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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엘 무화과 나무 | [3분 묵상]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 이야기) _홍익학당.윤홍식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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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익학당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bohd
(181227 요한복음)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아니라고는 안 하고,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해서
예수께서 놀라운 얘기를 합니다.
\”빌립이 그대를 부르기 전에 나는 그대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
이게 뭔 의미냐면요, 각주 보시죠.
랍비들은 잎이 커가지고 그늘이 넓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율법을 공부합니다.
거기서 또 묵상을 합니다. 그러니까 선정과 지혜죠.
불교로 말하면 선정과 지혜를 어디서 닦느냐,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닦아요.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깊은 신심을 가지고 메시아를
뵙기를 바라면, 이건 제 추측인데,
메시아를 뵙기를 바라면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율법을 공부하고 묵상한 것 같아요.
정황이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까 놀란 거예요.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나 너 봤지롱.\” 하면
그러면 나다나엘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저 양반이 메시아구나.\”라고 하는 거죠.
왜냐하면, 자기가 우리나라 같으면,
\”미륵이시여 빨리 오세요, 미륵이시여.\”
막 이렇게 열심히, 막 정화수 떠 놓고 빌었는데
딱 어느 양반이 미륵이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너 내가 너 정화수에서 빌 때 봤지롱.\” 하면,
\”미륵이구나!\” 하겠지요.
자기가 간구했던 대상이라고 생각하겠죠.
예수님이 지나가다가 미리 보고,
\”나중에 쟤 낚을 때 써먹어야지.\”
하실 수도 있지만 재미있죠, 이런 상황들이.
그래서 나다나엘은 이 모든 걸 훤히 보고 계셨던
예수님을 메시아로 곧장 인정하게 됩니다.
이게 아무튼 훨씬 전이라고 보여요.
바로 직전에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던 게 아니고,
아마 그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메시아를 향해서
뭔가 간구했던 게 아닌가, 나다나엘이.
그래서 딱 예수님이 이 얘기를 하니까 깜짝 놀랍니다.
나다나엘이 바로 얘기해요.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이게 스스로 이렇게 확신할 정도의 사건이었던
거예요, 예수님의 얘기가.
그래서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메시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왕이십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하게 되고,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그대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는가?\” 지금 내 말이 이제 맞죠.
맞는데, \”그 말만 갖고 나를 믿는가?
이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진짜 메시아의 사역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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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나다나엘의 무엇을 보셨을까

주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자 곧바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알아보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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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2/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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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3-51) 무화과 아래 있던 나다나엘

무화과는 율법의 나무, 이스라엘의 나무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하고, 아담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사용한 잎이 무화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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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lphis.or.kr

Date Published: 2/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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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식물과 유대 전통의학 2 – “무화과 나무 아래서 나다나엘은 …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나다나엘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낮잠? 무화과 따 먹기? 빌립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께 나아온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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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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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걱정한 ‘민족주의’ – 기독일보

전설에 따르면 나다나엘은 인도와 아르메니아 일대에서 선교하다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을 당하며 순교를 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승에 기인해 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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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5/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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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에서 – 브런치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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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6/28/2021

View: 8949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오늘 아침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질문에 부딪혔다. 요한복음 1:43-51에는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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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phesh.tistory.com

Date Published: 5/27/2021

View: 7096

요한복음: 나다나엘(Nathanael)의 무화과 나무

(요 1:48~49, 나다나엘이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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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arer.tistory.com

Date Published: 9/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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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다나엘과 무화과나무 – 다음블로그

나다나엘과 무화과나무 빌립이 전도해서 예수님께 나아온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하는 의구심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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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0/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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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묵상]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 이야기) _홍익학당.윤홍식
[3분 묵상]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 이야기) _홍익학당.윤홍식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나다나엘 무화과 나무

  • Author: 홍익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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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4. 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Slg3MpVwxeg

(요한복음 1:43-51) 무화과 아래 있던 나다나엘

빌립이 와서 메시야를 만났으니 가 보자고 했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했던 나다나엘은 사람을 메시야라고 만나보자는 빌립의 말을 좇아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은 육신의 어떠함이 선함이라는 가치관이다. 육신의 행실과 모양이 선의 근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가치관은 사람이 메시야라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사람의 추함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자신의 가치관을 넘어서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런 나다나엘의 모습을 예수님은 ‘간사함이 없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네(나다나엘)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라고 하신다.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언제 나를 봤단 말입니까?”라는 식의 의문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러자 한술 더 떠서 예수님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하시고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셨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47-51)

