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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복음 18 장 | 마태복음 18장 14620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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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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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제공 : CGNTV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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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

마태복음 18. … 제 18 장 …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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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0/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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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마태복음 18장 – 한국컴퓨터선교회

(마 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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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1/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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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성경 마태복음 18장 – HANGL NOCR

18:8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잘라 내버려라. 두 손, 두 발 다 가지고 영원히 타는 불 속에 던져지느니 불구자나 장애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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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9/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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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7(화) “마태복음 18:1-20” / 작성 정한조

본문 마태복음 18:1-20 찬송가 315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천국에서 큰 사람(1-14절)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시간이 지날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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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7/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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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 KLB – 어린 아이같이 되라 – 그때 – Bible Gateway

마태복음 18 … 18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 까? … 18:6 원문에는 이 구절에 쓰인 동사가 수동태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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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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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장 주석 – 마태복음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마태복음 제 18장 =====18:1 그때에 – 막 9:33에 의하면 그때는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실 때이며, 17:24-27에 의하면 그곳에서 반 세겔의 성전세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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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4/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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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QT : 마태복음 18장 21절~35절 용서는 성도의 의무입니다.

큰 죄를 용서받고도 작은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용서받은 은혜를 모르는 자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이웃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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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7/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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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장 – 주님의 마음 – 동행 여정

어린 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 작은 자 하나를 업신여기지 않고 실족하게 하지 않는 사람, 잃은 양 한 마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죄 지은 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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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hegospelpastor.com

Date Published: 10/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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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장: 하늘 나라에서 사는 법 – Godmade

손이든 발이든 눈이든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 있다면 제거해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죄의 근원을 제거 하라는 뜻입니다. 죄 짓게 하는 것은 손이나 발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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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made.tistory.com

Date Published: 5/25/2022

View: 4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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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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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태 복음 18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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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1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XbCk8a1dWsc

마태복음 18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1)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2)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1)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3)(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우리말성경 마태복음 18장

18:1 그때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 물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18:2 예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고

18:3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변화돼 어린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런 어린아이 가운데 한 명이라도 죄를 짓게 하는 사람은 큰 맷돌을 목에 달아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18:7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일 때문에 이 세상에 화가 있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과 같은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18:8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잘라 내버려라. 두 손, 두 발 다 가지고 영원히 타는 불 속에 던져지느니 불구자나 장애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18:9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빼내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 속에 던져지느니 한 눈만 가지고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18:10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뵙고 있다.

18:11 (없음)

18: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양 100마리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가 99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그 양을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18: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만약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 잃지 않은 99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욱 기뻐할 것이다.

18:14 이와 같이 이 어린아이 중 한 명이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18:15 “만일 네 형제가 네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잘못을 지적해 주어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너는 네 형제를 얻는 것이다.

18:16 그러나 만일 네 말을 듣지 않으면 그가 하는 모든 말에 두세 사람의 증거를 얻기 위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거라.

18:17 그러나 만일 그가 그들의 말도 거부하면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으면 너는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8:19 다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땅에서 어떤 일이든지 마음을 모아 간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다.”

18:21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여, 제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18:22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만 아니라 70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18: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빚을 결산하려는 왕과 같다.

18:24 왕이 결산을 시작하자 1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나오게 됐다.

18:25 그런데 그는 빚 갚을 돈이 없었기 때문에 주인은 그 종에게 그 자신과 아내와 자녀와 전 재산을 팔아 갚도록 명령했다.

18:26 그랬더니 종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조금만 참아 주시면 모두 갚아 드리겠습니다.’

18:27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 주었다.

18:28 그러나 그 종은 밖으로 나가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동료 종을 찾아냈다. 그는 동료의 멱살을 잡으며 ‘빚진 돈을 갚아라!’고 말했다.

18:29 그의 동료가 무릎을 꿇고 애걸했다. ‘조금만 참아 주게. 내가 다 갚겠네.’

18:30 그러나 그는 참지 못하고 가서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18:31 이 일을 본 다른 동료 종들은 너무 기가 막혀서 주인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 바쳤다.

18:32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불러서 말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나에게 애원하기에 내가 네 빚을 모두 없애 주었다.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하지 않았느냐?’

18:34 그 주인은 화가 나서 그 종을 감옥 관리들에게 넘겨주며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뒀다.

18:35 만일 너희가 진심으로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행하실 것이다.”

2020/01/07(화) “마태복음 18:1-20” / 작성 정한조

본문 마태복음 18:1-20

찬송가 315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천국에서 큰 사람(1-14절)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시간이 지날수록 바리새인, 제사장, 서기관 등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으로 보고, 혹 자신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자신들이 기대하는 메시아의 모습과 다르다는 것은 알고 배척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 와중에도, 당신이 승천하신 후에 당신의 사역을 이어갈 제자들을 훈련하셨습니다. 특히 16:16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주(당신)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지만, 3일 후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시며, 집중적으로 제자들을 훈련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천국에서 큰 사람은 누구인지와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1-14절은 한 어린아이를 실물로 한 교훈과 인간 존중에 대한 교훈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본문은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마태복음에서 ‘그 때에(토테, tote)’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대부분이 어떤 ‘특정한 시간’을 나타내기보다 앞에 나온 내용과 다른 내용이 나와, 주제가 바뀌는 상황을 알리는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그 때에’는 다른 ‘그 때에’와는 다른 말입니다. 이것은 앞에 있는 내용과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일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17장의 마지막 부분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서 성전세를 내도록 하셨습니다.

당시에 성전세는 아달월(Adar, 2-3월) 15일경에 납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니산월(Nisan, 3-4월)에 있었던 유월절(니산월 14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는 본문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약 1달 전쯤의 일입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큰지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때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하나님의 나라)’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세상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 나라가 이루어지면 다른 제자들보다 자신들이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욕망으로 서로 눈치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셨음에도 그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통해서 제자들을 교훈하셨습니다.

(2-5)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예수님은 실물교육을 굉장히 잘하셨습니다. 들판에 계실 때는 들에 있는 백합화로, 공중에 나는 새로 교육하셨습니다. 지금은 한 어린아이를 세우셨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최고 실권자가 어린아이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TV를 볼 때도 아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아이가 외식하자고 하면 계획에도 없던 외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19세기까지만 해도, 어린아이의 인격은 존중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20세기의 최고의 발견은 ‘어린이의 발견’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시는 성인 남성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 수를 계산할 때도 여자와 어린아이는 그 대상에서 제외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어린아이는 보이는 모습 그대로 작고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착하게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은 물론 어린아이도 본질적으로 죄인인 것은 동일합니다. 아이는 어릴수록 부모에게 의존적이기에, 부모의 말과 행동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수용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6-7)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작은 자’는 단지 어린아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연약한 사람들, 무시당하며 사는 사람들,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지금의 표현으로 하면, ‘갑’이나 ‘을’에도 해당하지 못하는, ‘병’, ‘정’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는 것(걸림돌이나 장애물을 놓아서 죄를 범하게 만드는 것)은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연자맷돌’은 ‘나귀가 돌리는 커다란 맷돌’입니다. 그런 돌을 목에 달고 빠지면, 살아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작고, 하찮게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사람도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연자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하는 것은, 과장법적 표현인데, 크게 보이는 사람은 물론, 작고, 하찮게 보이는 사람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반려견이 아무리 자신이 다른 강아지들보다 우수하다고 자랑질을 해도, 사람이 보기에는 모두 강아지인 것은 동일합니다. 하물며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사람을 보면 얼마나 더 그러하시겠습니까?

(8-10)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말씀도 과장법입니다. 이것을 문자로 받아 손이 범죄하면 손을 자르고, 발이 범죄하면 발을 자른다면, 우리 중에서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죄를 짓는 삶을 살지 말고, 의를 행하는 삶과 복을 짓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뒤집어서, 우리의 사지가 멀쩡할 때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죄악된 삶을 살다가 손과 발을 잃고서 하나님을 알고, 주님을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건강할 때에, 가진 것이 많았을 때에, 젊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큰소리를 치다가, 건강을 잃고서, 가진 것을 다 허비하고서, 나이가 들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수용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면 그것이 은혜일 수 있습니다.

11절은 (없음)입니다. 그 (없음) 앞에 작은 숫자로 3이라고 되어있고, 아래에 “어떤 사본에, 11절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가 있음”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13곳에 (없음)이 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성경의 원본은 없고, 사본만 있습니다. 사본도 다양한 등급이 매겨져 있습니다. (없음)이라고 기록한 것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사본들에는 이 구절이 없고,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본에만 있을 경우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작게 보이는 사람까지 존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12-14)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양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동물입니다.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빠른 다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변색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양들에게 목자가 없다면,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멸종될 동물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그런 양이 길을 잃었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고, 약한 존재 중에 약한 존재입니다.

