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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할례 (로마서 2:17-29)
아침예배
베이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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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할례(로마서 2:17~29절, 2018년 9월 4일 성경묵상)

마음의 할례(로마서 2:17~29절) 로마서의 숨겨진 이야기 우리는 로마서가 사도 바울이 3차전도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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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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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 마음의 할례 – 김해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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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할례를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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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는 마음에 할지니-5월6일 – 호산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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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강 로마서 2:25-29 유대인과 할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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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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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할례 (로마서 2:17-29)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1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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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베이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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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6.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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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할례(로마서 2:17~29절, 2018년 9월 4일 성경묵상)

마음의 할례(로마서 2:17~29절)

로마서의 숨겨진 이야기

우리는 로마서가 사도 바울이 3차전도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AD. 55-56년에 고린도에서(롬 16:1~2,23, 고전1;14, 행20:2-3)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사실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로마교회는 선교 전초기지로 삼아 서반아 지역으로 선교를 계속하려는 의도로 로마서를 기록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살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로마교회의 상황에 대해서 살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홍인규 교수의 로마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발췌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는 역사적 진공 상태에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는 사보 바울의 막연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냥 디아트리베를 사용해서 혼자 상상하고 쓴 신학 논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로마서는 특정한 상황에 부닥친 특정한 사람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을 통해서 오고 오는 세대의 교회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가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합니다. 로마서는 어거스틴, 루터, 칼빈, 웨슬리, 바르트 등과 같은 기독교 거성들의 사상과 가르침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요. 로마서는 로마서 1:7에 나타난 바와 같이(참조.1:15),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쓴 편지입니다. 로마서 16장을 보면, 이 로마 성도들은 5개 가정 교회들(house churches)로 나뉘어 모임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16:5, 10, 11, 14, 15)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는 로마교회의 기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로마서 1:13; 15:22에서 그는 여러 번 로마에 가기를 원했으나 길이 막혀 갈수 없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설립한 사람이 아닙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설립했다고 주장하지만, 이 설은 거의 타당성이 없습니다(참조.롬 15:20; 고후 10:16).

그런데요,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가 쓴,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의 전기(biography)에 의하면,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서가 작성되기 6~7년 전인 A.D.49년에 모든 유대인들에게 로마에서 떠나라는 추방령을 내렸다고 말합니다. 크레스투스(chrestus)라는 사람 때문에 빈번하게 발생하는 소요가 그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소요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가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그런 주장을 반대하는 유대인들 간의 논쟁과 갈등이 소요로 비화되었으리 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학자들은 크레스투스(Chrestus)가 그리스도(Christos)를 의미한다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사이의 충돌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에 지중해 연안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거하던 경건한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로마에서 온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행 2:10절에는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로마로 돌아 간 후에, 예전처럼 유대인의 회당 모임에 규칙적으로 참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회당 모임에 참석하면서 예루살렘에서 경험한 놀라운 경험을 열심히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뜨거운 가슴으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했을 것입니다. 또한, 당시에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는데, 예루살렘이나 안디옥에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로 이주해 선교에 동참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전파에 가장 먼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pselytes)과 할례는 안 받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던 이방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도시에서처럼 로마에 사는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절했고, 결국에는 큰 소요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요?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소요로 말미암은 사회적인 불안을 정치적인 위협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A.D.49년에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추방된 사람들 가운데 고린도에 가서 바울을 만난 브리스가와 아굴라도 있었습니다(행 18:2).

그런데 이 추방 명령으로 말미암아 로마교회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로마교회의 구성원들 가운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다수였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소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만이 로마에 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의 회당과는 상관없이 개인 집에서 독자적으로 모임을 구성해야만 했던 것입니다(롬 16). 이것이 로마에 가정교회가 생기게 된 배경이었습니다.

그런데 A.D 54년 클라우디우스가 죽고 네로가 등극하자, 추방당했던 많은 유대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점차 로마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16:3을 보면,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이름이 나타나는데, 그들도 분명히 이때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55-56년에 로마서를 로마교회에 보냈을 때, 그 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롬 1:5-6, 13; 11:13, 23-24, 28, 31, 15:7-8).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로마교회에 합류했지만, 이제는 그들이 소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전세가 역전된 것입니다. 결국, 헬라인들과 돌아온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은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4-15장에서 취급하고 있는 강한 자와 연약한 자의 갈등이 로마교회의 실제 상황과는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갈등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어 보입니다.

바울이 로마교회를 세우지도 않았고 방문한 적도 없지만, 그 교회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서 16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거기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틀림없이 그들을 통하여 그곳 형편을 소상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4-15장의 문제는 로마교회의 실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은 음식과 절기에 대하여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4:2-3, 6, 14-15, 17, 20-21, 23절을 보면, 먹고 마시는 것이 특별히 로마교회 안에서 쟁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안디옥 사건(갈2:11이하)과 고린도 교회(고전 8:1-3)에 나타난 것처럼, 초대 가정교회는 식탁 교제를 자주 했기 때문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식탁 교제는 항상 문젯거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정결법(purify law)에 따라 정결한 음식만 먹었던 것입니다.

특히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자기들의 정결 의식에 따라 도살되지 아니한 짐승의 고기일 수도 있고 또한 우상에게 제물 로 드려졌던 고기일 수도 있기에 금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 교회의 다수를 차지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그런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과의 식탁 교제에서는 채소만 먹고(14:2) 예배도 따로 드리는 것이 좋다 고 생각했을 것입니다(참조. 15:6-7).

그러나 독자적인 길을 가고자 하는 마음은 유대인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많았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난 몇 년 동안 독자적으로 모였기 때문에, 생활 습관이 너무 달라서 골치만 아프게 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자기들의 모임에 반드시 포함 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은 로마교회 안에 있는 분열과 불화의 치유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은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로마서 14-15장에 있는 “서로 받으라”는 권면은 앞에 나오는 이신칭의의 교리. 곧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들로 상징되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복음을 설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사도 바울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들도 한 몫하고 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값싼 은혜를 전하는 율법 폐기론자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쓸 때 자신의 선교 사역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었습니다. 15:19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그동안 지중해 동쪽 지역, 즉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갈라디아, 아시아, 마케도니아, 아가야)복음을 편만하게 전했습니다. 이제는 그 지역에서 더이상 일할 곳이 없었기에 바울은 이방교회들로부터 모은 헌금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달한 후, 로마를 거쳐 서반아(스페인)로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바울이 해온 사역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별히 이방인이 율법의 행위가 없어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선포한 그의 복음은 선교지의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보수적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바울의 선교지까지 와서 일종의 역선교를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다. 로마교회 역시 그런 적대자들의 선동과 위험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3:8과 16:17이 그것을 증거해 줍니다.

