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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생애 | 요한 웨슬리의 생애ㅣ감리교의 창시자ㅣ신앙의 위인전 상위 75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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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세속화되고 어두워질 때마다 빛을 비추어 교회를 어두움에서 건져내시고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 등불 역할을 하셨던 분들이 바로 ‘빛을 따라 산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장 많이 닮은 성도들로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성도들 중의 한분인 요한 웨슬리의 생애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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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존 웨슬리 · 1 요약. 1.1 신학공부와 목회활동; 1.2 전도여행과 사회개혁 · 2 생애. 2.1 어린 시절. 2.1.1 성공회 사제의 자녀 · 3 영향. 3.1 웨슬리에게 영향을 준 인물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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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0/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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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생애 > 기독교자료모음 – 기독정보넷

존 웨슬리(John Wesley)는 감리교를 창시한 신학자이자, 근대 복음주의적 기독교 부흥을 이끈 목사입니다.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 소속이었으나 형식적인 신앙을 탈피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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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10/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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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생애(개정판)(웨슬리 이야기 2)김진두 | kmc- 교보문고

새로운 디자인과 판형으로 개정한 | 『존 웨슬리의 생애』는 모든 인류를 위한 진리의 사도이자 성결과 사랑의 성자인,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생애를 역사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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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yobobook.co.kr

Date Published: 6/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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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생애와 신학 – 네이버 블로그

존 웨슬리는 감리교의 창시자로 추앙된다. ‘감리교인’ 혹은 ‘메소디스트(Methodi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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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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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esley’ Life 존 웨슬리의 생애

John Wesley’ Life 존 웨슬리의 생애. 영국의 상황. 18세기의 영국은 산업혁명의 초기 단계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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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dkumc.org

Date Published: 3/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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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John Wesley)의 생애 – 한국신학마당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생애 (1703-1791) 웨슬리는 전도자, 신학자, 그리고 사회 개혁자로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웨슬리의 이러한 세 면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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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heologia.kr

Date Published: 3/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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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리의 생애ㅣ감리교의 창시자ㅣ신앙의 위인전 최근 …

Mission Letter 자료실 Source Board John Wesley’ Life 존 웨슬리의 생애 영국의 상황 18세기의 영국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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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you.maxfit.vn

Date Published: 7/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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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 mission – 제 1강. 존 웨슬리의 생애

이계준 존 웨슬리(John Wesley)는 18세기 영국이 낳은 위대한 전도자이고 통전적 신학자인 동시에 유능한 교회 행정가이었다. 그는 침체된 영국 성공회를 바판하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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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ssion.bz

Date Published: 9/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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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생애 – 감리교교육마당

감리교교육마당 > 감리교교육 | 존 웨슬리(John Wesley)는 감리교회(Methodist church)의 창시자이다.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17일 영국 링컨셔(Lincolnshire)의 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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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mcedu.net

Date Published: 10/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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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생애 – 당당뉴스

저자 김진두 목사는 평생 존 웨슬리 연구에 매진하여 누구나 쉽고도 정확하게 존 웨슬리를 알도록 힘써왔다. 감리교신학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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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angdangnews.com

Date Published: 8/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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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리의 생애ㅣ감리교의 창시자ㅣ신앙의 위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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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존 웨슬리 생애

  • Author: 성결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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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3. 1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IDW53Zcaos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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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John Wesley, 1705년 8월 31일[3] ~ 1791년 8월 31일)는 영국 개신교계에서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인물로,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 창시자다. 영국국교회[4](Church of England)에서 안수를 받았으며 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이다. 또한 웨슬리의 사역과 저술은 감리교의 활동만이 아니라 19세기 성결 운동과 20세기 오순절 운동 및 기독교 사회복지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요약 [ 편집 ]

신학공부와 목회활동 [ 편집 ]

차터하우스 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한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의 교수(fellow)가 되었으며, 1725년에는 부제가, 1728년에는 사제/장로목사가 되었다. 잉글랜드국교회인 잉글랜드 성공회 사제였던 아버지 새뮤얼 웨슬리의 교구에서 사제로 사역한 후 1729년 옥스퍼드로 돌아와 신성회(Holy Club)를 지도하였다. 신성회는 신학 공부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을 연마하기 위한 모임이었으며, 동생 찰스 웨슬리가 처음 시작하여 조지 휫필드도 가입하였고, 존 웨슬리도 가입한 후 모임을 지도하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아메리카 식민지 조지아로 건너가 2년 동안 선교를 했지만 실패했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웨슬리는 아메리카로 건너가는 동안 만났던 모라비아 교도들과 교류하였다. 이후 독일을 방문해 모라비안 교회와 독일 경건주의 교회들을 돌아보기도 했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복음적 회심을 경험하였다. 웨슬리는 이날의 일기에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즈음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들과 결별하고 스스로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전도여행과 사회개혁 [ 편집 ]

웨슬리의 사역은 조지 휫필드처럼 교회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사역이었다. 하지만 휫필드가 예정론의 칼빈주의적 감리교를 지향했던 것과 달리 웨슬리는 자유의지론을 바탕으로 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가까운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브리튼섬 전역과 아일랜드를 다니면서 웨슬리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소모임인 속회를 조직하여 소모임 안에서 신자들이 훈련 받고 양육 받을 수 있게끔 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웨슬리가 평신도 설교자를 세워 자신처럼 나라 곳곳을 다니며 선교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웨슬리의 지도 아래, 감리교도들은 교도소 개혁과 노예해방 등 당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이끌고 개혁하였다.

신학사상 [ 편집 ]

웨슬리는 비록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지만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해 주장하였고,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에 맞섰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 내면에 하나님의 사랑이 깊게 자리한다면, 이를 바깥으로 표출하여 사회적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웨슬리의 신학은 공교회주의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시적으로 표현되는 수단인 성례전과 예전을 존중하는 성공회 고교회주의(High church,Anglo-catholic)와 개인의 종교경험을 존중하는 복음주의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을 통해 신자들이 변화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감리교와 잉글랜드 성공회 [ 편집 ]

전생애를 통틀어 웨슬리는 잉글랜드 성공회 성직을 유지하였고, 영국에서 감리교 운동은 단지 침체된 영국성공회를 개혁하는 내부의 신앙 운동이라 하였으나, 미국 감리교회에서 목사를 안수할 감독을 웨슬리가 파송하며 미국에서는 분리적 태도를 취했다. 웨슬리 사후 영국 감리교는 미국 감리교회처럼 영국 성공회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인 교단을 형성하였으며, 감리교로부터 사회운동을 강조하는 구세군, 성결교, 오순절 운동 등이 생겨났다. 즉 당시 영국 사회와 교회사에 끼친 웨슬리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래서 웨슬리는 “영국에서 제일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흔히 묘사되곤 한다.

생애 [ 편집 ]

어린 시절 [ 편집 ]

성공회 사제의 자녀 [ 편집 ]

존 웨슬리는 1705년 8월 31일 엡워스(Epworth)에서 태어났다. 엡워스는 링컨에서 서북쪽으로 37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웨슬리는 새뮤얼 웨슬리(Samuel Wesley)와 수재너 웨슬리(Susanna Wesley)의 열아홉 자녀 중 15번째였다. 새뮤얼 웨슬리는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한 영국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이었으며, 1696년부터 엡워스의 성공회 사제가 되어 목회하고 있었다. 새뮤얼 웨슬리는 1689년 개신교 목사인 새뮤얼 아네슬리(Samuel Annesley)의 25번째 딸인 수재너와 결혼하였다. 새뮤얼과 수재너는 총 열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이 중 여섯 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새뮤얼과 수재너는 모두 개신교 목사의 자녀였지만 젊은 시절 잉글랜드 성공회로 전향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께 학문을 익히다. [ 편집 ]

당시 대부분 가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웨슬리의 부모도 자녀들을 일찍부터 교육시켰다. 딸들을 포함하여 모든 아이들은 걸음마와 말을 배우자마자 글을 읽는 법을 배웠다. 근대 서양 중간계급 가정에서는 가정교사나 부모가 자녀들을 가르쳤는데(나이팅게일도 부친이 따님들인 플로렌스와 나이팅게일에게 학문을 가르쳤음)지식인인 수재너 사모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에 능통하였고, 존 웨슬리와 형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원어인 그리스어로 신약성서를 읽으며 생생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가르침을 새겼다. 존 웨슬리도 어머니처럼 지식인이어서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할 때부터 신학, 문학, 음악에 모두 밝았다. 즉, 성직자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실력을 쌓는 일부터 해나가야 함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된다.

엄격하고 자상한 가정교육 [ 편집 ]

존 웨슬리와 그의 형제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새뮤얼보다 수재너 웨슬리였다. 수재너는 점심 식사와 저녁 기도 시간 전에 아이들을 불러 배운 것을 잘 익혔는지 점검해 보았다. 수재너는 아이들이 반찬 투정을 하지 못하게 했고, 무분별하게 간식 먹는 것도 엄격히 금했다. 이를 어길시에는 어김 없이 회초리를 들었다. 회초리를 맞고 나서 큰 소리로 우는 것도 금했다. 수재너는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의 의지를 정복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 형성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고 보았다. 아이들을 엄격히 가르치면서, 수재너는 아이들 한 명씩 밤에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 고민을 듣고 대화하였다. 존 웨슬리는 목요일 밤마다 어머니와 만났으며, 성장한 후에도 평생 목요일 밤 시간을 그리워하였다.

화재 [ 편집 ]

1709년 2월 9일 사제관 화재에서 구출되는 어린 존 웨슬리. 새뮤얼 윌리엄 레이놀즈 작.

존 웨슬리의 어린 시절 중 가장 특기할 만한 사건은 1709년 2월 9일 사제관에서 일어난 화재일 것이다. 당시 웨슬리는 다섯 살이었다. 다른 가족들이 화재를 보고 피신한 것과 달리 웨슬리는 늦게까지 화재를 인지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불이 난 사실을 알고 간신히 창가에 올라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아들이 두려움에 떨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새뮤얼 웨슬리는 아들을 구하려고 노력했으나 화재가 심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새뮤얼은 어쩔 수 없다 생각하여 아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 찰나에 같이 불을 끄던 주민들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어깨를 딛고 올라가 웨슬리를 구했고, 웨슬리가 구조되자마자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지붕이 무너지던 찰나 구조된 웨슬리를 보고 수재너는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수재너는 스가랴 3장 2절을 인용하며 웨슬리를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토막”이라고 불렀고, 웨슬리 자신도 이 별명을 즐겨 사용하였다.

학교공부 [ 편집 ]

열한 살이 된 1714년, 웨슬리는 런던에 있는 차터하우스 학교(Charterhous School)에 입학하였다. 차터하우스에서의 생활은 결코 풍족하고 행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웨슬리는 집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엄격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견뎌내었다. 차터하우스에서 6년 간 수학한 후, 1720년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옥스퍼드 재학 시절과 성공회 성직서품 [ 편집 ]

웨슬리가 수학하고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은 크라이스트처치 내부.

1720년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입학한 존 웨슬리는 1724년, 문학사(B.A.) 학위를 땄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문학석사(M.A.) 학위 취득을 위해 계속 공부하였다. 웨슬리는 1725년 9월 19일 옥스퍼드의 주교 존 포터(J. Potter)의 서품성사 집전으로 부제(deacon)로 서품받았다. 부제서품받을 즈음 웨슬리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제러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거룩한 죽음(Rules and Exercises for Holy Living and Holy Dying)》이라는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웨슬리는 이 책을 통해 참된 신앙은 먼저 마음 속에 뿌리 내리고 자라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1726년 3월 17일, 웨슬리는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의 연구교수(fellow)가 되었다. 연구교수가 된 웨슬리는 학교 안에 연구실을 얻을 수 있었고 1751년 결혼할 때까지 해마다 18파운드에서 최고 80파운드까지, 평균 약 30파운드의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웨슬리는 연구를 계속하면서 학교에서 고전 문학과 논리학, 그리스어와 신약성서, 고전 문학과 철학을 가르쳤으며 이외에도 학생들의 개인 지도를 하였다. 웨슬리는 1728년 9월 22일에 성공회 부제서품 때와 마찬가지로 존 포터에게 성공회 사제(elder; priest)로 서품받았고, 1735년 조지아로 떠날 때까지 연구교수로서 연구와 강의를 성실히 수행했다.

