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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고난의 극복 시리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소경 거지 바디메오의 믿음과 구원! L 류영모 목사 명설교 L 하나님 말씀 최근 답변 3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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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0월 9일 한밤의 기도회 설교
성경본문 : 마가복음 10장 46~52절
설교자 : 류영모 목사
예장통합 부총회장 \u0026 한소망교회 _ 류영모 목사님의 명설교 전체를 시청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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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메세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또 혼자 믿지 마시고 이웃에게 구원의 메세지를 전하세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 교회홈페이지 http://www.hansoma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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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그날이 오기까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예수님은 그의 간청을 거절치 않으시고, 딸이 있는 곳으로 함께 가셨다. 주변의 사람들은 앞으로 펼쳐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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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mm119.com

Date Published: 8/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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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도순 – 다국어 성경 Holy-Bible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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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10/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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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하프 – 벅스

…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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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usic.bugs.co.kr

Date Published: 3/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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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제 19 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신약전서: 복음 교리반 교사 교재. … 하나님 아버지는 네 옆에 계시며 네가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축복 받기에 합당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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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8/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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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17:11~19) – 유평교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17:11~19) · 1. 믿음이 있는 열 명(11~13절). 오늘의 사건은 11절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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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12/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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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누가복음 7:1-50)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누가복음 7:1-50) … 믿음이 무엇인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이다 (히브리서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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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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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7]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뉴저지초대교회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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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jchodae.org

Date Published: 1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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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7:11-19(2016.3 …

나음을 입은 사마리아인에게 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바로 잘 찾아왔고, 그것이 바로 너의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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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4/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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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Author: 한소망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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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7. 2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onIdfwa8VH8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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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17:11~19)

제목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본문 : 누가복음 17장 11~19절

설교자 : 조정의

오늘 설교의 제목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으로 오늘 본문의 결론과 핵심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과연 어떤 믿음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일까요? 어떤 종류의 믿음이 구원을 가져올까요?

예수님은 바로 전에도(5~10절) 믿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했을 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의 양이 아니라 믿음의 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믿음이라면 위대한 일을 이루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어내는 진실된 믿음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에 일어난 사건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믿음을 갖게 되기를, 이미 가지고 있다면 그 진실된 믿음을 굳게 지키고 그 믿음을 따라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히 10:39).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17장 11~19절)

1. 믿음이 있는 열 명(11~13절)

오늘의 사건은 11절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일어난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승천하실 날이 가까이 옴을 보시고 주요 사역지였던 갈릴리를 떠나셨을 때(눅 9:51)부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기까지(19:28) 거의 10장에 가까운 내용을 이 과정을 기록하는데 할애하였습니다.

누가의 관심은 예수님이 갈릴리를 떠나 어떻게 예루살렘에 오게 되셨는지 그 경로를 자세히 따져가며 순차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하신 여러 가지 일을 핵심 교훈에 따라 체계적으로 조합하기 원했습니다(1:3-“차례대로”). 그래서 이 과정 중에 지리적인 정보를 자세히 제공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 정보를 어느 정도 제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디에서 이 일을 행하신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사건은 예수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실 때 일어난 일입니다(11절).

갈릴리는 사마리아 북쪽에 위치하고 예수님이 가시려는 예루살렘은 사마리아 남쪽에 위치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직접 통과하지 않으시고 갈릴리 남쪽까지 내려와서 동쪽에 있는 요단강 근처로 우회하여 이동하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이 경로는 보통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택한 경로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갈릴리와 사마리아가 만나는 지역을 통과하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신 것입니다(12절)

예수님이 마을로 들어가고 있을 때,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오늘날엔 나병을 한센병이라고 부릅니다. 이 병은 아주 무서운 병입니다. “피부 및 점막, 안구에 발진과 각종 염증을 일으키고 피딱지와 출혈 징후를 보이며 해당 부위에서 감각을 잃어버리거나 반대로 과민하게 감각을 느끼게 되는 전염병”입니다.

나균에 의해 감염되는 병인데 쉽게 말하면 산채로 부패하는 병입니다. 몸이 썩고 문드러지고 상처 나고 부러지고 발에 못이 박혀도 감각이 없습니다. 살아있지만 죽어가는 병, 그리고 심각하게 부패되는 몸 상태를 스스로 감지하지 못하는 병, 그 병을 한센병, 한자로 나병, 순우리말로 문둥병이라고 부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아주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성경의 계명에 따르면 나병환자는 부정하니 혼자 살되 진 밖에서 살아야 합니다(레 13:46). 그러나 아주 심각한 지경에 이른 환자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돕고 보살펴야 했기 때문에 열 명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상인들과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마을 밖으로 쫓겨났습니다(민 5:2-3). 이들은 사회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클레이에 따르면 문둥병자 쪽에서 건강한 사람 쪽으로 바람이 불면 적어도 50미터는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299p).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에게 가까이 갈 때 소리로 그들의 존재를 알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목소리를 높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사역을 하시는 동안 그분의 가르침과 병 고치는 능력에 대한 소문이 근처 사방에 퍼졌기 때문입니다(눅 4:37). 특히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한 동네에서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 후로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져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듭니다(5:15). 열 명의 나병환자들도 그 예수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주인”(master)이라는 뜻을 가진 이 호칭은 성경에서 오직 누가만 사용하고 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주여”라고 부를 때 사용되었습니다(눅 5:5; 8:24, 45; 9:33, 49).

