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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 | 소망의 이유를 아는 사람들 (베드로전서 3:13~16) | 안광복 담임목사 | 상당교회 주일설교 211226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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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장
13절.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절.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절.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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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

베드로전서 3장 13-15 :또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말며 소동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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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eomoon.org

Date Published: 5/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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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 입문: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 – 교보문고

독일 본 대학 조직신학부 정교수 게어하르트 자우터의 『종말론 입문 –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소망해도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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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yobobook.co.kr

Date Published: 8/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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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 광성교회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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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sch.net

Date Published: 5/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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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13-22 KRV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 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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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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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13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 14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 15너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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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hanchurch.com

Date Published: 12/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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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 | 2022.07.24 모든 답변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 | [Calvary Chapel Toronto] 주일예배. 침례자 간증 | 소망의 이유 묻는 자에게 답할 것을 준비하라 | 2022.07.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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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ppa.covadoc.vn

Date Published: 6/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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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 – 종말론 입문 – 알라딘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 – 종말론 입문. 게어하르트 자우터 (지은이), 최성수 (옮긴이) 한들출판사 1999-05-15. 정가. 14,000원. 판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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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ladin.co.kr

Date Published: 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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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3:13-17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에 하나님께서 보배롭게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의 인이 그 내면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소망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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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adukro.blogspot.com

Date Published: 5/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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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종말론 입문 – Daum 블로그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종말론 입문] – 게어하르트 자우터 읽기 … 기독교의 위기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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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4/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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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이유를 아는 사람들 (베드로전서 3:13~16) | 안광복 담임목사 | 상당교회 주일설교 2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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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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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2. 2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lInUKxvmpAg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 큐티 나눔터

베드로전서 3장 13-15 :또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보편적으로는 이 말이 맞다. 그러나 모든 일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악한 자들이 크리스천에게 못되게 하는 것은 우선은 자신에게 유익을 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사탄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사탄이 하는 일은 의인을 괴롭히는 일이고 그의 자녀들도 같은 일을 한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은 고난을 피할 수 없다.

특히 경건한 사람이 주의 거울이 되어 사람들에게 비추다가 당하는 고난은 반드시 약속이 있고 갚음이 있다.

심지어 애매하게 고난을 받아도 주를 생각하며 견디면 상급이 있다고 말씀했던 것을 생각하면

의를 위한 고난은 하나님이 자녀로서 기쁨으로 받아야할 복이라고 본다.

다만 내 믿음이 그 말씀을 굳게 따름으로 지치지 않고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악인이 주는 두려움은 나의 가장 모자란 부분이나 아픈 부분을 찌른다.

이 때 일반 사람 같으면 더욱 의시소침하여 절망하거나 분노로 일어서게 된다.

절망하는 것 보다야 일어서는 것이 낫겠지만 크리스천의 대응은 달라야 한다고 말씀한다.

크리스천은 절망도 분노도 아닌 주님 안에서 거룩하게 행동함으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일반적인 반응을 생각하던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함을 보인다면 예상 밖의 일이므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말로 묻지 않아도 무언의 질문을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언제나 같은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온유와 경애다.

온유는 다툼을 쉬게 하고 분노를 잠재우며 절망하지 않는 내공을 제공한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할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의로운 행동은 나의 의로 그치기 때문이다.

종말론 입문: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 – 교보문고

상품상세정보 ISBN 9788983495068 ( 8983495065 ) 쪽수 349쪽 크기 153 * 224 mm 판형알림 이 책의 원서/번역서 Einfuhrung in die eschatologie / Sauter, Gerhard

책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독일 본 대학 조직신학부 정교수 게어하르트 자우터의 『종말론 입문 –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소망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종말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미래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구성됨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미래에 대한 언약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 성취되기 때문에 우리는 확실한 소망의 이유를 가질 수 있음을 일깨운다.

목차

1.”종말론”,개념과 그 변천

1.1 종말론-다의적인 개념

1.2 “종말론”개념의 전형적인 사용 방식

1.3 긴장 상황들과 논점들

2.나사렛 예수:”소망을 짊어지신 분?”

