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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행전 17 장 | 사도행전 17장 상위 166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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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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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제공 : CGNTV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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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다.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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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9/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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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사도행전 17. 17. 1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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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6/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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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 KLB – 데살로니가에서 – 바울과 – Bible Gateway

데살로니가에서 –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로 갔는데 거기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다. 바울은 평소의 습관대로 회당에 가서 세 주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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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12/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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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성경 사도행전 17장 – HANGL NOCR

17:1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는 바울>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 회당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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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11/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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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0(화) “사도행전 17:1-15” / 작성: 이창호E

[본문] 사도행전 17장 1-15절 [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다 (1~9)] [(1a)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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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3/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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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 네이버 블로그

【제2차 전도여행에 관한 계속적인 기록으로, 빌립보를 떠난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전도를 거쳐 베레아에서 전도한다. 이 후 아덴에서의 전도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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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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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우리말성경) / 다니엘성경 – genie – 지니

사도행전 17장 (우리말성경) – 06:24. [우리말성경] 제17장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전도함] 1.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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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enie.co.kr

Date Published: 4/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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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주석 – 사도행전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사도행전 제 17장 =====17:1 <마케도냐의 데살로니까에 있는 한 고대의 탑> 저희 – 바울과 실라를 말한다. 디모데와 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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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10/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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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26~31절, “창조주와 심판주 하나님” – 주일 설교

2020.8.16_8월 셋째 주일 말씀 사도행전 17장 26~31절<신 218>, v.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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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fgca.com

Date Published: 9/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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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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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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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sBO30J7PSqA

사도행전 17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다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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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 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수 있겠느냐 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쉬운성경 사도행전 17장

17:1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는 바울>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 회당이 있었습니다.

17:2 바울은 습관대로 회당으로 들어가 삼 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유대인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17:3 바울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이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7:4 유대인 중에 그 말에 설득되어 바울과 실라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많은 그리스인들과 적잖은 귀부인들도 바울을 따랐습니다.

17:5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들을 시기하여 시장에서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켜 도시를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군중 앞으로 끌어 내려고 야손의 집으로 쳐들어갔습니다.

17:6 그러나 바울과 실라를 찾지 못하자, 그들은 야손과 다른 형제 몇 사람을 마을의 관원들에게 끌고 가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던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

17:7 그런데 야손이 그들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가이사의 법을 어겨가며 예수라 하는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스르는 행동을 합니다.”

17:8 무리와 마을의 관원들은 이 말을 듣고는, 당황하였습니다.

17:9 그러나 마을의 관원들은 야손과 다른 신자들에게서 보석금을 받고 그들을 풀어 주었습니다.

17:10 <베뢰아에서 전도하는 바울> 밤이 되자, 신자들은 곧바로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베뢰아에 도착하여 유대인의 회당으로 들어갔습니다.

17:11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의 말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바울이 한 말이 사실인지를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17:12 그래서 그들 가운데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귀부인과 남자들도 적지 않게 믿게 되었습니다.

17:13 그러나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을 듣고, 거기까지 가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17:14 그래서 형제들은 급히 바울을 바닷가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17:15 바울을 수행하던 사람들은 바울을 아테네까지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능한 한 빨리 실라와 디모데를 바울에게로 데려오라는 지시를 받고 베뢰아로 돌아갔습니다.

17:16 <아테네에서 전도하는 바울> 바울은 아테네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온 도시가 우상들로 가득 찬 것을 보고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17:17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인들과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도 날마다 토론하였습니다.

17:18 어떤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이 바울과 논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이 수다쟁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말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외국의 다른 신들에 관해서 말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17:19 그들이 바울을 붙잡아 아레오바고에 있는 시의회로 데려가서 바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전하고 있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줄 수 있겠소?

17:20 당신이 하는 말은 우리에게는 무척 낯설고 새로운 것이오. 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소.”

17:21 아테네 사람과 그 곳에 사는 외국 사람들은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말하거나 듣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시의회 앞에 서서 말했습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17:23 내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여러분이 섬기는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 중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글을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섬기는 그 신에 대해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17:24 그분은 온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며, 사람이 지은 신전에서 살지 않으십니다.

17:25 또한 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겨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17:26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으로부터 세계 모든 인류를 만들어 땅 위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 시대와 지역의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17:27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17:28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시인 가운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17:29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 자신을 사람의 생각으로나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금이나 은이나 돌 같은 우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17:30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서나 온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17:31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한 사람을 시켜 온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이에게 그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17:32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내용에 관해 나중에 더 듣고 싶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7:33 그리고는 바울은 그들을 떠나갔습니다.

17:34 그 때, 바울이 전한 말을 믿고 바울을 따르게 된 사람이 몇 사람 있었습니다. 그렇게 믿게 된 사람들 중에는 아레오바고 시의회의 의원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자와 그 밖에 몇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2020/10/20(화) “사도행전 17:1-15” / 작성: 이창호E

[본문] 사도행전 17장 1-15절

[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다 (1~9)] [(1a)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빌립보를 떠난 바울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리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빌립보에서 악덕 유대 고용주들의 모함으로 심한 매질을 받고 실라와 함께 옥에 투옥되었다가 다음 날 풀려났습니다. 빌립보 상관은 바울과 실라를 풀어주면서 바로 빌립보를 떠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옥에서 풀려난 바울은 매질로 인해 상한 몸을 제대로 추스를 겨를도 없이 루디아의 집에 가서 고별인사를 하고 누가를 남겨두고 곧 바로 데살로니가를 향해 떠났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빌립보를 떠날 때 그는 심한 매질로 인해 만신창이(滿身瘡痍)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데살로니가로 가는 도중에 바울이 치료를 받았다거나 잠시 휴식을 취했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본문은 바울이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도 빌립보에서 160km 거리에 있는 데살로니가까지 쉬지 않고 한걸음에 간 것 같은 뉘앙스를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 일행이 들렸던 ‘아볼로니아‘에는 “바울 강단(헬라어 배마 또는 비마)”이라 불리는 작은 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는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7:1절‘] 말씀이 새겨져있습니다. 바울이 그 바위 위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생긴 유적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데살로니로가로 가면서 잠시 들렸던 마을에서도 성하지 않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매진했습니다.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당시 로마제국의 속주였던 마게도냐 지방의 행정 수도인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 일행의 행보를 본문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1b~2) ‘…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서는 유대인 회당이 없어서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았던 것과는 달리, 데살로니가에는 행정 수도답게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했고, 유대인의 회당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전도여행을 하면서 들른 도시에 유대인 회당이 있으면 제일 먼저 회당을 방문해서 그 회당을 그 도시를 위한 전도의 거점으로 삼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회당은 유대인은 물론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세 안식일동안 회당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상처투성이인 몸을 이끌고도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했던 것입니다.

추석 연휴 첫날인 9월30일에 94세의 국내 최고령 여의사이신 한원주 원장이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산부인과와 내과 전문의인 그녀는 1979년에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부설 의료선교의원 원장으로 취임해서, 29년간 영세민과 노숙인 등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를 무료로 돌봤습니다. 83세인 2008년에 의료선교의원에서 은퇴한 그녀는 남양주시의 매그너스 재활요양병원의 내과 과장을 맡아 올해 9월7일까지 12년간 환자 치료를 위해 전념했습니다. 그녀는 “사랑, 관심, 배려만으로도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며 환자들과 끊임없이 소통했고, 하루 평균 20명의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그녀는 평소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해요. 살아 있는 동안 기쁘게 살며 내 할 일을 할 겁니다.”라고 하시면서, “할 수 있는 때까지 일하다 하나님이 부르면 언제든지 ‘네, 갑니다’ 하고 달려갈 것”이라고 말했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삼 주간에 걸쳐 구약성경을 토대로 강론한 내용에 대해 3절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는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심과 부활을 해석하여 선포하였으며, 그 예언이 예수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증거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즉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구약성경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신다’]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해 반드시 죽으셔야 했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죽은 자 가운에서 부활하셔야 합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들어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죽으셔야만 하고,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반드시 다시 사셔야만 함을 말씀한 다음, 자신이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빌립보에서 당한 고초와 160km에 달하는 긴 여정으로 인해 바울의 행색은 참으로 남루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키도 작고, 몸집도 작고, 또 다리는 안짱다리이고, 양쪽 눈썹이 일자 눈썹이고, 코는 매부리코이고, 이마도 대머리라고 합니다. 이처럼 행색도 외모도 보잘 것 없는 그가 데살로니가에 있는 한 유대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자, 경건한 헬라인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로마제국의 속국인 마게도냐의 행정 수도이자 상업의 중심도시였던 만큼 헬라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종교적으로 그리스 신들을 숭배했고, 성적인 부도덕이 만연했던 도시였습니다. 황금만능주의와 우상숭배가 만연한 대도시에서 초라하고 볼품없이 작은 한 유대인이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놀랍게도 회당에 있는 이방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이 변화된 이유를 데살로니가 전서 1장5절에서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살전 1:5a)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복음은 말로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달되었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복음은 단순히 말로만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후 아덴에서의 바울 사역에서 살펴보겠지만, 당시에는 대중을 설득하는 수사학(修辭學)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언변으로 보자면 바울은 어눌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는 말은 [‘바울과 실라의 삶에 합류했다’]는 의미입니다. 목사의 삶이 설교의 주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과 실라가 단순히 말로만 복음을 전도했다면 공중에서 흩어지는 공허한 말이 되었겠지만, 이들이 말로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성령님의 역사가 이방인들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만민제사장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언행일치의 삶을 살 때, 우리의 이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회당에는 유대인도 있었는데, 본문은 복음을 받아들인 대상을 [‘경건한 헬라인과 귀부인’]이라고 한정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헬라인’(God-fearers-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을 말하는데, 할례는 받지 않아도 되며, 또 유대사회에 속하지는 않되 유일신 창조주를 믿으며 율법대로 경건하게 살기로 헌신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회심한 이방인들과 귀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는데, 정작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의 반응은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회당에서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는데, 회당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전한 바울을 시기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시기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을 골고다 십자가로 내몬 장본인은 유대 백성들이 아니라, 경건하다고 자처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행위에 대해 시비를 걸어보았지만 번번이 자신들이 틀렸음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이 자신들의 권위를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입지를 위협한다는 판단 하에 예수님을 시기해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다는 누명을 씌워, 반역 죄인으로 몰아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몰았습니다. 지금 데살로니가 회당의 유대인들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그들은 외지에서 온 바울이 자신들의 입지를 훼손시킨다는 피해의식에 휩싸여 바울을 시기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바울을 잡으려고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바울이 묵고 있는 야손의 집을 습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6-7)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야손의 집에 바울이 없자, 그들은 야손과 그 형제들을 읍장 앞으로 끌고 가서 [‘로마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고 예수를 임금으로 섬기는 반역죄에 동조했다’]고 거짓 모함했습니다. [‘그러나 시청 관원들은 야손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서 보석금을 받고 놓아주었습니다’ (새번역, 9)] 일반적으로 피고인이 도망가거나 증거 인멸의 염려가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법원은 피고인에게 일정 금액의 보석금을 받고 보석을 허가합니다. 시청 관원들이 야손과 그 일행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주었다는 말은 야손이 반역 죄인인 바울과 다시 상종하지 않거나, 바울이 나타나면 즉시 바울을 신고하겠다는 조건부 석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야손과 그 형제들은 밤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바울을 몰래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10a)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

