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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복음 22 장 | 마태복음 22장 18220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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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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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

마태복음 22. … 제 22 장 …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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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5/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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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마태복음 22 · 12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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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1/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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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마태복음 22장 – 한국컴퓨터선교회

마태복음 22장 … (마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눅14:16.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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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6/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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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37 – 다국어 성경 Holy-Bible

마태복음 22장 ·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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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11/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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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7(금) “마태복음 22:1-14” / 작성 정한조

본문 마태복음 22:1-14 찬송가 291장 ‘외롭게 사는 이 그 누군가’ 혼인 잔치 비유(1-10절)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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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9/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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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성경 마태복음 22장

쉬운성경 마태복음 22장 · 쉬운 성경 · 자료선교부 10.12 21:11 확대 축소. 22:1 <결혼 잔치의 비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다른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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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1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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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Matthew 22 KLB;NIV – 천국이란? – 예수님은 다시

천국이란? – 예수님은 다시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을 위해 결혼 잔치를 베푸는 어떤 왕과 같다. 왕은 종들을 시켜 잔치에 초대한 손님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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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8/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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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장 주석 – 마태복음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마태복음 제 22장 =====22:1 천국은 마치 과 같으니 – 이것은 예수의 천국 비유 서두의 정형(定型)이다. 여기 ` 과’에 여격이 쓰이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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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9/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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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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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태 복음 22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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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1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JgCh_8uZOJE

마태복음 22

혼인 잔치 비유(눅 14:15-24)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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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저희가 돌아 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18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21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26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2020/01/17(금) “마태복음 22:1-14” / 작성 정한조

본문 마태복음 22:1-14

찬송가 291장 ‘외롭게 사는 이 그 누군가’

혼인 잔치 비유(1-10절)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옷을 벗어서 양탄자처럼 길에다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에다 깔았습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서 “호산나_제발 구원하소서”를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리는 지축이 뒤흔들릴 정도였지만, 그 모습의 실상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덮개가 열린 자동차를 타고서 카퍼레이드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타는 세발자전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으시고, 일반화폐를 성전화폐로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실상을 아셨던 예수님께서는 열매가 없고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 아무런 열매가 없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3가지 비유로 그들의 불순종과 강퍅함을 지적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두 아들 비유’이고, 두 번째는 ‘포도원 농부 비유’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마지막 세 번째 비유인 혼인 잔치 비유입니다.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고대에는 지금처럼 먹거리와 볼거리가 많았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먹고 사는 것이 어느 정도 나아진 것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4000년이 넘는 우리나라 역사 중에서 보릿고개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도 불과 50년 전부터입니다. 또한 100년 전의 사진을 보면, 거리에 있는 사람 중에 신을 신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풍성한 혼인 잔치는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도 잔치, 특히 혼인 잔치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예수님 당시에 잔치 참석은 두 번의 초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주인(임금)은 잔치를 열 날짜를 정하고 -이때에는 시간은 정하지 않았습니다- 초대할 사람들을 정해서, 종들을 보내 그날 참석할 수 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참석할 사람들의 숫자가 파악되면, 그 수에 알맞은 양의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잔치 당일 주인은 음식 준비가 끝나는 대로 다시 종들을 보내어서 처음에 초대한 사람들을 불러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주인이 종들을 두 번째 보낸 것입니다. 물론 주인은 그들이 당연히 잔치에 참여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응하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오기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초대하는 사람에 대한 심한 모욕이었습니다.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임금은 종들을 다시 보내어서, 오찬을 준비했으니 꼭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소와 살진 짐승, 그리고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고 했습니다.

600kg짜리 소 한 마리를 도축하면, 약 1,500명 이상이 먹을 수 있습니다. 본문의 ‘소’는 단수(單數)가 아니라 복수(複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마리 이상을 잡은 것입니다. 두 마리를 잡았다면 3,000명, 세 마리를 잡았다고 하면 4,500명이 나누어 먹을 수 있습니다. 만약 10마리를 잡았다고 하면 15,000명이 나누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만 잡은 것이 아니라 ‘살진 짐승’도 잡았습니다. 양이나 염소, 닭 등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 단어 역시 복수입니다. 게다가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얼마나 풍성하게 준비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초대했는지,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을 만큼 얼마나 세심하게 준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풍성하게, 또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시고 사람들을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5-6)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돌아보지 않다’의 문자적인 의미는 ‘무시하다’, ‘소홀히 여기다’입니다. 히브리서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 있는데, ‘등한히 여기다’가 ‘돌아보지 않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것을 요즘 하는 말로 표현하면, 임금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그 초대를 완전히 ‘개무시’하는 것입니다.

초대의 거부 이유가 한 사람은 ‘자기 밭’ 때문이었고, 또한 사람은 ‘자기 사업’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탕진하거나, 세속적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 또 악한 일을 저지르기 위해서 참석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두 일상생활과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유물들을 잘 관리하고, 일터와 학교에서, 가정에서 모두 우리는 진실하고 신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신뢰하게 될 때, 그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 있고, 우리의 눈을 ‘영원’이 아니라 ‘세상’에만 머물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줄 것 같이 느껴져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진리를 살지 못하고,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종들을 ‘잡아서’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잡다’, ‘모욕하다’, ‘죽이다’라는 점점 그 폭력의 강도가 심해지는 동사를 사용해서 적나라한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는 선지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악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임금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유대인들이 ‘잡다’, ‘모욕하다’, ‘죽이다’라는 3개의 동사로 악을 행한 것을 표현했었는데, 임금도 ‘보내다’, ‘진멸하다’, ‘불사르다’의 3개의 동사로 심판의 강도가 점점 커 짐을 표현합니다.

이 예언은 A.D. 70년, 로마 제국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당하므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이후로 그들은 1,900여 년의 세월을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결과였습니다.

임금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8-9)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처음에 임금은 사람들을 초대할 때 아주 예의를 갖추어서 했습니다. 초대할 사람들에게 미리 종들을 보내서 참석 여부를 확인하고, 잔치 준비가 끝났을 때 다시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정식으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리를 채울 사람들을 데리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의견이 어떤지, 잔치가 마음에 드는지, 참석할 의사가 있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불손하기까지 합니다. 마치 ‘해 놓은 음식 처리하게나 하자’라고 생각하는 정도의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적인 풍자(諷刺)에 해당합니다. 한 사람의 꺾어짐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넘어가게 했다는 것을 비유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이번에 초대될 사람들은 ‘악한 자’에서 ‘선한 자’까지입니다. 그 안에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갑니다. 이 초대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처음에 정식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모든 사람에게 열린 문이 되었습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처음에 초대를 거절했던 사람들은 당시로 보면, 하나님께서 본래 말씀하신 그 의미를 상실한 채 조상들이 해석해 준 율법을 가지고 자신들이 의롭다고 고집을 피우며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했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잔치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당시에 죄인으로 여김을 받았던 사람들과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던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11-14절)

11-14절은 임금이 초대한 잔치에 들어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쫓겨나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이 앞의 이야기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기도 하고, 다른 비유로 보기도 합니다. 두 비유라고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1절에는 ‘비유로 대답하여’에서 ‘비유’가 복수형으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고대 중동의 잔치에서는 잔치 호스트가 처음부터 배석해 있지 않고, 잔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에 나왔다고 합니다. 손님이 가득한 잔치에 임금이 등장했다는 것은 잔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아무리 좋은 것이 많아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일 수가 없듯이, 임금이 초대한 잔치에 임금이 계시지 않는다면, 임금의 잔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보니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장례식에는 장례식에 어울리는 옷이 있고, 등산을 할 때는 산에 어울리는 옷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결혼 잔치에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임금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당연하게 임금은 왜 예복을 입지 않고 있는지를 물었지만, 그는 유구무언(有口無言), 입은 있으되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길에서 갑자기 초대를 받았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길에서 초대받은 사람이 이 사람 혼자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초대를 받고서 왔는데, 한 사람만 예복을 입지 않고 있는 것이 더 의아하지 않습니까?

고대 이스라엘 왕궁에는 왕궁을 찾아온 사람에게는 입혀 주는 예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복을 담당하는 관리가 있었습니다. 거리에서 초대받은 사람 중에 이 사람만 예복을 입지 않았던 것은, 그는 나눠 받은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잔치로 초대한 임금을 무시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갈 때 입을 옷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입니다

(13-14)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하나님의 형벌은 영원한 형벌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잔치에 들어가는 유일한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예복’을 받아 입는 것입니다. 다 받는 것입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것을 거부한 사람은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잔치에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는 하나님의 힘을 덧입어야 들어가는 곳이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음으로, 우리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잔치를 맛보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잔치로 초대하여 주시고, 그 속에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내어 쉬는 순간까지, 우리가 밭으로 가야 한다는 이유로, 내 사업을 하러 가야 한다는 핑계로, 내 욕망이나 세속적인 가치관을 성취하기 위해서 주님이 없이도, 이 잔치를 떠나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만용을 부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길거리에서 배회하며, 우리의 영혼이 배고프고, 외로움에 떨 때 불러주셨다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삶을 살아,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의 현장이 하나님의 잔치,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임금의 혼인 잔치 초대에 사람들은 자기 밭과 사업으로 인해서 가지 못한다고 핑계를 대었습니다. 지난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핑계를 댄 일이 있다면 무슨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2. 임금은 종들에게 거리로 나가서 악한 사람부터 선한 사람까지 모두 잔치로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언제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시게 되었습니까? 그때 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3. 혼인 잔치에 초대되었음에도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어두운 데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4. 매일 매일을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목적 삼고 살며, 하나님의 잔치 속에 살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쉬운성경 마태복음 22장

22:1 <결혼 잔치의 비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다른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22:2 “하늘 나라는 아들의 결혼 잔치를 마련한 왕에 빗댈 수 있다.

22:3 왕이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초대한 사람들을 모셔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22:4 그러자 왕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말했다.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잔치가 준비되었다고 말해라. 소와 살진 송아지도 잡았고,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으니, 어서 결혼 잔치에 오라고 하여라.’

22:5 그러나 사람들은 종들의 말을 듣지 않고, 제 갈길로 갔다. 어떤 사람은 밭에 나갔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다.