존 웨슬리가 아버지의 교구 목회를 도우러 고향에 내려 가 있는 동안, 1726년 존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가 옥스퍼드 크라이스처치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찰스는 입학 초기에는 경건하게 생활하지 않았었으나, 형 존과 어머니 수재너의 조언과 격려로 자신의 게으름을 반성하고 영적 생활을 새롭게 하려고 마음 먹었다. 결심 후에 찰스는 매주일 성찬을 받으며 매일 규칙적으로 개인 기도를 하면서 경건생활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찰스는 두 명의 친구(윌리엄 몰간과 로버트 커크함)와 함께 작은 모임을 하나 만들었는데 성경 공부와 경건 서적을 읽고 대화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1729년 11월 말 경에 웨슬리가 옥스퍼드에 돌아왔고, 웨슬리는 동생 찰스의 고전 연구를 지도하는 동시에 신앙 생활의 증진을 돕게 되었다. 웨슬리도 찰스가 시작한 모임에 참여하였고 자연스럽게 그 모임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이 신성회(Holy Club)의 시작이었다.

기도와 독서 [ 편집 ]

신성회는 매일 여섯시부터 아홉시까지 기도하고, 시편과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읽기 위해 모였다. 이들이 보았던 책은 주로 초대 교회와 중세기 성자들의 신비주의와 종교개혁 시대와 당대의 경건한 사람들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당시 영국 성공회에서 1년에 3번 정도 성찬을 받아도 된다고 권고한 것과 달리, 신성회 회원들은 말씀예전과 성찬예전이 균형을 이룬 초대교회 예전에 따라 매주일 성찬을 받았다. 이들은 초대 교회의 전통을 따라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였다. 1730년 8월부터 신성회 회원들은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규칙적으로 방문하고 전도하는 사회선교를 시작하였다. 윌리엄 모건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일은 후에 신성회의 사역 중 중요한 일로 정착하였다. 당시 감옥은 지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여건이 극도로 나빴으며, 신성회는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 겨울에는 석탄이나 나무를 갖다 주는 한편 심지어 빚을 못 갚아 들어온 죄수들을 대신해 빚을 갚아주고 석방시키기까지 했다.1732년 웨슬리는 신성회 회원들이 사용할 《매일 기도집(A Collection of Forms of Prayer for everyday in the week)》을 썼는데, 이 기도집에는 주일부터 월요일까지 매일 아침기도와 저녁기도가 실려 있으며 “매일의 자기성찰 일람표(A Scheme of Self-examination)”가 포함되어 있었다. 신성회는 웨슬리가 정한 규칙과 기도집을 엄격히 지켰다.

이렇게 신성회는 지나칠 정도로 규칙적이면서도 매우 열정적으로 경건 생활에 매달렸기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많은 질시와 조소를 당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바로 메소디스트(methodist)라는 이름이었다. 웨슬리 본인에 따르면 이 호칭은 네로 황제 시절 로마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의사 집단에서 유래하였다. 그 당시 의사들은 규칙적인 식이 요법을 통해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메소디스트란 바로 이 의사 집단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외에도 신성회는 “성경 벌레(Bible Moths)”, “공로주의자들(Supererogation Men)[5]”, “성례전주의자들(Sacramentarians)”, “초대 교회(Primitive Church)”, “열광주의자들(Enthusiasts)”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와 같은 옥스퍼드에서의 신성회 활동은 웨슬리가 회심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감리교회 운동의 시초였다.

조지아 선교와 실패 [ 편집 ]

1735년, 웨슬리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 중 하나였던 아메리카 조지아 서배너(Savannah)에 선교하기로 하였다. 1734년 말 아버지 새뮤얼 웨슬리 사제가 별세하였고, 별세하기 직전 완성한 욥기 주석서를 캐롤라인 왕비에게 전해달라고 존에게 요청하였다. 웨슬리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주석서를 왕비에게 전해주었다. 책을 전해주고 오는 길에 웨슬리는 옥스퍼드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Corpus Christi College)의 존 버턴(John Burton) 사제를 만났다. 버턴은 웨슬리에게 조지아로 가서 선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버턴은 웨슬리에게 조지아 식민지를 개척한 제임스 오글소프(James Oglethorpe)를 소개시켜 주기까지 했다. 제임스 오글소프는 웨슬리에게 식민지인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선교사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웨슬리는 고민하다가 고향 엡워스로 가서 어머니 수재너 웨슬리에게 조언을 요청하였다. 수재너 웨슬리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오히려 감탄하며 이야기했다. “내게 스무 명의 아들이 있다면, 다 그렇게 쓰임 받았으면 좋겠구나.” 웨슬리는 마침내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1735년 10월 10일, 버턴에게 선교사가 되기로 결정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모라비안 공동체와 만나다 [ 편집 ]

같은 해 10월 14일, 웨슬리는 갓 성공회 사제서품을 받은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그레이브젠드(Gravesend)로 갔다. 이날 동행하는 사람들 중에는 옥스퍼드 퀸즈 칼리지의 벤저민 잉햄(Bejamin Ingham)과 런던 상인의 아들 찰스 델라모트(Charles Delamotte)가 있었다. 이 네 사람은 데이비드 니치먼(David Nitschmann) 주교의 인솔 하에 시몬즈(Simmonds) 호에 올랐다. 이때 같이 배에 탄 이들 중에는 독일 헤른후트 노동공동체에서 온 개신교 신도들인 모라비안 26명도 있었다.

장장 4개월 23일 간 계속된 항해에서 시몬즈 호는 몇 번이나 전복될 뻔 하였다. 바닷물이 객실 창을 부수고 돛대까지 부러뜨릴 정도였다. 위기의 순간 웨슬리를 포함한 영국인들은 죽음의 공포 속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모라비아 교도들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시편을 찬송하고 기도하였고, 침착한 모라비아 교도들의 모습은 웨슬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웨슬리는 이들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라고 물었고, 이들은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배는 우여곡절 끝에 1736년 2월 6일 조지아에 상륙하였다. 존 웨슬리는 서배너에, 찰스 웨슬리는 프레데리카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존 웨슬리는 조지아주의 두 번째 영국 성공회 사제로서 온 것이지만 조지아에는 아직 전임인 새뮤얼 퀸시(Samuel Quincy)가 사제관에 그대로 남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웨슬리는 찰스 델라모트와 함께 모라비아 교도들이 쓰는 막사에 기거해야 했다. 2월 25일 두 사람은 이 독일인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고, 덕분에 모라비아 교도들을 매일 보며 그들의 경건한 생활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특히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의 지도자인 스팡겐베르크(August Spangenberg)와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스팡겐베르크와 웨슬리가 나눈 대화는 유명하다. 어느 날 스팡겐베르크는 웨슬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는 “당신 안에 증인을 갖고 있는가?”였고, 둘째는,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당신 영과 더불어 증언하고 있는가?”였다. 웨슬리는 느닷없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못하고 있었고, 그때 다시 스팡겐베르크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웨슬리는 잠시 머뭇 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그분이 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압니다.” 스팡겐베르크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바로 그분이 당신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웨슬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분이 저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기를 바랍니다.”

웨슬리는 이 날의 대화에서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의 일기에 그저 “의미 없이 내맽었다”라고 적었다. 웨슬리는 이 대화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스팡겐베르크와 모라비아 교도들이 보였던 믿음의 확신에 감탄하였다. 웨슬리는 자연스레 모라비아 교도와 스팡겐베르크에 끌리게 되었으며 믿음의 확신을 얻기까지 계속 교제를 나누었다.

미국사람들과의 갈등 [ 편집 ]

서배너에서 시작한 웨슬리의 목회는 시작은 꽤 순조로웠으나 곧 난항을 겪었다. 이유는 웨슬리의 보수적인 목회 스타일 때문이었다. 웨슬리는 비국교도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다시 베풀었으며, 세례 시에는 물에 세 번 잠기게 하는 것을 고집하였다. 웨슬리는 비국교도를 엄격히 차별하여 비국교도가 사망했을 때 장례식 집례를 거부하였다. 또 웨슬리는 조지아로 떠나면서 인디언이야말로 죄에 때묻지 않은 창조 본연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인디언 선교에 큰 꿈을 품었었지만 인디언 선교도 쉽지 않았다. 찰스 웨슬리도 형 존 웨슬리와 마찬가지로 난항을 겪었는데, 찰스가 겪은 것은 주로 식민지 주민들의 악의적인 협박과 행동이었다. 찰스 웨슬리는 이와 같은 악의적인 행동에 시달리다가 1736년 8월, 6개월 만에 식민지 활동을 청산하고 영국으로 되돌아왔다. 동생 찰스가 떠나자 웨슬리는 목회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프레데리카에 정기적으로 들르기 시작했다. 웨슬리가 부재하는 동안 서배너에서는 앞서 조직한 소모임을 통해 교인들이 서로의 신앙생활을 독려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서배너보다 프레데리카의 상황은 더욱 나빴고, 1737년 1월 26일을 마지막으로, 웨슬리는 프레데리카의 사역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서배너 식민지 사람들은 프레데리카와 달리 신앙에 열심이 있었으나,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엄격한 웨슬리의 스타일로 마찰을 빚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의 선교는 다른 쪽으로부터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소피아와의 갈등 [ 편집 ]

아직 독신이었던 웨슬리에게 조지아 주지사 오글소프는 치안장관 토머스 코스턴(Thomas Causton)의 조카 소피아 홉키(Sophia Hopkey)를 1736년에 소개시켜 준 적이 있었다. 소피아의 나이는 겨우 18살이었지만 아름답고 신앙적으로 신실한 여자였다. 웨슬리와 소피아는 곧 사랑에 빠졌지만 웨슬리는 자신의 금욕적이고 보수적인 경건생활과 사랑 사이에 갈등하기 시작했다. 웨슬리는 스킨십을 악한 것이라 생각하여 하지 않기로 결단하면서도 막상 소피아와 만나게 되면 스킨십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갈팡질팡해 하는 웨슬리를 소피아는 굳게 붙잡을 수 없었고, 1736년 3월 9일 웨슬리에게 마지막 통보를 하였다. 결혼할 마음이 없다면 자신에게 청혼한 윌리엄슨과 결혼하겠다는 말이었다. 웨슬리가 고민하는 사이 소피아는 결국 3월 12일 윌리엄슨과 결혼식을 올렸다.

소피아가 결혼하자 웨슬리의 마음은 질투와 미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웨슬리는 소피아의 신앙생활에 흠이 있음을 계속 지적하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8월 7일 영성체를 위해 나온 소피아와 남편 윌리엄슨에게 영성체를 하지 않음으로써 공개적인 굴욕을 주었다. 이 일은 큰 파장을 주었는데, 소피아가 치안장관 코스턴의 조카였기 때문에 일은 더욱 일파만파로 커졌다. 코스턴은 웨슬리가 개인적인 앙심을 품고 소피아에게 성찬 분급을 거부한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즉시 26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구성되었으며, 웨슬리에게 10개의 고소장이 접수되었다. 이에 웨슬리는 서배너에서의 선교가 사실상 끝났음을 직감하고 12월 2일 도망치듯이 조지아를 떠났다. 결국 1년 9개월에 걸친 조지아 선교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영국으로 돌아오다 [ 편집 ]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웨슬리는 또 다시 풍랑을 만나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이때의 심경을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인디언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메리카로 갔다. 그러나 오! 나는 누가 구원할 것인가? 이 불신앙의 악한 마음에서 나를 건져줄 자는 누구인가? 나는 맑은 여름 종교를 갖고 있다. 나는 위험이 없을 때에는 나 자신을 믿는다. 그러나 죽음의 위험이 가까이 올 때에는 나의 마음은 공포에 빠진다. 오호라! 누가 나를 이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할 것인가?”

올더스게이트 회심 [ 편집 ]

모라비안 페터 뵐러 목사와의 만남. [ 편집 ]

웨슬리는 1738년 2월 1일 우울한 모습으로 딜(Deal) 항구에 도착했다. 3일 후 웨슬리는 런던으로 가 오글소프와 조지아 이사들을 만나 사유서를 제출하고 선교사 임명장을 반환하였다. 갈 곳도 없던 웨슬리는 동생 찰스의 친구인 제임스 허턴(James Hutton)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허턴은 웨스트민스터 학교 근처에서 책방과 하숙집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웨슬리는 그곳에서 막 독일에서 온 모라비아 목사 피터 뵐러(Peter Boehler)를 만났다. 피터 뵐러는 웨슬리보다 9년 늦은 171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예나(Jena) 대학교를 졸업했고, 친첸도르프(Zinzendorf) 백작 밑에서 신앙 지도를 받은 후 헤른후트(Hernhut) 형제단에 가입했다. 영국과 아메리카에서는 선교사로 활동했다. 웨슬리는 뵐러와 급속도로 친해졌으며, 뵐러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웨슬리는 뵐러가 하는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믿음에 의지하다 [ 편집 ]

뵐러는 웨슬리에게 “내 형제여, 내 형제여, 당신은 당신의 철학을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Mi frater, mi frater, excoquenda est ista tua philosophia).”라고 말했다. 웨슬리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3월 5일 웨슬리는 병 중에 있던 동생 찰스를 보기 위해 옥스퍼드에 갔고 거기서 뵐러를 다시 만났다. 뵐러와의 대화 중에 웨슬리는 ‘우리에게 유일하게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saving faith)’이 부족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뵐러는 대화를 거듭하며 웨슬리에게 성서로 돌아갈 것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마르틴 루터의 ‘오직 믿음’의 교리(이신칭의)를 이야기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이 믿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냐고 묻자 뵐러는 회개하고 그 믿음 얻기를 구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어느 한 순간에 주어지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였다. 뵐러와의 대화 끝에 자신이 갖지도 못한 신앙에 대해 설교를 그만해야 하지 않나 번민하는 웨슬리에게 뵐러는 “믿음을 얻을 때까지 믿음에 대하여 설교하시오. 그리고 그 믿음을 얻게 되면 그 얻은 믿음을 가지고 설교하시오.”라고 말해주었다. 다음날인 3월 6일부터 웨슬리는 뵐러의 권고에 따라 믿음에 대한 설교를 시작했다.