이들이 만나서 교제한 기간은 불과 3주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된 이들은 자칫하면 불이익을 당할 위험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위험과 역경이 도사린다 할지라도 거짓에 굴하지 않고 진리와 생명을 추구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말씀을 받다(10~15)]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데살로니가의 폭도들을 피해 한밤중에 피신한 바울 일행은 80km 거리에 있는 베뢰아에 도착했습니다. 베뢰아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곧바로 유대인 회당을 찾아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웠습니다. [‘너그럽다’]는 의미는 [‘관대하다’]는 뜻으로 타인의 이야기를 잘 경청하고 수용하는 고상한 성품을 의미합니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바로 관대하고 너그러운 성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관대하고 너그러운 신앙인들이 될 때만, 나와 다른 성격과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까지도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복음의 통로자가 될 것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베뢰아 사람들이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건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바울이 전한 말씀이 사실인지 알기 위해서 구약 성경을 상세하게 연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전한 예수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았다’]고 증거합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듣는 것만으로 신앙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더 깊이 공부하고 묵상하는 과정을 통해 신앙은 성장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을 가르치는 리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경우, 구역장입니다. 구역성경공부를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역원들보다 한번이라도 더 성경을 읽고 연구해야 됩니다. 한번 두 번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 이전보다 신앙이 성장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는 반드시 교회에서 인정한 기관이나 교역자를 통해서 해야 합니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의 논리에 현혹되는 이유는 성경에 대한 무지를 이용하는 그들의 교활한 술책에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베뢰아 사역 소식을 전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무리를 지어 베뢰아로 내려와서 소동을 벌였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 베뢰아의 형제들이 바울을 곧 바다로, 즉 항구로 피신시킨 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바울과 함께 배를 타고 아가야의 아덴까지 동행했다고 본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유럽대륙으로 건너온 바울의 초기 사역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령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유럽 대륙으로 건너온 그의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복음의 열매가 맺는가 하면, 바로 목숨이 경각에 처하는 사건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사역과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상한 몸을 이끌고도 그는 자신의 안위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통로자로 전념했습니다. 그런 그를 통해 헬라의 우상 문화 속에 살고 있는 많은 이방인들이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되는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라는 역경은 우리의 신앙을 재점검해보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터닝 포인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고 한원주 원장의 경우,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이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30년간 함께 한 남편이 떠나고 나자 돈 모으는 것도 물질도 명예도 별 거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리학 박사로 명성을 떨친 남편에, 공부 잘하는 자녀들, 그리고 소문난 명의로 부러울 것 없었던 시절이 한 순간에 낙엽처럼 스러졌다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신앙적으로 다시 서게 되더라고요. 사실 모태신앙이었지만 정신없이 가족들 돌보며 살아왔죠. 그저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느라 의술이라는, 제가 받은 은혜와 은사를 소멸시키며 살아왔던 제 자신을 발견했어요. 기도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바쁠 땐 주일도 빠질 때가 많았죠. 그런데 남편이 죽으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저 하나님께 매달리며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애원하다시피, 하나님께 상담을 하는 그에게 하나님이 응답하셨다.

[‘뭘 그렇게 울고불고 하느냐. 넌 누구보다도 부요하게 살아왔다. 부모님 사랑도 많이 받았고,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미국 구경도 많이 했고, 병원이 잘 돼서 돈도 많이 벌지 않았느냐. 너는 네 주변 사람들을 돌아봤냐?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정신 차려라.’]

육신의 상처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복음 전도에 전념했던 2000년 전 사도 바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매일 최선을 다해 환자를 돌본 94세의 한원주 원장, 이들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에 전심을 다해 매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고 한원주 원장은 2019년 5월호 인터뷰 기사에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신앙생활 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돕고 있습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에 코로나 19라는 신앙의 터닝 포인트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는 곳마다 음해와 모함과 시기로 인해 온갖 험한 꼴을 당한 사도 바울은 한 번도 주님을 원망하거나 사역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묵묵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 사역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님 어려운 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 역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각자에게 허락하신 사역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말씀을 깊이 상고하여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잘 접목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유대인들과 같이 시기와 질투의 화신이 아니라, 관대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신앙인으로서 나와 다른 이웃을 주님의 사랑으로 기꺼이 품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바울이 도착한 도시에서 제일 먼저 유대인 회당을 찾아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2. 바울이 구약성경을 풀어 설명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3. 데살로니가 유대인 회당의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적대적인 행위를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4.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베뢰아 성도들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5. 오늘 본문 중 어떤 말씀 또는 어떤 사건이 오늘을 맞이하는 나에게 터닝 포인트가 되었나요?

(작성 이창호E)

사도행전 17장

【제2차 전도여행에 관한 계속적인 기록으로, 빌립보를 떠난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전도를 거쳐 베레아에서 전도한다. 이 후 아덴에서의 전도 활동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17:1)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말한다. 디모데와 누가는 빌립보에 체류중이다.

‘암비볼리’는 빌립보 남서쪽 약 53 km지점에 있는 도시로, B.C.167-146년 무렵에는 마게도냐 북부 지방의 수도였다. 빌립보보다 크고 요충지였으나 바울 일행은 단지 지나가는 정도로 그친다.

‘데살로니가’

아볼로니아 남서쪽 64 km 지점이며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였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내륙의 풍요로운 농경지를 동쪽에 있는 육로와 해로에 연결시켜 주었다. 그래서 키케로는 ‘우리 영토의 심장부’라 했다. 이 도시는B.C.42년 빌립보 부근의 싸움에서 옥타비아누스에 가담했기 때문에 자유시의 특권이 주어졌다. 이곳의 인구는 약20만으로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기에 바울과 실라는 이곳을 발칸 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다(살전1:7-8) 그러므로 그들은 빌립보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에서 160 km나 떨어져 있는 이 도시에 사력을 다해 들어온 것이다.

‘유대인의 회당’

데살로니가에는 유대 공동체와 회당이 있었으므로 바울과 실라는 효과적으로, 곧 바로 전도를 시작할 수 있는 선교지로 택했을 것이다.

‘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17:2)

자기의 관례대로‘

먼저 유대인을 전도하고 그 후 이방인을 전도하던 바울의 습관을 말한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구원의 소식을 전하고 그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거부당한 후에야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기계적인 수순을 밟아 증거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음을 확고히 인식하고 있었고, 동족 유대인의 구원을 항상 우선적으로 유념했다.

‘세 안식일에’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단지 3주 동안만 머물렀다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단지 3주 이상 그곳에서 체류하며 회당에서 가르쳤고, 회당에서 가르치지 않을 때는 거리나 그밖의 장소에서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으면서 적어도 한번 이상 빌립보 교회로부터 ‘쓸 것’을 공급받았고(빌4:16) 또 자신의 생계를 위해 친히 노동을 했다는 점(살전2:9)이 이 사실을 뒷받침 한다.

‘성경을 가지고’

구약성경을 토대로 가르쳤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 단 한번도 성경을 떠나서 가르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복음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강론하며’의 원형 ‘디알레고마이’는 ‘담론하다, 문답하다, 연설하다’등의 뜻이다.

