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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 장 강해 | 로마서강해 | 로마서 6:1-14 | 나도 죽은 십자가 | 유기성 목사 16401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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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 주석 – 로마서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로마서 제 6장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본절은 본장이 은혜와 죄의 관계를 설명하는 5:20, 21 내용을 이어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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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로마서 6 장 강해

  • Author: 선한목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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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3.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3rFBdpAimA4

로마서 6장 주석

로마서 제 6장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본절은 본장이 은혜와 죄의 관계를 설명하는 5:20,

21 내용을 이어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 5장에서 바울이 주장한 내용은 ‘죄에 거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를 깨닫는 문제’였다. 율법을 통하여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죄가 드러나게 됨에 따라 인간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느끼게 된다. 그 당시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죄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으며 오늘날

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자들은 기독교 진리의 깊은 내면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수박 겉핥기’식의 표면적 지식을 가지고 애매하고 오해하기 쉬운 문제에 관심을 쏟는

다. 여기서 ‘죄에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메노멘 테 하마르티아'(*

)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이 문구가 현재 능

동태 가정법을 띤 것은 그 내용이 실현 가능성이 없음을 나타낸다. 둘째, 이 문구는

‘죄와 더불어 산다’는 의미로 죄와 더불어 전혀 투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상태에 빠진 자들은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해 그

리스도를 섬기는 체하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이런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色慾)

거리로 바꾸는 자들(유 1:4)이다. 사실상 칭의의 교리 자체를 조금이라도 오해한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저항(抵抗)을 약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전과정

이 인간의 행위를 배제시키고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하게 됨으로 구원

교리도 역시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성도는 자유와 방종

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부도덕이 판을 쳐도 교리적으로 그것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

에 이르게 되었다(고전 5, 6장).

=====6:2

그럴 수 없느니라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1절의 가상적인

질문에 대한 단호한 부정의 대답이다. 바울은 악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장하고자 하

는 사악한 생각이 매우 모순됨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를 허용하는 면

허장이 아니라 성도의 의를 회복시키는 특허장이다. 한편 바울은 이와 다소 다른 문맥

에서(3:8, 9) 본문과 비슷한 어투로 대적들의 주장을 공박한 바 있다. 바울이 칭의론

(稱義論)을 가르치던 당시, 그의 가르침이 율법의 윤리적 요구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

함으로써 자유 방임 사상을 만연시키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했던 사람들이 때때로 그러

한 종류의 반론을 제기했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의 답변은 짧은 기간에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수년간의 깊은 명상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

고 본다.

죄에 대하여…더 살리요 – 바울은 이제 성도의 편에서 논증을 전개한다. 죄에 대

하여 죽은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세력에 지배받지 않는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리셨고 이 속죄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죄가 더욱 왕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전도(顚倒)시키는 행위이다(Calvin). 혹자는 본절의 ‘죄에 대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 하마르티아'(* )를 ‘죄로 인하여'(on account of sin)로 해석

한다(Michaelis, Cramer, Storr, Flatt, Nitzsch). 그러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그러

한 해석은 본절의 문맥상 바울이 의도하는 주장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죽었다’함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죄와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악된 삶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交通)

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에서처럼 성도가 ‘죽었다’는 선포

를 종종한다(11절 ;7:4, 6;갈 2:19;골 2:20;3:3). 이러한 성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

음이요, 율법에 대한 죽음인데 실제적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 옛 사람의 죽음이다.

이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라고 고백했다. 이

와 같은 체험적 고백이야 말로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갖는 것이

다.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신분을 갖고 있으면서 또 죄에게 종노릇한다는 것

은 분명히 모순이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해서 죄의 세력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거나 죄를 결코 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7장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죄와 투쟁하게 된

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의 세력권

을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초래하는 엄청난 불행들에 대하여 죽었으며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6, 14, 16, 17절 주석 참조).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바울은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

는 것을 세례받음과 결부시키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세례는 단순한 의식(儀式)이나

성례전(聖禮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은유적 의미를

갖는다. 세례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은 다른 구절에서도 본절과 비슷한 연관성을 지닌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계기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게 된 경우가 그러하다(고전 10:2). 그들은 처음으로 모세와 연합하

였고, 모세의 지도권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모세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았

다. 그리스도께 속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합

하여 함께 죽었다는 의미이며, 함께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세례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만 가능하며(고전 12:13), 이것은 성도의

신령한 체험이라느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례와 성찬 자

체에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이 있는 것처럼 가르침으로써 교리적인 오류를 범하

고 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의 죽으심에 세례받아 연합되었다는 것은 성도들

역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함께 죽은 자된

성도들은 죄에 종노릇하던 옛사람이 죽었으므로 계속 죄에서 종노릇하는 신분에 머물

려고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킴으로

써 바울은 많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더욱 처절하게 회개하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고 하는 가르침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있다.

=====6:4

그러므로 – 이 접속사는 1-3절까지의 진술에 대한 결론을 유도해 내기 위해 사용되

었다. 특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도 연합한

자들이라는 3절의 진술을 본절에서 더욱 진전시키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함께 장사되었나니 – 침례교도들은 본 구절이 물에 잠기게

되는 침례에 대한 영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절은 고전

15:3, 4과 같이 침례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

심과 장사되심이 갖는 영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5절 이하에

서 계속되는 바울의 설명에서 더욱 분명하게 밝혀진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

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을 ‘세례’라는 용어와 결부시킨 것은 성도와 그리스

도의 영적인 연합과 인격적인 연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Murray). 그러나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세례받음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생동적인 연합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는 사실이다. 바울은 비록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몸을 잠그는

일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葬事)되는 일로 묘사하였다. 여기서 ‘장사된다'(*

, 쉬네타페멘)함은 자연적인 출생으로 맺어지는 아담과의 관계에 의해

지배되던 옛 사람(엡 4:22;골 3:9)의 종말을 상징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을

하기 이전의 거듭나지 못한 본성과 행동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의미

한다(갈 5:24;골 2:12).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 어떤 사람들은 ‘영광’을 ‘장엄한 권능’으로 해석한

다(Hendriksen, Harrison, Barmby, Calvin, Black, Phillips, Erdman, Stott). ‘하나

님의 영광’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Omnipotence)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

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용어를 ‘하나님의 장엄한 권능’ 정도로 해석

하는 것은 ‘영광’이란 단어가 지닌 의미를 만족스럽게 드러내었다고 볼 수 없다. 본절

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새명 가운데 사는 것에 대

한 수단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근거가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광’

이란 용어 자체가 지닌 포괄적인 뜻을 드러낼 수 없게 된다.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죄에 대하여 죽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까지 포함

됨을 가르치고 있다. 이 말은 성도가 단순히 죄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의(義)의 영역에서 살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는 것”이라는 말씀과(요 10:10) 잘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는 말은 ‘새 생명의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그 가운데서 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죄가운데 거하자’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분명히

바울의 복음을 오해한 자들이다.

=====6:5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 블랙(Black)은 본 구절을 ‘그리스도

인 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같이 희생적인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성장함으로써 그리스

도의 죽으심을 공유하게 된다’고 해석한다. 머레이(Murray)도 이 해석에 동의한다. 이

해석은 ‘연합한’이라는 형용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쉽퓌토이'(* )가

‘함께 심겨진’ 또는 ‘함께 자라난’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

나 본장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에까지 자라

난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구절은 없다. 따라서 본절의 ‘쉼퓌토이’는 이미 바울이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성도가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음을 구

체적으로 표현해 주는 용어일 뿐이다(Hendriksen, Barmby).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 ‘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소

메다'(* )가 미래 시제인 것은(shall be, KJV) 본절에서 바울이 장래에

일어날 성도들의 신체상의 부활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생각한다

(Tertullian, Chrysostom, Ambrosiaster). 헬라어의 미래 시상은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그 외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논리적으로 또는 불가피하게 일

어날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후자(後者)의 의미를 살려 ‘에소메다’를 RSV는 ‘확실히

되리라'(shall certainly be)고 해석하였다. 또한 몇몇 주석가들은 본절의 미래 시제

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함으로써 당연히 초래되는 결과적 사실을 암시한다고 주장

한다(Murray, Meyer). 따라서 본절은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포괄한다

고 봄이 타당하다. 그러나 심사 숙고해야 할 사항은 바로 앞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부활이 몸의 부활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

에게 속한 자들에게 허락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연관시켰다. 그 삶은 장래 뿐만

아니라 현재에 속한 것이다.

=====6:6

우리가 알거니와 –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유대인이 아니라 바울 자신과 그의 복

음을 들은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의 복음을 들은 자들을 단순히 로마에 있는 성

도들만으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즉 바울은 진술하고자 하는 대상으로 복음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가진 자들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 옛 사람 – 바울은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하여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고

칭한다. ‘옛 사람’은 영적인 죽음 아래서 신음하며(엡 2:1;골 2:13) 본질적으로 마음

이 악하여 죄에게 종 노릇하는 사람이며(6절),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 즉 ‘새 사람’에 대해서 바울은 이미 1:18-3:18에서 자

세하게 언급하였다. ‘옛 사람’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그 죄로 인해 아무

런 갈등을 느끼지 않으며, 바람에 밀려 다니는 돛단배와 같이 죄의 세력에 따라 이리

저리 끌려다닌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 이 표현은 3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가 세

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합하였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 말은 우리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낡은 질서에서 떠나 의와 평안이 있는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의

미도 된다(갈 2:20). 결국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더 이상 육체의 욕심

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생활하는 삶의 변화를 가리킨다(고

후 4:11;골 2:20).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옛 사람이

죽은 것과 죄의 몸이 멸하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은 죄

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한다. 비록 성도가 현재의 삶 속에서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

을 지니고 있으나 신분상으로 이미 죄의 몸은 죽은 상태에 놓여 있다. 옛 사람이 그리

스도와 함께 죽은 사건은 반복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도에게 단일회적인(once for all)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 4:22)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권면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

명을 소유하게 되는 연합의 체험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성도의 현재적 삶은 항상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 속에 머무르고 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권면했던 것이다. 이 권면은 한 마디로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라

는 의미가 된다.

=====6:7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 여기서 하나의 난제(難題)가 있다. ‘죽은 자’가 그리스

도를 지칭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한 그리스도

인들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비록 본절이 단수로 언급되었으

나 그리스도가 죄에서 벗어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본 구절이 일종의 일반 명제로서 할라카

(Halakah)에 언급된 랍비적 가르침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이 유명한 유대인 교법사 가

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았고(행 22:3) 랍비의 지식과 유대인 전통에 정통(正統)했던

점을 미루어 보아 본절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기보다는 일반적인 명제로 언급되

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베드로도 일반 명제 형식을 빌어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실제적인 예로 스코틀

랜드에서는 사형 집행을 받은 사람은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한다고 한다. 한편 ‘죽은

자’와 연관해서 혹자는 ‘성도’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미 죽으신

그리스도와 같이 성도는 모든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죽었으므로 죄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에 있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Vaughan, Liddon). 그러나 그리스도나 성도가 죄

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의 세력, 죄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 본절은 칭의의 순서적 과정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

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씻음이 이루어짐을 믿고 회개하는 자

에게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고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의롭다 함

을 얻는 것이다. 칼빈(John Calvin)은 본절이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지적하면서 재판관의 판결로 사면(赦免)을 받은 죄수가 그 순간 기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듯이 성도가 죄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의 몸이 되는 것도 매우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하였다. 한편 유대인들은 본절을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으면

그것으로 율법의 의무에서 해방을 받는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

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날에 자기

의 죄를 책임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벧후 2:10).

=====6:8

본절은 내용상으로는 3절과 5절의 내용을 반복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성

도의 연합이 인격적이고 생명적인 연합일 뿐 아니라 영원한 연합임을 보여주고 있다

(Murray).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3절에 언급된 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여기서 다시 이 말씀을 반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성화(聖化)의 생활이 부과됨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 여기서 ‘살 줄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제소멘’

(* )은 1인칭 복수 미래형으로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우리가 살

것이다'(we shall live;KJV, RSV)이다. 이는 5절 주석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장래

적인 소망 곧 부활의 소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한 성

도는 또한 그리스도의 살으심과 연합하여 반드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곧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되니 이 땅에서 소유케 된 생명(* , 조에)은 장래에 일어난 구속 사건의 모

든 결과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쉰제소멘’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시 일어

날 성도의 부활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가 이 땅에서 영원한 나라의 생명을 소유하며 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

나 이 땅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부활 생명과 긴밀한 연관을 맺는다.

한편 본절에 ‘믿노니’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튜오멘'(* )은 1인칭

복수 현재 직설법으로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확실성 있는 견고한 믿음을 가리킨다. 이

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정(情)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성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함을 나타낸다.

=====6:9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 ‘다시…아니하

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케티'(* )는 ‘절대로…아니다’는 의미로서

부정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로서는 가장 강력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의미를 살

려 KJV는 ‘우케티’를 ‘더이상…않다'(no more)로 RSV는 ‘결코…아니다'(never)로 번

역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은 자의적(自

意的)이며 절대적인 일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아무런 흠과 티가 없으

셨으나 인류 구원을 위한 성업(聖業)을 이루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고 또 다

시 살아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타의에 의해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면 거기에는 하나

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도, 능력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죽지 아니하시는’, 즉

‘결코 죽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보장이 되신다.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이 그를 주장한다면 성도의 신앙

은 진실로 헛된 것을 좇는 꼴이 될 것이다(고전 15:12-17).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

한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신 사건에 있다.

이 사건이 참이어야만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의 연합을 하여 살게 된다는 확신

이 참이 될 수 있다. 사망이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한다면 그와 연합한 자들에게도

역시 주장하지 못한다. 이러한 주장이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일반 명제

에 대한 근거가 된다. 한편 본절이 자칫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

다는 어감을 줄 수 있다. 본래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는 결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

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8:3) 사망의 세력권 안에서 활동하게 되셨다. 그리고 죄인이 되시어 사망의

원리를 따라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본절에서 이미 그리

스도께서 한번 사망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처럼 ‘다시’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 본절의 ‘죄에 대하여'(*

, 테 하마르티아)란 표현은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신의 죄로 인한 필연적인 죽음(창 2:17)이 아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짐지우신 자기 백성의 죄와 허물을 위해 죽으셨다(사 53:4-6). 또한 본절의 ‘단번에’

(* , 에파팥스)란 표현은 구약의 속죄 제사 규례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

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드렸으며 백성

들은 죄를 범할 때마다 희생 제물을 가져왔으니 그 제사는 반복적이었다. 그러나 대제

사장되신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들이 반복적(反復的)으로 드려왔던 그 제사

대신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쳐 ‘오직 한번만'(once for all, RSV) 드림으로써 구약의 제

사를 완성하셨다(히 7:27;9:12;10:10).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피흘리신 제사는 구약의 모든 피제사의 최종적 제사요, 완전하고 영원한 제

사이기에 제사를 또 드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죽으실 필요가 없다.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 ‘하나님께 대하여’란 표현을 ‘하나님

으로 말미암아'(throught God), 혹은 ‘하나님 안에서'(in God)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으나(Calvin, Chrysostom) 이보다는 ‘하나님을 위하여’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

여’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당한 듯하다(Murray, Meyer, Hendriksen). 우선 본절의 ‘하

나님께 대하여’란 표현은 ‘죄에 대하여’와 대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구의 해석은

‘죄에 대하여’란 표현에 대한 해석과 문맥적 일치를 요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하

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맥락

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권고한 12-14절 내용과도 조화된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는 그의 서

신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함을 강조한 바있다(3:8, 14).

=====6:11

본절에 대해 스토트(John Stott)는 다음과 같이 매우 논리적이면서 간략하게 설명

했다. “만약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에 대한 죽으심이었으면, 그의 살으심이 하나님에

대해 살으심이고, 그리고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살으심 안에서 그와 연합되었다면, 우

리 자신은 죄에 대하여는 죽었으며(have deied)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았다(have

risen).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이 여겨야 한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 2절 주석에서 언급했듯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놓임을 받

아 자유를 누림을 말한다.칼빈(Calvin)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성도는 영적 자유를 얻은만큼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 날마다 육체의 소욕(所欲)을 제어하는 성화의 삶을 살도록 분투해야 한다. 이것

은 죄에서 완전히 끊어져 거룩함과 의 가운데 온전히 거할 때가지 해야 한다”고 하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엔 크리스토 예수) – 본

절에서 이 문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와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라는 전 후의

문구에 동일하게 연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떠나서는 죄의 세력으로부

터의 자유를 생각할 수 없고 생명의 부활도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커다란 건축물의 초석(礎石)과도 같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 표현을 그의 서신에서 자주 사용하였던 바, 성도와 그리스도간의

관계성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

용에 관해서는 본장 주제 강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참조하라.

여길지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제스데'(* )는 현재 명

령형 복수 2인칭으로 ‘권고’로 해석해도 되며 ‘명령’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12절과 13절에 사용된 동사가 명백히 명령형으로 해석되므로 본절도 권고형보다는 명

령형으로 해석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즉 성도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

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렇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진 사건은 성도들을 그러한 신분으로 만든 사

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다’는 말은 실재가 아닌 사건을 실재인 것처럼 생각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재적인 사건을 파악하여 그것을 굳게 붙잡는다는 의미이다.

=====6:12

그러므로 –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다(1, 2a 절)는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교리적으로 피력했던 진술들을(2b-11절)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본 접속사를 사용했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 바울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

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가 성도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

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바울이 논리적인 모순을 범하고 있는가 ? 그렇지 않다.

바울은 다시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고 언급함으로써 죄에 대한 성

도의 죽음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한다. 이것은 죄에 대한 성도의 죽음이 그리스도와 함

께 실재적으로 발생했던 사건에 대한 진술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죄가 성도들에게 왕

노릇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보장되어 있다. 다만 죄가 연약한 인간의 몸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고 이것 역시 현실이다. 그러나 죄가 이전과 같이 성도들에게 왕노

릇할 수는 없다. 성도들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만 주인이다. 그런데도 죄는 성도들의 연

약한 몸을 통하여 역사하면서 자신이 주인인 체 할 수 있다. 이러한 거짓된 가장(假

裝)조차 허용하지 않기 위해 바울은 본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성도는 의

인이요 거룩한 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나, ‘죽을 몸’을 지닌 현재는 아직 죄와 투쟁

하는 신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죽을 몸’의 ‘죽을’은 헬라어로 ‘드네토'(*

)이며 이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벌로써 내려진

필연적인 죽음을 가리킨다(mortal;KJV, RSV).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하기 전에 죽지 아

니하는 ‘생령'(生靈)을 가졌었다(창 2:7). 그러나 그가 범죄한 후부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고 이 사망의 진노는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내려졌다. 그러나 사망의

진노는 구속함을 받은 성도에게는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도

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면서 타락한 세상과 부딪히게 된다. 그렇기에 바

울은 더 이상 죄의 유혹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지속적으로 애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몸의 사욕(私慾)을 순종치 말고 – 죄는 우리 죽을 몸을 통해서 역사한다. 그 몸에

서 죄를 짓게 하는 욕구가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욕구대로 행하게 되면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도전(挑戰)을 받게 된다. 성도라면 당연히 죄와 투쟁할 준비가 되

어 있어야 하며 또한 투쟁해야 한다. 비록 죄에게 패배할 때가 많을지라도, 성도는 이

미 죄에 대한 승리를 보장받은 신분이므로 염려할 필요는 없다. 한편 ‘순종치 말고’라

는 말은 난폭하고 불같은 정욕대로 행할 것을 사단이 강요한다는 암시를 함축한다. 사

단의 세력은 성도가 단순히 죄와 연합하는 것을 지나 죄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죄의 심각성과 타격적인 지배성을 상기할 수 있다. 일찍이 사단은 그리스도께

도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조건을 내걸은바 있다(마 4: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

단의 유혹을 이기시고 꾸짖은 것처럼 성도는 죄악의 곁에 가지 말며 죄의 유혹을 단호

하게 거부해야 한다.

=====6:13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 ‘지체’라는말은 12절의 ‘죽을

몸’이라는 말과 내용상으로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불의의 병기'(*

, 호플라 아디키아스)란 표현은 각각의 지체가 죄의 종이 되어 불의를 행하는

도구가 됨을 나타낸다. 특히 바울은 ‘병기’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단순히 각 지체가

불의를 행함에 있어서 도구적인 의미보다 더 적극적인 수단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성도라 할지라도 자기 몸의 지체를 제어(制御)하지 않으면 이미 그의 몸

은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오직 너희 자신을…하나님께 드리며 – ‘너희 자신’은 ‘너희 죽을 몸'(12절)과 ‘너

희 지체’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란 표현

은 11절 내용의 반복으로, 성도가 의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자의 신분임을 상기시

키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서, 새

생명을 소유한 신분으로 자기의 지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 이유는 성

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고전 6:15),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며(고전 6:19), 값

으로 산 것(고전 6:20)이 되었기 때문이다.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혹자는 바울이 몸의 지체를 악에 대항

하고 의를 위해 전쟁하는데 사용되는 무기로 생각하게 된 것이 그의 선생들이나 스토

아 철학자들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Black). 그러나 이에 대한 근거는 매우 희

박하다. 오히려 바울은 구약의 ‘거룩한 전쟁'(holy war)에 대한 개념을 영적 전쟁에

적용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은 성도의 삶을 군사적 삶에 비유하는 표현법을 즐겨 사용

했다(고전 9:7;고후 6:7;엡 6:10-20;살전 5:8;딤후 2:3). 거듭난 성도는 자신의 몸을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죄와 투쟁하기 위한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성도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싫어할 때, 이미 그는 자기의 몸이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어떠한 의의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됨을 깨달아야 한다.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 성도가 자기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바쳤

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와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 수 없다. 그렇지만 자기 몸을 하나

님께 바치는 삶을 살고자 애쓰는 그 사람에게 죄가 왕노릇할 수는 없다. 한편 ‘주관치

못하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퀴리유세이'(* )는 미래 능

동태 직설법이다. 여기서 이 단어가 미래 시제인 것은 단순히 장래에 되어질 일을 언

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주관치 못한다는 내용을 강력하게 확증(確證)한다. 즉

죄가 성도를 주관치 못하는 것은 장래뿐만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도 확실히 그렇다는

것이다. 이 강력하고 확실성 있는 보증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는다.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 본절에서 ‘법'(* , 노모

스)이 ‘은혜'(* , 카리스)와 대비되어 있으므로 이 ‘법’은 ‘법칙’이나 ‘세상

적인 법’이 아니라 ‘율법’을 의미한다. 바울이 ‘율법’과 ‘은혜’를 대비시킨 것은 죄가

성도를 주관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즉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와는 관계없이 죄의 문제만으로 고민하여 항상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되니, 그 사람은 죄의 종이다. 그러나 은혜의 원리에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확신과 함께 죄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에 거하게 되므로

결코 죄가 그에게 왕노릇할 수 없다. 이 사실은 8:1, 2에서 바울이 선포했듯이 그리스

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을 뿐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

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6:15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 이 질문은 1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본절은 1절과 같은 질문이지만, 1절은 문제의 제

기이며 본절은 제기된 문제를 풀기 위해 그 동안 진술했던 내용을 재확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주제로의 전환을 위한 예비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리

고 또한 강조점의 차이로 1절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해도 좋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며, 본절은 ‘죄에서 해방되어 은혜 아래 있으므로 계속 죄를 지어도 좋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자에 대한 반론이다. 한편 ‘죄를 지으리요’라는 표현도 역시 1

절의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자세한 것은 1절 주석을

참조하라.

그럴 수 없느니라(* , 메 게노이토) –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질

문한 사항에 대해 강한 부정의 대답을 하고 있다. KJV는 이 문구의 헬라어 ‘메 게노이

토’가 지닌 강력한 부정의 뜻을 살려 ‘하나님이 금하신다'(Good forbid)라고 해석하였

고 RSV는 ‘결코 그렇지 않다'(By no means !)라고 해석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당연히 방종한 마음과 생활을 거부하고 은혜에 합당한 생활을 해

야 한다.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로스'(* )는

‘청지기’ 또는 ‘집사’를 가리키는 ‘디아코노스'(* )와는 달리 철저히

주인에게 예속된 ‘노예’를 가리킨다(slave;RSV, NIV). 어떤 사람이 자기 몸을 노예로

바치면 이미 그는 자기 몸에 대한 주권을 포기해야 한다. 오직 주인에 대한 철저한 복

종만 있을 뿐이다.

죄의 종으로 사망에…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 영적인 차원에서 사람은

‘죄의 종’이든지 ‘순종의 종’이든지 어느 한 편에 속하게 되어 있다. 물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하니한'(계 3:15)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엄격한 의미에서 ‘죄의 종’에

속한다. 한편 본절에서는 ‘죄의 종’과 ‘순종의 종’이 대조되어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죄의 종’은 ‘불순종의 종’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곧 ‘불순종의 아들들'(엡

5:6)로도 이해된다. 그리고 이들은 벧리알의 자손들로(신 13:13;삿 19:22) ‘불법의 사

람’이요, ‘멸망의 사람’이다(살후 2:3). 그리고 또 다른 대조로서 ‘사망’과 ‘의’가 언

급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죄의 종’과 ‘순종의 종’에게 각각 주어지는 열매다. 23절 말

씀과 연관지어 볼 때 본절의 ‘사망’은 ‘영원한 멸망’을 의미한다(살후 1:9). 반면에

‘의’는 ‘사망’과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영생’으로 대치해도 무난하다.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혹자는 본절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가 하나님께

로 돌아온 일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오늘날의 상태에 이르게 하신 하나

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주석했다(Hendriksen). 이 말은 바울이 로마 교회가 성화(聖

化)된 모습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절 이하에 계속된 바울의 진

술은 성화의 진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변화된

신분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 사망이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했으므로

(5:17) 그의 생명에 동참한 모든 사람은 죄의 종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지니고 있던 사람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 성화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 – 혹자는 본 구절이 딤후 1:13의 ‘바른 말’과 딤

전 1:10의 ‘바른교훈'(딤후 4:3;딛 1:9;2:1)과 같이 복음 중에서 윤리적인 부분에 대

한 설명에 속한다고 단언한다(Murray). 그러나 만일 이 주장을 따르면 곧이어 언급되

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절)는 선언이 믿음에 의한 것이 아

니라 윤리적인 본을 순종함으로써 주어진 결과임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기독

교를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려 놓는 결과를 초래하며 반(反)복음적인 가르침이다. 따라

서 ‘교훈의 본’은 복음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음으로 순종하여 – 이 표현은 바울이 10:10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

고 언급했던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과 ‘순종’을 동

일 선상에서 설명한다(히 3:18, 19;4:2, 6). 따라서 본 구절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또는 ‘마음으로 믿어’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본절에서 ‘순종’이라는 단어에 너무 치

중하면 인간 행위가 강조되며 바울이 그동안 강조했던 ‘믿음’과는 별개(別個)인 것으

로 오해하기 쉽다.

