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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위에 은혜 | 은혜 위에 은혜-할렐루야찬양대 5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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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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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위에 은혜’, 정확한 번역일까? : 오피니언·칼럼 – 기독일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고갈되지 않고 온 우주를 뒤덮고도 남을 정도로 충만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어주실 은혜가 은혜 위에 쌓이고 또 쌓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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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daily.co.kr

Date Published: 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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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위에 은혜러라 – Daum 블로그

은혜위에 은혜러라 요1:16 ‘은혜 위에 은혜러라’에서 ‘위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안티’네요. 영어 표현의 against, instead of 에 해당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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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3/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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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별 설교 – mission –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 복음 1:12-18)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처럼 은혜에 대하여 가장 잘 나타낸 표현은 없다고 할만큼 충만한 은혜를 나타낸 것으로 이 표현은 ‘가장 큰 은혜’, 혹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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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ssion.bz

Date Published: 1/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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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위에 은혜러라 – YES24

이 책은 갈라디아서, 요한계시록, 히브리서, 로마서에 이은 저자의 다섯 번째 강해서이다. 사복음서 중에 예수, 그리스도, 생명을 강조하는 요한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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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es24.com

Date Published: 8/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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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위에 은혜 – Faithlife Sermons

이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은혜 위에 있는 은혜로 가장 최상의 은혜를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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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ermons.faithlife.com

Date Published: 3/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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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위에 은혜 (요 1:14-16) – 기멀전

은혜가 아닌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 되게 하여 최종적으로 은혜가 승리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더 쉬운 말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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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9/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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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은혜 위에 은혜

  • Author: 사랑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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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6. 5. 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TzCVqioK7-Q

‘은혜 위에 은혜’, 정확한 번역일까?

기독일보

트윗하기 [1] 요 1:16절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여기서 그 유명한 ‘은혜 위에 은혜러라’란 문장이 나온다. 성도라면 잘 모르는 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유명한 구절이다. 하지만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는 내용의 정확한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몰려온다. [2] 보통 ‘은혜 위에 은혜러라’란 내용은 성도들이나 목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해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고갈되지 않고 온 우주를 뒤덮고도 남을 정도로 충만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어주실 은혜가 은혜 위에 쌓이고 또 쌓일 정도로 크고도 넓다.’ 별다른 해석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리말 성경의 내용은 이해하기가 쉽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잘못된 생각은 없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3] 이런 오해는 잘못된 번역에서 비롯된다. 원문은 ‘은혜 위의 은혜’(grace upon grace)가 아니라, ‘은혜를 대적하는 은혜’ or ‘은혜를 대체하는 은혜’(χάριν ἀντὶ χάριτος)이다. 한글번역 뿐 아니라 영어역본들도 한 가지 외에는 모두가 ‘위에’(upon)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오직 YLT만이 원문대로 ‘grace over-against grace’로 번역했다. [4] 아마도 번역가들이 ‘은혜를 대적한다’고 하려니 이상해지고 해서 그렇게 번역했으리라 생각한다. 이는 명백히 전후문맥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다. 16절 바로 다음 절을 놓쳐선 안 된다. 원래 성경원문에는 장절의 구분이 없지 않던가. 16절과 17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자연스런 흐름의 두 구절이다. 17절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5] 그렇다. 이 두 구절을 원문과 문맥에 맞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처음 은혜(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율법)는 나중에 주어진 것(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진리의 말씀)과는 대적 될 정도로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어지는 17절의 내용을 통해 16절의 의미가 선명해짐을 본다. [6] 복음서의 권위자인 카슨(D. A. Carson)은 <힘써 하나님을 알자>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율법을 주심은 은혜로운 일, 하나님의 멋지고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하지만 최고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다. 바위틈에 숨은 모세에게 보여주신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드러났다. 율법의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었지만, 이제 예수님은 새 언약, 궁극의 은혜와 진리를 가져오실 것이다. 이는 ‘옛 은혜를 대체하는 은혜’이며, 새 언약과 이어져 있다.” [7] 모세는 ‘살인하지 말라’ 했지만, 주님은 형제를 능멸하고 차별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고 하셨다. 요컨대 교회가 말하는 ‘의’, 교회가 추구하는 ‘의’는 당연히 구약의 율법의 요구나 세상의 요구하는 정의보다 높은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8] 십계명과 율법을 넘어서는(대체하는, over-against)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분의 신부인 우리에게도 세상법과는 구별되는 의와 덕을 요구한다. 오리를 가자면 십리까지 가주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주는 수준 높은 은혜와 사랑 베풂 말이다. ‘모세로 말미암은 은혜와는 대적이 된다고 할 만큼 족히 비교가 안 되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늘 마음에 되새기며 하나님의 은혜에 부족함 없는 삶을 오늘 나부터 잘 살아보자.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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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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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위에 은혜러라

요1:16 ‘은혜 위에 은혜러라’에서 ‘위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안티’네요. 영어 표현의 against, instead of 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대신하는 은혜’라는 뜻이며 앞의 은혜와 뒤의 은혜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17절에서 발견되죠.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그렇다면 전자의 은혜는 율법이며 후자의 은혜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풀어서 쓰면 ‘율법을 대신하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되는 것이죠.

히브리서에 천사보다 우월하시며,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해석할 수 있죠. 태양이 있으면 전기불이 필요 없듯이 예수그리스도 복음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우리는 율법의 은혜가 몽학선생임을 깨닫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더 큰 은혜 아래 머물지 못하고, 여전히 옛 은혜에 머무려고 하는 것은 퇴행이라 아니할 수 없군요.

‘율법’도 ‘은혜’로 주신 것이지만 이제는 ‘은혜 위에 은혜’. 즉 ‘율법을 대신하는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요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은혜 위에 은혜러라” 묵상할 수록 깊은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이미 충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과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은혜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죽을 죄인을 구원하여 살려주신 것만 해도 다른 것이 더 필요없는 완전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 위에 또 다른 은혜를 더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넘치고 있는 은혜 위에 계속해서 더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넘치고 넘치도록, 흘러 넘치고 넘쳐서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도록 끝이 없고 다함이 없는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묵상해 보면,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받는 은혜는 그런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 계시는 은혜는 그렇게 넘치고 넘치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가물에 콩 나듯 주시는 은혜가 아니라, 어쩌다 한 번 주시는 은혜가 아니라, 40일 금식하고 힘쓰고 애써야 주실까 말까 하는 그런 은혜가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고 보면 이미 넘치도록 주고 계시는 그런 은혜라는 것입니다.

내가 알든 모르든,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지금도 지켜 주시는 은혜, 공급해 주시는 은혜, 간섭해 주시는 은혜, 막아 주시는 은혜, 인도해 주시는 은혜, 기다려 주시는 은혜, 참아 주시는 은혜, 다시 기회를 주시는 은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계속 부어주고 계십니다. 몰라서 그렇지, 인정하지 않아서 그렇지,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변함없는 은혜를 부어주고 계십니다.

투덜거리고 불평하여도, 주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우성쳐도, 뒤돌아서 딴 짓을 하여도, 매일 흔들리고 넘어지고 실망시켜 드리는데도, 그런데도 하나님은 은혜 위에 은혜를 계속 부어 주십니다. 당신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은혜를 주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계시기에,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그토록 주시고 주시고 또 주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랍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하나님은 충만한 분이시랍니다. 넘치고 넘치는 분, 아무리 주셔도 줄어들지 않는 분,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시고, 항상 가지고 계시고, 그래서 언제나 주실 수 있는 분, 얼마든지 주실 수 있는 분, 그런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랍니다. 하나님은 곧 충만이십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그런 충만한 데서 받기 때문에, 은혜 위에 은혜라는 것입니다.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에 넘치고 넘치는, 은혜 위에 또 주실 수 있는 그런 은혜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4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그 영광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충만하신 그분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께서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은혜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은혜입니다. 어두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은혜입니다. 죽은 우리를 살리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은혜입니다.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은혜,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런 은혜를 아는 것이 복입니다. 어두운 이 세상에 오신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복입니다.

세상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영접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5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9-11절)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관대, 이방인이었던 우리들, 죄인이었던 우리들, 벌레만도 못한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 그냥 버리셔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우리들, 그런 우리가 무엇이라고, 우리에게는 그런 은혜를 주신다는 말입니까?

