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Home » 알프스 산맥 을 넘는 나폴레옹 | 자크 루이다비드 _ 알프스를넘는나폴레옹 4507 좋은 평가 이 답변

알프스 산맥 을 넘는 나폴레옹 | 자크 루이다비드 _ 알프스를넘는나폴레옹 4507 좋은 평가 이 답변

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알프스 산맥 을 넘는 나폴레옹 – 자크 루이다비드 _ 알프스를넘는나폴레옹“?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sk.taphoamini.com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https://sk.taphoamini.com/wiki/.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KTV스콘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16,526회 및 좋아요 55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Table of Contents

알프스 산맥 을 넘는 나폴레옹 주제에 대한 동영상 보기

여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세요!

d여기에서 자크 루이다비드 _ 알프스를넘는나폴레옹 – 알프스 산맥 을 넘는 나폴레옹 주제에 대한 세부정보를 참조하세요

그림 읽어주는 여자 – 홍옥희 영상해설사
(2016년 4월28일 목요일)

알프스 산맥 을 넘는 나폴레옹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 바위에 남긴 나폴레옹 다녀감

그래서 스페인의 왕이 프랑스의 거장 자크 루이 다비드에게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캔버스에 유화. 261 cm × 221 cm.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9/16/2022

View: 3987

자크 루이 다비드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 오늘의 ...

이 그림은 1800년에 나폴레옹이 북부 이탈리아를 침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던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스스로 이 …

+ 더 읽기

Source: www.jejudomin.co.kr

Date Published: 10/13/2021

View: 9457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작품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의 5점 연작(1801–1805)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이 그림은 나폴레옹이 노새가 아니라 “기운찬 말을 타고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0/12/2021

View: 7089

숨겨진 미술, 이야기 – 브런치

자크 루이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Le Premier Consul ... 전쟁의 신' 나폴레옹은 경사진 알프스 산맥과, 놀라서 앞발을 거칠게 올린 말도 ...

+ 더 읽기

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8/13/2021

View: 6112

그림이 있는 아침 나폴레옹이 흡족해 한 그림 자크 루이 다비드 …

다비드의 대표작인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사진·1801년)은 이때 그린 작품이다. 1800년 나폴레옹이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할 때 알프스산맥을 넘었던 …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www.hankyung.com

Date Published: 12/16/2021

View: 9215

[세계의 명화] 19세기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 자크 루이 …

새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을 찬양하였다. 이 그림은 1800년에 나폴레옹이 북부 이탈리아를 침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던 사건을 …

+ 여기에 보기

Source: kkongki.tistory.com

Date Published: 4/13/2021

View: 3281

작품번호 20 알프스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 자크루이 다비드

작품번호 20 알프스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 자크루이 다비드 가격: 3500원 작품번호 20 자크루이 다비드 Napoleon Crossing the Alps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

+ 여기에 더 보기

Source: m.bunjang.co.kr

Date Published: 7/20/2022

View: 7936

Napoleon Crossing The Alps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기분 좋은 그림으로 꾸미는 아름다운 Life. 국내외 유명 작가의 아트프린트&에디션 판화를 ‘그림닷컴’에서 만나보세요.

+ 더 읽기

Source: gurim.com

Date Published: 5/1/2022

View: 103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Napoleon Crossing The Alps)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Napoleon Crossing The Alps). 곡 기본정보. 음악과 함께 감상하는 다비드 명화 #1 (음악, 미술, 그림,. 곡 정보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music.bugs.co.kr

Date Published: 9/22/2021

View: 6854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알프스 산맥 을 넘는 나폴레옹

주제와 관련된 더 많은 사진을 참조하십시오 자크 루이다비드 _ 알프스를넘는나폴레옹. 댓글에서 더 많은 관련 이미지를 보거나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자크 루이다비드 _ 알프스를넘는나폴레옹
자크 루이다비드 _ 알프스를넘는나폴레옹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알프스 산맥 을 넘는 나폴레옹

