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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42 장 | 욥기 42장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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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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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2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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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0/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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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2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욥기 42. 42. 1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2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3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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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4/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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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성경 욥기 42장

42: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다> 그러자 욥이 여호와께 대답했습니다. 42:2 “주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아무도 주님의 뜻을 방해할 수 없는 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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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4/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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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2 KLB – 욥의 회개와 하나님의 축복 – Bible Gateway

42 그때 욥이 여호와께 이렇게 대답하였다. 2 “주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시므로 주의 계획은 그 어느 것도 좌절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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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1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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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42장 해석, 욥의 회복 – Daum 블로그

욥의 회복 욥42장 출처, 정리 *주제: “귀로 듣다가 눈으로 주님을 뵈오니” ▷드디어 욥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서막에 해당되는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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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6/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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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월) “욥기 42:1-17” / 작성: 김신년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없는 죄인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합니다. 멀리서만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자신의 실존이 어떤 모습인지 모른 채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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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9/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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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3월 13일. 욥기 42장. – 하늘품은교회

욥기 42장. 하나님을 아는 자의 마지막은 영광입니다. 1. 욥기의 마지막 장은 욥의 답변과 회개로 시작됩니다(1~6). 욥은 하나님의 위엄과 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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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apoom.or.kr

Date Published: 9/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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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2장
욥기 42장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욥 42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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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 2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WXGNCyfdLqQ

욥기 42

욥의 회개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결론 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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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2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8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쉬운성경 욥기 42장

42: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다> 그러자 욥이 여호와께 대답했습니다.

42:2 “주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아무도 주님의 뜻을 방해할 수 없는 줄 압니다.

42:3 ‘무식한 말로 내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라고 물으셨지요? 정말 저는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였고, 깨닫지 못하는 일들을 아는 체 하였습니다.

42:4 주님께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묻겠으니 너는 대답하여라’고 하셨지요?

42:5 주님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 저는 주를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42:6 이제 제 자신을 경멸합니다. 그리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42:7 여호와께서 욥에게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와 네 두 친구는 정말 나를 화나게 하였다. 너희들은 내게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않았다.

42:8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잡아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들의 죄를 위해 번제로 바쳐라. 그러면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이다. 나는 그의 기도를 듣고, 너희들을 너희 어리석음대로 다루지 않겠다. 너희는 욥과 달리 나에 대해 옳게 말하지 않았다.”

42:9 그러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은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고, 여호와께서는 욥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42:10 욥이 자기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 이후에 여호와께서는 그를 다시 번성케 하셔서, 그에게 전보다 두 배나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42:11 그러자 그의 모든 형제 자매와 전에 그를 알았던 모든 자가 와서 그와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욥에게 내리셨던 모든 재앙을 생각하며 그를 위로하고 슬퍼해 주었고, 각각 돈과 금고리를 욥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42: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처음보다 더 큰 복을 주셔서, 그는 만 사천 마리의 양과 육천 마리의 낙타와 황소 천 겨리와 당나귀 천 마리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42:13 그리고 욥은 일곱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42:14 그의 첫째 딸을 여미마라 하고, 둘째 딸을 긋시아, 셋째 딸을 게렌합북이라 불렀는데

42:15 온 땅에 욥의 딸같이 아름다운 사람이 없었고, 욥은 그들에게도 아들과 같이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42:16 그후, 욥은 백사십 년을 더 살면서, 자손을 사 대까지 보았고

42:17 오래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냉수한그릇 창고

◈욥의 회복 욥42장 출처, 정리

*주제: “귀로 듣다가 눈으로 주님을 뵈오니”

▶드디어 욥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서막에 해당되는 1~2장>과 <종장에 해당되는 42:7~17절>을

산문으로 되어 있는 <틀frame 이야기>라고 부릅니다.

그동안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시문으로 된

욥의 탄식과 세 친구들과의 뜨거운 설전,

엘리후의 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욥의 답변을 거쳐

마침내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욥기에서 특이한 것은

왜 의로운 욥이 불의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명확하게 대답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인과응보적인 해석이 옳은지 틀린지 직답을 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엘리후가 제기했던 고난의 목적론적 해석,

즉 교육적 해석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습니다.

만일 욥기의 저자가 고난의 신비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을

명쾌하게 진술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면

욥기는 아주 밋밋한 책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불가지론’ 혹은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물론 이런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불합리.몰이해 되어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믿음>입니다.

고난의 의미와 목적이 미궁 속에 빠지기에 욥기는 더욱 불후의 고전이 되었습니다.

욥기에는 그 대신에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와 은총이 크게 부각되었고

그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와 은총 앞에 선 인간의 근본적인 자세,

즉 겸손과 순종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욥기가 위대한 것은

인류사에 인간이 계속해서 겪게 될 고난의 신비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본문 말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1~6절에서 욥은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에 대해 두 번째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답변에서 욥은 자신의 비천함에 대해서 겸허히 인정했는데

두 번째 답변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그의 사고와 자세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둘째, 7~9절은 그동안 첨예하게 대립했던 욥과 친구들 사이의 논쟁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판결과 더불어 친구들들 위한 욥의 중보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친구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옳게 말하지 못했다고 평가하십니다.

