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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7 장 | 이사야 7장 22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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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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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제공 : CGNTV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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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7

제 7 장 … 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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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8/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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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7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이사야 7 · 1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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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6/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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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7장 성경주석 – BIBLE STORY

<이사야 7장 흐름정리>. 7~10장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한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그 중 본장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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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11/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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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5월 9일. 이사야서 7장. – 하늘품은교회

이사야 7장. 임마누엘, 우리의 유일한 소망. 1. 선지서를 읽을 때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하스는 웃시야와 요담을 거쳐 왕이 되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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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apoom.or.kr

Date Published: 6/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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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7장1-14절 – 성경묵상 – 설향목 – Daum 카페

{ 이사야 7장1-14절}. 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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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4/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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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사야 7장 주석

이사야 7장 주석. =====7: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 본. 절은 예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시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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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ntiochministry.tistory.com

Date Published: 4/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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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7 KLB – 아하스왕에게 보냄을 받은 – Bible Gateway

아하스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7 웃시야의 손자이며 요담의 아들인 아하스가 유다를 통치할 당시 시리아의 르신왕 과 르말랴의 아들인 이스라엘의 베가왕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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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9/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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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7장
이사야 7장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이사야 7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 Views: 조회수 14,1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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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 2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UbXdgX64wmU

이사야 7

아하스 왕에게 삼가며 조용하라 하시다

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2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1)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5 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

7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8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9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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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2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3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찌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5 아람과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곤하게 하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파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을 삼자 하였으나 7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 8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 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찌니라 9 (8절에 포함되어 있음) 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든지 높은데서든지 구하라 12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찌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 17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비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의 오는 날이니라

이사야 7장 성경주석

<이사야 7장 흐름정리>

7~10장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한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그 중 본장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하나를 시사해 준다. 이스라엘은 아람과 연합하여 남 왕국 유다를 침략하였고 이는 다윗 왕조를 영원히 지켜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한편, 북 왕국의 침공 때문에 온 유다 백성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자 하나님은 ‘임마누엘’ 약속을 주시면서 자신만을 굳게 의지하면 친히 대적을 물리쳐 주겠다고 하셨다.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으로 곧 메시야 예언이다.

<이사야 7장 줄거리>

1. 이사야가 르신과 베가로 인해 두려워 떨고 있던 아하스를 위로함.

10. 징조를 구할 권리를 받았으나 그것을 거절한 아하스에게 약속된 그리스도가 징조로 주어짐.

17. 그분이 앗수르를 통해 심판하실 것이 예언됨.

<이사야 7장 개역한글>

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2.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3.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찌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5. 아람과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곤하게 하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파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을 삼자 하였으나

7.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

8.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9.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든지 높은데서든지 구하라

12.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찌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

17.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비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의 오는 날이니라

18.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19.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20.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편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털과 발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

21. 그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22. 그 내는 젖이 많으므로 뻐터를 먹을 것이라 무릇 그 땅 가운데 남아 있는 자는 뻐터와 꿀을 먹으리라

23. 그 날에는 천 주에 은 일천 개의 가치 되는 포도나무 있던 곳마다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라

24. 온 땅에 질려와 형극이 있으므로 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25. 보습으로 갈던 산에도 질려와 형극 까닭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놓으며 양의 밟는 곳이 되리라

<이사야 7장 성경주석>

7:1 아하스 때에.

이 기별은 아하스의 치세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BC 734년에 전해진 기별임이 분명해 보인다(참조 16절 주석).

7:1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

앗수르의 자료들은 웃시야가 앗수르에 대하여 강경책을 썼으며, 그의 아들 요담도 동일한 정책을 유지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아하스는 그들과는 달리 앗수르에게 친선 정책을 폈다. 그는 앗수르의 도움을 얻기 위해 디글랏 빌레셀에게 성전과 자신의 궁전에서 취한 금과 은을 보냈다(참조 왕하 16:5~10 주석). 우리는 왕하 15:29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베가가 반(反)앗수르 정책을 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디글랏 빌레셀이 그를 치러 왔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리는 앗수르의 자료들을 통해서 아람의 르신도 이와 마찬가지로 앗수르에 적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에 서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들은 앗수르에 대항해서 하나의 동맹체로 연합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하스에 대한 베가와 르신의 공격은 그를 폐하고 새 왕을 그 자리에 앉히며, 또한 유다에게 앗수르에 대항하는 일에 연합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7:1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대하 28:5~15에 따르면 유다는 베가와 르신에게 참패를 당하였으며, 아카바 만(灣)에 위치한 엘랏은 아람의 수중으로 들어갔다(왕하 16:6). 하지만 예루살렘 성읍 자체는 비록 포위는 당했었지만 함락되지는 않았다(왕하 16:5).

7:2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기로되.

즉 다윗 가문의 살아 있는 대표인 아하스에게 보고되었음을 의미함. 이 공격은 특히 다윗 왕조를 향한 공격이었는데, 이는 아하스를 폐하고 다브엘 가문에서 새 왕을 세워 유다의 왕좌에 앉히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6절).

7:2 왕의 마음.

사해 두루마리 1QIsa에는 이 구절이 빠져 있다.

7:2 흔들렸더라.

(「제임스왕역」에는 “움직였더라”-역자 주). 또는 “흔들렸더라.” 아하스는 왕좌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하였다(6절). 배도한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자신의 왕국이 곧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7:3 스알야숩.

문자적으로는 “남은 무리가 돌아오다(돌아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와 그의 아들들을 백성에게 징조가 되게 하셨다(8:18). 이사야와 동시대의 인물인 호세아도 그의 아들들이 의미심장한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다(호 1:4~9). 이사야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남은 무리가 돌아올 것이라는 이 기별을 전하였다(4:2, 3; 10:21 등).

7:3 윗못 수도.

성읍이 포위를 당한 때에는 언제나 물 공급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여겨졌다. “윗못 수도”는 “성모 마리아의 우물” 또는 “동정녀의 샘”으로 알려진 기혼의 위쪽 저수지인 것으로 확인되었다(참조 제4권, 149). 이 샘은 오벨의 동쪽 가장자리에, 그리고 성전 지역의 남쪽에 있던 기드론 계곡에 위치하였다. 후에 히스기야가 그 유명한 수로인 실로암 터널을 만들어서(왕하 20:20; 대하 32:30) 물을 이 기혼 샘에서 성안에 있는 실로암 못까지 끌어들였다. 아하스 시대에는 도성이 포위되었을 때 이 수원(水源)이 성 밖에 있었을 것이므로 적과 마주치지 않고 물을 성안으로 들여오는 방법에 대하여 깊은 연구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7:3 나가서.

비록 아하스 자신은 악한 왕이었지만 여호와께서는 다윗 왕조의 몰락을 허락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으셨다(참조 창 49:10; 삼하 7:12, 13). 따라서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유다를 보존하고자 하시는 여호와의 의지를 왕에게 알리도록 이사야가 보내심을 받았다.

7:4 종용하라…두려워 말며.

하늘에 계신 여호와께서 도우신다면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왕은 하나님 신뢰하기를 거절하였으며, 그 결과 자신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 닥쳤을 때 그는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7:4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

모욕적인 표현. 겉보기엔 강력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힘이 빠져 쇠약해진 이스라엘과 아람 그리고 그 왕들은 타다가 남아서 연기 나는 부지깽이들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다 타버리고 남은 것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불빛이 한 번만 더 반짝이고 나면 그들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 처지에 있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아하스가 이스라엘이나 아람과 관련해서 지혜로운 정책을 펼치도록 지금 그 나라들이 맞이할 운명을 예언하고 계신다. 아하스가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은 힘을 잃어 가는 아람이나 이스라엘이 아니라 떠오르는 세력인 앗수르였다. 이어지는 40~50년 동안 유다는 앗수르에게 거의 삼킨 바 되었지만, 아하스는 불가피하게 앗수르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7:6 유다를 쳐서.

그들의 계획은 유다를 정복하여 그 땅을 점거하는 것이었다.

7:6 세워 왕을 삼자.

그들은 아하스를 폐하여 다윗 왕조를 몰락시키고 새 왕으로 “다브엘의 아들”을 보좌에 앉히고자 하였다. 이 새 왕의 신원은 알 수 없지만 “다브엘”이라는 이름이 “선한 신”이라는 의미를 지닌 아람어인 것으로 보아 그가 아람 사람이었던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스라엘과 아람은 다윗의 보좌에 새로운 꼭두각시 군주를 앉히기로 서로 합의하였다.

7:7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다윗의 가문은 몰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스라엘과 아람이 세운 계획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집에 대하여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다(참조 창 49:10; 삼하 7:12). 그는 사람들이 유다에 대한 자기의 목적을 방해하거나 메시야가 나오실 그 왕조를 몰락시키도록 허락지 않으실 것이었다.

7:8 육십오 년 내에.