  • Author: KTV스콘
  • Views: 조회수 16,526회
  • Likes: 좋아요 55개
  • Date Published: 2016. 4. 27.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a_GOb1n6Gq8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 바위에 남긴 나폴레옹 다녀감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나폴레옹! 가볍게 한번 볼까요?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을 때는 아직 배가 나오지 않은 31살, 1800년 5월입니다. 몸이 가벼웠으니 말을 타고 험난한 알프스 산맥을 넘었겠지요?ㅋ

대군을 이끌고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경계인 알프스 산맥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어 이탈리아를 점령한 대단한 위인입니다. 이 멋진 사건을 당연히 기록해야겠지요. 그래서 스페인의 왕이 프랑스의 거장 자크 루이 다비드에게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캔버스에 유화

261 cm × 221 cm

1801

말메종 성 소장

백마를 타고 오른손을 뻗으며 나를 따르라~​ 참고로 백마는 늙은 말이라더군요. 사람도 늙으면서 흰머리카락이 나듯이 말들도 그런가 봅니다.

너무나도 아이코닉한 작품이지요. 근데 이 작품을 왜 스페인의 왕이 주문했을까 궁금하시죠? 이 당시 스페인의 왕이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였습니다.​ㅋㅋ 그래서 이 작품은 조제프가 왕자리에서 물러난 1812년 까지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망명을 갔는데 작품도 따라갔지요. 그렇게 1949년 까지 미국에 있다가 손녀 유제니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에 작품을 넘겨 주면서 지금의 말메종 성 미술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말메종 성은 파리 근교에 있는 나폴레옹과 조세핀이 살던 집입니다.

근데 베르사유 궁전에 다녀오신 분들도 이 작품을 보지 않았나요?​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Ver. 2

1801​

베르샤유 궁전 소장

이 작품은 자크 루이 다비드가 두번째로 그린 작품으로 원래는 생 끌루 성에 있었습니다만 1814년에 프러시아 병사들이 처들어와서 이 작품을 들고 독일로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프랑스 베르샤유 궁전에 있지요.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Ver. 3

1802

베르샤유 궁전 소장

근데 자크 루이 다비드는 한점을 또 그렸습니다. ​이번 작품은 프랑스의 앵발리드, 퇴역군인들을 위한 병원과 집이 있는 곳에 걸었던 작품입니다. 그러다가 루이 필립왕이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겼지요.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Ver. 4

1803

샤를로텐부르크, 독일 베를린

다비드는 또 그렸어요. 왜 그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튼 이 작품으 밀라노로 보내졌다가 오스트리아 병사들이 들고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비엔나의 벨베데레 미술관에 클림트의 키스와 함께 소장되어 있습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Ver. 5

1804

벨베데레 궁전

다비드는 또 또 그렸습니다​. 이번은 개인 소장용이었지요. 그래서 죽을 때 까지 가지고 있다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딸이 나폴레옹 3세에게 선물로 줬습니다. 튈르리 궁전에 소장되어 있다가 지금은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겼다고 하네요. 그럼 베르사유 궁전에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 세점이나 있단 얘긴가요?

어찌됐든, 이 멋진 작품이 거짓말이라고 어디선가 들어보셨을 겁니다. 말은 험한 산을 오를 수 없기 때문에 당나귀를 타고 넘었다는 말이 있죠. 사실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작품은 있습니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폴 들라로슈 (본명: 이폴리트 들라로슈)

캔버스에 유화

289 cm × 222 cm

1850년

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 소장

많이 초라해 보이죠? 프랑스 화가가 영국에서 그린 나폴레옹입니다. 정말 이런 모습이었을까? 이 작품은 영국의 왕이 폴 들라로슈와 함께 루브르 박물관을 (튈르리 궁전) 관람 왔다가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을 보고 들라로슈에게 주문을 한 작품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만 사실 그대로 그려달라고 주문을 했다네요. 하지만 전쟁이 끝난지 50년이 지난 1850년에 그려진 작품이니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들라로슈도 주문을 한 영국 왕 아서 조지도 나폴레옹을 존경했기 때문에 절대 나쁜 뜻으로 이렇게 그린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5점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왼쪽 하단을 보면 바위에 이름을 새겨놨습니다.

제일 위에 나폴레옹의 이름인 Bonaparte (보나파르트), 그 아래 Hannibal (한니발 바카, 카르타고의 자수), 그 옆에 Karolus Magnus가 (카를루스 대제 또는 샤를마뉴, 샤를 대제) 새겨져 있습니다.