이 호칭만으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지만 나병 환자들이 예수님을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적어도 그들은 예수님을 의지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높은 분으로 인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하신다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자신들의 병을 고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곡히 요청한 것입니다.

예전에 온 몸에 나병이 든 환자가 예수님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요구했을 때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5:12-13). 그리고 그의 나병이 곧 떠났습니다. 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어떻게 고쳐주실까요?

2. 믿음이 고친 질병(14절)

예수님은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고 곧 이어 그들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아마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율법에 따르면 환자가 정결하게 되었을 때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서 진영 밖에서 진찰하게 하였습니다(레 14). 나았다는 것이 확인 되면 정결한 새 두 마리를 잡고 백향목, 홍색 실, 우슬초로 새의 피를 찍어 정결함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고 마지막으로는 양으로 제사를 드리는 등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 필수조건은 몸이 나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전에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고치시고 나서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열 명에게는 그냥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나병환자라면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잠깐만요, 아직 저희 몸은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데요? 손과 몸이 뭉개진 것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이 상태로 제사장들에게 보이라고요? 여기서 깨끗하게 해주시고 나서 제사장에게 확인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충분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제사장에게 몸을 확인하러 가는 그 길에서 내가 너희를 고쳐 줄 테니 나를 믿고 지금 가라!”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있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 모두가 예수님이 자기들 병을 고치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제사장을 향해 출발했고 그들 모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14절) “출발하자 그들이 깨끗함을 받았다”

누가의 이 표현을 주목해보십시오. 그들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누구에게서 이런 놀라운 긍휼을 받은 것입니까? 예수님에게서 입니다. 그들의 온 몸을 둘러싸고 있던 흉측한 질병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힘입어 믿음으로 내딛은 한 발자국의 걸음에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 모두가 예수를 “주”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합당한 순종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모두가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을 가진 것일까요?

누가가 특별히 이 병 고침의 사건을 기록한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머지 절반의 본문이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3. 믿음이 참된 한 명(15~19절)

열 명의 나병 환자 중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았습니다. 나병의 상태가 워낙 심각했고 그 병에서 치유된 것이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에 육안으로도 확인이 되었습니다. 마치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갔을 때 그의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된 것같이(왕하 5:14) 이 사람의 살이 깨끗하게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을 보시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다”고 나옵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깨끗함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다시 돌아오면서 계속해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다른 아홉 명은 아직 자신이 깨끗하게 된 것을 몰랐을까요? 이 한 명의 나병 환자가 자기의 깨끗해진 피부를 보며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예수님께 돌아온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돌아오는 내내 기쁨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아마 처음 그의 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부터 터져 나오는 눈물과 기쁨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기뻐하지 않았을까요? 왜 기뻐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동안 그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받았던 설움, 가족과 떨어져 볼 수 없었던 그리움, 육체의 고통, 냄새, 썩어짐, 죽음에 대한 공포… 그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격리되었던 사회에서 다시 받아줍니다. 심각한 부패를 알지 못했던 고장 난 몸에서 정상적으로 반응하는 몸을 입은 것입니다. 다른 아홉 명의 나병환자 모두가 그런 기쁨으로 서로 얼싸안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 단 한 사람이 취한 반응이 바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 한 사람만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그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8절). 이 한 사람만 자기에게 긍휼을 베푸신 예수가 곧 하나님이며 자신을 깨끗하게 하신 능력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그에 합당한 감사를 돌리러 돌아온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가 자신을 고칠 것이라 믿었고 그 믿음대로 고침을 받았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뻐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아래 머리를 숙이고 엎드립니다. 그리고 감사를 드립니다. 누가는 그냥 지나가며 한 마디 툭 하듯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에게 참 불편한 이름입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동쪽 요단강쪽으로 돌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그들은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지배했을 때 여러 민족을 억지로 혼합하게 한 혼혈민족입니다. 그 전으로 올라가도 남유다왕국과 분리되어 그리심산에 자기들의 성전을 만들고 정통에서 벗어난 제사장을 자기들 마음대로 세웠던 불쾌한 민족입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곳에 성전을, 레위인이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정말 아브라함의 자손인지 알 수 없는 족속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지나가셨을 때 거기 있던 여인이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서로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 4:9).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은 범죄자, 세리, 창녀들처럼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지 못할 “죄인”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교사들의 관점이었습니다. 예수가 정말 의인이라면 왜 이런 죄인들을 상종하는가? 우리같이 의롭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정통 유대인들과 어울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라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유대인 중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리며 율법에 열심을 냈던 그래서 스스로 “선한 사람”이라고 여긴 자들 중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고 그분을 영접한 이가 참으로 적었습니다. 그 놀라운 기적을 눈으로 목격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면서도 말입니다.