롬 3:8절입니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롬 16:17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그럽니다. 로마교회에도 이렇게 사도 바울을 못 마땅해하는 거짓 교사들이 들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롬 3:31; 6:1, 15; 7:7의 수사학적 질문들 뒤에 적대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이 있음을 살펴야 합니다. 3:31절입니다. 사도 바울이 묻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6:1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6:15절입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계속해서 7:7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편지를 보내어 로마 성도들에게 자기 복음을 충분히 설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도착하기 전에 사도 바울을 율법 폐기론자로 모는 유대 거짓 교사들이 로마교회에서 확실한 입지를 선점한다면, 지중해 서쪽 지역에서 선교하려던 그의 계획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스페인 선교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로마교회의 전략적인 지원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할을 감당하려면 우전 로마교회가 올바른 복음 위에 굳게 서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한다”(롬 1:11)고 말하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교회가 복음에 견고하게 서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서반아 선교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1:11절에서의 ‘신령한 은사’는 바울의 복음이다(참조.1:15). 그러나 바울의 로마 방문계획은 그 성사 여부가 불확실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구제헌금을 전달한 후 로마로 갈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로마에 갈 수 없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로마서 15:31에는바울의 그런 염려가 잘나타나 있습니다.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그럽니다. 만일 바울이 로마에 가지 못하게 된다면, 로마서는 바울의 마지막 유언서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 염려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18~32절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이야기와 2:1절 이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이야기는 결국 로마교회의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휴! 꽤 긴 글이지만 재미있게 읽으셨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배경으로 오늘 본문을 묵상해야 합니다. 사실 초대 교회 곳곳에 율법주의자들과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고 로마교회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로마서 2:17-29절)

사도 바울이 디아트리베를 사용해서 유대인들이 1:18~32절까지의 이야기를 읽고 어떻게 반발할 것을 염두에 둔 것이 2:1절부터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판단에 대한 말씀에 가장 강하게 반발하는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너무 잘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이 쏟아부은 노력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그들이 이방인들과 함께 취급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사도 바울은 다시 질문과 답변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락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만약 네가 유대인이라고 주장한다면 “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는가?”라는 도전적인 질문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에 합당한 유대인이 되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특권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단락은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스스로 믿으니”에 걸립니다. 그러니까 17~20절의 괄호에 들어가 있는 내용들은 유대인들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굳게 믿고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는 율법의 소유했기 때문에 하나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유대인들의 하나님이라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기 유대인이라 불린다는 말은 그들의 자부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결론을 내리기를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한 바 있습니다. 율법을 소유한 것과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다니고 있기때문에 성경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두 번째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은 우리는 율법으로 교육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이 믿음은 그들 스스로 믿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줄 알기 때문에 스스로 선생이 되었습니다. 가르치기를 좋아합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의 자부심이 어떤 부작용을 낳습니까?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라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습니까? 유대인들이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사람들로서 어리석은 사람들의 교사라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선생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말들이 유대인들이 가진 자부심입니다. 스스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출석하다보면 저절로 귀에 딱지가 앉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뭐는 어떻게 해야 하고 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교사요 선생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악 이론을 기막히게 잘 안다고 해서 노래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유창하다고 해서 그가 곧 좋은 그리스도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이유를 들어서 유명한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에 다니는 것이 곧 내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큰 교회를 출석하면 괜히 어깨에 힘을 주면서 나 어느 교회 출석한다고 말하는 것도 유대인들과 동일한 근거 없는 자부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의 이런 근거없는 자부심에 대해서 신랄하게 성경의 잣대를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율법을 가진 것도 맞고 지식이 있고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인 것도 맞지만 과연 그 율법이 삶이 되어 열매를 맺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어지는 질문들을 들어 보십시오. 어쩌면 이 질문은 바로 제게 하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신앙생활을 그래도 오래 했고 나는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입니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교사, 전도사, 목사들에게 던지는 질문인 것입니다.

첫째 너희는 남을 가르치면서도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말씀을 전할 때 가장 먼저 적용되어야 할 대상이 바로 설교자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런 도전을 받습니다. 과연 내가 이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혹은 이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들은 그들이 가르친 내용과 다르게 사는 그들의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도둑질을 하고,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간음을 하고,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고 묻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가르치고 지키는 율법은 마음이 없는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삶을 움직이는 율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율법과 다른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인해 그들이 자랑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지만, 우리가 이들처럼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가운데 모욕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 율법을 가졌다는 특권의식은 충만하지만,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그들의 이중적인 삶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유대인인데 하는 자부심만 강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저는 우리 신앙생활이 이와 같을까 두렵습니다. 제가 목사처럼 살지도 않으면서 목사입네 자부심만 강할까 두렵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없이 살아가면서 그래도 내가 목사라는 생각에 대접만 받으려는 사람일까 두렵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어른이기 때문에, 오래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나는 교사이고 선생이며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늘 남을 판단하고 살아가는 사람일까 두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마음의 할례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할례입니다. 할례는 ‘언약의 표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백성, 곧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서약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출19:8). 이 할례를 은밀한 곳에 한 것은 이것 가지고 자랑하지 말라는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를 행한 것 자체가 공로가 되거나 믿음의 표지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가 진정한 할례가 되려면 율법을 잘 지키면서 할례를 받았을 때입니다. 그러나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서 할례만 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진정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까? 그것은 참된 유대인은 ‘표면적 유대인’ 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인 것처럼 할례도 마음의 할례를 행한 사람이 진정한 할례를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표면적이라는 말은 ‘빛나는, 분명한, 공개적으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형적으로 유대인으로서 빛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율법을 잘 지키고 할례를 받고 가르치고 금식하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것으로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면적이라는 말은 감추어진, 혹은 사적인, 혹은 비밀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음속에서 진정한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이 진정한 유대인이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표면적인 육신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가 아니라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마디를 더 첨부 하고 있습니다. 영으로 마음에 하는 할례라는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프뉴마는 성령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령으로 마음에 한 할례가 진정한 할례라는 것입니다. 율법 조문을 지키는 것으로 할 바를 다 했다고 말하는 것은 노예의 마음입니다. 더 나아가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야 한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표면적 할례, 표면적 유대인들의 관심은 모두 사람들의 인정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칭찬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야 하는데 그것은 마음의 할례, 즉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을 예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단락은 자신이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현대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고있는 수많은 신앙적인 행동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선행과 예배와 헌금이 마음의 할례로부터 시작된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신앙생활이냐는 것입니다.

