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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 장 | 창세기 2장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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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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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제공 : CGNTV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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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 – 에덴 동산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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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1/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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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창세기 2 ·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 2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 3하나님이 일곱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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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8/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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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어쓰기] 창세기 2장 1절~25절 – 산성교회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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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mch.net

Date Published: 8/29/2022

View: 6673

창세기 2,Genesis 2 KLB;NIV – 이렇게 해서 우주가

셋째는티그리스강으로 앗시리아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는 유프라테스강이었다. 15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어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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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1/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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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읽기] 창세기 2장 – Pensées

[성경읽기] 창세기 2장 ·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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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392766.tistory.com

Date Published: 1/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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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 & 성경주석 – BIBLE STORY

하나님이 6일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한 것처럼, 사람도 6일 동안 수고하고 일곱째 날에 쉬어야 한다. 이 매주의 안식일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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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9/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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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8(월) “창세기 2:1-25”/ 작성: 이동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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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6/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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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 – 창세기 2장 / 개역개정 – CCM악보

성경 말씀 – 창세기 2장 / 개역개정 ·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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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cmakbo.tistory.com

Date Published: 10/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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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에 창설된 동산(창세기 2장 4 ~ 9절) – 유앙겔리온

지난 시간에 이어서 말씀을 드리는데 창조 기사가 창세기 1장에 한번 나왔는데 다시 2장에서 조금 더 다른 이야기로, 다른 모습으로 기록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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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orbaea.com

Date Published: 1/19/2021

View: 5349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창세기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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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
창세기 2장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창세기 2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 Views: 조회수 15,8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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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2. 3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JlNThwGgoaU

창세기 2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에덴 동산

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1)생령이 되니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2)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3)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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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14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세기 2,Genesis 2 KLB;NIV

Copyright © 1985 by Biblica, Inc.® Used by permission. All rights reserved worldwide.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Copyright ©1973, 1978, 1984, 2011 by Biblica, Inc.® Used by permission. All rights reserved worldwide.

NIV Reverse Interlinear Bible: English to Hebrew and English to Greek. Copyright © 2019 by Zondervan.

[성경읽기] 창세기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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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읽기] 창세기 2장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에덴 동산

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3)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세기 2장 해설

1-3 절 안식일을 복주심

창조가 끝이 났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마치시고 그치셨다. 안식은 쉼을 말한다. 마지막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셨고 거룩하게 하셨다. 히브리어 ‘샤바트’는 ‘일을 중지하다’ ‘행동을 멈추다’의 뜻이다.(천사무엘 창세기) 거룩하다는 ‘구분해 따로 놓다’의 의미로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모든 날을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마지막 일곱째 날만 그렇게 하셨다.

4-25절 에덴 동산과 계명

4-6절 인간의 창조의 필요성

‘내력’(4절)은 최초로 등장하는 톨레돗으로 ‘족보’ ‘역사’ 를 뜻한다. 톨레돗이 왜 이곳에 등장하는 지 모호하다. 하지만 인간의 창조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내력’ 즉 역사는 적절해 보인다. ‘땅과 하늘’(4절)은 1장의 ‘하늘과 땅’(1:1)과 역치되어 있다. 이제 땅이 화제의 중심에 선 것이다. 앞으로 땅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땅(에레츠)은 비가 내리지 않았고, 갈(경작 에베드)할 사람도 없다. 초목과 채소가 경작할 사람과 연결시키고 있다. 땅과 사람은 창조 때부터 서로 연관을 지어왔고, 땅을 사람의 섬김(에베드)를 받아야 함을 나타낸다.

7-9절 사람의 창조와 에덴동산

7-9절까지는 사람과 에덴동산의 두 나무를 소개한다. 모든 악의 근원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와 연관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땅의 흙으로 만드셨다. 7절의 흙은 토양이 아닌 ‘먼지(샤파르)’이다. 땅은 에레츠가 아닌 아담의 기원이 되는 ‘아마드’이다. 아마드의 샤파르(먼지)로 인간을 만든 것이다. 그 인간에게 하나님은 생기를 불어 넣으신다. 생기는 ‘네샤마’로 코로 호흡할 때 그 바람이다. 노아의 홍수 때 코로 숨쉬는 모든 생물은 죽었는데 이 때 사용된 ‘숨쉬다’는 동일한 네샤마이다. 숨을 끊어버림으로 생명을 앗아 간다. 코를 통해 바람이 들락거리는 것이 곧 생명이다.

‘동방’에 에덴 동산을 창설하셨다. 성경에서 동쪽은 굉장히 경계해야할 방향이다. 동방사람, 동쪽으로 이동 등의 포괄적인 의미 속에서 동쪽은 이방인, 저주 받은 곳, 타락한 죄인들이 사는 곳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방을 해가 떠오르는 곳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곳이다. 성막과 성전이 동쪽을 향해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에덴 동산에 사람으로 하여금 거주하게 하셨다. 동산에 많은 먹을 거리를 주셨고,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두셨다.

10-14절 에덴에서 흘러 나오는 네 강

에덴 동산에서 강이 시작된다. 강은 생명의 근원이다. 에스겔의 성전과 요한계시록의 하나님의 보좌에서 강이 흘러나오는 것은 에덴 동산을 모형으로 한다. 에덴은 하나님의 보좌였던 것이다. 네 강의 이름은 비손, 기혼, 헷데겔과 유브라데이다. 성경에서 4는 완전함을 의미하며, 네 방향은 온 세상을 뜻한다. 비손 강이 흐르는 하윌라의 금은 순금이다. 더렵혀지지 않는 완전하고 흠 없는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설명이다. 네 강과 관련된 상징들은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등장하며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동산을 의미한다.

15-19절 아담의 사역과 계명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 동산으로 이근다. 경작하다는 히브리아 아바드는 섬기다는 뜻으로 영어의 서비스의 기원이 되는 단어다. 서비스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다’로 사용된다. 결국 아담의 이 땅을 섬기는 자로 존재하는 것은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고 그것을 부정적으로 보면 안된다. 중립적인 의미를 내포하지만, 다른 의미로 아담의 운명이 숨겨져 있다.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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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 & 성경주석

<창세기 2장 흐름정리>

인간 타락을 설명하기 위한 서론적인 단계로서, 인간의 최초 상태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친히 불어 넣으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고귀성과 존엄성을 분명하게 부각시키는 내용이다. 그리고 생명나무에 대한 언급은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순종해야함을 강력히 주지시킨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때 가장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순종과 불순종이라고 하는 주제는 향후에 전개되는 인간 역사의 복과 화를 결정짓는 근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창세기 2장 줄거리>

1. 최초의 안식일.

4. 창조의 방식.

8. 에덴동산의 창설.

10. 거기서 흘러나는 강.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19,20. 피조물들의 이름 짓기.

21. 여자의 창조와 결혼 제도.

<창세기 2장 개역한글>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14.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세기 2장 성경주석>

2:1 이루니라.

2장의 처음 세 절과 4절의 전반부에서는 실제로 첫 장의 창조 이야기가 중단없이 계속되고 있다. 1절은 장엄한 회고로 앞선 6 일간의 일, 뒤따른 안식일의 쉼을 연결시킨다. 하나님이 “그 지으시던 일을” 다했을 때, 그는 이루지 못하고 남겨 놓은 일이 없었다(참조 히 4:3). 여기서 “만물”, 곧 차바(s.aba’)라는 말은 창조된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2:2 일곱째 날에.

(「개역한글판」에는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로 되어 있음). 1절과 2절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난제, 곧 전자는 하나님의 일이 여섯째 날에 마쳤다고 진술하고, 후자는 일곱째 날에 마쳤다고 진술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70인역」, 「사마리아오경」 및 「시리아역」은 그 말이 처음 사용되고 있는 히브리 본문의 “일곱째”라는 말을 “여섯째”라는 말로 대체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선택하였다. 어떤 주석가들은 히브리 본문의 “일곱째”라는 말은 필사자의 실수라고 생각하면서 이러한 변경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 자신이 세운 본문 비평에 대한 기본적인 규칙의 하나, 곧 일반적으로 두 개의 가능한 해석들 가운데 더 어려운 것을 원래의 것으로 취한다는 규칙을 범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개역한글판」을 만든 사람들은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라고 번역하였다-역자 주) “마치시니”(ended)라는 말은 예칼(yekal)이다. 칼뱅을 필두로 하여 몇몇 학자들은 예칼을 “끝냈다”(had finished)라는 말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문법적으로 가능하다. 다른 해석은 창조 사업이 안식일의 제정 직후에 마쳤다고 생각한다. 창조의 완성은 소극적인 면에서 창조 사업의 정지(停止)에 있으나, 적극적인 면에서는 일곱째 날을 복 주고 거룩하게 함에 있다. 정지 자체가 그 일의 완성의 일부를 이루었다.

2:2 안식하시니라.

