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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7 장 강해 | [하루 한 장] 전도서7장_이름이 기름보다 낫고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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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5 [하루 한 장]“이름이 기름보다 낫고” (전7장)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http://sungminch.com
6장까지 인생의 헛됨을
반복해서 노래한 전도자는
7장부터 시작되는 후반부에서는
그러한 헛됨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더 낫다는 인생의 통찰입니다
이 말은 인생의 끝이 있음을
알고 겸손하게 미래를 대비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지만
이것은 또한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밝혀주는
예언적인 말씀이기도 합니다
좋은 기름인 향유옥합을 깨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던
죄 많은 한 여인의 헌신은
그 여인의 이름을 널리 전하는
복된 소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기쁜 소식이지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보다 훨씬 더 큰 복음이 되었고
사망권세를 뛰어넘는 참 승리로
우리를 살리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죽음 없는 삶은 공허합니다
이름 없는 기름은 무의미합니다
이름을 남기는 생을 소망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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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7장 주석강해설교] 지혜와 어리석음이 대조됨(전 7:1-29)

전도서 기자는 생활 가운데 필요한 참 지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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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rn153.tistory.com

Date Published: 8/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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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7장 & 성경주석 – BIBLE STORY

전도서 7장 & 성경주석. Timberners-Lee 2017. 5. 19. 00:49. <전도서 7장 흐름정리>. 본장은 지혜의 유익과 가치를 가르치는 내용이다. 원래 사람은 정직한 존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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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6/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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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도서 7장 주석

전도서 7장 주석.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 나으며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름’이란 어떤 살마에 대한 단순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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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ntiochministry.tistory.com

Date Published: 9/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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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8(금) “전도서 7:1-29” / 작성: 정한조

본문 전도서 7:1-29 찬송가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 알림 사항 : 2018년에 영성담임목사인 정한조목사가 새벽기도를 화-금요일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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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4/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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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7장 강해 – 네이버 블로그

전도서 7장 강해 · 1.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솔로몬에게 그 지혜가 깨닫게 하셨습니다. · 2.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정직하게 지으셨습니다.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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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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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전도서 7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토브 쉠 미쉐멘 토브 웨욤 함마윁 미욤 히왈도 개역개정,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새번역,1 명예가 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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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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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7장] 한 남자; 예수 그리스도 – 언약성경장로교회

우리는 지금까지 전도서 1~6장 까지 말씀을 공부하면서 우리 인생에 하나님이 빠질 때 허무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음을 배웠습니다. 이제 7장부터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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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venantbpkorea.org

Date Published: 3/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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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7장 주일 설교말씀] 깨닫고 사는 삶(전도서 7:19-22)

안녕하세요. 오늘은 전도서 7장 주일 설교말씀 중에서 깨닫고 사는 삶이라는 성경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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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edesd153.tistory.com

Date Published: 10/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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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7장 강해 설교문] 사는것과 죽는것(전 7:2) – 알쓸잡

안녕하세요. 알쓸잡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은 전도서 7장 강해 설교문 중에서 사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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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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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강해 – 옛신앙

우리는 일심단합하여 참 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 5장: 하나님을 경외함, 재물이 헛됨. 1-7절, 말씀 듣기, 기도, 서원. [1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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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ldfaith.net

Date Published: 1/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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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전도서7장_이름이 기름보다 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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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전도서 7 장 강해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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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11. 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V8dkdgENd4I

[전도서 7장 주석강해설교] 지혜와 어리석음이 대조됨(전 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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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기자는 생활 가운데 필요한 참 지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혜가 없어서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과 행동을 지혜롭게 하여 칭찬을 받습니다. 우리는 영적 지혜가 있어야 하고 육적인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영적 지혜는 구원받는데 필요하고 육적 지혜는 이 땅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갖추어 하나님께 칭찬받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이 대조됨(전 7:1-29)

[1절]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 . . .

본문은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이름이란 사람이 죽은 후에 그에게 붙여지는 이름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경건한 사람, 의로운 사람, 선한 사람 등의 이름이다. 그것은 오래 남는다. 보배로운 기름은 값비싼 향유를 가리킨다. 그것은 잠시 동안은 좋은 향기를 낸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적인 향기에 불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라지고 없어질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이름은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올리운 자로 기억되며,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이며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 기억된다. 아브라함은 믿음과 순종의 사람으로 기억되며, 요셉은 하나님과 동행한 자이며 형통함을 얻은 자로 기억된다. 다윗은 믿음과 찬송의 사람으로 기억되며, 히스기야는 경건한 자로 기억된다. 저들은 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있다.

본문은 또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라고 말한다. 죽는 날은 사람이 일생을 마감하는 날이다. 의인은 그의 의로운 생을 정리하고 결산하며 그의 이름을 남기는 날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셨다. 죽는 날은 또 의인이 죄와 슬픔, 질병과 고통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그러나 출생하는 날은 사람이 생을 시작하는 날로서 어떻게 살지 미지수이다. 믿음으로 살고 의롭게 살면 그의 생이 복되지만, 믿음 없이 살고 죄만 짓고 살면 그의 생은 큰 화가 된다. 예수님을 팔아넘겼던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던 제게 좋을 뻔한 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는 보배로운 기름보다 아름다운 이름을 귀히 여기자. 단지 생일을 축하하지 말고 믿음으로 의롭고 선하게 살다가 죽기를 사모하자.

[2-4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 . .

본문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사람이 잔칫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면 죽음의 문제를 생각할 기회가 없고 경건하고 바른생활, 근신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초상을 당한 집에 조문하러 가면,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죽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유익이 많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진실하고 정직해지며, 죽음을 생각할 때에 죄악 된 일, 하나님 앞에 책망받을 일, 양심에 거리끼는 일, 시간을 낭비하는 일을 버릴 것이다.

본문은 또,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라고 말한다. 사람이 웃을 때는 자기 부족과 연약을 잊어버리고 죽음의 일도 잊어버리기 쉽고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하며 죽음을 대비할 기회를 놓치기 쉽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을 살피며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인해 슬퍼하고 죽음의 문제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의탁할 때 심령에 은혜와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특히 회개의 슬픔은 유익이 많다. 주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4).

그러므로 본문은 또,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라고 말한다. 우매자들은 잔칫집에 빠지지 않고 모여든다. 그들은 현재의 육신적 즐거움을 좋아하고 기뻐한다. 그러나 지혜자들은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참석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기에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더욱 가다듬게 되고 내세를 준비하는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우리는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참석하자.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며 내세를 준비하자.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며, 죄악 된 일을 멀리하자.

[5절]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본문은,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한다. 책망을 좋아하는 자가 없고 책망 자체는 듣는 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무겁게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바른 지적과 책망은 결국 유익을 줄 것이다. 책망을 들은 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고 고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6:23은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라고 말하였고, 잠언 27:5-6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라고 했다. 또 옛날부터 참 선지자는 책망의 설교를 하였다. 예레미야 28:8-9, “나와 너 이전 선지자들이 자고로 여러 나라와 큰 국가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의 계명을 행치 않고 불경건과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우매자의 노래는 듣기는 좋으며 마음을 즐겁게 할지 모르나 유익이 없다. 그것은 전도서 2:2에서 전도자가 웃음을 논하여 미친 것이라고 표현하고 희락을 논하여 저가 무엇을 하는가고 한 것에 딱 맞다. 아모스 6:5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유다 백성이 비파에 맞춰 헛된 노래를 지절거렸다고 증거 하며 책망하였다.

사람의 참 의미와 가치는 하나님 안에서만 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은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풍성한 평안과 행복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유행가 같은 우매자의 노래를 좋아하지 말자. 우리는 오히려 지혜로운 종들과 동료들과 이웃들의 책망과 권면을 좋아하자.

[6-7절]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 . . .

본문은, “[이는]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매자의 노래소리보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더 나은 이유를 보인다.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는 일시적으로는 요란하지만 곧 그친다.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요란스러워도 무가치하고 허무하다.

본문은 또,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라고 말한다. ‘탐학’이라는 원어(오쉐크)는 ‘압제, 토색[강제로 빼앗음], 토색으로 얻은 이익’을 뜻한다(BDB). 이것은 위협하여 강압적으로 빼앗는 이익을 가리킨다. 이것은 일종의 탐심이다. 성경은 탐심을 정죄하며 경계한다. 디모데전서 6:9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라고 말한다.

롯의 아내는 재산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므로 소금기둥이 되었다(창 19:26). 아간은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 또 50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탐하다가 그 가족과 함께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수 7장). 게하시도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탐하다가 나병에 걸렸다(왕하 5장).

또 뇌물은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는 악한 것이다. 출애굽기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신명기 16:19,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우리는 의롭게 번 적은 소득이 복됨을 알아야 한다. 잠언 16:8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매자의 기쁨을 버리고, 또 토색과 탐심, 또는 뇌물을 멀리하며, 불의의 이익을 구하지 말고, 정직하게 번 소득으로 살아가자.

[8절]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본문은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다”라고 말한다. 아무리 큰 일, 좋은 일이라도, 일의 시작은 시작일 뿐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시작이 중요하다는 뜻일 뿐, 그 일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일이 잘 안 되어서 오히려 해가 되거나 수치가 될 수도 있다. 일의 끝은 일이 성취되어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을 말한다. 무슨 일이든지 잘 계획하고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잘 진행하고 치명적 실수를 막고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잘 이기고 완성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일을 잘 성취하려면 인내가 필요하고 또 인내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많은 노력과 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낙심치 않고 오래 참은 자들이다. 농부도 밭 갈고 씨 뿌리고 물과 거름을 주고 김매고 병충해 막고 이렇게 참고 일해야 추수하게 될 것이다. 직장인도 겸손히 참고 일을 배우고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하고 커서 취직하고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삶 전체가 그러하다. 겸손과 인내는 인생의 성공적의 삶의 필수적인 덕이다.

신앙생활도 비슷하다. 주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성공적인 신앙인을 묘사하시기를,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라고 하셨다(눅 8:15). 야고보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라고 교훈하였다(약 5:7-8). 믿음은 인내를 수반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겸손과 인내를 가지고 하자. 세상에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겸손과 인내로 행하면 잘 될 것이다. 신앙생활도 이치가 비슷하다. 우리는 겸손과 인내로 주를 섬기자.

[9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본문은,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라고 말한다. ‘마음’이라는 원어는 ‘영’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은 영의 활동이다. 우리는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물론, 정당한 노가 있다. 불의를 보고 노하는 의분은 정당성이 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가 있다(나 1:6). 예수께서 채찍으로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신 의분도 있다(요 2:15). 핍박하는 악인들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을 호소한 시편의 글들도 이런 의미에서 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과 감정은 지나치고 잘못되기 쉽다. 그러므로 잠언은 미련한 자가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고(잠 12:16) 속히 노하며(잠 14:17) 그 노를 다 드러낸다(잠 29:11)고 말한다. 또 야고보서 1:20은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노하기를 더디 하라고 교훈한다. 그것은 인내의 한 면모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본받는 것이다. 잠언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며(잠 14:29) 슬기로운 자라고 말하고(잠 19:11), 또 그런 자는 용사보다 낫다고 말한다(잠 16:32). 또 주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교훈하셨다(마 5:44).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성내지 아니한다고 말했고(고전 13:4-5),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라고 교훈하였고, 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라고 하였다(엡 4:26, 31-32).

우리는 쉽게, 급히 노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며 우매자의 행위임을 명심하자.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 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며 살아가자.

[10절]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본문은,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라고 말한다. 사람이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비교가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도 단편적인 이야기일 경우가 많을 것이다. 역사에는 항상 이면적 이야기가 있음을 안다.

우리는 옛날이 오늘보다 나았다는 불평 어린 평가를 버리자. 실상, 옛날에도 어려운 일들은 있었을 것이고 더 많았을 수도 있다. 우리는 모든 현실을 겸손히 긍정하고 감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현재 어떤 부족이나 어려움이 있다면, 우리는 그 원인을 생각하며 자신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라면 우리는 즉시 회개하며 그것을 달게 받아야 할 것이지만, 만일 그것이 단순히 하나님이 주신 훈련 과정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려운 현실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과 돌보심을 구해야 할 것이며, 또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건하고 의롭고 성결하게 살면서 미래의 평안을 기대하며 참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 감사할 것들이 많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의 징책하심보다 크시다. 사사기는 111년의 징계의 햇수와 296년의 평안의 햇수를 증거 한다. 시편 30:5는,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예비하셨고(여호와 이레)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셨고(만나와 메추라기) 우리를 인도하셨고(불기둥과 구름기둥) 이곳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에벤에셀).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현실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며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 간구하자.

[11-12절]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 . . .

본문은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라고 말한다. ‘햇빛을 보는 자’는 모든 살아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부모로부터 받는 유업과 유산은 물질적 유여함을 주는 좋은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지혜가 이와 같이 아름답고 유익하고 좋다고 말한다.

그 이유에 대해, 본문은 “[이는]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라고 말한다. 본문은 지혜와 돈이 다 보호하는 것이 되지만, 지혜가 돈보다 더 낫다고 말한다.

돈이 있으면 영양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따뜻한 옷을 입을 수 있고 편안한 집에서 살 수 있고 몸이 아프면 좋은 의사와 약의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또 돈이 있으면 자녀도 좋은 교육을 받게 할 수 있다. 이처럼 돈은 우리의 건강과 우리의 자녀를 보호하는 점이 있다.

이와 같이, 지혜도 우리를 보호한다. 지혜는 잘못된 빚보증을 하지 않게 함으로 재산을 보호한다. 지혜는 우리를 게으르지 않게 함으로 가난으로부터 보호한다. 지혜는 교만하여 서로 다투지 않게 함으로 인간관계를 보호해준다. 무엇보다, 지혜는 우리를 죄로부터 보호해주며 우리의 자녀도 보호해준다.

본문은 특히 지혜가 우리의 생명을 주고 그것을 보존한다고 말한다. 지혜는 영생의 길이다. 지혜를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죄를 버리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게 한다. 잠언 3:13-18은, 지혜가 정금보다 진주보다 귀하며 그 오른편에 장수가, 그 왼편에 부귀가 있고 그 길은 즐거움과 평강의 길이며 마침내 생명나무의 열매 곧 영생을 누리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지혜가 부모의 유산보다 더 귀함을 깨닫고 그것을 사모하며 소유하자.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든 악을 버리며 계명에 순종하자.

[13-14절]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 . .

본문은,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섭리자이시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좋고 나쁜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곧게 할 자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5:7에서,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욥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욥기 1:21,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이것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잠 3:6).

본문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한다. 사람은 내일의 일을, 아니 다음 순간의 일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실을 좋은 날과 힘든 날,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뒤섞어 두셔서 장래 일을 짐작치 못하게 하셨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약 4:14).

본문은 특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형통하고 좋은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그러나 곤고한 날, 즉 어려운 일이 있는 날에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어떤 부족이 없는지, 죄가 없는지 자신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시편 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자신을 반성할 기회를 삼고 회개하고 말씀을 순종케 된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고 인정하자. 특히 곤고한 날, 어려운 일이 있는 날에는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생각하자.

[15-18절]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 . . .

본문은,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長壽)하는 악인이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의인이지만 아벨처럼 다른 사람의 미움과 핍박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자가 있고, 악인이지만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 않고 은밀히, 교묘히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서도 내버려 두심으로 장수(長壽)하는 자도 있다.

본문은 그러므로,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게 자신의 의를 나타내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사람 앞에 드러내는 의는 외식적, 율법주의적, 바리새인적 의가 되기 쉽다. 또 그런 사람은 자신을 크게 여기고 남을 정죄하기 쉽고 그러면 주위 사람들의 반감을 더 쉽게 살 것이다.

본문은 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적당한 악인이 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성을 가진 죄인이지만, 드러난 악인은 사회적 제재를 당하고 감금을 당하고 벌을 받고 심한 경우는 사형도 당한다. 그런 악인이 되지 말라는 뜻이다.

본문은 또한,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라고 말한다. 너무 드러나게 의를 행하고 의인인 척하지도 말고, 또 너무 드러나게 악을 행해서도 안 된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이런 잘못들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를 얻어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 의를 행해도 은밀히 하고 드러날 경우도 자랑치 말고 높은 마음으로 남을 정죄하지 말고, 또 물론 드러나게 악을 행하지도 말아야 한다.

[19-20절] 지혜가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본문은 “지혜가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라고 말한다. 본문은 지혜의 가치와 지혜의 유익을 증거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잠언이 말한 그 지혜인 줄 안다. 그것은 세상적, 육신적 지혜가 아니고, 신적, 천적, 영적 지혜이다.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고 또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즉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함으로 증진되는 것이다.

지혜는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한다. 성읍의 유사 즉 성읍의 관원은 세상에서 지혜와 권세가 있는 자이다. 그는 보통 일반 사람들보다 기억력, 판단력, 언변, 용기가 더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은 자는 성읍의 열 유사보다 더 지혜롭고 더 능력이 있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의 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지혜롭게 되었다고 체험적 고백을 하였다(97-100절). 또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그 지혜가 바벨론의 박사들보다 열 배나 더 나았다(단 1:20).

본문은 “[왜냐하면]( 키 י󰗑)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없음이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참 지혜가 열 유사보다 나은 이유가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왕들도, 관원들도 다 죄인이며 부족한 인생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리 세상적으로 유능하고 권세 있는 자라도, 자신의 무지와 편견과 아집을 이길 수 없고, 세상의 악한 풍조를 이길 수 없고, 마귀의 시험이나 죄의 유혹을 피하거나 이길 수 없다. 사람이 아무리 세상적 지혜가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범죄하고 불행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지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지혜를 귀하게 여기자. 우리는 하나님만 경외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만 사모하고 순종하자.

[21-22절]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 . . .

본문은,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좋은 친구의 의견과 충고를 들을 필요가 있다. 나라의 통치자는 백성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 남의 의견을 듣지 않는 자는 실수하기 쉽고 독선적이고 편협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의 모든 말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말들에는 항상 잘못된 말, 부정적인 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들의 말만 들으면 무엇을 확신하고 용기를 가질 수 없고 낙심하여 아무 일도 못하기 쉽다. 사람들의 말만 듣는 자는 어린이 동화의 이야기처럼 결국 당나귀를 지고 가는 자와 같이 될 것이다.

느헤미야 6장에 보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의 중건을 위해 유대 땅에 총독으로 왔을 때, 산발랏, 도비야, 게셈 등은 그를 대적하였고 그를 해치려 하였다. 그들은 느헤미야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하고 왕이 되려 한다는 거짓말을 퍼뜨렸다. 그것은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고 그와 그의 동료들의 손을 피곤케 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었다.

오늘날도 사탄은 하나님의 종들을 낙심케 하여 하나님의 바른 일을 못하게 하려 한다. 사도 바울은 전도사역에서 매 맞음, 갇힘, 자지 못함, 먹지 못함 등 많은 고난을 받았고 또 영광도 얻고 욕도 들었으며 악한 이름도 얻었고 아름다운 이름도 얻었으나(고후 6:5-8) 낙심치 않았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확신하여 그 뜻을 행하는 것이다(엡 5:15-17).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사람들의 의견을 조금 들을 필요는 있으나 그 모든 말에 마음을 쓸 것은 없다. 우리는 오직 성경을 믿고 행하자.

[23-24절]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 . .

본문은,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의 모든 일들 곧 하나님의 섭리의 일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솔로몬은 인간적 지혜로 세상의 모든 일을 이해하려고 힘썼고 인간적으로 지혜자가 되기를 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참 지혜에 이르지 못했고 참 지혜는 그와 거리가 멀었다.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라는 말에 ‘무릇 된 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그 이유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솔로몬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그 이치와 그 이유가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하고 파악하기에 너무 멀고 너무 깊다고 고백한다. 사람으로서 그것을 능히 통달할 자가 없다고 깨달은 것이다.

본문은 사람의 지혜의 한계성 곧 인간의 무지함을 증거 한다. 사람이 무엇을 다 아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며 또 하나의 무지(無知) 일뿐이다. 사람이 우주만물에 대해 가진 지식은 지극히 미미하고 지극히 단편적인 것일 뿐이다. 우주는 사람이 파악하기에는 너무 광대하고 광활하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이 파악할 수 없이 높고 깊으시다. 여기에 인간의 겸손과 참 경건의 시작이 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천년은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다고 고백하였다(시 90:40. 이사야는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라고 증거 하였다(사 40:15, 17).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하시는 모든 일들에 대해 인간의 무지함을 깨닫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오직 겸손히 엎드리며 그를 섬기자.

[25-26절]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 . . .

본문은,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마음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다”라고 말한다. 후반부의 원문은 “어리석은 것 곧 미련한 것과 정신없는 것(혹은 미친 것)의 악”이라는 뜻이다. 세상에는 어리석고 악한 일들, 정신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 솔로몬은 그 모든 일들을 살피고 연구하고자 하였다.

본문은 또,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고 말한다. 남자가 아내를 잘 만나는 것은 큰 복이다. 어진 아내는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그 값은 진주보다 귀하다(잠 19:14; 31:10). 그러나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줄 같은 여인이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죄악과 사망으로 이끈다.

솔로몬은 그런 여자를 “사망보다 독한 자”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의 실패의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가 나이 늙었을 때 왕비들은 그의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다(왕상 11:4). 그는 잠언에서 다투는 여인에 대해 여러 번 말했다.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 같다고 말하였고(19:13; 27:15) 그런 여자와 큰 집에 살기보다 광야나 지붕 모퉁이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했다(21:9, 19). 그런 여자의 남편은 마음에 큰 고통을 당하고 결국 불행에 이른다.

본문은 또,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라는 원어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KJV, NASB, NIV)’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는 그런 여인을 피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자는 그에게 잡혀 결국 큰 낭패를 당할 것이다.

우리는 마음이 올무 같은 자가 되지 말고 선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자가 되어 마귀의 시험을 피하자.

[27-29절] 전도자가 가로되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 . .

본문은, “전도자가 가로되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참으로 깨닫고 인생에 대해 깨닫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중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질 수 있는 지혜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고전 1:21).

본문은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한다. 솔로몬은 천 명의 남자들 중에 겨우 한 명을 찾았고 천 명의 여자들 중에서는 하나도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여자들은 아마 그가 거닐었던 700명의 왕비와 300명의 첩들을 가리켰는지도 모른다. 실상, 온 세상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참 지혜자이시다. 그의 모친 마리아까지도 그와 비교할 수 없는 비천한 죄인에 불과하다.

본문은 또,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원문–‘그들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꾀’라는 원어(퀴쉬보노스)는 ‘고안들, 계획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본래 정직하게 만드셨다. 사람은 본래 선도 악도 아닌 중성 상태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고 선한 상태로 지음을 받았다. 그것이 의와 거룩의 하나님 형상이다(엡 4:22-24). 그러나 사람은 범죄함으로 많은 꾀를 내었고, 많은 악한 고안들과 계획들을 내었다. 창세기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세기 8:21,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사람은 본래의 거룩하고 선한 하나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며 성화이다. 우리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죄성을 이겨야 한다.

[사무엘상 2장 히브리어 주석 강해]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삼상 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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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7장 & 성경주석

<전도서 7장 흐름정리>

본장은 지혜의 유익과 가치를 가르치는 내용이다. 원래 사람은 정직한 존재로 지음 받았으나 스스로 간사한 꾀를 많이 낸다(29절). 그러므로 온갖 탐욕과 죄악 가운데서 일생을 보내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나은 이유는 인생의 비극을 통해 진지하게 삶을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2절).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슬픈 일도 만나고 기쁜 일도 만난다. 하나님이 이 두 가지 일들을 번갈아 겪게 하시는 것은 이러한 갖가지 일들을 통해 지혜롭게 대처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기 위함이다(14절). 물론 이 지혜는 얄팍한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얻게 되는 신령한 지혜를 가리킨다.

<전도서 7장 줄거리>

1. 헛된 삶을 값진 삶으로 바꾸어 놓는 아름다운 이름과

2. 금욕과

8. 인내와

11. 지혜를 갖는 것임.

23. 지혜자가 되는 어려움.

<전도서 7장 개역한글>

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5.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6. 우매자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7.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

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11. 지혜는 유업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12.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13.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15.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18.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19. 지혜가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21.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22.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

23.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24.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25.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26.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27. 전도자가 가로되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28.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29.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전도서 7장 성경주석>

7:1 아름다운 이름.

참조 잠 22:1. 품성에 근거를 둔 좋은 평판은 그 값을 측량할 수 없는 재산이다.

“내게서 내 아름다운 이름을 훔쳐 간 사람은 자신을 부하게 못할 것을 내게서 강탈해 가고 진짜 나를 가난하게 만들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수여될 개인적인 상들 중 하나는 세상을 이긴 모든 이에게 약속된 “새 이름”이다(계 2:17).

7:1 보배로운 기름.

“보배로운”으로 번역된 단어는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할 때의 “아름다 운”과 같은 단어이다. “기름”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창 28:18; 35:14; 출 25:6; 29:2에서는 “기름”으로, 잠 27:9, 16; 전 9:8; 10:1에서는 “향기름”으로 번역되었다(참조 아 1:3). 좋은 비누를 구할 수 없었던 동방에서 향기름은 매우 값진 것이었다(참조 룻 3:3; 삼하 12:20). 히브리어에서는 이름이라는 단어 (s∨em)과 “기름” 혹은 “향기름”이라는 단어 셰멘(s∨emen)의 발음이 비슷하다.

7:1 죽는 날.

훌륭한 삶을 살아서 좋은 평판을 얻은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었으므로, 첫 구절에 대한 두 번째 구절의 평행구적 성격이 분명해진다. 출생 시에 그의 삶이 앞에 놓여 있으나 그는 함정과 실망과 슬픔과 좌절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어떤 배가 항해를 시작하여 항구를 떠날 때는 항해 중에 만날지도 모를 위험들에 관하여는 거의 아무런 통고를 받지 않고 출발한다. 대양을 가로질러 안전한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들어올 때 배는 기쁨으로 영접을 받는다.

7:1 출생하는.

문자적으로 “그의 출생의 날.” 사람의 출생은 70평생(시 90:9, 10)의 짧은 삶의 시작이지만, 죽음은 새 땅에서 시작될 영생(눅 20:36; 고전 15:51~55)과 안식(계 14:13)과 최고의 만족(계 7:16)과 현세의 고통(고후 4:17)과는 전혀 다른 영원한 영광의 서곡일 수 있다.

7:2 초상.

유대인들의 애도 기간은 7일이었고(창 50:10), 그때에는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울음꾼들이 참예했다(막 5:38; 요 11:19, 31).

7:2 잔치.

혼인잔치도 7일간 계속되었고(창 29:27), 애도의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하였다(롬 15:12; 참조 갈 6:2).

7:2 모든 사람.

문자적으로 “각 사람.” 사람이 자신의 창조주를 만날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 사는 것은 사람을 진지하게 만든다. 일생을 통하여 그는 창조주를 만나는 그 엄숙한 날을 위하여 준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7:3 슬픔.

경박함은 품성을 강하게 하지 못한다. 헬라에는 이를 확인하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슬픔을 당하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참조 히 2:10; 12:1~11).

7:3 마음.

슬픔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변장된 축복일 경우가 흔히 있다. 고난의 풀무불은 동기를 깨끗하게 하고, 타인에 대하여 동정적이게 하는 포용력을 만든다.

7:4 지혜자.

지혜자는 삶의 진지한 문제들을 돌아보고 거기서 도덕적, 영적 교훈을 깨닫는 법을 배운다. 반면에 우매자들은 삶의 좀 더 경박한 면에 끌려 오락 속에서 만족감을 구하고, 내세에 관한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7:5 책망.

5절은 4절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여호와의 “책망”은 그 백성의 보호벽이다.

7:5 우매자의 노래.

오락 장소에서 하는 상스럽고 아무런 교훈이 되지 않는 노래들을 뜻하는 것이 분명하지만(참조 암 6:5), 우매자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일종의 권고에 관한 언급이기도 하다.

7:6 웃음소리.

우매한 자의 웃음은 헤프고 시끄럽고 무의미하다(참조 욥 20:5).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우매자의 박수갈채에 대한 언급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무 의미도 없고 그 배후에 아무 책임도 없기 때문에 하등의 가치가 없다.

7:6 타는 소리.

동방에서는 흔히 좋은 연료감이 부족하였으므로 가랑잎이나 나뭇가지를 철저히 주워 모아서 음식을 요리하거나 집안을 훈훈하게 하는 데 사용하였다. 가시나무나 나뭇가지 혹은 마른 곡식 그루터기는 빨리 타면서 소리를 내지만 음식을 요리하고 방을 데울 만한 꾸준한 열은 내지 못한다(참조 시 58:9; 118:12; 사 9:18).

7:7 탐학.

(「제임스왕역」에는 “oppression”[압제]로 되어 있음-역자 주). 같은 히브리어 단어가 겔 22:12에서는 “토색”으로 번역되었다. 그것은 축재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속여 그 재물을 빼앗을 기회와 능력을 잔인하게 이용하는 것을 언급한다.

7:7 우매하게.

이 말은 “타락한”이란 뜻이다. 만약 어떤 현인이 압제와 탐학의 죄에 빠지면 그는 타락하게 될 것이고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을 것이다.

7:7 뇌물.

(「제임스왕역」에는 “gift”[선물]로 되어 있음-역자 주). 이 말은 “뇌물”이라는 뜻이다. 뇌물을 받음으로 사람의 판단력은 흐려지고 무력해진다(참조 출 23:8; 신 16:19; 잠 15:27). “마음”(heart, 「개역한글판」에는 “명철”로 되어 있음-역자 주)은 이해력의 상징이며, 사람의 도덕성을 상징하기도 한다(호 4:11).

7:8 일.

“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말” 혹은 “의견”이라는 뜻으로 더 자주 사용된다. 말 혹은 의견이 끼치게 될지도 모를 최종적인 영향을 미리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7:8 참는 마음.

“참는”으로 번역된 단어의 어근은 “오래 계속되다”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참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문자적으로 “마음이 오래 계속되는” 사람이다. 대조적인 표현은 “마음이 조급한”(잠 14:29)이다. 비슷한 용례가 신약에 나타나는데, 히 6:15에는 “오래 참아”로, 약 5:8에는 “너희도 길이 참고”로 되어 있다. 그것은 문자적으로 “오래 견디는 마음”이다.

7:8 교만한 마음.

문자적으로 “높은 마음” 혹은 “높여진 마음”이다(참조 시 138:6; 사 5:15; 10:33; 렘 13:1~15).

7:9 급한.

곧 “평온을 잃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불안한.” 사람의 감정은 다스려서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참조 약 1:19).

7:9 노.

참조 엡 4:26, 31; 딛 1:7.

7:9 머무름이니라.

노한 마음에서 나온 말과 행동은 종종 큰 상처를 입히고 잊어버리기가 매우 어렵다. 그리고 그것들로 해를 입힌 자는 흔히 오래 기억된다(참조 잠 14:33).

7:10 옛날.

연단받지 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흔히 현재가 과거보다 훨씬 더 시련이 많다고 생각하므로 성미가 급하고 까다로워진다. 노인들도 쉽게 그런 태도를 갖게 되고, 지난날의 어려웠던 일들이나 자신의 결점들까지 잊어버리는 것 같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습관적으로 애굽에서의 이전 생활을 돌아보았다. 욥도 비슷한 약점을 드러냈다(욥 29:2). 스 3:12; 학 2:3에 묘사된 노인들의 태도와 또 시편의 시인의 태도(시 77:5~9)를 비교하라.

7:11 지혜는…아름답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지혜는 가장 좋은 유산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유산은 지혜롭게 가장 잘 이용하면 이중의 복이라고 본다.

7:12 보호하는 것.

즉 “보호.” 이 절의 첫 부분은 문자적으로 “그늘 속에 지혜가 있고 그늘 속에 은이 있다”로 해석된다. 지혜와 돈은 비록 같은 종류는 아니지만 둘 다 피난처와 도움의 길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부자이면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중의 피난처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늘”은 위험을 피하는 피난처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일반적인 비유이다(시 17:8; 91:1; 사 32:2). 재물도 때로는 생명을 구할 수 있고(잠 13:8), 지혜도 성읍을 건져낼 수 있다(전 9:15). 그러나 재물로는 영원한 구원을 살 수 없고(시 49:6, 7), 순수한 마음의 평화도 줄 수 없다(눅 12:15). 참 지혜는 사람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할 수 있다(시 111:10; 참조 욥 28:28). 약 3:17은 참 지혜에 관해서 감동적인 말로 알려 준다.

7:12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더욱 아름다움”으로 번역된 말은 전도서에서 12회 사용되었다. 돈에 대한 지식의 우월성과 관련해서 하는 말이므로 여기서는 “장점”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7:12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제임스왕역」에는 “giveth life”[생명을 줌이니라]로 되어 있음-역자 주). “살게 해 주다”가 더 낫다. 부요(富饒)함은 그 부한 사람이 죽는 원인이 될 수도 있지만, 지혜는 위기의 때에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지혜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과도한 식욕을 막아 줄 수 있지만, 부유함은 사람을 지나친 식욕에 탐닉하게 하여 질병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한 육체적 생명 이상의 것이 암시되어 있다. 최상의 의미에서 지혜는 사람을 참된 경건을 실천하도록 인도한다(잠 3:13~18; 8:25). 영적인 영역에서는 불멸로 인도하는 일, 곧 생명을 올바른 상태로 보존하는 일이 온전히 성취되었다(요 5:21; 6:63).

7:13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

생애를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이 섭리하신 길(참조 욥 9:12; 11:10; 12:14).

7:13 보라.

(「제임스왕역」에는 “consider”[생각하라]로 되어 있음-역자 주). 문자적으로 “쳐다보라.”

7:13 굽게 하신 것.

아마도 삶의 다양한 경험들과 그 고통과 역경과 시련들과 아픔들에 관한 언급일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도 한나(삼상 1:5, 6)나 바울(고후 12:7)처럼 져야 할 십자가가 있었다(창 15:2, 3).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전진하며(롬 11:36; 고후 4:18; 히 2:10),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된다(욥 9:12; 11:10; 12:14).

7:14 기뻐하고.

문자적으로 “행복 가운데 있고.” 일이 잘 풀려 나갈 때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에스더 시대에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의 경험(에 8:16, 17)과 비교하라.

7:14 곤고한 날에는.

문자적으로 “불행한 날에는…알라.” 만약 일이 우리의 원대로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불평하거나 짜증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의심하고 낙망하는 것은 죄이다.

7:14 …하게 하사.

