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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과 복음 | 33 율법과 복음 20276 투표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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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율법과 복음(Law and Gospel)은 개신교에서는 율법과 복음 즉 하나님의 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관계에 대한 신학이며, 루터교와 개혁교회 신학의 핵심적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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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의 차이 – 다음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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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의 바른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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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다시 개혁주의 신학을 논한다] ②율법과 복음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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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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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율법과 복음
33 율법과 복음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율법 과 복음

  • Author: 성경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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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10. 17.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jA5_AB7Cidg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율법과 복음(Law and Gospel)은 개신교에서는 율법과 복음 즉 하나님의 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관계에 대한 신학이며, 루터교와 개혁교회 신학의 핵심적 사상이다. 다른 기독교 교파들도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이 문제는 보통 루터교와 개혁교회 전통에서처럼 뜨겁게 논의되거나 엄격하게 규정되지는 않았다.

때로는 ‘율법과 은혜’, ‘죄와 은혜’, ‘성령과 서간’, ‘자선·봉사의 사역(διακονíα, 디아코니아)’, ‘성령/권능의 사역’ 등의 제목 아래 이 문제가 논의되기도 한다.[1]

루터의 시각 [ 편집 ]

율법과 복음의 구별에 대한 구체적인 공식은 마르틴 루터(1483–1546)에 의해 기독교 교회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복음주의 루터교 성서 주해의 토대로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1531) 제4조에 규정되어 있다: “모든 성경은 이러한 것들로 나누어져야 한다. 율법과 복음이라는 두 가지 주요 주제 어떤 곳에서는 율법을 제시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을 제시하는데, 즉 구약성서에서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를 위하여 죄의 경감, 명분, 생명이 영원할 것을 약속하거나, 신약성서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나타나신 이후, 죄의 사면을 약속한다. 죄와 명분과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을.”[2] 일치 신조도 마찬가지로 5조에서 이러한 구별을 확인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법과 복음의 구별은 매우 성실하게 교회에서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고 가르치고 고백한다.”[3]

마르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러한 이유로, 누구든지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는 이 기술을 잘 아는 사람은, 그가 가장 앞에 서서 그를 성경의 박사라고 부른다.”[4] 루터 정통 시대(1580–1713) 전반에 걸쳐, 루터 신학자들에게는 이 해석학적 규율이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 같은 구분은 패트릭 해밀턴의 Patrick`s Places(1528년) 첫 논문에서였다.[5]

루터교회의 초대(그리고 세 번째) 총회장이었던 칼 페르디난트 빌헬름 발터(1811–1887)는 1884–85년 컨콜디아 신학교에서 열린 저녁 강연에서 이 신학적 기술에 대한 관심과 관심을 새롭게 했다.[6]

개혁주의 [ 편집 ]

율법과 복음의 구별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표준적인 공식이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몇몇 사람들은 그것을 루터교 신학이라고 특징지었다.[7]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대한 논평에서 율법과 복음을 “중요하고 일반적인 성경 나눔”으로 극명하게 구분했다.[8] 루이스 벌코프는 율법과 복음을 “주님의 말씀의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두 부분”이라고 불렀다.[9]

1536년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개혁가 장 칼뱅은 율법의 세 가지 용도를 구분했다. 칼뱅은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문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 ‘도덕법’이라고 불리는 것의 기능과 사용을 간단히 논해보자. 지금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신의 의를 보여준다… , 그것은 경고하고, 알려주고, 판결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불의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한다.”(2.7.6). 그것은 “법상의 끔찍한 위협을 듣고 강요받지 않는 한, 어떤 것이 옳고 옳은 것인지에 대해 어떠한 주의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특정 인간을 구속하는 처벌의 두려움”(2.7.10) 기능을 한다. “신자들을 훈계하고 잘 행하도록 촉구한다.”(2.7.12-13) 이 주장은 첫째와 둘째가 전환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치 신조와 동일하다.

후기 개혁주의에서는 순서가 루터교도와 같다. 세 가지 용도를 다음과 같이 부른다.

usus politicus sive civilis : 정치적 또는 시민적 용도는 죄에 대한 구속이며 구원의 과업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신앙인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하느님의 일반적인 계시나 공통의 은혜의 일부분이다. usus elenchticus sive paedagogicus : 죄와 맞서서 우리를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중요한 교육적 방법.

usus didacticus sive normativus : 오직 신자들을 위한 교도의 용어로 의의의 길을 가르침[10] usus didacticus sive normativus : 오직 신자들을 위한 교도의 용어로 의의의 길을 가르침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율법의 세번째 용도를 설명하면서 십계명에 담긴 도덕법은 기독교인들에게 구속력이 있으며, 인류를 구원하는 데 나타난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께 봉사하며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고 가르친다. 장 칼뱅은 이와같은 율법의 세번째 용도를 주된 용도로 여겼다.[11]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의 차이점 [ 편집 ]

스콜라적 루터교와 개혁파 신학자들은 율법의 제3의 사용이 신자들을 위한 기능을 하는 방식에서 주로 달랐다. 개혁파는 구속받은 사람들이 선행을 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세 번째 용법(tertius usus legis)을 강조했다. 일부 루터교인들은 여기에서 행위의 의로움의 위험을 보았고, 궁극적인 규범이 되기보다는 제3의 용도가 신자를 항상 제2의 용도로, 그리고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율법의 세 번째 용법이 루터에게서 전혀 발견되지 않고 필립 멜란히톤에게서 나왔다고 제안한다. 일부 루터교인들은 그 견해를 거부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율법의 “제3의 사용”의 타당성에 대해 완전히 논쟁을 벌였다. 예를 들어, Paul Althaus는 율법과 복음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씁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날 하나님의 명령은 각 개인에게 특별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항상 동시대적이고 항상 새롭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시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나(및 각 사람)에게 명령합니다… . 현재 순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대한 지식의 살아 있고 영적인 특성은 규칙과 규정에 의해 파괴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신학자들은 제3의 사용이 일종의 율법주의로 이어지거나 조장한다고 믿고 있으며 아마도 이것이 오직 믿음에 대한 암시적 부정으로 보았다. 반대로, 개혁파 기독교인들은 때때로 일부 현대 루터교도들의 이러한 이중 사용 계획을 일종의 반율법주의로 이끄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루터에게는 율법의 교육학적 사용이 일차적이었고 칼빈에게는 이 세 번째 또는 교훈적 사용이 주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루터교와 개혁파 전통 모두 율법의 삼중적 개념화를 유지한다.