“안식하였다”는 동사 샵바트(s∨abbat)는 실제로 노동이나 활동을 “중단하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창 8:22; 욥 32:1 등). 인간 기술공이 자신의 일의 이상을 구현하게 되었을 때 그 일을 끝내는 것처럼, 무한히 더 높은 지각을 지닌 하나님은 어떤 새로운 것을 생산해내기를 중단함으로써 세상의 창조를 완수하고 “안식하였다.” 하나님은 쉼이 필요하여 안식하지 않았다(참조 사 40:28).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은 탈진이나 피로의 결과가 아니라, 앞서 행한 일의 중단이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일곱째 날이라”는 예상되는 구절이 성경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성경 주석가들은 안식의 기간은 앞선 각각의 여섯 날들처럼 24시간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여섯째 날의 창조가 마칠 때에 시작하여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은 그러한 견해를 반박한다. 이 구절은 편견없는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안식이 제7일 동안에만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는 유일한 성경 본문은 아니다. 왜냐하면 십계명 자체도 하나님이 6일 동안 일하고 창조 주일의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음을 명백히 진술하기 때문이다(출 20:11).

본문에 담긴 말에 의하면, 6일의 창조의 날들은 일반적인 길이를 갖는 이 땅의 날들이었다. 이와 다르게 해석할 어떤 분명한 빛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일곱째 날을 동일한 방법으로 이해해야 하며, 그것이 이 땅의 안식일의 근거로 언급되는 모든 구절에서 보통의 하루로 간주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출 20:11; 31:17).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이 쉼의 날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설명이 첨가되고 있다. 여기서 거룩한 기록은 매주의 안식일을 하나님의 창조 사업과 일곱째 날의 쉼과 밀접하게 관련시키는데, 이는 넷째 계명에도 그렇게 나타나 있다. 일곱째 날을 축복했다는 말은 그것에 의해 그 날이 하나님의 은총의 특별한 대상이 되며, 그의 피조물들에게 복을 가져다 줄 날로 선언되었음을 시사하였다.

2:3 거룩하게 하셨으니.

거룩하게 하시는 행위는 그 날이 거룩하며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구별되었다는 선언에 있었다. 나중에 시내산이 거룩하게 되었듯이(출 19:23), 즉 한동안 하나님이 거하는 곳으로 신성함을 입었듯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을 위하여 성별되었듯이(출 29:44), 희년이 종교적인 목적을 위하여 거룩하게 바쳐졌듯이(레 25:10), 여기서는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되었으며, 그와 같이 거룩한 날로 선언되었다. 일곱째 날을 복 주며 그 날이 거룩하다고 선언한 이 행위는 인류를 위해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안식일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매주의 제7일 안식일은 흔히 유대인 시대에 속한 제도로 간주되어 왔지만, 영감의 기록은 최초의 이스라엘 백성들(야곱-이스라엘의 자손)이 태어나기 2,000년도 훨씬 전에 제정되었다고 선언한다. 더욱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막 2:27)이라고 선언한 예수의 말씀이 있는데, 그 말은 이 제도가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서 제정된 것임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2:3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일곱째 날에 안식하도록 명한 데에는 사람이 그의 창조주의 사랑과 선함에 대하여 숙고함으로 창조주와 같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누리도록 명하는 것보다 더 고귀한 이유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한 것처럼, 사람도 6일 동안 수고하고 일곱째 날에 쉬어야 한다. 이 매주의 안식일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거룩한 제도이므로, 입법자인 하나님은 그것의 준수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거룩한 시간의 일부나 전부를 빼돌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죄와, 인간의 능력과 그의 시간의 원 소유자인 하나님의 것을 약탈하는 죄를 짓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한 제도인 안식일은 우리의 경의와 존중을 받을 가치가 있다. 하나님은 이를 게을리하는 것을 죄로 여긴다.

안식일은 일상적인 육체적 노동을 삼가며 정신과 마음을 거룩한 사물에 바칠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회(聖會)로 안식일을 사용하도록 훈계를 받았다(레 23:3). 복음서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안식일을 그렇게 사용하였으며(눅 4:16; 행 17:2; 18:4 등), 그리스도의 지상 봉사가 마친 후에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계속해서 준수되어야 한다(마 24:20)고 증언한다.

안식일이 새 땅에서도 예배일로서 여전히 기념될 것이라(사 66:23)는 사실은 하나님이 결코 안식일의 준수를 다른 날로 옮기도록 의도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매주의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로서, 인간에게 매주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대하여, 그리고 자비로운 창조자이자 공급자인 그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지를 상기시켜 준다. 안식일을 거절하는 것은 창조자를 거절하는 것이며, 온갖 종류의 거짓 이론들을 위한 문을 활짝 여는 것이다. “안식일은 그분의 존재에 대한 계속적인 증거이며, 그분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지혜와 그분의 사랑을 상기시켜 주는 방편이다. 안식일이 항상 신성하게 준수되어 왔다면, 무신론자나 우상 숭배자가 결코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336).

2:4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이 말은 창세기 2장의 설명을 도입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2:4~3:24를, 1:1~2:4의 기록보다 더 후대에 다른 저자로부터 나온 두 번째의 다른 창조에 대한 기록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 지지할 수 없는 이론에 관하여는 창세기에 대한 서론을 참조하라. 그 내용을 연구하면 2장은 결코 1장의 창조 이야기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2장의 목적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의 가정에 두는 것인데, 이 일은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하지만 2장은 에덴의 가정이 창설된 이후에 한 그것에 대한 설명이다. 이 정보가 없었다면, 에덴의 상태에 있었던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설명은 슬프게도 불완전할 뿐 아니라 창세기 3장의 사건들─인간의 타락─도 거의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장(창세기 2장)에는 인간의 창조, 에덴 가정의 묘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충성심 혹은 그의 가정에 대한 도덕적 권리에 대한 시금석, 곧 그의 지성 혹은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통치할 정신적 자격에 대한 시금석, 그리고 이 첫 가정의 설립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추가적인 세부 사항들이 포함되어 있다.

2:4 천지의 창조된.

1:1에서 시작된 창조 이야기는 이렇게 종결된다. 이 말들은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그것들은 브히바르암(behibare’am)의 번역인데, 때때로 그렇게 해 온 것처럼 “그것들이 창조된 후에”라고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그들을 창조할 때에”(in their crea-tion)를 뜻하며,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는 전체 구절은 “이것은 천지가 창조되었을 때 그것들의 기원에 대한 역사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2:4 대략이 이러하니라.

“대략”에 해당하는 단어 톨레도트(toledot)는 일반적으로 인간 가족의 역사, 즉 그의 자손들의 출생(참조 5:1; 6:9; 11:10 등)을 언급하는 데 사용된다. 여기서 이 말은 인간의 친족 관계가 아닌, 1:1과 2:1을 되새기는 구절인 “천지”의 창조에 대해 사용된 유일한 경우로 나타난다. 한 주석가는 “대략”(generations)이라는 말이 “그것들의 생성에 대한 역사나 설명”을 적절하게 언급한다고 주장한다. 유대백과사전은 이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천지의 창조 과정은 2:4에서 족보와 같은 역사로 간주된다”(유대백과사전, “Generation”). “각 날은 세대 또는 발생(generation)이라고 불리었는데 그것은 이 날들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업의 어떤 새로운 부분들을 발생시켰거나 생산했기 때문이었다”.

2:5 초목.

4~6절은 지표면의 모습, 특히 창조 주일의 여섯째 날에 출현한 인간의 창조 직전의 식물에 대해 간략하게 묘사함으로써 7절의 인간 창조를 예고한다. 여기에 땅을 “경작할” 누군가가 출현하기만 하면 완전하게 될 낙원이 있다. 기대에 부풀어 활기에 넘친 모든 자연은 마치 관현악단이 모든 악기를 조율한 가운데 그들의 지휘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들의 왕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다.

2:6 안개.

“안개”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드(’ed)는 다소 모호한 뜻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 본문 외에는 유일하게 욥 36:27에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 말을 “홍수”를 뜻하는 앗수르어 에두(edu)와 비교하여, 그 뜻을 성경에 나타난 이 두 구절에 적용시켰다. 그러나 “홍수”라는 말은 이들 본문의 어느 쪽과도 맞지 않으며, “안개” 또는 “수증기”는 두 경우 모두 의미가 통한다. 고대의 번역자들은 이 말을 대개 “샘”으로 표현하였는데, 이 번역은 그들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나타낸다. “샘” 하나가 온 땅을 적실 수 있었을 것 같지 않은 사실로 볼 때, “샘”이 에드에 대한 바른 번역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히 나타난다. “안개”는 가장 훌륭한 번역으로 보이며, 이 경우 우리는 “안개”를 “이슬”과 같은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하늘에서 비가 내려 홍수로 이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비웃고, 노아가 “아직 보지 못하는 일”(히 11:7)을 믿으므로 칭찬을 받은 사실은 비가 홍수 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음(부조와 선지자, 84 85)을 나타낸다. 노아의 믿음의 눈만이, 물이 하늘에서 떨어져 자신이 지은 방주를 피난처로 찾지 않은 모든 생물을 익사시키는 장면을 그려볼 수 있었다. 홍수 후에 무지개가 제정되었으며(9:13~16),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은, 비가 그 사건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의견에 무게를 더해 준다.