문자적으로 “…하게 했다.” 하나님은 일의 균형을 알맞게 잡아 주신다. 번영이 있으면 그 다음엔 역경이 뒤따른다. 사람이 걱정 근심이 전혀 없이 사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참조 욥 1:21; 2:10). 사람은 매일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잠 4:26). 참된 행복은 물질적 소유의 다과(多寡)에 있지 않다(눅 12:15; 참조 마 6:33, 34).

7:14 그 장래 일을.

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내다볼 수 없고, 닥칠지도 모를 상황들을 전혀 통제할 수도 없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사람의 특권인 것은 그분의 손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롬 8:28; 참조 창 42:36).

7:15 내 헛된 날.

즉 나의 날아가고 있는 날들(참조 1:2).

7:15 모든 일.

문자적으로 “전체.”

7:15 멸망하는.

히브리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의인을 축복하심으로 장수케 한다고 믿었다(출 20:12; 신 4:40; 잠 3:1, 2, 13~16; 4:10; 참조 시 91:16). 신약은 지상에 있는 의인의 생명에 관하여 또 다른 측면을 제시한다(마 5:10~12; 요 17:15; 딤후 3:12).

7:15 장수하는.

욥도 같은 불평을 한다(욥 12:6; 21:7; 참조 시 37:7). 의인 아벨은 젊어서 죽었지만, 악인 가인은 나이 많도록 살았다. 외견상 사물의 당연한 질서가 전도된 듯한 이 사실은 역사를 통하여 각 시대의 의인들의 마음을 당혹케 하였다. 히브리인들은 일반적으로 악인들이 초년에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시 37:9, 10; 55:23; 58:3~9). 물론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는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마 16:27; 참조 계 20:12~15).

7:16 지나치게 의인.

밖으로 드러난 몸가짐과 말씨만을 보고 평가하는 율법주의를 경계하는 말이다. 참 신앙은 거룩한 하나님(레 19:2; 엡 3:14) 그리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엡 3:17~19)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7:16 지나치게 지혜자.

솔로몬은 지금까지 지혜의 가치에 관하여 말해 왔다. 이제는 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심하게 하는 태도에 관하여 경고한다. 사도 바울도 같은 권고를 한다(롬 9:20~23).

7:16 패망케 하겠느냐.

히브리어 동사형이 재귀동사이므로 그런 행동이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강조해 준다. 비유 가운데 바리새인은 독선과 인간적인 지혜로 스스로를 패망케 한 자의 본보기이다(눅 18:9~14).

7:17 지나치게 악인.

모든 금지 조항을 벗어 던지지 말라. 그렇게 하면 결국 성령께서 더 이상 진정한 회개로 이끌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일을 삼가라(시 10:11; 참조 말 1:2, 6; 2:17; 3:8, 13).

7:17 우매자.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고, 하나님이 그가 하는 일을 보지 않으신다는 믿음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자는 어떤 행동에 너무도 굳게 사로잡히기 때문에 영적 문맹(文盲)이 되어 결국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시 14:1).

7:17 기한 전에.

악이 지나치면 홍수 전 시대 사람들(욥 22:16)과 그 후시대의 악인들(시 55:23; 잠 10:27)처럼 초년에 죽음을 초래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7:18 잡으며.

지나친 행동이나 경솔한 행동을 피하라는 권고이다. 삶에서 중용은 멋진 규칙이다. 극단은 일반적으로 위험하다.

7:18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참 목적을 성취시키고 인생을 끝까지 잘 경영해 나가는 능력은 여호와를 경외할 때에만 가질 수 있다(느 5:9; 욥 28:28; 시 111:10; 사 33:6).

7:19 지혜가…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참으로 현명한 사람은 위로부터 오는 지혜로 마음을 채움으로써 승리의 삶을 쟁취한다. 여기서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라고 번역된 것과 같은 히브리어 동사가 “이기다” 혹은 “이겼다”로도 나타난다(삿 3:10; 6:2; 시 9:19; 참조 잠 24:5).

7:19 성읍 가운데.

옛날에 마을의 모든 문제를 의논하고 판결한 마을 장로들의 회의와 비교되고 있다. 힌두교 마을에서는 같은 형태의 회의가 존속되고 있고, 그 회의체를 일컬어 판취(panch) 즉 “다섯”이라 하는데, 이는 마을 공동체의 규율을 강화하기 위하여 선택된 다섯 장로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7:19 열 유사.

문자적으로 “열 사람의 치리자.” 같은 히브리어 단어가 창 42:6에서는 “총리”로, 전 10:5에서는 “주권자”로, 단 5:29에서는 아람어 “치리자”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7:20 죄를 범치 아니하는.

참조 왕상 8:46; 잠 20:9; 롬 3:23; 요일 1:8.

7:20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사람에 관해서 말한다면 의로운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가 더 좋은 번역일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아브라함과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때로는 통탄할 만한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는 실수를 극복하고 승리를 얻을 수 있다(참조 요일 3:6; 5:4).

7:21 사람의 말.

다른 사람이 한 말이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성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7:21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

정(情)에서 노여움이 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의견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전 4:3, 4).

7:22 저주한.

문자적으로 “경히 여기다”, “하찮게 여기다” 또한 “멸시하다”, “명예를 손상시키다.” 여기서는 “비방하다”, “멸시하는 말을 하다”라는 뜻이다.

7:23 나를 멀리하였도다.

참조 욥 28:12~28.

7:24 깊고 깊도다.

참조 욥 11:7~9; 롬 11:33.

7:25 내가…알고자 하였더니.

문자적으로 “나 곧 나의 마음까지도 알고자 하여 돌아보았더니.” 지혜를 찾아 구하는 그의 진지함을 나타내는 강세적 표현이다.

7:25 명철.

이렇게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27절에서 “이유”로, 9:10에서는 “계책”으로 나타난다. 대하 26:15에서는 이 단어의 여성형이 “기계”로, 전 7:29에는 “꾀”로 번역되었다.

7:26 포승.

“포승”으로 번역된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들릴라가 삼손을 묶기 위하여 사용한 “끈”을 언급하는 데 사용되었다(삿 16:8). “올무”와 “그물”과 “포승”은 아주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여자를 묘사한다(참조 잠 5:22; 22:14).

7:26 여인.

참조 잠 7:5~23.

7:26 하나님을 기뻐하는.

문자적으로 “하나님 앞에 선한.”

7:27 낱낱이.

문자적으로 “하나하나.” 참조 렘 5:1~5.

7:28 일천.

대개 어림수로 사용되었다(참조 출 20:6; 34:7; 시 105:8). 솔로몬이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온전한 남자가 흔하지 않다는 것이다.

7:28 여인.

온전한 여인이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을 솔로몬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남자들 중에서보다 여인들 중에서 찾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천 명의 처첩을 거느린 솔로몬의 경험, 그들 중 다수가 이방 여인들이었으며, 그들은 분명히 모두 서로 질투하며 다투었을 것이며, 대체로 그런 가정 사정이 늘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솔로몬에게 끝없는 어려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런 어려움들에 대해서 그는 복잡한 결혼을 하게 된 자기 자신을 책망하기보다는 여인들을 비난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참조 창 3:12).

7:29 정직하게.

“곧다”, “바르다”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도덕적인 정직을 일컫는 말이다.

7:29 꾀.

같은 단어가 대하 26:15에서는 “기계”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은 전쟁 때 돌을 발사하는 기계 혹은 장치이다. 그 동사의 어근은 “생각하다”, “고안하다”, “발명하다”를 의미한다(참조 암 6:5). 인간은 도덕적으로 정직한 원래의 상태로부터 타락하였고, 그 자체가 반드시 악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사람을 부도덕으로 몰고 가는 그런 수단으로 이용되는 일들을 도모하는 데 익숙해졌다.

참고자료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6권, 시조사.

– 「열린노트성경」, 아가페출판사.

[스크랩] 전도서 7장 주석

전도서 7장 주석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 나으며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름’이란 어떤 살마에 대한 단순한 외적인 회칭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대변

하는 것으로도 쓰였던 바, ‘아름다운 이름’이란 그 사람에 대한 훌륭한 ‘명성’을 가리

킨다(Luther, M.A.Eaton, Lange, G.A.Barton, T.H. Leale). 히브리인들은 자신의 이

름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을 대단히 명예로운 일로 간주했다(8:10;욥 18:17;잠

10:7). 그리고 ‘기름’이란 일반적으로 팔레스틴 지경긔 감람나무 열매에서 채취하는

식물성 기름을 말하는데, 이는 그 용도 면에서 여러 가지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1(1) 식용(출29:2,23;레 2:1,2,4-7), (2) 등화용(출 25:6;27:20), (3) 의료용(사

1:6), (4) 화장품용(삼하 14:2;시 23:5), (5) 향유용(눅 23:56) 등이다. 특히 이는

팔레스틴 지역과 같이 건조한 기후 여건 속에서는 그 몸에 기름을 발라 향기를 내는

데 유용하게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룻 3:3;삼하 12:20;시 45:7,8;암 6:6 참조). 또한

본절 후반절의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란 전반절의 의미와 연관되는 듯이

보인다. 즉 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좋은 명성을 쌓으며 살다가 죽는 것이 어리석고

우매한 가운데 고통과 고난을 당하며 살지도 모르는 삶의 시작이 날보다 낫다는 것이

다(D.R. Glenn). 그러나 전도자는 삶보다 죽음을 더 애찬하는 염세 주의자로서 말한

것은 아니다. 왠냐하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도자는 인간의 모든 삶의 축복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3:13;5:!8), 인간의 본분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지키

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12:13). 단지 여기서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명성

을 얻는 지혜로운 삶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 유심(留心)하리로다 – ‘초상

집’이란 문자적으로는 ‘애곡하는 집'(the house of mourning, KJV, RSV)이다. 그리고

‘잔치집’이란 술을 마시며 희락을 즐기는 곳으로서 암시되어진다 이와 같은 맥락에 근

거하여 본절은 헛되고 허무하게 쾌락을 즐기면서 사는 겁소다인생에 대해 보다 진지하

고 숙연하게 생각케 함으로 유익하고 보람된 인생을 보내는 것이 더 낫다는 의미이다

(4절)

=====7: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이 얼굴에 근신함으로 … 됨이니라 – 전후 문맥상 역시 앞절

(2절)과 연관도니가 내용으로 보인다. 여기서 ‘슬픔’이란 단순히 고난이나 손해 등으

로 일낳 슬픔이라기보다는 2절에 암시된 바와 같이 죽음 또는 그로 인한 애곡을 보고

서 느껴지는 숙연한 슬픔을 뜻하며, ‘웃음’ 역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보다는 육신적

희락을 즐기는 데서 얻어지는 쾌락적, 일시적 웃음을 뜻한다(2:2-10). 따라서 본절은

인생에서 보게 되는 숙연한 슬픔은 육체적 쾌락에서 얻어지는 가벼운 웃음과는 달리

삶의 궁극적 의미를 상고케하여 더욱 진지하고 보람된 생(生)을 결단케 하기 때문에

좋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 있느니라 – 1-3절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구

절로서, 지혜자는 삶의 의미와 목표를 늘 진지하게 상고하는 반면에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어 단순히 순간 순간 육체적 희락만을 즐기고 웃음을 추구한다는 뜻

이다.

=====7:5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 나으니라 – 본절도 역시 앞절(4절)처럼 그

의미에 있어서는 계속 전문(前文)들과 연관된다 하겠다. 책망은 들을 당시에는 감정

을 상하게 하는 것처럼 느껴지나 종국적으로는 잘못되고 우매한 길을 벗어나 지혜로운

길로 접어들게 한다. 반면 우매자의 노래 소리는 들을 때에는 기쁜 것 같고 육감적으

로 상쾌한 것 같으나 결국에는 일시적, 육체적 희락 속에선 헛되고 허무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7:6

우매자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 이것도 헛되니라 –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나

무가 희귀하여 가시나무나 풀, 보리, 그루터기 등을 땔감으로 사용하였는데(시

58:9;120:4;마 6:30 참조), 특히 가시나무는 쉽고 빠르게 그러나 요란한 소리를 내면

서 타지만 이내 사그라져 꺼지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이 소리는 헛되고 요란할 뿐

실속이 없는 소리이다. 이것은 우매자의 웃음 소리가 겉으로만 요란할 뿐 실속이 없

고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7:7

탐학(貪虐)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 망케하느니라 – 원문에 의하면 본절 서

두에는 연결사 ‘키'( )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해석은 각양 각색이다. (1)

원인을 나타내는 연결사이다(NASB, Hengstenberg, Hitzig). (2) 본절이 앞절들과 하

등의 유사한 연관성이 없으므로 이를 ‘그러나’와 같은 부사로 본다(Ewald, Elster).

(3) 강조걱인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다(욥 6:21;사5:7, Lange). 영역본 KJV, RSV 등도

이를 ‘확실히'(surely)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다. (4) 원인을 나타내는 연결사로 보기

는 하나 앞절과 본절 사이에는 또 다른 구절이 빠져 있다(Delitzsch). 그러나 우리는

문맥상 이를 원인을 나타내는 연결사이되 특히 5절 내용과 연결됨을 암시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 같다. 즉 본적의 원인 때문에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5절)

낫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탐학’의 히브리어 ‘오쉐크'( )는 ‘압제’

(opperssion, KVJ, RSV, NASB), ‘강탈’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후반절은 출 23:8;신

16:19;잠 15:27과 유사하다. 성경에서 ‘뇌물’을 의인의 눈을 멀게 하는 것 또는 명철

을 흐리게 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뇌물이 그 하나님의 공의성을 훼소니키고 공

정한 판단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7: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 나으니 – 본절의 상,하반절은 내용상 서

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 같다(Lange). 즉 어떤 일을 시작해서 그 과정을 인내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좋은 결과를 유출해 낼 경우 그 끝은 처음보다 낫다는

뜻 혹은 어떤 일을 끝까지 마감하는것이 시작만 거창하게 하고서 중도에 그만 두는 것

보다 낫다는 뜻이다(Finishing is better than starting, LB). 이는 곧 “나중까지 견

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케 한다. 한편 후반절의

‘마음’에 해당하는 ‘루아흐'( )는 ‘영'(spirit)을 뜻하며 ‘참는 마음’과 ‘거만한

마음’에 대해 일반적으로 영역본들은 ‘영 안에서 참음'(the patient in spirit, KJV,

RSV ; partience of spirit, NASB)과 ‘영 안에 거만함'(the proud in spirit, KJV,

RSV ; haughtiness of spirit, NASB)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7: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 머무름이니라 – 본절도 문맥상 앞절(8절)과

연관되는 것으로 본다(G.A.Barton). 전반절에 대해서 대부분 영역본들은 ‘너의 영 안

에서 급하게 노를 발하지 말라'(Be not hasty in thy spirit to be angry, KJV ; Do

not ve quickly provoked heart to be angry, NASB)로 번역하고 있다. 성급히 화를

내는 것은 정의의 의분과는 달리 인격에 대한 통제를 잃은 것으로서 결국 죄악을 낳고

만다(창 4:5;삼 삼 18:8). 특히 오늘날과 같이 모든 것이 급속하게 변해가는 스피드

시대에는 본절 말씀이 더욱 절실하다 하겠다(욥 5:2;잠 12:16).

=====7: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 지혜가 아니니라 – 주어진 현

실 감당해야 할 현 시대의 사명을 도외시하고 지나간 시절만 생각하는 나약하고 어리

석은 삶의 태도를 책망하는 말씀이다(Eaton). 한편 본절을 앞절 특히 8절의 내용과연

결시켜 해석해 볼 수 있다. 즉 어떤 일을 시작해서 좋은 결과를 유출해 낼 때 그나중

이 처음보다나을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일을 시작했던 옛날이 일의 결과를 낸 오늘

보다 낫다고 하는 것은 좋은 결과를 유출해 내지 못했다는 증거이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는 뜻이라 하겠다.

=====7:11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 … 유익하도다 – 이는 지혜의 유익성과 보배로움을 언

급한 말인데, 여기서 ‘지혜’는 2:12-16에서 암시되어진 바와는 달리 하나님의 지혜,

신앙에 의해 얻어지는 신성한 지혜를 말하는 것 같다. 본절에서 ‘유업’이란 ‘나할라’

( )로서 가나안 땅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물려받는 ‘기업'(출 6:8) 또는 부

모로부터 물려받는 상속 재산을 의미하는데, ‘유업같이’에 대해서는 그 의견이 두 가

지로 나뉜다. (1) 이는 한글 개역 성경처럼 ‘유업과 같이'(like an inheritance,

NIV)를 의미한다(2:16;욥 9:26, Lange, Zockler). (2) 이는 ‘같이'( , 임)라는 말

이 ‘…과 함께'(with)라는 말로 번역되는 바, ‘유업과 함께'(with an ingeritance,

KJV, RSV, NASB)를 뜻한다(70인역, T.H. Leale, D.R. Glenn, G.A. Barton, Wycliffe).

(1)을 취할 경우,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나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처

럼 귀하다는 뜻이며, (2)의 경우 지혜는 그 자체로서도 귀하고 빛나나 유업 즉 재산과

함께 있을 때 그 재산을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하는 바 더욱 빛나고 가치가 있게 된다

는 뜻이 된다. 이중 어느 쪽을 택해도 본절 이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7:12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 보존함이니라 – 지혜의 유용성의 탁월함을 재

물과의 비교를 통해 묘파(描破)한 구절이다. 원문에 의하면 본절 서두에는 연결사

‘키'( )가 있어서 본절이 앞절으 이유를 설명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본절에서 ‘보

호하는 것’에 해당하는 ‘첼'( )은 ‘그늘'(shadow)을 뜻하나 영역본들은 이와 연관

시켜 ‘보호'(protection, RSV, NASB), ‘방어'(a eefence, KJV)를 뜻하는 것이로 번역

했다. 한편 후반절의 말씀은 잠 3:18,22;8:35의 말씀과 그 맥을 같이한다 하겠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 하나님을 겨외하고 신앙함으로 얻어지는 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어리석고 멸망으 길로 가는 것을 막어주고 오히려 의와 생명의 길로 인도해 준

다는 것이다(잠 2:20).

=====7:13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 곧게 하겠느냐 – 이는 1:15;6:10의 말씀과 유사

하며 내용상 8,9절과 연관시켜 볼 수도 있겠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

들을 작정, 주관하고 계시는 바 그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들은 성급하고 인내하지 못

하는 자세로 하나나가의 역사하시는 일에 대항하거나 거역하지 말고 순응해야 함을 암

시해 준다는 말이다.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 본절은 내용상 앞절(13절)

과 연관되며 그 의미 역시 인간사에서 임의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닌정하라

는 말씀으로 보인다(D.R. Glenn). 여기서 ‘형통한’에 해당하는 ‘토브'( )는 ‘좋

은’, ‘선한’, ‘아름다운’의 뜻을 갖는다(2:1 참조). 그리고 ‘기뻐하고’도 문자적으로

는 역시 그 원형이 ‘토브’이다. 또한 ‘생각하라’의 히브리어 ‘라아'( )는 ‘보

다’, ‘관찰(주시)하다’, ‘생각(숙고)하다’ 등의 뜻을 갖는다.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

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인다. 혹자는 바로 뒷구절 즉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나(Lange), 이보다는 하나님이 곤고케 한신 목적, 이유 등

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라는 뜨승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다(D.R. Glenn). g

한편 후반절의 ‘장래 일’이란 문자적으로는 ‘아하라 메우마'( )

인데 그것이 무어승마 의미하느냐에도 의견이 두 가지로 나뉘인다. (1) 사람이 죽은

후의 일을 의미한다(Delitzsch). (2) 사람의 장래 일 즉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 일

을 의미한다(G.A.Barton, T.H. Leale, Lange).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2)를 뜻하는 것

으로 본다. 아무튼 이런 후반절의 의미는 인간의 연약함, 제한되미 마언급함으로 하

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순응해야 되미마 가르치고 있음이 분명하다.

=====7:15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 있으니 – 이는 단순히 과도하게 행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중용(中庸)을 가르치는 말이 아니다. 즉 여기서 전도자가 말하

는 것은 ‘지나친 의(義)’라기보다는 ‘무모한 자기 의'(self-righ-teousness)인 것이

다. 전도자는 선만을 행하는 의인이란 이 세상에 없다고 갈파하고 있거니와(20절),

본절은 자신의 의를 자랑하려드는 자들에 대한 역설적 경고라 하겠다(Eaton,

Whybary). 한편 저자가 ‘내 헛된 날’이라 말한 것은 하나님을 떠난 그 자체로서의 인

생이 허무하며 무상한 것임을 암시하며(6:12) 특히 이는 솔로몬 자신이 한떠 하나님을

떠났던 기간을 상기하며 말한 것일 수도 있다(왕상 9:24;11:1-13 참조).

=====7: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려 … 패망케 하겠느냐 – 본절 역시 앞절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의(義)를 추구하고 자랑하려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내용이다(롬

3:20;7:1-25;10:3;갈 2:16;3:11,12).

=====7: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 죽으려느냐 – 이는 앞절(16절)과 대비되는 말씀으

로서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 노골적으로 악행을 일삼는 것을 금하는 내용

이다. 특히 본절에서 ‘지나치게’라는 말은 악을 무절제하게 행하지 말고 돌이킬 것을

권고하는 뜻이 담겨 있다. 한편 본절에서 악인이나 우매자가 그들의 악행으로 파멸에

이르고만다는 것은 시 37:10;55:23;58:3-9;73:18;잠 10:27 등과 일맥 상통한다 하겠

다.

=====7:18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 것임이니라 – 지나친 자기 의(義)

의 추구나 의도적인 악행을 다시금 금하고 있다. 물론 본절이 적당한 수준에서 악을

행하는 것을 방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저자는 인간의 육신적 생각에서 비롯된 행

위는 좌로나 우로 치우칠 수밖에 없음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한편 후반절의 말씀

은 전도자가 인간의 본분을 하나님을 경외 하는 것으로 말하고, 그것이 곧 지식과 지

혜의 근본이며, 하나님의 돌보심과 축복을 얻는 지름길이라는 말씀을 생각케 한다

(12:13;시 34:7,9;잠 1:7;9:10). 또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만유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분으로서 알고 경배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7:19

지혜가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 있게 하느니라 – ‘유사’에 해당하는 ‘솰리트'(

)는 ‘지배자’, ‘방백’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성읍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자,

외부 세력으로부터 성을비마 지키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리고 본절의 ‘지혜’

는 6:*에서와는 달리, 특히 앞 18절과 연관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어 지는 지혜

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잠 9:10).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얻은 힘이

인간적인 힘이나 능력보다 훨씬 강할 수밖에 없음을 주지시킨다. 한편 ‘열’이란 단순

히 숫자상의 ‘열’을 뜻한다기보다는 완전수로서 많은 수를 가리킨다 하겠다(욥 19:3).

=====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 없느니라 – 원무에 의하면 본절 서두

에는 연결사 ‘키'( )가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의 정황한 의미에 대해서는

(1)강조적인 말로서 ‘확실히'(Surely, RSV ; Indeed, NASB)로 보거나(M.A. Eaton,

Lange), (2) 이유를 나타내는 말로서 ‘…때문에'(For, KJV)로 이해한다(D.R.Glenn).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본절은 앞절과의 연관성을 (바튼(G.A. Barton)은 18절에 대한

이유로, 랑게(Lange)는 19절의 확증으로, 이튼(M.A. Eaton(dms 16-19절 내용을 다시

강조하는 표현으로 각각 봄) 시사하며 특히 지혜의 필요성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리

고 본절은 솔로몬의 말한 바 왕상 8:46과 유사하며 바울의 말한 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하는 말씀을 생각케 한다(롬 3:23).

=====7:21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 죄악된 인간 본성의 보편성과 심각

성은(20절) 말의 실수와 비신실함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약 3:2).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말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특히 아첨하는 말에 마음을 두는 것은 스스로 올무에

빠져드는 것과 다름없다.

=====7:22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아느리라 – 이는 21절에 연장되는 말로서 모든 사

람이 죄인이며 따라서 그들의 말에 지나치게 신경을 기울이는 것이 쓸모없음을,자신이

남을 저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 확증하는 내용이다. “마음”은 “양심”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도 볼수 있다.(G.A.Barton).그리고 이는 사람의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가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며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리라”(롬 2:15)는 말씀을 생각케 한다.

=====7:23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멀리하였도다.-“이 모든 것”이란 앞의 내용

들을 가리킨다.그리고 상반절은 전도자가 그의 지혜로 앞의 모든 것을 살펴보았으나

그 모든 내용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한계성을 인정하는 것을 뜻하며 하반절도 상반절과

연관되어 전도자 자신이 지혜롭게 되어 모든 것을 아는 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지혜가

그에게서 멀리하였다는 고백이다.이와 같은 사실은, 한편으로는 인가적인 지혜로 는

이세상 모든 것을 헤아려 알 수 없음을 보여주며, 또 한편으로는 참다운 지혜는 인간

자신의 노력에 의해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얻

어지는)것임을 암시한다(2:26).

=====7:24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능히 통달하랴.-이는 앞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

이 그동안 갈고 닦은 지식과 인생 경험에 바탕을 둔 나름대로의 폭넓은 식견으로도 이

세상에서 역사되어지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는 한계성을 언급한 것이라 하겠다.된

것의 히브리어 “마쉐하야”( )는 “존재하는 것”(what has been,NASB)을 뜻하

는데, 혹자는 이를 현존하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역사되어질 모든 섭리

까지 포함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롬 11:33 참조, M.A. Eaton).

=====7:25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하였더니.-앞에서 인간 지혜의

한계성을 고백한 기자는 이제 돌이켜 인간의 완악한 본성을 살피고자 한다.특히 본절

에는 유사한 의미를 지닌 말들이 여러 차례 반복됨으로써 기자의 탐구의욕이 어느 정

도 간절하고 철저한지를 암시하고 있다.

=====7:26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잡히리로다.-본절에서 악한 여인에 대해 언급한

사실이 기자의 여자 기피 심리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본서의 다른 곳에서

는 사랑하는 아내와의 행복한 삶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9:9). 여기

서는 악한 여인을 대표적으로 선정하였을 뿐이며 또 이러한 여인의 올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임을 상기시키는 데 주안점이 있다.

=====7:27

원무에 의하면 본절 서두는 “레아”( , 보라, Look, NIV;Behold, RSV,

NASB)로 시작되고 있다. 이것은 전도자가 자신이 깨달은 바를 감탄하면서 선포하고 있

음을 나타낸다.

====7:28

일천 남자 중에서…얻지 못하였느니라.-“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에 대해 혹

자는 죄짓기 전의 순수하고 무죄한 아담을 가리킨다고 하나(Lange)이보다는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자(T.H. Leale, M.A.Eaton), 혹은 진정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

(D.R.Glenn)로 보는 것이 낫겠다. 또한 여기서는 남자보다 여자 가운데서 더 찾기가

어려운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인류역사에서 최초로 타락한 자가 남자 아닌 여자

라는 맥락에서 언급되어진 것으로 보인다(딤전 2:11-15참조).그리고 본절에서 “일천”

이란 단순히 숫자상의 의미를 나타내기보다는 많은 수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수로 보인

다(출20:6;34;7;민1:16;신1:11;욥9:3;33:23;시50:10;84:10).

=====7:29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꾀를 낸 것이라.-이는 앞절(28절)에 이어 인

간의 부패성, 죄악성을 나타낸 구절이다. “정직하게”에 해당하는 “야솨르”( )는

“곧은”,”올바른”(upright, KJV,NIV, RSV)의 뜻으로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무

죄한 상태로 만드셨음을 암시하며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

히 좋았더라”(창 1:31)는 말씀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솨

본”( )은 “계략”, “계책” 등의 의미하는데, 본절에서는 특히 아담 안에서 정

죄된 인간들이(롬 5:16-21)일생 동안 의롭지 못한 일을 획책함을 뜻하며 인간 부패의

근본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음을 암시한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 대우인력 김진규

메모 :

2018/12/28(금) “전도서 7:1-29” / 작성: 정한조

본문 전도서 7:1-29

찬송가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 알림 사항 : 2018년에 영성담임목사인 정한조목사가 새벽기도를 화-금요일까지 일주일에 4일을 인도했습니다. 내년에는 새신자반과 성숙자반을 준비해서 인도하여야 하기에 물리적으로 일주일에 새벽기도를 4일 인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2019년부터는 영성담임목사는 화요일과 금요일에 인도하고, 목요일에는 다른 세 분의 담임목사님들이 돌아가며 인도하고, 월, 수, 토요일은 전임교역자들이 돌아가면서 인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지혜자의 태도(1-7절)

12장으로 된 전도서는 1-6장에서는 해 아래에서 하나님을 떠난 삶은 허무한 것임에 대해서, 그리고 7-12장은 하나님을 경외함을 통해 해 위를 구하는 삶에 대해 증거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해 위를 구하는 삶의 문을 엽니다.

또 전도서의 본론 부분에는 4개의 설교(강화)가 있는데, 세 번째 것이 6:1-8:14까지입니다. 어제 나눈 6장이 해 아래서의 삶의 허무함에 관한 한숨이었다면, 7:1-8:14은 그 한숨을 어떻게 생명의 숨인 하나님의 숨으로 바꾸어 가는지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은 ‘지혜자의 태도’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좋은 기름’은 감람(올리브)나무에서 추출한 감람유(올리브유)입니다. 이 기름은 식용으로 사용된 것은 물론, 피부의 건조함을 막는 의약품과 화장품으로도 사용되었고, 잔치와 장례에도, 성전에서 불을 밝기는 용도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왕궁의 보물목록에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름은 ‘재산’이나 ‘재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이름’과 ‘기름’이 끝 자가 같지만, 히브리어로는 첫 글자가 같습니다. 그래서 이름과 기름을 비교하고 대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기름(재산, 재능)과 이름 중 무엇이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한지를 저울질을 하면 언제나 ‘기름’ 쪽으로 천칭이 기웁니다. 종종 “이름이 밥 먹여주나?”라고 이름을 비웃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갈수록, 살아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수록 ‘이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곤 합니다. 지나온 세월동안 ‘기름, 기름, 기름’하며 살았던 세월이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2-4)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마음이 편하기로 하면 장례식장보다 결혼식장이 훨씬 낫습니다. 장례식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울지만, 결혼식장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웃습니다. 무엇보다도 결혼식장에는 먹을 것이 풍성합니다. 과거 가난한 시절에 결혼식은 평소에 먹지 못한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장례식장에도 음식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배불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90년 100년 동안 살며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면 그래도 낫지만, 어린 자녀들을 둔 가정에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남아 있는 가족들은 삶의 궤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또 부모는 돌아가시면 뒷산에 묻지만 자녀는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자녀를 잃은 장례식에 조문을 가면 목회자도 마음이 눌립니다. 또한 아주 가까이 지내던 지인이나 친한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잘 살고 있는 것이 맞는가?”, “나에게도 불현 듯 죽음이 찾아오는 것은 아닌가?”하고 잠을 잘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확실히 결혼보다는 죽음(장례) 앞에서 인생을 깊이 생각하고 영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이 초상집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7)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꾸지람이나 책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실 꾸지람과 책망을 들을 때는 이미 마음이 많이 상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상대가 말하는 것이 거의 들리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책망의 내용은 틀린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 말을 중심으로 듣고 자신에게 적용하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탐욕이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탐욕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자(솔로몬)가 이 고백을 하는 것은 자신이 산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에게는 최고의 지혜가 있었지만, 국력을 더 크게 하고, 자신을 세상에 더 드러내게 하려는 탐욕이 그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지혜자였던 그는 나라를 두 동강나게 한 원인제공자가 되었습니다. 뇌물에게도 사람이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뇌물에 오염이 되고나면, 명철은 사라지고 맙니다.

더 나은 선택(8-14절)

8-14절은 ‘더 나은 선택’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중학교 때의 성적은 고등학교에 갈 때에 필요하고, 고등학교 때의 성적은 대학교 갈 때에 필요합니다. 물론 대학교 때의 성적은 대학원이나 취직할 때에 필요합니다. 지금 직장에서 은퇴할 때가 다 되었는데, 초.중.고등 시절의 성적이나 받은 상장을 자랑한다면 정말 미련한 것입니다. 독일 속담에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Ende gut, alles gut)’는 말이 있습니다. 바른 끝맺음은 이전의 삶을 아름다운 의미로 승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또한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은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조심해야할 1번이 교만이고, 2번도 교만이고, 3번도 교만입니다. 물론 99번도, 100번도 교만입니다.

우리에게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유익한 경우는 비록 지금 삶에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과거에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함께 하심을 확신하기 위한 경우입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를 발판삼아 현재를 새롭게 수용할 때는 유익하지만, 현재를 직면하려고 하지 않고, 낙심과 절망에 있게 하는 것이라면 과거를 떠올리는 것은 무익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지날 때에 끊임없이 애굽에서 있었던 일, 특히 거기서 값없이 먹었던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 등을 떠올리며 불평했습니다.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은 지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2)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표준새번역. 12) 돈이 사람을 보호하듯 지혜도 사람을 보호한다. 그러나 지혜를 깨우쳐 아는 지식이 더 좋은 까닭은 지혜가 그 사람의 목숨을 살려 주기 때문이다.

돈과 지혜가 사람을 함께 보호하지만, 목숨을 살려내는 것은 지혜라고 합니다. 돈이 사람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의 거의 대부분은 외적인 것입니다. 그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에도 많은 도움을 줄 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와 질문 앞에서는 결코 답을 줄 수 없습니다. 그 때는 반드시 지혜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오직 그 지혜만 우리를 궁극적으로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오직 위로부터만 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고 했습니다.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함께 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능하시기 때문이거나 우리를 외면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으로, 또 최상으로 충분히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를 안다면, 우리가 더 바르게, 더 신실하게,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섭리’의 ‘섭(攝)’자가 ‘당기다. 쥐다’의 뜻입니다. 그 한자에는 ‘손 수(手)’ 변에 ‘귀 이(耳)’ 자가 3개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듣고, 듣고, 또 듣는 것입니다. 그 듣는 것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듣고, 삶으로 듣는 것이고, 과거를 듣고, 현재를 듣고, 미래를 듣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깊은 지혜입니다.