감리교회의 관점 [ 편집 ]

존 웨슬리는 감리교 설교자들에게 율법과 복음을 강조하라고 충고했다[12] [12] 의심할 여지 없이 둘 다 그들의 자리에서 설교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둘 다 한꺼번에 설교하거나 둘 다 설교되어야 한다. 모든 조건적 약속들은 이것의 예들이다. 그것들은 율법과 복음이 뒤섞여 있다. 이러한 모델에 따르면, 나는 모든 설교자들에게 복음의 정신으로 접목되고, 강화되고, 활기를 띠는 법칙을 설교할 것을 지속적으로 조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러한 설명을 알리고,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집행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모든 설교에서 (그리고 더 명시적으로 좋을수록 좋음) 그리스도인에 대한 부싯돌과 같은 위대한 명령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선언하는 동안, 그리스도는 모든 것, 우리의 지혜, 의, 거룩함, 구원, 모든 생명, 사랑,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며, 모든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자유롭게 주어지는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이 이처럼 영혼을 계몽하고 튼튼하게 하고, 영양을 공급하고 가르친다는 것, 믿는 영혼의 길잡이, ‘음식, 약’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방법론은 모세에게 주어진 십계명인 의례법과 도덕법을 구별한다.[13] 감리교에서 도덕법은 “우주의 근본적 존재론적 원리”이며 “영원히 하나님의 손가락에 의해 인간의 마음에 깃들어 있다.”[13] 루터교회의 가르침과 대조적으로 감리교회는 율법과 복음을 심오한 의미에서 함께 가져온다. 은총과 그것을 통해 우리는 삶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좋은 소식을 발견한다.”[13]라고 감리교 전통의 아버지 존 웨슬리가 가르쳤다.

[13] …율법과 복음 사이에는 전혀 모순이 없다; … 복음의 확립을 위해 율법이 사라질 필요는 없다. 사실 그들 둘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을 대체하지 않지만, 그들은 완전히 잘 일치한다. 예를 들어, 서로 다른 관점에서 고찰한 바로 그 같은 말들은 율법과 복음의 일부분이다. 만약 그것들이 계명으로 여겨진다면, 그것들은 율법의 일부분이다: 약속이라 할지라도, 복음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계명으로 생각될 때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것은 율법의 한 갈래로, 약속으로 간주될 때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즉 약속으로 제안된 율법의 명령이다. 따라서 영혼의 빈곤, 마음의 순결,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결합되어 있는 그 어떤 것이든 복음적인 빛으로 볼 때, 그렇게 많은 위대하고 귀중한 약속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 사이에는 가장 가까운 관계가 있다. 한편으로 법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복음을 위해 길을 열어주고, 다른 한편으로 복음은 계속해서 우리를 더욱 정확하게 법을 이행하도록 이끈다. 우리는 아직 성서에 있는 모든 명령이 단지 가려진 약속일 뿐이라는 것을 더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Sermon 25, “Sermon on the Mount, V,” II, 2, 3)

복음과 율법 [ 편집 ]

전통적으로 신학자들은 율법에서 시작하여 복음으로 나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카를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은총과 사랑을 강조하면서 복음을 먼저 강조하고 율법을 말한다. 이것은 어거스틴과 종교개혁가들이 보는 순서를 완전히 변경시킨 신학적 활동이다.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율법과 복음의 차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 2: 기능들 율법은 복음의 세 기능들에 의하여 응답되는 세 가지 기능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복음적 설교에 있어서 우리는 사람들이 생에 있어서의 그들의 참된 삶의 상황을 인식하게 하기 위하여 때로 율법을 설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필요성을 인정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매일의 삶을 위한 성령의 변형시키는 능력에 개방되어질 것입니다.

1. 율법의 기능들

(1) 거울

율법의 첫 번째 그리고 주된 기능은 우리를 고소하는 기능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하고 또 원하는 것이 되는데 어떻게 실패하였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미 양심에 의해, 경험에 의해 고소당한 상태에 있으며, 이것이 인생의 냉혹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일상적인 종교생활에 있어서 쉽사리 피상적이고 자기 만족적으로 될 수가 있습니다. 몇가지 삶의 실천, 선행을 통해 우리가 훌륭한 기독교인이 될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한 참된 메시지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롬 3:19)”이 됩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반역과 현실을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대로 보며 복음을 통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위한 아무런 소망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 연석

연석이란 자동차, 자전거, 등이 보도로 들어오거나 사람들을 상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로를 따라서 놓여진 방어막을 말합니다. 율법은 사회안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무모하게 상해를 가하는 일이 없게 막습니다. 율법이 사람들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할 수는 없지만, 악을 행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러한 율법의 기능은 모든 사회에서 경험할 수 있으며, 구약의 율법역시 이스라엘 사회의 법입니다. 성, 재산, 결혼, 정부, 정의 같은 모든 것을 통제하여 사회적 안정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입니다. 갈 3:23-24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율법, 정부, 양심, ‘후견인’이 되는 종교를 주셨습니다.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하는 동기를 주신 것이며, 성령은 우리를 “마음으로부터 복종하게” 하실 것입니다. (3) 안내

우리는 율법에 의하여 건전한 행위에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것을 우리에게 분별하도록 해 주는 기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율법은 언제나 우리를 고소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이신 예수님을 닮아 그대로 살아가려 하지만, 그 모델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이 율법의 기능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정죄되고 죄책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복음안에 있다 해도 우리의 힘으로 은혜안에 거할 수는 없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2. 복음의 기능들

(1) 위로

율법의 거울로서의 기능으로 인해 우리는 정죄됩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복음이 주는 답변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며,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다. (롬 5:8) 율법과 복음이 가지는 첫째 기능의 역동성은 바로 회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회개는 참된 기독교적 삶의 시작이며, 용서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기회입니다. (2) 재창조

새로운 회개의 삶은 복음의 능력에 의하여 주도되고 또 효력을 발생하는데, 복음의 두 번째 기능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으로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일 뿐 아니라 좋은 능력입니다. (롬 1:16) 이 구원은 죄의 영원한 효력(죽음과 정죄)에서 뿐만 아니라 죄의 현재의 능력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 새로운 능력은 외부적으로는 분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안에 있는 새로운 영이 죄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를 줄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99%는 부작위(不作爲)의 죄입니다. 부작위란 말은 “의무 불이행”, “태만”이라는 죄입니다. 죄에는 omission과 commission의 죄가 있는데, 부작위(omission, nonfeasance)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죄”(소극적인 죄)이며, commission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죄”(적극적인 죄)를 말합니다. 따라서 신, 구약 모두에서 하나님은 마음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렘 17:10, 삼상 16:7, 왕상 8:39, 롬 8:27, 계 2:23)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이 악의 파급을 막는 것이었다면, 복음의 두 번째 기능은 재창조의 능력으로 인류를 변화시키는데 대한 희망을 얻습니다. (3) 자유케 함

