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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 장 | 갈라디아서 2장 20186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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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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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

할례자의 사도와 이방인의 사도 ·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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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9/20/2022

View: 6524

갈라디아서 2 | RNKS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1그 다음에 십사 년이 지나서, 나는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2내가 거기에 올라간 것은 계시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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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2/24/2021

View: 1976

갈라디아서 2 KLB;NIV – 바울과 다른 사도들 – Bible Gateway

2 그로부터 14년 후에 나는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갔습니다. 2 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내가 이방인들에게 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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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3/12/2021

View: 4570

쉬운성경 갈라디아서 02장 – HANGL NOCR

2:1 <다른 사도들을 만나다> 십사 년이 지나서, 나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이번에는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갔습니다. 2:2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하나님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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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5/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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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갈라디아서2장 바울이 사사로이 제시한 복음 – Pensées

갈라디아서 2장은 2:11에서 시작된 사도직 변증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2장을 1-10까지와 11-21절까지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서론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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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392766.tistory.com

Date Published: 5/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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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 – Korean Living Bible (KLB) – Biblica

갈라디아서 2:1-21. 바울과 다른 사도들. 1그로부터 14년 후에 나는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갔습니다. 2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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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ica.com

Date Published: 6/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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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 교사용]

갈라디아서 2장. 1.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1년간 사역을 한 후 떠났던 1차 전도여행 기간은 약 4년이다(AD 46-49). 이 여행 말미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행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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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khong.org

Date Published: 4/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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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주석 – 바울서신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갈라디아서 제 2장 =====2:1 십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 사 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세 번에 걸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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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3/19/2022

View: 8462

갈라디아서 2장 1절-21절, 매일성경큐티와 새벽설교를 위한 …

갈라디아 민족 · 십사 년 후에(2:1) : 바울의 1차 예루실럼 방문 후 14년이 지난 때를 가리킵니다. · 유력한 이들(2:6) :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을 위시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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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tfreak.tistory.com

Date Published: 8/1/2022

View: 9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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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갈라디아서 2장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갈라디아서 2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 Views: 조회수 11,741회
  • Likes: 좋아요 97개
  • Date Published: 2021. 2.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obmGBNjmhpQ

갈라디아서 2

할례자의 사도와 이방인의 사도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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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루살렘 회의

1 그 다음에 십사 년이 지나서, 나는 바나바 와 함께 디도 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 으로 올라갔습니다. 2 내가 거기에 올라간 것은 계시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설명하고, 유명한 사람들에게는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달리고 있는 일이나 지금까지 달린 일이 헛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3 나와 함께 있는 디도 는 그리스 사람이지만,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4 몰래 들어온 # 그 , ‘거짓 형제들’ 거짓 신도들 때문에 할례를 강요받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자 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엿보려고 몰래 끼여든 자들입니다. 5 우리는 그들에게 잠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6 그 유명하다는 사람들로부터 나는 아무런 제안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든지, 나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 유명한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런 제안을 하지 않았습니다. 7 도리어 그들은, 베드로 가 # 유대 사람을 가리킴 할례 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과 같이, 내가 # 이방 사람을 가리킴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8 그들은, 베드로 에게는 # 유대 사람을 가리킴 할례 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사도직을 주신 분이, 나에게는 # 이방 사람을 가리킴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사도직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9 그래서 기둥으로 인정받는 야고보 와 # 베드로 게바 와 요한 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나와 바나바 에게 오른손을 내밀어서, 친교의 악수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이방 사람에게로 가고, 그들은 # 유대 사람을 가리킴 할례 받은 사람에게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10 다만, 그들이 우리에게 바란 것은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고 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내가 마음을 다하여 해 오던 일이었습니다.

안디옥에서 바울이 게바를 나무라다

11 그런데 # 베드로 게바 가 안디옥 에 왔을 때에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나는 얼굴을 마주 보고 그를 나무랐습니다. 12 그것은 # 베드로 게바 가, # 또는 ‘ 야고보 가 보낸’ 야고보 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계 그리스도 인들을 가리킴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입니다. 13 나머지 유대 사람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하였고, 마침내는 바나바 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습니다. 14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 베드로 게바 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 해석자들에 따라, 인용을 21절까지 확대하기도 함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다

갈라디아서 2 KLB;NIV

Copyright © 1985 by Biblica, Inc.® Used by permission. All rights reserved worldwide.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Copyright ©1973, 1978, 1984, 2011 by Biblica, Inc.® Used by permission. All rights reserved worldwide.

NIV Reverse Interlinear Bible: English to Hebrew and English to Greek. Copyright © 2019 by Zondervan.

쉬운성경 갈라디아서 02장

2:1 <다른 사도들을 만나다> 십사 년이 지나서, 나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이번에는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갔습니다.

2:2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거기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과 따로 만나서 내가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전에 한 일이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헛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2:3 나와 함께 있던 디도는 비록 그리스 사람이지만 나는 그에게 억지로 할례를 베풀지는 않았습니다.

2:4 우리 가운데 거짓 형제들이 몰래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다시 율법의 종으로 만들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엿보려고 정탐꾼처럼 끼어들었습니다.

2:5 그러나 우리는 그 거짓 형제들의 뜻을 조금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가 늘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바랐습니다.

2:6 저 귀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내가 전하는 복음을 바꾸지 못했습니다(그들이 귀한 사람이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사람이 똑같습니다).

2:7 오히려 그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신 것처럼, 내게도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유대인을 위해 사도로 일할 권리를 주셨고, 내게는 이방인을 위해 사도로 일할 권리를 주셨습니다.

2:9 지도자로 인정받던 야고보와 베드로 와 요한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특별한 은혜를 깨닫고, 바나바와 나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여, 그대들은 이방인에게 가십시오. 우리는 유대인에게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10 그들은 우리에게 한 가지, 곧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것은 사실 내가 힘써 해 오던 일입니다.