그러므로 논쟁의 최후 승자로서 욥의 팔을 들어주십니다.

셋째, 10~17절은 욥이 회복되어 갑절의 축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욥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1.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에 대한 욥의 답변 42:1~6

하나님은 두 차례의 말씀을 통하여 욥의 독선을 완전히 꺾어 놓으셨습니다.

먼저 욥의 짧은 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세계 창조의 신비를 헤아리기에는

도저히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욥은 첫 번째 답변에서 매우 겸손해졌습니다.

비천한 자기가 감히 하나님께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느냐며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이라고 했습니다(40:4~5).

여기에서 욥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의 무능하고 무지한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다음에 혼돈과 허무와 악을 상징하는 괴물 짐승

베헤못과 리워야단도 장악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심으로써

욥이 이해하지 못하는 악과 고통의 혼란스러운 세계까지도

당신의 손안에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두 번째 대답에서 욥은 자기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주권적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욥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두 번째 답변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욥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해서 하나님과 화해한다는 사실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기 전까지는, 거의 대부분이 의견 불일치로 일관했습니다.

자신의 무죄 체험과 인과응보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욥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친구들과는 물론이고 하나님께도 끊임없이 불평과 원망을 토로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욥이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일치시켜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게 됩니다.

먼저 2~3절을 보세요.

1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2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차례씩이나 자기에게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욥은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적 자유와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욥은 의로운 자신이 왜 불의한 고통을 당하는가를 물으며

하나님의 정의에 강한 이의를 제기했었습니다.

자신의 이성으로, 즉 인과응보 신학으로서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부당한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바로 그 까닭에 부당한 고통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 같은 것은

아예 없다고 단정해버렸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제 자신이 겪는 부조리한 고통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와 창조 섭리 한 가운데 일어난

신비한 계획 중의 일부라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께 도전했다고 사과하며 자신의 과오를 뉘우칩니다.

사실 욥은 그토록 혐오하고 벗어나기 원했던 인과응보의 좁은 틀 안에

자신도 갇혀 있는 가운데, 오로지 그 원리의 잣대로만

자신의 고통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헤아리려고 하다보니

하나님의 계획은 최선으로는 혼돈이요 최악으로는 무(無)라는 결론에 도달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뒤

자신이 현재 당하는 고통이 자신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롭고 신비한 계획안에서 일어나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즉, 욥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욥기는, 인간의 단순한 고난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유 없는 고난>을 예표하는 책과 동시에,

그 고난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써 이겨나가는 <믿음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4절에서 주님의 말씀을 인용한 뒤 욥은 5~6절에서 아주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4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6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욥이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는 고백이 중요합니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은 친구들이 일러주는 말이나 소문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안 하나님입니다.

사실 욥은 세 친구들과 엘리후를 통하여 하나님에 관하여 수없이 들었습니다.

거기에는 정말 위대한 교리와 교훈도 있었고

금과옥조와 같은 지혜와 지식도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에 관한 위대한 정통 신학이었지요!

그런데 그 ‘들은 하나님’은 욥에게 어떤 위로도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답답함과 고통과 혼란만 가중시켰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주권적 자유와 은총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보게 된 것이지요!

☞ 귀로 듣는 신앙, 눈으로 뵙는 신앙 을 참조하세요.

▶6절 말씀은 번역상 논란이 심한 구절입니다.

6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이 말씀을 “티끌과 잿더미를 거부하고 포기합니다.”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신음과 탄식을 상징하는 티끌과 잿더미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고통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갖게 되었다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번역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현재 새번역 성경 그대로 욥이 자신의 과거 주장을 철회하고

겸손한 회개를 상징하는 티끌과 잿더미 위에서 뉘우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욥의 변화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 항의하고 불평했던 자세로부터 벗어나

사탄이 그토록 집요하게 의심했던,

‘아무 바라는 것 없이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음'(1:9)을

욥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1~12 욥의 까닭 없이 믿는 믿음

◑2. 하나님의 최종 판결과 욥의 중보기도 42:7~9

42:7절부터 다시 산문으로 돌아옵니다. 결론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욥기의 몸통 부분을 이루고 있는 욥과 세 친구들 사이의 세 차례에 걸친 대화에 있어서

과연 어느 쪽이 하나님에 대하여 옳게 이야기했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 나옵니다.

7 주님께서는 욥에게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한 것은,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엘리후가 욥과 세 친구들을 향하여 노를 발한 것처럼(32:2~5),

하나님 역시 친구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분노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종 욥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옳게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욥의 말이 옳았고, 친구들의 말이 틀렸기 때문이라는 는 것이지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의 이 말씀은 부분적인 판단이 아니라

욥기에서 전개되어 온 모든 발언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으로 봐야 하기에

욥이 하나님의 말씀을 두 번 듣고 나서

두 차례 말한 답변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동안 탄식하며 도전하며 불평했던, 비신앙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던

일체의 언어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즉, 도전적이고 불순종적이고 심지어 비신앙적인 것처럼 보였던

욥의 모든 발언을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욥의 회개는

자기의 죄과(자기 의와, 하나님 의심)를 인정하는 회개뿐만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창조주의 시각으로 전환해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세계와 공의를 보게 된 시각의 변화를 포함합니다.