2:7 흙으로.

사람이 땅에서 유래한 물질들, 곧 땅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과학에 의해 확증되고 있다.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인체의 분해는 동일한 사실을 증명한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주된 요소들은 산소, 탄소, 수소 그리고 질소이다. 다른 많은 요소들도 적은 비율로 존재한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으며, 또한 취함을 입은 “땅으로 돌아”갈(전 12:7) 것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사실적인가.

2:7 사람을 지으시고.

아담의 창조에 관하여 추가적인 중요한 사항들이 제시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작업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의 손이 창조의 신비한 일을 수행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허락된다. “지으시고”에 해당하는 단어 야차르(yas.ar)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고안(考案)과 모습에 일치하도록 형체를 빚어 모양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 말은 토기장이(사 29:16; 49:5 등), 우상을 만드는 금장색(사 44:9; 합 2:18) 그리고 하나님의 활동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며, 하나님은 다양한 것들, 그 중에서도 특히 빛(사 45:7), 사람의 눈(시 94:9), 마음(시 33:15), 계절(시 74:17)을 조성한다.

2:7 생기.

“숨”[氣]은 느샤마(nes∨amah)의 번역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생명을 주는 원리가 아담의 생명 없는 몸에 들어갔다. 생명의 불꽃이 그의 육체로 전가되도록 해준 매개체를 하나님의 “(생)기”라고 말한다. 동일한 사상이 욥 33:4에도 나타난다. “전능자의 기운(nes∨amah)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사람에게 나누어진 그 “(생)기”는 그의 생명과 같다. 그것은 생명 자체이다(사 2:22). 사망 시에는 “숨(nes∨amah, 생명)이 끊어진”다(왕상 17:17). 사람에게 있는 이 “생명의 호흡”은 동물들에게 있는 “생물의 기식”과 결코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만물은 그들의 생명을 하나님에게서 받기 때문이다(창 7:21, 22; 전 3:19). 그러므로 그것은 정신이나 지능이 될 수 없다.

2:7 생령.

사람의 생명 없는 형체에 이 하나님의 “(생)기”(nes∨amah)가 불어넣어졌을 때, 사람은 살아 있는 “영”, 네페쉬(nepes∨)가 되었다. 네페쉬라는 말은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다. (1) 숨(욥 41:21), (2) 생명(왕상 17:21; 삼하 18:13 등), (3) 애정의 자리로서의 마음(창 34:3; 아 1:7 등), (4) 살아 있는 존재(창 12:5; 36:6; 레 4:2 등), (5) 인칭 대명사를 강조하기 위해(시 3:2; 삼상 18:1 등). 네페쉬는 하나님에 의해 조성되며(렘 38:16), 죽을 수 있으며(삿 16:30), 죽임을 당하며(민 31:19), 먹히며(은유적으로, 겔 22:25), 구속(救贖)되며(시 34:22), 소성케 된다(시 19:7)는 것을 주목하라. 이 중 아무것도 혼, 즉 루아흐(ruah.)에 적용되지 않으며, 이것은 두 용어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가리킨다. 위의 조사에서 2:7의 네페쉬를 「제임스왕역」이 “영혼”(soul)으로 번역한 것은, 만일 그것이 흔히 사용되는 표현인 “불멸의 영”이라는 의미라면, 적절치 않다는 것이 위의 검토를 통해 명백해진다. 이 개념은 널리 퍼져 있지만, 성경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바르게 번역될 수 있다: “사람이 산 존재가 되었다”(「개정표준역」). “영”을 “존재”와 동의어로 간주할 때, 우리는 이 본문에서 네페쉬의 성경적인 의미를 얻게 된다.

2:8 하나님이…동산을 창설하시고.

에덴 동산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홍수가 본래의 지구의 물리적인 특징을 너무 바꿔놓았기 때문에 과거의 위치를 현재에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이 동산을 “공원”을 뜻하는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말인 “낙원”(paradise)이라고 부른다. 낙원을 뜻하는 히브리어 파르데스(pardes)는 구약에서 몇 번밖에 나타나지 않는데(느 2:8; 전 2:5; 아 4:13), 에덴 동산에 대한 이름으로보다는 나무를 언급하기 위해 나타난다. 헬라어로 파라데이소스(paradeisos)인 “낙원”은 「70인역」 역자들에 의해 우리의 첫 부모의 가정에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2:9 나무.

사람의 훌륭한 거처를 준비하는 일에 실용성뿐 아니라 장식(裝飾)에도 주의가 기울여졌다. 그의 필요와 기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각종 식물들이 제공되었다. 꽃과 나무와 관목들은 그 향기로는 사람의 감각을 기쁘게 해주었고, 그 절묘한 형태와 매혹적인 색깔로는 눈을 즐겁게 해주었으며, 감미로운 과일로는 미각을 만족케 하였다. 온 시대를 통하여 에덴은 세상적 탁월함에 대한 인간의 가장 높은 개념이 되었다.

2:9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이 말들이 나타나는 순서는, 마치 그것들이 사후 고안인 것처럼 현대 언어권에 사는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인다. 이 때문에 어떤 비평적인 학자들은 9절의 후반부가 나중에 첨가된 것이거나 본래의 것이 와전(訛傳)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영어로 번역되었을 때 이상한 것처럼 보이는 이 배열은 히브리어에는 보통 있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본문의 순수성에 대해 의심할 구실이 전혀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12:17은 문자적으로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시며, 그리고 그의 집에도”라고 읽을 수 있다. 이와 동일한 문장 구조에 대한 다른 실례들은, 비록 영어 번역에서는 그렇게 인식할 수 없을지라도, 창 28:14; 민 13:23; 신 7:14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안식일을 준수함으로써 그들의 창조주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나타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생명의 유지자인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표현할 기회를 가져야 하였다.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이 나무에 초자연적인 효력을 부여하였다. 그 열매는 사망에 대한 해독제가 되고 그 잎은 생명과 불멸을 유지하는 요소가 됨으로, 인간은 그것을 먹는 한 계속해서 살게 될 것이었다.

그 나무들 중 하나는 “생명”의 나무, 문자적으로는 “그 생명”(the life) 곧 하하이임(hah.a-yyim)의 나무라고 하였다. 이 말이 형태상 복수인 사실은 그것을 추상명사를 나타내는 복수로 인식함으로써 설명되는데, 여기서 정관사는 이 나무가 “그” 생명 자체와 어떤 관련이 있으며, 다시 말해 생명은 그 나무의 열매를 사용함으로써 얻어지거나 보존될 것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먹기에 좋은” 동산의 다른 나무들도 생명을 유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만일 한 나무가 “생명나무”라는 특이한 이름으로 다른 나무들과 구별된다면, 그 열매도 다른 나무들의 열매와는 다르고 가치가 뛰어난 어떤 방법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일이 인간으로 “영생”할(3:22) 수 있게 할 것이라는 진술은 이 나무의 가치가 동산에 있는 다른 많은 유용한 나무들의 가치와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준다.

두 번째 나무의 이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인데,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이다. “지식”이라는 말 앞에 붙은 정관사 “그”는 그 나무가 어떤 종류의 지식이나 모든 종류의 지식을 다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대조된 “악”에 대한 슬픈 지식만을 제공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나무들의 이름은 중요하다. 두 경우 모두에서 “나무”라는 말은 생명과 지식이라는 추상적인 용어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이 두 나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선언할 아무런 이유도 제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에게 영적인 의미를 부여해 준다. “언약궤”가 성전 기구의 실제적인 한 품목이었으나, 그것도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이름을 받았다. 우리를 대신하여 구주가 흘린 속죄의 피 또한 매우 실제적인 물질이었다. 마찬가지로 그 두 나무도 성취해야 할 중요한 목적이 있는 사실적인 나무들로 간주되어야 하며, 이것들의 물질적이고 도덕적인 목적들은 그 이름에 나타난다.

2:10 강.

10~14절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노력을 기울였으나, 홍수 후의 지표면이 이전 것과는 같은 모습이 거의 아니기 때문에 아마도 만족할 만한 설명을 결코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높은 산맥들을 융기시키고 광대한 대양을 형성하게 한 그처럼 엄청난 규모의 격변은 강과 같은 보다 약한 지표면의 특징들을 그대로 남겨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영감의 말씀이 제시하는 것 외에 현재의 지표면의 모습으로 홍수 전의 지리적인 조건을 확인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2:11 비손.