복음의 세 번째 기능은 우리로 하여금 변형의 최종단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율법의 세 번째 기능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안내를 말했는데, 이제 복음으로서 이 죄에 대한 옛 속박은 깨어졌고,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는 것입니다. (롬 6:18) 죄의 세력과 율법의 몸가짐으로부터의 이러한 새로운 자유를 성령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특별한 특징입니다. 기독교인은 더 이상 자신의 성행에 대한 어떠한 보상, 어떠한 인정, 어떠한 사례, 어떠한 감사도 기대하지않습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성취합니다. 기독교인의 선행은 이제 새로운 본성입니다. 보상을 구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랍니다. 선을 행하려는 새롭고 자발적이고 관대한 의지를 가진 것, 이러한 자유가 복음안에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의 기능들은 상호간의 역동적인 관계속에서만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양자는 모두 우리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한가지 선한 뜻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선물을 왜곡하여 그것을 통해 우리가 자신을 의롭게 하고 또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완전한 위탁을 피하게 하는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도구가 되게 하는 것은 죄의 힘입니다. (롬 7:7) 율법의 선한 목적은 죄의 세력이 깨뜨려져야 성취될 수 있습니다. 이 승리하는 능력은 복음을 통하여 성령(하나님의 영)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정적인 어떤 속성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동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롬 1:16-17) 이 하나님의 역동적이고 구속적인 의에 대한 재발견은 구약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필요성을 촉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율법인 동시에 복음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미 만물을 의롭게 하신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는 의를 위해 일하십니다. 구약의 율법들은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율법들은 압박받는 자들을 속박으로부터 보호하고 해방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언제나 복음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다라는 것은 다른 종교에 있어서도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은 새로운 요소입니다. 그는 의로써 판단하시고 의를 위하여 일하시는 인격적 존재라는 것은 율법과 복음이 지니는 독특한 소식입니다.

율법과 복음은 사탄의 세력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왼손, 오른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사탄이 창조물가운데 완전한 혼돈을 일으키려는 것을 저지합니다. 복음은 악을 대항하고 의를 수호하기 위해 사람들을 하나님의 충성된 동반자로 변화시킵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은 수용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기쁨’이 됩니다. (시 119)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은 복음 충만한 마음에 있어서는 자유케 하며 풍요하게 하는 순간이 됩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고 이 둘의 분명한 이해는 우리는 믿는 성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초석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안에는 신학의 부재시대, 다시 말해서 성서신학적 연구가 빈약하고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노력이 없이 성경을 단지 하나의 종교적 수단으로 삼는 기독교회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경이라고 하는 책속에 갇히신 분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역사속에서 인간과 독특한 관계를 형성하시는 인격의 주체이십니다. 따라서 성경이 역사의 산물이라고 할 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이라고 하는 이 두가지의 긴 역사성과 역사적인 차이점을 분명히 이해를 해야만 성경을 바르게 알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은 이 둘의 큰 차이점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적기 때문에, 성경을 단지 하나의 책으로 간주하고 창세기나 요한 계시록을 같은 시각과 해석력을 가지고 읽습니다. 실상은 해석할 아무런 도구나 사전 지식이 없이 성경을 봄으로써 성경을 함부로 이용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1. 율법과 은혜 신약을 복음이라고 한다면, 구약을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서는 모세오경을 의미하나, 구약에는 전체적으로 율법아래 있는 예언이며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법제화된 율법은 실제로는 아담과 하와 이후로 약 2400년이 지나,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은 이후 430년이나 지나서야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갈 3:17-18)

그런데 율법이든 신약의 복음이든 성경전체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복음을 전달하려고 쓰여진 책들입니다. 때문에 율법과 복음이라는 말을 대조시키기 보다는 율법과 은혜라는 말로 비교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은혜, 율법과 복음은 사실상 대조라기보다는 상호 관계적이고 보완적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은 율법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불필요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질서와 백성을 보호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율법이 분명하게 주어지기 전에 사람들은 양심에 의해 판단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담은 주전 4114년경 사람이고 아브라함은 주전 2166년에 태어났으며 아담후 1948년 이후입니다. 출애굽은 주전 1446년에 이루어졌고, 시내산에 머무는 동안 (1446.2-1445.3)

십계명과 율법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고, 구원을 받은 것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은혜로 된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이후 이스라엘백성도 역시 은혜로 살아왔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 자체가 완전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으로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어기면 율법전체를 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범주가 존재합니다. (1) 도덕적인 율법의 계명 (출 20:1-26, 십계명), (2) 재판 (민법) (출 21-24장), (3) 의식 (출 24-31장 & 레위기의 대부분).

2. 율법의 바른 이해 율법이 당시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을 보호하고 질서를 다스리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한 시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요1:17) 복음이 분명히 나타나기 전까지만 율법이 유효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받을 때의 모습은 심판의 장면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은혜아래 계속 머물러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감사하지도 않는 것을 보시면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조건이 붙은 순종과 축복을 제시하셨을 때 그들은 그것이 얼마나 완전한 순종을 의미하는지를 몰랐으며 자신들의 중한 죄된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수 있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행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안에 머물러 있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 19:8)”고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도 은혜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은혜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약안에 이미 복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율법은 이 은혜를 대신한 것이 아니라 은혜에 더해진 것일 뿐이다. (갈 3:19) 약속의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게 될 것이다. 이 조건이 붙은 율법에는 축복과 저주가 함께 있다. 삶의 축복을 전제로 한 유대교인들은 바로 이 율법의 축복을 자신들의 행위에 의해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율법과 은혜에 대한 오해의 문제가 있다.

(1) 율법주의 (legalism): 구원받기 위해서는 올바른 행위를 하고 율법을 지키고 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바울이 쓴 책이 로마서입니다.

(2) 반율법주의 (Antinominism): 은혜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살아갈 때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론입니다. 이를 반박하기 위해 쓴 책이 야고보서 & 고린도 전후서입니다.

(3) 갈라디아주의 (Galatianism): 우리가 행위로써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기는 하지만, 구원받은 다음에는 율법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서 이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행위로 그 구원이 보존된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이것 역시 결과적으로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부정하는 것임을 밝혔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목적은 이스라엘의 죄를 알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롬5;13) 율법이 있기 전에는 양심만으로 인간의 죄를 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양심은 생각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도 죄가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정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이 온 것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정죄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이며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의로운 것입니다. 완전한 것이나, 인간의 죄를 밝혀줄 뿐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유지시켜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율법은 시대적으로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 은혜로 구원받을 때까지 몽학선생(초등교사)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다. 율법은 인간의 축복과 저주를 약속하지만 축복을 받으려면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는 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저주, 아담이후의 모든 인간이 저지른 죄,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사망과 저주의 문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시기 전까지는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이 저주를 끊어내는 십자가의 은혜가 율법의 저주를 중단시키고 생명과 영생을 주시는 온전한 은혜가 시작된 것입니다.