신약성서를 연구하다 [ 편집 ]

3월 말에 피터 뵐러는 웨슬리에게 경건주의적 전통의 방식으로 구원을 가져다 주는 믿음의 본성을 설명해 주었다. 믿음의 본성은 거룩함(죄로부터의 자유)과 행복(용서받았다는 자각에서 오는 평화와 기쁨)으로 열매 맺는 것이며 거룩함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즉 뵐러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을, 칭의-법적인 변화와 연결시킬 뿐 아니라 중생-참여적 변화와도 연결시킨 것이다. 웨슬리는 뵐러의 말이 맞는지 살피기 위해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연구하였다. 그 결과 웨슬리는 4월 말에 뵐러를 다시 만났을 때는 뵐러가 설명한 믿음의 본성에 대해 동의할 수 있었으며, 여러 간증을 듣고 “즉각적인 회심”에 대해서도 동의하였다. 그리고 웨슬리는 “이제 나의 논쟁은 끝났다. 주여! 믿음 없는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울부짖었다.

성공회 교회와의 갈등 [ 편집 ]

5월 1일 웨슬리는 뵐러의 충고에 따라 다른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과 함께 “우리의 작은 신도회”를 설립하였고, 이것은 후에 “페터레인(Fetter Lane) 신도회로 발전했다. 5월 4일에는 뵐러가 아메리카로 떠났고, 웨슬리는 뵐러의 권고대로 계속 자신의 부족한 믿음에 대해 설교하였고, 영국 성공회의 전례와 다른 자유로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영국 성공회 사제들이 웨슬리의 이러한 행보에 당황하기 시작했고, 웨슬리가 광신주의에 사로잡혔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찰스 웨슬리 [ 편집 ]

존 웨슬리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중, 동생 찰스 웨슬리도 병석에서나마 같은 확신을 얻기 갈망하고 있었다. 찰스도 뵐러와의 깊은 대화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어야 한다고 깊게 소망하였다. 찰스는 5월 말 루터의 “갈라이다서 주석”을 읽기 시작하면서 당혹감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우리의 교회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와 같이 이렇게 중요한 교리에 기초하고 있다고 누가 믿을 것인가? 특별히 우리의 강령과 설교가 폐기되지 않고 중심 가르침이 없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를 새로운 교리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찰스는 머물고 있던 집의 주인인 존 브레이(John Bray)가 무식한 막노동자였음에도 예수 그리스도만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모든 것을 분별하며, 그 가족도 신앙 안에서 감사와 평화, 기쁨이 넘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5월 21일 오전 9시, 찰스는 존 웨슬리와 친구들의 방문을 받고 기도와 찬양을 하였다. 9시 30분쯤 되어서 홀로 남아 더욱 더 간절히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다. 잠결에 찰스는 누군가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고 조용하지만 아주 분명한 음성을 들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믿으라. 그리하면 네 모든 병이 나음을 얻으리라.” 찰스는 이 음성이 브레이의 누이 무스그레이브(Musgrave) 부인이 말한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찰스를 간호하고 신앙적인 권고를 해온 터너(Turner) 부인의 목소리였다. 찰스는 무스그레이브를 불러달라고 터너 부인에게 이야기했고, 터너 부인이 내려간 사이 “이상한 마음의 떨림”을 경험하였다. 그리고는 “내가 믿습니다.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였고 병도 나았다. 다음날 동생이 중생의 은혜를 체험했다는 소식을 듣고 웨슬리는 찰스를 방문하였고, 찰스는 형도 같은 은혜를 체험하도록 간절히 기도해주었다.

저녁기도, 루터의 로마서 주석 [ 편집 ]

1738년 5월 24일, 이른 아침 존 웨슬리는 성서를 묵상하는 중에 성서 구절 하나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베드로후서 1:4)” 이 날 오후 웨슬리는 세인트 폴 교회에서 있었던 저녁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찬양대는 푸셀의 “오!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께 나아갑니다(Out of the deep have I called unto thee, O Lord)”를 불렀다. 이 곡은 마음의 고뇌와 거룩한 열망에 휩싸여 있던 웨슬리의 영적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웨슬리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올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reet)의 네틀턴 코트(Nettleton Court)에서 모이는 모라비아 교도의 기도회에 가기 위해 저녁 기도회에서 빠져 나와 성서를 펴니 “네게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도다”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기도회 장소에 도착한 웨슬리는 뒷자리에 앉아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

“그러므로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성령으로 외적인 선한 사역을 기뻐한다면, 불신앙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대로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그랬듯이 죄를 짓게 하고 육체를 낳으며, 외적인 악한 사역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6장 8-9절에 “그분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라고 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불신앙은 모든 죄의 뿌리요, 수액이며, 최고의 기도이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우리 안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8시 45분, 마지막 구절을 읽는 소리를 듣는 순간 웨슬리는 마음이 따듯해지는 경험을 하였다. 존 웨슬리가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회심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날 저녁에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썼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신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 경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I felt my heart strangly warmed).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를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웨슬리는 곧 마음에서 경험한 것을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간증하였고 밤 10시쯤 되어서는 신도회 회원들과 함께 동생 찰스에게로 가 이 기쁨을 나눴다.

감리교회에서의 활동과 별세 [ 편집 ]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영국성공회의 제제와 직무파면으로 성공회 소속 교회에서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자, 존 웨슬리는 그 자신이 이룬 영국내 복음주의 운동이었던 감리교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감리교회가 영국내에서 활동하고, 기독교 윤리적으로 무기력하던 영국성공회 내부에서 복음주의적 변혁의 힘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그는 감리회의 대표이며 대표 성직자인 동시에 직무를 박탈 당했어도 파면된 영국성공회 성직자의 자격은 남았다. 존 웨슬리 자신도 스스로를 성공회 사제라고 생각하였다. 1791년 3월 2일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영향 [ 편집 ]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Evangelical) 운동은 개인적 복음과 사회적 복음의 입장을 지닌 감리교회로 발전하였고, 국가교회인 영국국교회로만 안주하는 것에 반대하는 복음주의적 생명력을 심으며, 잉글랜드 성공회가 현재의 성공회로 발전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존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은 교회의 전통, 예전, 성사를 중요하게 생각한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과 함께 영국신학의 전통으로 존중되고 있다. 전자는 저교회파(Low Church), 후자는 고교회파(High Church)로 불리기도 하였다.[6]

웨슬리에게 영향을 준 인물과 서적들 [ 편집 ]

웨슬리는 다양한 인물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 중에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그의 종교적 열심을 증진시키는 데 공헌했으며 윌리엄 로우의 <경건한 삶을 위한 엄숙한 부르심>과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은 그의 성화론에도 영향을 미쳤다.[7]

존 웨슬리의 신학 [ 편집 ]

존 웨슬리의 신학은 당시 교리 중심의 사상적 신학에 대비하여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실천중심”의 신학을 전개하였다.[8] 교리를 선택하는 문제로서 신앙이 아니라 “성화” 즉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에 견주어 오로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은총과 사랑은 웨슬리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며, 신학이 추구해야 할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삶의 기준이 되며 최종적 칭의를 향한 능력으로 보았다. 이는 개신교의 교리를 형성했던 칼빈주의나 루터주의, 경건주의 등과 구별되는 신학적 방법론이었다.

실천신학적 접근 [ 편집 ]

웨슬리의 신학적 접근은 교부신학자와 같이 성서에 기초하여 성서의 진리를 실현하며 전인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주목하는 실천적 신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에게 성서의 진리를 실현하는 신학은 세상을 낙관론이나 비관론적 입장이 아니라 양쪽의 긴장을 지닌 중도적 대안 또는 제3의 과정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제3의 방법의 현실적 표상은 율법과 복음, 은총과 행위, 사랑 받음의 은총과 힘 입음의 은총, 칭의와 성화, 순간과 과정, 은총의 보편성과 은총의 제한적 실현, 하나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응답, 최초 칭의와 최종 칭의와 같은 긴장 속의 주제에 대한 대안과 방법을 제시하며 나타났다.[9] 이 신학의 주제들은 은총의 개념으로 초점이 맞춰진다.

은총의 실천 [ 편집 ]

은총의 개념은 초기 교부들과 고전 공의회의 신학을 뛰어넘어 결정적인 체험의 순간을 시작으로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는 발전의 과정을 수반한다고 보았다. 기독교인의 ‘삶’이란 구원을 주는 은총의 실천 속에서 일관되게 매일 성장을 가져오며, ‘의’도 내주하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점차 자란다고 보았다.[10] 이를 위한 실천적 은총의 수단은 일반 수단과 특별 수단으로 구분하였다. 하나님의 여정 속에 있는 일반적 은총의 수단인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을 깨달아가는 보편적 순종이고, 특별한 은총의 수단은 제도적 은총의 수단과 상황적 은총의 수단으로 구분하였다.

제도적 은총 수단: 성경과 전통 [ 편집 ]

제도적 은총의 수단은 대부분의 신자가 생각하는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경건한 행위들이다. 그러나 경건의 모양만이 아니라 능력을 경험하는 체험도 존중하였다. 공중예배와 성경읽기, 성찬 참여, 가족기도, 개인기도, 성경공부, 속회와 금식과 절식이 제도적 은총의 수단이며 이들을 습관적으로 실천하고 그 안에서 영혼의 체험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11] 이 중 특히 성례전인 성찬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구분을 따라 내적인 은총에 대한 외적인 징표이고 이로서 우리가 내적인 은총을 받는 수단이라고 강조하였다.[12] 그가 보았던 성찬은 기존의 성례전시각인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츠빙글리주의와 차이를 둔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엄숙한 기념으로 이 기념인 온전한 기억과 참여를 통해 하나님의 몸의 현전이 아니라 실재적인 영적 현존이 있다고 구분하였고, 성례전을 통해 칭의와 성화의 현재적 구원 은총인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금 나타난다고 설명하였다.[13] 성례전으로 세례에 대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구세주로 믿음으로 믿고 행하여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칭의(稱義)론을 기독교인이 성령에 의해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가기 위한 전제로 보았다. 세례는 기독교인이 되는 첫단계이나 완전한 단계는 아니며, 죄를 짓는 과정 속에서 세례로 받은 주님의 자녀로 온전히 새롭고 깨끗하게 될 수 없기에 체험적인 온전한 마음의 변화와 경건한 성화의 삶이 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세례와 거듭남을 구분하였으므로 성인의 세례와 유아 세례를 묶어서 생각하였다.