이 예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치 않다. 이 주석에서 임시로 채택하고 있는 왕들의 연대기(참조 제3권, 107; 제4권, 76, 77; 왕상 6:1 주석)에 따르면 이 예언은 BC 734년경에 선포된 예언이다. 또한 그 어떤 연대기도 아하스가 742년 이전에 즉위했을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722년에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의해 함락됨으로 역사를 마감하였다. 현대 학자들 중에는 이 구절이 후대의 어떤 사람에 의해 삽입된 것으로 단정짓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이 말이 8절과 9절 사이의 사상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이 같은 삽입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65라는 숫자가 이사야서의 원문에 없었다고 생각할 만한 어떤 결정적인 이유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이 수가 원문에 있었다는 추정 하에 이 예언의 성취에 대한 두 가지 가능한 해석이 제기되었다. 734년부터 65년 후는 670년으로 당시는 엘살핫돈(681~669년)이 앗수르를 다스리던 때였다. 엘살핫돈(또한 그 다음에는 그의 후계자인 아슈르바니팔[성경에서는 오스납발])은 한 무리의 메소보다미아 사람들을 이전 북방 왕국의 영토로 이주시켰다(스 4:2~10). 이 일은 이스라엘이 한 국가로서 종말을 고하고 나서(BC 723/722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자신의 지배 하에 있는 민족들을 사방으로 흩어버린 앗수르의 정책은 그들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민족적 동질감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말살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따라서 열 지파에 속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이 종종 “버림받은” 민족들로 일컬어 왔던 주변의 주민들 속에 흡수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들 중 얼마가 유다 사람들이 사로잡혀 갈 때 함께 사로잡혀 가서 바벨로 유수 이후에 그들과 함께 돌아왔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이전 유다 왕국의 후신인 유다 공통체의 일원으로 돌아왔을 뿐, 그들이 이스라엘 왕국의 후신이 된 것은 아니었다.

제기된 해석들 중 다른 하나는, 65년이라는 기간이 웃시야 또는 여로보암 II세의 치세에 지진이 발생했던 때를 전후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지진은 아모스가 언급한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의 표였다. 만일 그렇다면 이사야는 여기에서 단순히 723/722년에 있을 사마리아의 함락을 일컫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해석은 가능성은 있지만 입증하기는 불가능한 해석이다. 이는 지진이 발생한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65년이라는 기간의 명확한 기산점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 이 예언의 의미를 확정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필요하지도 않다. 아마도 이 같은 구체적인 예언이 이 예언이 주어진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명확하고 의미심장했을 것이다. 이 예언에 대한 이해가 우리보다는 그들에게 훨씬 더 중요하였음이 분명하다.

7:9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아하스가 베가와 르신이 자신들의 도모를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보증의 말씀을 믿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는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히 11:6), 또한 그분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지도력에 자신을 맡길 수도 없다.

7: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의 믿음을 키워 주시기 위하여 이 같은 제안을 하셨다. 연약한 자들과 편견이 있는 자들에게 확고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종종 이 같은 징조들이 주어진다.

7:11 깊은 데서든지…구하라.

마소라 본문을 기록한 사람들(참조 제1권, 35, 36)은 자음으로 된 히브리어 본문 h‘mq s∨’lh가 하에메크 셔알라(ha‘emeq s∨e’alah)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깊은 데서 구하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70인역」의 후기 개정판들과 헬라어 번역자들은 마소라 본문이 만들어지기 수 세기 전에 h‘mq s∨’lh를 “스올(Sheol)의 깊은 곳으로”라는 의미를 지닌 하에메크 셔올라(ha‘emeq s∨e’olah)로 여겼다.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들의 문법적 조화 측면에서는 “스올의 깊은 곳에서”가 더 선호되긴 하지만, 그럴지라도 이 둘 중 어느 것이 옳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스올의 의미에 대해서는 삼하 12:23; 22:6; 잠 15:11 주석을 참조하라. 하늘의 높이와 스올의 깊이를 대조한 다른 실례들에 대해서는 신 32:22; 욥 11:8; 시 86:13; 139:8을 참조하라.

7:12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아하스는 믿기를 거절하였다. 그는 믿기를 원치 않았으며, 또한 자신이 믿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떤 것도 원치 않았다. 그는 그의 정책을 이미 확정하였으며, 그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무엇이든 그에게 자신의 정책을 바꾸도록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였다. 그가 얻고 싶은 도움은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의 도움이었다.

7:12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즉 징조를 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시험치 않겠다는 의미임. 아하스는 이를 통해서 자신의 완고함과 하나님께 대한 그의 반역의 정신을 드러내었다. 하나님이 그를 도우며 지도하시겠다고 제안하셨지만 그는 하나님 대신에 그 도움을 앗수르에 의존하기로 선택하였다. 아하스는 하나님과는 어떤 일도 함께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으며, 또한 이 같은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 보였다.

7:14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아하스 자신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로부터 그에게 한 징조가 주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이 징조는 그가 선택한 징조가 아닌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징조가 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다가올 위기의 때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신실함을 유지하며 살아갈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그가 그들과 함께하실 것임을 보증하는 말씀을 주시는 것을 적절한 것으로 여기셨다. “남은 무리가 돌아오다”라는 의미의 스알야숩이라는 이사야의 첫째 아들의 이름(참조 3절 주석; 8:18)이 그 나라에 이 같은 징조로 주어져 있었다. 그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다가올 앗수르의 침공 시에 한 남은 무리가 구원받게 될 것임을 생각하였다.

7:14 징조.

히브리어 오트(’ot), “징조”, “표”, “기호”, “생각나게 하는 사람(것).” 구약에서는 오트가 기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본질적으로 오트는 언약의 무지개(창 9:12), 안식일(출 31:31; 겔 20:12, 20), 문설주에 뿌려진 유월절 양의 피(출 12:13),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향로(민 16:38) 등 중요한 영적 진리를 생각나게 하는 가시적인 것들이었다. 애굽에서의 “표징들”(출 4:8; 7:3; 신 4:34 등), 기드온(삿 6:17)과 히스기야(왕하 20:8, 9; 사 38:7, 8)에게 주신 표징들은 협력을 이끌어 내고 믿음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기적적인 징표들이었다. “징조”는 언제나 예외 없이 영감의 말씀이 그것과 연결시키고 있는 영적 진리 혹은 예언적 기별을 확증하거나 생각나게 하기 위한 어떤 사물이나 사건으로 이루어졌다. 거기에는 기적적인 요소가 포함될 수도 있고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다. “징조”의 핵심은 그것을 받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들의 눈으로 그것을 봄으로 믿음의 눈이 떠져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약속들을 굳게 붙잡도록 하는 데 있다. 지금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그렇게 하도록 요청하시는 것처럼(사 7:11) 어떤 사람이 “징조”를 요구했을 때든지 혹은 하나님께서 직접 “징조”를 선택하셨을 때든지, 어떤 경우든 상관없이 “징조”는 항상 그것이 주어지는 사람들의 눈에 실제로 보이도록 주어졌다.

이와 관련해서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사 8:18)고 한 이사야의 선언을 주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선언은 그것이 7:14에 약속된 “징조”와 동일한 예언적 절차를 통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에서 그 중요성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각각 “여호와가 구원하시리라”, “남은 무리가 돌아올 것이다”, “약탈을 신속히 하고, 전리품을 재촉하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들인 이사야, 스알야숩, 마헬살랄하스바스는 모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있을 임박한 앗수르의 유다 침공과 관련된 다가올 사건들에 대하여 웅변적으로 말하였다. 이사야와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께서 북방 왕국인 이스라엘이 몰락하고 사로잡힘을 당하던 그 위기의 때에 가능하다면 아하스와 유다의 협력을 얻어내고자 고안해 내신 “징조들”이었다.

7:14 너희.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복수로 되어 있다. 13절에 비춰볼 때 여기서 “너희”는 “다윗의 집”, 곧 지금 아하스가 살아 있는 대표자로 있는 유다의 왕족을 일컫는다. 또한 1, 2절에 근거해 볼 때 “다윗의 집”이라는 표현은 아하스 자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14절의 복수명사 “너희”를 오늘날 편집자가 쓰는 “우리”라는 용어에 필적하는 표현의 한 형태로 여기며, 또한 이에 근거하여 그 “징조”가 “다윗의 집”의 살아 있는 대표자이며, 유다의 왕과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아하스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진 징조였다고 결론짓는다. 또한 복수명사 “너희”가 아하스와 다윗의 보좌에 오른 그의 후계자들을 함께 일컫는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7:14 처녀.