한니발 다녀감, 카를루스 다녀감 마지막으로 나폴레옹 다녀감! 이 세명이 알프스 산맥을 넘은 위인들이지요.

나폴레옹이 정말 당나귀를 타고 초라하게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면 기원전 3세기에 아프리카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카는 코끼리와 수만 병사를 이끌고 스페인을 지나 론강을 건너 알프스 산맥을 넘었으니 정말 대단한 위인이죠!!! 나폴레옹도 이런 모습을 원했나 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팬이었던 다비드가 더 멋지게 그려줬을지도 모르고요!

AUT INVENIAM VIAM AUT FACIAM – HANNIBAL BAECA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라 – 한니발 바르카

자크 루이 다비드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 ( 1801|캔버스에 유채물감|272×230㎝|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

기본적으로 정치 화가였던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는 하마터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뻔 했던 프랑스 혁명(1789~1799)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다비드는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새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을 찬양했다.

이 그림은 1800년에 나폴레옹이 북부 이탈리아를 침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던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스스로 이 장면을 선택한 다음, 다비드에게 자신을 ‘사나운 말위에 올라탄 평온한’모습으로 그릴 것을 명했다. 황제의 이목구비가 이상화돼 표현된 가장 큰 이유는 나폴레옹이 그림이 제작되는 동안 한 번도 모델로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그림은 무엇보다도 나폴레옹 제국의 위엄을 상징하고 있다. 사납게 몰아치는 바람에 거칠게 나부끼는 말의 갈기와 나폴레옹의 망토는 이 그림에 웅장한 느낌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최고의 선전일뿐, 진실은 훨씬 더 무미건조하다. 사실 나폴레옹은 화창한 날에 알프스 산을 넘어 진군했다. 발췌=「명화1001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

Bonaparte Crossing the Alps

작가 폴 들라로슈 연도 1850년 매체 캔버스 유화 크기 222 cm x 289 cm cm 소장 워커 아트 갤러리 (영국 리버풀)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때때로 알프스를 건너는 나폴레옹이라고도 하며, 자크 루이 다비드의 주제에 대한 더 잘 알려진 버전의 제목이기도 함)는 프랑스 예술가 폴 들라로슈[1][2]의 1848-1850년 유화이다.[3] 이 그림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자신의 군대와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통과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나폴레옹과 휘하의 군대가 1800년 봄에 이탈리아에 있는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하기 위한 시도로 행해진 여행이었다.[4][5] 루브르 랑스와 영국 리버풀의 워커 미술관에 이 그림의 여러 판본이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것의 작은 판본을 소유했다.[6]

이 작품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의 5점 연작(1801–1805)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이 그림은 나폴레옹이 노새가 아니라 “기운찬 말을 타고 차분히”[7] 그랑 생베르나르 고개를 건너는 영광스러운 비전을 제시한다.

그림 [ 편집 ]

역사적 배경 [ 편집 ]

1798년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일환으로 나폴레옹은 당시 오스만 제국의 속주였던 이집트를 침공하여 정복할 준비를 했다. 그러한 군사 행동은 프랑스의 무역 이익을 확보하고, 영국이 인도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등 수많은 이익을 약속했다. 1798년 7월 1일, 나폴레옹은 이집트 해안에 상륙했다. 수 많은 사상자를 낸 길고, 연쇄적인 격돌 끝에, 전역은 오스만-영국의 승리로 이어졌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를 탈환했다는 소식을 듣고 파리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우위를 회복하기 위해 그는 치살피나 공화국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에 대한 기습공격을 계획했다. 오스트리아군이 나폴레옹의 대규모 군대가 알프스를 횡단할 수 있을 거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못할 것이라는 가정에 따라 그는 그곳을 경로로 선택했다.[8] 그는 알프스를 통과하는 최단 경로인 그랑 생베르나르 고개를 선택하여 가능한 한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9][10]

1800년 5월 15일,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 40,000명 (야전포병과 수하물 열차를 포함하지 않음)(경포병과 보병 35,000명, 기병 5,000명)은 산을 통과하는 힘든 여행을 시작했다.[11][12][13] 나폴레옹의 군대는 5일 동안 이 고개를 가로지르며 거의 22,000병의 와인, 1톤 반 이상의 치즈, 약 800kg의 고기를 소비했다.

