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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복음 3 장 주석 | [Live] 기쁨과 사랑의 능력 (마태복음 3:1-17)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10116 224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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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태 복음 3 장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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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실시간 스트리밍 시작일: 2021.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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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3장 주석

마태복음 제 3장

=====3:1

그 때에 – 이 구절의 뜻은 (1) ‘결정적인 어느 때'(Hill)를 말할 수도 있고,

(2) ‘예수와 그의 가족이 나사렛에 살던 무렵'(Broadus)을 뜻할 수도 있다. 마태는

구약에서 어떤 특정한 시점(時點)을 나타내던 표현 방법(창 38:1;출 2:11, 23;사

38:1)의 영향을 받아 뒤에 이어지는 기록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하고자 이런 표

현법을 사용한 것 같다. 한편 ‘그 때’는 2장과 약 30년의 차이가 있는 주후 28년 정도

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즉, 디베료 가이사(Tiberias Caesar) 재위 15년(눅 3:1, 2)

되던 해, 곧 세례요한 내지 예수의 나이가 30세 된던 때였다. 여기서 ’30’이란

나이는 모세 율법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

(민 4:3, 42-45). 이는 결국 율법의 완성자요 인류 구속의 과업을 실행키 위해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의 사역을 인준해주는 하나의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된다.

세례요한(* ,요안네스 호 배티스테

스) – 히브리어 요하난(* )이란 이름에서 유래한 ‘요한’은 제사장이자, 유

대의 지도자로서 B.C.106년에 사망한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 이래로 유대인들

에게 흔히 사용되는 이름이었다. 이 이름은 신약에서 4, 5명 정도 등장하는데, 특히

본문에서 ‘요한’이란 이름 앞에 ‘세례'(Baptist)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자주 나오는

다른 이름과 구별하기 위해서 일 뿐 아니라 그의 사역의 중점이 ‘세례’에 있었기 때문

이다. 한편, 히브리인의 이름에는 (1) 할례명(이 이름은 거룩한 이름으로 종교적 목

적과 의식에서만 사용한다)과 (2) 개인명(個人名, 즉 세속명으로서 일반적으로 통용

되는 이름이다) 및 (3) 그밖에 한 개인에게 관련된 공적 임무, 정신적, 신체적.

신분적, 도덕적 특성을 일컫는 이름이 있었다. 여기 ‘세례 요한’이란 이름은 바

로 (3)번의 공식 임무에 관련된 직능적(職能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의 역

사 역사가 요세푸스(Jesephus)도 ‘세례자 요한’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편 세례요

한은 엄격히 말해서 율법 시대에 속한 자요, 죄를 책망하여 회개를 촉구한 구약 최후

의 선지자였다. 그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은혜’와 연관된 것처럼 그는 구약의 율법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의 은혜 시대를 예비하는 준바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세

례 요한의 탄생 경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누가복음 1장을 참조하라.

유대 광야에서(수 15:61;삿 1:16) – 여리고 남쪽과 사해 서쪽 고원 지대에 걸

쳐 펼쳐진 황량한 석회암의 굴곡으로 되어 있는 광야이다. 군데군데 오아시스가 있

고, 엔게디 근처에는 폭포도 있어 목초지로 이용되던 땅이었다(시 65:12;욜 2:22;눅

15:4). 이곳은 ‘십 황무지'(삼상 23:14, 15), ‘마온 황무지'(삼상 23:24), ‘엔게디

횡무지'(삼상 24:1), ‘예루엘 광야'(대하 20:16)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는데, 그

모든 땅이 유다 지파에 속하였기 때문에 전통에 따라 ‘유대 광야’로 지칭되었던 것이

다. 한편, 이 광야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칩거(蟄居) 생활을 하며 흩어져 살았는데

예수 당시의 극단적 유대교 종파의 하나인 엣세네파(the Essenes)도 그 중에 하나였

다. 세례 요한의 성장지와(눅 1:80) 초기 사역지(요 3:23)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에

그를 엣세네파의 일원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유대인들의 역사성으로 볼 때

‘광야'(Desert, NIV)는 단순히 소외된 지역으로만 여겨지지 않고 ‘예언적 의미’를

갖고 있는 특수 지역이었다. 그 예로써 율법이 광야에서 계시되었고 열심당원들

(Zealots)도 광야를 은신처로 삼았었다(24:26;행21:38). 이러한 의미에서 학자들은 세

례요한의 활동 무대였던 광야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Bonnard, Maier). 더불어 ‘광야에서’란 말 중에 ‘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기네

타이'(* )가 3인칭 단수 현재형으로 ‘그가…에 와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는 단순히 장소를 강조한 말이 아니라 그의 사역의 현재성을 강

조한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사역의 현재성과 역사성을 생동감있게

전해주며, 그의 사역의 예언적 특성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전파하여 – 이에 대한 헬라어 ‘케륏손'(* )은 ‘유앙겔리조마이’

(* )와는 달리 말씀을 선포하는 그 자체로서의 사건에 관

계된 것이 아니라 선포의 방법과 의미에 관계된 것이다. 즉 그는 메시지를 선포하되

단지 하나님께서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말씀만을 고(告)하는 것이 그의 사명의 전부이

었음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그가 광야를 사역 장소로 택한 것도 하나님의 지시

(사 40:3)에 따른 것이었다. 실로 세례 요한의 전파지로 택하신 광야야말로 이스라엘

의 피폐(疲弊)한 영적 상태를 적절히 묘사했다 할 것이다.

=====3:2

회개하라 – 이 말의 원어 ‘메타노에이테'(* )는 고전 헬라

어에서 순수한 의미로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을 가지며, 통속적으로는 단순히 ‘무슨

일을 후회한다’라고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도입된 이단어의 용례(用例)는

‘새 행실로 돌아 온다’는 히브리어 ‘슈브'(* )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백성들

로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로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외침이다. 즉 유대인 중에도 믿음없

는 자가 있고, 우상 숭배자가 있기에 그러한 불신과 영적 음행(淫行)에서 돌이키라는

구약적 의미인 것이다(Alford). 실로 이 말은 머리로서만 계획을 수정하고 감정적으로

만 후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와 죄책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Turn ye) 전인격적인

참회(懺悔)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메시야를 영접하는 마음과 행위의 철

두 철미한 변화 전반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의 행위가 근본적으로 올바른 궤

도를 이탈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철저한 번화가 절대 요청되는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롬 3:10). 한편 이 같은 회개는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서만 참 회개임

이 증명된다.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 요한의 설교의 두번째 주제로서 회개의 이유를 밝히고 있

다. 왜냐하면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는 날에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구별될 것이기 때문이다(25:31-46). 따라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천국’ 또

는 ‘하늘 나라'(* ,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마가와 누가에는 ‘하나님의 나라'(*

,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로 표현한다. 한편 이 표

현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 왕국에서 유래한 것으로서(단 2:44;7:13, 14,27) 구약 성

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곧 ‘왕국'(* , 말쿠트)의 주요 의미는 ‘통치

‘(reign)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왕국’을 뜻하는 ‘바실레이

아'(* )는 간혹 영토를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4:8) 대부분이 역동적

인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암시한다. 이는 당시 천국을 영적인것으로만 해석

하고 인간의 마음안에 있는 것로 간주하던 랍비들의 해석이나 메시야 왕국이 이뤄질

때 로마의 지배가 무너지고 정치적 평화와 번영이 도래하리라던 A.D. 1세기 당시의 유

대인들의 극단적 해석과는 달리 역동적(dynamic)으로 이 땅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에서는 대적들을 멸망시키고 이 땅

에 공평과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실(사 9:7) 하나님의 강림(降臨)과 통치에 대한 기대

로 고조되어 (1) 다윗 언약 성취에 대한 대망으로 나타나기도 하며(삼하 7:13,14).

(2) 여호와의 날로서 심판의 어두움(암 5:18,19)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

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 땅에 구체화될 천국과, 그리스

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영원한 천국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본

문에 제시된 세례 요한의 선포는 바로 예수의 초림으로 구체화될 천국에 관한 언급인

것이다. 한편 여기서 ‘가깝다'(* ,엥기켄)라는 말은 천국이 갖는 역동

적 의미와 함께 결합되어 ‘천국은 예수와 그의 말씀과 이적과 함께 왔고, 그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왔으며, 이 시대의 종말에는 완성된 모습으로 올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

닌다. 즉 하늘나라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즉 온 세계에 왔고, 마침내는 영원

히 존속될 것이다. 한편 마태가 ‘하나님 나라’ 라는 표현을 피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

을 함부로 부르기를 꺼려했던(출 20:7) 유대인의 일반적인 완곡어법(婉曲語法) 때문일

것이다.

=====3:3

저는…자라(* ,후토스 가르 에스틴) – 본절의 내

용은 2절에서 세례 요한이 천국을 전파하는 공적인 근거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본

문장은 이유와 원인을 나타내는 ‘가르'(* )에 의미를 살려 ‘왜냐하면 저가…자

이기 때문에’로 고치는 것이 더욱 완전한 번역이 된다. 한편 본절은 예언과 성취라는

구조(flufillment formula)로 묘사되어지지 않은 구약 인용 구절 중의 하나이다. 즉

본문의 경우는 단순히 문자적 예언 성취가 아니라 하나의 모형적, 종말론적 성취로 보

아야 한다.이러한 예언은 다른 복음서에도 공히 취급되고 있다(마 1:2, 3;눅 3:4-6;요

1:23). 특별히 세례 요한 자신은 요 1:23에서 ‘나는…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라’하였고, 예수께서도 마 11:10에서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하심으로써 이사야

가 예언한 내용의 궁극적인 성취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증하고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 사 40:3은 바벧론 포로 생활에서 그의 백성을 예루살렘

으로 돌아오게 하실 뿐만 아니라 더불어 귀환하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이다

(McNeile). 여기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하나님의 선구자를 가리킨다. 특별히 여기

서 ‘소리’란 어떤 의지나 의미가 개입된 주체적 발언이 아니라 물리적 음파일 뿐이다.

이는 ‘로고스'(* ), 곧 말씀으로 표현된 예수의 주체적 발언과 그인격을

소개하는 세례 요한의 메신저(messenger)로서의 기능을 확실히 드러내 준다. 그리고

‘외치는 자’는 하나님이시요, 듣는 사람은 선지자 이사야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포

로에서 귀한하는 것에 대한 이 예언은 온전한 성취가 못되었고, 부분적으로 이루어졌

을 뿐이다. 따라서 이 예언은 필연적으로 보다 온전한 성취, 즉 메시야 왕국(하늘나

라)의 선포와 도래에 관심을 갖게 된다(Alford). 여기서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단순히

역사적 측면에서의 포로 귀환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영적으로 죄의 노예로 전락한 인

류를 해방시키고 당신의 나라로 귀환시키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 해토이마사테) – ‘주’를 뜻하는

‘퀴리오스'(* )는 하나님에 대한 신적 칭호로서 히브리어로는 ‘주인’을

뜻하는 ‘아도나이'(* )에 해당한다. 이는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

는 안된다는 십계명 중 제 3계명(출 20:7)의 금기(taboo)를 철저히 따른 것으로 여호

와의 대(代)명칭이다. 한편 ‘예비하라’는 말은 정확하게 준비되었다는 뜻의 ‘헤토이

모스'(* )에서 유래하여 불편함 없이 적절히 준비하라는 의미이다. 그

런데 세례 요한은 주께서 이 땅에 셔서 사역하시는데 불편없도록 모든 것을 ‘예비

하는’ 선구자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예비된 길을 따라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

을 위해 ‘천국’을 또한 ‘예비하셨다'(요 14:2, 3).

첩경(捷徑)을 평탄케 하하 – 여기서 ‘첩경'(* , 트리부스)에 해당하

는 히브리어 ‘메실라'(* )는 곧게 뻗은 대로(high-way)를 가리킨다. 이에 대

해 어떤 학자는 마차가 힘차게 달릴 수 있었던 ‘마차로’로 이해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 길은 분명 ‘왕의 대로’로 손색이 없는 길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어지는 ‘평탄케

하라’는 말의 헬라어 ‘유데이아스'(* )는 ‘곧다’, ‘기쁘다’, ‘바르

다’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주의 길’을 회개로 표현한 은유법이다. 즉, 평탄케 하

라’는 말은 단순히 물리적 측면에서 길을 곧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일치하도록 ‘바른’질서를 유지하며, 정의를 이루라는 말이다. 이말이 당시 세

례 요한의 역할이었다면,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인 것이

다.

=====3:4

약대 털옷 – 검소하고 금욕적인 구도자(求道者) 본연의 모습올 상징한 옷차림으로

서 엘리야의 의상과 의도적 일치를 이룬다(왕하 1:8). 이는 결국 요한이 엘리야 재현

예언(말 4:5;눅 1:7)의 성취자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실로 투박한 털옷은 선지자들이

주로 입는 옷으로 알려졌으며(슥 13:4).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

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들이 백성의 죄를 자신이 대신하여 슬퍼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입었다 한다. 이 옷은 약대(낙타)의 가죽 옷이 아니라 단지 낙타 털로 거칠게 짠

옷이었다. 한편, 약대 털옷을 입은 세례 요한의 모습은 당시의 죄악된 현실을 부정하

며, 회개를 선포하는 그의 사역과 일치한다.

가죽띠 – 풍성한 겉옷올 허리에 단단히 묶기위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옷차림에

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메뚜기(* , 아크리데스) – 이는 몸집이 큰’ 종류의 메뚜기로서 레

위기에서도 식용(食用)으로 허락된 정결한 식물이었다(렘 11:22). 지금도 동앙에서

는 메뚜기를 식용으로 삼는데, 유대에서는 하층 천민들이 음식으로 사용했다.

석청(* ,메리 아그리온) – 석청(石淸)은 야생꿀로서 나무의

수액(樹液)이라는 견해(Meyer, Burce, Diodorus)도 있고, 야생 벌꿀(Bengel, Carr)이

라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으나, 구약 셩경에서 이 단어

가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바위 틈새에 만들어진 야생 벌꿀(삿 14:8, 9;삼상

14:25-29;시 81:16)로 생각된다. 메뚜기와 석청은 광야 생활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연상시키고, 철저한 자기 절제와 고독한 삶을 살았던 예언자들의 경건한 행위를 암

시해 준다. 실로 세례 요한은 의복과 음식으로 백성들에게 회개와 임박한 천국을 전

했던 것이다(Bengel).

=====3:5

이 때에…다 그에게 나아와 – ‘이 때에’는 세례자가 ‘회개’와 ‘천국’ 선포 사역을

시작한 때(1절)를 가리킨다. 실로 400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

갈’의 암울한 시대의 절망 속에 살아가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이야말로 그들의 영적 가

뭄을올 해갈(解渴)시켜줄 단비로 여겼으며 그중에서도 어떤 이는 그를 예언된 메시야

로 기대하며(눅 3:15;요 1:20) 그에게 모여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나오는 지명

(地名)들은 2:3과 마찬가지로 장소를 의인화시킨 것으로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회개

자로서 제일 먼저 광야로 향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긔고 ‘온 유대’에서 ‘온’이라

는 말은 그 당시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환대(歡待)를 암시한다. 그리고 ‘요단 강 사

방’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이두매, 베레아, 사마리아등의 이른바 종교적으

로 소외된 지역 전반을 가리키며, 또 요한 사역의 본거지가 요단강인 것과 사역의 내

용이 ‘회개 촉구’와 ‘세례 베푸는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3: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 이는 자기들이 범한 죄를 조목조목 고백했음을 가리킨

다. 이에 대해 역사가 요세푸스이(Josephus)는 ‘그들이 자신들의 범죄와 율법에 대한

죄를 고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죄의 고백은 율법에 규정된 의무로서 범죄한 당사

자의 책임(레 5:5;26:40)이자 제사장의 의무 중 하나였다(레 16:21). 이스라엘이 영

적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는 이러한 고백이 순조롭게 이뤄졌으나(느 9:2, 3;시 32:5)

영적 기갈 상태에서는 침묵하고 있을뿐이었다. 한편 막 1:4과 눅 3:3에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한다. 그러나 마태는 세례의 선행 조건으로 ‘죄의

고백’을 언급했을 뿐 ‘죄 사함’은 예수가 죽을 때(26:28)까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

다. 이것은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의 세례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증거가 된다

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개인적인

‘죄의 자복’이 이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적이 없었다. 바야흐로 메시야 도래의 기운

이 전국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요단강(* ) – 히브리어 ‘야라드'(* , 내려가다)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빨리 흐르는 강’을 의미한다. 이 강은 헤르몬산에서 발원하여 갈릴

리 바다를 경유(經由)한 다음 사해에 달하는 강이다. 요단의 수원(水源)에서 사해

까지의 직선 거리는 약 217km인데, 전장(全長)은 강의 굴곡과 경사 때문에 400km 이

상이 된다. 요단은 팔레스틴 최대의 강이며, 이스라엘 산업의 젓줄이 되는 중요한

강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와도 필연적인 깊은 관계를 갖게 되는 바, 아브라함과

롯의 분가(창 13:10)로부터 야곱의 밧단아람 피신(창 32:10), 여호수아의 가나안 입

성(신 3:26-29), 사사시대에는 에홋(삿 3:26-30), 기드온(삿 7:24,25), 입다(삿

12:5,6)의 전장(戰場)으로, 엘리야의 승천(왕하 2:6-11), 엘리사의 나아만치유(왕하

5:1-14) 등으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바로 이곳에서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한것은 의

미 심장한 일이라 하겠다. 한편 요단강은 물살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그

중한 여울에 자리잡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을 것이다.

세례를 받더니(* , 카이 에밥티존토) – 할례

(circumcision) 아브라함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 의미

가 부여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시 세례 행위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세례에 죄에 대

한 고백과 씻음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부가된 것은

요한에게서 유래한다. 이에 대해 요세푸스(Josephus)는 증언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세

례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예비 행위로서 의로운 행위, 곧 죄 고

백을 요구했다고 한다. 따라서 요한이 회개하고 세례받음으로써 메시야의 오심을 준

비하자고 강력히 촉구한 점으로 보아 적어도 공개적으로 죄와 인연을 끊는 것이 세례

의 전제 조건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또한 쿰란(Qumran) 종파는 제의적 부정

(祭衣的 不淨)을 제거키 위해 정결례(淨潔禮)를 행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랍비들은

유대인이 아닌 한도내에서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여하튼 요한의 세례가

온몸을 물에 잠기게 하는 침례(浸禮)를 행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나 세례 의식

이 침수(浸水)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이 상징하는 ‘회개와 사죄’,

그로말미암아 얻어지는 ‘새 생명’이 중요한 것이다. 요한은 계시 수준의 세례를 베풀

었고, 예수께서는 완성된 사역의 서례를 베푸셨다(26:28).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고 유대 민족을 새 생명의 길로 불러내고 있었다(Robertson).

=====3:7

바리새인(* , 파리사이온) –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바

리새파는 사두개파와 함께 마카비 독립 운동시대 초기(B.C. 167)에서 대제사장 요나단

(B.C. 159-143)치하 사이에 기원(起源)된 경건주의자들로 보여지며, ‘바리새’라는 이

름으로 공식적으로 나타난 것은 요한 힐카너스 당시(B.C. 135-105)로 보인다. 그런데

이 이름은 히브리어 ‘파라쉬'(* )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구별하다’란 의미를 가

진다. 즉 바리새인은 ‘성별된 자’로서 율법과 구전(口傳)된 조상들의 모든 전통을 엄

격히 지키고 영혼 불멸, 부활과 내세, 천사의 존재 등을 신앙하며 배타성이 강한 일단

의 무리들을 가리킨다(행 23:8). 그러나 그들의 분리주의는 율법의 순수한 정신과 내

면적 경건을 무시하고 형식주의적인 위선과 의모를 중시하는 외식주의로 전락하여 그

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다(눅 11:43,44;12:1). 그렇다고해서 그들의 표리

부동(表裏不同)한 신앙으로 인하여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의 본래의 모습은 율법의 수호자(守護者)로 자처할 만큼 율법 준수에 철저했고 의

로운 이스라엘을 고대하며, 장차 도래할 메시야 왕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

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온 것은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지대한

관심을 겉으로 나타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회개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현

장에 회개에는 유념치않고 외식의 옷만을 걸치고 거만하게 나타난 것이다. 한편

‘많은’이라는 말에서 그들의 수(數)를 측정할수는 없겠지만 요세푸스(Josephus)에 따

르면 대헤롯이 죽을 때 바리새인들은 6천명 이상이나 되었다 한다.

사두개인(* , 사두카이온) – 이 명칭의 기원에 대하여는

(1) 알렉산더 대왕 당시의(B.C. 323) 사독이란 사람에게서 유래하였다 (2) 히브리어로

‘체디크'(* ), 헬라어로 ‘아포 디카이오쉬네스'(*

), 즉 ‘의’라는 말에서 근거하였다(Epiphanius)는 견해가 있으나 유대의

전승에 따르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왕상 1:38)이란 인물에게서 기원하

였다(Thayer, Carr)고 한다. 이들 중 후자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이들은 민

족주의자들로서 바리새파, 엣세네파와 함께 유대의 3대 종파의 하나이며 바리새인들과

는 적대적인 파당이었다. 또한 그들은 바리새파보다 숫적로 열세였지만 정치, 경제적

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었고 특히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은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제사

장급의 고위층이었다. 그들은 모세 오경 이외에는 모든 전승을 부인하였고, 내세도,

부활도, 천사도, 심지어 하나님의 섭리도 믿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유전(遺傳)의

위험은 피하였지만, 무익한 세상적인 열심과 인간의 이성에 절대적 기준을 두는 오류

(mistake)에 빠져 들어갔다(Alford).

오는 것을(* , 엘코메누스)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을 한 부

류로 묵어 기록한 것은 본서에 5회(16:1, 6, 11, 12) 나타난다. 상호 적대적인 두 파

가 함께 왔다는 데에는 이의(異意)가 없으나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을 가능성에 대

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혤라어 본문에서는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지 새례 장소에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지 분명한 구별을 짓지 않고 있다. 그

러나 뒤이어 나오는 세례 요한의 질책(叱責)으로 보아 그들은 세례 모습을 관찰하러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Bruce). 실로 이 두파는 종교적 목적에서는 상호 적대적이었지

만 예수를 정치적으로 대적하는 목적에서는 연합하였다 (16:1;22:23, 34;행 4:1).

독사의 지식들아 – 이는 예언적 전통에 속한 선언이다(사 14:29;30:6). 요한은 광

야에서 흔히 블 수 있는 독사들을 보며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간교한 뱀

을 연상하였을 것이다. 현대처럼 저속한 욕설이없던 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

였던 그들에게 저주받은 뱀(창 3:14)의 후예라고 욕한 것은 위선과 변절, 기만 등으로

길들여진 그들을 향한 신적 권위에 의거한 화(禍)의 선포였다. 예수께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해 같은 책망을 하신 적이 있다(23:33). 이 욕설은 ‘아브라함의 자손’

(9절)으로 자랑하던 그들에게 사단의 도구인 뱀의 후예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사악

한 실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누가…피하라 하더냐 – 이 말은 ‘너희가 무슨 근거로 나는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뜻의 질책성 질문이다. 엘리야로 예언된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

하기 위해 등장하여 등장하여 천국을 선포(2절)할 때 이미 ‘임박한 진노’가 암시되어

있었다(말 3:1, 2;4:1, 5). 그런데 세례 요한의 이 당황스런 질문이 지향하는 궁극적

인 목적은 단지 임박한 진노를 당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자각케 하고 끝

내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데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

란 말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감정을 인격화한 표현으로서 이것은 하나의 정

태적(靜態的) 감정이 아니라 참으로 무서운 실제적이며 존재론적 극형(極刑)을 수반하

는 것이었다. 한편 ‘임박한 진노’는 이방인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

영접을 준비(회개)하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홀연히 다가오는 종말론적인 것이

다(살전 1:10). 물론 이 진노는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훼파

됨으로서 1차 성취되었지만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마지막 심판 때에 온전히 성취될 것

이다(계6:16, 17).

=====3: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한 참된 방법이 제시된다.

즉 사단이 그들에게 귀뜸해준 위선적 종교 행위와 같이 단지 형식적인 세례 행위로는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 운)외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참

된 회개(2절 참조)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란 말이다. 여기서 ‘합당한'(* ,

앝시오스)이란 단어는 ‘같은 분량의’란 뜻으로서 마음속의 실제 회개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행위(열매)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뜻한다.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으로는 많은

의로운 일들(righteousness actions)을 행하였으나 그들의 내면은 결코 의롭지 않기

(not righteousness)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는 합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사람이

건 외견상 의로운 행동들을 할 수 있으나 그에 합당한 열매는 맺지못한다. 즉 내면이

청결한 사람만이 오직 의로운(올바른, 좋은) 행동들과 하나님께 기억될만한 열매들을

추수할 수 있는 것이다(Bruce). 한편 여기서는 열매가 단수(* , 칼폰)로

묘사되었는데 비해 본절과 평행 구절인 눅 3:8에는 복수(* , 칼푸스)

로 표현되었다. 이 차이는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조화가 가능하다. 즉 회개에 합당

한 열매가 변화된 삶에 따른 여러 종류의 은혜로 여겨지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될 수

있으며(21:3), 그 열매들의 뿌리는 오직 하나라는 점에서 단수(갈 5:22)로 묘사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3:9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말라 – 신구약 중간 시대에 일어난 공적신학

(功積神學, merit theology)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용

어는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과 족장들, 특히 아브라함의 공적이 그 후손에게 효력을 미

친다고 생각케 했다(Carson, Divine Sovereignty, pp.39ff). 유대인트리포(Trypho) 순

교자 저스틴(Justine)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육신을 따

라 다윗의 흩어진 자손들에게 저희가 죄인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패역한다 할지라도

영원한 나라가 주어지리라는 생각에서 당신들도 그것을 준행하였고’라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Alford). 랍비들의 교훈에도 ‘할례를 받은 자 중에 지옥에 갈 자는 아무도 없

다’라는 말이있다. 여기서 ‘생각지 말라'(* , 메 독세테)는 부정

명령법의 단호한 명령으로써 요한 자신과 그들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커다란 괴리

(estrangement)가 존재하고 있음을 명백히 나타낸다(Robertson). 그리고 ‘속으로’

(* , 레게인 엔 헤아우토이스)라는 표현은 그들

의 외적 상황(아브라함의 혈통)이 마음의 생각(구원받을 것임)으로 변한동작을 표

시하는데 사용된다(Beck). 그러나 구원의 참된 조건은 육적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영적 자손이 되는 데에 있는 것이다(롬4장). 이처럼 자신들의 종교적 특권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오해는 사실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을 탐

하는 가증한 위선적 범법 행위였다. (1) 하나님이 그들을 선민으로 삼으신 것은 사실

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속사 전개의 중심이요 도구로 삼기 위하신 것이었지 그들을 무

조건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2) 구약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바대로 그들이 선

민이 된 것은 결코 무슨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이 선민의 지위를 유지

하여 온 것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용서 덕택이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도 여느 인

간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타락과 교만의 역사였음을 보여 준다. (3) 따라서 그들이

선민의 혈통에 끼이게 된 것은 그저 감사할 조건일 따름이지 결코 아무때나 내세

우는 특권층 신분증명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돌들로도(* ,에크 톤 리돈투톤) – 이

것이 요한의 발 밑에 있던 요단 강변의 돌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고(Carr,

Virnect), ‘아브라함의 자손’과는 무관한 이방인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다

(Chrysostom). 그런데 문맥상 이 견해들을 모두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히브리

어나 아람어에서 ‘자손들'(banim)과 ‘돌들'(abanim)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 풍유

(諷諭)가 가능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은 ‘돌’처럼 여기는 아브

라함의 ‘자손'(유대인)들의 악한 교만 때문에 그들이 마찬가지로 ‘돌’처럼 여기는 이

방인들을 하나님께서 들어 약속의 ‘자손’으로 만드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실로 하나님

은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창 2:7) 당신이 원하시기만하면 발 밑의 돌이나

아니면 유대인들의 발 밑의 돌처럼 천하게 여기는 이방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재창조

하실 수 있는 것이다(롬 4:17)여기서 요한은 이방인 역시 선민의 대열(교회)에 들어와

아브라함의 특권과, 품성을 소유할 수 있다는, 그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3:10

이미…놓였으니 – 메시야의 진노가 임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곧 시간적

여유가 더이상 없는 바로 이 시점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별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Broadus). 한편 세례 요한은 ‘열매 맺음’을 언급할 때에 ‘타작마당'(12절), ‘나무와

뿌리, 알곡과 쭉정이, 도끼질과 사르는 불’ 등을 연상했을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무리들에 대한 심판을 도끼로 나무를 찍는 일에 비한 사실은 구약의 관

용적인 용어(사 10:33, 34;렘 46:22 등)에 준해서 심판을 묘사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

이다. 여하튼 이제 천국이 가까이 옴(2절)과 동시에 심판도 가까이 왔다. 이 천국과

심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역동적인 것으로서 천국을 선포하는 것은, 곧 심판의 도

래를 선언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회개를 선포하는 것이다. 더욱이 세례 요한은 그

도끼가 줄기 혹은 가지에가 아니라 ‘뿌리에’ 놓임으로 심판이 완전할 것임을 명백히

했다. ‘놓였으니'(* ,케이타이)는 현재 완료형으로 시행할 준비가 끝났음

을 암시한다. 더욱이 이 현재적 시상이 ‘찍어’, ‘던지우리라’는 말에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서 심판 준비가 다 되어 있음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불에 던지우리라 – 심판은 성경에서 곧잘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불로 묘사된다

(말 4:1;마 13:40;18:8, 9;막 9:43;요 15:6). 이 심판은 그 나라와 의를 위하여 선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것이다(히 6:8).

=====3:11

나는…세례를 주거니와 –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란 말이 막 1:8이나 눅

3:16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은 마태가 요한을 예수보다 하위에 두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취한것으로 보려는 학자도 있으나(Hill), 막 1:4과 눅 3:3에서도 요한의 세례

를 회개의 세례라고한 사실과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에 이말은 단지 ‘나는 회개

와 관련한 세례를 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즉 그의 ‘물로'(* ,엔

휘다티) 세례를 베푸는 행위는 예수의 속죄사역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서 예수께서 베

푸신’성령과 불’의 세례가 없다면 물 속에 침수하는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 근본적으로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는 선구자적인 사역에 불과한 것임

을 요한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내 뒤에 오시는 이 – ‘내 뒤에'(* , 오피소 무)는 시간적 순서

로 ‘후에’란 의미이다. 요한은 이 표현에서 자신과 메시야의 사역적, 개인적 관계

를 서술한다. ‘오시는 이'(* , 호 엘코메노스)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에 대한 정치적인 색채를 피한 칭호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메시

야에 대한 잘 알려진 관용적 표현으로써 ‘실로가 오시기까지'(창 49:10)와 같은 구약

의 진술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즉 본 구절은 요한이 담대하게 사역함으로써 백성들에

게 자신이 그리스도로 인식되는 것을(눅 3:15) 스스로 불식시키기 위하여 자신은 단지

메시야의 전구(前驅)임을 명백히 밝힌 표현이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 ‘뒤에 오는 이’가 능력이 더 많고 귀하다는 것은 정상적

인 경우가 아니다. 왜냐하면 보통 덜 귀한 사람이나 제자가 뒤를 따르는 것이 상례

(常例)였기 때문이다(16:24). 특히 ‘능력있다'(* , 이스퀴로스)라는

말은 후천적인 지위나 능력이 아닌 자생적 권위와 능력이 있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적

용하고 있으며(렘 32:18;사 40:10;단 9:4), ‘능력이 많으시니'(*

,이스퀴로테로스)는 능력의 자의적(自意的)이고 인격적인 소유를 말한다.

더욱이 선지자보다 나은 자인 세례 요한이 노예들이나 하는 일인 신을 들고 다니는 일

조차 감당치못할 그러한 분은 누구인가. 이러한 표현은 세례 요한의 지극한 겸손이지

만 과장된 겸손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오시는 이’는 바로 ‘말씀'(* ,

로고스)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의 신을 들기도 – 고대 중근동 지방에서는 아주 천한 신분의 노예가 자기 주인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고, 제자들이 스승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Edersheim). 그런데 요한은 자신이 그러한 천한 일 조차도 수행할 수 없는 비천한 존

재임을 극구 시인하고 있다.

감당치못하겠노라 – 이는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도덕적, 영적으로 그 일을 수

행할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실로 요한의 이 고백은 예수의 충

만한 신성(神性)을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가능했다(사 6:5).

그는 성령과 불로…세례를 주싶 것이요 – 마태와 누가는 공히 ‘성령 세례’란 말에

‘불’이란 단어를 추가하고 있다(눅 3:16). 그런데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제시

되고 있다. (1) 신자에 대한 구원 이후에 나타나는 불신자에의 심판이다. 즉 ‘성령’

(* , 프뉴마)을 ‘바람’으로 해석하여 신자들이 성령의 거룩한 바람에

불려가고 그나머지는 심판의 불에 태워진다는 이동적 의미의 해석이다(Bruce). (2) 성

령은 의인에게 임하는 성령의 은사(恩賜)요, 불은 악인 위에 내리는 맹렬한 심판이다.

그러나 위의 견해들보다 가장 당한 것은 두 단어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여 하나님

의 백성에 대한 성령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즉 원문에서 ‘…으로’라는 한 개의 전치

사인 ‘엔'(* )은 성령과 불을 모두 받음으로써 이 둘을 한 개념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불’은 성령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연단하는 자의 불로(말 3:2, 3), 정결케 하

는 불로(사 6:6;슥 13:9;벧전 1:7), 또는 성령 강림의 상징으로(행 2:3) 나타나기

때문에 두 단어는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는 상이한 표현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서 물

세례가 눈에 보이는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는 신앙 고백적, 공식적 의

식이라면 성령 세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씻음과 연합에 대한 하나님의 유효한 인정의

결과이다. 한편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진 것으로서

(겔 36:25-27;39:29;욜 2:28) 신약 성경에만 사용되는 특별한 용어가 아니다.

=====3:12

손에 키틀 들고…타작 마당을 – 먼저 ‘키’는 풍력(風力)을 이용하여 곡식의 쭉정

이를 분리해 내는 일종의 소쿠리이다. 한편 ‘손에'(* , 토 프투온)

든 키는 10절의 ‘놓여있는’ 도끼보다 더욱 강렬한 심판의 상징이다. 한국과 유사한 유

대 농촌을 연상시키는 이런 심판의 비유는 구약에서도 자주 보인다(4:1). 키를 ‘손에

든’ 메시야는 ‘타작 마당'(시 1:4;사 5:24;단 2:35;호 13:3)으로 비유된 자신의 세상

에서 신자로 비유된 알곡과 불신자로 비유된 쭉정이를 철저히 나누실 것이며, 또한 그

각각을 심판 내지는 구원이라는 하나의 단위로(‘모아’) 취급할 것이다. 한편 ‘곡간’은

중근동지방에서 주로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하또는 토굴에 설치해 두었었다. 물

론 본문에서는 구원받은 자들의 영원한 피난처, 곧 어떤 악한 세력에도 노출되지 않

는 안전한 처소로 이해할수 있다(시 71:7). 계속해서 ‘꺼지지 않는 불’은 어떤 한 시

점에 이르러 소멸되는 불이 아니라 어떠한 결핍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화력을 지닌 불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벌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종말론적인 심

판과(사 34:10;66:24;렘 7:20), 지옥을 의미하기도 한다(5:22). 현실에 반드시 존

재할 이 무서운 ‘불’에 알곡 아닌 모든 쭉정이를 남김없이 태워 자신의 타작 마당

을 정하게 하실것이다. 한편 ‘정하게 하사'(* , 디아카다리

에이)의 ‘디아'(* )와 ‘태우시리아라'(* ,카타카우세이)의

‘카타'(* )는 완료형이며 종료(終了)의 뜻을 가지고 있어 악한 자를 멸절시키

는 최종 심판이 철저하고 완전한 것임을 강조한다.

=====3:13

이 때에(* , 토테) – 세례 요한의 등장(1절)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현재 접

속사를 사용하여 전절과 적접 연결된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이 절정에 달해 있을 바

로 그때에 예수께서 오셨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 이 장면의 평행 구절인 막 1:9에는 ‘예수

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본서 2:23의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라는 말과 연결시켜볼 때 예수께서 애굽에서 귀국하신 이래 계속해

서 나사렛 동네에 거주하고 계셨음을 알 수있다. 한편 요단강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

‘톤'(* )이 제시된 것은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세례 사역지로 잘 알려진 요단강

의 바로 그지점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행위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메시야적 소명을

인식하고 있었으며(눅 2:49), 요한이 메시야를 위한 자신의 선구자적 소명을 자각하

고 있듯이(11절)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죄에

대해서 무관하신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가 이다. 이는

예수께서 개인적인 죄 의식을 느끼셨기 때문이(Bauer, Strauss) 아니고, 요한의 세례

를 보증하기 위한 것도(Kuinoel, Kern) 아니고, 그가 율볍에 복종했다는 것을 나타내

기 위한 것(Hoffmann, Krabbe, Osiander)도 아니다. 예수의 수세(受洗)의 참 뜻은 말

씀에 표현한 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요(15절;신 6:25), 그가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시기(사 53:4-6) 위함이다.

=====3:14

말려(* , 디에코뤼엔) – 미완료 과거형으로 그저 한번 ‘말려

보는'(* , 코뤼오) 정도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집요하게 만류했음을 암시

한다. 요한은 예수의 종교적, 윤리적인 우월성과 순결한 자태에 강렬한 인상을 받고

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지극히 비천함을 느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세례 요한

은 30년전 마리아가 엘리사벱을 방문했던 일(눅 1:39-45)그리고 예수가 자기의 출생

사건보다 더 놀라운 출생 사건을 통해 태어났으며, 어린아이로서는 경이로운 성경

지식을 가졌었다는 사실(눅 2:41-52)을 알고 있었올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직.간접

의 지식보다 자신 앞에 서신 예수를 직접 대면하고나서 그의 탁월한 성결성과 영적 심

화력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한은 성령의 하강(descent)하시는

신적 표적이 있기전까지는 아직 예수의 메시야성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이 확

실하다. 그것은 요 1:31-32의 평행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세례 받는 것

을 만류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요한은 예수가 메시야이신

것을 알아보고 그에게서 성령과 불로 세례 받기를 원하였다. 이 견해는 마태복음의

주제가 성령이 아니고 의(義)란 점에서 동감하기 어렵다. 예수의 답변을 보더라도(15

절) ‘의’가 강조되고 있다. 더욱이 마태는 예수가 누구에게나 성령과 불의 세례를 주

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춰 기록하

고 있는것이다. 사실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행 2장) 이후였기

때문에 마태는 성령의 세례가 주어진 것은 그가 기록하려는 시대보다 뒤의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11:2-12에서는 세례 준 후에도 요한이 예수를 완전히 ‘알지’ 못

하였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2) 요한의 세례는 종말론적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니

라, 죄의 고백과 회개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은 겸손한 인물로서 예수가

자기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는 알고 있었으나 예

수에게는 회개해야 할 죄릍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예수가 자기에게 세

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실로 마태는 요한이 언제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깨달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태는 예수의 무죄함과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 세례 요한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

하튼 요한이 흠(欠)이 있는 자신으로서는 순결 무흠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었

다.