빛을 빛으로 알아보는 은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은혜,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은혜, 감히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 수 있는 은혜, 아니 우리는 무엇이라고 그런 은혜를 주신다는 말입니까?

보이지 않는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은혜, 영적인 세계를 인식하고 볼 수 있는 은혜, 저 천국과 영원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은혜, 아니 정말 우리가 무엇이라고 그런 은혜를 주신다는 말입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완벽한데, 다 주셨는데, 그 은혜 위에 은혜를, 넘치고 넘치는 은혜를 계속해서 부어주신다는 말입니까?

육신이 약한 인간임을 아시기에, 죄성을 가진 인간임을 아시기에, 알지만 믿지만 모시고 있지만 또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우리임을 아시기에, 이미 충분한 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또 주시고 또 주신다는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말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참으로 감격스러운 아침입니다. 지금도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심령 가득히 넘치는 아침입니다.

우리는 그런 은혜를 받는 자들입니다.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은혜를 계속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힘 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을 더욱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흘러넘치게 주시는 그 은혜를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받아서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게 주시는 은혜가 넘치나이다!’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많이 더울거라죠. 시원한 바다 사진 한 번 보시고 오늘도 화이팅하시기 바랍니다.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주님의 충만하신 은혜가 오늘 하루 여러분의 삶 가운데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는 표현이 마침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뜻은 뭘까요?

3.

첫째, 어감(語感)상 이것을 묵상해 보면 이런 의미가 있을 듯싶습니다. 기본적 은혜가 있고, 그 위에 얹히는 은혜가 있습니다.

기본적인 은혜, 무엇 보다 먼저 받아야할 우선적인 은혜가 있습니다. 뭘까요? 구속의 은혜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하더라도 무엇보다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먼저 받아야할 것, 먼저 받아야할 은혜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구원도 받지 못했는데 다른 것 풍성히 받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요?

구원도 못 받았는데 건강하고, 돈 벌고, 출세하고, … 이런 것은 도살의 날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얻은 다음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무엇보다, 무엇보다 주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얻는 은혜부터 누리십시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내 영혼이 구원을 얻는 은혜를 먼저 얻어야 합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 되고 형통하기를 원한다는 말씀처럼, 영혼부터 구원을 얻는 은혜를 얻어야 합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 적어도, 적어도 여기, 이 왕십리 중앙교회에 나와 예배하는 여러분들은 이 기본적인 은혜, 영혼이 은총을 입는, 예수 이름으로 구원 얻는 기본적인 은혜는 이미 다 받으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 기본적인 은혜 위에 은혜가 더 필요합니다. 곧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들이 채워지는 은혜, 이른바 물질적 은혜가 풍성해야 합니다. 건강해야 하고픈 사명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가정이 평안해야 신나게 살 수 있습니다. 사업도 그런대로 잘 되어 나가야지 즐거이 주의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엡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합니다. 우리 주 예수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즉 기본적인 은혜가 충만한 이에게 먹고사는 물질의 은혜, 부가적인 은혜마저 충만하기를 바라는 축복입니다.

빌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이에게, 기본적 은혜를 누리는 이에게 당신의 그 풍성하심을 따라 필요한 모든 것들, 물질, 건강, 행복, 직장, 권세, 명예 등등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풍성하게 채우시기를 바란다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 위에 은혜, 이 기본적인 은혜 위에 부가적인 풍성한 삶의 은혜들이 기도하고 사모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풍성하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은혜가 계속적으로 새로운 은혜로 바꾸어진다는 뜻입니다.

즉 은혜 받고 교회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 생활을 시작하게 한 은혜는 다음 단계로 새로운 은혜로 바뀌어 갑니다. 그래서 초신자의 은혜가 다르고, 중견신자의 은혜가 다르며, 성숙한 신자의 은혜가 다릅니다. 모두들 다 똑같이 은혜를 운운하지만, 사실 그 은혜를 따지고 들여다보면 다 다릅니다. 집사가 말하는 은혜가 다르고, 장로가 감격하는 은혜가 다릅니다. 그 깊이가 다르고, 그 질이 다릅니다.

은혜는 발전합니다. 초신자 때에는 그저 교회 나올 수 있게 된 은혜만으로도 감격하여 눈물이 납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면 좋은 교회, 좋은 목사를 만난 은혜에 감사합니다. 굳이 내가 챙기고, 따지고 해서 나온 것도 아닌데 좋은 교회, 좋은 목사, 좋은 성도들을 만난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그리고 이 은혜에 감사하여 감격해 하면 그 은혜는 다음 은혜를 창출하는데 섬길 수 있고, 봉사할 수 있고, 나눌 수 있고, 기꺼이 주님을 위해 드릴 수 있고, 마침내 그 분을 위해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은혜에 직면하게 됩니다!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성도들의 헌신, 섬김, 희생이 얼마나 귀한 지 알게 됩니다. 섬길 수 있다는 것이,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주 예수를 위해 욕을 먹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 나 같은 것이 뭐라고 …

은혜는 은혜를 낳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 더 신령한 은혜, 더 깊숙한 은혜가 있습니다. 지금 현재의 은혜를 모르기에 그 다음 단계의 은혜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작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 때 느끼는 것, 모든 게 감사하더라구요. 살아있는 게 감사했고, 곧 일어설 수 있을 만큼 아픈 게 감사했고, 교우들의 사랑과 관심을 확인할 수 있어 감사했고, 그나마 다시 먹을 수 있게 되어 감사했고, … 가만 생각해 보니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를 감사하니 그 다음 게 감사해지고, 하나의 은혜를 알게 되니 그 다음 은혜를 깨닫게 되고, …. 은혜를 모르고, 감사를 모르는 이들은 가끔 며칠 병원에 입원 좀 해 보십시오. 그러면 은혜와 만나게 됩니다.

은혜 위에 은혜, 현재의 은혜를 알면 또 다른 더욱 기가 막힌 은혜의 세계가 열립니다. 더욱 크고 신비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헬라어 원어 성경으로 오늘 본문 ‘은혜 위에 은혜’를 보면, ‘위에’라는 헬라어 단어가 ‘안티’‘anti’란 단어입니다.

그 뜻은 ‘… 대신’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원문상의 직역된 해석은 ‘은혜 대신 은혜’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란 다소 의역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 대신 은혜’, 무슨 의미일까요? 뭘 대신한다는 걸까요?

문맥의 흐름으로 살펴보아 구약적 율법의 은혜 대신 더 높은 은혜를 뜻합니다. 이어진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구약의 율법적 은혜 대신 은혜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보면, 기독도가 어느 방에 들어갔더니 먼지가 한 자나 쌓였는데 한 소년이 깨끗이 한다고 빗자루로 쓸고 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러자 먼지는 뽀얗게 방안에 자욱하게 떴다가 잠시 후 도로 바닥에 다 가라앉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율법이라고 안내자는 말합니다.

이어서 다른 방에 들어갔더니 역시 앞의 방처럼 먼지가 한 자나 쌓였는데, 한 소녀가 방을 청소한다며 쓰는데, 좀 달랐습니다. 이 소녀는 먼저 물을 뿌리고 그리고 나더니 깨끗이 씻어냈습니다. 안내자는 이것을 ‘은혜’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네 삶을 깨끗이 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구약적 은혜, 율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그 풍성하신 은혜입니다. 모든 것을 잠재우는 동시에 그대로 쓸어낼 수 있도록 하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주님은 그 어떠한 죄를 지은 이라 할지라도 모두를 그대로 용납해 주셨습니다. 돌을 들고, 칼을 들고, 정의를 지키겠노라고, 죄인들을 끌고 온 사람들을 향해선 죄 없는 자가 먼저 하라고 하시면서, 죄를 지은 현장범일지라도 주님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셨습니다.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끌려갔는데, 주님은 아무런 말도 없으시고 그저 그를 받아주셨습니다. 죄인들에게 주님은 은혜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곤 그 은혜로 죄인들은 감격했고, 스스로 모든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며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게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이게 구약의 율법은 흉내도 못내는 용서함의 은혜입니다.