이 대화는 극적이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은 정말로 대단한 능력을 가지셨나 보다, 그냥 한 마디만 하면 사람이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시는구나!’로 읽으면 곤란하다. 물론 예수님의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예수님의 능력이 사람이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굴복하게 하시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보여준 이 대화 속의 반응은 예수님의 능력에 자신의 의지가 제압당한 것이 아니다. 나다나엘의 속에서 무엇인가가 밖으로 표현된 것이다.(신앙이라는 것이 사람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면 예수님의 능력도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제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화과는 율법의 나무, 이스라엘의 나무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하고, 아담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사용한 잎이 무화과 나뭇잎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무화과나무는 율법의 나무이다.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내면 육신의 부끄러움이 감추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성경을 몸으로 지켜 행하면 인생이 가진 연약함과 추함이 가려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것이다.(인생이 추하고 연약한 것은 사람의 기준이지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고 하신 것은 나다나엘이 율법 아래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그랬기 때문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그 고백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인식이다.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지창조에 있어 가장 먼저 빛을 만드신 것이다. 빛이 곧 인식이고, 빛이 있어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다나엘은 자신이 무화과나무 곧 율법의 가치관 아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 사람이다. 이것을 성경에서 다른 말로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나다나엘이 도적질과 같은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다. 무화과나무 밑은 인생이 거할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자리를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가진 ‘하말티아’가 원어인 것이다.

무화과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담의 범죄다. 그래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이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볼 때 부끄러운 인간의 정체성을 가리려 한 것이다. 율법으로 사람의 연약함을 가리려 하는 것이 그것이다. 나다나엘이 무화과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무화과의 가치관, 곧 선악과를 먹은 가치관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다나엘이 스스로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할 때, 자신이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존재였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하는 그 가치관을 고수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당연히 빌립을 따라 예수님께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기 가치관을 넘어서서 예수님을 만났고, 그 예수님께서 자신의 자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가 아니라 선악의 가치관을 가진 무화과나무 아래, 곧 사람이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율법의 기준을 자기 의로 가진 자리에 있었다고 할 때 그것이 인정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죄를 자복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회개, 돌아섬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는 것은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사람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렛과 같은 천한 동네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은 추하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보고, 그것도 나사렛 출신에 비슷한 동네인 갈릴리에서 살고 있는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것은 대단한 반전인 것이다. 무화과 잎으로 가리고 싶은 모습을 가진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율법 아래 있었다는 것,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려는 사람이었다는 것,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모습을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추하고 연약한 것으로 보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 고백이 없었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든 믿음은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소유와 공로의 신으로 모독하고 있는 것을 신앙이라 착각하는 사람일 뿐이다.

반면에 그런 고백이 있는 사람은 하늘이 열린다고 하셨다. 이 고백이 바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아들 삼으심을 믿는 고백이다. 그 고백, 그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을 때와는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늘이 열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시작을 개천절이라고 하듯이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고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앞에서 말한 세상에 비친 빛이 나다나엘에게 또 그 고백이 있는 사람에게 비취었다는 것이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 그것은 주기도문에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 하늘의 뜻은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사람을 만났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 하늘이 열리는 것이고, 하늘의 뜻이 땅(사람)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성서식물과 유대 전통의학 2 – “무화과 나무 아래서 나다나엘은 무엇을 했을까?”

<성서 식물과 유대 전통 의학>

“무화과 나무 아래서 나다나엘은 무엇을 했을까?”

무화과 나무아래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장 45절 ~ 49절)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나다나엘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낮잠? 무화과 따 먹기?

빌립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께 나아온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는가?’하는 의구심이 가득한 채로 마지못해 빌립의 요수에 응했다. 나다나엘을 보신 예수님은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며 최고의 찬사를 하셨고,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참으로 선문답처럼 들린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우리에게는 전혀 수수께끼처럼 들리는 이 말씀을 듣고 나다나엘은 곧바로 메시아의 고백이 터져나왔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반신반의하던 나다나엘의 모든 의구심을 일거에 날려버린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다나엘의 심령에 비수처럼 꽃힌 것이다. 과연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하다가 들킨(?) 것일까? 그 밑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을까? 아니면 입을 벌리고 누워서 무화과 열매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물레방앗간에… 무화과 나무아래…

한국 성도들 입장에서 성경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데, 이는 2000년이 지난 ‘시간적’ 갭(GAP)과 함께,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이스라엘과 한국이라고 하는 ‘공간적’ 갭을 메우는 작업이 그리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모와 자식 간의 세대 차이로 인해, 부모는 자식들이 쓰는 그들만의 표현과 은어를 이해할 수 없고, 자식도 부모 세대의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요즘처럼 컴퓨터 시대에는 자식들이 사용하는 채팅 용어들은 부모 세대들에게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한 세대만 시간이 지나도 그들만의 문화와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세대를 살아간다고 해도 공간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끼리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자란 아이들과 미국에서 자란 교포 아이들의 표현은 서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이처럼 시간적, 그리고 공간적 갭을 메우려는 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성경을 2000년이 지난 한국 사람의 눈으로 이해하지 않고, 1세기 유대인들의 눈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과연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는 표현이 1세기 유대인 나다나엘에게도 선문답이나 수수께끼처럼 들렸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말은 1세기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쓰던 숙어와 같은 표현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철수, 네가 어젯밤 영숙이와 물레방앗간에서 한 짓을 알고 있다’고 말할 때, 부모 세대는 ‘물레방앗간에서’ 영숙이와 철수가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리겠지만 자식 세대에서는 뚱딴지처럼 들릴 것이다.