=====3:15

이제 허락하라 – 본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최초의 말씀이다. 여기서 ‘이제'(*

,알티)라는 말은 특별한 시점을 암시하고 있다. 즉 예수는 요한의 반대(14절)가

원칙적으로 옳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제'(지금), 즉 구속사중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

는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가 종의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 보여야 했고, 그분이 스스로 벡성들과 같이 되었

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셔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수세(受洗) 전부터

자신의 메시야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여하튼 메시야

이신 주님만이 이러한 명령을 세례 요한에게 할 수있었다. 실로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

를 베풂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아버지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자신을 복

종시킨 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 예수께서 ‘나’라는 1인칭 단수 명사를 쓰시지 않고 ‘우

리’라는 복수 형태를 취하신 것은 예수와 요한, 곧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모든 의를

이루어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이어지는 ‘이와 같이 하여’란 말은 단순

히 세례와 같은 어떤 절차를 강조하는 말이라기 보다 모든 의를 이루기위한 순종의 자

세, 또는 순종의 마음을 강조한 말이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 여기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1) 예수

의 세례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의’를 성취하는 것이다(O. Cullmann). 이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사 53:13-53:12)에도 나타나듯이 예수가 당할 죽음의 세례를 예시한 것이

다. 그러나 ‘의’를 예수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2) 예수는 하나님의 명령(‘모든 의’)을 모두 순종(‘이루다’)해야 했으며 세례도 그

명령 중 하나이다. 이 견해는 세례가 ‘의’가 아니라 ‘회개와 죄의 고백’의 관계에 있

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는 부적당하다. 가장 적당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3)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뜻(‘모든 의’)이며, 예수께서 요

한과 함께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하나

님의 뜻을 따라 그의 사적 생애를 마감하고 메시야 직무를 수행하는 공생애로 들어가

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Bruce, Erdman). 더욱이 예수의 수세의 주제는 모든

죄인을 대신한 고난이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적 메시지에 따르면 예수는 고난

받는 종(사 42:1-9;49:1-6;50:4-9;52:13-53:12)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요한

은 세례를 베푼 후 즉시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 불렀고, 예수 자신

도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세례로 표현했다(눅 12:50).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요한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예수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무흠한 신성(神性)의 소유자이시지만, 그분 곧 메시야에게 합당한

세례를 베푼다. 이로써 예수와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동역자의 선상에

서게 된다. 한편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데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이는 모

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즉 공생애에 앞서 예수는 이

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직의 자격과 능력이 구비되었으나 인간적 수준에서 또 인

간들의 이해를 위해서도 교회의 선한 전승(inheritance)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실제

로 이런 예수의 자세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16절의 성령 강림과 17절의 천성(天聲)을

통해 예수가 모든 의를 갖추신 자임을 공표(公表)하셨다. (2) 이를 통해 세례 요한은

메시야가 도래했음과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공적으로 선언했다(요 1:31-34).

(3) 회개, 세례가 필요없었던 예수는 수세를 통해 죄로 타락된 인간과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켰고 우리를 대신하는 일을 시작하셨다(고후 5:21). (4)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

신 것은 그를 믿는 자에게 보이신 수세의 모범이었다.

=====3:16

예수께서…곧…올라오실세 – ‘곧'(* , 유뒤스)은 ‘올라오실세’

(* , 아네베)에 속하는 말로서 예수가 세례받은 후 곧바로 물에서 나왔다는

사실 뿐 아니라 성령의 증거도 역시 즉각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그런 점에서 이

말은 성령이 임하실 때에는 그가 물 속에 있지 않고 강둑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암시

한다. 한편 ‘물에서 올라 오실세’란 말을 근거로 예수의 침례설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례를 준다’는 뜻의 ‘배티조'(* )란 단어는 원래 ‘잠그다’의

의미뿐 아니라 ‘물로 무엇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도 지닌다(막 7:4;딛 3:5). 그리고

관용적으로 어떤 것에 충만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적 접근을 통해 예

수의 수세를 침례 또는 세례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그 자체가 지니는 영적 의미와 거룩한 정신을 외면한 채 세례냐 침례냐의 어떤 외적

의식만을 절대적 규준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세례의

참의미를 무시하는 형식주의적 독선이 될 수 있다. 한편 ‘올라 오실세’는 비둘기같이

‘내려'(* , 에르코메논)란 말과 연결되어 마치 땅과 하늘이 화답

하는 것같은 미묘한 대조를 이룬다.

하늘이 열리고(* , 아네와데산 아우토) – 이 구절

은 구약성경의 환상들(사 64:1;겔 1:1;행 7:56;계 4:1;19:11)을 연상시킨다. 고대 신

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표현은 ‘모든 의를 이루신’ 예수께 대한 하나님의

비상(非常)하신 역사개입이지 예수의 한낱 환상이 아니다. 한편 어떤 사본들(에브라

임, 베자)에는 이 부분이 ‘하늘이 그에게 열리고’로 표현되어 하늘이 예수에게만 국한

되어 열렸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즉 다른 그 누구도 아무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 이때 예수의 선지자였던 요한은 하늘

의 열림을 직접 목격했었을 것이다(Olshausen). 그리고 대중들도 하늘의 열림과 동시

에 하늘로서나는 소리를 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인류의 조상이 낙원에서 쫓겨

난 이후(창 3:24) 극히 부분적으로만 열렸던 하늘이 예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열려 하나의 새릅고 신비한 교제(交際)가 가능케 된 사실을 강조해주고 있다.

비둘기같이(* ,호세이 페리스테란) – 여기 사용

된 직유법은 성령과 비둘기를 명백히 관련시킨다. 즉 이 말은 성령 강림의 방식이 비

둘기 같다는 뜻도 되고, 성령이 비둘기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는 뜻일수도 있다. 누가

복음에는 후자의 견해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형체로'(*

, 소마티코 에이데이)가 첨가되어 있다. 한편 성령에 관하여 이와 같은 유추적

표현이 나오는 구약성경은 창 1:2 뿐이다. 탈무드(Talmud)에는 창1:2이 ‘하나님의 신

은 비둘기같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로 해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어느 합

리주의자는 비둘기 한마리가 예수의 머리 위에 날개치고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이

것이 환상적 장면이든 아니든 분명 성령이 신인(God-Man)이신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수

행하도록 돕기 위해 예수 위에 임하신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

시면서 성령의 적극적이고도 완전한 후원을 받으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웨스트

코트(Westcott)는 ‘예수의 참 인간으로써 합당한 은사인 성령을 받으심으로 공생애의

첫 발을 내디디셨다. 주관적으로 볼 때 신인을 연합시킨 성령이 육화(肉化)하신 말씀

(예수) 위에 임하셨고,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공

개적으로 계시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Pulpit Commentary).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비

둘기는 성령의 교통하는 힘의 온유(11:29)와 순결(1:16)과 생명의 충만(창 1:2;요

7:37-39)을 상징하는데, 이것들은 예수의 품성과 사역의 특질과 좋은 비교가 되고있

다.

자기 위에 임하심 – 예수께 성령이 임하심은 시 45:7에 예언된 관유(灌油,기름부

음)의 성취였다. 실로 율법에 있어서도 흠 잡을 것이 없는 예수께서는 율법에 정한 나

이 30세(민 4:3) 때에 공개적 절차를 통해 공식적인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

심으로 우리의 선지자, 대제사장, 왕으로서 취임하셨던 것이다(Luther). 여기에서 물

과 불과 성령의 삼각 세례가 완성되었다(Alford).

=====3:17

헬라어 원문에는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감탄사 ‘보라'(* ,

이두)가 문두에 언급되어 있다. 이 ‘이두’는 어떤 사건의 중요성.급작성을 강조하거나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본문에서는 위의 두기능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하늘로서 소리 – 본문의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에 관해 어떤 학자들은 랍비 문

학과 연관시켜 해석하려 한다. 즉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

였던 영(靈)과 예언자가 잠잠해진 400년동안의 침묵기에 하나님의 영의 소리를 반영

해 전달해 주는 수단을 통털어 히브리어로 ‘바트콜'(* )이라 불렀는데,

번역하면 ‘소리의 딸’이란 의미이다. 물론 그 수단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본문을 단순한 ‘바트 콜’, 즉

지금까지 있어왔던 평범한 하늘의 계시정도로만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

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이보다 더 강력하다. 실로 이 ‘소리'(* , 포네)는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침묵을 깨뜨리시고 다시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는 계시이다. 결국 이것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분명한

징조요, 그것을 공적으로 입증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소리였던 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이 말은 소위 ‘고난받는 종의 노

래’라 일컬어지는 사 42:1을 반영하고 있으며, ‘너는 내 아들이라’고 노래한 시 2:7의

변형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에 들려진 하늘의 소리는,

곧 그를’고난받는 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여기 ‘이는 내 아들이요’라는 말은

예수 주위에 있는 어떤 다른 사람도 하늘의 증거를 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

다. 아마도 많은 무리가 있었는지 모른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태의 주관

심사가 아니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내 아들’로 부르심으로 2:15을 확인하고

있고 다음 장에서 사단에 의해 즉시 사용되게된다(4:3, 6). 이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아들로 공적 인준(認准)을 받고 신격(神格)의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라

는 사실이 확증된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 성령, 성삼위의 거룩한 해후(邂逅)가 이루

어지며, 성부의 음성은 변화산상(17:5)에서와 수난기간(요 12:28)에 다시 들린다. 한

편 영지주의자들(Gnostics)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성령 강림이 있은 후 위와같은 하나

님의 공적인 인준이 있기 전까지 육체에 속한 한 자연인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의 인준으로 신적 본질을 가지게 되었지만 십자가 상에서 성부 하나님의

버리심을 고백(27:46)할 때에 그 신성이 다시 벗겨졌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요일

4:2,3). 그러나 이는 예수의 영원 현존성과 영원하신 신성을 간과한 이단적 견해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아들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령을 반영한 용어인 ‘사

랑하는'(* ,아가페토스)이란 말은 질적인 측면을 강조한 ‘유일한 사

랑’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가음에 나오는 ‘기뻐하는'(* , 유도

케사)이 초시간적인 부정과거인 점으로 보아 이 ‘사랑하는’이란 용어는 심정적언 측면

뿐 아니라 ‘선택’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직역하면 ‘내가 그를 선택함으로 인

해 기뻬하였던 자’이다. 이는 메시야를 시간이 있기 전, 곧 영원 전에 선택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영원성을 강력히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요단강에

성육신(Incarnation)하여 우뚝 서 계신 아들의 영원한 신적 선택의 위대한 역사적 사

실이 성부 하나님에 의해 선포된 것이다. 정녕 아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될 때 아버

지께서는 감추어진 방법으로 그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고, 백성들의 대표자이며, 고난받는 종으로 동시에 나타내 보여 주셨다.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03장

3:1 세례요한의 출현 (마태복음 3:1-6) 여기에는 복음 시대를 알리는 여명이었던 세례 요한의 세례와 설교에 관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Ⅰ. 세례 요한이 출현한 시기. “그 때에,” 또는 “그 후에”란 말은 예수님의 유아 시절까지만을 취급한 앞장의 사건들보다 훨씬 후에란 뜻이다. 또한 “그 때에”란 말은 하나님께서 복음이 시작되는 때로 정하신 시기, 즉 “때가 찬”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서도 가끔 이러한 의미로 “그 때에”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로써 다니엘이 예언한 마지막 “한 이레”가, 그 중에서도 메시야께서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그 언약을 굳게 하실”(단 9:27) 마지막 이레의 후반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출현은 모두 때를 맞추어 일어난 것들이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관하여 출생시와 출생 전에 영광스러운 일들이 언급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그들의 어린 시절에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권능이 그들과 함께 한다는 특별한 징조들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기대되지만 사실은 전혀 그 반대였다. 그리스도가 열 두 살 되시던 해에 성전에서 박사들과 논쟁하시던 것을 제외하고는 요한이나 그리스도에게 서른 살이 되기까지 특별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다. 그들의 청소년기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으며 그들 생애의 대부분도 모두 어두움과 불명료함(tempus adelon)에 싸여 있다. 이들의 유년시절은 마치 상속자가 비록 후에 그가 “모든 것의 주인”이 되기는 할지라도 나이가 차기 전에는 다른 종들과 다름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견상 다른 아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들을 알려 준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하나님으로 역사 하실 때에도 “스스로 숨어 계신다”(사 45:15)는 것을 보여 준다. 야곱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 “여호와께서 이 곳에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창 28:16). 우리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가에서 내다보시기 오래 전에”(아 2:9) 벽 저편에서 계신다.

2. 우리의 믿음은 주로 그리스도의 직무와 사업에 염두를 두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직무와 사업에서는 그의 권능을 “나타내시지만”, 그의 인격에서는 “숨기시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분(God-man)이셨다. 그러나 그가 선지자로 나타나시기까지는 그가 하신 말씀과 행하신 것에 대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너희는 그를 들을 지어다.”

3. 젊은 사람은 비록 자격을 완전히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공적인 업무에 자신을 내세워서는 안 되며, 겸손하고 사양하는 마음, 즉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하나님으로 역사 하실 때에도 “스스로 숨어 계신다”(사 45:15)는 것을 보여 준다. 야곱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 “여호와께서 이 곳에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창 28:16). 우리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가에서 내다보시기 오래 전에”(아 2:9) 벽 저편에서 계신다.우리의 믿음은 주로 그리스도의 직무와 사업에 염두를 두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직무와 사업에서는 그의 권능을 “나타내시지만”, 그의 인격에서는 “숨기시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분(God-man)이셨다. 그러나 그가 선지자로 나타나시기까지는 그가 하신 말씀과 행하신 것에 대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너희는 그를 들을 지어다.”젊은 사람은 비록 자격을 완전히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공적인 업무에 자신을 내세워서는 안 되며, 겸손하고 사양하는 마음, 즉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한다. 마태는 세례 요한의 잉태와 출생에 대해 누가가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마치 광야에서 외치기 위하여 구름에서 떨어져 내려온 것처럼 성년이 된 세례 요한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하고 있다. 3백년 이상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한 불빛이 오랫동안 꺼져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선지자로 오실 그분이 그토록 기다려졌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선지자나 선지자 행세를 하는 자까지도 없었다. 따라서 말라기 선지자는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 더 직접적으로 세례 요한을 가리켜 “내가 내 사자를 보내노니”(말 3:1)라고 말씀하였다. Ⅱ. 세례 요한이 맨 처음 출현한 곳은 “유대 광야”였다. 유대 광야는 전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이 광야에는 여호수아 15장 61, 62절에 그 이름이 나타나는 대로 여섯 성읍과 그 고을들이 있었다. 세례 요한은 이 성읍들과 마을에서 전파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헤브론 가까이에서 출생하여 그 때까지 이 부근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의 활동 무대는 그가 오랫동안 명상으로 시간을 보냈던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요한은 그가 이스라엘에 나타난 후에도 그가 맡은 일과 어긋나지 않는 한 조용히 지내기를 좋아했음을 보여 준다. “주의 말씀”이 여기 “광야에서” 요한을 찾아내었다. 어떠한 곳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찾아오지 못할 만큼 멀리 떨어진 곳은 없으며, 오히려 성도들이 하늘과 더불어 가장 신령한 교통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소란함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임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다윗이 시편 63편을 기록했던 곳도 “유대 광야”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과 가졌던 신령한 교통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다(호 2:14). 율법이 주어진 곳도 광야였으며,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의 이스라엘”이 먼저 광야에 발견되었으며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교훈 하셨다”(신 32:10). 세례 요한은 아론의 반차를 쫓은 제사장이었으나 광야에서 전파하는 일을 하였을 뿐, 성전에서 결코 제사장 직무를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론의 자손이 아닌 그리스도께서는 가끔 성전에 나타나셨으며 마치 권세를 가진 자처럼 성전에 앉아 계시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말라기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너희가 찾는 주께서 홀연히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라”(말 3:1)고 하였다. 이 말씀은 그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사자가 성전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아론의 제사장 직분을 밀어내어 광야로 쫓아낼 것을 암시한다. 복음이 광야에서 시작된 것은 광야와 같은 이방 세계에 대한 위로를 의미한바 이제 “내가 사막에 백향목을 심을 것이며”(사 41:18, 19), “광야가 열매맺는 땅이 될 것이며”(사 32:15), “광야가 기뻐할 것이라”(사 35:1)는 예언들이 분명히 성취되었다. 70인역에는 “요단의 광야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곳은 바로 요한이 전파하던 광야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는 스스로를 “은둔자”라고 부르면서 세례 요한을 따르는 행세를 한다. 그러나 성경은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고 해도 가지 말라”(마 24:26)고 말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따르는 자들을 “광야로 유혹하여” 끌고간 자도 있었다(행 21:38). Ⅲ. 그의 설교. 세례요한은 전파하는 것을 그의 임무로 삼았다. 그는 싸우거나 논쟁하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전파하면서”(1절)나타났다. 왜냐하면 “전도의 어리석음”에 의해 세워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1. 그가 전파한 내용은 “회개하라”는 것이었다(2절). 그는 이것을 “유대 땅”에서, 소위 “유대인”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던 자들 가운데서 전파하였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회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말씀을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유대광야, 즉 평범한 시골 사람들 가운데서 전파하였다. 왜냐하면 스스로 유혹의 길을 완전히 벗어나고 도시의 허영과 악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무죄할 수는 없으며, 회개함으로 깨끗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가 전파한 내용은 “회개하라”는 것이었다(2절). 그는 이것을 “유대 땅”에서, 소위 “유대인”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던 자들 가운데서 전파하였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회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말씀을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유대광야, 즉 평범한 시골 사람들 가운데서 전파하였다. 왜냐하면 스스로 유혹의 길을 완전히 벗어나고 도시의 허영과 악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무죄할 수는 없으며, 회개함으로 깨끗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의 임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회개케 하기”위한 것이었다. “회개하라”(Metanoeite)는 말은 “스스로를 생각해 보라”는 뜻이며 처음 생각의 오류를 시정하기 위하여 두 번 생각해 보라, 즉 “되씹어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네 생활을 곰곰히 생각해 보고 마음을 고치라. 네 생각이 잘못되었으니 다시 잘 생각해보고 고치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참된 회개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죄와 성결,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해 그전에 가졌던 것과는 “다른 생각들”을 갖게 되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러한 방향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 “마음”의 변화는 “생활”의 변화를 가져온다. 과거의 잘못된 행실에 대해 진정으로 뉘우치는 자는 더 이상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이러한 회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이며(행 17:30),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위로를 받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준비와 자격이다. 만일 사람의 마음의 범죄로 말미암아 악해지고 더럽혀지지 않았더라면 이와 같이 고통스러운 예비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인간의 마음에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하였으므로 편안해지기 전에 먼저 고통을 받아야 하며, 안식을 얻기 전에 수고해야만 하였다. 아픈 상처는 찾아내어야 하며, 그렇지 않고서는 치료받을 수 없다. “나는 상하게 한 후에, 낫게 하는 자니라.” 2. 세례요한은 이러한 외침의 내용을 강화하기 위하여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일시적인 국가적 자비를 얻기 위해서나, 또는 일시적인 국가적 심판을 면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요구 내용은 같으나 그 이유는 새롭고 순전히 복음적인 것이었다. 이제 여기에서는 인간을 사회적 또는 정치적인 자격에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자격에서 고려되고 있다. 세례요한은 이러한 외침의 내용을 강화하기 위하여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일시적인 국가적 자비를 얻기 위해서나, 또는 일시적인 국가적 심판을 면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요구 내용은 같으나 그 이유는 새롭고 순전히 복음적인 것이었다. 이제 여기에서는 인간을 사회적 또는 정치적인 자격에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자격에서 고려되고 있다. 여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한 은혜, 계약의 복음적인 성취, 또는 믿는 자들에 대한 천국의 개방을 의미한다. 이 “왕국”의 주권자는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즐거움으로 그의 충실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이 왕국은 이 세상의 왕국이 아니라 하늘의 왕국이며, 영적인 왕국이다. 그 근원도 하늘이며 그것이 지향하는 곳도 하늘이다. 요한은 이 천국이 “가까왔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때 천국은 바로 문 앞에 있었으며 성령의 부르심과 복음적 은혜의 풍성함이 완전히 드러남에 의해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다.

(1) “가까웠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는 가장 큰 “자극제”이다. “죄에 대하여” 또한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은 없다. 이러한 것이 복음적인 회개이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의 사랑을 느낌으로써, 그를 통한 사죄와 용서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된다. 친절은 남을 정복하며, 겸손케 하고, 녹아지게 한다. 이러한 은혜와 이러한 천국의 법과 사랑을 저버리고 범죄한 나는 얼마나 몹쓸 인간인가!

(2)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는 가장 큰 “격려”가 된다. “회개하라, 그러면 네 회개로 네 죄가 사하여질 것이다. 의무의 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러면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비의 길에서 너에게 돌이키시리라.” 사죄의 선언은 전에도 도망하고 피했던 죄인을 발견하여 데리고 온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한 사람의 끈과 사랑의 띠로 회개하도록 이끌려진다. “가까웠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는 가장 큰 “자극제”이다. “죄에 대하여” 또한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은 없다. 이러한 것이 복음적인 회개이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의 사랑을 느낌으로써, 그를 통한 사죄와 용서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된다. 친절은 남을 정복하며, 겸손케 하고, 녹아지게 한다. 이러한 은혜와 이러한 천국의 법과 사랑을 저버리고 범죄한 나는 얼마나 몹쓸 인간인가!”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는 가장 큰 “격려”가 된다. “회개하라, 그러면 네 회개로 네 죄가 사하여질 것이다. 의무의 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러면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비의 길에서 너에게 돌이키시리라.” 사죄의 선언은 전에도 도망하고 피했던 죄인을 발견하여 데리고 온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한 사람의 끈과 사랑의 띠로 회개하도록 이끌려진다. Ⅳ. 세례 요한에게서 성취된 성경의 예언(3절). 세례 요한은 복음 시대와 복음 은혜를 가리키는 가장 복음적인 이사야서의 예언의 첫머리에 언급된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사야 40장 3,4절을 보라.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1.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세례 요한은 그 자신 스스로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요 1:23). “나는 소리이다.” 이것이 전부였다.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으며, 사람이 그 목소리로 그의 마음을 알게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세례 요한에 의해 알리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받아들여져야 한다(살전 2:13). 바울이 무엇이며 아볼로가 무엇인가? 그들은 한낮 소리에 불과하였다. 요한은 깨우쳐 주는 크게 “외치는 자의 소리”(fwnh bowntoj)라고 불리워진다. 그리스도는 ‘말씀”이라고 불리우셨는데, 이것은 분명하고 명료해서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소리”였던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일깨웠고, 그 다음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계시록(14:12)에서 보는 대로 그들을 가르치셨다. 즉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레 소리와도 같은 소리가 거문고 타는 소리와 같이 들렸던 것이다”(계 14:3).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세례 요한은 그 자신 스스로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요 1:23). “나는 소리이다.” 이것이 전부였다.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으며, 사람이 그 목소리로 그의 마음을 알게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세례 요한에 의해 알리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받아들여져야 한다(살전 2:13). 바울이 무엇이며 아볼로가 무엇인가? 그들은 한낮 소리에 불과하였다. 요한은 깨우쳐 주는 크게 “외치는 자의 소리”(fwnh bowntoj)라고 불리워진다. 그리스도는 ‘말씀”이라고 불리우셨는데, 이것은 분명하고 명료해서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소리”였던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일깨웠고, 그 다음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계시록(14:12)에서 보는 대로 그들을 가르치셨다. 즉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레 소리와도 같은 소리가 거문고 타는 소리와 같이 들렸던 것이다”(계 14:3).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삼손의 어머니는 “강한 독주”를 마시지 않았음에도 삼손은 “강한 사람”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의 아버지는 형벌로 말미암아 벙어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다. 외치는 자의 소리가 벙어리 아버지에게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권능이 하나님께 있으며 사람에게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2. 세례 요한이 맡은 임무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것”이었다. 세례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그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주를 위해 한 백성을 예비케 할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었다(눅 1:17).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왕국의 성격을 암시했던 사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화려한 옷으로 정장을 한 선구자로서가 아니라 운둔자의 검소한 차림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람들이 지나가기 전에는 그 길을 깨끗이 다듬기 위해 관리들이 파송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

(1) 세례 요한은 그 자신이 그 당시의 세대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서 주의 길을 예비하였다. 이 당시 유대인의 교회와 국가에 있어서 모든 것은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있었다. 신앙심은 크게 쇠퇴하였고, 종교의 생명력은 장로들의 유전과 규범에 의해 타락하고 무기력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위선적인 인물들이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지식과 권력의 열쇠를 그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세례 요한이 맡은 임무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것”이었다. 세례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그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주를 위해 한 백성을 예비케 할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었다(눅 1:17).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왕국의 성격을 암시했던 사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화려한 옷으로 정장을 한 선구자로서가 아니라 운둔자의 검소한 차림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람들이 지나가기 전에는 그 길을 깨끗이 다듬기 위해 관리들이 파송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세례 요한은 그 자신이 그 당시의 세대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서 주의 길을 예비하였다. 이 당시 유대인의 교회와 국가에 있어서 모든 것은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있었다. 신앙심은 크게 쇠퇴하였고, 종교의 생명력은 장로들의 유전과 규범에 의해 타락하고 무기력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위선적인 인물들이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지식과 권력의 열쇠를 그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백성들은 유대인의 특권을 극도로 자랑했으며, 그들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을 확신하고 죄를 깨닫지 못하였다. 또한 그들은 겸손케 하기 위해 근래에 로마의 속국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겸손해지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말라기 선지자 시대의 사람들처럼 방자하고 교만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반박하고 부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 세례 요한은 이러한 산들을 평탄케 하기 위해, 즉 그들 자신이 품고 있는 교만한 마음을 끌어내리고 그들 자신의 죄를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훈이 좀더 잘 받아들여지고 효과적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2) 세례 요한이 가르쳤던 회개와 겸손의 교훈은 그 당시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 있어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영혼 속에 들어오시게 하고 “마음을 낮추어” 그를 다윗의 자손(삼하 19:14)으로 영접하기 위해서는 해야할 많은 일들이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자신의 의로서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이 없다. 장애물은 치워 없애기 전에는 언제나 장애가 되기 마련이다. 이와 같이 편견은 제거해야 하며, 교만한 생각은 낮추어야 하며, 또한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해야한다.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기 위해 영원한 문들이 열리기 전에 먼저 놋쇠문들은 깨뜨러져야 하며, 철 빗장은 끊어져야 한다. 죄와 사탄의 길은 “굽으러진 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예비하려면 그 길들이 “곧바르게”되어야 한다(히 12:13). 세례 요한이 가르쳤던 회개와 겸손의 교훈은 그 당시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 있어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영혼 속에 들어오시게 하고 “마음을 낮추어” 그를 다윗의 자손(삼하 19:14)으로 영접하기 위해서는 해야할 많은 일들이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자신의 의로서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이 없다. 장애물은 치워 없애기 전에는 언제나 장애가 되기 마련이다. 이와 같이 편견은 제거해야 하며, 교만한 생각은 낮추어야 하며, 또한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해야한다.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기 위해 영원한 문들이 열리기 전에 먼저 놋쇠문들은 깨뜨러져야 하며, 철 빗장은 끊어져야 한다. 죄와 사탄의 길은 “굽으러진 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예비하려면 그 길들이 “곧바르게”되어야 한다(히 12:13). Ⅴ. 세례 요한의 복장과 모습, 그리고 그의 생활 방식(4절). 메시야를 이 세상의 일시적인 왕으로 기대했던 유대인들은 그의 선구자야말로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옷차림을 갖추고 올 것이며, 또한 그가 타고 올 수레도 역시 굉장할 것으로 추측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그는 “주님이 보시기에는 큰 자”였을 것이나 이 세상의 눈에는 천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스도 자신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 왕국의 영광은 영적인 것이며, 그 왕국의 백성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가난하게 되고 멸시받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의 영광과 즐거움과 부귀를 다른 세상에서 얻는다. 1. 그의 옷차림은 검소하였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끈을 허리에 띠었다.” 그는 서기관들처럼 “긴 옷”을 입지 않았고, 왕궁에 있는 자들처럼 “부드러운 옷”을 입지도 않았다. 그는 시골의 촌뜨기가 입는 옷을 입었다. 왜냐하면 그는 시골에서 살았고 그의 모습이나 습관은 이런 환경에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섭리 가운데서 우리로 하여금 처하게 하신 장소와 환경에 우리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요한이 이러한 옷차림으로 나타난 것은,

(1) 그는 야곱과 같이 “평범한 사람”이며, 이 세상과 또한 이 세상의 기쁨과 즐거운 것들에 대해서는 죽은 자와 같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겸손한”자는 그 겸손을 옷차림에 대한 성스러운 무관심에 의해 나타내 보여야 하며, 옷 입은 것으로 자신을 꾸미지 말고, 다른 사람을 옷차림으로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2) 세례 요한의 이러한 옷차림은 또한 그가 선지자임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은 금욕을 행하는 자로서 거친 옷(털옷)을 입었기 때문이었다(슥 3:4). 또한 이러한 옷차림은 특별히 그가 약속된 엘리야임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털이 많이 난 사람”이었으며(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엘리야가 털옷을 입었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또한 허리에 가죽끈을 매었다는 사실이 성경 가운데 특별히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왕하 1:8). 세례 요한은 금욕생활에 있어서 엘리야에게 어떤 면에서도 뒤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 세례 요한은 “다시 오리라고 한 엘리야”임을 알 수 있다.

(3) 이러한 옷차림은 또한 그가 마음의 결심이 굳은 사람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의 허리띠는 그 당시 보통 쓰였던 “좋은” 것이 아니라 “강한” 가죽끈이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 “허리에 띠를 띠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 보게 될 그 종은 복있는 종이다(눅 12:35, 벧전 1:13).

2. 그의 음식 역시 검소한 것이었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 이것은 그가 이런 것 외에는 결코 다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처럼 보일는지는 모르나 그가 한적한 곳에 가서 오랫동안 명상을 계속할 때에는 이런 종류의 음식들로 흔히 배를 채웠기 때문이었다. 그의 옷차림은 검소하였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끈을 허리에 띠었다.” 그는 서기관들처럼 “긴 옷”을 입지 않았고, 왕궁에 있는 자들처럼 “부드러운 옷”을 입지도 않았다. 그는 시골의 촌뜨기가 입는 옷을 입었다. 왜냐하면 그는 시골에서 살았고 그의 모습이나 습관은 이런 환경에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섭리 가운데서 우리로 하여금 처하게 하신 장소와 환경에 우리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요한이 이러한 옷차림으로 나타난 것은,그는 야곱과 같이 “평범한 사람”이며, 이 세상과 또한 이 세상의 기쁨과 즐거운 것들에 대해서는 죽은 자와 같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겸손한”자는 그 겸손을 옷차림에 대한 성스러운 무관심에 의해 나타내 보여야 하며, 옷 입은 것으로 자신을 꾸미지 말고, 다른 사람을 옷차림으로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세례 요한의 이러한 옷차림은 또한 그가 선지자임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은 금욕을 행하는 자로서 거친 옷(털옷)을 입었기 때문이었다(슥 3:4). 또한 이러한 옷차림은 특별히 그가 약속된 엘리야임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털이 많이 난 사람”이었으며(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엘리야가 털옷을 입었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또한 허리에 가죽끈을 매었다는 사실이 성경 가운데 특별히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왕하 1:8). 세례 요한은 금욕생활에 있어서 엘리야에게 어떤 면에서도 뒤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 세례 요한은 “다시 오리라고 한 엘리야”임을 알 수 있다.이러한 옷차림은 또한 그가 마음의 결심이 굳은 사람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의 허리띠는 그 당시 보통 쓰였던 “좋은” 것이 아니라 “강한” 가죽끈이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 “허리에 띠를 띠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 보게 될 그 종은 복있는 종이다(눅 12:35, 벧전 1:13).그의 음식 역시 검소한 것이었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 이것은 그가 이런 것 외에는 결코 다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처럼 보일는지는 모르나 그가 한적한 곳에 가서 오랫동안 명상을 계속할 때에는 이런 종류의 음식들로 흔히 배를 채웠기 때문이었다. “메뚜기”는 나는 곤충의 일종이며 좋은 음식물이며, 구약에서도 정결한 음식으로 규정되어 먹도록 허용되었다(레 11:22). 메뚜기는 요리하는데 번거로운 손질이 필요 없고 소화가 잘되었기 때문에 나이가 늙어 몸이 쇠약해지면 “메뚜기도 위장에 부담이 된다”(전 12:5)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석청”은 가나안 지방에 풍부했던 야생풀이었다(삼상 14:26). 석청은 방울로 떨어질 때 즉시 거두어들이든지, 아니면 사람들이 돌보거나 보살핀 것이 아니고 벌들이 나무나 바위의 움푹한 곳에 스스로 모아둔 것을 거두거나 한다. 이것은 그가 배불리 먹지 못하고 모자란 듯이 먹었음을 말해 준다. 메뚜기와 석청으로 배부르게 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세례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마 11:18).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 호기심이나 체면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영적인 일들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규칙적인 식사를 할 겨를이 거의 없었다.

(1) 이 사실은 그가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관하여 전파했던 교훈과 일치한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애통하고 억제하도록 촉구하는 임무를 맡은 자는 모름지기 먼저 그 자신이 진지하고 자기 부정적이며 금욕적이고 이 세상을 멸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는 외침이 필요할 정도로 악했던 그 당시 유대의 죄악에 대해 깊이 느낀 감정을 이와 같이 나타내 보였다. 그에게는 모든 날이 “금식하는 날”이었다.

(2)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의 그의 임무와 일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생활은 그가 “천국”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았으며 그 권능을 체험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신적이며 영적인 즐거움을 알게 된 자는 감각적인 모든 즐거움과 장식을 한낮 거룩한 무관심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는 그들이 이보다 더 좋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모본을 보임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예비하였다. 이와 같이 이 세상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의 헛됨을 확신하는 것이 마음속에 천국을 맞아들이기 위한 준비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도다.” 이 사실은 그가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관하여 전파했던 교훈과 일치한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애통하고 억제하도록 촉구하는 임무를 맡은 자는 모름지기 먼저 그 자신이 진지하고 자기 부정적이며 금욕적이고 이 세상을 멸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는 외침이 필요할 정도로 악했던 그 당시 유대의 죄악에 대해 깊이 느낀 감정을 이와 같이 나타내 보였다. 그에게는 모든 날이 “금식하는 날”이었다.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의 그의 임무와 일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생활은 그가 “천국”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았으며 그 권능을 체험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신적이며 영적인 즐거움을 알게 된 자는 감각적인 모든 즐거움과 장식을 한낮 거룩한 무관심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는 그들이 이보다 더 좋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모본을 보임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예비하였다. 이와 같이 이 세상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의 헛됨을 확신하는 것이 마음속에 천국을 맞아들이기 위한 준비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도다.” Ⅵ. 그를 모시고 따랐던 사람들(5절).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가 다 그에게 나아왔다.” 큰 무리가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그에게로 나아왔다. 각계 각층의 사람들, 즉 남자와 여자, 청년과 노인, 부자와 가난한 자, 바리새인들과 세리들, 이 모든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천국”을 전파한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그들이 소문으로만 들었던 많은 것을 직접 듣기 위해 그에게로 나아왔다. 1.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존경심을 가지고 그를 따랐다는 것은 세례 요한에게 주어진 실로 큰 영광이었다. 대개 이와 같이 영광의 그림자조차 좇지 않는 자에게 실로 큰 영광이 주어진다. 또한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겸손하고 자기를 부정하며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는 존경을 받는다. 사람들은 이러한 분들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남모르는 가치와 존경을 부여한다.

2. 또한 이것은 세례 요한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몰려와 “천국으로 들어가려고”하기 시작하였다(눅 16:16). 복음이 밝아오는 아침의 “태에서” “젊음의 이슬이” 내리는 것을 보며(시 110:3) 이렇게 많은 고기가 모인 곳에 그물이 던져지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3. 이것은 이 때가 바로 어떤 위대하신 분이 나타날 시기였다는 증거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곧 나타나리라고 생각했다(눅 19:11). 그래서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에 나타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는 너무도 다른 생활을 하면서 전파하게 되자 그들은 그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서슴없이 말하였으며(눅 3:15), 이것이 그처럼 많은 군중으로 하여금 세례 요한의 주위로 구름처럼 몰려들게 하였던 것이다.

4. 요한에게서 어떤 유익을 얻으려는 자는 그의 책망을 달게 받으면서 광야로 “나아가야만”한다. 이와 같이 참된 말씀의 젖을 사모하는 자는 그들에게 가져다주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찾아낼 것이다. 또한 회개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하는 자는 이 세상의 번거로움을 떠나 조용한 곳으로 “나아가야만”한다.