은근히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면서 나는 다 알고 있다는 대토를 취하고 있지는 않은 것입니까? 그래서 배우는 일에 인색하고 판단하는 일에 열심 내는 연약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이 단락은 로마서의 주제에 닿아 있습니다. 뭡니까? 복음의 능력은 마음의 할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에게서만 나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신앙생활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가 자리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인 저는 가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에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판단자가 되어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신앙적인 행위들로 경건의 표지를 삼으려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할례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면적인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의를 밖으로 드러난 경건의 모양에서 찾지 말고 매일매일 말씀 가운데서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이면적인 삶에서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외형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셔서 세상에서 빛을 발하는 귀한 성도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마음의 할례” (The circumcision of the heart)

“마음의 할례” (The circumcision of the heart)

“마음의 할례”

(The circumcision of the heart)

10-8-17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2:28,29

28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참 유대인이 아니며 육체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참 할례가 아닙니다 (A man is not a Jew if he is one inwardly, nor is circumcision merely out ward and physical)

29 오히려 마음에 참된 변화를 받은 사람이라야 참 유대인이며 기록된 율법이 아닌 성령님에 의한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 입니다. 이런 사람은 칭찬을 사람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습니다 (No, a man a Jew if he is one inwardly; and circumcision is circumcision of the heart, by the Spirit, not by the written code. Such a man’s praise is not from men, but from God) (현대인의 성경)

<서 론>

저는 지난주에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 이라는 말씀의 제목으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눴습니다. 저는 우리 인간의 진정한 복과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히 즐거워 하는 것’ 이라는 점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인간의 자연적 상태는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즐거워도 않습니다. 우리속에 있는 죄 때문 입니다.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멀리 하고, 미워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을 너무도 좋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뻐할수 있는 존재로 우리가 바뀔수 있는 상태가 바로 ‘영적 부흥’ 입니다. 이 영적부흥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시작 된다’고 말씀 드렸고, ‘그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함으로서, 그리고 ‘죄에 대한 영적 자각과 회개’ 와 함께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 함’ 을 통해 우리 인간의 영적 부흥은 점점 더 왕성해 짐을 볼수 있습니다. 오늘 ‘마음의 할례’ 는 ‘우리 인간의 내면적인 상태가 어떠해야 하는지’ 를 핵심적으로 잘 설명해 주는 것 입니다. 우리는 육체에 할례를 받을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선언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다는 것 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 를 받음으로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뻐할수 있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의 삶을 사시길 소망 합니다.

<본 론>

이 ‘할례’ 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놓쳐서는 않될 단어중의 하나일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할례’ (circumcision) 는 자신의 신앙과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 입니다. 그렇다면, 이 ‘할례’ 는 무엇일까요? <할례란 태어난지 팔일된 사내 아이의 양피를 베는 유대인의 종교의식> 입니다. 이것이 언제부터 시작 되었을까요? 그것은 <창. 17장> 에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 땅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께서 그가 99세 되었을때에 다시 나타나셔서 ‘그가 모든 민족의 아비가 될것’ (v.4) 을 다시한번 약속하시고, 그의 이름을 ‘아브람’ (귀한 아비) 에서 ‘아브라함’ (열국의 아비) 로 바꿔 주셨습니다 (v.5). 그리고 난 뒤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집에 속해 있는 모든 남자, 심지어 종들까지도 모두 할례를 받게 할것을 명 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내아이는) 누구든지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v.12) 고 명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토록 심각하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할례를 받게하라’ 명하시고 난 다음, 그 할례가 주는 의미를 “ ~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 하였음이니라” (v.13,14) 고 그 이유를 밝히셨기 때문 입니다. 다시말해, 만약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 태어난 남자중에 할례를 받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것이 되어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된다는 무서운 결과를 얻게 된는 것 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이 할례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확실한 보증 (guarantee) 라고 그들은 생각 했던 것 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할례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다는데 있습니다. 단순히 ‘ 몸의 양피를 베어내는 종교의식 ’ 을 치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할례가 이뤄졌다는 것이 아니다는 것 입니다. 요즘은 종교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Non-Christian 부모들도 난지 팔일정도에 남자아이의 양피를 베어 내 주는 것 (=포경수술)이 건강에 좋다라는 의학적인 의견들로 해서 이렇게 하는 것을 여러분들도 흔하게 들어 보셨을 것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께서 명하신 할례의 의미일까요 ?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 (= 자녀 ) 이 되었다는 언약의 표시 입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의 백성이다’ 는 것을 몸에 지니는 표시 (mark) 인 것 입니다. 이 할례를 통하여 남자의 생식기 일부를 베어내는 의식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의 옛사람은 죽고, 이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영적 의미가 그 할례의식에 있는 것 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놓치지 말아야 할 할례의 의미는 ‘존 웨슬레’ 가 설교한 ‘마음의 할례’ 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웨슬리는 <마음의 할례란 몸에 가하는 외적 할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된 혼과 마음과 영의 올바른 상태’ 를 의미하는 것> 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한마디로 ‘거룩함’ 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온전하게 되는 것이며, 마음으로 부터 시작하여 점점 더 삶 전체가 더러움으로 부터 깨끗함을 받는 것을 뜻 합니다. 또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육체의 할례’ 를 받았다고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생각 입니다. 마치 할례가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증>처럼 말 입니다 (할례의식 ≠ 하나님의 백성).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할례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겠다는 서약’ (롬. 2:25) 이라는 사실 입니다. 이 서약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겠다는 그 백성의 결심이지, 이것이 <자격증> 혹은 <천국티켓> 같은 것이 아니다는 것 입니다.