죄인, 세리, 몸을 파는 여인, 가난한 자, 병든 자, 사마리아인, 이방인…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손가락질 하고 그들과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판단거리를 삼았던 이들 중에는 이렇게 예수께 돌아와 감사하며 영접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얻은 유익에 기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한 나병환자에게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모두 똑같이 긍휼함을 맛보지 않았느냐? 모두가 다 썩어가는 몸에서 아기 피부같이 새로운 몸으로 완전한 고침을 얻지 않았느냐? 사람의 지혜나 능력으로 경험할 수 없는 기적을 경험하지 않았느냐? 그 표적이 부활과 생명인 나를 믿으라고 말하고 있지 않느냐? 그 아홉은 왜 그것을 보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지금 책망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천국 복음에 대한 선포,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이신 놀라운 병 고침과 기적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외치고 있는 사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려온 그 메시야이시며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그 나라 백성은 왜 모르냐는 것입니다. 왜 영접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처음부터 예수님은 이 현실에 직면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향 동네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읽고 이것이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말씀하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의 거절을 받았습니다.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엘리야 시대 이스라엘에 수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시돈 땅 한 과부에게 엘리야가 보내심을 받았고, 엘리사때 수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지만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4:26-27). 그 때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절벽으로 몰아 떨어뜨려 죽이려 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믿음을 보고 놀라십니다. 한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위를 완벽하게 인정하고 그것에 바로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 예수님께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보지 못하였다”고 칭찬을 듣습니다(눅 7:9).

예수님은 이스라엘 땅에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오신 메시야이셨지만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 1:11).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는 유대인이라는 혈통으로 난 것이 아니고 육신의 정에 이끌려 되는 것도 아니며 사람이 뜻을 품는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된 믿음을 가진 자, 예수님을 영접하는 참된 믿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요 1:12-13).

그것이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나병 환자였던 이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절).

나머지 아홉 명은 썩어진 몸에서 완전히 깨끗함을 얻었지만 썩어진 영혼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깨끗해진 육체는 언젠가 썩을 것이고 썩어진 영혼은 영원한 심판을 당하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방인의 영혼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단지 육체의 질병만 해결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썩어진 영혼이 주님의 이 말씀으로 완전히 깨끗해졌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혈통, 사회적인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으로, 자기의 계획과 뜻으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을 통해 거듭 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 그분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간단명료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아들을 영접한 자는 생명이 있고, 그 아들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생명이 없습니다. 영생은 그 아들을 관계 속에서 경험적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요 17:3). 우리를 구원하는 참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입니다.

적용

여러분. 우리 모두는 나병 환자와 같습니다. 우리 영혼은 살아있지만 썩어 문드러지는 죄로 부패해가는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이 병은 치명적이어서 살아있을 때도 부패한 삶을 살게 하고 죽고 나서도 영원토록 고통을 받는 병입니다. 이 병은 비극적이게도 우리 스스로는 그 썩는 냄새와 증상을 알아차리기 힘든 병입니다. 그런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진실되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아홉 명이 가진 것과 같은 믿음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뭔가 좋은 것을 주실 것 같고, 위로와 격려를 주실 것이라 믿고, 좋은 사람과 좋은 만남과 공동체 안에서 여러 유익을 통해 삶에 활력을 주실 것이라 믿을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여러분은 그 모든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은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 믿음은 여러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로 돌아와 그분을 영접하고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미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받은 큰 기쁨,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 속에서 솟아나는 한없는 감사…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썩어짐을 면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길어야 70-80년 사는 육신의 삶에서도 질병에서 놓이고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큰 소리로 외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마땅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삶에서 죄의 저주에서 놓이고 하나님과 관계가 영원히 회복되는 것은 얼마나 큰 소리로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마땅한 일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시편기자는 136편에서 각 행마다 “감사하라”고 독려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죄로 인해 고통과 슬픔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 살지만 우리가 날마다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진실된 믿음이 바라보는 대상, 우리가 영접하여 영원히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그 모든 고통과 슬픔을 충분히 잊고도 남을 만큼 풍성하고 무궁한 축복과 긍휼을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성령과 피로써 거듭났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늘의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감사하며 기쁨으로 구주를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이 기쁨을 앗아가지 않도록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켜내기 원합니다.