5.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온 자들은 많았지만 참으로 그것을 고수한 자는 소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와 예루살렘 주변에서 그리스도께서 냉대를 받으셨음을 생각해 보라. 이와 같이 자진하여 듣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참된 신자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의하라. 호기심의 고상하고 다양성 있는 제스츄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좋은 설교를 듣기도 하며, 그 설교에 잠시 동안 도취되기도 하나 그 설교의 권능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겔 33:31, 32).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존경심을 가지고 그를 따랐다는 것은 세례 요한에게 주어진 실로 큰 영광이었다. 대개 이와 같이 영광의 그림자조차 좇지 않는 자에게 실로 큰 영광이 주어진다. 또한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겸손하고 자기를 부정하며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는 존경을 받는다. 사람들은 이러한 분들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남모르는 가치와 존경을 부여한다.또한 이것은 세례 요한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몰려와 “천국으로 들어가려고”하기 시작하였다(눅 16:16). 복음이 밝아오는 아침의 “태에서” “젊음의 이슬이” 내리는 것을 보며(시 110:3) 이렇게 많은 고기가 모인 곳에 그물이 던져지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이것은 이 때가 바로 어떤 위대하신 분이 나타날 시기였다는 증거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곧 나타나리라고 생각했다(눅 19:11). 그래서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에 나타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는 너무도 다른 생활을 하면서 전파하게 되자 그들은 그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서슴없이 말하였으며(눅 3:15), 이것이 그처럼 많은 군중으로 하여금 세례 요한의 주위로 구름처럼 몰려들게 하였던 것이다.요한에게서 어떤 유익을 얻으려는 자는 그의 책망을 달게 받으면서 광야로 “나아가야만”한다. 이와 같이 참된 말씀의 젖을 사모하는 자는 그들에게 가져다주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찾아낼 것이다. 또한 회개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하는 자는 이 세상의 번거로움을 떠나 조용한 곳으로 “나아가야만”한다.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온 자들은 많았지만 참으로 그것을 고수한 자는 소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와 예루살렘 주변에서 그리스도께서 냉대를 받으셨음을 생각해 보라. 이와 같이 자진하여 듣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참된 신자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의하라. 호기심의 고상하고 다양성 있는 제스츄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좋은 설교를 듣기도 하며, 그 설교에 잠시 동안 도취되기도 하나 그 설교의 권능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겔 33:31, 32). Ⅶ.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맞아들인 의식(6절). 그의 교훈을 받아들이고 그의 가르침에 복종하게 된 자들은 요단강에서 그에 의해 “세례를 받았으며,” 이로써 그들의 회개와 메시야의 왕국이 가까웠다는 신앙을 고백하였다. 1. 그들은 “죄를 고백”함으로써 자신들이 회개를 입증하였다. 그들은 아마 세례 요한에게는 일반적인 고백, 즉 그들은 죄인이며 죄에 오염되어 있고 그것을 정결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고백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들이 특별히 지은 죄를 조목별로 고백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을 “의롭게 하는 것”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으나, 요한은 그들에게 자신들을 “정죄할 것”과 전에 늘 습관적으로 했던 것처럼 일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 온 이스라엘이 모여 그들의 죄를 고백하던 일반적인 회개에 머물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도사린 악한 죄들을 하나 하나 열거하면서 고백할 것을 가르쳤다. 이와 같이 화평과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죄를 참회하는 고백이 요구되며 또한 슬픔과 수치로 겸손해져서 그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들만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의(義)의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요일 1:9).

2. 그들은 이제 “임박한 천국”의 은혜에 대해 세례로써 보증을 받았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불의에서부터 그들을 “깨끗게 하실” 것이라는 표로 물로써 그들을 씻었다.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관례에 의하면, 개종자들을 받아들일 때, 특히 “복음의 의로 난 개종자”들처럼 모세의 율법을 행할 필요가 없고 할례를 받지 않는 개종자들을 그들의 종교 안으로 받아들일 때는 세례를 행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는 지도자로 추대된 탁월한 종교심을 가진 사람들이 제자들을 받아 들일 때에 행한 세례와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의 세례에 대해 “그것이 하늘로부터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라고 질문하신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베푼 세례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세례 요한은 이 관례를 따랐으나 그의 세례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며, 그것이 “회개의 세례”(행 19:4)였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세례들과 구별된다. 그들은 “죄를 고백”함으로써 자신들이 회개를 입증하였다. 그들은 아마 세례 요한에게는 일반적인 고백, 즉 그들은 죄인이며 죄에 오염되어 있고 그것을 정결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고백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들이 특별히 지은 죄를 조목별로 고백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을 “의롭게 하는 것”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으나, 요한은 그들에게 자신들을 “정죄할 것”과 전에 늘 습관적으로 했던 것처럼 일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 온 이스라엘이 모여 그들의 죄를 고백하던 일반적인 회개에 머물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도사린 악한 죄들을 하나 하나 열거하면서 고백할 것을 가르쳤다. 이와 같이 화평과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죄를 참회하는 고백이 요구되며 또한 슬픔과 수치로 겸손해져서 그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들만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의(義)의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요일 1:9).그들은 이제 “임박한 천국”의 은혜에 대해 세례로써 보증을 받았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불의에서부터 그들을 “깨끗게 하실” 것이라는 표로 물로써 그들을 씻었다.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관례에 의하면, 개종자들을 받아들일 때, 특히 “복음의 의로 난 개종자”들처럼 모세의 율법을 행할 필요가 없고 할례를 받지 않는 개종자들을 그들의 종교 안으로 받아들일 때는 세례를 행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는 지도자로 추대된 탁월한 종교심을 가진 사람들이 제자들을 받아 들일 때에 행한 세례와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의 세례에 대해 “그것이 하늘로부터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라고 질문하신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베푼 세례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세례 요한은 이 관례를 따랐으나 그의 세례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며, 그것이 “회개의 세례”(행 19:4)였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세례들과 구별된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전 10:2). “의식적 예법”은 여러 가지의 “씻는 것이나 세례”에 있었다(히 9:10).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치료하는 율법, 즉 회개와 신앙의 법에 관계된다. 그는 요단강, 즉 이스라엘이 통과했고 나아만이 치유함을 받았던 그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아마도 처음부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라 후일에 그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요단강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그는 또한 세례를 베풀어줌으로써 그들이 종사하던 직업에 따라 경건한 생활을 하도록 강력히 촉구하였다. 죄의 고백은 언제나 다시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은혜의 힘에 의한 거룩한 결심이 수반되어야 한다.

3:7 세례요한의 설교 (마태복음 3:7-12) 세례 요한이 전파한 가르침은 “임박한 천국”을 생각하고 외쳤던 회개의 가르침이었다. 이제 여기에는 그 가르침의 적용이 나타나 있다. 설교의 생명이 실제 생활의 적용에 있듯이, 세례 요한의 설교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이 설교를 적용한 대상. 적용한 대상은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7절).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나아오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생각과 입장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들은 그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있었던 세 종파(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중에서 두 종파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 중 에센파에 대해서는 복음서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잘 알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이 은둔 생활을 하였고 공적인 일에 전혀 종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설교를 적용한 대상. 적용한 대상은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7절).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나아오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생각과 입장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들은 그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있었던 세 종파(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중에서 두 종파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 중 에센파에 대해서는 복음서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잘 알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이 은둔 생활을 하였고 공적인 일에 전혀 종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의식과 교회의 세력, 장로들의 유전 등에 열심있던 자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이들과는 정반대의 극단으로 흘러서 영들이나 내새의 존재를 부인했던 자연신론자들과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이 세례 베푸는데 온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실상은 호기심으로 들어보려고 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그들 중 몇 사람은 복종하여 세례를 받았을 것이나, 그들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눅 7:29, 30)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의식(儀式)에 나아오지만 그 의식의 참된 힘을 맛보지 못한다.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이들에게 모든 진실 됨으로 말하고 있다. 또한 그가 말했던 것을 그는 또한 모든 무리에게 말하였다(눅 3:7).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세례 요한이 말한 것과 관계되었기 때문이다. 2. 그 적용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평범하면서도 급소를 찌르는 것이며,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는 단지 “그들 앞에서”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부딛치는 설교였다. 비록 그는 공식적인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사사로운 교육을 받았으나 대중 앞에 나타났을 때는 부끄러워하거나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그 적용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평범하면서도 급소를 찌르는 것이며,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는 단지 “그들 앞에서”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부딛치는 설교였다. 비록 그는 공식적인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사사로운 교육을 받았으나 대중 앞에 나타났을 때는 부끄러워하거나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Ⅰ. 여기에는 먼저 확신과 경각의 말씀이 있다. 그는 처음부터 거칠게 말을 했으며, 그들이 평소에 듣고 있었던 랍비라는 호칭도 쓰지 않았고 칭찬도 하지 않았다. 1. 그가 그들을 부르는 데 사용한 호칭은 “독사의 자식들아!”였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을 같은 칭호로 불렀다(마 12:34; 23:33). 그들은 “독사”와 같은 자들이었다. 겉모양은 그럴 듯하나 독을 품었으며, 모든 선한 것들에 대해 악의와 적의가 가득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 즉 그들과 똑같은 마음씨를 가졌던 자들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들이 그 뱀의 후손(창 3:15), 즉 그들의 조상 마귀의 후손(요 8:44)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모두가 한 가지로 “독사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간에 원수지간이었으나 악한 일에는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악한 세대는 “독사의 세대”이며, 그들은 그렇게 불리워지는 것이 마땅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마땅히 죄인들에게 그들의 참된 본성을 담대하게 알려 주어야 한다.

2. 세례 요한이 그들에게 준 “경고”는 “누가 너희를 일러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하더냐?”였다. 이것은 그들이 임박한 진노의 위험에 처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들의 처지는 거의 절망적이었고, 그들의 마음은 죄로 강퍅해졌기 때문에(즉 바리새인은 그들의 믿음을 자랑함으로, 또한 사두개인들은 믿음을 대적함으로) 그들 가운데서 희망적인 일이 생겨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것임을 의미한다. 즉 “무엇 때문에 또는 너희들이 무엇을 두려워하여 천국에 대해 물으려 하는가?” 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필 수 있다.

(1) “임박한 진노”가 있다. 즉 지금 현재 쏟아지는 진노 이외에 후일을 위해 쌓아둔 미래에 당할 진노가 있음을 말한다.

(2) 이 진노를 피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가장 큰 관심이다.

(3) 우리에게 이러한 진노를 피하도록 경고하신 것은 놀라운 자비이다. “누가 우리에게 경고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가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으로, 교역자들에 의해서, 또한 양심으로 경고하신다.

(4) 이러한 경고들은 때때로 안심하고 있는 자와 그들 자신에 대해 선하다고 생각하는 강팍한 자들에게는 큰 놀라움을 준다. 그가 그들을 부르는 데 사용한 호칭은 “독사의 자식들아!”였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을 같은 칭호로 불렀다(마 12:34; 23:33). 그들은 “독사”와 같은 자들이었다. 겉모양은 그럴 듯하나 독을 품었으며, 모든 선한 것들에 대해 악의와 적의가 가득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 즉 그들과 똑같은 마음씨를 가졌던 자들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들이 그 뱀의 후손(창 3:15), 즉 그들의 조상 마귀의 후손(요 8:44)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모두가 한 가지로 “독사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간에 원수지간이었으나 악한 일에는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악한 세대는 “독사의 세대”이며, 그들은 그렇게 불리워지는 것이 마땅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마땅히 죄인들에게 그들의 참된 본성을 담대하게 알려 주어야 한다.세례 요한이 그들에게 준 “경고”는 “누가 너희를 일러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하더냐?”였다. 이것은 그들이 임박한 진노의 위험에 처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들의 처지는 거의 절망적이었고, 그들의 마음은 죄로 강퍅해졌기 때문에(즉 바리새인은 그들의 믿음을 자랑함으로, 또한 사두개인들은 믿음을 대적함으로) 그들 가운데서 희망적인 일이 생겨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것임을 의미한다. 즉 “무엇 때문에 또는 너희들이 무엇을 두려워하여 천국에 대해 물으려 하는가?” 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필 수 있다.”임박한 진노”가 있다. 즉 지금 현재 쏟아지는 진노 이외에 후일을 위해 쌓아둔 미래에 당할 진노가 있음을 말한다.이 진노를 피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가장 큰 관심이다.우리에게 이러한 진노를 피하도록 경고하신 것은 놀라운 자비이다. “누가 우리에게 경고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가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으로, 교역자들에 의해서, 또한 양심으로 경고하신다.이러한 경고들은 때때로 안심하고 있는 자와 그들 자신에 대해 선하다고 생각하는 강팍한 자들에게는 큰 놀라움을 준다. Ⅱ. 여기에는 “권고와 지시”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그러므로 너희는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는 경고를 받았으니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경건한 생활을 하기를 힘쓰라는 것,” 또는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를 공언하고 회개의 세례와 가르침에 참예하였으니 너희가 진정으로 참회한 증거를 나타내 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는 마치 뿌리와 같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모든 죄를 버리고 선한 것을 붙잡으며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개혁함으로써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우리는 공연히 마음속에 회개했다고 꾸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곧 “회개에 합당한 열매”(axionj thj metanoiaj)들이다. 죄를 뉘우친다고 하면서도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 자는 회개한 자라는 명칭이나 회개한 자가 가지는 특권을 소유하기에 합당치 않은 자들이다. 세례 받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회개를 공언하는 자들은 모름지기 회개한 자로서의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하며, 회개한 죄인으로 합당치 못한 어떤 일도 행해서는 안 된다. 회개한 자로서 합당한 일이란 겸손하고 눈이 높지 않은 일이며, 가장 적은 자비에도 감사할 줄 알며, 극심한 고통도 참으며, 죄는 그 모양이라도 경계하며, 죄로 접근하는 것도 삼가며, 해야할 모든 의무에 있어서 넘치게 행하며, 남을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 자비로운 것 등이다. Ⅲ. 여기에는 또한 그들의 외적인 특권을 믿고 회개에의 부르심을 저버리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9절).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 육적인 마음이 우리에게 속삭여 교역자들이 힘써 만나려 하고, 기대해야 할 하나님 말씀의 확실하고 힘있는 권능을 밀쳐놓게 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헛된 생각들이며 예레미야는 이럴 생각을 품고 있는 자들에 대해 “너희는 마음을 씻으라”고 명령하고 있다(렘 4:14). Mh, doxhte-“하지 말라, ∼인체 하지 말라, 즉 속으로 ∼라 하지 말라, 이것이 너희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러한 교만을 품지 말라”는 뜻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여 스스로 기뻐하지 말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한 생각을 품고 편안히 졸거나 헛된 기대를 꿈꾸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히 입 밖으로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하는 말을 주목해 보시며, 우리 영혼의 그릇된 안심과 기대, 그리고 우리 영혼이 스스로를 속이며 그 정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 거짓을 모두 잘 알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망하게 하는 거짓말을 “오른편 손 안에” 감추며 그것을 고백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여 “혀 아래로 굴러 버리고”만다. 그들은 마귀의 계획을 지킴으로써 마귀를 이롭게 한다. 이제 세례 요한이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려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이 자랑하는 구실은,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며, 우리는 이방인들처럼 죄인들이 아니다. 그들이 마땅히 회개해야 한다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개가 택한 백성이요. 거룩한 민족인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요, 우리에게 속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씀은,

(1)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도 없고, 회개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아브라함에 대한 관계와 그와 맺어진 계약에 관계된 것이 너를 거룩하다고 일컬어 너희 마음과 생활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2)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을지라도 무슨 큰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심판하는 일에서 제외되거나 임박한 진노를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또한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의 회개치 않음을 그대로 묵인할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비록 선하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지닌 선한 관계들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설령 경건한 조상들의 피를 이어 받고 종교적인 교육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잘 경외하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우리에게 충고해 주고 위해 기도해 주는 훌륭한 친구들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회개의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인가?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와 더불어 맺은 언약의 특권에 참예할 자격이 있다. 즉 우리는 그의 자손이기 때문에 “교회의 아들들, 즉 여호와의 전”(렘 7:4)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대개의 많은 사람들이 현세적인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영광과 특권에 스스로 지나친 신뢰를 둠으로써 천국에는 못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이다.

2. 이러한 구실은 얼마나 어리석고 근거 없는 것이었는가!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자기들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소유한 백성이며, 따라서 그들이 만일 멸절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는 교회 때문에 곤란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이러한 자만심이 실로 어리석은 것임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즉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너희가 속으로 무엇이라고 말하든지간에)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9절)고 외쳤다. 그는 이제 “통과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다바라 근처의 요단강(요 1:28)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는데, 이곳은 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통과한”일이 있으며 여호수아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각 지파에게서 돌 하나씩을 취하여 세운 열 두 돌이 있는 곳이었다(수 4:20). 그것은 하나님이 일으킬 수 있었던 그 돌들이 단지 묘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을 지칭했던 것 같다. 또한 그는 아마도 이사야 51장 1절에 있는 아브라함이 너희를 떠난 반석”이라는 구절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삭을 이와 같은 반석에서 떠내신 하나님은 만일 필요하다면 그 이상의 일도 다시 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 “불가능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당시 그곳에 있던 “이방인 군인들”을 가리키면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 자신을 위해 교회를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축복을 넘겨 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추측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첫 번째 부모가 범죄 했을 때 그들을 멸망시키고 돌로 또 다른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내실 수도 있으셨다. 또한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즉, “너희와 같이 강퍅하고 냉담하고 쓸모 없는 죄인들보다는 오히려 이 돌들이 더 훌륭하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현 세대가 어떻든 간에 하나님은 결코 세상 교회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시온에 있는 죄인들의 확신에는 낙심을 주지만 시온의 아들들의 소망에는 격려가 된다. 만일 유대인들이 꺾이어 넘어진다면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을 것이다(마 21:43; 롬 11:12). 그들이 자랑하는 구실은,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며, 우리는 이방인들처럼 죄인들이 아니다. 그들이 마땅히 회개해야 한다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개가 택한 백성이요. 거룩한 민족인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요, 우리에게 속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씀은,”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도 없고, 회개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아브라함에 대한 관계와 그와 맺어진 계약에 관계된 것이 너를 거룩하다고 일컬어 너희 마음과 생활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을지라도 무슨 큰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심판하는 일에서 제외되거나 임박한 진노를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또한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의 회개치 않음을 그대로 묵인할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비록 선하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지닌 선한 관계들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설령 경건한 조상들의 피를 이어 받고 종교적인 교육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잘 경외하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우리에게 충고해 주고 위해 기도해 주는 훌륭한 친구들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회개의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인가?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와 더불어 맺은 언약의 특권에 참예할 자격이 있다. 즉 우리는 그의 자손이기 때문에 “교회의 아들들, 즉 여호와의 전”(렘 7:4)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대개의 많은 사람들이 현세적인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영광과 특권에 스스로 지나친 신뢰를 둠으로써 천국에는 못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이다.이러한 구실은 얼마나 어리석고 근거 없는 것이었는가!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자기들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소유한 백성이며, 따라서 그들이 만일 멸절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는 교회 때문에 곤란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이러한 자만심이 실로 어리석은 것임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즉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너희가 속으로 무엇이라고 말하든지간에)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9절)고 외쳤다. 그는 이제 “통과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다바라 근처의 요단강(요 1:28)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는데, 이곳은 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통과한”일이 있으며 여호수아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각 지파에게서 돌 하나씩을 취하여 세운 열 두 돌이 있는 곳이었다(수 4:20). 그것은 하나님이 일으킬 수 있었던 그 돌들이 단지 묘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을 지칭했던 것 같다. 또한 그는 아마도 이사야 51장 1절에 있는 아브라함이 너희를 떠난 반석”이라는 구절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삭을 이와 같은 반석에서 떠내신 하나님은 만일 필요하다면 그 이상의 일도 다시 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 “불가능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당시 그곳에 있던 “이방인 군인들”을 가리키면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 자신을 위해 교회를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축복을 넘겨 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추측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첫 번째 부모가 범죄 했을 때 그들을 멸망시키고 돌로 또 다른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내실 수도 있으셨다. 또한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즉, “너희와 같이 강퍅하고 냉담하고 쓸모 없는 죄인들보다는 오히려 이 돌들이 더 훌륭하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현 세대가 어떻든 간에 하나님은 결코 세상 교회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시온에 있는 죄인들의 확신에는 낙심을 주지만 시온의 아들들의 소망에는 격려가 된다. 만일 유대인들이 꺾이어 넘어진다면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을 것이다(마 21:43; 롬 11:12). Ⅳ. 여기에는 경솔하고 안일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또한 시대의 표적을 모르고 그들에게 닥칠 재난의 때에 무관심한 유대인들에게 두려움의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있다(10절). “너희들의 주위를 살펴 보라.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려라!” 1. “너희의 재난이 얼마나 엄격하고 급박한가? 도끼가 너희 앞에 옮겨져 이미 나무의 뿌리에 놓였으며, 또한 선한 행실을 지속해야할 때가 이르렀다. 지금이야말로 너희들이 멸망할 시기가 바야흐로 다가왔으며, 즉각적이고 진지한 회개 없이는 도저히 이를 피할 수 없다. 이제 하나님은 이전보다 더 빨리 너희에게 심판을 행하실 것이며 이 심판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방법을 많이 허용하신 곳에는 시간을 적게 허용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속히 오리라.” 이제 그들은 마지막 시련을 당해야할 위기에 놓여 있다. 기회는 바로 지금이며 이후에는 결코 없다.

2. “만일 너희가 이것을 고치지 않는다면 너희의 운명은 얼마나 쓰라리고 비참할 것인가!” 이제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져 있다고 선포된 것은 하나님은 그 선포에 있어서 진지하심을 보여 주며, 또한 “모든 나무마다” 그 타고 난 재능이나 영광에 있어서 아무리 “높다고”할지라도, 외적인 직업이나 행위가 아무리 “푸르다”고 할지라도 회개에 합당한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어버림”을 당할 뿐만 아니라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내어버림”을 당하며, 결국 쓸모 없는 나무들은 가장 적합한 장소인 하나님의 “진노의 불”속에 던지움을 받을 것이다. 이 밖에 그들이 소용될 곳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들은 땔감으로 적합하다. 이것은 아마도 로마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한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대개의 심판이 그러했듯이 싹이 돋아날 뿌리는 남겨둔 채 가지를 자르든지 나무둥지를 베어내는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을 여지없이 멸망시키는 전체적이고 최후적이며 회복시킬 수 없는 완전 파멸의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끝장을 내실 것이므로 진노는 극도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너희의 재난이 얼마나 엄격하고 급박한가? 도끼가 너희 앞에 옮겨져 이미 나무의 뿌리에 놓였으며, 또한 선한 행실을 지속해야할 때가 이르렀다. 지금이야말로 너희들이 멸망할 시기가 바야흐로 다가왔으며, 즉각적이고 진지한 회개 없이는 도저히 이를 피할 수 없다. 이제 하나님은 이전보다 더 빨리 너희에게 심판을 행하실 것이며 이 심판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방법을 많이 허용하신 곳에는 시간을 적게 허용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속히 오리라.” 이제 그들은 마지막 시련을 당해야할 위기에 놓여 있다. 기회는 바로 지금이며 이후에는 결코 없다.”만일 너희가 이것을 고치지 않는다면 너희의 운명은 얼마나 쓰라리고 비참할 것인가!” 이제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져 있다고 선포된 것은 하나님은 그 선포에 있어서 진지하심을 보여 주며, 또한 “모든 나무마다” 그 타고 난 재능이나 영광에 있어서 아무리 “높다고”할지라도, 외적인 직업이나 행위가 아무리 “푸르다”고 할지라도 회개에 합당한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어버림”을 당할 뿐만 아니라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내어버림”을 당하며, 결국 쓸모 없는 나무들은 가장 적합한 장소인 하나님의 “진노의 불”속에 던지움을 받을 것이다. 이 밖에 그들이 소용될 곳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들은 땔감으로 적합하다. 이것은 아마도 로마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한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대개의 심판이 그러했듯이 싹이 돋아날 뿌리는 남겨둔 채 가지를 자르든지 나무둥지를 베어내는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을 여지없이 멸망시키는 전체적이고 최후적이며 회복시킬 수 없는 완전 파멸의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끝장을 내실 것이므로 진노는 극도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Ⅴ. 요한의 모든 설교의 중심이 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전파해야만 한다. 1. 여기에는 세례 요한보다 더 높은 그리스도의 위엄과 탁월성이 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하여 어떻게 자신을 비천하게 말하였는가를 살펴보자(11절).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성례의 효력은 그것을 베푸는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들은 단지 표시로 적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특권이다(고전 3:6; 왕하 4:31).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왔기 때문에 큰 권능을 가지기는 했지만 그리스도는 더 큰 것을 가지셨다. 주님이 보실 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마 11:11) 요한은 실로 위대하였지만 그는 자신을 “그의 신들메를 들기도 감당치 못할” 무가치하고 비천한 자로 여기고 있다.

(1)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가 그에 비하면 얼마나 능력이 많으신 분인가를 잘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보다 능력이 더 많으시며,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그들을 “위해,” 그들에 “의해”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실한 교역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그의 능력은 연약함 가운데서 그 효력을 발생한다.

(2) 세례 요한은 그가 그리스도에 비하면 그의 신들메를 들기도 감당치 못할 만큼 비천한 줄을 잘 알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영예를 주신 자는 매우 겸손하고 그 자신이 스스로를 볼 때에 비천하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높여지기 위하여 기꺼이 그 자신을 낮추며, 그리스도만이 전부가 되기 위하여 그 자신 아무 것도 아닌 자,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2. 여기에는 그들이 지금 급박하게 기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출현의 목적과 의도가 있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보냄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예언되었을 때(말 3:1, 2), 이에 곧 뒤따라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며,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을 것이라”(3절)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엘리야가 온 이후에는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올 것이며,” 세례 요한은 여기에서 이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1)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은 “그의 능력 있는 은혜의 사역에 의해” 구별을 짓기 위함이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즉 너희 중 어떤 사람에게)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1] “불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리스도의 특권이다.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베푸신 성령의 특별 은사에서 이 일을 행하셨으며, 그 자신이 요한의 이 말들을 이 일에 적용시키고 있다(행 1:5). 그는 요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을 은혜와 위로에서 이 일을 행하시고 있다(눅 11:13; 요 7:38, 39; 행 11:16 을 보라).

[2] 성령으로 세례 받는 자들은 “불로” 세례를 받는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일곱 등불”로 나타난다(계 4:5). 성령은 조명의 역할을 하며 모든 것을 밝게 하며 덥게 하며 태운다. 즉 성령은 “태우는 영”으로서 모든 부패와 그 불순물을 깨끗이 태워버리며, 이렇게 함으로써 영혼을 그 자체와 같이 거룩하고 정결하게 만든다. 또한 불은 하늘을 향하여 탄다. 또한 성령의 불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삼커버린다. 그리스도는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씀하신다(눅 12:49).

(2)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은 “그의 심판의 마지막 결정에 의해” 구별을 짓기 위함이다(12절). “그는 손에 키를 들고 계시다.” 참 빛에 의해 모든 것을 통찰하시는 아버지의 영원한 지혜자로서의 그의 식별하는 능력과, 또한 모든 심판이 위탁된 인격자로서의 그의 식별하는 권리는 “그의 손 안에 있는 키”이다(렘 15:7). 이제 그는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 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 보이는 가시적(可視的) 교회는 그리스도의 마당이다. “너 나의 타작한 것이여, 나의 마당의 곡식이여”(사 21:10). 교회의 모형인 성전은 타작 마당 위에 세워졌다.

[2] 이 마당에는 밀과 겨가 섞여 있다. 참 신자는 실속 있고 유익하고 가치 있는 밀과 같으며, 위선자는 가볍고 속이 비고 쓸모 없고 무가치하고 바람에 날러가 버릴 겨와 같다. 밀고 겨는 현재 똑같은 외적 신앙 고백과 똑같은 가시적 집단 속에 함께 어울려 섞여 있다.

[3] 타작 마당이 정하게 되어 밀과 겨가 구별되는 날이 온다. 이러한 종류의 어떤 일이 종종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승들을 바벨론에서 부르시는 때이다(계 18:4). 그러나 대규모로 키질하고 구별하는 날, 즉 교훈과 공력(고전 3:13), 사람들(마 25:32, 33)에 대해 판결하는 때는 마지막 심판날이다. 그때에 성도와 죄인은 영원히 구분될 것이다.

[4] 하늘은 창고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곳으로 그의 모든 밀을 즉시 모아들일 것이며 그 중의 한 알도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것들을 잘 익은 곡식들을 거둬들이는 것처럼 모을 것이다. 죽음의 낫은 그들을 자신의 백성에게로 모이게 하는 데 사용된다. 성도들은 천국에서 함께 소집되며, 결코 흩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안전하며 더 이상 노출되지 않는다. 외부적으로는 타락한 이웃들과 분리되며, 내부적으로는 타락한 감정들과 격리된다. 그들에게는 결코 겨가 없다. 그들은 “곳간”(마 13:30)과 “창고”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그들은 철저히 정결하게 된다.

[5]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로서, 겨를 태울 것이며, 정녕 위선자와 불신자의 운명(몫)과 형벌, 영원한 파멸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삶과 죽음, 선과 악이 주어져 있다. 우리는 지금 “밭”에 있지만 그때에는 “마당”에 있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세례 요한보다 더 높은 그리스도의 위엄과 탁월성이 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하여 어떻게 자신을 비천하게 말하였는가를 살펴보자(11절).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성례의 효력은 그것을 베푸는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들은 단지 표시로 적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특권이다(고전 3:6; 왕하 4:31).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왔기 때문에 큰 권능을 가지기는 했지만 그리스도는 더 큰 것을 가지셨다. 주님이 보실 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마 11:11) 요한은 실로 위대하였지만 그는 자신을 “그의 신들메를 들기도 감당치 못할” 무가치하고 비천한 자로 여기고 있다.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가 그에 비하면 얼마나 능력이 많으신 분인가를 잘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보다 능력이 더 많으시며,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그들을 “위해,” 그들에 “의해”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실한 교역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그의 능력은 연약함 가운데서 그 효력을 발생한다.세례 요한은 그가 그리스도에 비하면 그의 신들메를 들기도 감당치 못할 만큼 비천한 줄을 잘 알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영예를 주신 자는 매우 겸손하고 그 자신이 스스로를 볼 때에 비천하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높여지기 위하여 기꺼이 그 자신을 낮추며, 그리스도만이 전부가 되기 위하여 그 자신 아무 것도 아닌 자,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여기에는 그들이 지금 급박하게 기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출현의 목적과 의도가 있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보냄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예언되었을 때(말 3:1, 2), 이에 곧 뒤따라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며,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을 것이라”(3절)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엘리야가 온 이후에는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올 것이며,” 세례 요한은 여기에서 이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은 “그의 능력 있는 은혜의 사역에 의해” 구별을 짓기 위함이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즉 너희 중 어떤 사람에게)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불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리스도의 특권이다.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베푸신 성령의 특별 은사에서 이 일을 행하셨으며, 그 자신이 요한의 이 말들을 이 일에 적용시키고 있다(행 1:5). 그는 요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을 은혜와 위로에서 이 일을 행하시고 있다(눅 11:13; 요 7:38, 39; 행 11:16 을 보라).성령으로 세례 받는 자들은 “불로” 세례를 받는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일곱 등불”로 나타난다(계 4:5). 성령은 조명의 역할을 하며 모든 것을 밝게 하며 덥게 하며 태운다. 즉 성령은 “태우는 영”으로서 모든 부패와 그 불순물을 깨끗이 태워버리며, 이렇게 함으로써 영혼을 그 자체와 같이 거룩하고 정결하게 만든다. 또한 불은 하늘을 향하여 탄다. 또한 성령의 불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삼커버린다. 그리스도는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씀하신다(눅 12:49).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은 “그의 심판의 마지막 결정에 의해” 구별을 짓기 위함이다(12절). “그는 손에 키를 들고 계시다.” 참 빛에 의해 모든 것을 통찰하시는 아버지의 영원한 지혜자로서의 그의 식별하는 능력과, 또한 모든 심판이 위탁된 인격자로서의 그의 식별하는 권리는 “그의 손 안에 있는 키”이다(렘 15:7). 이제 그는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 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보이는 가시적(可視的) 교회는 그리스도의 마당이다. “너 나의 타작한 것이여, 나의 마당의 곡식이여”(사 21:10). 교회의 모형인 성전은 타작 마당 위에 세워졌다.이 마당에는 밀과 겨가 섞여 있다. 참 신자는 실속 있고 유익하고 가치 있는 밀과 같으며, 위선자는 가볍고 속이 비고 쓸모 없고 무가치하고 바람에 날러가 버릴 겨와 같다. 밀고 겨는 현재 똑같은 외적 신앙 고백과 똑같은 가시적 집단 속에 함께 어울려 섞여 있다.타작 마당이 정하게 되어 밀과 겨가 구별되는 날이 온다. 이러한 종류의 어떤 일이 종종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승들을 바벨론에서 부르시는 때이다(계 18:4). 그러나 대규모로 키질하고 구별하는 날, 즉 교훈과 공력(고전 3:13), 사람들(마 25:32, 33)에 대해 판결하는 때는 마지막 심판날이다. 그때에 성도와 죄인은 영원히 구분될 것이다.하늘은 창고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곳으로 그의 모든 밀을 즉시 모아들일 것이며 그 중의 한 알도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것들을 잘 익은 곡식들을 거둬들이는 것처럼 모을 것이다. 죽음의 낫은 그들을 자신의 백성에게로 모이게 하는 데 사용된다. 성도들은 천국에서 함께 소집되며, 결코 흩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안전하며 더 이상 노출되지 않는다. 외부적으로는 타락한 이웃들과 분리되며, 내부적으로는 타락한 감정들과 격리된다. 그들에게는 결코 겨가 없다. 그들은 “곳간”(마 13:30)과 “창고”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그들은 철저히 정결하게 된다.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로서, 겨를 태울 것이며, 정녕 위선자와 불신자의 운명(몫)과 형벌, 영원한 파멸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삶과 죽음, 선과 악이 주어져 있다. 우리는 지금 “밭”에 있지만 그때에는 “마당”에 있게 될 것이다.

3:13 예수께서 세례 받으심 (마태복음 3:13-17) 우리 주 예수님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거의 삼십세가 된 지금까지 갈릴리에 은거하셨다.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지리하고 어두운 밤이 지난 후, 보라! “의의 태양”은 저렇게 영광 중에 떠오르고 있지 않는가! 바야흐로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의 예언적인 직무를 수행하실 “적절한 때가 이르렀다.” 그는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택하지 않고(그는 다른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세 번에 걸쳐 이곳에 왔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세례 요한의 “세례를 주었던” 곳을 택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자들”이 그에게 호소하였기 때문이며, 그들만이 그를 환영하게 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우리 주님보다 6개월 먼저 출생하였고, 그가 전파하고 세례를 베풀었던 것도 그리스도가 출현하시기 약 6개월 전이었다고 추측된다. 그는 “요단강 인근 지방”에서 그의 길을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이를 위해 최근 6개월 동안 행한 일을 이전 몇 해 동안 행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리리로부터 “요단강”으로 오신 것은 우리가 의식에서 하나님께 접근할 기회를 얻기 위하여 어떠한 수고나 고통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보다 밀접하게 갖기 위하여 기꺼이 그에게로 나아가야할 것이다. 발견하려는 자는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신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1.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권유를 받고 가까스로 이를 허락하였다(14, 15절).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신 것은 그의 위대하신 겸손의 한 실례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일찍이 복음 전파를 시작하시자마자 겸손을 가르치셨으며, 또한 이를 그 자신이 모본을 보이심으로써 가르치셨고, 모든 사람들 특히 젊은 사역자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리스도는 최고의 영광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그의 첫 단계는 이와 같이 그 자신을 낮추시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무릇 높이 오르려고 하는 자는 낮아지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영예의 이전은 겸손이다”(Before honour is humility).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에게 대한 무상의 존경이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는 것을 주목하여 보고 그에게 행했던 봉사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무릇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세례 베풀기를 말리며 거절한 사실(14절).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발을 씻으려 했을 때 한사코 이를 말렸던 베드로와 같이(요 13:6, 8) “이를 말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우신 겸손은 믿음이 강한 신자라 할지라도 단번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놀라운 것이며, 또한 너무 깊고 신비스러우므로 그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즉시로 그것들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흑암의 이성”에 의해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려 반대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겸손하게 이 영예는 자신이 받기에 너무도 큰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의 어머니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에게 행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겸손을 나타내고 있다. ”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눅 1:43). 요한은 이제 큰 명성을 얻었고 널리 존경을 받았지만 이 얼마나 겸손한가! 하나님께서 더욱 존귀히 여기는 자는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영혼이 계속적으로 낮은 데 처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유의하라.

(1) 요한은 그가 마땅히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내가 당신에게 불과 같은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과 같은 성령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세례였기 때문이다(11절).

[1]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지만”(눅 10:15),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많이 소유한 자라고 할지라도 여기에서와 같이 불완전한 상태라면 더욱 더 가져야 하며 또한 더욱 많은 것을 그리스도에게 요구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2] 요한은 그가 “여자에게서 난 자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세례를 받아야할 필요가 있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으므로 그는 다른 아담의 후손들과 같이 부패하였으며 또한 그 자신도 깨끗케 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청결한 영혼은 그들 자신에게 잔존하는 불결한 죄의 더러움을 가장 민감하게 깨닫고 있으며, 또한 매우 진지하게 영적인 씻음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3]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었으니, 그리스도는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을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하지 못한 것이나 우리를 위해 하셔야만 하는 분이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의 지고성과 거룩성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며, 또한 그들이 더욱 그러한 사람일수록 더욱 구분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4]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이 대화는 요한을 매우 존경하고 그를 메시야로 추대하려는 많은 무리들 앞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요한은 아무 스스럼없이 공개적으로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로부터 버림을 받아 파멸 상태에 놓여 있다고 고백한다고 해서 그들의 위대성에 금이 가거나 경시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5]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구자였지만,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받아야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시간적으로 그리스도보다 앞선 자라고 할지라도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서 받아야 하며, 그를 주시하고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6]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세례를 베푸는 교역자들은 그들이 자신들에 대해 전파하고 있는지를 특별히 유의해야 하며, 또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네 자신을 조심하라.” “네 자신을 구원하라”(딤전 4:16).

(2)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가 그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죄인들로부터 구별된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죄인에게(by), 죄인으로(as), 죄인들 가운데서 (among) 세례를 받으려고 오실 수 있는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이 구절에 대한 예수님의 취소(1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그리스도는 요한의 겸손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지만, 그의 사양을 그대로 수락하신 것은 아니다. 그는 그 일을 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것의 이유를 제시하지 못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방법을 취할 것임은 온당한 사실이다.

