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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구절 | 철학자 김재인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한권의책]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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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좋은 구절 – 화엄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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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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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 요약 및 서평 –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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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 YES24 블로그 – 내 삶의 쉼표

[도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이 책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끊임없이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 [인상깊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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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김재인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한권의책]
철학자 김재인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한권의책]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구절

  • Author: SBS Biz 날리지 knowledge
  • Views: 조회수 99,244회
  • Likes: 좋아요 2,246개
  • Date Published: 2021. 3. 2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YxFK7VKr3Ko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좋은 구절

인간은 더러운 강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한다. 더러워지지 않으면서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려면.

초인은 바다이며, 그대들의 커다란 경멸은 그 속으로 가라앉을 수 있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사이에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 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줄 가운데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橋)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밖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출처 :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단 하나의 순간일지라도 끝없이 충실하게 산다는 것, 즉 그러한 순간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유의미하게 산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이 순간이 존재하기 위해서 꼭 필요로하는 인생의 기타 모든 견디기 어려운 순간에 관해서도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욕하게 될 때, 이 사상이 포함한 니힐리즘은 극복되고, 이 사상의 운명애적인 긍정적인 면이 여기서 비로소 진정으로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세계의 사상, 2002.5.20, 사회문화연구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5분 만에 읽기!

여러분은 ‘니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망치를 든 철학자, 초인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아마 가장 많은 분들이 떠올리는 내용은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구절인 ‘신은 죽었다’ 말이죠. 이 말은 얼핏 보면 단순히 기독교를 비판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이루고자 한 영역은 그보다 훨씬 크고 넓었습니다. 기독교를 포함한 서구 문명의 오래되고 낡은 가치를 모두 부수고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죠. 그는 기존의 종교와 사상이 생을 부정하는 사상이라고 여겼습니다. 지금의 삶을 부정하고, 보이지도 않는 다음 세계, 새로운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삶에 대한 모독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것이죠. 그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지금의 이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잠시 시간을 내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살펴보죠. 이 책의 주인공 격인 차라투스트라는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자인 조로아스터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는 30살이 되는 해에 고향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는데요. 10년간 깨달음의 기쁨을 누렸지만, 자신이 얻은 지혜를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하산을 결심하게 됩니다. 산을 내려오던 중 그는 어느 늙은 은둔자를 만납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가 왜 구태여 스스로 얻은 지혜를 나누려 하는지 묻습니다. 사람들은 어차피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테고, 그렇다면 그의 노력은 헛수고에 불과하게 될 테니까요.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은둔자에게 대체 당신이 산에서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이냐고 되묻습니다. 그는 노래하고, 울고 웃으며, 신을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 말을 듣곤 크게 웃으며 산을 내려옵니다. 그리고 생각하죠.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 늙은 성자는 숲속에 살고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나 보다!

그렇다면 신의 죽은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차라투스트라는 마을에 도착해 막 줄타기를 시작하려는 곡예사의 구경꾼 대열에 합류합니다. 그리고 곡예사가 곡예를 시작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로운 인간상, 즉 위버멘쉬(Übermensch, ’초인’이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를 제시하죠.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것들은 그들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원하며 사람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려 하는가?

여기서 위버(Über)란 ‘뛰어넘는’을, 멘쉬(mensch)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위버멘쉬이란 기존의 해로운 전통과 가치를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내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곡예사의 줄타기에 앞서 흥을 돋우는 광대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지켜본 사람들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니체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죠. 앞서 이야기했지만 니체가 말하는 ‘신’이란 우리가 기도를 올리는 신 외에도 인류가 떠받드는 다양한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 낡은 도덕과 이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서양문화를 오랜 기간 지배한 플라톤의 이상주의적 세계관 등이 여기에 해당하죠. 그는 이런 모든 가치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 노력하며 스스로의 가치 속에서 성장하는 ‘주인의 도덕’ 또는 ‘강자의 도덕’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죠.

마지막으로 그는 위버멘쉬는 이 세계의 영원회귀함을 받아들인다고 믿었습니다. 영원회귀란 말 그대로 세상 모든 것이 영원히 회귀한다는 믿음을 말합니다. 자연의 모든 과정을 결정하는 유한한 수의 요인들이 존재하므로, 그 수의 가능한 조합들이 존재한다면, 이 수가 다 찬 뒤에는 이전의 조합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는 이처럼 영원히 창조되며 영원히 파괴되는 세계를 ‘디오니소스적 세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초인의 태도를 니체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라고 이야기하죠.

니체는 오랜 기간 다양한 평가를 받아 왔습니다. 누군가는 그의 책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과 은유로 가득하다며 손가락질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약 30여 년 동안은 나치즘에 의해 그의 사상이 왜곡되어 설파되기도 했죠. 하지만 인간의 가능성을 믿은 그의 사상은 제1, 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의 가능성을 고민하던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존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방향으로 인간을 나아가게 하고자 한 철학자가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였던 것이죠.

내용]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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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1. 인상 깊은 부분

p.15

* 초인은 ‘영원회귀’의 진리를 체득하고, ‘힘의 의지’를 실현시킬 미래의 인간을 가리킨다. ‘슈퍼맨’이라는 의미가 아님에 유의할 것. 어원으로 보나 문맥으로 보나 (다리를) ‘건너간다’는 의미가 강하게 함축되어 있다.

p.16

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초인은 대지의 뜻이다. 그대들의 의지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초인이 이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형제들이여, 간곡히 바라노니 대지에 충실하라.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마라! 그들은 스스로 알든 모르든 독을 타서 퍼뜨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삶을 경멸하며 말라죽어 가고 스스로 중독된 자들로, 대지는 이들에게 지쳤다. 그러니 그들이야 죽든 말든 내버려두라!

지난날에는 신에 대한 불경이 최대의 불경이었다. 그러나 신이 죽었으므로, 신에 대해 불경을 저지른 자들도 함께 죽었다. 이제 가장 무서운 것은 이 대지에 불경을 저지르고, 탐구할 수도 없는 것의 뱃속을 대지의 뜻보다 더 높이 존중하는 것이다!

p.48

꾸며대고 신을 갈망하는 자들 가운데에는 언제나 병든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인식하는 자를 맹렬하게 미워하며, 덕 가운데서 가장 새로운 덕인 정직을 더없이 미워한다.

p.51

*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자기(Selbst)’는 한 개인이 자신의 개인성을 넘어 유일자로서 보편적인 인간성을 획득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인간의 전체성 및 완전성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한 개인의 인격적 완성을 위한 목표 개념이 바로 ‘자기’이다.

p.68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왜 그렇게 놀라는가? 인간은 나무와 같은 존재가 아닌가. 인간은 높은 곳으로 그리고 밝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하면 할수록 그 뿌리는 더욱더 강인하게 땅 속으로 파고들어 가려 한다네. 아래쪽으로, 어둠 속으로, 심연 속으로, 악 속으로 뻗어나가려 하는 거지.

“그렇지요, 악 속으로!” 하고 젊은이가 소리쳤다. “어떻게 하여 그대는 나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까?”

차라투스트라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영혼을 들여다보지는 못하고 오히려 영혼을 꾸며내는 걸세.”

p.70

그대는 아직도 자신을 고귀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대를 원망하고 악의에 찬 눈길을 던지는 다른 사람들도 그대를 고귀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잊지 마라. 고귀한 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의 길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고귀한 자는 착한 사람들에게도 방해가 된다. 그래서 그를 착한 사람이라고 부르면서도, 사실은 그를 제거하려고 한다.

고귀한 자는 새로운 것과 새로운 덕을 창조하려 한다. 반면에 착한 자는 옛것을 원하며 옛것을 간직하려 한다.

그러나 고귀한 자가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위험이 아니다. 오히려 고귀한 자가 뻔뻔스러운 자, 조롱하는 자, 파괴하는 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위험하다.

아, 나는 최고의 희망을 잃어버린 고귀한 자들을 알고 있었다. 희망을 잃은 그들은 이제 드높은 희망이라면 무조건 비방하였다.

p.76

나는 그대들 마음속의 증오와 질투를 알고 있다. 그대들은 증오와 질투를 모를 정도로 위대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증오와 질투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만큼은 위대해지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들이 인식의 성자가 될 수 없다면 적어도 인식의 전사는 되도록 하라! 인식의 전사는 성스러움의 길동무이자 선구자가 아닌가.

p.84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그들의 주둥이와 욕망이 내뿜는 악취 속에서 질식할 셈인가? 차라리 창문을 깨고 시원한 바깥으로 뛰쳐나가라!

악취에서 벗어나라! 이 인간쓰레기들이 벌이고 있는 우상 숭배로부터 벗어나라!

악취에서 벗어나라! 이들 인간 제물들이 내뿜는 후텁지근한 김에서 벗어나라!

위대한 영혼들에게 대지는 아직도 활짝 열려 있다. 조용한 바다 냄새가 감도는, 그런 자리가 혼자서 혹은 둘이서 은둔하고 있는 자들을 위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위대한 영혼들에게는 아직도 자유로운 삶이 활짝 열려 있다. 참으로, 적게 소유한 자는 그만큼 더 적게 지배된다. 찬양할지어다. 소박한 가난을!

국가가 없어지는 곳, 그곳에서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들의 삶이 시작된다. 그곳에서 꼭 있어야 할 자들의 노래, 단 한 번뿐이며 대체할 수 없는 그런 노래가 시작된다.

국가가 없어지는 곳. 그곳을 보라, 형제들이여! 그대들에게 무지개가, 초인으로 이르는 다리가 보이지 않는가?

p.89

그들은 그대의 모든 덕 때문에 그대를 처벌한다. 그들이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은 오직 그대의 실책뿐이다.

그대는 온화하고 올바른 마음씨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왜소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 탓은 아니다.”라고. 그러나 그들은 옹색한 소견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위대한 존재는 죄다.”라고.

그대가 그들을 온화하게 대하더라도 그들은 경멸당한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대가 베푼 은혜를 은밀한 악행으로 되갚는다.

그대의 말없는 긍지는 언제나 그들의 기분에 거슬린다. 그러므로 그대가 허영심을 부릴 정도로 자신을 낮추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기뻐 날뛰리라.

p.95

그대는 벗 앞에서 어떠한 옷도 걸치지 않으려 하는가? 있는 그대로의 벌거벗은 자신을 벗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대의 친구에게 영광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대의 벗은 그대를 악마에게 넘겨주고 싶어 할 것이다!

추호도 자신을 숨기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분노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벌거벗는 것을 두려워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그렇다. 그대들이 신이라면 옷을 부끄러워해도 될 테지!

p.96

그대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벗이 될 수 없다. 그대는 폭군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벗을 가질 수 없다.

여인들의 가슴속에는 너무도 오랫동안 노예와 폭군이 숨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여인들은 아직도 우정을 맺을 수가 없다. 여자는 오직 사랑만을 알 뿐이다.

여인의 사랑에는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한 불공정함과 맹목성이 들어 있다. 그리고 여인의 지적인 사랑에조차도 빛 이외에 불의의 습격과 번개와 밤이 여전히 들어 있다.

여인에게는 아직도 우정을 맺을 능력이 없다. 여인은 여전히 고양이요 새다. 또는 기껏해야 암소다.

여인에게는 아직도 우정을 맺을 능력이 없다. 그러나 말하라, 그대 남자들이여. 그대들 중 누가 우정을 맺을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아, 그대 남자들이여, 그대들의 영혼은 얼마나 가난하고 인색한가! 그대들이 벗에게 주는 정도라면 나는 나의 적에게도 줄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때문에 더 가난해지는 일도 없으리라.

동지애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우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100

* 고대 페르시아의 배화교를 창시한 조로아스터의 독일어식 이름이 차라투스트라다.

p.104

그대들은 자신을 칭찬하려는 목적으로 이웃이라는 증인을 끌어들인다. 그대들은 증인을 유혹하여 그대들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갖도록 만들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들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앎과 반대로 말하는 자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무지를 무시하고 말하는 자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이웃과 만나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이웃마저 기만하는 것이다.

p.110

그대는 그들을 넘어서 올라간다. 그러나 그대가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질투에 찬 그들의 눈에 그대는 더욱더 왜소하게 보인다. 더군다나 날아서 가는 자는 가장 많은 미움을 받는다.

p.113

여자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다. 그리고 여자 문제에 있어서 모든 것은 ‘하나의’ 해결책을 갖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임신이다.

여자에게 있어서 남자란 하나의 수단이다. 목적은 언제나 아이에 있다. 그렇다면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란 무엇인가?

참된 남자는 위험과 놀이, 이 두 가지를 원한다. 그러므로 남자는 위험천만한 장난감으로서 여자를 원한다.

남자는 전투를 위해, 여자는 전사의 휴식을 위해 교육받아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나치게 달콤한 과일을 전사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전사는 여자를 좋아한다. 가장 달콤한 여자라도 그 맛이 쓰기 때문이다.

p.121

창조한 자들보다 더 나은 사람 하나를 창조하려는 두 사람의 의지. 이것을 나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지를 실천하려는 상대방에 대한 외경심을 나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p.127

참으로, 천천히 죽을 것을 설교하는 자들이 존경하는 저 히브리 사람은 너무 일찍 죽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의 때 이른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불운이 되었다.

그가, 이 히브리 사람 예수가 알고 있었던 것은 히브리 사람들의 눈물과 비애, 그리고 착하고 의로운 자들의 증오뿐이었다. 그리하여 죽음에 대한 동경이 그를 엄습했던 것이다.

그가 황야에 머물러 있으면서 어떻게든 착하고 의로운 자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더라면 그는 사는 법을 배우고 대지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웃음까지 배웠을 것이다!

내 말을 믿어라, 형제들이여! 그는 너무 일찍 죽었다. 내 나이만큼만 살았더라도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했으리라! 그는 철회할 수 있을 만큼 고귀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채 성숙하지 못했다. 그 젊은이의 사랑은 미숙했고, 인간과 대지에 대한 그의 증오도 미숙했다. 그의 마음과 정신의 날개는 아직도 묶인 채 무거웠다.

p.135

망설이며 오랫동안 손에 든 지팡이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던 그는 마침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변해 있었다.

이제 나 홀로 가려고 한다. 제자들이여! 그대들도 이제 헤어져 제 갈 길을 가도록 하라! 나는 그러기를 바란다.

진실로 바라노니, 그대들은 나를 떠나라.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에 대항하라! 그리고 더 바람직한 것은 차라투스트라라는 존재를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그가 그대들을 속였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인식하는 인간은 적을 사랑할 뿐 아니라 벗을 미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머물러 있는 자는 선생에게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로부터 월계관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가?

그대들은 나를 존경하지만, 어느 날 그 존경이 무너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 입상(立像)에 깔려 죽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그대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믿는다고 말하는가? 그러나 차라투스트라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대들은 나의 신도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신도가 어쨌단 말인가!