믿음이 무엇인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이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사람은 바라는 것이 있다. 가장 갈급한 것은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에 근원적으로 하나님이 그 갈급함을 채워주실 수 있다. 우상 숭배로는 얻을 수 없다. 이는 헛된 믿음이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다. 멸망의 길로 가는 첩경이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것은 성령으로 난 것이라고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마치 바람은 소리로 가늠할 수 있지만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신 것을 안다. 사람의 생명은 신비하다. 난자와 정자와 결합하여 세포 분열 과정을 거쳐서 생명이 자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가 자라는 것은 자연적으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같다. 그러나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다는 것을 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떤 분이신지 이 땅에 나타내 보이셨다 (요한복음 1:18). 그리스도는 이 땅에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골로새서 1:15). 주님께서 이 땅에 오사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온전히 죽기까지 내어주셨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 (히브리서 12:3).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셨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히브리서 5:8).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해주신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음의 주이시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자기 목숨을 이 세상 죄를 대신하여 내어주셨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어두움과 사망의 그늘에 갇혀있던 사람이 정결함과 깨끗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 설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피를 받으시고 사람을 죄에서 깨끗케하여 주실 것을 믿으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사람이 죄인 되었을 때에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사 그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다.

믿음이 아니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전부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래서 믿음이 아니면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이다. 오직 믿음이 사람이 근본 누구인지 알게 하는 길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함량 미달로 오그라들 수밖에 없다. 믿음의 눈으로 이 사실을 발견할 때 그리스도가 값없이 부어주시는 용서와 깨끗케하는 은혜를 영접할 수 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과 정결함을 입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 설 수 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관계가 종식되고 평화 관계가 되었다. 믿음으로 죄와 가책이 더 이상 왕노릇 하지 못하고 대신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거룩한 자녀로 입양되었다.

믿음이 아니면 사람은 자기 육체를 의지한다. 그래서 경력과 명예와 재산을 쌓는다. 그런데 그것은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다. 하늘 꼭대기에 닿고자 하지만 헛수고에 불과하다.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 믿음이 아니면 나갈 필요조차 모른다. 믿음이 아니면 마음의 공백이 무엇인지 왜 그런지 알 수 없다. 믿음이 아니면 삶의 불만족이 무엇인지 왜 있는지 모른다. 믿음이 아니면 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도록 일상의 도전과 어려움을 통해서 그에게로 이끄신다. 노력과 의지는 어느 정도 작동하는 것같다. 조금 더 노력하면 목표지점에 도달할 것같다. 그렇게 믿음이 아닌 믿음으로 노력을 배가하지만 항상 부족하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 부족함을 통해서 믿음의 눈을 뜨도록 인도하여 주신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진리로 나오도록 이끌어 주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 믿음의 길로 부르셨다. 하나님은 자녀가 없는 75 세의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약속의 땅으로 순종하여 나갔다.

오늘 본문에는 첫째로, 주님께서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스라엘 가운데 이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둘째로, 죽음이 없는 부활의 믿음을 보여주셨다. 나인성에서 한 장례행렬을 멈추시고 관에 손을 대시며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니 죽었던 자가 일어났다. 셋째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질문에 답변하여 주셨다. 질문 요지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가 맞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씀하셨다. 넷째로,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청을 받으셨을 때 한 죄인이 나와 주의 발을 눈물고 적시고 그의 머리털로 씻기고 향유를 그 발 위에 부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말씀하셨다.

첫째로, 예수님은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여 주셨다. 1-10 절에 나와 있다.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함께 가실쌔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 그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유대인 장로 몇에게 예수님을 모셔오도록 부탁하였다.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였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집으로 가시는 중이었다. 이때 백부장은 벗들을 보내어 주께서 그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으니 오지 마시고 말씀만 하사 낫게 하여 주시길 간구하였다. 백부장이 그렇게 말한 근거는 군인으로서 명령 한마디에 담긴 권세와 능력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를 포함하여 수하에 있는 군인은 이리 오라 하면 오고 저리 가라 하면 복종하였다. 이를 근거로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과 권세는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을 믿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믿었을 뿐아니라 두려움과 떨림으로 경외하였다. 그래서 오지 마시고 말씀만 하시면 낫겠다고 말하였다.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좇는 무리에게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이때 백부장의 하인이 이미 강건하여졌다. 진정한 믿음은 능력을 낳는다. 이는 믿음의 대상이 능력의 주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떤 모양이나 항상 믿음으로 산다. 의자에 앉을 때, 차 시동을 걸 때, 엘리베이터를 탈 때 믿음으로 한다. 그런데 믿었지만 고장이 날 경우가 있다. 그래서 믿음의 대상이 무엇인지가 관건이다.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면 능력이 없다.

