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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복음 27 장 | 마태복음 27장 224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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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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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제공 : CGNTV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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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

마태복음 27. … 제 27 장 …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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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5/27/2021

View: 6252

마태복음 27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마태복음 27 · 4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 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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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2/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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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마태복음 27장 – 한국컴퓨터선교회

(마 27: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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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8/3/2021

View: 568

마태복음 27:28 – 다국어 성경 Holy-Bible

마태복음 27장 · 새벽이 되어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모두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 대제사장들은 그 은돈을 거두고 말하였다. ·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시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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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2/15/2021

View: 7973

마태복음 27 KLB – 재판과 처형 – 이른 아침 모든 – Bible Gateway

재판과 처형 – 이른 아침 모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합의하였다. 그러고서 그들은 예수님을 묶어서 끌고 가 총독 빌라도에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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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10/15/2022

View: 9716

쉬운성경 마태복음 27장 – HANGL NOCR – 한글 신기관

27:1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끌려가심>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논의를 하였습니다. 27:2 그들은 예수님을 묶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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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7/15/2021

View: 8177

마태복음 27장 주석 – Daum 카페

마태복음 제 27장. ====27:1 새벽에 – 본장 초두에 제시된 ‘새벽에’의 원문 ‘프로이아스 데'(* ) 를 직역하면 ‘그리고 (이른) 아침에’ 로 번역할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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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4/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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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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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태 복음 27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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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1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aIDr5nJ0CZ4

마태복음 27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기다(막 15:1; 눅 23:1-2; 요 18:28-32)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유다가 목매어 죽다(행 1:18-19)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ㄱ)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예수를 넘기다(막 15:2-15; 눅 23:3-5, 13-25; 요 18:33-19:16)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1)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2)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군병들이 예수를 희롱하다(막 15:16-20; 요 19:2-3)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막 15:21-32; 눅 23:26-43; 요 19:17-27)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영혼이 떠나시다(막 15:33-41; 눅 23:44-49; 요 19:28-30)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ㄴ)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3)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무덤에 넣어 두다(막 15:42-47; 눅 23:50-56; 요 19:38-42)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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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 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 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15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줄 앎이러라 19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35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42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45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 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주라 분부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62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쉬운성경 마태복음 27장

27:1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끌려가심>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논의를 하였습니다.

27:2 그들은 예수님을 묶어, 총독인 빌라도에게 데려가, 그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27:3 <유다가 자살함>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는 예수님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을 보고,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은 삼십 개를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27:4 유다가 말했습니다. “내가 죄없는 피를 팔아 넘기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였습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그것은 너의 문제다.”

27:5 유다는 은화를 성전 안에 내던지고 나가서 목매어 자살했습니다.

27:6 대제사장들이 성전에서 그 돈을 거두고 말했습니다. “이 돈은 피값이니, 성전에 두는 것은 안 될 일이다.”

27:7 그들은 서로 의논하여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 나그네들의 묘지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27:8 그 밭은 지금까지 피밭이라고 불립니다.

27:9 그래서 예언자 예레미야가 말한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이 은화 삼십 개,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몸값이라고 정한 값을 받았다.

27:10 그리고 토기장이의 밭을 샀는데 밭값으로 그 돈을 주었다. 이것은 주께서 내게 지시하신 그대로이다.”

27:11 <빌라도가 예수님께 질문함> 예수님께서 총독 앞에 서셨습니다. 총독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예수님께서 “네가 말하였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27:12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고발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27:13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너를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 것이 들리지 않느냐?”

27: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27:15 <바라바와 예수님>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 한 명을 총독이 사면해 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27:16 당시 감옥에는 바라바라고 하는 아주 악명 높은 죄수가 한 명 있었습니다.

27:17 사람들이 모였을 때,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너희는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아니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냐?”

27:18 빌라도가 이렇게 말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자기에게 넘겨 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7:19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 말했습니다. “저 죄없는 사람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어젯밤 꿈 속에서 제가 이 사람 때문에 몹시 고통을 받았습니다.”

27:20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군중들에게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님을 죽이도록 요청하라고 시켰습니다.

27:21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두 사람 중에 누구를 석방시켜 주길 원하느냐?”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바라바요!”

27:22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그들이 모두 대답했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시오!”

27:23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그러자 사람들은 더 크게 소리쳤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시오!”

27:24 빌라도는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을 떠다가 사람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 너희가 알아서 해라.”

27:25 사람들이 한결같이 대답했습니다. “그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지겠습니다.”

27:26 결국 빌라도는 바라바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리게 한 후, 십자가에 매달도록 내어 주었습니다.

27:27 총독의 군인들이 예수님을 총독의 관저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모든 부대원이 예수님 주위로 모였습니다.

27:28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대신 붉은색 옷을 입혔습니다.

27:29 그리고 가시로 왕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 위에 씌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오른손에 지팡이를 쥐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말하며 예수님께 무릎 꿇고 절하면서 놀렸습니다.

27:30 그들은 예수님께 침을 뱉고 지팡이를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쳤습니다.

27:31 예수님을 실컷 조롱한 후에, 붉은색 옷을 벗기고, 원래의 옷으로 다시 입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려고 끌고 갔습니다.

27:32 <십자가에 못박히심> 군인들이 나가다가 구레네 출신의 시몬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군인들은 그에게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습니다.

27:33 그들은 골고다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골고다는 ‘해골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27:34 군인들은 예수님께 쓸개즙을 섞은 포도주를 주어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맛을 보시고는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27:35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27:36 그리고 거기 앉아서, 예수님을 계속 지켜 보았습니다.

27:37 그들은 예수님의 머리 위에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 예수다”라고 쓴 죄패를 걸어 놓았습니다.

27:38 그 때, 두 강도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한 사람은 오른쪽에, 다른 한 사람은 왼쪽에 매달렸습니다.

27:39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저으면서 예수님께 욕을 하였습니다.

27:40 “성전을 헐고 삼 일 만에 다시 세운다는 사람아! 네 자신이나 구원하여라.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27:41 이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장로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27:42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구하면서, 자기 자신은 구하지 못하는구나!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겠다.

27:43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를 당장 구원해 주시라고 그래라. 자신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27:44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똑같은 욕을 예수님께 했습니다.

27:45 <예수님께서 돌아가심>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이 어둠에 덮였습니다.

27:46 오후 3시쯤에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이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

27:47 거기 서 있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27:48 그러자 얼른 한 사람이 뛰어가서 해면을 가져다, 신 포도주를 적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시도록 지팡이에 매달아 주었습니다.

27:49 나머지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가만 놔 두어라. 엘리야가 그를 구원하러 오나 보자.”

27:50 다시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27:51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두 조각으로 갈라졌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쪼개졌으며,

27:52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27:53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였습니다.

27:54 예수님을 지키던 백부장과 병사들이, 지진과 일어난 모든 일들을 보고 매우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27:55 많은 여자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를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섬기려고 따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27: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27:57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 그 날 저녁에, 요셉이라는 아리마대 출신의 한 부자가 왔습니다. 그도 역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27:58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요셉에게 넘겨 주라고 군인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27:59 요셉은 그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천으로 둘렀습니다.

27:60 그리고 바위를 뚫어 만든, 자신의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습니다. 그는 큰 돌을 굴려 무덤의 입구를 막고 돌아갔습니다.

27:61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 맞은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27:62 <예수님의 무덤을 지킴> 이튿날, 곧 준비일이 지난 후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왔습니다.

27:63 그들은 말했습니다. “각하, 그 거짓말쟁이가 살아 있을 때, ‘내가 삼 일 뒤에 살아날 것이다’라고 한 말이 기억납니다.

27:64 그러니 명령을 내리셔서 삼 일째 되는 날까지 그 무덤을 꼭 지키게 하십시오.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간 후 사람들에게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번 속임수는 처음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27:65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경비병들을 데리고 가서, 당신들이 할 수 있는 대로 무덤을 지키시오.”

27:66 그렇게 해서 그들은 무덤에 가서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들을 시켜 입구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장 주석

마태복음 제 27장

====27:1

새벽에 – 본장 초두에 제시된 ‘새벽에’의 원문 ‘프로이아스 데'(* )

를 직역하면 ‘그리고 (이른) 아침에’ 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산헤드린 공의회가 해

가 떠오른 후에야 비로소 공식 회의를 열 수 있다는 관례에 따라 이미 지난 밤사이에

비공식적으로 예수의 사형을 결의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해가 떠오른 때’를 기다려

그 결의안올 정식 회의에 상정한 것을 묘사한 문구이다(눅 22 : 66). 실로 이것은 자

신들의 불법을 위장하기 위한 합법적인 노력이었다.

예수를 죽이려고 –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구에는 없는 문구로서 마태는 26:59, 즉 ‘데제사장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를 반복하고 있다. 아마 예수의 적대

자들은 예수에 관한 소송을 어떻게 제출할 것인가를 결정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심중

에 있는 주된 소송 이유는 예수로 인해 자기를의 종교, 사회적인 각종 기득권을 잃게

될 위험성 때문이었지만 저들이 내세우는 형식상의 이유는 예수께서 ‘신성모독’의 죄

를 범했다는 것이었다(26:65,66). 그러나 신성 모독은 단순한 종교적 문제로서 그 당

시 각 피지배 지역 주민들의 종교, 문화에 개방적이었던 로마의 한 행정관인 빌라도로

하여금 사형 판결을 이끌어 내는데 있어 충분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저들은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저들은 결정적인 사형죄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메시야의 왕권을

공소(公訴)의 주제로 삼아 예수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움으로써 빌라도로 하여금 사

형 판결을 내리도록 하려 했던 것이다(행 17 : 5-4).

함께 의논하고(* ,쉼불리온 에라본). 이 말은

함께 숙의적 과정을 거친다는 뜻이기 보다 어떤 ‘결의안을 통과시키다’라는 라틴어법

적 표현과 유사하다(Consillium Ca-pere). 결국 재차 산헤드린 공의회로 모인 그들이

이미 제 1차 야간회의에서 결안된 예수의 사형 선고를 합법적 절차에 따라 새롭게 인

준해 준 것이었다.

=====27:2

결박하여 끌고 가서 – ‘결박’은 두손을 뒤로 모으고 포승으로 묶는 것을 가리키

는데, 이는 사형과 같은 극형을 인도받은 자들을 언도할 때 사용되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에서부터 결박당하셨던 것 같으며(26 : 57) 재판과정 동안 풀렸다가 재차 포

박당하신 듯하다.

총독 빌리포 – ‘총독’으로 번역된 ‘헤게모니'(* )는 지도자, 총독

권자, 또는 통치권자를 뚱하는 일반적인 칭호이다(10 : 18). 이직분의 더 특별한 명

칭은 ‘총독’, ‘행정 장관’이란 뚱의 ‘에피트로포스'(* )가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전자의 호칭이 사용되었다. 한편 그들은 가이사에게 직접

고소하지 않고도 식민지인의 생사 여탈권(生死 與奪勸)을 가질만큼 권한이 컸다. 여

하튼 사태는 ‘빌라도’라는 이름 앞에 ‘총독’이라 명칭을 덧붙여서 빌라도가 로마 제

국을 대표하는 행정 책임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빌라도는 유다, 사마리아, 이

두매를 관할한 여섯번째 총독으로서 디베리오(Tiberius) 황제로부터 A.D. 26년에 총독

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 등의 증언에 따르면 잔인하고

전제적(專制的)이며, 자신의 수하에 있는 유대인 관리들을 싫어하고, 그들을 이해하려

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매우 외골수적인 지배자였던 것 같다 (Jos.Antiq.XVIII,35,55-

62;Wars II,169-177). 또한 그는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구별된(고르반) 돈을 훔쳐 수

도가 설비로 유용(流用)했으뗘, 이에 에루살렘 주민들이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을 때

군대를 파견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더럽힌 적도 있었다

(눅 13 : 1). 그런데 복음서에 제시된 그의 인물됨이 위와는 크게 대조되는, 그야말

로 심약하고 기회적 주의적인 성경으로 묘사된 데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문점을 제시

하곤 한다. 이에 대해 ‘훼넌'(Hoehner, Ch-ronological, Aspects , pp. 104-105)는 빌

라도가 그 당시 곧. A.D. 33년에 예수를 처형할 시점에 로마의 디베료 가이사에게 신

임을 잃고 있었으며, 자신의 구원자이며 반유대주의자인 세아누수(Sejanus, A.D. 31.

10. 19 사망)가 죽음으로써 그가 상당히 위추된 상태였으므로, 정치 감각이 탁월했던

그가 이 예수 처형건에 대해 연약한 모습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견해는 연대기적 차원에서 성경 기록과 상당한 차이를 두고 있으므로 전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심리적, 정치적 측면에서 빌라도의 고도의 정치술

에 의한 후기 생존의 한 방법으로 이렇게 유익한 모습을 보였였다 보는 학자도 있다.

여하튼 A.D. 33년까지의 빌라도의 행정은 극히 부정적으로 평가되었으며, A.D. 36년에

는 황제에게 소환되어 프랑스 지방에서 귀향살이를 하다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어쨌든 예수 처형당시 빌라도는 가이시랴에 자기 관저가 있었으나 유월절 등과

같은 큰 명절 때는 예루살렘에 입경하여 그곳 치안을 관할하곤 했다. 아마 그당시 빌

라도는 자기 아내와 함께 안토니아 성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때 산해

드린의 공식 회의에서 예수를 사형 선고한 후에 곧장 이곳 빌라도의 처소로 끌고 온것

은 비록 그들이 자의적으로 사행을 결정할 수는 있지만 사형 집행권은 오직 총독의 권

한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산헤드린 법에 따르면(1:1;7:2) 예루살렘 멸망(A.D.70)

약 400여년 전에 집행권 유대의 자치적 권한에서부터 로마 정부 당국으로 이양되었다

고 한다. 여하튼 예수가 빌라도 앞에 선 때는 금요일 아침, 곧 유대력 니산월 14일

아침이다.

=====27:3

때에(* , 토테) –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로서 ‘그 때에’, ‘그다음에’, ‘그

리고나서’ 라는 의미틀 지닌다. 여기서는 문맥상 예수가 산헤드린의 고소로 빌라도에

게 제소(提訴)된 직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의 정죄됨을 보고 – 여기서 ‘보고'(* , 이돈)란 ‘쳐다보다’, ‘조심하다

‘, ‘주목하다’는 뜻의 원어 ‘오라오'(* )의 제 2과거행 분사이다. 이는 결

국 유다가 예수의 재판사건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따

라서 이 문구는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로 번역된 공동번역과 새번

역이 훨씬 이해하기 쉽다. 유다는 아마 예수께서 체포되어 산헤드린에 의해 사형 판

결을 받고 빌라도에게 넘겨지기까지 전 과정을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고 직 . 간접적

으로 보고 들은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뉘우쳐 – 헬라어 ‘메타멜레데이스'(* )는 마음과 삶

의 전적인 번화(* , 메타노이아)룰 뜻하는 ‘메타노에인'(*

)보다는 상당히 약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자신의 행위를 뒤돌아보고 단순

히 괴로워하며 ‘후회’하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 청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단지 인간적 후회의 차원에서만 바꾸는 것이

다. 여하튼 ‘뉘우치기’까지 하는 유다의 마음의 상태를 보건대 그는 예수께서 설마 사

형에 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은 듯하다. 이렇게

본다면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긴 것은 돈을 탐하였다기 보다는 예수께서 메시야로서의

능력을 보이도록 하기 위해 예수를 배반했다는 이야기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

이 자기가 계획한 악한 일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볼 때 순간적인 양심의 가책을 받

을수도 있다는 점에서 꼭 전자의 입장이 옳다고만 볼 수도 없다. 율의 배반 의도가

무엇이었든간에 예수의 죽음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임은 분명한 것이다.