2.1 “하나님 나라”- 먼 곳으로부터의 조망

2.2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예고는 단순한 번개일 뿐인가?

2.3 예수의 소망 가운데 무엇이 아직 남아 있는가?

2.4 예수 그리스도:마지막이요 장차 오실 분

3.인간과 그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

3.1 신학의 경계 설정으로서의 종말론

3.2 기독교 실존의 종말론적인 정립

3.3 소망의 어둠 속에서

3.4 새로운 존재는 역사 속에서 빛을 발한다

3.5 근본적인 종말론-새로운 지평을 갖는 신학

4.소망의 하나님-미래의 힘

4.1 목적지향적 시작과 돌발적 시작

4.2 “역사”라고 하는 우주 속에서의 하나님

4.3 기독교의 위기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소망

4.4 종교적-정치적 행위 이론으로서 종말론:억눌린 자들의 해방에 대한 소망

4.5 발견의 맥락으로서의 “역사”

5.소망 가운데 하나됨? 에큐메니칼한 관점

5.1 움츠러든 대화

5.2 소망의 확신이 갖는 특징

5.3 교회의 자기 이해를 재는 척도로서의 종말론

6.교회 생활 속에서의 소망

6.1 지성적인 목회활동으로서 소망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

6.2 죽음을 넘어서는 소망:”영혼 불멸”?”죽은 자의 부활”?

6.3 장차 오실 분의 언약

6.4 치료로서의 정화?

6.5 주의 만찬:오실 그리스도를 선포

7.개요:종말론의 근본적 질문들

7.1 신학적 구상들의 마찰면

7.2 확인을 위한 질문

7.3 무엇에 근거한 대답인가?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2009. 10. 4.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 36)

본문 : 벧전 3:15-16

제목 :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고난 속의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소아시아에 흩어져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우리 성도가 가진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이 신앙을 버리지 말 것과 오히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시절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난을 당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히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언제나 어느 시대나 다 나름대로 고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생활고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인간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시비를 걸기도 합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고 싶고 칭찬 받는 삶을 살고 싶지만 그렇게 모두에게 다 잘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세상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것은 옛날에 비하면 참 모두들 잘 먹고 잘 삽니다.

그러나 너무나 잘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사람들과 비교를 하면 나는 못사는 사람이라고 느껴져서 불행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병으로 사고로 실패로 가족관계로 인간관계로 특별한 고통을 겪으면서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우리 성도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서 고난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1.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

본문 15절 말씀 중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험한 세상을 산다고 해도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성도란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가 되심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거룩하게 하고“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거룩하게 만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에서처럼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거룩하다고 인정하고 거룩하다고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분이시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존경하고 우러러보고 그 은혜를 알고 감사드리고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할 너무나 귀하신 분이십니다.

마음속에 정말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너무나 보고 싶고 너무나 만나고 싶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사람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런 분을 마음에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주님을 귀하게 여기고 거룩하게 여기고 살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무렇게나 대하지 못합니다.

거룩하시다고 인정하고 선포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가 예수님을 처음만난 것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닷가에 사는 어부로서 숙달된 기술로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던 그 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께서 평범한 사람이 아닌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신 줄 알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가르치신 말씀들을 듣고 몸소 살아가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 모시고 사는 우리 주님은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산신령이나 용왕과 같이 누가 만들어 놓은 신이 아닙니다.

태양이나 달과 같은 피조물도 아닙니다.

호랑이나 소 같은 짐승도 아닙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이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지금도 우주만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 분이 우리가 모시고 있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다고 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모르고 예수님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모시고 사는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타락하여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어서 그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잡혀가셔서 재판을 받으실 때 베드로는 어쩔 수 없는 생명의 위협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후 다시 찾아주셔서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렇게 배반을 한 베드로를 다시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시 찾아주셨고 또 충분히 이해를 해 주셨습니다.

변함없이 그를 사랑하셨고 그에게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모시는 주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수도 없이 변하고 배반하고 속 썩이고 미움 받을 짓만 골라하지만 주님께서는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의 승천을 직접 다 목격을 한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하고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승천하시면서 가셔서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실 것과 때가 되면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을 직접 받았습니다.