이제 우리가 명심해야할 사실은 무엇일까요?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이 ‘침례 혹은 세례’ 를 영적으로 적용해 볼때 과거 유대인들의 할례와 동일하게 간주한다는 점을 생각해 볼때, 유대인들이 단순히 할례받았다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자동으로 받고, 또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면, 우리가 침례 (혹은 세례) 받는 것도 그 행위로 구원받거나 의로와지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것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결정 합니까? 그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일 것 입니다. 바로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 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 과연 무엇이 마음에 받는 할례일까요 ?’(What means the circumcision of heart?):

첫째, ‘ 마음의 참된 변화를 경험하는 것 ’ (It means that we changed from our hearts) 입니다: <로마서 12장> 을 시작하면서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를 행해 이렇게 과감하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고. 사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고 도전하는 이유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 요,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 가 무엇인지? 에 대한 (바로 앞절, <롬. 12:1>) 대답인 것 입니다. 바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 는 것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드릴 우리 각자의 산제사요, 영적 예배 인 것 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리고 성령께서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 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내 신분의 영광스러움을 점점 더 깨닫아 나감으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 받음을 통해’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our minds) 가능한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이 마음의 변화를 ‘내가 너를 위해서 알아서 변화시켜 주겠다’ 고 약속하시지 않습니다. 반대로, 언제나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Circumcise your hearts, therefore, and do not be stiff – necked any longer) (신. 10:16) 라고 우리 각자가 마음의 할례를 행하길 명하시는 것 입니다. 다시말해,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으로 나아가라는 것 입니다. 마음의 변화를 경험할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점점 더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여 살고자하는 영적 예배를 드릴수 있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질문은, 우리 인간의 마음의 변화는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인가? 하는 점 입니다.

둘째, ‘ 성령을 통해 마음에 받는 할례인것 ’ (It means that we are circumcised in our hearts by the Holy Spirit) 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장차 그의 택성들과 새롭게 언약을 세울것을 약속 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This is the covenant I will make with the house of Israel after that time”, declares the Lord. “I will put my law in their minds and write it on their hearts.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will be my people) (예레미야 31:33) 고 선언 하셨습니다. 저는 끊없이 깊고, 한없이 넓은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은혜와 비밀을 다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확신하고 그분의 자녀의 영광과 권세를 더욱 깨닫으면 깨닫을 수록 이해하게 되는 것은, 저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치만 하나님은 나의 전적인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철저하게 나의 자발적인 의지를 통해 순종과 행함으로 그분께 나아가기 원하시는 것 입니다. 이런 순종의 삶의 본으로 보여주신 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삶 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여러분과 저의 몫인 것 입니다. 비록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에, 아니 아담을 창조 하시기도 전에, 아니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그 선하신 뜻 가운데서 택하셨지만, 그렇다고 내 의지와 자발적인 순종 없이 자동으로 이 구원의 역사를 행하지 않으신다는데 놀라운 신비와 비밀이 있는 것 입니다. 마치 생명의 신비를 알수 없드시, 구원의 신비도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다 이해할수 없는 것 입니다. 모든 구원받은 자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취소될수 없는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이제 구원 받았으니 세상 가운데서 적당히 죄 좀 짓고 육체적 쾌락을 즐기다가 천국가자’ 라고 구원 받은 자는 결코 말할수 없다고 사도바울은 선언하는 것 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결코 그렇수 없다는 것 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는 (자)’ (빌. 2:12) 라는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의 참된 변화를 받을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 마음에 그분의 법을 기록하실때 가능하다’ 고 예레미야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수백년 전에,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복음의 비밀을 선포하기 훨씬전에 예레미야뿐 아니라, 여러 구약의 선지자들은 육체에 행하는 할례가 참된 할례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 마음에 행하는 할례’, 즉 성령님을 통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것’ 이 진정한 할례라고 이미 선포했던 것 입니다 (에스겔 44:7, 예레미야 4:4, 36:26,27).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육체적인 자랑과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선포하신 진정한 할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 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참된 변화는 성령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 입니다.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 “ ~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것(이며)” (욜. 2:28) 이라는 예언이 바로 성령을 통한 우리 마음의 참된 변화와 충만함인 것 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성령님의 은혜로 변화되어지고, 꿈꾸며 비젼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셋째, ‘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는 것 ’ (It means that we enjoy the freedom of Christ) 입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의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라고 할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성도들의 진정한 자유를 그 핵심 메세지로 삼은 것은 그 당시 유대주의적인 배경을 가지고 갈라디아교회에 가만히 들어와서 성도들을 거짓되게 가르친 교사들 때문 이었습니다. 특별히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할례’ 의 문제를 집중언급 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율법이 왜 주어졌으며,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나서 결론적으로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셨습니까? 그것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실때까지 죄를 밝히시려고 덧붙여 주신 것 입니다” (갈. 3:19) 라고 말 했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 입니다.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요, 율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할례’ 도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 입니다. 할례 그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지도, 우리를 의롭게도 못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나서, <갈. 5장> 을 시작 하면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통하여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v. 1) 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종의 멍에 입니까? 사도바울은 그것을 <2~12절> 까지를 통해 바로 ‘유대인들의 할례의식’ 을 집중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하게 된 우리가 또 다시 유대인들이 행하던 육체의 할례를 행한다면 그것은 ‘종의 멍에’ 를 다시 뒤집어 쓰는 것이라는 겁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갈. 5:11) 라고 육체적 할례가 복음을 대적하고, 십자가의 거치는 원수가 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육체적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통하여 참된 자유자로 살아감을 뜻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자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합니까?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갈. 5:13) 고 선언 합니다. 바로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는 것’ 입니다. 또한 빌립보 교회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 말로, 참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빌. 3:3) 라고 하면서 ‘성령으로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 참으로 할례 받은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저는 이런 참된 할례자가 곧 ‘자유자’ 임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고 있습니까? 성령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고,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님의 주신 자유 안에서 참된 마음의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 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마음의 할례를 받으셨습니까? 무엇이 마음의 할례 입니까? 그것은 마음의 진정한 변화 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기뻐하심을 추구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 입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은 그의 영, 성령을 통하여 그의 자녀들을 마음의 할례를 행하십니다. 이런 성령을 통한 진정한 할례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칭찬을 듣는자라고 사도 바울은 선언 합니다. 그는 더 이상 종의 굴레를 입지않고 자유자로서 살게 되기 때문 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것 입니다. 성령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참된 예배를 드리고,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 입니다. 이런 참된 마음의 할례를 받으시고, 그리스도의 자유로 참된 자유자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원 합니다. 아멘.

마음의 할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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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할례

[로마서강해 (9)] (로마서 2:25~29)

(서론) 할례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종교적 상징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상징에 부합하는 삶의 내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할례의 참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1. 할례는 하나님과 맺은 영원한 언약의 표입니다(창세기17:9~14).

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표입니다(9~10절).

나. 남자의 포피를 베는 의식입니다(난지 8일 만에, 11~12절).