즉, 욥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 진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친구들의 발언이

겉으로는 신앙적이며 모범적이며 정통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정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 경험에서부터 출발하여 진지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말했습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욥이 비록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악과 고통을 허용하실 수 있는 주권적 자유를 가지듯이,

욥 역시 보상이나 징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껏 탄식하고 항의할 수 있는 주권적 자유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크고도 넓은 주권적 자유는

이러한 인간의 주권적 자유까지도 용납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 형식이 탄식이나 항의나 불평 원망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진실한 경험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말할 때

그 말은 옳다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친구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그릇되게 말했다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8~9절을 보세요.

8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마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지고 가서, 너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용서하여 달라고 빌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않고, 어리석게 말하였지만,

내가 그대로 갚지는 않을 것이다.”

9 그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니, 주님께서 욥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욥이 친구들의 잘못을 씻기 위하여, 대신 번제를 드리라는 명령이지요.

이것 역시, 욥이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욥의 고난은 <이해하기 어려운,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친구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욥의 죄악을 추궁하고 회개를 종용했지만..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친구들의 과오에 대한 용서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번제물을 갖고 욥에게 가서

자기들을 대신하여 죄의 용서를 비는 번제를 드려달라고 요청했고

욥이 그대로 해서 이들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욥은 사탄을 이긴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친구들과의 대결에서도

최종 승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주목할만한 것은

욥은 그동안 심각하게 균열되고 소외되었던 사회적 관계도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니 세 친구들과도 화해하게 되었고

이를 필두로 해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하나 둘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3. 욥의 회복 42:10~17

욥이 친구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드렸는데

가장 먼저 욥의 재산이 회복되었습니다(10절).

10 욥이 주님께, 자기 친구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

욥의 재산을 회복시켜 주셨는데, 욥이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보다 배나 더 돌려주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욥의 재산을 회복시키신 것이 아니라

욥이 친구들을 용서해달라고 중보 기도한 다음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욥은 자기를 괴롭혔던 친구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할 수도 있고/안 할 수도 있는

주권적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역시 욥의 재산을 회복시킬 수도/ 안 시킬 수도 있는, 주권적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이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나

하나님께서 욥의 재산을 회복시켜주기로 결정하신 것이나

어떤 강압이나 부담감 때문이 아닌,

인격 존재가 누릴 수 있는 주권적 자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회복과 축복을 인과응보론적으로 해석하는 것,

즉 중보 기도했기 때문에 재산 회복이 되었다는 해석이야말로

욥기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물질의 회복은 진정한 회복의 서막에 불과합니다.

진짜 회복은 공동체적인 것이며 관계적인 것입니다.

욥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공동체적이고 사회 윤리적인 측면입니다.

욥의 회복은 단지 개인 신상의 회복에 그친 것이 아니고

주변 사람들과의 단절되고 소외된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욥의 회복은 자신의 건강이나 재산이나 자녀들의 회복에 그치지 않고

이웃과의 회복으로 점차 확대됩니다.

▶11절을 보세요.

11 그러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전부터 그를 아는 친구들이 다 그를 찾아와,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기뻐하면서, 먹고 마셨다.

그들은 주께서 그에게 내리신 그 모든 재앙을 생각하면서,

그를 동정하기도 하고, 또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저마다, 그에게 돈을 주기도 하고, 금반지를 끼워 주기도 하였다.

12 주님께서 욥의 말년에 이전보다 더 많은 복을 주셔서, 욥이, 양을 만 사천 마리,

낙타를 육천 마리, 소를 천 겨리, 나귀를 천 마리나 거느리게 하셨다.

욥은 전염성이 있는 악성 피부병에 걸려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 뒤

교외의 쓰레기장 잿더미에 앉아있었습니다(2:8).

사회적 죽음, 이것이 더욱 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을 멀리하고 조롱했던 일가친척과 이웃들이 하나 둘 욥의 집에 찾아와

위로하며 귀한 선물까지 주었습니다.

물질과 건강의 회복보다 훨씬 더 중요한 관계의 회복이 일어난 것이지요!

▶재산 회복과 이웃과의 관계 회복은

마침내 자녀 회복과 자신의 건강 회복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욥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일곱 아들과, 세 딸을 얻었습니다(13~14절).

13 그리고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다.

14 첫째 딸은 여미마, 둘째 딸은 긋시아,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고 불렀다.

흥미로운 것은, 아들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데

딸들의 이름은 구체적으로 열거되어있습니다.

‘잉꼬 비둘기’를 뜻하는 여미마, ‘육계화’를 뜻하는 긋시아,

그리고 ‘눈화장용 도구’를 의미하는 게렌합북입니다.

모두 빼어나게 아름답다는 것을 암시하는 이름들이지요.

