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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 장 | 갈라디아서 4장 18220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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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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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제공 : CGNTV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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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

제 4 장.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염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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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3/21/2022

View: 8466

갈라디아서 4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갈라디아서 4 · 9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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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5/30/2021

View: 7814

갈라디아서 4 – 다국어 성경 Holy-Bible

갈라디아서 4장 ·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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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4/6/2021

View: 3959

갈라디아서 4 KLB – 여러분, 상속자는 모든 것의 – Bible Gateway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는 보호자나 재산 관리인 아래 있습니다.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는유치한 유대교의 율법에 매여 종살이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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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7/14/2021

View: 6019

2021/03/06(토) “갈라디아서 4:1-11” / 작성: 강요섭

[본문] 갈라디아서 4장 1-11절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첫 전임사역을 시작하면서 10명의 청소년 임원들과 제자훈련을 한 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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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1/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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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갈라디아서4장 하갈과 사라, 시내산과 예루살렘

[장별설교] 갈라디아서4장 하갈과 사라, 시내산과 예루살렘 ·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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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392766.tistory.com

Date Published: 8/15/2022

View: 1316

갈라디아서 4장 주석 – 바울서신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갈라디아서 제 4장 =====4:1 내가 또 말하노니 – 이것의 헬라어 ‘레고데'(* )는 바울이 새로운 진술을 시작할때 앞서 언급된 사건에 대한 부연 설명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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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8/21/2022

View: 3283

갈라디아서4장 주석 – 블로그 – 네이버

갈라디아서4장 주석 … 바울은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 율법으로 돌아간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다시 복음의 진리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구약의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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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9/2021

View: 3071

매일말씀묵상. 9월 28일. 갈라디아서 4장. – 하늘품은교회

갈라디아서 4장.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1.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이을 자인데, 유업을 완전히 상속받는 성인이 될 때까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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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poom.or.kr

Date Published: 12/24/2021

View: 5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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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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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갈라디아서 4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 Views: 조회수 11,742회
  • Likes: 좋아요 108개
  • Date Published: 2021. 2.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5YBmbeA487k

갈라디아서 4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1)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염려하다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2)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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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021/03/06(토) “갈라디아서 4:1-11” / 작성: 강요섭

[본문] 갈라디아서 4장 1-11절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첫 전임사역을 시작하면서 10명의 청소년 임원들과 제자훈련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3과쯤 진행하면서 구원상담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10명중에 한 명을 제외하고서는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사역을 하면서 많은 청소년, 청년들을 만나 심방을 하며 구원상담을 해보았을 때 평균적으로 10명중에 7-8명 정도는 분명한 신앙의 고백이나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대부분 자신이 요즘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많이들 주십니다. 이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적 문화에는 익숙하지만 복음의 참 의미는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갈라디아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받은 은혜와 자유의 구원을 다시금 율법주의 아래에서 제한당할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들이 주님께 받은 구원의 자유와 은혜를 다시 한 번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1-7절)] [(1-3)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유업을 이을 자’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모든 것을 상속받고 다스려야 하는 자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가 성인이 되어 참 상속자로 인정을 받기 까지는 후견인과 청지기 곧 3장의 초등교사처럼 아버지가 택한 훈련자 아래에서 상속자 수업을 받게 됩니다. 그 과정은 때로 매우 고되고 엄격하여 종의 생활과 다름없이 강한 훈련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예전에는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 노릇 하였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란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주의로 변질된 유대교요, 이방인들에게는 각 종 우상을 섬기는 종교와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큰 구원의 때가 이르기까지 율법주의로 대표되는 스스로의 힘과 불완전한 우상의 힘을 빌어 구원에 이르려 몸부림 치며 종처럼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두움의 시기를 거쳐 드디어 큰 은혜의 때가 임하였습니다.

[(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때가 이르러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주셨고 그 아들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창세기 3장에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메시아로서의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의미이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임하신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된 명분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함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 나셨다는 것이 왜 우리의 속량과 자녀 됨과 연결이 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하게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우리와는 다르게 모든 죄의 유혹을 이기시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시사 하나님 앞에 온전한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이루지 못한 율법의 요구로 인해 발견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지시고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는 주님께, 주님의 의는 우리에게 전해지며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있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아들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을 믿고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6-7)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임하셔서 예수님과 동일하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확신을 허락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아생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심에 주저함이 없으셨기에 그분의 영을 받은 우리 또한 담대하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49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라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육신의 부모에게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 고백하시며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 되심을 고백하셨고 또한 누가복음 23장 4절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거하실 때에도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앞두신 순간까지 한결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영을 받은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고 담대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자녀이기에 또한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으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며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때로는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불순종하다 돌이키기도 하고,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여 실망시킬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부모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고 그 집의 상속자로 인정하여 주는 것은 나의 공로 때문이 아닌 내가 부모님의 자녀라는 관계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때론 우리가 실수와 연약함속에 넘어질지라도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때로는 징계하셔서 혼내실지언정 그 자녀된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세워 가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닌 그 자녀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가운데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지 말라(8-11절)] [(8-11)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겼고 또한 유대교의 그늘아래에서 율법주의적인 신앙의 뿌리를 가질 수 밖에 없었겠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아신 바 되었음에도 어찌하여 다시 그 율법주의의 그늘아래 거하려 하냐며 그들이 유혹에 흔들리는 것이 어리석은 선택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다는 것은 그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가 단순히 신과 인간, 주인과 종의 관계를 넘어선 인격적 관계 곧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까지 깊어졌음을 알려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왜 그 좋은 자녀의 자리, 상속자의 자리에서 다시금 두려움의 종의 자리로 내려가려 하는지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들이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율법적으로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는 것에 빠져 있는 것을 염려합니다.

[(10-11)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죄인인 것을 깨닫도록 주신 거울 같은 이 율법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 거울 뒤로 숨어버렸고 또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사건들을 기억하며 그리스도를 통한 참 구원의 사건을 소망하도록 주신 유월절 절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안식일을 준비하기 위해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님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서 자유를 얻은 갈라디아 사람들은 오히려 다시 그 유대교의 절기 속에 자신을 가두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보고 자신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이 헛되게 될까 두렵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미 골수 바리새인으로 하나님의 뜻을 쫒지 않고 율법 그 자체로 의로움을 추구했던 삶의 끝이 그리스도의 원수 된 자리였음을 경험했던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 자리에 서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교의 절기를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 속에도 전통을 따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날과 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전통의 길들을 따라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복음의 정신을 잃어버린 채 화석화된 습관의 길만 남아있게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오늘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해준 이 간절한 권면은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을 그 자녀로 부르시기 위해 그 아들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율법 아래에서 이루신 모든 의를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가 지키지 못한 율법의 모든 죄 값을 지고 십자가에 죽으사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내사 우리 주님과 같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내 신앙생활의 결점을 찾으며 내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지 두려움 속에 더욱 견고한 신앙의 공로를 쌓으려 애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려는 우리의 구원의 여정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지만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확신 없이 율법주의와 같은 자기 의의 그늘아래 자신의 신앙의 뿌리를 두는 것은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지 돌아보며 그 은혜에서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복된 주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신앙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의 말씀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내 열심과 감정과 의에 뿌리내려 생명력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 시간 다시금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나를 위해 친히 모든 죗값을 치루어 주시고 그 모든 의를 선물로 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을 감히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가운데 복음의 감격을 누리며 그 복음의 자유함을 통해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삼아 주시옵소서. 형식과 모양만 남은 신앙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매일 우리의 삶이 구원의 감격 속에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복된 삶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묵상해봅시다.