‘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17:3)

바울설교의 중심은 대개 ‘증거와 선포’였다. 그는 구약 성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심과

부활을 해석하여 선포하였으며, 그 예언이 예수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증거하였다. 그가 메시야의 고난과 부활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한 구약성경 구절은 신21:23, 시2,16, 110편이며 사53장 등이다.

‘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17:3)

바울의 설교 끝에는 늘 권고가 따른다. 여기서 바울의 권고로 많은 회심자들이 생긴다.

‘경건한 헬라인’이란 우상을 숭배하고 부도덕한 생활을 하는 세계 가운데서도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귀부인’은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부인들로서, 당시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들로 짐작된다. 마게도냐 지방에서는 다른 지방에서보다 여성들이 많은 자유를 누렸다.

‘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17:5)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복음을 훼방하기 위해 소동을 일으켰다.

이 유대인들의 시기는 단순한 시기가 아니라 갖가지 중상모략이 섞여 있는 것이었다.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좇게 되자 유대인들은 이를 와해할 목적으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그 중 하나가 시장이나 광장의 불량배들을 고용하여 소란을 일으키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을 매도하는 것이었다.

‘야손’은 ‘여호수아, 예수’의 헬라어 번역 이름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바울과 그의 일행은 ‘야손’의 집에서 머물렀다.

‘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17:6)

발견하지 못하매‘

불량배들의 소동을 접한 집 주인 야손은 바울과 전도단 일행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을 것이다.

‘야손과 및 형제들’

형제는 야손의 형제들이라기 보다는 예수 안에서 함께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불량배들은 바울을 찾지 못하자 야손과 다른 몇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끌고가 누명을 씌워 행정당국에 넘겼다.

‘읍장들’은 로마 영토 내의 자치도시를 책임지는 행정 장관을 가리키는데, 이 칭호는 마게도냐에서만 적용되었다고 한다. 로마는 데살로니가를 식민지가 아닌 자유도시로 인정하여 5명의 읍장들이 도시를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여’

당시 ‘천하’는 로마제국 전체를 가리켰다. 따라서 본문은 로마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로마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야손이나 바울은 정치적인 죄목으로 고소를 당한 것이다.

‘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17:7)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야손이 로마 제국을 어지럽게 하는 범죄자들과 하나가 되어 죄를 지었으며, 또 야손의 음모를 그의

집에서 작당하여 범죄했다는 것이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가이사의 명은 ‘황제의 법령’을 뜻한다. 황제에 대한 반역과 로마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에

대한 처벌이 명시되어 있으며 제국 내 모든 곳에 적용되었다.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가이사 외에 다른 왕이 있다고 하는 것은 곧 반역이었다. 유대인들은 모의 끝에 가장 큰 죄인 반역죄를 뒤집어 씌웠다. 그것은 바울의 설교 중‘하나님의 나라’를 말한 것을 빌미로 로마에 반역하여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임금을 세웠다고 모함했을 것이다.

‘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17:8)

그리스도인들이 가이사에게 반역했다는 소리가 다른 무리에게 전해지고 읍장들에게 고해지자, 이

소란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읍장들은 이러한 고소에 성의없는 반응을 보이면 그들 역시 반역 공모죄를 범하는 결과를 낳게 됨으로 엄중한 처벌을 내려야만 했다.

‘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17:9)

야손은 바울 일행을 도시로 다시 들이지도 않고 접촉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보석금을 지불하고 석방되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야손의 집에서 바울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보석이 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버울은 살전 2:18에서 데살로니가에 가고자 하나 ‘사단의 막음’으로 인하여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두고 한 말로 보인다. 특히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야손과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의 안전을 염려한 사랑의 배려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바울은 너희에게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2:18)

‘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17:10)

읍장들이 보석금을 받고 야손 일행을 조건부 석방을 했다는 사실은, 바울 일행의 데살로니가 체류는 양측 모두에게 위험한 일이었다. 야손이 끌려 갔을 때, 바울은 어느 비밀 장소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소수 개심자들의 안내를 받아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 남서쪽 약80 km 지점으로 많은 인구가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렇게 비중있는 도시는 아니었다. 베뢰아에서는 그 시민들의 포용력과 종교에 대한 태도가 독선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 사역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사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17:11)

‘너그러워서’

진리 앞에서 편견없이 객관적 자세를 나타내 보였고, 또 깨끗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헬라어 ‘파세스 프로뒤미아스’는 파세스(모든) + 프로뒤미아스(준비된, 자진해서)의 뜻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모든 준비된 마음과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열심을 다해 말씀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말씀은 준비된 마음 밭에 떨어질 때 좋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상고하므로’의 헬라어 ‘아나크리노’는 원래 재판정에서 선고 전에 심문하는 과정을 표현하는 말로, ‘자세히 검토하다, 취조하다’의 뜻이 있다.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열심을 다해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고 그 본의를 다시금 잘 새겼다는 의미이다. 이들은 구약성경을 통해 얻은 지식과 헬라의 철학사상, 그리고 그들의 생활체험 등을 바탕으로 바울의 설교를 깊이 비교 검토하여 복음을 진리로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17:12)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는 상류 사회에 속해 있으면서 사회적 영향력을 미쳤던 헬라인들을 가리킨다. 그 중에는 유대교로 개종했던 이방인들과 이교도를 믿던 사람들도 다소 있었을 것이다. 한편, 바울의 아시아 여행에 동반했던 부로의 아들 ‘소바더’도(29:4) 이 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이다.

‘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17:13)

베뢰아에서 선교활동의 소식이 데살로니의 유대인들의 귀에 들어가자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베뢰아까지 달려왔다.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에서처럼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소동을 일으켰으나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이 소동의 무리에 베뢰아 사람들이 가담했다는 언급이 없는 것은, 바울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적어도 바울 일행에 대해 적의를 나타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17:14)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의 소동으로 인해 베뢰아 도시에서 안전하게 거할 곳이 없어진 바울은, 그곳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으로 신속하게 베뢰아를 떠난다. 그리고 실라와 디모데는 계속 체류하며

아직은 성장이 미약한 그곳 교회를 보살피게 된다.

‘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17:15)

바울은 아덴을 선택해 그곳을 찾아갔다.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

바울이 아덴으로 떠난 후 데모데가 베뢰아에 남아 어떤 일들을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행적을 서신서와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아덴에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만난다(살전3:1)

– 바울은 디모데를 다시 데살로니가로 파송한다(살전3:2)

– 바울은 실라를 마게도냐(빌립보)로 파송한다. 그리고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간다(18:1)

– 고린도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만난다(18:5, 살전3:6)

마게도냐 지방에서의 전도 활동을 마친 바울은 당시 헬라 세계의 종교, 예술, 철학, 학문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아덴에서 선교 활동을 재개한다. 바울은 이곳 사람들의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관심을 유발시켜 복음을 전했으나 그리 큰 결과를 얻지 못하고 우상 숭배와 철학적 사변에 젖어있는 그들의 생활태도에 실망한다.

‘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17:16)

아덴’은 아테네 여신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B.C. 495-439)에의해 이 도시는 전성기를 맞아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사원과 건축물들이 건축되었다.

아울러 문학, 철학, 과학, 수사학 등이 꽃피워졌으며 민주주의의 기초가 내려지기도 했다.

펠레폰네소스 전쟁(B.C. 461-404)으로 인해 아덴을 빛을 잃었지만 그 문학적, 역사적 명성은 그대로 남아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바울이 이 도시를 방문한 때는 찬란한 영광이 사그러지고, 명성만이 남아 있었지만, 그 도시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아덴에는 파르테논을 숭배하기 위해 세운 수많은 신전들과 조각품이 있었다. 바울에게 있어 그 건축과 조각들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무익하고 사악한 우상들로 여겨졌을 것이다.

‘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17:17)

‘회당에서는’

바울은 그의 규례대로 먼저 회당을 방문했다.

‘장터에서;

아덴에는 다른 그리스 도시들처럼 오직 하나의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장은 상업과 웅변과 철학적 담론의 중심지였음은 물론 한가한 사람들이 소일을 위해 북적대는 곳이기도 하다.

‘변론하니’

바울이 회당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세히 증거하고, 시장과 길거리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사람드렝게 설파했다.

‘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17:18)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주의를 표방했다.

스토아: 스토아 학파는 금욕주의를 주장했다. 당시 에피쿠로스 학파와 아덴에서 쌍벽을 이루었다.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주창자 에피쿠로스(B.C.341-270) 제논(B.C.340-265) 이름의 유래 주창자인 에피쿠로스의 이름을 땀 제논이 아덴의 아고라 공장에서 늘 가르치던 장소가 장식회랑이었던 것에서 유래 주장 쾌락주의 주장. 이 쾌락은 육욕적인 것이 아니라 고통, 육정, 공포, 죽음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난 마음의 평정 즉 아타락시아를 뜻한다. 우주속에 내재하며 인간 삶에 지침이 되는 원칙으로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 엄격한 금욕주의와 만물을 통할하다는 로고스론, 최선을 다하는 자는 지위 계급을 막론하고 칭송을 받을 것이라는 만민 동등주의, 만인 형제주의 사상을 주장. 종교관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으나, 그 신들이 인간의 삶과는 전혀 관련을 맺지 못한다는 자연신교의 입장을 취함. 범신론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하나님을 세계 정신이라 생각함.

