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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강해 | [하루 한 장] 요한복음18장_내가 그니라 490 개의 새로운 답변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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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9 (화) [하루 한 장]“내가 그니라” (요18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요한복음 18장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수난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요한은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과
가룟 유다의 입맞춤 장면을
의도적으로 생략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스스로
이 고난을 선택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당할 일을 모두 아시고
당당하게 나아가서 그 고난과
죽음을 감내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에게 닥칠 환란과 박해를
역시 도망치지 않고 잘 맞서서
결국 믿음으로 이겨내라고 하는
예수님의 속 깊은 메시지입니다
우리 생에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셨음을 기억하고
당당하게 이겨냅시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전화 051-204-0691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교회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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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주석 – Daum 카페

요한복음 제 18장 =====18: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 여기서 지시하는 예수의 말씀은 17장에서 언급된 예 수의 기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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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위기에 처했을 때 그리스도인의 삶 – 대학마을교회

요한복음 18:1-40 위기에 처했을 때 그리스도인의 삶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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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과: 요한복음 18~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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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 여기서 지시하는 예수의 말씀은 17장에서 언급된 … 그리고 요한은 공관복음에서 공통되게 다루고 있는 겟세마네 기도에 대해 언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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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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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요한복음18장_내가 그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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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한복음 18장 강해

  • Author: 홍융희
  • Views: 조회수 5,80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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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6. 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cpfUO_mGpcA

요한복음 18장 주석

요한복음 제 18장

=====18: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 여기서 지시하는 예수의 말씀은 17장에서 언급된 예

수의 기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이 기도를 마치신 뒤에 예수는”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장은 예수의 중보기도(17장)에 이어 수난 기사에 관한 내용

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공관복음에서 공통되게 다루고 있는 겟세마네 기도

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요한은 17장의 기도를 겟세마네 기도와 대체시키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하므로써 요한은 예수의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노출시키지 않고

대신 17장의 기도문에 나타난 예수의 위엄을 강조하려고 의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 예수가 기도를 마치고 이동한 장소의 방향으로 언급되는

기드론 골짜기(공동번역)를 말한다. ‘시내’로 번역된 ‘케이마르로스'(*

)는 ‘겨울에 흐르는 시내’라는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이 시내는 겨울 우기 동안에 약

간의 물이 흐르고 곧 말라버리기 때문에 다른 계절에는 말라있는 건천(wadi)이라고 보

는 것이 더 정확하다. 기드론은 ‘백향목’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인데 구약 시대의 우상

들이 불태워지던 곳이며(왕상 15:13)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자 반란군을

피해 다윗이 건넜던 곳이기도 하다(삼하 15:23).

거기 동산이 있는데 – 기드론 시내 건너쪽에 있는 동산이라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

는데 ‘동산'(* , 케포스)이라는 말은 요한만이 언급한다. 마태와 마가는 ‘겟

세마네’라 불리는 곳으로, 누가는 ‘감람산’으로 언급하고 있다(마 26:36;막 14:32;눅

22:39). 그러나 마태와 마가가 언급한 ‘곳’이 ‘장소’, ‘들’을 의미하는 ‘코리온'(*

)인 것으로 보아서 ‘정원'(garden)을 의미하는 본절의 ‘동산’과 의미상 별다른 차이가

없다. 또 ‘들어가다’는 말이나 4절의 ‘나아가'(* )라는 말로 보아서

이곳에 어떤 울타리가 있음을 암시하므로 ‘케포스’나 ‘코리온’ 둘다 ‘정원’ 또는 ‘제

한된 장소’로 이해할 수 있다(C.K. Barrentt). 특히 이곳은 2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예수와 제자들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이 장소를 가롯 유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감람산에 있는 ‘겟세마네’라는 이름을 가진 ‘정원’ 또는 ‘농원’을 지칭

한다.

그의 제자들 – 저자는 제자들을 복수로 언급할 분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

다. 이점은 공관복음서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이름을 언급하여 세 명의 제자를

강조하고 구별한 것과 대조된다.

=====18:2

가끔 모이시는 곳 – 요한은 예수와 제자들이 이 동산을 처음 찾는 것이 아니라 이

전에 여러 차례 방문한 곳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누가는 보다 더 자세하게 이곳을

‘늘 하시던 대로'(눅 22:39, 공동번역) 찾으신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는 따로 떨어

진 유다가 군대를 이끌고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즉 유다가 예수의 일행이 머문 장소를 알았던 것은 유다 자신도 예수와 함께 이곳을

여러 번 방문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8:3

군대와 – 본문은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유다가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이끌고 온사람

들의 신분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공관복음서는(마 26:47;막 14:34;눅 22:47) 유다가

이끌고 온 사람들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 , 오클로스)라고만

밝히고 있으나 요한은 군대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종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

서 언급된 ‘군대'(* , 스페이라)는 로마군 600명으로 구성된 한 부대 단위

를 나타내기도 하며 또한 200여명으로 구성된 보병 중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

다(C.k>Barrentt). 그런데 혹자는 ‘스페이라’를 안토니아 성에 주둔해 있던 작은 부대

로 추측한다(Robertson, Lenski). 그러나 12절에서 지휘관으로 천부장이 언급되는 점

으로 미루어 보아 그렇게 작은 부대는 아닐 것이다. 그들은 예수와 그의 11제자와 다

수의 백성들이 함께 있을 것을 대비해 많은 수의 하속을 동행했을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하속들 – 공관복음서와 같이 요한도 역시 예수를

죽게한 주동자로 대제사장 계급과 바리새파 계급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하

속(下屬)들(* , 후;페레테스)은 성전 경비를 맡은 일종의 경찰로서 이

해된다(C.K> Barrett). 한편 예수를 체포하러 온 무리 중에 대제사장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산헤드린이 보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Lenski)이는 예수의 죽

음에 대해 유대의 지도층 전체가 개입되어 있음을 시사해 준다.

등과 홰와 병기 – 공관 복음서에서는 ‘검과 몽치’라고만 언급하는데(마 26:47;막

14:43) 본문에서는 등과 홰까지 언급된다. ‘등’과 ‘홰’는 고대에 동의어였으나 후대에

와서 등불과 횃불로 구분하여 사용되었다(C.K. Barrett). 한편 이때는 유월절(니산월

14일) 전날이며 당시 월력(月曆)을 사용했던 정황으로 보아 거의 만월의 상태였을 것

이다. 따라서 불이 필요치 않을 수 있으나 당시 상황이 구름으로 인해 흐린 날씨였거

나 아니면 예수의 체포 시간이 한밤중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등과 홰를 언급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요한은 당시의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했던 장본인이기에 일기와 관련

된 상황을 잘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후자보다는 전자의 추정이 본절에 더

적합한 것 같다.

=====18:4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 이 말은 예수의 초자연적 예지(豫知)를 부여하기 위해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예수는 사역 초기부터 죽음의 위협이 있음을 예측하고 이

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사역 도중 위협에 직면했을 때 예수는 자

신이 예측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사역 도중 위협에 직면했

을 때 예수는 자신이 예측하고 있는 그 고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아시고 위

험한 피해 자리를 옮긴 적이 있었다(10:39;11:54). 그러나 지금은 때가 이르렀기 때문

에(17:1) 피하지 않고 담대히 맞부딪치고 있다. 한편 혹자는 ‘아시고’에 해당하는 헬

라어 ‘에이도스'(* ) 대신 ‘이돈'(* , ‘깨닫다’)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C.K. Barrett). 그 근거는 ‘에이도스’보다 ‘이돈’이 신적 예지와 관련된 용

어이며 요한이 예수에 대한 신적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독특한 용어를 많이 애용했다는

점이다. 본절에서 ‘이돈’이 사용될 경우 2절의 ‘에데이'(* , ‘알다’)와 구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목적어 ‘그 당할 일을 다'(* ,

판타 타 에르코메나)란 표현에 이미 예수의 신적 예지가 암시되어 있으므로 굳이 ‘이

돈’으로 본문을 변경시킬 필요가 없다.

나아가 – 예수는 동산에서 나가셔서 잡으로 온 무리들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이

같은 묘사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자발적 체포를 강조하고 있으며 당당하고 권

위있는 예수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요한은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이

적대자들에 의한 단순한 처형이 아니라 구원사적 맥락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섭리이

며 예수가 섭리를 자발적으로 수용했음을 강조한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 예수께서 체포하러 온 자들 앞으로 나아가 ‘누구를 찾느

냐’라고 질문하신 것에는 예수의 권위있는 위엄이 나타나 있으며, 예수가 무기력하게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다하기 위해 당당하게 체포됨을 묘사하기 위한 저자

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본절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의 체포나 죽음을 위

엄있는 구속사적 드라마로 이해하게 된다.

=====18:5

나사렛 예수 – 예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언급된 본문은 나사렛(*

, 나조라 이온)이란 형용사를 첨가하고 있다. 이와같은 형태는 본서에서는 예수

의 명패에 쓰인 칭호에서(19:19), 그리고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전할 때(1:45

, *, 아포 나자렛, ‘나사렛에서 온’) 언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름 앞에 지명을

붙여 사용한 것은 아마도 예수의 출생지를 밝히려 했던 의도에 따른 것임과 동싱 동명

이인(同名異人)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내로라 – 예수는 ‘나사렛 예수’가 자신임을 아주 짧은 말로 밝힌다. ‘내가…이다’

(* ,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출 3:14) 간결하면서도

권위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단순히 자신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시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했다. 요한은 예수의 자기 계시를 강조하기 위해 공관복음서 저자와 달리

이 표현을 부각시켰다.

유다도 함께 섰더라 – 이는 유다가 예수의 맞은편에 적대자들과 함께 서 있음을 묘

사해 준다. 정면으로 예수와 마주하고 있는 유다는 배신자로서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

여준다. 한편 공관복음서와 구별되는 점은 유다가 예수에게 입맞추어 예수를 체포케

하는 행위가 언급되지 않고 예수가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예수의 권위와

위엄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묘사한다는 점이다.

=====18:6

저희가 물러가서…엎드러지는지라 – 본문은 예수가 ‘내가 그이다’라고 말하자 나

타난 반응을 묘사한 것으로 예수의 신적 권위를 묘사해 주고 있다. 즉 이 말이 하나님

을 가리키는 말인 ‘나는 스스로 있는자'(* , 에고 에이미 호온)

라는 출 3:14의 70인역(LXX)을 연상했기 때문에 적대자들이 두려워 물러서며 엎드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예수의 신적 권위가 강조됨은 물론 예수의 승리자의

모습으로 죽으셨음이 확인된다.

=====18:7

물으신대…하거늘 – 4절과 동일한 질문이 반복되고 5절과 똑같은 대답이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독자성, 즉 예수가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어 체포된 것이 아님을

거듭 확인해 주고 있으며 동시에 예수의 권위있는 위엄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깔려 있다. 한편 요한은 5절의 ‘대답하되’를 본절에서는 ‘말하되’로 바꾸어 표현했다.

이는 같은 말의 반복을 싫어하는 요한의 습관에 따른 것이다.

=====18:8

이 사람들의 가는 것 – 예수는 적들이 찾고 있는 예수가 자신임을 거듭 확인시키고

대신 자신과 함께 있던 제자들은 자유롭게 갈수 있도록 하라는 제안을 하고 있다. 즉

자신을 내어 놓고 제자들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한다. 이것은 요한의 독특한 자료로

막 14:50에서 언급되는 제자들의 도주와 대조되고 있다. 이것은 요한이 공관복음서 저

자와 달리 제자들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밝혀 제자들을 호

의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수의 이같은 행동은 10:11에서 예견된

바로서 이는 예수의 자신이 자발적으로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밝

히는 것이다.

=====18:9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 예언의 성취를 나타내는 본문의 어투는 본서에서 자주 언

급되는 문구이다(C.K.Barrett, A.T. Robertson). 여기서 성취된 예언은 17:12을 가리

킨다. 특히 17:12에서 언급된 멸망의 자식이 여기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이미 유다가

악의 세력에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예언의 성취에 관한 언급은 예수 자신의

말을 성경적 권위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18:10

시몬 베드로 – 본절에서 베드로의 이름이 히브리식 이름과 함께 쓰이고 있다. 즉

‘바요나 시몬'(마16:17) 또는 ‘요한의 아들 시몬'(1:42;21:15)으로 언급되지만 주로

‘시몬’이란 말만을 덧붙여 ‘시몬 베드로’라고 호칭하게 된다. 여기서 베드로가 칼을

사용하여 적들에게 대항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칼을 사용한 자의 이

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마 26:51;막 14:47;눅 22:50). 아마도 공관복음서는 칼

을 사용한 자의 신분에 해가 돌아가지 않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요한 복음은 공관복

음서보다 훨씬후대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이름을 밝혀도 본인에게 아무런 영형을 주

지 않을 뿐 아니라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여 베드

로의 이름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검을 가졌는데 – 눅 22:36-38에 따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검을 휴대하도록 지시하

였고 제자들 중에서 검 두 자루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공격용으로 준비된

것으로 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눅 22:36-38 주석 참조). 왜냐하면 칼 두 자루로

무력에 해당한다는 것은 상식 밖이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유월절에는 무기를 휴대할

수 없도록 규제되었으므로(C.K. Barrett, Robertson) 베드로가 무기를 소지한 것은 불

법이었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베드로가 열심당원이었다고 할 증거는 될 수 없을 것이

다. 이 칼은 아마도 위험한 순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감지한 베드로가 호신용으로 준

비해 둔 단검으로 보인다.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 마태와 마가는 어느쪽 귀인지 언급하지 않지만 누가와

요한은 동일하게 오른쪽 귀를 잘랐다고 언급한다. 누가는 역사가로서 당시의 정황을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통해 ‘오른편’이란 형용사를 사용했으며 요한은

귀를 자른 장본인으로 ‘시몬 베드로’라는 이름을 밝힌 것처럼 잊을 수 없는 그 밤의

사건을 세밀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 형용사를 사용했던 것같다. 한편 본서에서는 ‘베어

버리니’가 ‘아페콰센'(* )으로 언급된 반면 공관복음서에서는 ‘아페일

렌'(* )으로 기록되었다. 이 차이는 요한이 공관복음서에서 그의 사용되

지 않는 독특한 용어를 종종 언급하는 데서 발생한 것이므로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아무튼 눅 22:49에서는 한 제자가 예수에게 칼을 사용해도 되느냐고 물었던 것으로 진

술되고 있으나 본서에서의 베드로의 행동은 예수의 의사와 무관하게 갑자기 일어난 것

으로 볼 수 있다.

말고 – 귀가 잘려나간 대제사장의 종을 가리키는 이름인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이름

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본서에만 언급되고 있다. 이것도 역시 사건 현장을 사실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신뢰성을 높이고 당시의 정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

다.

=====18:11

검을 집에 꽃으라 – 칼을 사용한 베드로에게 보인 예수의 반응은 칼을 놓으라는 명

령인데 공관복음서에서는 마태복음만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마 26:52). 그리고 이

표현대신 누가는 잘리워진 귀를 만져 낫게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눅 22:51). 특히

마태복음은 칼을 사용한 사실에 대해 채강하고 훈계하는 장면을 관심 깊게 묘사하고

있는데 반해 누가복음은 원수를 치료하고 싸매는 모습을 통해 사랑과 화해의 실천자로

서의 예수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본서는 메시야적 사역에 깊은 의미를 두었으므로

칼 사용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 – 본서에서 ‘잔’이라는 말이 본절에서만 나타나고 있으며 공관

복음서에서 언급된 잔의 의미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막 10:38, 39;14:36 주석 참조).

특히 본서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행해졌던 예수의 기

도가 본절에서 함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눅 22:42). 여기서 잔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

스도 예수가 겪어야 할 수난을 의미한다.그러나 이 수난의 잔이 우연히 발생된 것이

아니라 죄악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임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는

‘아버지께서 주신’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공관복음서

에 비해 하나님의 예정을 매우 강조하는데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운명이 하나님의 예정

에 따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 본문은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 기도 내용을 함축한 듯하

다. 즉 아버지의 뜻이라면 잔을 마시겠다고 하는 예수의 결단을(마 26:42;막 14:36;눅

22:42) 좀더 담담하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미 예수는 이 수난의 길이

필연적으로 걸어가야 할 자신의 길임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하나님

께 전폭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어 순종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이

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칼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길을

막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마 16:21-23).

=====18:12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 – 요한은 최종적으로 예수를 체포한 사람들을 밝

히고 있다. 3절의 언급과 다른 점은 ‘천부장’이라는 구체적 직위를 명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부장은 문자 그대로 1000명으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을 의미한다. 그러

나 바렛(C.K. Barrett)은 천부장에 해당하는 본절의 헬라어 ‘킬리아르코스'(*

)가 로마군의 한 부대의 지휘관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라고 주장한다. 그렇

지만 그는 어떤 규모 부대의 지휘관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역 성

경 중(RSV)에서는 바렛의 견해와 같이 단순히 ‘Captain’이라고 번역되어 지휘관적인

‘천부장’이 아니라 규모가 작은 부대의장임이 암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견해는 다음두

가지 추정에 의해 부정된다. (1)요한으로 추정되는 15절의 제자는 대제사장과 서로 알

고 있었으므로 그곳에 온 자가 ‘천부장’인지 직급이 그보다 훨씬 낮은 자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2) 민란의 이유로 산헤드린이 예수를 체포하러 군대까지 동원

시켰으므로 ‘천부장’이 나섰을 것이다.

잡아 결박하여 – ‘잡아'(* , 쉰엘라본)는 ‘함께 잡다’란 말로 ‘

체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결박하여'(* , 에데산)는 본절에서는 ‘묶는

다’로 해석되지만 본래는 투옥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같은 표현은 시사해 주는 것

은 단호하게 법을 집행하는 체포 현장을 묘사함과 동시에 11절에서 보여준 예수의 단

호한 모습과 함께 예수의 체포 역시 간결한 용어로 표현하여 예언의 전격적인 성취를

돋보이게 하는 데 있다. 또한 요한은 공관복음처럼 체포에 대한 예수의 설명을 첨가하

지 않음으로써 생략법을 통한 예언 성취를 강조했다.

=====18:13

안나스 – 안나스는 눅 3:2;행 4:6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누가는 안나스 직책을 대

제사장 가야바와 함께 언급함으로써 안나스가 대제사장인 것처럼 이해하게도 한다. 허

나 요한은 안나스의 직책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해 대제사장 가야바와 구분함으로써

당시 안나스는 대제사장이 아님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안나스는 A.D. 6-15년 사이에

대제사장의 직책을 맡았던 사람인데 그에게 아들 다섯이 있었다. 그 아들들 역시 제사

장을 맡았었다며 본문에 언급된 사위 가야바도 대제사장이었다. 본래 대제사장은 종

신적이었으나 로마의 지매가 시작된후 대제사장직이 막대한 부와 권력에 의해 좌우되

어 로마에 대한 적극적인 추종자들에게 주어짐으로써 자주 교체되었다. 안나스 역시

로마 총독 그라투스(Gratus)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런데 무리들이 예수를 대제사장 가

야바에게로 데려가지 않고 그의 장인 안나스에게로 데려간 이유가 무엇인지 본문에 언

급되지 않아 알수 없다. 아마 안나스는 대제사장 직위에서 폐위 당했으나 그의 사위가

대제사장이었으므로 대제사장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졌던 사람

으로 짐작된다.

그해의 대제사장 – 본문과 동일한 언급이 11:49에서 나타난바 있는데 ‘그해’라는

단어는 제사장직이 1년으로 끝나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체포되던 역

사적인 해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언급된 가야바는 약 20년 동안 대제사장직을 맡

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C.K. Barett).

=====18:14

가야바는…권고하던 자러라 – 가야바는 예수께서 사역을 하였던 기간에 대제사장

으로 활동하던 자였다. 본절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11:50을 가리킨다. 유대 백성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들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그것이 필경은 로마의 공격을 초래하

리라는 염려에서 그는 ‘산헤드린의 회원들에게 예수를 죽이는것이 모두를 위하여 유익

하다’고 말했었다. 이러한 그의 권고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

에는 예언적 의미로 예수의 죽으심과 결부되었던 것이다(11:51, 52).

=====18:15

다른 제자 – 베드로와 더불어 체포되어 끌려가는 예수의 뒤를 따라갔던 두 제자 가

운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제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다. 아

리마대 요셉(19:38)이나 니고데모(3:1-15;7:50-52;19:39)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가

하면 저자의 동생인 야고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Godet, Watkins) 그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즉 요한 자신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

도 있는데(Lenski, Robertson)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그러나 여기에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한낱 갈릴리 어촌의 어부에 지나지 않는 요한이 어떻게 유대의 최고 지도

자인 대제사장 안나스와 친분관계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혹자는 요한이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기 때문에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

측한다. 그러나 이는 실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오히려 요한이 예수

의 제자로서 예수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지 못했던 자신의 나약했던 당시의 모습을 연

상하면서 그제자가 자신이라고 밝히지 않았을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리고 본절의 설명을 통해 베드로와 자신이 어떻게 그 법정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독

자들에게 알려주어 법정안에서의 모든 일들이 직접 두 제자에 의해 목격된 진실임을

암시해준다.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 – 이 제자가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문지키는 여

종에게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 문을 통과해 들어갈 수 있었던 데서 입증된다. 여기

서 ‘아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노스토스'(* )는 어느 정도의 친밀성을

나타내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이 말은 ‘친한 친구’, ‘친척 관계’ 또는 ‘형제’를

뜻할 수 있지만(Barrett) 그런 정도의 관계는 아닐지라도 그가 안으로 들어갈 때 문지

기로부터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결코 단순한 관계가 아닌 것으

로 짐작된다. 한편 다드(Dodd)는 ‘그 사람이 대제사장과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

람으로서 제사장 출신이거나 아니면 대제사장과 관련된 일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제사장이었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제롬(Jerome)은 이에 반박하면서 ‘기독 교회의 사제’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거의 근거가 없으므로 타당하지 않다.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 여기서 ‘뜰'(* , 아울렌)이 울타리 안의

뜰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산헤드린의 집회장소 안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여기서

안나스가 예수에게 심문을 하는 데(19-24절), 이 심문이 안나스 개인에 의한 비공식적

인 것이라면 ‘안뜰’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산헤드린에 의한 심문이 시작되기 직전

에 있었던 것이라면 산헤드린 집회 장소의 안뜰이라고 볼 수 있다(Barrett). 안나스가

심문 후에 예수를 그해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에게 보낸 점 그리고 본절에서 ‘집 뜰’

이라고 진술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18:16

다른 제자가…데리고 들어왔더니 – 베드로가 체포되어 끌려가는 예수를 왜 따라왔

는지 분명치 않다. 10절에서와 같이 자기의 스승을 구출하거나 복수를 하기 위해 따라

왔을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자기 혼자서 그들의 손에서 예수를 구출한다는 것은 불

가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스승인 예수의 신변에 어떤일이 일어날 것인지 걱정이 되

어 따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13

:38)는 말씀을 이루려는 주님의 섭리가 있을 수도 있다. 본문에 의하면 베드로는 문안

으로 들어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따라

오기는 했지만 예수의 제자로서의 신분이 드러날 경우 자기의 신변에 위험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감히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거기에는 자기의 칼

에 상처를 입었던 대제사장의 종(10절)도 있었을 것이므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일

종의 모험이었다. 베드로가 들어오지 못한 것을 안 ‘다른 제자’가 문 지키는 여종에게

말하여 베드로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였다. 그 다른 제자가 처음 들어갈 때 베드

로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은 사실을 언급한 것에 대해 다음 세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1)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2) 내부의 사

정을 그가 미리 알아보기 위함이다. (3) 들어가기 힘든 그곳에 베드로도 확실히 들어

갔음을 밝히기 위함이다(L. Morris). 본문이 전개되는 과정으로 보아 여기서는 첫번째

추정이 개연성(蓋然性)이 높다.

=====18:17

문 지키는 여종 – 이 말의 헬라어 ‘헤파이디스케 헤 뒤로로스'(*

)는 비슷한 표현의 반복이라고 생각된다(C.K. Barrett). 16절에서는 ‘헤파이디스케’가

생략된 채 ‘헤 두로로스’ 만으로 ‘문 지키는 여자’를 표현했다. 그리고 본절에서는 그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어린 소녀’ 또는 ‘하녀’를 의미하는 ‘헤 파이디스

케’를 첨가시켰다. 요한은 ‘헤두로로스’를 반복함으로써 베드로가 문을 통과하지 못하

고 있음과, 베드로가 부인하게 되는 정황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마가는 베드로에게 첫

번째 질문을 한 여자가 ‘대제사장의 여종’이었다고 전해주며(마 14:66, 67) 마태와 누

가는 단지 ‘한 여종’이었다고 전해주고 있다(마 26:69, 70;눅 22:56-57). 여기서 발견

되는 공통점은 베드로에게 첫번째 치욕스런 부인(否認)을 하도록 질문을 던지는 사람

이 여종이라는 점이다. 하찮고도 연약한 여종 앞에서조차 베드로는 담대함을 가지지

못하고 주님을 부인하는 비겁함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베드로의 초라한 모습은 그가

예전에 보여 주었던 용기있는 언행이 얼마나 인간적인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던가를

잘 보여준다(13:37).

너도…하나가 아니냐 – 이 말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는 다른 제자’와 같이 너도 이 사람의 제자가 아니냐”는

의미로 여종의 질문을 해석하는 학자가 있다(Barrett). (2) ‘너도 다른 많은 사람의

제자 중 하나’라는 표현은 ‘다른 제자’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

에 대한 것이므로 ‘너도’는 예수의 모든 제자들과 관계있는 표현이다. 따라서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18:18

추운 고로…쬐더라 – 유월절은 양력으로 3, 4월경이므로 밤에는 다소 쌀쌀한 날씨

였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 특별하여 대제사장의 하속들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마당에 불을 피워 쬐고 있었다. 본문에

숯불 – 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드라키안'(* )은 매우 오래된 말

로 신약성경에는 본절과 21:9에만 나온다. 이에 대해 모리스(L. Morris)는 요한이 당

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여러 사람들

이 둘러서서 불을 쬐는 자리는 몸을 숨기고 추위를 피하는 데에도 적당한 장소라고 생

각되었을 것이다. 한편 ‘대제사장을 아는 다른 제자’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없는데

이 때문에 ‘이 제자’의 등장이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를 서술하기 위해 저자가 등장시

킨 인물이라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는 듯하다(15절 주석 참조). 또한 예수를 체포하여

안나스에게 인도한 병사들에 대한 언급도 없는데 아마 이들은 자기들의 숙소로 돌아갔

을 것이다.

=====18:19

대 제사장 – 예수께서 체포당하신 해의 공식적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으며(13절)예수

가 붙잡혀 온 곳은 안나스가 있는 곳이었다(13절). 따라서 본문의 ‘대제사장’은 안나

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24절을 볼때 더욱 명확해진다. 그런데 혹자

는 본문의 대제사장이 가야바를 가리킨다고 보고 안나스는 단지 원로로서 참관한 것이

라고 한다(Godet, Westcott). 이러한 해석은 다른 복음서들이 안나스에 의한 심문을

전하지 않고 가야바에 의한 심문만을 전하고 있는 것과 일치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안나스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안나스앞에서의

심문은 유죄를 위한 예비 심문이라고 보는것이 타당하다. 즉 요한은 안나스에 의한 예

비심문을 전해주는 것이고 다른 복음서들은 가야바에 의한 공식 심문을 전해주는 것이

다. 그렇다면 왜 이 해의 대제사장이 아닌 안나스(13절)을 가리켜 대제사장이라고 했

는가? 그것은 본래 대제사장직이 종신적이었고 여전히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

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3절에서 요한은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

는데 그것이 여러 사람이 대제사장직을 동시에 맡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보기는 어렵

다. 그렇다면 그것은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를 포함시켜 그렇게 불렀던 것이라고 보

아야 한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안나스를 ‘대제사장’으로 부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

는다.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 – 공관복음서들이 전하는 바 가야바의 질문과 본문이 전

하는 안나스의 질문은 핵심이 다르게 나타난다. 즉 가야바의 심문은 예수의 인격 곧

예수가 메시야인가에 초점이 있고(마 26:57-68;막 14:53-65;눅 22:54, 55, 63-71) 안

나스의 심문은 예수의 의도들에 초점이 있다. 안나스의 심문은 예수의 의도들에 초점

이 있다. 안나스는 두 가지를 묻는데 하나는 예수의 제자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

는 예수의 제자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교훈에 관한 것이다. 전자는 제자

들의 숫자, 성향,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 모으는 이유 등에 관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후자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예수는 가르침을 통해 어떤 것을 기대하는가 즉

그의 교훈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예수가 제자들을 규합하여 무력

혁명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11:47, 48 주

석 참조). (2) 예수가 가르치는 중심 교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으로 예수의 가르침에서

구약의 교훈에 반하는 이교적인 사상을 찾아내 정죄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18:20

드러내어 놓고 – 안나스의 두가지 질문 가운데 예수는 제자에 관한것은 대답하시지

않고 교훈에 관한 것만 대답하셨다. 예수는 안나스가 묻는 질문의 의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의 물음 자체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안나스는 거만과 권위에

도취되어 지극히 상투적인 질문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이교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인정할

만한 혐의를 잡아 내려 했지만 예수는 자기의 모든 언행이 공개적이었음을 밝힘으로써

안나스의 의도를 좌절 시킨다.

세상에 – ‘세상’은 주로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활동 영역으로 언급되지만 여기서

는 단순히 인간들이 사는 생활 터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의 교훈이 공개

적이었음을 말하는 또다른 표현이다. 예수는 결코 은밀한 곳에서 비밀스럽고 파괴적인

것을 가르치지 않았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회당과 성전 – 예수께서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는 것은 그의 가르침이 공개적이

었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해 준다. 회당에서의 가르침은 6:59에, 성전에서의 가르침은

7:14;8:20에 언급된다.

은밀히는 아무것도 – 예수는 쿰란 종파와 같이 은밀하게 공동체를 형성하여 엄격한

제한을 두어 가르치지 않고 언제나 공개적으로 가르치셨으므로 산헤드린 회원뿐 아니

라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교훈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18: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 예수는 안나스가 질문을 통하여 포착하고자 의도한 어떤내

용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의 물음 자체가 어리석은 것임을 지적하셨다. 안나

스는 예수가 공개적으로 가르치신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동안 그들은 예수를 잡기 위해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

도 그가 질문한 것은 예수의 발언 가운데서 책잡을 만한 것을 찾아 내고자 함이다. 그

러나 유대인의 재판 원칙은 피고가 자신에게 부리한 증언을 하도록 강요받을 수 없으

며, 피고의 진술을 유죄의 근거로 삼을 수도 없게 되어 있다. 다만 증인들의 증언이나

구체적인 물증의 객관성과 타당성에 의해서만 유죄를 선언할수 있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예수는 안나스의 교활한 음모에 일침을 가하면서 증인들을 요구하고 있다.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 예수의 이 요구는 잔꾀를 부리지 말고 적법한 방식으로

증거를 제시하라는 뜻이다. 참고로 공관복음서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산헤드린은 예

수를 심문함에 있어서 비록 거짓된 증인들이었지만 그들로 하여금 증언하게 하여 심문

을 하는 모습이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마 26:59-63;막 14:55-59).

=====18:22

하속 하나가 손으로…쳐 – ‘하속’으로 번역된 ‘헤이스 파레스테코스 톤 휘페레톤’

(* )은 직역하면 ‘관원들 중 곁에 서 있었던 한 사람’을 의미한

다. 이 표현으로 보아 이 사람은 대제사장의 경호원이거나 산헤드린 경비원이었을 것

이다. 그는 안나스를 대하는 예수의 태도가 불손하다고 느꼈던지 손으로 예수의 뺨을

때렸다. 혹자는 본절의 ‘손으로 예수를 쳐’라는 표현이 손바닥으로 예수의 뺨을 친 것

이 아니라 몽둥이나 채찍으로 때린 것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이는 헬라어 ‘라피스마'(*

)의 초기용법을 따른 것이라고 본다. 초기에 이 단어는 몽둥이로 때리

는 행위를 가리켰다. 그러나 점차 후기로 갈수록 그 단어는 손으로 뺨을 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Meyer, Barrett, Bernard, Bultmann, Morris). 그리고 다드(C.H.

Dodd)는 본 구절을 예수의 수난과 관련된 사 50:6과 연관지어 예수가 손으로 뺨을 맞

았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본문의 묘사는 손으로 뺨을 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랍비 율법에 의하면 심문 중에 있는 피고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순순히 응해

야 한다. 이것과 晥쳬臼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다음과 같은 기록

을 남기고 있다. ‘대제사장에게 설득당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에게 불경건한 자

처럼 정의를 등지는 것이다'(Josephus, C. Apion, II). 그러나 이런 것은 지극히 권위

주의적이고 편의주의적 발상일 뿐으로 피고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받지 않는

다는 랍비적인 가르침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또한 대제사장 안나스의 한 하속이

예수의 뺨을 친것은 정당한 선고에 의해 유죄가 확정되기 전에는 육체적 가혹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유대법에 위배되는 불법적 과잉 충성의 행위였다. 특히 유대인

들에게 있어 어떤 사람의 뺨을 친다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런 행위는 거의 금기시되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뺨을 맞은 것은 말할수 없는 수욕(羞辱)을 의미하며 또한 사 50:6의 예언이 성취된 것

이라고 할수 있다.

=====18:23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며…나를 치느냐 – 본문에서 예수는 정당한 항의를 한다. 만

약 예수가 한 말 가운데 잘못된 것이 있다면 대제사장이 정당하게 심판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의 심판이 내려지기도 전에 또는 그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폭

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이의 제기는 지극히 정당했다.그

것은 안나스의 침묵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24절). 한편 본절에서 보여준 예수의

태도는 ‘오른 쪽 뺨을 치는 자에게 왼쪽 뺨도 돌려 대라’는 그의 말씀(마 5:39)과 모

순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말씀의 핵심은 상대방의 행위에 대하여 절

대 복수하지 말라는 데에 강조됨이 있다.지금 예수가 보여준 행동은 정당한 발언을 한

것일 뿐이었다.

=====18:24

예수를…가야바에게 보내니라 – 안나스는 자기의 의도가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고

있으며 그리하여 더 이상의 심문을 포기하고 예수를 당시의 실제적인 대제사장 가야바

에게 보내었다. 요한은 안나스가 예수를 가야바에게 보냈다는 짧은 기록만을 남길 뿐

공관복음서에서 자세히 언급된 가야바 앞에서의 심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

다(마 26:57-68;막 14:53-65; 눅 22:66-71). 대신 요한은 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

를 강조했다. 아마 요한은 가야바를 수장으로 하는 산헤드린이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 거짓증언과 억지로 인한 것이었으며 사실상 예수는 무죄하였다는 사실이 빌

라도 앞에서의 심리 과정에서 충분히 드러난다고 보아 가야바 앞에서의 심문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안나스가 당시 가야바보다 실제적인 영향력을

더 많이 끼칠 수 있었으므로 안나스 앞에서의 심문만 묘사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것

이다.

=====18:25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울었다는 곳에 세워진 통곡교회>

사람들이 묻되…아니라 하니 – 이 장면은 18절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그 사이에

예수는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당하고 있었다. 복음서들 사이에는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

는 당사자가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

어 나타난다.

마가의 경우 첫번째와두번째 질문자

가 동일인으로 여종이며 세번째는 익명의 ‘어떤 사람’인 것으로 전해주고 있다(눅 22:

54-62). 이에 비해 요한은 첫번째는 여종, 두번째는 ‘사람들’, 마지막 세번째는 베드

로의 칼에 귀가 잘린 바 있던 대제사장의 종 ‘말고’와 인척 관계인 한 종에 의해 질문

이 주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여러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들에 피워 놓은 불빛

과 횃불에 의해 사람을 식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질문자의 성별이나 신분에

관해서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을수 있다. 다만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람이 저자 요한이

었다면 그곳에 참관했던 그의 기록이 가장 정확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부인을 비교적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베드로

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강도가 질문의 횟수가 거듭함에 따라 강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마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드로는 ‘맹세하고 부인’하기 까지 했

다(마 26:72). 모든 인류를 위해 무고한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의 모

습과 자기 한 몸의 안전을 위해 거짓을 말하며 자신의 맹세까지(마 26:33, 35) 저버리

는 베드로의 나약하고 추한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18:26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 – 요한만이 증언하고 있는 바 ‘귀를 베어 버리운 사

람’은 대제사장이 종 말고였다(10절). 세번째 질문자는 이 말고의 친척으로 예수가 체

포되던 사건 현장에 있었다고 자처하고 나섰다. 누가에 의하면 이 세번째 질문은 두번

째 질문이 끝난 후 1시간 뒤에 있었으며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에

따라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제시하고 있다(눅 22:59, 60). 아마 이 세번째 질문자는

베드로의 말투를 통해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짐작했을 것이다. 한편 그의 질문은 질문

자 자신이 말고의 친척으로서 현장에서 목격했다는 것과 베드로가 갈릴리인이라는 사

실이 그가 예수의 제자임을 증거한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동반함으로써 베드로를 압박

해 왔다. 이제 베드로는 순순히 자기가 예수의 제자임을 고백하던가 아니면 더 강하게

부정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18:27

요한의 서술은 냉정하고 담담하다고 할 수 있을만큼 부가적인 설명없이 사실만을

간결하게 증언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마지막 질문에 직면하여 예수를

저주하기까지 하면서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마 26:74).

이러한 베드로의 부인 속에는 자기의 맹세를 단 몇 시간도 지켜내지 못하는 그의 나약

한 모습과 불안이 상징적으로 잘 암시되어 있다.

곧 닭이 울더라 –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는 베드로의 맹세와 “닭울

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의 예언 중에 유감스럽게도 실현된 것은

베드로의 맹세가 아니라 예수의 예언이었다(13:37, 38). 요한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공

관복음서에 의하면 베드로는 닭 울음 소리를 듣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 심히 통곡했

다고 전한다(마 26:75;막 14:72;눅 22:62).