(1) 그리스도는 어떻게 그것을 끝까지 주장하셨는가? 그것은 “이제” 행해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요한이 그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오히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려고” 하였다. Afejarti – “이제 허락하라.” 즉 “이제 그것을 받도록 하라.”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매사는 알맞은 때에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지금”인가?

[1] 그리스도는 “이제”겸손의 상태에 있다. 그는 자신을 비웠으며, 아무런 명성을 취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사람의 형상”을 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따라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셨다. 그는 완전히 순수하였지만 씻음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세례를 받으려 하셨으며, 따라서 “죄를 알지도 못하셨지만”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신”것이다.

[2] 요한의 세례는 지금 명성을 얻고 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그의 역사를 행하고 계시다. 그것이 현재 하늘의 섭리이며, 따라서 예수님은 이제 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그의 성령 세례는 오랜 시간이 경과한 이후에(행 1:5) 베풀어질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이제” 그 절정에 이르렀다.

[3] 그것은 “지금 행해져야만”한다. 왜냐하면 지금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이며, 그 일을 하시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요 1:31-34).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에 현현되어야 하며, 가장 겸손하고 겸비했던 그 자신의 행동에서 하늘로부터 기사에 의해 두드러지게 되셔야만 한다.

(2) 이에 대해 그가 제시한 이유는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이다.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에는 타당성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은혜스러운 것이었다(히 2:10; 7:26). 우리는 해야 할 것만 아니라 합당한 것을 행해야 하며, 또한 반드시 해야 할 것만이 아니라 “사랑스럽고 좋은 평판이 있는” 것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2] 우리 주님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자신에게 매우 합당한 것으로 여기셨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휘트비 박사가 설명한 것과 같이) 모든 신적 제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모든 법칙을 준행하려는 마음의 준비를 나타낸다. “그가 이와 같이 하여” 회개의 세례에 의해 그의 길을 준비시키려고 요한을 보내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롭다 하고 그의 지식을 인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법칙과 마찬가지로 모범에 의해 선한 모든 것을 후원하고 격려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스도는 종종 요한과 그의 세례를 훌륭하게 언급하였으며, 그는 더 나은 일을 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맨 처음 행하시고,” “그 다음 가르치시기” 시작하셨다. 그의 사역자들도 똑같은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하여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씻음에 대한 “의식적인 율법의 의를 성취하셨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세례에 대한 복음적 의식을 그의 교회에 천거하셨으며, 그것을 존귀케 하셨고, 그것에 어떤 효능을 두시려했는가를 보여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물 씻음에 복종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물 씻음을 반대하신 것은 그것이 인간이 발명하고 고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것을 쫓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권유를 받고 가까스로 이를 허락하였다(14, 15절).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신 것은 그의 위대하신 겸손의 한 실례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일찍이 복음 전파를 시작하시자마자 겸손을 가르치셨으며, 또한 이를 그 자신이 모본을 보이심으로써 가르치셨고, 모든 사람들 특히 젊은 사역자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리스도는 최고의 영광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그의 첫 단계는 이와 같이 그 자신을 낮추시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무릇 높이 오르려고 하는 자는 낮아지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영예의 이전은 겸손이다”(Before honour is humility).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에게 대한 무상의 존경이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는 것을 주목하여 보고 그에게 행했던 봉사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무릇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요한이 그리스도에게 세례 베풀기를 말리며 거절한 사실(14절).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발을 씻으려 했을 때 한사코 이를 말렸던 베드로와 같이(요 13:6, 8) “이를 말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우신 겸손은 믿음이 강한 신자라 할지라도 단번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놀라운 것이며, 또한 너무 깊고 신비스러우므로 그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즉시로 그것들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흑암의 이성”에 의해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려 반대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겸손하게 이 영예는 자신이 받기에 너무도 큰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의 어머니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에게 행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겸손을 나타내고 있다. ”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눅 1:43). 요한은 이제 큰 명성을 얻었고 널리 존경을 받았지만 이 얼마나 겸손한가! 하나님께서 더욱 존귀히 여기는 자는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영혼이 계속적으로 낮은 데 처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유의하라.요한은 그가 마땅히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내가 당신에게 불과 같은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과 같은 성령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세례였기 때문이다(11절).”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지만”(눅 10:15),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많이 소유한 자라고 할지라도 여기에서와 같이 불완전한 상태라면 더욱 더 가져야 하며 또한 더욱 많은 것을 그리스도에게 요구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요한은 그가 “여자에게서 난 자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세례를 받아야할 필요가 있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으므로 그는 다른 아담의 후손들과 같이 부패하였으며 또한 그 자신도 깨끗케 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청결한 영혼은 그들 자신에게 잔존하는 불결한 죄의 더러움을 가장 민감하게 깨닫고 있으며, 또한 매우 진지하게 영적인 씻음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었으니, 그리스도는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을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하지 못한 것이나 우리를 위해 하셔야만 하는 분이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의 지고성과 거룩성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며, 또한 그들이 더욱 그러한 사람일수록 더욱 구분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이 대화는 요한을 매우 존경하고 그를 메시야로 추대하려는 많은 무리들 앞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요한은 아무 스스럼없이 공개적으로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로부터 버림을 받아 파멸 상태에 놓여 있다고 고백한다고 해서 그들의 위대성에 금이 가거나 경시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요한은 그리스도의 선구자였지만,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받아야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시간적으로 그리스도보다 앞선 자라고 할지라도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서 받아야 하며, 그를 주시하고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다.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세례를 베푸는 교역자들은 그들이 자신들에 대해 전파하고 있는지를 특별히 유의해야 하며, 또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네 자신을 조심하라.” “네 자신을 구원하라”(딤전 4:16).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가 그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죄인들로부터 구별된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죄인에게(by), 죄인으로(as), 죄인들 가운데서 (among) 세례를 받으려고 오실 수 있는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이 구절에 대한 예수님의 취소(1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그리스도는 요한의 겸손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지만, 그의 사양을 그대로 수락하신 것은 아니다. 그는 그 일을 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것의 이유를 제시하지 못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방법을 취할 것임은 온당한 사실이다.그리스도는 어떻게 그것을 끝까지 주장하셨는가? 그것은 “이제” 행해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요한이 그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오히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려고” 하였다. Afejarti – “이제 허락하라.” 즉 “이제 그것을 받도록 하라.”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매사는 알맞은 때에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지금”인가?그리스도는 “이제”겸손의 상태에 있다. 그는 자신을 비웠으며, 아무런 명성을 취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사람의 형상”을 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따라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셨다. 그는 완전히 순수하였지만 씻음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세례를 받으려 하셨으며, 따라서 “죄를 알지도 못하셨지만”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신”것이다.요한의 세례는 지금 명성을 얻고 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그의 역사를 행하고 계시다. 그것이 현재 하늘의 섭리이며, 따라서 예수님은 이제 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그의 성령 세례는 오랜 시간이 경과한 이후에(행 1:5) 베풀어질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이제” 그 절정에 이르렀다.그것은 “지금 행해져야만”한다. 왜냐하면 지금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이며, 그 일을 하시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요 1:31-34).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에 현현되어야 하며, 가장 겸손하고 겸비했던 그 자신의 행동에서 하늘로부터 기사에 의해 두드러지게 되셔야만 한다.이에 대해 그가 제시한 이유는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이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에는 타당성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은혜스러운 것이었다(히 2:10; 7:26). 우리는 해야 할 것만 아니라 합당한 것을 행해야 하며, 또한 반드시 해야 할 것만이 아니라 “사랑스럽고 좋은 평판이 있는” 것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우리 주님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자신에게 매우 합당한 것으로 여기셨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휘트비 박사가 설명한 것과 같이) 모든 신적 제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모든 법칙을 준행하려는 마음의 준비를 나타낸다. “그가 이와 같이 하여” 회개의 세례에 의해 그의 길을 준비시키려고 요한을 보내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롭다 하고 그의 지식을 인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법칙과 마찬가지로 모범에 의해 선한 모든 것을 후원하고 격려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스도는 종종 요한과 그의 세례를 훌륭하게 언급하였으며, 그는 더 나은 일을 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맨 처음 행하시고,” “그 다음 가르치시기” 시작하셨다. 그의 사역자들도 똑같은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하여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씻음에 대한 “의식적인 율법의 의를 성취하셨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세례에 대한 복음적 의식을 그의 교회에 천거하셨으며, 그것을 존귀케 하셨고, 그것에 어떤 효능을 두시려했는가를 보여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물 씻음에 복종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물 씻음을 반대하신 것은 그것이 인간이 발명하고 고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것을 쫓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뜻과 이러한 이유로 요한은 아주 만족하였으며, “이에 그는 허락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맨 처음 그에게 베푸신 영예를 극구 사양했던 겸손은 이제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봉사를 수행하도록 만들었다. 겸손을 구실로 우리의 의무를 사양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Ⅱ. 하늘은 엄숙하게 특별한 영광을 나타냄으로써 그리스도의 세례를 기꺼이 빛내어 주었다(16, 17절).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셨다” 세례를 받았던 그 밖의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고백하기 위해 머물러 있었지만”(6절), 그리스도는 고백할 죄가 없으므로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물에서”(aps ton ndatoj)란 말은 그가 물로 씻음 받기 위하여, 즉 그의 머리와 얼굴을 씻기우려고(요 13:9) 내려갔던 “강가에서”란 의미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그가 옷을 벗고 세례를 받았다면 그 옷을 입었다든지, 벗었다든지의 설명이 반드시 있어야 할텐데 여기에는 그런 부대 설명이 없다. 그는 최고의 상쾌함과 확고한 결심으로 일을 착수했던 사람처럼”곧 물에서 올라 오셨다.” 그는 시간을 낭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까지 얼마나 곧장 걸어가셨던가!” 이제 그는 “물에서 올라 오셨으며,” 모든 사람들은 이목을 집중하였다. 1. “보라, 하늘이 그에게 열리지 않았던가!” 적어도 별이 총총한 창공 저편에 있는 어떤 것을 그에게 나타내기라도 하는 듯이.

(1) 이것은 그로 하여금 “그의 앞에 놓여진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떠맡은 임무를 계속 수행해 나가도록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하늘은 지금 그가 착수하고 있는 일을 다 마쳤을 때 그를 영접하기 위하여 열려 있다.

(2)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복종하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를 통하여 하늘은 사람의 자녀들에게 열려져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죄는 하늘을 닫았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친밀한 교제를 중지시켰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하늘 나라를 모든 믿는 자들에게 개방하셨다.” 신적인 빛과 사랑은 사람의 자녀들에게 두루 임하였으며, “우리는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담대함을 얻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받았으며, 하나님께 의무로 보답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중개되는데, 그는 밑 부분을 땅에 두고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 사닥다리이며,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안락한 교제를 갖거나 마침내 하늘나라를 얻게 될 소망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이 열린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충실히 이행할 때에만 그와 더불어 교제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2.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또는 비둘기처럼)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시는(또는 비추시는)것을 보았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보았고(막 1:10), 요한도 그것을 보았으며(요 1:33, 34), 또한 아마도 곁에 있던 사람들도 이것을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공적인 취임임을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성령이 내려 그를 비추었다.” 옛 세례의 맨 처음에 “하나님의 영”은 마치 새가 둥우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처럼 “수면에 운행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는 새 세계의 맨 처음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시지만 성령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것이 아니라, ” 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실 것이라”(사 11:2; 61:1)고 예언되었으며, 이곳에서도 그렇게 하셨다. 왜냐하면,

[1] 그는 예언자이시기 때문이었다. 예언자도 언제나 그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그의 예언적인 임무를 신적 본성(휘트비 박사의 말)에 의하지 않고 성령의 영감에 의해 수행하셨다.

[2] 그는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이었다. “성령은 그에게 내렸으며,” 그로 말미암아 은혜와 은사와 위로에 있어서 모든 신자들에게 파급되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하여 “사람을 위해 선물을 받으셨다.”

(2) “성령은 비둘기같이 그 위에 임하셨다.” 이 비둘기가 살아있는 실제의 비둘기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환상에서와 같이 비둘기와 유사한 형상인지는 확실치 않다. 만일 형체나 형상(눅 3:22)이 있었다면 그것은 사람의 형체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양으로” 보여지는 존재는 특별히 제 이위 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날짐승 중 하나(하늘은 지금 열려져 있다)임에 틀림없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비둘기가 이에 가장 적합할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성령은 비둘기 같이 성령이다. 이 성령은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비둘기”같지 않으며, 불쾌감이 없는 결백한 비둘기 같다. “성령”은 공중의 왕이지만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잔인한 새인 독수리와 같은 형체로 내려오지 않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무해하고 악의가 없는 “비둘기의 형체로” 내려왔다. 그리스도의 성령도 이와 같았다. “그는 다투거나 들레지 않을 것이다.” 기독자들은 “비둘기와 같이 남을 해하지”말아야 한다. 비둘기는 특히 눈이 두드러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눈(아 5:12)과 교회의 눈(아 1:15; 4:1)이 비둘기의 눈과 비교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이 동일한 기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둘기는 많이 운다(사 38:14). 그리스도는 종종 우셨다. 참회하는 영혼은 “골짜기의 비둘기”에 비유된다.

[2] 비둘기는 희생 제물로 드려졌던 유일한 날짐승이었으며(레 1:14),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성령”에 의해 “하나님께 자신을 흠 없이 바쳤다.”

[3] 노아 홍수 때에 물이 감소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준 것은 입에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온 비둘기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화평에 관한 기쁜 소식은 “비둘기 같은” 성령에 의해 전달된다. 성령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사람에게 전하며, 또한 우리를 향하신 그의 뜻은 “선하시며 악이 없으시다.” “반구(비둘기)의 소리가 우리의 땅에 들림”(아 2:12)으로써 갈대아의 석의(釋義)는 “성령의 소리”를 이해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화해하신다는 것은 “비둘기의 날개”를 타고 우리에게 전해진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3. 이 엄숙함을 설명하고 완성하기 위하여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던 “하늘로부터의 소리가 있었다.” 성령은 그 자신을 “비둘기”의 형체로 나타내셨으나 하나님 아버지는 “소리”로 나타내셨다. 왜냐하면 율법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신 4:12). 일찍이 하늘로부터 땅에 왔던 최고의 소식인 복음은 그렇게 왔고 또한 그러하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하고 명백하게 그리스도에게와 또한 그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여기에서 어떻게 우리 주님을 인정하고 계신가를 살펴보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여기에서 몇 가지로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1] 하나님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이는 내 아들이다”로 나타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하나님께로 난” 그의 아들이시다(골 1:15; 히 1:3). 또한 이것은 초자연적인 임신에 의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임신”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졌다(눅 1:35).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는 세상의 구속자라는 특별한 임무와 사명을 맡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이를 위해 성별 되었고, 파송되었으며, “아버지의 양육을 받았으며”(잠 8:30), 임명되었다. “내가 그를 내 장자로 삼을 것이다”(시 89:27).

[2] 아버지 하나님이 그에게 지닌 애정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이다. 즉 그가 아끼는 아들, 그의 “사랑의 아들”(골 1:13)이다. 하나님은 그를 영원 전부터 자기의 가슴속에 품고 계셨으며(요 1:18), “언제나 그의 즐거움”이었다(잠 8:30). 그러나 특별히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또한 사람의 구원 역사를 떠맡은 일에 있어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그는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자”(사 42:1)이다. 그는 구속의 언약에 동의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였다”(요 10:17; 3:35). “보라,” 그리고 경탄하라.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가를!” 그는 실로 그의 사랑하는 자를 내어 버렸고 그의 진노의 자식이었던 자들을 위해 고난을 받고 죽게 하셨다. 아니,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유일하신 아들, 그가 사랑하신 이삭을 우리의 죄를 위해 서슴없이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신 것”은 그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증거가 아니고 또 무엇인가!

(2)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인정하시려는가를 알 수 있다. 즉 그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그와 “더불어”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안에 있는 모든 자와 신앙으로 그와 연합된 자를 기뻐하신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사람의 자녀들을 싫어하셨으나 지금은 그의 분노가 사라졌으며, 또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영접”하셨다(엡 1:6). 모든 세계여, 주목하라. 이 분이야말로 우리에게 양손을 얹으신 평화의 조성자, 중개자이시며,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요 14:6) “그 안에서 우리의 영적 제사는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선물을 거룩케 하시는” 제단이기 때문이다(엡 2:5). 그리스도에게서(out of)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in) 하나님은 화목케 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이것이 모든 복음의 총합(sm)이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의 소리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며, “그가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진실한 말씀”이다. 우리는 기꺼이 이 말씀에 의견을 함께 해야 하며, 그는 우리의 사랑하시는 구세주이며 “우리는 그를 기뻐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보라, 하늘이 그에게 열리지 않았던가!” 적어도 별이 총총한 창공 저편에 있는 어떤 것을 그에게 나타내기라도 하는 듯이.이것은 그로 하여금 “그의 앞에 놓여진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떠맡은 임무를 계속 수행해 나가도록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하늘은 지금 그가 착수하고 있는 일을 다 마쳤을 때 그를 영접하기 위하여 열려 있다.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복종하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를 통하여 하늘은 사람의 자녀들에게 열려져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죄는 하늘을 닫았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친밀한 교제를 중지시켰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하늘 나라를 모든 믿는 자들에게 개방하셨다.” 신적인 빛과 사랑은 사람의 자녀들에게 두루 임하였으며, “우리는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담대함을 얻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받았으며, 하나님께 의무로 보답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중개되는데, 그는 밑 부분을 땅에 두고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 사닥다리이며,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안락한 교제를 갖거나 마침내 하늘나라를 얻게 될 소망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이 열린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충실히 이행할 때에만 그와 더불어 교제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그는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또는 비둘기처럼)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시는(또는 비추시는)것을 보았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보았고(막 1:10), 요한도 그것을 보았으며(요 1:33, 34), 또한 아마도 곁에 있던 사람들도 이것을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공적인 취임임을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성령이 내려 그를 비추었다.” 옛 세례의 맨 처음에 “하나님의 영”은 마치 새가 둥우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처럼 “수면에 운행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는 새 세계의 맨 처음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시지만 성령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것이 아니라, ” 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실 것이라”(사 11:2; 61:1)고 예언되었으며, 이곳에서도 그렇게 하셨다. 왜냐하면,그는 예언자이시기 때문이었다. 예언자도 언제나 그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그의 예언적인 임무를 신적 본성(휘트비 박사의 말)에 의하지 않고 성령의 영감에 의해 수행하셨다.그는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이었다. “성령은 그에게 내렸으며,” 그로 말미암아 은혜와 은사와 위로에 있어서 모든 신자들에게 파급되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하여 “사람을 위해 선물을 받으셨다.””성령은 비둘기같이 그 위에 임하셨다.” 이 비둘기가 살아있는 실제의 비둘기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환상에서와 같이 비둘기와 유사한 형상인지는 확실치 않다. 만일 형체나 형상(눅 3:22)이 있었다면 그것은 사람의 형체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양으로” 보여지는 존재는 특별히 제 이위 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날짐승 중 하나(하늘은 지금 열려져 있다)임에 틀림없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비둘기가 이에 가장 적합할 것이다.그리스도의 성령은 비둘기 같이 성령이다. 이 성령은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비둘기”같지 않으며, 불쾌감이 없는 결백한 비둘기 같다. “성령”은 공중의 왕이지만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잔인한 새인 독수리와 같은 형체로 내려오지 않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무해하고 악의가 없는 “비둘기의 형체로” 내려왔다. 그리스도의 성령도 이와 같았다. “그는 다투거나 들레지 않을 것이다.” 기독자들은 “비둘기와 같이 남을 해하지”말아야 한다. 비둘기는 특히 눈이 두드러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눈(아 5:12)과 교회의 눈(아 1:15; 4:1)이 비둘기의 눈과 비교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이 동일한 기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둘기는 많이 운다(사 38:14). 그리스도는 종종 우셨다. 참회하는 영혼은 “골짜기의 비둘기”에 비유된다.비둘기는 희생 제물로 드려졌던 유일한 날짐승이었으며(레 1:14),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성령”에 의해 “하나님께 자신을 흠 없이 바쳤다.”노아 홍수 때에 물이 감소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준 것은 입에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온 비둘기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화평에 관한 기쁜 소식은 “비둘기 같은” 성령에 의해 전달된다. 성령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사람에게 전하며, 또한 우리를 향하신 그의 뜻은 “선하시며 악이 없으시다.” “반구(비둘기)의 소리가 우리의 땅에 들림”(아 2:12)으로써 갈대아의 석의(釋義)는 “성령의 소리”를 이해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화해하신다는 것은 “비둘기의 날개”를 타고 우리에게 전해진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이 엄숙함을 설명하고 완성하기 위하여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던 “하늘로부터의 소리가 있었다.” 성령은 그 자신을 “비둘기”의 형체로 나타내셨으나 하나님 아버지는 “소리”로 나타내셨다. 왜냐하면 율법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신 4:12). 일찍이 하늘로부터 땅에 왔던 최고의 소식인 복음은 그렇게 왔고 또한 그러하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하고 명백하게 그리스도에게와 또한 그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하나님은 여기에서 어떻게 우리 주님을 인정하고 계신가를 살펴보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여기에서 몇 가지로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하나님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이는 내 아들이다”로 나타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하나님께로 난” 그의 아들이시다(골 1:15; 히 1:3). 또한 이것은 초자연적인 임신에 의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임신”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졌다(눅 1:35).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는 세상의 구속자라는 특별한 임무와 사명을 맡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이를 위해 성별 되었고, 파송되었으며, “아버지의 양육을 받았으며”(잠 8:30), 임명되었다. “내가 그를 내 장자로 삼을 것이다”(시 89:27).아버지 하나님이 그에게 지닌 애정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이다. 즉 그가 아끼는 아들, 그의 “사랑의 아들”(골 1:13)이다. 하나님은 그를 영원 전부터 자기의 가슴속에 품고 계셨으며(요 1:18), “언제나 그의 즐거움”이었다(잠 8:30). 그러나 특별히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또한 사람의 구원 역사를 떠맡은 일에 있어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그는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자”(사 42:1)이다. 그는 구속의 언약에 동의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였다”(요 10:17; 3:35). “보라,” 그리고 경탄하라.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가를!” 그는 실로 그의 사랑하는 자를 내어 버렸고 그의 진노의 자식이었던 자들을 위해 고난을 받고 죽게 하셨다. 아니,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유일하신 아들, 그가 사랑하신 이삭을 우리의 죄를 위해 서슴없이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신 것”은 그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증거가 아니고 또 무엇인가!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인정하시려는가를 알 수 있다. 즉 그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그와 “더불어”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안에 있는 모든 자와 신앙으로 그와 연합된 자를 기뻐하신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사람의 자녀들을 싫어하셨으나 지금은 그의 분노가 사라졌으며, 또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영접”하셨다(엡 1:6). 모든 세계여, 주목하라. 이 분이야말로 우리에게 양손을 얹으신 평화의 조성자, 중개자이시며,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요 14:6) “그 안에서 우리의 영적 제사는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선물을 거룩케 하시는” 제단이기 때문이다(엡 2:5). 그리스도에게서(out of)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in) 하나님은 화목케 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이것이 모든 복음의 총합(sm)이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의 소리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며, “그가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진실한 말씀”이다. 우리는 기꺼이 이 말씀에 의견을 함께 해야 하며, 그는 우리의 사랑하시는 구세주이며 “우리는 그를 기뻐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헬라어 마태복음 3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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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 데 타이스 헤메라이스 에케이나이스 파라기네타이 요안네스 호 밮티스테스 레뤼쏜 엔 테 에레모 테스 유다이아스

개역개정,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새번역,1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 ㉠또는 ‘침례자’

우리말성경,1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며

가톨릭성경,1 그 무렵에 침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영어NIV,1 In those days John the Baptist came, preaching in the Desert of Judea

영어NASB,1 Now in those days John the Baptist came, preaching in the wilderness of Judea, saying,

영어MSG,1 While Jesus was living in the Galilean hills, John, called “the Baptizer,” was preaching in the desert country of Judea.

영어NRSV,1 In those days John the Baptist appeared in the wilderness of Judea, proclaiming,

헬라어신약Stephanos,1 εν δε ταις ημεραις εκειναις παραγινεται ιωαννης ο βαπτιστης κηρυσσων εν τη ερημω της ιουδαιας

라틴어Vulgate,1 in diebus autem illis venit Iohannes Baptista praedicans in deserto Iudaeae

히브리어Modern,1 בימים ההם בא יוחנן המטביל ויהי קרא במדבר יהודה לאמר׃

성 경: [마3:1]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 그 때에 – 이 구절의 뜻은 (1) ‘결정적인 어느 때'(Hill)를 말할 수도 있고, (2) ‘예수와 그의 가족이 나사렛에 살던 무렵'(Broadus)을 뜻할 수도 있다. 마태는 구약에서 어떤 특정한 시점(時點)을 나타내던 표현 방법(창 38:1;출 2:11, 23;사 38:1)의 영향을 받아 뒤에 이어지는 기록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하고자 이런 표현법을 사용한 것 같다. 한편 ‘그 때’는 2장과 약 30년의 차이가 있는 주후 28년 정도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즉, 디베료 가이사(Tiberias Caesar) 재위 15년(눅 3:1, 2) 되던 해, 곧 세례요한 내지 예수의 나이가 30세 된던 때였다. 여기서 ’30’이란 나이는 모세 율법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민 4:3, 42-45). 이는 결국 율법의 완성자요 인류 구속의 과업을 실행키 위해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의 사역을 인준해주는 하나의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된다.

󰃨 세례 요한(*, 요안네스 호 배티스테스) – 히브리어 요하난(*)이란 이름에서 유래한 ‘요한’은 제사장이자, 유대의 지도자로서 B.C.106년에 사망한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 이래로 유대인들에게 흔히 사용되는 이름이었다. 이 이름은 신약에서 4, 5명 정도 등장하는데, 특히 본문에서 ‘요한’이란 이름 앞에 ‘세례'(Baptist)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자주 나오는 다른 이름과 구별하기 위해서 일 뿐 아니라 그의 사역의 중점이 ‘세례’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히브리인의 이름에는 (1) 할례명(이 이름은 거룩한 이름으로 종교적 목적과 의식에서만 사용한다)과 (2) 개인명(個人名, 즉 세속명으로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이다) 및 (3) 그밖에 한 개인에게 관련된 공적 임무, 정신적, 신체적. 신분적, 도덕적 특성을 일컫는 이름이 있었다. 여기 ‘세례 요한’이란 이름은 바로 (3)번의 공식 임무에 관련된 직능적(職能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Jesephus)도 ‘세례자 요한’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편 세례요한은 엄격히 말해서 율법 시대에 속한 자요, 죄를 책망하여 회개를 촉구한 구약 최후의 선지자였다. 그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은혜’와 연관된 것처럼 그는 구약의 율법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의 은혜 시대를 예비하는 준비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세례 요한의 탄생 경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누가복음 1장을 참조하라.

󰃨 유대 광야에서(수 15:61;삿 1:16) – 여리고 남쪽과 사해 서쪽 고원 지대에 걸쳐 펼쳐진 황량한 석회암의 굴곡으로 되어 있는 광야이다. 군데군데 오아시스가 있고, 엔게디 근처에는 폭포도 있어 목초지로 이용되던 땅이었다(시 65:12;욜 2:22;눅 15:4). 이곳은 ‘십 황무지'(삼상 23:14, 15), ‘마온 황무지'(삼상 23:24), ‘엔게디 횡무지'(삼상 24:1), ‘예루엘 광야'(대하 20:16)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는데, 그 모든 땅이 유다 지파에 속하였기 때문에 전통에 따라 ‘유대 광야’로 지칭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 광야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칩거(蟄居) 생활을 하며 흩어져 살았는데 예수 당시의 극단적 유대교 종파의 하나인 엣세네파(the Essenes)도 그 중에 하나였다. 세례 요한의 성장지와(눅 1:80) 초기 사역지(요 3:23)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에 그를 엣세네파의 일원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유대인들의 역사성으로 볼 때 ‘광야'(Desert, NIV)는 단순히 소외된 지역으로만 여겨지지 않고 ‘예언적 의미’를 갖고 있는 특수 지역이었다. 그 예로써 율법이 광야에서 계시되었고 열심당원들(Zealots)도 광야를 은신처로 삼았었다(24:26;행21:38). 이러한 의미에서 학자들은 세례요한의 활동 무대였던 광야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고 있다(Bonnard, Maier). 더불어 ‘광야에서’란 말 중에 ‘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기네타이'(*)가 3인칭 단수 현재형으로 ‘그가…에 와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는 단순히 장소를 강조한 말이 아니라 그의 사역의 현재성을 강조한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사역의 현재성과 역사성을 생동감있게 전해주며, 그의 사역의 예언적 특성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 전파하여 – 이에 대한 헬라어 ‘케륏손'(*)은 ‘유앙겔리조마이'(*)와는 달리 말씀을 선포하는 그 자체로서의 사건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선포의 방법과 의미에 관계된 것이다. 즉 그는 메시지를 선포하되 단지 하나님께서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말씀만을 고(告)하는 것이 그의 사명의 전부이었음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그가 광야를 사역 장소로 택한 것도 하나님의 지시(사 40:3)에 따른 것이었다. 실로 세례 요한의 전파지로 택하신 광야야말로 이스라엘의 피폐(疲弊)한 영적 상태를 적절히 묘사했다 할 것이다.

카이 레곤 메타노데이테 엥기켄 가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개역개정,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새번역,2 말하기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였다.

우리말성경,2 말했습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가톨릭성경,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영어NIV,2 and saying,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near.”

영어NASB,2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영어MSG,2 His message was simple and austere, like his desert surroundings: “Change your life. God’s kingdom is here.”

영어NRSV,2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has come near.”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λεγων μετανοειτε ηγγικεν γαρ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2 et dicens paenitentiam agite adpropinquavit enim regnum caelorum

히브리어Modern,2 שובו כי מלכות השמים הגיעה׃

성 경: [마3:2]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 회개하라 – 이 말의 원어 ‘메타노에이테'(*)는 고전 헬라어에서 순수한 의미로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을 가지며, 통속적으로는 단순히 ‘무슨 일을 후회한다’라고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도입된 이 단어의 용례(用例)는 ‘새 행실로 돌아 온다’는 히브리어 ‘슈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백성들로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로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외침이다. 즉 유대인 중에도 믿음없는 자가 있고, 우상 숭배자가 있기에 그러한 불신과 영적 음행(淫行)에서 돌이키라는 구약적 의미인 것이다(Alford). 실로 이 말은 머리로서만 계획을 수정하고 감정적으로만 후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와 죄책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Turn ye) 전인격적인 참회(懺悔)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메시야를 영접하는 마음과 행위의 철두 철미한 변화 전반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의 행위가 근본적으로 올바른 궤도를 이탈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철저한 변화가 절대 요청되는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롬 3:10). 한편 이 같은 회개는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서만 참 회개임이 증명된다.

󰃨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 요한의 설교의 두번째 주제로서 회개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는 날에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구별될 것이기 때문이다(25:31-46). 따라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천국’ 또는 ‘하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톤우라논)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마가와 누가에는 ‘하나님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로 표현한다. 한편 이 표현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 왕국에서 유래한 것으로서(단 2:44;7:13, 14,27)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곧 ‘왕국'(*, 말쿠트)의 주요 의미는 ‘통치'(reign)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왕국’을 뜻하는 ‘바실레이아'(*)는 간혹 영토를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4:8) 대부분이 역동적인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암시한다. 이는 당시 천국을 영적인것으로만 해석하고 인간의 마음안에 있는 것로 간주하던 랍비들의 해석이나 메시야 왕국이 이뤄질 때 로마의 지배가 무너지고 정치적 평화와 번영이 도래하리라던 A.D. 1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의 극단적 해석과는 달리 역동적(dynamic)으로 이 땅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에서는 대적들을 멸망시키고 이 땅에 공평과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실(사 9:7) 하나님의 강림(降臨)과 통치에 대한 기대로 고조되어 (1) 다윗 언약 성취에 대한 대망으로 나타나기도 하며(삼하 7:13,14). (2) 여호와의 날로서 심판의 어두움(암 5:18,19)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 땅에 구체화될 천국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영원한 천국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본문에 제시된 세례 요한의 선포는 바로 예수의 초림으로 구체화될 천국에 관한 언급인 것이다. 한편 여기서 ‘가깝다'(*, 엥기켄)라는 말은 천국이 갖는 역동적 의미와 함께 결합되어 ‘천국은 예수와 그의 말씀과 이적과 함께 왔고, 그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왔으며, 이 시대의 종말에는 완성된 모습으로 올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하늘나라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즉 온 세계에 왔고, 마침내는 영원히 존속될 것이다. 한편 마태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피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를 꺼려했던(출 20:7) 유대인의 일반적인 완곡어법(婉曲語法) 때문일 것이다.

후토스 가르 에스틴 호 레데이스 디아 에사이우 투 프로페투 레곤토스 포네 보온토스 엔 테 에레모 헤토이마사테 텐 호돈 퀴리우 유데이아스 포이에이테 타스 트리부스 아우투

개역개정,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새번역,3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 ㉡사 40:3(칠십인역)

우리말성경,3 세례자 요한은 바로 예언자 이사야가 말했던 그 사람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의 소리가 있다. ‘주를 위해 길을 예비하라. 주의 길을 곧게 하라.’” 사40:3

가톨릭성경,3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 ”

영어NIV,3 This is he who was spoken of through the prophet Isaiah: “A voice of one calling in the desert,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make straight paths for him.'”

영어NASB,3 For this is the one referred to by Isaiah the prophet when he said, ”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 MAKE READY THE WAY OF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영어MSG,3 John and his message were authorized by Isaiah’s prophecy: Thunder in the desert! Prepare for God’s arrival! Make the road smooth and straight!

영어NRSV,3 This is the one of whom the prophet Isaiah spoke when he said, “The voice of one crying out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of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헬라어신약Stephanos,3 ουτος γαρ εστιν ο ρηθεις υπο ησαιου του προφητου λεγοντος φωνη βοωντος εν τη ερημω ετοιμασατε την οδον κυριου ευθειας ποιειτε τας τριβου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3 hic est enim qui dictus est per Esaiam prophetam dicentem vox clamantis in deserto parate viam Domini rectas facite semitas eius

히브리어Modern,3 הלא זה הוא אשר נבא עליו ישעיהו הנביא לאמר קול קורא במדבר פנו דרך יהוה ישרו מסלותיו׃

성 경: [마3:3]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 저는…자라(*, 후토스 가르 에스틴) – 본절의 내용은 2절에서 세례 요한이 천국을 전파하는 공적인 근거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본 문장은 이유와 원인을 나타내는 ‘가르'(*)에 의미를 살려 ‘왜냐하면 저가…자이기 때문에’로 고치는 것이 더욱 완전한 번역이 된다. 한편 본절은 예언과 성취라는 구조(flufillment formula)로 묘사되어지지 않은 구약 인용 구절 중의 하나이다. 즉 본문의 경우는 단순히 문자적 예언 성취가 아니라 하나의 모형적, 종말론적 성취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예언은 다른 복음서에도 공히 취급되고 있다(마 1:2, 3;눅 3:4-6;요 1:23). 특별히 세례 요한 자신은 요 1:23에서 ‘나는…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하였고, 예수께서도 마 11:10에서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하심으로써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의 궁극적인 성취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증하고있다.

󰃨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 사 40:3은 바벧론 포로 생활에서 그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뿐만 아니라 더불어 귀환하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이다(McNeile). 여기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하나님의 선구자를 가리킨다. 특별히 여기서 ‘소리’란 어떤 의지나 의미가 개입된 주체적 발언이 아니라 물리적 음파일 뿐이다. 이는 ‘로고스'(*), 곧 말씀으로 표현된 예수의 주체적 발언과 그인격을 소개하는 세례 요한의 메신저(messenger)로서의 기능을 확실히 드러내 준다. 그리고 ‘외치는 자’는 하나님이시요, 듣는 사람은 선지자 이사야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포로에서 귀한하는 것에 대한 이 예언은 온전한 성취가 못되었고,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따라서 이 예언은 필연적으로 보다 온전한 성취, 즉 메시야 왕국(하늘나라)의 선포와 도래에 관심을 갖게 된다(Alford). 여기서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단순히 역사적 측면에서의 포로 귀환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영적으로 죄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해방시키고 당신의 나라로 귀환시키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주의 길을 예비하라(*, 해토이마사테) – ‘주’를 뜻하는’퀴리오스'(*)는 하나님에 대한 신적 칭호로서 히브리어로는 ‘주인’을 뜻하는 ‘아도나이'(*)에 해당한다. 이는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된다는 십계명 중 제 3계명(출 20:7)의 금기(taboo)를 철저히 따른 것으로 여호와의 대(代)명칭이다. 한편 ‘예비하라’는 말은 정확하게 준비되었다는 뜻의 ‘헤토이모스'(*)에서 유래하여 불편함 없이 적절히 준비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시는데 불편없도록 모든 것을 ‘예비하는’ 선구자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예비된 길을 따라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천국’을 또한 ‘예비하셨다'(요 14:2, 3).

󰃨 첩경(捷徑)을 평탄케 하라 – 여기서 ‘첩경'(*, 트리부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실라'(*)는 곧게 뻗은 대로(high-way)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는 마차가 힘차게 달릴 수 있었던 ‘마차로’로 이해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 길은 분명 ‘왕의 대로’로 손색이 없는 길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어지는 ‘평탄케 하라’는 말의 헬라어 ‘유데이아스'(*)는 ‘곧다’, ‘기쁘다’, ‘바르다’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주의 길’을 회개로 표현한 은유법이다. 즉, 평탄케 하라’는 말은 단순히 물리적 측면에서 길을 곧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일치하도록 ‘바른’ 질서를 유지하며, 정의를 이루라는 말이다. 이말이 당시 세례 요한의 역할이었다면,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인 것이다.

아우토스 데 호 요안네스 에이켄 토 엔뒤마 아우투 마포 트리콘 카멜루 카이 코넨 데르마티넨 페리 텐 오스퓐 아우투 헤 데 트로페 엔 아우투 아크리데스 카이 멜리 아그리온

개역개정,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새번역,4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다. 그의 식물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우리말성경,4 요한은 낙타털로 옷을 지어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둘렀습니다. 그리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가톨릭성경,4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영어NIV,4 John’s clothes were made of camel’s hair, and he had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His food was locusts and wild honey.

영어NASB,4 Now John himself had a garment of camel’s hair and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his food was locusts and wild honey.