‘쟁론할새’

바울은 직업적인 철학자들과 함께 논쟁에 참여한 것을 말한다. 당시 아덴에는 직접적인 철학자들이 준비를 갖추고 논쟁에 참여할 목적으로 광장이나 거리에 나타나곤 했다.

‘말장이’란 곡식을 쪼아먹는 새를 뜻했으나 후에 쓰레기를 주워모으는 사람을 가리켰으며, 점차 다른 사람의 사상을 얻어듣고 그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것인 양 도용하는 사람을 일컫게 되었다.

결국 이 말은 변변치 못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극단적인 조롱과 멸시를 뜻하며, 그 철학자들이 바울을 사기꾼이나 떠벌이 같은 인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

철학자들은 바울을 새로운 신들을 전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아덴에는 수많은 이방 신들이 숭배되었고, 도 그 신들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철학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를 한 이방 신으로 생각했으며 ‘부활’을 예수라는 신의 배우자인 여신으로 잘못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17:19)

‘아레오바고’는 고대 아덴의 재판정으로, 주로 종교와 교육,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재판권을 행사하던 일종의 권력기구였다. 당시 시의 모든 행정관들은 이 평의회의 구성원이었으며 면책특권을 누렸다. 바울이 끌려간 아레오바고는 반드시 법적 재판의 형식을 띤 것이 아니라 해도, 공적 집회의 성격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19:20)

표면적으로는 정중하고 예의를 갖춘 말로 보이나 조롱섞인 태도도 배제되지 않았다. 아울러 그들에게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호기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헬라의 종교적 배경과 철학적 사고체계에서 바울의 가르침이 새롭고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기에

바울에게서 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고자 했다. 그러나 헬레니즘이 철학적 사고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려고 한 철학자들의 노력 자체가 무모한 것이었다.

‘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17:21)

아덴 사람들의 생활은 호기심 많고 경박했다. 아덴 사람들은 끝없이 새로운 것들을 찾아다녔고, 새로운 것을 찾았을 때는 금방 식상해 버렸다. B.C.5세기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클레온은 ‘아덴 사람들은 새로운 것이라고만 하면 가장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라 했다.

이런 피상적 기질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새로운 면을 보고서 복음을 일시적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이내 낡은 것으로 여겨 내던져 버렸을 것이다.

‘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17:22)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바울이 이곳에 선 것은, 자신을 변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주어진 모든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선포자로 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순간도 복음 증거자로서의

사명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 증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이 말은 그들의 도시에 신전과 신상들이 많았기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이 말은 그들의 경건함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무분별한 미신적인 태도에 대한 비난으로 보인다.

‘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도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17:23)

‘알지 못하는 신에게’

2세기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는 팔레룸에서 아덴으로 가는 길에 ‘이름은 있고 알지 못하는 신들의

제단’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 아덴 사람들은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아직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들이 존재하리라는 생각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글을 새겨 단을 만들었다.

그렇게 하여 ‘알지 못하는 신들’의 저주에서 도시를 보호하고자 했을 것이다.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바울은 이렇게 막연한 신관을 갖고 있는 아덴 사람들에게 성경에 계시하고 있는 창조, 구속, 부활의 신간을 도입하며 제시한다.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17:24)

아덴에는 3만이 넘는 신들이 있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러한 신들 중 하나로 포함하지 않도록 그분은 유일하신 분이시며, 우주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심을 명백히 했다. 이 세상에는 그 어느것도 스스로 존재하거나 다른 것들을 존재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또 이 세상 어느것도 하나님과 관계없이 생겨난 것도 없고 그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분은 만유를 지으신 분으로서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에도 관여하시고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손으로 지은 전’은 바울이 처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파르테논 신전을 떠 올릴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이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하다 해도 그것은 인간이 지은 것이 틀림없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도 이같이 고백한 바 있다. 그분은 전지전능 무소부재 하신 분이시다.

아덴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국가와 또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많은 신전과 사원 안에 수많은 신들을 소유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소유될 수 없는 분이시며, 그러한 신들과 같은 부류로 혼동되어서도 안된다.

‘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17:26)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아덴 사람들은 신들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는 인간들의 희생제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신상에 음식을 갖다 놓고 옷을 입히고, 좋은 장소에 안치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분이 아니시므로 인간의 희생제사를 원치 않으신다. 그분은 무엇이 필요할 때 스스로 모든 것을 얻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인간의 호흡을 한치도 연장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명과 호흡’의 주인이시다.

‘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17:26)

아덴 사람들은 그들이 아타카 본토의 흙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다른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에 반대하여 인류는 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한 혈통과 한 조상을 가진 후손임을 언급하고 있다.

‘한 혈통으로’는 ‘한 사람으로부터‘ 라 번역할 수 있다. ’한 사람‘은 아담을 염두에 둔 말로 , 아담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인류의 하나됨이라는 사상은 바울 신학의 바탕이다.

‘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17:27)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영적으로 어두움의 상태에 놓여있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방황하는 것을 묘사한다.

아덴 사람들은 수많은 신들을 찾아 다녔지만 그들로부터 영혼의 갈급함이나 구원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했다.

이들이 믿고 따르던 신들은 오히려 그들을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몰아 넣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범신론적 사상은 오히려 하나님을 올바로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17:28)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이 구절은 크레타의 시인 ‘에피메네데스’의 시에 나온다.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은 다소의 ‘아라투스’와 앗소의 ‘클리안데스’를 가리킨다.

바울이 이곳 외에도 헬라의 시를 정확하게 몇차례 인용한 것으로 미루어(고전15;33, 딛1:12)그는 헬라의 학문이나 문학에도 능숙했을 것이다.

‘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라’(17:29)

성경적인 인간론의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다. 따라서 자연물(금,은, 돌) 따위로 만들어 놓은 신들은 인간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인간보다 뛰어난 신적인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다.

‘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17:30)

‘알지 못하던 시대’는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드러나기 이전을 가리킨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우상 숭배 행위마저 참고 견디시며 자신을 자연을 통해 계속적으로 계시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고, 그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 복음의 메시지가 온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니다.

‘회개하라’

이 회개는 삶의 태도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데, 아덴 사람들이 우상 숭배를 그치고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17:31)

‘정하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이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며, 예수께서 심판주이심의 증거가 된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내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17:32)

부활이란 주제는 아덴 사람드렝게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으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었으나, 몸의 부활은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육체는 속되고 악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아덴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조롱과 비웃음으로 일축해 버리면서 복음을 거부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더 상세한

내용을 듣기 요청했고, 그들 중 몇몇은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17:33)

바울의 설교는 대부분의 청중들에게는 거부되었지만, 몇몇 사람들에게 수용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더 이상 아레오바고 광장에 머물기를 거절하였다. 아마도 바울에게는 공공장소에서

연설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은 듯하며, 오히려 위험에 처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다행한 일이라 추측된다.

‘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17:34)

소수의 믿는 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결코 신자의 수가 많고 적음에 좌우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사역이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근거하고 있는가이다. 바울은 이곳에서 아덴 선교의 복음의 씨를 심은 것이다.

‘디오누시오’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후기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아덴의 첫 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음악, 그리고 설레임

사도행전 17장 (우리말성경) – 06:24 [우리말성경] 제17장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전도함] 1.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에는 유대 사람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2. 바울은 늘 하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3주 동안 안식일마다 성경에 대해 사람들과 토론했습니다. 3.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은 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했던 것을 설명하고 증명하며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십니다”라고 전했습니다. 4. 몇몇 유대 사람들은 그 말에 설득돼 바울과 실라를 따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많은 그리스인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도 그들의 말을 믿게 됐습니다. 5. 그러자 유대 사람들에게 시기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시장의 불량배들을 끌어 모아 떼를 지어 도시 안에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찾아 사람들 앞에 끌어내려고 야손의 집으로 쳐들어갔습니다. 6. 그러나 그들을 찾지 못하자 야손과 다른 형제들을 그 도시의 관원들 앞에 끌고 와 소리치며 말했습니다. “세상을 온통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이곳에도 왔는데 7. 야손이 그들을 자기 집에 들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가이사의 칙령을 거역하며 예수라는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합니다.” 8. 이 말을 듣고 사람들과 그 도시의 당국자들은 당황했습니다. 9. 그러나 당국자들은 야손과 다른 신자들로부터 보석금을 받고 그들을 놓아주었습니다. 10. 밤이 되자마자 형제들은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도착하자 유대 사람의 회당으로 들어갔습니다. 11.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어서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바울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12. 그래서 그들 가운데 많은 유대 사람들이 믿게 됐고 적지 않은 그리스 귀부인들과 많은 그리스 남자들도 믿게 됐습니다.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 사람들은 바울이 베뢰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또 나타나 사람들을 선동해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14. 그러자 형제들은 즉시 바울을 바닷가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15. 바울을 수행하던 사람들은 그를 아테네까지 인도했습니다. 그들은 실라와 디모데도 속히 자기에게 데려오라는 바울의 지시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아테네에서 전도함] 16.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바울은 그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매우 격분했습니다. 17. 그래서 그는 회당에서는 유대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 사람들과 또 시장에 나가서 날마다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과 토론했습니다. 18.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변론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이 물었습니다.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외국의 다른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바울이 예수와 그 부활에 대한 복음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 그때 그들은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데려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소개하고 있는 이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까? 20. 당신이 우리 귀에 생소한 것들을 전하니 우리가 그 뜻을 좀 알고 싶습니다.” 21. 모든 아테네 사람들과 거기 사는 외국 사람들은 보다 새로운 것을 말하거나 듣는 일에 시간을 쏟던 사람들이었습니다. 22. 그러자 바울이 아레오바고 광장 가운데 서서 말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이여! 내가 보니 여러분은 여러모로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23. 내가 두루 다니면서 여러분이 무엇을 섬기는지 자세히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게 됐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예배해 온 그 신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24. 그 신은 온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사람이 손으로 지은 신전들 안에 살지 않으십니다. 25. 하나님께서는 뭔가 부족해서 인간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다른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6.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민족을 만들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셨고 각 나라의 연대를 미리 정하시고 그들의 국경도 정해 주셨습니다. 27.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과 그리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어떤 사람이 말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29.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이상 하나님을 사람의 생각이나 기술로 금이나 은이나 돌에 새겨 만든 형상 따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30. 알지 못했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버려 두셨지만 이제는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31.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운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을 공의로 심판할 날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날에 대한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32.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에 어떤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이 이야기에 대해 다시 듣고 싶소”라고 말했습니다. 33. 그러자 바울은 그들로부터 나왔습니다. 34. 그때 몇 사람들은 바울을 따르며 믿게 됐습니다. 그 가운데는 디오누시오라는 아레오바고 시회 의원과 다마리라는 여인과 그 외에 몇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주석