은 삼십을…도로 갖다 주며 – 26:15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유다는 악한 자기 행

위의 결과요 침묵하고 있는 증인이라 볼 수 있는 은 삼십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되

돌려 주어 양심의 가책을 가볍게 하고자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당시 자신의 과

오를 깊이 인식하는 동시에 예수의 무죄함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에 이처럼 환불(還

拂)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그 행위의 결과만을 씻어버림으로써

해결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 그들이 한 부류, 곧 산헤드린의 회원들임을 암시하기 위해

두단어를 묶은 하나의 관사(* , 토이스)만을 사용하였다(21:23)

=====27:4

무죄한 피 – 사본에 따라서는 ‘의로운 피’ 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같은 변형은

전체문맥과 잘 조화를 이룬다. 즉 19절절에 ‘의로운사람’이라는 문구가 예수께 사용

되고 있고, 24절에도 ‘이 의로운 사람의 피’라는 문구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들과 ‘무

죄한 피’와는 동일한 맥락을 이룬다. 한편 ‘피’는 생명의 요체로서 특히 본문에서는

사람의 전존재롤 의미한다. 실로 예수는 ‘무죄한 인격’이었던 것이다.

죄를 범하였도다 – 유다는 무죄한 죄를 판 자신의 죄를 뒤늦게 고백하나, 하나님

께가 아니라 공범자인 산헤드린에게 했다. 따라서 이 자인(自認)은 구원에 이르는 회

개가 아니라 자기의 실수에 대한 인간적인 강박 관념에서 비롯된 일종의 넋두리에 불

과했다.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고전 셈어의 관용적 표현으로서 참으로 매정한 결별

선언이다. 즉 이것은 배신자에 대한 뼈아픈 배신선언인 것이다.

네가 당하라 – 똑같은 문구가 24절에 다시 한번 나온다. 여기서 ‘당하라’는 헬라

어 ‘와세이'(* )는 강한 의지가 내포된 명령이다. 따라서 본문을 재구성하면

‘그것은 너의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가 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공동번역에서는 ‘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라’로 번역되어 있다.

=====27:5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 여기서 ‘성소'(* , 나오스)가 성전 구내 전체를

뜻하는지, 이방인의 뜰과 막연히 구별된 제사장만이 출입할 수 있는 성소(sanctuary)

를 뜻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구구하나 대체적으로 후자를 택하고 있다. 적어도 그렇다

면 이때 유다는 심각한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떻게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양으로 율

법의 규례를 무시한 채 성소 뜰로 뛰어들어 열린 성전문으로 은 삼십이 든 주머니를

던져 넣었을 것이다.

물러가서 – 마치 단말마(斷末魔)의 그것처럼 필사적으로 자기 절망감을 극복하려

했던 유다는 성소에서 뛰쳐나와 곧장 힌놈 꼴짜기의 으슥한 곳으로 숨어들었을 것이다

(The Pulipit Commentary).

스스로 목매어 죽을지라 – 그러나 본문과는 달리 사도행전에서는 유다가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튀어나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행 1:18). 이는 양 기사간의 모순

을 드러내기 보다 조화로운 장면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가룟 유다는 자살 장소로 가

파른 바위 언덕 위로 을라가 그곳 나뭇가지에 목을 매었는데, 후에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그 가지가 부러짐으로 해서 날카로운 바위에 떨어져 창자가 터져 죽어 갔을 것이

다(행 1:18,19 주석 참조). 한편 ‘목 매어 죽은’ 사건은 이곳 외에 70인역(LXX)의 삼

하 17-23에서 나온다. 이를 근거로 하여 어떤 학자들은(B,F, Meyer, McNeile)다욋을

배신한 친구인 아히도벧과 다욋의 자손을 배신한 가릇유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하기 위

해 마태가 의도적으로 본 장면을 첨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태가 이같은 비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두 배신자를 비교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Moo, Use of O.T. pp.

189-91). 결국 유다는 끌내 멸망에 이르는 자기 길로 가고 말았다(행 1:25).

=====27:6

이것은 피 값이라 – 유다가 ‘예수의 피(4절)를 팔므로써 벌어들인 돈이라는 뜻이

다. 따라서 대제사장들이 이갈은 단정적 발언을 한 것은 적어도 유다의 행위가 사악

한 자신들 의견시에서 볼 때도 옳지 못했다는 점을 간접 시언한 것이다.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 율법에 의하면서(신 23:18) 이런 피값으로 얻은돈

은 창기나 개같은 자의 돈과 같이 취급되어 여호와께서 미워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신 이런 류의 돈들은 자선과 구제 등의 대사회적인 용도로 사용되거나, 현금한 당사

자에게 되돌려준 듯하다. 따라서 제사장들이 유다의 돈을 성전금고에 넣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성전고’로 번역된 헬라어 ‘코르바나스'(*

)는 거룩한 물건과 고르반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서(15:5;Jos. Wars II,IX.4), 이곳의

재물들은 주로 각종 제사와 성전 관리를 해 활용되었다. 그런 점에서 일전에 가룟 유

다에게 주어진 은 삼십은 이곳에서 지출된 것이라는 추론(推論)이 가능하다. 어찌되

었든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 지도자들은 엄청난 불의를 자행했음에도 의식상으로는

깨꿋하려는 위선을 떨치지 못했던 것이다(12:9-14;15:1-9;23:23).

=====27:7

의논한 후 – 구체적인 토론을 한 것이기 보다 신속하게 결의안을 통과시켰음을 암

시한다(1절). 그들의 믿음은 악을 도모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 사도행전에 의하면 유다가 밭을 산 것으로 되어 있다(행1:

18). 분명 그 제사장이 밭을 샀다고 하여도 그 돈의 원(原) 주인은 유다이었으므로,

사실상 슈다가 산 것과 같다고 설명할 수 있다(Roberton). 한편 이밭의 소재지는 점토

지대인 예루살렘 남쪽, 곧 힌놈 골짜기 맞은편에 있다고 전해지며, ‘악한 회의의 언덕

‘( the Hill of Evil Counsel) 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은 더이

상 토기 굽는 장소로서 효율 가치가 없어진 불모지(不毛地)로 잘 알려져 있었던 듯하

다. 왜냐하면 매우 싼 가격으로 쉽게 이곳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들 유대 지도자들이 이런 결정을 신속히 하게 된것은 아마도 벌써부터 ‘나그네의 묘지

‘에 대한 필요성올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여하튼 일로 인해 즉 11:12, 13의 예

언이 온전히 성취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그네의 묘지 – 여기서 ‘나그네’란 이방인들이 아니라 타 지방에 사는 유대인이

나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따라서 ‘나그네의 묘지’란 그들이 명절 등

의 일로 예루살렘에 입경했다가 죽는 경우 묻어 주는 묘지를 말한다. 한편 이곳은 한

편 이곳은 현재에도 가난한 예루살렘 주민이나 치욕스런자들의 뼈무덤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27:8

오늘날까지 – 이 한정적 표현은 본서가 기툭된 그 시점에 이르기 까지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결국 이 말은 본서가 예루살렘과 그 주변이 완전히 파괴되고 황폐화되어버

린 A.D.70년의 예루살렘 멸망 전에 이미 기록되었음을 간접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유

다 자살 사건과 본서 기록 시점과는 어느 정도 시간 간격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피밭 – 마태복음에 의하면 ‘피밭’이라는 이름은 피값을 주고 그 땅을 산것에서 유

래한다고 하는 반면에 사도행전에서는 유다의 피가 거기에 흘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불

리워진다고 한다(행 1:18, 19). 그래서 예루살롑 주민들은 이 땅을 ‘아겔다마’, 곧

‘피의땅’ 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 차이의 극복을 위해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

다. 즉 만약 유다가 제사장들이 산 밭에서 죽었다고 가정(假定)한다면 마태복음과 사

도행진의 이야기는 일치되는 것이다. 아마 제사장들은 반드시 바로 그 날은 아니었지

만 지체하지 않고(아마 예수의 부활이 있을 일요일로 뗘겨짐 밭을 샀을 것이

다. 그리고 돈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알고 있었으며, 또 극심한 후회로 절망에 잠

겨 있던 유다가 이스라엘의 계약에 따라 나그네를 위한 묘지로 삼은 그 밭에서 자살하

기로 결심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유다가 돈을 성전에 던져 넣고나

가서 즉시 자살했다면 그 시기는 제사장들이 그 돈으로 밭을 사기 전일 수도 있다. 그

렇다고 하더라도 유다의 시체를 그곳에 옮겨 묻었다면 앞의 이야기는 무리없이 받아들

여질 수 있을 것이다.

=====27:9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맡씀이 이루었나니 – 구약 예언의 성취를 강조하는 전형적

인 마태의 문구이다. 구약 예언의 성취를 알리는 이 문구는 예레미야에서 온 것처럼

되어있는 본문과는 달리 사실은 스가랴의 예언으로 보아도 좋을만큼 대부분이 슥 11:

12, 13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렘 18:3에서 토기장이의 집을 방문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렘 32:6ff. 에서는 밭을 산 것에 대해 하고 있어서 예레미야서가 완전히 배제

될 수는 없다. 여하튼’예레미야’란 이름을 후기 편집자들이 첨가했다거나, 순전히 렘

32:8-14의 인용이라는 사실을 들어 이 차이를 해명하는 학설들이 있다. 이와 함께 선

지자의 이름이 ‘예레미야’로 제시된 이유로는, 스가랴서를 위시한 모든 예언서들을 대

표하는 이름이 ‘예레미야’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Light foot

;Talmud, Baba Bathra 14b). 그러나 예레미야 대신에 ‘이사야’가 예언서의 대표격으로

더 자주 사용된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가장 유력한 설

명은 다음과 같다. 즉 마태가 렘 18:2;19:1,2;32:8-15의내용을 종합하고, 즉 11:13과

결합시켜 하나의 문장을 만든 후 그 구절을 대표적인 선지자 예레미야의 이름으로

인용하였다는 학설이다(Bruce, Meyer, Gundry). 이러한 예는 신약의 다른 곳 에서도

발견된다(2:23;막 1:2, 3). 실로 마태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께서 사형(死刑)에 이르는 이모든 과정(은 30에 팔리우고,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이 사들여진 일 등)이 구약의 예언을 모두 성취했다는 사실이다. 즉 스가랴서에 기

술된 예언이 목적하는 바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목자되신 여호와께 삯 은 삼십은

을 드렸고 제사장은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것을 소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그같이 예언이 예수의 팔리우는 사건으로 성취되었던 것이다.

=====27: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며 – 이 문구는 2절에 연결하여 있으면 오히려 자연스럽

다. 마태가 자기만의 독특한 기사인 유다의 사망 이야기를 2절과 11절 사이에 삽입시

킴으로써 이같은 시간적 중단이 생겼다. 본문 이하부터 계속해서 ‘빌라도’라는 이름

대신 ‘총독’이라는 직책명을 반븍해서 사용하여 (15. 19, 21절)예수의 사형이 정치적

문제에 따라 이방인의 손에 의해 공식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때 빌라도의 심문은 총독 관저(praetorium)에서 진행되었다.

유대인의 왕 – 당시 로마의 재판 과정은 먼저 집행관이 원고측의 고소 이유를 듣고

피고에게 몇 마디 질문을 한 뒤 피고의 자기 변론을 듣는 과정을 필요에 따라 몇번 거

듭하다가 배심원들의 의견을 들은 다음 판결을 내렸으며, 그렇게 확정된 판결은 일사

천리(一瀉千里)로 집행되었다. 유대 지도자들의 예수에 대한 고발 내용(아마 세금 문

제에 관해 언급하신 것을 예수에게 불리하게 적용시키는 것과 함께 그가 열심당(the

Zealot)과 같이 반역을 꾀하여 유대인의 왕이 되려 한다는 죄목이었을 것이다<눅 23:2 >츱)을 듣고 빌라도는 예수께 본문의 내용으로 질문하였던 것이다. 사실 빌라도는 로

마 총독으로서 점령군을 책임지고 있었으며 법과 질서의 문제에 민감했다. 만일 빌라

도가 예수의 범죄의 정치적 성격을 확신할 수 있다면 예수는 로마의 십자가 처형에의

해서 죽임을 당하여도 무방하다. 그런 점에서 빌라도의 관심은 ‘예수가 정치적인 권력

을 장악하여 로마의 법과 질서에 위협을 가했는가’ 이며 따라서 그는 자신의 관점에서

묻는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한편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칭은 일찍이 2:2에서 동

방 박사들이 예수께 사용한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역사적로는 물론 신학적으로도 중요

한 의미를 지닌다. 즉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은 십자가의 명예에도 사용되었

을 뿐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가 약속된 메시야, 곧 유대인의 왕이라

는 확신 아래 세워진 기독교 신앙의 서장(序章)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문제는 이미 본서 초두에서부터 부각되어 왔던 주제이다. 십자가에 못박

혔던 메시야가 곧 유익하고 정당한 우리의 주이신 것이다(N.A. Dahl, The Crucified

Messiah, pp. 10-36)

네 말이 옳도다(* ,쉬 레게이스). 직역하면 ‘네가 말했다’로서 굳

이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신이 잘 알고 있지 않느냐는 긍정적 답변이다. 사실 예

수께서는 위의 질문에 대해 26:25, 64 등에서 이미 긍정하신바 있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세상의 구세주로서의 메시야 됨을 긍정한 것이지, 정치적 의미에서의 왕됨을

긍정한 것은 아니다. 물른 이때 빌라도는 과연 예수가 어떤 의미에서 유대인의 왕이

셨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예수께서 지니신 왕권의 본질에 대해서는 요한복

음 18:34-37에 자세히 정의되어 있다.

=====27:12

고소를 당하되 – 마가복음에는 고소하는 이들이 대제사장들로만 국한되는더 반해

마태는 ‘장로들’을 첨가하고 있다. 이처럼 마태가 ‘장로들’을 첨가한 것은 백성의 대

표들이 예수를 고소한 일에 분명히 관여하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또한 26:65,

66 에서는 산헤드린이 사형 판결을올 내린 이유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 아들 그리

스도라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음을 알 수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유대법에 의해서는 성립되지만 로마법에 의해서는 유죄 판결의 이유

가 안 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저들이 예수를 고소하였다고만 언급되어 있을뿐 구체

적으로 어떤 내용을 고소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눅 23:2 에 의하면 고소 내용

이 예상했던대로 정치적인 죄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11절 참조).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 이 시야가 예언한 바 있는 ‘고난받는 종'(사 53:7)

의 침묵을 연상시켜 준다. 예수께서는 앞서 있었던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에서도 침묵

을 지키셨다(26:62, 63). 그리고 이후 요 9에서도 마지막(세번째) 침묵을 지키셨다.