영어MSG,4 John dressed in a camel-hair habit tied at the waist by a leather strap. He lived on a diet of locusts and wild field honey.

영어NRSV,4 Now John wore clothing of camel’s hair with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his food was locusts and wild honey.

헬라어신약Stephanos,4 αυτος δε ο ιωαννης ειχεν το ενδυμα αυτου απο τριχων καμηλου και ζωνην δερματινην περι την οσφυν αυτου η δε τροφη αυτου ην ακριδες και μελι αγριον

라틴어Vulgate,4 ipse autem Iohannes habebat vestimentum de pilis camelorum et zonam pelliciam circa lumbos suos esca autem eius erat lucustae et mel silvestre

히브리어Modern,4 והוא יוחנן לבושו שער גמלים ואזור עור במתניו ומאכלו חגבים ודבש היער׃

성 경: [마3:4]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 약대 털옷 – 검소하고 금욕적인 구도자(求道者) 본연의 모습올 상징한 옷차림으로서 엘리야의 의상과 의도적 일치를 이룬다(왕하 1:8). 이는 결국 요한이 엘리야 재현 예언(말 4:5;눅 1:7)의 성취자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실로 투박한 털옷은 선지자들이 주로 입는 옷으로 알려졌으며(슥 13:4).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들이 백성의 죄를 자신이 대신하여 슬퍼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입었다 한다. 이 옷은 약대(낙타)의 가죽 옷이 아니라 단지 낙타 털로 거칠게 짠 옷이었다. 한편, 약대 털옷을 입은 세례 요한의 모습은 당시의 죄악된 현실을 부정하며, 회개를 선포하는 그의 사역과 일치한다.

󰃨 가죽띠 – 풍성한 겉옷올 허리에 단단히 묶기 위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 메뚜기(*, 아크리데스) – 이는 몸집이 큰’ 종류의 메뚜기로서 레위기에서도 식용(食用)으로 허락된 정결한 식물이었다(렘 11:22). 지금도 동양에서는 메뚜기를 식용으로 삼는데, 유대에서는 하층 천민들이 음식으로 사용했다.

󰃨 석청(*, 메리 아그리온) – 석청(石淸)은 야생꿀로서 나무의 수액(樹液)이라는 견해(Meyer, Burce, Diodorus)도 있고, 야생 벌꿀(Bengel, Carr)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으나, 구약 셩경에서 이 단어가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바위 틈새에 만들어진 야생 벌꿀(삿 14:8, 9;삼상 14:25-29;시 81:16)로 생각된다. 메뚜기와 석청은 광야 생활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연상시키고, 철저한 자기 절제와 고독한 삶을 살았던 예언자들의 경건한 행위를 암시해 준다. 실로 세례 요한은 의복과 음식으로 백성들에게 회개와 임박한 천국을 전했던 것이다(Bengel).

토테 엨세포류에토 프로스 아우톤 히에로솔뤼마 카이 파사 헤 유다이아 카이 파사 헤 페리코로스 투 요르다누

개역개정,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새번역,5 그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다 요한에게로 나아가서,

우리말성경,5 예루살렘과 온 유대 지방과 요단 강 전 지역에서 사람들이 요한에게로 몰려왔습니다.

가톨릭성경,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영어NIV,5 People went out to him from Jerusalem and all Judea and the whole region of the Jordan.

영어NASB,5 Then Jerusalem was going out to him, and all Judea and all the district around the Jordan;

영어MSG,5 People poured out of Jerusalem, Judea, and the Jordanian countryside to hear and see him in action.

영어NRSV,5 Then the people of Jerusalem and all Judea were going out to him, and all the region along the Jordan,

헬라어신약Stephanos,5 τοτε εξεπορευετο προς αυτον ιεροσολυμα και πασα η ιουδαια και πασα η περιχωρος του ιορδανου

라틴어Vulgate,5 tunc exiebat ad eum Hierosolyma et omnis Iudaea et omnis regio circa Iordanen

히브리어Modern,5 ויצאו אליו ישבי ירושלים וכל יהודה וכל ככר הירדן׃

성 경: [마3:5]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이 때에…다 그에게 나아와 – ‘이 때에’는 세례자가 ‘회개’와 ‘천국’ 선포 사역을 시작한 때(1절)를 가리킨다. 실로 400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갈’의 암울한 시대의 절망 속에 살아가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이야말로 그들의 영적 가뭄을 해갈(解渴)시켜줄 단비로 여겼으며 그중에서도 어떤 이는 그를 예언된 메시야로 기대하며(눅 3:15;요 1:20) 그에게 모여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나오는 지명(地名)들은 2:3과 마찬가지로 장소를 의인화시킨 것으로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회개자로서 제일 먼저 광야로 향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긔고 ‘온 유대’에서 ‘온’이라는 말은 그 당시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환대(歡待)를 암시한다. 그리고 ‘요단 강 사방’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이두매, 베레아, 사마리아등의 이른바 종교적으로 소외된 지역 전반을 가리키며, 또 요한 사역의 본거지가 요단강인 것과 사역의 내용이 ‘회개 촉구’와 ‘세례 베푸는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카이 에밮티존토 엔 토 요르다네 포타모 휲 아우토 엨소몰로구메노이 타스 하마르티아스 아우톤

개역개정,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새번역,6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6 그들은 요단 강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가톨릭성경,6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았다.

영어NIV,6 Confessing their sins,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영어NASB,6 and they were being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as they confessed their sins.

영어MSG,6 There at the Jordan River those who came to confess their sins were baptized into a changed life.

영어NRSV,6 and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river Jordan, confessing their sins.

헬라어신약Stephanos,6 και εβαπτιζοντο εν τω ιορδανη υπ αυτου εξομολογουμενοι τας αμαρτιας αυτων

라틴어Vulgate,6 et baptizabantur in Iordane ab eo confitentes peccata sua

히브리어Modern,6 ויטבלו על ידו בירדן מתודים את חטאתם׃

성 경: [마3:6]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 이는 자기들이 범한 죄를 조목조목 고백했음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역사가 요세푸스이(Josephus)는 ‘그들이 자신들의 범죄와 율법에 대한 죄를 고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죄의 고백은 율법에 규정된 의무로서 범죄한 당사자의 책임(레 5:5;26:40)이자 제사장의 의무 중 하나였다(레 16:21). 이스라엘이 영적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는 이러한 고백이 순조롭게 이뤄졌으나(느 9:2, 3;시 32:5) 영적 기갈 상태에서는 침묵하고 있을뿐이었다. 한편 막 1:4과 눅 3:3에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한다. 그러나 마태는 세례의 선행 조건으로 ‘죄의 고백’을 언급했을 뿐 ‘죄 사함’은 예수가 죽을 때(26:28)까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의 세례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개인적인 ‘죄의 자복’이 이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적이 없었다. 바야흐로 메시야 도래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 요단강 – 히브리어 ‘야라드'(*, 내려가다)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빨리 흐르는 강’을 의미한다. 이 강은 헤르몬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바다를 경유(經由)한 다음 사해에 달하는 강이다. 요단의 수원(水源)에서 사해까지의 직선 거리는 약 217km인데, 전장(全長)은 강의 굴곡과 경사 때문에 400km 이상이 된다. 요단은 팔레스틴 최대의 강이며, 이스라엘 산업의 젖줄이 되는 중요한 강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와도 필연적인 깊은 관계를 갖게 되는 바, 아브라함과 롯의 분가(창 13:10)로부터 야곱의 밧단아람 피신(창 32:10), 여호수아의 가나안 입성(신 3:26-29), 사사시대에는 에홋(삿 3:26-30), 기드온(삿 7:24,25), 입다(삿 12:5,6)의 전장(戰場)으로, 엘리야의 승천(왕하 2:6-11), 엘리사의 나아만 치유(왕하 5:1-14) 등으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바로 이곳에서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한 것은 의미 심장한 일이라 하겠다. 한편 요단강은 물살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그 중 한 여울에 자리잡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을 것이다.

󰃨 세례를 받더니(*, 카이 에밥티존토) – 할례(circumcision) 아브라함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시 세례 행위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세례에 죄에 대한 고백과 씻음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부가된 것은 요한에게서 유래한다. 이에 대해 요세푸스(Josephus)는 증언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세례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예비 행위로서 의로운 행위, 곧 죄 고백을 요구했다고 한다. 따라서 요한이 회개하고 세례받음으로써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자고 강력히 촉구한 점으로 보아 적어도 공개적으로 죄와 인연을 끊는 것이 세례의 전제 조건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또한 쿰란(Qumran) 종파는 제의적 부정(祭衣的 不淨)을 제거키 위해 정결례(淨潔禮)를 행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랍비들은 유대인이 아닌 한도내에서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여하튼 요한의 세례가 온몸을 물에 잠기게 하는 침례(浸禮)를 행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나 세례 의식이 침수(浸水)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이 상징하는 ‘회개와 사죄’, 그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새 생명’이 중요한 것이다. 요한은 계시 수준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께서는 완성된 사역의 서례를 베푸셨다(26:28).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고 유대 민족을 새 생명의 길로 불러내고 있었다(Robertson).

이돈 데 폴루스 톤 파리사이온 카이 삳두카이온 에르코메누스 에피 토 밮티스마 아우투 에이펜 아우토이스 겐네마타 에키드논 티스 휘페데잌센 휘민 퓌게인 아포 테스 멜루세스 오르게스

개역개정,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새번역,7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7 그러나 여러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 곳으로 몰려오는 것을 보고 요한이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더러 다가올 진노를 피하라고 하더냐?

가톨릭성경,7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영어NIV,7 But when he saw many of the Pharisees and Sadducees coming to where he was baptizing, he said to them: “You brood of vipers! Who warned you to flee from the coming wrath?

영어NASB,7 But when he saw many of the Pharisees and Sadducees coming for baptism, he said to them, “You brood of vipers, who warned you to flee from the wrath to come?

영어MSG,7 When John realized that a lot of Pharisees and Sadducees were showing up for a baptismal experience because it was becoming the popular thing to do, he exploded: “Brood of snakes! What do you think you’re doing slithering down here to the river? Do you think a little water on your snakeskins is going to make any difference?

영어NRSV,7 But when he saw many Pharisees and Sadducees coming for baptism, he said to them, “You brood of vipers! Who warned you to flee from the wrath to come?

헬라어신약Stephanos,7 ιδων δε πολλους των φαρισαιων και σαδδουκαιων ερχομενους επι το βαπτισμα αυτου ειπεν αυτοις γεννηματα εχιδνων τις υπεδειξεν υμιν φυγειν απο της μελλουσης οργης

라틴어Vulgate,7 videns autem multos Pharisaeorum et Sadducaeorum venientes ad baptismum suum dixit eis progenies viperarum quis demonstravit vobis fugere a futura ira

히브리어Modern,7 ויהי כראותו רבים מן הפרושים והצדוקים נגשים לטבילתו ויאמר להם ילדי הצפעונים מי השכיל אתכם להמלט מן הקצף הבא׃

성 경: [마3:7]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바리새인(*, 파리사이온) –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함께 마카비 독립 운동시대 초기(B.C. 167)에서 대제사장 요나단(B.C. 159-143)치하 사이에 기원(起源)된 경건주의자들로 보여지며, ‘바리새’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나타난 것은 요한 힐카너스 당시(B.C. 135-105)로 보인다. 그런데 이 이름은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구별하다’란 의미를 가진다. 즉 바리새인은 ‘성별된 자’로서 율법과 구전(口傳)된 조상들의 모든 전통을 엄격히 지키고 영혼 불멸, 부활과 내세, 천사의 존재 등을 신앙하며 배타성이 강한 일단의 무리들을 가리킨다(행 23:8). 그러나 그들의 분리주의는 율법의 순수한 정신과 내면적 경건을 무시하고 형식주의적인 위선과 의모를 중시하는 외식주의로 전락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다(눅 11:43,44;12:1). 그렇다고해서 그들의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신앙으로 인하여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의 본래의 모습은 율법의 수호자(守護者)로 자처할 만큼 율법 준수에 철저했고 의로운 이스라엘을 고대하며, 장차 도래할 메시야 왕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온 것은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지대한 관심을 겉으로 나타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회개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현장에 회개에는 유념치 않고 외식의 옷만을 걸치고 거만하게 나타난 것이다. 한편 ‘많은’이라는 말에서 그들의 수(數)를 측정할 수는 없겠지만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대헤롯이 죽을 때 바리새인들은 6천명 이상이나 되었다 한다.

󰃨 사두개인(*, 사두카이온) – 이 명칭의 기원에 대하여는 (1) 알렉산더 대왕 당시의(B.C. 323) 사독이란 사람에게서 유래하였다 (2) 히브리어로’체디크'(*), 헬라어로 ‘아포 디카이오쉬네스'(*), 즉 ‘의’라는 말에서 근거하였다(Epiphanius)는 견해가 있으나 유대의 전승에 따르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왕상 1:38)이란 인물에게서 기원하였다(Thayer, Carr)고 한다. 이들 중 후자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이들은 민족주의자들로서 바리새파, 엣세네파와 함께 유대의 3대 종파의 하나이며 바리새인들과는 적대적인 파당이었다. 또한 그들은 바리새파보다 숫적로 열세였지만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었고 특히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은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제사장급의 고위층이었다. 그들은 모세 오경 이외에는 모든 전승을 부인하였고, 내세도, 부활도, 천사도, 심지어 하나님의 섭리도 믿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유전(遺傳)의 위험은 피하였지만, 무익한 세상적인 열심과 인간의 이성에 절대적 기준을 두는 오류(mistake)에 빠져 들어갔다(Alford).

󰃨 오는 것을(*, 엘코메누스)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을 한 부류로 묵어 기록한 것은 본서에 5회(16:1, 6, 11, 12) 나타난다. 상호 적대적인 두 파가 함께 왔다는 데에는 이의(異意)가 없으나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혤라어 본문에서는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지 세례 장소에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지 분명한 구별을 짓지 않고 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세례 요한의 질책(叱責)으로 보아 그들은 세례 모습을 관찰하러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Bruce). 실로 이 두파는 종교적 목적에서는 상호 적대적이었지만 예수를 정치적으로 대적하는 목적에서는 연합하였다 (16:1;22:23, 34;행 4:1).

󰃨 독사의 지식들아 – 이는 예언적 전통에 속한 선언이다(사 14:29;30:6). 요한은 광야에서 흔히 블 수 있는 독사들을 보며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간교한 뱀을 연상하였을 것이다. 현대처럼 저속한 욕설이 없던 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였던 그들에게 저주받은 뱀(창 3:14)의 후예라고 욕한 것은 위선과 변절, 기만 등으로 길들여진 그들을 향한 신적 권위에 의거한 화(禍)의 선포였다. 예수께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해 같은 책망을 하신 적이 있다(23:33). 이 욕설은 ‘아브라함의 자손'(9절)으로 자랑하던 그들에게 사단의 도구인 뱀의 후예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실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 누가…피하라 하더냐 – 이 말은 ‘너희가 무슨 근거로 나는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뜻의 질책성 질문이다. 엘리야로 예언된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등장하여 천국을 선포(2절)할 때 이미 ‘임박한 진노’가 암시되어 있었다(말 3:1, 2;4:1, 5). 그런데 세례 요한의 이 당황스런 질문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지 임박한 진노를 당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자각케 하고 끝내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데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란 말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감정을 인격화한 표현으로서 이것은 하나의 정태적(靜態的) 감정이 아니라 참으로 무서운 실제적이며 존재론적 극형(極刑)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한편 ‘임박한 진노’는 이방인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 영접을 준비(회개)하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홀연히 다가오는 종말론적인 것이다(살전 1:10). 물론 이 진노는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훼파됨으로서 1차 성취되었지만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마지막 심판 때에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계6:16, 17).

포이에사테 운 카르폰 맠시온 테스 메타노이아스

개역개정,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새번역,8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우리말성경,8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

가톨릭성경,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영어NIV,8 Produce fruit in keeping with repentance.

영어NASB,8 “Therefore bear fruit in keeping with repentance;

영어MSG,8 It’s your life that must change, not your skin!

영어NRSV,8 Bear fruit worthy of repentance.

헬라어신약Stephanos,8 ποιησατε ουν καρπους αξιους της μετανοιας

라틴어Vulgate,8 facite ergo fructum dignum paenitentiae

히브리어Modern,8 לכן עשו פרי הראוי לתשובה׃

성 경: [마3:8]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한 참된 방법이 제시된다. 즉 사단이 그들에게 귀뜸해준 위선적 종교 행위와 같이 단지 형식적인 세례 행위로는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운)외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참된 회개(2절 참조)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란 말이다. 여기서 ‘합당한'(*, 앝시오스)이란 단어는 ‘같은 분량의’란 뜻으로서 마음속의 실제 회개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행위(열매)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뜻한다.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으로는 많은의로운 일들(righteousness actions)을 행하였으나 그들의 내면은 결코 의롭지 않기(not righteousness)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는 합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사람이건 외견상 의로운 행동들을 할 수 있으나 그에 합당한 열매는 맺지 못한다. 즉 내면이 청결한 사람만이 오직 의로운(올바른, 좋은) 행동들과 하나님께 기억될만한 열매들을 추수할 수 있는 것이다(Bruce). 한편 여기서는 열매가 단수(*, 칼폰)로 묘사되었는데 비해 본절과 평행 구절인 눅 3:8에는 복수(*, 칼푸스)로 표현되었다. 이 차이는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조화가 가능하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변화된 삶에 따른 여러 종류의 은혜로 여겨지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될 수 있으며(21:3), 그 열매들의 뿌리는 오직 하나라는 점에서 단수(갈 5:22)로 묘사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ㅋ카이 메 돜세테 레게인 엔 헤아우토이스 파테라 에코멘 톤 아브라암 레고 가르 휘민 호티 뒤나타이 호 데오스 에크 톤 리돈 투톤 에게이라이 테크나 토 아브라암

개역개정,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새번역,9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우리말성경,9 너희는 행여나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실 수 있다.

가톨릭성경,9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 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영어NIV,9 And do not think you can say to yourselves, ‘We have Abraham as our father.’ I tell you that out of these stones God can raise up children for Abraham.

영어NASB,9 and do not suppose that you can say to yourselves, ‘ We have Abraham for our father’; for I say to you that from these stones God is able to raise up children to Abraham.

영어MSG,9 And don’t think you can pull rank by claiming Abraham as father. Being a descendant of Abraham is neither here nor there. Descendants of Abraham are a dime a dozen.

영어NRSV,9 Do not presume to say to yourselves, ‘We have Abraham as our ancestor’; for I tell you, God is able from these stones to raise up children to Abraham.

헬라어신약Stephanos,9 και μη δοξητε λεγειν εν εαυτοις πατερα εχομεν τον αβρααμ λεγω γαρ υμιν οτι δυναται ο θεος εκ των λιθων τουτων εγειραι τεκνα τω αβρααμ

라틴어Vulgate,9 et ne velitis dicere intra vos patrem habemus Abraham dico enim vobis quoniam potest Deus de lapidibus istis suscitare filios Abrahae

히브리어Modern,9 ואל תחשבו בלבבכם לאמר אברהם הוא אבינו כי אני אמר לכם כי מן האבנים האלה יכול האלהים להקים בנים לאברהם׃

성 경: [마3:9]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 신구약 중간 시대에 일어난 공적신학(功積神學, merit theology)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용어는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과 족장들, 특히 아브라함의 공적이 그 후손에게 효력을 미친다고 생각케 했다(Carson, Divine Sovereignty, pp.39ff). 유대인트리포(Trypho) 순교자 저스틴(Justine)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육신을 따라 다윗의 흩어진 자손들에게 저희가 죄인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패역한다 할지라도 영원한 나라가 주어지리라는 생각에서 당신들도 그것을 준행하였고’라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Alford). 랍비들의 교훈에도 ‘할례를 받은 자 중에 지옥에 갈 자는 아무도 없다’라는 말이있다. 여기서 ‘생각지 말라'(*, 메 독세테)는 부정 명령법의 단호한 명령으로써 요한 자신과 그들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커다란 괴리(estrangement)가 존재하고 있음을 명백히 나타낸다(Robertson). 그리고 ‘속으로'(*, 레게인 엔 헤아우토이스)라는 표현은 그들의 외적 상황(아브라함의 혈통)이 마음의 생각(구원받을 것임)으로 변한 동작을 표시하는데 사용된다(Beck). 그러나 구원의 참된 조건은 육적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고믿음으로 영적 자손이 되는 데에 있는 것이다(롬4장). 이처럼 자신들의 종교적 특권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오해는 사실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을 탐하는 가증한 위선적 범법 행위였다. (1) 하나님이 그들을 선민으로 삼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속사 전개의 중심이요 도구로 삼기 위하신 것이었지 그들을 무조건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2) 구약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바대로 그들이 선민이 된 것은 결코 무슨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이 선민의 지위를 유지하여 온 것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용서 덕택이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도 여느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타락과 교만의 역사였음을 보여 준다. (3) 따라서 그들이 선민의 혈통에 끼이게 된 것은 그저 감사할 조건일 따름이지 결코 아무때나 내세우는 특권층 신분증명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 이 돌들로도(*, 에크 톤 리돈투톤) – 이것이 요한의 발 밑에 있던 요단 강변의 돌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고(Carr, Virnect), ‘아브라함의 자손’과는 무관한 이방인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다(Chrysostom). 그런데 문맥상 이 견해들을 모두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히브리어나 아람어에서 ‘자손들'(banim)과 ‘돌들'(abanim)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 풍유(諷諭)가 가능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은 ‘돌’처럼 여기는 아브라함의 ‘자손'(유대인)들의 악한 교만 때문에 그들이 마찬가지로 ‘돌’처럼 여기는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들어 약속의 ‘자손’으로 만드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실로 하나님은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창 2:7) 당신이 원하시기만하면 발 밑의 돌이나 아니면 유대인들의 발 밑의 돌처럼 천하게 여기는 이방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재창조하실 수 있는 것이다(롬 4:17)여기서 요한은 이방인 역시 선민의 대열(교회)에 들어와 아브라함의 특권과, 품성을 소유할 수 있다는, 그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에데 데 헤 맠시네 프로스 텐 리잔 톤 덴드론 케이타이 판 운 덴드론 메 포이운 카르폰 칼론 엨콮테타이 카이 에이스 퓌르 발레타이

개역개정,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새번역,10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

우리말성경,10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조리 잘려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가톨릭성경,10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영어NIV,10 The ax is already at the root of the trees, and every tree that does not produce good fruit will be cut down and thrown into the fire.

영어NASB,10 “The axe is already laid at the root of the trees; therefore every tree that does not bear good fruit is cut down and thrown into the fire.

영어MSG,10 What counts is your life. Is it green and blossoming? Because if it’s deadwood, it goes on the fire.

영어NRSV,10 Even now the ax is lying at the root of the trees; every tree therefore that does not bear good fruit is cut down and thrown into the fire.

헬라어신약Stephanos,10 ηδη δε και η αξινη προς την ριζαν των δενδρων κειται παν ουν δενδρον μη ποιουν καρπον καλον εκκοπτεται και εις πυρ βαλλεται

라틴어Vulgate,10 iam enim securis ad radicem arborum posita est omnis ergo arbor quae non facit fructum bonum exciditur et in ignem mittitur

히브리어Modern,10 וכבר הושם הגרזן על שרש העצים והנה כל עץ אשר איננו עשה פרי טוב יגדע וישלך באש׃

성 경: [마3:10]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이미…놓였으니 – 메시야의 진노가 임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곧 시간적 여유가 더이상 없는 바로 이 시점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별하는 일이 시작되었다(Broadus). 한편 세례 요한은 ‘열매 맺음’을 언급할 때에 ‘타작마당'(12절), ‘나무와 뿌리, 알곡과 쭉정이, 도끼질과 사르는 불’ 등을 연상했을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무리들에 대한 심판을 도끼로 나무를 찍는 일에 비한 사실은 구약의 관용적인 용어(사 10:33, 34;렘 46:22 등)에 준해서 심판을 묘사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제 천국이 가까이 옴(2절)과 동시에 심판도 가까이 왔다. 이 천국과 심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역동적인 것으로서 천국을 선포하는 것은, 곧 심판의 도래를 선언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회개를 선포하는 것이다. 더욱이 세례 요한은 그 도끼가 줄기 혹은 가지에가 아니라 ‘뿌리에’ 놓임으로 심판이 완전할 것임을 명백히 했다. ‘놓였으니'(*, 케이타이)는 현재 완료형으로 시행할 준비가 끝났음을 암시한다. 더욱이 이 현재적 시상이 ‘찍어’, ‘던지우리라’는 말에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서 심판 준비가 다 되어 있음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 불에 던지우리라 – 심판은 성경에서 곧잘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불로 묘사된다(말 4:1;마 13:40;18:8, 9;막 9:43;요 15:6). 이 심판은 그 나라와 의를 위하여 선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것이다(히 6:8).

에고 멘 휘마스 밮티조 엔 휘다티 에이스 메타노이안 호 데 오피소 무 에르코메노스 이스퀴로테로스 무 에스틴 후 우크 에이미 히카노스 타 휘포데마타 바스타사이 아우토스 휘마스 밮티세이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

개역개정,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새번역,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11 나는 너희가 회개하도록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분은 나보다 능력이 더 많으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도 없다. 그분은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가톨릭성경,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침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실 것이다.

영어NIV,11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영어NASB,11 “As for me,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He who is coming after me is mightier than I, and I am not fit to remove His sandals;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fire.

영어MSG,11 “I’m baptizing you here in the river, turning your old life in for a kingdom life. The real action comes next: The main character in this drama–compared to him I’m a mere stagehand–will ignite the kingdom life within you, a fire within you, the Holy Spirit within you, changing you from the inside out.

영어NRSV,11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is coming after me; I am not worthy to carry his sandals.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fire.

헬라어신약Stephanos,11 εγω μεν βαπτιζω υμας εν υδατι εις μετανοιαν ο δε οπισω μου ερχομενος ισχυροτερος μου εστιν ου ουκ ειμι ικανος τα υποδηματα βαστασαι αυτος υμας βαπτισει εν πνευματι αγιω και πυρι

라틴어Vulgate,11 ego quidem vos baptizo in aqua in paenitentiam qui autem post me venturus est fortior me est cuius non sum dignus calciamenta portare ipse vos baptizabit in Spiritu Sancto et igni

히브리어Modern,11 הן אנכי טובל אתכם במים לתשובה והבא אחרי חזק הוא ממני אשר אינני כדי לשאת נעליו והוא יטבל אתכם ברוח הקדש ובאש׃

성 경: [마3:11]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나는…세례를 주거니와 –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란 말이 막 1:8이나 눅 3:16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은 마태가 요한을 예수보다 하위에 두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취한것으로 보려는 학자도 있으나(Hill), 막 1:4과 눅 3:3에서도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한 사실과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에 이말은 단지 ‘나는 회개와 관련한 세례를 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즉 그의 ‘물로'(*, 엔 휘다티) 세례를 베푸는 행위는 예수의 속죄사역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서 예수께서 베푸신’성령과 불’의 세례가 없다면 물 속에 침수하는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 근본적으로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는 선구자적인 사역에 불과한 것임을 요한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 내 뒤에 오시는 이 – ‘내 뒤에'(*, 오피소 무)는 시간적 순서로 ‘후에’란 의미이다. 요한은 이 표현에서 자신과 메시야의 사역적, 개인적 관계를 서술한다. ‘오시는 이'(*, 호 엘코메노스)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에 대한 정치적인 색채를 피한 칭호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메시야에 대한 잘 알려진 관용적 표현으로써 ‘실로가 오시기까지'(창 49:10)와 같은 구약의 진술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즉 본 구절은 요한이 담대하게 사역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로 인식되는 것을(눅 3:15) 스스로 불식시키기 위하여 자신은 단지 메시야의 전구(前驅)임을 명백히 밝힌 표현이다.

󰃨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 ‘뒤에 오는 이’가 능력이 더 많고 귀하다는 것은 정상적인 경우가 아니다. 왜냐하면 보통 덜 귀한 사람이나 제자가 뒤를 따르는 것이 상례(常例)였기 때문이다(16:24). 특히 ‘능력있다'(*, 이스퀴로스)라는 말은 후천적인 지위나 능력이 아닌 자생적 권위와 능력이 있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적용하고 있으며(렘 32:18;사 40:10;단 9:4), ‘능력이 많으시니'(*, 이스퀴로테로스)는 능력의 자의적(自意的)이고 인격적인 소유를 말한다. 더욱이 선지자보다 나은 자인 세례 요한이 노예들이나 하는 일인 신을 들고 다니는 일조차 감당치못할 그러한 분은 누구인가. 이러한 표현은 세례 요한의 지극한 겸손이지만 과장된 겸손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오시는 이’는 바로 ‘말씀'(*, 로고스)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 그의 신을 들기도 – 고대 중근동 지방에서는 아주 천한 신분의 노예가 자기 주인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고, 제자들이 스승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Edersheim). 그런데 요한은 자신이 그러한 천한 일 조차도 수행할 수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극구 시인하고 있다.

󰃨 감당치못하겠노라 – 이는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도덕적, 영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실로 요한의 이 고백은 예수의 충만한 신성(神性)을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가능했다(사 6:5).

󰃨 그는 성령과 불로…세례를 주싶 것이요 – 마태와 누가는 공히 ‘성령 세례’란 말에 ‘불’이란 단어를 추가하고 있다(눅 3:16). 그런데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1) 신자에 대한 구원 이후에 나타나는 불신자에의 심판이다. 즉 ‘성령'(*, 프뉴마)을 ‘바람’으로 해석하여 신자들이 성령의 거룩한 바람에 불려가고 그나머지는 심판의 불에 태워진다는 이동적 의미의 해석이다(Bruce). (2) 성령은 의인에게 임하는 성령의 은사(恩賜)요, 불은 악인 위에 내리는 맹렬한 심판이다. 그러나 위의 견해들보다 가장 당한 것은 두 단어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성령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즉 원문에서 ‘…으로’라는 한 개의 전치사인 ‘엔'(*)은 성령과 불을 모두 받음으로써 이 둘을 한 개념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불’은 성령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연단하는 자의 불로(말 3:2, 3), 정결케 하는 불로(사 6:6;슥 13:9;벧전 1:7), 또는 성령 강림의 상징으로(행 2:3) 나타나기 때문에 두 단어는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는 상이한 표현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서 물 세례가 눈에 보이는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는 신앙 고백적, 공식적 의식이라면 성령 세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씻음과 연합에 대한 하나님의 유효한 인정의 결과이다. 한편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진 것으로서(겔 36:25-27;39:29;욜 2:28) 신약 성경에만 사용되는 특별한 용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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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새번역,12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우리말성경,12 그분이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깨끗이 해 좋은 곡식은 모아 창고에 두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가톨릭성경,12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영어NIV,12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영어NASB,12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thoroughly clear His threshing floor; and He will gather His wheat into the barn, but He will burn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영어MSG,12 He’s going to clean house–make a clean sweep of your lives. He’ll place everything true in its proper place before God; everything false he’ll put out with the trash to be burned.”

영어NRSV,12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and will gather his wheat into the granary; but the chaff he will burn with unquenchable fire.”

헬라어신약Stephanos,12 ου το πτυον εν τη χειρι αυτου και διακαθαριει την αλωνα αυτου και συναξει τον σιτον αυτου εις την αποθηκην το δε αχυρον κατακαυσει πυρι ασβεστω

라틴어Vulgate,12 cuius ventilabrum in manu sua et permundabit aream suam et congregabit triticum suum in horreum paleas autem conburet igni inextinguibili

히브리어Modern,12 אשר בידו המזרה וזרה את גרנו ואסף את דגנו אל אוצרו ואת המץ ישרפנו באש אשר לא תכבה׃

성 경: [마3:12]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손에 키틀 들고…타작 마당을 – 먼저 ‘키’는 풍력(風力)을 이용하여 곡식의 쭉정이를 분리해 내는 일종의 소쿠리이다. 한편 ‘손에'(*, 토 프투온) 든 키는 10절의 ‘놓여있는’ 도끼보다 더욱 강렬한 심판의 상징이다. 한국과 유사한 유대 농촌을 연상시키는 이런 심판의 비유는 구약에서도 자주 보인다(4:1). 키를 ‘손에 든’ 메시야는 ‘타작 마당'(시 1:4;사 5:24;단 2:35;호 13:3)으로 비유된 자신의 세상에서 신자로 비유된 알곡과 불신자로 비유된 쭉정이를 철저히 나누실 것이며, 또한 그각각을 심판 내지는 구원이라는 하나의 단위로(‘모아’) 취급할 것이다. 한편 ‘곡간’은 중근동지방에서 주로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하 또는 토굴에 설치해 두었었다. 물론 본문에서는 구원받은 자들의 영원한 피난처, 곧 어떤 악한 세력에도 노출되지 않는 안전한 처소로 이해할 수 있다(시 71:7). 계속해서 ‘꺼지지 않는 불’은 어떤 한 시점에 이르러 소멸되는 불이 아니라 어떠한 결핍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화력을 지닌 불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벌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종말론적인 심판과(사 34:10;66:24;렘 7:20), 지옥을 의미하기도 한다(5:22). 현실에 반드시 존재할 이 무서운 ‘불’에 알곡 아닌 모든 쭉정이를 남김없이 태워 자신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실 것이다. 한편 ‘정하게 하사'(*, 디아카다리에이)의 ‘디아'(*)와 ‘태우시리아라'(*, 카타카우세이)의 ‘카타'(*)는 완료형이며 종료(終了)의 뜻을 가지고 있어 악한 자를 멸절시키는 최종 심판이 철저하고 완전한 것임을 강조한다.

토테 파라기네타이 호 예수스 아포 테스 갈릴라이아스 에피 톤 요르다넨 프로스 톤 요안넨 투 밮티스데나이 휲 아우투

개역개정,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새번역,13 그 때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셨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13 그때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에서 요단 강으로 오셨습니다.

가톨릭성경,1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영어NIV,13 Then Jesus came from Galilee to the Jordan to be baptized by John.

영어NASB,13 Then Jesus arrived from Galilee at the Jordan coming to John, to be baptized by him.

영어MSG,13 Jesus then appeared, arriving at the Jordan River from Galilee. He wanted John to baptize him.

영어NRSV,13 Then Jesus came from Galilee to John at the Jordan, to be baptized by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3 τοτε παραγινεται ο ιησους απο της γαλιλαιας επι τον ιορδανην προς τον ιωαννην του βαπτισθηναι υπ αυτου

라틴어Vulgate,13 tunc venit Iesus a Galilaea in Iordanen ad Iohannem ut baptizaretur ab eo

히브리어Modern,13 ויבא ישוע מן הגליל הירדנה אל יוחנן להטבל על ידו׃

성 경: [마3:13]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이 때에(*, 토테) – 세례 요한의 등장(1절)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현재 접속사를 사용하여 전절과 적접 연결된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이 절정에 달해 있을 바로 그때에 예수께서 오셨다는 의미이다.

󰃨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 이 장면의 평행 구절인 막 1:9에는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본서 2:23의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라는 말과 연결시켜 볼 때 예수께서 애굽에서 귀국하신 이래 계속해서 나사렛 동네에 거주하고 계셨음을 알 수있다. 한편 요단강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 ‘톤'(*)이 제시된 것은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세례 사역지로 잘 알려진 요단강의 바로 그 지점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행위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메시야적 소명을 인식하고 있었으며(눅 2:49), 요한이 메시야를 위한 자신의 선구자적 소명을 자각하고 있듯이(11절)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죄에 대해서 무관하신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가 이다. 이는 예수께서 개인적인 죄 의식을 느끼셨기 때문이(Bauer, Strauss) 아니고, 요한의 세례를 보증하기 위한 것도(Kuinoel, Kern) 아니고, 그가 율법에 복종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Hoffmann, Krabbe, Osiander)도 아니다. 예수의 수세(受洗)의 참 뜻은 말씀에 표현한 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요(15절;신 6:25), 그가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시기(사 53:4-6) 위함이다.

호 데 요안네스 디에콜뤼엔 아우톤 레곤 에고 크레이안 에코 휘포 수 밮티스데나이 카이 쉬 에르케 프로스 메

개역개정,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새번역,14 그러나 요한은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렸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14 그러나 요한은 이를 말리면서 예수께 말했습니다. “제가 오히려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게 오시다니요!”

가톨릭성경,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영어NIV,14 But John tried to deter him, saying, “I need to be baptized by you, and do you come to me?”

영어NASB,14 But John tried to prevent Him, saying, “I have need to be baptized by You, and do You come to me?”

영어MSG,14 John objected, “I’m the one who needs to be baptized, not you!”

영어NRSV,14 John would have prevented him, saying, “I need to be baptized by you, and do you come to me?”

헬라어신약Stephanos,14 ο δε ιωαννης διεκωλυεν αυτον λεγων εγω χρειαν εχω υπο σου βαπτισθηναι και συ ερχη προς με

라틴어Vulgate,14 Iohannes autem prohibebat eum dicens ego a te debeo baptizari et tu venis ad me

히브리어Modern,14 ויוחנן חשך אותו לאמר אני צריך להטבל על ידך ואתה בא אלי׃

성 경: [마3:14]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말려(*, 디에코뤼엔) – 미완료 과거형으로 그저 한번 ‘말려보는'(*, 코뤼오) 정도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집요하게 만류했음을 암시한다. 요한은 예수의 종교적, 윤리적인 우월성과 순결한 자태에 강렬한 인상을 받고 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지극히 비천함을 느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세례 요한은 30년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던 일(눅 1:39-45) 그리고 예수가 자기의 출생 사건보다 더 놀라운 출생 사건을 통해 태어났으며, 어린아이로서는 경이로운 성경 지식을 가졌었다는 사실(눅 2:41-52)을 알고 있었올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직.간접의 지식보다 자신 앞에 서신 예수를 직접 대면하고나서 그의 탁월한 성결성과 영적 심화력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한은 성령의 하강(descent)하시는 신적 표적이 있기전까지는 아직 예수의 메시야성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요 1:31-32의 평행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세례 받는 것을 만류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요한은 예수가 메시야이신 것을 알아보고 그에게서 성령과 불로 세례 받기를 원하였다. 이 견해는 마태복음의 주제가 성령이 아니고 의(義)란 점에서 동감하기 어렵다. 예수의 답변을 보더라도(15절) ‘의’가 강조되고 있다. 더욱이 마태는 예수가 누구에게나 성령과 불의 세례를 주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춰 기록하고 있는것이다. 사실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행 2장) 이후였기 때문에 마태는 성령의 세례가 주어진 것은 그가 기록하려는 시대보다 뒤의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11:2-12에서는 세례 준 후에도 요한이 예수를 완전히 ‘알지’ 못하였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2) 요한의 세례는 종말론적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니라, 죄의 고백과 회개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은 겸손한 인물로서 예수가자기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는 알고 있었으나 예수에게는 회개해야 할 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예수가 자기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실로 마태는 요한이 언제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깨달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태는 예수의 무죄함과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 세례 요한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요한이 흠(欠)이 있는 자신으로서는 순결 무흠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었다.