사도행전 제 17장

=====17:1

<마케도냐의 데살로니까에 있는 한 고대의 탑>

저희 – 바울과 실라를 말한다. 디모데와 누가는

빌립보에 체류중이었다(16:12,40)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 ‘암비볼리’

(Amphipolis)는 빌립보 남서쪽 약 53km 지점에

있는 도시로서 B.C167-146년 무렵에는 마게도냐

북부지방의 수도였다.

이곳은 빌립보 지방보다 크고 요충지(要衝地)였으나

바울일행은 단지 지나가는 정도로 그친다.

‘아볼로니아'(Apollonia)는 암비볼리에서 약 4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 곳은 갈라디아에 있는

‘아볼로니아’와는 다른 곳이다.

데살로니가 -이곳은 아볼로니아 남서쪽 64km지점이며 데르마이크만(Thermaic Gulf)에

위치해 전략적 요충지였고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였다. 데살로니가(Thessalonica)는

마게도냐 내륙의 풍요로운 농경지를 동쪽에 있는 육로와 해로에 연결시켜 주었다.

그래서 키케로(Cicero, B.C.106-43)는 이곳을 ‘우리 영토의 심장부’라고 했다.

이 도시는 B.C.42년 빌립보 부근의 싸움에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에게 가담했기

때문에 자유시(Civitaslibera)의 특권이 주어졌다.

또 데살로니가는 인구 약 20만의 도시

로 정치, 경제의 중심지여서 자연히 많은 사람들로 붐볐으며 유대와 유사한 점이 많았

다(살전2:14-16).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이곳을 발칸 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

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다(살전1:7,8). 그러므로 그들은 빌립보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에서 160여km나 떨어져 있는 이 도시에 사력을 다하여 들어왔던 것이

다(R.N.Longenecker).

유대인의 회당 – 렌스키(Lenski)에 따르면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로 오기 전 다

른 두 도시, 곧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에 머물지 않은 부분적인 이유는 그곳에 유대인

의 회당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데살로니가에는 유대 공도체와 회당이 있었

으므로 바울과 실라는 효과적으로 또 곧바로 전도를 시작할 수 있는 그곳을 선교지로

택했을 것이다.

=====17:2

자기의 규례대로(* , 카타 토 에이오도스) – ‘규례’의 헬라어 ‘에

이오도스’는 ‘에도'(* )의 완료 부사로서 ‘습관’, ‘익숙한 일’ 등의 뜻이다. 이는

이미 바울이 새로운 도시에서 회당을 찾아 복음 전하는 일을 습관처럼 여기고 있음을

의미한다. 살라미(13:5), 비시디아 안디옥(13:14), 이고니온(14:1) 등에서 바울은 이

미 그의 습관대로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파했다. 바울이 회당을 다른 곳보

다 먼저 찾은 이유는 회당에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물론 바울

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구원의 소식을 전하고 그 복음이 유대인들에게서 거부당한 후에

야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식의 기계적인 수준을 밟아 증거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다만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음을 확고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동족 유대

인의 구원을 항상 우선적(優先的)인 일로 유념하고 있었던 것이다(롬1:16;2:9,10).

세 안식일에 – 이 구절만 가지고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단지 3주 동안만 머물렀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3주 이상 그곳에서 체류하며 회당에서 가르쳤고, 회당에

서 가르치지 않을 때는 거리나 그밖의 장소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것이다(Furneaux).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으면서 적어도 한번 이상 빌립보 교회로부터 ‘쓸 것’을 공급받

았고(빌4:16) 또 자신의 생계를 위해 친히 노동했다는 점(살전2:9) 등이 이 사실을 뒷

받침한다.

성경을 가지고 – 구약성경을 토대로 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 단 한번도 성경을 떠나서 가르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복음의 주체인 예

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강론하며(* , 디엘려사토) – 원형 ‘디알레고마이'(* )의 제

1부정과거 중간태 직설법으로서 ‘담론하다’, ‘문답하다’, ‘연설하다’ 등의 뜻을 나타

낸다.

=====17:3

뜻을 풀어…증명하고 – 여기서 바울의 설교 형태가 잘 드러난다. 바울 설교의 중

심은 대개가 ‘증거와 선포’의 형태였다. 그는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심과 부활을 해석하여 선포하였으며 그 예언이 예수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증거

하였다. 이러한 증거와 선포는 13:16이하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메

시야의 고난과 부활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한 구약성경 구절은 신21:23;시2,16,110편;

사53장 등이었을 것이다.

=====17:4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 바울의 설교 끝에는

늘 권고가 뒤따른다. 여기서 바울의 권고로 많은 회심자들이 생긴다. ‘경건한 헬라

인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20:4에 언급된 ‘아리스다고’와 ‘세군도’가 예수를 믿게 되

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귀부인들’은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부인들로서 당시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들로 짐작된다. 마게도냐 지방에서는 다른 지방에서보다

도 여성들이 많은 자유를 누렸다. 한편 호르트(Hort)는 이 ‘귀부인들’은 다른 사람들

이 아닌 ‘이방인들의 유대인 아내들’이라고 주장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한편 여

기서 헨헨(Haenchen)은 사회 지도급 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데

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그들이 바울 일행에 대한 박해를 막지 못했는가 하는 점에 대

해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경우에 있어 핍박의 주동세력은 시당국자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의문은 쉽게 해소될 수 있다(I.H.

Marshall).

=====17:5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에서처럼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

아들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복음을 훼방하기 위해 소동을 일으켰다. 살전 3:3-10에

의하면 이 유대인들의 시기는 단순한 시기가 아니라 갖가지 중상모략이 섞여 있는 것

이었다.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 –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쫓게 되자 유대인들은

이를 와해할 목적으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 중 하나가 시장이나 광장

등의 불량배들을 고용하여 소란을 일으키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매도

(罵倒)하는 것이었다.

야손 – 이는 ‘여호수아’ 또는 ‘예수’에 대한 헬라어 번역 이름이다. 학자들에 따

라서는 이 사람이 유대인(Lenski, Longenecker)이 아니면 이방인 출신(Robertson)이라

고 각기 다르게 주장한다. 분명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바울과

그의 전도단 일행이 빌립보에서 루디아의 집에서 머물렀던 것처럼(16:14) 여기서는

‘야손’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런데 본 구절의 ‘야손’이 롬16:21에 언급된 바울 친척

인 ‘야손’과 동일 인물인지는 분명치 않다.

=====17:6

발견치 못하매 – 불량배들의 소동을 접한 집 주인 야손은 바울과 전도단 일행을 다

른 곳으로 피신시켰을 것이다.

야손과 및 형제를 – ‘형제'(* , 아델포이)란 야손의 형제를 의미한다기 보

다는 여기서는 예수 안에서 함께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Howard Marshall). 불

량배들은 바울을 찾지 못하자 그들의 눈에 띄는 야손과 다른 몇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끌고가 가당치 않은 누명을 씌워 행정당국에 넘겼다.

읍장들 – ‘폴리타르카스'(* )라는 칭호는 B.C.2세기부터 A.D.3세기에

걸친 시대의 비문에서 발견되었고 마게도냐의 도시들에만 적용되었다고 한다. 이 칭

호는 로마 영토 내의 자치 도시를 책임지는 행정 장관을 가리킨다. 로마는 데살로니

가를 식민지가 아닌 자유 도시로서 인정하여, A.D.1세기에는 다섯 명의 읍장들이 이

도시를 다스리게 했고 그후 2세기에는 읍장이 6명이 되도록 늘렸다.

천하를 어지럽게 – 당시 ‘천하’라고 하는 말은 곧 로마 제국 전체를 가리켰다(눅

2:1). 따라서 본문은 로마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야손이나 바울은 정치적인 죄목으로 고소를 당한 셈이다.