어떤 죄를 지었는가요? 어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가여?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 분에게는 은혜 대신 은혜, 곧 무한히 용서하시고 죄인을 용납해 주시는 엄청난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죄인을 몰아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쫀쫀한 도덕 선생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스스로 인색한 분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아, 그 분은 실로 엄청나신 분이십니다.

4.

보십시오, 16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예수님을 한 마디로 ‘충만’이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충만, Fullness! 인색한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충만한 예수님! 그러기에 누구든지 그분에게 나아가 필요한 것들을 얻고, 충만함을 함께 누립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b)

무엇이 문제인가요?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예수님께 고하십시오. 은혜 위에 은혜, 충만하신 예수님께 간구하십시오. 그 충만함이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을 아직까지 모르는 듯, 구하지 않고 찾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곤 여전히 삶이 힘들다고 버둥대는 이들이 있습니다.

기도의 장소, 성도들이 모여서 힘을 모아 간구하는, 하늘의 축복의 창고, 그 충만한 창고를 여는 기도 모임, 새벽기도회, 금요기도회에 나아와 구하십시오. 주님의 충만함이 내게도 주어질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어떤 이가 날 찾아와 고백을 하더라구요. 전엔 참으로 힘들었는데, 요 몇 년 사이 주님께서 생각 밖으로 충만한 은혜와 복을 주셔서 너무 잘된다며 감사하더라구요.

여러분은 알고 계신가요? 자신이 이미 은혜 위에 은혜, 그 충만한 예수님의 은혜 안에 들어와 살고 있음을? 자기만 모를 뿐입니다.

브라질에는 큰 강, 아마존이 있습니다. 이 강의 하류는 그 폭이 100리가 넘는다고 합니다. 어느 날 조그만 돛단배가 바다에서부터 그 강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배는 오랫동안 바다에서 항해하던 중 식수가 다 떨어져서 배안의 사람들이 모두 목이 말라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그 때 저쪽에서 다른 배 한 척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틀림없이 항구에서 나오고 있는 배였으므로 식수가 많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배 가까이 다가가서 물을 부탁하였습니다.

“우리 배의 선원들이 목말라 죽어 가는데 물 50갈론만 파십시오.” 그랬더니 그 뱃사람들이 웃으며 그러더랍니다. “양동이로 배 밑의 물을 퍼 마시지 그러세요?”

무슨 말인가요? 이미 그 배는 아마존 강의 한 가운데 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강 한 가운데 있으면서, 여전히 짠 바닷물 위에 있는 줄 알고, 갈증에 허덕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있는가요? 이미 여러분의 삶은 은혜 위에 은혜의 세계 안에 있습니다. 그 분께, 그 충만하시고도 충만하신 예수님께 간구하기만 하십시오.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눅6:38) 할렐루야!

5.

이 충만한 축복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의 증언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3)

교회는 충만한 곳입니다. 왜? 그 충만한 은혜의 예수님, 은혜 위에 은혜이신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 아니 그 충만한 예수님의 몸이 교회이기에, 누구든지 그곳에 나가면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곳이기에 충만한 곳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의 세계 안에 사는 여러분,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신 33:29)라고 말할 정도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은혜의 바다에서 사는 이들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눈동자같이 사랑한다 하시며, 그 분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던질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더군다나 충만하실 뿐만 아니라 은혜 위에 은혜가 되신 예수님께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신다고까지 하십니다!

이 은혜를 누립시다. 간구와 감사함으로 이 은혜를 누립시다. 샘은 퍼내면 퍼낼수록 솟아납니다. 은혜 위에 은혜가 간구하고 간구하는 성도들에게 늘 충만히 주어지기를!

예수님의 충만한 은혜 요한 1:14-18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신가?

하나님은 정말 내 개인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시는가?

하나님은 내가 고투하고 있는 이 절박한 상황에 도움을 주실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의심할 때가 많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도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섭리를 의심하게 되는 어두운 ‘영적 겨울’은

있게 마련입니다.

사도 요한도 사람이기에 분명 그랬습니다.

그랬던 그가 말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이것은 수많은 시련과 의심을 지나온 사도 요한의 마지막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충만한 은혜.”

‘충만’의 헬라어 ‘플레로마토스’는 ‘가득 찬 정도를 넘어 넘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분에게서 차고 넘쳐서 우리들은 물론 오고 오는 세대를 충족시키고도

남는다는 뜻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 엄청난 우주가

오늘도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함입니다.

온 우주에 비하면 한 알갱이의 먼지에 불과한 지구와 그 위에 사는 우리들도 당연히 그분의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소수만이 그 은혜를 누립니다.

그 이유를, 파스칼이 그의 명저 ‘팡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세상은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빛이 존재하지만,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핑계대기에 충분할 만큼 어둡기도 하다.”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말입니다.

풀잎 끝 이슬방울에도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은 왜 보지 못하고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요?

민수기는,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시내 광야에서

보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민수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시내 광야에서 ‘제사장 훈련’을 1년만 시키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 했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일 세대 200만 명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들은 이집트에 내려진 열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엄청난 기적, 그리고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온 몸으로 체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어도 믿음과 구원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민수기에는 모두 아홉 번에 걸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베라에서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만나만 먹기 싫다며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하며 울었습니다.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그 땅의 사람들은 거인들이고 자신들은 메뚜기 같으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자신들을 삼키는 땅이라고 혹평하자 백성들이 대성통곡하였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전진하자는 갈렙과 여호수아를 오히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사나운 아말렉 족속을 피해 우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갈 길이 멀어졌다고 하나님을 원망

하였습니다.

레위 자손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무리를 규합하여 모세에게 반역하였습니다.

무리바에서 물이 없다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에돔 땅을 우회하다가 길이 멀고 험하다며 원망하였습니다.

브올에서

신전에 속한 여인들과 음행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음행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모세에 대한 반역이 두 번, 음행과 우상숭배가 한 번, 물과 음식 그리고 먼 길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여섯 번이나 됩니다.

광야는 모든 것이 모자라고 길이 험합니다.

낮에는 살인적인 더위였다가 밤에는 영하로까지 내려갑니다.

또한 광야는 내 능력, 노력, 학벌, 미모, 재능이 철저히 무력화되는 곳으로 내가 씨를 뿌리고

가꾼다고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어쩌면 광야에서의 원망과 불평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산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광야와는 비교할 수 없는 풍요로운 땅입니다.

물과 음식은 넘쳐나고 생필품은 쌓아놓을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 원망과 불평이 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정말 파스칼의 말이 맞습니다.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핑계 대기에 충분할 만큼 세상은 언제나 어둡습니다.

마음에 새기셔야 합니다.

무심코 내뱉는 원망과 불평이

놀랍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차단하여 이 아름다운 세상을 일순 황폐한 광야로 바꾸고,

나로 하여금 이 광야 길을 힘겹게 걷게 만든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불평과 원망은 일순간에 신앙심을 무력화시키며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이나 스스로를 메뚜기로 보며 가나안 땅을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통곡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벌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민 14:33)

“유리하는 자라니, 별 것도 아니네.”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징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한 가인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사람들이 겪게 되는 필연을 말합니다.

정처 없는 고단한 광야 길을 살다가 고아처럼 길을 잃고 만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니요, 광야이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더 잘 보고 더 잘 누릴 수 있습니다.

광야에는 자신을 의탁할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랬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고, 그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해져 풍성하고 존귀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

하나님 아버지께 가장 소중한 여러분들이 있는 것마저 빼앗겨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들로 하여금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했다가는 저도 하나님의 책망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찾고 보아서, 올해부터는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해지는 삶을 살기로 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 말씀을 마음에 새기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막 10:38)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자기 아들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즉 좌의정과 우의정 자리에 앉혀 달라고 청탁하자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에까지 기록된 이 ‘엄마의 치맛바람’의 당사자가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당시 사도 요한도 자신의 어머니의 청탁에 “우리 엄마 최고!”라며 속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그 청탁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알았고 생각날 때마다 얼굴이 화끈

거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다 만사형통, 부귀영화, 무병장수에 해당될 것이며,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작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모르고 기도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모두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대신 ‘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려 하고, 하나님의 뜻 대신 ‘내 뜻’을 이루려

하고, 일용할 양식은커녕 몇 대가 먹고도 남을 양식에도 불안해하고, 용서대신에 이를 갈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 대신에 ‘내게’ 영원히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부르짖는 기도와 철저한 종교생활에 매진하며 이제나 임할까 저제나 임할까 하늘만

바라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들어 나는 하나님의 무응답에 실망하고 분노합니다.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만으로도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주기도문은 정처 없이 떠도는 ‘유리하는 삶’을 종식시키는 진리와 생명의 이정표입니다.