그런 때에 목자는 99마리를 산에 두고, 길을 잃은 양을 찾으러 간다고 합니다. 그것이 목자의 현명한 행동인지, 어리석은 행동인지는 길을 잃은 양이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자신이 99마리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면, 목자의 행동은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길 잃은 양이라면, 목자의 행동은 비합리적일지라도 감동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은 목자의 행동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15-20절)

15-20절은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과정인지에 대해서 교훈합니다.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이라는 말은 죄를 범한 사람이 나와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관계에 있는 사람이 내게 죄를 범한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면, 몹시 아픕니다. 그런데 아픈 것이 ‘발’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믿지 않았던 도끼에 발등이 찍히면 발이 아플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아물게 됩니다. 하지만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혀,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나게 되면, 시간이 지나도 잘 아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에 그 사람에게 가서 일대일로 만나서 ‘권고(眷顧)_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어떤 일을 하도록 권함’이라는 의미의 ‘권고(勸告)’가 아니라, 우리말 사전적인 의미로 ‘관심을 가지고 돌봄’이라는 의미의 ‘권고(眷顧)_돌아볼 권, 돌아볼 고’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권고’가 헬라어로는 그런 뜻이 아니라, ‘드러내다’, ‘폭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죄를 범했을 때, 의도를 가지고 잘못했을 때, 그 사람과 일대일로 만나서, 그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분명하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의 잘못을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일대일로 이야기를 했는데 듣지 않으면, 1-2사람을 데리고 가서, 2대1 또는 3대1이 되어서 말하라고 하십니다. 2-3명은 구약에 나타나 있는 ‘증인의 수’입니다. 개인적인 권고로 해결되지 않을 때, 증인을 세우라는 것은 일어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또한 죄를 범한 형제를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일대일도 안 되고, 2대1 또는 3대1도 되지 않을 때, ‘교회에 말하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공적으로 응대함으로 죄를 범한 사람에게 다시 한번 더 회개의 기회를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공동체 밖에 있게 함으로 마지막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18-20)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것은 죄를 범한 사람이 교회의 말도 듣지 않아서 교회 공동체 밖으로 내어 보냈을지라도, 그런 결정을 아주 신중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은 소수의 사람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그렇게 적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있었다’라고 과거형으로 표현하지 않고, ‘있을 것이라’라고 미래형으로 표현하지도 않고, ‘있느니라’라고 현재형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인,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와 같은 의미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께서 언제나 현존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에 언제나 현존하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작고 연약한 사람도 실족하지 않도록 존중하는 것은 그들을 자신의 힘이나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또한 비록 아주 친밀한 사람이 나에게 죄를 범할지라도 그를 찾아가 일대일로 말하고, 듣지 않으면, 2대1 또는 3대1로 말하며,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를 통해서 말하며, 신앙공동체에서 소외시키는 방법을 통해서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도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는 사람만 가능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신실하며, 우리 중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삶의 자리에 현존하시는 주님,

주님께서 연약하고, 부족하며, 보잘것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를 세워 주시고, 존중해주시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주신 것처럼, 우리도 작아 보이는 사람, 연약하게 보이는 사람을 세워 주고 존중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순간이라도 우리가 사람들을 우리가 가진 것이나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대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혹 다른 사람이 내게 죄를 범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대하는 믿음과 순종을 주시옵소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우리의 힘으로 삼음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사람을 품는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당신이 어린아이와 같았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2. 작은 자라도 실족하게 하면 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혹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신 일이 있습니까? 또한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실족하신 일이 있습니까? 그 때에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겨내셨습니까?

3.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가장 최근에 당신의 삶의 자리에 주님께서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은 언제였습니까?

4. 하나님을 당신의 힘으로 삼아, 작은 존재로 보이는 사람을 세워 주고, 내게 죄를 범한 사람을 용서해 주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마태복음 18장 주석

마태복음 제 18장

=====18:1

그때에 – 막 9:33에 의하면 그때는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실 때이며, 17:24-27에

의하면 그곳에서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신 때이다. 성진세는 매년 아달월(태양력 2-3

월) 15일 경에 한 번씩 내는 것이므로(출 30:11-16) 구체적으로 이 때는 예수께서 돌

아가시기(니산월, 태양력 3-4월 14일경) 한 달 전일 것이며 제3차 갈릴리 사역을 마치

시고 유대로 들어가려#고(19:1) 하실 무렵이었을 것이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 이 질문은 가버나움으로 오는 도중에 발생한 것으로

(막 9:33;눅 9:46), 마가는 제자들이 노중(路中)에서 ‘누가 크냐’에 대해서 열띤 토

론을 하였다고 전한다(막 9:33).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는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

으셨으나 제자들은 잠잠하고 아무말도 뭇하였다고 한다(막 9:33-37). 한편 누가는 예

수께서는 그때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고 기술하고 있다(눅 9:40-48). 이를 정리하면 예

수께서 제자들이 논쟁하는 것을 아시고(누가), 그들에게 물으시니 그들이 잠잠해졌고

(마가), 바로 그때에 제자들은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질문했다고

(마태) 볼 수 있다. 제자들이 자리 다툼과 세속적 권력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고(16:16), 또한 세 제자만 변화 산상에서의 영광스런 주의 광휘를 목격했을

뿐 아니라(17:1), 베드로만 성전세 사건과 연루된 사실(17:24-27) 등으로 볼 수 있다.

특별히 예수께서 세상 임금이 그의 아들에게서는 관세와 정세(政勢)등의 세금을 내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만 비겨서 하늘 임금의 아들이신 예수 자신도 결코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 세금을 내실 뿐이라고 말씀하

셨는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머지 않아 메

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그곳을 정복하실 것이며 따라서 자신들도 새왕국에서

백성들을 통치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에 부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기대에 따라 제자들의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분쟁과 갈등이 발생되었는데 본문의 말씀

‘누가 크니이까’는 이러한 갈등이 구체적으로 표면화 된 것을 나타내 준다. 한편 예수

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와 몰이해는 그가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부활하실 때까지 계속되

었다.

=====18:2

한 어린아이를 불러 – 유명한 ‘어린아이 교훈’으로 아이들은 위한(for) 교훈이 아

니라 그들을 통해(through) 어른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 이전 시대와 그 당시

만해도 어린이는 여자들과 함께 그 집의 가장의 재산 몰록에 들어갔을 뿐 결코 사람으

로 대접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인정하

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순진무구한 특성이 바로 천국 시민의 자격이 되는 것임을 말

씀하셨다. 그런데 초대 교회 전설에 의하면(Nicephorus) 이 어린아이는 훗날 안디옥

의 감독이자 순교자가 된 익나티우스(Ignatius), 내지는 버려진 고아(Paulus) 또는 주

의 제자가 되기 위해 훈련받는 한 아이(Boten) 등으로 추측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한

편 1세기 후반부의 디오그네투스의 편지(Diognetus Epistle)는 크리스챤은 어린아이들

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 마가의 기록(막 9:36)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작은 아이 하

나를 표본으로 삼으셨을 뿐 아니라 그 아이를 친히 안으시기까지 하셨다. 이는 하찮게

보이는 생명체 하나하나에게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신 드넓은 사랑을 보여주신 행동이

다.

=====18:3

돌이켜 –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 우한 조건으로써 선행되어야 할 행동이다. 따라서

돌이키지 않으면 어른은 결코 어린아이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 여기

서 ‘돌이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페테'(* )는 ‘스스로 돌이키

다’는 뜻이며 동사의 제 2과거형으로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따

라서 이 말은 한낱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가능

한 마음의 변화, 즉 참회와 중생을 이루는 전인적인 변화를 가리킨다(요 3:3;행

2:38).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 여기서 ‘어린아이’란 천진함이나 순결함이나

믿음의 이상형으로서가 아니라, 겸손의 이상형으로서 또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

의 대표격으로서 내세워지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겸손한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시

는 것이지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D. A. Carson).

아이의 겸손이란 그가 본질상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고 부모의 품 안에서만

평안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 그분의 보호아래서만 살고자 하는

겸손함(골 4:11, 12;요일 5:14). 그리고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거나 자기

를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부끄럼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

며,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나 계산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순수성을 지니고 가

르침에 대해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신뢰와 믿음을 그 믿음의 본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천국 시민의 모델이 되고 있다.