=====18:28

가야바에게 관정으로 – 요한은 안나스가 예수를 가야바에게 보냈다는 이야기만 보

도했을 뿐 산헤드린에서 예수가 질문받은 이야기는 전하지 않았다. 공관복음서에 의하

면 예수는 빌라도 앞에 서기 전에 유대 법정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 심문에서 예수는

유대법에 의하면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는 신성모독 죄를 뒤집어 쓴다(마 26:57-

66;막 14:53-64;눅22:66-71). 그러나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은 사형을 집

행할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빌라도의 법정에 예수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본

문의 의미이다. 한편 본문에서 ‘관정(* , 프라이토리온)은 라틴어

‘프라에토리움'(Praetorium)에 상응하는 말로서 본래로마 군대의 영내에 있는 장군의

막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본문에서는 총독의 관저를 가리킨다. 유대지역을 다스리

는 로마의 총독은 평상시에 가이사랴에 머물면서 총독의 직무를 수행했다(행 23:33).

그러나 유월절과 같은 대축제일에 총독은 식민지 백성의 소요(騷擾)를 예방하거나 진

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이때 총독이 머물던 관저의 위치에 대해 학자에

따라 헤롯 궁전이었다고 보는 견해(Benoit, Barrett)와 안토니아의 성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옳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새벽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이'(* )는 로마의 시간법으로 제 4

졍을 가리키는데 지금의 새벽 3-6시를 가리킨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예수를 빌라도의

관저에 데리고 왔다는 것은 산헤드린에서의 예수의 심문이 밤사이에 있었음을 말해 주

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의 불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것

과 같은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 밤에 심문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2) 심문이 있는 당일

에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불법이었다. 전자는 중요한 사건의 심문을 낮에 시행해야

한다는 규칙을 어긴 것이고 후자는 심문한 당일에는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불법이었

다. 전자는 중요한 사건의 심문을 낮에 시행해야 한다는 규칙을 어긴 것이고 후자는

심문한 당일에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규정을 어긴 것이다. 한편 혹자는 본 구절

속에는 세상에 대한 예수의 승리의 날이 동텄다는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Bultmann) ‘새벽’이란 표현은 시간의 경과를 알리기 위해 사용된 단어로 영적인 해석

이 요구되지 않으므로 그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 예수를 관정으로 끌고간 유대인들은 예수만 넘겨주고 자

기들은 관정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부정을 법함으

로써 유월절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방인의 집

에 들어가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에 따른 규정이 아니라 랍비들이 정한

규례였는데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이 규례를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행 10:28).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 본서에 의하면 예수를 빌라도의 법저에 세울 때까지

아직 유월절 잔치를 먹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잡히시

던 날 이미 유월절 식사는 끝났고 대축제 일이 첫날이 시작되었다(마 26:17-30;막

14:12-26;눅 22:7-23). 이러한 공관복음서와 본서의 시간적 차이에 대하여 혹자는 공

관복음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하고(Keim, Strauss), 반면에 다른 학자는 본서가 정

확하다고 하는 등(Lucke, Meyer) 견해가 서로 엇갈리고 있는 데 혹자는 이 차이들을

조화시켜 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런 시도를 하는 학자들은 본절의 ‘유월절 잔

치’가 유월절 다음날부터 시작되어 절기 칠일 동안 계속 먹는 ‘식사’인 ‘차기가흐

‘Chagigah)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Lenski, Morris, Robertson).

특히 유대인들은, 슬프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먹는 니산월 14일의 양고기 식사 후 축제

적 분위기에서 니산월 15일의 ‘차기가흐’를 반드시 먹었다. 로버트슨(Robertson)은 이

주장의 신빙성을 더 강화하기 위해 ‘파스카'(* , ‘뜻’)라는 단어에 대한 요

한의 용법을 제시한다. 즉 요한이 ‘파스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식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축제’를 가리킨다는 것이며 절기 전체의 주간을 가리킨다는 것이

다(39절;2:23). 이렇게 본다면 본문의 ‘유월절 잔치’는 유월절의 양고기 식사를 가리

키는 것이 아니라 무교절의 식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은 19:14에서

예수가 빌라도 앞에서 심문당하던 날이 ‘유월절의 예비일’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

므로 본서와 공관복음서는 분명히 하루 정도의 차이가 난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는 13:3의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본절에는 유대인들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희극적 아

이러니(Irony)가 묘사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무교절을 유월절로 표현했는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구약 시대에는 무교절과 유월절을 엄격

히 구분하였으나 구약 말기에 이르러 점차 구분이 희미해졌다. 따라서 초기 사도 시대

에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일컬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

들이 모든 율법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도 의례적인 규법을 지

키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8:29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 한은 아무런 보충 설명 없이 빌라도를 등장

시키는데 이는 본서의 독자들이 이미 그를 잘 알고 있음을 암시한다. 빌라도는 A.D.26

-36년 까지 유대 지방의 총독을 맏았었다.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에 의하

면 빌라도는 잔인하고 오만하며 쉽게 분노하고 특히 유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완고하고 의식적인 종교적 편견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런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종교적 규법을 인정하고 밖으로 나온 것은(28절) 다소 뜻밖

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유대인들의 대절기였으며 따라서 민족주의와

강하게 결부된 그들의 종교적 감정은 언제라도 폭동으로 분출할 수 있었으므로 가능하

면 그들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쉬어야 할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와 심문을 시작했다.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 빌라도는 로마의 재판절차를 좇아 먼저 고발자

에게 피고의 혐의 사실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18:30

행악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사본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대문자 사본과 소문자 사본은 ‘카코포이오스'(* )를, 나머지 대문

자 사본과 후기 시리아 역본 및 콥탁 역본은 ‘코콘 포이온'(* ),

‘코코포이온'(*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했다. 어느 독법이 정

확한지 결정지을 수 없으나 본절에서 ‘에이미'(* , ‘이다’)의 미완료 과거형이

사용되었으므로 명사형인 ‘카코포이오스’나 분사형인 ‘코콘 포이온’과 ‘코코포이온’이

적합하다. 중요한 것은 어느 형태를 취해도 본질적인 뜻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법률 위반 여부에 관계없이 심성 자체가 악하며 인격이 바르지 못

한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유대인들의 고소는 다분히 감정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범죄

사실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요한은 전하

고 있지 않으나 공관복음서들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사형에 처함이 마땅하다고

결정한것은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혀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고 보았기 때

문이었다(마 26:63-66;막 14:61-64;눅 22:66-71).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에 관

한 것이었고 로마 법정은 식민지 국민의 종교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재판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것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로마 법정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이끌어 내기 위

해 비종교적인 죄목으로 예수를 고발했지만 그것이 전혀 구체성이 없는 ‘행악자’라는

죄목이었다. 혹자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가리켜 ‘행악자’라고 고발하는 이 장면에서

‘세상’과 계시’의 대졀을 발견한다(Bultmann). ‘세상’은 ‘계시’를 반대하고 거부한다.

‘계시’가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했으므로 그들은 계시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세상은 끝내 계시를 거부하거나 벗어날 수 없고 계시를 눌러 이길 수도 없다

(19:30;20:1-17). 한편 고소자들은 예수가 ‘행악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즉 지

속적으로 악을 행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에이미’의 미완료 과거형 ‘엔'(* )

을 사용했다. 이표현 속에는 예수가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반역음모를 꾀

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18:31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 라도는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하여(30절) 좀더 구체적으로

따져 묻지도 않고 재판을 거부할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빌라도가 이런 반응을 보이

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를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 빌라

도는 유대인들이 제기하는 소송이 로마 법정에서 재판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의 문제라고 여겼을 것이다. (2)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이미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음을 알았고 따라서 자기에게 재판을 하라는 것은 결국 자기들이 판결한 바를 추인

해 달라는 것이므로 그런 무례한 행위에 대해 자기는 권세있는 자로서 결코 응할수 없

다는 의사 표시일 것이다. (3) 빌라도는 본래 포악하고 거만한 자였으므로 총독으로서

사형 선고를 내릴수 있는 자기의 권위를 강하게 내보이고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의 무력

함을 스스로 고백하게 하려는 계산된 정치적 발언을 하였을 것이다. (4) 때가 유대인

의 명절이니만큼 그들에게 넘겨 주고자 했을 것이다. 빌라도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품으로써 좋지 않았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

고자 꾀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본 구절은 네번째의 추정이 가장 타당하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하여(30절) 좀더 구체적으로 따져 묻지도 않고 재판

을 거부할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빌라도가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는 분명치 않으나 이를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제기하

는 소송이 로마 법정에서 재판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의 문제라고 여

겼을 것이다. (2)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이미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음을 알았고 따라

서 자기에게 재판을 하라는 것은 결국 자기들이 판결한 바를 추인해 달라는 것이므로

그런 무례한 행위에 대해 자기는 권세있는 자로서 결코 응할 수 없다는 의사 표시일

것이다. (3) 빌라도는 본래 포악하고 거만한 자였으므로 총독으로서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는 자기의 권위를 강하게 내보이고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의 무력함을 스스로 고백

하게 하려는 계산된 정치적 발언을 하였을 것이다. (4) 때가 유대인의 명절이니맡큼

그들에게 넘겨 주고자 했을 것이다. 빌라도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

으므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품으로써 좋지 않았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자 꾀했을 가능

성이 크다. 따라서 본 구절은 네번째의 추정이 가장 타당하다.

=====18:32

예수께서…어떠한 죽음으로 –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일 것을 결정하였고 이제 로마

법정을 통해그 결정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만약 예수께서 로마법정에 의해 사형 집

행을 선고 받는다면 그것은 곧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코 우

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며 예수께서 이미 예고하신 바였

다(3:14;12:32, 33). 마태의 기록에는 이것이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마 20:19).

=====18:33

다시 관정에 들어가 –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종교적인 규범을 준수하기 위해 관정에

들어가지 않고 예수만 인도한 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빌라도가 왔다갔다 하며

(38절) 심문을 해야 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본서 기록에 따르면 빌라도의 이 질문은 다소 갑작스럽다

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끌고와 고발하기까지의 과정에는 이런

질문을 유발시킬 수 있는 어떤 암시도 없었기 때문이다(28-30절). 그런데 공관복음서

에는 이점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주어져 있다. 눅 23:2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예수

를 다음 세 가지 죄목으로 고발하였다. (1) 예수가 유대인을 미혹하는 행동을 한다.

(2) 가이사 즉 로마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지시킨다. (3) 자기를 가리켜 유대

인의 왕이라고 선언한다. 본문에서 빌라도는 그 가운데 정치적 문제와 관련된 것에 대

해 심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번째와 두번째 고소 내용은 빌라도에게 문

제가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첫번째 고소 내용은 유대인들 내부 문제로서 그들 스스

로가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두번째 것은 빌리도가 이미 알고 있는바, 로마 황제에

게 세금 바칠 것을 강요하는 총독에 대해 계속해서 반항해 온 것이 바로 완고하고 저

항적인 유대인 자신들이었으므로 이제 그들이 자기들의 동족인 유대인 자신들이었으므

로 이제 그들이 자기들의 동족인 예수를 가리켜 세금 내는 것을 금하는 자라고 고발하

는 것이 신뢰할 수 없는 조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절의 질문은 세번째 고소

내용인 정치적인 의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마 빌라도가 예수가 추구하며 가르

쳐 왔던 영적 왕에 대한 의미를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6:15). 결국 빌라도의

질문의 요지는 예수가 무력으로 유대를 로마로 부터 해방시킬 왕이냐는 것이다.

=====18:34

네가 스스로…다른 사람들이 –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가리켜 ‘자칭 왕 그

리스도'(눅 23:2)라고 하는 자라고 고소했을때 그들은 빌라도가 그 고소의 내용을 정

치적인 의미로 이해하기를 바랬음에 틀림없다. 만일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고소자

의 의도처럼 정치적 선동자라는 측면자에서 빌라도가 이해했다면 예수의 답변은 부정

적일 수밖에 없으며 반면 진실한 일부 유대인들의 경우처럼 이 말이 대망의 메시야를

가리키는 종교적 의미로 빌라도에게 이해되었다면 예수는 긍정의 답변을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35절로 미루어 볼 때 빌라도는 단지 유대인 고소자들의 말을 듣고 정

치적 의미에서 예수께 물은 것 같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네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하라’는 정도의 의미로 하신 말씀이라하겠다.

=====18:35

내가 유대인이냐…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 예수의 질문에 대한 빌라도의 대답은

자신의 개인적 호기심에 의한 심문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오직 빌라도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발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행위가 무

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빌라도는 총독으로서 유대인 중 누군가가 자칭 이스라엘의

왕이라하며 세력을 규합하여 반로마적 투쟁을 주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 없었고 또

한 체포되어 끌려온 예수의 모습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한다며 그를 고발했다. 그리하여 빌

라도는 보다 구체적인 질문으로 예수에 대해 알고자 했다.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 이 표현 속에는 한가지 분명히

확인되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 재판이 이방인 총독에 의해 제기된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대제사장이 주도적 역할을 했음도 강조되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궁극적 책임의 소재와 결부된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 의해 떠밀

려 재판을 진행하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재판을 이끌어간 세력은 대제사장들로 대변되

는 유대인들이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로 대변되는 유대인들이다. 빌라도는 직무상 재

판에 관련된 책임을 져야겠지만 유대인들은 사건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

이다.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 예수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빌라도

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그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한다. 결국 예수께서 하신 일

들은 그의 나라를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가 한 일을 설명하는 것보다 그의 나

라의 정체를 설명하는 것이 빌라도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내 나라’ 즉

소유자가 예수인 그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왕인 나라

는 사람들이 그렇게 지키고자 애쓰며 권력으로만 유지되고 힘이 질서의 원리인 그런

나라는 아니다. 예수는 그 나라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빌라도에게 설명할 필요

를 느끼지 않는다. 아마 설명한다 하더라도 빌라도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

하여 예수는 그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기본적인 사실만을 말해줌으로써

고소권에 관한 빌라도의 일차적 의혹을 해소시켜 주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내 종들이 싸워 – 예수께서는 자기의 나라가 세상에 속하니 않는 것임을 설명하는

데 있어 단 하나의 단서를 제시한다. 그것은 싸움에 의해 획득되고 유지되는 것이 아

니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속한 나라의 권력이란 예외없이 싸움에 의해 얻어지고 싸

움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나 그의 추종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것은 예수의 나라가 세상의 나라와는 전혀 다른 질서와 원리에 의해 세원진 것임을 증

명해 준다. 그 나라는 사람이 통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나

라이며(계 11:15) 힘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의 원리로 세워지는 나라이다.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 본문에서 예수는 자기가 로마 정부에 넘겨진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넘겨졌음을 말함으로써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는데 유대인들

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8:37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 ‘그러면’ 이라는 표현은 ‘네가 왕이 아니냐’는 빌라도

의 질문이 예수의 답변(36절)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해준다. 36절에서 예수의 답변 가

운데 ‘내나라’라는 진술은 그것이 비록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형태

로든 예수가 왕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빌라도의

질문은 긍정의 대답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그럴경우 공동번역이나 RSV의 번

역처럼 “네가 왕이냐?” (so you are a king?)로 번역하는 것이 의미상 더 타당할 것이

다. 혹자는 이 빌라도의 질문이 ‘그래도 그대가 왕이라는 말인가?’의 의미로 해석하여

주장하지만(Morris)그보다가 진지한 자세로 질문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내가 왕이니라 – 비로소 예수의 긍정적인 대답이 주어지고 있다. 이 대답은 ‘네말

이 옳도다’로 되어 있는 마가의 기록보다(막 15:2) 더 분명한 긍정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가 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육적으로 말하자면 왕가인 다윗의 가문에서 출

생했고(마 1:1;롬 1:3), 영적으로 말하자면 성삼위의 제2격인 하나님의 아들이다(롬

1:4). 그래서 서편의 저자들은 하나님을 ‘왕’이라고 표현했다(시 47, 48편). 그리고

사사 가드온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곧 택함을 받은 백성의 ‘왕’이라고 고백했다(삿

8:23). 이처럼 하나님은 왕이시기에 성자 예수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 왕이 되신

다(고전 15:25).

났으며…왔나니 – ‘났으며’는 예수가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음을 가리키

는 것으로 그의 참된 인성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하는

이단처럼 인간의 몸을 입은 것처럼 보였을 뿐 실제로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라

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완전한 인간이었다. 한편 ‘왔나니’라는 표현은 그의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본래적 존재도 이 세상에 기원을 두고 있지 않음을

말해준다. 예수는 자신의 기원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16:28). 이것은

예수가 신적인 본성을 지니고 계신 존재임을 의미한다. 참 인간이면서 참 하나님이신

예수의 본성은 신비 그 자체이다.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 본 구절 바로 앞에 진술된 ‘이를 위하여'(*

, 에이스 투토)는 예수가 본구절을 강조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예수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며(1:1-3), 진리이다(14:6). 그 자신이 진리인 예수는 세상에 오신 궁

극적인 목적은 사람들을 생명에로 인도하는 것이었다(14:6).

진리에 속한 자는…듣느니라 – 진리에 속한 자만이 진리이신 예수의 말씀을 이해

할 수 있다. 본 구절은 다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께 올 수 없다는 사실(3:27;6:44, 45, 65)과 본절은 잘 조화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정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 본 구절은 영적 진리에 무지한 빌라

도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예수는 진리의 왕으로 진리를 말하고

있으므로 만일 빌라도가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면 예수의 말씀을 이해했겠지만 그는 결

코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니었기에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18:38

진리가 무엇이냐 – 이 질문은 다음 몇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너같은 자가

어찌 진리를 알겠느냐? (2)’당신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에 대해서 나는 관심이 없다.

‘ 본 구절은 세상 사람들 특히 정치가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하찮은 회의주의(Scep-

ticism)에서 비롯된 질문이다(Godet). 그들은 이상주의적이고 사변적인 문제에 대해

일반적으로 무관심하다.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에게 질문을 던진 후 예수의 대답을 듣

기 전에 곧바로 밖으로 나간것으로 보아 (2)해석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 빌라

도는 예수에 대하여 어떤 적대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의사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 빌라도는 다시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바깥으로 나

가(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28, 33절 주석을 참조하라) 예수를 심문한 후 얻은 자신의

판단을 전했다. 그 결론은 예수가 사법적 처벌을 받을 아무런 혐의가 없었다는 사실이

다. 빌라도는 나름대로 공정한 재판장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비록 그는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의사는 없었지만 적어도 예수가 처벌을 받아야 할만한 행위를 하지 않았

을 뿐 아니라 의도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그것을 사실대로 유대인

들에게 전했다.

=====18:39

유월절이면…전례 – 빌라도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심문하기는 하였지만 재판장

으로서의 자신의 직무를 유기(遺棄)하였다. 그는 자신이 말한 바 예수의 무죄를 확인

하였으므로(38절) 유대인들의 동의를 물을 것도 없이 예수를 석방했어야 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못하고 유대인들의 동의를 얻고자함으로써 우유 부단한 그의 성

격을 노출시켰다. 아마 그는 자기가 관할하고 있는 지역의 지도자들이 고소했다는 이

유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자기의 판단대로 밀고 나갈 수 없었을 것이

다. 아무튼 빌라도는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석방시켜 주는 전례를 따라 예수를 풀어주

고자 했다. 한 사람을 석방시켜 달라고 요청한 자들이 유대인들로 기록되어 있다(막15

:8). 요한은 자세한 대화를 기록하기보다는 빌라도의 말에 초점을 맞추었으므로 유대

인들의 요청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석방시

켜주는 관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쉬나의 암시외에 자료의 불충분으

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예수 당시에 그런 관습이 적용되고 있었던 사실만큼

은 확실하다고 여겨진다. 아마 그 전례는 로마 통치자들이 유대인들에 대한 통치를 용

이하게 하기 위한 유화(有和)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유대인의 왕을…원하느냐 – 빌라도는 예수를 가리켜 유대인의 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혹자는 빌라도가 이명칭을 사용한 것에 대해 그가 예수를 위해 유대인들의 마음

을 돌리게 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L. Morris). 그러나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

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예수를 고발한 유대인들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다고 볼수도

있다. 따라서 굳이 표현으로써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자 한 것 같지는 않

다. 아마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고소했던 내용 중 하나인 ‘유대인의 왕’이란 표현

을 단순히 반복한 것 같다.

=====18:40

바라바라 하니…강도러라 – ‘강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스테스'(* )

는 당시에 ‘게릴라’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C.K. Barrett). 바라바라는 반로마

적 혁명 운동을 주도했던 정치법이었을 것이다(막 15:7;눅 23:19). 유대인들은 자가당

착적(自家撞着的)인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 왕 즉 정

치법으로 고소한 반면 진짜 정치범은 놓아 달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

대인들은 전혀 일관성도 없이 다만 예수에 대한 적개심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

고 메시야를 죽이려고 혈안(血眼)이 되어 있었다.

헬라어 요한복음 18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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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우타 에이폰 예수스 엨셀덴 쉰 토이스 마데타이스 아우투 페란 투 케이마르루 투 케드론 호푸 엔 케포스 에이스 혼 에이셀덴 아우토스 카이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개역개정,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새번역,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는 동산이 하나 있었는데, 예수와 그 제자들이 거기에 들어가셨다.

우리말성경,1 예수께서 이 기도의 말씀을 하신 뒤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에는 동산이 하나 있었는데 예수와 제자들이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가톨릭성경,1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제자들과 함께 그 곳에 들어가셨다.

영어NIV,1 When he had finished praying, Jesus left with his disciples and crossed the Kidron Valley. On the other side there was an olive grove, and he and his disciples went into it.

영어NASB,1 When Jesus had spoken these words, He went forth with His disciples over the ravine of the Kidron, where there was a garden, in which He entered with His disciples.

영어MSG,1 Jesus, having prayed this prayer, left with his disciples and crossed over the brook Kidron at a place where there was a garden. He and his disciples entered it.

영어NRSV,1 After Jesus had spoken these words, he went out with his disciples across the Kidron valley to a place where there was a garden, which he and his disciples entered.

헬라어신약Stephanos,1 ταυτα ειπων ο ιησους εξηλθεν συν τοις μαθηταις αυτου περαν του χειμαρρου των κεδρων οπου ην κηπος εις ον εισηλθεν αυτος και οι μαθητα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1 haec cum dixisset Iesus egressus est cum discipulis suis trans torrentem Cedron ubi erat hortus in quem introivit ipse et discipuli eius

히브리어Modern,1 ויהי ככלות ישוע לדבר את הדברים האלה ויצא החוצה עם תלמידיו מעבר לנחל קדרון ושם גן ויבא בו הוא ותלמידיו׃

성 경: [요18: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 여기서 지시하는 예수의 말씀은 17장에서 언급된 예수의 기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이 기도를 마치신 뒤에 예수는”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장은 예수의 중보기도(17장)에 이어 수난 기사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공관복음에서 공통되게 다루고 있는 겟세마네 기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요한은 17장의 기도를 겟세마네 기도와 대체시키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하므로써 요한은 예수의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노출시키지 않고 대신 17장의 기도문에 나타난 예수의 위엄을 강조하려고 의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 예수가 기도를 마치고 이동한 장소의 방향으로 언급되는 기드론 골짜기(공동번역)를 말한다. ‘시내’로 번역된 ‘케이마르로스'(*)는 ‘겨울에 흐르는 시내’라는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이 시내는 겨울 우기 동안에 약간의 물이 흐르고 곧 말라버리기 때문에 다른 계절에는 말라있는 건천(wadi)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기드론은 ‘백향목’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인데 구약 시대의 우상들이 불태워지던 곳이며(왕상 15:13)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자 반란군을 피해 다윗이 건넜던 곳이기도 하다(삼하 15:23).

󰃨 거기 동산이 있는데 – 기드론 시내 건너쪽에 있는 동산이라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는데 ‘동산'(*, 케포스)이라는 말은 요한만이 언급한다. 마태와 마가는 ‘겟세마네’라 불리는 곳으로, 누가는 ‘감람산’으로 언급하고 있다(마 26:36;막 14:32;눅22:39). 그러나 마태와 마가가 언급한 ‘곳’이 ‘장소’, ‘들’을 의미하는 ‘코리온'(*)인 것으로 보아서 ‘정원'(garden)을 의미하는 본절의 ‘동산’과 의미상 별다른 차이가 없다. 또 ‘들어가다’는 말이나 4절의 ‘나아가'(*)라는 말로 보아서이곳에 어떤 울타리가 있음을 암시하므로 ‘케포스’나 ‘코리온’ 둘다 ‘정원’ 또는 ‘제한된 장소’로 이해할 수 있다(C.K. Barrentt). 특히 이곳은 2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예수와 제자들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이 장소를 가룟 유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감람산에 있는 ‘겟세마네’라는 이름을 가진 ‘정원’ 또는 ‘농원’을 지칭한다.

󰃨 그의 제자들 – 저자는 제자들을 복수로 언급할 분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 점은 공관복음서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이름을 언급하여 세 명의 제자를 강조하고 구별한 것과 대조된다.

에데이 데 카이 유다스 호 파라디두스 아우톤 톤 토폰 호티 폴라키스 쉬네크데 예수스 에케이 메타 톤 마데톤 아우투

개역개정,2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새번역,2 예수가 그 제자들과 함께 거기서 여러 번 모이셨으므로, 예수를 넘겨줄 유다도 그 곳을 알고 있었다.

우리말성경,2 그곳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던 곳이어서 예수를 배반한 유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2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러 번 거기에 모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팔아 넘길 유다도 그 곳을 알고 있었다.

영어NIV,2 Now Judas, who betrayed him, knew the place, because Jesus had often met there with his disciples.

영어NASB,2 Now Judas also, who was betraying Him, knew the place; for Jesus had often met there with His disciples.

영어MSG,2 Judas, his betrayer, knew the place because Jesus and his disciples went there often.

영어NRSV,2 Now Judas, who betrayed him, also knew the place, because Jesus often met there with his disciples.

헬라어신약Stephanos,2 ηδει δε και ιουδας ο παραδιδους αυτον τον τοπον οτι πολλακις συνηχθη ο ιησους εκει μετα των μαθητω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2 sciebat autem et Iudas qui tradebat eum ipsum locum quia frequenter Iesus convenerat illuc cum discipulis suis

히브리어Modern,2 וגם יהודה מוסרו ידע את המקום כי פעמים רבות נועד שמה ישוע עם תלמידיו׃

성 경: [요18: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가끔 모이시는 곳 – 요한은 예수와 제자들이 이 동산을 처음 찾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여러 차례 방문한 곳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누가는 보다 더 자세하게 이곳을 ‘늘 하시던 대로'(눅 22:39, 공동번역) 찾으신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는 따로 떨어진 유다가 군대를 이끌고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즉 유다가 예수의 일행이 머문 장소를 알았던 것은 유다 자신도 예수와 함께 이곳을 여러 번 방문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호 운 유다스 라본 텐 스페이란 카이 에크 톤 아르키에레온 카이 에크 톤 파리사이온 휘페레타스 에르케타이 에케이 메타 람파돈 파논 카이 카이 호플론

개역개정,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새번역,3 유다는 로마 군대 병정들과,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우리말성경,3 유다는 로마 군인들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횃불과 등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3 그래서 유다는 군대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영어NIV,3 So Judas came to the grove, guiding a detachment of soldiers and some officials from the chief priests and Pharisees. They were carrying torches, lanterns and weapons.

영어NASB,3 Judas then, having received the Roman cohort and officers from the chief priests and the Pharisees, came there with lanterns and torches and weapons.

영어MSG,3 So Judas led the way to the garden, and the Roman soldiers and police sent by the high priests and Pharisees followed. They arrived there with lanterns and torches and swords.

영어NRSV,3 So Judas brought a detachment of soldiers together with police from the chief priests and the Pharisees, and they came there with lanterns and torches and weapons.

헬라어신약Stephanos,3 ο ουν ιουδας λαβων την σπειραν και εκ των αρχιερεων και φαρισαιων υπηρετας ερχεται εκει μετα φανων και λαμπαδων και οπλων

라틴어Vulgate,3 Iudas ergo cum accepisset cohortem et a pontificibus et Pharisaeis ministros venit illuc cum lanternis et facibus et armis

히브리어Modern,3 ויקח יהודה את הגדוד ומשרתים מאת הכהנים הגדולים והפרושים ויבא שמה בנרות ובלפידים ובכלי נשק׃

성 경: [요18: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군대와 – 본문은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유다가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이끌고 온 사람들의 신분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공관복음서는(마 26:47;막 14:34;눅 22:47) 유다가 이끌고 온 사람들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 오클로스)라고만 밝히고 있으나 요한은 군대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종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군대'(*, 스페이라)는 로마군 600명으로 구성된 한 부대 단위를 나타내기도 하며 또한 200여명으로 구성된 보병 중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C.k>Barrentt). 그런데 혹자는 ‘스페이라’를 안토니아 성에 주둔해 있던 작은 부대로 추측한다(Robertson, Lenski). 그러나 12절에서 지휘관으로 천부장이 언급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렇게 작은 부대는 아닐 것이다. 그들은 예수와 그의 11제자와 다수의 백성들이 함께 있을 것을 대비해 많은 수의 하속을 동행했을 것이다.

󰃨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하속들 – 공관복음서와 같이 요한도 역시 예수를 죽게한 주동자로 대제사장 계급과 바리새파 계급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하속(下屬)들(*, 후;페레테스)은 성전 경비를 맡은 일종의 경찰로서 이해된다(C.K> Barrett). 한편 예수를 체포하러 온 무리 중에 대제사장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산헤드린이 보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Lenski) 이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 유대의 지도층 전체가 개입되어 있음을 시사해 준다.

󰃨 등과 홰와 병기 – 공관 복음서에서는 ‘검과 몽치’라고만 언급하는데(마 26:47;막14:43) 본문에서는 등과 홰까지 언급된다. ‘등’과 ‘홰’는 고대에 동의어였으나 후대에 와서 등불과 횃불로 구분하여 사용되었다(C.K. Barrett). 한편 이때는 유월절(니산월14일) 전날이며 당시 월력(月曆)을 사용했던 정황으로 보아 거의 만월의 상태였을 것이다. 따라서 불이 필요치 않을 수 있으나 당시 상황이 구름으로 인해 흐린 날씨였거나 아니면 예수의 체포 시간이 한밤중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등과 홰를 언급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요한은 당시의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했던 장본인이기에 일기와 관련된 상황을 잘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후자보다는 전자의 추정이 본절에 더적합한 것 같다.

예수스 운 에이도스 판타 타 에르코메나 엪 아우톤 엨셀덴 카이 레게이 아우토이스 티나 제테이테

개역개정,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새번역,4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닥쳐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우리말성경,4 예수께서는 자기가 당할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와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가톨릭성경,4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영어NIV,4 Jesus, knowing all that was going to happen to him, went out and asked them, “Who is it you want?”

영어NASB,4 So Jesus, knowing all the things that were coming upon Him, went forth and said to them, ” Whom do you seek?”

영어MSG,4 Jesus, knowing by now everything that was coming down on him, went out and met them. He said, “Who are you after?” They answered, “Jesus the Nazarene.”

영어NRSV,4 Then Jesus, knowing all that was to happen to him, came forward and asked them, “Whom are you looking for?”

헬라어신약Stephanos,4 ιησους ουν ειδως παντα τα ερχομενα επ αυτον εξελθων ειπεν αυτοις τινα ζητειτε

라틴어Vulgate,4 Iesus itaque sciens omnia quae ventura erant super eum processit et dicit eis quem quaeritis

히브리어Modern,4 וישוע ידע את כל אשר יבא עליו ויצא ויאמר אליהם את מי תבקשו׃

성 경: [요18: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 이 말은 예수의 초자연적 예지(豫知)를 부여하기 위해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예수는 사역 초기부터 죽음의 위협이 있음을 예측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사역 도중 위협에 직면했을 때 예수는 자신이 예측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사역 도중 위협에 직면했을 때 예수는 자신이 예측하고 있는 그 고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아시고 위험한 피해 자리를 옮긴 적이 있었다(10:39;11:54). 그러나 지금은 때가 이르렀기 때문에(17:1) 피하지 않고 담대히 맞부딪치고 있다. 한편 혹자는 ‘아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스'(*) 대신 ‘이돈'(*, ‘깨닫다’)을 사용해야 한다고주장한다(C.K. Barrett). 그 근거는 ‘에이도스’보다 ‘이돈’이 신적 예지와 관련된 용어이며 요한이 예수에 대한 신적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독특한 용어를 많이 애용했다는 점이다. 본절에서 ‘이돈’이 사용될 경우 2절의 ‘에데이'(*, ‘알다’)와 구별이될 수 있다. 그러나 목적어 ‘그 당할 일을 다'(*,판타 타 에르코메나)란 표현에 이미 예수의 신적 예지가 암시되어 있으므로 굳이 ‘이돈’으로 본문을 변경시킬 필요가 없다.

󰃨 나아가 – 예수는 동산에서 나가셔서 잡으로 온 무리들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이같은 묘사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자발적 체포를 강조하고 있으며 당당하고 권위있는 예수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요한은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이 적대자들에 의한 단순한 처형이 아니라 구원사적 맥락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예수가 섭리를 자발적으로 수용했음을 강조한다.

󰃨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 예수께서 체포하러 온 자들 앞으로 나아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에는 예수의 권위있는 위엄이 나타나 있으며, 예수가 무기력하게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다하기 위해 당당하게 체포됨을 묘사하기 위한 저자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본절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의 체포나 죽음을 위엄있는 구속사적 드라마로 이해하게 된다.

아페크리데산 아우토 예순 톤 나조라이온 레게이 아우토이스 에고 에이미 헤이스테케이 데 카이 유다스 호 파라디두스 아우톤 멭 아우톤

개역개정,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새번역,5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 사람이다.” 예수를 넘겨줄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우리말성경,5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 사람이다.” 배반자 유다도 그들과 함께 거기에 서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5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팔아 넘길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영어NIV,5 “Jesus of Nazareth,” they replied. “I am he,” Jesus said. (And Judas the traitor was standing there with them.)

영어NASB,5 They answered Him, “Jesus the Nazarene.”He said to them, “I am He.” And Judas also, who was betraying Him, was standing with them.

영어MSG,5 He said, “That’s me.” The soldiers recoiled, totally taken aback. Judas, his betrayer, stood out like a sore thumb.

영어NRSV,5 They answered, “Jesus of Nazareth.” Jesus replied, “I am he.” Judas, who betrayed him, was standing with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5 απεκριθησαν αυτω ιησουν τον ναζωραιον λεγει αυτοις ο ιησους εγω ειμι ειστηκει δε και ιουδας ο παραδιδους αυτον μετ αυτων

라틴어Vulgate,5 responderunt ei Iesum Nazarenum dicit eis Iesus ego sum stabat autem et Iudas qui tradebat eum cum ipsis

히브리어Modern,5 ויענו ויאמרו את ישוע הנצרי ויאמר אליהם ישוע אני הוא וגם יהודה מוסרו עמד אצלם׃

성 경: [요18: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나사렛 예수 – 예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언급된 본문은 나사렛(*, 나조라 이온)이란 형용사를 첨가하고 있다. 이와같은 형태는 본서에서는 예수의 명패에 쓰인 칭호에서(19:19), 그리고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전할 때(1:45, *, 아포 나자렛, ‘나사렛에서 온’) 언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름 앞에 지명을 붙여 사용한 것은 아마도 예수의 출생지를 밝히려 했던 의도에 따른 것임과 동싱 동명이인(同名異人)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내로라 – 예수는 ‘나사렛 예수’가 자신임을 아주 짧은 말로 밝힌다. ‘내가…이다'(*,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출 3:14) 간결하면서도 권위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단순히 자신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시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했다. 요한은 예수의 자기 계시를 강조하기 위해 공관복음서 저자와 달리 이 표현을 부각시켰다.

󰃨 유다도 함께 섰더라 – 이는 유다가 예수의 맞은편에 적대자들과 함께 서 있음을 묘사해 준다. 정면으로 예수와 마주하고 있는 유다는 배신자로서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편 공관복음서와 구별되는 점은 유다가 예수에게 입맞추어 예수를 체포케하는 행위가 언급되지 않고 예수가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예수의 권위와 위엄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묘사한다는 점이다.

호스 운 에이펜 아우토이스 에고 에이미 아펠돈 에이스 타 오피소 카이 에페산 카마이

개역개정,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새번역,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뒤로 물러나서 땅에 쓰러졌다.

우리말성경,6 예수께서 “내가 그 사람이다” 하시자 그들은 뒤로 물러나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가톨릭성경,6 예수님께서 “나다.” 하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 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영어NIV,6 When Jesus said, “I am he,” they drew back and fell to the ground.

영어NASB,6 So when He said to them, “I am He,” they drew back and fell to the ground.

영어MSG,6 (SEE 18:5)

영어NRSV,6 When Jesus said to them, “I am he,” they stepped back and fell to the ground.

헬라어신약Stephanos,6 ως ουν ειπεν αυτοις οτι εγω ειμι απηλθον εις τα οπισω και επεσον χαμαι

라틴어Vulgate,6 ut ergo dixit eis ego sum abierunt retrorsum et ceciderunt in terram

히브리어Modern,6 ויהי בדבר ישוע אליהם אני הוא ויסגו אחור ויפלו ארצה׃

성 경: [요18: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저희가 물러가서…엎드러지는지라 – 본문은 예수가 ‘내가 그이다’라고 말하자 나타난 반응을 묘사한 것으로 예수의 신적 권위를 묘사해 주고 있다. 즉 이 말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인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에고 에이미 호온)라는 출 3:14의 70인역(LXX)을 연상했기 때문에 적대자들이 두려워 물러서며 엎드리게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예수의 신적 권위가 강조됨은 물론 예수의 승리자의 모습으로 죽으셨음이 확인된다.

팔린 운 에페로테센 아우투스 티나 제테이테 호이 데 에이판 예순 톤 나조라이온

개역개정,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새번역,7 다시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우리말성경,7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가톨릭성경,7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였다.

영어NIV,7 Again he asked them, “Who is it you want?” And they said, “Jesus of Nazareth.”

영어NASB,7 Therefore He again asked them, “Whom do you seek?” And they said, “Jesus the Nazarene.”

영어MSG,7 Jesus asked again, “Who are you after?” They answered, “Jesus the Nazarene.”

영어NRSV,7 Again he asked them, “Whom are you looking for?” And they said, “Jesus of Nazareth.”