=====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 성도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죄의 몸이 멸하

여졌으며(6절), 동시에 죄에 대하여 죽은 그는 죄에서 벗어났다(7절). 이런 이유로 그

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8:1).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 ‘종이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둘로데테’

(* )는 단순 과거 시제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단순과거 시제

는 어떤 동작이 불확정직임을 나타낸다. 즉 동작의 결과가 완료되었음을 나타내지 않

는다. 바울은 성도가 ‘의에게 종이 된’것을 단순과거 시제로 표현함으로써 7절의 ‘교

훈의 본’, 곧 복음을 믿은 결과 성도가 죄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종이 된 상태가

현재에도 계속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 ‘육신'(* , 사르크스)은 새로운 피조물로 옮겨질

수 있는 ‘몸'(* , 소마)과는 달리 이 세상의 존재 양식에 속하여 있고 이 세상

과 더불어 멸망당할 자로서의 인간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 ‘육신’은 ‘영'(성령)과 대

립을 이루면서 연약함과 허무 가운데 있는 인간성을 의미한다(Ridderbos). 따라서 본

절은 본 서신을 받아보게 될 로마교회가 영적인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 영적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예를 들었음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종에 대한 예를 가리킨다. 바울은 성도의 신분이 하나님의 신실

한 종이라는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종과 주인과의 관계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과 같이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는 표현

을 갈 3:15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전에 너희가…불법에 이른 것같이- 본 구절은 1:18에서 3:18까지 바울이 언급한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요약 설명으로 이해된다. 바울은 여기서 로마 교회 성도들

이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 ‘거룩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스모

스'(* )가 ‘성화’를 의미하는지 ‘성결'(holiness)을 의미하는지에 대

한 견해가 학자마다 다르다. 혹자는 고전 1:30;살전 4:3, 4, 7;살후 2:13;딤전 2:15;

히 12:14;벧전 1:2 등을 근거로 ‘하기아스모스’가 과정적인 의미를 지닌 ‘성화’

(sanctification)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상태를 가리키는 ‘거룩’ 또는 ‘성별’을 뜻한다

고 이해한다(Murray, Barmby). 그러나 앞에서 언급된 구절들 중에 살전 4:3, 4, 7과

딤전 2:15은 단순히 ‘성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그밖의 것들은 그렇

지 않다. 렌스키(Lenski)에 따르면 ‘하기아스모스’의 접미사 ‘모스'(* )는 ‘활

동’을 의미하는데, 이 ‘활동’은 우리 자신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고전 1:30;6:11에서 ‘하기아스모스’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거룩’을 의미하며 이 ‘거룩’함이 ‘의’와 ‘구속’과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전가됨을 가

르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하기아스모스’를 ‘거룩’ 또는 ‘성별’로 해석하든지

‘성화’로 해석하든지 상관없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을 위해서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바울은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와 ‘구속’과 ‘거룩'(성화)을 믿음으로 전가받았으나 아직

연약한 육신에 매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몸의 구속’을 기대한다고도 했으며

(8:23)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듯이(13절) 당연히 ‘거룩함에 이

르라’고 권면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본절에 언급된 바울의 권면은 ‘거룩'(성화)이 구원

의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사실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 이 표현은 19절의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

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

기 이전에는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

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의 신분은 ‘죄의 종’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聯合)하여 자기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사람은 ‘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 의를 행해야 할 의무도 책임도 없었

다. 비록 자연인은 본성이 율법의 행위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2:14, 15). 그래서 칼빈(Calvin)은 “육체의 자유는 단지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서 우리를 자유케 하여 마귀에게 얽매이게 할 뿐이다”라고 진술했던 것이

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 6:24)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교훈과도 일맥 상통한다.

=====6:21

그 때에(* , 토테) – 바로 앞절에서 언급한 ‘죄의 종이 되었던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죄의 종이 되었던 때를 가리킨다.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 성경은 ‘열매'(* , 카르폰)에 대해 말할 때

‘선한 열매'(마 3:8;요 4:36;갈 5:22;빌 1:11;약 3:17)와 ‘악한 열매'(22절;7:5)를 구

분한다. 혹자는 여기서 바울이 ‘선한 열매’를 의미한다고 단언한다(Murray, Barmby).

그리고 본절의 질문에 대하여 ‘전혀 없었다’란 대답이 암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러

한 해석은 그다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르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때’

란 표현이 죄의 종이었던 때를 의미하므로 ‘열매’를 달리 해석하지 않고 ‘열매’란 표

현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면 본절은 “너희가 죄의 종이었

을 때에 무슨 열매를 맺었느냐 ?”가 된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죄의 종으

로 사망에 이르는 열매가 아니었던가 ?”일 것이다.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 이 표현은 17절에서 20절까지의 진술이 그리스도

를 믿고 있으면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면 죄에 거하자'(1절)고 주장하는 로마 교회 성

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 상태의 로마 교회 성도들에 대한

것임을 보여준다. 성도가 하나님을 모르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힘써 대적했었으

나 하나님을 알면서부터 의에게 종이 되었으므로 그는 지난 날의 일들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 죄의 종이 된 결과는 오직 ‘사망’만 있을 뿐이다. 혹

자는 이 ‘사망’이 ‘영원한 사망’을 가리키는지 확실치 않다고 주장하지만(Barmby),

(1) ‘사망’이 ‘영생’과 대조되어 언급되고 있는 점(22, 23절), 그리고 (2) ‘마지막’이

라는 단어가 종말론적 사건인 대심판에 대한 암시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의 ‘사

망’은 ‘영원한 죽음’ 곧 지옥의 형벌을 의미한다.

=====6:22

그러나 이제는 – 이 표현은 극적인 전환을 보여주기 위해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것

이다(3:21 주석 참조). 지금까지 바울은 죄에게 종된 상태에 있는 인간의 실존과 그

결말에 대해 설명했으나 본절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내용으로 전환(轉換)시키고자 이

같은 접속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 18절의 내용을 반복한다. 그리고 성도가 죄에서 해방

된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있다(6절).

하나님께 종이 되어 – 하나님께 종이 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행해

야 한다. 이 ‘의’는 (1)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도에게 이루어졌지만, (2) 연약한 육

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성도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천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록 바울이 18절에서는 ‘의에게’라고 언급했고 본절에서는 ‘하나님

께’라고 언급했을 뿐이지 그 두 단어는 본질상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 여기에 언급된 ‘거룩함’도 19절에서와 마찬가

지로 ‘하기아스모스'(* )이다. 이 ‘거룩’은 인간의 순수한 노력만으로

성취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셨던 ‘성화’

(sanctfication)를 의미한다. 그리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는 해석상 애매한 표현이

지만 구체화시키자면 ‘거룩함의 열매’ 또는 ‘성화의 열매’로 해석될 수 있다. 바울은

이 ‘성화의 열매’를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얻

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테'(* )의 시제가 개역성경과는 달리 현재

형이기 때문이다. 이 시제는 본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성화

의 열매’를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말하지 않고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19절의 ‘거룩함(성화)에 이르라’는 권면과 함께 종

합적으로 해석되어야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본절과 19절을 종합해 볼 때 성도는

‘성화의 열매’를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으면서도(고전 1:30;6:11) 동시에 ‘성화’를 수행

해야 할 의무를 지닌 신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화’ 자체도 ‘의’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성도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것을 바라보면

서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그것이 드러나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 예수의 가르침대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요

5:24;6:47, 54). 그렇지만 완전한 의미의 영생은 마지막 부활 때에 거룩함의 열매를

소유한 자에게 주어진다.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영생이니라 –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은

죄에 계속 거하는 자에게 지불되는 대가가 사망이라는 의미이다. ‘삯’에 해당하는 헬

라어 ‘와소니아'(* )는 흔히 ‘병사들의 급료’의 의미로 사용된다

(Hendriksen, Murray, Calvin, Barmby, Black). 비록 ‘와소니아’가 딤전 5:18에서는

단순히 노동자가 일한 것에 대한 대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나머지 구절들

(눅 3:14;고전 9:7)에서는 군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

로써 일꾼과는 달리 군인들이 철저하게 군사적인 의무에 매여있음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처럼, 사람이 ‘죄의 종’으로서 죄에게 충성함으로 ‘사망’이라는 대가를 받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와소니아’는 그 다음에 언급되는 은사(* ,

카리스마)와 대조되고 있다. 이 ‘은사’는 ‘일한 것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

는'(4:6) 것에 대하여 적용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다. 그리고 이 ‘은사’는 성도가 죄

에서 해방되어(18, 22a절) 거룩의 열매를 얻게 된(22b절) 사실을 지적하고 있음이 분

명하다. 이처럼 성도는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자신이 노력한 대가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사로 값없이 ‘의’, ‘성화’, 그리고 ‘구원’을 받게 되므로 결

코 자랑할 수 없다.

[로마서 6장 강해 설교말씀] 성화(聖化)의 이유(롬 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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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에서는 구원받은 백성이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끝난 것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은 거듭남으로 중생한 것입니다. 다시 태어났으니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성화는 태어난 사람이 성장해 나가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세상에서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성화(聖化)의 이유(롬 6:1-23)

1-11절, 세례의 원리

[1-3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에이스)[안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에이스)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지만(5:20)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는 없다. ‘그럴 수 없다’는 말은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그 이유는 성도가 이미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이다. 죄에 대해 죽은 자가 어떻게 계속 죄 가운데 살 수 있겠는가?

성도가 거룩해야 할 이유는 세례의 원리로 설명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한 것이다. 세례는 첫째로 죄씻음을 표시하고 확증하지만,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표시하고 확증한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오고, 죄씻음은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을 가져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그를 믿는 우리는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고 그와 연합된 성도가 계속 죄 가운데 거하면서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구원의 이치에 반대되는 일이 되는 것이다.

[4-5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장사된 것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부활하심과 같이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려 함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또한 그와 함께 사는 것이며, 그의 부활의 생명이 그와 연합된 이들 속에 역사하여 새 생명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이치가 그러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죄 가운데, 즉 영적 죽음 가운데서 산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구원받은 자들은 새 생명을 받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구원받은 것이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6-7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옛 사람’은 죄로 인해 죽었던 옛 자아, 곧 구원받기 전의 자신을 가리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옛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 피조물이 되었다(고후 5:17). 옛 사람이 죽은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려 함이다. ‘죄의 몸’은 ‘옛 사람’과 같은 뜻으로 죄성(罪性)의 주체를 가리킨다. 이제 죄의 몸인 옛 사람은 죽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새 사람이 살았다. 우리의 구원은 죄 안 짓게 하는 구원이다. 그것은 죄에 대해 죽는 구원이며 의를 향해 사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죄 가운데 산다면 그것은 구원의 목적과 방향에 역행하는 것이다.

[8-11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연합되어 그와 함께 죽은 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또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삶으로 나타난다. 비록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완전하지 못할지라도, 거룩함은 구원의 당연한 과정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고 영원히 사시고 다시 죽지 않으시듯이, 예수 믿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고 범죄치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해 단번에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은 영원히 제거되었다. 죄와 사망은 설 곳이 없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사역은 완전하고 영원하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을 향해 사신 것이었다. 이제 죄와 사망은 끝났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만이 그에게 있다. 그의 부활의 한 의미가 여기에 있다. 성도의 거룩한 삶 곧 성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가 의미하는 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의 연합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 곧 성도의 성화(聖化)의 당위성을 증거한다. 그것은 세례의 원리로 설명된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살았다. 그것은 죄의 몸인 옛 사람이 죽었고 새 사람이 새 생명 안에서 산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성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죄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을 향해 산 자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죄와 결별하고 산 자처럼 의와 거룩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12-23절, 순종의 원리

[12-13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몸의 욕심들로 말미암아 그것에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는 몸의 욕심들을 통해 활동한다(약 1:15). 몸은 의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죄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성도는 죄에 대해 죽은 자이므로 죄가 몸을 주장치 못하도록 욕심들을 통제하고 절제해야 하고 죄에 복종치 말아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 몸을 거룩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지체’는 몸의 부분들, 즉 눈과 귀와 입, 손과 발 등을 가리킨다. 성도는 이제 몸의 모든 부분을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며 더럽고 악한 것을 보고 듣고 말하며 만지고 그런 곳으로 갔을지라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 몸을 거룩하게 드리고 의롭고 선한 것만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해야 한다.

[14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성도가 자기 몸을 죄에게 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죄가 그들을 주관치 못하기 때문이다. 또 죄가 그를 주관치 못하는 이유는 그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법적 책임과 그 형벌이 제거되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을 말한다. 의롭다 하심 곧 칭의(稱義)는 법적인 구원이다. 성도는 법적으로 완전한 의를 이미 얻었다.

[15절]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럴 수 없다’는 원어(메 게노이토)는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바울은 6:1-2에서도 성도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계속 머물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 후 ‘그럴 수 없다’고 분명하게 대답했었다. 그는 여기서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되는가 하고 질문한 후 ‘그럴 수 없다’고 다시 한번 분명하게 대답한다. 그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죄짓는 생활을 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성화는 성도의 당연한 길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죄 가운데 거해서는 안 된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계속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니라”고 말하였다(요일 3:9-10).

[16-17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성도가 거룩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순종의 원리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의 종이 된다. 죄에게 순종하면 죄의 종이 되어 죄 안에 살다가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의 종이 되고 의 안에 살다가 영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바울은 성도가 구원받았던 처음 순간을 언급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순간이다. 우리는 본래 죄에게 순종하고 죄만 짓고 살았던 죄의 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들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이었고 그를 믿는 자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주신다는 약속이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구원을 받았다. ‘마음으로’라는 원어(에크 카르디아스)는 ‘마음으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라는 뜻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마음에서 우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마음으로 순종한 결과 죄에게서 해방되고 의에게 종이 되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에 근거하여 우리의 모든 죄는 씻음 받고 우리는 단번에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았다. 우리는 죄에게서 자유케 되고 의에게 종이 되었다.

[19-22절]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은 우리 속에 남은 죄성을 가리킨다. 성도가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지만, 그에게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거룩함에 이르라는 권면이 필요한 것이다. 성도는 성화(聖化)가 당연한 목표라는 권면과 격려가 필요한 것이다.

성도가 죄의 종이었을 때는 죄만 지었기 때문에 의에 대해 자유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에 맺은 열매라는 것은 더러운 죄들이었으므로 부끄러운 것들뿐이었고 그 결국은 사망이었다. 진실로, 모든 죄들은 비록 범죄할 당시에는 혹시 즐거워보일지라도 지나고 보면 부끄러운 것들이다. 의는 칭찬받을 만하지만, 죄는 수치와 후회를 남길 뿐이다. 이제 성도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으로 인해 죄에게서 해방되었다. 죄의 종이 죄에게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하나님께 종이 되는 자유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마 11:30).

거룩함의 열매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당연한 열매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반드시 성화(聖化)를 동반한다. 법적인 구원에 실제적 구원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닐 것이다. 출생한 아기가 성장하는 것은 정상적 일이듯이, 중생한 성도가 지식이 더하고 거룩하여지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정상적이고 당연한 성화는 성도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 성도는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의 열매를 맺다가 영생에 이른다.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과 거룩의 열매를 맺는 것은 영생과 한 줄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끊어질 수 없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이 정상적 과정이 없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23절]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恩賜)[은혜의 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영생임이니라].

성도가 영생을 확실히 얻을 것이라는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죄에 대한 대가(代價), 즉 보응과 형벌이 죽음이지만 택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기 때문이다. 이 짧은 말씀은 복음 진리의 요약과도 같다.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는 우리가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는 아직도 죄성이 남아 있다. 그러나 성화는 성도의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삶을 위해 힘써야 한다. 거룩은 구원의 본질이요 목적이며 방향이다. 우리는 의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거룩함을 이루어야 한다.

[민수기 히브리어 원어 성경 강해] 레위 아들 게르손 고핫 므라리(민 3: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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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

이 문서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인상 깊었던 내용 및 개인적으로 반추한 것들을 기록한 노트입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인의 생활, 성화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한다; 즉 복음과 칭의의 현실적 효과를 이야기 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았고, 또한 그와 함께 산다는 것이 핵심이다.

본 장을 이해하는 데 주의할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다던지 하나님께 대하여 종이 되었다는 것은 신자의 인격적 활동에서 죄의 영향이 완전히 소멸되었음 꼭 뜻한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다. 9절에서 적고 있듯이 이는 ‘주장하는 권세’ 곧 주권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 주권을 논하는 테두리, 영역은, 17절에서 ‘마음’이라고 적은 바 우리 영혼의 심장이다. 그랬을 때, 불신자는 죄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대권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 절대적 대권 아래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어떤 원칙이 지배하는 위치에 두셨냐는 것 뿐이다. 불신자는 죄가 주권을 행사하는 위치에 두셨지만, 신자는 그리스도 안의 은혜가 주권을 행사하는 위치에 두신 것이다.

1–5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는 죄에 계속하여 거하는 것이 불가능함

2절: 여기서 “죄”는 우리의 부패를 나타낸다; “죄성”이라고 해도 된다 (12절 설명 참조).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나중에 9–11절에서 보겠지만, 죄의 주권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신자의 인격적 활동에 죄의 영향이 소멸되었다고 꼭 볼 수는 없다 (이에 대해서는 7장에서 더 상세히 적고 있다); 하지만, 19절에서 적고 있듯이, 그 영혼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에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영생이 자리잡고 있다; 반대로 불신자는 죄로 인한 사망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불신자는 계속해서 죄의 종노릇을 하게 되는데,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 악순환에서 또한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죄가 더 이상 우리에게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주권을 주장한다.

3절: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죄의 주권에 대하여 죽었는데, 이것은 우리와 예수님이 하나로 연합 되었기 때문에 되어진 일이다. 여기서 “합하여”는 into이다.

4절: 예수 믿기 전에는 죄가 주권을 행사하고, 오히려 부분적으로나마 남아있던 하나님의 형상의 영향을 간혹 받기도 한 상태였는데, 반대로 이제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새 생명이요, 죄는 영향을 끼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은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다. 속죄는 영화를 위한 수단이다; 그리스도께서 메시아가 되신 ‘목적’은 우리를 그와 함께 그 처럼 살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속죄를 최종 목적 처럼 생각하기 쉬운가?) 그리스도의 은혜가 목적을 이루는데에 부족하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어 그 은혜 아래 들어간 자는 죄에 계속 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4절을 통해 사도는 우리에게 성화가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셨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죄값을 치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만세 전에 예정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그 안에서 택하신 이유는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작정이 또한 서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바울의 이야기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분리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화를 분리할 수 없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하심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성화의 길을 걷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화는 ‘구원 받은 것이 감사하니 이제라도 힘을 내서 열심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자’는 식의 반응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밀고 가시는 영광의 길에 대해 ‘아멘’으로, ‘예, 과연 그것이 제가 마땅히 가야할 길입니다, 저를 주장하소서’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행보이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4)

5–11절: 죄의 주권에서 벗어났음을 알아야 함

5절: 죄의 주권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동시에 새 생명의 주권 아래 들어간 것은 물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에도 참예하기 때문이다.

9–11절: 죄에 대해서 죽었다던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것은, 9절에서 언급하듯이 ‘주권’에 대한 이야기이다. 불신자는 죄가 주권을 행사하고, 신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권을 행사하신다. 이는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통치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대권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 절대적 대권 아래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어떤 원칙이 지배하는 위치에 두셨냐는 것이다. 불신자는 죄로 인한 죽음이 주권을 행사하는 위치에 두셨지만, 신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생명이 주권을 행사하는 위치에 두신 것이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호세아 14장 8절)

그러므로 죄의 주권에서 벗어났고 (the vigor of sin is destroyed), 이제는 예수님의 새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실체를 분명히 알고 확신하라. 이는 마치 본디 죄의 왕국에서 태어났으나, 그리스도 예수의 나라로 옮기워진 것과 같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로새서 1장 13절)

죄의 왕국과 접전 중이라 그 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있어도 다시는 죄의 주권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 특히, 다시는 죄가 우리를 옭아 메는 족쇄인 사망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9절 참조)! 죄의 영향력 까지 없애는 것이 성화의 길이고, 이를 성경은 “땅의 지체를 죽이는” (Mortification of the Flesh; 로마서 8장 13절) 것으로 표현했다.

“for though the mortifying of the flesh is only begun in us, yet the life of sin is destroyed, so that afterwards spiritual newness, which is divine, continues perpetually.”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1절의 ‘여길지어다’라고 번역된 번역된 λογίζομαι는 ‘그런 줄로 대충 여기고 살으라’는 말이 아니라, 사실을 분명히 알고 거기에 의거해 모든 것을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죄값을 치뤘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듯이, 그의 죽으심과 부활이 또한 나를 죄의 주권에서 해방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향해 걷게하신다는 것을 또한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나를 죄책에서 면제해 줄 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 또한 해방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한 행보를 할 수 있는 위치로 옮겨 주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 할 것이고 그 자각 위에서 모든 것을 행해야 할 것이다.

12–14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행함

12–13절: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다시는 죄의 주권 아래 있던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갈 일이 아니다. 여기서 “몸”이라고 한 것은 6절의 옛 사람과 통한다. “죽을”이란 헬라어로 mortali (영어로 mortal) 곧, 죽기로 작정된, 죽음에 이르도록 저주 받음을 뜻한다;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 그런 면에서 “죽었다”(dead)고 말할 수 있다. 죄가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은 죄가 죽을 몸으로 “너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이다 (Let not sin therefore reign “you” in your mortal body); 이는 그 사욕을 좇지 않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Still further, he gives the name of sin to the original depravity which dwells in our hearts, and which leads us to sin, and from which indeed all evil deeds and abominations stream forth. In the middle, between sin and us, he places lusts, as the former has the office of a king, while lusts are its edicts and commands.” (Calvin, Commentary on Romans)

어떻게 하면 사욕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가? 나의 의지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한다 (13절). 나를 거룩의 길로 하나님께서 밀고 가고시겠다고 알리셨기에 (6절) 나의 지체를 그 분의 뜻에 따라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호세아 14장 8절)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활용하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사도행전 13:43)

의의 도구 정도가 아니라 의의 “병기”(arma, 헬라)로서 죄를 대적하는 병기로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죄의 사욕을 좇으면 그것은 마치 죄에게 우리 수족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죄에게 종 노릇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의 명령에 손발을 놀릴 일이다!

“As the soldier has ever his arms ready, that he may use them whenever he is ordered by his general, and as he never uses them but at his command; so Christians ought to regard all their faculties to be the weapons of the spiritual warfare: if then they employ any of their members in the indulgence of depravity, they are in the service of sin. But they have made the oath of soldiers to God and to Christ, and by this they are held bound: it hence behoves them to be far away from any intercourse with the camps of si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4절: 죄가 죄인에게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에 근거해서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6절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죄의 주권에서 벗어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 율법의 정죄를 피했기 때문이다. 실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율법이 우리에게 선언할 수 있는 모든 정죄와 형벌을 받은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는 자이며, 그에게는 죄가 다시는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

“‘Vobis non dominabitur,’ ὀυ κυριεύσει — shall not be a lord over you, shall not have power or authority or control over you; or, it may mean, shall not domineer over you, so as to retain you, as it were by force, under its power: and the reason given favors this idea; for he says,’Ye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Law is the strength of sin; and by law it binds its subjects under its service.” (John Owen, footnote in Commentary on Romans by John Calvin)

첨언하자면, 율법이 아닌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다시는 율법을 상전으로 모시고 그것을 통해 의를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도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

15–19절: 율법이 아닌 은혜이기에 더더욱 죄를 짓는 것이 불가함

14절에서 사도는 또한 특이한 말을 하는데 바로 “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더 이상 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이 7장에서 이어진다. 여기서는 당분간 우리가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더 가르친다. 무엇보다도 율법에서 자유하다고 죄를 짓겠는가를 논박한다.

15절: 그렇게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해서 죄를 범하겠는가? 율법의 정죄 기능에서 자유하다는 것이지 교육적 기능까지 없어진 것은 아님을 배울 수 있다.

16–18절: (16절) 원인과 결과를 헛갈리지 말자; 종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다; 사도는 누구에게 순종하는지 보면 누구의 종인지 안다는 단순한 진리를 언급할 뿐이다.

16, 17, 18절에서 의인화한 “죄”를 19절에서는 “부정과 불법”이라고 표현했다. 죄인에게 있는 모든 부패의 총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와 대비해 16절의 “순종”이라던지 18, 19절의 “의”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새 심령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죄의 종이라면 그 주인으로 부터 사망을 물려받을 것이요, 순종의 종이 되면 그 주인으로 부터 의(righteousness)를 물려받는다 (16절). 의에 이른다는 것은 칭의(justification)에 이른다는 뜻이 아니다. 의와 칭의는 구별되는데, 이렇게 비슷한 단어로 우리말 번역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16절에 ‘순종의 종‘이라 표현한 것을 18절에서는 순종의 열매를 따라 ‘의의 종‘이라고, 19절에서는 순종의 대상을 따라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고 표현했다. 이 모든 말은, 앞서 9–11절에서 논한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권을 행사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죄의 종이라던지 순종의 종이라던지를 논하는 테두리 곧, 죄 혹 은혜의 주권이 역사하는 장소는, 우리 심령의 가장 깊은 곳이라는 점이다 — 이를 17절에서 우리 말로는 ‘마음’이라고, 영어로는 heart라고 번역 하였다. 이것을 보고 신자의 인격적 활동에 죄의 영향이 소멸되었다고 꼭 볼 수는 없다 (이에 대해서는 7장에서 더 상세히 적고 있다); 그러나 그 영혼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에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영생이 자리잡고 있지만, 불신자는 죄로 인한 사망이 자리잡고 있다.

결국 16절에서 사도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앞서 (14절) 율법에서 자유케 됨으로 죄가 우리에게 주권을 부리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가 은혜의 주권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고 했는데, 주권이 바뀐 이상 죄를 더 멀리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순종의 종으로 만드신 것이고, 그로써 죽음을 물려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이룬 것은 — 우리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 하나님이시다 (17절). 17절에 교훈의 “본”이라고 번역된 것은 manner, fashion, pattern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실패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16절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다. 16절에서 ‘순종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을 18절에서는 ‘의의 종’이라고 표현했다; 열매로 원인을 기술한 것이다. 16절의 논리를 따르자면 18절은 17절의 결과가 아닌 원인이다. 영어 번역(ESV)은 이를 조금 더 명확히 했다.

그러므로 17–18절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케 하셨고, 또한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게 하셨다.”

“If the Son shall free you, you shall be free indeed.” (John 8:36.)

사도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순종케 하셨는지 언급함으로써, 외부에서 규율하는 율법과 비교하여 은혜 아래 거하는 것이 얼마나 더 우월한지 보이고 있다.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에 거하면 죄를 더 짓기는 커녕 근원적인 데서 부터 죄를 미워하게 된다.

19절: “육신이 연약하므로” — 즉 우리의 연약 때문에 — ‘전에 죄에게 내어준 것 처럼 의에게 내 주라’고 밖에 말 할 수 없지만, 실상 죄에게 내어준 것 보다 훨씬 더 열심으로 의에게 내주어야 한다고 사도는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영혼의 심장에 자리 잡은 새 생명이 우리의 행실을 통해 분명히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지체를 의에게 ‘내주라‘고 하였는데, 이는 13절의 ‘드리라‘와 원문에는 같은 단어이다; 우리의 힘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것이다. 이는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한 바 성신님을 의지하여 생활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장 16–18절)

20–23절: 은혜 아래서 비로소 성화와 영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음

20절: 대조법, 즉 우리가 이제는 죄에 대해 자유하고 의의 종이 되었다. 전에는 의에 대해 자유하였다, 특히 의가 우리를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았고, 죄의 전적인 주장 아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 안에서 다시는 죄가 우리를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의가 우리를 주장한다.

21절: “그 때”란 예수님 믿기 전. “부끄러워 하나니” 우리의 불순종에 대해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것은 신자의 특징 중 하나다.

22절: “마지막”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그 최종 도착지를 말한다; 원인과 결과가 아니다; 다시 말해 거룩함의 대가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영어 번역은 이를 조금 더 잘 표현했다.

23절: “죄의 삯”과 대비하여 ‘의의 삯’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사 (free gift)”라고 표현한 것을 주의하라. 또한 “영생”을 주어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주의하라; 다시 말해 ‘영생은 하나님의 은사’라고 이해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을 가져온다“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22절과 연계해서 내리는 결론은 칭의와 성화, 영화 —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It may however be hence inferred with certainty, that our salvation is altogether through the grace and mere beneficence of God. He might indeed have used other words — that the wages of righteousness is eternal life; and then the two clauses would correspond: but he knew that it is through God’s gift we obtain it, and not through our own merits; and that it is not one or a single gift; for being clothed with the righteousness of the Son, we are reconciled to God, and we are by the power of the Spirit renewed unto holiness. And he adds, in Christ Jesus, and for this reason, that he might call us away from every conceit respecting our own worthiness.” (Joh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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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로마서 6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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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 운 에루멘 에피메노멘 테 하마르티아 히나 헤 카리스 플레오나세

개역개정,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새번역,1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말성경,1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가톨릭성경,1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은총이 많아지도록 우리가 계속 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

영어NIV,1 What shall we say, then? Shall we go on sinning so that grace may increase?

영어NASB,1 What shall we say then? Are we to continue in sin that grace might increase?

영어MSG,1 So what do we do? Keep on sinning so God can keep on forgiving?

영어NRSV,1 What then are we to say? Should we continue in sin in order that grace may abound?