결단코 천국에 둘어가지 못하리라 – ‘결단코…못하리라’, 곧 이중 부정 ‘우 메'(*

)가 사용된 가정법으로, 천국 입성을 절대 불허하시겠다는 당신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이다. 제자들은 ‘친국에서 누가 크냐’는 문제에 관심하고 있으나 예수께서는

천국 시민의 자격(資格)의 문제를 말씀하셨다. 따라서 천국으로의 입국 거부의 이 말

씀은 제자들의 쓸데없는 논쟁을 단번에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8 } 4 끼기쁠 낫추는 그이가. 사모 ) 3-4의 고난받는 종의 1래를 연상케 하는 말씀이다.

“자기뤄 낫추다’의 혈라어 동사 ‘타페이1오’ (멱488퉈01)쳤 단순할 의미의 겸손이 아니

라 멸시, 촨대, 굴욕 둥올 당하면서까지 겸손할 것올 의미한다. 따라서 신국시민의

자격으로서 의 자기를 낮춤이란 하나넘의 말씀올 전하고 실천함으로 진찌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수모와 몌시를 당하는 것올 기뻐하는 상태를가리킨다.

이것이야말로 장차 예루살렘에서 모 욕과 조롱을 받고 저주의 십자가를 지실 주넘의

길올 그대로 따르는 깃임올 의미한다(빌 2 } 5

=====18:8

돌이켜 –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 우한 조건으로써 선행되어야 할 행동이다. 따라서

돌이키지 않으면 어른은 결코 어린아이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 여기

서 ‘돌이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페테'(* )는 ‘스스로 돌이키

다’는 뜻이며 동사의 제 2과거형으로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따

라서 이 말은 한낱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가능

한 마음의 변화, 즉 참회와 중생을 이루는 전인적인 변화를 가리킨다(요 3:3;행

2:38).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 여기서 ‘어린아이’란 천진함이나 순결함이나

믿음의 이상형으로서가 아니라, 겸손의 이상형으로서 또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

의 대표격으로서 내세워지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겸손한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시

는 것이지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D. A. Carson).

아이의 겸손이란 그가 본질상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고 부모의 품 안에서만

평안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 그분의 보호아래서만 살고자 하는

겸손함(골 4:11, 12;요일 5:14). 그리고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거나 자기

를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부끄럼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

며,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나 계산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순수성을 지니고 가

르침에 대해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신뢰와 믿음을 그 믿음의 본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천국 시민의 모델이 되고 있다.

결단코 천국에 둘어가지 못하리라 – ‘결단코…못하리라’, 곧 이중 부정 ‘우 메'(*

)가 사용된 가정법으로, 천국 입성을 절대 불허하시겠다는 당신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이다. 제자들은 ‘친국에서 누가 크냐’는 문제에 관심하고 있으나 예수께서는

천국 시민의 자격(資格)의 문제를 말씀하셨다. 따라서 천국으로의 입국 거부의 이 말

씀은 제자들의 쓸데없는 논쟁을 단번에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8 } 4 끼기쁠 낫추는 그이가. 사모 ) 3-4의 고난받는 종의 1래를 연상케 하는 말씀

이다. “자기뤄 낫추다’의 혈라어 동사 ‘타페이1오’ (멱488퉈01)쳤 단순할 의미의 겸손이

아니 라 멸시, 촨대, 굴욕 둥올 당하면서까지 겸손할 것올 의미한다. 따라서 신국시민의

자격으로서 의 자기를 낮춤이란 하나넘의 말씀올 전하고 설친함으로 진찌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수모와 몌시를 당하는 것올 기뻐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이야말로 장차 예루살렘에서 모욕과 조롱을 받고 저주의 십자가를 지실 주넘의

길올 그대로 따르는 깃임올 의미한다(빌 2: 5)

=====18:10

소자…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 비록 세상에서 미약하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개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저희 천사들이 – 성경은 국가(단 10:13;12:1), 교회(계 1:20), 개인을 위한(행

12:15) 수호(守護) 천사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수호 천사’는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페르시아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을 사람들을 위한 비사자로서 생

각한다. 이처럼 천사들이 구원을 상속받은 자들에게 봉사하도록 보냄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히 1:14). 워필드(Warfield)의 의견에 의하면 본문의 말씀, 즉 ‘소자들

의 천사들’은 사후의 그들의 영을 의미하며 타스커(Tasker)에 의하면 ‘저희의 영적인

짝들’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본절의 천사들은 성도들을 섬기도록 보냄을 받은 영적

실존으로서 현재 하늘에서 하나님 가까이 있는 것으로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워필

드(Warfield)의 학설은 결코 지지받을 수 없다. 여하튼 천사들의 수종은 비록 성도가

세상적으로는 비천해도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소유하고 있는 존재이므로

결코 업신여김을 받을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한편 본문의 이 내용을 근

거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영혼들을 위해 수호하는 천사를 제공하셨다는 교리가

발전되었다(시 34:7;91:11;눅 15:7-10).

하늘에서…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 이 구절은 전통적으로 난해한 것으

로 여겨져 왔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각 성도들을 수종하는 천사들이 동시에 어떻게 하

늘에서 천부(天父)의 얼굴을 볼 수 있는가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혹자

(Gregory)는 천사가 각 성도에게 영적으로 임재하여 수종드는 동시에 내적 관조를 통

한 희락을 향유하기 위해 하나님의 시선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말로 본

문의 난해점을 해결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는 수호 천사는 ‘하나님 면전의 천사’로서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신이 수호하는 영혼들의 안녕을 구원함으로써 그 이중적 사역을

감당한다고 한다. 어떻든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것은 마치 왕정 체제

하에서의 신하의 배알(拜謁)처럼 매우 각별한 예우와 신임을 받는다는 의미로 받아들

여질 수 있다(왕하 25:19;에 1:14;렘 52:25). 즉 수종하는 천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존재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큰 영광을 부여받은 존

재들에게 당신의 백성의 수직(守直)을 명하셨다. 이는 결국 천사들의 위상(位相)의 탁

월성을 강조하기보다 ‘소자’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 보호의 충만성과 완전성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8:11

본문은 2류 사본에 해당하는 A. D. 4-9세기의 언셜체 사본이나 수리아역 및 라틴

벌게잇(Vulgate) 역에는 눅 19:10에서 그 내용을 전입(轉入)한 본문(‘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권위있는 시내 사

본이나 바티칸 사본 등에는 본문이 빠져 있다. 여하튼 2류 사본의 기록을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문맥상 생략된 본문의 내용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지극한 관심을 가지신

‘소자들’의 존귀성을 논하기 위한 서언(序言)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8:13

만일 찾으면 – 이 말은 잃어버린 양 가운데는 찾지 못할 양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

포하고 있다. 실로 잃어버린 양이 자신을 찾는 주인의 애절한 음성을 외면하고 끝끝내

제 고집대로 행동한다면 그 주인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유

의지를 선한 방향으로 돌려 겸손히 주인의 음성을 듣는 양에 대해서만은 주인은 어떤

대가르르 치러서라도 찾고 찾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도들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거룩한 집념이다.

더 기뻐하리라 – 아흔 아홉마리보다 한마리를 더 아낀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 길

잃은 양이 안전한 곳에 있는 아흠 아홉마리보다 더 불쌍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큰 배려를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건강한 자녀보다 병약한 자녀에게 더 큰

애정과 보살핌을 주듯이 말이다. 더욱이 ‘찾는 수고’의 노력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찾은 기쁨’이 상승하게 마련인 것이다.

=====18:14

잃어지는 것은…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 부정적 의미의 ‘잃어지는 것'(멸

망)은 이말의 긍정어 ‘찾음을 당하여 영생을 얻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실로 하나님

의 뜻은 무든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이다(딤전 2:4). 하나님 나라에서의 최고의 가치

는 바로 그 자리에 참예하는 성도들이 있다(Bachmann). 따라서 잠시 믿음의 길에서 벗

어난 성도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인 것이다. 미래의 결론은 이 소자

들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교훈으로 되돌아 간다(3-6절). 극서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이 소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것은 하

나님께 엄청난 죄를 짓는 것임을 의미한다. 물론 개개에 대한 이 사라은 전체 양떼를

대가로 치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여 전체 양떼 중에서 단 하나라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 앞에서는 ‘어린아이’ 또는 ‘소자’ 등의 말이 사용되었

는데 여기서부터는 ‘형제’라는 말이 앞의 그것과 거의 같은 의미로 반복 사용되고 있

다(15, 21, 35절). 한편 유대인의 용법에서는 형제라는 말이 ‘같은 종교를 가진 자’,

‘같은 종교적 공동체의 일원’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그렇다면 이 말은 ‘믿음의 동