그대들이 나를 만났을 때, 그대들은 아직도 자신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신도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신앙이란 이처럼 보잘것없는 것이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된다면, 그때 내가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참으로, 형제들이여. 그때가 오면 나는 다른 눈으로 내가 잃은 자들을 찾으리라. 또 다른 사랑으로 그대들을 사랑하리라.

언젠가 그대들은 나의 벗이 되어야 하며, ‘하나의’ 희망을 품은 아이들이 되어야 하리라. 그러면 나는 세 번째로 그대들과 함께 하면서 위대한 정오를 축복하리라.

위대한 정오란 인간이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길의 한 가운데에 서 있을 때이며, 저녁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길을 최고의 희망으로서 축복하는 때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새로운 아침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몰라해가는 자는 자신이 저 너머로 건너가는 자임을 알고 스스로를 축복할 것이며, 그때 그의 인식의 태양은 그에게 정오의 태양이리라.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찾아올 위대한 정오에 우리의 마지막 의지가 되기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154

그러나 그대에게 고통 받는 친구가 있다면, 그대는 그의 고통이 쉴 수 있는 휴식처가 되도록 하라. 그러면서도 딱딱한 침대, 야전 침대가 되도록 하라. 그래야만 그대가 그에게 가장 필요한 자가 될 것이다.

p.164

그리고 어떤 자들은 한 줌의 정의를 내세우면서 그 정의로 말미암아 만물에 해악을 끼친다. 그리하여 세계는 그들의 불의에 빠져 익사하고 만다.

아, 그들의 입에서 덕이라는 말이 나올 때면 나는 얼마나 불쾌한가! 그들이 “나는 정의롭다.”라고 말하면 내게는 언제나 “나는 복수했다!”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들은 그들의 덕을 가지고서 적의 눈을 후벼내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높이는 것은 오직 다른 사람을 낮추기 위해서다.

p.173

나는 그대들의 거미줄을 찢는다. 그러면 그대들은 분노하여 허위의 동굴 밖으로 몸을 드러내리라. 그리고 그대들의 정의라는 말의 뒤편에서 그대들의 복수심이 튀어나오리라.

인간을 복수심으로부터 구제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최고의 희망으로 나아가는 다리이며 오랜 폭풍우 뒤의 무지개다.

그러나 타란튤라는 물론 다른 것을 원한다. “세상이 우리들의 복수심의 폭풍우로 가득 차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에게는 정의다.”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한다.

“우리와 동등하지 않은 모든 자들에게 복수하고 모욕을 주리라. 그리고 평등에의 의지. 이것 자체가 앞으로는 덕의 이름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을 가진 모든 것에 반대해 함성을 지르리라!” 타란튤라의 마음을 가진 자들은 이렇게 맹세한다.

그대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이여. 무력감에서 오는 폭군의 망상은 그리하여 그대들의 마음속으로부터 평등을 외친다. 그대들의 가장 은밀한 폭군적인 욕망이 덕이라는 말을 가장하고 있다!

p.201

약자는 강자를 섬겨야 한다, 라고 약자는 자신의 의지를 설득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기도 보다 약한 자의 지배자가 되려고 한다. 약자도 이러한 기쁨만은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작은 자가 가장 작은 자를 지배하는 기쁨과 힘을 갖기 위해 보다 큰 자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가장 큰 자도 힘을 위해 헌신하고 목숨을 건다.

p.216

순진무구함은 어디에 있는가? 생식에의 의지가 있는 곳에 있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 창조하고자 하는 자는 내가 보기에 가장 순수한 의지를 가진 자다.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모든 의지를 가지고 의욕하지 않을 수 없는 곳에 있다. 내가 사랑하고 몰락하려고 함으로써 하나의 상이 단지 하나의 상으로만 머물지 않는 곳에 있다.

사랑한다는 것과 몰락한다는 것. 그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짝을 이루어왔다. 사랑에의 의지. 그것은 죽음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그대들 비겁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p.248

의지는 과거로 되돌아가 의욕할 수가 없다. 의지가 시간을 부수지 못하고 시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의지의 가장 외로운 슬픔이다.

의욕은 인간을 해방시킨다. 의욕 그 자체는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고 자신의 감옥을 조롱하기 위해 그 어떤 수단을 생각해 내는가?

아, 감옥에 갇힌 모든 수인은 바보가 된다! 감금된 의지도 바보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구제한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의지의 원한이다. 과거에 있었던 것. 이것이 의지가 굴리지 못하는 돌의 이름이다.

그리하여 원한과 불만에 찬 의지는 돌을 굴리고 자신과 같이 원한과 불만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복수를 한다.

p.267

“높이 오르려 할 때 그대들은 위를 올려다본다. 그러나 나는 이미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아래로 내려다본다. 그대들 중에 그 누가 웃으면서 동시에 높이 올라와 있을 수 있는가?

가장 높은 산에 오르는 자는 모든 비극적 유희와 비극적 엄숙함을 비웃는다.”

p.271

끊임없이 자신을 아끼기만 하는 자는 결국 그렇게 너무 아끼다 병들고 만다. 그러니 준엄하게 되는 것을 칭송하라! 버터와 꿀이 넘쳐흐르는 땅을 나는 칭송하지 않는다!

많은 것을 보려면 자기 자신을 놓아버릴 줄 알아야 한다.

산을 오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혹독함이 필요하다.

p. 278

말하자면 용기는, 공격적인 용기는 최상의 살해자다. 왜냐하면 모든 공격 속에는 울려 퍼지는 승리의 음악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가장 용감한 동물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모든 짐승을 극복했다. 승리의 음악을 울리면서 인간은 모든 고통을 극복했다. 인간의 고통은 더없이 깊은 고통이었음에도.

용기는 심연 앞에서의 현기증도 살해한다. 인간이 서 있는 곳 그 어디 심연 아닌 곳이 있던가! 본다는 것 자체가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가?

용기는 최상의 살해자다. 용기는 동정도 살해한다. 동정이야말로 가장 깊은 심연임에도 불구하고. 삶을 깊이 통찰하는 만큼 인간은 고통도 깊이 통찰한다.

그러나 용기는, 공격하는 용기는 최상의 살해자다. 이 용기는 죽음조차도 살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러면 다시 한 번!”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p.301

호의가 있는 곳에 그만큼의 약점이 있고, 정의와 동정이 있는 곳에 그만큼의 약점도 있음을 나는 본다.

그들은 서로 둥글둥글 잘 지내고 정직하고 친절하다. 마치 작은 모래알들이 다른 모래알들과 더불어 둥글둥글 잘 지내고 정직하고 친절하듯이.

작은 행복을 겸손하게 얼싸안는 것, 그들은 이것을 순종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느새 또 다른 작은 행복을 향해 곁눈질한다. 겸손하게.

사실 그들이 한결같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다. 즉 그 누구로부터도 고통 받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겁함이다. 이미 그것이 덕이라고 불리고 있긴 해도.

그리고 그들, 이 왜소한 자들이 거칠게 말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기서 그들의 쉰 목소리만을 들을 뿐이다. 말하자면 살짝 바람만 불어도 그들의 목소리는 쉬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영리하며, 그들의 덕은 영리한 손가락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주먹이 없다. 그들의 손가락은 주먹 뒤로 기어들어 숨을 줄 모른다.

그들에게 있어서 덕이란 겸손하고 양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늑대를 개로 만들었고, 인간 자체를 인간 최고의 가축으로 만들었다.

p.304

아, 그대들은 나의 다음과 같은 말을 알아들어야 한다.

“그대들이 의욕하는 바를 언제든 행하라.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의욕할 수 있는 자가 되라!”

“그대들의 이웃을 언제나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지만 우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되도록 하라! 커다란 사랑으로 사랑하며, 커다란 경멸로 사랑하라!”

신을 부정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p.324

낡은 신들은 이미 오래전에 최후를 고했다. 그리고 참으로 낡은 신들은 착하고 즐거운 신들로서 종말을 고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낡은 신들이 황혼 속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건 거짓말이다! 오히려 낡은 신들은 너무 웃어대다가 죽고만 것이다!

그것은 가장 극단적으로 신을 부정하는 말, 즉 “신은 하나뿐이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라는 말이 어떤 신의 입으로부터 나왔을 때 생긴 일이었다.

분노의 수염을 단 늙은 신, 질투의 신이 이처럼 자기 분수를 잊었던 것이다.

그러자 모든 신들이 웃었고 그들의 의자에 앉아 몸을 흔들어대며 소리쳤다. “신들은 존재하지만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신성함이 아닌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p.330

특히 착한 자를 지칭하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독성이 깊은 파리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들은 철모르고 쏘아대며 철모르고 속인다. 그들이 어떻게 나에 대해 공정할 수 있단 말인가!

착한 자들 가운데서 사는 자는 그 동정심 때문에 거짓말을 배운다. 동정심은 모든 자유로운 영혼을 둘러싼 공기를 후텁지근하게 만든다. 착한 자들의 어리석음이란 그만큼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p.334

육욕, 지배욕, 이기심. 이 세 가지는 지금껏 가장 저주받아 왔고 가장 나쁘게 비방되고 왜곡되어 왔다. 하지만 나는 이 세 가지를 인간적으로 제대로 보려고 한다.

p.346

나의 가르침은 이렇다. 언젠가 나는 것을 배우려는 자는 우선 서고 걷고 달리고 뛰어오르고 기어오르고 춤추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나는 것을 한꺼번에 배우지는 못하는 법이다!

p.353

그대의 이웃들 사이에서도 그대 자신을 극복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가 자신의 힘으로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남으로부터 받게 되는 일은 없도록 하라!

그대가 하는 일을 그 누구도 그대에게 다시 되풀이하여 돌려줄 수는 없다. 보라, 되갚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자는 복종해야만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수는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 복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아직도 많다!

p.355

아, 이 착한 자들! 착한 자들은 결코 진리를 말하는 법이 없다. 정신에 있어서 이처럼 착하게 된다는 것은 일종의 병이다.

그들, 이 착한 자들은 양보하고 참고 견딘다. 그들의 마음은 다른 사람을 따라서 말하고, 바닥에서부터 복종한다. 그러나 복조하는 자는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는다.

하나의 진리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착한 사람들이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함께 모여야 한다. 아,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이러한 진리에 어울릴 만큼 충분히 악한가?

저돌적인 모험, 오랜 의심, 잔인한 부정, 권태, 생동하는 것 속으로 파고듦. 이런 것들이 함께 모이는 것은 얼마나 드문 일인가! 그러나 이러한 씨앗으로부터 진리가 태어나는 법이다!

지금까지 모든 지식은 사악한 양심과 더불어 성장했다! 그러니 부숴버려라, 부숴버려라, 그대 인식하는 자들이여, 낡은 서판을!

p.359

그대들이 어디서 왔는가가 아니라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을 앞으로 그대들의 명예로 삼아라! 그대들 자신을 넘어서서 가려는 그대들의 의지와 그대들의 발, 그것을 그대들의 새로운 명예로 삼아라!

p.40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 아, 인간이여! 귀 기울여라!

둘! 깊은 한밤중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셋! 나는 잠자고 있었다, 잠자고 있었다.

넷! 나는 깊은 꿈에서 깨어났다.

다섯! 세계는 깊다.

여섯! 낮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깊다.

일곱! 세계의 슬픔은 깊다.

여덟! 기쁨은 마음의 고통보다도 더 깊다.

아홉! 고통은 말한다, 사라져라!

열! 그러나 모든 기쁨은 영원하라고 한다.

열하나! 깊고 깊은 영원을 원한다.

열둘!

p.411

아, 이 세상에서 동정하는 자들보다 더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자들이 어디 있었던가? 그리고 동정하는 자들의 어리석음보다 더 큰 고통을 가져온 것이 이 세상 어디에 있었던가?

자신의 동정심도 뛰어넘지 못하면서 사랑을 하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애도를 표하라!

언젠가 악마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에게도 지옥이 있으니,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다.”

또 최근에 나는 악마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신은 죽었다. 인간에 대한 동정 때문에 신은 죽었다.”

p.456

나는 밝게 쳐다보며 정직하게 말하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대도 잘 알고 있다시피, 그대 늙은 성직자여. 그에게는 그대와, 즉 성직자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말하자면 그의 언행은 애매모호했다.

그는 또한 불분명하기까지 했다. 씩씩거리며 격노하는 이자는 우리가 그의 말을 잘못 이해한다고 얼마나 화를 냈던가! 하지만 그는 왜 좀 더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게 우리들의 귀 탓이었다면, 왜 그는 우리들에게 그의 말을 잘못 알아듣는 귀를 주었던가? 우리들의 귀에 진흙이 있었다고 치자. 좋다! 그렇다면 누가 이 진흙을 집어넣었단 말인가?

그자는, 제대로 수련하지 못한 이 도공은 너무도 많은 실패를 저질렀다! 그런데도 그가 자신의 항아리와 피조물을 보고 잘못 만들어졌다면서 복수를 했다는 사실. 그것은 좋은 미감에 거슬리는 죄다.

경건함 속에도 좋은 미감은 들어 있는 법. 그래서 마침내 이 미감이 말했다. “이따위 신은 꺼져라! 차라리 신이 없는 게 낫다. 차라리 혼자 힘으로 운명을 만들리라. 차라리 바보가 되리라. 차라리 내 자신이 신이 되리라!”

p.464

너무나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들의, 이 왜소한 인간들의 권리를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에게 힘까지 주었다. 그리하여 이제 그들은 ‘왜소한 인간들이 선이라고 부르는 것만이 선하다.’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 자신이 왜소한 인간 출신인 저 설교자가 말했던 것, 즉 자기 자신을 두고 ‘내가 진리다.’라고 증언했던 저 기이한 성자요 왜소한 인간들의 대변자가 말했던 것이 오늘날 진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p.505

여자 같은 자, 노예 출신인 자, 특히 천민이라는 잡동사니, 이런 자들이 이제 모든 인간 운명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 아, 역겹다! 역겹다! 역겹다!

이런 자들은 지치지도 않으면서 묻고 또 묻는다. “어떻게 해서 인간은 가장 좋게,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안락하게 보존될 수 있는가?” 이렇게 물음으로써 그들은 오늘의 주인이 된다.

오늘을 지배하는 이들 주인을 극복하라. 아, 형제들이여, 이 왜소한 자들을. 이런 자들이 초인에게 가장 커다란 위험이 된다.

극복하라, 그대들, 차원 높은 인간들이여, 자잘한 덕을, 가소로운 재치를, 모래알 같은 조바심을, 개미떼 같은 잡동사니를, 가련한 자기만족을, 최대 다수의 행복을!

그리고 굴종하느니 차라리 절망하라. 참으로 나는 그대들이 오늘을 살 줄 모른다는 점 때문에 그대들을 사랑한다. 그대들, 차원 높은 인간들이여! 그렇기 때문에 그대들은 가장 잘 살고 있는 것이다!

p.513

한 사물이 귀한 종에 속하면 속할수록, 그것이 성공할 가능성은 더 적어진다. 그대들, 여기에 있는 차원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 모두는 실패작이 아닌가?