아포크리데이스 데 호 예수스 에이펜 프로스 아우톤 아페스 아르티 후토스 가르 프레폰 에스틴 헤민 플레로사이 파산 디카이오쉬넨 토테 아피에신 아우톤

개역개정,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새번역,15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그제서야 요한이 허락하였다.

우리말성경,15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 그러자 요한은 그대로 따랐습니다.

가톨릭성경,15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영어NIV,15 Jesus replied, “Let it be so now; it is proper for us to do this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Then John consented.

영어NASB,15 But Jesus answering said to him, “Permit it at this time; for in this way it is fitting for us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Then he permitted Him.

영어MSG,15 But Jesus insisted. “Do it. God’s work, putting things right all these centuries, is coming together right now in this baptism.” So John did it.

영어NRSV,15 But Jesus answered him, “Let it be so now; for it is proper for us in this way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Then he consented.

헬라어신약Stephanos,15 αποκριθεις δε ο ιησους ειπεν προς αυτον αφες αρτι ουτως γαρ πρεπον εστιν ημιν πληρωσαι πασαν δικαιοσυνην τοτε αφιησι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15 respondens autem Iesus dixit ei sine modo sic enim decet nos implere omnem iustitiam tunc dimisit eum

히브리어Modern,15 ויען ישוע ויאמר אליו הניחה לי כי כן נאוה לנו למלא כל הצדקה וינח לו׃

성 경: [마3:15]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이제 허락하라 – 본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최초의 말씀이다. 여기서 ‘이제'(*, 알티)라는 말은 특별한 시점을 암시하고 있다. 즉 예수는 요한의 반대(14절)가 원칙적으로 옳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제'(지금), 즉 구속사 중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는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가 종의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 보여야 했고, 그분이 스스로 벡성들과 같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셔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수세(受洗) 전부터 자신의 메시야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여하튼 메시야이신 주님만이 이러한 명령을 세례 요한에게 할 수있었다. 실로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를 베풂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아버지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자신을 복종시킨 자가 된 것이다.

󰃨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 예수께서 ‘나’라는 1인칭 단수 명사를 쓰시지 않고 ‘우리’라는 복수 형태를 취하신 것은 예수와 요한, 곧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모든 의를 이루어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이어지는 ‘이와 같이 하여’란 말은 단순히 세례와 같은 어떤 절차를 강조하는 말이라기 보다 모든 의를 이루기위한 순종의 자세, 또는 순종의 마음을 강조한 말이다.

󰃨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 여기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1) 예수의 세례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의’를 성취하는 것이다(O. Cullmann). 이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사 53:13-53:12)에도 나타나듯이 예수가 당할 죽음의 세례를 예시한 것이다. 그러나 ‘의’를 예수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2) 예수는 하나님의 명령(‘모든 의’)을 모두 순종(‘이루다’)해야 했으며 세례도 그 명령 중 하나이다. 이 견해는 세례가 ‘의’가 아니라 ‘회개와 죄의 고백’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는 부적당하다. 가장 적당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3)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뜻(‘모든 의’)이며, 예수께서 요한과 함께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사적 생애를 마감하고 메시야 직무를 수행하는 공생애로 들어가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Bruce, Erdman). 더욱이 예수의 수세의 주제는 모든 죄인을 대신한 고난이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적 메시지에 따르면 예수는 고난받는 종(사 42:1-9;49:1-6; 50:4-9;52:13-53:12)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은 세례를 베푼 후 즉시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 불렀고, 예수 자신도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세례로 표현했다(눅 12:50).

󰃨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요한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예수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무흠한 신성(神性)의 소유자이시지만, 그분 곧 메시야에게 합당한 세례를 베푼다. 이로써 예수와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동역자의 선상에 서게 된다. 한편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데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이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즉 공생애에 앞서 예수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직의 자격과 능력이 구비되었으나 인간적 수준에서 또 인간들의 이해를 위해서도 교회의 선한 전승(inheritance)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이런 예수의 자세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16절의 성령 강림과 17절의 천성(天聲)을 통해 예수가 모든 의를 갖추신 자임을 공표(公表)하셨다. (2) 이를 통해 세례 요한은 메시야가 도래했음과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공적으로 선언했다(요 1:31-34). (3) 회개, 세례가 필요없었던 예수는 수세를 통해 죄로 타락된 인간과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켰고 우리를 대신하는 일을 시작하셨다(고후 5:21). (4)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를 믿는 자에게 보이신 수세의 모범이었다.

밮티스데이스 데 호 예수스 유뒤스 아네베 아포 투 휘다토스 카이 이두 에네오크데산 아우토 호이 우라노이 카이 에이덴 토 프뉴마 투 데우 카타바이논 호세이 페리스테란 카이 에르코메논 엪 아우톤

개역개정,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새번역,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셨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속에서 올라오셨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자신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가톨릭성경,16 예수님께서는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영어NIV,16 As soon as Jesus was baptized, he went up out of the water. At that moment heaven was opened,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lighting on him.

영어NASB,16 After being baptized, Jesus came up immediately from the water; and behold, the heavens were opened,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as a dove and lighting on Him,

영어MSG,16 The moment Jesus came up out of the baptismal waters, the skies opened up and he saw God’s Spirit–it looked like a dove–descending and landing on him.

영어NRSV,16 And when Jesus had been baptized, just as he came up from the water, suddenly the heavens were opened to him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alighting on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6 και βαπτισθεις ο ιησους ανεβη ευθυς απο του υδατος και ιδου ανεωχθησαν αυτω οι ουρανοι και ειδεν το πνευμα του θεου καταβαινον ωσει περιστεραν και ερχομενον επ αυτον

라틴어Vulgate,16 baptizatus autem confestim ascendit de aqua et ecce aperti sunt ei caeli et vidit Spiritum Dei descendentem sicut columbam venientem super se

히브리어Modern,16 ויהי כאשר נטבל ישוע וימהר לעלות מן המים והנה נפתחו לו השמים וירא את רוח אלהים יורדת כיונה ונחה עליו׃

성 경: [마3:16]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예수께서…곧…올라오실세 – ‘곧'(*, 유뒤스)은 ‘올라오실세'(*, 아네베)에 속하는 말로서 예수가 세례받은 후 곧바로 물에서 나왔다는 사실 뿐 아니라 성령의 증거도 역시 즉각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그런 점에서 이 말은 성령이 임하실 때에는 그가 물 속에 있지 않고 강둑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물에서 올라 오실세’란 말을 근거로 예수의 침례설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례를 준다’는 뜻의 ‘배티조'(*)란 단어는 원래 ‘잠그다’의 의미뿐 아니라 ‘물로 무엇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도 지닌다(막 7:4;딛 3:5). 그리고 관용적으로 어떤 것에 충만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적 접근을 통해 예수의 수세를 침례 또는 세례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그 자체가 지니는 영적 의미와 거룩한 정신을 외면한 채 세례냐 침례냐의 어떤 외적 의식만을 절대적 규준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세례의 참의미를 무시하는 형식주의적 독선이 될 수 있다. 한편 ‘올라 오실새’는 비둘기같이 ‘내려'(*, 에르코메논)란 말과 연결되어 마치 땅과 하늘이 화답하는 것같은 미묘한 대조를 이룬다.

󰃨 하늘이 열리고(*, 아네와데산 아우토) – 이 구절은 구약성경의 환상들(사 64:1;겔 1:1;행 7:56;계 4:1;19:11)을 연상시킨다. 고대 신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표현은 ‘모든 의를 이루신’ 예수께 대한 하나님의 비상(非常)하신 역사 개입이지 예수의 한낱 환상이 아니다. 한편 어떤 사본들(에브라임, 베자)에는 이 부분이 ‘하늘이 그에게 열리고’로 표현되어 하늘이 예수에게만 국한되어 열렸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즉 다른 그 누구도 아무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 이때 예수의 선지자였던 요한은 하늘의 열림을 직접 목격했었을 것이다(Olshausen). 그리고 대중들도 하늘의 열림과 동시에 하늘로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인류의 조상이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창 3:24) 극히 부분적으로만 열렸던 하늘이 예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열려 하나의 새릅고 신비한 교제(交際)가 가능케 된 사실을 강조해주고 있다.

󰃨 비둘기같이(*, 호세이 페리스테란) – 여기 사용된 직유법은 성령과 비둘기를 명백히 관련시킨다. 즉 이 말은 성령 강림의 방식이 비둘기 같다는 뜻도 되고, 성령이 비둘기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는 뜻일수도 있다. 누가복음에는 후자의 견해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형체로'(*, 소마티코 에이데이)가 첨가되어 있다. 한편 성령에 관하여 이와 같은 유추적 표현이 나오는 구약성경은 창 1:2 뿐이다. 탈무드(Talmud)에는 창1:2이 ‘하나님의 신은 비둘기같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로 해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어느 합리주의자는 비둘기 한마리가 예수의 머리 위에 날개치고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이것이 환상적 장면이든 아니든 분명 성령이 신인(God-Man)이신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도록 돕기 위해 예수 위에 임하신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성령의 적극적이고도 완전한 후원을 받으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는 ‘예수의 참 인간으로써 합당한 은사인 성령을 받으심으로 공생애의 첫 발을 내디디셨다. 주관적으로 볼 때 신인을 연합시킨 성령이 육화(肉化)하신 말씀(예수) 위에 임하셨고,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계시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Pulpit Commentary).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비둘기는 성령의 교통하는 힘의 온유(11:29)와 순결(1:16)과 생명의 충만(창 1:2;요 7:37-39)을 상징하는데, 이것들은 예수의 품성과 사역의 특질과 좋은 비교가 되고 있다.

󰃨 자기 위에 임하심 – 예수께 성령이 임하심은 시 45:7에 예언된 관유(灌油, 기름부음)의 성취였다. 실로 율법에 있어서도 흠 잡을 것이 없는 예수께서는 율법에 정한 나이 30세(민 4:3) 때에 공개적 절차를 통해 공식적인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심으로 우리의 선지자, 대제사장, 왕으로서 취임하셨던 것이다(Luther). 여기에서 물과 불과 성령의 삼각 세례가 완성되었다(Alford).

카이 이두 포네 에크 톤 우라논 레구사 후토스 에스틴 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엔 호 유도케사

개역개정,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새번역,17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였다. / ㉩또는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자다’

우리말성경,17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한다.”

가톨릭성경,17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영어NIV,17 And a voice from heaven said, “This is my Son, whom I love; with him I am well pleased.”

영어NASB,17 and behold, a voice out of the heavens said,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pleased.”

영어MSG,17 And along with the Spirit, a voice: “This is my Son, chosen and marked by my love, delight of my life.”

영어NRSV,17 And a voice from heaven said, “This is my Son, the Beloved, with whom I am well pleased.”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ι ιδου φωνη εκ των ουρανων λεγουσα ουτος εστιν ο υιος μου ο αγαπητος εν ω ευδοκησα

라틴어Vulgate,17 et ecce vox de caelis dicens hic est Filius meus dilectus in quo mihi conplacui

히브리어Modern,17 והנה קול מן השמים אומר זה בני ידידי אשר רצתה נפשי בו׃

성 경: [마3:17]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헬라어 원문에는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감탄사 ‘보라'(*, 이두)가 문두에 언급되어 있다. 이 ‘이두’는 어떤 사건의 중요성.급작성을 강조하거나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본문에서는 위의 두기능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 하늘로서 소리 – 본문의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에 관해 어떤 학자들은 랍비 문학과 연관시켜 해석하려 한다. 즉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였던 영(靈)과 예언자가 잠잠해진 400년동안의 침묵기에 하나님의 영의 소리를 반영해 전달해 주는 수단을 통털어 히브리어로 ‘바트콜'(*)이라 불렀는데, 번역하면 ‘소리의 딸’이란 의미이다. 물론 그 수단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본문을 단순한 ‘바트 콜’, 즉 지금까지 있어 왔던 평범한 하늘의 계시정도로만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이보다 더 강력하다. 실로 이 ‘소리'(*, 포네)는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침묵을 깨뜨리시고 다시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는 계시이다. 결국 이것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분명한 징조요, 그것을 공적으로 입증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소리였던 것이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이 말은 소위 ‘고난받는 종의 노래’라 일컬어지는 사 42:1을 반영하고 있으며, ‘너는 내 아들이라’고 노래한 시 2:7의 변형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에 들려진 하늘의 소리는, 곧 그를 ‘고난받는 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여기 ‘이는 내 아들이요’라는 말은 예수 주위에 있는 어떤 다른 사람도 하늘의 증거를 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아마도 많은 무리가 있었는지 모른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태의 주관심사가 아니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내 아들’로 부르심으로 2:15을 확인하고 있고 다음 장에서 사단에 의해 즉시 사용되게 된다(4:3, 6). 이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아들로 공적 인준(認准)을 받고 신격(神格)의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확증된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 성령, 성삼위의 거룩한 해후(邂逅)가 이루어지며, 성부의 음성은 변화산상(17:5)에서와 수난기간(요 12:28)에 다시 들린다. 한편 영지주의자들(Gnostics)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성령 강림이 있은 후 위와같은 하나님의 공적인 인준이 있기 전까지 육체에 속한 한 자연인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예수가 하나님의 인준으로 신적 본질을 가지게 되었지만 십자가 상에서 성부 하나님의 버리심을 고백(27:46)할 때에 그 신성이 다시 벗겨졌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요일 4:2,3). 그러나 이는 예수의 영원 현존성과 영원하신 신성을 간과한 이단적 견해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아들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령을 반영한 용어인 ‘사랑하는'(*, 아가페토스)이란 말은 질적인 측면을 강조한 ‘유일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기뻐하는'(*, 유도케사)이 초시간적인 부정과거인 점으로 보아 이 ‘사랑하는’이란 용어는 심정적인 측면 뿐 아니라 ‘선택’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직역하면 ‘내가 그를 선택함으로 인해 기뻐하였던 자’이다. 이는 메시야를 시간이 있기 전, 곧 영원 전에 선택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영원성을 강력히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요단강에 성육신(Incarnation)하여 우뚝 서 계신 아들의 영원한 신적 선택의 위대한 역사적 사실이 성부 하나님에 의해 선포된 것이다. 정녕 아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될 때 아버지께서는 감추어진 방법으로 그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백성들의 대표자이며, 고난받는 종으로 동시에 나타내 보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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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제3장 주석(고경태 목사)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광야에서 회개를 촉구하는 요한의 사역은 기이한 일이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을 선언했다(11절). 메시아께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사역을 한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선포했다(2절). 참고로 마태복음에서 천국(the Kingdom of heavens)이고,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나오지 않는다. 천국은 주기도문에서 충만하게 나타난다.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은 회개처럼 보이지만, 회개를 위해서 예수의 구속 사역이 성취되어야 한다(행 2장). 회개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관문이다. 예루살렘에 거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리고 모든 유대인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둘째, 요한은 그들에게 참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요구했다(8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메시아를 믿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을 향해서 세례 요한은 긴박한 심판을 선언했다.(참고 계 1:1, 7). 하나님의 심판이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있는 것처럼, 열매 없는 나무는 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다(10절). 요한은 아브라함이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촉구했다(9절, 눅 3:8). 이것은 마치 새관점학파가 “아브라함 자손”을 주장하는 것을 예견한 듯하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메시아인가? 생각하기도 했다(눅 3:15).

1.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회개를 선언했다(1-2절). 세례 요한이 말라기가 예언한 엘리야로서 말라기 4장에서 예언한 아버지의 마음을 돌이키고, 그들의 마음을 아버지께 돌이키는 사역을 했다(말 4:6). 세례 요한이 선포한 회개 촉구는 메시아를 그릇되게 기다리는 사상이었다. 예수께서도 회개를 촉구했는데, 오신 메시아를 믿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가르친 회개를 잘 따랐다면 오신 메시아를 잘 믿었을 것이다.

[마태복음 3장 헬라어 주석강해]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식(마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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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3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식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공생애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사생애 기간은 요셉과 함께 했고 이제는 공생애의 시작은 성부 하나님과 시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 있을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계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있고 성령 하나님은 비둘기 같이 내렸고 성자 하나님인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음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식(마 3:13-17)

13절은 토테 파라기네타이 호 이에수스 아포 테스 갈릴라이아스 에피 톤 이오르다넨 프로스 톤 이요안넨 투 밥티스데나이 휘프 아우투입니다.

마 3: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3:13

이때에(토테) – 세례 요한의 등장(1절)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현재 접속사를 사용하여 전절과 직접 연결된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이 절정에 달해 있을 바로 그때에 예수께서 오셨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 이 장면의 평행 구절인 막 1:9에는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본서 2:23의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라는 말과 연결시켜 볼 때 예수께서 애굽에서 귀국하신 이래 계속해서 나사렛 동네에 거주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요단강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 ‘톤’이 제시된 것은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세례 사역지로 잘 알려진 요단강의 바로 그지점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행위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메시아적 소명을 인식하고 있었으며(눅 2:49), 요한이 메시아를 위한 자신의 선구자적 소명을 자각하고 있듯이(11절)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죄에 대해서 무관하신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가이다. 이는 예수께서 개인적인 죄의식을 느끼셨기 때문이(Bauer, Strauss) 아니고, 요한의 세례를 보증하기 위한 것도(Kuinoel, Kern) 아니고, 그가 율법에 복종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Hoffmann, Krabbe, Osiander)도 아니다.

예수의 수세(受洗)의 참 뜻은 말씀에 표현한 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요(15절; 신 6:25), 그가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시기(사 53:4-6) 위함이다.

14절은 호 데 이오안네스 디에콜뤼엔 아우톤 레곤 에고 크레이안 에코 휘포 수 밥티스데나이 카이 쉬 에르케 프로스 메입니다.

마 3: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3:14

말려(디에콜뤼엔) – 미완료 과거형으로 그저 한번 ‘말려보는'(콜뤼오) 정도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집요하게 만류했음을 암시한다. 요한은 예수의 종교적, 윤리적인 우월성과 순결한 자태에 강렬한 인상을 받고 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지극히 비천함을 느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세례 요한은 30년 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던 일(눅 1:39-45) 그리고 예수가 자기의 출생 사건보다 더 놀라운 출생 사건을 통해 태어났으며, 어린 아이로서는 경이로운 성경 지식을 가졌었다는 사실(눅 2:41-52)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직. 간접의 지식보다 자신 앞에 서신 예수를 직접 대면하고 나서 그의 탁월한 성결성과 영적 심화력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한은 성령의 하강(descent) 하시는 신적 표적이 있기 전까지는 아직 예수의 메시아 성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요 1:31-32의 평행 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세례 받는 것을 만류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요한은 예수가 메시아이신 것을 알아보고 그에게서 성령과 불로 세례 받기를 원하였다.

이 견해는 마태복음의 주제가 성령이 아니고 의(義)란 점에서 동감하기 어렵다. 예수의 답변을 보더라도(15절) ‘의’가 강조되고 있다. 더욱이 마태는 예수가 누구에게나 성령과 불의 세례를 주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춰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행 2장) 이후였기 때문에 마태는 성령의 세례가 주어진 것은 그가 기록하려는 시대보다 뒤의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11:2-12에서는 세례 준 후에도 요한이 예수를 완전히 ‘알지’ 못하였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2) 요한의 세례는 종말론적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니라, 죄의 고백과 회개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은 겸손한 인물로서 예수가 자기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는 알고 있었으나 예수에게는 회개해야 할 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예수가 자기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실로 마태는 요한이 언제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깨달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태는 예수의 무죄함과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 세례 요한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요한이 흠(欠)이 있는 자신으로서는 순결 무흠 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었다.

15절은 아포크리데이스 데 호 이에수스 에이펜 프로스 아우톤 아페스 아르티 후토스 가르 프레폰 에스틴 헤민 플레로사이 파산 디카이오쉬넨 토테 아피에신 아우톤입니다.

마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3:15

이제 허락하라 – 본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최초의 말씀이다. 허락하라는 단어가 아피에미이다. 놓아주다는 뜻이다. 명령법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주님이 세례 요한에게 명령하여 반드시 세례를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과거 시제는 이미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공생애의 사역이 시작될 것이 작정되었다는 의미다.

여기서 ‘이제'(아르티)라는 말은 특별한 시점을 암시하고 있다. 즉 예수는 요한의 반대(14절)가 원칙적으로 옳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제'(지금), 즉 구속사 중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는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가 종의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 보여야 했고, 그분이 스스로 백성들과 같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셔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수세(受洗) 전부터 자신의 메시아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여하튼 메시아이신 주님만이 이러한 명령을 세례 요한에게 할 수 있었다. 실로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를 베풂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아버지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자신을 복종시킨 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 예수께서 ‘나’라는 1인칭 단수 명사를 쓰시지 않고 ‘우리’라는 복수 형태를 취하신 것은 예수와 요한, 곧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모든 의를 이루어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이어지는 ‘이와 같이 하여’란 말은 단순히 세례와 같은 어떤 절차를 강조하는 말이라기보다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한 순종의 자세, 또는 순종의 마음을 강조한 말이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 여기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1) 예수의 세례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의’를 성취하는 것이다(O. Cullmann).

이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사 53:13-53:12)에도 나타나듯이 예수가 당할 죽음의 세례를 예시한 것이다. 그러나 ‘의’를 예수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2) 예수는 하나님의 명령(‘모든 의’)을 모두 순종(‘이루다’) 해야 했으며 세례도 그 명령 중 하나이다. 이 견해는 세례가 ‘의’가 아니라 ‘회개와 죄의 고백’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는 부적당하다. 가장 적당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3)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뜻(‘모든 의’)이며, 예수께서 요한과 함께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사적 생애를 마감하고 메시아 직무를 수행하는 공생애로 들어가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Bruce, Erdman). 더욱이 예수의 수세의 주제는 모든 죄인을 대신한 고난이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적 메시지에 따르면 예수는 고난 받는 종(사 42:1-9; 49:1-6; 50:4-9; 52:13-53:12)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은 세례를 베푼 후 즉시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라 불렀고, 예수 자신도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세례로 표현했다(눅 12:50).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요한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예수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무흠 한 신성(神性)의 소유자이시지만, 그분 곧 메시아에게 합당한 세례를 베푼다. 이로써 예수와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동역자의 선상에 서게 된다.

한편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데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이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즉 공생애에 앞서 예수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직의 자격과 능력이 구비되었으나 인간적 수준에서 또 인간들의 이해를 위해서도 교회의 선한 전승(inheritance)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이런 예수의 자세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16절의 성령 강림과 17절의 천성(天聲)을 통해 예수가 모든 의를 갖추신 자임을 공표(公表)하셨다. (2) 이를 통해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도래했음과 메시아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공적으로 선언했다(요 1:31-34).

(3) 회개, 세례가 필요 없었던 예수는 수세를 통해 죄로 타락된 인간과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켰고 우리를 대신하는 일을 시작하셨다(고후 5:21). (4)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를 믿는 자에게 보이신 수세의 모범이었다.

16절은 카이 밥티스데이스 호 이에수스 아네베 유뒤스 아포 투 휘다토스 카이 이두 아네오크데산 아우토 호이 우라노이 카이 에이덴 토 프뉴마 투 데우 카타바이논 호세이 페리스테란 카이 엘코메논 에프 아우톤입니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3:16

예수께서… 곧… 올라오실새 – ‘곧'(유뒤스)은 ‘올라오실새'(아네베)에 속하는 말로서 예수가 세례 받은 후 곧바로 물에서 나왔다는 사실뿐 아니라 성령의 증거도 역시 즉각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이 말은 성령이 임하실 때에는 그가 물속에 있지 않고 강둑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물에서 올라오실새’란 말을 근거로 예수의 침례설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례를 준다’는 뜻의 ‘밥티조’란 단어는 원래 ‘잠그다’의 의미뿐 아니라 ‘물로 무엇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도 지닌다(막 7:4; 딛 3:5). 그리고 관용적으로 어떤 것에 충만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적 접근을 통해 예수의 수세를 침례 또는 세례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그 자체가 지니는 영적 의미와 거룩한 정신을 외면한 채 세례냐 침례냐의 어떤 외적 의식만을 절대적 규준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죄 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세례의 참 의미를 무시하는 형식주의적 독선이 될 수 있다.

한편 ‘올라오실새’는 비둘기같이 ‘내려'(에르코메논)란 말과 연결되어 마치 땅과 하늘이 화답하는 것 같은 미묘한 대조를 이룬다.

하늘이 열리고(아네오크데산 아우토) – 이 구절은 구약성경의 환상들(사 64:1; 겔 1:1; 행 7:56; 계 4:1; 19:11)을 연상시킨다. 문법은 직설법 현재 능동태를 사용하고 있다. 직설법은 하늘이 실제로 주님이 세례를 받을 때 열렸다는 의미다. 현재 시제를 사용했으니 그 당시에 열렸음을 말한다.

고대 신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표현은 ‘모든 의를 이루신’ 예수께 대한 하나님의 비상(非常)하신 역사 개입이지 예수의 한낱 환상이 아니다. 한편 어떤 사본들(에브라임, 베자)에는 이 부분이 ‘하늘이 그에게 열리고’라로 표현되어 하늘이 예수에게만 국한되어 열렸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즉 다른 그 누구도 아무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 이때 예수의 선지자였던 요한은 하늘의 열림을 직접 목격했었을 것이다(Olshausen). 그리고 대중들도 하늘의 열림과 동시에 하늘로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인류의 조상이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창 3:24) 극히 부분적으로만 열렸던 하늘이 예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열려 하나의 새롭고 신비한 교제(交際)가 가능케 된 사실을 강조해주고 있다.

비둘기같이(호세이 페리스테란) – 여기 사용된 직유법은 성령과 비둘기를 명백히 관련시킨다. 즉 이 말은 성령 강림의 방식이 비둘기 같다는 뜻도 되고, 성령이 비둘기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는 뜻일 수도 있다.

누가복음에는 후자의 견해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형체로'(소마티코 에이데이)가 첨가되어 있다. 한편 성령에 관하여 이와 같은 유추적 표현이 나오는 구약성경은 창 1:2 뿐이다. 탈무드(Talmud)에는 창 1:2이 ‘하나님의 신은 비둘기 같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로 해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어느 합리주의자는 비둘기 한 마리가 예수의 머리 위에 날개치고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이것이 환상적 장면이든 아니든 분명 성령이 신인(God-Man)이신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도록 돕기 위해 예수 위에 임하신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성령의 적극적이고도 완전한 후원을 받으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는 ‘예수의 참 인간으로서 합당한 은사인 성령을 받으심으로 공생애의 첫 발을 내디디셨다.

주관적으로 볼 때 신인을 연합시킨 성령이 육화(肉化)하신 말씀(예수) 위에 임하셨고,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계시되셨다’라고 설명하고 있다(Pulpit Commentary).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비둘기는 성령의 교통 하는 힘의 온유(11:29)와 순결(1:16)과 생명의 충만(창 1:2; 요 7:37-39)을 상징하는데, 이것들은 예수의 품성과 사역의 특질과 좋은 비교가 되고 있다.

자기 위에 임하심 – 예수께 성령이 임하심은 시 45:7에 예언된 관유(灌油, 기름 부음)의 성취였다. 실로 율법에 있어서도 흠잡을 것이 없는 예수께서는 율법에 정한 나이 30세(민 4:3) 때에 공개적 절차를 통해 공식적인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가 되심으로 우리의 선지자, 대제사장, 왕으로서 취임하셨던 것이다(Luther). 여기에서 물과 불과 성령의 삼각 세례가 완성되었다(Alford).

17절은 카이 이두 포네 에크 톤 우라논 레구사 후토스 에스틴 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엔 호 유도케사입니다.

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3:17

헬라어 원문에는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감탄사 ‘보라'(이두)가 문두에 언급되어 있다. 이 ‘이두’는 어떤 사건의 중요성. 급작성을 강조하거나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본문에서는 위의 두 기능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하늘로서 소리 – 본문의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에 관해 어떤 학자들은 랍비 문학과 연관시켜 해석하려 한다. 즉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였던 영(靈)과 예언자가 잠잠해진 400년 동안의 침묵기에 하나님의 영의 소리를 반영해 전달해 주는 수단을 통틀어 히브리어로 ‘바트콜’이라 불렀는데, 번역하면 ‘소리의 딸’이란 의미이다.

물론 그 수단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본문을 단순한 ‘바트 콜’, 즉 지금까지 있어 왔던 평범한 하늘의 계시 정도로만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이보다 더 강력하다. 실로 이 ‘소리'(포네)는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침묵을 깨뜨리시고 다시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는 계시이다.

결국 이것은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분명한 징조요, 그것을 공적으로 입증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소리였던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이 말은 소위 ‘고난 받는 종의 노래’라 일컬어지는 사 42:1을 반영하고 있으며, ‘너는 내 아들이라’라고 노래한 시 2:7의 변형 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에 들려진 하늘의 소리는, 곧 그를’고난 받는 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여기 ‘이는 내 아들이요’라는 말은 예수 주위에 있는 어떤 다른 사람도 하늘의 증거를 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아마도 많은 무리가 있었는지 모른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태의 주 관심사가 아니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내 아들’로 부르심으로 2:15를 확인하고 있고 다음 장에서 사단에 의해 즉시 사용되게 된다(4:3, 6).

이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아들로 공적 인준(認准)을 받고 신격(神格)의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확증된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 성령, 성삼위의 거룩한 해후(邂逅)가 이루어지며, 성부의 음성은 변화산상(17:5)에서와 수난 기간(요 12:28)에 다시 들린다.

한편 영지주의자들(Gnostics)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성령 강림이 있은 후 위와 같은 하나님의 공적인 인준이 있기 전까지 육체에 속한 한 자연인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의 인준으로 신적 본질을 가지게 되었지만 십자가 상에서 성부 하나님의 버리심을 고백(27:46)할 때에 그 신성이 다시 벗겨졌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요일 4:2,3).

그러나 이는 예수의 영원 현존성과 영원하신 신성을 간과한 이단적 견해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아들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령을 반영한 용어인 ‘사랑하는'(아가페토스)이란 말은 질적인 측면을 강조한 ‘유일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다음에 나오는 ‘기뻐하는'(유도케사)이 초시간적인 부정과거인 점으로 보아 이 ‘사랑하는’이란 용어는 심정적인 측면뿐 아니라 ‘선택’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직역하면 ‘내가 그를 선택함으로 인해 기뻐하였던 자’이다.

이는 메시아를 시간이 있기 전, 곧 영원 전에 선택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영원성을 강력히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요단강에 성육신(Incarnation)하여 우뚝 서 계신 아들의 영원한 신적 선택의 위대한 역사적 사실이 성부 하나님에 의해 선포된 것이다.

정녕 아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될 때 아버지께서는 감추어진 방법으로 그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백성들의 대표자이며, 고난 받는 종으로 동시에 나타내 보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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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3장

<마태복음 3장 흐름정리>

침례 요한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침례를 기록하고 있는 3장은, 그리스도의 본격적인 사역으로 넘어가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 침례 요한의 사역은 천국 선포, 회개 촉구, 침례 등으로 요약된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비하고 그의 등장을 자연스럽게 안내한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직전에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음으로써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과 같이 되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고자 하신 당신의 겸손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순종을 나타내 보이셨다.

<마태복음 3장 줄거리>

1. 침례 요한이 자신의 직임과 침례에 대해 선포함.

7. 침례 요한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함.

13. 요단강에서 예수에게 침례를 베풂.

<마태복음 3장 도움말>

* 1절 : 그 때에[그 무렵].

예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실 때(2:23)를 말함. 예수는 “삼십 세쯤 되”었을 때 공중봉사를 시작했다. 이때는 AD 27년 가을이었다. 요한이 예수보다 약 6개월 먼저 태어났으므로 6개월 먼저 공중봉사를 시작했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요한은 같은 해 봄, 아마도 유월절경에 공중봉사를 시작했을 것이다.

* 1절 : 침례 요한.

예수는 요한에 대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눅 7:28)라고 언급했다. 그는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였다. 백성들을 움직이는 요한의 영향력은 엄청나서 결국 헤롯 안티파스도 처음에는 그를 해치는 것을 주저했으며, 유대의 지도자들도 그에 대해 공공연하게 반대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 2절 : 회개하라.

문자적으로는 “후에 다르게 생각하다”이며, 따라서 “마음을 바꾸다”, “목적을 바꾸다”를 의미한다. 비록 요한의 설교에서 죄의 고백이 강조되고 있지만(6절), 회개란 죄의 고백 이상을 포함한다. 신학적으로 이 단어는 마음의 변화뿐만 아니라 의지의 새로운 방향 전환, 즉 변화된 목적과 태도를 포함한다.

* 3절 : 주의 길을 예비[준비]하라.

요한은 “천국”이 수립될 것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2절) 그 나라 왕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알린다. 여기에 사용된 어투는 고지된 왕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양에서는 군주가 자신의 영토 내의 어떤 곳을 방문할 때, 방문하려는 지역에 미리 사자를 보내 그의 방문이 예정되어 있음을 알리고 준비하도록 그곳 주민들을 소집했다. 평상 시에는 도로를 거의 보수하지 않았으므로 각 지역 주민들은 왕이 지나갈 곳에 좋은 길을 “예비”하곤 했다. 동양의 어떤 곳에는 아직도 왕이나 유명한 사람들이 지나갈 곳을 보수하는 관례가 남아 있다.

* 4절 : 음식.

단순한 식사는 정신적인 강인함과 영적인 통찰력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거룩한 진리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시대의 소망, 101). 이러한 자질들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나타난 침례자 요한에게 반드시 필요했으며, 또한 오늘날 이 세상에 엘리야의 기별을 전해야 할 사람들에게도 필수적이다.

* 6절 : 자복[고백]하고.

우리가 자복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신다(요일 1:9). 침례자 요한은 온갖 종류의 죄와 잘못들에 대해 강렬한 미움을 느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아첨하는 기별을 보내지 않는다. 그것은 영생에 치명적인 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개혁의 표징 가운데 하나는 죄에 대한 진지한 회개와 그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 7절 : 바리새인[바리새파 사람].

바리새파라는 종파에 소속된 사람들. 이들은 구약의 율법과 조상의 전통을 매우 중시했으나 지나치게 형식에 치우치고 위선적이었다.

* 7절 : 사두개인[사두개파 사람].

정치적 당파인 사두개파에 소속된 사람들. 귀족 정치적인 견해를 표방하고, 국가의 세속적 야망에 강한 관심이 있었다. 모세의 율법을 경전으로 받아들이지만, 구약의 나머지 부분은 거절하고 바리새인들이 중시하는 전통의 가치도 거부했다. 산헤드린을 장악하고 제사장직을 독점한 귀족이었다.

* 9절 : 아브라함.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자만했다. 탈무드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단 한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람과 앞으로 존재할 모든 사람보다 더 귀하다. 그들은 이러한 관계가 요한과 예수가 요구한 회개와 선한 행실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았으면서도 선행에 대한 보상을 원했다. 사실, 그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대신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오랜 기간 유대인들의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받으”신다(행 10:34, 35). 오직 아브라함을 닮아 가는 사람만이 그를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 10절 : 좋은 열매.

오직 선한 사람만이 선한 습관의 열매를 키울 수 있는데, 바로 그 열매에서 선한 성품을 거둘 수 있다.

* 12절 : 알곡은 모아.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일은 “세상 끝”에 일어난다.

* 12절 : 꺼지지 않는 불에.

성경은 악한 자들이 끝없이 고통받는, 영원히 타는 불의 개념을 전달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한 자들이 완전히 소멸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영원히 타는 지옥불이 성경에서는 낯선 개념이며, 하나님의 성품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성경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선언한다(유 7장; 벧후 2:6). 그러나 그 악한 도시들을 태운 불은 오래도록 타지 않았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불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도시들은 마지막 큰 날에 있을 불이 어떠할 것인가를 보여 주는 “거울”로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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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제 3장 =====3:1 그 때에 – 이 구절의 뜻은 (1) ‘결정적인 어느 때'(Hill)를 말할 수도 있고, (2) ‘예수와 그의 가족이 나사렛에 살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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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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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세례요한의 출현 (마태복음 3:1-6) 여기에는 복음 시대를 알리는 여명이었던 세례 요한의 세례와 설교에 관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Ⅰ. 세례 요한이 출현한 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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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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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 데 타이스 헤메라이스 에케이나이스 파라기네타이 요안네스 호 밮티스테스 레뤼쏜 엔 테 에레모 테스 유다이아스 개역개정,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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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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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그리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 1.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회개를 선언했다(1-2절). 세례 요한이 말라기가 예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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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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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3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식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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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3장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ㅇ그 때에 – 이 구절의 뜻은 (1) ‘결정적인 어느 때'(Hill)를 말할 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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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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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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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3장 강해설교 중에서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세례식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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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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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 우리는 마태복음 3장에 들어서자마자 세례 요한이란 사람의 갑작스런 등장을 대하게 됩니다. 요한이란 이름은 ‘여호와 은혜 주시다’란 뜻으로 이 이름은 천사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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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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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 데 타이스 헤메라이스 에케이나이스 파라기네타이 요안네스 호 밮티스테스 레뤼쏜 엔 테 에레모 테스 유다이아스

개역개정,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새번역,1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 ㉠또는 ‘침례자’

우리말성경,1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며

가톨릭성경,1 그 무렵에 침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영어NIV,1 In those days John the Baptist came, preaching in the Desert of Judea

영어NASB,1 Now in those days John the Baptist came, preaching in the wilderness of Judea, saying,

영어MSG,1 While Jesus was living in the Galilean hills, John, called “the Baptizer,” was preaching in the desert country of Judea.