2:11 <바울이 베드로를 나무라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그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내가 그를 대면해서 나무랐습니다.

2:12 베드로가 안디옥에 와서 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있는데,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이 오자 먹는 것을 그만두고 그 자리에서 물러갔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2:13 이처럼 베드로는 거짓된 행동을 했고, 다른 유대인 성도들도 거짓된 행동을 했습니다. 심지어 바나바조차 그들의 거짓된 행동에 유혹을 받았습니다.

2:14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를 향해 “베드로여, 당신은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처럼 살지 않고 이방인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라고 합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2:15 우리는 이방인, 곧 ‘죄인’이 아니라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2:16 하지만 우리는 율법을 따른다고 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지,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닙니다.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2:17 우리 유대인은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그리스도께 나아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밝히 드러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시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2:18 내가 이미 헐어 버린 모세의 율법을 다시 가르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내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2:19 나는 율법을 위해 사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나는 율법에 의해 죽었습니다. 내가 율법을 향해 죽은 것은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한 것입니다.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내 몸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구하시려고 자기 몸을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2:21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장별설교] 갈라디아서2장 바울이 사사로이 제시한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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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갈라디아서2장 바울이 사사로이 제시한 복음

갈라디아서 2장은 2:11에서 시작된 사도직 변증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2장을 1-10까지와 11-21절까지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서론에서 바울은 자신이 계시에 따라 예루살렘 올라간 이야기를 합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복음대로 살지 않는 베드로를 바울이 책망한 이야기를 함으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정당성을 논증합니다.

1. 1-10절 두 그룹의 사도와 합의

2. 11-21절 베드로를 책망한 바울

1. 1-10절 예루살렘 방문에 복음을 제시하다.

바울은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전해 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어떤 시기를 기점으로 ‘십사 년 후’(1절)에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올라간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을 호출했기 때문이 아니라 ‘계시를 따라’(2절) 올라갔습니다. ‘계시를 따라’ 올라갔다는 말은 주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명령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들에게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제시’(2절)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제시하되 ‘사사로이’ 했다고 말합니다. 즉 공적이 아니라 사적인 것으로 서로 이야기하고 나누었다는 말입니다. 약간 의아해 보이는 표현이지만,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복음을 사도들의 허락을 받거나 인준을 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베드로를 할례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자로, 자신을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사도가 되는 것은 교회의 선택이나 훈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모든 직분이 하나님께 기원이 있기는 하지만 사도직은 다른 직분에 비해 좀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소명에 의한 것임을 드러내 줍니다. 바울이 제시한 복음을 듣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친교의 악수’를 했습니다.(9절)

또 하나는 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헬라인 디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바울은 헬라인 디도를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갔음에도 그는 억지로 할례를 시키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왜냐하면 할례를 받지 않고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습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할례를 시키지 않는 이유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4절)이었습니다. 거짓 형제 또는 거짓 교사들의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4절 하)이었습니다. 바울은 5:1에서 다시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율법으로 인해 오는 육신의 탐욕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령이 부어지고, 그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17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이 자유는 이전처럼 죄의 종이 아니라 아들이 갖는 자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가 이끄는 대로 죄를 짓고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 애굽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부르시고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이제는 종이나 노예가 아니라 아들입니다. 호세아 11:1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을 받을 수 있고, 당당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직접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 간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들이 누리는 자유입니다.

그런데 거짓 형제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었지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가만히 들어와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자유를 빼앗아 내 던졌습니다. 그것을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들의 종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5:10에서는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2. 11-21절 베드로를 책망한 바울

바울은 이제 중요한 한 가지 사건을 언급합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때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12절 말씀에 의하면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는 이방인들과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다 야고보에서 온 사람들을 발견하고 이방인들과의 식탁을 급하게 벗어나 도망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왜 문제일일까요? 먼저 야고보라는 인물을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유대적 전통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해 봅시다.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유대 전통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닙니다. 여전들이 그들은 이방인들과 식탁교제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탁교제를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분과 혈통이 무너지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의 민족이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갈라디아서 다음 성경인 에베소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에베소서 2:11-18]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복음은 혈통과 민족, 신분과 성별을 너머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방인들과 함께 거리낌 없이 식탁교제를 나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야고보에서 사람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율법을 따라 행하던 본성에 의해 이방인들과의 식탁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바라본 바울은 베드로를 향해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비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먼저는 베드로는 유대인답게 살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 행동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강압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고 따집니다. 그리고 나서 16절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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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주석

갈라디아서 제 2장

=====2:1

십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 사

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세 번에 걸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첫번째 방문은 그가 회

심한지 삼년 후에 베드로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고(행 9:26), 두번째 방문은 안디옥 교

회의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으며(행 11:29,30), 세번째 방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하러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행 15:1 이하). 본절에 나타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이 이차 방문인지 삼차 방문인지

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갈라진다. 먼저 두번째 방문이라고 주장하는 견해

(Bruce, Calvin)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행 15장의 세번째 방문은 공적 회의에

참석한 것이지만, 2절에 의하면 바울은 개인적으로 예루살렘 지도자를 만났으므로 세

번째 방문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2) 행 15장에는 디도에 대한 언급이 생략되

어 있으나 본절에는 디도와 바나바가 동행(同行)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본구절

의 방문은 세번째 방문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3) 본절의 ‘다시’를 두번째 방문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견해는, 만일 1:18에 기록된 방문이 첫번째 방문이라

면 문맥상 본 구절의 방문이 두번째 방문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진다. 다음으로 세번째 방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Berkhof,

Eerdman, Findlay, Robertson). (1) 행 15장과 본장의 주제가 동일하다는 것인데, 두

곳 모두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할례’를 다루고 있다. (2) 행15장에서 지도자들

