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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 의 증거 | \”참된 거듭남의 증거들\” (2016-08-21 주일예배) – 박한수 목사 187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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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1 로마서 10:9-10
(박한수위임목사님)
제자광성교회 (031-975-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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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의 증거 – 다음블로그

거듭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길 원합니다.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지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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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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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거듭남의 증거 (요일5:1~13) – 새생명새생활(20)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여 영접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창조적인 역사를 통하여 믿는 사람 속에 영원한 새 생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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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utc24.kr

Date Published: 3/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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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의 증거 (요 3:1~15) – 기멀전

거듭남의 증거 (요 3:1~15) 오늘 저는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 요한복음 3장에 보면,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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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7/2/2022

View: 9063

거듭남의 증거 (요 6:39-40, 44) – 기독정보넷

거듭남의 증거 (요 6:39-40, 44) – 설교 : 황영복 목사사람이 이 세상의 삶으로 … 거듭난 성도가 얻게 될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있기에 이땅에서의 삶이 항상 기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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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11/17/2021

View: 5209

거듭남의 증거

벧전1:3,2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크신 긍휼에 따라,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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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afe.chch.kr

Date Published: 4/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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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23일 “거듭남의 증거”(구원의확신) – 설교 – 기장교회

거듭남의 증거(구원의 확신) 고후13:5 서론. 함께 읽은 고린도후서13:5 말씀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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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ijangchurch.org

Date Published: 3/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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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자의 6가지 징표, ‘당신은 진정 거듭났는가?

성경은 거듭남의 징표와 증거를 명확히 제시한다. 하나님은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를 무지 속에 버려두지 않으셨다. 우리 가운데는 자신이 실제로 거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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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djc.kr

Date Published: 11/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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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거듭남의 증거들\” (2016-08-21 주일예배) – 박한수 목사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거듭남 의 증거

  • Author: 제자광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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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6. 8. 2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m3j2UUSPBBk

coram Deo

거듭남의 증거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11-12)

잘 알려진 이솝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몹시 굶주린 여우가 먹이를 찾아 마을 어귀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문득 여우의 눈에 탐스럽게 영근 포도밭이 들어왔습니다. 여우는 냉큼 포도밭에 뛰어 들어가 포도송이를 노려보았습니다. ‘고것 참 맛있게 생겼네. 그런데 너무 높이 매달려 있단 말씀이야. 어떻게 해야 저걸 따 먹을 수 있을까?’ 여우는 포도나무에 매달려 있는 탐스러운 포도송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쳐다보면 볼수록 군침이 돌았습니다. 여우는 너무 배가 고픈지라 힘껏 뛰어올라 포도를 입에 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 번, 네 번을 거듭해도 힘만 빠질 뿐 포도에 입이 닿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포도를 포기한 여우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저 포도는 너무 시어서 따더라도 먹지 못 할 거야.’ 그리고는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이 우화를 이렇게 개작해보면 어떨까요? 수백 마리 여우들이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경쟁하다가 그 중에서 제일 유능한 놈이 그렇게도 기대하던 포도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입맛을 크게 다신 후, 포도 한 알을 딱 따서 입에 넣었습니다. 근데 이게 웬일입니까? 포도가 너무 시어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이 여우가 밑에서 군침만 흘리고 있는 여우들에게 뭐라고 말했겠습니까? “아우, 너무 시어!” 라고 했을까요? 아니면 “이야, 정말 맛있다!”고 말했겠습니까? 시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억울한 것입니다.

‘이거 따려고 내가 한 평생을 바쳤나?’ 그러니까 맛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걸 맛본 건 자기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밑에 있는 여우들이 “야~ 부럽다. 너는 참 훌륭한 여우야.” 라고 칭찬합니다. 그러다가 꼭대기에 올라간 여우가 죽습니다. 그 다음 여우가 맛있는 포도를 먹겠다고 또 목숨 걸고 올라갑니다. 먹어보고는 속으로 욕합니다. ‘그 나쁜 놈, 이걸 맛있다고 그래?’ 그렇지만 자기도 나무 아래에 있는 여우들에게 “참 맛있다!” 고 말하고는 죽고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실제로 성공한 사람들이 말 못하는 진실이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성취 후에 몰려오는 공허함과 싫증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지만 진실을 숨기고 있습니다. “아~ 속았다! 올라와보니 너무 허무해!” 이렇게 말하려니 너무 억울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은 숨긴 채 가짜를 보여주며 사는 것입니다. 결국, 죽기 전에야 진실한 고백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암브로스 비어스(Ambrose Bierce)는 “성취는 노력의 끝이자 싫증의 시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토록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손을 잡고 싶었던 사람도, 연애가 시작되고 나면 이내 지겨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결혼에 이르면 더 무뎌지기 시작하고, 나중엔 마지못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없이 마구 방탕하며 사는 부류가 있고, 다른 하나는 열심히 일만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 똑같습니다. 둘 다 가망 없는 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끊임없는 갈증을 느낍니다. 마치 바닷물을 마시듯이……. 솔로몬의 말처럼 사람의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본질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먼저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물고기는 물에 살고, 나무는 땅에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이 본질을 떠나서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온 인류를 대표하는 최초의 사람 아담이 마귀의 유혹을 받고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 결과 인류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영육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인 인류는 일생토록 죄의 종이 되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타락한 이 세상의 풍속과 마귀를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상과 종교에 빠지게 되었고, 두려움과 미움, 갈등, 분쟁, 다툼, 악몽, 가위눌림, 환청, 환상과 같은 정신문제와 각종 질병과, 경제문제, 가정문제, 후대문제 등으로 고통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심판 받고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타락된 본성을 지니게 되었고,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합니다. 선행이나 교육, 철학, 종교는 사람의 필요를 채울 수 없습니다. 어떤 것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사람의 마음(렘17:9)을 개선시킬 수 없습니다. 거듭남만이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킵니다.

이 땅에는 사망의 세력을 잡고 있는 마귀를 없앨 수 있는 영웅이 없으며,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의인도 없고, 영생을 줄 수 있는 자도 없습니다. 즉,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므로 이 땅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육신을 입으시고 생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결박하셨으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셨습니다. 또한 부활을 통해 사망을 폐하시고 영생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 생명을 그분 자신 안에 가지고 계셨으며 이 생명을 아들에게 주셨습니다(요한복음 5:26). 누구든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고 그를 주(主)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여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성령의 창조적인 역사로 영원한 새생명을 넣어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신비한 사건을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은 눈에 보이지 않고 피부로 느낄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새로운 생명이 그 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마치 육신의 부모로부터 나서 육신의 생명을 얻는 것처럼, 거듭남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의 생명, 즉 영생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근본적인 필요는 하나님의 생명이며, 이 필요는 오직 거듭남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2. 거듭난 결과

(1) 새로운 생명이 생깁니다(요한복음 5:24). 그 생명이 바로 성령입니다(고린도전서 6:17; 로마서 8:16).

(2) 새로운 마음이 생깁니다(에스겔 11:19). 말씀에 순종하며 살도록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3) 새로운 부모가 생깁니다(로마서 8:14-15).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4) 새로운 형제가 생깁니다(고린도전서 16:20). 위로부터 난 형제들을 말합니다.

(5)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고린도후서 5:17). 육신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사람을 말합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난 자요, 세상의 사주, 팔자, 관상, 미신, 부적 등을 완전히 초월하는 새롭고도 놀라운 신분이 된 것입니다.

(6) 새로운 영적 이해가 생깁니다(요한복음 14:26). 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말씀을 깨닫게 도우십니다.

(7) 새로운 도덕적인 경향이 생깁니다(요한일서 2:29). 그리스도의 의를 본받아 의를 행하게 됩니다.