상황적 은총의 수단: 이성과 경험 [ 편집 ]

상황적 은총의 수단은 제도적 은총의 수단을 초월하는 성령의 인도로 은총 안에서 자라 가도록 하는 이성과 경험에 기초한 수단을 구분하였다. 선행 은총을 통해 생긴 도덕법은 신앙인의 양심과 상황에 맞춰 생각하도록 하였으나 상황적인 대응이 아니라 하나님, 그리스도론과 밀접한 도덕법으로서 윤리적 기준을 의미한다.[14]

관련저서 [ 편집 ]

번역된 저서 중 1차 문헌 [ 편집 ]

그리스도인의 완전 (이후정 옮김, 감리교신학대학교 출판부)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존 웨슬리의 생애 – 교보문고

새로운 디자인과 판형으로 개정한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이야기메도디스트들의 필독서「존 웨슬리의 생애」가 새로운 디자인과 판형으로 새단장하였다. 이 책은 모든 인류를 위한 진리의 사도이자 성결과 사랑의 성자인,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생애를 역사적 사실대로 묘사하였다. 한국인의 정서에 맞추어 신학도와 목회자가 존 웨슬리를 자세히 이해할 수 있도록 기술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재미있는 이야기 형식으로 쓰였다.추천의 글참으로 놀라운 책이다. 영국과 미국에서도 이렇게 좋은 「존 웨슬… 더보기

메도디스트들의 필독서「존 웨슬리의 생애」가 새로운 디자인과 판형으로 새단장하였다. 이 책은 모든 인류를 위한 진리의 사도이자 성결과 사랑의 성자인,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생애를 역사적 사실대로 묘사하였다. 한국인의 정서에 맞추어 신학도와 목회자가 존 웨슬리를 자세히 이해할 수 있도록 기술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재미있는 이야기 형식으로 쓰였다.참으로 놀라운 책이다. 영국과 미국에서도 이렇게 좋은 「존 웨슬리의 생애」는 나온 적이 없다. 너무나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한국교회사에 길이 기념할만한 대작이다. 김 박사는 중대한 내용을 읽기 쉽고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은혜로운 이야기로 가득 찬 이 책을 목회자와 신학도만이 아니라 평신도들 모두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조종남 박사(전 서울신학대학교 총장, 한국웨슬리학회 명예회장)이 책은 한국인이 쓴 가장 훌륭한 존 웨슬리의 전기 작품이다. 김 박사는 가장 많은 자료를 읽고 가장 자세하고 가장 아름답게 존 웨슬리의 생애를 그렸다. 특히 그의 부흥운동, 성령체험, 신비체험, 그리고 신유와 귀신추방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학문과 영성운동 양면에서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여성관계, 인상, 성격, 사랑의 실천, 생활습관 등 인간 존 웨슬리의 모습을 진지하고도 재미있게 묘사하였다.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든지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쓴 김 박사를 더욱 칭찬하고 싶다. 앞으로 수십 년간 이 책이 존 웨슬리에 관한 최고의 책으로 애독될 것이라 확신한다.- 김홍기 박사(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한국웨슬리학회 회장)감리교회 신앙과 신학을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소개하는 ?웨슬리 이야기? 시리즈는 총 3권으로 구성하였다. 제1권「웨슬리의 뿌리」에서 웨슬리가문 신앙선조들의 믿음과 삶을, 제2권「존 웨슬리의 생애」에서 존 웨슬리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메도디스트 역사와 신앙전통을, 제3권「더욱 더 사랑해」(근간)에서는 찰스 웨슬리의 생애, 그리고 시와 찬송을 소개한다. 닫기

존 웨슬리의 생애와 신학

존 웨슬리의 생애와 신학



1) 가족적 배경

존 웨슬리는 감리교의 창시자로 추앙된다. ‘감리교인’ 혹은 ‘메소디스트(Methodist)’란 ‘고지식한 사람’ 혹은 ‘원리원칙에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복음주의와 사회운동을 중시하는 개신교의 중요한 한 갈래이다.

존 웨슬리는1703년 6월17일 영국의 링컨셔주 에프워스(Epworth)에서 성공회 사제인 새뮤얼 웨슬리(Rev.Samuel Wesley)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전체 19명의 자식들 가운데 15번째 였다. 그의 집안은 3대에 걸쳐 성공회 목사를 배출한 집안이다. 그의 아버지인 새뮤얼 웨슬리는 40년간 교구 일을 맡아 본 성실한 성직자로, 자녀들의 교육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아버지 새뮤얼 웨슬리의 목회에서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를 보면서 존 웨슬리가 받은 영향은 다음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성경의 원문에 충실한 해석, 2) 세계선교를 향한 사역적 확신, 그리고 3) 소규모 모임을 통한 신앙조직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존 웨슬리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물론 라틴어에도 능통했다. 후에 그가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감리교의 특징인 속회(class)를 활성화 한 것도 아버지 목회에서 배운 방법들이다.

그의 어머니 수산나는 역시 성공회 목사의 딸이다. 헬라어, 라틴어, 프랑스어에 능통할 만큼 빈틈없는 학문 실력으로 19남매를 직접 가르쳤으며, 신앙생활에 몹시 엄격했다. 규칙적인 생활과 기도를 하는 것은 물론 영적일기를 쓰도록 하고 가정을 통한 자녀들의 영적 구원에 신경을 썼다. 영국교회사에서 존 웨슬리라는 지성적이고 활동적인 설교자이며 신학자가 나온 것은 부모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가족 가운데 그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 (Charles Wesley)는 그에게 큰 도움이 된 동역자였다. 후기에 동생과의 갈등이 있기는 했지만, 그를 가장 크게 후원해주고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이 바로 동생인 찰스였다.

2) 좌절의 초기목회

1720 년 옥스포드의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에 입학한 존 웨슬리는 다양한 언어와 논리학, 윤리학, 철학, 웅변, 그리고 신학 등 다양한 학문을 공부했다. 1725년 성공회 부제 (ordained deacon)에 서품되었고, 1726년 링컨대학의 연구원(fellow)에 임명되었다. 1927년 동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아버지의 교회에서 2년간 일을 하고 연구원직을 수행하기 위하여 다시 옥스포드로 돌아왔다. 이 때 18세기에 다시 유행이 불기 시작한 중세의 영성가인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영향으로 성직자가 되어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1928년 영국 성공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729년은 감리교(메소디즘)의 시작으로 기록된 해이다. 그의 동생인 찰스가 옥스포드에 친구들과 함께 ‘경건 클럽(The Holy Club)’을 만든 해이기 때문이다. 이 클럽에는 찰스와 조지 윈필드와 같은 성서적 신앙관을 갖은 젊은이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을 조직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모임을 비웃는 옥스포드 대학생들이 ‘메소디스트’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불렀기 때문에 후에 ‘메소디스트’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1735년 10월 14일 존과 동생 찰스는 미국의 조지아 지방의 사바나를 향해 항해에 나섰다. 그들은 새로 만들어진 사바나 교구의 교구목사로 주지사인 제임스 오글레토피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그는 배에서 그는 큰 경험을 하고 그의 초기 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항해 중이던 배가 큰 폭풍을 만났을 때, 모든 사람이 두려워 하였지만 경건주의 기도교 종파인 ‘모리비안(Moravian)’들은 무서워 하기는 커녕 조용하게 찬송과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는 이 장면을 보고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모라비언들과의 교류를 시작한다.

존 웨슬리는 미국에 도착한 후, 큰 위기에 처한다. 존 웨슬리는 같은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간 소피아 홉키라는 여인과 로멘스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녀와 절교를 하고 그녀에게 성찬식을 주는 것을 거부하자, 그녀와 그녀의 남편인 (존 웨슬리와 헤어지고 난 후 만난) 월리엄 윌리엄슨이 그를 고발한 것이다. 열가지 항목에 걸쳐 고발된 그는 재판정에 서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미국 땅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3) 회심

미국에서의 실패는 그를 의기소침하게 했다. 그러나 배에서 만났던 모라비언들의 모임에 참석한 그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되는 대단한 경험을 한다. 1738년 5월24일 런던의 알더스게이트(Aldersgate)에서 모라비언의 모임에서 들은 마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Preface to Romans)’을 읽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경험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About a quarter before nine, while he was describing the change which God works in the heart through faith in Christ, 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I felt I did trust in Christ, Christ alone, for salvation; and an assurance was given to me that He had taken away my sins, even mine, and saved m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이 경험은 존 웨슬리에게 성령과의 직접 교통을 하는 경험을 제공하여 주었고, 이 후 그의 사역에 경험적인 신앙을 강조하게 되었다. 당시 영국 성공회 입장에서는 대단히 과격한 신앙적 입장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는 모라비언들의 총본부인 독일의 헌헛에 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서 찬송을 짓는 등 열심히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성공회에서는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교회로부터 초대를 받지 못한 그는 설교를 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존 웨슬리의 옥스포드 시절의 친구이고 ‘경건클럽’의 회원인 조지 화이트필드 역시 그와 비슷한 처지로 영국 성공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었다. 그러나 조지 윈필드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대신에 교회에 다닐 수 없는 사람들인 광부나 농부같은 사람들을 이하여 야외에서 설교를 하곤 했다.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존 웨슬리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등을 돌아다니며 직접 사람들에게 전도와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 전도 여행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그가 일생동안 한 전도여행은 그 거리가 40만km나 되었다고 한다.

4) 존 웨슬리 신학의 발전과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제제

1739년 그는 모라비언들이 이단인 ‘침묵주의(Quietism)’를 지지한다고 생각하여 모라비언들과 결별을 한다. 스스로 신앙체를 조직하기로 마음을 먹은 그는 브리스톨과 킹스우드에 ‘영국 메소디스트 소사이어티’를 결성한다.

그 해, 미국에서 선교를 하고 있던 부제들에게 성공회가 사제 서품을 주지 않는 것에 반발해 자신이 스스로 사제 서품을 줌으로서 사실상 성공회에서 감리교회가 분열되었다. 영국 성공회는 미국의 독립전쟁 이후,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 위하여 미국에서 사제서품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행동은 성공회를 화나게 했다. 성공회 목사들은 설교와 출판물을 통해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웨슬리와 그의 추종자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목회를 계속했다.

비록 그가 감리교파를 만들고 목사들에게 사제서품을 해 주었지만, 존 웨슬리 사제 자신은 자신을 성공회 사제로 생각했다. 왜냐면 그의 존 웨슬리의 입장에서는 복음주의(Evangelical) 운동은 부패하고 사회적인 영향을 상실한 성공회를 갱신하려는 신학운동이었지, 새로운 교회를 만들려는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영국 성공회는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제제를 부과했다. 복음주의 운동은 영국의 왕이 수장인 영국 성공회가 보기에는 국가교회와 국가질서를 혼란하게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영국 성공회는 교회내에서 복음주의 설교자들의 설교를 금하였고, 교회에서 복음주의 성직자들을 파문하였다. 심지어 영국 성공회에서는 복음주의 운동을 영국에 성공회를 파괴하고 로마 캐톨릭을 재건하려는 운동의 일부로 간주하기도 했다.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성공회의 제제로 교회에서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자, 존 웨슬리는 결국 자신이 만든 영국내 복음주의 운동이었던 감리교회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활동하였다. 그가 주도한 감리파는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기독교 윤리에서 무기력하던 성공회 내부에 복음주의적 변혁을 이끌기도 했다.

그가 신학적 토대를 마련한 감리교는 미국에서 더욱 활발하게 피어났다. 또 그의 아이디어인 ‘감독’제도와 ‘순환근무’ 같은 제도들은 감리교의 특징적인 제도로 자리를 잡았다. 반면 존 웨슬리는 감리회의 대표이며 동시에 직무를 박탈 당했어도 파면된 성공회 성직자의 자격은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존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은 교회의 전통, 예전, 성사와 같은 형식을 존중하는 옥스포드 운동(Oxford Movement)과 함께 영국 성공회의 전통이 되었다.

존 웨슬리는 1748년 감리교 목회자 양성을 위하여 킹스우드 신학교를 설립했다. 그의 사후인 1831년 미국에서는 웨스리안 대학이 그의 이름을 따라 설립되었다. 평생을 복음주의 신학과 가난한 자를 위한 설교에 힘을 쏫은 존 웨슬리는 1791년 3월2일 친지들에게 “나는 찬양한다. “나는 찬양한다. 찬양한다 (I’ll praise… I’ll praise…)”라는 유언을 남기고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5) 존 웨슬리 신학의 특징

존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의 성공회에서 유행했던 조지 와이트필드의 칼빈주의(Calvinism)과는 다른 알미니안 주의(Arminian Doctrine)를 수용했다. 알미니즘 학파를 지지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존 웨슬리는 칼빈주의적인 ‘선거’와 ‘교회로 부터의 출교제도’에 반대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초기 동역자이며 친구인 조지 와이트필드와 결별을 한 이유가 되었다.