2. 종과 아들의 차이점에 대하여 묵상해봅시다.

3.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묵상해봅시다.

4. 복음보다 내가 더 의지하는 신앙의 습관과 행위가 없는지 돌아보며 내 구원의 근거가 무엇인지 묵상해봅시다.

(작성: 강요섭)

[장별설교] 갈라디아서4장 하갈과 사라, 시내산과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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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갈라디아서4장 하갈과 사라, 시내산과 예루살렘

바울은 3장에서 율법이 결코 복음을 앞설 수 없음을 아브라함과 모세의 시내산 율법을 통해 증명해 보였습니다. 3장의 결론은 율법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는 지침이지 결코 의롭게하는 수단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시내산 율법 이전에 이방인이었던 아브라함이 믿음을 통해 의에 이른 것처럼, 이 시대의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처럼 언약의 백성이 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4장에서 몇 가지의 주제로 계속하여 논증합니다.

1. 1-7절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2. 8-11절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어리석은 갈라디아인

3. 12-20절 거짓 교사들의 열심

4. 21-31절 하갈과 사라의 비교

1. 1-7절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4:1-7은 구약으로 표현되는 옛 언약의 시대를 ‘종’으로 비유하고, 신약으로 표현되는 새 언약의 시대를 ‘아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치 3장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어제 상세하게 설명하지 못했던 율법의 기능 중에서 3:24에서 표현하는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있습니다. 바울은 4:1에서는 초등교사를 ‘종’으로 표현하고, 4:2에서는 ‘후견인과 청지기’로 비유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부유한 로마인들은 전쟁을 통해 포로가 된 종들 중에서 명석한 두뇌와 높은 학력을 소유한 이들을 차출(差出)해 청지기와 후견인으로 삼았다. 물론 그들의 신분은 종입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자녀를 맡겨 교육했습니다. 기초적인 학문과 예의범절 등을 가르쳤습니다. 아이가 성년이 되었을 때 후견인들의 간섭과 통제 아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새 언약이 이르기 전, 율법을 따라 살았던 구약의 시대를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1절에서 ‘어렸을 동안’이라고 표현하고, 4절에서는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하였다고 말합니다. ‘종 노릇’한다는 말은 율법의 권세의 통제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굴욕적인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때가 차매(τὸ πλήρωμα τοῦ χρόνου)’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 아래에서 벗어나 ‘아들의 명분’(5절)을 얻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6절)로 부르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 가운데 ‘아들의 영’을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아들의 영은 곧, 예수의 영이여, 예수의 영은 곧 성령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됩니다.(7절) 갈라디아서 4:4-7은 로마서 8:1-17을 요약하고 있는 듯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로마서 8장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4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 육신에 죄를 정하사(3절)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4절 하)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3절)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6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5절)

2. 8-11절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어리석은 갈라디아인

바울이 1-7절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이미 아들이 되었고, 다시 어린 아이가 될 수도, 될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다시 종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8-11절에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때에는’,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들은 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세상의 초등학문, 또는 세상의 어둠의 영들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의 이면에는 어둠이 영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대학자인 더글라스 무는 ‘하나님이 아닌 자들’을 ‘거짓 신들’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0으로 돌아가 볼까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10:19-2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0:19-20] 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인들에게 깊은 우려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 아들이 되었는데 왜 다시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다시 종노릇하려는가 따집니다.(9절)

3. 12-20절 거짓 교사들의 열심

12-20절에서 바울은 교회를 걱정하는 바울의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초기에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을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14절)했습니다. 15절에 의하면 눈이라도 빼어 바울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이 표현이 속담을 가져온 것인지 실제의 눈을 말하는 것인지 모호합니다. 분명한 것은 초기에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을 그만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들어와 그들에게 전통과 권위라는 이름으로 교인들을 충동질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열심은 교인들을 바울에게서 떼내어 자신들에게로 향하게 하려는 이간질이었습니다.(17절)

바울은 다시 시작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초반에 ‘갈라디아인들아!’라 불렀는데 이제는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힐 일입니까? 바울은 이 표현을 통해 자신이 수고와 애씀으로 갈라디아교회를 이루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다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리’라고 말합니다. 마치 이단에 속아 집을 나간 자녀를 보는 부모의 심정이 아닐까요.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던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는 이것이 목회자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4. 21-31절 하갈과 사라의 비교

바울은 다시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하갈과 사라, 시내산과 예루살렘이란 단어로 설명합니다. 하갈은 종이고,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 즉 자유자였습니다. 하갈에서 난 아들은 종이고, 사라에게서 난 아들은 주인인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을 아들입니다. 23절에서 바울은 의미심장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한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는 약속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이것은 이스마엘과 이삭의 차이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시 시내산과 예루살렘으로 비유합니다. 시내산은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산으로 옛 언약 즉 율법을 말합니다. 시내산은 지금의 땅에 있는 예루살렘을 말합니다.(25절) 그런데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닌 ‘위에 있는 예루살렘’(26절)은 복음, 즉 새 언약을 말합니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인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율법의 행위를 의지해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은 자유 하는 자들이며,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28절)이며, ‘성령을 따라 난 자’(29절)입니다. 율법은 절대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율법은 정죄하고 저주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생명을 낳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세웁니다. 요한계시록 21장으로가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예루살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계시록의 정황상 역사의 종말을 말하고 있는 하지만 서술되는 내용은 새언약을 통해 이루어질 새로운 시대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요한계시록 21:1-4]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새 언약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시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이스마엘이 이삭을 박해하듯, 육신의 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을 핍박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종의 아들이 기업을 물려받을 수 없듯, 율법에 종노릇하는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자유한 여자의 아들만이 유업을 얻게 됩니다.(30절) 우리가 누구입니까? 종입니까? 아니면 아들입니까? 만약 우리가 약속의 자녀이고,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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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장 주석

갈라디아서 제 4장

=====4:1

내가 또 말하노니 – 이것의 헬라어 ‘레고데'(* )는 바울이 새로운

진술을 시작할때 앞서 언급된 사건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할때 일반적으로 사용된 형식

이다(롬 15:8; 고전 1:12). 그는 3장 마지막 부분(3:23 – 29절)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

하여 비유를 사용하여 계속 설명하고 있다. 즉, 바울은 율법 아래 있던 상태에서 믿음

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변화를 마치 다른 사람의 보호를 받던 유아기로부터 스스

로 선택권과 자유를 가지는 성년으로 변화되는 것에 비유한다.