(8) 이름이 천국 호적에 기록됩니다(요한계시록 3:5). 하늘의 보호를 받고, 하늘의 배경을 가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9) 새로운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요한계시록 5:9). 옛날에는 허탄한 세상 노래를 즐겼지만, 거듭난 이후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혼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3. 거듭남의 증거

(1) 신앙의 형제를 사랑하기 시작합니다(요한일서 5:1). 보이지 않는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보이는 형제를 자기 몸처럼 사랑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즐겁게 순종합니다(요한일서 5:2-3).

(3) 구원의 확신이 생깁니다(요한일서 5:6-13). 하나님의 생명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가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예수가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외적 증거는 말씀이고, 내적 증거는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확실히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면 우리 안에 영생이 있음을 확실히 알게 되고, 구원의 확신을 누리게

됩니다.

(4) 기도응답에 대한 확신이 생깁니다(요한일서 5:14-15).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5)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합니다(요한일서 5:18). 성령께서 지키시므로 악한 자가 거듭난 성도를 만지지도 못할 것입니다.

(6) 인생을 믿음으로 이기면서 살게 됩니다(요한일서 5:4).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깁니다.

(7) 예수 제일주의로 살게 됩니다(갈라디아서 2:20).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 이제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새사람이 되었으니,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는 일반적인 증거들입니다. 이런

삶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점차적으로 변화됩니다. 거듭난 사람 속에는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변화가 전혀 없다면 자신의 구원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구원의 경험과 확신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됩니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이제부터 당신의 삶에 거듭난 증거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듭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길 원합니다.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지금 내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합니다. 내 안에 영원한 생명으로 오셔서, 나를 다스리시고 인도해주옵소서. 이제부터 거듭남의 증거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 거듭남의 증거 (요일5:1~13) – 새생명새생활(20)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여 영접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창조적인 역사를 통하여 믿는 사람 속에 영원한 새 생명을 넣어 주심으로 그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영적인 신비한 사건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피부로 느낄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새로운 생명이 그 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거듭난 결과

1) 새로운 생명이 생김 (요5:24)

2) 새로운 마음이 생김 (겔11:19)

3) 새로운 부모가 생김 (롬8:14-15)

4) 새로운 형제가 생김 (고전16:20)

5) 새로운 피조물이 됨 (고후5:17)

6) 새로운 영적 이해가 생김 (요14:26)

7) 새로운 도덕적인 경향이 생김 (요일2:29)

8) 이름이 천국 호적에 기록됨(계3:5)

9) 새로운 노래를 부르게 됨 (계5:9)

거듭남의 증거

1) 신앙의 형제를 사랑하기 시작 (요일5:1)

2) 하나님의 말씀을 즐겁게 순종함 (요일5:2-3)

3) 구원의 확신이 생김(요일5:6-13)

(1) 외적 증거 – 말씀의 증거

(2) 내적 증거 – 성령님의 증거

4) 기도응답에 대한 확신이 생김 (요일5:14-15)

5)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함 (요일5:18)

6) 인생을 믿음으로 이기면서 살게됨 (요일5:4)

7) 예수 제일주의로 살게됨(갈2:20)

이런 삶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역사 하심으로 말미암아 점차적으로 변화된다. 거듭난 사람의 속에는 반드시 변화가 일어난다. 변화가 전혀 없다면 자신의 구원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구원의 경험과 확신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 하십시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 하십시요.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되고 당신의 삶에 거듭난 증거가 이제부터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거듭남의 증거 (요 3:1~15)

거듭남의 증거 (요 3:1~15)

오늘 저는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거듭남이라는 말이 그리 생소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새로운 결심을 밝힐 때 거듭나겠다고 말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정치인들이 국민의 지지를 호소할 때 “이제 우리 정당은 거듭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또는 어느 기업체에서 생산한 식료품에서 몸에 해로운 물질이 발견되었을 때, 해명서를 발표하면서 “이제부터 거듭나는 심정으로 고객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성경이 말씀하는 거듭남과는 거리가 멉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거듭남은 영적인 차원에 속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남은 우리의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믿는 사람을 일컬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니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구원을 선물로 받은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적 신분이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영적 신분이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 받은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법적으로만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13절에 이르기를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태어나는 것을 가리켜 중생(重生) 또는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born again 곧 “다시 태어남”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어 성경에 보면 신생(新生) 곧 새롭게 태어남이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의역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남은 곧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한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과 같습니다. 이처럼 거듭난 사람은 이전의 그 사람이 아닌 전혀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외모 상으로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여전히 이전에 쓰던 그 이름을 갖고 있고, 이전과 같은 가족 관계 속에서 살고, 그야말로 외적으로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그 사람의 내면은 전혀 새롭게 변한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거듭나기 전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했고 전혀 관심도 없었는데, 거듭나고 나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되고 더 알기를 원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과거에는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였는데, 이제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중생 또는 거듭남은 우리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거듭남에 대한 욕구를 가질 수조차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한번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인데다 유대교의 최고 법정에 해당하는 산헤드린의 의원이기도 했습니다. 산헤드린의 의원수가 겨우 71명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그가 상당히 귀한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님께 와서 말하기를 “랍비여,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같이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에 대하여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육으로 난 것이란, 우리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에게서 육으로 태어나는 경험을 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다시금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가리켜 성령으로 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시든지 주권적으로 행하십니다. 따라서 거듭남이 성령의 일이라는 말씀은 거듭남이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로 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반드시 거듭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은 그 다음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요 3:5).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떨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거듭남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듭남의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믿는 자 곧 그 이름을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마 7:21)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다 믿는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지라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며, 그런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했지만 얼마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처럼 행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혹 나는 거듭난 것일까, 아니면 거듭나지 못한 것일까, 궁금해 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각자 자기의 믿음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입으로만 “주여, 주여”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거듭난 사람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줍니다.

첫째로, 우리가 구원의 진리를 믿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을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실 뿐 아니라, 거듭난 성도와 함께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거듭난 성도들과 함께 하시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과는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믿는 사람 속에 계시는 것을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그 속에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6장 19절 이하에는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성령을 모신 성령의 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전이 되다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면 성령께서는 얼마 동안 우리와 함께 하실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제, 성령께서 우리 몸을 성전 삼아 임하여 계시면서 하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고 구원의 진리를 알게 된 것은 우리 안에 임하여 계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열어서 깨닫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의미를 알고 감동을 받는 것 역시 성령께서 우리를 감화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구원의 진리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도 성령의 은혜를 입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날 창조론을 부인하고 진화론을 신봉하는 학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학자들은 물질세계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탐구해서 잘 이해하지만, 영적 차원에 속하는 일에 대해서는 캄캄절벽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것도, 예수님이 인류의 구주이신 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의 은혜를 입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공부를 많이 했건 적게 했건 상관없이 하나님이 창조주 되신 것을 알며,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확신하는데, 이는 그가 성령의 은혜를 입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성경의 모든 말씀을 하나도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난해한 말씀도 적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구원의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으며,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때, “아는 것”은 단지 머리로 외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인간들을 창조하셨음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것과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는 죄인이지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됨을 믿습니까? 우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 같은 사실을 믿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받아 거듭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거듭난 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을 보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는 부자지간이라고 반드시 사랑의 관계라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그 자녀의 관계는 전적으로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든지 오직 사랑의 동기로 행하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대속의 죽음을 당케 하신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 5절 이하에는 이 같이 말씀합니다.