백부장은 이방인이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원의 은혜는 차별이 없다. 구원은 혈과 육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12-13). 그런데 어떤 점에서 백부장은 이스라엘보다 나은 믿음인가? 먼저 백부장은 종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었다.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불쌍히 여겼다. 그의 간절한 기도를 겸손하게 주님께 구하였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주께 구할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유대인 장로들을 통해서 불쌍히 여겨주시길 구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죽어가는 종을 낫게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긍휼을 구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신다 (이사야 42:3).

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나오는 길이 언제나 열려 있었다.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와 오래 참으시는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였다. 조상들의 믿음의 유업과 제사와 율법과 약속이 있었다. 하나님이 가난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을 받으심을 배웠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긍휼하심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긍휼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였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믿고 구하였다.

둘째로, 예수님은 죽었던 청년을 다시 살리셨다. 그 청년은 과부의 아들이었다. 11-17 절에 나와 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 장면은 예수님이 구하지 아니하였음에도 이적을 행하신 보기 드문 일이다. 나인 성은 가버나움에서 남서쪽으로 32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주님께서 그 마을 입구에 이르렀을 때 마침 장례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죽은 자는 이 동네의 과부의 독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장례 행렬에 나와 안타까운 마음으로 과부를 위로하였다. 이를 보신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다.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관에 손을 대시며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시자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였다. 주님은 그를 어미에게 돌려주셨다.

예수님은 왜 불쌍히 여기셨는가? 죽음 권세 아래 슬피 우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죽은 자를 상여에 매고 따라가는 행렬은 모든 사람을 슬픔과 무의미와 허무와 절망으로 내몰기에 충분하다. 인생은 장례 행렬과 같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다. 사람은 사망 권세 앞에서 무력하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주님은 이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셨다. “청년아 일어나라!” 죽었던 자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났다. 그리스도 안에는 사망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셨다. 이는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시는 장면이다. 물론 이 청년은 다시 죽는다. 예수님은 부활의 능력과 권세가 있음을 가르쳐주셨다.

먼저 예수님은 장례 행렬을 멈추셨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잠시 혼돈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죽은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이 그를 어미에게 주었다. 이때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들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가득하였다. 큰 선지자가 일어났다고 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셨다고 말하였다.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퍼졌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다. 슬픔의 행렬을 멈추셨다. 환희와 영광의 생명을 부어주셨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돌아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사람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움과 슬픔과 좌절과 한숨을 몰아내주신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사람이 죄인되었을 때에 독생자 아들을 기꺼이 내어주신 것을 가리킨다. 구원을 요구할 자격도 없고 어떻게 할 줄도 모르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사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다. 이로써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다. 사람을 그 질고와 어두움과 슬픔을 몰아내고 해방하기 위하여 대신 슬픔과 질고와 고난을 받으셨다. 주님께서 사망의 찔림과 상함과 징계를 받으셨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영생을 주신다.

셋째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질문에 답하여 주셨다. 주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나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다. 18-35 절에 나와 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질문을 받고 답을 주셨다. 요한은 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그의 질문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가 맞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주님으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감옥에 갇혀 있는 요한에게 메시야의 사역이 무엇인지 말씀하여 주셨다.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을 죄의 사슬에서 해방하는 것이다.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눈을 열어 주신다. 하나님 앞에서 의의 길을 걷도록 일으켜 세우신다. 율법적으로 부정하게 되어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자에게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고쳐주신다. 선과 악을 분별하고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닫도록 귀를 열어주신다. 죄로 인하여 죽었던 영을 다시 살려주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을 선물로 주신다. 이것이 이 땅에 성육신하신 주 그리스도께서 만세 전부터 영원토록 베푸시는 은혜이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요한이 보낸 사람들에게 하시는 동안 그들 눈 앞에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셨다. 사람이 그 허물과 죄로부터 사함 받고 정결케 되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뿐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사람을 질병과 고통과 악귀와 소경에서 눈을 뜨는 능력이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그리스도께서 장차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실 것을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외쳐 말하였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가 외쳐 말한대로 주님은 하나님의 희생의 어린양으로 이 세상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셨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선지자보다 나은 자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보다 큰이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였다. 그보다 큰이가 없다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로 말이암아 죄씻음을 입고 의롭다함을 입은 자와 비교할 수가 없다. 요한의 사역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본질적으로 사람을 변화하여 죄인을 용서하고 정결케 하여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과 세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 세례는 하나님 앞에 죄를 인정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죽고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난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하였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거부하였다.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들은 자기 유익에만 눈이 멀어 있었다. 세례 요한은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고 인자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먹기를 탐하는 자라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말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입어야 하는지 몰랐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모세의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의 세례도 거부하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도 거부하였다. 그들은 마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장터에 앉은 아이들과 같았다.