무화과 나무 아래 : 토라를 공부하는 최적의 장소

성서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토라를 소유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두루마리 성경인 토라는 당시 1년 치 봉급을 모아야 겨우 살 수 있는 귀중품 중의 귀중품이었다. 늘 다음 끼니를 걱정하는 소작농이 대부분이던 성서시대 이스라엘에서, 토라는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마을의 회당에나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회당을 지을 규모가 되는 마을의 회당에나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회당을 지을 정도의 사람이 없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토라를 공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당시 랍비 문헌에 보면, 회당이 없는 작은 마을에서 토라를 공부하는 최적의 장소로 추천된 곳이 바로 ‘무화과나무 아래’였다.

이스라엘의 건기(여름)는 한국보다 훨씬 덥지만 무척이나 건조하다. 그래서 햇빛 아래에서는 호흡조차 힘들 정도이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무척 선선하다. 6개월간 지속되는 이스라엘의 여름 날씨에서, 잎이 넓어 좋은 그늘을 제공하는 ‘무화과나무 아래’는 유명한 랍비와 함께 토라를 공부하고 토론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추천된 것이다. 아울러 넓은 그늘과 함께 여름 내내 쉼 없이 열매를 맺는 무화과의 향기는 뇌의 왕성한 기억력을 돕는 청량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진리를 찾던 구도자, 나다나엘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열심히 토라를 공부하고 진리를 찾던 구도자였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뜨거운 여름 햇살을 피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토라를 묵상하던 나다나엘을 예수님은 이미 보셨을 것이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 이 말씀은 나사렛 출신 랍비인 예수에 대한 그의 선입견을 일거에 날려버렸으며 그의 입에서 메시아 고백이 터져 나온 것이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이에 대한 나다나엘의 메시아 고백을 오늘날에 적용할 때 가장 유사한 예는 이와 같을 것이다. 어떤 성도가 100일 작정 특별 새벽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자 갈급함 가운데 울부짖었다고 하자. 그러나 100일 기도가 끝났어도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는 보이지 않았고 음성은 들리지 않아 실의에 빠졌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네가 특별 새벽기도를 하면서 간절히 나를 찾을 때에 내가 이미 너를 보았다’고 말씀하신다면, 그 성도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만난 감격에 이런 고백이 터져 나올 것이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

첫 범죄와 무화과나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장 7절)

에덴동산에서의 첫 범죄 사건에 대한 기록에 무화과나무가 나오는 것을 보면, 분명 무화과나무는 성지 이스라엘에 자생하는 대표적인 나무였을 것이다.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한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난 첫 번째 반응은 자신들의 벗었음에 대한 자각이었다. 이들은 얼른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 부끄러운 부위를 가렸다. 그러면 왜 굳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렸을까? 물론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이 있겠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무화과나무의 잎이 크고 넓어 부끄러운 부위를 가리기에 안성마춤(?)이었다는 것이다. 만약 올리브나무 잎처럼 작은 잎으로 가렸다면 상당히 ‘민망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악과는 어떤 나무일까?

동산 중앙에 덩그러니 서 있던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의 정체에 대해 서양에서는 보편적으로 사과나무로 보는 듯 하다. 그러나 사과는 중동에서 자생하는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다분히 서양의 문화에서 탄생한 선악과일 뿐이다. 그러면 성서의 공간적 배경이 펼쳐진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선악과로 가능한 나무의 후보로 무엇을 생각했을까? 가장 근접한 후보는 바로 쥐엄나무이다. 쥐엄열매는 히브리어로 ‘하루브’(בורח)인데 이는 멸망을 뜻하는 ‘마하리브’(בירחמ)와 그 어원이 같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선악과의 후보는 무화과나무이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마자 바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었다는 다분히 정황적 근거에 기초한 판단 때문이다. 선악과 열매를 따먹자마자 벗었음을 느끼고 곧바로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엮기 위해서는, 무화과나무가 선악과에서 무척 가까운 곳에 위치했던지 아니면 무화과나무 자체가 선악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이다.

* 출처 : 이스라엘 투데이 December. 2008. no. 26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걱정한 ‘민족주의’

전설에 따르면 나다나엘은 인도와 아르메니아 일대에서 선교하다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을 당하며 순교를 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승에 기인해 그에 관한 작품은 대부분 참혹한 도상을 띤다.

그 가운데 가장 사실적이면서도 치열한 영성을 간직한 작품은 밀라노 두오모 성당(Duomo di Milano)에 세워진 그의 입상일 것이다. 사도상은 대개 긴 겉옷을 두르고 그 권위와 기품을 드러내지만, 나다나엘이 두르고 있는 것은 그의 벗겨진 살가죽이다.