“5)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리고 요한일서 4장 9절 이하에는 이 같이 말씀합니다.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어주신 파격적인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셨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그 때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사실인즉,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놀랍고 기이해서 우리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랑을 우리가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에 받아들이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튜브를 타고 바다 깊은 곳에 들어갔다가 그만 튜브를 놓치는 바람에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데, 누군가가 헤엄쳐 와서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구해준 사람은 너무 힘을 소진한 나머지 쓰러져 죽고 말았다고 합시다. 자, 구출 받은 사람의 입장이라면 그 심정이 어떠할까요? “나 때문에 저 사람이 죽었구나, 나를 죽음에서 구해 내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렸구나.” 그러면서 그의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평생 잊지 아니할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을 구해 주는 것도 귀하지만,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구해 주신 것은 더욱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되면 그 순간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 전파에 어찌나 열정적이었던지, 사람들은 그를 보고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13)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복음 전파에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랑을 알려면 먼저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뿐 아니라, 거듭난 성도들은 그 사랑을 더 깊이 깨닫는 만큼 믿음도 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 내라 권면해도 마이동풍인 사람이라도 한번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기만 하면 누가 권면하지 않아도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강제로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는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보아서 거듭난 사람인지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보아서 거듭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과 적대관계에 있습니다. 그는 아직 육에 속한 사람으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욕심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소원이 전혀 없고 오로지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욕망으로 가득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행위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5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5)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그 사람 속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생각과 언행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거듭난 성도는 자기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해 주실 때, 기쁨으로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그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의 생각을 복종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그 마음에 기쁨을 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마음에 고통을 느낍니다. 바로 이 점이 거듭난 사람의 특징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불순종해도 아무런 가책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영이 죽은 상태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형제들을 사랑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보아서 내가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부족한 인간인지라 때로 형제를 미워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는 곧 회개하고 다시금 형제를 사랑합니다. 그 삶 속에 사랑의 열매를 맺히느냐 맺지 못하느냐를 보아서 그 사람이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만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서 먹고 살아갑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권면하기를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고 했습니다.

거듭난 성도는 처음에 영적 갓난아이와 같습니다. 갓난아기는 제 발로 걷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합니다. 혼자서 음식을 찾아 먹지도 못하고, 혼자서 옷도 입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무능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갓난아기가 마냥 무능한 것은 아닙니다. 잘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젖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갓난아기는 젖이 먹고 싶으면 즉시로 울음으로 신호를 보냅니다. 마냥 참고 기다리는 아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갓난아기는 젖을 먹는 대로 하루가 몰라보게 자라납니다. 이는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난 지 오래 되지 않은 성도는 영적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교회생활도 서툴고, 성경 지식도 적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다 이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설교를 들어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왠지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처음부터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자주 설교를 듣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자라고 말씀을 깨닫는 능력이 향상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 4:28)고 하셨습니다. 씨를 뿌리면 여린 싹이 나오고 그 다음 자라서 이삭이 되고 그 다음에 결실을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고 거듭난 성도도 갓난아기의 단계에서 점점 자라나서 성숙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처럼 날이 갈수록 믿음이 자라고 있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듭남의 증거는 생활 속에서 선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니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거듭난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방금 소개한 열매를 생활 속에 맺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는 이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은 가지가 되었으므로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까지 말씀해 드린 세 가지 방법 외에도 거듭남을 알 수 있는 방법들이 있지만, 오늘은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구원의 진리를 믿으십니까? 여러분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순종하며 그 결과 선한 열매를 맺고 있으십니까? 이 세 가지 물음에 진심으로 “아멘!”으로 화답하시는 분들은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성도님 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듭남의 증거

출처

원문

벧전1:3,2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크신 긍휼에 따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어 살아 있는 소망을 갖도록 하셨으며,

여러분이 거듭나게 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구속이나 의롭게 됨과 마찬가지로 거듭남도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한 방면이다. 구속과 의롭게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가 해결되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살아나서,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인 유기적인 연결을 갖게 된다. 따라서 거듭남의 결과는 살아 있는 소망이다. 이러한 거듭남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성취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명과 생명 주시는 영의 선물을 가져와, 새로운 출생을 가능하게 하고 살아 있는 소망을 갖게 한다”(알포드).

씨는 생명을 담고 있다. 썩지 않을 씨인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 거듭났다. 우리가 거듭나도록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의 영 안으로 전달하는 것은 바로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다.

거듭남

”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할 수 있다는 것은 온 우주 가운데 가장 큰 기적이다 “( 리 , 각주 , 영문판 , p.1189). 이것이 곧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으로 거듭남을* 의미한다 . 하지만 역대로 그리스도인의 역사 가운데 거듭남에 대한 중요하고 핵심적인 의미가 점차적으로 무시되고 잊혀지게 되었다 . 어떤 이들은 거듭남을 단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 새로운 시작 ” 으로 본다 . 다른 이들은 거듭남이 옛 생활 방식을 버리고 새롭게 도덕적인 그리스도인의 길을 따라가기로 결정하는 시기라고 여기기도 한다 . 심지어는 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Third Edition) 조차도 거듭남을 ” 영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개정하다 . 영적인 회심 혹은 부활을 체험하다 . 개정하다 ” 로 정의하고 있다 . 거듭남 이 ” 영적인 회심 , 도덕적 부흥 또는 재출생 ” 이라는 것이다 . 유감스럽게도 , 이러한 정의들은 너무 낮아서 이 소중한 진리에 대한 의미 전달에 충분하지 않고 ,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 . 이 사이트는 많은 명성 있는 그리스도인 저자들의 글에서 발췌하여 , 성경이 제시하는 거듭남의 의미와 합당한 체험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기획되었다 . 다음 링크들은 주요 내용들을 통하여 거듭남의 의미를 찾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

요한복음에 계시된

거듭남의 정의

거듭남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 팔링게네시아 (palingenesia)” 는 팔린 (palin, “다시” ) 과 게네시스 (genesis, “탄생” ) 란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Vine’s). 그러므로 “거듭난다”는 의미는 문자 그대로 다시 태어난는 것입니다 . 비록 이 단어가 매우 중요한 신약의 용어이지만 , 스트롱 성구사전 (Strong Concordance) 에 따르면 이 단어는 신약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 딛 3:5, 마 19:28). 위클리프 (Wycliffe) 는 그의 성경사전 (Bible Dictionary) 에서 ” 신약에서 여러 가지 다른 표현들이 동일한 진리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지만 , 다시 태어남 또는 위로 부터 태어남 ( 요 3:3, 벧전 1:23), 하나님께로서 태어남 ( 요 1:13) 같은 이러한 표현들은 새로운 출생 같은 역동적인 변화의 사상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 라고 지적했습니다 . 거듭남의 정의는 교리적으로는 단순하지만 , 그 의미와 실재에 있어서는 심오합니다 .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거듭남은 새 생명을 가져오는 재출생이다 . 이는 절대적으로 생명의 문제이지 결코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 거듭남은 단지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생명 이외에 또다른 생명을 갖는 것이다 . 우리는 이미 부모님으로부터 사람의 생명을 받았다 .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신성한 생명을 받을 필요가 있다 . 그러므로 거듭남이란 우리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생명 이외에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갖는 것이다 . 그러므로 거듭남은 다른 생명을 갖기 위해 다른 출생을 필요로 한다 . 거듭나는 것이나 다시 태어나는 것은 우리 자신을 고치거나 교정하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우리가 부모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부모님의 생명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명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이고 ( 요 1:13), 하나님으로 부터 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 , 즉 영원한 생명 ( 요 3:15-16) 을 갖는 것이다 . ( 위트니스 리 , 요한복음 라이프 스터디 . 98)

요한복음에서 계시된 거듭남

그 단어의 성경상 용법에 의하면 ,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

특별히 요한복음은 거듭남에 대한 진리를 명백하게 해줍니다 . 이 책에서 요한은 거듭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 (1:13), 다시 태어나는 것 (3:3),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 (3:5-6) 이라고 했습니다 . 이 세 구절들을 철저히 연구하면 거듭남에 관한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남

아들이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듯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합니다 .

