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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주일 설교 | [절기특별설교]어린이주일_하나님의 작품 15587 투표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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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특별설교]어린이주일_하나님의 작품
안녕하세요, 여러분? 여기를 꼭 읽어봐주세요 🙂
어린이 여러분들이 주인공인, 어린이 주일이예요 ~
어린이 여러분들은 한명 한명 모두 다 하나님의 걸작품인걸 알고 있나요?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아보고
우리와 같은 걸작품인 구경선 작가님에 대해서도 알아보려고 해요.
하꿈아이의 영상은 매주 목요일 2시경에 업로드됩니다.
일정표가 블로그에 올려져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
블로그에는 공과공부 자료도 함께 올라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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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주일(01) 설교 (9편) – 블로그 – 네이버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어린이를 축복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 … [오늘의 설교]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가 되려면 기사의 사진 5월 첫째 주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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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4/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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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주일설교 – 어린이를 축복합시다 (막 10:13-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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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jesusfestival.org

Date Published: 9/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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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 – mission – 어린이주일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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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ssion.bz

Date Published: 7/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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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주일) 설교모음 – Daum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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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m.blog.daum.net

Date Published: 10/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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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주일 설교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17)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린이 주일 설교말씀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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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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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2018 – 자녀가 잘 되는 법 [에베소서 6:1-4] – 어린이주일

오늘은 어린이 주일로, 우리 교회학교 학생들이 함께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한 가정이 믿음안에서 하나님께 나와 함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복된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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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akumc.org

Date Published: 11/21/2022

View: 6704

5/5(어린이주일) 설교 –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리이까?”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5월 5일은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지켜온 어린이날입니다. 이 날에 우리들은 자녀 양육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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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rosskc.com

Date Published: 5/13/2022

View: 1590

어린이가 없는 어린이 주일을 보내면서… – 크리스찬 투데이

5월은가정의달입니다.첫주일이어린이주일이고둘째주일은어머니주일로대부분의교회가지키고있습니다.매년어린이주일을맞을때마다설교의본문을어.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www.christiantoday.us

Date Published: 10/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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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특별설교]어린이주일_하나님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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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어린이 주일 설교

  • Author: 하꿈아이
  • Views: 조회수 2,53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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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4. 2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JyTTaaYkC4s

어린이주일의 유래

어린이주일의 유래

성경에는 어린이의 고귀함과 그들에 대한 마땅한 대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하나님의 축복이자 선물이며(시 127:3-5),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영원한 생명체이며(롬 11:36),

구속의 대상이자 천국 시민의 그림자이며(막 10:13-16),

가정과 사회와 국가의 기초가 됨(마 7:24)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약자인 동시에

진지함과 순수함을 갖춘 인격의 주체이기도 하며 그들에게는

내일의 역사가 달려 있으므로 바르게

교육해야 할 대상임에 분명합니다.

이에 몇몇 선각자들은 세계 각 지역의 교회를 중심으로

어린이 주일을 정하였으며

1870년 미국의 한 조합 교회에서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예배당을 꽃으로 장식하고 ‘샤론의 꽃, 어린이’라는 제목으로

어린이 예배를 드린 데에서 유래하여 ‘꽃주일’이라고도 불립니다.

1. 시기

어린이 주일은 어린이들의 가능성과 꿈을 존중하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실시되었습니다.

즉 1856년 미국 메사추세츠주의 레오날드 목사가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킨 이래 1868년 미국 감리교회에서

이날을 기념일로 정했으며,

1883년에는 미국 전역에서 이날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는 것으로 확산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일반적으로

6월 둘째 주를 어린이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6월 둘째 주가 어린이 주일로 결정된 것은,

일년 중 꽃이 만발한 가장 아름다운 이 시기가 푸르고 아름다운 어린이들의

이미지와 가장 잘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초창기에는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켜 오다가

1956년 5월 첫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변경하였습니다.

이는 1946년부터 지켜오던 5월 5일 어린이날과 근접해 있을 뿐 아니라

어린이 주일의 근본 취지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유래

어린이 주일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절기는 아니지만

근세에 들어오면서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교회의 절기로 보편화되었습니다.

자라나는 어린이가 어떻게 교육되느냐는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과 직결되기에

몇몇 뜻있는 목회자들은 어린이들을 위한 교회의 특별한 봉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최초로 어린이 주일을 제정한 유니버셜리스트 제일교회의

레오날드(G.H Leonald)목사 역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던 한 사람으로

1856년 어린이들을 그리스도인으로서 훈련시키고 어른들에게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는 취지에서

6월 둘째 주를 자신이 사역하는 교회의 어린이 주일로 정하고

그날 어린이 주일 행사를 거행했습니다.

레오날드 목사의 어린이 주일 시행이후 교회들은 이에 대한

높은 관심을 나타냈고,

1868년에는 미국 감리교에서 6월 둘째 주를 어린이 주일로 정식으로 승인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결정은 다른 교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1883년 미국의 장로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다른 교파들도 ‘어린이 주일’안을 결의안으로 통과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어린이 주일은 교회 절기의

일부분으로서의 위치를 갖게 되었으나

이 무렵의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도 어린이에 대한 인식이

성숙하지 못했음은 물론 어린이라는 호칭조차 없던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우리에겐 어린이 주일의 제정보다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 대한바른 인식이 더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방정환, 마해송 등의 어린이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선각자들이 1922년 일본 동경에서 색동회를 조직하여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해 어린이 인격보호와

바른 성장에 대한 어른들의 관심과 각성을 촉구하는 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도 어린이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한편 초창기 5월 1일이었던 어린이날이

1927년부터는 5월 첫째주일로,

그리고 1946년에

오늘날과 같은 5월 5일로 변경되었고,

1957년에는

어린이 헌장이 제정, 공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교회들도 초창기에는 미국에서 처음 제정된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켜오다가

1956년부터 5월 첫째 주를 어린이 주일로 변경하여

보다 활발하게 지켜오고 있습니다.

(어린이주일) 설교모음

예수께서 어린이를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마태복음 18:1~14

석원태 목사

누군가 18세기는 남자를 발견했고, 19세기는 여자를 발견했고, 20세기는 어린이를 발견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역사의 원년을 이루는 그의 삶 속에서 어린이를 저희 한가운데 세우시고, 천국인의 표본으로 교훈하셨습니다(마 18:2, 막 9:36).

Ⅰ.예수의 어린이관에 대한 성경을 봅니다(마 18:1~5).

마태복음 18장 2~5절 중에서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3~15절에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9장 35~37절에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3~16절에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3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어린이관은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셨다고 하였습니다. 결코 어린이는 한편 구석에 있어야만 될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른들 구석이나 가족들의 구석이나 사회나 국가의 한 구석이나 교회의 구석에 있어야 될 존재들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왜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저들 한가운데 세우셨을까? 우리는 어린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사실을 능히 찾아낼 수 있습니다.

1) 어린이 자체의 존재적 중요성을 일깨워 줌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예수님 제자들이나 어른들은 예수님께 오는 아이들을 꾸짖고 업신여겼습니다. 사실상 저들은 성년이 되기 전에는 여자들과 함께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여겨졌던 시대였습니다. 어린이는 아직까지 미숙한 존재로 가운데가 아닌 구석이나 밖에 있어야 될 자들로 취급받던 때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저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실로 놀라운 예수의 행동이었습니다. 그 존재적 중요성을 알려주는 일이었습니다.

2) 어린이는 마땅히 영접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이는 부모와 가족과 사회와 국가에서 언제나 그 중심으로, 한가운데로 영접 곧 환영받아야 될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그 큰 이유는 어린이를 영접함이 곧 예수를 영접함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영접할 정도가 아니고,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결과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가운데 있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3) 어린이는 천국인의 표본이 된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이, 어린이는 누구든지 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린이에게 있는 특성을 강조함으로 중생인(거듭남)의 품성을 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에게는

① 돌이킴, 곧 회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잘못에 대한 자기 변화가 있다는 말입니다.

②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③ 남을 섬기는 받듦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④ 부모를 향한 신뢰심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⑤ 가르침에 대한 순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⑥ 주어진 행복에 대한 만족과 감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⑦ 미래를 향한 소망심이 가득 차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3복음서에서는 어린이에 대하여 말할 때,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이야말로 참으로 한가운데 세움을 받는 자들이 아닌가!

4) 어린이는 사랑과 축복을 받아야 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① 영접하였습니다. ② 자기에게 나옴을 용납하였습니다. ③ 그 어린아이들을 안아주었습니다. ④ 저희 위에 안수해주셨습니다. ⑤ 그리고 축복해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마땅히 가운데 세움을 받아야 할 자들이 아닌가! 예수 사랑과 축복의 대상들은 언제나 가운데 세움을 받는 자들입니다.

5) 어린이는 하늘에 천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마 18:10).

Ⅱ. 교회의 한가운데 어린이를 세워야 됩니다(마 18:6~14).

예수님의 삶은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운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에 대한 교훈을 행하신 그 배경에는 제자들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으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고 쟁론이 있었기 때문에 어린아이를 저희 가운데 세우게 된 것입니다(막 9:33~34). 저들은 또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 18:1)라고 주님께 질문하였습니다. 교회에서는 누가 크냐고 하는 질문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천국에서는 어린이가 제일 큰 자’라고 대답하시는 가운데, 한 어린아이를 저희 가운데 세우고 천국에 대한 교훈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 부분에 와서 교회로 하여금 어린이를 교회 가운데 세워야 한다는 책임 있는 교훈을 던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어린이를 한가운데 세우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

1) 예수 믿는 하나의 소자라도 실족케 하지 말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마 18:6~9).

마태복음 18장 6절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소자’(mikrovi)는 앞에 나오는 어린아이를 지목할 뿐만 아니라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마 25:40)에게도 해당됩니다. ‘실족’이란 말은 ‘넘어지게 하다’(마 16:23), 혹은 ‘오해하게 하다’(마 17:27)라는 뜻으로 유혹에 빠뜨려 그 믿음을 넘어뜨리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고 함으로, 소자를 실족케 하는 자의 받을 앙화(殃禍)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자를 실족케 하는 손이나 발이나 눈은 예외없이 지옥불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마 18:7~9).

2) 예수 믿는 하나의 소자라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0절에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멸시하지 말라, 관심 밖의 존재로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있는 데도 없는 것 같이, 귀한 데도 천한 것 같이 여기지 말라고 한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그 소자들은 이미 하늘에서 파송받은 하나님의 천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국가를 지키는 수호천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단 10:13, 12:1). 교회를 지키는 수호천사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계 1:20). 혹은 개인을 지키는 수호천사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행 12:15). 본문에는 어린이를 지키는 수호천사가 마치 신복이 왕을 가까이 배알하듯이(왕하 10:8), 하나님 앞에서 저 어린이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마 18:10).

3) 예수 믿는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지 않고 다 찾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3~14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에 대한 교회의 목자적 심정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그것을 100마리의 양 가운데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예수의 목자적 가슴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한 소자에 대한 교회의 목자적 가슴은 ① 개인적인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한 마리 양, 한 소자입니다. ② 참으시는 인내의 사랑입니다.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는 인내입니다. ③ 궁극적으로 찾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찾고 마는 것입니다. ④ 그것은 기뻐하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⑤ 그것은 영원한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궁극적 구원의 사랑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은 오늘 교회가 어린이(小子)를 한가운데 세워야 할 책임있는 사명입니다. 교회가 어린이를 한가운데 세움에 있어 그 어린 소자 하나도 실족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를 잃어버렸을 때는 찾도록 찾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말씀하였습니다. 아니 감사하였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라고 하였습니다. 천국복음의 비밀이 어린아이들에게 임하고 있음을 감사하였습니다. 다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그 현장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를 찬양하는 어린아이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마 21:16)라고 격찬하며 만족하셨습니다. 천국은 바로 아이들의 세계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였습니다. 사나운 짐승들이 어린아이에게 끌려 다니는 세계라고 하였습니다(사 11:6). 젖 먹는 어린아이와 젖 뗀 어린 아이들이 맹수들과 함께 사는 평화세계라고 하였습니다(사 11:8). 말하자면 갓난아이들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영적 중생인들의 세계를 말합니다(벧전 2:2, 벧전 1:23).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고후 5:17). 이것은 지상의 전투 교회와 내세의 승리 교회(천국)의 특색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들이 중심이 되는 세계입니다. 어린이는 하나님의 나라 한가운데 서야 될 존재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어린이를 저희 한가운데 세우시고 천국시민성을 교훈하였습니다. 중생받은 영적 어린이는 하나님나라에서 중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접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회개와 겸손과 신뢰심과 순종과 감사와 소망의 품성을 지닌 천국인의 표본이 됩니다. 저들이야말로 주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교훈하였습니다. 교회는 모름지기 이러한 어린아이들을 한가운데 세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을 한가운데 세우기 위하여 하나라도 실족케 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 그 하나를 잃으면 찾도록 찾아내고 마는 예수님의 목자적 심정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저희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인의 품성을 교훈하셨습니다. 지적으로, 체력적으로, 영적으로 미숙한 어린아이들은 마땅히 교회의 한가운데 자리를 잡도록 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저들이야말로 가정과 교회와 역사의 중심들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중심에는 영적으로 거듭난 아이, 곧 갓난아이, 젖 먹는 아이, 젖 뗀 아이, 어린아이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저들이 교회의 한가운데 자리를 잡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교회된 특색과 미래적인 중심의 힘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받은 새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닌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을 교회의 한가운데, 역사의 한가운데 세우시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영적 어린아이는 교회에서 가장 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됩니다(딤전 3:15). 이 집의 가운데는 어린아이들이 서 있어야 합니다. – 아 멘 –

=========================================================================================== 제목 : 어른이 되고자하는 자는 본문 : 마-18-01-5 어른이 되고자하는 자는 먼저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마 18:1-5)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얼마 앞둔 시점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마도 이 질문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질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것은 “천국에서는 누가 큰자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마가복음서의 기사에 의하면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를 떠나 가버나움으로 오는 도상에서 이 질문을 가지고 제자들사이에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제자들앞에 세우시고 가르치시기를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큰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문화권에서는 큰분을 가르켜 어른, 어르신네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의 교훈을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어른이 되려면 먼저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 또 하나의 믿음의 역설이 있습니다. 역설이란 모순되어 보이지만 진리인 것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지난 주일은 어린이 주일이었고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의 교훈의 핵심이 어린이의 소중함이었다면 오늘 어버이 주일의 교훈의 핵심은 어른들의 소중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이와 어른의 소중함을 놀라운 진리의 역설로 가르치십니다. 어린이는 어른같이 다루어 질수 있어야하고, 어른은 어린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갈수 있는 성숙한 인격의 질로서 ‘어른아이다움’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벗어야 한다는 교훈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어린아이의 유치함, 어린아이의 나약함, 어린아이들의 흔들림등에 대한 적지않은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이에게서 배울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성인들이 이 어린이들에게서 배울 것들은 천국백성들의 인격적 본질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천국백성들이 배워야 할 어린아이다움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1. 어린이의 신뢰성을 배워야 합니다.

어린이를 어른과 비교할 때 가장 현저한 대조적인 특성은 신뢰성일 것입니다. 어린이는 잘 믿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믿지 못합니다. 종종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주의시키는 말 가운데는 “사람 다 믿지 말라’는 말 아닙니까? 어른들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상처받은 혹은 배반당한 인생 경험 때문에 세상을 믿지 못합니다. 사람들을 믿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믿지 못함으로 인하여 하나님도 신뢰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없이 우리는 결코 구원받을수도 천국에 들어 갈수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이 혹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준 상처에도 불구하고 다시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믿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시람을 믿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어린이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어린이는 얼마나 잘 믿습니까? 그들은 친구를 믿습니다. 이웃을 믿습니다. 선생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렸을 때 믿음을 갖지 못하면 어른이 될수록 늙어 갈수록 믿음갖기가 더욱 어려워 진다는 것은 통계학적인 진리입니다.

사실 우리네 인생은 믿지 못할 여러 배신의 경험으로 가득차 있는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결코 창조적인 인생을 살아갈수 없습니다. 수학의 공식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믿음의 전제(명제)를 수용하지 않고는 수학도 풀리지 않습니다. 과학자가 자기의 실험이나 탐구의 결과를 믿지 못한다면 그의 실험이나 탐구가 진행될수 있겠습니까? 사업가가 자기가 착수하는 사업의 결과를 믿을수 없다면 의욕적인 사업의 추진이 가능하겠습니까? 정치가가 자신의 선출을 믿지 못한다면 또한 자기의 정치참여를 통한 보다 낳은 세상의 개혁을 믿을수 없다면 정치에 투신할수 있겠습니까? 교육가가 자기의 교육을 통하여 학생들의 배움과 학문의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면 교육이 가능하겠습니까? 의사가 자기의 진단과 치료를 믿을 수 없다면 진료가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초도 믿음입니다. 잘 아시는 히브리서11:6의 말씀을 다시 묵상해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예수님의 구주 되심에 대한 믿음-이 믿음 없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한1:1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어린이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2. 어린이의 단순성을 배워야 합니다.

단순성의 반대는 복잡성입니다. 어른들의 사고는 복잡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단순합니다. 단순하기 때문에 잘 믿고 잘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금세기의 영성운동의 큰 스승인 리챠드 포스터는 단순성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트레이드 마크(trade mark)이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단순성의 두가지 표현은 솔직함과 만족함이라고 가르칩니다. 단순성은 솔직함입니다. 단순한 사람은 투명합니다. 그는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의 사고는 복잡합니다. 여러 가지를 계산하기 때문합니다. 어린이가 솔직할수 있는 것은 계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손익계산을 다하고 예수님 따를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수요예배에 12제자를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처음 제자들에게 공통된 하나의 특성이 있습니다. 바로 이 단순성입니다. 단순하게 믿고 단순하게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단순함이 세상을 감동시키는 힘인 것입니다.

단순성의 또 하나의 표현은 만족함입니다. 단순한 사람은 단순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의 만족은 현재에 있습니다. 그는 미래를 생각하며 미리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를 보십시오. 별것아닌 것 가지고 기뻐하며 만족합니다. 누가 어린이에게 고가의 장난감이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까? 어른들입니다. 어린이들에게는 장난감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종이조각 하나, 떨어진 단추하나, 나무 가지 하나도, 기어다니는 곤충하나도 모두 신기한 장난감입니다. 이것들과의 놀이에 빠져 있는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지켜보십시오. 행복함 그 자체가 아닙니까? 지나치게 결과 중심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오늘의 가치관은 현대인들에게서 단순한 행복을 빼앗아 가고 말았습니다. 어떤 수도사 지망생이 산위 높은 곳에 있는 수도원을 찾아올라 와서 큰 스승앞에 엎드려 진리를 배우고 싶다고 말하자 이 스승은 젊은 수도사 지망생에게 “산위에 오르는 동안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수도원을 찾느라고 미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고 하자,”네가 산길을 걸어 오르는 동안 지나친 그 많은 꽃들의 행복과 시내물의 노래소리를 떠나 어디에서 너는 진리를 찾고 행복을 구하겠느냐”고 되돌려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눈을 떠서 보면 우리 주변에는 지금 여기서도 만족할수 있는 행복이 지천으로 늘어져 있습니다. 내가 숨쉴수 있는 행복,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울릴수 있는 행복,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수 있는 행복, 이런 단순함의 눈이 열린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천국을 보고 누리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 단순성을 배워야 합니다. 어린이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3. 어린이의 개방성을 배워야 합니다.

개방성은 열린 마음입니다. 호기심이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실로 어린이의 특성은 끊임없는 호기심이 아니겠습니까? 열린 마음의 반대는 닫힌 마음입니다, 폐쇄성입니다. 더 이상 새로운것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탐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성인들의 의식구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꿈이 없습니다. 발전이 없습니다. 호기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를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탐구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하고,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더 알고 싶어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천국의 신비를 더 알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백성들의 특성이 아닙니까? 그런데 당시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상실한채로, 비 본질적인 것들을 가지고 논쟁을 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천국에 대한 호기심보다도 천국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는 것에만 관심이 고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정한 어른이 되려면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개방성이야 말로 우리를 젊게하는 비밀입니다. 유대인 랍비 시드니 그린버그는 정신적인 청년과 정신적인 노인의 차이를 이렇게 구별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믿는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의심으로만 대한다면 노인이다. 우리가 받기보다 주고자 한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받기만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즐길 것을 즐길줄 안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인생이 뜻대로 안된다고 해서 꿈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고 있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예로부터 존재한 편견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아직도 성공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공상만 일삼고 있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매력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더 이상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다면 노인이다. 우리가 아직도 사랑을 찾고 있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독을 떠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아직도 행복을 추구한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려 하지 않고 행복을 찾는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사랑을 주고 받을줄 안다면 우리는 청년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받기만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모든 것은 나의 성실성에 달려 있다고 믿고 아직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면 우리는 청년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교회 모든 어버이들께서 이런 개방성을 지닌 어린이의 마음으로 혹은 청년의 마음으로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개방성은 창조력의 원천이요 우리가 창조할수 있는 한 인생은 아직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소위 창조적인 계절이 지났다고 생각하는 노년기에 오히려 더 위대한 창조를 남긴 사람들의 기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선 성경을 보십시오. 모세는 80세에 자기 민족을 출애굽시키는 위대한 모험을 시작했습니다. 안나 할머니는 84세에 메시야 대망의 기도가 응답받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갈렙은 85세에 아직도 “그 산지를 내게 주소서”외치며 미완성 과업을 향한 인생의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90세에 주께로부터 환상을 받아 인류 역사에 대한 불멸의 계시를 기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하나님께로부터 약속된 생명 이삭을 품에 안을수 있었습니다.

대령 샌더스는 나이 66세에 유명한 캔터기 프라이 치킨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소설가 홈스는 70세에 ‘커피잔 너머’라는 명작을 저술했습니다. 레이건은 70세에 미국 대통령이 되어 미국 역사상 가장 인상깊은 스피치들을 남긴 대통령으로 또한 통치기간 가장 백성들을 행복하게 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습니다. 괴테는 80세에 파우스트를 완성했습니다. 전도자 빌리 그래함은 80대에 아직도 왕성한 열정으로 세계적인 전도 집회들을 인도하며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시인 로버트 부라우닝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나와 함께 나이를 먹자./가장 좋은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나니/인생의 끝 그것은 처음을 위하여 만들어졌나니/하나님을 신뢰히라. 전체를 보라. 두려워 하지말라.” 그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내가 처음 태어날 때 모든 사람들은 웃었고 나는 홀로 울었나니. 그러나 내가 죽는 날 모든 사람들은 울고, 나는 홀로 웃을수 있는 삶을 살자”

그렇습니다. 젊음을 결정하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태도입니다. 우리교회 모든 어르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시고 어린이의 믿음, 그 단순성 그리고 개방성을 가지고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시는 영원한 소년 소녀, 영원한 청춘을 누리시는 어버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제목 : 천국의 스승 본문 : 마-18-01-6

시 편 15: 1- 5

마태복음 18: 1- 6

카릴 지브란의 책 속에 나오는 예언자 알무스타파는 어린이에 대한 부모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이들은 당신의 아이들이 아니니라. 그들은 당신을 빌어서 오나 당신으로부터 오지는 않느니라. 그리고 비록 그들이 당신과 더불어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당신의 것은 아니니라.

당신은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어도 좋으나, 당신의 생각을 주려고 하지는 말아라. 그들은 그들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당신은 그들이 몸담을 집을 지어줄 수는 있으나, 그들의 넋이 깃들 집은 지어줄 수 없나니, 그들의 넋은 당신이 찾아갈 수 없는, 꿈에서라도 찾아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서 살고 있기에.

당신은 그들과 같이 되려고 애써도 좋으나, 그들을 당신과 닮게 만들려고 하지는 말아라. 삶은 뒷걸음질치지도 않거니와 어제와 더불어 꾸물거리지도 않기에.”

아이들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천국의 스승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워야 하며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우려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가르치려 하고 또 소유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 대한 이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아이들을 그르치고 그들로 말미암아 부모 된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중산층의 자녀들이 범죄 청소년이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가르칠 여유가 생겼기 때문에 그것으로 아이들을 무엇인가로 만들어 보려고 애를 쓰는 부모 때문입니다. 차라리 가난하였을 때는 아이들에게 무엇인가 배우도록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배웁니다. 자연을 보고 배우며 하나님이 저들을 위하여 두신 모든 환경에서 배웁니다. 음악적 소질이 있으면 아무리 가난하여도 스스로 그 음악적 재질을 키워나갑니다. 하나님이 아이에게 주신 재능과 소질을 우리가 올바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억지로 부모가 원하는 재능을 강요할 때 그 아이는 그릇되기 시작합니다. 소질이 없는데도 피아노를 쳐야만 하는 현대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괴롭기만 합니다. 이 아이들은 스스로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우리는 옆에서 이를 도와주고 격려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남의 집 아이를 잠시 맡았을 때 그 아이에게 우리의 생각을 강요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이들입니다. 하나님이 잠시 우리에게 맡겨 주셨을 뿐입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면 하나님이 곧 찾아가십니다. 아이들은 그 부모를 곧 떠납니다. 그동안 우리는 그 아이에게서 배우고 그들을 올바로 돌보아 줄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이들을 올바로 양육하는 비결은 그들을 내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그들을 내 마음대로 하려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양육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하는 부모야말로 가장 좋은 부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할 때 우리는 바로 아이들을 이해하게 되고 그들을 소유하지 않고 독립된 인격으로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쩌다가 가끔 아이들의 책상에서 그들이 써놓은 일기나 편지를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읽으면서 이것을 쓴 것이 내 아이인가를 의심하게 됩니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생각이 내 아이 속에 있었다는 발견에 그저 놀랄 뿐입니다. 내가 너무 그 아이와 동떨어져 있음을 발견하곤 하였을 것입니다. 결코 아이들은 내 소유일 수 없습니다. 내 생각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소유가 아닙니다. 내가 소유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섬세하며 까다롭고 거룩한 인격입니다. 간단한 기계조차 그 원리를 모르는 내가 어떻게 그렇게 복잡하고 섬세한 인격을 알 수 있으며 다룰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린 아이를 키우는 것은 화초를 가꾸는 일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적당한 토양에 심어 때를 따라 적당량의 물을 주면 화초는 저절로 자라서 꽃을 피우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들이 자랄 수 있는 좋은 환경과 적당한 사랑을 부어주면 저들은 아주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좋은 환경이란 좋은 집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환경을 뜻합니다. 자연이 그 무엇보다도 좋은 환경이 될 것입니다. 아이들은 하나님에게서 왔기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이야말로 그 아이들에게는 최적의 토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많이 물을 주면 나무의 뿌리가 썩는 것처럼 지나친 과보호나 사랑은 그 아이를 그릇되게 만들기 쉽습니다.