조지 매티슨이 너무나 아름다운 기도를 하였습니다.

“당신이

화창한 날에 오시든 비 오는 날에 오시든 저는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맞이하겠습니다.

당신은 화창한 햇빛보다 귀하시며 당신만 계시면 비가 와도 괜찮습니다.

제가 갈망하는 것은, 당신의 선물이 아니라, 바로 당신입니다.”

“제가 갈망하는 것은 당신의 선물이 아니라 바로 당신입니다.”

정말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이십니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다른 길로 가야 합니다.

그 길에 대해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독생하신 하나님’은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보고 배우고 살면 마침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미혼모에다가 술과 마약과 나쁜 기억들로 찌들어 살았던 오프라 윈프리는 어느 날 이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감사일기’를 쓰는 일입니다.

그 내용은 별거 아닙니다.

“일찍 일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점심 스파게티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상의 감사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녀는 회복되기 시작했고, 그 사랑을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기회도 함께 따라왔습니다.

현재 1억5천만 명이 시청하고 있는 ‘오프라 윈프리 쇼’는 사람들의 아픔을 들어주고 그들을

돕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시작한 감사일기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 찾기’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20-21)

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은 결단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못을 박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가르침 하나를 살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분의 가르침 둘을 살면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1+1=2가 아닙니다.

백이 되고 천도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하나님을 보게 되고 내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찾아 헤맸던 욥이 마침내 외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이 감격스런 외침이 저와 여러분의 입에서 터져 나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복음 1장 9-18절

주님께서 아기 예수로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 성탄절입니다. 태초에

계셨던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어둠에 비취시는 참빛이 되시고 사람들 가운데

에 거하시는 육신이 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성육’

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기적을 기념하는 것입

니다.

성탄절을 보내는 것은 바로 성탄의 정신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하고

죄인되어 원수가 되기조차 하는 인생들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우리들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 성탄절입니다. 문제는 그 상자를 받아놓고는 열어보지 못

하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란 선물을 받기는 받았는데 전혀 그 선물을 누리고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선물 상자를 받아놓고는 열어보지 못하는 사람들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 선물 상자를 열어보고는 예수님 안

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들(골 2:3)을 즐기고 있으십니

까?

1. 지금도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에서는 그 보물상자 속의 보물들을 ‘은혜 위에 은혜’라고 표현

해 놓고 있습니다. 지혜와 지식을 깨닫게 되니 은혜 위에 은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 “은혜 위의 은혜”가 특별히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은

혜”임을 오늘 강조하고 싶습니다.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합니다. 여기서 “거하시매”라는 말은 ‘장막을 친다’는 뜻입니다. 하지

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장막을 쳐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머무시

는 것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요한복음서를 기록하였을 당시는 예수님께서 이미 이 땅에

계시지 아니 하실 때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지

금 현재)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본다는 것도 보고서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보

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보았더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가 진

리가 충만하더라”고

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14절). 그 충만한데

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이고(16절), 계속 받게 되니 은혜 위의 은혜가 되

는 것입니다. 한 번 받고 마는 것이면 은혜 위의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을 친히 보여주시는 예수님

왜 이 대목에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에 대해서 언급

하시는 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광을 충만한 가운데 목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됩니

까?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

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 오직 하나님께로 나는 거듭난 자들은 예수 그리

스도의 영광을 목도하고 자기들과 지금 함께 거하시는 그 은혜, 은혜 위에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도 요한은 18절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본래 하

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

신 하나님이 나타내셨

느니라.” 무엇을 나타냈다는 것입니까? ‘독생하신 하나님’ 곧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

니까? 하나님을 본 사람이 이때까지는 없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본 사람들

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보고 그 보이시는 하나님을 지금도 계속해서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위에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

서 제자들 중의 한 명인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꾸중하셨지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3.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며 교제하는 우리

문제는, 빌립은 예수님을 보아서 아버지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있지만 우

리는 빌립처럼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

을 보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우리야말로 이렇

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물론 육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이 아닙니다. 그것은 재림하실 때에 ‘그 찌른 자도 볼 것이요’라고 한 것

처럼 온 천하의 사람들이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

니다. 영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라면 어떤 공간이나 시간 내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공간과 시간에 갇혀 계시지 않고 시공

간을 초월하셔서 계시기 위해서 승천하셨고, 그렇게 승천하시는 것이 팔레스

타인 지역에 제약되어 존재하는 것보다 제자들에게 더 좋겠다고 하셨던 것입

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더불어 함께 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그냥 “아멘”이라고 습관적으로 말씀하시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런데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이지요!

이런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거듭나는 것이고,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입

니다. 하나님되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 기적인 것처럼, 멸망당할 죄인

인 우리가 의인으로 여겨지고 그 본성이 바뀌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적

감각을 갖게 되고 계속 하나님이 그 중

에 거하시는 즐거움으로 살아갈 수 있

는 것은 기적인 것입니다.

이 기적으로 이제 우리 가운데 지금도 거하시는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즐거

움과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살았

고, 어거스틴이 그렇게 살았고, 루터와 칼빈이 그러했습니다. 청교도들이 그

렇게 살았습니다. 성탄절은 바로 이것을 환기시키면서 이 은혜 위의 은혜를

증거하는 기회가 됩니다.

마치는 말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12월 26일을 ‘선물의 날’(Boxing Day)이라고 합니

다.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 가령 예를 들면 신문배달부, 우체부, 아파트

관리인 등등 주변의 소외되거나 고마운 분들에게 조그만 선물로 사랑의 관심

을 보이는 날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베푸는 것이 성탄절 문

화입니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온 산을 뒤덮어 놓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성탄

절기의 전통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전통을 잘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은혜 위의 은혜”는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가운

데 지금도 계속 거하시는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예수께서 오셨

다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함께 거하시는 것을 우

리가 체험하고 누리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그것이 성탄의 즐거움, 기쁜 성탄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즐거움과 기쁨으

로 성탄절을 기다리고 또한 사랑의 아름다운 헌신과 섬김들이 풍성하기를 주

님의 이름으로 기원하면서 이에 말씀을 맺겠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 복음 1:12-18)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 복음 1:12-18)