간의 연합을(행 15:8,9) 강조하고 있는데, 본장에서도 동일하게 연합을 서술하고 있다

(9절). (3) 행 15장이나 본장이 모두 유대주의자들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주장하고

있다. 이상의 견해들 가운데 본절이 말하는 바울의 방문이 세번째 방문이라는 것이 더

욱 타당한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예루살렘 공의회의 연대를 A.D. 49년경으로

보고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연대를 추정하면 1차는 A.D. 35년, 2차는 A.D. 46년(행

11:30;12:25), 3차 방문은 A.D. 49년에 이루어졌다. 여기서 만일 본장의 방문을 2차

방문과 연결시킨다면 바울의 1차 방문은 A.D. 46년에서 14년 전인 A.D. 32년의 되며

또한 그가 회심한 시기는 그보다 3년 전인 A.D. 29년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때가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이어야 하므로 불가능하다.

(2) 두번째 방문을 주장하는 자들은 디도에 대한 언급이 행15장에 없다는 이유로 세번

째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디도에 대한 기록은 사도행전 전체에서 누락되어 있다.

(3) 바울이 두번째 방문을 생략한 것은 무슨 속임수나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이

방인의 할례 문제를 다루는 본장에서 다른 주제, 즉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문제를

취급한 두번째 방문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성을 못느꼈기 때문이다. (4) ‘다시'(*

,팔린)는 두번째를 뜻하기도 하지만 요 18:27에서 베드로의 세번째 부인

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두번째’를 의미하는 헬라어 ‘듀테론'(* )

을 쓰지 않고 ‘팔린’을 사용한 것은 단지 방문의 반복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바나바 – 그는 레위 지파 출신의 유대인으로 구브로에서 태어나 바울보다 먼저 복

음을 받아들였던 사람으로서 이방인들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안디옥 교회로 파송되었다(행 11:22). 그의 본명은 요셉이

었으나 사도들은 그를 ‘권위자’, ‘권위의 아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바나

바’로 불렀다(행 4:36).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로소(행 11:24) 초대 교회의 헌

신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하고 바울의 체험을 변호하며

함께 사역하였으나 2차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마가의 동행 문제로 바울과 결별(訣別)

하게 되었다(행 15:36-41).

디도 – 그는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으로서 고린도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목회자이다(고후 8;23;12:18). 본절에서 이방인의 할례 문제로 등장하는 그는 바

울이 ‘나의 참 아들 디도’라고 말할 만큼 바울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기록은 그가 로마에서 달마디아로 갔다는 것이다(딤후 4:10).

=====2:2

계시를 인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아포칼립신'(*

)은 바울의 이방인 선교가 어떠한 인간적인 동기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님을

확실히 보여준다. 한편 행 13장에서는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이방인을 위해 파송되는

과정이 안디옥 교회의 결정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바울의 선교 사역이 교회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본절에서 언급된 바, 바울의 선교 사역의 동기가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은 서로 상반되지 않는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결정 배후

(背後)에 하나님의 계시하심이 있음을 확신하였을 것이다(Hendriksen)

달음질하는 것 – 바울은 개종 이후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당시의

운동 경기를 염두에 두어 묘사하였다. 그의 달음질은 향방없는 것이 아니라(고전

9:26) 분명하고 확고한 목표를 향한 것이었다.그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도자들을

사사로이 만나는 면밀한 계획을 갖기도 하였으며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위해 지도자로

서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결국 변하거나 바울의 달음질을 헛되게 하는 것은 자

신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이었으므로 본절에는 바울 자신이 유대주의자들의 모든

거짓된 것들을 반드시 고치고야 말겠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2:3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

으시고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거행하도록 명령하셨다(창

17:10-14). 그러나 세월이 경과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의 언약적인 의미보다는

종족적이며 문화적인 우월감의 상징으로서 외적인 할례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급

기야는 구원을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교

회안의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과 함께 할례를 시행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

이 된다고 주장하여 이방인 신자들에게까지 할례를 강조했다. 할례에 대한 보다 자세

한 내용은 구약 호크마 창 17:1-14의 주제 강해 ‘할례 언약과 세례’, 창 34:25-31의

주제 강해 ‘할례 실시에 따른 제반 사항’을 참조하라. 한편 ‘억지로…아니하였으니’

의 헬라어 ‘우데…에낭 카스데'(* … )는 할례를 주장하는

강한 압력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는 바울의 굳건한 의지를 나타낸다.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회유(懷柔)에 말려들어 할례를 중요하게 생각한 상황에서 바

울이 할례받지 않은 디도를 유력한 증인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디도가 갈라디아 교회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2:4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 ‘거짓 형제’의 헬라어 ‘프슈다델푸스'(*

– )는 ‘프슈데스'(* )와 ‘아델포스'(*

)의 합성어이다.’프슈데스’는 ‘거짓 사도'(고후 11:13),’거짓 선지자'(벧후 2:1)

등에서 처럼 ‘거짓’이라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본절에서 ‘파레

이사크투스'(* ,’가만히 들어온’)와 함께 이 말을 사용하여

은밀하고 은근하게 복음을 훼손시키는 거짓 교사들의 교활한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한

편 바울이 1:11에서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된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라고 부른 것

은 그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본절에서 유대주의자들을 향하여 ‘거짓 형제’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 속에 그들이 설 자리가 없음을 나타낸다.그

러나 그들이 누구인가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그들은 최소한 내부에서 믿음을 배반한

사도들이나 성도들은 아닐 것이다(Lenski).아마 ‘거짓 형제’는 (1) 예루살렘 공의회에

서 이방 그리스도인도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을 주장하며 모세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

자들이거나 (2) 공의회의 결과가 갈라디아와 안디옥 교회에 소개되었다(행 15:30). 그

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에는 계속해서 교인들을 미혹하는 유대주의자들이 존재했으