=====17:7

들였도다 – 헬라어 ‘휘포데데크타이’는 원형 ‘휘포데코마이'(* )의 현

재 완료형으로서 ‘손님으로 영접하다’는 뜻이다. 이는 야손이 로마제국을 어지럽게

하는 범죄자들과 하나가 되어 죄를 지었으며, 또 야손의 음모로 그의 집에서 작당(作

黨)하여 범죄했다는 암시를 내포한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 여기서 가이사의 명은 가이사 율리우스(Julius Caesar)

의 ‘황제의 법령’을 뜻한다. 여기에는 황제에 대한 반역과 로마제국의 질서를 어지럽

히는 것에 대한 처벌이 명시되어 있고 제국 내 모든곳에 적용되었다.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 가이사 외에 다른 왕이 있다고 하는 것은 곧 반

역이었다. 유대인들은 모의 끝에 가장 큰 죄인 반역죄를 뒤집어씌웠다. 그들은 바울

의 설교 중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한 것을 빌미로 로마에 반역하여 새로운 나라와 새

로운 임금을 세웠다고 모함했을지도 모른다(14:22;19:8;20:25;28:23,31). 그리고 이

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

고 그의 서신들에서 사람들의 오해를 줄이기 위해 ‘왕국’이라든가 ‘임금’이란 말을 가

능한 회피했을 수도 있다(R.N.Longenecker). 그렇지만 예수께서 로마제국을 초월하여

메시야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가 되심은 분명한 사실이다.

=====17:8

무리와 읍장들이…소동하여 – 그리스도인들이 가이사에게 반역했다는 소리가 다른

무리에게 전해지고 읍장들에게 고해지자 이 소란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

었다. 이러한 억울한 누명에 대해서 야손과 그 일행은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으며 그

들을 위해 증언해 줄 바울과 실라도 그곳에 없어서 읍장들의 처벌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읍장들은 이러한 고소에 대해 성의없는 반을을 보이면 그들

역시 반역 공모죄를 범하는 결과를 낳게 됨으로 엄중한 처벌을 내려야만 했다.

=====17:9

보(保)를 받고 놓으니라 – 법정 용어로서 판결이 명한 보석금을 받고 석방했다는

말이다. 야손과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이의를 제기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바

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 다시 들어가지 아니하였다는 것과 유대인들이 야손의 집에

서 바울 일행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야손 일행은 이후로 바울의 일행을

도시내에 다시 들이지 않겠으며 접촉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보석금을 지불하

는 정도로 충분히 석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바

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면서 겪는 어려움이지 야손과 그의 일행의 보석금에 관한 문

제가 아니다(D.E.Haenchen). 한편 살전 2:18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고자 하나

‘사단이 막음’으로 해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이며 특

히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야손과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의 안전을

염려한 사랑의 배려 때문이다(J.W.Packer).

=====17:10

밤에 형제들이 – 읍장들이 보석금을 받고 조건부적으로 야손의 일행을 석방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바울일행의 데살로니가 체류는 양측 모두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었

다. 야손이 읍장들에게 끌려갔을 때 아마 바울일행은 데살로니가의 어느 비밀장소에

숨어 있었을 것이고 낮보다는 다소 안전한 밤이 되서야 소수의 새로운 개심자들의 길

안내로 데살로니가를 떠날수 있었을 것이다.

베뢰아 – 데살로니가 남서쪽 약 80km 지점, 마게도냐 평원 남쪽 올림푸스 산맥 기

슭의 조그마한 언덕에 위치했다. 당시 이 도시에는 많은 인구가 살고 있기는 하였으

나 정치적으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17:11

더 신사적이어서 – ‘더 신사적’의 헬라어 ‘유게네스'(* )는 비교급의 형태

로서 ‘가문이 좋은’, ‘출신이 좋은’, ‘고귀한’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베뢰아

사람들이 모두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이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편견

없이 객관적 자세를 나타내 보였고 또 깨끗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 파세스 프로뒤미아스) – ‘프로뒤미아스’는

‘열심히’, ‘자신해서’, ‘준비된’ 등의 뜻이며 ‘파세스’는 ‘모든’이란 뜻으로 베뢰아

사람들은 모든 준비된 마음과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열심을 다하여 말씀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말씀은 준비된 마음 밭에 떨어졌을 때 좋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마

13:3-8).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 ‘상고하다’의 헬라어 ‘아나크리노'(* )는

‘자세하게 골라내다’, ‘체를 쳐서 가려내다’, ‘탐색하다’, ‘조사하다’는 등의 뜻을 내

포한다. 이는 종종 사법적 심문(審問)과 관계되어 사용되었으나 여기서는 베뢰아 사

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열심을 다해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고 살펴 그 본의를 다시

금 잘 새겼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구약성경을 통하여 얻은 지식과 헬라의

철학사상, 그리고 그들의 생활체험 등을 바탕으로 바울의 설교를 깊이 비고 검토하여

복음을 진리로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17:12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 – 상류사회에 속해 있으면서 사회적 영향력을 미쳤던 헬라인

들을 가리킨다. 그 중에는 유대교로 개종했던 이방인들과 이교도를 믿던 사람들도 다

소 있었을 것이다. 복음은 헬라인과 유대인의 구별없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보여주는 구절이다(롬1:16). 한편 바울의 아시아 여행

에 동반했던 부로의 아들 ‘소바더’도(20:4) 이 때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17: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소동케 하거늘 – 베뢰아에서 선교활동의 소식이

데살로니가의 사악한 유대인들의 귀에 들어가자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베뢰아까지 달

려왔다. 이들은 똑같이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소동을 일으켰으나 별다른 실효를 거두

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이 소동의 무리에 베뢰아 사람들이 가담하였다는 언급이 없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이는 바울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은 베뢰아의 유대인들

이 적어도 바울 일행에 대해 적의(適意)를 나타내지는 않았음을 시사한다.

=====17:14

바울을…바다까지 가게 하되…거기 유하더라 –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의 소

동으로 인하여 베뢰아 도시 안에 안전하게 거할 곳이 없어진 바울은 그곳 그리스도인

들의 도움으로 신속하게 베뢰아를 떠난다. 바울이 바다로 나가 정확히 어디로 갔는지

밝혀져 있지 않으나 아마도 메돈(Methone)이나 디움(Dium)이나 피드나(Pydna)로 갔을

것이다(Longenecker, Lenski). 그리고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보다는 다소 위험이 적다

고 판단되었던지 베뢰아에 계속 체류하여 아직은 성장이 미약한 그곳 교회를 보살폈던

것 같다.

=====17:15

바울을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 바울이 다른 곳을 두고 하필 아덴으로 갔던 이유

는 이곳에 언급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아덴이 베뢰아에서 가장 가까운 선교 장소

여서인지(Haenchen), 아니면 마게도냐가 안전해지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선교활동을

계속하려고 해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마게도냐의 대부분을 여행

했기 때문에 새로운 선교장소를 택해야 했고 그래서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아덴을 선

택해 그곳을 찾아갔던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가장 좋을 듯하다(Lenski).

실라와 디모데를…속히 오게 하라 – 바울이 아덴으로 갔을 때 디모데가 베뢰아에

남아 어떤 일들을 했는지 구체적으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의 행적을 서

신서와 비교해 보면 다소 윤곽이 잡힌다.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만

난다(살전3:1). 그러나 바울은 다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파송하고(살전3:2), 실라

는 마게도냐(추측컨대 빌립보일 것이다)로 파송한다. 이 사이에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갔으며(18:1), 그곳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만난다(18:5;살전3:6).

=====17:16

아덴 – 아덴(Athens)은 에게해의 지류 샤론만에 위치하였으며 피라에우스(Piraeus)

항구에서 약 8km 떨어진 내륙도시이다. 북쪽으로는 파르네스 산, 동쪽으로는 펜텔리

쿠스 산, 남동쪽으로는 히멧투 산이 둘러싸고 있는 좁은 평지에 자리잡은 이 도시는

아티카의 영웅 데세우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아테네(Athene) 여신을 기념하기 위해

‘아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페리클레스(B.C.495-239)에 의해 이 도시는 전성기를

맞아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사원과 건축물들이 건축되었다. 아

울러 문학, 철학, 과학, 수사학 등이 꽃을 피웠으며 민주주의의 기초가 내려지기도 하

였다. 그러나 펠로폰네수스 전쟁(B.C.431-404)으로 인하여 아덴은 빛을 잃었다. 그

렇지만 그 문학적, 역사적 명성은 그대로 남아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바울이 이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는 찬란했던 옛 영광이 사그라든 뒤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명

성만은 계속 지속되고 있던 터라 그 도시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17:17

헬라어 원문에 나오는 ‘멘 운'(* )이란 말은 ‘따라서’라는 뜻으로 새로운 장면을

이끌어 내며 본 단락의 도입부분(16절)과 본론부분을 연결시켜 준다(17절 이하).

회당에서는 – 바울은 그의 규례대로 먼저 회당을 찾았다. 어떤 학자는 바울은 먼

저 회당을 방문했다는 본문의 기록은 누가의 독특한 서술 양식에 따라 일부러 첨가된

것이라고 본다(Conzelmann). 그러나 바울의 습관을 고려하면 이는 오히려 역사적 사

실에 대한 기록으로 봄이 나을 것이다.