히브리어 알마(‘almah). 이 단어는 단수와 복수 모두 합하여 구약에 9회밖에 나오지 않는데(창 24:43; 출 2:8; 대상 15:20; 시 46편의 표제; 68:25; 잠 30:19; 아 1:3; 6:8; 사 7:14), 이 중에 문맥을 통해서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곳은 한군데도 없다. 이 불확실성이 서로 다른 두 견해, 곧 알마를 “처녀”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와 “젊은 여자”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단어가 이 둘 중 오직 하나만을 의미하는 것임을 증명하기 위한 깊이 있는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각 방향에 대한 이 연구들로 인해 한층 두터워진 증거들도 모든 히브리어 학자들을 납득시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히브리어 사전 편찬자들은 알마가 “[성적으로] 성숙하다”라는 의미의 알람(‘alam)이라는 어원에서 파생되었다는 것과 알마라는 단어가 임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의 “젊은 여자”를 나타낸다는 것에 동의한다. 알마와 이 단어의 남성형인 엘렘(‘elem)은 둘 모두 육체적으로 성숙한 상태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단어들이 동정이나 처녀성을 의미하는지 혹은 결혼한 상태를 나타내는지에 대해 어떤 확실한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아 6:8, 9에서 알라모트(‘alamot[알마의 복수형]. 「개역한글판」에는 “시녀”-역자 주)가 “완전한” 젊은 여인과는 대조적으로 “왕후”나 “비빈”과 같은 부류로 구분된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히브리어 본문에 근거해 보면 사 7:14의 알마는 이미 임신한 경험이 있는 여자일 수도 있다(아래 “잉태하여”에 관한 주석을 참조하라). 만일 이사야가 이 말을 할 당시에 그녀가 아직 처녀였다면 우리는 예수의 경우와 유사한 또 하나의 기적적인 출생에 직면하게 된다. 이 같은 경우에는 매우 심오한 신학적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더 상세한 논의를 보려면 성경 해석의 제문제(Problems in Bible Translation), 152~157을 참조하라.

명확하게 처녀성을 묘사하고 있는 히브리어 단어는 브툴라(betulah)이다. 이 단어는 구약에 50회 등장하는데, “처녀” 외에는 다른 어떤 의미로도 쓰이지 않았다. 성경에서 브툴라는 남자들과 가까이 한 적이 없는 결혼 가능한 여자를 뜻한다. 대개 젊은 여자를 가리키지만 실제로는 젊고 늙음에 상관이 없다. 알마라는 단어가 브툴라나 여기에서 파생된 다른 단어들처럼 처녀성과 관련해서 쓰인 경우는 한 번도 없다. 브툴라는 이에 상응하는 남성 명사는 없지만 “최고의 젊은이”, “뛰어난 젊은이” 등과 같은 의미를 지닌 바후르(bah.ur)라는 단어와 짝을 이루어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엘렘과 알마가 육체적인 성숙을 의미하듯이 바후르와 브툴라는 히브리 사회에서 최고의 이상적인 젊은 남녀를 묘사한다. 도덕적 순결과 처녀성이 명백히 언급될 때는 예외 없이 언제나 바후르와 브툴라가 쓰인다. 이 같은 경우에 엘렘 및 알마와 쓰인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이사야는 “청년(바후르)이 처녀(브툴라)와 결혼함같이”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기뻐하신다고 말한다(사 62:5). “정결한 처녀”(파르쎄노스[parthenos], 고후 11:2)인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시온이 왕하 19:21; 사 37:22; 62:5; 렘 14:17; 31:4; 애 1:15 등에서 한 번도 알마로는 일컬어지지 않고 항상 브툴라로만 일컬어진 데에는 매우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이 표상적으로 알마로 일컬어진 적은 한 번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브툴라로 적절히 묘사된 교회보다 못한 교회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나이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직 품성에만 관심이 있으시다. 이사야는 브툴라라는 단어를 모두 다섯 번 사용하였다(23:4, 12; 37:22; 47:1; 62:5). 만일 그가 7:14의 “젊은 여자”가 엄격한 의미의 “처녀”로 이해되기를 바랐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그가 여기서도 필시 브툴라를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태는 사 7:14을 인용하면서 엄격히 “처녀”만을 의미하는 파르쎄노스(parthenos)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마 1:23 주석을 참조하라.

사 7:14절의 문맥과 “징조”와 “처녀”로 번역된 단어들과 관련된 전술한 사실에 근거해 볼 때 여기에 언급된 예언은 이 장에 설명되어 있는 역사적 상황의 틀 안에서 머지않아 성취될 예언임이 분명하다. 마태가 이 예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예언이 또한 장차 오실 메시야를 가리키고 있음도 분명하다. 구약에는 이 예언처럼 일차적으로는 머지 않은 장래에 적용되고, 그 다음에는 먼 장래에 적용되는 이중 적용 예언이 많이 있다(참조 신 18:15 주석).

7장의 이야기에서 이사야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 말고는 이 “젊은 여자”의 신원에 대하여 더 언급된 것은 없다. 하지만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녀가 어떤 특정한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그 젊은 여자”로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그 여자가 당시에 현존했던 인물이었는지의 여부, 또한 아하스나 이사야가 당시에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 등은 확실히 알 수 없다(참조 Gesenius, Hebrew Grammar, § 126. “사자”가 히브리어로는 “그 사자” 곧 도망가는 사람을 쫓는 특정한 사자로 되어 있는 암 5:19도 참조하라). 어떤 사람들은 14절에 언급된 “젊은 여자”의 신원에 대하여 7장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에 근거해서 이 예언은 우리는 알지 못하나 아하스와 이사야는 잘 알고 있던 한 사람을 통해서 성취된 예언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또한 이사야 시대에 이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기 위해서는 약속된 아들의 어머니, 곧 마리아같이 엄격한 의미의 처녀가 있어야만 했다는 견해를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같은 견해는, “징조”는 본질상 기적적인 것이어야만 하며 알마(‘almah)라는 단어는 단순히 “젊은 여자”가 아닌 반드시 엄격한 의미의 “처녀”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확신에 근거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신다면 그는 얼마든지 이 일을 가능케 하실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아이는 그리스도처럼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나타내는 아이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유일무이한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아하스가 당시에 스물한 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청년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왕하 16:1, 2; 참조 제3권, 107) 이 특정한 “젊은 여자”가 그의 아내였거나, 아니면 당시에 왕의 주변에 현존하던 어떤 다른 젊은 여자였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와는 달리 이사야가 여기에서 자신이 아하스 왕을 만나러 갈 때 그와 동행했을 가능성이 있는 8:3에 나오는 “그 여선지자”(「개역한글판」에는 “내 아내”-역자 주)인 자신의 아내를 일컫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사람들도 있다(참조 8:3 주석). 이 일이 이사야의 사역 초기에 있었으며, 이 일 후에도 선지자로서의 그의 사역이 반세기 혹은 그 이상 계속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해 볼 때(선지자와 왕, 382; 참조 1:1; 6:1) 이사야 자신이 그때에 젊은 청년이었음이 분명하며, 따라서 당시에 그의 아내가 “그 젊은 여자”로 일컬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7:14 잉태하여.

히브리어 동사는 완료시제로 되어 있다. 이는 대개 완결된 행위를 나타내기 때문에 “잉태하였다”로 번역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장차 있을 행위를 나타내는데 종종 완료시제를 사용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예언이 분명히 성취될 것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미래의 사건을 이미 성취된 사건처럼 이야기하였다(참조 제1권, 25, 26). 이에 기초해 볼 때, 이 단어는 “잉태할 것이다”로 번역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어떤 번역이 영감의 말씀이 의도하고 있는 바를 더 정확하게 반영하는지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 히브리어 단어에 대한 가장 자연스런 해석은 이사야가 이 말을 할 당시에 징조가 될 아이가 이미 잉태된 상태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라는 견해를 지니고 있다. 이 견해는 14절에서의 시제의 일치와도 조화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젊은 여자”가 아하스의 아내 혹은 왕족 중에 한 사람인 다른 젊은 여자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예언이 아하스에게 주어진 “징조”였으며, 아마도 이사야는 그 아이가 잉태된 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며, 또한 이 두 사람 모두 당시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성(性)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하지만 “징조”가 반드시 기적적인 특성을 지녀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14절 “징조”에 관한 주석을 참조하라).

7:14 임마누엘.

히브리어 임마누 엘(‘Immanu ’El). 문자적으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곧 문맥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우리를 우리의 원수들에게서 건져내신다는 의미이다. 이 이름의 메시야적 의미에 대해서는 마 1:23 주석을 참조하라. 유다가 북방 왕국과 함께 멸망하지 않을 것임을 가리키는 “여호와가 [유다를] 구원하시리라”라는 의미의 이사야와 “남은 무리가 돌아올 것이다”라는 의미의 스알야숩(3절), 그리고 “약탈을 신속히 하고 전리품을 재촉하라”라는 의미의 마헬살랄하스바스처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당시에 또한 더 본질적으로는 곧 발생할 사건들과 관련해서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나타내 보여 주는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하나의 징조로서의 이름이었다. 더 상세한 설명은 8:1~3, 8, 10 주석을 참조하라. 임마누엘이라는 징조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하고 복 주시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하실 것임을 증언하게 될 것이었다. 다른 나라들이 패하여 몰락할 때에도 유다는 여전히 보존될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에도 유다는 살아남을 것이었다. 산헤립이 유다 땅을 쳐서 그 나라를 멸하려고 왔을 때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는 임마누엘과 관련된 이사야의 말에서 확신과 용기의 근원을 찾아냈음이 분명하다. 히스기야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용기를 북돋우어 주기 위한 자신의 기별에서 그들에게 “우리와 함께하시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왕하 32:7, 8)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7:14 하리라.