이 같은 참혹함을 대면할 때 우리는 그 죽음의 잔혹한 방식에만 매몰되어 두려움에 떨기 십상이지만, 실은 나다나엘의 도상에는 성서 컨텍스트(문맥)가 있다. 그 벗겨진 살갗과 직결된 기호가 있는 것이다. 바로 ‘간사함’이다. 돌로스 우크(δόλος οὐκ), 즉 나다나엘에게는 ‘간사함이 없다’는 대목이다(요 1:47).

나다나엘은 열두 제자 중에 복음서를 통틀어 3회밖에 나오지 않는 제자 바돌로매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열두 명 가운데 가장 존재감이 없던 그가 대체 왜 요한복음에서만은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으로 무려 7회나 수록되었는지, 그의 이름 ‘나다나엘’만큼이나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부정적 성향의 인물인 것처럼 등장한다. 단짝 친구인 빌립이(둘은 꼭 ‘빌립과 바돌로매’로 표기되어 있다) 나사렛에서 선지자를 만났다고 증언했을 때, 일언지하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는 빌립이 증언하기 전부터 예수라는 인물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나사렛 예수가 바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선지자라…”는 설명을 듣고서 보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이 부정적 평가는 개인적 성품에서라기보다는 ‘나사렛 전승’에 대한 전면적 거부·부정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한 이해이다. 나다나엘의 선입견은 한마디로 민족적인 메시야 운동에 대한 평가절하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바돌로매 입상 측면, 밀라노에 있는 두오모(Duomo) 성당.

유대 민족은 역사적으로 두 단계에 걸친 강도 높은 헬라화(Hellenizing)를 당하였는데, 첫 번째는 알렉산더와 그의 부하들에 의하여, 두 번째는 로마제국과 헤롯 가문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이는 대단히 혹독한 과정이었지만, 두 단계 중 인기 정치를 구사했던 헤롯 가문이 주도한 헬라화은 전자보다 더욱 혹독했다.

이에 대한 반응도 두 갈래로 갈렸다. 하나는 적극적인 헬라화 곧 세계화를 수용하는 진영, 다른 하나는 세계화를 전면 거부하는 진영이었다. 후자는 철저한 민족주의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것은 언제나 예언자의 예언 전통을 활용한 메시야 운동(Messianic Movement) 아류 집단의 난립으로 나타났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며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여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는 가말리엘의 소견은 바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는 나다나엘의 냉소의 다른 버전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운동(Jesus Movement)’도 난립한 메시야 운동의 한 아류로 비쳤다는 사실의 방증인 셈이다.

그런데 이 부정적 선입견으로 가득했던 나다나엘의 반응에 변화가 일어났다. 짤막한 다이얼로그 끝에 일어난 변화이기에 그 변화의 요인이 무엇인지, 특히 동시대 수많은 메시야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그가 유독 예수를 ‘임금님’으로 알아보게 된 결정적 계기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은 무척 난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리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 전승’을 부정한 것이라 일렀는데, 나사렛 전승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살피면 두 사람이 교감한 내용에 한층 더 근접해 다가갈 수 있다. 나사렛 전승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을 일컫는다. 이 예언 중에 ‘가지’를 뜻하는 네쩨르(נֵצֶר)를 바로 ‘나자렛'(Ναζαρὲτ)으로 보는 전승인 것이다.

▲가까이 보면 살가죽이 벗겨진 묘사가 선명하다. 1562년 Marco d’Agrate 작품.

그러면 나다나엘은 대체 왜 ‘나자렛 전승’을 부정한 것일까? 그것은 앞서 가말리엘의 소견에 표명이 되었다시피, ‘왕의 제도’란 본래 열광적 분위기로 자기들이 원하는 왕을 뽑아 달라 아우성치다가는 이내 자신들 기준에 미달할 시 가차 없이 끌어내리되, 끌어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벗기고 매질하고 죽이는 야만성에 기초한 제도인 까닭이었다.

이스라엘에 왕의 제도를 도입한 사무엘에게 이 제도에 대한 경고를 하달한 것은 그 문맥으로 비추어 볼 때, 제도의 위험성 자체보다는 민중의 우민성을 드러내 고발하는 맥락이었다.

이와 같은 왕의 제도를 부정하는 나다나엘을 가리켜 ‘참 이스라엘인(ἀληθῶς Ἰσραηλείτης)’이라는 찬사를 보낸 이유는 절대 다수가 추종하는 민족주의, 아니 민족주의를 프로파간다로 삼는 우민정치(ὀχλοκρατία)를 배격한 나다나엘의 소신이 실로 “간사하지 않게” 비쳤던 까닭이다. 바로 이것이 그의 이름을 바돌로매가 아닌 나다나엘로 기억하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

바돌로매라는 이름은 마치 맹인 디매오의 아들을 ‘바디매오’로 표기한 것처럼 탈마이(תַּלְמָי)의 아들(בַּר)을 바돌로매(Βαρθολομαῖος)로 부른 것이었다. 그야말로 무명이 아닐 수 없는 이름이다. 그러나 이 무명 제자의 이름은 전혀 다르게 기억되었다.