료’, ‘신앙의 동지’로 번역될 수도 있다. 예수는 이제 메시야 공동체, 즉 주를 따르는

무리들 안에서 행해진 죄에 대해서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편 본

문에서의 죄는 하나님께 대한 근원적, 궁극적 범죄가 아니라 신자 상호간의 도덕적 범

죄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비록 한글 개역 성경과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생략되었으나

라틴 벌게잇(Vulgate)역을 위시한 권위있는 제문서들에서는 ‘네게 대해'(* ,

에이스 데)라는 말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바로 뒤 이어지는 문장을

살펴보면 본문의 죄라는 것이 다른 형제를 멸시하는 행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 이 명령은 실족한 자를 잃지 않기 위

한 제 1단계의 작업으로서 죄 지은 형제르 보호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며 동시

에 가능한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는 일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권고

하다’는 말씀은 단순히 꾸짖다의 의미인 ‘에피티몬'(* )이 아니라 ‘

노출시키다’, ‘빛으로 가져오다’,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과 확신을 주다’란 뜻의 ‘엘

렝코'(* )이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권고의 의미는 죄에 대한 심판이나

책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도록 ‘무엇이 죄악인가’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 또는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 형제의 잘못을 정당하게 꾸짖

고 개도(開導)하는 것(요 8:46;딤전 5:20)을 말한다. 즉 그 권고의 목적은 형제를 판

단, 질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형제를 다시 참 형제로 얻기 위함이다(고전

9:19-22;벧전 3:1). 이것이 바로 죄를 지은 형제와의 첫 화해 작업에 해당한다(레

19:17).

만일 들으면…얻은 것이요 – 사실 개인적으로 만나서 책망을 듣는 경우 그것을 순

순히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겸손한 마

음으로형제의 잘못을 권고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와 지

혜와 조심성과 사기 부정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며 그 무엇보다 형제를

진실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러한 진지한 노력을 통해서 형제

적 친교를 회복하고 그 주의 제자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새롭게 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노력은 정녕 필요하다(눅 17:3, 4;살후 3:14, 15;약 5:19, 20).

=====18:17

듣지 않거든(* , 파라쿠세) – ‘무심코 듣다’, ‘무시하다’는 뜻

으로 남의 말을 신중히 듣지 않고 오히려 방관하는 자세로 건성으로 듣거나 완전히 무

시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사 65:12).

교회에 말하고 – 범죄한 형제가 회개치 않아 개인적인 해결이 실패한 경우 제 3단

계이자 마지막 조치(措置)로서 교회가 공식 개입하며 범죄한 그 형제를 권면하기 위해

연합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한편 여기서 ‘교회’란 18, 19절의 특권을

살필 때 그 당시 존재하던 유대인의 회당으로 보기 보다는 아직 구체적으로 세워지지

는 않았지만 지금 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16:18). 실로 교회

는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전형으로서 진리 전수의 터전이자, 모든 신앙인들의 성결한

교제의 장(場)이요, 신앙 훈련과 성숙의 도장이어야 한다.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 ‘이방인과 세리’는 유대 사회의 통상적인 개념으로

유대의 회당이나 기타의 모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 즉 ‘단체 밖의 사람’을 가리

키는 말이다. 한편 헬라어 원문은 이 말을 ‘너에게 있어서 그가 이방인과세리처럼 되

게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각 교인이 범죄한 형제에게 대한 태도를 뜻하는

것이므로, 교회가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정죄하고 교회에서의 징계를 넘어 사

회적 책벌(責罰)까지 부여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세 번에 걸친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

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각각의 교인들은 교회 차원에서의

친교와 교류를 일절 금하고 범죄한 형제와의 더 이상의 접촉을 피하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와의 접촉을 피하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로부터의 소외’라는 압력을 ‘죄지은 그 형제’에게 가함으로써 또 다시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18:19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 여기서 먼저 ‘두 사람’이란 예수의 제자된 자로서,

연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數)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견해와는 전적으로 다른 견해

가 있다. 최근에 던컨 엠 데레트(J. Duncan M. Derrett)는 주장하기를 합심한 두 사람

이란 ‘죄 지은 자와 그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자’로서, 그 두 사람은 교회의 결의를 기

초하여(18절) 상대방의 요구하던 권리에 대해서는 일치를 보게 되는 바로 땅에서 합

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합심하다’의 뜻인 동사 ‘쉼포네오'(*

)가 ‘어떤일을 의논하여 합의 보는 것’이라고 하는 사설은 데레트의 주장

을 밑받침해 주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두 사람’을 믿는 자들

가운데서 친교나, 합의, 합심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로서 이해한다. 또한 ‘합심’

이란 헬라어 ‘심포네오’가 ‘교향악'(Symphony)이란 말의 어원이란 점에서도 추측해 볼

수 있듯이 ‘함께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연출해 내다’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단순히 ‘마

음의 일치, 조화’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사람의 일치는 물론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처럼 완전한 일치를 이룬 자들에게 각 개인에

게 임제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적으로 임재하신다. 즉 이 땅에서 겸손한 두 영혼

의 일치된 기도는 하늘 아버시께서 그것들을 교회의 간구로 받아들이시고 교회가 지닌

특권(18절:16;19)에 해합당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F. R. Fay).

무엇이든지 구하면 – 프리지크(Preisigke)에 의하면 ‘구하다’의 뜻인 동사 ‘아이테

오'(* )는 ‘어떤 권리를 요구하는것’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본문의 구절은 두 사람이 합심하여 주님께 간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이는 18절에서 거론된 형제의 범죄 내용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합심 속에는 보

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성령께서 함께 계셔서 그들의 원하는 바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게 하신다.

=====18:20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 ‘내 이름으로’라는 의미의 헬라어 ‘에이스 토 에몬오노

마'(* )의 문자적인 뜻은 ‘내 이름과 관련해서’,

‘내 이름 안에서’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 2,3인이

모인 것 또는 2,3인이 모여 예수의 가르침과 뜻을 서로 나누는 것 그리고 예수를 사랑

하며 연합하기를 열망하여 예수를 자기 소원과 신앙의 궁긍적 대산으로 삼기를 원하는

자들이 모인 것 등으로 해석 될 수 있다.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이 말은 ‘두 사람 사이에 토라(율법)의 말씀이 이야기

되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함께 있다’는 유대 랍비의 속담집(Aboth 3:3)에서

처럼 그리스도인 2, 3인이 예수의 말씀을 서로 나누거나 그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는

곳은 그 장소가 어디든지 말론하고 예수께서 영으로 임재하시겠다고 하는 의미이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께서 조금 있으면 제자들의 곁을 떠나실 것이 암시되어 있는 말이

기도 하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당신의 이름으로 연합한 무리들을 향하

여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으로 영원히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셨다(28:20). 이는 예수의

영원한 현존성과 편재성 및 무변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18:21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 본문은 현제의 죄문제(15–20절)와 결부된 죄용서

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실 성도들의 의무는 죄인을 권면하는 일과 더불어 죄인을 용서

하는 이 양자를 조화 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와 평행 본문인 눅 17:3, 4이 “회개하거

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너는 용서하라”로, 회개가 용서의 전체 되어

있으며 일곱 번이 최종 숫자로서 거론되어 있는 것에 비하여, 마태의 본문은 용서의

전제가 결코 회개는 아니며 베드로가 언급한 일곱이라는 숫자도 예수의 의해 단번에

부정되었다. 따라서 마태는 용서의 법은 누가의 그것에 비해 상당히 관대하고 너그러

운데 이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할 것을 기대하는

마태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여기서 ‘용서하다’의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 동

사 ‘아페소'(* )는 ‘용서하는 사람과 관련된 죄악을 범죄한 형제로부터

먼 곳으로 보내다’는 의미로 악행자가 회개하여 죄 자백을 우리에게 하든 아니하든 즉

시 모든 악을 용서해야 한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베드로의 이 적극적인 제안은 당시의 문화적 배경 하에

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책무를 수치(數値)화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벤시라 같은 이는 범죄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

을 말하고 있고(외경 집회서 19:13-17), 또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용서하

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다(암 1:3;2:1;Jome 86b). 따라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율법적 용서 개념을 능가하는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완전수 내지는 거룩

한 수에 해당하는 ‘7’번의 용서를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3번이든 7번이든 제한적인

용서는 무한수로서의 일흔 번씩 일곱번에 의해 거부되었다.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적 행습이나 랍비

들의 가르침, 심지어 베드로의 제안까지도 거부하시고 당신의 초월적인 권위로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새 지평을 여셨다. 여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말에 대해 70*7(490)로 보는 학자도 있고(Erasmus, Jerome, Alford, Grotius등) 70인

역(LXX)에 의한 창 4:24에 나오는 라멕에 관련된 77배의 형벌과 연관지워 70+7(77)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Augistine, Ewald, Origen, Bengel 등). 여하튼 490번이든, 77번

이든 본문의 숫자는 강한 상징성을 내포한 말로서 숫자상의 어떤 기준이나 실제적인

용서의 범위를 초월한(Wycliffe) 끝없는 용서, 무제한적인 사랑을 가르친 말이다. 즉

형제들 간의 용서는 결코 횟수나 일정한 정도에 의해 제한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인

데, 이는 23-35절의 비유에서 보여 주듯이 용서의 갈등을 겪고 있는 형제들은 그들이

용서한 것보다 더 크고 많은 용서를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더구

나 예수가 가르친 용서의 횟수는 철저한 복수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창 4:24의 복수의

횟수(일흔 일곱번)보다 또는 구약적 복수의 한계 규정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넓

고 큰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보복과 형벌이 끝없는 용서의 모범을 따

르는(엡 4:32;골 3:13)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자비와 용서도 더 한층 끝이 없는 것이

어야 한다(A. W. Argyle). 진정 예수의 이 새로운 용서의 법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지닌 무제한적인 복수심을 무제한적인 사랑과 용서로 대치(代置)시켜 놓으셨다

(McNeile).