들라로슈의 퐁텐블로에서 퇴위하는 나폴레옹, 1845년 캔버스에 유채

알프스를 넘어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군대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원정의 불길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군은 거의 한 달 만에 마렝고로 후퇴했다. 그곳에서 6월 14일 큰 전투가 벌어졌고, 그 결과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했다.[3]

예술가와 의뢰 [ 편집 ]

자크-루이 다비드의 이 장면은 나폴레옹의 알프스 횡단에 대한 들라로슈의 생각과 크게 다르다.

다비드의 제자인 앙투안 장 그로와 함께 공부한 들라로슈는 역사와 성서의 인물과 웅대한 주제를 그리는 인기 있는 프랑스 화가였다.

리버풀의 그림은 들라로슈와 조지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한 후 유명한 사건의 다비드 버전을 본 후 온슬로의 3번째 백작 아서 조지에 의해 의뢰되었다. 나폴레옹이 망명한 지 거의 40년 만에 나폴레옹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난 후 최근에야 박물관에 다시 걸려 있었다. 그림이 비현실적이라는 데 동의한 조지는 상당한 양의 나폴레옹 도구 컬렉션을 소유하고 있었고 들라로슈에게 보다 사실적인 묘사를 의뢰했다. 엘리자베스 푸카트 워커는 실제로 루브르 랑스에 걸려 있는 그림이 리버풀 그림이 제작된 1850년에 이미 미국에서처럼 먼저 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스테픈 반은 아서 조지와 들라로슈의 만남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지만, 들라로슈는 거의 동일한 두 작품을 제작하고, 하나는 미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수용 [ 편집 ]

이 작품은 나폴레옹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이유로 여러 권위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몇몇 사람들은 들라로슈의 그림 선택에 동의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들라로슈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나폴레옹의 천재성을 추구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반대했다.[14]

완성 직후 이 작품은 영국으로 옮겨져 1850년 그곳에서 문학잡지인 〈아테네움〉(Atheneum)의 평론가로부터 평론을 받았다.[15] 그 작품에 대한 잡지의 논평은 그들이 그림의 몇 가지 특징에 대해 칭찬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들라로슈를 비판했다고 지적했다.

“ 프랑스 복장을 한 장교가 노새에 올라타서 거친 농부에 의해 위험한 길을 안내한다. 그의 보좌관은 우뚝 솟은 알프스의 계곡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휘장을 엮은 것, 네 발 달린 동물의 얽히고 설킨 질감, 등에 달린 마구의 디테일을 생략하지 않은 충실도로 표현되었다. 박힌 눈의 표류, 덧없는 순간의 고독한 태양 광선이 만든 매달린 고드름은 같은 자질로 네덜란드 학파를 최고 수준으로 높이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진리로 주어진다. 그러나 겸손한 아작시오 중위를 유럽의 넓은 지역의 운명의 지배자이자 중재자로 이끈 고매하고 대담한 천재는 델라로슈에 의해 헛되이 추구될 것이다.[14] ”

일부는 일반적으로 당시 들라로슈의 작품에 불만을 품었고, 부분적으로는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가 그의 ‘낮은 예술 기준’으로 묘사된 것을 비판했다. 그러한 비평가들은 들라로슈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쓴 〈더 젠틀맨스 매거진〉(The Gentleman’s Magazine)을 포함한다.

“ 이것들은 모두 그의 스타일의 수정을 보여 주지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의 최근 작품들은 그가 잃어버린 동정심을 회복하기 위해 계산되지 않았다. 들라로슈는 천재라기보다는 재능있는 예술가라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교육과 부지런한 연구 덕분에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화가가 아닌 화가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예술가의 진정한 사명, 즉 대중교육을 발전시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충동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그는 그것에 굴복했다. 그는 반사였지만, 빛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대중을 높이는 대신, 그는 대중에게 자신을 낮추었다.[16] ”

각주 [ 편집 ]

숨겨진 미술, 이야기

미술을 이용했던 정치가 ‘나폴레옹’과 ‘신고전주의 미술’

나폴레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젯밤 아트플랫폼 sharp spoon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하는 장면을 놓치고 싶지 않을 때, 오늘날의 우리는 휴대폰을 꺼낸 다. 한 계절의 아름다움과 여러 명소들, 때로는 태어난 아이의 성장과정까지 각자의 취향을 손바닥 정도의 작은 기계에 고스란히 담는다.