사실 저들의 고소 내용은 예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대답하신 진실 말고는 모두

거짓 고소였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침묵으로써 저들의 허위에 찬 거짓고소를 부정하

실 수밖에 없었다.

=====27:13

저희가 너를 쳐서…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 한 두마디의 거짓도 아니고 무수히

많은 고소 앞에서도 예수는 흔들리지 않고 오직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가 분명 무죄(無罪)함을 직감했고 사지 않은 상태로 예수를 풀어 반감을 사지 않

은 상태로 예수를 풀어 주려 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께 자기 변호의 기회

를 준 것이다.

=====27:14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 이중부정 구문을 사용하고 있는 혤라어 원문을 직역

하면 예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셨는데 단 한마디의 고소에 대해서도 (답변)하지 않으

셨다’가 된다. 실로 예수의 침묵은 무언(無言) 중에 자신의 무죄성욜 강조하신 동시

에 자신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서(20:28) 기꺼이 고난을 당하겠다는 당신의

거룩한 뜻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심히 기이히 여기더니 – 이 말은 가끔 초자연적인 사실 앞에서 경이감을 표시하는

데 사용되었다(9:33)실로 죽음 앞에서 조금도 혼들림 없이 자신을 구재(救災)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한채 ‘한 마디’ 대답 없이 침묵할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 다

변(多辯)의 수사학으로 길들여진 빌라도가 그런 일을 일찍이 본 일이 있었겠는가 ? 그

는 사실상 초자연적 존재와 사건 앞에 서 있는 것이며, 따라서 기이히 여기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여하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많은 말로 가르치시던

예수께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진정 예수께 있어서

는 말하는 것도 침묵하는 것도 인류에 대한 당신의 지극한 사랑의 표시인 것이다.

=====27:15

명절을 당하면…죄수 하나를 – 명절에 죄수를 풀어 주는 전례가 역사적으로 언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이 관습이 유대인을 무마하기 위한

로마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행해졌다고 한다(Gro-tius) (2) 로마와 헬라에서는

황제의 생일이나 명절에 죄수들을 석방했던 관습이 있었는데, 공적 축일(祝日)에 로마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석방한 것은 빌라도 이전 시대부터의 관습이었던 것 같다

(Braune). (3) 유대인의 풍속에 관한 고대 문서(M, Pesahim)에는 ‘그들은 그들이 감

옥에서 석방해 주고자 하는 자를 대신하여 유월절 앙을 죽일 수 있었다’는 내용이 있

어 유대 지방에서 매년 유월절에 대속사가 이루어졌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4) 앞의

설명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복음서 연구가의 브랜스콤(B.H. Breanscomb)은 그 전례에

대해 ‘여기 설명된 것과 같은 그런 전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유월절

절기에 로마의 총독들이 정규적으로 죄수 한명을 석방했으며, 또 그 죄가 어떠하든지

간에 무리들이 개인을 지명했다는 관례는 전혀 아무런 확증이 없을 뿐만아니라 팔레스

틴을 다스리던 로마 통치의 정신과 방법에 전혀 모순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로

마법에는 로마 제국의 행정관은 아직 정죄되지 않은 죄인을 사면해 주거나 이미 정죄

된 죄인을 용서해 줄 권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본문의 풍속의 기원이 보호하다 하더라

도, 최소한 로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던 유대 지역에서 실행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

이다(Moule, Idiom Book, p 59).

=====27:16

빌라도의 바리바리 하는 유명한 죄수 – 하위그룹에 속하는 헬라어 사본들(아도스사

본. 8-9세기경)과 시리아역, 그리고 고대 교부들의 문헌들에서는 ‘바라바’를’예수 바

라바(Jesus Ba-rabbas)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본문에 ‘예수’라

는 이름이 삭제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에 대한

존경심이 커지고 ‘예수’라는 이름이 신성시 되면서 ‘예수 바라바’에서 ‘예수’라는 명

칭이 생략되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와 더불어 이 사실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다

음과 같은 견해를 덧붙인다. 즉 마태는 17절에서 바라바라와 예수를 구분하기 위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라는 문구로 ‘예수 바바라’와 ‘그리스도 예수’를 구분하고 있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오늘날 크게 지지받지 못하고 있는형편이다.한편

‘바라바'(Barabbas)라는 말의 의미는 ‘바르 아바'(bar Abba) 곧 ‘아바의 아들’, ‘아버

지의 아들’이라는 뚱이다. 이에 대해 랍비의 아들'(Ewald), 또는 ‘마귀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적 그리스도를 뜻한다고도 한다(Theophylact). 이와는 반대로 이것이 하나님

의 아들에 관련되고, 바로 그것에서 하나님 거룩한 섭리의 일면을 발견한다고 주장하

기도 한다(Olshausen). 그러나 이러한 제견해들 중에 어느것을 단정적으로 주장하기

란 사실 힘들다. 한편 본문의 ‘유명한'(* , 에피세모스)이란 ‘탁월

한’, ‘눈에 띄는’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특혀 ‘악명(惡名)높은’이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사실 바라바는 평범한 죄수는 아니었다(막 15:7;)눅 23:19;요 18:40). 즉

그는 단순한 도둑이나 강도가 아니라 적어도 사행에 처해질 정도인 것으로 보아 아마

반란 음모자였음이 분명하다. 사울 당시 유대 전역에도 게릴라에 의한 반란과 유혈

사태가 빈번하였었다(Jos.Antiq.XVIII,3-10,3-10,60-62;눅 13:1). 아마 바라바도 그러

한 유혈 사태에 관련되었을 것이며, 거기에다가 반도덕적 악행도 저질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유대 백성에게 있어서 그는 악명 높은 강도로서가 아니라 어떤면에서 ‘영웅

‘적 행동을 한 자로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27:17

빌리포가 물어 – 마가복음과는 달리전례대로 해주기를 구하는 무리의 요구가 본문

에는 빠져 있다. 또한 마가복음에서는 빌라도가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

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막 15:9)고 묻고 있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빌라도가 백성들에

게 요구하기를 ‘바라바’와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사실 그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종교적 열성이 강한 유대 백성이라면 적어도 선한 선

생으로 이해되었던 예수를 선택할 줄 알았을 것이다. 그는 마치 자기가 무모한 살인

의 책임을 회포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맞은 양 이렇게 다급히 백성들에게 물었으

며, 이 방법으로 산헤드린의 악한 계책(計策)을 깨뜨려 버리려 하였던 것 같다. 한편

빌라도가 선택을 요구한 ‘저희’는 예수를 고소한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

특사로 사면될 죄인을 선택함에 있어서 빌라도가 의견을 물었던 무리들이었다(막

15:8). 이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확실치는 않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체포

와 재판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군중들은 혁명 투사였던 ‘예수 바라바’

의 이름을 외치면서(8, 9세경의 아도스 사본이 신빙성이 있다면 그의 사면을 요구하였

을 것이고, 이때 빌라도는 이 외침을 예수 그리스도를 지지하는 함성으로 잘못 알아듣

고(왜냐하면 빌라도는 내심으로 바라바 보다는 예수를 석방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너

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라 하는 예수냐 아니면 그리

스도라 하는예수냐’라고 군중들에게 질문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Lane, Mark P. 554)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한편 본문의 ‘그리스도라 하는(불리우는)

예수’란 표현은 예수의 신적 존재를 무시하고 경시하여 부르는 말임이 분명하다.

=====27:18

이는 저가 …앎이러라 – 여기서 ‘앎이러라'(* ,에데이)는 말은 제 2과거

완료 시상으로서 이미 충분히 납득한 상태에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즉 빌

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에 결함이 있음과 그들의 불같은 행동의 이면에는 개인

적인 시기와 질투가 스며 있음을 모두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는 21:15, 16;21:45 에서도 이미 보여진 바 예수의 가르치는 권위나 능력과 언

행이 저들의 위선과 허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 아니라 저들의 종교, 사회상의

고유한 권위를 상당히 침범하였기 때 문에 그들의 마음에 생겨났을 것이다. 빌라도의

이러한 유대 지도자들의 저의(底意)를 이해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였다. 실로 사

람이 알지 못한 채 죄를 짓는다면 그 실수 한 가지만 책망 받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

런데 알면서도 짐짓 죄를 지었을 때는 죄를 지었다는 것 뿐 아니라 자신의 양심을 거

스렸다는 사실까지도 아울러 책망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과적으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빌라도의 잘못은 결단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27:19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 – 요 19:13에서처럼 마태는 빌라도가 총독 관저 앞

에 마련된 돌로 만든 단상, 곧 재판석에 앉았다고 기록한다. 물론 그가 이 자리에 알

은 것은 유대인들의 선택(17절)을 귀담아 듣고 그에 준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일 것

이다. 한편 이 빌라도의 태도는 그의 제도적 권위와 그의 실제적 무능력 사이의 대조

를 심화시킨다.

그 아내가..가로되 – 빌라도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는 마태복음에서만 나온다. 전

설에 의하면 빌라도의 아내의 이름은 ‘프로클라 클라우디아'(Procula Claudia)였는

데, 유대교에 귀의했을뿐 아니라(외경 니고데모 복음서 2장), 그리이스와 에디오피아

교회에서는 그녀를 심지어 성자(聖者)의한 사람으로 숭배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여

하튼 A.D. 21년에 로마상원 의회에는 어떤 지방행정관도 그의 아내를 부임지까지 동반

할 수 없다는 법이 제안되었었다(Tarcitus, Annals III.33-35). 그러나 그 제안은 아

직 입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빌라도의 부인이 그와 함께 총독관저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저 옳은 사람(* , 토 디카이오 에케이노) – 여기서

‘옳다’는 말은 ‘전혀 무흠하다'(innocent)라는 뜻으로 결국 이 말은 거룩한 예언자나

메시야에게만 국한되어 표현되는 유대인의 관용어이다. 따라서 그 아내는 예수의 절

대 무죄성과 함께 예수의 신적 속성을 어느정도 이해한 상태였을 것이다. 이것은 그

녀가 꿈에서 얻어낸 신령한 지식이었다.

꿈에…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 그녀는 초자연적인한 꿈 때문에 정

신적으로 뿐 아니라 육체적로도 상당히 고통당했다고 실토했다. 한편 빌라도의 아내

의 ‘꿈’ 이야기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상기시킨다(1, 2장). 사실 꿈에 대한 강조는

마태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서 마태에게 있어서는 ‘꿈’이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으로 이

해되고 있다(1:20;2:12,13,19,22) 어쨌든 그녀의 꿈이 신적 계시로 이해되든 아니면

단순한 예수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염려한 심리적갈등에 의한 마음의 표상이었든지간에

마태가 이 이야기를 통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유대 지도자듸

의 돌이킬 수없는 책임과 예수의 무죄를 밝히고자 하는데 있다.

=====27:20

대제 사장과장로들이…권하여 – 산헤드린은 빌라도가 확신에 찬 결단을 내리는데

주저하면서 때마침 찾아온 아내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백성들을 충동하는데

성공 한다. 특별히 본문에서 대졔사장과 장로들이 일치된 한 무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각각에 관사 (* ,호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은 그들 각자가 군중들 틈에서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하게 하는 사주(使嗾)를 매우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었음을 간접 시사한다.

예수를 멸하자. 마태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문구로 유대 지도자들의 음모와 그들의 책

임이 강조되고 있는 표현이다.

=====27:21

둘 중에 누구를 – 마가복음과는 달리 본서에서는 빌라도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

하는가’하고 다시 한번 결정을 묻는다. 그러나 백성의 대답은 단호히 산혜드린의 결

정을 바라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했다. 사실 이때 내심으로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

하는 빌라도는 가능한한 분위기를 예수에게 불리하지 않은 방향으로 유도해 보려고 하

지만 백성들은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볼 때 백성

들이 그러한 반응을 보인것은 이해할만하다. 즉 바라바냐 예수냐 하는 선택의문제 앞

에 그들은 로마 총독의 의도보다는 자기들의 지도자들의 의도롤 찬성했을 것이다. 식

민지의 억압받는 상황에서 점령군 사령관의 말을 듣느니 차라리 밉지만 자기들의 지도

자들의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이(Jos.,Antiq.,XVIII269-272). 더구나 산

헤드린의 지도자들이 예수에 대해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퍼뜨리면서

선동(煽動)했나면 순진한 백성들로서는 당연히 예수의 사형을 지지했을 것이다. 훗날

배드로는 이같은 군중 심리에 의한 어리석고도 불의한 결정에 대해 통렬히 비난하는

설교를 하게 된다. (행 3:14,15).

=====27:22

그러면…내가 어떻게 하랴 – 빌라도는 비록 유대 백성들이 산헤드린의 충동질에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또 한번 예수의 석방도 요구하지 않겠느냐는 일말의 기

대를 가지고 조심스런 질문올 덧붙인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그는 예수에게 십자가

형이 아닌 좀더 가벼운 형벌이 요구되기를 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의 태도는

매우 무책임하고 결단성이 없는 것으로 재판의 판결에 있어서 고유한 판결권을 가진

그로서는 마땅히 자신의 양심적 소신에 따라서 판결을 내렸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고 판결권을 백성들에게 이양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 이 외침의 주동자는 물론 산헤드린 공회원들었을 것이다. 그

러나 어찌되었든 ‘무리’들은 적극적 동조자로서 예수의 처형을 요구하였다. 사실 그들

중에 최소한 몇몇은 바로 며칠 전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시 ‘호산나’ 찬미했던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21:9). 한편 이 십자가 처형 요구는 곧 예수를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

로 단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32-4절).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가장 불명예스러운

난동으로 처형할 것, 곧 로마법에 의한 십자가형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이다. 실로

유대 백성들은 자신들의 영적 무감각과 자기 파괴적 열광으로 그들 자신의 메시야를

로마의 십자가로 제거(除去)한 것이다.

=====27:23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 누가복음에는 ‘무슨 악한 일을 했는가 ?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했나니 때려서 놓으라'(눅 23:14-16)고 기록되어 있어, 가능하면

예수를 극형으로 처형하지 않으려는 빌라도의 태도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 19:1-16 에서도 예수를 용서하려는 빌라도의 노력이 잘 묘사되고 있다. 요

컨대 빌라도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은 그가 상식과 선의를 갖추고 있는 행정관이기는

하지만 정의에 서서 소신껏 행동치 않는 기회주의적이고 우유부단한 인물이었음을 보

여 준다.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 빌라도의 소신없는 태도는 오히려 군중들의 주장을 더욱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즉 자신들의 주장에 결국 빌라도가 굴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군중들은 흥분과 열광으로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사5

:7).

=====27:24

아무 효험도 없이 – 이는 빌라도의 완전한 굴복을 뜻한다.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

고 – 여기서 ‘나려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네타이(* )는 현재 시상으로

서 지금 군중들이 마치 폭도로 변할 듯한 장면을 확연히 관찰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즉 더이상 지체할수 없는 급박한 상황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민란’은 로

마의 지방 행정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로서 이 일이 로마정부에 전달되면 자기 신

상에 크나큰 해가 되었다. 따라서 어떠한 생을 치러서라도 민란을 사전에 예방해야만

했다.

