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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Pdf | 에베소서 개요 Ephesians 102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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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을 통해 에베소서의 문학적 구조와 내용의 흐름을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복음이 어떻게 예수님과 서로에 대한 헌신으로 하나 된 다민족 공동체들을 만들어 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BibleProject #바이블프로젝트 #성경 #에베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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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제작:
한국어 현지화팀 
Grace and Mercy Foundation Korea
Seoul, South Korea
영어 원본 콘텐츠 제작
BibleProject
Portland, Oregon,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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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Pdf | 에베소서 강해(03)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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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ppa.covadoc.vn

Date Published: 1/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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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강해 – 인터넷 신학강의

주 예수 그리스도(마 5:18; 요 10:35)와 사도 바울(갈 3:6; 딤후 3:16). 의 증거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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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ldfaith.com

Date Published: 11/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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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에베소서 강해 1(마틴로이드존스-1-2장) – Daum 블로그

에베소서 강해 1 마틴 로이드존스 성경: 엡1:1상반절 1장 1절(上)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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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8/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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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1 | PDF – Scribd

Download as PDF, TXT or read online from Scribd … 김성수 목사 에베소서 강해 목차 … 에베소서 강해가 끝나면 요한복음 강해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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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cribd.com

Date Published: 9/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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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에베소서,빌립보서 – Sermon-Online

의 에베소서 강해서인 하늘에 속한. 이 그것이었다. 대 시절 어느 해 여름에 그 책을 숙독 … 다 주석은 단지 최선의그리고 가장 어려운 형태의 성경강해하나님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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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ir.sermon-online.com

Date Published: 10/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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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에베소서 강해. 김윤규 목사. I. 기록 연대: 사도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서 골로새서를 기록한 (A.D 61/62 년 경) 후에. 골로새서의 수신자들과 비슷한 환경(혼합 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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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wgchurch.ca

Date Published: 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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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 옛신앙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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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ldfaith.net

Date Published: 4/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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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에 들어가며 – 한길교회

에베소서는 기독교의 복된 소식과 그 의미를 놀라울 만큼 간결하면서도 포괄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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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urchtheway.com

Date Published: 6/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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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 창원성산교회

에베소서 강해(28) 하나님 앞에서(1) (엡5:1~2). 1. 기억해 볼까요? – 지난 주 결단한 내용에 대해 나눠봅시다! 2. 말씀요약 :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의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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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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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1권 -마틴 로이드 존스- 강대식 목사 – 네이버 블로그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사도 바울은 언제나 이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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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8/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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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개요 Ephes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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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에베소서 강해 pdf

  • Author: 바이블프로젝트 BibleProject –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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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2. 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1Cvb3mjw7WQ

에베소서 강해 Pdf | 에베소서 강해(03)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 송태근 목사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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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1

마틴 로이드존스

성경: 엡1:1상반절

1장 1절(上)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어떤 사람들은 이 서신을 “바울 신학의 면류관이요 절정이다”라고 묘사합니다.

이 서신의 장엄한 주제는 시작하는 첫 절에서 대번에 암시가 되어 있듯이 주제의 가장 우선으로 하나님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서신을 시작합니다. 우리도 어떠한 일에 직면했을 때에, 모두 이런 식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요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도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이 당하는 주된 고통의 원인은 우리가 너무나 주관적인데 있으며, 너무나 우리 자신들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며,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리 자신들에 대하여만 너무 과민하게 대하는 탓에 비참해지고 곤고하게 되어 우리들은 많은 시간들을 “슬픔과 비참함 속에서” 허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게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고 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참 된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알도록 하려는데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하셨으며, 무엇을 하시는가를 맞부딪쳐 보게 함으로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대면시킵니다.

그리고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의 위대한 주제는 하나님입니다. 영원하시고 영존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스스로 만족하신 하나님, 또 영원부터 영원까지 어떠한 도움도 필요 없으신 하나님, 마지막으로 항상 자신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영광 중에 살아계셔서 거하시는 하나님이 이 서신의 위대한 주제입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나, 모든 일에 있어서 언제나 우리 자신들을 시험하고 우리의 필요들을 먼저 시험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그것 보다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즉 하나님의 관점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 서신을 대하고 있는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 붙들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말씀을 듣는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에 “ 네가 선 땅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고 하신 소리를 듣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깊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서신을 대해야 하는데 먼저 살펴볼 것은 바울이 자신을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 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의도 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생각에는 언제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상상 할 수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도 없고 복음도 없다는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복음은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행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주권적인 뜻 안에서, 그의 무한하신 은혜로 말미암아서, 그의 긍휼의 풍성함을 따라서 그의 뜻의 비밀을 따라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 모든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십니다 .” 그리고 우리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택하심을 받았는데, 그 계획하심에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아 하나님께 대하여 화평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서신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길을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두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절대적으로 기독교의 진수가 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하여 그 교회 안에서 가장 명확하게 밝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나라를 함께 모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른 사람들, 다른 민족들, 외모도 다르고 심리나 다른 모든 생각할 수 있는 방면에서 다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가 새롭게 이해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온 세상이 예수님을 배척하며 주님을 “갈릴리 사람” “목수”라는 말로 격하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세상의 구주시오, 왕 중의 왕이시오, 만유의 주시오, “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의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려 지는 ” 분이십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그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 은혜의 풍성함 ”을 베풀어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 ”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성경: 엡1:1하반절

1장 1절 (하)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 ”이라고 합니다.

우리더러 성도들이라고 하는데, 성도라는 말의 의미는 구별함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구별함을 받았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분리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예로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어 느 의미에서 그들은 다른 많은 민족들 가운데 한 민족이었지만 그런데도 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독특한 민족이 되었는데, 그들은 “ 하나님의 백성들 ”이었고, “ 선택된 세대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 ”이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는 구별된 백성으로 세상 안에 살고 있으나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 소유된 사람, 즉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일차적 으로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서 하나님께로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로 성도들은 정결함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가기 위해서는 죄로부터 정결해 져야 하는데, 성도의 마음과 의지와 그의 행동과 그 밖의 모든 것을 더럽히는 것으로부터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정결함을 얻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성도라는 말의 의미는 “ 정결함을 입어서 주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 ”인 것입니다.

에베소는 큰 도시로서 풍요와 우상 숭배가 만연한 곳이었습니다. 우상숭배를 자랑하고 그뿐 아니라 요술과 마술과 같은 일들이 자행되었던 절망적인 도시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를 통행할 때에 그 도시가 이교도들로 꽉 차고 거만과 교만으로 가득한 것을 알게 되었으며, 많은 이단들과 하나님을 반대하는 모든 것이 가득한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그러한 토양에서 자라날 것이라는 소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런 도시였지만 성령님에 의해 바울이 쓰임 받게 되어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고 성도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이렇듯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들어서 성도로 바꾸어 주는 강력한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말했던 “ 신실한 자들 ”이라는 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서 “ 신실한 ”이란 말이 어떻게 사용 되었는지를 다른 성경을 통해서 살펴 볼 때,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게 된 도마가 그 말을 믿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 다시 사도들 앞에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그런 다음 주님은 다시 도마에게 “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20:27)고 하셨을 때 사용 된 “ 믿는 ”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 신실한 ”이란 말은 “ 믿음을 행하는 ” 이라는 말로 번역해서 “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믿음을 행하는 자들 ”이라고 읽는 것이 본문에 더 충실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근본적이고 우선적인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확실한 믿음을 떠나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멋지거나 선한 사람, 또는 도덕적인 교양과 이상주의자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특별한 진리를 믿는 사람들인데, 그것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 그분의 사역을 충만하게 믿는 것입니다. 이제 “ 신실한 성도들 ”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다는 것을 충만하게 믿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은 것을 확고하게 믿었으며, 성령에 관하여도 믿었으며, 성령께서 오순절 날에 보내심을 받아 오셨고, “ 아버지의 약속 ”이 이루어진 것을 믿습니다. 이러한 일들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들을 “ 신실한 사람들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 신실한 ”이라는 말의 또 하나의 의미는 우리가 믿음을 지킨다는 의미로서 우리가 믿음을 붙잡고 있으며, 믿음의 일관성을 지키고 있어서, 그 믿음에 충성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믿을 만한 사람이며, 그 복음을 믿고 신뢰하고 있으니 우리 또한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믿어줄 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들은 아무리 핍박이 심하다고 해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이사는 주”라고 하기를 거절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위협 앞에서도 “ 예수는 주 ” 라는 말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며, 이상하고 괴이한 사람들이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러한 일이 있을 지라도 신실해야 합니다. 재정적으로나 희생의 대가로 어떤 것을 치러 손실을 본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신실함을 지켜야하며, 믿을 만하고 의뢰할 만해야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바로 믿음을 행하는 신실한 성도입니다. 성도는 어디에 있거나 신실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이웃이나 친구들, 직장의 동료, 사업상의 동업자, 모든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주님과 어딘지 모르게 닮은 점이 있는 성도다운 품격이 드러나야 합니다. 성도와 신실하게 된다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거룩함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사이의 관계를 늘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거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거룩한 자, 즉 성도라 불리는 사람들을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성도가 없고, 성도가 아니고서 거룩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 엡1:2절

1장 2절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 을 지어다.

“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는 말은 고대 사람들이 만날 때에 하는 인사법으로서 유대인들은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에 매우 예의바른 인사는 “평안하십니까, 당신에게 평강이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렇게 친숙한 말을 취하여 복음을 친숙하게 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인사는 세상 사람들이 만나서 하는 다소 형식적인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하고 넓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편지를 시작할 때에 자동적으로 사용하는 단순한 인사의 형식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복음 안에서 모든 한없는 풍성함을 온전히 체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사실 “ 은혜 ”와 “ 평강 ”이라는 말보다 우리 믿음 전체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없는데도 우리는 이 말들을 얼마나 가볍게 내뱉어 버리는 습관이 있는지 모릅니다. “ 은혜 ”는 우리 믿음의 시작이고 “ 평강 ”은 우리 믿음의 마지막이 됩니다. “ 은혜 ”는 샘이요, 원천이요, 근원이 되는데, 그것은 바다로 굽이쳐 흘러가는 도도한 강물도 어떤 특별한 산 중에 있는 작은 근원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근원이 없이는 어떠한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 은혜 ”는 성도의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의 원천이요, 샘이요, 근원입니다. 그러나 “ 평강 ”은 성도의 삶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는 자신이 받을 만한 공로나 자격이 전혀 없는데도 주어지는 호의라고 할 수 있으며, 모든 언어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말들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은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평강이라는 말은 단순히 불협화음이나 난폭함이나 싸움이 없는 전쟁이 그치는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물론 그러한 것들이 모두 포함된 상태에서의 “온전한 안식과 평온의 상태”를 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은혜와 평강을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사람은 죄와 타락의 결과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되어 평강을 잃어버리고 본질상 이 세상에 태어나던 때부터 하나님을 미워하였습니다. 인간은 죄 안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지음을 받을 때에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때에만 자기 속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도록 지음 받았으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연인으로서는 진정한 평강을 알 수가 없고 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죄와 타락의 상태에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 은혜 ”로서 찾아와 값없이 베풀어 주십니다. 이제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평강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가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은 “ 우리의 아버지 ”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전체 관계는 죄와 결부시킬 때에 원수 되었던 자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전적으로 새로워지고 전적으로 변하게 되어, 우리를 새롭게 만드신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거기에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라는 말씀이 기독교와 다른 것과 구별되게 하는 새로운 요소가 작용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 요소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작용합니다. 그러니 은혜와 평강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난 기독교가 있을 수 없듯,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 또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영광의 보좌에서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에 “ 죄 있는 육신의 모양 ”을 입었지만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으셨으며, 그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형벌을 담당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 대하여 화평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시고 그런 다음에 우리에게 그의 성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단순히 죄 사함만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셔서 “ 하나님의 자녀들 ”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도록 하셨던 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도록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하여, 그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2절에서 하는 말은 그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평강을 누리라는 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나누는 인사말로 바뀌기를 바랍니다.

성경: 엡1:3절(1)

1장 3절 (1)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며, 신실한 자들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은혜와 평강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은혜로 제공된 이 복락들이 무엇인가를 인식하며 깨달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유업에 들어감으로 인하여 마땅한 대로 그의 삶을 누리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인데, 물론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거리는 이것을 이해하는 지식의 부족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성경을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교리들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삶에 있어서 많은 실패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이 부족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는 주요한 고통거리입니다. 호세아(4:6)는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어째서 자신들이 그러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런 일들을 알기만 하였더라면 다른 나라같이 되기를 추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속 받은 것에 관한 진리를 깨닫게 되면 언제나 찬송하게끔 됩니다. 진리를 깨달은 자들이 하는 첫 번째 일은 언제나 찬양과 감사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전에는 전혀 알지 못하였던 행복함과 기쁨과 화평을 느끼는 감격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은혜와 평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진실로 인식한다면, 우리는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삶에서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처럼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신약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진정한 기쁨과 찬양, 그리고 감사가 성도의 삶에서 가장 귀한 일이라는 것을 누구나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참 기쁨과 평강을 주신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다른 불신자들과는 전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성도들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사는 삶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며, 그러한 관계는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이러한 기쁨을 얻게 할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특징은 “ 찬양 ”이어야 하며, “ 감사 ”하는 삶입니다. 찬양과 감사와 만족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인을 돋보이게 하고 그가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배와 기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배하고 찬양하며 감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 대하여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기도할 때에 찬미하는 것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서만 “ 예배와 찬미 ”로 나갈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디에서나 늘 “ 찬송하리로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라고 부르며 모든 찬미와 복락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은혜 안에서 자라나는 최고의 정점인 장성한 분량의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바, 진실로 그 뜻에 합당하게 사는 길은 “ 감격적으로 사랑과 찬양에 빠져 들어갈 때 ”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배의 일차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축복을 받기 위한다든지 여러 가지 것들을 구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미해 드리기 위하여 예배당에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궁핍함과 어려운 문제의 것들을 하나님께 구해야 하지만, 그것은 예배 이외의 시간에 해야 할 일들입니다.(예: 9시 기도회) 우리는 언제나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가 예배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첫 번째 원리로서 구원의 본질을 참으로 인식하게 된 성도는 찬양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두 번째 원리로 나가게 되면,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한 가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복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복되심을 인하여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 때문에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 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셨으니 하나님 역시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신 방식 때문에 찬양을 받으시고, 그의 위대한 구원에 대한 계획과 그 이루신 방식에 대해서 우리가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가 말하고 있는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 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사도는 두려우신 하나님으로 인식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자하심과 같은 성품의 인자하신 하나님으로 묘사하고자 의도적으로 이런 문구를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찬성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으로 묘사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라고 말씀하시기를 즐거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라는 말을 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온 모든 복락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온 것임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과 창세전에 복되신 삼위 간에 이루어진 모종의 언약의 일부로서 우리에게 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표현 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타락과 인간의 죄악을 미리 아시고 그것에 대하여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아들에게 주시고, 그 아들은 자발적으로 그들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하나님께 청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그들과 화해하고 회복하여 새 생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세상이 있기 전에 우리가 처할 위치에 대해 아시고 그 자신의 아들과 언약을 맺어 이 합의를 맺으셔서 하나의 서약을 하신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어, 그는 우리의 대표자요, 중보자요 보증자가 되신 것입니다. 모든 복락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을 때,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복 되신 삼위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시고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생각하셔서 그 결과로 용서와 구속함을 받을 길을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일을 인식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예배하는 일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언약에 들어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라고 찬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 엡1:3절(2)

1장 3절 (2)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우리는 언제나 사도바울이 한 것처럼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로부터 시작하고,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언약으로 나아가 실질적인 복락을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위한 일에만 관심이 많아서, 우리가 누릴 복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일에나 다른 어떤 방면에 있어서든지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일을 저돌적으로 성급하게 하지 않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가를 먼저 생각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대통령을 만나기 위하여 예절을 지키는 일을 기피한다면 그 사람을 무례한 자라고 할 것이 분명한 것처럼,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무례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대통령에게도 그러할 진데 하나님께는 더욱 예의를 갖추고 나가야 할 것이며, 그분의 영광됨을 찬양하고, 또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하여 칭송과 영광을 돌리는 일을 잊지 말고 제일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 하나님께서 “나” 라는 개인에게 복을 얻게 하기 위하여 어떤 일들을 하셨는가를 조목조목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이제껏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나서 자기의 또 다른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간청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축복을 더욱더 누리게 될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에게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성급하게 자신의 문제로부터 시작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에게서도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나온 사람이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보다 먼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소연을 합니다.

물론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자신이 처해 있는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예배를 드리기 전에 개인적인 시간을 내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자세는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와서 무슨 빚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이것저것들을 해결해 달라고 혹은 이런 저런 복을 달라고 다짜고짜 졸라대기 시작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예배드리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대접을 받기 위해서 혹은 하나님께 용무가 있어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나간 사람, 어떻게 보면 그는 마치 채무자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예배는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서, 어떠한 것을 받기 위해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구원해 주신 은혜와 이제껏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그분의 업적을 찬양하며 경배하러 나가는 축제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울며 회개함으로 나가는 것은 잔치 상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개인적인 시간을 내서 기도할 때에 해야 할 것이고, 예배드리는 시간에 까지 끌고 들어오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누릴 하나님의 축복의 경로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은 축복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 원천을 접함에 있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축복이 실제로 어떤 방식과 어떤 길로 우리에게 오는지를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복락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게 되는데 그를 떠나서는 우리는 결코 어떤 복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류 전체가 누리고 있는 일반적이며 공통적인 복락들은 하나님의 “ 일반 은혜 ”에 의해서 선인에게나 악인에게 고루 내려집니다.(마5:45)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 누리는 복락도 하나님께로부터 오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방식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특별한 은혜는 아무나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은혜의 복락과 특권들이 주어지는데, 우리는 이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복락은 세상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일반적인 복과는 달라서 온전한 만족을 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세상 천지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욕심은 우주를 담고도 모자라 더 채우고, 또 채워도 그 마음의 욕심을 채울 수가 없어서 갈급해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채워진 성도의 마음은 항상 만족하며,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라도 가득 채워진 충만함 가운데서 살아가게 됩니다. 결코 많이 가졌거나 적게 가진 것에 대한 차이가 없으며 주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이 지금 처해 있는 상태가 너무나 비참하다고 할지라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비참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언제 어디서나 머리가 되고, 위에 있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또 하나님의 그 성품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기 때문에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하나님께로 향한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될 어떠한 행위들 말고는 염려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의 관심도 그러한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복락들과 특권들을 인식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복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위해 다른 어떤 이름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으니(행4:12) 그리스도는 모든 복락의 유일무이한 중보자이며, 복락의 독점적인 통로가 되시니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 복락을 받아 누릴 수가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곧 바로 나아가려고 하지만 그리스도로 인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조차 없고 기도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 이제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하여 몸의 각 지체로 존재하며, 그리스도께 대하여도 신비로운 관계를 누리게 되었으며, 그 생명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이제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 동참한 사람들이니 성도들이 누리는 모든 복락과 성취하고 체험하는 모든 좋은 것들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락이 오는 것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니 그 복락들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적용시키는 특별한 일도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의도와 역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그는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것,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능하도록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하여 받을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아도 되는 분이었지만, 살아계실 동안 우리의 본이 되어 성령을 받아서 사역을 감당 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삶을 충만케 하셔서 복음서들에 묘사된 대로의 삶을 살아가도록 가능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를 닮은 삶을 살아 갈수가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도하여 그 생명으로 충만케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누리는 모든 복락들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복락들은 우리가 중생할 때에 주어지는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을 받을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하여 준비시켜서 우리가 받게 될 일차적인 축복들로 주어지는 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여행을 하고 있는 “ 나그네요, 행인 ”으로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 세상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솜씨의 표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즐기고, 그 모든 아름다움을 누리며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임에 틀림없는 사실일 지라도 타락된 세상이라서 우리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의 사고방식과 이세상의 정신과 이 세상의 정신구조를 좇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 공중 권세를 잡은 자 ”에 의해 조종되고 있으니, 그들의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제 성도는 이 세상을 아버지의 세상, 영광과 놀라움에 가득한 하나님의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타락한 이 세상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많은 복락들을 누리며 살지만, 그것은 잠시 일 뿐 참된 복락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늘에 속한 것들이라는 것을 압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복들 보다 더 큰 것은 하늘에 있는 신령한 복입니다. 이 복은 “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 ”으로 주어지며, 하늘에 간직되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벧전1:4~6)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니 이러한 것들을 누리고 처음 열매에 속한 것을 맛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누리고 있다면, 점점 더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에 영광의 존전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면전에 서서 그를 영원히 보는 영광스러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죄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 엡1:3절(3)

1장 3절 (3)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그리스도인들은 “ 하늘에 속한 ”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을 알게 된다면, 우리들의 전체적인 사고방식을 전폭적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나서 중생함을 인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하였으며, 그의 생명 안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그로부터 오는 모든 복락들을 함께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유기적인 연합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 매여 있는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하늘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이렇게 신분이 변화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도덕적이거나 상당히 존경할 만한 것을 갖추게 된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일시적이거나 피상적인 개선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역에서 하늘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살리시고, 이끌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하여 주셨듯이, 우리가 중생할 때에 이러한 것에 상응하는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났다는 것이 사도 바울이 주장하는 요지입니다.

엡 1:18~21 “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에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 바로 그러한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한 능력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붙잡는 것이 극히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고 불가능할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도는 그러한 것들을 꼭 붙잡으라고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기 위해 기도하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전혀 이해할 수조차 없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사실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 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전서 2장 에서 진술하는 “ 육신에 속한 사람 ”과 “ 영에 속한 사람 ” 사이의 차이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두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 선조들에게서 받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을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가지고 있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는 그 본성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살고 있고 다른 사람과 같은 삶을 똑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일이나 사회적인 조건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예술을 연구하고 음악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세속에 속한 삶을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러 국면에서 실패를 하고, 죄를 지으며 살고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육신적인 사람과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가 않은 또 다른 본성이 있는 그는 신령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위대한 일은 그에게 다른 첨가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은 비 그리스도인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그들은 다른 영역과 질서에 속하여 있는 새 생명의 양심 때문에 지은 죄에 대한 것조차 다른 무엇이 있는데, 그리스도인은 그것에 대하여 성령을 통하여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성도들 영혼 안에서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새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단지 한 생명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옛 사람에 불과하며,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 새 사람 ” 을 더 가지고 있게 되었는데, 이 “ 새 사람 ” 은 “ 옛 사람 ” 과 서로 합하지 못하여 둘 사이에는 항상 긴장과 갈등이 있습니다.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갈5:17) 그리스도인은 “ 그리스도 안 ” 에 있고, 그리스도께서는 “ 하늘에 속한 분 ” 이기 때문에 성도는 이 두 성질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그 새로운 생명을 받아 그것을 인식하고, 또 내 안에 이전부터 선조로부터 물려받아 가지고 있던 너무나도 다른 또 하나의 성품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에게 두 가지 성품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 어둠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 ” 로 옮겨져(골1:13)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속하여 있는 국가의 시민임과 동시에 천국의 시민으로 두 가지 국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 살고 있지만 천국 시민으로서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성도는 천국 시민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신분에 걸 맞는 품격으로 행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전의 모습 그대로 산다면 참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삶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엡1:4절

1장 4절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 구절의 “ 곧 ”이라는 말은 앞에 있는 구절과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여기서 “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이 우리에게 어떤 방식을 통하여 오게 되는 가를 설명해 주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죄와 실패를 거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을 누릴 수 있도록 보배로운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복락을 성도들이 누릴 수가 있게 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 즉 그의 삶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로 인하여 그러한 일들이 가능하게 되었고, 그 가능하게 된 사실을 성도들이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누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절대로 우리의 믿음이 앞에 서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반드시 앞에 세워야 하고 그것을 믿는 믿음이 그 다음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것마저도 처음에 놓지 않고 영원으로 돌아가서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에 의하여 행해진 일이라는 것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니 우리는 언제나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까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시작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니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그 택하심의 섭리에 따라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서 믿음을 가지게 된 성도들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해야 합니다. 성경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신 일에 대한 계시된 기록으로서, 죄에 빠진 인간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목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통일성 있게 선언합니다. 성경의 주도적인 주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 하나님께서 하시기 시작하신 일, 하나님께서 실제로 하신 일,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시는 일, 이 모든 것의 놀라운 결과들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제시하는 “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라는 말씀은 우리가 죄와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어 멀리 있었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됨됨이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 그 기쁘신 뜻 ”에 의하여 창세전에 선택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이제 우리가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성경을 하나하나 우리와 대면시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논쟁하는 정신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고, 항상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며, 예배하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하며, 성경의 기록된 문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항상 인식하면서 접근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은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것은 “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 ”이 이런 진리를 받을 조건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나를 보시고, 아시고 ,나를 선택하시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 나를 그리스도께 주심으로서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날 까지 이루실 것 ”(빌1:6)에 대하여 감사드릴 것은 우리의 구원 문제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인데, 만일 사람에게 맡겨졌다면 절대로 구원을 완수 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여기서 살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우리에게 전체 복음에 대한 개관 중 하나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의 죄와 타락의 모든 결과들과 효과들을 제거시켜 도말하시고 그것을 완전히 교정시키시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마귀의 공작으로 인해 발생한 인간의 죄와 타락의 결과로 주어지게 될 그 무섭고 가장 비참한 사건의 모든 효과와 결과들을 완전히 바로잡는 것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마귀의 일은 무산되고 멸해 질것이며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이 백성들은 가장 비극적인 “ 타락 ”의 결과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선택하신 목적은 우리가 “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 ”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에는 세 가지 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1. 거룩하고 흠이 없이

이 말은 성도의 성화를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 거룩 ”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 거룩 ”이라는 말은 열매가 반점도 없고 얼룩진 것이나 속이 썩은 부분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묘사하는 온전한 성결함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교회의 지체들이 가지고 있는 기능들을 다 온전하게 발휘하여 결함이 없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합력하여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2. 하나님 앞에서

그런데 “ 거룩하고 흠이 없이 ”라는 말 앞에는 “ 그 앞에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실제적으로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선택함을 받은 목적입니다.

이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도록 하려 하는 것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고, 그 가운데서 행하고, 거하도록 하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3. 사랑 안에서

“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롬13:10)는 말씀과 같이 거룩은 사랑의 차원에서만 바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은 거룩에 대한 정의가 됩니다. 그리고 사랑의 반대는 미워하는 것이며 다투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적대감을 갖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인의 몸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는 언제나 심판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거룩이나 사랑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입니다. “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롬8:7)라는 말씀처럼 사람들은 타락할 떼에 이미 하나님을 미워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의 결과로 인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원수로 아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구원의 결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 사랑 안에서 ” 나타난다고 하는데 우리가 우리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있게 되었다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로 주어집니다.

그런 일이 우리에게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있었던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 즉 타락으로 인하여 심판을 받아야 마땅할 죄인이었던 우리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과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그 모든 것들이 다 제거 되어 이제 거룩한 사람으로 신분의 변화를 일으키는 위대한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실에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 사랑 안에서 ”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 사랑 안에서 ”라는 말은 우리들 자신을 묘사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도들 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일 것이고,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거룩은 율법을 지키는 어떤 기계적이거나 도덕적인 거룩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사랑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성도는 거룩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는 사람입니다. 그는 “ 사랑 안에서 거룩하기 ” 때문입니다.

그는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이며, “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의무감에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므로 자발적으로 순종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 사랑 안에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 한다는 말은 우리의 행복과 다른 어떤 일을 막론하고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 그리스도 안에 ”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인데,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죄의 용서함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게 되면 우리는 반드시 거룩하여지게 됩니다. 구원이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이라는 차원에서 생각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구원에 있는 모든 문제는 결국 우리를 거룩이라는 목적으로 인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위하여 선택받았기 때문에 거룩해야 하는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거룩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닮아서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 보배로운 진리, 이 위대한 진리를 알게 된 우리는 이 영예로운 신분을 지키기 위하여 더욱 거룩을 위하여 즐거움으로 보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엡1:5-6절

1장 5~6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4~6절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누리는 이 위대한 구속의 일을 하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역할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성자께서 행하시는 역할에 대하여 계속하여 보여 줄 것이며, 또한 뒤이어서 성령께서 행하시는 역할들도 우리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대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받아들여 주시는 것과 그것의 결과로 인하여 우리에게 오는 모든 특권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지점에서 위대한 주제의 원리들을 만나게 될 것인데, 그 원리들은 우리의 삶에 손해를 가져다 줄 수도 있고,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에는 원수들과 우리를 향하여 대적하는 사람들로 에워싸이게 되는 것을 느낄 수도 있으며, 어려움이나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살펴 볼 것은 “ 우리를 예정하사 자기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러한 진술들을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 그 안에서 ”, “ 그로 말미암아서 ”, “ 그를 인하여 ”, “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라는 말을 계속하여 하는 것은 강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데 너무 열심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는 없으며, 모든 사람들이 다 구속 받을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렇지 않은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 것은 아벨과 가인으로부터 두 부류로 나뉘어서 노아의 시대에도 방주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확연하게 나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자신의 백성을 삼으실 때에도 다른 나라들을 자신의 백성이나 아들로서 표명하신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가르침도 하나님의 친 백성과 하나님께 버림받아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주장하는 만인 구원설은 분명히 잘못된 이론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것은 “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만 ” 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권세를 소유하신 분으로서 만일 그가 하늘에서 땅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 중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행하신 모든 것의 결과로 인하여 가능해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의 한 아들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인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되는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나와의 연합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로 즐거워하고 있는 한에서 우리의 아들 됨과 그리스도의 아들 됨 사이를 명확히 구분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방식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식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안에서 한 위격으로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내적 성품으로서 존재하는 아들이시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자로서 받아들여져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들 됨의 자격을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것이니 우리는 신적인 존재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적인 성품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인간들이고 그리스도께서는 “ 영원한 본체 ”시며 “ 하나님 자체 ”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형제로 부를 수는 있지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시기는 하였지만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내적 성품으로서 존재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성도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특이한 방식으로 그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 가운데서 이루어진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말로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녀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들은 지상에서도 특권을 누리고, 하늘에서도 같은 특권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같은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은 단순히 타락이나 죄의 영향을 없애버리는 것으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속의 일차적인 면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의하여 죄와 타락의 영향들을 없애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에게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이상의 것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바울이 “ 그리스도 안에서 ”와 “ 아담 안에서 ”라는 말을 사용하는 로마서 5장에 있는 논증을 비교하여 봄으로 밝혀집니다. 우리는 본질상 아담의 후손이며, 아담은 무죄한 상태에서 완전하게 창조되어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만물의 영장이었지만 여전히 피조물로서, 그가 아무리 높아지고 아무리 완전하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 이상을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담은 온전하였고, 무죄하였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았지만 땅에서 나서 흙에 속한 사람으로(고전15:47) “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 ”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지위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 ”로서 특권을 받아 아담이 누리지 못하였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도록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 그리스도 안에 ”있어 우리는 아담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오른 것입니다. 아담은 완전하였지만 타락하고 실패하고 말았지만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은 결단코 타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타락하여 버림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10:28~29) 이렇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을 인하여 타락의 비극적인 결과들을 다 없게 하신 결과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은 우리의 죄를 도말하신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위까지도 더 높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이 잃어버렸던 복락들이 우리에게 회복되어 되돌려졌을 뿐 아니라 우리는 그보다 더한 것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아무리 심각하고 무서운 죄를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요, 하나님의 양자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고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되어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졌던 지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누리게 된 이 새로운 관계에서 아담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모든 특권들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성경: 엡1:5절

1장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는 앞에서 구원의 목적이 마귀의 일을 멸하고, 우리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조건으로 회복시키고,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과 누렸던 교제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5절에서는 우리를 보다 더 영광스러운 지점으로 인도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로 예정되었다는 엄청나게 영광스러운 진술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어떤 높은 승강기를 타고 오르는 것과 비교할 수도 있는데, 우리가 최고의 영광스러운 관점을 가지고 일종의 플랫폼에 도달한 것처럼 말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떨어져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지옥의 형벌 밖에는 받을 것이 없었던 위치에 있던 자들 가운데에서 얼마를 하나님 자신의 아들들이 되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하나님의 목적하심이었다는 말로 바꾸어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 타락한 인류 중에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서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이요 목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운명을 받아 누리게 될 사람들을 택하시고 선별하시어 그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있어야 할 조치들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시는 구속의 사역일 것인데, 죄인 된 인간을 그저 용서하시고 하늘나라에 옮겨 놓으시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조건으로 만들어 놓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는 절대로 거룩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덧입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 그리스도 안에서 ”만 거룩함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선택받은 성도들만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영광스러운 위치로 신분의 승격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에 속한 사람이라면, 이렇듯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목적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이 이 장면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는 말씀을 살펴보겠는데, 헬라어 원어를 문자 그대로 옮긴다면, “ 우리를 예정하사 자녀들로 받아들여지게 하셨으니 ”라는 식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로마법에서 빌려온 것으로 여겨지는데, 로마법에서는 양자가 되면 그 양자가 된 사람이 그를 받아들인 사람의 이름을 따고 그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양자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법적으로 절대적인 권리를 가지게 되는데, 양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그 아이에 대한 모든 권한과 특권을 가지게 되고,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성품과 혈통에 관계없이 아버지의 지위에 관한 특권들을 모두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자됨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아들이 되어서 새로운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은 양자로 받아들여짐에 의해서 성품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 의하여 결정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거듭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게 되어, 우리가 “ 신의 성품에 참여한 사람들 ”이 되고, 위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 양자 ”라는 용어가 전달하는 개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성품에 강조점을 두고 있지 않고 전적이고 법적으로, 우리가 서 있는 위치와 지위와 신분으로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양자라는 것은 하나님과 새롭게 관계를 가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아들로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양자로 받아들여져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에 속한 특권들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누리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격상된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삶은 너무도 초라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는 갈라디아서 4:1~5 의 진술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는 말씀에서 보듯이 진정한 자녀임에도 아직 성장하지 않아 아버지의 정한 때가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정한 때가 이르기 까지도 그의 성품과 혈통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가진 지위와 법적인 신분에 있어서는 달라진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 구속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런 특권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라는 것도 모릅니다. 세상의 것들은 온통 부패한 것뿐이라서 세상의 영광들도 썩어지는 영광일 뿐이며,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만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세상은 진정한 명예와 부요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도 관심이 없고 하늘에 속한 어떠한 것을 말한다 해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하나의 목수로밖에 보지 않았고, 그 안에 있는 영광을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그것을 알았는데 “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말한 요한처럼, 그리스도께서 비록 종의 형체를 입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비쳐 나오는 영광을 그들은 보았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변화산상에서 목격하였는데, 하나님의 양자로 받아들여지는 사람들의 영광도 그러한 영광과 유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그것은 참이 아닙니다. 실질적인 영광은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은 특권들 중에 참 영광이 있습니다.

그 영광은?

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이라는 것입니다.