22:6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잡아다가, 그들을 모욕하고 죽였다.

22:7 왕은 매우 화가 났다. 그는 군사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죽였다. 그리고 온 도시를 불태워 버렸다.

22:8 그리고 자기 종들에게 말했다. ‘결혼 잔치가 준비되었으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자격이 없다.

22:9 너희는 큰 길에 가서, 너희가 만나는 사람마다 결혼 잔치에 초대하여라.’

22:10 종들은 거리에 나가, 만나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불러들였다. 그래서 결혼 잔치 마당은 잔치 손님들로 가득 찼다.

22:11 왕이 그들을 보러 들어왔다가 결혼 잔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았다.

22:12 그 사람에게 왕이 말했다. ‘친구여, 결혼 잔치 예복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2:13 왕이 종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두운 곳에 던져 버려라. 그 곳에서 슬피 울고 고통스럽게 이를 갈 것이다.’

22:14 초대받은 사람은 많으나, 선택된 사람은 적다.”

22:15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 그 때, 바리새파 사람들이 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잡아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공모했습니다.

22:16 그들은 자기들의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이들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며, 하나님의 길을 올바르게 가르치시며,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으시므로 아무에게도 치우치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22:17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22:18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의 악한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위선자들아! 왜 나를 시험하느냐?

22:19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내게 보여라.” 사람들이 은돈 한 데나리온을 예수님께 보여 드렸습니다.

22:20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얼굴이고, 누구라고 쓰여 있느냐?”

22:21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가이사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어라.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22:22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부터 떠나갔습니다.

22:23 <부활에 대하여>같은 날,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두개파 사람 몇 명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했습니다.

22:24 “선생님, 모세는 ‘남자가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형을 대신하여 아들을 낳아 주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22:25 우리 가운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첫째가 결혼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어, 아내를 자기 동생에게 남겨 놓았습니다.

22:26 그런데 둘째도, 셋째도, 그리고 일곱째까지 첫째와 똑같이 되었습니다.

22:27 결국엔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22:28 일곱 형제 모두가 이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부활 때에 이 여자는 이 일곱 형제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22:29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22:30 부활할 때에는 누구도 장가가거나, 시집 가지 않으며, 오직 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천사처럼 될 것이다.

22:31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했느냐?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22:33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22:34 <가장 중요한 계명> 예수님께서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으셨다는 소식을, 바리새파 사람들이 듣고 함께 모였습니다.

22:35 그 가운데 율법의 전문가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22:36 “선생님, 율법에서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합니까?”

22: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모든 마음과 모든 목숨과 모든 정성을 다해서,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22:38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계명이다.

22:39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인데 이것도 첫째 계명과 똑같이 중요하다.

22:40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22:41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바리새파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자손이냐?” 바리새파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22: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어찌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겠느냐? 그는,

22:44 ‘여호와께서 내 주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라고 말하였다.

22:45 다윗이 이처럼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22:46 아무도 예수님께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 아무도 예수님께 감히 질문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2,Matthew 22 KLB;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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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Copyright ©1973, 1978, 1984, 2011 by Biblica, Inc.® Used by permission. All rights reserved worldwide.

NIV Reverse Interlinear Bible: English to Hebrew and English to Greek. Copyright © 2019 by Zondervan.

마태복음 22장 주석

마태복음 제 22장

=====22:1

천국은 마치 과 같으니 – 이것은 예수의 천국 비유 서두의 정형(定型)이다. 여기

` 과’에 여격이 쓰이는데, 이것은 ` 에서와 같은 그런 상황이다’라는 말의 간결한

표현이다(Jeremias). 그러므로 여기서는 천국이 어떤 왕과 같은 것이 아니라, ‘천국은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잔치와 같다’고 이해해야 한다.

자기 아들을 위하여 – 그 임금에게 자기의 아들은 그 나라의 상속자이자 자기의 모

든 것이다. 그의 출생과 성장은 아버지인 임금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알 수 없

다. 더욱이 그 아들이 다 커서 혼인도 하고 이제는 나라를 맡을 수도 있게 되었으니

왕궁에는 행복과 권세와 명예가 가득했다. 왕은 이 혼인과 잔치의 성사에 정성을 다하

며 친히 모든 일을 주도하시는 것을 본다. 여기서 임금은 하나님을, 아들은 예수 자신

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 곧 천국의 사역을 왕이 아들을 위해

베푸는 혼인 잔치로 말씀하신 것이다.

혼인 잔치 – 원문에는 `가무스'(* )라고 복수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아마 여러 날 계속되는 잔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의 결혼 축제는 대개 7일이나 그

이상 밤낮으로 계속된다. 성년이 된 한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결합하는 것을 축하하

는 그 잔치는 기쁨과 풍요로움으로 가득찬 축제이다. 천국이 이런 ‘혼인 잔치’로 비유

된 것이 생소한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을 아내

로 맞아들인 남편으로 말씀하셨다(사 54:5). 거기에 상응(相應)하여 신약에서도 그리

스도께서 그의 교회와의 연합으로 남편이 되심을 말하고 있다(엡 5:23-32). 그리고 혼

인 잔치로서의 천국 묘사는 계 19:7-9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이렇게 죄인들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메시야 왕국의 사랑과 기쁨을 혼인과 결부시키는 것

은 신 .구약에서 통일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첫 이적의 영광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한 일이다(요 2:1-11).

=====22:3

종들을 보내어 – 대개 부자들의 잔치는 날짜를 정하고 종들을 보내어 미리 손님을

청해 두지만 시각은 알리지 않고 당일에 준비가 마쳐지는 대로 다시 종들이 나가서 인

도하여 오는 것이 관습이었다(에 5:8;6:14). 더구나 왕자의 혼인은 나라의 큰 일이므

로 이런 절차들이 아주 엄밀하고 신중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종들을

구약의 선지자들로 보나, 천국의 임박함을 처음 선포한 세례요한이라고 하는 것이 타

당하다. 이 종들은 바로 구약의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나라와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했

던 신앙의 선조들과 선지자들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천국 초대장은 ‘회개하라 천국

이 가까왔느니라'(마 3:2)는 천국 시작의 선포였다. 특히 세례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신랑의 친구로서 자기에게 큰 기쁨이 있다는 비유(요 3:29)에서 예수를 신랑으로 소개

하였다.

그 청한 사람들을 – ‘초청을 받은 사람들을'(* , 케클레

메누스)에서 ‘청하다, 부르다'(* , 칼레오)의 현재완료 수동분사로서 그

초청이 과거에 단회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종들을 보내는 그 시점까지 계속 유

효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구약에서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져 왔고 그것이 결코 취소되거나 잊혀지지 않았다가 때가 되매 실제로 시작되고

초청이 온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왕궁의 행사에는 백성들을 대표하여 고관대작(高官

大爵)들이 초청을 받고 참석한다(막 6:21). 마찬가지로 천국의 약속과 초대의 말씀도

이스라엘의 선생들과 지도자들에게 맡겨졌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초청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여 백성들을 인도할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 왜 세례를 주느냐?’고 물었던 자들로서(요 1:19-28) 지금 예

수와 논쟁하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다.

오기를 싫어하거늘 – `싫어하다'(* , 우크 에델론)는 미완료

형으로서 그들이 왕의 초대를 ‘끝끝내 원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지극히 완

고한 마음으로 왕의 초대를 거절했다. 왕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그 잔치에 가기를

싫어했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시 내분(內紛)의 조짐이 있거나 반란의

기운이 무르익은 나라의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외부적으로는 전혀 그런 조짐이 없이

그들은 반드시 응하겠다고 약속을 했고 기다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잔치

가 임박하자 그들은 태도를 돌변하여 본색을 드러내었다. 그 거절의 이유를 그 왕궁의

혼사에 걸맞는 중한 선물을 바치기 싫어서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Derrett), 그것이

고유한 관습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본 비유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어쨌든 이것은

예수 자신의 비유 해석대로(21:32) 유대의 지도층들이 끝내 세례 요한을 믿지 않은 것

을 가리킨다. 세리와 창녀들로 대표되는 죄인들에게 회개와 세례를 허용하는 세례 요

한의 사역과 메시지(3:7-10)는 그들의 전통과 질서에 정면으로 배치(背馳)되었기 때문

이었다.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 왕의 영적인 의무이다. 그런데 그 명(command)을 무시

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또 한 번 간청(懇請)하다

시피 청하러 종들을 보내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백성

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의 ‘다른 종들’

은 바로 예수 자신과 그의 사도들로 시작된 신약 시대의 전도자들이다. 예수는 세례

요한을 이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17)고 선포하셨다. 이와 더불어 예

수께서는 12사도와 70인 전도대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눅 10:9,11)는

메시지를 주어서 파송하셨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 여기서 오찬(* , 아리스톤)은 유대인들이 들

던 하루 두 끼니 가운데 첫번째 끼니를 가리키는 말로서 보통 늦은 아침(midmoming)쯤

에 갖는 식사를 가리킨다. 그런데 며칠을 계속되는 성대(盛大)한 혼인 잔치의 풍습으

로 볼 때, 이 ‘오찬’은 잔치가 시작되는 식사이이었을 것이다(Meyer).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 그런데 그 오찬은 친히 왕이

자기의 소유물로 정성껏 풍성하게 준비한 것이었다. 그 잔치를 위해서 양(量)과 질

(質)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음식이었다. 이것은 왕의 잔치가 초대받은 사람

들에게 얼마나 충분하고 실제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가를 강조하는 것이다. 천국도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것이 준비되어 있다. 천국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

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신랑이시면서 신부를

값주고 사기 위해서 친히 제물이 되신 분이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사

람들이 먹고서 영원히 사는 생명의 떡으로(요 6:47-58),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수가 영

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것으로(요 4:14) 말씀하셨다.