그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고난과 환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만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주님을 우리가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너무 귀한 것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한번 하신 약속은 꼭 지키시는 변한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

본문 15절 말씀 중에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고생을 하면서도 소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 무엇이기에 도대체 그렇게 신앙생활을 잘 하면서 사느냐고 물으면 거기에 대해서 대답할 말을 항상 준비하고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준비는 하고 있는데 누가 물어봐주지 않으니까 말을 해 줄 기회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 소망이 넘치고 기쁨이 넘쳐야 누가 물어나 봐 줄 것인데 사는 것이 별로 신통치 않으니까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제가 가끔 밖에 나가면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저에게 전도지를 줍니다.

전도지를 받으면서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아 이 사람들이 내가 목산데 목사도 몰라보고 전도지를 줘…….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기에 사람들이 나에게 전도를 하려고 할까 어떤 교회 목사님은 목사님 얼굴만 보고 그 교회에 등록한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얼마나 내 얼굴이 성도답지 못하면 전도지를 다 줄까 라고 섭섭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기쁘고 즐겁고 소망이 넘치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게 소망에 관한 질문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절망에 관한 질문을 하고 교회는 절망에 관한 대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소위 신앙에 성공을 했다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복을 받습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예 제가 기도를 많이 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예 제가 헌금생활을 잘 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예 제가 금식기도를 해서 우리 아들을 인류대학에 보냈습니다.

예 제가 기도를 해서 아무개 불치병을 고쳤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성도들이 서로 하는 말이 이런 말이고 강단의 설교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소망에 관한 이야기 즉 천국의 소망에 관한 이야기 영원한 생명의 소망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말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들은 소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절망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기도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기도하면 병이 낫고, 기도하면 성공을 해 이런 이야기는 소망을 주는 이야기가 아니고 절망을 주는 이야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기도해서 좋은 대학에 가는 사람은 백에 한 명, 천에 한명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서 서울대학에 갔다고 말하는 사람 한 사람을 제가 압니다.

공부를 잘 못했는데 특별히 수학에 약했는데 기도했더니 그날 수학문제가 아는 문제가 나왔더라는 것입니다.

그랬다고 제가 수험생들보고 야 아는 문제만 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해 그러면 돼 라고 말한다면 그 학생은 십중팔구 불합격할 것이 뻔합니다.

병이 들면 기도하면 다 나아 아무렇게도 살아도 돼 그렇게 말했다가 그 사람이 건강에 대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벌컥 병이 든다면 그 사람을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법칙으로 다스리시지 그 법칙을 깨고 초자연적으로 기적을 일으켜서 통치하시는 것을 극히 제한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을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우리가 기도만 하면 다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기 하시지 않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으실 것입니다.

“브루스 올마이티“ 라는 영화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한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면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것도 있습니다.

사랑고백을 위해서 달빛이 더 빛나게 달이 더 크게 보이게 하니까 반대편에 사는 일본 사람들이 다 해일이 일어나서 죽게 됩니다.

복권을 사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다 들어주니까 복권 1등이 1,000원짜리가 되어버립니다.

만일 우리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살 수 있다면 기도하는 성도가 왜 사업이 망하고 기도하는 성도가 왜 병이 들고 왜 죽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질서의 법칙 가운데다가 이미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면 받을 복을 다 입력해 놓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행함도 다 자연적인 방법으로 응답을 하고 계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초자연적인 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다면 그 사람에게는 소망보다는 절망을 안겨주는 것이 됩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연의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망에 관한 이야기란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의 소망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줄 준비를 항상 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목적이 천국을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성공을 위해서 산다면 사람들이 이 세상의 성공에 대해서 물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소망에 관한 대답을 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온유와 두려움은 누구를 향한 온유와 두려움이냐에 따라서 해석을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온유와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경외로 해석을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고 대답하는 용어가 법정에서 쓰는 용어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그 한 구석에서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과거를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소망에 대해서 대답을 할 때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비위에 맞추기 위해서 사람들이 바라는 이 세상의 소망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정직한 답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에게 잘해주기 위해서 하늘나라의 복음 천국 복음을 전하지 않고 영원한 소망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바르게 전해야 될 것입니다.

