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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 장 강해 | 로마서강해 | 로마서 4:1-25 |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 유기성 목사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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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 주석 강해 – Pensé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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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 주석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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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 강해 설교말씀] 아브라함의 예(롬 4:1-25) – 알쓸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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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 장 강해 |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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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 옛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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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로마서 4 장 강해

  • Author: 선한목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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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3. 1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nyezrgimeM

로마서 4장 주석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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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 주석 강해

로마서 4장의 간략한 주석과 강해입니다. 4장에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신약의 믿음이 갖는 특징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로마서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3장의 내용을 강화하기 위한 도입 질문이다. ‘우리 조상’은 화자인 바울의 조상 즉 유대인이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정체성이자 근본이다.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을 설명하여 유대인들이 잘못된 성경해석을 꼬집는 동시에 이방인의 정당함을 말한다.

얻었다(εὑρηκέναι)는 유레카 발견하다는 뜻이다. 왜 얻었다고 번역했을까? 구약에서 발견하다는 빈번하게 사용된다. 완료 시제로 이미 완성된 아브라함의 경험을 공유한다.

‘우리 조상’은 언어유희적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우리 조상’을 바울이 사용하여, ‘그래 너희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아브라함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내가 알려주마’라는 의도가 깔려 있다.

로마서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행위’는 곧 율법의 행위를 암시한다.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로답함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러니 너희도 하지 마라. 아브라함이 율법의 행위로 의로다함을 받을 수 없는 모세의 율법은 아브라함 이후 거의 430년 후에 생겼기 때문이다.

로마서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기록되었으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의롭게 된 사건을 가져온다.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헬라어는 바울이 70인 역을 인용했음을 드러낸다.

의로 여겨진 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셨다.

로마서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로마서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삯 미스도스는 대가이다. 노동력을 지불하고 그에 상응하는 품삯을 받는다. 일종의 교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보수가 왼다. 하지만 일하지 않아도 받았다면 그것은 선물이다. 의는 거래가 아닌 일방적인 선물이다.

로마서 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로마서 4: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로마서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시 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LXX 31:1) τῷ Δαυιδ συνέσεως μακάριοι ὧν ἀφέθησαν αἱ ἀνομίαι καὶ ὧν ἐπεκαλύφθησαν αἱ ἁμαρτίαι

(LXX 31:2) μακάριος ἀνήρ οὗ οὐ μὴ λογίσηται κύριος ἁμαρτίαν οὐδὲ ἔστιν ἐν τῷ στόματι αὐτοῦ δόλος

로마서 4: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이 복(ὁ μακαρισμὸς)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복이다. 아브라함이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을 때 이므로 아브라함은 무할례자였다.

로마서 4: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로마서 4: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무할례시에 받은 아브라함의 복은 지금의 무할례자들이 그 복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아브라함이 받는 복의 실체이다.

로마서 4: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아브라함으로 무할례자, 이방인으로서의 복이다. 유대인 즉 할례를 그 이후이다. 할례를 결코 아브라함의 믿음을 앞서지 못한다.

로마서 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다. 아브라힘이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다. 율법과 상관없는 복이다.

로마서 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하나님의 법은 역행되지 않는다. 믿음이 먼저고 그다음이 율법이다. 만약 율법에 속한 자가 상속자가 되면 하나님의 약속은 잘못된 것이다.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로마서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다른 의미에서 율법은 진노를 이룬다. 율법의 기능은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삯을 위한 것으로 거래이다. 하지만 믿음으로 약속이며 선물이다.

중앙선이 없으면 중앙선 침범도 없다. 신호등이 없다면 신호 위반도 없다. 율법은 결국 종속하고 제한하며 진노를 불러일으킨다.

로마서 4: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상속은 믿음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유대인들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니 당연히 믿음으로 상속이 가능하다. 유대인들이 배제된 것이 아니다. 차별이 없어진 것이다.

로마서 4: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καλοῦντος) 이시니라

믿음에서 더 올라간다. 그다음은 하나님이 창조적 능력이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과 맞닿아 있다.

부르신다는 칼레오(καλέω)는 말씀하시다와 치환된다. 부르심은 곧 말씀하시다이다. 말씀은 존재이다. 창조는 존재론적이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과거형이 아니다. 빛이 있다이다. 빛이 있다(예히)는 미완료형으로 계속된 – 계속될 미래형으로 번역한다. 즉 하나님은 한 번 부르시면 계속 있게 된다.

וַיֹּ֥אמֶר אֱלֹהִ֖ים יְהִ֣י אֹ֑ור וַֽיְהִי־ אֹֽור׃

로마서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을 때 믿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하여.

로마서 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은 무지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사라의 잉태 불가능성을 알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을

로마서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로마서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로마서 4: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결국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가 그를 의롭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의는 무할례시에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히 신뢰한 것이다. 바울은 믿음의 중심을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에 두고 있다.

로마서 4: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로마서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바울은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의 논증을 마친 다음 곧바로 현재로 끌고 와 무할례자들인 이방인들에게 적용시킨다. 죽음에서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은 곧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하나님이다. 그러니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될 것이다. 놀랍게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부활을 능력으로 치환시킨다.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동전의 양면이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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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 주석

로마서 제 4장

=====4:1

그런즉 – 2:1에서 언급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처럼 별 의미 없이 다른 화제로 전

환하고자 사용된 접속사이다. 자세한 것은 2:1 주석을 참조하라. 3:19-31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하고 이제 본

절부터는 이신 칭의의 구체적 실례로 아브라함을 예(例)로 들고 있다.

육신으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사르카'( )는 직역하면

‘육신을 따라’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하나는 ‘우리 조상’

과 연결된 수식어로 해석하는 경우이며 (2) 또 하나는 동사 ‘얻었다’를 수식하는 부사

구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는 사본에 따라 다소 차이를 두고 있는데 만약 ‘얻었다’를

뜻하는 헬라어 ‘휴레케나이'( )가 ‘아브라암'( , ‘아브

라함’)앞에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카타 사르카’는 (1)의 의견에 따라 자연적인 혈

연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반면 ‘휴레케나이’를 ‘헤몬'( ,

‘우리’) 뒤에 위치시키는 소문자 사본들에 의하여 해석한다면 ‘카타 사르카’는 (2)번

의 의견에 따라 윤리적인 의미, 다시 말해서 ‘육신의 원리를 따라’ 또는 ‘율법의 행위

를 따라’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 Murray) 바울이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육신’의 개념을 증거로 제시한다. 바울은 ‘육신’이라는 말을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의 본성’과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8:4, 5, 12;고

전 1:26) 때로는 ‘육신으로’라는 표현을 ‘썩어질 육체의 소욕과 충동에 의하여’라는

경멸적인 의도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순수한 자연적 출생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

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증거할 때(1:3) 또는 다른 사람

들을 육신적인 형제 관계로 표시할 때 등이다(9:3;고전 10:18). 이와 같은 의미에서

‘육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면 바울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부르면서 혈연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육신’이라는 말을 추가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

자의 경우를 따를 때에는 ‘우리’라는 말이 유대인만을 칭하는 말인가 ? 라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서에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 보통 모든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3:31). 한편 후자의 견해

를 지지하는 자들(Lenski, Calvin, Meyer, Godet, Hodge)은 ‘육신으로’라는 말을 ‘얻

었다’라는 동사에 연결시킴으로써 ‘육신’을 ‘행위’ 또는 ‘율법’의 의미로 취급한다.

이 경우 본절의 뜻은 ‘아브라함이 육신의 행위로 무엇을 얻었는가 ?’ 라는 의문문 형

태가 된다. 본 구절의 앞 뒤의 문맥으로 보면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는 행위로 말미암아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2절;3:27) 사실이

므로 본절의 ‘육신으로’라는 의미는 유대인의 조상된 아브라함의 혈연적 관계를 뜻하

는 말이라기보다는 윤리적인 의미에서 ‘자랑할만한 것’ 또는 ‘율법의 행위’ 등으로 해

석하는 것이 보다 더 논리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얻었다 하리요 – ‘얻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레케나이'( )는

완료형으로 ‘발견했다'(have found), ‘얻었다’, ‘만났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문제는 이 단어가 어떤 사본에서는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 단어의 삽입에

의문을 제기하여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Lightfoot, Murray). 이 견해를 취할 경우

‘육신으로’는 자연스럽게 ‘우리 조상’과 연결된다. 그리고 ‘우리’란 대명사는 바울과

유대인 특히 로마에 있는 유대인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

님을 이미 3:9에서 밝힌 바 있다. 또한 2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이란 구절은

‘얻었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얻었다’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어야 바울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4:2

아브라함이 – 바울이 아브라함을 설명한 것은 유대주의자들도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선민의 조상으로 아바라함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 랍

비들의 문헌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3살부터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으며 할례와 율법

을 예비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그들 역시 창 15:6의 말

씀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의 공로를 증명하려고 했으며 특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공로’에 의하여 후사(後嗣)가 되어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Hendriksen). 그 당시의 유대교적 가르침보다 성경을 중요시한 바울은 ‘나는 너를 열

방의 조상으로 세웠다’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

으로서 아브라함을 칭의를 받는 신앙의 본질적인 모범으로 인정함으로써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따라야할 신앙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성도들

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을 돌이켜 보는 믿음 속에 있는 반면 아브라함은

장차 되어질 일들에 대하여 믿음으로 기다렸다는 것에서 서로의 차이를 발견할 수는

있으나 본질적인 ‘의’의 개념에 있어서 양자는 동일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

행위로써 –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직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지 않았으나 바울은 율

법의 원리 곧 행함의 원리를 아브라함 시대까지 적용시키고 있다. 이로써 바울은 (1)

믿음의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부

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2) 행위의 원리가 단순히 모세에 의해서 주어진 율

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암시해 주고 있다.

만일…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 바울은 ‘에이'( , ‘만일’)에 부정 과거 직설

법 수동태 동사 ‘에디카이오데'( )를 연결시킴으로 하나의 조건

문을 만들었다. 이 조건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 혹자는 논

리적이며 형식적인 가정으로서 현실적이며 실재적인 근거에 있어서는 ‘없느니라’는 부

정(不定)을 유도하는 조건문으로 인정하는 반면, (2) 혹자는 바울이 부정 과거 가정법

을 사용하여 단회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조건문으로 해석

한다(Lenski).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행위로'( , 여스 에르곤) 의롭

다 함을 받았으므로 일차적으로는 자랑할 것이 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

치려 하였던 구체적인 행위의 결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렌

스키(Lenski)는 바울의 주장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3:19-31에서 말한 것과)

증명하기 위해 ‘여스 에르곤’과 ‘여스 에르곤 노무'( ,

‘율법의 행위’)를 서로 구별하려 한다. 신앙의 행위로서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

만 ‘율법의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의

‘행위’는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자랑과 구분이 되는 것으로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행위’인 바, 바울이 자신을 자랑

할 수 있었던 것(고후 11;21;12:12)과 같은 성격의 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 주

장에 따른다면 우리는 자칫 믿음을 공로로 인정하는 유대 랍비적인 교훈에 빠지게 되

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1절 주석 참조). 칭의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

에는 신앙이라는 인간의 공로조차 아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편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 Murray)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면 자랑할 근거가 있다는 형식적인 논리를 인정하나 그 논리가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적용될 수 있느냐하는 문제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왜냐하면 본절 하반절은 하나님 앞

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하미 자랑할 것이

없다라는 구절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바울은 가정적인 추론 속에서 아브라함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이 아니

라는 것을 증명하고 보다 확실하게는 가정문을 반증(反證)하기 위해 다음절에서 창

15:6을 인용하고 있다.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 본문에는 누구에게 자랑하는 것인지 그 자랑의 대상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혹자는 ‘자랑할 것’이란 말을 ‘영광받을만한 것’으

로 대치할 것을 주장한다(Meyer). 그렇지만 그렇게 의도적으로 본문의 의미를 바꾼다

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대로라면 영광을 주는 대상이 하나님

이 되어야 하는데, 곧바로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는 구절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

이다. 따라서 본문 전체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수정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하나님 앞에서도 자랑할 것이 있겠으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 일반적으로 문어체에서는 ‘기록된 바'(

, 카도스 게그라프타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한다

(3:10). 본절에서 바울이 의문문의 형식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은 구어체적(口語體

的)인 것으로 독자들과 보다 밀접한 관계에서 지금 논하고 있는 주제에 대하여 심사숙

고해 보기 의함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 본 구절은 창 15:6을 인용한 것이다. 혹자는 본절을

약 2;21과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Luther).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약

2:21은 창 26:5과 관계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야고보 사도는 믿음 자체를 무시한 것

이 아니라, ‘믿음’에 따르는 삶(행위)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아무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은 창 15:5에서 하나님을 통해 선포된 약속에 대한 것이

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신뢰이다. 아브라함 자신은 스스로의 능력으

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이룰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약속을 성취시

키실 뿐이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신뢰를 두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이루

어진 약속의 성취는 그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믿

음을 통해서 값없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 믿음과 행위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구약에 기록된 또 하나의 구절을 극복해야 한다. 시편 106:31은 비느하스의 열

정적인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이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

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으며 비스하스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의롭다 여

기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스하스가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경건치 아

니한 자들도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칭의와 구별이 되어야 한다. 비느하스의 행위

는 앞에서 살펴본대로 믿음의 한 열매로서 주어진 결과로 보아야 한다(J. Murray). 경

건치 아니한 자, 또는 할례받지 아니한 자들의 칭의를 논하는 문제에 있어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과 ‘믿음의 선한 열매로 인한 결과’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다. 한편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로기스데'(

)는 ‘로기조마이'( )의 부정과거 수동태로서 (1) 의롭다 여김을

받은 수동적 행위를 의미하며 (2) ‘의롭게 만들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그렇게

평가해 주었다’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을 정

도로 인격(person)에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의 신분적 관계에 있

어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았다는 뜻이다.

=====4:4

일하는 자에게는 – 본 구절에 대해 혹자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열심으

로 추구해야 할 선행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적을 내세워 자기 공로를

자랑하려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Calvin). 본절 전체가 일상적인 고용 관

계에 대한 것을 비유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점에서는 1차적으로 삶을 위해 일하는 일꾼

을 의미하며, 2차적으로는 다음절에 기록된 ‘일을 한 것이 없는 자’와 ‘믿는 자’ 등과

대조를 이루는 개념으로서 단지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 삯을 – 일꾼이 요구하는 ‘삯'( , 미스도스)은 문자적으로 일해준 것

에 대한 품삯을 의미하지만(눅 10:7;딤전 5:18) 은유적으로는 ‘보상'(reward)을 뜻하

는 말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외에도 신약에는 삯을 뜻하는 말로 ‘와소니온'(

)이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이는 눅 3:14에 병사의 급료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본서에서는 죄의 ‘삯'(6:23)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일꾼이 그의 일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당연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이 정당한

요구를 ‘빚'( , 오페일레마)이라는 개념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용법이다.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 ‘빚'( , 오페일레마)

은 ‘삯’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였으나 ‘은혜'( , 카리스)와는 대조적인 뜻

으로 사용되었다. ‘빚’은 히브리어로 ‘맛솨아'( )로서 주로 모세의 율법에 나

타나는 바, 채무 관계를 지적하는 데 쓰여졌다(출 22:25). 무엇을 빌린 자는 반드시

갚아야 했으며 만일 채무자가 정당하게 갚지 못했을 경우 채권자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고 채무자로부터 생계 수단이 되는 어떠한 것들을 전당물로 잡을 수 있었다(신

24:6). 신약에서 ‘오페일레마’는 구약에서와 같이 사업적인 용어로 쓰이기도 하였으며

(눅 7:41) 특히 비유 속에서는 채무자를 용서하거나 또는 죄인으로 취급할 때 쓰였다.

채무자는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옥에 갇혀 있어야 했으며(눅 12:57-59) 또한 송사(訟

事)하는 자에 의하여 재판관에게 고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본절에서 일하는 자가

삯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채권자가 송사하는 것과 같이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을 요구하

는 것으로서 빚을 탕감받은 자들이 탕감받은 것을 은혜로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

서 그들에게 있어서 ‘일’은 자랑이며 동시에 정당한 자기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처

럼 바울은 일하는 자들의 정당한 삯을 언급함으로써 다음절에 나오는 일하지 아니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용서와 칭의(稱義)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

려는 자에게 있어서 행위의 결과는 일꾼이 일한 것에 상응한 대가를 받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설 만한 자리가 없다. 오로지 행위의 주체인 자

신의 자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 삯을 위해서 일하지 않은 사람, 즉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가 아니라 의를 얻기 위해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이 본절에

서 의를 얻기 위해 아무 행위도 하지 않고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계속 진술했듯

이 오직 하나님은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신다. 4절과 비

교해 볼 때, 이 믿음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과 관련된다(엡 2:8).

경건치 아니한 자 – 이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 애쓰지 않는 자와 동의어지만 죄인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그보다 더욱 강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용어는 하

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 주고 있다(Murray).

의롭다 하시는 – ‘의로 여기시나니'( , 톤 디카이운

타)라는 현재 분사형 포현은 그 시제에 있어서 ‘믿는 자'( , 피

스튜온티)와 일치하는 것으로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이 철저하게 믿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경건치 아니한 자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

인에게도 임한다는 구원의 진리를 적용한 것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적용되었던 원리와도

일치한다.

=====4:6

일한 것이 없이 – 이 말은 원문상으로 ‘행위와 상관없이'( ,

코리스 에르곤)라는 의미를 지닌다(without works, KJV). 바울이 거듭 강조하여 이 표

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의 행위 내지

노력과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 ‘행복’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카리스몬’

( )은 ‘축복’이나 ‘행복’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특별히 이 단어는

단순한 ‘축복’이나 ‘행복’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에 강조점이 있다. 그

래서 혹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되다고 선포되는 것’이라고 의역하기도 했다(Black).

이 해석을 따를 때, 본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이 받은 바 축복에 대한 다윗이 선포

하기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받은 축복’이라는 구절은 그 속에 이미 하

나님의 은총을 내포하며 동시에 믿음으로 참여한 모든 자들에게 임할 동일한 축복을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4:7

그 불법…복이 있고 – ‘불법’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하이 아노미아이'(

)이다. 이 말은 ‘율법'( , 노모스)이란 말에 부정 접두어 ‘아’

( )가 첨가되어 이루어진 파생어이다. 포괄적으로는 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나 보다 정확하게는 ‘율법을 어긴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율법을 어긴 행

위’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죄로 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서 ‘불법’과 ‘죄’는 동

의어의 반복으로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하심을 받고'( , 아페

데산)라는 동사와 ‘가리우심을 받고'( , 에페칼뤼프데산)라

는 동사 역시도 동의어의 반복이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시문학에서는 평행 대구법

(parallelism)을 사용하여 앞절과 뒷절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뜻을 강조하

고 그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구체화시키곤 하였다(시 6:1). 한편 ‘아페데산’과 ‘에페

갈뤼프데산’은 둘다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능동

적인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축복의 상태를 나타낸다.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거나

가리움 받는 것은 이미 과거에 성취되었으므로 그에게 남은 것을 성취된 구원 속에서

누려야 할 축복 외에 아무것도 없다.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 – 본절은 7절의 중복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

니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유(私有)하시는 은혜를 보다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앞

절에서는 ‘불법이 사함을 받는 것’, ‘죄가 가리움을 받는 것’ 정도로 언급했으나, 본

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규정되는 ‘죄’조차 없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이 강

조되었다. 바울이 이신 칭의에 대해 설명할 때에 본 구절은 결정적인 논리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다고 할 때 논리상 믿음이 의로 여겨지는 중간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 논리의 틈을 본

절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 의로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 사람이 행한 죄악이 어떻게 여겨지게 되는 가에 대해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7절과 본절의 인용 구절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4:9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 바울은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범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지금 예로 들은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므

로 무할례자된 이방인이 이 축복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문제가 유대인에 의해 제기될

수 있다. 그래서 행위에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할례자인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바울은 본절의 질문을 제기했다. 할례는 율법과 더불어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보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바울은 본절에서

할례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바울 논지의 핵심은 비록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중요시

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칭의의 축복에 할례가 전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J. Murray). 바울은 이러한 논지를 본절의 질문을 제기함으

로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 3절에서 언급했던 구절이 다시 반복되

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3절에서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재차 강

조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게 되었던 시점으로

화제를 전환하기 위하여 반복되는 것이다.

=====4:10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포스 엘로기스 데'(

)인데, 이를 직역하면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뇨 ?’가 된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해서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느뇨 ?’라는 질문이 된다. 그런데 이에 대

한 대답이 의롭다고 여겨지게 된 시점(時點)에 관한 것이므로 ‘어떻게’보다는 ‘언제’

라고 번역하는 편이 적절하다.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할례

의식을 한 때로부터 20여년 전이었다(창 15:6;17:23, 24). 이 대답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할례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바울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이

다. 행 15:1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언급되어 있듯이

초대 교회 시대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들이 받은 바 우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예로 베드로는 이방인들(무할례자들)과 함께 애찬을 나누다가 할례자들

이 들어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갈 2:12). 이처럼 초

대 교회 당시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에 대하여 구별하는 관습이 남아 있었고, 그로 인해

복음의 본질이 변질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하나님

의 의(義)의 전가(轉嫁)가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팽배

되어 있는 그러한 분위기에 대하여 명백한 복음적인 해결책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4:11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 본절에서 바울은 그동안 문제시되었던 ‘할례’의 의미에

대해서 진술한다. 유대인들은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유일한 증표로 믿고

있었으나, 바울은 그들의 신학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창17:10, 11에는 할례

가 ‘언약의 표징'( , 세메이온 디아데케스)으로 언급

되어 있다. ‘언약의 표징’이라는 것은 언약을 맺은 것에 대한 증거로 나타내 보이는

표시(sign)이다. 그리고 구약 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언약을 맺는 것은

쌍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것이었다(Robertson). 그러면서도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하여 취하신 은혜와 사랑의 증표이며 약속이었다. 따라서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할례 이전에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대

한 증거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이 할례에 내포된 은혜의 비밀을 간과하고 겉모양만 취하여

그것이 매우 귀중한 것처럼 자랑하였다.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 ‘인'( , 스프라기스)은 신약에서 책

을 봉(封)하거나(계 5:1), 도장 찍는 것과 같은 증표(딤후 2:19;계 7:2)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모든 일을 결론짓는 마무리를 나타낼 때나 또한 어떠한 것을 그대

로 보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의 무덤을 봉인하였다는 것도 그의 죽음이 확

인되었다는 뜻이다. 예수의 부활이 확실한 것은 세상이 인봉을 통하여 그의 죽음을 확

고하게 증명했기 때문이다(마 27:65). 이와 같이 인(印)이라는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진실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특히 본절에서는 이미 무할례시의 믿

음으로 의롭게 된 사실을 확인하는 외적 보증의 의미로 이 용어가 쓰여졌다. 다시 말

해서 할례는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의의 수단도 아니며 단지 이미 의롭게

된 것을 입증하는 표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표적은 성령의 오심(엡 1:13;4:30)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함께 살아났다는 사

실을 예표하는 세례라고 할 수 있다.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 바르트(K. Barth)는 본절을 주석하면

서 원(元)역사계와 역사계를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즉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

를 받은 것은 원역사적인 사실의 믿음의 의가 역사계에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사건은 원역사적인 것 속에 파묻히게 된

다. 이러한 주장은 암시적으로 율법 폐기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율법

은 원역사적인 하나님의 의가 현 역사 속에서 단순히 나타나진 것에 불과할 뿐 그 이

상의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울은 율법이 의

의 전달 내지 계시로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3:31). 성도의 신앙은

히 11:1에 언급된 바와 같이 원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실재가 동시적으로 의미를 지

닐 때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된다. 예수의 천국 비유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도 원

역사적인 실재임과 동시에 현 역사적인 실재이다(Ridderbos). 할례는 무할례시에 주어

진 믿음의 의(원역사적인 것)가 현 역사 속에서 공표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고로

구약 시대에는 할례가 의미있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그 표는 단지 그리스도를 부각시키고 확증시켜 주는 역할을 담

당할 뿐이다. 따라서 할례 자체가 전혀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같이 그리스도

중심의 예언적 사건으로 그 의미는 항상 남아 있게 된다.

=====4: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것은

(1) 그가 처음으로 할례를 받아 혈통으로 자기에게서 난 자들에게 그 할례 의식을 전

했으며, (2) 그 할례를 전할 때 할례만이 아니라 자기가 무할례시에 받았던 ‘믿음의

의’에 대한 것도 동시에 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1절만 떼어서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단지 무할례자의 조상이 되어 할례받은 유대인의 조상은 되지 않는다는 오해가 발생될

수 있다. 그래서 본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도 되는 이유를 설명하게

된 것이다.

무할례 시에 가졌던 – 본절에서는 ‘할례받을 자들’과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 할례받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없는 자는 아브라함의 후

사가 될 수 없듯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지 않는 이방인 무할례자들도 당연

히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할례 시’가 아

니라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인’이다. 따라서 무할례든 할례이든 그것이 결코 구

원에 있어서 유리하거나 불리한 조건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

은 (1)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며 (2) 또한 그 할례가 믿음으로 받았던 의

를 ‘인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중

요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J. Murray). 바울이 할례 자체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 않았

다는 것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사실속에 잘 나타나며(행 16:3) 또한 할례를 믿음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아니한 사건 속에

잘 나타난다(갈 2:3).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 – 이 부류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다 포함된

다. ‘자취’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크네신'( )은 신약 성경에서 ‘보조’

(步調;고후 12:18) 또는 ‘본이 될 만한 모범'(벧전 2:21) 등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

으며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의 ‘흔적’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였다(갈 6:17). 본절

에서 ‘믿음의 자취’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던 삶의 흔적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요 8:39)

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걸었던 그 신앙의 노선을 따라가라’는 의미이다. 이 가르침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자손

이 됨을 시사한다. 한편 ‘좇는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토이케오'( )

는 ‘대오(隊伍)를 이루어’ 또는 ‘줄을 맞추어 행진한다’라는 뜻을 가진 군사 용어로서

‘일관성 있는 행함’의 의미로 번역되었다(갈 5:25;빌 3:16).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발

자취를 따르는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고 일관성 있게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4:13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 – 이 약속은 창 17:4-8에 언급되었다. 하나님께

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율법보다 430년 앞서 주어졌으며, 후에 생긴 율법이 이

미 주어진 언약을 취소할 수 없었다(갈 3:17).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약

속은 율법에 선행하며, 약속의 원리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리

고 이 약속의 원리는 바울이 본절에서 진술하고 있는 바대로 ‘믿음의 의’뿐이다. 왜냐

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이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세상의 후사’란 일차적으로 창 17:8의 말

씀대로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이 유업으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창 17:4에 언급된 대로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이므로, 그의 신앙의 자취

를 좇는 모든 민족이 후사가 되며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갈 3:29). 따라서 본절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하여 모든 땅의 족속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보증'(Hendriksen)

과 관련된 것임이 분명하다.

=====4:14

속된 자들’을 의미하며 바울의 또다른 표현에 의하면 ‘율법의 종노릇하는 자들’로서

종의 멍에를 멘 자들을 뜻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도 오직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만

성취된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펠라기우스(Pelagius)와 그의 추

종자들,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Roman Chatholic Church)는 하나님의 약속이 선행을

통해서 성취된다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만들었다. 이런 자들은 그리

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이며(갈 1:7), 이렇게 전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갈 1:8, 9).

만일…후사이면 – ‘후사’를 뜻하는 ‘클레로노모스'( )는 ‘상

속자’라는 의미로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어진 것을 물려받을 자를 뜻한다. 구약의 개

념으로 상속자가 얻을 것은 (1) 약속의 땅 가나안(창 12:7;13:14, 15), (2) 믿음으로

자손된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후손을 얻게 될 하나님의 축복, (3) 한 후손 메시야에 의

한 세계 통치를 의미한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의 상속

자라면 믿음은 의미를 잃게 되고 약속된 언약은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실제

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세상의 상속자라는

주장을 한다(요 8:39). 한편 본절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과 믿음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

하기 위해 먼저 약속으로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믿음에 의하여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

명할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를 두고 바울이 시작과 성취 중간에 들어온 율법의 무용성

(無用性)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5:20). 그러나 바울이 의도한 요점은 율법 무용론이

아니다. 다만 바울이 말한 것은 중간에 끼어 들어온 율법이 앞서 있었던 약속을 변경

시킬 수 없으며 율법에 의하여 후사가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 ‘헛것이 되고'( ,

케케노타이)라는 것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원문상 ‘그 속의 내용이 없

어졌다’라는 뜻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믿음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

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 내용 없는 것으로 변해 버린다면 약속

도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는 약속은 효력을 발생

할 수 없게 될 것이며( , 카테르게타이, ‘폐하여졌다’) 또한 법

적 신실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잃게 될 것이다. 만약 율법의 행위로 약속이 보증

된다면 율법 이전에 이미 보증받았던 아브라함이 약속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그 약속

에 의하여 성취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좇는 모든 믿음은 오히려 율법의

종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율법으로만 약속이 보증되고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

면 이스라엘의 신앙은 여타의 윤리 종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 율법은 행위의 완전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고 저주를 선포한

다(신 28:58ff.). 따라서 인간 편에서 볼 때 율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죄와

저주의 근거로서의 기능만을 가진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받은 모세의 직분을 ‘정죄

(定罪)의 직분'(고후 3:9)이라고 진술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율법의

저주’를 담당한 것이라고 선포했다(갈 3:13).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인간들을 위해 의

를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수 없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 쉬운 예로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의 법이

없다면 그 나라에 사는 백성은 아무런 범죄자가 되지 않는다. 오직 범죄자가 범죄자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은 그 나라의 법률에 따라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법률이 있음으로써

범법자는 죄인으로 정죄받고 심판을 받는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율법에 따른 정죄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믿음의 원리에 따라서만 살았다. 또한

노아는 아브라함처럼 할례에 대한 규례도 받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는 ‘의인’으로 인정되었다(창 6:9). 그가 의인으로 또한 완전한 자로 칭함을

받은 것은 율법적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께 정죄를 받은 것(창 6:5)은 율법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이 중요

한 것이다.

=====4:16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 ‘후사가 되리라’는 약속은 은혜와 믿음으

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믿으으로'( , 에크 피스테오스)라는 말

은 ‘율법을 통해서'( , 디아 노무)라는 개념과 반대적인 의미이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라는 말은 약속이라는 개념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약속된 그리스도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원문

이 ‘수단과 방법’을 뜻하는 전치사 ‘디아'( )를 사용하지 않고 ‘에크'( )를

사용한 것도 믿음이라는 것을 수단과 방법적인 것으로 전락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약속이 내용이며 동시에 약속 그 자체이다. 따라서 믿음은 약속이 성취된 곳에

나타나는 결과이며 동시에 약속이 하나님에 의하여 성취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본절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이 은혜로 말

미암아 성취되도록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보다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은혜’라는 개념이다. 믿음에 의하여 은혜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하여 믿음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1) 믿는 자

로 하여금 믿음의 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며 (2) 신앙의 확실성을 갖게

하며 (3)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신실하심을 선포하심으로써 믿는 자들의

의를 성취하도록 하는 방편이며, 또한 궁극적인 의의 보증이다.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것

이기에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될 수 없다(15절). 하나님의 약속이 보

증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유효하며, 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고 보증해 준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 바울은 ‘그

모든 후손’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를 ‘율법에 속한 자’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라고 했다. 통상적으로 ‘율법에 속한 자’는 단순히 유대인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

된다(14절). 이런 사실 때문에 헨드릭슨(Hendriksen)은 ‘율법에 속한 자’가 단지 ‘유

대인’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반부에 언급된 ‘그 모든 후손’ 곧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받은 ‘그 모든 후손’에는 분명히 ‘믿지 않는 유대인’은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율법에 속한 자’는 율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원리

를 따르는 ‘유대인’을 의미하며,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는 믿음의 원리

를 따르는 ‘이방인’을 가리킨다(12절 주석 참조). 이에 대해서는 곧이어 언급되는 하

반절에 의해 더욱 지지를 받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 바울이 ‘우리’라고 표현한

것은 믿음 안에 있는 ‘신앙의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이 신앙의 공동체에는 유대인이

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오직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모든 족속이 포함된다. 지금 바울이

논하고 있는 것은 혈통적인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한 것이다. 14

절에서 바울은 혈통적으로만 ‘율법에 속한 자들’은 후사가 될 수없다고 선포했다. 그

러므로 본절에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실 수 있는 후사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자

들뿐이다.

=====4:17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바울이 여기서 창 17:5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아브라함이 혈통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는 이유에 대한 성경적인 증

거를 위한 것이다. ‘많은 민족’은 문자적으로 ‘혈연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영적으로

‘믿음의 원리를 좇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모든 믿는 자들의 새로운 공

동체’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이유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후사에게 주어진 특권과

유익을 함께 소유하는 공동체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됨으로 말

미암아 인종적 보편성이 성취되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심

을 받았다는 표현은 ‘무할례자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과 ‘할례자의 조상’

이란 표현을 포괄하는 보다 광범위한 표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

는 동등한 부르심을 받았음을 시사하며 또한 세계 도처의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름으로 후사가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강조한다(J. Murray).

그의 믿은 바 하나님 –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을 정의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관(神觀)을 정의하며 동시에 모든 믿는 자들의 신관을 정의한다. 이는

두 가지의 사실을 전제로 하는데, (1)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하

나님이 되신다는 것이며 (2)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는(16절)

사실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정의한 후에 그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확고히

하신 ‘아브라함의 조상됨’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의 조상으로

삼으신 하나님 곧 예수를 죽인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아브

라함의 자손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 이 구절은 살아 역동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해주며 또한 생

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엡 1:20). 본절에서 그 의미는 크게

두 가지를 포함한다. (1) 이삭의 출생이며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다. 바울

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에 대

한 약속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끝가지 기다렸던 역사적 사건을 상기하면서 아

브라함의 믿음을 유추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출생을 기다리며 장차 있을 메시

야의 세계와 그의 승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Lenski, J. Murray, E.F.