영어NRSV,1 In those days John the Baptist appeared in the wilderness of Judea, proclaiming,

헬라어신약Stephanos,1 εν δε ταις ημεραις εκειναις παραγινεται ιωαννης ο βαπτιστης κηρυσσων εν τη ερημω της ιουδαιας

라틴어Vulgate,1 in diebus autem illis venit Iohannes Baptista praedicans in deserto Iudaeae

히브리어Modern,1 בימים ההם בא יוחנן המטביל ויהי קרא במדבר יהודה לאמר׃

성 경: [마3:1]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 그 때에 – 이 구절의 뜻은 (1) ‘결정적인 어느 때'(Hill)를 말할 수도 있고, (2) ‘예수와 그의 가족이 나사렛에 살던 무렵'(Broadus)을 뜻할 수도 있다. 마태는 구약에서 어떤 특정한 시점(時點)을 나타내던 표현 방법(창 38:1;출 2:11, 23;사 38:1)의 영향을 받아 뒤에 이어지는 기록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하고자 이런 표현법을 사용한 것 같다. 한편 ‘그 때’는 2장과 약 30년의 차이가 있는 주후 28년 정도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즉, 디베료 가이사(Tiberias Caesar) 재위 15년(눅 3:1, 2) 되던 해, 곧 세례요한 내지 예수의 나이가 30세 된던 때였다. 여기서 ’30’이란 나이는 모세 율법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민 4:3, 42-45). 이는 결국 율법의 완성자요 인류 구속의 과업을 실행키 위해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의 사역을 인준해주는 하나의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된다.

󰃨 세례 요한(*, 요안네스 호 배티스테스) – 히브리어 요하난(*)이란 이름에서 유래한 ‘요한’은 제사장이자, 유대의 지도자로서 B.C.106년에 사망한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 이래로 유대인들에게 흔히 사용되는 이름이었다. 이 이름은 신약에서 4, 5명 정도 등장하는데, 특히 본문에서 ‘요한’이란 이름 앞에 ‘세례'(Baptist)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자주 나오는 다른 이름과 구별하기 위해서 일 뿐 아니라 그의 사역의 중점이 ‘세례’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히브리인의 이름에는 (1) 할례명(이 이름은 거룩한 이름으로 종교적 목적과 의식에서만 사용한다)과 (2) 개인명(個人名, 즉 세속명으로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이다) 및 (3) 그밖에 한 개인에게 관련된 공적 임무, 정신적, 신체적. 신분적, 도덕적 특성을 일컫는 이름이 있었다. 여기 ‘세례 요한’이란 이름은 바로 (3)번의 공식 임무에 관련된 직능적(職能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Jesephus)도 ‘세례자 요한’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편 세례요한은 엄격히 말해서 율법 시대에 속한 자요, 죄를 책망하여 회개를 촉구한 구약 최후의 선지자였다. 그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은혜’와 연관된 것처럼 그는 구약의 율법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의 은혜 시대를 예비하는 준비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세례 요한의 탄생 경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누가복음 1장을 참조하라.

󰃨 유대 광야에서(수 15:61;삿 1:16) – 여리고 남쪽과 사해 서쪽 고원 지대에 걸쳐 펼쳐진 황량한 석회암의 굴곡으로 되어 있는 광야이다. 군데군데 오아시스가 있고, 엔게디 근처에는 폭포도 있어 목초지로 이용되던 땅이었다(시 65:12;욜 2:22;눅 15:4). 이곳은 ‘십 황무지'(삼상 23:14, 15), ‘마온 황무지'(삼상 23:24), ‘엔게디 횡무지'(삼상 24:1), ‘예루엘 광야'(대하 20:16)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는데, 그 모든 땅이 유다 지파에 속하였기 때문에 전통에 따라 ‘유대 광야’로 지칭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 광야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칩거(蟄居) 생활을 하며 흩어져 살았는데 예수 당시의 극단적 유대교 종파의 하나인 엣세네파(the Essenes)도 그 중에 하나였다. 세례 요한의 성장지와(눅 1:80) 초기 사역지(요 3:23)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에 그를 엣세네파의 일원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유대인들의 역사성으로 볼 때 ‘광야'(Desert, NIV)는 단순히 소외된 지역으로만 여겨지지 않고 ‘예언적 의미’를 갖고 있는 특수 지역이었다. 그 예로써 율법이 광야에서 계시되었고 열심당원들(Zealots)도 광야를 은신처로 삼았었다(24:26;행21:38). 이러한 의미에서 학자들은 세례요한의 활동 무대였던 광야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고 있다(Bonnard, Maier). 더불어 ‘광야에서’란 말 중에 ‘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기네타이'(*)가 3인칭 단수 현재형으로 ‘그가…에 와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는 단순히 장소를 강조한 말이 아니라 그의 사역의 현재성을 강조한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사역의 현재성과 역사성을 생동감있게 전해주며, 그의 사역의 예언적 특성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 전파하여 – 이에 대한 헬라어 ‘케륏손'(*)은 ‘유앙겔리조마이'(*)와는 달리 말씀을 선포하는 그 자체로서의 사건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선포의 방법과 의미에 관계된 것이다. 즉 그는 메시지를 선포하되 단지 하나님께서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말씀만을 고(告)하는 것이 그의 사명의 전부이었음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그가 광야를 사역 장소로 택한 것도 하나님의 지시(사 40:3)에 따른 것이었다. 실로 세례 요한의 전파지로 택하신 광야야말로 이스라엘의 피폐(疲弊)한 영적 상태를 적절히 묘사했다 할 것이다.

카이 레곤 메타노데이테 엥기켄 가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개역개정,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새번역,2 말하기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였다.

우리말성경,2 말했습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가톨릭성경,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영어NIV,2 and saying,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near.”

영어NASB,2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영어MSG,2 His message was simple and austere, like his desert surroundings: “Change your life. God’s kingdom is here.”

영어NRSV,2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has come near.”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λεγων μετανοειτε ηγγικεν γαρ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2 et dicens paenitentiam agite adpropinquavit enim regnum caelorum

히브리어Modern,2 שובו כי מלכות השמים הגיעה׃

성 경: [마3:2]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 회개하라 – 이 말의 원어 ‘메타노에이테'(*)는 고전 헬라어에서 순수한 의미로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을 가지며, 통속적으로는 단순히 ‘무슨 일을 후회한다’라고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도입된 이 단어의 용례(用例)는 ‘새 행실로 돌아 온다’는 히브리어 ‘슈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백성들로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로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외침이다. 즉 유대인 중에도 믿음없는 자가 있고, 우상 숭배자가 있기에 그러한 불신과 영적 음행(淫行)에서 돌이키라는 구약적 의미인 것이다(Alford). 실로 이 말은 머리로서만 계획을 수정하고 감정적으로만 후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와 죄책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Turn ye) 전인격적인 참회(懺悔)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메시야를 영접하는 마음과 행위의 철두 철미한 변화 전반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의 행위가 근본적으로 올바른 궤도를 이탈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철저한 변화가 절대 요청되는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롬 3:10). 한편 이 같은 회개는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서만 참 회개임이 증명된다.

󰃨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 요한의 설교의 두번째 주제로서 회개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는 날에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구별될 것이기 때문이다(25:31-46). 따라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천국’ 또는 ‘하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톤우라논)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마가와 누가에는 ‘하나님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로 표현한다. 한편 이 표현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 왕국에서 유래한 것으로서(단 2:44;7:13, 14,27)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곧 ‘왕국'(*, 말쿠트)의 주요 의미는 ‘통치'(reign)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왕국’을 뜻하는 ‘바실레이아'(*)는 간혹 영토를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4:8) 대부분이 역동적인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암시한다. 이는 당시 천국을 영적인것으로만 해석하고 인간의 마음안에 있는 것로 간주하던 랍비들의 해석이나 메시야 왕국이 이뤄질 때 로마의 지배가 무너지고 정치적 평화와 번영이 도래하리라던 A.D. 1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의 극단적 해석과는 달리 역동적(dynamic)으로 이 땅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에서는 대적들을 멸망시키고 이 땅에 공평과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실(사 9:7) 하나님의 강림(降臨)과 통치에 대한 기대로 고조되어 (1) 다윗 언약 성취에 대한 대망으로 나타나기도 하며(삼하 7:13,14). (2) 여호와의 날로서 심판의 어두움(암 5:18,19)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 땅에 구체화될 천국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영원한 천국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본문에 제시된 세례 요한의 선포는 바로 예수의 초림으로 구체화될 천국에 관한 언급인 것이다. 한편 여기서 ‘가깝다'(*, 엥기켄)라는 말은 천국이 갖는 역동적 의미와 함께 결합되어 ‘천국은 예수와 그의 말씀과 이적과 함께 왔고, 그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왔으며, 이 시대의 종말에는 완성된 모습으로 올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하늘나라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즉 온 세계에 왔고, 마침내는 영원히 존속될 것이다. 한편 마태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피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를 꺼려했던(출 20:7) 유대인의 일반적인 완곡어법(婉曲語法) 때문일 것이다.

후토스 가르 에스틴 호 레데이스 디아 에사이우 투 프로페투 레곤토스 포네 보온토스 엔 테 에레모 헤토이마사테 텐 호돈 퀴리우 유데이아스 포이에이테 타스 트리부스 아우투

개역개정,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새번역,3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 ㉡사 40:3(칠십인역)

우리말성경,3 세례자 요한은 바로 예언자 이사야가 말했던 그 사람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의 소리가 있다. ‘주를 위해 길을 예비하라. 주의 길을 곧게 하라.’” 사40:3

가톨릭성경,3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 ”

영어NIV,3 This is he who was spoken of through the prophet Isaiah: “A voice of one calling in the desert,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make straight paths for him.’”

영어NASB,3 For this is the one referred to by Isaiah the prophet when he said, ”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 MAKE READY THE WAY OF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영어MSG,3 John and his message were authorized by Isaiah’s prophecy: Thunder in the desert! Prepare for God’s arrival! Make the road smooth and straight!

영어NRSV,3 This is the one of whom the prophet Isaiah spoke when he said, “The voice of one crying out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of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헬라어신약Stephanos,3 ουτος γαρ εστιν ο ρηθεις υπο ησαιου του προφητου λεγοντος φωνη βοωντος εν τη ερημω ετοιμασατε την οδον κυριου ευθειας ποιειτε τας τριβου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3 hic est enim qui dictus est per Esaiam prophetam dicentem vox clamantis in deserto parate viam Domini rectas facite semitas eius

히브리어Modern,3 הלא זה הוא אשר נבא עליו ישעיהו הנביא לאמר קול קורא במדבר פנו דרך יהוה ישרו מסלותיו׃

성 경: [마3:3]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 저는…자라(*, 후토스 가르 에스틴) – 본절의 내용은 2절에서 세례 요한이 천국을 전파하는 공적인 근거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본 문장은 이유와 원인을 나타내는 ‘가르'(*)에 의미를 살려 ‘왜냐하면 저가…자이기 때문에’로 고치는 것이 더욱 완전한 번역이 된다. 한편 본절은 예언과 성취라는 구조(flufillment formula)로 묘사되어지지 않은 구약 인용 구절 중의 하나이다. 즉 본문의 경우는 단순히 문자적 예언 성취가 아니라 하나의 모형적, 종말론적 성취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예언은 다른 복음서에도 공히 취급되고 있다(마 1:2, 3;눅 3:4-6;요 1:23). 특별히 세례 요한 자신은 요 1:23에서 ‘나는…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하였고, 예수께서도 마 11:10에서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하심으로써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의 궁극적인 성취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증하고있다.

󰃨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 사 40:3은 바벧론 포로 생활에서 그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뿐만 아니라 더불어 귀환하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이다(McNeile). 여기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하나님의 선구자를 가리킨다. 특별히 여기서 ‘소리’란 어떤 의지나 의미가 개입된 주체적 발언이 아니라 물리적 음파일 뿐이다. 이는 ‘로고스'(*), 곧 말씀으로 표현된 예수의 주체적 발언과 그인격을 소개하는 세례 요한의 메신저(messenger)로서의 기능을 확실히 드러내 준다. 그리고 ‘외치는 자’는 하나님이시요, 듣는 사람은 선지자 이사야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포로에서 귀한하는 것에 대한 이 예언은 온전한 성취가 못되었고,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따라서 이 예언은 필연적으로 보다 온전한 성취, 즉 메시야 왕국(하늘나라)의 선포와 도래에 관심을 갖게 된다(Alford). 여기서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단순히 역사적 측면에서의 포로 귀환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영적으로 죄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해방시키고 당신의 나라로 귀환시키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주의 길을 예비하라(*, 해토이마사테) – ‘주’를 뜻하는’퀴리오스'(*)는 하나님에 대한 신적 칭호로서 히브리어로는 ‘주인’을 뜻하는 ‘아도나이'(*)에 해당한다. 이는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된다는 십계명 중 제 3계명(출 20:7)의 금기(taboo)를 철저히 따른 것으로 여호와의 대(代)명칭이다. 한편 ‘예비하라’는 말은 정확하게 준비되었다는 뜻의 ‘헤토이모스'(*)에서 유래하여 불편함 없이 적절히 준비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시는데 불편없도록 모든 것을 ‘예비하는’ 선구자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예비된 길을 따라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천국’을 또한 ‘예비하셨다'(요 14:2, 3).

󰃨 첩경(捷徑)을 평탄케 하라 – 여기서 ‘첩경'(*, 트리부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실라'(*)는 곧게 뻗은 대로(high-way)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는 마차가 힘차게 달릴 수 있었던 ‘마차로’로 이해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 길은 분명 ‘왕의 대로’로 손색이 없는 길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어지는 ‘평탄케 하라’는 말의 헬라어 ‘유데이아스'(*)는 ‘곧다’, ‘기쁘다’, ‘바르다’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주의 길’을 회개로 표현한 은유법이다. 즉, 평탄케 하라’는 말은 단순히 물리적 측면에서 길을 곧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일치하도록 ‘바른’ 질서를 유지하며, 정의를 이루라는 말이다. 이말이 당시 세례 요한의 역할이었다면,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인 것이다.

아우토스 데 호 요안네스 에이켄 토 엔뒤마 아우투 마포 트리콘 카멜루 카이 코넨 데르마티넨 페리 텐 오스퓐 아우투 헤 데 트로페 엔 아우투 아크리데스 카이 멜리 아그리온

개역개정,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새번역,4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다. 그의 식물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우리말성경,4 요한은 낙타털로 옷을 지어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둘렀습니다. 그리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가톨릭성경,4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영어NIV,4 John’s clothes were made of camel’s hair, and he had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His food was locusts and wild honey.

영어NASB,4 Now John himself had a garment of camel’s hair and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his food was locusts and wild honey.

영어MSG,4 John dressed in a camel-hair habit tied at the waist by a leather strap. He lived on a diet of locusts and wild field honey.

영어NRSV,4 Now John wore clothing of camel’s hair with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his food was locusts and wild honey.

헬라어신약Stephanos,4 αυτος δε ο ιωαννης ειχεν το ενδυμα αυτου απο τριχων καμηλου και ζωνην δερματινην περι την οσφυν αυτου η δε τροφη αυτου ην ακριδες και μελι αγριον

라틴어Vulgate,4 ipse autem Iohannes habebat vestimentum de pilis camelorum et zonam pelliciam circa lumbos suos esca autem eius erat lucustae et mel silvestre

히브리어Modern,4 והוא יוחנן לבושו שער גמלים ואזור עור במתניו ומאכלו חגבים ודבש היער׃

성 경: [마3:4]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 약대 털옷 – 검소하고 금욕적인 구도자(求道者) 본연의 모습올 상징한 옷차림으로서 엘리야의 의상과 의도적 일치를 이룬다(왕하 1:8). 이는 결국 요한이 엘리야 재현 예언(말 4:5;눅 1:7)의 성취자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실로 투박한 털옷은 선지자들이 주로 입는 옷으로 알려졌으며(슥 13:4).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들이 백성의 죄를 자신이 대신하여 슬퍼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입었다 한다. 이 옷은 약대(낙타)의 가죽 옷이 아니라 단지 낙타 털로 거칠게 짠 옷이었다. 한편, 약대 털옷을 입은 세례 요한의 모습은 당시의 죄악된 현실을 부정하며, 회개를 선포하는 그의 사역과 일치한다.

󰃨 가죽띠 – 풍성한 겉옷올 허리에 단단히 묶기 위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 메뚜기(*, 아크리데스) – 이는 몸집이 큰’ 종류의 메뚜기로서 레위기에서도 식용(食用)으로 허락된 정결한 식물이었다(렘 11:22). 지금도 동양에서는 메뚜기를 식용으로 삼는데, 유대에서는 하층 천민들이 음식으로 사용했다.

󰃨 석청(*, 메리 아그리온) – 석청(石淸)은 야생꿀로서 나무의 수액(樹液)이라는 견해(Meyer, Burce, Diodorus)도 있고, 야생 벌꿀(Bengel, Carr)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으나, 구약 셩경에서 이 단어가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바위 틈새에 만들어진 야생 벌꿀(삿 14:8, 9;삼상 14:25-29;시 81:16)로 생각된다. 메뚜기와 석청은 광야 생활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연상시키고, 철저한 자기 절제와 고독한 삶을 살았던 예언자들의 경건한 행위를 암시해 준다. 실로 세례 요한은 의복과 음식으로 백성들에게 회개와 임박한 천국을 전했던 것이다(Bengel).

토테 엨세포류에토 프로스 아우톤 히에로솔뤼마 카이 파사 헤 유다이아 카이 파사 헤 페리코로스 투 요르다누

개역개정,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새번역,5 그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다 요한에게로 나아가서,

우리말성경,5 예루살렘과 온 유대 지방과 요단 강 전 지역에서 사람들이 요한에게로 몰려왔습니다.

가톨릭성경,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영어NIV,5 People went out to him from Jerusalem and all Judea and the whole region of the Jordan.

영어NASB,5 Then Jerusalem was going out to him, and all Judea and all the district around the Jordan;

영어MSG,5 People poured out of Jerusalem, Judea, and the Jordanian countryside to hear and see him in action.

영어NRSV,5 Then the people of Jerusalem and all Judea were going out to him, and all the region along the Jordan,

헬라어신약Stephanos,5 τοτε εξεπορευετο προς αυτον ιεροσολυμα και πασα η ιουδαια και πασα η περιχωρος του ιορδανου

라틴어Vulgate,5 tunc exiebat ad eum Hierosolyma et omnis Iudaea et omnis regio circa Iordanen

히브리어Modern,5 ויצאו אליו ישבי ירושלים וכל יהודה וכל ככר הירדן׃

성 경: [마3:5]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이 때에…다 그에게 나아와 – ‘이 때에’는 세례자가 ‘회개’와 ‘천국’ 선포 사역을 시작한 때(1절)를 가리킨다. 실로 400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갈’의 암울한 시대의 절망 속에 살아가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이야말로 그들의 영적 가뭄을 해갈(解渴)시켜줄 단비로 여겼으며 그중에서도 어떤 이는 그를 예언된 메시야로 기대하며(눅 3:15;요 1:20) 그에게 모여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나오는 지명(地名)들은 2:3과 마찬가지로 장소를 의인화시킨 것으로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회개자로서 제일 먼저 광야로 향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긔고 ‘온 유대’에서 ‘온’이라는 말은 그 당시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환대(歡待)를 암시한다. 그리고 ‘요단 강 사방’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이두매, 베레아, 사마리아등의 이른바 종교적으로 소외된 지역 전반을 가리키며, 또 요한 사역의 본거지가 요단강인 것과 사역의 내용이 ‘회개 촉구’와 ‘세례 베푸는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카이 에밮티존토 엔 토 요르다네 포타모 휲 아우토 엨소몰로구메노이 타스 하마르티아스 아우톤

개역개정,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새번역,6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6 그들은 요단 강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가톨릭성경,6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았다.

영어NIV,6 Confessing their sins,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영어NASB,6 and they were being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as they confessed their sins.

영어MSG,6 There at the Jordan River those who came to confess their sins were baptized into a changed life.

영어NRSV,6 and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river Jordan, confessing their sins.

헬라어신약Stephanos,6 και εβαπτιζοντο εν τω ιορδανη υπ αυτου εξομολογουμενοι τας αμαρτιας αυτων

라틴어Vulgate,6 et baptizabantur in Iordane ab eo confitentes peccata sua

히브리어Modern,6 ויטבלו על ידו בירדן מתודים את חטאתם׃

성 경: [마3:6]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 이는 자기들이 범한 죄를 조목조목 고백했음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역사가 요세푸스이(Josephus)는 ‘그들이 자신들의 범죄와 율법에 대한 죄를 고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죄의 고백은 율법에 규정된 의무로서 범죄한 당사자의 책임(레 5:5;26:40)이자 제사장의 의무 중 하나였다(레 16:21). 이스라엘이 영적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는 이러한 고백이 순조롭게 이뤄졌으나(느 9:2, 3;시 32:5) 영적 기갈 상태에서는 침묵하고 있을뿐이었다. 한편 막 1:4과 눅 3:3에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한다. 그러나 마태는 세례의 선행 조건으로 ‘죄의 고백’을 언급했을 뿐 ‘죄 사함’은 예수가 죽을 때(26:28)까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의 세례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개인적인 ‘죄의 자복’이 이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적이 없었다. 바야흐로 메시야 도래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 요단강 – 히브리어 ‘야라드'(*, 내려가다)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빨리 흐르는 강’을 의미한다. 이 강은 헤르몬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바다를 경유(經由)한 다음 사해에 달하는 강이다. 요단의 수원(水源)에서 사해까지의 직선 거리는 약 217km인데, 전장(全長)은 강의 굴곡과 경사 때문에 400km 이상이 된다. 요단은 팔레스틴 최대의 강이며, 이스라엘 산업의 젖줄이 되는 중요한 강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와도 필연적인 깊은 관계를 갖게 되는 바, 아브라함과 롯의 분가(창 13:10)로부터 야곱의 밧단아람 피신(창 32:10), 여호수아의 가나안 입성(신 3:26-29), 사사시대에는 에홋(삿 3:26-30), 기드온(삿 7:24,25), 입다(삿 12:5,6)의 전장(戰場)으로, 엘리야의 승천(왕하 2:6-11), 엘리사의 나아만 치유(왕하 5:1-14) 등으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바로 이곳에서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한 것은 의미 심장한 일이라 하겠다. 한편 요단강은 물살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그 중 한 여울에 자리잡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을 것이다.

󰃨 세례를 받더니(*, 카이 에밥티존토) – 할례(circumcision) 아브라함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시 세례 행위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세례에 죄에 대한 고백과 씻음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부가된 것은 요한에게서 유래한다. 이에 대해 요세푸스(Josephus)는 증언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세례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예비 행위로서 의로운 행위, 곧 죄 고백을 요구했다고 한다. 따라서 요한이 회개하고 세례받음으로써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자고 강력히 촉구한 점으로 보아 적어도 공개적으로 죄와 인연을 끊는 것이 세례의 전제 조건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또한 쿰란(Qumran) 종파는 제의적 부정(祭衣的 不淨)을 제거키 위해 정결례(淨潔禮)를 행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랍비들은 유대인이 아닌 한도내에서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여하튼 요한의 세례가 온몸을 물에 잠기게 하는 침례(浸禮)를 행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나 세례 의식이 침수(浸水)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이 상징하는 ‘회개와 사죄’, 그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새 생명’이 중요한 것이다. 요한은 계시 수준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께서는 완성된 사역의 서례를 베푸셨다(26:28).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고 유대 민족을 새 생명의 길로 불러내고 있었다(Robertson).

이돈 데 폴루스 톤 파리사이온 카이 삳두카이온 에르코메누스 에피 토 밮티스마 아우투 에이펜 아우토이스 겐네마타 에키드논 티스 휘페데잌센 휘민 퓌게인 아포 테스 멜루세스 오르게스

개역개정,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새번역,7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7 그러나 여러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 곳으로 몰려오는 것을 보고 요한이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더러 다가올 진노를 피하라고 하더냐?

가톨릭성경,7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영어NIV,7 But when he saw many of the Pharisees and Sadducees coming to where he was baptizing, he said to them: “You brood of vipers! Who warned you to flee from the coming wrath?

영어NASB,7 But when he saw many of the Pharisees and Sadducees coming for baptism, he said to them, “You brood of vipers, who warned you to flee from the wrath to come?

영어MSG,7 When John realized that a lot of Pharisees and Sadducees were showing up for a baptismal experience because it was becoming the popular thing to do, he exploded: “Brood of snakes! What do you think you’re doing slithering down here to the river? Do you think a little water on your snakeskins is going to make any difference?

영어NRSV,7 But when he saw many Pharisees and Sadducees coming for baptism, he said to them, “You brood of vipers! Who warned you to flee from the wrath to come?

헬라어신약Stephanos,7 ιδων δε πολλους των φαρισαιων και σαδδουκαιων ερχομενους επι το βαπτισμα αυτου ειπεν αυτοις γεννηματα εχιδνων τις υπεδειξεν υμιν φυγειν απο της μελλουσης οργης

라틴어Vulgate,7 videns autem multos Pharisaeorum et Sadducaeorum venientes ad baptismum suum dixit eis progenies viperarum quis demonstravit vobis fugere a futura ira

히브리어Modern,7 ויהי כראותו רבים מן הפרושים והצדוקים נגשים לטבילתו ויאמר להם ילדי הצפעונים מי השכיל אתכם להמלט מן הקצף הבא׃

성 경: [마3:7]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바리새인(*, 파리사이온) –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함께 마카비 독립 운동시대 초기(B.C. 167)에서 대제사장 요나단(B.C. 159-143)치하 사이에 기원(起源)된 경건주의자들로 보여지며, ‘바리새’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나타난 것은 요한 힐카너스 당시(B.C. 135-105)로 보인다. 그런데 이 이름은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구별하다’란 의미를 가진다. 즉 바리새인은 ‘성별된 자’로서 율법과 구전(口傳)된 조상들의 모든 전통을 엄격히 지키고 영혼 불멸, 부활과 내세, 천사의 존재 등을 신앙하며 배타성이 강한 일단의 무리들을 가리킨다(행 23:8). 그러나 그들의 분리주의는 율법의 순수한 정신과 내면적 경건을 무시하고 형식주의적인 위선과 의모를 중시하는 외식주의로 전락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다(눅 11:43,44;12:1). 그렇다고해서 그들의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신앙으로 인하여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의 본래의 모습은 율법의 수호자(守護者)로 자처할 만큼 율법 준수에 철저했고 의로운 이스라엘을 고대하며, 장차 도래할 메시야 왕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온 것은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지대한 관심을 겉으로 나타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회개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현장에 회개에는 유념치 않고 외식의 옷만을 걸치고 거만하게 나타난 것이다. 한편 ‘많은’이라는 말에서 그들의 수(數)를 측정할 수는 없겠지만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대헤롯이 죽을 때 바리새인들은 6천명 이상이나 되었다 한다.

󰃨 사두개인(*, 사두카이온) – 이 명칭의 기원에 대하여는 (1) 알렉산더 대왕 당시의(B.C. 323) 사독이란 사람에게서 유래하였다 (2) 히브리어로’체디크'(*), 헬라어로 ‘아포 디카이오쉬네스'(*), 즉 ‘의’라는 말에서 근거하였다(Epiphanius)는 견해가 있으나 유대의 전승에 따르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왕상 1:38)이란 인물에게서 기원하였다(Thayer, Carr)고 한다. 이들 중 후자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이들은 민족주의자들로서 바리새파, 엣세네파와 함께 유대의 3대 종파의 하나이며 바리새인들과는 적대적인 파당이었다. 또한 그들은 바리새파보다 숫적로 열세였지만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었고 특히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은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제사장급의 고위층이었다. 그들은 모세 오경 이외에는 모든 전승을 부인하였고, 내세도, 부활도, 천사도, 심지어 하나님의 섭리도 믿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유전(遺傳)의 위험은 피하였지만, 무익한 세상적인 열심과 인간의 이성에 절대적 기준을 두는 오류(mistake)에 빠져 들어갔다(Alford).

󰃨 오는 것을(*, 엘코메누스)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을 한 부류로 묵어 기록한 것은 본서에 5회(16:1, 6, 11, 12) 나타난다. 상호 적대적인 두 파가 함께 왔다는 데에는 이의(異意)가 없으나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혤라어 본문에서는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지 세례 장소에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지 분명한 구별을 짓지 않고 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세례 요한의 질책(叱責)으로 보아 그들은 세례 모습을 관찰하러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Bruce). 실로 이 두파는 종교적 목적에서는 상호 적대적이었지만 예수를 정치적으로 대적하는 목적에서는 연합하였다 (16:1;22:23, 34;행 4:1).

󰃨 독사의 지식들아 – 이는 예언적 전통에 속한 선언이다(사 14:29;30:6). 요한은 광야에서 흔히 블 수 있는 독사들을 보며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간교한 뱀을 연상하였을 것이다. 현대처럼 저속한 욕설이 없던 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였던 그들에게 저주받은 뱀(창 3:14)의 후예라고 욕한 것은 위선과 변절, 기만 등으로 길들여진 그들을 향한 신적 권위에 의거한 화(禍)의 선포였다. 예수께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해 같은 책망을 하신 적이 있다(23:33). 이 욕설은 ‘아브라함의 자손'(9절)으로 자랑하던 그들에게 사단의 도구인 뱀의 후예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실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 누가…피하라 하더냐 – 이 말은 ‘너희가 무슨 근거로 나는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뜻의 질책성 질문이다. 엘리야로 예언된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등장하여 천국을 선포(2절)할 때 이미 ‘임박한 진노’가 암시되어 있었다(말 3:1, 2;4:1, 5). 그런데 세례 요한의 이 당황스런 질문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지 임박한 진노를 당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자각케 하고 끝내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데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란 말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감정을 인격화한 표현으로서 이것은 하나의 정태적(靜態的) 감정이 아니라 참으로 무서운 실제적이며 존재론적 극형(極刑)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한편 ‘임박한 진노’는 이방인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 영접을 준비(회개)하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홀연히 다가오는 종말론적인 것이다(살전 1:10). 물론 이 진노는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훼파됨으로서 1차 성취되었지만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마지막 심판 때에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계6:16, 17).

포이에사테 운 카르폰 맠시온 테스 메타노이아스

개역개정,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새번역,8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우리말성경,8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

가톨릭성경,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영어NIV,8 Produce fruit in keeping with repentance.

영어NASB,8 “Therefore bear fruit in keeping with repentance;

영어MSG,8 It’s your life that must change, not your skin!

영어NRSV,8 Bear fruit worthy of repentance.

헬라어신약Stephanos,8 ποιησατε ουν καρπους αξιους της μετανοιας

라틴어Vulgate,8 facite ergo fructum dignum paenitentiae

히브리어Modern,8 לכן עשו פרי הראוי לתשובה׃

성 경: [마3:8]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한 참된 방법이 제시된다. 즉 사단이 그들에게 귀뜸해준 위선적 종교 행위와 같이 단지 형식적인 세례 행위로는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운)외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참된 회개(2절 참조)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란 말이다. 여기서 ‘합당한'(*, 앝시오스)이란 단어는 ‘같은 분량의’란 뜻으로서 마음속의 실제 회개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행위(열매)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뜻한다.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으로는 많은의로운 일들(righteousness actions)을 행하였으나 그들의 내면은 결코 의롭지 않기(not righteousness)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는 합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사람이건 외견상 의로운 행동들을 할 수 있으나 그에 합당한 열매는 맺지 못한다. 즉 내면이 청결한 사람만이 오직 의로운(올바른, 좋은) 행동들과 하나님께 기억될만한 열매들을 추수할 수 있는 것이다(Bruce). 한편 여기서는 열매가 단수(*, 칼폰)로 묘사되었는데 비해 본절과 평행 구절인 눅 3:8에는 복수(*, 칼푸스)로 표현되었다. 이 차이는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조화가 가능하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변화된 삶에 따른 여러 종류의 은혜로 여겨지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될 수 있으며(21:3), 그 열매들의 뿌리는 오직 하나라는 점에서 단수(갈 5:22)로 묘사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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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새번역,9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우리말성경,9 너희는 행여나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실 수 있다.

가톨릭성경,9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 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영어NIV,9 And do not think you can say to yourselves, ‘We have Abraham as our father.’ I tell you that out of these stones God can raise up children for Abraham.

영어NASB,9 and do not suppose that you can say to yourselves, ‘ We have Abraham for our father’; for I say to you that from these stones God is able to raise up children to Abraham.

영어MSG,9 And don’t think you can pull rank by claiming Abraham as father. Being a descendant of Abraham is neither here nor there. Descendants of Abraham are a dime a dozen.

영어NRSV,9 Do not presume to say to yourselves, ‘We have Abraham as our ancestor’; for I tell you, God is able from these stones to raise up children to Abraham.

헬라어신약Stephanos,9 και μη δοξητε λεγειν εν εαυτοις πατερα εχομεν τον αβρααμ λεγω γαρ υμιν οτι δυναται ο θεος εκ των λιθων τουτων εγειραι τεκνα τω αβρααμ

라틴어Vulgate,9 et ne velitis dicere intra vos patrem habemus Abraham dico enim vobis quoniam potest Deus de lapidibus istis suscitare filios Abrahae

히브리어Modern,9 ואל תחשבו בלבבכם לאמר אברהם הוא אבינו כי אני אמר לכם כי מן האבנים האלה יכול האלהים להקים בנים לאברהם׃

성 경: [마3:9]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 신구약 중간 시대에 일어난 공적신학(功積神學, merit theology)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용어는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과 족장들, 특히 아브라함의 공적이 그 후손에게 효력을 미친다고 생각케 했다(Carson, Divine Sovereignty, pp.39ff). 유대인트리포(Trypho) 순교자 저스틴(Justine)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육신을 따라 다윗의 흩어진 자손들에게 저희가 죄인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패역한다 할지라도 영원한 나라가 주어지리라는 생각에서 당신들도 그것을 준행하였고’라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Alford). 랍비들의 교훈에도 ‘할례를 받은 자 중에 지옥에 갈 자는 아무도 없다’라는 말이있다. 여기서 ‘생각지 말라'(*, 메 독세테)는 부정 명령법의 단호한 명령으로써 요한 자신과 그들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커다란 괴리(estrangement)가 존재하고 있음을 명백히 나타낸다(Robertson). 그리고 ‘속으로'(*, 레게인 엔 헤아우토이스)라는 표현은 그들의 외적 상황(아브라함의 혈통)이 마음의 생각(구원받을 것임)으로 변한 동작을 표시하는데 사용된다(Beck). 그러나 구원의 참된 조건은 육적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고믿음으로 영적 자손이 되는 데에 있는 것이다(롬4장). 이처럼 자신들의 종교적 특권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오해는 사실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을 탐하는 가증한 위선적 범법 행위였다. (1) 하나님이 그들을 선민으로 삼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속사 전개의 중심이요 도구로 삼기 위하신 것이었지 그들을 무조건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2) 구약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바대로 그들이 선민이 된 것은 결코 무슨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이 선민의 지위를 유지하여 온 것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용서 덕택이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도 여느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타락과 교만의 역사였음을 보여 준다. (3) 따라서 그들이 선민의 혈통에 끼이게 된 것은 그저 감사할 조건일 따름이지 결코 아무때나 내세우는 특권층 신분증명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 이 돌들로도(*, 에크 톤 리돈투톤) – 이것이 요한의 발 밑에 있던 요단 강변의 돌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고(Carr, Virnect), ‘아브라함의 자손’과는 무관한 이방인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다(Chrysostom). 그런데 문맥상 이 견해들을 모두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히브리어나 아람어에서 ‘자손들'(banim)과 ‘돌들'(abanim)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 풍유(諷諭)가 가능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은 ‘돌’처럼 여기는 아브라함의 ‘자손'(유대인)들의 악한 교만 때문에 그들이 마찬가지로 ‘돌’처럼 여기는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들어 약속의 ‘자손’으로 만드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실로 하나님은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창 2:7) 당신이 원하시기만하면 발 밑의 돌이나 아니면 유대인들의 발 밑의 돌처럼 천하게 여기는 이방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재창조하실 수 있는 것이다(롬 4:17)여기서 요한은 이방인 역시 선민의 대열(교회)에 들어와 아브라함의 특권과, 품성을 소유할 수 있다는, 그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에데 데 헤 맠시네 프로스 텐 리잔 톤 덴드론 케이타이 판 운 덴드론 메 포이운 카르폰 칼론 엨콮테타이 카이 에이스 퓌르 발레타이

개역개정,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새번역,10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

우리말성경,10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조리 잘려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가톨릭성경,10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영어NIV,10 The ax is already at the root of the trees, and every tree that does not produce good fruit will be cut down and thrown into the fire.

영어NASB,10 “The axe is already laid at the root of the trees; therefore every tree that does not bear good fruit is cut down and thrown into the fire.

영어MSG,10 What counts is your life. Is it green and blossoming? Because if it’s deadwood, it goes on the fire.

영어NRSV,10 Even now the ax is lying at the root of the trees; every tree therefore that does not bear good fruit is cut down and thrown into the fire.

헬라어신약Stephanos,10 ηδη δε και η αξινη προς την ριζαν των δενδρων κειται παν ουν δενδρον μη ποιουν καρπον καλον εκκοπτεται και εις πυρ βαλλεται

라틴어Vulgate,10 iam enim securis ad radicem arborum posita est omnis ergo arbor quae non facit fructum bonum exciditur et in ignem mittitur

히브리어Modern,10 וכבר הושם הגרזן על שרש העצים והנה כל עץ אשר איננו עשה פרי טוב יגדע וישלך באש׃

성 경: [마3:10]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이미…놓였으니 – 메시야의 진노가 임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곧 시간적 여유가 더이상 없는 바로 이 시점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별하는 일이 시작되었다(Broadus). 한편 세례 요한은 ‘열매 맺음’을 언급할 때에 ‘타작마당'(12절), ‘나무와 뿌리, 알곡과 쭉정이, 도끼질과 사르는 불’ 등을 연상했을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무리들에 대한 심판을 도끼로 나무를 찍는 일에 비한 사실은 구약의 관용적인 용어(사 10:33, 34;렘 46:22 등)에 준해서 심판을 묘사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제 천국이 가까이 옴(2절)과 동시에 심판도 가까이 왔다. 이 천국과 심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역동적인 것으로서 천국을 선포하는 것은, 곧 심판의 도래를 선언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회개를 선포하는 것이다. 더욱이 세례 요한은 그 도끼가 줄기 혹은 가지에가 아니라 ‘뿌리에’ 놓임으로 심판이 완전할 것임을 명백히 했다. ‘놓였으니'(*, 케이타이)는 현재 완료형으로 시행할 준비가 끝났음을 암시한다. 더욱이 이 현재적 시상이 ‘찍어’, ‘던지우리라’는 말에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서 심판 준비가 다 되어 있음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 불에 던지우리라 – 심판은 성경에서 곧잘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불로 묘사된다(말 4:1;마 13:40;18:8, 9;막 9:43;요 15:6). 이 심판은 그 나라와 의를 위하여 선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것이다(히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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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새번역,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11 나는 너희가 회개하도록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분은 나보다 능력이 더 많으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도 없다. 그분은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가톨릭성경,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침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실 것이다.