과거의 사람들은 어땠을까.

휴대폰 이전에 과거의 필수품은 카메라였다. 카메라의 파급효과는 굉장했다. 사진과 같은 사실적인 그림에서, 사진으로 남길 수 없는 모네와 고흐 같은 거친 화풍을 등장시켰다. 카메라의 등장으로 당시 화가들은 더이상 사진과 같은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어졌다. 그들은 신과 왕에 대한 존경보다는 그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문화를 향유하기 시작했다.

좌) 자크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우)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그래서일까. 카메라가 등장하기 전의 작품을 바라보면 감탄을 금치 못한다. 실제로 보고 그린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정교하고 생생하다. 명암과 색채로 표현한 피부결은 매끈한 등선에서도 근육과 뼈가 느껴지게 하며, 천의 질감은 푹신해 보일 정도로 사실적이다 . 이런 정교한 표현방법과 여백의 처리는 전체적으로 엄숙하면서도 진중한 분위기이다.

약 300여 년 전, ‘ 신고전주의 미술 ‘은 역사와 신화를 바탕으로 사실적인 묘사 가 더해지면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귀족을 위한 화려한 미술에 등을 돌린 대중들에게 신고전주의 미술은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18세기 말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던 이 사조의 중심에는 대표적으로 다비드 와 앵그르 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를 주도했던 정치가도 있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The word impossible is not in my dictionary)’

한 번쯤은 들어봤을 명언이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그는, 오늘날까지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빼어난 정치가라는 사실에는 이견을 둘 수 없다. 약 300여 년 전의 행보가 오늘날까지 명언과 업적으로 현대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니, 정치가를 넘은 역사적 인물이다. 지중해의 작은 섬 소년에서 유럽을 제패한 프랑스의 황제, ‘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1821)’의 이야기이다.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남긴 작품을 통해 우리는 나폴레옹이라는 한 사람의 이미지를 받아들였다. 전쟁에서의 용맹함, 군주의 카리스마는 그를 대면하지 못했음에도 연상된다. 신고전주의의 대가 다비드와 앵그르가 그린 주인공이자 미술을 이용했던 정치가, 나폴레옹을 작품으로 만나보자 .

자크 루이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Le Premier Consul franchissant les Alpes au col du Grand Saint-Bernard)>

자크 루이 다비드 (David, Jacques Louis, 1748~1825) 의 <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은 나폴레옹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놀란 말 위에서도 잃지 않은 카리스마와 평정심은, 용맹함을 넘어서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당시 나폴레옹의 궁정화가 였던 그는 이 작품 으로 충성도를 비췄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군대를 무찌르게 위해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의 협곡을 힘차게 오르는 모습이다. ‘전쟁의 신’ 나폴레옹은 경사진 알프스 산맥과, 놀라서 앞발을 거칠게 올린 말도 막을 수 없다. 침착하고 당당함을 잃지 않은 여유로운 모습 에서 그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그림 속의 나폴레옹은 침착함을 넘어서 손을 위로 뻗었다. 이는 앞으로 나아가라는 의미로 추측할 수 있는데, 그들의 방향을 안내하듯 불어오는 바람까지 그를 돕고 있다. 당시 나폴레옹은 당대 최고 권력자로 황제가 되기 전이었다. 위험한 전쟁에서도 늘 선두에 나서서 병사를 지휘했는데, 이런 일화로 비추어보는 다비드의 그림은 신뢰감 있는 군주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그림의 하단을 보면 힘겹게 올라가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나폴레옹과 다르게 매우 힘들어하는 표정이다. 바닥의 돌은 나폴레옹의 성 보나파르트(BPNAPARTE)와 함께, 알프스를 정복한 영웅들의 이름(HANIBAL, KAROLVS MAGNVS)이 적혀있다. 다비드가 이 작품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현실은 어땠을까. 알프스를 넘는 일은 그림과 다르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0만 명의 군사가 3만 명으로 축소될 정도였다고 하니, 넘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병사들의 처참하고 끔찍한 모습이 짐작된다.