용기를 내라, 그게 어쨌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일이 아직도 가능한가! 마땅히 웃어야 하는 방식으로 그대들 자신을 비웃는 것을 배우라!

그대들이 실패했고 반밖에 성공치 못했다 하더라도 무엇이 이상한가, 그대들 반쯤 파멸한 자들이여! 그대들 속에서 거세게 밀치며 다가오지 않는가, 인간의 미래가?

인간의 가장 멀고 가장 깊고 별처럼 가장 높은 것, 인간의 엄청난 힘. 이러한 모든 것이 그대들의 항아리 속에서 서로 부딪치며 거품을 내고 있지 않은가?

p.553

물론 아이들처럼 되지 않고서는 그대는 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고 나서 차라투스트라는 두 손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우리는 털끝만큼도 하늘나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 우리는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 우리는 지상의 나라를 원하고 있다.

p.567

이제 스스로 이 노래를 불러보라. 노래의 제목은 다시 한 번이고, 노래의 의미는 모든 영원 속으로! 이다. 노래하라. 그대들, 차원 높은 인간들이여, 차라투스트라의 돌림 노래를!

아, 인간이여! 주의를 기울여라!

깊은 한밤중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잠들어 있었다. 나는 잠들어 있었다.

깊은 꿈에서 나는 깨어났다.

세계는 깊다.

낮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다.

세계의 고통은 깊다.

쾌락은 마음의 고통보다도 더 깊다.

고통은 말한다. ‘사라져버려라!’

하지만 모든 쾌락은 영원을 원한다.

깊디깊은 영원을 원한다!”

p.575 작품해설

니체는 서슴없이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끊임없이 말하는 철학자다. 희미하게라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자는 지상에서 스스로를 방랑자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종 목표가 어디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그런 목표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의 분신 차라투스트라 또한 여행자다.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목표가 없다는 것은 돌아가 안주할 곳이 없음을 말한다. 자기 손으로 이미 자기 집을 파괴해 버렸던 것이다. 한 손에 청진기 다른 손에 망치를 든 채 자유정신을 가두어놓았던 형이상학의 견고한 성과 그 모든 우상과 종교적 독단을 진단하고 두들겨 부수었기 때문이다.

p.577 작품해설

그러므로 우리 현대인들은 수천 년에 걸쳐 양심을 찢어발기고 자신의 타고난 동물성을 학대한 상속인이다. 요컨대 양심의 가책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며, 타고난 원죄라는 것도 그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과 악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시 극복되어야만 한다.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은 이러한 의미다. 신이 존재하는 것은 그가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빈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니, 인간이 스스로를 빈약한 존재로 오해했던 것이다.

p.578 작품해설

그러나 건강한 자는 가치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고 그것에 따라 사물과 행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자의 최고 형상이라고 할 수 있는 초인은 말종인간과 대척점에 있는 존재다.

p.580 작품해설

신의 죽음은 인간적 형태의 온갖 우상 숭배의 종식을 의미한다. 차라투스트라가 신의 죽음을 전하는 곳에서 초인을 가르치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초인으로의 변신은 자기 바깥에 가치의 기준을 두고 그것에 복종해 온 인간이 마침내 노예 생활을 끝내고 자기 가치의 주인이 됨을 말한다. 초인은 문자 그대로 넘어서 나아가며 끊임없이 한계와 제약을 돌파해 나가는 커다란 육체적 이성의 주체다.

인간의 미래에 대한 니체의 비전은 긍정적이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인간은 지상에서 그와 비견될 만한 것이 없는 유쾌하고 용기 있고 창의적인 동물이다. 이 동물은 어떤 미궁에 있어도 여전히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찾아낸다.”

p.581 작품해설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유명한 질문을 던진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를 이어받은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영원회귀를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피어난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흘러간다. 모든 것은 꺾이고 모든 것은 새로이 이어간다. 존재의 동일한 집이 영원히 세워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모든 것은 다시 인사를 나눈다. 모든 순간에 존재는 시작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이 회전한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굽어 있다.”

이러한 영원회귀의 무상함을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 ‘긍정’이다. 허무주의의 원천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영원회귀를 ‘다시 한 번!’ 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에게 고유한 ‘용기’다. 자기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와 물고 늘어지는 뱀의 대가리를 과감하게 물어뜯어 버리는 용기, 그것이 차라투스트라를 초인의 경지로 변신케 하고, 힘의 의지와 영원회귀 사이의 불협화음적인 긴장을 더 높은 원리인 디오니소스의 유희로 해소하게 하는 동력이다.

2. 읽고 나서

너무나 유명한 책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제야 읽은 것을 다소 간에 부끄럽게 생각하긴 합니다만, 읽는 내내 ‘이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저도 읽다가 도중에 한 번 포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습니다… 어쨌거나 완독을 하고 나니 마치 명산名山을 등반한 기분입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이런 얘길 해도 되나?’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내린 결론은 ‘만약 니체가 현시대에 태어나 이 책으로 유명작가가 된다면, 그는 아마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것이다.’입니다.

니체는 1844년에 태어나 1900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비교적 짧은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나 말년에는 오랫동안 정신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초인을 부르짖었으나 육신이라는 말이 정신이라는 기수의 마음과는 다르게 너무 일찍 주저앉은 것 같습니다.

책의 내용을 보신 분들은 느끼시겠지만, 이 책에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깊은 혐오감과 더불어, 여성과 오늘날 PC(Political Correctness)를 옹호하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아주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특히 니체의 개인사 중에서, 니체가 살로메라는 여인에게 두 번이나 청혼을 했다가 두 번 모두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거절 이후 니체가 이탈리아 각지를 전전하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첫 부분을 구상했다고 하니 니체의 마음이 어떤 상태였을까에 대해서는 다소간에 짐작이 가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전에 포스팅 한 적이 있었던 조던 피터슨 교수의 『12가지 인생의 법칙』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이 책에서도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한 긍정과 더불어 PC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저자의 생각을 볼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도구적 측면에서는 조던 피터슨 교수가 니체보다 훨씬 세련됐습니다. 조던 피터슨 교수는 ‘데이터’를 가지고 얘기하기 때문이죠(물론 사회과학분야에서의 데이터가 가지는 한계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책을 읽으면서,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입고 있는 옷과 다루고 있는 도구가 달라질 뿐이지, 꽤 비슷한 내용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일취월장』 과 『완벽한 공부법』의 저자들이신 고영성 작가님과 신영준 박사님의 유튜브 채널 ‘뼈아대’를 즐겨보는 편입니다. 얼마 전 고영성 작가님께서 『12가지 인생의 법칙』에 대하여 개인의 동기부여 측면에서는 정말 좋은 책이지만, 리더에게 좋은 책은 아니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역시 그런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에 기꺼이 맞서고, 나약함을 거부하고, 스스로 진보할 수 있다고 믿는 의지를 갖는다는 것은 개인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나약함’에 대해 정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죠.

실제로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 포스터는 니체가 말년에 정신병으로 오락가락하고 있을 때 니체의 사상을 왜곡하여 히틀러를 찬양하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자신의 범죄를 ‘초인’이라는 개념 하에서 정당화하고, 더욱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책을 읽는 동안 히틀러가 분명히 니체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였는데,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실제로 영향을 끼쳤더라고요. 물론 둘 사이의 연결고리는 여동생의 몫이었지만 말이지요.

개인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자신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하는 동력으로써 ‘초인’의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상당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더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지도층의 아젠다가 되는 순간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희생자들이 속출하기 마련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라는 책을 좋아합니다. 페미니즘 서적으로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넘어 모든 인간들이 잊지 말아야 할 지혜를 알려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각자가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성을 가지게 된다면, 그때에 기회가 도래하고 셰익스피어의 누이였던 그 죽은 시인이 종종 스스로 내던졌던 육체를 걸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라는 것은 타인에 대한 예속이나 굴종 없이 스스로의 의지와 욕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립능력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니체가 말한 초인이 지향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능력은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유용한 것이고, 필요한 것이니까요.

이 책은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되는 책이라고 결론짓고자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의지를 불태울 훌륭한 도화선이 되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혐오를 정당화하는 몽둥이가 될 책입니다.

자신의 중용中庸을 믿는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일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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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뭐라고 말했을까요? 들어보기만 했지 숙제처럼 밀려있던 그 이야기를 함께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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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니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망치를 든 철학자, 초인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아마 가장 많은 분들이 떠올리는 내용은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구절인 ‘신은 죽었다’ 말이죠. 이 말은 얼핏 보면 단순히 기독교를 비판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이루고자 한 영역은 그보다 훨씬 크고 넓었습니다. 기독교를 포함한 서구 문명의 오래되고 낡은 가치를 모두 부수고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죠. 그는 기존의 종교와 사상이 생을 부정하는 사상이라고 여겼습니다. 지금의 삶을 부정하고, 보이지도 않는 다음 세계, 새로운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삶에 대한 모독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것이죠. 그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지금의 이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잠시 시간을 내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살펴보죠. 이 책의 주인공 격인 차라투스트라는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자인 조로아스터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는 30살이 되는 해에 고향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는데요. 10년간 깨달음의 기쁨을 누렸지만, 자신이 얻은 지혜를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하산을 결심하게 됩니다. 산을 내려오던 중 그는 어느 늙은 은둔자를 만납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가 왜 구태여 스스로 얻은 지혜를 나누려 하는지 묻습니다. 사람들은 어차피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테고, 그렇다면 그의 노력은 헛수고에 불과하게 될 테니까요.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은둔자에게 대체 당신이 산에서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이냐고 되묻습니다. 그는 노래하고, 울고 웃으며, 신을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 말을 듣곤 크게 웃으며 산을 내려옵니다. 그리고 생각하죠.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 늙은 성자는 숲속에 살고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나 보다!”

그렇다면 신의 죽은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차라투스트라는 마을에 도착해 막 줄타기를 시작하려는 곡예사의 구경꾼 대열에 합류합니다. 그리고 곡예사가 곡예를 시작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로운 인간상, 즉 위버멘쉬(Übermensch, ’초인’이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를 제시하죠.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것들은 그들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원하며 사람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려 하는가? 여기서 위버(Über)란 ‘뛰어넘는’을, 멘쉬(mensch)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위버멘쉬이란 기존의 해로운 전통과 가치를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내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곡예사의 줄타기에 앞서 흥을 돋우는 광대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지켜본 사람들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니체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죠. 앞서 이야기했지만 니체가 말하는 ‘신’이란 우리가 기도를 올리는 신 외에도 인류가 떠받드는 다양한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낡은 도덕과 이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서양문화를 오랜 기간 지배한 플라톤의 이상주의적 세계관 등이 여기에 해당하죠. 그는 이런 모든 가치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 노력하며 스스로의 가치 속에서 성장하는 ‘주인의 도덕’ 또는 ‘강자의 도덕’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죠.

마지막으로 그는 위버멘쉬는 이 세계의 영원회귀함을 받아들인다고 믿었습니다. 영원회귀란 말 그대로 세상 모든 것이 영원히 회귀한다는 믿음을 말합니다. 자연의 모든 과정을 결정하는 유한한 수의 요인들이 존재하므로, 그 수의 가능한 조합들이 존재한다면, 이 수가 다 찬 뒤에는 이전의 조합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는 이처럼 영원히 창조되며 영원히 파괴되는 세계를 ‘디오니소스적 세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초인의 태도를 니체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라고 이야기하죠.

니체는 오랜 기간 다양한 평가를 받아 왔습니다. 누군가는 그의 책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과 은유로 가득하다며 손가락질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약 30여 년 동안은 나치즘에 의해 그의 사상이 왜곡되어 설파되기도 했죠. 하지만 인간의 가능성을 믿은 그의 사상은 제1, 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의 가능성을 고민하던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존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방향으로 인간을 나아가게 하고자 한 철학자가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였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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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뷰&서평&인상 깊게 보았던 구절들 … 발매 2004.01.02. … 끊임 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라고 주문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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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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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좋은 구절 · 인간은 짐승과 초인사이에 밧줄이다. · 저 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줄 가운데 있는 것도 위험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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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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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표작인 의 한 구절인 ‘신은 죽었다’ 말이죠. 이 말은 얼핏 보면 단순히 기독교를 비판한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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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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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좋은 구절 :: 화엄삼매. Article author: stmarysclinic.tistory.com; Reviews from users: 39753 ⭐ Ratings; T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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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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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가 10년 동안 머무르던 동굴에서 하산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는 내용으로, 주로 철학서로 분류되지만, 옴니버스로 구성된 소설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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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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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 요약 및 서평. 해토머리 2010. 4. 29. 16:43. 1. 작가소개. –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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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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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이 책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끊임없이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 [인상깊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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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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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를 드디어 뗏다. 만세~! 책걸이~! … 신약의 복음서를 연상시키는 구절 등, 이 책에는 흥미로운 요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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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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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_니체. 니체와 이 책에 나오는 ‘신은 죽었다’라는 구절은 굉장히 유명하다. 단지 그 구절만 들어봤던 나는 이 긴 제목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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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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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소개

–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5살 때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나움부르크로 이사하였다.

포르타 김나지움 시절에는 음악과 그리스·로마 문화에 심취하였고, 1864년 본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古典文獻學)을 배웠으나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시절 동안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고, 바그너와 음악을 통해 깊은 관계를 맺었다.

69년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스승 리츨의 추천을 받아 스위스 바젤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지자 위생병으로 종군하였으나 병에 걸려 제대한 뒤 평생 병고에 시달리는 몸이 되었다. 당시 유명한 작곡자로 알려졌던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했으며, 특히 비극 를 듣고 매혹된 나머지 처녀작인 을 저술하였다.

이 저서는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비극의 정신이 진실한 문화창조의 원천임을 인식하고, 과 의 두 가지 원리로 그리스비극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그 정신을 현대에서 부흥시킨 것이 바그너의 음악임을 논하여 그의 신예술운동을 지원하려 하였다. 뒤이어 발행된 4편은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는 독일 국민과 문화에 통렬한 비난을 가하는 한편 유럽문화에 대한 회의를 나타내고 천재(天才)를 위대한 창조자로서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1편은 헤겔학파의 신학자 슈트라우스의 에 대한 공격으로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2편은 역사를 기념비적·골동품적·비판적인 3종류로 구분한 역사주의에 대한 비평이었다.

3편은 쇼펜하우어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니체 자신의 실존적 결의의 표명이기도 하다.

4편은 바그너가 바이로이트에서 공연한 악극 에 관한 찬사이다. 그러나 이 저술을 계기로 바그너와 절교하였으며, 이리하여 천재적인 재질에 의하여 새로운 게르만적 헬레니즘문화를 세우려고 한 낭만적 이상은 무너졌다.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79년 대학에서 퇴직하고 알프스산과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해변을 전전하는 투병생활을 하면서 사색을 계속하여 등을 저술하였다.