다.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3~14절)

2. 할례의 가치는 순종(율법을 행함)에 있습니다(로마서2:25~27).

가. 할례자가 율법을 범하면 할례가 무익하게 됩니다(25절).

나. 할례 받지 않고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할례 받은 것처럼 여겨집니다(26절).

다. 할례 없이 순종하는 자가 할례를 행하고도 불순종하는 자보다 낫습니다(27절).

3. 진정한 할례는 마음의 할례입니다(로마서2:28~29).

가. 표면적인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적인 것입니다(28절).

1) 표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입니다

2)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참 할례가 아니고 마음에 할례를 받는 신령한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나. 마음의 할례는 성령으로 마음이 새로워짐을 의미합니다(29절).

이미 구약에서도 마음의 할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예레미아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 할례는 남자 포피(가죽)을 베는 것입니다.

㈁ 마음의 할례는 마음의 가죽을 베는 것입니다.

2) 에스겔 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

㈀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예수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 성령이 오실 때 새 마음이 됩니다.

㈂ 성령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3) 빌립보서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결론) 성도는 성령으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롬 2:17~29)

* 오늘의 말씀 :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로마서 2:17~29)

* 본문요약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증거로,

자기들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지극히 선한 뜻을 구분할 줄 알며,

진리의 지식과 규모를 가지고 어리석은 자를 인도하는 진리의 빛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가르치는 대로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가진 것을 자랑하기만 하고 그 율법을 실천하지는 않아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소유한 두 번째 증거로 할례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할례를 받았더라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무할례와 같이 여김 받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무할례자라 할지라도 율법을 지키면 그가 진정한 할례자가 됩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다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찬 양 : 195장(새 261) 이 세상의 모든 죄를

539장(새 488) 이 몸의 소망 무엔가

* 본문해설

1. 유대인의 잘못된 자긍심(17~24절)

17) 그런데도 스스로 유대인임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며 ,

18) 율법의 교훈(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

19)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 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 이요

20) 또 율법에 있는 모든 지식과 진리의 근본(교훈)을 가진 자라고 과시하면서

스스로 어리석은 자 의 교사와 어린아이 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어찌하여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않느냐?

도둑질하지 말라고 선포하는 네가 어찌하여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 네가 어찌하여 간음하며,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어찌하여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어찌하여 율법을 어겨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참고, 이사야 52:5).

– 율법을 의지하고(17절) :

율법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믿고 안심해 버리는 태도

– 하나님을 자랑하며(17절) :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자랑하는 것

–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18절) :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간할 줄 알며,

그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기까지 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 소경의 인도자(19절) :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인도할 책임을 가진 자

–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19절) :

어둠 속에 있는 세상 사람들을 빛이신 하나님께로 인도할 책임을 가진 자

– 어리석은 자, 어린아이(20절) :

여기에서 어리석은 자와 어린아이는 같은 의미로,

영적으로 어리석고 연약한 새신자들을 가리킵니다.

2. 참된 할례와 참된 유대인(25~29절)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네가 받은 할례 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어기면 할례를 받았을지라도

그 할례가 무할례(할례를 받지 않은 자)가 되었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할례를 받지 않은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 ( 儀文 ) 과 할례를 가지고(할례까지 받았으면서도)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심판)하지 아니하겠느냐?

28) 대저 표면적 유대인 이 다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다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 이 참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 할례(25절) :

구약에서 하나님의 계약 백성이라는 징표(sign)로

남성의 생식기의 표피를 잘라내는 의식을 말합니다.

– 의문(儀文)(27절) : 율법조항, 율법조항에 따른 의식과 절차

– 표면적 유대인(28절) : 유대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겉모양의 유대인

– 이면적 유대인(29절) :

이방인으로 태어나 혈통은 유대인이 아니나,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계약 백성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이런 자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유대인이라는 뜻으로

이면적(내면적) 유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 묵상 point

1. 유대인의 신앙의 허위의식 :

➠ 만일 주변에서 이런 사람을 발견했다면

➀ 오직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믿고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➁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랑합니다.

➂ 말씀에 소망을 두고, 말씀에서 삶의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➃ 말씀에서 삶의 만족을 얻고, 말씀을 배우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신 뜻을 좋아하기까지 합니다.

➅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➆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지식과 진리의 모든 교훈을 가진 자입니다.

➇ 그리고 그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고 말하는 사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➈ 무엇보다도 하나님 백성의 징표인 할례를 받은 자입니다.

만일 주변에서 이런 특징을 보이는 자를 발견한다면

당신은 그를 가리켜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아마도 나도 이런 사람처럼 훌륭한 믿음을 가진 자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라고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바울은 이들이야말로 지옥에 가야 할 가장 흉악범들이라고 날을 세워 공격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유대인의 신앙의 허위의식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

1) 남을 잘 가르치는 그들이 정작 자기는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21절)

완벽하게 보이는 유대인들의 신앙 습관에서 한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빠진 한 가지 때문에

그들이 이렇게 완벽하게 보이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가장 가까운 자로 공격받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랑하고 의지하는 말씀을 들으려고만 했지

자신의 삶에는 적용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가르치는 데에는 열심히 하였으나,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그 말씀대로 실천하여 살려는 데에는 게을렀다는 것이

그들의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2) 말씀을 깨달아 지식으로 채우고 있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있다

유대인들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면

그 말씀을 자신의 몸에 소유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그 말씀을 자기 머리에 담고 소유한 자들은

말씀을 아예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저 이방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말씀대로 살지 않고 죄 속에 산다고 할지라도

혹 복은 받지 못할지 모르나, 최소한 심판을 받게 되는 일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방인들을 향하여 욕을 할 때마다

“저 율법 없는 자들…”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한번 말씀을 깨달은 것이 머리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도둑질하거나 간음을 했을지라도 자기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듣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하기 위해 있습니다.

행하고 실천하기 위해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으면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3)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24절)

초대교회 역사가 요세푸스는

주후 19년에 로마에서 벌어진 한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한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어겨 고소를 당했는데,

벌을 받을까 두려워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로마로 떠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율법과 그 지혜를 해석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몇 사람과 친분관계를 맺었습니다.

그중에 풀비아(Fulvia)라는 귀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귀부인에게서 재산을 갈취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자기와 같이 사악한 세 사람을 공모자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들은 그녀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으로 자주색 옷감과 금을 보내도록 시키고는

중간에서 그것을 가로챘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풀비아는 그녀의 남편 사투르니누스(Saturninus)에게 말했고,

그는 친구였던 디베료 황제(가이사 티베리우스)에게 이 사실을 모두 말했습니다.