물을 가져다가…손을 씻으며 – 이 문구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것이다. 한편 신

명기 21:6,7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살해되외었을때 그 부근에 있는 성(城)의 장로들은

손을 씻는 의식을 통하여 자신들은 이 범죄와 무관하다는 것을 나타내어야 했다. 그

리고 시편 26:6과 73:13은 이 법이 거의 금언적이라는 것을 입증해준다. 이처럼 무죄

의 표시로 손을 씻는 행위는 철저히 유대적인 것으로서, 몇해 동안 유대를 통괄하던

빌라도에게는 익숙한 풍습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유대 풍습을 따름으로써 그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전했을 뿐 아니라 그 유대인들을 은연 중에 경멸했던 것이다.

물론 손을 씻고 난 후, 손바닥을 마주침으로써 자신의 결백과 무흠을 강조하였다고 한

다. 이처럼 빌라도는 행정적으로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자기가 최총 결정권자였음

에도 뷸구하고 이 간단한 상징 행위를 통해 자기 무죄를 선언하는 대신 모인 무리들에

게 그 죄책을 전가(imputation)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온몸으로 자신의 무죄를 선언

했지만 역사는 오늘도 그의 죄책을 묻고 있다(사도신경 中).

이 사람의 죄에 대혀여 – 사본(시내, 레기우스 등)에 따라 본문을 ‘이의인(*

,디카이온)의 피에 대하여’로 읽기도 했다. 적어도 이것이 사실이라면 빌라도

는 분명 자기 아내가 전해 준 말(9절)을 신중히 기억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자신의 비겁한 행동은 공의의 관점에서 더욱 지탄(指彈)받아야 마땅했다.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 빌라도는 의식적(손씻음)으로 뿐 아니라 윤리적,

사법적으로도 자기의 죄책을 모면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역사와 양심의 법, 그리

고 하나님의 법에 의해 영영히 그 허물을 단죄받을 것이다.

=====27:25

백성이 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 이같은 표현은 성경에서 자주 발견

되는 관용적 어구로서(출 20:5;삼하 1:16;3:28; 행18:6),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인정

하고 심지어 자랑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백성’을 원문의 의미에

충실하려면 ‘모든 백성'(* ,파스 호 라오스)이라고 번역함이 옳다.

‘모든 백성’이 법적 양식에 따라서 예수의 회가 부당하게 흐르는 것에 대한 책임을 자

신과 자기의 후손들에게 돌리라고 했던 것이다. 특히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을 배칙하는

완고한 태도가 들어있다. 한편 마태는 15:32; 17:14 등에 사용했던 ‘무리들'(*

,라오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백성'(* ,라오스)이라고 함으로

써 단순한 군중이 아닌 하나님의 친 백성이 그런 말을 했음을 은연중에 밝히고 있다.

한편 무죄한 메시야의 죄를 흘리게 한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기꺼이 받아들

이겠다고 한 저들의 말대로 유대인들은 A.D.70년 예루살렘의 끔찍한 최후를 겪어야 했

으며, 이후에 끝없는 유랑 생활, 그리고 2차 셰계 대전을 전후한 20세기에는 유대인

600만명이 학살당하는 민족적 참극(慘劇)을 당해야 했다.

=====27:26

바리바는…놓아주고 – 빌라도는 군중들의 위압적 호소에 굴복하여 바라바를 석방

하고 대신 그리스도 예수를 죽음에 내어주었다. 본문은 특히 이 인물의 운명의 극명

한 대조가 부각되는데, 이 대목에서의 본래적인 초점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즉 예

수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고난받고 범죄자를 대신하여 죽임당하시러 이 땅에 오셨다는

대속의 진리를 분명히 볼 수 있다.

채찍질하고 십자가에…넘겨 주니라 – 예수께서 당하신 채찍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

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즉 유대의 율법에 있어서 매질은 40대로 제한되

어 있으나(신 25:3; 고후 11:24)로마인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힘이 있는대로 때리고 싶

을 때까지 때렸다. 특히 매질에 사용되던 채찍은 유대인들처럼 막대기가 아니라 여러

갈래로 된 동물의 가죽 끝에 뼈조각이나 납덩이를 붙여 만든 손잡이가 짧은 형태의 것

이었다. 죄인은 옷이 벗겨진 후 기둥에 꽁꽁 묶여졌다. 매질이 얼마나 심하였든지

그 매질이 가해지는 동안 죄인의 몸에서는 회가 분수같이 뿜어 나도고, 뼈가 드러나

보일 뿐 아니라 내장(內藏)까지 튀어나올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Josep-hus, war II 612; VI,304) 심지어 매질만으로 사람이 죽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한 매질은 죄인을 십자가에 처형하기에 앞서 힘을 빼는 데 사용되곤 하였다. 예수는

판결이 나기 전에 이미 뼈질을 당하셨다(눅 23:16,22;요 19:1-5). 따라서 판결이 내

려진 뒤에는 반복되지 않았다. 만일 매질이 반복되었다면 예수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여하튼 빌라도는 몇 마디 더 심문한 뒤에(요 19:1-16) 예수를 십자가

에 못박히게 념겨 주었다(16절) 이러한 모든 사실들은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상시시켜 준다(사 53:6,12).

=====27:27

총독의 군병들이 – 빌라도는 자기 수하에 있는 로마 출신 군사들에게 예수를 십자

가 형에 처할 것올 명령하였다. 따라서 ‘총독의 군병들’은 이후부터 예수를 ‘유대인

의 왕’이라 부르며 모멸적언 조롱을 하게 된다(막15:16-20;요 19:2,3). 이는 이사야

예언의 온전한 성취였다(사 53:3).

관정 – 헬라어로 ‘프라이토리온'(* )으로 불리워지며 라틴어

‘프레토리옴'(Preatorium)과 상응하는 말이다. 이는 본래 장군의 본부를 가리키는 말

인데, 여기서는 총독의 공식 거주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즉 유대 총독의 본거

지는 가이사랴였지만 파종 명절의 치안 유지를 위해 예루살렘에 주둔할 때는 특별 거

주지가 마련되었었다. 예수 당시 빌라도 총독은 자신의 예루살렘 특별 거주지를 안토

니아 요새에 정하고 있었고, 로마 군대를 그곳에 함께 주둔시키고 있었다. 한편 공동

번역 성서는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총독 관저’로 번역하고 었다.

온 군대 – 여기서 ‘군대’란 헬라어로 ‘스페이라'(* )인데 26:53.54

에 언급된 ‘영'(* ,레기온)을 10등분한 한 부대이며, 천부장의 지휘 아래

있는 300명에서 600명에 이르는 부대이다. 이 ‘군대’가 소집된 것은 무죄한 죄수이신

예수를 놀이삼아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주위에 모여 예수의 왕

권을 마음껏 놀리고 조롱하였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책임자 빌라도의 묵허(黙許)

하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빌라도의 죄책은 더욱 가중된다 하겠다.

=====27:28

총포를 입히며 – 사실 예수께서는 조절에서 채찍질을 당하기 전에 이미 한 번 옷을

벗기웠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계속 옷올 벗기는 데 이곳까지 끌려와 희롱당하셨

는지, 아니면 채찍 후 그 입던 옷을 다시 입으신 후 여기서 다시 옷을 벗어왔는지 분

명치 않다. 여하튼 예수는 걸레처럼 찢기어진 당신의 어깨 위에 ‘홍포’를 걸치게 된

것이다. 여기 ‘홍포'(* ,클라뮈스)는 아마도 로마의 군인들이나 시장관

들이 입던 짧고 붉은 망또였을 것이다(28절). 그런데 이 홍포의 색상에 대해 ‘진흥색

‘이라 한 마태복음과는 달리 마가와 요한복음에서는 ‘자색 옷’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

데 ‘자색’으로 된 옷은 황제만이 입을 수 있었고(Macc 10:20, 62;11:58;14:43,44)군인

들은 옷을 착용했다는 점에서 예수가 입은 ‘홍포’는 군병들의 망또였던 것으로 추적된

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군병들이 예수께 입힌 옷은 헤롯왕의 옷장에서 버려졌던 븜은

왕의 의복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8갹즙. 어찌되었든 여기서 마태가 강조하고자 한 것

은 로마 병사들이 예수께 왕을 상징(象徵)하는 옷으로 갈아 입힌 후 그분을 조롱하려

했다는 점이다.

=====27:29

당시 면류관을 엮어 – 당시 사용되던 동전에 보면 디베우스가이사(Tiberius

Caesar)가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이 새겨져 있는데, 그 면류관 위에는 빛나는 못들이

달려 있었다. 군인들은 그것을 생각하여 주변에서 자라는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예수

의 머리 위에 씌웠다. 이 가시나무에 관해서는 야자나무나 아칸더스(acanthus)나무,

또는 아랍의 나바(naba)나 나브카(nabka)심지어 선인장 종류나 아카시아 종류의 나무

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여하튼 가시나무와 가시덤불이 쉽게 자라는 팔레스틴에서

흔한 종류의 것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한편 그들이 가시관을 씌운 원래 목적은 예

수를 조롱하기 위해서였을지라도 결국 그들은 고난의 왕관을 혜수께 씌웠던 것이다.

따라서 그 가시에 의해 찢어진 예수의 머리에는 검붉은 핏방울이 쉴새없이 흘러내렸음

에 분명하다.

갈대를 그 오른손에 – 동전에 새겨긴 황제의 오른손에는 통치권의 상징인 황제의

홀(笏)이 쥐어져 있는데, 로마 군병들은 이것을 모방하여 예수의 오른손에 ‘갈대’를

쥐어 주었다. 이 ‘갈대’는 등나무 종류의 평범한 풀이나 줄기가 꿋꼿한 갈대였음이

분명하다.

무릎을 꿇고 – 마가복음에서는 ‘예배하다’를 뜻하는 ‘푸로스퀴네오'(*

)라는 동사를 사용했는데, 마태는그 단어 대신 단순히 ‘무릎 꿇다’는 뚱인 ‘고

뉘페테오'(* )라는 동사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의미상

동일하게 언급됨이 마땅하다. 즉 군인들이 예수를 조롱하는 자리에서 그들이 마치 자

신들의 군주인 ‘가이사’에게 경배하듯 예수를 경배하며 심히 우롱했던 것이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 이는 ‘가이사 만세’라는 로마인들의 황제에 대한

찬사의 외침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공동번역과 새번역에서는 이를 ‘유대인의 왕 만

세’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께서 하찮은 로마

군병들에게 치욕스러은 조롱을 당하신다. 그러나 마태는 저들의 조롱이 오히려 역설

적으로 진리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묵묵히 시사해 주고 있다. 군인들은 조롱의 차

원에서 예수께 황제에게 대한 모든 예를 갖춤으로써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께 경배하

리라’는 시 22:27의 내용을 역설적으로 성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군인듸은 자

신들도 모르는 가운데 진리를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예수는 면류관을 쓰시

고, 흘을 들고,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신 동시에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이었

다.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진리의 선포인 것이다.

=====27:30

침 뱉고…머리를 치더라 – 로마 군인들은 왕에 대한 충성의 표로 입맞추는 대신

가장 모욕적인 행동으로서 그에게 침을 뱉었다. 그리고 왕을 위하여 목숨바쳐 싸우는

대신 갈대로 머리를 내리쳤다. 그 결과 그분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는 더 깊이 그분의

피부 속으로 박혀 들어갔을 것이며 얼굴은 더욱 검붉게 물들어 갔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치더라’는 말은 어쩌면 이것은 지상에서의 그리스도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대

접(待接)이었는지 모른다. 한편 마태는 조롱과 육체적 학대를 구별하여 먼저 조롱한

후에 학대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27:31

희롱을 다한 후 –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과거 완료의 시제를 의미하는 부정과거형

로 씌어졌다. 따라서 마태는 그 어간에 되어진 세세한 내용을 어느 정도 생략했음을

보여 주고있다. 그러므로 그 회롱과 학대가 언제까지 계속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하

지만 분명한 것은 로마 군병들이 자신들의 기분을 마음껏 푼 정도로 예수는 육체적으

로 서서히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편 요한의 중언(요19:4-6)에 따르

면 이때 빌라도는 다시 한번 예수의 석방을 해 노력한 혼적이 발견된다.

그는 옷을 입혀 – 대개 옷을 벗기은 채로 형장을 향하며, 가는 도중에 사람들의 비

웃음과 매질을 당해야만 했다. 이러한 관습이 예수께 적용되지 않은 것은 아마 그가

너무 많은 매질올 이미 당했기 때문에 더 매질을 당하게 되면 아예 죽게될 것으로 여

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그때가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신경을 너무

자극하지 않도록 삼가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편 예수께서 다시 입으신 ‘옷'(*

,히마티온)은 주로 겉옷을 뚱하지만 군병들이 제비뽑은 사건에(시 22:18;

요 19:23)비춰볼 대 분명 속옷까지 포함한 표현일 것이다.

십자기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리라 –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가 유대 시간으

로 ‘제 3시’, 곧 오늘날의 오전 9시였으므로(막 15:25), 본문은 아직 오전 9시가 되기

전의 일이라 본다. 여하튼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에서부터 로마 당국의 사형 언도에

이르기까지 예수에 대한 판결은 밤새 급속히 진행되었고 급기야 아침에 르러 십자가

형을 집행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유대인의 습관을 좆아 그 사형 집행은 성문밖에서

이뤄졌는데(민 15:35, 36;행 7:58; 히 13:11, 12),이때 예수는 관례를 따라 자신이

질 십자가를 친히 지고 형장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 형장으로의 이동은 원래 죄수

처형을 전담했던 부총독이 맡아야 했으나 그 부총독(Li-ctor)이 빌라도의 명령을 거부

했기 때문에 대신 말탄 백부장이 형장 이동을 진두 지휘(陳頭指揮)하였으며, 네 명의

군병들이(요 19:17,23)예수의 신변 호위를 했고 그 뒤에 군병들이 따라 나섰다고 전한

다(Lange, The pulpit Commen-tary).