우민적 민족주의에 맹목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심지어 군왕적(Βασιλεία) 다윗 전승을 향해 평가절하를 서슴지 않는 그의 기품을 통해, 그의 이름은 다윗에게 부정적 예언을 서슴지 않았던 ‘나단’의 이름으로 더 기억된 것이다. 나다나엘(Ναθαναήλ)이라는 이름은 바로 그 ‘나단'(נְתַנְאֵל)에 대한 회상이 아니면 결코 일곱 회씩이나 강조할 이유가 없는 이름이다.

이와 같은 바돌로매 전승에 입각하여, 바돌로매라는 인물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참) 이스라엘인’의 표상이 되었다. 자신의 껍질을 벗겨내는 이 성찰이야말로, 그의 순교사화(피부가 벗겨져 죽임당한 전설)를 압도하는 그의 이름의 진정한 기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입상의 발 부분.

훗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시점에 이르러 민중(民衆)은 실제로 나다나엘의 예견 그대로 반응했는데, 형틀 팻말에 ‘유대인의 왕’이라 쓰는 것도 아까워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고쳐 적을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 팻말에 ‘나사렛 예수’라는 명칭을 기재함으로써, 민중 스스로가 ‘나쩨르(나자렛) 전승’을 파기했음을 그들의 간사함(δόλος)으로 폭로하였다.

그리하여 박피(剝皮, flaying), 곧 벗겨진 살가죽은 순교한 나다나엘에게 지조의 상징이 되었지만, 간사한 자들에게는 추호의 거리낌 없이 뒤집어쓰는 그 인두겁의 상징이 되었다.

(cf. 요한복음 1장. 사무엘상 3장.)

에필로그

밀라노 두오모 성당에 세워진 저 ‘Marco d’Agrate’ 작품이 만들어지기 20-30년 전, 미켈란젤로의 작품인 ‘최후의 심판’에도 나다나엘이 나온다. 정중앙에서 최후의 심판자로 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바로 좌편 하단에서 자신의 살 껍질을 들고서 항변이라도 하는 듯한 인물이 바로 그다.

미켈란젤로는 이 ‘최후의 심판’ 장면 중에서 저 나다나엘의 살 껍질 얼굴 부분에다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한 쪽 손엔 아예 나이프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기가 자기 가죽을 벗긴 듯하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1536-1541)’.

개인의 영으로나 집단의 영으로나, 우리 역시 필연적인 저 자리에 서고 말 것이다. 우리 자신의 박피는 지조일지 인두겁일지, 미켈란젤로의 나다나엘 역시 저 돌로스(δόλος)에 대한 표지로서 결코 무관치 않다.

▲이영진 교수.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이다.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해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신학자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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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43절-50절

43-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이번 말씀에서는 나다나엘을 눈여겨 본다.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를 보면 선문답처럼 둘이서만 통하는 대화를 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다나엘은 ”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다고?”

라며 의문을 제기한다. 이때 빌립은 말한다. “와서 직접 보면 알아.”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듯이. 예수님에게서는 사람에게서 느낄 수 없는 신적 아우라가 있었을 것이다.

나다나엘이 오는 것을 본 예수님은 이미 나다나엘의 인간적 품성을 아셨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가슴에 콕 찌르면서 아프다.

나다나엘은 하나님 앞에 이미 인정받은 사람이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다음에

이어지는 대화를 보면 뭔가 아리송하다.

예수: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 빌립이 너를 부르기도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봤다.

나다나엘 :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

예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는 것을 믿느냐

빌립과 다른 제자들은 이 대화의 의미를 눈치채었을까?

예전에

‘예수’ 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영화에서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었다.

‘나다나엘은 홀로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무화과 나무 잎 사이로 하나님의 형상 같은 빛을 본다. 나다나엘은 그 빛이 하나님임을 깨닫게 되는데 마침 빌립이 와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한다.

나다나엘은 빌립을 따라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 나타났던 그 하나님임을 알게 된다’

나는 그전에 ‘무화과나무에서 보았다’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꽤 궁금하였었다.

누군가는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에서 기도하는 것을 그전에 지나다가 본 것이라 하였으나 문맥적으로 맞지 않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영화에서의 해석이 적절하다고 느꼈다.

나다나엘은 선한 사람이었고 또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실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이다.(45절)

그러므로 무화과나무 아래서 혼자 다시 오실 하나님을 묵상하거나 아니면 기도 중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는 영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거나 빛 같은 형상을 마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분이 하나님 이심을 알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은 체험하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고 개인마다 다르다.