② 우리는 하나님 아들 자신의 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하신 아들에게 있던 동일한 성령을 우리의 마음에도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③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최종적인 구속을 완성 받게 될 소망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날에 우리는 죄에서 자유를 받게 될 것이며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벧후3:13)

④ 성도가 세상을 판단 할 것이며 심지어 천사를 판단 할 것이라고 합니다.(고전 6:2~3)

우리는 천사들보다 더 높아 모든 하나님의 천사들을 판단하여 그들의 빛 됨과 순전함을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엡1:6절(1)

1장 6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모든 것을 행하여 주셨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바람이지만 인간의 요청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며 인간 속에 있는 어떤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반응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 자신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도는 계속하여 이 진리를 강조하고 있으며, 그는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어째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셨는지에 대한 이유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속의 뒤에 있는 위대한 동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생각 속에 있는 궁극적인 목적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 구원의 위대한 목적으로부터 나온 모든 복락들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입기 위하여 선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여지게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모든 영광을 찬미하게 되는데 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비춰 볼 때 우리 자신들을 어떻게 여겨야 하는가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어느 곳이든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세상에 오신 것에 대하여 다룰 때에는 언제나 찬양과 감사와 영광이 성경의 주제가 됩니다. 이 사건은 세상에 있었던 일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한 일에 대하여 우리의 반응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기는 합니까?

우리가 주말이나 어느 특별한 날에 야구나 축구 경기장에서 흥분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고 듣게 됩니다. 그리고 콘서트와 같은 집회장소에서 인기 있는 연예인에 대하여 열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과 같이, 사람들은 즐거운 일을 만나게 될 때에 그러한 일들에 대하여 열심 있는 반응으로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특별한 연예인들이나, 특정한 사람들에 관하여 반응하여 말하고 그것을 화제로 삼는 것에 열심인 것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할 때에 그런 반응들을 보이는지는 참으로 의문스럽습니다. 오늘날 교회 밖에 있는 대 다수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꺼려하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우리가 그러한 사람들에게 준 인상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일어난 이 놀라운 사건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일에 실패한데 원인이 있는데, 우리는 사실 그 놀라운 일에 주인공이 되시는 분에 대한 찬미를 보이지 않았고, 우리가 해야 하는 바를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높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어떤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다른 종교와 차이를 느끼지 못하여 그러한 자리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첫째 되고 가장 위대한 진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 다는 것으로 “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 ”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 말은 구약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존전을 나타낼 때 “ 여호와의 영광 ”으로 쓰였던 말임을 발견합니다.

이제 천군천사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보겠습니다.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 그러한 다음에야 “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합니다. 구원이 언급되는 순간에 가장 먼저 우선적으로 말하여 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생각하여야 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구원과 관련하여 생각 할 때에 “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 ”하고자 하는 그런 감정으로 넘쳐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고 그의 영광을 찬양하고자 하는 인식이 듭니까? 우리는 어떤 잘못된 행위를 한 것만을 가지고, 또 그 죄의 열매만을 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죄의 진면목은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하는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으니, 즉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일이라는 소요리 문답의 제 일문에서 말하는 대로입니다. 우리는 과학자의 관점을 가지고 하늘을 쳐다보며 별들을 생각하지만, 시편 기자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별들을 지으시고 그 별들을 질서로 지어 놓으신 분이시며, 모든 행성들이 운행하는 길을 정해 놓으신 분입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며,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시19:1) 하나님의 영광은 이렇게 자연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로 인하여 눈이 멀어서 이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 하나님의 영광 ”에 대하여는 역사를 통하여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깊은 안목을 가진 사람들은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계획과 야망, 그리고 자신이 이룬 업적에 대하여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계시며, 그 모든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노아의 홍수,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구원, 홍해가 갈라지는 것, 요단을 가르고 건너는 일, 그리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는 일들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크게 볼 수 있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속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가장 충만하게 보는 것도 구속 안에서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꿈을 계획하고 지상 낙원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지만 현대 세계가 증거하는 바와 같이 그 모든 노력은 실패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의 구원을 고안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사단의 능력과 사망의 권능을 정복하시고 이기심으로 우리가 누릴 복락을 방해하는 모든 다른 것들을 처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나타나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한 요구들을 만족시켜 드려야 했기 때문이며, 그 자격이 되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에서 “ 의롭다 하신 선언을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롬3:25~26)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영광을 보는 것은 그 은혜 가운데서입니다. 어느 의미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최종적으로 우리 안에서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내진다는데 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16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들리게 하라 .”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한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빼 놓고는 이 사람들에 관하여 설명할 방법이 없구나 .”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살고 행동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진리들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들을 보아야 하는데, 사도는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고, “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열납하셨다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누가복음 1:28에서 사용한 “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함께 하시 도다. ”라는 말씀은 본문의 뜻과 같이 사용 됩니다.

그러므로 “ 우리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사랑하시는 은총을 크게 베푸신 것을 아노라 ” 이것은 사도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미가 되는데, 그는 하늘의 천사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향하여 하였던 말과 같은 것을 우리에게 똑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크게 은총을 입은 사람아 ”란 말은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여자들 중에 선택하사 그의 아들을 나게 하시려 하셨다는 것, 즉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태에 들어가서 그녀에게서 나게 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우리에 관하여도 유사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들로 받아들여지기로 예정되었고, 이제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27에서는 “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육신적으로 마리아에게 들어가셨듯이 그는 영적으로 그의 자녀들인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들어오셔서 거하시게 되어 우리는 성령의 거하시는 전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 크게 은총을 받은 사람 ”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 리가 구원 받아 누리는 이 모든 특권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 엡1:6절(2)

1장6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이제 6절에 있는 “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라는 세 마디로 된 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사도는 우리가 복음을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의 차원에서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여짐 ”을 받은 결과로 우리가 누릴 특이한 특권들을 6절에서 상기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그냥 “ 그리스도 ”나 “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말을 하지 않고 “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그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영광스럽고 놀라운 일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 하늘에 있는 정사와 권세들 ”에게 그의 깊은 지혜를 결국 나타내 보이시려는 것을 우리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시려고 한다는 것은 잘 믿어지지는 않지만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말인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통하여 어떤 일을 하실 때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마3:17), 그리고 변화산상에서(마17:5), 또한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악한 농부의 비유(마21:37) 속에서도 이 말을 쓰시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하나이며, 본체에 있어서 분리 될 수 없으신 한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 사랑하시는 ”이라는 말은 영원한 하나님의 본체 중의 본체라는 것을 밝혀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아들로 받아들여져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결과로 인하여 “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면서 ” 살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이제 세상은 우리 안에 있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어떤 것을 세상이 우리로 말미암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나 “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 즉 그 아들의 인격 속에서 충만하고 충일하게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이시며, “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광채와 위엄의 충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밖으로 비취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영원 전부터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아버지께서 그 아들에게 주시는 사랑은 시작이 없습니다. 그 아들은 그 사랑하심을 받은 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 전체를 누리고 계셨던 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애정을 모두 쏟아 부음을 받은 유별나신 분으로서 그것을 완벽하게 표현할 만한 다른 어떠한 말도 없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 사랑하시는 자 ”라는 말로 표현하였는데, 그것만큼 더 훌륭한 표현은 없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가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 그렇듯이 우리의 구원은 사랑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안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보내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분량을 측량하는 것은 바로 이 말씀에 비춰 볼 때 비로소 알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무섭게 뒤 틀려 꼬인 사람들을 위하여 보내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저질렀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속을 이루기 위해서 보내신 분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요, 그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내려다보시는 분이시며,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셔서 보내신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찰하시고 주목하시고 계셨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면서 부모들이 체험할 수 있는 한 가지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한 부모로서 자녀를 생명이 위태로운 곳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는 그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 부모는 자신의 자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고, 그 아들에게 다가오는 시련과 폭풍을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애타는 심정으로 지켜보면서 그러한 상황에 있는 자기의 아들을 생각 하고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그것을 무한정하게 확대하여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 자기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개념화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치는 것을 보셨으며, 그를 비웃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 세상을 단 한 순간에 끝장 내 버릴 수 있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불가능한 것이 없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상이 자신의 아들, 자신의 사랑하시는 자가 당하는 모든 것들을 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그 분이 자신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버림을 받고, 그들의 멸시를 받고, 조롱을 당하고, 미워하심을 받고 채찍에 맞으시고, 결국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보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고뇌와 수치를 다 생각하여 낼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가 자신을 거역하는 죄인들이 그렇게 함부로 하는데도 불구하고 참으시는 것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멸시와 핍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랑의 가장 절정에 이른 독백은 어떤 인간도 이를 수 없는 주님의 체험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밑에 서면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를 버리고, 그를 따르며, “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고백했던 제자들까지도 그를 버려두고 다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그 분이 하나님의 “ 사랑하시는 자 ”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한 사랑의 빛을 받으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거하여 오셨던 그분이 그렇게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아버지와 얼굴과 미소까지도 볼 수 없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어떠한 것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거기서 물러서셨더라면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없었을 것이며, 기독교인이 될 수도 없었고, 우리는 거듭난 자녀들이 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 사랑하시는 자 ”가 그 괴로움과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으며,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분량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와의 관계를 다루어 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 사랑하는 자 ”라는 말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라는 것에 관하여 다루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입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더 높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사랑하심을 받는 것만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7:23에 있는 주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 나오는 말에서 확증할 수가 있습니다. “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 이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됨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는 친밀성을 의미하며, 그것은 지위와 신분의 문제 뿐 아니라, 우리가 법적으로 아들로 받아들여졌다는 것, 그 보다 더 큰 것, 즉 아버지께서는 지금 우리를 사랑하시되 그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과 똑 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믿기지 않는 엄청난 일이지만 사실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들 ”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형제들 ”입니다. 칼빈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된 것은 사람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 사랑하시는 자 안에 ” 있기 때문에 “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 ”들입니다.

성경: 엡1:7-9절

1장 7~9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우리는 그동안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장엄한 설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서 책망할 것이 없고 흠이 없는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오점이 없어야 할 그 아들 됨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살펴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땅에 있어서 넘어지기 쉬우며 죄를 짓기가 십상인데, 우리의 마음에 가질 수 있는 의문이 바로 이러한 것들로 여겨집니다.

우리가 그런 높은 지위와 조건을 얻게 되기까지는 많은 것들이 행해져야 할 필요가 있으나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언제나 죄의 장벽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와 죄악들에 관하여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만 했고, 그 조치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특별하고 유별난 일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지혜와 미리 아심을 인하여 또한 목적하심을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 자신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내신 것입니다.

– 1 단락 –

그 길이 여기 7절에서 요약되어 윤곽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 자신들을 구원하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있으며, 또는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는 식으로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악한 길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깨달아야 하는 제일 되는 것은 어떤 사람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할지라도, 금식을 하고, 땀을 흘리며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것으로는 어떤 차이도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회심 전에는 이런 오류가 있었으며, 스스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애쓴 적이 있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발견한 장엄한 사실로 인하여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큰 오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자랑하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위대하였던 성도들의 이야기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도화선도 바로 그것을 인식한데 원인이 있었습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았다 ”는 진술의 가장 중추가 되는 요점은 우리가 자신을 구원하게 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종의 조치를 취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 2 단락 –

우리는 이제 다신 한번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풍성함을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적용하기 위하여 이 중차대한 진술로 되돌아 와야 합니다. 사도는 여기서 “ 그의 죽으심 ”이라고 말하지 않고 “ 피 ”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 구속 ”이라는 말이 사용 되고 있습니다. 구속은 “ 속전을 주고 구출하여 낸다 .”는 의미로서 어떤 사물을 대신하여, 그것에 상응하는 마땅한 값을 지불하는 속전을 의미합니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포로로 잡혀서 노예가 되었다면, 그가 구속을 받으려면 지불할 능력이 있는 친족이 그 값을 속전으로 지불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도 같은 것이 적용 되는데, 만일 친족이 그 합당한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그 감옥에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전당포에 가게 되는 것을 성경에서 발견 할 수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전 세대에 있었던 풍속이라는 것을 들어서 알 것입니다.

부채를 갚기 위하거나 아니면 급하게 돈을 써야 할 상황이 발생하면 어떤 담보물을 주고서 일정액의 돈을 얻습니다. 그런 다음 그가 자신이 전당포에 맡긴 소유물을 찾고자 하면, 담보물을 건지기 위한 대가를 그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속전을 주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해방되기에 필요한 값을 지불하심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숙고해야 하는 또 다른 문제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필요한 정확한 값의 문제인데, 이 문제에 대하여 사도는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다 .”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 그의 피 ”가 우리의 속전의 값입니다. 사도 바울이 “ 피 ”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의 죽으심으로 일어난 일은 구약의 희생제사와 관련되어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피입니다. 불완전한 구약의 희생 제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짐승의 피가 아닌 완전한 의로움을 지닌 하나님의 의를 충족 시킬만한 사람의 피가 있어야 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으며 그 일을 위해서 희생제물이 되셔서 그 제사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 3 단락 –

우리는 다시 한 번 “ 구속 ”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 우리는 구속의 방식에 관한 이 말씀이 지시하는 속전을 지불한 결과로 우리가 죄 사함을 얻게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대상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인식하든지, 인식하지 못하든지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이 결정 됩니다.

인생에 있어서 잘못되어 가는 문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구속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기 전에는 우리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 불순종하는 모든 자녀들 ”위에 머물러 있으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축복을 필요로 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 대하여 화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 사함은 언제나 구속의 첫 번째 요점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서 죄 사함을 얻게 되고, 예수님의 살아나심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보면 “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 이 말씀처럼 그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죄와 죄책으로부터 건짐을 받고 그의 살으심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실 것이며, 그가 행하시는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은 십자가의 처방을 적용함으로 이루어집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을 때에 하나님 편에서는 어떤 새 일을 하실 필요가 전혀 없고 단지 갈보리에서 단번에 이루신 것을 단순하게 그에게 적용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죄에 빠진다고 할지라도 그의 모든 불의와 모든 죄에서 깨끗케 되는 것은 “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요 오직 하나밖에 없는 길입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4 단락-

이제 “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 라고 하는 어구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죄 사함과 구속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방식에 대하여 상고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러한 일이 왜 있었느냐는 것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7절에 나와 있듯이 “ 그의 은혜의 풍성함 ”입니다. 그 은혜가 바울로 하여금 전도자가 되게 하고, 대륙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게 하였습니다. 그 은혜가 그로 하여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물로 간구하며 전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삶에 있어서 그를 지탱해 주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알게 되면 필연적으로 바울과 어느 정도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며, 그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노래를 하게 되고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며, “ 측량 못할 기쁨으로 가득하게 되며, 영광으로 충만하게 ”되어 기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은 “ 그리스도의 피 ”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지불된 값에서 보이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모든 풍성함은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함으로써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부요한 사람에게 가서 어떤 선물을 요구하였는데, 그가 그것을 생각하고는 “좋아요. 내가 드리지요.”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매우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관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용서하여 주십사 하는 청을 드림으로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간청함을 받지도 아니한 때에 그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마음으로 배역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등을 돌리고 있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됨됨이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 따라 주셨습니다. 그러한 것을 주시려고 먼저 마음먹은 분도, 그것을 주신 분도 전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되 인색한 방식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말로 할 수 없는 풍부함으로 후히 주셨으며 넘치도록 충만함으로 아무런 조건도 값도 없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는 “ 도저히 깊이를 잴 수 없는 바다 ”보다 더 무한하게 깊은데,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으며 하나님 자신만큼이나 위대하고 광활하다고 밖에 다른 표현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의 풍성함으로 인하여 우리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그가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여 알도록 까지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 충만한 믿음의 확신 ”을 가질 수 있으니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 .”는 것을 알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불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들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 ”과 “ 하나님의 성도들 안에 있는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 ”을 “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예비 된,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고 더럽지 아니한 기업 ”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것이 준비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 ”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그의 있는 그대로 볼 것이며, 그와 같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이 왕 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누리고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함께 만물을 다스리게 될 것인데,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 우리는 종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양자로 받아들여져 아들로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 ”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5 단락 –

사실 3~14절에 이르는 말씀은 하나의 큰 문장인데, 여러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문장이며, 모든 말씀들은 하나의 큰 진술로서 같은 주제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각개의 특별한 진술을 그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것을 첨가하면서도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방식에 관한 위대한 목적을 선언함에 있어서 사도 바울이 최상급에 속한 용어들로 묘사하면서도 설명의 부족을 절실한 마음으로 계속하여 첨가하는 일을 이렇게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넘치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함으로 우리들에게 넘치는 방식에 대해서 설명함에 있어서 “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 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과 함께 그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하셨다 ” 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절대적인 지혜자이시기 때문에 모든 일을 지혜로 행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이라고 할 수 없고, 더군다나 “총명”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묘사하는 말로 쓰여진 경우가 전혀 없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결여된 표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말하고 있는 바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풍성함은 죄 사함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넘친 나머지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까지도 더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 지혜와 총명은 사실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아는 지식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아는데도 절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 즉 “ 그가 우리를 선택 하셨다 .”는 것과 “ 우리를 예정하셨다 .”는 것, 그리고 “ 우리에게 그 뜻의 비밀을 알리셨다 .”는 위대한 진술은 9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분명히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 “ 하나님께서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라고 연결시킬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 위대한 구속의 계획, 구원의 체계를 자신 안에서 예정하신 하나님께로부터 기원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에 따라 구원을 계획하시고 목적하셨으며 그 비밀을 알리셔서 나타내셨다는 말이 되는데, 그 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고 받게 할 수 있는 어떤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 이 두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특별한 메시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 ”을 “ 우리에게 풍성하게 ”하셨는데, 그것이 “ 모든 지혜와 총명 안에서 ” 넘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의 비밀과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을 이해하고 통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이 천국의 비밀은 허락된 사람들만[마13:11, 롬16:25~26, 고전2:6~8, 엡3:2~5, 딤전3:16]이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고전1:7~12, 마11:25~26]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어 천국의 비밀을 알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 밖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합니다.

성경: 엡1:10절

1장10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셔서 밝혀주신 비밀의 본질이며 에베소서의 실제적인 주요 목적을 이해하는 열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이 되는 모든 성경의 중심 주제를 진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알 수가 없습니다. 화가 지속 될지, 아니면 전쟁이 일어날지,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의 일을 우리는 알 수가 없고, 그것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시간낭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궁극적인 미래에 대해서는 확실히 압니다. 바로 이 점이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과의 차이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인 것과 하나님의 계획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역사가 어떤 정해진 방식으로 끝이 날 것을 알고 있고, 그러한 것들을 세상에 알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비 그리스도인들의 그 자연적인 상태에서 그리스도인다운 행실을 기대할 수는 없으며, 그들에게서 성경에 계시된 죄와 죄의 방식들도 인식시키거나 알 수 있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모든 일은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알려질 비밀로서 존재하며, 이런 사실은 성령을 통해서만 이해하고 인식하게 되니, 성도 외의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미련한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반드시 있게 될 터인데,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모든 일이, 모든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게 될 때 가서야 알게 될 것이지만, 그 때는 이미 늦은 때가 될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는 말로 돌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이 계획의 본질에 대하여 숙고하여 나가고자 합니다. 이 말씀은 “ 만물들을 다시 재통일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려 ”고 한다는 뜻인데, 이 일은 이미 이 시대에서 진행 되어 나가고 있으며, 주님의 성육신으로 시작 되고, 하나님의 이러한 경륜과 계획, 그리고 목적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시키려 하시는데 있습니다. 창조 당시에 완전한 상태를 지녔던 모든 사물들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완전한 상태를 잃어버리고 말았는데, 그러한 상태에서 원래의 상태를 다시 찾게 될 것이며, 그들은 “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만물은 본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아래에서 완전한 조화의 상태로 있은 적이 있었다는 것과,(골1:15~18, 골2:20)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모든 권세들의 머리라는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되고 지어진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졌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를 통하여 창조되고 지음 받았습니다.

세상과 짐승들 뿐 아니라 천사들과 보좌들과 정사들과 권세들도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모든 체계들 안에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졌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며 뛰어난 상태로 계셨습니다. 그러니 모든 세상, 짐승, 땅의 모든 열매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든 짐승들과 생명 없는 자연을 다스리는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을 받았고,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완벽하였으며 완전한 조화와 완전한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모든 것은 위대한 그 머리를 중심으로 조화를 이루며 내려가면서 계통이 세워졌으며, 모든 일은 다시 그 최고의 머리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다시 올려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제 그러한 통일과 조화가 계속되지 않는 사실, 세상의 현재 상황은 이 완벽한 조화가 깨어진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 조화를 거역하는 일은 먼저 하늘에서부터 일어났는데, 그것은 사단의 타락에 의한 반역이었고, 그로 인하여 하늘에서부터 쫓겨난 사단의 무리들에 의해 사람이 유혹됨에 따라 결국 사람에게도 조화의 상태가 깨어지고 불화가 일어나, 쟁론과 싸움, 잘못 이해하는 일, 전쟁, 피 흘림, 살인, 시기, 질투, 사람들의 자취를 따라서 그러한 모든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죄의 결과로 모든 피조물 자체도 고통을 받게 되고 땅도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롬8:20)

이제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래의 조화를 회복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다시 재통일하셔서 다스리시게 됨으로서 옛날의 조화가 다시 회복됩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를 이 말씀을 통해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이미 알았습니다. 하 나님과 화해하고 서로 사람들끼리 화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 그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죄로 말미암아 세워진 중간의 담을 허시고 모든 분쟁과 함께 옛날의 적대감을 사라지게 함으로서 “ 화평을 이룩하셨습니다 .”

이 모든 복락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해당이 되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조화도 약속되지 않아 “ 영원한 멸망으로 ” 던져지게 되어, 우주 밖의 어느 곳, 즉 조화를 해치거나 방해하지 못하는 지점에 있게 될 것입니다. 타락한 천사들과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최종적인 정죄를 받기까지 무저갱에 결박당하여 묶여 있을 것이며(벧후2;4, 유1:6), 그러고 난 뒤 어느 시점에 영원토록 고문당할 “ 불 못 ”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계20:10) 반면에 성도된 우리들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만물의 영장”의 지위로 높여져, 만물이 우리 아래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된 완전한 조화는 사람 안에 이루어지는 조화가 될 것이며, 사람들 사이에도 이 조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땅 위에도 조화가 있게 되고, 짐승들 안에서도 그런 조화가 회복될 것입니다. 하늘에도 조화를 이루어 우리 복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아래 모든 만물이 조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머리가 되셔서 모든 것은 다시 그 안에서 재통일 되어, 영원토록 그리스도 안에서 재 연합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서신의 메시지이며 바로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바 로 그것이 우리에게 계시된 비밀입니다.

성경: 엡1:11-14절(1)

1장 11절 ~14절: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서론

이 본문 전체를 한꺼번에 다룰 수는 없지만 각각의 부분적인 진술들을 숙고하기 전에 전체로 다루어 봄으로서 세부적인 부분들을 이해 할 수가 있고, 또한 그 내용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보편적인 주제에 관하여 분명하게 포착하여 이해할 때만 가능합니다. 이 세상은 세계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어떤 이슈와 같은 뉴스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훨씬 능가하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실행에 대한 관심입니다. 세상의 일들은 매우 불확실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훨씬 더 크고, 장엄하며, 확실합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 지혜와 총명 ”을 주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있게 하신다고 하는데, 그러한 “ 지혜와 총명 ”이 아니고서는 이런 일들은 사실 우리에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고 우리의 삶에서 전혀 멀리 떨어져 있는 무관한 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성령의 조명을 받게 되면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는데, 이제껏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신의 계획을 자신의 방식으로 시행하시며, 그 계획 속에 우리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수반되어 결국 조화로운 회복으로 그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사도는 이 서신에서 기독교회의 본질과 성격에 관하여 가장 넉넉하게 가르치고 있는데, 교회는 많은 방면에서 하나님의 장엄하고 범 우주적인 계획, 그리고 모든 영역과 모든 국면에서 조화를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획에 대한 최상의 예증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사실 “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라는 말처럼, 그리고 이제껏 우리가 강해를 통해서 알아보았듯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어 가신다는 것에 대한 유일한 설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계속하여 언급하는 것은, 이제껏 하나님께서 하시는 영광스러운 일들을 설명은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더 심오한 진리를 첨가하여 진술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자꾸 첨가적인 요소가 가미된 진리의 반복이 오히려 즐겁기만 하고, 그 영광스러운 진리에 대한 관심이 넘쳐나고 그 때문에 영광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 한 번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하여 첨가하고 또 첨가하여 성도들이 확고하게 설 수 있도록 반복하여 설명함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으로서, 바울의 이러한 설교를 표현한다면 우리를 향해 하나님의 복음을 폭포수와 같이 퍼 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계획, 곧 온 우주를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거느리시려는 계획을 진행시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그 일을 하시는가에 대하여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초에 있는 “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 ”는 구절과 13절초에 있는 “ 너희도 그 안에서 ”의 두 구절에서 이 위대한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구절이 시작점이 됩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11절에서 말하는 “ 우리 ”와 13절에서 말하는 “ 너희 ”라는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가를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 우리 ” 라는 말은 사도 자신을 가리켜 하는 “ 나 ” 를 의미하는 말로 자신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을 가리키고, “ 너희 ” 라는 말은 1차적으로는 에베소에 있는 이방 그리스도인 들을 가리키고, 다음으로는 서신을 받아 회람하여 돌려볼 여러 지방에 사는 이방의 그리스도인 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도는 “ 우리 ”와 “ 너희 ”라는 말을 강조하는데, 그 말은 우리 유대인들과 너희 유대인들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며,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 하나가 되었다 ”는 진술입니다. 그러니 “ 우리가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너희도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 ”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주제를 2장에서, 그리고 3장 5~6절에서 다시 반복하여 말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진리를 밝히기 위해서 총력을 다 기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일을 감탄하며, 감격해 하면서 다시 4장에서 다시 말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라고 하며, 그렇게 된 것을 자랑합니다.

사실 바울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완고하고 편협한 유대 민족주의자로서 자기의 혈통을 얼마나 자랑하였는지 모르며, 이방인들은 그에게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 이방인의 사도 ”가 되었습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특별히 흥미 있고 황홀하게 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사도의 관점에서 세상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더욱더 흥미 있는 것이 됩니다. 세상은 모든 갈등과 부딪침과 분쟁과 긴장으로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진리에 비추어서 세상적인 것에 등을 돌리며 사도에 의하여 밝혀지는 이 하나님의 계획을 살펴본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실패하는 일들 중의 하나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방면에 복음을 적용시켜서 하나님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 바울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조화를 회복하고 통일을 이루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기독교를 완벽하게 그려주고 있는데, 그것을 다섯 가지 요소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 그리스도 안에 ”서 하나로 연합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를 떠나서는 연합을 소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해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들이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어떤 특별한 나라에서 태어났거나, 부모들이나, 할아버지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화해케 하셔서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연인들에게는 막힌 담이 있고, 서로 나누어지는 분쟁만이 있었습니다. 철의 장막과 같이 사람 사이를 막고 있는 담들은 서로 그리고 각자 자기편만을 생각하고 분쟁에 의한 분리와 불행으로 가득한 것이 세상입니다. 이런 상황을 처리하는 오직 유일한 방식은 기독교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을 현대의 여러 난제들에 적용시키거나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것, 또는 기독교 원리들을 적용하는 방식을 가르치는 것이 교회의 할 일은 아닙니다. 그들은 결코 기독교의 교훈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9~10절에서 그 점을 매우 분명하게 말하는데,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우리는 선한 일을 하기 전에 먼저 “ 그리스도 안에서 지은바 ”되어야 하고 우리가 행동하기 전에 살아나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전에는 그런 일은 전혀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이 앞으로 개선되어 더 좋아진다거나, 지상 유토피아의 건설이나 파라다이스와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절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말세로 치닫게 될 수록 더 악해지고 강포해진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진정한 의미로서 주어지는 화해를 서로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로만 구속받고, 그리스도의 피로만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피로만 서로 간에 화평을 누릴 수 있는 화해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그들의 죄와 실패를 대신 책임지셔서 그들 대신 죽으심으로 그들을 화해의 자리로 이끌어 들이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해도 화평도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 그리스도 안에 ” 있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와 함께 “ 후사 ”가 되는 지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방식으로 죄 사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같은 기업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 우리 ”가 그 안에서 분깃을 얻었고, “ 너희 ”도 그 안에서 분깃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은 이제 같은 후사일 뿐 아니라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임할 복락의 후사들이 되어 함께 기업으로 가지게 될 것이며, 또 모두가 함께 그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나라들은 자기 나라를 확장시키려고 싸우고, 자기 나라의 이권을 위해서 싸웁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돈 때문에 싸우고, 지위 때문에, 인기 때문에 혹은 다른 어떤 것들 때문에 싸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마음과 소유욕과 탐욕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더럽지 않고 없어지지 아니하는 하늘에 있는 ” 기업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은 생각하지 않음으로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자기와 함께 후사가 된 사람들 ”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싸움이나 분쟁이나 중간에 막힌 담은 허물어져 버리고 화평합니다.

셋째로 하나님 편과 사람 편의 모두를 보여 주는 진술 가운데서 우리가 이 복락에 참여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났던 방식을 숙고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진리가 된 방식을 숙고하고 우리가 아는 것이 이제 우리 자신에게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는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인지, 사람이 “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리스도와 함께 “ 후사 ”가 되는 이 지위에 들어가는 방식은 어떤 것인지, 그러한 주제에 대해서 하나님 편에서와, 그리고 사람의 편에서 알아보아야 하는데, 그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에 자신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주장, 그리고 자기변호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태도를 가졌던 바리새인들의 자세를 우리 주님은 미워하셨습니다. 주님의 새로운 이론과 새로운 사상, 그리고 새로운 가르침이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의 선입견들을 상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의지하기 쉬운 선입견들을 우리 자신들에게서 제거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죄의 결과로 그러한 선입견에 기울어지기가 아주 쉽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개념화 된 생각과 선입견을 버리고, 자신과 마음을 전적으로 성경에 복종시키되,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하면서, 성경에 접근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실제로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가를 살피는 가운데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성경에 주입되어 읽혀지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마음의 비밀을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마음의 비밀이 우리보다 어찌나 높든지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려고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단지 겸손하게 나와서 그것을 살펴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 접근하여 성령을 받아 마음에 조명을 받고 이해력을 주심에 따라 순복하는 태도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구속에 관련하여 이런 일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과 성경의 가르침을 주신 하나님께 부단히 감사해야 하는 것도 바로 그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을 알게 하시는 성령님의 조명하심에 따라서 알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가 시작되기 전에, 창세전에 그 마음의 원대로 온 우주가 조화를 회복하게 하실 것을 뜻하시고, 그 마음의 원하심을 따라 정하신 뜻대로 그 일을 우리에게 행하시기로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성경의 이 부분을 만나게 되었고, 또 이 말씀이 증거되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구상하시고, 그 계획안에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그 안에 함께 있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그 마음에 우리가 존재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한 의중과 마음속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타락하였을 때, 즉시 그의 목적을 계시하셔서 사람들이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획, 자신의 뜻을 발표하시고 역사하셔서 그 계획을 창세전부터 이 시간까지 진행시켜 나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계획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 중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하심의 열매로서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 ”을 따라 된 하나님의 계획의 열매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목적은 역시 우리로 “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 ”이 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가 이러한 복락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증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 그 얻으신 기업을 구속하기까지 ” 우리를 인 치셨다는 것과, 우리가 이미 그 계획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일러주시는데, 그것을 “ 성령의 인치심 ”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치심에 관하여 사도행전에서 실제로 그 방편이 어떤 것인가를 보게 됩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일이 맡겨졌고, 주님은 승천 하실 때, 이 땅에는 몇 명 되지 않는 사람들 밖에는 남겨두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위대한 계획이 그 몇 사람들에 의하여 이행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성령이 자기들에게 임하기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또한 성령이 임한 다음에 가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전하여야 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갔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 되는 것은 “ 진리의 말씀 ” 또는 “ 구원의 복음 ”을 방편으로 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그것을 “ 진리의 말씀 ”이라고 부릅니다. 이 구원의 좋은 소식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위험에 처하여 있는 사람들에게 이 임박한 진노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좋은 소식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며, 이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전도자의 사명입니다.

“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 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5:18~21)

그러니 구원의 좋은 소식 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을 하셨다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임박할 진노에서 우리를 건지셨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와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를 향한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 기업을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여 놓으셨는데, 우리로 그의 자녀들로 삼으신 모든 것의 방법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전적으로 자신의 아들에게 담당시키시고, 그 안에서 그 죄들을 벌하시고, 처리하셨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이 모든 은사를 주시는 것인데, 바로 그것에 대한 복된 소식이 구원의 메시지이며 “ 진리의 말씀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이 무엇임을 인식하는 사람, 즉 “ 진리의 말씀 ”을 깨달은 사람은 이제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노력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를 쓰며, 선한 삶을 영위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 진리의 말씀 ”을 거부하고, 전하는 사람을 핍박하며 소리 지르면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야단을 칩니다. 그러니 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가적인 진수가 되는 요인인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열어서 진리의 말씀을 적용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엡1:11-14절(2)

1장 11~14절: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1. 성령으로 인침

우리는 사실 성령이 아니고서는 구속받을 필요성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구속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성령의 사역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부가적인 진술은 체험적인 입장에서 특별히 중요성을 가지는데, 복음에 관한 모든 진리와 복음 안에서 우리를 위해 제공된 모든 것을 확신케 되는 방식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광과 이러한 일들의 위대함 중 얼마를 우리가 시간 세계에 살고 있을 동안에도 누릴 수 있는 방식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많은 방종과 실패를 자행하는 것은 바로 이 진술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한 원인이 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위치를 잘못 지키고 있다거나, 우리의 쓸모가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 약속의 성령 ”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구절 속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체험을 하고 있어야 할 충만함에 들어갈 수 있는 방식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 주 안에서 즐거워하라 .” 항상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지상 생애를 마치시려 할 즈음에 “ 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라 .”고 말씀하셨고 “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겠다. ”고 말씀하셨는데,(요 15:11)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유산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기쁨과 평안과 행복으로 충만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 성령의 인치심 ”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 인침 ”이라는 낱말이 가진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1) 인침의 첫 번째 의미는 권위를 상징하고 나타냅니다. 도장은 어떤 계약이나, 진품이라는 것을 보증하는 것으로 진정성을 확증하는 것이며, 신빙성과 견고함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2) 소유자의 표지가 됩니다. 자기에게 속한 것에 대한 도장을 사용한 사람의 소유임을 증거합니다.

3) 안전 보장을 위해서 사용되기도 합니다.

어떤 우편물이 배송 될 때에 왁스 같은 물질을 녹여서 노끈 위에 짙게 바른 다음 거기에 인을 쳐서 왁스 위에 나타나게 함으로서 그 인이 손상 되었을 때 그 우편물에 누군가 손댔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이 무덤에 장사지내졌을 때 로마 당국자들과 유대인들은 주님의 제자들이 그 몸을 가져다가 어떤 일을 할까 걱정하여 무덤 문에 돌을 굴려 막고 거기에 그것을 안전케 하려고 인을 쳐 봉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침이라는 말은 세 가지 주요한 의미 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인침에 대하여 성경은 마3;17, 눅7:22, 요3:33, 요5:10, 요6:27, 요7:46, 요10:38, 요14:10 등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성령의 인침은 믿는 모든 자들에게 불가피하게 일어나지만, 믿는 것과 성령의 인치심 사이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을 수 있고, 성령의 감동 또한 사람에 따라서 체험적으로 충만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하심은 성도들이 고대해야 할 위대한 복락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성령의 인치심의 두 일 사이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는데, 아주 짧은 순간이 될 수도 있고, 긴 기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참조 : 요14장, 요20:22, 행1:4~5, 행2장, 행8:12, 행15:6~9, 행19:2~6]

그 인침이 믿는 일 바로 뒤에 즉각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반드시 간격을 두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언제나 믿는 것이 먼저이고 인침이 그 다음입니다.

