은 명쾌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믿음의 객관적 요인이 말씀이고 주관적인 요인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백전백승하려면 말씀 충만해야 합니다. 물에 푹 졌어야 불화살을 소멸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푹 졌어야 영적 전쟁에서 불화살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사탄의 불화살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세상의 갖가지 사상으로 사탄이 불화살을 던져도 말씀을 꺼버려야 합니다.

내 감정에 사탄이 어떤 불화살을 쏜다하여도 말씀으로 이 불화살을 잠재워 버려야 합니다. 사단이 내 의지에 어떤 불화살을 던져 유혹한다해도 말씀이 가라는 곳에 가고 멈추라는 곳에 멈춰버리는 것입니다. 사단은 계속해서 말씀 충만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10년을 교호에 다녀도 성경 1독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문 읽을 때는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이 되는 데 성경을 읽으면 달고 오묘한 수면제가 됩니다. 연속극은 그렇게 재미가 있고 지루한 지 모르고 안 보면 견딜 수가 없는데 성경을 보면 지루하고 머리에 쥐가 납니다. 사단이 쏘는 모든 불화살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말씀 충만해야 합니다. 말씀에 근거한 인생관, 말씀에 근거한 세계관, 말씀에 근거한 경제관, 말씀에 근거한 가정관, 말씀에 근거한 결혼관, 말씀에 근거한 자녀관, 말씀에 근거한 내세관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방패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패는 나 홀로만 방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합하여야 합니다. 영화에서 고대 전쟁을 할 때 보면 방패로 서로 연결하여 어마어마한 큰 방패를 형성하는 것을 봅니다. 큰 방패로 탱크의 장갑판처럼 만들어 방진(方陣)대열을 이루어 진군하는 군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 내려오는 것도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오는 적들을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물리치는 것을 봅니다. 연합된 믿음의 방패는 방어용 정도가 아니라 적군을 밀어내는데 최고의 공격용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 군사의 가장 큰 힘은 언제나 연합된 방패 작전이었습니다. 믿음의 방패를 함께 세우기 위한 구체적인 제안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교회는 전투적인 교회입니다. 사단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쉬지 않고 불화살을 던지도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 충만, 성령 충만으로 믿음의 방패를 함께 세워 믿음의 공동체를 지키고 승리해야 합니다. (김필곤 목사)

믿음의 방패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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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5:4/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옛날에는 군인들이 싸움터에 나갈 때에 커다란 방패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방패는 일반적으로 아주 크고 무거웠습니다. 적의 공격과 화살로부터 병사의 온 몸을 감쌀 수 있는 커다란 방패를 사용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방패의 끝에는 갈고리가 마련되어 있어서 다른 병사의 방패와 이 갈고리로 연결하여 마치 커다란 성벽처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적은 쉽게 공격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보호할 수 있는 이와 같은 방패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의 방패라고 부릅니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행하신다라는 것을 믿는 것이며, 또 당신이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심지어 당신 안에 의심이 든다 하여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뜻합니다. 의심이라는 것은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고, 그의 신실하심과 그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게 하여 당신의 믿음을 흔들고 당신을 부상시키시기 위해 적들이 쏘아 대는 화살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믿음의 방패를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통해 배운 것들을 믿어야 합니다. 마음에 새긴, 암송함 성경 구절들을 믿고 그 순간의 상황에 적용 해야합니다. 심지어 당신의 삶에 문제가 있을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시며,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치 병사들이 각자의 방패를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서로서로 연결하여 전체를 위해 사용하듯이 우리도 다른 믿음의 동료들과 연대하여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서로서로를 굳게 붙들어주고 견고하게 세워줄 수 있습니다.

사탄은 불신앙과 의심의 근원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이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무기입니다. 사탄은 이 무기로 톡톡한 재미를 보았습니다(창세기 3:1). 지금도 사탄은 이 무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는 무기는 믿음입니다(요한일서 5:4). 신자가 믿음의 방패를 자기 앞에 둘 때에 거짓의 아비가 쏘는 불신앙의 불화살을 막을 수 있습니다.

•} 기도:

나의 하나님, 믿음의 방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제가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주님, 주님이 저를 축복하시면 감사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제가 가진 것에 감사하겠습니다.”- 필 로버트슨/ Lord, if You bless me, I’ll thank You; but if You don’t, I’ll be thankful for what I have.- Phil Robert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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