어떤 시골 교회에 집사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집에서 많은 돼지를 길렀습니다. 너무 욕심이 과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그의 집에서 여덟 마리의 새끼를 낳았습니다. “집사 님, 축하합니다. 새끼를 여덟 마리나 낳았다면서요? “그러자 그는 시무룩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여덟 마리가 뭐가 많습니까? 옆집의 돼지는 새끼를 열두 마리나 낳았다는데요.” 며칠 뒤에 그 집사 님이 기르는 돼지들 가운데 다른 돼지가 또 새끼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열 네 마리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 님, 이제는 만족하시지요? 새끼를 열 네 마리나 낳았으니까요. 정말 하나님의 은혜네요.” “목사님, 열 네 마리가 뭐 그리 많습니까? 한 스무 마리쯤 되면 모를까?”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집사 님, 제가 보기에 집사 님은 돼지보다도 욕심이 더 많으신 것 같습니다.” “아니, 목사님 어떻게 돼지와 저를 비교해서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집사 님, 보세요. 돼지가 아무리 욕심이 많은 짐승이라 해도 구정물 한 통만 다 먹고 나면 만족할 줄 압니다. 그런데 집사 님은 도무지 만족이 없지 않습니까? 집사 님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집사 님이 돼지보다도 욕심이 더 많을 수 밖에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아도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좋은 일이 생겨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사람은 이것도 감사하고 저것도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설교 문에 물고기의 IQ는 0.3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로 옆의 동료가 낚시 바늘에 걸려 발버둥치면서 끌려가는 것을 금방 보고도, 곧 물고기는 그것을 잊어버린 채 또 다시 입질을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우스개 소리로 우리 나라의 정치인의 IQ도 0.3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동료 정치인이 뇌물을 먹고서 감옥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도 뒤돌아 서서 또 다시 뇌물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 뇌물을 먹고 감옥에 끌려간 정치인은 10년 전에도 있었고,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습니다. 그 일은 내일도 계속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 정치인의 지능지수가 고작 0.3밖에 안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적인 IQ는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까지 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슨 일을 조금 잘하면 내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 것처럼 쉽게 낙심해 버리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셨고 지금도 베풀어주고 계시건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너무나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기억하면서 살도록 매년 삼대절기를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18세기 영국에 존 뉴턴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불량한 청년이요,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그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영국의 해군에 입대를 시켰습니다. 그는 군대의 엄격하고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탈영을 해버렸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실컷 매를 맞고서 영창에 갇혔습니다. 그후 그를 아프리카 노예 선에 팔아 넘겨버렸습니다. 그는 15개월 동안 아프리카의 어느 작은 섬에 갇혀서 노예처럼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극적으로 영국 무역선에 구조되어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노예선의 선장이 되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잡아다가 팔아 넘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바다 위에서 심한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그는 다 죽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그리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뒤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의 어두웠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너무나도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405장 “Amazing Grace”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그는 일평생 동안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죽는 그 시간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고 또 전했습니다. 그가 남긴 말씀 가운데 “이 다음에 내가 천국에 가면 세 가지 때문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첫째는 그곳에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없다는 사실 때문에 놀랄 것이고, 둘째는 그곳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며, 마지막으로 나 같은 죄인이 그곳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사실 천국은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리와 창기처럼 겸손하게 자기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큰 죄인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런데 나 같은 죄인이 천국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깜짝 놀라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기억력이 쇠퇴해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다른 것을 다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나는 이 한 가지만큼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다. 그것은 내가 과거에 너무나 큰 죄인이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님은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지나간 삶을 돌이켜 보십시다. 우리도 역시 큰 죄인이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용서받기 어려운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걸음을 에벤에셀로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몸은 큰 맨션 안에 살면서 영혼은 불행하게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평생 큰 집 마련하느라 고생하지만 그 큰집에서 얼마 못 살고 죽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비싼 집에 집 지키는 개 키우고 감시 카메라를 달고도 불안하게 살면 그게 무슨 복입니까? 최고급 아파트에 살아도 그 영혼은 아직도 판자 집이라면 그것이 무슨 행복이겠습니까?

시편 기록자는 주안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다고 고백했고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고백했습니다(시 84:10). 이 말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하루의 삶이 믿음이 없이 사는 3년의 삶보다 낫다는 말이고, 믿음을 가지고 초가집에서 사는 것이 믿음 없이 큰집에 사는 것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진정 행복하게 살려면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인생은 성취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삶 자체가 다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과 시간들에 대해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살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항상 은혜를 아는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이 철이 들었다고 하는 것은 대개 은혜를 아는 자가 될 때 철이 들었다고 합니다. 나이가 많지 않아도 “부모님의 은혜가 참 고맙구나!”하는 생각이 들면 철이 든 것이고, 나이가 많이 들어도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있으면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것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아직도 부모님으로부터 계속해서 무엇을 얻을 것만 생각하면 철이 덜 든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는 사라집니다. 더 얻을 것만 생각하는데 어떻게 은혜가 느껴지겠습니까?

신앙생활에서도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할 때 은혜를 아는 철든 신앙이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받을 것만 생각하면 은혜는커녕 원망할 일만 많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심각한 위기입니다. 그러면 영혼도 망가지고 축복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피멍이 들게 하면 어찌 축복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바벨론 포로가 되지만 다시 회개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사고만치는 자식을 꺼내러 경찰서를 들락거리는 마음이 멍든 어머니가슴과 같습니다. 아마 훨씬 더 애절한 마음으로 우리를 보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 무슨 원망을 합니까? 이제 우리는 조금 어렵다고 하나님을 아프게 하고, 교회를 아프게 하고, 형제를 아프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구약의 큰 사건이 두 번나옵니다. 하나는 출애굽의 역사요, 둘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요1:1, 12-18) 나오는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은혜에다 은혜를 더 쌓아 올린 것과 같이 온통 은혜라는 말입니다. 앞에도 은혜요 뒤에도 은혜요 오른 쪽을 봐도 은혜요 왼쪽을 봐도 은혜라는 말입니다. 즐거울 때에도 은혜요 고난의 때에도 은혜요, 성공할 때에도 은혜요 실패할 때도 은혜라는 고백입니다. 깨닫고 보면 모든 것이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신앙의 세계입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도 이런 은혜를 체험하고 깨닫고 감격하는 아름다운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래 은혜란 단어는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분에 넘치는 선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 위에 은혜라고 하여 더욱 그 뜻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또 어떻게 설명하여도 받을만한 자격이 전무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에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크고 엄청난 은혜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이런 은혜 위에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에는 먼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은혜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최고의 은혜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어야 합당합니다. 어떤 인간의 노력이나 수단도 자신을 구원하는데 전혀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완전히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잃은 비참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 버려도 아까울 것이 없는 인간들, 하나님께 불순종만 하고 주시는 은혜를 깨닫지도 못하는 우매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들 가운데 보내셔서 인간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입니다. 생명을 대신 할 것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은혜는 정말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닐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은혜 위에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약에 보면 본래 인간이 하나님을 뵙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뵙는 영광과 기쁨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있었던 감격을 고백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하고, 믿어 그 안에서 참된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정말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어떤 은혜도 예수 그리스도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은혜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사용된 충만 이란 단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수나 양에 있어서 전혀 부족함이 없는 완성된 상태로 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빈곳이 없는 충만 이요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차고 넘치는 충만 이십니다. 범죄한 인간이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고 충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주신 은혜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줄 수가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모두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 사용된 “충만”(플레로마)이란 말은 ‘가득 차 있는 것’, ‘전체’ 또는 ‘합’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온갖 보화가 충만하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과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9절에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온갖 지혜와 의, 그리고 거룩과 자비가 충만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1:13). 그리스도는 이러한 충만한 중에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충만한 분이므로 온 인류에게 무한한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는 인류 전체가 아무리 많이 마실지라도 고갈되는 법이 없는 샘물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목마른 자들을 향하여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초청하십니다. 예수 님께로 오는 자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되는 것은 그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여 항상 넘치기 때문입니다. 실로 모든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있는데, 이것은 오직 예수 님 안에 있는 충만한 것들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다 빈자리가 있으며, 그 어떤 빈자리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것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바로 우리가 그 은혜를 받아 누리는 사람들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의 은혜러라”고 한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우리는 이미 그의 충만한데서 넘치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깨닫고 보면 부족함이 없는 넘치는 은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위에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이렇게 끝이 없는 은혜라는 말이요 아울러 무진장한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처럼 은혜에 대하여 가장 잘 나타낸 표현은 없다고 할만큼 충만한 은혜를 나타낸 것으로 이 표현은 ‘가장 큰 은혜’, 혹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은혜’라는 최상급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끊임없이 은혜가 지속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순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의 시작 전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영원한 삶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은혜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속되는 은혜요, 주일부터 토요일까지 지속되는 은혜요 한 달만이 아니라 년 초부터 년 말까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풍성한 은혜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상황이나 분위기와 관계없이 언제나 우리를 향하여 풍성하게 역사 하시는 은혜입니다. 좋은 때는 주시고 나쁠 때는 외면하시는 은혜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그릇이 너무 작아 주시는 은혜를 다 감당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치지 않고 계속하여 은혜를 더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은혜를 체험하면서 고백하기를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시편 23편에서 고백하였습니다.

이 예수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될 생수입니다. 이 생수는 유대교라는 종교나 어떤 다른 종교의 우물에서 나오는 물과는 다릅니다. 또 인간들이 추구하는 재물이나 명예, 또는 권력이라는 우물에서 얻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고 하신 바로 그 생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믿음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족함이 없이 주시는 생수입니다. 하나님의 그 막강한 에너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우리의 생활 전반에 아니 우리의 미래와 영원에까지 끌어들여 생명의 빛과 온기와 바람이 불어오게 하셨습니다. 정말 죄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 자가 되어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는 복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기쁨을 깨닫고 감사할 뿐 아니라 아직 이 진리를 모르는 이웃에게 전하여 함께 이 은혜를 누리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1.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희랍 신화를 보면 한 여인이 영원한 나라로 가기 위해 강을 건널 때 뱃사공이 말합니다. “영원한 나라로 가기 전에 레테 호수의 물을 먹을 것인지 안 먹을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이 호수의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되죠?”