그래서 예수께서 손가락을 한 개 드시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불립문자인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 각자에게 나타나시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끝없이 보이셨음을 알게 한다. 성경에 있는 말씀이 진실임을 인간의 체험으로도 끝없이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

과학이 이토록 발전한 세상에서도.

하나님은 아직도 그분의 자녀들에게 나타나셔서 힘을 얻게 하시고 또 소망을 품게 하신다.

나다나엘처럼 마음에 선함을 품고

무화과나무 아래 한적한 곳에 나아가 하나님을 묵상하는 시간이 많으면 하나님을 또 순간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오늘 아침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질문에 부딪혔다. 요한복음 1:43-51에는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1. 먼저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 흥분에 가득차서 자신이 성경에 기록된 메시야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별로 미덥지 못하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은 조그만 시골 동네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나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빌립은 확신했다. 그리고 친구에게 이렇게 초청했다.

“와서 보라!”

2.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이는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아마, 나다나엘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듯하다. 나다나엘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아니, 나를 얼마나 안다고……’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전에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난적이 없었다. 그는 의아해 하며, (만일 내가 나다나엘이라면 거짓선지자가 아닌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저를 어떻게 아시지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이 애매한 답변 한 마디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며 의심하던 나다나엘이 놀라운 고백을 한다.

“선생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3.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먼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그는 혼자 있었으며 그곳에 어떤 다른 목격자도 없었던 듯하다. 만약 목격자가 있었다면, 그 목격자가 예수님에게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정보를 알려 줄 수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는 대답이 나다나엘에게 그리 놀라운 것이 없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에서 혼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나다나엘의 마음 속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토대로 볼 때 그가 그곳에서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일’을 했을 가능성은 없다. 또한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에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의 일’이 가진 비중을 볼 때 그가 그냥 단순히 그 아래에서 멍하게 앉아 있거나 서성거리고 있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이 그곳에서 홀로, 뭔가 특별한 긍정적인 일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무엇일까?

다시 한번 나다나엘을 향한 예수님의 평가를 생각해 보면, 그는 “참된 이스라엘 사람(a true Israelite)”이었다. 이 말을 통해서 다양한 가설들을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황(context)-로마의 식민지였으며,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매우 어렵고 혼란한 시기였음-을 고려해보면,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그 어떤 ‘선한 일’을 행하시기를 간구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간구처럼 그는 자신의 눈으로 메시야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과 하나님 둘 사이에 있었던 그 일, 그 간구를 아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보내신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불가능했던 것이다.

4. 나다나엘이 그동안 자신이 간절히 기다려오던 이스라엘의 임금을 만났지만, 막약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하나님과 둘만의 시간을 가지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그저 ‘나사렛 시골 청년’ 또는 근거 없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거짓선지자로 인식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무화과나무 아래 거할 필요가 있다. 나의 일상의 길모퉁이에서 주님을 마주칠 때, 스쳐지나가지 않고 그분을 알아보기 위해서, 나의 삶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아채고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 위해서, 골방에서 하나님과의 단 둘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나 자신 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민족, 열방을 위해서 간구하고 엎드리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나의 무화과나무 아래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2011년 2월 5일

요한복음: 나다나엘(Nathanael)의 무화과 나무

요한복음 1장 후반부는 예수께서 12제자 중 4명과 처음 만나게 된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선지자(prophet)라 부르던 세례(침례)요한에게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제자 중 두 명이 세례(침례) 요한의 말 (요 1:29,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을 듣고 예수를 따라가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되는데, 그 중 한 명이 안드레(Andrew)였습니다. 안드레는 밤 사이에 그 분이 ‘그리스도(Christ = Messiah)’ 라는 확신을 갖게 되어 자신의 형인 베드로(Peter)를 데리고 가 예수께 소개를 하여 또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합니다. 이튿날 베드로/안드레 형제의 같은 고향 사람인 빌립(Philip)이 예수를 만났고 빌립 역시 그 분이 ‘그리스도’라는 확신을 갖게 되어, 평소 알고 지내던 나다나엘(Nathanael)을 데리고 가 예수께 소개를 합니다.

1장 본문에 나오는 4명의 제자들은 모두 북쪽 갈릴리 호수 (민물이지만 크고 풍랑도 있어 갈릴리 바다라고도 부릅니다) 인근의 촌구석 출신들입니다. 2명은 하루 고기 잡아 하루 먹고 사는 어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관심사는 돌고 도는 쳇바퀴 인생이 아닌 ‘오시리라 한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His Kingdom)’이었기에, 걸어서 며칠씩이나 걸리는 예루살렘과 세례(침례) 요한이 있는 곳까지의 발걸음을 수시로 반복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다나엘도 그런 갈릴리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친구 빌립이 자신이 삶 속에서 가장 목말라하며 찾고 기다리던 ‘그리스도’를 마침내 만나게 되자 제일 먼저 달려가 그 소식을 알려준 사람이 나다나엘이었습니다. 평소 만날 때마다 얼마나 많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둘이 나누었을지가 상상되는 대목입니다.