헬라어신약Stephanos,7 παλιν ουν αυτους επηρωτησεν τινα ζητειτε οι δε ειπον ιησουν τον ναζωραιον

라틴어Vulgate,7 iterum ergo eos interrogavit quem quaeritis illi autem dixerunt Iesum Nazarenum

히브리어Modern,7 ויסף וישאל אתם את מי תבקשו ויאמרו את ישוע הנצרי׃

성 경: [요18: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물으신대…하거늘 – 4절과 동일한 질문이 반복되고 5절과 똑같은 대답이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독자성, 즉 예수가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어 체포된 것이 아님을 거듭 확인해 주고 있으며 동시에 예수의 권위있는 위엄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깔려 있다. 한편 요한은 5절의 ‘대답하되’를 본절에서는 ‘말하되’로 바꾸어 표현했다. 이는 같은 말의 반복을 싫어하는 요한의 습관에 따른 것이다.

아페크리데 예수스 에이폰 휘민 호티 에고 에이미 에이 운 에메 제테이테 아페테 투투스 휘파게인

개역개정,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새번역,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 사람이라고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다. 너희가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여라.”

우리말성경,8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고 있다면 이 사람들은 보내 주라.”

가톨릭성경,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영어NIV,8 “I told you that I am he,” Jesus answered. “If you are looking for me, then let these men go.”

영어NASB,8 Jesus answered, “I told you that I am He; so if you seek Me, let these go their way,”

영어MSG,8 “I told you,” said Jesus, “that’s me. I’m the one. So if it’s me you’re after, let these others go.”

영어NRSV,8 Jesus answered, “I told you that I am he. So if you are looking for me, let these men go.”

헬라어신약Stephanos,8 απεκριθη ο ιησους ειπον υμιν οτι εγω ειμι ει ουν εμε ζητειτε αφετε τουτους υπαγειν

라틴어Vulgate,8 respondit Iesus dixi vobis quia ego sum si ergo me quaeritis sinite hos abire

히브리어Modern,8 ויען ישוע הלא אמרתי לכם אני הוא לכן אם אתי תבקשו הניחו לאלה וילכו׃

성 경: [요18: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이 사람들의 가는 것 – 예수는 적들이 찾고 있는 예수가 자신임을 거듭 확인시키고 대신 자신과 함께 있던 제자들은 자유롭게 갈수 있도록 하라는 제안을 하고 있다. 즉 자신을 내어 놓고 제자들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한다. 이것은 요한의 독특한 자료로 막 14:50에서 언급되는 제자들의 도주와 대조되고 있다. 이것은 요한이 공관복음서 저자와 달리 제자들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밝혀 제자들을 호의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수의 이같은 행동은 10:11에서 예견된바로서 이는 예수의 자신이 자발적으로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히나 플레로데 호 로고스 혼 에이펜 호티 후스 데도카스 모이 우크 아폴레사 엨스 아우톤 우데나

개역개정,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새번역,9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전에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나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신 그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우리말성경,9 이것은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 중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9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영어NIV,9 This happened so that the words he had spoken would be fulfilled: “I have not lost one of those you gave me.”

영어NASB,9 to fulfill the word which He spoke, “Of those whom You have given Me I lost not one.”

영어MSG,9 (This validated the words in his prayer, “I didn’t lose one of those you gave.”)

영어NRSV,9 This was to fulfill the word that he had spoken, “I did not lose a single one of those whom you gave me.”

헬라어신약Stephanos,9 ινα πληρωθη ο λογος ον ειπεν οτι ους δεδωκας μοι ουκ απωλεσα εξ αυτων ουδενα

라틴어Vulgate,9 ut impleretur sermo quem dixit quia quos dedisti mihi non perdidi ex ipsis quemquam

히브리어Modern,9 למלאת הדבר אשר אמר מאלה אשר נתת לי לא אבד לי אף אחד׃

성 경: [요18: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 예언의 성취를 나타내는 본문의 어투는 본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문구이다(C.K.Barrett, A.T. Robertson). 여기서 성취된 예언은 17:12을 가리킨다. 특히 17:12에서 언급된 멸망의 자식이 여기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이미 유다가악의 세력에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예언의 성취에 관한 언급은 예수 자신의말을 성경적 권위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몬 운 페트로스 에콘 마카이란 헤일퀴센 아우텐 카이 에파이센 톤 투 아르키에레오스 둘론 카이 아페콮센 아우투 토 오타리온 토 뎈시온 엔 데 오노마 토 둘로 말코스

개역개정,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새번역,10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고였다.

우리말성경,10 그때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쪽 귀를 베어 버렸습니다. 그 종의 이름은 말고였습니다.

가톨릭성경,10 그 때에 칼을 가지고 있던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영어NIV,10 Then Simon Peter, who had a sword, drew it and struck the high priest’s servant, cutting off his right ear. (The servant’s name was Malchus.)

영어NASB,10 Simon Peter then, having a sword, drew it and struck the high priest’s slave, and cut off his right ear; and the slave’s name was Malchus.

영어MSG,10 Just then Simon Peter, who was carrying a sword, pulled it from its sheath and struck the Chief Priest’s servant, cutting off his right ear. Malchus was the servant’s name.

영어NRSV,10 Then Simon Peter, who had a sword, drew it, struck the high priest’s slave, and cut off his right ear. The slave’s name was Malchus.

헬라어신약Stephanos,10 σιμων ουν πετρος εχων μαχαιραν ειλκυσεν αυτην και επαισεν τον του αρχιερεως δουλον και απεκοψεν αυτου το ωτιον το δεξιον ην δε ονομα τω δουλω μαλχος

라틴어Vulgate,10 Simon ergo Petrus habens gladium eduxit eum et percussit pontificis servum et abscidit eius auriculam dextram erat autem nomen servo Malchus

히브리어Modern,10 ולשמעון פטרוס חרב וישלפה ויך את עבד הכהן הגדול ויקצץ את אזנו הימנית ושם העבד מלכוס׃

성 경: [요18:1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잘려진 말고의 귀]

󰃨 시몬 베드로 – 본절에서 베드로의 이름이 히브리식 이름과 함께 쓰이고 있다. 즉 ‘바요나 시몬'(마16:17) 또는 ‘요한의 아들 시몬'(1:42;21:15)으로 언급되지만 주로 ‘시몬’이란 말만을 덧붙여 ‘시몬 베드로’라고 호칭하게 된다. 여기서 베드로가 칼을 사용하여 적들에게 대항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칼을 사용한 자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마 26:51;막 14:47;눅 22:50). 아마도 공관복음서는 칼을 사용한 자의 신분에 해가 돌아가지 않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요한 복음은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후대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이름을 밝혀도 본인에게 아무런 영형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여 베드로의 이름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 검을 가졌는데 – 눅 22:36-38에 따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검을 휴대하도록 지시하였고 제자들 중에서 검 두 자루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공격용으로 준비된 것으로 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눅 22:36-38 주석 참조). 왜냐하면 칼 두 자루로 무력에 해당한다는 것은 상식 밖이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유월절에는 무기를 휴대할 수 없도록 규제되었으므로(C.K. Barrett, Robertson) 베드로가 무기를 소지한 것은 불법이었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베드로가 열심당원이었다고 할 증거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칼은 아마도 위험한 순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감지한 베드로가 호신용으로 준비해 둔 단검으로 보인다.

󰃨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 마태와 마가는 어느쪽 귀인지 언급하지 않지만 누가와 요한은 동일하게 오른쪽 귀를 잘랐다고 언급한다. 누가는 역사가로서 당시의 정황을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통해 ‘오른편’이란 형용사를 사용했으며 요한은 귀를 자른 장본인으로 ‘시몬 베드로’라는 이름을 밝힌 것처럼 잊을 수 없는 그 밤의 사건을 세밀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 형용사를 사용했던 것같다. 한편 본서에서는 ‘베어버리니’가 ‘아페콰센'(*)으로 언급된 반면 공관복음서에서는 ‘아페일렌'(*)으로 기록되었다. 이 차이는 요한이 공관복음서에서 그의 사용되지 않는 독특한 용어를 종종 언급하는 데서 발생한 것이므로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아무튼 눅 22:49에서는 한 제자가 예수에게 칼을 사용해도 되느냐고 물었던 것으로 진술되고 있으나 본서에서의 베드로의 행동은 예수의 의사와 무관하게 갑자기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 말고 – 귀가 잘려나간 대제사장의 종을 가리키는 이름인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본서에만 언급되고 있다. 이것도 역시 사건 현장을 사실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신뢰성을 높이고 당시의 정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에이펜 운 호 예수스 토 페트로스 발레 텐 마카이란 에이스 텐 데켄 토 포테리온 호 데도켄 모이 호 파테르 우 메 피오 아우토

개역개정,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새번역,11 그 때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

우리말성경,11 그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받아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가톨릭성경,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셨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영어NIV,11 Jesus commanded Peter, “Put your sword away! Shall I not drink the cup the Father has given me?”

영어NASB,11 So Jesus said to Peter, “Put the sword into the sheath; the cup which the Father has given Me, shall I not drink it?”

영어MSG,11 Jesus ordered Peter, “Put back your sword. Do you think for a minute I’m not going to drink this cup the Father gave me?”

영어NRSV,11 Jesus said to Peter, “Put your sword back into its sheath. Am I not to drink the cup that the Father has given me?”

헬라어신약Stephanos,11 ειπεν ουν ο ιησους τω πετρω βαλε την μαχαιραν σου εις την θηκην το ποτηριον ο δεδωκεν μοι ο πατηρ ου μη πιω αυτο

라틴어Vulgate,11 dixit ergo Iesus Petro mitte gladium in vaginam calicem quem dedit mihi Pater non bibam illum

히브리어Modern,11 ויאמר ישוע אל פטרוס השב חרבך אל נדנה הכי לא אשתה את הכוס אשר נתן לי אבי׃

성 경: [요18:1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잘려진 말고의 귀]

󰃨 검을 집에 꽃으라 – 칼을 사용한 베드로에게 보인 예수의 반응은 칼을 놓으라는 명령인데 공관복음서에서는 마태복음만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마 26:52). 그리고 이 표현 대신 누가는 잘리워진 귀를 만져 낫게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눅 22:51). 특히 마태복음은 칼을 사용한 사실에 대해 채강하고 훈계하는 장면을 관심 깊게 묘사하고 있는데 반해 누가복음은 원수를 치료하고 싸매는 모습을 통해 사랑과 화해의 실천자로서의 예수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본서는 메시야적 사역에 깊은 의미를 두었으므로 칼 사용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다.

󰃨 아버지께서 주신 잔 – 본서에서 ‘잔’이라는 말이 본절에서만 나타나고 있으며 공관복음서에서 언급된 잔의 의미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막 10:38, 39;14:36 주석 참조). 특히 본서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행해졌던 예수의 기도가 본절에서 함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눅 22:42). 여기서 잔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겪어야 할 수난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수난의 잔이 우연히 발생된 것이 아니라 죄악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임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는 ‘아버지께서 주신’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공관복음서에 비해 하나님의 예정을 매우 강조하는데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운명이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 본문은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 기도 내용을 함축한 듯하다. 즉 아버지의 뜻이라면 잔을 마시겠다고 하는 예수의 결단을(마 26:42;막 14:36;눅22:42) 좀더 담담하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미 예수는 이 수난의 길이 필연적으로 걸어가야 할 자신의 길임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어 순종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칼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길을 막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마 16:21-23).

헤 운 스페이라 카이 호 킬리아르코스 카이 호이 휘페레타이 톤 유다이온 쉬넬라본 톤 예순 카이 에데산 아우톤

개역개정,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새번역,12 로마 군대 병정들과 그 ㉠부대장과 유대 사람들의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를 잡아 묶어서 / ㉠그, ‘천부장’

우리말성경,12 군인들과 천부장과 유대 사람의 경비병들이 예수를 체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묶어서

가톨릭성경,12 군대와 그 대장과 유다인들의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결박하고,

영어NIV,12 Then the detachment of soldiers with its commander and the Jewish officials arrested Jesus. They bound him

영어NASB,12 So the Roman cohort and the commander and the officers of the Jews, arrested Jesus and bound Him,

영어MSG,12 Then the Roman soldiers under their commander, joined by the Jewish police, seized Jesus and tied him up.

영어NRSV,12 So the soldiers, their officer, and the Jewish police arrested Jesus and bound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2 η ουν σπειρα και ο χιλιαρχος και οι υπηρεται των ιουδαιων συνελαβον τον ιησουν και εδησα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12 cohors ergo et tribunus et ministri Iudaeorum conprehenderunt Iesum et ligaverunt eum

히브리어Modern,12 אז תפשו הגדוד ושר האלף ומשרתי היהודים את ישוע ויאסרהו׃

성 경: [요18:1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 앞에 선 예수]

󰃨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 – 요한은 최종적으로 예수를 체포한 사람들을 밝히고 있다. 3절의 언급과 다른 점은 ‘천부장’이라는 구체적 직위를 명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부장은 문자 그대로 1000명으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렛(C.K. Barrett)은 천부장에 해당하는 본절의 헬라어 ‘킬리아르코스'(*)가 로마군의 한 부대의 지휘관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는 어떤 규모 부대의 지휘관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역 성경 중(RSV)에서는 바렛의 견해와 같이 단순히 ‘Captain’이라고 번역되어 지휘관적인 ‘천부장’이 아니라 규모가 작은 부대의 장임이 암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다음 두가지 추정에 의해 부정된다. (1)요한으로 추정되는 15절의 제자는 대제사장과 서로 알고 있었으므로 그곳에 온 자가 ‘천부장’인지 직급이 그보다 훨씬 낮은 자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2) 민란의 이유로 산헤드린이 예수를 체포하러 군대까지 동원시켰으므로 ‘천부장’이 나섰을 것이다.

󰃨 잡아 결박하여 – ‘잡아'(*, 쉰엘라본)는 ‘함께 잡다’란 말로 ‘체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결박하여'(*, 에데산)는 본절에서는 ‘묶는다’로 해석되지만 본래는 투옥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같은 표현은 시사해 주는 것은 단호하게 법을 집행하는 체포 현장을 묘사함과 동시에 11절에서 보여준 예수의 단호한 모습과 함께 예수의 체포 역시 간결한 용어로 표현하여 예언의 전격적인 성취를 돋보이게 하는 데 있다. 또한 요한은 공관복음처럼 체포에 대한 예수의 설명을 첨가하지 않음으로써 생략법을 통한 예언 성취를 강조했다.

카이 에가곤 프로스 한난 프로톤 엔 가르 펜데로스 투 카이아파 호스 엔 아르키에류스 투 에니아우투 에케이누

개역개정,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새번역,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인데,

우리말성경,13 먼저 그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가톨릭성경,13 먼저 안나스에게 데려갔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사제 가야파의 장인이었다.

영어NIV,13 and brought him first to Annas, who was the father-in-law of Caiaphas, the high priest that year.

영어NASB,13 and led Him to Annas first; for he was father-in-law of Caiaphas, who was high priest that year.

영어MSG,13 They took him first to Annas, father-in-law of Caiaphas. Caiaphas was the Chief Priest that year.

영어NRSV,13 First they took him to Annas, who was the father-in-law of Caiaphas, the high priest that year.

헬라어신약Stephanos,13 και απηγαγον αυτον προς ανναν πρωτον ην γαρ πενθερος του καιαφα ος ην αρχιερευς του ενιαυτου εκεινου

라틴어Vulgate,13 et adduxerunt eum ad Annam primum erat enim socer Caiaphae qui erat pontifex anni illius

히브리어Modern,13 ויוליכהו בראשונה אל חנן והוא חתן קיפא אשר שמש בכהנה גדולה בשנה ההיא׃

성 경: [요18:1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 앞에 선 예수]

󰃨 안나스 – 안나스는 눅 3:2;행 4:6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누가는 안나스 직책을 대제사장 가야바와 함께 언급함으로써 안나스가 대제사장인 것처럼 이해하게도 한다. 허나 요한은 안나스의 직책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해 대제사장 가야바와 구분함으로써 당시 안나스는 대제사장이 아님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안나스는 A.D. 6-15년 사이에 대제사장의 직책을 맡았던 사람인데 그에게 아들 다섯이 있었다. 그 아들들 역시 제사장을 맡았었다면 본문에 언급된 사위 가야바도 대제사장이었다. 본래 대제사장은 종신적이었으나 로마의 지매가 시작된후 대제사장직이 막대한 부와 권력에 의해 좌우되어 로마에 대한 적극적인 추종자들에게 주어짐으로써 자주 교체되었다. 안나스 역시 로마 총독 그라투스(Gratus)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런데 무리들이 예수를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데려가지 않고 그의 장인 안나스에게로 데려간 이유가 무엇인지 본문에 언급되지 않아 알수 없다. 아마 안나스는 대제사장 직위에서 폐위 당했으나 그의 사위가 대제사장이었으므로 대제사장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졌던 사람으로 짐작된다.

󰃨 그 해의 대제사장 – 본문과 동일한 언급이 11:49에서 나타난바 있는데 ‘그 해’라는 단어는 제사장직이 1년으로 끝나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체포되던 역사적인 해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언급된 가야바는 약 20년 동안 대제사장직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C.K. Barett).

엔 데 카이아파스 호 쉼불류사스 토이스 유다이오스 호티 쉼페레이 헤나 안드로폰 아포다네인 휘페르 투 라우

개역개정,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새번역,14 가야바는 ‘한 사람이 온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유대 사람에게 조언한 사람이다.

우리말성경,14 가야바는 전에 ‘한 사람이 백성들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다’라고 유대 사람들에게 조언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가톨릭성경,14 그리고 가야파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다고 유다인들에게 충고한 자이다.

영어NIV,14 Caiaphas was the one who had advised the Jews that it would be good if one man died for the people.

영어NASB,14 Now Caiaphas was the one who had advised the Jews that it was expedient for one man to die on behalf of the people.

영어MSG,14 It was Caiaphas who had advised the Jews that it was to their advantage that one man die for the people.

영어NRSV,14 Caiaphas was the one who had advised the Jews that it was better to have one person die for the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14 ην δε καιαφας ο συμβουλευσας τοις ιουδαιοις οτι συμφερει ενα ανθρωπον απολεσθαι υπερ του λαου

라틴어Vulgate,14 erat autem Caiaphas qui consilium dederat Iudaeis quia expedit unum hominem mori pro populo

히브리어Modern,14 הוא קיפא אשר יעץ את היהודים כי טוב אשר איש אחד יאבד בעד כל העם׃

성 경: [요18:1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 앞에서 선 예수]

󰃨 가야바는…권고하던 자러라 – 가야바는 예수께서 사역을 하였던 기간에 대제사장으로 활동하던 자였다. 본절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11:50을 가리킨다. 유대 백성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들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그것이 필경은 로마의 공격을 초래하리라는 염려에서 그는 ‘산헤드린의 회원들에게 예수를 죽이는 것이 모두를 위하여 유익하다’고 말했었다. 이러한 그의 권고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에는 예언적 의미로 예수의 죽으심과 결부되었던 것이다(11:51, 52).

에콜루데이 데 토 예수 시몬 페트로스 카이 알로스 마데테스 호 데 마데테스 에케이노스 엔 그노스토스 토 아르키에레이 카이 쉬네이셀덴 토 예수 에이스 텐 아울렌 투 아르키에레오스

개역개정,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새번역,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라서,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안뜰에까지 들어갔다.

우리말성경,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 집의 마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가톨릭성경,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예수님과 함께 대사제의 저택 안뜰에 들어갔다.

영어NIV,15 Simon Peter and another disciple were following Jesus. Because this disciple was known to the high priest, he went with Jesus into the high priest’s courtyard,

영어NASB,15 Simon Peter was following Jesus, and so was another disciple. Now that disciple was known to the high priest, and entered with Jesus into the court of the high priest,

영어MSG,15 Simon Peter and another disciple followed Jesus. That other disciple was known to the Chief Priest, and so he went in with Jesus to the Chief Priest’s courtyard.

영어NRSV,15 Simon Peter and another disciple followed Jesus. Since that disciple was known to the high priest, he went with Jesus into the courtyard of the high priest,

헬라어신약Stephanos,15 ηκολουθει δε τω ιησου σιμων πετρος και ο αλλος μαθητης ο δε μαθητης εκεινος ην γνωστος τω αρχιερει και συνεισηλθεν τω ιησου εις την αυλην του αρχιερεως

라틴어Vulgate,15 sequebatur autem Iesum Simon Petrus et alius discipulus discipulus autem ille erat notus pontifici et introivit cum Iesu in atrium pontificis

히브리어Modern,15 ושמעון פטרוס ותלמיד אחר הלכו אחרי ישוע והתלמיד ההוא היה נודע לכהן הגדול ויבא עם ישוע לחצר הכהן הגדול׃

성 경: [요18:1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 다른 제자 – 베드로와 더불어 체포되어 끌려가는 예수의 뒤를 따라갔던 두 제자 가운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제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다. 아리마대 요셉(19:38)이나 니고데모(3:1-15;7:50-52;19:39)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가 하면 저자의 동생인 야고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Godet, Watkins) 그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즉 요한 자신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Lenski, Robertson)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그러나 여기에 제기될 수있는 문제는 한낱 갈릴리 어촌의 어부에 지나지 않는 요한이 어떻게 유대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 안나스와 친분관계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혹자는 요한이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기 때문에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는 실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오히려 요한이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지 못했던 자신의 나약했던 당시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그 제자가 자신이라고 밝히지 않았을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리고 본절의 설명을 통해 베드로와 자신이 어떻게 그 법정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독자들에게 알려주어 법정안에서의 모든 일들이 직접 두 제자에 의해 목격된 진실임을 암시해준다.

󰃨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 – 이 제자가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문지키는 여종에게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 문을 통과해 들어갈 수 있었던 데서 입증된다. 여기서 ‘아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노스토스'(*)는 어느 정도의 친밀성을 나타내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이 말은 ‘친한 친구’, ‘친척 관계’ 또는 ‘형제’를 뜻할 수 있지만(Barrett) 그런 정도의 관계는 아닐지라도 그가 안으로 들어갈 때 문지기로부터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결코 단순한 관계가 아닌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다드(Dodd)는 ‘그 사람이 대제사장과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제사장 출신이거나 아니면 대제사장과 관련된 일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제사장이었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제롬(Jerome)은 이에 반박하면서 ‘기독 교회의 사제’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거의 근거가 없으므로 타당하지 않다.

󰃨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 여기서 ‘뜰'(*, 아울렌)이 울타리 안의 뜰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산헤드린의 집회 장소 안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여기서 안나스가 예수에게 심문을 하는 데(19-24절), 이 심문이 안나스 개인에 의한 비공식적인 것이라면 ‘안뜰’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산헤드린에 의한 심문이 시작되기 직전에 있었던 것이라면 산헤드린 집회 장소의 안뜰이라고 볼 수 있다(Barrett). 안나스가 심문 후에 예수를 그해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에게 보낸 점 그리고 본절에서 ‘집 뜰’이라고 진술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호 데 페트로스 에이스테케이 프로스 테 뒤라 엨소 엨셀덴 운 호 마데테스 호 알로스 호 그노스토스 투 아르키에레오스 카이 에이펜 테 뒤로로 카이 에이세가겐 톤 페트론

개역개정,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새번역,16 그러나 베드로는 대문 밖에 서 있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인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문지기 하녀에게 말하고,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

우리말성경,16 그러나 베드로는 문 밖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인 그 제자가 나와서 문지기 하녀에게 말해 베드로를 들어오게 했습니다.

가톨릭성경,16 베드로는 대문 밖에 서 있었는데, 대사제와 아는 사이인 그 다른 제자가 나와 문지기 하녀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

영어NIV,16 but Peter had to wait outside at the door. The other disciple, who was known to the high priest, came back, spoke to the girl on duty there and brought Peter in.

영어NASB,16 but Peter was standing at the door outside. So the other disciple, who was known to the high priest, went out and spoke to the doorkeeper, and brought Peter in.

영어MSG,16 Peter had to stay outside. Then the other disciple went out, spoke to the doorkeeper, and got Peter in.

영어NRSV,16 but Peter was standing outside at the gate. So the other disciple, who was known to the high priest, went out, spoke to the woman who guarded the gate, and brought Peter in.

헬라어신약Stephanos,16 ο δε πετρος ειστηκει προς τη θυρα εξω εξηλθεν ουν ο μαθητης ο αλλος ος ην γνωστος τω αρχιερει και ειπεν τη θυρωρω και εισηγαγεν τον πετρον

라틴어Vulgate,16 Petrus autem stabat ad ostium foris exivit ergo discipulus alius qui erat notus pontifici et dixit ostiariae et introduxit Petrum

히브리어Modern,16 ופטרוס עמד מחוץ לפתח ויצא התלמיד האחר המידע לכהן הגדול וידבר אל השערת ויבא את פטרוס פנימה׃

성 경: [요18:1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 다른 제자가…데리고 들어왔더니 – 베드로가 체포되어 끌려가는 예수를 왜 따라왔는지 분명치 않다. 10절에서와 같이 자기의 스승을 구출하거나 복수를 하기 위해 따라왔을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자기 혼자서 그들의 손에서 예수를 구출한다는 것은 불가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스승인 예수의 신변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걱정이 되어 따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13:38)는 말씀을 이루려는 주님의 섭리가 있을 수도 있다. 본문에 의하면 베드로는 문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따라오기는 했지만 예수의 제자로서의 신분이 드러날 경우 자기의 신변에 위험이 있을 수있었기 때문에 감히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거기에는 자기의 칼에 상처를 입었던 대제사장의 종(10절)도 있었을 것이므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베드로가 들어오지 못한 것을 안 ‘다른 제자’가 문 지키는 여종에게 말하여 베드로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였다. 그 다른 제자가 처음 들어갈 때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은 사실을 언급한 것에 대해 다음 세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1)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2) 내부의 사정을 그가 미리 알아보기 위함이다. (3) 들어가기 힘든 그곳에 베드로도 확실히 들어갔음을 밝히기 위함이다(L. Morris). 본문이 전개되는 과정으로 보아 여기서는 첫번째 추정이 개연성(蓋然性)이 높다.

레게이 운 토 페트로 헤 파이디스케 헤 뒤로로스 메 카이 쉬 에크 톤 마데톤 에이 투 안드로푸 투투 레게이 에케이노스 우크 에이미

개역개정,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새번역,17 그 때에 문지기 하녀가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베드로는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우리말성경,17 문지기 하녀가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한 사람이지요?”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니오.”

가톨릭성경,17 그 때에 그 문지기 하녀가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요?” 하자, 베드로가 “나는 아니요.”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17 “You are not one of his disciples, are you?” the girl at the door asked Peter. He replied, “I am not.”

영어NASB,17 Then the slave-girl who kept the door said to Peter, “You are not also one of this man’s disciples, are you?” He said, “I am not.”

영어MSG,17 The young woman who was the doorkeeper said to Peter, “Aren’t you one of this man’s disciples?” He said, “No, I’m not.”

영어NRSV,17 The woman said to Peter, “You are not also one of this man’s disciples, are you?” He said, “I am not.”

헬라어신약Stephanos,17 λεγει ουν η παιδισκη η θυρωρος τω πετρω μη και συ εκ των μαθητων ει του ανθρωπου τουτου λεγει εκεινος ουκ ειμι

라틴어Vulgate,17 dicit ergo Petro ancilla ostiaria numquid et tu ex discipulis es hominis istius dicit ille non sum

히브리어Modern,17 ותאמר האמה השערת אל פטרוס הלא גם אתה מתלמידי האיש הזה ויאמר אינני׃

성 경: [요18:1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 문 지키는 여종 – 이 말의 헬라어 ‘헤파이디스케 헤 뒤로로스'(*)는 비슷한 표현의 반복이라고 생각된다(C.K. Barrett). 16절에서는 ‘헤파이디스케’가 생략된 채 ‘헤 두로로스’ 만으로 ‘문 지키는 여자’를 표현했다. 그리고 본절에서는 그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어린 소녀’ 또는 ‘하녀’를 의미하는 ‘헤 파이디스케’를 첨가시켰다. 요한은 ‘헤두로로스’를 반복함으로써 베드로가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음과, 베드로가 부인하게 되는 정황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마가는 베드로에게 첫번째 질문을 한 여자가 ‘대제사장의 여종’이었다고 전해주며(마 14:66, 67) 마태와 누가는 단지 ‘한 여종’이었다고 전해주고 있다(마 26:69, 70;눅 22:56-57). 여기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베드로에게 첫번째 치욕스런 부인(否認)을 하도록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여종이라는 점이다. 하찮고도 연약한 여종 앞에서조차 베드로는 담대함을 가지지 못하고 주님을 부인하는 비겁함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베드로의 초라한 모습은 그가 예전에 보여 주었던 용기있는 언행이 얼마나 인간적인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던가를 잘 보여준다(13:37).

󰃨 너도…하나가 아니냐 – 이 말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는 다른 제자’와 같이 너도 이 사람의 제자가 아니냐”는 의미로 여종의 질문을 해석하는 학자가 있다(Barrett). (2) ‘너도 다른 많은 사람의 제자 중 하나’라는 표현은 ‘다른 제자’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에 대한 것이므로 ‘너도’는 예수의 모든 제자들과 관계있는 표현이다. 따라서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헤이스테케이산 데 호이 둘로이 카이 호이 휘페레타이 안드라키안 페포이에코테스 호티 프쉬코스 엔 카이 에데르마이논토 엔 데 카이 호 페트로스 멭 아우톤 헤스토스 카이 데르마이노메노스

개역개정,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새번역,18 날이 추워서, 종들과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우리말성경,18 날씨가 추웠기 때문에 종들과 경비병들은 숯불을 피워 놓고 둘러서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불을 쬐며 그들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18 날이 추워 종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었다.

영어NIV,18 It was cold, and the servants and officials stood around a fire they had made to keep warm. Peter also was standing with them, warming himself.

영어NASB,18 Now the slaves and the officers were standing there, having made a charcoal fire, for it was cold and they were warming themselves; and Peter was also with them, standing and warming himself.

영어MSG,18 The servants and police had made a fire because of the cold and were huddled there warming themselves. Peter stood with them, trying to get warm.

영어NRSV,18 Now the slaves and the police had made a charcoal fire because it was cold, and they were standing around it and warming themselves. Peter also was standing with them and warming himself.

헬라어신약Stephanos,18 ειστηκεισαν δε οι δουλοι και οι υπηρεται ανθρακιαν πεποιηκοτες οτι ψυχος ην και εθερμαινοντο ην δε μετ αυτων ο πετρος εστως και θερμαινομενος

라틴어Vulgate,18 stabant autem servi et ministri ad prunas quia frigus erat et calefiebant erat autem cum eis et Petrus stans et calefaciens se

히브리어Modern,18 והעבדים והמשרתים בערו אש גחלים כי עת קר היתה ויעמדו שם ויתחממו וגם פטרוס עמד עמם ומתחמם׃

성 경: [요18:1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 추운 고로…쬐더라 – 유월절은 양력으로 3, 4월경이므로 밤에는 다소 쌀쌀한 날씨였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 특별하여 대제사장의 하속들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했다. 그래서 마당에 불을 피워 쬐고 있었다. 본문에

󰃨 숯불 – 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드라키안'(*)은 매우 오래된 말로 신약성경에는 본절과 21:9에만 나온다. 이에 대해 모리스(L. Morris)는 요한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여러 사람들이 둘러서서 불을 쬐는 자리는 몸을 숨기고 추위를 피하는 데에도 적당한 장소라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한편 ‘대제사장을 아는 다른 제자’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없는데 이 때문에 ‘이 제자’의 등장이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를 서술하기 위해 저자가 등장시킨 인물이라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는 듯하다(15절 주석 참조). 또한 예수를 체포하여 안나스에게 인도한 병사들에 대한 언급도 없는데 아마 이들은 자기들의 숙소로 돌아갔을 것이다.

호 운 아르키에류스 에로테센 톤 예순 페리 톤 마데톤 아우투 카이 페리 테스 디다케스 아우투

개역개정,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새번역,19 대제사장은 예수께 그의 제자들과 그의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

우리말성경,19 대제사장은 예수께 그의 제자들과 그의 가르침에 관해 물었습니다.

가톨릭성경,19 대사제는 예수님께 그분의 제자들과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

영어NIV,19 Meanwhile, the high priest questioned Jesus about his disciples and his teaching.

영어NASB,19 The high priest then questioned Jesus about His disciples, and about His teaching.

영어MSG,19 Annas interrogated Jesus regarding his disciples and his teaching.

영어NRSV,19 Then the high priest questioned Jesus about his disciples and about his teaching.

헬라어신약Stephanos,19 ο ουν αρχιερευς ηρωτησεν τον ιησουν περι των μαθητων αυτου και περι της διδαχη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19 pontifex ergo interrogavit Iesum de discipulis suis et de doctrina eius

히브리어Modern,19 וישאל הכהן הגדול את ישוע על תלמידיו ועל לקחו׃

성 경: [요18:1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의 심문]

󰃨 대제사장 – 예수께서 체포당하신 해의 공식적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으며(13절) 예수가 붙잡혀 온 곳은 안나스가 있는 곳이었다(13절). 따라서 본문의 ‘대제사장’은 안나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24절을 볼때 더욱 명확해진다. 그런데 혹자는 본문의 대제사장이 가야바를 가리킨다고 보고 안나스는 단지 원로로서 참관한 것이라고 한다(Godet, Westcott). 이러한 해석은 다른 복음서들이 안나스에 의한 심문을 전하지 않고 가야바에 의한 심문만을 전하고 있는 것과 일치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안나스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안나스 앞에서 의심문은 유죄를 위한 예비 심문이라고 보는것이 타당하다. 즉 요한은 안나스에 의한 예비심문을 전해주는 것이고 다른 복음서들은 가야바에 의한 공식 심문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해의 대제사장이 아닌 안나스(13절)을 가리켜 대제사장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본래 대제사장직이 종신적이었고 여전히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3절에서 요한은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것이 여러 사람이 대제사장직을 동시에 맡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것은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를 포함시켜 그렇게 불렀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안나스를 ‘대제사장’으로 부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 – 공관복음서들이 전하는 바 가야바의 질문과 본문이 전하는 안나스의 질문은 핵심이 다르게 나타난다. 즉 가야바의 심문은 예수의 인격 곧예수가 메시야인가에 초점이 있고(마 26:57-68;막 14:53-65;눅 22:54, 55, 63-71) 안나스의 심문은 예수의 의도들에 초점이 있다. 안나스의 심문은 예수의 의도들에 초점이 있다. 안나스는 두 가지를 묻는데 하나는 예수의 제자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제자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교훈에 관한 것이다. 전자는 제자들의 숫자, 성향,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 모으는 이유 등에 관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후자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예수는 가르침을 통해 어떤 것을 기대하는가 즉그의 교훈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예수가 제자들을 규합하여 무력혁명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11:47, 48 주석 참조). (2) 예수가 가르치는 중심 교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으로 예수의 가르침에서 구약의 교훈에 반하는 이교적인 사상을 찾아내 정죄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아페크리데 아우토 예수스 에고 파르레시아 렐랄레카 토 코스모 에고 판토테 에디닼사 엔 쉬나고게 카이 엔 토 히에로 호푸 판테스 호이 유다이오이 쉬네르콘타이 카이 엔 크륖토 엘랄레사 우덴

개역개정,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새번역,2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소. 나는 언제나 모든 유대 사람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으며, 아무것도 숨어서 말한 것이 없소.

우리말성경,20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드러내 놓고 말했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대 사람들이 모여 있는 회당이나 성전에서 가르쳤고 숨어서 말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가톨릭성경,2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영어NIV,20 “I have spoken openly to the world,” Jesus replied. “I always taught in synagogues or at the temple, where all the Jews come together. I said nothing in secret.

영어NASB,20 Jesus answered him, “I have spoken openly to the world; I always taught in synagogues and in the temple, where all the Jews come together; and I spoke nothing in secret.

영어MSG,20 Jesus answered, “I’ve spoken openly in public. I’ve taught regularly in meeting places and the Temple, where the Jews all come together. Everything has been out in the open. I’ve said nothing in secret.

영어NRSV,20 Jesus answered, “I have spoken openly to the world; I have always taught in synagogues and in the temple, where all the Jews come together. I have said nothing in secret.

헬라어신약Stephanos,20 απεκριθη αυτω ο ιησους εγω παρρησια ελαλησα τω κοσμω εγω παντοτε εδιδαξα εν τη συναγωγη και εν τω ιερω οπου παντοτε οι ιουδαιοι συνερχονται και εν κρυπτω ελαλησα ουδεν

라틴어Vulgate,20 respondit ei Iesus ego palam locutus sum mundo ego semper docui in synagoga et in templo quo omnes Iudaei conveniunt et in occulto locutus sum nihil

히브리어Modern,20 ויען אתו ישוע אנכי בגלוי דברתי אל העולם ותמיד למדתי בבית הכנסת ובבית המקדש אשר כל היהודים נקהלים שמה ולא דברתי דבר בסתר׃

성 경: [요18:2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의 심문]

󰃨 드러내어 놓고 – 안나스의 두가지 질문 가운데 예수는 제자에 관한 것은 대답하시지 않고 교훈에 관한 것만 대답하셨다. 예수는 안나스가 묻는 질문의 의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의 물음 자체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안나스는 거만과 권위에 도취되어 지극히 상투적인 질문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이교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인정할만한 혐의를 잡아 내려 했지만 예수는 자기의 모든 언행이 공개적이었음을 밝힘으로써 안나스의 의도를 좌절시킨다.

󰃨 세상에 – ‘세상’은 주로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활동 영역으로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인간들이 사는 생활 터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의 교훈이 공개적이었음을 말하는 또다른 표현이다. 예수는 결코 은밀한 곳에서 비밀스럽고 파괴적인것을 가르치지 않았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 회당과 성전 – 예수께서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는 것은 그의 가르침이 공개적이었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해 준다. 회당에서의 가르침은 6:59에, 성전에서의 가르침은 7:14;8:20에 언급된다.