Harrison). 사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흔히 부르는 하나님

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었으나 바울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적용

함으로써(24절)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과 또한 그것을 믿는

자들을 의로 여기신다는 두 가지의 핵심적 진리를 동시에 증거하였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 – 이 구절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특성을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이시며(마 3:9;눅 3:8) 그 어떠한 인간의 공로나 반항에도 구애받지

아니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절대 주권의 능력을 행사하는 분이시다. 그분 앞

에서는 아브라함의 늙은 육체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죄인의 추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

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가능성 속에서 역사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미리 정하신 작정과 통치 속에서 결정해 놓으신 것들을 성취해 나아가신다. 다시 말해

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후손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언약

이 성취될 것을 확신하였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약속하신 것

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성취된 것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확신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으며 본절과 같이 하나님을 정의할 수 있는 신앙이다.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자기 아내 사라가 잉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상속자는 자기의 종인 엘리에셀이 될 것이라고 고했다(창 15:2). 그럼에도 그

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번성케 하실 것을

(창 15:5) 믿었다. 키에르케골(Kierkegaard)은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사건에 대해 이

야기하면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것을 기대함으로써 위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위

대했던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이다”라고 함과 동시에 ‘불가능한 것을 기

대했던 사람’을 ‘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자’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공포와 전

율] 중에서). 그러나 아브라함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아브라함이 바라고 믿었

다는 것은 자신의 소망에 대하여 믿음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더 나아가 개인의 소

망이 성취되는 것을 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

와 모순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랐기 때문에 소망이 성취된 뒤

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20절). 그는 믿고 바라는 모든 것의 근원을 하

나님의 영광으로 돌리고 있다. 과학에 있어서 사실에 대한 ‘확신’은 과학자가 세워 놓

은 가설을 추론(推論)하여 밝혀진 사실(비록 이 사실이 진리는 될 수 없을지라도) 또

는 추론에 의해 세워진 가설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전혀 불가능

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믿고 바라는 것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목

적의 결정성(determinateness), 곧 약속의 신실성을 믿고 바라는 것이기에(J. Murray)

전제된 가설을 추론하여 믿는 과학적 확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 이 내용은 창 15:5 b의 ‘네 자손이 이와 같

으리라’는 말씀의 인용구이다. 여기서 ‘후손’이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

만, 창세기 본문에서나 본절에서는 ‘율법에 속한 자’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

모두를 지칭한다(16절 주석 참조).

=====4:19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 바울은 생식(生

殖) 능력이 없는 것을 ‘죽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헬라 본문에서 ‘죽은 것 같음’이

란 말이 아브라함에게는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 , 네네크로

메논) 언급되어 있으며, 사라에게는 명사형( , 네크로신)으로 언급되

어 있다. 사라에게 명사형으로 사용된 것은 앞에서 사용된 분사형의 반복이며, 아브라

함에게 완료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이미 생식 능력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

함이다. 그리고 개역 성경의 번역에서 사용된 ‘같음’이란 말은 헬라 본문에서는 사용

되지 않고 있다. 특히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있지 않으나 헬라 본문에는 ‘이미’를

의미하는 헬라어 ‘에데'( )가 사용되어 두 사람 모두 생식 능력이 사라졌다는 사

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17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라는 말씀

이 ‘이미 생식 능력을 상실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식 능력을 회복시키시고’라는 의미

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24절의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

운데서 살리신 이’라는 구절과도 연결되어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은 사라의 태(胎)가 생산 능력이 없는데서 생산의 능력을 갖추게 된 사실과 영적

으로 일맥 상통한다. 영적인 의미에서 생산 능력이 없는 사라가 그의 후손을 생산하게

된 것이나 죽었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을 주는 영'(고전 15:45,

life-giving-spirit)으로서 잠자는 자의 첫열매가 되신 것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4:20

의심치 않고 – ‘의심하다’의 헬라어 ‘디에크리데'( )는 ‘디아크리

노'( )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아브라함의 의심하지 아니한 행위가

개인의 능동적인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디아크리노’는 ‘가려내다'(마

16:3), ‘구별하다'(약 2:4) 또는 ‘스스로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다'(14:23;막 11:23)라

는 의미인데 본절에서는 아브라함의 ‘확신'( , 플레로포레오)과 반

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의심치 않았다’는 것은 소망에 근거해서(

, 에프 엘피디) 믿음으로 살았기에 갈등할 수가 없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뒤나모데 테 피스테이'(

)에서 ‘믿음'(피스테이)은 앞에 전치사가 없이

여격으로 사용되었다. 메첸(Machen)은 전치사가 없는 단순한 여격은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 예로 ‘에게이론 타이 토 로고 투 퀴리우'(

)는 ‘그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일으킴

을 받는다’를 의미하는데 주님의 ‘말씀’이 ‘일으킴을 받게 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절은 문자적으로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믿음’이 ‘강하여지게 되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말은 아

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강하게 붙들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한 가

지 난제가 발생한다. 창 15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다는 사실이 창 17:17의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된 사

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는 말씀에 의해 도전받

게 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이와 같이 분명하게 의심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고 진술하고 있는가

?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은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비록 혹자는 아브라함의 믿음

이 연약하여져서 의심을 하였으나 다시 하나님께서 그것을 강하게 해주셨다는 것으로

이해하지만(Hendriksen)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다만 아브라함이 의심을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즉 그의 자

손이 수없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은 문자적으로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라를 통해서만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갈

의 아들 이스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비록 하갈은 사라의 몸종이었지만 하갈의 자식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

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고하기를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 15장에서

말씀하셨던 그 약속을 재차 창 17:19-21에서 말씀하심은 아브라함의 약해진 믿음을 다

시 확고히 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사라의 태에서 난 자만이 그 약속을 성취시킬 것이라

는 점을 아브라함에게 못박으신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본 구절에 대해서 구약성경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창 17:19-21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재보증받은

아브라함은 곧바로 하나님께서 이전에 명하신 할례 의식을 행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방법에 대해 확고히 믿게 되었음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4:21

약속하신 그것 – 본문에 언급된 약속의 구체적인 내용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

라'(17절)는 것과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18절)고한 것이다. 이약속은 아브라함의 소

망과 확신에 의하여 얻어낸 보증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

록 보여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근거한다. 아브라함의 확신보다 더 확실한

것은 그분의 약속이다. 왜냐하면 약속은 하나님 자신의 전능성과 신실성을 나타내신

목적있는 작정이기 때문이다.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 이 말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

(창 18:14)에 대한 확신이며 또한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

려 함이라'(창 18:19)는 말씀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다. 본 구절에 대하여 혹자는 본절

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힘과 활기를 완벽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고 진술하기도 한다.

=====4:22

그러므로 –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므로'( ,

디오) 다음에 ‘카이'( )가 언급되어 있다. ‘카이’는 일반적으로 접속사로 사용되

어 ‘그리고’를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또한 역시’라는 의미를 지닌다. 바울이 이 단

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9절 하반절에서 언급했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말씀

을 다시 반복하면서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4:23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실은 동

시성(Synchronism)과 통시성(Diachronism)을 동시에 지닌다. 즉 그 원리는 아브라함에

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 모두에게도 적용된다. 이에 대해서 성경 자체의

증거로는 15:4;시 102:18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당신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만 적용되며 모세 이후부터는 율법만이 적용될 뿐이다’라

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것이다.

=====4:24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

‘우리’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본절은 이

방인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열려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는 유대인의 특권을 부인

하고 있는 23절의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라는 내용과 호응을 이룬다. 여기

서 바울은 자신의 논리를 ‘믿음의 내용’으로 옮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화제

를 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언급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최종적으로 예

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

속하시고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은 동일한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결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

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는 것과 신약 시대에 성도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용상 동

일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실현될 ‘약속’에 대한 것인 반면, 신약

시대 성도의 믿음은 성취된 ‘약속’에 대한 것이다.

=====4:25

예수는…살아나셨느니라 – 본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성도에게 적용

시키면서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두 구절을 대조시키고 있다. 즉 ‘우리 범죄함’과 ‘우

리를 의롭다하심’이 대조되어 있고,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와 ‘위하여 살아나셨으니

라’가 대조되어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내어 줌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죄를 위

한 대속적(代贖的)인 죽음을 의미하며,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심은 대속의 결과인 ‘의’

를 보증하고 선포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바울은 24절에서 믿음의 내용으로 ‘우

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것에 대하여 언급했던 것을 성도들에게 다시 적용시

키는 논리의 순서를 밝고 있다. 한편 바울이 예수의 대속적 죽으심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은 사 53:1-9과 같이 구약 시대에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내용이 언

급되어 있어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사건

이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증명되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

리스도 사건에 대해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까지 굳이 증명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내용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

을 밝혀내는 것이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을 위해 더 유익한 것으로 판단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5장에서 8장까지 줄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성도들에게 어떤 의

의를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 진술하게 되었다.

헬라어 로마서 4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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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 운 에루멘 휴레케나이 아브라암 톤 프로파토라 헤몬 카타 사르카

개역개정,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새번역,1 그러면 육신상으로 우리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아브라함에 관하여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말성경,1 그러면 우리가 육신에 따라 우리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톨릭성경,1 그렇다면 혈육으로 우리 선조인 아브라함이 찾아 얻은 것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영어NIV,1 What then shall we say that Abraham, our forefather, discovered in this matter?

영어NASB,1 What then shall we say that Abraham, our forefather according to the flesh, has found?

영어MSG,1 So how do we fit what we know of Abraham, our first father in the faith, into this new way of looking at things?

영어NRSV,1 What then are we to say was gained by Abraham, our ancestor according to the flesh?

헬라어신약Stephanos,1 τι ουν ερουμεν αβρααμ τον πατερα ημων ευρηκεναι κατα σαρκα

라틴어Vulgate,1 quid ergo dicemus invenisse Abraham patrem nostrum secundum carnem

히브리어Modern,1 ועתה מה נאמר על אברהם אבינו מה זה השיג לפי הבשר׃

성 경: [롬4:1]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아브라함의 의(義)]

󰃨 그런즉 – 2:1에서 언급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처럼 별 의미 없이 다른 화제로 전환하고자 사용된 접속사이다. 자세한 것은 2:1 주석을 참조하라. 3:19-31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하고 이제 본절부터는 이신 칭의의 구체적 실례로 아브라함을 예(例)로 들고 있다.

󰃨 육신으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사르카'(*)는 직역하면 ‘육신을 따라’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하나는 ‘우리 조상’과 연결된 수식어로 해석하는 경우이며 (2) 또 하나는 동사 ‘얻었다’를 수식하는 부사구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는 사본에 따라 다소 차이를 두고 있는데 만약 ‘얻었다’를 뜻하는 헬라어 ‘휴레케나이'(*)가 ‘아브라암'(*, ‘아브라함’)앞에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카타 사르카’는 (1)의 의견에 따라 자연적인 혈연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반면 ‘휴레케나이’를 ‘헤몬'(*, ‘우리’) 뒤에 위치시키는 소문자 사본들에 의하여 해석한다면 ‘카타 사르카’는 (2)번의 의견에 따라 윤리적인 의미, 다시 말해서 ‘육신의 원리를 따라’ 또는 ‘율법의 행위를 따라’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 Murray) 바울이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육신’의 개념을 증거로 제시한다. 바울은 ‘육신’이라는 말을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의 본성’과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8:4, 5, 12;고전 1:26) 때로는 ‘육신으로’라는 표현을 ‘썩어질 육체의 소욕과 충동에 의하여’라는 경멸적인 의도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순수한 자연적 출생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증거할 때(1:3) 또는 다른 사람들을 육신적인 형제 관계로 표시할 때 등이다(9:3;고전 10:18). 이와 같은 의미에서 ‘육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면 바울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부르면서 혈연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육신’이라는 말을 추가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를 따를 때에는 ‘우리’라는 말이 유대인만을 칭하는 말인가 ? 라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서에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 보통 모든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3:31). 한편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Lenski, Calvin, Meyer, Godet, Hodge)은 ‘육신으로’라는 말을 ‘얻었다’라는 동사에 연결시킴으로써 ‘육신’을 ‘행위’ 또는 ‘율법’의 의미로 취급한다. 이 경우 본절의 뜻은 ‘아브라함이 육신의 행위로 무엇을 얻었는가 ?’ 라는 의문문 형태가 된다. 본 구절의 앞 뒤의 문맥으로 보면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는 행위로 말미암아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2절;3:27) 사실이므로 본절의 ‘육신으로’라는 의미는 유대인의 조상된 아브라함의 혈연적 관계를 뜻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윤리적인 의미에서 ‘자랑할만한 것’ 또는 ‘율법의 행위’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더 논리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얻었다 하리요 – ‘얻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레케나이'(*)는 완료형으로 ‘발견했다'(have found), ‘얻었다’, ‘만났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문제는 이 단어가 어떤 사본에서는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 단어의 삽입에 의문을 제기하여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Lightfoot, Murray). 이 견해를 취할 경우 ‘육신으로’는 자연스럽게 ‘우리 조상’과 연결된다. 그리고 ‘우리’란 대명사는 바울과 유대인 특히 로마에 있는 유대인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이미 3:9에서 밝힌 바 있다. 또한 2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이란 구절은 ‘얻었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얻었다’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어야 바울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에이 가르 아브라암 엨스 에르곤 에디카이오데 에케이 카우케마 알 우 프로스 데온

개역개정,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새번역,2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말성경,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면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없습니다.

가톨릭성경,2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영어NIV,2 If, in fact, Abraham was justified by works, he had something to boast about–but not before God.

영어NASB,2 For if Abraham was justified by works, he has something to boast about; but not before God.

영어MSG,2 If Abraham, by what he did for God, got God to approve him, he could certainly have taken credit for it. But the story we’re given is a God-story, not an Abraham-story.

영어NRSV,2 For if Abraham was justified by works, he has something to boast about, but not before God.

헬라어신약Stephanos,2 ει γαρ αβρααμ εξ εργων εδικαιωθη εχει καυχημα αλλ ου προς τον θεον

라틴어Vulgate,2 si enim Abraham ex operibus iustificatus est habet gloriam sed non apud Deum

히브리어Modern,2 כי אם נצדק אברהם מתוך המעשים לו התהלה אך לא לפני האלהים׃

성 경: [롬4:2]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아브라함의 의(義)]

󰃨 아브라함이 – 바울이 아브라함을 설명한 것은 유대주의자들도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선민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 랍비들의 문헌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3살부터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으며 할례와 율법을 예비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그들 역시 창 15:6의 말씀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의 공로를 증명하려고 했으며 특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공로’에 의하여 후사(後嗣)가 되어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Hendriksen). 그 당시의 유대교적 가르침보다 성경을 중요시한 바울은 ‘나는 너를 열방의 조상으로 세웠다’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을 칭의를 받는 신앙의 본질적인 모범으로 인정함으로써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따라야할 신앙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을 돌이켜 보는 믿음 속에 있는 반면 아브라함은 장차 되어질 일들에 대하여 믿음으로 기다렸다는 것에서 서로의 차이를 발견할 수는 있으나 본질적인 ‘의’의 개념에 있어서 양자는 동일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

󰃨 행위로써 –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직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지 않았으나 바울은 율법의 원리 곧 행함의 원리를 아브라함 시대까지 적용시키고 있다. 이로써 바울은 (1) 믿음의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2) 행위의 원리가 단순히 모세에 의해서 주어진 율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암시해 주고 있다.

󰃨 만일…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 바울은 ‘에이'(*, ‘만일’)에 부정 과거 직설법 수동태 동사 ‘에디카이오데'(*)를 연결시킴으로 하나의 조건문을 만들었다. 이 조건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 혹자는 논리적이며 형식적인 가정으로서 현실적이며 실재적인 근거에 있어서는 ‘없느니라’는 부정(不定)을 유도하는 조건문으로 인정하는 반면, (2) 혹자는 바울이 부정 과거 가정법을 사용하여 단회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조건문으로 해석한다(Lenski).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행위로'(*, 여스 에르곤)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일차적으로는 자랑할 것이 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려 하였던 구체적인 행위의 결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렌스키(Lenski)는 바울의 주장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3:19-31에서 말한 것과) 증명하기 위해 ‘여스 에르곤’과 ‘여스 에르곤 노무'(*, ‘율법의 행위’)를 서로 구별하려 한다. 신앙의 행위로서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만 ‘율법의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의 ‘행위’는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자랑과 구분이 되는 것으로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행위’인 바, 바울이 자신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고후 11;21;12:12)과 같은 성격의 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 주장에 따른다면 우리는 자칫 믿음을 공로로 인정하는 유대 랍비적인 교훈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1절 주석 참조). 칭의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에는 신앙이라는 인간의 공로조차 아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편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 Murray)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자랑할 근거가 있다는 형식적인 논리를 인정하나 그 논리가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적용될 수 있느냐하는 문제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왜냐하면 본절 하반절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하미 자랑할 것이 없다라는 구절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바울은 가정적인 추론 속에서 아브라함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보다 확실하게는 가정문을 반증(反證)하기 위해 다음절에서 창 15:6을 인용하고 있다.

󰃨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 본문에는 누구에게 자랑하는 것인지 그 자랑의 대상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혹자는 ‘자랑할 것’이란 말을 ‘영광받을만 한 것’으로 대치할 것을 주장한다(Meyer). 그렇지만 그렇게 의도적으로 본문의 의미를 바꾼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대로라면 영광을 주는 대상이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데, 곧바로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는 구절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 전체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수정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하나님 앞에서도 자랑할 것이 있겠으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

티 가르 헤 그라페 레게이 에피스튜센 데 아브라암 토 데오 카이 엘로기스데 아우토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개역개정,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새번역,3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하였습니다. / ㉡창 15:6 ㉢원어로는 ‘그것이 그의 의로 여겨졌다’

우리말성경,3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라고 합니다. 창15:6

가톨릭성경,3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였습니다.

영어NIV,3 What does the Scripture say? “Abraham believed God, and it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영어NASB,3 For what does the Scripture say? “AND ABRAHAM BELIEVED GOD, AND IT WAS RECKONED TO HIM AS RIGHTEOUSNESS.”

영어MSG,3 What we read in Scripture is, “Abraham entered into what God was doing for him, and that was the turning point. He trusted God to set him right instead of trying to be right on his own.”

영어NRSV,3 For what does the scripture say? “Abraham believed God, and it was reckoned to him as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3 τι γαρ η γραφη λεγει επιστευσεν δε αβρααμ τω θεω και ελογισθη αυτω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라틴어Vulgate,3 quid enim scriptura dicit credidit Abraham Deo et reputatum est illi ad iustitiam

히브리어Modern,3 כי הכתוב מה הוא אמר והאמן אברהם ביהוה ויחשבה לו צדקה׃

성 경: [롬4:3]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아브라함의 의(義)]

󰃨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 일반적으로 문어체에서는 ‘기록된 바'(*, 카도스 게그라프타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한다(3:10). 본절에서 바울이 의문문의 형식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은 구어체적(口語體的)인 것으로 독자들과 보다 밀접한 관계에서 지금 논하고 있는 주제에 대하여 심사숙고해 보기 의함이다.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 본 구절은 창 15:6을 인용한 것이다. 혹자는 본절을 약 2;21과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Luther).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약 2:21은 창 26:5과 관계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야고보 사도는 믿음 자체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르는 삶(행위)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아무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은 창 15:5에서 하나님을 통해 선포된 약속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신뢰이다. 아브라함 자신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이룰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약속을 성취시키실 뿐이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신뢰를 두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진 약속의 성취는 그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믿음을 통해서 값없이 주어진 것이다.

󰃨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 믿음과 행위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구약에 기록된 또 하나의 구절을 극복해야 한다. 시편 106:31은 비느하스의 열정적인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이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으며 비스하스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스하스가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도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칭의와 구별이 되어야 한다. 비느하스의 행위는 앞에서 살펴본대로 믿음의 한 열매로서 주어진 결과로 보아야 한다(J. Murray). 경건치 아니한 자, 또는 할례받지 아니한 자들의 칭의를 논하는 문제에 있어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과 ‘믿음의 선한 열매로 인한 결과’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편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로기스데'(*)는 ‘로기조마이'(*)의 부정과거 수동태로서 (1) 의롭다 여김을 받은 수동적 행위를 의미하며 (2) ‘의롭게 만들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그렇게 평가해 주었다’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을 정도로 인격(person)에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의 신분적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았다는 뜻이다.

토 데 에르가조메노 호 미스도스 우 로기제타이 카타 카린 알라 카타 오페일레마

개역개정,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새번역,4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을 은혜로 주는 것으로 치지 않고 당연한 보수로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말성경,4 일하는 자에게는 품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않고 정당한 대가로 여겨지나

가톨릭성경,4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이 선물이 아니라 당연한 보수로 여겨집니다.

영어NIV,4 Now when a man works, his wages are not credited to him as a gift, but as an obligation.

영어NASB,4 Now to the one who works, his wage is not reckoned as a favor, but as what is due.

영어MSG,4 If you’re a hard worker and do a good job, you deserve your pay; we don’t call your wages a gift.

영어NRSV,4 Now to one who works, wages are not reckoned as a gift but as something due.

헬라어신약Stephanos,4 τω δε εργαζομενω ο μισθος ου λογιζεται κατα χαριν αλλα κατα το οφειλημα

라틴어Vulgate,4 ei autem qui operatur merces non inputatur secundum gratiam sed secundum debitum

히브리어Modern,4 הנה הפעל לא יחשב לו שכרו על פי החסד כי אם על פי החוב׃

성 경: [롬4:4]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일하는 자에게는 – 본 구절에 대해 혹자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열심으로 추구해야 할 선행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적을 내세워 자기 공로를 자랑하려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Calvin). 본절 전체가 일상적인 고용 관계에 대한 것을 비유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점에서는 1차적으로 삶을 위해 일하는 일꾼을 의미하며, 2차적으로는 다음절에 기록된 ‘일을 한 것이 없는 자’와 ‘믿는 자’ 등과 대조를 이루는 개념으로서 단지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을 의미한다.

󰃨 그 삯을 – 일꾼이 요구하는 ‘삯'(*, 미스도스)은 문자적으로 일해준 것에 대한 품삯을 의미하지만(눅 10:7;딤전 5:18) 은유적으로는 ‘보상'(reward)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외에도 신약에는 삯을 뜻하는 말로 ‘와소니온'(*)이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이는 눅 3:14에 병사의 급료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본서에서는 죄의 ‘삯'(6:23)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일꾼이 그의 일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당연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이 정당한 요구를 ‘빚'(*, 오페일레마)이라는 개념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용법이다.

󰃨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 ‘빚'(*, 오페일레마)은 ‘삯’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였으나 ‘은혜'(*, 카리스)와는 대조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빚’은 히브리어로 ‘맛솨아'(*)로서 주로 모세의 율법에 나타나는 바, 채무 관계를 지적하는 데 쓰여졌다(출 22:25). 무엇을 빌린 자는 반드시 갚아야 했으며 만일 채무자가 정당하게 갚지 못했을 경우 채권자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고 채무자로부터 생계 수단이 되는 어떠한 것들을 전당물로 잡을 수 있었다(신 24:6). 신약에서 ‘오페일레마’는 구약에서와 같이 사업적인 용어로 쓰이기도 하였으며(눅 7:41) 특히 비유 속에서는 채무자를 용서하거나 또는 죄인으로 취급할 때 쓰였다. 채무자는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옥에 갇혀 있어야 했으며(눅 12:57-59) 또한 송사(訟事)하는 자에 의하여 재판관에게 고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본절에서 일하는 자가 삯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채권자가 송사하는 것과 같이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빚을 탕감받은 자들이 탕감받은 것을 은혜로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일’은 자랑이며 동시에 정당한 자기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바울은 일하는 자들의 정당한 삯을 언급함으로써 다음절에 나오는 일하지 아니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용서와 칭의(稱義)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에게 있어서 행위의 결과는 일꾼이 일한 것에 상응한 대가를 받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설 만한 자리가 없다. 오로지 행위의 주체인 자신의 자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토 데 메 에르가조메노 피스튜온티 데 에피 톤 디카이운타 톤 아세베 로기제타이 헤 피스티스 아우투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개역개정,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새번역,5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비록 아무 공로가 없어도, 그의 믿음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우리말성경,5 일하지 않고도 경건치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집니다.

가톨릭성경,5 그러나 일을 하지 않더라도 불경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받습니다.

영어NIV,5 However, to the man who does not work but trusts God who justifies the wicked, his faith is credited as righteousness.

영어NASB,5 But to the one who does not work, but believes in Him who justifies the ungodly, his faith is reckoned as righteousness,

영어MSG,5 But if you see that the job is too big for you, that it’s something only God can do, and you trust him to do it–you could never do it for yourself no matter how hard and long you worked–well, that trusting-him-to-do-it is what gets you set right with God, by God. Sheer gift.

영어NRSV,5 But to one who without works trusts him who justifies the ungodly, such faith is reckoned as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5 τω δε μη εργαζομενω πιστευοντι δε επι τον δικαιουντα τον ασεβη λογιζεται η πιστις αυτου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라틴어Vulgate,5 ei vero qui non operatur credenti autem in eum qui iustificat impium reputatur fides eius ad iustitiam

히브리어Modern,5 אבל לאשר איננו פעל כי אם מאמין במצדיק את הרשע אמונתו תחשב לו לצדקה׃

성 경: [롬4:5]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일을 아니할지라도 – 삯을 위해서 일하지 않은 사람, 즉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가 아니라 의를 얻기 위해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이 본절에서 의를 얻기 위해 아무 행위도 하지 않고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계속 진술했듯이 오직 하나님은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신다. 4절과 비교해 볼 때, 이 믿음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과 관련된다(엡 2:8).

󰃨 경건치 아니한 자 – 이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 애쓰지 않는 자와 동의어지만 죄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그보다 더욱 강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용어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 주고 있다(Murray).

󰃨 의롭다 하시는 – ‘의로 여기시나니'(*, 톤 디카이운타)라는 현재 분사형 포현은 그 시제에 있어서 ‘믿는 자'(*, 피스튜온티)와 일치하는 것으로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이 철저하게 믿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경건치 아니한 자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에게도 임한다는 구원의 진리를 적용한 것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적용되었던 원리와도 일치한다.

카다페르 카이 다윋 레게이 톤 마카리스몬 투 안드로푸 호 호 데오스 로기제타이 디카이오쉬넨 코리스 에르곤

개역개정,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새번역,6 그래서 행한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사람이 받을 복을 다윗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6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사람의 복에 대해 다윗도 이렇게 말합니다.

가톨릭성경,6 그래서 다윗도 하느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영어NIV,6 David says the same thing when he speaks of the blessedness of the man to whom God credits righteousness apart from works:

영어NASB,6 just as David also speaks of the blessing upon the man to whom God reckons righteousness apart from works:

영어MSG,6 David confirms this way of looking at it, saying that the one who trusts God to do the putting-everything-right without insisting on having a say in it is one fortunate man:

영어NRSV,6 So also David speaks of the blessedness of those to whom God reckons righteousness apart from works:

헬라어신약Stephanos,6 καθαπερ και δαβιδ λεγει τον μακαρισμον του ανθρωπου ω ο θεος λογιζεται δικαιοσυνην χωρις εργων

라틴어Vulgate,6 sicut et David dicit beatitudinem hominis cui Deus accepto fert iustitiam sine operibus

히브리어Modern,6 כאשר גם דוד מאשר את האדם אשר האלהים יחשב לו צדקה בלא מעשים באמרו׃

성 경: [롬4:6]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일한 것이 없이 – 이 말은 원문상으로 ‘행위와 상관없이'(*, 코리스 에르곤)라는 의미를 지닌다(without works, KJV). 바울이 거듭 강조하여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의 행위 내지 노력과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 ‘행복’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카리스몬’ (*)은 ‘축복’이나 ‘행복’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특별히 이 단어는 단순한 ‘축복’이나 ‘행복’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에 강조점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되다고 선포되는 것’이라고 의역하기도 했다(Black). 이 해석을 따를 때, 본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이 받은 바 축복에 대한 다윗이 선포하기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받은 축복’이라는 구절은 그 속에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내포하며 동시에 믿음으로 참여한 모든 자들에게 임할 동일한 축복을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카리오이 혼 아페데산 하이 아노미아이 카이 혼 에페칼뤼프데산 하이 하마르티아이

개역개정,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새번역,7 ㉣”하나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복이 있다. / ㉣시 32:1; 2

우리말성경,7 “주께서 불법을 용서하시고 죄를 덮어 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고

가톨릭성경,7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영어NIV,7 “Blessed are they whose transgressions are forgiven, whose sins are covered.

영어NASB,7 “BLESSED ARE THOSE WHOSE LAWLESS DEEDS HAVE BEEN FORGIVEN, AND WHOSE SINS HAVE BEEN COVERED.

영어MSG,7 Fortunate those whose crimes are carted off, whose sins are wiped clean from the slate.

영어NRSV,7 “Blessed are those whose iniquities are forgiven, and whose sins are covered;

헬라어신약Stephanos,7 μακαριοι ων αφεθησαν αι ανομιαι και ων επεκαλυφθησαν αι αμαρτιαι

라틴어Vulgate,7 beati quorum remissae sunt iniquitates et quorum tecta sunt peccata

히브리어Modern,7 אשרי נשוי פשע כסוי חטאה׃

성 경: [롬4:7]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그 불법…복이 있고 – ‘불법’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하이 아노미아이'(*)이다. 이 말은 ‘율법'(*, 노모스)이란 말에 부정 접두어 ‘아’ (*)가 첨가되어 이루어진 파생어이다. 포괄적으로는 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나 보다 정확하게는 ‘율법을 어긴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율법을 어긴 행위’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죄로 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서 ‘불법’과 ‘죄’는 동의어의 반복으로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하심을 받고'(*, 아페데산)라는 동사와 ‘가리우심을 받고'(*, 에페칼뤼프데산)라는 동사 역시도 동의어의 반복이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시문학에서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사용하여 앞절과 뒷절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뜻을 강조하고 그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구체화시키곤 하였다(시 6:1). 한편 ‘아페데산’과 ‘에페갈뤼프데산’은 둘다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축복의 상태를 나타낸다.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거나 가리움 받는 것은 이미 과거에 성취되었으므로 그에게 남은 것을 성취된 구원 속에서 누려야 할 축복 외에 아무것도 없다.

마카리오스 아네르 후 우 메 로기세타이 퀴리오스 하마르티안

개역개정,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새번역,8 주님께서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실 사람은 복이 있다.”

우리말성경,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않으실 사람은 복이 있다.” 시32:1-2

가톨릭성경,8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

영어NIV,8 Blessed is the man whose sin the Lord will never count against him.”

영어NASB,8 “BLESSED IS THE MAN WHOSE SIN THE LORD WILL NOT TAKE INTO ACCOUNT.”

영어MSG,8 Fortunate the person against whom the Lord does not keep score.

영어NRSV,8 blessed is the one against whom the Lord will not reckon sin.”

헬라어신약Stephanos,8 μακαριος ανηρ ω ου μη λογισηται κυριος αμαρτιαν

라틴어Vulgate,8 beatus vir cui non inputabit Dominus peccatum

히브리어Modern,8 אשרי אדם לא יחשב יהוה לו עון׃

성 경: [롬4:8]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 – 본절은 7절의 중복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유(私有)하시는 은혜를 보다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앞절에서는 ‘불법이 사함을 받는 것’, ‘죄가 가리움을 받는 것’ 정도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규정되는 ‘죄’조차 없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바울이 이신 칭의에 대해 설명할 때에 본 구절은 결정적인 논리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할 때 논리상 믿음이 의로 여겨지는 중간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 논리의 틈을 본절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 의로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 사람이 행한 죄악이 어떻게 여겨지게 되는 가에 대해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7절과 본절의 인용 구절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 마카리스모스 운 후토스 에피 텐 페리토멘 에 카이 에피 텐 아크로뷔스티안 레고멘 가르 엘로기스데 토 아브라암 헤 피스티스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개역개정,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새번역,9 그러면 이러한 복은 할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내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리는 것입니까? 우리는 앞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9 그러면 이 복은 할례받은 사람에게만 내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할례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라고 했습니다.

가톨릭성경,9 그렇다면 이 행복이 할례 받은 이들에게만 해당됩니까? 아니면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도 해당됩니까? 우리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고 말합니다.

영어NIV,9 Is this blessedness only for the circumcised, or also for the uncircumcised? We have been saying that Abraham’s faith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영어NASB,9 Is this blessing then upon the circumcised, or upon the uncircumcised also? For we say, “FAITH WAS RECKONED TO ABRAHAM AS RIGHTEOUSNESS.”

영어MSG,9 Do you think for a minute that this blessing is only pronounced over those of us who keep our religious ways and are circumcised? Or do you think it possible that the blessing could be given to those who never even heard of our ways, who were never brought up in the disciplines of God? We all agree, don’t we, that it was by embracing what God did for him that Abraham was declared fit before God?

영어NRSV,9 Is this blessedness, then, pronounced only on the circumcised, or also on the uncircumcised? We say, “Faith was reckoned to Abraham as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9 ο μακαρισμος ουν ουτος επι την περιτομην η και επι την ακροβυστιαν λεγομεν γαρ οτι ελογισθη τω αβρααμ η πιστις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라틴어Vulgate,9 beatitudo ergo haec in circumcisione an etiam in praeputio dicimus enim quia reputata est Abrahae fides ad iustitiam

히브리어Modern,9 ועתה האשור הזה העל המילה הוא אם גם על הערלה הלא אמרנו כי לאברהם נחשבה אמונתו לצדקה׃

성 경: [롬4:9]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할례의 의미]

󰃨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 바울은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범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지금 예로 들은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므로 무할례자된 이방인이 이 축복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문제가 유대인에 의해 제기될 수 있다. 그래서 행위에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할례자인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본절의 질문을 제기했다. 할례는 율법과 더불어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보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바울은 본절에서 할례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바울 논지의 핵심은 비록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중요시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칭의의 축복에 할례가 전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J. Murray). 바울은 이러한 논지를 본절의 질문을 제기함으로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 3절에서 언급했던 구절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3절에서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게 되었던 시점으로 화제를 전환하기 위하여 반복되는 것이다.

포스 운 엘로기스데 엔 페리토메 온티 에 엔 아크로뷔스티아 우크 엔 페리토메 알 엔 아크로뷔스티아

개역개정,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새번역,10 그러면 어떻게 아브라함이 그러한 인정을 받았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기 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할례를 받은 후에 된 일이 아니라, 할례를 받기 전에 된 일입니다.

우리말성경,10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의로 여겨졌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때입니까? 아니면 할례를 받지 않은 때입니까? 할례를 받은 때가 아니라 할례를 받지 않은 때입니다.

가톨릭성경,10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그러한 인정을 받았습니까? 할례를 받은 다음입니까? 아니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입니까? 할례 받은 다음이 아니라 할례 받지 않았을 때입니다.

영어NIV,10 Under what circumstances was it credited? Was it after he was circumcised, or before? It was not after, but before!

영어NASB,10 How then was it reckoned? While he was circumcised, or uncircumcised? Not while circumcised, but while uncircumcised;

영어MSG,10 Now think: Was that declaration made before or after he was marked by the covenant rite of circumcision? That’s right, before he was marked.

영어NRSV,10 How then was it reckoned to him? Was it before or after he had been circumcised? It was not after, but before he was circumcised.

헬라어신약Stephanos,10 πως ουν ελογισθη εν περιτομη οντι η εν ακροβυστια ουκ εν περιτομη αλλ εν ακροβυστια

라틴어Vulgate,10 quomodo ergo reputata est in circumcisione an in praeputio non in circumcisione sed in praeputio

히브리어Modern,10 ואין נחשבה לו אם בהיותו מהול או בעודנו ערל הן לא בהיותו מהול כי אם בערלתו׃

성 경: [롬4:10]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할례의 의미]

󰃨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포스 엘로기스 데'(*)인데, 이를 직역하면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뇨 ?’가 된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해서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느뇨 ?’라는 질문이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답이 의롭다고 여겨지게 된 시점(時點)에 관한 것이므로 ‘어떻게’보다는 ‘언제’라고 번역하는 편이 적절하다.