황제는 크게 진노하여 로마에서 모든 유대인을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이 네 사람의 사악한 행동 때문에 로마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이 추방당한 것입니다.』

(생명의 삶 플러스에서 옮김)

● 묵상 :

오늘날 말씀을 듣기만 하고 자신에게 적용하기를 싫어하는 자들로 인하여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일들이 예수님을 멸시하는 일이라고 경고합니다.

①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되지 마십시오.

그러나 오늘날에도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그때의 유대인들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감동이 되면 “은혜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은혜받았다는 말은 그 말씀대로 내가 변화되었을 때 할 수 있는 말인데,

듣고 마음에 감동만 있으면 은혜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신앙생활의 모든 것을 다 이룬 양 기뻐하며 돌아가서는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다가

다시 주일예배에 와서 말씀만 듣고는 또다시 자기만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②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려 힘쓰는 자가 되십시오.

말씀에 따라 내가 회개하게, 말씀에 따라 내가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지 않는다면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듣고 읽었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국 백성이 되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묵상할 때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 힘쓰는 자가 되십시오.

최근에 읽은 말씀에서 회개해야 할 부분과 내가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반드시 찾아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2. 구원의 외적인 증거를 찾는 사람들

1) 할례의 바른 의미 : 영적 긴장감을 가지라는 것

하나님의 계약 백성이라는 징표(sign)로

남성의 생식기의 표피를 잘라내는 의식을 말합니다.

본래 할례는 몸에 하나님의 백성 된 징표를 남겨서,

그 징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임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징표를 볼 때마다

느슨해진 태도를 바로잡고 영적인 긴장감을 항상 가지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몸의 가장 소중한 부분이면서

동시에 하루 중에 가장 많이 보는 곳에 그 징표를 남기게 한 것입니다.

2) 그러나 유대인은 할례를 구원의 징표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징표를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징표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징표로 이해하였습니다.

할례를 받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일단 몸에 남긴 할례의 흔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살인을 했든 간음을 했든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3) 할례는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있는 안전 막이 아닙니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유대인의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표징이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표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표징 하나만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섬기려는 열망도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방인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오직 할례 하나 받았다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지옥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4) 오늘날에도 할례와 같은 구원의 징표를 찾는 자들이 많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구원의 증거로서의 표징을 갖기를 원합니다.

가령 신령한 은사라든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고 믿어질 만큼 큰 부흥을 이루었다든가….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한 삶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떠한 표징이든 간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표징 때문에 망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 묵상 :

만일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왕이 아니라 평범한 백성이었더라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평신도였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름다운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오히려 저주가 되지 않으려면

다윗처럼 복을 받을수록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려는 열심을 보여야 합니다.

3.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

1) 세상의 풍요는 구원의 징표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명품으로 자신의 외모를 꾸미려 하는 것처럼,

신앙인들도 이렇게 구원의 표징이라고 여길만한 것들로

자신의 신앙의 외모를 꾸미려 합니다.

신령한 은사를 가진 자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고,

복을 많이 받은 자라는 평가를 받고 싶어 합니다.

누가 봐도 그럴만한 평가를 할 만한 표징들을 얻기 위해 신령한 은사를 구하고,

더 많은 복을 구합니다.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학교, 더 좋은 건강을 구합니다.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구해야 합니다.

주께서도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구하라 하셨는데,

이런 것만 구하고 찾으니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외적인 것을 가진 것을

유대인들처럼 구원의 표징으로 알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2) 마음의 할례를 받기에 힘쓰십시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에 할례를 받기에 힘써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으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회개하여

죄의 때를 청소하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때가 쌓이면 마음이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구하여 성령을 통해서

내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입니다.

4. 오직 하나님의 칭찬 받기를 기대하며 사는 사람들

1) 결국 이것은 누구에게 칭찬받기를 원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어떤 평가하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과장하여 자랑하게 되고,

자기가 없는 것은 애써 무관심 하려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바로 자기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통해서

자기들이 얼마나 훌륭한 혈통을 가진 자인지를 인정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애써 감추려 했습니다.

2) 그러므로 사람보다 하나님께 칭찬받기를 원하는 자가 되십시오.

하지만 하나님께 칭찬받기를 바라는 자들은 겉모양을 꾸미기에 힘쓰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마음의 자리, 내면의 자리에 하나님의 아름답고 선한 것을 채우기에 힘씁니다.

바울은 이런 자가 참된 할례를 받은 자요,

이런 자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유대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칭찬받기를 바라는 자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를 기뻐하십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의 복을 내려주십니다.

* 기도제목

1. 유대인들같이 잘못된 허위의식에 빠지지 않도록

바른 분별력을 갖게 하옵소서.

2.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듣고 실천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3. 거짓된 것으로 구원의 표징을 삼으려는

신앙의 허위의식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4. 성령을 충만하게 내려주셔서

마음의 할례를 받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마음의 할례를 받아라.

성령강림후 12주(2017년 8월 27일)

로마서 2장 24-29절

마음의 할례를 받아라.

가. 하나님의 이름은 높임 받아야 한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이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는 말씀과도 같습니다}(24절).

본문에서 바울은 율법과 할례 의식의 잘못된 이해를 경계하고 참된 신앙생활을 권면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너희 때문에’는 율법을 알고 가르친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말합니다(21-23절).

부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누를 끼쳐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은 우리 입장에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입장에서 헤아려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입술로 하나님을 욕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건 내 입장입니다. 하나님 입장은 우리가 율법을 범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6:9). 여기서 ‘거룩히 여김을 받다’(άγιαζω)가 수동태라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소서” 한다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장에서 영광 받도록 우리가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안믿는 것이나 다름없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할례가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율법을 범하는 자라면 할례 받은 것은 무할례나 다름없습니다}(25절).