인침을 받는 것은 믿는 자들에 한합니다. 그러나 인침을 받지 아니하고도 성도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것은 믿음이며, 그 사실을 확증하는 것은 성령의 인침입니다. 인침이 우리로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침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더욱 확증해 준다는 예기입니다.

도장이란 언제나 그러한 일을 하는 바와 같습니다.

2. 인침의 본질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과 언제나 일치하는 방법과 방편들을 의지해야 합니다. 수세기에 걸쳐 교회의 지나온 과거는 모든 부흥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깨우치신 결과로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임하기 시작 되고나서, 그 부흥은 퍼져나갔습니다. 생명력을 잃고 죽어가는 교회는 결단코 가치를 지속시키는 어떤 일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날 때 세상은 그것에 대하여 듣게 되고 호기심을 갖게 되어, 오순절 날과 같은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것이 모든 부흥의 줄거리이며,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에 관하여 이사야 40장에서 마지막장까지의 부분에서와 에스겔 36~37장에서 두드러진 방식으로 그 약속이 발견되며, 생명을 부어주시는 성령의 약속으로 가득합니다. 그 중에서도 요엘서 2장에 예언된 말씀에서 말세의 성도들에게 부어주실 “ 약속의 성령 ”에 관하여 가장 결정적으로 예언 되어있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자기의 사역과 우리 주님의 사역을 성령의 임하심의 차원에서 구분하여 “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 .”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같은 메시지를 가르치셨는데,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눅11:13)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 체험을 주실 것을 사모함으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는 보다 더 의미심장한 진술로 이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 약속의 성령 ”으로 인침 받는 다는 것은 중생할 때나 회개할 때나 믿음을 가질 때의 성령의 역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오순절이 이르기까지 중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았듯이, 사도들은 오순절 날 이전에 중생해있었고, 그 후에 성령을 받았으며, 성령을 받기 이전에 이미 주님을 믿고 회개 하였으며, 거듭나는 중생을 통해서 새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1장에 나타난 사마리아 사람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들은 믿음을 행사하고 있었고 거듭나 있었으며 회개하고 믿어 세례를 받았지만 그들은 “ 성령의 인침 ”의 의미에서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는 것은 믿음을 가지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영적 이해를 위해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기름부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성화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성령의 인침을 받는 것은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한 사건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세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약속, 곧 우리가 이 기업을 누리러 들어가고 있다는 약속을 “ 인쳐 주시는 것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친히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임을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에게 속하여 있음을 보증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런 정황들과 증거로 볼 때 성령의 인침이 없는 사람도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내주함, 성령을 받지 않고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 ”(고전12:3) 때문이며, “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 ”일 수가 없기(롬8:9)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인을 받는 것과 성령의 내주하심을 받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침은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거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동안에 성령의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임을 증거하는 것이요, 도장을 찍은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의 논리가 성립됩니다.

믿는 성도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 성령의 내주 ”는 성도들이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으나, “ 성령의 인치심 ”은 언제나 성도들에게 확신을 주는 어떠한 체험으로 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새 술에 취한 사람들처럼 보인 것과 같이 어떤 환각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들게 할 정도의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이 “ 성령의 인침 ”, 즉 “ 성령의 세례 ”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찬미하고 마음이 끓어 올랐고, 살아 움직였으며, 이전에는 전혀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였던 일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이 성령의 인치심에는 은사가 주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성령의 인침에서 궁극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은사가 아니라 우리가 기업을 받았음을,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성도 각 사람에게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나누어 주는 선물이지만 이것은 성령님께서 주실 수도 있고 주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순절 이전의 믿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인 사도들은 구약시대의 성도들과 같이 믿는 자들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종과 같이 후견인들 아래 있어서 자신들의 지위가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아버지인 것을 믿었지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자마자, 곧 인침이 임하자마자 “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양자의 영을 부어 주셨기 때문인데, 곧 자기 자신의 아들의 영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이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것은 “ 양자의 영 ”이며 “ 아들의 자격을 주는 영 ”입니다. “ 성령의 인치심 ”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인식하게 하는 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직접적인 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롬8:16)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압도적인 체험입니다.

3. 우리 기업의 보증

우리는 이제 “ 성령의 인침 ”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확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에베소 사람들을 강하게 해 주고, 위로해 주며, 세워 주려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를 거기서 끝낼 수 없다는 생각으로 “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말씀을 더 가입시킵니다.

이제 우리는 “ 성령의 인치심 ”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 성령의 인치심 ”과 “ 보증 ”을 함께 연결하고 있는 방식을 보게 됩니다. 그는 고린도 후서1:21~22과 고린도 후서5:5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확고하게 서게 하기 위함입니다.

교회의 전체적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지성적인 이해나 지성적인 만족을 주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워 주고 우리를 견고케 하여 주며, 우리로 굳건한 그리스도인들로 만들며 요동치 아니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우리를 다른 어떤 것으로도 흔들지 못할 그러한 기초를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들로서 견고함을 받을 필요가 있으며, 어떤 체험의 차원에서보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시고 의도하셨던 우리 지위의 위대함과 그 신분의 영광의 차원에서 우리 자신들을 바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제 “ 보증 ”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부터 알아보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기업을 이전하는 것과 관련하여 자주 쓰인 말로서, 사고팔고 할 때 바로 이 어휘를 사용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이 말은 일종의 서약조로 주어지는 보증금을 나타낼 때 쓰이는 말로 계약금, 또는 서약금의 형태로 얼마간을 담보로 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어휘에는 더 가치가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일종의 계약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지불할 총액의 분할금, 나누어 내는 양 중에서 1회분에 해당하는 금액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할부 판매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 구속 ”이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 최종적인 완성 ” 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완전하게 해방되고 완전하게 구원되는 하나님의 계획이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복락이 성령에 의하여 우리에게 전달되어지고, 특히 “ 성령의 인침 ”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보배 피로 우리를 위해 확보하여 놓으신 것을 완전 충만하게 받기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계약금(분할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체를 받기 전에 우리 기업의 일차적인 계약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업을 온전하게 받게 되는 날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안에 있는 모든 소유권이 완성되어 모두를 완전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일정한 수의 영혼들을 구속하시려는 완전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측면에서는 “ 구속 ”이란 이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게 모아지는 바로 그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의 분깃으로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다섯째는 모든 것의 목적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는 말에 들어있습니다. 사도가 가르치고 있는 바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 무엇일지를 알게 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을 맛보기로 체험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다 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무한하신 은혜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맛보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증금으로 지불하신 1차분의 것을 맛보기로 맛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평강, 이런 기쁨을 누리고 계십니까? “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하심이라 ”는 말씀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기 위해서 허용된 것이니 만큼, 우리는 우리의 즐거움을 그분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하여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경: 엡1:15-17절

1장 15~17절: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3절로 시작하여 14절에 이르기까지의 진술을 마친 사도는 다음에 그의 편지를 받는 이 에베소 사람들과 이 편지를 받아 볼 다른 교회들을 향하여 시선을 돌리면서 그가 이제까지 말해 왔던 것을 적용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은 신학적인 논문을 쓴 것이 아니라 한 목회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을 돕고 강하게 해 주며, 모든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용기를 갖고 살도록 그들을 격려하고 적용시켜 주기 위한 목적에서 쓰여진 것입니다.

사도는 이 시점에서 이제까지 자기와 자기 편지를 받는 독자들이 기독교의 진수를 살펴보아 왔을 것으로 인식하고,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 그 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다가올 큰 수확의 첫 열매를 누리고 있는 사실을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특별하게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복락에 참여한 자들임을 스스로 인식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조적인 “ 이를 인하여 ” 라는 말로 새로운 항목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사실 이제까지 말한 것과 앞으로 올 것 사이를 연결짓는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사도는 기도의 정확한 본질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언제나 그러해야 하듯이 그의 기도에도 두 국면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는 감사하기를 “ 마지않는다 .” 고 하는 말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잘 영위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대한 나라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한 후사요 기업 무를 자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같은 지위에서 같은 복락을 누리는 것보다 더 기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하나님께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그런 감사를 드리고 나서 하나님께 간구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아마 그리스도인의 삶의 국면에서 기도의 문제만큼 사람들의 난제로 등장하는 국면은 없을 것이지만 그러한 난제가 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결국 인간 영혼의 가장 고상한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하면서 정신을 집중시키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간구를 하나님께 어떻게 말할 것인지, 어떻게 그들의 간구를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는지를 잘 몰라 곤란을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심각하게 취급하는 순간부터 기도의 심오한 성격을 배우기 시작 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계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기도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모든 것이 다 간단하게 보고 주기도문을 되풀이 하듯 합니다. 또한 몇 마디의 간구만을 아뢰일 뿐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였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은 전혀 기도를 시작조차 안한 사람이라고 단언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조금밖에 기도하지 못합니까! 우리는 기도에 대하여 얼마나 작게만 압니까!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말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주님께서 친히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으며 기도하기 위하여 매번 그들 중에서 물러 나가시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제자들이 느꼈던 그러한 것을 느끼기 전에는 우리는 기도 생활을 아직 시작도 안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생활하는 가운데 기도한 적이 결코 없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정말로 기도하는 어려움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기도하는 것이 무엇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문제를 대면함에 있어서 성경에 풍부한 기도의 위대한 모본들을 살펴보고 지켜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한 실례들 가운데 사도 바울의 기도가 가장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가 하나님께 드린 간구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그것을 우리의 생활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1. 영광의 아버지

우리는 기도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가?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서서 해야 하는지, 엎드려서 해야 하는지, 두 손을 들고 해야 하는지, 또는 시간의 문제도 다루며, 간구해야 할 순서까지 정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기도는 카톨릭의 예배 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특징들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그리고 보다 영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그러한 상세한 국면에서는 주의를 덜 기울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중심적인 면에서 바르게 되어 있을 때 그 밖의 다른 것들은 저절로 바르게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할 일은 사도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고 있지 않고, 성령님께 기도하고 있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과 교제하는 것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이시지 목적과 대상은 아닙니다. 그는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는 중요하고 귀한 분이요 그를 통하여 아버지께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대 제사장이며 우리의 대표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기도는 그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사도는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관찰할 두 번째 문제는 사도가 아버지께 기도하는 방식입니다. 그는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를 그들에게 깨우쳐 주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를 체험하였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 자신이 기뻐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으며, 반면에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무릎을 꿇거나 서거나 하지 않았고,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지 즉각적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멈추어서 무언가를 생각합니다. 그는 먼저 묵상하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 행하려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상기하고, 그는 그가 말씀을 나누려고 하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상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확신 있게 담대함으로 기도해 나감에도 불구하고 경배와 찬미의 요소가 언제나 같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방법을 잘 알면서도 실수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동시에 긴박한 일로 바쁘게 기도할 때에, 이런 긴박한 문제를 얼른 처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을 건성으로 빨리 해치우고 말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긴박하더라도 다른 모든 일과 모든 사람, 모든 것은 그 다음의 문제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비교할 때 다른 모든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떤 말을 하기 전에 하나님에 관한 일들을 스스로 상기하는 사도 바울의 자세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그는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주 확실한 방식으로 자신을 바울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택하셔서,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보다 더 깊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성육신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을 생각나게 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무언가를 더 첨가하고 있는데, 그는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 영광의 아버지 ”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광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모든 탁월하심과 모든 완전하심과 모든 속성들을 다 함축하는 표현을 담은 “ 영광 ”이라는 말로 하나님께 불려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가장 위대한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었다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존전에 나갈 때에 이 영광이 어느 정도 나타날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우리가 “ 영광의 아버지께 ”나아가 말씀을 드리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는 전혀 기도하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지만 경외함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이는 그의 영광스러운 성품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아는 그리스도인의 지식

이제 사도 바울이 실제로 드린 간구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이 간구는 에베소서 1장 마지막까지 계속되는데, 두 대목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 대목은 일반적인 간구이고, 다음에서는 어떤 특별한 문제를 다룹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일반적인 간구부터 생각해야 하는데, 이점은 매우 중요하며 다음에 오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다뤄야 합니다. 이 간구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에게 대하여 말한 것에 비추어 볼 때 그렇습니다.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 약속의 성령 ” 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며, 성령을 통해서 “ 기업의 보증 ” 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바울이 아직도 그들의 상태에 온전히 만족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위대한 복락을 체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중보기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되 매우 긴박한 생각을 가지고 특별한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들에게 더욱더 많은 것이 열려져 하나님의 은혜의 무한한 부요함을 더욱더 많이 알고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심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며, 그저 첫걸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탄생이 끝이 아닌 것 같이 회심하는 것은 영적 생명의 한 분야로서 이 세상에서 어린아이가 태어나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사람들 앞에 놓여 있는 엄청난 가능성들을 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은혜 안에서 자라나고 영적 생명의 정상에까지 오른 자로서 그 생명의 정상에서 누리고 있는 영광스럽고, 광활한 전경을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도 포착하여 자신과 같은 위치에서 조망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림에 있어서, 그들의 삶에 필요한 어떠한 것들, 또는 그들의 성화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지 않고, “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기도가 가지는 의미는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우리의 생각들이 너무 사람 중심적인데 있고, 또 너무 주관적이라는데 있다는 점을 알게 하여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사람에서 시작하고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 모든 문제로 시작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먼저 죄 용서함을 받아야 하고, 또 실패로 인하여 겪게 될 불행을 면하기 위하여 죄로부터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사람에게 사로잡혀, 사람의 필요가 무엇인지,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반해, 사도의 접근 방식은 그것과 전적으로 다릅니다. 그는 성도들이 거룩하게 되는 일에 관심을 두는 것보다, 또는 행복이나 기쁨 같은 것보다, 그들이 “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가짐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 ”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것을 간구의 첫 번째 것으로 도입합니다.

이것은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에게만 예외적으로 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드린 기도에서도 “ 그들의 사랑이 자라고 그들이 지식과 총명에 있어서 자라나기 ”를 위하는 기도를 했으며,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기도하였습니다.

물론 그도 행복과 기쁨에 관하여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많지만, 그것을 먼저 말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에 대하여 더 많이 알 필요성부터 먼저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성도들의 믿음과 삶의 가장 부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데, 사도 바울이 그것을 얻기를 간구한 것은 에베소에 있는 아직 영적으로 미숙한 성도들을 위해서 드린 기도의 제목입니다. 이 기도는 모든 성도들이 언제나 드려야 하는 것이고 항상 드려야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크게 필요로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제사장적인 주님의 기도 가운데 나오는 “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습니다 .”(요17:25)라는 기도와 같습니다.

그런데 “ 아는 것 ”이라는 말은 매우 강하고 힘이 있는 용어입니다. 그 말은 임시방편적으로 엉성하게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피상적인 지식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그것은 예리하고 정확한 지식, 확실한 지식, 그리고 체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온전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아직 땅에 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노예였으며, 무지하고 교육을 받지 못하여 글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서 초대 교회 당시에 그 점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중보기도 하는 것은 그들이 충만한 지식, 즉 정확하고 예리하고 체험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곧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이라고 표현할 뿐만 아니라 “ 영광의 아버지 ”라고 묘사된 그분을 아는 지식을 그들이 가질 수 있기 위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저 이론적으로만 알고 이지적으로만 아는 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직관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을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실질적으로 교제, 즉 “ 하나님과의 만남 ”을 가질 수 있기 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인격적이고 친밀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 진리를 말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임재를 의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도 무엇인가를 알고 인식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로 하여금 경외심과 “ 경건한 두려움 ”으로 충만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확신을 새롭게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풍요함은 무한하여 우리의 지식으로 한정을 지을 수가 없어서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갈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 내가 하나님을 알 수만 있다면! ”이라는 갈망에 주리고 목말라 할 것입니다.

3. 지혜와 계시

이제 우리에게 제기된 큰 문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알 수가 있는가? 입니다. 욥은 “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욥11:7)라고 말 할 때에 더 이상 생각할 수도 없게 그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사도의 기도 내용을 말하는 구절에서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 지혜와 계시의 정신 ”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는 에베소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거나, 지혜로운 행동과 활동을 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도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며 기도해야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모든 삶 속에서 어떠한 조건과 관계들이 지혜와 총명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 즉 지혜와 총명으로 지배당할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풍성히 누리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만이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 정신 ”이란 말은 성령을 나타낸다는데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합니다. 그래서 이 경우에서는 기도와 간구가 성령을 풍성히 누리기를 원한다는 내용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람은 본질 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성령님께서 그분만이 우리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길을 아는 지식을 알게 하여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체험에서 그 답을 찾을 수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한 시간 동안도 기도할 수 없다면 어찌하여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이나 친구들과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한 시간, 아니 몇 시간 동안이라도 대화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께는 한 시간도 말씀을 아뢰일 수 없습니까?

그것이 왜 그렇게 어렵습니까? 대답은 오직 한 가지뿐인데,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하게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존전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결과로 여겨지는 이점은 매우 단순한 하나의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스스로 어떠한 지식을 짜내고 이해를 동원하는 노력을 한다거나 천성적인 어떤 원인으로 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시도는 과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어떤 현세적인 차원에서 탐구하여 이루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위대하며, 무한히 우리보다 높으신 분이고, 우리를 무한하게 능가하시는 분입니다. 그러한 “ 무한성과 광대함 ”을 포착할 만큼 큰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님의 고유한 영역으로서 주어진 사역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우리로 그 지식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성령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주요한 방식으로 이 지식을 준다고 말하여 나갑니다.

먼저 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을 주시는데, 그것을 “ 지혜의 정신 ”이라고 합니다. 성령님은 성경의 메시지의 이해에 본질적 기능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그러한 일을 돕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말씀 안에 계신 성령님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계시에 복종해야만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 로는 “ 계시의 정신 ”을 주셔서 이해를 돕습니다. 말씀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는 또한 그 말씀을 읽는 자 안에 계셔서 그 말씀의 의미를 알도록 하십니다.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어떤 사람도 말씀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없을 것인데, 그래서 이러한 성령의 두 가지 작용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눈멀고 벙어리이며 도울 자가 없는 곤고한 죄인들 이었지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완벽한 장치로 주셔서, 그 진리를 우리가 알고, 또 그것을 받아 향유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완벽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는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마땅합니다.

성경: 엡1:18절

1장18절: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의 특별한 간구를 접하게 됩니다. 그는 “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임 ”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며 “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 그리고 “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무엇임 ”을 알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 지혜의 계시와 정신 ”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할 때에 많은 것을 다루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같은 것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수반되는 것들까지 “ 성령에 의해서 마음눈이 밝혀져 ”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원리 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가 본질상 마음의 눈이 밝혀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4:17~19) 마음의 눈이 어둡다는 것, 즉 총명이 어두워진 결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게 되고, 또 “ 무지하고 ” “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게 ” 됩니다.

우리는 자연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지와 총명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죄와 타락으로 인하여 그것이 어두워져 그 기능을 바르게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영광스러운 빛이 성경 속에서 그 앞에 비추이고 있고, 자연 속에서도 그러한 계시의 빛이 드러나 있지만 우리의 눈에 베일이 가려져 그러한 계시의 빛을 볼 수가 없으니 이제 그 베일이 벗겨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눈이 원래 창조 시에 가지고 있던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성령님께서 해 주십니다. 눈이 멀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아름다운 정경을 본다 할지라고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으며,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정경은 여전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제 “ 우리 마음의 눈 ”이 밝혀져 영적인 진리를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사도가 드리는 이 기도가 “ 그리스도 예수 안에 ” 있는 사람들, 다른 성도와 같이 후사가 된 사람들,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드린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을 영위하는 한 우리는 언제나 성령의 조명하는 역사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연약함을 지니고 있고, 이 죄악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 우리 안에 여전히 죄의 원리가 남아 있으므로 해서, 성령의 밝혀 주시는 역사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배우고 성경의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매일의 일상적인 삶에서 배도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다면 말씀이 그 전과 같이 말하지 아니함을 발견하게 될 것인데,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법칙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쌓아 놓은 것을 의지하고 살아갈 수 없으며, 그것은 마치 광야에서의 “ 만나 ”와 같은 것이라서 영적인 총명은 매일 새롭게 되어야 하니, 우리는 영적인 휴일을 즐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의존해야 하는 존재임을 인식하지 않는 한 말씀은 우리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우리가 조명을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적은 것밖에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과 성령의 밝혀주시는 힘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는데서 우리는 결단코 떠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원리 는 영적인 지식은 점진적으로 자라나는데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이 이미 많은 것을 아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다음에 그들의 지식이 더 자라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넓은 진리의 대양의 해변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 완숙한 지점 ”에 이르렀다는 인상을 주는 성도가 있는데, 그런 사람들처럼 비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러한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단순하게 죄사함의 체험의 차원에서만 생각한 결과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로 출발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성장하게 되고 더욱 지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정체된 상태에 서면 안 됩니다. 끊임없이 자라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하며, 1년 전보다 영적으로 더 진보해 있어야 하고 그 후 10년 뒤에는 그만 큼 더 자라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 갈수록 영적인 지식과 진리를 아는 총명이 더욱 자라가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원리는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 총명의 눈이 열려지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마음눈이 밝혀지는 것을 위해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 은혜와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것 ”이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을 향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마음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끊임없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1. 세 가지 특별한 기도 중의 첫 번째 간구

이러한 점들을 마음에 세기고 이제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에게 알기를 원하는 것, 세 가지 중에 첫 번째 문제 인 “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임 ”에 대하여 다루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르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 일반적인 부르심 ”이고 또 하나는 특별한 부르심인데 그것을 “ 유효적인 부르심 ”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하는데, 그들 모든 사람들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 부르심 ”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부르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일반적인 소명을 모든 사람들에게 발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지만, 여기서 사도가 말하고 있는 부르심은 그러한 부르심이 아니라 특별한 부르심 즉 “ 유효적인 부르심 ”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 일반적인 부르심을 온 세상에 발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특별한 의미에서 어떤 특별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어떤 사람도 이러한 특별한 부르심을 받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능력 있게 임하셔서 항거할 수 없는 하나의 명령으로 그들에게 임하시게 될 때에, 그들은 그들의 모든 존재를 다하여 그 부르심에 반응합니다. 사도의 간구는 이 부르심의 “ 소망 ”이 무엇임을 알기를 바라는 것이며, 그 부르심을 확실하게 믿게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가 의심케 함으로, 불확실성으로 공격해 오고, 죄를 통하여 우리를 괴롭힘으로 스스로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고 확신 한다면 이러한 것들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이 확실하다는 것을 안다면 이런 일들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의 인침은 주로 주관적이고 체험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말로 진술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직접 증거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또 감사해야 할 것은 그것만이 우리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날 큰 의심을 하게 되는 날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인침을 받았더라도 죄에 빠짐으로 말미암아 환경을 이유로, 또는 질병으로,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마귀가 와서 우리의 확신을 흔들기까지 우리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우는 사자와 같이 덤벼듭니다. 이 때에 우리는 시험에 빠져 스스로 자신의 체험도, 확신도 모두 거짓된 것으로 생각하여 스스로 속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다른 모든 입장을 확실하게 해 주는 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이 확신, 이 소망에 있어서 제일 되는 성분 또는 가장 우선적인 요소는 우리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아는 더 깊은 지식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보다 더 큰 소망과 확신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은 변함이 없이 동일하시며 자신의 목적을 바꾸지 아니하신다는 것보다 더 위안과 위로를 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이든지 시작하시면 반드시 마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계획하셨고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며,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약하셨기 때문에 안전한 것입니다.

2. 두 번째 간구

이제 사도가 두 번째로 드리는 특별한 간구인 “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 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르게 될 영광스러운 상태에 관하여 알게 되기를 위하여 사도 바울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르게 될 영광스러운 상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것으로 구속받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 안전하게 모아져서 이 위대한 구원의 유익들을 영원토록 누리게 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언어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참된 개념을 전달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언어의 가치를 우리 죄가 너무나 격하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어진 그 영광에 대한 말씀에 관심을 집중 시키면서, 사도는 “ 영광의 풍성 ”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높은 것 위에 가장 높은 것을 놓고 있습니다. 영광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영광의 풍성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이 초월적인 영광에 대하여 무언가 약간의 개념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범주를 훨씬 벗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일들에 대하여 성경에서 듣게 되는데, 그 영광의 중심적인 핵심은 우리가 그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것이면 족합니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은 죽음보다 더 훨씬 나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죽음에 대해서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영광에 대한 정보들을 너무나도 많이 듣습니다. 그 모든 것에 상상을 더하여도 그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들어갈 곳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중보기도 할 때에 이러한 사실들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소원 하게 되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성경: 엡1:19-23절

1장19~23절: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아멘

이제 에베소의 성도들을 위하여 사도가 드린 세 번째 간구 내용을 살펴보기에 이르렀습니다.

1.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

여기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더 많은 능력들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지극히 크심을 알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가 무엇인지 알게 하려는 중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면 우리의 두려움은 사라져 버리며, 우리의 구원에 대한 새로운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죄와 실패들로 인하여 “ 우리가 당도할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 ”을 누릴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또 나 자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평생을 내 영적인 존재를 개발하고 양육하는 데만 쏟는다 하더라도 그 영광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영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수도 없이 생각하고, 결심했으며, 실행에 옮겼지만, 거듭하여 실패하는 무능력을 스스로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나의 부패되어가는 몸을 생각할 때에도 내가 영광의 상태를 누린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고 상상할 수조차 없음을 인식합니다. 나는 세상에서 살면서 직업을 가지고, 또한 사업을 하면서 가족과 나를 위해 행해지는 모든 것들로 인하여, 그리고 삶과 환경의 압력들이 다 합하여 내가 이 영광을 위하여 준비하는데 시간을 내도록 허락하지도 않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강력한 원수 마귀는 마치 우는 사자가 먹을 것을 찾아 으르렁거리고 다니면서 나를 공격하려고 매복하고 있습니다. 나는 참으로 교활하여 언제나 형제들을 송사하는 자이며, 죄와 실패와 게으름에 빠져 사망 앞에 무기력하게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몰려오는 이와 같은 생각들로 인하여 “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 ” 을 누린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언제나 “ 하나님의 은혜 ” , 즉 “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여기 이렇게 있다고 말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 모든 일은 시작 되었고, 마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무궁토록 전능하신 능력이 우리 안에서 행사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로 인하여 죽음의 권세까지도 우리를 어찌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도 살아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 흠도 티도 주름 잡힌 것이나 그러한 것이 없는 ” 온전한 모습으로 서게 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서 계속하여 강력한 활동을 하신 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2.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

“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 여기서 “ 따라 ” 라는 말은 “결과” 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믿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하심을 떠나서는 전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성도의 삶 전부는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가 될 것이며, 우리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도 다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로 성도들 모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계신 “ 부활 ” 은 이미 우리 안에 일어난 영적인 부활을 말합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늘 인식하고 살아가는 상태, 즉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에 대한 견고한 믿음으로 확신이 있는 상태에서 삶을 영위하는 믿음 있는 성도를 지시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모두 이 진리에 비추어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시편 51편에서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던 다윗처럼, 우리에게 있어서도 구원을 받았다는 이 사실을 인식하게 될 때에 놀라워하고 감격하여 기쁨으로 찬송하는 삶을 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을 시작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진행하실 것이며 결국 그 일을 마치실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결국에는 그 분 앞에 온전하고 완벽하고 철저한 사람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앞에 면류관을 던지고, “ 기이함과 사랑에 빠져 찬미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

3.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능력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지, 우리의 우리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인식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모든 성도들마다 필요로 하는 가장 긴박한 실제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거의 모든 성도가 당하는 고통의 주요 원인은 우리에게 이미 들어온 구원의 위대함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도들 모두가 함께 구원의 위대함을 누리고 있으나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이나 서신서들 같은 신약성경을 대할 때, 초대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정말 기쁨이 있었고, 감격적인 것이 있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뻐하라는 것은 신약 성경의 전체 주제가 되며, 그리스도인은 기뻐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기뻐하기 보다는 침울해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마치 어깨에 큰 짐을 메고 끝없는 염려를 가지는 것과 같은 인상을 풍기며 살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런 저런 사실들에 의해 우리의 기쁨을 빼앗기고, 우리의 구원의 감격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구원의 위대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지나가고 있는 이 삶의 과정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며,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완전함과 위대함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고, 또 성도로서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인데, 만일 하나님의 능력이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상황은 철저하게 절망적이어서 한 순간도 성도의 삶을 영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것을 인식한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 염려할 것이 없으며,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일들에 대하여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모든 일을 기쁨으로 대할 수 있는 궁극적인 원인이 되며, 그런 생각은 결국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반드시 “ 선 ” 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 (요일4:4) 이제 유다서 마지막에 있는 축도로 시선을 돌려봅시다. “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 지어다. 아멘 ” (유다서 1:24~25)

그분만이 우리로 실족하지 않게 지키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그렇게 지키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흔들리지도 아니하며, 주어진 환경이 어떠하든지 결코 실망할 수 없으며, 소망이 있는 자신의 미래가 어찌 될 것에 대하여 인식함으로 인하여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놀라운 특권을 인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오고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이 새 생명의 기이함과 이적을 더욱 인식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은 “ 나의 위로요 ” “ 나의 위안이요 ” “ 나의 능력이요 ” “ 나의 보증입니다 .” 하나님은 내가 영광 중에 그 앞에 서게 되기까지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4. 교회는 그의 몸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편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더 부가적인 것을 대하게 될 것인데, 사도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신 것을 우리가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는지를 우리가 알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마지막 두 구절인 “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 라는 말씀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하는 것을 봅니다.

또 이 서신의 2장에서 교회를 건물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 요긴한 모퉁이 돌 ”이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기초이며, 선지자들은 “ 하나님의 집 ”의 지체들입니다. 그는 또한 교회를 위대한 제국에 비유하여 설명하며, 교회를 신부로 묘사하고 있고, 우리 주님이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비교하여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 모든 묘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시키려고 의도된 것인데, 특별히 우리가 연구하려고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이 본문의 두 구절에서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구절의 문맥으로 보아 그분 안에 있는 강력한 능력이 어떻게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지와 “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며 얻으신 기업 ”을 우리가 누리게 될 것임을 확신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 있습니다. 이런 정황들을 생각해 볼 때, 본문의 밝히고자 하는 “ 이런 능력에 대한 진리를 인식하는 방식 ”은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인식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려 놓고서 그 관계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 원리에서 우리가 첫 번째 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 그리스도 ”에 대하여 유기적이고 생명적인 방식으로 “ 연합하여 ”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몸은 여러 부분의 집합으로서, 손과 발 팔 다리 등등이 합하여,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몸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묶여 있어서 언제든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살아있는 생명적인 연결을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연합이며 신비적인 연합으로 불가분의 연합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을 함께 나누는 유기적인 것이기 때문인데, 그것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또한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며,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영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두 번째 로 생각해 볼 것은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로 오직 그분만이 유일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다른 권세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생명의 원천과 중심이 되시니, 그 몸은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의 활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없으며 한 순간도 살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 번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게 되면, 임의로 그 몸 안에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가 없고, 그분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미끄러져 실족하여 잠시 동안 세상에서 방황한다고 할지라도, 영원히 그렇게 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고, 그것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그 연합은 유기적이며 생명적이며 영적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떠난 성도라는 말은 있을 수 없는 말이며, 단지 병이 들어 있어서 그 몸이 아니라고 잘못 인식하거나,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뿐, 성도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존재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므로, 그들의 삶이 어떠하든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몸입니다.

세 번째 로 살펴 볼 것은 “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으로 몸을 충만케 한다는 말씀으로서, 이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한다 .”(골2:9)는 말씀과 같은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충만이 거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내 몸의 각 부분은 내 생명과 나로 충만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생명과 내 존재는 내 몸 각 부분에 있고, 내가 존재하는 것을 멈추는 그 순간 내 몸의 각 지체는 죽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손가락에 이르는 신경계를 절단하고 핏줄을 끊어 버리면, 그 손가락은 내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을 곧 멈추어 버리는 것처럼 내 생명 전부가 각 지체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에 대하여 주어진 놀라운 진술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인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죄와 육체와 마귀의 세력에 의한 유혹을 당하고 있을 지라도, 그러한 것들에 영향을 받아 망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속성과 능력들과 은혜들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 안에 생명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힘의 원천이며, 우리들 각 지체들을 활동시키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생명 되시는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로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생명의 힘을 의지하여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힘”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약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한 에너지를 받아 살아가는 강한 지체들임에 틀림없으니, 실패와 좌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욱더 그 기능을 연마해 나감으로서 그 무한하고 유용한 에너지가 있음을 발견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 능력에서 능력으로 ,” “ 영광에서 영광으로 ” 나가서, 급기야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충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완전한 사람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5. 최종적인 완성

이제 우리는 에베소서 1장에 대한 결론 지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이 “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 알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승리의 삶을 사는 비결로서 이런 일들을 인식하는 것을 능가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에 있어서 풍요로운 체험을 누리는 길은 신약성경의 이와 같은 진리를 포착하고 붙잡아 적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체험에 이르는 고속도로는 진리라는 것을 항상 인식해야만 합니다. 오직 체험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오히려 “비참과 그늘에 매인” 삶으로 전락시킬 우려가 너무나도 큽니다.

사도 바울의 최종적인 말은 “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아는 것 ”입니다. 우리는 필요로 하는 힘이 몸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인식하고, 언제나 그곳으로부터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는 이 능력을 이해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드러난 그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 그 능력은 얼마나 놀라웠던 가를 발견하게 될 것인데, 그것은 지옥과 악의 모든 세력들, 사망과 무덤이 그를 붙잡아 놓으려 할 때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으로 인하여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도 그를 붙잡아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에서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되신 주님을 “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 ”에 앉히심으로 이 순간에도 바로 거기에 계시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어떤 역할을 감당하시든지, 하나님의 권위의 상징인 우편에 있다는 것은 그곳에서 영예를 받고 있다는 표지로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권세와 능력들 위에 뛰어난 권위와 영예의 자리에 놓여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이 이 모양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권세들의 세력 때문인데, 하나님의 아들은 그 모든 권세들보다 더 훨씬, 무한하게 뛰어나십니다. 그는 그들이 입은 엄위와 존영과 권세와 지위보다 더 무한하게 큰 것을 가지고 계시는 분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는 선한 천사들, 복 받은 천사들보다도, 모든 권세들 위에 높이 계십니다.(히 1:5,14) 그리고 만물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데 그 모든 것의 주인이 되셔서 모든 만물을 통제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복되신 주님을 영적인 세계나 물질세계를 다 포함한 모든 만물을 장악하는 자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욱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성을 지니고 이런 뛰어나신 영광 중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예수님 안에서 인성을 높이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 안에 있는 인성이 모든 권세와 모든 권위를 입고 거기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의 분량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권세와 이 모든 영예와 모든 존영을 그에게 주신 것은 교회를 위하신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 그가 이처럼 하신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이 모든 능력을 행사하게 하기 위함인데, 자기 백성들을 끝내 구속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흠 없이 알현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만 하신 일도 아니고, 아버지와 영광을 함께 다시 누리기 위한 것만도 아니며, 우주 위에 이 큰 권세를 사용하시고 누리기 위하여서만도 아닙니다.