첫째 강의 이름인 비손은 성경 외의 자료에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으며, 심지어는 성경 자체에서도 이 강은 다른 곳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이 강을 인도의 인더스나 갠지스, 애굽의 나일 또는 아나톨리아에 있는 강들과 동일시하는 학자들의 견해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2:11 금이 있는 하윌라.

이와 동일한 고유 명사가 다른 본문들에서도 나타나지만, 그것은 홍수 후 시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본문들은 2:11의 “하윌라”의 위치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2:12 베델리엄.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베델리엄은 그 원산지가 아라비아, 인도, 페르시아 및 바빌로니아인 나무로서, 투명하고 향기로운 수지(樹脂)였다. 이것이 홍수 전 시대의 베델리엄과 동일한 것이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호마노. 이것은 아마도 붉은 색깔을 띤 보석 혹은 준보석들 중의 하나였음이 틀림없다. 고대의 번역들은 호마노(onyx), 붉은 줄무늬 마노(sar-donyx), 홍옥수(sardius) 및 녹주석(beryl)으로 다양하게 번역한다. 그러므로 “호마노”란 번역이 정확한지는 확실치 않다.

2:13 기혼.

이 절과 14절에 대하여는 10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2:15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자신이 창조한 사람을 위하여 거처를 준비한 하나님은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라”는 분명한 사명과 함께 이 에덴의 가정에 그를 두었다. 이 명령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을 때 완전하였다는 사실이 경작, 곧 인간의 노동의 필요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인간은 동산을 받았을 때와 같은 완전한 상태로 그것을 보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육체적 및 정신적 능력을 사용해야 하였다. 새 땅에서 육체적 노동이 삶의 즐거운 모습이 될 것이라는 사실(사 65:21~23)은 일이 저주가 되도록 의도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아담에게 준 동산을 “지키라”는 명령은 아마도 그가 경계하지 않으면 그에게서 그것을 앗아갈 위험이 닥칠 것이라는 숨겨진 암시일 것이다. “지키다”, 샤마르(s∨amar)라는 동사는 “경계하다”, “주시하다”, “보전하다”, “관찰하다” 그리고 “굳게 잡다”라는 뜻이다. 어떤 주석가들이 이 본문을 해석한 것처럼, 아담이 동산을 야수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도록 요청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합당하지 않다. 타락 이전에는 지상에서 동물들 사이에나 사람과 동물 사이에 어떤 적대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공포와 적대감은 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세상의 통치권과 동산의 소유권을 강탈하려고 하는 매우 실제적인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편 동산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다스린다”는 말과 동의어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의 의도를 사람에게 먼저 알리지 않고는 영향을 끼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보증이 있다(암 3:7). 만일 인간에게 유익한 것만을 행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목적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가 이 세상을 위협하는 위험에 대하여 아담에게 알려 주었을 것임이 틀림없다(부조와 선지자, 36 52, 53).

2:16 동산 각종 나무.

이 구절과 관련된 명령은 사람이 하나님이 말한 언어와, “할지니라”와 “말지니라” 사이의 구별을 이해하였음을 전제로 한다. 그 명령은 한 나무만 제외하고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자유롭게 먹도록 허락하면서 긍정적으로 시작한다. 다른 모든 나무를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는 “먹고 또 먹을지니라”, 곧 아콜 토켈(’akol to’kel)이라는 강세형 관용구에 의해 강조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금령에도 적극적인 측면이 있음을 나타낸다.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그러므로 이 자유에 대한 제한은 훨씬 더 구체적이다. 사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이름을 지닌 한 나무(9절 주석 참조)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 이것은 계시되지 않았으므로, 그 나무가 어떤 종류의 열매를 맺었을까 하고 추측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동산에 이 나무가 있는 그 자체가 사람이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였음을 나타냈다. 인간의 봉사는 강요되지 않았다. 그는 순종할 수도 불순종할 수도 있었다. 결정은 그의 것이었다.

열매 자체는 무해(無害)했다(교육, 25). 그러나 그것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은 이 나무를 인간의 충성과 순종을 시험하는 근거가 되도록 구별지었다. 도덕적인 존재로서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그의 양심에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의 율법을 어떤 특별한 상황에 적용시킴으로 그 법의 원칙들을 밝혀 조물주에 대한 인간의 충성을 공정하게 시험하려는 듯이 인간에게 금령이 부과되었다. 하나님은 만물의 진정한 소유자였으며, 심지어는 아담이 위탁받아 가지고 있는 것들의 소유자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그 자신을 위하여 피조물의 어떤 부분이라도 확보해 둘 수 있는 권리를 그에게 부여하였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이 세상의 많은 부분을 확보해 두고 아담에게 오직 작은 부분만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불합리한 것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사람은 한 나무를 제외하고는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을 금지한 것은 명백히 하나님에 대한 충성의 분명한 증거를 보이도록 하는 것 외에는 어떤 다른 목적으로도 사용되지 않았다.

2:17 네가 먹는 날에는.

이 금령을 범할 경우 심각한 형벌, 즉 죽음이 수반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형벌을 언급하고 있는 어법이 그 명령을 범한 바로 그 날에 형벌을 시행할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발표와 그것의 성취 사이에 중대한 모순이 있음을 본다. 그러나 “네가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 문자적으로 “네가 죽고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선언은 범죄한 날에 판결이 선고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사람은 조건적 불멸의 신분에서 무조건적 불멸의 상태로 옮겨갈 것이다. 타락 직전에 아담은 생명나무에 의해 그에게 허용된 불멸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파국과 더불어 발생한 그의 죽음은 매우 확실하였다. 이것이 바로 육체적 죽음이 즉각적으로 올 것이라는 사실 이상으로 그 말이 함축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원칙들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 자신을 그것에 복종시키고, 그 결과로 그가 잘될 것이라고 믿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함으로 아마 그에게서 독립해야 하였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으로부터의 분리는 필연적으로 죽음만을 가져올 뿐이다. 동일한 원칙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형벌과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에 빠지기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에 대한 확실한 결과들이다.

2:18 돕는 배필.

즉 그의 필요에 적절한, 그를 보완해 주는 배필. 짐승들은 떼나 무리로 창조되었지만, 사람은 적적한 개인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오랫동안 홀로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다. 외로움은 인간의 복리(福利)에 손해가 될 것이므로,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반려자를 만들고자 하였다.

2:19 각종 들짐승.

어떤 주석가들이 하나님은 인간에게 반려자를 제공하기 위하여 각종 동물들을 창조함으로써 여러 가지 성공적이지 못한 시도들을 하였다고 표현한 사상은 창조 이야기 중 이 부분의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모세가 기록한 것은 동물의 창조의 시점이 아니라 단지 그에 대한 사실이다. 「제임스왕역」에서 “지으시고”(formed)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형태는 “지으셨다”(had formed)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며, 따라서 그것은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 초반의 창조 행위를 돌이켜 보게 한다. 따라서 이 절의 첫 부분은 바로 뒤에 오는 것에 대한 머리말로 주어졌다.

2:19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은 이 동물들을 연구하고 그것들에게 적절한 이름을 부여하는 중요한 일을 수행해야 하였다. 그는 그 일을 위해서 그것들과 그것들의 습관을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이 일은 그에게 그것들을 지배할 자격을 부여하였거나 아마도 그 자격이 있음을 입증해 주었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그것들이 누리고 있는 가족 생활에 대해서 알고 자신에게는 그 교제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동물들보다 무한히 높게 창조하였다는 사실도 인식하였으므로, 그는 그것들 중에서 반려자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만일 여자를 조성하는 일이 창조주의 목적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것이었다면, 아담은 그 자신의 불완전함을 자각하고 교제의 필요성, 다시 말해 그가 홀로 남아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2:20 아담이 모든 육축…에게 이름을 주니라.

사람은 언어의 기능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음이 분명하다. 아담은 이제 이 능력을 사용하여 자신의 동물 연구에서 이루어진 관찰을 표현하였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연과학에 입문하게 되었으며, 동물들의 이름을 지음으로써 그것들을 다스리는 일을 시작하였다. 육축들은 그들의 미래의 관계에서 다른 동물들보다도 인간에게 더 가까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먼저 언급되었을 것이다. 사람이 좋아하는 새들, 그 중 그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될 어떤 종류의 새들은 두 번째로 열거된다. 아담과 홍수 이전의 세계가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름들이 무엇이었는지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2:20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동물의 창조에 대한 아담의 연구는 그에게 상당한 지식을 제공하였으나 그와 동등한 다른 존재와 더불어 교제하고 싶은 그의 갈망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여자가 남자와 더불어 누려야 할 동등한 동반자 관계를 지적해 준다. 그보다 열등한 피조물 가운데서는 아담에게 어울리는 진정한 반려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2:21 깊이 잠들게 하시니.