“네가…로 부를 것이다”라고 되어 있는 필사본들도 많이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히브리어 본문에는 문자적으로 “그녀가…로 부를 것이다”로 되어 있다. 전자에 따르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 아이는 왕족의 일원이 될 것이었으며, 또한 아하스의 아내나 아니면 아하스가 그 자손의 이름을 지을 권위를 지닌 다른 한 젊은 여자가 그 아이의 어머니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보다는 “그녀가…로 부를 것이다”가 더 정확한 독법일 것으로 여겨진다.

7:15 그가…알 때에.

문자적으로는 “그의 아는 것에(히브리어 르[le]).” 이는 곧 “그가 알 때에”라는 뜻이다. 전치사 르는 “저물 때에”(창 24:63), “서늘할 때에”(창 3:8), “저녁때에”(창 8:11), “출전할 때”(삼하 11:1) 등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임마누엘이라 불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만큼 충분히 자랐을 때에 그는 “버터와 꿀”을 먹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아이가 맛을 알기 시작하는 2, 3세 때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도덕적 판단력이 충분히 발달되는 12세경을 가리키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당시로부터 2, 3년이 지나면 BC 732년이 되고, 12년이 지나면 722년경이 된다(참조 사 7:1 주석). 732년에는 다메섹이 멸망하였고,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사마리아가 멸망하였다. 당시에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남아 있던 소수의 사람들은 그 황무한 땅에서(참조 17~20, 23~25절 주석) 풍성한 식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었다(참조 21, 22절 주석). 참조 8:4 주석.

7:15 버터와 꿀.

성경 시대의 “버터”는 응고된 우유였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동방의 여러 지역들에서 진미로 여겨지고 있는 식품이다(참조 출 3:17; 삿 5:25).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곧 풍요로운 땅이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응고된 우유와 꿀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곧 식물이 풍성함을 나타낸다. 그 땅은 황무하게 될 것이었지만, 그럴지라도 앗수르의 침공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 땅에 남아 있을 소수의 사람들은 충분한 양의 식물을 소유하게 될 것이었다(사 7:22).

7:16 대저.

히브리어 키(ki). 어떤 사람들은 16절의 “아이”가 3절의 “아들 스알야숩”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연결사는 이 “아이”가 14, 15절의 “아들”과 동일한 인물임을 보여 준다. 키(ki)라는 단어는 16절을 그 바로 앞에 나온 구절과 분리될 수 없게 만든다. 게다가 16절의 “아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 “그”(「개역한글판」에는 “이”-역자 주)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아이는 바로 직전에 언급된 아이(이 경우에는 임마누엘)로 이해해야 한다.

7:16 알기 전에.

참조 15절 주석.

7:16 두 왕의 땅이 폐한 바 되리라.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한 르신과 베가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한 바 있다(4절). 이제 그는 곧 태어날 아이가 두 살도 채 되기 전에 이 왕들이 보좌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선언한다. 만일 아하스가 736/735년에 왕위에 올랐다면 이사야와 나눈 이 대담은 735년 말이나 734년 초에 있었던 일이 된다.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III세는 735년에 아르메니아 지역의 우라르투(Urartu) 원정에 참여하였으며, 734년에는 팔레스타인을 그리고 732년에는 다메섹을 공격하였다(참조 제3권, 78). 앗수르는 북서아시아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 잔악한 노력을 감행하였다. 베가와 르신은 그들의 반앗수르 출정에서 아하스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는데, 이는 그가 이미 디글랏 빌레셀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왕하 16:5~7). 만일 유다의 지도자들이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이름 가운데 함축되어 있는 약속을 신뢰하기만 하였다면 그 나라는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징조로서 주어진 임마누엘이라는 아이가 두 살 경이 되면 베가와 르신의 치세는 그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었다. 그 일은 732년, 곧 디글랏 빌레셀이 다메섹과 전쟁을 벌인 두 해 중 두 번째 해에 일어날 것이었다. 이 예언이 성취될 시기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예언하고 있는 사 8:3, 4과 비교해 보라. 참조 왕하 15:30; 16:9.

7:17 여호와께서…임하게 하시리니.

아하스는 이미 자신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 대신에 그는 앗수르를 의지하고자 계획한다(왕하 16:5~7). 하지만 이사야는 그에게 앗수르가 유다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리려 고통의 원인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사 7:17~20; 8:7, 8; 10:6). 후에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할 때 유다가 애굽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나 이 역시 헛된 일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었다(30:1~3; 31:1~3, 8). 선지자는 지금 아하스에게 이 모든 일을 명백히 가르쳐 주고자 애쓰고 있다.

7:17 앗수르 왕.

암흑과 위기의 날들이 유다 앞에 놓여 있었다. 이날들은 두 세기 전 여로보암이 반역을 일으킨 이후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고통의 날들이 될 것이었다. 앗수르 왕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유다도 침공할 것이었다. 만일 유다가 여호와께로 돌아섰다면 그가 유다에게 복을 베푸셨을 것이며, 또한 앗수르 사람들이 그 땅을 치러오도록 허락치 않으셨을 것이었다. 이사야는 왕과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전력으로 노력하였지만 그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앗수르가 그 땅을 침공하도록 허락하실 것이었다.

7:18 파리[를]…부르시리니.

문자적으로는 “휘파람으로 파리를 부르다.” 이는 곧 멀리 떨어져 있는 애굽 군대를 호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애굽 제24왕조의 치세는 750~715년경이었다. 하지만 이 왕조의 치세에 누비아(Nubia)의 강력한 추장 중 한 사람인 피안키(Piankhi)가 또 하나의 왕조를 세워서 마침내 그의 지배권을 애굽의 남부까지 확장하였다. 이 에디오피아계의 25왕조는 715년경부터 663년경까지 애굽을 통치하였다. 산헤립이 유다를 치러 왔을 때(아마도 그의 두 번째 유다 침공 때[참조 제3권, 87, 88]) 25왕조의 네 번째 왕(참조 제3권, 72, 73, 107)인 디르하가(Taharka. 참조 제3권, 72, 73, 87, 88; 왕하 18:13; 19:9 주석)가 앗수르군의 진군을 위협하였다(참조 왕하 19:9; 사 37:9). 유다 백성 중 상당수가 애굽이 자신들을 앗수르로부터 건져내 줄 것으로 생각하고 그 나라를 의존하였던 듯이 보인다(왕하 18:21). 이 “에디오피아계”의 애굽 왕이 여기에서 “파리”로 불리는데, 이는 파리가 해충인 것처럼 애굽 사람들도 유다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성가신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사야는 애굽에게 도움을 구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어리석음을 지적한다(사 30:1~7; 33:1~3). 유다를 앗수르로부터 건져내실 분은 애굽이 아닌 하나님이셨다(31:4~9; 37:33~36).

7:18 벌.

앗수르가 벌에 비유된다. 여기서 벌은 끈질기고 무서운 적을 상징한다(신 1:44; 시 118:12). 벌침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치명적인 경우는 거의 없다. 앗수르가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로서(사 10:5~7) 유다를 치러 오긴 하겠지만 그로 인해 유다가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7:19 다 와서.

곤충들의 공격에 대한 비유가 계속 이어진다. 애굽 사람들과 앗수르 사람들이 파리와 벌처럼 그 땅으로 와서 그 나라를 침입할 것이었다.

7:20 그날에는.

즉 그때에는. 선지자가 유다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추이에 관해서 더욱 상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7:20 하수 저편에서.

유브라데강을 의미함(참조 수 24:2 주석). 앗수르는 회개치 않는 유다를 황무케 하고 또 그 오만함을 낮추기 위해 여호와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될 것이었다. 사 10:5~7에 사용된 이와 유사한 비유와 비교해 보라.

7:20 세내어 온 삭도.

여기에서 비유가 바뀐다. 이사야는 이전에 유다를 그 몸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병자에 비유한 적이 있다(1:5, 6). 지금은 이 나라가 수염을 포함해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의 모든 털을 다 깎이는 극도의 모욕을 당해 마땅한 사람에 비유되고 있다. 동방 사람들은 수염을 잃어버리는 것을 매우 큰 수치로 여겼다.

7:21 한 어린 암소.

앗수르의 침공 시에 그 땅의 거의 모든 것이 약탈당할 것이었다. 산헤립은 자신이 “셀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가축들”을 취해 갔다고 주장한다. 앗수르 사람들이 말하는 “큰 가축”은 소를, “작은 가축”은 양과 염소를 의미한다. 비록 대부분의 가축들이 모두 끌려가고 없을지라도 이곳저곳에 흩어져서 남아 있을 개개인들은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어 마리를 잘 지켰다가 키울 수 있게 될 것이었다.