갈 3:24-25 몽학선생(파이다고고스: 부유한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는 노예)이란, 옛날에 서당에서 한자를 배울 시절에 학생들이 서당에 안가고 땡땡이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마을 유지들이 합심하여 타 동내에서 하인을 하나 사서, 학생들을 집에서 서당으로 데려오는 일을 하게하고 학생들 공부하는 동안 장작을 팬다던가 서당 선생님 뒤 바라지를 하게 하기 위한 하인으로 글은 가르치지 않고, 양반 자재들을 집에서 서당까지 학생들을 데리고 가는 일만 하는 가짜 선생이며, 학생들이 그 하인(가짜 선생)의 말들 잘 듣게 하기 위하여 붙여준 이름이 몽학선생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몽학선생 번역은 아주 잘 된 것이다. 최근 개역판은 “초등교사”라고 하여 그 의미가 다시 불분명해졌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십자가안에서 완성됩니다. 율법의 완성은 죄없으신 인간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율법안에 있던 하나님의 의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완전히 타나났고 이제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은혜안에 있게 되면 그를 힘입어 율법을 완성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롬 13;10) 율법의 요구를 이루고 (롬 8:3-4) 굳게 세우는 것이다. (롬 3:31) 율법에서 해방되고 자유인이 된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법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갈 6:2, 약 1:25) 율법안에 희미하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의, 그 은혜와 사랑의 빛은 복음안에서 분명해졌으며, 온전히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율법안에만 있다면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생의 복음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양심과 율법안에서는 충분히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죄의 세력의 힘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어느정도 알게 해 주는 힘이 있었지만 그 죄와 악의 세력을 제거하는데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율법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로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해 보고자 하는 헛된 욕망과 자기 만족적 신앙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저주와 죽음이었습니다. 오늘날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자주 율법적 삶과 행위적인 신앙에 빠지는 것은 이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고 그 역할을 오해한 때문이며, 율법적인 삶이 인간으로 하여금 쉽게 종교적인 생활을 정의해 주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진 목적과 의도를 분명히 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의 한 도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기독교적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하나의 종교적 삶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 유대교를 믿은 이들이 살아왔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거나 믿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바울의 말대로라면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율법과 복음의 바른 이해

율법과 복음을 성경 안에서 온전하고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율법을 이해하고 바르게 해석함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께서 칭의를 부여해주신 동기와 더불어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규범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적으로 부패, 타락한 인간은 누구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통한 의의 전가를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기 의를 이루고자 하는 본성이 있기에 현시대에도 율법주의자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을 논하고 율법과 복음의 전반적인 의도와 취지를 살펴봄으로 양자간을 구별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이지만 이 율법과 복음을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율법의 기능

성경의 가르침은 율법의 기능을 “죄를 깨닫게 하는 것” 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롬 3:20).

율법이 없었다면 인간들은 죄의 구성요건 적법성 책임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육체적인 병을 얻어 고침을 받으려면 병원에 가서 진료와 치료 그리고 약의 처방을 통하여 병든 몸을 치료받을 수 있는 듯이 율법의 기능이란 어렵지 않게 경하게 해석을 한다면 진료의 단계 그것도 아주 명확히 우리가 어떠한 죄 가운데 있고 현재 어떤 상태인지를 아는 고정밀도 X-Ray 와 MRI 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하지만 병자의 치료는 진료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것이 아무리 고밀도, 고성능의 첨단기구라 하여도 이것의 기능은 진료와 진단이라는 기능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소위 환자의 기대인 병적 치료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재 환자의 병명과 병세가 어떠한가를 가름하는 일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 위와 같은 내용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율법의 기능이란 인간의 죄의 인식과 죄인임을 깨달아 알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함이니라”(갈 3:24) 하였다.

또한 이에 대하여 서철원 박사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 저서에서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고 의의 길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롬 3:19-31; 갈 2:16-21)고 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게 하는 것 외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그 자체가 선하고 거룩해도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 율법은 인간을 절망하게 하여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핵심이다 라고 율법을 주신 목적을 설명하면서, “구원은 믿음의 길이고 율법의 길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복음의 정의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복음의 정의를 성경적으로 아주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만(롬 1:16),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다(롬 3:21). 복음이란 율법을 폐지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약속하심을 확인하고 실현했기에 ‘그림자’(umbra)에 ‘몸’(corpus)을 부여했다(기독교강요, 2.9.4)라는 표현을 들고 있다. 그러니까 복음은 이전에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서 믿음의 백성들이 들었다(골 1:4-5).

율법에는 복음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기독교강요, 2.10.3). 율법에 계시된 언약의 약속이 복음에 의해서 계시되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요 복음의 더 좋은 소망으로 인도하는 길이었다(히 7:19; 시 110:4; 히 7:11, 19; 9:9; 10:1). 복음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율법을 통한 언약의 약속을 실현하며, 확인하며, 인준한다(기독교강요, 2.11.4). 그런고로 복음은 율법의 진료와 관계성을 띠고 있는 치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마 5:17). 따라서 우리는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는 ‘폐함’의 관계의 지속과 조성이 아니라 ‘완전케 함’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더욱 넓게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도 대립적 차원에서의 ‘폐지’의 관계가 아니라 ‘완성’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를 통한 율법의 완성과 성취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제15조는 “인간의 본성은 지극히 타락하여 연약하고 불완전하므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준행할 수 없다(신 5:29; 롬 10:3). 그러므로 율법의 목표이자 완성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의와 속죄 안에서 그를 온전히 붙잡는 것이 우리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삶이다.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들에 순종하는 행위에 대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복종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는 지구상의 그 누구도 그 율법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우리가 모든 일을 행할 때는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솔직한 심정으로 무익한 종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눅 17:10)” 라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는 율법의 목표요 완성이셨다. 소위 하나님의 율법은 본질상 예수 그리스도를 중점에 둔 것이지 인간들이 완벽하게 준수하도록 요구한 것이 우선순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어떤 인간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이유인즉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를 준수하는 공로는 전혀 불가하여서 그것을 자랑하는 행위는 아주 가증스러운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곧 우리 인간이 타락 가운데 연약함으로 인하여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지 못하고 이루고 사는 것 같아 목소리를 높여 우리의 행위와 의를 드러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늘 정죄 아래 있으며 고통과 저주 가운데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지고 죽음으로(갈 3:13)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었다. 죽음과 부활로 의의 전가를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대신 이루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19:30).

율법과 복음 안에서의 바른 믿음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잘못된 성경의 해석과 신학의 오류를 표명하거나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고 의로운 자로 여김을 받으려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새 언약 가운데 의롭게 중생한 백성으로 율법의 마침표이시며 복음의 진리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깨달아 상기하며 기쁨과 감사에 삶을 살아가는 바른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김현일 목사는 중앙대학교 법학 수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B.A) 호서신학대학원 & 개신원(M.Div) 총회신학연구원 (Th.M) 에서 공부를 하였고 경북 영주 현대중앙교회(예장 백석 ) (1993~현재)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성경 중심적 칼빈주의 개혁주의 교회를 지향하여 바른신학, 바른믿음, 바른생활의 공동체를 세워 가고자 정진하고 있고, 늦은감은 있지만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해설집 공동 집필 및 기타 칼빈주의 정론에 관한 서적 집필에도 신학자들과 동역하며 연구하는 사역에도 주력하고자 뜻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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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히브리서 7:11~28)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히 7:11).