절제와 바른 선택(15-22절)

15-22절은 절제와 바른 선택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8)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15절에 있는 것처럼 의롭게 살아도 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하게 살아도 망하지 않고 오랫동안 장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의로운 삶과 악한 삶을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지킬박사인데, 어떤 날은 하이드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또 의롭게 사는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은 굉장히 칭찬을 받아야 하는데, 그가 자신의 의로움을 과도하게 내세우다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또 악하게 사는 것만 해도 바르지 않는데, 그렇게 사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더 과도하게 악한 일을 행하다가 자기가 행한 악에게 무너지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또 인생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더욱 더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사는 것에는 후회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무궁함(23-29절)

23-29절은 ‘지혜의 무궁함’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전도자는 궁극적인 지혜를 찾는 것이 정말로 어렵다고 말합니다. 지혜를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오히려 미궁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것은 지혜가 우리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유한한 존재가 영원한 것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분만 영원한 지혜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도자가 인생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이렇게 고백하며 오늘 본문의 막이 내립니다.

(29)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한 길-진리와 생명의 길’을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죄를 범한 이후로 언제나 ‘여러 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꾀를 낸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생각하는 제 3의 길, 제 4의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그것이 더 낫겠다고 우기곤 합니다. 하지만 지나고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길이 더 옳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인간의 지혜 또는 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놓여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우리의 자유지만, 그 결과도 우리의 삶에 고스란히 남습니다.

2018년이 3일이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음으로 우리의 2019년이 진정한 새해로 엮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언제나 장례식보다는 결혼식을 더 좋아하고, 지혜보다는 재물을 선택하고, 형통할 때는 즐거워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곤고한 날에는 비관과 절망으로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를 잘 알면서도 우리 나름대로의 길을 선택하곤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음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인함임을 고백합니다.

올 한해 우리들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의 삶의 자리에 심어주시고, 은혜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언제나 우리의 귀를 열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하나님의 손 위에 올려지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2019년이 진정한 새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지금까지 축하하기 위해서 참석한 결혼식장에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조문한 장례식장에서 가장 깊이 느낀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2.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말씀하시는데,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에 배운 인생의 교훈은 무엇이었습니까?

3.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끼고 생각한 가장 큰 부조리(모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신앙 안에서 어떻게 정리가 되었습니까?

4.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지만, 사람들은 많은 꾀를 낸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낸 ‘꾀’의 대표적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으셨습니까?

5. 오늘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 주신 삶의 자리에서 곤고한 날은 물론 형통한 날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전도서 7장 강해

전도서 7장 강해

[ 서 론 ]

1.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 아들의 영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육신으로 사는 자는 짐승 같아서 영생을 알지도 못합니다.

1절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1. 아름다운 이름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이름입니다.

2. 사람들이 후세에 남기려는 이름과 다릅니다.(삼상15:12,삿8:27)

3.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52:12)

4.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시84:6)

5. 보배로운 기름은 아하수에로 왕이 처녀들에게 주어 그 몸을 아름답게 하던 몰약과 향품들 입니다.(에3:12)

※ 좋은 이름은 수많은 생명을 살려 영원한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고 보배로운 기름은 젊은 여자들의 아름다움은 잠깐 동안 사람들의 눈을 기쁘게 할뿐입니다. 존경도 잠시 뿐입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1. 죽는 날은 모든 일을 끝내고 다시 영광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날이고,

2. 출생하는 날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는 날입니다.

3. 나그네로 잠시 오는 그 날보다 모든 일을 끝내고 영광의 나라로 올라가는 그 날이 비할 데 없이 영광된 날입니다.

4.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2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1. 초상집에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장사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집이고,

2. 잔치 집은 육신을 즐겁게 하며 춤추고 뛰노는 집입니다.

3. 초상집에 가면 자기도 그와 같이 될 날이 멀지 아니한 것을 보고 준비하게 하고,

4. 잔치 집에 가면 육신을 기쁘게 하여 도리어 세상과 짝하게 됩니다.

※ 생일마다 잔치하던 욥의 자녀 십 남매는 집이 무너질 때에 다 치어 죽었습니다.(욥1:19)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1. 열매를 맺는 생명으로 살아 있는 자는 이런 것들에 유심하여 자기에게 임할 그날을 예비하는데 더욱 열심하게 됩니다.

※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6)

3절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1. 자신의 열매 없는 죽음을 슬퍼하는 슬픔은 세상에 속한 기쁨으로 웃는 자보다 나은 것은 슬퍼하는 자는 성령의 열매를 얻을 것이요 웃는 자는 사망의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롬7:24)

2. 하늘을 보는 얼굴에는 세상과 짝하는 자 되지 않기 위하여 다른 사람이 웃을 때에 도리어 근심하고 그 마음에 하늘나라의 산 소망으로 기쁘게 하십니다.

※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벧후2:8)

4절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1. 지혜 있는 자의 마음은 항상 자기 집이 초상집이 될 것을 생각하고 그날을 예비하는데 힘쓰고,

2. 우매자의 마음은 항상 잔치 집에 있어서 육신이 먹고 마시고 뛰놀 것만 생각하게 됩니다.

※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4:8)

5절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1. 지혜자의 책망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돌이키게 하는 역사를 이루고,

2. 우매자의 노래는 사망으로 가는 발걸음을 더 빨리 하게 합니다.

※ 두렵건대 마지막에 이르러 네 몸 네 육체가 쇠패할 때에 네가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 많은 무리들이 모인 중에서 모든 악에 거의 빠지게 되었었노라 하게 될까 하노라,(잠5:11-14)

6절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1.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시58:9)

2.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기뻐하는 웃음소리요,

3. 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는 죄로 인한 심판의 날에 불타 버리게 하시는 것을 말씀하시고,

4.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는 것은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기뻐하는 모든 정욕이 온 몸을 뜨겁게 하기 전입니다.

※ 세상의 부귀와 영광은 하늘의 영광을 불태우는 것이요 그것을 보고 기뻐하는 웃음소리는 불태우는 가시나무 타는 소리와 같습니다.

◎ 잠시 동안의 웃음소리가 영원한 부끄러움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고전3:15)

7절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

1. 탐학은 토색과 같은 것으로 자기의 권세를 악용하여 부정한 수단으로 재물을 탐욕으로 거두며 학대하는 자입니다.(눅19:8)

2. 그와 같은 자는 자기의 지혜를 가지고 악을 행하게 되니까 도리어 우매자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3. 권세자가 재물을 탐하게 되니까 간사한 자들이 뇌물로 그의 눈을 어둡게 하여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4.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잠17:15)

5.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23:8)

※ 나의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받지 아니하리라 나아만이 받으라 강권하되 저가 고사한지라,(왕하5:16)

◎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욥28:28)

8절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1. 일에 대한 끝이 있으니까 시작보다 낫고 시작만 있고 끝이 없으면 그 시작도 헛된 것이 됩니다.

2.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눅14:29)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1.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약5:10)

2.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자시니라,(약5:11)

3.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4.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시37:7)

5. 교만한 마음은 자기를 자랑하는 자가 되게 합니다.(습3:11)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이 앞잡이니라,(잠16:18)

9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1.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는 말씀은 지혜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2. 그러므로 네가 우매자의 잘못을 깨우치고 타이르다가 그가 듣지 아니한다고 기다리지 못하고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여 꾸짖지 말라고 하십니다.

3. 그의 잘못을 보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타이르는 말은 듣지 아니하고 버렸으나 네가 노하여 꾸짖으면 그것은 그가 오래도록 품고 너는 미워하게 되느니라,

4. 내가 네 혀로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너로 벙어리 되어 그들의 책망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라,(겔3:26)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며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8)

10절 “옛날이 오늘보다 나음은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자가 아니니라”

1. 옛날이 오늘보다 나음을 말하는 것은 그 옛날에도 선도 있고 악이 함께 있었으나 그것을 후세에 전하는 자들이 선한 것을 보고 전하였습니다.

2. 그러면 너도 오늘 세상에서 악한 자를 보지 말고 선한 것을 보는 눈을 가졌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니라,

※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먼저 네 눈 속에 들보를 빼어라,(마7:4)

11절 “지혜는 유업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1. 지혜를 얻은 자가 남겨 놓은 말과 글은 많은 유업과 같이 후세에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

2. 그러나 햇빛을 보는 자 곧 빛 가운데 사는 자에게는 유익하고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에게는 버리움이 되고 있습니다.

※ 어느 것을 택하는 자가 지혜 있는 자가 되고 우매자가 되느냐,

12절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1. 지혜를 가진 자도 그 육신 생명을 보호받게 되고 돈을 가진 자도 그 육신 생명이 보호받고 있습니다.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1. 지혜는 그 지혜를 얻은 자로 영원한 생명 안에서 열매 맺게 하고 있습니다.(잠3:18)

2. 그러니까 돈보다도 지혜가 더 좋은 것을 아는 지식이 더 아름답습니다.

13절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1.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시기로 준비된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9:10-24,겔16:60-63)

2. 자기의 의를 먼저 보는 사람의 지혜로는 굽게 보이지만 아무도 자기 육체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로 보면 곧게 하신 것입니다.(고전1:29)

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1.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할 것이니,(신28:47)

2.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하늘의 영광을 더하게 하시는 기쁨으로 찬송하고,

3. 곤고케 하시는 날에는 무엇을 위해서 이 곤고를 주시는지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2:10)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1.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장래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을 감히 헤아려 보지 못하게 하시기 위하여 이 두 가지를 함께 지으셨고 행하십니다.

2. 나는 빛도 짖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짖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사45:7)

15절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1. 내가 하는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사람이요,

2.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다는 것은 자기중심으로 사는 자들의 내 헛된 모든 날입니다.

3.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다는 말은 자기가 의롭게 살고 있는 그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버리는 자요,

4. 자기의 의로 인하여 자기 죄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의를 보이는 자가 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통해서 나타내주고 있습니다.(눅18:11)

5. 자기의 의로 인하여 자기의 죄를 가리워서 사함 받지 못하게 하여 멸망이 되고 있습니다.(요13:8)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1. 자기의 악행을 보고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되고,(마5:4)

2.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슬퍼하는 자에게는 성령을 주십니다.(롬7:24)

3. 장수한다는 것은 세상에서도 오래 살게 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 자기는 죄인의 괴수라는 것을 보는 자가 죄인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16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1. 지나치게 의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보다 자기를 앞세우는 자요,

2. 지나치게 지혜자가 되는 것은 사람의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가르치는 자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입니다.(마23:13)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1. 자기는 자기 생각대로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하고 충성한다고 해 놓고 도리어 멸망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2. 어찌하여 그와 같은 일들을 하고 있느냐 묻고 있습니다.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17절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1. 지나치게 악인이 되는 자는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렘6:15)

2.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4:19)

3. 이것이 양심이 화인 맞은 자입니다.(딤전4:2)

4. 우매자가 되는 것은 책망하고 징계하실 때에 패역해 지는 자들입니다.

※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사1:5)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1.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 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잠10:27)

2.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더라,(삼하13:39)

3. 압살롬도 다윗을 반역하고 상수리나무에 달려 저주받은 자의 죽음에 빠졌습니다.(삼하18:9)

4. 악을 행하고 기뻐하는 자는 더 큰 악을 행하게 하시는 그 날을 위하여 장수까지 주십니다.(시73:12)

※ 더 큰 악을 행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 수명을 다 마치지 못하고 죽게 하는 것이 그를 위한 것입니다.

18절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1. 너는 이것을 잡으라는 것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2. 저것을 놓지 말라는 것은 의를 행하는 생활입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여 말씀 듣기를 열심하는 자는 지나친 의인과 지혜와 악인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복음과 진리 가운데 살게 하십니다.(요6:13,시119:9)

19절 “지혜가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1. 여기서 말씀하시는 지혜는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요8:29)

2.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14:9)

3.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7)

4. 이와 같은 가운데 살면서 증거하는 그 말씀을 받는 자들이 성에서 다스리는 열 명의 유사들보다 더 강하게 하십니다.

20절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1. 선을 아무리 많이 행하고 충성한다고 해도 사람은 원죄가 있어서 누구든지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롬7:20)

2.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아주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고 두 번씩입니다.(욥1:8,욥2:3)

3.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함이요 라고 하셨으니 자기도 깨닫지 못하는 깊은 곳에 죄는 숨어 있었습니다.(욥32:2)

※ 그러므로 끝까지 죄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고 있습니다.

21절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1. 누구든지 자기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살기를 힘쓸 것이요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가 들으려 하지 말 것입니다.

2. 염려하건대 네 집에서 나는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22절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

1. 너도 가끔 다른 사람을 저주한 것과 같이 다른 사람들도 너를 저주할 것입니다.

2.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잠26:2)

※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삼하16:10)

◎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16:12)

23절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1. 내가 지혜를 가지고 있으니 이 지혜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내어 좋은 것만 취하는 지혜 자가 되려고 해 보았습니다.

2. 그러나 알아보려고 하면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지혜자가 되기에는 멀리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 천 다섯이며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왕상4:32-33,창2:19-20) 아담

24절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능히 통달하랴”

1. 무릇 된 것이라는 것은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고 하신 것 같이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요1:3)

2.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에 대하여서도 사람의 지혜로 측량하기에는 너무나 멀고,

3.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라고 하신 그 신성은 너무 깊고 또 깊어서 통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롬1:20)

※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 그 큰 능력의 우뢰야 누가 능히 측량하랴 장차 하늘에서 이루시는 영광은 우리가 능히 측량도 할 수가 없습니다.(욥26:14)

25절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1. 내가 돌이켜서 사람이 사는 동안에 지혜와 명철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궁구해서,

2. 악하게 사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 되고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이 되는 것을 알고자 하였습니다.

3. 악한 것이 어리석게 하고 어리석은 것이 미친 자의 생활로 나타나게 됩니다.

26절 “내가 깨달은 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1.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다고 하시는 것은 사람이 다니는 길에 올무를 놓고 기다리다가 그를 잡으려는 악한 마음이요,(잠1:11-16,마22:15)

2. 그물 같다고 하셨으니 새를 잡기 위하여 그물을 치고 숨어 기다리는 자입니다.

3.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 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시10:9)

4. 손이 포승 같은 것은 올무와 그물로 잡은 것들을 꽁꽁 결박해 쥐고 결코 풀어 주지 아니합니다.

5. 다른 형제가 범죄하기를 기다리고 노려보다가 붙잡기만 하면 결박하여 들고 돌아다니면서 논단하고 있습니다.(레19:16)

6. 여인이라고 하신 것은 지혜가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라고 하셨고,(잠2:16)

7. 사람의 딸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죽게 하는 역사입니다.(창6:1)

※ 사망보다 독한 자라고 하셨으니 육신을 죽이는 자보다 그 영혼을 죽여 영원한 사망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 죽은 다음에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저주하고 다니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1. 하늘의 영광된 열매를 더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그와 같은 여자의 올무와 그물과 포승을 피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십니다.

2. 그러나 세상과 짝하는 죄인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잡히게 하십니다. 발락이 더 나쁘냐? 발람이 더 나쁘냐?(민23:37)

※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9-12)

27절 “전도자가 가로되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28절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1. 전도자는 하나님의 지혜로 생명의 도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2. 헛되고 헛된 것들의 수를 낱낱이 세어서 그 수를 알고자 하였으나 깨달은 것은 이것뿐이라,

3. 내가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수도 알지 못하겠고 끝도 없는 것을 알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무저갱입니다.(계20:3)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 하였느니라”

1.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는 남자 중에서는 한마디 지혜를 얻었거니와,

2. 세상을 내려다보는 여자 중에서는 한 마디의 지혜도 얻지 못 하였느니라,

※ 남자와 일천 명을 만나서 겨우 한마디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왕상10:8)

29절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1.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솔로몬에게 그 지혜가 깨닫게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정직하게 지으셨습니다.(창1:27)

3. 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 실과를 먹은 그 거역의 씨가 원죄가 되어 하나님을 속이려는 많은 꾀를 낸 것입니다.(창3:6)

4.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고 무화과나무 사이에 숨었고 핑계하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그 수를 다 세아릴 수도 없고 끝도 알지 못합니다.

◎ 따라서 육신으로 세상을 보는 자의 죄도 끝이 없습니다.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창27:39)

[ 결 론 ]

1. 하나님으로부터 잠시 동안 육신으로 보내심을 받은 것을 깨달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늘의 영광을 더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주어 영원한 생명 안에 살게 하십니다.

히브리어 전도서 7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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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브 쉠 미쉐멘 토브 웨욤 함마윁 미욤 히왈도

개역개정,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새번역,1 명예가 값비싼 향유보다 더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말성경,1 좋은 이름이 좋은 향수보다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낫다.

가톨릭성경,1 명성이 값진 향유보다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낫다.

영어NIV,1 A good name is better than fine perfume, and the day of death better than the day of birth.

영어NASB,1 A good name is better than a good ointment, And the day of one’s death is better than the day of one’s birth.

영어MSG,1 A good reputation is better than a fat bank account. Your death date tells more than your birth date.

영어NRSV,1 A good name is better than precious ointment, and the day of death, than the day of birth.

헬라어구약Septuagint,1 αγαθον ονομα υπερ ελαιον αγαθον και ημερα του θανατου υπερ ημεραν γενεσεω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1 quid necesse est homini maiora se quaerere cum ignoret quid conducat sibi in vita sua numero dierum peregrinationis suae et tempore quo velut umbra praeterit aut quis ei poterit indicare quid post eum futurum sub sole sit

히브리어구약BHS,1 טֹוב שֵׁם מִשֶּׁמֶן טֹוב וְיֹום הַמָּוֶת מִיֹּום הִוָּלְדֹו׃

성 경: [전7:1]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에 대한 잠언]

󰃨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 나으며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이란 어떤 살마에 대한 단순한 외적인 회칭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대변하는 것으로도 쓰였던 바, ‘아름다운 이름’이란 그 사람에 대한 훌륭한 ‘명성’을 가리킨다(Luther, M.A.Eaton, Lange, G.A.Barton, T.H. Leale). 히브리인들은 자신의 이름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을 대단히 명예로운 일로 간주했다(8:10;욥 18:17;잠 10:7). 그리고 ‘기름’이란 일반적으로 팔레스틴 지경의 감람나무 열매에서 채취하는 식물성 기름을 말하는데, 이는 그 용도 면에서 여러 가지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1) 식용(출29:2,23;레 2:1,2,4-7), (2) 등화용(출 25:6;27:20), (3) 의료용(사 1:6), (4) 화장품용(삼하 14:2;시 23:5), (5) 향유용(눅 23:56) 등이다. 특히 이는 팔레스틴 지역과 같이 건조한 기후 여건 속에서는 그 몸에 기름을 발라 향기를 내는 데 유용하게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룻 3:3;삼하 12:20;시 45:7,8;암 6:6 참조). 또한 본절 후반절의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란 전반절의 의미와 연관되는 듯이 보인다. 즉 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좋은 명성을 쌓으며 살다가 죽는 것이 어리석고 우매한 가운데 고통과 고난을 당하며 살지도 모르는 삶의 시작이 날보다 낫다는 것이다(D.R. Glenn). 그러나 전도자는 삶보다 죽음을 더 애찬하는 염세주의자로서 말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도자는 인간의 모든 삶의 축복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3:13;5:!8), 인간의 본분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12:13). 단지 여기서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명성을 얻는 지혜로운 삶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토브 랄레케트 엘 베이트 에벨 밀레케트 엘 베이트 미쉬테 바아쉘 후 소프 콜 하아담 웨하하이 잍텐 엘 리보

개역개정,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새번역,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우리말성경,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모든 사람은 죽게 돼 있으니 말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가톨릭성경,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거기에 모든 인간의 종말이 있으니 산 이는 이를 마음에 새길 일이다.

영어NIV,2 It is better to go to a house of mourning than to go to a house of feasting, for death is the destiny of every man; the living should take this to heart.

영어NASB,2 It is better to go to a house of mourning Than to go to a house of feasting, Because that is the end of every man, And the living takes it to heart.

영어MSG,2 You learn more at a funeral than at a feast– After all, that’s where we’ll end up. We might discover something from it.

영어NRSV,2 It is better to go to the house of mourning than to go to the house of feasting; for this is the end of everyone, and the living will lay it to heart.

헬라어구약Septuagint,2 αγαθον πορευθηναι εις οικον πενθους η οτι πορευθηναι εις οικον ποτου καθοτι τουτο τελος παντος του ανθρωπου και ο ζων δωσει εις καρδια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2 melius est nomen bonum quam unguenta pretiosa et dies mortis die nativitatis

히브리어구약BHS,2 טֹוב לָלֶכֶת אֶל־בֵּית־אֵבֶל מִלֶּכֶת אֶל־בֵּית מִשְׁתֶּה בַּאֲשֶׁר הוּא סֹוף כָּל־הָאָדָם וְהַחַי יִתֵּן אֶל־לִבֹּו׃

성 경: [전7:2]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에 대한 잠언]

󰃨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 유심(留心)하리로다 – ‘초상집’이란 문자적으로는 ‘애곡하는 집'(the house of mourning, KJV, RSV)이다. 그리고 ‘잔치집’이란 술을 마시며 희락을 즐기는 곳으로서 암시되어진다 이와 같은 맥락에 근거하여 본절은 헛되고 허무하게 쾌락을 즐기면서 사는 것보다 인생에 대해 보다 진지하고 숙연하게 생각케 함으로 유익하고 보람된 인생을 보내는 것이 더 낫다는 의미이다(4절)

토브 카아스 밋세호크 키 베로아 파님 이탑 레브

개역개정,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새번역,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얼굴을 어둡게 하는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슬픔 어린 얼굴이 그의 마음을 바로잡기 때문이다.

가톨릭성경,3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 얼굴은 애처로워도 마음은 편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NIV,3 Sorrow is better than laughter, because a sad face is good for the heart.

영어NASB,3 Sorrow is better than laughter, For when a face is sad a heart may be happy.

영어MSG,3 Crying is better than laughing. It blotches the face but it scours the heart.

영어NRSV,3 Sorrow is better than laughter, for by sadness of countenance the heart is made glad.

헬라어구약Septuagint,3 αγαθον θυμος υπερ γελωτα οτι εν κακια προσωπου αγαθυνθησεται καρδια

라틴어Vulgate,3 melius est ire ad domum luctus quam ad domum convivii in illa enim finis cunctorum admonetur hominum et vivens cogitat quid futurum sit

히브리어구약BHS,3 טֹוב כַּעַס מִשְּׂחֹק כִּי־בְרֹעַ פָּנִים יִיטַב לֵב׃

성 경: [전7:3]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에 대한 잠언]

󰃨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이 얼굴에 근신함으로 … 됨이니라 – 전후 문맥상 역시 앞절(2절)과 연관된 내용으로 보인다. 여기서 ‘슬픔’이란 단순히 고난이나 손해 등으로 일낳 슬픔이라기보다는 2절에 암시된 바와 같이 죽음 또는 그로 인한 애곡을 보고서 느껴지는 숙연한 슬픔을 뜻하며, ‘웃음’ 역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보다는 육신적 희락을 즐기는 데서 얻어지는 쾌락적, 일시적 웃음을 뜻한다(2:2-10). 따라서 본절은 인생에서 보게 되는 숙연한 슬픔은 육체적 쾌락에서 얻어지는 가벼운 웃음과는 달리 삶의 궁극적 의미를 상고케하여 더욱 진지하고 보람된 생(生)을 결단케 하기 때문에 좋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레브 하카밈 베베트 에벨 웨레브 케시림 베베트 시메하

개역개정,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새번역,4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

우리말성경,4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다.

가톨릭성경,4 지혜로운 이들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자들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다.

영어NIV,4 The heart of the wise is in the house of mourning, but the heart of fools is in the house of pleasure.

영어NASB,4 The mind of the wise is in the house of mourning, While the mind of fools is in the house of pleasure.

영어MSG,4 Sages invest themselves in hurt and grieving. Fools waste their lives in fun and games.

영어NRSV,4 The heart of the wise is in the house of mourning; but the heart of fools is in the house of mirth.

헬라어구약Septuagint,4 καρδια σοφων εν οικω πενθους και καρδια αφρονων εν οικω ευφροσυνης

라틴어Vulgate,4 melior est ira risu quia per tristitiam vultus corrigitur animus delinquentis

히브리어구약BHS,4 לֵב חֲכָמִים בְּבֵית אֵבֶל וְלֵב כְּסִילִים בְּבֵית שִׂמְחָה׃

성 경: [전7:4]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에 대한 잠언]

󰃨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 있느니라 – 1-3절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구절로서, 지혜자는 삶의 의미와 목표를 늘 진지하게 상고하는 반면에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어 단순히 순간 순간 육체적 희락만을 즐기고 웃음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토브 리쉐모아 가아라트 하캄 메이쉬 쇼메아 쉬르 케실림

개역개정,5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새번역,5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더 낫다.

우리말성경,5 지혜로운 사람의 꾸지람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다.

가톨릭성경,5 지혜로운 이의 꾸지람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자들의 칭송을 듣는 것보다 낫다.

영어NIV,5 It is better to heed a wise man’s rebuke than to listen to the song of fools.

영어NASB,5 It is better to listen to the rebuke of a wise man Than for one to listen to the song of fools.

영어MSG,5 You’ll get more from the rebuke of a sage Than from the song and dance of fools.

영어NRSV,5 It is better to hear the rebuke of the wise than to hear the song of fools.

헬라어구약Septuagint,5 αγαθον το ακουσαι επιτιμησιν σοφου υπερ ανδρα ακουοντα ασμα αφρονων

라틴어Vulgate,5 cor sapientium ubi tristitia est et cor stultorum ubi laetitia

히브리어구약BHS,5 טֹוב לִשְׁמֹעַ גַּעֲרַת חָכָם מֵאִישׁ שֹׁמֵעַ שִׁיר כְּסִילִים׃

성 경: [전7:5]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에 대한 잠언]

󰃨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 나으니라 – 본절도 역시 앞절(4절)처럼 그 의미에 있어서는 계속 전문(前文)들과 연관된다 하겠다. 책망은 들을 당시에는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처럼 느껴지나 종국적으로는 잘못되고 우매한 길을 벗어나 지혜로운 길로 접어들게 한다. 반면 우매자의 노래 소리는 들을 때에는 기쁜 것 같고 육감적으로 상쾌한 것 같으나 결국에는 일시적, 육체적 희락 속에선 헛되고 허무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키 케콜 핫시림 타하트 핫시르 켄 세호크 핰케실 웨감 제 하벨

개역개정,6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새번역,6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소리는 가마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와 같다. 이 또한 헛되다.

우리말성경,6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은 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 또한 허무하다.

가톨릭성경,6 어리석은 자의 웃음은 솥 밑에서 타는 가시나무 소리 같으니 이 또한 허무이다.

영어NIV,6 Like the crackling of thorns under the pot, so is the laughter of fools. This too is meaningless.

영어NASB,6 For as the crackling of thorn bushes under a pot, So is the laughter of the fool, And this too is futility.

영어MSG,6 The giggles of fools are like the crackling of twigs Under the cooking pot. And like smoke.

영어NRSV,6 For like the crackling of thorns under a pot, so is the laughter of fools; this also is vanity.

헬라어구약Septuagint,6 οτι ως φωνη των ακανθων υπο τον λεβητα ουτως γελως των αφρονων και γε τουτο ματαιοτης

라틴어Vulgate,6 melius est a sapiente corripi quam stultorum adulatione decipi

히브리어구약BHS,6 כִּי כְקֹול הַסִּירִים תַּחַת הַסִּיר כֵּן שְׂחֹק הַכְּסִיל וְגַם־זֶה הָבֶל׃

성 경: [전7:6]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에 대한 잠언]

󰃨 우매자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 이것도 헛되니라 –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나무가 희귀하여 가시나무나 풀, 보리, 그루터기 등을 땔감으로 사용하였는데(시 58:9;120:4;마 6:30 참조), 특히 가시나무는 쉽고 빠르게 그러나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타지만 이내 사그라져 꺼지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이 소리는 헛되고 요란할 뿐 실속이 없는 소리이다. 이것은 우매자의 웃음 소리가 겉으로만 요란할 뿐 실속이 없고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키 하오쉐크 예홀렐 하캄 위압베드 엩 레브 맡타나

개역개정,7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새번역,7 탐욕은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고, 뇌물은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우리말성경,7 억압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뇌물은 마음을 부패시킨다.

가톨릭성경,7 억압은 지혜로운 이를 우둔하게 만들고 뇌물은 마음을 파멸시킨다.

영어NIV,7 Extortion turns a wise man into a fool, and a bribe corrupts the heart.

영어NASB,7 For oppression makes a wise man mad, And a bribe corrupts the heart.

영어MSG,7 Brutality stupefies even the wise And destroys the strongest heart.

영어NRSV,7 Surely oppression makes the wise foolish, and a bribe corrupts the heart.

헬라어구약Septuagint,7 οτι η συκοφαντια περιφερει σοφον και απολλυσι την καρδιαν ευτονια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7 quia sicut sonitus spinarum ardentium sub olla sic risus stulti sed et hoc vanitas

히브리어구약BHS,7 כִּי הָעֹשֶׁק יְהֹולֵל חָכָם וִיאַבֵּד אֶת־לֵב מַתָּנָה׃

성 경: [전7:7]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에 대한 잠언]

󰃨 탐학(貪虐)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 망케하느니라 – 원문에 의하면 본절 서두에는 연결사 ‘키'(*)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해석은 각양 각색이다. (1) 원인을 나타내는 연결사이다(NASB, Hengstenberg, Hitzig). (2) 본절이 앞절들과 하등의 유사한 연관성이 없으므로 이를 ‘그러나’와 같은 부사로 본다(Ewald, Elster). (3) 강조걱인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다(욥 6:21;사5:7, Lange). 영역본 KJV, RSV 등도 이를 ‘확실히'(surely)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다. (4) 원인을 나타내는 연결사로 보기는 하나 앞절과 본절 사이에는 또 다른 구절이 빠져 있다(Delitzsch). 그러나 우리는 문맥상 이를 원인을 나타내는 연결사이되 특히 5절 내용과 연결됨을 암시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 같다. 즉 본적의 원인 때문에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5절)낫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탐학’의 히브리어 ‘오쉐크'(*)는 ‘압제'(opperssion, KVJ, RSV, NASB), ‘강탈’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후반절은 출 23:8;신 16:19;잠 15:27과 유사하다. 성경에서 ‘뇌물’을 의인의 눈을 멀게 하는 것 또는 명철을 흐리게 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뇌물이 그 하나님의 공의성을 훼손시키고 공정한 판단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토브 아하리트 다발 메레쉬토 토브 에레크 루아흐 믹게바흐 루아흐

개역개정,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새번역,8 일은 시작할 때보다 끝낼 때가 더 좋다. 마음은 자만할 때보다 참을 때가 더 낫다.

우리말성경,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인내하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다.

가톨릭성경,8 일의 끝이 그 시작보다 낫고 인내가 자만보다 낫다.

영어NIV,8 The end of a matter is better than its beginning, and patience is better than pride.

영어NASB,8 The end of a matter is better than its beginning; Patience of spirit is better than haughtiness of spirit.

영어MSG,8 Endings are better than beginnings. Sticking to it is better than standing out.

영어NRSV,8 Better is the end of a thing than its beginning; the patient in spirit are better than the proud in spirit.

헬라어구약Septuagint,8 αγαθη εσχατη λογων υπερ αρχην αυτου αγαθον μακροθυμος υπερ υψηλον πνευματι

라틴어Vulgate,8 calumnia conturbat sapientem et perdet robur cordis illius

히브리어구약BHS,8 טֹוב אַחֲרִית דָּבָר מֵרֵאשִׁיתֹו טֹוב אֶרֶךְ־רוּחַ מִגְּבַהּ־רוּחַ׃

성 경: [전7:8]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에 대한 잠언]

󰃨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 나으니 – 본절의 상,하반절은 내용상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 같다(Lange). 즉 어떤 일을 시작해서 그 과정을 인내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좋은 결과를 유출해 낼 경우 그 끝은 처음보다 낫다는 뜻 혹은 어떤 일을 끝까지 마감하는 것이 시작만 거창하게 하고서 중도에 그만 두는 것보다 낫다는 뜻이다(Finishing is better than starting, LB). 이는 곧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케 한다. 한편 후반절의 ‘마음’에 해당하는 ‘루아흐'(*)는 ‘영'(spirit)을 뜻하며 ‘참는 마음’과 ‘거만한 마음’에 대해 일반적으로 영역본들은 ‘영 안에서 참음'(the patient in spirit, KJV, RSV ; partience of spirit, NASB)과 ‘영 안에 거만함'(the proud in spirit, KJV, RSV ; haughtiness of spirit, NASB)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알 테바헬 베루하카 리케오스 키 카암 베헤크 케실림 야누아흐

개역개정,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새번역,9 급하게 화내지 말아라.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의 품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말성경,9 너는 조급하게 분노하지 마라.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의 가슴에 머무는 것이다.

가톨릭성경,9 마음속으로 성급하게 화내지 마라. 화는 어리석은 자들의 품에 자리 잡는다.

영어NIV,9 Do not be quickly provoked in your spirit, for anger resides in the lap of fools.

영어NASB,9 Do not be eager in your heart to be angry, For anger resides in the bosom of fools.

영어MSG,9 Don’t be quick to fly off the handle. Anger boomerangs. You can spot a fool by the lumps on his head.

영어NRSV,9 Do not be quick to anger, for anger lodges in the bosom of fools.

헬라어구약Septuagint,9 μη σπευσης εν πνευματι σου του θυμουσθαι οτι θυμος εν κολπω αφρονων αναπαυσεται

라틴어Vulgate,9 melior est finis orationis quam principium melior est patiens arrogante

히브리어구약BHS,9 אַל־תְּבַהֵל בְּרוּחֲךָ לִכְעֹוס כִּי כַעַס בְּחֵיק כְּסִילִים יָנוּחַ׃

성 경: [전7:9]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에 대한 잠언]

󰃨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 머무름이니라 – 본절도 문맥상 앞절(8절)과 연관되는 것으로 본다(G.A.Barton). 전반절에 대해서 대부분 영역본들은 ‘너의 영 안에서 급하게 노를 발하지 말라'(Be not hasty in thy spirit to be angry, KJV ; Do not ve quickly provoked heart to be angry, NASB)로 번역하고 있다. 성급히 화를 내는 것은 정의의 의분과는 달리 인격에 대한 통제를 잃은 것으로서 결국 죄악을 낳고 만다(창 4:5;삼 삼 18:8). 특히 오늘날과 같이 모든 것이 급속하게 변해가는 스피드 시대에는 본절 말씀이 더욱 절실하다 하겠다(욥 5:2;잠 12:16).

알 토말 메 하야 쉐하야밈 하리쇼님 하이우 토브 메엘레 키 로 메호크마 솨알타 알 제

개역개정,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새번역,10 옛날이 지금보다 더 좋은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지 말아라. 이런 질문은 지혜롭지 못하다.