󰃨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할례 의식을 한 때로부터 20여년 전이었다(창 15:6;17:23, 24). 이 대답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할례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바울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행 15:1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언급되어 있듯이 초대 교회 시대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들이 받은 바 우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예로 베드로는 이방인들(무할례자들)과 함께 애찬을 나누다가 할례자들이 들어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갈 2:12). 이처럼 초대 교회 당시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에 대하여 구별하는 관습이 남아 있었고, 그로 인해 복음의 본질이 변질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의(義)의 전가(轉嫁)가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팽배되어 있는 그러한 분위기에 대하여 명백한 복음적인 해결책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카이 세메이온 엘라벤 페리토메스 스프라기다 테스 디카이오쉬네스 테스 피스테오스 테스 엔 테 아크로뷔스티아 에이스 토 에이나이 아우톤 파테라 판톤 톤 피스튜온톤 디 아크로뷔스티아스 에이스 토 로기스데나이 카이 아우토이스 텐 디카이오쉬넨

개역개정,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새번역,11 아브라함이 할례라는 표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얻은 믿음의 의를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으니, 이것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도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말성경,11 그가 할례의 표식을 받은 것은 할례를 받지 않은 때에 얻은 믿음의 의를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할례받지 않은 사람으로서 믿는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 돼 그들도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11 그는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에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확증하는 것으로서 할례라는 표징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움을 인정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영어NIV,11 And he received the sign of circumcision, a seal of the righteousness that he had by faith while he was still uncircumcised. So then, he is the father of all who believe but have not been circumcised, in order that righteousness might be credited to them.

영어NASB,11 and he received the sign of circumcision, a seal of the righteousness of the faith which he had while uncircumcised, that he might be the father of all who believe without being circumcised, that righteousness might be reckoned to them,

영어MSG,11 That means that he underwent circumcision as evidence and confirmation of what God had done long before to bring him into this acceptable standing with himself, an act of God he had embraced with his whole life.

영어NRSV,11 He received the sign of circumcision as a seal of the righteousness that he had by faith while he was still uncircumcised. The purpose was to make him the ancestor of all who believe without being circumcised and who thus have righteousness reckoned to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11 και σημειον ελαβεν περιτομης σφραγιδα της δικαιοσυνης της πιστεως της εν τη ακροβυστια εις το ειναι αυτον πατερα παντων των πιστευοντων δι ακροβυστιας εις το λογισθηναι και αυτοις την δικαιοσυνην

라틴어Vulgate,11 et signum accepit circumcisionis signaculum iustitiae fidei quae est in praeputio ut sit pater omnium credentium per praeputium ut reputetur et illis ad iustitiam

히브리어Modern,11 ואות המילה קבל לחותם צדקת האמונה אשר היתה לו בערלתו להיות לאב לכל המאמינים והם ערלים למען אף להם תחשב הצדקה׃

성 경: [롬4:11]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할례의 의미]

󰃨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 본절에서 바울은 그동안 문제시되었던 ‘할례’의 의미에 대해서 진술한다. 유대인들은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유일한 증표로 믿고 있었으나, 바울은 그들의 신학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창17:10, 11에는 할례가 ‘언약의 표징'(*, 세메이온 디아데케스)으로 언급되어 있다. ‘언약의 표징’이라는 것은 언약을 맺은 것에 대한 증거로 나타내 보이는 표시(sign)이다. 그리고 구약 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언약을 맺는 것은 쌍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것이었다(Robertson). 그러면서도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하여 취하신 은혜와 사랑의 증표이며 약속이었다. 따라서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할례 이전에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대한 증거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이 할례에 내포된 은혜의 비밀을 간과하고 겉모양만 취하여 그것이 매우 귀중한 것처럼 자랑하였다.

󰃨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 ‘인'(*, 스프라기스)은 신약에서 책을 봉(封)하거나(계 5:1), 도장 찍는 것과 같은 증표(딤후 2:19;계 7:2)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모든 일을 결론짓는 마무리를 나타낼 때나 또한 어떠한 것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의 무덤을 봉인하였다는 것도 그의 죽음이 확인되었다는 뜻이다. 예수의 부활이 확실한 것은 세상이 인봉을 통하여 그의 죽음을 확고하게 증명했기 때문이다(마 27:65). 이와 같이 인(印)이라는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진실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특히 본절에서는 이미 무할례시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실을 확인하는 외적 보증의 의미로 이 용어가 쓰여졌다. 다시 말해서 할례는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의의 수단도 아니며 단지 이미 의롭게 된 것을 입증하는 표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표적은 성령의 오심(엡 1:13;4:30)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함께 살아났다는 사실을 예표하는 세례라고 할 수 있다.

󰃨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 바르트(K. Barth)는 본절을 주석하면서 원(元)역사계와 역사계를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즉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원역사적인 사실의 믿음의 의가 역사계에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사건은 원역사적인 것 속에 파묻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암시적으로 율법 폐기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율법은 원역사적인 하나님의 의가 현 역사 속에서 단순히 나타나진 것에 불과할 뿐 그 이상의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이 의의 전달 내지 계시로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3:31). 성도의 신앙은 히 11:1에 언급된 바와 같이 원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실재가 동시적으로 의미를 지닐 때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된다. 예수의 천국 비유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도 원역사적인 실재임과 동시에 현 역사적인 실재이다(Ridderbos). 할례는 무할례시에 주어진 믿음의 의(원역사적인 것)가 현 역사 속에서 공표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고로 구약 시대에는 할례가 의미있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그 표는 단지 그리스도를 부각시키고 확증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따라서 할례 자체가 전혀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같이 그리스도 중심의 예언적 사건으로 그 의미는 항상 남아 있게 된다.

카이 파테라 페리토메스 토이스 우크 에크 페리토메스 모논 알라 카이 토이스 스토이쿠신 토이스 이크네신 테스 엔 아크로뷔스티아 피스테오스 투 파트로스 헤몬 아브라암

개역개정,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새번역,12 또 그는 할례를 받은 사람의 조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걸어간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말성경,12 그는 또한 할례받은 사람의 조상이 됐습니다. 곧 할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은 때에 가졌던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의 조상이 됐습니다.

가톨릭성경,12 또한 아브라함은 할례 받은 이들의 조상입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에 걸어간 그 믿음의 발자취도 따라 걸었습니다.

영어NIV,12 And he is also the father of the circumcised who not only are circumcised but who also walk in the footsteps of the faith that our father Abraham had before he was circumcised.

영어NASB,12 and the father of circumcision to those who not only are of the circumcision, but who also follow in the steps of the faith of our father Abraham which he had while uncircumcised.

영어MSG,12 And it means further that Abraham is father of all people who embrace what God does for them while they are still on the “outs” with God, as yet unidentified as God’s, in an “uncircumcised” condition. It is precisely these people in this condition who are called “set right by God and with God”! Abraham is also, of course, father of those who have undergone the religious rite of circumcision not just because of the ritual but because they were willing to live in the risky faith-embrace of God’s action for them, the way Abraham lived long before he was marked by circumcision.

영어NRSV,12 and likewise the ancestor of the circumcised who are not only circumcised but who also follow the example of the faith that our ancestor Abraham had before he was circumcised.

헬라어신약Stephanos,12 και πατερα περιτομης τοις ουκ εκ περιτομης μονον αλλα και τοις στοιχουσιν τοις ιχνεσιν της εν τη ακροβυστια πιστεως του πατρος ημων αβρααμ

라틴어Vulgate,12 et sit pater circumcisionis non his tantum qui sunt ex circumcisione sed et his qui sectantur vestigia quae est in praeputio fidei patris nostri Abrahae

히브리어Modern,12 ולהיות לאב גם למולים אך לא לאשר הם נמולים לבד כי אם גם הלכים בעקבות האמונה שהיתה לו לאברהם בעודנו בערלתו׃

성 경: [롬4:12]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할례의 의미]

󰃨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것은 (1) 그가 처음으로 할례를 받아 혈통으로 자기에게서 난 자들에게 그 할례 의식을 전했으며, (2) 그 할례를 전할 때 할례만이 아니라 자기가 무할례시에 받았던 ‘믿음의 의’에 대한 것도 동시에 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1절만 떼어서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단지 무할례자의 조상이 되어 할례받은 유대인의 조상은 되지 않는다는 오해가 발생될 수 있다. 그래서 본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도 되는 이유를 설명하게 된 것이다.

󰃨 무할례 시에 가졌던 – 본절에서는 ‘할례받을 자들’과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 할례받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없는 자는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듯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지 않는 이방인 무할례자들도 당연히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할례 시’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인’이다. 따라서 무할례든 할례이든 그것이 결코 구원에 있어서 유리하거나 불리한 조건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1)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며 (2) 또한 그 할례가 믿음으로 받았던 의를 ‘인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J. Murray). 바울이 할례 자체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사실속에 잘 나타나며(행 16:3) 또한 할례를 믿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아니한 사건 속에 잘 나타난다(갈 2:3).

󰃨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 – 이 부류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다 포함된다. ‘자취’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크네신'(*)은 신약 성경에서 ‘보조'(步調;고후 12:18) 또는 ‘본이 될 만한 모범'(벧전 2:21) 등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의 ‘흔적’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였다(갈 6:17). 본절에서 ‘믿음의 자취’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던 삶의 흔적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요 8:39)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걸었던 그 신앙의 노선을 따라가라’는 의미이다. 이 가르침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됨을 시사한다. 한편 ‘좇는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토이케오'(*)는 ‘대오(隊伍)를 이루어’ 또는 ‘줄을 맞추어 행진한다’라는 뜻을 가진 군사 용어로서 ‘일관성 있는 행함’의 의미로 번역되었다(갈 5:25;빌 3:16).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르는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고 일관성 있게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 가르 디아 노무 헤 에팡겔리아 토 아브라암 에 토 스페르마티 아우투 토 클레로노몬 아우톤 에이나이 코스무 알라 디아 디카이오쉬네스 피스테오스

개역개정,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새번역,13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3 아브라함이나 그의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약속은 율법으로 인해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인해 된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영어NIV,13 It was not through law that Abraham and his offspring received the promise that he would be heir of the world, but through the righteousness that comes by faith.

영어NASB,13 For the promise to Abraham or to his descendants that he would be heir of the world was not through the Law, but through the righteousness of faith.

영어MSG,13 That famous promise God gave Abraham–that he and his children would possess the earth–was not given because of something Abraham did or would do. It was based on God’s decision to put everything together for him, which Abraham then entered when he believed.

영어NRSV,13 For the promise that he would inherit the world did not come to Abraham or to his descendants through the law but through the righteousness of faith.

헬라어신약Stephanos,13 ου γαρ δια νομου η επαγγελια τω αβρααμ η τω σπερματι αυτου το κληρονομον αυτον ειναι του κοσμου αλλα δια δικαιοσυνης πιστεως

라틴어Vulgate,13 non enim per legem promissio Abrahae aut semini eius ut heres esset mundi sed per iustitiam fidei

히브리어Modern,13 כי לא על ידי תורה באה ההבטחה לאברהם ולזרעו להיותו ירש העולם כי אם על ידי צדקת האמונה׃

성 경: [롬4:13]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 – 이 약속은 창 17:4-8에 언급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율법보다 430년 앞서 주어졌으며, 후에 생긴 율법이 이미 주어진 언약을 취소할 수 없었다(갈 3:17).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약속은 율법에 선행하며, 약속의 원리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원리는 바울이 본절에서 진술하고 있는 바대로 ‘믿음의 의’뿐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이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세상의 후사’란 일차적으로 창 17:8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이 유업으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창 17:4에 언급된 대로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이므로, 그의 신앙의 자취를 좇는 모든 민족이 후사가 되며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갈 3:29). 따라서 본절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하여 모든 땅의 족속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보증'(Hendriksen)과 관련된 것임이 분명하다.

에이 가르 호이 에크 노무 클레로노모이 케케노타이 헤 티스티스 카이 카테르게타이 헤 에팡겔리아

개역개정,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새번역,14 율법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약속은 헛된 것이 됩니다.

우리말성경,14 만일 율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효가 되고 약속은 파기됐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4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상속자라면, 믿음은 의미가 없어지고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영어NIV,14 For if those who live by law are heirs, faith has no value and the promise is worthless,

영어NASB,14 For if those who are of the Law are heirs, faith is made void and the promise is nullified;

영어MSG,14 If those who get what God gives them only get it by doing everything they are told to do and filling out all the right forms properly signed, that eliminates personal trust completely and turns the promise into an ironclad contract! That’s not a holy promise; that’s a business deal.

영어NRSV,14 If it is the adherents of the law who are to be the heirs, faith is null and the promise is void.

헬라어신약Stephanos,14 ει γαρ οι εκ νομου κληρονομοι κεκενωται η πιστις και κατηργηται η επαγγελια

라틴어Vulgate,14 si enim qui ex lege heredes sunt exinanita est fides abolita est promissio

히브리어Modern,14 כי אלו לבני התורה הירשה האמונה לריק תהיה וההבטחה בטלה׃

성 경: [롬4:14]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율법에 속한 자들 –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 하는 자들’ 또는 ‘율법의 체계에 종속된 자들’을 의미하며 바울의 또다른 표현에 의하면 ‘율법의 종노릇하는 자들’로서 종의 멍에를 멘 자들을 뜻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도 오직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만 성취된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펠라기우스(Pelagius)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Roman Chatholic Church)는 하나님의 약속이 선행을 통해서 성취된다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만들었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이며(갈 1:7), 이렇게 전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갈 1:8, 9).

󰃨 만일…후사이면 – ‘후사’를 뜻하는 ‘클레로노모스'(*)는 ‘상속자’라는 의미로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어진 것을 물려받을 자를 뜻한다. 구약의 개념으로 상속자가 얻을 것은 (1) 약속의 땅 가나안(창 12:7;13:14, 15), (2) 믿음으로 자손된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후손을 얻게 될 하나님의 축복, (3) 한 후손 메시야에 의한 세계 통치를 의미한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의 상속자라면 믿음은 의미를 잃게 되고 약속된 언약은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세상의 상속자라는 주장을 한다(요 8:39). 한편 본절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과 믿음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약속으로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믿음에 의하여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를 두고 바울이 시작과 성취 중간에 들어온 율법의 무용성(無用性)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5:20). 그러나 바울이 의도한 요점은 율법 무용론이 아니다. 다만 바울이 말한 것은 중간에 끼어 들어온 율법이 앞서 있었던 약속을 변경시킬 수 없으며 율법에 의하여 후사가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 ‘헛것이 되고'(*, 케케노타이)라는 것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원문상 ‘그 속의 내용이 없어졌다’라는 뜻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믿음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 내용 없는 것으로 변해 버린다면 약속도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는 약속은 효력을 발생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카테르게타이, ‘폐하여졌다’) 또한 법적 신실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잃게 될 것이다. 만약 율법의 행위로 약속이 보증된다면 율법 이전에 이미 보증받았던 아브라함이 약속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그 약속에 의하여 성취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좇는 모든 믿음은 오히려 율법의 종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율법으로만 약속이 보증되고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면 이스라엘의 신앙은 여타의 윤리 종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호 가르 노모스 오르겐 카테르가제타이 후 데 우크 에스틴 노모스 우데 파라바시스

개역개정,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새번역,15 율법은 진노를 불러옵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습니다.

우리말성경,15 왜냐하면 율법은 진노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함도 없습니다.

가톨릭성경,15 율법은 진노를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습니다.

영어NIV,15 because law brings wrath. And where there is no law there is no transgression.

영어NASB,15 for the Law brings about wrath, but where there is no law, neither is there violation.

영어MSG,15 A contract drawn up by a hard-nosed lawyer and with plenty of fine print only makes sure that you will never be able to collect. But if there is no contract in the first place, simply a promise–and God’s promise at that–you can’t break it.

영어NRSV,15 For the law brings wrath; but where there is no law, neither is there violation.

헬라어신약Stephanos,15 ο γαρ νομος οργην κατεργαζεται ου γαρ ουκ εστιν νομος ουδε παραβασις

라틴어Vulgate,15 lex enim iram operatur ubi enim non est lex nec praevaricatio

히브리어Modern,15 כי התורה מביאה קצף כי באשר אין תורה גם אין שם עברה׃

성 경: [롬4:15]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 율법은 행위의 완전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고 저주를 선포한다(신 28:58ff.). 따라서 인간 편에서 볼 때 율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죄와 저주의 근거로서의 기능만을 가진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받은 모세의 직분을 ‘정죄(定罪)의 직분'(고후 3:9)이라고 진술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율법의 저주’를 담당한 것이라고 선포했다(갈 3:13).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인간들을 위해 의를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수 없다.

󰃨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 쉬운 예로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의 법이 없다면 그 나라에 사는 백성은 아무런 범죄자가 되지 않는다. 오직 범죄자가 범죄자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은 그 나라의 법률에 따라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법률이 있음으로써 범법자는 죄인으로 정죄받고 심판을 받는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율법에 따른 정죄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믿음의 원리에 따라서만 살았다. 또한 노아는 아브라함처럼 할례에 대한 규례도 받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인’으로 인정되었다(창 6:9). 그가 의인으로 또한 완전한 자로 칭함을 받은 것은 율법적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께 정죄를 받은 것(창 6:5)은 율법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디아 투토 에크 피스테오스 히나 카타 카린 에이스 토 에이나이 베바이안 텐 에팡겔리안 판티 토 스페르마티 우 토 에크 투 노무 모논 알라 카이 토 에크 피스테오스 아브라암 호스 에스틴 파테르 판톤 헤몬

개역개정,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새번역,16 이런 까닭에, 이 약속은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은혜로 주셔서 이것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도, 곧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보장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우리말성경,16 그러므로 약속은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 곧 율법을 따라 사는 사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도 은혜로 이 약속을 보장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가톨릭성경,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영어NIV,16 Therefore, the promise comes by faith, so that it may be by grace and may be guaranteed to all Abraham’s offspring–not only to those who are of the law but also to those who are of the faith of Abraham. He is the father of us all.

영어NASB,16 For this reason it is by faith, that it might be in accordance with grace, in order that the promise may be certain to all the descendants, not only to those who are of the Law, but also to those who are of the faith of Abraham, who is the father of us all,

영어MSG,16 This is why the fulfillment of God’s promise depends entirely on trusting God and his way, and then simply embracing him and what he does. God’s promise arrives as pure gift. That’s the only way everyone can be sure to get in on it, those who keep the religious traditions and those who have never heard of them. For Abraham is father of us all. He is not our racial father–that’s reading the story backwards. He is our faith father.

영어NRSV,16 For this reason it depends on faith, in order that the promise may rest on grace and be guaranteed to all his descendants, not only to the adherents of the law but also to those who share the faith of Abraham (for he is the father of all of us,

헬라어신약Stephanos,16 δια τουτο εκ πιστεως ινα κατα χαριν εις το ειναι βεβαιαν την επαγγελιαν παντι τω σπερματι ου τω εκ του νομου μονον αλλα και τω εκ πιστεως αβρααμ ος εστιν πατηρ παντων ημων

라틴어Vulgate,16 ideo ex fide ut secundum gratiam ut firma sit promissio omni semini non ei qui ex lege est solum sed et ei qui ex fide est Abrahae qui est pater omnium nostrum

히브리어Modern,16 על כן מתוך אמונה למען לפי חסד למען תחיה ההבטחה קימת לכל זרעו לא לבני התורה לבדם כי גם לבני אמונת אברהם אשר הוא אב לכלנו׃

성 경: [롬4:16]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 ‘후사가 되리라’는 약속은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믿으으로'(*, 에크 피스테오스)라는 말은 ‘율법을 통해서'(*, 디아 노무)라는 개념과 반대적인 의미이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라는 말은 약속이라는 개념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약속된 그리스도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원문이 ‘수단과 방법’을 뜻하는 전치사 ‘디아'(*)를 사용하지 않고 ‘에크'(*)를 사용한 것도 믿음이라는 것을 수단과 방법적인 것으로 전락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약속이 내용이며 동시에 약속 그 자체이다. 따라서 믿음은 약속이 성취된 곳에 나타나는 결과이며 동시에 약속이 하나님에 의하여 성취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본절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이 은혜로 말미암아 성취되도록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보다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은혜’라는 개념이다. 믿음에 의하여 은혜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하여 믿음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1) 믿는 자로 하여금 믿음의 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며 (2) 신앙의 확실성을 갖게 하며 (3)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신실하심을 선포하심으로써 믿는 자들의 의를 성취하도록 하는 방편이며, 또한 궁극적인 의의 보증이다.

󰃨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것이기에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될 수 없다(15절).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유효하며, 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고 보증해 준다.

󰃨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 바울은 ‘그 모든 후손’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를 ‘율법에 속한 자’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라고 했다. 통상적으로 ‘율법에 속한 자’는 단순히 유대인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14절). 이런 사실 때문에 헨드릭슨(Hendriksen)은 ‘율법에 속한 자’가 단지 ‘유대인’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반부에 언급된 ‘그 모든 후손’ 곧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받은 ‘그 모든 후손’에는 분명히 ‘믿지 않는 유대인’은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율법에 속한 자’는 율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유대인’을 의미하며,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이방인’을 가리킨다(12절 주석 참조). 이에 대해서는 곧이어 언급되는 하반절에 의해 더욱 지지를 받는다.

󰃨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 바울이 ‘우리’라고 표현한 것은 믿음 안에 있는 ‘신앙의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이 신앙의 공동체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오직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모든 족속이 포함된다. 지금 바울이 논하고 있는 것은 혈통적인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한 것이다. 14절에서 바울은 혈통적으로만 ‘율법에 속한 자들’은 후사가 될 수 없다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실 수 있는 후사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자들뿐이다.

카도스 게그랖타이 호티 파테라 폴론 에드논 테데이카 세 카테난티 후 에피스튜센 데우 투 조오포이운토스 투스 네크루스 카이 칼룬토스 타 메 온타 호스 온타

개역개정,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새번역,17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함과 같습니다. 이 약속은, 그가 믿은 하나님,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것입니다. / ㉤창 17:5

우리말성경,17 기록되기를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믿은 하나님, 곧 죽은 사람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조상이 됐습니다. 창17:5

가톨릭성경,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 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영어NIV,17 As it is written: “I have made you a father of many nations.” He is our father in the sight of God, in whom he believed–the God who gives life to the dead and calls things that are not as though they were.

영어NASB,17 (as it is written, “A FATHER OF MANY NATIONS HAVE I MADE YOU”) in the sight of Him whom he believed, even God, who gives life to the dead and calls into being that which does not exist.

영어MSG,17 We call Abraham “father” not because he got God’s attention by living like a saint, but because God made something out of Abraham when he was a nobody. Isn’t that what we’ve always read in Scripture, God saying to Abraham, “I set you up as father of many peoples”? Abraham was first named “father” and then became a father because he dared to trust God to do what only God could do: raise the dead to life, with a word make something out of nothing.

영어NRSV,17 as it is written, “I have made you the father of many nations”)–in the presence of the God in whom he believed, who gives life to the dead and calls into existence the things that do not exist.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θως γεγραπται οτι πατερα πολλων εθνων τεθεικα σε κατεναντι ου επιστευσεν θεου του ζωοποιουντος τους νεκρους και καλουντος τα μη οντα ως οντα

라틴어Vulgate,17 sicut scriptum est quia patrem multarum gentium posui te ante Deum cui credidit qui vivificat mortuos et vocat quae non sunt tamquam ea quae sunt

히브리어Modern,17 ככתוב כי אב המון גוים נתתיך והוא האמין בהביט אל אל המחיה את המתים והקורא את אשר לא היה כמו הוה׃

성 경: [롬4:17]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 바울이 여기서 창 17:5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아브라함이 혈통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는 이유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를 위한 것이다. ‘많은 민족’은 문자적으로 ‘혈연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영적으로 ‘믿음의 원리를 좇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모든 믿는 자들의 새로운 공동체’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이유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후사에게 주어진 특권과 유익을 함께 소유하는 공동체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됨으로 말미암아 인종적 보편성이 성취되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표현은 ‘무할례자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과 ‘할례자의 조상’이란 표현을 포괄하는 보다 광범위한 표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는 동등한 부르심을 받았음을 시사하며 또한 세계 도처의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름으로 후사가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강조한다(J. Murray).

󰃨 그의 믿은 바 하나님 –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을 정의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관(神觀)을 정의하며 동시에 모든 믿는 자들의 신관을 정의한다. 이는 두 가지의 사실을 전제로 하는데, (1)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며 (2)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는(16절) 사실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정의한 후에 그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확고히 하신 ‘아브라함의 조상됨’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의 조상으로 삼으신 하나님 곧 예수를 죽인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 죽은 자를 살리시며 – 이 구절은 살아 역동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해주며 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엡 1:20). 본절에서 그 의미는 크게 두 가지를 포함한다. (1) 이삭의 출생이며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끝가지 기다렸던 역사적 사건을 상기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유추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출생을 기다리며 장차 있을 메시야의 세계와 그의 승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Lenski, J. Murray, E.F. Harrison). 사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흔히 부르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었으나 바울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적용함으로써(24절)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과 또한 그것을 믿는 자들을 의로 여기신다는 두 가지의 핵심적 진리를 동시에 증거하였다.

󰃨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 – 이 구절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특성을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이시며(마 3:9;눅 3:8) 그 어떠한 인간의 공로나 반항에도 구애받지 아니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절대 주권의 능력을 행사하는 분이시다. 그분 앞에서는 아브라함의 늙은 육체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죄인의 추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가능성 속에서 역사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미리 정하신 작정과 통치 속에서 결정해 놓으신 것들을 성취해 나아가신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후손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성취될 것을 확신하였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성취된 것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확신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으며 본절과 같이 하나님을 정의할 수 있는 신앙이다.

호스 파르 엘피다 엪 엘피디 에피스튜센 에이스 토 게네스다이 아우톤 파테라 폴론 에드논 카타 토 에이레메논 후토스 에스타이 토 스페르마 수

개역개정,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새번역,18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 ㉥창 15:5

우리말성경,18 아브라함은 소망이 없는 가운데서도 소망을 갖고 믿었습니다. 이는 “네 후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창15:5

가톨릭성경,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 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영어NIV,18 Against all hope, Abraham in hope believed and so became the father of many nations, just as it had been said to him, “So shall your offspring be.”

영어NASB,18 In hope against hope he believed, in order that he might become a father of many nations, according to that which had been spoken, “SO SHALL YOUR DESCENDANTS BE.”

영어MSG,18 When everything was hopeless, Abraham believed anyway, deciding to live not on the basis of what he saw he couldn’t do but on what God said he would do. And so he was made father of a multitude of peoples. God himself said to him, “You’re going to have a big family, Abraham!”

영어NRSV,18 Hoping against hope, he believed that he would become “the father of many nations,” according to what was said, “So numerous shall your descendants be.”

헬라어신약Stephanos,18 ος παρ ελπιδα επ ελπιδι επιστευσεν εις το γενεσθαι αυτον πατερα πολλων εθνων κατα το ειρημενον ουτως εσται το σπερμα σου

라틴어Vulgate,18 qui contra spem in spem credidit ut fieret pater multarum gentium secundum quod dictum est sic erit semen tuum

히브리어Modern,18 באשר אין תקוה קוה ויאמן למען אשר יהיה לאב המון גוים כמו שנאמר כה יהיה זרעך׃

성 경: [롬4:18]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자기 아내 사라가 잉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상속자는 자기의 종인 엘리에셀이 될 것이라고 고했다(창 15:2).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번성케 하실 것을(창 15:5) 믿었다. 키에르케골(Kierkegaard)은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것을 기대함으로써 위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위대했던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이다”라고 함과 동시에 ‘불가능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을 ‘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자’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공포와 전율] 중에서). 그러나 아브라함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아브라함이 바라고 믿었다는 것은 자신의 소망에 대하여 믿음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더 나아가 개인의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와 모순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랐기 때문에 소망이 성취된 뒤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20절). 그는 믿고 바라는 모든 것의 근원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고 있다. 과학에 있어서 사실에 대한 ‘확신’은 과학자가 세워 놓은 가설을 추론(推論)하여 밝혀진 사실(비록 이 사실이 진리는 될 수 없을지라도) 또는 추론에 의해 세워진 가설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전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믿고 바라는 것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목적의 결정성(determinateness), 곧 약속의 신실성을 믿고 바라는 것이기에(J. Murray) 전제된 가설을 추론하여 믿는 과학적 확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 이 내용은 창 15:5 b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말씀의 인용구이다. 여기서 ‘후손’이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만, 창세기 본문에서나 본절에서는 ‘율법에 속한 자’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 모두를 지칭한다(16절 주석 참조).

카이 메 아스데네사스 테 피스테이 카테노에센 토 헤아우투 소마 에데 네네크로메논 에카톤타에테스 푸 휘파르콘 카이 텐 네크로신 테스 메트라스 사르라스

개역개정,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새번역,19 그는 나이가 백 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면서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말성경,19 아브라함은 100세나 돼 이미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성경,19 백 살가량이 되어,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사라의 모태도 죽은 것이라 여기면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영어NIV,19 Without weakening in his faith, he faced the fact that his body was as good as dead–since he was about a hundred years old–and that Sarah’s womb was also dead.

영어NASB,19 And without becoming weak in faith he contemplated his own body, now as good as dead since he was about a hundred years old, and the deadness of Sarah’s womb;

영어MSG,19 Abraham didn’t focus on his own impotence and say, “It’s hopeless. This hundred-year-old body could never father a child.” Nor did he survey Sarah’s decades of infertility and give up.

영어NRSV,19 He did not weaken in faith when he considered his own body, which was already as good as dead (for he was about a hundred years old), or when he considered the barrenness of Sarah’s womb.

헬라어신약Stephanos,19 και μη ασθενησας τη πιστει ου κατενοησεν το εαυτου σωμα ηδη νενεκρωμενον εκατονταετης που υπαρχων και την νεκρωσιν της μητρας σαρρας

라틴어Vulgate,19 et non infirmatus fide consideravit corpus suum emortuum cum fere centum annorum esset et emortuam vulvam Sarrae

히브리어Modern,19 ולא רפתה אמונתו ולא התבונן אל גופו שכבר נפוג בהיותו כבן מאת שנה ואל בלות רחם שרה׃

성 경: [롬4:19]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 바울은 생식(生殖) 능력이 없는 것을 ‘죽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헬라 본문에서 ‘죽은 것 같음’이란 말이 아브라함에게는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 네네크로메논) 언급되어 있으며, 사라에게는 명사형(*, 네크로신)으로 언급되어 있다. 사라에게 명사형으로 사용된 것은 앞에서 사용된 분사형의 반복이며, 아브라함에게 완료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이미 생식 능력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개역 성경의 번역에서 사용된 ‘같음’이란 말은 헬라 본문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특히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있지 않으나 헬라 본문에는 ‘이미’를 의미하는 헬라어 ‘에데'(*)가 사용되어 두 사람 모두 생식 능력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17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라는 말씀이 ‘이미 생식 능력을 상실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식 능력을 회복시키시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24절의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는 구절과도 연결되어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은 사라의 태(胎)가 생산 능력이 없는데서 생산의 능력을 갖추게 된 사실과 영적으로 일맥 상통한다. 영적인 의미에서 생산 능력이 없는 사라가 그의 후손을 생산하게 된 것이나 죽었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을 주는 영'(고전 15:45, life-giving-spirit)으로서 잠자는 자의 첫열매가 되신 것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에이스 데 텐 에팡겔리안 투 데우 우 디에크리데 테 아피스티아 알 에네뒤나모데 테 피스테이 두스 돜산 토 데오

개역개정,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새번역,20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굳세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말성경,20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고 도리어 믿음이 굳건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가톨릭성경,20 그는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영어NIV,20 Yet he did not waver through unbelief regarding the promise of God, but was strengthened in his faith and gave glory to God,

영어NASB,20 yet, with respect to the promise of God, he did not waver in unbelief, but grew strong in faith, giving glory to God,

영어MSG,20 He didn’t tiptoe around God’s promise asking cautiously skeptical questions. He plunged into the promise and came up strong, ready for God,

영어NRSV,20 No distrust made him waver concerning the promise of God, but he grew strong in his faith as he gave glory to God,

헬라어신약Stephanos,20 εις δε την επαγγελιαν του θεου ου διεκριθη τη απιστια αλλ ενεδυναμωθη τη πιστει δους δοξαν τω θεω

라틴어Vulgate,20 in repromissione etiam Dei non haesitavit diffidentia sed confortatus est fide dans gloriam Deo

히브리어Modern,20 ולא חלק לבו בהבטחת האלהים כחסר האמונה כי אם התחזק באמונתו ויתן כבוד לאלהים׃

성 경: [롬4:20]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의심치 않고 – ‘의심하다’의 헬라어 ‘디에크리데'(*)는 ‘디아크리노'(*)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아브라함의 의심하지 아니한 행위가 개인의 능동적인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디아크리노’는 ‘가려내다'(마 16:3), ‘구별하다'(약 2:4) 또는 ‘스스로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다'(14:23;막 11:23)라는 의미인데 본절에서는 아브라함의 ‘확신'(*, 플레로포레오)과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의심치 않았다’는 것은 소망에 근거해서(*, 에프 엘피디) 믿음으로 살았기에 갈등할 수가 없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뒤나모데 테 피스테이'(*)에서 ‘믿음'(피스테이)은 앞에 전치사가 없이 여격으로 사용되었다. 메첸(Machen)은 전치사가 없는 단순한 여격은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 예로 ‘에게이론 타이 토 로고 투 퀴리우'(*)는 ‘그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일으킴을 받는다’를 의미하는데 주님의 ‘말씀’이 ‘일으킴을 받게 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절은 문자적으로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믿음’이 ‘강하여지게 되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강하게 붙들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한 가지 난제가 발생한다. 창 15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다는 사실이 창 17:17의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는 말씀에 의해 도전받게 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이와 같이 분명하게 의심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고 진술하고 있는가 ?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은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비록 혹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연약하여져서 의심을 하였으나 다시 하나님께서 그것을 강하게 해주셨다는 것으로 이해하지만(Hendriksen)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다만 아브라함이 의심을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즉 그의 자손이 수없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은 문자적으로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라를 통해서만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비록 하갈은 사라의 몸종이었지만 하갈의 자식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고하기를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 15장에서 말씀하셨던 그 약속을 재차 창 17:19-21에서 말씀하심은 아브라함의 약해진 믿음을 다시 확고히 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사라의 태에서 난 자만이 그 약속을 성취시킬 것이라는 점을 아브라함에게 못박으신 것이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본 구절에 대해서 구약성경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창 17:19-21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재보증받은 아브라함은 곧바로 하나님께서 이전에 명하신 할례 의식을 행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방법에 대해 확고히 믿게 되었음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카이 플레로포레데이스 호티 토 에펭겔타이 뒤나토스 에스틴 카이 포이에사이

개역개정,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새번역,21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가톨릭성경,2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영어NIV,21 being fully persuaded that God had power to do what he had promised.