어렸을 동안에는 – ‘어렸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오피스'(* )

는 ‘말을 못하는 자’라는 뜻이다. 바울은 ‘네오피스’라는 단어를 기독교 진리의 장성

한 분량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젖’을 먹어야 하는 연약한 자들을 비유하는데 사용

하였다(고전 3:1, 2). 본절에서는 성년과 대조하여 미성년의 상태를 가리킨다. 유대

에서는 만 12세까지를 미성년으로 취급하였는데 이들은 재산을 소유할 수는 있었으나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종과 다를 바가 없었다.

=====4: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 로마 시대의 관습법상 미성년자는 14세까지 그의 아버

지가 의뢰한 후견인 아래 있었으며 재산권은 25세가 될 때까지 청지기가 대신 관리했

다. 그러나 명확히 고정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Lightfoot). 아마도 이들이 성년이

되는 것은 아버지의 재량권(載量權)에 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아이들은 매년

3월 17일에 열리는 ‘리베랄리아'(Liberalia)라는 가족들의 잔치에서 성인이 되었고,

그 아이는 공식적으로 아버지에 의해 인정되는 아들이자 상속자로 받아들여졌다

(Boice).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언급하는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

지기 아래’ 있다는 말은 로마의 관습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바울이 비유한 논

리 속에서 우리는 율법의 종된 상태에서 믿음으로 자유자가 되는 것은 그 작정한 때를

따라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달려있음을 선명하게 알 수있다.

후견인과 청지기 – 앞에서 바울은 율법을 ‘파이다고스’에 비유하였고 여기서는 ‘보

호자'(guardians), ‘어린 아이를 책임지는 자’ 등의 뜻을 가진 ‘후견인'(*

, 에피트로푸스)과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청지

기'(* , 오이코노무스)에 비유했다. 바울이 몽학선생보다 더

구체적이고 법률적인 지위를 가진 직책들을 비유로 사용한 것은 율법 아래 매인자들의

종속 상태를 강조하기 위함인 것 같다. 비록 유대주의자들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

라고 생각할지라도, 그들은 율법의 청지기와 후견인에게 매인자들로서 실제적인 권한

은 없고 참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미성년자의 상태에 처한 것과 같았다.

=====4:3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 ‘초등 학문’의 헬라어 ‘스토이케이아'(*

)는 ‘차례’, ‘질서’, ‘순위’ 등을 의미하는 ‘스토이코스'(*

)에서 유래한 말로 크게 세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1) 헬라 사회에서 세상을 구

성한다고 하는 기본적인 네 요소, 즉 물, 불, 흙, 공기 등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

다. (2)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초보적 영들'(elemental spirits)에 의하여 움직여

진다고 믿었던 점성술에서의 천체 숭배를 가리킨다(Ambrose, Augustine, Chrysostom).

점성술에 대한 내용은 구약의 유다 왕 므낫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유대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바벨론 포로 생활이 므낫세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별 숭배’

때문이라고 믿었다(Cole). 초대 교회 당시에는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자들이

혼합주의적인 신비 종교를 만들면서 ‘스토이케이아’를 하늘과 땅의 모든 공간에 존재

한다고 믿는 ‘모든 영과 천사들과 마귀들’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하였다. (3) 종교적

지식의 미숙한 단계 또는 어떤 분야에 있어서의 초보 단계(행 15:10; 골 2:8, 20; 히

5:12 등)를 의미한다(Jerome, Tertullian, Calvin, Lightfoot). 본절에서 ‘스토이케이

아’는 (2)와 (3)의 뜻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렇게 볼때 바울이

유대인의 율법주의나 천체 숭배 및 그리스도 신앙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의식과 사상

들을 ‘ 초등 학문’이라는 독특한 개념 속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9, 10절;

롬 8:38). 즉 바울은 그리스도 신앙 이외의 모든 다른것들을 우상적이며 유치한 것으

로 취급하였다.

=====4:4

때가 차매 – ‘때’에 해당하는 ‘크로노스'(* )는 2절의 ‘아버지의 정한

때'(* , 프로데스미아)와 연관이 있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작정한 기간이 지났음을 시사한다. 또한 때가 차기 전에 일정한 기간 동안

율법에 매여 있었던 암담한 상태가 끝났음을 암시한다. 한편 NIV는 본문을 ‘시간이 충

만하게 임하였을 때'(When the time had fully come)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율법이 하

나님의 백성을 억압함으로 그들이 더이상 견디기 어려운 무기력과 곤고함에 이르렀음

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 바울 서신에서 ‘보내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

는 세가지가 있다. (1) ‘아포스텔로'(* )는 특별한 임무를 주

어 보낸다고 하는 데에 역점을 주고 있다(요 17:18). ‘사도'(*

, 아포스톨로스)가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 (2) ‘펨포'(* )는 하나님이 아들을 보낸다는 의미로 (롬

8:3)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신다는 의미로 (요 14:26) 쓰였다. 이는 단지 보낸다고

하는 사실에 역점을 두고 있다. (3) 본절에서 사용된 ‘엑사포스텔로'(*

)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 그를 보낸 사람이나 장소, 사회적 지위에 귀속

되어 있다는 점에 역점을 두고 있다(눅 1:53; 행 7:12; 11:22). 이에 본절의 ‘엑사포

스텔로’는 아들이 하나님에게 귀속되어 있다는 것과 그를 보낸 실존적 공간, 즉 하늘

나라를 염두에 두고 씌여진 것으로 본다(E, Huxtable).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 본절에는 바울의 기독론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자’라고 묘사하여 예수 그리스도

의 신성을 나타낸다(빌 2:5, 6: 고 1:15, 16). 반면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

한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하였다. 즉 ‘여자에게서’라는 말은 메시야의 계보인 다

윗의 ‘혈통’에서 나셨음을 의미하고(롬 1:3) 따라서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었다

는 것을 의미한다(3:13).

율법 아래 나게 하신것 – 본 문장 또한 앞 문장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완전한 인

성을 가진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강조점에 있어서 단지 ‘사람’

으로 오신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의무를 가진 ‘유대인’으로 오셨다는 것이

다(Longenecker).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삶속에서 율법의 요구를 만족 시키시고(마

5:17, 18) 죽음으로 율법의 진노를 짊어지셨다(3:13; 빌 2:8).