󰃨 은밀히는 아무것도 – 예수는 쿰란 종파와 같이 은밀하게 공동체를 형성하여 엄격한 제한을 두어 가르치지 않고 언제나 공개적으로 가르치셨으므로 산헤드린 회원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교훈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티 메 에로타스 에로테손 투스 아케코오타스 티 엘랄레사 아우토이스 이데 후토이 오이다신 하 에이폰 에고

개역개정,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새번역,21 그런데 어찌하여 나에게 묻소?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를,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시오.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소.”

우리말성경,21 그런데 왜 나를 심문하는 것이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내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라. 그들이 내가 한 말을 알고 있다.”

가톨릭성경,21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 보아라.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영어NIV,21 Why question me? Ask those who heard me. Surely they know what I said.”

영어NASB,21 “Why do you question Me? Question those who have heard what I spoke to them; they know what I said.”

영어MSG,21 So why are you treating me like a conspirator? Question those who have been listening to me. They know well what I have said. My teachings have all been aboveboard.”

영어NRSV,21 Why do you ask me? Ask those who heard what I said to them; they know what I said.”

헬라어신약Stephanos,21 τι με επερωτας επερωτησον τους ακηκοοτας τι ελαλησα αυτοις ιδε ουτοι οιδασιν α ειπον εγω

라틴어Vulgate,21 quid me interrogas interroga eos qui audierunt quid locutus sum ipsis ecce hii sciunt quae dixerim ego

히브리어Modern,21 ומה תשאל אתי שאל נא את השמעים מה שדברתי אליהם הנם יודעים את אשר אמרתי׃

성 경: [요18:2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의 심문]

󰃨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 예수는 안나스가 질문을 통하여 포착하고자 의도한 어떤 내용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의 물음 자체가 어리석은 것임을 지적하셨다. 안나스는 예수가 공개적으로 가르치신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들은 예수를 잡기 위해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질문한 것은 예수의 발언 가운데서 책잡을 만한 것을 찾아 내고자 함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재판 원칙은 피고가 자신에게 부리한 증언을 하도록 강요받을 수 없으며, 피고의 진술을 유죄의 근거로 삼을 수도 없게 되어 있다. 다만 증인들의 증언이나구체적인 물증의 객관성과 타당성에 의해서만 유죄를 선언할수 있었다. 이것을 알고있는 예수는 안나스의 교활한 음모에 일침을 가하면서 증인들을 요구하고 있다.

󰃨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 예수의 이 요구는 잔꾀를 부리지 말고 적법한 방식으로 증거를 제시하라는 뜻이다. 참고로 공관복음서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산헤드린은 예수를 심문함에 있어서 비록 거짓된 증인들이었지만 그들로 하여금 증언하게 하여 심문을 하는 모습이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마 26:59-63;막 14:55-59).

타우타 데 아우투 에이폰토스 헤이스 파레스테코스 톤 휘페레톤 에도켄 라피스마 토 예수 에이폰 후토스 아포크리네 토 아르키에레이

개역개정,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새번역,22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경비병 한 사람이 곁에 서 있다가 “대제사장에게 그게 무슨 대답이냐?” 하면서, 손바닥으로 예수를 때렸다.

우리말성경,22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가까이 있던 경비병 중 하나가 예수의 얼굴을 치며 말했습니다.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런 식으로 말해도 되느냐?”

가톨릭성경,22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대사제께 그 따위로 대답하느냐?” 하였다.

영어NIV,22 When Jesus said this, one of the officials nearby struck him in the face. “Is this the way you answer the high priest?” he demanded.

영어NASB,22 When He had said this, one of the officers standing nearby struck Jesus, saying, “Is that the way You answer the high priest?”

영어MSG,22 When he said this, one of the policemen standing there slapped Jesus across the face, saying, “How dare you speak to the Chief Priest like that!”

영어NRSV,22 When he had said this, one of the police standing nearby struck Jesus on the face, saying, “Is that how you answer the high priest?”

헬라어신약Stephanos,22 ταυτα δε αυτου ειποντος εις των υπηρετων παρεστηκως εδωκεν ραπισμα τω ιησου ειπων ουτως αποκρινη τω αρχιερει

라틴어Vulgate,22 haec autem cum dixisset unus adsistens ministrorum dedit alapam Iesu dicens sic respondes pontifici

히브리어Modern,22 ויהי כדברו הדברים האלה ויך אחד המשרתים העמד שמה את ישוע על הלחי ויאמר הכזאת תענה את הכהן הגדול׃

성 경: [요18:2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의 심문]

󰃨 하속 하나가 손으로…쳐 – ‘하속’으로 번역된 ‘헤이스 파레스테코스 톤 휘페레톤'(*)은 직역하면 ‘관원들 중 곁에 서 있었던 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 표현으로 보아 이 사람은 대제사장의 경호원이거나 산헤드린 경비원이었을 것이다. 그는 안나스를 대하는 예수의 태도가 불손하다고 느꼈던지 손으로 예수의 뺨을 때렸다. 혹자는 본절의 ‘손으로 예수를 쳐’라는 표현이 손바닥으로 예수의 뺨을 친 것이 아니라 몽둥이나 채찍으로 때린 것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이는 헬라어 ‘라피스마'(*)의 초기용법을 따른 것이라고 본다. 초기에 이 단어는 몽둥이로 때리는 행위를 가리켰다. 그러나 점차 후기로 갈수록 그 단어는 손으로 뺨을 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Meyer, Barrett, Bernard, Bultmann, Morris). 그리고 다드(C.H.Dodd)는 본 구절을 예수의 수난과 관련된 사 50:6과 연관지어 예수가 손으로 뺨을 맞았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본문의 묘사는 손으로 뺨을 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랍비 율법에 의하면 심문 중에 있는 피고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순순히 응해야 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대제사장에게 설득당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에게 불경건한 자처럼 정의를 등지는 것이다'(Josephus, C. Apion, II). 그러나 이런 것은 지극히 권위주의적이고 편의주의적 발상일 뿐으로 피고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받지 않는다는 랍비적인 가르침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또한 대제사장 안나스의 한 하속이 예수의 뺨을 친것은 정당한 선고에 의해 유죄가 확정되기 전에는 육체적 가혹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유대법에 위배되는 불법적 과잉 충성의 행위였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 어떤 사람의 뺨을 친다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런 행위는 거의 금기시되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뺨을 맞은 것은 말할수 없는 수욕(羞辱)을 의미하며 또한 사 50:6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페크리데 아우토 예수스 에이 카코스 엘랄레사 마르튀레손 페리 투 카쿠 에이 데 칼로스 티 메 데레이스

개역개정,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새번역,23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한 말에 잘못이 있으면, 잘못되었다는 증거를 대시오. 그러나 내가 한 말이 옳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시오?”

우리말성경,23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잘못 말한 것이 있다면 그 잘못한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은 말을 했다면 어째서 나를 치느냐?”

가톨릭성경,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

영어NIV,23 “If I said something wrong,” Jesus replied, “testify as to what is wrong. But if I spoke the truth, why did you strike me?”

영어NASB,23 Jesus answered him, “If I have spoken wrongly, testify of the wrong; but if rightly, why do you strike Me?”

영어MSG,23 Jesus replied, “If I’ve said something wrong, prove it. But if I’ve spoken the plain truth, why this slapping around?”

영어NRSV,23 Jesus answered, “If I have spoken wrongly, testify to the wrong. But if I have spoken rightly, why do you strike me?”

헬라어신약Stephanos,23 απεκριθη αυτω ο ιησους ει κακως ελαλησα μαρτυρησον περι του κακου ει δε καλως τι με δερεις

라틴어Vulgate,23 respondit ei Iesus si male locutus sum testimonium perhibe de malo si autem bene quid me caedis

히브리어Modern,23 ויען אותו ישוע אם רעה דברתי תנה עד כי רעה היא ואם טוב מדוע תסטרני׃

성 경: [요18:2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의 심문]

󰃨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며…나를 치느냐 – 본문에서 예수는 정당한 항의를 한다. 만약 예수가 한 말 가운데 잘못된 것이 있다면 대제사장이 정당하게 심판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의 심판이 내려지기도 전에 또는 그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이의 제기는 지극히 정당했다. 그것은 안나스의 침묵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24절). 한편 본절에서 보여준 예수의 태도는 ‘오른 쪽 뺨을 치는 자에게 왼쪽 뺨도 돌려 대라’는 그의 말씀(마 5:39)과 모순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말씀의 핵심은 상대방의 행위에 대하여 절대 복수하지 말라는 데에 강조됨이 있다. 지금 예수가 보여준 행동은 정당한 발언을 한 것일 뿐이었다.

아페스테일렌 운 아우톤 호 한나스 데데메논 프로스 카이아판 톤 아르키에레아

개역개정,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새번역,24 안나스는 예수를 묶은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보냈다.

우리말성경,24 그러자 안나스는 예수를 묶은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냈습니다.

가톨릭성경,24 안나스는 예수님을 결박된 그대로 가야파에게 보냈다.

영어NIV,24 Then Annas sent him, still bound, to Caiaphas the high priest.

영어NASB,24 So Annas sent Him bound to Caiaphas the high priest.

영어MSG,24 Then Annas sent him, still tied up, to the Chief Priest Caiaphas.

영어NRSV,24 Then Annas sent him bound to Caiaphas the high priest.

헬라어신약Stephanos,24 απεστειλεν αυτον ο αννας δεδεμενον προς καιαφαν τον αρχιερεα

라틴어Vulgate,24 et misit eum Annas ligatum ad Caiaphan pontificem

히브리어Modern,24 וישלחהו חנן אסור בזקים אל קיפא הכהן הגדול׃

성 경: [요18:2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의 심문]

󰃨 예수를…가야바에게 보내니라 – 안나스는 자기의 의도가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고 있으며 그리하여 더 이상의 심문을 포기하고 예수를 당시의 실제적인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었다. 요한은 안나스가 예수를 가야바에게 보냈다는 짧은 기록만을 남길 뿐 공관복음서에서 자세히 언급된 가야바 앞에서의 심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마 26:57-68;막 14:53-65; 눅 22:66-71). 대신 요한은 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를 강조했다. 아마 요한은 가야바를 수장으로 하는 산헤드린이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 거짓증언과 억지로 인한 것이었으며 사실상 예수는 무죄하였다는 사실이 빌라도 앞에서의 심리 과정에서 충분히 드러난다고 보아 가야바 앞에서의 심문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안나스가 당시 가야바보다 실제적인 영향력을 더 많이 끼칠 수 있었으므로 안나스 앞에서의 심문만 묘사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것이다.

엔 데 시몬 페트로스 헤스토스 카이 데르마이노메노스 에이폰 운 아우토 메 카이 쉬 에크 톤 마데톤 아우투 에이 에르네사토 에케이노스 카이 에이폰 우크 에이미

개역개정,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새번역,25 시몬 베드로는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베드로가 부인하여 “나는 아니오!” 하고 말하였다.

우리말성경,25 시몬 베드로는 서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도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지요?” 베드로는 부인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아니오!”

가톨릭성경,25 시몬 베드로는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요?” 하고 물었다. 베드로는 “나는 아니요.” 하며 부인하였다.

영어NIV,25 As Simon Peter stood warming himself, he was asked, “You are not one of his disciples, are you?” He denied it, saying, “I am not.”

영어NASB,25 Now Simon Peter was standing and warming himself. So they said to him, “You are not also one of His disciples, are you?” He denied it, and said, “I am not.”

영어MSG,25 Meanwhile, Simon Peter was back at the fire, still trying to get warm. The others there said to him, “Aren’t you one of his disciples?” He denied it, “Not me.”

영어NRSV,25 Now Simon Peter was standing and warming himself. They asked him, “You are not also one of his disciples, are you?” He denied it and said, “I am not.”

헬라어신약Stephanos,25 ην δε σιμων πετρος εστως και θερμαινομενος ειπον ουν αυτω μη και συ εκ των μαθητων αυτου ει ηρνησατο εκεινος και ειπεν ουκ ειμι

라틴어Vulgate,25 erat autem Simon Petrus stans et calefaciens se dixerunt ergo ei numquid et tu ex discipulis eius es negavit ille et dixit non sum

히브리어Modern,25 ושמעון פטרוס עמד ומתחמם ויאמרו אליו הלא גם אתה מתלמידיו ויכחש ויאמר אינני׃

성 경: [요18:2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거듭되는 베드로의 부인]

󰃨 사람들이 묻되…아니라 하니 – 이 장면은 18절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그 사이에 예수는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당하고 있었다. 복음서들 사이에는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는 당사자가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나타난다. 마가의 경우 첫번째와 두번째 질문자가 동일인으로 여종이며 세번째는 익명의 ‘어떤 사람’인 것으로 전해주고 있다(눅 22:54-62). 이에 비해 요한은 첫번째는 여종, 두번째는 ‘사람들’, 마지막 세번째는 베드로의 칼에 귀가 잘린 바 있던 대제사장의 종 ‘말고’와 인척 관계인 한 종에 의해 질문이 주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여러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들에 피워 놓은 불빛과 횃불에 의해 사람을 식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질문자의 성별이나 신분에 관해서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을수 있다. 다만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람이 저자 요한이었다면 그곳에 참관했던 그의 기록이 가장 정확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아무튼 중요한것은 베드로의 부인을 비교적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강도가 질문의 횟수가 거듭함에 따라 강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마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드로는 ‘맹세하고 부인’하기까지 했다(마 26:72). 모든 인류를 위해 무고한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의 모습과 자기 한 몸의 안전을 위해 거짓을 말하며 자신의 맹세까지(마 26:33, 35) 저버리는 베드로의 나약하고 추한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레게이 헤이스 에크 톤 둘론 투 아르키에레오스 슁게네스 온 후 아페콮센 페트로스 토 오티온 우크 에고 세 에이돈 엔 토 케포 멭 아우투

개역개정,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새번역,26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으로서, 대제사장의 종 가운데 한 사람이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동산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는데 그러시오?”

우리말성경,26 대제사장의 하인들 중 한 사람이 거기 있었는데 그 사람은 베드로가 귀를 벤 사람의 친척이었습니다. “당신이 동산에서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않았소?”

가톨릭성경,26 대사제의 종 가운데 하나로서, 베드로가 귀를 잘라 버린 자의 친척이 말하였다. “당신이 정원에서 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않았소?”

영어NIV,26 One of the high priest’s servants, a relative of the man whose ear Peter had cut off, challenged him, “Didn’t I see you with him in the olive grove?”

영어NASB,26 One of the slaves of the high priest, being a relative of the one whose ear Peter cut off, said, “Did I not see you in the garden with Him?”

영어MSG,26 One of the Chief Priest’s servants, a relative of the man whose ear Peter had cut off, said, “Didn’t I see you in the garden with him?”

영어NRSV,26 One of the slaves of the high priest, a relative of the man whose ear Peter had cut off, asked, “Did I not see you in the garden with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6 λεγει εις εκ των δουλων του αρχιερεως συγγενης ων ου απεκοψεν πετρος το ωτιον ουκ εγω σε ειδον εν τω κηπω μετ αυτου

라틴어Vulgate,26 dicit unus ex servis pontificis cognatus eius cuius abscidit Petrus auriculam nonne ego te vidi in horto cum illo

히브리어Modern,26 ויאמר איש מעבדי הכהן הגדול והוא מודע לאשר קצץ פטרוס את אזנו הלא ראיתיך עמו בתוך הגן׃

성 경: [요18:2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거듭되는 베드로의 부인]

󰃨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 – 요한만이 증언하고 있는 바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은 대제사장이 종 말고였다(10절). 세번째 질문자는 이 말고의 친척으로 예수가 체포되던 사건 현장에 있었다고 자처하고 나섰다. 누가에 의하면 이 세번째 질문은 두번째 질문이 끝난 후 1시간 뒤에 있었으며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에 따라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제시하고 있다(눅 22:59, 60). 아마 이 세번째 질문자는 베드로의 말투를 통해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짐작했을 것이다. 한편 그의 질문은 질문자 자신이 말고의 친척으로서 현장에서 목격했다는 것과 베드로가 갈릴리인이라는 사실이 그가 예수의 제자임을 증거한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동반함으로써 베드로를 압박해 왔다. 이제 베드로는 순순히 자기가 예수의 제자임을 고백하던가 아니면 더 강하게 부정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팔린 운 에르네사토페트로스 카이 유데오스 알렠토르 에포네센

개역개정,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새번역,27 베드로가 다시 부인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우리말성경,27 베드로는 다시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습니다.

가톨릭성경,27 베드로가 다시 아니라고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다.

영어NIV,27 Again Peter denied it, and at that moment a rooster began to crow.

영어NASB,27 Peter then denied it again, and immediately a rooster crowed.

영어MSG,27 Again, Peter denied it. Just then a rooster crowed.

영어NRSV,27 Again Peter denied it, and at that moment the cock crowed.

헬라어신약Stephanos,27 παλιν ουν ηρνησατο ο πετρος και ευθεως αλεκτωρ εφωνησεν

라틴어Vulgate,27 iterum ergo negavit Petrus et statim gallus cantavit

히브리어Modern,27 ויסף פטרוס לכחש ופתאם קרא התרנגול׃

성 경: [요18:2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베드로가 또 부인하다]

요한의 서술은 냉정하고 담담하다고 할 수 있을만큼 부가적인 설명없이 사실만을 간결하게 증언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마지막 질문에 직면하여 예수를 저주하기까지 하면서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마 26:74). 이러한 베드로의 부인 속에는 자기의 맹세를 단 몇 시간도 지켜내지 못하는 그의 나약한 모습과 불안이 상징적으로 잘 암시되어 있다.

󰃨 곧 닭이 울더라 –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는 베드로의 맹세와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의 예언 중에 유감스럽게도 실현된 것은 베드로의 맹세가 아니라 예수의 예언이었다(13:37, 38). 요한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베드로는 닭 울음 소리를 듣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 심히 통곡했다고 전한다(마 26:75;막 14:72;눅 22:62).

아구신 운 톤 예순 아포 투 카이아파 에이스 토 프라이토리온 엔 데 프로이 카이 아우토이 우크 에이셀돈 에이스 토 프라이토리온 히나 메 미안도신 알라 파고신 토 파스카

개역개정,28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새번역,28 사람들이 가야바의 집에서 총독 ㉡관저로 예수를 끌고 갔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그들은 몸을 더럽히지 않고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하여 관저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 ㉡그, ‘프라이토리온’

우리말성경,28 그때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가야바의 집에서 로마 총독의 관저로 끌고 갔습니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몸을 더럽히지 않고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해 관저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성경,28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야파의 저택에서 총독 관저로 끌고 갔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그들은 몸이 더러워져서 과월절 음식을 먹지 못할까 두려워,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영어NIV,28 Then the Jews led Jesus from Caiaphas to the palace of the Roman governor. By now it was early morning, and to avoid ceremonial uncleanness the Jews did not enter the palace; they wanted to be able to eat the Passover.

영어NASB,28 Then they led Jesus from Caiaphas into the Praetorium, and it was early; and they themselves did not enter into the Praetorium so that they would not be defiled, but might eat the Passover.

영어MSG,28 They led Jesus then from Caiaphas to the Roman governor’s palace. It was early morning. They themselves didn’t enter the palace because they didn’t want to be disqualified from eating the Passover.

영어NRSV,28 Then they took Jesus from Caiaphas to Pilate’s headquarters. It was early in the morning. They themselves did not enter the headquarters, so as to avoid ritual defilement and to be able to eat the Passover.

헬라어신약Stephanos,28 αγουσιν ουν τον ιησουν απο του καιαφα εις το πραιτωριον ην δε πρωια και αυτοι ουκ εισηλθον εις το πραιτωριον ινα μη μιανθωσιν αλλ ινα φαγωσιν το πασχα

라틴어Vulgate,28 adducunt ergo Iesum a Caiapha in praetorium erat autem mane et ipsi non introierunt in praetorium ut non contaminarentur sed manducarent pascha

히브리어Modern,28 ויוליכו את ישוע מבית קיפא אל בית המשפט ויהי בבקר השכם והמה לא נכנסו אל בית המשפט למען אשר לא יטמאו כי אם יאכלו את הפסח׃

성 경: [요18:2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가야바에게 관정으로 – 요한은 안나스가 예수를 가야바에게 보냈다는 이야기만 보도했을 뿐 산헤드린에서 예수가 질문받은 이야기는 전하지 않았다.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빌라도 앞에 서기 전에 유대 법정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 심문에서 예수는 유대법에 의하면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는 신성모독 죄를 뒤집어 쓴다(마 26:57-66;막 14:53-64;눅22:66-71). 그러나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은 사형을 집행할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빌라도의 법정에 예수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본문의 의미이다. 한편 본문에서 ‘관정(*, 프라이토리온)은 라틴어 ‘프라에토리움'(Praetorium)에 상응하는 말로서 본래 로마 군대의 영내에 있는 장군의 막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본문에서는 총독의 관저를 가리킨다. 유대지역을 다스리는 로마의 총독은 평상시에 가이사랴에 머물면서 총독의 직무를 수행했다(행 23:33).그러나 유월절과 같은 대축제일에 총독은 식민지 백성의 소요(騷擾)를 예방하거나 진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이때 총독이 머물던 관저의 위치에 대해 학자에 따라 헤롯 궁전이었다고 보는 견해(Benoit, Barrett)와 안토니아의 성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옳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 새벽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이'(*)는 로마의 시간법으로 제 4졍을 가리키는데 지금의 새벽 3-6시를 가리킨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예수를 빌라도의 관저에 데리고 왔다는 것은 산헤드린에서의 예수의 심문이 밤사이에 있었음을 말해 주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의 불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것과 같은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 밤에 심문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2) 심문이 있는 당일에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불법이었다. 전자는 중요한 사건의 심문을 낮에 시행해야한다는 규칙을 어긴 것이고 후자는 심문한 당일에는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불법이었다. 전자는 중요한 사건의 심문을 낮에 시행해야 한다는 규칙을 어긴 것이고 후자는 심문한 당일에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규정을 어긴 것이다. 한편 혹자는 본 구절속에는 세상에 대한 예수의 승리의 날이 동텄다는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Bultmann) ‘새벽’이란 표현은 시간의 경과를 알리기 위해 사용된 단어로 영적인 해석이 요구되지 않으므로 그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 예수를 관정으로 끌고간 유대인들은 예수만 넘겨주고 자기들은 관정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부정을 법함으로써 유월절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에 따른 규정이 아니라 랍비들이 정한규례였는데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이 규례를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행 10:28).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 본서에 의하면 예수를 빌라도의 법저에 세울 때까지 아직 유월절 잔치를 먹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이미 유월절 식사는 끝났고 대축제 일이 첫날이 시작되었다(마 26:17-30;막14:12-26;눅 22:7-23). 이러한 공관복음서와 본서의 시간적 차이에 대하여 혹자는 공관복음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하고(Keim, Strauss), 반면에 다른 학자는 본서가 정확하다고 하는 등(Lucke, Meyer) 견해가 서로 엇갈리고 있는 데 혹자는 이 차이들을 조화시켜 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런 시도를 하는 학자들은 본절의 ‘유월절 잔치’가 유월절 다음날부터 시작되어 절기 칠일 동안 계속 먹는 ‘식사’인 ‘차기가흐’Chagigah)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Lenski, Morris, Robertson). 특히 유대인들은, 슬프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먹는 니산월 14일의 양고기 식사 후 축제적 분위기에서 니산월 15일의 ‘차기가흐’를 반드시 먹었다. 로버트슨(Robertson)은 이 주장의 신빙성을 더 강화하기 위해 ‘파스카'(*, ‘뜻’)라는 단어에 대한 요한의 용법을 제시한다. 즉 요한이 ‘파스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식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축제’를 가리킨다는 것이며 절기 전체의 주간을 가리킨다는 것이다(39절;2:23). 이렇게 본다면 본문의 ‘유월절 잔치’는 유월절의 양고기 식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교절의 식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은 19:14에서 예수가 빌라도 앞에서 심문당하던 날이 ‘유월절의 예비일’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므로 본서와 공관복음서는 분명히 하루 정도의 차이가 난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13:3의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본절에는 유대인들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희극적 아이러니(Irony)가 묘사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무교절을 유월절로 표현했는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구약 시대에는 무교절과 유월절을 엄격히 구분하였으나 구약 말기에 이르러 점차 구분이 희미해졌다. 따라서 초기 사도 시대에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일컬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모든 율법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도 의례적인 규범을 지키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엨셀덴 운 호 필라토스 엨소 프로스 아우투스 카이 페신 티나 카테고리안 페레테 카타 투 안드로푸 투투

개역개정,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새번역,29 빌라도가 그들에게 나와서 “당신들은 이 사람을 무슨 일로 고발하는 거요?” 하고 물었다.

우리말성경,29 빌라도가 밖으로 나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이 사람을 무슨 일로 고소하려는 것이냐?”

가톨릭성경,29 그래서 빌라도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나와, “무슨 일로 저 사람을 고소하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영어NIV,29 So Pilate came out to them and asked, “What charges are you bringing against this man?”

영어NASB,29 Therefore Pilate went out to them and said, “What accusation do you bring against this Man?”

영어MSG,29 So Pilate came out to them and spoke. “What charge do you bring against this man?”

영어NRSV,29 So Pilate went out to them and said, “What accusation do you bring against this man?”

헬라어신약Stephanos,29 εξηλθεν ουν ο πιλατος προς αυτους και ειπεν τινα κατηγοριαν φερετε κατα του ανθρωπου τουτου

라틴어Vulgate,29 exivit ergo Pilatus ad eos foras et dixit quam accusationem adfertis adversus hominem hunc

히브리어Modern,29 ויצא פילטוס אליהם ויאמר על מה תאשימו את האיש הזה׃

성 경: [요18:2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 요한은 아무런 보충 설명 없이 빌라도를 등장시키는데 이는 본서의 독자들이 이미 그를 잘 알고 있음을 암시한다. 빌라도는 A.D.26-36년 까지 유대 지방의 총독을 맡았었다.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에 의하면 빌라도는 잔인하고 오만하며 쉽게 분노하고 특히 유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완고하고 의식적인 종교적 편견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런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종교적 규범을 인정하고 밖으로 나온 것은(28절) 다소 뜻밖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유대인들의 대절기였으며 따라서 민족주의와 강하게 결부된 그들의 종교적 감정은 언제라도 폭동으로 분출할 수 있었으므로 가능하면 그들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쉬어야 할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와 심문을 시작했다.

󰃨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 빌라도는 로마의 재판절차를 좇아 먼저 고발자에게 피고의 혐의 사실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아페크리데산 카이 에이판 아우토 에이 메 엔 후토스 카콘 포이온 우크 안 소이 파레도카멘 아우톤

개역개정,30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새번역,30 그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하였다. “이 사람이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님께 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말성경,30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이 범죄자가 아니라면 총독님께 넘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30 그들이 빌라도에게, “저자가 범죄인이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께 넘기지 않았을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영어NIV,30 “If he were not a criminal,” they replied, “we would not have handed him over to you.”

영어NASB,30 They answered and said to him, “If this Man were not an evildoer, we would not have delivered Him to you.”

영어MSG,30 They said, “If he hadn’t been doing something evil, do you think we’d be here bothering you?”

영어NRSV,30 They answered, “If this man were not a criminal, we would not have handed him over to you.”

헬라어신약Stephanos,30 απεκριθησαν και ειπον αυτω ει μη ην ουτος κακοποιος ουκ αν σοι παρεδωκαμε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30 responderunt et dixerunt ei si non esset hic malefactor non tibi tradidissemus eum

히브리어Modern,30 ויענו ויאמרו אליו לולא היה זה עשה רע כי עתה לא הסגרנהו אליך׃

성 경: [요18:3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행악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사본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대문자 사본과 소문자 사본은 ‘카코포이오스'(*)를, 나머지 대문자 사본과 후기 시리아 역본 및 콥탁 역본은 ‘코콘 포이온'(*),’코코포이온'(*)등으로 다양하게 기록했다. 어느 독법이 정확한지 결정지을 수 없으나 본절에서 ‘에이미'(*, ‘이다’)의 미완료 과거형이 사용되었으므로 명사형인 ‘카코포이오스’나 분사형인 ‘코콘 포이온’과 ‘코코포이온’이 적합하다. 중요한 것은 어느 형태를 취해도 본질적인 뜻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이 말은 문자적으로 법률 위반 여부에 관계없이 심성 자체가 악하며 인격이 바르지 못한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유대인들의 고소는 다분히 감정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범죄 사실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요한은 전하고 있지 않으나 공관복음서들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사형에 처함이 마땅하다고 결정한것은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혀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마 26:63-66;막 14:61-64;눅 22:66-71).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에 관한 것이었고 로마 법정은 식민지 국민의 종교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재판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것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로마 법정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이끌어 내기 위해 비종교적인 죄목으로 예수를 고발했지만 그것이 전혀 구체성이 없는 ‘행악자’라는 죄목이었다. 혹자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가리켜 ‘행악자’라고 고발하는 이 장면에서 ‘세상’과 계시’의 대졀을 발견한다(Bultmann). ‘세상’은 ‘계시’를 반대하고 거부한다.’계시’가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했으므로 그들은 계시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세상은 끝내 계시를 거부하거나 벗어날 수 없고 계시를 눌러 이길 수도 없다(19:30;20:1-17). 한편 고소자들은 예수가 ‘행악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즉 지속적으로 악을 행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에이미’의 미완료 과거형 ‘엔'(*)을 사용했다. 이 표현 속에는 예수가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반역음모를 꾀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에이펜 운 아우토이스 호 필라토스 라베테 아우톤 휘메이스 카이 카타 톤 노몬 휘몬 크리나테 아우톤 에이펜 아우토 호이 유다이오이 헤민 우크 엨세스틴 아포크테이나이 우데나

개역개정,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새번역,31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를 데리고 가서, 당신들의 법대로 재판하시오.” 유대 사람들이 “우리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우리말성경,31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이 사람을 데리고 가서 너희들의 법에 따라 재판하라.” 유대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

가톨릭성경,31 빌라도가 그들에게 “여러분이 데리고 가서 여러분의 법대로 재판하시오.” 하자, 유다인들이 “우리는 누구를 죽일 권한이 없소.”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31 Pilate said, “Take him yourselves and judge him by your own law.” “But we have no right to execute anyone,” the Jews objected.

영어NASB,31 So Pilate said to them, “Take Him yourselves, and judge Him according to your law.” The Jews said to him, “We are not permitted to put anyone to death,”

영어MSG,31 Pilate said, “You take him. Judge him by your law.” The Jews said, “We’re not allowed to kill anyone.”

영어NRSV,31 Pilate said to them, “Take him yourselves and judge him according to your law.” The Jews replied, “We are not permitted to put anyone to death.”

헬라어신약Stephanos,31 ειπεν ουν αυτοις ο πιλατος λαβετε αυτον υμεις και κατα τον νομον υμων κρινατε αυτον ειπον ουν αυτω οι ιουδαιοι ημιν ουκ εξεστιν αποκτειναι ουδενα

라틴어Vulgate,31 dixit ergo eis Pilatus accipite eum vos et secundum legem vestram iudicate eum dixerunt ergo ei Iudaei nobis non licet interficere quemquam

히브리어Modern,31 ויאמר אליהם פילטוס קחהו אתם עמכם ועשו משפטו כתורתכם ויאמרו אליו היהודים אין לנו רשיון להמית איש׃

성 경: [요18:3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 라도는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하여(30절) 좀더 구체적으로 따져 묻지도 않고 재판을 거부할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빌라도가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를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제기하는 소송이 로마 법정에서 재판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의 문제라고 여겼을 것이다. (2)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이미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음을 알았고 따라서 자기에게 재판을 하라는 것은 결국 자기들이 판결한 바를 추인해 달라는 것이므로 그런 무례한 행위에 대해 자기는 권세있는 자로서 결코 응할수 없다는 의사 표시일 것이다. (3) 빌라도는 본래 포악하고 거만한 자였으므로 총독으로서 사형 선고를 내릴수 있는 자기의 권위를 강하게 내보이고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의 무력함을 스스로 고백하게 하려는 계산된 정치적 발언을 하였을 것이다. (4) 때가 유대인의 명절이니만큼 그들에게 넘겨 주고자 했을 것이다. 빌라도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품으로써 좋지 않았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자 꾀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본 구절은 네번째의 추정이 가장 타당하다.

히나 호 로고스 투 예수 플레로데 혼 에이펜 세마이논 포이오 다나토 에멜렌 아포드네스케인

개역개정,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새번역,32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인가를 암시하여 주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우리말성경,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당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신 그 말씀을 이루려는 것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32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며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 된 것이다.

영어NIV,32 This happened so that the words Jesus had spoken indicating the kind of death he was going to die would be fulfilled.

영어NASB,32 to fulfill the word of Jesus which He spoke, signifying by what kind of death He was about to die.

영어MSG,32 (This would confirm Jesus’ word indicating the way he would die.)

영어NRSV,32 (This was to fulfill what Jesus had said when he indicated the kind of death he was to die.)

헬라어신약Stephanos,32 ινα ο λογος του ιησου πληρωθη ον ειπεν σημαινων ποιω θανατω ημελλεν αποθνησκειν

라틴어Vulgate,32 ut sermo Iesu impleretur quem dixit significans qua esset morte moriturus

히브리어Modern,32 למלאת דבר ישוע אשר דבר לרמז אי זה מות עתיד הוא למות׃

성 경: [요18:3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예수께서…어떠한 죽음으로 –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일 것을 결정하였고 이제 로마법정을 통해그 결정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만약 예수께서 로마법정에 의해 사형 집행을 선고 받는다면 그것은 곧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며 예수께서 이미 예고하신 바였다(3:14;12:32, 33). 마태의 기록에는 이것이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마 20:19).

에이셀덴 운 팔린 에이스 토 프라이토리온 호 필라토스 카이 에포네센 톤 예순 카이 에이펜 아우토 쉬 에이 호 바실류스 톤 유다이온

개역개정,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새번역,33 빌라도가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를 불러내서 물었다.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 / ㉢그, ‘프라이토리온’

우리말성경,33 그러자 빌라도는 다시 관저로 들어가 예수를 불러다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 사람들의 왕이냐?”

가톨릭성경,33 그리하여 빌라도가 다시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었다.

영어NIV,33 Pilate then went back inside the palace, summoned Jesus and asked him, “Are you the king of the Jews?”

영어NASB,33 Therefore Pilate entered again into the Praetorium, and summoned Jesus and said to Him, “Are You the King of the Jews?”

영어MSG,33 Pilate went back into the palace and called for Jesus. He said, “Are you the ‘King of the Jews’?”

영어NRSV,33 Then Pilate entered the headquarters again, summoned Jesus, and asked him, “Are you the King of the Jews?”

헬라어신약Stephanos,33 εισηλθεν ουν εις το πραιτωριον παλιν ο πιλατος και εφωνησεν τον ιησουν και ειπεν αυτω συ ει ο βασιλευς των ιουδαιων

라틴어Vulgate,33 introivit ergo iterum in praetorium Pilatus et vocavit Iesum et dixit ei tu es rex Iudaeorum

히브리어Modern,33 וישב פילטוס אל בית המשפט ויקרא אל ישוע ויאמר אליו האתה הוא מלך היהודים׃

성 경: [요18:3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다시 관정에 들어가 –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종교적인 규범을 준수하기 위해 관정에 들어가지 않고 예수만 인도한 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빌라도가 왔다 갔다 하며(38절) 심문을 해야 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본서 기록에 따르면 빌라도의 이 질문은 다소 갑작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끌고와 고발하기까지의 과정에는 이런 질문을 유발시킬 수 있는 어떤 암시도 없었기 때문이다(28-30절). 그런데 공관복음서에는 이점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주어져 있다. 눅 23:2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예수를 다음 세 가지 죄목으로 고발하였다. (1) 예수가 유대인을 미혹하는 행동을 한다.(2) 가이사 즉 로마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지시킨다. (3) 자기를 가리켜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언한다. 본문에서 빌라도는 그 가운데 정치적 문제와 관련된 것에 대해 심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번째와 두번째 고소 내용은 빌라도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첫번째 고소 내용은 유대인들 내부 문제로서 그들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두번째 것은 빌리도가 이미 알고 있는바, 로마 황제에게 세금 바칠 것을 강요하는 총독에 대해 계속해서 반항해 온 것이 바로 완고하고 저항적인 유대인 자신들이었으므로 이제 그들이 자기들의 동족인 유대인 자신들이었으므로 이제 그들이 자기들의 동족인 예수를 가리켜 세금 내는 것을 금하는 자라고 고발하는 것이 신뢰할 수 없는 조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절의 질문은 세번째 고소내용인 정치적인 의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마 빌라도가 예수가 추구하며 가르쳐 왔던 영적 왕에 대한 의미를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6:15). 결국 빌라도의 질문의 요지는 예수가 무력으로 유대를 로마로 부터 해방시킬 왕이냐는 것이다.

아페크리데 예수스 아포 세아우투 쉬 투토 레게이스 에 알로이에이폰 소이 페리 에무

개역개정,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새번역,3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이 하는 그 말은 당신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나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말하여 준 것이오?”

우리말성경,34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하는 그 말은 네 생각에서 나온 말이냐? 아니면 나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말해 준 것이냐?”

가톨릭성경,34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하고 되물으셨다.

영어NIV,34 “Is that your own idea,” Jesus asked, “or did others talk to you about me?”

영어NASB,34 Jesus answered, “Are you saying this on your own initiative, or did others tell you about Me?”

영어MSG,34 Jesus answered, “Are you saying this on your own, or did others tell you this about me?”

영어NRSV,34 Jesus answered, “Do you ask this on your own, or did others tell you about me?”

헬라어신약Stephanos,34 απεκριθη αυτω ο ιησους αφ εαυτου συ τουτο λεγεις η αλλοι σοι ειπον περι εμου

라틴어Vulgate,34 et respondit Iesus a temet ipso hoc dicis an alii tibi dixerunt de me

히브리어Modern,34 ויען אתו ישוע המלבך תדבר זאת או אחרים הגידו לך עלי׃

성 경: [요18:3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네가 스스로…다른 사람들이 –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가리켜 ‘자칭 왕 그리스도'(눅 23:2)라고 하는 자라고 고소했을때 그들은 빌라도가 그 고소의 내용을 정치적인 의미로 이해하기를 바랬음에 틀림없다. 만일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고소자의 의도처럼 정치적 선동자라는 측면자에서 빌라도가 이해했다면 예수의 답변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으며 반면 진실한 일부 유대인들의 경우처럼 이 말이 대망의 메시야를 가리키는 종교적 의미로 빌라도에게 이해되었다면 예수는 긍정의 답변을 생각하셨을것이다. 그런데 35절로 미루어 볼 때 빌라도는 단지 유대인 고소자들의 말을 듣고 정치적 의미에서 예수께 물은 것 같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네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하라’는 정도의 의미로 하신 말씀이라하겠다.