=====27:32

나가다가 – ‘시골에서’ 올라온 구레네인 시몬과의 만남이 곧 있었던 것으로 보아

(막15:20, 21)’관정으로부터’ 나갔다는 말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갔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사형 집행이 성 밖에서 집행되었던 규정(레 24:14;왕상

21:13)과 사람들이 많은 곳을 통과하여 형장에 이르게하는 그 당시 관례에 따라 예수

는 예루살롑 시민이 모두 목격할 수 있는 대로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예

수께서 나아갔던 그 고난의 길을 가리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sa)라 명명하여

기념하고 있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당시 심한 매질로 인해 거의 기진했기 때문에(요

19:17) 혼자의 힘으로 형장에까지 완전히 나아갈 수 없었다(히 13:13).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 – 아마 그는 리비아 서북편에 위치한 구레네의 ‘디아스포라

‘란 큰 유대인 집단에(Jos.,Antiq.,XIV.7,2;Cont.Apion., 제 2권)소속된 일원이었던

것 같다(행 11:22;13:1). 한편 구레네 거주자들은 예루살렘에 자기들의 회당을 갖고

있었던 것 같으며, 시몬은 이때 유월절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입경한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사도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로 미루어 볼때에 (막

15:21;롬16:13), 시몬 역시 이 사건 이후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사

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어느 누가 유월절과 안식일을 눈 앞에 두고 피흘리는 십자가

를 지고자 했겠는가마는 이때 구레네 시몬은 아무런 원망과 불평없이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비록 항거할 수 없는 로마의 군법에 따라 징발(徵發)되는 비운을 맞았으

나 그는 피흘리며 죽어가신 예수의 최후를 누구보다 생생히 목격할수 있었으며, 그후

로 전가족이 구원얻는 크나큰 측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억지로'(*

,엥가류산)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말로서 마치 증앙정부로부터 특명을 받은 진

령이 목적지로 가기 위해 강제로 말이나 사람을 차출해갔던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5:14), 여기서는 ‘징발하며’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여하튼 구레네 시몬은 ‘억지

로’ 십자가를 졌지만 결과적으로 ‘억지로’ 측복을 받은 격이 되었다. 여기서 십자가에

대해서는 막 15:21-34의 강해를 참조하라. 한편 본절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중대한

오해를 일으키는 구절이기도 하다. 즉 제 2세기 영지주의의 이단자였던 바실리데스

(Basilides)는 예수가 아니라 구레네 시몬이 도중에 바뀌치기 당해 십자가에 죽었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34절의’예수께’는 원문에 의하면 ‘그에게’ 이고 따라서 본문상

‘시몬에게’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덧붙인다(31절 이후에는 원문상 예수라는 이름

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35절의 ‘예수를 십자가에’도 왼문에는 ‘그를 십자가에’

라고 되어 있어 이 경우 역시 ‘시몬을 십자가에’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바실리데스의 견해는 이 장면을 철저히 오해한 것이며, 이일로 인해 그는 이단자로 정

죄되었다. 사실 법적용에 있어서 철저했던 로마 당국자들과 또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 심히 원했던 유대지도자들이 이러한 실수를 용인할리 만무하다. 그와 더불어 요

19:17에 의하면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나가셨다’고 분명히 기술

하고 있다.

=====27: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 – ‘골고다’라는말은 아람어 또는 히브리어의 ‘길갈타’ 또는

‘굴골토'(* )를 헬라어로 음역(音譯)한 것으로 ‘해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런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그곳이 많은 시체가 버려짐으로 자연히 해골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학자들(Jerome, Hieronymus)도 있고, 그곳이 해골 모양

의 언덕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학자들(Bengel, Cyril, De Wetty)도 있는

데, 후자의 견해가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 한편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곳을 지칭하는 용어로 흔히 사용되는 ‘갈보리'(Calvary)는 고든(Gordon)이라는 한 장

군에 의해 명명되었으나 아람어와는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보리’라는

말은 원뜻과 조화되는데 그 이유는 ‘갈보리’가 ‘해골’을 의미하는 라틴어 ‘칼바

‘(Calva)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골고다’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아무튼 가장 가능성 있게 생각되는것은 그곳이 ‘성에서 가까운'(요 19:20),’길

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29절), ‘성에서 지방으로 내려가는 주요 도로변'(32절)에 위

치한 오늘날의 ‘성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가까운 곳으로 추정된

다. 이곳 외에도 모든 장군이 주장하는 ‘고든 갈보리'(Gor-don’s Calvary)일 가능성

도 배제할 수 없다.

=====27:34

쓸개 탄포도주 – 이는 시편 69:21을반영하고 있으며 48절에서 비슷한 구절이 다시

반복된다. 한편 마가복음에는 ‘물약을 탄 포도주’로 되어 있는데 이같은 차이는 아

람어의’물약'(morah)이라는 말이 히브리어의 ‘담'(marrah)과 유사할 뿐 아니라 그 쓴

맛이나 독성에 있어서도 유사하기 때문에 생겨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사건에서

마태복음이 중언하는 ‘슬개 탄 포도주’란 말이 국약 시편에 더 가깝다. 여하튼 본문의

‘쓸개'(* ,콜레)란 진짜 ‘쓸개’나 ‘담즙’을 뜻하기 보다 쓴 맛이나는 것이라

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말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carson, Lenski).그리고

‘포도주’응 매우 센 독주(毒酒)로서 취기가 속히 들고 마위 성분이 강한 술을 가리킬

것이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 쓰디쓴 포도주를 사형당하는 죄수에게 제공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1)십자가 형을 당하는 죄수들에게 순간적으로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하거나, 그 고통을 참아낼 힘을 주려했기 때문인 동시에 (2) 술

로인해 거의 마취되다시피 한 죄수들은 사형 집행관들이 손쉽게 다룰 수 있었기 때문

에 제공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독한 포도주를 최후의 순간에 이른자에게 제공

된 것은 잠 31:6, 7의 교횬에 근거한 관습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더불어

이때 예수께 드려지는 포도주는 예루살렘의 어느 부유한 여인의 자발적인 헌납에 의해

자비의 선물로 전해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Li-ghtfoot).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 예수께서는 자비의 선물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

로 일단 맛을 보시는 정도로 그치셨다. 예수께서는 적어도 그 포도주에 마취 성분이

있음을 익히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여기서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우크 에델랜)는 말은 계속적인 거부 의사를 내포한 말로서, 예수는 그 당시 몇

번에 걸쳐 마실 것을 강요당했으나 끝까지 마시지 않을 것을 고사(固辭)하셨음을 보여

준다. 실로 예수께서는 마취제의 도움으로 고통을 덜어보려 하기보다는 모든 감각을

지닌채 맑은 정신으로 끝까지 다가오는 뼈저린 고통에 맞서고자 하셨던 것이다. 즉 예

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것이 순전히 당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른 것으로서 그

십자가가 제공하는 아주 세미한 고틔조차도 친히 감수하시며 인성(人性)으로서 당하셔

야 할 모든 고통을 끝까지 체험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진정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당신의 ‘잔’을(20:22;요18:11)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시고자 하셨다. 한편으

로는 이같은 행동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이미 말씀하신 바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

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26:29)는 당신의 말씀을 문자적으

로 성취하고 계신 것이다.

=====27:35

예수를 십자기에 못박은 후에 – 십자가 형은 로마인들의 독특한 형벌로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단지 이방 점령 지역의 극악한 범죄자들에게

만 적용되었던 형벌이다(Jos.,Judoll,1). 한편 로마법에 의한 십자가 처형은 (1) 먼저

공식적 선고를 받은자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향한다. (2) 형장으로 행하는

길에 자기 죄목이 적힌 명패를 가슴에 달아 지나가는 통행인들에게 인격적 모독을 받

게 한다. (3) 형장에 도착한 죄수의 옷을 벗긴다. (4) 독한 술로 육체와 정신을 혼미

케 한 후 십자가에 못을 박거나 묶어 그것을 반듯이 세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미

세워둔 십자가위에 죄수를 끌어올려 못박는 경우도 있음). (5) 그런 상태로 계속 버려

두어 죄수로 하여금 서서히 죽어가게 한다(이때 건강한 남성의 경우 3일 정도 경과해

야 숨이 끊긴다). 이때 각종 야수(野獸)나 새들이 죄수의 몸을뜯어 먹는 경우가 허다

하다고 한다. (6) 어느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 그 죄수의 다리를 꺾고 치명적인 외상

(外傷)을 가함으로써 어떠한 소생 가능성도 없애 버린다(물론 이때 외관상 죽은것이

확인되면 다리는 꺾지 않고 창으로 몸을 찔러 확인 사살만 한다). 여하튼 로마법에

의해 십자가형에 선언된 사형수는 십자가에 수직으로 머달리도록 그 손목과 발이 묶이

거나 못박히는데, 예수의 경우는 못박혀 달리신 예이다. 그런데 로마법에 따르자면

죄수들은 벌거벗긴 채로 십자가에 못박히는데, 예수의 경우 그들이 유대인들의 규정

(M. Sanhedrin 6:3)에 따라 허리 아랫 부분을 가리는 옷을 예수에게 걸쳐주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한편 십자가의 형태는 X자형(Crux decussata) 또는 T자형(Crux

commi-ssa), + 자형(Crux immissa)과 같이 여러 가지였으나 전통적인 형태는 +자형이

었다.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그 머리 부분에 명패가 부착된 것으로 보아 십자

형임이 분명하다(37절). 죄인이 십자가에 달리는 높이는 몇 십 센티에서 단 몇 센

티까지 다앙하였는데 예수께서는 지면에서 그리 높지 않케 달리셨던 것 같다(48절:요

19:29). 여하튼 예수께서는 그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신 21:22,23) ‘나무 위에 달

린 저주받은 자'(갈3:13)로서 최후의 순간을 맞으시게 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

실은 이 엄청난 참혹의 헌장을 단순히 한 분사구문(‘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으

로 취급하고 오히려 뒤이어지는 군병들의 제비쁩기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처럼 기술되

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이것은 그 십자가 형벌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적어도 그 당

시 사람이면 익숙히 알고 있었던 것이거나 아니면 기자(記者)가 더이상떨리는 붓끝으

로 예수의 참혹한 절규를 추적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을뿐이

다.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옷은 사형 집행자가 갖는 것이

통례였다. 이때 4명의 로마 군병들은 아마 예수의 겉옷과 속옷 그리고 허리띠와 신발

을 나눠갖기 위해 제비뽑았을 것이며, 이것은 요 19:23, 24 에 기록되 있는 바처럼 시

22:18의 말씀을 성취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가는 이때를 제 3시, 곧 오전 9시로 기록

함으로써 (막 15:25)예수의 처형이 분명한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다.

=====27: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 마가복음 평행구인 막 15:25의 ‘때가 제 삼 시가 되어 십자

가에 못박으니라’를 생략하고 마태는 그 자리에 이 문구를 기록하고 있다. 저들이 지

키는 까닭은 못 박힌 자의 고틔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누가 구해내지 못하게 지키기

위함이다. 죄수가 완전히 숨이 끊어지기까지 지키는 것은 그들의 고유 업무였던 것이

다. 하여튼 예수는 분명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호흡을 멈추신 것이 확실하다.

=====27:38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 – 처형되는 죄수의 죄목을 밝히는 내용의 패(주

로나무 위에 석고를 바르고 그 위에 붉은 글씨내지는 검은 글씨를 새겨 넣음)를 목에

걸거나 가슴에 매달고 형장에까지 가서 십자가를 세우고 그 죄패를 머리 위에 매다는

것이 로마 처형법상 한 관례였다. 한편 예수의 죄패는 빌라도가 쓴 것으로(요 19:19,

23) 각 복음서간에 약간의 차이를 이룬다(막 15:26; 눈 23:38; 요 19:19 조). 그중

요한복음의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이 가장 완전한 형태인 것으로 추

정된다. 여하튼 빌라도는 이 죄명(罪名)을 통하여 자신의 반(反)유대적 입장을 분명

히 밝히고 있다. 즉 그는 로마의 지배 아래있는 유대인들의 처지와 그들 서로간의

반목(反目)상태를 조롱했던 것이다. 한편 이 죄패는 각 지방에서 오는 순례자를 위해

히브리어(아람어), 헬라어(당시의 보편적 언어), 라틴어(로마의 공용어)로 각각 기록

되었다(요 19:20). 그런데 이 세가지 언어의 패에 대해 흑자(Westcott)는 그리스도를

위한 종교(히브리어), 문화(헬라어), 사회(라틴어)적 예비 활동의 총체적 표현으로 간

주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학자는(Robertson)유대인을 위한 선언(히브리어), 법적 선언

(라틴어), 만인을 위한 공표(헬라어)등으로 세 언어를 이해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저

들은 예수를 단죄하고 나아가 유대 민족을 조롱하려고 그런 죄패를 붙여 놓았지만 그

것은 역설적으로 전리를 고백하는 것이 되었다. 실로 복음서 초두에 동방 박사들은

예수를 ‘유대인의왕’으로 예배했었고(2:2) 그에게 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었

다. 이제 그분의 생애의 마지막에 로마의 군인들은 그의 옷을 뻬앗고, 옷을 벗기은채

고독하게 죽어가는 그의 십자가 아래 달아있으면서 처음에 붙여진 그 칭호를 마지막으

로 달아 주고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묘하게도 예수께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붙

여 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방인들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언약 백성, 선택받은

백성인유대 민족들은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께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를 부여

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하라고 요구한다(요 19:21).

=====27: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 십자가형도 항상 다른 사람에게 경고를 주

기 위해 공개적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형을 분명히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역설적으로나마 ‘십자 가의 증인’이 될 수 있었다.

한편 본문의 장면은 시편 22:7에 언급된 ‘사람마다 나를 보고 비쪽거리고 머리를 혼들

며 빈정댑니다'(공동 번역)의 반영이다. 여기서 ‘지나가는 자들’은 예수의 사형언도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예루살렘 성내(城內)의 주민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머

리를 혼드는’ 것은 상대방을 심히 멸시하고 조롱하는 유대인들의 상징적 행동이었다

(시 109:25; 애 22:15). 여하튼 유대인들은 다시 산헤드린 재판에서 보여 준 것과 같

은(26:67,68) 사악한 장면을 보여 준다. 비록 그들이 예수의 적대자들이라 할지라도

예수꺼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을 당하는 그 순간에 조롱과 멸시를 퍼붓는 잔인함을

보여 주고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를 모욕하여(* –

,에불라스페문), 즉 예수의 ‘신성을 모독하여'(blasphemabant. Vulgate)돌이킬 수 없

는 참람한 불경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9:3;12:31;26:65).

=====27:40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성전을 헐고 사흘에 다

시 그것을 지으려 했던 자여’가 된다. 이는 조 26:61에서 이미 비난한 바 있는 내용

이다. 따라서 그 당시 비난하는 무리들은 적어도 산헤드린에 동조했 자들이었음이 분

명하다. 한편 예수의이 말씀은 성전을 문자 그대로 헐고 다시 3일만에 복원시키겠다

는 뚱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적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요2:19-22).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이는 이미 가야바의 질문(26:63) 중에 물어진 것

인 동시에 시험자 사단의 질문이기도(4:3, 6)했다. 이처럼 지나가는 행인을 통하여

사단은 여전히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뚱을 어기고 고통을 회피(回避)하도록

유혹하였던 것이다(Lohmeyer;16:21-23). 실로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가장 연

약한 상태에 있는 자에게 쉽게 접근하여 기회만 주어지면 미혹하려드는 것이 사단의

속성이다(벧전 5:8).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 그룻된 페시야관에 짙게 물들어 있던 유대

인들의 어리석은 요구였다. 즉 그들은 적어도 메시야라면 각종 이적과 영웅적 활동을

전개할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의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예수는 능히 그럴 수 있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26:53)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

련해두신 자기 희생을 통한 만인 국원에의 길을 지금 가고자 하신 것이다(16:23).

=====27:41

처음에는 로마 군인들이(37절), 그 다음에는 군중들이(39, 40절), 그리고 이제는

산헤드린의 중추적 인물들, 곧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이 예수를 조롱하고나

선다. 이로 보건대 산헤드린은 이제 완전한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십

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라는 그들의 요구는 40절에 나온 행인들의 사단적 요구와 일치

되고 있다. 실로 그들은 믿기 위해 이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사단의 대변자로서 예

수의 신적 권위에 대한 완전한 의혹과 또 그런 자를 처형시킨 승리감에 도취되어 또

한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이같은 자신에 찬 요구를 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는 저들의 비난은 결코 조롱받을 일이 아니었

다. 왜냐하면 남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것은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 이방인에 의해 예수가 ‘유대인의 왕’으로 불려진데 대

한 유대인들의 대구적(對句的) 비난이다. 특히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그 속에 언약

적인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비난은 자신들의 죄를 더욱

가중시키는 격이되었다.