=====4:5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아들의 명분’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

오데시안'(* )은 ‘양자됨’이라는 뜻으로서 신약성경에서 바울만이

사용하였다. 바울이 이말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됨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것

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TDNT). 하나님의 유일

한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제도와 율법을 순종하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

게 하셨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신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시

고(눅 2:21), 유월절 절기를 지키셨으며(눅 2:41; 요 2:13) 그밖의 모세 율법을 지키

면서 자라나셨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속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하나님이 그들

들을 아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를 주고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빌 2:8).

=====4:6

아들의 영 –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들의 영’이 증거하

기 때문이다. ‘아들의 영’은 ‘하나님의 영'(롬 8:14) 또는 ‘그리스도의 영'(롬 8:9)으

로서 ‘성령’을 가리킨다. 성령은 약속대로 오순절 다락방에 강림하신 이후에 모든 믿

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양자됨’을 증거한다.

아바 아버지 –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그들

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출 4:22; 사 63:16; 렘 3:19). 그러나 예수 당

시의 유대인들 중에 실제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예

수께서 ‘우리 아버지’라고 불렀을때 불경하다고 말한 것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는 당연

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성령의 내주(內主)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의 관계가 새로워졌고 그 새로워진 관계를 ‘아바’라고 표현했다(Longenecker). ‘아바’

는 아람어로서 ‘아버지’를 뜻하며 탈무드에서는 아기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Jeremias). 이는 어린아이가 ‘아빠’라고 하는 것처럼 아버지를

더욱 친근하게 부르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말을 사용하여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주 가까운 것임을 증거한다.

=====4:7

유업을 이을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로노모스'(* )는

‘상속자’, ‘후사’ 등의 뜻을 가진다. 본문에서 이말은 ‘종’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

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누리는 모든 축복을 소유한 자를 의미한다(롬 8:14

-17).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의 내적증거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특권

을 소유하게 되었다. 한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디아

데우)는 본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3:24, 26), ‘약속으로 말미암아'(3:18), ‘그리

스도 예수 안에서'(3:26)등의 모든 방편들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러한 표현

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양자됨이 자신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은혜

의 결과라는 것을 상기시키려 하고 있다(Longenecker).

=====4:8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하였더니 –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교도로 있

을 때의 상태를 지적한다. ‘하나님이 아닌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우신 데오이스’

(* )는 문자적으로 ‘신이 아닌 자들'(those who by

nature are not gods, NIV)이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이를 ‘귀신'(고전 10:20) 또는

‘신이라 칭하는 자'(고전 8:5)라고 표현하기도 했으며 이것들은 제우스, 아폴로 등과

같이 인간의 상상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들을 의미한다(E. Huxtable). 이처럼 인간이

만든 형상을 섬기는 것은 우상 숭배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를 분명하게 금지하셨다(출

20:4; 신 7:2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본성적으로 우상의 노예가

되게 마련이다.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 ‘이제는'(* ,뉜 데)은 8절의

‘그 때에는'(* , 토테)과 극명한 대조를 보이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상태

변화를 설명한다. ‘알다’의 헬라어 ‘그노스덴테스'(* )는 ‘기노스

코'(* )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 ‘오이다'(* , ‘사실적으로

알다’) 등과는 달리 보다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의 앎을 나타낸다. 즉, 하나

님을 아는것은 믿음을 통하여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이 주권적으

로 선택하신 은혜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 – 본 구절은 율법을 빗대어 말하는 표현으로 3절에서 언급

한 ‘초등 학문’의 특성을 지적하고 있다(3절 주석 참조). ‘약하고’의 헬라어 ‘아스데

네'(* )는 히 7:18에서 율법은 무력하고 빈곤하여서 인간을 대속하고 속량

할 능력이 없다. 또한 ‘천한’의 헬라어 ‘프토카'(* )는 원래 사람들이 절대

적인 궁핍으로 인해 구걸할 수 밖에 없는 ‘결핍 상태’를 의미한다(TDNT). 본 구절에서

이러한 의미의 단어를 사용한 것은 초등 학문인 율법은 항상 결핍이 있고 한계가 있음

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율법이 갖고 있는 초라함은 ‘그리스도의 풍성함'(엡 3:8)과 대

조되는 개념으로 그리스도를 떠난 사람들의 초라함과 천박함을 동시에 시사하고 있다.

=====4:10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율법주의를 책망하고 있다. 본절과 유사한 문구는 골 2:16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당

시 이방인 교회속에는 거짓된 외식적 율법에 의하여 상당한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의식적으로 지켰던 율법의 규례들은 다음과 같다. (1) ‘날'(*

,헤메라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켰던 금식일과 안식일을 뜻한다. 그리

고 여기에 하루만 지키는 절기가 포함된다. (2) ‘달'(* ,메나스). 매월 초

하루에 지키는 월삭(삼상 20:5, 18; 사 66:23)과 달의 반복적 운행과 관련된 절기들,

즉 정월로서 추수가 시작되는 아빕월(출 13:4), 2월이며 꽃의 계절인 시브월(왕상

6:1), 비의 계절인 7월과 8월, 즉 에다님월(왕상 8:2)과 불월(왕상 6:38) 등을 가리킨

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 있어서 달에 대한 절기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월력이 달

랐으므로 그들의 문화권에서 혼란을 초래했던 것으로 보인다(E. Huxtable). (3) ‘절

기'(* , 카이루스).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3대 절기, 곧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레 23장)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여 추가된 나팔절(레

23:23 – 25), 수전절(마카비상 4:52 – 59), 부림절(에 9:24 – 32) 등을 말한다. (4)

‘해'(* , 에니아우투스). 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레 25:2 –

7)과 매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레 25:8 – 55)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상에서 언급한

종교적 절기들을 충실히 지킨 사실만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그들이 율법의 참된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왜곡

된 신앙을 소유함으로 더 큰 멍에와 굴레에 빠져 헛된 열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책망

한다.

=====4:11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 바울의 ‘헛될까’라는 표현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에

치우쳐 있음을 염려한 데서 나온 것인지 그들이 완전히 율법주의자가 되어 예수 그리

스도의 복음에서 이탈하였기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니다. 실제로 당시의 갈라디아 교인

들은 아직 할례를 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들 중에 절기와 날들을 지키

는 유대주의자들이 침투하였던 것은 사실이다(9,10절).