요즈음 화초를 가꾸는 일에 있어서도 화초가 가진 본성대로 자라게 두지 아니하고 억지로 그 모양을 바꾸고 혹은 성장을 억제해서 사람이 보기 좋은 모양을 만들어 놓습니다. 철사를 감아서 억지로 휘어지게 만들고 가지를 잘라내므로 모양을 가다듬습니다. 이런 분재(盆栽)는 기르는 사람의 취향에 맞도록 뜯어고쳐 기형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우리의 아이들을 그런 모양으로 키우려 하고 있습니다. 소질이 없는데도 억지로 그림을 그리게 하고 음악을 공부하게 합니다. 좀 자유롭게 놀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데, 이를 억지로 가두고 공부하도록 몰아넣습니다. 자기 적성과는 상관없이 덮어놓고 아무 과나 선택하여 대학에 진학합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은 기형적인 인격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부모가 만든 분재와 같은 작품입니다. 분재는 기형일수록 보기가 좋습니다만 우리 아이의 기형적인 인격은 우리의 큰 고통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아이들은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 잘 자랄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하고 사랑을 부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천국의 스승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우리는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첫 번째 교훈은 그들이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

우리의 아이들이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천국에서 가장 위대한 자는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회개하여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린 아이는 우리에게 천국을 가르쳐주는 스승입니다. 천국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어린 아이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국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우리 가정에 아이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사랑을 배우고 겸손을 배우며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어린 아이를 보면서 자신의 정결치 못함과 신뢰치 못함과 사랑 없음을 깨달으면서 회개하여 이런 아이와 같이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어린 아이들이야말로 천국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런 천국의 스승을 우리 가정에 다 모시고 있으면서도 그들에게서 배우려 하는 대신 그들을 악마의 자식으로 만들려 하며,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아 가지고 온 그 사랑과 믿음과 순진함을 제거하려 합니다. 그런 것은 바보스러운 것이요 미완성의 것이며, 출세하는데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린 아이와 같이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마음이 화평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끊임없이 우리를 어린 아이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는 소리가 있습니다. 사랑을 따라 사는 일은 손해요, 믿음을 갖는 것은 항상 사기 당하기 쉽고, 겸손한 자가 되는 것은 바보가 되는 것이라는 소리를 따라 우리는 늘 욕망이 가득한 어른으로 머물고 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어른에서 어린 아이로 돌아가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순진함을 되찾고 정직하며 겸손하며 단순해지며 사랑하며 믿으며 그리고 꿈을 갖는 것―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천국의 스승인 어린 아이들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이에게서 이런 보배들을 보면서 배우고 동시에 그 보배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잘 가꾸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가르칩니다”라는 시를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그 어린아이는 당신보다 훨씬 위대합니다.

당신이 가르치는 그 아이가 당신을 가르칩니다.

당신은 그더러 예수와 같이 되라고 가르치지만 당신은

그가 이미 당신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잊었습니까?

당신은 그의 잘못을 올바로 가르친다고 하지만 가르치는 쪽은

당신이 아니라 마음이 더 깨끗하고 자유로운 그입니다.

당신은 그더러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지만

그러나 알 수 없겠습니까?

그보다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당신입니다.

그는 단순한 믿음으로 즉시 믿으나

당신은 당신 나름의 의심과 이유를 찾아냅니다.

당신은 그더러 용서하라고 가르치지만 그러나 모르겠습니까?

그는 당신이 가르칠 때 이미 용서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가 용서할 때는 당장에 용서해 줍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떻습니까?

원한을 오래 품고 빚진 자를 잊지 못합니다.

당신은 그에게 사랑을 가르치려 하지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외칩니다.

“얘야, 내가 선생이 아니라 네가 선생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가르치는 그에게서 배우십시오.

그를 닮으십시오.

천국에 가려면 그래야 한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순진하던 아이들이 자라면서 거짓말하고 속이는 자가 되는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그렇게 사랑스럽던 아이가 미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렇게 단순하던 아이들이 간교하고 얄밉도록 꾀를 쓰게 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일까요? 이 모두가 어른들의 잘못이요 책임입니다. 이제 우리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어린 아이에게서 그 보배들을 발견하고 그 가치를 귀하게 여겨 배우며, 동시에 그것을 잘 간직하도록 도와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의 양육은 믿음 없이는 올바로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천국을 맛보게 하는 아이들

이 어린이들은 우리에게 천국을 가르쳐 줄뿐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천국을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이 어린 아이가 있으므로 해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잠시라도 근심 걱정을 잊어버리고 웃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사랑을 선사하고 기쁨을 주며 우리로 웃게 만듭니다. 이런 보배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린이를 주시는 것은 천국을 우리에게 선물하시는 것입니다. 그 아기의 웃음소리, 그 눈짓, 그 몸짓 하나하나가 기쁨이요, 사랑이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명절이나 부모님의 생신 때면 가족들이 모입니다. 이런 때에 언제나 주인공은 예쁘게 자라나는 아기들이 단연 그 모임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 아기들을 중심으로 화제가 이루어지고, 그 아기의 재롱 때문에 웃으며, 그 아기 때문에 분위기 전체가 기쁨에 충만하게 됩니다. 아기가 있는 곳에 천국이 이루어지고 거기에 마귀는 무서워 도망을 갑니다. 젖내나는 아기를 품안에 안을 때 누구나 거기서 사랑을 느끼며, 기쁨을 맛봅니다.

가끔 내 자녀들의 어렸을 적 사진을 들추어보면서 그들의 해맑은 웃음이 함박꽃처럼 피어있는 사진을 발견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마음이 평온해지고 잔잔한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의 함박 웃음은 하나님의 미소입니다. 조지 라이드 아웃의 “어린이 찬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창조하실 때 이른 아침부터 하셨다. 어둠을 물리치며 떠오라는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바라보시고 밝아오는 하늘색으로 아기의 눈빛을 삼으셨고, 진홍빛 아침 노을로 아기의 뺨을 칠하시고, 황금빛 햇살로 비단결 머리를 만드셨다. 재잘재잘 지저귀고 속삭이는 새들의 노래를 들으시고 아기의 목소리를 삼으셨다. 때로는 부드럽고 낮은 음으로, 때로는 감미롭고 강렬한 음으로 조율하셨다.

양떼 속에서 이리저리 뛰노는 어린양들을 보시고 그 활발한 동작을 아기의 심장에 넣으셨다. 은빛 여울을 보시고 그 음악을 들으시고 아기의 웃음을 여울소리처럼 만드셨다. 사랑의 날개를 타고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려 서둘러 가는 빛나는 천사들의 모습을 보시고 순결과 사랑으로 아기의 마음을 지으셨다.

아기를 만드신 다음 세상에 내려보내 가정에 기쁨을 주시고 푸른 들판에 웃음을 주시고 가는 곳마다 즐거움을 주셨다. 아기를 가정에 보내시고 부모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위해 이 아이를 양육하라.” 교회에 보내시고 말씀하셨다. “나의 사랑과 계명을 가르치라.” 나라에 보내시고 말씀하셨다. “사랑으로 대하여 주라. 나라를 위해 은총을 빌 것이며 저주하지 아니하리라.” 겨레에 보내시고 말씀하셨다. “선하게 대하여 주라. 가장 거룩한 재산이요 희망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어린이는 천국의 스승입니다. 나의 소유로 생각하고 내 뜻대로 하려 하지말고 겸손히 그들에게서 천국을 배우고 그들이 천국에서 가지고 온 보배들을 고이 간직하도록 도와야 하겠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감사하면서 어린이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그 웃음을 통해 위로 받으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 제목 :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본문 : 마-18-01-7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마18:1-7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거듭해서 가르치신 말씀들 중의 한 말씀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고 주님의 제자가 될 수도 없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강변교회에서 지난 22년 동안 거듭해서 강조한 말씀들 중의 한 말씀도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좋은 신자가 될 수도 없고 행복한 신자가 될 수도 없다고 강조한 말씀입니다. 오늘아침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단순하고 순수한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3가지 순수한 성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어린아이는 순수한 소원을 품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를 보면 무지개를 손으로 잡고 싶고 하늘에 떠 도는 흰 구름을 보면 구름을 타고 멀리 날아가고 싶은 순수한 소원을 품습니다. 아빠를 보면 아빠와 같이 되고 싶고 엄마를 보면서 엄마와 같이 되고 싶고 선생님을 보면 선생님과 같이 되고 싶어하는 소원을 품습니다. 우리교회의 성혜진 어린이는 어린아이 때부터 목사님을 좋아하며 목사님과 같이 되고 싶은 소원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년 3월 6일 저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보냈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성혜진이예요. 목사님 그동안 건강하셨어요. 저도 커서 목사님이 되고 싶어요. 목사님이 되고 싶으면 성경과 찬송을 많이 읽고, 많이 외우고, 많이 쓰고 그래야 겠죠. 그렇지만 참 어려울 것 같아요. 목사님! 목사님은 어떻게 목사님이 되셨어요. 제 생각에는 목사님은 분명히 하나님을 많이 믿고, 성경과 찬송을 많이 외우고 부르고 쓰셨죠? 목사님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목사님 같아요. 목사님! 저도 목사님이 될려면 목사님처럼 성경을 많이 읽어야 겠죠? 목사님 그리고 목사님이 될려면 참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는 꼭 목사님이 되서 하나님도 잘 믿고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될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목사님이요. 목사님 궁금한 게 있어요? 목사님은 설교하실 때 은혜로운 말씀을 어디서 가져오세요? 성경책에서 가지고 오신 것 같아요. 성경책에서는 은혜로운 말씀이 담겨있으니까요. 목사님 찬송가에도 은혜스러운 찬양이 담겨있을까요? 그러면 안녕히 계세요. 목사님 사랑해요. 안녕히 계세요. 성혜진 올림.”

저는 이번 워싱턴 디씨에서 강의를 하면서 거기 모인 목회자들에게 혜진이의 편지를 읽어주었습니다. 이길자 라는 어느 여자 전도사님이 혜진이의 편지에 감동을 받고 저에게 20불을 주면서 혜진이에게 선물을 사다 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성혜진에게 선물을 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혜진이의 순수한 소원을 축복하시고 그대로 이루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귀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순수한 소원을 품고 사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순수한 소원을 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37:4). 저는 어렸을 때 평양에 있을 때 3가지 소원을 품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싶은 소원과 마음껏 공부하고 싶은 소원과 목사가 되고 싶은 소원을 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세 가지 소원을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둘째, 어린아이는 순수한 믿음을 가집니다.

어른들은 계산적이지만 어린이들은 무조건 믿습니다. 저는 이번 시카고 헤브론 교회에서 3일간 부흥집회를 인도하면서 6살 난 어린아이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헤브론 교회는 2000여명의 성도들을 가진 순수하고 뜨겁고 은혜와 사랑이 충만한 너무나 좋은 교회였습니다. 저는 이번에 송용걸 목사님과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왔습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은혜를 흡족하게 받으며 감사하고 기뻐하는 참으로 좋은 교회였습니다. 넓은 땅에 아담한 교회당과 커다란 교육관 건물이 지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넓은 땅과 교회당 건물들을 사게 된 동기가 6살 난 어린아이의 소원과 믿음이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헤브론 교회의 담임 목사님인 송용걸 목사님의 6살 난 딸 송수잔이 어느날 유치원에 갔다가 오는 길에 자동차 안에서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느 선교 단체의 지도자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교단체가 어려움에 처해 있기 때문에 그 선교단체가 소유하고 있던 8 에이커 즉 1만 평의 넓은 땅과 8동의 선교부 건물들을 파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6살 난 딸은 집에 오자마자 아버지에게 그 넓은 땅과 건물을 사서 교회의 땅과 건물로 쓰자고 했습니다. 그 땅은 너무 넓고 그 건물들은 너무 큰 건물들이기 때문에 송용걸 목사님은 처음에는 딸의 말에 선 듯 동의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딸은 단순하고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그 땅과 건물을 사자고 졸랐습니다. 순수한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는데 송수잔 어린이는 그와 같은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땅과 건물을 사자고 졸랐습니다. 송 목사님도 단순하고 순수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면 사도록 하자고 말하고 교회의 성도들과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도 모두 그 땅과 그 건물을 사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결국 그 땅과 그 건물을 샀습니다. 1989년의 일이었습니다. 1990년 5월 입당예배를 드리는 날 헤브론 교회는 500불짜리 수표를 감사의 뜻으로 송수잔 어린이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헤브론 교회가 한 어린아이의 순수한 소원과 믿음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지금도 교회의 분위기가 너무 순수하고 순박하고 감동과 사랑이 넘치는 분위기였습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순수한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이루어 주십니다. 저는 어렸을 때 제가 품은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11살 때 평양을 떠나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내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믿음을 현실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해 주셨고 마음껏 공부하게 해 주셨고 목사가 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셋째, 어린아이는 순수한 사랑을 지닙니다.

순수한 사랑이란 조건 없이 주고 싶어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어른들은 이해 타산적이지만 어린이들은 조건 없이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저희는 이번에 동혁이네 가족들과 순수한 사랑을 주고받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저희는 또한 이번에 강변교회 부교역자 출신 목회자들과 순수한 사랑을 주고받으며 마음에 잔잔한 감동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뉴욕 중부교회의 김재열 목사님과 김숙희 사모는 강변교회를 같이 시작한 창립 멤버들입니다. 뉴욕중부교회 역시 순수하고 소박하고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아주 좋은 교회였습니다. 3일 동안 부흥집회를 인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김재열 목사님과 김숙희 사모는 20여년 전과 조금도 변함없는 아니 더 순수하고 사려 깊은 사랑을 저희들에게 베풀어주었습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New England 풍의 호텔에서 편히 쉬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집회를 인도하도록 세심한 사랑의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헤어지는 날 뉴욕 공항에서 잠시동안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받을 사례비를 중부교회 건축헌금으로 드린다고 돌려주었을 때 안 받는다고 승강이를 벌였고 나는 다시 돌려준다고 승강이를 벌이는 동안 사람들이 몰려들고 공항 경비원까지 긴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완강하게 사례비를 돌려주고 도망치듯 뛰었을 때 김숙희 사모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쉬워했습니다. 사랑을 순수하게 주고받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일이고 어린아이들의 성품을 지닌 어른들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는 흐뭇한 일입니다.

이강호 목사님과 방영희 사모는 강변교회에서 함께 주님을 섬기던 신실하고 순수한 분들입니다. 런던 갈보리 교회에서 목회를 너무나 잘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갈보리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순수하게 은혜를 사모하며 흡족하게 은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방영희 사모가 말하며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강호 목사님과 방영희 사모님이 저희 두 사람과 동혁이네 가족에게 베풀어준 사랑이 너무 극진했습니다. 이틀 밤을 너무 좋은 호텔에서 너무 잘 쉴 수 있도록 특별한 배려를 해주었고 맛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호텔에서 헤어지는 날 아침 잠시동안 또 한번의 승강이가 벌어졌습니다. 제가 이미 지불한 호텔 비용을 극구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제발 대접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하면서 방영희 사모가 봉투를 제 가방에 억지로 집어넣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지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순수하게 주고받을 때 저희들의 마음에는 잔잔한 감동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조건 없이 순수하게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어린아이들의 세계이며 교회와 천국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순수한 사랑을 주고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기뻐하시며 우리들의 삶을 축복하십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머니의 순수한 사랑과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순수한 사랑을 주고받으며 기뻐하며 행복을 누렸습니다. 남한에 내려와서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신학교에 다니던 주일학교 선생님 두 분이 너무 가난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저는 중학생이었지만 쌀을 구해다가 두분 선생님들에게 갖다 드린 일도 있고 선생님 한 분에게는 성경책을 사드린 일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강변교회 어린이들과 사랑을 주고 받으며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유년부의 다원이는 언제나 저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어합니다. 사랑을 순수하게 주고받는 일은 참으로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고 주님의 제자가 될 수도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어린아이는 순수한 소원을 가집니다. 어린아이는 순수한 믿음을 가집니다. 어린아이는 순수한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즉 믿음 소망 사랑을 순수하게 가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어린아이의 순수성을 상실하고 불순하게 됩니다. 소원도 믿음도 사랑도 불순하게 변질합니다. 예수님은 불순하게 된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우리들을 다시 어린아이로 만들어 주십니다. 다시 순수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너무 어른이 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얘들아”라고 부르시면서 어린아이가 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한번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이 품은 소원이 어떤 소원입니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우리들이 주고 받는 사랑이 어떤 종류의 사랑입니까? 어린아이들의 것과 같은 순수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어른들의 것과 같은 이기적이고 불순한 것들입니까? 예수님은 오늘 아침에도 2천 여년 전과 꼭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 오늘 아침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들을 새롭게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소원과 믿음과 사랑을 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의 자녀들도 어린아이의 순수성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정말 어린이 순수한 성품을 지니도록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어른들이 정말 어린이의 순수한 성품을 지니도록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 제목 : 어린이 천국 잔치 본문 : 마-18-1-10

마태복음 18 : 1-10

1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 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 까 2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 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 하리라 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 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 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또 누구든 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 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 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 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7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 게는 화가 있도다 8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 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 다 나으니라 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 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10삼가 이 소자 중에 하 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 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 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18 세기는 남자를 발견했고, 19세기는 여자를 발견했고, 20세기는 어린이 를 발견했다.”고 하였습니다. 인간 이해에 대한 변화를 나타내는 말 같 습니다. 그러나 이미 역사의 신기 원이시던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불 러 저희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 고 저 위대한 자신의 천국 복음을 입증하였습니다. 20세기에 이르러서 야 어린아이들의 중요성을 발견한 사람들에 비한다면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서도 확실히 세기적(世紀的) 선구자였습니다.

Ⅰ. 예수님과 어린아이와 천국에 대한 교훈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천국 에서는 누가 제일 큰 자입니까?”

하 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 은 자기 앞에 모인 여러 어린이들 가운데 한 아이를 불러 저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 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 은 어른들의 교만(방자함)을 염두에 두시고, 어린아이들의 겸손을 지목 하고 있습니다.

다시 4절에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심으로 어린이를 겸손의 상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5절에 「누구든지 내(예수) 이름으로 이 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 (예수)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심으 로 어린이가 크게 환영을 받아야 될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6절에 「누구든지 나(예수) 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 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실족케 하지 말라는 말은 거침돌이 되지 말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10절에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시 고,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저들을 위 하여 항상 수호 천사를 파송하고 있 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14 절에서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 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디베랴 언덕에서 한 어 린아이가 갖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 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아 가지고 저 놀라운 이적의 재료로 삼았습니 다(요 6:9-13). 그 어린이가 가진 보 잘것없는 소유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세상에 오신 그 선지자'(요 6:14)의 표적을 보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어른들을 먹여 주는 간접적 요 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최후 예루살렘 입 성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거기에서 자신을 보고

“호산나, 다 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의 열 광적인 환영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 다. 이때 유대교권주의자들인 대제 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분을 내며, 예수님께 저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 리를 듣느냐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 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 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 21:16)라고 하시며, 구약 시편 8 편의 예언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높 이는 젖먹이들의 감사 찬송을 하나 님이 기쁘게 열납하고 있다고 대답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호 산나 다윗의 자손’을 외치던 어린 아이들의 소리는 결코 시끄러운 소 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 시는 온전한 찬미의 제사라고 한 것 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 고」 천국 시민의 자질을 말씀했다 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디베랴 언덕에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이적도 사실상 그 한 어린아이가 저들 가운데 중심이 되고 말았습니 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호산나 찬송하며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고백하는 어린아이들이 저들 가운데 중심인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던 사람 들 중에는 어린아이를 예수께로 데 리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그 일을 꾸짖었습니 다. 그것을 보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분을 내시고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 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 이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 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 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막 10:13-15)고 하셨습니다. 그리 고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마 19:13-14, 눅 18:16-17)고 하시 며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 수하고 축복해 주셨습니다(막 10:16).

예수님은 교만한 무리(어른들) 가운데 한 어린아이를 세우셨습니 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들의 심성의 특징인 겸손과 신뢰성과 순진성과 단순성과 봉사와 희생성과 이타적 애정성을 들어 천국 시민의 영적 자 질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한가운데 자기 를 세우고 자기를 나타냅니다. 사람 들은 역사의 한가운데 자기의 업적 과 공로와 명예를 나타내기를 좋아 합니다. 아니면 역사의 한가운데 영 웅이나 호걸이나 가인들을 세우고 교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어 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천국을 교훈하셨습니다.

Ⅱ. 천국은 어린이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연령적으 로, 체력적으로, 지적으로 미숙한 한 어린아이를 한가운데 세우고 천국을 교훈하신 것은, 결국 그가 이룩하실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사실상 어 린아이들이 중심된 세계임을 웅변 적으로 예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내다 본 메시야 왕국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 왕국의 시민들이 모두 어린아이로 묘사된 평화의 나라였습니다. 예수 자신이 「한 아기」, 「한 아들」로 예언 되었습니다(사 9:6). 천국에서는 「어린아이」에게 양과 표범과 어린 염소와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들이 끌려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사 11:6).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 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아무 해됨이나 상함이 없는 평화 충만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사 야는 천국의 시민을 「어린아이」, 「젖먹는 아이」, 「젖뗀 아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갓난아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2). ‘방금 태어난 아이’를 뜻합니 다. 그 아이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 을 빨면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 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 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 물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요 3:3, 5, 고후 5:17). 새 사람, 곧 아이들 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 버리고, 옛 것은 벗어 버린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감사 기도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비밀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 게는 숨겨져 버리고 어린아이들에 게 나타나게 됨이 감사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1:25). 이것이 아버 지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1:26). 이른바 유대교권주의자들이 아닌 예수님의 갈릴리 제자들, 죄인 들, 병든 자들, 가난한 자들 곧 구원 받기로 작정된 모든 자들을 어린아 이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우리가 이를 하나 님의 나라(천국)는 아이들만의 세 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천 국에는 이른바 어른들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 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큰 무리, 곧 오른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저 들이 받은 구원의 감격을 고백하는 모든 무리는 예외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어린아이들입니다 (계 7:9-10). 영적으로 천국은 거듭 난 새 사람의 세계, 곧 어린아이들 의 세계입니다. 어린아이들이 판을 치는 세계입니다.

Ⅲ. 경향 어린이 천국 잔치

지금 우리는 새 예배당 입당과 함께 주일마다 어린이 천국 잔치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주일 오전 예 배와는 별도로 주일 오후에 특별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어린이를 위한 특별한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이 것은 우리가 이곳에 새 성전을 시작 하고 금요 밤마다 모이는 기도회에 서 이미 하나님께 서원했던 것입니 다. 우리는 3년이 가깝도록 새 성전 신축 완공과 입당 그리고 어린이 천 국 잔치를 위하여 기도해 오고 있습 니다. 지난 1년 동안은 우리 교회 교육국으로 하여금 어린이 천국 잔 치에 관한 여러 프로그램들을 연구 하고, 계획하고, 준비하도록 하였습 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응답하셨습 니다. 성전이 완공되고 역사적인 새 성전 입당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리 고 지난 5월 24일 주일 오후부터 마침내 경향 어린이 천국 잔치를 열 었습니다. 첫날부터 잔치는 대성황 입니다.

경향 어린이 천국 잔치 중에 진행 되는 주요 프로그램의 내용들은 어 린이 찬양과 율동, 동화, 성경 이야 기, 미니 올림픽, 성화(영화) 상영, 기독교 명사들을 초대하여 각종 묘 기(진기 명기) 등을 시범적으로 보 여 주는 일(축구, 태권도, 연극… 등) 등 다채로운 순서들이 주일마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어린이 천국 잔치는 바로 예 수님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우리는 새 성전 한가운데 어린이들 을 세우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저들 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 다. 이 천국 어린이 잔치를 통하여 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를 원합니다. 적어도 어린이 전도는,

① 어른 전도보다 효과적입니다.

그 이유는 저들에게 있는 겸손과 순진과 신뢰심과 순종심이 어른들보 다 더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예 수 복음의 진리를 흡수하는데 훨씬 빠르기 때문입니다.

② 가정 전도의 첩경입니다.

닫혀 버린 가정의 문을 두드리 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지름길 이 바로 그 가정의 어린이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어린이 새소 식반과 어린이 선교원이 한몫을 하 고 있습니다.

③ 교회의 미래 성장을 보장하는 결정적인 비전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받은 축복의 묵 시(vision)가 있다면 그것은 어린이 전도입니다. 어린이가 없는 교회는 그 앞이 캄캄합니다.