우리가 믿겠노라 – 물론 거짓과 악의에 찬 약속이다.

=====27:43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 조절에 인용했던 시편 22:7에 이어 본절에서는 그 다음

절인 시편 22: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

나이다’를 그 깊은 뜻을 완전히 파악치 못한 채로 인용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기

뻐하시면'(* ,델로)이란 말은 70역(LXX)에 따른 번역으로서 깊은 애정을 가지

고 그 세세한 데까지 돌보고 계심을 나타내고 있다. 여하튼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할 때 그것이 그가 메시야로써 동시에 그 이상의 신

분을 가진 자임을 주장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만일 예수께서 메시야라

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의 모든 일을 성사시켜주실 것인데 그례지 않은 것으로 보

아 예수가 단지 자신을 시야로 가장하고 있다는 결론을 이끌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사악하게도 구속 사역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마음대로 비웃고 있었

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버리셨다고 단정했던 유대 지도자들의 생각이 옳았

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혹심한 시

련, 곧 하나님의 버리심과 마음이 젖어지는 고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

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부활케 하심으로써 예수가 메시야되심을

분명히 증거하셨다. 실로 그들은 하나님이 부재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

이 헌존(現存)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7:44

함께…못박힌 강도들도…욕하더라 – 주위롤 둘러싼 모든 군중들이 적어도 한 마

디씩은 예수를 비난한 것을 보고 있던 강도들은 상대적인 우월감에 그들마저도 예수를

희롱하게 되었을것이다(Robertson). 이러한 가능성은 ‘욕하더라'(*

,오네이디존)는 말이 미완료 시상으로서 뒤늦게나마 이제 막 그일을 작했음을 암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누가 왜 보고에 의하면 이렇게 비난했던 두 강도중 하나가

(‘데스마이’, 38절) 잠시후 예수의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거룩하심과 또한 끝까지인

내하심에 강한 감동(感動)을 받아 멸망의 벼랑 끝에서 구원받게 되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눅 23:39-43).

=====27:45

제 육 시로부터…제 구 시까지 – 본문의 ‘제 6시’, ‘제 9시’는 유대인의 시간 단

위로 오늘날의 시간과 6시간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제 6시’는 오늘날의 정오

(낮 12시)를, ‘제 9시’는 오늘날의 오후 3시를 가리킨다. 실로 예수께서는 오전 9시

경부터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막 15:25) 오후 3기경까지 근 6시간여동안 찢어지는 듯

한 육쳬적 고통과 더불어 어둠보다 더 짙은 영적, 정신적 고뇌(46절)를맛보시며 시시

각각 다가오는 당신의 죽음을 온몸으로 확인하고 계셨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 제 6시에서 제 9시까지 약 3시간 동안의 ‘어두움’은 마

치 애굽에서 첫 슈월절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재앙시에 나타났던 3일 동안의 어두움을

상기시킨다(출 10:21-23). 따라서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은 심판 또는 비극을 알

리는 표적이었음이 분명하다(암 8:9, 10). 한편 이때의 어두움이 ‘온 땅에’ 임했다고

하는데 그 ‘온 땅’이란 의미가 어디까지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에

대해 혹자는(D.A.Carson) ‘온 땅에’를 뚱하는 헬라어’에피 파산 텐 겐'(*

)이 온 지구(the earth)전체를 뜻하기보다, 국한된 지역으로서의

모든 ‘땅'(the land)을 의미한다고 보아 ‘유대 지경 전체’라는 제한적 의미로 이해하

고있다. 이같은 견해는 매우 타당한 것인데, 그 이유는 당시 유대 땅에 임한 어두움

은 예수의 죽음과 유대 민족에게만 관계된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과 연관을

지닌 출 10:22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던 하나님의 심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는데,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었다’, 결국 이기록은 본문의 ‘온

땅’을 제한적인 의미로 이해하는데 간접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이때의 어두움에 대하

여 사막의 열풍에 의한 천기 조건의 이상으로 발생한 우연 발생적이고도 일시적인 현

상이거나 아니면 단지 ‘일식’ 현상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날은 음력 보름이 다 된 시간이었으므로 천문학적 상식로 월

식이 될 가능성은 있으나 일식(日蝕)은 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

연법칙상의 현상이라기 보다는 찬송가의 시구처럼 영혼의 신령한 태양되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물질 세계의 태양이 밝은 빛을 잃어서(눅 23:44)캄캄하게 된 것으

로 볼 수 있다. 여하튼 이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상징적 의미들도 도출해낼 수 있다.

(1)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준엄함(26:24; 사

5:30). (2) 인류의 무거운 죄짐을 대신 지신 예수의 십자가 수난이 얼마나 고통스럽

고 수치스러운지를 보임. (3) 전우주적 통치자의 고뇌에 찬 죽음에 대한 자연계의 순

웅(롬 8:22) 등의 뜻으로 볼 수 있다.

=====27:46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 마치 기름이 동난 등블이 마지막 자기 심지를 태우며

희뿌연 연기와 불꽃을 일으키둣, 예수께서는 더이상 항거할 수 없는 죽음에의 기운과

영적인고독 앞에서 마지막 기운을 돋우어 성부 하나님께 절규(絶叫)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 엘리라마 사박다니(* )히브리어와 아

람어 음역에 따른 시 22:1의 인용으로서 십자가상의 가상 칠언(架上七言)중에 네번째

말씀에 해당하며(요 19:28-30강해 ‘가상 칠언’ 참조), 마태와 마가만이 기록하고있다.

그런데 마태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인 히브리어 ‘엘리'(* )를 그대로 음역하여

‘앨리(* )’엘레이(* )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마가는 이것을 ‘나의 하

나님'(* ,엘로히)라는 아람어 음역에 근거하여 ‘엘로이'(‘* )로 표기

하고 있다(막 15:34). 그 다음에 이어지는 ‘라마 사박다니’는 분명 순수 아람어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외경 베드로 복음서(Gospel of Peter)에는 ‘엘리’를 ‘나의 하나님’

이 아닌 ‘나의 능력'(my power) 으로(* ,헤 뒤스나미무; 이는

히브리어 ,’헬리’의 뚱임) 번역하여(‘나의 능력이며 나의 능력이여 당신은 나

를 버리셨나이까’) 마치 가현설(Docetism)에 입각한 듯한 하소연으로 표기하고 있다.

즉 베드로 복음서에 따르면 인간 예수만이 고틔 당하고 죽은 것이 된다. 물론 이것은

예수께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말쏨하셨기 때문에 ‘엘’라는 말이 쉽게 사람들에게 ‘엘

리야’를 부르는 둣이 잘못 들려질 수 있는 것 같이, ‘엘리’가 ‘헬리’로 잘못 들려졌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다욋이 예언적

으로 노래한 시 22:1의 말씀이 당신의 찢어지는 듯한 영적 절망감을 예언적로 표현해

놓은 것으로 인정하시고 이 구절을 인용하신 것이다. 실로 예수의 이러한 부르짖음은

가장 필요한 시간에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데 대한 절대 고독감과 심각한 위

기적 심경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가 당할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悽絶)하고 무

거운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절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1)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다는 점(고후:5),

(2)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셨다는 점이

(빌 2:6-8), (3) 죄를 향한 하나님의 중오와 보응이 얼마나 엄격하고도 무서운 것인가

라는 점, (4) 성부로서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지만(눅23:46)죄악을 징벌하시는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은 예수가 죄인의 자리에서 영, 육의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인류를

구원 해야하는 이상 그를, 철저히 포기하고 그에게 무간섭하셔야 했다는 점, (5) 하나

님께 버림받은 최악의 상황을 맞아 대속적 죽임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인간 구원을 소

망하신 예수의 지극한 사랑(요 3:16)등이다.

나의 하나님(* ,데무) –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본문에만 나타나는 표

현으로서, 비록 ‘하나님’이 예수 자신에게서 떠나가셨다 하더라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않으시고 그분을 ‘나의’ 하나님으로 호소하고 있

는 것이다. 어쩨면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인성(仁性)으로 인

류의 죄를 모두 담당하시는 대속의 제물이 되셨으며 그 인성은 신성(神性)의 절대적

후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나의 아버지’가 아닌 ‘나의 하나님’이라 호소하신

것이라고 볼 수있다(Lenski).

어찌하여(* ,히나티) – 직역하면 ‘어떤 목적을 두시고’과 된다. 즉 예

수께서는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목적에 대해서 묻고 계신 것이다. 이는 분

명 신성으로서의 예수가 지적(知的)결함을 의미하기보다 오히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와의 직임상의 차이를 보여 주는 동시에 성부께 대한 성자의 절대 겸손과 완전한

순종의 진리를 암시해 주고 있다(24:36).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를 그의 원수들의 손에 버려

두셨다는 뜻을 내포하는(Hend-riksen)동시에, 하나님께서 인류 죄악을 위해 마련해 두

신 ‘잔'(진노와 심판을 그에게 마시우게 하셨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실로 예수의 이같

은 절규에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충만한 댓가를 자신의

온몸으로 친히 치르고 계신 예수의 뜨거운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한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말씀이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최후의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 복음과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 밖에도 여섯 마디의 말씀을 더하신 것으로 기록되

어 있다. 사복음서를 통한 가상 칠언을 정리하면 (1) ‘저희를 사하여 주소서'(눅 23:

34) (2) ‘나와 함께 낙원 있으리라'(눅23:43) (3) ‘저가 아들이니이다'(요 19:26) (4)

본문 (5) 본문 ‘내가 목마르다’ (6) ‘다 이루었다'(요 19:28) (7) ‘내 영혼을 아버지

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등이다.

=====27: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이들 – 이를 로마 군인들 중 몇몇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

으나(Zigabenus, Euthym), 적어도 구약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유대인들이었음이 분명하다(Theophy-lact). 그리고 좀더 깊이 생각하

면 ‘엘리’의 정차한 발음을 듣지 못했다는 점에서 헬라와 유대인일 가능성도 높다.

엘리야를 부른다 – 엘리야는 녹지 않고 살아서 승진한 의인으로서(왕하 2:9-12) 유

대인들의 전통적 종말관에 따르면 그가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하러 다시 올 것으로 기

대 되었다. 그리하여 저들은 예수께서 ‘엘리엘리…’하는 절박한 절규를 듣고 엘리

야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즉 그를은 ‘옐리’라는 말을 ‘엘리야’를 뜻

하는 히브리어 ‘옐리야후'(* )로 잘못 듣고 있었던 것이다(특히 70인역은

이를 ‘* ,엘루우’로 기록함). 40절에서 예수에게 조롱하여 말하기를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었다. 이례게 말하는 저들의 심정은

신성 모독죄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들의 마음속에 비록 그

대상이 눈앞의 예수가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 애타게 고대해왔던 메시야 대망(待望)이

담겨져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저들의 메시야 대망은 예수의 말씀 ‘엘리 엘

리…’를 듣는 순간 곧 오해를 하여 엘리야가 와서 도와 주나 보자고 하게 하였다. 아

마 그들은 엘리아가 와서 예수를 도와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여 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예수 자신보다는 십자가 아래서 예수

를 조롱하고 있는 자기들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27:48

한 사람이….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 아마 이 일이 발생한 동기는 예수께서

‘목마르다'(요 19:28)는 맡씀을 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이같은 햐

동은 예수에 대한 동정심에 근거한 것이기 보다 예수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延長)시

켜 과연 엘리야가 그를 구해주는지를 보려고 한 악한 의도(47, 49절)에서 나온 것으

로 보인다. 아무튼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어 그것을 갈대에 째어 예수께 마시

우게 한 행동은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구약 예언(시69:21)을 다시 한번(34절)더 성취시킨 사건이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한편 여기서 ‘해융’이란 일종의 스폰지(sponge)같이 다량의 엑체를 빨아들이는 도구로

서 바다생물의 뼈대 갈은 것에서 추출한다. 그리고 ‘신포도초'(* ,와소스)란

원래 ‘식초’란 뜻으로서 정확히는 ‘포스카'(posca), 즉 신포도주와 계란, 물을 섞어

만든 로마 군인들의 음료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 예수께 최후의 음료를 제공한

것은 로마 군병 중 한 사람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27:49

그 남은 사람들이…가만 두어라 – 여기 ‘가만 두어라’는 말은 ‘지금 횬자 내버려

두라’, ‘조용히 물러서라’ 등의 말일 것이다. 이는 예수를 향한 더욱더 조롱적인 어

투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마태에 의하면 이 말을 한자는 예수에게 방금 신 포도주를

준 로마 군병이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임에 비해 마가복음에서는 신 포도주를 마시우

게 한 후 자신의 행동을 금하는 군중들에게 선 포도주를 예수께 먹인 바로 그 사람이

계속해서 말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막 15:36). 이에 비해 요한은 그것이 누구에

의해 발설되었는지, 그리고 조롱인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직 성

경 말씀이 성취된 것에만 관심을 두고있다 (요 19:28,29). 따라서 어느 것이 정확한

보고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어찌되었든 예수의 절규하는 소리에 자극을 받은 군중들

은 떠들고 그 와중에 로마 군병들은 심정적으로 합세(숨박히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엘리야가 와서…구원하나 보자 – 적어도 유대인들은 예수가 지금 도저히 희생불가

능한 죽음의 문턱에 이르른 것이라고 자신해 해며 이같은 조롱을 거듭하고있다. 한편

어떤 사본에서(시내, 바티칸 등)본절과 다음절 사이에 요 19:34 에 기록되어 있는 바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는 이야기를 추가시키고 있다. 대신 요한복음과는 반대로 ‘물

과 피’의 순서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물과 피를 통하여 상징되는 성례전과

의 절차상의 일치를 위함인듯하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Robertson) 이 이야기가 후대

의 필사가에 의해 기계적이고도 무모하게 베껴썼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위의 몇몇 사본은 역사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신학적 측면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삽입구라 본다.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로 목을 축이신 후 아마

‘가상 칠언’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제 6,7번째 말씀(눅 23:46;요19:30)을 외치신 것

같다. 특히 예수께서 최후의 순간에 ‘크게’ 외칠 수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당신에게는

생명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눙동적이고 자발적(自發的)으로 당신의

생명을 내어준 결과에 의해서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생명은 그 누구에

게도 빼앗길 수 없지만 스스로 포기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요 10:17, 18).