“과거의 모든 아픈 기억들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녀가 좋아하며 “그럼 저는 이 물을 먹을래요”라고 하니까 뱃사공이 한 마디 더 합니다. “그런데 이 호수의 물을 마시면 기뻤던 일도 동시에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 말을 듣고 이 여인은 고민하다가 레테 호수의 물을 먹지 않고 영원한 나라로 갑니다. 사람에게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기억을 가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아름다운 기억입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며, 형제들과 사랑을 나누며 교회생활을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끝까지 아름답게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삶에서 아름다운 기억이 없고 미움과 질투만 있다면 그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영혼이 부서지는 아픔입니다. 서로 아껴주어야 하는 마음에 증오를 심어준 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죄악입니다. 그런 영혼이 부서지는 경험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요? 대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창고에서 찾아야 합니다. 시84:1,6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그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하면서 자기 영혼의 파괴를 막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몸은 포로생활에 처해있어도 영혼은 행복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니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찬460)우리를 향한 이토록 귀한 은혜를 알고 계십니까? 오늘의 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감사가 없습니다. 감사 결핍증에 걸려 있습니다. 감사 결핍증보다 감사 불감증에 걸려 있습니다. 감사를 모릅니다. 발달된 물질문명은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말살시키고 있습니다. 부자는 배가 불러 하나님을 잊고, 가난한 사람은 배가 고파 하나님을 잊고, 배운 사람은 적은 지식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기억치 않고, 무식한 사람은 무식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는 시대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법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할 모르는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돈, 명예, 권세에는 머리를 숙이지만 하나님께는 머리 숙이지 않습니다.

손발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머리도 입도 뒤틀리는 찬송시인 송명희씨는 공평하신 하나님을 외치고 삽니다. 어느 날 방송국에 다니는 모 장로님이 딱한 사정보고 미국에 데리고 가서 치료하고 공부시키겠다고 했답니다. 그러자 그녀는 “난 이대로가 좋아요.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대로 살겠어요!” 그 때 그 장로님을 그녀를 껴안으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습니까? 조금 잃었다고 없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시편 69편 31절을 통하여 시편기자는 진정한 감사는 황소를 드리는 것보다도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감사치 못하는 생활이 죄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봅시다. 그리고 하나 하나 감사합시다. 은혜 받은 기억은 인생의 큰 자산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은혜 받은 때, 은혜 받은 장소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대한 기억으로 포로 생활에서 그나마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런 좋은 기억들은 언제 주어집니까? 항상 기쁜 마음으로 희생할 때 주어집니다. 우리가 희생함으로 좋은 기억들을 만들면 그것이 얼마나 인생의 큰 자산입니다.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받은 은혜를 깨달아야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애의 모든 것을 ‘은혜’ 두 글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2. 나의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금년도 달력 한 장을 남기고 살아왔지만 정말로 경제적으로 힘에 겨운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부패한 인간의 본성은 어려운 일만 기억을 하고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이만큼이라도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은 외적인 환경입니다. 조금이라도 일이 잘 되면 그럴만한 외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리거나 환경에 돌립니다. 그러나 일이 잘못되면 하나님께 원망을 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하는 잘못된 습성입니다. 일이 잘 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모든 일을 행하시고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리고 거기에 합당한 영광과 감사를 올려야 합니다.

미국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무수한 고난 끝에 백화점 왕이 되고, 재무부 장관이 되고, 미국의 10대 재벌에 든 사람이 되고, Y.M.C.A 창설자가 된 죤 위너 메이커씨가 100만 달러 예배당을 짓고 낙성식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내가 주일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애들이 줄서서 감사 예물을 바치는데 집이 너무 가난했던 나는 빈손으로 온 것이 너무 괴로워 주일학교 끝나고 오후에는 벽돌 굽는 아버지 공장으로 찾아가 그 이야기를 하면서 벽돌이라도 한 수레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사택을 찾았습니다. 잠버드 목사님은 내게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오늘 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단독으로 100만 달러 예배당을 짓게 되니 이 큰 은혜를 말로 다할 수가 있겠습니까?”하면서 울었답니다. 지금 우리 안에 이런 기쁨의 눈물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 안에는 이런 감사가 있습니까? 많은 것을 드리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있는 것으로 드릴 수 있음이 복된 일입니다. 드릴 수 있다는 것 바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이고 감사한 일입니까?

3. 이웃과 함께 나누며 즐거워하는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50대 중년남성 무명씨가 구세군 자선냄비에 3752만원 기증했습니다 요즘 불법 대선 자금을 밝히면서 수 백 억대를 거둔 정치인들과는 대조적입니다. 신명기 16장 11절에서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 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맥추 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노비, 고아, 과부, 객 등 모든 사람이 빠짐없이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빈부나 귀천이나 노소를 막론하고 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다 빠짐없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외짝 믿음 가정은 온 가족이 하루 빨리 한 마음으로 한 자리에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강권하여 주께로 인도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온 가족이 다 함께 감사 제단을 쌓을 수 있도록 소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집에 욕심 많은 주인과 마음씨 착한 머슴이 살고 있었습니다. 동이 트자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향하는 머슴의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이 “저 녀석이 산에 가서 빈둥거리며 놀기만 할지도 모르니 오늘은 뒤를 한번 밟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산 중턱쯤 머슴을 좇던 주인이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파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못 가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곰이 나타났습니다. 기겁을 하고 달아나려 했지만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바라보는 곰을 보는 순간 빌고 또 빌었습니다. “목숨만 건질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겠다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갑자기 “퍽”하는 소리와 함께 곰이 기우뚱하며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언제 달려왔는지 하인이 곰의 등을 도끼로 후려치고 있었습니다. 곰은 죽었고 머슴과 주인은 다리를 절며 마을로 내러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회복된 주인은 환한 얼굴로 그 곰의 가죽을 벗기고 그 가죽을 갖고 장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그의 얼굴은 빛이 그리 밝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머슴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이놈아 도끼자국 때문에 반값도 채 못 받지 않았느냐?” 우리는 함께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계가 있겠지만 최선을 다하여 어려운 사람과 함께 하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믿음의 사람이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도 세상의 원리를 그대로 따라가며 끝없는 욕심을 채워야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갈 때 우리 인생이란 얼마나 많이 벌고 얼마나 많이 쌓았느냐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이 주었는가로 평가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함께 살아야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이웃과 함께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주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이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합시다. 있는 것으로 감사합시다. 더불어 나누며 삽시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찾으시는 감사의 사람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과 주 예수를 깊이 사귀고 믿으며 그들을 체험하고 아는 삶 속에는 참으로 풍성한 은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직한 사람들 되고,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 특히 죄의 문제에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되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깊이 앎으로 은혜를 풍성하게 받기 바랍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합니다. 받되 풍성하게 받아야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롬3:24, 딛3:7). 은혜를 받아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느9:17). 은혜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행15:11) 은혜를 받아야 위로와 소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살후2:16). 은혜를 받아야 다른 좋은 것들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은혜라는 말을 조사하다가 큰 것을 하나 깨달았습니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이 ‘은혜와 무엇’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14절에 은혜와 진리라는 말이 나오고 느헤 미야 9장17절, 다니엘서 1장9절에는 은혜와 긍휼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밖에도 은혜와 영화(시84:11), 은혜와 권능(행6:8), 은혜와 자비(욜2:13 욘4:2), 은혜와 사도의 직분(롬1:5), 은혜와 의의 선물(롬5:17) 등 많습니다. 이것을 은혜를 받으면 평강이 따라온다, 은혜를 받으면 진리가 따라온다, 은혜를 받으면 자비가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경우나 은혜가 먼저 나옵니다. 은혜가 뒤에 나오는 경우가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평강도 누릴 수 있다’ ‘은혜를 받아야 진리도 깨달을 수 있다’ ‘은혜를 받아야 긍휼도 입을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말하면서도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 13장13절에서 축도의 원형을 제시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같이 은혜를 먼저 말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다른 좋은 것들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기쁨도 누릴 수 있습니다. 은혜는 기쁨입니다. 은혜를 헬라말로 ‘카리스’라고 합니다. 카리스는 ‘기쁨’을 말하는 ‘카라’에서 왔습니다. 은혜는 기쁨인데 일반적인 기쁨, 인간이 주는 기쁨과는 다른 기쁨입니다. 위로부터 주시는 기쁨입니다. 거저 주시는 기쁨입니다. 진정한 기쁨, 인간이 추구하는 참 기쁨, 그리고 평강, 그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2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는 말씀의 숨은 뜻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하는데 내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불행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 것, 이것은 총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남달리 봐주고 사랑해주고 관심을 가져 주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나에게는 그런 총애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데 이유 없이 곱게 봐주고 대우해 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됩니다. 은혜를 소중하게 여겨야합니다.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받은 은혜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은혜에서 떨어지면 안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감사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저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해야 합니다(시145:7). 은혜 받은 사람은 여호와의 은혜를 보답해야 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해야합니다(고후9:8). 은혜 받은 사람은 은혜의 영광을 찬송해야 합니다(엡1:6). 이럴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해 주십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덧입혀 주십니다. 은혜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은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은 자로 합당한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나가서 좋은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응답하시고 돕는 은혜에 이르게 하십니다. 드라마 사극에서 신하들이 임금에게 ‘성은이 망극하나이다’라는 말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저것은 하나님께나 쓸 수 있는 말인데…’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성은(聖恩)은 ‘거룩한 은혜’라는 뜻이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진심으로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은혜 받은 자로 합당한 생활을 할 때 은혜 위에 은혜를 덧입혀 주실 줄 믿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의 삶을 사시는 저와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원영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은혜 위에 은혜러라