④ 어린이 전도는 미래지향적입니 다. 생산적이고 창조적입니다. 21세 기를 대비하는 복음 운동의 모든 자원들이 바로 어린아이들에게 있 습니다. 어릴 때부터 받은 복음의 진리가 저들에게 바른 신관, 바른 인생관, 바른 구원관, 바른 존재적 가치관을 정립시켜 줍니다.

그래서 저들 속에 내일의 위대한 구령 운동의 목회자, 선교사, 신학 교수, 사회 봉사자, 정치가, 경제가, 교육가, 예술가, 과학자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 세계는 무한한 미래의 잠재력이요 폭발력입 니다. 아니 위대한 축복의 미래적 물결입니다. 아니 그 어린이 자체 가 천국 운동이요 천국의 전령사들 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위대한 사건 들은 전쟁이나, 지진이나, 기타 여러 종류의 폭풍이 아닙니다. 바로 이 세계의 위대한 사건들은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 그 자체입니다. 바로 이 아이들은 역사 가운데 지진이요 폭풍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 를 가운데 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축복하 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 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 성전 입당과 함께 경향 어린이 천국 잔치 를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 스마일즈(Samuel Smiles) 는 ‘유년기는 거기에 비친 영상 (image)을 내세에 반사해 주는 거 울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셀렉트(Selected)는 이렇게 말했습 니다. ‘어린이의 마음 속에 당신이 무엇을 쓰든지 물로 지울 수 없다. 모래는 파도가 사나울 때 옮겨질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의 노력은 썩어 버릴 수도 있다. 어떤 이야기들은 없어지고 어떤 노래들은 잊혀질 것 이다. 그러나 어린이의 마음 속에 새겨 놓은 이 기록들…, 세월도 그 것은 변경하지 못하리라. 어린이의 가슴 속에 무엇을 써넣든지 기쁨의 이야기든 근심의 이야기든, 하늘이 축복했든지 땅이 모독했든지, 변함 없이 거기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우 리 경향 4반세기 25년은 이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고 말았습니다. 을지 로에서, 동자동에서, 여의도에서의 교회 운동이 그러했습니다. 우리 모 두 하나님의 새 성전 한가운데에 어린이들을 세웁시다. 교회의 한가 운데에 어린이들을 세웁시다. 그리 고 저들의 입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부르짖게 합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새 성전 한가 운데에 어린이들을 세웁시다. 그리 고 저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 앙의 고백과 감사의 서원이 경향의 자원과 미래가 되게 합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새 성전 한가운데에 어린이들을 세웁시다. 그리고 저들 이야말로 경향이 받은 천국 운동의 기수들이 되게 합시다. 이 위대한 어린이 천국 잔치에 수종드는 모든 경향인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 니다.

=========================================================================================== 제목 : 기독교와 어린이 본문 : 마-18-1-10

마태복음 18장 1-10절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 가 크니이까 2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 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 가지 못하리라 4그러므로 누 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 서 큰 자니라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 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 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 에게는 화가 있도다 8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 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 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 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 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 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 보다 나으니라 10삼가 이 소 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 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8세기는 민중을 발견한 세 기요, 19C는 여자를 발견했 고, 20C는 어린이를 발견한 세기라고 말한 이가 있습니 다. 그러나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사람 수에도 들지 못하 던 어린이를 존귀히 여기고 사랑해 주어야 할 것을 가르 쳐 주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큽니 까?”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어 린이를 내세우며 어린이가 큰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구든 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 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 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작은 아이 하 나라도 실족케 하는 사람은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어린 이를 얼마나 귀중히 여기시는 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 습니까?

로마 제국만 해도 부모는 자식을 죽일 수도 있고 마음 대로 버릴 수도 있고 노예로 팔아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B.C1세기에 편지하기를

“만 일 당신이 낳을 아이가 사내 라이라면 기르고 계집아이라 면 버리시오”하고 펴지 했고 세네카는

“약하거나 못생긴 아이들은 우리는 버린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이 들과 여자들은 숫자에 넣지도 않을 만큼 천대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잘못된 사 상을 말씀으로 행동으로 바로 잡아 놓았습니다. 한번은 많 은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을 데 리고 예수님께서 기도해 주시 기를 바랄 때에 제자들은 꾸 짖으며 아이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때에 예수님은 오 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 을 금하지 말라(누가복음 18 장 16절)”고 하셨습니다. 그 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정신은 어린이를 귀중히 여기고 잘 교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무시하거나 학대하 는 가정은 복을 받을 수 없고 어린이를 소홀히 여기는 교회 는 부흥하지 못하고 어린이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국가와 민족은 번영하지 못하는 것입 니다.

1. 어린이를 사랑해야 합니 다.

아일랜드의 역사가 나피엘 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어린 소녀가 유리 조각을 주우며 우는 것을 보고 왜 그러느냐 고 물었더니 몹시 사나운 주 인집의 유리병을 잘 못하여 깨뜨려서 그런다고 걱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나피엘 은 자기가 그 깨어진 그릇을 사 주겠다고 했지만 마침 자 기에게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 다. 그리하여 내일 그 자리에 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 이튿날이 마침 자기의 연 구비를 도와주는 사람이 만나 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 때 나피엘은 어느 쪽을 택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가 많은 연구비를 못 받는 한이 있어 도 그 어린 소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거절을 하고 그 소녀를 만나서 깨어진 그 릇을 사주고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그 스폰서가 그 다 음날 더 많은 연구비를 가져 다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예수님의 정신과 어긋나게 어린이들을 무시하고 무관심하게 키울 때 가 많습니다. 어느 교회 학교 어린이가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추운 겨울 새벽 에 아버지가 일어나시기 전에 내복을 따뜻하게 해 드리려고 입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일어나시자 마자

“아침부터 어린것이 어른의 옷을 왜 입고 있니?”

하고 꾸 짖었다고 하니 그 어린 동심 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겠 습니까?

어느 26세의 젊은이가 자신 이 열등감이란 고정관념에 사 로 잡혀 고민하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 청년의 어린 시절을 더듬어 올라갔더 니 그의 부모는 자기가 어려 서부터 공부를 잘 해도, 운동 에 우승을 해도, 모형 비행기 를 잘 만들어도 부모가 칭찬 은 해주지 않고 만족하지 못 하다는 듯이 트집만 잡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이 청년은 만사에 자신이 없고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사회생활 할 때 에 회사에서는 사장에게, 교 회에서는 목사님께, 학교에서 는 선생님께 반항적이고 불평 만 하는 사람이 되고 만 것 입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칭찬해 주 면 교만한 성격이 자리잡게 될 염려도 있기는 하지만, 부 모가 말과 행동으로 잘 표현 해 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 대 단히 주요합니다.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사랑을 표 현해 주어야 합니다. 꼭 안아 주며, 궁둥이를 두들겨 주거 나 뺨에 뽀뽀해 주거나 어깨 를 툭툭 치고 어루만져 주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란 사람이 문제아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2. 사랑의 채찍을 가져야 합니다.

어린이들이 잘 할 때에는 잊지 말고 사랑해 주고 칭찬 해 주어야 하지만, 사회의 법 을 어기거나 하나님의 규율을 어기면 고통이 따른다는 것도 알려주어야 정상적인 인격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 해서는 잘못했을 때 깨닫도록 타이르거나 채찍을 가해야 합 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 나는 많은 자녀들을 훌륭히 키운 어머니인데, 그녀는 말 하기를

“자녀들의 고집을 즉 시 꺽어버려라 이것을 빨리 꺾을 수록 좋다. 자녀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고 그들을 제 멋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부모 는 사실상 잔인한 사람이다. 이런 부모는 타파되어야 할 악습을 기르는 것이 된다.”고 했고 또

“자녀들을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부모는 마귀 의 일을 하는 사람이며 신앙 을 무의미하게 하며 구원을 불가능하게 하고 영혼과 육신 을 멸망케 하는 사람이라”라 고 했습니다.

오늘 날 이 세상이 무법천 지처럼 되어 가고 자식이 부 모를 구타하거나 죽이기도 하 는 등 청소년들의 범죄가 심 각하게 증가되고 악화되는 것 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제멋대 로 하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입 니다. 교육 철학 자체가 잘못 된 이유도 있습니다. 선생님 이 학생에게 체벌을 못하게 하고 못된 짓을 해도 가만 내 버려두면 저절로 고쳐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① 하나님의 규휼이나 사회 의 규율을 어겼을 때는 고통 이 오는 것을 깨우쳐 줘야 합 니다.

② 부모에게 불순종하거나 반항할 때는 반드시 고집을 꺾어야 합니다. 부모에게 자 기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도 순종하지 않는 사 람이 됩니다.

③ 거짓말하거나 속이는 버 릇은 어려서부터 고치도록 징 계해야 합니다.

④ 출처 모를 물건을 가져 왔을 때 묵인하지 말고 반드 시 그 근거를 캐내어 징계를 해야 하고 제자리에 돌려놓도 록 해야 합니다.

어느 강도 흉악범이 법의 심판을 받아 사형 집행을 당 하게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어머니의 면회를 청하더니 철 창속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끌 어당기더니 그 코를 이빨로 물어뜯더랍니다. 이유를 물어 보니까 어려서 물건을 훔쳐 와도 책망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둬서 자기가 결국 사형 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육체 적인 고통을 주는 방법이나, 방안에서 혼자 벽을 향하여 한 시간씩 앉아서 반성하게 한다든지, 좋아하는 것을 하 루나 한 두시간 못하게 한다 든지, 회초리를 따끔하게 때 려서 깨닫게 해 주는 방법 등 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걸핏하면 때리라는 것은 아닙 니다. 일평생에 몇 번, 꼭 필 요할 때 채찍을 들 필요가 있 습니다.

벌을 줄 때는 반드시 기억 해 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① 부모의 화풀이를 때려서 는 안됩니다. 부모가 감정을 완전히 통제 할 수 있어야지. 화풀이로 때렸구나 하는 인상 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렇 게 되면 부모의 권위도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부 모는 도끼나 칼을 가지고 쫓 아다니며 죽일 듯이 덤벼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상식 이하의 행동입니다.

② 공평하게 징계해야 합니 다. 어느 아이는 더 사랑하고 어느 아이는 더 많이 때리거 나 하면 자녀가 감정을 사서 더 삐뚤어진 길로 가게 됩니 다.

③ 징계 받는 이유를 보여 줘야 합니다. 이유 없이 고통 을 주면 징계가 무의미하고 반항심만 갖게 합니다.

④ 부모가 공동으로 책임을 지고 의논해서 벌을 주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때리는데 어머니는 역성을 든다던가하 면 역효과가 납니다. 어머니 는 때리는데 아버지는 어머니 를 나무란다던지 하면 교육이 안됩니다.

⑤ 매를들때 욕구 불만을 말하지 말고 기도하는 마음으 로 해야 될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필요 없이 때리기 만 하지 말라. 매를 쥘 때는 하나님께 그것을 축복하시도 록 기도하라 그렇지 않으면 부모 자신의 심령이 해를 입 고 자녀에게도 유익이 없다”

고 했습니다.

⑥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합 니다. 한번 벌을 주면 그것으 로 용서해 주고 끝나야지 한 번 지난 일을 두고두고 되풀 이해서 말하면 안됩니다. 하 나님도 우리가 한번 회개하면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아침 안개가 사라짐같이 우리 의 죄를 도말 하시고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⑦ 그 아이에게 맞도록 벌 을 주고 그 아이만 있는데서 벌을 줘야지 사람이 많은데서 망신을 주면 안됩니다.

잠언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 지 아니하리라”고 했고 잠언 13편 24절에

“초달을 차마 못 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 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를 하느니라”했으 며 잠언 29편 15절에는

“채찍 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내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 라”고 했습니다. 제사장 엘리 는 자식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못된 짓을 해도 가만 히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하나 님께서 진노하셔서 그 자식들 은 한날에 다 전사하고 이 소 식을 들은 엘리는 쓰러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3. 부모가 생활로 본이 되 어야 합니다.

부모의 말은 자녀들이 들을 수도 있고, 안 들을 수도 있 지만 눈을 보는 것은 결코 잊 지 않고 깊은 감화를 받습니 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진실 한 신앙생활과 헌신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 다.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있 을지 모르나 자녀는 속이지 못합니다. 자식들 보는 데서 성경 읽고, 기도하는 모습, 정 성껏 헌금 드리는 모습을 보 여 주면 그것이 백번 말하는 것 보다 낫습니다. 꿈에도, 교 회나 목사를 비판하는 말을 하면 안됩니다. 그 보다 더 큰 저주는 없습니다.

헛된 약속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지키지 못할 약 속을 아무렇게나 해 놓고 지 키지 않으면 부모의 위신도 떨어지고 거짓말쟁이가 됩니 다. 무엇을 달라고 하면 잘 생각해서 줘야 할 것은 약속 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약속 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명령은 끝까지 시행 하도록 해야 합니다. 자식들 에게 명령을 내린 뒤에는 반 드시 시행했는지 여부를 확인 해야 됩니다. 말만해 놓고 내 버려두면 부모의 말이 권위가 서질 않습니다. 적당히 기회 만 넘기면 된다는 생각을 갖 게 해야 합니다. 또 시행하지 못할 것은 명령을 하지 말아 야 합니다.

4. 자녀들은 반드시 예수님 께 데려와야 합니다.

자녀를 낳거든 제일 먼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며 축복 기도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또 유아 세례를 받게 하고 교회에 출 석할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 니다. 강제성을 띠더라도 예 수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어떤 장로님의 아들이 고3 이라고 교회에 나오지를 안길 래 물어 봤더니, 입학하면 나 오게 하겠다고 하더랍니다.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서 지금은 예배를 못 드리게 했다는 이유를 그럴듯하게 말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다음 에 대학에 떨어져서 온 가족 이 우울해 하고 슬퍼하는데, 그 집에 가서

“대학에 떨어진 것은 걱정하면서 자식이 지옥 으로 떨어 질 것은 걱정 안합 니까?”라고 했답니다.

어려서부터 성실하게 예배 출석하는 일과 십일조와 감사 헌금 드리는 습관을 길러 주 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 을 밥과 옷으로만 키우지 말 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키워야 한다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리미리 말씀으로 양육하고 기도를 많이 해 주 어야 합니다.

=========================================================================================== 제목 : 어린이 사랑 본문 : 막-10-13-16

<어린이 사랑> 막10:13-16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그의 시대의 고정관념과 일반적 관행을 깨뜨리는 혁신자의 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어린아이들의 존재와 인권에 관한 의식이 오늘날처럼 높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어린이들은 힘없고 약하며 의존적이고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존재였습니다. 어린이들은 가진 것 없고 내놓을 것 없는 존재여서 어른들에 의해 하찮게 여겨지고 무시당하곤 했습니다. 당시의 이러한 사고와 관행은 오늘 본문에서 보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태도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아온 사람들을 꾸짖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꾸짖는다”는 말은 그 의미가 매우 강한 말로서 마가복음에서는 귀신을 내쫓거나 하나님의 뜻에 반대한다고 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본문 1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신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말로 꾸짖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예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접근하는 것을 막고 쫓아버리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고와 관행에 정반대 되는 입장을 표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의 편에 서시고, 어린아이들을 반겨 품으시며, 어린아이들을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으로 만드시고, 어린아이들을 높이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노하셨다고 했는데(13-14), 이것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아이들 편에 서실 뿐 아니라 어린이들을 깔보고 무시하는 당대의 사고와 관행을 강하게 비판하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심으로써(16) 어린아이들이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과 존중과 축복의 대상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14) 어린이를 더할 나위 없이 높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시며 우리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언급하시며 하나님나라와 연결시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린이 사랑은 하나님나라의 법이요 원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나라에서는 어린아이라고 해서 무시당하거나 소홀히 여겨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어린아이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막9:37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하나님에 의해 영접되는 것이고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생명이며 인격적 존재들입니다. 이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린이들을 우리 각 가정에 위탁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는 가장 좋은 길은 그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예수님의 품에 안기게 하고 그의 축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아온 사람들은 그 시대의 일반적 풍조에 비추어 보면 예외적인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아이들을 아무 생각 없이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 아이들을 만져 주시기를 바라고 온 것입니다(13).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마19:13에서는 예수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들을 기뻐 맞으시고 그들이 바란 대로 그들의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16). 아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데리고 나아오고 그의 품에 안기게 하고 그에 의해 복을 받게 하는 것은 하나님나라백성 됨의 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아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데리고 나아오지 않고 그의 품에 안기게 하지 않고 그에 의해 복을 받게 하지 않는 부모는 그 아이에 대하여 가장 큰 실책을 범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향하여 크나큰 불충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아직도 아이들을 교회에 보내지 않는 부모들, 자녀들이 고3이라고 해서 주일날 교회 대신 학원이나 독서실에 가라고 하는 부모들은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중한 것인지를 이 시간 분명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복 받을 기회를 자녀들에게서 강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식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식들을 위해서라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식사랑과 정반대 되는 길을 가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그들 자체만으로도 어른들에게 기쁨과 행복이 되지만, 또한 어른들에게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가르치는 거울이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14-15절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다 했습니다.

먼저 14절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온통 아이들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 물론 아닙니다. “이런 자”란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나라백성들의 특징으로서 예수님께서 가리키고자 하신 것은 어린이들이 갖고 있는 어떤 장점들이라기보다는 어린이들 자체, 즉 어린이들처럼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내어놓을 것 없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전적으로 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진 것 많고 자랑할 것 많은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나 내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기며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밖에는 기댈 것이 없음을 아는 사람들의 것임을 가르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어른들에게 이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한 도구로, 거울로 어린아이들을 허락하셨음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사랑할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열심히 배우려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많은 말로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아이들은 아무 말 없이도 어른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음 15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라고 했는데 “받들지 않는 자”보다는 눅18:17에서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자”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가진 것, 내어놓을 것,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전적으로 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저 죄인이고 벌거벗은 자일뿐임을 고백하며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하여 하나님나라백성 되기를 간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이들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깨닫도록 하나님께서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을 선물로 주셨음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며, 아이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시며 가르치신 대로 어린아이들을 천대하거나 무시하는 세상에 맞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사람들보다 아이들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내 아이들만 사랑하는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복 받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회가 복된 사회입니다. “개구리소년들”이라는 비극을 발생시키는 사회는 극악무도한 사회입니다. 아이들을 학대하거나 어른들의 이익이나 탐욕을 위해 아이들을 이용하는 행위를 강력하게 제재하고 단호하게 응징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을 오염시키고 병들게 하는 모든 환경을 제거하고 추방해야 합니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비뚤어진 성의식을 심어주는 일체의 음란유해요소들을 철저히 뿌리뽑아야 합니다. 어린이들을 성노리개로 삼는 사회는 악마적 사회입니다. 이러한 사회풍조에 맞서 싸우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방치하거나 비호하는 당국이나 모든 악한 세력들을 질책하고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인 어린이 사랑을 지속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밝고 건강하며 복된 세상을 만들어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제목 : 어린이 신앙 교육과 국가의 운명 본문 : 막-10-13-16

마가복음 10장 13-16절

오 헨리(O. Henry)의 작품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한 남자가 아내를 잃고 어린 딸만 데리고 살았는데, 직장에 갔다오면 신문만 보고 딸아이가 공부하다 모르는 것이 있어서 물어 보면 가르쳐 주지도 않고, 함께 놀자고 해도 놀아 주지도 않고 무관심하게 대해 주니까, 그 소녀가 점점 자라서 불량한 짓을 하고 거리의 깡패가 되고 말았습니다. 후에 그 소녀가 죽어서 천당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가 너 같은 사람은 여기에 못 들어 갈 것이라고 말하니까, 이 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니다. 그 소녀를 들어오게 하라. 그러나 너무 바쁘다고 해서 자기 자녀를 돌보지 않은 이 아버지 같은 사람은 못 들어오게 하라”고 말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 자녀교육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 세상이 어지럽고 불의와 불법이 가득 찬 이유는 자녀교육을 잘못시켰기 때문입니다. 밥 먹이고 옷만 입히면 자식을 키우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귀중하기로 말하면 어린이들이 꽃이나 애완견이나 다이아몬드에 비하겠습니까? 그 나라의 장래는 그 나라의 어린이들을 어떻게 교육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오늘날 걸핏하면 어린 학생들이 총을 난사해서 학생들과 선생들을 무참히 죽이고, 어린 학생들이 술, 담배, 마약을 복용하고, 중 고등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까지 임신하는 형편이니 얼마나 이 세상이 부패했습니까? 이 모든 원인이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1. 믿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미국의 예를 든다면 형식으로라도 학교마다 채플(Chapel) 시간을 가지고 성경을 가르칠 때에는 미국이 저렇게 타락하지 않았는데, 케네디 대통령 때 채플 시간을 없애고 성경 교육 시간을 없이한 다음부터 장발족이 생기고, 히피족이 생기고, 음주.흡연.마약 복용자가 늘어나고, 걸핏하면 총기를 난사하여 애꿎은 생명을 죽이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을 가지면 청소년들이 이렇게 타락하지 않습니다. 잠언 1장 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9장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지혜와 명철의 근본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그 분을 두려워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엊그제 전국 여선교회 대회 때 김종문 감독께서 설교하시는 가운데 아주 속시원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그 교회 집사님 가정에 심방을 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찬송을 부르는 도중 윗방에 있던 그 집 딸이 문을 확 열더니 머리를 쑥 내밀고는 큰소리로 “내일 나 시험이란 말이예요”하고는 문을 확 닫더랍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겁이 난 얼굴로 “목사님, 찬송 좀 조용히 부를 수 없을까요? 그 애가 전교에서 일등이예요” 그러더랍니다. 기가 막혀서 그 목사님이 윗방으로 올라가서 책상에 엎드려 있는 그 학생 등에 손을 얹고, 예수님에 관해서 교회에 관해서 쭉 설명을 해 주었더니 이번에는 울면서 “그런데 우리 엄마는 그런 얘기를 한 번도 해 준 일이 없어요” 그러더랍니다. 집사라도 엄마가 더 한심스러운 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믿음 생활하는 것을 대학 입학보다 더 중요하고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르쳐야 하는데, 그런 믿음을 하나도 심어주지 못한 것입니다.

잠언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고, 신명기 6장 4-9절은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인데,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말씀대로 철저히 가르쳤기 때문에 나라는 망해서 세계에 흩어져 살아도 그 신앙과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던 것입니다.

① 그 심령에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심어 주어 거듭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했습니다. 영생을 못 얻고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질 것은 걱정하지 않고, 대학에 떨어질 것만 걱정하는 집사가, 집사입니까?

②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어려서부터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무디 선생은 “성경이 죄로부터 그 사람을 지켜주든지, 죄가 성경으로부터 그 사람을 지켜주든지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③ 기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말하기 시작해서부터 주님을 찾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고, 또 부모가 날마다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이명박 장로님이 그 어머니의 기도 생활과 철저한 믿음의 생활을 가르쳐 준 데 대하여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부모의 자식이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④ 교회의 출석과 예배의 중요성을 철저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은 학교 가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들이 아침에 TV를 보느라고 교회에 안 가는데도 가만 두는 부모가 기독교인입니까? 때려서라도 보내야 합니다. 우리는 북한에서 자아비판을 하고 전교생 앞에서 매를 맞고 퇴학을 당하면서도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2. 정직과 진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엊그제 어느 신문을 보니까, 한 예수 믿는 여자가 은행에 돈 100만원 맡겼는데, 와서 통장을 보니까 500만원으로 적혀 있더랍니다. 잠시 동안은 마음에 시험을 받았지만, 즉시 은행 담당직원한테 전화를 해서 사실을 말해 주었더니 반가워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400만원이 비어서 찾고있는 중이었는데 못 찾으면 제가 400만원을 물어내야 했었는데 참으로 감사하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런 마음이 생겼느냐?”고 해서 자기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했답니다.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이 18살 때 점원을 하는 중에 어느 날 밤 문을 닫고 돈을 계산하는데 3센트가 남더랍니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낮에 왔던 아줌마 생각이 나서 그 밤중에 한 시간 넘는 거리를 달려가 전해주었더니, 황금 같은 3센트라고 칭찬하며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축복하더랍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어떻습니까? 대통령의 세 아들, 조카까지 엄청난 부정, 비리에 쌓여 세상을 어지럽게 하지 않습니까? 정직과 진실을 잃어버렸으면, 일류 대학을 나와도 쓸데없고, 대통령이 되어도 무엇합니까? 지식을 많이 가질수록, 권세를 많이 가질수록, 그만큼 죄를 더 짓고 세상을 그만큼 부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제일 시급한 일은 경제나 정치가 아니라 정직성과 진실성이 실종된 것입니다. 아무리 수지맞는 일이 있어도 “아니요”할 수 있고, 아무리 큰 고통이 따라와도 “예”할건 “예”할 수 있는 정직한 사람이 심히 찾아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성공 못할 것 같고, 못 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84편 11절에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했고, 역대상 29장 17절에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즐거이 드렸사오며…”하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도 먼저 정직함,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엄청난 재물을 드렸지만, 정직하지 못하고 성령을 속이다가 큰 변을 당했습니다.

정직과 진실을 잃었으면 아무 데도 쓸모 없는 인간입니다. 자녀들에게 무엇보다 정직함과 진실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마귀의 속성은 거짓말쟁이요 잔인함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마귀의 자식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정직성과 진실성을 저버린 사람은 그 믿음도 헛되고 거짓된 것입니다. 거짓된 마음에는 참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양심이 마비되거나 더러워진 사람의 믿음은 파선한 배와 같아서 그의 믿음도 파괴된 것과 같습니다.