며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케 된 성도들을 다시 율법 아래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신자인 것처럼 가장하여 열심은 있으나 실제로는 복음을 거부

하고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였다(고후 11:26;벧후 2:1). 이러한 갈라디아 교회의 형편

가운데서 디도가 할례 받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은 자유 얻은 자로 하여금 자유를 잃

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2:5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 복종을 요구하던 자는 디도에게 할례를 요구했던

무리들로 국한시켜 이해하기보다는 더욱 광범위한 의미에서 유대주의화를 꾀하던 ‘거

짓 형제’들이 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사도 바울 일행은 위의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이나 율법을 강조하는 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어떤 서방 사본들

에서는 ‘호이스우데'(* , ‘…한 자들에게 조금도…않다’)가 생략되

어 본 구절이 ‘잠시동안만 복종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사본에 의하면 바울이 잠

시 동안만 평화를 위하여 타협할 수도 있었던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베자(Bezae) 사

본을 제외한 모든 언셜(Uncial) 사본과 오래된 파피루스 사본(P46), 그리고 고대 헬라

교부의 번역에서 ‘호이스 우데’는 생략되어 있지 않다. 또한 본장의 문맥상 바울이 거

짓 형제들과 조금이라도 타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지금까지 달려온 길이 헛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할례는 초대 교회의 최대 논쟁이

며 또한 복음에 대한 최대의 도전(挑戰)이었다. 이 논쟁 앞에서 바울이 진리를 양보했

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Lenski).

복음의 진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알레데이아 투 유앙겔리우'(*

)는 본절과 14절에만 나오는 것으로 ‘결

함이 전혀 없는 복음'(Lightfoot) 또는 ‘진리가 담겨 있고 진리에 속해 있는 복음’

(Burton)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복음을 들어 언급하는 것은 디도의 할

례 문제는 한 개인의 구원 문제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 문제에

직결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2: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 바울은 세 번에 걸쳐 ‘호이 도쿤데스'(*

,’유력한 자들’)를 사용하여(2절) 베드로, 요한,야고보 등 예루살렘의 사도를

지칭하였다(9절). 이러한 호칭 후에 곧바로 하나님은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언급하

는 것을 보면 바울이 이 호칭을 풍자적 의미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Cole).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 헬라어 본문에 나와 있는 후치사 ‘가르'(* )는

선행 구절을 보다 충분하게 설명해 주는 삽입구가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 구절은 선행 구절에서 제시된 ‘외모를 취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어떤 유

명한 자들일지라도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직

접 받은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과 동시에 예루살

렘 교회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것과 전혀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

명하고자 했다.

=====2:7

내가 무할례자에게…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 여기서 ‘할

례자’와 ‘무할례자’는 구체적인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킨다(롬 4:9;엡 2:11 등). 유대주의자들은 베드로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서로 다른 것이 있다고 주장한 것 같다(Lenski). 그러나 바울은

사역상 서로 다른 책임이 있을 뿐 어디까지나 복음의 내용은 동일(同一)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바울이 할례자에게 복음 전하는 자로 열 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

를 대표로 내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1)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을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Lenski, Huxtable). 그러나 전자는 타당하

지 않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가

이사랴와 다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또한 그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행 15:7). 바울 역시 이방인들에

게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한

바 있다(행 23:11). 그는 또한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행 26:20ff.)보아, 본절에서 바울이 의도

하는 바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 자신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베

드로와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2:8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 – ‘사도로’의 헬라어 ‘에이스 아포스톨렌'(*

)은 베드로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명확하게 인정하는 표현이

다. 바울은 베드로보다 가문이나 학문에서 뛰어난 자로소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

었으나 자신을 베드로보다 우월한자로 여기지 않는다. 여기에는 바울의 겸손함이 포함

되어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바울이 이와 같이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사도로

세우신 이가 동일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을 사도로 세우신 하

나님과 베드로를 사도로 세우신 하나님을 동일시함으로 자신의 사도됨을 증거하고 있

다. 두 사도 중에 하나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또 하나는 이방인을 중심으로 사역했으

나 그들의 사역의 내용은 같은 것이었으며 둘 다 동일한 섭리와 은혜에 의하여(고전

15:9,10)사도로 세우심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서 맺어지는 열매도 무할례자

이거나 할례자이거나 동일한 것이었다.

=====2:9

기둥같이 여기는 – ‘기둥'(* ,스튈로이)이라는 표현은 중요성을 강조하

는 말이다. 탈무드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이스라엘의 세 ‘기둥'(*

,암무딤)이라 하였고 이스라엘의 계약 공동체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그들 위에 세

워졌다고 한다(Longenecker). 이러한 개념을 사용하여 바울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을

‘기둥’에 비유한 것 같다.실제로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어가는 권위와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들이었다. 바울은 유대주의 자들을 향해 의도적으로 히브리적 개념을 도입

해 논리를 펴나가면서 세 사도가 갖는 비중(比重)을 강조하였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 – 이 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지도자적 입

장에 서 있었던 사실에 역점을 둔 것이다(행 15장). 먼저 야고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바울은 1:19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였으나, 본절에서는

그냥 ‘야고보’라고 칭하고 있다. 이는 본장의 전체 맥락이 예루살렘 공의회를 언급하

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장이었다(1:19 주석 참조).