헬라어신약Stephanos,1 τι ουν ερουμεν επιμενουμεν τη αμαρτια ινα η χαρις πλεοναση

라틴어Vulgate,1 quid ergo dicemus permanebimus in peccato ut gratia abundet

히브리어Modern,1 אם כן מה נאמר הנעמד בחטא למען ירבה החסד׃

성 경: [롬6:1]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본절은 본장이 은혜와 죄의 관계를 설명하는 5:20,21 내용을 이어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 5장에서 바울이 주장한 내용은 ‘죄에 거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를 깨닫는 문제’였다. 율법을 통하여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죄가 드러나게 됨에 따라 인간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느끼게 된다. 그 당시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죄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자들은 기독교 진리의 깊은 내면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수박 겉핥기’식의 표면적 지식을 가지고 애매하고 오해하기 쉬운 문제에 관심을 쏟는다. 여기서 ‘죄에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메노멘 테 하마르티아'(*)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이 문구가 현재 능동태 가정법을 띤 것은 그 내용이 실현 가능성이 없음을 나타낸다. 둘째, 이 문구는 ‘죄와 더불어 산다’는 의미로 죄와 더불어 전혀 투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상태에 빠진 자들은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해 그리스도를 섬기는 체하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色慾)거리로 바꾸는 자들(유 1:4)이다. 사실상 칭의의 교리 자체를 조금이라도 오해한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저항(抵抗)을 약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전과정이 인간의 행위를 배제시키고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하게 됨으로 구원 교리도 역시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성도는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부도덕이 판을 쳐도 교리적으로 그것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전 5, 6장).

메 게노이토 호이티네스 아페다노멘 테 하마르티아 포스 에티 제소멘 엔 아우테

개역개정,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새번역,2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말성경,2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떻게 죄 가운데 그대로 살겠습니까?

가톨릭성경,2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죄에서는 이미 죽은 우리가 어떻게 여전히 죄 안에 살 수 있겠습니까?

영어NIV,2 By no means! We died to sin; how can we live in it any longer?

영어NASB,2 May it never be! How shall we who died to sin still live in it?

영어MSG,2 I should hope not! If we’ve left the country where sin is sovereign, how can we still live in our old house there?

영어NRSV,2 By no means! How can we who died to sin go on living in it?

헬라어신약Stephanos,2 μη γενοιτο οιτινες απεθανομεν τη αμαρτια πως ετι ζησομεν εν αυτη

라틴어Vulgate,2 absit qui enim mortui sumus peccato quomodo adhuc vivemus in illo

히브리어Modern,2 חלילה לנו כי מתנו לחטא ואיך נוסיף לחיות בו׃

성 경: [롬6:2]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그럴 수 없느니라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1절의 가상적인 질문에 대한 단호한 부정의 대답이다. 바울은 악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장하고자 하는 사악한 생각이 매우 모순됨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를 허용하는 면허장이 아니라 성도의 의를 회복시키는 특허장이다. 한편 바울은 이와 다소 다른 문맥에서(3:8, 9) 본문과 비슷한 어투로 대적들의 주장을 공박한 바 있다. 바울이 칭의론(稱義論)을 가르치던 당시, 그의 가르침이 율법의 윤리적 요구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함으로써 자유 방임 사상을 만연시키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했던 사람들이 때때로 그러한 종류의 반론을 제기했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의 답변은 짧은 기간에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수년간의 깊은 명상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 죄에 대하여…더 살리요 – 바울은 이제 성도의 편에서 논증을 전개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세력에 지배받지 않는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리셨고 이 속죄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죄가 더욱 왕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전도(顚倒)시키는 행위이다(Calvin). 혹자는 본절의 ‘죄에 대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 하마르티아'(*)를 ‘죄로 인하여'(on account of sin)로 해석한다(Michaelis, Cramer, Storr, Flatt, Nitzsch). 그러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그러한 해석은 본절의 문맥상 바울이 의도하는 주장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죽었다’함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죄와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악된 삶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交通)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에서처럼 성도가 ‘죽었다’는 선포를 종종한다(11절 ;7:4, 6;갈 2:19;골 2:20;3:3). 이러한 성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이요, 율법에 대한 죽음인데 실제적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 옛 사람의 죽음이다. 이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라고 고백했다. 이와 같은 체험적 고백이야 말로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갖는 것이다.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신분을 갖고 있으면서 또 죄에게 종노릇한다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해서 죄의 세력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거나 죄를 결코 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7장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죄와 투쟁하게 된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의 세력권을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초래하는 엄청난 불행들에 대하여 죽었으며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6, 14, 16, 17절 주석 참조).

에 아그노이테 호티 호소이 에밮티스데멘 에이스 크리스톤 예순 에이스 톤 다나톤 아우투 에밮티스데멘

개역개정,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새번역,3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3 그리스도와 연합해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해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합니까?

가톨릭성경,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침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침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영어NIV,3 Or don’t you know that all of us who were baptized into Christ Jesus were baptized into his death?

영어NASB,3 Or do you not know that all of us who have been baptized into Christ Jesus have been baptized into His death?

영어MSG,3 Or didn’t you realize we packed up and left there for good? That is what happened in baptism. When we went under the water, we left the old country of sin behind; when we came up out of the water, we entered into the new country of grace–a new life in a new land! That’s what baptism into the life of Jesus means.

영어NRSV,3 Do you not know that all of us who have been baptized into Christ Jesus were baptized into his death?

헬라어신약Stephanos,3 η αγνοειτε οτι οσοι εβαπτισθημεν εις χριστον ιησουν εις τον θανατον αυτου εβαπτισθημεν

라틴어Vulgate,3 an ignoratis quia quicumque baptizati sumus in Christo Iesu in morte ipsius baptizati sumus

히브리어Modern,3 או האינכם ידעים כי כלנו הנטבלים למשיח ישוע למותו נטבלנו׃

성 경: [롬6:3]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바울은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세례받음과 결부시키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세례는 단순한 의식(儀式)이나 성례전(聖禮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은유적 의미를 갖는다. 세례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은 다른 구절에서도 본절과 비슷한 연관성을 지닌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계기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게 된 경우가 그러하다(고전 10:2). 그들은 처음으로 모세와 연합하였고, 모세의 지도권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모세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께 속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함께 죽었다는 의미이며, 함께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세례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만 가능하며(고전 12:13), 이것은 성도의 신령한 체험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례와 성찬 자체에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이 있는 것처럼 가르침으로써 교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의 죽으심에 세례받아 연합되었다는 것은 성도들 역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함께 죽은 자된 성도들은 죄에 종노릇하던 옛사람이 죽었으므로 계속 죄에서 종노릇하는 신분에 머물려고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킴으로써 바울은 많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더욱 처절하게 회개하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고 하는 가르침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있다.

쉬네타페멘 운 아우토 디아 투 밮티스마토스 에이스 톤 다나톤 히나 호스페르 에게르데 크리스토스 에크 네크론 디아 테스 돜세스 투 파트로스 후토스 카이 헤메이스 엔 카이노테티 조에스 페리파테소멘

개역개정,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4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4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해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인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침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영어NIV,4 We were therefore buried with him through baptism into death in order that, just as Christ was raised from the dead through the glory of the Father, we too may live a new life.

영어NASB,4 Therefore we have been buried with Him through baptism into death, in order that as Christ was raised from the dead through the glory of the Father, so we too might walk in newness of life.

영어MSG,4 When we are lowered into the water, it is like the burial of Jesus; when we are raised up out of the water, it is like the resurrection of Jesus.

영어NRSV,4 Therefore we have been buried with him by baptism into death, so that, just as Christ was raised from the dead by the glory of the Father, so we too might walk in newness of life.

헬라어신약Stephanos,4 συνεταφημεν ουν αυτω δια του βαπτισματος εις τον θανατον ινα ωσπερ ηγερθη χριστος εκ νεκρων δια της δοξης του πατρος ουτως και ημεις εν καινοτητι ζωης περιπατησωμεν

라틴어Vulgate,4 consepulti enim sumus cum illo per baptismum in mortem ut quomodo surrexit Christus a mortuis per gloriam Patris ita et nos in novitate vitae ambulemus

히브리어Modern,4 לכן נקברנו אתו בטבילה למות למען כאשר נעור המשיח מן המתים בכבוד האב כן נתהלך גם אנחנו בחיים מחדשים׃

성 경: [롬6:4]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그러므로 – 이 접속사는 1-3절까지의 진술에 대한 결론을 유도해 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도 연합한 자들이라는 3절의 진술을 본절에서 더욱 진전시키고 있음을 암시한다.

󰃨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함께 장사되었나니 – 침례교도들은 본 구절이 물에 잠기게 되는 침례에 대한 영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절은 고전 15:3, 4과 같이 침례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이 갖는 영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5절 이하에서 계속되는 바울의 설명에서 더욱 분명하게 밝혀진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을 ‘세례’라는 용어와 결부시킨 것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영적인 연합과 인격적인 연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Murray). 그러나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세례받음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생동적인 연합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비록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몸을 잠그는 일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葬事)되는 일로 묘사하였다. 여기서 ‘장사된다'(*, 쉬네타페멘)함은 자연적인 출생으로 맺어지는 아담과의 관계에 의해 지배되던 옛 사람(엡 4:22;골 3:9)의 종말을 상징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을 하기 이전의 거듭나지 못한 본성과 행동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의미한다(갈 5:24;골 2:12).

󰃨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 어떤 사람들은 ‘영광’을 ‘장엄한 권능’으로 해석한다(Hendriksen, Harrison, Barmby, Calvin, Black, Phillips, Erdman, Stott).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Omnipotence)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용어를 ‘하나님의 장엄한 권능’ 정도로 해석하는 것은 ‘영광’이란 단어가 지닌 의미를 만족스럽게 드러내었다고 볼 수 없다. 본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새명 가운데 사는 것에 대한 수단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근거가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광’이란 용어 자체가 지닌 포괄적인 뜻을 드러낼 수 없게 된다.

󰃨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죄에 대하여 죽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까지 포함됨을 가르치고 있다. 이 말은 성도가 단순히 죄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의(義)의 영역에서 살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과(요 10:10) 잘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는 말은 ‘새 생명의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그 가운데서 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죄가운데 거하자’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분명히 바울의 복음을 오해한 자들이다.

에이 가르 쉼퓌토이 게고나멘 토 호모이오마티 투 다나투 아우투 알라 카이 테스 아나스타세오스 에소메다

개역개정,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새번역,5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말성경,5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그분과 연합한 사람이 됐다면 분명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같은 부활로도 그분과 연합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5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영어NIV,5 If we have been united with him like this in his death, we will certainly also be united with him in his resurrection.

영어NASB,5 For if we have become united with Him in the likeness of His death, certainly we shall be also in the likeness of His resurrection,

영어MSG,5 Each of us is raised into a light-filled world by our Father so that we can see where we’re going in our new grace-sovereign country.

영어NRSV,5 For if we have been united with him in a death like his, we will certainly be united with him in a resurrection like his.

헬라어신약Stephanos,5 ει γαρ συμφυτοι γεγοναμεν τω ομοιωματι του θανατου αυτου αλλα και της αναστασεως εσομεθα

라틴어Vulgate,5 si enim conplantati facti sumus similitudini mortis eius simul et resurrectionis erimus

히브리어Modern,5 כי אם נדבקנו בדמיון מותו אכן גם נהיה דבוקים לתחיתו׃

성 경: [롬6:5]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 블랙(Black)은 본 구절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같이 희생적인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성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공유하게 된다’고 해석한다. 머레이(Murray)도 이 해석에 동의한다. 이 해석은 ‘연합한’이라는 형용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쉽퓌토이'(*)가 ‘함께 심겨진’ 또는 ‘함께 자라난’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본장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에까지 자라난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구절은 없다. 따라서 본절의 ‘쉼퓌토이’는 이미 바울이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성도가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주는 용어일 뿐이다(Hendriksen, Barmby).

󰃨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 ‘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소메다'(*)가 미래 시제인 것은(shall be, KJV) 본절에서 바울이 장래에 일어날 성도들의 신체상의 부활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생각한다(Tertullian, Chrysostom, Ambrosiaster). 헬라어의 미래 시상은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그 외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논리적으로 또는 불가피하게 일어날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후자(後者)의 의미를 살려 ‘에소메다’를 RSV는 ‘확실히 되리라'(shall certainly be)고 해석하였다. 또한 몇몇 주석가들은 본절의 미래 시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함으로써 당연히 초래되는 결과적 사실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Murray, Meyer). 따라서 본절은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포괄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러나 심사 숙고해야 할 사항은 바로 앞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부활이 몸의 부활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에게 속한 자들에게 허락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연관시켰다. 그 삶은 장래 뿐만 아니라 현재에 속한 것이다.

투토 기노스콘테스 호티 호 팔라이오스 헤몬 안드로포스 쉬네스타우로데 히나 카타르게데 토 소마 테스 하마르티아스 투 메케티 둘류에인 헤마스 테 하마르티아

개역개정,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새번역,6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말성경,6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해져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압니다.

가톨릭성경,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어NIV,6 For we know that our old self was crucified with him so that the body of sin might be done away with, that we should no longer be slaves to sin–

영어NASB,6 knowing this, that our old self was crucified with Him, that our body of sin might be done away with, that we should no longer be slaves to sin;

영어MSG,6 Could it be any clearer? Our old way of life was nailed to the Cross with Christ, a decisive end to that sin-miserable life–no longer at sin’s every beck and call! What we believe is this:

영어NRSV,6 We know that our old self was crucified with him so that the body of sin might be destroyed, and we might no longer be enslaved to sin.

헬라어신약Stephanos,6 τουτο γινωσκοντες οτι ο παλαιος ημων ανθρωπος συνεσταυρωθη ινα καταργηθη το σωμα της αμαρτιας του μηκετι δουλευειν ημας τη αμαρτια

라틴어Vulgate,6 hoc scientes quia vetus homo noster simul crucifixus est ut destruatur corpus peccati ut ultra non serviamus peccato

히브리어Modern,6 באשר ידעים אנחנו כי נצלב אתו האדם הישן אשר בנו למען תבטל גוית החטא לבלתי היותנו עוד עבדים לחטא׃

성 경: [롬6:6]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우리가 알거니와 –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유대인이 아니라 바울 자신과 그의 복음을 들은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의 복음을 들은 자들을 단순히 로마에 있는 성도들만으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즉 바울은 진술하고자 하는 대상으로 복음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가진 자들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우리 옛 사람 – 바울은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하여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고 칭한다. ‘옛 사람’은 영적인 죽음 아래서 신음하며(엡 2:1;골 2:13) 본질적으로 마음이 악하여 죄에게 종 노릇하는 사람이며(6절),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 즉 ‘새 사람’에 대해서 바울은 이미 1:18-3:18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옛 사람’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그 죄로 인해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으며, 바람에 밀려 다니는 돛단배와 같이 죄의 세력에 따라 이리 저리 끌려다닌다.

󰃨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 이 표현은 3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합하였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 말은 우리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낡은 질서에서 떠나 의와 평안이 있는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의미도 된다(갈 2:20). 결국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더 이상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생활하는 삶의 변화를 가리킨다(고후 4:11;골 2:20).

󰃨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옛 사람이 죽은 것과 죄의 몸이 멸하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한다. 비록 성도가 현재의 삶 속에서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나 신분상으로 이미 죄의 몸은 죽은 상태에 놓여 있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건은 반복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도에게 단일회적인(once for all)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 4:22)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권면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연합의 체험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성도의 현재적 삶은 항상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 속에 머무르고 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권면했던 것이다. 이 권면은 한 마디로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라는 의미가 된다.

호 가르 아포다논 데디카이오타이 아포 테스 하마르티아스

개역개정,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새번역,7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말성경,7 이는 죽은 사람은 이미 죄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7 죽은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영어NIV,7 because anyone who has died has been freed from sin.

영어NASB,7 for he who has died is freed from sin.

영어MSG,7 (SEE 6:6)

영어NRSV,7 For whoever has died is freed from sin.

헬라어신약Stephanos,7 ο γαρ αποθανων δεδικαιωται απο της αμαρτιας

라틴어Vulgate,7 qui enim mortuus est iustificatus est a peccato

히브리어Modern,7 כי אשר מת הוא נקה מן החטא׃

성 경: [롬6:7]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 여기서 하나의 난제(難題)가 있다. ‘죽은 자’가 그리스도를 지칭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비록 본절이 단수로 언급되었으나 그리스도가 죄에서 벗어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본 구절이 일종의 일반 명제로서 할라카(Halakah)에 언급된 랍비적 가르침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이 유명한 유대인 교법사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았고(행 22:3) 랍비의 지식과 유대인 전통에 정통(正統)했던 점을 미루어 보아 본절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기보다는 일반적인 명제로 언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베드로도 일반 명제 형식을 빌어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실제적인 예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사형 집행을 받은 사람은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한다고 한다. 한편 ‘죽은 자’와 연관해서 혹자는 ‘성도’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미 죽으신 그리스도와 같이 성도는 모든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죽었으므로 죄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에 있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Vaughan, Liddon). 그러나 그리스도나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의 세력, 죄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 본절은 칭의의 순서적 과정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씻음이 이루어짐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고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칼빈(John Calvin)은 본절이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지적하면서 재판관의 판결로 사면(赦免)을 받은 죄수가 그 순간 기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듯이 성도가 죄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의 몸이 되는 것도 매우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하였다. 한편 유대인들은 본절을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으면 그것으로 율법의 의무에서 해방을 받는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날에 자기의 죄를 책임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벧후 2:10).

에이 데 아페다노멘 쉰 크리스토 피스튜오멘 호티 카이 쉬제소멘 아우토

개역개정,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새번역,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말성경,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것을 믿습니다.

가톨릭성경,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영어NIV,8 Now if we died with Christ, we believe that we will also live with him.

영어NASB,8 Now if we have died with Christ, we believe that we shall also live with Him,

영어MSG,8 If we get included in Christ’s sin-conquering death, we also get included in his life-saving resurrection.

영어NRSV,8 But if we have died with Christ, we believe that we will also live with him.

헬라어신약Stephanos,8 ει δε απεθανομεν συν χριστω πιστευομεν οτι και συζησομεν αυτω

라틴어Vulgate,8 si autem mortui sumus cum Christo credimus quia simul etiam vivemus cum Christo

히브리어Modern,8 והנה אם מתנו עם המשיח נאמין כי גם נחיה עמו׃

성 경: [롬6:8]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본절은 내용상으로는 3절과 5절의 내용을 반복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인격적이고 생명적인 연합일 뿐 아니라 영원한 연합임을 보여주고 있다(Murray).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3절에 언급된 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여기서 다시 이 말씀을 반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성화(聖化)의 생활이 부과됨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 여기서 ‘살 줄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제소멘'(*)은 1인칭 복수 미래형으로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우리가 살 것이다'(we shall live;KJV, RSV)이다. 이는 5절 주석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장래적인 소망 곧 부활의 소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한 성도는 또한 그리스도의 살으심과 연합하여 반드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곧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되니 이 땅에서 소유케 된 생명(*, 조에)은 장래에 일어난 구속 사건의 모든 결과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쉰제소멘’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시 일어날 성도의 부활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가 이 땅에서 영원한 나라의 생명을 소유하며 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부활 생명과 긴밀한 연관을 맺는다. 한편 본절에 ‘믿노니’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튜오멘'(*)은 1인칭 복수 현재 직설법으로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확실성 있는 견고한 믿음을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정(情)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성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함을 나타낸다.

에이도테스 호티 크리스토스 에게르데이스 에크 네크론 우케티 아포드네스케이 다나토스 아우투 우케티 퀴리유에이

개역개정,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새번역,9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말성경,9 우리가 알기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은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죽지 않으시고 죽음이 더 이상 그분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가톨릭성경,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영어NIV,9 For we know that since Christ was raised from the dead, he cannot die again; death no longer has mastery over him.

영어NASB,9 knowing that Christ, having been raised from the dead, is never to die again; death no longer is master over Him.

영어MSG,9 We know that when Jesus was raised from the dead it was a signal of the end of death-as-the-end. Never again will death have the last word.

영어NRSV,9 We know that Christ, being raised from the dead, will never die again; death no longer has dominion over him.

헬라어신약Stephanos,9 ειδοτες οτι χριστος εγερθεις εκ νεκρων ουκετι αποθνησκει θανατος αυτου ουκετι κυριευει

라틴어Vulgate,9 scientes quod Christus surgens ex mortuis iam non moritur mors illi ultra non dominabitur

히브리어Modern,9 באשר ידענו כי המשיח אחרי אשר נעור מן המתים לא ימות עוד והמות לא ישלט בו עוד׃

성 경: [롬6:9]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 ‘다시…아니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케티'(*)는 ‘절대로…아니다’는 의미로서 부정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로서는 가장 강력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의미를 살려 KJV는 ‘우케티’를 ‘더이상…않다'(no more)로 RSV는 ‘결코…아니다'(never)로 번역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은 자의적(自意的)이며 절대적인 일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아무런 흠과 티가 없으셨으나 인류 구원을 위한 성업(聖業)을 이루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고 또 다시 살아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타의에 의해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도, 능력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죽지 아니하시는’, 즉 ‘결코 죽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보장이 되신다.

󰃨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이 그를 주장한다면 성도의 신앙은 진실로 헛된 것을 좇는 꼴이 될 것이다(고전 15:12-17).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신 사건에 있다. 이 사건이 참이어야만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의 연합을 하여 살게 된다는 확신이 참이 될 수 있다. 사망이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한다면 그와 연합한 자들에게도 역시 주장하지 못한다. 이러한 주장이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일반 명제에 대한 근거가 된다. 한편 본절이 자칫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다는 어감을 줄 수 있다. 본래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는 결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8:3) 사망의 세력권 안에서 활동하게 되셨다. 그리고 죄인이 되시어 사망의 원리를 따라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본절에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한번 사망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처럼 ‘다시’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호 가르 아페다넨 테 하마르티아 아페다넨 에파팤스 호 데 제 제 토 데오

개역개정,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새번역,10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0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 사시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0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영어NIV,10 The death he died, he died to sin once for all; but the life he lives, he lives to God.

영어NASB,10 For the death that He died, He died to sin, once for all; but the life that He lives, He lives to God.

영어MSG,10 When Jesus died, he took sin down with him, but alive he brings God down to us.

영어NRSV,10 The death he died, he died to sin, once for all; but the life he lives, he lives to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0 ο γαρ απεθανεν τη αμαρτια απεθανεν εφαπαξ ο δε ζη ζη τω θεω

라틴어Vulgate,10 quod enim mortuus est peccato mortuus est semel quod autem vivit vivit Deo

히브리어Modern,10 כי אשר מת מת לחטא פעם אחת ואשר חי חי הוא לאלהים׃

성 경: [롬6:10]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 본절의 ‘죄에 대하여'(*, 테 하마르티아)란 표현은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신의 죄로 인한 필연적인 죽음(창 2:17)이 아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짐지우신 자기 백성의 죄와 허물을 위해 죽으셨다(사 53:4-6). 또한 본절의 ‘단번에’ (*, 에파팥스)란 표현은 구약의 속죄 제사 규례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드렸으며 백성들은 죄를 범할 때마다 희생 제물을 가져왔으니 그 제사는 반복적이었다. 그러나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들이 반복적(反復的)으로 드려왔던 그 제사 대신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쳐 ‘오직 한번만'(once for all, RSV) 드림으로써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셨다(히 7:27;9:12;10:10).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피흘리신 제사는 구약의 모든 피제사의 최종적 제사요,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이기에 제사를 또 드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죽으실 필요가 없다.

󰃨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 ‘하나님께 대하여’란 표현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throught God), 혹은 ‘하나님 안에서'(in God)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으나(Calvin, Chrysostom) 이보다는 ‘하나님을 위하여’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당한 듯하다(Murray, Meyer, Hendriksen). 우선 본절의 ‘하나님께 대하여’란 표현은 ‘죄에 대하여’와 대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구의 해석은 ‘죄에 대하여’란 표현에 대한 해석과 문맥적 일치를 요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권고한 12-14절 내용과도 조화된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함을 강조한 바있다(3:8, 14).

후토스 카이 휘메이스 로기제스데 헤아우투스 에이나이 네크루스 멘 테 하마르티아 존타스 데 토 데오 엔 크리스토 예수

개역개정,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새번역,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말성경,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 자로 여기십시오.

가톨릭성경,11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영어NIV,11 In the same way, count yourselves dead to sin but alive to God in Christ Jesus.

영어NASB,11 Even so consider yourselves to be dead to sin, but alive to God in Christ Jesus.

영어MSG,11 From now on, think of it this way: Sin speaks a dead language that means nothing to you; God speaks your mother tongue, and you hang on every word. You are dead to sin and alive to God. That’s what Jesus did.

영어NRSV,11 So you also must consider yourselves dead to sin and alive to God in Christ Jesus.

헬라어신약Stephanos,11 ουτως και υμεις λογιζεσθε εαυτους νεκρους μεν ειναι τη αμαρτια ζωντας δε τω θεω εν χριστω ιησου τω κυριω ημων

라틴어Vulgate,11 ita et vos existimate vos mortuos quidem esse peccato viventes autem Deo in Christo Iesu

히브리어Modern,11 וכן גם אתם חשבו אתכם מתים לחטא וחיים לאלהים במשיח ישוע אדנינו׃

성 경: [롬6:11]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본절에 대해 스토트(John Stott)는 다음과 같이 매우 논리적이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만약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에 대한 죽으심이었으면, 그의 살으심이 하나님에 대해 살으심이고, 그리고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살으심 안에서 그와 연합되었다면, 우리 자신은 죄에 대하여는 죽었으며(have deied)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았다(have risen).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이 여겨야 한다.”

󰃨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 2절 주석에서 언급했듯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놓임을 받아 자유를 누림을 말한다. 칼빈(Calvin)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성도는 영적 자유를 얻은만큼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 날마다 육체의 소욕(所欲)을 제어하는 성화의 삶을 살도록 분투해야 한다. 이것은 죄에서 완전히 끊어져 거룩함과 의 가운데 온전히 거할 때가지 해야 한다”고 하였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엔 크리스토 예수) – 본절에서 이 문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와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라는 전 후의 문구에 동일하게 연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떠나서는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생각할 수 없고 생명의 부활도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커다란 건축물의 초석(礎石)과도 같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 표현을 그의 서신에서 자주 사용하였던 바, 성도와 그리스도간의 관계성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본장 주제 강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참조하라.

󰃨 여길지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제스데'(*)는 현재 명령형 복수 2인칭으로 ‘권고’로 해석해도 되며 ‘명령’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12절과 13절에 사용된 동사가 명백히 명령형으로 해석되므로 본절도 권고형보다는 명령형으로 해석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즉 성도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진 사건은 성도들을 그러한 신분으로 만든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다’는 말은 실재가 아닌 사건을 실재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재적인 사건을 파악하여 그것을 굳게 붙잡는다는 의미이다.

메 운 바실류에토 헤 하마르티아 엔 토 드네토 휘몬 소마티 에이스 토 휘파쿠에인 타이스 에피뒤미아이스 아우투

개역개정,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새번역,12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말성경,12 그러므로 여러분의 죽을 몸에서 죄가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해 몸의 정욕에 순종하지 말고

가톨릭성경,12 그러므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영어NIV,12 Therefore do not let sin reign in your mortal body so that you obey its evil desires.

영어NASB,12 Therefore do not let sin reign in your mortal body that you should obey its lusts,

영어MSG,12 That means you must not give sin a vote in the way you conduct your lives. Don’t give it the time of day.

영어NRSV,12 Therefore, do not let sin exercise dominion in your mortal bodies, to make you obey their passions.

헬라어신약Stephanos,12 μη ουν βασιλευετω η αμαρτια εν τω θνητω υμων σωματι εις το υπακουειν αυτη εν ταις επιθυμιαι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12 non ergo regnet peccatum in vestro mortali corpore ut oboediatis concupiscentiis eius

히브리어Modern,12 אם כן אפוא אל תמלך החטאת בגופכם אשר ימות לנטות אחריה בתאותיו׃

성 경: [롬6:12]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병기]

󰃨 그러므로 –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다(1, 2a 절)는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교리적으로 피력했던 진술들을(2b-11절)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본 접속사를 사용했다.