영어NASB,21 and being fully assured that what He had promised, He was able also to perform.

영어MSG,21 sure that God would make good on what he had said.

영어NRSV,21 being fully convinced that God was able to do what he had promised.

헬라어신약Stephanos,21 και πληροφορηθεις οτι ο επηγγελται δυνατος εστιν και ποιησαι

라틴어Vulgate,21 plenissime sciens quia quaecumque promisit potens est et facere

히브리어Modern,21 וידע בלבב שלם כי את אשר הבטיח גם יכל לעשותו׃

성 경: [롬4:21]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약속하신 그것 – 본문에 언급된 약속의 구체적인 내용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17절)는 것과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18절)고한 것이다. 이약속은 아브라함의 소망과 확신에 의하여 얻어낸 보증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보여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근거한다. 아브라함의 확신보다 더 확실한 것은 그분의 약속이다. 왜냐하면 약속은 하나님 자신의 전능성과 신실성을 나타내신 목적있는 작정이기 때문이다.

󰃨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 이 말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창 18:14)에 대한 확신이며 또한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라'(창 18:19)는 말씀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다. 본 구절에 대하여 혹자는 본절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힘과 활기를 완벽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고 진술하기도 한다.

디오 카이 엘로기스데 아우토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개역개정,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새번역,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 ㉦또는 ‘그의 믿음을’ ㉧창 15:6

우리말성경,22 그러므로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습니다. 창15:6

가톨릭성경,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영어NIV,22 This is why “it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영어NASB,22 Therefore also IT WAS RECKONED TO HIM AS RIGHTEOUSNESS.

영어MSG,22 That’s why it is said, “Abraham was declared fit before God by trusting God to set him right.”

영어NRSV,22 Therefore his faith “was reckoned to him as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22 διο και ελογισθη αυτω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라틴어Vulgate,22 ideo et reputatum est illi ad iustitiam

히브리어Modern,22 על כן גם נחשבה לו לצדקה׃

성 경: [롬4:22]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그러므로 –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므로'(*, 디오) 다음에 ‘카이'(*)가 언급되어 있다. ‘카이’는 일반적으로 접속사로 사용되어 ‘그리고’를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또한 역시’라는 의미를 지닌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9절 하반절에서 언급했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말씀을 다시 반복하면서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우크 에그라페 데 디 아우톤 모논 호티 엘로기스데 아우토

개역개정,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새번역,23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 하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우리말성경,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라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가톨릭성경,23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기록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영어NIV,23 The words “it was credited to him” were written not for him alone,

영어NASB,23 Now not for his sake only was it written, that it was reckoned to him,

영어MSG,23 But it’s not just Abraham;

영어NRSV,23 Now the words, “it was reckoned to him,” were written not for his sake alone,

헬라어신약Stephanos,23 ουκ εγραφη δε δι αυτον μονον οτι ελογισθη αυτω

라틴어Vulgate,23 non est autem scriptum tantum propter ipsum quia reputatum est illi

히브리어Modern,23 ולא לבד למענו כתובה זאת שנחשבה לו׃

성 경: [롬4:23]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실은 동시성(Synchronism)과 통시성(Diachronism)을 동시에 지닌다. 즉 그 원리는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 모두에게도 적용된다. 이에 대해서 성경 자체의 증거로는 15:4;시 102:18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당신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만 적용되며 모세 이후부터는 율법만이 적용될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것이다.

알라 카이 디 헤마스 호이스 멜레이 로기제스다이 토이스 피스튜우신 에피 톤 에게이란타 예순 톤 퀴리온 헤몬 에크 네크론

개역개정,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새번역,24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우리말성경,24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도 위한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4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을 믿는 우리도 그렇게 인정받을 것입니다.

영어NIV,24 but also for us, to whom God will credit righteousness–for us who believe in him who raised Jesus our Lord from the dead.

영어NASB,24 but for our sake also, to whom it will be reckoned, as those who believe in Him who raised Jesus our Lord from the dead,

영어MSG,24 it’s also us! The same thing gets said about us when we embrace and believe the One who brought Jesus to life when the conditions were equally hopeless.

영어NRSV,24 but for ours also. It will be reckoned to us who believe in him who raised Jesus our Lord from the dead,

헬라어신약Stephanos,24 αλλα και δι ημας οις μελλει λογιζεσθαι τοις πιστευουσιν επι τον εγειραντα ιησουν τον κυριον ημων εκ νεκρων

라틴어Vulgate,24 sed et propter nos quibus reputabitur credentibus in eum qui suscitavit Iesum Dominum nostrum a mortuis

히브리어Modern,24 כי אם גם למעננו אשר עתידה להחשב לנו המאמינים במי שהעיר את ישוע אדנינו מן המתים׃

성 경: [롬4:24]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 ‘우리’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본절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열려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는 유대인의 특권을 부인하고 있는 23절의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라는 내용과 호응을 이룬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논리를 ‘믿음의 내용’으로 옮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화제를 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언급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은 동일한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결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는 것과 신약 시대에 성도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용상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실현될 ‘약속’에 대한 것인 반면, 신약 시대 성도의 믿음은 성취된 ‘약속’에 대한 것이다.

호스 파레도데 디아 타 파랖토마타 헤몬 카이 에게르데 디아 텐 디카이오신 헤몬

개역개정,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새번역,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말성경,25 예수께서는 우리의 범죄를 인해 죽음에 넘겨지셨고 우리의 의를 위해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가톨릭성경,2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영어NIV,25 He was delivered over to death for our sins and was raised to life for our justification.

영어NASB,25 He who was delivered up because of our transgressions, and was raised because of our justification.

영어MSG,25 The sacrificed Jesus made us fit for God, set us right with God.

영어NRSV,25 who was handed over to death for our trespasses and was raised for our justification.

헬라어신약Stephanos,25 ος παρεδοθη δια τα παραπτωματα ημων και ηγερθη δια την δικαιωσιν ημων

라틴어Vulgate,25 qui traditus est propter delicta nostra et resurrexit propter iustificationem nostram

히브리어Modern,25 אשר נמסר בעבור פשעינו ונעור לבעבור צדקנו׃

성 경: [롬4:25]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예수는…살아나셨느니라 – 본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성도에게 적용시키면서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두 구절을 대조시키고 있다. 즉 ‘우리 범죄함’과 ‘우리를 의롭다하심’이 대조되어 있고,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와 ‘위하여 살아나셨으니라’가 대조되어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내어 줌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적(代贖的)인 죽음을 의미하며,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심은 대속의 결과인 ‘의’를 보증하고 선포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바울은 24절에서 믿음의 내용으로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것에 대하여 언급했던 것을 성도들에게 다시 적용시키는 논리의 순서를 밝고 있다. 한편 바울이 예수의 대속적 죽으심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은 사 53:1-9과 같이 구약 시대에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증명되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해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까지 굳이 증명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내용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을 위해 더 유익한 것으로 판단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5장에서 8장까지 줄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성도들에게 어떤 의의를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 진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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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 강해 설교말씀] 아브라함의 예(롬 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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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에서는 바울이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할례나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된다는 개념을 버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예(롬 4:1-25)

1-16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

[1-3절]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사실에 대해 아브라함을 예로 들며 창세기 15:6을 인용하였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는 이와 같이 구약성경이 증거한 바이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대로 믿고 성경에 교훈된 대로 행하며 살아야 한다.

[4-5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이라는 말은 행위를 가리킨다. 일하는 자가 받는 삯은 은혜가 아니고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의롭다 하심이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하였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닐 것이지만, 의로운 행위가 없었을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믿음이 의로 간주되었으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이와 같이, 믿음과 행위는 서로 대조되고 구별된다. 믿음은 행위와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저 믿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에게 의로운 행위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다. 참 믿음은 경건하고 의로운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람의 행위는 불완전하므로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6-8절] 일한 것이 없이(코리스 에르곤)[행위들과 별개로]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행위와 별개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 증거한 다윗의 시를 인용하였다. 그가 인용한 말씀은 시편 32:1-2이다. 그것은 사람이 죄가 없어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죄의 사함과 가리움을 받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보인다. 이와 같이, 칭의(稱義)는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인 것이다.

[9-10절]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할례 받기 전인가 후인가? 창세기 15장에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건이 나오고, 창세기 16장에는 그가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라고 증거하며, 창세기 17장에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이 99세 때라고 증거한다(17:24).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때는 그가 할례를 받기 13년 전이었다.

[11-13절]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할례받을 뿐 아니라](원문)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後嗣)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할례는 그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받은 의를 확증하는 표이었다.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라고 할 때, 그 할례자는 단지 육신의 할례를 받은 자들을 가리키지 않고, 육신의 할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버지가 되고 그 후손이 온 세계에 충만하리라는 약속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14-16절]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後嗣)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카타 카린)[은혜에 의거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 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율법은 죄인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그로 하여금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 그러므로 율법만으로 라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율법과 은혜, 행위와 믿음은 다시 대조된다. 율법을 행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물론, 믿는 자는 율법에 순종하며 의롭게 행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 그 자체는 율법 순종의 행위와는 구별된다.

본문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진리를 아브라함의 경우를 통해 또 다윗의 고백을 통해 증거한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다윗도 행위로는 실수가 없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인정을 받았다. 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진리는 할례자에게나 무할례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믿음과 행위는 구별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17-25절, 아브라함의 믿음

[17-18절]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믿음의 성격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자이시다. 그는 무(無)로부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믿음은 바로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라는 말은 ‘소망을 거슬러 소망 중에’(against hope in hope)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아브라함은 인간적 소망이 없었으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붙들었다. 그는 인간적 소망을 거슬러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가진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자신에 대한 부정과 하나님께 대한 긍정을 뜻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자기에게 무엇이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을 섬기다가 자기에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드러날 때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 자신을 신뢰한 것이다.

[19-22절]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 백세가 되어 자기 몸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 있었으나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상태만 바라보지 않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 믿음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은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며,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내맡기는 것이다.

[23-25절]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의 구원도 같은 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십자가에 내어줌이 되셨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 때문에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을 믿는 자는 참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내용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인간의 무엇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단지 전능의 하나님, 부활의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아브라함처럼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믿음의 성격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을 바라고 믿었다. 그는 전능의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자이시다. 믿음은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며,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해 죽으셨고 또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해 부활하셨다. 신약 성도들이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음을 믿을 때, 그들은 바로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것이다. 이것이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이다. 우리는 이 믿음을 굳게 가지자.

[민수기 히브리어 원어 성경 강해] 대제사장 아론 집안 소개(민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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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겨 주시다(롬4장)

로마서 1-3장에서 보았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구원을 가져다주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의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과 서로서로를 향해 올바른 관계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분열해 다투는 로마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일을 보고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깨어진 관계를 화목케 하는 일에 로마서 전체에 걸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이런 해석은 바울에게 하나의 문제를 야기한다. 바울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뿐 아니라 율법을 중시하는 할례받은 유대인들에게도 이 글을 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바울의 해석은 유대인들이 ‘조상’으로 여기던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징표로 할례를 받았던 아브라함(창 17:11)의 이야기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려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창세기 12장 1-3절, 15장 6절 및 17장 1-14절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해석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말씀을 소중히 여기시며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을 그의 불임 아내인 사라를 통해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다고 결론짓는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겨 주셨다(롬 4:3, 9, 22). 바울은 로마서 독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겨 주신 것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오래전에 일어났으며, 할례는 그가 이미 하나님을 믿는다는 하나의 징표로써 나중에 온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롬 4:10-11).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음을 인정하셨을 무렵에, 아브라함은 바울이 살던 세계의 할례 받지 않던 이방인들과 같은 신분이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율법하에서 의롭게 된 게 아니라 믿음의 의로움을 통해 유대인들과 이방인 모두의 조상이 된 것이다(롬 4:11-15).

로마서 4 장 강해 | 로마서강해 | 로마서 4:1-25 |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 유기성 목사 137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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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 주석 강해 · 얻었다(εὑρηκέναι)는 유레카 발견하다는 뜻이다. · ‘우리 조상’은 언어유희적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우리 조상’을 바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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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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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 주석 … 절부터는 이신 칭의의 구체적 실례로 아브라함을 예(例)로 들고 있다. … 었다’라는 동사에 연결시킴으로써 ‘육신’을 ‘행위’ 또는 ‘율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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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3/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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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 운 에루멘 휴레케나이 아브라암 톤 프로파토라 헤몬 카타 사르카 개역개정,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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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1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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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에서는 바울이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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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kh123.tistory.com

Date Published: 2/21/2021

View: 2791

제목: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 본문: 로마서 4장 1-25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롬4: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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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ssion-hamburg.de

Date Published: 8/24/2021

View: 5222

이것이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이다. 4장: 아브라함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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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ldfaith.net

Date Published: 9/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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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장에서 보았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구원을 가져다주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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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heologyofwork.or.kr

Date Published: 10/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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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 운 에루멘 휴레케나이 아브라암 톤 프로파토라 헤몬 카타 사르카

개역개정,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새번역,1 그러면 육신상으로 우리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아브라함에 관하여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말성경,1 그러면 우리가 육신에 따라 우리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톨릭성경,1 그렇다면 혈육으로 우리 선조인 아브라함이 찾아 얻은 것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영어NIV,1 What then shall we say that Abraham, our forefather, discovered in this matter?

영어NASB,1 What then shall we say that Abraham, our forefather according to the flesh, has found?

영어MSG,1 So how do we fit what we know of Abraham, our first father in the faith, into this new way of looking at things?

영어NRSV,1 What then are we to say was gained by Abraham, our ancestor according to the flesh?

헬라어신약Stephanos,1 τι ουν ερουμεν αβρααμ τον πατερα ημων ευρηκεναι κατα σαρκα

라틴어Vulgate,1 quid ergo dicemus invenisse Abraham patrem nostrum secundum carnem

히브리어Modern,1 ועתה מה נאמר על אברהם אבינו מה זה השיג לפי הבשר׃

성 경: [롬4:1]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아브라함의 의(義)]

󰃨 그런즉 – 2:1에서 언급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처럼 별 의미 없이 다른 화제로 전환하고자 사용된 접속사이다. 자세한 것은 2:1 주석을 참조하라. 3:19-31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하고 이제 본절부터는 이신 칭의의 구체적 실례로 아브라함을 예(例)로 들고 있다.

󰃨 육신으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사르카'(*)는 직역하면 ‘육신을 따라’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하나는 ‘우리 조상’과 연결된 수식어로 해석하는 경우이며 (2) 또 하나는 동사 ‘얻었다’를 수식하는 부사구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는 사본에 따라 다소 차이를 두고 있는데 만약 ‘얻었다’를 뜻하는 헬라어 ‘휴레케나이'(*)가 ‘아브라암'(*, ‘아브라함’)앞에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카타 사르카’는 (1)의 의견에 따라 자연적인 혈연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반면 ‘휴레케나이’를 ‘헤몬'(*, ‘우리’) 뒤에 위치시키는 소문자 사본들에 의하여 해석한다면 ‘카타 사르카’는 (2)번의 의견에 따라 윤리적인 의미, 다시 말해서 ‘육신의 원리를 따라’ 또는 ‘율법의 행위를 따라’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 Murray) 바울이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육신’의 개념을 증거로 제시한다. 바울은 ‘육신’이라는 말을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의 본성’과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8:4, 5, 12;고전 1:26) 때로는 ‘육신으로’라는 표현을 ‘썩어질 육체의 소욕과 충동에 의하여’라는 경멸적인 의도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순수한 자연적 출생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증거할 때(1:3) 또는 다른 사람들을 육신적인 형제 관계로 표시할 때 등이다(9:3;고전 10:18). 이와 같은 의미에서 ‘육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면 바울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부르면서 혈연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육신’이라는 말을 추가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를 따를 때에는 ‘우리’라는 말이 유대인만을 칭하는 말인가 ? 라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서에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 보통 모든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3:31). 한편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Lenski, Calvin, Meyer, Godet, Hodge)은 ‘육신으로’라는 말을 ‘얻었다’라는 동사에 연결시킴으로써 ‘육신’을 ‘행위’ 또는 ‘율법’의 의미로 취급한다. 이 경우 본절의 뜻은 ‘아브라함이 육신의 행위로 무엇을 얻었는가 ?’ 라는 의문문 형태가 된다. 본 구절의 앞 뒤의 문맥으로 보면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는 행위로 말미암아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2절;3:27) 사실이므로 본절의 ‘육신으로’라는 의미는 유대인의 조상된 아브라함의 혈연적 관계를 뜻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윤리적인 의미에서 ‘자랑할만한 것’ 또는 ‘율법의 행위’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더 논리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얻었다 하리요 – ‘얻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레케나이'(*)는 완료형으로 ‘발견했다'(have found), ‘얻었다’, ‘만났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문제는 이 단어가 어떤 사본에서는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 단어의 삽입에 의문을 제기하여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Lightfoot, Murray). 이 견해를 취할 경우 ‘육신으로’는 자연스럽게 ‘우리 조상’과 연결된다. 그리고 ‘우리’란 대명사는 바울과 유대인 특히 로마에 있는 유대인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이미 3:9에서 밝힌 바 있다. 또한 2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이란 구절은 ‘얻었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얻었다’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어야 바울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에이 가르 아브라암 엨스 에르곤 에디카이오데 에케이 카우케마 알 우 프로스 데온

개역개정,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새번역,2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말성경,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면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없습니다.

가톨릭성경,2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영어NIV,2 If, in fact, Abraham was justified by works, he had something to boast about–but not before God.

영어NASB,2 For if Abraham was justified by works, he has something to boast about; but not before God.

영어MSG,2 If Abraham, by what he did for God, got God to approve him, he could certainly have taken credit for it. But the story we’re given is a God-story, not an Abraham-story.

영어NRSV,2 For if Abraham was justified by works, he has something to boast about, but not before God.

헬라어신약Stephanos,2 ει γαρ αβρααμ εξ εργων εδικαιωθη εχει καυχημα αλλ ου προς τον θεον

라틴어Vulgate,2 si enim Abraham ex operibus iustificatus est habet gloriam sed non apud Deum

히브리어Modern,2 כי אם נצדק אברהם מתוך המעשים לו התהלה אך לא לפני האלהים׃

성 경: [롬4:2]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아브라함의 의(義)]

󰃨 아브라함이 – 바울이 아브라함을 설명한 것은 유대주의자들도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선민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 랍비들의 문헌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3살부터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으며 할례와 율법을 예비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그들 역시 창 15:6의 말씀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의 공로를 증명하려고 했으며 특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공로’에 의하여 후사(後嗣)가 되어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Hendriksen). 그 당시의 유대교적 가르침보다 성경을 중요시한 바울은 ‘나는 너를 열방의 조상으로 세웠다’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을 칭의를 받는 신앙의 본질적인 모범으로 인정함으로써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따라야할 신앙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을 돌이켜 보는 믿음 속에 있는 반면 아브라함은 장차 되어질 일들에 대하여 믿음으로 기다렸다는 것에서 서로의 차이를 발견할 수는 있으나 본질적인 ‘의’의 개념에 있어서 양자는 동일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

󰃨 행위로써 –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직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지 않았으나 바울은 율법의 원리 곧 행함의 원리를 아브라함 시대까지 적용시키고 있다. 이로써 바울은 (1) 믿음의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2) 행위의 원리가 단순히 모세에 의해서 주어진 율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암시해 주고 있다.

󰃨 만일…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 바울은 ‘에이'(*, ‘만일’)에 부정 과거 직설법 수동태 동사 ‘에디카이오데'(*)를 연결시킴으로 하나의 조건문을 만들었다. 이 조건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 혹자는 논리적이며 형식적인 가정으로서 현실적이며 실재적인 근거에 있어서는 ‘없느니라’는 부정(不定)을 유도하는 조건문으로 인정하는 반면, (2) 혹자는 바울이 부정 과거 가정법을 사용하여 단회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조건문으로 해석한다(Lenski).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행위로'(*, 여스 에르곤)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일차적으로는 자랑할 것이 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려 하였던 구체적인 행위의 결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렌스키(Lenski)는 바울의 주장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3:19-31에서 말한 것과) 증명하기 위해 ‘여스 에르곤’과 ‘여스 에르곤 노무'(*, ‘율법의 행위’)를 서로 구별하려 한다. 신앙의 행위로서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만 ‘율법의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의 ‘행위’는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자랑과 구분이 되는 것으로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행위’인 바, 바울이 자신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고후 11;21;12:12)과 같은 성격의 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 주장에 따른다면 우리는 자칫 믿음을 공로로 인정하는 유대 랍비적인 교훈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1절 주석 참조). 칭의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에는 신앙이라는 인간의 공로조차 아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편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 Murray)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자랑할 근거가 있다는 형식적인 논리를 인정하나 그 논리가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적용될 수 있느냐하는 문제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왜냐하면 본절 하반절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하미 자랑할 것이 없다라는 구절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바울은 가정적인 추론 속에서 아브라함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보다 확실하게는 가정문을 반증(反證)하기 위해 다음절에서 창 15:6을 인용하고 있다.

󰃨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 본문에는 누구에게 자랑하는 것인지 그 자랑의 대상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혹자는 ‘자랑할 것’이란 말을 ‘영광받을만 한 것’으로 대치할 것을 주장한다(Meyer). 그렇지만 그렇게 의도적으로 본문의 의미를 바꾼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대로라면 영광을 주는 대상이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데, 곧바로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는 구절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 전체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수정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하나님 앞에서도 자랑할 것이 있겠으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

티 가르 헤 그라페 레게이 에피스튜센 데 아브라암 토 데오 카이 엘로기스데 아우토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개역개정,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새번역,3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하였습니다. / ㉡창 15:6 ㉢원어로는 ‘그것이 그의 의로 여겨졌다’

우리말성경,3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라고 합니다. 창15:6

가톨릭성경,3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였습니다.

영어NIV,3 What does the Scripture say? “Abraham believed God, and it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영어NASB,3 For what does the Scripture say? “AND ABRAHAM BELIEVED GOD, AND IT WAS RECKONED TO HIM AS RIGHTEOUSNESS.”

영어MSG,3 What we read in Scripture is, “Abraham entered into what God was doing for him, and that was the turning point. He trusted God to set him right instead of trying to be right on his own.”

영어NRSV,3 For what does the scripture say? “Abraham believed God, and it was reckoned to him as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3 τι γαρ η γραφη λεγει επιστευσεν δε αβρααμ τω θεω και ελογισθη αυτω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라틴어Vulgate,3 quid enim scriptura dicit credidit Abraham Deo et reputatum est illi ad iustitiam

히브리어Modern,3 כי הכתוב מה הוא אמר והאמן אברהם ביהוה ויחשבה לו צדקה׃

성 경: [롬4:3]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아브라함의 의(義)]

󰃨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 일반적으로 문어체에서는 ‘기록된 바'(*, 카도스 게그라프타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한다(3:10). 본절에서 바울이 의문문의 형식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은 구어체적(口語體的)인 것으로 독자들과 보다 밀접한 관계에서 지금 논하고 있는 주제에 대하여 심사숙고해 보기 의함이다.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 본 구절은 창 15:6을 인용한 것이다. 혹자는 본절을 약 2;21과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Luther).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약 2:21은 창 26:5과 관계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야고보 사도는 믿음 자체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르는 삶(행위)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아무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은 창 15:5에서 하나님을 통해 선포된 약속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신뢰이다. 아브라함 자신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이룰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약속을 성취시키실 뿐이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신뢰를 두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진 약속의 성취는 그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믿음을 통해서 값없이 주어진 것이다.

󰃨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 믿음과 행위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구약에 기록된 또 하나의 구절을 극복해야 한다. 시편 106:31은 비느하스의 열정적인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이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으며 비스하스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스하스가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도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칭의와 구별이 되어야 한다. 비느하스의 행위는 앞에서 살펴본대로 믿음의 한 열매로서 주어진 결과로 보아야 한다(J. Murray). 경건치 아니한 자, 또는 할례받지 아니한 자들의 칭의를 논하는 문제에 있어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과 ‘믿음의 선한 열매로 인한 결과’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편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로기스데'(*)는 ‘로기조마이'(*)의 부정과거 수동태로서 (1) 의롭다 여김을 받은 수동적 행위를 의미하며 (2) ‘의롭게 만들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그렇게 평가해 주었다’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을 정도로 인격(person)에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의 신분적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았다는 뜻이다.

토 데 에르가조메노 호 미스도스 우 로기제타이 카타 카린 알라 카타 오페일레마

개역개정,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새번역,4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을 은혜로 주는 것으로 치지 않고 당연한 보수로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말성경,4 일하는 자에게는 품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않고 정당한 대가로 여겨지나

가톨릭성경,4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이 선물이 아니라 당연한 보수로 여겨집니다.

영어NIV,4 Now when a man works, his wages are not credited to him as a gift, but as an obligation.

영어NASB,4 Now to the one who works, his wage is not reckoned as a favor, but as what is due.

영어MSG,4 If you’re a hard worker and do a good job, you deserve your pay; we don’t call your wages a gift.

영어NRSV,4 Now to one who works, wages are not reckoned as a gift but as something due.

헬라어신약Stephanos,4 τω δε εργαζομενω ο μισθος ου λογιζεται κατα χαριν αλλα κατα το οφειλημα

라틴어Vulgate,4 ei autem qui operatur merces non inputatur secundum gratiam sed secundum debitum

히브리어Modern,4 הנה הפעל לא יחשב לו שכרו על פי החסד כי אם על פי החוב׃

성 경: [롬4:4]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일하는 자에게는 – 본 구절에 대해 혹자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열심으로 추구해야 할 선행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적을 내세워 자기 공로를 자랑하려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Calvin). 본절 전체가 일상적인 고용 관계에 대한 것을 비유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점에서는 1차적으로 삶을 위해 일하는 일꾼을 의미하며, 2차적으로는 다음절에 기록된 ‘일을 한 것이 없는 자’와 ‘믿는 자’ 등과 대조를 이루는 개념으로서 단지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을 의미한다.

󰃨 그 삯을 – 일꾼이 요구하는 ‘삯'(*, 미스도스)은 문자적으로 일해준 것에 대한 품삯을 의미하지만(눅 10:7;딤전 5:18) 은유적으로는 ‘보상'(reward)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외에도 신약에는 삯을 뜻하는 말로 ‘와소니온'(*)이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이는 눅 3:14에 병사의 급료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본서에서는 죄의 ‘삯'(6:23)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일꾼이 그의 일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당연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이 정당한 요구를 ‘빚'(*, 오페일레마)이라는 개념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용법이다.

󰃨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 ‘빚'(*, 오페일레마)은 ‘삯’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였으나 ‘은혜'(*, 카리스)와는 대조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빚’은 히브리어로 ‘맛솨아'(*)로서 주로 모세의 율법에 나타나는 바, 채무 관계를 지적하는 데 쓰여졌다(출 22:25). 무엇을 빌린 자는 반드시 갚아야 했으며 만일 채무자가 정당하게 갚지 못했을 경우 채권자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고 채무자로부터 생계 수단이 되는 어떠한 것들을 전당물로 잡을 수 있었다(신 24:6). 신약에서 ‘오페일레마’는 구약에서와 같이 사업적인 용어로 쓰이기도 하였으며(눅 7:41) 특히 비유 속에서는 채무자를 용서하거나 또는 죄인으로 취급할 때 쓰였다. 채무자는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옥에 갇혀 있어야 했으며(눅 12:57-59) 또한 송사(訟事)하는 자에 의하여 재판관에게 고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본절에서 일하는 자가 삯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채권자가 송사하는 것과 같이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빚을 탕감받은 자들이 탕감받은 것을 은혜로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일’은 자랑이며 동시에 정당한 자기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바울은 일하는 자들의 정당한 삯을 언급함으로써 다음절에 나오는 일하지 아니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용서와 칭의(稱義)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에게 있어서 행위의 결과는 일꾼이 일한 것에 상응한 대가를 받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설 만한 자리가 없다. 오로지 행위의 주체인 자신의 자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토 데 메 에르가조메노 피스튜온티 데 에피 톤 디카이운타 톤 아세베 로기제타이 헤 피스티스 아우투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개역개정,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새번역,5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비록 아무 공로가 없어도, 그의 믿음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우리말성경,5 일하지 않고도 경건치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집니다.

가톨릭성경,5 그러나 일을 하지 않더라도 불경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받습니다.

영어NIV,5 However, to the man who does not work but trusts God who justifies the wicked, his faith is credited as righteousness.

영어NASB,5 But to the one who does not work, but believes in Him who justifies the ungodly, his faith is reckoned as righteousness,

영어MSG,5 But if you see that the job is too big for you, that it’s something only God can do, and you trust him to do it–you could never do it for yourself no matter how hard and long you worked–well, that trusting-him-to-do-it is what gets you set right with God, by God. Sheer gift.

영어NRSV,5 But to one who without works trusts him who justifies the ungodly, such faith is reckoned as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5 τω δε μη εργαζομενω πιστευοντι δε επι τον δικαιουντα τον ασεβη λογιζεται η πιστις αυτου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라틴어Vulgate,5 ei vero qui non operatur credenti autem in eum qui iustificat impium reputatur fides eius ad iustitiam

히브리어Modern,5 אבל לאשר איננו פעל כי אם מאמין במצדיק את הרשע אמונתו תחשב לו לצדקה׃

성 경: [롬4:5]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일을 아니할지라도 – 삯을 위해서 일하지 않은 사람, 즉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가 아니라 의를 얻기 위해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이 본절에서 의를 얻기 위해 아무 행위도 하지 않고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계속 진술했듯이 오직 하나님은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신다. 4절과 비교해 볼 때, 이 믿음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과 관련된다(엡 2:8).

󰃨 경건치 아니한 자 – 이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 애쓰지 않는 자와 동의어지만 죄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그보다 더욱 강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용어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 주고 있다(Murray).

󰃨 의롭다 하시는 – ‘의로 여기시나니'(*, 톤 디카이운타)라는 현재 분사형 포현은 그 시제에 있어서 ‘믿는 자'(*, 피스튜온티)와 일치하는 것으로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이 철저하게 믿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경건치 아니한 자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에게도 임한다는 구원의 진리를 적용한 것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적용되었던 원리와도 일치한다.

카다페르 카이 다윋 레게이 톤 마카리스몬 투 안드로푸 호 호 데오스 로기제타이 디카이오쉬넨 코리스 에르곤

개역개정,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새번역,6 그래서 행한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사람이 받을 복을 다윗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6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사람의 복에 대해 다윗도 이렇게 말합니다.

가톨릭성경,6 그래서 다윗도 하느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영어NIV,6 David says the same thing when he speaks of the blessedness of the man to whom God credits righteousness apart from works:

영어NASB,6 just as David also speaks of the blessing upon the man to whom God reckons righteousness apart from works:

영어MSG,6 David confirms this way of looking at it, saying that the one who trusts God to do the putting-everything-right without insisting on having a say in it is one fortunate man:

영어NRSV,6 So also David speaks of the blessedness of those to whom God reckons righteousness apart from works:

헬라어신약Stephanos,6 καθαπερ και δαβιδ λεγει τον μακαρισμον του ανθρωπου ω ο θεος λογιζεται δικαιοσυνην χωρις εργων

라틴어Vulgate,6 sicut et David dicit beatitudinem hominis cui Deus accepto fert iustitiam sine operibus

히브리어Modern,6 כאשר גם דוד מאשר את האדם אשר האלהים יחשב לו צדקה בלא מעשים באמרו׃

성 경: [롬4:6]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일한 것이 없이 – 이 말은 원문상으로 ‘행위와 상관없이'(*, 코리스 에르곤)라는 의미를 지닌다(without works, KJV). 바울이 거듭 강조하여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의 행위 내지 노력과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 ‘행복’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카리스몬’ (*)은 ‘축복’이나 ‘행복’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특별히 이 단어는 단순한 ‘축복’이나 ‘행복’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에 강조점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되다고 선포되는 것’이라고 의역하기도 했다(Black). 이 해석을 따를 때, 본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이 받은 바 축복에 대한 다윗이 선포하기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받은 축복’이라는 구절은 그 속에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내포하며 동시에 믿음으로 참여한 모든 자들에게 임할 동일한 축복을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카리오이 혼 아페데산 하이 아노미아이 카이 혼 에페칼뤼프데산 하이 하마르티아이

개역개정,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새번역,7 ㉣”하나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복이 있다. / ㉣시 32:1; 2

우리말성경,7 “주께서 불법을 용서하시고 죄를 덮어 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고

가톨릭성경,7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영어NIV,7 “Blessed are they whose transgressions are forgiven, whose sins are covered.

영어NASB,7 “BLESSED ARE THOSE WHOSE LAWLESS DEEDS HAVE BEEN FORGIVEN, AND WHOSE SINS HAVE BEEN COVERED.

영어MSG,7 Fortunate those whose crimes are carted off, whose sins are wiped clean from the slate.

영어NRSV,7 “Blessed are those whose iniquities are forgiven, and whose sins are covered;

헬라어신약Stephanos,7 μακαριοι ων αφεθησαν αι ανομιαι και ων επεκαλυφθησαν αι αμαρτιαι

라틴어Vulgate,7 beati quorum remissae sunt iniquitates et quorum tecta sunt peccata

히브리어Modern,7 אשרי נשוי פשע כסוי חטאה׃

성 경: [롬4:7]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그 불법…복이 있고 – ‘불법’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하이 아노미아이'(*)이다. 이 말은 ‘율법'(*, 노모스)이란 말에 부정 접두어 ‘아’ (*)가 첨가되어 이루어진 파생어이다. 포괄적으로는 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나 보다 정확하게는 ‘율법을 어긴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율법을 어긴 행위’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죄로 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서 ‘불법’과 ‘죄’는 동의어의 반복으로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하심을 받고'(*, 아페데산)라는 동사와 ‘가리우심을 받고'(*, 에페칼뤼프데산)라는 동사 역시도 동의어의 반복이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시문학에서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사용하여 앞절과 뒷절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뜻을 강조하고 그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구체화시키곤 하였다(시 6:1). 한편 ‘아페데산’과 ‘에페갈뤼프데산’은 둘다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축복의 상태를 나타낸다.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거나 가리움 받는 것은 이미 과거에 성취되었으므로 그에게 남은 것을 성취된 구원 속에서 누려야 할 축복 외에 아무것도 없다.

마카리오스 아네르 후 우 메 로기세타이 퀴리오스 하마르티안

개역개정,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새번역,8 주님께서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실 사람은 복이 있다.”

우리말성경,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않으실 사람은 복이 있다.” 시32:1-2

가톨릭성경,8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

영어NIV,8 Blessed is the man whose sin the Lord will never count against him.”

영어NASB,8 “BLESSED IS THE MAN WHOSE SIN THE LORD WILL NOT TAKE INTO ACCOUNT.”

영어MSG,8 Fortunate the person against whom the Lord does not keep score.

영어NRSV,8 blessed is the one against whom the Lord will not reckon sin.”