=====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 이것은 ‘도외시하다’ 혹은 ‘개의치 않다’는 의미로서

(A.T.Robertson) 전혀 관심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들의 이 큰 무례함은 교만과

무지 때문이었다. 유대의 지도층은 요한과 예수의 천국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

냐하면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와 그의 왕국은 자신들의 전통 위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

이었다. 또한 그리스도는 다윗의 뒤를 이은 용사로서 군사적인 프로그램에 따라 자기

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하고 로마와 열방을 정복해 나가 천하의 왕국을 세

워야할 자인데, 예수는 오히려 자신들에게 회개하라고 대적(對敵)하니 고려할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대 백성들도 자신들이 바라던 정치적인 해방과 현세적인 이

득을 가져다 줄 것같지 않자 나중에는 다 예수버리고 만다.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 그들 가운데는 무관심하고 냉담

한 소극적인 자들이 있었다. 예들 들어 예수의 천국초청과 명령을 뒤로 하고 크게 고

민하면서 자기의 신(神)인 재물을 향하여 갔던 젊은 부자관원(눅 18:18-23)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보다 자기들의 밭과 상업을 더 가치있게 여긴 것이다.

그들은 외형적이고 문자적인 율법 준수(observance)에서 얻은 자기의와 공로로 구원받

을 수 있을 것으로 믿으면서 세상의 안전과 쾌락을 위해서 돈을 좋아했던 바리새인들

이었다(눅 16:14).

=====22:6

그 남은 자들은 죽이니 – 헤롯왕은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살해할 것을 계획하고 무고(無辜)한 어린아이들을 죽였다(2:1-16). 자기의 기득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위험한 세력을 근절(根絶)시켰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아들 헤롯 안

티파스는 세례요한을 잡아 죽였다(막 6:17-29). 그리고 지금은 유대 지도층들이 그 마

음속에 시기와 질투(27:18)로 가득차서 예수께 대한 적대감과 살의(殺意)를 노출시키

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신들의 민족의 안전과 사회 질서의 안녕

을 위해서라고 했다(요 11:47-53).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자기들의 이권과 명예를 사수

하기 위한 위선책에 불과했다. ‘능욕하고'(* , 휘브리산)라는 말은 학

대하다는 말보다 더 혹심한 모욕과 처벌을 뜻한다. 그들은 예수께 “네가 그리스도냐,

그러면 선지자 노릇해 보아라”며 침뱉고 주먹으로 쳤었다(26:65-68). 이와 함께 그들

은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죽였던(23:35) 선례가 있고, 이어서 예수의 사도들을 투옥

하고 죽일 것이었다(행 4:1-3;5:17,18;8:1).

=====22:7

임금이 노하여 불사르고 – 왕의 간곡한 초청을 거절한 자들에게 왕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왕 자신에게 대한 모욕이요, 반역이기 때문이다. 이제 왕은 종

들을 보내지 않고 군대를 보낸다. 그 ‘군대'(* , 스트라튜마타)

는 대군이 아니라 한 무리의 군인들을 가리킨다. 전란(戰亂)이 심한 팔레스틴 지역에

서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어떤 도시를 왕이 군대를 보내 파괴하는 것이 전혀 낯

선 일은 아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가 끝나는 시점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

판은 시작된다. 이제 그들은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살인자들이었고, 예루살

렘 성도 더이상 하나님의 거룩한 성이 아니라 그 살인자들의 동네(*

, 텐 폴린아우톤)였기 때문이다. 이 예언은 주후 70년경 디도(Titus) 장군의 로마 군

대에 의해 문자 그대로 응하였다. 이 부분을 후대의 가필(加筆)로 보는 견해도 있으

나, 이제 예수께서 당신의 죽으실 것(20:17-19)과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24:2)을 예언

하시는 마지막 주간에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로

마 군대가 하나님의 군대는 아니나, 고레스와 다른 경우들처럼(사 10:5;45:2) 간혹 하

나님은 이방의 군대를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22:8

청함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 처음 초청을 받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과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그 초청은 이제 무효화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청이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이다(Lenski). 이제는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회개한 이방인과 죄인들을 포함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이 하

나님 나라의 상속자의 권리를 갖는다.

=====22:9

사거리 길에 가서 – 사거리 길(* , 타

스 디여소두스톤 호돈)은 성읍 경계에서 지방으로 통하는 길들이 시작되는 넓은 광장

으로 형성된 곳이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왕래하는 곳이다.

사람을 만나는 대로 – 그곳의 사람들은 처음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

의 사람들이다. 눅 14:21에는 분명하게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

로 드러난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이 혐오하던 죄인들이었다. 왕의 분노는 무자격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갑절의 호의(好意)로 나타났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던 종교 지도자

들은 예수를 거부하고, 예수는 세리와 사마리아인 같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다.

=====22:10

악한 자나 선한 자나 – 바리새인에게는 자신들의 기준에 의한 선악의 개념이 뚜렷

했다. 그들은 자칭 의인들이었고 세리와 창녀들, 병자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

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들, 악인들로 여겼다. 그러나 그들이 전통적으로 세운 선악의

기준을 하나님께서는 참고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의모를 보지 않으시

고 그 중심을 보신다.

=====22:11

한 손님들이 다 참석하면 잔치가 시작된다. 이들 문화권에서는 잔치에 주인이 처음

부터 함께 하지 않고 식사 시간이 되면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서 손님들을 환영하는 것

이 상례로 되어 있다(Jeremias). 이는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양과 염소를 갈라내듯이

심판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보러'(* , 데아사스다이)라는

말은 대상의 참된 성질과 특성을 의도적으로 자세히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왕은 이

잔치에 부적격(不適格)한 사람을 즉시 찾아내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고후 5:10).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 – 고대 동방에서는 잔치의 주인이 초청한 사람들에게 예

복을 한 벌씩 주는 것이 관례라고는 하나(왕하 10:22), 1세기의 혼인 잔치에서는 그것

이 확실하지않고, 본 비유에서도 그것은 밝혀지지않고 있다. 그러나 길에서 바로 온

사람들에게 알맞는 예복이 있을 리도 없고 자기의 것을 가지고 올 여유도 없었을 것이

다. 그러면 우리는 궁정의 행사에 참여하거나 왕을 알현(audience)하려는 자에게 왕으

로부터 예복이 주어지는 관습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선악이 문제되지 않

고, 원래의 신분과 처지를 가리고 그 잔치에 합당한 예의와 함께 왕께 대한 예(禮)를

갖추는 예복이 문제였다. 이 예복은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옷, 구원의 옷(사

61:10)이며, 세례요한과 예수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말씀하신 회개와 믿음(롬

10:9,10)이라는 옳은 행실이다(계 19:8). 이렇게 천국의 심판의 기준이 외형적인 선악

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믿음이라는 것은 당시의 전통적인 유대교가 그리는

심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가 행한 의의 분량만큼 구원과 상급을 얻고 이방

인과 죄인들은 결코 메시야 왕국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하나님이 주신 예복을 입은 것만으로 구원을 누

리는 것이다. 예복을 입지 않은 이 사람은 바로 가룟유다를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하나

(Tasker), 오히려 예수의 답변을 듣고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받은

(16:6-12) 율법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며, 이들은 교회

에 함께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를 멸시하다가(고전 15:12-19) 종말에

심판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22:12

친구여 – ‘친구여'(* , 헤타이레)라는 말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불평하는 일꾼(20:13)에게와 가룟유다(26:50)에게 사용되었다. 이것은 애정이나 특별

한 선의가 담긴 말이 아니라 손아래 사람에게 하는 그저 무관심한 투의 말이다.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않고 – 남들은 다 왕이 주는 예복을 입었는데, 그것을 입지

않고 자기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음을 자신의 지식과 행위로 구원받기에 충분하다고

믿는 자고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들은 가라지들이고(13:24-30), 염소들이며

(25:41-46),`주여 주여’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7:21-23).

=====22:13

사환들에게 말하되 – 1-10절에는 `종들'(* ,둘로이)이 사용되었고,

11-14절에는 `사환들'(* , 디아코노이스)이 사용되었으므로 이 비

유가 원래는 독립된 두 비유였음을 암시한다고 하나, 왕의 밑에서 전령으로 일하는 자

들과 잔치를 담당하고 수종드는 자들이 달리 불리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면 이

사환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보좌하고(마 13:41,49) 영원천국

에서 성도들에게 수종들 천사들일 것이다. 한편 그들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수족

을 결박하는 것은 반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바깥 어둠에 내어 던

져지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형벌에 대한 일관된 묘사이다

(8:12;13:42,50;24:51;25:30). 그것은 즉각적이고도 철저한 형벌이며 영원한 형벌이어

서 더이상의 자비나 기회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은 생생하여 절망과 한탄과 분노

로 불타오른다. 그런데 이것이 사랑의 하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단지 경고

나 과장된 표현이라고 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가치를 가

볍게 여기는 자들이 하나님의 형벌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진정 지옥의 형벌을 두려워

하는 것은 결코 유치한 신앙이 아니다.

=====22:14

청함을 받은 자 택함을 입은 자 – 개역 성경에는 원문의 ‘왜냐하면'(* ,가

르)이 생략되었는데, 이것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끄는 말이다. 임금이 처음에 손님들

을 초청했지만 그 초청을 받아들이고 예복을 입어 ‘택함을 입은 자들'(*

, 에클레크토이)은 소수였다. 그러나 손(guest)이 가득했기 때문에(10절) 잔치를 맛본

사람이 소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스라엘 모두를 먼저 초청했는데, 그들 거

의가 거절하여 택함을 입지 못한 비극적인 현실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택함을

입었다는 것은 이제 잔치를 맛볼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을 말한다(눅 14:24). 그 조

건은 부르심을 받고, 주시는 예복을 입는 것이다. 인간 편에서는 다 받는 것뿐이다.

선택의 교리의 핵심이 여기에서 나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예수를 알 수 없고 예수께 갈 수 없다(16:17;요 6:65).하나님의 택정

함을 이루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택함을 입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적고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

혜를 무시하는 인간의 교만이 그토록 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결어를 마

태가 후대에 삽입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청중과 논적(論敵)을 향한 결론적 경구로서

진정한 예수의 말씀임을 부인(否認)하기 어렵다.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상론하고 – `이에'(* ,토테)는 때로 시간적인 의

미보다는 앞뒤의 사건을 논리적으로 연결해 주는 접속사로 쓰이는 마태의 독특한 용법

이다(90회). 예수를 잡아야 하나 예수께서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여기 바리새인들만 언급한 것은 막 12:13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가리키는 ‘저희’와 모순되는 것 같으나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거

의가 바리새인들이었고, 계속해서 진행되는 예수께 대한 올무를 놓는 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대표로 쓴 것이다.