바울은 1장에서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 심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2장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면서 그들이 전해 받은 율법과 할례 의식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논증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킬 때에만이 유대인이 가진 선민의식도 도움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얻은 구원에 있어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된 표시는 더 이상 할례 의식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구현된 율법 준수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주여 주여 말한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고 있는 자가 들어갈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마7:21). 바울 역시 “계명을 실천하지 않으면 도리어 화가 되고 실천이 따를 때에만 우리에게 생명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롬7:10).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실천하는 일에 관심해야 합니다. 말씀의 실천 없이 교회 다니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

{겉모습이 유대인이라고 해서 유대인이 아니고 겉으로 보이는 신체적 할례가 할례가 아닙니다. 도리어 내면의 유대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고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이는 법조문이 아니라 영으로 받는 것입니다}(28-29절).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면적 유대인’과 ‘마음의 할례’는 신앙의 메타포로써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 준비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신명기에도 “하나님께서 마음의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실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신30:6). 곧 마음의 할례를 통해 말씀에 순종케하는 마음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율법이 주어졌다고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이 없어서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런 백성들에게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고 외쳤습니다(렘4:4).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지만 마음은 떠났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는 참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음을 교훈하셨습니다(마15장). 바울 역시 “너희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강권하였습니다(롬12:2). 우리의 내면 세계인 마음이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으로 준비되어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할 수 있습니다.

라. 하나님은 거룩한 삶을 칭찬하신다.

{그런 사람은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29절).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한다고 거룩해지시고, “높임 받으소서”라고 노래한다고 높아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래 거룩하시고, 원래 높은 보좌에 계십니다. 시인은 고백하길 “너희는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할지어다. 왜냐하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시99:9). 하나님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에 마땅히 영광 돌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로도 하나님을 높여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올바로 향해있지 않으면 이러한 신앙생활의 수단은 사람에게 보이는 외식이 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으로 부르셨습니다(살전4:7).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을 기대하십니다. 이 거룩은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되게 순종할 때 비로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마음의 불순물들을 제거해 나가며 날마다 칭의의 믿음에서 성화의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삶을 칭찬하십니다.

[성경토픽] 마음의 할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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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토픽] 마음의 할례란 무엇인가?

할례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언약의 증표이다. 남성의 성ㄱ ㅣ의 표피를 자름으로 옛사람의 죽음과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할례는 그 어떤 계명보다 우선시되는 중요한 행위였다. 구약에서는 할례받음과 받지못함에 대해 무척 민감하게 반응한다.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할례받지 못한 백성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할례받음은 이스라엘 백성됨의 증표였던 것이다. 할례는 육신에만 있지 않고 마음에도 존재한다.

신명기 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예레미야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마음의 할례는 신약적으로 말하면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모습을 말하며, 구약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답지 않으며 탐욕에 이끌려 살아가는 완악함을 말한다.

예레미야 9:26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에스겔 선지자는 마음와 몸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은 성소에 들어갈 수 없다고 대언한다. 마음의 할례는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속주로 받지 않는 완악함과 죄악된 행실을 말한다.

에스겔 44:9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사도행전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로마서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진정한 할례는 육체가 아니라 마음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한 새 마음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마음의 할례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받았고, 받아야할 진정한 할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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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29 오히려 마음에 참된 변화를 받은 사람이라야 참 유대인이며 기록된 율법이 아닌 성령님에 의한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칭찬을 사람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습니다.

로마서 2:29 KLB

오히려 마음에 참된 변화를 받은 사람이라야 참 유대인이며 기록된 율법이 아닌 성령님에 의한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칭찬을 사람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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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는 마음에 할지니-5월6일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 본문 : 로마서 2:17-29 )

【본문 배경】

본문은 그 당시에 교회 안에 있는 가장 첨예한 문제인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당시 교회 가운데 아주 예민한 문제는 이 복음이 먼저 유대인이 되고 그리고 나서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에 대한 갈등이었습니다. 이것이 갈등이 되는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셨다고 여기는 그 생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보니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도 당연히 유대인의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이방인들까지 구원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의 복음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초대교회 속에서 많은 공격을 받았던 그런 문제가 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것이 진리이기에, 그리고 이방인의 구원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에, 이 싸움을 계속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싸움의 관점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 아님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 여기 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말씀과 나눔】

<질문1> 유대인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17절)

율법

(설명)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백성의 예배와 삶에 관한 명령입니다(출 21:1). 그래서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절대적인 그런 법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볼 때, 율법은 결코 구원의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시대 속에서 필요한 그런 하나의 법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을 절대적인 구원의 조건으로 그렇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이 이해한 것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율법을 다 지켜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율법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지는 자기 자랑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문제입니다. 즉,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율법도 문제이고, 그것이 영적인 자기 자랑과 교만이 된 것도 문제입니다.

<질문2> 율법을 대하는 그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23절)

율법을 자랑하는 자로 오히려 율법을 범하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다.

(설명) 율법을 강조하고, 그것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그런 자들이지만, 오히려 유대인들은 그 율법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율법을 강조하고 자랑하지만, 그들 자신이 그 율법의 형식만 지키지, 그 근본정신을 지키지 않아 온전하게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그들 스스로가 율법을 범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유대인들의 위선적인 행위에 대한 고발도 들어가 있지만, 동시에 율법을 지킨 다는 것의 그 한계에 대한 지적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그 율법을 그렇게 온전하게 지킬 수 없다는 바로 그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눔 1) 우리는 율법이 아닌 복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복음의 축복을 나눠봅시다. (율법이라는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복음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깨닫게 되고 은혜를 고백하게 되는 상황들을 나눕니다.)

<질문3>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 됨의 외적인 표현입니다.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지만 그 할례가 무할례와 같이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25절)

율법을 범하기 때문입니다.

(설명)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명령하신 것입니다(창17:11). 언약의 표징인 이 할례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됨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할례를 받았다고 해도, 그가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에서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고 어기게 되면, 그는 진정한 할례 받은 하나님의 백성일 수 없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지적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바울 사도는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래야 구원을 받는 것의 허구를 지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래야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의 잘못된 주장도 동시에 하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4> 사도 바울은 할례는 어디에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까?(29절)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설명) 구약에도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한다고 여러 번 언급한 것이 나옵니다. (신 10:16, 렘 4:4).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할례를 강조한 그런 것입니다. 단지 표면적이고 형식적으로 행하는 그런 표징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온전히 변화되는 바로 그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외적인 의식이 아니라 영적인 역사이며, 종교적인 형식이 아니라 내면적인 진정한 변화를 통한 삶의 온전한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것을 인용해서,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조건으로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할례를 통해서 유대인이 되고,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의 문제점을 아주 강하게 드러낸 그런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한 마음에 할례를 받는 것은 율법을 통한 그런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히 거듭나는 진정한 복음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구원은 바로 할례나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가능하다는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눔 2) “할례를 마음에 받아야 된다”고 했을 때 자신에게 적용 할 것을 고백해봅시다. (마음의 할례를 받음으로 나타나는 변화들과 결단들을 나눕니다. -예)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겠다는 것,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함으로 살아가겠다는 결단.)