󰃨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 바울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가 성도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바울이 논리적인 모순을 범하고 있는가 ? 그렇지 않다. 바울은 다시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고 언급함으로써 죄에 대한 성도의 죽음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한다. 이것은 죄에 대한 성도의 죽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실재적으로 발생했던 사건에 대한 진술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죄가 성도들에게 왕노릇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보장되어 있다. 다만 죄가 연약한 인간의 몸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고 이것 역시 현실이다. 그러나 죄가 이전과 같이 성도들에게 왕노릇할 수는 없다. 성도들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만 주인이다. 그런데도 죄는 성도들의 연약한 몸을 통하여 역사하면서 자신이 주인인 체 할 수 있다. 이러한 거짓된 가장(假裝)조차 허용하지 않기 위해 바울은 본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성도는 의인이요 거룩한 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나, ‘죽을 몸’을 지닌 현재는 아직 죄와 투쟁하는 신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죽을 몸’의 ‘죽을’은 헬라어로 ‘드네토'(*)이며 이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벌로써 내려진 필연적인 죽음을 가리킨다(mortal;KJV, RSV).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하기 전에 죽지 아니하는 ‘생령'(生靈)을 가졌었다(창 2:7). 그러나 그가 범죄한 후부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고 이 사망의 진노는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내려졌다. 그러나 사망의 진노는 구속함을 받은 성도에게는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면서 타락한 세상과 부딪히게 된다. 그렇기에 바울은 더 이상 죄의 유혹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지속적으로 애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 몸의 사욕(私慾)을 순종치 말고 – 죄는 우리 죽을 몸을 통해서 역사한다. 그 몸에서 죄를 짓게 하는 욕구가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욕구대로 행하게 되면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도전(挑戰)을 받게 된다. 성도라면 당연히 죄와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또한 투쟁해야 한다. 비록 죄에게 패배할 때가 많을지라도, 성도는 이미 죄에 대한 승리를 보장받은 신분이므로 염려할 필요는 없다. 한편 ‘순종치 말고’라는 말은 난폭하고 불같은 정욕대로 행할 것을 사단이 강요한다는 암시를 함축한다. 사단의 세력은 성도가 단순히 죄와 연합하는 것을 지나 죄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죄의 심각성과 타격적인 지배성을 상기할 수 있다. 일찍이 사단은 그리스도께도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조건을 내걸은바 있다(마 4: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유혹을 이기시고 꾸짖은 것처럼 성도는 죄악의 곁에 가지 말며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메데 파리스타네테 타 멜레 휘몬 호플라 아디키아스 테 하마르티아 알라 파라스테사테 헤아우투스 토 데오 호세이 에크 네크론 존타스 카이 타 멜레 휘몬 호플라 디카이오쉬네스 토 데오

개역개정,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새번역,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 ㉣또는 ‘무기’

우리말성경,13 또한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자처럼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가톨릭성경,13 그리고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영어NIV,13 Do not offer the parts of your body to sin, as instruments of wickedness, but rather offer yourselves to God, as those who have been brought from death to life; and offer the parts of your body to him as instruments of righteousness.

영어NASB,13 and do not go on presenting the members of your body to sin as instruments of unrighteousness; but present yourselves to God as those alive from the dead, and your members as instruments of righteousness to God.

영어MSG,13 Don’t even run little errands that are connected with that old way of life. Throw yourselves wholeheartedly and full-time–remember, you’ve been raised from the dead!–into God’s way of doing things.

영어NRSV,13 No longer present your members to sin as instruments of wickedness, but present yourselves to God as those who have been brought from death to life, and present your members to God as instruments of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13 μηδε παριστανετε τα μελη υμων οπλα αδικιας τη αμαρτια αλλα παραστησατε εαυτους τω θεω ως εκ νεκρων ζωντας και τα μελη υμων οπλα δικαιοσυνης τω θεω

라틴어Vulgate,13 sed neque exhibeatis membra vestra arma iniquitatis peccato sed exhibete vos Deo tamquam ex mortuis viventes et membra vestra arma iustitiae Deo

히브리어Modern,13 ]31-21[ גם אל תכינו את אבריכם להיות כלי עול לחטא אך תכינו את נפשכם לאלהים כחיים מעם המתים ואבריכם כלי צדקה לאלהים כי החטא לא יוכל למשל עוד בכם יען אינכם תחת יד התורה כי אם תחת יד החסד׃

성 경: [롬6:13]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병기]

󰃨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 ‘지체’라는 말은 12절의 ‘죽을 몸’이라는 말과 내용상으로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불의의 병기'(*, 호플라 아디키아스)란 표현은 각각의 지체가 죄의 종이 되어 불의를 행하는 도구가 됨을 나타낸다. 특히 바울은 ‘병기’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단순히 각 지체가 불의를 행함에 있어서 도구적인 의미보다 더 적극적인 수단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성도라 할지라도 자기 몸의 지체를 제어(制御)하지 않으면 이미 그의 몸은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 오직 너희 자신을…하나님께 드리며 – ‘너희 자신’은 ‘너희 죽을 몸'(12절)과 ‘너희 지체’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란 표현은 11절 내용의 반복으로, 성도가 의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자의 신분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서, 새 생명을 소유한 신분으로 자기의 지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 이유는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고전 6:15),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며(고전 6:19), 값으로 산 것(고전 6:20)이 되었기 때문이다.

󰃨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혹자는 바울이 몸의 지체를 악에 대항하고 의를 위해 전쟁하는데 사용되는 무기로 생각하게 된 것이 그의 선생들이나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Black). 그러나 이에 대한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오히려 바울은 구약의 ‘거룩한 전쟁'(holy war)에 대한 개념을 영적 전쟁에 적용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은 성도의 삶을 군사적 삶에 비유하는 표현법을 즐겨 사용했다(고전 9:7;고후 6:7;엡 6:10-20;살전 5:8;딤후 2:3). 거듭난 성도는 자신의 몸을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죄와 투쟁하기 위한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성도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싫어할 때, 이미 그는 자기의 몸이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어떠한 의의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됨을 깨달아야 한다.

하마르티아 가르 휘몬 우 퀴리유세이 우 가르 에스테 휘포 노몬 알라 휘포 카린

개역개정,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새번역,14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4 죄가 여러분을 지배하지 못할 것인데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14 죄가 여러분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

영어NIV,14 For sin shall not be your master, because you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영어NASB,14 For sin shall not be master over you, for you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영어MSG,14 Sin can’t tell you how to live. After all, you’re not living under that old tyranny any longer. You’re living in the freedom of God.

영어NRSV,14 For sin will have no dominion over you, since you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헬라어신약Stephanos,14 αμαρτια γαρ υμων ου κυριευσει ου γαρ εστε υπο νομον αλλ υπο χαριν

라틴어Vulgate,14 peccatum enim vobis non dominabitur non enim sub lege estis sed sub gratia

히브리어Modern,14 ]31-21[׃

성 경: [롬6:14]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병기]

󰃨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 성도가 자기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와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 수 없다. 그렇지만 자기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고자 애쓰는 그 사람에게 죄가 왕노릇할 수는 없다. 한편 ‘주관치 못하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퀴리유세이'(*)는 미래 능동태 직설법이다. 여기서 이 단어가 미래 시제인 것은 단순히 장래에 되어질 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주관치 못한다는 내용을 강력하게 확증(確證)한다. 즉 죄가 성도를 주관치 못하는 것은 장래뿐만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도 확실히 그렇다는 것이다. 이 강력하고 확실성 있는 보증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는다.

󰃨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 본절에서 ‘법'(*, 노모스)이 ‘은혜'(*, 카리스)와 대비되어 있으므로 이 ‘법’은 ‘법칙’이나 ‘세상적인 법’이 아니라 ‘율법’을 의미한다. 바울이 ‘율법’과 ‘은혜’를 대비시킨 것은 죄가 성도를 주관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즉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와는 관계없이 죄의 문제만으로 고민하여 항상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되니, 그 사람은 죄의 종이다. 그러나 은혜의 원리에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확신과 함께 죄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에 거하게 되므로 결코 죄가 그에게 왕노릇할 수 없다. 이 사실은 8:1, 2에서 바울이 선포했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을 뿐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티 운 하마르테소멘 호티 우크 에스멘 휘포 노몬 알라 휘포 카린 메 게노이토

개역개정,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새번역,15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말성경,15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짓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가톨릭성경,15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영어NIV,15 What then? Shall we sin because we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By no means!

영어NASB,15 What then? Shall we sin because we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May it never be!

영어MSG,15 So, since we’re out from under the old tyranny, does that mean we can live any old way we want? Since we’re free in the freedom of God, can we do anything that comes to mind?

영어NRSV,15 What then? Should we sin because we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By no means!

헬라어신약Stephanos,15 τι ουν αμαρτησομεν οτι ουκ εσμεν υπο νομον αλλ υπο χαριν μη γενοιτο

라틴어Vulgate,15 quid ergo peccavimus quoniam non sumus sub lege sed sub gratia absit

히브리어Modern,15 ועתה מה הנחטא יען איננו תחת יד התורה כי אם תחת יד החסד חלילה׃

성 경: [롬6:15]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 이 질문은 1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본절은 1절과 같은 질문이지만, 1절은 문제의 제기이며 본절은 제기된 문제를 풀기 위해 그 동안 진술했던 내용을 재확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주제로의 전환을 위한 예비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강조점의 차이로 1절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해도 좋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며, 본절은 ‘죄에서 해방되어 은혜 아래 있으므로 계속 죄를 지어도 좋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자에 대한 반론이다. 한편 ‘죄를 지으리요’라는 표현도 역시 1절의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자세한 것은 1절 주석을 참조하라.

󰃨 그럴 수 없느니라(*, 메 게노이토) –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질문한 사항에 대해 강한 부정의 대답을 하고 있다. KJV는 이 문구의 헬라어 ‘메 게노이토’가 지닌 강력한 부정의 뜻을 살려 ‘하나님이 금하신다'(Good forbid)라고 해석하였고 RSV는 ‘결코 그렇지 않다'(By no means !)라고 해석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당연히 방종한 마음과 생활을 거부하고 은혜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

우크 오이다테 호티 호 파리스타네테 헤아우투스 둘루스 에이스 휘파코엔 둘로이 에스테 호 휘파쿠에테 에토이 하마르티아스 에이스 다나톤 에 휘파코에스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개역개정,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새번역,16 여러분이 아무에게나 자기를 종으로 내맡겨서 복종하게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죄의 종이 되어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거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6 여러분이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든지 순종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죄의 종이 돼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순종의 종이 돼 의에 이릅니다.

가톨릭성경,16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종으로 넘겨 순종하면 여러분이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여러분은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 되거나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영어NIV,16 Don’t you know that when you offer yourselves to someone to obey him as slaves, you are slaves to the one whom you obey–whether you are slaves to sin, which leads to death, or to obedience, which leads to righteousness?

영어NASB,16 Do you not know that when you present yourselves to someone as slaves for obedience, you are slaves of the one whom you obey, either of sin resulting in death, or of obedience resulting in righteousness?

영어MSG,16 Hardly. You know well enough from your own experience that there are some acts of so-called freedom that destroy freedom. Offer yourselves to sin, for instance, and it’s your last free act. But offer yourselves to the ways of God and the freedom never quits. All your lives you’ve let sin tell you what to do.

영어NRSV,16 Do you not know that if you present yourselves to anyone as obedient slaves, you are slaves of the one whom you obey, either of sin, which leads to death, or of obedience, which leads to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16 ουκ οιδατε οτι ω παριστανετε εαυτους δουλους εις υπακοην δουλοι εστε ω υπακουετε ητοι αμαρτιας εις θανατον η υπακοης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라틴어Vulgate,16 nescitis quoniam cui exhibetis vos servos ad oboediendum servi estis eius cui oboeditis sive peccati sive oboeditionis ad iustitiam

히브리어Modern,16 הלא ידעתם כי לאשר תתנו את נפשכם להיות עבדיו לסור למשמעתו הן עבדים אתם לאשר תשמעו לו אם לחטא אלי מות אם למשמעת אלי צדקה׃

성 경: [롬6:16]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로스'(*)는 ‘청지기’ 또는 ‘집사’를 가리키는 ‘디아코노스'(*)와는 달리 철저히 주인에게 예속된 ‘노예’를 가리킨다(slave;RSV, NIV). 어떤 사람이 자기 몸을 노예로 바치면 이미 그는 자기 몸에 대한 주권을 포기해야 한다. 오직 주인에 대한 철저한 복종만 있을 뿐이다.

󰃨 죄의 종으로 사망에…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 영적인 차원에서 사람은 ‘죄의 종’이든지 ‘순종의 종’이든지 어느 한 편에 속하게 되어 있다. 물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하니한'(계 3:15)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엄격한 의미에서 ‘죄의 종’에 속한다. 한편 본절에서는 ‘죄의 종’과 ‘순종의 종’이 대조되어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죄의 종’은 ‘불순종의 종’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곧 ‘불순종의 아들들'(엡 5:6)로도 이해된다. 그리고 이들은 벧리알의 자손들로(신 13:13;삿 19:22) ‘불법의 사람’이요, ‘멸망의 사람’이다(살후 2:3). 그리고 또 다른 대조로서 ‘사망’과 ‘의’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죄의 종’과 ‘순종의 종’에게 각각 주어지는 열매다. 23절 말씀과 연관지어 볼 때 본절의 ‘사망’은 ‘영원한 멸망’을 의미한다(살후 1:9). 반면에 ‘의’는 ‘사망’과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영생’으로 대치해도 무난하다.

카리스 데 토 데오 호티 에테 둘로이 테스 하마르티아스 휘페쿠사테 데 에크 카르디아스 에이스 혼 파레도데테 튀폰 디다케스

개역개정,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새번역,17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여러분은 전해 받은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우리말성경,17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전해받은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

가톨릭성경,17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전해 받은 표준 가르침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영어NIV,17 But thanks be to God that, though you used to be slaves to sin, you wholeheartedly obeyed the form of teaching to which you were entrusted.

영어NASB,17 But thanks be to God that though you were slaves of sin, you became obedient from the heart to that form of teaching to which you were committed,

영어MSG,17 But thank God you’ve started listening to a new master,

영어NRSV,17 But thanks be to God that you, having once been slaves of sin, have become obedient from the heart to the form of teaching to which you were entrusted,

헬라어신약Stephanos,17 χαρις δε τω θεω οτι ητε δουλοι της αμαρτιας υπηκουσατε δε εκ καρδιας εις ον παρεδοθητε τυπον διδαχης

라틴어Vulgate,17 gratias autem Deo quod fuistis servi peccati oboedistis autem ex corde in eam formam doctrinae in qua traditi estis

히브리어Modern,17 אבל תודת לאלהים כי הייתם עבדי החטא ואחר שמעתם בכל לבבכם אל תכונת הלקח אשר נמסרתם לו׃

성 경: [롬6:17]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혹자는 본절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일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오늘날의 상태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주석했다(Hendriksen). 이 말은 바울이 로마 교회가 성화(聖化)된 모습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절 이하에 계속된 바울의 진술은 성화의 진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변화된 신분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 사망이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했으므로(5:17) 그의 생명에 동참한 모든 사람은 죄의 종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지니고 있던 사람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 성화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 – 혹자는 본 구절이 딤후 1:13의 ‘바른 말’과 딤전 1:10의 ‘바른교훈'(딤후 4:3;딛 1:9;2:1)과 같이 복음 중에서 윤리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에 속한다고 단언한다(Murray). 그러나 만일 이 주장을 따르면 곧이어 언급되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절)는 선언이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본을 순종함으로써 주어진 결과임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기독교를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려 놓는 결과를 초래하며 반(反)복음적인 가르침이다. 따라서 ‘교훈의 본’은 복음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 마음으로 순종하여 – 이 표현은 바울이 10:10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고 언급했던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과 ‘순종’을 동일 선상에서 설명한다(히 3:18, 19;4:2, 6). 따라서 본 구절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또는 ‘마음으로 믿어’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본절에서 ‘순종’이라는 단어에 너무 치중하면 인간 행위가 강조되며 바울이 그동안 강조했던 ‘믿음’과는 별개(別個)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엘류데로덴테스 데 아포 테스 하마르티아스 에둘로데테 테 디카이오쉬네

개역개정,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새번역,18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8 죄에서 해방돼 의의 종이 됐습니다.

가톨릭성경,18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영어NIV,18 You have been set free from sin and have become slaves to righteousness.

영어NASB,18 and having been freed from sin, you became slaves of righteousness.

영어MSG,18 one whose commands set you free to live openly in his freedom!

영어NRSV,18 and that you, having been set free from sin, have become slaves of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18 ελευθερωθεντες δε απο της αμαρτιας εδουλωθητε τη δικαιοσυνη

라틴어Vulgate,18 liberati autem a peccato servi facti estis iustitiae

히브리어Modern,18 שחררתם מידי החטא לכן השתעבדתם לצדקה׃

성 경: [롬6:18]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죄에게서 해방되어 – 성도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죄의 몸이 멸하여졌으며(6절), 동시에 죄에 대하여 죽은 그는 죄에서 벗어났다(7절).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8:1).

󰃨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 ‘종이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둘로데테'(*)는 단순 과거 시제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단순과거 시제는 어떤 동작이 불확정직임을 나타낸다. 즉 동작의 결과가 완료되었음을 나타내지 않는다. 바울은 성도가 ‘의에게 종이 된’것을 단순과거 시제로 표현함으로써 7절의 ‘교훈의 본’, 곧 복음을 믿은 결과 성도가 죄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종이 된 상태가 현재에도 계속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안드로피논 레고 디아 텐 아스데네이안 테스 사르코스 휘몬 호스페르 가르 파레스테사테 타 멜레 휘몬 둘라 테 아카다르시아 카이 테 아노미아 에이스 텐 아노미안 후토스 뉜 파라스테사테 타 멜레 휘몬 둘라 테 디카이오쉬네 에이스 하기아스몬

개역개정,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새번역,19 여러분의 ㉥이해력이 미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으로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 ㉥그, ‘육신’

우리말성경,19 여러분의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대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의 지체를 부정과 불법의 종으로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처럼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십시오.

가톨릭성경,19 나는 여러분이 지닌 육의 나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영어NIV,19 I put this in human terms because you are weak in your natural selves. Just as you used to offer the parts of your body in slavery to impurity and to ever-increasing wickedness, so now offer them in slavery to righteousness leading to holiness.

영어NASB,19 I am speaking in human terms because of the weakness of your flesh. For just as you presented your members as slaves to impurity and to lawlessness, resulting in further lawlessness, so now present your members as slaves to righteousness, resulting in sanctification.

영어MSG,19 I’m using this freedom language because it’s easy to picture. You can readily recall, can’t you, how at one time the more you did just what you felt like doing–not caring about others, not caring about God–the worse your life became and the less freedom you had? And how much different is it now as you live in God’s freedom, your lives healed and expansive in holiness?

영어NRSV,19 I am speaking in human terms because of your natural limitations. For just as you once presented your members as slaves to impurity and to greater and greater iniquity, so now present your members as slaves to righteousness for sanctification.

헬라어신약Stephanos,19 ανθρωπινον λεγω δια την ασθενειαν της σαρκος υμων ωσπερ γαρ παρεστησατε τα μελη υμων δουλα τη ακαθαρσια και τη ανομια εις την ανομιαν ουτως νυν παραστησατε τα μελη υμων δουλα τη δικαιοσυνη εις αγιασμον

라틴어Vulgate,19 humanum dico propter infirmitatem carnis vestrae sicut enim exhibuistis membra vestra servire inmunditiae et iniquitati ad iniquitatem ita nunc exhibete membra vestra servire iustitiae in sanctificationem

히브리어Modern,19 כדרך בני אדם אני מדבר מפני רפיון בשרכם כי כאשר לפנים הכינותם את אבריכם לעבודת החטאה והרשע להרשיע כן עתה הכינו את אבריכם לעבודת הצדקה להתקדש׃

성 경: [롬6:19]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 ‘육신'(*, 사르크스)은 새로운 피조물로 옮겨질 수 있는 ‘몸'(*, 소마)과는 달리 이 세상의 존재 양식에 속하여 있고 이 세상과 더불어 멸망당할 자로서의 인간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 ‘육신’은 ‘영'(성령)과 대립을 이루면서 연약함과 허무 가운데 있는 인간성을 의미한다(Ridderbos). 따라서 본절은 본 서신을 받아보게 될 로마교회가 영적인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 영적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예를 들었음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종에 대한 예를 가리킨다. 바울은 성도의 신분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라는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종과 주인과의 관계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과 같이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는 표현을 갈 3:15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 전에 너희가…불법에 이른 것같이- 본 구절은 1:18에서 3:18까지 바울이 언급한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요약 설명으로 이해된다. 바울은 여기서 로마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

󰃨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 ‘거룩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스모스'(*)가 ‘성화’를 의미하는지 ‘성결'(holiness)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견해가 학자마다 다르다. 혹자는 고전 1:30;살전 4:3, 4, 7;살후 2:13;딤전 2:15;히 12:14;벧전 1:2 등을 근거로 ‘하기아스모스’가 과정적인 의미를 지닌 ‘성화'(sanctification)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상태를 가리키는 ‘거룩’ 또는 ‘성별’을 뜻한다고 이해한다(Murray, Barmby). 그러나 앞에서 언급된 구절들 중에 살전 4:3, 4, 7과 딤전 2:15은 단순히 ‘성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그밖의 것들은 그렇지 않다. 렌스키(Lenski)에 따르면 ‘하기아스모스’의 접미사 ‘모스'(*)는 ‘활동’을 의미하는데, 이 ‘활동’은 우리 자신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고전 1:30;6:11에서 ‘하기아스모스’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거룩’을 의미하며 이 ‘거룩’함이 ‘의’와 ‘구속’과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전가됨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하기아스모스’를 ‘거룩’ 또는 ‘성별’로 해석하든지 ‘성화’로 해석하든지 상관없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을 위해서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바울은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와 ‘구속’과 ‘거룩'(성화)을 믿음으로 전가받았으나 아직 연약한 육신에 매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몸의 구속’을 기대한다고도 했으며(8:23)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듯이(13절) 당연히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본절에 언급된 바울의 권면은 ‘거룩'(성화)이 구원의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사실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호테 가르 둘로이 에테 테스 하마르티아스 엘류데로이 에테 테 디카이오쉬네

개역개정,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새번역,20 여러분이 죄의 종일 때에는 의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말성경,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는 의에 대해 자유스러웠습니다.

가톨릭성경,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영어NIV,20 When you were slaves to sin, you were free from the control of righteousness.

영어NASB,20 For when you were slaves of sin, you were free in regard to righteousness.

영어MSG,20 As long as you did what you felt like doing, ignoring God, you didn’t have to bother with right thinking or right living, or right anything for that matter.

영어NRSV,20 When you were slaves of sin, you were free in regard to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20 οτε γαρ δουλοι ητε της αμαρτιας ελευθεροι ητε τη δικαιοσυνη

라틴어Vulgate,20 cum enim servi essetis peccati liberi fuistis iustitiae

히브리어Modern,20 כי בעת היותכם עבדי החטא חפשים הייתם מן הצדקה׃

성 경: [롬6:20]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 이 표현은 19절의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는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의 신분은 ‘죄의 종’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聯合)하여 자기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사람은 ‘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 의를 행해야 할 의무도 책임도 없었다. 비록 자연인은 본성이 율법의 행위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2:14, 15). 그래서 칼빈(Calvin)은 “육체의 자유는 단지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서 우리를 자유케 하여 마귀에게 얽매이게 할 뿐이다”라고 진술했던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 6:24)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교훈과도 일맥 상통한다.

티나 운 카르폰 에이케테 토테 에프 호이스 뉜 에파이스퀴네스데 토 가르 텔로스 에케이논 다나토스

개역개정,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새번역,21 여러분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이제 와서 여러분이 그러한 생활을 부끄러워하지마는, 그러한 생활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우리말성경,21 그러나 여러분은 그때 무슨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이제 여러분은 그런 일들을 부끄러워합니다. 이는 그것들의 마지막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21 그 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영어NIV,21 What benefit did you reap at that time from the things you are now ashamed of? Those things result in death!

영어NASB,21 Therefore what benefit were you then deriving from the things of which you are now ashamed? For the outcome of those things is death.

영어MSG,21 But do you call that a free life? What did you get out of it? Nothing you’re proud of now. Where did it get you? A dead end.

영어NRSV,21 So what advantage did you then get from the things of which you now are ashamed? The end of those things is death.

헬라어신약Stephanos,21 τινα ουν καρπον ειχετε τοτε εφ οις νυν επαισχυνεσθε το γαρ τελος εκεινων θανατος

라틴어Vulgate,21 quem ergo fructum habuistis tunc in quibus nunc erubescitis nam finis illorum mors est

히브리어Modern,21 ומה אפוא הפרי שהיה לכם אז מן המעשים אשר עתה תבשו מהם כי אחריתם המות׃

성 경: [롬6:21]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그 때에(*, 토테) – 바로 앞절에서 언급한 ‘죄의 종이 되었던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죄의 종이 되었던 때를 가리킨다.

󰃨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 성경은 ‘열매'(*, 카르폰)에 대해 말할 때 ‘선한 열매'(마 3:8;요 4:36;갈 5:22;빌 1:11;약 3:17)와 ‘악한 열매'(22절;7:5)를 구분한다. 혹자는 여기서 바울이 ‘선한 열매’를 의미한다고 단언한다(Murray, Barmby). 그리고 본절의 질문에 대하여 ‘전혀 없었다’란 대답이 암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해석은 그다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르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때’란 표현이 죄의 종이었던 때를 의미하므로 ‘열매’를 달리 해석하지 않고 ‘열매’란 표현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면 본절은 “너희가 죄의 종이었을 때에 무슨 열매를 맺었느냐 ?”가 된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는 열매가 아니었던가 ?”일 것이다.

󰃨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 이 표현은 17절에서 20절까지의 진술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면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면 죄에 거하자'(1절)고 주장하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 상태의 로마 교회 성도들에 대한 것임을 보여준다. 성도가 하나님을 모르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힘써 대적했었으나 하나님을 알면서부터 의에게 종이 되었으므로 그는 지난 날의 일들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 죄의 종이 된 결과는 오직 ‘사망’만 있을 뿐이다. 혹자는 이 ‘사망’이 ‘영원한 사망’을 가리키는지 확실치 않다고 주장하지만(Barmby), (1) ‘사망’이 ‘영생’과 대조되어 언급되고 있는 점(22, 23절), 그리고 (2)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종말론적 사건인 대심판에 대한 암시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의 ‘사망’은 ‘영원한 죽음’ 곧 지옥의 형벌을 의미한다.

뉘니 데 엘류데로덴테스 아포 테스 하마르티아스 둘로덴테스 데 토 데오 에케테 톤 카르폰 휘몬 에이스 하기아스몬 토 데 텔로스 조엔 아이오니온

개역개정,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새번역,22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말성경,22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종이 돼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

가톨릭성경,22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어NIV,22 But now that you have been set free from sin and have become slaves to God, the benefit you reap leads to holiness, and the result is eternal life.

영어NASB,22 But now having been freed from sin and enslaved to God, you derive your benefit, resulting in sanctification, and the outcome, eternal life.

영어MSG,22 But now that you’ve found you don’t have to listen to sin tell you what to do, and have discovered the delight of listening to God telling you, what a surprise! A whole, healed, put-together life right now, with more and more of life on the way!

영어NRSV,22 But now that you have been freed from sin and enslaved to God, the advantage you get is sanctification. The end is eternal life.

헬라어신약Stephanos,22 νυνι δε ελευθερωθεντες απο της αμαρτιας δουλωθεντες δε τω θεω εχετε τον καρπον υμων εις αγιασμον το δε τελος ζωην αιωνιον

라틴어Vulgate,22 nunc vero liberati a peccato servi autem facti Deo habetis fructum vestrum in sanctificationem finem vero vitam aeternam

히브리어Modern,22 אכן עתה בהיותכם משחררים מידי החטא ומשעבדים לאלהים יש לכם פריכם לקדשה ואחריתו חיי עולם׃

성 경: [롬6:22]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그러나 이제는 – 이 표현은 극적인 전환을 보여주기 위해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것이다(3:21 주석 참조). 지금까지 바울은 죄에게 종된 상태에 있는 인간의 실존과 그 결말에 대해 설명했으나 본절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내용으로 전환(轉換)시키고자 이 같은 접속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 18절의 내용을 반복한다. 그리고 성도가 죄에서 해방된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있다(6절).

󰃨 하나님께 종이 되어 – 하나님께 종이 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행해야 한다. 이 ‘의’는 (1)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도에게 이루어졌지만, (2)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성도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천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록 바울이 18절에서는 ‘의에게’라고 언급했고 본절에서는 ‘하나님께’라고 언급했을 뿐이지 그 두 단어는 본질상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 여기에 언급된 ‘거룩함’도 19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기아스모스'(*)이다. 이 ‘거룩’은 인간의 순수한 노력만으로 성취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셨던 ‘성화'(sanctfication)를 의미한다. 그리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는 해석상 애매한 표현이지만 구체화시키자면 ‘거룩함의 열매’ 또는 ‘성화의 열매’로 해석될 수 있다. 바울은 이 ‘성화의 열매’를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얻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테'(*)의 시제가 개역성경과는 달리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이 시제는 본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성화의 열매’를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말하지 않고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19절의 ‘거룩함(성화)에 이르라’는 권면과 함께 종합적으로 해석되어야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본절과 19절을 종합해 볼 때 성도는 ‘성화의 열매’를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으면서도(고전 1:30;6:11) 동시에 ‘성화’를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지닌 신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화’ 자체도 ‘의’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성도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것을 바라보면서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그것이 드러나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 예수의 가르침대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요 5:24;6:47, 54). 그렇지만 완전한 의미의 영생은 마지막 부활 때에 거룩함의 열매를 소유한 자에게 주어진다.