더 놀라운 것은 남자들과 똑같이 여자들도 동등한 유산을 물려받습니다(15절).

15 땅 위의 어디에서도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더욱이 그들의 아버지는, 오라비들에게 준 것과 똑같이, 딸들에게도 유산을 물려주었다.

유대 율법에 따르면 오라비들이 없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딸이 유산으로 상속받을 수 있다고 규정했는데(민27:1~11),

딸들이 아들들과 완전히 동등한 상속자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이 특별합니다.

당시가 율법 이전, 즉 족장시대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도 고려시대까지는 이런 모계사회적 전통이 강했는데,

조선시대 유교가 들어오면서 부계사회, 아들중심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저는 욥기에 사회 윤리적이며 사회 평등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했다는 사실은

이렇게 그 당시 가장 천대받기 쉬웠던 취약 그룹들,

즉 종이나 고아와 과부, 나그네, 소작농, 여성들과의 구체적 관계에서

그리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욥의 회복은 예전의 자비와 정의의 단순한 회복을 넘어서

양성 평등의 이상을 실천할 만큼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라는 사실을 암시해줍니다!

▶마침내 욥은 자신의 건강까지 회복해서 140년이나 더 살았다고 합니다(16절).

16 그 뒤에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그의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다.

17 욥은 이렇게 오래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회복된 그 때의 나이가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시90:10절에서 말하는 인간 수명의 두 배를 더 산 셈이 됩니다.

욥의 수명은, 당시 족장시대의 수명과 비슷하므로,

욥의 생존 연대를, 족장시대로 봅니다.

그러나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장수의 복을 받았습니다.

욥은 아브라함처럼 아들과 손자와 증손까지 사대를 보면서

오래오래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17절).

더 이상 여한이 없이 천수를 누렸다는 말이지요!

◑교훈 및 적용

욥기서는 가히 혁명적인 책입니다.

저 김흥규 목사는 이번에 욥기를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회개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욥기에 대하여 편견을 가진 것,

전체적인 맥락에서가 아니라 한 두 부분을 발췌하여 설교했던 일,

욥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믿음으로 잘 참아냈더니

갑절의 축복을 받았다고 쉽게 해석한 일,

고난을 당한 교인들을 찾아가 세 친구들처럼 위로하고 권면했던 일, 등등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꼬박 38일 동안 욥기 구석구석을 훑어본다고 했지만

놓친 부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욥기에 대한 피상적인 해석을 뛰어 넘어

아마 한국 교회들 중에서 욥기를 가장 심도 있게 파고 든

몇 안 되는 교회 중에 하나일 것이라는 자부심은 있습니다. 아멘!

▶욥기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여러 가지이겠지만

정의와 은총의 관계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리고 마치고자 합니다.

욥기에서 끈덕지게 도전하는 주제는 인과응보론, 즉 정의론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세상은

상선벌악의 도덕적 질서가 자리잡힌 곳이라는 견해이지요.

욥기는 우리가 과연 인과응보, 즉 정의가 어김없이 척척 실현되는

좁은 세계관의 틀을 벗어나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묻습니다.

이것은 천상 회의가 열렸을 때 이미 사탄에 의해서 제기된 물음이었는데

사탄은 하나님과의 내기에서 욥이 저렇게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선행에 대한 축복의 기대와, 과오에 대한 징벌이 두렵기 때문에

저렇게 하는 것이지

아무 까닭 없이, 바라는 것 없이 그럴 리 만무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내기에서 사탄은 완전 KO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욥은 재산과 자식들을 잃고 마침내 건강마저 잃고

생명이 위태로울 때조차도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욕하지 않았습니다.(1:22, 2:10)

문제는 멀리서 욥을 위로하겠다고 찾아 온 친구들까지도

사탄과 보조를 같이 했다는데 있습니다.

이들은 그 당시 가장 널리 유행했던 인과응보의 정통 신학을 가지고

욥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은

도덕 질서가 완벽하게 자리 잡힌 곳이기에

악인은 반드시 망하고 선인은 반드시 흥한다는 주장이었지요.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욥의 고난은 까닭 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욥이 현재의 고난을 당하는 것은 반드시 과거에 저지른 죄악 때문이므로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지만

미래의 회복을 장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기는 이와 같이 편협한 정의에 기반을 둔 세계관,

즉 다분히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을 뒤흔드는데 모든 노력을 집중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는 것만큼 받는 ‘give & take’가 아닙니다.

은총이 선악간의 우리 행위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될 때

이미 은총이 아닙니다.

내가 이 만큼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상을 받고

이 만큼 나쁜 일을 했기 때문에 징벌을 당한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서의 은총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이나 엘리후, 심지어 욥까지도, 이러한 생각을 벗어 던지지 못했습니다.

준 만큼 되받는다는 식의 정의가,

하나님의 통치 방식의 전부인 줄로 착각했던 것이지요. 인간본능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주님의 뜻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했습니다.(42:3)

이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방식이 정의만이 아니라

사랑과 은총도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사랑과 은혜는 부담을 주고 강요당한 상태에서는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오직 주권적 자유가 주어질 때에만 일어날 수 있지요!