저자에서 – 아덴에는 다른 그리이스 도시들처럼 오직 하나의 시장이 있었다고 한

다. 이 시장은 상업과 웅변과 철학적 담론의 중심지였음은 물론 한가한 사람들이 소

일(消日)을 위해 북적대는 곳이기도 하였다(Meyer). 한편 헨헨(Haenchen)은 이 시장

이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있는 옹기시장(* , 케라메이코스)으로서 아덴의

생활중심지였다고 설명한다.

변론하니(* , 디엘레게토) – 2절의 ‘강론하며’와 같은 뜻으로 바울이 회

당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세히 증거하고 시장과 길거리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사람

들에게 설파한 것을 나타낸다.

=====17:18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 – ‘에비구레오’는 ‘에피큐로스 학파’를 뜻하며, ‘스

도이고’는 ‘스토아 학파’를 뜻한다.

쟁론할새 – 바울이 직업적인 철학자들과 함께 논쟁에 참여한 것을 나타낸다. 당시

아덴에는 직업적인 철학자들이 준비를 갖추고 논쟁에 참여할 목적으로 광장이나 거리

에 나타나곤 하였다.

말장이(* , 스페르몰로고스) – 원래 곡식을 쪼아먹는 새를 뜻하였으나

후에 쓰레기를 주워모으는 사람을 가리켰으며, 점차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얻어 듣고

그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것인 양 도용(盜用)하는 사람을 일컫게 되었다. 그리

고는 이 말이 결국 변변치 못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결국 여기서

이 말은 극단적인 조롱과 멸시의 의미로서 그 철학자들이 바울을 사기꾼이나 떠벌이

같은 인물로 보았다는 뜻이다.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 – 철학자들은 바울을 새로운 신들을 전하는 사람으로 생

각했던 것같다. 당시 아덴에는 수많은 이방신들이 숭배되었고 또 그 신들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철학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를 한 이방신으로 생각했으며 ‘부

활'(* , 아나타시스)이란 말을 예수란 신의 배우자인 여신으로 잘못 이해했

던 것으로 보인다(I.H.Marshall, Longenecker, Haenchen). 참고로 그리이스의 열 두

신을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17:19

<현재의 아레오바고>

아레오바고 – 이는 문자적으로

‘법정’ 또는 ‘아레스의 평의회’라는

뜻으로 주로 종교와 교육,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재판권을 행사하던

일종의 권력 기구였다. 바울 당시

시의 모든 행정관들은 이 평의회의

구성원이었으며 면책(勉責) 특권을

누렸다.

한편 바울이 끌려간 아레오바고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아덴인들의

비공식적 집회를 가

리킨다고 본다(Barnes). 이 견해는 바울의 연설투가 법정상의 변호와 거리가 멀고 또

재판 진행에 관한 어떤 암시도 없다는 점에 의해 뒷받침된다. 반면에 이를, 바울의

가르침 내용을 심문하기 위해 열린 공식 법정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Hemer). 이 견

해는 디오누시오라는 아레오바고 관원에 대한 언급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34절).

걸론적으로 이것이 반드시 법적 재판의 형식을 띤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공적 집회의

성격임에는 분명하다고 봄이 무난할 듯하다.

=====17:20

무슨 이상한 것을…알고자 하노라 – 표면적으로는 정중하고 예의를 갖춘 말로 보

이지만 조롱 섞인 태도도 배제되지 않았다. 아울러 그들에게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호기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헬라의 종교적 배경과 철학적 사고 체계에서는 바울의 가

르침이 새롭고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에게서 더욱 자세한 내용과 그

배경 등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의 철학적 사고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을 이해하려고 한 철학자들의 노력 자체가 무모했다.

=====17:21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 이는 아덴 사람들의 호기

심 많고도 경박한 생활 태도를 말해준다. 아덴 사람들은 끝없이 새로운 것들을 찾아

다녔고, 새로운 것이라고 찾았을 때는 또 이내 식상(食傷)해 버렸다. 이에대해 B.C.5

세기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클레온은 아덴 사람들을 소위 새로운 것이라고만 하면 가장

잘 속아넘어가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었다(Thucydides, History). 이러한 피상적인

기질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새로운 면을 보고서 복음을 일시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

도 이내 낡은 것으로 여겨 내던져 버렸을 것이다.

=====17:22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 바울이 이 곳에 선 것은 죄인으로서 자신을 변론하기 위

해서나 혹은 철학자들 앞에서 철학을 강의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다만 바울은 주어진

모든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선포자로서 그곳에 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순간도 복음 증거자로서의 사명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 증

인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 영역 성경 KJV는 이 부분을 ‘너무 미신적이다'(too sup-

erstitious)라고 번역하고, NIV는 ‘매우 종교적이다'(very religious)라고 옮긴다.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종교성이 많다’고 한 것은 그들의 도시에 신전과 신상들이

많았던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바울의 이 말은 그들의 경건함이나 종교적인 성향에

대한 칭찬(Chrysostom)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그들의 무분별한 미신적인 태도에 대한

비난으로 이해됨이 더 합당하다(Calvin, Luther).

=====17:23

알지 못하는 신에게(* , 아그노스토 데오) – 이러한 유형의 비문을 증

거하는 것들이 있는데, 2세기의 지리학자였던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팔레룸에서

아덴으로 가는 길에 ‘이름은 있고 알지 못하는 신들의 제단’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

한 버가모에 있는 한 비문에도 ‘알지 못하는 신’이 새겨져 있다(Bruce, Longenecker,

Blaiklock, Marshall, Meyer). 그러나 이에 대한 충분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비문의

내용이나 비문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Longenecker, Haenchen). 이는

아덴 사람이 가진 신관의 한 유형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

다고 보았으며, 아직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들이 존재하리라는 생각에서 ‘알지 못

하는 신에게’라는 글을 새긴 단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여 그 도

시를 ‘알지 못하는 신’들의 저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종교심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Blaiklock). 바울은 이러한 헬라적 배경을 토대로 하여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즉

여느 때와 같이 유대의 역사를 언급하거나 구약성경을 인용함으로써 그의 설교를 시작

하지 않고 아덴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기초로 하여 그와 아덴사람들과의 접

촉점을 마련하였다.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알게 하리라 –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접촉점으로서,

‘알지 못하는 신’을 언급하는데, 아덴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절대자를 표현하기

위한 것 같다. 바울은 이러한 ‘막연한 신관’을 가진 아덴 사람들에게 성경을 계시하

고 있는 창조(24절), 구속(25-30절), 부활(31절)의 신관을 도입하여 제시하고 있다.

=====17:24

우주와…만유를 지으신 신께서 – 하나님은 헬라의 많은 신들 중에 주신인 제우스

처럼 여러 신 가운데 있는 신이 아니라 유일하신 분이시다. 아덴에는 약 30,000이 넘

는 신들이 있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러한 신들 중에 하나로 포함하

지 않도록 그분은 유일하신 분이시며 우주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심을 명백히

했다. 이 세상에는 그 어느것도 스스로 존재하거나 다른 것들을 존재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또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과 관계없이 생겨난 것도 없고 그와 무관하

게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분은 우주와 만유를 지으신 분으로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관여하시고 인류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신다.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 ‘손으로 지은 전’은 바울이 처해 있던 상황과

비교하여 본다면 쉽게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떠올릴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이 아무

리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이 지은 것이 틀림없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후에 봉헌할 때도 이와 같은 고백을 한 바 있다(왕상8:27).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국한될 수가 없으시다. 그분은 전지전능(全

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다. 아덴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국가와 또 파르

테논 신전을 비롯한 많은 신전과 사원 안에 수많은 신들을 소유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렇게 소유될 수 있는 분도 아니며 그러한 신들과 같은 부류와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 아덴 사람들은 신들의 항구한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는

인간들의 희생 제사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신상에

음식을 갖다놓고 옷을 입히고 또 좋은 장소에 그 신상들을 안치시킨다. 그러나 하나

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심으로 인간의 희생 제사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

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많은 헌금과 헌물을 드린다 하여 더 많이 응답하거나 기뻐하시

지도 않는다. 그분은 무엇이 필요하다 생각될 때 우리의 도움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얻으실 수 있는 분이다. 왜냐하면 그는 완전하고 충만하사 자신 안에서 모든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을만큼 충족하신, 이른바 유복적 속성(有福的 屬性)을 지닌 분이기

때문이다(딤전1:11;6:15).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이 세

상의 그 누구도 인간의 호흡을 한치도 연장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

명과 호흡’의 주인이시다.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 아덴 사람들은 그들이 아티카(Attic) 본

토의 흙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바

울은 이에 반대하여 인류는 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한 혈통과 한 조상을 가진

후손임을 언급하고 있다(Bruce, Longenecker). ‘한 혈통으로'(한글개역, KJV)라는 번

역은 ‘여스 헤노스 하이마토스'(* )라고 되어 있는 후대의 사본들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오래된 사본들( , A, B등)에서는 ‘하이마토스'(*

)가 생략되어 있고 단지 ‘여스 헤노스'(* , 피)라고 기록되어 있다.

많은 번역본들이 이를 따르는데(현대인의 성경, NASB, RSV, NIV 등), ‘한 사람으로부

터'(from on 또는 from one man)라고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한 사람’은 아담을 염

두에 두고 하는 말임이 분명한데, 아담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인류의 하나됨이라는 사

상은 바울 신학의 바탕이 되고 있다(롬5:12-21;갈3:28). 이러한 하나됨은 죄로 인해

훼손되었지만, 구속으로 인해 회복되었다(Bruce).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

로 아덴 사람들에게 성경적인 인간관을 피력하고 있다.