=====4:12

나와 같이 되기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네스데 호스 에고'(*

)는 현재 중간태 명령법으로서 직역하면 ‘계속 나와 같이 되기를’

이라는 의미이다. 이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몇가지의 견해

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혹자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사랑과 정직으로

대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너희도 내앞에서 솔직하라’는 의미로 본다(Cole).(2) 혹자는

바울이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의 모든 의식주의(儀式主義)를 폐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된 것을 상기시키면서 ‘너희도 나와 같은 자유자가 되라’고

했다고 본다(E. Huxtable). (3) 혹자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입장에 선 것을 상

기시키면서 ‘너희도 내 입장에서 나를 이해하라’고 권면했다고 본다(NEB, Boice). 이

상의 세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지만 문맥상 (2)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

다. 왜냐하면 바울은 계속해서 율법과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

문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지위와 유대인이 갖는 우월감을 초라한 것들로

인식하고 참된 자유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가르치고 있다.

=====4:13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너희가 아는 바라 – 바울은 처음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

음을 전하던 때를 구체적으로 회상하고 있다.’너희가 아는 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테'(* )는 사적(私的)인 역사의 배경을 설명할 때에나(고전

16:15; 빌 4:15)또는 이미 확정된 교리들을 진술하려 할 때에(롬 2:2; 3:19; 딤전

1:8)자주 사용되었다. 본절의 배경이 되는 행 13:13, 14에 의하면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중 바보와 버가를 지나 속히 갈라디아 지방으로 올라갔다. 당시 버가는 저지대로

서 해안의 습지로 인한 유행병들이 많이 돌았는데 특히 말라리아가 심했다. 바울은 여

기서 얻은 유행병으로 인하여 하루 속히 버가를 떠난것 같다. 그러나 혹자는 바울이

루스드라 지방에서 겪은 육체적 핍박으로 인하여(행 14:19; 딤후 3:11)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갈라디아에 더 오래 머물렀다고 추정한다(Boice). 어쨋든 바울의 계획에 차질

을 주었던 그의 질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상당히 ‘약한 몸으로’

(고전 2:3) 갈라디아에서 목회 했음을 알 수 있다

=====4:14

버리지도 아니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셉튀사테'(* )

는 ‘ 퇴짜 놓다’, ‘침 뱉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70인역(LXX)에는 나타나지 않

고 신약성경에서도 본절에서만 사용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병자를 만나면 그 병에 걸

리지 않기 위해서 침을 뱉는 관습이 있었다(Lightfoot).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에게 존경과 사랑으로 대했다. 과거에 바울은 신과 같이(행 14:12, 13)

환영받았지만 자신이 신처럼 존경받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반면에 본절에서는 자신

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환영받은 사실을 긍정적으로 보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칭찬한

다. 이처럼 자신을 후대(厚待)한 갈라디아 교인들을 칭찬한 이유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신에게 보여준 사랑과 환영이 참된 것이었기 때문이고, 갈라디아 교인들의 상태가

율법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염려하여 과거의 상태를 기억나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 ‘복’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카리스모스'(*

)는 ‘축복'(blessedness), ‘행복'(happiness), ‘기쁨'(joy) 등을

뜻한다. 한편 소유격 ‘너희의'(* , 휘몬)는 단순 용법으로 쓰였든지 재귀 용

법으로 쓰였다. 더욱이 이 말은 주격 소유격이나 목적격 소유격으로 사용된다. 본절에

서는 단순 대명사로 보이며 그 기능상 소유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이 낫다. 그

래서 본절은 ‘너희들이 갖고 있는 바 축복된 내용들(앞에서 언급한)이 어디 있느냐?’

라는 의미이다(Longenecker).

증거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로'(* )는 바울 서신에

서 항상 칭찬할 때 사용되었다(5:3; 롬 10:2; 골 4:13). 신중하고도 엄숙한 이 표현은

뒤에 나오는 구체적인 내용의 진실성과 사실성을 강조한다. 본절에서는 바울 자신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다 해주기를 원했던 갈라디아 교인들의 헌신적인 생활을 생생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4:16

참된 말을 하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듀온'(* )은 진

리를 뜻하는 ‘알레데스'(* )에서 나온 동사 ‘알레듀오'(*

)의 능동태 분사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과 엡 4:15에서만

사용되었는데 엡 4:15에서는 참말을 신실하게 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거룩한 삶과 하나

님의 진리를 열심을 다해 지키고자 하는 생활 습관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실제

로 바울의 삶에 있어서 진리는 단순히 말 속에만 남아 있지 않고 그의 모든 삶의 모습

과 습관에서도 반영되었다(고후 4:2; 딤후 2:4).

원수가 되었느냐 – ‘원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드로스'(* )는 능동

적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개역성경에는 번역 되어 있지 않은 소유격 ‘휘몬'(* ,

‘너희의’)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원수

가 되겠느냐는 반어법적 문장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너희와 원수되기

위함인줄 아느냐’라는 뜻이다. 그런데 원수 관계는 서로 조화될 수 없고 연합할 수 없

는 관계이다. 따라서 바울이 본절에서 의도하는 바는 내가 너희와 그토록 감격스러운

기쁨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어찌하여 원수의 관계가 될 수 있겠느냐는 의미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4:17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의 간사함을 지적한다. ‘열심 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루신'(*

)은 ‘시기, 증오, 진노의 감정으로 가득 차다’, ‘열렬히 바라다’는 의미이다. 본

절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위장된 열심을 폭로하고 자신의 선하고 아름다운 열심을

증명하려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열심은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

고, 접붙임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지체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

고 와해(瓦解)시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된 것을 파괴시키려고 열심을 다한다.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의 열심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

역시 거짓된 진리에 지나친 열심을 가진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1:13, 14).

=====4: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언제든지 좋으니라 – 열심으로 사모

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본절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1) 열심의 주체가 바울일 경

우, 바울은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에나 지금이나 언제든지 선한 열심으로 서로 돕기를

소원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Burton). (2) 열심의 주체가 갈라디아 교인일 경

우,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음 복음을 받았을 때 좋은 일에 열심을 내었듯이 지금 진리

를 말하는 (16절) 자신에게도 다시 좋은 열심을 보이기를 소원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Cole). (3) 열심의 주체가 율법주의자들일 경우, 바울은 참 복음을 전하는 사

도답게 율법주의자들의 열심을 어느 정도 용납하겠다는 겸손과 시랑의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자들의 열심이 선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언제

든지 환영한다는 뜻이다(Lightfoot, Ridderbos). 세 견해 중 우선 (2)와 (3)의 해석이

타당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본절의 ‘사모함을 받음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루스다

이'(* )는 수동태나 중간태로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수동태로 볼 경우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자들의 ‘환심을 샀다’는 것이되며, 중

간태를 취할 경우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전처럼 지금도 열심으로 선한 일을 추구하기

를 사도 바울이 바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단지 문법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2)와

(3)의 해석이 타당성을 갖지만,전후 문맥상으로나 본절의 내용상으로 볼때 (3)의 해석

이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 즉, 앞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한 거짓 교사

들의 간사하고 교활한 특징을 기술하였고 계속하여 본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그들의 섬김의 동기가 선하지 않은 데 있음을 역설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본절

에서 바울이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복음의

적(敵)인 그들에 대해 바울이 연속적인 비난을 가하고 있는 것은 본절의 ‘좋은 일에

대하여'(* , 엔 칼로)와 ‘언제든지'(* , 판토테)라는

반어적 의미를 가진 부사어에 잘 드러난다(Longenecker). 이러한 맥락에서 공동번역은

본절을 “그들이 좋은 동기로 여러분에게 열심을 보인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번역하였다.