폴 들라로슈, <알프스 산맥을 건너는 보나파르트(Bonaparte Crossing the Alps)>

약 50년 후에 프랑스의 화가인 폴 들라로슈(Hippolyte Delaroche, 1797~1856) 가 그린 나폴레옹의 모습은 조금 더 현실적이다 . 역사화와 초상화를 잘 그렸던 그의 작품은 다비드와는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나폴레옹이 탄 말이다. 본래 나폴레옹은 가파른 협곡을 오르기에 어려움이 있는 말이 아닌, 노새를 탔다고 알려졌다 .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노새의 위로 나폴레옹의 모습도 누추해 보인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손 위치도 현실적이다. 평소 나폴레옹은 위가 좋지 않아서 배를 자주 만졌다고 알려졌는데, 그림 속의 모습에서도 배에 손을 올렸다. 영웅이 아닌 인간적인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현실적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다른 버전들

영웅이 되고 싶은 야심가였던 그는 다비드의 작품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모습이야 어찌 되었건 자신이 남기고 싶은 이미지를 표현해주었으니, 어찌 총애하지 않을 수 있을까. 본래 이 작품은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가 친선의 의미로 다비드에게 주문한 초상화였는데, 그림을 보고 만족한 나폴레옹도 추가적으로 3점을 더 주문했다. (다비드 스스로가 한 점을 더해서 총 다섯 점이 그려졌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The Coronation of Napoleon)>

전작인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으로 나폴레옹의 취향을 ‘저격’한 다비드이다. 그가 그린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역시 현실을 모두 반영한 그림은 아니었다.

그는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약 200여 명의 사람들로 화려하면서도 웅장하게 표현했다. 황제를 위해 격식 있게 갖춘 인물들의 의복에서 이 자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그들 대부분은 조세핀의 머리에 왕관을 씌어주는 나폴레옹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나폴레옹의 취향이 반영된 그림이었다. 그 당시 다비드는 스스로 황제의 관을 쓴 나폴레옹을 그리려고 했으나, 주변의 항의로 위의 모습과 같이 변경했다고 알려진다. 그림의 뒤편 중앙에는 나폴레옹의 어머니가 앉아있다. 당시 나폴레옹의 어머니는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다비드는 마치 그녀가 아들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지켜보듯 화면의 중앙에 그렸다.

이렇게 다비드는 프랑스의 역사를 그의 해석으로 화폭에 다르게 담으면서 부와 명성을 얻었다. 나폴레옹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이자, 용맹함을 갖춘 영웅으로 만들었다. 훗날 그는 나폴레옹이 최후를 맞이하자 프랑스에서 추방을 당한다.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프랑스의 회화 발전에 큰 공헌을 했음에도 예술을 도구로 이용한 화가 라는 점에서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Napoleon on his Imperial throne)>

신고전주의 대가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 도 그림을 통해 흔들림 없는 군주의 모습을 표현했다.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던 스승 다비드의 제자답게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사실과 같이 정교하게 화폭에 담았다.

앵그르의 작품 속 나폴레옹은 체격이 매우 건장하다. 키가 작았다고 알려진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 나폴레옹의 카리스마와 화려한 옷에서도 감춰지지 않은 건장하고 강인한 이미지를 그렸다. 나 폴레옹의 권위를 넘어서 황제의 신성한 이미지룰 표현했다. 다비드의 제자임을 고려한다면,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우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보나파르트, 제 1집정관(Bonaparte, First Consul)>