영혼이 떠나시다(* ,페켄 토 프뉴마). 복음서는 예수님

의 죽음의 의의를 설명하지 않고 오직 그의 죽음의 사실만을 간단하게 언급한다. 한편

예수의 죽음을 묘사할 때 ‘생명, 목숨’을 뜻하는 ‘프쉬케'(* )의 떠남으로

표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영’을 뚱하는 ‘프뉴마'(*

)의 떠남으로 표기한것은 물론 당신의 죽음이 우리 인간과 똑같은 영, 육의 분리

를 뜻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내어주셨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특히 ‘영혼이 떠나가시다'(1짜0 딱58뛔##8 he gave up his spirit)란 담

담한 표현은 정해진 바로 그 시간에 예수께서 친히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는 강한암

시가 내포되어 있었다. 진실로 예수께서 성부로부터 버리심을 당하여 깊은 심연(深淵

,gulf)으로 떨어지고 자기 백성들에게 잔인한 조롱을 받고 숨지시던 바로 그 순간이

그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ransom for many)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때이다

(20:28). 한편 본문의 이 사실을 어거스틴(augustine)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분은 당신이 원하셨기 때문에, 원하시던 때에, 원하시는 대로 떠나가셨다.’

=====27:51

성소 휘장이…찢어진 둘이 되고 – 성소에는 지성소(the most Holy Place)와 성소

(the Holy Place)를 나누는 휘장과, 성소와 안뜰(the court)을 나누는 휘장이 각각 있

었다. 여기서 찢어진 휘장이 단지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둘 모두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바깥 휘장이

쪼어져 나간 것은 어쩌면 성전의 임박한 멸망을 암시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안쪽 휘장이 찢어

진 사실이다. 이 안쪽 휘장은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1년에

단 1회만 열렸다(히 9:7). 혹자에 따르면 이 휘장은 높이 55규빗(1규빗=약 45.6cm),

너비 16규빗 크기의 문에 드리워졌었는데,그것은 바벧론 제(製)로서 고급 린넨(linen)

의 직물에 갖가지 색을 입혔으며, 또한 그 위에 아름답게 여러 모양의 수를 놓았다고

한다.(Josephus, Wars V 5.4). 실로 이같은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것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의 일임)분명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담겨있는 상징적사건이었다.

즉 하나님의 임재 처소를 의미하는 지성소를 드리우고 있던 휘장은 분명 하나님과 인

간의 죄로 인한 단절과 불완전한 교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휘장이 찢어짐

은 (1) 대속 제물이신 예수의 찢겨진 육체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 산 길이

열렸음을 상징한다(히 10:19, 20). 이로써 그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이 대속

(代贖)의 죽음을 의지하고 담대히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2) 혈통적

선민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옛 언약의 신비가 벗겨지는 동시에 구속의 온전반 성취를

이루게 되었음을 상징한다(5;17-20;히 6:19;9:6). 이와 함께 (3) 유대교와 유대교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성진의 멸망을 상징한다. 물론 이 멸망은

A.D. 70년의 예루살렘 패망을 의미한다기 보다 차라리 ‘믿음이 온 후’에는 ‘믿음이 오

기 전’의 모든 것이 멸망케 된다는 신학적 의미에서의 멸망이다.

땅이 진동하여 비위가 터지고 – 이것은 마태복음만의 독특한 기록이다. 성전 휘장

이 젖어짐과 동시에 땅이 무너진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진정

백부장의 탄성(54절)과 함깨 이 모든 사건은 예수의 죽음직후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

다(D.Wenham, ‘Resurrection’ pp. 42-46). 아마도 마태는 지진 그 자체를 성전 휘장이

쪼어지고 무덤이 열리는 사건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과 신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왕상 19:11;사 29:6; 렘 10:10;겔:18). 좀더 발전적으로, 이 지진과 바

위의 갈라짐은 당신의 독생자의 죽으심으로 인한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의 임재(시 18:

7;사5:25; 욜 2:10)를 뜻한다. 즉 이것은 예수의 죽음을 믿음으로 수용하는 자에게는

새언약과 새 창조의 하나님으로서의 임재를, 끝까지 불선하는 자에계는 진노와 영원한

심판의 주로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암시한다. 한편 성전이 서있는 지반은 지질학상으

로 결함이 있는 곳이다. 오늘날 그곳에 모슬렘 사원이서 있는데 지금까지 여러 번 지

진에 의해 손상을입어왔다고 한다(D.Baly, The Geography of the Bible. p 25;Cyril.

Cateches. Cateches. 13권 33).

=====27:52

무덤들이 열리며 – 이 구절 역시 마태복음만의 기록이다. 앞부분에서의 지진의

결과로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커다란 돌문이 열리게 되었다. 이는 팔레스틴의 무덤

들이 대개 천연 동굴이나 아니면 바위를 쪼개어 만든 인조동굴에 시체를 안치(安置)하

고 그 출구에 큰돌을 굴려놓아 봉함으로써 의식적 부정을 방지하고 야수에게 시체가

도난당하지 않게 한 사실에 비춰 생각할 수 있다.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 마태복음에만 기륵되어 있는 본문은 수많은 의

혹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적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다. 실로 이 사건은 메시야가 오실 때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믿

음(9:25;22:23)이 현실화한 것인 동시에 예수 재림 때에 있을 모든 성도의 부활을 예

증해주는 것이다. 물론 본문의 이 사건은 53절 증언하는 바 예수의 부활 이후에 일어

난 것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강조하고자 했던 마태의 저작 의도에 따라 이

곳에 옮겨져 기록된것 같다. 한편 성경에서는 본 사건 이전에도 몇번의 기사가 소개

되었는데(왕상 17장: 왕하 4:32-35; 마9장 눅 7장 ; 요 11장) 이 모두는 한결같이 자

연적인 몸으로서의 부활이었다. 본 부활 사건을 두고 학자들 중에는 썩지도 아니하고

다시 죽지도 아니한 영체(spiritual body)를 입고 부활한 사건(고전 15:53)으로 보기

도 하며, 앞서의 부활 사건과 같이 단지 육체적으로 죽었던 자들이 소생한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의 부활이 다시 땅위에 살게 하려는 것이기 보다는 예수의 부활과 그 능력

을 중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영화(榮華)의 몸’으로 부활했다고 보는 것

이 좋을 듯하다. 어쨌든 죽었던 자의 몸이 무덤에서 일어나 예수 부활 후 무덤에서나

온 것은 (1)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 승리가 성도들에게 가져다 주

는 생명력 넘치는 영향력을 상징한다(고전 15:55-57). (2) 예수께서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생생히 중거한다(고전 15:23). (3)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음부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상징한다(엡 4:8,9

). 한편 본문의 ‘성도들'(* , 하기오이)은 교회의 한 전설에 따라 구약 시

대의 위인들(심지어 욥도 여기에 포함되었다고 함)이라고 보기도 한다(벧후 3:4). 사

실 우리는 그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분명 구약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거나 중간기 시대에 영적인 영웅들로서 활약한 자들이거나 이스라엘

역사상의 순교자들이 아닌가 생각한다(사 4:3; 단 7:18; Tobit 8:15;1 Enoch 38:4, 5)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성도들’을 상징적으로 이해하여 생존시 페시야를 대망하던 자들

로서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그 소망하는 바가 성취된 자들이라 보는 것이 좋을 둣하

다. 만일 부활한 성도가 이러한 사람들이라면 예수 이전에 살던 사람들 역시 예수 이

후의 사람들과 같이 예수의 승리와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들의 부활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27: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 여기서 ‘부활'(* ,에게르

신)이란 말은 특수 동사로서 예수께서 무덤에서 일어난 ‘그들을 부활시켰음’을 뜻할

수도 있고 아니면 능동태로 취급하여 ‘예수 자신이 부활 하신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부활’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으로 볼 때(고전 15:23)’예수의 부활’로 보는 것

이 적절하다. 즉 개역성경의 번역대로 예수께서 먼저 부활하신 후 그 부활의 영향력

(影響力)에 의거해 저희가 무덤에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마태가 성도의 부활장면

을 이곳에 배치한 것은 정확한 시간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의 부활이 가

져다주는 생명력 넘치는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정상적인 시간 순서을 무시하고 이 사

실을 이곳에 앞당겨 왔던 것이다. 한편 부활한 성도들이 ‘거룩한 성’ 곧 ‘예루살렘

‘(4:5)에 들어가 행하였던 모든 행적을 추적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

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을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을 찾아가 예수의 부활을 증거현상 중인

이 되었다는 점이다(겔 37:12). 그리고 덧붙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

림으로 인해 신약 교회가 폭발적으로 이방 세계에 그 세력을 떨치기 전까지 여전히 성

도(Holy City)예루살롑은 복음의 중심지였다는 점이다(행 1:8).

=====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 –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본문의 신앙고백을

백부장 혼자하는데(막15:53)반해 본서에서는 백부장 외에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

도 같이 그런 고백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마가복옴에서는 백부장이 예수의

‘운명하심’을 보고 그런 고백을 하는데, 본서에서는 ‘지진과 그 되는 얼’, 즉 흑암과

지진과 예수의 부르짖음등의 일련의 사건들을 목격하고 고백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백부장과 군병들은 예수의 처형이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

다. 그러한 기이한 사건들은 그 군병들로 하여금 두려음에 훵싸이게 했고 아마 그들은

그러한 사건들이 자신들이 가담한 그 범죄에 대한 하늘의 진노였다고 믿게 되었을 것

이다. 한편 본문의 ‘두려움'(* ,에포베데산)은 단순한 공포심

이상의 것으로 아마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장면에서 혼히 발견되는 일종의 종교적

두려움 같은 것임에 분명하다(사 6:5). 한 전설에 따르면 이러한 경건한 두려움에 휩

싸였던 본문의 ‘백부장’은 ‘론지누스'(Longinus)이며 (외경 베드로 복음서에는 ‘페트

로니우스’ 예수의 죽으심을 친히 목격했던 그 십자가 아래서 참된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 누구에 의하면 백부장을 위시한 군병들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아마 누가에 의한 고백은 예수

를 죄인으로 고소한 유대인들의 판결이 정녕 잘못된 것으로서 예수는 무흠하신 분이라

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기술(記述)된것 같다. 어쨌든 그 당시 백부장과 군병들은

죽어가신 예수에 대해 그분은 과연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동시

에 고백한것이 분명하다. 실로 그들의 고백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의미를 우

리에게 알려 준다. 즉 그것은 약속의 메시야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그의

‘고난과 죽음’의 현장에서 가장 분명히 당신의 존재를 나타내 보여 주고있다는 사실이

다. 사실 혹자는 ‘아들'(* ,휘오스)이란 말 앞에 관사가 붙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단순한 영웅적 인물 정도로 고백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Bruce). 그러나 이

호칭은 메시야 개념이 내포된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임이 분명하다. 이같은 사실은

그들이 고백한’진실로'(* ,알레도스)라는 강조적 표현에서 더욱 확신할

수 있다. 분명 이 부사는 유대인들이 조롱한 내용(3:5-13;15:21-28;27:39-44)과 정반

대의 사실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이방인의 입술에서 이같은 고백이 나

왔다는 것은 이방 선교의 신호탄인 동시에, 십자가의 효능이 즉시 발휘되고 있음을 보

여 준다.

=====27:55

예수를 섬기며…좇아온 많은 여자 – 마태는 또 한 부류의 십자가의 산 중인을 소

개하고 있다. 그들은 당시 사회적 인습으로 블때 천한 신분에 속했던 몇몇 여인들이

었다. 그 여인들 중에는 예수의 무덤을 맨 처음 찾아간 여인도 있었다. 특히 마태가

그 여인들의 이름과 행적을 이곳에 기록한 것은 십자가의 사건이 마무리 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세상의 낮고 췬한 자들을 들어 지혜롭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

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을 것시다(고전 1:27-31). 한편, 이 여인들은 갈릴리

에서 온 자들로서, 그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제자들과 예수의 쓸 것을 돕고 또 천국복

음을 듣기 위혜 예수를 따라다니곤 했다(눅 8:2, 3). 실로 예수께 대한 그들의 헌신

적 노력과 사랑은 죽음도 불사(不辭)하는 것이였다. 진정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극

복하는 법이다(요일 4:18). 예수가 체포되자 죽기까지 예수를 쫓겠다던 제자들은 하

나같이 달아났고(26:57), 특히 가장 열심있는 자로 자처(自處)하던 베드로마저 예수를

부인(否認)하고 말았다(26:69-75). 그런 와중에 갈릴리 전도 사역 때부터 예수의 쓸

것을 돕기 위해 예수를 따라 다니던(눅8:2, 3)여인들은 예수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정

(旅程)에 동참했으며. 또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두려음을 극복하고 처절한 예수의 최

후를 타는 가슴으로 지켜보게 된 것이다. 실로 그 여인들은 예수께 대한 숨은 봉사자

들이었으며 예수의 생(生)과 사(死)의 조용한 중인들이었다.

멀리서 바라보고 – 이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당시 십자가 현장 주변에 접근하기

가 용이(容易)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7:56

예수의 최후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던 여인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실로 세상의 낮고 천한 자들을(유대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자들을 천한 신분으로

간주함) 들어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반영한 광경이라 볼 수

있다(고전 1:29-31). 한편 이 네 여인들의 프로필(profile)을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마태복음

히가쁜츰 요향늠음

비 1

?막달라 1막달라 ?막췄라 일곱 귀신이 나

빠찌아 마지아 마리아 간여인(막1뻬

9) 늑 8 } 2)

?야꼬보와 ?잔은 야고 ?글로바외 작운 야과보가

요셈의 보와 요세 아좨 알쳬오의 빠들

어머니 의 뻐머니 마키아 야꼬보(10 } 3)

마키아 마키하 라면 블로바가

곧 알쾌오이다.

야세뻬대외 ?살로메 ?예수의 야꼬보와 요한

아들들왜 이모 외 어머니는 예

어머니 수의 이모였다

그녀는 십자가

밀레서 #% 킬

꼬츨 생각샜

는지 모론다.

야록없욤) 야륙없윰) #4 모친 요한은 예수의

(마리아) 모친과 쳬제들

의 이름쁠 끝내

밝히지 않는다

(2 } 1-4

5)

=====27:57

저물었을 때 – 이때는 금요일이 끝나고 안식일이 막 시작되려는 오후 6시경으로 추

측된다. 그런데 신 21:22, 23에 명한 바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예수의 시신(屍身)은 밤새도톡 십자가에 달린 채로 있어서는 안 되었다. 특히

바로 다음날이 안식일과 큰 명절인 유월절이 겹치는 거룩한 날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의 관습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모습을 만인들이

다 볼 수 있도록 시신이 날짐승에게 뜯겨먹히거나 부패할 때까지 그대로 십자가에 달

아 놓는 것이었다. 만일 그 시신을 장사지내고자 하면 로마의 지방 행정관의 용인(容

認)하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장사지낼 수 있도록 청할 수 있는 자들은 대개

죽은자들의 친구들과 친척들이었으며 그나마 대역(大逆)죄로 죽은 경우는 결코 허용되

지 않았다.