말의 올무에 걸리게(* , 파기듀소신) – `올무에 걸리게

하다’는 말은 본래 사냥에 사용되는 말로서 한 대상에 대해 주도면밀하게 함정이나 덫

을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자기들의 메시야를 죽이기 위해 모든 종교적인 지식

과 현실적인 모든 상황을 이용하여 덫을 놓는 생생한 표현이다.

=====22:16

자기 제자들을 헤롯당원들과 함께 –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올무에 빠지게 하려고

헤롯당원들과 함께 가도록 했다. 사실 그 양자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면에서 서로 다

른 견해로 잦은 충돌을 일으켰던 사이였으나 예수에 관한 문제만은 일찍부터 협력하여

일을 꾸몄었다(막 3:6). 평행구인 눅 20:20은 헤롯당원들을 동행시킨 바리새인들의 의

도는 로마의 총독의 손으로 예수를 처지하려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연로(年

老)한 바리새인들은 연소(年少)한 제자들을 보내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접근하도

록 했는데, 그것은 자기들의 위신과 체면을 지키고, 새로운 얼굴들을 내세워 진실한

구도자의 모습으로 가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힐렐(Hillel) 학파와

샴마이(Shammai) 학파가 있었다. 누가는 그들이 정탐(spying)했었다고 말하는데, 정탐

은 자기의 신분을 감추기 위함이며, 그들은 전략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들은 예수로부

터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즉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온갖 최고의 칭

찬을 시작한다. 그 첫째가 ‘선생님이여'(* , 디다스칼레)이다. 이

것은 랍비와 같은 의미인데, 진리와 권위를 갖춘 가르치는 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처

음에 그들이 와서 ‘네가 무슨 권세로’라고 했던 말투와는 전혀 달리 예수를 칭찬하고

추켜 세우는 전략을 사용한다. 둘째는, ‘당신은 참되시며'(* , 알레데스)

라는 말이다. 이 말은 바리새인들이 참으로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었으나 예수를 선지

자로 믿는 백성들이 듣도록 한 말일 것이다. 이것은 ‘선한 선생님’이라는 표현같이 그

들로서는 파격적인 높임이었음이 틀림없다. 참되신 선생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

하여 가르칠 수 있다. 다시 한 번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라고 하여 강

조한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니, 또한 그것을 참되게 가르치는 자는 어렵고 미묘한

문제라 할지라도 명쾌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셋째로,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라고 하여 지금까지 그렇게 참되게 가르치고 행하는데 있어서 예수는

백성들의 여론과 인기를 고려하지 않았고 관원들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지적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지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평가하시는 방식인데, 그처럼 사람이 가진 권세나 사람들의

평판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하셨다는 말이다. 이렇게 열렬한 지지자로서 진정

으로 해답을 앙망하는 자세로 가장한 것이다. 이는 비록 겉에 꿀을 바르고 속에는 독

을 넣은 인사말이지만 이것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가장 공정한 평가를 바리새

인 스스로가 내린 것이다. 이제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이런과분한(?) 칭찬에 걸맞게 어

떤 껄끄러운 문제에 대해서도 단호하고 시원한 해답을 두려움없이 제시해야 했다. 그

러면 당연히 로마당국의 정책에 대항하는 견해를 공식적으로 답할 것이고 그때 조용히

지켜보던 헤롯당원들이 증인이 되어 그들이 로마 총독에게 고소(告訴)하면 되는 것이다.

=====22:17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 예수 당시 유대 지방의 납세 문제는

민감한 문제였다.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 헤롯은 종교적으로는 유대인이었으므로 그에

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종교적인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유대 지방은 아켈라오가 폐

위되고 황제의 직속령으로 재편성되어 황제가 임명하는 총독이 다스리게 되자 유대 백

성들은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직접 세금을 바치는 격이 되었다. 한편 이때 가이사는

A.D. 12-37년에 로마를 통치한 티베리우스 황제였다. 그리고 로마 정부는 매 14년마다

한 번씩 그 각 지방에서 바쳐야 하는 세금의 총량을 결정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

했다(눅 2:1). 이스라엘에서는 바벧론 유수때부터 이방 지배자들에게 조공(朝貢)을 바

치는 일이 문제된 적이 없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

이다. 그런데 그 인구 조사를 즈음하여 갈릴리 사람 유다(행 5:37)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신데 이방 왕들에게 세금을 바쳐 그를 인정한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반란은 진압되었어도 가이사에 대한 납세의 적법성(適法性) 문

제는 계속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하나님의 선민이 예루살렘성전이 있

는 유대 땅의 소출(所出)에서 십일조를 성전에 바치면서 그 동일한 소출에서 떼어 이

방인 왕의 통치아래 있다는 표로 세를 바치는 것을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꺼림직하게

여겼다(F.F.Bruce).과격분자들인 열심당은 그 일을 수치(羞恥)로 여겼다. 그러나 헤롯

당은 헤롯가문을 재흥시켜 헤롯 대왕의 호시절로 돌이키려고 로마 제국에 협력하면서

납세도 적극 권장하던 자들이었다. 어쨌든 지금 예수는 궁지에 빠졌다. 납세를 찬성하

면 열심당과 바리새인들과 일반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여 그들이 환영하는 메시야

가 될 수 없고, 납세를 반대하면 헤롯당원과 사두개인들, 로마 총독과 헤롯 왕으로부

터 정치범으로 몰리게 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에 예수가 로마에 대한 납세

를 찬성하지 않으실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사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서 살려는 그들

에게도 그 문제는 큰 고민이었다. 여하튼 바리새인들의 사악함은 하나님의 도에 참된

예수의 견해 중에서 율법에 열심인 자신들과 일치되리라고 예상한 점을 이용한 데 있

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예수를 옭아매기에 충분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세 – 로마 제국이 강요하는 세금은 토지세와 소득세와 인두세가 있었다. 여기의 ‘

세'(* , 켄소스)는 인두세로서, 로마 정부는 자기들의 통치를 받은 속

주에서 남자는 14세 이상부터, 그리고 여자는 12세 이상부터 65세에 해당하는 모든 사

람들에게 부과하였다. 한편 라틴어의 Census라는 말은 바로 이 인두세에서 유래하였

다.

=====22:18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 예수는 그들의 정중하고 호의적이며, 간절한 물

음 속에 있는 살의와 사악함을 보셨다. 이에 대해 마가는 ‘외식함’, 누가는 ‘간계’라

고 표현했다(막 12:15;눅 20:23). 그들의 입으로 말한 바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예

수는 당신을 시험코자 하는 그들의 중심을 다 아셨고 그것을 백성들 앞에 드러내셨다.

예수는 그 질문이 가지고 있는 함정과 덫을 바로 아셨던 것이다.

=====22:19

셋돈 데나리온 하나 – 이 세금은 로마 황제가 발행하는 은화로 바쳐야 했다. 고

대사회에서 화폐는 왕권의 상징으로 어떤 왕이 왕위에 오르면 즉시 자기 자신의 화폐

를 발행했다. 왕위를 노리는 자까지도 자기의 왕직의 실재성을 과시하기 위해 화폐를

발행했다(W.Barclay). 이것이 데나리온인데, 당시 가장 널리 유통되던 화폐였고, 거기

에는 재임 중인 황제의 이름과 칭호가 찍혀 있어서 황제의 재산임을 나타냈다. 그 가

치는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이었고, 로마 군인의 하루 품삯이었다. 세금은 매년 일인

당 한 데나리온을 내야 했다.

=====22:20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 이 데나리온 주화의 한 면에는 황제의 신성을 표시

하는 월계관을 쓰고 있는 황제 티베리우스의 두상과 ‘존엄한 신의 존엄한 아들 티베리

우스가이사’라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다른 면에는 ‘지극히 높은 사제'(Pontifex

Maximus, 폰티펙스막시무스)라는 라틴어 글과 신들의 평화를 나타내는 홀과 감람나무

가지를 각각 왼손과 오른손에 쥐고서 신들의 보좌에 앉아 있는 황제의 어머니의 그림

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 이런 이방인의 우상숭배적인 화폐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큰 혐오감을 일으켰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 정부는 이 화폐를 쓰게 함으로

자기들이 지배하는 권세를 피지배민들로 하여금 피부로 느끼게 하고 인각시키는 것이

었다. 랍비들은 큰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아브라함에게 대한 약속은 구체

적으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이 새겨진 화폐가 세계에 통용되는 것으로 이루어진

다고 믿었다(Beasley-Murray). 초기의 헤롯가에는 유대인의 종교관 때문에 이러한 형

상 새기는 일을 피했으나 분봉왕 빌립이 이것을 유대 주화에 도입했다. 그 뒤로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이 일을 행했던 것이다(Robertson).

=====22:21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 ‘가이사'(* , 카이사르)는 최초의 로마 황제 율

리우스 가이사(Julius Caesar, B.C. 100-44)의 성(姓)이었으나 나중에는 ‘황제’의 공

식 직함 명칭이 되었다. 예수의 질문은 너무 당연하고 무해(無害)하게 보여서 바리새

인들은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항상 질문자의 입에서 대답을 이끌어내셨

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입에서 나온 같은 말로

대답하신다. 데나리온의 화상과 글이 가이사의 것이면, 그 주화는 가이사의 것이다.