3.선한 양심을 가지라.

오늘 본문 16절 말씀에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제일 우선이지만 이 세상을 살면서도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할 것입니다.

내가 저 친구 잘 아는데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 사람은 천국에 갈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어떻게 저런 사람이 다 천국에 간다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야 공의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렇게 세상을 산 사람을 천국으로 데리고 오실 수 있느냐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면서도 우리가 바르게 살지 못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하고 비웃을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고 거룩한 백성이냐 죄인들만 모아놓은 감옥 같다. 진짜 나쁜 사람들만 다 모여 앉아서 천국 운운 하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선한행위와 관계없이 천국의 가게 되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살지만 이런 비난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심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살아온 배경을 바탕으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양심들이 다 선한 양심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되고 훈련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하면서 비웃으면서 살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우리를 비웃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고 있습니다.

이 선한 양심대로 천국의 복음을 이야기 하고 천국을 목표로 사는 사람은 그 소망대로 영원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예수님은 이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메시야가 되십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참된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소망의 이유를 묻게 하고 그 물음에 정확한 답변을 할 수 있도록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가진 사람답게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양심을 따라 선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3:13-22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베드로전서 3:13-22 KRV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KRV: 개역한글 번역본 취소 성경 언어 한국어 언어 바꾸기 {{#items}} {{local_title}} {{/items}} ← 언어 취소 {{#items}} {{local_name}} {{/items}}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 | [Calvary Chapel Toronto] 주일예배. 침례자 간증 | 소망의 이유 묻는 자에게 답할 것을 준비하라 | 2022.07.24 모든 답변

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 – [Calvary Chapel Toronto] 주일예배. 침례자 간증 | 소망의 이유 묻는 자에게 답할 것을 준비하라 | 2022.07.24“?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ppa.covadoc.vn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https://ppa.covadoc.vn/blog/.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토론토 갈보리채플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54회 및 좋아요 9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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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15

설교 : 추승호 목사 / 침례자 간증 : 손양준, 채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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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장 13-15 :또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말며 소동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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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26 March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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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이유 Reason For Happiness

하나님 안에서 극복되지 못할 고난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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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 입문: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 – 교보문고