물론 이런 모든 것들이 포함 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 우리를 위하여 ”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내가 있고, 우리가 그의 신비적인 몸의 지체가 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특권이며, 영예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어떤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또는 주목할 만한 인물이 되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치며 다투고, 노력하며, 그것을 위하여 많은 희생들을 합니까? 그런데 성도들은 세상에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주님의 영광의 높은 지위를 함께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 그 안에 있다 ”고 하는 사실과 이 존귀가 여전히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 (고후4:17)라는 말씀의 뜻을 알게 될 것이며,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담대하여 기쁨으로 찬송하는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 엡2:1-3절

2장 1~3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1. 서 론

이제 우리가 에베소서 강해의 2장에 이르게 되었는데 우리가 이미 배웠던 1장의 논증에 관해 이해하지 못하면 2장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1장의 논증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주장하고 있는 가장 크고 중요한 주제는 “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하심이라 .” 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세우신 계획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어떻게 활동하셔서 이루어 가시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진술들을 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 자신에게 달린 일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임을 입증해 나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 죄사함 ”을 얻었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리와 후사와 놀라운 기업을 받게 된 “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 ”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을 인쳐 주셨음을 확신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하늘에 속하여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이미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신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이미 이루신 일이라는 그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성령의 인치심에 의해서입니다.

이런 확신이 없어서, 이지적으로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이 큰 영광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렵고, 벅찬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인치심을 통해서 확연하게 보이는 것처럼 믿어진다면, 어떠한 환경이 주어질 지라도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죄 안에 있는 사람

당시 바울의 서신을 받아 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믿고 있었으나 그들의 신앙은 아직 어린아이들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이제 그들이 이해의 눈이 열려져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크기와 위대성과 장엄함에 대해서 붙잡아 장성한 성도로 성장하여 주변의 이교주의자들에게 현혹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믿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 에 관하여 명확히 알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붙잡기 전의 과거에 우리가 어떠한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전에는 이 구원의 위대성에 대하여 올바른 개념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출발하는 지점은 우리가 처한 정확한 위치, 곧 부패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 수고하고 무거운짐 진 자 ”들의 친구 정도로만 인식하여 우리의 어려움을 도와주시는 분이기에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구속의 전체를 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속을 알기 위해서는 언제나 우리의 죄의 깊이를 인식해야 하며, 왜! 성자 하나님 되시는 분이 인성을 스스로 취하시고 어린아이로 태어나야만 했으며, 갈보리에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인간이 타락하여 죄 가운데 있다고 하는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거부감을 가집니다. 그들은 진화론적인 생각으로 가득하여, 사람은 언제나 발전하고 개선되어 종국에는 선을 이루고, 지상 낙원을 이루고 살 것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사람은 부패하여 점점 더 악해 지고 흉포해 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창조 이래로 언제나 그래왔듯이 사람들은 더욱 교활해지고, 더욱 흉포해지며, 문명이 발달할수록 세상이 더욱 부패되어간 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앞으로 점점 진화하여 완전한 상태를 이룰 것이라고 합니다. 이 뻔뻔스러운 사람들의 말은 모두 허위라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철학이 발전하고, 심리학이 발전하고, 새로운 교육과 문화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도덕성이 교육과 환경에 의해서 완전한 모습으로 진전되는 현상은 결코 없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른다면 문명의 발달로 미개인들이 사라짐에 따라 범죄도 줄고 죄의 인식도 선한 상태로 바뀌어야 할 터인데, 전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악하고 교활해진 범죄의 형태만을 대하게 됩니다.

세상은 절대로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악으로 치닫는 다는 성경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은 사실을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으며, 여러 사실들을 뛰어 넘어서는 추상적인 방법이나,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 이성으로 해결하려고 하며, 그저 증상들을 진단하고 어떤 의미에서 수면제와 진통제와 해열제들을 주면서 잠시 동안 편안하게 해 주면서 우리가 건강하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함으로서 근본적인 문제를 노출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회개하라는 말씀으로 사실적으로 죄 앞에 대면하게 하며, 근본적인 원인으로부터 접근하여 잘못된 문제를 파헤치고 도려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참아내기가 힘들고, 아프지만 진정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 구절에서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죄에 빠진 인간에 관한 성경적인 관점을 4가지로 요약합니다.

첫 번째로 “ 허물과 죄들 안에서 죽었던 ” 것이 인간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의 겉모습으로는 살아있지만 실상은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어 있었던 것을 인식할 때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의 위대성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정신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해야 하는데, 세상이 “ 공중 권세 잡은 자 ” 에 의해서 지배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세상에서 작용하고 있는 악의 원리에 의해 지배받게 됩니다.

“ 공중 권세 잡은 자 ” 란 마귀, 사단으로 이 세상에서 신으로서 나타나며 행세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영위하는 모든 유의 삶을 결정짓고 인간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악한 영적 권세와 힘을 조정하는 자입니다. 아무리 선하게 보이고 아무리 좋게 보일 지라도 그들에 의해서 조장되어지는 것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들로 결국 망하게 하는 조건과 상황에 사람이 빠져들도록 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 성경처럼 더 실제적인 면을 다루는 것은 없으며, 성경이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라는 개념처럼 우스운 것은 없습니다. 사실 세상이 이처럼 뒤범벅이 된 상태에 빠져 있는 것도, 성경이 사람에 관해서 말하는 진리를 사람이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의 상태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라는 것이며 그것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지 못하여, 하나님의 생명 밖에 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두 번째로 인간이 이런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며, 그런 일에 관심도 두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원한 삶에 대한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의 영화로움에 대하여 접하게 될 때에 오히려 그것을 지겹게 여기고 싫어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어떠한 종교를 만들어 냅니다. 어째서 사람이 이런 상태에 빠지고, 또 그러한 조건에 빠뜨립니까? 그것에 대하여 바울은 2절에서 “…….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 고 말합니다. 그러니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고통이 되는 것은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이 이 모든 고통과 재난을 불러온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죄는 어떤 자질이 모자란 것이나, 단순히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너무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며 의도적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불순종으로 나타나며, 순종과 떨어져 있는 것이고, 우리를 지시하시는 하나님의 권리와 다투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에 의해서 지어졌으며 창조 되었다고 하는 생각을 싫어하고,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상에 대하여 모욕감을 가지며 분개합니다. 자신이 최고이며,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자기 위에 있다는 생각을 좋아하지 않고, 모든 것 위에 있어서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는 생각을 좋아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반대하며 하나님께 대적하고 있는 사람의 본성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 즉 반역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고통은 그 불순종에서 모두 기인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교제하며,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만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인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모든 방면에서 자신의 일을 처리할 수 있고, 누구에게도 심지어 하나님께로부터도 아무런 도움이 필요치 않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전적으로 불순종하고, 스스로를 주장하며, 역설하며, 자기의 충족을 자랑하며, 그 안에서 과대망상에 빠져 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사람이 타락하여 지은 죄의 결과로 죄의 노예가 되어 그 악의 권력에 의해 지배를 당하고, 세상의 정신에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 중에 잉태되어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됩니다. 그 타락한 죄의 본질은 마음에 있기 때문에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할 수가 없는 본질상 부패한 악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치명적으로 실수하는 것은 죄의 본질과 성향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고 행위와 행동들의 차원에서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 죄 ”는 모든 도덕적인 행동들이 포함 되지만 본질은 아닙니다. 죄는 “ 네 마음과 목숨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할지니라 .” 는 말씀에 일치되는 삶에 정 반대 되는 행위, 즉 “ 죄 ”의 본질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 죄 가운데 있는 우리의 상태와 조건을 묘사하고, 곧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붙잡기 전에 우리가 어떠하였는가를 묘사하였고 두 번째로는 어떻게 해서 그런 상태에 빠져 있었는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 번째 요점 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실제로 어떻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는 실제적인 방식으로 육체에 대한 투쟁을 다룹니다. 사도는 죄 가운데 빠져서 은혜 밖에 있는 사람의 상태를 “ 허물과 죄 ”의 생활이라고 하는데, “ 허물 ” 이라는 말은 진실한 것과 정직한 것에서 실족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정직하고 진실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지어졌으나, 그것에서 실족하고, 벗어나 더 이상 정직하지 못하여 마치 땅바닥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과 같이 올바른 위치에서 벗어나 수직에서 기울어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 죄들 ”이란 말은 내 안에 잠재해 있는 죄의 속성들이 밖으로 표출되는 외적인 표징들을 가리킵니다. 육체 내부에 숨어 있던 죄의 속성이 악한 행동으로 나타나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의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너무도 헌신적이고 너무도 훌륭한 삶을 살다가 간 자연인들을 생각 할 때에 그들이 결코 육체의 욕심에 따라서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의 타락 이래로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인류 전체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 육체의 원하는 것 ”들에 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굶주리고, 목마르고, 잠을 자고 싶어 하고, 쾌락을 원하고, 행복하기를 원하고, 안일에 빠지기를 원하고, 성적인 것을 원하고, 매혹적인 것을 바라는 욕망들을 생각할 때에 그 모든 것들은 우리 몸의 본질적인 진수가 되는 요소로, 본성적이며, 본능적으로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일로서 선하게 창조된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들은 본질적으로는 선하며,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위해서 사는 것이 잘못입니다.

배고파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그 욕구를 체우는 것 또한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먹기 위해서 산다면 그것은 육체의 욕심입니다. 만일 먹고 싶은 욕망이 우리를 통제하고, 육체의 원하는 것으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으면 그것은 육체의 욕심에 대한 하나의 표증입니다. 마찬가지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마시는 모든 것들이, 만일 마시는 것을 즐기기 위해서 한다면 그것도 육체의 원하는 것이 되듯, 잠을 자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잠꾸러기가 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있어서 쾌락은 모두 옳으며, 즐거움에는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지만 그 쾌락에 지배되고 즐거움에 지배되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다툼이 있다면 그것은 육체의 원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안에는 육체의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주실 때에 그것은 복종되도록 되어 있었고, 제자리를 지키도록 되어 있어서 우리는 절제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 육체의 원하는 것들 ”이 통제권을 가지게 되어, 권위의 자리에 올라서서 우리를 충동하고 강권하는 일들을 하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의 힘은 너무나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 육체의 원하는 것들은 마음에도 해당이 됩니다. 우리의 관심과 행동을 통제하고 조종하고 지시하는 것이 어떤 것이든지 마음에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무엇을 위해 살든지 그것은 마음의 원하는 것이요, 마음의 욕심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가장 낮은 수준에서의 마음의 욕심을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질투, 시기, 악의, 교만, 혐오, 분노, 성냄으로 그것들은 마음의 원하는 것들의 나타냄에 불과합니다.

좀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서 그 문제를 살펴본다면, 야망에 따른 욕심입니다. 부요, 명예, 권력, 권세 등 성공하고 싶은 욕심들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더 수준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지적인 욕구 자체가 죄가 되지는 않지만 그러한 것들에 의하여 지배당하는 삶이 죄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의 원하는 것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육체의 욕심이라는 통제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욕심의 상태 가운데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으며 하나님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출할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뿐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를 앙망하는 것이며, 그의 충만한 데서 받는 것이며, 그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만 우리는 안전합니다.

이제 우리는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 관한 네 번째 요점 을 살펴보기에 이르렀는데, “ 불순종의 아들들 ”은 본질상 “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최종적인 진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미 숙고해 본 그러한 조건에 있는 사람에 관하여 무어라고 말씀하시며, 또 어떻게 생각하시며 무엇을 행하시는가를 보여 줍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이고 우리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시는 방식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 우리도 다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 ” 였다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 하나님은 사랑 ”이시라는 표현을 좋아하며 “ 하나님의 진노 ”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기를 꺼려하며 “ 하나님의 사랑 ” 안에 모든 것을 포함시켜 감추어 버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임에 틀림이 없지만 역시 동등하게 공의와 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경의 맨 처음부터 그러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찾아 오셔서 그에게 심판을 선고하시는데, 그는 아담을 동산에서 쫓아내고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셨습니다. 화염검은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공의의 칼, 하나님의 진노의 칼, 죄인을 벌하시는 심판의 칼입니다. 처음부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과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또한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이스라엘 자녀들의 여러 징벌, 민족이든 개인이든 간에 징벌하시는 것들이 하나님의 공의에서 나타납니다. 이제 신약의 최초의 설교자인 세례 요한은 “ 회개하라 ”고 하였으며, 자신에게 나온 바리새인들에게 “ 누가 너희더러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사랑의 하나님에 관해서 가장 놀라운 진술로 흔히 요약이 되고 있는 구절 속에서 그 하나님의 진노를 발견한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3:16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3:36에 보면 “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되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 라고 합니다.

그러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까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개