요한복음 1 장 12 절과 13 절은 거듭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것임을 계시합니다 . 이 구절들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 출생하다 또는 태어난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같은 생명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 아들이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듯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생명을 갖습니다 . 마찬가지로 이 구절들은 거듭남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것 이외에 다른 수단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 이 구절 전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 거듭남의 기적을 이해하고 체험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진실로 온 우주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입니다 . ( 위트니스 리 , 각주 , 1189)

다시 태어남

요한복음은 거듭나는 것이 또한 다시 태어나는 것임을 계시합니다 (3:3). 이 구절에서 주님은 니고데모 에게 선포하셨습니다 . ”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원문 참조 )”(3:3).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영적인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 존 넬슨 다비는 그의 성경 번역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시간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갖는 것 이상의 뜻을 지닌다고 지적했습니다 . 그는 ” 다시 ” 란 단어는 ” 다시 ” 라는 뜻 뿐만 아니라 생명의 새로운 근원과 출발지점에서도 역시 ” 완전히 새롭게 ” 라는 뜻을 지닌다고 설명했습니다 . 거듭남은 생명의 새로운 근원이며 새로운 시작인 것입니다 . (1268)

거듭남은 참으로 ” 새로운 시작 ” 입니다 . 단지 행위나 시간의 시작이 아니라 ” 생명의 새로운 시작 ” 인 것입니다 .

이 생명의 ” 새 근원 ” , 새 출생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 여기서 주님은 니고데모 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 ” 니고데모야 ! 네가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너는 오직 물질적인 것들만 볼 수 있다 . 만약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을 깨닫기 원한다면 , 너는 반드시 다른 생명을 받아야 한다 . 너는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하다 .” 이것은 고린도전서 2 장의 사도 바울의 말과 부합합니다 . ”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 (11-12 절 ) 이 성경 구절은 거듭남이 참으로 단지 시간이나 행위의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생명의 새로운 시작임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

물과 성령으로 태어남

요한복음 3 장 5 절에서 주님은 계속해서 니고데모 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 침례 요한이 이러한 말들을 마태복음 3 장 11 절에서 바리새인들에게 했기 때문에 ( 각주 3:5 2 참조 ),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했을 것입니다 . 두 출생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주님은 구별된 두 사역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

물로 태어나는 것 은 침례 요한의 사역인 ” 종결 “의 사역을 가리킨다 . 침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먼저 그들의 죄악된 상태를 회개하고 영적 죽음과 장사를 의미하는 침례를 받으라고 말함으로써 주님께서 그분의 구원을 사람들에게 가져오실 수 있는 길을 예비하였다 ( 마 3:11).

또 다른 방면인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은 요한의 사역에 근거하여 그 후에 나오는 예수님의 생명의 사역 또는 ” 발아 ” 의 사역을 언급한다 ( 요 3:6, 요 12:24). 6 절에서 주님은 거듭나는 것이 사람의 영 ( 하나님을 담도록 그분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가장 깊고 내재적인 부분 ) 안에서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임을 계시하셨다 . 거듭날 때 성령은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가지고 우리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한 영이 되고 , 우리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 고전 6:17; 롬 8:16).

소책자 ”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 에서 위트니스 리는 이 부분의 성경 말씀을 분명히 했습니다 .

2011년 10월 23일 “거듭남의 증거”(구원의확신)

거듭남의 증거(구원의 확신) 고후13:5

서론. 함께 읽은 고린도후서13:5 말씀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하신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명령이 있다.

하나는 내가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시험하라 하신다. 내가 가진 믿음이 구원받을만한 참된 믿음인지 혹은 잘못된 믿음은 아닌지 살펴보라는 것이다. 내가 가진 믿음이 구원받을만한 참 믿음이라면 그 증거는 무엇인지 말해봐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확증하라 하신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확신 위에 굳게 서라는 말이다. 참된 믿음이 있으면,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비틀거리지도 말고 확신 가지고 담대하게 살라는 말씀이다.

1. 딤후1:12 을 보면 바울이 고백한다. ‘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 바울은 하나님께 맡긴 자기의 영혼 자기의 인생을 하나님이 붙드사 끝까지 지키시고 반드시 영광의 나라에 이르게 하실 줄 확신했다. 이런 확신이 바울을 담대케 했다. 복음에 미치게 했다. 그래서 주님 때문에 고난 받아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핍박이 와도 즐거워하였다.

히6:19 은 또 이렇게 말씀한다. 같이 읽자. ‘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 히6장 문맥을 보면 ‘이 소망’은 ‘구원의 확신’을 가리킨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이 영혼의 닻과 같다 한다. 구원의 확신이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어긋난 길로 가지 않고 휘장 안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한다는 말씀이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 우리 영혼은 세상에 줄 수 없는 평안함과 기쁨을 누린다. 구원의 확신이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어려움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기도의 자리에 나가게 하고, 좋은 일이 있어도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구원의 확신이 우리 영혼에게 주는 유익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2. 반면에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불안하다. 평안함이 없다. 기쁨으로 섬기지 못한다. 봉사를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영적으로 눌리고 두렵다.

저는 확신 없는 봉사가 얼마나 비참한지 뼈저리게 체험해 본 사람이다. 대학 1학년 때 선교단체에서 전도를 자주 나갔는데,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 받습니다’ 하는 말을 할 때마다 제 양심이 저에게 망치질을 했다. ‘야 너도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감격이 없는데 그 소리가 어떻게 입에서 나오냐. 너부터 그 구원이라는 것이 주는 기쁨을 먼저 누려봐라. 그러고나서 다른 사람에게 말해라’ 그러는 것 같았다.

존 웨슬리 아시죠? 선교사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다. 구원의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배를 삼킬 듯이 밀려오는 파도를 보면서 두려워 떨었다. 그때 배 한쪽 편에는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안하게 찬송하는 경건주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 일로 충격을 받고 다시 말씀을 연구하다가 루터의 글을 읽고 구원의 확신을 얻었고, 그 후로는 그의 사역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이처럼 구원의 확신이 없는 성도는 영적으로 무기력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고, 반면 올바른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삶을 주님 위해 헌신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3.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할 게 있다. 교회를 다니면서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도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잘못된 확신을 가지는 것은 더 위험하다는 점이다. ‘구원 얻을 만한 참된 믿음’의 증거가 보이지 않는데도,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면서 마음 편케 사는 것은 참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것은 마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등에 고장난 낙하산을 달고 뛰어 내린 것과 같다. 낙하산이 있으니 안심하고 땅을 향해 신나게 내려온다. 그런데 그 낙하산이 고장이 났으니 어떻게 되는가? 사정없이 땅 바닥에 곤두박질할 것이다.

거짓된 구원의 확신이 이런 결과를 낳는다. 구원받은 줄 알고 열심히 믿는다고 믿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 천국문 앞에 섰는데 하나님이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만약 그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당황스럽고 낭패이겠는가?

그러기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되, 거짓된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 참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내 믿음이 구원 얻을만한 참된 믿음이라는 분명한 증거가 있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구원 얻을만한 믿음이라는 증거가 없는 거짓 확신에 속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고후13:5을 다시 보면 2가지 명령을 하신다. 하나는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시험하라, 구원 얻을만한 참된 믿음이 있는가 자신을 살피라 그 말이다. 또 하나는 확증하라는 것이다. 구원 얻을만한 믿음이라는 증거가 있는 믿음이 내 안에 있다면, 바울처럼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살라는 것이다. 확신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평안도 누리고, 고난도 이기고, 죽도록 충성도 하면서 살아라 그 말이다.