우리말성경,10 “어떻게 옛날이 지금보다 나은가?”라고 하지 마라. 그런 질문은 지혜롭지 못하다.

가톨릭성경,10 “어째서 옛날이 지금보다 좋았는가?” 묻지 마라.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영어NIV,10 Do not say, “Why were the old days better than these?” For it is not wise to ask such questions.

영어NASB,10 Do not say, “Why is it that the former days were better than these?” For it is not from wisdom that you ask about this.

영어MSG,10 Don’t always be asking, “Where are the good old days?” Wise folks don’t ask questions like that.

영어NRSV,10 Do not say, “Why were the former days better than these?” For it is not from wisdom that you ask this.

헬라어구약Septuagint,10 μη ειπης τι εγενετο οτι αι ημεραι αι προτεραι ησαν αγαθαι υπερ ταυτας οτι ουκ εν σοφια επηρωτησας περι τουτου

라틴어Vulgate,10 ne velox sis ad irascendum quia ira in sinu stulti requiescit

히브리어구약BHS,10 אַל־תֹּאמַר מֶה הָיָה שֶׁהַיָּמִים הָרִאשֹׁנִים הָיוּ טֹובִים מֵאֵלֶּה כִּי לֹא מֵחָכְמָה שָׁאַלְתָּ עַל־זֶה׃

성 경: [전7:10]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에 대한 잠언]

󰃨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 지혜가 아니니라 – 주어진 현실 감당해야 할 현 시대의 사명을 도외시하고 지나간 시절만 생각하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삶의 태도를 책망하는 말씀이다(Eaton). 한편 본절을 앞절 특히 8절의 내용과 연결시켜 해석해 볼 수 있다. 즉 어떤 일을 시작해서 좋은 결과를 유출해 낼 때 그 나중이 처음보다 나을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일을 시작했던 옛날이 일의 결과를 낸 오늘보다 낫다고 하는 것은 좋은 결과를 유출해 내지 못했다는 증거이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는 뜻이라 하겠다.

토바 호크마 임 나할라 웨요테르 레로에 핫솨메쉬

개역개정,11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새번역,11 지혜는 유산을 받는 것만큼이나 좋은 것이니, ㉠이 세상에서 살면서 그 덕을 보기 때문이다. / ㉠히, ‘해 아래’

우리말성경,11 지혜는 유산처럼 좋은 것이다. 해를 보는 사람이라면 지혜의 덕을 보지 않는 사람이 없다.

가톨릭성경,11 지혜는 상속 재산처럼 좋은 것 태양 아래 사는 이들에게 득이 된다.

영어NIV,11 Wisdom, like an inheritance, is a good thing and benefits those who see the sun.

영어NASB,11 Wisdom along with an inheritance is good And an advantage to those who see the sun.

영어MSG,11 Wisdom is better when it’s paired with money, Especially if you get both while you’re still living.

영어NRSV,11 Wisdom is as good as an inheritance, an advantage to those who see the sun.

헬라어구약Septuagint,11 αγαθη σοφια μετα κληροδοσιας και περισσεια τοις θεωρουσιν τον ηλιον

라틴어Vulgate,11 ne dicas quid putas causae est quod priora tempora meliora fuere quam nunc sunt stulta est enim huiuscemodi interrogatio

히브리어구약BHS,11 טֹובָה חָכְמָה עִם־נַחֲלָה וְיֹתֵר לְרֹאֵי הַשָּׁמֶשׁ׃

성 경: [전7:11]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에 대한 잠언]

󰃨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 … 유익하도다 – 이는 지혜의 유익성과 보배로움을 언급한 말인데, 여기서 ‘지혜’는 2:12-16에서 암시되어진 바와는 달리 하나님의 지혜, 신앙에 의해 얻어지는 신성한 지혜를 말하는 것 같다. 본절에서 ‘유업’이란 ‘나할라'(*)로서 가나안 땅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물려받는 ‘기업'(출 6:8) 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상속 재산을 의미하는데, ‘유업같이’에 대해서는 그 의견이 두 가지로 나뉜다. (1) 이는 한글 개역 성경처럼 ‘유업과 같이'(like an inheritance, NIV)를 의미한다(2:16;욥 9:26, Lange, Zockler). (2) 이는 ‘같이'(*, 임)라는 말이 ‘…과 함께'(with)라는 말로 번역되는 바, ‘유업과 함께'(with an ingeritance, KJV, RSV, NASB)를 뜻한다(70인역, T.H. Leale, D.R. Glenn, G.A. Barton, Wycliffe). (1)을 취할 경우,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나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처럼 귀하다는 뜻이며, (2)의 경우 지혜는 그 자체로서도 귀하고 빛나나 유업 즉 재산과 함께 있을 때 그 재산을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하는 바 더욱 빛나고 가치가 있게 된다는 뜻이 된다. 이중 어느 쪽을 택해도 본절 이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키 베첼 하호크마 베첼 하카셒 웨이트론 다아트 하호크마 테하예 베알레하

개역개정,12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새번역,12 돈이 사람을 보호하듯, 지혜도 사람을 보호한다. 그러나 지혜를 깨우쳐 아는 지식이 더 좋은 까닭은, 지혜가 그 사람의 목숨을 살려 주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12 돈이 방패막이가 되듯 지혜도 방패막이가 된다. 그러나 지혜를 깨우쳐 아는 지식이 더 뛰어난 이유는 지혜가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가톨릭성경,12 지혜의 그늘에 있는 것은 돈의 그늘에 있는 것과 같다. 지식이 좋은 점은 그 지혜가 소유자의 생명을 보존하여 준다는 것이다.

영어NIV,12 Wisdom is a shelter as money is a shelter, but the advantage of knowledge is this: that wisdom preserves the life of its possessor.

영어NASB,12 For wisdom is protection just as money is protection. But the advantage of knowledge is that wisdom preserves the lives of its possessors.

영어MSG,12 Double protection: wisdom and wealth! Plus this bonus: Wisdom energizes its owner.

영어NRSV,12 For the protection of wisdom is like the protection of money, and the advantage of knowledge is that wisdom gives life to the one who possesses it.

헬라어구약Septuagint,12 οτι εν σκια αυτης η σοφια ως σκια του αργυριου και περισσεια γνωσεως της σοφιας ζωοποιησει τον παρ’ αυτης

라틴어Vulgate,12 utilior est sapientia cum divitiis et magis prodest videntibus solem

히브리어구약BHS,12 כִּי בְּצֵל הַחָכְמָה בְּצֵל הַכָּסֶף וְיִתְרֹון דַּעַת הַחָכְמָה תְּחַיֶּה בְעָלֶיהָ׃

성 경: [전7:12]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에 대한 잠언]

󰃨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 보존함이니라 – 지혜의 유용성의 탁월함을 재물과의 비교를 통해 묘파(描破)한 구절이다. 원문에 의하면 본절 서두에는 연결사 ‘키'(*)가 있어서 본절이 앞절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본절에서 ‘보호하는 것’에 해당하는 ‘첼'(*)은 ‘그늘'(shadow)을 뜻하나 영역본들은 이와 연관시켜 ‘보호'(protection, RSV, NASB), ‘방어'(a eefence, KJV)를 뜻하는 것이로 번역했다. 한편 후반절의 말씀은 잠 3:18,22;8:35의 말씀과 그 맥을 같이한다 하겠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 하나님을 겨외하고 신앙함으로 얻어지는 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어리석고 멸망으 길로 가는 것을 막아주고 오히려 의와 생명의 길로 인도해 준다는 것이다(잠 2:20).

레에 엩 마아세 하엘로힘 키 미 유칼 레타켄 엩 아쉘 입웨토

개역개정,1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새번역,13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이 구부려 놓으신 것을 누가 펼 수 있겠는가?

우리말성경,13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구부리신 것을 누가 펼 수 있겠는가?

가톨릭성경,13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아라. 그분께서 구부리신 것을 누가 똑바로 할 수 있으랴?

영어NIV,13 Consider what God has done: Who can straighten what he has made crooked?

영어NASB,13 Consider the work of God, For who is able to straighten what He has bent?

영어MSG,13 Take a good look at God’s work. Who could simplify and reduce Creation’s curves and angles To a plain straight line?

영어NRSV,13 Consider the work of God; who can make straight what he has made crooked?

헬라어구약Septuagint,13 ιδε τα ποιηματα του θεου οτι τις δυνησεται του κοσμησαι ον αν ο θεος διαστρεψη αυτον

라틴어Vulgate,13 sicut enim protegit sapientia sic protegit pecunia hoc autem plus habet eruditio et sapientia quod vitam tribuunt possessori suo

히브리어구약BHS,13 רְאֵה אֶת־מַעֲשֵׂה הָאֱלֹהִים כִּי מִי יוּכַל לְתַקֵּן אֵת אֲשֶׁר עִוְּתֹו׃

성 경: [전7:13]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에 대한 잠언]

󰃨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 곧게 하겠느냐 – 이는 1:15;6:10의 말씀과 유사하며 내용상 8,9절과 연관시켜 볼 수도 있겠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작정, 주관하고 계시는 바 그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들은 성급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에 대항하거나 거역하지 말고 순응해야 함을 암시해 준다는 말이다.

베욤 토바 헤예 베토브 우베욤 라아 레에 감 엩 제 레움마트 제 아사 ㅏ엘로힘 알 디베라트 쉘로 임차 하아담 아하라우 메우마

개역개정,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새번역,14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

우리말성경,14 잘되어 갈 때는 기뻐하고 고난의 때에는 생각하여라. 이 두 가지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미래에 대해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가톨릭성경,14 행복한 날에는 행복하게 지내라. 불행한 날에는, 이 또한 행복한 날처럼 하느님께서 만드셨음을 생각하여라.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인간은 알지 못한다.

영어NIV,14 When times are good, be happy; but when times are bad, consider: God has made the one as well as the other. Therefore, a man cannot discover anything about his future.

영어NASB,14 In the day of prosperity be happy, But in the day of adversity consider– God has made the one as well as the other So that man may not discover anything that will be after him.

영어MSG,14 On a good day, enjoy yourself; On a bad day, examine your conscience. God arranges for both kinds of days So that we won’t take anything for granted.

영어NRSV,14 In the day of prosperity be joyful, and in the day of adversity consider; God has made the one as well as the other, so that mortals may not find out anything that will come after them.

헬라어구약Septuagint,14 εν ημερα αγαθωσυνης ζηθι εν αγαθω και εν ημερα κακιας ιδε και γε συν τουτο συμφωνον τουτω εποιησεν ο θεος περι λαλιας ινα μη ευρη ο ανθρωπος οπισω αυτου μηδεν

라틴어Vulgate,14 considera opera Dei quod nemo possit corrigere quem ille despexerit

히브리어구약BHS,14 בְּיֹום טֹובָה הֱיֵה בְטֹוב וּבְיֹום רָעָה רְאֵה גַּם אֶת־זֶה לְעֻמַּת־זֶה עָשָׂה הָאֱלֹהִים עַל־דִּבְרַת שֶׁלֹּא יִמְצָא הָאָדָם אַחֲרָיו מְאוּמָה׃

성 경: [전7:14]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에 대한 잠언]

󰃨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 본절은 내용상 앞절(13절)과 연관되며 그 의미 역시 인간사에서 임의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말씀으로 보인다(D.R. Glenn). 여기서 ‘형통한’에 해당하는 ‘토브'(*)는 ‘좋은’, ‘선한’, ‘아름다운’의 뜻을 갖는다(2:1 참조). 그리고 ‘기뻐하고’도 문자적으로는 역시 그 원형이 ‘토브’이다. 또한 ‘생각하라’의 히브리어 ‘라아'(*)는 ‘보다’, ‘관찰(주시)하다’, ‘생각(숙고)하다’ 등의 뜻을 갖는다.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인다. 혹자는 바로 뒷구절 즉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나(Lange), 이보다는 하나님이 곤고케 한신 목적, 이유 등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다(D.R. Glenn). 한편 후반절의 ‘장래 일’이란 문자적으로는 ‘아하라 메우마'(*)인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도 의견이 두 가지로 나뉘인다. (1) 사람이 죽은 후의 일을 의미한다(Delitzsch). (2) 사람의 장래 일 즉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 일을 의미한다(G.A.Barton, T.H. Leale, Lange).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2)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 아무튼 이런 후반절의 의미는 인간의 연약함, 제한되미 마언급함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순응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음이 분명하다.

엩 하콜 라이티 비메 헤블리 예쉬 차디크 오베드 베치데코 웨예쉬 라솨 마아리크 베라아토

개역개정,15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새번역,15 헛된 세월을 사는 동안에, 나는 두 가지를 다 보았다.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악한 채로 오래 사는 악인도 있더라.

우리말성경,15 나는 내 허무한 삶 가운데 이 두 가지를 다 보았다. 의인들이 자신의 의로움 가운데 망해 가는 것과 악인들이 자신의 악함 가운데 장수하는 것 말이다.

가톨릭성경,15 내 허무한 생애 중에 나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의롭지만 죽어 가는 의인이 있고 사악하지만 오래 사는 악인이 있다.

영어NIV,15 In this meaningless life of mine I have seen both of these: a righteous man perishing in his righteousness, and a wicked man living long in his wickedness.

영어NASB,15 I have seen everything during my lifetime of futility; there is a righteous man who perishes in his righteousness, and there is a wicked man who prolongs his life in his wickedness.

영어MSG,15 I’ve seen it all in my brief and pointless life–here a good person cut down in the middle of doing good, there a bad person living a long life of sheer evil.

영어NRSV,15 In my vain life I have seen everything; there are righteous people who perish in their righteousness, and there are wicked people who prolong their life in their evil-doing.

헬라어구약Septuagint,15 συν τα παντα ειδον εν ημεραις ματαιοτητος μου εστιν δικαιος απολλυμενος εν δικαιω αυτου και εστιν ασεβης μενων εν κακια αυτου

라틴어Vulgate,15 in die bona fruere bonis et malam diem praecave sicut enim hanc sic et illam fecit Deus ut non inveniat homo contra eum iustas querimonias

히브리어구약BHS,15 אֶת־הַכֹּל רָאִיתִי בִּימֵי הֶבְלִי יֵשׁ צַדִּיק אֹבֵד בְּצִדְקֹו וְיֵשׁ רָשָׁע מַאֲרִיךְ בְּרָעָתֹו׃

성 경: [전7:15]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중용의 지혜]

󰃨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 있으니 – 이는 단순히 과도하게 행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중용(中庸)을 가르치는 말이 아니다. 즉 여기서 전도자가 말하는 것은 ‘지나친 의(義)’라기보다는 ‘무모한 자기 의'(self-righ-teousness)인 것이다. 전도자는 선만을 행하는 의인이란 이 세상에 없다고 갈파하고 있거니와(20절), 본절은 자신의 의를 자랑하려 드는 자들에 대한 역설적 경고라 하겠다(Eaton, Whybary). 한편 저자가 ‘내 헛된 날’이라 말한 것은 하나님을 떠난 그 자체로서의 인생이 허무하며 무상한 것임을 암시하며(6:12) 특히 이는 솔로몬 자신이 한때 하나님을 떠났던 기간을 상기하며 말한 것일 수도 있다(왕상 9:24;11:1-13 참조).

알 테히 차디크 하르베 웨알 티트하캄 요테르 람마 팃쇼멤

개역개정,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새번역,16 그러니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 왜 스스로를 망치려 하는가?

우리말성경,16 그러니 지나치게 의롭게 살려고 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롭게도 살려고 하지 마라. 무엇 때문에 멸망을 자초하겠는가?

가톨릭성경,16 너는 너무 의롭게 되지 말고 지나치게 지혜로이 행동하지 마라. 어찌하여 너는 너 자신을 파멸시키려 하느냐?

영어NIV,16 Do not be overrighteous, neither be overwise–why destroy yourself?

영어NASB,16 Do not be excessively righteous, and do not be overly wise. Why should you ruin yourself?

영어MSG,16 So don’t knock yourself out being good, and don’t go overboard being wise. Believe me, you won’t get anything out of it.

영어NRSV,16 Do not be too righteous, and do not act too wise; why should you destroy yourself?

헬라어구약Septuagint,16 μη γινου δικαιος πολυ και μη σοφιζου περισσα μηποτε εκπλαγης

라틴어Vulgate,16 haec quoque vidi in diebus vanitatis meae iustus perit in iustitia sua et impius multo vivit tempore in malitia sua

히브리어구약BHS,16 אַל־תְּהִי צַדִּיק הַרְבֵּה וְאַל־תִּתְחַכַּם יֹותֵר לָמָּה תִּשֹּׁוםֵם׃

성 경: [전7:16]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중용의 지혜]

󰃨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려 … 패망케 하겠느냐 – 본절 역시 앞절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의(義)를 추구하고 자랑하려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내용이다(롬 3:20;7:1-25;10:3;갈 2:16;3:11,12).

알 티르아쉬 하르베 웨알 테히 사칼 람마 타무트 베로 잍테카

개역개정,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새번역,17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게 살지도 말아라. 왜 제 명도 다 못 채우고, 죽으려고 하는가?

우리말성경,17 또 지나치게 악하게 살지도 말고 그렇다고 어리석게 살지도 마라. 무엇 때문에 때가 되기 전에 죽으려고 하는가?

가톨릭성경,17 너는 너무 악하게 되지 말고 바보가 되지 마라. 어찌하여 네 시간이 되기 전에 죽으려 하느냐?

영어NIV,17 Do not be overwicked, and do not be a fool–why die before your time?

영어NASB,17 Do not be excessively wicked, and do not be a fool. Why should you die before your time?

영어MSG,17 But don’t press your luck by being bad, either. And don’t be reckless. Why die needlessly?

영어NRSV,17 Do not be too wicked, and do not be a fool; why should you die before your time?

헬라어구약Septuagint,17 μη ασεβησης πολυ και μη γινου σκληρος ινα μη αποθανης εν ου καιρω σου

라틴어Vulgate,17 noli esse iustus multum neque plus sapias quam necesse est ne obstupescas

히브리어구약BHS,17 אַל־תִּרְשַׁע הַרְבֵּה וְאַל־תְּהִי סָכָל לָמָּה תָמוּת בְּלֹא עִתֶּךָ׃

성 경: [전7:17]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중용의 지혜]

󰃨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 죽으려느냐 – 이는 앞절(16절)과 대비되는 말씀으로서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 노골적으로 악행을 일삼는 것을 금하는 내용이다. 특히 본절에서 ‘지나치게’라는 말은 악을 무절제하게 행하지 말고 돌이킬 것을 권고하는 뜻이 담겨 있다. 한편 본절에서 악인이나 우매자가 그들의 악행으로 파멸에 이르고만다는 것은 시 37:10;55:23;58:3-9;73:18;잠 10:27 등과 일맥 상통한다 하겠다.

토브아쉘 테에호즈 바제 웨감 미제 알 탄나흐 엩 야데카 키 예레 엘로힘 예체 엩 쿨람

개역개정,18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새번역,18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우리말성경,18 하나를 붙잡되 다른 하나도 놓지 않는 게 좋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양극단을 피해야 한다.

가톨릭성경,18 하나를 붙잡고 있으면서 다른 하나에서도 네 손을 떼지 않는 것이 좋다. 정녕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는 그 둘 다에서 성공을 거둔다.

영어NIV,18 It is good to grasp the one and not let go of the other. The man who fears God will avoid all extremes.

영어NASB,18 It is good that you grasp one thing, and also not let go of the other; for the one who fears God comes forth with both of them.

영어MSG,18 It’s best to stay in touch with both sides of an issue. A person who fears God deals responsibly with all of reality, not just a piece of it.

영어NRSV,18 It is good that you should take hold of the one, without letting go of the other; for the one who fears God shall succeed with both.

헬라어구약Septuagint,18 αγαθον το αντεχεσθαι σε εν τουτω και γε απο τουτου μη ανης την χειρα σου οτι φοβουμενος τον θεον εξελευσεται τα παντα

라틴어Vulgate,18 ne impie agas multum et noli esse stultus ne moriaris in tempore non tuo

히브리어구약BHS,18 טֹוב אֲשֶׁר תֶּאֱחֹז בָּזֶה וְגַם־מִזֶּה אַל־תַּנַּח אֶת־יָדֶךָ כִּי־יְרֵא אֱלֹהִים יֵצֵא אֶת־כֻּלָּם׃

성 경: [전7:18]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중용의 지혜]

󰃨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 것임이니라 – 지나친 자기 의(義)의 추구나 의도적인 악행을 다시금 금하고 있다. 물론 본절이 적당한 수준에서 악을 행하는 것을 방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저자는 인간의 육신적 생각에서 비롯된 행위는 좌로나 우로 치우칠 수밖에 없음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한편 후반절의 말씀은 전도자가 인간의 본분을 하나님을 경외 하는 것으로 말하고, 그것이 곧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며, 하나님의 돌보심과 축복을 얻는 지름길이라는 말씀을 생각케 한다(12:13;시 34:7,9;잠 1:7;9:10). 또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만유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분으로서 알고 경배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하호크마 타오즈 레하캄 메아사라 솰리팀 아쉘 하이우 바이르

개역개정,19 지혜가 지혜자를 성읍 가운데에 있는 열 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새번역,19 지혜는 슬기로운 한 사람을, 성읍을 다스리는 통치자 열 명보다 더 강하게 만든다.

우리말성경,19 지혜는 성안에 있는 열 명의 용사들보다 지혜로운 한 사람을 더 강하게 한다.

가톨릭성경,19 지혜는 지혜로운 이를 성안에 있는 열 명의 권세가보다 더 힘세게 만든다.

영어NIV,19 Wisdom makes one wise man more powerful than ten rulers in a city.

영어NASB,19 Wisdom strengthens a wise man more than ten rulers who are in a city.

영어MSG,19 Wisdom puts more strength in one wise person Than ten strong men give to a city.

영어NRSV,19 Wisdom gives strength to the wise more than ten rulers that are in a city.

헬라어구약Septuagint,19 η σοφια βοηθησει τω σοφω υπερ δεκα εξουσιαζοντας τους οντας εν τη πολει

라틴어Vulgate,19 bonum est te sustentare iustum sed et ab illo ne subtrahas manum tuam quia qui Deum timet nihil neglegit

히브리어구약BHS,19 הַחָכְמָה תָּעֹז לֶחָכָם מֵעֲשָׂרָה שַׁלִּיטִים אֲשֶׁר הָיוּ בָּעִיר׃

성 경: [전7:19]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의 능력]

󰃨 지혜가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 있게 하느니라 – ‘유사’에 해당하는 ‘솰리트'(*)는 ‘지배자’, ‘방백’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성읍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자, 외부 세력으로부터 성을 비마 지키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리고 본절의 ‘지혜’는 6절에서와는 달리, 특히 앞 18절과 연관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어지는 지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잠 9:10).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얻은 힘이 인간적인 힘이나 능력보다 훨씬 강할 수밖에 없음을 주지시킨다. 한편 ‘열’이란 단순히 숫자상의 ‘열’을 뜻한다기 보다는 완전수로서 많은 수를 가리킨다 하겠다(욥 19:3).

키 아담 엔 차디크 바아레츠 아쉘 야아세 토브 웨로 예헤타

개역개정,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새번역,20 좋은 일만 하고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는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우리말성경,20 선한 일만 하고 절대로 죄짓지 않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

가톨릭성경,20 죄를 짓지 않고 선만을 행하는 의로운 인간이란 이 세상에 없다.

영어NIV,20 There is not a righteous man on earth who does what is right and never sins.

영어NASB,20 Indeed, there is not a righteous man on earth who continually does good and who never sins.

영어MSG,20 There’s not one totally good person on earth, Not one who is truly pure and sinless.

영어NRSV,20 Surely there is no one on earth so righteous as to do good without ever sinning.

헬라어구약Septuagint,20 οτι ανθρωπος ουκ εστιν δικαιος εν τη γη ος ποιησει αγαθον και ουχ αμαρτησεται

라틴어Vulgate,20 sapientia confortabit sapientem super decem principes civitatis

히브리어구약BHS,20 כִּי אָדָם אֵין צַדִּיק בָּאָרֶץ אֲשֶׁר יַעֲשֶׂה־טֹּוב וְלֹא יֶחֱטָא׃

성 경: [전7:20]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의 능력]

󰃨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 없느니라 – 원본에 의하면 본절 서두에는 연결사 ‘키'(*)가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의 정황한 의미에 대해서는 (1)강조적인 말로서 ‘확실히'(Surely, RSV ; Indeed, NASB)로 보거나(M.A. Eaton, Lange), (2) 이유를 나타내는 말로서 ‘…때문에'(For, KJV)로 이해한다(D.R.Glenn).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본절은 앞절과의 연관성을 바튼(G.A. Barton)은 18절에 대한 이유로, 랑게(Lange)는 19절의 확증으로, 이튼(M.A. Eaton(dms 16-19절 내용을 다시 강조하는 표현으로 각각 봄) 시사하며 특히 지혜의 필요성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리고 본절은 솔로몬의 말한 바 왕상 8:46과 유사하며 바울의 말한 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하는 말씀을 생각케 한다(롬 3:23).

감 레콜 하데바림 아쉘 예답베루 엘 티텐 립베카 아쉘 로 티쉬마 엩 압데카 메칼레카

개역개정,21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새번역,21 남들이 하는 말에 마음을 쓰지 말아라. 자칫하다가는 네 종이 너를 욕하는 것까지 듣게 된다.

우리말성경,21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신경 쓰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말도 들릴지 모른다.

가톨릭성경,21 사람들이 말하는 온갖 이야기에 네 마음을 두지 마라. 그러지 않으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게 되리라.

영어NIV,21 Do not pay attention to every word people say, or you may hear your servant cursing you–

영어NASB,21 Also, do not take seriously all words which are spoken, so that you will not hear your servant cursing you.

영어MSG,21 Don’t eavesdrop on the conversation of others. What if the gossip’s about you and you’d rather not hear it?

영어NRSV,21 Do not give heed to everything that people say, or you may hear your servant cursing you;

헬라어구약Septuagint,21 και γε εις παντας τους λογους ους λαλησουσιν μη θης καρδιαν σου οπως μη ακουσης του δουλου σου καταρωμενου σε

라틴어Vulgate,21 non est enim homo iustus in terra qui faciat bonum et non peccet

히브리어구약BHS,21 גַּם לְכָל־הַדְּבָרִים אֲשֶׁר יְדַבֵּרוּ אַל־תִּתֵּן לִבֶּךָ אֲשֶׁר לֹא־תִשְׁמַע אֶת־עַבְדְּךָ מְקַלְלֶךָ׃

성 경: [전7:21]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의 능력]

󰃨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 죄악된 인간 본성의 보편성과 심각성은(20절) 말의 실수와 비신실함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약 3:2).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말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특히 아첨하는 말에 마음을 두는 것은 스스로 올무에 빠져드는 것과 다름없다.

키 감 페아밈 랍보트 야다 립베카 아쉘 감 앝테 앝타 킬랄르타 아헤림

개역개정,22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

새번역,22 너 또한 남을 욕한 일이 많다는 것을 너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우리말성경,22 너 자신도 여러 번 남을 저주했던 것을 네 마음이 알 것이다.

가톨릭성경,22 너도 다른 이들을 여러 번 저주했음을 너 자신이 알고 있다.

영어NIV,22 for you know in your heart that many times you yourself have cursed others.

영어NASB,22 For you also have realized that you likewise have many times cursed others.

영어MSG,22 You’ve done that a few times, haven’t you–said things Behind someone’s back you wouldn’t say to his face?

영어NRSV,22 your heart knows that many times you have yourself cursed others.

헬라어구약Septuagint,22 οτι πλειστακις πονηρευσεται σε και καθοδους πολλας κακωσει καρδιαν σου οπως και γε συ κατηρασω ετερους

라틴어Vulgate,22 sed et cunctis sermonibus qui dicuntur ne accommodes cor tuum ne forte audias servum tuum maledicentem tibi

히브리어구약BHS,22 כִּי גַּם־פְּעָמִים רַבֹּות יָדַע לִבֶּךָ אֲשֶׁר גַּם־[כ= אַתְּ] [ק= אַתָּה] קִלַּלְתָּ אֲחֵרִים׃

성 경: [전7:22]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의 능력]

󰃨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아느리라 – 이는 21절에 연장되는 말로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따라서 그들의 말에 지나치게 신경을 기울이는 것이 쓸모없음을,자신이 남을 저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 확증하는 내용이다. “마음”은 “양심”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G.A.Barton).그리고 이는 사람의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며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리라”(롬 2:15)는 말씀을 생각케 한다.

콜 조 닛시티 바호크마 아말티 에흐카마 웨히 레호카 밈멘니

개역개정,23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새번역,23 나는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해 보았다. 내가 “지혜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결심해 보았지만, 지혜가 나를 멀리하더라.

우리말성경,23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혜로 시험해 보고는 “내가 지혜로워지기로 결심했다”고 했으나 그것은 내 능력 밖이었다.

가톨릭성경,23 나는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여 보았다. “나는 지혜롭게 되리라.” 말하여 보았지만 그것은 내게서 멀리 있었다.

영어NIV,23 All this I tested by wisdom and I said, “I am determined to be wise”–but this was beyond me.

영어NASB,23 I tested all this with wisdom, and I said, “I will be wise,” but it was far from me.

영어MSG,23 I tested everything in my search for wisdom. I set out to be wise, but it was beyond me,

영어NRSV,23 All this I have tested by wisdom; I said, “I will be wise,” but it was far from me.

헬라어구약Septuagint,23 παντα ταυτα επειρασα εν τη σοφια ειπα σοφισθησομαι

라틴어Vulgate,23 scit enim tua conscientia quia et tu crebro maledixisti aliis

히브리어구약BHS,23 כָּל־זֹה נִסִּיתִי בַחָכְמָה אָמַרְתִּי אֶחְכָּמָה וְהִיא רְחֹוקָה מִמֶּנִּי׃

성 경: [전7:23]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의 능력]

󰃨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멀리하였도다.-“이 모든 것”이란 앞의 내용들을 가리킨다.그리고 상반절은 전도자가 그의 지혜로 앞의 모든 것을 살펴보았으나 그 모든 내용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한계성을 인정하는 것을 뜻하며 하반절도 상반절과 연관되어 전도자 자신이 지혜롭게 되어 모든 것을 아는 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지혜가 그에게서 멀리하였다는 고백이다.이와 같은 사실은, 한편으로는 인가적인 지혜로 는 이세상 모든 것을 헤아려 알 수 없음을 보여주며, 또 한편으로는 참다운 지혜는 인간 자신의 노력에 의해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얻어지는)것임을 암시한다(2:26).

라호크마 쉐하야 웨아모크 아모크 미 이므차엔누

개역개정,24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새번역,24 지혜라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멀고 깊으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우리말성경,24 지혜라는 것이 그토록 멀고 길이를 알 수 없이 심오하니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가톨릭성경,24 존재하는 것은 멀리 있으며 심오하고 심오하니 누가 그것을 찾을 수 있으리오?

영어NIV,24 Whatever wisdom may be, it is far off and most profound–who can discover it?

영어NASB,24 What has been is remote and exceedingly mysterious. Who can discover it?

영어MSG,24 far beyond me, and deep–oh so deep! Does anyone ever find it?

영어NRSV,24 That which is, is far off, and deep, very deep; who can find it out?

헬라어구약Septuagint,24 και αυτη εμακρυνθη απ’ εμου μακραν υπερ ο ην και βαθυ βαθος τις ευρησει αυτο

라틴어Vulgate,24 cuncta temptavi in sapientia dixi sapiens efficiar et ipsa longius recessit a me

히브리어구약BHS,24 רָחֹוק מַה־שֶּׁהָיָה וְעָמֹק עָמֹק מִי יִמְצָאֶנּוּ׃

성 경: [전7:24]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의 능력]

󰃨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능히 통달하랴. – 이는 앞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그동안 갈고 닦은 지식과 인생 경험에 바탕을 둔 나름대로의 폭넓은 식견으로도 이 세상에서 역사되어지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는 한계성을 언급한 것이라 하겠다.된 것의 히브리어 “마쉐하야”(*)는 “존재하는 것”(what has been,NASB)을 뜻하는데, 혹자는 이를 현존하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역사되어질 모든 섭리까지 포함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롬 11:33 참조, M.A. Eaton).

삽보티 아니 웨립비 라다아트 웨라투르 우밬케쉬 호크마 웨헤쉬본 웨라다아트 레솨 케셀 웨핫시클루트 홀렐로트

개역개정,25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여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새번역,25 그래도 나는 한 곳으로만 정신을 쏟아 보았다. 지혜가 무엇인지, 사물의 이치가 어떤 것인지를, 연구하고 조사하고 이해하려고 하였다. 사악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우매가 얼마나 미친 일인지를 깨닫는 데에 정신을 쏟아 보았다.

우리말성경,25 그리하여 내가 마음을 바쳐 지혜와 사물의 이치를 알아내려고 살펴보고 연구해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얼마나 바보스럽고 미련한지 알아보려고 했다.

가톨릭성경,25 나는 마음을 다하여 지혜와 사리를 알고 찾고 구하며 과연 사악함은 우둔한 것인지 우매함은 어리석은 것인지를 알아보기로 작정하였다.

영어NIV,25 So I turned my mind to understand, to investigate and to search out wisdom and the scheme of things and to understand the stupidity of wickedness and the madness of folly.

영어NASB,25 I directed my mind to know, to investigate, and to seek wisdom and an explanation, and to know the evil of folly and the foolishness of madness.

영어MSG,25 I concentrated with all my might, studying and exploring and seeking wisdom–the meaning of life. I also wanted to identify evil and stupidity, foolishness and craziness.

영어NRSV,25 I turned my mind to know and to search out and to seek wisdom and the sum of things, and to know that wickedness is folly and that foolishness is madness.

헬라어구약Septuagint,25 εκυκλωσα εγω και η καρδια μου του γνωναι και του κατασκεψασθαι και ζητησαι σοφιαν και ψηφον και του γνωναι ασεβους αφροσυνην και σκληριαν και περιφοραν

라틴어Vulgate,25 multo magis quam erat et alta profunditas quis inveniet eam

히브리어구약BHS,25 סַבֹּותִי אֲנִי וְלִבִּי לָדַעַת וְלָתוּר וּבַקֵּשׁ חָכְמָה וְחֶשְׁבֹּון וְלָדַעַת רֶשַׁע כֶּסֶל וְהַסִּכְלוּת הֹולֵלֹות׃

성 경: [전7:25]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의 능력]

󰃨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하였더니. – 앞에서 인간 지혜의 한계성을 고백한 기자는 이제 돌이켜 인간의 완악한 본성을 살피고자 한다.특히 본절에는 유사한 의미를 지닌 말들이 여러 차례 반복됨으로써 기자의 탐구 의욕이 어느 정도 간절하고 철저한지를 암시하고 있다.