타 가르 옾소니아 테스 하마르티아스 다나토스 토 데 카리스마 투 데우 조에 아이오니오스 엔 크리스토 예수 토 퀴리오 헤몬

개역개정,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새번역,23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말성경,23 죄의 대가는 죽음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가톨릭성경,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영어NIV,23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영어NASB,23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fre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영어MSG,23 Work hard for sin your whole life and your pension is death. But God’s gift is real life, eternal life, delivered by Jesus, our Master.

영어NRSV,23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fre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23 τα γαρ οψωνια της αμαρτιας θανατος το δε χαρισμα του θεου ζωη αιωνιος εν χριστω ιησου τω κυριω ημων

라틴어Vulgate,23 stipendia enim peccati mors gratia autem Dei vita aeterna in Christo Iesu Domino nostro

히브리어Modern,23 כי שכר החטא הוא המות ומתנת חסד אלהים היא חיי העולם במשיח ישוע אדנינו׃

성 경: [롬6:23]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영생이니라 –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은 죄에 계속 거하는 자에게 지불되는 대가가 사망이라는 의미이다. ‘삯’에 해당하는 헬라어 ‘와소니아'(*)는 흔히 ‘병사들의 급료’의 의미로 사용된다(Hendriksen, Murray, Calvin, Barmby, Black). 비록 ‘와소니아’가 딤전 5:18에서는 단순히 노동자가 일한 것에 대한 대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나머지 구절들(눅 3:14;고전 9:7)에서는 군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일꾼과는 달리 군인들이 철저하게 군사적인 의무에 매여있음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처럼, 사람이 ‘죄의 종’으로서 죄에게 충성함으로 ‘사망’이라는 대가를 받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와소니아’는 그 다음에 언급되는 은사(*, 카리스마)와 대조되고 있다. 이 ‘은사’는 ‘일한 것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4:6) 것에 대하여 적용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다. 그리고 이 ‘은사’는 성도가 죄에서 해방되어(18, 22a절) 거룩의 열매를 얻게 된(22b절) 사실을 지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성도는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자신이 노력한 대가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사로 값없이 ‘의’, ‘성화’, 그리고 ‘구원’을 받게 되므로 결코 자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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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죄 가운데서 살 수 없다.

김.형익 목사 / 벧샬롬교회 담임목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을 졸업하고 GP선교회 한국대표, 인도네시아 주재 선교사, 죠이선교교회 (미국) 담임목사를 역임했다. 생명의말씀사 간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의 저자

사도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말(5:20)에 대한 반론을 다룬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더 지어도 되는가?”하는 문제다(1). 이것은 소위 율법폐기론 혹은 반율법주의 논리다. 사도는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의 교리로 대답한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도가 함께 죽었다는 의미다(3~4).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2).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어찌 죄를 지으면서 살겠는가(2)? 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고 이것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새로운 삶이다(4~5).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우리가 죄에게종노릇하고 살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6). 여기서 ‘옛 사람’은 아담과 연합한 죄인의 실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율법의 저주와 형벌 아래 있는 존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전의 사람을 가리킨다.

그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그리스도 안에서 그 죗값이 치러졌다.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사람’이다.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를 그리스도를 바라보듯이 바라보신다. 죄를 지은 적도,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로 여겨주신다. 성도는 이렇게 죄의 종의 신분에서 해방되어 의롭다함을 얻은 자가 되었다(7).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죽지 아니하심과 같이 영원한 생명을 사는 자다(8~9).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겨야 한다(11).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가 얻은 새로운 신분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죄가 자신을 다스리도록 허락할 수 없다(12). 오직 자기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13). 죄가 더 이상 신자를 지배할 권리를 가지고 있은 것은, 신자가 은혜의 법 아래 있기 때문이다(14).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이 신자로 하여금 죄를 더 짓게 할 수 있을까(15)? 그럴 수 없다. 누구에게 순종하느냐가 누구의 종인가를 결정한다. 죄에게 순종한다면 그는 죄의 종이며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고, 은혜의 원리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는 의에 이르게 될 것이다(16).

바울은 다시 말한다. 신자는 누구인가? 그는 본래 죄의 종이었는데 복음을 듣고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자다(17~18). 그러므로 신자는 이제 자기 몸을 과거처럼 부정과 불법을 행하는데 드리는 대신의에게 드려 거룩함에 이르는 존재다(19). 과거에 죄의 종이었을 때, 사람은 의에 대해서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삶을 살았다(20). 그 때 맺은 열매는 오직 부끄러운 것들뿐이었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었다(21). 그러나 성도는 이제 죄로부터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되었으며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 결국 영생에 이르는 복된 신분을 얻었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23).”

이 복음의 객관적 사실—복음—의 렌즈로 성도가 자신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성도 안에는 여전히 죄의 본성적 잔재가 남아 있어서그것과 싸워야 하지만,사도는 그것을 ‘죄의 몸’(6), ‘죽을 몸’(12)이라고 부른다.죄는 신자를 주인으로써 다스리지 못하고 오직 죄의 몸, 죽을 몸을 다스리려고 할 뿐이다(14). 그러므로 신자는 죄가 자기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힘써 싸워야 한다(12).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가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부적절할 뿐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사도의 논리다.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표시이고 인(印)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뿐 아니라 죽은 옛 사람을 장사 지내는 의식이다. 거듭난 사람이 거듭나기 전과 같이 살 수 있는가? 성경의 대답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에게 심겨진 하나님의 생명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고, 의를 이루고 싶은 갈망을 주며 거룩에 이르는 소원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이전처럼 죄 가운데 편안히 살 수 없다. 유대인이 가진 율법은 죄를 이기게 할 힘이 없었지만,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은혜는 죄와 죽음을 정복한다. 당신은 이 은혜를 경험하고 사는가?

“하나님 아버지, 저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은혜, 저희가 죄에 대하여 죽은 존재가 되었기에 죄가 더 이상 저희 존재를 주장할 수 없게 된 은혜를 감사하옵나이다. 그러므로 죄가 저희 죽을 몸 곧 죄의 몸을 주장하지 않도록 거룩을 위한 싸움을 날마다 감당하는 삶을 살도록 은혜를 풍성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로마서 6장 설교말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다”(롬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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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6장 설교말씀 중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다라는 말씀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다”(롬 6:1-11)

● 명제 :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 목적 : 우리도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하고 무덤에서 주님과 부활로 연합되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죄가 청산되지 않으면 영원한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원죄이고 또 다른 죄는 자 범죄입니다. 이것을 청산하려면 믿음과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원죄가 해결되고 행위의 회개로 자 범죄를 해결합니다. 주님은 이 문제를 청산해 주시려고 육체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육체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구원받은 자는 주님과 연합된 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으면 함께 살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과 함께 무덤에서 부활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여 평생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롬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느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냐고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더 받으려고 죄에 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자 범죄를 계속해서 지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원죄가 사라진 사람입니다. 원죄가 사라졌다는 것은 영원한 심판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자가 이 세상에서 자 범죄를 계속해서 지으면 안 됩니다. 율법주의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죄를 더 짓고 있습니다. 믿음이 아닌 행위를 주장하고 있으니 은혜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더하고 있습니다.

롬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바울은 말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겠냐는 말입니다. 율법주의자는 이것을 반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나타내어 죄에 거함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로 구원 얻는 자들에게 죄를 허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자 범죄를 짓는 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자 범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반복적 회개가 필요합니다.

롬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 알지 못하냐고 합니다. (세례를 받은: טבל 타발 2881 담그다, 적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담가져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는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세례는 내가 받고 싶지 않다고 해서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받고 싶다고 해서 받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로 받게 됩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성령세례를 주지 않습니다. 물세례는 교회에 들어와 세례 학습을 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철저한 은혜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내가 학습 공부를 했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공부하지 않아도 오는 것이 성령세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주님과 함께 장사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나도 또한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기 때문입니다. (장사되었나니: קבר 카바르 6912 매장하다) 나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과 함께 무덤에 묻혀 장사되었습니다. 이렇게 장사된 것도 나의 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주님과 함께 무덤에 장사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과 함께 묻히지 않으면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지 않으면 나는 새 생명을 소망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새 생명: חדש 하다쉬 2319 새롭게 하다, 새로 만들다) 주님과 함께 무덤에 들어가 연합되어 부활됨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하다쉬는 완전히 새롭게 탄생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히브리어 문법은 강조 수동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하에 완전한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내가 변화되기 싫어도 변화될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새 사람으로 바뀌기 싫어도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완전히 새로운 부활의 삶을 살게 해 줍니다.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내가 완전히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면 주님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됩니다. 어떤 이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이런 자는 교회는 나오지만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입니다. 아직 설 죽은 자입니다. 주님의 죽음과 완전하게 연합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런 자는 주님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완전하게 연합되지 못합니다. 주님과 같은 부활의 모습으로 연합된 자는 영화의 몸을 가진 자입니다. 속사람이 완전히 부활되어 주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모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만이 가능합니다.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자는 절대 주님과 부활의 모습으로 연합할 수 없습니다.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바울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율법의 행위 아래에 있던 시절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아직도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못한 상태입니다. (죄의 몸이 죽어: אבד 아바드 6 멸망하다, 죽다, 소멸하다) 죄의 몸이 죽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멸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말합니다. 어떤 이는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옛사람이 완전히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면 원죄가 더 이상 나에게 역사하지 못합니다. 완전히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의 원죄를 완전하게 소멸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의 종노릇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롬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 원죄에서 벗어나 의롭다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의롭다고 칭해주셨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נקה 나카 5352 비우다, 깨끗하다, 무죄로 하다)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죽고 원죄에서 벗어나 나는 완전히 죄가 없는 무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내가 의롭게 되려고 열심히 노력해도 되지 않습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노력이 헛수고라고 말합니다. 내가 의롭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시고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거룩한 상태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다시 원죄 상태로 돌아가 구원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롬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이제는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살 줄을 믿게 됩니다. (믿노니: אמן 아만 539 확실하게 하다, 믿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으니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살 것도 믿게 됩니다. 이 믿음은 내가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입니다. 사역 능동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이끄시는 믿음이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믿게 됩니다.

롬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은 다시 죽지 않습니다. 사망이 다시 주님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주님의 부활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죽음이 주님을 엄습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죽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새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겉 사람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몸입니다. 이 몸을 통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됩니다. 구원받고 나면 나의 속사람이 영원히 주님과 연합하여 살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영화의 몸으로 부활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롬6: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주님은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습니다. 나의 원죄와 자 범죄를 위하여 단번에 죽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여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되셨습니다. 우리의 부활도 주님과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부활됩니다.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라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를 통하여 구원을 얻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되었습니다.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구원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나의 행실이 하나님 앞에서 자 범죄를 짓는다고 해도 이것으로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징계만 있을 뿐입니다. 원죄가 해결된 사람은 이제부터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주님과 항상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시켜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고 주관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평생 동행하시고 주님과 함께 새 생명의 삶을 누리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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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6장 1-21장 로마서 강해 3권 -마틴로이드 존스-강대식 목사 요약

롬6장 1-2

1장 서론적 분해 (로마서강해 3권) 마틴 로이드 존스 2010-05-19 강대식 목사 한가족교회 http://afamily.ijesus.net

“청교도의 길” http://blog.daum.net/kds2012

“청교도연구회” http://cafe.daum.net/ps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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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6:1-2)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를 분해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인기있는 방식은 1-5장은 칭의, 6-8장은 성화, 9-11장은 유대인과 종말의 문제, 12-16장은 실제적인 권면과 적용의 방식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기계적일 뿐 아니라 로마서가 말하지 않는 것을 로마서에다 갖다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온 힘을 기울여 밝힐 것이다.

사람들은 여러 제목 밑에 이러한 모양으로 아주 교묘하게 구분짓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모든 것을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결국에 가서는 문제를 보다 복잡미묘하게 할 뿐이다. 성경 해석의 철칙은 본문 말씀이 가는 대로 따라가고, 말씀 속에 없는데 우리 마음 속의 어떤 틀을 거기에다 부과하지 않는 것이다.

단순하게 정돈하고 알파벳 글자수와 같게 하는 것 등은 도움이 되겠지만 성경 말씀 자체를 희생시켜 가면서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전제해야 하는 것은 6장이하에서 새로운 대목을 시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로마서를 그럴듯하게 쉽게 세분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은 바로 이 점에서이다. 6;1에서 성화의 주제를 다루기 시작한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그런즉 무슨 말을 하리요?”. 이제껏 말해 왔던 것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그 문제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이제 그가 말할려고 하는 것은 이제까지 말해 온 것에서 야기되는 문제이다. 5장 전체의 주제를 재음미해봐야 한다.

(로마서의 장 구분도 16세기경에야 된 것이며 정확하지도 못하며 독자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5장에서 사도가 말하는 주제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주제였다. 처음 네 장에서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위대한 교리를 말했고 5장의 주제는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칭의가 아주 완전한 의미에서 우리의 최종적인 구속을 보장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5장 내내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통치 아래 있음으로 해서 우리의 장래는 확실히 보장되었고, 모든 축복으로 인도하는 동기가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는 그 문제에 대하여 종결지은 것이 아니고 8장 마지막에 가서야 끝을 낸다.

6장에서부터 무언가 잠깐 멈출 필요를 느꼈으며, 극히 중요한 질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진로를 바꾼 것이다. 5:20-21은 대번에 두 가지 특별한 난제를 야기시킨다. (롬5:20-21)“(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둘 다 율법에 관한 문제이다. 첫째는, 율법을 제치고 은혜 일변도의 진술이 사람들에게 죄를 짓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닌가? 율법폐기론으로 무율법주의롤 인도하기 쉬운 교훈이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는, 율법은 이제 전혀 가치없고 쓸모 없지 않은가?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속계획과 체계에 있어서 율법이 차지하는 기능과 위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6장과 7장에서 행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장은 5장과 8장 사이의 삽입구적인 장이다. 5장과 8장의 주제는 동일한 것이요, 계속되는 것이다. 8장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 시작한다. 이 진술은 5장 마지막과 연결되는 것이지 7장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8장은 5장이 끊긴 자리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6장과 7장은 본 주제를 벗어난 탈선이 아니라 삼입대목이다. 5장에서 야기되는 난제들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6장은 첫 번째 난제인 율법폐기론의 위험성을 다루고, 7장은 두 번째 난제, 율법의 위치와 기능을 다룬다. 그런 다음 칭의의 결국에 대한 위대한 주제로 다시 넘어가게 되어 8장 초두에서 마지막까지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6,7장에 나오는 말씀들이 성화를 다루고 있다는 견해를 철저히 배격한다. 6장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14절과 15-23절이다. 첫 부분에서, 순수하고 교리적인 방식으로 율법폐기론의 위험을 다루고 둘째 부분에서 실제적이고 체험적으로 다룬다. 첫째 부분을 세분하면 1-2절은 문제를 제기하고 보편적인 답을 한다. 3-11절은 보다 상세한 답변으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설명한다. 12-14절은 이상의 모든 것을 비추어서 개관적인 호소를 한다. 성경을 해석할 때, 부분으로 들어가기 전에 전체를 마음 속에 넣어두는 것이 언제나 좋다. 전체의 개념에 상응하지 않게 부분을 해석해서는 결코 안된다.

1절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즉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이 특별한 오해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교리가 전해질 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면 이런 오해나 질문은 생길 수가 없다. 잘못 이해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매우 위험하다.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로 되어진다는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나는 주장한다. 만일 우리의 설교가 그런 오해와 도전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참으로 설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에 대하여 이런 반기를 든 적이 없다. 그러나 마틴 루터에게는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 형식적이고 죽은 기독교는 언제나 그런 식의 도전을 해왔다.

2절의 답변, “그럴 수 없느니라”. ‘결코 아니다’,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의 뜻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신칭의를 이해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울이 1-5장에서 말한 모든 것을 파악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칭의 뿐만 아니라, 우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 은혜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으며, 그렇게 행동하기는 더욱 어렵다. 은혜의 임무는 우리들을 죄의 문제와 왕노릇 아래에서 건져 내어 은혜의 왕 노릇 아래로 옮겨주는 것이다. 5;21,“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이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여기서 우리는 로마서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위대한 진술들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진술을 비슷한 형태로 반복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절에서, 6-8절에서, 10,11절에서, 그리고 11절에서는 권면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살리요”라는 진술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죄에 대하여 죽은”은 부정과거형 동사로서 한번 일어나서 다시는 변개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자로서의 우리의 과거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일단 일어나고 변동될 수 없는 사실을 말한다. 6,7,8,10,11절에서도 같은 동사형을 쓰고 있음을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여기에 너희에게 영원하며 단번에 일어난 일이 있노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아담 안에’ 있는 것을 중단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 시작할 때에 일어난 것이다.

롬6:3 그리스도와의 연합[3장] 로마서강해3권 2010-06-02 —————————————-

(롬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2절의 엄청나고 놀라운 진술에 대한 대답을 3-11절에서 하고 있다.

5:12-21에서 “우리가 전에는 아담 안에 있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그 개념을 함축했다. ‘어떻게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단 말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로 인하여서이다.

3-11절은 그것을 상세하게 풀이하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는 기독교 진리 가운데서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심오하고, 가장 극적이고, 가장 위안을 주는 것 중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 6장을 읽으면서도 이 교리를 놓치는 것은 ‘세례 받은’이란 말만을 보고 다른 것은 보지 않기 때문이다. ‘세례 받은’에 대한 해석;

① 성례주의자 해석. 세례를 받아야 중생한다는 가르치는 교리. 세례행위 자체가 수세자와 예수 그리스도를 연합시킨다고 한다. 이것은 마차 뒤에 말을 갖다 놓는 격이다. 이것은 사제주의와 교회를 추겨 세우게 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만인제사장주의를 가르친다. 세례는 생명과 연합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에 인치는 것이다. 에디오피아의 내시의 경우, 고낼료의 경우, 빌립보 간수의 경우가 그랬다.

② 서약의 세례. 죄의 생활을 뉘우치고 동시에 새 삶의 길을 서약한다는 것.

③ 그리스도의 영향권 내로 세례 받았다는 주장. 조상들이 홍해를 지날 때 ‘그,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세례는 영향권 차원 에서만 아니라 연합, 영적 연합의 차원에서이다.

④ 세례는 구원하는 효과임을 믿는 우리의 믿음의 표라고 주장. 그러나 세례는 어린 가지를 원목에 접붙일 때 일어나는 류의 연합을 의미한다.

⑤ 세례란 연합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 장사하는 표로 물 아래로 내려가고, 부활하는 표로 물 위로 다시 나온다는 것. 그러나 바울은 세례로 말미암아 그것이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세례는 어떤 일을 성취한다.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끌어 준다.

우리를 그리스도에 병합시키고 연합시키는 세례는 고전12:13이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장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이다. 그리스도는 머리요, 우리는 몸이다. 우리는 모두 그에게 연합되어 있고 우리는 서로 모두 연합되어 있다. 그 연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성령에 의한 세례로 이루어졌다. 성령의 세례(baptism with the Spirit)가 아니다. 그것은 놀랍고 신비로운 성령의 사역이다. 중생시키시는 성령의 사역과 같다.

갈2:20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도 동일한 연합 교리를 말해 준다. 세례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키고 접붙일 때 성령에 의해서 수행되어지는 세례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키는 이는 성령이시다.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세례도 바로 그것이다. 구원 중 가장 영광스러운 국면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이다. 사활을 좌우하는 연합이다.

“알지 못하느냐”.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지식임을 단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교리를 높은 수준의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원에 관한 영광스러운 사실은 내가 아담에게서 건짐을 받고 그와의 관계를 끊고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나에게 오는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 우리에게 새생명의 씨를 주시고 중생케 하시는 성령은 동시에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영이시다. 이 구절들을 체험의 차원에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체험이 아니라, 신분과 조건과 지위 문제를 다루고 있다.

두 지위만이 있을 뿐이다. 중간지대는 없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없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지 않았으면 구원받은 사람일 수가 없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에게로 세례를 받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 전체에게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우리가 그 안에서 충만해졌다”(골2:10)고 말한다. 언제 그랬다는 말인가? 지금이다! 앞으로 충만하여질 것이 아니라, 지금 그 안에서 충만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체험을 생각지 말아야 한다. 느낌과 체험이 어떠하든지 간에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해 있다. 그리스도는 지금 여러분의 “의와 지혜와 거룩과 구속함”이 되시는 것이다. 지금이다.

이러한 것들은 더욱더 체험하여 나갈 수 있다. 또 그래야만 한다. 사도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하다. “너희는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 또한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에게 사실인 것은 너희에게도 사실이다. 너희는 그것을 점차적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너희에게 사실이 되어 있다.” 여러분의 최종적인 구원과 완전한 구속의 보증은 바로 그것이다.

“티나 주름잡힌 것 등 그러한 모든 것에서” 구원 받을 것을 보증하는 것도 그것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지금 나의 거룩함이 되시는 것이다. 내가 이 순간에 죽는다 하여도,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고, 의롭다 함을 입는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그 모든 것이 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행하신 모든 것은 나의 것이 된다. 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살으심 안에 있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롬6장 3-4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함축하는 것들 [4장] 로마서강해3권 강대식 목사 한가족교회 2010-06-09 —————————————-

(롬6:3-4)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것은 우리가 그에게 연합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에게 일어난 일들에 우리는 동참자가 된 것이다.

1. 우리는 그의 죽으심에서 함께 연합되었다.

우리가 겪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아담이 실제적인 죄를 지었으나 우리는 모두 그 안에서 죄를 지었으며, 그와 함께 죄를 지었다고 말한다. 이제 여기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함께 죽은 것이다. 그가 행하신 것은 우리가 행한 것이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에 있어서 함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며 그와 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강조해야 할 것은 이것은 주관적이거나 체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 6장을 강해할 때 그릇되게 나가는 것이 이 점에서 이다. 그들은 체험적인 차원에서 그것을 생각하고 고집한다. 그 때문에 이 롬 6장은 ‘성결집회’에서 부단하게 쓰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가 취급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는 거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취급하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 되어진 것이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던 것과 같이 우리에게 기정사실화 된 것을 말한다.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었을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의 신분은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무엇이 아니다.

그것이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다. 또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나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인기있는 가르침은 “여러분은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으니 더 깊은 영적 생활과 더 큰 축복을 원한다면 여러분은 이제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고 말한다.2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하여’라고 말한다. 그는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그가 죽을 때 우리도 죽었다. 이것이 논증의 전체 요점이다.

갈2:20보다 더 자주 잘못 해석되고 잘못 적용되는 성구가 없다. 여기에서는 칭의 외에 다른 것을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화와 관련해서 이 구절을 사용한다. “너는 구원받았으나 삶 가운데서 승리를 얻지 못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충만한 체험을 하고 있지 못하다. 너는 제 2단계로 들어가기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충만한 축복을 체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성화의 일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라고 강권한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이다. 바울은 어떤 비상한 성자나 두 번째 단계에 이른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칭의에 관하여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음과 이것을 떠나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롬 6장의 가르침과 정확히 같다.

10절에서 그 점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죄의 체계와 영역과 통치에 대하여 영단번에 죽으셨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도 역시 죄의 체계와 영역과 통치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같이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연합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과는 하등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죄의 왕노릇과 맺고 있었던 우리의 관계와 같다.

2.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사지냄에서 연합되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뿐 아니라 그의 장사지냄에 있어서도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장사는 죽음에 대한 적극적인 증거이다. 장사는 이생과 이 세상에 대한 관계가 종결되었음을 선하는 선언장이다. 우리 주님께서 장사되셨을 때, 그가 이 세상과 그가 탄생하였을 때 가지신 삶에 대하여 가잔 관계, 즉 율법 아래 속하고, 죄의 체계와 권세 안에 들어오셨던 삶의 관계가 종결되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자기가 자원하여 고의적으로 가지셨던 죄의 통치와 죄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우리도 세례 받음으로 그와 함께 연합되었으므로 함께 장사되었다. 죄의 왕노릇과 체제로부터 장사된 것이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해석해 준 것이다. 우리가 죄의 왕노릇과 통치와 그 체제 아래 있던 우리의 신분이 끝났음을 표명하는 것이다.

3. 우리는 그의 부활하심에도 그와 함께 연합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라고 하였다. ‘아버지의 영광’이란 ‘아버지의 권능’을 말한다. 이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데서 가장 놀랍고 특이한 방식으로 나타낸 바 되었다는 것이다. (엡1:19-20)“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부활이 선포하는 것은 나타난 바 된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이다. 부활은 이 엄청난 능력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부활이 말하는 주는 바는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사망의 권능과 왕노릇에 의하여 붙잡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행2:24)“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주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죄와 그 통치를 완벽하게 이기셨다고 하는 궁극적인 증거이며, 죄에 대한 관계를 청산하셨다고 하는 궁극적인 증거이다.

주님은 부활의 결과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신다.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우리에게도 같은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엡2:5-6)“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나는 그와 함께 죽었고, 장사지낸 바 되었고, 그와 함께 살아났다. 나는 새 체제 안에 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삶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통치와 체제에 대한 관계를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청산하셨듯이, 우리도 역시 그러하다. 사도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으며, 우리가 사력을 다하여 십자가에 달려 스스로 죽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났다. 우리는 이 지위에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 그것은 되어질 것이 아니다. 현재 되어져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죄의 왕노릇 아래에도 있지 않다. 우리는 그것과 영원히 관계를 끊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보좌에 앉은 바 되었다(엡2:6).

3,4절은 2절의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는 것의 반복이다. 이것이 얼마나 정확히 일어났으며, 어째서 그것이 필연적으로 사실이어야만 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어느 누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논박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면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장사지냄과 함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부활에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다. 너희는 더 이상 죄의 통치와 죄의 체계에 대하여 하등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사실이라면 어찌하여 우리가 죄 가운데서 더 거하겠는가?

믿는 ‘우리를 향한’ 이 지극히 큰 능력과 이미 우리 안에서 역사한 부활의 능력으로 폐해진 죄의 통치와 왕노릇이 다시 우리를 사로 잡을 수가 결코 없다. 우리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토록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죄의 삶을 살게끔 허락되어 있지 않다.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장치 못하리니’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세례의 결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죽음 뿐 아니라 그의 부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동참한다. 우리는 새생명 가운데로 들어간 것이다.

롬6장 5-6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음 5장 강대식 목사 2010-06-16 [로마서강해3권] 한가족교회 —————————————-

(롬6:5-6)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바울이 말하는 구조를 정확하게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2절에서 전제를 설정하여 놓고 3,4절에서 그것을 단단하게 확정시키고, 5절에서 아주 미소한 차이로서 그것을 재진술한다. 6,7절에서 첫 번째 항목을 8-10절에서 두 번째 항목을 보다 상세하게 다시 풀어나간다.

‘만일’은 의문이 아니라 ‘때문에’의 뜻이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 사실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연합하다’의 뜻. ‘함께 자라다’ 즉 본질적인 연합으로서 함께 자람을 의미한다. ‘연합된 성장’의 의미이다.

‘본받음’. 우리의 죽음과 부활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동일하지 않다. 그에게 일어난 일은 독특성과 고유함을 지니고 있다. 사도는 마음으로 이 구별을 하라고 ‘본받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본받은 것이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같은 구별이 8:3에 있다. 주님이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것이지 죄있는 육신으로 오시지 않은 것과 같다. 그에게 문자적으로 일어난 것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그와 함께 죽지 않았고 그가 죽으실 때 겪으신 고난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와 가진 영적인 관계 때문에 그의 실제적 죽음이 가져온 결과와 귀추가 우리에게 미쳤다는 것이다. 아담과의 관계에서와 동일한 병행이다. 죽음과 부활의 결과와 모든 덕을 우리는 전부 가지고 있다. 그것이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의 부활하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연합한 자가 ‘되리라’. 되리라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말한다. 11절에서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한다. 언제요? 지금이다. ‘되리라’도 그와 함께 죽은 우리가 그와 함께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죽고 살아났듯이 우리도 죽고 산 것이다. 미래사가 아니다.

‘그의 부활을 본받아’. 4절 끝에서 말한 ‘새생명’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생명으로 살아난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지배와 죄의 폭군 밑에 있는 옛 생명에 속하지 있지 않다. 10절의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심,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11절에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술은 미래까지도 포함한다. 우리의 구원은 몸의 영화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빌3:20-21“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하였다”하고, 그것을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에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이라고 더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이미 못박혔다.