아페크리데 호 필라토스 메티 에고 유다이오스 에이미 토 에드노스 토 손 카이 호이 아르키에레이스 파레도칸 세 에모이 티 에포이에사스

개역개정,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새번역,35 빌라도가 말하였다. “내가 유대 사람이란 말이오? 당신의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겨주었소. 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

우리말성경,35 빌라도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유대 사람이냐? 네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다. 네가 저지른 일이 대체 무엇이냐?”

가톨릭성경,35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하고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영어NIV,35 “Am I a Jew?” Pilate replied. “It was your people and your chief priests who handed you over to me. What is it you have done?”

영어NASB,35 Pilate answered, “I am not a Jew, am I? Your own nation and the chief priests delivered You to me; what have You done?”

영어MSG,35 Pilate said, “Do I look like a Jew? Your people and your high priests turned you over to me. What did you do?”

영어NRSV,35 Pilate replied, “I am not a Jew, am I? Your own nation and the chief priests have handed you over to me. What have you done?”

헬라어신약Stephanos,35 απεκριθη ο πιλατος μητι εγω ιουδαιος ειμι το εθνος το σον και οι αρχιερεις παρεδωκαν σε εμοι τι εποιησας

라틴어Vulgate,35 respondit Pilatus numquid ego Iudaeus sum gens tua et pontifices tradiderunt te mihi quid fecisti

히브리어Modern,35 ויען פילטוס האף אנכי יהודי הלא עמך וראשי הכהנים הסגירוך אלי מה עשית׃

성 경: [요18:3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내가 유대인이냐…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 예수의 질문에 대한 빌라도의 대답은 자신의 개인적 호기심에 의한 심문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오직 빌라도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발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행위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빌라도는 총독으로서 유대인 중 누군가가 자칭 이스라엘의 왕이라하며 세력을 규합하여 반로마적 투쟁을 주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 없었고 또한 체포되어 끌려온 예수의 모습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한다며 그를 고발했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보다 구체적인 질문으로 예수에 대해 알고자 했다.

󰃨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 이 표현 속에는 한가지 분명히 확인되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 재판이 이방인 총독에 의해 제기된 것이라는점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대제사장이 주도적 역할을 했음도 강조되어야 한다. 이것은예수의 죽음에 대한 궁극적 책임의 소재와 결부된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 의해 떠밀려 재판을 진행하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재판을 이끌어간 세력은 대제사장들로 대변되는 유대인들이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로 대변되는 유대인들이다. 빌라도는 직무상 재판에 관련된 책임을 져야겠지만 유대인들은 사건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아페크리데 예수스 헤 바실레이아 헤 에메 우크 에스틴 에크 투 코스무 투투 에이 에크 투 코스무 투투 엔 헤 바실레이아 헤 에메 호이 휘페레타이 호이 에모이 에고니존토 안 히나 메 파라도도 토이스 유다이오이스 뉜 데 헤 바실레이아 헤 에메 우크 에스틴 엔튜덴

개역개정,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새번역,3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우리말성경,36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종들이 싸워 유대 사람들이 나를 체포하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지금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

가톨릭성경,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였으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영어NIV,36 Jesus said, “My kingdom is not of this world. If it were, my servants would fight to prevent my arrest by the Jews. But now my kingdom is from another place.”

영어NASB,36 Jesus answered, “My kingdom is not of this world. If My kingdom were of this world, then My servants would be fighting so that I would not be handed over to the Jews; but as it is, My kingdom is not of this realm.”

영어MSG,36 “My kingdom,” said Jesus, “doesn’t consist of what you see around you. If it did, my followers would fight so that I wouldn’t be handed over to the Jews. But I’m not that kind of king, not the world’s kind of king.”

영어NRSV,36 Jesus answered, “My kingdom is not from this world. If my kingdom were from this world, my followers would be fighting to keep me from being handed over to the Jews. But as it is, my kingdom is not from here.”

헬라어신약Stephanos,36 απεκριθη ο ιησους η βασιλεια η εμη ουκ εστιν εκ του κοσμου τουτου ει εκ του κοσμου τουτου ην η βασιλεια η εμη οι υπηρεται αν οι εμοι ηγωνιζοντο ινα μη παραδοθω τοις ιουδαιοις νυν δε η βασιλεια η εμη ουκ εστιν εντευθεν

라틴어Vulgate,36 respondit Iesus regnum meum non est de mundo hoc si ex hoc mundo esset regnum meum ministri mei decertarent ut non traderer Iudaeis nunc autem meum regnum non est hinc

히브리어Modern,36 ויען ישוע מלכותי איננה מן העולם הזה אם היתה מלכותי מן העולם הזה כי אז נלחמו לי משרתי לבלתי המסר ביד היהודים ועתה מלכותי איננה מפה׃

성 경: [요18:3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 예수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그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한다. 결국 예수께서 하신 일들은 그의 나라를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가 한 일을 설명하는 것보다 그의 나라의 정체를 설명하는 것이 빌라도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내 나라’ 즉 소유자가 예수인 그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왕인 나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지키고자 애쓰며 권력으로만 유지되고 힘이 질서의 원리인 그런 나라는 아니다. 예수는 그 나라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빌라도에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아마 설명한다 하더라도 빌라도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그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기본적인 사실만을 말해줌으로써 고소권에 관한 빌라도의 일차적 의혹을 해소시켜 주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 내 종들이 싸워 – 예수께서는 자기의 나라가 세상에 속하니 않는 것임을 설명하는데 있어 단 하나의 단서를 제시한다. 그것은 싸움에 의해 획득되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속한 나라의 권력이란 예외없이 싸움에 의해 얻어지고 싸움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나 그의 추종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의 나라가 세상의 나라와는 전혀 다른 질서와 원리에 의해 세원진 것임을 증명해 준다. 그 나라는 사람이 통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나라이며(계 11:15) 힘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의 원리로 세워지는 나라이다.

󰃨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 본문에서 예수는 자기가 로마 정부에 넘겨진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넘겨졌음을 말함으로써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는데 유대인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에이펜 운 아우토 호 필라토스 우쿤 바실류스 에이 쉬 아페크리데 호 예수스 쉬 레게이스 호티 바실류스 에이미 에고 에이스 투토 게겐네마이 카이 에이스 투토 엘렐뤼다 에이스 톤 코스몬 히나 마르튀레소 테 알레데이아 파스 호 온 에크 테스 알레데이아스 아쿠에이 무 테스 포네스

개역개정,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새번역,37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우리말성경,37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왕이란 말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말대로 나는 왕이다. 나는 진리를 증거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거하려고 이 세상에 왔다. 누구든지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말을 듣는다.”

가톨릭성경,37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영어NIV,37 “You are a king, then!” said Pilate. Jesus answered, “You are right in saying I am a king. In fact, for this reason I was born, and for this I came into the world, to testify to the truth. Everyone on the side of truth listens to me.”

영어NASB,37 Therefore Pilate said to Him, “So You are a king?” Jesus answered, ” You say correctly that I am a king. For this I have been born, and for this I have come into the world, to testify to the truth. Everyone who is of the truth hears My voice.”

영어MSG,37 Then Pilate said, “So, are you a king or not?” Jesus answered, “You tell me. Because I am King, I was born and entered the world so that I could witness to the truth. Everyone who cares for truth, who has any feeling for the truth, recognizes my voice.”

영어NRSV,37 Pilate asked him, “So you are a king?” Jesus answered, “You say that I am a king. For this I was born, and for this I came into the world, to testify to the truth. Everyone who belongs to the truth listens to my voice.”

헬라어신약Stephanos,37 ειπεν ουν αυτω ο πιλατος ουκουν βασιλευς ει συ απεκριθη ο ιησους συ λεγεις οτι βασιλευς ειμι εγω εγω εις τουτο γεγεννημαι και εις τουτο εληλυθα εις τον κοσμον ινα μαρτυρησω τη αληθεια πας ο ων εκ της αληθειας ακουει μου της φωνης

라틴어Vulgate,37 dixit itaque ei Pilatus ergo rex es tu respondit Iesus tu dicis quia rex sum ego ego in hoc natus sum et ad hoc veni in mundum ut testimonium perhibeam veritati omnis qui est ex veritate audit meam vocem

히브리어Modern,37 ויאמר אליו פילטוס אם כן אפוא מלך אתה ויען ישוע אתה אמרת כי מלך אנכי לזה נולדתי ולזה באתי בעולם להעיד לאמת כל אשר הוא מן האמת ישמע בקולי׃

성 경: [요18:3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 ‘그러면’ 이라는 표현은 ‘네가 왕이 아니냐’는 빌라도의 질문이 예수의 답변(36절)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해준다. 36절에서 예수의 답변 가운데 ‘내 나라’라는 진술은 그것이 비록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예수가 왕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빌라도의질문은 긍정의 대답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그럴 경우 공동번역이나 RSV의 번역처럼 “네가 왕이냐?” (so you are a king?)로 번역하는 것이 의미상 더 타당할 것이다. 혹자는 이 빌라도의 질문이 ‘그래도 그대가 왕이라는 말인가?’의 의미로 해석하여 주장하지만(Morris) 그보다가 진지한 자세로 질문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내가 왕이니라 – 비로소 예수의 긍정적인 대답이 주어지고 있다. 이 대답은 ‘네 말이 옳도다’로 되어 있는 마가의 기록보다(막 15:2) 더 분명한 긍정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가 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육적으로 말하자면 왕가인 다윗의 가문에서 출생했고(마 1:1;롬 1:3), 영적으로 말하자면 성삼위의 제2격인 하나님의 아들이다(롬1:4). 그래서 시편의 저자들은 하나님을 ‘왕’이라고 표현했다(시 47, 48편). 그리고사사 가드온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곧 택함을 받은 백성의 ‘왕’이라고 고백했다(삿8:23). 이처럼 하나님은 왕이시기에 성자 예수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 왕이 되신다(고전 15:25).

󰃨 났으며…왔나니 – ‘났으며’는 예수가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참된 인성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하는 이단처럼 인간의 몸을 입은 것처럼 보였을 뿐 실제로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라 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완전한 인간이었다. 한편 ‘왔나니’라는 표현은 그의 왕국이 이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본래적 존재도 이 세상에 기원을 두고 있지 않음을 말해준다. 예수는 자신의 기원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16:28). 이것은 예수가 신적인 본성을 지니고 계신 존재임을 의미한다. 참 인간이면서 참 하나님이신 예수의 본성은 신비 그 자체이다.

󰃨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 본 구절 바로 앞에 진술된 ‘이를 위하여'(*, 에이스 투토)는 예수가 본구절을 강조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예수는 그 자신이하나님의 말씀이며(1:1-3), 진리이다(14:6). 그 자신이 진리인 예수는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을 생명에로 인도하는 것이었다(14:6).

󰃨 진리에 속한 자는…듣느니라 – 진리에 속한 자만이 진리이신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본 구절은 다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께 올 수 없다는 사실(3:27;6:44, 45, 65)과 본절은 잘 조화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정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 본 구절은 영적 진리에 무지한 빌라도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예수는 진리의 왕으로 진리를 말하고있으므로 만일 빌라도가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면 예수의 말씀을 이해했겠지만 그는 결코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니었기에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레게이 아우토 호 필라토스 티 에스틴 알레데이아 카이 투토 에이폰 팔린 엨셀덴 프로스 투스 유다이우스 카이 레게이 아우토이스 에고 우데미안 휴리스코 엔 아우토 아이티안

개역개정,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새번역,38 빌라도가 예수께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 사람들에게로 나아와서 말하였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우리말성경,38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 사람들에게 나가 말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

가톨릭성경,38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진리가 무엇이오?”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다인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영어NIV,38 “What is truth?” Pilate asked. With this he went out again to the Jews and said, “I find no basis for a charge against him.

영어NASB,38 Pilate said to Him, “What is truth?” And when he had said this, he went out again to the Jews and said to them, ” I find no guilt in Him.

영어MSG,38 Pilate said, “What is truth?” Then he went back out to the Jews and told them, “I find nothing wrong in this man.

영어NRSV,38 Pilate asked him, “What is truth?” After he had said this, he went out to the Jews again and told them, “I find no case against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8 λεγει αυτω ο πιλατος τι εστιν αληθεια και τουτο ειπων παλιν εξηλθεν προς τους ιουδαιους και λεγει αυτοις εγω ουδεμιαν αιτιαν ευρισκω εν αυτω

라틴어Vulgate,38 dicit ei Pilatus quid est veritas et cum hoc dixisset iterum exivit ad Iudaeos et dicit eis ego nullam invenio in eo causam

히브리어Modern,38 ויאמר אליו פילטוס מה היא האמת ואחרי דברו זאת יצא שנית אל היהודים ויאמר אליהם אני לא מצאתי בו כל עון׃

성 경: [요18:3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소문]

󰃨 진리가 무엇이냐 – 이 질문은 다음 몇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너같은 자가 어찌 진리를 알겠느냐? (2)’당신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에 대해서 나는 관심이 없다.’ 본 구절은 세상 사람들 특히 정치가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하찮은 회의주의(Scep-ticism)에서 비롯된 질문이다(Godet). 그들은 이상주의적이고 사변적인 문제에 대해 일반적으로 무관심하다.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에게 질문을 던진 후 예수의 대답을 듣기 전에 곧바로 밖으로 나간것으로 보아 (2)해석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 빌라도는 예수에 대하여 어떤 적대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의사도 갖고 있지 않았다.

󰃨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 빌라도는 다시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바깥으로 나가(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28, 33절 주석을 참조하라) 예수를 심문한 후 얻은 자신의 판단을 전했다. 그 결론은 예수가 사법적 처벌을 받을 아무런 혐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빌라도는 나름대로 공정한 재판장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비록 그는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의사는 없었지만 적어도 예수가 처벌을 받아야 할만한 행위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의도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그것을 사실대로 유대인들에게 전했다.

에스틴 데 쉬네데이아 휘민 히나 헤나 아폴뤼소 휘민 엔 토 파스카 불레스데 운 아폴뤼소 휘민 톤 바실레아 톤 유다이온

개역개정,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새번역,39 유월절에는 내가 여러분에게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소. 그러니 유대 사람들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소?”

우리말성경,39 유월절에는 내가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는데 너희들을 위해 ‘유대 사람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가톨릭성경,39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내가 과월절에 죄수 하나를 풀어 주는 관습이 있소. 내가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원하오?”

영어NIV,39 But it is your custom for me to release to you one prisoner at the time of the Passover. Do you want me to release ‘the king of the Jews’?”

영어NASB,39 “But you have a custom that I release someone for you at the Passover; do you wish then that I release for you the King of the Jews?”

영어MSG,39 It’s your custom that I pardon one prisoner at Passover. Do you want me to pardon the ‘King of the Jews’?”

영어NRSV,39 But you have a custom that I release someone for you at the Passover. Do you want me to release for you the King of the Jews?”

헬라어신약Stephanos,39 εστιν δε συνηθεια υμιν ινα ενα υμιν απολυσω εν τω πασχα βουλεσθε ουν υμιν απολυσω τον βασιλεα των ιουδαιων

라틴어Vulgate,39 est autem consuetudo vobis ut unum dimittam vobis in pascha vultis ergo dimittam vobis regem Iudaeorum

히브리어Modern,39 הן מנהג הוא בכם כי אשלח לכם איש אחד חפשי בפסח היש את נפשכם כי אשלח לכם את מלך היהודים׃

성 경: [요18:3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유월절이면…전례 – 빌라도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심문하기는 하였지만 재판장으로서의 자신의 직무를 유기(遺棄)하였다. 그는 자신이 말한 바 예수의 무죄를 확인하였으므로(38절) 유대인들의 동의를 물을 것도 없이 예수를 석방했어야 했다. 그러나빌라도는 그렇게 하지못하고 유대인들의 동의를 얻고자 함으로써 우유 부단한 그의 성격을 노출시켰다. 아마 그는 자기가 관할하고 있는 지역의 지도자들이 고소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자기의 판단대로 밀고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빌라도는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석방시켜 주는 전례를 따라 예수를 풀어주고자 했다. 한 사람을 석방시켜 달라고 요청한 자들이 유대인들로 기록되어 있다(막15:8). 요한은 자세한 대화를 기록하기보다는 빌라도의 말에 초점을 맞추었으므로 유대인들의 요청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석방시켜주는 관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쉬나의 암시외에 자료의 불충분으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예수 당시에 그런 관습이 적용되고 있었던 사실만큼은 확실하다고 여겨진다. 아마 그 전례는 로마 통치자들이 유대인들에 대한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유화(有和)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 유대인의 왕을…원하느냐 – 빌라도는 예수를 가리켜 유대인의 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혹자는 빌라도가 이명칭을 사용한 것에 대해 그가 예수를 위해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L. Morris). 그러나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예수를 고발한 유대인들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다고 볼수도있다. 따라서 굳이 표현으로써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자 한 것 같지는 않다. 아마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고소했던 내용 중 하나인 ‘유대인의 왕’이란 표현을 단순히 반복한 것 같다.

에크라우가산 운 팔린 레곤테스 메 투톤 알라 톤 바랍반 엔 데 호 바랍바스 레스테스

개역개정,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새번역,40 그들은 다시 큰 소리로 “그 사람이 아니오.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하고 외쳤다. 바라바는 강도였다.

우리말성경,40 그러자 그들이 다시 소리쳤습니다. “그 사람이 아닙니다. 바라바를 놓아주십시오.” 바라바는 강도였습니다.

가톨릭성경,40 그러자 그들이 다시 “그 사람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하고 외쳤다. 바라빠는 강도였다.

영어NIV,40 They shouted back, “No, not him! Give us Barabbas!” Now Barabbas had taken part in a rebellion.

영어NASB,40 So they cried out again, saying, ” Not this Man, but Barabbas.” Now Barabbas was a robber.

영어MSG,40 They shouted back, “Not this one, but Barabbas!” Barabbas was a Jewish freedom fighter.

영어NRSV,40 They shouted in reply, “Not this man, but Barabbas!” Now Barabbas was a bandit.

헬라어신약Stephanos,40 εκραυγασαν ουν παλιν παντες λεγοντες μη τουτον αλλα τον βαραββαν ην δε ο βαραββας ληστης

라틴어Vulgate,40 clamaverunt rursum omnes dicentes non hunc sed Barabban erat autem Barabbas latro

히브리어Modern,40 ויוסיפו ויצעקו לאמר לא את האיש הזה אלא את בר אבא ובר אבא היה מרצח׃

성 경: [요18:4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바라바라 하니…강도러라 – ‘강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스테스'(*)는 당시에 ‘게릴라’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C.K. Barrett). 바라바라는 반로마적 혁명 운동을 주도했던 정치법이었을 것이다(막 15:7;눅 23:19). 유대인들은 자가당착적(自家撞着的)인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 왕 즉 정치법으로 고소한 반면 진짜 정치범은 놓아 달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전혀 일관성도 없이 다만 예수에 대한 적개심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메시야를 죽이려고 혈안(血眼)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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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위기에 처했을 때 그리스도인의 삶

요한복음 18:1-40

위기에 처했을 때 그리스도인의 삶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요 18:37상)

본문은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체포당하시고,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는 사건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 속에서 예수님의 행하심과 베드로의 행동이 대조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빌라도와도 대조가 됩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진리에 속한 사람이 되어 진리의 왕 되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1. 예수님의 시인, 베드로의 부인(요 18:1-18, 25-27)

예수님은 성전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이 동산은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자주 가셔서 기도하셨고 제자들도 아는 장소였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도 이곳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후면 가룟 유다가 로마의 군대를 데리고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올 것을 아셨습니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그 자리를 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도 그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이 때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로부터 얻은 아래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위축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앞으로 나가서 그들을 향해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당하게 “내가 그니라(I am He).”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의 영적인 권세에 압도되어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재차 물으셨습니다. 이에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자, 다시 “내가 그니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안위보다 제자들을 안전하게 보내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고,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크리스천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당당하게 어떤 환경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신자요, 대학마을교회 성도라는 신분을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발적으로 해야 합니다. 교회도 누가 보든 안보든 자발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마치 봄에 사람이 억지로 짜지 않아도 수액을 내뿜는 지리산의 고로쇠나무처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역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자신보다 타인에 대한 배려를 앞세워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위급한 상황에서 구심점이 자기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자식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을 구하려고 하기보다 본능적으로 자식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성숙한다는 것은 아기자기에서 다른 사람을 먼저 보살피고 사랑하고 섬겨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이에 칼을 가지고 있던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그 종의 이름은 말고였습니다. 그가 왜 말고의 귀를 잘랐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목을 치려다가 무서워서 귀를 쳤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베드로의 인간성과 의리와 용기는 대단합니다. 베드로의 당돌한 행동으로 순식간에 피비린내나는 싸움이 벌어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 18:11).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눅 22:5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어루만져 주심으로 낫게 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칼은 칼집에 꽂고 잔을 마셔야 됩니다. 칼은 혈기와 감정으로 이는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반면에 잔은 십자가의 잔, 고난의 잔으로 하나님의 역사방법입니다. 칼은 멸망의 원인이라면 잔은 승리의 원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잔보다 칼을 듭니다. 이는 칼은 단번에 효과가 나타나지만 잔은 자기가 깨지는 아픔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혈기와 끓어오르는 감정의 칼을 꽂고 고난의 잔, 인내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우리는 권위적인 칼과 자존심의 칼을 꽂고 섬김과 기도의 잔, 온유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우리가 잔을 마실 때 고통이 따르지만, 그 후에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습니다. 가야바는 교활하여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다른 제자는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과 아는 관계이므로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서 서성거렸습니다. 이를 안 요한은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집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이때에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I am not).”(요 18:17하)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는 부인하고 군중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밤이 깊어 추워지자 베드로는 아랫사람들이 피워놓은 모닥불가로 다가가 눈치를 살피며 불을 쬐었습니다.

사람들이 조마조마하며 하속들 곁에서 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에게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단호하게 부인했습니다(요 18:25). 그런데 바로 그곳에 베드로가 귀를 잘랐던 말고의 친척이 있었습니다. 그가 베드로를 알아보고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다그쳤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또 다시 부인했습니다. 그는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막 14:71).

이 때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에 예수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눅 22:61). 이 예수님의 눈길은 원망의 눈길이 아니었습니다. 이 눈길은 사랑과 자비의 눈길, 연민과 슬픔의 눈길, 용서와 이해의 눈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길과 마주치는 순간에 그의 심령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 온 몸을 쥐어짜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베드로가 자신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을 더 신뢰하고 의지했습니다. 그는 육체의 팔을 의지했습니다. 그리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하셨지만 깨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아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있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성실을 믿고 의지할 때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깨어 늘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눅 11:4하). 그리고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고 했습니다(고전 10:12).

둘째는 그가 엉거주춤한 상태로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의 요건 중 하나는 아주 가까이에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선을 긋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사단은 항상 어정쩡한 사람에게 접근합니다. 확신 있게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감히 접근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길에서 중간은 없습니다. 의의 종이 아니면 불의의 종이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은 없습니다. 희면 희고 검으면 검지, 회색 신앙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폭적으로, 아주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셋째는 그가 고난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고난 받는 것을 보자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 때만큼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막 8:38).

그가 예수님을 부끄러워했던 것은 십자가의 비밀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23). 영광과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후에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게 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벧전 4:13상). 그리고 그는 거꾸로 십자가를 지고 순교했다고 합니다.

2. 진리의 왕 예수님, 세상의 통치자 빌라도(요 18:19-40)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해 심문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제자양성과 복음전파였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말씀을 전파하시되 드러내놓고 회당과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요 18:20)

이단들의 특징은 은밀히 자기들끼리만 가르치고 전수합니다. 그들이 은밀히 하는 것은 자기들이 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밀히 행하는 자들은 어둠의 자식들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화장실만 빼놓고 모두 열려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열려 있고, 가정이 열려 있고, 교회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열린사회는 결코 부패하지 않습니다. 자녀들과 함께 TV를 보는 열린 가정은 타락하지 않습니다. 자기 방에서 혼자 은밀히 숨어서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열린 가정, 열린 교회, 열린사회, 무엇보다도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열린 마음은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길 가실 때나 식사하실 때나 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새벽부터 밤 이 늦도록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생애를 배우고 디모데에게 이렇게 전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바울은 밀레도 고별 메시지에서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20)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말씀을 전파하도록 함에 있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불법 집회를 통해 예수님을 사형 판결했습니다. 그런 후에 그들은 예수를 유대 총독의 관정으로 끌고 갔지만 유월절 잔치를 먹기 위해 관정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의 집에 갔다 오면 불결하다 하여 옷을 빨곤 했습니다. 그들은 겉은 깨끗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속은 더럽고 추했습니다.

빌라도는 이런 사람들을 볼 때 기분이 나빠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였느냐며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긴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집행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손에 넘겨 채찍질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막 10:33-34).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해 심문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 예수님은 빌라도가 스스로 한 말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하여 네가 한 말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가 사무적이고 객관적인 질문보다 인격적으로 예수님께 묻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남들이 예수님이 왕이라고 하니까, 덩달아서 물어보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객관적이고 지적인 탐구나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인격적으로 믿어야 할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여전히 사무적이고 객관적으로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예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는 총칼로 다스리는 눈에 보이는 정치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는 영적인 나라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여전히 세상 나라의 정치가로 권력과 돈과 명예만을 찾고 추구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빌라도는 예수님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요 18:37상). 예수님이 왕이심을 밝히셨습니다(I am a king).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 18:37하) 예수님은 만민을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한 나라를 건설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영적인 나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적은 로마제국이 아니라 공중권세 잡은 사탄입니다. 아담의 범죄이후 사탄은 인류 위에 왕노릇해 왔습니다. 모든 인생들은 사탄의 통치아래 있어 왔습니다. 이로 인해 세상은 음란과 폭력, 거짓과 위선, 미움과 시기심, 절망과 두려움, 슬픔과 분노의 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짓눌려 고통하는 병든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구원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에 진리를 증언하시기 위해 오신 진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진리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 죄를 위해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왕이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적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희생의 왕, 사랑의 왕, 섬김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최대 원수인 죽음을 파하시고 부활하셔서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왕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항상 진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탄은 죄와 사망의 법으로 다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다스리십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다스리는 곳은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가득합니다. 부활의 산 소망이 넘쳐납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지배하는 나라는 장소나 환경이나 지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지배하는 나라는 모든 환경을 초월해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진리의 왕 되심을 증언하는 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힘이 곧 진리였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해도 힘이 없고 소수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직 힘만이 최고였습니다.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싸워서 이기면 정의요, 진리요 패배하면 불의요 역적이었습니다. 이처럼 세상 역사는 승자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빌라도에게 예수님께서 진리의 왕이심을 증언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는 빌라도에게 비친 예수님은 초라하게만 보였습니다. 이는 그가 진리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국 진리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리의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쳐 심판과 멸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잔을 마시기 때문에 진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다스리시는 진리의 왕이십니다. 우리가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돈과 권력과 쾌락의 거짓 왕들로부터 지배받는 삶에서 진리의 왕 예수님을 모시고 진리의 인도함을 받는 삶, 진리의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요한복음 18장 1-40절 잔을 받으신 예수님

잔을 받으신 예수님

요한복음 18장 1-40

예수님과 제자들은 감람산에 도착하셨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이곳에서 겟세마네의 기도를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요한은 그 내용을 기록하지 않고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잡히신 것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군병들을 끌고 와서 예수님을 넘겼고 이에 분노한 베드로는 칼을 빼들어 ‘말고’라고 하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고쳐주시면서 자신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잡히셨습니다. 먼저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의 뜰에 끌려가 심문을 당하시고 후에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이런 와중에 예수님의 예언대로 베드로의 부인이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끌려가 심문을 당하셨는데 이 때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잔을 마시게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1절부터 4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가셨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들러 기도하시던 곳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가룟유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군병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들은 등과 횃불 뿐 아니라 무기를 들고 왔던 것입니다. 이 일을 당하신 주님은 이일에 대해 미리 알고 계셨다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당할 일을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에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했고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이 너희가 찾는 나사렛 예수라고 했을 때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이 뒤로 물러나서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과 잠시 동일시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내가 그니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면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면서 하신 말씀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말이었는데 본문에 “내가 그니라”라는 말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말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군병들은 놀라 뒤로 물러가 엎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놀라 엎드러져 있는 그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누구를 찾느냐”라고 말입니다. 이에 그들도 전과 동일하게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질문하고 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하십니다.

8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두 번이나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 이유 중에 하나가 8절에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들이 잡으러 온 자는 바로 나이므로 제자들은 안전하게 돌아가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심은 자신을 내어 놓고 제자들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만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마가복음 14장 50절에서 언급되는 제자들의 도주와 대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공관복음서 저자와 달리 제자들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밝혀 제자들이 도망 간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생각하고 계심을 나타내려 한 것입니다. 이미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이 당신을 모두 떠날 것을 아셨기에 그들이 떠나게 되는 것을 이해하시고 제자들의 마음을 가볍게 하심인 것으로 여겨지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사건은 아주 중요한 영적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죄로 인하여 형벌 받는 것을 볼 수 없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이 모든 것을 담당하시고 제자들은 그 형벌로부터 놓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절인 9절에서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예수님은 이미 요한복음 10장 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하셔서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을 위해 죽으실 것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이 후에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어려움을 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을 당신이 받는 것과 동일시 하셨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체휼하실 뿐 아니라 계속해서 함께 고난을 당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겠다고 다메섹으로 갈 때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심으로 성도를 핍박하는 것이 자신을 핍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것을 보고 베드로의 호기가 발동하였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칼을 빼들고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고의 잘린 귀를 다시 붙여주셨다(눅 22:5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칼로 저항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먼저 칼을 꽂으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 하신 후에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한 후에 제자들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원칙을 제공하였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박해를 당할 때 그 박해에 대처하는 방식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강력한 박해를 당해도 절대로 칼을 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죽이려고 했을 때 자신이 살겠다고 칼을 들지 않았습니다.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 할 때까지 교회는 단 한 번도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겠다고 칼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인해 죽임 당함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사도행전 5장에 보면 나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으로 인해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협박을 당하며 풀려 날 때 제자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행5:41)고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초대교회성도들이 잡혀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들과 싸워야 할 때도 그들은 상대 검투사에게 칼을 들지 않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대를 사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당한고 무시를 당한다고 해서 세속적인 힘을 의지하여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종종 선거 때가 되면 세속적 권력을 얻어 기독교나라를 만들겠다는 사람들이 일어나지만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이룰 수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이미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 절에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김은 잔을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이 잔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 죽음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음으로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사는 주의 백성들의 삶도 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마신 잔을 우리도 마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음의 잔을 마셨다면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이 잔을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매일 매순간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요구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명예에 대해, 쾌락에 대해, 육신적 욕구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죽는 것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1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린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인해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백성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들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그것이 필경은 로마의 공격을 초래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원들이 어찌할지를 고민할 때 가야바가 했던 말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말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가야바는 11장 50절을 보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했었습니다. 이렇게 한 말을 요한은 해석하기를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11:51,52)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죽으실 것을 가야바의 과거 행적을 거론하며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생각하며 죽음의 길로 나아가실 때 제자들의 모습을 대변한 한 사람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드로입니다.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25절부터 27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예고하신대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제자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죽음의 길을 걷고 계셨는데 제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는 것을 위해 40일 동안 모세와 행복한 대화를 하고 계셨다면 그 백성들은 자신들을 위해 자신들을 인도할 송아지를 만들어 송아지 앞에서 뛰놀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합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시고 우리들은 우리들의 육적 이익을 위해 주를 부인하고 썩어질 이익을 취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탄식으로 기도할 때 우리들의 영적 귀가 닫히고 눈이 감겨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세상과 짝하여 세상을 하나님 섬기듯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이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답게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의 믿음과 교회 밖에서의 삶의 모습이 다른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생명의 주관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없어서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죽일 힘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3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이 말씀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끌고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예수님을 죽여 달라고 부탁할 때 사람들이 한 말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사형권이 없었습니다. 당시 사형권은 오직 로마에게만 있었기 때문에 총독에게 끌고 갔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입으로 자신들의 한계를 말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빌라도와 대화 때에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과의 대화하면서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요19:10)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요19:11)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은 예수님의 목숨을 거둘 수 있는 힘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그렇게 말씀하시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정한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니엘서 4장에서 느브갓네살이 고백한대로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주님을 믿지 못하고 세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거룩한 삶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주관하시고 생명을 주시기도 거두시기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세상의 휘둘림에 끌려 다니는 비참한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눈은 이 땅의 권세가 아닌 하늘의 권세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렇게 하셨고 그 눈으로 기꺼이 이 땅의 박해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36절과 3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주님은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약 이 땅에 속한 것이라면 이 땅의 방법대로 군대를 동원해 자신을 구원해 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 땅의 방법과 이 땅의 가치관대로 살거나 이기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땅에 방법은 세속적인 힘을 많이 소유한 자가 강한 것입니다. 재물이 많고, 권력이 높고, 인기가 많은 것이 강한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그것으로 세상을 이긴다면 주님은 우리들에게 넘치게 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땅에 속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이 땅의 가치관으로 이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주님의 나라는 하늘에 속하였으며 이 땅에 오신 것은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왕으로 오셨지만 세속적인 왕의 통치를 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심”으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절로 3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진리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본서 14장 6절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라 하셨습니다. 그 자신이 진리인 예수는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을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에 속한 자만이 진리이신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 구절은 다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께 올 수 없다는 사실(3:27;6:44, 45, 65)과 본 절은 잘 조화됩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정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두 번째로 본 구절은 영적 진리에 무지한 빌라도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는 진리의 왕으로 진리를 말하고 있으므로 만일 빌라도가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면 예수의 말씀을 이해했겠지만 그는 결코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니었기에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주의 백성만이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오셨고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 제목이 “잔을 받으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습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에 감동받아 죽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열정과 헌신에 근거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 근거하여 죽음의 잔을 받으셨습니다. 그 잔은 예수님께는 죽음을 안겼지만 우리에게는 생명을 주신 잔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리 안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78과: 요한복음 18~19장

이 재판은 성전 근처에 있는 안토니아 요새에서 열렸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학생들에게 경전 안내서에 나오는 성경 지도 12,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 을 펴서 안토니아 요새[지도에서 3번]를 찾아보라고 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그 관리들이 자신을 체포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들은 그분을 유대인의 지도자 중 하나인 안나스에게 데리고 갔으며, 그다음에는 예수님을 사형시키고 싶어 했던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데리고 갔다.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명이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리고 세 명의 사람이 각각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고 물었으나 베드로는 세 번 다 그분을 모른다며 부인했다. 가야바의 심문이 끝난 후,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분을 유대 지방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로 데려가서 재판과 판결을 받게 했다. 로마 당국만이 예루살렘에서 사형 판결을 집행할 권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학생에게 요한복음 18장 12~32절 에 대한 다음 요약문을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한다.

이 성구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염려하셨는가? (학생들이 대답하고 나면, 다음 문구들을 칠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사” 아래에 열거한다. 사도들을 보호하는 것, 종의 귀를 치유하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 요한복음 18장 8절 에 나오는 이 사람들과 요한복음 18장 9절 에 나오는 내게 주신 자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도들을 가리킨다고 설명해 주면 좋을 것이다.)

몇몇 학생에게 요한복음 18장 4~11절 과 누가복음 22장 50~51절 을 돌아가며 소리 내어 읽으라고 한다.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눈으로 따라 읽으면서, 이 무리가 왔을 때 예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무장한 일단의 관리들이 여러분을 체포하고 결국에는 사형에 처하게 하려고 다가오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요한복음 18장 1~3절 에 대한 요약으로,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을 겪으신 후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체포하도록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관리들을 대동하고 그곳에 도착했다고 설명한다.

요한복음 18~19장 에 설명된 사건들이 일어나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와 로마 총독 빌라도는 각각 서로 다른 우선순위를 가졌다고, 즉 서로 다른 것에 가치를 두었다고 설명한다. 칠판의 한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사라고 적고 다른 쪽에는 빌라도의 관심사라고 쓴다. 학생들에게 요한복음 18~19장 을 공부하면서, 삶에서 어떤 관심사를 최우선순위로 삼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한 가지 진리를 찾아보라고 한다.

칠판에 쓴 질문에 대한 답을 몇몇 학생에게 들어 본다.

여러분은 타인의 안녕과 행복을 염려하는 것이 도무지 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가? 그것은 언제인가?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체포하고 심문한 후에 그분을 빌라도에게 데리고 갔다

요한복음 18:33~19:16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다

학생 두 명에게 요한복음 18장 33~37절에 기록된 구주의 말씀과 빌라도의 말을 각각 소리 내어 읽으라고 한다. (수업 시작 전에 이 두 학생에게 자신이 읽을 부분을 찾아 두라고 할 수도 있다.) 여러분이 직접 해설자 역할을 할지 아니면 또 다른 학생에게 그렇게 하도록 부탁할지 고려해 본다. 이 학생들이 각자 맡은 부분을 읽을 때,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눈으로 따라 읽으면서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알기를 원했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요한복음 18장 33절에 따르면,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알기를 원했는가?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며 고발했는데, 이는 예수님이 왕이라고 주장한 경우 그분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선동죄, 즉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죄(요한복음 19:12 참조) 판결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무엇을 설명해 주셨는가? (그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요한복음 18:36], 자신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러]”[요한복음 18:37] 지상에 왔다.)

학생들에게 요한복음 18장 38~40절을 조용히 읽으면서,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는가? (그는 자신이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38절]고 말했다.)

39절에 따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무엇을 했는가?

요한복음 19장 1~5절에 대한 요약으로,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조롱했다고 설명한다. 그런 후 빌라도는 예수님을 사람들 앞으로 데려갔다.

학생들에게 요한복음 19장 4, 6절을 조용히 읽으면서,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말을 반복적으로 했는지 찾아보라고 한다.(“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빌라도가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주장한 것을 기초해 볼 때, 빌라도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여겼던 것 같은가?