에베소서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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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에베소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12월 8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마 5:18; 요 10:35)와 사도 바울(갈 3:6; 딤후 3:16)의 증거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진술된 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이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으로 여전히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에베소서 서론 1장: 교회의 기초 2장: 교회의 구성원 3장: 교회의 세계성 4장: 교회의 일체성 5장: 교회의 성결성 6장: 교회의 전투성 서론 에 베소서의 저자 는 바울이다.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3:1, “. . . 갇힌 자된 나 바울은.” 초대교회에 익나시우스, 허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툴리안, 이레니우스 등은 본 서신을 인용하며 그것이 사도 바울의 서신임을 증거하였다. 본 서신의 수신자 는 에베소 교인들이다. 몇몇 고대 사본들에 ‘에베소 교인들에게’라는 구절이 생략되어 있으나, “에베소에 있는”이라는 구절이 있는 사본들과 역본들의 압도적 증거들이 있고, 1) 무라토리 단편,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등 초대 교부들의 증거들도 있다. 본서의 저작 연대 는 주후 60년경일 것이며,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로마 감옥에서 썼다고 본다(3:1; 4:1). 본서의 특징적 주제 는 교회이다. 본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대해 증거한다. 본서에는 ‘교회’라는 말이 9번 나온다(로마서에는 5번, 고린도전서에는 22번, 고린도후서에는 9번, 갈라디아서에는 3번 등). 본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 은 다음과 같다. [1-2장, 교회의 본질] 1장, 교회의 기초 2장, 교회의 구성원 [3-6장, 교회의 속성] 3장, 교회의 보편성 4장, 교회의 일체성 5장, 교회의 성결성 6장, 교회의 전투성 1장: 교회의 기초 1-14절,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 [1-2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평안]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 그가 무지하여 예수님 믿는 자들을 핍박하였을 때, 주께서 그를 부르셨고 사도로 삼으셨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를 위해 세우시고 보내신 자를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며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안을 기원하였다. 은혜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성화(聖化)의 은혜이며, 평안은 그 은혜에 근거한 마음의 평안과 육신적, 물질적, 환경적 평안을 가리킨다. [3-6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 때문에 그를 찬송하면서 그의 구원을 세 단계로 설명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이시며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이시며 셋째는 성령의 인치심이시다. 오늘 우리도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찬송해야 한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다. 그것은 땅에 속한 것 곧 육신적, 물질적, 현세적 복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것 곧 영적, 내세적 복이다. 현세적 복도 복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죽으면 다 끝나는 복이다. 그러나 구원은 영원한 천국과 영생의 복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창세 전 선택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의 기쁘신 뜻대로’ 된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근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의 기쁘신 뜻대로 인류 중 어떤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셨다. 그는 그들을 아셨고 사랑하셨고 택하셨고 구원과 영생으로 예정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 자이시며(요 8:58)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영광을 누리셨던 자이시며(요 17:5) 태초부터 계신 자이시며(요 1:1) 영원 전부터 계신(미 5:2) 신적 구주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죄인들을 택하시고 그들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轉嫁)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죄를 대속(代贖)하시는 제물이 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었다. 하나님의 선택의 일차적 목적은 택자들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함을 보인다. 죄는 사람 앞에서는 감출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혜롭고 거룩하고 의롭게 지음을 받았으나(전 7:29; 골 3:10; 엡 4:24) 범죄함으로 더러워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을 구원하셔서 다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를 계획하신 것이다. 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실패치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그들은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지만, 양자(養子)로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었다(요 1:12; 롬 8:15). 하나님의 선택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선택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은혜이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죄인들은 지옥 갈 자신들을 택하시고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할 것밖에 없다. [7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창세 전에 택함 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었다. 그들의 모든 죄는 씻음 받았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속(贖)함을 증거한다.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贖)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다(벧전 1:18-19). [8-10절] 이는( 헤스 )[그 은혜를]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계획]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뜻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대속(代贖)의 이치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비밀이었다. 구약 백성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러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후에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유일한 길이시다(요 14:6).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는 시간표가 있었다. 아담의 창조 후 6천년의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었다. 아담 후 천년 경에 노아라는 인물이 출생하였다. 아담 후 2천년 경에는 아브라함이 출생하였다. 아담 후 3천년 경에는 다윗이 출생하였다. 아담 후 4천년 경이 되어 ‘때가 찬 경륜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들 곧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이 다함께 구원을 받는다. 디모데전서 2:5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증거하였다. 그는 지금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나 지상에 있는 성도들이나 다 한 몸, 한 가족, 한 교회, 한 나라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모든 택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교회가 된다. [11-12절]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그리스도를 먼저 바랐던(혹은 믿었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役事)하시는 자’ 곧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우리의 예정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근거했다. 이 하나님의 예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 곧 천국 백성이 되었다.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원어는 6절과 14절의 말과 동일한데, 그것은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 천국 백성된 최종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다. [13-14절]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그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救贖)하시고[그 얻으신 것의 구속(救贖)의 때까지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뜻이다. ‘너희도’라는 말은 11절의 ‘우리가’라는 말에 이어진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에베소 교인 너희도 구원의 복음 진리를 듣고 그것을 믿었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안에서 또한 믿어’라는 말은 ‘그것을 믿어’라는 뜻이다. ‘그것’은 바로 앞에 나오는 구원의 복음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오셨다. 성령의 인치심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선택과 구속(救贖)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세 번째 단계이다. 14절의 ‘이는’( 호스 )( 남성 관계대명사)이라는 말은 앞절의 성령을 가리킨다. 원어에서 ‘성령’은 중성명사이지만, 남성 관계대명사가 사용된 것은 성령의 인격성을 증거한다. 성령의 인치심, 곧 성령께서 구원받은 성도 안에 거하시는 것은 성도가 끝까지 견디는 일에 보증과 보장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주께서 피흘려 구속(救贖)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은, 모두 다 끝까지 보존되며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성화(聖化)를 이루다가 마침내 영광에 이를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사모하며 받아 누리자. 둘째로, 우리는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되도록 실제적으로도 힘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은 것을 감사하며 찬송하자.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로 영원한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로 복음을 깨닫고 믿어 구원 얻게 하신 것을 감사하며 찬송하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자. 15-23절, 사도 바울의 기도 [15-16절]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주 예수께 대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이를 인하여’라는 말은 에베소인들의 구원받은 사실을 인하여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로 인해 감사한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기 때문이며 또 그들의 믿음이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으로 나타난 진실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성도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인한 감사보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고 그의 믿음이 참되며 자라고 있다는 사실로 인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시고(딤전 2:5) ‘마지막 아담’과 ‘둘째 사람’이시고(고전 15:45, 47) ‘의인’이시다(행 7:52). 하나님께서는 또한 ‘영광의 아버지’이시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은 세 가지이었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주시기를 구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죄사함의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다(요 17:3). 그러나 에베소 교인들은 이제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그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혹은 영]’이 필요했다. ‘계시(啓示)’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셔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마 11:27; 막 4:12). 신앙생활의 시작에도 또 진행에도, 하나님의 주시는 지혜와 지식이 필요하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지식을 이미 얻었으나 그의 지식은 자라고 확고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큰 복이다. [18절]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둘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구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은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며 그가 우리에게 주신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은 천국의 영광과 복을 가리킨다. 그것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롬 8:18)이며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고후 4:17)이며 또 ‘지극히 귀한 보석 같은 영광’(계 21:10-11)이다. [19절]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셋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인들로 믿어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죄로 인하여 어두워졌고 심히 무감각해졌던 우리를 깨우쳐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그의 능력의 일이시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이 결코 다시 살 수 없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능력의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이 능력이,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신 자들을 오늘날도 구원하신다. [20절]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역사(役事)하여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 오르게 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의 표이었다. 죽음은 인류 역사 수천 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큰 세력처럼 보였고, 사람의 절망들 가운데서 가장 큰 절망처럼 보였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가장 큰 절망을 단번에 극복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의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에서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심도 놀라운 사실들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사실들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다. 사도행전 1:9, 10,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베드로전서 3: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21절] 모든 정사(政事)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 ‘정사(政事)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모든 이름들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셨다. 빌립보서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물론, 불신자들이나 이방 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무시하고 그의 신적 영광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무지한 세상이 그를 인정하지 않고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뿐이지, 그는 아버지와 함께 동등한 권세를 가지시고 동등한 영광을 누리신다. [22절]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오른편에 앉게 하심은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유의 주이시다. 만물은 그의 발 아래 있고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시다. 만물 중에는 인류의 원수인 사탄도 포함되며 사탄도 마침내 그리스도의 발 아래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발 아래 굴복할 것이다(시 110:1; 롬 16:20). 높임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골로새서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머리’라는 말은 ‘우두머리, 주’라는 뜻이다. 그가 교회의 우두머리이시므로 교회는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또 교회의 지도자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마 23:10). ‘머리’라는 말은 몸의 머리라는 뜻도 가진다. 머리와 몸이 나뉠 수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잠시라도 분리될 수 없는 생명적 관계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잠시라도 존재할 수 없다. [23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개인이시지만, 또한 새 인류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류가 선택되었고(엡 1:4)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며(엡 1:10) 구원받는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모두가 한 새 몸을 이룬다(엡 2:15). 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표현된다.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적으로, 온 세계적으로 교회를 통해 충만히 이루어지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전도, 곧 지역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의 기지(基地)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충만한 성취인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충만한 성취이며 완성이다. 교회의 충만은 수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 전체가 다 구원받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성경과 역사가 증거하는 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역적으로, 시대적으로 쇠퇴하는 단체가 아니고 수적으로 성장하고 충만해져 가는 단체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의 기도의 내용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내용이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자. 우리는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더 아는 복을 누리기를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히셔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더 깨닫고 그 천국과 영생의 영광을 더 깨닫기를 원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무지하고 연약한 우리를 그의 능력으로 구원하셔서 구주 예수님 믿고 구원 얻게 하셨다. 우리는 오늘도 그의 능력을 의지하며 이 험한 세상을 산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의 역사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가 교회의 머리 되심을 알고 그에게와 그의 모든 말씀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천사들과 모든 사람들의 이름들 위에 뛰어나신 이름이시다. 이 세상은 그를 모를지라도, 우리는 그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영광을 찬송해야 한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과 주님과 왕이시다. 교회는 오직 성경에 계시된 대로 그의 뜻과 교훈에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교회의 본분은 오직 성경말씀을 믿고 복종하는 것이다. 2장: 교회의 구성원 1-10절, 은혜의 구원 [1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성도의 영혼은 과거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이었다. ‘허물과 죄’란 아담의 첫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원죄(原罪)와 이 원죄 때문에 각 사람이 실제로 범하는 자범죄(自犯罪)를 포함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경고하셨던 대로(창 2:16-17), 죄의 보응은 죽음이다(롬 6:23).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는 죽은 자이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죽은 영혼은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의와 선을 행하지 못한다. [2절]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구원받기 전에 사람들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 이 세상 풍속은 죄악된 풍속이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사탄이다. 사탄은 ‘이 세상 임금’(요 12:31), ‘이 세상 신’(고후 4:4) 등으로 표현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3-4에서,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어둡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은 온 세상이 악한 자[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요일 5:20).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믿음과 순종을 주시지만, 사탄은 사람들 속에 불신앙과 불순종을 일으키며 이 세상에 죄악된 풍조를 조장한다. [3절]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도 과거에 불순종의 아들들처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었다. ‘육체’라는 말( 사르크스 )은 ‘죄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고 본다. 돈에 대한 욕심, 이성에 대한 욕심, 세상 권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 등이 그러하다. 이것들은 다 세상적이요 죄악되다. 구원받기 전의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 [4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의 구원이 왔다. 우리가 구원받은 원인과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은혜밖에 없었다. 다른 원인과 이유는 없었다. 우리 속에는 어떤 원인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었고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무능력했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했고(렘 17:9), 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렘 13:23).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확증되었다. [5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다. 죽었던 우리의 영혼은 새 생명을 얻었다. 이것을 중생(重生, 거듭남)이라고 표현하며,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일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 되었고 그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구원이다.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올리우셨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 믿는 모든 자들도 그와 함께 새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었고 천국을 상속받는 자들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은 우리의 구원과 그 특권에 대한 성취와 확증이며 상징이 되었다. [7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하신 자비와 은혜를 나타내심이었고 그 은혜는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온 세상에 밝히 전파되고 있고 증거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피 흘리신 죽음은 순전히 죄인들을 대신하신 것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시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대속물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죄가 제거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큰 희생이었고 우리에게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8절] [이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얻었으며].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그의 은혜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구원의 수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다. 믿음은 지식과 찬동과 의지를 포함한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이며(요 6:35, 37) 그를 영접하는 것이며(요 1:12)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롬 6:17). 믿음은 입술로 고백된다(롬 10:9-10). 물론, 참된 믿음은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약 2:17). 참된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요 구원에 필수적이지만 사람의 어떤 공로적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율법 순종의 행위와 대조되는 어떤 것이다(롬 4:5). 믿음은 빈손과 같다.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기 위해 빈손이 필요하지만, 빈손은 자랑할 만한 공로가 될 수 없다. 회개하는 상한 심령과 진실한 믿음은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그것은 공로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한다(요 3:16).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정상적이고 정당한 수단이며, 불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며 멸망에 이르는 길이다(요 3:18, 36).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구원을 얻었다’는 원어( 세소스메노이 )(완료분사)는 믿는 성도가 이미 구원을 얻었음을 보인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로 더러워진 자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법적인 구원을 가리킨다.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구원받은 성도는 현재 성화를 이루다가(빌 2:12)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롬 5:9-10). [8-9절] . . .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선물임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것’( 투토 tou’to )은 ‘구원받은 사실’을 말한다. 구원은 우리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랑하지 못한다. 성도의 미래의 영광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핏값으로 사신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이다(롬 8:30). [10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들을 위해서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하게 사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려주셨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디도서 3:4-5,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重生)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8-9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이나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일이 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우리는 이 귀하고 복된 사실을 감사하자. 셋째로, 구원의 목적은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말하면서 자신의 나태함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하되, 늘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게 살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며, 영혼 구원의 전도와 참 교회 건립에 힘써야 한다. 11-22절, 하나님과 화목케 하심 [11-12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外人)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러므로 생각하라”는 말씀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살았고 구원을 받았으므로, 과거의 신분과 상태가 어떠하였으며 거기로부터 어떻게 현재의 신분과 상태로 구원을 받았는지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에베소 교인들은 과거에 구원받기 전에 어떤 신분과 상태에 있었는가? 본문은 그들의 구원받기 전의 신분과 상태를 일곱 가지로 표현한다. 첫째로, 그들은 ‘육체로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하나님을 경외함도 없는 자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과거에 다 이방인이었다. 둘째로, 그들은 전에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었다. 무할례당은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무할례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언약과 상관없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과거에 다 무할례자이었다. 셋째로, 그들은 그때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백성에게 율법에 암시된 구주이셨다. 구약 백성은 율법 중 제사법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밖에’라는 원어( 코리스 )는 ‘상관없다’는 뜻이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상태에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구주가 없었다. 그들은 구주를 알지 못했고 그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 우리는 과거에 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넷째로,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요 선민(選民)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셨고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셨다. 그 나라에는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과 규례 밖에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의 복과 상관이 없고 그 복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우리가 과거에 그러하였다. 다섯째로, 그들은 과거에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外人)’이었다. ‘약속의 언약들’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에게 약속하셨던 복을 말한다. 그 핵심적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창 17:7-8; 렘 30:22; 31:33; 겔 11:20; 14:11; 36:28). 그것은 또 영생과 평안의 복을 포함한다(신 5:33; 잠 3:16-18). 할례는 그 하나님의 약속의 표이었다. 할례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그런 복이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과거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外人)이었다. 여섯째로, 그들은 구원받기 전에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던 자들’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늙음과 쇠잔함, 질병들과 죽음 등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할 소망이 없다. 과거의 우리들은 이와 같이 슬픔이 많은 인생, 허무한 인생일 뿐이었다. 일곱째로, 그들은 전에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다. 그들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신(神)에 대한 약간의 의식이 없지 않았으나, 그들은 헛된 우상들을 신(神)인 줄 알고 섬겼다. 그들은 그 헛된 우상들을 의지하고 바랐던 자들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 지식의 시작이지만, 이전의 그들은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적인 무지와 흑암 속에 살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돌보심도 받지 못했다. 과거의 우리가 바로 그러하였다.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제’는 구원받은 후를 가리킨다. ‘전에 멀리 있었다’는 말은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통해, 즉 그가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피로 이루신 속죄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졌고 그와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 이것이 구원이다. [14절] [이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화평이심이니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방인인 에베소인들이 이스라엘과 가까워진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셔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을 구별하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다. 이제 신약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영적 특권의 차이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히 그를 부르는 자들을 누구나 차별 없이 받으신다. [15절]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이방인은 우상숭배적이고 부도덕하므로, 과거에 유대인은 이방인에 대해 정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적대 관계는 의문(儀文) 곧 율법 조문에 근거한 것이었다. 특히 구약의 의식법들, 예를 들어, 성막이나 제사들이나 절기들 그리고 정(淨), 부정(不淨)의 음식들 등에 대한 법들은 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시키는 법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의식법들은 다 성취되었고 따라서 그 법들은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이 둘로 자신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이제는 유대인의 교회가 따로 없고 이방인의 교회가 따로 없다. 이제는 둘을 다 포함하는 한 교회가 있을 뿐이다. 신약교회는 세계적 단체이며 신약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적대 관계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케 된 관계가 되었다. [16-18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과 사람들은 원수와 같은 상태에 있었다.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유대인들도 그러했다. 성경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 못지 않게 우상숭배적이고 부도덕하였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미워하셨고 죄인들도 하나님께로 나오기를 꺼려하고 하나님을 싫어하고 멀리 떠나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목케 하시며 그 둘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롬 5:10). ‘먼데 있는 너희’는 이방인들을 가리키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막론하고 모두들에게 평안의 복음, 화목의 복음을 전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들은 한 성령을 받고 한 성령 안에서 그의 위로와 권면을 받으며 하나님을 섬긴다.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은 유대인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 곧 동료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 즉 신약교회는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들을 다 포함하는 세계적인 교회가 되었다. [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신약교회의 기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 즉 그들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다. ‘모퉁이 돌’은 건물을 구성하는 모든 돌들의 기준이 되는 기초석이다. 그것은 건물을 결합시키고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21-22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교회의 목표는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이 되어 가는 것이다.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듯이 성전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다. ‘성전이 되어 간다’는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전도요, 둘째는 개인의 성화이다. 전도는 성전 건립의 일이다. 한 명의 택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은 건물의 벽돌 한 장이 쌓이는 것과 같다. 모든 영혼들이 다 돌아올 때 이 성전 공사는 완공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 개인의 영적 성장 즉 성화(聖化)도 필요하다. 성도는 구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을 때 이미 법적으로는 완전한 의를 받았으나(고전 1:30; 롬 3:23, 24; 10:4),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구원과 그 의를 그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들의 인격과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함과 섬김을 그리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함을 나타내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받기 전 상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 이방인들이었다. 우리는 할례도 없는 자들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이었다. 우리에게는 내세의 소망이 없었고 영생과 부활과 천국의 소망도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상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우리를 구원해주셨는지, 그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구원받은 현재의 새 상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방인들이 아니고 외인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과 동일한 시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 즉 가족이 되었다.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 물론, 이 성전은 지금도 건축 중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성화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전체 교회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남김 없이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존귀한 백성이 되었고 또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 된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 모든 일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교회의 기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21절), 주 안에서(21절), 성령 안에서(22절), 예수 안에서(22절)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가까워졌고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구주 예수께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다 하나같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그는 하나님과 원수 되고 서로 원수 되었던 우리를 화목케 하셨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개인의 성화(聖化)를 위해서와 남은 택자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더욱 힘써야 한다. 3장: 교회의 세계성 1-13절,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 [1절]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된[너희 이방인들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가 된](KJV, NASB) 나 바울은. ‘이러므로’라는 말은 이방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즉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고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이 되어가는 은혜 때문에라는 뜻이다. 이 은혜 때문에,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고 그들을 위해 일하다가 옥에 갇힌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가 되었다. [2-4절]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 오이코노미아 )[경영, 계획, 직무]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을 ‘비밀’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구약 백성들에게는 감취어 있었던 내용이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이방인들의 구원은 암시되어 있었다(창 12:3; 시 117:1). 그러나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은 아무도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큰 은혜가 주어질 것을 기대하거나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은 비밀이었다. 그러나 그 놀라운 사실이 하나님의 계시로 사도 바울에게 알려졌고 다른 사도들에게도 알려졌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뿐 아니라 또한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은혜의 구주가 되신다고 증거한 내용을 읽는 자마다 그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았다는 사실과 그가 깨달은 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그것을 알았다. 이미 증거한 대로, 이방인이었던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과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복이며 특권이다. [5절]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여기의 ‘선지자들’은 2:20과 4:11에도 나오는 말로 신약시대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사도들과 함께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이 받고 깨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 곧 이방인들에게도 함께 주신 은혜의 복음 진리는 바울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도 성령으로 계시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비밀의 진리는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셨던 진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계시된 교회의 세계성의 진리 곧 교회가 유대인들만의 교회가 아니고 또한 이방인들도 참여하는 교회라는 진리는, 구약성경에 암시된 바는 있지만(창 12:3; 22:18; 시 117:1; 사 45:22), 밝히 드러나 있지는 않았던 바이었다. 그 사실은 구약시대에는 비밀과 같았다. [6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의 내용을 다시 말한다. 즉 그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과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이것은 이방인들 편에서 볼 때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비밀이 계시된 신약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지지 않는다. 이제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특권을 누린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기업을 이어받는 자들이 되고, 함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고, 또 함께 복된 약속 곧 부활과 영생과 천국 기업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7절]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사도 바울은 주께로부터 이 복음을 받았고 이것을 전파하는 일꾼이 되었다. 그가 복음의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대로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된 일이었다. 바른 직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받는다. 인위적인 직분은 덕을 세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은혜로 부르시고 은혜로 세움을 받은 자마다 그 동일한 은혜의 역사하심을 따라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8절]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 은혜의 복음을 위해 바울을 택하신 것은 바울이 남보다 선하고 의로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무지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 믿는 성도들을 핍박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바울에게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단지 입술의 고백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의 실수를 깊이 회개했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참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회개하고 겸손해진 자를 들어 쓰신다. 그는 교만한 자는 쓰지 않으시고 도리어 물리치신다. 자신을 크게 여기는 자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바울에게 바로 이런 은혜가 임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전하는 자가 될 수 있었다. 겸손한 봉사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하며 그 영광만을 드러내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자기의 이름과 영광에만 관심을 둘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자기의 것으로 취함으로써 결국 그의 영광을 가리우는 자가 될 것이다. [9-11절] 영원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전통사본)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계획]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모든 사람이 알게 하려](Byz, UBS)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영원부터’라는 말은 ‘오랜 시대 동안’ (NASB)이라는 뜻이며 ‘감취었던’이라는 말에 걸린다.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이라는 말은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을 수종드는 선한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비밀은 심지어 하늘의 천사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피조물들은 심지어 하나님 곁에 있는 선한 천사들이라도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교회 곧 구원받은 성도들을 통하여 그 천사들에게도 하나님의 깊고 넓은 지혜가 알려진다.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영원하신 뜻대로 된 것이다. 창세 전 곧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예정하셨다(엡 1:4).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 전의 의논을 상상한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 전의 의논과 작정대로 온 세상에 충만한 이 구원의 일이 시작되었고 진행되고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12절]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복음 안에서 우리 모두가 받은 은혜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 예수께서 단번에 이루신 속죄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그 은혜 때문에, 우리는 오직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로마서 5:1의 말씀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다. 또 히브리서 10:19의 말씀대로, 우리는 주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지성소] (KJV, NIV) 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13절]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고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깨달았다면, 고난의 현실을 인해 낙심치 말아야 한다. 고난은 항상 있는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은 오늘도 우리 주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 주의 종들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다. 옛날부터 주의 종들은 항상 고난과 핍박을 당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을 고난 중에서도 지키시고 도우시고 위로하셨다. 성도의 고난과 핍박은 그에게 부끄러움이 아니고 영광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에게도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 사도들이 쓴 신약성경은 이방인들도 구원의 복을 누림을 밝히 증거하였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하고 당당하게 하나님께 나아가게 됨을 감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 됨의 특권을 얻었고 지금도 그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 당하는 고난 때문에 낙심치 말아야 한다. 참된 헌신은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그러다 고난을 받을지라도 낙심치 않고 오히려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겸손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했다(8절).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자가 되려면,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14-21절, 바울의 기도와 찬송 [14-15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2)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이라는 말씀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family)’이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키며, 하늘에 있는 가족은 이미 천국에 들어가 영광 중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키고, 땅에 있는 가족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하늘에 들어간 이들은 승리하여 안식을 누리고 있고, 땅에 사는 우리들은 죄와 세상과 마귀와 싸우며 살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주어져 있다. 모든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이름이 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간절한 기도의 모습이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하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스스로 시작하였거나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그가 친히 이루시는 일이다. 여기에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다. 바울은 단지 에베소 교인들의 의지에 호소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의 선한 결심이나 노력은 마땅히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역사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여전히 연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무엇보다 말씀과 기도의 생활이다. [16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바울의 첫 번째 기도 내용은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에베소 교인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옵소서라는 것이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은혜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라는 뜻을 포함할 것이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성도들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심을 보인다. 성령께서는 성도들 속에 오셔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권면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신다. ‘속사람’은 ‘중생한 영혼’을 가리킨다고 본다. 중생한 영혼들에 심겨진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려는 새 성향은 더욱 자라고 강건케 되어야 한다. 중생한 성도들의 영혼들은 늘 죄성의 도전을 받는다. 중생한 성도는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 아직 연약하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것을 ‘육신의 연약’이라고 표현하였다. 로마서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不淨)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로마서 7:22-24,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8:3-8,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성령]을 좇는 자는 영[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중생한 자에게도 남아 있는 이 육신의 연약성 곧 죄성은 중생한 사람의 속사람에게 도전한다. 이것은 사람 본성의 타고난 죄악성의 도전이다. 그러나 중생한 성도들에게 이런 연약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셔서 지식과 믿음, 의와 선과 진실에 굳게 서게 하시는 것이다. 중생한 사람은 갓난아이 같아서 자라가야 한다. 히브리서는,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는’ 영적 어린아이 곧 기독교의 초보적 교리의 확신을 겨우 가진 성도들과, ‘단단한 식물을 먹는’ 영적으로 장성한 자 곧 의의 말씀을 체험하고 선악을 분별하며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성도들을 대조시켰다(히 5:12-13). 또 히브리서 6:1-3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2:2에서 갓난아이들같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함으로 자라가야 할 것을 가르쳤고 베드로후서에서는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말했다(3:18). [17-19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의 기도의 두 번째 내용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에 계시게 하옵소서라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마 28:20).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영께서는 그들 속에 거하신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러나 성도는 그와 연합되어 있음을 믿음과 순종으로 표현해야 하며 체험해야 한다.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항상 계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과 같다. 예수님 믿는 우리는 그가 성령으로 우리 속에 늘 계심을 믿어야 한다. 바울의 기도의 세 번째 내용은 사랑 가운데 굳게 서서 그 사랑을 온전히 알아 충만한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랑은 하나님의 크신 구속(救贖)의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십자가에 희생시키셨다(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구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확실히 믿고 그 사랑 가운데 확고하게 서야 한다. 바울은 또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그 넓이’란 그 사랑이 각 민족, 각 나라에서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을 막론하고 주어짐을 보이며, 그 ‘길이’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그가 끝까지 사랑하심을 보이며, 그 ‘높이’란 그의 자기희생적 사랑의 고상함과 가치를 보이며, 또 그 ‘깊이’란 그의 사랑의 심오함, 곧 사람의 머리로 다 측량할 수 없고 사람의 가슴으로 다 느낄 수 없는 그의 긍휼의 사랑을 보인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다. 그것은 자신을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것은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자신의 몸과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것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었다. 누가 그 사랑을 다 깨달을 수 있겠는가? [20-21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넉넉히 주시는 하나님,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약 1:5)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을 영원히 돌려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실 수 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의 죄성을 이기고 온전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계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계신다. 우리는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을 항상 인정하고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고린도후서 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셋째로,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고 사랑으로 충만한 자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더욱 알고 사랑으로 충만한 자가 되어야 한다. 4장: 교회의 일체성 1-6절, 겸손, 사랑, 연합 [1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러므로’라는 말은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았으므로’라는 뜻이다. ‘주 안에서 갇힌 내가’라는 말은 바울이 주를 위해 또 이방인들을 위해 일하다가 옥에 갇힌 자로서 진지하게 말하고 있음을 보인다. ‘권한다’는 말은 권위적으로 명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부드럽게 말함을 나타낸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죄악된 세상 속에서 죄악된 삶을 살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주셨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는 단지 전도자의 음성을 통해 부르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게 하셨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믿게 하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은 죄를 멀리하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5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사랑과 거룩의 삶임을 증거한다. 그는 본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의 삶으로 표현한다. 우선, 우리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행해야 한다. ‘모든 겸손’이라는 말은 모든 면에서 또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는 과거에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이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복음 진리를 깨달은 자라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의 덕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6-8에서 하나님과 동등 되신 주께서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셨고 속죄제물로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그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고 교훈하였다. 또 우리는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한다. 오래 참는 것은 사랑의 속성이다. 고린도전서 13:4, 7,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 .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조급한 사랑은 부족한 사랑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린다. 우리는 상대방의 부족과 허물을 덮어주고 오래 참아야 한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잠언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심과 사랑으로 우리를 용납하셨다.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 그 아들을 오래 기다리며 참으며 용납했던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참으시며 용납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 상대방의 부족과 허물을 덮어주고 오래 참고 사랑으로 용납해야 한다.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또 우리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한다. ‘평안’은 ‘화평’이라고도 번역된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불화와 분열은 좋지 않다. 하나님의 뜻은 일치와 연합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20에서 육신의 죄성에서 나오는 죄악들로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 등을 말하였다. 요한일서 3:15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 헤노테스 )’이라는 말은 ‘성령의 하나이심’이라는 말인데, 한글성경대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할 것이다. 성령께서는 한 분이시며 모든 성도는 그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본문에 ‘힘써 지키라’는 말은 사람의 연약함을 전제한다. 성도들도 사람이며 교회도 사람들의 모임이므로 교회가 분열하기 쉽고 성도들이 교만과 욕심과 미움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 곧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을 힘써 지켜야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일체성은 불신앙과 오류를 포용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과 진리와 의 안에서의 일치와 연합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14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사귀리요]”라고 말했고, 또 에베소서 5:11에서는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말하였다. 예수님 믿는 성도들은 바른 믿음과 진리와 의 안에서 일치하고 연합해야 한다. [4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다. 세상에 교회들이 많고 교파들이 많아도 또 성도가 속한 교회는 각각 달라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이며 모든 성도는 그 한 교회의 교인이다. 택함 받은 죄인들은 중생과 회개와 믿음으로 이 한 몸 안으로 들어온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큰 죄를 짓고 회개치 않아 제명, 출교를 받기 전까지 다 그 한 몸인 교회에 속한다. 성령께서도 한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救贖)을 택자들에게 실제로 적용하여 구원하는 자이시다. 그는 죄인들을 중생(重生)시켜 구주 예수를 믿게 하시고 그들 속에 계셔서 그들로 하여금 선하고 거룩하게 살게 하시는 자이시다. 그는 모든 성도에게 보혜사 곧 위로자, 격려자, 권면자이시며 교회를 인도하시며 잘못을 책망하시고 부흥케 하시는 자이시다. 이 세상에는 성령 말고 다른 영들, 곧 사탄과 악령들이 있다. 그들이 곧 미혹의 영들, 속이는 영들, 거짓말하는 영들, 이단의 영들이다. 오늘날 은사운동에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같지 않은 많은 비진리들과 거짓된 요소들이 포용되고 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므로(요 14:17) 모든 일을 성경 교훈대로 행하신다. 그는 성경의 교훈에서 이탈하거나 성경 교훈을 넘어서거나 성경 교훈에 반대되는 일들을 하지 않으신다. 참된 성령 운동은 에스라 때의 부흥운동처럼 성경의 성실한 연구와 강해와 실천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성경의 충실한 해석과 실천이 없는 운동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일 수 없다. 우리의 부르심의 소망도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미래의 소망으로 부르셨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인들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서의 영생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육신적, 물질적 부귀와 영광과 권세를 바라며 살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장차 영광 가운데 드러날 일들을 소망하며 산다(고후 4:16-18). 예수님 믿는 모든 성도는 다 이 동일한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이다. [5절]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주께서도 한 분이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오늘날 불신앙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예수는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에 불과하며 그런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증거되신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죽으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승천하셨고 지금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장차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성경에 증거된 이 예수님 외에 다른 주님이 없다. 그는 사람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꽃과 같으시고 죄가 없고 사랑과 긍휼이 충만하신 사람이시지만, 그 이상이시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지셨고 우리의 경배와 찬송과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주님이시다. 믿음도 하나이다. 물론, 이단과 정통 신앙은 다르다. 천주교의 믿음과 개신교의 믿음은 다르다. 자유주의의 믿음과 보수주의의 믿음은 다르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각종 이단 사설들은 다르다. 물론 개신교회들 안에도 교파들 간에 믿는 내용의 차이가 있고, 한 교파 안에서도 작은 교리적 문제에 있어서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개신교회들 내에는 신앙의 근본적인 내용에 일치가 있다. 역사적 개신교회들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일치하는 믿음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성경의 절대적 권위,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그의 신성(神性), 그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심, 그의 대속, 부활, 재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한 죄인들의 중생(重生)과 칭의(稱義), 마지막 심판, 죽은 자들의 부활, 영생, 천국과 지옥 등을 믿는다. 여기에 확실히 역사적 기독교회에 믿음의 일치가 있다. 세례도 하나이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한다. 죄씻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하다(요일 1:7). 그러므로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행 2:38) 베풀어진다. 그러므로 죄씻음을 상징하고 확증하는 세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세례밖에 없다. [6절]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만유로 말미암으시고] 만유[우리 모두] 3)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님께서도 한 분이시다. 영원자존하신 참 하나님께서는 한 분뿐이시다. 그는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세상을 홀로 섭리하신다. 그 외의 모든 신들은 다 거짓이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참되시다. 그는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이시다. ‘만유’는 ‘모든 것’ 혹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만유의 원천이시며 만유 위에 초월해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특히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우리 모두 안에 거하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또 항상 겸손하고 온유해야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덕이다. 그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빌 2:5-8). 이것은 성도에게 매우 중요한 덕이며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서 매우 요긴한 덕이다. 둘째로, 우리는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전 13:4). 사랑은 상대방의 잘못과 부족을 오래 참고 그가 깨닫기를 기다려주며 그가 깨닫고 사과할 때 용서해주고 그를 용납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그런 인내와 사랑을 가져야 한다. 에베소서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셋째로, 우리는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하나이다. 우리는 한 하나님과 한 주님과 한 성령님을 믿고 섬기며 한 소망과 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한 세례를 받았고 한 몸이 되었다. 우리는 범사에 또 항상 겸손하며 온유하고, 오래 참고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고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한다. 7-16절,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감 [7-8절]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몸된 교회를 완성하시기 위해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들을 주신다. 그는 자신의 권한으로 은혜의 선물을 각 사람에게 다르게 주신다. 이것은 특히 봉사의 직분에 있어서 그러하다. 교회의 직분들은 그가 주신 다양한 은사들에 따른 것이다. 사도 바울은 메시아 사역을 예언한 시편 68편(68:18)을 인용함으로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키며,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라는 말은 메시아의 원수 곧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에 대한 말씀이라고 보인다. 시편 본문은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는다’고 표현했으나, 오늘 본문은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다윗이 원수들에게서 전리품들을 취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을 정복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주셨음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9-10절]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먼저] 4)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올라가셨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키고, ‘그가 먼저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리키든지 그가 무덤 속에 묻히셨던 일을 가리킨다. ‘모든 하늘 위에 오르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여 들어가신 천국은 지극히 높은 하늘임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천국을 ‘셋째 하늘’이라고 표현했다(고후 12:2).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목적은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대로 구원을 온 세상에 충만히 이루신다는 뜻이라고 본다. [11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주께서 교회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직분은 ‘사도’이었다. 그 직분은 열두 제자와 바울에게 주어진 직분이었다. 원문 신약성경에서 예외적으로 바나바도 두 번 사도로 불리었다(행 14:4, 14). 사도는 주께서 친히 세우신 자로서 복음의 선포자요 해설자이었다(롬 1:1). ‘선지자’는 사도들처럼 복음 진리의 계시와 은혜를 받은 직분이었다. 사도행전 15:32의 유다와 실라는 선지자이었다. 선지자의 사역은 미래의 예언보다 현재의 교훈이었던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사도들과 더불어 신약시대의 선지자들을 교회의 기초라고 불렀다(엡 2:20). 이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훈이 교회의 기초라는 뜻이다. ‘복음 전하는 자’는 빌립, 디모데, 디도 등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했던 직분을 가리킬 것이다. 초대 교회가 뽑았던 일곱 사람 중 하나인 빌립은 ‘전도자’로 불렸고(행 21:8),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하였다(딤후 4:5). 오늘날에도 전도의 특별한 사명을 느끼고 그 일에 전념하는 자들, 국내외 선교사들과 개척 전도자들이 이 부류에 속할 것이다. 원문에서 ‘목사와 교사’라는 말( 투스 포이메나스 카이 디다스칼루스 )에서 하나의 관사는 그것이 한가지 직분임을 보인다. ‘목사’라는 원어( 포이멘 )는 ‘(양이나 소를 치는) 목자’라는 말로 양무리를 돌보는 자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다(요 10:14-16). 또 그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다(요 21:16). ‘치다’는 말( 포이마이노 )은 ‘돌보다, 다스리다, 인도하다’는 뜻이다. 사도행전 20:28에 보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말했다. 오늘날 목사와 장로들은 양을 치는 직무를 수행한다. 목사를 ‘교사’라고 부른 것은 목사의 중요한 직무를 보인다. 목회에 있어서 설교는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모든 교리적, 윤리적 교훈을 주는 것이다. 목회는 무엇보다 양들을 돌아보고 성경을 충실히 가르치는 일이다. 목사들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과 교훈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잘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참 목사들은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계시된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을 힘써 연구하고 바르게, 충실하게, 가감 없이 가르쳐야 한다. [12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목사의 직무는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성도를 온전케 한다’는 것은 성도의 부족한 점들을 온전케 한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28-29에서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말했다.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은 바로 성도의 성화(聖化)의 일이다. 성화는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의 온전함이다. 이것은 죄로 인해 어그러진 인격을 완전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도덕적 표준에 맞는 인격자가 되게 하는 일이다. 완전 성화는 성도의 삶의 목표이며 목회의 목표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일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는 오늘날도 설교와 성경공부가 사람을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성경말씀에 정통한 목사들이 필요하다. 오늘도 우리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을 믿는다(딤후 3:16-17). 목사의 직무는 또 성도들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온전케 되면 여러 가지 봉사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온전케 하시고 그의 여러 가지 일들에 쓰시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여러 가지 봉사의 일들을 필요로 한다. 이 일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중요한 일들이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는 주일학교 교사들, 구역 권찰들, 찬양대 봉사자들이 필요하다. 목사의 직무는 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전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다. 한 명의 영혼이 구원받을 때마다 교회라는 건물의 벽돌이 한 장 쌓여져 간다. 하나님의 택한 모든 영혼들이 다 구원받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완성될 것이다. 또 구원받은 성도들의 성화(聖化), 곧 그들의 지식과 인격과 삶을 온전케 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들은 신실한 목사후보생들을 일으키며 성경과 신학으로 잘 훈련시켜야 하며, 이것은 교회들의 미래를 위한 좋은 준비가 될 것이다. 이런 준비가 없다면 교회들에는 소망이 없을 것이다.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상적인 온전한 인격이시다. 교회는 목사들의 직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자리에까지 자라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야 한다. 목회의 목표는 개인들의 성화와 온전함뿐 아니라 또한 교회적 완전에 있다. 교회 전체가 ‘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목사들의 사역의 또 하나의 중요한 목표이다. 이런 점에서 목사들은 지교회뿐 아니라, 전체교회에 책임이 있다. 교인들의 영적 성숙과 완전은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일치된 믿음과 지식을 가져야 한다. 목사는 성경과 신조들과 신학을 부지런히 연구함으로써 성도들이 일치된 믿음과 지식에 도달하게 해야 한다. 우리의 영적 성장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본받을 수는 없으나 그의 인성의 온전함은 본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인격의 모범이시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진실과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 [14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교인들에게 믿음과 지식의 온전함이 필요한 까닭은 세상에 있는 모든 잘못된 교훈들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과거에 어린아이들처럼 사람들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방황하였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들도 속고 다른 이들도 속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러므로 다시는 사람들의 교리들과 교훈들과 사상들을 따라 방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바른 지식과 믿음의 온전함이 필요하다. 성도들과 신약교회는 지식과 믿음이 온전해야 한다. [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참된 것을 하다’는 원어( 알레듀오 )는 ‘참되다, 참된 말을 하다’는 뜻이다 (BDAG) .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는 말은 온전케 되는 방법을 보인다. 사랑과 진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본래의 사람의 성품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그 본래의 의롭고 선한 성품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죄악된 옛 성품을 다 버리고 사랑과 진실 안에서 자라서 온전함을 이루어야 한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 성장의 목표임을 보인다. 교회는 모든 면에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한다. 교회는 말씀을 배우고 영적으로 성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마음, 그의 말들과 행동들, 그의 진실과 사랑, 그의 온유와 겸손, 그의 충성과 인내를 본받아야 한다. 성화는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의 이치를 사람의 머리와 몸에 비유한 것이다. 사람의 머리는 몸을 자라게 하는 데 필수적 기관이다. 머리가 상하면 몸이 계속 자랄 수 없다. 건전한 머리는 몸을 성장케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건전한 머리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몸된 교회가 정상적인 상태에 있다면 그 교회는 그를 통해 자라서 온전케 될 것이다. [16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 되신 그에게서 각 마디를 통해 도움을 입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활동하여 자라며 사랑 안에서 건립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한 완전한 사람’으로 세우시는 힘의 근원이 되신다. 그에게서 온 몸은 각 마디를 통해 도움을 입어 자라게 된다. 그는 요한복음 15장에서도 자신과 제자들을 참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에 비유하시면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그 나무로부터 도움을 입음으로써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이치를 말씀하셨다. 물론 주께서는 그의 영 곧 성령을 통해 이런 일을 이루신다. 참으로 개인이나 교회의 영적 성장과 온전함은 사람의 인위적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영, 곧 성령의 도우심으로 되는 것이다. 성화(聖化)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열심으로 가르치고 또 열심히 잘 배워야 한다. 주께서는 교회에 목사들을 주셨다. 목사의 중요한 직무는 교사의 직무이다. 목사는 양무리를 돌보며 특히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자이다. 목회 사역의 목표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과 그리함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봉사의 일들을 하게 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들을 위해 의도하신 이 뜻을 감사히 여기면서, 오늘날도 목사들은 성경과 신조들과 신학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성경을 바르게, 열심으로 가르쳐야 하고, 또 성도들은 성경을 열심히 잘 배워 자라가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목사의 직무는 성도 개개인을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완전케 하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전체 교회를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완전케 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 이르도록 범사에 자라고 완전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성화의 목표이실 뿐 아니라, 전체 교회의 영적 성장의 목표이시다. 전체 교회는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온전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지교회 양무리들을 돌보는 목회의 책임뿐 아니라, 전체 교회에 대한 책임도 가진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 일을 위해 힘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하며,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을 주셔서 우리로 자라며 온전케 하실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오래 참고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한 말만 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점점 자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것이다. 17-25절, 의와 거룩과 진실 [17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생각]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부터 다른 이방인들처럼 행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의 특징들을 열거한다. 첫째로, 이방인들은 그 생각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계명도 모르고 세상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을 모르고 허무한 것을 생각하고 행하고 있다. [18절]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굳어짐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둘째로, 이방인들은 깨달음이 없고 무지하다. 그들은 육신적인 일들이나 물질적인 일들에는 지혜가 있을지 모르나 참으로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모른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도 가장 기본적 사실들인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사람의 삶의 목적과 사람의 죄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해 모르고 있다. 셋째로, 이방인들은 마음이 굳어져 있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 그들은 마음이 완고해 자신의 잘못된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자기 생각대로만 살며 하나님의 진리를 진지하게 찾지 않으며,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떠나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참된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며, 영생의 길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19절]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 아셀게이아 ajsevlgeia)[육욕, 호색,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넷째로, 이방인들은 도덕적 감각이 없고 자신들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고 있다. 그들은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도덕 의식이 없다. 그래서 이방 사회는 심히 부도덕하며 죄악된 사회가 되었다. 부도덕한 사람들의 죄악들 중 첫째는 음란이다. 사람들은 음란하고 방탕하다. 그들은 ‘모든 더러운 것’ 즉 온갖 죄악들을 행한다. 죄 없는 사회는 아름답고 평화로울 것이지만, 죄악된 세상은 갈등들과 상처들로 얼룩져 있다. 의는 깨끗하고 단정한 옷과 같지만, 죄는 더럽고 냄새나는 옷과 같다. 이런 점들이 이방인들의 삶의 모습이다. 이것들은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런 무지하고 부도덕한 모습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는 이제 이방인들처럼 행하지 말아야 한다. [20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죄악된 것들로부터 떠나라고 명하셨다. 우리는 그의 명령을 순종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죄를 회개했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우리는 그에게서 죄악된 삶으로부터 회개하라고 배웠지, 이방인들의 죄악된 삶을 그대로 살라고 배우지 않았다. [21절]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그에 대하여]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예수께서는 진리 자체이시며 그 안에 진리가 있다(요 14:6). 에베소 교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듣지는 못했을 것이나 사도들을 통해 그에 대해 많이 들었고 그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본절 끝의 “받았을진대”라는 말부터 24절까지는, “받았으니 곧 . . . 입으라는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바르다고 본다. 즉 22절부터 24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 가르침을 받은 내용을 말한다. 그것은 모든 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라는 구원의 초청이었다. [22절] 너희는 유혹의[속이는]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舊習)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이전의 생활 방식에 대하여(KJV, NASB), 너희는 속이는 욕심들을 따라 부패하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사람의 욕심들은 처음에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기 때문에 속이는 것이다. 옛사람은 구원받기 전의 자아(自我)를 말하며 앞절들에서 말한 이방인들의 모습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속이는 욕심들을 따라 부패하는 삶이었다. ‘벗어버리고’라는 원어( 아포데스다이 )(과거부정사)는 그 행위의 단회성(單回性)을 보인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 단번에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것은 반복될 수 없는 구원의 사건이다. 구원은 성도들에게 단번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것이 중생이며 회개와 믿음이다. [23절] 오직 심령으로[너희의 생각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 영의 활동들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이다. 본절은 그 중에 특히 지식을 강조한다. 사람의 영의 활동들 중에 생각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의 생각은 그의 행동을 결정한다. 바른 생각은 바른 행동으로 나타나고, 잘못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구원은 일차적으로 생각의 변화이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우리는 생각이 새롭게 되었다. ‘새롭게 되어’라는 원어( 아나네우스다이 )(현재부정사)는 계속성을 나타낸다. 우리의 구원은 생각의 변화에서 시작되지만, 그 생각의 변화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성숙해진다. 성화(聖化)는 깨달음의 성숙 과정이다. 사람의 연약성은 잘 변하지 않지만, 성도의 생각과 깨달음의 변화는 있다. 하나님을 아는 생각, 자신의 부족을 아는 생각, 구주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는 생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성숙해진다. 그 생각의 성숙은 평생 계속될 것이다. [24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의와 참된 거룩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을 따라’ 지으심을 받았다는 말씀은 새사람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임을 보인다.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의 내용은 ‘의와 참된 거룩’이다. 그것을 ‘본래의 의’라고 부른다. 구원은 범죄함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 즉 그 본래의 의를 회복하는 것이다. ‘입으라’는 원어( 엔뒤사스다이 )(과거부정사)는 단회성(單回性)을 보인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명하는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 믿기 전에 그들이 받았던 구원 초청의 내용이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초청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옛사람의 상태에서 새사람의 상태로 옮겨지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가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이루신 의(義)로 옷 입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것이 칭의(稱義)이다. 이 칭의(稱義)는 이제 성화(聖化)로 나아간다. [25절]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그런즉’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우고 믿어 구원을 받아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본문은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되기 때문에 거짓을 버리고 서로 참된 것을 말하라고 교훈한다. 세상에는 거짓말로 물질적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다. 원산지를 속인 식자재나 인체에 해로운 식품을 파는 자, 이중장부를 쓰는 기업, 가짜 영수증, 가짜 추천서, 가짜 학위증, 가짜 증명서를 만들거나 사용하는 자, 법정에서 위증하는 자, 가짜 취업 알선소, 가짜 결혼 소개소, 가짜 연예 기획사 등 속이는 자들이 많다. 거짓말은 나쁜 악이다. 모든 거짓의 근원은 마귀이다. 예수께서는 마귀를 거짓의 아비라고 표현하셨다(요 8:44).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속였었다. 거짓과 속임은 마귀의 본성이다. 마귀는 거짓으로 가득한 자이다. 세상은 마귀의 손 아래 있으므로 거짓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거짓말하는 자들을 반드시 철저하고 엄중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는 거짓말하는 자들이 많지만, 성경은 그들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계 21:27; 22:15) 다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계 21:8).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거짓말은 지극히 합당치 않다. 우리는 선의의 거짓말도 삼가야 한다. 사람의 남은 죄악성은 거짓말하고 속이는 데 익숙하다. 따라서 우리는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려고 해야 한다. 진실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가장 기본적 덕목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생각하며 말하며 살아가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진실만을 말하려고 해야 하며 항상 참된 것만 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방인들의 행위를 버려야 한다. 이방인들은 그 생각이 허무하고 깨달음이 없고 무지하며 마음이 굳어져 있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고 도덕적 감각이 없고 방탕하고 음란하며 모든 더러운 것들을 욕심으로 행한다. 비록 과거에 우리의 삶이 그러했을지라도, 우리는 이제 그런 삶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 초청은, 속이는 욕심을 따라 부패하는 옛사람을 버리고 생각의 영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으로 지으심을 입은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청대로 그의 은혜로 모든 죄를 회개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거룩함을 얻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제 날마다 생각의 영이 새로워져 의와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또 모든 거짓을 버리고 서로 간에 진실한 말만 해야 한다. 우리는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 예수님 믿고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았고 또 그때로부터 날마다 성경말씀과 성령의 감동 가운데 생각이 더욱 성숙해지고 도덕성에 있어서 성화(聖化)를 이루어 하나님의 백성답게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26-32절, 선함, 덕스러움, 인자함 [26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분을 낼 때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람이 정당하게 분을 낼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악된 일들에 대해 노하신다. 주 예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지도자들이 타락하여 성전 제사의 제물로 이익을 취하는 것을 보시고 노하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마 21:12-13). 우리는 세상의 불의한 일들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노하며 엄히 책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분을 내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정당하게 분을 낼 때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분을 낼 때 말과 행동에 실수하기 쉽다. 과격한 말, 미워하는 말, 욕설, 성급한 판단과 정죄, 싸움, 살인 등의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우리는 분노할 때 그런 실수가 없도록 조금 멈추어 생각하고 기도하며 신앙적, 이성적 언행을 하도록 힘써야 하며, 죄악에 대한 미움과 분노 중에라도 형제를 미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분을 내어도 그 분을 해가 지도록 품고 있지 말아야 한다. 상대가 깨닫지 못하고 사과하지도 고치지도 않는 때라도, 우리는 그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원수 갚는 일이 하나님께 있다(롬 12:19). 노를 품고 있으면 몸에도 해롭고 마귀의 시험에 빠지기 쉽다. 분노의 감정은 미움, 과격한 말과 행동, 술취함, 살인 등으로 발전되며, 그것은 마귀로 틈을 타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할 때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매우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은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심령은 항상 온유와 평안으로 단장되어야 한다.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도 신중히 생각한 후에 내어야 하며, 분노 중에라도 마귀가 우리를 범죄케 하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28절]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도둑질은 남의 돈이나 물건을 부당하게 취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거짓과 탐심, 또 수고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게으른 마음에서 생기는 일이다. 그것은, 돈 벌기가 어렵고 땀 흘려 일하기는 싫기 때문에 남이 벌어 놓은 것을 훔쳐서 쉽게 사용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불의한 이익, 더러운 이익을 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행위이다. 오늘날 사회에는 도둑질이 많다. 옷 도둑, 학생의 부정행위, 학자의 논문 표절, 음악이나 영화의 불법 다운로드, 기업주의 노동력 착취, 피고용인의 근무 태만 등. 우리는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아야 하고, 제 손으로 수고하여 가난을 면하고 도리어 빈궁한 자들을 구제하며 선한 일을 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29절]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무릇’이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라는 뜻이다. ‘더러운’이라는 원어( 사프로스 )는 ‘불건전한, 나쁜’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불건전하고 나쁜 말을 삼가야 한다. 주께서는 형제에게 ‘라가’ [빈 머리, 바보]라고 말하면 공회에 잡혀가고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22). 우리는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남에게 유익을 준다는 뜻이다. 우리는 말을 할 때 남에게 해를 주는 말을 하지 말고 유익을 주는 말을 해야 한다. 잠언 10:20-21,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잠언 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에 대해 성경에서 어떤 때는 ‘하나님의 영,’ ‘성령,’ 혹은 ‘영’이라고 표현되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라는 특이한 표현이 사용되었다. 성령께서는 피조 세계를 초월해 계시며 도덕적으로 성결하시다. 또 그는 자신이 거룩하실 뿐 아니라, 또한 죄인들을 거룩케 하신다. 그것이 구원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생각과 정신, 거룩한 마음과 거룩하게 살려는 의지를 주신다. 우리는 우리의 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을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인격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근심하신다. 그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일위신론자(一位神論者 유니테리안들)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어떤 은사주의자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하나님의 힘이나 기운이 아니다. 그는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이시며 성령께서도 그러하시다. 그는 기뻐하기도 하시고 근심하기도 하신다. 그가 근심하시면 진노하실 것이다. 이사야 63:10은,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이다. 인을 친다는 것은 확인하는 뜻이다. 우리는 무슨 문서를 확인할 때 거기에 도장을 찍거나 서명을 한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거하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하나님의 확인이다. 그 효력은 ‘구속(救贖)의 날까지’ 지속된다. 우리가 거듭나고 의롭다 하심을 얻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오셔서 거하시므로 우리의 성화(聖化)와 영화(榮化)를 보장하시는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부족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말씀대로 살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셔서 멸망치 않고 영광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요 3:16; 6:39-40; 10:28; 롬 8:30). [31절]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모든’이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라는 뜻이다. ‘악독’이라는 원어( 피크리아 )는 ‘씁쓸함’(bitterness)이라는 말로 독한 생각을 뜻한다. 독한 생각에서 ‘노함과 분냄’이 나온다. 또 분노는 ‘떠듦과 훼방’으로 나타난다. ‘훼방’은 남을 악한 말로 비난하는 것을 가리킨다. 말은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다. 실상, 말은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다. 끝으로 ‘악의(惡意)’는 남을 해치려는 생각과 뜻을 가리킨다. 남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말은 남을 해치려는 의지로 발전한다. 위의 말들은 점점 심해지는 과정이라고 보인다. 처음에는 모든 종류의 악한 생각이지만, 그 다음에는 노함과 분냄, 그 다음에는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 그리고 마침내 모든 악한 의지로 발전해 나아간다고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은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아직 남아 있는 죄성 즉 옛사람의 성질들이다. 이것들은 새사람이 된 성도에게는 합당치 않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모든 악들을 다 버려야 한다. [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인자하다’는 원어( 크레스토스 )는 ‘자비롭다, 친절하다’는 뜻이다. ‘불쌍히 여기다’는 원어( 유스프랑크노스 )는 ‘동정하다, 불쌍히 여기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도들이 인간 관계에서 취해야 할 태도이다. 우리는 서로 자비롭고 친절하게 대하며, 인정이 있고 동정심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본문은 서로 용서하는 자들이 되라고 교훈한다. 용서는 사랑을 위해 꼭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도덕적 결함과 실수가 많기 때문에, 서로 용서함이 없다면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기 전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신 후,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3:14). 그것은 제자들이 서로의 잘못을 용서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같이 서로 용서해야 한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주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는 1만 달란트의 빚과 같고 우리의 동료가 우리에게 진 빚은 100데나리온 정도와 같다고 비유하셨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며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까, 한 데나리온을 10만원으로만 보아도 1만 달란트는 약 6조원이다. 지옥 갈 만한 우리의 죄는 1만 달란트와 같았다. 그것은 사람이 결코 갚을 수 없는 큰 금액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만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한다. 정당한 분노라도 분노는 지나치거나 치우치기 쉽고 마귀의 시험에 떨어져 범죄하기 쉽다. 둘째로, 우리는 도둑질하지 말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며 선을 베풀 수 있도록 손으로 일하며 수고해야 한다. 성도는 의로운 자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선을 행하고 구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종류의 불건전하고 나쁜 말을 우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선하고 은혜로운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근심케 말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모든 악독, 노함과 분냄, 떠듦과 훼방, 모든 악의를 다 버리고 서로 자비롭고 친절하게 대하고 인정 있는 자들이 되고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도다운 거룩한 삶이다. 5장: 교회의 성결성 1-7절, 사랑과 거룩함 [1-2절]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예물과 제물로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 주께서는 친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사도 바울은 로마서 5:8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했다.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로 내어주신 사실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확증되었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4:9-11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유화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본서신 에베소서의 시작 부분인 1:3-6에서 이렇게 말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의 아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구속(救贖)하셨고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는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려 중생(重生)시키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특히,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의 죽음은 예물과 제물로 향기로운 냄새[유화(속죄)의 냄새] 5) 로 하나님께 드려졌다. 요한복음 15:12-13에 보면, 주께서는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셨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 대속의 큰 사랑을 본받아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3절]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음행’은 합법적 결혼관계 이외의 성행위를 가리킨다. 합법적 결혼관계란 본인들의 동의와 부모들이나 증인들의 인정 아래 이루어진 결혼관계를 말한다. 부부의 성행위는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이지만, 그 외의 성행위, 즉 간음이나 강간이나 근친상간적 행위나 매춘행위나 동성애나 짐승과의 성행위 등은 음행의 죄악이다. ‘온갖 더러운 것’은 성적 불결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더러운 악을 가리킨다. 그것은 죄악된 것을 보고 들음으로 생각과 감정이 더러워지는 것부터 말이나 행위의 불결까지 모든 더러운 악들을 포함한다. 말과 행위의 더러움은 생각과 마음의 더러움에서 나오므로, 주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마 5:8), 잠언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교훈하였다(잠 4:23). ‘탐욕’은 좀더 가지려는 마음이다. 이것은 주로 돈에 대한 욕심이다. 그러나 돈뿐 아니라, 또한 세상 영광, 명예, 권세에 대한 욕심도 있다. 이것들은 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근본이 다르다. 탐욕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마음가짐이다. 하나님 없는 자들에게는 세상과 돈이 그들의 바라는 것의 전부이다.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는 말씀은, 실질적으로 마음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이런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죄를 미워하고 그런 것에 대해 말하는 것도 꺼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마땅한 바’이다. ‘성도’라는 말( 하기오스 )은 ‘거룩한 자’라는 뜻이다. 거룩은 모든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행위들을 떠나는 도덕적 성결이다. 성도는 말과 행위에서 거룩해야 한다. [4절]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누추함’이라는 원어( 아이스크로테스 )는 ‘더러움, 추잡함’이라는 뜻이다. ‘희롱의 말’은 저속하고 상스러운 농담을 가리킨다. 더럽고 추잡한 말, 어리석은 말, 저속하고 상스러운 농담은 다 성도에게 합당치 않은 것들이며 성도답지 못한 말들이다. 성도는 이런 말들을 버려야 하고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여 감사해야 하고 또 우리에게 호의와 선을 베푼 사람들에게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5절] [이는]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못할 것임이니라]. 우리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을 버리고 더럽고 추잡한 말,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탐하는 자를 우상숭배자라고 표현한 것은 탐하는 자는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와 같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돈이 신이다. 도덕적으로 더러운 자들과 탐욕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 하지 않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9-10에서,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동성애자)나 남색하는 자(동성애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탐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욕하는] 자나 토색하는[강제로 남의 것을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또 그는 갈라디아서 5:19-21에서도 육체의 일들인 여러 가지 죄악들을 열거한 후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22:15에서,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말했다. 우리가 이런 분명한 진리를 인식한다면, 우리는 천국 확신과 소망을 가진 자들로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등 모든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게 선하게 의롭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6-7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임함이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 ‘헛된 말’이란 율법과 복음의 진리에 맞지 않는 말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웬만큼 죄를 지어도 괜찮다,’ ‘그 정도 죄를 지어도 천국은 갈 수 있다’는 등의 말이다. 그것은 헛된 말, 속이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이며 우리가 죄를 떠나는 것이다. 계속 죄 가운데 사는 자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참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모든 죄악을 버리려 할 것이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애쓸 것이다. ‘이를 인하여’라는 말씀은 앞에서 언급한 죄악들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심 등의 죄악들 때문에’라는 뜻이다. 이런 죄악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끝까지 참고만 계시지 않는다. 그는 마침내 이 세상에 가득한 죄악들에 대하여 일어나셔서 그것들을 범한 죄인들에게 진노하시며 그들을 심판하시고 징벌하실 것이다. 영원한 지옥 불못은 그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 우리도 과거에는 불순종하던 자들이었으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은 후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죄 가운데 살다가 그들과 함께 그들이 받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거룩하게 살고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과 의식주로 만족하며 오직 천국을 소망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속죄제물로 주신 그 사랑을 본받아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모든 더러운 것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음행, 온갖 더러운 것, 더러운 말,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 탐욕을 버려야 한다.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있을 것이다. 특히 더러운 말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우리는 거룩한 말을 하고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한다. 8-14절, 빛의 자녀들 낮과 밤, 빛과 어두움은 누구든지 분간할 수 있듯이, 영적 세계에서도 의와 불의,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은 밝히 분간할 수 있다. [8절] [이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빛이기 때문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에베소 교인들이 불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들이 전에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 되었기 때문이다.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그들은 어두움에 속해 있었고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었다. 어두움은 무지와 부도덕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온갖 부도덕에 빠져 있었다. 즉 그들은 앞부분에서 말한 음행, 온갖 더러운 것, 탐욕, 단정치 못함,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 등을 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다. 그들은 빛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므로 빛 안에 들어왔을 뿐 아니라 그들은 빛들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4). 어두움과 반대로, 빛은 지식과 도덕성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으며, 또 우리 자신을 알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 세상에 있으며 또 장차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이것이 성도들이 가지게 된 지식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는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로 단장되었고 오직 도덕적 삶을 추구하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빛의 자녀처럼 행해야 하고, 지식과 도덕성을 가진 자들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사는 불경건한 생활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제일의 목표로 삼고 날마다 하나님을 더 알고 첫째로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야 하고, 또 오직 그의 계명대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9절] [이는] 빛의[성령의](전통사본) 6) 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있음이니라].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는 성령께서 거하시며 성령을 따라 삶으로써 맺혀지는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 그것은 도덕적 인격과 행위의 열매이다. 그것은 빛의 열매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으며(롬 8:14), 그 열매는 빛의 삶, 즉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이다. [10절]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고 주님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해 보아야 한다. 빛의 자녀다운 삶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은 우리가 주의 기쁘신 뜻을 잘 깨닫지 못할 때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처한 현실 속에서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확인하여 그것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통해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셨고(암 5:6), 또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암 5:14), “오직 공법[공의]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라고 말씀하셨다(암 5:24). 하나님을 찾고 경외하고 섬기는 경건한 삶, 또 그의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11절] [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사도는 7절부터 계속 명령어로 교훈했다. 7절, ‘저희와 함께 참여하지 말라.’ 8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10절,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절,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이라는 말은 어두움의 일들이 열매 없는 일들임을 보인다. 어두움의 행위들은 유익한 열매들이 없는, 사람답지 못한 행위들이다. 죄악을 사랑하고 죄악된 일을 행하는 사람은 짐승보다 나은 것이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런 헛된 행위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들을 책망해야 한다. ‘책망하다’는 원어( 엘렝코 )는 ‘폭로하다, 책망하다’는 뜻이다 (BDAG) . 우리는 어두움 즉 음란과 더러움과 탐욕의 일들의 헛됨과 무가치함과 사악함을 폭로하고 책망해야 한다. [12-13절]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휘포 투 포토스 )[빛에 의해]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죄인들은 악을 은밀히 행한다. 그러나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일들, 즉 어두움의 일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다. 그러므로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기도 부끄러워한다. 공공연하게 뻔뻔스럽게 악을 행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악을 행할 때 그 행위의 악함을 느끼면서 행하며 그들의 악이 혹시 드러날 때면 자기 얼굴을 가리우며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들이 빛에 의해 나타날 것이다. 죄의 죄악됨과 헛됨과 사악함이 책망될 때, 그것과 대조해 무엇이 옳은 것이며 무엇이 선한 것인지 드러나는 것이다. [14절]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잠자는 자’는 성도들 중에 바로 살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죽은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죽었던 영혼이 거듭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야 한다. 그들은 깨어 불경건한 세상 속에서 빛된 삶을 살아야 한다. 즉 그들은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에 합당하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참된 지식과 도덕성의 빛을 비추셔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불경건과 불의와 죄악을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한다. 우리가 전에는 세상 사람들처럼 어두움이었다. 그것은 무지하고 불경건하고 악하고 거짓된 삶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주 안에서 빛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시다. 우리는 참 빛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기며 그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경건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치 말고 도리어 책망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은 성도들은 이제는 열매 없는 헛되고 무가치한 어두움의 행위들에 참여치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런 행위들을 드러내고 책망해야 한다. 7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6:17,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우리는 범죄치 말고 죄를 책망해야 한다. 셋째로, 잠자는 자들은 깨어 일어나야 한다. 누가 잠자는 자들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진심으로 믿으면서도 아직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이 그런 자들이다. 깨어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회복을 진심으로 간구하고 결심하는 것이다. 그는 멸망할 세상과 함께 멸망할 자가 아니다. 그는 멸망할 자들과 구별되어야 하고 회개하고 새로운 삶으로 자신을 증거해야 한다. 15-21절, 지혜, 성령 충만, 찬송, 감사 [15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정확히]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자세히’라는 원어( 아크리보스 ) 7) 는 ‘[표준에 맞게] 정확히’라는 뜻이며 전통본문에는 ‘행할 것’이라는 말에 붙어 있다. 8) 우리는 표준에 맞게 정확히 행할 것을 주의해야 한다. 성경말씀은 우리의 행위의 표준이다. 성경말씀에 맞는 것이 의이다. 의롭게 행하는 것이 지혜이며 그렇지 못한 것이 어리석음이다. 시편 119: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성경의 요점은 우리가 모든 죄를 버리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만 믿고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고 기도에 힘쓰고, 성경의 교훈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16-17절] 세월을 아끼라. [이는] 때가 악하니라[악함이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세월을 아끼라’는 원어( 엑사고라조메노이 톤 카이론 )는 ‘시간을 사서 건지라’는 말인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가장 잘 사용하라는 뜻이다. 그것은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죄악된 유행과 풍조는 교인들을 죄에 빠뜨리려 하며, 물질적 탐욕과 육신적 쾌락은 교인들을 유혹하며, 세상의 염려들은 교인들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세상의 바쁜 일들은 교인들로 점점 교회의 일에 참여치 못하게 만든다. 또 악한 시대는 때때로 성도들을 핍박한다. 또 이 세상은 전도를 방해한다. 오늘날 공영 방송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 외의 거의 모든 것을 다 전달하고 있다. 헛된 사상들과 이념들, 헛된 오락들, 불륜과 외도, 술취함, 폭력, 음란성 있는 복장, 노래, 춤, 심지어 귀신 이야기들까지 전달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다 전달할 수 있으나,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진리만은 제외되고 있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들처럼 세월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사람의 생애는 한 번뿐이다. 우리는 주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밝히 계시되어 있고 기록되어 있다.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은 첫째로, 택함 받은 자들의 구원이며, 둘째로, 성도가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술은 육신적 기쁨을 위하고 세상의 근심과 고통을 잊으려고 사용된다. 그러나 술 취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제력을 잃게 만들고 실수하게 하며 방탕에 떨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술 취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고전 6:10; 갈 5:21). 그러므로 술을 끊는 것은 성도의 좋은 전통이다. 잠언 23:3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성도는 술 취함 대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오셔서 영원히 거하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큰 복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보혜사’( 파라클레토스 )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위로자’라는 뜻이다.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풍성한 위로를 얻는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원어( 플레루스데 엔 프뉴마티 )는 ‘계속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뜻이다. 원문에서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어( 플레루스데 )(현재수동태)는 반복적 행위를 가리킨다. 성령의 충만은 한 번만 가지는 일이 아니고 계속 반복적으로 가져야 하는 일이다. 또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수동적 의미를 가진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주체가 아니고 대상이며 성령께서 주체이시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충만히 거하시고 큰 위로와 힘을 주신다. [19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영적인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도의 정상적인 삶은 성령 충만한 삶이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감사의 행위로 나타난다. 본문의 ‘시’는 시편을 가리킨 듯하고, ‘찬미 혹은 찬송’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속성들과 그의 하신 일들을 인정하고 높이는 노래를 가리킨다. ‘영적인 노래들’은 성도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나오는 간증적 노래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성도들의 감사와 죄의 회개와 선한 결심 등의 내용이다. ‘서로 화답하라’는 말은 ‘서로들에게 말하라’는 뜻인데, 이것은 시와 찬송과 영적 노래들이 하나님께 드려질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성도들에게도 들려짐으로써 그들의 신앙생활에 유익을 주게 하고 그래서 다 함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선한 삶을 살게 하라는 뜻이다. 본절과 비슷한 교훈인 골로새서 3:16의 원문은 “모든 지혜로, 시와 찬송과 영적 노래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번역할 수 있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는 말씀은 찬송과 영적 노래들이 우리의 입이나 목에서만 나와서는 안 되고 마음 중심에서 나와야 함을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으로 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찬송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 찬양대는 일반 합창단들과 다르다. 찬양대의 의미와 가치가 다를 뿐만 아니라 찬양의 내용이나 방법도 다르다. 세상 노래들은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 중심의 노래들이다. 그러나 찬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 중심의 노래들이다. 시편 33:1-2,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시편 96:1-2,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 시편 100:1-4,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편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20절]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만드신 창조자이시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주시는 섭리자이시다. 해마다 늦가을이 되면 우리는 올해도 우리의 육신을 위해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또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건강과 직장과 가정과 사회적 안정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는, 무엇보다, 죄와 허물로 죽었었고 지옥 가야 마땅했던 우리를 값없이 주신 은혜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으로 구원하셨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고 복된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드린다. 비록 우리가 지금 고난 중에 있다 할지라도, 지금 우리 자신이나 우리 가족이 무서운 병과 싸우고 있고 경제적 곤란 가운데 있고 자녀 문제로 염려하고 있고 또 우리 사회가 이념의 대립과 갈등, 경제의 파탄, 안보의 불안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혹시 우리 자신의 부족과 죄가 없는지 반성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훈련의 현실을 달게 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처한 현실의 혹독함이 아니고, 우리가 참된 믿음과 참된 회개와 간절한 기도가 있는가 여부이다. 욥은 고난 중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했다(욥 1:21).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말했다. 참된 성도들에게는 고난은 있으나 보호하심과 회복하심도 있고 합력하여 선을 이룸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21절] 그리스도를[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주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교훈하셨다(마 20:26). 사도 바울은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교훈했고(롬 12:10) 또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다(빌 2:3).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는 정신이다.