본 항목은 모세 율법 시스템의 약점을 지적하고 옛 언약과 “더 좋은 언약”(22절)을 대조시킵니다. 율법은 “더 좋은 소망”(19절)으로 대치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다시 말해서 옛 언약 시대의 제사장들은 새 언약 시대의 주인공으로 오신 예수님의 제사장직에 의해 무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파문을 일으키는 새로운 패러다임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은 유대인의 종교적 삶의 편람이었고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주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율법은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고 율법의 영원성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댁 제사장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통해 율법의 위치와 효력을 재조명하였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우리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를 구별하고 특별히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합니다.

1. 모세 율법이 정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은 완전하지 않았습니다(11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11절)은 예수님입니다. 개역개정판의 ‘반차’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 단어입니다. 계통, 반열, 서열, 실례, 혹은 순서라는 의미입니다. 저자는 만약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이 온전했다면 왜 다른 방식으로 세워진 제사장이 필요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율법은 영원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저자는 이 주장을 뒤집는 셈입니다. 레위 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오도록 율법에서 규정했는데 다른 출처에서 나온 비(非)레위 지파의 제사장이 있다는 것은 율법의 불변성에 대한 도전입니다.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르는 다른 제사장의 존재는 레위 지파 제사장들에게 흠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사역은 불완전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서 죄의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제한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심각한 죄들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간음, 우상숭배, 불효자, 안식일 위반, 살인 등은 율법에서 용서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장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율법이 정한 제사 방식으로는 모든 죄를 처리하지 못합니다. 모세법 아래의 제사장들은 무지하거나 미혹된 자들을 너그럽게 대할 수 있었습니다(히 5:2). 그러나 고의로 죄를 범하는 자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민 15:30). 그래서 다윗이 고의로 간음과 살인을 범했을 때 모세법이 그를 도울 수 없었으므로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시 51:16)고 하였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모세법을 무시하고 상한 심령을 회개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로 곧장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새 언약을 내다본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최악의 죄들도 용서하는 파워가 있습니다.

2. 율법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때로는 율법의 규례들을 영원하다고 하였지만 당사자의 평생이나(‘종신토록’, 창 43:9; 출 21:6) 혹은 관련된 기한이 끝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 유월절 규례를 영원히 기념하여 ‘대대로’ 지키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모세의 율법 시대가 끝날 때까지를 가리켰습니다(출 12:14; 12:17, 24).

☞ 성전의 등불 관리나 제사장의 예복 및 수족 정결의식에 대한 규례도 영원히 지키라고 했는데 마찬가지 의미입니다(출 27:21; 28:43; 29:9; 30:21).

☞ 안식일 준수가 영원한 언약이라고 한 것도 (출 31:16~17) 같은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율법은 잠정적인 법이었기 때문에 일정 기간 동안만 유효하도록 애초부터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레위 지파의 계통을 따르지 않은 다른 종류의 제사장이 세워진 것은 율법의 원래 의도와 한계성을 고려해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3. 율법은 불충분합니다.

♦ 율법의 제사 의식들은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터놓았지만 같은 죄인들인 레위 제사장들을 통한 간접적이고 불완전한 방식이었습니다. 여러 제사 의식들은 그 자체로서는 하나님과의 밀접한 교제와 평안을 누리기에는 불충분하였습니다.

♦ 모세법의 도덕 수준은 낮았습니다. 일부다처제를 금지하지 않았고 쉽게 이혼할 수 있었으며 주인과 여종 사이의 동침을 허락했습니다.

♦ 율법 종교는 성전과 성일과 음식 및 위생 규례 등에 집착합니다.

♦ 어떤 면에서 율법은 인간의 내면을 거의 다루지 않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용이한 점도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도 다 지켰다고 자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한때 그렇게 생각한 듯합니다(빌 3:6). 물론 열 번째 계명을 진지하게 대한다면, 전적 좌절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로마서 7장 7~25절의 포인트입니다. 율법은 죄를 촉발시키고 갈수록 더 강력한 힘으로 죄인을 사로잡습니다. 율법에 따라 거룩해지려고 애쓸수록 실패를 거듭합니다.

♦ 율법은 형벌의 두려움 아래 죄인을 묶어둡니다. 율법은 어느 정도 이스라엘을 가나안 족속들처럼 우상 숭배와 부도덕과 불의의 범람으로 완전히 파멸되지 않도록 막아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효능은 제한적이었고 이스라엘은 결국 우상 숭배로 이방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율법은 레위 제사장들이나 경배자들을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세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제사장과 완전한 경배자들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자기 백성을 다시 하나님께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가진 구주(2:10)와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 수 있는 경배자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소원은 모세 시스템의 제사장이나 동물 희생에 의존해서 성취될 수 없었습니다(9:9).

4. 율법은 변경되고 폐지되었습니다.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느니라” (7:12, 18~19).

제사 직분이 바뀌어졌다는 것은 율법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옛 계명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폐지되었고 새 계명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옛 계명 아래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성전과 레위 제사장과 동물의 희생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으므로 모세 시스템은 모두 폐지되었습니다.

그럼 율법은 무용지물이 되어 내버려도 된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말은 다른 것으로 대치되고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약은 율법 제도가 사라지고 옛 언약이 새 언약으로 대치될 것을 예고해 왔습니다(렘 31:31~34; 시 40:6~7). 이것은 모세 시스템이 그 자체로서 나빠서가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복음을 예시한 그림자였지 복음의 실체는 아니었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둘 다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율법은 임시적이고 예수님은 영구적입니다. 율법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이었고 복음은 실제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실체를 선포합니다. 율법은 예언적이고 예수님은 성취적입니다. 율법은 부분적이고 불충분합니다. 제사장 직분은 변경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세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접근하는 모든 시스템이 예수 그리스도로 대치되었습니다.

율법은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표지판이었고 화살표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율법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이제 주의 백성은 예수님의 속죄 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갑니다. 이것이 “더 좋은 소망”(7:19)입니다. 신약 교인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과 가까운 교제를 할 수 있고 영적으로 성숙해진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과 직접 교제해야 합니다.