바울이 다른 두 사도보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의 이름을 먼저 기록한 것은 우연의 일

치라기보다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의장으로서의 야고보를

설명하기 위함인 것 같다(Boice). 그러나 다른 사도들의 이름이 뒤에 나왔다고 해서

예루살렘 교회 속에서 이들의 서열이 정해져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 다음으로, 바

울은 모두 아홉 번에 결쳐 베드로를 언급하는데 일곱번은 ‘게바’라고 불렀으며(14

절;1:18;고전 1:12;3:22;9:5;15:5) 두 번은 ‘베드로’로 칭하였다(7,8절). 특히 유대주

의자들과 논의할 때 게바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베드로와 자신의 관계를 오해없이

설명하려 한 것 같다(Huxtable). 끝으로, 요한이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였다는 기

록은 성경에서 본절에만 나타난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여러 곳에서 함께 등

장하며 또한 사역하였다(행 3:1;4:13;8:14 등)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덱시아스 에도칸 코이노니아스’

(* )는 ‘교제의 오른손을 주었다’

라고 직역된다. 이는 고대 사회에서 우정을 돈독하게 하고 동의한다는 의사 표시였다

(Longenecker). 본절에 언급된 다섯 사람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즉 야고보와 게바, 요한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

방인을 위한 복음 전파에 주력하였다. 이 두 그룹은 서로 독자적이면서도 하나님의 나

라를 건설하는 사역에 협력하였다(행 15:25,26). 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았다는 것은

사적(私的)인 장소에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는 의미보다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공식 석

상에서 결의한 사항을 실행할 때에 함께 협력하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손을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Lenski).

=====2:10

가난한 자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에 ‘톤 프토콘'(* )은 ‘가

난’을 뜻하는 일상 용어로서 돈이나 재산이나 생활 수단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는

뜻으로 쓰인 단어이다. 신약에서 이 말은 ‘거지’에게도 사용되었으며 (눅 16:20) 주로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자들에게 사용되었다(마 19:21;눅 19:8;요 13:29). 당시 가

난한 자들은 복음 전파의 주요 대상이었다(마 11:5).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부요하

게 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셨으며 자신을 찾아온 부자들에게 재산을 팔아 가

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마 19:21) 자신과 제자들이 함

께 거하는 공동체 속에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준비된 공동궤를 가지고 있었다(요

13:29). 사도행전에 와서는 ‘엔데에스'(* )라는 말이 등장하는데(행 4:34)

이는 초대 교회 안의 ‘가난한 자’,’궁핍한 자’로서 다른 사람들이 재산을 팔아 나누어

준 덕분에 살아가는 자들을 뜻한다. 초대 교회에 있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문

제는 할례와 같이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당연히 행하여야 되는 임무로 인식되어 있었

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임무는 공의회의 결정에 의하여 수립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요 13:29), 또한 초대 교회의 출발부터 교회가 감당했던 사명이다(행 24:17).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 바울은 믿음과 구제 문제를 믿음과 할례 문제처럼 대

립시키지 않는다. 바울의 힘써 행하는 구제는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외식적인 것이 아

니다. 본절의 구제가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알 수는 없으나 바울의 생애 가운데 구제의

사건은 여러 번 등장한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가 모은 구제 헌금을 가

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으며(행 11:29,30) 여러 서신서에서 구제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행 24;17;롬 15:25-27;고후 8:1-5). 또한 그는 구제에 대한 교훈을 남겼으며(롬

12:13;엡4:28;딤전 6:18)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그 일을 위하여 정

직하게 살 것을 요구한다(엡 4:28). 이러한 삶의 요구는 선행이 신앙의 살아 있는 증

거요(약 2:14-17) 신앙 고백의 진실성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요일

3:17,18)

=====2:11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 여기서 베드로의 행위가 명백하게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

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더욱 뚜렷해진다. (1)’면책하였노라’의 헬라어 ‘안테

스텐'(* )이 문자적으로 ‘대항하다’, ‘저항하다’ 혹은 ‘반발하다’라는

의미로 베드로의 행위가 ‘복음의 진리’를 훼손(毁損)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있었음

을 시사한다. (2) ‘안텐스텐’의 시제가 부정과거로서 바울이 베드로를 성공적으로 책

망했으며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에 대항하지 못하고 굴복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Lenski). (3) 더욱이 바울은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아니고 공개적으로 면책하며 저지

했다는 사실로 베드로의 잘못의 심각성이 더해간다(Hendriksen). 이와 같이 바울은 예

루살렘에서와는 달리 안디옥에서는 베드로보다 높은 위치에 서서 성도들을 대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데, 이는 베드로의 잘못이 너무도 명백하여 견책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Robertson).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바울이, 신자라면

누구나 소유하고 있는 완전한 동등권을 항상 공격하며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좁고 치우

쳐 있는 유대 중심적 신앙관에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이며(Huxtable) (2) 예루살렘 교

회의 그 어떠한 권세자도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에 대하

여 책망받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Cole).

=====2:12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 본 구절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던

식탁 교제나 성찬을 가리키는 것같다. 이것이 정식 예배였는지 아니면 비공식적인 그

리스도인의 모임이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본절에서 초대교회 당시 유대 출신의 그리

스도인들이 이방 출신 그리스도인과의 식사를 꺼린 사실이 나와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

은 이유 때문이었다. (1) 유대인들은 레 11장에 있는 정함과 부정함에 관한 규례를

철저히 지켜왔고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준수하려 하였다(민 25장, 31장;단 1:8;토비

트 1:1-12;마카베오상 1:62).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그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이방인들이 먹는 음식 중에는 레 11장의 정결(精潔) 규례에 위배되는

것이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따라서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출신의 그

리스도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지 않으려 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들을 부연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제한 규정들 때문이다. 이러한 규정들은 그 종류가 대단

히 많고 다양했는데 초대교회 당시에는 하나님의 율법 못지않게 존중된 것으로 보인

다. 그 실례로 장로들의 유전에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

데, 이는 단순히 위생상 이유 때문에서가 아니고 이방 사람들과 접촉하여 부정하게 된

손으로 음식을 먹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마 15;1-20;막 7:1-23). 위와

같은 이유로 오랫동안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이방인에 대한 배타심이 굳어져왔다.