넷째로, 예수님은 그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은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다. 38-50 절에 나와 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누가는 이 여자를 죄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자비하시고 친절하신 나사렛 예수의 소문을 듣고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나왔다. 이 여자는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예수님을 그 집으로 초청한 바리새인 시몬은 아주 불편해 하였다. 시몬은 문둥병에 걸렸다가 나음 받았다 (마태복음 26:6). 그는 예수님이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기에 당연히 물리쳐야 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많이 탕감 받은 자와 적게 받은 자 중에 많이 받은 자가 더 감사와 사랑이 많다고 말씀하셨다. 시몬은 예수님이 집에 들어오실 때 발을 씻을 물을 주지 아니하였다. 입맟추지도 아니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였다. 반면 이 여자는 예수님께 자비와 긍휼을 구하였다.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래서 하염없이 감사와 통회의 눈물을 흘렸다. 머리털로 발을 씻고 그 발 위에 향유를 부었다. 그 여자는 그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렸다.

예수님은 그 여자의 많은 죄를 사하여 주셨다. 그는 친절하고 자비하신 예수님께 행함으로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였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열납하여 주시고 평안을 주셨다. 주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자를 물리치지 아니하신다.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천국으로 환영하여 주신다.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신다.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말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8:12). 이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여자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통로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능력과 권세를 나타낸다. 믿음으로 죽음과 어두움의 권세를 물리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어두움과 사망 권세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의의 길을 걸어간다. 믿음으로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한다. 하나님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믿음을 기뻐 받으시고 부활의 능력을 부어주신다.

2020.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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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7:11-19(2016.3.10.) : 네이버 블로그

2016년 3월 10일 경배와 찬양

성경본문: 눅 17:11-19

제 목: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찬 양: 430(주와 같이 길 가는 것)

누가복음 17장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

지난 주는 개강하는 주간이라 다들 바쁘셨습니다.

이제 이번 주가 지나면 어느 정도 분주한 부분도 차분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중에 우리 신학부가 모여서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기쁩니다.

우리말 가운데 꽃샘이라는 예쁜 말이 있습니다.

<꽃샘>은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여 부리는 매서운 날씨라는 뜻으로, 이른봄 꽃이 필 무렵 변덕스럽게 추워지는 날씨나 그 추위를 이르는 말>로, <입샘>이라는 말로도 불립니다.

이런 날씨에 몸 잘 돌보시기를 바랍니다.

**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누가복음에만 나오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갈릴리와 사마리아 국경에 위치한 한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열명의 나병환자들(문둥병자, 악성피부병)이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열 명 가운데 아홉은 유대인이고 한 명은 사마리아인인 것으로 보아, 유대와 사마리아는 국경에 나병환자를 위한 공동 주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병에 관해서는 레위기 13장이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애굽을 나온 백성이 광야에서 진을 구성하여 기거할 때,

야웨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피부에 이상 증상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레위기 13장 2절 이하에 보면,

2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3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4 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5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둘 것이며

6 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부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의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7 그러나 그가 정결한지를 제사장에게 보인 후에 병이 피부에 퍼지면 제사장에게 다시 보일 것이요

8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라 이는 나병임이니라

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레위기 13장) 46절에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고 말씀합니다.

야웨께서 이렇게 나병환자를 진영 밖에 살게 했던 이유는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에는 혼자 살게 했다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는 열 명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소록도라는 곳에 나병환자들을 위한 처소를 마련하여 치료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모여 살면서 어떤 기대를 했겠습니까?

이들은 기존사회로 복구하는 것이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피부가 깨끗해져야했고, 그 사실을 제사장으로부터 확인 받아야했습니다.

***

어느 날 이 마을에 소문이 돌았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나사렛 예수께서 자신의 마을로 지나가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마을에는 더 많은 나병환자가 살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가운데 열 명은 예수님께 큰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그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기다렸고, 예수를 보자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소리를 들은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몸을 살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고 말했습니다.

즉, 너희들이 살던 마을의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집으로 복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10명 모두는 제사장이 있는 곳을 향해 갑니다.

아직 몸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이들은 예수님의 말대로 합니다.

그들이 길을 가는 중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너무나 기뻐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아홉 명은 제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이 일러준 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기 위해서 갔던 것입니다.

예수께로 돌아온 한 명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드렸습니다.

누가는 이 사람의 신분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좀 특이하고 엉뚱합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은 몸이 깨끗하게 되면 제사장들에게 보이라고 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나음을 입은 사마리아인에게 <일어나 가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제사장에게로 가서 치유됨을 확증하고 집으로, 사회로 복귀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문장은 복음서에 기록된 4개 사례에서 7회 사용되었습니다.