아담의 몸으로부터 그의 반려자를 창조하기로 계획한 하나님은 그를 마취로 인한 무의식 상태와 비교될 만큼 깊은 잠에 빠지게 하였다. 아담이 잠든 동안 하나님이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그 자리를 살로 채운 일은 사실상 외과 수술이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측면”, “문짝”, (건물의) “익면”(翼面), (벽 덮개의) “판벽”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첼라(s.ela‘)가 여기서는 “갈빗대”라는 뜻을 지닌다. 「70인역」과 「불가타역」으로부터 현대어 성경에 이용된 이 전통적인 번역은 설형 문자의 기록을 통해 정확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히브리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앗수르어에서 갈빗대를 가리키는 말은 셀루(se∨lu)였다.

2:22 여자를 만드시고.

모세는 히브리어를 잘 구사하였으며 독자들에게 감명을 주기 위하여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알았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1장의 이야기에서 “창조하다”(1:27), “만들다”(1:26), “이루다”(2:7)라는 동사를 사용하였다. 이제 그는 여기에 다소간 같은 뜻의 용어인 “짓다”(to build)라는 동사를 첨가한다. 이 각각의 용어는 그 나름대로 독특한 뉘앙스를 지닌다. 아담의 갈빗대는 그의 반려자가 그것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기본적인 물질을 형성하였다. 그 여자는 남자와 더불어 분리될 수 없는 연합과 생명의 교제를 나누도록 지음을 받았으며, 그녀가 창조된 방식은 결혼에 대한 도덕적 법령을 위한 실제적인 기초를 놓는 것이어야 하였다. 여자는 “동등한 자로서 그의 곁에 서서 그의 사랑과 보호를 받아야” 하였다. 결혼은 주와 그의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과 생명의 교제의 표상이다(엡 5:32).

2:22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하나님이 친히 첫 결혼식을 엄숙히 거행하였다. 여자를 만든 후, 하나님은 그 여자를 아담에게로 인도하였는데, 그는 틀림없이 그때쯤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있었을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처럼(눅 3:38), 하와도 하나님의 딸로 불려진 것이 당연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그녀를 아담에게로 인도하였으며 그녀를 아담에게 선물하였다. 그러므로 결혼 언약이 그 신성한 제도의 창시자를 의미하는 이름인 하나님의 언약(잠 2:17)으로 불린 것은 적절하다.

2:23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아담은 그녀를 소망하던 반려자로 알아보고 자신의 신부로 기쁘게 환영하였으며 자신의 기쁨을 시적인 외침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바로”라는 표현은 그가 여자에게서 그의 마음의 소원의 성취를 보았을 때의 유쾌한 놀라움을 반영한다. 그가 세 번씩이나 반복한(히브리어 본문에서) “이것”이라는 말은 즐거움과 놀라움 가운데 그의 눈이 지금 첫사랑의 강렬한 전율을 가지고 머물고 있는 그녀를 생동감 있게 가리킨다. 본능적으로 또는 하나님의 지시의 결과로 그는 그녀가 그 자신의 일부임을 인식하였다. 그는 이제부터 그녀를 그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하였다. 왜냐하면 그녀를 사랑함으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강조한다(엡 5:28).

2:23 여자라 칭하리라.

아담이 그의 새롭게 창조된 반려자에게 준 이름은 그녀가 창조된 방식을 나타내었다. “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잇샤(’is∨-s∨ah)는 “남자”를 뜻하는 이쉬(’is∨)라는 말에 여성형 어미가 더해져 이루어진다. 영어의 “여자”(woman은 앵글로-색슨어로 wife-man이라는 뜻임)와 “남자”(man)라는 말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다른 여러 언어들에서도 마찬가지다.

2:24 부모를 떠나.

이 절의 말씀은 아담의 예언적인 발언으로 간주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것은 결혼 예식에서 하나님이 하신 선언의 일부이다(참조 마 19:4, 5; 산상보훈, 99). 이 말은 남자와 여자의 가장 심오한 육체적 및 영적 연합을 표현하며, 세상 앞에 일부일처제가 하나님이 정한 결혼의 형태임을 주장한다. 이 말은 자식의 의무와 부모에 대한 존경을 버릴 것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의 아내는 근본적으로 그의 애정의 첫째가 되어야 하며, 그의 첫째 의무도 그녀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이 그의 부모에 대한 매우 당연한 사랑을 대신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지만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어야 한다.

2:24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남편과 아내는 육체의 연합, 관심의 공동체, 애정의 상호성을 통해 존재하는 바, 그들의 연합은 오해할 수 없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이혼을 강력하게 정죄할 때 바로 이 문단을 사용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마 19:5).

2:25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아담과 하와는 외형적인 의복이 필요치 않았다. 왜냐하면 창조자가 그들 안에 완전하게 반영된 그분 자신의 의로운 품성을 상징하는 빛의 두루마기로 그들을 둘렀기 때문이다. 그들의 조물주의 도덕적 형상이 그의 지상의 자녀들에게서 다시 반사될 때, 그는 그들을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기 위하여 다실 오실 것이다(참조 계 7:9; 19:8; 실물교훈 69, 310,). 순결의 흰 두루마기는 지상의 구원받은 자들이 낙원의 문으로 들어갈 때 입게 될 의상이다.

참고자료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1권, 시조사.

– 「열린노트성경」, 아가페출판사.

2016/07/18(월) “창세기 2:1-25”/ 작성: 이동규

본문 창세기 2장1-25절

찬송가 420장 ‘너 성결키 위해’

지난 주 토요일 새벽기도회 시간부터 다시 창세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시간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묵상을 다 마치고 다시 창세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책들이 있지만 읽고 또 읽고, 묵상하고 또 묵상하는 책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책도 몇 번 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읽고 또 읽고, 묵상하고 묵상합니다. 평생에 걸쳐 읽습니다.

그럼에도 신비로운 것은 성경이 물리지가 않습니다. 마치 한국 사람이 김치가 물리지 않고, 서구 사람들이 치즈가 물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성경의 비밀이며 신비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말씀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크기를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성경은 읽을 때마다 새롭고, 읽고 또 읽어도 물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 독서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폭과 깊이를 더해가야 하는 것이고, 편협하고 왜곡된 외눈박이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과 관점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3절입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마침내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을 따라 엿새 동안의 하나님의 창조가 완벽하게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쉬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새번역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공동번역은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복된 것과 거룩은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과 주님의 부활에 근거해 세상이 일요일이라 부르는 날을 ‘주님의 날’ 곧 ‘주일’로 부르고 지킵니다. 그리고 주일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봉사하고 친교(교통)합니다. 그리스도인 됨의 특징입니다.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사항은 담임목사님의 책 ‘새신자반’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하나님의 성도된 우리도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 뿐 아니라 모든 날이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 6절입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조 때 지상의 상태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치 아침 안개로 덮여있는 드넓은 비옥한 들판을 연상케 합니다.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생명과 풍성한 수확의 기대를 갖게 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장면입니다.

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사람의 몸의 재료가 무엇인지를 밝혀주고 하나님 자신의 숨을 인간에게 불어넣어주심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령’은 단순히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영적 존재란 뜻입니다. 사람과 짐승과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본능을 쫓는 짐승처럼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숨을 받은 거룩한 영적 존재로 살아야 함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 때 흙으로 빚어진 약하고 유한한 존재지만 의미있는 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8절에서 17절은 에덴동산과 선악 나무 열매는 먹지 말라는 금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8-9절, 16-1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에덴동산에서 ‘동산’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뜻은 ‘울타리를 치다’입니다. 곧 보호를 목적으로 울타리를 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울타리가 있는 동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울타리가 있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울타리도 없이 향방 없이 흩어지는 바람처럼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경계가 있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말씀의 경계 안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고,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고, 선과 악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숨을 가진 생명의 존재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18절에서 25절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각종 짐승과 새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아담과 인류의 첫 여자 하와의 창조에 대한 말씀입니다. 23절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복되고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것은 창조된 인간의 책임이며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지키고 보존하며 보호해야 합니다. 비오는 날 폐수를 방류하거나 과도한 세제 사용, 또 많은 음식물 쓰레기에 대한 신앙적 반성을 해야 합니다. 누구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현실에 대해 진지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성결하게 사랑하며, 모든 면에서 서로 돕는 베필로 살아가야 합니다. 불륜과 간음의 죄가 무감각해진 이 심판의 시대에 유혹과 함정을 조심하고 경계하며 부부가 서로에 대한 고마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삶의 화두는 거룩입니다. 가정, 직장, 학교, 시장, 슈퍼, 식당, 전철, 버스, 자동차 안, 동네, 교회 등등 어디 있든지 있는 삶의 자리에서 오늘도 하나님의 숨을 가진 영적 존재로서 말씀의 경계를 따라 거룩을 사는 하루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거룩의 가치가 무너진 시대에 그래도 우리 삶의 화두는 거룩이라는 사실을 늘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어디 있든지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숨을 가진 영적 존재로 말씀의 경계를 따라 거룩을 살아내는 오늘 그리고 내일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거룩으로 중한 병든 이 땅이 회복되고 주께서 영광 받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도인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2. 사람이 짐승처럼 살아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그리스도인들은 울타리가 있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 울타리는 어떤 울타리입니까?