1)

요한복음은 예수의 성육신과 공생애를 해석하고 영적 의미를 강조하는 등 교리 중심의 메시지로 구성되어 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구원자 예수님만이 성부하나님의 유일한 기름 부음 받은 자이신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 예수를 믿음으로만 오직 구원얻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인성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곧장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예수님만이 하나님이시라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예수님의 탄생 사건, 시험 받으심, 변화산 사건 등에 관한 기사가 없다. 또한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최후의 만찬보다는 세족식을 강조하는 쪽으로 말씀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짧고 간결한 비유 대신 긴 강화설교가 특징이다(13-16장까지). 또한 공관복음과 달리 예수님의 사역지가 갈릴리가 아닌 거의 유대지역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요한복음에는 유월절이 3차례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 p.20-21

2)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특히 치유사역(Healing ministry)을 통해 당신께서 스스로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셨다. 즉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메시야닉 사인(Messianic sign) 그 자체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 역사 속에서 영원한 구세주요 메시야로 오셨음을 보여주셨다. 그런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반드시 재림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 정한 때와 시기에 예수님은 반드시 오실 것이다. 아멘.

— p.33

3)

2장에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표적 중 첫 번째 표적, 곧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가 나온다. 잔치의 주인공은 어린 양이신 신랑 예수님과 그 신부 된 교회인 우리들이다. 그 잔치에 꼭 필요한 것은 ‘기쁨’을 상징하는 포도주이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는 자칫하면 그 기쁨의 상징인 포도주가 떨어져 엉망이 될 뻔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내 곧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그럼으로써 가나 혼인잔치는 되살아났다. 여기서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상징한다. 결국 예수께서 만드셨던 ‘포도주’는 십자가 보혈이 우리에게 미래형 하나님나라에의 입성과 영생이라는 ‘하나님나라 잔치에의 기쁨’의 선물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 p.65

4)

‘물’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성령’은 다른 하나님, 한 분 하나님이신 기능론적 종속성과 존재론적 동질성을 만족하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렇기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라는 것은 성부하나님의 유일한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그리스도, 메시야이신 구원자 예수님과, 그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쳐주셔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하신 성령님으로 거듭난다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후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주신다. 그렇기에 당연히 예수와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 p.86

5)

4장 43-54절은 두번째 표적을 통해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치유를 보여주고 있다. 50절을 보면 “믿고 갔더니 외아들이 살아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3장 36절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반드시 나을 것을 믿고 갔던 그 신하는 비록 죽어가던 아들이 살아나는 현장은 보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믿음으로’ 살아난 아들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요한복음 20장 29절의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연상된다.

— p.113

6)

5장에는 세 번째 표적으로 38년 동안 원망과 불평을 가득 안은 채 병자로 살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38년 동안(38년 3개월 10일) 바란 광야에서 체류할 때의 험악한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종말(교회)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의 고해(苦海)와 같은 인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지난 세월 동안 치유를 위해 엉뚱한 해결책으로 안간힘을 다하였고 그럴수록 자신의 소중한 한 번 인생을 원망으로 가득채웠을 뿐이었다.

— p.149

7)

오병이어 이야기는 최후의 만찬과 같이 유월절에 있었던 사건으로 실상은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의 살과 피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5병 2어 이야기는 요한복음 6장 53절 이하부터 곧장 최후의 만찬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 이야기는 마태복음 26장 26-30절, 마가복음 14장 22-26절, 누가복음 22장 15-20절, 고린도전서 11장 23-25절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구약에서의 유월절의 종말론적 성취이기에 살과 피를 언급(요 6:11, 53-57)한 오병이어 이야기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 p.187

은혜 위에 은혜 (요 1:14-16)

은혜 이후의 세 사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땅 위에 계시면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하루는 그 병 고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한 번 방문을 해 보았다고 합니다. 앉은뱅이 거지로 있다가 나음을 받은 한 남자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는 술주정뱅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아, 왜 이렇게 사는가?” “주님, 내가 주님 앞에 큰 은혜를 입어 앉은뱅이에서 고침을 받고 새 사람으로 바로 살아보려고 했는데 막상 살아보니 마음대로 안됐습니다. 하는 일마다 잘 안 되고 먹고살기도 힘들었습니다. 내가 앉은뱅이로 구걸할 때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먹는 것은 해결이 되었는데 성한 몸으로 살려니 더 고달파서 술을 한 잔씩 마시다 보니 이렇게 중독이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창기로 있다가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된 여인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창기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자여, 왜 이렇게 사느냐?” “주님, 죄송합니다. 내가 주님을 만나서 새 사람이 되었는데 바로 살아보려고 했지만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창기 출신이라고 상대도 해 주지 않고 나를 멸시하는 것이 계속 되다보니 내가 오히려 창기로 사는 것이 자유로워서 이렇게 몹쓸 짓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소경으로 있다가 눈을 뜬 청년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이 젊은이가 불량배가 돼 있었습니다. “청년이여, 왜 이렇게 사는가?” “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본래 장님이 아니었습니까? 눈을 떠서 세상을 살아보니 너무도 나를 실망시키는 일이 많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사람 중에 내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갈등을 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불량배로 사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세 사람을 만나보니 그 지경이 되어 있었습니다. 앉은뱅이가 걷는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소경이 눈을 뜬 것은 은혜입니다. 창기가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된 것도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은혜 받은 후에 감당을 하지 못했습니다. 은혜 받은 후에 일어나는 인생살이를 소화해 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은 것, 세례를 받은 것, 집사가 된 것, 장로가 된 것, 목사가 된 것이 모두 은혜입니다. 그런데 은혜 받은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은혜를 대신 하는 은혜

본문 16절의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이 말씀이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중심말씀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우리말 문자로 보면 은혜 위에 중복해서 받는 은혜, 거듭 받는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헬라 원어로 보아야 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이 말을 ‘안티’라는 말로 썼습니다. 안티라는 말은 영어에 대신한다(instead of)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대신하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은혜를 위한 은혜’라는 의미가 됩니다. 문자적으로 그런 뜻이지만 의미상으로 좀더 해석을 붙여야 합니다.