그는 성공회의 전통에도 충실했다. 성공회의 기도서에 따른 철저한 신앙생활과 전통적 예식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성경이 모든 진리의 중심이라는 점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 거룩한 기독교인으로 자라가기 위한 전제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개인적 회심과 신앙적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침례교인들에게 사명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거듭남의 은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 죄를 멀리 하는 거룩한 마음,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도록 가르쳐다. 그는 복음주의 신학에서 중요한 신학적 토대를 구축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학에 가장 구별되는 점은 기독교인으로써의 사회봉사와 사랑의 실천이다. 존 웨슬리에 따르면 크리스찬의 사랑이란 이웃들과 그들의 복지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 사랑의 동기 역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순수한 동기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오늘 날 중요한 감리교의 정신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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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명의 자녀가운데 열 다섯번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청교도 목사의 자녀들이었으며 교회를 영국교회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조부와 부친이 목사였던 사무엘 웨슬레는 옥스퍼드 대학 시절에 영국교회로 들어가 영국교회의 목사로 안수받은 후 링컨 주의 습지에 위치한 엡워스 교구를 맡아 거의 40년간을 봉직하였습니다. 부친 사무엘 웨슬리는 성례를 귀하게 여기던 목사였습니다. 비록 위대한 학자나 시인은 아니었지만 사무엘은 욥기에 관한 주석을 출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저술의 대부분은 엡워스 목사관의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고 그가 지은 찬송 중의 하나가 연합감리교 찬송가인(The United Methodist Hymnal)에 수록되어있습니다,(#293,“Behold the savior of Mankind”) 요한 웨슬레의 체격은 작았으나 그의 다갈색 머리와 정렬적인 성경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습니다. 특별히 웨슬레가 태어나고 자라난 엡워즈 마을은 난폭한 주민들이 있어 사무엘 목사의 농작물에 불을 놓기도 하고 젖소를 찔러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6살이 된 해 겨울 즉 1709년 2월 9일 한 밤 중에 원인 모를 화재가 목사관에 발생하였을 때 이층 다락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는 화재속에서 깨어나 조금도 당황하지 아니하고 창문 곁에 다가서서 “사람 살리세요”라고 외쳤으며 이를 본 불을 끄던 교회 청년들이 무등을 서서 그를 구출해내는 순간에 그 집이 쓰러졌다고 합니다. 웨슬리는 구사일생으로 구원받은 자기 생명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조각”(스가랴 3:2)이라 비유하여 생각하고 자기 사진 밑에 이 성경구절을 쓰고 항상 “하나님이 왜 나를 죽음에서 구해주셨을까?”그 이유를 생각하며 평생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였다고 합니다. 감사하게도 이 화재로 인하여 집이 완전히 타 버렸는데도 가족중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불타는 목사관에서 마지막으로 구출된 요한 웨슬레는 그 당시 나이가 다섯 살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아네슬리 웨슬리는 비범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자녀 양육은 직접 가정에서 조기 교육을 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독서는 광범위하였고 특히 종교와 신학에 관한 서적들을 섭렵하였으며 남편 목사의 출타 중에는 목사관에서 기도회를 직접 인도하였습니다. 수산나와 사무엘은 종교와 정치 문제에 있어서 서로 의견대립이 있을때가 많았는데 때론 이 일로 인해서 목사관에 심각한 긴잠감이 감돌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궁핍과 연이은 출산과 아울러 계속된 어린 자녀들의 죽음이 또 다른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열 아홉명의 자녀중에서 요한 웨슬레를 포함하여 열 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였습니다. 자녀중 가장 맏이인 사무엘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국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일곱명의 딸, 곧 에밀리아, 수산나, 메리, 메헤타벨, 앤, 마타와 케지의 삶은 아주 어려웠습니다. 프레데릭 E, 메이저는 그의 저서 ‘The Story of John Wesley’s Sisters or Seven Sisters in Search of Love‘에서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여러번 자신의 누이들이 감리교 운동에 보다 적극적이지 못한다고 실망을 표현하곤 했는데 가난과 가정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그들은 웨슬레의 감리교 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동생이었던 챨스 웨슬레(Charles Wesley)는 그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역자였습니다. 챨스 또한 아버지와 두 형과 같은 길, 영국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적인 신앙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였으며 상당한 시적 재능을 발휘하여 감리교 역사에 빛나는 위대한 찬송가 작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6,000곡 이상의 찬송시를 기록하였고 그의 찬송시는 다른 교단에서 발행하는 찬송가집에도 많이 수록될 정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찬송으로 ‘천사 찬송하기를(새찬송, 통일 126장)’ ‘만 입이 내게 있으면(새찬송, 통일 23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새찬송 15장 통일55장)’이 수룩되어 있습니다. 엡워즈 목사관에서의 삶은 요한 웨슬레에게 귀한 신앙의 터를 닦아주고 오랜 추억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성경과 영국교회에서 사용하는 기도서에 대한 사랑을 배웠습니다. 부모님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는 학문과 교회의 가르침, 기독교인으로서 필요한 훈련, 또한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이 모두를 귀중히 여겼으며 목회 말년에 이르서는 엡워스에서 경험되어진 수많은 사건들을 회상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교육과 목사안수 요한 웨슬레는 그 당시로서는 최상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1714년 상류층의 자녀들이 다니는 챠터 하우스에 입학하였고 그 곳에서 대학 진학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는 1720년 옥스퍼드 대학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1724년 졸업을 할 때에는 고전과 현대문학, 신학, 역사, 과학을 폭넓게 공부하였고 신약성경을 원어로 능숙하게 읽을 정도였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우수한 성적을 올린 우등생이었습니다. 옥수포드를 졸업할 무렵에는 부모님의 권유로 종교적인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볼 때 그가 아버지와 형의 뒤를 이어 영국교회의 목사가 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졸업후에도 1726년 3월에는 링컨 칼리지의 연구원으로 뽑히는 영예로 인해 옥스퍼드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습니다. 연구원이 되면 특별 요청이 없는 한 캠퍼스에서 살아야 한다거나 대학에서만 의무를 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런 기회로 인해 요한 웨슬레는 자유롭게 옥스퍼드를 떠나 상당한 기간 동안 아버지의 교회 일을 도와줄 수가 있었습니다. 웨슬레는 1727년부터 1729년까지 이 교회를 담임하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요한 웨슬레는 1728년 7월 옥스퍼드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는 하였지만 자신에게는 교구 목회가 적합하지 않음을 이미 확인하였습니다. 1729년 9월 웨슬레는 링컨 칼리지로부터 강의를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결국 옥스퍼드롤 돌아온 그는 옥스퍼드 학자로서의 동료간에 사이도 좋았고 운동을 잘하여 인기도 있었으나 그의 마음 저변에서는 심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의 동생인 챨스 웨슬레는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의 학생이 되어서 영적 성장을 목표로 옥스퍼드 대학의 다른 학생들과 소그룹으로 규칙적인 만남을 갖고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그들의 초청으로 이 그룹의 일원이 되었고 곧 그들의 비공식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웨슬레 두 형제는 옥스퍼드 학생들을 중심으로 신성클럽(Holy Club)을 조직하여 기도와 성서연구와 봉사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당시 대학가에 만연하고 있었던 도덕적, 종교적인 방종을 거부하고 대신 정규적인 신앙클럽의 모임으로 신앙생활을 지속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특별히 요한 웨슬레는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심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꾸준히 기도생활을 계속 하였습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성경을 읽으며 기도생활을 했고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금식을 했습니다. 또는 그는 매주 성만찬에 참석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고 특히 가난한 어린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매주 두 번씩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건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자신이 십자가를 자신있게 질 수 없었던 사실에 대하여 늘 고민을 하였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이 적은 그룹에 속한 사람들을 ‘성례주의자’ ‘성경벌레’ ‘신성구락부’ 혹은 ‘규칙주의자’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결국에 ‘규칙주의자(Method-ist)’라는 단어에서 나온 ‘감리교인’이란 말이 이 후에 웨슬레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사무엘 웨슬레의 죽음과 조지아 선교여행 1735년 아버지의 별세후 요한과 챨스 웨슬레는 당시 영국교회의 선교기관이었던 복음전도협회(Society for the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의 선교사로 자원을 하게 됩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러한 선교사역이 초대 기독교인들이 행했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1735년 가을, 웨슬레 형제는 선교사 자격으로 영국의 새 식민지였던 미국 죠지아주에 있는 원주민들을 향해 떠나가게 됩니다. 새 식민지를 향해 항해하던 도중 선상에서 심한 폭풍을 만났는데 함께 탑승한 26명의 모리비안 교도들이 기쁘게 찬송하는 것을 보고 젊은 요한 웨슬레는 “어떻게 저들을 내가 갖지 못한 내적 평화와 위로를 지녔을까?”하며 의아해 했습니다. 두 달동안의 험난하고 고생스러운 항해 끝에 그들은 1736년 2월 6일 미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때 요한 웨슬레는 적어도 3가지 목표를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조지아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식민지 개척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둘째로 미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셋째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확신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식민지인 죠지아주에서의 요한 웨슬레의 경험은 환멸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요한 웨슬레가 생각했던 것만큼 원주민들이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웨슬레는 성실하게 정열적으로 일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선교사역에 냉담하거나 반항적이었습니다. 인디언들과의 접촉도 빈번하지 못했고 효과도 별로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요한 웨슬레가 섬긴 교구의 교인이었던 소피 합키라는 여인과의 불행한 사랑은 결국 대 배심원의 기소를 받게 되어 식민지를 떠나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선교사 생활을 시작한 지 2년이 채 못된 1737년 12월 죠지아를 떠나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동생 챨스는 그 때 이미 영국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독일의 경건주의자 모라비안과의 만남 그러나 미국에서의 경험이 모두 부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조지아로 가던 배안에서 식민지에서 머무는 동안, 또한 영국으로 돌아오던 때 배안에서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인 모라비안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니콜라스 루드윅 폰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적인 지도하에 있었던 그룹으로 모라비언들은 영적으로 훈련된 내적인 긴밀한 교제안에서 이루어지는 단순한 개인적인 신앙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들이 보여주는 신앙과 위로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그들의 확실한 신뢰와 체험을 부러워하기도 하였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웨슬레는 몇개월동안 영적으로 깊은 침체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는 옥스퍼드로 돌아갈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것이 올바른 길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설교를 하지 않으려고 생각하였으나 모라비언 친구였던 독일의 경건주의자인 피터 뵐레(Peter Boehler)는 웨슬레에게 설득하기를 자신이 찾고 있는 믿음을 얻을 때까지 이를 위하여서라도 계속 설교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경건주의자들의 신학은 내적 구원의 확신에서 오는 영혼을 뒤흔들만한 신앙의 체험으로 기독교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회심 1738년 5월 24일 저녁 요한 웨슬리는 내적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드디어 그가 바라던 구원의 확신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런던의 올더스케이트 거리에 위치한 어느 작은 기도 모임의 참석은 요한 웨슬레의 장래와 그의 사역 방향을 바꾸어 놓게 되었습니다. 그 날의 체험에 대하여 요한 웨슬레는 그의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저녁에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나는 올더스케이트 가에서 모이는 한 교회의 집회에 참석했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로마서에 대한 루터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쯤 되었을 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심으로써 일어나는 변화에 대하여 설명할때에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고 그때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사하여 주시고 나같은 죄인의 죄마저도 또한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일지, 1738년 5월 24일) 동생 챨스 또한 형 요한보다 삼일전에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올더스케이트에서의 회심 체험은 요한 웨슬레에게 있어서 복음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큰 변화를 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교적인 모든 의문과 갈등을 이성으로만 해결하려고 했던 요한 웨슬레에게는 올더스케잇 체험을 통하여 소망과 확신이 불같이 일어나게 되었고 자신의 생애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회심의 체험이 시험이라든가 의심, 절망과 같은 기독교인들이 극복해야 하는 문제들로부터 그를 완전히 해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진정한 삶의 모습으로 믿고 있던 평안, 기쁨,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가끔 고백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올더스케이드의 체험을 통하여 그가 분명히 확신하게 된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성결은 인간의 노력으로 시작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시고 힘 주시는 은헤를 신뢰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믿음이었습니다. 독일 헤른후트: 모라비아본부 방문 5월 24일의 회심 체험이후 요한 웨슬레는 독일 헤른후트에 소잭하고 있었던 모라비언 교도들의 본부를 방문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곳에 몇일을 머물면서 그는 그들의 공동체적 삶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들의 지도자인 진젤도르프 백작과도 신앙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모라비안 교도들이 보여준 친밀함과 서로를 돌보는 마음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헤른후트를 방문한지 몇 달이 지난후에 모라비안교도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의 역사를 기다리는데 너무나 소극적이라고 웨슬레는 지적하였습니다. 그들이 회심경험을 앞당기기 위해서 기도, 성경공부, 성만찬과 같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수단(The means of grace)을 보다 적극적으로 적용하지 않음을 잘못이라고 그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738년 가을 영국으로 돌아온 후 요한 웨슬레는 종교적인 활동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는 독서와 연구, 기도, 감옥 방문, 성만찬 집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를 설교하는데 자신의 시간을 쏟으며 전력하였습니다. 그는 교구 목사로서 어느 한 교구를 맡아 안정된 목회를 하는 대신에 교회마다 다니면서 순회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통하여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순회 전도자로서의 그의 사역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옥외설교시작: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 맨 처음 설교는 옥스퍼드 대학생들 앞에서 하였습니다. “확실한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설교내용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가슴을 움켜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뉴게이트의 감옥에서도 ‘거저 주시는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수많은 죄수앞에서 설교하였습니다. 웨슬리가 크게 믿음의 구원을 외치자 여기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그의 말은 칼날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박혀들고 많은 나무를 태우는 뜨거운 불길과 같았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희망을 잃었던 그들에게 말씀으로 희망을 되찾게 해주었고 의심에 가득찬 그들에게 확신을 갖게하고 종교가 한낮 차갑고 생명력 없던 일과에 불과했던 그들에게 경건심과 뜨거움을 체험하도록 도와주었기에 일반 대중들은 웨슬레의 복음전파를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반면에 웨슬리의 설교가 회중들을 사로잡고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게되자 핍박과 비방도 거세지게 되었습니다. 기존 교회로부터 요한 웨슬레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일기장에 보면 그는 설교 도중에 계속 돌을 맞아 “세 번이나 쓰러졌다”고 기록하고 있고 60차례에 걸쳐 폭력을 당했다고 합니다. 1739년 4월 요한 웨슬레는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됩니다. 그의 친구인 죠지 휫필드의 권유로 교회 건물밖에서 곧 브리스톨 야외에서 처음으로 옥외설교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1739년 복잡한 브리스톨(Bristol) 도시 외곽에 위치한 킹스우드(Kingswood)라는 곳에서 광부들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지친 몸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느 늦은 오후였습니다. 혹독한 노동으로 하루의 일과를 마친 광부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지쳐 있었습니다. 웨슬레는 처음으로 이 광부들에게 옥외 설교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사용하셨던 똑같은 성경 본문(눅4:18-19)으로 광부들에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이 때의 경험을 이렇게 일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후 4시에 나는 상식에서 조금 더 벗어난 일을 하기로 하였다. 나는 도시에 접하고 있는 약간 높은 언덕에 서서 약 삼천명의 청중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다, 내가 선포한 성경 말씀은 다음과 같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일지, 1739년 4월 2일) 그의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그대로 불덩어리였습니다. 막혔던 화산이 터져오르듯이 그의 입에선 불덩어리가 뿜어나왔습니다. 처음 모인 사람들이 200명정도밖에 안되었는데 5번째 설교할때는 그곳에 1만명이 훨씬 넘었고 다음엔 1만 8천명이 몰려왔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복음적인 메시지를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말이나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교회, 가정, 장터, 탄광 입구, 그 외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복음을 메시지를 들고 나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250,000마일이나 순회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는 영국에 있는 도시, 마을, 농폰들을 순회했을뿐 아니라 북쪽의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까지 규칙적으로 순회 전도를 다녔습니다. 그는 86세의 나이에도 자신을 핍박했던 아일랜드 콘웰에서 2만 5천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말년일지라도 자신에게 남은 한순간 한순간을 쓸모없이 살아가지 않고자 촌음을 아껴서 복음 전파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쇠약하여 죽기 5일전까지도 그는 32km 떨어진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할 정도였습니다. 50년동안 말을 타고서 250,000마일 이상 말을 타고 다니면서 지구 10바퀴 이상되는 거리를 다니며 전도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 틈에 2백권이 훨씬 넘는 책을 펴내었습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 평균 32km를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60년동안 한번도 걸러본 적이 없이 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고 설교하였고 동생과 만든 수많은 찬송가중에 1,778년에는 좋은 것만 뽑아 525곡의 커다란 찬송가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8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8주간동안에 무려 80번의 설교를 한 정력가였습니다. 