헬라어신약Stephanos,8 μακαριος ανηρ ω ου μη λογισηται κυριος αμαρτιαν

라틴어Vulgate,8 beatus vir cui non inputabit Dominus peccatum

히브리어Modern,8 אשרי אדם לא יחשב יהוה לו עון׃

성 경: [롬4:8]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 – 본절은 7절의 중복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유(私有)하시는 은혜를 보다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앞절에서는 ‘불법이 사함을 받는 것’, ‘죄가 가리움을 받는 것’ 정도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규정되는 ‘죄’조차 없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바울이 이신 칭의에 대해 설명할 때에 본 구절은 결정적인 논리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할 때 논리상 믿음이 의로 여겨지는 중간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 논리의 틈을 본절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 의로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 사람이 행한 죄악이 어떻게 여겨지게 되는 가에 대해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7절과 본절의 인용 구절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 마카리스모스 운 후토스 에피 텐 페리토멘 에 카이 에피 텐 아크로뷔스티안 레고멘 가르 엘로기스데 토 아브라암 헤 피스티스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개역개정,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새번역,9 그러면 이러한 복은 할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내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리는 것입니까? 우리는 앞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9 그러면 이 복은 할례받은 사람에게만 내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할례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라고 했습니다.

가톨릭성경,9 그렇다면 이 행복이 할례 받은 이들에게만 해당됩니까? 아니면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도 해당됩니까? 우리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고 말합니다.

영어NIV,9 Is this blessedness only for the circumcised, or also for the uncircumcised? We have been saying that Abraham’s faith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영어NASB,9 Is this blessing then upon the circumcised, or upon the uncircumcised also? For we say, “FAITH WAS RECKONED TO ABRAHAM AS RIGHTEOUSNESS.”

영어MSG,9 Do you think for a minute that this blessing is only pronounced over those of us who keep our religious ways and are circumcised? Or do you think it possible that the blessing could be given to those who never even heard of our ways, who were never brought up in the disciplines of God? We all agree, don’t we, that it was by embracing what God did for him that Abraham was declared fit before God?

영어NRSV,9 Is this blessedness, then, pronounced only on the circumcised, or also on the uncircumcised? We say, “Faith was reckoned to Abraham as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9 ο μακαρισμος ουν ουτος επι την περιτομην η και επι την ακροβυστιαν λεγομεν γαρ οτι ελογισθη τω αβρααμ η πιστις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라틴어Vulgate,9 beatitudo ergo haec in circumcisione an etiam in praeputio dicimus enim quia reputata est Abrahae fides ad iustitiam

히브리어Modern,9 ועתה האשור הזה העל המילה הוא אם גם על הערלה הלא אמרנו כי לאברהם נחשבה אמונתו לצדקה׃

성 경: [롬4:9]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할례의 의미]

󰃨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 바울은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범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지금 예로 들은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므로 무할례자된 이방인이 이 축복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문제가 유대인에 의해 제기될 수 있다. 그래서 행위에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할례자인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본절의 질문을 제기했다. 할례는 율법과 더불어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보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바울은 본절에서 할례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바울 논지의 핵심은 비록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중요시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칭의의 축복에 할례가 전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J. Murray). 바울은 이러한 논지를 본절의 질문을 제기함으로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 3절에서 언급했던 구절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3절에서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게 되었던 시점으로 화제를 전환하기 위하여 반복되는 것이다.

포스 운 엘로기스데 엔 페리토메 온티 에 엔 아크로뷔스티아 우크 엔 페리토메 알 엔 아크로뷔스티아

개역개정,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새번역,10 그러면 어떻게 아브라함이 그러한 인정을 받았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기 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할례를 받은 후에 된 일이 아니라, 할례를 받기 전에 된 일입니다.

우리말성경,10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의로 여겨졌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때입니까? 아니면 할례를 받지 않은 때입니까? 할례를 받은 때가 아니라 할례를 받지 않은 때입니다.

가톨릭성경,10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그러한 인정을 받았습니까? 할례를 받은 다음입니까? 아니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입니까? 할례 받은 다음이 아니라 할례 받지 않았을 때입니다.

영어NIV,10 Under what circumstances was it credited? Was it after he was circumcised, or before? It was not after, but before!

영어NASB,10 How then was it reckoned? While he was circumcised, or uncircumcised? Not while circumcised, but while uncircumcised;

영어MSG,10 Now think: Was that declaration made before or after he was marked by the covenant rite of circumcision? That’s right, before he was marked.

영어NRSV,10 How then was it reckoned to him? Was it before or after he had been circumcised? It was not after, but before he was circumcised.

헬라어신약Stephanos,10 πως ουν ελογισθη εν περιτομη οντι η εν ακροβυστια ουκ εν περιτομη αλλ εν ακροβυστια

라틴어Vulgate,10 quomodo ergo reputata est in circumcisione an in praeputio non in circumcisione sed in praeputio

히브리어Modern,10 ואין נחשבה לו אם בהיותו מהול או בעודנו ערל הן לא בהיותו מהול כי אם בערלתו׃

성 경: [롬4:10]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할례의 의미]

󰃨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포스 엘로기스 데'(*)인데, 이를 직역하면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뇨 ?’가 된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해서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느뇨 ?’라는 질문이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답이 의롭다고 여겨지게 된 시점(時點)에 관한 것이므로 ‘어떻게’보다는 ‘언제’라고 번역하는 편이 적절하다.

󰃨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할례 의식을 한 때로부터 20여년 전이었다(창 15:6;17:23, 24). 이 대답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할례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바울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행 15:1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언급되어 있듯이 초대 교회 시대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들이 받은 바 우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예로 베드로는 이방인들(무할례자들)과 함께 애찬을 나누다가 할례자들이 들어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갈 2:12). 이처럼 초대 교회 당시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에 대하여 구별하는 관습이 남아 있었고, 그로 인해 복음의 본질이 변질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의(義)의 전가(轉嫁)가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팽배되어 있는 그러한 분위기에 대하여 명백한 복음적인 해결책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카이 세메이온 엘라벤 페리토메스 스프라기다 테스 디카이오쉬네스 테스 피스테오스 테스 엔 테 아크로뷔스티아 에이스 토 에이나이 아우톤 파테라 판톤 톤 피스튜온톤 디 아크로뷔스티아스 에이스 토 로기스데나이 카이 아우토이스 텐 디카이오쉬넨

개역개정,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새번역,11 아브라함이 할례라는 표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얻은 믿음의 의를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으니, 이것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도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말성경,11 그가 할례의 표식을 받은 것은 할례를 받지 않은 때에 얻은 믿음의 의를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할례받지 않은 사람으로서 믿는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 돼 그들도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11 그는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에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확증하는 것으로서 할례라는 표징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움을 인정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영어NIV,11 And he received the sign of circumcision, a seal of the righteousness that he had by faith while he was still uncircumcised. So then, he is the father of all who believe but have not been circumcised, in order that righteousness might be credited to them.

영어NASB,11 and he received the sign of circumcision, a seal of the righteousness of the faith which he had while uncircumcised, that he might be the father of all who believe without being circumcised, that righteousness might be reckoned to them,

영어MSG,11 That means that he underwent circumcision as evidence and confirmation of what God had done long before to bring him into this acceptable standing with himself, an act of God he had embraced with his whole life.

영어NRSV,11 He received the sign of circumcision as a seal of the righteousness that he had by faith while he was still uncircumcised. The purpose was to make him the ancestor of all who believe without being circumcised and who thus have righteousness reckoned to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11 και σημειον ελαβεν περιτομης σφραγιδα της δικαιοσυνης της πιστεως της εν τη ακροβυστια εις το ειναι αυτον πατερα παντων των πιστευοντων δι ακροβυστιας εις το λογισθηναι και αυτοις την δικαιοσυνην

라틴어Vulgate,11 et signum accepit circumcisionis signaculum iustitiae fidei quae est in praeputio ut sit pater omnium credentium per praeputium ut reputetur et illis ad iustitiam

히브리어Modern,11 ואות המילה קבל לחותם צדקת האמונה אשר היתה לו בערלתו להיות לאב לכל המאמינים והם ערלים למען אף להם תחשב הצדקה׃

성 경: [롬4:11]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할례의 의미]

󰃨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 본절에서 바울은 그동안 문제시되었던 ‘할례’의 의미에 대해서 진술한다. 유대인들은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유일한 증표로 믿고 있었으나, 바울은 그들의 신학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창17:10, 11에는 할례가 ‘언약의 표징'(*, 세메이온 디아데케스)으로 언급되어 있다. ‘언약의 표징’이라는 것은 언약을 맺은 것에 대한 증거로 나타내 보이는 표시(sign)이다. 그리고 구약 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언약을 맺는 것은 쌍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것이었다(Robertson). 그러면서도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하여 취하신 은혜와 사랑의 증표이며 약속이었다. 따라서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할례 이전에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대한 증거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이 할례에 내포된 은혜의 비밀을 간과하고 겉모양만 취하여 그것이 매우 귀중한 것처럼 자랑하였다.

󰃨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 ‘인'(*, 스프라기스)은 신약에서 책을 봉(封)하거나(계 5:1), 도장 찍는 것과 같은 증표(딤후 2:19;계 7:2)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모든 일을 결론짓는 마무리를 나타낼 때나 또한 어떠한 것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의 무덤을 봉인하였다는 것도 그의 죽음이 확인되었다는 뜻이다. 예수의 부활이 확실한 것은 세상이 인봉을 통하여 그의 죽음을 확고하게 증명했기 때문이다(마 27:65). 이와 같이 인(印)이라는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진실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특히 본절에서는 이미 무할례시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실을 확인하는 외적 보증의 의미로 이 용어가 쓰여졌다. 다시 말해서 할례는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의의 수단도 아니며 단지 이미 의롭게 된 것을 입증하는 표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표적은 성령의 오심(엡 1:13;4:30)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함께 살아났다는 사실을 예표하는 세례라고 할 수 있다.

󰃨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 바르트(K. Barth)는 본절을 주석하면서 원(元)역사계와 역사계를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즉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원역사적인 사실의 믿음의 의가 역사계에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사건은 원역사적인 것 속에 파묻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암시적으로 율법 폐기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율법은 원역사적인 하나님의 의가 현 역사 속에서 단순히 나타나진 것에 불과할 뿐 그 이상의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이 의의 전달 내지 계시로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3:31). 성도의 신앙은 히 11:1에 언급된 바와 같이 원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실재가 동시적으로 의미를 지닐 때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된다. 예수의 천국 비유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도 원역사적인 실재임과 동시에 현 역사적인 실재이다(Ridderbos). 할례는 무할례시에 주어진 믿음의 의(원역사적인 것)가 현 역사 속에서 공표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고로 구약 시대에는 할례가 의미있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그 표는 단지 그리스도를 부각시키고 확증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따라서 할례 자체가 전혀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같이 그리스도 중심의 예언적 사건으로 그 의미는 항상 남아 있게 된다.

카이 파테라 페리토메스 토이스 우크 에크 페리토메스 모논 알라 카이 토이스 스토이쿠신 토이스 이크네신 테스 엔 아크로뷔스티아 피스테오스 투 파트로스 헤몬 아브라암

개역개정,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새번역,12 또 그는 할례를 받은 사람의 조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걸어간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말성경,12 그는 또한 할례받은 사람의 조상이 됐습니다. 곧 할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은 때에 가졌던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의 조상이 됐습니다.

가톨릭성경,12 또한 아브라함은 할례 받은 이들의 조상입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에 걸어간 그 믿음의 발자취도 따라 걸었습니다.

영어NIV,12 And he is also the father of the circumcised who not only are circumcised but who also walk in the footsteps of the faith that our father Abraham had before he was circumcised.

영어NASB,12 and the father of circumcision to those who not only are of the circumcision, but who also follow in the steps of the faith of our father Abraham which he had while uncircumcised.

영어MSG,12 And it means further that Abraham is father of all people who embrace what God does for them while they are still on the “outs” with God, as yet unidentified as God’s, in an “uncircumcised” condition. It is precisely these people in this condition who are called “set right by God and with God”! Abraham is also, of course, father of those who have undergone the religious rite of circumcision not just because of the ritual but because they were willing to live in the risky faith-embrace of God’s action for them, the way Abraham lived long before he was marked by circumcision.

영어NRSV,12 and likewise the ancestor of the circumcised who are not only circumcised but who also follow the example of the faith that our ancestor Abraham had before he was circumcised.

헬라어신약Stephanos,12 και πατερα περιτομης τοις ουκ εκ περιτομης μονον αλλα και τοις στοιχουσιν τοις ιχνεσιν της εν τη ακροβυστια πιστεως του πατρος ημων αβρααμ

라틴어Vulgate,12 et sit pater circumcisionis non his tantum qui sunt ex circumcisione sed et his qui sectantur vestigia quae est in praeputio fidei patris nostri Abrahae

히브리어Modern,12 ולהיות לאב גם למולים אך לא לאשר הם נמולים לבד כי אם גם הלכים בעקבות האמונה שהיתה לו לאברהם בעודנו בערלתו׃

성 경: [롬4:12]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할례의 의미]

󰃨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것은 (1) 그가 처음으로 할례를 받아 혈통으로 자기에게서 난 자들에게 그 할례 의식을 전했으며, (2) 그 할례를 전할 때 할례만이 아니라 자기가 무할례시에 받았던 ‘믿음의 의’에 대한 것도 동시에 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1절만 떼어서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단지 무할례자의 조상이 되어 할례받은 유대인의 조상은 되지 않는다는 오해가 발생될 수 있다. 그래서 본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도 되는 이유를 설명하게 된 것이다.

󰃨 무할례 시에 가졌던 – 본절에서는 ‘할례받을 자들’과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 할례받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없는 자는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듯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지 않는 이방인 무할례자들도 당연히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할례 시’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인’이다. 따라서 무할례든 할례이든 그것이 결코 구원에 있어서 유리하거나 불리한 조건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1)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며 (2) 또한 그 할례가 믿음으로 받았던 의를 ‘인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J. Murray). 바울이 할례 자체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사실속에 잘 나타나며(행 16:3) 또한 할례를 믿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아니한 사건 속에 잘 나타난다(갈 2:3).

󰃨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 – 이 부류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다 포함된다. ‘자취’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크네신'(*)은 신약 성경에서 ‘보조'(步調;고후 12:18) 또는 ‘본이 될 만한 모범'(벧전 2:21) 등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의 ‘흔적’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였다(갈 6:17). 본절에서 ‘믿음의 자취’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던 삶의 흔적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요 8:39)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걸었던 그 신앙의 노선을 따라가라’는 의미이다. 이 가르침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됨을 시사한다. 한편 ‘좇는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토이케오'(*)는 ‘대오(隊伍)를 이루어’ 또는 ‘줄을 맞추어 행진한다’라는 뜻을 가진 군사 용어로서 ‘일관성 있는 행함’의 의미로 번역되었다(갈 5:25;빌 3:16).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르는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고 일관성 있게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 가르 디아 노무 헤 에팡겔리아 토 아브라암 에 토 스페르마티 아우투 토 클레로노몬 아우톤 에이나이 코스무 알라 디아 디카이오쉬네스 피스테오스

개역개정,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새번역,13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3 아브라함이나 그의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약속은 율법으로 인해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인해 된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영어NIV,13 It was not through law that Abraham and his offspring received the promise that he would be heir of the world, but through the righteousness that comes by faith.

영어NASB,13 For the promise to Abraham or to his descendants that he would be heir of the world was not through the Law, but through the righteousness of faith.

영어MSG,13 That famous promise God gave Abraham–that he and his children would possess the earth–was not given because of something Abraham did or would do. It was based on God’s decision to put everything together for him, which Abraham then entered when he believed.

영어NRSV,13 For the promise that he would inherit the world did not come to Abraham or to his descendants through the law but through the righteousness of faith.

헬라어신약Stephanos,13 ου γαρ δια νομου η επαγγελια τω αβρααμ η τω σπερματι αυτου το κληρονομον αυτον ειναι του κοσμου αλλα δια δικαιοσυνης πιστεως

라틴어Vulgate,13 non enim per legem promissio Abrahae aut semini eius ut heres esset mundi sed per iustitiam fidei

히브리어Modern,13 כי לא על ידי תורה באה ההבטחה לאברהם ולזרעו להיותו ירש העולם כי אם על ידי צדקת האמונה׃

성 경: [롬4:13]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 – 이 약속은 창 17:4-8에 언급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율법보다 430년 앞서 주어졌으며, 후에 생긴 율법이 이미 주어진 언약을 취소할 수 없었다(갈 3:17).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약속은 율법에 선행하며, 약속의 원리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원리는 바울이 본절에서 진술하고 있는 바대로 ‘믿음의 의’뿐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이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세상의 후사’란 일차적으로 창 17:8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이 유업으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창 17:4에 언급된 대로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이므로, 그의 신앙의 자취를 좇는 모든 민족이 후사가 되며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갈 3:29). 따라서 본절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하여 모든 땅의 족속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보증'(Hendriksen)과 관련된 것임이 분명하다.

에이 가르 호이 에크 노무 클레로노모이 케케노타이 헤 티스티스 카이 카테르게타이 헤 에팡겔리아

개역개정,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새번역,14 율법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약속은 헛된 것이 됩니다.

우리말성경,14 만일 율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효가 되고 약속은 파기됐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4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상속자라면, 믿음은 의미가 없어지고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영어NIV,14 For if those who live by law are heirs, faith has no value and the promise is worthless,

영어NASB,14 For if those who are of the Law are heirs, faith is made void and the promise is nullified;

영어MSG,14 If those who get what God gives them only get it by doing everything they are told to do and filling out all the right forms properly signed, that eliminates personal trust completely and turns the promise into an ironclad contract! That’s not a holy promise; that’s a business deal.

영어NRSV,14 If it is the adherents of the law who are to be the heirs, faith is null and the promise is void.

헬라어신약Stephanos,14 ει γαρ οι εκ νομου κληρονομοι κεκενωται η πιστις και κατηργηται η επαγγελια

라틴어Vulgate,14 si enim qui ex lege heredes sunt exinanita est fides abolita est promissio

히브리어Modern,14 כי אלו לבני התורה הירשה האמונה לריק תהיה וההבטחה בטלה׃

성 경: [롬4:14]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율법에 속한 자들 –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 하는 자들’ 또는 ‘율법의 체계에 종속된 자들’을 의미하며 바울의 또다른 표현에 의하면 ‘율법의 종노릇하는 자들’로서 종의 멍에를 멘 자들을 뜻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도 오직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만 성취된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펠라기우스(Pelagius)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Roman Chatholic Church)는 하나님의 약속이 선행을 통해서 성취된다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만들었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이며(갈 1:7), 이렇게 전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갈 1:8, 9).

󰃨 만일…후사이면 – ‘후사’를 뜻하는 ‘클레로노모스'(*)는 ‘상속자’라는 의미로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어진 것을 물려받을 자를 뜻한다. 구약의 개념으로 상속자가 얻을 것은 (1) 약속의 땅 가나안(창 12:7;13:14, 15), (2) 믿음으로 자손된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후손을 얻게 될 하나님의 축복, (3) 한 후손 메시야에 의한 세계 통치를 의미한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의 상속자라면 믿음은 의미를 잃게 되고 약속된 언약은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세상의 상속자라는 주장을 한다(요 8:39). 한편 본절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과 믿음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약속으로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믿음에 의하여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를 두고 바울이 시작과 성취 중간에 들어온 율법의 무용성(無用性)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5:20). 그러나 바울이 의도한 요점은 율법 무용론이 아니다. 다만 바울이 말한 것은 중간에 끼어 들어온 율법이 앞서 있었던 약속을 변경시킬 수 없으며 율법에 의하여 후사가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 ‘헛것이 되고'(*, 케케노타이)라는 것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원문상 ‘그 속의 내용이 없어졌다’라는 뜻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믿음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 내용 없는 것으로 변해 버린다면 약속도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는 약속은 효력을 발생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카테르게타이, ‘폐하여졌다’) 또한 법적 신실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잃게 될 것이다. 만약 율법의 행위로 약속이 보증된다면 율법 이전에 이미 보증받았던 아브라함이 약속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그 약속에 의하여 성취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좇는 모든 믿음은 오히려 율법의 종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율법으로만 약속이 보증되고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면 이스라엘의 신앙은 여타의 윤리 종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호 가르 노모스 오르겐 카테르가제타이 후 데 우크 에스틴 노모스 우데 파라바시스

개역개정,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새번역,15 율법은 진노를 불러옵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습니다.

우리말성경,15 왜냐하면 율법은 진노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함도 없습니다.

가톨릭성경,15 율법은 진노를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습니다.

영어NIV,15 because law brings wrath. And where there is no law there is no transgression.

영어NASB,15 for the Law brings about wrath, but where there is no law, neither is there violation.

영어MSG,15 A contract drawn up by a hard-nosed lawyer and with plenty of fine print only makes sure that you will never be able to collect. But if there is no contract in the first place, simply a promise–and God’s promise at that–you can’t break it.

영어NRSV,15 For the law brings wrath; but where there is no law, neither is there violation.

헬라어신약Stephanos,15 ο γαρ νομος οργην κατεργαζεται ου γαρ ουκ εστιν νομος ουδε παραβασις

라틴어Vulgate,15 lex enim iram operatur ubi enim non est lex nec praevaricatio

히브리어Modern,15 כי התורה מביאה קצף כי באשר אין תורה גם אין שם עברה׃

성 경: [롬4:15]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 율법은 행위의 완전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고 저주를 선포한다(신 28:58ff.). 따라서 인간 편에서 볼 때 율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죄와 저주의 근거로서의 기능만을 가진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받은 모세의 직분을 ‘정죄(定罪)의 직분'(고후 3:9)이라고 진술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율법의 저주’를 담당한 것이라고 선포했다(갈 3:13).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인간들을 위해 의를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수 없다.

󰃨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 쉬운 예로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의 법이 없다면 그 나라에 사는 백성은 아무런 범죄자가 되지 않는다. 오직 범죄자가 범죄자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은 그 나라의 법률에 따라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법률이 있음으로써 범법자는 죄인으로 정죄받고 심판을 받는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율법에 따른 정죄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믿음의 원리에 따라서만 살았다. 또한 노아는 아브라함처럼 할례에 대한 규례도 받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인’으로 인정되었다(창 6:9). 그가 의인으로 또한 완전한 자로 칭함을 받은 것은 율법적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께 정죄를 받은 것(창 6:5)은 율법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디아 투토 에크 피스테오스 히나 카타 카린 에이스 토 에이나이 베바이안 텐 에팡겔리안 판티 토 스페르마티 우 토 에크 투 노무 모논 알라 카이 토 에크 피스테오스 아브라암 호스 에스틴 파테르 판톤 헤몬

개역개정,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새번역,16 이런 까닭에, 이 약속은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은혜로 주셔서 이것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도, 곧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보장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우리말성경,16 그러므로 약속은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 곧 율법을 따라 사는 사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도 은혜로 이 약속을 보장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가톨릭성경,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영어NIV,16 Therefore, the promise comes by faith, so that it may be by grace and may be guaranteed to all Abraham’s offspring–not only to those who are of the law but also to those who are of the faith of Abraham. He is the father of us all.

영어NASB,16 For this reason it is by faith, that it might be in accordance with grace, in order that the promise may be certain to all the descendants, not only to those who are of the Law, but also to those who are of the faith of Abraham, who is the father of us all,

영어MSG,16 This is why the fulfillment of God’s promise depends entirely on trusting God and his way, and then simply embracing him and what he does. God’s promise arrives as pure gift. That’s the only way everyone can be sure to get in on it, those who keep the religious traditions and those who have never heard of them. For Abraham is father of us all. He is not our racial father–that’s reading the story backwards. He is our faith father.

영어NRSV,16 For this reason it depends on faith, in order that the promise may rest on grace and be guaranteed to all his descendants, not only to the adherents of the law but also to those who share the faith of Abraham (for he is the father of all of us,

헬라어신약Stephanos,16 δια τουτο εκ πιστεως ινα κατα χαριν εις το ειναι βεβαιαν την επαγγελιαν παντι τω σπερματι ου τω εκ του νομου μονον αλλα και τω εκ πιστεως αβρααμ ος εστιν πατηρ παντων ημων

라틴어Vulgate,16 ideo ex fide ut secundum gratiam ut firma sit promissio omni semini non ei qui ex lege est solum sed et ei qui ex fide est Abrahae qui est pater omnium nostrum

히브리어Modern,16 על כן מתוך אמונה למען לפי חסד למען תחיה ההבטחה קימת לכל זרעו לא לבני התורה לבדם כי גם לבני אמונת אברהם אשר הוא אב לכלנו׃

성 경: [롬4:16]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 ‘후사가 되리라’는 약속은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믿으으로'(*, 에크 피스테오스)라는 말은 ‘율법을 통해서'(*, 디아 노무)라는 개념과 반대적인 의미이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라는 말은 약속이라는 개념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약속된 그리스도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원문이 ‘수단과 방법’을 뜻하는 전치사 ‘디아'(*)를 사용하지 않고 ‘에크'(*)를 사용한 것도 믿음이라는 것을 수단과 방법적인 것으로 전락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약속이 내용이며 동시에 약속 그 자체이다. 따라서 믿음은 약속이 성취된 곳에 나타나는 결과이며 동시에 약속이 하나님에 의하여 성취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본절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이 은혜로 말미암아 성취되도록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보다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은혜’라는 개념이다. 믿음에 의하여 은혜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하여 믿음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1) 믿는 자로 하여금 믿음의 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며 (2) 신앙의 확실성을 갖게 하며 (3)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신실하심을 선포하심으로써 믿는 자들의 의를 성취하도록 하는 방편이며, 또한 궁극적인 의의 보증이다.

󰃨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것이기에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될 수 없다(15절).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유효하며, 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고 보증해 준다.

󰃨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 바울은 ‘그 모든 후손’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를 ‘율법에 속한 자’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라고 했다. 통상적으로 ‘율법에 속한 자’는 단순히 유대인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14절). 이런 사실 때문에 헨드릭슨(Hendriksen)은 ‘율법에 속한 자’가 단지 ‘유대인’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반부에 언급된 ‘그 모든 후손’ 곧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받은 ‘그 모든 후손’에는 분명히 ‘믿지 않는 유대인’은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율법에 속한 자’는 율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유대인’을 의미하며,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이방인’을 가리킨다(12절 주석 참조). 이에 대해서는 곧이어 언급되는 하반절에 의해 더욱 지지를 받는다.

󰃨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 바울이 ‘우리’라고 표현한 것은 믿음 안에 있는 ‘신앙의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이 신앙의 공동체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오직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모든 족속이 포함된다. 지금 바울이 논하고 있는 것은 혈통적인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한 것이다. 14절에서 바울은 혈통적으로만 ‘율법에 속한 자들’은 후사가 될 수 없다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실 수 있는 후사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자들뿐이다.

카도스 게그랖타이 호티 파테라 폴론 에드논 테데이카 세 카테난티 후 에피스튜센 데우 투 조오포이운토스 투스 네크루스 카이 칼룬토스 타 메 온타 호스 온타

개역개정,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새번역,17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함과 같습니다. 이 약속은, 그가 믿은 하나님,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것입니다. / ㉤창 17:5

우리말성경,17 기록되기를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믿은 하나님, 곧 죽은 사람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조상이 됐습니다. 창17:5

가톨릭성경,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 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영어NIV,17 As it is written: “I have made you a father of many nations.” He is our father in the sight of God, in whom he believed–the God who gives life to the dead and calls things that are not as though they were.

영어NASB,17 (as it is written, “A FATHER OF MANY NATIONS HAVE I MADE YOU”) in the sight of Him whom he believed, even God, who gives life to the dead and calls into being that which does not exist.

영어MSG,17 We call Abraham “father” not because he got God’s attention by living like a saint, but because God made something out of Abraham when he was a nobody. Isn’t that what we’ve always read in Scripture, God saying to Abraham, “I set you up as father of many peoples”? Abraham was first named “father” and then became a father because he dared to trust God to do what only God could do: raise the dead to life, with a word make something out of nothing.

영어NRSV,17 as it is written, “I have made you the father of many nations”)–in the presence of the God in whom he believed, who gives life to the dead and calls into existence the things that do not exist.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θως γεγραπται οτι πατερα πολλων εθνων τεθεικα σε κατεναντι ου επιστευσεν θεου του ζωοποιουντος τους νεκρους και καλουντος τα μη οντα ως οντα

라틴어Vulgate,17 sicut scriptum est quia patrem multarum gentium posui te ante Deum cui credidit qui vivificat mortuos et vocat quae non sunt tamquam ea quae sunt

히브리어Modern,17 ככתוב כי אב המון גוים נתתיך והוא האמין בהביט אל אל המחיה את המתים והקורא את אשר לא היה כמו הוה׃

성 경: [롬4:17]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 바울이 여기서 창 17:5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아브라함이 혈통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는 이유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를 위한 것이다. ‘많은 민족’은 문자적으로 ‘혈연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영적으로 ‘믿음의 원리를 좇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모든 믿는 자들의 새로운 공동체’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이유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후사에게 주어진 특권과 유익을 함께 소유하는 공동체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됨으로 말미암아 인종적 보편성이 성취되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표현은 ‘무할례자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과 ‘할례자의 조상’이란 표현을 포괄하는 보다 광범위한 표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는 동등한 부르심을 받았음을 시사하며 또한 세계 도처의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름으로 후사가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강조한다(J. Murray).

󰃨 그의 믿은 바 하나님 –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을 정의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관(神觀)을 정의하며 동시에 모든 믿는 자들의 신관을 정의한다. 이는 두 가지의 사실을 전제로 하는데, (1)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며 (2)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는(16절) 사실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정의한 후에 그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확고히 하신 ‘아브라함의 조상됨’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의 조상으로 삼으신 하나님 곧 예수를 죽인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 죽은 자를 살리시며 – 이 구절은 살아 역동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해주며 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엡 1:20). 본절에서 그 의미는 크게 두 가지를 포함한다. (1) 이삭의 출생이며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끝가지 기다렸던 역사적 사건을 상기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유추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출생을 기다리며 장차 있을 메시야의 세계와 그의 승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Lenski, J. Murray, E.F. Harrison). 사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흔히 부르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었으나 바울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적용함으로써(24절)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과 또한 그것을 믿는 자들을 의로 여기신다는 두 가지의 핵심적 진리를 동시에 증거하였다.

󰃨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 – 이 구절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특성을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이시며(마 3:9;눅 3:8) 그 어떠한 인간의 공로나 반항에도 구애받지 아니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절대 주권의 능력을 행사하는 분이시다. 그분 앞에서는 아브라함의 늙은 육체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죄인의 추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가능성 속에서 역사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미리 정하신 작정과 통치 속에서 결정해 놓으신 것들을 성취해 나아가신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후손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성취될 것을 확신하였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성취된 것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확신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으며 본절과 같이 하나님을 정의할 수 있는 신앙이다.

호스 파르 엘피다 엪 엘피디 에피스튜센 에이스 토 게네스다이 아우톤 파테라 폴론 에드논 카타 토 에이레메논 후토스 에스타이 토 스페르마 수

개역개정,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새번역,18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 ㉥창 15:5

우리말성경,18 아브라함은 소망이 없는 가운데서도 소망을 갖고 믿었습니다. 이는 “네 후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창15:5

가톨릭성경,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 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영어NIV,18 Against all hope, Abraham in hope believed and so became the father of many nations, just as it had been said to him, “So shall your offspring be.”

영어NASB,18 In hope against hope he believed, in order that he might become a father of many nations, according to that which had been spoken, “SO SHALL YOUR DESCENDANTS BE.”

영어MSG,18 When everything was hopeless, Abraham believed anyway, deciding to live not on the basis of what he saw he couldn’t do but on what God said he would do. And so he was made father of a multitude of peoples. God himself said to him, “You’re going to have a big family, Abraham!”

영어NRSV,18 Hoping against hope, he believed that he would become “the father of many nations,” according to what was said, “So numerous shall your descendants be.”

헬라어신약Stephanos,18 ος παρ ελπιδα επ ελπιδι επιστευσεν εις το γενεσθαι αυτον πατερα πολλων εθνων κατα το ειρημενον ουτως εσται το σπερμα σου

라틴어Vulgate,18 qui contra spem in spem credidit ut fieret pater multarum gentium secundum quod dictum est sic erit semen tuum

히브리어Modern,18 באשר אין תקוה קוה ויאמן למען אשר יהיה לאב המון גוים כמו שנאמר כה יהיה זרעך׃

성 경: [롬4:18]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자기 아내 사라가 잉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상속자는 자기의 종인 엘리에셀이 될 것이라고 고했다(창 15:2).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번성케 하실 것을(창 15:5) 믿었다. 키에르케골(Kierkegaard)은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것을 기대함으로써 위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위대했던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이다”라고 함과 동시에 ‘불가능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을 ‘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자’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공포와 전율] 중에서). 그러나 아브라함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아브라함이 바라고 믿었다는 것은 자신의 소망에 대하여 믿음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더 나아가 개인의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와 모순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랐기 때문에 소망이 성취된 뒤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20절). 그는 믿고 바라는 모든 것의 근원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고 있다. 과학에 있어서 사실에 대한 ‘확신’은 과학자가 세워 놓은 가설을 추론(推論)하여 밝혀진 사실(비록 이 사실이 진리는 될 수 없을지라도) 또는 추론에 의해 세워진 가설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전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믿고 바라는 것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목적의 결정성(determinateness), 곧 약속의 신실성을 믿고 바라는 것이기에(J. Murray) 전제된 가설을 추론하여 믿는 과학적 확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 이 내용은 창 15:5 b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말씀의 인용구이다. 여기서 ‘후손’이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만, 창세기 본문에서나 본절에서는 ‘율법에 속한 자’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 모두를 지칭한다(16절 주석 참조).

카이 메 아스데네사스 테 피스테이 카테노에센 토 헤아우투 소마 에데 네네크로메논 에카톤타에테스 푸 휘파르콘 카이 텐 네크로신 테스 메트라스 사르라스

개역개정,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새번역,19 그는 나이가 백 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면서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말성경,19 아브라함은 100세나 돼 이미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성경,19 백 살가량이 되어,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사라의 모태도 죽은 것이라 여기면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영어NIV,19 Without weakening in his faith, he faced the fact that his body was as good as dead–since he was about a hundred years old–and that Sarah’s womb was also dead.

영어NASB,19 And without becoming weak in faith he contemplated his own body, now as good as dead since he was about a hundred years old, and the deadness of Sarah’s womb;

영어MSG,19 Abraham didn’t focus on his own impotence and say, “It’s hopeless. This hundred-year-old body could never father a child.” Nor did he survey Sarah’s decades of infertility and give up.

영어NRSV,19 He did not weaken in faith when he considered his own body, which was already as good as dead (for he was about a hundred years old), or when he considered the barrenness of Sarah’s womb.