7:22 그 내는 젖이 많으므로.

하지만 여호와께서 그 땅에 남아 있게 될 남은 무리는 버리지 않으실 것이었다. 그들은 하늘이 내리는 복을 받아서 “버터와 꿀”을 먹게 될 것이었다. 비록 사람이 저주를 초래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남은 무리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이었다. 참조 15절 주석.

7:23 은 일천 개.

즉 은 1000세겔(참조 창 20:16 주석; 애 8:11). (「제임스왕역」에는 “은 일천 개의 가치 되는 일천 그루 포도나무가 있던 곳마다”-역자 주). 포도나무 한 그루의 값이 은 한 개라면 이는 매우 비싼 것이다. 따라서 이 포도나무들은 극상품이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는 최상의 포도원이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황무한 땅으로 변해버린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포도원”이 저주를 받았을 때 그곳에서는 질려와 형극이 돋아났다(사 5:6).

7:24 살과 활을 가지고.

사람들이 그 나라에서 한때는 잘 경작되던 땅이었지만 지금은 황무한 땅으로 변해 버린 지역들에 숨어 있는 맹수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다닐 것이었다. 혹은 사람들이 이 지역들에서 놀이 삼아 사냥을 할 것에 대한 묘사일 수도 있다.

7:25 질려와 형극.

한때는 평화롭고 비옥했던 농장이 황무한 땅으로 변해 버릴 것이었는데, 이는 그 주인들과 관리인들이 다 포로로 잡혀가서 다시는 그들의 고향 땅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7:25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히브리어 본문에는 “네가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로 되어 있다.

참고자료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7권, 시조사.

– 「열린노트성경」, 아가페출판사.

매일말씀묵상. 5월 9일. 이사야서 7장. > 매일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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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7장. 임마누엘, 우리의 유일한 소망

1. 선지서를 읽을 때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아하스 는 웃시야와 요담을 거쳐 왕이 되었는데, 유다 역사에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한 왕이라 할 만한 인물입니다. 본문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베가 왕과 아람(혹은 수리아)의 르신 왕이 연합하여 남왕국 유다를 치러 온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주전 735년). 큰 나라인 앗수르의 세력 아래 들어간 아람과 북이스라엘(본문 에브라임)은 독립을 위해 힘을 모았고, 유다를 끌어들이려 했지만 앗수르의 세력에서 벗어나 있던 유다가 응하지 않자, 두 나라는 연합하여 무력으로 시위를 한 것입니다.

2. 북이스라엘-아람 연합군은 하루에만 유다 용사 십이만 명을 죽였고 왕자와 대신들을 죽였으며 이십만 명을 사로잡아갔습니다(대하 28:6~8). 하지만 선지자 오뎃의 중재로 붙잡혀간 포로들은 돌아오게 됩니다(대하 28). 다 이긴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아람 연합군은 유다에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삼아 세우려고 했고, 그 일은 실패하게 됩니다(1,6).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7). 하지만 이 전쟁은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들을 사시나무 떨듯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2).

3. 이 때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말씀을 주셔서 , 아하스 왕에게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악한 권력자에게 나아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겠지만 ,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겼을 것입니다 . 그러니 왕 앞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아하스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아셨고(아무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이사야를 그곳,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로 보내셨습니다(3).

4.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사야를 보내실 때 , 그의 아들 스알야숩과 함께 가라고 하신 일입니다 . 왜 하나님께서는 아들과 함께 이사야를 보내셨을까요 ? 이사야의 아들 , 스알야숩의 이름의 뜻은 ‘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 는 것입니다 . 즉 , 스알야숩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의 메시지였습니다 . 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연합한 두 왕 르신과 베가는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고 낙심치 말라고 아하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4). 남 유다를 자신들 마음대로 하려는 두 왕의 뜻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7).

5. 오히려 65 년 안에 에브라임 ( 북 이스라엘 ) 은 망하여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말씀을 주셨습니다 (8~9). 실제로 주전 732년 아람이 앗수르에게 진압되었고,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함락되었으며, 이 예언 후 65년이 지난 주전 669년에는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추방과 외국인들의 이스라엘 이주를 통해서 나라가 다시 설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6. 그러나 문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아하스왕이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9b).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으면 너희도 정녕 굳게 서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그런데 슬프게도 아하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앗수르를 의지하는 어리석은 시도를 함으로써(왕하 16:7), 영적 파산의 길로 가고 맙니다.

7. 오늘 본문의 아하스왕의 모습은 불신자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 그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않았습니다 .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 이사야는 그에게 하나님의 구원 약속에 대한 징조를 구하라고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11~12). 그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던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하지만(신 6:16)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나는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나를 시험하지 마세요”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8. 아하스는 징조 구하는 것을 거절하였지만 , 이사야는 그에게 ‘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는 놀라운 징조와 약속을 주었습니다 (14). 이는 실로 구약 최고의 그리스도 예언입니다 . 여기서 처녀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마’가 젊은 여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이 단어는 정확하게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 성적으로 순결한 여자를 가리킵니다. 주전 200년 경 칠십인 경을 번역한 학자들은 이 단어를 번역할 때, 처녀(동정녀)를 뜻하는 헬라어 ‘파르테노스’를 채택했습니다.

9.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는 아하스 시대에 성취되었습니다 . 그렇다면 그 ‘아이’(16)는 8:3에 언급되는 이사야의 아이를 가리키는지, 또는 제3의 인물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지만, 이 아이가 태어나서 선악을 가릴 줄 알게 되는 12~13세가 되기 전에 아람과 이스라엘은 약탈을 당하고, 연합국의 두 왕들은 왕위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15~16).

10. 실제로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이 약탈을 당한 것은 이때로부터 2~3년이 될 때(주전 732년) 일어났고 12~13년이 되던 주전 722년에는 이스라엘이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심판은 단지 아람과 이스라엘에만 임하지 않고 유다에도 임하게 될 텐데, 그날은 앗수르가 쳐들어오는 날이 될 것입니다(17). 하나님은 애굽의 파리와 앗수르의 벌을 부르셔서 유다에 오게 하시고 유다는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8~19). 앗수르는 유다를 수치스럽게 할 것이고(20) 사람들은 최소한의 소유와 음식으로 연명하게 될 것이며(21~22)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은 포도원(포도나무 한 주에 은 한 세겔이라고 한 것은 당시 최고의 가격이었다)도 황폐하게 되고 농사짓던 모든 곳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23~25).

11. 어떤 상황에서도 , 소망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구원,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당면한 것에서의 구원을 바랄 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구원의 문제를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보여주셨습니다. “ 처녀가 잉태하여 낳을 아들을 통한 구원 ” 이며 , 그것을 통하여 임마누엘 하실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입니다 .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 이것이 오늘 우리의 소망입니까 ? 임마누엘로 인하여 오늘 당면한 문제들을 이겨내십니까 ?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유일한 소망은 ‘ 그리스도 안에서 ’ 만 주어집니다 . “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9 절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 끝날 까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신뢰하며 오늘을 살게 하옵소서. 굳게 믿어, 굳게 서는 인생이 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한 신뢰가, 날이 갈수록 더욱 굳건해지게 도와주옵소서. 때로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일이 있더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함께 하심으로 오늘도 승리하도록 은혜로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7장1-14절

2020년 9월 28일 월요일

◑ 오늘의 말씀 묵상 ◑

❈ 할렐루야 !!

– 오늘은 즐거운 추석 연휴가 기다리고 있는 월요일 아침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 어느 해 보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무겁고 힘들게 지나는 중에 추석을 기다리고 있는 만큼, 가정마다 사랑과 위로와 격려가 가득하시기를 바라며, 특히 크고 작은 일에 갈등이 없는 명절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 지금 우리 민족이 생각 밖에 서해안 공무원 피살 사건으로 인하여 많은 갈등과 번민의 소리로 어수선하게 들리는 현실인 만큼 기도하고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도록 잘 중제가 되길 기대합니다.

– 원망과 갈등을 넘어 정말 좋은 화목의 기회가 되며,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되고 우리 민족이 평화와 번영의 웃음꽃이 피는 그 날이 올 수 있도록 소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한주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본 문 ◑

{ 이사야 7장1-14절}

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2. 어떤 사람이 다윗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5. 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

7.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8.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 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9.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려느냐?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제 목 ◑◑◑◑

◗◗ 하나님의 징조로서 임마누엘 하심

◑◑◑ 본문 이해와 요약 ◑◑◑

◗ 7장에서는 이사야 선지자는 아람의 르신과 북이스라엘의 베가의 침입을 받아 심히 두려워하는 아하스 왕과 백성들에게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고 반드시 위기를 구원하실 하나님 만을 믿으라 예언 하면서 한 징조로 제시하여 임마누엘 평강의 복을 받아 누리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악한 왕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 보다는 인간적인 방법과 계산으로 자기에게 닥친 위기와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불신앙과 고집분통인 어리석은 왕의 모습입니다.