연대를 정하시며…경계를 한하셨으니 – ‘연대를 정하셨다’는 구절을 통해 하나님

께서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정해주셨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또한 14:17에 근거하여 볼

때 계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D.E.Haenchen). 본절은 24절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알지 못하는 신’은 곧 하나님으로 창

조주이시며, 그는 시간을 만드사, 사람을 시간의 흐름속에서 살게 하셨고 나아가 모든

민족들이 살 수 있는 공간적인 경계까지 정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시편 기자와

모세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 땅의 모든 경계를 정하셨으며 여름

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라고 노래했다(시74:17). 또한 모세도 모든 민족들의 경계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졌음을 교훈하고 있다(신32:8).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러

한 구약성경에서 유래하는 사상에 근거하여 아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재해석하

고 있는 것이다.

<각 학파의 주장비교>

=====17:27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 ‘더듬어 찾다’는 뜻의 헬라어 ‘프셀라파오’

(* )는 ‘만지다’, ‘느끼다’는 뜻으로 ‘소경이 무엇인가 열심히 더듬어 찾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영적으로 어두움의 상태에 놓여있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더듬

어 찾아 방황하는 것을 묘사한다. 아덴 사람들은 수많은 신들을 쫓아 다녔지만 그들

로부터 영혼의 갈급함이나 구원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했다. 이들이 믿고 따르던 신들

은 오히려 그들을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몰아 넣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범신론적 사

상, 불가지론 또는 회의론 등은 오히려 하나님을 올바로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17:28

그를 힘입어…기동하며 – 이 구절은 크레타(Creta)의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

des, B.C.6세기)의 4행시 ‘크레티카'(Cretica)에도 나온다. 제우스의 아들 미노스

(Minos)가 그의 부친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바울은 당시 아덴인

들에게 익숙했던 이야기를 통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참 하나님을 증거하고자 한 것

이다.

그의 소생 – 이런 표현은 길리기아 시인 아라투스(Aratus, B.C.315-240)의 시 ‘패

노메나'(Phaenomena)에 나온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클레안데스(Cleanthes, B.C.331-

233)의 시 ‘제우스에게 드리는 찬송'(Hymn to Zeus)에도 나타난다. 바울이 이곳 외에

도 희랍의 시를 정확하게 몇 차례 인용한 사실로 미루어(고전15:33;딛1:12) 그는 희랍

의 학문이나 문학에도 능숙했으리라 짐작된다. 이렇듯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

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제반 여건(與件)을 이미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

이 알고 있는 희랍적인 지식들을 복음을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했으며, 희랍 세계의 시

를 인용하여 복음을 증거했지만 그의 메시지는 철저히 복음적이며 성경적이었다. 한

편 24-28절의 바울의 설교는 다음과 같이 희랍의 철학적 사고와 비교된다.

+—-+—————————+———————————————+

| | 바울의 설교 | 헬라의 철학적 사고 |

+—-+—————————+———————————————+

| | (1)하나님은 한 분이다. | (1)스토아 철학 : 범신론 |

| +—————————+———————————————+

| | (2)하나님은 창조자이시다. | (2)에피큐로스 철학 : 세상 만물은 영원전부터 |

| | | 존재해 온 원자들의 우연한 집합. |

| +—————————+———————————————+

| | (3)인류는 한 하나님에서 | (3)아덴 사람들은 아티카(Attica) 본토의 |

| | 창조되었고 같은 조상을 | 흙에서 생겨나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

| | 가진 후손이다. | 자부함. |

| +—————————+———————————————+

| | (4)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 (4)에피큐로스 자연신론(deism) : 신은 인간의 |

| | 삶을 섭리하신다. | 일에 절대 관여하지 않음. |

| +—————————+———————————————+

| | (5)천지의 주재시다. | (5)인간이 드리는 희생제사를 통하여 신들은 |

| | |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또 한사람의|

| | | 손으로 신들을 새겨 만질 수 있다고 여김. |

+—-+—————————+———————————————+

=====17:29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여길 것이 아니니라 – 바울의 이 말은 스토아 철학

(Stoicism)의 범신론적인 의미에서 한 것이 아니다.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고,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본성’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연 그대로의 운명을 아

는 사람이 현자(賢者)이고, 현자는 또한 신과 같은 자라고 한다. 이는 자연 그 자체

를 신으로 보는 것이고, 근본적으로 성경적 신관, 인간관과는 배치된다. 그런데 바울

은 그들의 용어인 ‘신의 소생’이라는 싯구를 사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셩경적인 인간론의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다

(창1:26,27). 따라서 자연물(금, 은, 돌 따위)로 만들어 놓은 신들은 인간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인간보다 뛰어난 신적인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의

논증의 독특함을 알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 말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참 신이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 바울의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의

점진적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의 절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

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선포와 절단에의 촉구로 옮겨가고

있다. ‘알지 못하던 시대’란 바울이 이미 루스드라에서 ‘지나간 세데'(14:16)라고 표

현한 말로서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드러나기 이전에 가리킨다.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의 헬라어 ‘휘페리돈'(* )은 ‘보지않다’, ‘간과하다’

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생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며 또 심판보다는 가급적 회개의

때를 기다리는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우상 숭배 행위마

저 참고 견디시며 자신을 자연을 통해 계속적으로 계시하셨다(14:16;롬3:25). 그렇지

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고 그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

고 그 복음의 메시지가 온 세상에 울려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알

지 못하는 신’이 아니다. ‘알지 못하는 신’은 그 정체가 드러났고 아울러 ‘알지 못하

던 시대’도 끝이 났다.

회개하라( ,메타노에인) – 이는 ‘메타노에오'(* )의 현재 능동

태 부정사로서 계속적인 명령의 뜻을 내포한다. 이 회개는 삶의 태도의 근본적 변화

를 요구하는데 여기서는 아덴 사람들이 우상 숭배를 그치고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혹자는 이 구절이 하나님의 용서와 이신득의(以

信得義)를 가르치는 바울 사상에 걸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

에도 회개에 대한 강조점이 여전히 나타난다(살전1:9,10).

=====17:31

정하신 사람 –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로서 언급하신 것 같이(막14:41;눅17:24)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

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 아울러 온전한 인성(人性)을 지니고 세상에 오셨고

인류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 본절에서 심판주를 ‘사람’이라고 굳이 표현한 것이 다

소 어색해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심판주란 의례히 초월적 위엄과 권세를 지닌 분

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계18:8). 그러나 이 표현은 후반절의 ‘죽은 자 가운데서 다

시 살리신’이란 구절과 연결되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즉 본절은 인자의(죽으심과)

부활이 엄연히 역사적 사실이며 이는 곧 예수께서 심판주이심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

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바울의 설교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이 설교를 두

고 한낱 철학적 강변 또는 자신의 지식과 언변에 대한 자랑에 불과하다는 평을 내리거

나 그의 아덴 사역이 실패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사실 바울이 아덴에서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거나 함께 예배를 드렸다고 하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바울

은 아덴에서 분명한 성과를 보았다(34절). 바울은 자신의 화려한 사역을 기대하지 않

았다. 그는 항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최고로 여기며(빌3:8)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모든 노력을 기운인다. 결국 바울의 아덴 사역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

다. 아울러 그의 이 설교는 결코 철학적 강변이 아니다. 이 설교 가운데는 그리스도

의 구원의 메시지가 샛별같이 빛나고 있다.

======17:32

저희가…기롱도 하고…다시 듣겠다 하니 – 부활이란 주제는 역시 아덴 사람들에

게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었으나, 몸의 부활에 관한 사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들은

육체를 속되고 악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만 아니라 부활

또한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졌다(고전1:18). 시인 에스킬루스(Aeschy-

lus, B.C.525-456)가 ‘사람이 일단 죽으면 티끌이 인간의 피를 빨아들이며 결코 부활

은 없으리라’고 노래한 바 있듯이 본문의 아덴인들은 바울의 설교를 조롱과 비웃음으

로 일축(一蹴)해 버리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일단의 사람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더욱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 듣기를 요청했고 그들 중

몇몇은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17:33

바울이…떠나매 – 바울의 설교는 대부분의 청중들에게는 거부되었지만, 몇몇 사람

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하지만 바울은 더이상 아레오바고 광장에 머무르기를 거절하

였던 것 같다. 아마 바울은 공공장소에서 연설할 수 있는 자유나 권한이 있지 않았던

듯하며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수도 있고, 그랬더라도 다행히 그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Haenchen).

=====17:34

몇 사람이…믿으니 – 여기서는 세례를 주었다거나 예배를 드렸다거나, 또는 장로

를 세원다는 등의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소수의 믿는 자들이 생겨났다고 하는 이 간

략한 언급에는 이 여러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결코 신자의 수가 많고 적음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사역이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근거하고 있는가이다. 바울은 이곳에서 아덴 선

교의 복음의 씨를 심은 것이다.

디오누시오 – 이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후기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아덴의 첫 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첫 개종자가 대개 그 지역 교회의 지도

자가 되었던 사실과(고전16:15,16) 조화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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