하나님은 욥이 인과응보라는 정의관에서부터 벗어나

더 넓고 주권적 자유로운 세계,

즉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원하셨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가 의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의 실천은 더욱 더 넓은 세계,

즉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질 때 의미가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출21:24)라는 차원의 정의 실천은

여전히 우리의 행위와 공로 의식에 뿌리박고 있기에

온전하지 못하며 끝없는 정의 요구를 불러옵니다.

오직 아무 바라는 것이나 이유나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 있을 때

우리의 정의는 어떤 보상이나 징벌 의식 등의 부담감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보다 성숙한 차원에서 수행될 수 있습니다.

▶인과응보론에 사로잡혀 있던 세 친구들의 사고는

나중에 가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의

경직된 위선주의와 만나게 되고

욥은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게 됩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죄인들을 볼 때

그들의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인격성이 아닌

단지 죄를 지었다는 결과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거기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인과응보론적 시각을 가졌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율법적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함부로 정죄하고 심판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욥과 마찬가지로 의로우면서도 불의한 고난을 당하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정의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도 깨달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막15:34) 하시면서

당신의 불의한 고통 한 가운데에서

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를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침내 부당한 고통이 인간의 상선벌악,

즉 인과응보라는 인간의 편협한 시야를 통하여 결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와 은총의 신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일부로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에서도 비슷합니다.

만일 세 친구들이나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선에는 보상이,

악에는 징벌이 어김없이 척척 수행되어야만 하는 윤리 도덕적인 곳이

이 세상의 전부라면

창기나 세리들, 죄인들이 설자리는 과연 어디였을까요?

예수님의 지상 최후의 동반자요 천국 최초의 동반자였던 강도 한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탕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어떻게 되었으며,

세리장 삭개오의 운명 또한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의 행위와 아무 상관없이 우리가 죄인이며 자격 없음에 불구하고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용서는

이런 죄인들까지 다 품는 포괄적이고 무제약적인 것입니다.

욥기는 분명히 정의에 대해서 아주 예민한 관심을 가지지만

이렇게 정의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사랑과 은총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 곳곳에서도 대립과 반목으로 얼룩진

총체적 위기와 난국이 해소되지 않고 연일 되풀이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직 정의 실현에만 눈이 어둡기 때문은 아닐까요?

때로 내가 손해보는 것 같아도 양보하고, 원수라고 할지라도 용서하고,

부당한 고난이라고 할지라도 한 번 참아보려 하고, 그렇게 할 때

이 세상은 한결 더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결국 욥기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와 인간의 주권적 자유가 만나는 책이라는

구띠에레스의 말은 옳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적 자유 때문에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에 따라

그대로 갚아주신다는 강박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인간 역시 주권적 자유 의지로 상선벌악에 대한 기대나 부담감을 갖지 않고

신앙 생활할 수 있는 동시에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지요.

제가 발견한 욥기의 진수는 오늘 한국 교회 곳곳에 뿌리 깊이 만연해 있는

일체의 물물 교환식, give & take식의 값싼 기복주의 신앙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구분시켜주는 책이라는데 있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이상 김흥규 목사님의 욥기 강해를

인터넷에서 스크랩 해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편집자

2018/04/23(월) “욥기 42:1-17” / 작성: 김신년

본문 욥기 42장1-17절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평가받은 욥에게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그 고난은 욥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의 고난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온 친구들조차도 위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몰아닥친 고난이라는 광풍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욥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38장 1절에서 폭풍우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셨는데, 그 폭풍우는 비를 동반하지 않은 회오리바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이라는 광풍에 의해 요동치고 있던 욥에게 그 모든 광풍을 잠재우는 회오리 바람으로 욥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창조세계의 신비와 하나님의 창조 주권에 대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욥은 너무나 놀라워 말문이 막혀 버렸습니다(38-41장). 이제 자신의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라고(40:3-5) 대답하였던 욥은 이제 오늘 본문 1-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주를 뵈옵고 회개하는 욥

귀로 듣기만 하였던 하나님을 대면한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발언을 거둬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때로 고난, 어려움, 질병을 겪게 될 때 우리는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묻습니다. 왜 나여야 합니까? 왜 우리 가족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우리가 묻고 싶고 때로 따지고 싶은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나아갑니다. ‘왜 지금이어야 합니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라고 질문하기도 합니다. 욥이라고 왜 하나님께 묻고 싶은게 없겠습니까? 왜 따지고 싶은 게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자 그의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질문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신의 질문, 자신의 발언을 모두 거둬들이고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5-6절). 질문을 가지고, 때로 원망과 불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만, 어렴풋이 듣던 그 하나님을 한 발짝 더 가까이서 대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더 뚜렷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한 발자국 더 주께로 나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인식하는 순간 “왜?”라는 질문이 사라져 버립니다. 오히려 주님 앞에 선 자신의 실존을 인식하게 되며, 가슴을 치며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 주께 고백하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없는 죄인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합니다. 멀리서만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자신의 실존이 어떤 모습인지 모른 채 하나님께 따지려 들지만, 하나님께 한 발자국만 가까이 나가도 인간은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숙연해지고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욥을 변호해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욥에게뿐만 아니라 욥의 세 친구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7-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7-8절, 이 두 절 안에 하나님은 욥을 네 번이나 “내 종 욥”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욥을 변호해주셨고, 그가 옳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욥을 정죄하던 그의 친구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속하기 위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사를 통해서 그들을 향한 욥의 기도를 기뻐 받으신 후에야 그들의 제사를 받으셔서 용서해주심으로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들과 욥과의 관계를 모두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욥에게 대한 잘못이면서 동시에 욥을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에 대한 죄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회복된 욥의 삶