우모체 아니 마르 밈마웨트 엩 하잇솨 아쉘 히 메초딤 와하라밈 랍바흐 아수림 야데하 토브 리페네 하엘로힘 임말레트 밈멘나 웨호테 일라케드 바흐

개역개정,26 마음은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더 쓰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내었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 여인을 피하려니와 죄인은 그 여인에게 붙잡히리로다

새번역,26 나는 또, 올가미와 같은 여자 마음이 덫과 같고, 손이 쇠사슬과 같은 여자는 죽음보다 더 쓰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남자는 그런 여자를 피할 수 있지만, 죄인은 그런 여자에게 걸려들고 말 것이다.

우리말성경,26 그러고 나서 내가 깨달은 것은 마음이 덫과 그물 같고 손이 사슬 같은 여자는 죽음보다 더 지독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그런 여자에게서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죄인은 사로잡힐 것이다.

가톨릭성경,26 그리하여 나는 여자란 죽음보다 쓰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는 올가미, 그 마음은 그물 그 손은 굴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지만 죄인은 그에게 붙잡히고 만다.

영어NIV,26 I find more bitter than death the woman who is a snare, whose heart is a trap and whose hands are chains. The man who pleases God will escape her, but the sinner she will ensnare.

영어NASB,26 And I discovered more bitter than death the woman whose heart is snares and nets, whose hands are chains. One who is pleasing to God will escape from her, but the sinner will be captured by her.

영어MSG,26 One discovery: A woman can be a bitter pill to swallow, full of seductive scheming and grasping. The lucky escape her; the undiscerning get caught.

영어NRSV,26 I found more bitter than death the woman who is a trap, whose heart is snares and nets, whose hands are fetters; one who pleases God escapes her, but the sinner is taken by her.

헬라어구약Septuagint,26 και ευρισκω εγω πικροτερον υπερ θανατον συν την γυναικα ητις εστιν θηρευματα και σαγηναι καρδια αυτης δεσμοι χειρες αυτης αγαθος προ προσωπου του θεου εξαιρεθησεται απ’ αυτης και αμαρτανων συλλημφθησεται εν αυτη

라틴어Vulgate,26 lustravi universa animo meo ut scirem et considerarem et quaererem sapientiam et rationem et ut cognoscerem impietatem stulti et errorem inprudentium

히브리어구약BHS,26 וּמֹוצֶא אֲנִי מַר מִמָּוֶת אֶת־הָאִשָּׁה אֲשֶׁר־הִיא מְצֹודִים וַחֲרָמִים לִבָּהּ אֲסוּרִים יָדֶיהָ טֹוב לִפְנֵי הָאֱלֹהִים יִמָּלֵט מִמֶּנָּה וְחֹוטֵא יִלָּכֶד בָּהּ׃

성 경: [전7:26]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의 능력]

󰃨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잡히리로다. – 본절에서 악한 여인에 대해 언급한 사실이 기자의 여자 기피 심리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본서의 다른 곳에서는 사랑하는 아내와의 행복한 삶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9:9). 여기서는 악한 여인을 대표적으로 선정하였을 뿐이며 또 이러한 여인의 올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임을 상기시키는 데 주안점이 있다.

레에 제 마차티 아메라 코헬레트 아하트 레아하트 림초 헤쉬본

개역개정,27 전도자가 이르되 보라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연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새번역,27 보아라, ㉡전도자가 말한다.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사물의 이치를 하나하나씩 찾아가는데, / ㉡히, ‘코헬렛’. ‘설교자’ 또는 ‘교사’ 또는 ‘총회의 인도자’

우리말성경,27 전도자가 말한다. “보라. 이것이 내가 깨달은 것이다. 내가 모든 이치를 알아내기 위해서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았지만

가톨릭성경,27 코헬렛의 말이다. 보아라, 결과를 얻으려고 하나하나 더듬어 내가 찾아낸 바를.

영어NIV,27 “Look,” says the Teacher, “this is what I have discovered: “Adding one thing to another to discover the scheme of things–

영어NASB,27 “Behold, I have discovered this,” says the Preacher, “adding one thing to another to find an explanation,

영어MSG,27 At least this is my experience–what I, the Quester, have pieced together as I’ve tried to make sense of life.

영어NRSV,27 See, this is what I found, says the Teacher, adding one thing to another to find the sum,

헬라어구약Septuagint,27 ιδε τουτο ευρον ειπεν ο εκκλησιαστης μια τη μια του ευρειν λογισμον

라틴어Vulgate,27 et inveni amariorem morte mulierem quae laqueus venatorum est et sagena cor eius vincula sunt manus illius qui placet Deo effugiet eam qui autem peccator est capietur ab illa

히브리어구약BHS,27 רְאֵה זֶה מָצָאתִי אָמְרָה קֹהֶלֶת אַחַת לְאַחַת לִמְצֹא חֶשְׁבֹּון׃

성 경: [전7:27]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의 능력]

원본에 의하면 본절 서두는 “레아”(*, 보라, Look, NIV;Behold, RSV, NASB)로 시작되고 있다. 이것은 전도자가 자신이 깨달은 바를 감탄하면서 선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아쉘 오드 바케솨 나프쉬 웨로 마차티 아담 에하드 메엘레프 마차티 웨이솨 베콜 엘레 로 마차티

개역개정,28 내 마음이 계속 찾아 보았으나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천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내가 찾았으나 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느니라

새번역,28 아직도 얻지 못하였지만, 다만 찾으면서 깨달은 것은 오로지, 천 명 가운데서 남자 하나는 찾을 수 있어도, 천 명 가운데서 여자 하나는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성경,28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내 영혼이 계속 찾아보았지만 남자 가운데는 1,000명 가운데 한 명 그것을 알아낼 수 있을까 여자 가운데는 한 명도 없었다.

가톨릭성경,28 내 영이 줄곧 찾아보았지만 나는 찾아내지 못하였다. 나는 천 명 가운데 남자 하나를 찾아내었지만 그 모든 이들 가운데에서 여자는 하나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영어NIV,28 while I was still searching but not finding–I found one upright man among a thousand, but not one upright woman among them all.

영어NASB,28 which I am still seeking but have not found. I have found one man among a Yousand, but I have not found a woman among all these.

영어MSG,28 But the wisdom I’ve looked for I haven’t found. I didn’t find one man or woman in a thousand worth my while.

영어NRSV,28 which my mind has sought repeatedly, but I have not found. One man among a thousand I found, but a woman among all these I have not found.

헬라어구약Septuagint,28 ον ετι εζητησεν η ψυχη μου και ουχ ευρον ανθρωπον ενα απο χιλιων ευρον και γυναικα εν πασι τουτοις ουχ ευρον

라틴어Vulgate,28 ecce hoc inveni dicit Ecclesiastes unum et alterum ut invenirem rationem

히브리어구약BHS,28 אֲשֶׁר עֹוד־בִּקְשָׁה נַפְשִׁי וְלֹא מָצָאתִי אָדָם אֶחָד מֵאֶלֶף מָצָאתִי וְאִשָּׁה בְכָל־אֵלֶּה לֹא מָצָאתִי׃

성 경: [전7:28]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의 능력]

󰃨 일천 남자 중에서…얻지 못하였느니라. –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에 대해 혹자는 죄짓기 전의 순수하고 무죄한 아담을 가리킨다고 하나(Lange)이보다는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자(T.H. Leale, M.A.Eaton), 혹은 진정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D.R.Glenn)로 보는 것이 낫겠다. 또한 여기서는 남자보다 여자 가운데서 더 찾기가 어려운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인류역사에서 최초로 타락한 자가 남자 아닌 여자라는 맥락에서 언급되어진 것으로 보인다(딤전 2:11-15참조).그리고 본절에서 “일천”이란 단순히 숫자상의 의미를 나타내기보다는 많은 수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수로 보인다(출20:6;34;7;민1:16;신1:11;욥9:3;33:23;시50:10;84:10).

레바드 레에 제 마차티 아쉘 아사 하엘로힘 엩 하아담 야솨르 웨헴마 비케슈 히쉬보노트 랍빔

개역개정,29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새번역,29 그렇다. 다만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말성경,29 내가 깨우친 것은 오직 이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바르게 만드셨지만 사람들은 온갖 짓을 다했다는 것이다.”

가톨릭성경,29 다만 이것을 보아라, 내가 찾아낸 바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올곧게 만드셨지만 그들은 온갖 재주를 부린다는 것이다.

영어NIV,29 This only have I found: God made mankind upright, but men have gone in search of many schemes.”

영어NASB,29 “Behold, I have found only this, that God made men upright, but they have sought out many devices.”

영어MSG,29 Yet I did spot one ray of light in this murk: God made men and women true and upright; we’re the ones who’ve made a mess of things.

영어NRSV,29 See, this alone I found, that God made human beings straightforward, but they have devised many schemes.

헬라어구약Septuagint,29 πλην ιδε τουτο ευρον ο εποιησεν ο θεος συν τον ανθρωπον ευθη και αυτοι εζητησαν λογισμους πολλους

라틴어Vulgate,29 quam adhuc quaerit anima mea et non inveni virum de mille unum repperi mulierem ex omnibus non inveni

히브리어구약BHS,29 לְבַד רְאֵה־זֶה מָצָאתִי אֲשֶׁר עָשָׂה הָאֱלֹהִים אֶת־הָאָדָם יָשָׁר וְהֵמָּה בִקְשׁוּ חִשְּׁבֹנֹות רַבִּים׃

성 경: [전7:29]

주제1: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태도]

주제2: [참지혜의 능력]

󰃨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꾀를 낸 것이라. – 이는 앞절(28절)에 이어 인간의 부패성, 죄악성을 나타낸 구절이다. “정직하게”에 해당하는 “야솨르”(*)는 “곧은”,”올바른”(upright, KJV,NIV, RSV)의 뜻으로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무죄한 상태로 만드셨음을 암시하며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말씀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솨본”(*)은 “계략”, “계책” 등의 의미하는데, 본절에서는 특히 아담 안에서 정죄된 인간들이(롬 5:16-21)일생 동안 의롭지 못한 일을 획책함을 뜻하며 인간 부패의 근본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음을 암시한다.

라틴어Vulgate,30 solummodo hoc inveni quod fecerit Deus hominem rectum et ipse se infinitis miscuerit quaestionibus quis talis ut sapiens est et quis cognovit solutionem ver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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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7장] 한 남자; 예수 그리스도

본문: 전도서 7:1~29

지난 시간에는 어떻게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세 가지 유형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돈과 명예가 많으면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둘째는 자식이 많고 장수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질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 앞에 사람답게 걸을 수 있는 지식이 있는가? 질문이었습니다. 이 세 질문에 대한 답은 전도서는 No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것은 자신이 지금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공상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것을 해주지 않는 가에 대해 하나님과 따지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것들이 실상은 우리에게 독이 되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전도서 1~6장 까지 말씀을 공부하면서 우리 인생에 하나님이 빠질 때 허무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음을 배웠습니다. 이제 7장부터는 설교자는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오늘 7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통해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의 말씀의 제목은

“한 남자”, 예수 그리스도

I. 나는 누구인가? (v1~14)

(1) 죽음을 늘 묵상하는 나 (v1~4)

v1~4절에서는 설교자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통해 인생의 끝이 있음을 알게 하고 있습니다. 1a절을 보십시오. “좋은 이름이 귀한 향유보다 낫고” “좋은 이름”은 그 사람이 남긴 평판을 말합니다. “항유”는 죽은 자에게 바르는 기름을 말합니다. 가난한 자는 시체에 이런 기름을 바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평판을 남기는 것이 부하게만 살다가 죽는 것보다 낫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11:39“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통해 좋은 평판을 얻었으되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하였으니” 히브리서에 소개된 믿음의 조상들은 심한 조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뿐 옥에 갇히는 시련과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며 시험을 받기도 하고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니며 궁핍과 고난과 고통을 당하였으며 사막과 산과 동굴과 땅굴에서 떠돌아다녔느니라.(히브리서 11:36~38) 그러나 그들은 좋은 이름을 얻었습니다.

1b절을 보십시오. “죽는 날이 사람의 태어난 날보다 나으니라.” 설교자에게는 “죽는 날”이 배가 만선을 하고 돌아오는 날과 같습니다.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나은 것은 인생의 모진 풍파를 끝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애곡하는 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이는 그것이 모든 사람의 끝이기 때문이라. 살아 있는 자는 그것을 자기 마음에 두리라.” “애곡하는 집”은 초상집을 의미합니다. 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좋습니까? 이는 우리 모두가 죽는 사실을 마음에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인지하고,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삶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끝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것은 짐승의 삶과 같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슬픔이 웃음보다 나으니 이는 얼굴의 슬픔으로 인하여 마음이 더 나아지기 때문이니라.” 이 구절은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찰에서 나온 구절입니다. 결코 웃음을 폄하하고자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을 정직하게 바라볼 때, 인생은 고통입니다. 생노병사의 고통 속에서 사는 인생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이 고통의 바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통찰할 때 슬픔이 웃음보다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이 슬픔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합니다. 자신의 창조주를 찾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애곡하는 집에 있으나 어리석은 자들의 마음은 희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희락”은 쾌락을 의미합니다. 인생에서 먹고 마시면서 앞서 언급한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이 없는 삶입니다. 이들은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지혜로운 자들의 마음은 늘 “애곡하는 집”에 있습니다. 늘 죽음을 생각하고, 자신이 가야 곳을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함을 생각합니다.

(2) 치명적인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는 나 (v5~7)

5~6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사람에게 나으니라 가시나무가 솥 밑에서 우지직 소리를 내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의 웃음도 그와 같나니 이것도 헛되니라.” 솔로몬 시대 중동에는 땔감이 부족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땔감의 재료들을 사용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가시나무입니다. 가시나무는 불에 던져지면 요란한 소리를 냅니다. 마치 화력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쉬 꺼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실속이 없는 땔감의 재료입니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자들은 사람들의 사탕바림과 같은 칭찬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에는 실속이 없습니다. 진정한 실속은 지혜로운 자의 말을 듣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어리석은 자들만이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7절을 보십시오. “참으로 학대는 지혜로운 자를 미치게 하며 뇌물은 마음을 파멸시키느니라.” 지혜로운 자도 때로는 인생길을 걸을 때, 부에 대해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학대”란 의미는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빼앗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의를 통해 재산을 축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뇌물을 받는 것은 다른 사람의 공정한 기회를 빼앗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5~7절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실수를 범하고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자들도 어리석음에 빠져 살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자임을 가르쳐 죽고 있습니다.

(3) 인생의 역경을 견디며 살아가는 나 (v8~10)

8~9절을 보십시오. “일의 끝이 일의 시작보다 낫고 영 안에서 참는 자가 영 안에서 교만한 자보다 나으니 네 영이 조급하여 분노하지 말라. 분노는 어리석은 자들의 품에 머무느니라.” “일의 끝이 일의 시작보다 낫고”의 의미는 지혜로운 자는 일의 끝과 시작을 생각하는 자입니다. 그 과정에서 올 어려움과 고난까지도 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 속에서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인내하는 자는 열매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결코 인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힘을 믿고 가는 자는 인생의 길에서 넘어져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인생에는 인생의 쓴 뿌리, 분노가가득합니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립니다. 또한 과거지향적인 삶을 삽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르기를, 이전의 날들이 지금의 날들보다 더 나은 이유가 무엇이냐? 하지 말라. 네가 이것에 대하여 지혜롭게 묻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의 의미는 옛날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았다고 한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지혜로운 태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인생의 길을 자신의 힘으로 삽니다. 그리고 넘어진 후에는 분노와 불평, 그리고 과거에 매여 삽니다. 이런 삶은 지혜로운 자의 삶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자는 인생의 모든 일들을 다 예상합니다. 그리고 인내합니다. 뒤에 남겨진 것을 보지 않고 앞을 보고 전진합니다. 이런 삶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인내합니다.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 모두 가 인생의 역경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차이점은 누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차이입니다.

(4)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나 (v11~14)

11~12절을 보십시오. “지혜는 상속 재산과 더불어 좋은 것이니 그것을 통하여 해를 쳐다보는 자들에게 유익이 있도다. 지혜는 방벽이며 돈은 방벽이니라. ”지혜는 상속 재산과 더불어 좋은 것이니“ 상속 재산을 받을 때, 그 재산을 지혜롭게 사용할 지혜를 함께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받은 재산을 잘 지키고, 크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지혜“는 사람의 인간적인 지혜를 의미합니다.”방벽“이라는 의미는 ”안식처 또는 ”피난처“란 의미입니다. 돈이 인생의 피난처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돈을 잘 관리하는 재능 또한 인생의 피난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삶에 유익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생각하는 돈과 그를 잘 관리하는 지혜가 언제나 영원할 수 있을까요? 13~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깊이 생각해 보라. 그분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우리 인생이 항상 탄탄대로만을 달릴 수는 없습니다. 굽은 길도 걸어야 가야 합니다. 그리고 굽은 길을 가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14a를 보십시오. ”형통하는 날에는 기뻐하되 역경을 당하는 날에는 깊이 생각하라.” 하나님은 형통한 날과 역경을 통해 우리의 삶을 쭉 뻗은 길로도 가게 하시고, 굽은 길로도 가게 하십니다. 인생이 형통할 때는 우리는 기뻐합니다. 그러나 역경이 오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이 두 가지를 주신 것은 인생을 겸손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II.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v15~18)

(1) 지나치게 의로운 인생

“나의 허무한 날들 속에서 내가 모든 일을 보았는데 자기의 의로움 속에서 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사악함 속에서 자기 생명을 길게 하는 사악한 자가 있도다. “지나치게 의로운 자가 되지도 말며 스스로 지나치게 지혜로운 자가 되지도 말라. 어찌하여 네가 네 자신을 멸하려 하느냐?” 인생을 살아갈 때 악인이 득세하고 장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럴 때에 의로운 마음이 가득하여 악인과 싸우려고 하는 의인이 있습니다. 이 불의한 사회를 개조해 보고자 사회 운동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악한 자들의 반격과 덫에 빠져 자기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2) 지나치게 악과 타협한 인생

또한 17절에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너는 지나치게 사악한 자가 되지도 말며 어리석은 자가 되지도 말라. 어찌하여 네가 네 때가 이르기도 전에 죽으려 하느냐?” 악인과 결탁하여 사는 것입니다. 악인과 결탁하여 이 세상에서 악한 일을 하는 의인은 하나님께서 그 목숨을 강제로 거두어 가십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생

또 다른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생입니다. “네가 이것을 붙잡고 참으로 네 손을 이것에서 거두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그것들 모두에서 벗어나리라.”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26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이제 설교자는 그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III.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가? (v19~29)

19절은 지혜의 가치 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지혜로운 자를 도시 안에 있는 열 명의 용사보다 강하게 하느니라.” 하나님은 지혜를 얻은 자가 열 명의 용사 열 명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인생은 세상을 밝히는 등불과 같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열은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또한 ‘용사’는 통치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열 명의 용사는 세상의 권력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권력을 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왜 지혜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까? 지혜는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땅 위에 하나도 없느니라.” 설교자는 이 땅에서 의로운 자는 그 누구도 없다고 말합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네가 들을까 염려하노라. 너도 그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였음을 네 마음도 종종 아느니라.” 21~22절은 이 세상에 의로운 인간이 없다는 하나의 일예가 됩니다. 누구든지 그 마음에 다른 사람을 향한 저주가 있습니다. 이는 종과 주인이 같습니다. 차이는 누가 덜 하느냐의 차이뿐입니다.

설교자는 인생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의로운 인생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의롭게 되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23~24절에서 설교자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찾고 또 찾았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혜가 멀리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내게서 멀리 있었도다” 또한 24절에서 지혜를 자신의 힘으로 찾을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멀리 있고 지극히 깊은 것을 누가 능히 찾아내리요?” 솔로몬은 지혜를 실체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지혜가 무엇인가?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깊게 알고자 하면 알수록 그는 더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안다는 것은 그에게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렴풋하게나마 그가 알게 된 지혜는 무엇입니까? 26절을 보시시오. 음녀의 존재입니다. 음녀가 사람을 유혹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창녀가 젊은이를 속여 꾀여 내듯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속이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는 그 여자의 꾐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전도자가 이르되, 보라, 내가 하나씩 하나씩 세어가며 전말을 알아내어 이것을 알게 되었노라.” 전도자는 우리 인생에 구원자가 있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내 혼이 아직도 찾고 있으나 내가 알아내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곧 내가 천 명 중에서 한 남자를 찾았으나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한 명도 찾지 못하였느니라.” 솔로몬은 “한 남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여자가 지혜롭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열은 완전수입니다. 열이 두 번 곱한 수가 1000입니다. 3 또한 완전수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모든 인류 중에서 한 남자만이 의로우며, 그 분을 통해 의로워질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 “한 남자”는 누구냐? 여기서 솔로몬은 막혔습니다. 도저히 그가 누군지를 더 이상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이 누군지를 압니다. 그 분은 천하 만민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29절은 “한 남자“ 구원자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발견한 것은 오직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사람을 곧바르게 만드셨으나 그들이 많은 창안물을 찾아냈다는 것이라.” 29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곧 바르게, 의로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안물’의 의미는 ‘생각, 계획, 계략, 또는 계책’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악을 구별하고 스스로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 위한 여러 가지 생각과 계략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에는 악이 들어오게 되었고, 사람들은 점점 더 복잡하게 악한 일에 연루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인간은 선을 알면서도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존재로 변해버렸습니다.

[전도서 7장 주일 설교말씀] 깨닫고 사는 삶(전도서 7: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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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전도서 7장 주일 설교말씀 중에서 깨닫고 사는 삶이라는 성경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지혜도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을 깨닫는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늘의 지혜를 받아 복음을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깨닫고 사는 삶(전 7:19-22)

전 7:19 지혜가 지혜자를 성읍 가운데에 있는 열 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전 7: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전 7:21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전 7:22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

지도자 솔로몬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때그때 조심하며 알고 살아가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지혜는 그 지혜의 소유자에게 어떠한 능력을 제공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 지혜로운 자가 열 사람의 유사보다 낫다 <19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열 사람의 유사라고 하는 것은 그 성읍을 대표하는 유지를 의미합니다. 즉 그 성의 실권자, 성공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한 사람이 돈푼이나 벌고 세상 공부를 많이 한 사람 열 명보다 훨씬 낫다는 말씀입니다.

그 의미를 다시 두 가지로 분류해 봅시다.

첫째, 지혜의 힘이 물리적인 힘보다 우월하고, 믿음의 힘이 무력의 힘보다 강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믿음으로 승리했던 전쟁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한 예로, 아람 나라가 사마리아 성을 쳐들어 왔을 때 기도의 사람이었던 엘리사의 기도로 이 아람 나라 군사들을 유도해서 사마리아 성안으로 데려왔던 기가 막힌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군인들은 활 한번 쏘지를 않았습니다. 창 한번 던진 일도 없었고 칼 한번 휘두~른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와 하나님과의 직통 기도와 그 능력의 힘을 통해서 아람 나라를 대파시킨 것은 무력의 힘보다 기도의 힘과 지혜의 힘이 더 강함을 입증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섬기는 지혜자의 가치는 힘만 믿고 사는 열 명의 집권자, 혹은 성공한 사람들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6일 전쟁을 통해서 아랍을 대파했던 그 사건을 굉장한 사건으로 이해하고 또 자랑하고 있습니다. 6일 전쟁의 경우 무력과 무력의 싸움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혜와 힘의 싸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막강한 아랍 나라를 6일 동안에 이겼던 것은 군인이나 무기가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랍과의 전쟁을 앞두고 각료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아랍과 이스라엘의 군사력을 비교 검토해 보았더니 20:1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혜를 짜내 새로운 전략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이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던 것처럼 첫째 날 제공권을 장악하여 6일 동안에 전쟁을 끝내고 일곱째 날에는 쉬자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었습니다. 그들은 창조의 순서를 전쟁의 순서에 적용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은 일하시고 일곱째 날에는 쉬셨으니 우리도 엿새는 전쟁을 하고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자는 작전을 세운 것입니다. 이것이 6일 전쟁입니다. 이것은 힘의 싸움이 아니라 지혜의 싸움이었습니다. 지혜의 힘은 물리적인 힘보다 강합니다. 우리에게도 이 지혜가 필요합니다. 돈을 벌고 사업에 성공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하는 사람이 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것은 의인이 없어서였지 그 동네에 유명한 정치가나 실업가가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의로운 사람 하나의 힘과 지혜로운 한 사람의 힘은 열 명의 유명 인사보다 더 위대합니다. 교회에도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서머나 교회가 그런 교회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존재 가치가 없어 보였지만 실상은 강한 교회 실상은 튼튼한 교회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과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그 교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문제를 기도와 믿음으로 해결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 열왕기서를 보면 유다 왕 히스기야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한 방법이 똑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문제는, 앗수르라는 강대국이 쳐들어와서 항복하라고 협박했을 때 그는 각료 회의나 군사 작전 회의를 소집하기 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보낸 협박 편지를 가지고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펴놓고는 하나님의 응답을 구했습니다. 그는 기도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만일 히스기야가 각료 회의를 갖고 군사 작전 회의를 해서 군사를 동원해 싸움을 벌였더라면 이길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엄청난 희생을 지불해야 했을 것입니다. 앗수르 군사 18만 명을 죽이려면 이스라엘 백성도 그 수만큼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인간의 지혜를 유보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동원해서 18만 명이 넘는 앗수르 군사를 진멸시키셨습니다.

둘째 문제는, 히스기야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때 그는 낯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를 통해서 히스기야는 고침 받고 15년을 더 살았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끓고 엎드려서 기도했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포기할 때,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며 내 마음의 자리를 비울 때 주께서 내 심령의 공간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주님께서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다” <계 3:20>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까닭이 있다면 그것은 자존심과 교만과 경험을 믿기 때문입니다.

2>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다 <20절>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전도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 제아무리 선을 추구하고 경건의 모습을 갖춘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국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왕상 8:46> 이 일에 대해서 사도 야고보도 말하기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약 3:2>라고 했고 사도 요한도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전적인 부패를 알고 있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고 연약한 존재임을 또한 알아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참된 지혜를 얻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그 지혜는 죄인에게 그가 걷고 있는 악한 과정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하며 그로 하여금 유일한 안전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로 돌이키게 해 줄 것입니다.

3>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면 저주하는 것을 듣게 된다 <21절>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말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관한 나쁜 소식에 심각한 주의를 기울이지 말며 그러한 왜곡된 사실에 의하여 자신의 견해와 행동을 제약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도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남에게서 모욕을 들을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자신을 험담하는 소문과 풍문에 의해 상처를 받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삼하 16:11> 사람들은 이웃에게 대한 칭찬보다는 비평하기를 좋아하기 마련이므로 이웃의 험담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전 4:3> 우리는 이러한 이웃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우리 자신에게도 발견되는 것이므로 남들을 탓하기 전에 먼저 딤후 1: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롬 12:3절에”너희가 마땅히 생각해야 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지혜롭게 생각하고”라고 말씀합니다. 근신하는 마음을 다른 말로 가장 근사치로 바꾼다면 “지혜로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낱말 자체가 지혜라는 뜻은 아니지만 가장 근사치의 의미가 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살아가도록 주신 선물은 “능력과 사랑과 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지혜가 왜 소중합니까? 두려움이 찾아오게 되면, 우리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는 제일 먼저 자제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어쩔 줄을 모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이 고난을 없애 주세요 이 시련과 역경을 없애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하나님 이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옳습니까? 이렇게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이 지혜가 삶에서 내가 가는 출구를 열어주며 내 삶을 발전시키고 내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중요한 기도를 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주신 놀라운 선물 가운데 하나가 “지혜”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왜 이 사실을 모르십니까? 왜 활용하지 않으시나요? 인간의 지혜를 포기할 때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며 내 마음의 자리를 비울 때 주께서 내 심령의 공간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주님께서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까닭이 있다면 그것은 자존심과 교만과 경험을 믿기 때문입니다. 2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그렇습니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전도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 제 아무리 선을 추구하고 경건의 모습을 갖춘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국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귀한 신앙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왕상 8:46> 이 일에 대해서 사도 야고보도 말하기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약 3:2>라고 했고 사도 요한도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전적인 부패를 알고 있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고 연약한 존재임을 또한 알아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참된 지혜를 얻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그 지혜는 죄인에게 그가 걷고 있는 악한 과정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하며 그로 하여금 유일한 안전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로 돌이키게 해 줄 것입니다. 2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면 저주하는 것을 듣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남의 비판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들으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조만간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들을 듣게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남에게서 모욕을 들을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자신을 험담하는 소문과 풍문에 의해 상처를 받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삼하 16:11> 사람들은 이웃에게 대한 칭찬보다는 비평하기를 좋아하기 마련이므로 이웃의 험담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고전 4:3> 우리는 이러한 이웃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우리 자신에게도 발견되는 것이므로 남들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약 3장에 말이 나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꼭 불과 같다고 했습니다. 삶의 바퀴를 사르는 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무심코 던진 한마디 말이 박혀서 미움과 악독으로 평생을 증오하며 살아갑니다. 그 한마디 타격이 불씨가 되어 그 생애가 흘러가는 동안 꺼지지 않고 계속 미움의 불이 타오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를 향해서 무심코 던진 너는 쓸모없는 놈이라는 한마디의 말이 그 아이의 마음속을 평생 불사릅니다. 나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내 아들이 타격을 받습니다.

내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의 말이 어떤 한 형제의 가슴속에 깊은 고통을 줍니다. 생애의 바퀴를 불사릅니다. 이처럼 무서운 영향력을 갖는 것이 바로 말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는 말, 마치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내 생애를 그처럼 마음대로 방향을 전환시킬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영향력을 주면서 자랄 수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대화를 나눕니다. “엄마 거짓말과 도적질 중에 어느 것이 나쁘지” 하는 아들의 질문에 어머니가 “도적질이 나쁘지!” 그랬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아니에요 엄마 거짓말이에요. “왜 그러니?” 도적질이야 물건 갖다 주면 변상이 되지만 거짓말은 변상이 안되잖아요” 옳은 말입니다.

불행한 것은 우리가 평생에 그렇게 많이 사용하고 늘 우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인 말을 가지고 내가 주변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지 모르는 채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비극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참으로 자랐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네 말의 습관이 어떤가 보아라! 그 말이란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말의 영향력이 엄청난 것에 대해서 탈무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은 손이 없지만 손이 하는 일을 한다 사람을 죽인다. 그런데 손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손은 가까이 있는 사람만 죽이지만 말은 멀리 있는 사람도 죽인다. 화살처럼 그렇지만 화살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화살은 손으로 막을 수 있지만 말의 쏘아대는 무서운 살상력은 피할 세력이 없다” 말의 영향력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살펴봐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주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워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기도해야 할 제목입니다. 나갈 말과 안 나갈 말을 구분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내가 상대방에 대해 안 좋은 것을 마음에 아무리 품고 있어도 참고 있으면 상대방과의 사이에 틈을 내지 않고 저절로 해결되는데 일단 말을 해 놓으면 내 마음이 바뀌어져도 그 말은 돌아다니면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파수꾼을 세워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 주님과 날마다 교제해야 합니다.

누구와 만나서 어떤 말씨를 배우느냐에 따라서 내 말의 습관이 달라집니다. 사 50:4절에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는도다.” 우리 주님께 기도하고 그 주님과 깊이 교제합시다. 침묵할 줄 아는 은혜를 우리 주님에게서 배워야겠습니다. 쓸모없는 이야기는 안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3> 말의 실수를 자백하십시오

내가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자백하십시오 그것이 나쁜 것이라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입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사람들이 정답대로 말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언제나 틀렸을 때는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참 편합니다. 정답을 무시하면 말이 길어집니다.

4>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혀가 길들여졌습니다. 언제입니까?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실 때였습니다. 그 입술이 열려서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그 입술이 열려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일을 이 땅에 힘차게 전파하는 입술로 바뀌었습니다. 이제까지는 자랑만 하던 입술이었습니다. 뽐내던 입술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험담했던 입술이었습니다. 그 입술로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그 입술이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역사를 많은 사람에게 힘 있게 전하는 능력의 입술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할 때입니다. 내 입술의 방향이 바뀌어졌습니다. 길들일 수 없던 과거는 잃어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갖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언어를 갖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구주입니다. 찬송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찬미하는 입술로 바뀝니다.

성령 충만이 우리의 입술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온전한 능력이십니다. 길들여지지 않는 혀가 술에 취하지 않고 오직 성령 충만할 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화답하며 놀라운 생애로 변화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한번밖에 못 사는 생애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인 언어생활 이 부분이 성장하고 있는 가 내속에 바뀌어져야 할 언어 습관이나 입에 쉽게 붙어 있는 거짓말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언어는 없는가를 살펴보면서 성숙한 언어생활이 되도록 주님의 은혜를 구하십시다. 그런데 만약 거슬리는 비판의 말을 듣게 되었을 때에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당신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들을 했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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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7장 강해 설교문] 사는것과 죽는것(전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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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알쓸잡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은 전도서 7장 강해 설교문 중에서 사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제목: 사는 것과 죽는 것

성경: 전도서 7:2

기독교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는 곳입니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물음의 해답을 가장 빠르게 얻어내려면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통하여 찾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살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삶의 문제를 다루는 동시에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전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백년대계를 꿈꾸고 계획을 세울지라도 오늘 하루만 산다는 심정으로 살아야 바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집을 나서며 오늘도 무사히 건강하게 주님 은혜 안에서 살게 해 주시기를 마음속으로 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기도를 더 보태야 합니다. 오늘이라도 나에게 죽음이 다가온다면 준비된 사람으로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시90: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지금 현제 세계에서는 하루 동안에 죽는 사람이 170만 명입니다 하루 동안에 죽는 사람이 1초에 20명입니다. 시골보다도 큰 도시가 하루에 하나씩 쓸어져 없어지는 것입니다 모세의 말처럼 홍수처럼 쓸어 가는 것입니다.