본문의 교훈들을 다시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지혜자로서 주의하며 성경말씀에 맞게 정확히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때가 악하므로 세월을 아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술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진심의 찬송을 올려야 한다. 여섯째로, 우리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일곱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한다. 22-33절, 아내와 남편의 의무 [22-24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알 )[그런즉, 그러므로] 9)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 복종하되 주께 복종하듯이 해야 한다.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의 말에 대항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아내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은 남편들이 자기 아내들의 머리라고 가르친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명령과 순종의 관계이다. 남편들이 아내들의 머리이기 때문에,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자신을 속죄제물로 내어주셨기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께 범사에 복종해야 하듯이, 아내들은 범사에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아내들의 복종은 거의 절대적이어야 한다. 단지 한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는 일 즉 죄 되는 일의 경우이다. 그러나 죄 되는 일 외에는 언제든지 무엇에든지 아내들은 그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골로새서 3: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디도서 2:3-5,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전서 3:1-6,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남편 순종은 거룩한 부녀들의 본이었다. [25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것을]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다.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그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 남편들은 어떤 경우에라도 자기 아내들을 사랑해야 한다. 거기에는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어 보인다. 골로새서 3: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베드로전서 3: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 [26-27절] 이는 [그가 그것을]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남편들의 의무를 설명하다가 교회의 거룩함에 대해 말한다. 교회의 거룩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교회란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를 위해 자신을 대속 제물로 드리셨다. 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영혼들이 그 구원의 복음의 말씀을 믿음으로 깨끗함과 거룩함을 얻게 하시고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그의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대로 다 성취되었다. 주의 피로 구속(救贖)받고 복음으로 깨끗하게 된 교회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 곧 구원받은 성도들은 실제적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즉 교회는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거룩하고 완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비록 지상에서 이런 노력은 불완전하며 우리의 의와 완전은 여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밖에 없지만, 우리는 교회들 곧 성도들의 거룩함과 완전함을 위해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성화와 온전함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살전 4:3). 성도들이나 교회가 사상이나 생활에 있어서 거룩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지극히 성도답지 못하며 교회답지 못한 것이다. [28절]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들을 자기의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즉 아내는 남이 아니고 남편의 몸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의 몸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29-30절] [이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주께서](전통사본)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함이니 이는] 우리는 그 몸의[그 몸과 살과 뼈의] 10) 지체임이니라.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지 자기의 몸을 사랑하며 자기의 몸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먹고 적절한 운동을 하고 또 옷을 입혀 몸을 보호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몸의 지체인 교회를 이처럼 보살피시고 공급하시고 양육하시고 보호하신다. [31-32절]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결혼이란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일이다. 창세기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부모를 떠난다’는 말씀은 결혼이 독립 가정을 이루는 일임을 나타낸다.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된다’는 말씀은 부부의 관계는 인간 관계 가운데 가장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낸다. 부부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다. 사도 바울은 결혼 관계의 비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성경은 과연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결혼의 비유로 종종 표현한다.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요한계시록 19:7-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풍성한 생명(요 10:10)과 힘을 얻는 것(요 15:4-5)은 영적인 연합의 신비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연합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었다. [33절]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존중하라, 존경하라].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들을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같이 하고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다시 정리해보자. 첫째로,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에 밝히 교훈된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성경은 남존여비 사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와 가정의 질서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돕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 여자를 창조하셨다. 그는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우셨다. 그러므로 아내는 자기 남편을 자기의 머리로 여기며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교회 곧 구원받은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아내는 자기의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본문은 아내들이 범사에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라고 교훈한다. 그것은 죄 되는 일 외에는 항상 복종하라는 뜻이다. 또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둘째로,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도 성경에 밝히 교훈된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아내는 남편의 몸의 한 부분, 즉 그의 갈빗대이었다.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십자가에 속죄제물로 자신을 내어주심같이, 남편은 자기 아내를 무조건적으로,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순종생활로 나타나야 한다. 아내의 순종과 남편의 사랑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순종할 때 우리 자신도 우리 가정도 평안하고 복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지 말고 억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과 그의 계명들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았던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속죄제물로 죽으심으로 우리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셨고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게 하셨다. 우리는 그 은혜를 잊지 말고 억만분지 일이라고 보답하는 양으로 모든 죄를 멀리하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6장: 교회의 전투성 1-9절,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의 의무 [1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는] 이것이 옳으니라[옳음이니라].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5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은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근거를 보인다.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안에 사는 그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이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은 순종의 한계도 보인다. 부모의 명령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된다면 부모에게 순종할 수 없다. 부모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2-3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자녀들은 자기들을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그들은 부모를 무시하지 말고 그들의 사랑과 수고를 인정하고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서 “그리하면 내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고 약속하셨다. 그는 부모를 공경하며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현세에서도 잘 되고 오래 사는 복을 주실 것이다. 구약에서 룻과 에스더는 좋은 예이다. 룻기 3:5,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에스더 2:20, “에스더가 모르드개[에스더를 길러준 부모와 같은 사촌 오빠]의 명한 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고하지 아니하니 저가 모르드개의 명을 양육받을 때와 같이 좇음이더라.” 그들의 생애는 복되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에서 이 계명을 어기는 자는 엄하게 징벌되었다. 신명기 21:18-21에 보면,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은 부모가 그를 성읍 장로들에게 내어주고 성읍의 모든 사람은 그를 돌로 쳐죽임으로써 이스라엘 사회에서 악을 제거해야 했다. [4절]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본문은 자녀 교육의 의무를 교훈한다. “아비들아”라는 말씀은 자녀 교육의 주체가 아버지임을 보인다. 자녀 교육은 정부나 학교에 맡겨진 일이 아니고 심지어 교회에 맡겨진 일도 아니고 부모에게 그것도 아버지에게 맡겨진 일이다.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녀 교육의 책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완수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장로와 감독의 자격을 말하면서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라고 말했다(딤전 3:4-5).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자녀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하거나 학대하지 말라는 뜻을 포함한다. 부모는 자녀들을 어리다고 무시하거나 부당한 명령을 하거나 강압하고 위협하거나 구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 해가 되며 그들을 빗나가게 만들며 겉으로만 순종하는 이중적 인격을 만들기 쉽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은 자녀 교육의 방법을 말씀한다. ‘교양’이라는 원어( 파이데이아 )는 ‘교육, 훈련, 징계’ 등의 포괄적 의미를 가진다. 또 ‘훈계’라는 원어( 누데시아 )는 ‘훈계, 권면, 경고 등’의 뜻을 가진다. 우리는 주께서 주신 성경말씀을 가지고 교훈하고 훈련하고 훈계하고 권면하고 경고해야 한다.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부모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은혜 주시기를 겸손히 간구해야 하고 늘 교훈하고 또 선한 본을 보여야 한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날마다 규칙적 성경 읽기와 기도뿐 아니라, 성수주일(聖守主日)과 십일조 등 기본적인 경건 훈련을 시켜야 하고 또 의와 선과 진실의 도덕 훈련을 시켜야 한다. 이사야 58:13-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성수주일은 복되다! 말라기 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 생활도 복되다! 또 부모는 자녀가 잘못할 때 징계하고 체벌해야 한다. 잠언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늦기 전에] 징계하느니라.”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지옥]에서 구원하리라.” 잠언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자녀 교육에 있어서는 비인격적이고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과 체벌을 가진 소위 스파르타식 교육도 잘못이지만, 엄격한 교훈과 규율과 체벌이 전혀 없는 자유방임적 교육은 잘못된 교육 방식이다. [5-7절]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하플로테티 테스 카르디아스 )[마음의 단순함, 성실함, 진실함]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종들은 자기들의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들은 주인에게 ‘두려워하고 떨며’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주인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순종하라는 뜻이다. 종이 주인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면 그에게 순종하기 어렵다. 그들은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순종해야 한다. 또 그들은 주인에게 ‘단순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의 마음을 다른 곳에 두지 않고 맡겨진 일에 단순하게 성실하게 두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종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종들은 종의 위치에서 모든 일을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주인의 모든 일들을 다 알려고 하거나 다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그들은 ‘그리스도께 하듯’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놀라운 교훈이다. 주인이 그리스도가 아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께 하듯이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그리스도께 하듯이 순종하는 것과 같다. 또 그들은 주인 앞에 눈가림으로만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단 마음으로’ 해야 한다. 즉 겉보기에는 주인을 섬기는 것 같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일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중심을 다 보시고 다 아시는 주 앞에서 단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오늘날 사회의 각 분야에서 직책상 아랫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아랫사람들은 단순한 마음으로 자기의 직책에 충실하고 윗사람에게 순종하며 눈가림으로만 하지 말고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단 마음으로 일해야 할 것이다. [8절]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종이나 자유인이나 우리의 선행은 주께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보상은 단지 종교적 봉사의 행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세속적 직업에서의 선행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세상 직업에서 감사하게, 성실하게, 보람되게 선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보상은 마지막 심판 날에 주실 보상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기대할 만한 보상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게 사는 자들에게 내세의 복뿐 아니라, 현세의 복도 약속하셨다(딤전 4:8). [9절]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위협]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본문은 주인들도 종들에게 “이와 같이 하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종들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주인에게 순종해야 하듯이, 주인들도 합당한 마음을 가지고 종들을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종들이 주인에게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듯이, 주인들도 종들에게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주인들은 종들을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 주인들은 종들에게 정당한 책망과 경고를 할 수 있다. 잠언 29:21에 보면,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리라”는 말씀이 있다. 그것은 종에게 정당한 책망과 경고를 하지 않으면 자기 분수를 모르게 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주인들이 종들에게 부당하고 무리한 혹은 비인격적인 책망이나 위협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공의롭지 못하고 인정 없는 윗사람이 되어서는 안되며 주인의 권위를 남용하거나 악용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주인들이 종들을 위협해서는 안 될 이유는, 모든 주인들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온 세상에서 가장 크시고 높으신 주인이시다.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또한 너희 자신의 상전[주]’이라고 되어 있다. 하늘에 참 주인께서 계시다. 그는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 하나님 앞에 사는 자들일진대, 어떻게 주인들이 종들 앞에서 교만하고 부당하고 무리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자녀는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그들을 공경해야 한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4계명에 명령된 하나님의 뜻이며 옳은 일이다. 그것은 자녀들로서 마땅한 의무이다. 또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장수(長壽)와 번영의 약속이 있는 복된 의무이다.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그의 삶이 복되고 잘되고 또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다. 둘째로, 부모 특히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자녀들을 바르게 교육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부모들에게 특히 아버지들에게 주신 엄숙한 의무이다. 자녀 교육은 정부나 학교의 책임이 아니고 심지어 교회의 책임도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부모들의 책임이며 아버지들의 책임이다. 그들은 성경의 교훈과 훈계와 징계와 경건한 본으로 자녀들을 경건하고 도덕적이게 양육해야 한다. 셋째로,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단순한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으로, 또 눈가림으로만 하지 말고 단 마음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선행에 대해 갚아주실 것이다. 이 교훈은 오늘날 성도들의 직장생활에 적용된다.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을 두려워하며 단순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하듯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단 마음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에 충성해야 한다. 넷째로, 주인들은 종들을 위협하지 말고 공정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대해야 한다. 주인들은 종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하고, 하늘에 크시고 참되시고 공의로우신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계심을 항상 기억해야 하고, 범사에 정직하게, 선하게, 겸손하게,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10-24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0-11절]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대항하여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 중에 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마귀와 악령들과 그들을 돕는 악한 자들이다. 마귀는 지혜와 능력이 있어서 간교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궤계를 대항하여 서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본문에는 ‘서기 위해’라는 말이 두 번(11, 13절), ‘서라’는 말이 한 번(14절) 나온다. 성도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목적과 목표는 마귀와의 싸움에 넘어지지 않고 서기 위함, 즉 승리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영적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우선 하나님의 힘으로 강건해져야 한다. 전쟁에서 필요한 것은 강한 군사력, 즉 가장 좋은 무기들과 병사들의 체력과 용맹스런 마음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다. 힘과 능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시 62:11). 하나님께서는 피곤한 자들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들에게 힘을 주신다(사 40:28-29). [12-13절] [이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대함임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본문은 성도들의 싸움의 대상이 누구이며 그 싸움의 성격이 어떠함을 보인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단순히 사람들이 아니고 이 세상 나라 권세자들의 뒤에 있는 악령들이다.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 인류의 시조를 범죄하게 한 이후 계속하여 온 세상을 미혹하여 사람들을 범죄하게 하고 또 교회를 부패시키고 혼란시키는 일을 해왔다. 성도들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사탄과 악령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영적인 무장이다. 우리는 힘있는 병사로 잘 무장하고 싸움에 임할 때, 악한 날, 곧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날에 또 환난과 핍박의 날에, 마귀의 시험들을 능히 이기고 주께서 명하시고 맡기신 모든 일을 완수하고 설 수 있다. 그러나 겁약한 자들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지 않는 자들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지고 범죄하고 실패하고 낙심하고 좌절할 것이다. [14-17절]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火箭)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본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설명한다. 첫째로, 진리로 허리띠를 띠는 것이다. ‘진리’는 ‘진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며 마귀는 거짓되다. 진실은 하나님의 세계의 특징이며, 거짓은 마귀의 세계의 특징이다. 마귀와의 싸움에서 필수적인 덕은 진실이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행하면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다. ‘진리’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할 수 있다. 요한복음 17:17에 보면, 주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허리띠를 띠어야 한다. 둘째로, 의의 흉배를 붙이는 것이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의가 되셨다. 우리는 이 의를 늘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 또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단번에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이제 죄를 멀리하고 의만 행해야 한다. 성도는 모든 죄와 불의를 멀리하고 항상 의롭고 정정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셋째로,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평안의 복음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였고 우리의 심령에 참 평안을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하였으며 마음에 평안을 얻었다. 또 우리는 이 평안의 복음, 이 화목의 복음을 늘 신처럼 신고 만나는 자들에게 전해야 한다. 넷째로,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속죄 신앙이 중요하다. 이 속죄 신앙이 구원 신앙이다. 우리의 순종과 선행은 늘 부족하지만, 우리가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밖에 없다. 요한일서 5:4-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다섯째로, 구원의 투구를 쓰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리킨다고 본다. 투구를 쓴 자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고한 지식과 믿음이 없는 자는 마귀의 시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는 마귀의 밥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의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진다면 마귀의 시험을 이길 것이다. 여섯째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칼과 같다. 그것은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이다.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이 책을 통해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성경을 인용하심으로써 마귀를 물리치셨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성경을 읽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는 자는 칼 없이 전쟁에 나가는 자와 같다. 그 전쟁의 결과는 보나마나 실패이다. 사람들은 실패의 삶을 살면서도 성경 읽기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배우고 묵상해야 한다. [18-20절]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일곱째로, 성령 안에서 항상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마지막 내용은 기도이다. 우리는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많이 또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무시로’라는 말은 ‘항상’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7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하였다. ‘성령 안에서’라는 말은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심을 암시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6-27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마귀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마귀는 기도하지 않는 자를 자기 밥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는 성도는 마귀를 이길 것이다. 마귀는 기도하는 자를 무서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성도의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지원을 받는 방법이다.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는 원문은 직역하면, “이를 위하여 깨어 모든 인내와 간구로 모든 성도들을 위해 구하라”이다. ‘모든 인내로’라는 말은 기도에는 많은 인내가 필요함을 보인다. 우리는 기도할 때 낙심치 말고 오래 참으면서 기도해야 한다(눅 18:1-8). 또 ‘깨어’라는 말은 기도가 곧 깨어 있는 일임을 증거한다. 기도하는 성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이지만, 기도하지 않는 자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자이다. 기도의 내용에 관해,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교훈한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선한 일이다. 우리가 다른 성도들을 위해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다른 성도들을 위한 기도야말로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이다. 사도 바울은 또 “나를 위하여 구하라”고 말한다. 그는 지금 쇠사슬에 매인 채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전도 사역을 위해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이다. 비록 자신이 이런 죄수의 몸이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을 주셔서 그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해주시기를 기도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전도자를 돕는 방법 중에 기도보다 더 중요한 방법은 없다. 설교는 영혼들을 구원하며 그들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다(고전 1:21; 골 1:28-29). 그러므로 설교자를 위한 기도는 매우 귀하고 중요한 기도이다. [21-24절]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엔 압다르시아 )[식지 않고, 죽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아멘]. 1 1) 사도 바울에게는 두기고 같은 진실한 동역자가 있었다. 그는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이며 바울의 모든 사정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알리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이었다. 오늘날에도 이런 충성된 일꾼들이 필요하다. 또 사도 바울은 다른 편지들과 달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 외에 ‘믿음을 겸한 사랑’을 기원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믿음과 사랑을 사모해야 한다. 또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식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원하였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식지 않고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세상에서의 우리의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은 영적 전투와 같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마귀와 악령들과 그들에게 속한 자들이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넘어지지 말고 서야 하고 이겨야 한다. 이렇게 영적 싸움을 잘 싸워 이기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로, 우리는 주 안에서와 그의 힘으로 강건해져야 한다. 우리의 심신이 연약하면 이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그를 의지하면 우리는 힘을 얻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첫째, 진리의 허리띠를 띠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진실해야 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둘째, 의의 흉배를 붙여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고 범사에 정직해야 한다. 셋째,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했고 심령의 평안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 복음을 만나는 자마다 증거해야 한다. 넷째, 믿음의 방패를 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가 되신 구주 예수님만 믿고 의지해야 한다. 다섯째,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한다. 우리는 구원의 확고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여섯째, 성령의 검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많이 읽고 듣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일곱째, 늘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늘 기도할 뿐 아니라, 모든 성도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특히 목사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 미주 1 ) Byz A it d vg syr p cop sa bo arm 등. 2) Matthew Poole, “바울이 여기에서[빌립보서 2:12에서] 강조하는 바는, 우리가 구원의 일에 게으르지 말고 우리가 그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나님과 함께 일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협력은, 그리스도께만 합당한 구원의 획득이나 공로에 관계되지 않고, 단지 그리스도께서 풍성히 완성하신 것의 적용에 관계된다”( Commentary, III, 691). 3) Byz it d vg syr p arm Origen lat 등에 있음. 4) Byz it d vg syr p arm Irenaeus gr lat 등이 그러함. 5) Byz B 075 vg syr p cop sa-mss arm geo 등에 있음. 6) Byz p 46 등. 7) 한글개역성경은 이 단어를 모두 ‘자세히’라고 번역하였다(마 2:8; 눅 1:3; 행 18:25; 살전 5:2). 8) Byz A D it (d) vg (arm) cop bo-mss 등이 그러함. 9) 보통의 경우는 ‘그러나’라고 번역하지만, 이 경우에는 문맥적으로 ‘그런즉, 그러므로’라는 뜻이 가능하다고 한다 (BDAG, KJV) . 10) Byz it d vg syr (p) arm Irenaeus 등이 그러함. 11) Byz it d vg cl ww syr p cop bo-pt arm eth 등에 있음.

에베소서 강해1권 -마틴 로이드 존스- 강대식 목사

에베소서강해 1권, 1-13장 요약 마틴 로이드 존스 저서

강대식 목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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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연구회” http://cafe.daum.net/psc-k

* 강론일: 2010-07-09 * 제목: 1장 서론 * 책명: 에베소서강해 1권 —————————————-

루터는 로마서를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요 복음의 가장 순수한 표현이다”라고 했다.

로마서만큼 복음을 순전하고 명백하게 진술한 것이 없다.

에베소서는 복음을 가장 숭엄하고 엄위롭게 표현한 서신이라 할 수 있다. 더 넓고 더 크다.

이 서신보다 더 숭엄한 것이 성경 전체를 다 살펴보아도 없다.

어떤 분은 “바울 신학의 면류관이요 절정이다”라고 한다.

“기독교의 정제된 진수요,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권위있고 가장 완벽한 개요이다”라고도 한다. 사도가 사용하는 말들, “그 모든 것의 영광”, “하나님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신비와 부요함들!”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위대한 구원과 구속의 파노라마를 “하늘”에서 내려다 본다.

이 서신은 전체적이고 일반적인 진술을 포착하여야만 세밀한 부분들을 이해하고 포착할 수 있다. 반면에 장 별로 대강 분해하여 다루는 사람들은 그들의 무지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 서신의 주제는 하나님-하나님 아버지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사도 바울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우리도 그렇게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들이 당하는 주된 고통의 원인은 너무 주관적이고, 너무 자기 중심적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성경의 메시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영원하시고 영존하시는 하나님, 스스로 만족하신 하나님, 영원부터 영원까지 어떠한 도움도 필요 없으시고 항상 자신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영원한 영광 중에 살아 계시고 거하시는 하나님이 주제이다.

바울은 자신의 뜻으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다. 교회가 그를 부른 것이 아니다. 그를 부르신 이는 하나님이셨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사도가 된 것이다. 우리도 우리 자신들로부터 시작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임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 알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3장의 큰 주제이다.

그 비밀은 이방인들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후사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밀”이라는 말은 에베소서에서 여섯 번이나 사용된다. “경건의 비밀이 크도다”. “하나님의 뜻의 비밀이여!”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다. 우리 유한하고 죄가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은혜”라는 말이 이 서신에서 열세 번이나 사용되었다.