헬라어신약Stephanos,19 και μη ασθενησας τη πιστει ου κατενοησεν το εαυτου σωμα ηδη νενεκρωμενον εκατονταετης που υπαρχων και την νεκρωσιν της μητρας σαρρας

라틴어Vulgate,19 et non infirmatus fide consideravit corpus suum emortuum cum fere centum annorum esset et emortuam vulvam Sarrae

히브리어Modern,19 ולא רפתה אמונתו ולא התבונן אל גופו שכבר נפוג בהיותו כבן מאת שנה ואל בלות רחם שרה׃

성 경: [롬4:19]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 바울은 생식(生殖) 능력이 없는 것을 ‘죽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헬라 본문에서 ‘죽은 것 같음’이란 말이 아브라함에게는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 네네크로메논) 언급되어 있으며, 사라에게는 명사형(*, 네크로신)으로 언급되어 있다. 사라에게 명사형으로 사용된 것은 앞에서 사용된 분사형의 반복이며, 아브라함에게 완료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이미 생식 능력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개역 성경의 번역에서 사용된 ‘같음’이란 말은 헬라 본문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특히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있지 않으나 헬라 본문에는 ‘이미’를 의미하는 헬라어 ‘에데'(*)가 사용되어 두 사람 모두 생식 능력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17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라는 말씀이 ‘이미 생식 능력을 상실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식 능력을 회복시키시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24절의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는 구절과도 연결되어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은 사라의 태(胎)가 생산 능력이 없는데서 생산의 능력을 갖추게 된 사실과 영적으로 일맥 상통한다. 영적인 의미에서 생산 능력이 없는 사라가 그의 후손을 생산하게 된 것이나 죽었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을 주는 영'(고전 15:45, life-giving-spirit)으로서 잠자는 자의 첫열매가 되신 것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에이스 데 텐 에팡겔리안 투 데우 우 디에크리데 테 아피스티아 알 에네뒤나모데 테 피스테이 두스 돜산 토 데오

개역개정,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새번역,20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굳세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말성경,20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고 도리어 믿음이 굳건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가톨릭성경,20 그는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영어NIV,20 Yet he did not waver through unbelief regarding the promise of God, but was strengthened in his faith and gave glory to God,

영어NASB,20 yet, with respect to the promise of God, he did not waver in unbelief, but grew strong in faith, giving glory to God,

영어MSG,20 He didn’t tiptoe around God’s promise asking cautiously skeptical questions. He plunged into the promise and came up strong, ready for God,

영어NRSV,20 No distrust made him waver concerning the promise of God, but he grew strong in his faith as he gave glory to God,

헬라어신약Stephanos,20 εις δε την επαγγελιαν του θεου ου διεκριθη τη απιστια αλλ ενεδυναμωθη τη πιστει δους δοξαν τω θεω

라틴어Vulgate,20 in repromissione etiam Dei non haesitavit diffidentia sed confortatus est fide dans gloriam Deo

히브리어Modern,20 ולא חלק לבו בהבטחת האלהים כחסר האמונה כי אם התחזק באמונתו ויתן כבוד לאלהים׃

성 경: [롬4:20]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의심치 않고 – ‘의심하다’의 헬라어 ‘디에크리데'(*)는 ‘디아크리노'(*)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아브라함의 의심하지 아니한 행위가 개인의 능동적인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디아크리노’는 ‘가려내다'(마 16:3), ‘구별하다'(약 2:4) 또는 ‘스스로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다'(14:23;막 11:23)라는 의미인데 본절에서는 아브라함의 ‘확신'(*, 플레로포레오)과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의심치 않았다’는 것은 소망에 근거해서(*, 에프 엘피디) 믿음으로 살았기에 갈등할 수가 없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뒤나모데 테 피스테이'(*)에서 ‘믿음'(피스테이)은 앞에 전치사가 없이 여격으로 사용되었다. 메첸(Machen)은 전치사가 없는 단순한 여격은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 예로 ‘에게이론 타이 토 로고 투 퀴리우'(*)는 ‘그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일으킴을 받는다’를 의미하는데 주님의 ‘말씀’이 ‘일으킴을 받게 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절은 문자적으로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믿음’이 ‘강하여지게 되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강하게 붙들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한 가지 난제가 발생한다. 창 15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다는 사실이 창 17:17의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는 말씀에 의해 도전받게 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이와 같이 분명하게 의심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고 진술하고 있는가 ?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은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비록 혹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연약하여져서 의심을 하였으나 다시 하나님께서 그것을 강하게 해주셨다는 것으로 이해하지만(Hendriksen)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다만 아브라함이 의심을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즉 그의 자손이 수없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은 문자적으로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라를 통해서만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비록 하갈은 사라의 몸종이었지만 하갈의 자식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고하기를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 15장에서 말씀하셨던 그 약속을 재차 창 17:19-21에서 말씀하심은 아브라함의 약해진 믿음을 다시 확고히 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사라의 태에서 난 자만이 그 약속을 성취시킬 것이라는 점을 아브라함에게 못박으신 것이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본 구절에 대해서 구약성경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창 17:19-21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재보증받은 아브라함은 곧바로 하나님께서 이전에 명하신 할례 의식을 행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방법에 대해 확고히 믿게 되었음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카이 플레로포레데이스 호티 토 에펭겔타이 뒤나토스 에스틴 카이 포이에사이

개역개정,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새번역,21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가톨릭성경,2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영어NIV,21 being fully persuaded that God had power to do what he had promised.

영어NASB,21 and being fully assured that what He had promised, He was able also to perform.

영어MSG,21 sure that God would make good on what he had said.

영어NRSV,21 being fully convinced that God was able to do what he had promised.

헬라어신약Stephanos,21 και πληροφορηθεις οτι ο επηγγελται δυνατος εστιν και ποιησαι

라틴어Vulgate,21 plenissime sciens quia quaecumque promisit potens est et facere

히브리어Modern,21 וידע בלבב שלם כי את אשר הבטיח גם יכל לעשותו׃

성 경: [롬4:21]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약속하신 그것 – 본문에 언급된 약속의 구체적인 내용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17절)는 것과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18절)고한 것이다. 이약속은 아브라함의 소망과 확신에 의하여 얻어낸 보증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보여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근거한다. 아브라함의 확신보다 더 확실한 것은 그분의 약속이다. 왜냐하면 약속은 하나님 자신의 전능성과 신실성을 나타내신 목적있는 작정이기 때문이다.

󰃨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 이 말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창 18:14)에 대한 확신이며 또한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라'(창 18:19)는 말씀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다. 본 구절에 대하여 혹자는 본절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힘과 활기를 완벽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고 진술하기도 한다.

디오 카이 엘로기스데 아우토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개역개정,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새번역,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 ㉦또는 ‘그의 믿음을’ ㉧창 15:6

우리말성경,22 그러므로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습니다. 창15:6

가톨릭성경,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영어NIV,22 This is why “it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영어NASB,22 Therefore also IT WAS RECKONED TO HIM AS RIGHTEOUSNESS.

영어MSG,22 That’s why it is said, “Abraham was declared fit before God by trusting God to set him right.”

영어NRSV,22 Therefore his faith “was reckoned to him as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22 διο και ελογισθη αυτω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라틴어Vulgate,22 ideo et reputatum est illi ad iustitiam

히브리어Modern,22 על כן גם נחשבה לו לצדקה׃

성 경: [롬4:22]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그러므로 –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므로'(*, 디오) 다음에 ‘카이'(*)가 언급되어 있다. ‘카이’는 일반적으로 접속사로 사용되어 ‘그리고’를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또한 역시’라는 의미를 지닌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9절 하반절에서 언급했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말씀을 다시 반복하면서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우크 에그라페 데 디 아우톤 모논 호티 엘로기스데 아우토

개역개정,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새번역,23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 하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우리말성경,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라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가톨릭성경,23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기록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영어NIV,23 The words “it was credited to him” were written not for him alone,

영어NASB,23 Now not for his sake only was it written, that it was reckoned to him,

영어MSG,23 But it’s not just Abraham;

영어NRSV,23 Now the words, “it was reckoned to him,” were written not for his sake alone,

헬라어신약Stephanos,23 ουκ εγραφη δε δι αυτον μονον οτι ελογισθη αυτω

라틴어Vulgate,23 non est autem scriptum tantum propter ipsum quia reputatum est illi

히브리어Modern,23 ולא לבד למענו כתובה זאת שנחשבה לו׃

성 경: [롬4:23]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실은 동시성(Synchronism)과 통시성(Diachronism)을 동시에 지닌다. 즉 그 원리는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 모두에게도 적용된다. 이에 대해서 성경 자체의 증거로는 15:4;시 102:18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당신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만 적용되며 모세 이후부터는 율법만이 적용될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것이다.

알라 카이 디 헤마스 호이스 멜레이 로기제스다이 토이스 피스튜우신 에피 톤 에게이란타 예순 톤 퀴리온 헤몬 에크 네크론

개역개정,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새번역,24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우리말성경,24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도 위한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4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을 믿는 우리도 그렇게 인정받을 것입니다.

영어NIV,24 but also for us, to whom God will credit righteousness–for us who believe in him who raised Jesus our Lord from the dead.

영어NASB,24 but for our sake also, to whom it will be reckoned, as those who believe in Him who raised Jesus our Lord from the dead,

영어MSG,24 it’s also us! The same thing gets said about us when we embrace and believe the One who brought Jesus to life when the conditions were equally hopeless.

영어NRSV,24 but for ours also. It will be reckoned to us who believe in him who raised Jesus our Lord from the dead,

헬라어신약Stephanos,24 αλλα και δι ημας οις μελλει λογιζεσθαι τοις πιστευουσιν επι τον εγειραντα ιησουν τον κυριον ημων εκ νεκρων

라틴어Vulgate,24 sed et propter nos quibus reputabitur credentibus in eum qui suscitavit Iesum Dominum nostrum a mortuis

히브리어Modern,24 כי אם גם למעננו אשר עתידה להחשב לנו המאמינים במי שהעיר את ישוע אדנינו מן המתים׃

성 경: [롬4:24]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 ‘우리’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본절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열려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는 유대인의 특권을 부인하고 있는 23절의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라는 내용과 호응을 이룬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논리를 ‘믿음의 내용’으로 옮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화제를 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언급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은 동일한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결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는 것과 신약 시대에 성도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용상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실현될 ‘약속’에 대한 것인 반면, 신약 시대 성도의 믿음은 성취된 ‘약속’에 대한 것이다.

호스 파레도데 디아 타 파랖토마타 헤몬 카이 에게르데 디아 텐 디카이오신 헤몬

개역개정,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새번역,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말성경,25 예수께서는 우리의 범죄를 인해 죽음에 넘겨지셨고 우리의 의를 위해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가톨릭성경,2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영어NIV,25 He was delivered over to death for our sins and was raised to life for our justification.

영어NASB,25 He who was delivered up because of our transgressions, and was raised because of our justification.

영어MSG,25 The sacrificed Jesus made us fit for God, set us right with God.

영어NRSV,25 who was handed over to death for our trespasses and was raised for our justification.

헬라어신약Stephanos,25 ος παρεδοθη δια τα παραπτωματα ημων και ηγερθη δια την δικαιωσιν ημων

라틴어Vulgate,25 qui traditus est propter delicta nostra et resurrexit propter iustificationem nostram

히브리어Modern,25 אשר נמסר בעבור פשעינו ונעור לבעבור צדקנו׃

성 경: [롬4:25]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예수는…살아나셨느니라 – 본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성도에게 적용시키면서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두 구절을 대조시키고 있다. 즉 ‘우리 범죄함’과 ‘우리를 의롭다하심’이 대조되어 있고,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와 ‘위하여 살아나셨으니라’가 대조되어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내어 줌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적(代贖的)인 죽음을 의미하며,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심은 대속의 결과인 ‘의’를 보증하고 선포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바울은 24절에서 믿음의 내용으로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것에 대하여 언급했던 것을 성도들에게 다시 적용시키는 논리의 순서를 밝고 있다. 한편 바울이 예수의 대속적 죽으심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은 사 53:1-9과 같이 구약 시대에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증명되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해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까지 굳이 증명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내용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을 위해 더 유익한 것으로 판단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5장에서 8장까지 줄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성도들에게 어떤 의의를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 진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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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21년 7월 1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마 5:18; 요 10:35)와 사도 바울(갈 3:6; 딤후 3:16)의 증거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진술된 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이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으로 여전히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잘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로마서 서론 1장: 사람의 죄 2장: 하나님의 심판 3장: 칭의(稱義)의 방법 4장: 아브라함의 예 5장: 칭의(稱義)의 결과 6장: 성화(聖化)의 이유 7장: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8장: 성령의 인도하심 9장: 은혜로 택하심 10장: 신앙고백 11장: 하나님의 구원 계획 12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13장: 사회적 의무, 이웃 사랑, 빛의 생활 14장: 서로 덕을 세우라 15장: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 16장: 인사 서론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하나님의 감동으로, 아마 고린도에서 기록한 편지로서(롬 15:19, 23-26; 16:1; 행 19:21) 바울의 13권 혹은 14권의 서신들 중에서, 아니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구원의 복음을 가장 논리적으로 밝히 증거한 매우 중요한 책이다. 본서의 저자 는 사도 바울이다(1절).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 로마의 클레멘트, 익나시우스, 순교자 저스틴, 폴리갑 등은 본서를 많이 인용하였고 교회역사상 본서의 바울 저작성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본서의 저자는 본서 끝부분에서 자신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북서쪽 해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하였고 이제는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행적과 일치한다(행 19:21; 20:22; 24:17 등). 본 서신을 받은 로마교회 의 기원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로, 천주교회는 사도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세웠고 25년간 그 교회의 감독으로 있었다고 주장한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고린도의 디오니시우스는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함께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말하였다. 1) 이레니우스도 말하기를, 로마교회가 베드로와 바울, 두 영광스러운 사도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였다. 2) 터툴리안은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 당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오늘날 일반적으로 베드로가 로마를 방문했으며 또 후에 그곳에서 순교 당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가 로마교회를 세웠다거나 25년간 그곳에서 사역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 전에 베드로가 그곳에서 교회를 세웠고 그곳에서 사역하고 있었다면 바울은 필경 그에게도 문안했을 것이고, 또 남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사역했던(롬 15:20) 그가 그 교회를 방문하려고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둘째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와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자들이 로마에 돌아가 교회를 세웠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셋째로,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사도 바울이나 기타 다른 제자들에 의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신자들이 로마로 올라가 살면서 교회를 세웠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견해는 다 가능하다고 본다. 본 서신의 저작 장소 와 연대 에 관하여, 본 서신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려는 소원을 갖고 있었고(1:10), 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을 견고케 하고 열매를 맺게 하기를 원하였다(1:11, 13). 그는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 예루살렘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모은 헌금을 가지고 그리로 가고 있었다(15:25-27). 또 그가 ‘식주인[집주인] 가이오’를 언급한 것을 보면, 그는 고린도에 머물고 있었다고 보인다(고전 1:14). 그러므로 본 서신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주후 56년경에 썼을 것이다. 로마서의 특징적 주제 는 구원 이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이치에 대해 증거했는데, 1, 2장은 구원의 필요성으로서 사람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3-5장은 의롭다 하심(칭의, 稱義)에 대해, 6-8장은 거룩하여짐(성화, 聖化)에 대해, 또 9-11장은 구원받을 자들에 대한 예정에 대해 증거했다. 그리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구원 얻은 자들의 삶에 대하여 교훈하였다. 구원 얻은 자들은 거룩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1장: 사람의 죄 1-7절, 복음 안에서 문안함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했다. 종은 주인에게 복종하는 신분이다. 그는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순종해야 한다. 바울은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고 그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또 자신을 그의 종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구주와 주님이시다. 우리는 사람이나 돈이나 쾌락의 종이 되지 말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그에게 즐거이, 온전히 복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또 자신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하였다. 누가복음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사도(使徒)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과 바울에게만 적용되는 명칭이다.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가 배신했으므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았다(행 1:26). 사도행전에서 예외적으로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가 바울과 함께 ‘사도들’이라고 두 번 불리었다(행 14:4, 14 원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함을 입었다고 말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해설하고 선포하는 일을 맡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성령의 특별한 감동을 받은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전달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초를 놓은 자들이었다(엡 2:20). 그러므로 신약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잘 파악하기 위해 사도들에게로, 즉 그들의 글들인 신약성경으로 나아가야 한다. 혼란한 시대에는 더욱 성경만이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확인하는 길이다. 종교개혁시대에 많은 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복음이 가리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어떤 교훈과 노선이 바른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루터는 비록 한 사람의 천주교 신부이었지만 성경의 확실한 지식과 확신으로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 수 있었다. 다른 개혁자들도 그러하였다. 오늘날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에도 참된 교회들과 종들은 오직 성경으로 가야 한다. [2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내용으로 구약성경에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 구약성경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약속하였었다. 창세기 3:15에 예언된 ‘여인의 후손’이나 창세기 12장에 언급된 ‘아브라함의 씨’나 창세기 49:10에 예언된 ‘ 실로 ’[안식의 사람]나 이사야 9:6의 신적 아기의 탄생이나 미가 5:2의 그의 근본이 태초인 자 등이 그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구약성경에 근거하고 있다. 구약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과 예표의 말씀들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요 5:39; 눅 24:27, 44). [3절]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씨, 자손]에서 나셨고.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사람이시요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참된 인성(人性)과 참된 신성(神性)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시다. 본절의 ‘육신’이라는 원어( 사르크스 )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참 사람으로 탄생하셨다. 그의 몸만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것이 아니고, 그의 영도 그러하셨다. 즉 그는 몸과 영혼을 가진 참 사람이셨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의 성취이었다. 예레미야 23:5,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에스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호세아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예언들의 성취이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마 1:1)는 말로 시작된다. [4절] 성결의 영( 프뉴마 하기오쉬네스 )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성결의 영’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속에 계신 거룩한 신성(神性)의 영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인성(人性)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요 신성(神性)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증거는 그가 행하신 기적들과 그의 부활하심이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기본적 사실들이다. 고린도전서 15:1-4,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 . . .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기적들과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반드시 확인하고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인정하다’는 원어( 호리조 )는 ‘확정하다, 선언하다’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선언되셨다’라고 번역하였다 (KJV, NASB, NIV) . 그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부활하심으로써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히 인정되고 확정되고 선언되신 것이다. 이 분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와 같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과 참된 신성을 증거하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중심 인물이시며 복음 자체이시다. 그는 죄인들의 대속물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구주이시다. 그는 슬픔과 불행, 절망과 허무, 죽음의 그늘진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오신 구주이시다. 그 안에 구원과 영생, 기쁨과 소망이 있다. [5-6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 또 은혜는 사도의 직분에도 관계된다. 우리는 직분에 있어서도 무자격한 자들이다. 사도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는 것이었다. ‘믿어 순종케’라는 원어( 에이스 휘파코엔 피스테오스 )는 ‘믿음의 순종을 위해’라는 뜻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믿음 자체가 순종 곧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 마음으로 순종한 자는 물론 행위로도 순종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가지고 곳곳에 다니며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의 순종을 하게 하였다. 이 편지를 받는 로마 교인들도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무리 중에 들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었다. ‘부르심’은 성령께서 죄인들을 회개시켜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 그의 양들,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자들만 그의 부르심을 입고 그들은 그의 특별한 소유가 된다.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7절]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편지하노니](고전, 고후, 갈 외에는 작은 글씨로 첨가됨)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고후, 갈 외에는 ‘있을지어다’라고 번역함).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며 성도(聖徒, 거룩한 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들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긍휼로 택함을 입은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죄사함을 받아 거룩해진 무리들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안이 있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성화를 이루어간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성화도 불가능할 것이다. ‘평안’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을 다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의 결과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복음이며 복음의 전달자는 사도들이며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자이시다. 그는 죄인의 구주로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대속사역을 이루셨다. 이 배교의 시대에 우리는 그의 사도들의 글인 신약성경을 통해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예수님 믿고 죄사함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소유가 되고 그를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은 가장 존귀한 구원의 복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을 깨닫고 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안을 더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믿음의 견고함과 거룩하여짐과 온전해짐, 즉 우리가 죄와 마귀와 싸워 이기기 위해 필요하다. 또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평안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이 필요하다. 8-17절, 로마에 복음 전하기를 원함 [8-10절]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내 영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먼저 로마의 교인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을 나타낸다. 오늘날 우리의 감사의 이유도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물질적 형통과 번창보다 먼저 우리 자신과 주위의 형제들이 구원 얻은 사실과 그들의 믿음과 믿음의 성장과 믿음의 소문이 주위에 퍼져나감을 감사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섬긴다고 표현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으로 구원받았고 그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바울은 또 ‘내 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표현한다. 우리의 인격은 우리의 영에 있다. 영은 인격의 주체이며 몸은 영의 도구이다. 기독교는 단지 몸의 종교가 아니고 영의 종교이다. 우리의 중생한 영의 새 성향은 우리의 마음과 몸을 늘 주장해야 한다. 바울은 그의 감사와 쉬지 않는 기도 생활에 대해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신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진실한 마음과 진실한 사역을 증거한다.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진실하게 말하고 행하며 또 감사하고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에게로 갈 좋은 길 얻기를 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것 혹은 저것을 하겠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약 4:15). [11-12절] [이는]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원함이니 그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서로의 안에 있는](원문)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이 로마로 갈 좋은 길 얻기를 기도한 이유는 그들 보기를 심히 원했기 때문이며, 그가 그들 보기를 원했던 것은 그들에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그들을 견고케 하기 위함이었다. ‘신령한 은사’는 방언이나 병 고침 같은 은사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도들의 사역은 일차적으로 말씀 사역이었다. 그 말씀 사역을 통하여 성도들의 신앙과 소망은 어린아이의 시기를 벗어나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로 자라며 견고케 된다(골 1:28-29). 오늘날 목사들의 사역의 목표와 임무는 바로 성경의 바른 강해이다. 바울은 또 서로의 견고한 믿음을 인해 서로 위로를 얻기를 원했다. 이것은 사실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사도는 성도들에게 무엇을 주려고만 하지 않고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으려 한다고 겸손히 말했다. 성도의 교제란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은혜로 주신, 서로 안에 있는 믿음을 인하여 피차 위로와 힘을 얻는 것이다(살전 5:14). 이것이 영적 교제이며 교제의 유익이다. 우리의 교제는 단지 먹고 마시는 데 그치지 말고, 이렇게 같은 믿음의 확인을 통해 위로와 격려를 주고 받는 교제가 되어야 한다. [13절]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약간의](원문)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은 그가 로마로 가기를 원한 또 하나의 목적을 그들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들 가운데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라고 표현한다. 문맥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영혼 구원의 열매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는 거창하게 많은 사람의 구원을 목표로 삼지 않고 ‘약간의’ 열매 즉 몇 사람의 구원을 목표로 삼았다. 우리는 한 영혼의 구원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또 바울이 본문에서 말한 열매는 로마의 성도들의 인격의 온전해짐과 선행을 포함한다고 본다. 구원 얻은 성도들은 인격이 온전해짐과 선행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갈 5:22-23). [14-15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고 말했다. 여기의 ‘빚’은 전도의 빚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영혼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또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깨달았다면,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배운 자에게나 못 배운 자에게나,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우리나라 사람에게나 다른 나라들의 사람에게나 차별 없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택함 받은 자들만 회개하고 믿고 구원받을 것이지만, 우리의 전도 대상에는 어떤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해야 한다. [16-17절] [이는] 내가 [그리스도의](전통사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아니함이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이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함이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복음을 널리 전하기를 원했다. 그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복음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었다. 원문에는 ‘능력’이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 이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오늘날도 이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다른 수단으로가 아니고 이 복음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고전 1:21-24).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이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 또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까닭은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義)가 복음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다 행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바이었고(신 6:25), 죄는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어긴 상태이었다. 이 세상의 근본적 문제는 죄 문제 곧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겨 범죄함으로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문제의 해결은 모든 사람과 세상의 근본 문제의 해결이다. 사람의 가장 큰 복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사람의 가장 중요한, 근본적 문제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행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경험과 성경을 통해 명백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의(義)를 복음에 나타내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의 모든 죄의 책임과 형벌을 담당하심으로 이루신 의(義)이다(단 9:24; 롬 10:4; 고전 1:30). 이제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이 의(義)를 주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다.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라는 뜻이라고 본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받는다. 이것이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는 이치이다. 어떤 큰 죄인이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그를 구주와 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을 깨닫고 그를 영접하고 믿는 것, 곧 속죄신앙은 죄인이 구원 얻는 신앙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바울은 로마로 가서 그 교인들을 견고케 하기를 원했다(11절). 우리의 믿음과 인격은 성경말씀으로 견고해져야 한다. 믿음은 말씀에서 나오며(롬 10:17) 말씀은 영의 양식과 같고(마 4:4) 일정한 음식보다 귀히 여겨야 한다(욥 23:12). 그것은 우리의 신앙 지식을 확실케 하며(눅 1:4) 우리에게 확신을 준다(딤후 3:14).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한다(골 3:16). 우리는 신구약성경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인격이 견고해져야 한다. 둘째로, 바울은 로마로 가서 서로의 믿음을 인해 위로 얻기를 원했다(12절). 우리는 서로를 위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는 서로 위로하는 자가 된다(고후 1:3-4). 성령께서는 위로자로 우리 속에 계신다(요 14:16). 로마서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성도들의 교제는 서로의 참된 믿음 때문에 서로에게 위로가 된다. 셋째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16절).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구원 얻은 자들은 다 복음에 빚진 자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고 죄인들은 그 복음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이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한 명의 영혼이라고 구원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와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이다. 18-27절, 우상숭배와 정욕의 죄 로마서 1-2장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한다.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은 그들의 많은 죄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때문이다. [18-19절]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나타남이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본문은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까닭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 하늘로 좇아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의 많은 죄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많은 죄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 바울은 사람을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불의를 행하면서 진리를 가로막는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진리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잃게 되고 마음이 어두워지고 진리를 왜곡시키고 진리를 대항한다. 사람의 죄는 불경건과 불의로 요약된다. 모든 죄는 불의이며 그 중에 하나님에 대한 죄가 불경건이다. 불의는 불경건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의(義)요, 그것을 지키지 못한 것이나 어긴 것이 죄이다. 죄들 중 불경건은 근원적 죄이다. 다른 모든 죄는 불경건에서 나온다.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므로 여러 가지 죄를 짓는다. 사람들의 불경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어느 정도 모든 사람 속에 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보이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어느 정도 알려주셨다. 그것이 사람의 종교성, 하나님 의식, 양심, 이성 등이다. [20절] [이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됨이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오묘막측한 천지만물의 존재는 전지전능한 창조자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 작은 건물 하나도 지은 자가 있는데, 천지만물이 우연히 생겼다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말이다. 천지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신성(神性)을 알게 해준다. 자연만물은 사람이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게 만든다. [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감사치 않고 도리어 우상숭배에 떨어졌기 때문에 진노하신다. ‘하나님을 알되’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알고 있음을 보인다. 무신론자도 전쟁 때에는 하나님을 찾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선조들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왔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의식하며 살지만, 그 하나님을 참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고 또 그에게 감사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심히 어두워져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이 사람의 근본적인 무지(無知)이며 어리석음이다. [22-23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새들과 짐승들]와 버러지 형상[기는 것들]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사람들은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 그를 알지 못하고 있다. 세상의 시작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세상의 진행과 목적에 대한 지식도 있을 수 없다. 역사상 천재적 사상가들의 결론은 보통 사람들의 결론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사람을 다 무지하고 어리석다고 말한다. 사람의 무지의 대표적 증거가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 세계를 혼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자존자이시며 그의 영광은 썩어지거나 없어지지 않는 영광이며,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썩어지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우상숭배는 불경건과 무지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불경건에 대해 진노하시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2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그러므로’라는 말은 불경건이 모든 정욕의 죄의 원인임을 보인다. 하나님은 인류의 도덕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부도덕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도덕성의 회복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에만 가능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만 악을 떠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들을 정욕의 죄 가운데 버려두셨다. 그는 죄인들을 회개시키시고 구원하실 능력도 있고 그들을 버려두실 권한도 있다. 왜 자신들을 구원치 않으시냐고 항의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고, 지금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있고 자연만물 속에 명백히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치 않고 오히려 우상숭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불경건한 마음을 마음의 정욕과 더러움에 버려두셨다. 정욕의 죄는 불경건에서 나온다. 그것은 불경건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한 징벌이다. 죄는 죄를 더한다. 불경건한 사회는 음란한 사회가 된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징벌이다. [25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에 관한 바른 말을 가리키고, ‘거짓 것’은 하나님에 관한 거짓된 말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참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었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말을 헛된 우상의 말로 바꾸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조물들을 조물주 대신 혹은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상 앞에 절하지만, 우상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지만, 죽은 조상들은 후손들에게 복과 화를 주지 못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에 돈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러나 돈이 신이며 사람이 신인가? 돈이 얼마나 헛되고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지는 재벌의 자살이나 병원 중환자실이나 장례식장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돈의 종이 되어 돈을 위해 살며 자신만 사랑하며 의지하다가 허무하게 죽어간다. 사람은 이런 헛된 것들을 극복해야 한다. 영원히 찬송 받으실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그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섬기며 그에게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26-27절]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 파데 아티미아스 )[저열한 욕망]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 아스케모쉬넨 )[상스러운 행위들]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사람들의 죄들 가운데 두드러진 죄는 저열한 욕망의 죄 즉 음란의 죄이다. 바울은 여성들의 죄에 대해 말한다. 여성들은 자신들을 순리대로 쓰지 않고 역리로 쓴다. 여성들이 자신들을 순리대로 쓴다는 말은 성년이 되어 결혼하여 정상적 결혼생활을 하는 것을 말하며, 역리로 쓴다는 것은 정상적 결혼생활을 이탈하여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특히 여성들의 간음, 음행, 매춘, 동성애 등을 가리켰다고 본다. 바울은 남성들의 죄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부부관계로 만족하지 않고 심지어 남성이 남성으로 더불어 상스러운 행위들을 하였다. 이것은 동성애를 가리킨 것이라고 보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혼의 질서를 파괴하는 악한 행위이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과 욕구는 이렇게 심히 변질되고 부패되었다. 동성애의 죄악은 옛날 소돔성과 고모라성 사람들의 죄악이었다(창 19장). 또 옛날 가나안 족속들에게 이런 죄악이 있었다(레 18장). 또 고대 헬라 사람들과 로마 사람들 가운데도 이런 죄악이 보편적이었다. 키케로(Cicero)는, “[동성애의] 행위는 헬라인들 가운데는 보편적이었고, 그들의 시인들과 위인들, 심지어 지식인들과 철학자들도 그런 일을 행했고 그것을 자랑했다. . . . 그것은 어떤 특정한 도시들만의 풍습이 아니라 그리스 전체의 풍습이었다”라고 말했다( 투스쿨란 토론집 4:33; 반즈 노트 , p. 554). 하나님께서는 이런 동성애에 대해 ‘상당한 보응’을 내리셨다. 소돔성과 고모라 성은 유황불비로 잿더미가 되었고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멸망당했다. 고대 헬라와 로마도 다 멸망하였다. 오늘날 에이즈 (AIDS) 질 병의 세계적 유행은 동성애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보인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노는 마지막 심판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은 경건과 도덕성의 완전한 회복인데, 그것은 불가능하고 오직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경건해야 한다. 우리는 우상숭배치 말아야 한다. 돈이나 사람이나 자기 자신이나 과학이 우상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자존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참 하나님, 창조자, 섭리자, 심판자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에게 합당한 감사와 영광과 경배를 올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거룩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불의를 버리고 도덕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이 음란한 세대에서 특히 음란, 간음, 매춘, 동성애의 악을 다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늘 깨끗이 씻음 받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항상 거룩하게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 28-32절, 여러 가지 죄악들 [28절] 또한 저희가 마음( 에피그노세이 )[지식]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 아도키몬 눈 )[부패된 생각](NASB, NIV)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사람들은 세상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기를 싫어한다. 하나님의 지식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지만 그들은 그 지식을 거절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부패된 생각에 내버려두셨다.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부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셔서 합당치 못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거절하는 자는 결국 여러 가지 죄악들에 떨어진다. 불경건은 모든 죄악들의 뿌리이다. [29절] 곧 모든 불의, [음행](전통본문), 3) 추악( 포네리아 )[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詐欺)[속임],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불경건의 결과, 사람들에게는 모든 불의가 가득하다. ‘모든 불의’는 뒤에 열거된 여러 죄악들을 포함한다. ‘불의’(不義)는 모든 죄악들의 대표적 명칭이다. 의(義)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행위요, 불의(不義)는 그의 계명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계명에 순종하는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시고 모든 불의를 정죄하신다. 사람들은 또 음행이 가득하다. 사람의 죄악들 중에 우상숭배 다음으로 두드러진 죄악은 음행이다.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다(마 12:39). 하나님께서는 결혼 제도를 주셨고 사람에게 성적 순결과 깨끗하고 단정한 삶을 명하시며 음행을 미워하시고 정죄하신다. 사람들은 또 악이 가득하고 탐욕이 가득하다. 악은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 물질적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하게 살라고 명하시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한다. 또 탐욕은 세상의 것을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이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 대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며 일종의 우상숭배이다(골 3:5). 탐욕은 사람으로 다른 죄들을 짓게 하는 원인이 되며 거기서 각양의 죄들이 나온다. 성도가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참으로 믿고 소망하고 사모한다면 허무한 세상의 것들에 대한 탐심을 버려야 한다. 사람들은 또 ‘악의’(惡意)가 가득하다. 악한 마음에서 악한 행위들이 나온다. 사람은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하며 악한 마음을 버리고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또 ‘시기, 살인, 분쟁’이 가득하다. 시기는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미워하는 마음으로 발전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살인하는 데까지 이르기도 한다.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다(요일 3:15). 또 사람은 욕심 때문에 살인하기도 한다. 또 사람들은 분쟁한다. 시기와 미움, 사랑 없음, 자기 중심적임, 상대방을 무시함, 오해함 등이 분쟁을 만든다. 사람들은 또한 ‘속임과 악독’이 가득하다.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남을 속이고 남을 해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성도는 자기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거기에 순복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진실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사람들은 또 ‘수군수군한다.’ 이것은 은밀히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남에게 할 말이 있으면 당사자에게 직접 해야 하며 뒤에서 그에 관해 수군거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또 그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30절]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거만한]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비방한다’는 말은 남의 명예에 해가 되는 말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비방은 교만과 시기와 미움 등에서 나온다. 사랑은 이웃의 모든 허물을 덮지만(잠 10:12), 미움은 이웃에 대한 비난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인간 관계에 금이 가고 가정이나 단체나 교회나 사회가 파괴된다. 사랑은 건설하는 덕이요, 미움과 비난은 파괴하는 악이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라는 원어( 데오스튀게이스 )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라는 뜻일지도 모르지만 (BDAG) 인간 관계의 죄를 말하는 문맥상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들’이라는 뜻 같다 (Thayer) . 모든 악이 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이지만 특히 남을 거짓되이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가증한 악이다. 또 사람들은 ‘거만한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이다. 거만함과 교만함과 자랑함, 이 세 단어들은 뜻이 서로 가깝다. 교만은 마귀의 죄악이고(딤전 3:6) 죄인들의 특성이 되었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항하고 자신을 주인과 왕으로 여기는 것이 교만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과 왕이시므로, 교만은 어리석고 무지한 일이요 매우 근본적 죄악이다. 거기서 남을 멸시함과 자랑이 나온다. 사람들은 또 악을 도모하며 계획한다. 이것은 실수의 악이 아니고 의도된 악, 계획된 악이다. 고의적인 악행은 실수로 범하는 악행보다 더 악하다. 부지 중에 범한 죄와 고의적인 죄는 벌이 크게 다르다. 사람들은 또 부모를 거역한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되지 않은 자녀들은 부모를 거역한다. 이것이 부패된 인간 본성이다. 아이들은 엄한 교훈과 징계와 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잘 길들여지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은 어릴 때부터 교훈과 징계의 매로 아이들을 교육하라고 말한다(잠 23:13-14). 사람의 부패된 인간성은 사랑의 매를 통해 비로소 조금 제어되고 고쳐질 수 있다(잠 13:24; 22:15). [31절] 우매한 자( 아쉬네투스 )요 배약(背約)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원통함을 풀지 않는 자요](전통본문) 4) 무자비한 자라. 사람들은 우매하여 참된 지혜와 지식, 총명과 이해력이 없다. 그들은 많은 지식을 추구하여 얻지만, 참으로 알아야 할 지식, 곧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지금 왜 여기 살고 있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우매한 인생의 모습이다. ‘배약(背約)하는 자’는 약속을 어기는 자, 불신실한 자를 가리킨다. 사람이 약속을 어기는 데는 부득이한 환경적 요인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는 자신의 불신실함 때문이다. 사람들은 쉽게 약속하고 그 약속을 쉽게 저버린다. 특히 사람의 불신실함은 시간이나 돈에 대한 약속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신실한 인격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려 한다. ‘무정한 자’는 인정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는 인정이 있어 보이지만, 다른 많은 경우 무정함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부모님을 저버리며 아내를 학대한다. 힘센 자는 약한 자를 학대하고 그의 것을 빼앗고 강대국은 약소국을 침입한다. 또 사람들은 원통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마음에 오래 간직하고 잘 풀지 않고 또 보복하려 한다. 사람은 서로 화해하기 어렵고 마음을 달래기 어려운 존재이다. 이런 부족 때문에 때때로 인간 관계가 허물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한 자와도, 그가 사과하면, 언제나 즉시 화해해야 한다. 우리는 남을 용서하기를 힘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무자비하다.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은 이기적(利己的)이게 변하였고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고 남의 것을 교묘하게 빼앗는다. 또 그들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결코 할 수 없을 악을 행하며 또 거칠고 폭력적이고 사악한 자들이 되었다. [32절]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쉰유도쿠시 )[칭찬하느니라, 기뻐하느니라]. 사람들은 이런 죄악들을 행하는 자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를 알고 있다. 이런 공의는 그들의 사회법들에 어느 정도 나타나 있고 그들의 양심의 법에도 기록되어 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은 사망이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칙이다. 죄인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죽고 영원히 죽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들의 몸의 죽음 정도가 아니고 그들의 몸과 영혼이 받을 영원한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계 2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들만 이런 죄악들을 행할 뿐 아니라 이런 것들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칭찬하고 기뻐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 가증한 뻔뻔함과 완악함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람들은 심히 죄악되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죄들에 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렇게 내어 버려두셨다(24, 26, 28절). 사람들은 모든 불의, 음행, 악, 탐욕, 악의가 가득하고, 시기, 살인, 분쟁, 속임, 악독이 가득하고, 수군수군하고 비방하고 하나님 앞에 가증하고, 거만하고 교만하고 자랑하고, 악을 계획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지혜와 총명이 없고 약속을 어기고 무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않고 무자비하며 게다가 악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칭찬하고 기뻐하는 뻔뻔함까지 있다. 이런 모든 죄악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에게 임한다. 둘째로, 우리는 이런 모든 죄악들을 미워하고 버리고 그것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는 모든 죄악들을 깨끗이 씻음 받아야 한다. 사람의 죄들은 어떻게 씻음 받을 수 있는가? 사람의 죄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만 깨끗이 씻음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하고 미워하고 버리기를 결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이제는 모든 죄를 멀리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2장: 하나님의 심판 [1-3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사람은 자기도 악하면서 남의 악함을 판단하기 잘한다. 그러나 그에게 바른 판단력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이 그를 옳은 자로 만들지는 못한다. 남의 잘못을 잘 지적하고 판단한다고 해서 그가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판단의 행위가 그를 정죄하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같은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의 양심은 자기도 정죄받아야 할 자임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악인이든지, 그를 판단하는 자든지, 혹은 그를 심문하고 벌을 주는 재판관이든지 하나님의 공의롭고 두려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4-5절]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남의 죄를 판단하면서 자신은 회개치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더 큰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다른 죄인보다 더 악한 자이다. 장차 하나님의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가상적 이야기가 아니고 장차 온 세상에 임할 한 사건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요 온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 사실들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필요성을 증거한다. [6-8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엑스 에리데이아스 )[혹은 ‘이기적 야망으로’(NASB)]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그의 심판은 공의롭다. 그는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보응하신다. 선을 행하는 데는 인내가 필요하다. 한두 번 선을 행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계속 선을 행하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은 참으로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가리킨다. 참고 선을 행함으로써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는 복된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고 영생에 이를 것이다. 구원받을 자들은 참고 선을 행하며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사모하다가 영생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 속에는 다투며 당을 짓는 이기적 야망이 있다. 그들은 사람의 존귀함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헛된 것만을 더 가지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에 복종치 않고 당을 지어 진리와 다투며 불의를 좇고 온갖 악을 행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 대해 공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노와 분으로 보응하실 것이다. [9-10절]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 스테노코리아 )[곤경, 심한 고생]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평안]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혼에 환난과 심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 육신에도 그러하지만, 그의 영혼에 더욱 그러하며, 악인은 죽은 후에도 그 영혼이 지옥에서 고통 중에 있게 될 것이다(눅 16:23-25). 악에 대한 이러한 보응은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동일하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안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복도 의인의 심신(心身) 곧 육신과 영혼에 다 적용되며, 또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다 적용된다. [11절]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하며 세계적이다. 그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다 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역사와 전통과 특권 때문에 그들을 편벽되이 취급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학력이나 직업, 재산이나 가문, 사회적 신분 등 외적 조건을 보고 편벽되이 그를 판단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롭게, 공평하게, 공정하게 심판을 시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2-13절]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편벽되이 취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는데도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것이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나 다 그들이 행한 대로 공의롭고 공평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서 더 나은 조건을 가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가지고 있었느냐, 율법을 알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율법을 지켰느냐가 문제이다. 왜냐하면 신명기 6:25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킨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4-15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방인들은 그들에게 율법이 없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서 면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 없는 이방인들도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며 그 양심으로 옳고 그름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양심, 즉 도덕적 분별력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 속에 기록해 두신 율법이다. 그래서 사람은 양심대로 행해야 한다. [16절]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사도 바울은 복음의 내용 속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진리가 있음을 증거한다. 심판은 두려운 진리이지만, 기독교의 근본 교리이며(히 6:1-2) 복음의 기본적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심판주이심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주이시다(요 5:22; 행 17:31).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 심판은 공의롭고 철저할 것이다. 여기에 모든 사람의 구원의 필요성이 있다. [17-24절]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형식]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神社)[신전]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 중에 한 지도적인 인물을 가상적으로 들어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그 유대인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 그는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긴다. 그는 율법 지식과 진리의 형식을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다. 사도 바울은 남을 가르치는 유대인이 도적질하거나 간음하여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과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악을 행하는 그 유대인 때문에 그의 하나님을 욕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오늘날 형식적인 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가 교인이라는 이름, 더욱이 직분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떤 악을 행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다운 인격과 삶이 없이 교인이라는 이름이나 교회의 직분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교인이라는 이름보다, 또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의 직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의롭고 선한 인격과 삶임을 알고 기도하고 힘써야 한다. [25-29절]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 디카이오마 )[의(KJV), 요구(NASB, NIV)]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儀文)( 그람마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성령으로 말미암고](NASB, NIV) 의문(儀文)[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할례를 받은 것은 율법을 행할 때 가치가 있지, 율법을 범할 때는 아무 가치가 없다. 그것은 무할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할례자가 율법을 어기면 그가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 무할례자인 이방인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유대인들을 판단하지 않겠는가? 할례의 의미와 가치는 율법을 행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음의 할례에 대해 가르친다(신 10:16; 렘 4:4). 그것은 마음의 모든 더러움과 완고함을 베어 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심령의 거룩한 변화인 중생(重生)을 가리킨다. 진정한 기독교는 마음과 내면성의 종교이며 변화된 심령의 종교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죄악된 마음 상태로부터 새로워지고 깨끗해지는 마음의 변화이다. 참된 경건은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장차 온 세상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고(요 5:22) 아들 예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행 17:31; 딤후 4:1; 사도신경). 요한계시록 22:10,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그 날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이다(5절). 사람은 자기의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고 불의를 좇는 자는 진노에 이를 것이다(6-8절). 주께서는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도 다 심판하실 것이다(16절). 요한계시록 20:13,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종교적 외식을 미워하신다. 성도라는 이름이나 교회의 직분자라는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도다운 인격과 삶이다. 참된 경건은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여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옛날 유대인들처럼 결코 형식적 교회 생활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주께서는 외식자들에게 화를 선언하셨고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죄인들은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해야 한다. 3장: 칭의(稱義)의 방법 1-18절, 모든 사람이 죄인임 [1-2절]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특권들 중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을 통해 온 세계의 모든 족속에게 전달되었다. 모세와 선지자들과, 예수님과 사도들은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성경 저자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진리들을 계시하셨고 그것들을 기록하고 보관하며 전달하게 하셨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특권이었다. 시편 147:19-20,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3-4절]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신실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어떤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보관의 특권에 차질이 생긴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은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폐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 거짓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참되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들과 심판에서 의로우시다. [5-6절]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사람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하여서 그 불의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불의하실 수 없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가 불의하시다면, 어떻게 심판자가 되실 수 있겠는가? 의롭지 못한 심판자는 참된 심판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일지라도, 또 그들의 죄와 부도덕함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 할지라도, 그들이 범죄하는 한 그들은 마땅히 정죄(定罪)받아야 한다. [7-8절] 그러나[왜냐하면 5)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않겠느냐 함이라.]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定罪)받는 것이 옳으니라. 본문은 5, 6절을 보충 설명한다. 사람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게 드러났을지라도 그의 거짓말이 어떤 선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며 선으로 간주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무슨 일이든지 목표가 선하고 옳아야 할 뿐만 아니라, 방법도 선하고 옳아야 한다. 이 말씀은 전도를 위해 자유주의 교회들과 천주교회들과 협력하는 어떤 복음주의 전도자들의 오류를 잘 증거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바른 목표를 가져야 하고 바른 방법도 사용해야 한다. 바른 목표를 위해 올바르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9절]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인임을 증거하였다. 그는 1장에서는 주로 이방인의 죄를, 2장에서는 주로 유대인의 죄를 증거했다고 보인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특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는 죄인들이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두 다 구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다. [10-12절]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과 사람’(神人)이신 예수님만 예외이실 뿐이다. 사람들 중에서 그는 유일하게 죄가 없으시다(히 4:15; 벧전 2:22; 요일 3:5). 그 외에 하나님의 계명에 완전히 일치하게 산 자, 참으로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다. 의인 노아나 욥이나 다니엘도(창 6:9; 욥 1:1; 겔 14:14) 완전한 의인은 아니었다. 또 깨닫는 자도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누구이시며 사람이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또 장차 어디로 갈 것인지 깨닫지 못한다. 또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모든 사람은 인생의 정로(正路)를 알지 못함으로 이리저리 치우쳤고 헛되고 무가치하게 살고 있다. 사람들이 쌓은 선한 업적이라는 것도 실상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영원히 가치 있고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13-15절]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사람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같이 구역질나는 나쁜 냄새를 낸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들은 더럽고 악취나는 것들뿐이다. 또 사람들의 혀는 속이는 혀이다. 사람들은 거짓말에 숙련되어 있다. 또 그 입술에는 남을 죽이는 독이 있고 그들의 말들은 남을 저주하는 악독으로 가득하다. 또 그들의 발들은 남을 죽이기에 빠르다. 참으로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되었고 무능력해졌다. [16-18절] 파멸과 고생[불행]이 그 길에 있어 평강[평안]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죄인인 사람들의 길에는 파멸과 불행이 있고 그들은 평안의 길을 알지 못한다. 또 그들의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죄인들의 죄악된 삶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경건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된다(잠 16:6).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들에게는 악을 버리고 떠남도 없고 참된 의(義)와 선(善)도 없다. 그런 자들에게 파멸과 불행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상의 현실이며 우리가 구원 얻기 전 상태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들과 성경을 주셨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통해 주신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들을 감사히 받고 읽고 다 믿고 다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참되시고 진실하시고 신실하시다. 디모데후서 2:13, “우리는 미쁨[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신실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고 우리의 삶의 목표와 그 방법도 바르고 참되게 가져야 한다. 셋째로,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며 심령이 심히 부패되어 선을 행하기에 무능력하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셨고(렘 17:9) 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는 절망적인 말씀을 하셨다(렘 13:23). 인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구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다. 넷째로, 죄인들의 길에는 파멸과 불행이 있고 그들의 심령에는 평안이 없다. “파멸과 불행이 그 길에 있어 평안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이사야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죄는 죽음과 불행과 지옥 형벌을 가져왔다. 사람이 천국에서 영생과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려면 죄사함과 의(義)의 구원이 필요하다. 19-31절, 칭의(稱義)의 방법 [19-20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사람은 율법을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율법의 역할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됨을 깨닫게 하여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판정되므로 하나님 앞에서 항변할 말이 없다. 율법을 다 지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21절] 이제는 율법 외에( 코리스 노무 )[율법과 별개로]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기독교 복음은 율법과 별개로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에 대한 소식이다. 사람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므로 구원이 필요했다. ‘이제는’이라는 말은 구약시대와 대조하여 신약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약시대에 증거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義)는 행위의 의, 즉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의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었다. 이제 하나님께서 율법과 별개로 주시는 한 의가 복음 안에 나타났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의이다. 이 의(義)는 율법과 선지자들, 즉 구약성경에 이미 증거된 바이었다. 구약성경은 ‘행하라’는 도덕법을 강조하지만, 제사들, 유월절 어린양, 성막 제도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도 증거하였다. 그 은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증거될 것이었다. 구약성경은 또 메시아의 속죄사역으로 인한 의(義)를 직접 예언하기도 하였다. 이사야 53:11,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다니엘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이레[주간]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되며[영원히 속(贖)하여지며] 영원한 의(義)가 드러나며 이상(異像)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믿는 모든 자에게 그리고 모든 자 위에](전통본문) 6)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의(義)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義)이다. 신약시대의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구나 차별 없이 받을 수 있는 의(義)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구원을 위해 필수적으로 중요하다. [23-24절]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되었음이니라]. 본문은 모든 믿는 사람들이 차별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까닭을 말한다. 그 까닭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단지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얻는 의(義)는 행위로 얻는 의(義)와 대조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값없이 거저 얻는 의이다. 이런 의가 가능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구속(救贖)을 이루셨기 때문이었다. ‘구속’(救贖)이란 값을 주고 산다는 뜻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죗값, 즉 죄의 책임 곧 죄책(罪責)과 형벌을 짊어지시고 우리를 건져내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그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25-26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 힐라스테리온 )[유화제물(宥和祭物)]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앞절의 말씀을 좀더 설명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의 속죄사역을 믿는 것이고 그의 피를 믿는 것이다. 피가 생명이므로 피흘림이 죄를 속(贖)한다(레 17:11). 유화제물(宥和祭物)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제물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크신 진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죽음으로 누그러지셨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속죄의 한 의미이다.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심으로라는 뜻이다. 물론, 사람이 예수님 믿고 난 후에 짓는 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씻음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무조건 의롭다고 간주하신다면 그런 판단 자체가 불의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죄인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예수님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셨으므로, 그것은 의로운 판단이시요 의로운 행위이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인한 의롭다 하심 곧 칭의(稱義)의 원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님 믿는 자들이 받는 의(義)의 정당함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轉嫁)시키셨으므로 그들을 의롭다고 정당하게 선포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받은 이 의롭다 하심은 성도가 실제로 의인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법적으로 의인으로 간주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법적인 의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 법정에서 성도들에게 죄가 없다는 무죄(無罪) 판결을 내리심과 같다. 물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또한 새 생명을 받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도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산다. 그러나 성도는 비록 법적으로는 완전한 의인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아직 불완전하고 부족이 있다. [27절]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성도의 의가 자신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속죄사역에 근거하기 때문에, 성도는 자랑할 것이 없다. 율법과 별개로 나타난 의, 복음 안에 나타난 의,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는 받는 사람 편에서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는 의이다. 왜냐하면 이 의는 사람들의 행위의 법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행위와 관계가 없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기조마이 )[간주하노라(NASB, NIV), 판단하노라, 결론을 내리노라(KJV)]. 본절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의 기본적 진리를 다시 결론적으로 단언하였다. [29-31절]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유대인들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 진리는 할례 받은 유대인들에게나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이 구원 진리는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에게나 동일하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효력 있는 진리이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약의 복음이 구약의 율법을 폐지시키는 것은 아니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충돌치 않는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구약과 신약은 그림자와 실체요 예언과 성취이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여 복음으로 이끄는 인도자 역할을 한다. 사실, 복음에 제시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죽음은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죽음이었고(갈 3:13) 율법의 의를 이루신 것이었다(롬 10:4).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세상에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 율법은 단지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할 뿐이다. 사람은 율법으로 죄를 깨달으나 율법을 지켜 구원받지는 못한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소위 율법주의는 진리가 아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한 구속(救贖)의 죽음을 죽으셨고 또 유화(宥和)제물이 되셨다.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 25절, “화목제물[유화제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로 인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 그는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셨고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셨다. 셋째로,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다. 이것이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이다. 4장: 아브라함의 예 [1-3절]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는 구약성경도 증거한 바이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그 증거로 들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셔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4-5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이라는 말은 행위를 가리킨다. 일하는 자가 받는 삯은 은혜가 아니고 당연히 받아야 하는 보수이다. 의롭다 하심이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하였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닐 것이지만, 의로운 행위가 없었을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의로 간주되었으므로,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와 같이, 믿음과 행위는 서로 구별되고 대조된다. 믿음은 행위와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저 믿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에게 의로운 행위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다. 참 믿음은 경건하고 정직한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람의 행위는 불완전하므로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행위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죄인 구원의 방법이다. [6-8절] 일한 것이 없이( 코리스 에르곤 )[행위들과 별개로]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행위들과 별개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 증거한 다윗의 시를 인용했다. 그가 인용한 말씀은 시편 32:1-2이다. 그것은 사람이 죄가 없어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죄가 있지만 죄사함을 받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보인다. 이와 같이, 의롭다 하심은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인 것이다. [9-10절]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할례 받기 전인가 후인가? 그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건은 창세기 15장에 나오고(15:16), 창세기 16장은 그가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라고 증거하며, 창세기 17장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때가 99세라고 증거한다(17:24).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때는 그가 할례를 받기 13년 이전이었다고 보인다. [11-13절]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저희도] 7)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할례 받을 뿐 아니라 또한](원문)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後嗣)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할례는 그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받은 의를 확증하는 표이었다.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라고 할 때, 그 할례자는 단지 육신의 할례를 받은 자들을 가리키지 않고, 육신의 할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버지가 되고 그 후손이 온 세계에 충만하리라는 약속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적용되고 그들을 다 포함하는 뜻이 있다. [14-16절]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後嗣)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카타 카린 )[은혜에 의거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율법은 죄인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그로 하여금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 그러므로 율법만으로라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었다. 여기서 율법과 은혜, 행위와 믿음은 다시 대조된다. 율법을 행하는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물론, 믿는 자는 율법에 순종하며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 그 자체는 율법 순종의 행위와는 구별된다. [17-18절]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믿음의 성격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자이시다. 그는 무(無)로부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믿음은 바로 그 하나님 곧 창조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라는 말은 ‘소망을 거슬러 소망 중에’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아브라함은 육신적으로 소망이 없었으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붙들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자신에 대한 부정과 하나님께 대한 긍정을 뜻한다. 자기에게 무엇이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을 섬기다가 자기에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드러날 때에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 자신을 신뢰한 것일 뿐이다. [19-22절]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이미]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생각하지 않고](전통사본) 8)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 백세가 되어 자기 몸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았을 때에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상태만 바라보지 않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며,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며 의탁하는 것이다. [23-25절]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때문에] 살아나셨느니라. 우리의 구원도 같은 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십자가에 내어줌이 되셨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 때문에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을 믿는 자는 참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내용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사람의 무엇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단지 전능하신 하나님,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아브라함처럼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다윗도 행위로는 부족과 실수가 없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용납함을 받았다. 이와 같이, 죄인들은 자신의 의롭고 선한 행위들로가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가 할례의 규례와 율법을 받은 것은 그가 받은 의를 확증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진리는 할례자에게나 무할례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할 뿐이다. 유대인들도, 이방인들도 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을 바라고 믿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자이시다. 믿음은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 신약 성도들이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음을 믿을 때, 그들은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것과 같다. 5장: 칭의(稱義)의 결과 1-11절, 칭의(稱義)의 결과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누리느니라].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디카이오덴테스 , 과거분사)이라는 원어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점진적이거나 반복적이지 않고 단회적임을 보인다. ‘누리자’라는 말( 에코멘 ) 9) 은 전통사본들의 다수에는 ‘누리느니라’( 에코멘 ) 10) 고 되어 있다. 칭의의 결과 중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사람들은 죄 가운데 있었을 때 하나님과 불화(不和)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대해 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성경말씀의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큰 특권이며 복이다. 그것은 에녹과 노아와 욥처럼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그와 동행하는 것이다(창 5:21-24; 6:9; 욥 29:4).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는 칭의를 받은 은혜를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모든 사람은 이제 칭의를 받은 은혜 안에 서 있다. 모든 성도는 이 은혜 안에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어야 하며, 결코 이 은혜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 칭의 받은 은혜가 곧 구원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믿고 구원 얻는 것은 그를 통하여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칭의의 결과 중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런 즐거움은 장차 올 영광스런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확신과 견고한 소망에서 나온다.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롬 3:23),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 곧 부활과 천국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 얻은 성도는 이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부활과 천국의 영광은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인 것이다. [3-4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鍊鍛)( 도키메 )[연단된 인격]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평안할 때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그것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연단된 인격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환난이 성도의 신앙 인격을 단련하여 몸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에 대한 그의 소망을 확실하게 만들기 때문에, 성도는 환난 중에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다. [5절]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도의 소망은 헛되지 않다. 그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헛된 꿈이나 망상이 아니다. 성도의 소망이 확실한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것과 같다.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표이시며 확증이시다. [6-8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는]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善人)( 투 아가두 )[그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확증하셨음이니라]. 우리가 불경건과 죄 가운데서 연약하였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고 성령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것이며 그 사랑을 체험한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사랑인가! ‘그 선인’은 앞에 말한 ‘의인’을 가리킨다고 본다. 죄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확증이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일서 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9-11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장차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확실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구원의 확신은 성도의 기쁨의 근거가 된다. 성도가 장래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결코 기뻐할 수 없을 것이며 고난 중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성도는 미래의 구원을 확신하므로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가져오고 그의 마지막 진노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다. 성도는 천국을 확신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또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말한다. 칭의의 결과는 참으로 놀랍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릴 뿐 아니라, 또한 미래의 구원의 확실한 보증과 확신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며 살고 천국을 확신하고 소망하며 항상 기뻐하며 산다.