어느 전도인의 뼈저린 가슴 아픈 사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암에 걸려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젊은이였습니다. 가족들은 충격을 받을까 암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가슴에 있는 혹을 떼냈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제 아물면 퇴원한다는 말로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목사님은 매일같이 찾아가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도무지 마음 문을 열지를 안더랍니다. 목사님 이제 퇴원하면 제가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 조금 더 지나고 나서 예수 믿는 거 생각해 보겠습니다. 의사 말로는 혹을 떼냈으니 한 달만 지니면 퇴원할 수 있데요. 그의 말을 들으며 얼마나 인생의 비애를 느끼며 고통을 겪었는지 모른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활보하며 걸어 다니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와 같이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재물을 쌓아놓고 세월에 맞추어 갖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만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죽음의 운명을 안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솔직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 앞에 겸손해져야 합니다. 죽음 앞에 솔직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기에 즉 오래 살 것으로만 알기에 바로 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곽선희 목사님을 통해서 들은 얘긴데 70이 다 된 할아버지가 이혼을 하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70까지 살고서는 이제 와서 무슨 이혼을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70까지 살았으니 다만 이제 와서라도 얼마라도 편하게 살아야 하겠으니 이혼을 해야 된다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곽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만약 지금 할머니가 죽을병에 걸려서 한 달 안에 돌아가신다면 그래도 이혼을 하겠느냐고 했더니 그렇다면 그럭저럭 그냥 살아야 하겠지요 하더랍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한 달밖에 못 살 것이라는 심정으로 사시면 되겠네요. 그다음에도 안 돌아가시면 역시 그러게 한 달밖에 못 사신다는 심정으로 사시다 보면 행복하신 날도 있으실 것입니다.라고 이혼 계획을 취소시켜 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종말론적 심정으로 살 때 겸손해지고 솔직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만 산다고 생각한다면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인가가 확실해질 것입니다.

영국의 대 설교가였던 스펄전 목사님은 40대 초반부터 고치기 힘든 어떤 지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끔 이런 말을 자주 했답니다. 오늘 설교가 마지막 설교가 될 것 같아 같은 말이지만 내가 꼭 하고 싶은 그 설교를 또 하겠습니다.라고 이미 하셨던 설교를 또 하셨지만 그때마다 온 교우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저도 오늘 마지막 설교하는 심정으로 저와 여러분들이 하루밖에 못 산다면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하는 심정으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를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없을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긴박감을 가지고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배드리는 자세가 달라지고 매일 듣던 소리라도 다르게 들릴 것입니다. 사실 내일이라는 것은 아무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루밖에 못 산다고 가정할 때에 꼭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저는 이제 저와 여러분들이 죽기 전에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1. 나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저녁에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 모든 것은 다 이별을 해야 하는데 만나야 하는 한분이 계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대면해야 합니다. 그분은 예수를 아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 목사가 미국에 선교사로 갔을 때 오글로 소프라는 목사가 묻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목사에게 예수를 아느냐고 묻는 것은 얼마나 완고한 태도입니까? 그러나 요한 웨슬레에게 문제가 있었나 봅니다. 웨슬레는 “예 압니다” 이 세상의 죄를 대신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오글로 소프 목사는 다시 묻기를 그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에게는 어떤 분이십니까?라고 또 물었습니다. 그러자 웨슬레는 우물쭈물 대답을 하긴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마음속에서는 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왜 나는 자신 있게 대답을 못할까 나의 믿음이 어딘가 잘못이 있나 보다 뼈아픈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선교사 일을 그만두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서 내가 오늘 저녁이라도 이 세상을 떠난다면 이런 상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렇게 열병을 치르듯 진통하는 가운데 어느 모임에 참석하여 드디어 하나님이 그에게 빛을 던져 주심으로 거듭난 체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기독교 역사에 샛별처럼 빚 나는 요한 웨슬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마치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확률이 5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에게도 구원의 확률이 50% 라고 하는 인상을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정말 아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 24:40:41)

여러분의 신앙이 아직도 바로 되어 있지 않다면 이 시간을 통해 해결 받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어떠한 관계입니까?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2. 교회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교회를 제처 놓고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교회와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고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분명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와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고는 충성된 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교회에 위선이 많아서 못 나가겠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위선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의사들 중에 위선자가 있다고 해서 아플 때 병원에 안 가겠습니까? 학교 교사들 중에 위선자가 있다고 해서 자녀들을 학교에 안 보내겠습니까? 계란을 한 줄 샀는데 그중에 한두 개 잘못된 것이 있다고 해서 그 후부터 계란 먹는 것을 그만두겠습니까?

3.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잘못된 모습을 남겨놓고 죽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의 모습은 바로 영원한 사람입니다. 죽으면 다시 고칠 수 없습니다.

4. 돈 문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죽는 데 돈 문제가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돈 문제야 말로 대단히 중요한 것이며 항상 깨끗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 빛을 지거나 돈을 떼먹고 죽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부득이 부채를 지는 일이 있다면 분명한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꼭 지키려고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빛을 지고 갚지 못할 때 기독교를 들먹입니다. 빚을 지고 갚을 수 있는데도 갚지 않는다면 정직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세상은 부정직한 사람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돈 관계에 항상 깨끗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부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갚는다고 하는 굳은 결의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대한 빛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빛도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호리라도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날들이 있을지라도 하루밖에 못 산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반문하기를 그것은 당장 죽어가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지 나는 아직 몇십 년을 더 살지 모르기에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장 죽는 심정으로 살지 아니하면 하늘에 보화를 쌓아 놓을 수 없고 바로 살 수도 없고 주님을 만날 준비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 때라도 위로부터 소환장이 날아오면 미련 없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후회 없는 생애를 사실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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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강해

전도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20년 10월 14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마 5:18; 요 10:35)와 사도 바울(갈 3:6; 딤후 3:16)의 증거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진술된 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전통적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야곱 벤 카임에 의해 편집한 제2 랍비 성경(봄버그판)을 표준적 본문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잘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1장: 해 아래의 모든 것이 헛됨 2장: 쾌락도, 지혜도, 수고도 헛됨 3장: 모든 일이 때가 있음 4장: 학대, 시기, 친구 없음 5장: 하나님을 경외함, 재물이 헛됨 6장: 낙이 없는 삶 7장: 지혜와 어리석음이 대조됨 8장: 왕에게 복종하라 9장: 사람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 10장: 작은 어리석음 11장: 구제, 선행, 근면, 즐거운 삶 12장: 사람의 본분

서론 전도서의 저자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1:1) 솔로몬이다. 저자는 큰 지혜를 많이 얻었고(1:16),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고(2:8) 잠언을 많이 지었다(12:9)고 말한다. 그것은 솔로몬에게 가장 적합하다. 열왕기상 4:29-30, 32,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저가 잠언 3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며.” 10:23,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왕보다 큰지라.” 11:3, “왕은 왕후가 700인이요 빈장[첩]이 300인이라.” 그는 후년에 인생을 회고하며 본서를 썼을 것이다. 본서가 솔로몬이 쓰지 않았고 후대의 어떤 저자가 썼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1) 이러한 견해에 대한 가장 유력한 증거로 주장된 것은 언어적 자료들 즉 단어들과 문법 구조가 후대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도서의 어휘, 어형론, 구문 구조, 문체 등은 히브리 저작들의 어느 시대에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2) 본서는 언어와 문체에서 아가서와 공통점이 가장 많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여호와(הוהי)로 부르지 않는 것은 전도서와 아가서 두 권뿐이다. 3) 이 사실은 본서가 솔로몬의 저작이라는 내적인 증거들 중에 중요한 한가지 점이기도 하다. 성경의 각 책들은 특징적 주제를 가진다고 본다. 시가서들도 그러하다. 욥기의 특징적 주제는 고난이며, 시편은 기도와 찬송, 잠언은 지혜, 아가서는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신구약성경 66권이 도서관같이 다양한 주제들의 책들로 구성되어 풍성한 교훈이 되게 하셨다. 전도서의 특징적 주제는 허무이다. 전도서에는 ‘헛되다’는 말( 헤벨 )이 38번 나온다. ‘헛되다’는 원어는 원래 ‘수증기, 입김’이라는 뜻이며(잠 21:6; 사 57:13) ‘사라지는 것, 덧없는 것, 무가치한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BDB). 또 본서에는 ‘해 아래’라는 표현도 29번이나 나온다. 본서는 초두에도, 맨 마지막에도 세상의 모든 것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일이 헛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1:2; 12:8). 이런 사상은 단순한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와 다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헛되다는 것은 현실이며 사실이다. 우리는 오히려 이런 사실 때문에 영생하시는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본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교훈하기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는 말한다(12:13).

본문 혹은 각주에 자주 사용된 약어 KJV 영어 King James Version NASB 영어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NIV 영어 New International Version LXX 고대 헬라어 70인역 Syr 고대 수리아어역 It 고대 라틴어역 Vg 고대 라틴어 Vulgate역 BDB Brown-Driver-Briggs, Hebrew Lexicon of the O. T KB Koehler-Baumgartner, Lexic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 Langenscheidt Langenscheidt Pocket Hebrew Dictionary . NBD The New Bible Dictionary. IVP. Poole Matthew Poole, A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JFB Jamieson-Faussett-Brown, A Commentary.