그들 모두가 가지고 다니던 데나리온 주화는 로마 황제의 주화였고, 그것은 곧 이스라

엘이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 있음을 분명히 증거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들의 입으로

그 주화가 황제의 소유임을 말하게 하셨다. 한편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화폐 주조

(鑄造)의 권리가 한 나라의 통치자에게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통치

권력의 증거가 되어 있었고, 거기에 저항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께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다면 로마에 세금을 바칠 뿐만 아니라

그 법을 준수하고 합당한 요구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임을 강조하셨다. 예수의 이

첫 대답은 문자적으로는 반민족적이고 친로마적인 입장이었으나 뒷 말씀과 연결될 때

는 참으로 기이하고 심오한 도(道)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십일조와

성전세와 헌물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당시 하던 관례대로이다. 그러나 문제

는 주화가 황제의 소유이므로 황제에게 바쳐야 한다면 하나님의 소유에서 제외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만물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인각되어 있는뎨( 롬

1:20),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받으실만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고 있는가? 예수는

상황의 본질을 정확히 아셨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하나님께 합법적인가를 물은 그들이 실은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하나

님께 전혀 바치지 않고 있었다. 실로 그들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던 것이

다(23:23). 그들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로 바

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들은 가이사의 것도 가이사에게 돌리지 않으려고 했

기 때문에 멸망당하고 만다. 결국 주후70년, 성전이 파괴되고 성전세 반세겔까지 로마

정부의 강요로 로마에 있는 쥬피터 카피돌리누스에 바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 그 영역과 경계를 정하신 말씀이시다. 교회는 이스라

엘 민족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형상을 찾아 하나님께로 돌리는 하

나님의 구원의 통치영역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생명과 권세가

나타나 있어서 복음을 믿는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 복음의 통치권은 예수의 속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것이 최초로 하

나님께 온전히 돌려짐으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을

제외한 당신의 것을 받으신다. 하나님이 주시고 받으시는 것에 비하면 가이사가 주고

받는 것은 얼마나 시시한가? 교회는 하나님께 받고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질서이고,

시민 생활은 가이사에게 받고 가이사에게 바치는 질서이다. 어느 요구도 다른 요구를

방해하지 않는다. 가이사가 자기의 것만을 요구할 때는 그에게 시민으로서 복종하는

것이다. 여기에 근거해서 바울은 롬 13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시민 생활을 가르친다. 그

러나 교회는 가이사가 하나님의 것까지 요구했을 때는 육체를 줄지언정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가이사에게 바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이 더 포괄적이고 우월하기

때문이다.

바치라(* , 아포도테)는 17절의 ‘ 바치다'(* , 두나

이)와는 다르다. 이것은 마땅히 돌려 주어야 할 것을 돌려 준다는 의미이다. 똑같은

동사가 21:41에서 농부가 제때에 주인에게 소출을 바치는 것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그

러나 D.A. Carson은 가이사가 실제적으로 그들에게 준 것이 없기 때문에 ‘돌려주다

‘(pay back), 혹은 ‘지불하다’란 의미보다 그냥 ‘주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이사가 눈에 보이게 준 것은 없어도 그의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권

세를 위임 받아서 하는 일이어서 거기에 해당하는 존경과 두려움과 세를 마땅히 바쳐

야 하기 때문에(롬 13:1-7) 어떤 대가를 ‘지불하다’는 의미로는 쓰일 수 있을 것이다.

=====22:22

기이히 여겨 – 그들은 예수에게 이런류의 해답이 나오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그

대답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의 협공을 피하면서 도리어 그들의 부패한 심장을 찌른

것이다.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것’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게 되었다. 그들은 압도당

하여, 즉 ‘기이히 여겨'(* , 에다우마산) 놀라고 감탄할 뿐이었

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해 들은 그들의 선생들은 눅 23:2에서 예수의 이 말씀을 왜곡하

여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선동(agitation)했다고 고소한다.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 사두개인(3:7, 주석 참조)들은 숫자상으로는 많

지 않았으나 부유한 귀족들이며 지배 계급에 속한 자들이었다. 제사장들은 대부분 사

두개인들이었다. 그들은 헬라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자기 민족의 역사적 근거로서 모

세 오경은 인정했으나, 기타의 구전, 문서들,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유전과 서기관들의

성경 해석과 적용을 배척했다(Winer). 그들은 물질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믿었다. 그래

서 만약 부활이 있다면 그것은 땅에서의 생전의 동일한 조건이 그대로 유지되어 현생

의 불합리하고 모순된 삶이 변함없이 개속되므로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유대교

는 죽음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건한 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최후의 부활까지는 음부(스올)에서 그림자처럼 미약한 존재의 형태로

있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사람은 죽음과 더불어 영혼과 육체가 다 없

어진다고 믿었다. 그들은 영혼의 존재와 부활의 교리가 오경에서 증명될 수 없다고 하

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신 31:16;32:39을 인용하여 오경에서 몸의 부활을 증명하

려 했다. 그리고 오경외에 사 26:14에서도 부활을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들이 몸의 부활을 원칙적인 교리로 고수했어도 그들의 논의는 필요없는 상상과 억측으

로 흘렀다. 한 예로 그들은 부활했을때 어떤 옷을 입고 부활할 것인가를 문제 삼았다.

그리고 어떤 모양으로 부활할 것인가의 논의는 삼상 28:14(죽은 사무엘이 알아볼 수

있게 나타난 사건)에 근거하여 죽을 때 가졌던 모양 그대로, 불구자는 불구인 그대로

부활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모든 유대인들은 성지 팔레스틴에서 부활한다고 믿고 외

국에서 죽은 자들은 지하의 공로(空路)를 통해서 팔레스틴에 이르러 부활한다고 했다

(W. Barclay). 그들에게도 부활은 육체의 부활 그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두개

인들은 그들의 교리가 만들어내는 많은 모순 때문에 그것을 비웃고 믿지 않았던 것이

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제외된 자라

고 규정했다.

그 날에 물어 가로되 – 마태만이 그 질문이 같은 날에 있었다는 것을 기록한다.

유대 지도층의 세 파가 예수를 시험한 그 날(화요일)은 질문의 날이었다(Tasker). 바

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의 실패를 보고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논리로 예수를

굴복시킴으로 예수와 함께 경쟁자들을 제압하여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두개인들이 예수와 직접 관계한 유일한 경우이다. 그들은 예수가 바

리새파의 전통적인 부활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두개인

들은 그 교리의 모순된 점을 공격하여 백성의 인기가 최고도에 달한 ‘선생님’이신 예

수로 대답할 수 없게 만들어 망신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22:24

선생님이여 – 그들도 바리새파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존경과 위엄으로 자신들의

악의를 가장한다. 그러나 자신들에 대하여 가졌던 우월감 때문에 아첨까지는 하지 않

는다.

모세가 일렀으되 – 그들은 모세를 언급하면서 자신들의 종교적 이론의 근거가 모세

에게 있음을 은연(隱然)중 강조한다.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장가들어 – 이것은 신 25:5,6의 요약 인용이다.

그들은 신명기를 모세의 말로 인용한다. 신명기까지의 첫 다섯전을 모세의 저작으로

받는 것은 유대인의 정설(定說)이었다. 원래 레 18:16;20:21에서는 죽은 형제의 미망

인과는 결혼을 금지했다. 그러나 신 25:5에서는 형제가 자식이 없이(원문: 아들이 없

이)죽으면 그 형제가 형수(제수)를 취하여 아내 삼도록 했다. 여기 `아내에게 장가들

어'(* , 에피감브류세이)는 무자(無子)한 과부인 형수

에게 장가드는 자에 대해서 쓰였다(창 38:8;신 25:5). 신약에는 이곳에 한 번 나온다.

모세 이전에도 이 수혼(嫂婚)의 풍습은 있었다(창 38:8). 그리고 고대에서 근세까지

여러 동양 민족들에게서 그 관습을 찾을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관습을 이스라엘의 법

으로 정착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수혼법이 적용되는 무자한 과부를 취할 수 있는 이웃

친척도 같은 지경에 사는 형제에게 국한되었다. 그리고 그 의무는 거부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의무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당사자가 증인들 앞에서 그 남자의 신을 벗기고,

침 뱉고, 저주했다(신 25:7-10). 그러나 이것은 예수 당시에는 거의 퇴화된 법조문이

었다고 한다.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 `형을 위한’은 원문에 `그의 형제에게'(*

, 토 아델포 아우투)이다. `후사'(* , 스페르마)는 원래 파종(播種)을

위해 보관해 둔 씨를 뜻한다. 그리고 `세울지니라'(* , 아나스테세

이)는 `일으키다'(raise up)는 뜻이다. 수혼법은 자식이 없음으로 인하여 가문이 끊기

는 것을 가장 큰 재앙으로 여겼던 고대적인 사고에 뿌리를 두었다(Speaker). 형수와의

새로운 결혼에서 낳은 첫 아이는 죽은 형제의 법적인 아들로 간주되어 죽은 형제의 이

름을 물려 받고 그의 족보에 오르고 그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22: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 이 말로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예수께 제시한 예증이 대단

히 현실적인 것으로서 부인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강조한다.

끼쳐두고 – `아페켄'(* )은 ‘남겨 두었다’는 의미이다.

=====22:26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 모든 결혼이 아이를 생산하는데 실패했다. 아이가 있

었다면 부활 때에 아이를 낳은 형제의 아내가 되는 것이 당연하므로 끝까지 아이를 낳

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 있었던 사실인지, 논쟁의 극적인 효과

를 위해서 실제 있었던 어떤 경우를 확대하여 꾸며낸 이야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이야기가 실제적으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실행 불가능하다고 해도 법적인 가능성 때문

에 이야기 자체의 사실성을 따지지 않는다. 예수께서도 이 이야기의 사실성에 대해서

는 언급이 없다.

=====22:27

최후에 죽었나이다 – 사두개인의 시각에서 볼 때 그 여인의 죽음은, 곧 지상에서

의 삶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가능성도 바랄수 없는 완전한 종결로 보았다(신약 총

론 ‘신약의 종교적 배경’ 참조).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그 여인은 여전히 존재

하며 영원한 심판을 받기 위해 언젠가는 죽음의 문을 열고 일어나야할 잠재적인 부활

체였다. 이 신앙에 입각하여 바울은 부활의 영광을 확신했으며(고전 15:19), 또 니케

아 신경(Nicene Creed)은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생명’에 대한 뜨거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22:28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 이것은 철학적인 토론을 하기 좋아하는

사두개인들이 바리새파와 부활을 믿는 자들의 입을 막기 위해 만들었던 수수께끼였던

것 같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분명했다. 부활 후의 삶이 이 세상에서의 삶과 정확히

대응된다면 부활한 그 여인은 근친상간의 결혼의 죄의 책임을 지든지 그 형제들 중의

한 아내로 지목이 되어야 했다. 따라서 그 여인이 부활 후에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

그 대답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부활의 개념은 불합리한 것이 될 뿐이다. 사두개인들은

이 수혼법(嫂婚法), 계대(繼代) 결혼법이 모세의 법인데 모세가 그런 육체의 부활을

믿었다면 율법을 준수했을 때 그런 불합리한 문제가 발생되는 그런 계명을 명했을 리

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교리는 모세도 알지 못했던 것이며, 솔

로몬 시대 이후에야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Lenski). 이 문제는 과연 윤리적이

고 도덕적인 바리새인들이 대답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임이 틀림없었으며, 사람을 만

드시고 그 존재와 운명을 아시는 하나님만이 대답하실 수있는 것이었다.