‘알거니와’. 우리가 친숙하고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어야 할 어떤 것을 연상케 하기 위한 것, 강한 어조이다. 사도가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로마교인들에게 이 말을 썼다. 찰스 핫지는 “이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한다”고 한다. 정반대이다. 이것은 체험적인 지식이 아니요 믿음의 지식 이다. 성경에서 밝혀진 지식이요, 믿음이 있으면 확신하고 있는 지식을 의미한다. (체험의 지식이라면 기다리게 될 것이고, 믿음의 지식이라면 지금 살게 될 것이다.)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이다. 이 용어처럼 자주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없다. 성화를 말하는 사람들은 이 ‘우리 옛사람’을 죽이고 ‘옛 사람’을 제거시키려고 기를 쓰며 산다. 골방이나 산의 은둔자로 살게 한 것이 바로 이 투쟁이고 몸의 지체를 절단하기까지 하는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이 ‘옛사람’은 무엇인가? 그것은 육체적 본성과 육체적인 모든 기질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육체적인 본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하지 않는다. 중생 이전에 있었던 도덕적인 존재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정욕을 가진 육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전 사람’을 의미하지도 않다. 그러한 것을 의미하면 다른 성경들에 비추어서 반드시 절망적인 혼란에 처하게 된다. 5:12이하의 문맥을 보면 그 뜻이 분명해진다. ‘옛사람’은 아담 안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것은 내가 전에 있었던 사람이요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아담 안에 있었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누누이 말하고 있다. 내가 되돌아 볼 수 있는 옛 사람은 내가 아담 안에 있을 때의 사람이다. 그것은 나의 옛 인간이다. 그것은 나의 육체나 죄의 본성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도 내게 있다. 그러나 옛 사람이 가버렸고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리스도께서는 영단번에 죽으셨다(10절). 나의 옛 사람도 그와 함께 죽은 것이다.

엡4:22-24, 골3:9-10, 갈5;24. 이 진술들을 손상시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엣 사람의 내가 아담 안에 있었던 나의 옛 인간 존재, 율법 아래 있었고, 정죄 아래 태어났고, 아담과 함께 죄를 지었고, 그래서 아담의 죄의 결과들을 다 함께 거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나는 더 이상 그 옛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들 가운데 첫 열매가 되신다. 그는 새 종족의 머리이시다. 나는 이 새 종족의 한 성원이다.

그래서 ‘옛 사람을 벗으라’는 ‘옛 사람의 특성을 벗으라’는 말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뜻일 수 밖에 없다. 이미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벗으라고 할 리가 없다.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만일 너희가 옛 사람이 죽었으면 그 옛 사람처럼 살지 말라. 그러니 그것을 벗어버리고 옛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계속 믿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어떤 존재인 줄 알라. 너는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고 새 사람이다. 그러므로 네 신분이 새 사람이니 새 사람답게 살라.’는 것이다. 성년에 이른 사람을 예로 든다.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말한다. ‘당신은 어른이니 어른답게 구시오’. 갈5:24에서 바울이 아주 분명하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이는 나와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다.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옛 사람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옛 인간존재 아담 안에 있었던 사람을 의미한다. 그 사람은 영단번에 죽었다. 이 진술의 객관적인 성격을 꼭 붙들어야 한다. 체험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부름받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는 요청이 없다. 내가 하라고 요청을 받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아담 안에 있는 것 같이 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성화방식이다. 옛 사람을 제거하려는 일을 결코 하지 말자. 옛 사람은 가버렸다. 이는 체험해야 하지 않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체험이 승리가 될 때는 여러분이 그것을 믿을 때만이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은 것처럼 해야 한다. 99세의 남자와 90세된 그의 아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체험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 뿐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비체험적인 성령의 하시는 일이다. 성령께서는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세례받게 하시고 연합시키신다. 나는 말씀에서 그것을 발견하므로 그런 줄 아는 것이다. 내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아는 것은 말씀이 나에게 말씀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는 전혀 체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이다. 나는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믿은 대로 그것을 믿어야 한다. 나는 내가 죄인이요, 죄가 내 안에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는다. 나는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다. 나에겐 “그러므로 이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먼저 말씀을 믿으면, 그 결과로서 영광스러운 체험이 따라 온다. 먼저 말씀을 믿으면 그것이 진리라는 증거를 가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기초하여 서라. 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약속 위에 발을 올려 놓고 서라. 그 약속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앙의 지위상 매우 본질적인 것이다. 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셨다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취하고 믿는다. 나를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셨다고 하신다. 나는 그와 함께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그와 함께 다시 살아 그와 함께 새생명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깨닫고, 새생명의 증거를 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붙들어야 할 것은 옮겨졌다는 것과 이런 일들이 나의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 강론일: 2010-06-23 * 제목: 6장 자유함을 입음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6-7)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즉 ‘죄의 몸이 죽는(멸하는) 것’과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기 위함이다. “죄의 몸이 죽어”는 “죄의 몸이 효력을 잃고 꼼짝 못하게 하고 무능하게 하기 위하여”라고 해석해야 한다.

“죄의 몸”이 무엇인가? 옛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죄를 갖고 있는 우리의 육체인 몸을 의미한다. ‘현재 육체적인 상태에 있는 우리 안에 거하는 죄’를 의미한다. 여전히 죄와 사망이 우리 안에 다스리고 있는 형태로서의 몸을 말한다. ‘인격으로서의 나 자신’과 ‘죄의 몸’과의 구별이 있어야 한다. ‘죄의 몸’이라는 의미는 그 죄가 여전히 왕노릇하며 다스리지만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하지는 않고 단지 나의 몸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죄는 그를 지배하는 완전한 지배력을 얻었다. 5:11-21에서 그것을 명백히 살펴보았다. 즉 그의 전체인 몸, 정신, 영을 지배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아닌 모든 사람에게 그렇다. 그는 ‘죄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이다. 죄가 다스리고 있다. 그에게 속한 육적, 동물적 부분이 그를 다스리고 있다. “전에 우리도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의 유혹에 순종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지위는 무엇인가? 나 자신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장사되어 그와 더불어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왕노릇과 다스림으로서의 죄에 대해 죽었으며 그것과 단절했으며 죄는 나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죄가 아직도 나의 몸과 상당히 관련이 있다. 나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혀’졌다. 옛사람은 지나갔으며,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이다. 그것이 나에 관해 참된 것이다. 그것이 나에 관해 참된 진실일지라도 나의 몸, 나의 육적 몸에 관해서는 진실이 아니다. 죄는 나의 육적 몸에, 나의 지체에 아직도 있다. 죄는 나의 육체의 율법으로 역사하며 나의 기관인 몸의 부분과 ‘나의 지체’에 그것의 영향이 있다.

죄는 몸에 그 영향력을 남겨두고 있다. 나는 스스로 하나의 영적 존재로서 철저하게 영원히 죄의 영향권 밖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내셨다. 그러나 그 약속된 땅에 어떤 민족들 남겨 두셨고, 그의 백성들은 그들과 싸워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옛 백성들을 그 수준에서 다루셨던 방방식과 그의 백성들은 지금 영적 수준에서 다루시는 방식 사이에는 놀라운 균형을 이룬다. 몸은 아직 죄와 타락의 영향에서 구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구원 받은 것이다.

몸이 본질적으로나 천성적으로 죄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해둔다. 몸 자체에 죄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전에 나의 인성 전체를 지배하였던 죄가 지금 나의 몸의 지체를 주관하고 있을 따름이요, 그렇게 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 안에 있는 나, 영혼으로서의 나, 나의 인격으로서의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몸은 본능과 성향 등을 가지고 있다. 그 자체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성 본능, 식욕 등 자연적 본능들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우리의 몸의 차이. 그리스도의 몸은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모든 본능과 모든 기능과 능력과 성향이 온전한 조화와 바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나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우리를 지배하고, 폭군과 같이 압제하며, 우리를 휘몰아가는 몸의 요소들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욕을 채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욕을 가진 피조물이며, 그렇게 태어났다.

그것은 우리가 ‘아담 안에’ 태어났기 때문이며 그의 타락한 본성을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죄는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도 몸에게 그 세력을 행하고 있다. 인간 자체는 구원받았는데 , 그의 몸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으며,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롬8:23)고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아직 체험되지 않았다.

‘죄의 몸’은 뒤에 나올 ‘육신’과 같은 의미다. ‘육신’은 몸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고 죄와 악에게 지배되고 사용되어지는 것으로의 몸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삶 동안 죄가 거하는 것으로서의 몸이다. 그러므로 6:6에서 사도는 사실상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뒤에 궁극적인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내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가 아직 지배하는 몸에서까지 구원받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그러하니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죄의 노예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그는 자기 몸을 죄가 다스리게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 12, 13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다. ‘옛 사람’과 ‘죄의 몸’ 사이의 구별은 명확하고 중요하다.

‘옛 사람을 반대하여야 한다’는 사람은 엄청나 넌센스이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이다. ‘점차적으로 옛 사람에 대하여 죽는다’ 하는 사람도 넌센스이다. 이미 죽어서 영원히 가버린 사람이 죽어가다니요. 어떤 이는 ‘우리의 죽어가고 있는 사람으로부터의 점차적인 구원’을 말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옛 사람이 영단번에 죽었을 뿐 아니라 장사지낸 바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저 위대한 아브라함 카이퍼까지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의 이 세상의 삶이 끝날 때까지 옛 사람의 무덤을 파는 사람입니다”고 말했다. ‘옛 사람’은 죽음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며, 그를 위하여 무덤을 팔 필요가 없다. 그는 이미 무덤 안에 장사지낸 바 되었다. 옛 사람을 죽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구원받고 풀려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죄에 대하여 영단번에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옛 사람’은 옛 본성의 의미하지 않는다. 옛 본성이 의미하는 바는 ‘죄의 몸’이다.

하이델베르그 신조 제43장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져온 더 많은 결과들은 무엇이냐?” “그의 죽음으로 해서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와 함께 장사 되었다.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육신의 부패한 성향들이 더 이상 우리 가운데서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옛 사람은 육신이 아니다. 옛 사람은 ‘부패한 본성’이 아니다. 옛 사람은 아담적 본질이요, 옛 인간이다. 육신은 죄의 몸이요, 죄가 아직도 폭군노릇을 하고 있고 아직도 죄가 남아있는 몸이다. 그러나 은혜의 왕노릇 아래서는 몸까지도 구원을 받을 보장을 받았다.. 그러나 몸이 영화되는 날까지는 이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 다른 말로 해서 몸, 육신 안에 있는 죄를 다루는 방식은 지금이라도 여러분 자신에 관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 강론일: 2010-06-30 * 제목: 7장 죄에서 벗어남 * 책명: 로마서강해3권 —————————————-

(롬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롬 6:6과 엡 4:22-24의 조화의 난제가 있다. 롬 6:6에서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한다.

그것은 옛 사람에게 이미 일어난 일이요 영원히 끝난 일이다.

그러나 엡 4;22-24에서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한다.

같은 어휘라 할지라도 같은 의미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은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그는 이미 영단번에 죽어 버려 사라져 버린 것을 벗어 버리라고 권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엡 4:22의 “너희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에서 ‘옛 사람’은 옛 사람의 특징이 되는 언행심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벗어야 할 것은 옛 사람의 ‘언어 생활’ 또는 행동 양식이지 옛 사람 그 자체가 아니다. 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거듭났다. 너희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마치 옛 사람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인양 행동하지 말라. 너희답게 살라. 더 이상 너희답지 않게 살지 말라”. 그래서 롬 6:4과 엡 4:22-24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문맥이 그 점을 아주 명확하고 분명하게 한다.

엡 4;22은 행동과 윤리에 관심이 있고 롬 6;6은 옛 사람 자체에 관심이 있다.

6절의 가르침은 내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는 죄가 내 몸을 여전히 사용하는 것을 무능케

하고 무력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가르친다. ‘죄의 몸’의 좋은 해석은 옛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옛 사람과 죄의 몸 사이의 차이는 나의 ‘옛 자아’와 나의 ‘옛 본성’ 사이의 차이이다.

아더 웨이는 옛 사람을 전의 자아로, 죄의 몸을 옛 본성으로 번역하였다. 아주 훌륭한 번역이다.

우리 자신이 우리 본성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사도의 논증을 따라 갈 수 없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진리는 우리의 자아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내 옛 자아가 사라졌으며 나는 새로운 자아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때 만이 나의 옛 본성을 다룰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결정적이고 경이로운 진리이다.

나의 옛 본성의 문제는 내가 내 옛 자아가 가버렸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훨씬 쉬워진다.

내가 새 사람이란 것을 깨닫는 순간 내 몸, 즉 바울이 ‘죽을 몸’이라고 부른 내 몸에

아직 남아 있는 이 옛 본성을 다루기에 더 좋은 위치에 있게 된다.

죄는 더 이상 내 안에 있지 않고 내 지체 속에만 있다.

듣든 중 가장 자유를 주는 말이 아닌가! 그것이 사도의 주장이고, 그것이 구원방식이라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떨어질 때마다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의문을 가짐으로써 불행해한다. 사도는 여기서 그런 식의 의문이 잘못이라고 못박고 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죄를 지을 때마다 너희의 구원 문제를 들먹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8장 마지막의 장엄한 클라이막스).

나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혔다. 나는 의롭다 함을 받았고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이다.

하나님의 양자이다. 죄는 나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나는 다시 회심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어째서 죄를 짓는가? 죄가 내 지체 속에 있으며, ‘죄의 몸’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죄의 몸’을 나에게서 제거시킬 구원을 누리고 있다. 바울은 ‘우리 옛 사람’, 옛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인인지를 의심함으로써 다시 한 번 그 ‘옛 사람’을 다시 불러오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어 심지어 장사되어, 영원히 사라진 ‘옛 사람’을 다시 불러오는 것에 불과하다.

6절이 확실해야 7절에 나아갈 수 있다. ‘죽은 자’가 그리스도일 경우 그분은 의롭다 함을 받을 필요가

없는 분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는 흠정역 번역대로 ‘자유함을 얻었음이라’로 해야 한다.

‘죽은 자’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죽은 사람에 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며 자명한 진술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은 사람이 죽을 때, 그가 죽음으로써 그는 죄에서 벗어나 방면되며, 죄에 관한 한 절대적으로 자유롭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 사람이 죽을 때 그는 죄의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죄와 함께 일하는 율법의 관할에서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죽은 자는 죽는 순간 죄의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흠정역이 옳다. 죽은 자는 자유롭다. 죄에서, 죄의 모든 영역과 체제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자유롭다.

그래서 6,7절을 함께 놓을 수 있다.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은 모든 방면에서 죄에게 종노릇하는 데서 벗어나 구원받기 위한 것이다. 죽은 사람마다 죄의 권능과 죄의 왕노릇과 죄의 노예제도와 죄의 폭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2절로 돌아가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는 우리가 ‘죄의 통치와 왕노릇에 대하여 죽음’을 의미한다.

그는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죄는 아직도 죽을 몸에 거한다. 그러나 나의 참된 자아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나의 지체 속에 거하는 것이다. 내 몸, 내 육신 안에 거하는 것이다. 나는 죽은 사람과 같다.

죄의 관할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이다. “죄가 사람에게까지 왕노릇하였다”. 사망까지만 이다.

사도바울이 계속해서 우리도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고 강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벧전 4:1-2는 로마서 6장의 대목과 정확히 병행하는 말씀이다. (벧전4:1-2)“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죄를 그쳤다’는 더 이상 죄의 지배나 죄의 통치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라고 완벽하게 표현한다. 바울과 베드로는 모두 다 같은 일, 곧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은 단번에 하나의 존재, 하나의 영혼과 전인으로서 죄와의 관계를 끊었다는 것이다.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비록 우리가 여기 몸 안에 있지만, 비록 우리는 죄가 몸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죄에 떨어지지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나는 구원받은 것이다.

내가 지금 분명히 구원받은 것같이 영광 중에서 분명히 거하게 될 것이다.

침체를 극복하고 실패를 극복하는 길은 우리가 안전하다는 것과 우리가 그리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우리의 구원을 의심케 하는 마귀에 대한 처방은, 우리가 죄를 짓거나 말거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또한 죄가 한 인격(신분)으로서의 우리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또한 죄가 여러분을 다시 자기의 왕노릇 밑에 끌고 가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죄는 다만 우리의 몸에 남아 있다. 그 몸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완전히 해방될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라. 나는 한 사람, 한 존재, 한 인격으로서 한 전인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나는 이미 죄의 지배와 왕노릇과 죄의 통치와 관계를 끊었다.

죽은 사람은 누구든지 자동적으로, 정한 이치에 따라 필연적으로 자유-“죄에서 벗어나 자유케 된다”.

* 강론일: 2010-07-07 * 제목: 8장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8-10) (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열쇠가 되는 구절은 5절이다. (롬6: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7절은 5절 상반부에 대한 해설이요, 8-10절은 5절 하반부에 대한 해설이다.

죽음은 소극적이요 부활은 적극적이다.

8절은 5절 하반부의 반복에 불과하다. 아주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는 표현 때문에 넘어져서는 안된다.

부활의 믿음을 붙잡으라는 것이 아니다.

이 ‘믿는다’는 말은 사실상 ‘나는 그 사실을 안다’, ‘확신한다’ 말 대신에 온 것이다.

8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반드시 우리는 그와 함께 살 것이라는 의미이다.

만일 우리가 그와 함께 연합된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반드시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반드시 그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살 줄을 (믿노니)’의 미래시제의 문제.

우리의 장래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전혀 잘못된 것이다.

사도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은 지금 현재 우리에게 되어진 것이다.

현재 우리 가운데 되어진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더 이상 죄의 체제와 영역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에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그와 함께 살았다”는 것도 현재 우리의 것이다. 병행 구절들을 본다.

4절,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 이 세상에서의 삶 가운데서이다.

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언제? 미래 부활까지 미루어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야‘ 한다.

이것이 전체 요점이다.

엡2:1-4, “(1)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4)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것을 행하셨으며)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육체적인 의미에서는 미래이다.

현재 되어진 것을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다.

갈2:19–20도 마찬가지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부활한 후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그러하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현재 말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것은 정확히 여기 롬 6장에서 보는 바와 같다.

요약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전적으로 새생명을 향하여, 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새 체제 안에 있는 새생명에 대하여 살아났다는 것이 보편적인 전제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뿐 아니라, 새롭고 부활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9-10절은 많은 사람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우리와 우리의 체험’을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의 체험에 관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사실인 것만을 숙고해야만 한다.

또한 이 죄악의 관계 문제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일어난 일만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진리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우리의 현재 지위가 이 시점에서 사도의 관심이다.

체험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11절에 가서야 체험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이 분명하기까지는 우리 자신의 지위에 대해서 결코 명확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사셨으며”. 누가 살리신 것인가? 4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아버지의 영광’은 ‘아버지의 영광스런 능력’이란 의미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만족하셨다는 적극적인 증거이다. 부활은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 사명하신 일을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는 것을 전 우주에 선포하심이요 공포하심이다.

그는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신다”.

그 이유는 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영단번에 그것을 행하셨다.

부활이 그것을 증명한다. 부활은 그가 일을 마치셨으며 목적이 이루어졌음을 증거한다.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이것은 엄청난 진술이다.

죽음이 더 이상 그를 지배하거나 세력을 부리지 못한다.

그가 율법을 마치셨기 때문에 사망이 더 이상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

죽음은 그가 율법 아래 있는 동안만 간섭할 수 있었다. 율법을 떠나서는 그럴 수가 없다.

그의 부활은 그가 율법을 다 이루셨으며,

결국 율법이 사망 안에서는 더 이상 그를 접촉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는 그가 전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복종하여 들어왔던 죄와의 관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의 권세로서의 죄, 왕노릇하는 것으로서의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단번에” 죽으셨다. 그 의미는 ‘오직 단 한번’, ‘영단번에’, ‘단번에 영원히’ 이다. 반복함이 없다는 의미이다. 죄에 대하여 죽었을 때 그는 그것을 영단번에 행하셨다. 그리고 그 일이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결코 그가 다시 그것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였다. 대제사장도 일년에 한 차례씩 같은 일을 행하였다.

여기 주님께는 그렇지 않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가 그런 분으로 그런 일을 하셨기 때문에 또한 그가 그 일을 완성하신 방식 때문에, 그는 한 행동으로서 그것을 영단번에 이루셨다. 반복이 필요 없다.

앞으로도 반복이 있을 리 없다. 이와 같은 나는 “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아는 것이다.

* 강론일: 2010-07-14 * 제목: 9장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10-11) (10)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죄의 사망의 관계에서 구원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영단번에 이루셨다. 그는 둘째 아담이 아니다. 마지막 아담이다. 다른 아담이 필요치 않다. 그는 마침이 되셨다. 그는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그는 영단번에 죽으셨고, 죄와 사망에 대하여 영단번에 그 관계를 청산하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심이니”. 그리스도께서 지금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체제에서 살고 계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좌와 사망의 체제에 계셨었던 적이 있었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그는 지금 다른 체제에,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의 체제에서만 살아계신다. 10절 상반절과 하반절은 대조를 이룬다. 우리 주님은 짧은 기간 동안 영광의 체제에서 벗어나 ‘죄와 사망’의 체제로 들어오셨다. 그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체제에 있지 않다. 그는 ‘영광 가운데 올리우셨다’(딤전3:16). 그는 완전히 그의 영원한 영광을 되찾으셨으며, 그가 나오셨던 영역과 체제 속으로 다시 들어가신 것이다. (계1:18)“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엡1:20-23)“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 진술의 상세한 해석에 나아가기 전 명심해야 할 세 가지 원리들이 있다. 첫째 원리,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리인 것은 우리들에게도 진리라는 것. 우리와 그는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함께 장사되었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다. ‘이와 같이 너희도’이라는 두 말이 그 점을 증거한다.

둘째 원리, 11절의 진술은 비체험적이라는 것. ‘여기라’는 말 자체가 그 점을 분명히 증거한다.

셋째 원리, 이 구절이 거룩한 삶과 성화의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

“여기다”. ‘네가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하라’ ‘너희 앞에 가져다 놓으라’ ‘결론짓다’의 의미. 쿠에이즘(자기 자신에게 계속 말하면 더 좋게 느끼기 시작할 거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우습게 만들고 만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설득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결론이요 추론이요 하나님의 논리적 귀결이다. 쿠에이즘의 반대요, 우리는 거짓된 개념을 제거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에서 피할 수 없는 추론을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친히 이루실 수 있다고 결론 지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정직성에 기초한 논리이다.

“너희 자신”. 우리의 본질적 인격의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별된 인격, 우리 모두를 구별되고 다른 사람으로 만든 인격, 우리라는 개인들을 의미한다. 나는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것도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문제. 내가 결론지어야 되고 여겨야 되고 항상 내 안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첫째,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이 구절처럼 남용되고 잘못 해석하는 구절이 없을 것이다.

이 구절이 의미하지 않는 것이 다섯 가지. ① 그리스도인들로서 나의 의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너희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죄를 위하여 죽었다고 믿으며, 그가 죄를 위하여 죽었기 때문에 너희가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았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에 대하여 즉는 것이 너희의 의무임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나에게 사실인 것은 그리스도에게 사실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말은 순전히 불가능하다.

② 죄에 대하여 죽으라는 명령도 아니요, 죄에 대햐여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으니 그리스도인들도 죄에 대하여 죽으라는 강권적인 명령으로 해석하였다.

③ 내 안에 있는 하나의 세력으로서의 죄가 죽었다고 여기라는 의미도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죄와 완전히 관계를 끊었다고 하는 의미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체험에서 그와 같은 하나의 세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도의 진술은 죄가 죽었다든지, 죄가 우리 밖으로 근절당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죄는 아주 생생하게 살아 있다. 죄는 근절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체질 밖으로 뿌리 뽑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몸과 육신 안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④ 죄에 대하여 승리를 얻는 동안만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해석이다. 이들은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정말로 죽어 있는 것으로 여기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는 한 승리를 얻게 될 것이고, 승리를 얻는 동안은 죄는 실로 여러분이 관심을 두는 정도까지 죽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승리를 얻는 길은 이 구절을 되뇌이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죄는 사실상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계속해서 그렇게 말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체험적인 면으로 넘어간 것이며, 우리 주님과의 병행구 때문에 체험적일 수 없는 것이다. 이 구절은 나의 체험과 일상생활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⑤ 나를 죄에 대하여 죽게 만드는 것은 이 사실을 나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 ‘만일 네가 여기는 이 일을 계속하게 되면, 여러분은 죄에 대하여 정말로 죽게 될 것이다’. 사도는 실제적으로 그 정반대를 말하고 있다.

정확히 사도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적극적인 이 말씀은 권면이다.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인정하고 여기라”고 하고 있다. 주 예수 자신에게 진리인 것이 우리에게도 진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그러기를 바라는 것을 ‘여기는’ 것이 아니고 사실인 것을 그렇게 여겨야 한다. 나를 위하여 이미 이루어진 하나의 사실인 것을 여겨야 한다. 그 사실이란, 내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율법과 죽음 그 자체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이것-나의 죄에 대한 죽음과 하나님에 대하여 산 것-은 단번에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나를 위하여 성취된 일이다. 나는,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합하여 세례받게 한 성령의 역사 때문에 이 지위로 오게 되었으며,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모든 결과들을 거두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구절은 어떤 일을 성취하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위하여 영단번에 이루어진 일을 깨달으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것은 나의 체험에 관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있는 영역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나도 죄와 사망의 체제 가운데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전에 잠깐 동안 그 체제에 들어오셨다가 이제는 아닌 것처럼,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나는 더 이상 그것에 속하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 밖으로 나왔다.

이것이 우리가 이제 상세히 다루어 나갈 큰 원리이다. 우리는 이렇게 ‘여겨야’ 한다. 이 사실을 우리에 관한 진리로 여겨야 한다. 그것은 체험이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영원토록 죽었던 것과 같이, 나도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여기고 그것을 내 앞에 끊임없이 견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영역 가운데서 살지 않고 다른 영역에 속하여 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이다.” 이것은 나의 체험이 아니라 나의 서있는 위치요, 나의 지위요, 나의 신분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삶”, 이것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체제이다.

* 강론일: 2010-07-21 * 제목: 10장 죄의 왕노릇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죽음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해석의 원리; 1)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리인 것은 우리들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

2) 이 구절이 체험인 진술이나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의 죄의식의 차원에서부터, 죄를 어떻게 제거할까 하는 문제부터 시작하면 안 된다. 이미 우리들의 지위나 신분으로 확정된 사실을 깨닫고 부단히 우리 앞에 가져다 놓고 기억하라는 권면이다. 죄에 관하여 어떤 일을 하라는 권면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우리가 단호히 믿어야 할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위를 ‘체험하지’ 않는다. 듣고 믿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했던 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믿고 그것에 복종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내 안에 죄를 의식하면서 죄에 대하여 참말로 죽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아직도 가공할 죄인임을 느끼는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아브라함이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듯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①우리가 죄와 사망의 체제와 왕노릇에 대하여 영원히 죽었음을 부단히 인식하여야 한다. ②우리가 영단번에 그것을 이루었다는 것을 믿고 인식해야 한다. ③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망이 그를 다시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듯이,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사망이 다시 그리스도인을 주장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진술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라서 그리스도인들까지도 끊임없이 그것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 확정하는 말씀들이 있다.