=====18:23

천국은…과 같으니 –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이 비유는 끝없는 용서에 대한 앞벌의

교훈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예화로서 제시되고 있는데, 비유늬 형식은 13장의 천국

비유와 같으나 비유늬 내용은 25:31 이하에 나오는 마지막 심판과 유사하다. 실로 예

수께서는 용서의 기준을 이 지상의 현존하는 사회법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천국’ 법에

따른 그 나라 백성들의 준수 사항을 역설하고 계신 것이다.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 여기서 ‘종들'(* , 둘로이)이란 문자적으

로 노예들은 가리키지만 임금에게 빚진 돈의 액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으로 보아 임금

의 궁전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나 노예들이 아니라 왕의 영토중의 일부를 다스리고 그

곳에서 나오는 수입을 왕에게 상납해야 하는 지방 장관(Satraps) 혹은 영주라고 보아

야 한다(Herodotus).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신분에 대한 관심보다 천국 상속자들이 얼

마나 많이 죄용서함을 받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이러한 과장된 신분과 빚을 예시 하

셨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 제시된 ‘종들’은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세계를 다스리

고 지배할 것을 위임받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회계하려

한다고 하는 말의 헬라어 ‘쉬나라이 로곤'(* )은 ‘계산(*

,로고스)을 매듭짓다’, ‘거래를 청산하다(* , 쉬나이로)’의

의미로 수지와 그에 따른 균형을 살피는 것을 말하지만, 특별히 본문에서는 종말론적

심판의 자리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실로 말세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일생동안 자신들에게 맡기워졌던 일들에 대해서 결산하여야 한다(고후 5:10).

임금과 같으니 – 여기 ‘임금’은 자신의 통치권하에 있는 자들에게 절대 권력을 행

사할 수 있는 자를 가리키는데, 본문에서는 특히 35절과 연관되어 ‘천부’ 곧 만유의

주관자요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18:24

일만 달란트 – 달란트는 예수 당시의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통용되던 화폐 단위 중

가장 큰 것으로서(무게 단위로는 약 34kg의 순금에 해당함)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

의 일일 품삯인 1데나리온의 약 6000배에 상당하는 것 이었다. 이 일만 달란트에 대한

최근의 평가는 천 이백만 달러에 해당된다고 하지만 여러가지 물가 상승 요소를 감안

한다면 오늘날의 통화로는 10억달러 이상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D. A. Carson). 더

욱이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따르며 유대 전역에서 각출된 1년 세금이

고작 800달란트에 불과했다고 하니 이 일만 달란트의 가치가 얼마만 했는가를 가히 짐

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액수는 결국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정도로 큰 죄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8절의 일백 데나리온이

‘소액'(少額)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한정수인 것처럼 이 일만 달란트도 대금(大

金) 또는 많은 액수의 돈을 나타내기 위한 최소한의 한정수에 해당한다.

빚진 자(* , 오페이레테스) – 먼저 여기의 ‘빚’은 공금에서 횡

령 한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 금액이 지나치게 큰 것으로 보아 미처 다 상납하지 못

한 세금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아켈라오가 해마다 유다와 사마리아

에서 600달란트를,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에서 200달란트를 징수하였다

‘(Lenski)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이 엄청난 양의 부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

의 죄를 상징 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의 ‘오페이레테스’라는 헬라어

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도 언급된 바, 그곳에서는 ‘죄'(* ,

오페이레마)로 번역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이 죄와 부채의 차이점

과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차이점 : (1) 죄는 한 번 지은 이상 항상 죄이지만 부채

는 갚고 나면 더 이상 부채가 아니다. (2) 자신이 지은 죄는 누구에게 전가할 수 없으

나 부채는 제 삼자가 대신 감당할 수 있다. (3) 죄는 쌍방간의 쌍무 계약을 필요로 하

는 것이 아니지만 부채는 쌍방간의 동의를 일방적으로 어긴 것에서 발생된다. 유사점

:(1) 죄나 부채는 모두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죄는 하나님께, 부채는 채권자에

게. (2) 죄나 부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증가되어 가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죄는 죄를 낳고 부채는 부채를 낳는 악화 현상이 계속된다, (3) 죄나 부채

는 모두 면제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부채를 취소, 탕감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아무도 그것을 법으로 금지할수는 없다. 그것은 그의 특권에

속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죄도 하나님에 의해 취소, 용서받을 수 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 하리라”(사 43:25). 그런

데 본문에서는 부채를 담당할 제 삼자의 개입이 없이도 탕감이 가능했으나, 하나님께

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일에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전적으로 개입되어 있다. 예

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드려 사람의 죄악을 말소시키는 일을 담

당하셨다. 따라서 인간의 의인(議認)은 예수의 피흘림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

는 일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충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

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하나를 데려오매 – 이는 빚진 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빚을 신고한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숨겨오다가 마침내 타인에 의해 발각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어쩌면 하나님께

서 종말에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이미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지만 스스로

참회치 않고 묻지 둔 죄악에 대해서는 철두 철미 찾아 물으신다는 종말론적 심판의

장면을 예시한 것이 아닐까.

=====18:25

다 팔아 갚게 하라 – 이러한 주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만 달란트의 빚은 가족

모두를 노예로 판단해도 결코 다 갚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노예의

값은 많아야 약 1달란트였고 대부분의 경우는 10분의 1달란트나 그 이하가 일반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빚 때문에 자신과 가족을 파는 일이 구약성경에도 명기되어 있

는 일반적인 법이었다(레 25:39;왕하 4:1;느 5:5;사 50:1암 2:6;8:6). 물론 그런 노예

들은 50년마다 반복되는 희년에 해방되어졌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노예와 그의 가족

을 파는 것은 빚이 갚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의 절망적이 상황

과 그 탄원을 강조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즉 비유에서 임금이 채무 불이행자에게 무

자비할 종도리 요구 조건을 내세운 것은 그 채무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이 얼마만한

빚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갚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끝내

임금에게 호소하여 자비를 간구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정녕 그 임금

에게는 그 빚을 탕감해 줄 마음의 여력이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Chrysostom). 한편 이

처럼 막대한 빚을 지불할 수 없는 전적 무능한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영적 파산

(破産)을 그대로 묘사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18:26

엎드리어 절하며(* , 프로세퀴네이) – 이는 상대방에 대한 절

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신분을 최대로 격하시키는 고대 세계의 예법이

다. 특별히 본문의 헬라어는 미완료 과거형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엎드려 절하는

동적이 끊임없이 상대방으로부터 정을 일으킬 정도로 실행도었음을 암시한다. 실로 이

것이 빚의 청산에 전적으로 무능한 종이 취할 수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 참으소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크로뒤메오'(*

)는 ‘먼’, ‘긴’의 뜻인 ‘마크로스'(* )와 ‘강한 감정 ,

분노’를 뜻하는 ‘뒤모스'(* )의 합성어로, 그 빚을 임금 자신의 분노나 격

정을 일으키기 전에 그 일을 오앳동안 잊으시라고 하는 뜻을 나타낸다(Trench). 이 채

무자는 임금에게 그의 막대한 빚을 갚을 시간을 간구하였지만 이는 어떤 가능성 있는

약속이 아니라, 다만 임금의 노여움과 그 형벌을 일순간이나마 모면해 보려는 임기 응

변에 지나지 않는다.

=====18:27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 종에 대한 임금의 첫번째 시혜(施惠)로서 그 근본 동

인(動因)은 임금의 측은 지심(惻隱地心)이었다. 물론 종이 취한 겸손한 자세나 애절한

간구, 및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진솔한 실토도 이번 시혜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겠으나

그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원인은 바로 임금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다(눅 15:20).