이러한 것은 사마리아인도 인식하고 있는 일반적인 사실이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

인에게 물을 달라고 할 때 그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대답한다(요 4:7-9). 따라서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을 뿐 아니라 대단히 죄악된 행동으로 간주되

기까지 했다(Hendriksen).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약의 율법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실제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

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행동이며 삶이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러한 사

실을 인식하고 늘어나는 이방 그리스도인에 대해 몇가지 제한 사항을 제시하고 다른

어떠한 율법의 행위로도 짐을 지우지 않는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행 15:14-21).

저희가 오매…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 베드로가 이방 그리스도인과 함께 식사

하는 것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사람이 오자 이방인들과 식사

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행동의 동기는 예루살렘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Hendriksen). 또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사랑이나 자기 확신에 의해 나온 행동이 아니라 거짓과 위선의 행동

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동를 책망했다.

=====2:13

남은 유대인들도…외식하므로 – 주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 중 한 사람이요 공적

인 위치에 있었던 베드로가 한 외식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복음의 자유가 첨예(尖銳)

하게 대립되고 있는 초대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베드로의 이러한 실수는 단

순히 개인적인 외식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1) 다른 사람들 심지어 바나바같은 지

도자까지도 외식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근거가 되며 (2) 예루살렘 공의회(A.D.

49)의 율법 무용론에 대한 결정을 무효화시키는 것이고 (3) 결과적으로는 율법주의에

굴복한다는 위미를 지닌다. 여기서 우리는 공적인 위치에 있는 지도자의 행동의 중요

성과 함께 한 사람의 외식적인 행동은 중요성과 함께 한 사람의 외식적인 행동은 다름

사람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막 7:1-23).

=====2:14

모든 자 앞에서 – 바울은 베드로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공개적으로 책망을 했다.

이는 (1) 베드로뿐만 아니라 여러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잘못을 했으며

(2) 공적인 잘못은 사적으로 고칠 수 없기 때문이고(Lenski) (3) 그러한 실수를 베드

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Hendriksen).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 본절에서 바울이 ‘본래 유대인’임을 밝히는 것은 그도

태어나면서부터 유대인의 종교적 특권을 지녔음을 보여주어 다른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반감을 줄이게 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Cole).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 이방인들에게 ‘죄인'(* , 하마르톨로

이)이라고 말하는 것은 윤리적인 판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유대인의 독선에서 나오는

이방인에 대한 통상적인 언급이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특권을

누리고 있었지만 본문에서 바울은 그 특권을 자랑하거나 또는 이방인들을 조소하기 위

해 ‘죄인’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비록 바울이 유대교 내의 용어들을 사용하여

‘이방 죄인’으로 표현하였지만 이 말 속에는 매우 반어적(反語的)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당시 유대인들에 의해 죄인으로 간주된 이방인들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사실은 스스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을 하찮게 여기며 조금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독선적이고 교만한 태도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이다(Cole).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 본절에는 법정 용어인 ‘디카이오스'(* ,

‘의로운’)에서 파생된 말이 세 번 반복되고 있다. ‘의’는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것

이므로 그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다. 본절에서도 이 용어가 수동

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능동적인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의롭다고 선언한다’는 뜻이지 ‘의

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의로움에 이를

수가 없다(롬 3:20). 그러나 의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

시는 것은 인간의 윤리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이며 신적 표준에

서 발생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 본서에서 처음 나타나는 ‘율법’에 해당하는 헬

라어 ‘노모스'(* )는 바울 서신 중 특히 로마서와 본서에 많이 등장하는데

‘의'(* , 디카이오쉬네), ‘행위'(* , 에르곤) 등과 함

께 복음의 핵심을 설명할 때마다 ‘믿음'(* , 파스티스)과 관련되는 개

념으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 관사없이 사용된 ‘노모스’는 모세의 율법을 지시하는 것

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선한 행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자 하는 인간들이 ‘자기 의’를

위해 구축한 규범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유대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거짓된 규범들이

다. 인간이 만들어낸 규범으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 인간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다고 선언

하시게 되는 수단일뿐 절대적인 자격이나 요건이 되지 못한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믿

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자들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다(롬 5:18,19). 죄악

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만이 인간들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게 할 수 있으며 이를 신뢰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며 이러한 믿

음은 생명력이 있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역동적(力動的)인 삶을 살도

록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주의자들은 그 믿음에다가 할례와 같은 율법적이요

외적인 조건을 더 하려고 하였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본절은 시 143:2(LXX,

142:2)의 인용이며 아울러 롬 3:20 내용과 병행을 이룬다. 아래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편의 ‘파스존'(* , ‘모든 생명’) 대신에 로마서에서는 ‘파사 사륵

스'(* , ‘모든 육체’)를 사용하였고, 로마서와 본절에서는 시편에 없

는 ‘율법의 행위’를 부가(附加)시키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단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2:17

그리스도 안에서 – 이 말은 바울 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용어로서 그리스도와 성

도 간에 누리는 친밀한 개인적 교제를 시사한다. 그가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 사역

을 강조하는 것도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며, 예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전파하는 것과 미래 세계에 대한 거룩한 소망을 가지는 것도 그가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유일한 신앙의 대상이며 동시에 전부라고 고백하

고 있다. 특히 바울 신학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아담 안에서'(롬

5:12-19)라고 표현과 대조를 이룬다. 아담은 죄와 사망의 옛사람을 대표하지만, 그리

스도는 자유와 생명의 새 사람을 대표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은 십자가의 죽

음과 부활을 실현하신 그리스도와 실존적으로 연합하여(롬 8:39;14:7;빌 2:1) 구원받

은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죄인으로 나타나면 – 본절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1) 바울이 유대주

의자들의 입장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Hendriksen). 다시 말해서 유