앵그르는 이미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 이전에 <보나파르트, 제 1 집정관>으로 나폴레옹을 그렸다. 이 작품에서의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기 전이었다. 오스트리아 군대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던 도시에서 후원자인 나폴레옹을 기념하기 위해 앵그르에게 의뢰해서 그려진 것이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그리는 앵그르답게 작품 속의 나폴레옹은 강인하고 진중한 이상적인 정치인이다. 나폴레옹의 뒤로는 성당이 있는데, 교회와 정치의 화합을 위해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앵그르는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까지 작품세계를 이어나갔으며, 나폴레옹은 그에게 명성을 주었다. 정치적으로 예술을 사용하려는 정치가와, 그림이 출세의 수단이 되었던 시대의 합이 맞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등장부터 몰락까지, 앵그르는 세상의 혼란을 직접 경험했다. 그가 혼란스러운 세상보다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동경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마 치 그 시절 포토샵의 대가와 같은 그의 그림은 이상적이고 창조된 미가 담겨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 <튈르리의 서재에 있는 나폴레옹 황제(The Emperor Napoleon in His Study at the Tuileries)>

만약 카메라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아직까지 그림으로 당대의 권력가를 표현한다면 우리가 아는 정치인들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을지 문득 궁금하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미술을 영리하게 이용했다. 그는 미술로 표현하는 초상화와 역사화가 자신의 세력을 결집시키는데 유용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림을 통해 전쟁 속의 용맹스러운 영웅이자, 근엄하고 든든한 황제의 모습으로 세력을 구축했다. 이러한 행보는 신고전주의 미술을 유럽 전역에 빠르게 전파했다. 아마 그가 미술을 정치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다면 역사 속에서 다비드와 앵그르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를 담으려고 했던 수많은 예술가들을 만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정치와 예술의 결합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주시하며 생각해야야 하는 부분이다. 승자가 기록되는 역사책에서는 신고전주의 미술의 등장으로 무엇을 놓쳤는지 알 수 없다. 정치가를 찬양하는 예술의 발전이 당시 미술의 발전을 촉구했는지, 퇴행시켰는지는 확답이 어려운 이유이다.

나폴레옹은 도전정신과 포기를 모르는 상징적인 인물이자 수많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독재자로 기록되었다. 만약 다음 후대에 나폴레옹과 신고전주의 미술가들의 평가가 다시 이뤄진다면, 그들은 어떤 인물로 비치게 될까. 예술은 수학과 같이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나누기 어렵다. 확실한 건 그 당시 그들이 그린 작품을 통해 우리는 한 시대가 기억되는 것이다.

‘미술을 이용했던 정치가, 나폴레옹은 이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그림이 있는 아침] 나폴레옹이 흡족해 한 그림, 자크 루이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꿈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주는 장소가 있다. 빈센트 반 고흐에겐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 프랑스 남부도시 아를의 ‘노란 집’이 그랬다. 노란 집은 정신병원에서 나온 고흐가 내일을 꿈꾸며 다시 붓을 잡은 곳이다. 비운의 마지막을 맞은 곳이지만, 고흐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간도 있었다. 폴 고갱과 함께 밥을 먹는 시간이었다.고흐는 인생의 멘토이자 친구인 고갱에게 아를로 올 것을 권유하면서 편지에 이렇게 썼다.“요리를 해줄 가사도우미를 고용할 수 있겠지만 손수 해먹으면 훨씬 생활비를 줄일 수 있을 것 같다.”사실 고흐는 요리를 못했다. 그림에 몰두하느라 며칠씩 굶는 등 요리엔 관심도 없었고, 고흐가 요리를 하면 고갱은 ‘고흐의 요리는 그의 그림처럼 온갖 색채로 뒤범벅이 되어 고역에 가깝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반대로 고흐는 고갱의 요리에 대해 ‘최고의 만찬’이라고 극찬했다. 고흐가 고갱과 아를의 노란 집에 머물 당시 요리는 주로 고갱이 했다. 그는 뛰어난 솜씨를 갖고 있었다. “품위 없는 여성은 결코 요리를 잘할 수 없고, 대담한 마음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말도 남겼다.해군으로 몇 년간 세계를 돌아다닌 고갱은 해산물 요리의 달인이었다. 고흐가 장을 보면 고갱은 불을 피우고 칼질을 했다. 두 화가의 밥상 동거는 ‘노란 종이 위에 놓여 있는 청어(1889)’, ‘물고기가 있는 정물(폴 고갱, 1878)’ 등의 작품으로 남았다.고흐가 1889년 그린 ‘두 마리 게’는 고흐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그렸다. 한 마리는 뒤집어져 있고, 한 마리는 제 모습을 하고 있다. 고흐 특유의 거친 붓터치와 함께 대조되는 배경과 대상의 색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해석은 여러 가지다. 뒤집어진 게는 자신을, 온전한 게는 동생 테오를 상징한다는 풀이가 많다. 한 번 뒤집어진 게는 다른 게가 뒤집어줄 때까지 혼자서는 뒤집을 수 없다. 그래서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고독과 소외감에 몸부림치며 동생과의 영원한 동반자 관계를 꿈꿨던 고흐는 두 마리 게를 통해 테오에게 외쳤는지도 모른다. “테오, 어서 와서 나를 좀 뒤집어 달라”고.김보라 기자 [email protected]