영어NIV,11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영어NASB,11 “As for me,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He who is coming after me is mightier than I, and I am not fit to remove His sandals;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fire.

영어MSG,11 “I’m baptizing you here in the river, turning your old life in for a kingdom life. The real action comes next: The main character in this drama–compared to him I’m a mere stagehand–will ignite the kingdom life within you, a fire within you, the Holy Spirit within you, changing you from the inside out.

영어NRSV,11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is coming after me; I am not worthy to carry his sandals.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fire.

헬라어신약Stephanos,11 εγω μεν βαπτιζω υμας εν υδατι εις μετανοιαν ο δε οπισω μου ερχομενος ισχυροτερος μου εστιν ου ουκ ειμι ικανος τα υποδηματα βαστασαι αυτος υμας βαπτισει εν πνευματι αγιω και πυρι

라틴어Vulgate,11 ego quidem vos baptizo in aqua in paenitentiam qui autem post me venturus est fortior me est cuius non sum dignus calciamenta portare ipse vos baptizabit in Spiritu Sancto et igni

히브리어Modern,11 הן אנכי טובל אתכם במים לתשובה והבא אחרי חזק הוא ממני אשר אינני כדי לשאת נעליו והוא יטבל אתכם ברוח הקדש ובאש׃

성 경: [마3:11]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나는…세례를 주거니와 –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란 말이 막 1:8이나 눅 3:16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은 마태가 요한을 예수보다 하위에 두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취한것으로 보려는 학자도 있으나(Hill), 막 1:4과 눅 3:3에서도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한 사실과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에 이말은 단지 ‘나는 회개와 관련한 세례를 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즉 그의 ‘물로'(*, 엔 휘다티) 세례를 베푸는 행위는 예수의 속죄사역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서 예수께서 베푸신’성령과 불’의 세례가 없다면 물 속에 침수하는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 근본적으로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는 선구자적인 사역에 불과한 것임을 요한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 내 뒤에 오시는 이 – ‘내 뒤에'(*, 오피소 무)는 시간적 순서로 ‘후에’란 의미이다. 요한은 이 표현에서 자신과 메시야의 사역적, 개인적 관계를 서술한다. ‘오시는 이'(*, 호 엘코메노스)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에 대한 정치적인 색채를 피한 칭호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메시야에 대한 잘 알려진 관용적 표현으로써 ‘실로가 오시기까지'(창 49:10)와 같은 구약의 진술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즉 본 구절은 요한이 담대하게 사역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로 인식되는 것을(눅 3:15) 스스로 불식시키기 위하여 자신은 단지 메시야의 전구(前驅)임을 명백히 밝힌 표현이다.

󰃨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 ‘뒤에 오는 이’가 능력이 더 많고 귀하다는 것은 정상적인 경우가 아니다. 왜냐하면 보통 덜 귀한 사람이나 제자가 뒤를 따르는 것이 상례(常例)였기 때문이다(16:24). 특히 ‘능력있다'(*, 이스퀴로스)라는 말은 후천적인 지위나 능력이 아닌 자생적 권위와 능력이 있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적용하고 있으며(렘 32:18;사 40:10;단 9:4), ‘능력이 많으시니'(*, 이스퀴로테로스)는 능력의 자의적(自意的)이고 인격적인 소유를 말한다. 더욱이 선지자보다 나은 자인 세례 요한이 노예들이나 하는 일인 신을 들고 다니는 일조차 감당치못할 그러한 분은 누구인가. 이러한 표현은 세례 요한의 지극한 겸손이지만 과장된 겸손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오시는 이’는 바로 ‘말씀'(*, 로고스)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 그의 신을 들기도 – 고대 중근동 지방에서는 아주 천한 신분의 노예가 자기 주인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고, 제자들이 스승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Edersheim). 그런데 요한은 자신이 그러한 천한 일 조차도 수행할 수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극구 시인하고 있다.

󰃨 감당치못하겠노라 – 이는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도덕적, 영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실로 요한의 이 고백은 예수의 충만한 신성(神性)을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가능했다(사 6:5).

󰃨 그는 성령과 불로…세례를 주싶 것이요 – 마태와 누가는 공히 ‘성령 세례’란 말에 ‘불’이란 단어를 추가하고 있다(눅 3:16). 그런데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1) 신자에 대한 구원 이후에 나타나는 불신자에의 심판이다. 즉 ‘성령'(*, 프뉴마)을 ‘바람’으로 해석하여 신자들이 성령의 거룩한 바람에 불려가고 그나머지는 심판의 불에 태워진다는 이동적 의미의 해석이다(Bruce). (2) 성령은 의인에게 임하는 성령의 은사(恩賜)요, 불은 악인 위에 내리는 맹렬한 심판이다. 그러나 위의 견해들보다 가장 당한 것은 두 단어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성령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즉 원문에서 ‘…으로’라는 한 개의 전치사인 ‘엔'(*)은 성령과 불을 모두 받음으로써 이 둘을 한 개념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불’은 성령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연단하는 자의 불로(말 3:2, 3), 정결케 하는 불로(사 6:6;슥 13:9;벧전 1:7), 또는 성령 강림의 상징으로(행 2:3) 나타나기 때문에 두 단어는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는 상이한 표현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서 물 세례가 눈에 보이는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는 신앙 고백적, 공식적 의식이라면 성령 세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씻음과 연합에 대한 하나님의 유효한 인정의 결과이다. 한편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진 것으로서(겔 36:25-27;39:29;욜 2:28) 신약 성경에만 사용되는 특별한 용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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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새번역,12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우리말성경,12 그분이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깨끗이 해 좋은 곡식은 모아 창고에 두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가톨릭성경,12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영어NIV,12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영어NASB,12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thoroughly clear His threshing floor; and He will gather His wheat into the barn, but He will burn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영어MSG,12 He’s going to clean house–make a clean sweep of your lives. He’ll place everything true in its proper place before God; everything false he’ll put out with the trash to be burned.”

영어NRSV,12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and will gather his wheat into the granary; but the chaff he will burn with unquenchable fire.”

헬라어신약Stephanos,12 ου το πτυον εν τη χειρι αυτου και διακαθαριει την αλωνα αυτου και συναξει τον σιτον αυτου εις την αποθηκην το δε αχυρον κατακαυσει πυρι ασβεστω

라틴어Vulgate,12 cuius ventilabrum in manu sua et permundabit aream suam et congregabit triticum suum in horreum paleas autem conburet igni inextinguibili

히브리어Modern,12 אשר בידו המזרה וזרה את גרנו ואסף את דגנו אל אוצרו ואת המץ ישרפנו באש אשר לא תכבה׃

성 경: [마3:12]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손에 키틀 들고…타작 마당을 – 먼저 ‘키’는 풍력(風力)을 이용하여 곡식의 쭉정이를 분리해 내는 일종의 소쿠리이다. 한편 ‘손에'(*, 토 프투온) 든 키는 10절의 ‘놓여있는’ 도끼보다 더욱 강렬한 심판의 상징이다. 한국과 유사한 유대 농촌을 연상시키는 이런 심판의 비유는 구약에서도 자주 보인다(4:1). 키를 ‘손에 든’ 메시야는 ‘타작 마당'(시 1:4;사 5:24;단 2:35;호 13:3)으로 비유된 자신의 세상에서 신자로 비유된 알곡과 불신자로 비유된 쭉정이를 철저히 나누실 것이며, 또한 그각각을 심판 내지는 구원이라는 하나의 단위로(‘모아’) 취급할 것이다. 한편 ‘곡간’은 중근동지방에서 주로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하 또는 토굴에 설치해 두었었다. 물론 본문에서는 구원받은 자들의 영원한 피난처, 곧 어떤 악한 세력에도 노출되지 않는 안전한 처소로 이해할 수 있다(시 71:7). 계속해서 ‘꺼지지 않는 불’은 어떤 한 시점에 이르러 소멸되는 불이 아니라 어떠한 결핍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화력을 지닌 불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벌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종말론적인 심판과(사 34:10;66:24;렘 7:20), 지옥을 의미하기도 한다(5:22). 현실에 반드시 존재할 이 무서운 ‘불’에 알곡 아닌 모든 쭉정이를 남김없이 태워 자신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실 것이다. 한편 ‘정하게 하사'(*, 디아카다리에이)의 ‘디아'(*)와 ‘태우시리아라'(*, 카타카우세이)의 ‘카타'(*)는 완료형이며 종료(終了)의 뜻을 가지고 있어 악한 자를 멸절시키는 최종 심판이 철저하고 완전한 것임을 강조한다.

토테 파라기네타이 호 예수스 아포 테스 갈릴라이아스 에피 톤 요르다넨 프로스 톤 요안넨 투 밮티스데나이 휲 아우투

개역개정,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새번역,13 그 때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셨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13 그때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에서 요단 강으로 오셨습니다.

가톨릭성경,1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영어NIV,13 Then Jesus came from Galilee to the Jordan to be baptized by John.

영어NASB,13 Then Jesus arrived from Galilee at the Jordan coming to John, to be baptized by him.

영어MSG,13 Jesus then appeared, arriving at the Jordan River from Galilee. He wanted John to baptize him.

영어NRSV,13 Then Jesus came from Galilee to John at the Jordan, to be baptized by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3 τοτε παραγινεται ο ιησους απο της γαλιλαιας επι τον ιορδανην προς τον ιωαννην του βαπτισθηναι υπ αυτου

라틴어Vulgate,13 tunc venit Iesus a Galilaea in Iordanen ad Iohannem ut baptizaretur ab eo

히브리어Modern,13 ויבא ישוע מן הגליל הירדנה אל יוחנן להטבל על ידו׃

성 경: [마3:13]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이 때에(*, 토테) – 세례 요한의 등장(1절)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현재 접속사를 사용하여 전절과 적접 연결된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이 절정에 달해 있을 바로 그때에 예수께서 오셨다는 의미이다.

󰃨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 이 장면의 평행 구절인 막 1:9에는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본서 2:23의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라는 말과 연결시켜 볼 때 예수께서 애굽에서 귀국하신 이래 계속해서 나사렛 동네에 거주하고 계셨음을 알 수있다. 한편 요단강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 ‘톤'(*)이 제시된 것은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세례 사역지로 잘 알려진 요단강의 바로 그 지점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행위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메시야적 소명을 인식하고 있었으며(눅 2:49), 요한이 메시야를 위한 자신의 선구자적 소명을 자각하고 있듯이(11절)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죄에 대해서 무관하신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가 이다. 이는 예수께서 개인적인 죄 의식을 느끼셨기 때문이(Bauer, Strauss) 아니고, 요한의 세례를 보증하기 위한 것도(Kuinoel, Kern) 아니고, 그가 율법에 복종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Hoffmann, Krabbe, Osiander)도 아니다. 예수의 수세(受洗)의 참 뜻은 말씀에 표현한 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요(15절;신 6:25), 그가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시기(사 53:4-6) 위함이다.

호 데 요안네스 디에콜뤼엔 아우톤 레곤 에고 크레이안 에코 휘포 수 밮티스데나이 카이 쉬 에르케 프로스 메

개역개정,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새번역,14 그러나 요한은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렸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14 그러나 요한은 이를 말리면서 예수께 말했습니다. “제가 오히려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게 오시다니요!”

가톨릭성경,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영어NIV,14 But John tried to deter him, saying, “I need to be baptized by you, and do you come to me?”

영어NASB,14 But John tried to prevent Him, saying, “I have need to be baptized by You, and do You come to me?”

영어MSG,14 John objected, “I’m the one who needs to be baptized, not you!”

영어NRSV,14 John would have prevented him, saying, “I need to be baptized by you, and do you come to me?”

헬라어신약Stephanos,14 ο δε ιωαννης διεκωλυεν αυτον λεγων εγω χρειαν εχω υπο σου βαπτισθηναι και συ ερχη προς με

라틴어Vulgate,14 Iohannes autem prohibebat eum dicens ego a te debeo baptizari et tu venis ad me

히브리어Modern,14 ויוחנן חשך אותו לאמר אני צריך להטבל על ידך ואתה בא אלי׃

성 경: [마3:14]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말려(*, 디에코뤼엔) – 미완료 과거형으로 그저 한번 ‘말려보는'(*, 코뤼오) 정도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집요하게 만류했음을 암시한다. 요한은 예수의 종교적, 윤리적인 우월성과 순결한 자태에 강렬한 인상을 받고 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지극히 비천함을 느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세례 요한은 30년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던 일(눅 1:39-45) 그리고 예수가 자기의 출생 사건보다 더 놀라운 출생 사건을 통해 태어났으며, 어린아이로서는 경이로운 성경 지식을 가졌었다는 사실(눅 2:41-52)을 알고 있었올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직.간접의 지식보다 자신 앞에 서신 예수를 직접 대면하고나서 그의 탁월한 성결성과 영적 심화력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한은 성령의 하강(descent)하시는 신적 표적이 있기전까지는 아직 예수의 메시야성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요 1:31-32의 평행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세례 받는 것을 만류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요한은 예수가 메시야이신 것을 알아보고 그에게서 성령과 불로 세례 받기를 원하였다. 이 견해는 마태복음의 주제가 성령이 아니고 의(義)란 점에서 동감하기 어렵다. 예수의 답변을 보더라도(15절) ‘의’가 강조되고 있다. 더욱이 마태는 예수가 누구에게나 성령과 불의 세례를 주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춰 기록하고 있는것이다. 사실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행 2장) 이후였기 때문에 마태는 성령의 세례가 주어진 것은 그가 기록하려는 시대보다 뒤의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11:2-12에서는 세례 준 후에도 요한이 예수를 완전히 ‘알지’ 못하였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2) 요한의 세례는 종말론적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니라, 죄의 고백과 회개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은 겸손한 인물로서 예수가자기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는 알고 있었으나 예수에게는 회개해야 할 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예수가 자기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실로 마태는 요한이 언제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깨달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태는 예수의 무죄함과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 세례 요한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요한이 흠(欠)이 있는 자신으로서는 순결 무흠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었다.

아포크리데이스 데 호 예수스 에이펜 프로스 아우톤 아페스 아르티 후토스 가르 프레폰 에스틴 헤민 플레로사이 파산 디카이오쉬넨 토테 아피에신 아우톤

개역개정,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새번역,15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그제서야 요한이 허락하였다.

우리말성경,15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 그러자 요한은 그대로 따랐습니다.

가톨릭성경,15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영어NIV,15 Jesus replied, “Let it be so now; it is proper for us to do this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Then John consented.

영어NASB,15 But Jesus answering said to him, “Permit it at this time; for in this way it is fitting for us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Then he permitted Him.

영어MSG,15 But Jesus insisted. “Do it. God’s work, putting things right all these centuries, is coming together right now in this baptism.” So John did it.

영어NRSV,15 But Jesus answered him, “Let it be so now; for it is proper for us in this way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Then he consented.

헬라어신약Stephanos,15 αποκριθεις δε ο ιησους ειπεν προς αυτον αφες αρτι ουτως γαρ πρεπον εστιν ημιν πληρωσαι πασαν δικαιοσυνην τοτε αφιησι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15 respondens autem Iesus dixit ei sine modo sic enim decet nos implere omnem iustitiam tunc dimisit eum

히브리어Modern,15 ויען ישוע ויאמר אליו הניחה לי כי כן נאוה לנו למלא כל הצדקה וינח לו׃

성 경: [마3:15]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이제 허락하라 – 본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최초의 말씀이다. 여기서 ‘이제'(*, 알티)라는 말은 특별한 시점을 암시하고 있다. 즉 예수는 요한의 반대(14절)가 원칙적으로 옳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제'(지금), 즉 구속사 중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는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가 종의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 보여야 했고, 그분이 스스로 벡성들과 같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셔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수세(受洗) 전부터 자신의 메시야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여하튼 메시야이신 주님만이 이러한 명령을 세례 요한에게 할 수있었다. 실로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를 베풂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아버지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자신을 복종시킨 자가 된 것이다.

󰃨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 예수께서 ‘나’라는 1인칭 단수 명사를 쓰시지 않고 ‘우리’라는 복수 형태를 취하신 것은 예수와 요한, 곧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모든 의를 이루어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이어지는 ‘이와 같이 하여’란 말은 단순히 세례와 같은 어떤 절차를 강조하는 말이라기 보다 모든 의를 이루기위한 순종의 자세, 또는 순종의 마음을 강조한 말이다.

󰃨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 여기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1) 예수의 세례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의’를 성취하는 것이다(O. Cullmann). 이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사 53:13-53:12)에도 나타나듯이 예수가 당할 죽음의 세례를 예시한 것이다. 그러나 ‘의’를 예수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2) 예수는 하나님의 명령(‘모든 의’)을 모두 순종(‘이루다’)해야 했으며 세례도 그 명령 중 하나이다. 이 견해는 세례가 ‘의’가 아니라 ‘회개와 죄의 고백’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는 부적당하다. 가장 적당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3)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뜻(‘모든 의’)이며, 예수께서 요한과 함께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사적 생애를 마감하고 메시야 직무를 수행하는 공생애로 들어가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Bruce, Erdman). 더욱이 예수의 수세의 주제는 모든 죄인을 대신한 고난이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적 메시지에 따르면 예수는 고난받는 종(사 42:1-9;49:1-6; 50:4-9;52:13-53:12)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은 세례를 베푼 후 즉시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 불렀고, 예수 자신도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세례로 표현했다(눅 12:50).

󰃨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요한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예수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무흠한 신성(神性)의 소유자이시지만, 그분 곧 메시야에게 합당한 세례를 베푼다. 이로써 예수와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동역자의 선상에 서게 된다. 한편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데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이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즉 공생애에 앞서 예수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직의 자격과 능력이 구비되었으나 인간적 수준에서 또 인간들의 이해를 위해서도 교회의 선한 전승(inheritance)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이런 예수의 자세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16절의 성령 강림과 17절의 천성(天聲)을 통해 예수가 모든 의를 갖추신 자임을 공표(公表)하셨다. (2) 이를 통해 세례 요한은 메시야가 도래했음과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공적으로 선언했다(요 1:31-34). (3) 회개, 세례가 필요없었던 예수는 수세를 통해 죄로 타락된 인간과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켰고 우리를 대신하는 일을 시작하셨다(고후 5:21). (4)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를 믿는 자에게 보이신 수세의 모범이었다.

밮티스데이스 데 호 예수스 유뒤스 아네베 아포 투 휘다토스 카이 이두 에네오크데산 아우토 호이 우라노이 카이 에이덴 토 프뉴마 투 데우 카타바이논 호세이 페리스테란 카이 에르코메논 엪 아우톤

개역개정,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새번역,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셨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속에서 올라오셨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자신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가톨릭성경,16 예수님께서는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영어NIV,16 As soon as Jesus was baptized, he went up out of the water. At that moment heaven was opened,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lighting on him.

영어NASB,16 After being baptized, Jesus came up immediately from the water; and behold, the heavens were opened,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as a dove and lighting on Him,

영어MSG,16 The moment Jesus came up out of the baptismal waters, the skies opened up and he saw God’s Spirit–it looked like a dove–descending and landing on him.

영어NRSV,16 And when Jesus had been baptized, just as he came up from the water, suddenly the heavens were opened to him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alighting on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6 και βαπτισθεις ο ιησους ανεβη ευθυς απο του υδατος και ιδου ανεωχθησαν αυτω οι ουρανοι και ειδεν το πνευμα του θεου καταβαινον ωσει περιστεραν και ερχομενον επ αυτον

라틴어Vulgate,16 baptizatus autem confestim ascendit de aqua et ecce aperti sunt ei caeli et vidit Spiritum Dei descendentem sicut columbam venientem super se

히브리어Modern,16 ויהי כאשר נטבל ישוע וימהר לעלות מן המים והנה נפתחו לו השמים וירא את רוח אלהים יורדת כיונה ונחה עליו׃

성 경: [마3:16]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예수께서…곧…올라오실세 – ‘곧'(*, 유뒤스)은 ‘올라오실세'(*, 아네베)에 속하는 말로서 예수가 세례받은 후 곧바로 물에서 나왔다는 사실 뿐 아니라 성령의 증거도 역시 즉각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그런 점에서 이 말은 성령이 임하실 때에는 그가 물 속에 있지 않고 강둑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물에서 올라 오실세’란 말을 근거로 예수의 침례설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례를 준다’는 뜻의 ‘배티조'(*)란 단어는 원래 ‘잠그다’의 의미뿐 아니라 ‘물로 무엇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도 지닌다(막 7:4;딛 3:5). 그리고 관용적으로 어떤 것에 충만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적 접근을 통해 예수의 수세를 침례 또는 세례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그 자체가 지니는 영적 의미와 거룩한 정신을 외면한 채 세례냐 침례냐의 어떤 외적 의식만을 절대적 규준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세례의 참의미를 무시하는 형식주의적 독선이 될 수 있다. 한편 ‘올라 오실새’는 비둘기같이 ‘내려'(*, 에르코메논)란 말과 연결되어 마치 땅과 하늘이 화답하는 것같은 미묘한 대조를 이룬다.

󰃨 하늘이 열리고(*, 아네와데산 아우토) – 이 구절은 구약성경의 환상들(사 64:1;겔 1:1;행 7:56;계 4:1;19:11)을 연상시킨다. 고대 신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표현은 ‘모든 의를 이루신’ 예수께 대한 하나님의 비상(非常)하신 역사 개입이지 예수의 한낱 환상이 아니다. 한편 어떤 사본들(에브라임, 베자)에는 이 부분이 ‘하늘이 그에게 열리고’로 표현되어 하늘이 예수에게만 국한되어 열렸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즉 다른 그 누구도 아무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 이때 예수의 선지자였던 요한은 하늘의 열림을 직접 목격했었을 것이다(Olshausen). 그리고 대중들도 하늘의 열림과 동시에 하늘로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인류의 조상이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창 3:24) 극히 부분적으로만 열렸던 하늘이 예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열려 하나의 새릅고 신비한 교제(交際)가 가능케 된 사실을 강조해주고 있다.

󰃨 비둘기같이(*, 호세이 페리스테란) – 여기 사용된 직유법은 성령과 비둘기를 명백히 관련시킨다. 즉 이 말은 성령 강림의 방식이 비둘기 같다는 뜻도 되고, 성령이 비둘기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는 뜻일수도 있다. 누가복음에는 후자의 견해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형체로'(*, 소마티코 에이데이)가 첨가되어 있다. 한편 성령에 관하여 이와 같은 유추적 표현이 나오는 구약성경은 창 1:2 뿐이다. 탈무드(Talmud)에는 창1:2이 ‘하나님의 신은 비둘기같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로 해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어느 합리주의자는 비둘기 한마리가 예수의 머리 위에 날개치고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이것이 환상적 장면이든 아니든 분명 성령이 신인(God-Man)이신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도록 돕기 위해 예수 위에 임하신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성령의 적극적이고도 완전한 후원을 받으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는 ‘예수의 참 인간으로써 합당한 은사인 성령을 받으심으로 공생애의 첫 발을 내디디셨다. 주관적으로 볼 때 신인을 연합시킨 성령이 육화(肉化)하신 말씀(예수) 위에 임하셨고,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계시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Pulpit Commentary).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비둘기는 성령의 교통하는 힘의 온유(11:29)와 순결(1:16)과 생명의 충만(창 1:2;요 7:37-39)을 상징하는데, 이것들은 예수의 품성과 사역의 특질과 좋은 비교가 되고 있다.

󰃨 자기 위에 임하심 – 예수께 성령이 임하심은 시 45:7에 예언된 관유(灌油, 기름부음)의 성취였다. 실로 율법에 있어서도 흠 잡을 것이 없는 예수께서는 율법에 정한 나이 30세(민 4:3) 때에 공개적 절차를 통해 공식적인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심으로 우리의 선지자, 대제사장, 왕으로서 취임하셨던 것이다(Luther). 여기에서 물과 불과 성령의 삼각 세례가 완성되었다(Alford).

카이 이두 포네 에크 톤 우라논 레구사 후토스 에스틴 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엔 호 유도케사

개역개정,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새번역,17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였다. / ㉩또는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자다’

우리말성경,17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한다.”

가톨릭성경,17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영어NIV,17 And a voice from heaven said, “This is my Son, whom I love; with him I am well pleased.”

영어NASB,17 and behold, a voice out of the heavens said,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pleased.”

영어MSG,17 And along with the Spirit, a voice: “This is my Son, chosen and marked by my love, delight of my life.”

영어NRSV,17 And a voice from heaven said, “This is my Son, the Beloved, with whom I am well pleased.”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ι ιδου φωνη εκ των ουρανων λεγουσα ουτος εστιν ο υιος μου ο αγαπητος εν ω ευδοκησα

라틴어Vulgate,17 et ecce vox de caelis dicens hic est Filius meus dilectus in quo mihi conplacui

히브리어Modern,17 והנה קול מן השמים אומר זה בני ידידי אשר רצתה נפשי בו׃

성 경: [마3:17]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헬라어 원문에는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감탄사 ‘보라'(*, 이두)가 문두에 언급되어 있다. 이 ‘이두’는 어떤 사건의 중요성.급작성을 강조하거나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본문에서는 위의 두기능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 하늘로서 소리 – 본문의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에 관해 어떤 학자들은 랍비 문학과 연관시켜 해석하려 한다. 즉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였던 영(靈)과 예언자가 잠잠해진 400년동안의 침묵기에 하나님의 영의 소리를 반영해 전달해 주는 수단을 통털어 히브리어로 ‘바트콜'(*)이라 불렀는데, 번역하면 ‘소리의 딸’이란 의미이다. 물론 그 수단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본문을 단순한 ‘바트 콜’, 즉 지금까지 있어 왔던 평범한 하늘의 계시정도로만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이보다 더 강력하다. 실로 이 ‘소리'(*, 포네)는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침묵을 깨뜨리시고 다시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는 계시이다. 결국 이것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분명한 징조요, 그것을 공적으로 입증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소리였던 것이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이 말은 소위 ‘고난받는 종의 노래’라 일컬어지는 사 42:1을 반영하고 있으며, ‘너는 내 아들이라’고 노래한 시 2:7의 변형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에 들려진 하늘의 소리는, 곧 그를 ‘고난받는 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여기 ‘이는 내 아들이요’라는 말은 예수 주위에 있는 어떤 다른 사람도 하늘의 증거를 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아마도 많은 무리가 있었는지 모른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태의 주관심사가 아니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내 아들’로 부르심으로 2:15을 확인하고 있고 다음 장에서 사단에 의해 즉시 사용되게 된다(4:3, 6). 이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아들로 공적 인준(認准)을 받고 신격(神格)의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확증된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 성령, 성삼위의 거룩한 해후(邂逅)가 이루어지며, 성부의 음성은 변화산상(17:5)에서와 수난기간(요 12:28)에 다시 들린다. 한편 영지주의자들(Gnostics)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성령 강림이 있은 후 위와같은 하나님의 공적인 인준이 있기 전까지 육체에 속한 한 자연인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예수가 하나님의 인준으로 신적 본질을 가지게 되었지만 십자가 상에서 성부 하나님의 버리심을 고백(27:46)할 때에 그 신성이 다시 벗겨졌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요일 4:2,3). 그러나 이는 예수의 영원 현존성과 영원하신 신성을 간과한 이단적 견해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아들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령을 반영한 용어인 ‘사랑하는'(*, 아가페토스)이란 말은 질적인 측면을 강조한 ‘유일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기뻐하는'(*, 유도케사)이 초시간적인 부정과거인 점으로 보아 이 ‘사랑하는’이란 용어는 심정적인 측면 뿐 아니라 ‘선택’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직역하면 ‘내가 그를 선택함으로 인해 기뻐하였던 자’이다. 이는 메시야를 시간이 있기 전, 곧 영원 전에 선택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영원성을 강력히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요단강에 성육신(Incarnation)하여 우뚝 서 계신 아들의 영원한 신적 선택의 위대한 역사적 사실이 성부 하나님에 의해 선포된 것이다. 정녕 아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될 때 아버지께서는 감추어진 방법으로 그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백성들의 대표자이며, 고난받는 종으로 동시에 나타내 보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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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3장 강해설교]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세례식(마 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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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3장 강해설교 중에서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세례식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이 나타나 예수님의 길을 평탄하게 하고 있습니다. 회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때가 되매 예수님의 사생애가 끝나고 공생애가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세례식(마 3:1-17)

1-12절,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품

[1-3절]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 . . .

그때에 세례[세례주는 자] 요한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 전파하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이었는데, 이사야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하였다(사 40:3).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앞서 와서 그의 길을 예비한 자이었다. 그는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였다. 그가 외친 내용은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도 오셔서 회개를 전파하셨다(마 4:17). 회개는 죄를 인정하고 그것을 미워하고 그것을 청산할 결심을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눅 5:32). 또 그는 사람이 멸망치 않으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눅 13:3). 또 그는 하나님께서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의인 아흔 아홉명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다(눅 15:7).

복음 운동은 회개 운동이다. 예수께서는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셨다(눅 24:47). 복음 확장의 역사는 회개 운동의 확산의 역사이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 후 모여든 유대인들에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라”고 외쳤다(행 2:38). 베드로를 통해 고넬료의 가족들이 복음으로 구원받은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말했다(행 11:18).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전도 사역을 요약하기를,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하였다(행 20:21).

기독교는 회개 운동이다. 죄인이 죄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 구원이나 신앙생활을 말할 수 없다. 죄를 회개하는 것이 구원이며 신앙생활의 시작이다. 우리 교회에 발을 디디는 자마다 참으로 회개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자. 우리 가족들과 교우들 중에 회개치 않은 자가 하나도 없기를 기도하자.

[4절]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 . . .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 곧 야생꿀이었다. 이 구절은 세례 요한의 옷차림과 먹는 음식에 대해 증거한다. 약대 털옷과 가죽띠는 검소한 옷차림이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가정에서 태어났으므로 제사장의 귀한 의복과 생활환경을 가질 수 있었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 생활을 선택하였다. 그의 복장은 회개를 외치는 하나님의 종다운 복장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종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검소한 옷을 입으라고 가르친다. 디모데전서 2: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라.” 베드로전서 3: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라.” 이런 교훈은 어찌 여자에게만 해당하겠는가? 성경은 값진 옷이나 호화로운 단장을 반대한다. 그리스도인의 복장은 검소해야 한다.

요한은 음식도 검소하였다. 물론 광야생활이니 검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경은 성도의 식생활이 검소해야 할 것을 교훈한다. 잠언 23:20,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디모데전서 6:7-8,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장차 올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크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내세의 소망을 가진 성도는 그렇지 않다.

전도와 구제는 주께서 명하신 교회와 성도들의 최대의 임무이다. 우리가 전도와 구제를 위해 돈을 쓰려면 검소하게 먹으며 절약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내세(來世)가 있다. 거기에는 온갖 부요(富饒)와 보화가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장망성(將亡城)에 그렇게 애착을 두지 않으며 과도하게 물질을 소모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굳세게 가지고 우리의 생활 방식을 정리하자. 우리는 검소하게 먹고 입으며 선한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자.

[5-6절]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 . . .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나아와 그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의 종들의 손에 붙이실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비록 그는 후에 옥에 갇히고 목 베임을 당할 것이지만, 그의 사역은 얼마 동안이나마 성공적이었다. 사람의 구원이나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 그가 긍휼히 여기실 때 영혼이 구원받고 교회가 부흥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시면 영혼들의 구원과 교회의 부흥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선지자 예레미야이다. 그는 약 41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으나 한 명의 회심자를 얻지 못한 것 같다. 예루살렘 성은 의인 한 명이 없어서 마침내 멸망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 성실하게 선포하고 전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역의 결과에 대해 너무 마음을 쓰지 말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사람이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고전 3:6).

그러므로 주의 종들과 교회는 단순히 교인들의 수에 관심을 두지 말자. 우리의 진정한 관심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충실한 도구가 되어 그의 말씀을 바르고 성실하게 전달하였는가에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수에 관심을 둘 때 불신앙과 오류를 포용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바른 교회, 바른 목사, 바른 직분자, 바른 교인이 되기를 원하며, 또한 하나님의 긍휼로 영혼들이 구원을 얻고 교회가 부흥하기를 기도하자.

[7-10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 . . .

요한은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경건하고 보수적인 자들이었고, 사두개인들은 주로 부유한 제사장들이었다고 한다. 요한의 책망을 보면, 그들은 회개하였기 때문에 온 것 같지는 않다.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모든 죄인이 다 마귀의 자식이라는 뜻을 내포할 것이지만(요 8:44; 요일 3:10), 특히 그들이 남을 죽이는 독을 품은 자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요한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선포하였다. 그는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고 도끼로 나무를 찍듯이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는 실제로 칼, 기근, 전염병 등이었다. 주후 70년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는 로마 군대의 칼날로 예루살렘은 황폐케 될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지옥불 심판이 있을 것이다.

요한은 또 유대인들의 헛된 확신을 지적하였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헛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참으로 경건하고 죄를 회개하고 의와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헛된 소망에 불과하다. 헛된 소망은 위조수표와 같아서 그것이 수백 장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세례 요한은 특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하였다.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생각이나 말로만 인정하고 감정으로만 슬퍼하는 것은 부족하다. 참된 회개는 반드시 의지적 결단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전의 죄악 된 생활방식을 청산하고 그것으로부터 돌이키는 행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 구원의 확신도 얻게 된다. 죄 가운데 머물면서 구원을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열매로 나타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거룩케 된 생활이다.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지만(롬 6:17), 그 결과는 변화된 행위이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이론이나 형식만이 아니요, 인격과 삶으로 증거된다. 전에 악하였던 사람이 이제 선한 사람이 되고, 전에 거짓되었던 사람이 이제 진실한 사람이 되고, 전에 교만했던 사람이 이제 겸손한 사람이 되고, 전에 성격이 거칠고 남을 미워했던 사람이 이제 온유와 사랑의 사람이 되고, 전에 더러운 죄에 빠졌던 사람이 이제 거룩하고 단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11-12절]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 . . .

세례 요한은 또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증거하였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메시아께서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시며 자기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과연 요한과 비교할 수 없이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다.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이시며(마 28:18), “신성의 모든 충만을 육체에 가지신” 분이시다(골 2:9). 요한은 메시아의 능력과 영광을 바로 보았고 자신은 그의 신을 들 종이 되기도 감당치 못할 자임을 깨달았다.

세례 요한은 또 메시아의 사역을 두 가지로 증거했다. 첫째로, 그는 메시아께서 성령으로 세례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하였다. 다수의 전통사본들은 ‘성령과 불로’라는 구절에서 ‘불’이라는 말을 생략하지만, 누가복음 3:16은 ‘성령과 불로’라고 증거한다. 성령과 불의 세례는 죄를 씻으시는 성령의 중생 사역을 가리켰다고 본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하며 불은 더러운 죄악을 태워 깨끗케 하는 것을 상징했다고 본다. 요한은 죄씻음을 상징하는 물세례를 베풀고 있었으나, 메시아께서는 실제로 죄씻음을 주는 성령의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예수 믿는 자들은 이미 성령의 세례, 즉 중생과 죄씻음을 받았다.

둘째로, 그는 메시아께서 불로 심판하시는 분임을 증거하였다.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완전히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최후 심판 때에 알곡과 쭉정이가 나뉠 것이다. 알곡은 천국에 들이고, 쭉정이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꺼지지 않는 불’은 지옥불을 가리킨다. 지옥의 교리는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교리이다(마 10:28; 막 9:43-49). 메시아는 심판자이시며, 그의 심판은 악인들에게 지옥 형벌이다. 죄를 회개치 않는 자가 지옥에 던지울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지옥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사랑도, 친절도 아니다. 우리는 그가 내릴 불 심판, 특히 영원한 지옥 불의 심판을 믿고 두려워하며 또 힘써 전하자.

13-17절,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

[13-17절]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 . . .

이때에 예수께서는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셨다. 그러나 요한은 말리며 말하였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그러자 요한은 허락하였다.

예수께서 죄 없으신 의인이라는 점에서나,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점에서나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합당치 않으나, 그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다.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의 뜻인 세례라는 제도에 순종하심과, 모든 택함받은 자들의 죄를 담당한 자로서 상징적으로 죄사함의 세례를 받으심과, 또 그럼으로써 삼위 하나님의 증거를 받으심을 의미하였다고 본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그에게](전통본문)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오심을 보셨다. 그때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여기에 삼위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오시고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친 음성을 들려주셨다. 특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위해 친 음성으로 증거하셨다.

이와 같이, 마태복음 1장부터 3장까지에서 사도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적어도 일곱 가지의 증거를 기록하였다.

첫째는 구약성경의 증거이다. 마태는 메시아께서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자손과 다윗의 자손으로 예언된 분이심을 증거하였다.

둘째는 천사의 증거이다.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아기를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하였음을 증거하였다.

셋째는 동방박사들의 증거이다. 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 탄생하셨음을 증거하였다.

넷째는 별의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초자연적인 징조의 별은 동방박사들로 하여금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깨닫게 하였다.

다섯째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증거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비록 그에게 경배하러 가지는 않았으나, 성경에 근거하여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였다.

여섯째는 세례 요한의 증거이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께서 성령으로 세례 주실 분이시며 장차 불로 심판하실 분이라고 증거하였다.

일곱째는 하나님의 친 음성의 증거이다. 하나님께서는 친 음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하셨다.

우리는 성경을 좀 단순히 읽고 성경의 충만한 증거들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자. 또 구약시대로부터 약속되고 예언되어 온 메시아를 기쁨으로 환영하고 성심으로 믿자. 그가 누구신지에 대하여 신구약 성경에 증거된 대로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그를 섬기며 따르자.

[창세기 11장 히브리어 강해] 아브라함의 구속사 셈의 족보(창 11: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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