2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그 은혜의 풍성함!”,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과 부요함, 흘러 넘치도록 충만한 부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서신의 최고 목적은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흘러 넘치는 풍성함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관점과 통찰력을 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서들에서 그 다음으로 잘 나오는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경 전역에서 언제나 두 번째로 나오는 말이다. 바울은 처음 구절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도 없고 복음도 없다. 복음은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것이다.

모든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행된다. 하나님이 그의 주권적인 뜻 안에서, 그의 무한하신 은혜로 말미암아서, 그의 긍휼의 풍성함을 따라서, 그의 뜻의 비밀을 따라서, 우리 구원을 위해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것이다”. 그 안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의 모든 풍성함을 다 쌓아 놓으셨다. 그를 떠나서는 기독교의 메시지도 없다. 우리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택하심을 받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하여 화평을 얻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길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 그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하늘로부터 땅에 보내셨고 십자가 위에서 고뇌와 수치를 받게 하신 것 때문이다.

이 서신에서 그리스도는 절대적으로 진수가 되는 것임이 밝혀져 있다. 1장이 상기시켜 주는 바와 같이 그는 “그의 몸된 교회의 머리”이다.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이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계시는” 분이다. 그는 23절,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다. 그는 하늘이나 땅에 있는 모든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이 이 서신의 실제적인 주제이다.

10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2장에서는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괴롭게 하는 난제들을 발견한다. 그 난제들이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공중 권세잡은 자”에 기인하는 것을 본다. 사도는 하나님의 구속계획이 필요한 것은 인간의 타락 때문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이 있기 전에 마귀, 사탄이라고 불려지며, “이 세상의 신”이 된 광명한 천사의 타락이 선행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 가공할 힘은 인간의 삶의 특징이 되어 왔던 적대감과 곤경과 파괴의 근본 원인이다.

또 하나의 위대한 주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중간에 막힌 담”은 사라졌다. 하나님께서는 “둘로 하나를 이루셨다”. 새로운 창조가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교회라고 칭하여지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연합되고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교회는 이 서신에서 또 하나의 주제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하여 그 교회 안에서 가장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다른 사람들, 다른 민족들,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 온 사람들이, 다른 체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 외모도 다르고 심리나 다른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르게 되기까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해변 이편에서 저편에까지, 달들이 차고 더 이상 기울지 않기까지” 왕노릇을 하게 될 순간까지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하고 계신다. 교회를 그에 비추어서 보는 것, 그리고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는 중요성과 특권과 책임성을 아는 것만큼 더욱더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나 놀라운 것은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4장에서 이 서신 끝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는 바 윤리적인 행실이다. 그것은 그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계획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 그의 은혜를 나타내야 하는 것 때문에 그러한 윤리적인 행실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체험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어떠한 사람들이며,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일을 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신 방식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 있는 그의 기업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고, 믿는 사람들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얼마나 변화시킬는지요!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히소서”. 이 서신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들을 붙잡고 그것들을 누리도록 하자.

* 강론일: 2010-07-16 * 제목: 2장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 * 책명: 에베소서강해 1권 —————————————-

(엡1:1-2)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신약의 서신들에서 서론의 인사들은 중요하고 진수가 되는 진리들이 들어 있다. 신약의 서신들은 오로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 예수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그 교훈을 보편적으로 일반 세상에 적용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이며 이단적이다. 에베소서는 일반적인 교회의 지체들에게 보내진 것이다. 특별히 학식 있는 자에게만 보낸 것이 아니다. 이 서신의 높은 교훈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최소치에 해당하는 진리를 대하게 된다. 사도 바울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사람들이 더 많고 더 깊고 더 높은 진리들을 배우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이것이 사도의 기도이며 궁극적인 목적이다.

오늘날 현 시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어떻게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으면서도 그들이 살고 있던 이방의 이교도 지역에 그러한 심오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그들다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조직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그들의 사람됨의 자질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지고 있었던 능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것이 기독교가 고대 세계를 정복하였던 방식이었다. 기독교가 현대 세계에 감화를 끼칠 수 있는 길은 바로 그러한 방식밖에는 없다. 기독교가 현대 사회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신약성경에서 발견하는 것 같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세 가지 용어로 묘사하고 있다. “성도들”, “신실한 자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1) “성도들”. 첫째 의미는 ‘구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 좋은 실례는 행19:9에서 제자들을 따로 분리시켜서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한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이 모인 곳이다. 기관이 아니다. 그에 대한 완벽한 예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선택된 세대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자들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라도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구별되었으며 매우 다르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었다. 예배당에 참석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인격적으로 구별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며,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르냐 하는 것이다.

둘째 의미는 ‘내적으로 구별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성도”란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성도는 죄책으로부터 정결함을 입은 사람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되기 전에 먼저 그는 죄책으로부터 정결함을 얻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죄의 오염에서도 정결함을 입은 사람이다. 성도는 그의 마음과 의지와 그의 행동과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더럽히는 것으로부터 정결함을 입은 사람이다.

카톨릭이 거짓된 이분법을 사용하여 어떤 사람들을 뽑아서 “성자”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고 비성경적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도이고 성도가 아니고서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다. 세상의 정신이나 사고방식에 주관을 받지 않는 것이다.

에베소는 이교도들로 꽉 차고 거만과 교만으로 가득한 도시였다. 기독교가 그런 토양에서 자라날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전도를 하였고 바울의 전도는 성령의 쓰임을 받았다. 교회가 세워졌고 성도들이 생기게 되었다. 후에 에베소는 사도 요한의 일터가 되었다. 복음은 인간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 복음이 한 도시에 들어가면 성령 충만한 사도 바울의 인격에서 일어난 바와 같이 불가능한 것이 없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남편이나 자녀나 어떤 다른 친척에 관하여 절망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은 아닌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 고린도나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을 기억해 보라.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것은 강력한 일들을 성취하였다.

복음은 가장 절망적인 개인을 들어서 성도로 바꾸어 줄 수 있다.

2) “신실한 자들”. 올바른 번역은 “믿음을 행하는”이다. 주님이 도마에게 한 말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의 ‘믿는’이라는 말과 같은 원어이다. 그들은 믿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인은 특별한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다. 그 믿음의 진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위에 중심을 두는 것이다. 성도는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다. 누구를 믿고 무엇을 믿는 믿음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임을 믿는다. 그의 성육신을 온전히 믿는다. 그의 영원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거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그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낸 것을 믿는다.

기독교의 성원이 될 법한 선한 사람이 성도가 아니다. 도덕적인 교양과 이상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삶을 위한 경외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성도가 아니다.

“신실한”의 또 하나의 의미는, 믿음을 지킨다는 의미이고, 믿음을 붙잡고 있으며, 믿음의 일관성을 지키고 있으며, 믿음에 충성하고 있으며, 믿음을 변호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믿을만한 사람이며,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신뢰할만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믿어줄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교훈의 풍조에 휘말리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무리 핍박이 심하다 할지라도 좌절할 수 없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가이사는 주”라고 하기를 거절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예수는 주”라는 말을 하였다. 우리는 그러한 핍박은 받지 않는다. 우리는 재정적인 대가나 직업적인 희생의 대가로 어떤 것을 치른다 할지라도 신실해야 하며,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굳건히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사람이다.

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는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는 사람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몸의 지체들”이다.

(엡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느니라”. 그는 머리요 나는 그 몸의 지체이다. 우리 사이에는 생명적이고 유기적이고 신비적인 연합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누리는 모든 축복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은 것이요 은혜 위에 은혜 가운데서 받은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함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이시오 우리는 그 생명의 일부분이다.

“성도들”, “신실한 자들”, “그리스도 안에”의 순서들을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명백하고 우선적인 것은 그가 “성도”라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구별된 사람들이며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도”와 “신실하게 된다는 것”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이다. 거룩함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사이의 관계를 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은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윌리암 템플, “거룩하지 않는 신자가 없고, 신자가 아니고서 거룩한 사람이 없는 법이다.”

우리의 칭의와 성화 사이를 틈을 내서 분리하려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일은 “그가 우리에 대하여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를 나누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의롭다 하심을 얻고도 거룩함을 입지 못할 수도 있다는 교훈은 거짓된 것이다. 그러한 것은 불가능하다. 밀접한 연관이 있다. 우리는 거룩함을 입지 않고 믿는 자일 수 없다. 이 신약적인 의미에서 신자가 아니 되고서는 거룩해질 수가 없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

* 강론일: 2010-07-25 * 제목: 3장 은혜, 평강, 영광 * 책명: 에베소서강해 1권 —————————————-

(엡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절은 인사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누리는 유익들을 말해 주고 있다.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것은 고대 사람들이 만날 때에 하는 인사법이었다. 사도는 이 친숙한 말을 취하여 그것을 새로운 기독교 체계 속으로 가지고 들어온다. 훨씬 더 심오하고 더 넓고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한없는 풍성을 온전히 체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2절은 이 전체 서신의 서곡이라 할 수 있다. 주요 테마들이 모두 이 구절 속에 들어 있다.

“은혜”와 “평강”이다. 이 두 말보다 우리 믿음 전체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은혜는 우리 믿음의 시작이다. 평강은 우리 믿음의 마지막이다.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의 원천이요, 샘이요, 근원이다.

“평강”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끌어 내는 것이다. 시작이 있고 모든 것이 의도하는 바의 목적이 있다.

“은혜”는 “공로 없이 호의의 베품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호의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내리 사랑이라는 말로 부른다. 내려오는, 아래로만 내려가는 사랑이다. 은덕 어린 친절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필립 도드릿지, “은혜! 그 청아한 소리 은은히 내 귀에 들리네”.

“평강”은 단순히 전쟁을 그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헬라어 원어의 근본적 의미는 “연합”, “분리가 있은 뒤에 오는 연합”이다. 어떤 경쟁과 다툼이 있은 후에 함께 모이고 화해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화평케 하는 제물”의 표현이 있다. 싸웠던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고 악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연합하며 화해를 이루는 것이다. 이 서신 2장에서 나타나는 개념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14).

한 성령으로 그들은 한 주님께로 모이게 되었다. 그것이 “평강”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우리가 은혜와 평강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의 죄와 타락의 결과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평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를 평강으로 인도하는 은혜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필사적으로 싸우고 그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내적인 전쟁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죄 때문에 모두 자기 중심적요 자기 위주로 되어버린다.

복음의 전체 메시지는 “은혜”라고 하는 말로 도입이 된다. 현대적인 은혜의 개념이 피상적이고 부적당한 것은 죄에 대한 부적당한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의 깊이를 측량하려면 죄의 깊이를 측량해야 한다. 은혜는 사람이 갖고 있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호의를 가지고 그를 보신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활동을 하여 우리가 죄를 지은 결과로 묘사한 모든 것을 완전히 다 원상복귀 시킨다. 무엇보다 은혜는 인간을 하나님과 화평한 자리로 옮겨놓는 것이다. (롬5: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은혜는 인간 속에 화평을 주신다. 마음의 안식과 생각의 안정을 가져다 준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어떤 것도 같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전에 미워했던 사람을 이제는 죄와 사탄의 희생물이 된 것을 알고 안쓰럽고 불쌍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평화, 자기 안에 있는 평화,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 외에 “하나님의 평화”라 불리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빌4:7)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실 뿐 아니라 그 평강을 유지시켜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도하는 바 평강 속에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인하여 우리에게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는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 그것을 바라기조차 하지 못할 사람이다. 우리는 그것을 성취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주신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시는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값없는 은사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다. 사도는 여기서 하나님을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의 부성애로 묘사하고 있지 않다. 거기에는 새로운 요소가 있다. 그 다음의 말에서 소개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것이 기독교를 다른 것과 구별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 요소이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은혜와 평강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함께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차대한 교리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기독교 같은 것은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축복은 없다. 처음이나 중간에서나 마지막에서 그리스도를 빼놓고서 기독교라고 부르짖는 것은 어떠한 것도 기독교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되신다.

사도를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분은 누구신가? 그는 주님이시다. 말하자면 여호와이시다. “주”라고 번역된 말은 유대인들의 구약시대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말로 사용되던 말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언약적인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사용되었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그는 복음서에서는 나사렛 예수로 묘사된 분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되게 세워 놓는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분이시다. 그는 우리의 참되시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옆에 같이 서 계실 수 있는 분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영원부터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는 역시 “예수”이시다. 그것은 그가 역시 참으로 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그에 관하여 복된 것을 듣게 된다. (엡1: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 그는 주이시다. 그는 여호와이시며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이시다. 이것은 큰 신비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니”. 그러함에도 그는 친히 주 여호와이시다. 그는 또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이시다” 그는 여호와시다. 그러나 그는 또 예수이시다. 하나님이요 사람인 신이다.

성육신의 기이한 교리가 2절에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내리 사랑을 가지고 강림하신 복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격위이시다. 그는 여호와 주께서 “예수‘가 되신 것이며, 그는 스스로 인성을 입으시고 스스로 우리의 난제들을 짊어져 심지어는 우리의 연약과 우리의 죄악들을 담당하신 분이시다. 그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내리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리스도”라는 말. 주 예수 그리스도, 그는 구주요, 기름부음을 받은 자요, 메시야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분이다. 그는 영광스런 보좌에서 이 세상으로 내려오셨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시고 그런 다음에 우리에게 그의 성품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우리에게 죄사함만을 주신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새로 태어남을 주셨다. 존 칼빈,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아들이 되신 것은 사람들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리스도의 하나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를 포함하여 자신과 함께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선물이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 아버지의 존전에서 영원토록 거하는 것이다.

“은혜”는 그러한 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평강으로 인도하시며,

아들 되는 자격을 가져다 주시며,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 강론일: 2010-07-30 * 제목: 4장 영원한 언약 * 책명: 에베소서강해 1권 —————————————-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사도는 그들이 “성도들”이며, “신실한 자들”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임과, 그 결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 다음에, 이제 3절에서는 그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을 보여 주며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3절은 서신 전체의 중심이다. 이 서신의 제목은 구원의 계획이다. 구원의 방식이요 우리가 처해 있는 엄청난 과정이다. 또한 이 서신의 주제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일들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통거리는 이해와 지식의 부족 때문이다. 성경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니고, 성경의 교리들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긴박한 필요는 “우리의 마음 눈이 열리는 것이다.” 부르심을 받은 높은 “부르심”의 특권과 가능성을 깨닫기 위하여서다. 우리가 더욱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이러한 것들의 풍성함을 체험할 것이다. 호세아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호4:6)라고 하였다. 사도는 여기서 우리에게 우리가 어떠한 사람들인가 하는 교리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원리는 우리가 구속받은 것에 관한 진리를 깨달으면 그것은 언제나 찬송을 하게끔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을 발하게 하는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가 찬양하는 것은 그 교리를 묵상한 결과이다. 찬양과 감사는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위대한 특징이다. 사도행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서정이 넘치는 책이라고 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당한 모든 핍박과 어려움 그리고 역경들에도 불구하고, 찬양을 드리고 감사하는 정신으로 특징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전에는 전혀 알지 못하였던 행복함과 기쁨과 화평을 느끼는 감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같은 줄기가 신약서신들 전체에서 발견된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신약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진정한 기쁨과 찬양, 감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귀한 일이라는 것을 누구나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참 기쁨과 평강을 주신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불신자들과는 전적으로 달라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찬양이어야 한다. 찬양과 감사와 만족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인들 돋보이게 하고, 그가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예배에 있어서 찬양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뛰어나게 하는 것이다. 수세기 동안 내려오면서 쓰여진 경건생활을 위한 모범서들이나 특별한 성찬식을 위하여 말하는 모범서들에서, 예배와 기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배하고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바, 진실로 그 뜻에 합당하게 사는 길은 여러분과 제가 “감격적으로 사랑과 찬양에 빠져 들어갈 떄”이다. 찬양은 실로 모든 공적 예배의 행위들 중에서 매우 중요한 순서이다. 우리의 예배의 일차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배는 마음과 가슴에서 우러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미해 드리기 위하여 예배당에 나가는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언제나 출발하는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점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찬양과 찬미와 예배가 복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을 주목하도록 하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그 신령한 복들은 성령을 통하여 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언제나 삼위일체론자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그것이 참된 예배라고 하면 언제나 삼위일체론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한 위에 머물러 버리고 만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필연적으로 복되신 삼위일체의 삼위의 각 위에게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는 위험이 언제나 상존하고 있다. 기독교는 그 근원과 그 계속적인 존재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적이다.

동시에 성경에서 그 삼위 하나님의 각 위들이 소개되는 순서에 관하여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순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순서를 언제나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한다.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두 번째 원리는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다우시기 때문에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한 가지는 그것은 복되심이다. 하나님은 그래서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셨으니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신 방식 때문에 찬양을 받으시고 찬미를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계획이 이 3절에 제시되어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사이에 영원하고 위대한 도모가 있었다. 4절은 언제 그 회합이 열렸던가를 말해 준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영원한 회의에서 삼위 하나님의 각 위들께서 우리에 관하여 관심을 두셨던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다.

우리를 구원하는 일이 복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들 사이에서 분담되고 각 위들은 각각 어떠한 일을 담당하실 것인가 하는 것을 합의하셨다.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옛 신학자들을 말하였다. 아버지는 그것을 계획하셨고, 아들을 그것을 실행에 옮기시고, 성령께서는 그것을 적용하시는 일을 하시기로 정하신 것이다. 이 점이 이 1장에서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4-6절에서는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7-12절에서는 아들의 하신 일, 13-14절에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진술하고 있다. 각 경우에 있어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함이라” 또는 그와 비슷한 말로 그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라.

영원한 회의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은 은혜 언약 또는 구속 언약이라고 불러지는 위대한 언약을 하셨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진술들 중 하나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3절의 표현은 우리에게 온 모든 복락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온 것임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리고 창세 전에 복되신 삼위간에 이루어진 언약의 일부로 우리에게 온 것임을 알려주기 위하여 묘사한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에게 온 복락들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 백성들을 아들에게 주셨다. 아들은 자발적으로 그들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하나님께 청하셨던 것이다. 그는 그들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할 것을 계약하셨던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를 하고 회복하여 새생명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 계약의 조건은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인성을 입으시고 인류의 죄를 스스로 담당하시고 그 형벌을 받으실 것과 그들을 대신하고, 그들을 대표하여 고난을 받으실 것을 계약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창세 전에 이루어졌던” 계약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실 때에 그것에 관한 것을 말할 수 있으셨다. 알리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뒤에 가서 부수적인 조항들이 맺어졌다. 노아와 언약을 맺으셨고 아브라함과 모세와 언약을 맺으셨다. 이러한 것들이 원초적인 언약은 아니었다. 아들과 맺은 언약이 원초적인 언약이었다. 이 모든 부수적 언약들은 이 위대한 언약을 가리키는 것들이었다. 모형들과 의식적인 제사들과 희생세자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지시하고 있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그리고 율법은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제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영원 전에 아들과 맺은 언약을 되돌아 가리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는 우리의 대표자시오, 우리의 중보자시오, 우리의 보증자이시다. 모든 복락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가 여러분을 위하여 하신 일을 인식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예배하는 일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우리는 그 언약에 들어 있는 사람들이다.

* 강론일: 2010-08-06 금 * 제목: 5장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 책명: 에베소서강해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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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이 복의 순서를 잘 지켜야 한다. 우리의 곤고함과 주관적인 성격 때문에 대번에 복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 언제나 우리 자신들을 위한 일을 원한다. 그러나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함을 주장한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하고 난 뒤에,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러한 복을 얻게 하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가 하는 것을 인식하고 나서야 복으로 간다. 가장 비참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만을 생각하고 자신들의 받을 축복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축복을 더욱더 누리게 될 것이다. 실제적인 사람은 축복을 향하여 돌진하는 사람이 아니다. 축복의 원천을 생각하고 그 원천을 접하는 사람이다.

축복이 어떤 길을 따라서 오는가를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그 복락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다.

‘그리스도 안’을 떠난다면, 결코 어떤 복도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모든 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복락의 유일무이한 중보자이시다. 복락들이 오는 유일한 통로요 독점적인 통로이다. 우리는 마음이나 체험에서 이 사실을 얼마나 잊기 쉬운가. 오직 “중보자,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보자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딤전2:5).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기뻐하심이라”(골1:19).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2-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2:3).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

이 복에 대한 두 번째 진리는 “신령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 복락들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그 복락들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성령의 의도와 역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가 행하는 일은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것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능하도록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을 우리가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르쳐지는 놀라운 진리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삶을 충만케 하시고 그로 하여금 복음서들에 묘사된 대로의 삶을 살아가도록 가능케 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그러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모든 복락들은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성령이 역사하신 결과이다. 이러한 것들이 “신령한 복”이다. 이러한 복락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오는 복락들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다(고전6:19).

그 복들은 “하늘에 속한” 것이다. 구약에서 복락들은 양과 소와 염소의 수와 소유한 땅으로 평가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루시는 구약적인 방식은 보다 실물적이었다. 어린아이들처럼 백성들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주로 지상에 속한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외양적이고 분명한 복락들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신약성경을 들어가면 전적으로 다른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그 복락들은 “하늘에 속한 것들”이다. 우리는 이 복락들을 지상에 있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에 속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분명히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신약적인 원리를 대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은 솔직히 말하여 공적으로 다른 세상에 속한 것이다. 이 원리가 “여기 이 세상”이 강조되고 있는 오늘 날에는 인기가 없다. 현대인은 다른 세상에 속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복락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에 속한” 것들이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매우 특이하고 놀라운 지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이 세상에 속하여 있는 사람은 아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우리는 여기에 단순히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본향을 떠나서 말이다. “나는 여기서 나그네/ 내 본향은 하늘에 있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행인)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그리스도인들은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다. 그들은 자기들이 떠나온 나라를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그 나라에 속하여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신약성경 전체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지나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경멸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도 하나님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솜씨의 표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즐겨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아름다움과 모든 하나님의 솜씨를 나타내는 것을 누려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세상이 타락되어 있음을 안다. 세상은 우리에게 위험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이 세상의 사고방식과 이 세상의 정신구조를 좇아서는 안 된다. 세상의 정신과 사고방식은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공중권세 잡은 자”에 의하여 조종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실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5:1)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다른 세계에 대한 전형적인 관점을 대변하고 있다.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2). 세상과 그리스도인이 가진 관계는 이러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많은 잠시적인 복락들을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받지만 참된 복락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늘에 속한 것들이다.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1:4-5).

우리를 사로잡는 다음의 말은 “모든”이라는 말이다.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되”. 그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함축하는 말이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되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을 주셨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이 세상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복락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모든 복락들이 에베소서에서 바울에 의하여 매우 엄청난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들은 죄 용서함부터 시작한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죄사함은 엡1:7에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은 3:19에 언급되어 있다. 그 얼마나 크고 말할 수 없는 복인가? “양자로 받아들여짐”에서 하나님의 권속이 된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를 성령을 통하여 누리게 된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또한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셔서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게 될 때”까지 그리스도 자신을 점점 닮아가게 된다. 동시에 그는 우리에게 죄와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6:10).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은혜롭게 제공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하여지고”(6:1).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우리 속에 있는 평화,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복됨과 “말로 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을 누리며, “고난 중에서는 위로를, 시련 중에서는 지원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복락”들을 다 열거할 수 없으며, 이렇게 끝을 맺어야 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9)

이 복락들은 지금 여기서부터 누려야 한다. 분명히 점진적으로 우리에게 온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우리에게 갑자기 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13-14). 우리는장차 올 것의 처음 맛을 보게 되고, 더 많은 것을 받게 될 것이며, 끝내는 그 모든 영광의 충만함을 받고 온전하게 복을 받게 되고, 그것을 누리되 영원히 누리게 될 지점에 이르기까지 발전하게 될 것이다.

* 강론일: 2010-06-18 * 제목: 6장 예수는 주시다 * 책명: 성령의 주권적사역 —————————————-

어떤 점에서 성경은 하나님과 마귀 사이의 큰 대립에 대한 기록이다. 마귀는 항상 하나님의 사역을 해치려고 한다. 그는 첫 사람을 타락시켰으며, 새로운 피조물을 동일하게 유혹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성령의 나타남을 최선을 다해 모방함으로 이를 행한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영들을 “헤아리고 분별하며 시험” 해야 한다. 위대한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은 우리의 이성과 지혜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자연인의 지성은 여기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말하는지 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성은 성령에 의해 계발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할 가치가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으며 성령께서 예리하게 계발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은 성경 자체의 명백한 가르침이다.

1. 우리가 항상 적용해야 할 시험은 고전12:3에서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동일한 것을 요일 4장에서 말씀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이 두 본문은 요한복음 16장의 우리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을 확증해 준다. “그(성령)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알리겠음이니라”(14절). 이것은 성령의 사역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것에 대한 궁극적인 시험이다. 성령은 스스로 말하거나, 심지어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게도 하지 않는다. 우리 주님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지속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래서 성부에 관하여서는 거의 말하지 않고 성자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이다. 성령에 대하여만 이야기할 뿐, 성령이 성자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문제가 있다.

“예수는 주시라!”. 초대 교인들이 순교한 것은 바로 이 고백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가이사는 주시다”라고 말하기르 강요당하였다. 그를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의 위격에 관한 진리를 믿는 것을 의미하며, 그는 진정으로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독특성과 그의 영원한 아들됨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즉, 아버지와의 상호 동등과 동일한 영원성, 그리고 성육신의 위대한 교리를 믿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그 안에 성령을 소유하지 못하였다.

사도 요한의 노년기에 한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가 한 공중 목욕탕에 들어가고 있을 때, 우리 주님의 인성의 실재를 부인한 이단 종파의 한 사람인 셀수스가 거기서 목욕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 순간 그는 그곳을 떠났으며 심지어 그러한 사람과 같은 건물에도 있으려 하지 않았다. 이 태도는 정당하다. 그런 사람을 기독교 교회 안에서 만날 수 있다니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성령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역 뿐 아니라 위격도 이해할 수 있게 하신다. 성령만이 우리가 성례를 지키는 이유와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하신다. 성령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지신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신다.

2. “예수는 주시다!”라는 말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누가는 서두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내가 먼저 쓴 글에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행1:1). 계속해서 사역하시는 이는 바로 예수이시다. 여러분은 성령의 위대한 활동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탁월하게 드러나며 사건들을 주관하시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사도행전은 그의 사역이 계속된 이야기이다.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도록 인도하신다.

3. “예수는 주시다!”라는 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에게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1세기에서 이 고백을 말한다는 것은 바로 순교를 의미했고, 유대인은 가족으로부터 추방되고 이름이 족보에서 말살되는 것을 의미했다. 어떤 사람이 이 고백을 한다면, 그가 자신의 삶을 예수께 맡기는 것과 교회와 연합하는 것과 때로는 오해와 조롱과 박해에 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영적이고 도덕적이고 은사가 많다는 이들에게서도 예수가 주되심을 확인해야 한다.

퀘이커교도들은 완전한 정통 기독교인들로 시작했지만 점차적으로 그들의 강조점을 내적 광명에 두게 됨으로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되었다. 매우 영적이며 도덕적인 사람들에게서도 예수의 주되심을 확인해야 한다. 병고침의 기적과 놀라운 인도하심과 대부분의 은사들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서도 예수의 주 되심을 확인해야 한다.

(마24:23)“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살후2:8-9)“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다양한 은사들에 관하여 지나치게 열중해서 그들의 균형을 잃어버렸다.

(고후11:1-3)“–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11:13-15)“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5. 은사들은 성령세례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

대 부흥보다 더 절박한 것은 없다. 교회가 형식과 무기력과 무감동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요청되는 것은 성령세례이다. 그러나 여기에 또 다른 영이 들어올 수 있다. 지나치게 벗어나도록 강요하거나, 그것을 모방함으로써 이를 망치려고 할 것이다. 성령의 부차적인 은사와 성령의 세례를 사람들에게 혼란시켜서 둘 모두를 거부하게 하여 대 부흥의 필요성을 잊어버리도록 할 것이다.

6. 은사 목록들과 예수의 주되심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 13, 14장에서 사람들은 특별한 은사의 목록들에만 너무 관심이 많아 그 결과 이 장들 전체의 메시지를 상실하는 것이 큰 문제이다. 이것은 나무들을 보고 숲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이다. 바울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우리가 이 모든 것들에 바른 관점과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장들을 성령의 은사를 연구하도록 쓴 것이 아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곤란과 혼란과 심지어 분리가 있었다. 사도는 이것을 회복시키고 올바르게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수는 주시라!”

핵심적인 원리는, 진정으로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의 삶에서 이 모든 은사들의 목적과 위치에 관해 균형되고 바른 견해를 갖는 것이다. 이 원리가 교회역사에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던 수많은 위험들로부터 우리를 구해줄 것이다. 이 원리로 끝을 맺고 있는 14장 마지막 절을 보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바울이 이 세 장을 쓴 것은 고린도교회가 영적인 분별력에 있어서 “지나치고 무질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시정하기를 원하는 오류였다.

* 강론일: 2010-08-13 금 * 제목: 6장 하늘에 속한 * 책명: 에베소서 강해 —————————————-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빗나가는 것은 그릇된 입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물리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이 적극적으로 다른 세상에 속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면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받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 병을 앓거나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 오는 복락들이 “신령한” 것들이며, “하늘에 속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가장 무서운 오해이다.

사도는 결코 이 구절에서만큼 더 높이 올라가는 적이 없다. 우리를 “하늘로” 올려주고 있다. 기독교의 입장을 가장 위대하고 가장 엄위롭게 보여주고 있다. “하늘에 속한”이라는 표현은 이 서신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이 서신에ㅐ서 그 말은 다섯 번이나 나온다. 3절에서 나오고, 23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을 말한다. 2:6, 3:10, 6:12에서 나온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깊은 의미와 실질적인 의미에서만 이 말을 사용한다. 그것은 기독교 진리를 대표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진리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이 어떠한 사람들인가를 알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며 전체적인 사고방식을 전폭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이 “하늘”은 고후 12장의 바울이 경험한 “셋째 하늘”과 정확히 같은 것이다. 대기권 하늘도 아니고, 별들이 있는 하늘도 아닌, “셋째 하늘”이 있다. 이곳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시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곳이다. 그곳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몸을 입고 거하시는 곳이다. 3장의 “정사들과 권세들”이 있는 곳이다. 계시록 5장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이다. 그곳에는 “온전함을 입은 사람들의 영들이” 있다.

사도가 “하늘에 속한”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로부터, 그로 말미암아 오는 하늘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고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한 것은 거듭남을 인하여 그리스도께 연합하였으며, 그의 생명 안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오는 모든 복락들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도의 가르침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다. 이 유기적인 연합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 해당되는 것은 모두 영적으로 우리에게 해당된다. 그가 하늘에 있듯이 우리도 하늘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리는 복락들은 “하늘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단순한 피상적인 변화가 아니라 획기적인 변화를 한 것이다. 우리는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넘어갈 정도의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이끌어 내어 살리시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여 주셨듯이 우리가 중생할 때에 이것에 상응하는 변화가 우리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다.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분명히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도한다. (엡1:18-21)“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바로 그러한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진리이다.

사도의 진술이 진리라면,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불가사의한 인물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늘에 속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이 하늘에 속하여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느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조차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진리이다.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나는 나 자신이지만 나 자신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두 나라에 속하여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우리는 조국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늘나라의 요구들을 안다. 우리는 그 땅의 법률들을 범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영원하고 죽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다른 영역에 거하는 주님이신 그 왕을 거스리기는 더 싫어하는 것이다. (엡2: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영으로 나는 이 순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다. 그러나 나는 육신의 몸을 입은 채로 이 땅에서 살고 있다. 이 몸도 영화롭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두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사고방식이요 동시에 그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사고방식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것이든지 세상이 보는 방식대로 보지 않는다. 즉, 하늘에 속하여 있는 사람들인 우리는 모든 것을 다르게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을 영적인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교회의 일차적인 임무는 영적인 사고방식과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다. 교회는 모든 고통들에 대하여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그 원인을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이러한 것은 죄 때문이며 마귀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엡6: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는 모든 것을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이해의 차원에서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문제를 다루는 오직 유일한 방식은 영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은 국가의 지도자들이나 왕들을 세우시고 권세자들과 관원들을 세우심으로써 악을 막으신다. 그들은 부정적인, 소극적인 방식으로서 단순히 악을 제어하는 역할만 한다. 정부가 사람을 선하게 하지는 못한다. 문화와 교양도 사람을 영적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나 다른 적극적인 방식이 있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위대한 구원을 통하여 적극적이고 근본을 치료하는 방식으로 세상의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다. 그는 사람을 “이 악한 현 세대” 가운데서 끌어내어서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기신다. 그는 사람 속에 죄를 짓기 싫어하는 원리를 넣으시는 것이다. 그에게 그 원리는 거룩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는 것이다. 사람은 적극적으로 선하게 된다. 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 나라들 안에는” 새로운 나라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것만이 치료의 방책이다.

급기야는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커져서 죄가 망하여지고 사라지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아니 그만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안다. 정치가들은 아무리 비상하다 할지라도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직접 보이는 차원에서만 본다.

이 세상에 있는 가장 큰 비극은 교회가 전해야 하는 참다운 메시지를 전하는 대신 세상적이고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늘에 속한”이라는 말을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뿐이다.

여러분은 “하늘에 속하여” 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이 두 영역에 속하여 있다는 것을 아는가? 여러분은 전쟁과 평화와 세상의 고통들에 대하여 이 새로운 영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 여러분은 그 모든 것을 하늘의 전망대에서 하나님의 전망에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그 모든 것을 보시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할지어다!

* 강론일: 2010-06-25 * 제목: 7장 은사를 구함 * 책명: 성령의 주권적 사역 —————————————-

성령세례의 구체적이고 특별한 목적은 주님의 증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이 일을 위한 하나의 방식이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특별한 은사를 소유하지 않고도 성령세례를 받은 수 있다는 것이 성경과 역사의 가르침이다. 휫필드, 웨슬리 형제, 피니, 무디 등은 확실한 체험으로 성령세례를 받았으나 결코 방언을 하거나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이것은 현재에 은사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은사들이 사도시대에만 국한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동일하게 이 모든 것들이 교회에 언제나 나타나져야 한다는 말하는 사람들에게 역시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령의 주권에 속한 영역이다. 성령의 수세기에 걸친 여러 교회 부흥의 시기에 이 주권을 보여주셨다. 성령은 때로 이러한 특별한 은사를 동반하지 않고 말과 언어와 설교의 능력을 주셨다.

고린도교회에 일어났던 혼란은 그들이 이 영적 은사들에 대한 지식에서, 균형과 조화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었다.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14;20).

첫 번째 원리는 은사가 결코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는 은사가 중심이었기에 즉 무대의 중심을 차지했기에, 사도가 그들을 책망해야만 했다. 신약성경을 주도하는 중심적인 위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과 모든 것이 그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중심은 은사가 아니라 우리 주님인 것이다. 교회의 개혁과 부흥의 위대한 시기에, 놀라운 일들이 발생하였고 분명한 현상들이 존재했지만 기적들이 중심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가 은사들 중에 어떤 하나나, 그들 모두에 관하여 끊임없이 말하거나, 그것들을 우리의 가르침이나 설교의 중심적 위치에 올려 놓는다면, 우리는 이미 균형과 조화를 상실한 것이다.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운동을 일으킨다는 것은 확실히 비성경적으로 보인다. 우리는 신앙이나 교리의 어떤 특별한 국면에 관하여, 운동을 절대로 일으켜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는 순간 균형을 잃어버린다.