한 학생에게 요한복음 19장 7절을 소리 내어 읽으라고 한다.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눈으로 따라 읽으면서, 유대인 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빌라도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해설 부분을 읽었던 학생들에게 요한복음 19장 8~11절에서 각자 자신의 역할을 소리 내어 읽으라고 한다.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눈으로 따라 읽으면서,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빌라도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는 점을 빌라도에게 이야기하자, 빌라도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만일 여러분이 빌라도의 입장이었다면, 여러분이 총독으로서 지닌 권한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서 어떤 마음이 들었겠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11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께서 유대인들에 대해 “죄[가] 더 크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만일 빌라도가 군중의 요청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명한다면, 예수님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도모한 사람들과 같은 정도는 아니더라도 빌라도도 역시 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학생들에게 마태복음 27장 19절을 조용히 읽으면서, 빌라도의 아내가 그에게 무엇을 하도록 조언했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그런 후 찾은 것을 말해 달라고 한다.

한 학생에게 요한복음 19장 12~15절을 소리 내어 읽으라고 한다.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눈으로 따라 읽으면서, 빌라도는 예수님에 관해 무엇을 하려고 했으며 유대인들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12절에 따르면, 빌라도는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에게 어떤 말을 했는가?

학생들에게 가이사는 빌라도를 유대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한 로마 황제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빌라도는 전에 로마 군인들에게 유대인들을 학살하도록 명하기도 했으며, 그들의 성스러운 종교적 전통을 다소 더럽힌 적도 몇 차례 있었다. 빌라도의 그런 행위는 가이사에게 보고되었고, 가이사는 빌라도를 견책했었다. (제임스 이 탈매지, 예수 그리스도, 제34장, 주해 7, 648~649쪽 참조)

만일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가이사의 “충신”(12절)이 아니라고 보고한다면,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만일 가이사가 빌라도를 충신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가이사는 빌라도의 총독 지위와 권한을 앗아갈 것이다.)

빌라도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것과 무죄한 구주를 놓아주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고 설명한다.

한 학생에게 요한복음 19장 16절을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한다. 나머지 반원들에게는 눈으로 따라 읽으면서, 빌라도가 어느 쪽을 선택했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빌라도는 어느 쪽을 선택했는가?

이 선택은 빌라도의 가장 큰 관심사에 관하여 무엇을 드러내 주는가? (학생들이 대답하고 나면, 칠판에서 “빌라도의 관심사” 아래에 다음 문구들을 적는다. 자기 자신, 즉 자신의 지위와 권한)

빌라도가 무죄한 구주를 놓아주는 것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에 두기로 결정한 것에서 우리는 어떤 원리를 배울 수 있는가? (학생들이 대답하고 나면, 다음 원리를 칠판에 적는다. 우리가 옳은 일을 하는 것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결과적으로 죄를 짓게 될 것이다. )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옳은 일을 하는 것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에 두려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는가?

옳은 일을 하는 것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에 두려는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비교 및 대조 여러 가르침과 인물, 또는 사건들 사이의 유사점이나 차이점을 주목하면 교리와 원리, 경전 구절이 분명해지고 복음 진리를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학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지상 생활의 마지막 순간을 공부하면서, 빌라도의 품성과 비교하여 그리스도의 품성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매튜헨리주석1015-요한복음 18장

요한복음 18장

Ⅰ. 동산에서 잡히신 예수 18:1-12

고난을 통하여 완전케 되신 구원의 대장인 예수께서 이제 원수와의 결투의 순간이 다가왔다. 이제 눈을 돌려 이 위대한 광경을 보도록 하자.

(1) 우리 주 예수께서는 담대한 투사처럼 먼저 싸움터에 출전하신다(1,2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1절).

1)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그의 고난을 맞이하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선지자로서 전해야 할 것을 모두 전하셨으며, 이제 자신의 영혼을 속죄 물로 드리는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친히 수행하신다. 그리고 그가 이 제사장의 직무를 완수하셨을 때, 그는 왕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셨다. 주님은 이 시련의 때를 위해 제자들을 말씀으로 준비시키셨으며 기도로써 시련을 대비하신 후에 그 시련을 용기 있게 맞으러 나가셨다. 그는 전신갑주를 입고서야 싸움에 임하셨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속한 사람들을 무작정 싸움터에 투입시키지 않으시며 우선적으로 싸움에 필요한 것을 그들에게 준비시키신다. 우리는 확고한 결단을 함으로써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 가로놓은 엄청난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2)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동산에 들어가셨다(1절). 주님은 평상시와 마찬 가지로 행동하셨으며, 때가 이르렀을 때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건 면하게 되건 간에 자신의 방식을 변경하려 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 밤에는 감람산에 거하시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이것은 그의 습관이었으므로 자신의 고통을 예견하셨다고 해서 자신의 습관을 고치시려 하지 않았다. 주님은 그의 대적들로 인하여 백성들의 소요가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만일 주님이 성안에서 잡히고 그로 인해 소요가 발생한다면, 재난이 일어나 유혈사태로 번질 것이다. 그는 이것을 막기 위해서 물러나셨던 것이다. 우리 자신이 고난에 말려들 때, 우리는 우리와 함께 다른 사람들도 말려들게 될 것을 우려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순순히 고난당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사람들로부터 영예를 얻고자 하는 자들은 가능한 한 뜻있는 죽음을 원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피가 그리스도에게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은 그러한 죽음을 택할 필요가 없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속을 떠난 은거 생활의 본을 보여 주셨다. 만일 우리가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려 한다면, 우리는 설혹 그곳이 거룩한 도성이라 할지라도, 세상의 도성들에 거하는 무리들과 그곳에 대한 관심과 위로를 뒤로 제쳐놓아야 하며 버려야 한다.

3)주님은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이동하셨다. 그는 감람산으로 가시기 위해 이 시내를 건너야만 하셨다. 그러나 이 사실이 기록된 것은 기기에 무엇인가 의미심장한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 시내가 기드론 시내, 즉 검은 시내로 불리우게 된 것은 그 계곡이 성의 오물로 인해 검게 되었거나 물이 변색했기 때문이다. 유다의 경건한 왕들은 이 기드론 시냇가에서 우상들을 불사르고 파괴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시냇물에 가증한 것들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시내를 통과하심으로써 자신의 수난을 시작하셨던 것이다.

4)주님께서 동산으로 들어가셨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동산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본 복음서에만 기록되었다. 에덴 동산에서부터 죄가 시작되었고, 거기서 구속 자를 보내신다는 사실이 약속되었다. 그리스도 또한 한 동산에 묻히셨다. 우리가 동산을 거닐 때, 그리스도의 고난이 동산에서 있었음을 묵상하자. 우리가 동산에서 누리는 모든 즐거움은 거기서 주님이 고난 당하신 덕택이다. 우리는 재산을 소유하고 또 그것을 즐길 때 항상 고난을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쁨의 동산은 눈물의 휘장 안에 있기 때문이다.

5)그는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가셨다. 그들은 주님의 고난과 인내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이로써 그들이 보다 큰 확신과 애정을 갖고 이러한 사실들을 세상에 전파할 수 있으며, 고난에 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나약함을 볼 수 있도록 그들을 위험 가운데로 끌어들이신다. 때로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을 곤경에 빠뜨리시는데 이는 그들을 구원하심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6)배신자 유다는 예수의 은거 처를 알고 있었다. 호젓한 동산은 묵상하고 기도를 드리기에 적합한 장소이다. 거기서 우리는 감화를 받고 맹세를 새로이 하며, 결심을 굳히기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유다가 예수의 은거 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데에는 다음의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로 유다의 죄를 가중시키기 위해서였다. 즉 자신에게 주님을 배신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는 주님을 배신하고자 했으며 또한 자신이 그리스도와 친숙한 관계에 있다는 점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고결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소행을 비열한 행위로 경멸했을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주님은 배신자 유다가 그를 찾으러 올 줄을 아셨으면 서도 그에게 발각되기 위해 그곳으로 가셨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당하고 죽으려 하셨음을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동산으로 가셨던 때는 밤늦은 시작(오후 8시 혹은 9시경으로 추정됨)이었다. 다른 제자들이 잠자러 갔을 때 주님께서는 고난을 당하기 위하여 기도하러 가셨다.

(2) 우리 구원의 대장이신 주께서 싸움터에 이르시자 원수가 그를 공격한다(3절). 유다는 그 하속들과 함께 그곳으로 왔다. 본 복음서 기자는 고민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른 세 복음서 기자들이 그것을 충분히 기술하였기 때문이다.

1)그리스도를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은 유다와 그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이었다.’ 첫째, 여기서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 고용된 무리는 일종의 군대였다. 그리스도의 친구들은 극소수였으나 원수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많았다. 둘째, 그들은 여러 부류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이방인인 로마의 군대요 또 ‘대제사장들의 하속들이었다. 대제사장들의 하속들은 유대인들로서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 하나가 되었다. 셋째, 대제사장들로부터 명령을 받아 위임받은 무리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주님에 대한 체포 영장을 소지했던 것 같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수적인 면이나 세력 적인 면에서 얼마나 막강한 적들을 갖고 있었으며 또한 앞으로 얼마나 갖게 될 것인가를 살펴보자. 즉 당시의 교권과 정권이 복음을 핍박하기 위해 야합했던 것이다. 넷째 모든 무리들은 유다의 지휘를 따랐다. 그는 이 군대를 인수받았던 것이다. 그는 하찮은 열 두 명의 뒤를 따라 다니는 것보다 이 수백 명의 당당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2)그들은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그들은 ‘등과 홰와 병기를 갖고’ 왔다. 비록 달빛은 비추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가 도망칠 것을 대비하여 등을 갖고 왔다. 곁에 있는 태양을 찾기 위해 촛불을 밝힌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또한 그들은 주님이 저항하실 것에 대비하여 무기를 휴대하였다. 주님의 전쟁 무기는 영적인 것으로서 종종 이 무기로 그들을 패배시켰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다른 무기, 즉 검과 몽치에 의존하였던 것이다.

(3) 우리 주 예수께서는 원수의 첫 공격을 멋지게 격퇴하셨다(4-6절).

1) 주께서 그들을 맞이하신 방법.

첫째, 주님은 그들에게 온유한 질문을 하심으로써 그들을 대하셨다(4절). 주님은 그 당할 일을 다 아셨으므로 평정을 잃지 않고 용감히 그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부드럽게 질문하셨다. 다음을 살펴보자.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을 예견하셨다. 그는 ‘그 당할 일을 다 아셨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칠 것인가에 대해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고통을 재촉할 뿐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장차 전반적으로 고난을 당할 것으로 예상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은 우리가 예상했던 손실일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과감하게 그의 고난을 맞이하신다. 백성들이 강제로 주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을 때, 그는 물러나 자신을 숨기셨다(요 6:15). 그러나 그들이 강제로 주님께 십자가를 지우려 했을 때에는 자신을 내어 주셨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세상에 고난을 당하러 오셨고 또한 통치하시기 위해서 저 세상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불필요하게 고난당하는 데 대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죄로 인하여 그 고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이 주님께 찾고 있는 자를 물었을 때, 그는 매우 침착하고 부드러운 답변으로 그들을 맞으셨다(5절).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자, 주님은 ‘내로라’고 대답하셨다. 적어도 성전의 하속들은 주님을 종종 보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유다도 주님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 중 아무도 “당신이 우리가 찾는 사람이다”라고 감히 말하지 못했다, 그들은 주님을 찾으면서 그를 나사렛 예수라 불렀다. 이것은 그에게 주어진 모욕적인 칭호로서 그의 메시아직을 묵살하기 위한 호칭이었다. 이것을 볼 때, 그들이 그를 알지도 못하였고 그가 어디 계신지도 몰랐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그는 그들에게 “내가 바로 너희가 찾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신다. 비록 그들이 주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지만, 주님은 그 모욕을 무시하시고 그 칭호에 답변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베들레헴의 예수였으므로 “나는 그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다. 이로써 주님은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를 시인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즉 주님과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말 것을 가르치신다. 본문에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5절)는 말씀이 특별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서 있던 유다가 이제는 주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자들과 합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말씀은 다음의 이유에서 언급되었다. 즉 유다의 뻔뻔스러움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그가 자신의 스승을 대면할 배짱을 어디서 얻었는지, 그리고 그가 어째서 부끄러워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누구나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주께서 ‘내가 그로라’고 힘있게 말씀하신 것은 그를 체포하러 온 사람들의 허를 찌르기 위한 것이었으며, 특별히 유다를 겨냥한 말씀이었다.

2)주님은 그들을 위협하여 뒤로 물러서게 하셨다.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6절). ‘내로라’는 말씀은 그의 제자들을 소생시키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으나 그의 원수들에게는 치명타가 되었다. 이로써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다.

첫째, 주님은 그들을 처치하실 수 있었다. 그들을 엎드러지게 하셨을 때 그가 그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주님은 그들이 강제로 자신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으며, 전에 그가 말씀하셨듯이 단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버리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려 했던 것뿐이었다. 주님은 자신의 인내와 관용, 그리고 자신의 원수에게까지도 자비로운 사랑을 베푸시는 모범을 보여 주시려 했다. 주님은 그들을 엎드러뜨리는 것만으로 그들 스스로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으며 회개의 기회를 주셨던 것이다.

둘째, 주님께서 종국에는 그의 모든 무자비한 원수들을 처치할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않을 것이며 도주하다가 주님 앞에 엎드러질 것이다.

(4) 주님은 원수들에게 일격을 가하신 후에 그의 친구들을 보호하신다(7-9절).

1)주님은 그들의 분노에 자신을 계속 맡겨 버리신다(7절). 그들이 엎드러졌을 때, 주님께서 피해 버리실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이 다시 일어섰을 때, 그들이 추격을 포기하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집요하게 주님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무엇이 그들을 괴롭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권능보다는 차라리 다른 것 때문으로 간주하려 했다. 죄로 인해 몹시 강퍅해진 마음은 어떠한 것으로도 그것을 변화시키거나 교정시키도록 작용할 수 없다. 주님은 기꺼이 체포되려 하신다. 그들이 주님 앞에서 엎드러졌을 때, 그는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셨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께 ‘나사렛 예수라’고 같은 대답을 하였다. 그들은 같은 대답을 반복함으로써 자신들의 사악함에 대한 완고함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여전히 오만하게 주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다. 또한 유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굽히지 않았다.

2)주님은 제자들을 저들의 광란으로부터 구하려고 애쓰셨다. 즉, 주님은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노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용기를 보여주셨으며,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셨다(8절). 이것은 제자들이 주님을 버린 죄, 특히 베드로가 그를 부인한 죄를 무겁게 하는 것이었다. ‘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의도가 숨어 있었다.

첫째, 그이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주님은 자신을 고난 앞에 내놓으신 때에도 제자들은 그 고난을 면케 해 주셨다. 이것은 그들이 고난을 감수하기에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들을 고난받게 하기에는 그들의 영혼이나 생명이 아까웠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에게는 다른 할 일이 있었으며, 가야 할 길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을 전하러 온 세상으로 나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를 따르도록 커다란 용기를 주신다. 주님은 우리의 기질을 고려하시어 십자가를 져야할 시기를 지혜롭게 정하시며, 우리의 힘에 맞도록 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형제 사랑의 훌륭한 모범을 보여 주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평안과 안전만을 도모해서는 안되며,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을 우리 이상으로 생각해야 한다.

둘째, 그는 중보자로서의 사명에 대하 본을 보여 주신다. 그가 자신을 고난과 죽음에 내어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피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3)그는 앞서 전하신 말씀을 확증하셨다(요17:12).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9절). 비록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지키는 것은 특별히 죄로부터 그들의 영혼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뜻하였지만, 여기서는 그들의 영혼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뜻하였지만, 여기서는 그들의 육체의 생명을 보호하신다는 것에도 적용된다. 그리스도는 계획된 사명을 위해서 육체적 생명도 보호하시려 한다. 육체의 생명은 그것이 모두 사용되기까지 보존될 것이다. 제자들을 보존하신 것은 그들의 영혼을 보존하신 것과 같다. 현재 그들은 십중팔구 믿음과 결단력이 매우 연약하였다. 이때 만일 그들을 고난에 몰아넣는다면, 그들 중 몇, 즉 그 중 연약한 자들은 잃어 버렸을 것이므로 주님은 아무도 잃지 않으시기 위해서 그들을 피하게 하려 하셨다.

(5) 주님은 한 제자의 경솔함을 꾸짖으시고 그들의 폭력을 제지하신다(10,11절).

1)베드로의 경솔함: 그는 한 자루의 검을 휴대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휴대한 검은 두 자루였다(눅 22:38). 한 자루의 검을 휴대한 베드로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는 ‘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 버렸다.’ 이 이야기의 진실성을 확증하기 위해 본문에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고 기록되었다(10절).

①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의 선한 의도를 인정해야 한다. 비록 그가 잘못 생각하였지만, 그는 그의 스승에 대한 진실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에 그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이제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한 것이다.

②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비록 그의 선한 의도는 해명되었을지라도 그것이 그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첫째, 그의 행동은 주님으로부터 전혀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병사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기다려야 할 뿐 그것을 앞질러서는 안 된다. 둘째, 베드로는 권력에 항거하였는데, 이것은 금지된(마 5:39) 행동이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결코 용납하시지 아니한 행동이었다. 셋째, 그는 그의 스승이 고난받는 것에 반대하였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그것은 주님께 대항하여 싸운 격이었다. 넷째, 그는 그의 스승이 바로 직전에 원수와 체결한 협정 조약을 파기하였다. 주께서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사실상 그들이 침착하게 행동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베드로 역시 이 말씀을 들었지만 그것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다섯째, 베드로는 어리석게도 그 자신과 그의 동료 제자들을 이 광분하는 무리의 분노 아래 노출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나치게 보존하려는 열정 때문에 자멸의 죄를 범하게 된다. 여섯째, 베드로의 용기가 자신을 실족케 했다고 간주할 만한 근거가 있다. 그것은 베드로가 이 사건 바로 직후에 그의 스승을 부인하는 겁쟁이 노릇을 한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 볼 때, 진정한 그리스도의 용사라면 우세한 경우뿐만 아니라 쇠퇴하는 것처럼 보일 경우에도 그리스도를 위해 나서야 할 것이다. 또한 설사 옳은 편에 승세가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 편에 서야 할 것이다.

③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상처 입은 자들을 치유하심으로써 그의 권능과 선하심을 나타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배적인 섭리에 의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눅 22:51).

2)주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셨다. 검을 집에 꽂으라(11절). 이것은 가볍게 꾸짖으신 책망이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든 것은 그의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설사 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격하고 경솔한 행동을 취할지라도, 그것이 슬픔과 낙망 때문에 취한 행동이라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고난 당할 때의 온순한 행동을 본보기로 보여 주신다.

3)이 책망에 대한 이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1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보여 주신다. 첫째, 주님은 자신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신다는 것을 완전히 증명하신다. 베드로가 저지른 어떠한 잘못도 때를 맞이한 그의 고난을 방해하려 했던 이때만큼 주님을 노하게 했던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같이 주님은 비록 이 고난이 쓴잔이었지만 이 잔을 기꺼이 마시려 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그 잔을 마시셨으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손에 구원의 잔을 들려주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둘째,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도록 하는 훌륭한 모범을 보여 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마신 잔을 통해 그와 서약해야 한다(마 20:23).그것은 한 잔에 불과하다. 그것은 비교적 적은 양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잔이다. 즉 고난이 우리에게 선물인 것이다. 그 잔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므로, 우리를 상하게 하지 않는다.

(6) 주님은 순순히 투항하여 포로가 되셨다. 이는 그가 도피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피하려고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1)예수의 잡히심: 예수를 잡아(12절). 주님에게 손을 댄 사람은 불과 몇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책임은 그들 모두에게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가세했기 때문이다. 반역에는 종범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모두가 주범인 것이다. 그들이 주님을 체포하려던 시도는 자주 좌절되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지금 더 큰 폭력을 행사하여 주님을 덮쳤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2)예수께서 결박당하심: 결박하여(12절). 이 복음서 기자만이 주님의 고난 중 이 부분을 기록하였다. 즉 그들은 주님을 체포하는 순간 결박하고 양팔을 묶었으며 쇠고랑을 채웠던 것이다.

첫째, 이것은 주님을 핍박하는 자들의 악의를 보여 준다. 그들은 그를 괴롭히고 그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결박했다 이 결박은 그에게 모욕과 수치를 주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 결박은 그가 도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 결박은 그가 도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주님을 이미 정죄받은 죄인처럼 결박했다. 이는 그들이 그를 사형에 처하고자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의 권세로 그를 핍박하는 자들의 양심을 결박하였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괴로워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복수하려는 듯 그를 이처럼 결박했던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결박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들이 주님을 결박하기 전에 주님은 중보자로서의 사명과 직책으로 스스로를 결박하셨다. 주님은 이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의무의 근으로 제단의 뿔에 묶이셨다. 죄는 영혼을 구속하는 사슬이며,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걸리게 된다. 또한 부패도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는 사슬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사단의 권세 아래 사로잡힌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사슬로부터 우리를 자유케하시려고 그 스스로 우리를 위해 순순히 결박당하셨다. 우리는 그의 결박을 통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처럼 성자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의무와 복종에 결박하시기 위해서 결박당하셨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결박이 우리를 결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결박당하신 것은 그를 위한 우리의 멍에를 가볍게 하기 위함이다. 즉 그리스도의 멍에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거룩하게 하고 그 고난을 경감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바울과 실라는 착고에 묶인 상태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멍에를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Ⅱ. 그리스도의 수욕과 베드로의 부인 18:13-27

우리는 본문에서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 당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과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생략한 그곳에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사건을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그 사건 자체만으로 전체의 이야기를 구성했는데, 여기서는 다른 이야기들과 함께 엮어 놓았다. 그리스도를 고소한 죄목은 종교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종교 재판소의 재판관들은 그 사건을 그들의 법원 관할권에 해당하는 것으로 취급했다.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모두 주님을 체포했으며, 양쪽 모두가 그를 심문하고 정죄하였다. 이것은 그가 양자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이다.

(1) 그들은 주님을 체포하자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13절). (1) 그들은 주님을 끌고 갔다. 그들은 그를 승리의 기념품으로서 의기양양하게 끌고 갔다. 그들은 주님을 가장 악질적이고 지독한 범죄자로 취급하며 난폭하게 급히 끌고 갔다. 우리는 충동적인 욕망에 이끌려 다니며 사단의 포로가 되어 그의 뜻대로 끌려 다녔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끌려 다니셨으며, 사단의 대리자들과 도구들에게 포로가 되셨던 것이다. (2) 그들은 그를 그들의 상전에게로 끌려갔다. 이제 한밤중이 되었다. 우리는 그들이 주님을 법정으로 소환하기에 적당한 시간까지 감금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은 책임 있는 공정한 법정이 아닌 정죄하려는 재판관들에게로 급히 끌려가셨다. 주님은 이렇게 불법적으로 기소되셨던 것이다. (3) 그들은 그를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갔다. 아마 도중에 그의 자택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체포에 성공했다는 확신 감을 갖고서 안나스를 기쁘게 해주려고 그 죄수를 그 앞에 내보였다. 위대한 희생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안나스의 앞에 보이셨다가 제단에 바쳐질 제물로서 재가되었고 묶인 채로 끌려가셨다. 이 안나스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이었다. 이 악한 자들은 서로 친분을 맺고 제휴함으로써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얻기를 원했던 것이다.

(2) 안나스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 기소가 강행되기를 원했으므로 주님을 결박한 상태로 가야바에게 보냈다.

1)가야바가 지닌 권력이 암시되고 있다(13절). ‘그는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다’. 대제사장직은 평생직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 그 보직은 거의 일년직이 되었을 정도로 자주 바뀌었다. 그들이 서로 해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파멸시키고 계셨다. 가야바는 메시아가 처형당하신 해에 대제사장이 되었다. 악한 일이 대제사장에 의해 자행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의 섭리는 악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 앉게 하여 그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셨다. 그 해에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파멸을 초래했으며, 이로써 그는 그리스도를 처형한 주모자가 되었다. 세상에는 승진함으로써 자신의 명망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만일 가야바가 승격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불명예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2)가야바의 악의는 얼마 전에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14절)라는 그의 진술을 반복하여 기록함으로써 암시되고 있다. 공정한 규례를 무시하고 정책적인 규례로 자신과 교회를 다스렸던 자가 바로 이 가야바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재판은 사실 심리가 있기도 전에 선고되었으며, 그들은 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이미 결정하였다. 즉 그는 죽어야 했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심문은 하나의 조롱에 불과했다. 이 14절의 진술은 우리 주 예수의 결백을 그의 가장 악한 원수의 하나가 입으로 시인한 증언이었다. 이 원수는 주님이 공익을 위해서 희생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죽음이 옳다고 말하지 않고 유익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3)그리스도에 대한 기소에 안나스도 찬동하였다. 그는 스스로 공범이 되었다. 첫째, 그는 주님을 석방시켜야 했을 때, 계속 그를 구금함으로써 천부 장이나 하속들과 마찬가지로 이 범행에 관여하였다. 더 많이 배운 사람인 안나스가 주님을 계속 결박하였다는 사실보다는 그를 결박한 난폭한 병사들에게 가벼운 죄가 적용됨을 볼 수 있다. 둘째, 그는 또한 대제사장과 공회에 합세하였다. 이 안나스는 그들과 함께 재판정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저들의 악행에 참여자가 되었던 것이다.

(3) 시몬 베드로는 가야바의 집에서 주님을 부인하기 시작하였다(15-18절).

1)베드로가 개정된 법정에 들어가려고 애썼다는 설명이 15,16절에 기록되었다.

①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은 (비록 그것이 아무런 것도 아니었음이 입증되었지만) 다음의 두 가지로 나타났다. 첫째, 베드로는 예수께서 끌려가실 때에 그를 뒤따라갔다. 비록 처음에는 그도 다른 제자들과 도망쳤지만, 후에는 자신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주님을 놓치지 않으리라고 했던 약속을 상기하고 마음을 약간 고쳐먹고 조금 떨어져서 뒤따라갔다. 그리스도를 진실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자들은 어떠한 조건하에서도 그를 따를 것이다. 둘째, 베드로가 예수께서 원수들 가운데 계시는 곳으로 들어갈 수 없었을 때, 그는 가능한 한 주님 가까이에 있으려고 했으므로 그 기회를 기다리면서 ‘문 밖에 서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드러났듯이, 그는 올무에 빠졌을 뿐이다. 베드로 자신보다도 베드로에 대해서 더 잘 아셨던 그리스도는 ‘나의 가는 곳에 지금은 네가 따라 올 수 없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셨다(요 13:36). 또한 주님은 베드로가 그를 부인하리라고 거듭 반복하면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주님을 버림으로써 자신의 나약함을 뒤늦게 경험했던 것이다.

②다른 제자가 베드로에게 베푼 친절: 그러나 이것도 후에 증명되듯이 아무런 친절도 아니었다. 요한은 본 복음서에서 수차래 자신을 가리켜 다른 제자라고 말하였는데 많은 주석 가들은 이것을 근거로 본문에 언급된 이 다른 제자를 요한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필자는 이 다른 제자를 요한이나 또는 열 두 제자들 중 한 사람으로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양우리 안에 있지 아니한 다른 양들도 소유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양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 반면 제자들이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내색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많은 무리들과 궁전, 심지어 네로의 궁전 안에도 선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다른 제자는 베드로를 들여보냄으로써 베드로에게 관심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그의 호의의 표시였을 뿐 아니라 베드로로 하여금 재판을 받으시는 그의 스승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친절은 아무런 친절도 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몹시 불친절한 행위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그 제자가 베드로를 대제사장의 뜰로 들여보냄으로써 그로 하여금 시험을 당하게 하였고 그 결과는 매우 좋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2)베드로는 들어가자마자 즉시 시험을 당하였다(17절).

①그 공격은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문을 지키기 위해 배치한 어리석은 처녀의 몇 마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들은 베드로에게 도전이 되었다. 그녀는 단지 그에게 무심코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만일 말고가 그를 붙잡고서 “이 녀석이 내 귀를 자른 놈이다. 내가 그 대가로 네 목을 베어야겠다”라고 말하였다면, 그것은 그가 경계할 분명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②베드로의 신속한 패배: 그는 자신을 돌이켜 볼 겨를도 없이 ‘나는 아니라’고 급히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안전에만 몰두한 나머지 주님을 단호히 부인하지 않고서는 안전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③그러나 그는 더욱 깊이 시험에 빠져 들어간다.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18절).

㉠종들이 자신들을 아끼는 모습을 보라. 밤이 추웠으므로 그들은 뜰에 불을 피웠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되실 것인 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모든 관심사는 앉아서 몸을 녹이는 것이었다.

㉠베드로가 어떻게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는가를 보라. ‘그는 앉아서 불을 쬐었다’. 그가 그의 주님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과 주님을 위해 윗뜰에 출두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대한 과오였다. 그는 주님을 위한 증인이 될 수 있었으며, 최소한 주님에 대한 증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주님의 모범을 통해 그가 이렇게 고난을 받을 차례가 되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배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양심도 그의 호기심도 그로 하여금 법정으로 나아가게 할 수 없었다. 그가 주님의 원수들과 함께 어울렸다는 사실은 더욱 잘못된 일이었다.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서서 몸을 녹이고 있었다. 따뜻한 불이 좋아서 그리로 다가가는 나쁜 무리들 가운데에 대수롭지 않은 일로 끼이려는 사람들이 있다. 만일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열심히 얼어붙지 않은 채 불과 몇 시간전의 열기가 계속되었더라면, 그는 지금처럼 몸을 녹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미루어 비난받아 마땅하다. 첫째, 이는 그가 이 악한 자들과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비웃으면서 그날 밤의 토벌에 대한 이야기로 기분을 풀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것이 베드로에게 무슨 즐거움을 주었겠는가? 만일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공개적으로 출두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면, 그는 한쪽 구석으로 물러가서 주님의 고난과 주님을 버린 자신의 죄로 인해 남몰래 우는 데 몰두하고 있었어야 할 것이다. 둘째, 베드로가 그 무리 중 하나로 여겨지길 바랬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자가 베드로가 아니냐?”는 소리를 듣기를 두려워했다. 우리를 태워 버릴 위험이 있는 자들과 함께 몸을 녹인다는 것은 유해한 일이다.

(4) 그리스도의 친구인 베드로가 그를 부인하기 시작했을 때, 주님의 원수인 대제사장은 주님을 심문하기 시작한다(19-20절). 그들의 첫 번째 시도는 본 복음서 기자가 기록했듯이, 주님이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교사임을 입증하려던 것 같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했듯이, 그들이 이것을 입증하지 못하자 그들은 그를 신성모독 죄로 고소했다.

1)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한 심문을 받으신 정황(19절)

첫째, 불법적인 재판 절차: 그것은 모든 율법과 공정성을 무시한 재판이었다. 이제 주님은 그들의 죄수가 되었지만, 그들은 주님에게서 고소할 만한 것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든 지각과 정당성을 무시하고 주님 자신의 실수로써 고소 당하기만을 엿보고 있었다.

둘째, 재판의 의도: 그때 대제사장은 주님을 처형할 조서를 작성하기 위해 그를 심문하였다. 그의 제자들에 관한 심문은 주님께 선동죄를 씌우기 위해서였다. 일부 학자들은 주님의 제자들에 관한 대제사장의 질문의 요지가 “그들이 모두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왜 나타나지 않느냐?”는 것으로서 주님을 버린 제자들의 비겁함을 들어 그를 조롱하는 동시에 그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려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의 교훈에 관한 심문은 주님을 이단으로 정죄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그 법정에서 심리되기에 적절한 문제였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종교 재판의 법정이 소제한 예루살렘에서 벌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행하신 기적은 많은 유익을 주었으며, 그들은 그의 기적 행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꼬투리도 잡지 못하였다.

2)이 조서에 답변하는 그리스도의 진술: 주님은 제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 질문이 부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주님에게서 제자들을 거느리신 것은 당시 유대 교법사들이 실행하고 허용했던 통례를 따르신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가야바가 제자들을 함정에 빠뜨릴 계획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 관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은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신 것이었다. 이는 주께서 전에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가야바가 그의 제자들의 비겁함을 들어 주님을 책망하려는 속셈이었다면, 주님의 묵비권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주님은 제자들에 대해 아무 것도 비난하려 하시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을 정당화시킬 입장도 아니었다. 주님은 그의 교훈에 관해서 특별히 어떤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하여 전해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해 물어보라고 말씀하셨다(20,21절).

①주님은 불법적인 재판 절차에 관해 재판관들을 넌지시 책망하신다. 주님은 그들이 그를 정당하게 취급하는지를 저들의 재판 관례에 의거하여 항변하신다.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21절). 이 말씀에는 재판에 대한 두 가지 모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내 교훈에 관해 어찌하여 지금 내게 묻느냐? 너희들이 이미 그것을 정죄하지 않았느냐?” 그들은 주님을 시인하는 사람들을 모두 출고시키기로 결정했으면서도(요 9:22), 이제 그의 교훈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고 묻고 있었다. 둘째,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내 자신을 책망하란 말이냐?”

②주님은 그의 가르침이 공개적이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정당성과 공개적인 재판을 주장하신다. 그리스도는 매우 훌륭하게 자신을 해명하신다. 첫째, 그의 가르친 방법에 대해서: 주님은 자유롭고도 분명한 말투로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라’라는 말씀으로 충분히 자신을 해명하신다. 둘째, 그가 가르친 사람들에 대하여: 그는 세상 곧 들을 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고귀한 사람이든 천한 사람이든, 학식이 있거나 무식하거나,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친구이든 원수이든 간에 그의 말씀을 듣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셋째, 그가 가르치신 장소에 대하여: 주님이 지방에 계셨을 때, 그는 의례히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또한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을 때에는 성전에서 같은 가르침을 전하셨다. 비록 주님이 종종 사택이나 산 위에서 그리고 바닷가에서 가르치셨지만, 그가 사적으로 전하신 말씀도 공개적으로 전하신 말씀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그리스도의 교훈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이라도 나타내기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이는 그의 교훈 안에 고유의 힘과 그것에 따르는 아름다움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넷째, 교훈 자체에 대하여: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20절). 주님은 구석진 곳을 찾아다니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어떠한 외적인 세력도 두려워하시지 않으셨으며 또한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할만한 말씀도 전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제자들에게 은밀히 전하신 말씀을 집 위에서 선포할 것을 명하셨다(마 10:27).

③주님은 자신의 말씀의 정당성을 입증하시기 위해 그것을 들었던 자들에게 알아보기를 원하신다.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21절).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귀에 듣기 좋은 말을 전할 그의 친구들이나 그를 따르는 자들을 의미하신 것이 아니라, 공정하게 들었던 사람들에게 물어 볼 것을 의미한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교훈은 그것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것이다. 공정하게 판단하려는 자들은 그 교훈에 대해 증거하지 않을 수 없다.

(5) 재판관들이 그를 심문하고 있는 동안 그 곁에 서 있던 종들은 주님을 능욕하고 있었다(22,23절).

1)하속들 중 하나가 주님께 비열한 모욕을 가했다. 이 무례한 하인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22절)고 하였다.

첫째, 그는 주님을 쳤다. 즉 그가 주님께 일격을 가하였다는 뜻이다. 아무 말도 없고 잘못도 없는 사람을 때리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게다가 손을 결박당한 사람을 때리는 것은 비겁한 짓이었다. 또한 법정에 선 죄수를 때리는 것은 야만적인 행위이다. 이것은 법정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치안 방해였지만 재판관들은 이를 묵인하였다.

둘째, 그는 건방지고 오만한 태도로 주님을 제재하였다. 제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마치 복되신 예수 님이 그의 우두머리에게 불손하게 행동하는 거칠고 무식한 죄수라도 되는 양 그는 예수께 제재를 가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될 것인가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예수를 친 것은 대제사장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으며,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행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말속에는 대제사장의 위엄을 지키기 위한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사악한 통치자들에게는 사악한 종들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그들의 두목이 핍박하려는 자들을 앞질러 괴롭히려 한다.

2)그리스도께서는 이 모욕을 놀라운 정도의 온유와 인내로써 견디셨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23).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다른 편 뺨을 돌려 대지 않으셨다. 이것으로 볼 때, 마태복음 5:39절의 말씀을 문자 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 본보기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이러한 경우에 우리가 스스로 보복을 한다거나 우리 입장에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우리에게 가해진 상해에 대한 분노는 항상 합리적이어야 하며 감정적이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대응이 그러하였다.

(6) 이와 같이 하속들이 주님을 능욕하고 있는 동안 베드로는 계속 그를 부인하고 있었다(25-27절).

1)베드로는 그 죄를 두 번씩이나 반복하였다(25절). 그가 대제사장의 종들과 함께 몸을 녹이고 있을 때 그들은 그에게 ‘너는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다. 아마도 베드로는 그렇다고 시인하면 잡힐까봐 두려워서 단호히 그것을 부인하여 ‘나는 아니라’고 말하였던 것 같다.

①그가 그 무리 속에 계속 끼여 있음으로써 그 시험 가운데로 자신을 밀어놓은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는 몸을 녹이려고 거기 있었다. 그러나 행악자들과 함께 몸을 녹이는 자들은 선한 사람들과 선행에 대해 점점 냉담해지며, 또한 마귀의 불 곁에 있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지옥 불에 떨어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②그가 재차 시험에 걸려든 것은 큰 불행이었다. 첫째, 간악한 유혹 자는 넘어지고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계속 그를 몰아댄다. 그러므로 이제는 한 계집종이 아니고 모든 종들을 통하여 그를 몰아낸다. 하나의 시험에 굴복하면 또 하나의 시험이 더욱 강하게 공격해 올 것이다. 사단은 우리가 물러날 때 더 세게 공격하는 법이다. 둘째, 사악한 동료의 위험성: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와 사귀려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쓴다. 우리가 사람을 선택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칭찬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선택에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한다.