[세계의 명화] 19세기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 자크 루이 다비드

[세계의 명화] 19세기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 자크 루이 다비드

캔버스에 유채물감 , 1801 , 272 x 230cm, 프랑스파리 루브르박물관

캔버스에 유채물감 , 1801 , 272 x 230cm, 프랑스파리 루브르박물관

1800년대 낭만주의 대 사실주의 , 라파엘전파 ,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 상징주의 , 세기말 등으로 표현 할 수 있는

19세기의 명화 그 중에서도 오늘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이란 대작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정치 화가였던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는 하마터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뻔 했던 프랑스 혁명(1789-1799)

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잇따르는 정치적 사건 속에서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열광적인 지지자가 되었고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여

새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을 찬양하였다.

이 그림은 1800년에 나폴레옹이 북부 이탈리아를 침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던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스스로 이 장면을 선택한 다음, 다비드에게 자신을 ‘사나운 말위에 올라탄 평온함’ 모습으로 그릴 것을 명했다.

황제의 이목구비가 이상화되어 표현된 가장 큰 이유는 나폴레옹이 그림이 제작되는 동안 한 번도 모델로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비드는 자세를 포착하기 위해 아들을 사다리 꼭대기에 앉혀야만 했다. 다비드는 마렝고 전투(1800)에서 나폴레옹이 입었던 제복을 빌려 나폴레옹의 군복은 좀 더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이그림은 무엇보다도 나폴레옹 제국의 위엄을 상징하고 있다.사납게 몰아치는 바람에 거칠게 나부끼는 말의 갈기와 나폴레옹의 망토는 이 그름에 웅장한 느낌을 부여한다. 그림 아래쪽 바위에 새겨진 한니발과 샤를마뉴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승리를 이끌어냈던 또 다른 장군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최고의 선전일뿐, 진실은 훨씬 더 무미건조하다. 사실 나폴레옹은 화창한 날에 알프스 산을 넘어 진군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비드는 표트로 대제의 기마상을 토대로 앞발을 들고 서 있는 말의 자세를 그렸지만, 사실 나폴레옹은 노새를 타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오늘 나의 불행은 언젠가 잘 못 보낸 시간에 대한 보복입니다.

-Napoleon Bonaparte ( 1769. 8 . 15 ~ 1821. 5 . 5 )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Napoleon Crossing The Alps)/고전파(The Classic)

음악을 재생할 플레이어를 선택해 주세요.

벅스 웹상단 > 플레이어 선택에서 플레이어를 변경할 수 있습니다.

웹 플레이어 벅스 플레이어 (프로그램 설치 필요) v 1.3.0 미만인 경우,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 해주세요.

[설치 안내 바로가기]

항상 선택한 플레이어로 재생

키워드에 대한 정보 알프스 산맥 을 넘는 나폴레옹

다음은 Bing에서 알프스 산맥 을 넘는 나폴레옹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필요한 경우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의 다양한 출처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유용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자크 루이다비드 _ 알프스를넘는나폴레옹

  • 동영상
  • 공유
  • 카메라폰
  • 동영상폰
  • 무료
  • 올리기

자크 #루이다비드 #_ #알프스를넘는나폴레옹


YouTube에서 알프스 산맥 을 넘는 나폴레옹 주제의 다른 동영상 보기

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크 루이다비드 _ 알프스를넘는나폴레옹 | 알프스 산맥 을 넘는 나폴레옹,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See also  롯데 마트 광교 점 | [롯데마트 스마트스토어] '광교점' 최근 답변 116개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