그는 평생 4만번의 설교를 했습니다. 성경이 만든 사람: 요한 웨슬레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성경이 만든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늘 “하나님! 나에게 이 책을 주소서. 내가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이 책의 메시지를 받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책이 참으로 나의 책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나로 이 책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웨슬레의 생애가 끝날 무렵에 그의 목회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조직력: 속회의 시작 특별히 요한 웨슬레와 절친했던 조지 휫필드 목사 또한 웨슬레처럼 옥외 및 순회 설교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믿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회개한 사람들을 계속 돌보는 영적 양육을 위한 별개의 조직이 없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요한 웨슬레는 회심한 사람들을 조직화하여 양육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회 각계 각층에 속해 있으면서 경제적으로 다양한 부류에 있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대부분은 노동자이거나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리교 설교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으며 이 경험 이후에 술주정, 가정 폭력, 매춘, 범죄, 절망 가운데서 벗어나 사랑과 희망, 기쁨의 새 삶을 누리게 되었다는 신앙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처럼 변화된 사람들이 은혜 안에서 성숙하고 성결에 이루도록 격려하는 방법을 모색하였습니다. 이것이 후에 감리교인들의 조직이 되었습니다. 1739년 11월 11일 그는 낯선 두 신사의 기증으로 대포공장을 개조하여 훌륭한 예배당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대포를 만드는 공장을 사람을 살리는 대포를 만드는 공장으로 만들어 이곳을 중심으로 감리교단이 성장하였습니다. 모이는 사람이 점점 늘자 웨슬리는 그 많은 사람을 다 돌볼 수 없어 구역마다 ‘속회(Class Meeting)’라는 것을 조직하여 일을 나누어 맡겼습니다. 속회는 약 12명의 사람들로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 속회의 인도자인 속장과 만나 영적인 대화를 나누고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회원들은 자신이 경험한 시험이나 유혹을 이야기하고 잘못을 고백하며 관심사를 나누고 자신들의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보다 신실한 삶을 위하여 서로 격려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감리교인들은 속회에 참석하도록 되어 있었고 이 속회에서 다른 집회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증을 발급하거나 갱신해 주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그외에 영적으로 보다 더 성숙한 신도들을 위하여 더 작은 모임은 ‘조(Band)’를 조직하였으나 이 조직은 속회처럼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습니다. 감리교 운동 초기에 웨슬레는 속회, 조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고 합니다.(속회와 조 모임보다 큰 모임을 ‘공회’라고 일컫는다. 최초의 공회는 런던과 브리스톨에서 조직) 감리교 여성운동 감리교의 영적인 힘과 통찰력이 있는 속회와 조 모임의 인도자들의 지도에 힘입어 크게 성장하였는데 그들이 대부분은 여성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사라 크리스비, 도로시 다운즈, 그레이스 머레이는 기독교인의 모범적인 삶을 보여줌으로써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새 생활을 시작하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웨슬레는 여성이 설교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1787년에 그는 몇 명의 남성 설교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든 감리교 설교자들이 따라야 했던 교리적 선포와 규율을 준수하는 한 남녀를 불문하고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공식적으로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1791년 그의 죽음 이후 여성 설교자를 반대하는 기운이 다시 감돌았습니다. 1803년 맨체스터 연회에서 여성 설교자에 대한 반대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결정되었습니다. 1) 감리교인들의 거의 대다수가 반대한다, 2) 모든 설교 장소에 보낼 만큼 충분한 남성 설교자들이 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여성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받은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그 여성은 반드시 여성들에게만 설교를 해야한다” 더군다나 설교하기를 원하는 여성은 미리 설교 전에 해당 지역의 감리사로부터 공식적인 허락을 받아야만 했습니다.(Minutes of Methodist Conference, 1803)(폴 칠코트는 그의 저서인 “She offered Them Christ:The Legacy of Women Preacher in Early Methodism”에서 감리교 운동의 초창기 여성의 역할에 대하여 자세히 다루고 있다) 감리교가 성장하면서 웨슬레는 평신도 전도자들을 자신의 조력자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여러 공회를 하나의 구역으로 묶은 순회구역(Circuit)의 전임 순회 전도자가 되거나 아니면 자신의 거주 지역에서 여가를 이용해 자원 봉사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연회의 기원- 첫 예배처소 브리스톨(Bristol New Room) 1744년부터 웨슬레는 설교자들과 매년 정기적으로 만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연회’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연회에서는 신학, 감리교 선교, 다음해 설교자 파송에 관한 회의를 하였습니다. 공회의 모임 장소로 고심하던 웨슬레는 1739년 초에 예배처소(Chaplel)을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브리스톨에서 지어진 첫 번째 예배 초소는 ‘새 집’(New Room)이라고 부릅니다. 그 곳은 예배와 설교를 위한 장소일뿐 아니라 웨슬레가 브리스톨을 방문할 때 머물 수 있는 거처 공간도 있었습니다. 이 집은 현재 영국 감리교회가 관리하며 방문자들에게 관광지로 개방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739년 웨슬레는 화운더리라고 알려진 런던에 있는 옛 무기 제조공장을 구입하여 개조하고 그 곳에 채플, 살림집, 출판시설을 갖추게 됩니다. 이 곳은 감리교인들의 사회봉사를 위한 여러 형태의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후에 감리교인들을 위한 채플들이 다른 도시와 마을에 설립되어 예배와 목회사역을 위한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환자를 위한 진료소, 고아들을 위한 집,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습니다. 요한 웨슬레에게 뛰어난 조직력이 없었다면 그의 영향은 당대에 머물렀을지도 모릅니다. 웨슬레는 교회를 분리할 의시가 전혀 없었고 오직 목표가 있었다면 그가 사랑하는 영국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데 그의 의도가 있었습니다. ‘거듭남’을 체험한 평신도들은 신도회(Society)를 조직하여 성서연구, 기도, 신앙훈련, 그리고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웨슬레 운동은 급속히 성장하여 성직자가 모자랐고 회중들에게 설교를 해줄 수 있는 순회설교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순회설교자들을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말씀을 전파함과 동시에 속회를 인도하고 심방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담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744년 요한 웨슬레와 챨스 웨슬레, 그리고 같이 일하던 4명의 영국 교회 성직자들과 4명의 평신도 설교자들이 모여서 연회(Conference)를 조직하게 됩니다. 1791년 웨슬레 형제가 사망하였을 때 영국에는 313명의 목사와 76,968명의 신도가 있었고 미국에는 198명의 목회자와 56,621명의 신자들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도전과 위기, 신학적 논쟁 영국교회의 목사와 평신도중에는 감리교 지도자와 평신도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특히 감리교 운동 초기에는 어려움을 준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영국교회에서 허락하지 않는 야외설교를 한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웨슬리의 죄악에 관한 단순한 논리와 복음주의적인 체험에 대한 말씀 선포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체험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감정에 치우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웨슬레가 평신도 전도자를 등용한 것이라든지 교구의 경계에 제한되지 않고 여기 저기 순회하며 하는 설교를 불쾌하게 여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남자들 중에는 자기 부인들이 감리교 채플에서 보내며 아픈 사람들을 심방하는 등 너무나 많은 시간을 가정밖에서 쓰고 있다고 불평하면서 웨슬레가 가정의 가치를 침범하고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는 영국교회의 분열을 조장한다는 의심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를 영국교회를 분열시키려고 노력하는 위장된 카톨릭 교인이라고 주장하는 극단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감리교인들은 만화와 풍자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웨슬레와 그의 설교자들과 감리교인들에 대한 폭도들의 폭력때문이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했습니다. 해가 지나면서 극렬한 핍박은 그쳤지만, 예정론과 자유의지, 신앙과 이성간의 관계, 이 세상에서의 온전으로의 가능성, 감리교인들이 강조하는 종교적인 체험, 감리교인들이 영국 교회를 떠나야 하느냐 하는 문제들을 놓고 신학적인 논쟁이 심화되었습니다. 다른 문제들이 요한 웨슬레의 삶에 암운을 드리웠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애정문제였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결혼생활과 지도력 1748년 웨슬레는 자신보다 13살 연하의 감리교 신자이며 과부인 그레에스 머레이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결혼할 계획까지 세워 놓았지만 챨스 웨슬레의 방해로 인하여 그레이스는 다른 감리교 설교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절망에 빠진 요한 웨슬레는 자기 동생의 결혼 방해에 극도로 화가 났었고 이 일로 인해서 형제간의 관계는 거의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금이 가게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1751년 2월 결혼을 했지만 이 결혼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메리 바제이, 혹은 몰리라고 부르는 뷰유한 상인의 미망인이었습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 못되어 그는 부인과 갈등을 겪게 되어 외부사역에 신경을 쏟고 가정과 부인에 등한시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인인 몰리는 요한 웨슬레가 계속해서 집을 비우고 다른 많은 여성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에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1757년부터 두 사람은 몇차례 별거를 하였습니다. 결국 아내가 1781년 사망할 때에도 웨슬레는 외출중에 있었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웨슬레가 감리교 운동을 지도하는데 있어서 독재를 한다는 비난도 있었습니다. 그는 감리교가 자신의 꿈과 이상에 맞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이끌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감리교 운동의 선구자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는 거의 예외없이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질때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습니다. 그에 의하면 감리교운동은 민주주의가 아니며 이런 운영 방식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유롭게 떠나도 좋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감리교인들은 그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당시 영국 감리교회를 향해 “나는 메도디스트(Methodist) 즉 감리교회라고 불리는 교회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없어질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단지, 그 교회가 능력이 없이 종교의 형태만 지닌채 한낱 죽은 단체로 전락할까 봐 염려한다” 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웨슬레는 말년에 이르러서는 많은 영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영성 88세의 생신을 맞은 요한웨슬리에게 장수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한 결과라고 하였으며 교인으로써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타락한 증거라고까지 하였습니다. 한 유명한 목사가 영국을 여행하던 중 웨슬레의 고택과 집무실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기도하던 기도실로 들어간 그는 마룻바닥에 쥐구멍 같은 구멍이 두 개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곳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저것은 무슨 구멍입니까?” “목사님 생각에는 무슨 구멍 같으세요?”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혹시 쥐구멍이 아닌가요? 맞습니까?” “천만에요. 저것은 웨슬리 목사님의 기도의 흔적입니다.”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했던지 웨슬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그 마룻바닥에는 쥐 구멍같은 무릎 자국이 구멍처럼 뚫려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새벽 4시에 두 시간씩 기도하고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규칙적으로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기도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모든 빛을 띤 청명한 얼굴로 기도실에서 나오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요한 웨슬레(John Wesley)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웨슬레는 하루에 두 시간을 기도하는 일에 바침으로 그의 확신을 뒷받침하였던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에게 샐리커햄이란 여성 중보기도사역자가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레 자신이 이 중보자를 만들었다고 고백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고 준비하셔서 자신에게 보내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아담 클라크박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배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가고 있었을 때 역풍을 만난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웨슬레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갑판에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역풍이 불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클라크 박사와 함께 “그러면 기도합시다”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웨슬레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당신은 어느 곳에서나 주관하시며 만물은 당신의 뜻을 섬기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손으로 바람을 움켜쥐시고 홍수도 잔잔케 하시며 영원히 왕으로 군림하시나이다. 이 바람과 파도에 명하시어 당신께 복종케 하사 우리가 갈 항구로 빠르고 안전하게 우리를 데려가게 하소서 !” 모든 사람이 웨슬레의 기도에 힘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웨슬레는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아무 말없이 다시 책을 집어 들고 읽었습니다. 클라크 박사가 갑판으로 올라가보니 놀랍게도 배가 다시 제대로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배는 그 후 줄 곧 순항하여 항구에 안전하게 도착했습니다. 바람이 갑자기 순조로워졌을때에도 웨슬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으리라는 것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에 기도가 이루어진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경건한 생활을 위해 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목사는 늘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첫째, 너는 항상 기도하는가? 둘째, 너는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가? 셋째, 너는 모든 경우에 감사하는가? 넷째, 너는 욕심내는 것이 없는가? 다섯째, 너는 두려워하는 일이 없는가? 여섯째, 너는 네 중심에 연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가? 일곱째,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요한 웨슬레의 마지막 순간 요한 웨슬리가 1791년 2월 14일 죽기 6일전에 영국 노예매매제도에 대항했던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에게 이런 편지를 썻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사람과 사단의 공격에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과연 누가 그대와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이 편지가 월버포스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6년후인 1807년 영국의회는 마침내 노예매매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릅니다. 1807년 ‘노예 매매 폐지법’과 1833년 ‘노예 해방 법령’통과는 아프리카를 넘어 전 세계에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는 세계사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흑인 노예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백인들과 함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게 했습니다. 1791년 2월말 88회의 생일을 앞두고 요한 웨슬레는 중병으로 눕게 되었습니다. 그가 다시 소생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친구들과 가족들을 그의 침상 주변에 모였습니다,. “마지막 날 밤에 그는 아이삭 와트의 찬송가 ”내 생명 다할 때, 말할 수 있을때까지, 내 창조주 찬양하리“를 불렀습니다. 너무나 약해진 웨슬레는 ”내 찬양하리….내 찬양하리“라는 말밖에는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모든 것 중에 가장 최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다“ 1791년 3월 2일 아침,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유산으로 남긴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의 생애 동안 벌은 돈의 거의 전부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남은 재산이라곤 겨우 두 개의 숟가락과 하나의 찻 주전자, 그리고 다 낡아빠진 코트 한 벌, 자신의 관을 런던에 있는 감리교 예배당 뒤뜰에 있는 묘지로 운반해 준 여섯명의 가난한 사람들의 수고비밖에 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기도와 전도운동, 드림과 사회정화운동을 위해 헌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위해 경건과 거룩의 삶, 성화의 삶을 사시다가 1791년 3월 2일에 53년의 전도사업을 마치고 88세를 일기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이란 말을 남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8세기 타락한 영국사회속에서 종교적 체험과 성결한 생활을 통해 대규모 신앙운동을 전개하였던 종교개혁자인 요한 웨슬레(John Wesley)는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당신이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곳을 찾아서, 할 수 있는 모든 때를 찾아,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선을 행하라 Do all the good you can, by all the means you can, in all the ways you can, in all the places you can, at all the times you can, to all the people you can, as long as ever you can’’라고 말함으로써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드림으로써 온전한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2013년 5월 24일은 요한 웨슬레 회심 275주년 기념일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프랑스의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는 “18세기 요한 웨슬레에 의해 일어난 감리교회가 영국을 변화시키고 개혁시켰으므로 불란서와 같은 유혈혁명이 영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영국사회와 국가의 희망이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유산을 그로부터 받았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위해서 끝없어 보이는 고민과 싸움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모두 다 요한 웨슬레처럼 될 수는 없지만 요한 웨슬레가 남기고간 그 위대한 정신과 신앙만은 우리가 계승시켜야 할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죽어가는 교회와 사회를 살리는 사람, 이 나라를 살리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저 교인의 수가 불어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변화된 한 사람,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요한 웨슬리 부흥 전도운동이 필요합니다. 제2의 요한 웨슬리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글 정리: 장재웅목사) Reference(참고자료) 챨스 유리긴, Jr ‘존 웨슬리:성결한 삶을 위하여’ John Hampson, ‘Memoirs of the Late Rev. John Wesley’, London 1791 Richard P. Heitzenrater, ‘Wesley and the People Called Methodist’, Nashville:Abingdon Press, 1995 Paul W. Chilcote, ‘She Offered Them Christ: The Legacy of Women Preachers in Early Methodism’ Nashville:Abington Press, 1993, 144page Albert C. Outler, ‘Theology in the Wesleyan Spirit’, Nashville: Discipleship Resources, 1975 Albert C.Outler and Richard P.Heitzenrater, editors, ‘John Wesley’s Sermons: Anthology’, Nashville:Abingdon Press, 1991 This entry was posted in 자료실 Source Boar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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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강. 존 웨슬리의 생애