첫 번째 사례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 앓는 여자>의 경우였는데, 마태복음 9장 22절, 마가복음 5장 34절, 누가복음 8장 48절에서 공히 사용되었습니다.

두 번째 사례는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경우였는데, 이 사례는 마가복음 10장 52절, 누가복음 18장 42절, 마태복음 20장 29-34절에 나오지만 이 문장은 마태복음 20장에서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사례는 <바리새인 시몬 집에서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누가복음 7장 50절)의 경우이고,

네 번째는 <사마리아인 나병환자>(누가복음 17장 19절)의 경우였습니다.

이상의 4개 사례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담고 있지만 세부적인 의미는 좀 다릅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 앓는 여자>의 사례는 낫고자 하는 여인의 열망도 강했고, 치료하시는 예수님의 사역도 여인의 손이 닿는 것과 동시적이었고 따라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선포도 즉각적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사례는 바디매오의 열망과 함께, 예수님의 즉각적인 치유사역이 일어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선포도 즉각적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 집에서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사례는 여인의 적극적인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적인 반응으로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 있는 <사마리아인 나병환자>의 경우는, 집단상담 형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치유를 요청했고, 이에 예수님의 치유방안이 제시되었습니다. 열 명은 다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아직 낫지도 않은 몸으로 제사장에게 가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몸이 깨끗해지자 아홉 명은 그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기 위해 갔고, 한 명은 다시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

오늘 우리의 본문은 다른 세 사례와는 많이 다른 면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온 한 명이 어떤 모습을 했기에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했을까요?

다시 본문을 살펴보면서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예수께서 저 멀리 서 계신 것을 본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Ἰησοῦ Ἐπιστάτα ἐλέησον ἡμᾶς>

라고 외쳤고,

여기서 우리는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선생>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선생>을 <에피스타타(Ἐπιστάτα)>라는 희랍어로 표기했습니다.

여기서 Ἐπι는 <위에>이고, στάτα는 <서다, 세우다>의 뜻을 지닌 <히스테미>에서 나온 말인데, 최상급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피스타타>는 <위에 가장 높이 서 있는 사람> 를 지칭합니다.

가령, 제사장 중의 제사장, 왕 중의 왕 등의 표현과 유사한데, 우리를 제사장 중의 제사장을 대제사장이라 부르고, 왕 중의 왕을 대왕 또는 만왕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에피스타타>는 그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키텔사전을 보면, <에피스테스>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랍비>를 희랍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태 마가 요한이 예수님을 <랍비>라고 표현했지만, 누가는 희랍어 번역어 <에피스타타>로 표현했습니다.

누가는 다른 곳에서는 <선생>을 <디다스칼레(Διδάσκαλε)>로 사용했는데,

이는 ‘가르치다’는 ‘디다케’와 ‘좋은, 잘’의 ‘칼레’,

그러니까 좋은 것을 가르치는 사람, 잘 가르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누가는 선생으로서 예수님을 표현할 때, <에피스타타>를 총 6회 사용했고, <디다스칼레(Διδάσκαλε)>를 16회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누가는 히브리어권과 아람어권 문화를 잘 모르는, 희랍어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기록했습니다.

누가가 예수를 <랍비>라고 하지 않고, <에피스타타(Ἐπιστάτα)>라고 표현한 것을 통해 볼 때, 희랍어권 독자들은 <예수가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자> <대선생>으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희랍어 독자들은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에피스타타>로 알고 <긍휼함을 베푸소서>라고 외쳤다고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깨끗함을 입은 후, 한 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돌리며>는 <독사존>이라는 현재분사 능동태의 동사입니다.

이 말은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영광을 돌리는 이의 행동이 돌아오면서 계속해서 영광을 돌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계속해서 입으로 감사하고 몸으로 춤추고, 이것을 반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나병환자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선생, 즉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자>로 알았다는 것이고, 또한 자신을 치유해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치유를 하신 분은 누구인가? 우리는 묻게 됩니다.

물론 답은 <하나님>입니다.

나음을 입은 사마리아인이 치유해주신 분을 <하나님>이라고 알았다면, 어디로 가야했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온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예수님께로 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것입니까?

나음을 입은 사마리아인은, 마치 강아지가 배를 땅에 깔고 엎드려서 주인을 맞이하듯 하는 행동을, 예수님께 보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로부터 극진한 인사를 받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하셨습니까?

17 …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라고 말합니다.

셋째,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왔습니다.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온

나음을 입은 사마리아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왔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돌리며>는 계속되는 행동, 반복되는 행위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돌리러>는 ‘한번의 사건’을 보여줍니다. ‘부정사 2과거 능동태 동사’는 ‘한번과거’를 말해주는 용법입니다.