이 저서들은 잠언(箴言)과 사상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속에서 종래의 낭만주의를 파괴하고 실증주의적·심리적 요소를 드러내고 있다. 83-85년에 걸쳐서는 전에 알프스 산중에서 깨달은 사상을 기반으로 한 의 이상을 그린 철학적 서사시인 를 저술하였다.

이 저서에 니체의 사상이 상징적으로 모두 표현되고 있으나, 이 추상성에 불만을 품고 구체적 논문 식으로 해설한 을 저술하였다.

이 저술에서는 고귀한 정신적 귀족의 육성을 주장하고 장래의 위대한 입법자를 암시하는 한편 퇴폐적인 근대의 여러 현상과 단순히 객관에만 치우치고 있는 과학정신, 동정(同情)에 기반을 두었다는 그리스도교적 도덕, 역사의식의 과잉 등을 예리하고 독특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 후 가 유럽 윤리사상의 비판서로서 출판되었으며, 이때 이미 가 준비되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사망 후에 유고(遺稿)만이 수집되어 출판되었다.

88년에는 등이 저술되었다. 그 중 는 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89년 1월 정신착란 증세에 빠져 바이마르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동생의 간호 아래 여생을 보냈다.

니체는 근대유럽의 정신적 위기를, 일체의 의미와 가치의 근원인 그리스도교적 신의 죽음, 즉 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 단정하고, 여기에서 발생한 사상적 공백상태를 새로운 가치창조에 의해 전환시켜 사상적 충실을 기했다. 이리하여 신 대신 초인을, 불멸의 영혼 대신 영겁회귀를, 선(善)과 참(眞) 대신 권력에의 의지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쁨 대신에 심연(深淵)을 거쳐서 웃는 인간의 내재적(內在的) 삶으로 가치를 전환시켰다.

‘신의 죽음’과 그에 따른 모든 전통가치의 상실을 선포했다. 그는 유일하게 지지받을 수 있는 인간의 반응은 허무주의적 반응, 즉 신이 없음이며, 삶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문제에는 답이 없다고 주장했다. 니체에 따르면, 신의 죽음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자신을 완성하며 그 본질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원숙한 문장과 함께 주로 문학자들에 의해 높은 평가를 받았고, 시대 변천과 함께 사상적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날의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그들의 선구자로 불리게 되었다.

2. 줄거리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훑어보기

차라투스트라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머물렀던 동굴은 아주 높은 곳에 있다. 그곳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보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한 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높다. 깨달음의 장소인 동굴의 높이가 이렇게 높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높이에서 세상을 본다는 의미가 있다. 그의 동굴은 또한 용감하고 긍지를 가진 동물인 독수리의 둥지를 닮았다. 독수리가 절벽 높은 곳에 둥지를 틀어 지상이 동물들이 자기 둥지를 침탈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은 지상의 악덕들이 쉽게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아주 높은 곳에 위치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내력을 설명하면서 이 책의 핵심 개념과 형식들이 아주 높은 바위에서 떠올랐기 때문에 “인간과 시간을 초월한 6천 피트”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동굴의 높이만큼이나 깊은 곳을 향해서도 여행을 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별들까지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이”만이 아니라 더없이 깊은 계곡과 물속도 들어가 봐야 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을 살펴보면 이러한 높이와 깊이가 반복적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그는 고도를 바꾸는 것에 익숙한 여행자다. 처음에 그는 높은 동굴에서 하산해 ‘얼룩소’라는 도시에 도달한다. 제1부는 ‘얼룩소’라는 도시에서 펼친 가르침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제2부에서 복음을 전하러 왔다가 비웃음만 산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높은 곳에 있는 자신의 동굴로 돌아간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내공이 더욱 커진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벗들을 찾기 위해 하산을 시작한다. 이번에 그가 향한 곳은 ‘행복의 섬’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지복의 섬은 그리스의 영웅들이 죽으면 간다는 낙원이다.) 섬에서 많은 경험을 한 차라투스트라. 그러나 제3부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스스로의 성숙을 위해 고독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벗들을 떠나 동굴로 돌아가려 한다. 그는 섬에서 나와 배를 타고 육지에 오른 후 감람산을 거치고 도시를 지나서 다시 자신이 동굴로 올라온다. 그리고 동굴 속에서 깊은 수련에 들어간다. 제4부에서 그는 다시 한 번 하산과 등정을 반복한다. 물론 이것은 앞서 이루어진 두 번의 하산과 등정 보다는 작은 규모이다. 동굴 속에서 위버멘쉬로의 변신이 임박했을 때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인간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 산 아래 쪽으로 내려갔다가 그들을 모두 동굴로 데리고 올라온다.

『차라투스트라』에 나타난 하강과 상승의 반복은 영원회귀의 반복과도 관련이 있다. 반복이라는 형식 자체는 동일해 보이지만 반복이 있을 때마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차이가 나타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반복을 거칠 때마다 건강한 신체로 변해간다. 또 하강과 상승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게 된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것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음을 의미하며, 세계를 여러 가지 시각에서 통찰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3. 주요 개념 정리

* 초인(超人 ubermensch) = superman : 인간이 초극(超克)화 된 모습. 인류의 목표가 없어진 다음에 나타나는 그에 대신할 최고의 가치로서의 이상. 초인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미래의 개념이다.

* 니힐리즘 : 라틴어의 ‘무(無)’를 의미하는 니힐(nihil)이 그 어원으로, 허무주의를 이르는 말

하지만, 니체의 ‘니힐리즘’은 일반적 의미의 니힐리즘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라는 입장에서 삶의 가치를 부정하고 권력을 쇠퇴시키는 그리스도교 도덕이나 불교 도덕을 수동적 니힐리즘이라고 하여 배척하고, 삶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 기성가치의 전도(顚倒)를 지향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을 제창하였다.

* 영겁회귀 : 니힐리즘의 최고 형태. 무한한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유한한 물질이 서로 만나 똑같은 현상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 지향해야 할 목표도 도달할 장소도 없이 세계는 영원히 생성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회귀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 최고의 무의미함을 견딜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 운명애(運命愛): 아무리 가혹한 인생이 여러 번 되풀이되어도 ‘이것이 인생이었던가. 좋아, 다시 한 번.’하고 결의를 다지는 긍정적인 태도.

* 권력의지: 염세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에 대한 대안으로 만들어 낸 말. 쇼펜하우어는 ‘생의 의지’를 생에는 고통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모든 존재들은 계속 생을 유지하려는 자기 보존의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사용했다. 니체는 ‘생의 의지’와 연관된 염세주의에 반대하면서, 생을 ‘권력의지’, 즉 세계에 반작용하기보다는 세계에 작용을 가하는 생명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열렬한 충동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말로 바꾸자면, ‘권력’보다는 ‘능력’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 르상티망 [ressentiment] : 인간 본성의 비합리적 측면, 특히 격정(激情)의 구실을 중시한 니체는 권력의지에 의해 촉발된 강자의 공격욕구에 대한 약자의 격정을 복수감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말을 빌면, 그리스도교의 ‘사랑’도 사실은 증오감 ·복수감의 숨겨진 정신적 태도에 지나지 않으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실천력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것을 상상(想像)의 복수로 갚는 인종(忍從)과 관용(寬容)의 모럴에 지나지 않는다.

* 관점주의[perspectivism] : 지식이 항상 특정한 관점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태도이다. 즉 순수한 지각은 존재하지 않으며, 관점 없는 지식이란 특정한 관점 없이 본다는 것만큼이나 모순적이다. 관점주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관점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관점이란 대상을 가능한 모든 관점에서 본다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4. 주요 구절과 해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들여다보기

(1)신은 죽었다.

신은 어디로 갔는가? 내가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우리 모두는 신의 살해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어떻게 우리가 대양을 마셔버릴 수 있었을까? 누가 우리에게 모든 지평선을 지워버릴 스펀지를 주었는가? 태양으로부터 이 지구를 풀어놓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지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모든 태양으로부터 떠나가는가? 우리는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광인의 울부짖음은 사람들이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밝은 대낮에 등불을 든 웬 ‘미친놈’이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거라 생각했다. 광인은 들고 있던 등불을 내동댕이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계속 중이며 방황 중이다. 그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번개와 천둥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필요하다.

저 밤하늘에 보이는 별빛이 수천 년 전이 것이었듯이 ‘신의 죽음’도 전달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 인간에게 신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생각해보면 신의 죽음에 훨씬 많은 의미가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만물은 신에 의해서 그 존재를 보장받으며, 그 가치는 신이 뜻에 비추어서 평가된다. 다시 말해서 신은 만물이 존재하는 토대이고 그 가치의 기준이다. 그래서 광인은 신의 죽음으로 지평선이 지워졌으며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하늘과 땅을 나누는 경계선이 지워지고, 지구로 하여금 안정적으로 공전하도록 단단히 붙들어 주고 있던 태양이 사라져 버렸다. 이때의 신이 죽음은 만물을 존재하게 해주는 어떤 초월적 실체의 사라짐이자, 선악(善惡)이나 미추(美醜)를 판단케 해주는 절대적 가치 기준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지상에 아직도 경배할 것이 있다는 사실에 나의 늙은 마음은 기뻐 날뛴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늙고 경건한 교황의 이 심정을 용서하라!

– 나귀를 숭상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그가 그렇게 기쁨으로 들떴던 이유. 그것은 바로 신앙이다. 신은 죽었지만 신앙이 남았다. 남아 있는 신앙은 계속 경배할 대상을 찾는다. 그것이 나귀이면 어떻게 금송아지면 어떻겠는가. 니체는 신보다 신앙이 더 오래된 것이고 더 오래갈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던 것 같다. 신이 있기 때문에 신앙이 생긴 게 아니라 신앙 때문에 신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2) 너희는 너희의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시장은 화폐가 풍기는 악취를 따라 사람들이 파리 떼처럼 꼬이는 곳이다. 예로부터 새로운 가치의 발명자들은 시장과 명성으로부터 떨어져서 살았다. 모든 위대한 것들은 시장과 명성으로부터 떨어진 곳에서 생겨난다.

–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곳이 시장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시장은 오늘날 가치가 규정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치는 얼마나 많은 화폐와 교환될 수 있느냐를 의미한다. 원래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 시장에서 비싼 값을 받는 것이 아니라 비싼 값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고귀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왜 그것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부를 축적하지만 그들은 점점 가난해진다. 그들은 권력을 원하며 그 무엇보다도 먼저 권력의 지렛대인 돈을 원한다. 이들 잽싼 원숭이들이 어떻게 기어오르는가를 보라! 그들은 앞을 다투어 남을 타고 넘어 기어오르다가 모두 진흙과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들은 모두 왕좌에 오르려고 한다. 마치 행복이 그 왕좌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들 모두는 미치광이들이요, 기어오르는 원숭이들이자 너무도 격렬한 자들이다. 여기에서는 악취가 난다.

– 시장을 통해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한결같다. 그들은 똑같은 행복을 얻고자 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더 많은 화폐를 얻는 것이다. 화폐가 모든 가치의 척도이므로 더 많은 화폐를 얻는 것이 곧 더 많은 가치를 얻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그들은 삶의 목표를 정하지도 못하며,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배자들이 오늘날 무엇을 두고 지배라고 부르는지를 보고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귀가 먹고 눈이 먼, 그리고 벙어리가 된 불구자처럼 살아왔다. 그것은 권력을 추구하는 천민들, 글이나 갈겨쓰는 천민들, 그리고 쾌락이나 쫓는 천민들과 함께 살지 않기 위해서였다.

– 니체 철학이 전제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나 노예들을 부려먹으며 안락한 생활을 누린 귀족들을 정당화해 준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믿기지는 않지만 상당수의 학자들이 그런 말을 자신의 철학적 교양을 뽐내는 양 하고 있다. 그러나 니체는 강자나 귀족에 대한 자신의 언급이 오해되는 것을 보며, 말을 이해 못하는 “얼간이들을 위해 내가 말하는 귀족들은 귀족명부에나 나오는 그런 귀족들이 아님을 밝혀둔다.”고 했다. 그는 ‘귀족’이니 ‘주인’이니 하는 말에 전혀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말하는 강자나 귀족의 유형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오늘날의 지배자들은 결코 강자도 귀족도 아니며, 권력과 자본의 노예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3) 사랑을 가르친다, 벗을 가르친다.

너희의 결혼. 나쁜 결합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희들은 너무 빨리 맺는다. 그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결혼 파기가 뒤따르는 것이다. 결혼에서의 왜곡이나 사기보다는 결혼 파괴가 낫다! “나는 나의 결혼을 파괴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결혼이 나를 파괴했다.”고 내게 말하는 여인이 있었다.

– 사람들은 결혼을 사랑의 결실처럼 말한다. 그러나 여러분들도 사랑을 변질시킨 결혼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으리라. 차라투스트라는 결혼의 위험성을 자주 환기시켰다. 언젠가 니체는 바그너의 작품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에 대해서 대단한 분노를 표시한 적이 있다. 바그너는 결혼의 구속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결혼이 방랑자를 구원한 사랑이라도 되는 양 표현했다. 한 여성이 그 방랑자를 숭배하고 사모해서 결혼하는 것을 보고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결혼은 무엇을 가져왔는가? 방랑자가 방랑하기를 멈춘 것이다. 바그너는 그것을 구원이라 했지만, 사실 그는 파멸한 것이다.” 결혼이 긍정적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때의 사랑이 훨씬 풍만한 것이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좋은 결혼을 “본인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 하나를 산출하기 위해 짝을 이루려는 두 사람의 의지”이며, “더욱 높은 신체를 창조하는, 창조하는 자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때 출산된 아이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창조물이면서 동시에 변신된 그들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결혼을 통해 그들은 새롭게 태어나야한다. 그들 자신이 그들의 아이여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능력의 확장이며 새로운 변신이다. 좋은 결혼은 서로를 좋은 친구로서 계속 사랑하게 한다. 그러나 보통의 결혼은 이와는 정반대다.

많은 너무도 많은 자들이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 아, 그것을 나는 어떻게 부를까? 아, 짝을 이루고 싶어 하는 영혼의 궁핍함이여! 아, 짝을 이루고 싶어 하는 영혼의 더러움이여! 아, 짝을 이루고 싶어 하는 영혼의 가엾은 안일함이여!

– 무언가 서로에게 줄 것이 있어, 자신에게 넘쳐나는 것이 있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받고 싶은 것이 있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어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결혼이다. 풍성한 토양에서 자라는 사랑의 식물은 서로를 선물하는 친구로 만들어주지만,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는 사랑의 식물은 상대방을 구속하는 가시 울타리로 자라난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견디어내지 못하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너희들은 너희의 이웃을 유혹하여 사랑하도록 만들고, 그들의 과오로 자신을 미화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예찬하려 할 때 증인을 끌어들인다. 너희들에 대해 좋게 생각하도록 그 증인을 유도하고 나서 너희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찾기 위해, 어떤 이는 자신을 잊기 위해 이웃에게 달려간다.