이어지는 10-17절은 욥기의 마지막 부분으로 그 이후의 욥의 삶의 회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0-15절을 보면,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 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를 다 회복시켜주셨을 뿐 아니라, 전에 가지고 있던 소유의 2배로 갚아주셨습니다. 욥의 말년에 불어난 양, 낙타, 소, 암나귀의 숫자가 처음 1장에 언급된 짐승의 숫자에서 정확하게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12절). 모든 소유를 두 배로 회복시켜주셨지만, 이 모든 소유속에 그의 자녀들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자녀가 욥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 이후에 하나님은 고난 받기 이전과 똑같은 10명의 자녀를 욥에게 다시 주셨습니다. 한 때 욥에게 저주를 퍼붓기도했지만 고난을 욥과 함께 견뎌냈던 아내를 통해 하나님은 다시 이전과 같은 7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허락하시고 가정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주신 세 명의 딸들은 땅 위의 어느 여인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추었습니다. 딸들의 아름다움은 부모의 자랑이고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Happily ever after

16-17절입니다.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아이들이 즐겨보는 동심의 세계를 다룬 애니메이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화면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다음과 같은 자막의 글귀로 마무리 됩니다. Happily ever after 그 이후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마치 애니메이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자막의 내용처럼, 욥기는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하게 마무리됩니다. 욥은 분복을 누리며 자손의 자손을 보며 이 땅에서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였습니다.

욥기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가 욥기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1. 내가 가진 잣대로 함부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욥에 대한 욥의 친구들의 평가는 구구절절 옳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좋아 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잣대로, 자신들의 기준으로 욥을 재단하고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옳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 욥에 대한 정죄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사람을 판단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의 판단은 너무도 자주 우리의 기준에 근거하고 우리의 편견에 근거하고 우리의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근거할 때가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우리 삶에는 우리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욥이 겪었던 고난은 욥이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이 통제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겪게되는 삶의 많은 부분이 때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들이 우리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곧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요 우리의 삶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우리 스스로 죽음의 한계를 넘을 수 없고, 우리 스스로 우리 인생을 주관할 수 없음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출발점이요 하나님을 소망하게 되는 첫걸음입니다.

3. 우리 인생의 문제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비로소 해결됩니다.

욥의 고난의 문제는 회오리바람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해결되었습니다. 욥의 문제는 하나님이 개입해주시지 않으면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그에게 개입하시려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이 개입해주시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욥에게 찾아가셨던 것처럼, 우리를 향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건이 바로 우리 가운데 오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입니다.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자 우리를 향해 찾아오신 사건, 전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 속으로 전격적으로 진격해 들어오신 하나님의 개입, 이것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바로 성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땅도 그가 지으셨기에 그의 소유이고, 인간도 그가 만드셨기에 그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고 자기가 창조하시고 소유하신 땅에 오셨지만 아무도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죄로 뒤범벅이 되어져 있는 세상속으로 진격해 찾아오셨고, 그 예수님을 도마의 고백처럼 주와 하나님으로 모셔 들이는 사람들을 주의 자녀로 받아주시고, 그들을 주의 백성으로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0-12)

우리를 대면하시려고 찾아오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지금 휘몰아치는 광풍속에서 이리 저리 흔들려 갈길을 알지 못하는 상황속에 처해 있다면, 인생을 흔드는 그 모든 광풍을 잠재우시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인생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회오리바람가운데 진격해오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우리 인생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회오리바람가운데 찾아오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인생의 광풍이 잠잠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야,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서야 비로소 주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평안할 때, 잔잔할 때, 그곳에서 자발적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입니다. 매일마다 자발적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는 광풍이 잘 몰아치지도 않을뿐더러, 광풍이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회오리바람 가운데 대면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어떠한 광풍에도 동요 없는 견고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회오리바람 한 가운데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 땅에서 가장 거대한 회오리바람인 태풍의 그 한가운데, 태풍의 핵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가장 잔잔한 곳인 것처럼, 회오리 바람 한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 그곳이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그곳이 우리를 품어주시는 예수님의 품입니다. 그곳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곳이 가장 안전하고 평안한 곳입니다. 다른 광풍은 접근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를 흔들 수도 없습니다. 회오리바람이 우리를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을 나의 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십시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을 이끌어가시는 동력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 방향을 이끌어가시는 유일한 동인(動因)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을 날마다 대면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삶으로 역설의 진리를 구현해내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욥의 인생처럼, 우리 인생을 마지막 자막 한줄로 마무리하게 될 것입니다. Happily ever after in Jesus Christ……

기도

하나님, 고난의 광풍이 우리를 흔들어도 회오리바람으로 우리에게 진격해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우리의 삶의 자리까지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나의 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을 날마다 대면하는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여전히 불어대는 광풍 앞에서도 견실히 주님 안에 거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참된 제자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나의 기도는 주님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까?