이 나라 장래의 운명도 어린이들의 정직성과 진실성에 달려 있습니다. 스위스나 덴마크, 스웨덴 같은 나라들은 국민이 몇 백 만 밖에 안 되지만, 그 국민의 정직함과 진실함을 믿기 때문에 그 나라 제품은 신뢰하고 사갑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미래의 운명도 이 국민의 정직성과 진실성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우리 나라 학생들의 머리는 우수한데, 정직함과 성실함이 문제입니다. 우리들의 자녀와 어린이들을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과 정직함과 진실함을 심어 주면 이 나라의 장래는 밝고 소망이 있습니다.

거짓말하거나 속일 때에는 오래 기억에 남도록 따끔하게 벌을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귀한 그릇으로 쓰십니다. 디모데후서 2장 21절부터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정직함과 진실함의 본을 보여야 따라 옵니다. 자식들 눈에 위선자로 보이면 믿음도 안 가지려고 합니다.

선민 이스라엘 사람이 모두 거짓되고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했던 일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고 했습니다.

3. 순종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부모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커서도 부모를 공경할 줄 알고, 하나님도 두려워할 줄 압니다. 오늘날 세계가 왜 이렇게 어지럽고 혼탁해 지는가 하면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입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Susanna Wesley)는 어려서부터 제멋대로 하지 못하도록 자기 고집을 꺾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식을 제멋대로 하도록 버려 두는 부모는 마귀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법을 어기거나 부모에게 불순종할 때에는 고통과 벌이 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야 정직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육 철학이 잘못돼서 체벌을 절대로 주면 안 되고 자유방임주의로 교육해야 된다고 하기 때문에 제멋대로 하고 자라며, 또 산아제한 때문에 하나, 둘만 나아서 과잉보호와 과잉사랑을 베풀며 키웠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술, 담배, 마약을 하고 조금만 꾸중을 하면 반항하고, 부모에게 덤벼들고, 스승을 구타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화난다고 총기를 난사해서 수많은 사람을 비참하게 죽이고 돈 몇 백만 원 얻자고 20대 젊은 여자들만 골라서 다섯 명, 여섯 명 죽여서 자동차에 싣고 다니는 끔찍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모두가 자식을 잘못 키워서 그렇습니다. 칭찬할 땐 칭찬하고 잘못할 때는 따끔하게 벌을 주어서 자기 고집을 꺾고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잠언 13장 14절에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라 사람으로 사망의 그물을 벗어나게 하느니라”했고, 잠언 29장 15절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했고, 17절에는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고 했습니다.

호박순은 방향을 잡아주는 대로 뻗어 올라갑니다. 어려서 제멋대로 하지 못하게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소도 새끼가 젖을 먹다가 못되게 굴면 뒷발로 걷어찹니다.

4. 극기를 가르쳐야 합니다

고통과 고난을 참고 견딜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유익한 인간이 되지 못하고 인생의 패배자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워도 고통과 고난을 참고 견디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식이 귀하다고 병역을 기피하게 만들고, 편한 자리에 있게 하려고 돈을 써 가며 운동하는 것은, 자식을 망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군에 갈 때에는 가서 훈련을 받게 해야 합니다. 한국에 5대 명문 대학이 있다고 합니다. 서울대, 연대, 고대 등등 그 다음에 해병대라고 합니다. 이 어렵고 힘든 해병대를 마친 사람은 고난의 대학을 졸업한 사람입니다. 군대만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고난, 실패의 고난, 핍박의 고난, 비판과 비난의 고난, 질병의 고난 등을 잘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태복음 5장 11절).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했고,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편 67절, 71절)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이길 줄 모르는 사람은 무익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기기로 다투는 자 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함이라”, 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왜 극기를 배워야 합니까? 세상에는 너무나 마귀의 유혹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 죄의 결과가 너무나 무섭기 때문이고, 또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귀한 그릇, 유익한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2002년 5월 5일 어린이 주일 설교

=========================================================================================== 제목 : 천국의 자녀 본문 : 막-10-13-16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며 그것을 친히 실천해주고 계심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누가 제일 큰 자가 되느냐고 토론을 벌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세우시며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린이들을 하늘나라의 자녀라고 불러주셨다는 것과 이 말씀의 해석 중에 어린아이와 예수님을 같은 수준에 놓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어린이 주일을 통하여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받아야 할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1. 우리도 어린아이를 예수님처럼 영접하자.

왜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영접했을까요? 우리는 가정에서 손님이 오시면 시끄럽다며 아이를 밖으로 내보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고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는 나의 것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늙은 나이에 간절히 구하여 이삭이라는 선물을 받았으며, 한나 또한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여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자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나의 소유물이 아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을 높여주고 위해준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이를 우리는 영접해야 할 것입니다.

2. 어린이를 천국의 자녀로 자라도록 도와야 한다.

어린이는 천국의 자녀이기에 천국의 자녀로 자랄 권리가 있으며 우리는 그렇게 키워야 합니다. 어떤 받침대로 키우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묘목처럼 어린이 또한 어떠한 받침대로 키우느냐에 따라 다르게 자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영아기 때의 교육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아이에게 올바른 받침대를 주어서 좋은 습관을 들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마땅히 가르칠 일, 즉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읽게 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하며 하나님을 순종하는 믿음을, 무엇보다도 비전을 갖고 앞으로 전진해나갈 수 있게 해야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바로 갖출 수 있도록 부모들이 도와야할 것입니다.

3. 우리도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한다.

“누구도 어린아이 같지 않고서는..”이라고 말씀에서는 나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고서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되라는 것은 유치한 짓을 하는 철부지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순결성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끝없는 상상력과 호기심 신뢰를 가지고 보고 듣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순결한 청순한 처녀성을 간직한 어린아이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어린이의 모습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모두 단순한 마음의 어린아이와 같이 되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결론

어리면 어릴수록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겸손하여, 틀에 잡혀 사는 것이 아닌 항상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이 나의 고집과 주장을 버리고 아이를 예수님처럼 영접하여 도와주고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가 되어 하나님의 음성을 따르는 자녀들이 되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 제목 : 예수님의 사랑을 보라 본문 : 막-10-13-16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받은 축복 가운데 하나가 어린 아이들이 우리 교회에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학교에 한 10,000명 정도가 출석을 하고 있고, 2,400명의 교사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 세계적으로 저희 교회가 받은 은혜인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보면 아무 유익도 없는 것 같고 교회학교는 필요 없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인 출석에 아이들을 포함시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어린이가 없는 교회, 어린이가 없는 나라는 소망이 없습니다. 정말 우리의 소망은 위로는 하나님이시고 아래로는 자라나는 어린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자라날 때만 하더라도 농촌에 아이들이 참 많았습니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와글와글하고 교회에 가도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농어촌에는 거의 아이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 면에 다섯 개, 여섯 개가 있던 초등학교가 거의 다 없어지고 하나만 남고, 노인들만 삽니다. 농촌이 힘이 든다고 가지를 않습니다. 특별히 농사는 남자들이 지어야 하는데 남자들이 안 갑니다. 안가는 이유가, 결혼을 못하는 거예요. 농촌으로 결혼해 오는 처녀들이 없어요. 죽어도 농촌은 안 가려고 하는 거예요. 땀 흘리고 고생하지요, 평생 일해봐야 자녀 교육도 못 시키고 생활도 할 수가 없고, 열심히 일해도 일년에 몇 100만원 벌기 어렵고, 몇 천 만원 빚이 없는 분이 없다고들 합니다. 모두 그 고생을 하면서 얻는 것은 없고, 먹는 것, 입는 것도 없으니 안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중국의 여자들이 농촌으로 결혼해 오는 일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중국에 신랑을 다 두고 와서 위장으로 결혼을 해 가지고는 밤에 그만 도망치는 거예요. 농촌의 총각들이 어떻게 기적적으로 결혼을 했지만 하루 아침에 또 혼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농촌의 총각들이 자살하고 목 매어 죽습니다. 장가가고 싶어 가지고요. 그런데 처녀들이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또 요사이는 필리핀 처녀들이 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필리핀 여자들이 이곳에 와서 문화에 적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농촌을 위해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교회는 다 마을마다 있습니다. 거기에 교역자들이 다 가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열 분, 다섯 분 앉혀 놓고 목사님들이, 전도사님들이 가 있어요. 저희 지역에도 이야기를 들으니까 1개의 면에 출생신고를 한 명이 했대요. 1년에 아기를 한 명 낳았는데 그 아이도 전도사님의 아이입니다. 그러니까 농촌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에요. 저희 교회가 농촌의 사과도 팔아주고 고추도 팔아주고 하면 불평하는 분도 있는가 본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도시 교회들이 농촌의 그런 일이라도 해 주어야 돼요. 더덕도 팔아주고, 대추도, 무도 팔아 주어야 합니다. 이 일마저 안하면 농어촌의 목회자들이 위로 받을 길이 없어요. 농촌이 없이 도시만 있을 수 있어요? 도시에서 자동차를 먹고 살 수 없습니다. 다 농촌에서 나오는 것을 먹어야 합니다. 선진국 미국도 농촌이 저렇게 잘되고 있지 않습니까? 농촌을 없이 하면 안됩니다. 농촌도 잘 되도록 우리가 사랑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줄 믿습니다.

어쨌든 저희 교회에 어린이들이 많은 것은 큰 은혜입니다. 어제는 제가 유아 세례를 272명을 주었어요. 일년에 유아세례도 이렇게 많이 주니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지… 오늘도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왔다 가니 얼마나 좋아요. 아이들이 많다라는 것 큰 은혜예요. 농촌에 있는 그 전도사님 아이가 너무 신기해서 동네 어른들이 하도 쓰다듬어서 애가 클 수가 없대요. 아이들은 우리 나라의 소망이에요. 아이들을 잘 길러야 돼요. 오늘 아이들 잘 기르는 것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공부시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이를 잘 기르는 길은 예수를 잘 믿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무 것 없어도, 설령 못 먹고 못 입고 좋은 학교 못 나온다 할지라도 하나님 잘 경외하며 하나님 잘 믿으면 다윗도 될 수 있고, 솔로몬같이 지혜로울 수도 있고, 히스기야 같이 훌륭한 정치인도 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 잘 믿는 것 이상의 복이 없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른이나 어린아이나, 남자나 여자나, 어느 나라 사람이나 우리 인간을 축복하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이 어린 아이를 안으셨습니다. 교회 나올 때는 다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다윗도 말합니다. ‘나는 아이라.’ 갓난아이 같은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올 때에 우리는 주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주님의 품은 사랑의 품입니다. 안겨야 사랑을 받습니다. 능력의 품입니다. 안겨야 능력을 받습니다. 은혜의 품입니다. 안겨야 은혜를 받습니다. 겸손하게 주님의 품에 안길 때 보혈의 은혜, 신령한 은혜, 각양 은혜를 받는 줄 믿습니다.

♬ 주 예수 넓은 품에 나 편히 안겨서

그 크신 사랑 안에 나 편히 쉬겠네 ♬

쉬는 품안이에요. 누구든지 안아주시는… 나라도 안아 주시고, 가정도 안아 주시고, 기업도, 모든 교회도 안아 주시는 넓은 품입니다. 온 세계를 품는 사랑의 품, 은혜의 품안에 안겨야 합니다.

또 주님은 안기운 모든 사람들을 안수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실 이는 예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손은 우리에게 안수하는 손입니다. 치료하는 손입니다. 긍휼의 손이십니다. 자비의 손입니다. 기적의 손이요, 축복의 손이 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안겨 안수를 받는 사람은 모든 저주가 변하고, 슬픔도 변하고 불행이 변합니다.

주님은 또 축복해 주셨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복을 줄 수가 없습니다. 자연도 사람에게 복을 주는 것 아닙니다. 축복이란 말은 영어로 blessing인데 사전을 찾아보니까 이 축복이란 blessing은 기독교만이 갖고 있는 용어라고 동아백과 사전에 말하고 있어요. 다른 종교에는 축복이 없어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 주셔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축복하시는 기독교의 독특한 용어예요. 모든 종교가 복을 받기를 원하지만 축복을 누가 주십니까? 우리에게 손을 올려서 축복할 이는 전능하사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입니다. 축복은 위로부터 옵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모든 좋은 것들이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빛이 되시는 하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축복이, 우리가 바라는 모든 축복이 있습니다.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학교에 있고 사람에게도 있고 길에도 있고 숫자에게도 있는 이런 것이 아니에요. 복은 여기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좋은 것들은 빛들의 아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축복 받기를 원합니다. 숫자 하나도 모두 복 받는 숫자를 좋아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여덟 자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여덟이라고 하면 일본 사람들은 미친대요. 왜냐하면 아래로 복이 양쪽으로 뻗어 나간다고 해서 일본 사람들은 이 숫자를 좋아해요. 이태리 사람들은 17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라틴어 순서를 바꿔놓으면 17은 ‘나는 죽는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싫어할 수밖에 없지요. 서양 사람들은 13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이 성만찬 베풀 때에 가롯 유다가 13이였거든요. 유다의 숫자라 해서. 아주 13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호텔에서 파티를 해도 12명은 받아주고 13명은 받아 주지를 않습니다. 13명 테이블이 없습니다. 비행기 좌석도 13을 하지 않습니다. 13은 아예 나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13하고 금요일이 겹치는 날을 아주 최악의 날로 정했습니다. 그 날은 교통사고도 많고 자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정신적으로 모두가 눌리는 거예요. 컴퓨터 바이러스도 제일 많이 뜨는 것이 바로 이 겹치는 날이라고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은 4자를 제일 싫어합니다. 죽을 4자라는 것입니다. 4자는 성경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4자는 좋은 숫자예요. 아파트에도 4층은 F라고 해서 4는 아예 없애버리고 싫어합니다. 우리나라는 겹자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1월 1일 설, 3월 3일 제비 오는 날, 5월 5일 단오, 7월 7일 칠석, 겹치는 것을 좋아해요. 어쨌든 축복을 받으려는 마음은 온 세계 사람들이 똑같습니다.

그러나 축복은 여기에도 저기에도 없어요.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 외에 아무 것도 없어요.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부름 받아도 하나님을 잘 경외함으로 그 안에서 천하의 축복을 다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인간의 실수가 많아도 하나님을 떠나는 실수보다 더 큰 실수는 없습니다. 어리석음이 많아도 하나님 떠나는 어리석음, 교회를 떠나는 어리석음보다 더 큰 어리석음은 없습니다. 아무리 다른 면으로 미련하고 죄가 많아도 하나님 떠나는 죄보다 더 큰 죄가 없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보다 더 큰 어리석음이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불행이 없어요. 다른 것은 다 길도 있고 소망이 있어요. 회복이 있어요. 주님이 함께 하시면 거지나 기생이나 술집여자나 바람둥이나 어떤 무식한 사람도 소망이 있어요. 회복이 있어요. 성경을 보세요. 기생 라합도, 이방 여인 룻도, 다 예수 안에는 길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면, 잘 살던 솔로몬 왕국도 무너지는 거예요. 하나님을 떠나는 것보다 불행한 일은 없는 거예요.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보다 놀라운 일은 없는 거예요. 그를 경외하면 그 안에 온갖 회복이 있고, 치료가 있고, 기적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분을 항상 예수에게로 인도해 주고 어린아이들에게 자나깨나 예수 잘 믿도록 ‘너는 하나님 잘 경외해라’고 해야 합니다. “목마른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실패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미국 부시 대통령은 허랑방탕하고 인간답지 않게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시에게는 존 에번스라고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지금은 상무 장관이 되었습니다. 예수 잘 믿는 친구입니다. 이 친구가 생일날 와서 교회로 인도하고 성경을 365개로 나누어 묶어서 ‘너 하루에 1권씩 읽어라’고 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읽어봐요. 말씀 속에 지혜 있지요, 소망이 있지요, 능력이 있지요, 치료가 있지요, 은혜가 있지요. 말씀이 거울이에요. ‘아! 이래서 안되겠구나!’ 자기를 보게 됩니다. 말씀이 망원경이에요. 세계와 우주를 보는 거예요.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말씀이 보는 거예요. 사람이 치료할 수 없는 것을 말씀이 치료하는 거예요. 그래서 부시가 성경을 읽고 사업이 잘 되고 주지사가 되고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지금 미국에 영적 부흥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학교에서 성경 공부를 부활하지요, 기도하는 것을 부활하지요, 백악관에 예배 드리는 것을 부활시키지요, 얼마나 영적 부흥운동을 일으키는지 모릅니다. 왜? 자기가 해 보았으니까. 주님을 떠났더라면 쓸모없는 사람이에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에요, 폐인으로 벌써 죽었을지 모를 사람이에요. 날마다 그렇게 술을 먹는데 10년 동안 먹으면 끝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의 말씀에 비춰지고 주님을 찾았더니, 주님을 만났더니, 중 예수 넓은 품에 안겼더니, 그 넓은 품이 부시를 안아 주어서 세계의 지도자로 만들어 주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민족이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항상 오직 주님을 향해 달려가듯이 주님을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아무 것 없을지라도 우리는 낙심할 것 없습니다. 예수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록펠러 어머니가 10가지 유언을 하였습니다. 록펠러는 가난하여 9살부터 남의 집 점원으로 일을 했는데 어머니가 물려준 신앙을 물려받은 거예요. 적어 보세요. 성경 뒷면에 이 10가지를 붙여 놓으면 참 좋은 거예요. 오늘 우리가 자녀들에게 가르칠 것이 있는데 진리의 말씀으로 자녀를 이끌지 아니하고, 엉뚱하게 자녀들을 이끌려고 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아무 것도 물려주지 못하고 이 신앙을 물려주었는데 록펠러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시다. 너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지만,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가 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복을 주신다는 거예요.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잘 섬겨라.

목사라고 하면 배가 아파하는 분이 있어요. 목사라고 하면 삐딱한 눈으로 보구요 넥타이 맨 것도 시기하구요 주의 종이라고 하면 물고 늘어지는 진돗개 같은 분이 있어요. 교회에 와서 항상 목사를 걸고 씨름하려고 하는 분이 있어요. 항상 목사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영적으로 시험 드는 분이 있어요. 신앙 생활은 그러면 안돼요. 열 가지, 백 가지 가운데 주의 종과 걸려 가지고 유익 될 일이 하나도 없어요.

3. 주일 예배를 본 교회에서 드려라.

내 교회가 있어야 돼요. 내 자리가 있어야 돼요. 교회에 와도 아무 곳이나 말고 자기 자리에 앉는 것이 좋아요. 얼마나 축복이에요. 윤보선 대통령은 돌아가실 때까지 자기 자리에 앉았어요. 항상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서 내 집이 있듯이 내 교회가 있는 거예요. 떠돌아 다니는 것, 집이 없다는 것, 얼마나 불행한 일이에요? 교회도 내 교회 없이 돌아다녀 봐요. 한 달만 다녀봐요. 믿음이 약해집니다. 영적으로 고아가 되는 거예요. 유리, 방황, 걸식하는 거예요. 꼭 설교 들어서 은혜 받는 것이 아니에요. 내 교회는 문만 열고 들어와도 평안이 와요. 은혜가 되는 거예요.

4.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주머니가 십일조 주머니예요. 평생동안. 세계 최고의 재벌이라도, 십일조 잘 하기로 유명한 분이 록펠러예요.

5. 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말아라.

친구를 만들고 원수를 만들면 안돼요.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어요. 누구든지 품어 주시고, 용서하는 주의 삶을 본받아요.

6.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하루를 그냥 되는대로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거예요. 목표를 정하고 기도하는 거예요. 아침기도 얼마나 좋아요? 아침에 문을 열 듯이 기도하면 길이 열리는 거예요. 활짝 길이 열리는 거예요. 아침기도, 새벽기도,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앞서 가시고 그 길을 축복하실 때 얼마나 잘 되겠어요?

7.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성하며 기도하라.

하루를 지나면 잘못한 것이 있지요. 저는 늘 있습니다. 저는 잘못하는 것이 늘 많습니다. ‘오, 아버지!’ 잠들기 전에 하루를 반성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밤에 복을 내려 주시는 거예요. 낮에는 인도하시고 밤에는 평강을 주시고 잘 자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밤사이에 준비해 주셔서 또 새로운 날을 맞이하게 해 주시는 거예요. 얼마나 좋아요?

8. 아침에는 꼭 하나님 말씀을 읽어라.

고 일어나면 신문을 보지요. 사실 신문 읽으면 얼마나 피곤한지 몰라요. 세상 돌아가는 만 가지를 보니까요. 별의 별 어려운 것들, 슬픈 것들, 답답한 것들 보니까 마음이 답답해요. 해외에 나가서 한 열흘동안 신문을 안 보면 한 이틀은 궁금하다가 한 일주일 지나면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신문 없는 곳이 그렇게 편할 수 없어요. 여러분 천국의 뉴스는 나에게 유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일매일 내게 소망이 되지만 세상은 아무리 읽어도 날마다 날마다 그런 것만 연속이예요. 특별한 것이 어디 나와요?

9. 남을 도울수 있으면 힘껏 도와라.

남을 돕는 것이 좋아요. 평생 남을 기쁘게 하고 유익되게 하고 무엇을 하든지 말 한 마디라도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고 사랑해 주고 용기 주고 아끼고 이것은 다 좋은 일들이에요. 선한 일을 하는 거예요.

10. 예배 시간에는 항상 앞에 앉아라.

어른들도 본받아야 돼요. 이렇게 살아야 돼요. 이것을 평생 어머니 말씀을 잘 지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씀 안에 무엇을 못 받겠어요. 다 얻는 거예요. 하나님이 다 내려 주시는 거예요. 축복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는 안내자예요. 우리는 가이드예요.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자녀들. 우리에게 맡겨주신 모든 심령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해 갈 때 주님의 손이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안아 주시고, 안수하여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의 품안에서 우리 인간은 고기가 물을 만나듯이 기쁨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할 줄 믿습니다.

교회는 우리의 소망입니다. 주의 품안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만나면 저가 우리를 존귀하게 하고 우리의 모든 불행과 슬픔과 가난과 저주를 물리쳐 주시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형통하게 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TV를 보니까 낚시하는 것이 잘 나오더라구요. 신앙은 낚시와 비슷한 점이 많아요. 낚시꾼은 앉아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먹어가면서 하루고 이틀이고 그냥 앉아 있어요. 교회도 우리가 나오면 그렇게 편하고, 아무도 없는데 물보고 혼자 앉아 있는데도 그렇게 편하고 행복해요. 우리도 주님 앞에 나오면 떠날 줄 모르고 좋아하는 낚시꾼처럼 예수 믿어야 돼요. 낚시하는 분들은요 매일매일 가구요. 못 잡아도 또 가고요 어떤 때는 배를 타고 원정가고요 또 며칠씩 갔다고 돌아와요. 오늘 우리는 주님을 이렇게 좋아해야 할 줄 믿습니다. 교회 오면 가고 싶은 마음이 없고, 교회만 오면 물 보듯이 편안하게 앉아 있아야 해요. 저는 낚시가 잘 안 맞더라구요. 오래전에 친구 목사님이 낚시하려 가자고 해서 밤에 갔어요. 서울에서 초저녁에 떠나서 한 11시에 도착을 했는데 낚시를 하다가 저는 졸려서 텐트에서 잤어요. 그런데 이 친구는 밤을 새우며 낚시를 하는 거예요. 얼마나 낚시를 좋아하는지…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물을 놓으면 많이 잡을 수 있는데 왜 저렇게… 한 시간에 한 마리씩 어떻게 잡나?” 나는 답답해서 못 하겠더라구요. 그래서 어느 목사님은 낚시 때문에 목회를 못한 분도 있대요. 그냥 당기다가 예배 시간도 놓쳐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낚시꾼은 많이 잡는 것, 그것이 문제가 아니래요. 낚시에 딱 걸렸을 때에 그 당기는 기분이요 그건 사람을 잡는다고 그래요. 고기하고 어떤 때는 한시간을 싸운대요. 도망가려는 고기와 당기고 풀고 하면서 한 마리를 잡는 그 기분은 말로 못한대요. 정말 우리의 신앙이 그래요. 예배 시간에 주님의 말씀이 딱 걸리면 잡아당기는 거예요. ‘저 말씀은 내 말씀이다.’ 저같은 경우는 늘 그렇게 믿었어요. 그래서 모든 예배 시간이 저에게는 낚시하는 사람이 큰 월척을 잡듯이 내게는 한없는 흥분과 감격과 축복의 시간이었어요. 성가대 찬양도 내게는 낚시에 걸리듯이 찬양이 나를 위한 찬양인 것처럼 흥분하고 감격하고 눈물 흘립니다. 어느 말씀이든지 예배 시간마다 싹 내게는 걸리는 거예요. “오! 아버지”하고 잡아당기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지만 예수 믿어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 인류 역사에 큰 축복을 받은 분이 되었습니다. 삭개오 같은 죄인도 예수 믿어가지고요 의인되고 그 가정이 천국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의 복을 받았어요.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나와서 주의 말씀 듣고 믿음의 생활하면 내 영혼에, 내 가정에 월척을 낚는 이 축복이 함께 할 줄 믿습니다. 예배 시간 시간마다 참석해서 은혜를 받고 여러분의 영혼이 잘 되고 복을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든지 외모를 볼 필요 없구요 어떤 세상적인 불행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면 다 해결되기 때문에 낙심하거나 부정적으로 보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할 일은 한나처럼 오직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성전 가까이 믿음의 생활 잘 하도록 가르쳐만 주면 그 외에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아이에게 축복이 주어지게 되는 거예요. 또 우리는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은 주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게 복을 빌어 줄 수 있고 축복해 줄 수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 주듯이 우리는 모든 분들을 축복할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축복하기를 좋아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성도되기를 바랍니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 30여년. 전체적인 우리 삶에 사회적인 분위기는 폭로 문화예요. 망신주는 거예요. 그냥 대통령 하신 분들. 망신시키는 거예요. 재벌 망신시키는 거예요. 또 몇 년 전에는 선생님들 망신을 주고요 선생님들이 부끄러워 못 다닐 정도로 망신을 주었어요. 작년에는 의사 망신 주고 또 몇 년 전에는 군인들 망신 주는 거예요. 군인이라고 하면 천하에 죄인이 되는 거예요. 또 검찰 망신 주고요 전부 망신만 주는 거예요. 작년에는 목사도, 교회도 망신을 주었어요. 이 나라에는 망신열이 뻗혀 가지구요 전부 나쁜 놈들만 있구요 천하에 역적들만 모여서 사는 나라. 아주 세계에 제일 나쁜 사람만 모여 사는 나라가 됐어요. 사람을 길러 주지를 못하고 전부 망신을 주는 거예요. 대통령마다 감옥에 집어넣어 버리고, 쫓아 내버리고, 하나도 남김없이 망신만 주는 거예요. 그리고 국민이 좋아해요.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에요. 어느 나라도 안 하는 짓을 하는 거예요. 중국 보세요. 공산주의 국가인데도, 정권이 바뀌어도, 다 보호받아서 괜찮게 지나는데 우리나라는 바뀌면 망신살이 들어요. 제가 지난 주에 세계를 다니며 보아도 선생님들 권위가 얼마나 있는지… 대학의 권위가 얼마나 있고 교수님 권위가 얼마나 있는지… 지도자들 권위가 얼마나 있는데 우리만 이렇게 전부 나쁜 사람들만 사는 데가 되었어요. 사람 하나 길러 내지를 못해요. 세계가 알아주는 존경하는 인물이 하나도 없는 나라가 되었어요. 이래서 되겠어요?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우리들이 예수의 사랑으로 안아주고 안수해 주고 God bless you! 하고 축복해 주는 이런 삶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서로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고, ‘잘 합니다. 아름답습니다. 훌륭합니다. 잘 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모든 분들에게 박수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까? 칭찬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까? 계속 헐뜯는 문화가 이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하겠습니까? 폭로하면 서로 원한에만 맺히는 거예요. 각 지역별로 항상 원한에 맺혀 있어요. 저희 교회도 부목사님들이 60명이나 됩니다. 다 천사같이 잘 하는 것 아니에요. 할 말이 있어도 제가 개인적으로 부르던지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깨닫게 되어 있어요. 부목사님 하나하나 한 것을 앞에 세워서 교인들 앞에 창피 주어봐요. 교회 분위기도 옳지 않고, 목사님도 원한에 맺히지… ‘김삼환이 두고 보자’ 속에 이런 것이 맺힐 것 아니에요? 다 덕이 없어요. 좋은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전부 다 ‘두고 보자’ 가슴에 다 맺혀 가지고 사는 거예요. 그러면 또 보복하고 보복하고 끊임없이 이어져 나가는 거예요. 오늘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 모두 이제는 안아야 되고, 이제는 사랑해야 되고 이제는 모두 너, 나 할것없이 칭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들춰내고 창피 주는 이런 문화가 안개처럼 걷어지고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주시는 축복만이 우리 교회에, 이 삼천리 반도 위에 넘치게 꽃이 피는 21세기 새 시대를 맞이하는 이 땅이 되고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 제목 : 엘리와 한나의 가정교육 본문 : 삼상-02-29-30 엘리와 한나의 가정교육

사무엘상 2장 29~30절

오늘은 어린이주일이고 다음 주일은 어버이주일입니다. 그리고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오늘날 가장 큰 위기 중의 하나는 가정들이 무너지고 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교실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이혼으로 말미암아 아이들이 버리워지거나 고아원에 갖다버려진 아이들이 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자녀교육에 실패한 제사장 엘리와 자녀교육에 성공한 한나를 대조해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엘리는 자식들의 죄에 무관심했고

한나는 자식을 거룩하게 키웠습니다.