율법은 크리스천 삶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전한 수준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논증입니다. “더 좋은 소망’을 두고 “연약하고 무익”(7:18)한 옛 계명의 소망에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흔히 십계명은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십계명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율법의 표지판입니다. 십계명의 의는 거룩하므로 크리스천은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액면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라보았던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의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해서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수준을 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단순히 도적질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입니다(엡 4:28). 또한 육체적으로 간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음욕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마 5:28). 이것이 십계명이 바라본 목표와 이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로 대치되었음을 확지하고 율법에 근거한 규정이나 관습을 교회나 개인 신앙생활의 지침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보다 높은 분입니다. 예수님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습니다. 율법 종교는 교회당 건물을 우선시하고 장소에 집착합니다. 모임과 행사 위주의 프로그램을 강조하며 신자 생활이 조직화된 교회의 테두리 안에 갇히게 합니다. 이같은 비자율적이고 일방적인 현대교회의 모습은 신약의 교회관과 율법 폐지의 관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신약 성도는 의를 가리키는 십계명까지도 그 수준을 넘어가도록 성령의 동기부여를 받습니다. 성령은 사랑의 원리로 율법의 한계를 넘도록 인도합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행하면 율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 율법의 수준을 상회하며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갈 5:22~23; 6:8) . 단순히 공동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레 19:18)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합니다(마 5:43~44). 이것은 율법이 요구하지도 않은 복음의 삶입니다. 율법은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멸의 생명”(7:16)을 가지셨으므로 영생에 속하는 “더 좋은 소망”(19절)과 “더 좋은 언약의 보중”(22절)이 되십니다.

모세법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율법의 시효는 모두 지났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아닌, 예수님 아래에서 삽니다. 모세 시스템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법이었습니다. 크리스천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더 나아갑니다. 신자는 성령에 복종함으로써 율법의 상한선을 넘어 ‘그리스도의 법’(갈 6:2)으로 삽니다.

[율법의 실체]

율법은 연약하고 무력합니다(18절). 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합니다(19절).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28절). 율법은 변경되고 폐지되었습니다(12, 18절). 이것이 7장 후반부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율법의 실체입니다.

율법은 용서를 받고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힘이 거의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사람들을 악행에서 어느 정도 억제시키는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형벌의 두려움을 통해서 통제되었지만 율법의 제재력은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율법은 죄를 확신시켜서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죄인에게 죄를 확신케 하는 것은 성령의 역할입니다(요 16:8; 행 2:36~41). 흔히 개역 성경에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었다고 번역했기 때문에(갈 3:24) 율법의 역할을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until Christ came) 율법이 우리들의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직역성경, 표준새번역, ESV, NIV 참조).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고 성령입니다. 율법이 만약 죄를 확신시키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이 있었다면 율법에 정통했던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잘 알면서도 죄 없는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였습니다. 바울도 회심하기 이전에 크리스천들을 박해했는데 그는 유대교의 거장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행 22:3)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6)고 고백했습니다.

율법은 죄인을 의롭게 하지도 못하고 영생을 주지도 않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7:19). 율법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삶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악을 견제하도록 의도된 것이었지만, 그 역할도 인간의 죄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롬 7:11). 율법은 희생 제물을 바치는 자들의 경미한 죄를 용서하고 의식상의 부정을 씻기며 피부병 등의 질병으로부터 치유되는 소망을 갖게 했지만 경배자를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로 세울 수 있는 ‘더 좋은 소망’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신약 성도들은 하늘의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의 속죄 피와 중보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갑니다(4:14~16). 우리는 교회당 건물이나 옛 계명에 속한 규례나 안식일이나 십일조 등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골 2:16). 그런 방식의 예배 시스템은 율법의 폐지와 함께 끝났습니다. “이런 것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골 2:17, 표준새번역).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합니다.”(히 7:16). 하나님의 맹세로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로 세웁니다(7:28). 이제 우리는 “더 좋은 언약”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성령 안에서 자유와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럼 옛 언약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크리스천들에게는 옛 언약은 법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폐기했다는 말은(7:18) 완전히 무용지물이 됐기 때문에 쓰레기 통에 내버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율법의 폐기는 다른 더 좋은 것으로 대치되고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율법이 가리킨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율법은 자신의 역할을 마친 셈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율법이 아닌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예수님 아래 있으면 율법의 요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충족됩니다. 더 높은 수준의 법으로 살면 낮은 수준의 법은 구태여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신약 성도들이 모세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해서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외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모범과 가르침을 따라 성령으로 행하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더 넘어서게 됩니다. 이것이 신약 성도들이 율법을 적용하는 방식입니다.

신자는 사랑의 원리로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법”(갈 6:2)으로 삽니다. 새 언약의 축복은 성령께서 이웃 사랑에 대한 “최고의 법”(the royal law, 약 2:8)을 우리에게 적용시킬 때 순종하여 받습니다. 로열 법은 모세의 규례가 아닙니다. 십계명도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크리스천은 성령 안에서 행함으로써 모세법을 성취하고 그것이 요구하는 수준을 초월합니다. ‘최고의 법’은 곧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랑의 법으로서 믿음과 생명과 자유의 길로 인도합니다(롬 3:27; 8:2; 약 2:11). 모세 율법은 무거운 멍에며 속박입니다(행 15:10). 항상 율법의 조문에 묶여 전전긍긍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과 용서에 바탕한 양심의 자유를 줍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로열 법은 율법의 영역과 수준을 넘어가고 율법이 줄 수 없었던 귀한 자유를 주므로 ‘더 좋은 언약’입니다.

(히브리서 강해, 이중수 지음, 출판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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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의 관계

관리자 16-03-31 09:36 ( 조회 5,620 )

율법과 복음의 관계

변 종 길 /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신약학

여러 견해들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고대 교회의 말시온은 율법과 복음을 날카롭게 대립적으로 이해하여 구약 성경을 비롯하여 율법적인 것은 성경에서 다 삭제하고 말았다. 종교개혁시대에 루터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았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며 절망하게 만들며,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며 죽이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은 폐지되었으며, 신약 시대에는 오직 그리스도의 법 곧 사랑만이 있을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에 의하면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더 이상 율법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율법의 계명들을 지킬 필요도 없으며, 단지 사랑의 원리를 따라 행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율법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구약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신앙의 진수로 파악하고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안식일 계명을 구약에 기록된 그대로 지키기 위해 주일에는 밥도 짓지 아니하고 차도 타지 아니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이런 것을 통해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율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과거의 엄격한 전통과 현재의 여러 혼란한 풍조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곧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마 5:17).

따라서 우리는 율법과 예수님의 관계가 ‘폐함’의 관계가 아니라 ‘완전케 함’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도 ‘대립’이나 ‘폐지’의 관계가 아니라 ‘완성’의 관계임을 말해 준다.

완성의 의미

그러면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고 할 때 이것은 구약의 율법을 그대로 두고서 거기다 무엇을 덧붙여서 완성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의 ‘보충’의 의미밖에 안 될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기록된 내용들을 그저 수동적으로 이루셨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기계처럼 지시되어 있는 대로 ‘실행’하는 것밖에 안 된다. 마치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이미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을 실행하듯이 예수님께서 율법을 이루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율법의 주체가 되셔서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율법을 이루셨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림자’이고 예수님이 ‘몸’이시기 때문이다(골 2:17). 따라서 예수님에 의해 율법의 의미가 충만히 드러나고 그 온전한 내용이 채워진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어떻게 이루셨을까?