2. 나의 질문이나 기도제목을 내려놓고 하나님앞에서의 나의 실존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3.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묵상합시다.

4. 내 인생을 마칠때 내게 내려질 하나님의 한 줄 평가는 무엇이겠습니까?

(작성:김신년)

매일말씀묵상. 3월 13일. 욥기 42장. > 매일말씀묵상

욥기 42장. 하나님을 아는 자의 마지막은 영광입니다.

1. 욥기의 마지막 장은 욥의 답변과 회개로 시작됩니다 (1~6). 욥은 하나님의 위엄과 존재 그리고 그 음성 앞에서 회개합니다 . 이것은 이전에 소발이 요구했던 회개와 다릅니다. 욥이 자기의 무고함을 증명하려다가, 지나치게 하나님에 대하여 판단하고 말한 것을 슬퍼하며 회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의 질문에 정확한 답을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압도당한 인간의 회개입니다. 욥의 눈물 나는 고백을 보십시오. “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5).”

2. 욥은 자기가 하나님과 가졌던 ‘ 우정 ’(God’s intimate friendship) 을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29:4). 이전에도 욥은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과 동행했었습니다 . 그러나 이제 욥이 고난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은 마치 과거에 자기가 하나님을 몰랐었다고 생각할 만큼 , 훨씬 새로운 하나님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얼마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 깊은 번민과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닐까요 ? 비록 욥이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욥이 말한 것이 정당했다고 선언하시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7~8). 욥이 그렇게도 원했던 하나님의 변호, 지금 하나님께서 친구들 앞에서 욥을 변호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3. 욥은 “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 라고 말했습니다 (6). 이것은 자신을 미워한다는 말입니다 . 즉 자기 안에 있는 죄성을 향한 증오이고 혐오입니다 . 이것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 이것이 없이 어떻게 회개할 수 있을까요? 욥은 의로운 자였지만 자신의 죄성에서 자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거역한 어떤 행위가 생각나서가 아니라, 깊은 고난의 과정에서 자신의 죄성을 보았기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 욥은 그 죄성을 미워한다고 고백합니다 . 이것이 회개입니다 . 우리는 우리의 죄성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욥을 더 깊게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4. 욥기는 3:1부터 42:6까지가 시의 형태로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마치 시편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42:7부터는 1~2장처럼 다시 산문의 형태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이 마지막 설명에서 욥이 받은 은혜의 체험을 봅니다 .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들을 책망하시면서 희생제물을 가지고 욥에게 가서 자신들을 위한 번제를 부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욥은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 내 종 ’ 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 고난 받으신 종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가 되셨듯이 , 의로운 종 욥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놀라운 자리에 서 있습니다 .

5. 또한 욥은 자기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 고난 이후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놀랍도록 체험했습니다 . 그는 죽어서 하나님이 자기를 변호해주시길 바랬지만, 하나님께서는 살아있는 욥에게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잃어버린 가축을 두 배로 주셨고, 잃어버린 관계들을 회복시켜 주셨으며, 자녀들을 그대로 주시되 욥의 세 딸은 전국에서 가장 아리따웠습니다. 욥의 이야기는 끝이 아름답고 영광스럽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12). 욥은 무려 140년이나 더 살았습니다(16).

6. 욥기의 교훈을 정리해보겠습니다 . 첫째 , 이 세상에는 우리의 지혜를 초월하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거니와”(신 29:29). 우리는 모든 오묘한 일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어둠 속으로 들어갈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깊게 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둘째 , 하나님의 백성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그러니 어떤 사람의 고난을 보고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가볍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 욥의 인내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 약 5:11). 인내(perseverance)는 믿음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욥의 믿음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붙잡아 주심이요, 이끄심입니다. 넷째 , 인과율 ( 원인과 결과 ) 의 법칙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아래 와야 합니다 . 다섯째 , 성도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가지는 친밀한 교제라는 것입니다 . 욥이 원했던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 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섯째 , 고통이 예배로 승화되는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받은 상처로 우리를 평가하실 것이라고 윌리암 레인은 말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땅에서 받는 고통이 예배로 변화될 것이라고 Norwich의 줄리안(Julian)은 말했습니다. 또한 칼빈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흘리는 눈물은 순종의 제사라고 했습니다. 욥에게 그것은 사실이었고 우리에게도 그럴 것입니다. 성도에게 무의미한 고통은 없습니다. 어떤 이는 욥과 같이 이 땅에서 회복의 은혜를 맛보겠지만 , 어떤 이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를 때 영광의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 인생의 모든 고통의 순간은 이제 우리의 예배가 될 것이며 , 우리는 그 소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욥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인생에서 당하는 고난과 시험과 어려움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지 알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제는 고난과 시험을 피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회로 삼게 하시고, 모든 순간을 예배로 승화시키는 저희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고난 이후에 욥에게 큰 은혜와 복을 주셨던 것처럼, 그리하여 그 인생을 아름답게 마치게 하신 것처럼, 저희에게도 그러한 은혜를 풍족하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욥과 세 친구들, 우리가 용서한 것과 같이, 욥기 42장 7절-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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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서에서 결론을 내리듯이, 욥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자신들이 했던 일들을 해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욥기서를 공부할 때, 욥의 고민이 어떻게 시작되며 진행되었고, 결국 어떻게 끝나는지를 살펴볼 뿐, 욥의 세 친구들에 대한 결론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편입니다.