이계준

존 웨슬리(John Wesley)는 18세기 영국이 낳은 위대한 전도자이고 통전적 신학자인 동시에 유능한 교회 행정가이었다. 그는 침체된 영국 성공회를 바판하므로 거기서 파면되었고 부득이 감리교회를 창설하여 미국 선교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미국 감리교가 1885년 아펜젤라 목사에 의하여 한국에 선교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칼럼에서 10여회에 걸쳐 “웨슬리의 생애와 사상”을 연재하려고 한다. 먼저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의 傳記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책이 있으나

A. 스케빙턴 우드, 이계준 옮김, 웨슬리의 선교적 사명(The Burnign heart), 전망사, 1995를 주로 참고하고자 한다.

한 위대한 영적 지도자의 생애를 통해 많은 교훈과 감동을 접하는 기회가 되기 바란다.

존 웨슬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일 내가 자서전을 쓴다고 하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웨슬리가 자기 인격형성에 영향을 미친 조상들에게 찬사를 드리는 간접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하느님이 그에게 맡기신 선교사업을 위한 준비가 그가 이 세상에 오기전에 이미 그의 조상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예레미아처럼 하느님께서 자기 조상들에게 어떤 뜻을 두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예레미아 1:5). M. 에드워즈는 웨슬리의 단절 없는 선교적 열정의 근원은 그의 혈통에 있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스스로 자기의 족보나 사회계층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회심 이후 선교에 열정을 쏟으면서 하느님이 자기를 선교의 도구로 쓰시기 위하여 조상들을 통해 준비하고 계셨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리뎀은 웨슬리의 조상의 탁월한 전통을 요약하기를 “청교도사상(Puritanism)의 지적, 문화적 및 종교적 절정”이라고 하였다.

웨슬리의 족보는 증조부에게 까지 올라간다. 증조부의 이름은 바돌로미우 웨스틀리(Westley)이다. 성에 붙은 “t”는 그의 아버지가 옥스포드대학에 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증조부는 1640년경부터 교구장으로 지냈는데 1662년에 청교도란 명분 때문에 알링톤 교구에서 추방당한 저명한 지도자이었다. 추방당한 후 그는 그 지역에서 박해를 당하는 비국교도(청교도)들과 운명을 같이 하며 그들의 집회에서 설교하였다. 그는 옥스포드대학에서 의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는데 교구에서 추방당하여 어려울 때 의학공부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1671년에 서거하였다.

웨슬리의 조부는 존 웨스틀리이다. 그는 “용감하고 재치가 넘치며 학자적이고 순회 전도자이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에게서 그의 손자의 모습을 미리 보는 듯 하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교의 부총장인 청교도 목사 존 오웬의 제자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대학 동기들 가운데는 유능한 청교도 지도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특수 교회”와 관계를 갖고 지역 교회에서 설교, 부두 선교, 순회 전도 등을 통해 많은 회심자들을 얻었다. 그는 감독에게 사제 안수를 받지 아니하고 청고도에 속한 고시관에게 목사 인준을 받았다. 그는 감독제도를 반대하였고 예전 사용을 거부하였으며 투옥까지 되었다가 1662년에 해직되었다.

웨스틀리는 그의 부친조다 조금 먼저 불과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텔포드는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의 순회 목회, 어부들에 대한 그의 관심, 자기의 원칙에 대한 철저함, 영혼 구원에 성공 및 단조로운 경건 생활 등, 이 모든 것이 그의 유명한 손자에게서 재현되었다.” 웨슬리가 조부의 일기를 읽고 매우 귀중하게 여겨서 자기 일기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조부의 이러한 목회와 사상이 그가 근대의 위대한 다원 선교자가 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존 웨슬리의 외조부는 사무엘 애니슬리(Samuel Annesley)이다. 그는 청교도적 비국교인 중 가장 저명한 사람으로 청교도들의 대감독으로 인정 받았다. 그는 부유한 지주의 독자로서 옥스포드 퀸스 대학에서 우등생으로 졸업하였고 1648년에 법학 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그는 1644년 안수받고 해군 군목으로 봉직한 후 교구 목사가 되었다. 그가 목회한 세인트 가일스 교회는 존 폭스와 존 밀턴 같은 유명 인사들이 안장되어 있는 역사적인 교회이기도 하다. 그는 탁월한 설교가이기도 하였는데 그의 설교집은 “청교도의 양심의 신학과 양심에 의한 생활에 관련된 문헌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애니슬리 박사는 1662년 영국 국교에서 추방된 후에도 계속 청교도들을 위해서 설교하였고 그가 교우들과 함께 마련한 리틀 세인트 헬렌스에 있는 집회장소는 비국교도들의 거점이 되었다. 그는 30년 이상을 런던 지역에서 청교도의 지도자로 활약하였고 대추방(Great Ejection) 후에는 비국교 성직자들에게 처음으로 공개적인 안수를 집례하였다. 애니슬리는 성만찬 예식을 올릴 때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인생의 좌우명이었고 또한 존 웨슬리의 것이기도 하였다. 웨슬리의 혈통 속에는 외조부의 청교도 정신이 깊이 수며든 것이다.

웨슬리가 조상으로 부터 위대한 청교도적 정신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의 직접적인 유산은 부모의 영국 교회에 대한 헌신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그의 부모는 영국교회와 강한 유대를 가졌지만 자기들이 물려받은 유산을 모두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웨슬리가 태어난 “엡워드(Epworth)의 목사관은 고교회적 분위기를 지녔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청교도 가정이었다”(A. W. 해리슨). 따라서 웨슬리의 인격형성에는 청교도적인 것과 성공회적인 것이 융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에게는 “성공회의 제도 및 권위와 청교도의 철저한 창의성과 금욕주의가 결합된 것이다”(카드만).

웨슬리의 부친 사무엘 웨슬리는 8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청교도들이 겪는 궁핍을 맛보아야 했다. 그는 14세까지 무료 학교에 다녔고 그 다음에는 청교도 자선가들의 도움으로 스텝니에 있는 청교도 학교와 스톡 뉴잉턴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였다. 그 대학의 학장인 찰스 모턴은 추후에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부총장이 되었다. 그의 학우 중에는 “로빈손 크루소”의 저자인 다니엘 데포가 있다.

사무엘은 대학을 마치면서 비국교도들을 위해 목회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는 자기가 받은 교육과 연계하여 비국교도의 성공회에 대한 비방을 연구하고 논박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는 심도있게 연구한 결과 성공회의 입장이 합법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는 가정의 청교도적 전통과 성공회의 입장 가운데 양자택일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열정적인 비국교도에서 감독 제도의 철저한 지지자로 선회한다. 그 후 삼우엘 만큼 헌신적인 일꾼이 영국 교회에는 없었다고 한다.