지나친 전문화는 항상 위험하다. 현대의학에서 매우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여러분이 모든 관심을 이 은사에 집중함으로써, 이것을 따로 분리시켜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신약성경의 균형과 조화를 상실해 버린다. 은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은사에 대한 이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관하여 그들을 책망하고 균형된 바른 사고로 돌려놓기 위하여, 사랑장인 위대한 13장을 기록해야만 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한다. 그들에게 일어났던 또 놀라운 일은 이 은사에 관하여 서로 경쟁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12장 중간의 요지이다.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14절). 서로에 관해서 문자 그대로 시기심으로 가득 찼고, 교회의 전체 상황은 가장 불행하고 가장 불운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과시”하는 경향으로 인도했다.

사도가 강조하는 중요한 것은 은사들을 바른 순서로 배열하는 것이다. 방언의 은사가 너무 탁월한 지위를 얻고 있었다. 이것은 세 장의 주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바울은 항상 방언을 목록의 마지막에 위치하도록 하였다. “더욱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14장에서 뒤에 첨가하여-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에 대하여 예언의 중요성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예언과 방언의 적당한 장점에 대해 가르쳐 준다. 방언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은사들 중에서 가장 낮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분명히 그들 모두가 다 방언을 말하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이 방언을 하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방언의 바른 위치와 순서를 유지하고 있다. “교회에서–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한다.

사람들은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라는 이 은사들의 목적과 의도와 위치를 잊어버린다. 그들은 은사 자체에만 머물러서 놀라고 굉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디에 주님이 있는가?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하면서도 신중하게 주님을 그 중심에 올려놓는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그가 은사를 나타냈을 때 그는 은사에 대하여 전파하지 않았다. 은사의 목적은 주님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은사를 중단하지 말라. 또한 그것에 집중해서도 안 된다. 항상 은사에 관하여 가르치거나 설교해서는 안 된다. 오직 예수만을 전파하라! 은사 집회를 찾지 마라. 그들은 주님에 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주님이 중심이고 필수이며 모든 것을 압도하지 않는 어떠한 가르침이나 설교도 이미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항상 고통과 마침내는 재난으로 인도한다. 어빙주의 운동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성경과 뒤따르는 교회사에 기록된 모든 위대한 부흥은 언제나 대복음운동이었다. 교회에서 시작하여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났다. 반면에 모방된 운동은 작고 분파적인 성향이고 내적인 운동이었다. 단순히 체험과 흥분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나 겉돌고 있는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은사는 각 사람에게 뿐 아니라 전 교회를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 어떤 감정이나 흥분 혹은 스릴을 기대하면서 이 집회에서 저 집회로 찾아다니는 사람들로 가득찬 대부흥집회에 관하여 잘 알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흥분된 체험이다.

성장도 유익도 지혜가 자라지도 않는다. 은사는 항상 교회의 덕을 세우려는 것이다.

은사를 구하는 의도가 중요하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보다는 이기적인 동기나 단순히 우리 자신을 높이려는 욕망으로 구한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되었다. 성령세례를 받는 가장 빠른 방식은 방언을 받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널리 퍼져 있다. 방언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12장 마지막 절). 자주 오용되고 잘못 해석하는 구절이다. 은사에 관심을 갖지 말라 은혜에 충만하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내가 한 좋은 길을 보이리라’의 뜻이다. 진정으로 은사 를 원한다면 은혜 를 구하라는 뜻이다. 이어서 14장에서 “사랑을 따라 구하라 그리고 신령을 사모하라”고 한다. 은사를 얻는 최상의 방식은 주님의 사랑을 구하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을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사랑을 주님에게 돌리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이 사랑으로 충만하면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은사를 얻는 지극히 좋은 길이다.

이것이 신약성경의 가르침이며 수세기를 통하여 온 성도들의 방식이었다. 은사를 직접적으로 구하지 말며 간접적으로 구하십시오. 그를 구하십시오! 그의 사랑을 구하십시오! 그의 영광을 구하십시오! 그에 대한 지식을 구하십시오! 그를 입증하고 증거하기 위한 권능을 구하십시오! 그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은사를 얻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수 도 있으나, 사랑이 없으므로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꾕과리”가 될 것이다.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한다.

그를 구하십시오! 그의 사랑을, 그의 생명을, 여러분의 존재의 근원인 그를 알기를, 그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은사를 받을 것이다. 은사들에 관하여 항상 말하지 말라. 은사들에 관한 집회를 갖지 말라. 절대로! 주님에 관한 집회를 가지라! 그에 관해서 선포하라.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균형을 유지하라. 여러분의 사고에서 조화를 주지하라. 무엇보다 은사를 얻기 위한 열망속에서 여러분 자신을 심리학자들이나 다른 악령들에게 넘겨주지 않도록 경계하라. 악령들이 이 귀중한 은사들조차도 모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 모두에게 지혜의 영과 지식의 영을 주시길 간구한다.

* 강론일: 2010-07-02 * 제목: 8장 방언을 통제함 * 책명: 성령의 주권적사역 —————————————-

고전 12~14장의 의도는 방언의 문제를 올바른 위치에 올려놓고 합당한 조화를 이루게 하려는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그로 인하여 교회에 무질서가 들어왔다.

바울은 은사의 목록에서 방언을 마지막에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고린도 교인들이 이것을 가장 첫 번째로 여기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예언의 은사가 더 크다는 것과 대조를 함으로써 잘못을 시정하고자 한다.

어떤 사람은 “나는 방언의 은사나 고전 12~14장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성경의 일부분을 제거하는 몹시 통탄할 만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는 성령을 소멸하게 되고, 단지 우리의 고정되고 자기 만족적이며, 독선적인 일종의 형식화된 기독교로 나아가기를 열망하고 있는 것이 된다.

금세기에 방어은사가 현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방언을 말하는 것과 관련된 운동이 1906년 미국과 영국의 몇 지역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오순절주의 운동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방언의 은사만큼 오해되고 오용될 여지가 있는 것은 없다. 강신술사들도 방언을 말한다. 사람들은 심리학적인 어떤 상황과 조건 아래서 강신술사의 영향아래서 방언을 말한다. 분명히 귀신들린 소녀가 방언을 말하기도 한다.

방언을 할 수 없다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성경과 교회사를 거부하는 것이다. 가장 위대하고 덕망 있는 사람들 위대한 설교자들과 복음전도자들도 성령세례를 받았지만 방언을 하지 못했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전 12~14장의 방언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전자는 알아 들을 수 있는 것이었고 후자는 본인도 타인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고전 14장 전체의 요점은 통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통역 없이는 방언의 은사는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론- 통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단지 교회에서는 통역해서 알아듣게 하라는 것이고, 28절에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만 말할 것이요“라고 했다. 통역 없이도 방언으로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수 있다.

사도가 방언에 관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령에 의해 혀가 움직여지기 때문에, 혀가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존스는 성령에 의해서 혀가 말할 때에만 방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론-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하지만 그 이후로는 어느 정도 마음에 따라서 그 선물을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존스는 예언은 성령에 의해 사람의 마음이 계발되어서 하는 것이고, 방언은 마음과는 상관이 없이 성령이 사람의 영에 직접적으로 역사해서 혀가 움직이는 것이라고 한다. 반론- 반대로 얘기하는 것 같다. 오히려 예언은 성령이 사람의 영에 직접적으로 말하게 하는 것이고, 방언은 혀가 성령에 의해 계발된 마음으로 말미암아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방언은 “천국의 언어” 즉 “영광의 언어”라는데 동의한다. 존스는 방언은 우리 스스로에 의해 시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원리라고 한다. 사람은 그가 원할 때마다 방언을 할 수 없다고 한다. 14:18에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를 볼 때 그것은 ‘나에게 성령이 자주 임하신다’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예언과 방언은 시작할 수는 없으나 통제할 수는 있다고 한다.

반론- 성령이 임할 때만 방언을 할 수 있다고 결론을 지으니까 ‘나에게 성령이 자주 임하신다’라는 해석을 넣어 억지를 부리게 된다. 그냥 방언을 더 말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보면 될 일을 그렇게 하고 있다.

성령이 임할 때만 방언을 할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사도 바울이 ‘성령이 임할 때만 방언을 해야 한다’고 틀림없이 말했을 것이다. 예언에 대해서도 그렇고 모든 은사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어야 할 것이다.

예언과 방언의 은사는 은사를 받은 자가 시작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남용을 조심해야 하고 철저하게 성령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하여야 할 것이고 그로 인하여 교만해지거나 성령을 자기 맘대로 주관할 수 있는 것처럼 월권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14: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를 보면 방언 은사를 받은 자가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존스는 과도한 제한을 하고 있고, 은사는 주어진 선물이라는 의미를 힘써 외면하고,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다는 로마서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은사는 항상 무질서와 과도한 주장과 남용이 문제가 되어 교회가 어지러울 수 있다.

바울은 말한다. “그런즉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조심할 것은 우리가 마음을 초월한 영적인 영역으로 이끌려가서 은사를 행하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자기 통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사도의 가르침이다.

자기 통제를 상실한 모방된 은사행위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러한 곳에서는 자제력을 잃고, 지각을 포기할 것을 조장한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만일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초월하여 어떤 일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행할려고 결정하셨다면

그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결코 여러분의 마음을 넘겨주거나, 자제력을 잃게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항상 악령들과 심리적인 것과 암시나 그 밖의 다양한 것들에 문을 여는 것이다.

‘이성을 초월한’ 그러나 여전히 ‘이성이 사용되는’ 이것이 성령의 영광스런 방법이다.

따라서 사도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라고 말함으로 그의 강론을 마치고 있다.

* 강론일: 2010-08-27 금 * 제목: 9장 아들로 받아들여짐 * 책명: 에베소서강해 1권 —————————————-

(엡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고, 우리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회복시키는 것, 아담이 타락하기 전 하나님과 누렸던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다.

사도는 우리를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지점으로 인도한다. 우리가 “아들들로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아들들로, 그의 양자들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진실로 엄청난 영광을 가지고 있는 무엇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의 각 책들을 피상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각 진술들의 부요한 내용을 인식하지 아니하면 그렇다. 에베소의 처음 부분에서 기독교 교리들의 가장 중요한 진수들 거의 대부분을 만나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다.

사도는 앞절에서 “우리를 택하사” 했고, 지금은 “우리를 예정하신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택하심”과 “예정하심”의 차이는 예정은 계획 그 자체이고, 선택은 그 계획이 성취되는 방식이다. “창세 전에” 타락한 아담의 사람들 중에서 얼마를 그의 아들들이 되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목적하심이었다는 엄청난 진술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속 안에 있는 하나님의 원초적인 목적이요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 정하심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그 영광스러운 운명을 받아 누리게 될 어떤 사람들을 하나님이 “택하시고” 선별하시는 일은 진수가 되는 중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서 그들이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하는 것이다.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존전에 감히 설 수 없기 때문이다.

“미리 정하심”보다 “선택하다”와 “거룩”을 왜 먼저 놓는가? 체험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택하는 것”,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들로 받아들여지는 것보다 더 먼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적하신 것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일을 대면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러한 계획과 이러한 체계를 보고 즐거워하는가? 자녀는 자기 아버지의 계획과 목적하시는 일을 보는 것이 즐겁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윤곽적으로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만일 이러한 것이 의미가 없다면 그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아들이 되게 하셨다”. 헬라어 원문으로는 “양자로 받아들여지게 하셨으니”이다. “양자”는 로마법의 개념이다. 양자가 되면 그는 받아들인 사람의 이름을 따고 그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확보한다. 사도가 이 개념을 사용한 것은 아들의 지위와 신분의 특별한 개념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 지위로부터 오는 특권들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양자라는 것은 하나님과 새롭게 관계를 가진 새 피조물임을 아들로서 주장하게 된다.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에 속한 특권들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갈4:1-5)“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양자”가 의미하는 것은 그 아이가 장성할 때에 그의 후사로서의 지위와 특권에 관한 선언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는 말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을 “양자”라는 말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서있는 위치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의 지위와 특권을 알기를 바라고 있다. 특권들을 누릴 수 있는 것이 구속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보다 높고 귀한 것이 없다. 그래서 양자로 받아들여진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높은 표현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3;1)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는 특권들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이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여 멸시하고 무시하더라도 내버려 두라. 그리스도의 “새 이름”이 우리 위에 쓰여 있다. 하나님이 친히 그것을 쓰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적인 권리를 가지고 그러한 것을 주장할 수 있다. “하늘의 왕의 자녀들이여/ 너희가 순례길 행할 때에/ 즐겁게 노래 부르라”(케닉스). 여러분의 머리를 들라. 여러분은 세상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라지지 아니할 영광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멸해질 수 없는 것이요 더럽혀지지 아니하는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운명을 보라. 목수의 아들로 십자가의 수모를 당하신 그분의 영광을 보라.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자신의 영을 받았다는 것이다. (갈4:4-6)“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이신 주님 안에 계셨던 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넣어주셨다. 그 얼마나 특권인가!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모든 시험과 핍박에도 승리하게 하신 것은 성령이시다. 그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아들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들”이다.

천국이 우리의 것이요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마5:3,5).

넷째, 우리는 최종적인 구속을 완성받게 될 소망을 확실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 영, 내 혼은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내 몸은 아직 죄의 몸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우리 몸이 구속받을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될 것이다(벧후3;1).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며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보장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는 내 머리칼이 모두 세신 바 되었다”는 것과, 나는 어떠한 것에 의하여도 하나님에게서 끊어질 수 없음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오 내가 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반대하여 일어서는 것같이 보인다 할지라도, 나는 부단히 그 길을 걸어나갈 것을 보장받고 있는 것이다. 그가 나를 인도하시는 것은 내가 그의 자녀요 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6:2-3). 우리가 세상과 천사까지 심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천사들보다 높다. 그들은 단지 “부리는 영들”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된 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천사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려 놓은 것이다. 여러분은 그러한 특권들을 알고 있는가? 그러하다면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안에 “양자의 영”을 가지고 있는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가? 여러분들은 그러한 것들을 인식하고 그러한 것들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가? 여러분이 성령에 인도함을 받고 있는가를 시험해 보는 시금석은 바로 그것이다.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고 하였다.

양자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으로부터 따라오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령을 통하여 인식하도록 우리 자신들을 부추기라. 우리가 신문들에 빼앗기는 시간, 세상적인 영광을 위한 일들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좀 줄이자. 그러한 특권들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들들이 되도록, 미리 정하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저주받아 비참하게 된 우리 죄인들을 보아주시다니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를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없는 영광스러운 지위에까지 올리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 강론일: 2010-09-03 * 제목: 10장 아담보다 더 높이 * 책명: 에베소서강해 1권 —————————————-

(엡1:5-6)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고전15: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교회 매우 초기부터 잘못된 것들이 가만히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단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교훈에서 잘못 되어갔고, 진리의 어떤 국면들을 오해하는 일들이 있어 왔다. 잘못된 교리를 가지면 잘못된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믿는 것과 그 사람의 됨됨이를 떼어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서 교리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교리는 삶의 원리다)

“모든 불어대는 교훈의 풍조에 이리저리 밀리지 아니하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교훈이 잘못되어 가면 우리의 생명은 금방 어려움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교리를 연구하여 잘못된 이단적인 가르침을 따르지 않도록 방비하여야 한다. 이단적인 교훈들은 초대교회에서와 같이 오늘날에 있어서도 살아 있고 세상에 일반적으로 존재한다.

오늘날에 있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요, 모든 사람들은 전부 형제들이라는 통상적인 개념이 판을 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필연성은 전적으로 불필요한 것이다. 중생도 회심도 필요가 없게 된다. 그들은 죄를 너무 심각하게 보는 것은 불건전하고 괴상하다고 하며, 바울이 강조한 율법적인 개념들은 전부 제거해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은 무조건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분명히 인류를 두 부류로 구분하여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있고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고 버려진 사람들이 있다. 영원한 복을 받은 사람들이 있고 영원한 멸망을 당할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구분은 아벨과 가인에게서 시작한다. 방주에서 구원받은 사람들과 버려진 사람들로 구분된다. 넓은 길로 멸망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있고 좁은 길로 생명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늘의 도성에 있는 사람들과, 개들과 함께 멸망을 받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스라엘은 나의 아들”(출4:22)이 있고, 다른 민족들이 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 있고, 마귀의 자녀들이 있다. (요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하지 않은 자들이 있다. “아들들이 되게 하실려고 예정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아버지라는 가르침처럼 사람들의 영혼과 구원에 해로운 것은 없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아들들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를 인하여”,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고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것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만”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내가 아들로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인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되는 것이다.

우리의 아들 됨과 그리스도의 아들 됨 사이를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출생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양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이다.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간다” 하셨다. “우리 아버지 우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아들됨은 파생적인 것이다. 우리는 아들 됨의 자격을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것이다. 우리가 “그 안에서” 아들들이 되는 것이 그러한 이유이다.

아들들이 되었다고 해서 신 또는 신적인 존재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인간들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본체”시오, “바로 하나님 자체”이시다. 우리는 그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형제로 부를 수 있으나 매우 유의해야 한다. 그는 인성을 취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아들과 자녀를 구별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들들”이 되는 것은 어떤 특별한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녀들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가지 못한 곳에 나아간 사람들만이 아들이 되고, “첫째 부활”에 참여할 사람들만이 아들이라는 식이다. 잘못된 가르침이다. 성경은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만이 “예정을 입어서 아들들이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켜서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말씀을 한 것이다. 어떤 구분이나 차별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다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자녀들”이라는 말과 “아들들”이라는 말을 항상 교대로 바꿔서 쓰고 있다.

구속은 단순히 타락이나 죄의 영향을 없애버리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구속은 그 이상을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일을 인하여 그러한 것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롬 5장의 “아담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비교 논증에서 밝혀진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15:47).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는 아담보다 그처럼 높은 위치에 오른 것이다. 아담은 완전하였다 할지라도 타락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은 결단코 타락하여 멀어져 나가지 아니한다. 타락하여 버림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요10:28-29)“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을 인하여 타락의 비극적인 결과들을 다 없이 하였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지위를 높이셨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이 잃어버렸던 복락들이 우리에게 회복되어서 되돌려졌을 뿐 아니라, 우리는 그보다 더한 것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누리게 된 이 새로운 관계에서 아담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심각하게 죄를 저질렀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제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요, 하나님의 양자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고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졌던 지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동안 그 지위에 부수한 영광들과 특권들 중에 어떤 것을 누리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이 “처음 익은 열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한 것들은 “첫 맛”에 지나지 아니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있는 그대로 볼” 날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그날에 면류관의 영광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아질” 것이다. 우리는 그날에 하늘의 모든 특권들과 그에 따르는 특전들을 다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은 다 해당이 되며 언제나 해당이 될 것이다.

* 강론일: 2010-09-10 * 제목: 11장 하나님의 영광 * 책명: 에베소서강해1권 —————————————-

(엡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사도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진리는 이렇다. 구원은 인간의 바람이나 인간의 요청에 의하여 된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있는 어떤 것을 보고서 반응하여 시행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를 구속하신 위대한 동기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의 모든 복락들을 주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가장 놀랍고 믿기 어려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거룩함을 입기 위하여 선택함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여지게 되기 위하여 선택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모든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도는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비춰볼 때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어떻게 여겨야 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시험하는 가장 좋은 시금석이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감격적인 용어들로 언급하고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예언할 때 가장 고양된 분위기 속에서 말하였다. 이사야 40장이 그렇다. 바울은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찬양과 감사를 발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 있었던 일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일일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세상에 오신 것은 언제나 성경에서는 찬양과 감사와 영광의 주제이다.

여러분의 반응은 어떤가? 우리는 그에 대한 찬미를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높이지 못하였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와 어떤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밖에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구절에서 사도는 우리에게 교회의 모든 분위기는 찬미하는 분위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구원에 관한 첫째 되고 가장 위대한 진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소유하신 본질적인 것이다. 히브리서 1장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말한다(3절). 하나님을 묘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이 있다면 그것은 “영광”이다. 그 말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며, 엄위를 내포하고 있으며, 더욱더 좋은 광채를 나타내는 말이다. 위대함과 영원함을 나타낸다. 구약에서는 영광은 하나님의 존전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었다. 왕상 8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언제나 하나님의 성전의 지성소에 거한다고 한다. 속죄소와 언약궤 위에는 그룹들이 있다. 거기에는 세키나의 영광이 있다. 구원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주목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데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다루신다는 것을 언급할 때에 나오는 말이다.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인간이 법죄를 행한 그 이후이다. 에덴의 동편에 그룹들과 화염검을 두어서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화염검과 그룹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임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죄인을 벌하게 하였던 것이다. 출애굽시에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들을 구원하는 일과 관련되어 보여주신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사야가 그의 선지직을 받을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 성전을 환상으로 보게 되었다.

신약성경에서는 더욱 분명한데, 밤에 목자들이 성육신의 놀라운 사실에 대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미한다. 구원이 언급되어지는 순간에 가장 먼저 우선적으로 말하여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내가 네게 부탁한 것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다”라고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구원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셨다”(고후4:6).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그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요1:14).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생각하여야 하는 방식이다. 죄의 진면목은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는 것이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일이다”(소요리문답 제일문). 잘못된 복음전도는 우리가 받는 큰 이익에 관하여만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위대하고 가장 높게 나타내었다는 점을 강조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 속에서 나타난다. 자연속에서도 나타난다. 과학자의 눈으로 보면 영광을 보지 못한다. 역사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역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크게 볼 수 있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속을 통해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장 진정한 영광의 지혜를 보기 위하여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 안에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의 구원을 생각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인간 자신의 이상향을 계획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무진 애를 쓴다. 그러나 현대 세계가 증거하는 바와 같이 그 모든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인간의 지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사단의 능력과 사망의 권능을 처리하셔야 했다. 그러한 능력들을 정복하시고 이기셨다. 우리의 복락을 방해하는 모든 다른 것을 다 정복하시고 이기셨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의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옛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갈보리 언덕에서 하나님의 거룩과 충만한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으로 인하여 죄가 처리되지 아니하면 죄인을 구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한 요구들을 만족시켜 드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의롭다 하신 선언을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셨던 것이다”(롬3:25-26).

그러나 하나님의 다른 영광은 그의 은혜 안에서 나타난 것이다. 우리의 반역과 죄와 거만을 보시고도 그러한 일을 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마땅히 일어나야 한다. 대답은 그의 은혜 안에서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아니하고는 이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영광을 보는 것은 그 은혜 가운데서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최종적으로 우리 안에서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내진다는 것이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3:10). “그러한 일들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바라던 것들”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17:10).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우리는 그렇게 살고 행동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진리들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들을 어떻게 보는가?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고,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열납하셨다”. 이 말은 눅1:28“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와 정확히 같은 말이다. 정확한 번역은 “우리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사랑하시는 은총을 크게 베푸신 것을 아노라”이다. 사도는 하늘의 천사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향하여 하였던 말과 같은 것을 우리에게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크게 은총을 입은 사람아”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이고,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처럼 우리 안에서 태어나시어 우리는 “크게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것은 “은총을 크게 입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무한하신 사랑과, 무한하신 긍휼과 은혜 가운데서 저와 여러분이 “크게 은총을 입을” 사람들이 될 것을 정하셨다. 그의 은혜로 인하여 우리는 죄의 비참과 비열함에서 벗어나서 구속함을 받을 것을 정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로 받아들이시고. 그뿐 아니라 바로 그의 아들 되신 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어서, “성령의 거하시는 전”이 될 것을 작정하신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개념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우리 자신들에 관하여 늘 생각해야 하는 방식이다.

나는 어찌하여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된 것인가? 오직 유일한 답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크게 은총을 받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1:31). 이것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구원관인가? 여러분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는가? 그렇지 아니하면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조금은 남겨 놓는가? 여러분을 구원한 것은 여러분 자신이 믿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 강론일: 2010-09-17 금

* 제목: 12장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 책명: 에베소서강해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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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복음의 장엄한 요약들 중 하나이다.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낸 방식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된 일이다.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복락들을 누리는 데 그것은 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안에서 최종적이며 궁극적으로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 1절에서 두 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2절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3절에서 두 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4절에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5절에서,‘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 대신에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고 한다.

용어를 변경한 이유를 알아봐야 한다. 이 위대한 구원의 충만한 의미와 깊이와 강도를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 안에서” 구원에 관한 모든 일을 하셨다. 사도는 가장 격앙된 절정의 높이에 올라서 이 말을 하고 있다. 성육신의 모든 신비도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있는 일이다. 이 용어가 전달하는 제일 메시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며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을 깨우쳐 준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통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강조하는 곳에서 언제나 사용되고 있는 말이다. 주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들려온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변화산상에서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저의 말을 들으라”(마17:5). 주님께서도 악한 농부의 비유 속에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말을 쓰신다. “저희가 (사랑하는-우리 번역은 생략))내 아들은 공경하리라”(마21:37).

주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에 언제나 그렇게 부르시는 것을 아셨다. “사랑하는 자”.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구속이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하여서만 성취되고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양자로 받아들여졌지만 그리스도는 영원한 출생에 의하여 아들이시다. 그는 아버지와 하나요 본체에 있어서 하나요 분리될 수 없는 분이다. “사랑하는”은 그리스도가 영원 본체중의 본체라는 것을 밝혀 주는 말이다. 하나님, 영원한 아들 하나님이신 것을 밝혀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 아들의 인격 속에서 충만하고 충일하게 드러난다. “그 사랑하는 자 안에서” 그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영광의 광체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다”(히1:1-3).

그 영광과 위엄의 충만이 그를 통하여 밖으로 비취어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4).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다.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그분 안에서 자신을 스스로 나타내신 것이다. 사람이신 예수님 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을” 보는 것이다. 이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 속에서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이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사랑하시는 자”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만큼 더 철저하게 표현된 것이 없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랑하시는 자”요, 영원히 사랑하시는 분이다. 바로 그러한 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의 분량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하여 이 용어를 살펴보자. 사도는 성경 전체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구원은 사랑의 결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의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이 보내신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진정으로 측량할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아들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아버지의 품에 계셨다는 것은 사실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4).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듣는 놀라운 일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다”(갈4:4)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과 그 하늘의 영광과 광채와 그 광휘 속에서부터 세상으로 그를 보내신 것이다. 그를 보내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분량을 측량하는 것은 바로 이 사실에 비춰 볼 때만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무섭게 꼬이고 뒤틀린 사람들을 위하여 보내신 분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요 그의 독생자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알려고 하면, 사복음서를 읽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 자기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모든 것을 한순간에 다 끝장내 버릴 수 있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불가능한 것이 없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상이 자기 아들, 자기의 “사랑하시는 자”를 배척하고 그를 핍박하고 그를 상처내는 것을 보시고 계신다. 세상이 자기 아들을 대우하는 것을 언제나 보고 계셨으며,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하시는 자”에 대하여 읽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시는 그분이 완전히 버림을 받고, 사람들의 멸시를 받고, 사람들의 침 뱉음을 받고, 조롱을 당하고, 미워하심을 받고, 채찍에 맞으시고, 결국 나무 십자가에 못박히신다. 아버지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가 자신을 거역하는 죄인들이 그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참으시는 것을 보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분량이다. 그가 아들이 고난을 당하도록 아끼지 아니하신 것은 우리가 죄 용서함을 받게 하기 위하심이셨다.

아들의 사랑의 관점에서 이 용어를 생각할 수 있다. 영원전부터 아버지 품 속에 있는 완전한 축복을 누리고 계셨던 그분이 사람이 되는 일을 자원하셨다. 스스로 인성을 취하셨다. 동정녀의 태에 들어와 성육신하셨다. 계속되는 그의 일생은 고난, 오해, 죄인들의 거역의 연속이었다. 30세까지 그러한 자세를 취하셨다. 사람들의 손에서 고난을 받고 계시는 것, 그것이 그의 사랑의 분량이다. 그 다음에 오는 멸시와 핍박이 있었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다. 그 부르짖음을 한 그분이 “사랑하시는 자”이다. 그는 여러분과 저를 위하여 그러한 것을 체험한 것이다.

만일 그가 물러섰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사랑하시는 자”가 괴로움과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신 것이다. 지옥에까지 내려가신 것이다. “사랑하시는 자”가 말이다. 무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그러한 것을 당하셨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우리와 구원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인식하는 것은 그렇게 고난을 받을 분이 누군가 하는 것을 알 때만이다.

또한 “사랑하시는 자”라는 말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을 말하고 있다. (요17:23)“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그리스도인에 관한 진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 관한 진리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아들로 받아들이심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그것은 아들됨 그 이상을 의미한다. (골3:12)“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우리의 구원과 구속의 최절정은 영광을 버리시고 음부로 내려가셨던 그리스도께서 다시 부활하셨으며 우리도 함께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사랑을 받는 정도의 위치까지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거룩하고 사랑을 입은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 우리는 형제들일 뿐만 아니라 사랑하시는 자들이다.. ”주의 사랑하시는“ 자들이다. 이것이 구원의 가장 높은 정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가?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들“이 된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전부 ”사랑하시는 자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사랑하시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사랑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는 공평하시지 않다 혹은 마구 거칠게 다루신다 는 시험에 들지 말라.

칼빈은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된 것은 사람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 저는 그 말에 이 말을 첨가한다. 우리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들이라고 말이다.

엡1권 강해

13장 구속

2010. 10. 8. 금요

(엡 1:7)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사도는 우리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여졌음”을 말하였다. 그는 이제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3-6절에서 성부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원 계획을 세우셨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이 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7-12절에서 이제 우리는 그 목적과 계획이 아들 하나님을 통하여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를 보게 되고, 13-14절에서는 이 위대한 계획과 목적을 수행하여 나가는 데 있어서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보게 된다.

우리가 아들 됨의 높은 지위를 얻게 되기까지는 많은 것들이 행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가장 큰 장애는 죄의 장벽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낸 것은 우리의 죄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이 장애,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를 누릴 수 있기 전에 제거되어야 하는 그 장애가 그리스도 안에서 처리 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 안에서”. 그것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바로 이 점에서 넘어진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인가?” 질문에 “예, 나는 그러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예요.” 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구원의 방식에 관한 이 제일되는 말씀이 전혀 이해가 안된 것이다.

복음의 중심과 핵심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전혀 구원이 없다는 진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구원의 처음과 끝, 핵심, 중심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것은 기독교의 구원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들을 구원하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수 없다. 바울이 그랬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도화선은 바로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았다”는 것의 가장 중추가 되는 요점은 우리가 자신을 구원하게 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셨다. 우리를 대신하여 어떤 행위를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것이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그 안에서 이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신과 화평케 하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구속은 그리스도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구속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루신 것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우리의 죄악은 그에게 전가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과 화목시킨 것은 그 행위의 결과이다.

기독교의 구속교리와 구원교리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와 구원은 그 안에 있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었으니”(고전1:30).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가르침을 단순하게 믿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것이다. 그의 생명과 그의 죽으심과 그의 장사지냄과 그의 부활하심과 그의 승천하심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매우 중요한 용어인 “구속”은 신약 전편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쓰여지는 말이다. 구속은 “속전을 주고 구출하여 낸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포로로 잡혀서 노에가 되었다면, 그가 구속을 받으려면 지불할 능력이 있는 친족이 그 값을 지불하여야 하는 것이다. 노예를 위하여 그에게 합당한 값을 지불하게 되면 그 노예는 해방되어 자유를 얻는 것이다. 주님은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속전)을 주려고” 오신 것이다. 이 말씀이 가르치는 것은 인류 전체가 죄의 결과로 인하여 종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노예의 신분으로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구약의 스토리는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킴으로 인하여 종에서 해방되려는 역사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왜냐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모두 죄의 노예와 사단의 노예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에 매여 있다. 그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새로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해방시키기에 충분한 값을 지불하신 것이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6:19-20).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정확한 값은 “그의 피!”이다. 여기에 구원 교리의 진수와 핵심이 있다. 사도는 “그의 죽으심”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저는 그가 의도적으로 피를 강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행하신 것은 구약의 희생제사의 가치에 대한 교리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분은 율법을 완성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구약의 희생제사들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희생제사의 목적과 의도는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다. 송아지와 염소와 희생제물의 피는 하나님께서 화목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화해하시고 노를 푸시기 위하여 흘려진 것이다. 화목이라는 것은 언제나 죄책을 속한 결과로 얻어진다. 대제사장이 손으로 동물의 머리에 안수함으로써 죄가 전가되었다. 그런 다음에 그 짐승은 죽임을 당하였다. 그런 방법으로 죄책이 속함을 받는 것이다. 속죄일에는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소(시은좌) 위에 뿌렸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받으시고 죄를 용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속하고 도말하시고 지워버리신 결과로 인하여 화목하시게 된 것이다.

그 구약의 희생제사나 다른 제사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하실 일에 대한 예고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히브리서 9장에서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게 된다. 그것들은 상징이요 잠시 동안만 죄를 가리우는 역할을 했다. 그것들은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없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는 자신을 드리셨고 하늘 지성소에 그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하늘의 제단 위에 그것을 놓았다. 그는 “단번에” 그 일을 하셨다. 우리가 용서를 얻게 된 것은 그의 피를 뿌림으로 인하여 되는 것이다. 그것은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도 없다”(히9:22)는 말을 확증해 준다. 그는 우리의 구속의 값을 지불하셨다. 그 값이란 자기 자신의 피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이다. 성경은 어떤 곳에서든지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죄를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짊어지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무리의 모든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요1:29).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그는 그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삼으신 것이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었다”. 이것이 명백하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식의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선한 삶을 살고 특정한 죄들을 짓지 않았으니 그리스도인이라는 식의 논리를 펴지 못할 것이다. 그의 죽으심, 그의 피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구속하시고 구원하신다. 거의 지옥에 가까워 올 정도로 죄를 범하였다 할지라도 이 메시지를 믿는다면 당신은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방식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우리의 죄악들을 짊어지신 바 되었다는 사실만을 의지하고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여야 한다. 그는 우리의 속전을 지불하셨다. 그는 율법과 지옥과 사망과 무덤에서 우리를 건져내셨다.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킨 분이 바로 그분이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는 구속을 받은 것이다. 하늘이나 땅에서 이와 견줄 만한 것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그는 나를 위하여 그의 목숨을 속전으로 주셨다. 그의 피가 흘려진 것은 내가 용서함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오, 그의 은혜의 풍성함이여! 오 그의 사랑의 넘침이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며 그 사랑이 얼마나 기이한 것인가”를 진정으로 알고 묵상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뿐이다. 십자가로 가라. 그리고 거기 서서 그 십자가를 바라보라. 나의 모든 선함이라는 것이 ‘더러운 옷’에 지나지 않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거기 머물러 있으라. 그러나 우리의 죄악이 그에게 담당시켜진 것을 보라. 그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필요한 값을 지불하여 사신 것을 보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을 말이다. 그의 발 아래 엎드려서 그를 경배하고 찬미하라. 그리고 그에게 우리 자신을 드리고 이렇게 말씀하기 바란다. “오, 신기하고 놀라운 사랑. 나의 모든 영혼과 목숨과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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