– 기독교의 가르침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이웃 사랑에 대한 가르침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그 타인 지향적인 헌신의 정체를 꿰뚫어라”고 말한다. 이웃 사랑에는 항상 주변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고 주변과 결탁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다 보니 “다섯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면 여섯 번째 사람은 항상 매장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먼 이웃을 ‘왕따’시키는 것이 이웃 사랑의 위험이다. 그렇게 패거리를 짜고 군중을 형성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고독을 선택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히려 이웃에 등을 돌리고,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권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숭고한 것은 먼 곳에 있는 사람과 앞으로 오게 될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너는 그(차라투스트라)가 진리를 말했다고 믿는가? 너는 왜 그것을 믿는가?” 그 제자가 답했다. “나는 차라투스트라를 믿습니다.” 그러자 차라투스트라는 머리를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믿음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나에 대한 믿음은.”

– 차라투스트라가 가르침을 펴다보니 어느덧 자신을 사랑한다고 따라다니는 ‘팬클럽’이 생겨났다. 차라투스트라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추종 세력들이 나타난 것이다. 신앙을 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신도들처럼, 차라투스트라의 제자들도 그에 대한 사랑을 신앙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란 사랑이 아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결코 우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상을 사랑하려거든 우상을 파괴하라. 차라투스트라가 신에 대한 사랑으로 말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는 신의 죽음을 신에 대한 사랑으로 바치지 않았던가.

나의 제자들이여, 이제 나 홀로 나의 길을 가련다. 너희들도 이제 한 사람 한 사람 제 갈 길을 가라! 내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진실로 너희들에게 권하거니와 나를 떠나라.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에 저항하여 스스로를 지켜라. 더 바람직한 일은 차라투스트라의 존재를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그가 너희들을 속였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선생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내가 쓰고 있는 월계관을 낚아채려 하지 않는가? 너희들은 나를 숭배한다. 그러나…… 신상에 깔려 죽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너희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믿고 있다고 말하려하는가? 그러나 차라투스트라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너희들은 나의 신자다. 그러나 신자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너희들에게 명하노니 이제 나를 버리고 자신을 찾도록 하라. 너희가 모두 나를 부인하고 나서야 나는 다시 너희들에게 돌아오리라. 언젠가 너희들은 나의 벗이 되어야 하고 새로운 희망의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 차라투스트라를 믿으려거든 차라투스트라를 의심하라. 차라투스트라를 따르려거든 먼저 그에게서 떠나라. 차라투스트라가 구하는 것은 신도가 아니라 친구이다.

나는 친구가 친구에게 베풀 듯 즐겨 베푼다. 낯선 사람들과 가난한 사라들은 내 나무에 달려 있는 열매를 직접 따도 좋다. 그들은 덜 부끄러울 것이다. 다만 거지만은 남김없이 몰아내라! 참으로 그들에게는 줘도 화가 나고 주지 않아도 화가 난다.

–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연민의 정이 깊은 자’로 부리는 것을 싫어했다. 그가 신의 죽음이라는 선물을 들고 온 이유도 결코 인간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연민을 느껴 인간을 구원하려 온 자가 아니다. 그는 어느 날 제 몸에서 일어난 충일함을 못 이겨, 저 하늘에 뜬 태양처럼 제 것을 저 모든 것들에게 내놓기 위해 선물을 들고 온 자였다. 왜 연민이문제일까? 연민이나 동정은 그것을 받는 자를 비참하게 만든다. 물론 그런 몹쓸 짓을 하고도 창피한 줄 모르는 박애주의자들이 널려 있고, 그런 몹쓸 짓을 당하고도 여전히 손을 내미는 빈곤한 영혼들이 널려있다. 연민이나 동정을 보이는 자는 친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지를 만든다. 위대한 사랑은 그 자신이 사랑할 친구들 창조한다. 선물은 군주도, 노예도, 거지도 만들지 않으며 오직 친구를 만든다. 그것이 위대한 사랑을 창조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벗에 대해 가르치며, “벗을 원한다면 그를 위해서 기꺼이 전쟁을 일으킬 각오라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 벗을 사랑한다면 벗과의 전쟁을 통해 그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선물은 못난이들을 동정하는데 쓰이는 게 아니라 파괴하는 데 쓰인다. 못난이들이 완전히 새로운 자들로 거듭날 수 있도록 그들을 공격한다. 친구가 된다는 건 그 진리를 섬기는 일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하는 일이다.

(4) 삶을 사랑하라

“생은 고통일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자들도 있는데, 거짓말이 아니다. 자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너희들은 이제 끝내도록 하라! 고통에 불과한 생을 끝내도록 하라! 곳곳에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그리고 이 대지는 죽음의 설교를 들어야 하는 자들로 가득 차 있다. 아니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설교를 들어야 하는 자들로. 아무래도 좋다. 그런 자들이 저편의 세계로 서둘러 떠나버리기만 한다면야!

– 차라투스트라는 죽음의 설교자들을 ‘결핵에 걸린 영혼을 가진 자들’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떠나 가상 세계를 창안하고 그곳에 확실하고 영원한 진리를 두는 것도 미친 짓이고, 가상 세계에서 이루어질 끔찍한 보복을 상상하며 이 세계를 견디는 것도 미친 짓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이 자신들의 소원대로 빨리 이 세상을 뜨기를 바란다.

창조하는 자가 있기 위해서는 고통이 있어야 하며 많은 변신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창조하는 자들이여. 너희들의 삶에는 쓰디쓴 죽음이 허다하게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너희들은 덧없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정당화하는 사람이 된다. 창조하는 자 스스로 다시 태어날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산모가 되어야 하고 산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 니체는 삶에 대한 사랑을 운명애라고 불렀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도 아니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을 아름답게 창조해 주는 것이다. 물론 그 창조에는 고통이 따른다. 이 같은 삶에 대한 사랑은 종종 크나큰 범죄 행위로 비난받는다. 차라투스트라가 ‘선하고 의로운 자’들로부터 비난받듯이, 죄의식과 낡은 습속들로부터 삶을 해방하는 과정은 사악한 범죄 행위처럼 취급된다. 그러나 사랑의 의미를 알고 있는 자는 그의 망치가 파괴 도구이기 이전에 창조의 도구이고 사랑의 도구임을 알고 있다.

(5) 새로운 우상인 국가를 조심하라

국가가 어떻게 이들 많은, 너무나도 많은 이들을 꼬드기는지를 보라! 어떻게 국가가 그들은 삼켜서 씹고 되씹는지를! “이 땅에서 나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나는 질서를 부여하는 신의 손가락이다.” 국가라는 괴물은 이렇게 외쳐댄다. 순진하고 귀가 얇은 자와 근시안인 자만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다! (많은 영웅들도 무릎을 꿇었다.)

– 국가는 마치 그 스스로가 보편적 선이고 정의인 양 행세한다. 실레로는 특정한 계층, 특정한 계급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혹은 그 스스로가 특정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사회로부터 초연한 양 거드름을 피운다. 근대 국가는 중세처럼 종교와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지는 않다. 낡은 신에 대한 믿음이 위태로워지자 근대 국가는 교회에서 발을 빼버렸지만 국가가 자신을 감싸주었던 신성한 베일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는 여전히 자신을 신의 대리자인 것처럼 나타낸다. 교회가 사람들을 전쟁터로 내몰면서 ‘신을 위한 성전’이라 말하듯이, 국가 역시 자신을 위해 죽는 것이 얼마나 영예로운 일인가를 설득한다. 수많은 전사들과 영웅들이 국가의 말에 속아 자기 목숨을 바쳤고, 국가는 이들을 활용해서 애국을 광고해댔다.

(6) 순수한 인식을 꿈꾸는 자들은 음탕하다.

학자들은 아직도 서늘한 그늘 아래 시원하게 앉아 있다. 그들은 무슨 일에서나 관망자로 남기를 원한다. 그리고 태양이 작열하는 뜨거운 계단 위에는 앉지 않으려고 몸을 사린다. 길가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우두커니 바로보고 있는 자들처럼, 그들 또한 기다리며, 다른 이들이 생각해낸 사상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섰다. 그들의 복잡함 앞에 내 단순함은 이야깃거리도 안 되겠군! 그들의 손가락은 실을 꿰는 법, 뜨개질하는 법, 천 짜는 법까지 알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정신이라는 양말을 뜨고 있는 것이다. –

– 하나의 객관적인 규칙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문제라면 학자는 ‘양말 제조공’과도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양말이 정신적인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학자들이 내뱉는 복잡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그 놀라운 직조 기술에 감탄한다. 자기 개념, 자기 가치를 생성시키지 못한 채 정해진 사유체계를 따라가는 학자들은 ‘감아진 대로 풀리며 돌아가는 시계태엽’이나 ‘낟알을 던져 주면 하얀 가루로 만들어 주는 맷돌’과 같다. 비록 그들이 정말 열심히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일을 수행한다고 해도 그것은 훌륭한 시계태엽이나 훌륭한 맷돌로서 그런 것일 뿐이다.

(7) 인간만큼 큰 귀를 보았다.

누군가가 현대인들의 베일과 덧옷, 분칠과 거동을 벗겨버린다면, 너희에게 남는 것이란 겨우 새들이나 놀라게 할 정도의 것에 지나지 않으리라. 내 자신으로 말하자면, 나는 참으로 아무 치장도 하지 않은 너희들의 알몸을 보고 놀란 새다. 뼈만 앙상한 것들이 내게 유혹의 눈길을 보내자 나는 그곳에서 도망치고 만 것이다. 현대인들이여, 알몸이든 옷을 입었든 간에 나는 너희들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 차라투스트라는 제 것도 아닌 잡동사니들을 긁어모아 폼을 잡고 있는 모델들이 역겨웠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에겐 가슴을 펴고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든 현대인의 포즈가 위선으로만 보였다. 다시 차라투스트라에게 물어보았다.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지식을 모은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차라투스트라가 답했다. 박식함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긁어모은 지식들 모두가 그들의 것이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 스스로 자신의 앎을 창조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나는 보았다. 이 사람에게는 눈이 하나 없고, 저 사람에게는 귀가 하나 없으며, 또 다른 사람에게는 다리가 없다는 것을, 거기에다 혀나 코나 머리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이런 것들은 내가 사람들과 지내면서 본 것 가운데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것들이다. 나는 훨씬 더 고약한 것들도 보았는데, 그것들 중 많은 것들이 너무나도 역겨워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이를테면 하나를 너무 많이 가진 대신에 그 밖에 다른 것은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이 있다. 이런 자들은 그저 하나의 커다란 눈이거나 커다란 주둥이거나 커다란 배 아니면 또 다른 커다란 어떤 것일 뿐이다. 나는 이런 자들을 일컬어 전도된 불구자라 부른다.

– 차라투스트라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을 ‘인간만큼 거대한 귀’로 표현한 것이다. 무언가 한 가지 능력만 있는 사람들, 그래서 누구는 귀로, 누구는 입으로 알려졌으며, 누구는 눈으로, 누구는 다리로 전문가가 되었다. 물론 전문적으로 한 가지를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데 있는 게 아니라 대부분의 것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한 가지 능력만 키우느라 여러 가지 능력을 퇴화시킨 것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8)춤추고 웃는 법을 배워라

나는 하늘을 날아갈 준비를 하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나의 천성이 이러한데 어찌 그것이 새의 천성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나는 중력의 영에 적의를 품고 있는데, 그것만 보아도 새의 천성이 분명하다. 나는 진정 중력의 영에 대해 불구대천의 적의와 으뜸가는 적의, 그리고 뿌리 깊은 적의를 품고 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내 알아차렸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가르치려는 비행술의 대단한 적대자가 있음을. 새처럼 가벼워지려는 몸을 천근만근의 무게로 잡아당기고 있는 자가 있음을. 그것은 바로 ‘중력의 영’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날개가 생겨난 이들에게 기대를 건다. 물론 날개가 있다고 해서 바로 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 시대 자기 삶에 대한 거부만으로는 결코 날 수가 없다. 부정과 거부는 여전히 무거운 자들의 정신이다. 중력의 영은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중력의 영이 던진 그물에 걸리면 부정과 거부는 금세 반동이나 허무로 돌변할 수 있다. 이제 막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한 이들이 꼭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이 이것이다.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 도약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 삶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기 삶을 아름답게 창조할 수 있다. 자기 삶을 부정하는 자는 탈주할 때 고통의 비명이나 분노의 울분을 토한다.

나는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그리고 내가 나의 악마를 보았을 때 나는 그 악마가 엄숙하며, 심오하며, 장중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중력의 영’이다. 그로 인해 모든 사물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람들은 분노가 아닌 웃음으로 죽인다. 자, ‘중력의 영’을 죽이지 않겠는가.

– 처음부터 나는 법을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서는 법, 걷는 법, 달리는 법, 기어오르는 법, 춤추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고 환하게 웃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법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강의는 ‘웃는 법’과 ‘춤추는 법’에서 시작된다. 심각해선 안 된다. 무거워선 안 된다. 웃고 또 웃어라. 춤추고 또 춤춰라. 그것이야말로 중력의 영을 죽이는 일이다.

(9)세상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들의 탁자다.

“너 지혜의 돌이여! 너는 너 자신을 높이 던졌지만 그러나 모든 던져진 돌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차라투스트라여 너는 정말로 돌을 멀리 던졌지만 그 돌은 네 위로 다시 떨어지리라.” 난쟁이는 이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오르고 또 올랐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몹쓸 병에 지쳐 있는 병자와 같았다……. 내게는 용기라 부르는 것이 있다. 용기는 심연에서 느끼는 현기증까지 없앤다. 사람이 있는 곳 치고 심연이 아닌 곳이 있던가!…… 용기는 최상의 살해자다. 그것도 공격적인 용기는. “그런 게 생이던가? 좋아! 그렇다면 다시 한 번!”

– 난쟁이 이야기 요지는 이런 것이다. 아무리 주사위 던져봐라! 그것은 똑같은 것만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괜히 무언가 새로운 것이 생겨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던져봐야 네 몸만 상할 뿐이다. 난쟁이가 말하는 동일한 반복, 그것은 법칙이면서 동시에 구속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다행히 그에게는 용기가 있었다. 그는 단순 무식하게 난쟁이에게 덤벼들었다. 완전히 배수진을 친 것이다. 사람 사는 곳 치고 고통이 없는 곳이 있던가!