4.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관련해 창조된 인간의 책임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작성: 이동규)

에덴에 창설된 동산(창세기 2장 4 ~ 9절)

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지난 시간에 이어서 말씀을 드리는데 창조 기사가 창세기 1장에 한번 나왔는데 다시 2장에서 조금 더 다른 이야기로, 다른 모습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왜 창세기 1장 창조 기사와 2장 창조 기사가 다른가? 하고 많이 고민을 해왔습니다. 한 2~300년 넘어 고민을 하고 학자들이 지금도 풀리지 않는 무엇이 있다 이렇게 인식을 해요. 그냥 밋밋하게 하나님 창조했다 넘어가면 그만인데 성경을 꼼꼼하게 한자 한자 따지면서, 분별하면서 보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1684~1766년까지 살았던 프랑스의 의사가 있었는데 진 아스트럭 이름이 좀 어렵습니다만은 어떻든 신학자가 아니고 의사입니다. 의사가 창세기를 꼼꼼하게 이렇게 살펴보는 중에 뭐가 다르다는 겁니다. 1장에서 창조 기사하고 2장에서 창조 기사하고 다르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 하면서 아무래도 1장 1절에서 2장 3절까지 기록하고 2장 4절부터 나오는 창조 기사가 많이 다르다 하고 이의를 제기했고, 그로부터 지난 300년 넘어 수많은 학자들이 이 부분을 가지고 연구하고 논문도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명쾌하게 해결이 되지는 않아요. 그래서 일반 교회에서는 대체로 언급 자체를 안 하고 그냥 넘어가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우리 샤론장로교회는 성경에 애매한 것이라도 일단 짚어서 생각해보고 넘어 간다. 그것은 전에부터 해왔죠.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첫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명칭을, 호칭을 다르게 쓰고 있어요. 1장 1절에서 2장 3절까지 나오는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으로 쓰고 있습니다. 33번이나 그냥 하나님‘엘로힘’으로 쓰고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2장 4절부터는‘엘로힘’이 아니고‘여호와 엘로힘’으로 이렇게 바뀌더니 그때부터는 계속해서 2장, 3장 끝까지 꼭 여호와 하나님으로 한 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 번도 예외가 없이 반드시 2장 4절부터 3장 끝까지 그것도 18번이나 여호와 하나님으로 불러요.

여태까지 모르고 다 지나쳤죠? 사람이 예를 들어서 책을 엄청나게 두껍게 쓰다 보면서 앞에서 쓰던 말하고 뒤에서 쓰던 용어가 달라질 수 있으나 불과 한두 장 차이에서 이렇게 완벽하게 호칭을 달리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그때 진 아스트럭이라는 의사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아무래도 한 분이 쓴 것 같지 않다. 즉 1장의 창조기사와 2장의 창조기사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서 기록됐다. 이렇게 주장을 하게 되었고 19세기 20세기 초반에 들어설 때까지 독일의 유명한 성서학자 율리우스 벨하우젠이라는 사람이 더 그 분야에 연구를 해가지고 5경을 지금 현재 모습으로 편집한 사람이 여러 사람이 가지고 있던 문서를 모아가지고 잘 배열하고 스토리가 되게 문서들을 가지고 편집을 한 것이 아니냐.

그런데 조금씩 손본 것도 있고 손보기가 영 어려운 부분들은 그냥 다른 것을 절충해서 무슨 새로운 글을 쓰지 않고 두 개를 나란히 다 놓았다는 겁니다. 둘 다, 소중하니까 어느 하나를 선택한 게 아니고 창조 이야기가 전해져 온 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 두 가지가 처음에는 구전으로, 말로 입으로 이렇게 전해져 오다가 언젠가 누구 손으로 문서화가 되어서 짤막짤막한 단편들이 문서가 있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제대로 써 보자하고 쓸 때 이야기를 절충해서 새로 창작을 한 것이 아니고 둘을 다 놓았다 그대로 가능하면 손 많이 안 되려고 이렇게 하면서 가능하면은 자초지종, 기승전결이 되게, 스토리가 되게 이렇게 배열하여 편집한 것이 아니냐? 소이 말하는 J.E.D.P라고 하는데 좀 어려운 말이 예요. 일반 교회에서는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J라는 문서는 하나님을‘야훼’라고 부른다는 거라.‘야훼 엘로힘’으로 부르고, E 문서라는 것은 꼭‘엘로힘’으로만 부른다. 하나님으로만 하고 여호와라는 말은 안 붙인다는 거요. 그러나 D라고 하는 문서는‘두투로론미온’이라고 하는 신명기 기자는 따로 있었다. 전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하고 전혀 다른, 신명기 기자는 전혀 다른 분이였고 레위기 기자는 P라고 해가지고 제사장 계열의 어떤 분이 썼다.

이래가지고 J.E.D.P라고 하는 것이 오늘 신학교에서는 우리교단을 비롯해서 좀 진보적인 교단에서는 이런 학설에 대해서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고 총신대나 고신대 쯤 되면 J.E.D.P 자유주의 신학 그냥 이단 사이비 이렇게 몰아 버립니다. 그런데 유럽이나 미국이나 조금 신학적인 사고가 유연한 그런 신학교에서는 거의 다 이것 무시할 수 없는 이론이다 이렇게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신앙은 꽤 보수적이지만은 학문적으로는 좀 유연한 생각을 갖고 있는 저의 입장에서는 좀 다릅니다. 문서 설 자체를 딱 부정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면이 있어요. 어떻게 앞에는 연달아서 33번을‘엘로힘’으로 하다가 갑자기 2장 4절 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18번이나 연속하거든요.

두 번째, 창조 내용과 순서가 많이 달라요. 1장 창조하고 2장 창조하고 예를 들어서 1장에는 첫째 날에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셨다. 둘째 날에 궁창위에 물과 궁창 아랫물을 나누셨다. 그리고 셋째 날에 육지를 솟아나게 하고 바다가 내려가서 육지와 바다를 나누셨다 하고 셋째 날에 채소와 과목과 땅에 풀을 나게 했다 되어 있어요. 1장 창조에, 그러니까 셋째 날에 육지를 만들면서 육지에 바로 채소와 과목과 땅에 풀을 나게 했다 되어있어요.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고 다섯째 날에 물에는 어류, 물고기 종류가 살게 하시고 궁창에는 새가 나르라 하셨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 땅에 육축과 기르는 것과 동물들을 종류대로 만드셨고 그리고 하나님 자기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드셨다하고 우리는 일장의 창조가 익숙하죠. 다른 것은 2장 창조는 거의 관심 없이 두는데 2장 창조를 볼까요. 4절에

4 여호와 하나님이

여태까지 33번이나 하나님으로만 하다가 2장 4절부터 갑자기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기록하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그러면 아무런 식물도 동물도 없는 거죠. 안개밖에 그런데 하나님이 7절에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러니까 2장 창조에서는 땅위에서 동물, 식물 다 창조 안하고 사람 제일 먼저 창조한 걸로 되어있죠? 맞아요? 입장 곤란합니까? 그런대로 짚어 보자는 그죠. 여기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짖었다는 말도 없고 그냥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생령이 라는 말은 번역이 어쭙잖습니다. 그것을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네페쉬하야’라고 하는데‘네페쉬’라는 말은 생명이 있는, 목숨이 있는‘하야’존재, 우리말로 이제 목숨 있는 존재는 이런 말은 잘 안 쓰니까요. 그러니까‘네페쉬하야’라는 게 생명체, 우리나라 말로 하면 생명체가 되었다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생령이 라는 좀 말은 억지번역이고 영이라는 단어는 없어요. 영이면‘루아크’가 나와야 되는데‘루아크’는 영이고‘네페쉬’가 혼인데 혹 혹은 목숨이‘네페쉬’데 그래서 생명체가 되었다. 그러니까 흙에다가 생기를 안 불어 넣으면 그냥 흙이죠. 기를 불어 넣어 으로서 생명체이 되었다. 우리 번역으로 하면 가장 무난한 번역이 생명체가 되었다고 번역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그렇게 봅니다.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러니까 에덴동산이라고도 하고 동방의 에덴에 창조하셨다 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식물 창조가 여기는 인간 창조보다 뒤로 되어 있죠. 그렇죠.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에덴이 고지대에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거기서 발원해 가지고 동산이 밑에 있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베델리엄 하는 것은 향료의 일종입니다. 베들레헴이 아닙니다. 발음이 비슷해 가지고, 호마노는 줄마노라고도 하고 오닉스라고도 합니다. 보석종류입니다.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14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강 이야기는 조금 있다 하기로 하고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사람을 동산에 두신 목적은 그 동산을 다스리고 지킨다. 요즘 말하면 관리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을 세우실 때 소유하게 하자하고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관리하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논이나 밭이나 갖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 대한민국 법상으로 소유권이 이전등기 되어 있지만은 하나님 앞에는 우리가 소유자가 아니고 관리인입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지 사람이 이전등기 하도록 하나님이 위임장을 써 주신적인 없어요. 우리는 관리인이고 청지기고 그래요. 관리인이다. 그래서 다스리며 지키게 하자 하시고 또,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그러면 창세기 1장 창조에는 동물이 먼저 지음 받았죠. 그런데 2장 창조에는 동물보다 사람이 먼저 지음 받았어요. 차이가 많이 나잖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도 다르고 순서도 다르다 내용도 상당히 다르다 해서 이것은 도저히 방금 앞에 그렇게 써놓고 뒤에 이렇게 쓸 수가 없다. 같은 사람이 쓰면, 그래서 두 가지 창조 이야기가 있는데 어느 하나도 편집자가 볼 때는 버릴 수 가 없다는 얘기예요. 둘 다 중요성이 있다. 둘 다 가치가 있다 해서 인위적으로 손을 대지 않고 전해져온 문서들을 둘 다 배열하되 가능하면 변형하지 않고 있던 그대로 쓴 것이 아니냐.