욥기 42장 7절부터 10절을 먼저 읽고 묵상해 볼 때, 우리는 욥과 세 친구들의 상황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욥기 42:7-10,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이 부분들은 욥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회개한 직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7절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특별히 말씀하시고, 세 친구들에게 욥에게 찾아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욥을 찾아 오시고 그의 세 친구들에게도 말씀하셨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바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욥기 42: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그리고 이어서 8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욥기 42:8,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욥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였었고, 하나님께서는 욥의 회개를 인정하셨습니다. 현재 상황 속에서 욥에게는 그 어떤 문제나 죄악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욥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에 대해 옳게 말하지 않았다”라고 하나님께서는 책망하시는데, 그들이 이미 반복적으로 욥의 숨겨진 죄를 하나님께서 벌하시고 계시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욥은 결코 고난을 당할 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의 믿음에 대한 확인을 위하여 그가 시험을 받도록 허락을 하셨습니다.

욥의 세 친구는 분명히 욥이 당한 시련과 고난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함부로 비난과 정죄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분명한 죄악이며, 아울러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한 것과 같습니다. 이들이 욥에게 퍼부은 정죄는 4장부터 23장까지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결같은 논리로 세 친구는 욥을 비난하고 모욕하였습니다.

세 친구는 욥을 비난하고 정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욥을 비난하지 않으셨고 심판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욥을 임의로 비난하고 정죄한 세 친구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의롭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욥은 고통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며, 의로움을 지키며 하나님을 모욕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욥이 이와같이 참아낼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욥은 사단이 하나님 앞에서 욥을 고발한 것과 세 친구들이 욥을 비난한 것과 같은 죄악을 저지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욥의 집안과 소유물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손을 거두시고 울타리를 제거하시면, 분명히 욥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 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하지만 욥은 모든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결코 주의 이름을 저주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믿음과 의로움을 지켰습니다.

다시 욥과 세 친구의 관계로 돌아가 봅시다. 욥이 42장 초반부에서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하지만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이 직접 용서해야만 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을 직접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흔히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 친구가 욥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준비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친구가 용서 받기 위하여 희생제물들(수소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을 욥에게 가져와서 번제물로 바치고, 욥이 세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욥기 8절을 다시 읽어 봅시다.

욥기 42: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죄를 지은 세 친구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해 달라고 회개만 하면 되었을텐데, 하나님께서는 굳이 욥에게 찾아 가게 하시고, 욥이 세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욥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직접적으로 회개하는 것으로는 부족함을 보여 주시는 구절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용서하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항입니다. 주기도문에서도 분명히 “우리가 용서한 것과 같이 우리를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주기도를 가르쳐 주신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14-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는 우리 스스로만을 위하여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부분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다른 이들을 용서해야만 하고, 나를 아프게 할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만 합니다. 욥의 세 친구는 회개하라는 명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고, 욥은 그들이 가져 온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세 친구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마치 예수님께서 하신 또다른 구절을 연상하게 합니다.

마태복음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결국 욥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욥 역시 친구들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께도 용서를 방았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였으며, 서로에게 지는 죄도 회개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피해를 받은 사람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회개의 과정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지난 2007년에 개봉했던 영화 ‘밀양’에서 살인범은,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면회 온 아들을 잃은 여주인공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용서하셨다”라고 말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라고 말하며 자기 마음대로 스스로를 용서한 내용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결코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과 세 친구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께 용서 받을 뿐 아니라 피해자의 용서와 기도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욥과 세 친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가장 이상적인 용서를 하였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용서에 관한 이야기들 중에는, 정신 건강을 위하여 용서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용서하지 않은 사람들의 정신 건강이 좋지 못하며, 죄를 지은 사람의 정신 건강 역시 문제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그대로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길” 원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를 핍박하고 목숨을 위협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러한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여 주소서”라고 기도하셨던 주님의 기도는 분명한 우리의 모범이 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따라가야만 할 용서의 기도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은 또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용서 받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내가 용서하고 그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시지 않으십니다. 내가 진심으로 나를 아프게 한 사람까지 용서하고 축복하며 기도할 때, 욥이 받았던 갑절의 축복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욥과 같이, 그리고 우리 주님과 같이 용서하고 축복하며 기도하여, 이 땅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의와 뜻을 이루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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