엘리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사장이 되었으면서도 두렵고 떨림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제사를 짓밟고 신성을 모독했습니다. 백성들이 제사드리러 오면 세살 갈고리로 솥에서 찔러내어 구워 먹고 삶아 먹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헌금이 들어오면 마음대로 끄집어내다가 제멋대로 써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상 2장 17절에 보면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22절에 보면 소위 제사장들이란 사람들이 회막문에서, 즉 거룩한 성전 안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는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무관심했습니다. 23~24절에서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하는 정도로만 이야기했지, 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야단을 치거나 심하게 책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3장 13절에 두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는 말이 히브리어에는 “그들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아들들이 저주받을 짓을 했는데도 눈살도 찌푸리지 않았으니 어찌 죄의 심판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는 평범하게 나무랄 뿐 호되게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렇게 키우지 않았습니다.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다”는 뜻은 거룩하게 구별해 키웠다는 뜻입니다. 어려서부터 성전에서 수종 들며 구별된 생활을 했습니다. 결국 제사장 엘리에게는 계시가 끊어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지만 어린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결국 엘리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에나갔다가 법궤도 빼앗기고 자기들도 전사해서 나라를 망하게 했지만 사무엘은 큰 회개의 운동을 일으켜 나라를 구원했습니다.

부모는 어려서부터 잘못을 바로잡고 죄를 지으면 징벌이 따른다는 것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잠언 14장 9절에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했고, 잠언 13장 24절에는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했습니다. 잠언 29장 15절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을 툭하면 화풀이로 때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잘못된 교육철학이 나라들을 어지럽게 하고 부패하게 만듭니다. 체벌도 못하게 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해도 때가 되면 다 고쳐지니까 가만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된 짓 다 하고, 부모를 구타하거나 멀리 갖다버리기도 하고, 스승의 머리를 깎거나 구타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2. 엘리는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존중히 여겼고, 한나는 하나님을 더 존중했습니다.

엘리는 자식들을 너무 사랑하고 귀중히 여긴 나머지,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룩함을 짓밟는데도 심상히 여겼습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요, 그 자식을 멸망케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 29절에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고 하나님의 분노에 가득찬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전혀 그와 반대입니다. 한나는 기도 응답으로 받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젖떨어지자마자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성전에서 자라며 수종 드는 일을 했습니다. 웬만하면 “서원은 그렇게 했지만 몇 년만 더 데리고 있겠습니다.” 했을 터인데 한나는 젖떨어지자마자 냉정하게 떼어 성전으로 보냈습니다. 결국 그 아들이 영적으로 큰 부흥을 일으켰고 나라도 구원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백 세나 돼서 받은 아들을 너무 귀히 여긴 나머지 하나님만 차지해야 될 마음의 지성소에 아들이 차지한 것을 보시고 “번제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보시고 “네가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하시면서 아들을 돌려주실 뿐 아니라 엄청나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TV에서 연속극이나 보고 만화나 보면서 교회에 안 가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내버려두는 부모는 하나님께 큰 책망 받을 것을 각오하시기 바랍니다. 자식을 밥과 옷으로만 키운다고 다된 것이 아닙니다. 자식들이 일류 대학엔 못 가도 신앙교육은 바로 시켜야 합니다. 자식의 육신이나 정신의 교육보다 영원한 영혼을 바로 이끌어 주는 것이 정말 복 받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신앙으로 바로 키우지 못한 사람은 자식을 낳지 않으니만 못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임마누엘 교회 김국도 목사가 초등학교 때 몹시 추운 겨울날 교회에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니까 저의 어머니께서 밥도 안 주고 옷을 다 벗기고 밖으로 내어쫓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영하 20도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도 혼만 내고 금방 들어오게 한 것이 아니라 5분, 10분, 15분, 문을 꼭 잠그고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감기 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할 때 “얼쿠려면 바싹 얼쿠어야 감기가 안들지 찬바람만 쏘이면 도리어 감기 든단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7남매가 엄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4형제가 모두 목사가 되고 딸들은 목사 혹은 장로의 부인이 되었고, 손자들도 모두 목사 혹은 목사 부인이 되었습니다. 평생 “너희들 공부 잘 해라” 혹은 “돈 많이 벌어라” 하는 말씀은 듣지 못했으나 “내 평생 소원은 너희들 예수님 잘 믿는 것이다” 하는 말씀만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말 안 듣고 속 썩히는 자식들이 있었지만 결국 다 예수님 잘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는 “자녀들을 제멋대로 하도록 버려두는 부모는 마귀의 일을 하는 사람이며 신앙을 무의미하게 하며 구원을 불가능하게 하며 자녀들의 육신과 영혼을 멸망케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3. 엘리는 기도하지 않았고

한나는 간곡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장 12~13절에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한나는 “오래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간절히 깊이 있게 기도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으면 엘리가 “술 취한 사람”인 줄 알았겠습니까? 사무엘상 1장 15절에 있는 한나의 대답을 보십시오.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사무엘상 1장 16절에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한나는 어려운 문제를 기도로 해결한 사람이며 억울하고 분한 것을 사람에게 복수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기도로 하나님 앞에 물 쏟듯이 쏟아놓은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는 것이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엘리가 한나의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았는지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할 때에 한나는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한 말씀을 보면 한나는 참믿음의 기도를 드린 여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종 엘리의 축원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될 것을 믿었습니다.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한 말씀을 보면 “주의 종의 기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는”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하신 것 같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 엘리는 기도했다는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의 눈이 어둡고 영의 귀가 어두워서, 간절히 기도하고 오래 기도한 한나를 술취한 사람이라고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은 엘리의 자식들은 타락하고 방탕하다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법궤도 다 빼앗기고 나라를 망쳤지만 기도의 사람, 한나의 아들 사무엘은 영적으로 큰 회개운동, 기도운동, 부흥운동을 일으켜 나라를 구원했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 배후에는 거의 다 위대한 기도의 부모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4형제가 다 목사가 되고 부흥사가 된 것은 저의 어머님의 기도의 영향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 Augustine의 어머니 모니카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방탕한 아들을 위하여 여러 해 동안 기도하고 눈물을 흘려도 응답이 없어서 유명한 암브로드 감독에게 찾아가 상담을 했더니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식이 망하는 법이 없으니 계속 기도하라”고 말씀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Augustine은 세계적인성자가 되었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자식들이 무서운 죄를 지어도 꾸짖지도 않고 안타까워하지도 않고 심상히 여기고 간절히 기도하지도 않았고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귀중히 여기더니 그 가정이 비참하게 망해서 제사장 대도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 군사의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엘리는 전쟁에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꼬꾸라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그 자부는 남편과 시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아기를 낳다가 “이가봇” 하고 죽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하루에 제사장 엘리와 두 아들과 자부가 다 죽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나의 아들 사무엘은 나라를 구원했고 영적인 큰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이 나라의 장래는 여러분 부모들의 자녀교육에 달려 있습니다.

=========================================================================================== 제목 : 어떻게 길러야 합니까? 본문 : 삿-13-07-14

본 문 : 삿 13:7-14

설교자 : 류병규목사 (광주중앙교회)

5월은 교회적으로 전도의 달이면서 또한 가정의 달이며, 오늘 주일은 어린이 주일로 지키

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5월 전도의 달에 우리 교회가 제창하는 표어가 있습니다. 119운동입

니다. 한 사람, 한 영혼, 구원하자는 것입니다. 특별히 5월 전도의 달에 우리 모두가 한 사

람이 한 영혼을 구원하는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5월을 맞이하여 교회

가 외적으로 환경이 바뀌었습니다. 가운이 바꿨고, 또 창에 커튼이 바뀌었습니다. 이와 같

이 우리의 마음도, 믿음도 새롭게 단장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의 자녀들과, 자손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해년마다 5월이 되면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게 되고 또

내일은 어린이 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처럼 어린이 주일을 보내면서, 어린이날을 우

리가 보내면서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은혜를 받으며 믿음의 답을 찾고자 합니다. “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

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12). 그렇다면 이

질문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질문과 기도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길러야 할까

요?

첫째 기도로 길러야 합니다.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

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

게 하소서”(8). 13장 2절 말씀에 보면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어찌 된 연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이를 잉태치 못하였습니다. 어

느 날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가 출타하고 없는 가운데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하는 말

이 “네가 본래 잉태치 못하여,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하는

놀랍고 기쁜 소식을 전해주게 되었습니다. 밖에 나갔다 돌아온 남편에게 마노아의 아내는

이 사실을 이야기했고 그 사실을 들은 마노아는 오늘 8절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마노아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들에

게는 도저히 자녀를 얻을 수 있는 소망이 없었는데,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였는데, 하나님

께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셔서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러므로 자기들에게 주어질 그 아들이 자기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기업인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의 자녀가 아니라,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이요,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기업이라

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녀를 주셨을 때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

셨을 때는 무엇인가 우리의 자녀들을 통하여서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

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하나님의 기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된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내 자녀라고 생각합니다. 내 자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소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생각과 내 뜻과 내가 원하는 대로 우

리의 자녀들을 기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부모들은 그러한 생각들을 가져서

는 안됩니다. ‘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기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에, 하나님의 말씀에 맞게 양육해야된다’ 하는 그런 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

마노아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까? 자기들의 힘으로는 자기의 자녀를 바르게 양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바르게 길러

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너무나 험악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갖은 재난

과 재앙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입니다. 하루에도 수 없이 많은 어려움과 어려운 사고

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 자녀들을 둔 부모는 그 자녀들이 밖에 나가 있을 때

에 잠시도 마음을 놓을 날이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내 곁을 떠나 있으면은 불안합니

다. 염려가 됩니다. 그 말은 그마만큼 이 세상에 위험과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

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은 죄악된 세상입니다. 너무나 죄가 관영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죕니다. 귀로 듣

는 것이 죕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죄악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듣지 않으려고 해도, 우리의 자녀들을 세상의 죄악이 가만히 내버려두지를 않습니다.

이러한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 정말로 믿음으로 의롭게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자

녀들을 바르게 길러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의 자녀들

의 미래를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미래가 불분명한 세상 가운데 우리는 살

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내일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10년, 20년 후를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직장문제가 그렇습니다. 사업의 문제가 그렇습니

다. 앞으로 진로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성한 자녀들이 가정을 이루고 사는데

그 자녀들의 가정이 온전할 것이며, 행복할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

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마노아가

말합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 마노아는 믿음

의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

다.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우리의 자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녀들을 위하여서 일하시는 하나님신 줄로 믿습

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래서 불의

의 길을 가다가도 돌이키게 하시고, 실패와 좌절 가운데 빠져 있다가도 하나님이 그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악과 위험 속에 빠져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능히 능력의

손으로 건져내 주실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녀는 망하

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귀신들린 자기 딸을 위하여 주님을 찾아

온 가나안 여인을 우리는 만날 수가 있습니다. 자기 딸을 위하여 주님 앞에 찾아왔습니다.

주님의 냉대와 정말로 말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하면서도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랑하

는 딸을 위하여 간구하는 믿음의 어머니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귀신들

린 아들을 주님께 데려온 아버지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

서”라고 주님 앞에 간청했을 때에, 주님의 응답을 받고 아들이 고침 받는 귀한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어느 농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농부는 믿음이 신실한 사람이었는데,

두 아들은 믿음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늘 권면하고 권면해도 믿음의 생활을 할 기미가 전

혀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아침에 들녘에 일을 나가려고 하면은 헛간

에 가서 농기구를 가져오는데 들어가서 한참을 계십니다. 자녀들은 무슨 영문인지 잘 몰랐

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지나서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

나자 집안을 정리하던 두 아들이 아버지가 아침이면 일을 하기 위해서 농기구를 가지러 간

그 헛간을 정리하러 들어갔다가 무엇인가 발견했습니다. 움푹 패인 땅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땅은 아버지가 자기의 아들들을 위하여서 아침마다 일을 나가기 전에 무릎을 꿇고 하나

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던 기도의 흔적이었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두 아들은 그 자리에서 무

릎을 꿇고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녀들

을 위하여서 얼마나 기도를 해왔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고, 우리의 자녀들

이 형통한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며, 바르게 자라주기를 원하고, 염려하며 근심은 하는데 얼

마만큼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해 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랑

하는 믿음의 아버지들이여,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위하여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의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마

노아는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여 구하옵나니’라고 하나님께 믿음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 시간 이후에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들을 위

하여 기도의 눈물을 흘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부모의 눈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보석과도 같을 것이고 그 기도 까닭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풀

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길러야 합니까?

둘째 말씀으로 길러야 합니다.

어느 날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하

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자 앞에 마노아가 하는 말이 무엇

입니까?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

떻게 행하오리이까” 라고 물을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말합니다.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

을 그가 다 삼가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즉 어떻게 그 아이를 기르며

행해야 하는가 하는 마노아의 질문 앞에 여호와의 사자는 그에게 말한 것을 삼가 다 지키게

하라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이 아이는 삼손인

데 하나님께서 그를 나실인으로 구별하였다는 것입니다. 나실인이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자,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헌신된 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보면 나

실인의 규례가 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셔서는 안됩니다.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어서는

안됩니다.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야 하고, 만지지 말아야 합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실인이 지킬 규례였습니다. 나실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

나는 삼손처럼 나면서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생을 살아가다가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로 나 자신을 헌신하여 드림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되겠다’ 라고 생

각한 사람이 나실인으로 서원하고서 일정한 기간을 나실인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나실인의

규례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것, 먹어서는 안될 것을 먹어서

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것을 먹지 말고 만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에 삭

도를 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그 사람 위에 무엇이 있는가를 상징하는 것이었

습니다. 그러므로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하는 것은 너 위에 하나님이 있는 것을 인정하

면서 살라 하는 교훈이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무엇을 행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세상적인 것들을 먹고, 마시며 행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세상풍속을 따라 살아가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

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가르쳐야 할까요?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그

래서 유대인들은 자기의 자녀를 낳으면 그들의 입이 열리기 전에, 귀가 트이기 전에 하나님

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는 자녀들을 키우면서 그

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

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언 22:6). 우리의 자녀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지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나와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대로 믿음으로 우리들의 자녀

들을 양육할 때에 하나님이 쓰시는 믿음의 일군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

다. 그리고 내일은 어린이날입니다. 시내 곳곳에 많은 어린이날을 겨냥한 선물들이 즐비해

있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자기들의 자녀들과 손주들을 위해서

어린이날 선물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한번 돌이켜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이 어린이

주일인데 여러분들의 아들과 딸들이, 여러분들의 손자와 손녀들이 오늘 아침 주일학교 예배

에 참석했습니까? 아니 지금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오늘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예배를 드렸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선물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자

녀들이, 우리의 자손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도

록 해야 한다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내일 어린이날인데 혹은 아들, 딸들에게 혹은 손자들

에게 한번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는, 엄마 아빠가 주는 성경책을 선물해 볼 수 있기를 원합

니다. “이 성경책을 열심히 읽어라, 이 성경책을 들고 주일마다 꼬박 꼬박 빠지지 말고 하

나님께 나아가서 예배를 드려라, 그리고 말씀과 믿음대로 살아라” 한번 권면해 볼 수 있기

를 원합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한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네스북이라고 세계 제일 가는 이야기들, 사건들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그런

데 미국의 일리노이주에 다부라고 하는 사람이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합니다. 오른 이유가

무엇이냐, 57년동안 주일학교를 개근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57년 동안 믿음 생활하는 것

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이 다부라고 하는 사람은 57년동안 주일학교를 한번도 빠지지 않고

개근하면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1932년 이 다브씨가 은퇴겸 생일을 맞이하

여 축하잔치가 열리게 되었는데 그 다브씨는 네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한 통은 중국에

나가 있는 선교사에게 온 편지였습니다. 또 한 통은 미 연방은행의 총재에게서 온 편지였

고, 또 한 통의 편지는 후버대통령의 비서실장에게서 온 편지였으며, 마지막 네 번째 편지

는 후버대통령 자신에게서 온 편지였습니다. 어느 날 이 다브씨가 길을 가다가 길에서 놀고

있는 네 명의 아이를 발견하고 그들은 전도해서 주일학교에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바로 그들이 훗날 미국을 이끌어 가는, 세계선교를 감당하

는 귀한 일꾼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세상적인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칠 때에 하나님께서 사용하

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내가 말한

것들을 다 삼가서 명한 것을 다 지킬 것이라’ 이 말씀대로 우리의 자녀들과 자손들을 하나

님의 말씀으로 다 양육하여서 하나님이 쓰시는 믿음의 귀한 일군들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

다. 어떻게 길러야 할까요?

셋째, 믿음의 본을 보여 길러야 합니다.

마노아는 그 하나님의 사자가 자기 아내에게 말하고, 자기에게 말한 것을 믿음으로 될 줄

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

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삿 13:4), 이 말은 장차 태어날 아이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지만 마노아의 아내, 즉 삼손의 어머니에게 한 말씀입니다. 먼저 너 자신부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를 가진 엄마가

얼마나 어린 생명을 위해서 여러 가지로 조심하는가를 잘 압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가진 엄

마의 태교가 새 생명에게 그마만큼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믿음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너무나 큰 신앙의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가장 위대한 스승

입니다. 부모는 가장 믿음의 좋은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의 믿음을 보

면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리고 기도하면서 하

나님의 살아 계심과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가르친다면은 우리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살아 계

심과 응답하심을 믿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부모들의 주일마다 하

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는 자녀들은 일평생 교회를 떠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사람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부모가 우리

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작은 일에도 감사의 예물을 드리며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보면서 자라는 자녀들은 훗날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

혜인줄 알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믿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내 부모가 다른 사람을 사

랑하고 이웃을 섬기며 봉사하는 삶을 보이며 살아갈 때에, 우리의 자녀들이 이웃을 사랑하

며 봉사하며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군들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

는 믿음의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의 신앙의 감시자와도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

을 누가 봅니까?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누가 봅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봅

니다. 그러므로 엉터리 믿음 생활하는 부모, 그 자녀가 바르게 믿음생활 할 것이라고는 기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도 바른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도 더 좋은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을 보고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어

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의 믿음을 보고 자랐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

까? “디모데야 너의 그 믿음은 너의 어머니와 너의 외할머니에게 있던 믿음인데 내가 너에

게도 있는 줄 아노라” 디모데가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바울의 믿음의 동역자가 될 수 있

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와 그의 외할머니의 믿음을 보고 본받아 자랐기 때문이요, 그의 어머

니와 외할머니가 믿음의 본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우리의 자녀들

앞에, 내 손자 손녀 앞에 과연 믿음의 본을 보이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세상

적인 것들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마음속에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기를 원합니

다. 그리고 말씀에 도전을 받고 우리의 자녀들 앞에 믿음의 본을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본을 보이고, 예배의 본을 보이고, 감사의 본을 보이고, 사랑과 봉사의 실천의 본을

보여서 우리의 자녀들이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자라며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어느

날, 어린 딸과 아빠가 함께 있으면서 대화를 나눕니다. 딸이 아빠에게 묻습니다. “아빠, 하

나님 죽으셨어요?” 아빠가 깜짝 놀라서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나님이 죽이시다니?”

“옛날에는 아빠가 하나님과 대화를 자주 나누셨는데 요즘엔 통 아빠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을 볼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죽으셨는가봐요” 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아빠

가 늘 하나님과 기도하면서 대화를 나눴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빠가 기도를 쉬게 될 때에

그 어린 딸이 그 아빠에게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의

자녀들이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구나”

라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경건한 믿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릴 때

에 우리의 자녀들이 그 모습을 보고 예배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성

도여러분, 우리의 자녀들과 자손들에게 좋은 믿음의 선생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노아를 통해서 어떻게 우리의 자녀들을 길러야 하는지를 배울 수가 있습니

다. 기도함으로 길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러야 합니다. 믿음의 본을 보이며 길

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잘 자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손자

손녀들이 믿음으로 잘 자랄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일하였던 사

사 삼손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고,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믿

음의 귀한 일군들이 배출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제목 : 여호와의 주신 기업 본문 : 시-127-03-5

시편 127:3-5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

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

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우리는 기업이라고 하면 크고 작은 사업을 하는 회사로 생각합니다. 사업가는 기업을 통하

여 부와 성공과 행복을 창출합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기업과는 관계가 먼 것으로 생각하

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결혼하고 자식을 낳으면 바로 그 자식이 하나님께서 주

신 기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기업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그 인간을 기르는 기

업, 즉 자식양육이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업을 잘하면 하나님

의 상급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잘 기르면 우리 일생의 가장 큰 상급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삶의 최고의 기업인 자식양육을 등한시하고 세상적인 기업

에만 몰두할 때가 많습니다. 그 결과 자식기업에 실패하고 자식이 재앙이 되어서 돌아올 때

가 많습니다. 우리는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자식 기업을 어떻게 경영하

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1. 자녀 기업은 농심으로 해야 한다

요한복음 15장 1절에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

식을 기르는데는 농부가 농사를 짓는 심정으로 자식을 돌보아야 합니다. 농부는 논밭을 갈

고 씨를 뿌립니다. 그리고 물대기에 심혈을 기울이며 비료를 주고 김매고 병충해를 방지하

는 지극한 정성과 관심과 사랑과 돌봄을 통해서 수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

부는 봄이 오면 가을 추수할 때까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쁩니다. 그냥 씨만 뿌려놓고 내던

져 놓는다고 곡식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어릴 때 이웃에 가난에 찌든 농부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사는데 유독 그 분

은 몹시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술먹기를 좋아하고 도박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농사

를 지을 때 마지 못해 논갈고 밭갈고 씨는 뿌려놓고 그 다음에는 내동댕이 쳐놓았습니다.

논에 가면 피가 잔뜩 나 있습니다. 농작물은 비뚤어져 있습니다. 밭에도 풀이 무성합니다.