우리가 마음대로 수정하려고 하면은 일관성 있게 앞에서 하나님 했으면 계속 하나님 하든지 아니면 앞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 했을 건데 이야기 토막이 갈라지면서 분리가 되면서 앞에서 33번이나 하나님, 뒤에는 18번이나 여호와 하나님, 한 번도 실수가 없이 다르게 쓰고 있거든요.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물론 우리가 지금은 언어혼잡 이후에 여러 언어로 변형되었는데 여러분 우리가 언어라는 게 얼마나 미묘하냐 하면은 동물을 보라고요 돼지를 보면 아무리 봐도 돼지라, 그렇죠. 돼지를 보고 소라고 한번 이름 짖어 봐. 소라고 한번 불러 봐요. 제비는 확실히 제비 같아요. 미꾸라지는 정말 미꾸라지야, 그래서 이름을 짓는다는 게 절대 쉬운 게 아닙니다. 그 존재의 특성과 그 존재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가 뭔가를 알아야 이름을 짓는 거지, 그래서 아담이 지금 있는 동물, 식물이름을 짓은 게 아니라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종류가 있었다고 생물 다양성이 지금하고 비교가 안 되는 거라.

지금 아시다시피 공룡만 해도 여러 수십 종류가 있는데 지금은 하나도 없잖아요. 매머드 같은 것도 없고, 수많은 생물들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다 짖어다는 것은 아담의 능력이 그런 생물의 특성과 존재의 가치와 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이름을 짓는 거죠.

저는 이름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편인데 그런 얘기를 강좌 중에 지나가면서 한 말씀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성경강좌 왔던 분들이 아들이나 딸을 곧 낳을 텐데 부부가 아무리 둘이서 머리를 짜도 이름이 생각이 안 난데요. 그래서 날보고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일방적으로 지어 가지고 마음에 안 들면 곤란하니까 당신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이름들을 몇 개를 권해 봐라, 내가 수정을 하든지 좋으면 좋다고 하든지 하겠다. 그리고 주변에 사촌까지 이름을 다 가져 와라, 중복되면 안 되니까

요즘 심심찮게 이름을 지어주는 편입니다. 이명훈 어디 있어요? 저 사람 이름을 제가 지었거든요. 명훈이 누나가 이름이 명진 이라서 남자 같으면 명철이, 여러 가지 생각하다가 명훈이 좋겠다. 밝은 교훈이 좋겠다. 이렇게 해서 명훈이라 지었고 그 외에도 더러 이름을 짓고 합니다. 아담은 동물들 식물들 이름을 다 지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꼭 여호와 하나님이라 그러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하여튼 비딱한 사람이 창세기 2장을 보다가 하나님이 덜 신사적이다. 왜 의논도 안 해보고 남자 갈빗대를 훔쳐 갔느냐, 비인격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나이 많은 목사님이 대답하기를, 갈빗대 하나 훔쳐가지고 여자 하나 갖다 주면 내 갈빗대 다 가져가고 괜찮다고 하더래요. 수지가 맞잖아요. 갈빗대 하나 투자해가지고 여자 하나 얻으면 수지가 맞는 거지요.

그래서 여기 이제 몇몇 순서에 있어서 1장 창조와 차이가 나고 그리고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이 18번이나 연속으로 꼭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거야, 내용도 상당히 다르고요. 그래서 이 두 가지 문건, 두 가지 자료가 전해왔는데 이걸 누가 처음 배열했느냐 하면 에스라가 하거예요. 에스라가

AD 90년에 이스라엘 땅 예루살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얌니아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 얌니아에서 유대 랍비 회의가 모입니다. 유대 장로회의가 유대교, 기독교가 아니고 AD 90년경에 예루살렘은 70년에 망했고 그로부터 20년 지나서 얌니아에서 장로회, 랍비들에 회의가 열려가지고 어떤 책까지가 거룩한 책이냐? 하고 거룩한 책들을 확정을 할 때 다시 말해 구약 39권을 확정할 때 얌니아에서 구약성경 5경을 누가 써느냐? 의논한 결과 연구한 학자들이 다 발표한 일치한 견해가 뭐냐 하면은 예루살렘이 함락된 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해가 BC 586년으로부터 130년 되는 해 그래서 456년에 에스라가 다섯 명의 조수, 다섯 명의 비서들과 함께 40일에 걸쳐 가지고 지금 현재 오경을 지금 모습으로 다듬어서 완성 짓겠다. 이것이 AD 90년 얌니아 회의에서 확정 한 겁니다.

그 학설이 전해지거든요. 그리고 2세기 3세기까지 우리 기독교에서도 얌니아 회의에 결정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가 그 뒤에 성경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역사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성경을 모세가 썼다고 해야 권위가 있는 것처럼 계속 모세오경이라고 이런 말을 자꾸 하는데 사실은 진실한 게 아니야, 모세가 통 안 썼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저도, 모세가 일부는 썼으나 모세가 무슨 말로 썼는지도 몰라요.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은 갈대아 우르 사람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물론 태어나기는 하란에서 태어났지만은 아주 어릴 때 자기 아버지 데라를 따라서 갈대아 우르에 내려갔다가 노아가 죽는 해가 아브라함 나이 60세 되었을 때 노아가 죽었어요. 그쯤해서 아브라함과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다시 고향 하란으로 올라옵니다. 와서 10년, 15년쯤 있을 때 75세쯤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기위해서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본토친척 아비집이 갈대아 우르가 아닙니다. 하란이야, 하란.

하란에서 10년 정도 살았거든요. 그래서 떠나왔을 때 그러면 아브라함이 쓰는 말이 갈대아 언어 내지 하란언어 라는 겁니다. 그 언어를 쓰고 있을 때 조금 있다가 75세쯤 되어서 가나안 땅으로 아브라함이 내려오거든요. 그때 아브라함이 쓰는 언어도 역시 하란언어, 갈대아 언어 이런 것을 썼을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삭도 자기 아버지가 쓰는 언어를 썼을 것이고 야곱도 마찬가지 그러다가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에 갔어도 쭉 그 언어를 썼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히브리어 문법이라든지 이런 게 발달이 안됐어요. 전혀,

애굽에 가서도 자기 언어도 쓰고 애굽 언어도 섞어 쓰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언어가 달라다는 것은 요셉이 애굽 총리가 되어 애굽 말로 하고 자기 형님들은 히브리말로 하기 때문에 중간에 통역을 세웠는데 요셉이 다 알아듣는데 못 알아듣는 줄 알았다. 그런 말도 있죠. 분명히 야곱자손들의 언어와 애굽 언어는 달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 400년 살다보니까 양쪽 언어를 다 쓰고 있었을 텐데, 바로왕의 공주의 아들로 영광스럽게 살던 모세는 거의 애굽의 학문을 통달해가지고 모세 때만해도 히브리 문법이나 문자는 발달 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아무리 봐도, 언제쯤에 히브리 문자가 책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문법이 발달했느냐 하면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정도 일겁니다. 빨라야 다윗과 솔로몬 시대 와서 문자라든지 문법이 체계화 되어 가지고 확실히 기록된 것은 다윗의 시편들이 있거든요 다윗의 시편들, 기도문들 이런 것을 보면

문서 활동이 활발하게 된 것은 BC 9세기 10세기 전후 그 뒤에 히스기야 왕 때 문서 활동이 좀 더 활발해지는 걸로 봐요. 모세시대부터 사사시대까지만 해도 별로 히브리어 문법들이 다듬어지지 않았을 텐데 지금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을 보면 창세기에서부터 말라기까지가 거의 동시대 문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혀 천년이나 간격이 있는 그런 문법 변화가 없이 동시대 문법으로 왜 이렇게 동시대 문법으로 기록될 수 있었냐 하면은 에스라가 짧은 기간에 지금 모습으로 다 손질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히브리 학자들과 랍비들은 그렇게 인정했고 유대인들은 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신 측이나 합동 측에서 아직도 모세오경이다 하고 또 문서설 이런 것을 이야기 하면 신신학 자유주의 이단 사이비 이렇게 봐요. 그러니까 그것이 경건하신 줄로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정직한 게 좋은 게 아닌가요. 사실이 무엇이냐, 그래서 우리가 아까 본 대로 한 사람이 바로 1장하고 2장 사이에 한 장도 안 넘어가서 언어 습관이 확 바뀔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분명히 1장문서와 2장문서는 다른 문서를 배열한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양심적인 학자들이 인정하는 것이고, 무조건 그냥 딴 소리 하지마, 하나님이 모세에게 다 불러 줘서 한자 한자 불러줬다. 이것이 축자영감설이라는 건데 축자영감설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믿는 게 좋은 신앙으로 생각하는가 봐요.