마찬가지로 죄인의 구원과 해방은 자신의 선행 여하에 달려 있기 보다는 전적으로 하

나님 아버지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 곧 긍휼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름

11:30-32).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임금이 베푼 두번째 시혜이다. 즉 임금은 종이 간구

한 것 (시간적인 여유, 조절) 이상의 것(완전한 탕감)을 약속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

서 ‘빚'(* , 다네이온)이란 횡령한 금액이 아니라 형편이 나빠서 생겨

진 부채라는 의미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이는 임금이 그 종에 대해 상당히 자비로

운 자세로 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탕감하다’, ‘용납하다’의 뜻인 ‘아피에미’

(* )는 주인의 자비나 지불 기한의 연장에 대한 채무자의 간청의 정도를

훨씬 넘는 것임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즉 ‘아피에미’는 보통 ‘용서하다'(forgive)로

번역되는 말인데, 문자적인 의미는 ‘…을 퇴거시켜 멀리 보낸다’고 하는 것으로 이는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고'(시 103:12) 그것을

멀리 쫓아 보내 버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완벽한 사죄의 은총을 예시해 주고 있다. 실

로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탕감해 주는’ 임금의 행위는 석방과 사죄의 두 법적 행

위를 동시에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이 지은 엄청난 죄악을 인정하고 용서를 간청

하는 죄인에 대해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아무런 보상 없이도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이러한 칭의는

(1)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판단즉 ‘불쌍히 여김’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지 죄인의

간청에 의해서 행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2) 이 한 번의 선언으로 우리의 모든 죄는

단번에 탕감받은 것이다. 이 의인(議認) 자격은 우리의 지불 능력의 가부에 의해, 죄

의 크고 작음에 따라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죄에의 단 한번의 선언으로 가

능하다(롬 8:33).(3) 그러나 우리의 의인(義認)됨에 있어서는 대속 제물로서의 그리스

도의 희생이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값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일정한

죄악을 용서받음으로써 의롭게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대속 또한 하나님의 진적인 은혜

와 사랑에 의한 것이다(요일 4:10).

=====18:28

그 종이 나가서 – 시간적으로 그리오래지 않은 때를 암시하고 있다. 이때는 임금으

로부터의 탕감 은혜를 받은 그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의 시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 종은 바로 그러한 시간에 자신의 용서받은 감격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기

회를 맞이하게 된다. 실로 그 받은 바 은혜를 적절히 나누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

리요, 그분이 설정한 기회가 아닐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 예수 당시의 1데나리온은 보병이나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화폐 단위로서, 6000분의 1 달란트에 해당한다. 따라서 1백 데나리온

은 1만달란트에 60만분의 1에 불과한, 참으로 계산할 가치조차 없는 미미한 소액이었

다. 여기서 24절의 1만 달란트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해 지은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것

이라면 일백 데나리온은 인간이 그 이웃이며 동료인 인간에게 범한 죄의 정도를 상징

하는 금액이다. 한편 본문의 ‘동관’이란 문자적으로는 동료 종이라는 뜻으로 채권자와

채무자가 서로 동료 관계에 있음을 시사해 준다.

붙들어 목을 잡고 – 여기서 ‘목을 잡고’에 해당하는 원어 ‘에프니겐'(*

,)은 미완료 과거 능동형으로서 ‘그의 목을 조르기 사작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실제로 얼마 안 되는 대수롭지 않은 금액을 빚진 동관을 대하는 탕감받은 종의 난폭하

고도 매정한 성격과 거만한 태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태도는 26절의 엎드려 절

하면서 자비를 구하던 자세와는 완전히 다름 모습이다. 실로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

한 자에게는 강한 인간의 열반적인 속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한편 당시의 로마법에

의하면 채권자는 법정에서 채무자의 목을 잡고 끌고 갈 수 있었다고 한다(F. R, Fay).

따라서 목을 잡는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으로 볼 때 상대에게 극한 모

욕을 주는 무자비한 폭행(暴行)중에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빚을 갚으라(* , 아포도스 에이 티 오페

일레어스) – 문자적으로는 ‘만약 빚진 것이 있다면 갚으라’고 하는 의미로서, 프릿취

(Fritzsch)와 올스하우젠(Olshgausen)은 헬라어외 정중한 표현에 속하는 ‘에이 티(*

)가 사용되었다고 하여 이말이 그 요구를 부드럽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

한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 속에서의 이 말은 ‘네가 가진 것이 있으니 갚으라’ 혹은 ‘

빚진 것을 모두 갚으라’는 칼날같은 강요로 보는 것이 좋다. 이것은 임금이 그 자신에

게 베풀었던 회계의 기회를 그는 자신의 채무자에게 전혀 부여하고 있지 않음을 뜻하

는 말이다. 그는 채무자와 계산도 해보지 않은 채 그를 만나자 마자 무조건적으로 빚

을 갚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8:29

엎드리어 간구하여(* , 파레카레이) – 이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

서 그 동작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본문의 의미는 26절의 존엄한 부복(府伏)하

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단순히 허리가 굽어지도록 간청하는 모습을 뜻하는 것이다.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 이 말은 조금 전 그 종이 임금에게 했던 말보다(26

절) 좀더 현실적인 간청이다. 왜냐하면 그 종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느 부채였지만 이 동관의 부채는 100여일의 노동으로 갚을 수 있는 소액의 부채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동과의 이 호소는 그 종으로 하여금 조금 저느이 자신의 처지를 기

억시키는데 충분했을 것이다.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 브장문에서 미완료시제가 쓰이면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뜻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가 거절했다(허락치 않았다)’는 동사의 미완료형인 ‘우크

에델렌'(* )은 22:3에서와 마찬가지로 채무자가 계속적으로 간청

함에도 불구하고 이 채권자가 용서하기를 싫어하여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음을 나타내

고 있다. 이는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모두 탕감하여 준 임금에 비해 그 종의 마음

이 얼마나 딱딱하고 완고했는가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특별히 허락하다’는

뜻의 헬라어 ‘델로'(* )는 ‘사랑하다’는 뜻을 내포한 단어로 사랑하는 마음

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상대방의 하찮은 소청이라도 들어 줄 수 있음을 시사해 준다.

사랑이 없는 마음을 가진 자는 또한 이웃의 눈물젖은 호소를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지게

된다.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 27절과 대조가 되는 구절이다. 임금은 그를 놓아 보

내었으나(석방) 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채무자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투옥). 25절의

경우와 같이 가족과 소유를 다 파는 것이 여기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이는 채무액

이 소액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신 이 경우에는 돈을 지급할때까지 사람을 구속하

는 일이 언급되었는데(5:25, 26 참조) 고대 사회에서는 채무로 인해 사람을 투옥시키

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Deissmann). 그러나 본문에서와 같이 일백 데나리온 때문에 옥

에 갇힌다고 하는 일은 억울한 경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헐값의 노예라고 할지라도

그 당시에는 오백 데나리온에 팔렸으므로 그의 빚보다 더 많은 액수로 사람을 파는 일

이 불법이듯이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구속하는 일도 역시 잘못된 일이었다. 더구

나 임금에게 빚의 지불 기간의 연장을 요청했던 그가 자신의 채무자의 지불 기한 연장

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구속시켜 버렸다고 하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냉혹한 사람인

가하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실로 받은 사랑을 주는 사랑으로 환원하지 못하는

자는 참사랑을 모독하는 자이다.

=====18:32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 첫번째 부름의 회계에의 호출이었다면 이번 두번째의 부름

은 정죄와 심판에의 호출이었다. 실로 이 지상에 모든 불의한 자, 형제 사랑을 외면하

는 자는 언제가는 이 두번째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사 63:4). 이 부름 이후에는 영원

한 투옥과 영원한 형벌만이 있을 뿐이다.