소는 하루종일 묶어 놓아서 뼈만 남았습니다.그렇게 게으르게 농사를 지으니까 가을에 거

둘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사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자식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을 낳아 들풀처럼 그냥 던져 놓으면 저절로 자랄 것이라

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지극한 정성과 관심과 사랑과 돌봄이 있어야 자식농

사도 잘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7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

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식을 기르는 부모들은 오랜 세월 큰 인내를 가지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때문에 농심이 없이는 자식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식을 키우는데 농심을 가지지 않고 낳아서 돈만 주고 내던져 놓으

면 자연적으로 들풀처럼 자랄 줄 아는데 이런 자녀들이 자라서 사회에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2. 자녀 기업은 가정 교육으로 형성된다

가정은 자식농사의 못자리이자 기업의 터전이라는 것을 잘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식을

교육하고 키우는데 학교가 돌보아 줄 것이니 학교에만 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 안되

는 것입니다. 사랑과 화목과 평안이 넘치는 가정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자식들은 그 분

위기를 마시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간에 이해와 동정과 사랑과 화목과 평안

이 있는 가정에서 자식들은 그 분위기를 마시고 자라는 것입니다. 가정에 분열이 있고 분쟁

이 있으면 그 분위기가 자녀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며 그 자녀들은 올바른 인격자로서 성장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것이 뭡니까? 서로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고 화목하고 평안을 가지고 기쁨

을 함께 나누며 소망을 가지고 사는 공동체입니다. 가족들에게는 내가 손해 보더라도 화해

하고 화목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특별히 부부간의 관계, 부모 자식간의 관계, 형제간의

관계는 이해를 따지면 언제나 손해가 옵니다. 이해를 따지지 말고 화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로 42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

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

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

다. 이것은 패배주의적인 철학이 아니라 우리가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지혜를 주

시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관계나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이해를 가지고서 따지는 관계가 아닙니다. 때문에

이겨도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내게 손해가 오더라도 화해하고 화목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

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놀라운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과 화목과 평안이 넘치

는 분위기 속에서 자녀들이 잘 자랄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롤 모델(Role model), 즉 모범으로 보고 자라는 것입니다. 결혼할 때 신

랑, 신부를 알려면 그 부모를 살펴보면 됩니다. 자녀들은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를 모범으로 삼고 딸은 엄마를 모범으로 삼습니다. 어릴 때 늘 보고 배우는 것이 아

버지, 어머니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린이의 인격은 1세에서 6세 사이에 토대가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미국의 아동교육 전문

가 폴디 마이어는 인격의 85%가 1세에서 6세 동안에 완성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린

아이가 1세에서 6세 동안에 어디에 있습니까? 부모와 같이 있습니다. 때문에 자녀의 성장

모델이 부모라는 것을 알면 부모의 언어, 심사, 행동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

는 것입니다. 잠언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

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아버님이 저에게 참으로 좋은 모범이 되어주신 것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합니

다. 저는 한국전쟁의 전란 중에 자랐습니다. 학교에 가면 학교가 아니라 완전히 난장판이었

습니다. 수업을 마치면 애들은 다 구석구석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습니다. 술병을 들고 학교

에 왔습니다. 수업을 마치면 큰 아이들은 떼를 지어 창녀촌으로 놀러갔습니다. 그런데 저

는 그곳에 전혀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자랄 동안에 아버님이 우리 보는 앞

에서 절대로 담배 피는 것을 못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이 술취해서 술주정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허랑방탕하게 우리 집안에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늘 그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아버님이 그렇게 안 했는데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며 마음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청소년들은 대개 결손가정이나 불안한 가정의 산물입

니다. 가정이 화목하고 인정이 있고 사랑이 넘치는 곳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이 사회적인 물

의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하버드대학에서 청소년 범죄자의 가정 배경 조사에 의하면 10명 중 6명의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거기서 자란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겠습니까?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

게 됩니다. 10명 중 6명의 부모가 자주 싸웠습니다. 부모가 늘 싸우는 것을 본 어린아이들

은 상처를 입고 나가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청소년 4명 중 3명

이 제약없이 마음대로 키움을 받아서 세상에 나가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부모가 징계를

하지 않고 막 기른 것입니다. 10가정 중 7가정에 건전한 오락기구가 없기 때문에 애들이 밖

으로 돌아다니면서 놀다가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10명 중 8명의 부모가 자녀의 친

구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10명 중 8명의 부모가 자녀에게 전혀 무관심했습니다. 그래

서 이 자녀가 사회적인 문제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다수 소년 범죄자들이 결손가정이었습니다. 부모가 이혼한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이

대다수 소년 범죄자들이 되었고 청소년 범죄자들의 80%가 신앙교육이 없었다는 것입니

다. 그들이 신앙적인 교육을 받았더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고 범죄

하지 않을 것인데 80%가 전혀 신앙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청소년들이 범

죄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녀교육의 선악의 선(線)을 부모들은 분명히 그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잘했

을 때는 칭찬을 아끼지 말며 악을 행했을 때는 경고와 벌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 22

장 15절에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아직 배우지 못했으므로 미련하지 않습니까? 그러

나 성경은 말하기를 징계하는 채찍이 이 미련을 마음속에서 쫓아낸다고 말했습니다.

잠언 23장 13절로 16절에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

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채찍으로 때리면 영혼을 멸망에서 구원합니다.

오늘날 교육은 어린아이들에게 채찍을 때리지 말라고 합니다. 학교 교육도 체벌을 못합니

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이 방종하게 자랍니다. 잠언 29장 15절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

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

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준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오늘날 부모들은 자녀들을 방임하면 안됩니다. 또 과보호하면 안됩니다. 잘할 때

는 칭찬하고 잘못했을 때에는 꾸짖고 채찍으로 때릴 수 있어야 지혜를 얻게 되고 마음에서

어리석음이 쫓겨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3. 자녀 기업은 신앙 교육으로 결실한다

자녀가 장차 자라서 대통령이 되고 재벌이 된다 해도 목숨을 잃어버리면 그 삶은 아무 소

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살면 70이요, 강건하면 80쯤 되는데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고 지옥

에 떨어지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녀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영혼을 구

원하는 것입니다. 잠언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릴 때 신앙을 넣어주면 떠나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

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으므로

그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신앙은 그 어머니의 품에 심어졌습니다. 바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동안 유대민

족에게 아들을 낳으면 모두 다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죽

음의 위험이 임하자 바구니에 담겨 나일강에 버려졌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왔다가 어린아이 우는 울음소리를 듣고 그 바구니를 건졌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모세

의 누이가 와서 히브리인 유모를 추천했는데 바로 친어머니였습니다. 그래서 친어머니가

유모가 되어서 모세를 그 품에 길렀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나이가 들자 바로의 궁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래서 40세가 될 때까지 바로의 궁에서 온갖 학문을 다 배우고 영화롭게 살았지

만 어릴 적 젖먹을 때 엄마 품에서 신앙을 배웠기 때문에 그것이 평생 모세의 마음을 떠나

지 않았습니다.

40세에 그는 히브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치고 나중에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위대한 지도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모

세의 마음의 신앙은 어릴 때 형성되었습니다. 1세부터 10세 전에 엄마 품에서 젖먹고 자랄

때 넣어준 그 신앙 때문에 그 이후로 그 40년을 살면서 바로의 궁전에서 호화의 극치의 삶

을 살고 애굽의 모든 학문을 배웠어도 그 신앙을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디모데의 신앙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

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디모데후서 1장 5절). 디모데는 바울의 영적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디모

데가 그렇게 좋은 신앙을 가진 것은 먼저 그 신앙이 외조모의 마음속에 있었고 그 다음에

는 그 신앙이 그 어머니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신앙을 가졌으므로 디모데가 그

위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개 보면 훌륭한 신앙을 가진 어

머니의 품에서 자란 자녀들은 끝까지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적인 삶을 가르치는 부모가 되어야 됩니다. 신명기 6장 5절로 7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

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어릴 때부터 자녀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먼저 가정예배를 착실

히 드려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데리고 교회 오는 것을 가르쳐야 됩니다. 자녀의 손을 잡

고 교회 와서 교회학교에 보내고 부모가 예배 드리고 또 자녀와 함께 집에 돌아가는 이것

이 그들의 습관이 되면 오래오래 그 마음속에 그 신앙의 모범이 떠나지 아니하는 것입니

다. 저는 우리교회 훌륭한 부모님들이 십일조를 드릴 때 꼭 자녀를 데리고 와서 자녀가 보

는 앞에서 제게 십일조를 드리고 안수기도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좋은 교훈입니

까?

윌리암 콜게이트는 콜게이트 치약, 콜게이트 대학 등을 설립한 사람입니다. 18세 되던 해

에 성년식을 마친 후 마을에서 가장 연로한 노인에게 가서 인생 자문을 구하자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일은 자신이 있

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노인은 청년의 손을 잡고 ‘네가 좋아하는 바로 그일을 하거라.

단 한가지 조건은 예수님을 네 동업자로 모시고 수입의 십일조를 반드시 동업자에게 드려

라. 그러면 너게 크게 성공해서 잘살게 될 것이다’라고 충고했습니다. 콜게이트는 그 노인

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는 비누와 초를 만드는 공장을 설립해서 일했고 십일조를 반드시 드렸습니다. 그 결과

로 큰 사업가로 성공하여 세계적인 치약과 비누 회사를 운영하고 콜게이트 대학을 설립해

서 그 수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놀라운 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주는 가장 큰 유산은 무엇입니까? 신명기 28장 1절로 6절이 바로 그 유산

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

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

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

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

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

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것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이 아니겠습니까? 어떠한 일류대학 졸업장보다

더 자녀들에게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주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이 가장 놀라

운 유산을 자녀에게 남겨줄 수 있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여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그것을 물려 받을 어린이

에게 좀더 많은 사랑과 정성을 쏟으라. 이것이 내 일생에 얻은 가장 귀한 교훈이라”고 했습

니다.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 “21세기는 도덕성을 지닌 민족만이 번영할 수 있다”고 말했

습니다. 도덕성이 없는 민족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번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도 알려 있지 않습니까? 도덕성을 잃은 큰 기업들이 부실경영을 해서 넘

어지지 않습니까? 결국 도덕성을 가진 기업이 장기적 시각으로 볼 때 성공합니다.

우리는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국은 입시교육에 눌려

인성교육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저 입시공부, 일류대학에 애들이 찌들어집니다. 그

래서 일류대학에 들어가면 그 다음에는 완전히 공부에 질려서 공부를 등한시하고 놀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있어도 지혜는 없고, 저주할 줄은 알아도 감사할 줄 모르고, 시기할 줄은 알아도 칭

찬할 줄 모르고, 경쟁할 줄은 알아도 협동할 줄 모르고, 쾌락은 알아도 사랑은 모르기 때문

에 오늘날 인성교육이 없는 우리 젊은이들은 사회도처에서 화합과 단결을 가져오지 못하

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을 우리가 잘 보고 있는 것입니다.

1889년에 이 세상에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아이이는 히틀러이고 한 아이는 아이젠하

워입니다. 똑같은 해에 동갑으로 태어났습니다. 한 아이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몹시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가정보다 사교생활을 더욱 중

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렸을 적 그의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아이를 알

코올 중독자인 숙모에게 맡기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16세가 된 소년은 학교를 중퇴하고 가

출했습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연명하다가 결국 독일 군대에 들어갔고 1차대전

에 독일이 패배한 이후에 정치에 투신하여 극렬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가정교육이 없었

고 신앙교육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34년 독일국민의 절대 영도자인 총통이 되었

고 그는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켜 온 유럽을 잿더미로 만든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에 한 아이가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소년은 아버지와 어머니

의 사랑을 흡족히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가훈

을 전해 주었고 가족 모두가 교회에서 가장 적극적인 봉사자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소년은

어른으로 성장해서 어머니의 두팔에 안겨 간곡하게 기도하던 매일 저녁의 일과를 기억하

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군대에 흥미를 느끼고 웨스트 포인트에 입학, 졸업하여 2차대전

당시 연합군 사령관이었고 이후 미국 대통령을 지냈는데 바로 아이젠하워였습니다.

1944년 6월 6일 이 두명의 동갑내기가 전투에서 대면했습니다. 11개월에 걸쳐 히틀러와 연

합군 사령군 아이젠 하워는 서로 싸웠습니다. 히틀러는 1945년 전쟁에 패배하고 4월 30일

지하 방공대피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 소식을 접한 전 세계는 박수갈채를 보내었

습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1969년 80세에 평화롭게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죽음을 전 세

계가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태도가 자녀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을 보여 주

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고 바람둥이 어머니 밑에서 잠시 자란 히틀러

는 사회와 인류에 대해서 무지무지한 반항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는 결국에는 독일의 총통

이 되고 난 다음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인류문명을 잿더미로 변화시켰습니다. 하지만 사랑

과 신앙교육을 받은 동갑내기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전쟁에서 인류를 구원했고 미국의 대

통령이 되고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은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을

통해 가정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자녀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기업이다

자녀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기업이기 때문에 자식을 개인 소유물처럼 취급해서는 안됩니

다. 4월 4일자 국민일보를 보면 제주도에서 한 아버지가 이민주 양이라는 어린 딸을 때려

서 죽였습니다. 그는 자기 부인과 생이별을 하고 있었는데 그 딸이 엄마가 보고 싶어서 엄

마에게 몰래 전화한다고 그 아버지가 그 딸을 굶기고 얼마나 매를 때렸던지 매맞아 죽었습

니다. 이런 창피하고 몰상식하고 몰지각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딸이 엄마에게 전화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엄마가 보고 싶어서 엄마에게 전화한다고 자기의 살과 피인

자식을 굶기고 때려 죽이다니 이런 것이 오늘날 우리 부모의 형상이 되어서 너무나 부끄럽

습니다.

아동학대는 하나님 앞에 범죄도 보통 범죄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19장 14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건복지부 발표에 보면 우리나라 잠재 피해아동은 45만명이라고 말합니다. 서울에서 9

만 7천명, 부산에서 3만 5천명, 제주에서 5천명, 경기에서 8만 3천명, 대구·인천에서 2만 3백

명이 학대를 받고 있습니다. 피해아동의 75%가 11세 이하 아동인데 어떻게 학대를 하느냐.

밥을 안 주고 굶겨요. 옷을 제대로 입히지 않아서 동상에 걸리게 해요. 때려요. 정서적으로

구박을 해요. 버려요. 그리고 심지어는 부모가 자식을 성폭행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비극

적인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5절로 6절에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이

학대에 대해서는 우리 주님께서 무지무지한 관심을 가지고 그를 추궁할 것입니다. 아동은

제2세 국민으로서 사랑받고 보호되고 양육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절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

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실 때 어

떠한 사랑을 베푼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몸을

찢고 피를 흘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돌보고 양육해서 천국백성으로 만들어 주

신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어느날 선생님이 초등학교 1학년 수업시간에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필요

한 물건이 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며 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까?’ 그러니까 한 아이가 손

을 들더니 ‘선생님! 저는 냉장고가 되고 싶습니다’ ‘왜 냉장고가 되고 싶습니까?’ ‘그 이유

는 속에 가득 찬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가 있고 또 냉장고는 우리 어머니가 항상 열

었다 닫았다 하므로 우리 어머니가 저를 냉장고처럼 열었다 닫았다 돌보아 주기 때문입니

다’

둘째 아이가 손을 들었습니다. ‘너는 뭐가 되고 싶으니?’ ‘저는 텔레비전이 되고 싶습니다’

‘왜?’ ‘그 이유는 우리 부모님이 좀더 자주 저를 보실 것이고 더 열심히 돌보아 주며 훨씬

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고 밖에 나가 놀라고 하지도 않고 끝나기 전에 주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상 우리 부모님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으니까 제가 텔레비전만 된다면 우

리 부모님이 항상 저를 쳐다봐 주고 제 말도 들어주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끝나기 전에는

잠도 안주무시고 저를 돌보아 줄 것 아닙니까?’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부모의 돌봄과 사랑이 필요했기에 어머니가 늘 열었다 닫았다하는

냉장고가 되고 싶다, 부모님이 늘 바라보는 텔레비전이 되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겠습니

까? 이만큼 오늘날 우리 사회는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내버려 놓았다는 증거

가 되는 것입니다.

아동은 국가의 장래이고 교회와 천국의 장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린이주일을 매

년 지나가는 행사로 지나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 부모들이 과연 하나님이 주신

기업인 자식들을 잘 기르는지 깊이 생각하고 반성해 보아야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

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 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우리도 한때는 다 어린아이였고 우리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정성

으로 자라서 어른이 되고 또 자녀의 부모가 되었습니다. 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

수님을 보내셔서 몸 찢고 피 흘려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성령을 보내시사 말씀으로 돌

보아 주시므로 우리가 신령한 자녀로 태어나고 성장하고 자라서 천국까지 가게 되었습니

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어린이주일에 우리가 깊이 반성하고 우리의 자녀를 잘못 기른 것

도 회개합니다. 또한 자녀를 기르는 부모들은 자녀에 대해서 더 많은 정성과 관심과 뜨거

운 사랑을 가지고 농부가 농사를 짓는 그 농심으로 자녀를 기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

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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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본문 : 신-06-04-9

신 6:4-9, 20-25

5월은 가정의 달이지요. 다양한 행사가 5월이 되면 정부는 정부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모든 기관이 가 정의 달에 맞추어 행사가 많습니다. 그 중에 먼저 어린이날이 제일먼저 오기 때문에 아이들을 위한 행 사가 계속 이어지게 되겠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가정, 하나님이 주신 이 아름다운 선물들을 우리는 믿음 안에서 잘 길러서 5월의 푸르름같이 아름다움같이 하나님 주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저들로 통하여 확장하고 또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아브 라함과 이삭, 야곱과 그의 후손들로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아가는, 태어날 앞 으로의 수많은 우리 후손들을 통하여 이 민족이 복음화되고 거룩한 땅이 되고 제사장의 나라가 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복된 나라가 되기를 우리는 모두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누구나 할 것 없이 잘 길러야 합니다. 이것은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것입니다. 교육 은 백년대계라고 하지 않습니까. 백년대계가 아닙니다. 천년만년 가도 교육보다 앞설 수는, 어떤 것 도 교육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잘 가르쳐서 잘 길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녀 를 사랑합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수고를 자녀를 위해 바치고 모든 돈을 자녀를 위해 서 다 쓰여져도 우리는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왜? 자녀가 잘되는 것이 가장 큰 일이니까요. 그래서 우 리는 잘 입히고 잘 먹이고 잘 재우고 누구보다도 앞서서 좋은 교육을 받게 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 이 모든 부모님들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자녀를 잘 기를 수 있습니까? 무엇을 먹여야 하고 입혀야 할 것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 ‘쉐마’를 사랑하는 자녀에게 가르쳐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 명기 6장 4절로 5절 이 두 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자녀에게 가르쳐 주는 귀한 메시지입니 다. 이것을 쉐마라고 합니다. 쉐마라는 히브리말은 들으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쓰기 전에 공부하기 전 에 먼저 듣는 것처럼 쉐마의 교육은 어머니 태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이 아이에게 늘 말하는 겁니다. 너는 들어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이신 여호와시니 너는 일생동안 마음을 다 하고 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을 계속해서 가르치는 겁니다. 부 모님만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정부가 가르칩니다. 학교가 가르칩니다. 제사장이 가르칩니다. 사회 가 가르칩니다. 언론이 가르칩니다. 모든 유대인의 교육은 이 쉐마 교육에 온 나라가 다같이 참여하 는 것이지, 집에 있는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만 가르치는 교육이 아닙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 너 희 믿는 여호와 야훼 하나님 전능하신 여호와를 너는 일생동안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 하여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섬겨야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교육은 1-2년에 끝나 는 것이 아닙니다. 10년 20년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장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계속합니다. 앉았을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밖에서나 집에서나 항상 이 교육을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입으로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손에도 손목에도 이 쉐마를 써서 기록하고 달고 다니고 이마에도 붙이고 다니고 문설주에도 바르고 밖의 문에도 바르고 온 집이 쉐마로 온 교육이 쉐 마로 가득 채운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 잘 섬겨라, 잘 믿어라. 영원히 영원히 하나님 한 분을 중심해 서 살아야 된다는 것을 백번 천번 만번 십만번 억만번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입니다. 끊임 없이 이것을 반복합니다. 유대인의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유대인의 우수한 교육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계 최고의 교육하면 유대인인데 유대인의 교육의 핵심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공부시키는 게 유대인의 교육입니까? 스파르타식으로 강하게 공부시키는 것이 유대인입니까? 아닙니다. 유대 나라 모두 교육을 연구하러 가보는 분들이 우리들보다 더 많이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더 철저한 것도 아니 고 어려서부터 일찍이 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유대인의 교육의 핵심은 쉐마입니다. 쉐마 교육을 받은 유대인은 오늘 세계를 지배합니다.

여러분 지난번 신문 보셨죠? 노벨상 받은 사람이 299명인가, 유대 인이 3분의 1, 94명. 우리 전 아시아 다 해도 몇 명되겠어요? 조그만 한 나라가 노벨상 받은 사람이 이 한 나라에서 90명 이상 백여명 가까이 나오고 전 미국의 대학교수의 35%가 유대인이고 모든 교육 계, 세계 정치계, 세계를 움직이는 위대한 예술분야, 과학에 유대인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세계 돈도 다 갖고 있습니다. 이 뿌리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샘은 하나입니다. 길은 하나입니다. 한곳에 서 나옵니다. 쉐마에서 나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가 선생님이 학교가 집에서 들에서 정치가 어른이 제사장이 랍비가 모두가 다 쉐마입니다. 계속 반복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간직하게 하고 생활 속에 간 직하게 하고 끊임없이 쉐마를 묵상하며 큐티하며 감사하며 믿으며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 다. 이것이 바로 세계를 보는 눈을 열게 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앎으로 이 세상을 아는 것은 간단하 게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담대함과, 그 하나님의 백성이 됨으로 세계를 보는 눈이 넓어지 고 그릇이 커지고 지혜와 총명이 생기게 되고 담대함이 오게 되고 총명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 다. 교육은 어려서 해야 합니다. 어렸을 때 교육이 제일 중요합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그러 지 않았습니까. 잠언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 지 아니하리라. 시편 71편 17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 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어려서 교육이 참 진짜 교육입니다. 좋은 것은 어려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이 우리에게 주신 자녀를 어려서부터 하나님 자녀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마귀의 자녀입니다. 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할 것입니다. 연세가 많아서 나이가 들어서 여러분 30, 40이 되어서 50이 되어서 공부하지마는 그거는 잊어버립니 다.

그러나 어려서 배운 것은 터가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좋은 부모는 좋은 가정은 쉐마 교육 입니다. 우리가 후회하는 삶은 자녀를 잘못 기른 것은, 잘못 먹이고 잘못 입힌 것이 아닙니다. 쉐마 교 육을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육하지 못하고 훈련하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을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이 얼마나 어려운 세상인데, 이 얼마나 복잡한 세상인데요. 이 얼마나 피곤한 세상인데요 얼마나 유혹 많은 세상인데요. 미국에 가 있는 한국 사람도 정신병자로 지금 버림받은 폐인이 6천 명 이나 된다는 것을 제가 보고를 듣고 야, 미국 땅에 가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방황합니다. 현대인 의 이 방황과 무질서와 혼란과 이 정신적인 고통이 먹지 못해서 배우지 못해서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이 허무할 수밖에 없고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의 말씀 은 생명의 샘과 같고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은 산을 옮기는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기 때문에 말 씀으로 훈련받은 사람은 어떤 환경도 어려움도 이겨내고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쉐마입니다. 끊임없 이 반복해야 합니다. 주일은 거룩한 날이다. 하나님을 잘 섬겨라.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기도 를 들어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 는 찬송을 통하여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엿새동안 창조하시고 칠일은 쉬셨다. 이 날은 거룩한 날이다. 예배는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야. 깨끗한 옷을 입어야 되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가 야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 주일은 다른 것 하면 안 된다. 거룩한 날이다. 정성껏 헌 금을 준비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전능한 자 앞으로 아이를 이끌고 가야합니다. 너는 원숭이의 자 손이 아니야. 너는 하나님의 자손이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천국 가서 영원히 살아 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야. 너의 조상은 버러지가 아니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우리가 왔다는 것을 쉐마를 통해서 천번만번 반복해야 됩니다.