③베드로가 전에는 그의 명예로 여겼던 것이 지금은 부끄러운 듯 ;나는 그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시험에 굴복한 것은 대단히 나약한 행위였다. 그리스도께서 찬사를 받고 존경받았을 때, 베드로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에 우쭐했었다. 이처럼 신앙이 널리 유행할 때 그 신앙으로 인한 명성에는 호의적인 듯이 보였던 많은 사람들이 그 신앙으로 인한 비난은 부끄러워한다.

2)그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죄를 범했다(26,27절). 여기서 그는 종들 중 하나에서 공격을 당하는데, 그는 말고의 친척으로 베드로의 거짓말을 자신 있게 지적하였다.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26절). 그러자 베드로는 다시 부인하였다.

첫째, 전에는 그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단지 의심쩍었을 뿐이었지만, 여기서는 그가 예수와 함께 있던 것을 목격한 사람에 의해 그의 신분이 밝혀지고 있다. 죄를 범하면서까지 고난을 회피하려는 자들은 더욱 죄에 말려들 수밖에 없으므로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진리를 드러내는 일에 용감하지. 이 종이 말고의 친척이란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이는 상황이 베드로에게 더욱 두려움을 가져다주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특별히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되며 피할 수 있는 한 그러한 상황은 피해야 한다. 친구가 부족한 사람은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비록 베드로를 기소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었지만, 그는 빠져 나왔으며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우리는 근거 없고 부질없는 두려움 때문에 종종 죄를 범하는 경구가 있다. 그러나 약간의 지혜나 결단력만 있다면 그 두려움은 충분히 없앨 수 있다.

둘째, 베드로의 굴복은 전에 못지 않게 비열했다.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27절). 죄의 일반적인 성격: 마음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된다'(히 3:13). 죄의 시작은 물 보가 터지는 것과 같아서 일단 둑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쉽사리 점점 악으로 빠져드는 법이다. 거짓말하는 죄의 특성: 이 죄는 여러 가지 죄를 만드는 죄이다. 하나의 거짓말은 그것을 지시해 줄 다른 거짓말을 필요로 하며, 이와 같이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된다.

셋째, 곧 닭이 울더라(27절). 본문에서 그의 참회에 대한 기록으로는 이것이 전부이다. 그가 참회하는 모습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하였다. 닭 울음소리는 다름 사람들에게 우연한 일이었으며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만, 베드로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던 것이다.

Ⅲ. 빌라도 앞에 서신 그리스도 18:28-40

우리는 본문에서 총독 관저 혹은 법정에서 그리스도가 로마 총독 빌라 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는 기사를 접하게 된다. 그들은 주님을 로마 법정에서 정죄함을 받게 하고 로마의 권력에 의해 처형되도록 하기 위해 그곳으로 서둘러 그를 끌고 갔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밟았다. (1) 주님을 보다 합법적이고 정식으로 처형하려 했다. 스데반의 경우처럼 군중을 선동해서 돌로 치는 것이 아닌 재판이라는 정식 절차를 밟아 처형하려는 것이었다. (2) 그들은 주님을 더욱 무난하게 처형하려고 하였다. 그들이 이 사건에 로마 정부를 개입시킨다면 폭동의 위험은 거의 없어질 것이었다. (3) 주님 자신에게 더욱 모욕을 가해 처형하려고 했다. 십자가형은 모든 처형법 중 가장 불명예스런 처형 법이었으므로 그들은 그 형벌로 주님에게 지울 수 없는 오명을 남기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던 것이다. (4) 저들은 비난을 덜 받고 주님을 처형하려고 하였다. 선한 일을 많이 행한 사람을 처형한다는 것은 남의 비난을 사게 마련이었으므로 그들은 이 악평을 로마 정부에 전가시키기를 원했다. 이것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악한 행동의 죄보다는 그 악한 행동으로 인한 악평을 더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기소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열정: 그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어 있을 때인 새벽이었다. 이제 주님을 손아귀에 넣자,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매달기까지 조금도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 했다. 둘째, 그들의 미신적 관습과 추악한 위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적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문 밖에 서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과의 접촉을 두려워했으므로 법정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이같이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보다는 관습상의 부정에 대해서 보다 철저했던 것이다. 이렇듯 관습상의 부정에 민감했던 그들이었지만 그리스도를 처형하기 위해 모든 율법의 정당성을 어기는 데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1. 빌라 도와 기소 자들 사이의 회담(29-32).

그들은 먼저 진술의 기회를 얻어 죄인을 고소하는 발언을 하였다(29-32절).

(1) 재판관은 기소 내용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관정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으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갔다’. 여기에 그를 칭찬할 만한 점이 세 가지 있다. 첫째, 그는 직무에 충실하였으며 매우 열심이었다. 공직자들은 자신의 편안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둘째, 그는 백성들의 기분을 잘 읽었다. 그는 “그들이 내게 오지 않고 불쾌하게 행동하면 저희 집으로 돌아가게 하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빌라 도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그들에게 나아갔다. 셋째, 그는 기소 내용을 요구함으로써 재판 규칙을 준수했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29절). “너희가 이 사람을 고소하는 죄목이 무엇이며, 그 죄에 대한 무슨 증거라도 있느냐?”

(2) 기소 자들은 주님이 행악자라는 막연한 기소내용으로 그에 대해 불리한 재판을 할 것을 요구한다.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30절). 이 말은 그들에 대해 다음의 사실을 암시한다. 첫째, 그들은 빌라 도에게 매우 무례하고 거칠게 행하였다는 점이다. 빌라 도는 그들에게 가능한 한 가장 조리 있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만일 그 질문이 매우 불합리하였다면, 그들은 그를 더욱 업신여겨 대답조차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그들은 주 예수께 대하여 엄청난 원한과 악의를 품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무죄가 입증될 수 있는 예수를 죄인으로 간주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는 행악자다’라고 주장한다. 선을 행하며 다니신 분을 행악자라고 하다니! 가장 많은 은혜를 베푼 사람들이 가장 못된 행악자로 낙인 찍혀 능욕 당하는 것은 결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셋째, 그들은 매우 오만했으며 자신들을 기만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제멋대로 재판하고 판결했던 것이다.

(3) 재판관은 주님을 그 유대인들의 법정으로 돌려보낸다(31절).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저희 법대로 재판하라(31절). 이 빌라도의 말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첫째, 어떤 학자들은 빌라도가 그들에게 남아있는 권력을 인정하고 그것을 행사하라고 아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빌라 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율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로 행사하라. 설혹 너희의 도가 지나치더라도 묵인해 주겠다.” 이같이 말한 것은 그가 유대인들을 만족시키기를 바랬으나 그들이 요구하는 일을 해 주는 것은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다른 학자들은 빌라도가 그들의 현재 상태가 약하고 예속되었다는 점을 들어 그들을 책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빌라 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너희 율법에 따라 그에게서 죄를 발견했으니 감히 할 수 있다면 너희 율법에 따라 그를 정죄하라”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빌라도가, 로마법에서는 결코 허용하지 않았던 피고의 진술을 기피한 재판을 모세 율법에서는 허용하고 있다는 듯이 여김으로써 그 법을 격하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4) 그들에게는 어떠한 재판권도 없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31절). 어떤 학자들은 그들이 생사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그들의 재판권을 부주의로 망각하고 로마의 재판정에 그를 넘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그들의 권한을 로마 당국이 제재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이 사실을 인정한 것은 자신들의 무례함을 속죄하며(30절).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였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리라(32절).그리스도의 말씀에 패배를 안겨 주려고 했던 자들까지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손길에 의해 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데 도움을 주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의 그러한 말씀은 그가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하셨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에 관해 전하신 두 가지 말씀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율법에 따라 그를 재판하기를 기피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첫째, 그리스도는 ‘자신이 이방인에게 넘겨지겠고 그들이 자신을 사형에 처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0:19, 막 10:33, 눅 18:32,33). 둘째, 그는 자신이 ‘들려서(마 3:14,12:32) 십자가에 못 박히리라'(마 20:19,26:2)고 말씀하셨다. 만일 유대인들이 그들의 율법대로 재판했다면, 주님은 돌에 맞아서 죽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로마인들에게 처형당하신 것은 필연적이었다. 로마 당국의 명령 때문에 그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처럼, 이제 그는 그들에 의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경우가 모두 성경 말씀에 일치하는 것이다.

2. 죄수에 대한 빌라도의 심문(33-38)

(1) 죄수인 주님이 법정에 섰다. 빌라 도는 문 앞에서 대제사장들과 얘기를 주고받은 후에 관정으로 들어와 예수를 끌어오라고 명했다. 빌라 도는 주님에 대한 재판에 들어갔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려 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2) 빌라도의 심문: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주님을 기소한 자들이 ‘그가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였다'(눅 23:2)고 그들의 기소 사실을 보도한다.

1)여기서 빌라 도는 주님을 기소할 만한 근거를 찾아내려는 의도에서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절). 어떤 학자들은 빌라도가 비난과 경멸이 섞인 투로 이 질문을 던졌다고 주장한다.

2)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요(34절). 너에게는 너 스스로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음이 분명하다.” 빌라 도는 직책상 로마 정부의 이권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주 예수의 어떠한 말씀이나 행적으로 인하여 위기에 처했다거나 손실을 입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라면 너는 나를 가이사의 적으로 몰아세우는 저들 자신이 정말 가이사의 적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일 빌라도가 마땅히 그래야 했듯이 이 문제에 대하여 알기를 원했더라면, 그는 예수에 대해 격분한 대제사장들의 진정한 이유가 주님께서 로마 정권을 타도하고 현세의 왕국을 세우는 데 있지 않았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기대에 만족하지 못하자, 실상 현 정부에 대해 불평하고 전복시킬 생각을 가진 가장 사악한 범죄자인 그들 자신이 주님을 고소하였던 것이다.

3)빌라 도는 그리스도의 답변에 분개하고 기분이 언짢아 한다(35절). 35절은 34절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다. 그리스도는 빌라 도에게 지금 묻는 말이 자신의 물음인가를 물으신다. 이에 빌라 도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내가 유대인이냐(35절). 빌라도가 “내가 유대인이냐”고 한 질문에 어떤 경멸이 들어있는지 살펴보자. 당시에 지각과 긍지를 지닌 사람이라면 유대인으로 간주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또한 그리스도는 빌라 도에게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말해 주었는가고 물으셨다. “그렇다”고 빌라 도는 대답한다.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35절). “그러니 나는 그들의 정보대로 일을 진행할 도리밖에 없노라”.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답변을 회피하셨다. 그래서 빌라 도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 무슨 일이냐?”

4)그리스도는 다음의 답변에서 빌라도의 앞 질문, 즉 “네가 왕이냐?”는 질문에 그가 어떤 의미에 있어서의 왕인가를 설명하심으로써 보다 완전한 대답을 하신다.

①그리스도의 왕국의 본질과 구조에 대한 설명: 본문에 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36절)고 기록되었다.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그의 나라를 소유하고 계시다. 그러나 그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 그 나라는 이 세상으로부터 세워지는 나라도 아니다. 그 나라의 본질은 세상 적이 아니다. 그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 중심에 이루어지는 나라로서 그들의 마음과 양심 가운데 세워진다. 그 나라의 방비와 지원도 세상적인 것에 속하지 아니한다. 그곳의 무기는 영적인 것이다. 그 나라의 목적이나 경향도 세상 적인 것이 아니다. 그 나라의 신하들은 비록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제자들도 아니며 이 세상이 좋아하는 자들도 아니다. 또한 그들은 세상의 지혜에 지배되지도 않으며 세상의 부로 부유하지도 않다.

②그리스도의 왕국의 영적 본질을 보여 주는 증거: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 우지 않게 하였으리라(36절).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를 구출하려는 무슨 소요나 시도도 없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싸우라고 명하시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세상 왕국의 멸망이 곧 그의 왕국의 성립이며 발전이라는 것을 아셨으므로 그를 따르는 자들이 싸우는 것을 아셨으므로 그를 따르는 자들이 싸우는 것을 금하셨다. “이제 너는 내 나라가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의 나라는 이 세상 안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이다.

5)빌라도의 다음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주님은 보다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37절). 빌라도의 명확한 질문:”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37절). 너는 자신이 왕국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는 네가 왕이지 않는냐? 설명해 보아라.” 우리 주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자신을 증거하신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37절). 즉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하였도다.” 비록 빌라도가 의미한 바와는 다르지만, 주님은 스스로 왕임을 인정하신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 하더라도, 그는 왕의 명예와 권위를 정당하게 주장하셨다. 주님은 자신을 설명하신다. 또한 그가 어찌하여 왕이실 수 있는가를 몸소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시려고’ 오셨음을 통해서 나타내신다. 그는 진리의 능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그는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위한 증인이요 또한 세상을 파멸시키는 죄악에 대적하는 증인이 되시려고 오셨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증거의 말씀을 통하여 그의 나라를 세우시고 또 보전하신다. 이 세상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사명과 목적은 “진리를 증거 하시는 것이었다.” 그는 진리를 드러내어 세상으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오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은 하나님께 관해 서나 또한 인간들을 향하신 그의 선하신 뜻에 관해서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요 17:26). 또한 그는 진리를 확증하시려고 오셨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통하여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기적을 통하여 신앙의 진실 됨을 증거 하셨다. 이제 그는 이 일을 행하심으로써 왕이 되시며 왕국을 세우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정신과 기풍은 진리 곧 신성한 진리이다. 사실상 그가 “나는 진리다”고 말씀하신 의미는 “나는 왕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진리에 대한 확고한 증거로써 세상을 정복하시며 진리의 전권 적인 능력으로 통치하신다. 그는 세상에 빛으로 오셨으며 낮의 태양처럼 통치하신다. 이 왕국의 신하들은 진리에 속한 자들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진리보다 더욱 위대하고 좋으며 더욱 확실하고 생생한 진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은혜와 진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임한 것이다.

6)이어서 빌라 도는 주님께 훌륭한 질문을 던지지만 그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38절). 그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말하고 나서 다시 나갔다. 이것이 훌륭한 질문이었음은 확실하다. 진리는 인간 정신이 추구하는 바 값비싼 진주와도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나 적어도 진리로 이해되는 것 외에 인간 정신에 의해 신뢰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일단 이런 질문을 던져놓고도 진리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견딜 만한 충분한 참을성이 없다. 또는 그들이 진리를 발견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겸손과 성실함을 겸비하지 못하고 있다. 빌라도가 이 질문을 제기한 의도는 확실치 않다. 아마도 그는 그리스도를 좋게 여겨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그 질문을 제기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학자들은 그가 재판관으로서 기소의 이유를 좀더 캐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일의 진실이 무엇인지, 이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 내게 말하라.” 다른 학자들은 그가 주님을 조롱하기 위해 질문하였다고 본다. 네가 진리에 대해 말하는구나. 진리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겠느냐, 아니면 그것의 정의를 내릴 수 있겠느냐?” 빌라 도는 마치 모든 종교를 희롱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무신론자처럼 주님과 그 기소 자 양측을 모두 조롱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그에게 대답하시자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리스도께서 빌라 도에게 진리가 무엇인지 말씀하려 하지 않으셨지만, 그의 제자들에게는 말씀하셨으며 또한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요 14:6).

3. 기소 자들과 죄수와 각각 회담한 후의 결과(38-40)

(1) 재판관이 주님의 친구로서 등장하였다.

1)그는 공개적으로 주님의 무죄를 선언하였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38절). 그리스도에게서 범죄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무죄에 대한 이 엄숙한 선언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①주 예수의 의로우심과 명예를 입증하는 것이다. 비록 주님께서 가장 악한 행악자로 취급되었지만, 그는 결코 그렇게 여겨질 분이 아니었다. ②그의 죽음의 목적과 의도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어떤 죄목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한 죄물로서 죽으셨으며,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합당함’을 보여주신 것이었다(요 11:50). ③유대인들은 주님에 대해 매우 격렬하게 고소함으로써 그들의 죄를 더욱 가중시켰다. 우리 주 예수는 무죄로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악자로 모함을 받으셨으며, 무리들은 그의 피를 목말라했다.

2)빌라도는 주님을 방면하기 위한 방책을 계획했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39절). 이 유대인의 왕을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이것은 마태복음 27:15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백성들에게 호소한 내용이었다. 아마 빌라도는 이 예수가 얼마 전 만해도 일반 백성들의 호산나 소리에 둘러싸여 입성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백성들이 예수의 방면을 요구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해방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축하하는 의미로 그들의 관례를 허용하였다. 그는 그 관례에 따라 예수를 그에게 놓아주겠다고 제안한다. 만일 빌라도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면, 그는 양심상 그를 방면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공정의 원칙보다 세상 적인 지혜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양편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 했다.

(2) 백성들은 주님의 대적으로 등장하였다.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40절). 그들이 얼마나 난폭하고 광분했는지 살펴보자. 빌라 도는 그 문제를 조용히 제시했으나, 그들은 그 문제를 격렬한 감정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소란과 소요로써 그러한 결심을 나타냈다. 대중의 소요에 의지하여 외치는 자들에게 이성과 정의가 결핍되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본문에서 간략히 기록되어 있듯이, 그들이 다른 사람을 내세운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불합리한 일인가! 바라바는 강도러라 .그러므로 바라바는 다음과 같은 인물이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파기한 자였다. 그래도 군중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요구했다. 둘째, 그는 공안과 개인의 번영을 깨뜨린 자였다. 강도들을 처형하라는 소란은 예루살렘에서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를 살리라는 소란이 있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죄는 곧 강도와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참으로 풍요롭게 해 주시는 그리스도보다는 오히려 이 죄를 택하는 어리석음을 자행하곤 한다.

#1-12 Sin began in the garden of Eden, there the curse was pronounced, there the Redeemer was promised; and in a garden that promised Seed entered into conflict with the old serpent.

Christ was buried also in a garden.

Let us, when we walk in our gardens, take occasion from thence to mediate on Christ’s sufferings in a garden.

Our Lord Jesus, knowing all things that should come upon him, went forth and asked, Whom seek ye? When the people would have forced him to a crown, he withdrew, ch.

#6:15|, but when they came to force him to a cross, he offered himself; for he came into this world to suffer, and went to the other world to reign.

He showed plainly what he could have done; when he struck them down he could have struck them dead, but he would not do so.

It must have been the effect of Divine power, that the officers and soldiers let the disciples go away quietly, after the resistance which had been offered.

Christ set us an example of meekness in sufferings, and a pattern of submission to God’s will in every thing that concerns us.

It is but a cup, a small matter.

It is a cup that is given us; sufferings are gifts.

It is given us by a Father, who has a father’s authority, and does us no wrong; a father’s affection, and means us no hurt.

From the example of our Saviour we should learn how to receive our lighter afflictions, and to ask ourselves whether we ought to oppose our Father’s will, or to distrust his love.

We were bound with the cords of our iniquities, with the yoke of our transgressions.

Christ, being made a sin-offering for us, to free us from those bonds, himself submitted to be bound for us.

To his bonds we owe our liberty; thus the Son makes us free.

#13-27 Simon Peter denied his Master.

The particulars have been noticed in the remarks on the other Gospels.

The beginning of sin is as the letting forth of water.

The sin of lying is a fruitful sin; one lie needs another to support it, and that another.

If a call to expose ourselves to danger be clear, we may hope God will enable us to honour him; if it be not, we may fear that God will leave us to shame ourselves.

They said nothing concerning the miracles of Jesus, by which he had done so much good, and which proved his doctrine.

Thus the enemies of Christ, whilst they quarrel with his truth, wilfully shut their eyes against it.

He appeals to those who heard him.

The doctrine of Christ may safely appeal to all that know it, and those who judge in truth bear witness to it.

Our resentment of injuries must never be passionate.

He reasoned with the man that did him the injury, and so may we.

#28-32 It was unjust to put one to death who had done so much good, therefore the Jews were willing to save themselves from reproach.

Many fear the scandal of an ill thing, more than the sin of it.

Christ had said he should be delivered to the Gentiles, and they should put him to death; hereby that saying was fulfilled.

He had said that he should be crucified, lifted up.

If the Jews had judged him by their law, he had been stoned; crucifying never was used among the Jews.

It is determined concerning us, though not discovered to us, what death we shall die: this should free us from disquiet about that matter.

Lord, what, when, and how, thou hast appointed.

#33-40 Art thou the King of the Jews? that King of the Jews who has been so long expected? Messiah the Prince; art thou he? Dost thou call thyself so, and wouldest thou be thought so? Christ answered this question with another; not for evasion, but that Pilate might consider what he did.

He never took upon him any earthly power, never were any traitorous principles or practices laid to him.

Christ gave an account of the nature of his kingdom.

Its nature is not worldly; it is a kingdom within men, set up in their hearts and consciences; its riches spiritual, its power spiritual, and it glory within.

Its supports are not worldly; its weapons are spiritual; it needed not, nor used, force to maintain and advance it, nor opposed any kingdom but that of sin and Satan.

Its object and design are not worldly.

When Christ said, I am the Truth, he said, in effect, I am a King.

He conquers by the convincing evidence of truth; he rules by the commanding power of truth.

The subjects of this kingdom are those that are of the truth.

Pilate put a good question, he said, What is truth? When we search the Scriptures, and attend the ministry of the word, it must be with this inquiry, What is truth? and with this prayer, Lead me in thy truth; into all truth.

But many put this question, who have not patience to preserve in their search after truth; or not humility enough to receive it.

By this solemn declaration of Christ’s innocence, it appears, that though the Lord Jesus was treated as the worst of evil-doers, he never deserved such treatment.

But it unfolds the design of his death; that he died as a Sacrifice for our sins.

Pilate was willing to please all sides; and was governed more by worldly wisdom than by the rules of justice.

Sin is a robber, yet is foolishly chosen by many rather than Christ, who would truly enrich us.

Let us endeavour to make our accusers ashamed as Christ did; and let us beware of crucifying Christ afresh.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18장

=====18: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 여기서 지시하는 예수의 말씀은 17장에서 언급된 예수의 기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이 기도를 마치신 뒤에 예수는”이라고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장은 예수의 중보기도(17장)에 이어 수난 기사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공관복음에서 공통되게 다루고 있는 겟세마네 기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요한은 17장의 기도를 겟세마네 기도와 대체시키고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하므로써 요한은 예수의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노출시키지 않고대신 17장의 기도문에 나타난 예수의 위엄을 강조하려고 의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 예수가 기도를 마치고 이동한 장소의 방향으로 언급되는기드론 골짜기(공동번역)를 말한다. ‘시내’로 번역된 ‘케이마르로스'(*)는 ‘겨울에 흐르는 시내’라는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이 시내는 겨울 우기 동안에 약간의 물이 흐르고 곧 말라버리기 때문에 다른 계절에는 말라있는 건천(wadi)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기드론은 ‘백향목’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인데 구약 시대의 우상들이 불태워지던 곳이며(왕상 15:13)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자 반란군을피해 다윗이 건넜던 곳이기도 하다(삼하 15:23).

거기 동산이 있는데 – 기드론 시내 건너쪽에 있는 동산이라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는데 ‘동산'(* , 케포스)이라는 말은 요한만이 언급한다. 마태와 마가는 ‘겟세마네’라 불리는 곳으로, 누가는 ‘감람산’으로 언급하고 있다(마 26:36;막 14:32;눅22:39). 그러나 마태와 마가가 언급한 ‘곳’이 ‘장소’, ‘들’을 의미하는 ‘코리온'(*)인 것으로 보아서 ‘정원'(garden)을 의미하는 본절의 ‘동산’과 의미상 별다른 차이가없다. 또 ‘들어가다’는 말이나 4절의 ‘나아가'(* )라는 말로 보아서이곳에 어떤 울타리가 있음을 암시하므로 ‘케포스’나 ‘코리온’ 둘다 ‘정원’ 또는 ‘제한된 장소’로 이해할 수 있다(C.K. Barrentt). 특히 이곳은 2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예수와 제자들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이 장소를 가롯 유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따라서 이곳은 감람산에 있는 ‘겟세마네’라는 이름을 가진 ‘정원’ 또는 ‘농원’을 지칭한다.

그의 제자들 – 저자는 제자들을 복수로 언급할 분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점은 공관복음서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이름을 언급하여 세 명의 제자를강조하고 구별한 것과 대조된다.

=====18:2

가끔 모이시는 곳 – 요한은 예수와 제자들이 이 동산을 처음 찾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여러 차례 방문한 곳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누가는 보다 더 자세하게 이곳을’늘 하시던 대로'(눅 22:39, 공동번역) 찾으신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는 따로 떨어진 유다가 군대를 이끌고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즉 유다가 예수의 일행이 머문 장소를 알았던 것은 유다 자신도 예수와 함께 이곳을여러 번 방문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8:3

군대와 – 본문은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유다가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이끌고 온사람들의 신분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공관복음서는(마 26:47;막 14:34;눅 22:47) 유다가이끌고 온 사람들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 , 오클로스)라고만밝히고 있으나 요한은 군대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종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군대'(* , 스페이라)는 로마군 600명으로 구성된 한 부대 단위를 나타내기도 하며 또한 200여명으로 구성된 보병 중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C.k>Barrentt). 그런데 혹자는 ‘스페이라’를 안토니아 성에 주둔해 있던 작은 부대로 추측한다(Robertson, Lenski). 그러나 12절에서 지휘관으로 천부장이 언급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렇게 작은 부대는 아닐 것이다. 그들은 예수와 그의 11제자와 다수의 백성들이 함께 있을 것을 대비해 많은 수의 하속을 동행했을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하속들 – 공관복음서와 같이 요한도 역시 예수를죽게한 주동자로 대제사장 계급과 바리새파 계급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하속(下屬)들(* , 후;페레테스)은 성전 경비를 맡은 일종의 경찰로서 이해된다(C.K> Barrett). 한편 예수를 체포하러 온 무리 중에 대제사장도 포함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이들은 산헤드린이 보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Lenski)이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 유대의 지도층 전체가 개입되어 있음을 시사해 준다.

등과 홰와 병기 – 공관 복음서에서는 ‘검과 몽치’라고만 언급하는데(마 26:47;막14:43) 본문에서는 등과 홰까지 언급된다. ‘등’과 ‘홰’는 고대에 동의어였으나 후대에와서 등불과 횃불로 구분하여 사용되었다(C.K. Barrett). 한편 이때는 유월절(니산월14일) 전날이며 당시 월력(月曆)을 사용했던 정황으로 보아 거의 만월의 상태였을 것이다. 따라서 불이 필요치 않을 수 있으나 당시 상황이 구름으로 인해 흐린 날씨였거나 아니면 예수의 체포 시간이 한밤중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등과 홰를 언급한 것으로이해될 수 있다. 요한은 당시의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했던 장본인이기에 일기와 관련된 상황을 잘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후자보다는 전자의 추정이 본절에 더적합한 것 같다.

=====18:4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 이 말은 예수의 초자연적 예지(豫知)를 부여하기 위해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예수는 사역 초기부터 죽음의 위협이 있음을 예측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사역 도중 위협에 직면했을 때 예수는 자신이 예측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사역 도중 위협에 직면했을 때 예수는 자신이 예측하고 있는 그 고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아시고 위험한 피해 자리를 옮긴 적이 있었다(10:39;11:54). 그러나 지금은 때가 이르렀기 때문에(17:1) 피하지 않고 담대히 맞부딪치고 있다. 한편 혹자는 ‘아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스'(* ) 대신 ‘이돈'(* , ‘깨닫다’)을 사용해야 한다고주장한다(C.K. Barrett). 그 근거는 ‘에이도스’보다 ‘이돈’이 신적 예지와 관련된 용어이며 요한이 예수에 대한 신적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독특한 용어를 많이 애용했다는점이다. 본절에서 ‘이돈’이 사용될 경우 2절의 ‘에데이'(* , ‘알다’)와 구별이될 수 있다. 그러나 목적어 ‘그 당할 일을 다'(* ,판타 타 에르코메나)란 표현에 이미 예수의 신적 예지가 암시되어 있으므로 굳이 ‘이돈’으로 본문을 변경시킬 필요가 없다.

나아가 – 예수는 동산에서 나가셔서 잡으로 온 무리들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이같은 묘사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자발적 체포를 강조하고 있으며 당당하고 권위있는 예수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요한은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이적대자들에 의한 단순한 처형이 아니라 구원사적 맥락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예수가 섭리를 자발적으로 수용했음을 강조한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 예수께서 체포하러 온 자들 앞으로 나아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에는 예수의 권위있는 위엄이 나타나 있으며, 예수가 무기력하게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다하기 위해 당당하게 체포됨을 묘사하기 위한 저자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본절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의 체포나 죽음을 위엄있는 구속사적 드라마로 이해하게 된다.

=====18:5

나사렛 예수 – 예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언급된 본문은 나사렛(* , 나조라 이온)이란 형용사를 첨가하고 있다. 이와같은 형태는 본서에서는 예수의 명패에 쓰인 칭호에서(19:19), 그리고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전할 때(1:45, *, 아포 나자렛, ‘나사렛에서 온’) 언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름 앞에 지명을붙여 사용한 것은 아마도 예수의 출생지를 밝히려 했던 의도에 따른 것임과 동싱 동명이인(同名異人)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내로라 – 예수는 ‘나사렛 예수’가 자신임을 아주 짧은 말로 밝힌다. ‘내가…이다'(* ,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출 3:14) 간결하면서도권위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단순히 자신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시기 위해 이표현을 사용했다. 요한은 예수의 자기 계시를 강조하기 위해 공관복음서 저자와 달리이 표현을 부각시켰다.

유다도 함께 섰더라 – 이는 유다가 예수의 맞은편에 적대자들과 함께 서 있음을 묘사해 준다. 정면으로 예수와 마주하고 있는 유다는 배신자로서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편 공관복음서와 구별되는 점은 유다가 예수에게 입맞추어 예수를 체포케하는 행위가 언급되지 않고 예수가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예수의 권위와위엄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묘사한다는 점이다.

=====18:6

저희가 물러가서…엎드러지는지라 – 본문은 예수가 ‘내가 그이다’라고 말하자 나타난 반응을 묘사한 것으로 예수의 신적 권위를 묘사해 주고 있다. 즉 이 말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인 ‘나는 스스로 있는자'(* , 에고 에이미 호온)라는 출 3:14의 70인역(LXX)을 연상했기 때문에 적대자들이 두려워 물러서며 엎드리게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예수의 신적 권위가 강조됨은 물론 예수의 승리자의모습으로 죽으셨음이 확인된다.

=====18:7

물으신대…하거늘 – 4절과 동일한 질문이 반복되고 5절과 똑같은 대답이 반복되고있다. 이것은 예수의 독자성, 즉 예수가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어 체포된 것이 아님을거듭 확인해 주고 있으며 동시에 예수의 권위있는 위엄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가깔려 있다. 한편 요한은 5절의 ‘대답하되’를 본절에서는 ‘말하되’로 바꾸어 표현했다.이는 같은 말의 반복을 싫어하는 요한의 습관에 따른 것이다.

=====18:8

이 사람들의 가는 것 – 예수는 적들이 찾고 있는 예수가 자신임을 거듭 확인시키고대신 자신과 함께 있던 제자들은 자유롭게 갈수 있도록 하라는 제안을 하고 있다. 즉자신을 내어 놓고 제자들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한다. 이것은 요한의 독특한 자료로막 14:50에서 언급되는 제자들의 도주와 대조되고 있다. 이것은 요한이 공관복음서 저자와 달리 제자들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밝혀 제자들을 호의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수의 이같은 행동은 10:11에서 예견된바로서 이는 예수의 자신이 자발적으로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18:9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 예언의 성취를 나타내는 본문의 어투는 본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문구이다(C.K.Barrett, A.T. Robertson). 여기서 성취된 예언은 17:12을 가리킨다. 특히 17:12에서 언급된 멸망의 자식이 여기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이미 유다가악의 세력에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예언의 성취에 관한 언급은 예수 자신의말을 성경적 권위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18:10

시몬 베드로 – 본절에서 베드로의 이름이 히브리식 이름과 함께 쓰이고 있다. 즉’바요나 시몬'(마16:17) 또는 ‘요한의 아들 시몬'(1:42;21:15)으로 언급되지만 주로’시몬’이란 말만을 덧붙여 ‘시몬 베드로’라고 호칭하게 된다. 여기서 베드로가 칼을사용하여 적들에게 대항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칼을 사용한 자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마 26:51;막 14:47;눅 22:50). 아마도 공관복음서는 칼을 사용한 자의 신분에 해가 돌아가지 않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요한 복음은 공관복음서보다 훨씬후대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이름을 밝혀도 본인에게 아무런 영형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여 베드로의 이름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검을 가졌는데 – 눅 22:36-38에 따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검을 휴대하도록 지시하였고 제자들 중에서 검 두 자루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공격용으로 준비된것으로 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눅 22:36-38 주석 참조). 왜냐하면 칼 두 자루로무력에 해당한다는 것은 상식 밖이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유월절에는 무기를 휴대할수 없도록 규제되었으므로(C.K. Barrett, Robertson) 베드로가 무기를 소지한 것은 불법이었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베드로가 열심당원이었다고 할 증거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칼은 아마도 위험한 순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감지한 베드로가 호신용으로 준비해 둔 단검으로 보인다.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 마태와 마가는 어느쪽 귀인지 언급하지 않지만 누가와요한은 동일하게 오른쪽 귀를 잘랐다고 언급한다. 누가는 역사가로서 당시의 정황을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통해 ‘오른편’이란 형용사를 사용했으며 요한은귀를 자른 장본인으로 ‘시몬 베드로’라는 이름을 밝힌 것처럼 잊을 수 없는 그 밤의사건을 세밀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 형용사를 사용했던 것같다. 한편 본서에서는 ‘베어버리니’가 ‘아페콰센'(* )으로 언급된 반면 공관복음서에서는 ‘아페일렌'(* )으로 기록되었다. 이 차이는 요한이 공관복음서에서 그의 사용되지 않는 독특한 용어를 종종 언급하는 데서 발생한 것이므로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아무튼 눅 22:49에서는 한 제자가 예수에게 칼을 사용해도 되느냐고 물었던 것으로 진술되고 있으나 본서에서의 베드로의 행동은 예수의 의사와 무관하게 갑자기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말고 – 귀가 잘려나간 대제사장의 종을 가리키는 이름인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본서에만 언급되고 있다. 이것도 역시 사건 현장을 사실적으로설명함으로써 신뢰성을 높이고 당시의 정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18:11

검을 집에 꽃으라 – 칼을 사용한 베드로에게 보인 예수의 반응은 칼을 놓으라는 명령인데 공관복음서에서는 마태복음만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마 26:52). 그리고 이표현대신 누가는 잘리워진 귀를 만져 낫게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눅 22:51). 특히마태복음은 칼을 사용한 사실에 대해 채강하고 훈계하는 장면을 관심 깊게 묘사하고있는데 반해 누가복음은 원수를 치료하고 싸매는 모습을 통해 사랑과 화해의 실천자로서의 예수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본서는 메시야적 사역에 깊은 의미를 두었으므로칼 사용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 – 본서에서 ‘잔’이라는 말이 본절에서만 나타나고 있으며 공관복음서에서 언급된 잔의 의미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막 10:38, 39;14:36 주석 참조).특히 본서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행해졌던 예수의 기도가 본절에서 함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눅 22:42). 여기서 잔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겪어야 할 수난을 의미한다.그러나 이 수난의 잔이 우연히 발생된 것이아니라 죄악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임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는’아버지께서 주신’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공관복음서에 비해 하나님의 예정을 매우 강조하는데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운명이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 본문은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 기도 내용을 함축한 듯하다. 즉 아버지의 뜻이라면 잔을 마시겠다고 하는 예수의 결단을(마 26:42;막 14:36;눅22:42) 좀더 담담하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미 예수는 이 수난의 길이필연적으로 걸어가야 할 자신의 길임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어 순종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칼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길을막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마 16:21-23).

=====18:12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 – 요한은 최종적으로 예수를 체포한 사람들을 밝히고 있다. 3절의 언급과 다른 점은 ‘천부장’이라는 구체적 직위를 명시하고 있다는사실이다. 천부장은 문자 그대로 1000명으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렛(C.K. Barrett)은 천부장에 해당하는 본절의 헬라어 ‘킬리아르코스'(* )가 로마군의 한 부대의 지휘관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는 어떤 규모 부대의 지휘관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역 성경 중(RSV)에서는 바렛의 견해와 같이 단순히 ‘Captain’이라고 번역되어 지휘관적인’천부장’이 아니라 규모가 작은 부대의장임이 암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견해는 다음두가지 추정에 의해 부정된다. (1)요한으로 추정되는 15절의 제자는 대제사장과 서로 알고 있었으므로 그곳에 온 자가 ‘천부장’인지 직급이 그보다 훨씬 낮은 자인지 충분히알 수 있었을 것이다. (2) 민란의 이유로 산헤드린이 예수를 체포하러 군대까지 동원시켰으므로 ‘천부장’이 나섰을 것이다.

잡아 결박하여 – ‘잡아'(* , 쉰엘라본)는 ‘함께 잡다’란 말로 ‘체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결박하여'(* , 에데산)는 본절에서는 ‘묶는다’로 해석되지만 본래는 투옥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같은 표현은 시사해 주는 것은 단호하게 법을 집행하는 체포 현장을 묘사함과 동시에 11절에서 보여준 예수의 단호한 모습과 함께 예수의 체포 역시 간결한 용어로 표현하여 예언의 전격적인 성취를돋보이게 하는 데 있다. 또한 요한은 공관복음처럼 체포에 대한 예수의 설명을 첨가하지 않음으로써 생략법을 통한 예언 성취를 강조했다.

=====18:13

안나스 – 안나스는 눅 3:2;행 4:6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누가는 안나스 직책을 대제사장 가야바와 함께 언급함으로써 안나스가 대제사장인 것처럼 이해하게도 한다. 허나 요한은 안나스의 직책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해 대제사장 가야바와 구분함으로써당시 안나스는 대제사장이 아님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안나스는 A.D. 6-15년 사이에대제사장의 직책을 맡았던 사람인데 그에게 아들 다섯이 있었다. 그 아들들 역시 제사장을 맡았었다며 본문에 언급된 사위 가야바도 대제사장이었다. 본래 대제사장은 종신적이었으나 로마의 지매가 시작된후 대제사장직이 막대한 부와 권력에 의해 좌우되어 로마에 대한 적극적인 추종자들에게 주어짐으로써 자주 교체되었다. 안나스 역시로마 총독 그라투스(Gratus)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런데 무리들이 예수를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데려가지 않고 그의 장인 안나스에게로 데려간 이유가 무엇인지 본문에 언급되지 않아 알수 없다. 아마 안나스는 대제사장 직위에서 폐위 당했으나 그의 사위가대제사장이었으므로 대제사장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졌던 사람으로 짐작된다.