1장: 해 아래의 모든 것이 헛됨 [1-2절]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다’는 원어( 헤벨 )는 원래 ‘수증기’나 ‘입김’이라는 뜻인데(잠 21: 6; 사 57:13) ‘사라지는 것, 덧없는 것, 무가치한 것’을 점차 뜻하게 되었다(BDB). 전도자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3-4절]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그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 자기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고 다만 뒤의 사람들에게 약간의 유익이 있을 뿐이며, 그 사람도 또 죽을 것이므로 결국은 헛되다는 말이 된다. 이와 같이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온다. 수천년의 인류 역사가 이렇게 진행되어 왔다. [5-7절]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그 강물이 흘러 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느니라]. 자연만물은 날마다 반복된 일을 한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간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간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다시 증발하여 하늘의 비구름이 된다. [8절]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자연만물의 이런 반복을 생각하면 만물이 피곤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만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도 만족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눈은 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지만 만족함이 없고 귀도 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지만 들어도 마음의 욕구에 차지 않는다. [9-11절]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혹은 ‘것들’]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세상의 모든 일들은 반복된다. 물론 과학문명에서 발명이라는 것이 있고 지식과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문제, 죄의 문제, 인간 관계의 문제, 종교적 문제, 도덕적 문제, 남을 미워하고 속이고 자기의 욕심을 추구하는 것, 돈 사랑, 육체적 쾌락 사랑, 명예심, 교만 등의 일들은 하나도 새로운 것이 없고 변한 것이 없다. 죄인인 사람들은 늙고 병들고 죽는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지나가고 우리의 기억에서 희미해진다. 또 다음 세대들도 우리에 대해 똑같이 그러할 것이다.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 [12-13절]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하늘 아래서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은 결국 괴로운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셔서 수고하게 하신 것이다. 삶은 괴로운 것이다. 아기를 출산할 때부터 심한 고통이 있고 출산된 아기도 울면서 세상의 삶을 시작하고 인생의 여정 전체가 수고로운 삶이다. [14절]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사람이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은 다 헛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사람이 바람을 잡아보려 해도, 그래서 그것을 잡았다 생각하고 그것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는 바람뿐인 것처럼, 사람의 모든 행사는 지나고 보면 공허하고 그가 죽고나면 더욱 그러하다. 사람이 출생하여 학교에 가고 학교를 나오면 취직하고 결혼하고 또 자녀를 출산하고 기르고 학교에 보내고 졸업하면 취직하고 또 결혼한다. 사람은 세상에서 이렇게 하다가 하나씩 죽는 공허한 삶을 사는 것이다. [15절]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사람이 늙으면 허리도 구부러지고 그 구부러진 허리는 곧게 할 수 없다. 또 이지러진 것 곧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셀 수 없다. 사람은 나이가 많아 늙으면 없어진 시력을 회복하기 어렵고, 없어진 청력도 회복하기 어렵고, 없어진 기억력과 기력도 회복하기 어렵다. [16-18절]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체험했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이는]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더함이니라].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원문)는 부친 다윗을 포함하여 이전 세대의 모든 지혜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지혜를 많이 얻어서 그 지혜의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살펴보고 묵상하였으나 번뇌와 근심만 더할 뿐이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의 헛됨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다(2절).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헛된 영광과 만족을 구하지 말고 세상적 지혜와 지식도 구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만 바라야 한다. 이것이 성경 특히 전도서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이다(전 12:13).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께서만 영원하시고 헛되지 않으시다. 하나님만 의미가 있으시고 가치가 있으시다. 하나님 안에 영생이 있고 참된 평안과 만족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천국만 믿고 소망하고 그의 계명만 순종해야 한다. 2장: 쾌락도, 지혜도, 수고도 헛됨 [1-1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 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道)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솔로몬은 육신의 즐거움이 헛됨을 말한다. 그는 웃음을 미친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술을 마시며 각종 사업을 크게 벌렸다. 집들을 짓고 포도원, 동산, 과원을 만들고 각종 과목을 심고 못을 파고 소와 양떼를 많게 하고 은금과 보배를 쌓고 노래하는 자들과 첩들을 많이 두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 모든 것들이 헛되고 무익함을 깨달았다. [12-17절]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 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12절의 ‘망령됨’이라는 원어( 홀렐로스 )는 ‘미친 것’이라는 뜻으로(madness)(KJV, NASB, NIV) 전도서에만 나온다(1:17; 2:12; 7: 25; 9:3; 10:13). 솔로몬은 지혜가 우매함보다 나으나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며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히 기억함을 얻지 못하며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이기 때문에 결국 다 헛되다고 말한다. 우리는 일시적인 것, 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에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한다. 다윗은 시편 39편에서 우리의 일생이 손 넓이만큼밖에 안되고 그림자 같다고 말하였다(시 39:5-6). 사도 바울도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며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하였다(고후 4:18). [18-23절]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싫어하였나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나타내어 수고한 모든 결과를 저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도 헛되다. 본문에는 ‘수고’라는 말이 10번이나 나온다. 모든 수고가 헛된 까닭은 그가 수고하여 이룬 모든 결과를 그의 뒤에 오는 사람이 누리고 관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많이 수고하지만, 그것의 결과를 즐기는 시간은 너무 짧다. 그래서 솔로몬은 마음으로 실망하였다고 말한다. 사람은 자기가 수고하여 얻은 것을 자기가 별로 쓰지 못하고 다음 사람에게 유업으로 넘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밤에도 쉬지 못하는 그 수고는 수고한 당사자에게 헛되고 큰 해가 되는 일일 뿐이다. [24-26절]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樂)(토브 בוֹט)[좋은 것,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솔로몬은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라고 말한다. 전도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즐거움에 대해 반복해 말한다(3:13; 5:18; 8:1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즐겁게 살기를 원하신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육신의 쾌락, 세상의 지혜와 지식, 세상의 모든 수고가 다 헛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지 말고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지 말고 세상일들만 힘쓰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요 6:27), 시편 39:5는 사람의 일생을 손 넓이만큼과 같고 없는 것과 같고 그 든든히 선 때도 참으로 허사뿐이라고 말했다. 둘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하고 그가 주시는 복과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의 은혜와 천국 소망의 즐거움이며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육의 양식으로 인한 즐거움도 포함한다. 그것은 다 성도가 땅에서 누리는 복이다. 3장: 모든 일이 때가 있음 1-13절, 시간과 영원 [1-8절] 천하에 범사가 기한[정한 때]이 있고 모든 목적[일]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포기할]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 1절의 ‘기한’이라는 원어( 제만 )는 ‘정한 때’(BDB, NASB)라는 뜻이고, ‘목적’이라는 원어( 케페츠 )는 ‘기쁨, 목적, 일’(BDB)이라는 뜻이다. 모든 일에는 정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루려고 작정하신 때가 있다. 사람은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그것은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출생하고 자기가 원치 않아도 죽음을 맞이한다. 씨를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사람을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병이나 사고로 갑자기 죽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되기도 한다. 집을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사람이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사람이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 돌이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장애가 되어 던져버릴 때가 있고 돌을 모아서 집을 짓거나 담을 세울 때가 있다. 사랑하는 여인을 안을 때가 있고 안아서는 안 될 때가 있다. 어떤 귀한 물건은 끝까지 찾을 때가 있고 어떤 것은 조금 찾다가 포기할 때가 있다. 어떤 것은 쓸모가 있어서 지킬 때가 있고 어떤 것은 쓸모가 없어 버릴 때가 있다. 어떤 천은 찢어버릴 때가 있고 어떤 천은 찢어진 부분을 꿰맬 때가 있다. 어떤 일에는 대의(大義)를 위해 잠잠할 때가 있고 어떤 일에는 사실을 증거하고 변명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큰 죄인이라도 사랑해야 할 때가 있고 어떤 경우에는 가족이라도 미워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경우는 이웃 나라와 전쟁해야 할 때가 있고 어떤 경우는 화해해야 할 때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 다니엘 11장은 “작정된 기한”이라는 말을 세 번 했다(단 11:27, 29, 35). 개인의 삶도, 하나님의 나라와 참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도 그러하다. 주 예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말씀하셨다(막 1:15). [9-11절]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일하는 자는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는가? 사람의 일하는 수고는 물질적 유여함이라는 유익이 있지만, 결국 늙고 죽을 것이므로 영속적 가치와 유익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수고로운 삶을 사람들에게 주셨다. 그러나 그가 창조하신 하늘과 땅, 산과 들과 바다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을 따라 매우 아름답다. 또 그는 사람이 이 지나가는 세상, 늙고 쇠하고 죽고 마는 삶 속에서 장수(長壽)를 복으로 누리게 하셨고 또 영생을 사모하게 하셨다. 사람은 시간의 제한 속에 살지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하시는 일들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 사람은 이 세상의 창조의 때나 이 세상의 종말의 때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출생의 때와 자기 자신의 죽음의 때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또 우리의 삶에서 많은 일들을 행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의 시작과 끝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가장 지혜롭고 선하신 뜻대로 또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 모든 일들을 행하실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빨리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영원하신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하나님 안에 있다. 개인과 세계의 모든 근원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고 그의 말씀 안에 있다. [12-13절]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본문은 수고로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두 가지 선물에 대해 말한다. 첫째는 기쁨과 즐거움이고, 둘째는 선을 행하는 것이다. 사람이 수고로운 삶 속에서도 기뻐하고 먹고 마시며 낙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복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즐거움은 물론 우선 영적인 즐거움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안과 즐거움에 있다(롬 14:17).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 빌립보서의 주요 교훈은 기뻐하라는 것이다. 성도는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고 살아야 한다. 항상 기뻐하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5:16). 그러나 이 즐거움은 또한 주 안에서 누리는 육신적 즐거움도 포함한다. 전도서는 이 사실을 여러 번 증거했다. 전도서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3:22,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5: 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8:15,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기독교는 쾌락주의도 아니지만 금욕주의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식물을 감사히 먹고 마시며 즐거워한다. 사도 바울은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고 할 것이나 그것은 미혹케 하는 귀신의 가르침이며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딤전 4:1-5). 또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복이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도록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며(엡 2:10), 주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딛 2:14). 우리가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 것은 구주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이다. 이것은 사람의 본래의 모습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조급하지 말고 하나님의 작정하시고 섭리하시는 때를 기다리며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해야 한다. 둘째로, 시간 속에 사는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는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고 그의 말씀인 성경 배우는 것을 가장 큰 복으로 알고 또 죄로 인해 참 지식을 잃어버렸던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에서 구원의 은혜와 영생의 소망과 현세의 복들을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계명대로 선을 행해야 한다. 14-22절, 인생은 죽는 존재임 [14절]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세상의 허무함과 대조하여 하나님의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며 그의 행하시는 일들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 곧 그가 창조하신 세상과 그 운행이, 또 그가 섭리하시는 일들이 영원하다. 시편 33:11, “여호와의 도모[뜻]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생각]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이사야 51: 6,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하시는 일에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그는 거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뺄 지혜와 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자이시요 사람은 피조물이며, 하나님께서는 전능자이시요 사람은 보잘것없는 풀과 같은 존재이며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순간, 그 앞에 두려워 떨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신 존재와 그의 전지, 전능하신 섭리 앞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욥기 23:13-15,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하는구나.” [15절]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이 세상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들은 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다. 해 아래는 참으로 새것이 없다(전 1:9). [16절]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세상에서 재판하는 법정은 법이 바르게 집행되어야 하며 공의가 행해져야 하는 곳이다. 의(義)는 하나님의 법에 맞는 것이다. 그것은 보통 사회법에도 맞고 또 이성과 사리와 양심에도 맞고 거짓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법정에도 불의와 악이 있다. 이것이 옛날부터의 현실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법관들도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욕심, 물질욕, 명예욕, 잘못된 선입관, 잘못된 사상과 이념, 인간적 친분 관계, 권력의 눈치 등의 이유로 법정에서까지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17절]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도다. 본문은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말한다. 모든 일들이 때가 있고,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때가 있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로마서 2: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8절]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도자는 앞에서 말한 대로 법정에 악이 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심판의 필요성을 재확인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셔서 그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음을 깨닫게 하시는 뜻이 있다고 말한다. 법정에서의 악과 불의, 억울함과 학대당함을 통해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도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며 짐승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19-21절]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사람이 짐승보다 낫지 않다는 깨달음은 그 둘이 동일하게 호흡을 하다가 결국 동일한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사람의 몸은 짐승의 몸과 똑같이 흙으로 돌아간다. 하나님께서 사람도, 짐승도 다 흙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창 2:7, 19; 시 104:29). 물론 사람의 혼( 루아크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 루아크 ) [호흡]은 땅으로 내려간다. 사람의 영혼은 짐승과 달리 불멸적이며(마 10:28)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 영생(永生)이나 영벌(永罰)을 받지만, 짐승의 호흡은 불멸적이지 않고 죽으면 없어진다. [22절]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身後事)[죽은 후의 일]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자기 일’이란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다양한 직업과 책임과 취미의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사람은 개인적으로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일들을 행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재능과 교회에 주신 직분과 은사는 다양하다. 로마서 12:68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권면하고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 여러 은사들을 주셨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즐거워하며 행하는 것이 복된 일이다. 전도서 2:24는 사람이 수고하는 중에 심령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복되다고 말했고, 3:12-13도 사람이 사는 동안 기뻐하며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주부는 즐거운 마음으로 집안일을 해야 한다. 현숙한 여인은 부지런히 손으로 집안일을 하는 자이다(잠 31:12, 13, 15, 27). 사도 바울은 젊은 여자들이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집안일을 하라고 교훈했다(딛 2:5). 사도 베드로는 장로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교인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권면했고(벧전 5:2-3), 바울은 성도들이 즐거움으로 헌금하며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교훈했고(고후 8:1-3; 9:2), 또 종들이 단 마음으로 육신의 주인들을 섬겨야 한다고 말했다(엡 6:5-8; 딛 2:9-10). 사람이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즐거워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며(2:24) ‘하나님의 선물’(3:13)이다. 그가 죽은 후에 될 일을 보게 하려고 그를 다시 살려 데려올 자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이 복인 줄 알고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 속에서 항상 즐거워하며 일하고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작정하시고 섭리하신다. 우리는 하나님만 경외하고 의지하고 순종해야 한다. 모든 육체는 풀 같고 그 영광은 꽃과 같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세세토록 있다(벧전 1:24-25). 하나님 안에만 영원한 생명이 있다. 둘째로, 사람은 자신이 죽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소망해야 한다. 우리는 의를 행해야 하는 법정에도 불의가 있는 것을 볼 때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며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다 죽으며 이 점에서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셋째로, 사람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그것은 그의 분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일로 생각하며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4장: 학대, 시기, 친구 없음 [1-3절]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 세상에는 학대받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지만 그들을 위로하는 자가 없다.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학대받는 자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다. 세상에 불의, 학대, 억울함 등이 있음을 볼 때, 세상은 분명 이상적이지 않고 살 만한 좋은 곳이 못된다. 이것은 사람의 죄로 인해 세상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더 복되며, 아니, 아예 태어나지 않은 자가 더 복되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또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대로, 내세(來世)가 있다. 의인에게는 복된 천국이 있고 악인에게는 심히 두려운 지옥이 있다. 또 이 세상에서도 고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고린도후서 1:3-4, “[그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4절]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여러 가지 교묘한 일’( 콜 키쉐론 함마아세 )이라는 원어는 ‘일의 모든 솜씨, 성취, 성공’(BDB, KB)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모든 수고를 하고 일을 성공해도 오히려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의 시기를 당하니, 그것도 헛된 일이라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좋은 인간관계는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이 세상은 생존경쟁과 시기 질투의 싸움터와 같다. [5-6절] 우매자는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느니라.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 ‘손을 거둔다’는 말은 ‘손을 모은다’는 뜻이다. 그것은 게으른 자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잠 6:10; 24:33). 사람의 수고가 헛되다고 하여서 게으름이 행복은 아니다. 우매자는 게으르고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한다. ‘자기 살을 먹는다’는 말은 우리말에 ‘제 살을 깎아 먹는다’는 말과 같다. 우매자의 게으름은 결국 자신을 망친다. 소득이 많은 것도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이 헛되고 마음의 고생뿐일 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적은 소득이라도 평온함이 있는 것이 더 낫다(잠 15:16-17). 행복은 소득의 많음에 있지 않고 마음의 평안에 있다. 그런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신다(살후 3:16; 사 48:18). [7-8절] 내가 또 돌이켜 해 아래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수고하기를 마지아니하며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하나니[하고 묻지 아니하나니](NASB; KJV도 비슷함)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 어떤 사람은 쉬지 않고 수고하여 돈을 번다. 그는 번 돈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쓰고 즐길 줄 모르고 계속 벌기만 한다. 그에게는 돈을 버는 목적이 없다. 그는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고 낙을 누릴 줄도 모르고 일만 한다. 그러므로 그의 수고는 참으로 헛되다. 사람이 돈을 버는 기계인가? 무엇을 위해 수고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가? 사람은 삶의 바른 목표가 필요하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이사야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둘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돈을 버는 것보다,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돈을 쓸 때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을 위해, 즉 전도와 교회 건립을 위해 쓰고, 둘째는 나를 위해 적당히, 절약해 쓰고, 셋째는, 주의 이름으로 이웃을 위해 구제하는 데 써야 한다. [9-10절]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동료]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서로 협력하면 무슨 일이든지 더 잘 하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또 둘 중에 하나가 혹 실수하거나 낙심할 때에도 다른 사람이 그를 붙들어 주고 그를 위로, 격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붙들어줄 친구가 없는 사람은 불행할 것이다. [11-12절]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두 사람의 친근한 교제는 서로에게 기쁨과 힘이 될 것이다. 또 두 사람이 단합하면, 어려운 일이 올 때 잘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친구들 간의 교제와 협력은 유익하다.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다투는 것은 서로에게 해를 줄 뿐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5:15는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께서 명하신 선한 일들에서 일심단합하기를 원하신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고 교훈하였다(살전 5:11). [13-16절]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청년]은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저는 그 나라에서 나면서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되었음이니라. 내가 본즉 해 아래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청년]과 함께 있으매 저의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늙은 왕은 교만하고 완고하고 미련하여서 바른 조언과 충고를 받을 줄 모르나, 그런 왕보다는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청년이 더 낫다. 본문은 한 청년이 자기 나라에서 가난한 자로 나서 자랐고 고난을 받아 옥에도 들어간 적이 있지만,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로 왕이 되었다고 말한다. 본문은 요셉의 경우를 말한 것 같다. 요셉은 왕은 아니지만, 왕의 제2인자로 왕을 대신해 통치하였다. 백성들은 늙은 왕 대신에 왕이 된 그 청년을 지지하고 그의 통치받기를 좋아하였다. 16절의 ‘후에 오는 자들’은 다음 세대의 사람들과 왕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한 때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던 그는 다음 세대에서는 사람들의 배척을 받기도 한다는 뜻이다. 세상의 권력은 무상하며 사람들의 여론도 변화무쌍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학대와 시기가 있는 세상에서 오직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을 위로자로 삼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비록 소득이 적어도 평온한 삶을 구해야 한다. 인생의 참 행복은 마음의 평안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참 평안을 주신다. 셋째로, 우리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수고하는 허무한 사람이 되지 말고, 삶의 바른 목표를 정하고 하나님과 교회와 하나님의 일과 선한 일을 위해 수고해야 하고 또 돈을 쓸 때도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김과 주 예수님을 믿음에 있어서 지식과 생각의 일치와 겸손과 사랑의 덕으로 서로 좋은 친구가 되고 좋은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일심단합하여 참 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 5장: 하나님을 경외함, 재물이 헛됨 1-7절, 말씀 듣기, 기도, 서원 [1절]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네 발걸음들](원문)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구약시대의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다. 신약교회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린다(딤전 3:15).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우리의 발을 삼가야 한다. ‘네 발걸음들’이라는 말은 우리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가리킬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가르친다. 본문은 하나님께 가까이 해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이는 우매자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예배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를 경외하고 악을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나이다”라고 말하였다(삼상 15:22). 호세아 6:6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인애(仁愛)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를 대접하려고 분주한 마르다보다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칭찬하기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한가지가 필요하니라(전통본문).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0:41-42). [2-3절]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우리는 교회에서나 어디에서나 하나님께 기도할 때 성급한 마음으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초월자이시며, 사람은 유한하고 낮고 비천한 피조물이며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말을 적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고, 수다스럽게, 무례하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 또 본문은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고 말한다. 일이 많으면 헛된 생각도 생기고, 또 말이 많으면 어리석은 말도 생긴다. 일반적으로, 지혜자는 말을 아끼고 신중하게 말하는 자이다. 잠언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17: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우리는 기도할 때도 그러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6:7-8). [4-7절]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 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서원’은 하나님께 맹세로 약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서원하면 갚기를 더디하지 말아야 한다. 민수기 30:2는,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破約)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고 말한다. 시편 15:4, “[주의 성산에 거할 자는]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에 나갈 때 하나님께 서원하였고 그가 승리하고 돌아올 때 그를 맞았던 외동딸을 번제로 드렸다(삿 11:30-31, 34-35, 39). 한나는 하나님께 아들 주시기를 구하며 서원하였고 사무엘을 얻은 후 그를 하나님께 바쳤다(삼상 1:10-11, 26-28). 그러나 우매자는 쉽게 서원하고 쉽게 잊어버리고 지키지 않는다.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함이 그에게 없기 때문이다. 사울 왕이 그런 자이었다. 그는 맹세한 것을 쉽게 저버렸다. 서원하고 그것을 갚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벌받을 죄가 된다. 신명기 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본문은 또,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신중히 기도하며 서원하고 서원한 것은 꼭 지켜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뜻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다. 종교 의식보다 말씀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예배드릴 때 설교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성급한 마음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드릴 제목들을 생각하며 한가지씩 차근하게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인격적인 기도이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고 무엇을 서원할 때는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하고, 또 서원한 것은 해(害)가 되어도 반드시 갚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바이다. 8-12절, 학대, 재물의 유익과 폐해 [8-9절] 너는 어느 도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이는]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음이니라. [더욱이](KJV) 땅의 이익은 뭇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본문은, “너는 어느 도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공의를 박멸하는 악한 자들이 있다.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다. 우리는 그것을 놀라지 말아야 한다. 본문은, “[이는]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음이니라”고 말한다. 문맥상 또 성경의 교훈적 성격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하나님에 대해 말씀한 것이라고 보인다. 땅 위의 높은 관리들보다 더 높은 자, 즉 온 우주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계시다. 세상에서는 높은 관리가 낮은 자의 행위를 감독하지만, 그것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두루 감찰하시고 공의로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5:1, 4,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본문은 또, “[더욱이] 4) 땅의 이익은 뭇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고 말한다. 땅의 이익, 즉 밭에서 나는 소산(所産)(곡식, 채소, 과일, 열매, 기름 등)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또 왕에게도 똑같이 유익을 준다. 거기에는 왕과 평민의 구별이 없다. 그러므로 권세자들은 가난한 서민들을 무시하지 말고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 [10절]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탐심은 더 가지려는 마음이다. 탐심은 끝없는 수렁과 같아 탐심을 가진 자는 만족이 없다. 사람은 탐심을 버려야 그 부족감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탐심을 정죄하며 경계하였다. 출애굽기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에베소서 5:3, 5,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탐심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큰 죄악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부족함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체험하기 때문이다.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마태복음 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성도는 세상에 사는 동안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 수 있다(딤전 6:7-8; 히 13:5). [11-12절]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재물의 유익이 많지만, 재물이 많아지면 그것을 쓰는 자도 많아진다. 한 사람의 쓸 수 있는 재물의 양은 제한적이다. 한 사람이 먹는 세 끼 밥의 양도 제한적이다.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거나 비만으로 해가 될 뿐이다. 실상, 재산이 많은 주인은 눈으로 그것을 보는 즐거움을 가질 뿐이지, 그것을 혼자서 다 쓰는 것은 아니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땀 흘리며 일하기를 원하시며 또 그런 자에게 복을 주신다. 노동하는 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잔다. 그러나 부자는 단잠을 못 잔다. 사람은 배가 너무 부르면 단잠을 자지 못하기도 하고 부자는 보물을 도적 맞을까봐 편안한 잠을 자지 못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돈은 유익이 있지만, 개인이 쓸 수 있는 돈의 양은 제한적이고, 또 재산이 많으므로 단잠을 자지 못하는 일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재물의 유익과 폐해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재물을 최고 가치로 여기며 살아서는 안 된다. 성경은 오히려 재물을 경계하고 부자 되려는 마음을 버리라고 가르친다. 시편 62:10,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置心)치[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잠언 23:4,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라] . . .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디모데전서 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윤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람은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있고 또 세상은 모든 사람들의 수고를 통해 먹을 것을 얻기 때문이다. 둘째로, 탐심은 만족이 없고 일종의 우상숭배이다. 우리는 탐심을 다 버리고 섭리자 하나님을 믿고 항상 자족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셋째로, 재물은 유익도 있지만 폐해도 있다. 우리는 마음을 물질에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한다. 13-20절, 재물의 헛됨, 복된 삶 [13-14절]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심한 폐해]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한다”는 말은 “재난을 인해 그 재물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재난’은 도난, 사기, 화재, 교통사고, 중한 병 등을 가리킬 것이다. 돈을 많이 소유한 자가 돈을 쓰지도 않고 아꼈는데, 재난을 당해 다 소비하고 자기 자녀를 먹일 음식거리를 살 돈도 없는 것이다. 재물은 참 허무한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23:5는,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하였고, 사도 바울도 재물을 ‘정함이 없는 재물’이라고 말하였다(딤전 6:17). 재물은 정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신앙에 방해물과 시험거리가 된다. 주께서는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를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로 비유하셨고(마 13:22) 또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려우며 심지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마 19:23-24). 또 바울도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교훈하였다(딤전 6:9-10). 재물은 허무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다. [15-16절]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도 폐단[심한 폐해]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사람은 평생 동안 많은 재물을 벌고 재난이 없이 그것을 누린다 할지라도, 죽을 때는 빈손으로 죽는다. 사람은 모태에서 빈손으로 나왔고 죽을 때도 빈손으로 죽는다. 그는 금은보석이나 돈이나 예금 통장을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는 수의 한 벌, 관 한 개로 족하다! 그래서 본문은 사람의 그러한 삶을 ‘심한 폐해’라고 표현하고 또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 곧 헛된 수고라고 표현한다. 사람이 일평생 돈을 번다고 수고하였으나 결국 허무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편 49:10-12는 말하기를,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田地)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고(눅 12:15), 풍년을 만난 어리석은 농부의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12:20).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교훈하였다(딤전 6:7-8). [17절]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 카마스 하르베 )[많은 고민](KJV, NASB)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본문은 세상적, 물질적 욕심을 가진 사람의 삶이 곤고하고 불행함을 증거한다. 사람은 일평생 어두운 데서 먹는다. 그는 시간적으로도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한다. 또 사람은 양심에 거리끼는 죄 가운데 살면서 기쁨과 평안이 없고 근심과 걱정, 우울함과 긴장이 많다. 모세의 말대로, 사람은 그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다(시 90:10). 주 예수께서는 사람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라고 표현하셨다(마 11:28). 또 사람은 질병도 있다. 신체적인 병도 있지만, 마음의 병도 있다. 병원은 각종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로 항상 붐빈다. 또 사람은 분노도 있다. 곤고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신경질과 짜증을 부리고, 불평과 불만, 미움과 적개심을 품고 사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그것과 다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기뻐하며 살고(살전 5:16) 평안의 주께서 때마다 일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며 산다(살후 3:16). 또 그들은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보인다(빌 4:5). 또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자들은 몸도 건강하다(잠 3:7-8). 또 그들은 범사에 감사하며 살고(살전 5:18) 그들을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그들을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한다(마 5:44). 또 그들은 부지런하게 자기 일을 하고, 이 세상 사는 동안 비록 부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사는 법을 배우며 실천한다(딤전 6:8). [18절]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혹은 ‘행복’)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사람의 일평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이다. 사람의 출생과 죽음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이 세상에 태어나고 또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죽는다. 사람의 일생은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하다(시 90:10). 인생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존재와 같다(마 11:28). 그것은 죄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는 죄의 형벌로 종신토록 수고하며 얼굴에 땀을 흘려야 땅의 소산을 먹을 것이라고 선언하셨고 하와에게는 해산하는 수고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3:17). 그러나 이 저주받은 세상, 수고로운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낙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분복이다. [19-20절]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저는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니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재물과 부요를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것과 수고하는 중 즐거움을 얻게 하시는 것, 또 사람이 자신의 일생의 길이가 얼마나 될지, 그가 언제 죽게 될지 별로 생각지 않고 마음에 기뻐하며 사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수고롭고 허무한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사람이 즐거워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는 것이 전도서의 한 진리이다. 전도서 2:24는,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라고 말했고, 전도서 3:13은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또 전도서 9:9는,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라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재물은 정함이 없을 뿐 아니라 신앙에 방해물과 시험거리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물을 감사히 사용하지만, 재물을 더 가지려고 욕심내거나 그것을 의지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천국만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물질에 대한 탐심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의식주의 필요를 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만 소망하며 세상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 사람처럼 평생 어두운 데서 슬픔과 번뇌와 병과 분노 중에 살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건강으로 살아야 한다. 수고롭고 허무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즐거움은 하나님의 복이요 우리의 분복이다. 우리는 그것을 감사함으로 누려야 한다. 6장: 낙이 없는 삶 [1-2절] 내가 해 아래서 한가지 폐단[폐해, 불행한 일]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 랍바 )[많은 일, 흔한 일](NASB)이라.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본문이 말하는 어떤 사람은 물질적 부나 세상적 성공에 대한 소원을 가졌고 또 그것을 하나님께 받았다. 그는 돈을 많이 벌었고 재산을 모았고 또 세상적으로도 출세하여 명예도 얻었다. 그러나 그는 몸에 심각한 병이 들었거나 큰 환난과 재난 때문에 그것을 누릴 힘이 없었고, 그 대신에 다른 사람이 그것을 누렸다. 참 기가 막힌 불행이었다. 세상에는 그런 일이 많이 있다. 세상의 행복은 사람이 계획하고 예상한 대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행복은 그의 지혜와 능력 안에 있지 않고 섭리자 하나님 안에 있다. 그래서 본문은 그런 상황을 ‘헛되어 악한 병’이라고 표현하였다. [3-6절]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니 햇빛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못하니] 이가 저보다 평안함이라. 저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사람이 100명의 자녀를 낳고 장수한다 할지라도 수고로운 세상에서 심령의 낙을 누리지 못한다면, 또 그 몸이 매장되지도 못한다면, 낙태된 자가 그보다 더 나을 것이다. 낙태된 자는 이 세상의 슬픔도, 불행도, 허무도 알지 못하고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사람이 천년의 갑절을 산다고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한다면 결국 다 한곳 즉 무덤으로 들어갈 것이니 오래 산 것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100명의 자녀를 낳은 것이나 1,000년의 갑절을 사는 것이 아무런 복이 되지 못한다. 이스라엘 왕 아합은 왕의 권세와 영광을 누렸고 자녀를 70명이나 낳았으나 자신은 전쟁에서 죽었고, 그 아내 이세벨은 예후의 반란 때 창문에서 내려 던지워 죽임을 당하였고, 그의 아들들 70명은 공부하는 도중에 모조리 목베어 죽임을 당하였다. 한두 명의 자녀라도, 길지 않은 생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참된 행복이다. [7-9절]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 네페쉬 )[영혼,욕구, 식욕](BDB)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인생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그]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 할라크 나페쉬 )[‘영혼의 걸음,’ ‘영혼의 욕구하는 바’(NASB), ‘욕구의 방랑’(KJV, NIV)]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사람의 수고는 결국 다 그의 입을 위한 것, 즉 먹고사는 그의 육신의 생활을 위한 것이지만,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한다. 식욕뿐 아니라, 영혼의 만족도 끝이 없어 보인다. ‘그 가난한 자’는 앞에서 말한 지혜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지혜자가, 비록 가난할지라도, 사람들 앞에서 처신하는 일이나 그래서 돈을 버는 일에서 우매자보다 분명히 나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도 다 허무하다. 그의 수고가 그에게 참 만족을 주지 못하고 그들은 다 똑같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실제로 낙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심령의 공상’은 ‘영혼의 욕구하는 바’를 가리켰다고 본다. 심령으로 아무리 좋은 욕구를 가져도 실제로 먹고 마시며 낙을 누리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수고한 후 먹고 마시는 것도 결국 헛되며 공허하다. [10절]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전 1:9-10). 하늘도, 땅도, 산도, 바다도, 해와 달과 별들도 옛날부터 불러오던 이름들이다. 만물이 다 그러하고 사람도 그러하다. 사람은 창조 때부터 사람( 아담 )이라고 불리었다. 또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귀하게 지음 받았으나 그의 몸은 흙으로 지음 받아 연약하며 죄를 지은 후에는 늙고 병들고 죽는 자가 되었다. 사람은 피조물이요 죄인이다. 그의 허무함과 불행은 특히 그의 죄인 됨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자기보다 강한 자, 즉 창조주 하나님과 다툴 수 없다. 그는 창조주 앞에 두려움과 겸손함으로 엎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자신을 티끌과 같다고 고백했다(창 18:27). 욥기 25:6은 인생을 벌레와 구더기라고 표현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고 부르셨다(사 41:14). 많은 고난을 받았던 사도 바울은 자신을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말하였다(고전 4:13). 이런 존재인 사람이 하나님과 다투는 것은 교만한 일이요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겸손하게 섬기며 그의 모든 말씀을 다 믿고 순종해야 한다. [11절]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 데바림 ) [‘말들,’ 혹은 ‘일들’]이 있나니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솔로몬은 많은 일들을 해보았다(전 2장). 그는 집들도 건축해 보았고 포도원과 과원도 만들어 보았으며 합창단도 만들어 보았다. 그러나 사람이 말이 많으면 헛된 말도 늘어나고 일이 많으면 헛된 일도 증가한다. 세상에 헛되지 않은 것은 무엇이며 참으로 유익하고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12절]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 토브 ‘좋은 것, 행복’)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身後)에[그의 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사람의 일생은 그림자같이 덧없이 지나간다. 시간의 흐름은 붙들어 둘 자가 없고 빠르고 허무하다. 그러므로 욥은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했고(욥 14:1-2), 다윗은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라고 말하였고(시 144:4), 또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고 고백하였다(대상 29:15). 또 야고보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했다(약 4:14). 이런 인생에게 무슨 낙이 있고 무슨 행복이 있는가? 또 죽은 후에 그의 집이나 그의 일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우리 소원을 재물에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앞으로도 인도하실 하나님,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만복의 근원 되신 섭리자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섬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먹고 마시고 낙을 누림이 하나님의 주신 복이긴 하지만 그것조차도 헛됨을 알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평안의 복을 항상 구하며 누려야 한다. 우리는 물질의 복, 자녀의 복, 장수(長壽)의 복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평안의 복 안에 거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피조물이며 죄인임을 알고, 결코 하나님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일들이 다 헛됨을 알고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겸손히 섬기며 믿고 의지하고 그에게만 소망을 두고 그가 주신 성경책에 계시된 대로 그의 모든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 즉 믿는 일과 계명 순종의 일을 힘써야 한다. 7장: 지혜와 어리석음이 대조됨 1-7절, 좋은 이름, 초상집, 우매자 [1절] 아름다운 이름( 토브 쉠 )[좋은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좋은 이름은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 좋은 이름은 경건하고 선한 사람이 죽은 후에 그에게 붙여지는 이름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경건한 사람, 의로운 사람, 선한 사람 등의 이름이다. 보배로운 기름은 값비싼 향유를 가리킨다. 좋은 이름은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 값비싼 향유는 잠시 동안 좋은 향기를 내지만, 그것은 물질적 향기에 불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라지고 없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좋은 이름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또 역사 속에 남는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올리운 자로 오래 기억되며,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 오래 기억된다. 아브라함은 믿음과 순종의 사람으로 오래 기억되며, 다윗은 믿음과 찬송의 사람으로 오래 기억되며, 히스기야는 경건한 자로 오래 기억된다. 이들은 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다. 죽는 날은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 죽는 날은 사람이 일생을 마감하는 날이다. 그 날 의인은 그의 의로운 생을 정리하고 결산하며 그의 이름을 남긴다. 주 예수께서는 가장 좋은 이름을 남기셨다. 죽는 날은 또 의인이 죄와 슬픔, 질병과 고통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그러나 출생한 날은 사람이 생을 시작한 날로서 어떻게 살지 미지수이다. 믿음으로 살고 의롭게 살면 그 생이 복되지만, 믿음 없이 살고 죄만 짓고 살면 그의 생은 큰 화가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악한 자들에게 그를 팔아 넘겼던 가룟 유다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던 제게 좋을 뻔한 자’(마 24:26)이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보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다가 죽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2-4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이는]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사람이 잔칫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면 죽음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없고 경건하고 바르고 근신하고 절제하는 생활에 대해서도 잊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상을 당한 집에 조문하러 가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며 그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유익하다.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며 진실하고 정직해야 하고, 또 죽음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일, 책망받을 일, 양심에 거리끼는 일, 시간을 낭비하는 일을 버려야 한다. 또 슬픔은 웃음보다 낫다. 왜냐하면 사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써 마음이 좋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웃을 때는 자기 부족과 연약을 잊어버리고 죽음의 일도 잊어버리기 쉽고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하며 죽음을 대비할 기회를 놓치기 쉽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살피며 자신의 범죄와 하나님의 징벌 때문에 슬퍼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때는 심령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회복의 은혜를 얻게 될 것이다. 특히 회개의 슬픔은 유익이 많다. 주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4). 그러므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즐겁게 노는 집에 있다. 우매자들은 잔칫집에 모여든다. 그들은 현재의 육신적 즐거움을 좋아한다. 그러나 지혜자들은 잔칫집에보다 초상집에 참석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기에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그것을 더욱 가다듬게 되고 내세를 준비하는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5절]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책망을 좋아하는 자가 없고 책망 자체는 듣는 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무겁게 하지만, 경건한 자의 바른 지적과 책망은 유익을 준다. 책망을 듣는 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6:23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하였고, 잠언 27:5-6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말했다. 또 옛날부터 참 선지자는 책망의 설교를 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나와 너 이전 선지자들이 자고로 여러 나라와 큰 국가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고 말했다(렘 28:8). 책망을 잘 듣는 것이 복이다. 우매자의 노래는 듣기는 좋으며 마음을 즐겁게 할지 모르나 아무 유익이 없다. 그것은 전도서 2:2에서 전도자가 웃음을 논하여 미친 것이라고 표현하고 희락을 논하여 저가 무엇을 하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다. 선지자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유다 백성들이 비파에 맞춰 헛된 노래를 지절거렸다고 증거하며 책망하였다(암 6:5). 사람의 참 의미와 가치는 하나님 안에서만 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기 때문이다.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순종해야 하고, 그럴 때 현세와 내세에 풍성한 평안과 복을 누릴 것이다. [6-7절] [이는]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헛됨이니라]. [참으로](KJV)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 우매자의 노래 소리보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더 나은 이유는 우매자의 웃음소리가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며 이것도 헛되기 때문이다.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는 일시적으로는 요란하지만 곧 그친다. 우매자의 웃음소리도 그러하다. 또 탐학은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은 사람의 명철을 부패시킨다. ‘탐학’이라는 원어( 오쉐크 ק������������)는 남을 위협하여 강압적으로 빼앗는 이익을 가리킨다(BDB). 이것은 개인에게나 국가에 다 적용된다. 성경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 교훈한다(고전 5:11). 강제로 빼앗는 것은 탐심에서 나온다. 탐심은 죄악이다. 롯의 아내는 재산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므로 소금기둥이 되었다(창 19:26). 아간은 여리고 정복 때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약 2.3kg, 또 약 600g의 금덩이 하나를 탐했다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수 7장). 또 뇌물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고 명철을 부패시킨다. 출애굽기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오직 의롭게 번 적은 소득만 복이 된다. 잠언 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보배로운 기름보다 좋은 이름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지 말고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고 선하게 살다가 죽기를 사모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참석해야 한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준비하고, 경건하고 선하게 살며 악을 멀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의 유행가나 우매자들의 노래를 좋아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종들의 책망과 믿는 교우들의 권면을 좋아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우매자의 기쁨을 버리고 토색과 탐심과 뇌물을 멀리하며 정직하게 번 돈으로 살고 불의의 이익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8-14절, 겸손과 인내, 불평, 지혜, 섭리 [8절]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일의 끝’은 일이 성취되어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을 말한다. 무슨 일이든지 잘 계획하고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잘 진행하고 예상치 못한 어려움들을 잘 이기고 치명적 실수 같은 것을 막아 그 일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어떤 일을 잘 성취하려면 인내가 필요하고 또 인내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 이 세상에서 성공한 자들은 많은 실패를 경험했어도 낙심치 않고 오래 참은 자들이다. 겸손과 인내는 성공적인 삶의 필수적 덕목이다. 신앙생활도 비슷하다.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승리한 신자를,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눅 8:15). 참된 믿음은 인내로 결실하는 믿음이다. [9절] 급한 마음[영]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우리는 급한 마음으로 노를 내지 말아야 한다.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물론, 정당한 노가 있다. 불의를 보고 노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가 있다(나 1:6). 예수께서 채찍으로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신 의분도 있다(요 2:15). 핍박하는 악인들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을 호소한 시편의 글들도 이런 의미에서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과 감정은 지나치고 잘못되기 쉽다. 그러므로 잠언은 미련한 자가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고 속히 노하며 그 노를 다 드러낸다고 말한다(잠 12:16; 14:17; 29:11). 또 야고보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하며(1:20) 성내기를 더디 하라고 교훈하였다(1:19). 그것은 인내의 한 면모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본받는 것이다. 잠언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며 슬기로운 자이며 용사보다 낫다고 말한다(잠 14:29; 19:11; 16:32).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성내지 않는다고 말했고(고전 13:4-5), 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하였다(엡 4:31-32). [10절]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우리는 옛날이 오늘보다 나았다는 불평어린 평가를 버리는 것이 좋다. 실상, 옛날에도 어려운 일들은 있었을 것이고 더 많았을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모든 현실을 겸손히 긍정하고 감사히 받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우리에게 현재 어떤 어려움이 있다면, 우리는 그 원인을 생각하며 자신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면 즉시 회개하며 달게 받아야 하겠지만, 만일 그것이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훈련 과정이라면 참고 견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려운 현실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과 돌보심을 구해야 하며 또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면서 미래의 평안을 기대하며 참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하나님께 감사할 일들이 많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의 징책하심보다 크다. 사사기는 111년의 징계의 햇수와 296년의 평안의 햇수를 증거한다. 시편 30:5는,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셨고 우리를 인도하셨고 이곳까지 우리를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다. [11-12절]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햇빛을 보는 자’는 모든 살아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지혜는 물려받은 기업같이 모든 살아 있는 자들에게 유익하다. 부모로부터 받는 유산은 물질적 유여함을 주는 좋은 것이다. 본문은 지혜와 돈이 다 보호하는 것이 되지만, 지식과 지혜가 돈보다 더 낫다고 말한다. 돈이 있으면 영양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따뜻한 옷을 입을 수 있고 편안한 집에서 살 수 있고 몸이 아프면 좋은 의사와 약의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또 돈이 있으면 자녀도 좋은 교육을 받게 할 수 있다. 이처럼 돈은 우리의 건강과 우리의 자녀를 보호하는 점이 있다. 이와 같이, 지혜도 우리를 보호한다. 지혜는 잘못된 빚 보증을 하지 않게 함으로 재산을 보호한다. 지혜는 우리를 게으르지 않게 함으로 가난으로부터 보호한다. 지혜는 교만하여 서로 다투지 않게 함으로 인간 관계를 보호해준다. 무엇보다, 지혜는 우리를 죄와 불행으로부터 보호해주며 우리의 자녀도 죄와 불행으로부터 보호해준다. 특히, 지혜가 더 아름다운 이유는 지혜가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지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그것을 보존한다.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의지하며 죄를 버리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영생에 이르게 한다. 잠언 3:13-18은, 지혜가 정금보다 진주보다 귀하며 그 오른편에 장수(長壽)가, 그 왼편에 부귀가 있고 그 길은 즐거움과 평안의 길이며 마침내 생명나무의 열매 곧 영생을 누리게 된다고 말했다. [13-14절]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좋고 나쁜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곧게 할 자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5:7에서,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잠 3:6). 사람은 내일에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고 다음 순간에 일어날 일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실을 좋은 날과 힘든 날,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섞어 두셔서 장래 일을 짐작치 못하게 하셨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약 4:14). 그러므로 본문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형통하고 좋은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그러나 곤고한 날, 즉 어려운 일이 있는 날에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야고보서 5:13은,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말했다. 특히, 우리는 곤고한 날을 만나면 우리 자신에게 어떤 부족이 없는지, 어떤 죄가 없는지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겸손과 인내를 가지고 해야 한다. 세상에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으나, 무슨 일이든지 겸손과 인내로 하면 잘 될 것이다. 신앙생활도 이치가 비슷하다. 우리는 겸손과 인내로 하나님과 주님을 섬겨야 한다. 둘째로, 쉽게, 급히 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우매자의 행위이다.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 해야 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어려운 현실을 불평하지 말고 범사에 섭리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항상 감사하며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 간구해야 한다. 넷째로, 지혜는 부모의 유산보다 더 귀하다. 우리는 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섭리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고 의탁해야 한다. 15-22절, 지혜로운 처신, 지혜 [15-18절]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이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세상에는 아벨처럼 다른 사람의 미움과 핍박을 받아 일찍 죽임을 당하는 의인이 있고,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 않고 은밀하고 교묘하게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서도 내버려두심으로 장수(長壽)하는 악인도 있다. 