생이 그런 거라면 뭐 손해 볼 것 없다! 또 던지겠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태도뿐이었다면 차라투스트라 역시 쉽게 지쳤을 것이다. 주사위 던지기가 놀이가 아니고 반복되는 노동 같은 것이었다면 그 용기도 언젠가는 시들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웃음과 춤을 배울 때처럼 주사위 던지기의 의미 역시 깨우치기 시작했다. 춤을 추면서 더 잘 추게 되고, 웃음을 웃으면서 더 잘 웃게 되듯이, 그의 주사위는 매번 더 높이 던져졌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지금 올라가는 주사위의 성공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관심 밖이다. 실해하면 또 하면 되니까…….

(10) 위버멘쉬를 가르친다.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너희들에게 내 방식의 죽음을 권한다. 내가 원할 때 찾아오는 자유로운 죽음 말이다……. 가장 맛이 들었을 때에도 남에게 계속 맛을 보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 오랫동안 사랑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신 맛을 내는, 그리하여 마지막 가을날까지 기다려야 하는 운명을 지난 시과도 있다. 그런 사과는 무르익자마자 노랗게 변색되고 주름투성이가 된다.

– 인간들은 인간적인 것에 대한 경멸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데 주저했다. 그들은 인간적인 것을 비웃은 것까지만 할 뿐 막상 그것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것에 대한 넘어섬은 역시 인간인 자신들까지 넘어서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변신이라는 불확실한 과정에 자신을 내맡기기보다는 뭔가 의지할 것을 찾음으로써 자신을 보존하고 지탱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들과 다른 길을 택했다. 차라투스트라의 자기 삶에 대한 긍정은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극복’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오늘의 나’를 죽여야 ‘내일의 나’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풋과일들만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나뭇가지에 매달린다. 모든 익은 것들은 집착을 버리고 떨어진다. 그것이 더 많은 생명들의 탄생임을 알기 때문이다.

5. 니체의 책들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목차

(1)니체의 책들

비극의 탄생, 음악 정신의 기원 – 1872년

(The Birth of Tragedy, Out of the Spirit of Music)

반시대적 고찰 (총 4부로 구성)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 1873년

(David Strauss, the Confessor and the Writer)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 1874년

(On the Uses and Disadvantages of History for Life)

교육자로서 쇼펜하우어 – 1874년

(Schopenhauer as Educator)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 – 1876년

(Richard Wagner in Bayreuth)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유정신을 위한 책 – 1878년

(Human, All to Human, A Book for Free Spirits)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Ⅱ – 1879년

(Human, All to HumanⅡ)

서광, 도덕의 편견들에 대한 사유 – 1881년

(Daybreak, Thoughts on the Prejudices of Morality)

즐거운 지식 (The Gay Science) – 1882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모두를 위한 책이면서 그 누구도 위한 것이 아닌 책

(Thus Spoke Zarathustra, A Book for All and None) – 1885년

선악을 넘어서, 미래 철학을 위한 서곡 – 1886년

(Beyond Good and Evil, Prelude to a Philosophy of Future)

도덕의 계보학, 하나의 논쟁 – 1887년

(On the Genealogy of Morals , A Polemic)

바그너의 경우: 한 음악가의 문제 – 1888년

(The Case of Wagner: A Musician’s Problem)

우상의 황혼, 혹은 망치 들고 철학하는 법 – 1889년

(Twilight of the Idols, or How One Philosophizes with a Hammer)

반그리스도 (The Antichrist) – 1895년(집필은 1888년)

니체 대 바그너: 한 심리학자이 파일들로부터 – 1895년(집필은 1888년)

(Nietzsche contra Wagner : Out of the Files of a Psychologist)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어떻게 지금의 나 자신이 되었는가 – 1908년(집필은 1888년)

(Ecce Homo, How One Becomes What One is)

권력의지 (The Will to Power) – 니체 사후 출간 (1882~1888년 집필

(2)『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목차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제1부

세 가지 변신에 대하여/ 덕의 교사에 대하여/ 저편의 또 다른 세계를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희열과 열정에 대하여/ 창백한 범죄자에 대하여/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산허리에 있는 나무에 대하여/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하여/ 전쟁과 전사들에 대하여/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시장터의 파리들에 대하여/ 순결에 대하여/ 벗에 대하여/ 천 개의 목표와 하나의 목표에 대하여/ 이웃 사랑에 대하여/ 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에 대하여/ 살무사에 물린 상처에 대하여/ 아이와 결혼에 대하여/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

제2부

거울을 갖고 있는 아이/ 행복의 섬에서/ 연민의 정이 깊은 자에 대하여/ 성직자에 대하여/ 도덕군자에 대하여/ 천민들에 대하여/ 타란툴라에 대하여/ 이름 높은 현자에 대하여/ 밤의 노래/ 춤에 부친 노래/ 만가(輓歌)/ 자기극복에 대하여/ 고매한 자에 대하여/ 교양의 나라에 대하여/ 순수한 인식에 대하여/ 학자들에 대하여/ 시인에 대하여/ 크나큰 사건에 대하여/ 예언자/ 구제에 대하여/ 처세를 위한 책략에 대하여/ 더없이 고요한 시간

제3부

방랑자/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뜻에 거슬리는 행복에 대하여/ 해뜨기 전에/ 왜소하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감람산에서/ 그냥 지나쳐 가기에 대하여/ 배신자에 대하여/ 귀향/ 세 개의 악덕에 대하여/ 중력의 영에 대하여/ 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 위대한 동경에 대하여/ 춤에 부친 또 다른 노래/ 일곱 개의 봉인

제4부

꿀 봉납/ 구조를 간청하는 외침/ 왕들과의 대화/ 거머리/ 마술사/ 실직/ 가장 추악한 인간/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 자/ 그림자/ 정오에/ 환영인사/ 만찬/ 보다 높은 인간들에 대하여/ 우수의 노래/ 과학에 대하여/ 사막의 딸들 틈에서/ 각성/ 나귀제/ 명정의 노래/ 신호

7. 참고 서적

『하룻밤에 읽는 서양 사상』 토마스 아키나리 지음 (오근영 옮김) 2003

『한 권으로 읽는 니체』 로버트 솔로몬, 캐슬린 하긴스 지음 (고병권 옮김) 2001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병권 지음 2003

자료정리:장광익 [email protected]

출처: SPR 경영연구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 요약 및 서평

1. 작가소개

–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5살 때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나움부르크로 이사하였다.

포르타 김나지움 시절에는 음악과 그리스·로마 문화에 심취하였고, 1864년 본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古典文獻學)을 배웠으나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시절 동안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고, 바그너와 음악을 통해 깊은 관계를 맺었다.

69년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스승 리츨의 추천을 받아 스위스 바젤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지자 위생병으로 종군하였으나 병에 걸려 제대한 뒤 평생 병고에 시달리는 몸이 되었다. 당시 유명한 작곡자로 알려졌던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했으며, 특히 비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를 듣고 매혹된 나머지 처녀작인 <비극(悲劇)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die, 1872)>을 저술하였다.

이 저서는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비극의 정신이 진실한 문화창조의 원천임을 인식하고, <아폴론형>과 <디오니소스형>의 두 가지 원리로 그리스비극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그 정신을 현대에서 부흥시킨 것이 바그너의 음악임을 논하여 그의 신예술운동을 지원하려 하였다. 뒤이어 발행된 <반(反)시대적 고찰 (Unzeitgemsse Betrachtungen, 1873-76)> 4편은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는 독일 국민과 문화에 통렬한 비난을 가하는 한편 유럽문화에 대한 회의를 나타내고 천재(天才)를 위대한 창조자로서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1편은 헤겔학파의 신학자 슈트라우스의 <교양(敎養)을 가진 속물(俗物)>에 대한 공격으로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2편은 역사를 기념비적·골동품적·비판적인 3종류로 구분한 역사주의에 대한 비평이었다.

3편은 쇼펜하우어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니체 자신의 실존적 결의의 표명이기도 하다.

4편은 바그너가 바이로이트에서 공연한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에 관한 찬사이다. 그러나 이 저술을 계기로 바그너와 절교하였으며, 이리하여 천재적인 재질에 의하여 새로운 게르만적 헬레니즘문화를 세우려고 한 낭만적 이상은 무너졌다.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79년 대학에서 퇴직하고 알프스산과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해변을 전전하는 투병생활을 하면서 사색을 계속하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1878-80)> <서광 (Morgenrte, 1881)> <기쁜 지혜 (Die frhliche Wihssenschaft, 1882)>등을 저술하였다.

이 저서들은 잠언(箴言)과 사상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속에서 종래의 낭만주의를 파괴하고 실증주의적·심리적 요소를 드러내고 있다. 83-85년에 걸쳐서는 전에 알프스 산중에서 깨달은 <영겁회귀> 사상을 기반으로 한 <초인(超人)>의 이상을 그린 철학적 서사시인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1883-91)>를 저술하였다.

이 저서에 니체의 사상이 상징적으로 모두 표현되고 있으나, 이 추상성에 불만을 품고 구체적 논문 식으로 해설한 <선악(善惡)의 피안 (Jenseits von Gut und Bse, 1886)>을 저술하였다.

이 저술에서는 고귀한 정신적 귀족의 육성을 주장하고 장래의 위대한 입법자를 암시하는 한편 퇴폐적인 근대의 여러 현상과 단순히 객관에만 치우치고 있는 과학정신, 동정(同情)에 기반을 두었다는 그리스도교적 도덕, 역사의식의 과잉 등을 예리하고 독특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 후 <도덕계보 (Zur Genealogie der Moral, 1887)>가 유럽 윤리사상의 비판서로서 출판되었으며, 이때 이미 <권력에의 의지 (Der Wille zur Macht)>가 준비되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사망 후에 유고(遺稿)만이 수집되어 출판되었다.

88년에는 <바그너의 경우> <우상(偶像)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 <안티 그리스도> <니체와 바그너>등이 저술되었다. 그 중 <이 사람을 보라>는 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89년 1월 정신착란 증세에 빠져 바이마르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동생의 간호 아래 여생을 보냈다.

니체는 근대유럽의 정신적 위기를, 일체의 의미와 가치의 근원인 그리스도교적 신의 죽음, 즉 <신은 죽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 단정하고, 여기에서 발생한 사상적 공백상태를 새로운 가치창조에 의해 전환시켜 사상적 충실을 기했다. 이리하여 신 대신 초인을, 불멸의 영혼 대신 영겁회귀를, 선(善)과 참(眞) 대신 권력에의 의지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쁨 대신에 심연(深淵)을 거쳐서 웃는 인간의 내재적(內在的) 삶으로 가치를 전환시켰다.

‘신의 죽음’과 그에 따른 모든 전통가치의 상실을 선포했다. 그는 유일하게 지지받을 수 있는 인간의 반응은 허무주의적 반응, 즉 신이 없음이며, 삶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문제에는 답이 없다고 주장했다. 니체에 따르면, 신의 죽음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자신을 완성하며 그 본질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원숙한 문장과 함께 주로 문학자들에 의해 높은 평가를 받았고, 시대 변천과 함께 사상적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날의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그들의 선구자로 불리게 되었다.

2. 줄거리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훑어보기

차라투스트라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머물렀던 동굴은 아주 높은 곳에 있다. 그곳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보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한 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높다. 깨달음의 장소인 동굴의 높이가 이렇게 높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높이에서 세상을 본다는 의미가 있다. 그의 동굴은 또한 용감하고 긍지를 가진 동물인 독수리의 둥지를 닮았다. 독수리가 절벽 높은 곳에 둥지를 틀어 지상이 동물들이 자기 둥지를 침탈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은 지상의 악덕들이 쉽게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아주 높은 곳에 위치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내력을 설명하면서 이 책의 핵심 개념과 형식들이 아주 높은 바위에서 떠올랐기 때문에 “인간과 시간을 초월한 6천 피트”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동굴의 높이만큼이나 깊은 곳을 향해서도 여행을 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별들까지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이”만이 아니라 더없이 깊은 계곡과 물속도 들어가 봐야 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을 살펴보면 이러한 높이와 깊이가 반복적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그는 고도를 바꾸는 것에 익숙한 여행자다. 처음에 그는 높은 동굴에서 하산해 ‘얼룩소’라는 도시에 도달한다. 제1부는 ‘얼룩소’라는 도시에서 펼친 가르침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제2부에서 복음을 전하러 왔다가 비웃음만 산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높은 곳에 있는 자신의 동굴로 돌아간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내공이 더욱 커진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벗들을 찾기 위해 하산을 시작한다. 이번에 그가 향한 곳은 ‘행복의 섬’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지복의 섬은 그리스의 영웅들이 죽으면 간다는 낙원이다.) 섬에서 많은 경험을 한 차라투스트라. 그러나 제3부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스스로의 성숙을 위해 고독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벗들을 떠나 동굴로 돌아가려 한다. 그는 섬에서 나와 배를 타고 육지에 오른 후 감람산을 거치고 도시를 지나서 다시 자신이 동굴로 올라온다. 그리고 동굴 속에서 깊은 수련에 들어간다. 제4부에서 그는 다시 한 번 하산과 등정을 반복한다. 물론 이것은 앞서 이루어진 두 번의 하산과 등정 보다는 작은 규모이다. 동굴 속에서 위버멘쉬로의 변신이 임박했을 때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인간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 산 아래 쪽으로 내려갔다가 그들을 모두 동굴로 데리고 올라온다.

『차라투스트라』에 나타난 하강과 상승의 반복은 영원회귀의 반복과도 관련이 있다. 반복이라는 형식 자체는 동일해 보이지만 반복이 있을 때마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차이가 나타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반복을 거칠 때마다 건강한 신체로 변해간다. 또 하강과 상승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게 된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것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음을 의미하며, 세계를 여러 가지 시각에서 통찰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3. 주요 개념 정리

* 초인(超人 ubermensch) = superman : 인간이 초극(超克)화 된 모습. 인류의 목표가 없어진 다음에 나타나는 그에 대신할 최고의 가치로서의 이상. 초인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미래의 개념이다.

* 니힐리즘 : 라틴어의 ‘무(無)’를 의미하는 니힐(nihil)이 그 어원으로, 허무주의를 이르는 말

하지만, 니체의 ‘니힐리즘’은 일반적 의미의 니힐리즘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라는 입장에서 삶의 가치를 부정하고 권력을 쇠퇴시키는 그리스도교 도덕이나 불교 도덕을 수동적 니힐리즘이라고 하여 배척하고, 삶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 기성가치의 전도(顚倒)를 지향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을 제창하였다.

* 영겁회귀 : 니힐리즘의 최고 형태. 무한한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유한한 물질이 서로 만나 똑같은 현상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 지향해야 할 목표도 도달할 장소도 없이 세계는 영원히 생성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회귀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 최고의 무의미함을 견딜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 운명애(運命愛): 아무리 가혹한 인생이 여러 번 되풀이되어도 ‘이것이 인생이었던가. 좋아, 다시 한 번.’하고 결의를 다지는 긍정적인 태도.