본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결과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린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 성경말씀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둘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우리가 천국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은혜 때문이며 환난 중에 낙심치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셋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장차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것도 확신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것은 그 사랑이 우리 속에 부어진 것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로부터의 구원도 확신하게 되었다. 12-21절, 영원한 생명 [12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에프 호 )[이는](Thayer, NASB)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이르렀음이니라]. 창세기 3장의 증거대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다. 아담의 첫 범죄는 아담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온 인류의 범죄이었다. 인류의 대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죄인이 되었고 그 죄의 결과로 모두가 죽게 되었다. [13-14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사람의 죽음의 원인은 죄이다. 율법이 없었던 모세 이전에도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15-16절]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왜냐하면]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죽었을지라도]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넘쳤음이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定罪)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dikaivwma)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많은 사람이 살았고,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가 죄와 정죄(定罪) 아래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의 많은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하여금 의롭다 하심에 이르게 하였다. [17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인류를 지배했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의 선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의의 선물을 풍성히 받아 영생을 얻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디 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 )[한 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런즉’이라는 말은 본절이 이 단락의 요점임을 보인다.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라는 말은 의롭다 하심의 결과가 생명임을 보인다. 의와 생명은 함께 간다. 죄는 사망이요 의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칭의의 결과는 영생, 다시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15절부터 18절까지 반복되는 말씀은 한 사람 아담의 죄가 어떻게 온 인류에게 전가(轉嫁)되었는지를 증거한다. 아담의 죄는 온 인류의 죄이었다. 이것이 원죄(原罪)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 이 원죄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 또 모든 사람이 정죄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증된다. 이와 비슷한 원리로, 그러나 정반대의 내용으로, 본문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가 어떻게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은혜로 풍성히 넘치도록 전가(轉嫁)되었는지를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많은 사람을 대신한 속죄’이었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셨고(마 20:28), 그의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신’ 피이었다(마 26:2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그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된 것이다. [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죄는 불순종이다. 죄악된 세계의 특징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이다. 순종은 의요 불순종은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과 의를 요구하신다. 노아는 순종하는 의인이며 아브라함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그러했다.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최고의 모범이시다. 그는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인간 부모에게 순종하셨고 율법을 주신 자로서 친히 율법을 준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의 순종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의가 되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함으로 이 의 안에 거해야 하며,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원망하고 불평하며 거역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잠잠히 믿고 순종하되 죽기까지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가진 진리가 진리일진대,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교훈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20-21절]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을 몰랐을 때는 죄가 적었으나 율법을 알게 되므로 우리는 우리의 많은 죄들과 우리 본성의 전적 부패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풍성했고 넘쳤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의 크심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의 정도에 비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큰 죄사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눅 7:47). 이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많은 죄사함을 얻었고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얻었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우리의 죄들은 크고 많고 심각했으나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는 컸고 풍성했고 놀라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다 죄인 되었고 정죄(定罪) 되었고 죽게 되었다. 아담은 한 개인일 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시조(始祖)이며 언약의 대표자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처음에 주셨던 명령 곧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명령은 인류를 대표하여 받은 명령 곧 행위언약이었다. 그 언약에서의 실패는 그 개인의 실패일 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실패이었다. 그것이 원죄(原罪)라는 것이다. 둘째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신자들은 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것은 우리의 의롭고 선한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의 의를 이루셨다. 셋째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다. 죄는 죽음이요 의는 생명이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죄의 값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다(롬 6:23). 6장: 성화(聖化)의 이유 [1-3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메 게노이토 )(강한 부정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에이스 )[안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에이스 )[안으로]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지만(5:20)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성도가 이미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이다. 죄에 대해 죽은 자는 계속 죄 가운데 살 수 없다. 성도가 거룩해야 할 이유는 첫째로 세례의 원리로 설명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그의 죽으심에 참여하였다. 세례는 일차적으로 죄씻음을 표시하고 확증하지만,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표시하고 확증한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오고, 죄씻음은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을 가져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그를 믿는 우리는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고 그와 연합된 성도가 계속 죄 가운데 거하면서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구원의 이치에 반대되는 일이 되는 것이다. [4-5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장사된 것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부활하심과 같이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려 함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또한 그와 함께 사는 것이며, 그의 부활의 생명이 그와 연합된 이들 속에 활동하여 새 생명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이치가 그러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죄 가운데, 즉 영적 죽음 가운데서 산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구원 얻은 자들은 새 생명을 받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구원 얻은 것이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6-7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옛 사람’은 죄로 인해 죽었던 옛 자아, 곧 구원 얻기 전의 자신을 가리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옛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 피조물이 되었다(고후 5:17). 옛 사람이 죽은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려 함이다. ‘죄의 몸’은 ‘옛 사람’과 같은 뜻으로 죄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 이제 죄성을 가진 몸인 옛 사람은 죽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새 사람이 살았다. 우리의 구원은 죄 안 짓게 하는 구원이다. 그것은 죄에 대하여 죽는 구원이며 의를 향해 사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구원 얻었다고 하면서 죄 가운데 산다면 그것은 구원의 목적과 방향에 반대로 가는 것이다. [8-11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전통본문) 11)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연합되어 그와 함께 죽은 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또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생활로 나타난다. 비록 구원 얻은 성도의 생활이 완전치 못할지라도, 거룩함은 구원의 당연한 과정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고 영원히 사시고 다시 죽지 않으시듯이, 예수님 믿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고 범죄치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해 단번에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은 영원히 제거되었다. 죄와 사망은 설 곳이 없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은 완전하고 영원하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을 향해 살아나신 것이다. 이제 죄와 사망은 끝났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생활만 그에게 있다. 성도의 거룩한 생활 곧 성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의 연합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12-13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몸의 욕심들로 말미암아 죄에 순종치 말고] 12)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도구]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는 몸의 욕심들을 통해 활동한다(약 1:15). 몸은 의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죄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성도는 죄에 대해 죽은 자이므로 죄가 몸을 주장치 못하도록 욕심들을 통제해야 하고 죄에 순종치 말아야 한다. 구원 얻은 성도는 자기 몸을 거룩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13절의 “너희 지체”라는 말에 ‘지체’는 몸의 부분들, 즉 눈과 귀와 입, 손과 발 등을 가리킨다. 성도는 이제 몸의 모든 부분을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며 더럽고 악한 것을 보고 듣고 말하며 만지고 그런 곳으로 갔을지라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 몸을 거룩하게 드리고 의롭고 선한 것만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해야 한다. [14절] [이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못할 것임이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성도들이 자기 몸을 죄에게 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죄가 그들을 주관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죄가 그들을 주관치 못하는 이유는 그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법적 책임과 형벌이 제거되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을 말한다. 의롭다 하심 곧 칭의(稱義)는 법적인 구원이다. 성도는 이미 법적으로 완전한 의를 얻었다. [15절]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메 게노이토 ). 바울은 6:1-2에서도 성도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계속 머물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 후 ‘그럴 수 없다’고 분명하고 강하게 대답했었다. 그는 여기서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이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되는가라고 질문한 후 ‘그럴 수 없다’고 한번 더 분명하고 강하게 대답한다. 그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이 죄짓는 생활을 할 수 없음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성화는 성도의 당연한 길이다. 성도는 죄 가운데 거해서는 안 된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죄를 계속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니라”고 말하였다(요일 3:9-10). [16-17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성도가 거룩해야 할 이유는 둘째로 순종의 원리로 설명된다. 사람은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의 종이 된다. 죄에게 순종하면 죄의 종이 되어 죄 안에 살다가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의 종이 되고 의 안에 살다가 영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바울은 성도가 구원 얻었던 처음 순간을 언급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순간이다. 우리는 본래 죄에게 순종하고 죄만 짓고 살았던 죄의 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들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이었고 그를 믿는 자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주신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구원을 얻었다. ‘마음으로’라는 원어( 에크 카르디아스 )는 ‘마음으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와’라는 뜻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마음으로 순종한 결과 죄에게서 해방되고 의에게 종이 되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에 근거하여 우리의 모든 죄는 씻음 받고 우리는 단번에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았다. 우리는 죄에게서 자유케 되고 의에게 종이 되었다. [19-22절]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은 우리 속에 죄성이 남아 있음을 가리킨다. 성도가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지만, 그에게 죄성이 남아 있으므로 거룩함에 이르라는 권면이 필요하다. 성도는 성화(聖化)가 당연한 목표라는 권면과 격려가 필요한 것이다. 성도가 죄의 종이었을 때는 죄만 지었기 때문에 의에 대해 자유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에 맺은 열매라는 것은 더러운 죄들이었으므로 부끄러운 것들뿐이었고 그 결국은 사망이었다. 진실로, 모든 죄들은 비록 범죄할 당시에는 혹시 즐거워보일지라도 지나고 보면 부끄러운 것들이다. 의는 칭찬받을 만하지만, 죄는 수치와 후회를 남길 뿐이다. 이제 성도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으로 인해 죄에게서 해방되었다. 죄의 종이 죄에게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하나님께 종이 되는 자유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마 11:30). 거룩함의 열매는 구원 얻은 성도에게 당연한 열매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반드시 성화(聖化)를 동반한다. 법적인 구원에 실제적 구원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닐 것이다. 출생한 아기가 성장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듯이, 중생한 성도가 지식이 더하고 거룩해지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정상적인 성화는 성도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 성도는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의 열매를 맺다가 영생에 이른다.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과 거룩의 열매를 맺는 것은 영생과 한 줄 위에 있고 그 줄은 끊어질 수 없다. 구원 얻은 성도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거룩한 생활을 하는 과정을 통해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이 정상적 과정이 없다면, 그는 구원 얻지 못한 자일 것이다. [23절]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恩賜)[은혜의 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영생임이니라]. 성도가 영생을 확실히 얻을 것이라는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죄에 대한 대가(代價) 즉 죄의 보응과 형벌이 죽음이지만 택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기 때문이다. 이 짧은 말씀은 복음 진리의 요약과도 같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본장은 구원 얻은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 즉 성화(聖化)의 이유를 증거한다. 첫째로, 구원 얻은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는 세례의 원리로 설명된다. 즉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았을 때 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살았다. 그것은 죄의 몸인 옛 사람이 죽었고 새 사람이 새 생명 안에서 산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우리의 죄성 때문에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죄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을 향해 산 자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죄와 결별하고 산 자처럼 의롭고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구원 얻은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는 순종의 원리로 설명된다. 즉 그가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는 아직도 우리로 범죄케 할 수 있는 죄성(罪性), 곧 죄악된 성질과 성향이 남아 있다. 그러나 구원은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과 방향이고 성도의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즉 구약의 도덕법과 신약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교훈들에 순종함으로써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하고 성화(聖化)를 이루어야 한다. 7장: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1-3절]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淫婦)[음란한 여자]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음란한 여자]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바울은 결혼의 비유를 들어 성도가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증거한다. 남편 있는 여인은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지만, 남편이 죽은 후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할지라도 음란한 여자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쪽이 죽었으므로 그와의 부부의 관계가 끝났기 때문이다. [4절]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시고 율법의 의(義)를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님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의 저주와 형벌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목적은, 부활하신 주와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인격과 생활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다. [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육신에 있을 때’라는 말은 구원 얻기 전의 상태를 가리키고,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라는 말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깨달아지는 죄의 정욕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가 구원 얻기 전에는 죄성이 우리를 지배하였고 죄의 정욕들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몸의 기관들에 역사해 우리로 사망에 이르는 행동을 하게 했다. 간혹 양심의 가책이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무시되고 변명으로 무마되었다. [6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NASB, NIV)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얽매였던 것’이라는 말은 율법의 규례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또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다. 바울은 6:14에서도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하였다. 또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강조하면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으나,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말하였고(3:23, 25),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했다(5:1). 바울은 그 책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죄와 방종에 떨어지게 하는 자유가 아니다. 그 자유는 율법의 공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해 살고 의와 거룩을 행하게 하기 위한 자유이다. 의롭고 거룩한 삶, 이것이 구원의 방향이다. 구원은 죄로부터 건져내어 의롭고 거룩하게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구원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앞에 6:15에서도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하였다. 또 그는 갈라디아서 5:13에서도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하였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라는 말에서 ‘영’이라는 말은 성령을 가리키며 (NASB, NIV) , ‘의문’(儀文)이라는 말은 ‘글자’라는 뜻으로 율법의 조문을 가리킨다고 본다(고후 3:6도 비슷함).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옛날처럼 율법 조문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성도에게 성화를 위한 큰 힘이 된다. 때때로 성도에게 죄와 연약이 있으나 그가 낙심하지 않고 더욱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의와 거룩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이 자유가 큰 힘이 되는 것이다.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제까지 말한 내용이 율법을 정죄(定罪)하는 인상을 줄지 모르기 때문에, 바울은 ‘율법이 죄인가?’라고 묻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율법이 없었다면 사람은 죄를 죄로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는 죄가 아니다. [8-11절]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율법은 그 자체가 죄가 아니지만, 죄가 율법으로 기회를 타서 우리 속에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죄로 인식되지 못하기 때문에 죄가 없는 것 같고 죄가 죽은 것 같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악된 성질과 행위들이 드러난다. 전에 율법이 없을 때는 죄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나 자신의 존재가 살아 있는 것 같았으나, 율법이 이를 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죄로 인하여 죽은 자라는 것이 드러났다. 율법은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약속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있다면 율법을 통하여 영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나, 우리는 율법을 다 행할 수 없고 율법을 통해 우리 자신이 심히 죄악됨을 깨달을 뿐이다. 영생에 이르게 할 율법이 실제로는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 죄는 율법으로 기회를 타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였고 죽게 하였다. [12-13절]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 자체는 죄악되지 않다. 율법은 실상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14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신령하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디모데전서 1:8에서도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고 말했다. 율법은 바른 정신으로 사용하면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 선하고 유익하다. 그러므로 선한 것이 우리에게 사망이 되었을 수 없다. 단지,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그 선한 율법으로 우리를 죽게 한 것이다. 이로써 죄가 심히 죄악됨을 드러낸 것뿐이다. [14-15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 속에는 선악간의 싸움이 있다. 바울은 ‘나는’ ‘나의’ ‘내가’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적 싸움을 표현한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 속에 있는 선악간의 싸움이다. 성도에게는 육신의 연약성 곧 죄성(罪性)이 남아 있다. 이 죄성 때문에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행치 못한다. 율법은 영적이지만, 나는 영적이지 못하고 육신적이다. 나는 육신에 속해 죄 아래 팔려 있고 때때로 원하는 것을 행치 않고 미워하는 것을 행하고 있다. [16-17절]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가 율법 행하기를 원한다는 것 자체가 율법의 선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는’이라는 말은 6절이나 8:1에도 쓰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를 가리킨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라는 말은 구원 얻은 성도에게 있어서 범죄의 주체는 참된 자아가 아님을 증거한다. 구원 얻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속사람’(22절) 혹은 ‘새 사람’(엡 4:24)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구원 얻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의와 생명 안에서 살려 하지만, 성도 속에는 죄성이 남아 있어 율법을 거슬러 죄를 짓게 한다. 성도가 죄를 짓는 것은 참된 자아의 행위가 아니고 자신 속에 남아 있는 죄성의 행위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가 범죄의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선악간의 모든 행위는 바로 우리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18-20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육신’이라는 원어( 사르크스 )는 ‘몸’( 소마 )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며, 성도의 남은 죄성은 육신 즉 몸에 있다고 보인다. ‘원함이 내게 있다’는 말은 구원 얻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의와 선을 원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새 사람의 소원이요 중생한 영혼의 변화된 성향이다. 구원 얻은 사람만 이러한 소원을 가진다. 구원 얻기 전에는 이런 소원이 없었고 단지 때때로 양심의 가책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구원 얻은 후에도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능력이 없다. 이것이 성도에게 남아 있는 죄성과 연약성인 것이다. 선을 원하는 것은 참된 자아요, 선을 원치 않고 악을 행하는 것은 내 속에 거하는 죄성이다. 그것이 우리 몸에 남은 옛 사람의 성질인 것이다. [21-23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 누스 )[생각]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성도는 자신 속에 두 가지 모순된 성향이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는 참된 자아의 소원으로서 선을 행하려 하는 성향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몸 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 악을 행하려는 성향이다. ‘속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의 참된 자아를 가리킨다. 중생한 참 자아는 ‘마음’( 누스 ) 곧 생각(mind)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그 법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다른 한 성향이 있어 우리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온다. 성도 속에는 이 대립된 두 가지 성향이 있어 항상 내면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24-25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 누스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의 탄식은 성도들의 탄식과 신음이다. 마음의 성향과 육신의 성향의 싸움으로 성도는 피곤해진다. 성도는 당연히 이 죄와 사망의 몸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하나님께 감사한다. 성도의 거룩한 생활과 성화는 이러한 싸움과 탄식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죄에 대해 점점 죽고 의에 대해 점점 산다. 하나님의 구원은 효력이 있고 승리적이다. 비록 구원 얻은 성도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지만, 성도들이 탄식과 신음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은 의롭다 하심 때문이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義人)으로 인정받았다. 성도는 때때로 죄에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의를 이미 얻었고 최종적 구원과 영생도 보장되어 있다(롬 8:30; 빌 1:6). 이 최종적 구원은 영육의 완전한 구원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저주와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 조문에 따라 행하지 않고 율법의 공포에서 벗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담대히 의와 거룩을 행한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의 육신에는 아직 죄성이 남아 있다. 구원 얻은 성도에게는 이 남은 죄성으로 말미암는 내면적 싸움이 항상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7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때때로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하고 신음하며 탄식한다. 그러나 성도는 탄식과 신음 속에서 점점 거룩해져간다. 그것이 성화의 과정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성도는 이미 얻은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천국 기업의 보장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과 자유 속에서 의와 선과 사랑을 힘써 행해야 한다. 8장: 성령의 인도하심 로마서 8장은 구원 얻은 성도들의 거룩한 생활 곧 성화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짐을 증거한다.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은혜이다.