악한 종아 – 25장에서 한 달란트를 맡았던 중에 대해 주인이 책망한 말을 연상시키

는 말이다(25:26). 형용사 ‘악한’이 붙은 이 말은 왕의 유죄 선고를 의미한다

(7:23;25:41;눅 19:22). 즉 이 한마디에 의해 전에 그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특사(特

赦)의 은전은 상실하게 도었다. 어욱이 이 ‘악한 종’이란 말이 종말의 심판에 관한 말

씀 중에서 종종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들은 이 채권자가 그

의 큰 빚을 갚지 못한 대가로 끝없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네가 빌기에(* , 파레카레사스) – 이 헬라어는 ‘간청하다’의

뜻인 ‘파레카레오'(* )의 부벚자 과거형으로 여기에서는 26:53에

서와 같이 ‘단순히 한 번 간청한 것으로 충분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문의 경우 과거의 계속된 동작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어떤 동

작이 일어난 것만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을 사용한 것은 용서해 준 것이 빚진자의 계

속적인 간청 때문이 아니라 임금의 무한한 자비심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18:33

불짱히 여김과 같이…불쌍히 여김이 – 이는 ‘받아들인 자비’와 그가 ‘행했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본문을 영적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첫번

째 자비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자비로서 두번째 자비, 즉 사람들에게 행해질 자

비를 촉구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요인이 된다. 또한 첫번의 자비는 은혜와 감사의 정

도가 엄청난 것임에 비해서, 앞으로 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비로서의 두번째 자비는

자비를 행하는 자에게는 당연한 의무이며 도리이고, 또 은혜와 감사의 정도로 지극히

미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또 하나의 자비가 있다. 이 세번째 자비는 벴겔

(Bengel)에 의하면 하늘나라의 관대하신 보상(benigna talio)을 의미하는 것으로, ”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라는 말과

같이 성도가 장래에 받게 될 하나님의 자비를 으미한다.

마땅치 아니하냐(* … , 우쿠 에데이세) – 의문사 ‘우크'(*

, 아니하냐)에서 강조하고 있는 긍적적 대답은 이 악한 자의 최후의 양심의 가책에

서 나와야 할 것이다. 그는 이 물음에 대해서 결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다. 왜냐

하면 그에게 부여된 처지는 오로지 자신의 채무자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 , 데이)때문이다. 더구나 미완료형 ‘에데이'(* )는 다

른 사람과 비교하여 탕감받은 이 사람에게만 계속적으로 부여된 도덕적 의무가 바로

형제, 동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마땅한 일을

하였을 경우 그것은 칭찬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처벌의 대

상이 되는 것은 오히려 마땅한 일이다.

=====18:34

주인이 노하여 – 여기서 ‘노하여'(* , 오르기스데이스)란 ‘자극

받아 격분하다’는 뜻으로 불의하고 매정하 동관의 처신이 주인의 감정을 크게 훼손시

킬 정도로 크나큰 잘못이었을 보여 준다. 이는 결국 받은 바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의

형제들에게 그대로 반영,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진노하실 것

인가에 대한 매우 적절한 예시이다. 정녕 형제 사랑과 용서와 화해를 잊은 영혼에 대

해서 하나님은 격렬한 노여움으로 그를 책망하실 것이다.

그 빚을 다 같도록 – 접속사 ‘헤오스 후'(* )는 ‘…까지’의 뜻으로, 제

한된 어느 시점까지의 도달 가능성을 암시한다. 바로 이 문장에 의해서 ‘연옥설'(煉獄

說)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본문의 사악한 동관은 감옥에 갇힌 이후라 할지

라도 그가 혹시 빚을 다 갚은 이후에 또 다른 일이 발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본

문의 제한적 용법에 근거해서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가 연옥의 상태로, 그 이후에는 회

개한자는 천국으로, 회개치 않은 자는 영원한 형벌의 자리로 ,옮기게 될 것이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크리소스롬(Chrysostom)이 이야기 하였듯이 이 문장은 일정한

시점의 한계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다. 즉 본문의 ‘빚을 모두 갚는 일이 발생하기까

지’라고 하는 말은 영구적인 불가능성을 말하는 가장 강한 표현이 된다. 따라서 주인

이 ‘그 빚을 다 갚도록 그곳에 있으리라’고 한 말은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 나오지 못

하리라고 하는 종신형인 무기 징역을 선언한 것이다. ‘악한 종'(32절) 이라고 하는 유

죄선고에 이어 이제 그에게 마땅한 형량(形量)이 선고된 것이다. 이러한 종신형은 영

원토록 불타고 있는 지옥의 형벌을 상징한다(Meyer). 한편 주인의 선고는 그 자신의 1

만 달란트의 빚에 따라 형벌이 주어진 것에 근거하지만 주인이 노한 것은 바로 그가

같은 동료의 죄를 탕감치 않는데에 있었다. 따라서 그가 형벌받게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부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부채를 탕감받는 은혜를 체험했음

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죄를 용서치 않은 것 때문이었다. 정녕 베푸는 사랑이 없는 자

는 받은 사랑을 등한시, 모욕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끝날의 심판 때에 극한 형벌을 언

도 받을 수밖에 없다(25:41-46).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 ‘옥졸’의 뜻인 ‘바나니스테스'(* )

는 ‘고통을주는 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은 단순히 옥을 지키는 간수인 ‘데스모

퓔라크스’ )가 아니다. 여기서는 결국 사악한 동관의 고통스럽고

처절한 투옥 기간을 연상시켜 준다. 한편 새번역과 공동 번역에서는 ‘옥졸’이라는 말

대신에 ‘형리’로 표현하고 있는데,이는 본문 해석에 충실치 못할 표현이다. 한편 ‘바

사니스타이’가 왕의 시위병을 의미한다고 하는 점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수종들고 있는 천사들을 상징하는 벗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옥졸들은 죄인을

그들 손으로 고문하고 매를 때리는 역할 뿐 아니라 지옥 형벌의 자리로 그를 인도하는

사역을 맡은 자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종말에 주님의 재림과 함께 천사들이

이 세상에 와서 가라지들을 골라 불에 처넣는다고 하는 비유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13:20).

오늘의 QT : 마태복음 18장 21절~35절 용서는 성도의 의무입니다.



받음 대로 베푸는 용서, 성도의 의무입니다.

오늘의 QT : 마태복음 18장 21절~35절 말씀



마18:21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18: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18: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마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마18: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마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마18: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마18: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마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마18: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마18: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마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마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마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본문 해설

1.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 (21~27) :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극악한 죄를 생각한다면, 내가 용서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의 죄란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 랍비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적어도 세 번은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라면 일곱 번 정도는 용서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계를 정하지 말고 용서해야 한다고 답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만 달란트의 빚을 전부 면제받은 종처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죄 은총을 받고 값없이 구원받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진 상태였고,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완전하게 용서하시고 그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랑을 깊이 깨달을 때 타인을 향한 진정한 용서가 가능합니다.

2.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 (28~35) :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웃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봐주지 않고 옥에 가둔 일의 부당함을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큰 죄를 용서받고도 작은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용서받은 은혜를 모르는 자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이웃과의 관계도 어그러지게 합니다. 또한 미움과 원망이 쓴 뿌리가 되어 그 자신의 삶과 인격까지 무너뜨립니다. 하나님께 용서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시고 본을 보이신 대로 용서를 실천할 때, 그곳에 천국이 임합니다.

오늘의 기도

만 달란트 빚진 자와 같은 악함이 제 안에 있음은 주님의 은혜를 잊은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신 주님의 긍휼이, 기꺼이 용서하는 삶으로 끊임없이 흘러가게 하소서.

용서의 의지적인 결정이며, 먼저 본을 보이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다. – 찰스 스탠리

묵상 에세이 : 용서, 용서, 그리고 또 용서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아미쉬 마을의 한 학교에 찰스 칼 로버츠라는 사람이 권총을 갖고 진입해 여학생 다섯 명을 죽였다. 2006년 10월 2일에 발생한 일이다. 로버츠 아미쉬 마을에 살던 사람이 아니라 조지타운 출신이었다. 이사건 직후 로버츠는 각각 일곱 살과 다섯 살인 두 딸, 18개월 된 아들, 그리고 아내를 남겨 둔 채 목숨을 끊었다. 수사 기관에서는 그가 어렸을 때 받은 상처 때문에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때 충격에 빠진 미국을 감동시키는 일이 곧이어 일어났다. 누구보다 분개하고 살인자와 그 가족을 원망하며 증오해야 할 아미쉬 마을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버츠를 용서하고 그의 장레를 치러 주었으며, 그 가족에게 위로와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CNN 뉴스에서 인터뷰한 내용이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우리 중 누구도 용서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셨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에 용서를 포함시켰다. 용서는 증오나 복수 등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주님의 가르침이다. 만일 내가 주님께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기독교 신앙 자체를 부인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용서는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다. 용서는 그리스도인이 끝까지 해야 할 ‘하나님 사랑의 실천’이다.