* 권력의지: 염세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에 대한 대안으로 만들어 낸 말. 쇼펜하우어는 ‘생의 의지’를 생에는 고통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모든 존재들은 계속 생을 유지하려는 자기 보존의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사용했다. 니체는 ‘생의 의지’와 연관된 염세주의에 반대하면서, 생을 ‘권력의지’, 즉 세계에 반작용하기보다는 세계에 작용을 가하는 생명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열렬한 충동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말로 바꾸자면, ‘권력’보다는 ‘능력’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 르상티망 [ressentiment] : 인간 본성의 비합리적 측면, 특히 격정(激情)의 구실을 중시한 니체는 권력의지에 의해 촉발된 강자의 공격욕구에 대한 약자의 격정을 복수감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말을 빌면, 그리스도교의 ‘사랑’도 사실은 증오감 ·복수감의 숨겨진 정신적 태도에 지나지 않으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실천력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것을 상상(想像)의 복수로 갚는 인종(忍從)과 관용(寬容)의 모럴에 지나지 않는다.

* 관점주의[perspectivism] : 지식이 항상 특정한 관점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태도이다. 즉 순수한 지각은 존재하지 않으며, 관점 없는 지식이란 특정한 관점 없이 본다는 것만큼이나 모순적이다. 관점주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관점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관점이란 대상을 가능한 모든 관점에서 본다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4. 주요 구절과 해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들여다보기

(1)신은 죽었다.

신은 어디로 갔는가? 내가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우리 모두는 신의 살해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어떻게 우리가 대양을 마셔버릴 수 있었을까? 누가 우리에게 모든 지평선을 지워버릴 스펀지를 주었는가? 태양으로부터 이 지구를 풀어놓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지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모든 태양으로부터 떠나가는가? 우리는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광인의 울부짖음은 사람들이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밝은 대낮에 등불을 든 웬 ‘미친놈’이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거라 생각했다. 광인은 들고 있던 등불을 내동댕이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계속 중이며 방황 중이다. 그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번개와 천둥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필요하다.

저 밤하늘에 보이는 별빛이 수천 년 전이 것이었듯이 ‘신의 죽음’도 전달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 인간에게 신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생각해보면 신의 죽음에 훨씬 많은 의미가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만물은 신에 의해서 그 존재를 보장받으며, 그 가치는 신이 뜻에 비추어서 평가된다. 다시 말해서 신은 만물이 존재하는 토대이고 그 가치의 기준이다. 그래서 광인은 신의 죽음으로 지평선이 지워졌으며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하늘과 땅을 나누는 경계선이 지워지고, 지구로 하여금 안정적으로 공전하도록 단단히 붙들어 주고 있던 태양이 사라져 버렸다. 이때의 신이 죽음은 만물을 존재하게 해주는 어떤 초월적 실체의 사라짐이자, 선악(善惡)이나 미추(美醜)를 판단케 해주는 절대적 가치 기준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지상에 아직도 경배할 것이 있다는 사실에 나의 늙은 마음은 기뻐 날뛴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늙고 경건한 교황의 이 심정을 용서하라! <나귀제>

– 나귀를 숭상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그가 그렇게 기쁨으로 들떴던 이유. 그것은 바로 신앙이다. 신은 죽었지만 신앙이 남았다. 남아 있는 신앙은 계속 경배할 대상을 찾는다. 그것이 나귀이면 어떻게 금송아지면 어떻겠는가. 니체는 신보다 신앙이 더 오래된 것이고 더 오래갈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던 것 같다. 신이 있기 때문에 신앙이 생긴 게 아니라 신앙 때문에 신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2) 너희는 너희의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시장은 화폐가 풍기는 악취를 따라 사람들이 파리 떼처럼 꼬이는 곳이다. 예로부터 새로운 가치의 발명자들은 시장과 명성으로부터 떨어져서 살았다. 모든 위대한 것들은 시장과 명성으로부터 떨어진 곳에서 생겨난다. <시장터의 파리들에 대하여>

–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곳이 시장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시장은 오늘날 가치가 규정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치는 얼마나 많은 화폐와 교환될 수 있느냐를 의미한다. 원래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 시장에서 비싼 값을 받는 것이 아니라 비싼 값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고귀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왜 그것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부를 축적하지만 그들은 점점 가난해진다. 그들은 권력을 원하며 그 무엇보다도 먼저 권력의 지렛대인 돈을 원한다. 이들 잽싼 원숭이들이 어떻게 기어오르는가를 보라! 그들은 앞을 다투어 남을 타고 넘어 기어오르다가 모두 진흙과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들은 모두 왕좌에 오르려고 한다. 마치 행복이 그 왕좌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들 모두는 미치광이들이요, 기어오르는 원숭이들이자 너무도 격렬한 자들이다. 여기에서는 악취가 난다.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 시장을 통해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한결같다. 그들은 똑같은 행복을 얻고자 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더 많은 화폐를 얻는 것이다. 화폐가 모든 가치의 척도이므로 더 많은 화폐를 얻는 것이 곧 더 많은 가치를 얻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그들은 삶의 목표를 정하지도 못하며,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배자들이 오늘날 무엇을 두고 지배라고 부르는지를 보고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귀가 먹고 눈이 먼, 그리고 벙어리가 된 불구자처럼 살아왔다. 그것은 권력을 추구하는 천민들, 글이나 갈겨쓰는 천민들, 그리고 쾌락이나 쫓는 천민들과 함께 살지 않기 위해서였다. <천민들에 대하여>

– 니체 철학이 전제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나 노예들을 부려먹으며 안락한 생활을 누린 귀족들을 정당화해 준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믿기지는 않지만 상당수의 학자들이 그런 말을 자신의 철학적 교양을 뽐내는 양 하고 있다. 그러나 니체는 강자나 귀족에 대한 자신의 언급이 오해되는 것을 보며, 말을 이해 못하는 “얼간이들을 위해 내가 말하는 귀족들은 귀족명부에나 나오는 그런 귀족들이 아님을 밝혀둔다.”고 했다. 그는 ‘귀족’이니 ‘주인’이니 하는 말에 전혀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말하는 강자나 귀족의 유형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오늘날의 지배자들은 결코 강자도 귀족도 아니며, 권력과 자본의 노예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3) 사랑을 가르친다, 벗을 가르친다.

너희의 결혼. 나쁜 결합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희들은 너무 빨리 맺는다. 그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결혼 파기가 뒤따르는 것이다. 결혼에서의 왜곡이나 사기보다는 결혼 파괴가 낫다! “나는 나의 결혼을 파괴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결혼이 나를 파괴했다.”고 내게 말하는 여인이 있었다. <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

– 사람들은 결혼을 사랑의 결실처럼 말한다. 그러나 여러분들도 사랑을 변질시킨 결혼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으리라. 차라투스트라는 결혼의 위험성을 자주 환기시켰다. 언젠가 니체는 바그너의 작품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에 대해서 대단한 분노를 표시한 적이 있다. 바그너는 결혼의 구속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결혼이 방랑자를 구원한 사랑이라도 되는 양 표현했다. 한 여성이 그 방랑자를 숭배하고 사모해서 결혼하는 것을 보고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결혼은 무엇을 가져왔는가? 방랑자가 방랑하기를 멈춘 것이다. 바그너는 그것을 구원이라 했지만, 사실 그는 파멸한 것이다.” 결혼이 긍정적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때의 사랑이 훨씬 풍만한 것이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좋은 결혼을 “본인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 하나를 산출하기 위해 짝을 이루려는 두 사람의 의지”이며, “더욱 높은 신체를 창조하는, 창조하는 자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때 출산된 아이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창조물이면서 동시에 변신된 그들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결혼을 통해 그들은 새롭게 태어나야한다. 그들 자신이 그들의 아이여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능력의 확장이며 새로운 변신이다. 좋은 결혼은 서로를 좋은 친구로서 계속 사랑하게 한다. 그러나 보통의 결혼은 이와는 정반대다.

많은 너무도 많은 자들이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 아, 그것을 나는 어떻게 부를까? 아, 짝을 이루고 싶어 하는 영혼의 궁핍함이여! 아, 짝을 이루고 싶어 하는 영혼의 더러움이여! 아, 짝을 이루고 싶어 하는 영혼의 가엾은 안일함이여! <아이와 결혼에 대하여>

– 무언가 서로에게 줄 것이 있어, 자신에게 넘쳐나는 것이 있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받고 싶은 것이 있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어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결혼이다. 풍성한 토양에서 자라는 사랑의 식물은 서로를 선물하는 친구로 만들어주지만,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는 사랑의 식물은 상대방을 구속하는 가시 울타리로 자라난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견디어내지 못하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너희들은 너희의 이웃을 유혹하여 사랑하도록 만들고, 그들의 과오로 자신을 미화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예찬하려 할 때 증인을 끌어들인다. 너희들에 대해 좋게 생각하도록 그 증인을 유도하고 나서 너희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찾기 위해, 어떤 이는 자신을 잊기 위해 이웃에게 달려간다. <이웃 사랑에 대하여>

– 기독교의 가르침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이웃 사랑에 대한 가르침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그 타인 지향적인 헌신의 정체를 꿰뚫어라”고 말한다. 이웃 사랑에는 항상 주변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고 주변과 결탁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다 보니 “다섯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면 여섯 번째 사람은 항상 매장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먼 이웃을 ‘왕따’시키는 것이 이웃 사랑의 위험이다. 그렇게 패거리를 짜고 군중을 형성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고독을 선택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히려 이웃에 등을 돌리고,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권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숭고한 것은 먼 곳에 있는 사람과 앞으로 오게 될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너는 그(차라투스트라)가 진리를 말했다고 믿는가? 너는 왜 그것을 믿는가?” 그 제자가 답했다. “나는 차라투스트라를 믿습니다.” 그러자 차라투스트라는 머리를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믿음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나에 대한 믿음은.” <시인에 대하여 >

– 차라투스트라가 가르침을 펴다보니 어느덧 자신을 사랑한다고 따라다니는 ‘팬클럽’이 생겨났다. 차라투스트라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추종 세력들이 나타난 것이다. 신앙을 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신도들처럼, 차라투스트라의 제자들도 그에 대한 사랑을 신앙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란 사랑이 아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결코 우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상을 사랑하려거든 우상을 파괴하라. 차라투스트라가 신에 대한 사랑으로 말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는 신의 죽음을 신에 대한 사랑으로 바치지 않았던가.

나의 제자들이여, 이제 나 홀로 나의 길을 가련다. 너희들도 이제 한 사람 한 사람 제 갈 길을 가라! 내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진실로 너희들에게 권하거니와 나를 떠나라.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에 저항하여 스스로를 지켜라. 더 바람직한 일은 차라투스트라의 존재를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그가 너희들을 속였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선생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내가 쓰고 있는 월계관을 낚아채려 하지 않는가? 너희들은 나를 숭배한다. 그러나…… 신상에 깔려 죽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너희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믿고 있다고 말하려하는가? 그러나 차라투스트라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너희들은 나의 신자다. 그러나 신자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너희들에게 명하노니 이제 나를 버리고 자신을 찾도록 하라. 너희가 모두 나를 부인하고 나서야 나는 다시 너희들에게 돌아오리라. 언젠가 너희들은 나의 벗이 되어야 하고 새로운 희망의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

– 차라투스트라를 믿으려거든 차라투스트라를 의심하라. 차라투스트라를 따르려거든 먼저 그에게서 떠나라. 차라투스트라가 구하는 것은 신도가 아니라 친구이다.

나는 친구가 친구에게 베풀 듯 즐겨 베푼다. 낯선 사람들과 가난한 사라들은 내 나무에 달려 있는 열매를 직접 따도 좋다. 그들은 덜 부끄러울 것이다. 다만 거지만은 남김없이 몰아내라! 참으로 그들에게는 줘도 화가 나고 주지 않아도 화가 난다. <연민의 정이 깊은 자에 대하여>

–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연민의 정이 깊은 자’로 부리는 것을 싫어했다. 그가 신의 죽음이라는 선물을 들고 온 이유도 결코 인간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연민을 느껴 인간을 구원하려 온 자가 아니다. 그는 어느 날 제 몸에서 일어난 충일함을 못 이겨, 저 하늘에 뜬 태양처럼 제 것을 저 모든 것들에게 내놓기 위해 선물을 들고 온 자였다. 왜 연민이문제일까? 연민이나 동정은 그것을 받는 자를 비참하게 만든다. 물론 그런 몹쓸 짓을 하고도 창피한 줄 모르는 박애주의자들이 널려 있고, 그런 몹쓸 짓을 당하고도 여전히 손을 내미는 빈곤한 영혼들이 널려있다. 연민이나 동정을 보이는 자는 친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지를 만든다. 위대한 사랑은 그 자신이 사랑할 친구들 창조한다. 선물은 군주도, 노예도, 거지도 만들지 않으며 오직 친구를 만든다. 그것이 위대한 사랑을 창조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벗에 대해 가르치며, “벗을 원한다면 그를 위해서 기꺼이 전쟁을 일으킬 각오라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 벗을 사랑한다면 벗과의 전쟁을 통해 그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선물은 못난이들을 동정하는데 쓰이는 게 아니라 파괴하는 데 쓰인다. 못난이들이 완전히 새로운 자들로 거듭날 수 있도록 그들을 공격한다. 친구가 된다는 건 그 진리를 섬기는 일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하는 일이다.

(4) 삶을 사랑하라

“생은 고통일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자들도 있는데, 거짓말이 아니다. 자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너희들은 이제 끝내도록 하라! 고통에 불과한 생을 끝내도록 하라! 곳곳에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그리고 이 대지는 죽음의 설교를 들어야 하는 자들로 가득 차 있다. 아니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설교를 들어야 하는 자들로. 아무래도 좋다. 그런 자들이 저편의 세계로 서둘러 떠나버리기만 한다면야!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하여>

– 차라투스트라는 죽음의 설교자들을 ‘결핵에 걸린 영혼을 가진 자들’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떠나 가상 세계를 창안하고 그곳에 확실하고 영원한 진리를 두는 것도 미친 짓이고, 가상 세계에서 이루어질 끔찍한 보복을 상상하며 이 세계를 견디는 것도 미친 짓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이 자신들의 소원대로 빨리 이 세상을 뜨기를 바란다.

창조하는 자가 있기 위해서는 고통이 있어야 하며 많은 변신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창조하는 자들이여. 너희들의 삶에는 쓰디쓴 죽음이 허다하게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너희들은 덧없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정당화하는 사람이 된다. 창조하는 자 스스로 다시 태어날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산모가 되어야 하고 산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행복의 섬에서>

– 니체는 삶에 대한 사랑을 운명애라고 불렀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도 아니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을 아름답게 창조해 주는 것이다. 물론 그 창조에는 고통이 따른다. 이 같은 삶에 대한 사랑은 종종 크나큰 범죄 행위로 비난받는다. 차라투스트라가 ‘선하고 의로운 자’들로부터 비난받듯이, 죄의식과 낡은 습속들로부터 삶을 해방하는 과정은 사악한 범죄 행위처럼 취급된다. 그러나 사랑의 의미를 알고 있는 자는 그의 망치가 파괴 도구이기 이전에 창조의 도구이고 사랑의 도구임을 알고 있다.