아리마대 부자 요셉…그도 예수의 제자리 – 여기서 ‘아리마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대개 ‘리다'(Lydda)나 ‘라마다임'(Ramathaim;삼상 1:1)으

로 간주한다. 한편 마가(막 15:43)와 누가(눅 23:50,51)는 요셉을 산헤드린 공의회의

요직(要職)을 맡은 자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누가는 그가 ‘의로은 사람’로서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산헤드린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단지 마

태만이 그가 ‘부자’임을 의식적(義識的)으로 밝힌다. 사마도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측면에 남다른 주의를 기울였던 마태는 이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라는 사 53:9-12의 예언을 상기(想起)했을

것이다. 어쨌든 지방에 있으면서도 예루살렘 근처에 자기 무덤이 있었다는 것(유대인

들은 메시야의 때가 도래하기를 고대하며 사후에라도 그때에 대한 소망을 간직하기 위

해 예루살렘 근방에 자기 가족묘를 마련해 두었다고 함)과 요한의 보고를 종합해 보면

요셉은 재물이 넉넉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마태는 요셉을 예수의 제자, 곧 그의추

종자라 한다(13:52;28:19). 비록 요셉이 사회적 신분 때문에 은밀(隱密)하게 예수를

좇았다고는 하나 그가 예수의 가르침에 깊은 감사를 받고 예수의 삶을 좇아간 것은 분

명한 것 같다.

=====27:58

빌라도에게 가서 – 지금껏 자신의 신앙을 노출시키지 않았던(요 19:38) 요셉은 예

수의 죽음을 틔해 옛 예언들이 성취되는 것과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재차 확신하고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담대히 떨쳐버리고 예수와 가까운 자로 자

처하며 그 시선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본문의 ‘가서'(* ,프

로설돈)란 긴급히 달려왔음을 암시하는 말로서, 죄수의 시체 관리 책임자인 총독에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貫澈)하기 위해 급히 총독 관저로 나아갔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는 산헤드린의 일원으로서 율법 준수에 철저했을 것이다. 따라서 큰 명절에 즈음하

여 이방인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피해야만 했고 또 시체와의 접촉을 멀리 해야만 할

입장이었다(요 18:28). 그럼에도 그는 의식적(儀式的)부정보다 예수의 장사에 더 관

심을 가졌던 것이다. 진정 신앙의 바른 도리에 입각한 자는 다른 어느 것보다 예수

사랑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예수의 시체를 달라 – 마가의 보고에 의하면 이때 요셉은 ‘당돌히'(용감하게) 예수

의 시체를 요구했다고 한다(막 15:43). 실로 그는 자신의 지위와 명예에 치명적 손실

이 가해질지도 모르는 그 상황을 결연히 떨치고 일어나는 참신앙의 용기를 보였던 것

이다. 한편 요셉이 이같은 간청을 한 때는 아마 요 19:311에서 보듯이 일단의 유대인

들이 빌라도를 접견(接見)하고 난 직후일 것으로 판단된다.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 빌라도는 요셉의 요청에 따라 먼저 십자가 형장(形場)의

관리자인 백부장에게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다음(막 15:44, 45)시체를 내어주었다. 이

처럼 까다로운 절차없이 시체를 내어준 사실은 적어도 그가 예수는 반역죄로 처형된

것이 아님을 어느 정도 공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57절 참조).

=====27: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 요셉 혼자 예수의 시체를 장사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시체를 옮겨가기 위해서는 우선 땅에 박힌 십자가를 뽑아 뉘운 다음 손과 발에

박힌 못을 빼어야 했고 시체를 옮기는 채비를 갖춰야 했다. 이와 함께 시체를 옮기는

일, 씻는 일, 몰약을 썩는 일 등 장례에 필요한 모든 일을 제한된 시간안에 요셉 혼자

하기에는 사실상 벅찬 일이다.

정한 세마포로 싸서 – 여기 ‘정한 세마포’란 질 좋고 깨끗한 아마(linen)를 가리키

는것 같다. 이 정한 세마포는 주로 시체를 싸는데 사용되었다. 한편 요한복음에 의

하면 일찍이 예수를 밤에 찾아갔던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沈香)섞은 것을 백근쯤 가

지고 와서 요셉을 도왔다고 한다(요 19:39). 또한 요한복음에는 유대인이 장례법대로

향품과 세마포로 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본서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27: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 59절의 ‘정한’이라는 단어와 ‘자기의 새 무덤’,그

리고 ‘큰’ 돌이라는 수식어는 마태복음에서만 강조어로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여기

서 ‘새’무덤이란 아직 죽음에 영향력이 그 공간을 침범치 못한 곳으로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몸을 가지신 예수의 시체를 안치(安置)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행 2:27). 실로 이곳은 부활 곧 ‘새’ 생명을 준비하는 예수의 휴식처였던것 같다. 한

편 이곳의 위치는 갈보리 언덕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현재의 성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가 서있는 곳으로 추정된다(Parrot). 그곳은 암석들로

구성되어 있어 돌로 깍은 무덤들을 쉽게 만수 있는 장소이다. 요셉은 모든 것을 ‘놓

고’그 자리를 떠나갔다. 진정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그의 신앙의 성격을 밝혀 준다.

왜냐하면 유죄판결을 받아 처형된 사람을 이스라엘 조상들과의 연속성을 대표하는 무

덤에 장례하는 것은 유대법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산헤드린의 결

정에 의해 사형을 받은 시체를 산헤드린 공회원이 장사지냈다는 것은 형언(形言)할 수

없이 진한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장면이다. 실로 이같이 주께서 누군가를 필요로 하

실 바로 그때 그곳에 주님 곁에 있을 수 있는 신앙인이 참 신앙인일 것이다.

=====27:61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 여기서 ‘다른 마리아’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를

가리킨다(56절 주석 참조). 실로 이 두 여인들은 예수의 장래를 주도하던 요셉과 일

단의 무리들, 그리고 56절에 언급된 동료 여인듸이 모두 떠난 이후 어둠이 깔리는 그

무덤가에서 예수께 대한 간절한 사랑의 마음을 지을 길 없어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이

다. 한편 로마법에 의하면 처형된 자들을 위하여 애곡(哀哭)하는 것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하여 여인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과 절망을 억지로 참으며, 예수의 장사(藏

事)를 조용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진정 예수의 처형과 매장의 증인은 제자들이 아니

라 여인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여인들의 권위가 무시당하던 당시의 상황에서(M

.Roshha-Shanah, 1:8)이 여인들의 증거는 참으로 특이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의 매

장 장소에 두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또다른 의미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그것은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법적인 효력을 지녔던 당시의 상황에서 예수의 죽으심 내지는 부

활의 역사성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3:1; 히 10:28). 이 증거와 기록

은 모든 가현설(Docetism)의 도전을 이겨내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27:62

예비일 다음 날 – 이 날은 안식일을 뜻한다. 그런데 왜 그냥 안식일이라 하지않고

예비일 다음날이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1) 마태가 안식일이라는

말 대신에 ‘예비일 다음 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25:57 에서 생략한 말을 사

용하고 싶어서이다(Bonnard, Hill, 막 15:42 참조). (마태가 ‘예비일 다음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일반적인 안식일(the last day of week)과 유월절기간 중의 안식

일(a feast-Sabbath)을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즉 마태는 안식일이 유월절중의 안식일

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런 표현을 썼다(D.a.Carson)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예

비일’을 의미하는 헬라어’파라스큐앤'(* )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날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주님께서 돌아가신날보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안식일 가리켜 ‘파라큐에’ 의

다음날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중 두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나 세번째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모여 – 서로 반목(反目)과 질시의 대상인 앙집단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공동 전선을 펴고 있는데 그것도 안식일에 이런일을 펼친다는 것

은 매우 이례적(異例的)인 것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요 18:28 에 의하면 그

들은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안식일 전날, 곧 금요일에는 궁전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않는다. 아마 그때는 그들 주위에 많은 군중들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들은 군중들의 눈을 피하며 하나둘씩 빌라도의 관정에 모여들기 시작

한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의 부활 문제를 대두시킨 것은 부활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22:23) 사두개인 출신들인 대제사장들이 아니라 부활 교리를 확신하고 있던 바리새인

들이었음이 분명하다.

=====27:63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하되 – 여기서 ‘주여'(* ,퀴리에)란 총독에 대

한 정중한 어법에 불과하다. 한편 ‘저 유흑하던자’이란 유대 군중들이 고대했던 바,

예수가 해방자요 정치적 메시야라는 사실을 전제(前提)로 한 말로서 진정 예수는 그들

의 기대에 부응치 못했기 때문에 ‘유혹하는 자'(deceiver)로 농락당했던 것이다. 이

런 사실은 초대교회 당시에까지 지속되어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가리켜’세상을 미혹

하던 사람’이라고 악선전(惡宣傳)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하튼 예수께서 사사로이 제

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고난과 부활 대한 예고(12:40;16:21;17:23:30:19)가 대제사장들

과 바리새인들에게 알려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그들에

게 말해주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잊어버리고 있는 사실을 저들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

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로 제자들은 정치적 페시야로서의 예수에 대한 기

대가 완전히 무너지자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을 모두 잊어버렸는 배반해 적대자들은 예

수를, 죽이고 그 무리들을 완전히 와해(瓦解)시켜 놓고도 신경질적으로 예민한 공포

속에서 예수의 능력을 두려워 하고 있었던 것이0]다.

우리가 기억하노니(* ,엠네스데멘). 이 말은 기동적(起動的)

부정과거 직설법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그뜻은’지금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는 의미

이다. 아마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즐기다가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예수의 시체가 장

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이 혹시 부활을 조직하여 거짓을 유포(流布)할지 모른

다는 우려 때문에 돌연 예수의 말씀이 기억났을(12:40)것이다.

=====27:64

그러므로 분부하여 – 당시 유대인은 로마 제국의 허락없이 독자적으로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 보존을 간청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는 자치 능력을 인정받은 성전 수비대가 따로 있었지만 그 활동 범위는 성전

에 국한되어 있었을 뿐이다.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 여기서 ‘사흘까지’란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

닌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평소에 자주 예언하시기를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

리라'(16:21;17:23;20:19)고 하셨으니 만인 사흘이 지나도 부활하지 않는다면 예수는

한갖 사기꾼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슈대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動員)하여 예수 부활을 저지(沮止)함으로써 그를 사기꾼으로 몰

아세우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인간적 장애를 초월하시고 부활

하셨으니 바로 여기에 우리가 믿는 부활의 도(道)와 하나님의 권능, 기독교의 진리가

있는 것이다(고전 15:12-28).

그의 제자들이…시체를 도적질하여 – 이는 그때의 정황으로서는 도무지 생각조차

하기 힘든 억측이었다. 사실 그 당시 제자들은 죽음으로 끝난 예수께 대해 깊은 회의

(懷疑)와 절망에 빠져있었을 뿐 아니라 더욱이 자신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모두 숨어

있었던 상태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 종교 지도자들은 흑시 있을지도 모를 예수

의 부활로 인한 소란을 미연(未然)에 방지하고, 또 자신들의 말대로 예수의 시체 도난

을 예방하기 위해 조급히 간청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예수의 완전한 죽음과

완전한 부활에 대해 더욱 확실한 증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 여기서 먼저 ‘유혹'(* ,프라네)이란 63절

‘유혹하던 자’란 말과 그 맥을 같이 하는 말로서 타인을 적극직으로 미혹하는 일종의

‘사기’를 뜻한다. 실로 유대 지도자를이 생각하기에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라고 주장

함으로써 ‘첫번째사기’를 쳤고,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의 예언로써 ‘두번째 사기’를 칠

것으로 믿어 자신들을 보호하고 백성들이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덤 파수(把守)

가 필요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예수의 페시야로서의 선동(煽動)보다

친히 부활함으로써 백성에게 끼칠 영향력을 더욱 두려워했던 것이다.

=====27:65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 ,에케테쿠스토디안). 많

은 학자들은 이 부분을 현재 명령법으로 해석하여 ‘경비병을 내어 줄 터이니 지키라’

고 해석한다(Roberrson, Lenski). 그러나 이에 비해 혹자는(D.A, Carson). 무덤을 지

킨 자들이 대제사장들에게만 보내하고 빌라도에게는 보고 하지 않는 28:11 에 근거하

여 본문을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카슨’은 그같은 주장의 연장

으로 본문에 나오는 ‘파숫군’은 로마 군인들이기 보다 오히려 레위인으로 구성된 성전

수비대원으로 보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본문에 언급된 빌라도의 대답은 제

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의 허락이 아니라 냉

소적인 말로 ‘너희들은 그 예수가 살아있을 때 두려워하더니 지금 그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두려움에 싸여 있구나 그렇게도 두려우면 너희들 힘으로 지키든지 말든지 마음

대로 하여라’의 의미로 해석한다. 물론 이같은 주장도 일견 타당성이있으나 본문을

명령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지지를 받고 있다. 따라서 명령법적 관점에서 볼 때 본

문의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란 말은 빌라도가 유대인들을 향해 그들이 목적하는

바 무덤 수비를 위해 자신의 부하 곧 로마 군인들을 활용하도록 하라는 지시가 될 것

이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파숫군'(* ,쿠스토디아)은 ‘네명으로

구성된 군인'(러시어로 Custodia)이라는 뜻으로 유대 성전 수비대가 아니라 로마 군병

으로 이뤄진 보초대, 경비대를 가리킨다(행 12:4). 어찌되었든 저들의 말대로 사람들

이나 미혹하는 사기꾼으로 예수를 이해했다면 왜 그리 두려워하는 것일까? 아마 저들

은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예수를 탁월한 예언자

정도로는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예언자라 할지라도 자기들의 기득

권(旣得權)을 위협할 때 저들은 지체없이 제거해 버린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온전히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장 완전히 반역(反逆)하는 경우이다.

힘대로 굳게 하라(* ,이스팔리사스데 호

스 이다테). 이를 직역하면 ‘너희가 알고 있는 방식대로 스스로 그것을 튼튼히 지키

라’이다. 즉 온갖 적절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두려움의 원인을 제거하라는 의

미이다. 이로써 빌라도는 자기의 권위롤 확실히 세우는 동시에 더이상 예수 사건으로

인한 골머리를 앓지 않기 위한 처방(處方)을 내린 것이다.

=====27:66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印封)하고 – 본문은 마치 ‘왕과 대신들은 사

자 우리의 문을 막은 돌에 봉인을 하여 아무도 다니엘을 건져 내지 못하게 하였더(단

6:17)는 다니엘의 체험을 연상케 한다. 사실 초대교회에서는 다니엘이 갇혀있던 사자

굴에서 무사히 나온 것을 예수께서 무덤에 머무시다가 그것을 뚫고 나와 부활하신 것

에 대한 모형(模型) 또는 비유로 생각했다. 한편 유대 지도자들은 서둘러 무덤 봉쇄

(封鎖)작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큰 돌을 굴려 무덤 출구를 막은 다밧줄로 그 돌과 무

덤 출구 양쪽에 동여맨 후, 밧줄의 중심부와 돌과 무덤벽 사이에 얽혀 있는 밧줄에 초

나 흙으로 밀봉(密封)했다. 따라서 만약 출구에 조그마한 이상이 있더라도 이 인봉이

깨어지기 때문에 부정한 방법의 헛소문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용이헹다. 실로 로마 제

국의 추악한 정권의 인준(認儁) 하에 유대인들의 치밀한 간개(諫疥)로 포장, 인봉된

꾸밈이었지만 모든 노력은 얼마 후 수포(水泡)로 돌아가고 말았다. 안식 후 첫날 동

시에 밝은 기운이 이는 동시에 페시야이신 예수를 하나님의 구속하라는 무대에서 제거

해 버리려는 그 모든 노력들은 부활의 항거(抗拒)할 수 없는 승리로 말미암아 하늘의

비웃음(시 2:4)을 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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