[출처: https://blog.daum.net/minusa/16098515]

나다나엘은 예수의 출신 지방 나사렛(Nazareth)이 성경에 기록된 것과 다르기 때문에, 회의적인 마음으로 (요 1:46,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알지도, 자신을 알지도 못하던 예수께서 그를 보시자마자 이미 잘 아시는 듯 하시는 말씀 (요 1:47,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에 깜짝 놀라고 맙니다. (요 1:48~49, 나다나엘이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나다나엘이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무과화 나무 아래서 빌립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이스라엘 큰 도시에서는 성경을 공부하려고 모이는 회당이 있었지만, 그런 회당이 없는 시골에서는 주로 무화과나무 아래에 모여 성경을 공부하거나 토론하곤 했다고 합니다. 각 가정에서도 가난한 단칸방 집의 경우, 마당에 심기운 무화과 나무 아래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조용한 공간으로 보편적이었다고도 합니다. 성경에도 자주 언급되는 팔레스타인 땅의 무화과 나무는 가장 흔한 나무중 하나로, 작게는 5미터, 최대 12미터까지 자라고 잎이 아주 넓어 좋은 그늘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더운 날 사람들이 모여 쉬기 좋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느티나무 정도 되겠네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하곤 했는지는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 (Who are you when no one’s looking)”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모습이 있기 마련이고, 그 비밀스러운 모습은 보통 아무도 보는 사람 없이 홀로 있을때 드러나곤 합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를 만나 까무러치게 놀랐던 이유는 아마도 자신만이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그 비밀스러운 시간을 예수께서 마치 들여다 본 듯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의 그 비밀스러운 시간은 예수께서 ‘거짓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표현하시기에 걸맞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나다나엘은 매일 거의 거르지 않고, 혹은 하루에도 여러번씩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의 비밀스러운 시간을 가져왔던 것이 아닐까 상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삶은 외롭고 쓸쓸한 시간들의 연속입니다. 그렇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오직 하나님만은 알아주시기라고 믿으며 지켜왔던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보낸 나다나엘의 시간들을 예수께서 알고 계셨다는 것은 그로 하려금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라고 고백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나의 무화과 나무는 어디입니까?

“다니엘은, 왕이 금령 문서에 도장을 찍은 것을 알고도,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 다락방은 예루살렘 쪽으로 창문이 나 있었다. 그는 늘 하듯이, 하루에 세 번씩 그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감사를 드렸다.” (다니엘 6:10)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시편 56:8)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6)

성경 전체를 통틀어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은 요한복음 1장과 21장 두 곳에만 나옵니다. 21장 2절 본문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다) 의 문맥으로 보면 그도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인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나다나엘이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 바돌로매(Bartholomew)일 것이라는 해석은 9세기 이후로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이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 (Εὐσέβιος, 에우세비오스) 의 ‘교회사’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헬라 철학자였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판타누스(Πάνταινος)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믿고 회개한 판타누스는 동방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인도 땅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인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고 합니다. (“나 판타누스는 알렉산드리아 총회 본부에 인도 지역 전도 결과에 관해 보고합니다. 예수의 사도 중 한 명인 바돌로매가 이미 인도 사람들에게 전도하였을 뿐 아니라, 히브리어로 기록된 마태복음을 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지금도 히브리어 마태복음을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습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바돌로매(나다나엘)는 인도와 아르메니아 일대에서 선교하다가, 산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을 당하며 순교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피에타, 다비드, 바티칸 시스틴 성당 (Sistine Chapel)의 천장화등으로 널리 알려진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는 1536-1541에 걸쳐 그린 “최후의 심판 (The Last Judgement)”에 사도 7명을 포함 391명 을 그리면서 바돌로매를 ‘그리스도’ 바로 앞에 크게 부각시켜 그려 넣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바돌로매가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은 그의 벗겨진 살가죽입니다. 이 살가죽의 얼굴 모델이 미켈란젤로 본인이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출처: https://www.italian-renaissance-art.com/Last-Judgement.html]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완성한지 21년 후인 1562년, 마르코 다그라테 (Marco d’Agrate) 는 밀라노 성당 (Duomo di Milano)에 “살가죽이 벗겨진 성 바돌로매 (St Bartholomew Flayed)”라는 동상을 만들었습니다. 이 동상에서 두루마기처럼 두르고 있는 것도 바돌로매 본인의 살가죽입니다. 거의 <인체의 신비전(神祕展)> 수준 만큼이나 인체 해부학적으로 정교하게 살가죽이 벗겨진 몸을 묘사했습니다.