【기도】 외형적인 신앙에 안주하던 우리의 모습에서 돌이켜 마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소서.

제16강 로마서 2:25-29 유대인과 할례

❖ 로마서 열여섯 번째 강론

로마서 2:25-29

유대인과 할례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한 바울 사도는 이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랑의 요소로 삼는 할례를 들어서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한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최대의 특권으로 간주하며 외적으로는 율법을 가지고 있고 자신들 몸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표시인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요 자랑거리였다.

바울은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25-26절)라고 하였다. 율법을 지킨다는 전제 하에서 할례가 유익한 것이지 율법을 어긴다면 할례는 할례가 아닌 것이 된다고 선언한다. 또한 거꾸로 의식으로는 할례를 받지 않은 자라도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지킨다면 할례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지킨다는 표현을 ‘퓔라소’로 언급하였다(퓔라소의 원형은 ‘피오’인데 ‘꺼내어 놓다’, ‘만들어 내다’, ‘밖으로 보여 주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의 죄를 폭로하면서 굳이 할례에 대한 문제까지 언급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더라도 할례는 받아야 한다는 것이 초대교회 일부 사람들의 주장이 있었다. 한 마디로 초대 교회의 핫이슈였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할례가 문제가 되었던 것을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행 15:1)

그러면 할례란 무엇인가? 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유대인들이 특권으로 여기고 있고 자랑으로 삼는 할례를 가지고 공격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했던 것일까? 할례란 남자 생식기의 끝을 자르는 것으로 유대인이라면 난지 8일 만에 반드시 행해야 하는 의식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할례에 대한 말씀이 창세기 17장에 처음 나타난다.

10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0-14)

이것이 나중에 율법으로 규정되어 “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출 12:48)라고 하여 할례 받지 않은 자는 유월절에 참여하지도 못하였다.

왜 유대인들에게 이토록 중요한 할례로 주어졌는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후손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받아들였지만 그 방법이 사라를 통해서도 상관이 없고 하갈을 통해서라도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아 언약의 후손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 아들이 약속의 아들인줄 알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으로 주시겠다고 선언하신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할례 언약이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할례란 아브라함이 혈통에 의한 인간적인 출산의 방식이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을 부정하는 차원에서 주신 언약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마엘의 출생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남자로 생각하고 씨를 가진 존재로 착각한 결과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생식기 포피를 잘라냄으로 ‘아브라함 너는 죽은 존재야!’, ‘너는 죽어야 돼!’라는 의미를 담아 더 이상 약속의 후손은 인간의 생물학적 활동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 놓으신 것이 할례이다.

고대 중동 지역에 여타 민족들에게도 할례가 있었지만 이스라엘에게 할례란 다른 민족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선택의 표시가 되었다. 다른 민족하고는 씨가 다르다는 차별성에 대한 문제를 성경에서는 ‘거룩한 민족’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을 거룩한 민족이라고 하는 말은 윤리 도덕적으로 고차원적인 민족이라거나 행동이 깨끗하고 신사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인간적인 핏줄과는 전혀 다른 계통에 의해서 생겨난 민족이며 본래 남자 쪽의 가문과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자르는 할례를 행하도록 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직접 출현된 민족이다. 인간의 핏줄과 관련있는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는 민족이라는 말이다. 할례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그 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담아 놓은 민족이라는 뜻이다. 겉으로는 할례를 행했다고 하지만 만약 그 안에 약속의 정신이 빠져나가면 아무리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외적으로 할례의 흔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뜻을 가지고 바울은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27절)라고 했다. 즉 오히려 의식적으로 할례를 받지 않은 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면 문자의 율법에 매여 율법을 범한 유대인들을 정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8-29절)라고 선언한다.

우리 성경에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본문을 직역하면 ‘영으로 하는 마음의 할례’라는 말이다. 즉 ‘성령에 의해 마음에 하는 할례’라는 말이다. 여기서 바울이 마음에 할례를 할 것으로 말한 것은 그가 새삼스럽게 밝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율법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바울은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 4:4)

육체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가 중요한 것이라고 구약에서도 밝히고 있다. 마음에 하는 할례란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바대로 말하자면 ‘여호와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음에 하는 할례를 에스겔 선지자는 새 영을 주셔서 새 마음을 주시는 것으로 이렇게 선포한다.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바울 사도가 말한 ‘영으로 하는 마음의 할례’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표면적”(헬, 파네이로스)이란 공개적이며 외형적으로 드러난 것을 말하고 “이면적”(헬, 크륍토스)이란 내부적으로 감추어져 은밀한 것을 말한다. 마태복음 6:4에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라고 하였는데 ‘은밀한’으로 번역된 말이 ‘크륍토스’로 하나님은 은밀한 자 가운데 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즉 은밀한 자, 이면적 유대인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라는 것이다.

성령에 의해 거듭나지 않고 율법이라는 문자(조문)를 곧이곧대로 지켜서 행하려고 하는 자들이 표면적 유대인이다. 할례를 자랑이요 특권으로 여기고 있는 것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려고 한 결과가 무엇인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인간의 혈통을 거부하고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으나 예수님은 육신의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심으로 할례 언약을 성취하셨다.

어쩌면 오늘 본문의 이 선포는 우리에게 굉장히 거리가 있는 말씀으로 들려질지도 모른다. 적어도 오늘날 우리는 할례가 지켜야 할 규례로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들의 율법과 할례를 가지고 공격하면서 복음을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율법, 할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그 어떤 ‘인간의 의’를 갖다 붙일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선포하고자 함이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 2:11)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2-17)

오늘날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 입에서 복음을 안다면 그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우리의 삶’이라는 의를 십자가에 들이댈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특징이 성숙이나, 성장이라고 말하면서 그 특징이 드러나는 것이 자라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자람, 성숙, 성장은 시간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하늘적 생명의 특징이 아니다.

영생이란 시간을 초월한 상태이기에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성도는 묵시를 사는 자이기 때문이다. 시간(역사) 속에서 날마다 자신의 죄가 발각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할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에 새겨 묵시의 세계를 살도록 일하시는 은혜를 성령께서 베푸시는 자를 성도라고 한다(http://cafe.daum.net/joosung 20190728 강론/김영대).✞

롬16.0225-29 유대인과 할례(2019072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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