(5) 새로운 우상인 국가를 조심하라

국가가 어떻게 이들 많은, 너무나도 많은 이들을 꼬드기는지를 보라! 어떻게 국가가 그들은 삼켜서 씹고 되씹는지를! “이 땅에서 나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나는 질서를 부여하는 신의 손가락이다.” 국가라는 괴물은 이렇게 외쳐댄다. 순진하고 귀가 얇은 자와 근시안인 자만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다! (많은 영웅들도 무릎을 꿇었다.)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 국가는 마치 그 스스로가 보편적 선이고 정의인 양 행세한다. 실레로는 특정한 계층, 특정한 계급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혹은 그 스스로가 특정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사회로부터 초연한 양 거드름을 피운다. 근대 국가는 중세처럼 종교와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지는 않다. 낡은 신에 대한 믿음이 위태로워지자 근대 국가는 교회에서 발을 빼버렸지만 국가가 자신을 감싸주었던 신성한 베일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는 여전히 자신을 신의 대리자인 것처럼 나타낸다. 교회가 사람들을 전쟁터로 내몰면서 ‘신을 위한 성전’이라 말하듯이, 국가 역시 자신을 위해 죽는 것이 얼마나 영예로운 일인가를 설득한다. 수많은 전사들과 영웅들이 국가의 말에 속아 자기 목숨을 바쳤고, 국가는 이들을 활용해서 애국을 광고해댔다.

(6) 순수한 인식을 꿈꾸는 자들은 음탕하다.

학자들은 아직도 서늘한 그늘 아래 시원하게 앉아 있다. 그들은 무슨 일에서나 관망자로 남기를 원한다. 그리고 태양이 작열하는 뜨거운 계단 위에는 앉지 않으려고 몸을 사린다. 길가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우두커니 바로보고 있는 자들처럼, 그들 또한 기다리며, 다른 이들이 생각해낸 사상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섰다. 그들의 복잡함 앞에 내 단순함은 이야깃거리도 안 되겠군! 그들의 손가락은 실을 꿰는 법, 뜨개질하는 법, 천 짜는 법까지 알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정신이라는 양말을 뜨고 있는 것이다. –<학자들에 대하여>

– 하나의 객관적인 규칙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문제라면 학자는 ‘양말 제조공’과도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양말이 정신적인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학자들이 내뱉는 복잡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그 놀라운 직조 기술에 감탄한다. 자기 개념, 자기 가치를 생성시키지 못한 채 정해진 사유체계를 따라가는 학자들은 ‘감아진 대로 풀리며 돌아가는 시계태엽’이나 ‘낟알을 던져 주면 하얀 가루로 만들어 주는 맷돌’과 같다. 비록 그들이 정말 열심히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일을 수행한다고 해도 그것은 훌륭한 시계태엽이나 훌륭한 맷돌로서 그런 것일 뿐이다.

(7) 인간만큼 큰 귀를 보았다.

누군가가 현대인들의 베일과 덧옷, 분칠과 거동을 벗겨버린다면, 너희에게 남는 것이란 겨우 새들이나 놀라게 할 정도의 것에 지나지 않으리라. 내 자신으로 말하자면, 나는 참으로 아무 치장도 하지 않은 너희들의 알몸을 보고 놀란 새다. 뼈만 앙상한 것들이 내게 유혹의 눈길을 보내자 나는 그곳에서 도망치고 만 것이다. 현대인들이여, 알몸이든 옷을 입었든 간에 나는 너희들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교양의 나라에 대하여>

– 차라투스트라는 제 것도 아닌 잡동사니들을 긁어모아 폼을 잡고 있는 모델들이 역겨웠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에겐 가슴을 펴고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든 현대인의 포즈가 위선으로만 보였다. 다시 차라투스트라에게 물어보았다.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지식을 모은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차라투스트라가 답했다. 박식함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긁어모은 지식들 모두가 그들의 것이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 스스로 자신의 앎을 창조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나는 보았다. 이 사람에게는 눈이 하나 없고, 저 사람에게는 귀가 하나 없으며, 또 다른 사람에게는 다리가 없다는 것을, 거기에다 혀나 코나 머리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이런 것들은 내가 사람들과 지내면서 본 것 가운데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것들이다. 나는 훨씬 더 고약한 것들도 보았는데, 그것들 중 많은 것들이 너무나도 역겨워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이를테면 하나를 너무 많이 가진 대신에 그 밖에 다른 것은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이 있다. 이런 자들은 그저 하나의 커다란 눈이거나 커다란 주둥이거나 커다란 배 아니면 또 다른 커다란 어떤 것일 뿐이다. 나는 이런 자들을 일컬어 전도된 불구자라 부른다. <구제에 대하여>

– 차라투스트라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을 ‘인간만큼 거대한 귀’로 표현한 것이다. 무언가 한 가지 능력만 있는 사람들, 그래서 누구는 귀로, 누구는 입으로 알려졌으며, 누구는 눈으로, 누구는 다리로 전문가가 되었다. 물론 전문적으로 한 가지를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데 있는 게 아니라 대부분의 것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한 가지 능력만 키우느라 여러 가지 능력을 퇴화시킨 것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8)춤추고 웃는 법을 배워라

나는 하늘을 날아갈 준비를 하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나의 천성이 이러한데 어찌 그것이 새의 천성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나는 중력의 영에 적의를 품고 있는데, 그것만 보아도 새의 천성이 분명하다. 나는 진정 중력의 영에 대해 불구대천의 적의와 으뜸가는 적의, 그리고 뿌리 깊은 적의를 품고 있다. <중력의 영에 대하여>

– 차라투스트라는 이내 알아차렸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가르치려는 비행술의 대단한 적대자가 있음을. 새처럼 가벼워지려는 몸을 천근만근의 무게로 잡아당기고 있는 자가 있음을. 그것은 바로 ‘중력의 영’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날개가 생겨난 이들에게 기대를 건다. 물론 날개가 있다고 해서 바로 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 시대 자기 삶에 대한 거부만으로는 결코 날 수가 없다. 부정과 거부는 여전히 무거운 자들의 정신이다. 중력의 영은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중력의 영이 던진 그물에 걸리면 부정과 거부는 금세 반동이나 허무로 돌변할 수 있다. 이제 막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한 이들이 꼭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이 이것이다.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 도약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 삶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기 삶을 아름답게 창조할 수 있다. 자기 삶을 부정하는 자는 탈주할 때 고통의 비명이나 분노의 울분을 토한다.

나는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그리고 내가 나의 악마를 보았을 때 나는 그 악마가 엄숙하며, 심오하며, 장중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중력의 영’이다. 그로 인해 모든 사물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람들은 분노가 아닌 웃음으로 죽인다. 자, ‘중력의 영’을 죽이지 않겠는가.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 처음부터 나는 법을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서는 법, 걷는 법, 달리는 법, 기어오르는 법, 춤추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고 환하게 웃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법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강의는 ‘웃는 법’과 ‘춤추는 법’에서 시작된다. 심각해선 안 된다. 무거워선 안 된다. 웃고 또 웃어라. 춤추고 또 춤춰라. 그것이야말로 중력의 영을 죽이는 일이다.

(9)세상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들의 탁자다.

“너 지혜의 돌이여! 너는 너 자신을 높이 던졌지만 그러나 모든 던져진 돌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차라투스트라여 너는 정말로 돌을 멀리 던졌지만 그 돌은 네 위로 다시 떨어지리라.” 난쟁이는 이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오르고 또 올랐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몹쓸 병에 지쳐 있는 병자와 같았다……. 내게는 용기라 부르는 것이 있다. 용기는 심연에서 느끼는 현기증까지 없앤다. 사람이 있는 곳 치고 심연이 아닌 곳이 있던가!…… 용기는 최상의 살해자다. 그것도 공격적인 용기는. “그런 게 생이던가? 좋아! 그렇다면 다시 한 번!”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 난쟁이 이야기 요지는 이런 것이다. 아무리 주사위 던져봐라! 그것은 똑같은 것만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괜히 무언가 새로운 것이 생겨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던져봐야 네 몸만 상할 뿐이다. 난쟁이가 말하는 동일한 반복, 그것은 법칙이면서 동시에 구속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다행히 그에게는 용기가 있었다. 그는 단순 무식하게 난쟁이에게 덤벼들었다. 완전히 배수진을 친 것이다. 사람 사는 곳 치고 고통이 없는 곳이 있던가!

생이 그런 거라면 뭐 손해 볼 것 없다! 또 던지겠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태도뿐이었다면 차라투스트라 역시 쉽게 지쳤을 것이다. 주사위 던지기가 놀이가 아니고 반복되는 노동 같은 것이었다면 그 용기도 언젠가는 시들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웃음과 춤을 배울 때처럼 주사위 던지기의 의미 역시 깨우치기 시작했다. 춤을 추면서 더 잘 추게 되고, 웃음을 웃으면서 더 잘 웃게 되듯이, 그의 주사위는 매번 더 높이 던져졌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지금 올라가는 주사위의 성공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관심 밖이다. 실해하면 또 하면 되니까…….

(10) 위버멘쉬를 가르친다.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너희들에게 내 방식의 죽음을 권한다. 내가 원할 때 찾아오는 자유로운 죽음 말이다……. 가장 맛이 들었을 때에도 남에게 계속 맛을 보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 오랫동안 사랑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신 맛을 내는, 그리하여 마지막 가을날까지 기다려야 하는 운명을 지난 시과도 있다. 그런 사과는 무르익자마자 노랗게 변색되고 주름투성이가 된다.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 인간들은 인간적인 것에 대한 경멸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데 주저했다. 그들은 인간적인 것을 비웃은 것까지만 할 뿐 막상 그것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것에 대한 넘어섬은 역시 인간인 자신들까지 넘어서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변신이라는 불확실한 과정에 자신을 내맡기기보다는 뭔가 의지할 것을 찾음으로써 자신을 보존하고 지탱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들과 다른 길을 택했다. 차라투스트라의 자기 삶에 대한 긍정은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극복’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오늘의 나’를 죽여야 ‘내일의 나’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풋과일들만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나뭇가지에 매달린다. 모든 익은 것들은 집착을 버리고 떨어진다. 그것이 더 많은 생명들의 탄생임을 알기 때문이다.

5. 니체의 책들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목차

(1)니체의 책들

비극의 탄생, 음악 정신의 기원 – 1872년

(The Birth of Tragedy, Out of the Spirit of Music)

반시대적 고찰 (총 4부로 구성)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 1873년

(David Strauss, the Confessor and the Writer)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 1874년

(On the Uses and Disadvantages of History for Life)

교육자로서 쇼펜하우어 – 1874년

(Schopenhauer as Educator)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 – 1876년

(Richard Wagner in Bayreuth)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유정신을 위한 책 – 1878년

(Human, All to Human, A Book for Free Spirits)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Ⅱ – 1879년

(Human, All to HumanⅡ)

서광, 도덕의 편견들에 대한 사유 – 1881년

(Daybreak, Thoughts on the Prejudices of Morality)

즐거운 지식 (The Gay Science) – 1882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모두를 위한 책이면서 그 누구도 위한 것이 아닌 책

(Thus Spoke Zarathustra, A Book for All and None) – 1885년

선악을 넘어서, 미래 철학을 위한 서곡 – 1886년

(Beyond Good and Evil, Prelude to a Philosophy of Future)

도덕의 계보학, 하나의 논쟁 – 1887년

(On the Genealogy of Morals , A Polemic)

바그너의 경우: 한 음악가의 문제 – 1888년

(The Case of Wagner: A Musician’s Problem)

우상의 황혼, 혹은 망치 들고 철학하는 법 – 1889년

(Twilight of the Idols, or How One Philosophizes with a Hammer)

반그리스도 (The Antichrist) – 1895년(집필은 1888년)

니체 대 바그너: 한 심리학자이 파일들로부터 – 1895년(집필은 1888년)

(Nietzsche contra Wagner : Out of the Files of a Psychologist)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어떻게 지금의 나 자신이 되었는가 – 1908년(집필은 1888년)

(Ecce Homo, How One Becomes What One is)

권력의지 (The Will to Power) – 니체 사후 출간 (1882~1888년 집필

(2)『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목차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제1부

세 가지 변신에 대하여/ 덕의 교사에 대하여/ 저편의 또 다른 세계를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희열과 열정에 대하여/ 창백한 범죄자에 대하여/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산허리에 있는 나무에 대하여/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하여/ 전쟁과 전사들에 대하여/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시장터의 파리들에 대하여/ 순결에 대하여/ 벗에 대하여/ 천 개의 목표와 하나의 목표에 대하여/ 이웃 사랑에 대하여/ 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에 대하여/ 살무사에 물린 상처에 대하여/ 아이와 결혼에 대하여/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

제2부

거울을 갖고 있는 아이/ 행복의 섬에서/ 연민의 정이 깊은 자에 대하여/ 성직자에 대하여/ 도덕군자에 대하여/ 천민들에 대하여/ 타란툴라에 대하여/ 이름 높은 현자에 대하여/ 밤의 노래/ 춤에 부친 노래/ 만가(輓歌)/ 자기극복에 대하여/ 고매한 자에 대하여/ 교양의 나라에 대하여/ 순수한 인식에 대하여/ 학자들에 대하여/ 시인에 대하여/ 크나큰 사건에 대하여/ 예언자/ 구제에 대하여/ 처세를 위한 책략에 대하여/ 더없이 고요한 시간

제3부

방랑자/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뜻에 거슬리는 행복에 대하여/ 해뜨기 전에/ 왜소하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감람산에서/ 그냥 지나쳐 가기에 대하여/ 배신자에 대하여/ 귀향/ 세 개의 악덕에 대하여/ 중력의 영에 대하여/ 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 위대한 동경에 대하여/ 춤에 부친 또 다른 노래/ 일곱 개의 봉인

제4부

꿀 봉납/ 구조를 간청하는 외침/ 왕들과의 대화/ 거머리/ 마술사/ 실직/ 가장 추악한 인간/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 자/ 그림자/ 정오에/ 환영인사/ 만찬/ 보다 높은 인간들에 대하여/ 우수의 노래/ 과학에 대하여/ 사막의 딸들 틈에서/ 각성/ 나귀제/ 명정의 노래/ 신호

7. 참고 서적

『하룻밤에 읽는 서양 사상』 토마스 아키나리 지음 (오근영 옮김) 2003

『한 권으로 읽는 니체』 로버트 솔로몬, 캐슬린 하긴스 지음 (고병권 옮김) 2001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병권 지음 2003

자료정리:장광익 [email protected]

출처: SPR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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