율법의 성취

예수님은 먼저 율법에서 자신에 대해 기록된 것들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태어나심과 애굽으로 피난 가심과 십자가에서 죽으심 등이 다 “주께서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다(마 1:22, 2:15, 4:14, 8:17, 12:17-21, 13:35, 21:4 등). 이처럼 예수님은 성경에 자기에 대해 기록된 대로 다 이루셨다. 또한 예수님은 율법의 계명들을 다 지켜 행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들을 다 이루셨다. 즉,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사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켜 드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정죄를 당하셨다. 그 이유는 율법의 요구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롬 8:3). 곧 우리 인간이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지 못하고 늘 정죄 아래 있으며 고통과 자주 가운데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율법의 정죄를 대신 당하게 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대신 이루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19:30).

이것은 곧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을 통하여 구원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길이 열린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여기서 율법의 ‘마침’(telos)이란 율법의 폐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처럼 자기 의를 세우려고 율법의 계명들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모든 노력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뜻이다.

율법의 원래 의미 회복

나아가서 예수님은 율법의 원래 의미를 충만히 드러내신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의가 되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정죄하며 저주하는 기능으로서의 율법의 역할은 끝이 났지만, 이로써 율법의 모든 기능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도 율법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표준이 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운다’고 말하였다(롬 3:31).

우리가 믿은 후에도 계속 남아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생활의 표준이 되는 율법’을 말한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율법의 제 3 효용’이라고 부르는데, 개혁교회에서 강조하는 기능이다. 율법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토라’로서 그것은 원래 ‘가르침, 교훈’을 뜻하였다. 이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율법은 원래 우리의 생활의 안내자가 되고 길잡이가 되기 위해 주어진 선한 것이었다(롬 7:12). 문제는 우리가 죄에 빠져 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도리어 율법의 정죄를 받아 저주와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된 우리에게는 율법이 다시금 원래의 선한 기능을 회복한다. 그래서 거듭난 신자의 생활을 인도하며 지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는 ‘감사의 규칙’이라고 불렀다. 곧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노예처럼 두려워하며 굴종함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루터파 교회와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당수가 정죄하는 율법의 기능, 곧 몽학선생적 기능(율법의 제 2 효용)만 강조하고 생활의 표준으로서의 율법의 기능은 등한시함으로 말미암아 신자의 생활이 소홀히 되고 윤리가 약해지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율법에 대한 치우친 이해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된 율법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모든 계명들이 문자 그대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은 유대교나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것으로 사실상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되고 만다. 바울은 이러한 유대주의자들의 미혹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하였다(갈 4:10,11). 나아가서 이러한 유대주의적 노력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갈 2:21).

따라서 우리는 구약의 모든 계명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안식일 계명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안식일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를 위해 온전히 헌신하는 신앙의 표현으로 안식일(주일)을 보내어야 한다. 두려움과 금지의 소극적인 안식일 개념에서 기쁨과 선행의 적극적인 안식일 개념으로 바뀌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신약적 안식일 개념에는 일상적인 상거래나 자기를 위한 시간 사용이나 세상 쾌락은 당연히 배제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고 있는 신약적 수준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최소한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구약적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최소한 구약 시대의 수준을 능가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복음은 율법을 능가하며 율법을 참으로 율법 되게 한다. 전에는 억지로, 두려움에서 율법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이제는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율법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전에는 단지 율법의 ‘문자’에만 얽매여 외적 순종만으로 만족하려고 하였으나 이제는 율법의 ‘원래 의미’를 생각하고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전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 그저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가졌지만, 이제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마음의 살인임을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마 5:21-26). 또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서도 단지 외적 간음뿐만 아니라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까지도 죄가 됨을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마음의 성결을 위해 노력한다. 이는 곧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이해하는 것이며, ‘복음의 빛 아래서’ 율법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

이러한 것은 곧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의 관점에서 율법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2:37-40). 이는 곧 온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곧 우리가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은 곧 이웃에게 사랑을 행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즉, ‘사랑’은 각각의 계명들 전체를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이며, ‘각 계명들’은 그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다. 따라서 율법과 사랑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을 다른 관점에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가 율법을 대할 때에 그 핵심과 근본 정신은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사랑의 구체적 실천은 율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율법의 각 계명들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짐승을 잡아 제사 드리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국가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신정국가와 관계된 시민법들은 이제 더 이상 시행될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도덕법도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한다(엡 6:1).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본 율법의 핵심은 사랑이다. 이런 점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야고보는 ‘최고한 법’이라고 불렀으며(약 2:8),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불렀던 것이다(갈 6:2).

율법과 복음의 차이와 신약과 구약의 차이

율법과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두 구성 부분입니다. 두 가지는 서로 구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계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동반합니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란 신약과 구약 사이의 차이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혼동하거나 동일시하여 율법 속에서 불완전한 복음을 보고, 복음 속에서 완전한 율법을 봅니다.

그러나 두 구절은 상호 다르며 서로로부터 거리를 분명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구약과 신약이란 하나의 은혜언약 안에 두 가지 연속된 경륜에 대한 명칭입니다.

이에 따른 성경책의 두 그룹에 대한 명칭입니다. 이들은 각각 같은 은혜언약의 경륜을 내용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율법과 복음의 차이란 전혀 다른 영역 위에서의 차이입니다.(바빙크)

이들의 명칭은 같은 언약의 두 경륜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전혀 다른 언약을 표시합니다. 율법은 본래 첫사람과 체결되었고, 그에게 완전한 순종 하에 영생을 약속하였던 소위 “행위언약” 안에 속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타락 후에 비로소 인간에게 알려졌고, 그에게 은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주신다는 “은혜언약”에 대한 선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언약은 행위언약의 폐기나 무효가 아니라 그것의 완성입니다. 둘 사이의 차이란 주로 그리스도께서 행위언약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실 수 있는 그것을 우리 대신 이루셨다는 점에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은혜언약이 비록 본질적으로 순수하게 은혜라 할지라도 행위언약의 율법을 처음부터 돕는 것이며, 그 율법과 연결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신자들 안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증거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피 흘려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으로 우리 인생 모든 문제가 처리되고 해답을 얻습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의 피의 복음으로 깊이 뿌리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십자가 대속의 피의 복음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영으로 충만 받아 율법을 지키는 자가 됩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예수보혈 신앙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율법을 지켜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매를 맺기 바랍니다.