– 그래서 그 방법으로 앗수르 왕에게 줄 뇌물을 마련하기 위해 성전을 훼파하였으며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아하스는 하나님의 악의 도구로 사용 된 앗수르 왕에게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실 때는 무조건 정죄하지 않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셔서 돌아오도록 경고 하신 후에 이것을 거부하면 그 때는 무섭게 버리고 심판을 결정하십니다.

☞ 그래서 7장에 대한 분석과 이해를 돕는다면, 먼저 1,2절에서 유다를 대적하기 위해서 아람과 에브라임이 동명하게 됩니다.

– 그래서 3-9절에서 이사야가 아하스 왕을 찾아가서 국제 상황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권면합니다.

– 그리고10-13절에서 불신앙인 아하스 왕이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기를 거절하게 됩니다.

– 그러나 14-16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메시야의 징조를 전하며 반드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짐을 전합니다.

– 그리고 17-25절에서 앗수르를 통하여 유다에게 큰 위험이 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 이제 적용할 수 있는 본문 안에 중심 구절 핵심 의미를 돕는다면, 먼저 1,2절에서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앙의 면모는 시련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 한편 3-6절에서 사단의 어떠한 방해와 훼방 가운데서도 성도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변함없습니다.

– 그리고 7절에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시도하는 악인의 도모는 모두 허사일 뿐입니다.

– 또한 8,9절에서 성도가 항상 기억해야 할 삶의 원리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낸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10,11절에서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만한 충분한 증거인 말씀이 강하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 한편 12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자리에 설 때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 그리고 14절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이성이나 경험에 의해 제한 될 수도 없고, 결코 제한되어서도 안 됩니다.

◗ 결론적으로 남유다의 가장 악하고 고집불통인 아하스 왕에게 다윗의 언약 때문에 참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사람 의지 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 하면 위기가 극복 될 것을 권면하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 전혀 믿음 없는 자에게 기대를 걸고 선포하시는 임마누엘의 약속은 변함 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 성령께서 언제나 성도와 함께하시어 구원을 베풀며 모든 길을 인도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하고 유다에게는 징계를 받으나 결국은 싸매시고 구원의 은총이 임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 성도는 임마누엘의 축복 예언이 완성 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법을 좇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적용한다면 ◖◖◖

♥ 오늘의 핵심 (P.S)

☞ 임마누엘을 믿으면 평강의 복을 누린다. (이사야 7장 14절)

◈ 본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이성이나 경험에 의해 제한 될 수도 없고, 결단코 제한되어서도 안 됩니다.

– 14절을 살펴보면 “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 하나님께서 불신앙으로 타락한 아하스에게 믿지 못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의지는 여전히 앞으로 되어 질 일을 말씀하신 징조가 나옵니다.

– 손바닥으로 태양 빛을 가린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여실히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 그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사실인데, 이것은 우리 인간의 경험이나 이성적 판단을 초월하시는 참으로 놀라운 징조입니다.

– 여기서 인간 의학적 생물학적으로 볼 때, 처녀가 아이를 잉태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그래서 완악한 아하스 왕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경험과 이성을 앞 내세우는 왕이기에 본 절의 예언을 사실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불신자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 본문 말씀 중에서 ‘처녀’ 라는 말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결혼하지 않고 남자를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린 소녀입니다.

– 오늘날도 이성과 경험을 내세우는 자들은 이 예언을 처녀가 아닌 젊은 여자로서 결혼하였으나 오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던 불임의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게 될 것임을 예언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는 분명 아주 젊은 처녀입니다.

– 그런데 문제는 이 예언이 아하스 시대의 징조와만 관련 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예언한 것인데, 이것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 성경의 예언들은 많은 경우 복합성을 띄고 있기에 가까운 때에 일어날 일과 보다 먼 시대에 일어날 일을 동시에 오묘하게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마태복음 1장 23절을 살펴보면 요셉에게 현몽한 주의 사자는 이 예언을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 본절의 예언은 직접적으로 아하스 시대에 있을 일을 예언한 것인 동시에 그때로부터 약 700여년 후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예언한 것입니다.

– 이성과 경험만을 내세우는 자들이 잘못된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가 이루시는 일들을 불완전하고 제한된 자신의 지식과 경험, 사고만으로 판단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 전 5:2절에서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고후 10:5절에서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 그렇기에 사람이 자신의 짧은 식견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그 행사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 그렇다면 나에게는 이런 짧은 식견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없는지를 살펴봅시다.

– 온전한 지혜와 한량없는 지혜를 지니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자랑하면, 미련하기 그지없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돌아봅시다.

– 먼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안경을 쓰고 인정하는 자세와 그 말씀과 행사를 신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 그리할 때 인간의 제한 된 능력과 힘을 따라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도우심을 힘입어 더욱 온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에게는 큰 은혜와 위로와 용기이며 영원한 소망으로 평강의 주인공입니다.

– 다시 14절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처녀가 낳을 아이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는데,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 하나님은 처녀가 아이를 넣는 것을 징조로 당신이 주신 약속의 진실성을 보장함과 동시에 그 아이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심으로 당신이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심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여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며,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관계가 좋을 때만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관계가 좋든 나쁘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 자기 백성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함께 하신다는 것이며, 하나님은 항상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슬픔과 기쁨의 때는 물론 환란과 고난의 때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 그런데 우리는 역경과 환란의 순간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 우리가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과 고통의 구덩이 속으로 몰아넣었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 중에 함께 계십니다.

– 유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멸망하고 그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을 때도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아주 버린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포로로 끌려가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가셨고, 자기 백성들과 함께 아픔과 고통을 나누셨습니다.

– 유다 백성들의 포로 됨으로 인하여 유다 사람들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우상 숭배자들의 조롱과 멸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나눈 고통이었습니다.

– 이렇게 바벨론까지 가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 하나님은 결국 자기 백성들을 이끌고 이스라엘 본토로 귀환하셨습니다.

– 이사야40장 3절에서 “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바와 같이 어떠한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유다 백성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 진정한 부모는 자기 자녀들을 징계할지언정 버리지는 않으시고 자기 자식이 아무리 못나도 늘 그와 함께 합니다.

– 또한 자식이 고통을 당하게 되면, 같이 고통스러워하며 할 수만 있으면, 그 고통을 자기가 짊어지려고 합니다.

– 창 35장 3절에서“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라고 하였습니다.

– 하나님은 진정으로 인자하시고 사랑하는 아버지이가 되시기에 성도를 위하여 하나뿐인 독생자 아들까지 내어주실 정도로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 그런즉 성도는 죄와 허물로 징계를 받을 때나 희망을 가질 수 없을 정도의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고 변함없는 소망을 품고 당당하게 고난과 환란을 딛고 일어섭시다.

– 계 21장3절에서“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라고 하였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에 성령님께서 묻는 것은 “ 처녀의 몸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나신 사실을 확실히 믿는 믿음인지?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동행 하시는 임마누엘이 확실하게 믿어지는 믿음인지? 아니면 현실을 바라보고 염려하고 걱정하며 근심에 눌려 있는 신앙은 아닌지? 앞으로 칠 흙 같은 어두움과 절대 위기의 상황이 온다하여도 임마누엘 하나님을 신뢰하고 당당하게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겠는지? 묻고 있으니 스스로 자문자답 해 봅시다. 임마누엘을 믿으면 평강의 복을 누리는 주역이 됩니다. 임마누엘은 구원 계획이요, 완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 지금 우리가 ‘코로나19’ 와 ‘태풍과 홍수’로 인하여 당하고 있는 고난과 환란과 역경들이 있었습니까? 결코 낙심하지 말고 절망하지 맙시다.

–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고난의 길임을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서면 그 어떤 것도 용서하시고 회복하게 됩니다.

–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고난 중에도 사랑하는 자녀들의 위로와 힘이요, 능력임을 기억합시다.

– 그러므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변함없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오늘도 주의 자녀들에게 권세와 능력을 위임하시고 신실하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모든 여건과 환경을 열어 놓고, 선한 영향력을 기대하고 계시며, 인류의 영원한 소망과 구원 계획과 섭리로 뜻을 정하신 임마누엘의 복을 확신하는 저와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할렐루야!!!

[스크랩] 이사야 7장 주석

이사야 7장 주석

=====7: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 본

절은 예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시로 – 에브라임 전쟁에 대한 요약이다. 선지자는 결과

를 미리 말한 다음 세부적인 사항들을 밝히는 방식으로 예언을 진행시킨다. ‘웃시야-

요담-아하스’로 이어지는 다윗 왕조의 역사는 유다가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서 어떻게

국제적 분쟁의 회오리와 그 참혹한 파멸 가운데로 급락하게 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그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 시로 – 에브라임 전쟁이었다(왕하 16장;대하 28장

참조). 구체적 설명은 강해란을 보라.