그래서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전부 성령이 한자 한자 불러줬다. 그런 말이 성경에 없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에 감동으로 되었다 하는 것이고, 예언은 언제나 사람의 뜻으로 내게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영감을 받아썼다 이런 말은 있어요.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 그런 말이 있으나 그것은 예언만 그래요 예언만, 역사라는 것은 인용한 것을 이야기 합니다. 이러이러한 말은 유대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더냐 하고 내가 그런 책에서 인용 한다 이렇게 쓰고 있어요.

그래서 이런 문제는 보통 신학교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은 저는 신학교에서 이야기 하는 거는 교회에서 말할 수 있어야 되고 교회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을 신학교에서 말해야 된다고 봐요. 신학교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거짓말 하다가 교회 와서 참말하고 그것은 말이 안 되죠.

그래서 칼 바르트는 조직신학을 하는데 교회에서 강의할 수 있는 조직신학을 해야 된다. 신학교에 신학자들만 자기들끼리 떠들고 교회 가서 입도 벙긋 못하고 이렇게 거짓말 신학하면 안되고 교회에서 말할 수 있는 교이학, 교회 교이학‘처어치 도그마틱스’라고, 그래서 때로는 가끔 부담되고 성도들이 듣고 시험 들라 하는 생각도 저도 있죠. 그러나 정직하게 하는 게 옳다고 봐요.

성도들은 시험 든다 해서 진실을 말하지 않고 무조건 성령이 한자 한자 불러줬다고 거짓말 하면 안 되죠. 만약에 성령이 한자 한자 불러줬으면 복음서 네 개가 똑같이 돼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 누가복음은 길게 불러주시고 마가복음은 짧게 불러주고 마가는 절반은 빼먹고, 그러니까 다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성령의 감동 받았다고 다 성령 되는 게 아니야, 감동을 받으면 양심이 민감해서 거짓말을 안 쓰는 거지, 그러면 성령 감동 받으면 모든 것을 다 아느냐? 그렇지도 않아요. 마가복음을 쓴 분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썼다면 모든 것을 다 아느냐? 아니죠. 많이 빼먹었죠.

그래서 이런 것을 제가 성도들 눈치를 보지 않고 정직하게 공부한데로 사실대로 강의하거나 설교를 하면 인터넷에 돌아서 보수교단, 합동 측이나 고신 측 사람들이 노목사는 성경관이 잘못되었다. 모세가 안 썼데, 하면서 자기들 끼리 난리가 났어요. 네가 모세가 쓰는 것 봤나? 내용을 보면 나중에 똑 같은 한 산을 놓고 어떤 기자는 시내산이라고 그러고 어떤 기자는 호렙산이라고 그래요. 같은 산입니다. 그런데 부르는 이름이 달라요.

그래서 창세기 같은 문제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창세기를 모세가 도저히 쓸 수 없는 그런 구절들이 꽤 있어요. 모세로서는 쓸 수 없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단 지파라는 말을 쓸려면 모세 시대는 못 쓰죠. 모세시대는 단 지파에게 땅을 나눈 적이 없어요. 아직까지, 가나안땅 들어가도 안했으니까, 그러면 단 지파의 땅이 처음에는 베냐민지파 바로 옆에 바다 쪽으로 소라와 에스다올 이쪽이 단지파가 제비뽑아 얻은 땅인데 아모리 족속이 너무 못살게 하니까 단지파가 자기들 분배받은 땅에 벗터내지 못하고 북쪽에 살만한데 없는가? 가서 헤르몬산 기슭에 원래 땅 이름이 라이스라는 땅인데 그 땅을 빼앗아 이름을 단이라 하더라. 그게 사사기 끝에 나옵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 서쪽에 단지파가 땅 분배받아 살았어요. 그런데 사사기 끝에 가서 보면 단지파가 쫓겨나서 헤르몬산 기슭에 올라가서 그 땅을 단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사사기 이후에 사무엘서에 보면 이스라엘 땅 전체를 볼 때 맨 북쪽 끝단을 단이라고 그래요 남쪽 끝단을 브엘세바라고 북쪽 끝단을 단이라고, 단에서 브엘세바 까지 이런 말을 하고 우리 같으면 함경도에서 제주도 까지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 길리고 연습한 사람이 318명이 있었는데 그돌라오멜 즉 엘람 왕 그돌라오멜, 고임 왕 디달 이런 사람들이 와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잡아 갔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 조카 롯도 잡아갔는데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 길리고 연습한 사람 318명을 거느리고 추격했는데 어디까지 갔느냐? 단까지 쫓아갔다고 되어 있어요. 모세는 가나안 땅 정복도 안했고 단지파 땅에도 있지도 않고 단지파는 아직도 요단강 동편에 모압 평지에 있을 때인데 어떻게 모세가 헤르몬산 기슭에 단까지 쫓아갔다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런 것을 모세가 썼다고 하는 것을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아나크로니즘 말도 안 되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다.

그리고 신명기도 보면 끝에 이런 말이 있어요. 모세가 죽기 직전에 비스기산에 올라가잖아요. 올라가서 서쪽을 바라보면 요단강 건너 가나안땅이 쭉 보입니다. 그리고 북쪽을 바라보면 길르앗 땅을 거쳐서 길르앗 땅 끄트머리 쪽에 헤르몬산과 단지파 땅이 보이는 거예요.

그러나 모세 때는 가나안 온 땅과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라고 말을 쓰는 게, 모세 때 단지파가 그 땅을 분배를 안 받았기 때문에 신명기에서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비스기산 꼭대기에서 요단 건너서 가나안 온 땅과 북쪽으로 길르앗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라는 말을 아직 쓸 수 없는 거예요. 단은 아직까지 가나안 땅도 안 들어갔기 때문에 모세보다 400년 후에야 단지파가 그 땅을 차지하거든요.

그런 것들을 본문을 정밀하게 잘 살펴보면 지금 보수교단이라 하는 사람들 말이 무리한 주장이 많아요. 악의는 아닙니다. 나쁜 뜻은 아니고 성도들이 행여나 성경의 권위에 의혹이 생겨서 성경을 우습 게 볼까 싶어 염려한 어른들이 노파심에서 한다고 봐요. 그러나 사실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교단은 신학자들이 상당히 학문적인 자세가 유연해서 고정관념을 갖지 말고 실제 사실 파악을 위해서 학문적 자유를 유연하게 하자는 입장 이예요.

그래서 조금 더 보면 3장에

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이 이야기는 1장 창조에는 안 나오던 이야기인데 인간의 배필, 여자이야기 그 다음 인간의 타락이야기 굉장히 중요하니까 이걸 무시할 수 없는 거죠. 1장 창조의 질서와 순서는 1장의 창조가 맞는 것 같아요. 2장 3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굉장히 근본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나란히 다 배열하자 하는 입장에서 썼다고 봅니다.

3장에 타락이야기는 지금부터 했다가는 너무 길어져서 다음 설교 때 조금 연장을 해서 보충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내용으로는 2장까지만 하는데 2장에서 중요한 것은 1장 창조와 순서도 약간 다르고, 포커서도 다르고, 그리고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에 있어서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결코 한 사람이 쓸 수 없는 내 용 이였다. 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여기까지 정리하고 3장 내용은 다시 한 번 더, 중요하게 때문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타락한 인간들에게 타락한 과정과 하나님의 창조된 대략을 기록해서 주셨는데 옛날에 우리가 예사로 볼 때는 잘 몰랐지만은 성경말씀을 자세히 본 즉, 1장에 창조 기사와 2장의 창조 기사가 약간 다른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다른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전한 기사가 완전치 아니하므로 서로 보충적인 의미에서 꼭 필요한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진 걸로 믿습니다. 이런 말씀을 공부하다가 진실 때문에 우리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게 하시고 또 이 두 기사를 다 앎으로 처음 창조한 대략을 원만하게 이해할 수 있는데 까지 이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드리고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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