(롬8: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요5: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11:25-26)“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나 우리는 죽어야 한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죽었으며 장사되었다. 그런데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이 모든 구절이 바울이 여기서 ”사망이 다시 그리스도인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그의 진술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망은 우리 주님을 더 이상 지배하지 않으며, 사망은 우리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

이 중요한 교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통과한다 할지라도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망이 더 이상 우리 위에 주도적인 권리를 사용하지 못한다. 사망이 우리에게 법적 효력을 가지지 못한다. 죄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통하여, 우리는 사망의 지배에서도 역시 구원받은 것이다. (히2:14-15)“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기만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결코 사망의 두려움에 매이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더 이상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났을 때 가지고 있었던 지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가 아직도 우리 몸 속에서 죄와 접촉하고 있지만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롬8:1)“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좌함이 없나니”라고 했다. 은혜에서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사망까지도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 재림 때에 지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변화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살고 있는 우리들은 사망을 통과해야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법적 요구로는 되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 속에 어떤 비통함이나 어떤 고통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잠자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의 품에 잠들게 될 것이다. 죽음의 공포도 영원히 없어지게 될 것이다. (롬8:38-39)“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나이가 들어 중추신경이 흐려지고 두뇌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키고 그런 상태에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런 가운데 자기기 믿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모독할 수도 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그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우리는 사망을 통과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상 죽지 않는다.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순전히 육체적인 문제로 인하여 잘못 인도되는 일이 없기 바란다. 바울처럼 사망이 하나의 ‘유익’이라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리라” 죽는 것이 유익하면, 죽음은 그에 대하여 어떤 지배도 가질 수 없다. 그는 죽음의 면전에서 미소지을 수 있는 것이다. 사망이 그를 그리스도의 존전으로 즉각 인도하기 때문에 그는 그것에 대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니”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간주하여야 할 것들이요, 우리 자신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하는 것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러 저러한 모양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죄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차지할 영광이 무엇인지,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맨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실천적인 교훈을 얻는 것으로, 우리와 죄, 우리와 사망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죄가 다시는 나를 그의 노예나 포로삼지 못한다. (요일3:9)“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계속 죄 가운데서 거하며 죄를 계속 짓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는 것은 그가 노예로서 짓는 것이 아니고, 그릇된 것을 하기로 선택하는 자유인으로서 죄를 짓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노예로서 ‘굴레에 매여’ 죄지으며, 포로로 잡혀서 죄짓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났다. 새로운 영토에 속하여 있다. 그는 “어둠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

엄청난 의미이다. 산을 3분의 2쯤 올라가다 넘어진 것이다. 산 아래서 넘어진 것과 같지 않다. 죄를 지었으니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다. 다시 산밑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다. 남은 높이를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죄에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정상에 가까이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지위이다.

그는 더 이상 그가 옛날에 있었던 곳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완전히 오르는 위치, 다른 체제에 속하여 있다. 그는 새 체제에서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다시 노예 신분으로 가지 않는다. 그는 노예로서 죄짓지 않고, 자유인으로서 죄짓는 것이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해방을 얻은 노예들에 관한 예. 노예 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났는데도, 특히 늙은 노예들은 자기들이 해방되었다는 것을 계속 잊곤 하였다. 습관과 관례에 따라 행동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익히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이 모든 악을 제거하는 방법은 우리 자신에 관하여 진리인 것을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이라고 자꾸만 말하는 것이다. 굴레가 없어졌고, 이제 그는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의 모든 지위와 조건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 교훈에서 진수가 되는 부분은 그것을 인식함에 따라서 체험속에서 점점 사실이 되어가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비그리스도인이었던 시절과 죄의 삶을 영위하였던 때를 돌이켜 보라. 죄에 대한 태도가 변하였다. 배교자도 하나님의 자녀요 타락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다르다. 그는 비참하고 정죄감을 느끼고 불안해 한다. 비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다. 즐기며 좋아하기만 할 것이다. 배교자는 돌아올 것이다. 죄를 계속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멈추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죽음과 무덤을 향하여 똑바로 서서 그들을 도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것들을 이기셨고, 우리가 그 안에 있으며, 그들이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청산하였으며, 죄와 사망에서 자유로워졌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 강론일: 2010-07-28(수) * 제목: 11장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 책명: 로마서강해3권 —————————————-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정말 죽었다는 사실을 꼭 붙잡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동시에 적극적인 진리인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고 하는 것을 붙잡아야 한다.

그것은 영역의 변화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체제와 하나님의 영역과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체제 가운데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우리는 은혜의 왕노릇이 작용하는 체제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5:21의 진술이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전적으로 새로운 영역과 새로운 체제 속으로 살리심을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는 바”(엡2:6) 되었다.

우리는 죄의 체제와 세력과 죄의 모든 왕노릇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은혜의 권세 아래 있게 된 것이다.

1)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우리가 이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것을 우리 앞에 부단히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에 들어섰다. 그것은 우리가 그의 존전에 살고 있으며 우리가 그의 존전에 나아감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의 자녀요, 그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요, 그의 아주 특별한 관심을 받는 자들이다. 이를 완전히 진술한 구절은 요17:23이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 진술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엄청난 진술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2) 그래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축복에 대한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롬5: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6:11은 5:2에 대한 일종의 해석이다. 하나님의 최상의 선물과 하나님의 가장 값진 축복들이 우리의 것이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지극히 크고 값진 약속들’.

우리는 아담이 처음에 알았던 그 교제보다 더 큰 교제를 누리고 있다. 아이삭 왓츠,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의 후예들이 자기 조상 아담이 잃었던 것보다 더 많은 축복들을 자랑하네(찬송)”.

3)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안에 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특별한 대상들이다. (롬8:28)“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창세전부터 가지신 하나님의 영원하고 위대한 계획 속에 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 답변은 엡1:4에 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구원계획의 전체 목적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흠이 없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4) 더욱 이 목적이 우리 안에서 역사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①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가장 신비스러운 방씩으로 그 안에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각 지체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우리가 그에게 접붙여졌으며 그로부터 생명을 받고, 그 안에 있다. (엡4: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나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라”(요6:35)가 되는 것이다. 중국 내지선교의 개척자였던 허드슨 테일러에게 가장 많은 해방을 주는 말은 ‘결코-아니라’는 말이었다. 내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그의 계획을 내 안에서 이루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성령의 내주하심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로 하여금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책망할 것이 없이” 하기 위한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을 두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빌2:12-13)“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는 의지를 지배하시고 우리를 자극하고 우리의 마음에 여러 가지 일을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모든 신자의 삶에는 그런 성령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부터 이 ‘역사하심’은 시작되고, 그로부터 계속되어 나가는 것이다.

③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엡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일어나실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던 같은 능력이다. (엡3:20-21)“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순간 우리는 이 능력에 대하여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룩함을 내기 위하여 의도되고, 주 앞에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게 하시기 위하여 의도된 능력이다.

④ 그 목적이 완전히 이루어짐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 확신함이라”(빌1:6). 어떤 것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만큼 확실하다. 어째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는가? “자기 앞에 영광스런 교회를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시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과 성자, 성령의 목적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것이 실패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능력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결과는 보증되는 것이다.

5)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긴다면, 그 효과는 ① 다음 번에 죄에 빠지게 될 때에 내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자문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은혜 속에 있다가 또 밖으로 나가곤 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구원받았다가 못받았다가 왔다 갔다 할 수 없다. 우리는 죄 지을 때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를 짓고 있는 것이지 율법을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훨씬 더 심각하다. 그러나 그것은 법적인 범법이 아니다. ② 죄에 대한 관계와 하나님께 대한 두 관계를 바르게 보게 될 것이다. 나의 느낌과는 상관 없이 나는 죄에 대하여 결별하였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체제 안에 살고 있다. 그 사실을 믿고 붙잡고 행동하라. ③ 이것을 깨닫게 되면 죄의 가공할 권능 때문에 느끼고 알았던 옛 절망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 절망감을 제지하는 유일한 길은 로마서 6장 특히 이 11절의 가르침이다. 전체 그리스도인 삶 가운데서 가장 해방감을 체험을 알게 하는 것이 6장이다.

④ 이 모든 것을 깨닫는 것은 기쁨과 소망감을 안겨 준다. 우리의 지위를 깨닫게 될 때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될 때 거룩한 웃음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될런지 모른다. 느헤미야가 그의 절망적인 백성들을 깨우쳤듯이 ‘주의 기쁨’이 오게 되어,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여러분의 힘이 되는 것이다”(느8;10). 나는 머리되신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생명이 내 영혼에 있다. 나는 더욱 더 강한 힘으로 변할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

⑤ 현재 나와 이 세상이 어떻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목표는 확실하고 명백하다는 것을 안다. 아무것도 그것을 정지시킬 수 없다. 이것이 로마서의 위대한 메시지이며, 성경 전체의 메시지이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았기 ‘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광을 향하여 가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나는 여러분에게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여러분이 죄의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마다 징계하나니’ 라는 말씀을 그대로 적용당할 것을 준비하라. 그는 죄에 계속 거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요, 거기서 잡아 끌어 올릴 것이다. 질병으로 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자를 빼앗아 갈 수도 있다. 또한 사업을 무너뜨리실지 모른다. 또한 여러분이 가질 수 있는 어떤 밝은 희망과 전망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그는 여러분을 먼지처럼 만드실 수도 있다. 그대로 방치하여 두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실로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았다. 그것을 깨닫기만 하면 자신 앞에 그것을 항상 놓고 잊지 않기만 한다면 앞으로는 실패하지 않게 할 것이며, 모든 것을 새로운 가운데서 보게 하고 사도 요한과 같이 장래를 바라보면서 그 안에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가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게 하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자신을 정결케 할 힘을 주실 것이다.

* 강론일: 2010-08-011 * 제목: 12장 신약의 성결 교훈방식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바울서신에서 “그러므로”란 말보다 더 중요한 말은 없다.

1) 교리는 언제나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란 말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1-11절에서 개진한 교리들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요13:17). 교리가 삶과 행동과 윤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심판 날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전13장).

2) 실천적인 대목은 이전 교리적인 대목을 바로 이해하였는지를 점검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둘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하고 반드시 서로 상통하여야 한다.

3) 그리스도인과 죄와의 관계에 대하여 알게 한다. 너희와 너희 죽을 몸, 분명히 이 둘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 바울이 죄로 너희에게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지 않고 있음을 강조한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하고 있다. 죄의 몸은 우리 몸에 남아 있는 죄를 의미한다. 글자 그대로 육신적인 몸이다. 그것은 죄짓기 쉬운 우리의 본성이 아니다. 저 위대한 칼빈마저 죄있는 본성으로 해석한다. 우리 자신은 구원 받았다. 죄는 여전히 몸에 남아 있다. 우리 자신은 이미 죄의 영역과 죄의 체제에서 건짐을 받았다. 그러나 죄는 오직 몸에 남아 있다. 하지만 몸이 영화롭게 되고 죄가 완전히 끊어지고 영원토록 없어질 날이 온다.

바울의 모든 권면은 우리가 우리의 죽을 몸에 죄가 왕노릇하거나 통치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왕노릇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가 죽을 몸에 있을 동안에는 언제나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몸을 통하여 우리를 지배할려고 기를 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죄는 본능을 사욕으로 바꾼다. 자연적인 본능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러나 죄는 자연적인 본능들을 비정상적인 정욕과 사욕으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그것을 막고 제지하여야 하며,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처리하지 못하면 죄가 곧 우리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 성경에 우리 몸과 죄와의 관계에 대한 진술이 그렇게 많은 것은 이 진리 때문이다.

롬6:19, 7:18, 20, 23, 24, 8:23, 12:1, 고전6;13.

4) 성결과 성화에 관한 신학적 교리 로 우리들을 안내해 준다. 신약의 성화교리에서 제1의 원리는 우리가 실천에 옮겨야 하는 무슨 일이라는 것이다. 권면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성화란 위로부터 받아지는 선물이 아니다. 제2원리는 성화는 영단번에 이루어지는 갑작스런 구원의 체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결과 성화에 관한 신약의 교훈 방식은 ‘포기하라’고 하지 않는다. 행동하라는 권면을 한다. 그들은 말한다. “당신의 고통은 죄와 싸우고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물론 당신은 패배한다. 거기서 잘못된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포기할 것 밖에는 없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고 그로 하여금 네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도록 하라. 그분은 여러분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며 당신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어려움을 더 이상 겪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백여년 동안 복음주의적인 교단에서 일반화되고 편만된 가르침이었다. 그 가르침과 “죄로 너희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과 어떻게 조화될까? 그것은 우리에게 적극적인 의지의 행동을 요청하는 권면이다.

그 가르침은 비성경적이고, 실로 많은 성경적인 교훈을 무시한다. 그것은 신약의 후반부를 필요없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투쟁을 멈추고 주님으로 하여금 그의 승리하는 삶을 우리 가운데 살게 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서신서마다 상세하게 실제적 권면을 한다. 도적질하지 말라. 어리석은 변론을 버리라, 서로 거짓을 행하지 말라고 한다.

어떤 이는 묻는다. 당신은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법 아래 있지 않으며, 죄의 권능 아래 있지 않으니 우리의 성화는 절대적으로 보장되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려 하실 거라고 우리를 설득하였다. 그것을 강조하여 놓고, 이제 당신이 말하는 것과 그것을 어떻게 조화시키려는가?”라고 묻는다. 조화시키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큰 일을 성취하신다. 그것이 성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빌2:12-13을 보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것이 신약의 성화 방식이다.

성화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성화는 우리가 성령에 의하여 이끌림을 받아 교리로부터 추론들을 끌어냄에 따라 이루어져 나간다. 이미 설정된 교리의 결과로 어떤 것들이 필연적이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거룩하게 되기를 갈망하는가? 여러분의 죽을 몸에 있는 죄를 이기기를 갈망하는가?

첫째로 교리를 이해하라. 교리에 분명치 못하면 ‘그러므로’로 나아갈 수 없다. 1-11절의 말씀을 이해했는가? 교리를 이해하는 것-그것이 출발점이다. 교리를 이해한 뒤에도 그 교리를 부단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라’- 끊임없이 그런 것으로 간주하고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라. 그리고 나서 그것으로부터 필연적인 추론들을 끌어내라. “이제 나의 위치는 무엇인가? 나는 내게 일어난 이 모든 것에 비추어서 어떠한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즉각적으로 우리의 성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교리는 우리들에게 성결에 대한 참된 동기들을 제공한다. 어째서 내가 죄로 나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해서는 안되는가? 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목적은 거룩이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 안다. 우리가 죄에 거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어떻게 죄와 동행할 수 있겠는가? 동기들은 그러하다. 이것이 내가 성화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명예,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가 나의 행동에 달려 있다. 내가 내 죽을 몸에 죄가 왕노릇하게 내버려 둔다면 나는 나의 하나님 아버지와 나의 구주와 내가 속한 하늘의 가정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이다. 난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성화의 방식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이러한 사람이며, 우리를 위하여 무엇이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우리의 손에 하나님의 가정의 모든 명예가 달려 있는가를 말해주는 진리이다. 그 진리를 이치를 따져보고 행할 것을 알라고 한다.

진리는 나로 하여금 나의 놀라운 지위를 부단히 생각하게 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았다. 내가 “죄가 내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것들을 깨달을 때이다. 그렇지 않다면, 전적으로 모순되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기다리고 있노라고 고백하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죄의 왕노릇을 허용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계획을 스스로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이 목적을 하나님은 이루어가고 계신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고 적지 아니하니”(고전11:30). 고린도 교회에는 죄로 자기 죽을 몸에 왕노릇 하도록 내버려 두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12:6).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고, 그는 이 목적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 나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죄로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대적한다면 우리가 매맞고 징계당한다 하여도 놀라서는 안 된다. 그것이 병일 수도 있고, 사고일 수도 있고, 죽음일 수도 있고, 슬픔일 수도 있다.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어 어리석고 더 야비한 짓이 어디 있는가?

성화의 권면은 우리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게 한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다. 우리 속에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계속 추진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권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교리는 이미 우리에게 “세상에 있는 자보다 너희 안에 있는 자가 더 크다”고 말하였다. 어떤 핑계도 댈 수가 없다.

우리는 홀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죄의 왕노릇을 멈추게 할 지위에 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를 피하리라”“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라”(벧전5:8,9)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를 정복하고 물리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적할 힘을 주셨다. 1-11절의 영광스러운 교리에 비추어 볼 때, 그러므로 죄로 우리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아야 한다.

* 강론일: 2010-08-17 * 제목: 13장 우리를 하나님께 드림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너희 지체를 –내주지 말라”는 우리의 의지를 향하여 주어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요, 할 수 있는 것이다. 성화하려면 무엇을 행하는 것을 멈추라고 하는 가르침과는 상충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죄를 이기려고 싸우는 것이 잘못이고, 길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한다. ‘다만 투쟁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길 뿐’이라고 한다. ‘그럴 때 주께서 그 사람 안에서 그 일을 행할 것’이라고 한다. ‘가장 큰 오류는 죄와 싸우려는 시도이며, 우리의 할 일은 그런 노력을 중단하는 것이다.“ 13절 말씀과 이 가르침은 합치되지 못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이 문제는 긴박하고 사활을 좌우하는 중요성을 가진 것이다. 스스로 굴복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모든 삶을 소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13절 말씀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의지를 행사하여 어떤 일은 행하고 어떤 일은 행하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13절 말씀은 소극적인 부분과 적극적인 부분으로 나눠 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내주지 말라”.

죄는 언제나 자기의 기회를 고대하고 있는 큰 원수이다. 반드시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죄라는 이 원수에게 내어 주어서는 안 된다. 지체는 죽을 몸의 부분들이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힘과 기능과 성향들이 내재하고 있다. 지능, 생각하는 힘, 논리적인 능력, 상상력, 정서를 포함한다. 12절에서 하나로 묶어 죽을 몸에 대하여 말한 다음에, 이제 그 죽을 몸의 성분이 되는 부분들을 말한다. 이 몸의 활동 가운데서 어떤 간단한 부분이라도 우리를 대적하는 세력인 죄에게 내어주어서는 안됨을 강조하고 있다.

“내주다”는 ‘임의대로 하게 내버려 두다’의 뜻이다. ‘불의’는 영원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대하여 반대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 몸의 어떤 기능이든지 죄의 도구로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 힘과 에너지와, 내 말과, 내 욕구, 내 마음, 내 생각, 내 상상이나 내 감정이나-이 모든 것은 나의 부분들이고 내 인격의 표현이다. 어떤 것이라도 죄의 이용물이 되어서도, 죄를 위해서 쓰여져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한다. 죄와 마귀가 우리를 얻으려는 위협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마귀는 우리 몸의 체제를 얻을 수 없으면, 마음을 얻을려고 할 것이고, 그것이 안되면 상상력을 통하여 하고, 그것도 안되면 교묘한 방식으로 정서를 통하여 그 일을 시도한다. 우리 자신을 전체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반드시 지체들과 부분들도 조심해야 한다. 우리 중 이 특정한 권면과 명령을 유별나게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몸으로 아니했을지라도, 상상속에서 즐기는 것도 지체의 부분을 죄에 넘겨 주어 죄가 불의의 도구로 사용하게 한 것이다. 죄는 사람과 하나님의 큰 원수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능력들과 기능들과 성향들이 그 자체로는 선하고 해롭지 않다. 그것들은 선하게 혹은 악하게 사용될 수 있다. 과거에 자기의 마음과 두뇌와 재간, 상상력, 말과 웅변의 은사 등,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죄의 종으로 그것을 사용한 사람들은, 이제 정확히 같은 힘들을, 의와 하나님께 대하여 무기들과 종들로 사용하여야 한다. 우리가 중생할 때 새 ‘지체’ 새 기능들을 받지 않는다. 그것들은 전과 같다. 차이는 그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죄의 편에서 사용되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사용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권면은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치 말라, 어떤 기능이나 힘도 죄가 애용하도록 결코 허락하지 말라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다. 1~11절에서 그리스도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같이 우리도 죄에 대하여는 영원히 죽은 자요, 사망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영원히 단번에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반복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 드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 자신을 죄에게 드리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고,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우리는 은혜의 왕노릇 아래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다.

기독교와 도덕의 차이는, 도덕은 하지 않아야 할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기독교는 언제나 적극적인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죄에게 드릴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드릴 수 있다. 어째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진 것 때문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 같이”. 그리스도인 외에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자는 없다. 불신자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기 땨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와 함께 부활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

“드리라”는 ‘그를 봉사하는데 자신을 내어준다’, ‘자신을 그의 뜻에 맡긴다’의 의미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임의대로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특권인지 알고 놀란 일이 있는가? 우리는 살았기에 하늘 군대의 성원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십자군에 종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후5: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마16:24)는 말씀도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라는 말씀이다.

왜 자신을 드린 후에 우리 모든 지체들과 모든 기능들을 드리라고 하는가? 이것은 성화의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자신을 드렸어’하고는 지체들을 드리는 것에 관해서는 무관심하기 때문에 율법폐기론으로 떨어지고 만다. 우리는 반드시 자신뿐 아니라 지체들 모두를 남김없이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의 모든 됨됨이,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 우리가 희망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맡겨져야 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그의 영광과 찬양을 위하여 산다. 하나님의 계획은 의로우시다. 우리의 지체는 ‘의의 무기’로 드려져야 한다. 적극적으로 또한 능동적으로, 우리는 이 의의 십자군, 하나님의 십자군인 진리의 십자군에 종사해야 한다.

성화와 성결 방식에 대한 신약적 교리와 관련하여 중대한 원리들 이 이 구절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우리가 성결과 성화에 관심을 가지는 주된 이유는 우리가 죄와 극렬한 싸움과 전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성결 교훈이 우리의 주관성을 기초로 가르쳐지고 있다. ‘여기 투쟁하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패배하고 불행한 내가 여기 있노라’ 하는 식이다. ‘진료소로 오라’고 광고한다. ‘당신이 필요한 것은 진료소, 영적 병원으로 오는 것이며, 여기서 당신의 질병과 아픔이 치료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의 구절들을 볼 때 어떤 진료소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병원, 막사가 아니라 전쟁터를 발견한다. 의사가 아니라 주임상사가 필요하다. 연병장에서 단정치 못하게 걷고 있다. 비참하게 느끼고 자신의 연약에 대하여 말한다. ‘나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못하다.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소리쳐 알려주는 특무상사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이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을 일이 없다. 굳건히 서서 하나님의 군대에서 우리가 어떤 신분이며 어떠해야 하는가를 인식하자. 너희 자신을 바쳐라. 이곳은 진료소가 아니다.

오늘날의 기독교회의 주요 문제는 교회가 진료소나 병원과 같은 것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는 데 있다.

우리가 영혼의 볼거리와 홍역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느끼며 자신에 대하여 말하며 우리의 기분과 주관적인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와 악의 나라와 대항하여 싸우는 의의 왕의 생각을 잊었다. 사람들은 내가 구원받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말하기를 잘한다. 저는 대답한다. 위대한 (성경말씀의)켐페인을 바라보시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시오. 잠깐 동안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잠시 당하는 고통을 잊으시기 바란다. 군대 안에서 싸우시기 바란다. 필요한 것은 진료소가 아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우리가 전투장에 있으며 우리는 한 장엄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성화는 섬김의 문제이지 내 주관적 기분이나 상태의 문제가 아니다. 내 느낌, 내 실패, 내 성공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성결은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 섬김의 문제이다 . 우리의 존재 전체를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 중 어떤 부분도 죄를 섬기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원수와 화친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성결을 가르치는 신약적 방식이다. 우리들 거의가 필요로 하는 것은 진료소가 아니라 자기 부하들을 통솔하는 특무상사의 말과 명령과 경고와 경계를 듣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교훈은 그처럼 오랫동안 성결과 성화교훈을 지배하여온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아주 단순하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성화는 쉽지 않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신약성경은 말한다. “담대하라, 남자답게 굳세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악한 일에 맞서라”. 이런 것들은 전부 군사적인 명령이다. 진료소와 병원을 생각하는 것을 없애야 한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개시하신 큰 작전의 차원에서 바라 보아야 한다. 그 작전에서 하나님은 승리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리로다”(롬8:37).

우리의 마음의 맨 윗층에 자리 잡아야 하는 생각은 왕과 그 왕을 위하여 일하는 것 이다. 내 영혼의 상태와 조건은 나와 그와의 관계 만큼 크지 않다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의 나라에 내가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더 크게 생각해야 한다. 무기력하고 감상적인 생각, 우리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는 병적인 생각, 우리를 돕는 것만을 생각하는 우리의 욕망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 접근방식을 전부 없애 버리시라! 그것은 비성경적이고 악한 것이다. 오히려 사도가 여기서 표현한 바대로 강하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위치를 바라보자. 사도 바울은 실로 어느 곳에서나 성화의 문제에 관련한 가르침에서 언제나 그것을 지적한다. 우리의 특권적인 지위를 확실히 인식하게 되면, 죄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죄가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도 못하게 할 것이며, 어떤 지체나 어떠한 기능이라도 ‘불의의 무기’로 죄에 드리지 않게 될 것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게 될 것이다.

* 강론일: 2010-08-25 수

* 제목: 14장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상기함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12-14) (12)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성결과 성화에 관련한 신약 교훈은 특징적인 원리들을 설정하고 있음을 알았다.

첫째 원리, 성결과 성화의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 자신부터 출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진료소, 병원으로 여기고 있다. 오히려 교회는 병영 막사와 같은 곳이다. “남자답게 굴어라”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어려움을 참으라” 이러한 권면들을 신약성경에서 부단히 발견한다.

둘째 원리, 이 문제를 하나님을 섬기는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이요, 도구요, 무기라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고무되기만 하면 개인의 성결과 성화 문제는 해결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에 관하여 생각하고, 우리 자신을 시험하고 우리의 영적 상태를 느끼고 있다. 그것은 잘못된 접근 방식이다. 우리는 부르심의 차원에서 바라 보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위대한 나라에서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널리 만연되어 있는 불건전한 진료와 주관적인 접근방식에 대한 건전한 신약적 접근방식이다.

셋째 원리, 신약은 언제나 성결 교리와 성화 교리를 나타낼 때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 1-11절까지 이 일을 해왔다. 그리스도가 죄에 죽으셨기 때문에 그를 믿고 그에게 속한 우리도 역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다는 것이다. 사도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라고 한다. 이 말은 우리가 새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처럼 드리십시오. 우리는 우리 속에 새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신자와 같은 죄인의 신분이 아닙니다. 불신자는 자신의 힘과 능력 밖에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새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그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죽을 몸 안에 있는 죄와 우리 밖에 있는 죄를 저항할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그렇게 말하며, 아주 담대하게 죄를 저항하라고 한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행동할 것을 요청한다. 그렇게 권면하고 명령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할 능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생명과 능력과 힘과 권능을 받았기 때문에, 신약이 아주 논리적으로 조리가 맞게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너희 지체를 죄나 불의를 위한 무기로 드리지 말라”.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여러분과 제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다른 무엇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당신을 위하여 그것을 하실 수 있도록 하시오”라고 가르치는 병원이나 진료소로 가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에 종사하고 있다. 우리는 싸워야 한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게 하셨다. 우리가 믿고,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 능력을 받는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화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생각나게 하고, “자, 이제 가자, 그 일을 하라”고 말한다.

넷째 원리, 다른 모든 것을 생각하기 전에 언제나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의 메시지가 그것이다. “죄인 중 괴수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제일 큰 관심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성결이 아니다. 우리의 첫째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에 와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순서를 뒤바꾸는 경향이 있다.

자신에 관해 너무 많이 관심을 기울인다. “나는 여기서 죄와 싸우고 있으며, 패배한다. 죄가 너무나 힘이 센데 비해 나는 너무 약하다. 어디에 나를 이기게 하는 방법이나 다른 무엇을 가르치는 교훈은 없는가?”

‘나는 승리의 생활을 원하고 해방되기를 원한다’ ‘나는 이 ~을 원한다’. 모두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요, 모두가 주관적이다. 신약성경은 결코 그것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우선적이면서 최고로 생각할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은 이 방식으로 삶을 바라볼 때만 이다. 거룩함에 대한 참된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비참하지 않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거룩해짐의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거룩할 때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6). 우리는 제1차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해져야 한다. 성결과 성화에 관한 어떤 교훈들은 하나님의 영광부터가 아니고 우리와 우리의 필요들로부터 출발하는데, 이것은 비성경적이고, 심각하게 비영적이다. 제가 볼 때 그런 주관적인 접근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수년동안 방황하게 하는 것 같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 그런 타이틀 자체가 그릇된 접근을 암시한다. (handbook to happyness,영적치유의 핵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어떻게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가 더 훌륭하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상태와 감정들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의하여 좌우되어야 한다. 아마 성결의 가장 높은 수준은 욥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때 도달되는 것이다. (욥13:15)“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하나님의 영광이여!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가르침에서 맨 먼저 눈에 띄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성결과 성화에 관한 모든 관심의 최고 이유여야 한다.

14절은 중요하면서 영광스러운 진술이다. 6장의 첫 번째 대목의 마지막 구절이다. 1절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이요, 첫 대목의 요약이다. 잘못된 해석은 12,13절에서 말한대로 행하면 그 결과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아니다. 심각하게 오해한 것이다.

그것은 명령이나 권면이 아니다. 그것은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씀이다. 바울이 이미 하라고 한 일을 하도록 용기를 주는 말씀이다. 12,13절의 권면과 명령을 이행하기 위한 근거를 말한다. 어째서 내가 죄로 나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내 지체를 죄에게 드리지 말아야 하는가?

대답은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엄하고 적극적인 권리주장이다.