=====22:29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 ‘성경'(* 하이 그라파이)은

구약전체의 문서를 가리킨다(눅 24:27, 44;요 5:39). 예수는 부활 교리가 전 성경(선

지자와 시편을 포함)에 걸쳐 지지(支持)를 받고 있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 성경이 예수를 증거하고 있는데, 만약 부활 교리가 모든 성경에서 가르쳐지지 않는

다면 예수의 부활도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예수의 눈에는 모세오경을 잘

믿는다는 사두개인들이 성경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부활에 대한

성경의 명백한 교훈(욥 19:25-27;사 26:19;단 12:2)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여

기서 ‘하나님의 능력'(* , 헤 뒤나미스 투데우)이란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능력이다.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를 만드신 하나님

께서 영혼과 흙이 된 육체를 통하여서 영적인 몸을 만드시는것(고전 15:42-44)은 어려

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사람을 현생에서의 육체적 상태로 만드신 것에

하나님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경시하는 큰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고로 – 원문은 ‘메 에이도테스'(* )로서 문자적으

로는 ‘보지 못하므로’이다. 이 말씀은 눈으로 성경과 피조계를 보면서도 그 안에서 바

른 진리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의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이다

(요 3:10;9:41). 사두개인들은 세상 철학으로 성경과 하나님을 판단한 것이다.

오해하였도다(* , 플라나스데)는 중간태로서 ‘너희가 너희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기만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과 하나님의 진

리에 대하여 무감각한 상태를 지적한다.

=====22:30

원문에 제시된 본문에는 ‘왜냐하면’이란 뜻의 `가르'(* )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설명의 도입부인 것이다. 예수는

먼저 부활의 성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부터 언급하고 다음에 성경으로 입증하신다.

부활때에는 시집도 아니가고 – 현생에서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번식시키기

위한 창조 법칙이다. 그래서 결혼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는 출산이다. 그러나 부활 때

는 창조의 목표가 완성된 마지막 때이므로 더 이상 출산이 필요 없고, 그러므로 자연

히 성적 만족을 요구하는 본능도 없어진다. 부활의 몸은 이렇게 존재의 규모와 질(質)

이 달라지므로 결혼관계가 해소(dissolution)되고,결혼이 필요가 없게 된다. 또한 이

세상의 쾌락과 만족과는 다른 새롭고 영원한 즐거움과 만족이 있게 된다. 이 대답으로

부터 어떤 이들은 천국에서는 그 이전의 삶이나 여러 관계들에 대한 기억조차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여하튼 오늘날에도 선한 어머니

는 그녀의 모든 자녀를 다 사랑할 수 있고 또한 그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듯이, 일

곱 형제들의 아내는 틀림없이 모든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 모두의 사랑

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D.A. Carson).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 예수는 부활체의 상태를 가장 분명하게 천사들과

비교해서 가르치신다. 천사들이 영적인 존재이듯이 부활한 인간의 몸도 영적인 존재이

다. 그러나 천사 되는 것이 아니라 천사의 존재 특성과 유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부활한 몸은 무성(無性)이라고 했으나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혼이 필요 없다고 하셨지 남녀의 구별이 없어진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셨기 때문이다. 남녀의 구분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드러

내는 증거로 존속될 것이다. 천사들과 비교해서 말씀하신 것은 천사들의 존재를 부인

하는 사두개인들에 대한 또 한 번의 공격이며, 천사들의 실재와 영적인 특성을 완전히

계시하신 것이다.

=====22:31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 예수는 이제 성경의 증거를 들어 부활의 사실을

입증하신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출 3:6)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

만이 아니라 현재의 이스라엘 청중에게도 하신 것으로 말씀하셨다. 이로 보건대 하나

님의 말씀은 당신의 언약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영원한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있으므로 그 말씀을 늘

읽고 바로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로라 – ‘나는 의 하나님이다'(*

, 에고 에이미 호 데오스)라는 이 말씀은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소개의 정형이다. 하나님은 언약의 상대방인 아브라함의 이름을 들어 스스로를 소개하

신다. 대개 우리는 유명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드러냄으로 우리 자신을 높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연약한 피조물의 이름에 즐거이 자신의 존재를 결부시킴으로 그와 맺

은 언약의 소중함과 그것에 대한 당신의 신실하심을 보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선조들의 하나님으로서 틀림없이 약속을 지켜오신 분으로 소개하는 것이

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생존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다. 또한 아브라

함, 이삭, 야곱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조성되는 기반으로 쓰임을 받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렇게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그들의 후

손됨을 구원의 보장(保障)으로 여겼던 것이다(3:9;요 8:39). 한편 본 구절은 ‘나는 아

브라함의 하나님이었노라’고 과거 시제를 사용해야 문법적으로 옳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 현재 시제를 사용하신 의미를 예수께서는 간과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 누가는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

라'(눅 20:38)는 예수의 해석을 첨가했다. 실로 예수는 부활과 영혼의 존재의 관점에

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신다. 하나님께서 현재 시제를 사용하셨다면 아브라함과 이

삭과 야곱은 더이상 죽은 자가 아니다. 그들은 존재가 소멸되어 버린것이 아니라 하나

님 앞에 살아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육체는 썩어 흙이 된 지 오래지만 그 영혼

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실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죽어 멸절(滅絶)되었다면 그들과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이 참여할 수 없고, 지켜 볼 수 없는 언약의 성취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당시

그 말씀을 들었던 모세와 백성들도 만약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어 멸절되었다고

믿었다면 하나님의 그런 말씀을 비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인용한 그 본문은

이 논증의 맥락에 있어서는 영혼의 존재와 그 불멸성을 증명하는데는 충분하지만 부활

을 증명하는 데는 충분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은 물론 천사의 존재와

영(靈)의 존재도 부인했다. 그러므로 문제는 영혼의 불멸성과 부활 사이의 선택이 아

니라, 모든 것의 멸절로서의 죽음과 사후의 생명 사이의 선택이었다(D.A. Carson).영

혼의 불멸이 육체의 부활을 암시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오경의 기

록자인 모세의 권위에 호소하여 자기들의 논리를 합리화시키려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오경에 있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통하여 부활의 교리를 확증하신 것이다.

=====22:33

무리가 놀라더라 – 누가는 바리새파로 거의 확실시 되는 어떤 서기관들이 ‘선생

이여 말쏨이 옳으니이다’라고 대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눅 20:39). 그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사상적 반대파인 사두개파를 예수께서 완전히 격파하신 것을 기뻐한 것이다.

대부분의 백성들도 유대교 안에서 날카로운 대립을 일으켰던 신학적 난제를 단지 성경

만으로 해결하신 예수의 신적 지식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할수가 없었다.

=====22:34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

게 하셨다는 말을 들었고, 소수는 그 자리에서 직접 보았을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벙

어리가 되어 다 물러갔다. 그들로서는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패(敗)하지 않은 것이

일단은 안심이었다. 헤롯당원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물었던 것은 유대의 정통성에

벗어나 있는 자신들의 입장을 합리화시켰던 이론들로서 예수께서 이 논쟁에서 패했다

면 그 반대 편에서 모든 면에서 정통성이 있다고 믿었던 바리새파도 잘못하면 함께 넘

어지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자기들이 예수를 넘어뜨리면 정통성은 더욱

확실해지고, 예수를 신임하나 율법을 모르는 무식한 백성들로부터(요 7:49) 예수를 분

리시켜 처리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여기 ‘모였다'(* , 쉰에크데

산)에 `에피 토 아우토'(* )가 번역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행

2:1처럼 ‘같은 장소’를 의미한 것이다. 이 문구는 사 2:2의 인용이며(26:3에 반복사

용), 원수들이 그리스도를 잡아 죽이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Tasker). 바리새인들은 마치 총회로 모이는 것처럼 무리를 지어 모였다. 그러나 그들

의 대책은 이미 바닥나 있었다. 첫번째 질문이 바로 그들이 짜내고 짜낸 유일한 묘책

(妙策)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모여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려는 것

을 보면 그들의 적의가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알 수 있다.

=====22:35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 마가는 ‘한 서기관'(*

, 그람마튜스)으로 기록했다. ‘율법사(* , 노미코스)는 ‘교법사'(*

, 노모디다스칼로스)로도 불리우는데, 율법의 해설자이고 가르치는 박사들로서 넓게는

서기관에 속한다. 그들은 율법에 정통한 신학자들이며 법률 전문가들이었다. 이미 그

당시에는 성경 뿐만 아니라 성경 해석과 유전들이 방대했고, 실제 생활의 민사(民事)

적인 일들에 적용하는 데는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이 필요했다. 그런데 막 12:28-34에

는 그 서기관이 질문을 하는 것을 책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두개인들을 논박하여 물

리치신 것을 기뻐하며 나왔으므로 대단히 우호적인 분위기이다. 그러나 이점 때문에

마태의 기록과 상충되지는 않는다. 마태는 바리새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의도를 표현

하고 있고, 마가는 그들 중에서도 내심 예수께 호의적인 소수가 예수의 사두개파를 이

기신 것을 기뻐하고 더욱더 자기들과 일치하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물었던 상황을 기

록한 것이다. 또한 눅 10:25-37에는 율법사가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의 입으로

두 큰 계명을 말한다. 그리고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연결된다. 이것은 같은 내

용이 다른 상황에서 다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누가는 이것을 생략할 수 있

다.