=====4:19

나의 자녀들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나 무'(* )는 그

리스도 안에 있으나 미성숙한 사람들을 칭하는 ‘네피오이'(* , ‘어린 아

이들’)와 구별된다(고전 3:1). 바울이 디모데를 부를 때에도 ‘테크논'(* )

을 사용한 것을 보면(딤전 1:18; 딤후 2:1)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신에게서 양

육받았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 같다. 바울은 본 서신에서 이말을 처음 사용하여 교회를

존속시키려는 자신의 헌신적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Ridderbos).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 ‘해산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디노'(* )

는 단순히 임심해 있는 오랜 기간보다는 분만하는 고통에 역점을 두고 있다. 즉, 바울

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양육하는 것을 어머니가 아기를 출산하는 고통에 비유하고 있

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중생의 체험을 해야 한다는 의미라기보기는 중생

한 자가 가야 할 성화의 과정을 전제하고 바울이 그들을 계속하여 양육함의 수고가 크

다는 것을 시사한다.

=====4:20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 바울은 자신의 심정을 음성에 비유하고 있다. 그는 지금

까지 강경한 어조로 말해 왔지만 갈라디아 교인들을 만나게 되면 부드럽고 온유한 말

로 격려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바울이 직접 그들과 만나서 말로 가

르치는 것이 서신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인식한 때문일 것이다(Ridderbos).

의심이 있음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루마이'(* )

는 ‘당황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를 뜻한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떠한 상태

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모르므로 당혹스럽다는 표현이며 그들을 직접 만나 그 의문을

풀고 싶다는 생각을 나타내는 말이다. 바울이 어떠한 일로 인하여 직접 갈라디아를 방

문할 수 없었는지는 정확하게 알수 없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갈라디아 교인들

을 향한 깊은 사랑과 관심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흔들리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깊이 타락하지 않고 바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4:21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 – 본절의 ‘율법'(* , 노몬) 역시 4절과

3:23등과 같이 정관사 없이 사용됨으로 ‘율법적 제도’를 가리키는 단어로 쓰여졌다.

따라서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은 주의 계명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지키려는 자

들이 아니라 외식에 치우쳐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려는 갈라디아 교회의 변절자들을 가

리킨다. 특히 ‘…하고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델론테스'(* )는 ‘원

하다’, ‘지지하다’, ‘좋아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델로'(* )의 현재 분사형

으로 과거에 율법을 따랐던 적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현재 의도적으로 율법주

의를 따르며 지지하고 있는 자들을 구체적으로 지시한다.

=====4:22

두 아들이 있으니 – 실제로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 외에도 후처 그두라를

통한 여섯명의 아들들이 있었다(창 25:1,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두 자녀만 언

급한 것은 그들의 탄생에 관계된 사건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서로 판이한 출발점을 가

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약속과(3:6 – 14) 관계된 반면, 다른 하나는 약속과 관계

없이 육신을 따라 난 것이다.

계집 종에게서 – ‘계집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스케'(* )는

신약성경에서 언제나 ‘노예로서의 여자’를 뜻하는 단어로 쓰였다(눅 12:45; 요 18:17;

행 12:13). 본절에서 이 단어는 사라의 여종인 ‘하갈’을 지시하며 나아가 그녀에게서

난 ‘이스마엘의 신분’과 ‘율법의 신분’을 암시한다.

=====4:23

육체를 따라 났고 – ‘육체를 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사르카'(*

)는 수태의 방법이 육체의 질서와 법칙으로 인해 태어났음을 보여주

고 그 아들을 잉태한 어머니의 신분을 시사한다. 여기서 ‘육체’는 보통 ‘영’이라는 말

과 대조되어 사용되는데 그것은 때때로 평범하고 자연적인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하였

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육체’는 영적이며 비가시적인 세계와 대조되는

세상의 현실적 삶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롬 1:3; 4:1; 고전 1:26; 고후 1:17; 5:

16).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약속’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팡겔리아스'(*

)는 본절에서 관사없이 사용되었다. 관사가 있는 경우에는 명백하게 아브

라함의 허리에서 날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지만(3:19), 관사없이 사용된 본절의 ‘약

속’은 이삭이 태어난 원인이며 수단이다. 이 출생의 신비는 초자연적인 것이며 인간이

구할 수 없는 가운데서 얻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4:24

이것은 비유니 – 비유를 뜻하는 헬라어 ‘알레고루메나'(*

)는 ‘알레고레오'(* )의 현재 분사형이다. 이는 ‘알로스'(*

, ‘다른’)와 ‘아고류오'(* ,’말하다’)의 합성 동사로 그 문자적

인 의미는 ‘다른 뜻으로 말하다’이지만 보통 ‘우의적(禹意的)으로 말하다’ 또는 ‘어떤

사물을 비유로 설명하다’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역사적 사실을 의심하지 않

고 과거의 교훈을 현재상황에 적용시켜 하나님의 섭리의 일관성을 논증하고 있다. 이

렇듯 현재를 포함하여 모든 시대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계시 역사를 살펴볼 때, 그 의

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 개역성경의 ‘하가’라는 번역은 ‘하갈’의

잘못된 표기이다. 헬라어 사본들과 다른 영역본들은 한결같이 ‘하갈'(‘* ,

Hagar)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본절에서 이름과 연관지어 논쟁이 되는 것은 ‘하갈’을

시내 산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점 때문이다. 수많은 주석가들이 ‘하갈’이라

는 이름의 지명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본절을 바

울이 사용한 우화로 푼다면 그 의미는 보다 쉽게 상징화된다. 시내 산을 하갈 산이라

고 불렀든지 ‘하갈’이라는 말 자체가 시내산을 의미하는 단어인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바울이 본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하갈과 시내산 및 지상의 예루살렘이 동

일선상에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있는 예루살렘 – 이 말은 그 당시에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이 본부로 삼고 있던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예루살렘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은 혈통적으로 유대인 중에 유대

인이요 누구보다도 순수한 사라의 후손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들은 율법의 저주를 감당

하시고 율법을 완성시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함으로 여전히 율법 아래 있는 종

의 신분을 갖게 되었다. 이들의 종됨은 이방인들이 믿음을 통하여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4:26

위에 있는 예루살렘 – 이는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대조를 이루는 천상의 새 예루살

렘을 상징한다. 그곳은 율법에게 종 노릇하는 자들을 해방시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영적 예루살렘이다. 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새로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히 12:24) 현재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룩한 도성이기도 하다(빌 3:20).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모든 시대

에 걸쳐 현재적으로 새 예루살렘의 백성이 되며 성령이 친히 이 일을 증거할 것이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계 21:2).