[특별기고/ 다시 개혁주의 신학을 논한다] ②율법과 복음의 관계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타나게 하라

‘복음은 율법의 약속 확인하고 실현한다’고 가르쳐 … 율법의 근본정신 사랑이 넘쳐나게 해야

김상현 목사 (목장교회·칼빈대 겸임교수)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며 성도가 신앙생활을 균형 있게 하도록 도와주는 척도가 된다. 초대 영지주의는 율법과 복음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상호분리관계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율법과 복음은 구별되나 그 둘이 상호분리 관계라고 말하지 않는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복음은 율법을 폐지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약속을 확인하고 실현했으며 ‘그림자’에 ‘몸’을 부여했다고 말했다.(기독교강요 2장 9절)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 되지만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증거를 받은 것(롬 3:21)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생활에 율법과 복음의 이해는 중요한 영적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율법과 복음의 연관성을 간과하면 율법 폐기론자가 되거나 율법주의(Legalism)로 흐르기 쉽다.

이신칭의 ‘신앙의 뿌리’

종교개혁 이후에 이신칭의 사상은 우리 신앙에 뿌리를 깊게 하였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말씀으로만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여기에 우리의 행위는 어떠한 도구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종교개혁 500주년을 넘어선 이 시점에 다시 행위중심으로 가려는 시도가 계속되어 왔다. 이것은 학계에서 혹은 강단에서 이신칭의 믿음을 강조하는 대신, 한국교회에 행위가 부족하다고 가르치는 것들이다. 결국 율법의 행위가 강조되면서 그 율법의 행위로 사랑보다는 정죄와 판단이 만연하게 된 것이다.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다른 사람에게 지키게 하고, 그 율법의 잣대로 정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신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복음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총회적으로 중요한 이 시점에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살펴보며 우리 자신들이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먼저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율법은 히브리어로 ‘토라’ 70인 역에서는 ‘노모스’라고 하였고 율법은 일반적으로 모세오경을 가르치나 더 집약적으로는 십계명을 뜻한다. 광의로는 율법, 예언, 성문을 다 포함한 구약성경 전체를 이르기도 한다. 또한 율법의 분류는 도덕법(출20:1-26)으로 십계명과, 재판법(출 21:1~24)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민법으로 모든 백성의 재판에 사용되는 법이며, 의식법(출 24~34장)으로 이스라엘의 종교의식에 관한 하나님의 법을 들 수 있다. 바울은 율법를 사용할 때 이렇게 구약성경 전체를 지칭할 때도 있지만(고전 14:9, 21, 34; 갈 4:21), 또한 법과 규범을 의미하는 경우(롬 7:21-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도 있다.

그러면 복음은 어떤 의미인가? 신약성경에서 복음, 유앙겔리온은 ‘좋은 소식’ 혹은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의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공관복음에서 유앙겔리온은 교회에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사건에 관한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에게 유앙겔리온은 그 신학의 중심 사상으로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로서 성도를 구원하신 역사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구원, 중생과 죄사함, 이 모든 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하였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율법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거룩한 의지의 표현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람에게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했다. 루터는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율법의 이중적 사용을 말하였는데, 시민적 사용(정치적 용법)은 사악한 자를 통제하고 시민적 의를 유지하고 세상에서 복음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것이며, 반면에 율법의 신학적 용법은 죄인들을 두렵게 하고 정죄하여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을 구하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루터에게 율법의 주된 기능은 신학적 용법이다. 루터는 율법의 부정적인 기능을 강조하였으며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서로 조화보다는 대립과 긴장의 관계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구원은 오직 한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즉 복음을 받아들이므로 구원을 얻는데,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만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루터는 누구든지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은 율법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며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복음 즉 구원의 길을 거부하는 무서운 죄를 짓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하였다. 루터는 누구든지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자신의 의와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만을 신뢰할 때,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통해서 성취하신 자신의 의를 줌으로써, 그를 율법으로부터 복음에로, 죄부터 의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긴다고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와 다르게 율법의 긍정적인 기능을 강조하였다. 칼빈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율법주의에 관하여는 루터와 칼빈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도 없고, 구원 즉 영생에 이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율법의 기능을 말할 때 칼빈은 루터와 다른 견해를 말하는데 그것은 율법의 제 1, 2기능 외에 천국백성의 삶의 규범으로서의 제 3의 기능을 말한 것이다. 칼빈은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이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고 했다. 율법의 기능 중에 의식적인 기능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되었고 율법의 도덕적인 기능은 성도들에게 여전히 삶의 규범으로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성경에서 성도는 율법의 저주와 요구에서 해방되었지만(롬 8:2) 율법을 주신 원래 목적 즉 그 법정신까지 폐기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롬 7:7) 바울은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롬 3:20, 롬 7:7) 또한 율법은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선생에 비유하고 있다.(갈 3:24) 즉 율법은 그 자체는 구원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서 오직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한다고 한 것이다. 바울은 율법을 비판하고 율법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오직 유대 기독교인들의 주장 즉 예수 믿는 복음도 중요하지만 여전히 할례를 포함한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이 완성된다는 주장을 비판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이라고 까지 했고 그들을 거짓 교사들이라고 비난하였다.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여 주일을 지킨다

예수님도 율법에 대하여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율법의 주체가 되셔서 그 율법을 다 이루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율법은 ‘그림자’요 예수님은 ‘몸’이시다.(골 2:17)예수님은 몸소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하셨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운다”고 말하였다.(롬 3:31)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폐기 된 것이 아니라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일을 신약의 안식일로 지킨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계명이 폐기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성도는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지킨다. 그것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두려움과 금지의 소극적인 개념으로 지켰다면 신약 성도들은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기쁨과 감사로,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지킨다. 신약성도에게 율법은 구원받기 위한 어떤 의무라기보다는 이미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칼빈은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본래의 율법의 용도라고 하였다. 그리고 율법의 정죄의 용도는 죄가 들어옴으로 우발적으로 생긴 것으로 보았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바로 율법은 복음 아래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복음 아래서 율법은 정죄의 기능이 아닌 사랑으로 해석이 된다. 복음 아래서 율법은 본래 정신인 사랑을 되찾는다. 예수님은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구분하였다.(마 22:37~40)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신칭의를 주장하면서 율법주의에 얼마나 쉽게 빠지는가? 얼마나 쉽게 어떤 규례와 범주를 정해놓고 그것이 마치 말씀이라도 된 양 그것을 신봉하는가?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율법정신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착각이다. 율법은 처음부터 사랑으로 주어졌다. 신앙생활은 사랑이며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정죄하고 극한 대립으로 가는 곳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율법은 사랑으로 주어졌다

현재 총회와 총신의 상황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지금처럼 고소 고발과 데모가 많은 때가 있었는가 싶다. 총신대 문제도 더 기도하고 인내하며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없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므로 총회를 세우려는 마음 보다는 정죄와 고소 고발이 난무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일련의 상황들을 보면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이 부재함을 느낀다.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진리 문제가 아니라면 절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고 하셨다.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복음의 본체이신 사랑의 주님을 묵상하자. 종교 개혁의 5대 외침(fivesolas)인 오직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그리고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Soli Deo Gloria) 그 사랑으로 우리 교회와 총회와 총신이 세상에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사모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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