=====7:2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 ‘다윗 집’은 다윗 왕조에 속한 아하스와 그의 정

부를 가리킨다. 선지자가 본문에서 ‘다윗 집’으란 표현을 쓴 데는 두 가지 이유가 함

축되어 있다. (1)다윗의 집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르신-베가

의 동맹군이 목표하는 바가 바로 다윗 왕조를 폐하고 괴뢰 정권을 세우는 데 있었던

것이다(6절). (2)이 위기는 다윗 왕조가 여호와와 맺은 언약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못한 데서 온 필연적 결과이며(삼하 7장), 따라서 아하스가 직면한 외부적 위협은 실

은 여호와의 징계로 주어진 것임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9절에서 선지자가 다시금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왕의 마음과…흔들렸더라 – 이 불길한 소식을 접했을 때 왕과 온 백성 곧 나라 전

체가 보인 반응은 심장이 얼어 붙는 듯한 두려움, 그것이었다. 선지자는 그것을 직유

법으로 표현한다:’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이는 주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불신을

단적으로 드려내 주고 있다. 믿음은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불신은 오직 두려

움만을 증폭시킨다.

=====7:3

때에 여호와께서…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 이 상황에서 선지자는 ‘스알야숩’이

란 의미 심장한 이름을 가진 그의 아들과 더불어 아하스 왕을 만나라는 여호와의 음성

을 듣는다. ‘스알야숩'(* )은 ‘남은 자가 돌아 온다’는 뜻이다(10:21).

이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위협(단지 남은 자만 돌아온다) 혹은 약속(적어도 남은 자는

꼭 돌아올 것이다)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문맥상 위로의 약속에 더 큰 비

중이 놓여 있음이 분명하다. 아하스 왕은 스알야숩뿐만 아니라 그 곁에 서 있는 이사

야를 또한 만나야 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란 뜻이 있는 이사야의 이름은 스알야

숩이란 이름과 함하여 완전한 계시를 이룬다(Leupold).

=====7:4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 이사야와 그 아들 스알야숩이

아하스 왕에게 보여진 것이 하나님의 시각적 메시지였다면, 본절부터는(9절까지) 청각

적 메시지가 명료하게 전달된다. 그 메시지는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4개의 명령(혹

은 권유)으로 시작된다. ‘삼가라'(* , 히솨메르)는 두려움에 쫓겨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종용하라'(* , 하쉬케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써 평온하고 안정된 마음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여기에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수

1:6)는 명령이 덧붙여진다. 왜냐하면 두려움이야말로 믿음의 정반대이기 때문이며, 그

러한 두려움으로부터는 마음이 녹아 내리는 낙심밖에는 아무것도 거둘 수 없기 때문이

다. 앞의 두 가지가 신앙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라면, 뒤의 두 가지는 불신앙에서

오는 전형적인 상태이다.

=====7:5

아람과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이…이르기를 – 개역 성경에는 ‘때문에'(*

, 야안 키)란 말이 빠져 있다. 원문대로 읽으면 ‘아람이 너를 대적해서 악을

도모하여,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도, 말했기 때문에’이다. 언제나 아람이 먼저

거론된다(4절). 이는 원정군의 주도권을 쥔 나라가 아람이었음을 나타낸다.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은 동의어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름을 셋으로 나누어 표

기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운율을 고려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Alexander). 본문에서 시작한 긴 문장은 7절에서 끝난다(Gesenius, Hitzig, Ewald).

=====7: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하였으나 – 앞절에서 말한 ‘악한 꾀’, 즉 원정군의

전쟁 목적이 명확하게 기술된다. 그것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그것을 곤하

게 하고’:’곤하게 하다’로 번역된 ‘네키체나'(* )는 ‘두렵게 하다’, ‘포위하

다’는 뜻이니, 곧 유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불어넣어 스스로 무너지게 하자는 것이

다. 고대의 전쟁은 신경전이 그 승패를 좌우했으며, 두려움을 느끼는 쪽이 으레 패배

하기 마련이었다. (2)’그것을 파하고’:’파하다'(* , 나브키엔나)는 ‘산산

이 쪼개다’, ‘박살내다’는 뜻이니, 힘으로 유다의 방어망을 뚫고 들어가 온 나라를 유

린하자는 것이다. (3)’다브엘의 아들을…왕을 삼자’:최종적인 목표는 다윗 왕조를 폐

하고 자기들의 정책에 순응하는 괴뢰 정권을 세우는 것이다. ‘다브엘의 아들’은 ‘르말

리야의 아들’이란 이름처럼 경멸스러운 표현이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더구나 이스

라엘인인지 수리아인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왕상 15:18에 나오는 수리아인

‘다브림몬’과 그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수리아인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7:7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 본문은 5절에서 시작한 긴 문장의 귀

결절에 해당하며 동시에 새로운 절을 유도하는 상관적인 기능을 갖는다:유다를 공격하

여 정권을 바꾸고자 하는(6절) 르신과 베가의 악한 꾀는(5절) 결코 실현되지 못한다(7

절). 왜냐하면…(8,9절).

=====7:8,9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 여기서 ‘머리'(*

,로쉬)는 한 나라의 수도 혹은 주권(통치)을 뜻하는 비유 언어이다. 본문의 의미는 다

음과 같이 의역 가능하다:’아람의 수도는 (오직) 다메섹일 뿐, 예루살렘은 아니다. 르

신이 다메섹의 왕이라면 그의 통치는 (오직) 다메섹에만 국한될 뿐, 예루살렘에는 미

칠 수 없다. 이러한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여호와의 권위에 도전하

는 행위이므로 용납될 수 없다.’

육십 오년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 본문은 앞에 나온 내용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아람에 대한 진술에 이어 에

브라임이 나온다는 것이다. (2)본문의 시점(아하스 왕 2년, 곧 B.C. 734년)으로부터

보면 에브라임의 패망이 불과 십 몇 년 내의 일인데 선지자가 65년이라고 말한 것은

연대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본문을 후대에 편집되어 삽

입된 것으로 간주했다(Eichorn, Gesenius). 그러나 현대적인 논리를 앞세워 섣불리 성

경을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선, 선지자의 눈은 시종 일관 유다에 향해 있다. 주

변 국가에 대한 언급도 유다에 관련있을 때만으로 한정된다. 그는 아람의 한계에서 그

와 동맹한 에브라임의 운명을 읽고, 또한 에브라임의 운명에서 같은 민족인 유다의 미

래를 읽는다. 그 미래는 전적으로 신앙에 따라 좌우된다. 둘째, 연대 문제에서 그것을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 의한 B.C. 722년의 예루살렘 점령에 국한시키기보다, B.C. 669

년에 있었던 앗수르 왕 앗술바니팔에 의한 식민지 정책에 맞춘다면, 65년이라는 기한

은 어김없이 들어맞는다. 앗술 바니팔은 주변 여러 민족들을 데려와서 사마리아에 거

주케 하였는데, 이로 인해 실질적으로 에브라임은 국가로서의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고

혼합 민족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왕하 17:24;스 4:2).

=====7: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 앞절과 본절 사이에 짧은 휴지(休止)가

있음이 분명하다. 아하스는 선지자의 전언(傳言)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의 마음이 앗수

르쪽으로 기울어진 듯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 그를 포기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

의 음성은 계속된다.

=====7: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아하

스 왕에게 그가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 관계 안에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징조’는 예언의 성취와 약속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하나의 증거로서 취해졌다. 그것은

때로는 이적(38:7,8;출 4:8)으로, 때로는 미래 사건들을 지명하는 지각 가능한 상징들

(8:3,4,18;겔 12:6)로 나타난다. 만일 아하스가 선지자의 예언을 의심한다면, 그는 이

적적인 증거를 구함으로써 불신앙을 확신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 주어

진 최후의 기회였다.

=====7:12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 여호와를 시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징조

를 구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의 말은 겉과 속이 다른 외식적인 언행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는 신 6:16의 금지 계명을 내세워 자신의 불신앙을 포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

시고자 하는 징조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그의 불신앙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Umbreit)나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는 능력(Gesenius)에 대

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내적인 완고함에서 비롯된 것

이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안 믿으려는 것이다. 그의 마음속

에는 이미 스스로 고안해낸 별도의 대책이 서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7:13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하려느냐 – 개역 성경에 단수로 나와 있는 ‘사람’은

원문에는 ‘사람들'(* , 아나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선지자 자신을 가리킨다

기보다는(Bultema) 아마도 권세자들에 의해 압제받는 백성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렇다

면 선지자의 책망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너희가 백성들을 그렇게 학대하고도 마치 그

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가장하고 이제는 불신앙으로 그의

은혜마저 거절하는구나.’