은혜를 대신하는 은혜가 무슨 뜻입니까? 과연 은혜를 대신할 것이 있는가? 은혜는 가장 귀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물을 대신할 다른 선물이 있는가? 의미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대신하는 은혜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아닌 것이 없는 은혜의 뜻입니다. 은혜가 아닌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 되게 하여 최종적으로 은혜가 승리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더 쉬운 말로 풀이하면 은혜 받은 후에 은혜롭지 못한 일들을 은혜롭게 하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은혜로운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나면 갈등이 오고 장애물이 오고 시험이 옵니다. 은혜를 받았는데도 은혜를 역행하는 온갖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도저히 은혜가 되지 않는 그런 일들이 발생이 됩니다. 그와 같은 것들을 ‘은혜 되게 하는 은혜’가 바로 은혜 위에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오랫동안 투병을 하는 성도가 계십니다. 이 분은 수 년 동안 교회출입을 하지 못하고 병상에 계십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이 방문을 했습니다. 그날 따라 성도가 이런 말씀을 합니다. “목사님, 제게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수 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데 정말 힘듭니다. 제가 제 발로 걸어서 주일예배를 한 번만 드리고 하늘나라로 갔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여러분, 병을 앓고 투병을 해 보면 내가 건강을 회복하는 이 은혜만 입으면 만사가 아멘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건강을 막상 얻고 보면 은혜 되지 못한 일들이 또 일어납니다. 이 성도의 소원을 가만히 새겨보면 오늘 우리가 몸소 걸어서 예배당에 나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은혜 되지 못한 것들을 붙잡고 불평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세히 보면 은혜 위에 은혜라는 것입니다.

고시를 준비하는 한 젊은이를 압니다. 수만 명의 국가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그 사람들이 합격만 하면 소원이 없겠다 싶어도 합격 이 후에 또 다른 문제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개업을 하시는 분들, 점포를 가지고 장사를 하시는 여러분들, 내가 돈만 벌면 무슨 문제가 있느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막상 돈을 벌고 보면 거기서 또 다른 인생의 장애물이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은혜 되지 못하는 것까지 모두 다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은혜를 말합니다.

충만한데서 받은 은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데서 받는다. 그러므로 은혜 위에 은혜라고 했습니다. ‘충만’이라는 말은 채워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세 가지 의미로 채워집니다.

첫째는 공간적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컵에 물을 가득 채우는 것은 공간적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교인들이 가득 앉아있는 것은 공간적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시간적인 충만이 있습니다. 때가 다 되었다, 결혼할 때가 되었다, 군대에 갈 때가 되었다는 것은 시간의 충만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면 취학연령이 오게 되는 시간적인 충만이 있습니다.

세번째는 제일 중요한 충만입니다. 내용의 충만, 가치의 충만입니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가치에 있어서 그 충만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충만을 받은 우리는 은혜 위에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안 되는 것들까지도 은혜를 대신할 수 있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충만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얻으면 공간적으로 하늘나라를 얻습니다. 예수님을 얻으면 시간적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소유하면 지옥에 갈 죄인도 구원을 받습니다. 그 완전한 충만의 실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얻은 자는 은혜 위에 은혜라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임종시에 말한 유명한 한 마디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지이다’ 그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그 말을 직접적으로 들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새겨보면 대단한 위인의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지입니다. 한 평생 살았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 줄로 믿습니다. ‘주여, 내 인생은 거지였습니다. 그러나 내 일생 동안 내가 먹고 입고 누리고 오늘의 이 영광스러운 내 삶의 모든 것은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고백을 가능하게 하는 고백이 ‘인생은 거지’라는 고백입니다. 오늘 ‘주님, 나는 거지입니다’라는 빈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시고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내가 뭐가 된 자처럼, 내가 무엇을 가진 자처럼 내 것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빈 마음에 거지와 같은 나의 손에 모든 것에 충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 빈 마음의 충만한 그 은혜, ‘주여, 금년 7개월도 주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라는 마음으로 맥추감사절을 맞이하

시기 바랍니다.

남미의 오지에 어떤 선교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동네에 부유한 가정에 속하는 한 가정의 여인이 아이를 안고 선교사에게 왔습니다. “선교사님, 내 아이가 중병으로 지금 죽어갑니다. 이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만약 이 아이의 병이 낫는다면 우리 집에 있는 제일 귀한 보석을 하나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은 그 아이가 병 낫기를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며칠 후에 그 어머니가 보석을 들고 왔습니다. 목사님 앞에 그 보석을 내어놓고 하나님께 드린다고 했습니다. “자매님, 감사합니다. 아들이 나았군요.” “아닙니다. 목사님, 내 아이는 어제 죽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기도한 이후로 우리 아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내 아들은 하늘나라에 간 것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기뻐서 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여러분, 아들이 죽은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아들이 죽은 그 슬픔, 아들이 죽은 그 재앙, 아들이 죽은 은혜 아닌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한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은혜를 아는 자, 그에게는 은혜 아닌 것도 은혜로 받아들여지며 아멘하며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 은총을 입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세 가지 인생관

이 땅 위의 인생은 세 가지 인생관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첫째는 운명론적 인생관입니다.

모든 것은 운명이다. 이미 다 정해져 있다, 전생의 업보다 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운명을 초월할 수가 없다고 운명론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사주팔자는 운명입니다. 사주는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변경시킬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사주팔자 이론이고 운명론입니다. 토정비결도 운명론입니다. 역술가들의 속임수가 무엇인줄 압니까? 당신의 사주는 도무지 손을 못 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운을 바꾸는 비법이 있다는 이것이 역술가들의 사기라는 것입니다. 사주팔자는 손 못 댄다고 해 놓고 자기는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속임을 당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많습니다.

둘째는 인본주의 인생관입니다.

사람이 다 한다는 것이고 사람이 중심입니다. 나치의 히틀러가 바로 그 표본입니다. 히틀러는 헤겔의 철학을 붙잡고 인간의 절대정신을 믿었습니다. 인간은 못 하는 것이 없다, 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놀라운 절대정신을 가진 민족이 게르만 민족이다 라고 해서 히틀러는 이 지구촌에 나치 왕국을 건설하는데 가장 방해되는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벨탑의 사상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북쪽에 있는 김일성 주체사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김일성 주체사상이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와 자유를 준다는 이론입니다.

세번째는 은혜론적 인생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10절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인생관입니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의 인생관입니다.

시편 31편19절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 지요” 이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커서 우주를 향하여 외치고 있습니다.

다니엘 10장19절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가로되 내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28절에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와서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아멘입니까?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까? 은혜 되지 못하는 것을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하나님 백성의 믿음입니다.

예수 때문에

어떤 집에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주일학교를 잘 다녔는데 아버지가 그 아이를 데리고 장년예배에 왔습니다. 그날따라 설교가 아이들이 듣기에는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이를 옆에서 보니까 목사님을 주목하면서 설교를 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기특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동식아, 너 오늘 목사님의 설교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니?” “아니요, 하나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를 끝까지 아주 잘 듣고 있던데?” “예,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뒤에 있는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 생각했어요.”

사실은 그 아이가 설교를 잘 들은 아이입니다. 여러분, 설교 들으면서 예수님 생각하십시오. 설교를 들으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고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을 생각했다는 그 아이, 목사님의 설교 한 마디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강단 뒤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생각했다는 신앙고백은 우리가 새겨 둘만한 이야기입니다.

금년을 살아오면서 은혜 되는 일만 있었습니까?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난을 보면 은혜 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멘 할 수 없습니다.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찬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무거운 짐들을 금년 한 해에도 많이 겪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 되지 못하는 그것을 은혜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위에 은혜라는 뜻입니다.

아이가 대학입시에 응시를 했지만 낙방을 했습니다. 몇 개월 동안 작정기도 하며 틀림없이 된다고 믿었는데 아이가 낙방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어머니는 두둑한 감사헌금을 했습니다. 사연을 물어보니까 “목사님, 우리 아이는 낙방을 했는데 내가 기도를 하다보니 은혜를 받아서 기뻐서 감사헌금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낙방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런데 딸을 위해서 기도를 하다보니 딸은 낙방을 해도 자기는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가 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살아야 됩니다. 이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맥추감사절은 그러한 신앙고백을 주님 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무슨 예산이나 사업의 차원이 아닙니다. ‘주여, 나는 금년에 거지입니다. 그러나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은혜롭지 못한 고통도 있었지만 주님 지금 생각해 보니 다 은혜였습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그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타나는 것이 절기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은혜 아닌 것을 은혜로 대신 할 줄 아는 이런 성도의 모습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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