4. 그러면 내가 구원받을만한 믿음을 가졌다고 확신할 수 있는 증거는 뭘까요? 내 영혼이 거듭났음을 확신해도 좋은 증거들이 뭐냐 그 말이다. 구원의 증거에는 외적인 증거와 내적인 증거가 있다. 그 중에 오늘은 내적이고 주관적인 증거 5가지를 말씀 드리려 한다. 오늘 말씀드리는 것은 전부가 아니라 일부이고, 이 외에도 많은 증거들이 있는데, 오늘은 내적이면서도 주관적인 5가지 증거를 말씀드리는 것이다.

1) 내 영혼이 거듭나서 구원받은 사람임을 알게 하는 첫 번째 증거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에 있어서 거리낌이나 어색함이 없고, 내 속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마다 평안함과 정겨움 그리고 기쁨이 있다는 사실이다 .

롬8:15-16 을 보면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라고 하신다.

우리가 거듭나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래서 우리 신분이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변화가 하나님이 내 영혼의 아버지이신 것이 믿어지고, 그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친근한 사랑으로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 가정에 자녀들이 아무리 철이 없어도 용돈도 주고 맛있는 것도 사준다 해서 이웃집 아저씨를 보고 ‘아버지’하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지 못한다. 그게 안된다.

마찬가지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마음의 평안함과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하고 부를 수 없다. 그렇게 불러지지가 않는다.

물론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때때로 다급한 일이 있고 의지할 데가 필요해서 ‘아이구 하나님’하고 신적인 존재를 찾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렇게 신을 찾아도 거듭나지 않은 이상 하나님께 대해 내 영혼의 아버지로서 누리는 따뜻함과 신뢰와 평안은 누릴 수가 없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심령이 되어야 성령께서 그 속에서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고 너는 그의 자녀이니, 너의 아픔을 가지고 아버지께 이야기해라, 너의 기쁨을 가지고 아버지께 감사해라’ 그렇게 증거해 주시기 때문에, 좋은 일이 있어도 ‘아버지’ 그러는 것이고 힘든 일이 있어도 ‘아버지’ 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2) 두 번째로 내가 가듭나서 구원받은 사람임을 알게 하는 증거는 내가 정말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 십자가 보혈을 믿고 사랑한다는 점이다 .

누가 구원 받은 참 믿음을 가졌고 누가 참 믿음이 아닌가를 우리 사람이 단정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간혹 목회자로서 목회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짚어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낄 때가 있다. 언제냐 하면 교회에 다닌 햇수가 오래되었고 신앙생활 한 연륜이 제법 쌓였는데도 자기가 얼마나 가망성 없는 죄인인지를 느끼지 못하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을 그렇게 지적하고 비난하는 분을 만날 때이다.

사람이 자기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 그냥은 모르지만 거울에 비추어 보면 잘 볼 수 있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 모습을 비추어 보고 성경에 내 삶과 마음을 투영해보면, 우리는 정말로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구약이든 신약이든 은혜 받은 사람이 자신에 대해 고백하는 말은 한결 같다. 뭔가?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고백이다. 사무엘서를 보면 다윗은 자기를 가리켜 ‘죽은 개와 벼룩 같은 자’라고 했다. 시편에서도 다윗은 ‘내가 모태에서 죄악 중에 잉태되었고 죄악 중에 출생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바울은 ‘죄인 중의 내가 괴수’라고 했다. 그런데 다윗이나 바울의 이런 고백들은 겸양으로 그냥 해 보는 소리가 아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워 본 사람, 온전한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쳐다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진심으로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 ‘하나님 나는 소망 없는 죄인입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이렇게 자기가 정말로 소망 없는 죄인임을 알면 옆 사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내 영혼이 죄악 가운데 망하게 되었는데, 옆 사람 얼굴에 먼지가 묻었든지 옷에 때가 있든지 그것 지적하며 정죄할 처지가 아닌 것이다. 이처럼 거듭난 사람의 심령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소망 없는 죄인임을 인식하고 산다.

울산교회에서 사역하는 동안, 교회에 큰 은혜를 입어 2008년도에 1년간 안식년을 보냈다. 에스라성경대학원에서 1년을 보내는 동안 저는 정말로 많이 울었다. 새벽에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그렇게 소망 없는 죄인임을 쳐다보면서 참 많이 울었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기적인지, 어떻게 그렇게 추하고 더럽고 음란한지, 어떻게 그렇게 위선적이고 거짓된 사람인지, 어떻게 그렇게 내 안에는 선한 것이라고는 돋보기로 들여다보아도 찾을 수가 없는지 정말로 울고 또 울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사람들을 만나면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하는 고백을 자꾸 하게 된다. 겸손한 척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저의 죄악됨을 있는 그대로 보고 나니까,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인 줄을 알게 되어서 그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죄인이요 부족하기 짝이 없다는 게 진실이니까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이렇게 거듭난 사람의 심령에는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이 생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그 다음은 주님의 십자가를 향한 사랑과 감격을 갖게 된다.

절망적인 자기 죄를 보았기 때문에 이제 주님의 십자가의 가치가 보인다. 십자가의 능력이 믿어진다. 십자가를 사랑하게 된다. 십자가가 내 생애 최고의 자랑이 되고, 내 삶의 가장 귀한 보배가 된다. 내 죄의 실상을 보고 나니 십자가 외에는 소망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오늘 제가 보여 드리지는 못하지만, 제 오른 팔에는 거의 10cm 가까운 큰 흉터가 있다. 이 상처는 제가 태어난 지 한 달 정도부터 발병해서 수개월 동안 제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던 ‘단’이라는 병의 흔적이다. 어린 아이에게 곧잘 나타나는 ‘단’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한 종류는 사람의 속에 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몸 밖으로 나는 경우라 한다. 옛날에는 의술이 그렇게 발달하지 못해서 몸 안에 단이 생기면 대개가 죽었고, 몸 밖에 발병해도 죽는 일이 많았다 한다. 제가 갓난아기일 때 이 단이 생겨서 머리를 비롯해서 온 몸이 고름 투성이가 되어서 제대로 눕혀 놓을 수도 없었다 한다. 그래서 제 상태를 보고 사람들이 포기하라고들 이야기 했었다 한다. 그런데 다들 포기하라 해도 그럴 수 없는 분이 계셨다. 누구일까요? 부모님이다. 저를 살리기 위해 저의 아버지가 입으로 주야를 무론하고 일일이 고름을 다 빨아 내셨다고 한다. 그래서 참 기적같이 제가 살게 되었다. 이번 추석에 큰 누님에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마음에 그렇게 말이 없으신 저의 아버지 사랑이 뭔지 참 가슴 뭉클했다.

그러면서 생각했었다. ‘그렇구나, 바로 우리 주님이 내 속에 있는 그 썩어 문드러지고 냄새나는 죄악을 빨아내시려고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내 심령의 그 더러운 것들 때문에 그렇게 모진 고난과 멸시를 당하셨구나’ 생각했었다.

그렇다. 여러분! 버러지 같은 우리네 인생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다.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죄로 얼룩진 우리를 살리시려고 주님이 그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

그 주님을 생각할 때 거듭난 성도의 마음이 어찌 기쁘지 않으며, 어찌 감격하지 않겠는가? 거듭나서 구원받은 성도의 마음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십자가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벧전1:8-9 에 ‘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고 하신다.

우리는 또 노래한다.

‘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참 회개 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주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로부터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세월이 갈수록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에 주님의 십자가를 향한 뜨거운 사랑과 감격이 더 충만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

3) 거듭나서 구원받은 세 번째 증거는 뭔가? 배고픔을 알고 양식을 찾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다 .