[출처: https://fotostrasse.com/st-bartholomew-flayed-duomo-di-milano/] [부연 설명]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 만난 것이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 북서쪽 게네사렛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을 때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4:18~22, 막 1:16~20, 눅 5:1~11). 공관복음보다 20~35년 후에 쓰인 요한복음은 앞서 쓰인 복음서에 이미 기록되었던 내용들을 중복해 다시 서술하는 대신, 추가 보완 되어야 할 내용들을 중심으로 쓰인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위에 요약한 요한복음 1장 후반부의 일이 먼저 있었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갈릴리 호숫가에서의 만남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보편적입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 ~ 2장 1절 기록에 따르면 3일 이내에 있었던 만남이라고 봐야 하는데 1장 28절 ( 이것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다 ) 에 기록된 장소가 2장 1절 ( 사흘째 되는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 ) 에 기록된 장소와 거리가 140Km나 떨어진 곳 (걸어서 약 28시간) 이라서 앞뒤가 잘 맞지 않게 보입니다. 거리와는 별개로, 또 마태복음 4장에서는 예수께서 세례(침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로 가셔서 40일간 금식하신 기록이 있기 때문에, 3일 간 있었던 일이라는 요한복음의 기록과 불일치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아마도 1장 28절의 “이것은 (These things)” 이 29절부터 시작 되는 제자들과의 만남을 말한 것이 아니라, 19~27절에 기록된 바리새파가 보낸 사람들과의 대화를 말한 것으로 봐야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이슬란드(Iceland)의 경우 성(姓, family name) 없이, 욘의 아들 피알라르 = 피알라르 욘선 (Fjalar Jóns + son), 욘의 딸 카트린 = 카트린 욘도티르 (Katrín Jóns + dóttir) 등으로 이름을 짓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성경에서 “바~ (Bar~)”로 시작되는 사람 이름은 “~의 아들”이라는 뜻 입니다. 나다나엘의 full name은 아마도 “바돌로매 나다나엘 (돌로매의 아들 나다나엘)” 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나다나엘과 무화과나무

빌립이 전도해서 예수님께 나아온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하는 의구심으로 가득했다. 나다나엘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며 최고의 찬사를 하셨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선문답 같은 말씀을 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우리에게는 수수께끼처럼 들리는 이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곧바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반신반의(半信半疑)하던 나다나엘의 심령에 비수처럼 꽂힌 것이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들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5-49)

과연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하다가 들킨(?) 것일까? 그 밑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을까? 아니면 누워서 입을 벌리고 무화과 열매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토라를 공부하기에 제일 좋은 장소였던 무화과나무 아래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는 표현이 나다나엘에게도 선문답이나 수수께끼처럼 들렸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1세기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다”는 말은 유대인들이 자주 쓰던 숙어 같은 표현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철수, 네가 어젯밤 영숙이와 물레방앗간에서 한 짓을 알고 있다”고 말할 때, 부모 세대가 물레방앗간에서 영숙이와 철수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금방 떠올릴 수 있는 것과 같다. 물론 자녀 세대에게는 이 말이 뚱딴지처럼 들릴 것이다.

성서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토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두루마리 성경인 토라는 1년치 봉급을 모아야 겨우 살 수 있는 귀중품이었다. 늘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소작농이 대부분이었던 성서시대 이스라엘에서, 토라는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마을의 회당에나 있는 것이었다. 회당이 없는 작은 시골마을에서는 토라를 공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당시 랍비 문헌을 보면, 회당이 없는 작은 마을에서 토라를 공부하기에 좋은 장소로 추천되는 곳이 바로 무화과나무 아래였다.

이스라엘의 건기(乾期)는 한국보다 훨씬 덥지만 무척 건조하다. 그래서 햇빛 아래에서는 호흡하기조차 힘들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무척 신선하다. 6개월이나 지속되는 이스라엘의 여름 날씨에서, 잎이 넓어 좋은 그늘을 제공하는 무화과나무 아래는 랍비와 함께 토라를 공부하고 토론하기에 좋은 장소였던 것이다. 아울러 여름 내내 쉼 없이 열매를 맺는 무화과의 향기는 기억력을 좋게 하는 청량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진리를 찾던 구도자, 나다나엘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열심히 토라를 공부하고 진리를 찾던 구도자였다. 예수님께서는 뜨거운 여름 햇살을 피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토라를 묵상하던 나다나엘을 이미 보셨던 것이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 랍비로 생각했던 그의 선입견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그의 입에서는 곧바로 고백이 터져 나왔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나다나엘의 고백을 오늘날 상황에 적용해보자.

어떤 성도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자 100일 작정 특별새벽기도를 하면서 울부짖었다고 하자. 그러나 100일 기도가 끝났어도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는 보이지 않았고 음성도 들리지 않아 실의에 빠졌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네가 특별새벽기도를 하면서 간절히 나를 찾을 때에 내가 이미 너를 보았다”고 말씀하신다면? 그 성도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만난 감격에 이런 고백이 터져 나올 것이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출처 : 소학교회/그분의 사랑하시는 제자

글쓴이 : 임종훈 원글보기 : 임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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