=====7:14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문자적으로는 ‘그녀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고 부른다’이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나(창

29:32-35;30:6-13;35: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인 관습으로 보인다(창 16:15;삼

하 12:24;눅 1:62,63등). 그러나 누가 아이의 이름을 짓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마 1:23에서는 본문의 주어가 3인칭 복수형(그들)으로 인용되었다. ‘임마누엘'(*

)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뜻이다. 일차적으로 그 이름은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르신-베가의 멸

망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구체적으로 누구이며 또 그의 어머니인 ‘처

녀'(* , 알마)는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예로부터 학자들 간에 논쟁이 끊이

지 않았다. (1)그 어머니는 동정녀 마리아이며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주장(E.J.Young):이것은 아이의 성장과 아하스 당대의 정치적 상황 사이의 역사적 관

련성을 기술하고 있는 15-17절로 인해 수용하기 어렵다. 이러한 난점을 피하기 위해서

는 본절의 아이와 15,16절의 아이를 구분하거나(박윤선), 혹은 본절과 15절의 아이와

16절의 아이를 각각 다른 인물로 구분할 수밖에 없는데(Bultema, Calvin), 이 경우에

해석의 자의성이 문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마 1:23에 의거, 본문이 메시야적 예언임

에 틀림없다고 할지라도 시공간적 거리를 무시하고 직접적으로 아기 예수와 그 모친

마리아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그 어머니는 아하스 왕의 왕비 혹은

후궁을 가리키며, 그 아이는 히스기야를 가리킨다는 주장(Lindblom, Steinmann):이는

주로 유태계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연대기적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B.C.728년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 이미 25세였으므로, 선지자

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는 10대의 소년이었던 것이다(대하 29:1). (3)그 어머니는 이

사야 선지자의 아내이며 그 아이는 선지자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주장

(Clements):이 경우에 선지자가 8:3에서처럼 ‘선지자의 아내’ 혹은 ‘여선지자'(*

, 하네비아)라고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굳이 ‘알마'(* )라는 모호한

말로 대신하였는가가 의심스럽다. 게다가 그의 아내처럼 오래도록 결혼 생활을 한 여

자를 ‘알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도 수긍하기 힘들다. (4)선지자가 특정인을 가리키지

않고 일반적으로 당시 유다에 살고 있던 어머니들을 가리킨다는 주장(O.Kaiser). 이

경우에 정관사 ‘하'(* )가 문제가 될 것이다. 이상의 어떤 주장도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 다만 이제까지 주어진 여러 증거들을 종합해볼 때, 우선 징조로서의 이 아이는

아하스 당대에 적용되어야 한다. 이는 그 아이의 성장 기한과 르신-베가 동맹군의 몰

락이 결부되어 있다는 15,16절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또한 이 징조는 아하스 당대에만

국한될 수 없다. 그것이 다윗의 집에 주어졌고, 더욱이 이 임마누엘의 위로가 앗수르

의 위협과 더불어 소멸되리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큰 역사적 지평으로

확대된다. 선지자의 예언이 궁극적인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은 그 인격 속에 임마누엘의

약속과 구원을 구현할 메시야의 탄생에서이다. 따라서 추측컨대, 아이의 어머니는 선

지자와 동(同)시대 사람으로서 다윗 가문에 속한 한 처녀이며, 그 아들의 이름 임마누

엘은 위기의 순간에 그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과 장차 인간의 몸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함께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7: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때에 미쳐 – 영아는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다. 선

악을 분별한다 함은 영아의 상태를 넘어섬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그 아이

가 자라서 사물을 판단하는 나이에 이를 때까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나이는 대략 3세

정도로 추정된다.

=====7:16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 바 되리라 – ‘미워하는’은 문자적으로는 ‘두려워

하는’이다. 유다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두 나라 수리아와 에브라임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과(B.C. 732년) 살만에셀 5세(B.C.722년)의 침공으로 황폐하게 될 것이

며(왕하 15:29;16:9;17:6), 따라서 그들로부터 가해진 위협도 소멸될 것이다.

=====7:17

여호와께서…임하게 하시리니 – 비록 수리아와 에브라임에 의한 위협은 소멸된다

할지라도 유다의 시련은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는 더 큰 위협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

은 유다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던 앗수르로부터 올 것이다. 구원의 약속으로부터 심

판의 위협으로의 이 돌연한 변화는 실은 아하스 왕의 불신앙이 자초한 것이다(10-13

절). 불신앙에 대한 심판은 여호와로부터 온다. 앗수르는 그 손의 막대기에 불과하다

(10:5).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 앞으로 당할 환난의 무서

움과 그 비참함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그 분열의 역사에 비견된다. 민족의 분

열은 모든 비극의 뿌리요 모태였다.

=====7:18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 – 유다를 괴롭힐 침략군에는 앗수

르 뿐만 아니라 애굽도 첨가된다. 선지자는 애굽을 파리로, 앗수르를 벌로 비유하고

있다. 나일 강을 끼고 있는 애굽에는 인간에게 해(害)를 끼치는 많은 종류의 곤충들,

그중에서도 특히 파리가 많았다. 반면에 많은 산과 숲으로 우거진 앗수르에는 벌떼가

많았다. 본문을 역사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상황의 전후 관계가 불분명할 수 있다.

애굽 군대가 유다 땅을 유린하게 된 것은(왕하 23:28-30) 훨씬 후대의 요시야 왕 때였

다(B.C.609년). 그리고 애굽 왕 바로느고가 이끄는 애굽 군대와 느부갓네살이 이끄는

바벧론군대가 격돌한 저 유명한 갈그미스(Carchemish)전투에서 애굽이 패퇴함으로써

고대 근동의 주도권은 사실상 바벧론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B.C.605년).

앗수르 군대에 의한 피해는 히스기야 왕 때 가장 극심하였다(36,37장).

=====7:19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 선지

자의 비유는 계속된다. 파리와 벌로 비유된 애굽과 앗수르 군대는 여호와의 신호에 따

라서 유다 땅 전역을 뒤덮게 될 것이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여기 언급된 네 장소

를 각각 파리와 벌의 서식지로 파악하여, 거친 골짜기와 가시나무 울타리는 파리에,

바위틈과 모든 초장은 벌에 연결시켰다. 또한 클레리커스(Clericus)는 이들 장소들이

군대가 주둔하기 적합한 곳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오스발트(Oswalt)는 이들이 곤충들

로 비유된 외국 군대로부터 유다 백성들이 몸을 숨기기 위해 선택한 장소들이라고 하

였다.

=====7:20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편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 애굽은 유다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선은

다시 앗수르에게 향한다. 18절에서 벌로 비유된 앗수르가 여기서 다시 삭도로 비유된

다. 그것은 ‘세내어 온 삭도’이다. 선지자는 아마도 아하스가 디글랏 빌레셀에게 상당

한 양의 돈을 주고 그의 도움을 구한 사실을 빗대어 말한 듯하다(왕하 16:7,8).

네 백성의 머리털과 발털을…수염도 깎으시리라 – 1:6에서 전신에 상처입은 패전

(敗戰) 군인으로 그려진 유다 백성이 여기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깎여진, 더할 나위

없이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다(삼하 10:4,5).

=====7:21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 벌거벗은 상태 곧 황무지로

변하고 만 유다의 비참함을 선지자는 그림으로 보여준다. 그 땅에 남아 있는 사람의

소유물은 겨우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에 불과하다. 여기서 젖을 뽑아낸들 얼

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현저한 인구 감소로 인하여 그 젖이 오히려 남아돌 것이라고

한다.

=====7:22

남아 있는 자는 뻐터와 꿀을 먹으리라 – 앗수르의 삭도를 피하여 남아 있는 자에게

제공되어질 음식은 응결된 젖과 야생꿀이 그 전부이다. 그들은 싫증이 날 정도로 계속

그것을 먹게 될 것이다(Delitzsch).

=====7:23

그 날에는 천(千) 주(株)에 은 일천 개의 가치되는 포도나무…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라 – 본절 이하에서 질려와 형극으로 특징지워지는 황무지에 대한 묘사가 계속 반

복된다. 남은 자들이 뻐터와 꿀로 연명하게 되는 것은 포도와 곡식으로 가득 채워졌던

언덕들이 모두 가시덤불로 뒤덮였기 때문이다. ‘은 일천 개’는 은화 일천 세겔을 말한

다. 이처럼 최상품의 포도나무들이 재배되던 곳이 그 날에는 질려와 형극으로 무성하

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유다 백성들에게 임할 비극을 극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7:24

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 찔레와 형극으로 가득 차고 사나운 들짐승들

이 서식하게 될 그곳에 살과 활을 갖지 않고 나가는 것은 크나큰 위험이 될 것이다.

그 땅이 쓸모가 있다면 어쩌면 사냥터로나 적합할지도 모른다.

=====7:25

그 땅은 소를 놓으며 양의 밟는 곳이 되리라 – 이전의 유다는 포도나무로 상징되는

농업 경제를 자랑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이제는 소와 양으로 상징되

는 유목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선지자가 본 유다의 미래 모

습이다(G.W.Grogan).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 대우인력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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