=====22:36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 마가복음에는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

이까”이다(막 12:28). 이는 동일한 의미이다. 한편 본문의 ‘크다'(* , 메

갈레)는 말이 정도나 계급에 대하여 사용될 때 최상급으로 ‘제일 중요한’이라는 의미

가 된다(Arndt Gingrich). 유대인들이 계명들을 크고 작은, 곧 중요하거나 사소한 법

들로 구별했던 것은 철두철미한 율법 준수의 정신에서 그리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탈

무드에 나오는 랍비 아키바의 이야기이다. 한쪽 다리로 서 있을 동안에 율법 전체를

설명하라는 이방인의 도전에 부정적 황금률-너에게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이

‘율법의 전체’이며 그 나머지는 주석에 불과하다고 답했다. 또 한편 랍비들은 율법을

세밀하게 나누어서 율법 중에 613(십계명 글자의 수) 계명이 있다고 보고 그중에 248

(사람 몸의 지체 수)조는 적극적, 365(일년의 날 수)조는 소극적인 금지 계명으로 분

류하였다. 그 중에는 중요하여 우선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15:4-6의

예). 이러한 변론의 정당한 근거로 그들은 다윗(시 15:2-5, 11계명), 이사야(사

33:15, 6계명), 아모스(암 5:4, 2계명), 미가(미 6:7, 3계명), 하박국(합 2:4, 하나의

계명) 등의 율법 요약 선례를 들었다. 어떻게 하면 율법을 더 온전히 지킬 수 있겠는

가하는 율법에 대한 열심이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학문적이고 실제

적인 중요한 문제였다. 더욱이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만을 인정했기 때문에 성경에는

명백하게 기록되지 않은 유전은 인정하지 아니함으로 바리새인들과 자주 충돌했었던

것이다. 눅 20:39, 40의 증거를 보면 이미 예수의 답변은 존경받는 율법사들에 의해

유대인 중에서 우세한 견해였던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율법을 연구함

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대로 행치 아니하

였고(23:2-4), 구약의 목표요 정점인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하는 데 실패하였다.

=====22:37

마음을 다하고 사랑하라 – 신 6:5의 인용이다. 이것은 가정이나 성전에서 매일의

예배에 사용한 신앙 고백문인 ‘쉐마'(* )의 한 부분으로 매일 두 번씩 소리 높여

암송함으로 유대인에게는 가장 익숙한 것이었다. 특히 이것은 십계명의 전반부, 하나

님께 대한 계명의 포괄적인 요약이다. 유대인 아이들은 이 구절을 외우는 것으로 교육

이 시작된다. 바리새인들은 신 6:8, 9에 따라 ‘쉐마’를 문의 오른편 기둥에 기록하고

또 이것을 기록한 작은 양피지를 상자에 넣어 끈으로 이마와 왼팔에 잡아 매었다( 경

문 , 23:5).

마음(* . 카르디아)은 외식이 아닌 진정한 의지를 강조한 말이다.

목숨(* ,푸쉬케)은 육체적 생명을 뜻하며, 이는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뜻(* , 디아노이아)은 지적 능력을 뜻하는 말로서,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해와 통찰력을 가졌음을 강조한 것이다.

다하여(* , 엔 홀레)는 ‘전부 안에서, 전체로써’라는 말이다. 신 6:5의

원문은 ‘뜻’ 대신에 ‘힘’이고, 마가와 누가에는 ‘힘’이 첨가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론

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들은 서로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라 중복되는 개념들로서 강조하

는 것이지 의미상의 별 차이는 없다. 결국 전 인격을 기울여, ‘존재의 전 기능을 다하

여'(Tasker), 전 생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사랑하라 – 원어 (* , 아가페세이스)는 미래 시상인데, 이것은

명령어의 대용어로서 법조문에 쓰이는 방식이다(Lenski). 이것은 단순한 애정이나 사

랑을 나타내는 ‘필레오'(* )과는 엄격하게 다르다. 자기 이해를 초월한 순수

하고 무목적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우리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다. 이 사

랑을 하려고 하면 우리에게 정말 하나님의 근원적인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요일 4:10).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과 율법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이 사랑의 온전한 모습은 예수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예수의 사랑을 풍족하게 누리고, 그 사랑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고, 이웃에 대하여도 고전 13장의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다(요 13:43).

=====22:38

크고 첫째 되는 – 원문상 (* , 헤 메갈레 카이

프로테)’가장 큰’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카이’는 설명적 용법으로서 가장 크기 때문

에 첫째라는 말이다. 막 12:31에는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다’는 말로 표현된다.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 분명히 이웃사랑은 두번째이다. 하나님은 항상 처음이다. 그

러나 그것이 둘째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포괄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

인이요,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다'(* , 호모이아 아우테)는

문자적으로 ‘그녀와 동일하다’인데, 이 3인칭 여성 대명사는 ‘크고 첫째 되는 계명'(*

, 헤 엔톨레; 여성 명사 단수)을 가리킨다. 즉 둘째도 첫째 계명과 같이 큰 계명이라

는 뜻이다. 이처럼 예수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같은 것으로 보신다. 하나님 사랑

과 이웃 사랑을 같은 하나의 계명으로 보신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견해와 다른 것이

다. 그들은 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면 어떤 경우에는 이웃에 대한

의무, 부모를 돌보는 것까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15:1-9). 더욱이 그

들은 원수는 미워했으며, 조건적인 사랑을 추구했고, 죄인들을 미워했다(5:43-47). 그

러나 예수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은 사람의 유전을 배제하고 두 개명을 사랑이라는 말

로 연결하여 하나로 만드신 것이다. 요한은 그것을 요일 4:20, 21에서 설명하고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 이것은 레 19:18의 인용으로서, 본서에서는 이미

5:43;19:19에서 언급되었다. 이것은 십계명의 후반부, 사람에 대한 계명의 포괄적 요

약이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결실된다. 이 두 계명의 결합은 ’12족장

의 언약’에도 나타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 문헌이 기독교 이전에 쓰여졌다는 것

을 부인한다. 그렇다해도 누가복음의 평행구가 보여주듯이 이 두계명을 함께 묶어서

말하는 것이 예수에게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서기관들의 형식적인 일치

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행위는 잘못되고,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고 그리고 그들이 알지 못하여 주를 죽였어도,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서 율법을 지

키는 데는 열심인 것은 사실이었다. 한편 이 이웃의 개념이 레 19:18에는 이스라엘 사

람과 그 땅에서 함께 사는 외국인을 포함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원수(5:44)를 비롯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눅 10:29-37)에게까지 확대된다. 사실 누가복음의 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이 이웃을 사랑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이웃 개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이웃 사

랑 개념은 온 세상의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요

11:52). 그러므로 이웃 사랑의 계명은 언약공동체의 존재 방식으로서 온전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과 능력의 반영인 것이다(5:48).

네 몸과 같이 – 원문은 ‘호스 세아우톤'(* )으로서 문자적으로

는 ‘네 자신처럼’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시인되면서 이

웃 사랑의 표준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적인 억지 해석이

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돌본다.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한 돌봄은 무조건적이어서 그에 대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또한 사람은 자신

의 잘못을 쉽게 용납하고 잊어버리고,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관대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미 지나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 이 사랑이 너무 과

해서 우리는 이기적이고 타락하고 부패한다. 그러나 우리 이웃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

나 무관심하고 냉정하고 계산적인가? 예수는 먼저 내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도 그 만큼

사랑하라는 순서나 정도가 아니라 이웃과의 형제적인 연합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웃에 대하여 그가 마치 ‘내 자신’인 것처럼 사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새계명

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요 13:34).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이 말씀은 그 뜻을 바로 알기가 무

척 힘들다. 문자적으로는 이 두 계명에 그 모든 율법과 그 선지자들이 매달려 있다는

‘강령'(* , 크레마타이)라는 말이다. 먼저 이 ‘두 계명’은 서로 분리

되거나 대등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처럼, 뿌리와 열매처럼 연결되어 있다

(사 1:17;58:6, 7). 그리고 그 모든 율법과 그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전체를 강조하여

말한 것이다. 또 구약성경의 요체는 율법이라 할 수 있다. 율법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법조문으로는 나오지 않지만 그 계명들의 근본 정신이 바로 여호와하

나님 사랑이다. 모든 법은 항상 그 법을 만드는 근본 정신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근본

정신이 무시되면 법조문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전구약의 계시와 역사의 목표와 의의는

하나님나라에 있다. 법은 그 나라의 성격과 형태를 결정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위한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요구하신다(신 10:12). 마음으로부터의 하나님 사랑은 다른 모든 종교적 의식들의 기

둥이다(삼상 15:22;호 6:6;암 5:21-24;미 6:6-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적 질서

로서 연합과 사랑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사랑의 질서위에 세워진다. 그리

고 이 사랑은 십계명의 전문에 나타난 바 이미 충분히 베풀어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과 공동체 사이에, 또 공동체 내부에서

나라가 설 수 없으니 성경과 민족과 역사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온 율법과 선지

자의 강령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물론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계명이어서 다

른계명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최고의 법인 사랑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다른 구체

적인 법조문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자동적으로 다른 계명들이 준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랑의 계명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사실상 모든 율법 준수

가 헛된 것이다. 율법에 열심인 바리새인들의 율법준수가 오히려 비판을 받는 것은 단

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희생과 관용이 없고 보이기 위한 행위만 무성하며 스스로 의롭게 여긴 것이다. 예수의

이 사랑의 계명은 모든 율법 준수의 동기와 그 자세를 규정하고 있으며, 적극적인 현

신과 자기희생과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산상보훈(5:17-20)의 의미하는 바이

다. 예수께서 7:12에서 똑같은 표현으로 ‘황금율’을 말씀하셨다. 바울은 롬 13:8-10에

서 이 문제를 다시 언급하면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라고 결론짖고 있다. 한편 랑

게(Lange)는 예수의 신성 주장이 신 6:4의 유일신 사상과 충돌하도록 해서 책잡고자

하려는 바리새인들의 음모가 이 질문에 있다고 하나, 오히려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예

수의 입을 통해 사두개파보다 자기들의 입장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물었을 것이다. 그

들은 이미 예수의 율법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사두개파에 비해서

옳은 점을 칭찬하시면서도 그들의 치명적인 헛점을 다음의 질문(22:41)을 통해서 가르

치시는 것이다.