바울은 현재 나에게 사실이고 미래의 내게 사실이 될 것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죄가 우리를 주장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고 말한다. 죄가 여러분을 주관치 못할 것이다.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그 은혜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그 은혜는 정복될 수 없는 것이다. 영원하고 끝까지 가는 것이다.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죄에서 완전히 구원받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완전하고 흠없고 부끄러울 것이 없이 영화된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성결에 대하여 가장 큰 자극제가 되는 것은 신약에 의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 안에서 성결을 이룩하게 하는 신약적인 방식이다. 신약은 우리가 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그 일을 하실 것이라고 말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신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진리들을 깨달으라. 그 진리들을 깨달아 죄를 대적하여 서라.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말게 하라. 너희 지체를 죄에게 드리지 말라. 너희가 은헤 아래 있고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라”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과 영화가 확실하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성결을 북돋아 주고 자극하고 고양시키는 것은 없다. 사도 요한이 말한 것에 전적으로 동조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여러분은 병원이나 진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교육과 이 정보와, 이 명령이 필요하다. 은혜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인식하라. 다시 새 언약의 조항들을 읽어 보라. 그리고 권리증서를 읽고 그것을 자랑하는 자처럼 살아가라. 자기의 모든 침체와 절망과 낙담을 잊어버리고, 장차의 영광을 바라보고 자신에게 말하라. “나는 낭비할 시간이 없어. 나는 영광을 기다리고 있어. 나는 그것을 고대하고 있어. 나는 서둘러서 그가 정결하신 것처럼 나 자신을 정결케 해야겠어. 난 장차 올 그 큰 날을 준비해야만 해, 그래서 내가 그 앞에 서게 될 때 부끄럽지 않아야지”. 성결과 성화의 가장 큰 촉진제가 이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방식이다. 이것들을 깨달으라. 이것들은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를 볼 것이고, 그와 같을 것이다. 여러분의 몸이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깨닫게 되면, 여러분은 죄를 미워하고 죄에 속한 모든 것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죄를 저항하고 “마귀를 대적할 것이다. 그리고 마귀는 여러분을 피할 것이다”. 여러분의 좌우명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니라”가 될 것이다.

* 강론일: 2010-09-01 수 * 제목: 15장 생명으로 설명된 소유권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15-16) (15)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6장의 첫 대목인 1-14절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였다면 성화에 관한 신약 교훈의 진수를 포착한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의 성화와 영화를 보장한다. 성화는 체험이 아니고 성경의 권면들을 행하는 것이다. 이 교리들을 알고서 그전보다 죄를 더 미워하게 되었는가?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대면할 때 새로운 확신을 주었는가? 은혜 안에서 자라는 일과 주를 아는 것에 진보하였는가?

그것이 진리로 거룩하여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교리를 아는 것이 죄에 대한 우리의 전체 태도를 변화시킨다. 죄가 우리를 공격하고 넘어뜨리려고 위협할 때, 이 진리를 앎으로 죄를 정복하고 이길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죽을 몸에 남아서, 세상과 마귀 안에서 우리를 대적하는 죄를, 더 큰 확신과 더 큰 확증과 더 큰 승리감으로 저항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제까지의 교리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이 교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제발로 서서 자기가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인지를 깨닫도록 하는 교리이다. 또한 이 교리는 은혜의 왕노릇의 능력 아래 그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이 교훈은 그로 하여금 승리케 하고, 그의 승리를 즐거워하게 한다.

이재 두 번째 대목(15~23절)으로 넘어 온 것이다. 바울은 진리에 충성하였고 교리를 설교하였기 때문에 무섭고 극심한 반대에 직면해야 했다. 법 없이 은혜 아래 있다고 하면,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예나 지금이나 이 교리가 지극히 위험하다고 한다. 법 없는 방종과 무범함을 조장할 거라고 한다. 또한 이 교리로 인하여 율법폐기론으로 빠져드는 자들이 있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이신칭의를 전혀 설교하지 않는 설교자들이 많이 있다.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윤리와 도덕을 설교할 뿐이다.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죄 짓다’의 바른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고의적으로 고집스런 죄를 의미한다. 죄의 상태에 계속 머물고, 계속 죄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나 가끔 죄 짓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정된 죄의 생활을 의미한다. ‘죄와 함께 동행하는’, ‘죄 가운데 고정되어 있는’, 죄 안에 계속 거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요일 3장의 ’죄짓다‘라는 말의 의미를 잘못 아는 것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실족케 하는 것은 없다.

“법 아래”. 율법을 지키느냐 한지키느냐에 우리 구원이 달려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그는 법 아래 있다. 그는 자기의 공로로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우리 구원이 우리 행위와 공로로 결정된다는 입장에 우리가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에 속한 것이요, 은혜에 의한 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런 추측 자체가 전혀 생각조차 할 값어치가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사도가 쓰고 있는 단어는 종이 아니라 노예이다. 그는 사실상 사람의 죄의 노예든지 은혜의 노예든지 하라고 말하고 있다. 6장의 전체 논증은 ‘은혜의 왕노릇’과 ‘은혜의 권세’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노예주, ㄸ또한 노예 주인의 의하여 행사되는 것 같은 권세이다. 죄는 그러한 권세를 행사한다. 은혜도 그러하다.

“혹시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죄에 대칭하여 순종이란 말을 놓고 있다. 아주 의도적이다. 그 목적은 한 순간이라도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메시지에 사람이 죄의 삶을 영위케 하는 것이 있다고 추측하는 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기이하고 기괴한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 우리가 무법하다거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법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 법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 것이라고 저는 답변한다. 오히려 그것은 순종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율법 없는 자가 결코 아니지만, 옛 의미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무율법주의자’ 라는 의미도, 전혀 율법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는 언제나 이런저런 율법 아래 있다. 이 모든 것은 순종이라는 말로 추측할 수 있다. 이 순종이라는 말은 사도가 16절에서 죄의 반대로 사용한 말이다.

흥미로운 요점이 있다. 사망의 반대는 생명인데 사도는 ‘의’를 말하고 있다. 의도적인 것이다. ‘의’ 대신 ‘생명’을 썼더라면 그는 자신의 가르침과 충돌되었을 것이다. 순종이 생명에 이른다고 말한다면,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6장 마지막 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라고 한다. 영생은 순종의 결과가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사이다. 순종이 의에 이르고, 순종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영위케 하였던 의의 생활로 인도한다고 말한 것은 아주 옳다. (엡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순종은 바로 그 의로 인도한다.

16절은 논증인데 몇가지 전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우리 자신들을 어떤 권세에 드린다면 그 세력의 노예가 된다. 내 자신을 어떤 권세에 판다면 나는 그 권세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내가 속하게 되는 권세는 자기의 노예를 향하여 주는 소유주의 권세이다. 전체적이고 독재적인 권세이다. 그 권세는 내가 행할 바어ㅘ 내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결정한다. 둘째, 두 궁극적인 전제주의적 세력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죄요, 하나는 순종이다. 이것이 사도의 대주제이다. 그는 5:12부터 그것을 시작했다. “두 지위만 있을 뿐이다. 아담 안에 있든지 그리스도도 안에 있든지 뿐이다”. 5:21에서 “죄의 왕노릇 아래 있어 사망에 이르든지, 은혜의 왕노릇에 속하여 의에 이르러 영생에 이르든지 둘 중 하나이다.” 중간지대란 없다. 모든 인류는 죄의 노예든지 순종의 노예든지이다. 셋째, 죄와 순종, 이 두 세력은 전적으로 다르고 서로 철저하게 반대되어 있다. 이것이 논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둘 다 노예 소유주요 상전이다. 죄와 순종의 차이는 마귀와 하나님의 차이이다. 지옥과 천국의 차이이다. 이 편은 무법천지와 모반이요, 저편은 하나님의 의와 진리이다. 본질상 그들은 영원토록 반대이다. 죄의 결과는 사망을 산출하고 순종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인 의를 산출한다. 넷째, 둘의 노예가 동시에 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은혜의 노예이면서 동시에 죄의 노예일 수 없다. 그들은 서로 충돌하고, 서로 배제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에게 속한 노예가 될 수 없다”(마6:24). 다섯째, 결국 우리가 행하는 바에 따라 우리의 주인이 누구이며, 우리의 지위가 무엇인가를 선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바로 인하여 이다! 그의 생황방식이 죄의 왕노릇 아래 있는지, 은혜의 왕노릇 있는지를 보여준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그들의 열매로 알아 보아야 한다. 선과 악은 섞이지 못하고 섞을 수 없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듭나고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 안에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본성은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것은 순종과 의와 거룩한 삶에서 스스로를 보여준다. 그것은 죄를 계속 짓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하거니와”(요한12서1:6).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2:4). 그것이 신약성경에서 성결과 성화를 가르치는 방식이다. 진료소에서 편안히 쉼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죄의 노예든지, 순종의 노예든지이다. 너희 신앙고백이 어떠할지라도, 너희의 이해와 지식이 어떠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의의 열매를 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웃음거리요, 거짓말이요, 전혀 무가치한 것이다.” 거짓된 도전을 해오는 자를 변박하고 물리치는 방식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는 그가 살아가고 행동하는 방식에 의하여 그가 누구의 노예인지를 선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것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거듭난 사람은 그 안에 나쁜 열매가 아닌 좋을 열매를 내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은혜의 노예요, 순종의 노예요, 하나님의 노예라면, 그것을 저절로 나타날 것이며, 반드시 순종하는 행위와 거룩한 행동에서 스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왜냐하면 은혜가 우리를 주관하고, 은혜가 자기의 목적을 이룰 것이며, 무엇보다 순종과 의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 강론일: 2010-09-08 * 제목: 16장 믿음과 순종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5)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성경 가운데 크게 뛰어나고 가장 중요하고 중추와 같은 구절. 15절의 질문에 16절의 보편적 원리로 답하고 그것을 17절에서 적용하고 있다. 우리를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어 하는 두 세력이 있다. 누구든지 동시에 이 두 세력 모두 아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그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다(16절).

17절은 성경 가운데서 가장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보여준다. 세 원리로 나누어 강해한다.

1) 그리스도인은 큰 변화를 이룩한 사람이다. ‘너희’가 ‘전에는 그런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아니하다. 너희는 이제 전적으로 다른 입장에 있다’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한다. 5:12-21에서 바울은 우리가 아담의 자녀로 태어났으며 아담의 본성을 물려 받은 것을 입증하였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본성으로 그러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는 어떤 큰 변화를 가져와야 할 필요가 있다.

신약은 너희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삶의 개선이나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고 한다. 중생, 새로 지음받은 것이 진수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창조물)이라”. 이것은 구원에 관한 신약의 전형적이고 특이한 용어이다. 특히 강조해야 할 것은 이 변화의 크기이다. 우리는 반드시 일어난 변화의 위대함에 대한 어떤 합당한 변화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인격 전체에 영향을 주는 변화이다. ‘너희가 순종하였다’-의지가 있다. ‘마음으로부터’-정서가 있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이지가 있다. 기독교가 이단이나 거짓 종교와 운동과의 차이이다. 이지와 지성에만 흥미를 느끼는 철학자들이 있다. 감정과 정서의 영역에만 감동시키는 운동들이 있다. 의지에만 직접 호소하는 윤리적인 교훈과 운동들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딤전1:11)은 어찌나 크고 위대하든지 그것은 전인을 수반하고, 전체 인격을 다룬다. 우리의 마음과 이지와 의지가 감동되지 않았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2) 이 변화가 너무 커서 소유권의 완전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소유권의 완전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본질상 죄의 노예였다. ‘죄의 종이더니’.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다’(시편) ‘사탄의 지배 아래 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하였다. 자연인이 자유를 운운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애석한 것이 없다.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죄의 노예로 태어났다. 노예라는 증거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아들과 영광스런 복음을 믿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노예 주인이 그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 우리는 모든 이들과 같이 진노의 자식들이다. 전적인 죄의 노예요, 마귀의 노예요, 어두운 나라의 노예이다. 물론 노예 중에 난폭한 죄를 짓지 않는 훌륭하고 의젓한 노예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해야 할 일’에 얽매여 있다. 관습의 노예요, 사회의 노예이다. 마귀는 우리가 노예인 이상 외모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다른 쪽이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전에는 그러하였으나 이제 더 이상 결코 그렇지 않다.

너희가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노예이다.” 18절,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었다는 것. 22절,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사람은 언제나 노예이다. 그는 죄의 노예로 태어났고, 두 번째 출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나 바울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사람은 죄와 사단의 노예이거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거나 둘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 신자는 전에 옛 어둠과 죽음의 나라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빛의 나라의 법과 권세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는 마귀에게 속하여 있었으나 이제는 의와 순종과 하나님 편에 속한 모든 것의 종이 된 것이다. 이 점이 분명한가? 가장 큰 변화이다.

이 큰 변화가 어떻게 오는가? 하나의 즉각적인 매개체는 ‘교훈의 본’이라고 사도는 말한다. 교훈의 본이란 ‘교리의 형태’, ‘교리의 양식’이라고 변역할 수 있다. 이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에 고통이 오고 부흥이 지체되는 것이다. 교훈의 본의 본질, 내용이 무엇인가? 단순히 죄사함의 메시지 만은 아니다.

복음전도의 메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롬1:16-18)“(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냐하면)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복음 전도에서 죄문제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지 않아야 한다. 그 다음에 구원을 성취하려고 하는 인간의 사력을 다하는 노력인 전적으로 소용없음을 말해야 한다. 바울은 1,2장과 3장에서 이 일을 한다. 그 다음에 이 완전한 절망과 소망없음과 낙담 가운데서 피할 길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그것이 메시지요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이다. 그것이 그 큰 변화를 가져온 즉각적인 매개체이다.

누가 그것을 사용하는가? 하나님의 성령은 이 말씀, 메시지, 이 교훈의 본을 가지사 우리를 그 속에 넣으시고, 그 교훈의 본이 우리에게 역사한다. 부분은 우리를 짓되 그 모양 그대로 지었다. 성경과 복음의 말씀은 즉각적인 매개체요, 사용된 기구이다.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의 최종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과 확실성은 내가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며, 그가 나를 옛 죄의 틀에서 건져 내어 이 새 틀에 넣었다는 바로 이것이다. 새 틀은 그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내가 완전해지기까지 그 속에 나를 넣어두셨다.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여 우리를 짓기 시작하면, 그는 중도에서 그만 두고 떠나시지 않는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 확신함이라”(빌1:6). 나는 결국 ‘점이나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그런 것이 없을 때에야’ 그 틀에서 나올 것이다. 나는 완전해지고, 거룩해질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닮게 될 것이다.

3)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의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교훈의 본’을 믿었다가 아니고 순종하였다고 말한다. 교훈을 지적으로 믿기만 하는 것은 생명에 아무런 것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아직도 죄의 노예들이요, 전적으로 육신적인 사람들이면서 성경읽기를 즐기고, 다른 이들의 말잇기 퍼즐하는 것처럼 교리를 가지고 희롱하는 자들이 있다. 칭의와 성화를 따로 떼어 놓는 것처럼 비성경적이고 적적으로 악한 것이 없다.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보편화된 가르침이다. 성화도 칭의처럼 믿음으로 받으라고 한다. 그것은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다. 사람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그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에 순종하는 것이다. 믿음은 마음으로부터의 순종이다. 필연적으로 어떤 변화된 삶으로 인도하지 않는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최고 목표는 단순히 우리를 용서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자니” 무엇을 위하여?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0).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은–”무엇을 위해?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믿어 순종케 하려고”(롬16:26).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1:22).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순종이다. 순종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 믿음은 어느 것이든지 쓸모없는 것이다. 마음으로 순종한다. 순종은 더디거나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 그 요구에 있어서 너무 엄중하다고 느끼는 것은 불쌍한 일이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 깊은 변화를 겪은 사람이다. 그는 교훈(교리)의 ‘틀’속에 있다.

그것이 무엇을 가르치는가? 회개할 것과, 죄를 떠나 ‘임박한 진노를 피할 것’,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순종할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원한 노예요, 행복한 노예이다. 따라서 그의 최상의 욕망은 하나님과, 우리 죄 때문에 세상에 오셨던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찬양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죄의 노예들이었던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출되어 이 신성한 틀, 교훈의 본에 넣어졌고, 그 결과 우리는 그의 모든 지시를 마음으로 순종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다.

* 강론일: 2010-10-1 금 * 제목: 17장 새생명의 원리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16-18)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6,17절에서 자기의 논증을 매듭 짓고 18절은 그리스도인의 지위를 요약한 것이다. 18절이 진리이니까, 19절의 호소를 할 수 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18절은 권면이 아니다. 스스로 죄에게서 벗어나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죄에서 자유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지위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이다. 두 번째 체험에까지 나아간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진리인 것이 아니다.

“죄에게서 해방되어”를 문자 그대로 우리 속에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죄가 남아 있지 않다거나, 우리는 완전히 죄와 관계를 끊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죄된 본성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옛 사람’과 죄의 본성 사이의 구분을 기억하라. 우리는 옛 사람과 영원무궁토록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그것은 죄의 본성에 관해서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12절에서 상고한 바와 같이 죄의 본성은 아직도 우리의 “죽음 몸에” 남아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시험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말하고 있지 않으며, 결코 ‘죄된 몸’, ‘죽을 몸’에 남아 있는 죄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다시는 고통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 우리는 의의 노예이고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에서 벗어났고, 구원받았으며, 더 이상 종의 지위에 있지 않다. 17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어떤 사람도 죄의 노예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이 복음을 믿는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가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분명히 위대하고 중대한 진술이다. 그것은 6장 전체의 논지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권능과 왕노릇하는 세력으로서의 죄의 노예가 아니다. 그는 더 큰 세력에 의해서 그로부터 해방되었다. 적극적인 국면은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 잘된 번역은 ”너희가 의에게 노예로 인치게 되었느니라“이다. 여기서 의란 단순히 도덕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준 원래의 의, 가장 고도의 도덕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옳음, 성결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우리의 지위는 우리가 의에게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의 권세와 통치와 의의 영향 아래로 왔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우리가 중생하는 순간부터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켜 놓는 것은 얼마나 철저하게 비성경적이고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 죄의 노예인 것을 멈추는 순간부터 우리는 의의 노예인 것이다. 중간지대는 없다. 한쪽에서 벗어나는 순간 다른 쪽에 있는 것이다. 다시 난다는 것은 새생명의 윈리가 우리 안에 놓여진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의의 원리이다.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시 우리 속에서 일하기 시작한 원리요, 그것은 신적인 권능과 함께 일한다. (빌2:12-13)“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갈5: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약4:5)“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생명의 씨앗을 넣으시는데 그것은 의의 씨앗이다. 그것이 우리 속에서 일하고 있으며, 성령께서 그 일을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점없고 흠없게 되기까지 그 과정은 계속되어 나갈 것이다.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 일을 행하신다.

어느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종하지 않는다면 징계와 벌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어려움에 처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하여 황폐하여질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신적 사역의 전부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완전케 하며 거룩하게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진리를 통하여 못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하실 것이다. 우리는 의의 노예 신분 아래 있으며 그래서 그가 그것을 시행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지위이다. 우리는 틀 속에 넣어지게 된 것이다. 은혜가 우리를 꽉 붙잡았으며 우리를 죄의 사슬과 죄의 왕노릇에서 건져냈으며, 그리고 그리스도께로 영광스럽게 포로로 잡히게 했다. 그것은 의에 대하여 노예가 되게 하였다. 그것은 은혜의 권능이요,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은혜의 왕노릇’이다. 우리는 그 은혜의 위엄과 견고한 팔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구속은 도덕에 대하여 필수적이다. 사람은 본성으로 죄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엄청난 죄의 힘에 의하여 조정받는 강력한 충동을 가진 피조물이다. 그는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며 죄의 왕노릇 아래 있다. 지적 휴메니스들은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믿는 것보다는 훨씬 부도덕하다. 완전히 자기중심적이다. 죄는 나면서부터 본성적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가공할 능력이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어둠을 사랑하며 그의 마음의 깊은 곳에서부터 빛을 싫어한다. 본성적으로 완전히 소망이 없다. 선한 충고나 교육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자기를 구원할 어떤 이, 구원을 필요로 한다. 그의 근본적인 필요는 선한 것을 행할 힘이다.

역사적 증거가 있다. 구속 교리의 진리를 가장 깊이 깨닫던 시대가 영국이 아는 가장 위대한 시대였다. 가장 최선의 법과 질서와 도덕에 대한 최고 관심을 보이고 선한 행실과 행동을 가장 많이 나타냈던 때가 개신교 개혁이 있은 바로 다음 세대인 엘리자베스 시대였다. 또한 청교도 시대에 도덕에 대하여 그처럼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구속교리를 믿고 그 교리들에 지배되고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을 프랑스 혁명과 같은 혁명에서 구한 것은 구속의 교리들을 믿었던 웨슬리의 복음적 대각성이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개인들의 증거도 있다. 죄의 노예였으며 전적으로 어리석고 야비하고 부도덕한 자들이 새 삶을 영위하였다는 역사의 큰 증거들이 있다. 그들이 믿었던 구속의 교리가 그들의 삶에 큰 능력으로 임한 것이다.

지적으로 학문적으로 선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현명한 신사들이 완전히 실패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절망적인 실패자를 구원할 유일한 힘은 구속의 힘뿐이다. 하나님만이 그를 도울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문제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데 있다. 신약성경의 교리들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자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말하는 교리들이다. – 성육신의 교리, 구속의 교리, 대신 속죄의 교리. 새생명과 새 본성과 새 탄생과 새 출발을 주신 것을 가르치는 중생과 회심의 교리.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을 우리 속에 살게 하시고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힘을 주신다는 교리로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구원받고 자기 발고 서게 되는 방식이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오직 이들 기독교 교리들로 말미암아 알 뿐이다. 이것을 떠나서는 구원도 없고 도덕성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율법으로도 “죄를 깨달을 수”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것이 들어왔고 이 구속, 이 하나님의 은혜, 이 의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값없는 은혜로 임하였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왜냐하면 우리안에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그것이 우리 안에서 도덕과 성결을 향한 욕망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구속이 도덕에 대하여 반기를 든다고 하지만, 신약성경은 구속이 사람 속에 의를 향한 주림과 목마름을 창조해낸다고 말한다. 신약은 구속이 도덕과 성결에 대하여 사모하는 마음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삶의 최고 동기, 소위 사랑과 감사의 심정을 산출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행하셨음을 깨닫는다. 또한 은혜에 보답하려고 한다. 도덕과 성결에 대한 가장 위대한 자극은 우리를 위하여 죽었고 우리 대신 자신을 내어 주신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욕망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구속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힘을 공급한다. 모든 성도들이 증거하고, 모든 순교자들의 죽음이 완전하게 증거한다. 아이삭 왓츠, “아, 놀랍고 신기한 사랑에 내 혼과 생명, 내 모든 것을 다 드리네”. 이것은 강제가 아니다. 즐거운 자유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다. 그것은 고역이 아니다. 그를 섬기는 것은 완전한 자유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주를 기뻐한다는 것은 구속의 교리를 이해하고 그것의 능력을 체험하며 사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2020/11/26(목) “로마서 6:1-14” / 작성: 김광욱

[본문] 로마서 6:1-14

[찬송가] 311장 ‘내 너를 위하여’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베푸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을 의롭게 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비록 죽을 죄인일지라도, 그는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피를 흘려 희생 제물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까지 어떻게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면, 로마서 6장부터 8장까지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의 삶이 어떤지,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1-2절)]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 5장 20절 하반절에 “죄가 더하는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을 듣고 오해할 사람이 있을 것을 대비해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죽을 죄인이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은혜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죄에 거한다는 것은 로마서 3장 8절에서 궤변론자들이 말하는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라는 궤변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기 위해서 죄를 짓자’는 궤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단호히 말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이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앞으로도 죄를 짓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오만에 빠지지 말라는 차원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합니다.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이란 죄로부터 분리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더이상 죄 가운데 살아서는 아니 될 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은 더이상 죄의 지배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데 어떻게 죄의 노예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연합하였다고 해서 성도가 전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순 없습니다. 성도가 죄를 지을 수 있으나 예수님을 믿기 전처럼 죄의 권세가 성도를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더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이 된 사람이라면 과거 죄인처럼 살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3절은 예수님과의 연합이 세례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3-7절)]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을 세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물로 받는 세례가 아니라 성령 세례를 뜻합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곧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이 되므로 죄의 권세 아래에 놓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죄를 이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다’함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속하여 죽으셨듯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죄의 몸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죄로부터 분리, 죄 씻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 세례를 받은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 죄에서 분리된 사람입니다.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4절 말씀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죄의 몸이 죽고, 또한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새사람으로 살아납니다. 새사람은 죄의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5절 말씀은 3, 4절의 말씀을 다시 반복하여 확증하는 말씀인데 그 안에 ‘같은 모양’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유사한 형태로’ 죄의 몸이 죽고,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유사한 형태로’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4절 말미에 “우리로 또한 새 새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는, 새사람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는 일은 많이 있겠지만 본문에서 찾아본다면 6절과 12, 13절에 그 일이 있습니다.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을 포함해서 로마 교회 성도와 오늘날 성도들을 다 포함합니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 옛사람을 죽게 하심은 우리에게 더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과 연합한 사람이 주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7절은 이렇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가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인 우리는 이제 더이상 옛사람 죄인이 아닙니다. 성도인 우리는 새사람 의인입니다. 그렇다면 의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8-11절)]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3,4,5절과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10절의 ‘단번에’입니다. 예수님께서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단번에 죽으심이요’는 한 번 죽으셨다는 의미와 동시에 완벽한 희생 제물로서 더 이상의 희생 제물이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단번에 죽으심은 모든 죄인의 죄에 대하여 죽으셨습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사람, 그리고 미래에 태어나 살아갈 사람의 죄를 단번에 죽으심으로 죄인들을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에 존재했거나 존재할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사에도 적용됩니다. 개인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예수님께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사람들이 이런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힐 것을 염려해 1~2절로 말했던 것입니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10절에 ‘살아계심’은 ‘죽으심’과 대조를 이루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죄에 대하여’ 대조를 이룹니다. 삶과 죽음이 상극이고 하나님과 죄가 상극입니다. 어떻게 죄가 하나님을 맞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죄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2절과 13절처럼 살아야 합니다.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12-14절)]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하여 첫째는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라’이며 둘째는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죽을 몸’이란 이 땅에서 유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예수님 안에서 죄의 몸이 죽고 의의 몸으로 살아 가더라도 유한한 이 땅에서 우리 인간의 몸은 결국 죽을 몸입니다. 이 몸이 더이상 죄에게 지배당하지 않도록 몸의 정욕대로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13절의 ‘지체’는 문자 그대로 눈, 코, 귀, 입, 손과 발 등을 가리킵니다. 지체를 죄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눈으로 보암직한 것에 마음이 빼앗기고, 코와 귀로 탐욕을 자극받고, 입으로 범죄하고, 손과 발로 악행을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보자, 눈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 손으로 그 열매를 따먹고 먼저 먹은 사람이 손으로 건네주고 또 배우자는 그것을 받아 입으로 먹는 행위를 통해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은 이렇게 몸의 정욕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선한 것을 보고, 우리의 귀로 선한 것을 듣고, 우리의 입으로 선한 것을 먹고 말해야 합니다. 가장 선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그 말씀을 선한 양식으로 먹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손과 발이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선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바울은 다시 한번 더 예수님과 연합하여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죄의 권세 아래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죄가 성도를 주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의 은혜 없이는 우리는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몸의 정욕대로 살아가지 않고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면 항상 자신이 예수님과 연합한 존재, 죄의 몸이 죽었고 의의 몸으로 살아난 존재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손이 예수님 안에서 나를 만들고 세우셨음을 늘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를 인식하며 인자하시고 긍휼하신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늘 사모하며 배우기에 힘쓰십시다. 매일매일 새벽기도회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빠지지 않고 묵상하심으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시길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저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게 하시고, 희생 제물이 되어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과 연합하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주님과 연합함으로 죄의 몸은 죽고 의의 몸으로 살아났음을 잊지 않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더이상 죄가 저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몸의 정욕대로 살아가지 않게 하시고, 몸을 하나님께 의의 무기로 드림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귀한 도구가 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손으로 예수님 안에서 지음을 받아 새롭게 태어난 존재임을 잊지 않으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은혜를 받기 위해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 본문에서 세례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무엇을 한 것이 됩니까?(두 가지)

4. 예수님과 연합하여 새사람이 된 사람,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5.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이루기 위해 힘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해야 하겠습니까?

(작성: 김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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