그러므로, 본문은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사람들 앞에서 너무 드러나게 자신의 의를 나타내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사람 앞에 드러내는 의는 바리새인들의 의처럼 외식적인 의가 되기 쉽다. 또 그런 사람은 자신을 크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쉽고 그러면 그는 주위 사람들의 반감을 사고 해를 입기 쉬울 것이다. 본문은 또한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적당히 악인이 되라는 뜻은 아니다.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악을 권장하지 않는다. 본문은 드러나게 악한 자는 사회적 제재를 당하고 감금이나 벌을 받고 심한 경우는 사형도 당하여 회개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드러난 악인이 되지 말라는 뜻이라고 본다. 본문은 또한 “너는 이것을 잡으며 이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너무 드러나게 의를 행하고 의인인 척하지도 말고 너무 드러나게, 무모하게 악을 행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이런 잘못들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19-20절] 지혜가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본문은 지혜의 가치와 지혜의 유익을 증거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잠언에서 교훈한 그 지혜이다. 그것은 세상적, 육신적 지혜가 아니고, 영적, 천적, 신적 지혜이다.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고 또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즉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함으로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지혜는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有司)보다 능력이 있게 한다. 성읍의 유사 즉 관원은 세상에서 지혜와 권세가 있는 자이다. 그는 보통 일반 사람들보다 이해력, 판단력, 언변, 용기가 더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은 자는 성읍의 열 유사보다 더 지혜롭고 더 능력이 있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지혜롭게 한다고 고백했다(97-100절). 또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바벨론의 박사들보다 열 배나 더 나았다(단 1:20). 본문은 “[왜냐하면]( 키 )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없음이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참 지혜가 열 유사보다 나은 이유가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왕들도, 관원들도 다 죄인이며 부족한 인생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리 세상적으로 유능하고 권세 있는 자라도, 자신의 무지와 편견과 욕심을 이길 수 없고, 세상의 악한 풍조를 이길 수 없고, 마귀의 시험이나 죄의 유혹을 피하거나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고서는 세상의 지혜자들도 범죄하고 불행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지혜가 아니다. [21-22절]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좋은 친구의 의견과 충고를 들을 필요가 있다. 나라의 통치자는 백성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 남의 의견을 듣지 않는 자는 실수하기 쉽고 독선적이거나 편협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의 모든 말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말에는 정확하지 않거나 잘못된 내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들의 말만 들으면 무슨 일에 확신과 용기를 가질 수 없고 낙심하거나 우왕좌왕하여 아무 일도 못하기 쉽다. 느헤미야서에 보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의 중건을 위해 유대 땅에 총독으로 왔을 때, 산발랏, 도비야, 게셈 등은 그를 대적하였고 그를 해치려 하였다. 그들은 느헤미야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하고 왕이 되려 한다는 거짓말을 퍼뜨렸다. 그것은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고 그와 그의 동료들의 손을 피곤하게 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었다(느 6장). 오늘날도 사탄은 하나님의 종들을 낙심케 하여 하나님의 바른 일들을 못하게 하려 한다. 사도 바울은 전도사역에서 매 맞음, 갇힘, 자지 못함, 먹지 못함 등 많은 고난을 받았고 또 영광도 얻고 욕도 먹고 악한 이름도 얻고 아름다운 이름도 얻었으나(고후 6:5-8) 낙심치 않았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확신하여 그 뜻을 충성되이 행하는 것이다(엡 5:15-17).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의를 행해도 은밀히 하고 드러날 경우에도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높은 마음이나 잘못된 생각으로 남을 정죄하지 말고, 또 드러나게 악을 행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를 얻어 이런 잘못들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지혜는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가 주시는 지혜로 바르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는 하지만 그 모든 말에 마음을 쓸 것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충성해야 한다. 23-29절, 사람의 무지함, 하나님 형상의 회복 [23-24절]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무릇 된 것이( 마 쉐하야 )[이미 있는 것도]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솔로몬은 지혜로 이 모든 것 곧 세상의 모든 일을 이해하려고 힘썼고 스스로 지혜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참 지혜에 이르지 못했고 참 지혜는 그와 거리가 멀었다. 솔로몬은 무릇 된 것, 즉 이미 가지고 있는 지혜도 너무 멀고 깊어서 다 파악하지 못하였다. 본문은 사람의 지식의 한계성 곧 사람의 무지함을 증거한다. 사람이 무엇을 꽤 아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며 또 하나의 무지(無知)일 뿐이다. 우주만물에 대한 사람의 지식은 지극히 미미하고 지극히 단편적인 지식일 뿐이다. 우주는 사람이 파악하기에는 너무 광대하고 광활하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이 파악할 수 없이 높고 깊으시다. 여기에 사람의 겸손과 하나님 경외의 이유가 있다. 욥기 36:26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선지자 이사야는 “보라, 그[하나님]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고 증거하였다(사 40:15, 17). [25-26절]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어리석은 것 곧 미련한 것과 정신 없는 것의 악’(KJV), ‘어리석은 것의 악과 미련한 것과 정신 없는 것’ 5) ]을 알고자 하였더니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기쁘시게 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이 세상에는 어리석고 악하고 정신 없는 일들이 많다. 솔로몬은 그 모든 일들을 살피고 연구하고자 했다. 특히 남자가 아내를 잘 만나는 것은 큰복이다. 잠언은 슬기롭고 현숙한 아내가 하나님께로서 오고 그 값이 진주보다 귀하다고 말하였다(잠 19:14; 31:10). 그러나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줄 같은 여인은 사람을 죄악과 사망으로 이끈다. 솔로몬은 그런 여자를 “사망보다 독한 자”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의 실패의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가 나이 늙었을 때 왕비들은 그의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했다(왕상 11:4). 또 그는 잠언에서 다투는 여인에 대해 여러 번 말했다. 그는 다투는 아내가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 같다고 말했고(19:13; 27:15) 그런 여자와 큰 집에 살기보다 광야나 지붕 모퉁이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21:9, 19). 그런 여자의 남편은 마음에 큰 고통을 당하고 결국 불행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라는 원어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자’라는 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KJV, NASB, NIV)’라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그런 여자를 피할 수 있지만, 죄인은 그런 여자에게 잡혀 결국 큰 낭패를 당할 것이다. [27-28절] 전도자가 가로되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솔로몬은 하나님의 진리와 인생에 대해 참으로 깨닫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중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천 명의 남자들 중에 겨우 한 명을 찾았고(아마 자신을 가리킨 듯함) 천 명의 여자들 중에서는 하나도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여자들은 아마 그가 거느렸던 700명의 왕비와 300명의 첩들을 가리켰을 것이다. 실상, 온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참 지혜자이시다. 그의 모친 마리아까지도 그와 비교할 수 없는 비천한 죄인에 불과하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고전 1:21). 참 지혜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질 수 있다. [29절]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그들은](원문) 많은 꾀( 킷쉐보노스 )[고안들, 계획들]를 낸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본래 정직하게 만드셨다. 처음 사람은 본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도덕적 중립 상태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도덕적으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상태로 지음을 받았다(엡 4:22-24).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후, 사람들은 많은 꾀를 내었고 많은 악한 것들을 생각하고 계획하였다. 창세기 8:21,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하시는 모든 일들에 대해 우리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오직 겸손히 엎드리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그를 섬겨야 한다.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악행은 미련함이다. 둘째로, 우리는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아내를 둔 남자는 마음에 큰 고통을 당하는 불행한 자이다. 우리는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본래의 형상인 정직하고 선한 인격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구원과 성화이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는 성령을 좇아 몸의 죄성을 죽여야 한다. 8장: 왕에게 복종하라 1-8절, 지혜자의 얼굴, 왕에게 복종, 불확실한 미래 [1절]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 오즈 ) [엄함(NASB, NIV), 사나움, 대담함(boldness)(KJV)](BDB)이 변하느니라. 본문에서 지혜자와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는 동일시되는 것 같다. 사리의 해석을 안다는 말은 세상의 일들, 즉 하나님의 섭리의 일들의 이치, 그 원인과 진행 방향과 예상되는 결과, 그 바른 대처 방식 등을 안다는 뜻이라고 본다. 이렇게 사리의 해석을 아는 사람의 지혜는 그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며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을 변하게 한다. 사람의 얼굴은 마음의 표현이다. 사람의 마음의 기쁨은 기쁜 얼굴로, 사람의 마음의 슬픔은 슬픈 얼굴로 나타나며, 또 마음의 겸손은 겸손한 얼굴로, 마음의 교만은 교만한 얼굴로 나타나고, 마음의 착함은 선한 얼굴로, 마음의 간교함은 간사한 얼굴로 나타난다. 사람의 무지함은 마음에 긴장과 두려움을 갖게 하고 얼굴을 굳게 하고 엄하게 하고 사납게 만들 것이다. 잠언 21:29도, “악인은 그 얼굴을 굳게 하나 정직한 자는 그 행위를 삼가느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혜는 사람의 얼굴을 밝게 하고 얼굴의 엄함과 사나움을 없애줄 것이다. 지혜는 마음에 이해심, 여유, 평안, 선함을 가지게 하고 그것은 밝고 평온한 얼굴로 나타날 것이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던 스데반은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성경은 말한다(행 6:15). [2절] 내가 권하노니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왕이 임직할 때 백성들은 보통 왕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역대상 11:3,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니 다윗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 백성은 왕에게 복종해야 한다. 로마서 13:12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말했다. 우리는 합법적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3절]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거히[급하게]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이는] 왕은 그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물러가기를 급하게 한다’는 말은 ‘무례하게, 반항적이게 행한다’는 뜻이다. 또 ‘일삼는다’는 원어( 아마드 )는 ‘계속하다, 고집하다, 참여하다(NASB)’(BDB)는 뜻이다. 우리는 왕 앞에서 무례하지 말아야 하고 또 악에 계속 머물거나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4절]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선지자 나단이 다윗 왕에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으나, 보통은 왕의 행동을 지적할 사람이 없고 지적하기가 매우 어렵다. 백성이 왕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단지, 왕의 명령이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날 때에는 따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땅의 왕보다 높으신 하늘에 계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이나 그 세 친구들은 왕의 명령을 어겼고(단 3, 6장),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도 유대인 사회의 최고기관인 공회의 명령을 어겼다(행 4:19). [5-6절] 무릇 명령을 지키는 자는 화를 모르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시기와 판단( 미슈파트 )[조치](NASB, NIV)을 분변하나니 무론 무슨 일에든지 시기와 판단[조치]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는 시기와 조치를 분별해 재앙을 경험치 않을 것이다. 이사야 48:18,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으리라.” 그러나 지혜가 없는 자는 그렇지 못하여 그에게 임하는 재앙이 심할 것이다. [7-8절]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생기( 루아크 )[영(KJV), 바람(NASB, NIV)]를 주장하여 생기[영]로 머므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자도 없고 전쟁할 때에 모면할 자도 없으며 악이 행악자를 건져낼 수도 없느니라. 사람은 장래의 일을 알지 못한다(약 4:14). 내일도 계속 평안할지, 내일 어떤 재앙이 임할지 아무도 모른다. 또 사람은 자신의 생명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한 시간이라도 연장할 수 없고(마 6:27) 죽음의 시간을 한 시간이라도 지연시킬 수 없다. 호흡이 떠나갈 때는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하고 호흡이 떠나가며, 죽음이 찾아올 때면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하고 죽음의 순간을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은 미래를 확신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 하나님의 주시는 지혜를 얻은 자는 가장 선하고 가장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는 꼭 필요한 때에 최선의 결정을 하며 살 수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간섭하심으로 하는 것이다. 시편 25:12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라고 말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지혜자의 얼굴은 밝고 사나움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마음에 지혜와 이해심과 여유를 얻어 우리의 사나운 얼굴이 밝고 평온한 얼굴로 변화되기를 원한다. 둘째로,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 한,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미래의 일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지혜롭고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하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9-17절, 악인, 인생의 낙, 하나님에 대한 지식 [9-13절] 내가 이런 것들을 다 보고 마음을 다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살핀즉 사람[한 사람]이 사람[다른 사람]을 주장하여 [자신을] 해롭게 하는(KJV, NIV) 때가 있으며 내가 본즉 악인은 장사지낸 바 되어 무덤에 들어갔고 선을 행한 자는 거룩한 곳에서 떠나 성읍 사람의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내가 본즉 성소에 드나들던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그들이 그렇게 행하던 성읍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MT, KJV, NASB) 이것도 헛되도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어떤]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될 것이요 악인은 잘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일시적으로 혹은 예외적으로 악인이 평안하고 형통한 경우가 있으나(욥 21:7-13a),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일반 진리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이다(롬 2장).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곧 죄 짓는 일을 큰 잘못으로 알고 두려워하며 피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려고 하는 자들은 잘될 것이며 평안하고 건강하고 장수하고 형통할 것이며 그들이 영생을 얻고 영원한 복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들, 곧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고 자신의 무지와 욕심과 죄성을 따라 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은 잘되지 못하며 평안치 못하며 영생하지 못하며 죽음과 불행을 당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벌을 받지 않는 자는 마지막 심판과 지옥 형벌이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다 받을 것이다. [14절]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 세상에는 고난을 받는 의인도 있고 평안을 누리는 악인도 있다. 전도서 7:15도,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라고 말했다. 욥기 21:7은,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壽)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고 말했고, 시편 73:4는, “저희는[악인들은]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라고 말했다. [15절]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 허무한 세상, 수고로운 세상, 싸움이 있고 도덕적인 무질서가 있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복은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쾌락주의를 가르친 것이 아니고 허무하고 수고로운 세상에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위로와 복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금욕주의에나 쾌락주의에 치우치지 말고 먹고 마시며 낙을 누리는 복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인 줄 깨닫고 감사히 누려야 한다. 전도서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전도서 3: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전도서 5: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16-17절]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하는 노고(勞苦)를 보고자 하는 동시에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 즉 해 아래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에 대해 사람은 지혜를 다해 연구하고 살펴도 그 원인, 그 이유, 그 진행 방향, 그 목적지를 다 깨달을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다 알 수 없다. 전도서 3:11,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그 존재 자체와 그 지혜와 지식과 능력이 무한하시지만, 사람은 심히 유한한 존재이다. 무한자와 유한자의 차이는 무한하다. 그러므로 욥기 11:7은,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고 말하였고, 또 로마서 11:33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많은 일들을 감추시는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사야 50:10은,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믿음이다. 또 신명기 29:29는,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계시된 말씀을 믿고 행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악인은 일시적으로 잘되고 장수하는 경우가 있으나 결국 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행하며 모든 악을 멀리해야 한다. 둘째로, 세상에는 도덕적 무질서가 있어 보이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믿어야 하고, 이 수고로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복을 감사히 누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다 알지 못하고 성경에 계시된 바와 지나온 경험을 통해 조금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더욱 알고 그를 믿고 의지하고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9장: 사람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 1-6절, 하나님의 섭리, 죽음, 생명 [1절] [이는]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원문에 ‘이는’이라는 말은 앞장 끝절에서 해 아래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는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모든 일, 모든 사람의 일들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그것들이 다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대로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악인이 형통하기도 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기도 하므로 우리는 현재의 상황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고 또 그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그의 뜻대로 섭리하시는 자이시다. 이사야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시편 115:3,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편 135:6,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자기 백성들, 즉 의인들과 지혜자들을, 비록 그들이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특별히 돌보신다. 신명기 33:3,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手中)[손 안]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주께서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요 10:28), 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하였다(롬 8:28). [2-3절]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악한 것이라.] 곧 인생의 마음에[더욱이, 인생의 마음은]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본문은 모든 사람의 마지막이 똑같음을 증거한다. 이것은 세상에서의 외형적인, 현상적인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늙고 병에 걸리기도 하고 또 마침내 다 죽는다. 이것은 의인과 악인에게 구별이 없어 보인다. 또, 아브라함과 욥처럼 의인도 물질적 부요의 복을 누리지만, 어떤 경우에는, 악인도 물질적 부요의 복을 누린다(욥 21:7-13; 시 73:3-5, 12). 또 아합처럼 악인이 전쟁에서 죽기도 하나(왕상 22:35), 요시야처럼 의인도 전쟁에서 죽기도 한다(왕하 23:29). 본문은 이런 일들이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의 악은 도덕적 개념보다는 ‘큰 고통’이라는 뜻이다. 더욱이, 본문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악이 가득하고 일평생에 미친 마음이 있고 또 마침내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이것이 세상에서 더욱 불행한 사실이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부패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이 세상에서 죄와 죽음은 가장 큰 불행이다. 그러나 거기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필요가 있고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필요성이 있고 심령의 변화와 거룩하고 의로운 삶으로의 변화의 가치가 있다. [4-6절] [이는]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있음이로다. 이는](MT, KJV)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이는]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본문은 생명의 가치가 큼을 증거한다. 개는 짐승 중에 보잘것없는 짐승이며 사자는 동물의 왕이라고 불리는 짐승이지만,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왜냐하면 죽은 사자는 더 이상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다른 사자나 짐승에게 먹잇감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모든 산 자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산 사람에게 인생의 불행을 피할 길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은 자에게는 그런 길이 없다. 산 자에게만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을 길이 있고, 영생의 길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초기부터 이 길을 보이셨다. 영생은 거짓이 없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딛 1:2). 그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 주신 가죽옷이 암시한 바이었고 옛날부터 주신 제사제도나 성막제도와 성전제도에서 암시된 뜻이었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아무 보상도 받을 수 없다. 그의 이름은 잊혀져 버리고 만다. 그의 사랑함도, 미워함도, 시기함도 다 없어져 버린다. 해 아래서 행한 모든 일에 대해 그는 이제 아무 분복도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살아 있는 자는 자신이 죽을 줄을 알고 그 죽음을 대비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죄와 불행을 깨닫고 회개하고 고치고 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자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성화를 위해 힘쓸 수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크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계명들에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의 가장 큰 불행이 죄와 죽음이며 가장 큰 행복이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단번에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과 영생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허무한 세상 것과 바꾸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죄를 멀리하며 내세를 준비해야 한다. 7-10절, 기쁘게 삶, 즐거운 부부, 근면 [7-8절]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성도의 정상적인 생활은 슬프고 우울하거나 금욕주의적이지 않다. 전도서는 반복해서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수고로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분복이라고 말했다(전 2:24; 3:13; 5:18; 8:15).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4:3-4에서 “[속이는 영이]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말했고, 골로새서 2:20-23에서는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의식주의나 몸을 괴롭게 하는 금욕주의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구원받은 성도가 몸의 죄성을 따르는 것을 금하는 성화(聖化)의 바른 방법도 아니라고 말하였다. 성도는 기쁨으로 음식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마시고 옷을 항상 깨끗하게 빨아 입고 머리에 향기름을 바를 수 있다. 구약 성도들은 추수 때에 기쁨의 잔치를 했다.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기쁘고 즐겁게, 밝고 활달하게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그의 하는 일들을 기쁘게 받으셨기 때문이다. 특히 신약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하나님 자녀의 특권을 얻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하였다(빌 4:4). [9절]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허무하고 수고로운 세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즐거이 음식을 먹고 마시며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사는 것이다. 물론, 부부가 바른 믿음 안에서 인격적으로 서로 사랑함이 있어야 한다. 잠언 12:4는,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고 말하였다. 부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아내들은 교회가 주께 복종함같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남편들은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엡 5:22, 25). 잠언은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戀慕)하라”고 교훈하였다(5:18-19). 결혼과 부부의 사랑은 사람들로 세상에서 음행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목적도 있다. 그러므로 결혼한 남편과 아내는 부부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7:1-5,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독신(獨身)도 하나님을 위해 유익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환난 시대에는 독신이 더 유익하다고 말했었고 또 결혼한 사람이 주의 일에 전념하지 못하고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세상일을 염려하게 된다고 말하였다(고전 7:26-28, 32-34). [10절]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고(창 1:28)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들을 거기에 두시고 그것을 다스리며 가꾸고 경작하게 하셨다(창 2:15). 일과 노동은 사람의 창조 때부터 사람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계명을 주실 때에도 ‘엿새 동안 힘써 너희의 모든 일을 행하고 제7일에 쉬라’고 말씀하셨다(출 20:9-10). 그러므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힘써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이 일하지 않고 게으른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일이다. 잠언 6:6-11은 근면을 교훈하면서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 가서 지혜를 배울 것과 게으름이 가난의 원인임을 말했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요 건강하다는 표이며 내가 무엇인가에 쓸모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람이 죽어 무덤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지혜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지금 살아 있을 때 게으르지 말고 힘써 일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각자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명했고, 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교훈했다(살전 4:11; 살후 3:10). 우리는 힘써 일하되 바르고 선한 일을 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착한 행실을 사람들에게 보이라고 교훈하셨다(마 5:16).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하심이다(딛 2:14).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성도들은 이 세상을 슬프고 우울하게 살지 말고, 기쁘고 즐겁게, 밝고 활달하게 살아야 한다. 둘째로, 결혼한 자는 즐겁고 복된 부부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허무하고 수고로운 이 세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복이다. 셋째로,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게으르지 말고 힘을 다해 일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할 일들에 충실하되 특히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 11-18절, 시기와 우연, 지혜자, 지혜자의 말 [11-12절]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 깁보림 )[강한 자들]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 요데임 )[지식 있는 자들, (전문적 지식과) 기술이 있는 자들]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時期)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물론, 더딘 경주자보다 빠른 경주자가 더 낫고, 약한 자보다 강한 자가 더 낫고, 어리석고 미련한 자보다 지혜롭고 명철한 자가 더 낫고, 지식과 기술이 없는 자보다 지식과 기술이 있는 자가 더 낫다. 사람이 자기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그 일에 숙달되고 전문가가 될 것이다. 각양의 직업을 가진 사람도, 주부인 여자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근면함이 삶의 성공을 결정짓는 충분한 요인은 아니다. 빠른 경주자도 경기하는 날에 몸이 안 좋거나 출발 시에 실수하거나 달리다가 넘어지거나 다른 이와 부딪혀 실패할 수 있다. 또 전쟁의 승리도 단지 군사력에만 있지 않다. 모든 일들은 시기(時期)와 우연에 영향을 받는다. 사람은 갑자기 닥칠 재앙의 때를 예측하지 못한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리듯이, 재앙이 사람에게 갑자기 임한다. 폭풍, 폭우, 폭설, 지진 같은 천재지변도, 무서운 전염병이나 큰 건물이나 대형 구조물의 붕괴 사고, 큰 화재나 교통 사고도, 어음 부도나 기업의 파산도, 또 국가적 혹은 세계적 경제공황도 다 사람들의 예상 밖에 있다.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야고보서 4:13-16,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利)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우리는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고백해야 한다. [13-16절] 내가 또 해 아래서 지혜를 보고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信聽)되지[그 말을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지혜는 효능과 유익과 장점이 있다.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이 이웃의 큰 나라 왕의 공격을 받았을 때, 한 가난한 지혜자가 그 성을 구원해내었다. 지혜는 힘보다 낫고 병기보다 나았다. 사무엘하 20장에 보면, 다윗 시대에 베냐민 사람 세바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요압이 그를 좇아 아벨이라는 성을 포위하고 그 성을 멸하려 하였는데, 그때 그 성에 지혜로운 한 여인이 나서서 요압과 대화해 세바의 머리를 내어줌으로써 그 성을 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지혜자를 쉽게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않고 그를 멸시하고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것이 무지한 세상의 모습이다. [17-18절] 종용히[조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지혜가 병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궤케 하느니라[파괴하느니라] 17절은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자들의 통치자의 호령보다 조용하게 잘 들린다는 뜻 같다. 어리석은 어른은 큰 소리로 자기의 생각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우매한 말들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말들이다. 그러나 지혜자의 말들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말들, 즉 의롭고 선한 말들이며, 그것들은 비록 조용하게 말해질지라도 유익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사람들이 그 말들을 통해 유익을 얻는다. 잠언 10:20-21은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고 말했다. 본문은 지혜가 병기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것은 전쟁에서 지휘관들의 전략 회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인다. 전쟁에서 전략적 지혜는 병기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무기들을 가지고 있어도 전략적 지혜가 없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또 본문은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파괴시킨다고 말한다. 아군의 1급 군사기밀을 적군에서 넘긴 한 명의 스파이는 아군을 패배케 만들 것이다. 다윗의 아들 암논의 친구 요나답의 어리석고 악한 제안으로 인하여 암논은 여동생 다말을 강제로 욕보였고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가져왔고(삼하 13장) 다윗 가정에 매우 수치스럽고 매우 고통스런 일이 되었다. 성경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고 말했고(고전 5:6), 또 악한 친구들이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말하였다(고전 15:33). 한 사람의 악한 행위가 많은 선을 파괴시킨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인생의 모든 일들에는 시기(時期)와 우연이 있다. 때때로 그것들이 사람의 일들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사람의 손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손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경외하고 그에게 모든 일을 맡기며 그의 인도하심만 구하고 오직 우리의 할 의무를 다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매한 자가 되지 말고 지혜자가 되어야 하고 또 지혜자의 경건하고 도덕적인 말을 통해 유익을 얻는 자가 되어야 한다. 지혜는 병기보다 낫다.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파괴시킨다. 10장: 작은 어리석음 1-7절, 우매함, 공순함, 직분자 [1절] 죽은 파리[파리들]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 우매함이 무엇인가? 우매함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것이다. 사람에게는 죄성(罪性)이 있으므로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판단, 또 말과 행동에는 우매함이 있다. 그것은 겉보기에는 또 세상적으로는 지혜일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것이다. 지혜는 무엇인가?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그리고 성경 교훈에 따른, 생각과 판단, 말과 행동이다. 로마서 8:5-6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성령]을 좇는 자는 영[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하였고, 갈라디아서 5:16은, “성령의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하였다. 야고보서 3:17은,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다”고 말하였다. 아무리 냄새가 좋은 향기름도 파리 한 마리가 거기에 빠져 죽으면 얼마 안 있어 파리가 썩어 악취가 날 것이다. 이처럼 작은 우매함이 사람의 지혜와 존귀함을 더럽힌다. 성도는 선한 인격의 향기를 나타내야 하는데, 말로나 행위로 나타나는 그의 작은 우매함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의 인격을 추하게 만드는 것이다. [2-3절]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우매자는 길에 행할 때에도 지혜가 결핍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하느니라. 오른편은 힘이 있는 쪽,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쪽을 말할 것이다. 사람은 보통 오른손을 쓰고, 왼손을 쓰는 자는 예외적이다. 왼편은 힘을 쓰기 불편한 쪽, 유용성이 적은 쪽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게으른 사색, 탁상공론(卓上空論), 말뿐이고 실천이 없는 생각을 가리킬 것이다. 지혜자는 생각하는 대로 실천하는 자이지만, 우매자는 말만하고 행치 않는 외식자들과 같은 자들이다(마 23:3). 우매자는 길에 행할 때에도 지혜가 결핍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한다. ‘길에 행할 때에도’라는 말은 큰 일에서 뿐 아니라 그의 일상적 말과 행동에서도 그렇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말로나 행위로 나타낸다. 우매자는 일상생활에서 말과 행동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우매함을 드러낸다. 마음은 사람의 행동의 근원이다. 사람은 죄악되므로 악하고 미련한 마음에서 악하고 미련한 말과 행동이 나온다. 주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유대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또 그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20). 사람은 마음의 변화를 받아 거룩해져야 한다. [4절]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순(恭順)이 큰 허물을 경하게 하느니라.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이라는 원문은 ‘주권자의 영[감정]이 너를 향해 일어나거든’ 즉 ‘주권자가 네게 분을 내거든’이라는 뜻이다. 주권자가 언제 분을 내는가? 보통 상대방이 잘못이 있을 때 그렇다. 본문은 그때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말한다. 자리를 떠나는 행동은 상대방의 분을 감정으로 대응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태도이며 자신의 완고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목이 곧고 완악하며 교만하고 패역한 태도이다. 그러나 공순함은 큰 허물을 가볍게 할 것이다. ‘공순’이라는 원어( 마르페 )는 ‘치료’라는 뜻이지만, ‘침착함, 평정, 온유함’이라는 뜻도 있다(BDB, KB). ‘공순’은 잘 번역된 말이라고 보인다. 주권자가 화를 낼 때 공순한 자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의 책망을 달게 받는 겸손한 태도이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부족이 있고 이런저런 실수와 잘못을 범할 수 있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고 윗사람의 책망을 달게 받고 자신의 잘못을 고치려는 마음이 있는가가 중요하다. 공순함은 큰 허물을 가볍게 할 것이다. 주께서는 회개하는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8:2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한 마음을 받으시고(시 51:17)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 용서해주신다(요일 1:9). 유다의 악한 왕 므낫세라 할지라도 그가 앗수르로 잡혀가는 큰 고난을 당하자 하나님 앞에서 크게 겸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고 그로 예루살렘에 돌아와 다시 얼마 동안 왕위에 있게 하셨다(대하 33:11-13). [5-7절] 내가 해 아래서 한가지 폐단 곧 주권자에게서 나는 허물인 듯한 것을 보았노니 우매자가 크게 높은 지위를 얻고 부자가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 또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방백들은 종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 본문은 “내가 해 아래서 한가지 폐단 곧 주권자에게서 나는 허물인 듯한 것을 보았노라”고 말한다. 원문은 ‘주권자[통치자]에게서 나오는 허물과 같은 한가지 폐단’이라고 되어 있다(KJV, NASB). 본문은 그 한 예로 우매자가 크게 높은 지위를 얻고 부자가 낮은 지위에 앉는 경우를 말한다. 우매자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부도덕하고 불성실하고 게으른 자인데, 그는 그에게 적합지 않고 그가 감당치 못할 크게 높은 지위을 얻었다. 그러나 반대로 부자는 낮은 지위에 앉았다. 여기에서는 부자와 지혜자가 동의어로 쓰인 것 같다. 성경에 나오는 나발 같은 미련한 부자도 있지만(삼상 25:2-3, 25), 지혜로운 부자도 많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도덕적이고 근면하며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반적 상식이 뒤바뀐 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본문은 또 종들이 말을 타고 방백들이 종처럼 땅에 걷는 경우도 말한다. 종들은 일반적으로 배울 기회를 많이 가지지 못하고 배운 것이 적으므로 지식이 부족하고 인격성, 도덕성, 지도력, 판단력, 포용력이 부족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자가 높은 지위를 얻어 말을 타고 다니고, 반면에 배울 기회가 많아 배운 것이 많고 지식과 인격성과 도덕성을 갖춘 방백들이 종처럼 땅에 걸어다니게 된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아마 미련한 통치자가 등장함으로써 하급 관리들을 잘못 등용한 때문일 것이다. 교회에서든지 국가에서든지 일꾼을 잘 등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교회는 성경의 교훈대로 자격자들을 직분자로 세워야 하며 국가도 이념과 도덕성과 인품 등 자질 있는 자를 세워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듯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를 항상 구하고 의로움과 선함으로 단장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평소에도 지혜를 말하는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죄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로서 날마다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몸의 죄성을 이기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언행을 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윗사람이 화를 낼 때 자리를 박차고 떠나지 말아야 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공순하게 행할 때 큰 허물도 가볍게 될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우리 교회가 건전한 지식과 식견, 좋은 인격과 재능을 가진 봉사자들을 추천하고 세우기 위해 기도하고 힘써야 한다. 8-20절, 보응, 지혜의 유익, 복된 나라 [8-9절]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돌을 떠내는 자는 그로 인하여 상할 것이요 나무를 쪼개는 자는 그로 인하여 위험을 당하리라.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 빠질 것이다. 남을 해치려는 계획을 세우는 자는 자신이 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 시편 7:15,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시편 57:6,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 파사의 왕후가 된 에스더 때에 왕의 악한 최고위 신하 하만이 한 예이었다(에 5장; 7:10). 또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릴 것이다. 담을 헌다는 말은 남의 땅을 취하려고 경계가 되는 담을 헌다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도적질하지 말라고 명하셨을 뿐 아니라, 또 율법에서 땅의 경계표를 이동시키지 말라고 교훈하셨다. 신명기 19:14, “네 기업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先人)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 잠언도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땅 경계의 표가 되는 돌]을 옮기지 말라고 교훈하였다(잠 22:28; 23:10). 또 돌을 떠내는 자는 그로 인해 상할 것이며 나무를 쪼개는 자는 그로 인해 위험을 당할 것이다. ‘떠내다’는 원어( 나사 )는 ‘(채석장에서) 떠내다’ 혹은 ‘제거하다’는 뜻이며(BDB), ‘쪼개다’는 원어( 바카 )는 ‘쪼개다’ 혹은 ‘뚫다’는 뜻이다(BDB). 이것은 땅의 경계석을 옮기든지, 남의 밭이나 과수원 울타리를 침범하는 행위를 가리킨 것 같다. 자기 땅을 넓히려고 담을 헐거나 땅의 경계표를 옮기거나 남의 소산을 취하려고 울타리를 뚫는 자는 뱀에게 물리거나 상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행을 공의로 징벌하신다. [10-11절]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방술을 베풀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무용하니라. 본문은 지혜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말한다.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든다. 이것은 목수들이 잘 알고 주부들도 부엌에서 쓰는 칼날이 무디면 고기를 썰 때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이와 같이, 지혜가 없으면 무슨 일이든지 하기 힘들고 지혜가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하기 쉽다.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다. 잠언 3:15-18은 지혜의 복됨을 잘 증거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長壽)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부와 존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본문은 또, “방술을 베풀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무용하니라”고 말한다. ‘술객’으로 번역된 원어( 바알 할라숀 )는 ‘혀의 주인, 달변가’라는 뜻이다. 뱀을 다루는 마술사는 뱀에게 말을 해 뱀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한다. 본문은 마술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비교하여 말하는 것뿐이라고 본다. 마술은 속임수도 있고 악령의 역사도 있다고 본다. 출애굽기에 보면, 애굽의 술객들은 그 술법으로 그들의 지팡이가 뱀이 되게도 하였고 강물로 피가 되게도 하였고 개구리로 땅에 올라오게도 하였다(출 7-8장). 그러나 사람이 방술을 베풀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무용하다. 아무리 달변가라 해도 이미 닥친 그 해를 피하거나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미리 지혜를 가지고 조치했어야 했다. [12-15절] 지혜자의 입의 말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키나니 그 입의 말의 시작은 우매요 끝은 광패니라.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신후사(身後事)[그가 죽은 후에 있을 일]를 알게 할 자가 누구이냐? 우매자들의 수고는 제각기 곤하게 할 뿐이라. 저희는 성읍에 들어갈 줄[들어가는 길]도 알지 못함이니라. 지혜자의 말과 우매자의 말은 너무 다르다. 지혜자의 말은 은혜롭고 덕스럽다. 그러나 우매자의 말은 어리석고 거칠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행함이 없는 자들이며 그들에게서는 경건과 선행을 기대할 수 없다. 우매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킨다. 그 입의 말의 시작은 우매이며 끝은 광패이다. 갈라디아서에 증거된 대로, 사람이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산 결과는 분쟁과 시기와 분냄 등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화평과 자비와 선함과 온유를 포함한다(갈 5:19-23). 야고보도 야고보서 3:14-17에서 독한 시기와 다툼은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 지혜이며,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다고 증거하였다. 본문은 또,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지만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니 그가 죽은 후에 있을 일을 알게 할 자가 누구이냐?”고 말한다. 우매자가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자신을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아는 척을 많이 하고 쓸데없는 말, 헛된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그는 실상 자신의 장래 일을 알지 못하고 죽은 후의 일은 더더욱 알지 못한다. 사람의 지식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본문은 또, “우매자들의 수고는 제각기 곤하게 할 뿐이라. 저희는 성읍에 들어갈 줄도[들어가는 길도]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한다. 성에 들어가는 길은 아이들도 아는 길이다. 천국 가는 길은 아이들도 알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우매자는 돈 벌기 같은 세상일들에 바빠 천국 가는 중요한 일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수고는 자신들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 그들은 참 평안과 휴식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16-20절]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에 연락하는 이 나라여, 화가 있도다. 왕은 귀족의 아들이요 대신들은 취하려 함이 아니라 기력을 보하려고 마땅한 때에 먹는 이 나라여, 복이 있도다. 게으른즉 석가래가 퇴락하고 손이 풀어진즉 집이 새느니라.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응용되느니라.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방(寢房)[침실]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 왕이 나이가 어리고 경건과 지혜와 지식, 경험도 부족하고 판단력과 지도력, 선함, 인내, 용기, 포용력 등도 부족하고 대신들은 자기 일에 충실치 않고 게을러 아침부터 술이나 마시는 나라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이 귀족의 아들로 자라 좋은 인격자이며 하나님을 경외함과 지혜와 지식, 판단력과 지도력, 또 백성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맡겨진 직무에 충실한 덕을 있고 대신들도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필요한 때 음식을 먹는 그런 나라는 복이 있을 것이다. 사람의 손이 게으르면 그의 집이 무너지고 지붕이 샐 것이다. 나라의 이치도 비슷하다. 19절은 그들이 쾌락을 위해 잔치하고 기쁨을 위해 포도주를 마시며 모든 일을 돈으로 처리하려 한다는 뜻 같다. 그렇게 해이하고 게으른 통치자들이 있는 나라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으로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권세자들을 세우신 줄 알고 그들을 존중하고 비방하지 말고 주 안에서 복종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롬 13:1-7; 딤전 2:1-2). 또 우리는 침실에서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공의로 보응하심을 깨닫고 우리는 남에게 악을 행치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지혜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깨닫고 실생활에서 항상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짧은 인생을 지혜롭게 살기를 소원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악하고 파괴적인 우매자가 되지 말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선하고 덕스럽고 은혜로운 말을 하는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통치자들과 백성이 게으르지 않고 경건하고 도덕적이고 근면하며 자기의 일들에 충실한 나라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11장: 구제, 선행, 근면, 즐거운 삶 [1-2절]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구제할 때 먹는 음식을 물 위에 던지듯이, 또 일곱 사람이나 여덟 사람에게 나눠주듯이 후하게 해야 한다. 성경은 구제에 대해 ‘흩어 구제한다’는 표현을 하며(시 112:9; 잠 11:24), 우리가 구제할 때 인색한 마음으로 하지 말고 너그러이 하라고 말한다. 신명기 15:7-8, 10,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 . .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우리는 구제한 것을 여러 날 후 찾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상하실 것이다. 신명기 15:10,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잠언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꾸어드리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본문은 땅에 무슨 재앙이 임할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구제한 돈보다 도적이나 사고로 잃는 돈이 더 많게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3-4절]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본문은 재앙에 대한 설명이라고 본다. 폭우가 쏟아지면 나무들이 남으로나 북으로 쓰러질 것이다. 사람이 나무같이 죽고나면 아무 일도 못한다. 재앙의 날과 죽음의 날이 찾아올 것이다. 재앙의 날에는 사람들이 은을 거리에 던지며 금을 더러운 물건같이 여길 것이다(겔 7:19). 그때 우리는 더 이상 선을 행할 힘도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앙을 당하기 전에 또 우리의 목숨이 있는 동안 선을 행해야 한다. 잠언 3:27은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라”고 말한다. 갈라디아서 6:10은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말한다. 또 야고보서 4:17은,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한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바람을 보고 파종을 미루거나 구름을 보고 추수를 늦추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농사하는 자는 웬만한 어려움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그의 계명에 합한 선한 일을 할 때 어려움이 예견되어도 또 어려운 일이 좀 있을지라도 낙심치 말고 선을 행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6:9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한다. 전도도, 구제와 선행도 그러하다. [5-6절]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될는지, 저것이 잘될는지, 혹 둘이 다 잘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고 임의로 부는 바람의 길을 알지 못하고 또 아이 밴 여인의 태에서 아기의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일을 성취하시는( 아사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들을 알지 못한다. 실상, 바람도, 생명의 잉태와 성장도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다.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다 그렇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갔을 때, 또 그가 시위대장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다가 억울하게 옥에 갇혔을 때, 아무도 그가 애굽 총리가 되리라고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이한 섭리 가운데 그를 총리가 되게 하셨다. 농부가 씨를 심고 물을 주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구원이나 성화의 일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회 있는 대로, 힘있는 대로, 선을 행하고 말씀을 널리 전파해야 한다. [7-8절] 빛은 실로 아름다운( 마소크 )[즐거운](BDB, NASB)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토브 )[좋은] 일이로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지로다[그러나 사람이 여러 해를 살고 그 모든 해들을 기뻐할지라도 어두움의 날들을 기억할지로다. 이는 그것들이 많음이라].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 태양 빛은 일곱 가지의 색깔을 띠는 아름다운 빛이다. 이 빛으로 만물의 형상과 색깔이 드러난다. 사람이 대낮의 불타는 태양을 직접 쳐다볼 수는 없으나, 일출이나 일몰의 아름다운 태양은 볼 수 있다. 빛은 기쁘고 즐거운 시간을 상징하고 어두움은 슬프고 고통스런 시간을 상징한다. 사람은 인생의 긴 여정을 사는 동안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롭게 살며 기쁘고 즐겁고 밝게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의 여정에 슬픈 날, 고통의 날도 많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의 삶은 슬픔과 피곤과 고통이 많고 심지어 의인이 당하는 핍박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앙망하는 자는 항상 새 힘을 얻고(사 40:31) 또 고난 많은 세상을 이길 것이다(요일 5:4). [9-10절]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청년의 때는 꿈과 소망이 있고 무슨 일이든지 하려는 소원이 많은 때이다. 사람이 늙을수록 꿈과 소망이 점점 줄어들고 마침내 다 없어지고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고, 하고 싶은 일을 해볼 수 있다. 너무 우울하거나 의기소침하거나 짜증스럽게 살지 말고 쾌활하고 씩씩하게 사는 것이 좋다. 그러나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죄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청년 때에 무슨 일이든지 해볼 수 있으나 오직 죄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청년 때의 생활 원리 두 가지를 교훈한다. 이것은 우리들 모두에게도 유익하다. 첫째는 기쁘게 살라는 것이다. 슬픔과 근심은 우리의 심신을 피곤케 하고 해롭게만 한다. 이 세상에는 항상 고난이 있다. 그러나 섭리자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쁘게 살 수 있다. 둘째는 악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누리되 악을 행치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장차 그가 우리의 모든 행위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식물을 물 위에 던지듯이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구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명령이다. 구제는 남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복이 된다. 둘째로, 우리는 재앙을 당하기 전에 또 목숨이 있는 동안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뜻과 성경 교훈에 맞는 선한 일이라면 크고 작은 어려움이 예상되더라도 낙심치 말고 행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행하시며 이루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고 우리의 모든 일들을 다 하나님께 맡기며 살고,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신 우리의 의무를 날마다 충실히, 부지런히 행해야 한다. 넷째로, 성도들과 특히 청년들은 세상을 기쁘게 살고 원하는 일들을 행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고 악을 행치 말아야 한다. 12장: 사람의 본분 [1-4절]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사람에게는 곤고한 날, 아무 낙이 없는 때가 온다. 사람은 그런 날이 오기 전, 즉 청년의 때에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2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은 사람의 노년기를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다는 것은 사람의 얼굴과 눈빛이 쇠해짐을 말하는 것 같다.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는 것은 많은 눈물을 흘린 다음에 또 다른 근심거리가 생기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떠는 것은 자기 몸을 지키는 손과 팔이 떨리는 것을 말하고,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지는 것은 등과 무릎이 구부러지고 약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치는 것은 이가 많이 빠져 음식을 잘 씹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고,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지는 것은 눈이 어두워 침침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지는 것은 입의 말이 적어지고 귀도 어두워지는 것을 가리키고, 새의 소리를 인해 일어나는 것은 이른 새벽 새 소리에도 잠을 깨는 것을 말하고, 음악하는 여자들이 쇠해지는 것은 목소리가 쇠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5절]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높은 곳을 두려워하는 것은 연로한 자들이 높은 곳에 서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가리키고, 길에서 놀라는 것은 길을 걸을 때도 놀라는 것을 말한다. 살구나무가 꽃이 피는 것은 머리가 백발이 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또 메뚜기가 짐이 되는 것은 작은 일도 힘들어하는 것을 말하고, 원욕(願慾)이 그치는 것은 욕구가 없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사람은 쇠약해져서 죽고 조문객들이 방문한다. [6절]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은줄이 풀리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신경조직이나 근육이 약해지는 것을 말하고, 금 그릇이 깨어지는 것은 사람의 뇌가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는 것은 좌우에 방을 가진 심장과, 동맥, 정맥의 혈관이 그 기능을 그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7-8절]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죽음은 몸과 영혼의 분리, 즉 영혼이 몸을 떠나는 현상이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 심판을 받는다. 죽은 후의 영혼은 천국 혹은 지옥에 들어간다. 전도자는 또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말한다. 이것은 전도서의 주제이기도 하다. 죽음은 이 세상의 삶이 허무하다는 것을 잘 증거한다. [9절] 전도자가 지혜로움으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묵상하고 궁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성경은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참된 지식을 전하며 가르친다. 성경 전체는 한마디로 지혜와 지식의 말씀이다. 솔로몬은 지혜의 말씀인 잠언 3천 개를 말하였다(왕상 4:32).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고 받은 지혜의 지식을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 내용들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들이지만, 인간 저자가 받고 묵상하고 연구하며 가르친 지식이다. 성경은 참으로 지혜와 지식의 보배로운 창고이다. 성경은 성도들을 노인보다, 스승보다, 또 원수보다 지혜롭게 한다(시 119:98-100). [10절] 전도자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 ‘아름다운 말’이라는 원어( 디브레 케페츠 )는 ‘기뻐할 만한 말들’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우리가 기뻐할 만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되고 좋은 말씀일 뿐 아니라, 내게 기쁨이 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24는,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라고 말했고 시편 119:92는,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라고 말했다. 또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다. 성경은 인생과 우주의 참된 이치에 대해 증거하는 진리의 말씀이다. 주 예수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 17:17). 시편 19:8은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말했고, 잠언 1:1-3은 잠언이 사람들로 하여금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말한다. [11절]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성경은 찌르는 채찍같이 또는 뾰족한 막대기같이, 또 잘 박히는 못과 같이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책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바른 길을 지시해주고 또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잘 박힌 못같이 우리 심령에 박혀 기억되고 활동한다. 그러므로 디모데후서 3:16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하였다. 또 성경은 한 목자께서 주신 말씀이다. 그 목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목자이시다(시 23:1; 80:1).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로 주신 말씀, 곧 우리의 신앙생활에 정확무오한 법칙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12절]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본문은 “더욱이 내 아들아, 그것들로부터 교훈을 받으라”고 번역할 수 있다(KJV). ‘그것들’은 성경말씀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큰 유익이 있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성경말씀으로 교훈을 받고 경계를 받아야 한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책들이 있다. 이 세상에서 책들을 만드는 일과 그것들을 연구하는 일은 끝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에게는 오직 한 권의 책이 있다. 그 책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며 그 책을 공부하는 것이 인생에게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며 거기에는 다른 무슨 책들이나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13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다”는 말씀은 전도서에서 말한 대로 세상의 모든 일, 즉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일이 다 헛되며 사람의 모든 수고와 즐거움도 그러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이 허무한 세상에서 사람의 본분은 무엇인가? ‘본분’이라는 원어( 콜 ל������)는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 그것이 사람이 행해야 할 본분이며 사람이 행해야 할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진리는 성경의 다른 여러 말씀과도 일치한다. 신명기 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즉, 사람의 본분은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14절] [이는]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심판하실 것임이니라].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인 이유를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켜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 날에 사람의 모든 행위, 심지어 사람의 은밀한 행위까지도 선악간에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대법원의 최종적, 확정적 판결과 같다. 사람이 거기에서 정죄되면 천국에서 제외되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정직하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람은 청년의 때에, 즉 노년기를 맞아 몸의 모든 기관들이 점점 쇠약해지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기 전에, 세상에서 육신의 죄악된 욕망을 따라 허무한 삶을 살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경외하고 그를 믿고 섬기며 천국을 소망하고 성경말씀에 순종하여 정직하게 살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이 지혜와 지식의 말씀, 기뻐할 만한 복된 말씀, 정직한 말씀,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임을 깨닫고 성경을 사랑하여 규칙적으로 읽고 묵상하며 믿고 실천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의 부귀와 권세와 영광, 그리고 육신의 모든 즐거움이 다 일시적이며 지나가는 것들이며 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알고, 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기억하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사람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 미주 1) 포로 후기의 것으로 봄. 자유주의자들 외에, Hengstenberg, Delitzsch, Lange, E. J. Young, H. C. Leupold 등이 이런 견해를 취함. 2) Gleason L. Archer, Jr., 김정우 역, 구약총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5), 551쪽. 3) 위의 책, 560쪽. 4) 웨 는 보통 ‘그리고, 또’라고 번역되지만, 영어성경은 ‘더욱이’(more- over)(KJV), ‘결국’(after all)(NASB) 등으로 번역하였다. 5) 원문에 ‘미련한 것’이라는 단어( 웨핫시켈루스 ) 아래 붙은 분리액센트( 티프카 )는 이 번역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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