=====4:27

기록된 바 – 바울은 본절에서 사 54:1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사야는 이 구절

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인한 화해를 선포하고 영적인 평화의 상태가 도래할 것을 묘사

하면서 ‘많은 주의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였

다.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새로운 섭리로 인하여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태

어날 것이라는 것과 믿음의 자녀들이 핍박자들의 고난을 물리치고 믿음의 자녀들이 궁

극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을 증거하고자 한다.

홀로 사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레무'(* )는 ‘과부된 자’라

는 뜻으로 남편 잃은 한 고부의 고독하고 불행한 상태를 나타낸다. 본 구절이 이사야

서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을 비유하는 바, 바벨론에 포로된 유다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

러한 의미의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90세가 넘어 도저히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사라에

게 주어졌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서술한다. 사라에게 주어졌던 약속이란 직접적으로

는 자손에 대한 것이지만, 이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것

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손의 어머니 사라(26절)를 통하여 복음을

주시며, 그 복음으로 교회가 크게 확장된다는 계시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교회의

확장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인 것이다(롬 14:11; 빌 2:9 – 11). 한편 이 말이 꼭 이

방인만을 상징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유하는 여인이 낳은 아들 중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구분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태어난 모든 양자들을 포함하기 때

문이다.

=====4:28

너희는 약속의 자녀라 –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이 비유에 적용시키고 있다.

약속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작정과 섭리를 통하여 주

신 선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자의적(自意的) 행위로 말미암지 않

고 부르시는 이의 뜻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는 육체의 족보를 따르지 않는다

(롬 9:8).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자녀들은 믿음을 통하여 태어나며,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새롭게 거듭나는 자들이다. 바울은 ‘자유하는 여자’와 ‘이삭’과 ‘약속의 자녀’

들과 갈라디아의 교인들을 동일선상에서 취급하면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에

포함될 모든 자들을 약속의 자녀로 선포하고 있다.

=====4:29

핍박한 것같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오켄'(* )은 ‘핍박하

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디오코'(* )의 미완료 능동태형이다. 바울이, 이스

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것을 계속적인 사실을 현재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여 그리스도인

들이 당하는 핍박의 현실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창 21:9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

했다’는 사실을 묘사한 히브리어 ‘차하크'(* )는 ‘경멸하며 비웃다’, ‘희롱하

다’의 뜻으로 이스마엘의 시기는 단순한 조소에서 그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바울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에 대한 핍박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사라가 하

갈을 내쫓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공동체 속에서 거짓된 이복 형제들, 곧 율법주의자들

을 멀리하라고 권고한다.

=====4:30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 유업을 이을 자는 오직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뿐임

을 강조한다. 이는 율법과 믿음이 공존할 수 없으므로 블가피하게 믿음이 선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Lightfoot). 유대주의자들은 유업을 이을 자가 유대인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핍박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입장을 반전시킨다. 유업은 그리

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만 해방되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에게

만 주어진 특권이라는 것이다(7절). 율법의 정죄 아래 계속 머물러 있는 자들은 육신

의 신분을 따라 죄의 종으로 머물게 되며(롬 3:23; 6:16; 7:14), 결굴 아버지의 유업

으로부터 제외된다.

=====4:31

그런즉 – 바울은 21절부터 서술한 하갈과 사라에 관한 이야기의 비유적인 재해석을

결론짓고 있다. 그 결론은 앞서 3:6-9에서 제기되었던 바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

녀이며 상속인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귀결된다. 특별히 바울이 지금까지 사

용한 ‘너희’ 또는 ‘저들’이라는 말 대신에 ‘우리'(* , 에스멘)라는 1인칭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모든 자들은 더 누리는 약

속의 자녀임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함이다.

갈라디아서4장 주석

갈라디아서4장

4:1-7.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바울은 또 다시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한 집에서 유업을 얻을 자는 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업을 받을 때까지는 후견인이나 청지기 아래 있게 된다. 그러나 정한 때가 되어 아버지의 상속을 받게 된다면 그들로부터 자유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께서 오기 전까지 율법 아래 있었지만 주님께서 오신 후부터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성령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로서 합당한 삶을 살도록 인도해 주신다. 아들은 종이 아니다. 비록 성년이 되기까지 부모 또는 후견인의 통제 아래 살지라도 자유한 자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것 자체가 자유 한 자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율법도 세상의 정신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무지로 인하여 여전히 세상에서 종노릇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무지를 일깨워 주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쓴 것이다.

지금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이처럼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들의 신분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해 준 것이다.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4:7)”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후 자신의 신분을 아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말해 준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때 우리의 신분은 종이 아니고 아들이다. 아들이면 우리는 자유자이며 또한 유업을 받을 자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이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임을 알게 해 주시고 이 축복을 누리며 살게 해 주옵소서.

4:8-20.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또는 내가 정당히 너희를 대접하므로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무지로 인하여 자유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이전의 종노릇하던 때로 돌아갔다. 그들은 또 다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킨다. 여기 그들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켰다는 것은 율법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로서 외적으로는 은혜를 떠나 의식적 종교로 돌아갔다는 의미다. 그들이 이처럼 쉽게 복음을 떠나 율법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율법의 의식들이 그들이 전에 숭배하던 자연종교 의식과 일치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신 날들(절기들)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기억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새롭게 하도록 하려 하심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살도록 해 주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통하여 달과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의식(儀式)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심령을 각성시켜 주심으로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해 주려 하심이다.