=====22: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물으시되 – ‘모였을 때'(* , 쉰

에그메논)라는 완료분사는 ‘그들이 여전히 예수 주위에 모여 있을 때’라고 번역할 수

있다(Knox). 공관복음의 평행구들(막 12:35-37;눅 20:41-44)은 본문을 예수의 바리새

인들에 대한 질문과 그들의 답변으로 구성하지 않고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이끌어 내거

나, 혹은 서기관들에게 일방적으로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서기관들의 대부분이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단지

바리새인들에게만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과 문답을 통해 모여든 유월절 축제의

순례자와 모든 백성들을 가르치시려는 의도로 시작되었음을 평행구들의 전체적인 상

황에서 우리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서로 다른 형태로 기록된 것은

그들의 기록 목적에 따른 편집자의 권한이다.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 이 질문은 유대 지도층과의 공식적

인 논쟁의 출발이 된 그들의 질문-‘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

세를 주었느뇨'(21:23)-에 대한 예수의 역습(counterblow)이다. 예수는 당신 자신이 ‘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시는 대신 ‘그리스도’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무지와 편견을 드러

내서 그들의 판단의 한계를 깨우치시는 것이다.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 이 견해는 가장 보편적으로 수납되었던 것이고 선

지자와 시편에 근거하는 것이었다(삼하 7:13,14;사 11:1, 10;렘 23:5). 장차 오실 메

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예수 자신도 예루살렘 입성시에 기쁘게 받아들인 적

이 있다(21:15,16). 마태는 거듭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호칭(9:27;15:22;20:30;21:9,15)과 족보(1:1-16) 뿐 아니라 유대인의 왕

(2:2;21:5;27:11,29,37,42)이라는 표현으로써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것을 부인하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메시야 개념이 세속화되어서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에서

의 ‘유대인의 왕’이라는 개념으로만 한정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철저하고도 근본

적인 변혁이 있어야 했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16:20).

=====22:43

다윗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 예수는 시 110편(LXX역에는 109편)을 인

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주가 되는 사실을 밝히신다. 먼저 예수와 바리새인들 그

리고 대부분의 유대인들 사이에 시 110편이 메시야 예언이라는 점과 그것이 다윗에 의

해 기록되었으며, 또한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 엔 프뉴

마티) 시편을 지었다는 사실에는 이론(異論)이 없이 일치하는 것을 본다. 여기서 예수

는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그 조상인 다윗 자신에 의해서 이미 성령이 깨닫게 하심

으로,’주'(* )로 불리워졌음을 지적하심으로 메시야의 초월성을 조상인 다

윗의 입의 증거로 입증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유대의 지도층으로부터 책잡

힌 유일한 항목은 당신의 신성의 주장이었기 때문이다(요 5:17,

18;8:56-59;10:24-38). 즉 예수의 신성 주장은 메시야의 초월성 예언을 응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메시야 신성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도 예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 모든 가르침과 기적이 가능했다고 인정한다(요 3:2).

그러나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요 10:33). 유일

신 야웨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방 문화와 정치 질서 속에서 사는 그들에게 있어서 우상

숭배와 신격화는 그들이 가장 민감하게 느끼고 반응하는 문제였고 결코 허용될 수 없

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의 초월성 주장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해했으

며 그 이유로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들은 인간적인 용사, 다윗의 전투적인 용맹을 물

려받은 한 자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되 하나님의 아들 혹은

하나님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메시야가 굉장한 능력과 권

세로 일하여 그의 존재와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기대까지는(요 12:34) 있었지만, 영원

한 선재(요 8:58),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부르고, 아버지와 ‘하나’라는 주장(요

8:54;10:30)까지 소화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점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다윗의 수많은 자손들 가운데서 누가 그리스도이냐?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만으로 어

찌 그리스도가 되겠느냐? 다윗의 자손이면서 그의 주이신 자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

리스도는 바로 다윗의 주이시다. 그리고 너희들이 나를 참람죄로 죽이려 하지만, 너희

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도 다윗의 주이니 그도 참람하다하여 죽이겠구나”라는 말씀이다.

=====22:44

주께서 내 주께 – 윈문은 ‘야웨(* )께서 내 주(* ,아도나이)께’로

되어 있다. 70인역(LXX)이 모두 ‘야웨'(* )를 ‘주'(* , 퀴리오

스)로 번역한고로 우리말로는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신구약에는 종이

주인에게, 백성이나 신하가 높은 지위에 있는 자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주'(*

, 아돈)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왕이 된 다윗이 ‘나의 주’라고 불러야 할 분은 하

나님밖에 없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왕이었고 그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린 사

람은 없다. 그러므로 다윗은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이미 자기의 후손인 메시야가 한

낱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오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

던 것이다. 이렇게 삼위일체의 신관(神觀)이 이미 메시야 예언에서 형성된다. 이것은

결코 철학적 사고의 반영이 아님을 볼 수 있다.

이르시되 – 원문(* , 느옴)은 귀에 대고 속삭이는 비밀한 통첩(通牒)을 의미

하여 하나님께만 쓰인다(Lenski).

내가 네 원수를 앉았으라 – 그리스도의 ‘원수'(* , 에크드로이)는

마귀와 그 세력들이다. 처음부터 거짓말하고 살인한 마귀와 그의 부하들이며, 그의 뜻

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당신을 믿지 않고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에게 마귀의 자

식들이라고 하셨으며(요 8:44), 가룟유다를 마귀라고 하셨다(요 6:70). 마귀는 하나님

의 거룩하고 의로운 통치를 비방하며, 백성들로 그 통치를 받지 않도륵 하여 하나님을

대항하고 그 일을 훼방한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는 원수가 승리하는 것 같았지

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부활시키심으로 죄와 죽음의 악의 세력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

를 거두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승천하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하

나니 우편에 앉으셨다. 고대의 왕들은 정복당한 왕들의 목을 발로 밟음으로, 그들의

승리의 기개를 드높였다(수 10:24). ‘발 아래 둔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즉

완전한 폐배와 굴복인 것이다. 이는 모든 악의 세력을 근절(eradication)하기 위한 마

지막 심판의 때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다는 말은 장소적인 개념보다는 하

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위엄에 동참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

기서는 이 모든 일들이 야웨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로 소개된다. 과연 그리스도

는 어린양처럼 원수들의 죽음의 함정으로 무기력하게 끌려가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권세로 원수를 결박하고 심판하시는 것이다.

=====22:45

다윗이 자손이 되겠느냐 –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그의 살던 촌 베

들레헴에서 나오리라는 성경의 예언(사 9:6,7;미 5:2)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갈릴리

출신의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다(요 8:41,42). 반면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초월성에 관한 예언(단 7:13;말 3:1)을 들어 갈릴리 출신 인

간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다(요 7:27).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신 증

거를 권세있는 가르침과 표적과 기사로 이미 충분하게 나타내셨다(요 7:31;10:24-38).

그러나 그들은 항상 자기들의 전통과 왜곡된 성경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심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자기들과 상관없이 오시고, 또 자기들을 인정하지

않으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도층은 늘 예수를 시험한다

(12:38;막 8:11;눅 11:16). 그러나 예수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이라는 그들의 요

청에는 한 번도 응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를 다윅이 주로 알았다면 누구도 주이신 그

리스도를 심사할 수 없는 것이다. 실로 주께서는 사람의 증거를 받으실 수가 없다. 그

래서 예수는 스스로 증거하시고 아버지의 증거로서 행하셨다(요 8:18). 그리고 오히려

주께서 그 백성들을 심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첫 선포가 ‘회개하라’였다는 사실이

바로 이를 반영한다. 또한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에 앞서 와서 회개를 선포하고 바리새

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

매를 맺으라고 경고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3:7-12). 그러나 유대의 지도층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도 회개하지 않았고,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아

무런 입장을 표명(表明)하지 못하였다. 그들늠 세례 요한이 자기들의 전통적 질서와

배치되었으나 백성들로부터는 선지자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잡지 못했을 따름이

다. 예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예수를 ‘주’로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장

로들과 대제사장들이요, 서기관들이었다. 그들, 권위자들이 ‘주’라고 부를 수 있는 분

은 하나님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의 지도층은 예수를 칭할 때 보통 2인칭 호

격으로서의 ‘당신’이라고 했으며, 호의를 가지고 경의를 표할 때 조차 반드시 `선생님

‘(* , 랍비)이라는 칭호만 사용했다(19:16;요 3:2). 이 공식적인 논쟁의 시

작에서 그들은 예수께 ‘네가’라고 했다(21:23).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최고 회의에서

요한처럼 어떤 인정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과 일반백성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을 보고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고백

하고 ‘주’라고도 칭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그 지식이 아버지로부터(16:17) 왔고, 지혜

롭고 슬기로운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와 같은 자에게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셨다

(11:25). 이처럼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받아들인 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며,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또한 예수는 당신의 남은 십

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그 사실을 증명하셨고,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계 22:16)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신비를 온전히 계시하셨다.

=====22:46

한 말도 능히 묻는 자도 없더라 –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동시

에 다윗의 주로서 하나님이시라는 영감된 말씀을 감히 부인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기

들이 문제로 삼을 수도 없었던 사실이었다. 결국 그들은 누가 그리스도인지 심사할 자

격이 없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끝까지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

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지식의 열쇠를 가진 책임자

들로서 자신들과 이스라엘 전체를 기만(期瞞)하는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눅 11:52).마

태는 이 해설로 논쟁 기사 전체(21:23-22:45)를 종결짓는다. 마가와 누가는 이미 세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으로 그들이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음을 밝힌다(막

12:34;눅 20:40). 예수는 그들의 질문에 다 대답하셨으나 그들은 예수의 질문에 한 번

도 바르게 대답한 적이 없었다. 여기에서 유대 지도층과의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대화

는 끝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이 아는

잘못된 지식으로 자기들의 주를 죽이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불법으

로 예수를 체포하고 거짓으로 고소하는 일밖에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날은 수난주간

의 화요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부분의 백성들이 즐겁게 들은(막 12:37) 예수의 이

말씀이 나중에,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후에 다윗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베드로에 의해서 오순절 설교(행 2:34-36)에서 다시 언급되면서 유대 백성들의

마음을 찌른다. 그리고 그 답변은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으리라고 생각되는 한 바리새

인에 의해서-그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이루어진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

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

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시라”(롬 1: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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