다시 말해,

나음을 입은 사마리아인은 되돌아오면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와서 <한번> 엎드려 감사를 표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한번과거’로 표현하신 이는 예수님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나음을 입은 사마리아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왔다>고 말씀하셨습다.

즉, 그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께 감사 표현한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우리는 예수님 스스로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본문에 나타나는 칭호의 변화를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에피스타타(Ἐπιστάτα)>, <예수 가장 높은 곳에 계신 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둘째, <돌리며>는 나음을 입은 사마리아인의 기쁜 마음을 현재적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선생에서 하나님으로 전환된 <예수>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영광받으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신가?

아니면 저 마을에 계시면서, 자신들에게 제사장을 보러가라고 말씀한 분이신가?

길 위에서 치유를 경험한 후, 나음을 입은 사마리아인은 <가장 높은 곳에 계신 이>인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게 됩니다.

이스라엘에서 나병 판정은 제사장이 하지만, 치유는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나음을 입은 사마리아인은 예수를 하나님의 사역을 하시는 분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나음을 입은 사마리아인의 기쁜 행동을 보시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영광을 받은 대상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나음을 입은 사마리아인은 하늘에 대고 감사를 표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를 표했습니다.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를 표한 것은 곧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표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

나음을 입은 사마리아인에게 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바로 잘 찾아왔고, 그것이 바로 너의 믿음이고, 그 믿음이 너를 구원한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현재분사 <돌리며>는 나음을 입은 사마리아인의 계속되는 기쁜 마음을 표현한 것이며

한번과거 <돌리러>는 나음을 입은 사마리아인의 기쁜 행동이 예수께 향한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나음을 입은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함으로 예수님께 최상의 칭호를 드렸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주(아도나이, 키리오스)>라고 고백함으로 최상의 칭호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예수님을 본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마27:54) 그리고 <의인>(눅23:47)이라 했고,

도마는 예수의 부활하신 몸을 보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20:28)이라 했고,

요한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요한복음 1장 1절)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는 고백은 대부분

예수님의 부활 이후(도마), 승천 이후(바울서신 등), 요한 공동체의 신학적 표현(요한복음) 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본 본문에 따르면,

한 명의 나병환자가 <하나님으로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고,

예수님도 이 믿음을 귀하게 보셔서 나병환자의 감사 행위가 <하나님으로서 예수 자신>에게 한 <하나의 사건>임을 인정했습니다.

나음을 입은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는 현장에서 예수님을 이토록 높인 유일무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을 아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신 4개의 사례 가운데 오늘 본문의 사례는 매우 특별합니다.

사마리아인의 믿음을 보면서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지, 비추어봅니다.

우리의 몸이 온전치 않음에도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시면,

우리는 곧장 갈 수 있는지,

길을 가다가 깨끗함을 입으면 즉시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지,

나병환자였던 사마리아인의 구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시작입니다.

이 믿음 위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 믿음 위에 우리의 신학공부도 있습니다.

이 믿음 위에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돌리며> 그리고 <돌리러> 가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날마다

한걸음 한걸음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돌리며> 그리고 <돌리러> 가는 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늘 함께 하시길 간절히 바라오며,

우리의 공부가 그런 길 위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새찬송(430)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1.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2. 어린 아이 같은 우리 미련하고 약하나 주의 손에 이끌리어 생명길로 가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3. 꽃이 피는 들판이나 험한 골짜기라도 주가 인도하는 데로 주와 같이 가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4. 옛선지자 에녹같이 우리들도 천국에 들려 올라 갈 때까지 주와 같이 가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누가복음에 나오는 번역어 <선생>의 원문

2:46 διδασκάλων, 3:12 Διδάσκαλε, 5:5 Ἐπιστάτα, 6:40 διδάσκαλον, 7:40 Διδάσκαλε, (8:24 ἐπιστάτα, 8:45 Ἐπιστάτα), 8:49 Διδάσκαλον, (9:33 Ἐπιστάτα), 9:38 Διδάσκαλε, (9:49 Ἐπιστάτα), 10:25 Διδάσκαλε, 11:45 Διδάσκαλε, 12:13 Διδάσκαλε, <17:13 Ἐπιστάτα>, 18:18 Διδάσκαλε, 19:39 Διδάσκαλε, 20:21 Διδάσκαλε, 20:28 Διδάσκαλε, 20:39 Διδάσκαλε, 21:7 Διδάσκαλε, 22:11 Διδάσκαλος

Ἐπιστάτα: 위에 가장 높이 서 있는 사람, 최상급/ Ἐπι: 위에, στάτα: 서다

Διδάσκαλε: 좋은 것을 가르치는 사람, 잘 가르치는 사람/ Διδάσ: 가르치는, καλε: 좋은 것

키워드에 대한 정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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