대주의자들이 의롭게 되기 위하여 예수를 믿음으로 율법을 폐기하는 죄인이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할 경우에 대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회심을 독려하는 문구로 해석한다

(Cole). 이 견해에 따르면, 유대주의자들이 예수를 믿고 율법을 폐기했다면 그들은 스

스로 이방인과 같이 율법을 도외시하는 죄인이 된 것이고 그것은 모세 율법보다 저급

한 수단의 삶으로 여겨질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그리스도마저 ‘죄를 위한 봉사자’

(* , 하마르티아스 디아코노스)로 전락시키는 어리

석음을 범하는 것과 같다. (2) 바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있다는 견해이다. 즉 바

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속에 죄악의 본성이 남아 있음

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죄악된 옛 사람의 습관

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롬 7:24)라고 고백한

바 있다. 본문에서 바울은 오히려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한다. 이

는 유대주의자들이 가진 의식법과 율법주의적 관점에서는 언제나 죄인인 것을 시인하

는 역설이다(R.E. Howard). 그가 유대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시인한다

고 해도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정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1). 본절의 해석은 자신이 계속해서 죄

인으로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전체의 맥락과 연결시

킬 때 후자가 보다 타당할 것 같다.

=====2:18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며 – 본문은 다분히 베드로가 유대주의자들을 두려워하

여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로부터 떠나 다시 유대인의 옛 습관으로 돌아간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2:11). 바울은 다메섹의 체험(행 9:1-7)이후에는 한 번도 뒤를 돌아

보지 아니한 일관된 삶을 살았음을 고백한다. 또한 율법의 공로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의도가 결단코 없음을 밝힌다.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 ‘범법한 자’의 헬라어 ‘파라바텐'(*

)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가 정의되는 ‘하마르톨로스'(*

, ‘죄인’)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파라바텐’은 문자적으로 ‘배신자’,’이단자’를

뜻하며 본절자서는 바울 자신이 다시 율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

(背信) 행위가 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 바울은 ‘나’라는 1인칭 대명사

를 사용함으로 자신에게 있었던 실제적인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을 향하여 ‘죽는

다’는 표현은 모든 관계가 단절된 것을 의미하며 더이상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었나니’의 헬라어 ‘아폐다논'(* )은 다음 절에 나

오는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쉬네스타우로마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들은 둘 다 단회적인 것으로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

갈 수 없으며 다시 십자가에 못박힐 수 없는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역설적으로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것은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살아났다’는 표현이다. 로마서

에서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표현했는데(롬 7:4), 이 두 표현은 모두 단

순히 사변적인 표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것을 고

백한 말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죄악으로부터 밀려오는 좌절감과 실패를 극복할 수가

없다. 오히려 율법은 인간 속에 있는 죄를 더욱 죄되게 만든다. 율법은 단지 죄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믿음과 새 생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는

기능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2:20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본 구절은 본서의 여러 곳에 거듭 언급되

는 내용으로(1:4;3:1,13;6:12,14)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초대 교회의 가르침의 초점이

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본절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변화

와 율법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신학적인 논증을 나타낸다. 실로 그토록 교만하고 자존

심 강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종래의 모든 삶과 사랑에 대

한 부정이요 새로운 삶을 향해 전환(轉換)을 이루는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이 변화된

삶은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고난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

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후에 그가 지고 가는 십자

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이었다(W.G.Coltman).

한편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스타우로마이'(*

)는 성도가 그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영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본서에 처음 등장하는 ‘십자가’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

하는 의미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함이며(롬 8:4), 또

한 실존적으로 구약의 모든 율법적 요구들을 완성한 역사적 사건이다. 바울은 그리스

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이제까지 자기가 메고 있던 율법의 요구들로부터 자유

와 해방을 얻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이 짧은 구절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두 언급되고 있다.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죽

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롬 6:4). 그리스

도와 바울의 완전한 연합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옛 사람의 자기 교만과 바리새인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잠시 동안 자신에게 패배감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심으로

인하여 얻은 자유와 평화는 그 고통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롬 8:18).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본절에는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1) ‘나’

대신에 ‘그리스도’,(2) ‘율법’ 대신에 ‘믿음’,(3) 과거의 ‘옛 사람’ 대신에 현재의

‘새 사람’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로 하여금 모든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서 종노

릇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와 사랑의 종이 되었으며(롬 6:19), 비록 제한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더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며, 성령을 좇는 삶을 살게 되었다

(롬 8:4).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안에서’사는 것이

다. 이는 과거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르

다. 예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요 15:7)라고 말씀하셨지만, 바울은 ‘아들을 믿

는 믿음안에’라고 말한다. 이는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실때에는 말씀으로 존재하시며 우

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2:21

하나님의 은혜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바울 자신이 그 죽으심과 부

활에 참여하게 된 신비적 연합의 사건이 ‘하나님의 은혜’로 묘사되고 있다. ‘은혜’의

헬라어 ‘카린'(* )은 ‘하나님이 주시는 값없는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아들

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과 우리로 아들을 믿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

이다.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 ‘헛되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레안'(*

)은 ‘연고없이’,’이유나 목적이 없이’,’불필요하게’등의 의미를 지닌다. 갈라

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이 다시 율법으로 도아갈 것을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율법에

대한 애착심과 관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

들어 버리는 결정적인 잘못이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옛 생활에 대한 단순한 향수

(鄕愁)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자 하는 범죄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배신 행위이다.

갈라디아서 2장 1절-21절, 매일성경큐티와 새벽설교를 위한 설명과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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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현대인의 성경

1 그로부터 14년 후에 나는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2 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내가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는 기쁜 소식을 공식 석상에서 전하였고 지도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과거에 한 일과 현재 하는 일이 헛되지 않을까 염려해서였습니다.