그러나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떠나 달과 절기를 지킨 것은 거짓교사들(유대주의자)의 유혹에 의해 이루어진 일로서 외형적으로는 율법으로 돌아간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이처럼 쉽게 복음을 떠나 율법으로 돌아간 것은 율법에서 명하고 있는 날과 달과 절기 그리고 해를 지키는 것이 그들의 과거 우상숭배 시 행하였던 종교 의식과 일치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복음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보다는 율법에 따라 종교 의식을 행하는 것이 그들의 문화와 일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이교 세계에 복음이 처음 증거 된 곳에 복음으로 인하여 그들의 문화가 그리스도교의 문화로 변화 되어 정착되기 전까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면 그곳에 그리스도교는 순전성을 유지할 수 없고 혼합종교 형태로 변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진리 안에서 바르게 성장 할 수 있도록 세속 문화를 그리스도교 문화로 변혁시켜 정착시키는 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날과 달과 절기 그리고 해를 지킨 것은 그들 스스로를 어리석음에 빠지게 한 것이었고 또한 바울에게는 그들을 위해 수고한 모든 수고를 헛되게 하는 것이었다. 믿음 안에 있을 때에 그들은 영적 부모인 바울을 자신들의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고 존경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아 복음의 진리에서 떠난 후부터 바울을 멀리 했다. 바울은 그들의 생명을 위하여 수고하였으나 거짓 교사들은 그들의 영혼을 파멸 시키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말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3:16)”고 묻고 또한 그들에게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4:19)”라고 말했던 것이다.

4:21-31.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바울은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 율법으로 돌아간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다시 복음의 진리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구약의 한 예를 들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계집종으로부터 난 자이고 또 다른 아들은 자유 하는 여자로부터 난 자다. 바울은 이 두 아들은 율법과 복음을 예표 하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4:24-25)”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통하여 날 자를 약속의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사라는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의 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없었고 또한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을 수 없었다. 물론 사라는 아직 아들을 잉태하지 못했지만 장차 그가 낳을 아들은 약속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그를 통하여 이루실 것이다. 그는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어 복의 원천이 될 것이고 그의 후손들은 한 민족을 이루어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림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을 미리보고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4:27)” 특별이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보다는 ”지금 우리는 어떤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은 언젠가 다 소진 되지만 하나님이 약속은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울은 약속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말한 후 갈라디아 성도들이 복음을 받고 그 은혜 가운데 사는 것 자체가 놀라운 축복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4:28)”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복음의 은혜 안에 사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들은 결코 거짓교사들의 유혹을 받아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그 은혜의 어떠함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축복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허락해 주신 축복을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 됨의 소중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딤후3:14)“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은혜들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배워야 할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바울은 계속하여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4:30)” 이 말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를 떠나 계속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따라 율법을 쫓아 행한다면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쫓겨날 것을 경고한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하는 여자의 자녀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바른 교리를 통하여 자신의 신분을 알고 그것을 지켜가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자신의 신분을 분명하게 알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은 거짓 가르침에 미혹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2021. 2. 12. 서신교회 목사 양인국

매일말씀묵상. 9월 28일. 갈라디아서 4장. > 매일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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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장.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1.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이을 자인데 , 유업을 완전히 상속받는 성인이 될 때까지는 , 후견인이나 청지기 아래 있는 존재와 같습니다 (1~2) . 유대인 신자들은 율법 아래 매여 있었고 , 이방인 신자들은 세상의 초등학문 ( 이교적인 모든 규정과 방식들 ) 아래 매여 있었습니다 (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어 그리스도를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고 (4), 이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고 성도들로 하나님의 아들들(상속자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5).

2.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 율법이나 , 세상 초등학문 아래 매여 있는 종이 아니라 , 아들의 명분을 얻은 상속자입니다 (6~7). 하나님은 이들에게 아들의 영인 성령을 주셔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6) .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는 세상 초등학문에 매여 종노릇했을지라도, 이제 하나님을 아는 자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9).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 또한 하나님의 아신 바 되는 것입니다 (8~9) . 사도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신들의 믿음의 진위를 다시 확인하라고 도전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아 아들이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의 영향으로 전에 종노릇하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이는 사도의 모든 수고를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10~11).

3. 사도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처음에 어떤 마음으로 복음을 받았는지를 상기시킵니다 . 그들은 바울 사도가 가진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 그를 업신여기지 않고 , 천사와 같이 혹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그를 영접해주었습니다 (13~14). 왜 그랬을까요 ? 바울이 전한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눈이라도 빼어서 바울의 연약한 시력을 대신하고 싶어 할 정도로 바울을 사랑했습니다(15). 이러한 모습은 복음의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을 어떤 존경과 사랑으로 대했는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은혜 받는 심령이 어떤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4. 그러나 아무리 그러했을지라도 , 지금 현재에는 거짓 교사들의 영향으로 바울을 원수로 여긴다면 , 그것은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떠났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16) 사도는 거짓 교사들이 선한 동기로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사람들과 바울 사이를 이간하려는 목적으로 열심을 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7~18). 그러나 사도는 마치 자녀를 해산하는 어머니 같은 심정으로, 지금도 갈라디아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하겠다고 말합니다(19). 그래서 사도는 갈라디아 사람들을 부모의 심정으로 엄히 꾸짖고 싶어 합니다(20).

5. 사도가 꾸짖으려는 것은 , 그들이 완전히 율법 아래로 돌아간 것은 아니라도 , 지금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21). 그래서 사도는 구약의 두 언약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아브라함이 두 아내가 있어서 그들로부터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고 ,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얻었습니다 . 하갈은 종이고 사라는 자유인입니다 . 이스마엘은 육신을 따라 (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간적 계획 하에 자기들의 노력으로 ) 낳은 아들이었으나 , 이삭은 약속을 따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아들이었습니다 .

6. 하갈은 아라비아의 시내산 , 현재의 예루살렘을 상징하고 , 사라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 두 여인은 두 언약을 대표합니다 . 하갈은 율법 언약을, 사라는 약속 언약을 대표합니다. 사도는 이 비유를 통해 , 갈라디아 사람들이 만일 율법을 지켜서 할례를 행하려 한다면 , 그것은 종인 하갈에게로 , 그리고 육체의 방법에로 , 지상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성도는 자유인인 사라에게 속하여 , 천상의 예루살렘의 성도가 될 사람들입니다 . 갈라디아에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28).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였듯이, 언제나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게 되는데, 지금 갈라디아 교회에서 거짓 교사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29). 그러므로 사도는 이제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꼭 집어서 명령합니다(30). 이는 거짓 교사들을 내쫓으라는 명령입니다.

7.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율법과 복음의 문제로 씨름합니다 . 율법적 성향에 묶여있는 본성 때문에 , 우리는 계속해서 선명한 복음의 진리를 들어야 합니다 . 외면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로 신앙을 확인하고 증명하려는 모든 태도는, 사도가 배척하는 율법주의적인 경향입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자들은 복음의 은혜와 자유와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복음은 오늘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제시하며, 그 약속과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음으로 붙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이라고 자녀들에게 말씀하십니다 . 그리고 성령을 주셔서 ,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고 , 자녀됨의 확신을 누리게 하십니다 . 당신은 그 은혜를 알고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하나님 나라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셔서,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감당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부르심과 은혜를, 율법의 행위와 자기의 의로 바꾸지 않게 하시며, 일평생 그 은혜를 더 알고 누리며, 사나 죽으나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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