[머슴 교회] / 송영선

한절 묵상 : 마태복음 18장 21절~22절 말씀

마18:21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제한 없이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용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 안에 발 딛고 서 있을 수 있는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묶으셨습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하나님의 용서라는 기초를 깨부수는 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의 크기와 깊이와 넓이는 형제를 용서하는 삶을 살면서 체험하고 그 안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집니다. [긍휼의 목자 예수] / 채영삼

마태복음 18장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오늘 마태복음 18장에는 연약한 자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 죄를 범한 자, 빚을 진 자…,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소외당하는 연약한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자들을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그냥 뻔한 말씀으로 가볍게 듣고 지나갈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조차도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을 소중히 여기라, 실족하고 넘어진 자들에게 잘하라,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소중하다, 잘못한 형제들을 용서하라…., 너무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부정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나도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어린 아이 하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십니까? 실수한 자들, 넘어진 자들, 잘못한 자들, 죄를 지은 자들, 빚진 자들…., 그들을 얼마나 너그럽게 대하고 있습니까?

특별한 관심없이 그냥 멀리서 보고만 있지는 않습니까? 그냥 가까이 안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저 사람은 구제불능이야’ 라고 하면서 그냥 상대하지 않는게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오늘 주님은 의외의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회의 통념과는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4절)

어린 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 작은 자 하나를 업신여기지 않고 실족하게 하지 않는 사람, 잃은 양 한 마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죄 지은 형제를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사람, 자기에게 빚진 자를 너그러이 용서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과는 조금 다른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는 많이 다른 말씀입니다.

높은 자가 아닙니다. 힘 있는 자가 아닙니다.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배우고 똑똑하고 교양있고 품위있는 자가 아닙니다. 만나면 나도 덩달아서 품위가 올라갈 수 있는 그런 자가 아닙니다.

낮은 자입니다.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자입니다. 고개 숙이고 있는 자입니다. 뒤에 조용히 숨어있는 자입니다. 부끄러워 하는 자입니다. 상실해 있는 자입니다. 자신감과 의욕을 잃은 자입니다. 소망이 없다고 낙심해 있는 자입니다.

나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자입니다. 만나면 나도 함께 그렇다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자입니다. 늘 주어야만 하는 자입니다. 늘 들어주어야만 하는 자입니다.

그런 자들, 만나기 싫은 자들, 안 만나는게 좋은 자들, 그냥 멀리서만 보고 싶은 자들, 가까이 가면 나만 손해볼 것 같은 자들, 그런 자들…. 그런 자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잘 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자들을 예수님을 대하듯 하라고 말씀합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5절)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도 하시고, 집에도 들어가시고, 아무도 하지 않던 일을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해도 받으셨습니다. 모함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말씀입니다. 저 자신이 오늘 말씀 앞에 많이 부끄럽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 받고 싶습니다. 어린 아이를 향한,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저에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 영혼이 정말 소중합니다. 특별히 실족한 영혼, 지쳐있는 영혼…. 정말 소중합니다.

지쳐 있으십니까? 힘 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도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누구보다도 잃은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처럼, 나보다 연약한 자들을 향하여 이런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사십시다. 잘 돌아보면 나도 돌 볼 수 있는 영혼이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해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나서서 하면 됩니다.

천국에서 큰 자 되기를 소망하며….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토요일 아침, 굿모닝입니다!!^^

마태복음 18장: 하늘 나라에서 사는 법

마태복음 18장: 하늘 나라에서 사는 법

1. 1-14절: 하늘 나라와 지극히 작은 사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모두 하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즈음에 제자들도 하늘 나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이유도 하늘 나라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이 혹시 예루살렘에 이루어질 위대한 다윗 왕국이 아닐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 나라가 임하면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까? 아마도 제자들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묻습니다(1절).

그러자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부르셔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3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과 같이 된다”는 말은 4절에 나와 있듯 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 문화권에서 어린이는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존재감이 낮았습니다. 서로 높아지기를 다투는 세상에서 스스로 낮은 자리로 내려 서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이 사회에서 무시 당하고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사람을 절대적인 가치로 대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5절). 그것도 역시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잘 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사람”에 대한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6절)은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대부분에 해당하는 표현입니다. 그 중에는 사회적으로 무시 당하고 차별 받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이 다수였습니다. “걸려 넘어지게 한다”(6절)는 말은 “믿음을 버리게 한다”는 뜻입니다. 죄짓게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겉으로 하찮아 보인다고 해서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여 그 사람이 믿음을 버리고 죄에 빠지게 하는 도구가 되지 말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면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을 빼앗는 중대한 죄를 저지르는 셈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6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7절)는 현실을 인정하십니다. 죄성으로 인해 우리는 언제나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조심해야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8-9절)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손이든 발이든 눈이든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 있다면 제거해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죄의 근원을 제거 하라는 뜻입니다. 죄 짓게 하는 것은 손이나 발이나 눈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자극적인 표현을 통해 죄의 근원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생명”(8절)과 “영원한 불”(8절) 혹은 “지옥”(9절)을 대조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천국과 영생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지옥이 있고 영원한 형벌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엄연한 사실로 전제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 좋을 대로 상상 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 말씀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영원한 형벌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라면 이 땅에서 아까워할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가르침을 “잃어버린 양의 비유”로써 마무리하십니다(10-14절). 백 마리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는 그 중에서 한 마리가 보이지 않으면 찾아 나섭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은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사람이라도 하찮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누구나 같은 무게와 값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구를 대하든 하나님의 눈으로 대하여 누구에게나 한결 같아야 합니다.

2. 15-35절: 하늘 나라와 용서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로 인해 세상은 꼬이고 꼬입니다. 그것을 푸는 것이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꼬인 매듭을 푸는 지혜를 전해 주십니다. “네 형제”(15절)는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가 아니고 믿음의 형제입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를 말합니다. 그럴 경우,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 공동체를 시끄럽게 하지 말고 먼저 일대일로, 사적으로 해결하도록 노력하라고 하십니다. 만일 그래도 되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문제를 해결해 보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안 될 경우에 한하여 공동체에 알리고 교회의 결정에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돌아설 때까지 멀리하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에 대한 배려를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교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20절)는 믿음의 공동체 즉 교회를 말합니다. 모인 사람의 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모여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진정한 믿음의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결정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승인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전폭적으로 인정할만한 거룩하고 참된 믿음의 공동체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께,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거듭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되겠느냐고 묻습니다(21절). 당시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은 세 번 용서해 주면 충분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바리새파 율법학자들보다 높은 기준을 요구 하신다고 알고 있었기에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21절)라고 묻습니다. 일곱의 완전수입니다.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예수님은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22절)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490번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무한대로 하라는 뜻입니다. 이 대답에 다들 놀랐을 것입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그 ‘무한대의 용서’가 가능해지는 비밀을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당시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액수입니다. 오늘로 하자면 천억 정도에 해당합니다. 왜 그렇게 많은 빚을 지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왕이 그 종에게 빚을 갚으라고 다그치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다 갚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왕이 볼 때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 빚을 없애 주었습니다.

왕에게 그 많은 빚을 용서받고 궁궐을 나가던 중에 그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납니다. 백 데나리온은 오늘로 일만 달러 정도 되는 돈입니다. 왕에게 용서받은 그 종은 자신에게 빚진 친구에게 당장 갚으라고 다그칩니다. 그 친구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했지만 그 종은 결국 그 친구를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왕은 그 종을 하옥시킵니다.

이 비유에서 왕은 하나님을 말하고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은 우리 자신을 말합니다. 빚은 죄를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거듭 거듭 짓는 죄는 490번이 아니라 490000000000번도 넘습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상상할 수 없는 빚은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상상할 수 없는 죄의 양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그 죄를 모두 사해 주십니다. 아무 조건 없이! 그것이 믿는 자가 받은 은혜입니다. 만일 이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행하는 잘못을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내 형제가 나에게 하는 잘못이 아무리 커도 내가 하나님께 지은 잘못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용서의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한다는 말은 내가 받은 용서를 잊었다는 뜻입니다(35절).

묵상:

하나님의 다스림에 마음을 열면 먼저 나의 내면이 변화하고, 내면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땅의 나라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고 대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영원한 가치를 알아 보고 그것에 따라 사람을 대합니다. 땅의 나라에서는 다른 사람을 밟고서라도 높아지는 것이 목표인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의 발판이 되어 줍니다. 그렇기에 땅의 나라에서 무시 당하고 차별 당하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높임 받고, 땅의 나라에서는 높임 받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낮아집니다. 사실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제 위치를 찾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를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는 눈에 보이게 도드라져 보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들어간다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거대한 장벽 즉 우리의 죄가 치워졌다는 뜻입니다. 죄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께 상처를 주고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께 드린 상처를 모두 합하면 일만 달란트에 달합니다. 그 모든 것을 용서 받았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런 은혜를 입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그를 미워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다는 뜻입니다.

복 되어라, 모든 이들을 절대값으로 대하는 이!

복 되어라, 용서의 능력을 아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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