3 나와 동행한 디도는 그리이스 사람이었지만 억지로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4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몰래 들어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다시 율법의 종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5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을 언제나 기쁜 소식의 진리 안에 있게 하려고 한시도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6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제시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건간에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양을 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7 그들은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같이 내가 이방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을 보았습니다.

8 베드로에게 능력을 주어 그를 유대인의 사도로 삼으신 하나님이 나에게 능력을 주어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것입니다.

9 그리고 기둥 같은 지도자로 알려진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청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고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10 또 그들은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고 부탁했는데 그 일은 내가 전부터 열심히 해오던 일이었습니다.

11 그런데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그가 잘못한 일이 있었으므로 나는 여러 사람 앞에서 그를 책망하였습니다.

12 그것은 그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 몇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나가 버린 일이었습니다.

13 그러자 다른 유대인들도 안 먹은 체하며 밖으로 나갔고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유혹을 받았습니다.

14 그래서 나는 그들이 기쁜 소식의 진리대로 바로 살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에게 `유대인인 당신이 이방인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방인에게는 유대인답게 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고 책망했습니다.

15 우리는 날 때부터 유대인이지 소위 말하는 `이방 죄인’이 아닙니다.

16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사람은 없습니다.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고 하다가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 판명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18 내가 이미 헐어 버렸던 율법의 체계를 다시 세운다면 나는 율법을 범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19 나는 율법에 관한 한 율법 그 자체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 살기 위해서입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지금 나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21 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귀중합니다. 만일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설명과 요약

2장 5절, 순종, 새벽설교를 위한 더 깊은 말씀묵상

이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빼앗으려고 하는 거짓 신자들을 따르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혹시 나중에 거짓으로 판명된 가르침을 따른 적은 없었습니까? 어떤 영성 훈련이 잘못된 가르침을 피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2장 7절,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이 독특하게 ‘각자에게 맡겨진’ 복음 사역을 감당하고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가 ‘다름’으로 인해 분열하지 않고 연합하게 됩니다.

2장 10절,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우리는 변화됨으로써 자유로우며, 특별한 사역으로 인도하시는 성령께 순종하는 것에도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주변에 있는 연약한 사람들을 외면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심을 나타 내는 확실한 척도가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은 근검, 기부, 봉사, 영성 개발을 위한 기본 활동들을 실천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2장 11절-14절, 친구에게 올바른 것을 말해주기, 새벽설교를 위한 더 깊은 묵상

우리 모두는 친구가 필요하고 또 친구들이 있습니다. 비록 친구가 때로 옳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 친구와 함께 잘 지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 만일 친구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 그냥 모르는 체하고 넘어가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잘못을 말해 주는 것이 더 나은 일인가요?

갈라디아서 2장 11-14절 부분을 읽어 보십시오. 바울은 친구 게바(베드로)의 잘못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충고였습니다. 만약 우리도 바울의 본보기를 따른다면, 우리의 친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사랑의 충고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참된 친구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2장 14절,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 아니함을 보고

‘복음의 진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복음의 진리’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영성에 있어서 ‘명민함’ (discernment)이라고 합니다.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되지만 비복음적인 말이나 행동은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이 명민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2장 16절,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복음적인 자유의 삶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고 또 무엇을 하고 계신지 의지하는 믿음에서 생겨나고, 또 유지됩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세 번 ‘율법의 행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는 믿음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는 행위,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업적, 형식주의 그리고 율법주의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자유하게 되며 완전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2장 16절,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새벽설교를 위한 더 깊은 묵상

마르틴 루터는 수도원 생활 7년 동안 남보다 더 기도하고 더 금식하고 더 철저히 규칙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기쁨과 감사는 없고, 죄책감만 더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루터는 로마서를 비롯한 바울의 여러 서신을 통하여 바울의 신학을 연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1510년, 로마에 간 루터는 성 베드로 사원의 ‘거룩한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온맘으로 고행을 수행하던 그 때, 루터의 뇌리를 파고드는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

그 때 루터는 일어나 더 이상 고행의 삶을 통해 의롭게 되기를 포기하고, ‘오직 믿음으로’라는 기치 하에 힘차게 종교 개혁의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2장 19절-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구절을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함께 십자가를 지다'(cocrucified)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에 대해 놀랍도록 대담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과 같은 시간에 십자가에 매달린 두 강도에게 사용한 말입니다(마 27:44; 막 15:32; 요 19:32).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완전하고도 즉각적인 연합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옛 삶은 끝나고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이러한 내적 실재(reality)는 시간이 지나면서 외적 증거, 곧 성령의 열매들로 나타날 것입니다.

갈라디아 민족

갈라디아 민족은 주전 3세기에 중부 유럽에서 소아시아로 이주한 켈트족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 시대에는 갈라디아라는 로마 속주가 있었는데, 원래의 민족 지역보다 더 넓은 지역이었습니다. 인종적으로는 갈라디아 인들이 아닌 남쪽의 영토도 행정적으로는 갈라디아 지역에 포함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갈라디아라는 말이 인종적으로 갈라디아인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지방을 가리키는가는 갈라디아서의 수신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려 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세기까지의 일반적인 견해는 바울이 “북갈라디아” 즉 이 지방의 북부에 위치한 갈라디아 민족에게 보낸 편지가 갈라디아서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남갈라디아” 이론이 더 널리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바울이 이 지역의 남부 지역에 있는 교회들, 즉 첫 선교 여행에서 세운 교회들에 편지를 썼다는 것이고 나중에 이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십사 년 후에(2:1) : 바울의 1차 예루실럼 방문 후 14년이 지난 때를 가리킵니다.

유력한 이들(2:6) :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을 위시한 예루살렘 교회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의롭다 함(2:16) : 법정용어로, ‘의롭다고 선포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2:17) :‘아담 안에서’라는 표현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이루어 구원과 영생 가운데 있는 상태를 지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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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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