1-14절, 성령을 따라 삶 [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곧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전통사본) 13) 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나를](전통본문) 14) 해방하였음이라. ‘이제’는 구원 얻은 후를 가리키며, ‘육신’은 사람의 죄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고 본다. 구원 얻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이요 육신 즉 몸의 죄성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고 진실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비록 부족과 연약은 있지만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주시는 영생을 가리킨 것 같다. ‘죄와 사망의 법’은 율법을 가리킬 것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의를 주시고 죄와 사망의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주셨으므로 성도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3-4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 디카이오마) [의(KJV), 요구(NASB, NIV)]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은 본성의 죄성과 연약성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연약 때문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며 하나님의 복음의 중심적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이제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자들이 되었다.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라는 표현은 구원 얻은 자들을 묘사한다. 이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 율법의 요구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킴으로 얻는 의, 곧 완전한 의(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이 의를 이루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이루신 이 의를 예수님 믿는 자들에게 은혜로 주셨다. [5-8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성령](KJV, NASB, NIV)을 좇는 자는 영[성령](KJV, NASB, NIV)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본절의 육신과 영은 단지 사람의 육체와 영을 가리키지 않고 몸의 죄성과 성령을 가리킨다. 구원 얻은 자들에게는 단지 몸과 영의 대립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생한 사람의 영이라도 영육이 결합되어 있는 동안에는 몸의 죄성의 영향을 받아 영의 기능들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있어서 연약과 부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 얻은 성도의 내면적 싸움은 육신의 죄성과 성령의 대립이다. 사람은 몸의 죄성을 따라 살면 그 결과는 죽음이지만, 성령을 따라 몸의 죄악된 욕심을 죽이며 산다면 그 결과는 의와 생명과 평안인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 즉 몸의 죄성을 따른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사람은 심히 죄악되며 무능력해졌다. 그러므로 본성 그대로의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성화는 본성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된다.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KJV, NASB)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다. 성령께서는 구원 얻은 자 속에 오셔서 거하신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복이며 신약 성도에게 주신 특권이다. 이렇게 성령께서 그 속에 거하시는 성도는 더 이상 육신 즉 죄성을 가진 몸에 불과한 자가 아니고 성령 안에 있는 자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께서 계시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과 성령은 동일시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실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다시 증거된다. 참 성도는 이미 성령을 받은 자이며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성도가 될 수 없다. 오순절파는 이 점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본다. [10-11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성령께서는] 의를 인하여 산 것( 조에 )[생명](원문, KJV)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늘에 계시지만 신성(神性)으로 그의 영 곧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속에 계신다.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해 죽은 것과 같고 또 어느 날 죽게 될 것이지만,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는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자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생명을 시작하시고 유지시키시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성령은 의를 인하여 생명이시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성도들 속에 계시다면 성도들은 장차 그 영으로 인해 부활할 것이다. 성도의 부활은 확실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빈 무덤을 남기고 부활하셨듯이,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모든 성도들도 마지막 날 빈 무덤을 남기고 부활할 것이다. 성도들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그 일을 보증하신다. 성도들은 반드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12-14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KJV, NASB, NIV)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구원 얻은 우리는 죄성을 가진 몸에 빚이 있어 몸의 욕구대로 살아야 할 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은혜의 하나님께 빚을 진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주신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셨고 새 생명을 주셨다. 지옥 갈 죄인을 천국 가게 하신 구원의 은혜는 우리가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큰 빚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빚은 진 자이다. 성도는 죄성을 가진 몸의 욕구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 말씀은 가상적 경고이다. 이 말씀은 중생한 성도가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 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말씀이 사람이 율법을 행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듯이,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은 하나의 경고이지 구원 얻은 성도들이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택한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것이다(요 6:39).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부르신 모든 사람은 영광에 이를 것이다(롬 8:30). 그러나 성도가 계속 죄를 짓는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으로 몸의 죄악된 행위들을 죽여야 한다. 그것이 성화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우리 속에 거주하신다.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성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14절의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은 13절의 ‘영’이라는 말이 성령을 가리킴을 보인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성도의 거룩한 생활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화를 위해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사모하며 의지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들 속에 남아 있는 몸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안에 영원히 거하시며 그들을 감동하시고 지도하시고 거룩한 생활을 하게 도우신다. 성화는 성령의 은혜이다. 둘째로, 이렇게 구원 얻은 성도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 (1절). 참으로 중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몸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의와 선을 행하기를 힘쓸 것이며, 비록 그들에게 실수와 부족이 없지 않을지라도, 결코 정죄함이 없을 것이다. 셋째로, 성화(聖化)는 성도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몸의 죄성을 죽임으로써 조금씩 이루어진다. 성화는 단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은혜이다.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물론, 우리도 힘써야 한다. 15-39절, 양자(養子) 됨과 영화(榮化) [15-17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 아람어 )[아버지]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께서는 ‘양자(養子)의 영’ 곧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는 영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자(親子)이시고 예수님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양자(養子)들이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고 우리 속에 하나님을 ‘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마음을 일으키셨다. 우리의 영의 이런 진심의 고백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이다. 또 자녀들이 부모의 기업을 상속받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기업 곧 천국을 상속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의 상속자로 묘사되었고 우리도 그와 함께 천국을 상속받을 자로 묘사되었다. 영광의 천국은 성도들을 위해 예비되었다. 마태복음 25:34,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도 고난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며,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영광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고난 받은 후에 영광을 받을 것이다. 성도들의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에 이르는 과정이다. [18-21절]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장차 성도들에게 나타날 영광은 천국의 영광이며 부활과 영생의 영광이다. 요한계시록 21:10-11,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고린도전서 15:42-43,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성도들이 장차 누릴 천국과 영생의 영광은 그들이 현재 당하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아름답고 영원할 것이다.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피조물들’은 동식물의 세계를 가리키며, ‘하나님의 아들들’은 영광스런 부활체를 입은 성도들, 곧 영화(榮化)된 성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지금은 동물들도 식물들도 그 영광의 날을 기다리며 허무한 데 굴복하고 썩어짐에 종노릇하고 있지만, 그 날이 오면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자녀들처럼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 날에는 피조물들에게도 죽음이나 질병이나 썩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22-25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養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거듭난 자들을 가리킨다. 모든 피조물과 거듭난 성도들은 함께 탄식하며 성도들의 몸의 구속(救贖) 즉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기다리며 사모한다. 우리는 다 죄와 죽음과 불행이 영원히 사라질 그 날을 사모한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로 시작된 구원은 성화(聖化)로 진행되며 마침내 영화(榮化)로 완성될 것이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다 거듭하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룩해지고 영광에 이를 것이다. 우리의 법적인 구원 곧 칭의(稱義)와 양자(養子)는 영화(榮化)의 단계에서야 죄로부터의 완전한 구원, 즉 실제로 죄와 죄성이 전혀 없는 구원이 될 것이다. 지금은 죄와의 싸움, 죄성과의 싸움이 있지만, 그때에는 그런 싸움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 영화의 단계는 아직 미래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소망한다. 성도는 법적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장차 완전한 구원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영광의 구원을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완전한 구원이며 그 영광은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낙심치 말고 그 영화의 단계를 참고 기다려야 한다. [26-27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께서는 성도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기도할지 알지 못하지만, 이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이것은 성령의 도우심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실패치 않고,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쇠잔해지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을 아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그 기도를 잘 들으실 것이다.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알거니와’라는 말은 이 진리가 확실함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회개시키시고 믿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모든 것’은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 그것 안에는 낙심할 만한 일도 있고 실패한 일도 있고, 심지어 실수하고 범죄한 일도 있을 것이나, 그것들조차도 선을 이루는 데 사용된다. ‘선’은 일차적으로 성화(聖化)를 가리킨다. 성도의 일생은 영적 훈련과 성장의 과정, 즉 성화의 과정이다.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미리 아신 자들’이라는 말은 구별하여 사랑하신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회개와 믿음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뜻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선택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주권적 행위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선택이 아닐 것이다. 주께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 곧 선택된 자들만 그에게 나아와 그를 믿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요 6:37, 44, 65).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예정하셨다. 그의 예정의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목표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범죄함으로 그것을 상실하였고 이제 구원으로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은 죄 없는 거룩한 형상이다. 또 본문은 예수께서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이 되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히 예수님의 동생들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과거시제).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장차 영화롭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영화롭게 하셨다’는 과거시제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확실한 미래의 사건을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작정하신 바이며 지금 섭리하시는 바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이제 그를 믿는 자들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또 이 구원의 완성을 위해 성령께서 그들 안에 오셔서 도우시는 것이다. [31-32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일’은 구원의 일, 특히 영화를 가리킨다. 세상에서도 최고 권력자가 어떤 이를 위하면 그를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우주의 최고 권력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위하시는 자를 대적할 자가 누구이겠는가? 사람의 최대의 대적자는 사탄인데 심지어 사탄도 욥기 1장에 증거한 대로 하나님의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사탄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성도들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 증거는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다(요 3:16; 롬 5:8).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인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그 외의 것을 무엇이든지 주시지 않겠는가? [33-34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하나님이시도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본문은 칭의가 과거의 사건이지만, 그 효력이 지금도 있음을 증거한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을 송사하거나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속죄를 확증하셨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간구하심은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완전한 속죄와 의(義)를 계속 적용하시는 행위이다. [35-37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赤身)[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성도들의 구원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 크고 확실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랑의 줄을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사랑에 근거한 성도들의 구원은 영원한 보장을 가진다. 성도들의 생활은 고난의 생활이지만, 성도들은 어떤 고난의 현실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환난이나 곤고나 괴롭힘이나 기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다. 성도들의 구원과 승리는 완전하고 확실하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 하나님의 구원은 실패치 않고 끝까지 보존되고 성도들은 성화(聖化)를 이루고 마침내 영광에 이를 것이다. [38-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기에 성도들의 넉넉한 승리를 단언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영광의 구원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령의 인치심에서 확증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성도들에게 부어졌고 그 사랑에서 끊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구원의 완성인 영화는 확실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고난의 현실에서도 낙심치 않고 담대히 행할 수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15-16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둘째로, 성도들이 얻은 구원은 장차 영광에 이르는 구원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구원이다.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으셨듯이, 예수님 믿는 성도들은 비록 이 세상 사는 동안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지만 장차 영광의 부활의 몸을 얻고 영광의 천국에서 복된 영생을 누릴 것이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들도 고대하는 바이다. 그 영광은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소망 중에 그 영광을 참고 기다려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구원의 완성 곧 영화(榮化)는 확실하다.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성화를 이룬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는 아무도 없다.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에게는 영화(榮化)가 확실히 보장된다. 성도들은 넉넉히 이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성령을 따라 거룩한 생활을 힘써야 한다. 9장: 은혜로 택하심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문제를 다루면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증거했다. 9장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하였고 이 선택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과 은혜에 근거하였음을 증거했다. [1-3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사도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절히 사모하였다. 사람이 한 부모에게서 난 형제자매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친척들이나 같은 민족에 대해 더 친근함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특히 먼저 구원 얻은 자들이 구원 얻지 못한 가족들과 친척들과 동족들의 구원에 대해 매우 큰 안타까움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4-5절]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養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온갖 특권을 누린 특별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달리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었고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영광의 표들과 언약들과 율법과, 성막과 성전 예배 즉 제사 제도와, 약속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육신적으로는 그들에게서 나셨다. 그러나 그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입었던 민족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보내신 메시아를 죽였고 또 예수님 믿는 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죽이고 있었다. [6-9절] 또한[그러나](NASB)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그의 자손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선택된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그의 자손으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과 그 자손들이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에게서 난 여섯 명의 아들들과 그 자손들은(창 25:1-6) 아브라함의 언약의 복을 받은 자손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오직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자손들만 언약의 자손들로 간주되었다. [10-13절]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는 또한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을 때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들이 아직 나지도 않았고 선과 악을 행하지도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됨이 육신의 혈통이나 그들의 선한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선택으로 되는 것을 증거한다. 사람의 행위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 옷과 같다(사 64:6). 사람의 구원은 그의 선행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즉 그의 은혜의 선택에 있다(딤후 1:9). [14-16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출 33:19)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시므로 구원하실 자를 임의로 선택하신다는 사실은 결코 부당하거나 불의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그가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확증된다. 구원은 사람의 소원이나 노력으로가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17-18절]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출 9:16)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도 하시고 강퍅케도 하신다. 구원은 사람의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다. 구원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구원은 사람들 속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고자 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신다. [19-24절]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말대답]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토기장이가 진흙 덩어리로 귀한 그릇이나 천한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 결정할 권한이 있으시다. 실상, 악인의 멸망은 그 자신의 죄와 직접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멸망시키시는 것이 아니다. 악인들은 스스로 악을 행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악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셨다. 또 구원 얻는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얻은 것뿐이다. 사람의 죄악된 본성으로 말한다면, 우리나 저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로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 죄사함과 의를 주셨다. [25-29절]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호 2:23).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호 1:10) 함과 같으니라.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사 10:22)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이는 그가 그 일을 이루시고 의로 그것을 속히 이루실 것임이라. 이는 주께서 땅 위에서 속히 이루실 것임이니라](전통본문) 15)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사 1:9)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오직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긍휼로 남은 자들이 있었듯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들이 있으며 오직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30-33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의의](전통본문) 16)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율법의](전통본문) 18)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원인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가 아니고 율법의 행위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행위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행위로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며 멸망할 자들이다. 사람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써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으로 두셨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율법 행위를 의지하는 자는 그 돌에 걸려 넘어질 것이나,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도 바울은 비록 그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의 형제와 골육 친척의 구원을 원하였다.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우리는 주 예수님 믿지 않고 지옥 갈 우리의 가족들과 친척들과 동족들을 향해 간절함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 둘째로, 사람의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고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지도 않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16절).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18절). 죄인들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의 선택으로 말미암는다.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신 자들은 다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을 것이다.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 얻음을 거절하고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했다가 실패하였다. 30-32절,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의의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에 의지함이라.” 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10장: 신앙고백 [1절]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관심을 두었다. 그들은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의 구원을 마음에 소원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2-3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으나 종교적 열심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의(義)가 참으로 보잘것없음을 알지 못하고 단지 종교적 행위의 열심으로 의(義)를 이룰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 없는 열심은 종교적 형식주의나 위선에 떨어지기 쉬울 뿐 참된 의를 이루지 못하였다. 두 종류의 의(義)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의요 다른 하나는 사람이 자기의 행위로 이루는 의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이유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행위의 의는 심히 불완전하다. 이사야 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不淨)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오늘날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를 모르고 자기의 행위의 의를 이루려 하고 그것을 의지하려 할 때 실패할 수밖에 없다. [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의를 이루셨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셨다’(요 19:30)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의 대속 사역을 가리키며 그 내용은 율법의 요구를 이룬 완전한 의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고린도전서 1:30,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으니.” 의가 없었던 죄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 [5-8절]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무덤]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을 다 행함으로 이루는 의이다. 신명기 6:23,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신명기 5: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그러나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이루지 못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한 바 되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의를 이루셨다.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 성도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다. [9-13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마음으로 믿어져](원문)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입으로 고백되어](원문)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을 얻는 믿음의 기본적인 내용은, 예수께서 주님이신 것과 그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는 그의 기적들, 속죄, 재림 등을 믿을 수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주를 믿고 입으로 고백할 때 의롭다 하심과 구원을 얻는다. 구원에 있어서 신앙고백은 필수적이다. 사람의 믿음과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자발적 행위이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요 6:37, 44). 또 구원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11절),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12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13절)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 참된 믿음과 신앙고백이 중요하다. [14-17절]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하나님의](전통사본) 18)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선택된 자들은 자동적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전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얻는다.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전도의 말씀을 통해 생기며 전도는 하나님께서 전도자를 파송하심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을 전도라는 수단을 통해 구원하신다. 전도와 믿음은 하나님의 예정을 이루는 정상적이고 필수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사명이다.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교회는 전도자를 부르고 훈련시키고 세우고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는 어디든지 파송해야 한다. 전도자의 발걸음은 귀하고 아름답다. 또 교회는 파송된 전도자를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야 한다. 전도의 필요성은 말씀의 필요성이다. 전도는 말씀 전파이다. 믿음은 복음의 말씀의 바른 지식을 통해 생기기 때문이다. [18-21절]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바울은 신명기와 이사야서를 인용하였다. 신명기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이사야 65: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전파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리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말씀에 순종치 않고 그 말씀을 거슬러 행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고 그 죄를 뉘우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들을 불러 옛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 나게 하실 것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의를 이루셨다. 유대인들은 행위의 의를 고집하다가 실패했으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예레미야 23:5,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다니엘 9:24,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우리는 믿음으로 의를 얻었고 이제 그 의 안에서 의를 행해야 한다. 둘째로, 사람은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면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가족들과 함께 구원을 얻는다(행 16:31).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셋째로, 사람은 전도자의 전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 보냄을 받아야 전할 수 있고 전하는 자가 있어야 복음을 들을 수 있고 복음을 들어야 복음을 믿을 수 있고 믿어야 구원 얻을 수 있다(14, 15절). 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마가복음 16:15-16,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전도해야 한다. 11장: 하나님의 구원 계획 [1-6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7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만일 행위에서 난 것이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리라](KJV, NKJV). 19)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들 중에 남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고 바울 자신도 그러했다. 옛날에 선지자 엘리야의 시대는 배교의 시대이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을 남겨두셨다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교회들이 배교한 시대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종들과 교회들과 성도들이 있을 것이다. [7-12절]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신 29:4; 사 29:10).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시 69:22-23).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 백성 중 소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었으나, 남은 대다수는 완악하여져서 그를 거절하고 그를 믿지 않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성경에 예언된 바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이방인들의 구원이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시기 나게 되었다.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들의 풍성한 구원이 되었다면, 장차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온 세상이 얼마나 더 충만한 구원의 복을 누리는 일이 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실패까지도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신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암시했다. [13-16절]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들을 구원함으로 자기 골육 이스라엘 사람들로 시기케 하여 그들 중 얼마라도 구원하기를 소원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제사하는 곡식 가루의 처음 한 줌이 거룩하면 그 전체가 거룩하며, 나무의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들도 거룩하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그 후손들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고 구약교회와 신약교회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신약교회의 이방인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함에 참여하였다. [17-18절]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참감람나무 같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 때문에 가지들 중 다수가 꺾이었고 그 대신 돌감람나무 같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고 그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방인 신자들은 원나무 같은 유대인들을 향해 자랑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19-24절]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仁慈)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이방인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가지들인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끼지 않고 꺾어버리셨다면 접붙임 받은 가지들인 이방인 신자들도 꺾어버리실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엄위하심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인자(仁慈) 안에 거하지만, 불신앙과 죄 가운데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처분이 있을 것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불신앙 때문에 버림을 받았지만,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구원하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돌감람나무의 가지들도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거든 하물며 원가지들은 얼마나 더 잘 접붙임을 받겠는가? [25-26a절]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비밀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되지만 마침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온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 국가적 대회심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는 아닐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된 충만한 수의 사람들이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을 암시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그 말이 단순히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된 총수를 의미한다면 구태여 ‘비밀’이라고 표현할 것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와 이스라엘 백성의 ‘더러’가 대조되고, 또 이스라엘 백성의 ‘더러’와 ‘온’ 이스라엘이 대조되는 것을 생각할 때도 ‘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 국가적 회개를 암시한다고 본다. [26b-29절]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사 59:20-21).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 회복은 이사야서에 예언된 바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현재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말한다면 그들은 이제까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었었다. 이런 하나님의 선택의 사랑은 폐해진 것이 아니라고 보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키실 날이 올 수 있고 올 것이다. [30-32절]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는다. 이방인들은 전에는 불순종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으로 이제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고, 이와 비슷하게 유대인들은 지금 불순종하고 있으나 훗날에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긍휼이 임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불순종 가운데 버려두심은 그들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33-36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 에이스 아우톤 )[주를 위함]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구원의 복음 진리를 다 해설한 후에 이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고 부요하심과 그의 판단과 행하심의 깊고 측량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피조물인 인생이 어찌 창조자를 다 이해하며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실상 억만 분지 일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만큼 하나님과 그의 구원의 일에 대하여 알며 이해하며 전하며 설명할 뿐이다. 하나님의 계시하신 그 내용은 오늘날 신구약 66권의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주를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의 진리를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일반적인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특히 사람들의 구원의 일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계획하시고 처리하시며 특히 사람들의 구원의 일에 있어서 그러하시다. 이것은 웅대한 세계적, 우주적 진리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은혜로 택하신 자들을 남겨두셨다. 그는 엘리야 때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두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역사도 결국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방인들의 구원이 되었다. 오늘날 배교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신 자들이 있음이 확실하다. 교회들은 배교와 타협과 혼란 속에 있지만, 이런 교계의 풍조에 물들지 않고 순수한 옛신앙을 소유하고 옛길을 붙든 자들이 세계 곳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기대하며 또 우리 자신이 그런 자들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모든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달아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고 구원의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복음은 이방 세계로 전파되었고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돌감람나무의 가지들 같은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한 구원의 계획이 증거되었다.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더러는 완악할 것이나, 마침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25-26절). 그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을 암시하며, 여기에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있다. 셋째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서 비롯된다. 30-32절,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우리가 구원 얻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작정과 섭리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만 믿고 의지하고 그 긍휼 안에서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12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1-2절, 헌신(獻身)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로기켄 )[합당한] 예배니라. 사도 바울은 구원 얻은 자의 생활에 대해 교훈하면서 첫째로 헌신에 대해 말한다. 헌신(獻身)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몸은 우리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우리의 손과 발, 우리의 재능과 목소리와 힘, 우리의 시간과 돈, 심지어 우리의 생명까지 포함한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의 몸과 같이 움직인다. 몸이 없으면 이런 것들도 없다. 몸을 드리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다. 헌신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복음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의 소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은혜의 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크신 자비와 사랑과 은혜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후서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헌신을 ‘산 제사’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제사와 대조되는 말이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죽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신을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주신 오늘날에는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구약시대의 번제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했으나, 또한 성도들의 온전한 헌신도 상징했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이어야 한다.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죄를 짓지 않는 삶이다. 이런 헌신 곧 거룩한 삶을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배’라고 불렀다. 어떤 형식의 예배보다도,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과 거룩한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합당한 예배라는 뜻이다.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 누스 nou'”)[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도 바울은 헌신자가 행해야 할 바를 몇 가지 교훈한다.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은 언제나 불경건하고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다. 마태복음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또한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세상은 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오순절에 모였던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했다(행 2:40).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목적과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와 너무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께 헌신하려면 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본받는다면, 우리는 결코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게 살 수 없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다. 둘째로, 우리는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 구원은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방향으로의 생각의 변화이다. 그것이 중생이다. 또 ‘변화를 받으라’는 원어( 메타모르푸스데 )는 현재 명령형으로 우리의 생각의 변화가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반복해서 일어나야 함을 보인다. 성도의 영적 성장 곧 성화는 생각의 성숙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생각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에베소서 4:22-23도, “너희는 유혹의[속이는]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너희의 생각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계속 새롭게 되어]”라고 말한다. ‘새롭게 되어’라는 원어(현재부정사)도 계속성을 나타낸다. 우리의 구원은 생각의 변화에서 시작되고 그 생각의 변화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성숙해지는 것이다. 성화(聖化)는 깨달음의 성숙 과정이다. 사람의 연약성은 잘 변하지 않지만, 성도의 생각과 깨달음에는 변화가 있다. 생각의 성숙은 평생 진행될 것이다. 구원 얻기 전 우리의 생각은 이 세상 중심적이고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고 정욕적이었으나, 구원 얻은 우리는 이제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져서 성경에 교훈된 대로 하나님과 천국과 영생을 생각하고 경건하고 도덕적인 것만 생각하는 자들이 되었고 또 그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그 내용이 선하며 그것을 믿고 행한 결과도 선하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또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신다. 시편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빈번히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달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해야 하고 비록 그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아야 한다. 사도행전 20:27에 보면,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뜻을 거리낌 없이 다 전하였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밝히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디모데후서 3:15-17,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에게 구원과 온전함을 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부분적으로 아는 것으로 만족치 말고 성경 전체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생활에서 성경 읽기와 성경 연구는 필수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신구약 66권을 열심히 읽고 듣고 연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순종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헌신함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헌신(獻身)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손과 발을, 우리의 재능과 목소리와 힘을, 우리의 시간과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며, 우리의 목숨까지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바쳐야 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듯이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에 보답하여 헌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희생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희생하셨다. 그는 핏값으로 우리를 사셨다(행 20:28; 고전 6:20).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의가 되었고 그를 믿는 우리는 죄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보답하여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생각을 날마다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특히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계속 생각의 변화, 생각의 성숙함을 가져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 하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 곧 신구약 66권의 책에 계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을 귀히 여기며 주야로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하며 그 모든 말씀을 다 믿고 그 모든 말씀을 다 소망하고 그 모든 말씀을 힘써 행해야 한다. 헌신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3-13절, 그리스도인의 생활 [3-5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소프로네인 )[바르게, 건전하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바르고 건전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다. 몸에 여러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여러 직분이 있다. 각 지체는 자기 위치를 잘 지켜야 한다. 눈은 눈의 역할을, 입은 입의 역할을, 손이나 발은 손이나 발의 역할을 잘할 때 몸은 평안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도 각 사람이 자기 위치를 지키며 충성할 때 평안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4-27,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6-8절]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勸慰)하는 자면 권위(勸慰)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 하플로테스 )[단순함(KJV), 너그러움(NASB, NIV)]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는 각각 다르며 각 사람은 자기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예언하는 자는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한다. 오늘날에 설교자는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여 거기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전해야 한다. 섬기는 자는 섬기는 일로 해야 한다. 교회 직분자들은 섬기는 자들이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에, 권위(勸慰)하는 즉 권면하고 위로하는 자는 권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구제하는 자는 단순함과 너그러움으로 해야 한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해야 하고,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9-10절]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선한 것을 붙들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악을 미워하고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고린도전서 13:6,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거짓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거짓 없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한다. 악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며 선은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하게 사는 것이다. 아모스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미가 6:8,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우애하고 사이좋게 지내야 하고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대속하셨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서로를 먼저 존경해야 하고 또 서로에게 복종해야 한다. 에베소서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또 우리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또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한다. 우리는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 잠언 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데살로니가후서 3:10-1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에베소서 5:16, “세월을 아끼라[시간을 최선용하라]. 때가 악하니라.” 직장 다니는 자나 사업하는 자는 자기의 일에, 학생들은 학교 공부에, 주부들은 음식 만드는 일이나 집안 살림의 일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한다. 우리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일이다(요 6:27-29). 우리는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하며, 또 지교회에 속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임들에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하고 전도와 봉사의 일들에도 참여하고 힘써야 한다. 히브리서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12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우리는 소망 중에 즐거워해야 한다. 성도들의 소망은 주 예수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이것들은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소망하고 그 소망이 확실하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 또 우리는 환난 중에 참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질병들, 경제적 곤란, 자연적 재난, 핍박 등 여러 가지 환난들을 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 중에 참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권자 하나님께서 그 환난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그 환난 중에서도 우리를 지키실 것이 확실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 환난을 통해 우리의 인격을 단련시키시고 우리에게 영적 유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한다. 우리는 평안할 때 하나님께 찬송하지만, 환난 날에 기도해야 한다. 야고보서 5:13-16,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길이다. 우리가 기도에 항상 힘쓰면 어떤 어려운 일이 와도 낙심치 않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13절]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성도의 필요한 것들을 함께 나누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우리는 성도의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누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야 한다. 구제는 하나님의 뜻이다. 신명기 15:7-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 . .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우리는 어려운 교우나 이웃, 또 손님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후하게 대접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장로들의 자격 요건에 대해 가르치면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들었다(딤전 3:2).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을 따라 바르고 건전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임을 기억하고 결코 자기 위치를 벗어난 생각을 하지 말고 자기 위치에 맞게, 겸손하게, 바르고 건전한 생각을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이기도 하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하고 선한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서로 우애하고 서로를 먼저 존경하고 또 피차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부지런하게 살고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세상 일에도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각자 자기의 일에 충실해야 하지만, 특히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날마다 성경 읽고 기도하고 계명 순종하기를 힘써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아야 한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재림과 복된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확신하고 소망하고 즐거워하며 또 이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환난들을 참아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선행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성도들을 돌아보며 구제하기를 좋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딛 2:14). 14-21절, 선으로 악을 이기라 [14절]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성도는 자기를 핍박하고 심히 괴롭히는 자들에 대해서도 사랑으로 대하고 그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주 예수께서 친히 가르치신 내용이다.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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