사무엘은 성공회의 강한 지지자가 되므로서 그에게 옥스포드 대학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그는 가난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의 실습 준비로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마쳤다고 한다. 웨슬리 연구가로 유명한 슈미트 교수의 말과 같이 사무엘의 유별난 생의 과정은 결과적으로 두 가지 특징을 나타내게 되었다. 첫째로 그는 청교도가 강조하는 바 참회, 회심 및 신생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하였고, 둘째로 그는 계몽주의에 대한 역사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무엘은 1690년에 성공회 사제가 되었다. 그는 열정적인 제도 교회의 지지자가 되었지만 실상 그의 관심사는 교리적이거나 또는 목회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이고 교권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몸은 성공회 안에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언제나 청교도적인 전통에서 떠나지 못하였다. 그는 임종시에 아들에게 말하기를 “아들아, 내적 증거, 내적 증거, 이것이 기독교를 가장 강력하게 증명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 말은 전형적인 청교도적 주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고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순수한 복음을 설교한 족상들의 계보 속에 포함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웨슬리를 위대한 인물로 만든 일등 공신은 그의 어머니 스잔나 웨슬리이다. 그녀는 1688년에 사무엘과 결혼하였는데 애니슬리 박사의 가정에서 진귀한 전통을 가지고 왔다. R. 몽크의 말과 같이 “애니슬리 가정은 교육적인 표준과 엄격한 종교적 및 도덕적 교육을 병행하는 청교도 가정의 탁월한 본보기였다. 더욱이 이 가정은 비국교의 주심이었기 때문에 자녀들은 격렬한 신학 토론에 접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목회 초기에 교리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를 때 마다 어머니의 조언을 구하곤 하였다. 그러나 수잔나도 자기 남편과 같이 비국교도의 길을 떠나 평생을 성공회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기의 청교도적 유산을 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혈맥에서 계속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자녀들에게 준 인격적 헌신과 교육, 이 두 가지는 주로 청교도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성공회와 가톨릭 서적을 폭넓게 읽었으나 영혼의 양식은 청교도 고전에서 찾았다. “그녀의 주밀하고 짜임새있는 시간표, 그녀가 하느님 앞에서 하는 명상과 자기 성찰을 위해 정한 규칙적인 시간, 신앙 일지의 기록, 엄격한 청교도 안식일의 준수 — 이것들은, 존 웨슬리가 활동하기 오래 전에 통용되던 청교도의 중요한 낱말을 사용한다면, 그녀의 삶의 “법칙” (method) 전체이었다”(존 A. 뉴턴). 우리는 여기서 그녀의 삶의 철저한 법칙이 곧 감리교(Methodist Church)를 낳는 원천이 되었다는 암시를 받게 된다.

이렇듯 성공회와 청교도의 혼합된 유산이 존 웨슬리에게 미친 결과는 분명하다. 그는 죽는 날까지 강한 규범 의식과 내부로부터 혁신하려는 의욕이 넘치는 영국 교회의 일원이었다. 그는 예전(litergy)을 좋아하였고 신조와 교훈은 복음 신앙의 본질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선교적 활동에 있어서는 비국교적 조상들의 정신을 더 많이 활용한 사실을 볼 수 있다. 그의 궁극적인 관심은 영혼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고 따라서 교회의 기존 질서가 그의 길을 가로막을 때 주저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제거하였다. 그의 피 속에 숨겨져 있는 반항자가 뛰쳐나오곤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존 웨슬리의 족보를 통해 조상의 신앙적 유산이 자손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크다는 사실을 보았다. 신앙적 유산이나 정신적 가치를 중요시하지 않는 현대 가정의 풍토 속에서 웨슬리의 족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존 웨슬리의 생애 > 감리교교육

존 웨슬리(John Wesley)는 감리교회(Methodist church)의 창시자이다.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17일 영국 링컨셔(Lincolnshire)의 엡워스(Epworth)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 국교회 신부인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와 수잔나 웨슬리(Susannah Wesley) 사이에서 19남매 중의 15번째로 태어났다.

1714년 1월 28일 웨슬리는 런던의 챠터 하우스에 입학하여 공부하였고, 1720년 6월 24일 여름에 옥스포드에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1725년 9월 19일 주일 옥스포드에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의 교회당에서 웨슬리는 포터(Potter) 감독에 의해 영국 국교회의 집사사제(deacon;부제)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그는 토마스 아켐피스(Tomas a Kempis,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와 테일러(Jeremy Taylar,1613∼1677)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규칙”(The Rules for Holy Living and Dying)이라는 책과 로우(William Low,1686∼1761)의 “중대한 부름”이라는 책과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이란 명저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는 거룩한 삶(holy living)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하였다.

1726년 3월 17일 웨슬리는 옥스포드의 링컨 대학(Lincoln college)의 특별연구원(fellow)이 되었다. 이로부터 25년 이상을 링컨 대학에 있으면서 히브리어, 아랍어, 라틴어, 논리학, 윤리학, 철학, 물리학, 웅변학, 시가 신학등 그의 연구 방면은 상당한 범위에 걸쳐 있었다. 또한 그는 그 당시 웅변가로서도 상당한 명성을 떨쳤다.

1727년 8월부터 2년간 엡워드 교구에서 부친 사무엘 웨슬리를 도와 일했다.

1728년 9월 22일 웨슬리는 장로사제(elder:사제)로 서임되었다.

1729년 웨슬리는 옥스포드의 링컨 대학의 부름을 받아 돌아오게 되었다. 그 당시에 웨슬리는 그의 동생 챨스 웨슬리와 함께 신성 클럽(Holy Club)을 만들어서 활동했다. 이 모임의 목적은 참된 기독교적 품격을 형성하기 위해, 성경연구, 영성훈련과 명상, 기도와 예배, 사회적 실천 등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실행하는 것이었다. 동료들은 이 모임의 사람들을 규칙쟁이(Methodist)들이라고 불렀다. 이 말음 나중에 감리교회(Methodist Church)의 이름이 되었다. 이모임은 교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줄 운동이 되었고, 감리교회를 태동하게 하였다.

1735년 4월 25일 웨슬레의 부친인 사무엘은 72세의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사무엘이 죽은 이후 엡윗교회의 목사직을 웨슬레가 맞았으나 끝까지 하지 못하고 더욱더 큰 꿈을 앉고 옥스포드로 돌아오게 되었다.

1735년 10월 18일 오글레돕 장군과 함께 220톤의 “시몬즈”호를 타고 미국선교를 떠났다. 그러나 조지아(Georgia) 선교는 실패로 끝났다. 그리하여 1738년 2월 1일 웨슬리는 본국에 도착했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런던의 올더스게잇(Aldersgate)가에서 모인 한 저녁 집회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던 중 8시 45분경에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이 체험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다는 확신을 선사받게 되었다. 그 후 웨슬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로운 은총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1742년 7월 23일 웨슬리에게 있어서 어렸을 적부터 정신적인 지주가 되셨던 수잔나 웨슬리는73세의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1742년 브리스톨에서 처음으로 속회(Class meeting) 제도를 시작하였다. 그의 신도회(Society)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이고 상호 유기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하였기에 이 체계는 오늘날까지도 감리교회에 존속하고 있다. 속회는 한 신도회를 보다 작은 단위의 집단으로 나누어 거기에 지도자 한사람 씩을 두어 지도 감독하게 한 것이다.

1744년 첫 연회를 시작하였다. 이것은 감리교회의 시작이었다.

1769년에 북아메리카에 메도디스트교회를 창설하였는데 그때 나이는 이미 70고령에 이르렀다.

1791년 3월 2일 오전 6시 88세의 생을 일기로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들어갔다. 1938년부터 52년간 그는 4만회 이상의 설교를 하였다. 대체로 하루에 2회의 설교를 하였고 하루에 4-5회 설교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52년간 그가 여행한 거리는 334,672km(매년 6,436km)였다.

존 웨슬리의 생애

‣ 이 책은 메도디스트들의 필독서「존 웨슬리의 생애」가 새로운 디자인과 판형으로 새단장하였다. 이 책은 모든 인류를 위한 진리의 사도이자 성결과 사랑의 성자인,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생애를 역사적 사실대로 묘사하였다. 한국인의 정서에 맞추어 신학도와 목회자가 존 웨슬리를 자세히 이해할 수 있도록 기술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재미있는 이야기 형식으로 쓰였다. ‣ 지은이 김진두 저자 김진두 목사는 평생 존 웨슬리 연구에 매진하여 누구나 쉽고도 정확하게 존 웨슬리를 알도록 힘써왔다. 감리교신학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우대학교 신학석사, 잉글랜드 브리스톨대학교 신학박사(PhD)를 취득하였다. 현재 영등포중앙교회 담임, 감리교신학대학교 이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강사, 감신대 총동문회장이다. 또한 감리교의 신앙과 전통을 알리는 데에 기여한 공로로 ‘감리교회 저작상’ 제1호를 수상하였다. ‣ 추천의 글 참으로 놀라운 책이다. 영국과 미국에서도 이렇게 좋은 「존 웨슬리의 생애」는 나온 적이 없다. 너무나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한국교회사에 길이 기념할만한 대작이다. 김 박사는 중대한 내용을 읽기 쉽고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은혜로운 이야기로 가득 찬 이 책을 목회자와 신학도만이 아니라 평신도들 모두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 조종남 박사(전 서울신학대학교 총장, 한국웨슬리학회 명예회장) 이 책은 한국인이 쓴 가장 훌륭한 존 웨슬리의 전기 작품이다. 김 박사는 가장 많은 자료를 읽고 가장 자세하고 가장 아름답게 존 웨슬리의 생애를 그렸다. 특히 그의 부흥운동, 성령체험, 신비체험, 그리고 신유와 귀신추방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학문과 영성운동 양면에서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여성관계, 인상, 성격, 사랑의 실천, 생활습관 등 인간 존 웨슬리의 모습을 진지하고도 재미있게 묘사하였다.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든지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쓴 김 박사를 더욱 칭찬하고 싶다. 앞으로 수십 년간 이 책이 존 웨슬리에 관한 최고의 책으로 애독될 것이라 확신한다. – 김홍기 박사(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한국웨슬리학회 회장) ‣ 웨슬리 이야기 시리즈란? 감리교회 신앙과 신학을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소개하는 ʿ웨슬리 이야기ʾ 시리즈는 총 3권으로 구성하였다. 제1권「웨슬리의 뿌리」에서 웨슬리가문 신앙선조들의 믿음과 삶을, 제2권「존 웨슬리의 생애」에서 존 웨슬리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메도디스트 역사와 신앙전통을, 제3권「더욱 더 사랑해」(근간)에서는 찰스 웨슬리의 생애, 그리고 시와 찬송을 소개한다. ‣ 차례 머리말 / 4 약어표 / 7 1부_ 엡웟에서 옥스퍼드까지(1703~1735) 1. 영원한 고향 엡웟 – 어린시절(1703~1711) / 14 2. 세상에 나온 어린 성자 – 차터하우스 학교에서(1711~1720) / 23 3. 유령에 대한 신비한 경험(1716~1725) / 28 4. 학문과 경건과 낭만의 옥스퍼드 학생 시절(1720~1725) / 33 5. 생애 전체를 바치는 회심(1725) / 43 6. 여자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존 웨슬리(1725~1727) / 53 7. 내 아들은 링컨 대학 교수다(1726~1735) / 61 8. 규칙이 없이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 신성회 이야기(1729~1735) / 67 2부_ 옥스퍼드에서 올더스게이트까지(1735~1738) 1. 에덴동산의 뱀에 물린 존 웨슬리 – 조지아 선교(1735~1738) / 90 2. 예수 나를 위하여 – 올더스게이트 회심(1738) / 120 3. 원시 기독교를 찾아서 – 독일 여행(1738) / 152 3부_ 올더스게이트에서 온 나라로(1738~1791) 1. 불타는 가슴 – 부흥운동의 발발(1738~1791) / 172 2. 고난과 영광(1738~1791) / 214 3. 사자가 어린 양이 되다 – 성서적 성결을 온 땅에(1739~1791) / 246 4. 연결된 사람은 안전하고 복되다 – 존 웨슬리의 연결주의(1739~1791) / 265 4부_ 온 나라에서 온 세계로(1738~1791) 1. 만인을 위해 죽으신 예수 – 예정론 논쟁(1738~1778) / 276 2. 불쌍한 존 웨슬리 – 세 번째 실연과 불행한 결혼(1749~1771) / 306 3.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 – 사랑의 성자 존 웨슬리(1729~1791) / 326 4. 당대의 백과사전 존 웨슬리 – 학문과 저술과 출판(1720~1791) / 346 5. 살아 있는 사도 요한 – 존 웨슬리의 인상과 성격(1725~1791) / 359 6. 영국 국교도로 살고 죽으리라! – 미래를 위한 준비(1784~1788) / 369 7. 행복한 황혼 – 말년의 세월과 작별(1788~1791) / 385 존 웨슬리 생애의 주요 사건 / 403 참고도서 / 406 주 / 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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