갓난아이가 태어나면 가장 현저하게 하는 일이 무엇인가? 먹을 것 달라고 떼쓰는 일이다. 그래서 젖을 먹고 배가 부르면 잠을 자고, 일어나서 또 배가 고프면 운다. 왜 그렇는가?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으니까 배고픔을 느끼고, 배가 고프니까 먹을 것을 요구한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 피로 죄 씻음 받아 거듭나면, 우리 속에는 새로운 영적 생명이 있어서 이전에는 몰랐던 영적 배고픔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양식을 찾게 된다. 영혼의 양식인 생명의 말씀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면 배가 고파서 고통하게 된다.

영혼의 양식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데도 아무 감각이 없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 영혼은 현저하게 병이 들었든지 아니면 우리 속에 생명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현저하게 병이 든 경우는 그다지 크게 배고픔을 못 느낄 수는 있는데, 그러나 그 경우도 아예 안 먹고는 못 산다.

몸이 아파서 거동을 못한 채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들도 링거를 맞아도 맞으면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양분은 섭취하듯이, 그 영혼이 병들어서 정상적인 활동을 못하는 사람도 일단 거듭나서 영적 생명이 그 속에 있다면 그 영혼의 기능은 그만두고서라도 영적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은 찾게 되어 있다.

나아가서 영혼이 병들지 않고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성도라면, 단지 생존을 위한 영의 양식이 아니라, 그 양식을 먹고 정상적인 영혼의 기능을 발휘하고 영적 활동을 해서 열매를 맺기에 부족함이 없는 충분한 영혼의 양식을 요구하게 된다.

마4:4 에서 뭐라고 하는가? 같이 외워보자. ‘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 여러분! 이 말씀은 이론이 아니라 거듭난 성도라면 누구나가 일상생활 가운데서 항상 느끼고 체험하는 그런 진리의 말씀이다. 거듭나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영혼의 양식을 날마다 먹어야만 살 수가 있다.

아무튼 우리가 거듭나서 구원받은 세 번째 증거는 영적인 배고픔을 알고 그래서 영혼의 양식 – 곧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갈망하게 된다 하는 것이다.

4) 네 번째로 거듭난 증거는 죄를 미워하고 또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죄를 지으면 그 마음이 괴롭고 곤고해지며 하나님 앞에서 송구스러워진다 그 말이다.

① 이 네 번째 증거는 우리 성도들이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중생한 사람은 원칙적으로는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이다.

요일5:18 을 보자. ‘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

요일3:9 도 같이 보자. ‘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

여기 말씀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누구를 말하는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으니까 바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난 성도들 속에는 ‘하나님 씨’가 있어서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여기 거듭난 성도 속에 거한다고 하는 이 ‘하나님의 씨’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씨’에 대한 믿음의 선배들의 해석이 다양했는데, 어떤 이는 말씀이다, 어떤 이는 사랑이다, 혹은 진리라고도 했다. 또 어떤 분은 영원한 생명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이것이다 하고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거듭남에 관한 성경의 여러 가르침을 같이 생각해보면 ‘성령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거듭나서 성령님이 그 속에 거하는 자는 죄를 안 짓는다는 말씀인데, 여기에 또 굉장한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우선 우리 성도님들의 경험에서 볼 때 예수 믿고 거듭난 이후에 죄를 안 짓고 살았는가? 아니다. 다들 거듭난 후에도 죄를 짓고 살았다.

뿐만 아니라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서 그것 때문에 가슴을 치고 뼈를 깍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회개하는 것을 시편이나 여러 성경에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여기 요한일서 말씀들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 속에 ‘하나님의 씨’가 있는 사람은 죄를 안 짓는다고 하는가?

② 이런 어려운 문제를 교묘히 이용하여 성도들을 현혹시키고 진리에서 어긋나게 만든 이단이 있다. 뭐죠? 구원파다.

구원파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죄를 짓고 죄책감으로 고통당하고 고민하는 성도들의 심리와 요한일서 말씀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해 주겠다고 하면서 기성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래서 어떤 궤변이 나오느냐하면, 예수를 믿는 성도의 심령에는 하나님의 씨가 있어서 죄를 안 짓는 것인데, 그런데 내가 때때로 죄를 짓는 것은 내가 짓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거하는 죄의 권능이 죄를 짓는 것이니 나와는 상관이 없다 한다. 그러니 일단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이후에는 회개하지 않아도 되고 회개할 필요도 없으며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도 없이 완전히 해방된 양심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한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은 궤변인데, 그런데도 귀에 솔깃한 면이 있다. 왜 그렇는가? 예수를 믿은 이후에 죄책감으로 많이 시달려 보았기 때문이다. 또 예수를 믿는데 왜 나는 이렇게 잘 변하지를 않고 여전히 죄 앞에 굴복할 때가 많나 고민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파의 교리가 더 이상 죄책감으로 고통하지 않아도 되는 달콤한 미끼를 제공하기 때문에 귀가 솔깃할 수 있는 것이다.

③ 그러면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문자 그대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씨인 성령을 좇아 살 때 우리는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다. 거듭난 사람으로 우리 속에 와 계시는 성령님의 소욕을 따라서 온전히 살기만 하면 죄를 안 지을 수 있다 그 말이다. 하나님의 씨인 성령님께서는 결단코 우리가 범죄하도록 하시는 영이 아니시라 그 말이다.

그러면 우리 성도가 현실적으로 죄를 짓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좇아 살지 못하고, 아직도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육신의 법을 쫓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성령님 때문인가? 아니면 아직도 남아 있는 ‘옛 자아’의 어두운 그림자 때문인가? 바로 나의 옛 사람의 흔적이 되살아서 나로 범죄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서는 죄를 짓지 않는다 하는 말씀도 진리이고, 동시에 우리가 성령을 온전히 좇지 않고 육신의 소욕에 이끌림으로 인해 범죄하고 그래서 회개해야한다는 것도 진리이다.

이 두 가지 진리를 동시에 붙잡아야지 구원파처럼 한 가지만 붙들고 늘어지면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된다 그 말이다.

④ 다시 정리를 해 보자. 우리가 거듭나서 구원받은 사실이 죄와 관계해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1) 먼저는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을 온전히 좇아 살 때 죄를 짓지 않는다 했다 .

2) 두 번째로 우리가 연약하여 육신을 좇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을 때에는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이 그 죄에 대하여 증거하시고 책망하시고 또 탄식도 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거듭난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게 된다 .

그러기에 거듭난 사람은 성령을 좇아 죄를 짓지 않든지, 혹은 육신의 연약함을 인하여서 죄를 짓게 된다면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 때문에 그 지은 죄를 인하여 심히 아파하는 가운데 자기 속에 있는 죄를 토설하게 된다. 자기 속의 죄를 다 토해 내기까지는 거듭난 성도의 심령이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을 묶어서 이해하면 거듭나서 구원받아 성령님이 그 심령 속에 거하시는 네 번째 증거는 ‘크고 작은 모든 죄를 미워한다’는 것이다 .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거듭난 증거다. 죽어라고 죄가 미워지는 마음이 거듭난 증거다.

5) 이제 마지막 다섯째 증거는 뭔가? 죄를 미워하는 소극적인 단계를 넘어 의를 사모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팔복 중에 세 번째가 무엇인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우리가 구원받아 거룩하신 성령이 우리 속에 오시면 우리 마음에는 거룩한 소원, 의에 대한 갈증이 생긴다. 내 계획과 목표를 이루었다고 만족할 수 없고, 주님이 기뻐하는 선한 일, 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만 만족할 수 있다.

이것저것 양손 가득 가져야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작은 것이지만 나눔으로 만족한다. 원수를 반드시 갚아주어야만 속이 시원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원수를 용서하고 복을 빌면서 신령한 만족을 얻는다.