그해의 대제사장 – 본문과 동일한 언급이 11:49에서 나타난바 있는데 ‘그해’라는단어는 제사장직이 1년으로 끝나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체포되던 역사적인 해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언급된 가야바는 약 20년 동안 대제사장직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C.K. Barett).

=====18:14

가야바는…권고하던 자러라 – 가야바는 예수께서 사역을 하였던 기간에 대제사장으로 활동하던 자였다. 본절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11:50을 가리킨다. 유대 백성들이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들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그것이 필경은 로마의 공격을 초래하리라는 염려에서 그는 ‘산헤드린의 회원들에게 예수를 죽이는것이 모두를 위하여 유익하다’고 말했었다. 이러한 그의 권고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에는 예언적 의미로 예수의 죽으심과 결부되었던 것이다(11:51, 52).

=====18:15

다른 제자 – 베드로와 더불어 체포되어 끌려가는 예수의 뒤를 따라갔던 두 제자 가운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제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다. 아리마대 요셉(19:38)이나 니고데모(3:1-15;7:50-52;19:39)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가하면 저자의 동생인 야고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Godet, Watkins) 그 이름을 밝히지않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즉 요한 자신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Lenski, Robertson)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그러나 여기에 제기될 수있는 문제는 한낱 갈릴리 어촌의 어부에 지나지 않는 요한이 어떻게 유대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 안나스와 친분관계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혹자는 요한이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기 때문에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는 실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오히려 요한이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지 못했던 자신의 나약했던 당시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그제자가 자신이라고 밝히지 않았을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그리고 본절의 설명을 통해 베드로와 자신이 어떻게 그 법정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독자들에게 알려주어 법정안에서의 모든 일들이 직접 두 제자에 의해 목격된 진실임을암시해준다.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 – 이 제자가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문지키는 여종에게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 문을 통과해 들어갈 수 있었던 데서 입증된다. 여기서 ‘아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노스토스'(* )는 어느 정도의 친밀성을나타내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이 말은 ‘친한 친구’, ‘친척 관계’ 또는 ‘형제’를뜻할 수 있지만(Barrett) 그런 정도의 관계는 아닐지라도 그가 안으로 들어갈 때 문지기로부터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결코 단순한 관계가 아닌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다드(Dodd)는 ‘그 사람이 대제사장과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제사장 출신이거나 아니면 대제사장과 관련된 일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제사장이었다고 단정한다.그러나 제롬(Jerome)은 이에 반박하면서 ‘기독 교회의 사제’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이런 주장은 거의 근거가 없으므로 타당하지 않다.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 여기서 ‘뜰'(* , 아울렌)이 울타리 안의뜰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산헤드린의 집회장소 안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여기서안나스가 예수에게 심문을 하는 데(19-24절), 이 심문이 안나스 개인에 의한 비공식적인 것이라면 ‘안뜰’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산헤드린에 의한 심문이 시작되기 직전에 있었던 것이라면 산헤드린 집회 장소의 안뜰이라고 볼 수 있다(Barrett). 안나스가심문 후에 예수를 그해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에게 보낸 점 그리고 본절에서 ‘집 뜰’이라고 진술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18:16

다른 제자가…데리고 들어왔더니 – 베드로가 체포되어 끌려가는 예수를 왜 따라왔는지 분명치 않다. 10절에서와 같이 자기의 스승을 구출하거나 복수를 하기 위해 따라왔을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자기 혼자서 그들의 손에서 예수를 구출한다는 것은 불가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스승인 예수의 신변에 어떤일이 일어날 것인지 걱정이 되어 따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13:38)는 말씀을 이루려는 주님의 섭리가 있을 수도 있다. 본문에 의하면 베드로는 문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따라오기는 했지만 예수의 제자로서의 신분이 드러날 경우 자기의 신변에 위험이 있을 수있었기 때문에 감히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거기에는 자기의 칼에 상처를 입었던 대제사장의 종(10절)도 있었을 것이므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베드로가 들어오지 못한 것을 안 ‘다른 제자’가 문 지키는 여종에게말하여 베드로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였다. 그 다른 제자가 처음 들어갈 때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은 사실을 언급한 것에 대해 다음 세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1)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2) 내부의 사정을 그가 미리 알아보기 위함이다. (3) 들어가기 힘든 그곳에 베드로도 확실히 들어갔음을 밝히기 위함이다(L. Morris). 본문이 전개되는 과정으로 보아 여기서는 첫번째추정이 개연성(蓋然性)이 높다.

=====18:17

문 지키는 여종 – 이 말의 헬라어 ‘헤파이디스케 헤 뒤로로스'(*)는 비슷한 표현의 반복이라고 생각된다(C.K. Barrett). 16절에서는 ‘헤파이디스케’가생략된 채 ‘헤 두로로스’ 만으로 ‘문 지키는 여자’를 표현했다. 그리고 본절에서는 그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어린 소녀’ 또는 ‘하녀’를 의미하는 ‘헤 파이디스케’를 첨가시켰다. 요한은 ‘헤두로로스’를 반복함으로써 베드로가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음과, 베드로가 부인하게 되는 정황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마가는 베드로에게 첫번째 질문을 한 여자가 ‘대제사장의 여종’이었다고 전해주며(마 14:66, 67) 마태와 누가는 단지 ‘한 여종’이었다고 전해주고 있다(마 26:69, 70;눅 22:56-57). 여기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베드로에게 첫번째 치욕스런 부인(否認)을 하도록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여종이라는 점이다. 하찮고도 연약한 여종 앞에서조차 베드로는 담대함을 가지지못하고 주님을 부인하는 비겁함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베드로의 초라한 모습은 그가예전에 보여 주었던 용기있는 언행이 얼마나 인간적인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던가를잘 보여준다(13:37). 너도…

하나가 아니냐 – 이 말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1)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는 다른 제자’와 같이 너도 이 사람의 제자가 아니냐”는의미로 여종의 질문을 해석하는 학자가 있다(Barrett). (2) ‘너도 다른 많은 사람의제자 중 하나’라는 표현은 ‘다른 제자’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에 대한 것이므로 ‘너도’는 예수의 모든 제자들과 관계있는 표현이다. 따라서 후자의견해가 타당하다.

=====18:18

추운 고로…쬐더라 – 유월절은 양력으로 3, 4월경이므로 밤에는 다소 쌀쌀한 날씨였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 특별하여 대제사장의 하속들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했다. 그래서 마당에 불을 피워 쬐고 있었다.

본문에 숯불 – 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드라키안'(* )은 매우 오래된 말로 신약성경에는 본절과 21:9에만 나온다. 이에 대해 모리스(L. Morris)는 요한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여러 사람들이 둘러서서 불을 쬐는 자리는 몸을 숨기고 추위를 피하는 데에도 적당한 장소라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한편 ‘대제사장을 아는 다른 제자’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없는데이 때문에 ‘이 제자’의 등장이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를 서술하기 위해 저자가 등장시킨 인물이라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는 듯하다(15절 주석 참조). 또한 예수를 체포하여안나스에게 인도한 병사들에 대한 언급도 없는데 아마 이들은 자기들의 숙소로 돌아갔을 것이다.

=====18:19

대 제사장 – 예수께서 체포당하신 해의 공식적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으며(13절)예수가 붙잡혀 온 곳은 안나스가 있는 곳이었다(13절). 따라서 본문의 ‘대제사장’은 안나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24절을 볼때 더욱 명확해진다. 그런데 혹자는 본문의 대제사장이 가야바를 가리킨다고 보고 안나스는 단지 원로로서 참관한 것이라고 한다(Godet, Westcott). 이러한 해석은 다른 복음서들이 안나스에 의한 심문을전하지 않고 가야바에 의한 심문만을 전하고 있는 것과 일치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된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안나스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안나스앞에서의심문은 유죄를 위한 예비 심문이라고 보는것이 타당하다. 즉 요한은 안나스에 의한 예비심문을 전해주는 것이고 다른 복음서들은 가야바에 의한 공식 심문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해의 대제사장이 아닌 안나스(13절)을 가리켜 대제사장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본래 대제사장직이 종신적이었고 여전히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3절에서 요한은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것이 여러 사람이 대제사장직을 동시에 맡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것은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를 포함시켜 그렇게 불렀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안나스를 ‘대제사장’으로 부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 – 공관복음서들이 전하는 바 가야바의 질문과 본문이 전하는 안나스의 질문은 핵심이 다르게 나타난다. 즉 가야바의 심문은 예수의 인격 곧예수가 메시야인가에 초점이 있고(마 26:57-68;막 14:53-65;눅 22:54, 55, 63-71) 안나스의 심문은 예수의 의도들에 초점이 있다. 안나스의 심문은 예수의 의도들에 초점이 있다. 안나스는 두 가지를 묻는데 하나는 예수의 제자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제자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교훈에 관한 것이다. 전자는 제자들의 숫자, 성향,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 모으는 이유 등에 관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후자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예수는 가르침을 통해 어떤 것을 기대하는가 즉그의 교훈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예수가 제자들을 규합하여 무력혁명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11:47, 48 주석 참조). (2) 예수가 가르치는 중심 교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으로 예수의 가르침에서구약의 교훈에 반하는 이교적인 사상을 찾아내 정죄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18:20

드러내어 놓고 – 안나스의 두가지 질문 가운데 예수는 제자에 관한것은 대답하시지않고 교훈에 관한 것만 대답하셨다. 예수는 안나스가 묻는 질문의 의도에 대해 이미알고 있었으며 그의 물음 자체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안나스는 거만과 권위에도취되어 지극히 상투적인 질문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이교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인정할만한 혐의를 잡아 내려 했지만 예수는 자기의 모든 언행이 공개적이었음을 밝힘으로써안나스의 의도를 좌절 시킨다.

세상에 – ‘세상’은 주로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활동 영역으로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인간들이 사는 생활 터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의 교훈이 공개적이었음을 말하는 또다른 표현이다. 예수는 결코 은밀한 곳에서 비밀스럽고 파괴적인것을 가르치지 않았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회당과 성전 – 예수께서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는 것은 그의 가르침이 공개적이었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해 준다. 회당에서의 가르침은 6:59에, 성전에서의 가르침은7:14;8:20에 언급된다.

은밀히는 아무것도 – 예수는 쿰란 종파와 같이 은밀하게 공동체를 형성하여 엄격한제한을 두어 가르치지 않고 언제나 공개적으로 가르치셨으므로 산헤드린 회원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교훈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18: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 예수는 안나스가 질문을 통하여 포착하고자 의도한 어떤내용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의 물음 자체가 어리석은 것임을 지적하셨다. 안나스는 예수가 공개적으로 가르치신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들은 예수를 잡기 위해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질문한 것은 예수의 발언 가운데서 책잡을 만한 것을 찾아 내고자 함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재판 원칙은 피고가 자신에게 부리한 증언을 하도록 강요받을 수 없으며, 피고의 진술을 유죄의 근거로 삼을 수도 없게 되어 있다. 다만 증인들의 증언이나구체적인 물증의 객관성과 타당성에 의해서만 유죄를 선언할수 있었다. 이것을 알고있는 예수는 안나스의 교활한 음모에 일침을 가하면서 증인들을 요구하고 있다.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 예수의 이 요구는 잔꾀를 부리지 말고 적법한 방식으로증거를 제시하라는 뜻이다. 참고로 공관복음서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산헤드린은 예수를 심문함에 있어서 비록 거짓된 증인들이었지만 그들로 하여금 증언하게 하여 심문을 하는 모습이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마 26:59-63;막 14:55-59).

=====18:22

하속 하나가 손으로…쳐 – ‘하속’으로 번역된 ‘헤이스 파레스테코스 톤 휘페레톤’ (* )은 직역하면 ‘관원들 중 곁에 서 있었던 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 표현으로 보아 이 사람은 대제사장의 경호원이거나 산헤드린 경비원이었을 것이다. 그는 안나스를 대하는 예수의 태도가 불손하다고 느꼈던지 손으로 예수의 뺨을때렸다. 혹자는 본절의 ‘손으로 예수를 쳐’라는 표현이 손바닥으로 예수의 뺨을 친 것이 아니라 몽둥이나 채찍으로 때린 것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이는 헬라어 ‘라피스마'(* )의 초기용법을 따른 것이라고 본다. 초기에 이 단어는 몽둥이로 때리는 행위를 가리켰다. 그러나 점차 후기로 갈수록 그 단어는 손으로 뺨을 치는 행위를가리키는 것이 되었다(Meyer, Barrett, Bernard, Bultmann, Morris). 그리고 다드(C.H.Dodd)는 본 구절을 예수의 수난과 관련된 사 50:6과 연관지어 예수가 손으로 뺨을 맞았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본문의 묘사는 손으로 뺨을 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타당하다. 랍비 율법에 의하면 심문 중에 있는 피고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순순히 응해야 한다. 이것과 晥쳬臼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대제사장에게 설득당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에게 불경건한 자처럼 정의를 등지는 것이다'(Josephus, C. Apion, II). 그러나 이런 것은 지극히 권위주의적이고 편의주의적 발상일 뿐으로 피고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받지 않는다는 랍비적인 가르침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또한 대제사장 안나스의 한 하속이예수의 뺨을 친것은 정당한 선고에 의해 유죄가 확정되기 전에는 육체적 가혹 행위를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유대법에 위배되는 불법적 과잉 충성의 행위였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 어떤 사람의 뺨을 친다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존엄성을파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런 행위는 거의 금기시되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뺨을 맞은 것은 말할수 없는 수욕(羞辱)을 의미하며 또한 사 50:6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할수 있다.

=====18:23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며…나를 치느냐 – 본문에서 예수는 정당한 항의를 한다. 만약 예수가 한 말 가운데 잘못된 것이 있다면 대제사장이 정당하게 심판을 해야 한다.그러므로 대제사장의 심판이 내려지기도 전에 또는 그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이의 제기는 지극히 정당했다.그것은 안나스의 침묵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24절). 한편 본절에서 보여준 예수의태도는 ‘오른 쪽 뺨을 치는 자에게 왼쪽 뺨도 돌려 대라’는 그의 말씀(마 5:39)과 모순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말씀의 핵심은 상대방의 행위에 대하여 절대 복수하지 말라는 데에 강조됨이 있다.지금 예수가 보여준 행동은 정당한 발언을 한것일 뿐이었다.

=====18:24

예수를…가야바에게 보내니라 – 안나스는 자기의 의도가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고있으며 그리하여 더 이상의 심문을 포기하고 예수를 당시의 실제적인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었다. 요한은 안나스가 예수를 가야바에게 보냈다는 짧은 기록만을 남길 뿐공관복음서에서 자세히 언급된 가야바 앞에서의 심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마 26:57-68;막 14:53-65; 눅 22:66-71). 대신 요한은 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를 강조했다. 아마 요한은 가야바를 수장으로 하는 산헤드린이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내린 것이 거짓증언과 억지로 인한 것이었으며 사실상 예수는 무죄하였다는 사실이 빌라도 앞에서의 심리 과정에서 충분히 드러난다고 보아 가야바 앞에서의 심문 이야기를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안나스가 당시 가야바보다 실제적인 영향력을더 많이 끼칠 수 있었으므로 안나스 앞에서의 심문만 묘사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것이다.

=====18:25

사람들이 묻되…아니라 하니 – 이 장면은 18절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그 사이에예수는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당하고 있었다. 복음서들 사이에는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는 당사자가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나타난다. 마가의 경우 첫번째와두번째 질문자가 동일인으로 여종이며 세번째는 익명의 ‘어떤 사람’인 것으로 전해주고 있다(눅 22:54-62). 이에 비해 요한은 첫번째는 여종, 두번째는 ‘사람들’, 마지막 세번째는 베드로의 칼에 귀가 잘린 바 있던 대제사장의 종 ‘말고’와 인척 관계인 한 종에 의해 질문이 주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여러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들에 피워 놓은 불빛과 횃불에 의해 사람을 식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질문자의 성별이나 신분에관해서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을수 있다. 다만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람이 저자 요한이었다면 그곳에 참관했던 그의 기록이 가장 정확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아무튼 중요한것은 베드로의 부인을 비교적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강도가 질문의 횟수가 거듭함에 따라 강해지고 있음을알 수 있다. 가령 마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드로는 ‘맹세하고 부인’하기 까지 했다(마 26:72). 모든 인류를 위해 무고한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의 모습과 자기 한 몸의 안전을 위해 거짓을 말하며 자신의 맹세까지(마 26:33, 35) 저버리는 베드로의 나약하고 추한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18:26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 – 요한만이 증언하고 있는 바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은 대제사장이 종 말고였다(10절). 세번째 질문자는 이 말고의 친척으로 예수가 체포되던 사건 현장에 있었다고 자처하고 나섰다. 누가에 의하면 이 세번째 질문은 두번째 질문이 끝난 후 1시간 뒤에 있었으며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에따라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제시하고 있다(눅 22:59, 60). 아마 이 세번째 질문자는베드로의 말투를 통해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짐작했을 것이다. 한편 그의 질문은 질문자 자신이 말고의 친척으로서 현장에서 목격했다는 것과 베드로가 갈릴리인이라는 사실이 그가 예수의 제자임을 증거한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동반함으로써 베드로를 압박해 왔다. 이제 베드로는 순순히 자기가 예수의 제자임을 고백하던가 아니면 더 강하게부정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18:27

요한의 서술은 냉정하고 담담하다고 할 수 있을만큼 부가적인 설명없이 사실만을 간결하게 증언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마지막 질문에 직면하여 예수를 저주하기까지 하면서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마 26:74). 이러한 베드로의 부인 속에는 자기의 맹세를 단 몇 시간도 지켜내지 못하는 그의 나약한 모습과 불안이 상징적으로 잘 암시되어 있다.

곧 닭이 울더라 –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는 베드로의 맹세와 “닭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의 예언 중에 유감스럽게도 실현된 것은 베드로의 맹세가 아니라 예수의 예언이었다(13:37, 38). 요한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베드로는 닭 울음 소리를 듣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 심히 통곡했다고 전한다(마 26:75;막 14:72;눅 22:62).

=====18:28

가야바에게 관정으로 – 요한은 안나스가 예수를 가야바에게 보냈다는 이야기만 보도했을 뿐 산헤드린에서 예수가 질문받은 이야기는 전하지 않았다.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빌라도 앞에 서기 전에 유대 법정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 심문에서 예수는유대법에 의하면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는 신성모독 죄를 뒤집어 쓴다(마 26:57-66;막 14:53-64;눅22:66-71). 그러나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은 사형을 집행할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빌라도의 법정에 예수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본문의 의미이다. 한편 본문에서 ‘관정(* , 프라이토리온)은 라틴어’프라에토리움'(Praetorium)에 상응하는 말로서 본래로마 군대의 영내에 있는 장군의막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본문에서는 총독의 관저를 가리킨다. 유대지역을 다스리는 로마의 총독은 평상시에 가이사랴에 머물면서 총독의 직무를 수행했다(행 23:33).그러나 유월절과 같은 대축제일에 총독은 식민지 백성의 소요(騷擾)를 예방하거나 진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이때 총독이 머물던 관저의 위치에 대해 학자에따라 헤롯 궁전이었다고 보는 견해(Benoit, Barrett)와 안토니아의 성이었다고 보는견해가 옳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새벽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이'(* )는 로마의 시간법으로 제 4졍을 가리키는데 지금의 새벽 3-6시를 가리킨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예수를 빌라도의관저에 데리고 왔다는 것은 산헤드린에서의 예수의 심문이 밤사이에 있었음을 말해 주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의 불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것과 같은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 밤에 심문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2) 심문이 있는 당일에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불법이었다. 전자는 중요한 사건의 심문을 낮에 시행해야한다는 규칙을 어긴 것이고 후자는 심문한 당일에는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불법이었다. 전자는 중요한 사건의 심문을 낮에 시행해야 한다는 규칙을 어긴 것이고 후자는심문한 당일에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규정을 어긴 것이다. 한편 혹자는 본 구절속에는 세상에 대한 예수의 승리의 날이 동텄다는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Bultmann) ‘새벽’이란 표현은 시간의 경과를 알리기 위해 사용된 단어로 영적인 해석이 요구되지 않으므로 그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 예수를 관정으로 끌고간 유대인들은 예수만 넘겨주고 자기들은 관정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부정을 법함으로써 유월절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에 따른 규정이 아니라 랍비들이 정한규례였는데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이 규례를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행 10:28).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 본서에 의하면 예수를 빌라도의 법저에 세울 때까지아직 유월절 잔치를 먹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이미 유월절 식사는 끝났고 대축제 일이 첫날이 시작되었다(마 26:17-30;막14:12-26;눅 22:7-23). 이러한 공관복음서와 본서의 시간적 차이에 대하여 혹자는 공관복음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하고(Keim, Strauss), 반면에 다른 학자는 본서가 정확하다고 하는 등(Lucke, Meyer) 견해가 서로 엇갈리고 있는 데 혹자는 이 차이들을조화시켜 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런 시도를 하는 학자들은 본절의 ‘유월절 잔치’가 유월절 다음날부터 시작되어 절기 칠일 동안 계속 먹는 ‘식사’인 ‘차기가흐’Chagigah)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Lenski, Morris, Robertson).특히 유대인들은, 슬프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먹는 니산월 14일의 양고기 식사 후 축제적 분위기에서 니산월 15일의 ‘차기가흐’를 반드시 먹었다. 로버트슨(Robertson)은 이주장의 신빙성을 더 강화하기 위해 ‘파스카'(* , ‘뜻’)라는 단어에 대한 요한의 용법을 제시한다. 즉 요한이 ‘파스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식사’를뜻하는 것이 아니라 ‘축제’를 가리킨다는 것이며 절기 전체의 주간을 가리킨다는 것이다(39절;2:23). 이렇게 본다면 본문의 ‘유월절 잔치’는 유월절의 양고기 식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교절의 식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은 19:14에서예수가 빌라도 앞에서 심문당하던 날이 ‘유월절의 예비일’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므로 본서와 공관복음서는 분명히 하루 정도의 차이가 난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13:3의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본절에는 유대인들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희극적 아이러니(Irony)가 묘사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무교절을 유월절로 표현했는가?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구약 시대에는 무교절과 유월절을 엄격히 구분하였으나 구약 말기에 이르러 점차 구분이 희미해졌다. 따라서 초기 사도 시대에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일컬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모든 율법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도 의례적인 규법을 지키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8:29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 한은 아무런 보충 설명 없이 빌라도를 등장시키는데 이는 본서의 독자들이 이미 그를 잘 알고 있음을 암시한다. 빌라도는 A.D.26-36년 까지 유대 지방의 총독을 맏았었다.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에 의하면 빌라도는 잔인하고 오만하며 쉽게 분노하고 특히 유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유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완고하고 의식적인 종교적 편견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이런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종교적 규법을 인정하고 밖으로 나온 것은(28절) 다소 뜻밖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유대인들의 대절기였으며 따라서 민족주의와강하게 결부된 그들의 종교적 감정은 언제라도 폭동으로 분출할 수 있었으므로 가능하면 그들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쉬어야 할 새벽임에도불구하고 밖으로 나와 심문을 시작했다.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 빌라도는 로마의 재판절차를 좇아 먼저 고발자에게 피고의 혐의 사실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18:30

행악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사본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나타난다. 대부분의대문자 사본과 소문자 사본은 ‘카코포이오스'(* )를, 나머지 대문자 사본과 후기 시리아 역본 및 콥탁 역본은 ‘코콘 포이온'(* ),’코코포이온'(*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했다. 어느 독법이 정확한지 결정지을 수 없으나 본절에서 ‘에이미'(* , ‘이다’)의 미완료 과거형이사용되었으므로 명사형인 ‘카코포이오스’나 분사형인 ‘코콘 포이온’과 ‘코코포이온’이적합하다. 중요한 것은 어느 형태를 취해도 본질적인 뜻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이 말은 문자적으로 법률 위반 여부에 관계없이 심성 자체가 악하며 인격이 바르지 못한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유대인들의 고소는 다분히 감정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범죄사실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요한은 전하고 있지 않으나 공관복음서들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사형에 처함이 마땅하다고결정한것은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혀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마 26:63-66;막 14:61-64;눅 22:66-71).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에 관한 것이었고 로마 법정은 식민지 국민의 종교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재판권을 행사하지않았다. 이것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로마 법정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이끌어 내기 위해 비종교적인 죄목으로 예수를 고발했지만 그것이 전혀 구체성이 없는 ‘행악자’라는죄목이었다. 혹자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가리켜 ‘행악자’라고 고발하는 이 장면에서’세상’과 계시’의 대졀을 발견한다(Bultmann). ‘세상’은 ‘계시’를 반대하고 거부한다.’계시’가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했으므로 그들은 계시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세상은 끝내 계시를 거부하거나 벗어날 수 없고 계시를 눌러 이길 수도 없다(19:30;20:1-17). 한편 고소자들은 예수가 ‘행악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즉 지속적으로 악을 행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에이미’의 미완료 과거형 ‘엔'(* )을 사용했다. 이표현 속에는 예수가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반역음모를 꾀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18:31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 라도는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하여(30절) 좀더 구체적으로따져 묻지도 않고 재판을 거부할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빌라도가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를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제기하는 소송이 로마 법정에서 재판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 유대인자신들의 문제라고 여겼을 것이다. (2)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이미 예수를 죽이려 하고있음을 알았고 따라서 자기에게 재판을 하라는 것은 결국 자기들이 판결한 바를 추인해 달라는 것이므로 그런 무례한 행위에 대해 자기는 권세있는 자로서 결코 응할수 없다는 의사 표시일 것이다. (3) 빌라도는 본래 포악하고 거만한 자였으므로 총독으로서사형 선고를 내릴수 있는 자기의 권위를 강하게 내보이고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의 무력함을 스스로 고백하게 하려는 계산된 정치적 발언을 하였을 것이다. (4) 때가 유대인의 명절이니만큼 그들에게 넘겨 주고자 했을 것이다. 빌라도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과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품으로써 좋지 않았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자 꾀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본 구절은 네번째의 추정이 가장 타당하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하여(30절) 좀더 구체적으로 따져 묻지도 않고 재판을 거부할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빌라도가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를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제기하는 소송이 로마 법정에서 재판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의 문제라고 여겼을 것이다. (2)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이미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음을 알았고 따라서 자기에게 재판을 하라는 것은 결국 자기들이 판결한 바를 추인해 달라는 것이므로 그런 무례한 행위에 대해 자기는 권세있는 자로서 결코 응할 수 없다는 의사 표시일 것이다. (3) 빌라도는 본래 포악하고 거만한 자였으므로 총독으로서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는 자기의 권위를 강하게 내보이고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의 무력함을 스스로 고백하게 하려는 계산된 정치적 발언을 하였을 것이다. (4) 때가 유대인의 명절이니맡큼 그들에게 넘겨 주고자 했을 것이다. 빌라도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품으로써 좋지 않았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자 꾀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본 구절은 네번째의 추정이 가장 타당하다.

=====18:32

예수께서…어떠한 죽음으로 –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일 것을 결정하였고 이제 로마법정을 통해그 결정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만약 예수께서 로마법정에 의해 사형 집행을 선고 받는다면 그것은 곧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며 예수께서 이미 예고하신 바였다(3:14;12:32, 33). 마태의 기록에는 이것이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마 20:19).

=====18:33

다시 관정에 들어가 –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종교적인 규범을 준수하기 위해 관정에들어가지 않고 예수만 인도한 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빌라도가 왔다갔다 하며(38절) 심문을 해야 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본서 기록에 따르면 빌라도의 이 질문은 다소 갑작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끌고와 고발하기까지의 과정에는 이런질문을 유발시킬 수 있는 어떤 암시도 없었기 때문이다(28-30절). 그런데 공관복음서에는 이점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주어져 있다. 눅 23:2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예수를 다음 세 가지 죄목으로 고발하였다. (1) 예수가 유대인을 미혹하는 행동을 한다.(2) 가이사 즉 로마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지시킨다. (3) 자기를 가리켜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언한다. 본문에서 빌라도는 그 가운데 정치적 문제와 관련된 것에 대해 심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번째와 두번째 고소 내용은 빌라도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첫번째 고소 내용은 유대인들 내부 문제로서 그들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두번째 것은 빌리도가 이미 알고 있는바, 로마 황제에게 세금 바칠 것을 강요하는 총독에 대해 계속해서 반항해 온 것이 바로 완고하고 저항적인 유대인 자신들이었으므로 이제 그들이 자기들의 동족인 유대인 자신들이었으므로 이제 그들이 자기들의 동족인 예수를 가리켜 세금 내는 것을 금하는 자라고 고발하는 것이 신뢰할 수 없는 조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절의 질문은 세번째 고소내용인 정치적인 의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마 빌라도가 예수가 추구하며 가르쳐 왔던 영적 왕에 대한 의미를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6:15). 결국 빌라도의질문의 요지는 예수가 무력으로 유대를 로마로 부터 해방시킬 왕이냐는 것이다.

=====18:34

네가 스스로…다른 사람들이 –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가리켜 ‘자칭 왕 그리스도'(눅 23:2)라고 하는 자라고 고소했을때 그들은 빌라도가 그 고소의 내용을 정치적인 의미로 이해하기를 바랬음에 틀림없다. 만일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고소자의 의도처럼 정치적 선동자라는 측면자에서 빌라도가 이해했다면 예수의 답변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으며 반면 진실한 일부 유대인들의 경우처럼 이 말이 대망의 메시야를가리키는 종교적 의미로 빌라도에게 이해되었다면 예수는 긍정의 답변을 생각하셨을것이다. 그런데 35절로 미루어 볼 때 빌라도는 단지 유대인 고소자들의 말을 듣고 정치적 의미에서 예수께 물은 것 같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네 스스로판단하여 행동하라’는 정도의 의미로 하신 말씀이라하겠다.

=====18:35

내가 유대인이냐…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 예수의 질문에 대한 빌라도의 대답은자신의 개인적 호기심에 의한 심문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오직 빌라도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발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행위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빌라도는 총독으로서 유대인 중 누군가가 자칭 이스라엘의왕이라하며 세력을 규합하여 반로마적 투쟁을 주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 없었고 또한 체포되어 끌려온 예수의 모습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유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한다며 그를 고발했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보다 구체적인 질문으로 예수에 대해 알고자 했다.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 이 표현 속에는 한가지 분명히확인되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 재판이 이방인 총독에 의해 제기된 것이라는점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대제사장이 주도적 역할을 했음도 강조되어야 한다. 이것은예수의 죽음에 대한 궁극적 책임의 소재와 결부된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 의해 떠밀려 재판을 진행하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재판을 이끌어간 세력은 대제사장들로 대변되는 유대인들이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로 대변되는 유대인들이다. 빌라도는 직무상 재판에 관련된 책임을 져야겠지만 유대인들은 사건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 예수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그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한다. 결국 예수께서 하신 일들은 그의 나라를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가 한 일을 설명하는 것보다 그의 나라의 정체를 설명하는 것이 빌라도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내 나라’ 즉소유자가 예수인 그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왕인 나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지키고자 애쓰며 권력으로만 유지되고 힘이 질서의 원리인 그런나라는 아니다. 예수는 그 나라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빌라도에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아마 설명한다 하더라도 빌라도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그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기본적인 사실만을 말해줌으로써고소권에 관한 빌라도의 일차적 의혹을 해소시켜 주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내 종들이 싸워 – 예수께서는 자기의 나라가 세상에 속하니 않는 것임을 설명하는데 있어 단 하나의 단서를 제시한다. 그것은 싸움에 의해 획득되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속한 나라의 권력이란 예외없이 싸움에 의해 얻어지고 싸움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나 그의 추종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의 나라가 세상의 나라와는 전혀 다른 질서와 원리에 의해 세원진 것임을 증명해 준다. 그 나라는 사람이 통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나라이며(계 11:15) 힘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의 원리로 세워지는 나라이다.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 본문에서 예수는 자기가 로마 정부에 넘겨진 것이 아니라유대인들에게 넘겨졌음을 말함으로써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는데 유대인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8:37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 ‘그러면’ 이라는 표현은 ‘네가 왕이 아니냐’는 빌라도의 질문이 예수의 답변(36절)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해준다. 36절에서 예수의 답변 가운데 ‘내나라’라는 진술은 그것이 비록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예수가 왕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빌라도의질문은 긍정의 대답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그럴경우 공동번역이나 RSV의 번역처럼 “네가 왕이냐?” (so you are a king?)로 번역하는 것이 의미상 더 타당할 것이다. 혹자는 이 빌라도의 질문이 ‘그래도 그대가 왕이라는 말인가?’의 의미로 해석하여주장하지만(Morris)그보다가 진지한 자세로 질문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내가 왕이니라 – 비로소 예수의 긍정적인 대답이 주어지고 있다. 이 대답은 ‘네말이 옳도다’로 되어 있는 마가의 기록보다(막 15:2) 더 분명한 긍정을 나타내고 있다.예수가 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육적으로 말하자면 왕가인 다윗의 가문에서 출생했고(마 1:1;롬 1:3), 영적으로 말하자면 성삼위의 제2격인 하나님의 아들이다(롬1:4). 그래서 서편의 저자들은 하나님을 ‘왕’이라고 표현했다(시 47, 48편). 그리고사사 가드온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곧 택함을 받은 백성의 ‘왕’이라고 고백했다(삿8:23). 이처럼 하나님은 왕이시기에 성자 예수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 왕이 되신다(고전 15:25).

났으며…왔나니 – ‘났으며’는 예수가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참된 인성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하는이단처럼 인간의 몸을 입은 것처럼 보였을 뿐 실제로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라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완전한 인간이었다. 한편 ‘왔나니’라는 표현은 그의 왕국이 이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본래적 존재도 이 세상에 기원을 두고 있지 않음을말해준다. 예수는 자신의 기원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16:28). 이것은예수가 신적인 본성을 지니고 계신 존재임을 의미한다. 참 인간이면서 참 하나님이신예수의 본성은 신비 그 자체이다.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 본 구절 바로 앞에 진술된 ‘이를 위하여'(*, 에이스 투토)는 예수가 본구절을 강조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예수는 그 자신이하나님의 말씀이며(1:1-3), 진리이다(14:6). 그 자신이 진리인 예수는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을 생명에로 인도하는 것이었다(14:6).

진리에 속한 자는…듣느니라 – 진리에 속한 자만이 진리이신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본 구절은 다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으면아무도 예수께 올 수 없다는 사실(3:27;6:44, 45, 65)과 본절은 잘 조화된다. 따라서본 구절은 예정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 본 구절은 영적 진리에 무지한 빌라도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예수는 진리의 왕으로 진리를 말하고있으므로 만일 빌라도가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면 예수의 말씀을 이해했겠지만 그는 결코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니었기에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18:38

진리가 무엇이냐 – 이 질문은 다음 몇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너같은 자가어찌 진리를 알겠느냐? (2)’당신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에 대해서 나는 관심이 없다.’ 본 구절은 세상 사람들 특히 정치가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하찮은 회의주의(Scep-ticism)에서 비롯된 질문이다(Godet). 그들은 이상주의적이고 사변적인 문제에 대해일반적으로 무관심하다.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에게 질문을 던진 후 예수의 대답을 듣기 전에 곧바로 밖으로 나간것으로 보아 (2)해석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 빌라도는 예수에 대하여 어떤 적대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의 말에귀를 기울일 의사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 빌라도는 다시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바깥으로 나가(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28, 33절 주석을 참조하라) 예수를 심문한 후 얻은 자신의판단을 전했다. 그 결론은 예수가 사법적 처벌을 받을 아무런 혐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빌라도는 나름대로 공정한 재판장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비록 그는 예수의 말에귀를 기울일 의사는 없었지만 적어도 예수가 처벌을 받아야 할만한 행위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의도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그것을 사실대로 유대인들에게 전했다.

=====18:39

유월절이면…전례 – 빌라도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심문하기는 하였지만 재판장으로서의 자신의 직무를 유기(遺棄)하였다. 그는 자신이 말한 바 예수의 무죄를 확인하였으므로(38절) 유대인들의 동의를 물을 것도 없이 예수를 석방했어야 했다. 그러나빌라도는 그렇게 하지못하고 유대인들의 동의를 얻고자함으로써 우유 부단한 그의 성격을 노출시켰다. 아마 그는 자기가 관할하고 있는 지역의 지도자들이 고소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자기의 판단대로 밀고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빌라도는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석방시켜 주는 전례를 따라 예수를 풀어주고자 했다. 한 사람을 석방시켜 달라고 요청한 자들이 유대인들로 기록되어 있다(막15:8). 요한은 자세한 대화를 기록하기보다는 빌라도의 말에 초점을 맞추었으므로 유대인들의 요청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석방시켜주는 관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쉬나의 암시외에 자료의 불충분으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예수 당시에 그런 관습이 적용되고 있었던 사실만큼은 확실하다고 여겨진다. 아마 그 전례는 로마 통치자들이 유대인들에 대한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유화(有和)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유대인의 왕을…

원하느냐 – 빌라도는 예수를 가리켜 유대인의 왕이라고 표현하고있다. 혹자는 빌라도가 이명칭을 사용한 것에 대해 그가 예수를 위해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L. Morris). 그러나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예수를 고발한 유대인들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다고 볼수도있다. 따라서 굳이 표현으로써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자 한 것 같지는 않다. 아마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고소했던 내용 중 하나인 ‘유대인의 왕’이란 표현을 단순히 반복한 것 같다.

=====18:40

바라바라 하니…강도러라 – ‘강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스테스'(* )는 당시에 ‘게릴라’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C.K. Barrett). 바라바라는 반로마적 혁명 운동을 주도했던 정치법이었을 것이다(막 15:7;눅 23:19). 유대인들은 자가당착적(自家撞着的)인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 왕 즉 정치법으로 고소한 반면 진짜 정치범은 놓아 달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전혀 일관성도 없이 다만 예수에 대한 적개심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메시야를 죽이려고 혈안(血眼)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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