나이 많아서 배우는 것은 잊어버립니다. 우리 교단에 목사님 한 분이 연세 많은 90 넘으신 목사님이 한분 계시는데 또 80 넘으신 목사님하고 두분이 만나셨어요. 대화를 하시는 거예요. 여보, 당신 입원 했다지. 그래 입원했어. 그래 좀 어때? 괜찮아. 그러고 좀 이야기하시다가 정확하게 10분 이내로 또 한번 묻는 거예요. 자네 입원했다지. 그래 입원했어. 어떻게 됐어? 퇴원했어 괜찮아. 그러고 죽 이야 기하시다가 또 10분되면 또 그 이야기해요. 자네 입원했다지. 옆에서 들어보니까 계속 일곱 번 여덟 번 반복해요. 그 이유가 왜 그런지 아세요? 10분전에 한 이야기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다 잊어버려 요. 연세가 많으면 다 잊어버려요. 그래서 아침 먹은 걸 잊어버리고요 자기 나온 걸 잊어버려요. 조금 전에 들은 이야기를 금방 잊어버려요. 나이 많으면 다 잊어버려요. 그래서 80, 70, 60 되어서 어른들한 테 잘하는 건 다 잊어버려요. 소용없어요. 금방 잊어버려요. 그런데 어른들 만나보세요. 언제 것은 기 억하느냐? 20대, 10대에 있었던 일은 골목골목 돌 하나 있는 것까지 다 기억해요. 하나도 안 잊어버려 요. 모든 이야기, 언제 이야기만 하느냐? 어렸을 때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연세 많은 것은 금방 잊어 버려요. 자녀에게 가르칠 때 언제 가르치라고 했느냐? 여기 보면 어렸을 때 가르치라, 네 어린아이에 게 가르치라는 거예요. 뭘 가르치느냐? 야훼를 가르치라는 거예요. 높은 분을 가르치는 창조자를 가 르치라는 거예요. 하늘에 계신 분을 가르치라는 거예요. 그러면 땅의 것은 저절로 알게된다는 거예 요. 신령한 것을 가르치라는 거예요. 육신의 것은 금방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신령하고 거룩한 것을 가 르치라는 거예요. 영원한 것을 먼저 가르치고 생명을 먼저 가르치라는 거예요. 먹고사는 물질, 땅의 것을 가르치지 말라는 거예요. 그건 늦어도 된다라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귀중한 사명을 이어받았습니다. 하나님 주신 우리의 가정이 있습니다. 하나 님이 주신 우리의 선물들이 있습니다.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을 저들로 잘 믿게 하고 내가 믿는 하나 님을 저들이 잘 경외하고 잘 섬기게 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훌륭한 부모의 할 일입니다. 에베 소서에도 부모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 녀를 잘 길러라, 신앙의 본을 보여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물려주는 부모같이 훌륭한 부모 가 없습니다. 기도의 부모같이 훌륭한 부모가 없습니다. 이것은 본인에게도 축복이고 자녀에게도 큰 유산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돈을 많이 물려준다 해서 물려준 돈으로 그 자식이 행복한 것도 아니 고 부모를 귀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떤 부모님이 연로하셔가 지고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아들 삼형제가 와서 임종을 맞이했으니까 와서 장례식을 준비하는데 계속 다투는 거예요. 병원에서 아버지 입원해 가지고 지금 다 힘들어 이러시는데도 관을 우리 아버지 이렇 게 우리 귀한 아버님이신데 좋은 관을 쓰자 3백만 원짜리 쓰자 이러니까 또 130만 원짜리도 좋은데 무 슨 이러면서. 장례식 때는 다 화목하게 이렇게 일을 예를 치러야 되는데 상을 치러야 되는데 막내 아 들 의견이 안 맞는 거예요. 화장하자 그러고 공원 묘지로 모신다 그러고 자꾸 그러니까 아버님이 다 들으실 거 아니에요. 이래 들으시더니만 얘야 그 옷좀 다고. 그러시더래요. 왜 그러실래요 그러니까 아이고 너희들이 너무 힘드는 거 보니까 내가 그냥 묘지로 걸어갈란다. 관 살 필요가 뭐 있냐. 그냥 내 가 누울 테니까 그냥 묻어라. 그렇게 다툴 필요 뭐 있냐. 여러분 보세요. 요사이 신앙 이외에는요 부모에게 오히려 부모를 빨리 돌아가시게 해 가지고 뺏으려 고 하는 일이 일년에도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우리 교회 집사님이 경남 진주에 은행지점장 하신 집사 님이 계세요. 우리 교회에는 지점장 하신 분이 많아요. 몇 년 전에 보니까 현직 지점장으로 계신 분이 120명이에요. 은행에 계신 분이 많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교회는 돈이 많다는 거죠. 은행이 이렇게 많 으니까 얼마나 축복이에요. 은행에 높은 분들이 또 많거든요. 그 집사님이 진주에 계시는데 그 은행 에 돈을 제일 많이 저축하는 어른이 계시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오실 때마다 그 저축한 돈 가지고 다시 이자 받아 가지고 또 저축하고 또 모은 거 가지고 또 저축하고 그렇게 정확하게 그분이 오신대요. 그 런데 놀라운 것은 돈을 일원도 안 남기고 다 저축하고는 가실 교통비가 없어 가지고 꼭 타 가지고 간 대요. 버스비 천원만 해도 가실 텐데 절대로 안 간대요. 처음에는 지점장이 너무 감사해 가지고 엄청 난 돈을 맡기시니까 늘 먼저 드리고 만원도 드리고 이만원도 드리고 이랬는데 돈이 몇 십억 몇백억이 되면 좀 쓰실 줄도 알아야지 나중에는 지점장 집사님도 좀 이상한 마음이 들어가지고 한번 한 서너시 간 모른 척 하고 바쁜데 일을 하고 이래 보면서 다녀 봤대요.

그런데 세시간을 안가고 기다리시더래 요. 그 천원 받아가려고요. 그래서 또 천원을 드렸대요. 그래서 일년이 지났는데 그 어른이 돌아가셨 다고 연락이 와 가지고 장례식에 갔대요. 다른 분은 모르는데 지점장은 아실 거 아니에요. 그분이 갖 고있는 현금이 얼만지 아시니까 문상을 갔는데 5남매인데요 장례식을 못하고 대판 싸움이 나가지고 그냥 장례식이 수라장이 되었대요. 전쟁터가 되는 거예요. 다른 분은 모르지마는 우리 집사님은 어떻 게 지금까지 지나온 것을 너무 잘 아시니까 참 불쌍하고 그 어른이 보면 불쌍하고 자식은 또 불행하 게 보이는 거예요. 저런 놈들이 어디 있냐. 얼마나 많은 재산을 어떻게 모았는데 저것 가지고 서로 더 가지려고. 장례식 끝나고 그래도 되는데 오늘 우리가 어떻게 자녀를 길러야 됩니까? 대체로 모두 이 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가장 훌륭한 부모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자식은 불행하고 자신은 속 고 사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갈 때는 부끄러워 설 수가 없고요.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기르고 쉐마 에 집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이는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소망은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부유하신 하나님, 지혜의 하나님, 창조자 하나님 이 하나님 한 분만 바로 믿는 믿음 위에 서면 어디가도 두려울 것 없고요 어디가도 어려울 것 없고요 찬송가에 있는 대 로 무슨 일을 만날지라도 만사 형통할 줄로 믿습니다. 구약은 율법인데 율법이 법이 몇 개가 있느냐 하면요 율법이 몇 개의 조문이 있거든요. 하라, 하지 말라 하는 이 계명이 있는데 전체가 613개의 계명이 있어요. 이것은 기억하시는 게 좋아요. 613계명 가운데 하지 말라, 하면 안된다라는 게 몇 개가 있냐면 너무 쉬워요. 365개, 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 지 말라는 것이 365개예요. 그러면 하라는 게 몇 개가 나오느냐? 248개가 나와요. 하라는 것은 248, 하 지 말라는 것은 365개.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사람은 바로 이렇게 사는 거예요. 하지 말라는 게 더 많 아요. 그래야 성공하는 거예요. 하지 말라는 게 분명히 있어요. 어디가나 거절하는 게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잘 믿은 다니엘은 거절을 잘했다고요. 나는 못합니다. 그런 건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건 안됩 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살 때 좁게 살아요. 모든 성공하는 사람은 안 하는 것이 많 은 사람이 성공하는 거예요. 실패하는 사람은 이거나 저거나 없이 다하는 사람 그것이 실패의 인생이 에요. 누구나

[어린이 주일 설교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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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린이 주일 설교말씀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이 잘 되면 범사가 풀어지게 됩니다. 가정에 불화가 있으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부부가 싸우게 되면 자녀들도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가정의 부모가 먼저 화평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모습도 보여줄 때 자녀들이 보고 배우게 됩니다. 부모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면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향기가 풍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부모들이 자녀들을 진리의 복음으로 양육하여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자녀로 성장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제목: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고후2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고후 2:1~17

요절: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서나 멸망하는 자들 가운데서나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냄새니, 한 부류에게는 우리가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냄새요, 다른 부류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냄새니라. 누가 이런 일들을 감당하리요?” (고후 2:15-16)

주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받아 세상에 생명에로 인도하는 향기로 살아가자

5월은 가정의 달로 지킵니다. 첫째 주일은 어린이 주일, 둘째 주일은 어버이 주일, 셋째 주일은 청년 주일, 넷째 주일은 성령강림절, 다섯째 주일은 가정 주일로 지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꽃주일)로 지킵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영접하시고 축복하시며 친구로 삼아주셨습니다. 어린이날 (Children’s Day)은 어린이의 지위 향상을 위해 제정한 날로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년,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 사위, 독립운동가, 아동문화운동가)선생은 돌아가시기 몇일 전에 부인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왜 호가 ‘소파’인지 아시오? 나는 여태 어린이들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일을 했소. 이 물결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오, 훗날에 큰 물결 대파가 되어 출렁일 테니 부인은 오래오래 살아서 그 물결을 꼭 지켜봐 주시오” 했답니다. 조선시대인 17세기 <가례언해>와 <경민편언해>에 나이가 어린 사람을 “어린아이”로 지칭했으며, 1921년, 소파 방정환은 아동을 ‘늙은이’, ‘젊은이’와 대등하게 격상시킨 말로 ‘어린이’로 부르자고 제안하면서 “어린아이를 대접하거나 격식을 갖추어 이르는 말”이라고 하면서 초등학생 아동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용어를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1923년 3월 <어린이> 잡지 발간했으며 1923년 5월 1일에 <색동회>를 조직하면서 ‘어린이날’을 처음 지켰다고 합니다. ‘더 새로운 시대의 인물’이라는 선언문에서 어린이들이 미래 사회의 주역으로서 좋은 환경에서 씩씩하게 자라나기를 기원해서 일 년에 하루를 지켰으며, 1927년부터는 5월 첫째 주 월요일로 바뀌어 치르게 되었고, 1939년 어린이날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본 일제에 의해 중단된 뒤 광복되고 나서 1946년부터 어린이날을 5월 5일로 지켰고 1957년 어린이 헌장이 선포되었고, 1975년 5월 5일부터 오늘날까지 법정 공휴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어린이를 위해 열심히 살던 방정환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재정적인 문제 등 극심한 스트레스로 쓰러지게 되고 33세(1931년 7월 23일) 별세의 순간까지도 펜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방정환 선생님은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명언은 지금도 호소력이 있고 명심해야 할 말입니다.

‘나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10년을 투자하라’

‘어린이를 내 아들놈, 내 딸년하고 자기 물건같이 알지 말고 자기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새 인물인 것을 알아야 한다.’

‘어린이의 얼굴을 보라. 이 세상의 평화라는 평화는 모두 그 얼굴에서 우러나는 듯 고요하고 평화롭다.’

‘어린이는 아래의 세 가지 세상에서 온갖 것을 미화시킨다. 이야기 세상, 노래 세상, 그림 세상.’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입니다. 어른들은 미래의 희망이요, 주인공이 될 우리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존경합시다!’

‘어린이 여러분! 씩씩하고 정직한 어린이가 됩시다! 여러분들은 우리나라를 떠받칠 기둥입니다. 이웃과 나라를 사랑하는 어린이로 바르게 자랍시다!’

‘참혹하게도 우리 아이들에겐 노래가 없어. 우리는 싸워야겠어. 이겨야겠어. 나는 우리네 아이들을 한참 쳐다보다가 눈시울을 적신 적이 많았어. 마치 그 아이들이 가시밭을 걷는 것 같아서. 윤극영 선생, 동요곡 좀 하나 만들어 봐 줘. 정서가 부친 우리 아이들에게 꽃다운 선물을 보내 주지 않을 테야?’

‘새와 같이 꽃과 같이 앵두 같은 어린 입술로 천진난만하게 부르는 노래, 그것은 그대로 자연의 소리이며, 하늘의 소리입니다. 죄 없고 허물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하늘나라! 그것은 우리 어린이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까지든지 이 하늘나라를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사람이 모두 깨끗한 나라에서 살게 되도록 우리의 나라를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지 창간호 첫머리]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싹(어린이)을 위하는 나무는 잘 커가고 싹을 짓밟는 나무는 죽어 버립니다.’

‘우리들의 희망은 오직 한 가지 어린이를 잘 키우는 데 있습니다.’

‘희망을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다 같이 어린이를 잘 키웁시다.’

[1923년 5월 1일 첫 번째 맞는 어린이날을 기념하여 뿌린 전단에서]

‘어린 사람의 운동도 크지만 제일에 앞으로 그들을 직접 낳고 기르고 교양해 나갈 어머니들의 문제도 또한 큰 것이다.’ [<신여성> 잡지를 발간하면서]

‘이 나라 어린이를 위하여 좀 더 힘쓰지 못하고 가니 미안하다.’ [1931년 7월 23일 방정환 선생 유언]

교회에서는 어린이를 미래의 꽃이라고 여겨 5월 첫 주일을 꽃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 소년은 바미쯔바(Bar-Mitzvah “계명의 아들 the son of the commandment”)라고 부르는 13세 이전을 어린이라고 부릅니다. 소녀는 밧미쯔바(Bat-Mitzbah “계명의 딸”)이라고 부르는 12세 이전을 어린이라고 합니다(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나이 이전). 미국에서 Children 개념은 유아부터 8학년(중학교)까지를 말합니다. 한국에서는 3-12세로 유아, 유치, 초등학생을 어린이라 부릅니다. 성경에 어린이에 대해 많은 언급이 나옵니다. 쉐마교육, 테필린 교육 등 모든 교육이 가정에서 이뤄지며, 회당에서도 어린이에게 말씀 교육을 합니다. 예배는 모든 가족이 참석했습니다.

어린이 예배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3대(자녀, 부모, 조부모)가 함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은 말씀으로 양육받고 모두 결혼 후 방주에 들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삭은 태어나면서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신앙으로 양육받았습니다. 요셉, 모세, 사무엘, 솔로몬, 예레미야, 디모데 등 모두 어린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잠언서는 “내 아들아”로 시작하여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교훈을 떠나지 말지어다.”로 훈계하고 있습니다. 딤전 4: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딤후 1:5 “내가 네 속에 있는 꾸밈없는 믿음을 회상하노니 그것은 먼저 네 할머니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었으며 네 속에도 있는 줄을 내가 확신하노라.”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창 18: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삼상 2:26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렘 1:5-7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 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눅 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우리 찬송가에서 가장 오래전에 작사된 곡이 어거스틴의 “사랑의 하나님” (566장, 통 301장)으로 성부=사랑, 성자=사랑의 육화, 성신=사랑의 은사로 찬양합니다. “1.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적어도 잘 알 수 있어요. 4. 저 푸른 하늘의 수많은 별들도 주 하나님의 사랑을 늘 속삭이지요”

미국 주일학교에서도 많이 불리는 “예수께로 가면 If I go to Jesus” (565장, 통 300장)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걱정 근심 없고 정말 즐거워.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나와 같은 아이 부르셨어요” 세계적으로 가장 애송하는 어린이 찬송은 “예수 사랑하심은 Jesus loves me”(563장, 통 411장)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Yes Jesus loves me(3번) The Bible tells me so.”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말씀으로 작사된 564장(통 299장) “1.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 귀중한 보배 하나라도 남김없이 다 찾으시리 2. 정한 보배 빛난 보배 주 예수의 보배 하늘나라 두시려고 다 거두시리 3. 주를 사랑하는 아이 이 세상에 살 때 주의 말씀 순종하면 참 보배로다 <후렴> 샛별 같은 그 보배 면류관에 달려 반짝반짝 빛나게 비치리로다” 이 찬송에서 어린이는 천국의 보배(treasure)라는 말이 6번 나옵니다.

오늘은 고린도후서 2장을 통해 “사랑과 승리의 직분”을 강해합니다. 생명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1. 용서 촉구: 사랑의 직분(고후 2:1-11)

1 그러나 내가 이것 즉 내가 무거운 마음으로 너희에게 다시 가지 아니할 것을 스스로 결심하였나니 2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내가 근심하게 한 바로 그 사람 외에 나를 즐겁게 할 사람이 누구이겠느냐? 3 내가 바로 이것을 너희에게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기쁨을 얻어야 할 사람들로부터 근심을 얻지 아니하려 함이었노라. 나는 너희 모두에 대하여 확신하되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로 확신하였노라. 4 내가 마음이 몹시 괴롭고 아파서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나니 이것은 너희가 근심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에게 더욱 넘치게 베푸는 사랑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 5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근심을 일으켰을지라도 그가 어느 정도만 나를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나는 너희 모두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아니하려 하노라. 6 그런 사람에게는 많은 사람에게서 이같이 벌 받은 것이 충분하니라. 7 그런즉 너희가 오히려 반대로 그를 용서하고 위로함이 마땅하니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지나친 근심에 잠길까 염려하노라. 8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그를 향한 너희의 사랑을 확증하라. 9 너희가 모든 일에서 순종하는지 너희의 증거를 알기 위해 내가 또한 이런 목적으로 너희에게 썼노라. 10 너희가 누구에게 어떤 일을 용서하면 나도 용서하노라. 만일 내가 누구에게 어떤 일을 용서하였다면 내가 그것을 용서한 것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너희를 위해 한 것이니 11 이것은 사탄이 우리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의 계략들에 대해 무지하지 아니하노라.

1-3절. “그러나 내가 이것 즉 내가 무거운 마음으로 너희에게 다시 가지 아니할 것을 스스로 결심하였나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내가 근심하게 한 바로 그 사람 외에 나를 즐겁게 할 사람이 누구이겠느냐? 내가 바로 이것을 너희에게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기쁨을 얻어야 할 사람들로부터 근심을 얻지 아니하려 함이었노라. 나는 너희 모두에 대하여 확신하되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로 확신하였노라.” 고린도 교인들의 기쁨이 사도바울의 기쁨이요 그들의 근심이 그의 근심이었습니다. 성도의 기쁨은 교역자의 기쁨이요 성도의 근심은 교역자의 근심입니다. 또 교역자의 기쁨은 성도의 기쁨입니다.

4절. “내가 마음이 몹시 괴롭고 아파서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나니 이것은 너희가 근심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에게 더욱 넘치게 베푸는 사랑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 전도자 바울에게는 외적으로는 큰 환난과 핍박이 있었고 내적으로는 애통과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의 애통과 근심은 성도들의 연약과 부족 때문에 왔고 그래서 그는 많은 눈물로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눈물의 사역이었습니다. 행 20:19, 31에 보면, 그는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라고 말했고 또 “너희가 일깨워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눈물의 편지”는 책망과 권면의 내용이었는데 이 편지는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 전서와 후서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근심과 슬픔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을 향한 뜨겁고 넘치는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5-6절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근심을 일으켰을지라도 그가 어느 정도만 나를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나는 너희 모두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아니하려 하노라. 그런 사람에게는 많은 사람에게서 이같이 벌 받은 것이 충분하니라.” ‘근심하게 한 자’는 범죄자를 말합니다. 바울은 그로 인해 근심하였으나 너무 심하게 표현하지 않기 위해 ‘어느 정도 나를 근심케 한 것’이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범죄자를 권징 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받아들였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그 권징에 반대했을지도 모르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찬성하였고 그 범죄자를 벌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도 시대의 교회에는 권징(discipline)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권면을 순종하였습니다. 인간의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영의 권면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참된 신앙고백과 순종의 삶이 있는 공동체이었습니다.

7-9 “그런즉 너희가 오히려 반대로 그를 용서하고 위로함이 마땅하니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지나친 근심에 잠길까 염려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그를 향한 너희의 사랑을 확증하라. 너희가 모든 일에서 순종하는지 너희의 증거를 알기 위해 내가 또한 이런 목적으로 너희에게 썼노라.” 권징은 벌(punishment)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죄인의 회개를 목표로 합니다. 권징치 않으면 죄 가운데 머물 형제를 권징을 통해 바로 세우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제 권징의 목적이 이루어졌으므로, 바울은 그 범죄자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기지 않도록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말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징계한 후 그를 품어주듯이! 오늘날도 교회는 권징이 있고 용서와 위로도 있어야 합니다. 권징의 목적은 불완전한 성도를 완전한 사람으로 바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권징이 미움의 표현이 아니고 사랑의 동기에서 행해진 것이라는 것을 증거 할 필요가 있습니다. 범죄하는 교인을 징벌하는 교회의 심정에 그 교인에 대한 참된 사랑이 있음을 그에게 증거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그의 권면을 순종하리라고 기대합니다. 불순종은 예부터 인간의 뿌리 깊은 죄악입니다. 교회는 성경에 증거 된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0-11절 “너희가 누구에게 어떤 일을 용서하면 나도 용서하노라. 만일 내가 누구에게 어떤 일을 용서하였다면 내가 그것을 용서한 것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너희를 위해 한 것이니 이것은 사탄이 우리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의 계략들에 대해 무지하지 아니하노라.” 교회는 회개한 자를 용서하고 해벌(解罰)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행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8:18). 사탄은 범죄자로 하여금 너무 근심케 함으로 낙망케 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합니다. 사탄의 궤계는 성도를 범죄케 하고 낙심케 합니다. 그러므로 징벌도 필요하지만 회개한 자에게는 용서와 위로도 필수적입니다. 사탄은 죄인에게 속박과 근심과 낙심을 주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여 그에게 죄로부터 자유함과 기쁨과 평강을 주십니다. 교회는 범죄자에게 눈물의 권면과 책망을 해야 하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용서와 위로를 줌으로 마귀의 궤계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와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2-17)

12 또한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려고 드로아에 이르매 주께서 내게 문을 열어 주셨으되 13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영 안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여 그들과 작별하고 거기서 마케도니아로 들어갔노라.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 모든 곳에서 그분을 아는 냄새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서나 멸망하는 자들 가운데서나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냄새니 16 한 부류에게는 우리가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냄새요, 다른 부류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냄새니라. 누가 이런 일들을 감당하리요? 17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는 많은 사람들 같지 아니하고 오직 진실함에서 난 자같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같이 하나님의 눈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12-13절. 12절의 ‘문 gate’은 전도의 문입니다. 문은 하나님이 열어 주셔야 합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드로아에서 전도의 문이 주님 안에서 바울에게 열렸고 그는 거기서 복음을 전하였으나,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해 심령이 편치 못해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디도가 왜 돌아오지 못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습니다.

14절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 모든 곳에서 그분을 아는 냄새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감사하노라.” 구약시대에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듯이”(삼하 8:6, 14),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일행을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이기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the savour of his knowledge’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지식의 향기,’ 곧 그리스도의 지식을 널리 알리는 향기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사역은 고난 중에서도 항상 승리했습니다. 오늘날도 진리의 사역은 승리입니다. 불순종과 죄는 실패의 원인이지만, 순종과 의는 결국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종들의 사역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15-16절.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서나 멸망하는 자들 가운데서나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냄새니 한 부류에게는 우리가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냄새요, 다른 부류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냄새니라. 누가 이런 일들을 감당하리요?” 전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향기이며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냄새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사람들 가운데서 생명과 사망을 나누고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을 나누기 때문입니다(요 3:18).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 일을 감당할 뿐입니다.

17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는 많은 사람들 같지 아니하고 오직 진실함에서 난 자같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같이 하나님의 눈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부패시킨다’는 원어(카펠루오 kapeleuw)는 ‘장사하다, 품질을 떨어뜨리다, 혼잡시키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같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같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많은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같이 또는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순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증거 합니다. 그는 말씀의 바른 일꾼이었고 모든 시대에 복음 사역자의 좋은 본이 되었습니다. 말씀의 일꾼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변질되거나 타협하지 말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지 말고 순수하게, 순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고후 2:12-17의 교훈은 무엇인가요? 첫째로, 우리는 우리 교회에도 전도의 문이 넓게 열리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구원과 전도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알리는 지식의 향기를 널리 전하자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이 귀한 사역을 감당할 수 없겠으나 하나님의 은혜로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거짓 교사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시키거나 부패시키거나 변질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수하게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무궁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향기를 널리 전하여 수많은 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다합시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어린이가 되어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을 젖을 먹고 양육되어 우리 이웃에게 사랑의 예수님을 널리 전합시다. 어린이 찬송 429장에 있는 대로

1. 나는 주의 화원에 어린 백합꽃이니 은혜 비를 머금고 고이 자라납니다

주의 은혜 감사해 나는 무엇 드리리 사랑하는 예수님 나의 향기 받으소서

2. 나는 주의 품 안에 자라나는 아이니 찬미하며 주님을 믿고 따라갑니다

주의 사랑 감사해 나는 무엇 드리리 사랑하는 예수님 나의 마음 받으소서.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사도 바울께서 눈물로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하며 징계하며 용서함을 배우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사랑의 눈물로 탕자 어거스틴을 회개하도록 만든 모니카의 기도처럼 저희들도 자녀들을 위해 눈물로 씨를 뿌리게 하여 기쁨의 단을 거두게 하옵소서. 저희 자녀들을 효자, 효녀로 만들게 하시며,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성장시켜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 어린이들, 우리나라 어린이들, 세계 모든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며 평화 내려 주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애굽기 13장 히브리어 주석 강해] 유월절 무교절 규례 실행(출 13:1-10)

[성지순례 주일설교말씀] 산으로 도망하라(마 24: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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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주일 설교말씀] 어린이는 가장 귀한 보배입니다(신명기 3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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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신명기 31장 어린이 주일 설교말씀 중에서 어린이는 가장 귀한 보배입니다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이며 교회의 보배입니다. 그래서 신앙으로 잘 키워야 합니다. 교회의 미래는 어린이에게 있습니다. 지금은 주일학교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유럽 교회들도 어린이를 신앙적으로 키워내지 못했기 때문에 큰 건물만 남아있고 성도는 없습니다. 한국교회도 어린이를 신앙으로 키워내지 못한다면 유럽 교회를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녀들을 믿음으로 키워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게 하여 하나님을 온전하게 알고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부모가 신앙이 아닌 세상의 부와 명예를 좇게 만든다면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내세에서도 고통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에게 복음을 가르쳐서 믿음을 갖게 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가르칩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큰 인물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먼저 믿을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어린이는 가장 귀한 보배입니다(신 31:9-30)

신 31:9 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신 31:10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신 31:11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신 31:12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신 31:13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신 31: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죽을 기한이 가까웠으니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 막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에게 명령을 내리리라 모세와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회막에 서니

신 31:1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 문 위에 머물러 있더라

신 31:16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신 31:17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

신 31:18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신 31: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신 31:20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신 31:21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신 31:22 그러므로 모세가 그 날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쳤더라

신 31:23 여호와에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시니라

신 31:24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신 31:25 모세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사람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신 31:26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신 31:27 내가 너희의 반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 내가 살아서 너희와 함께 있어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

신 31:28 너희 지파 모든 장로와 관리들을 내 앞에 모으라 내가 이 말씀을 그들의 귀에 들려주고 그들에게 하늘과 땅을 증거로 삼으리라

신 31:29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길을 떠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하게 하므로 너희가 후일에 재앙을 당하리라

신 31:30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이 노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

<서론>

유대인들은 2천 년간 나라를 잃고 유리방황할 때 공존의식으로 어린이들을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엄마들이 수유를 할 때에 내 아이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선 이웃집 아이에게 먼저 먹여 주었는데, 이런 우호적 공존의식이 있었기에 그들은 방황과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민족의 독특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근래에 우리 민족은 산아제한으로 한 둘씩만 자녀를 낳기 때문에 제자식을 지나치게 사랑하여 과잉보호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왜 어린이들이 귀중한가?”를 말씀을 통해 상고하며 아울러 그러한 어린이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본론>

1. 어린이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기에 가장 귀하고 보배로우니 잘 길러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인물을 길러낸 성도들은 이처럼 자식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인 줄 알고 가장 귀중하게 길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을 신앙의 후사로 잘 길렀고, 레위와 요게벳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모세를 정성껏 길렀으며 한나는 기도의 응답으로 얻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 앞에 드려 길렀습니다. 이렇듯 어린이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니만큼 잘생겼느니 못생겼느니 말하지 말고 어린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잘 길러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아이 하나를 세 번 낳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첫째, 육신의 탄생(창 3:16), 두 번째, 복음을 통한 영적 거듭남(고전 4: 15),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인격적 탄생입니다(갈 4: 19). 우리 속담에 옥돌도 다듬어야 보배가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어린이들도 신앙으로 잘 길러야 천국 보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모가 되고 선생 된 자들이 잘못하여 어린이들을 실족하게 했다면 하나님 앞에 그 책임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라고 했는데 예수님 당시 수리아, 그리스, 로마제국의 중범자들을 사형에 처할 때 큰 돌을 목에 달아 깊은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귀한 아이들을 구원하는 책임이 그만큼 무겁다는 점을 인식하고 믿음으로 잘 길러 천국의 보배가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2. 어린이는 우리의 가문을 이어갈 후계자이니 가장 귀하고 보배롭게 잘 길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신 복이며(시 127: 3) 우리의 후계자요 우리의 가문을 이어갈 계승자이기에 가장 귀하고 보배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귀중한 자녀들을 올바로 교육하도록 가정교육의 대헌장을 선언하셨으니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을 강론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신 6:6-7). 학문과 기술은 학교나 교육기관에서 배우고 대인관계는 사회생활 속에서 배우지만 인격형성은 가정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 6)라고 말씀하였습니다.