죄를 미워할 뿐 아니라, 의를 사모하는 마음이 우리 속에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 우리가 거듭난 증거요 구원받은 믿음이 있다는 표징인 것이다.

그래서 마7:17-2 0에 뭐라고 하는가? ‘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 하신다.

빌1:11 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의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이다.

결론. 오늘 하나님은 신령한 지혜를 깨달은 사람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이 말씀에 따라 우리 성도님들은 정말로 내가 구원 얻을만한 참된 믿음이 있는지 자신의 내면을 잘 살펴보시기 바라고, 그 참된 믿음의 증거를 살핀 후에는 확증하는 신앙이 되시기 바란다. 구원의 확신 위에 굳게 서는 신앙이 되기 바란다. 구원받았는지 아닌지 머뭇거리지 말고, 이제 약속의 말씀 굳게 붙잡고 확신 위에 서기 바란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 때문에 바울처럼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아도 기뻐할 수 있고, 다윗처럼 내 안에 하나님이 싫어하는 작은 죄의 조각이 남아 있어도 철저하게 죄를 토설하고, 히브리서 기자처럼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주님이 교훈하신 것처럼 의를 사모하고 순종하여 선한 열매를 많이 맺고 살아가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

서대전성결교회 – 거듭난 자의 6가지 징표, ‘당신은 진정 거듭났는가?



“참으로 거듭난 제자가 적고 명목상의 기독교인이 많은 것,

교회가 세상의 비난을 받게 된 핵심 원인이다”

거듭남이란 참 믿음을 갖는 순간 인간의 마음과 본성이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을 자처한다고 해서 모두 다 똑같지는 않다. 교회 안에는 항상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존재한다. 하나는 이름과 형식만 갖춘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는 참 그리스도인이다.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듯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 참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영국 국교회의 신조에도 보면 “유형교회 안에는 항상 악한 자들과 선한 자들이 섞여 있다”라는 조항이 있다. 교회 안에는 ‘참 신앙을 결여한 사악한 자들’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음받아 선한 일을 하며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예배하는 사람들과 그분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는 공존한다. 세상에 마음을 바치는 사람들과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을 믿고 그 믿음대로 사는 이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죄를 의식하고 깊이 뉘우치지만 어떤 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신뢰하며 충성을 다하는 이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다.

성경 말씀대로 하면 좁은 길을 걸어가는 이들과 넓은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 좁은 길을 가는 자가 복음의 그물에 잡힌 좋은 고기, 그리스도의 밭에서 거둔 좋은 알곡이라면 넓은 길을 가는 자는 나쁜 고기, 그리고 가라지에 해당한다. 눈이 성한 사람이면 누구나 성경은 물론 세상에서 그런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거듭남의 가르침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와 상관없이 자명한 현실이다.

그러면 그런 차이가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거듭남에 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거듭났기 때문이고,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에 머무르는 이유는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변화되었지만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변화되지 못했다. 마음의 변화가 모든 차이를 빚어낸다.

요한일서에 명시된 거듭남의 영적 징표 체크 리스트

거듭남의 표시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거듭남의 징표와 증거를 명확히 제시한다. 하나님은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를 무지 속에 버려두지 않으셨다. 우리 가운데는 자신이 실제로 거듭났는지 아닌지를 고민하며 영혼의 건강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고, 거듭났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전혀 없는데도 당연히 거듭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은 그런 일이 있을 줄 미리 아시고 요한일서에 영적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을 제시하셨다. 요한일서는 거듭난 사람의 특성과 행동양식, 즉 삶의 습관과 태도와 믿음과 경험을 설명함으로써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거듭남의 교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요한일서를 철저히 공부해야 한다.

이제부터 거듭남의 징표와 증거를 순서대로 제시해보겠다. 이 책의 다른 내용은 모두 잊더라도 지금부터 말하는 내용은 절대로 잊지 말라. 이 증거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증거를 얼마든지 소개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는 요한일서에 제시된 증거에만 초점을 맞출 생각이다. 그 이유는 요한일서의 내용이 거듭난 자의 상태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사도 요한이 말하는 거듭남의 표징을 집중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징표 1, “죄를 짓지만 습관적으로 짓지는 않는다”

첫째, 거듭난 사람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 5:18).

거듭난 사람은 ‘습관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과 달리 거듭난 사람의 마음과 의지와 성향은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죄인 줄 모르기도 하거니와 악을 저지른 후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죄와 다투지 않고 친구처럼 지낸다. 하지만 거듭난 뒤에는 죄를 미워하고 멀리 하며 죄에 맞서 싸운다.

거듭난 사람은 죄의 영향을 받을 때면 탄식하고 슬퍼하며, 죄를 가장 큰 질병으로 간주해 해방을 갈망한다. 한마디로 거듭난 사람은 죄를 기뻐하지 않으며, 죄를 방치하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은 죄를 가증스럽게 여긴다.

물론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는 말씀대로 거듭난 자도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은 진정으로 죄를 혐오한다.

거듭난 자의 가장 큰 소망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약 3:2)라는 말씀대로 거듭난 자도 때로 악한 생각을 하거나 그릇된 언행을 일삼을 수 있다. 하지만 거듭난 자는 거듭나지 못한 자와는 다르게 본성적으로 죄를 거부하며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친다.

이것이 거듭난 첫번째 징표이다. 사도 요한은 당신을 어떻게 판단할까? 당신은 과연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일까?

징표 2, “구원의 근거를 행위나 공로에 두지 않는다”

둘째, 거듭난 사람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굳게 믿는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요일 5:1).

거듭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혼을 용서하고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이시며,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성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신성한 존재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다.

거듭난 사람은 자신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근거를 발견하고, 그분을 통해 자신의 죄와 불법이 모두 깨끗해졌다고 확신한다.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덕분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담대히 죽음과 심판을 향해 나간다.

물론 거듭난 사람도 두려움과 의심에 사로잡힐 수 있으며, 때로는 스스로 믿음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에게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신뢰하며 그분을 포기하고 다른 구원자를 찾겠느냐고 묻거나 영생의 소망을 선행, 공로, 기도, 사역 및 교회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봉사활동에 두겠느냐고 묻는다면, 비록 자신이 연약하고 실수가 많지만 온 세상을 다 준다 해도 절대로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를 가장 보배롭게 생각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며 굳게 붙잡겠다는 대답을 듣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거듭난 두 번째 징표이다. 사도 요한은 당신을 어떻게 판단할까? 당신은 과연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일까?

징표 3, “여전히 불완전하고 의심하며 살지만 끊임없이 거룩을 지향한다”

셋째, 거듭난 사람은 의를 행한다.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거듭난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이 미워하시는 일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거듭난 사람은 마음과 영혼과 생각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거듭난 사람은 구세주요 본보기이신 그리스도를 늘 우러러보며 그분이 무엇을 명하시든 기꺼이 복종함으로써 자신이 그분의 친구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물론 거듭난 사람도 완전하지 못하다. 사실 거듭난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의 불완전함을 겸손히 고백한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부패한 본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하며, 자기 안에 은혜를 거스르는 죄의 법이 도사리고 있어 끊임없이 하나님을 멀리하도록 부추긴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은 비록 자기 내면에 죄의 법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에 복종하기를 거부한다.

여러 가지 결함에도 불구하고, 거듭난 사람의 본성과 성향과 언행과 습관은 거룩함을 지향한다. 때로는 넘어지거나 잠깐 곁길로 치우치는 경우도 있지만, 거듭난 사람은 꾸준히 하나님을 향해 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영적 침체기를 보낼 때도 있고, 자신이 참 그리스도인인지 의심할 때도 있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은 존 뉴턴처럼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이 되지도 못했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지도 못했으며, 내가 또 다른 세상에서 되고 싶은 사람이 되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이전과 같지 않다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세”라고 노래한다.

이것이 거듭난 세 번째 징표이다. 사도 요한은 당신을 어떻게 판단할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일까?

징표 4,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을 특별히 더 사랑한다”

넷째, 거듭난 사람은 같은 신자를 사랑한다.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을 특별히 사랑한다. 거듭난 사람은 온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 중에서도 자기와 한 마음이 된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한다.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처럼 극악한 죄인도 사랑하지만, 동료 신자들을 더욱더 사랑한다. 거듭난 사람은 동료 신자들과 함께 어울릴 때 가장 편안해 하며, 세상에서 훌륭한 성도들과 함께 거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

세상 사람들은 지식, 명석한 두뇌, 인간적인 매력, 재산, 신분 따위를 높이 치지만 거듭난 사람은 ‘은혜’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은 은혜가 충만하고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을 가장 사랑한다. 거듭난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가족이자 형제로 받아들인다.

또한 거듭난 사람에게 동료 신자는, 같은 대장의 지휘 아래 공동의 적을 상대하는 전우이자 같은 길을 걸으며 똑 같은 어려움을 겪다가 영원한 집에 당도해서 편히 쉬게 될 동반자이다.

거듭난 사람과 동료 신자들은 서로 이해한다. 그들 사이에는 영적 유대감이 싹튼다. 신분이나 지위나 재산 등 다른 점이 많지만 그런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이자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거듭난 네 번째 징표이다. 사도 요한은 당신을 어떻게 판단할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일까?

징표 5, “세상 사람들에게 때로 특이하고 이상하다는 말을 듣는다”

다섯째, 거듭난 사람은 세상을 이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 5:4).

거듭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견해를 옳고 그름의 척도로 삼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은 세상의 방법과 관념과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느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주위에 있는 일들에서 기쁨을 찾지 않으며, 세상 사람들의 즐거움에도 동참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거듭난 사람의 눈에는 세상 사람들의 삶이 헛되고 무가치하고 무익하게 느껴진다.

또한 거듭난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주위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생각하는 일들을 하면서 만족을 얻는다. 그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아도 개의치 않고, 조롱을 당해도 포기하지 않으며,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칭찬받기를 더 좋아한다.

거듭난 사람은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분노를 초래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고수한다. 거듭난 사람에게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거듭난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어디를 가든지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그러다 보면 때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가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거듭난 사람은 그런 상황도 마다하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 당신의 생각은 사회적인 통념에 어긋나. 당신은 특이하고 이상해”라는 말을 듣더라도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은 더 이상 유행이나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세상을 즐겁게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첫번째 목표로 삼는다.

이것이 거듭남의 다섯 번째 징표이다. 사도 요한은 당신을 어떻게 판단할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일까?

징표 6, “자신의 영혼에 유익을 주는 사람을 친구 삼는다”

여섯째, 거듭난 사람은 주님이 그의 영혼을 지켜주신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요일 5:18).

거듭난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주의 깊게 보살핀다. 그는 죄를 멀리할 뿐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모든 유혹을 경계하며 사람을 사귀는 데도 매우 신중하다. 거듭난 사람은 악한 대화가 마음을 더럽히며, 선보다 악이 더 강력한 파급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시간을 유익하게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며, 읽을 책을 선택할 때도 신중을 기한다. 그는 해로운 책이 자신의 생각을 더럽히지 않도록 주의한다.

거듭난 사람은 친구 관계를 맺을 때도 각별히 주의한다. 그는 친절하고 상냥하고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사귀지는 않는다. 물론 그런 성품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혼에 유익을 주는 사람을 선택한다. 그는 일상생활의 습관이나 행동에도 신중을 기한다.

거듭난 사람은 인간의 마음이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으며 세상에는 악이 흘러 넘치고 마귀가 항상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그는 적의 진영으로 다니는 군인처럼 항상 단단히 무장하고 모든 유혹에 대비한다. 자기 영혼이 적진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늘 경계하며, 겸손히 기도하면서 살아간다.

이것이 거듭난 여섯 번째 징표이다. 사도 요한은 당신을 어떻게 판단할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일까?

거듭남의 징표가 드러나는 정도는 개인마다 다르다

지금까지 거듭남의 여섯 가지 징표를 차례로 살펴보았다. 이 내용을 주의 깊게 읽고 생각하고 마음에 새겨두기 바란다. 거듭난 사람들 가운데도 이 징표가 나타나는 정도에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거듭남의 징표가 너무 희미하고 흐릿해서 식별하기에 몹시 어렵다. 그들의 징표를 식별하려면 현미경이 필요할 정도이다.

그와 달리 거듭남의 징표가 너무 뚜렷하고 확실해서 언뜻 보아도 식별이 가능한 사람들도 있다. 한 사람이 여섯 가지 표징을 모두 뚜렷이 드러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사람마다 여섯 가지 징표 가운데 다른 사람들보다 강하게 나타나는 징표가 제각기 다르다. 모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앞서 말한 여섯 가지는 거듭남의 가장 확실한 징표에 해당한다. 사도 요한은 거듭난 자의 특징을 분명히 언급했다. 거듭난 사람의 성품도 사람의 용모만큼이나 개성이 뚜렷하고 분명하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기술한 서신에서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며, 의를 행하고, 동료 신자를 사랑하고, 세상을 이기며, 자신의 영혼을 지킨다고 말했다. 사도 요한은 거듭남의 징표를 언급한 같은 서신에서 그런 특징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이 모든 사실에 유념하기 바란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거듭남을 교회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런 성경의 가르침에 어떤 가르침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이다. 즉, 이 여섯 가지 징표가 있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거듭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듭난 척하지 말라

중생의 증거에 대한 여러 다양한 견해를 들어보자.

“중생의 증거는 우리의 행위와 태도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판단 기준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는 말씀에 있다. 마음이 불결하고, 손이 게을러 유익을 끼치지 못하고, 행실이 더럽고 부정하며, 부패한 본성에 이끌려 산다면 새로워진 척하지 말라. 그것은 아직도 옛 사람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홀 감독).

“우리의 입양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입양과 달리 단순히 외적 명칭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경우에는 새로운 영과 본성을 부여받아 모든 것이 획기적으로 변화한다. 우리는 그런 변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후사(상속자)로 지정되며, 초자연적인 중생의 역사를 통해 새롭게 거듭나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된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게 된다. 그분의 형상이 우리의 영혼 안에서 새롭게 되살아나며, 그분의 영이 우리 안에 머문다. 우리는 그분의 영에 인도함을 받으며, 그 뜻에 따라 행동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인 척한다. 하지만 자기기만에 빠져 있지 않은지 조심스럽게 살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릇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영이 존재하지 않고, 그분의 인도를 따르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품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성경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고 말씀한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겉모습을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요한은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고 말했다”(레이튼 대감독).

“스스로 중생을 체험한 충실한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스스로를 속이는 이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골 3:7)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지금도 ‘여전히 그 가운데 살며 그 가운데서 행하기’ 때문이다”(대버넌트 감독).

거듭난 것은 증명할 수 있다!

거듭남의 징표가 있는가? 당신은 거듭남의 교리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견해를 갖든 본인의 자유이지만 이 여섯 가지 징표를 갖추지 못했다면 두려워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 징표도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공상에 불과하다. 요한의 증거는 명백하다. 그런 징표 없이는 거듭났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는 공통된 가족의 형질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없다. 거듭난 자의 내면에는 순금 또는 순은임을 인정하는 확인 도장처럼 성령의 증거가 명백히 드러나야 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 23).

그런 증거가 없는 거듭남은 거짓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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