3. 어린이는 하나님의 교회에 기둥같이 쓰임 받을 일꾼이 될 터이니 가장 귀하고 보배롭게 잘 길러야 하겠습니다.

디모데는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난 외아들이었는데,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정성 어린 양육 가운데 하나님의 도를 배워 자랐고 바울 사도를 통하여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후일에 바울의 후계자가 되어 교회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식을 사랑하기 쉽고 세속적 욕망으로 자식을 양육하기 쉽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특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꾼이 되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부모는 교회의 중직자인데 자녀는 방탕아가 된다면 그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엘리 제사장은 경건한 사람이었으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탕자여서 무서운 저주를 가져왔습니다.

반면 고넬료의 집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시간을 내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던 중 온 식구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비록 가난해도 부모의 신앙을 따라 자식들이 교회 위해 봉사하고 수고를 개념치 않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때 그 얼마나 부러운 가정이겠습니까! 이러한 가정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4. 어린이는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역꾼이니 가장 귀하고 보배롭게 길러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도는 천국 시민임과 동시에 세상에 남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복음의 역군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자녀들을 목사나 전도사로 기르는 게 가장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 충성하는 일꾼으로 길러야 하겠습니다. 요셉, 다니엘, 모르드개, 에스더 같은 인물들을 길러내야 하겠습니다. 영국 시민혁명의 주역이었던 크롬웰 같은 정치가, 노예 해방의 선구자 링컨 대통령, 아름다운 노랫말로 성도들의 심금을 감동시킨 화니 클로스비여사, 과학의 왕 죤 뉴톤 등등 각 시대마다 사회 각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 훌륭한 평신도들이 그 얼마나 많습니까!

과거 우리 사회는 단순하고 가난과 전란으로 상처 입은 백성들이 많아 목사의 역할이 더욱 컸으나 이제는 교회 바깥 사회가 한없이 넓어져 일할 분야가 너무도 많습니다. 이런 시대에 여러분의 귀여운 자녀들을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여 이 나라와 세계 도처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역군이 되게 하시길 바랍니다.

<결론>

어린이 주일을 맞아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 신앙의 후계자들이요 내일의 교회와 나라의 역군이 될 어린이들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며 어린이들을 잘 길러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와 이 나라의 미래가 복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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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잘 되는 법 [에베소서 6:1-4]

오늘은 어린이 주일로, 우리 교회학교 학생들이 함께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한 가정이 믿음안에서 하나님께 나와 함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복된 일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아 ‘자녀가 잘 되는 법’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녀를 가진 부모들의 동일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때로 아이들이 잘못해서 화가 난 부모가 아이에게 “이런 빌어 먹을 놈”이라고 해서, 정말 커서 다른 사람에게 빌어 먹는 거지가 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모는 자신은 못 먹고 못입을 지언정,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분입니다. 제가 아는 한 남자분은, 미국에 올 때 가진 돈이 없어서 수 많은 고생을 하면서 돈을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해서 얻은 첫 아들이 잘 되라고 그 이름을 ‘하버드’라고 지었습니다. 커서 하버드 대학에 보내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었고, 아이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을지는 알만합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래서 열심히 뒷바라지 하고, 자녀가 잘되는 것을 자신이 잘되는 것보다 더 기쁘게 여기는 것이 부모님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육신의 부모님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 가정의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분은, 그 자녀들을 그 가정에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가 잘 되기를 그 어떤 부모보다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래서 자녀가 잘 되는 법도 알려 주셨습니다. 육신의 부모는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지만 그 방법을 알지 못해서 실패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자녀가 잘 되는 길인지를 명시하고 계시고, 그것을 분명한 약속으로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은 비단 어린 자녀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도 자녀가 잘되기를 원하고, 우리 자녀들도 자신들이 잘 되기를 원치 않겠습니까? “나는 대충 막 살 거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자녀가 잘 되는 법,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되는 법은 무엇인지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자녀가 잘 되는 법은,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라는 믿음을 가질 때입니다. 요한복음 1: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권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은, 자신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과 한 가족을 꾸미시고자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향해서 “너, 내 가족하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사람을 처음 만드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자신의 자녀로 삼고 한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자녀가 그 부모를 닮아서 태어나듯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담아서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잘됨을 경험하는 자녀는,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깨닫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1200년대에 이탈리아서 활동했던 성자 프란치스코에 대한 일화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화려한 옷을 입고, 부유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세상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의 허무함이 곧 찾아오게 되었고 영적인 방황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1205년에 페루자 정복을 위해 한 백작의 군대를 모집했는데, 그 군대에 자원 입대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집이 있는 아시시로 돌아왔습니다. 은혜를 받은 프란치스코는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들을 하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그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큰 부자고 포목상 주인이었는데, 아들이 자신의 사업을 이어받아 잘 되기를 바랬는데, 아들이 그러한 생각은 안하고, 날마다 다니며 전도하고 기도하는 것을 용납하기 힘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옷감을 팔아서 성당을 수리하는데 사용하는 아들을 보고 몹시 화가 났습니다. 결국 아버지, 피에트로는 프란치스코의 마음을 자극하기 위해서, 자신의 재산 상속권을 프란치스코에게 주지 않겠다는 재판을 주교 앞에서 열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주교가 행하는 재판석에 선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을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상속권은 물론 부친과의 관계마저 포기한다고 선언하고, 대중 앞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 뿐만 아니라, 입고 있던 옷을 다 벗고 아버지께 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너무 극단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오늘날 많은 가정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아버지를 잊어 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육신의 부모의 자녀이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시고 복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자녀된 자들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방법을 따라 살아갈 때에 잘 되는 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2. 육신의 부모는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지만, 어떻게 해야 잘 되는 일인지를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자가 되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명성을 가지는 것이 잘 되는 일이라고 여기고, 그 일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수고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녀가 잘 되는 두가지 법을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먼저,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에 특별히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에는 그에 따르는 약속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른 계명은 무엇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마쳐집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자녀에게는 약속을 주셨는데,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가 잘 되는 법으로, 부모 공경의 방법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 사회에 보면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경의 기준을 보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대단해 보이는 사람들이 공경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경할 사람은 적어도 공경할 만한 업적을 가진, 위인전에 나올 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공경할 대상에 대해서 세상의 권세자나 부한 자와 같은 업적을 이룬 사람을 공경하라고 하지 않고, 단순히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고 하십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할 조건으로 부모의 어떠한 업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가난하던지 부하던지, 높은 지위에 있던지 그렇지 않던지 상관없이 부모라는 그 자체로 공경할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때로 부모를 보면서, 공경할 만한 내용이 없어서 부모공경의 계명을 부당하게 여겨 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부모님보다 자기 부모님이 좀 못나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부자인 부모의 집에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께서 명령하실 때, 부모 공경은 부모가 어떤 분이고, 나에게 어떻게 해 주었냐라는 것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자녀라면 부모님에게 가져야 할 태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그 부모가 나를 잘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 부모를 공경하는 나를 보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로 잘 되도록 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나의 잘됨은 부모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3. 그리고 하나님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은 곧 부모님에 대한 순종으로 연결됩니다.부모에 대해서 공경할 때에 순종이 있게 됩니다. 1700년대 영국의 시인이며, 평론가인 사무엘 존슨(Sammuel Johnson)이, 어느 여름날 비가 막 쏟아질 때에 복잡한 장터에서 홀로 몇 시간이고 서 있었습니다. 사람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해도 인사도 받지 않고, 말을 걸어도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서서 눈물만 흘립니다. 그렇게 서 있는 모습을 지켜 보던 제자들이 대체 왜 그렇게 서 있느냐고 물어보자 그 이유를 말합니다. “사실은 50년 전, 우리 아버지가 바로 이 자리에서 낡은 책을 사고 파는 헌 책 장사를 하셨었지, 그런데 한 손님과 어느 날 어떤 책을 갖다주기로 약속하셨던 모양이야. 그런데 그 책을 손님에게 전달해 주기로 약속한 날, 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시다며, 아버지 대신 그 손님에게 그 책을 갖다 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구. 그런데 나는 발끈해서 아버지께 이렇게 대들었지, ‘헌 책 장사하시는 것도 창피스러운데 내가 그런 심부름까지 해야 되요?’ 내 말을 들으시고, 아버지는 아픈 몸으로 장터에 가셨고, 그 날 이후 몸이 약해져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50년이 지난 지금, 지금에 와서야 지난날 내가 아버지께 순종하지 못한 것, 아버지를 존경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네, 그리고 아무리 후회해도 그것만 가지고는 안되겠기에 내가 나를 벌주기 위해서 여기 서 있는 것이네.” 순종할 부모가 계시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잘됨을 경험하게 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부모님께서 계실 때에 힘써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부모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에 대해서 공경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 말씀에 순종함에 있어서 앞서는 것은 “주안에서”입니다. 주안에 있지 않은 부모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불순종할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말씀을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하고 불의한 것들, 거짓된 것들, 다른 이들을 해하고 미워하는 것들을 자녀에게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하고, 의롭고 진실되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기에 자녀가 잘 되게 하고자 할 때에, 부모의 신앙적인 책임도 큽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갈등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4절에 아비에게 주는 말씀이 있는데 자녀를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했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계명은,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마음대로 주입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모가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어서,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잘 양육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자녀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부모님들은 여러가지 수고를 하지만, 무엇보다도 수고해야 할 일은, 부모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기에 힘쓰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잘 가르쳐서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다가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세상의 부모들이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세상에 자녀들을 잘 되게 하려고 수 많은 노력을 합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잘 키워보겠다고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자녀를 양육합니다. 좋은 학교를 보내기 위해 이사를 하고, 아이들의 스케쥴에 마쳐서 부모의 스케쥴을 조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하나님은 자녀들이 잘 될 수 있는 방법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할 때에 그 자녀가 잘 될 것이고 장수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그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잘 되기를 원하신다면 부모를 공경하는 법을 가르치십시오. 그리고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그렇게 되면 자녀들이 잘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이들이 잘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물으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자녀들의 잘됨은 육신의 부모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잘 되게 해 주실 때에 가능합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여기에 있는 모든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잘됨의 축복이 임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5/5(어린이주일) 설교 –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리이까?”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리이까?”(삿 13:1-5, 8, 12, 24-25)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5월 5일은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지켜온 어린이날입니다. 이 날에 우리들은 자녀 양육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자녀를 주셨습니다. 시편 127:3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주신 축복 중에 가장 중요한 축복입니다.

이 자녀들에 대한 교육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신 6:6-9에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부모가 자녀교육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있음을 이 구절은 밝힙니다. 교회 목사도 2차적이고, 학교의 선생도 2차적이고, 교회에서 교육을 맡은 목사나 전도사도 2차적입니다. 부모만이 자녀 양육에 1차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부모가 이 소중한 자식을 어떻게 길러야 합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를 포스트모던 사회라고 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고도로 발달된 시대입니다. 이럴수록 우리들은 성경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녀 양육에 대하여 무엇을 말합니까? 오늘 본문 8절과 12절에 보면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8절에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마노아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의 부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을 자신에게 다시 보내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것은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미 부인에게 여호와의 천사는 자세히 일러 주었습니다. 그러나 마노아는 이것을 더 분명히 하고 싶었습니다. 마노아가 그렇게 기도하였더니 과연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을 주셨습니다. 다시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에게 마노아는 묻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합니까?” 마노아는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양육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고 싶습니다. 그가 자녀 양육을 하나님께 물었다는 것이 그의 신앙입니다.

마노아처럼 오늘날 우리 부모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자녀를 어떻게 길러야 합니까?” 그렇게 묻고 답을 받아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 믿음의 표현입니다. 아이가 자라나면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우리들은 질문해야 합니다. 시시 때때로 물어야 합니다. 계속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아이를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자녀를 세상에 보내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이 아이에 대한 뜻을 가지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아이를 기르는 특별한 방법을 제시하시고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실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이 아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부모인 내 생각대로 기르면 안됩니다. 내 마음대로 기르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자신의 뜻을 포기하겠다는 뜻입니다. 자기 포기는 자기 부정을 말합니다. “내 새끼를 왜 내 마음대로 못해?”라고 큰 소리치는 자세를 버리는 것입니다. “자식 양육에 대하여 나는 아니야, 나는 절대 아니야, 나는 안돼. 나는 못해. 내가 끼어들면 안돼. 나는 손 떼야 해.” 이것이 자기 포기이고 자기 부정입니다.

마노아의 부인은 본래 불임 여성이고 자녀를 낳은 적이 없습니다. 이런 가정에 아들을 주시겠다는 천사의 말은 이 가정에 큰 경사가 난 것임을 말합니다. 자녀가 없어서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뒤늦게사 자녀를 낳게 되었다면 금이야 옥이야 하고 소중하게 기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귀중한 자식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갖은 보약을 다 먹이고 싶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옷도 해 입히고 싶고,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장난감이나 책들을 사주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엄마 자신이 듣고 보고 배운 지식으로 철저한 법칙을 세우고 그것을 고집합니다. 내 지식, 내 열심, 내 주장, 내 잔꾀를 총동원하여 교육시키고 싶습니다. “조심해라, 신경써라, 피아노 연습하라, 태권도 해라, football해라…” 내 자식이 세상에 나가서 일등하기 위하여 주문과 요구가 많습니다. 자식을 잘 키워보겠다는 의욕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 마노아의 아내는 엄마로서 자기 마음대로 아들을 기를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이 아이는 날때부터 죽을때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지, 자기가 좋아하는 방법은 이미 다 버려야 합니다. 부모가 세운 철통 같은 규칙을 성령님의 망치로 다 부수어야 합니다. 마노아처럼 우리가 계속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나를 포기하고 내 주장을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나를 다 내려놓고, 나를 완전히 굴복하고, 철저히 항복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그 아이의 참된 창조주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인 자식을 끊임없이 맡기는 행위입니다. 아이의 참된 부모에게 태의 열매인 아이를 끊임없이 내어주는 결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이 집안을 통하여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실제 이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이입니다. 그 아이를 하나님께서 키우셔야 합니다. 나보다 그가 아이를 더 잘 아십니다. 나보다 그가 더 잘 인도하십니다. 나보다 그가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보다 그가 더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전능하신 분의 품에 내 사랑하는 아들을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자식과 나를 계속 내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계속 자주, 자주 그 아이의 양육문제를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과 의논해야 합니다.

자식이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께서 키우셔야 한다면 이 자식을 왜 우리 가정에 주었습니까? 그것은 나를 위하여 준 것입니다. 내 자아를 죽이라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도구입니다. 그 자식을 통하여 부모가 구원받기 위하여 보냈습니다. 그 자식으로 인하여 성숙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보내셨습니다.

내가 자식에 대한 집착이 심하면 심할수록 내 자식은 그만큼 더 망가집니다. 내가 붙들면 붙들수록 자녀는 상처를 입습니다. 내 욕심이 들어간 만큼 자식들은 고통과 탄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내 욕심을 버리고 내 아집을 버리고 내 주장을 버릴 때 주님께서 그 아들을 굳게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리이까?” 라는 질문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종수박사를 아십니까? 한국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 지역에서 활동하시는 세계적인 암 전문의입니다. 그는 대전고등학교 시절 자기 반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을 가진 학생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홀로 된 어머니는 아들을 잘 키울 방법을 몰라서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와 아침마다 그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저 눈물, 콧물 흘리면서 기도하였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교육시켜 주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어머니의 애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세계적인 의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자식 양육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자식 양육에 대하여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1) 조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묻는다고 답이 쉽게 오지 않습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점차 다급해 집니다.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 생깁니다. 위험에 대비하여 자식에게 뭔가 안전장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재빠른 세상에 가만히 있으면 우리 아이는 세상에 뒤떨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전진해야 하는데 기다리고 기다린다는 것이 너무나 힘듭니다. 이 다급한 마음에서 쉽게 묻지 않게 됩니다. 내 방법이 성급하게 나옵니다.

(2) 논쟁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조금씩 커가면 자기 생각이 많습니다. 아이들도 이론이 많고 자기 주장이 강합니다. 부모가 기도하여 답을 얻었다고 해도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성숙의 정도가 아이와 부모가 서로 다릅니다. 여기에서 갈등이 생깁니다. 서로 자기 주장을 내세웁니다. 언쟁이 생기고 다툼이 되고 상처가 생깁니다. 그것이 두려워서 쉽게 내 신앙의 색깔을 주장하지 못하기 쉽습니다. “적당히 넘어가자”하고 하나님의 뜻보다 현실에 타협하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묻기 어렵습니다.

(3) 묻지 않는 결과가 주는 비참함을 미리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양보하면 결과는 세상의 방법이 들어옵니다. 내 생각과 내 주장 대로 교육하면 자꾸 세상으로 세상으로 나가게 됩니다. 자녀들은 겉잡을 수 없는 강력한 세상에 휘감겨 떠내려 갑니다. 이런 결과를 예측한다면 지금 어려워도 하나님께 물어야 하는데 묻지 않는 것은 결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세상의 방법으로 나갔을 때 가져오는 신앙적인 피폐는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어두움의 세력은 아이를 어디로 끌고 갈지 모릅니다. 세상으로, 죄악으로, 불 속으로 끌고 가고 물 속에도 집어넣습니다. 이 끔찍한 결과를 내다보지 않기에 묻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험한 세상에서 믿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자녀들을 어떻게 기르오이까?”라고 계속 물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물을 수 있을까요?

(1) 부모인 내가 내 문제를 가지고 먼저 물음으로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찌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찌니라”고 천사가 마노아의 부인에게 명령합니다. 아이를 어떻게 기르느냐 하는 문제 이전에 엄마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먼저 나옵니다. 아이를 잘 기르기 위해서 엄마가 먼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엄마와 아빠가 먼저 포도주와 독주를 끊어야 합니다. 그것을 보고 자녀들도 술을 끊게 됩니다. 부모가 먼저 부정한 음식을 삼가야 합니다. 그것을 보고 자식들도 더러운 음식을 먹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자식들은 윗사람에게서 듣고 배우지 않습니다. 보고 배웁니다. 엄마나 아빠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자식들도 그대로 복사합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리이까?” 하기 전에 “이 부모가 어떻게 행하오리이까?”가 먼저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하나님께 묻는다면 자식의 문제도 계속 물을 수 있습니다.

(2)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까지 물어야 합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행동지침이 있습니다. 본문에도 나와있고 민수기 6장에서도 자세하게 나옵니다. 첫째, 포도나무 소산을 먹지 말라고 합니다. 둘째, 삭도를 머리에 대지 말라고 합니다. 셋째, 시체를 만지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사로잡힌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다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어쩌다가 소 뒷걸음 치다고 쥐잡기 식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에 대단히 민감해야 합니다. 자식의 나이와 성숙의 정도에 따라서 그들에 smart phone, internet, youtube, movie등 현대 문명의 이기를 가지고 노는 시간이나 장소를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현대는 아주 급속하게 타락합니다. 그냥 정신없이 지나다 보면 이미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다급한 상황에서 심각한 자세로 주님께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3)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왕은 나라가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비상사태에 돌입할 때 백성들의 책임자로서 하나님께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자녀가 대학을 가거나, 직장을 선택하거나, 결혼을 하는 일은 자식의 생애에 매우 중대한 일입니다. 이 중요한 싯점을 질문없이 지나가면 평생에 후회하게 되고 헛짓거리를 되풀이하게 됩니다. 다람쥐 체 바퀴 돌듯이 계속 돌아가야하는 수고에 걸릴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중대한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그 아이의 참된 창조자에게 그 아이를 맡겨야 합니다.

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실천하여 하나님께 자식에 대하여 묻고 또 묻고 또 물으면 이제는 나를 포기하게 되고 창조주 하나님께 자식을 끊임없이 내맡기게 되고 나는 온전히 주님께 굴복하는 자가 됩니다. 그 정도로 나를 하나님의 품, 은혜의 바다에 던져 버릴 때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어떤 복을 받습니까?

(1) 여호와의 신에게 감동된 자로 만드십니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하나님께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손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손에 아들을 맡겼더니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하나님의 손을 부어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손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이십니다. 사사기 13:25, 14:6,19, 15:14에 보면 삼손은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고 하거나 하나님의 신의 권능이 그에게 임했다고 표현합니다. 그는 땅에 살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자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삼손을 볼 때 그에게 근육이 없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힘이 나올 구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힘이 장사입니다. 그는 하늘의 힘을 가진 자입니다.

옛날에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IQ(지능 지수)가 좋아야 사회에 나가서 성공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EQ(감성 지수)가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SQ(영성 지수)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자를 사람들은 서로 찾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늘의 힘, SQ로 이 땅의 IQ와EQ를 능가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들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땅의 힘으로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하늘의 힘, 성령의 힘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와 능력있게 일하시기 원하십니다. 질문의 기도는 우리들을 더욱 성령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2) 어떤 적도 능히 물리칠 수 있는 자가 됩니다.

삼손이 하늘의 힘, 하나님의 힘을 가졌기에 땅에 있는 사람이 그를 당할 수 없습니다. 그는 성령의 힘으로 사자를 염소 새끼 찢음 같이 찢었습니다. 아스글론에 내려가 30명의 장정들을 단숨에 쳐 죽었습니다. 성문의 문짝을 손으로 뽑아 그것을 등에 메고 갑니다. 그는 나귀 턱뼈를 취하여 1000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삼손을 누가 감히 당합니까? 세상에 어떤 세력도 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충만하면 세상이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나약하지 않습니다. 겁내지 않습니다. 패배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꼭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 자신, 죄와 마귀를 이기기 위해서 우리들은 성령의 능력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질문 기도로 성령 충만을 받읍시다. 어디로 가든지 승리합니다. 나를 버리고 성령에 사로잡힘으로 우리들은 넉넉히 이기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3)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40년간이나 그의 권세에서 꼼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등장으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제 자기 손 아귀에서 이스라엘을 내어 주어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삼손의 그 강력한 힘으로 블레셋을 괴롭히니 블레셋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그 속박을 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될 때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가난한 homeless가 열심히 일하여 기업체의 사장이 되었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죽어가는 환자가 의사의 도움으로 건강을 다시 회복받는 일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영원히 지옥불 구덩이에서 신음해야 할 죄인이 예수 믿고 천국 갈 수 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일까요? 한 영혼을 구원하는 기쁨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우리들은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가장 즐거운 일은 농부가 일년 동안 죽도록 충성하고 가을에 곡식을 거두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군인이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고 전리품을 거두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입니다. 이 큰 기쁨의 날이 우리에게도 하루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우리 자녀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께 물어야 하는데 조급하여, 논쟁이 두려워 묻지 못했음을 용서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묻고 물어서 성령의 사람이 되는 축복을 부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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