상품상세정보 ISBN 9788983495068 ( 8983495065 ) 쪽수 349쪽 크기 153 * 224 mm 판형알림 이 책의 원서/번역서 Einfuhrung in die eschatologie / Sauter, Gerhard 책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독일 본 대학 조직신학부 정교수 게어하르트 자우터의 『종말론 입문 –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소망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종말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미래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구성됨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미래에 대한 언약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 성취되기 때문에 우리는 확실한 소망의 이유를 가질 수 있음을 일깨운다. 목차 1.”종말론”,개념과 그 변천 1.1 종말론-다의적인 개념 1.2 “종말론”개념의 전형적인 사용 방식 1.3 긴장 상황들과 논점들 2.나사렛 예수:”소망을 짊어지신 분?” 2.1 “하나님 나라”- 먼 곳으로부터의 조망 2.2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예고는 단순한 번개일 뿐인가? 2.3 예수의 소망 가운데 무엇이 아직 남아 있는가? 2.4 예수 그리스도:마지막이요 장차 오실 분 3.인간과 그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 3.1 신학의 경계 설정으로서의 종말론 3.2 기독교 실존의 종말론적인 정립 3.3 소망의 어둠 속에서 3.4 새로운 존재는 역사 속에서 빛을 발한다 3.5 근본적인 종말론-새로운 지평을 갖는 신학 4.소망의 하나님-미래의 힘 4.1 목적지향적 시작과 돌발적 시작 4.2 “역사”라고 하는 우주 속에서의 하나님 4.3 기독교의 위기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소망 4.4 종교적-정치적 행위 이론으로서 종말론:억눌린 자들의 해방에 대한 소망 4.5 발견의 맥락으로서의 “역사” 5.소망 가운데 하나됨? 에큐메니칼한 관점 5.1 움츠러든 대화 5.2 소망의 확신이 갖는 특징 5.3 교회의 자기 이해를 재는 척도로서의 종말론 6.교회 생활 속에서의 소망 6.1 지성적인 목회활동으로서 소망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 6.2 죽음을 넘어서는 소망:”영혼 불멸”?”죽은 자의 부활”? 6.3 장차 오실 분의 언약 6.4 치료로서의 정화? 6.5 주의 만찬:오실 그리스도를 선포 7.개요:종말론의 근본적 질문들 7.1 신학적 구상들의 마찰면 7.2 확인을 위한 질문 7.3 무엇에 근거한 대답인가?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2009. 10. 4.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 36) 본문 : 벧전 3:15-16 제목 :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고난 속의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소아시아에 흩어져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우리 성도가 가진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이 신앙을 버리지 말 것과 오히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시절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난을 당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히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언제나 어느 시대나 다 나름대로 고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생활고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인간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시비를 걸기도 합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고 싶고 칭찬 받는 삶을 살고 싶지만 그렇게 모두에게 다 잘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세상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것은 옛날에 비하면 참 모두들 잘 먹고 잘 삽니다. 그러나 너무나 잘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사람들과 비교를 하면 나는 못사는 사람이라고 느껴져서 불행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병으로 사고로 실패로 가족관계로 인간관계로 특별한 고통을 겪으면서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우리 성도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서 고난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1.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 본문 15절 말씀 중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험한 세상을 산다고 해도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성도란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가 되심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거룩하게 하고“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거룩하게 만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에서처럼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거룩하다고 인정하고 거룩하다고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분이시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존경하고 우러러보고 그 은혜를 알고 감사드리고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할 너무나 귀하신 분이십니다. 마음속에 정말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너무나 보고 싶고 너무나 만나고 싶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사람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런 분을 마음에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주님을 귀하게 여기고 거룩하게 여기고 살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무렇게나 대하지 못합니다. 거룩하시다고 인정하고 선포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가 예수님을 처음만난 것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닷가에 사는 어부로서 숙달된 기술로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던 그 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께서 평범한 사람이 아닌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신 줄 알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가르치신 말씀들을 듣고 몸소 살아가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 모시고 사는 우리 주님은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산신령이나 용왕과 같이 누가 만들어 놓은 신이 아닙니다. 태양이나 달과 같은 피조물도 아닙니다. 호랑이나 소 같은 짐승도 아닙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이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지금도 우주만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 분이 우리가 모시고 있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다고 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모르고 예수님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모시고 사는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타락하여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어서 그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잡혀가셔서 재판을 받으실 때 베드로는 어쩔 수 없는 생명의 위협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후 다시 찾아주셔서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렇게 배반을 한 베드로를 다시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시 찾아주셨고 또 충분히 이해를 해 주셨습니다. 변함없이 그를 사랑하셨고 그에게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모시는 주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수도 없이 변하고 배반하고 속 썩이고 미움 받을 짓만 골라하지만 주님께서는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의 승천을 직접 다 목격을 한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하고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승천하시면서 가셔서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실 것과 때가 되면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을 직접 받았습니다. 그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고난과 환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만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주님을 우리가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너무 귀한 것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한번 하신 약속은 꼭 지키시는 변한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 본문 15절 말씀 중에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고생을 하면서도 소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 무엇이기에 도대체 그렇게 신앙생활을 잘 하면서 사느냐고 물으면 거기에 대해서 대답할 말을 항상 준비하고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준비는 하고 있는데 누가 물어봐주지 않으니까 말을 해 줄 기회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 소망이 넘치고 기쁨이 넘쳐야 누가 물어나 봐 줄 것인데 사는 것이 별로 신통치 않으니까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제가 가끔 밖에 나가면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저에게 전도지를 줍니다. 전도지를 받으면서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아 이 사람들이 내가 목산데 목사도 몰라보고 전도지를 줘…….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기에 사람들이 나에게 전도를 하려고 할까 어떤 교회 목사님은 목사님 얼굴만 보고 그 교회에 등록한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얼마나 내 얼굴이 성도답지 못하면 전도지를 다 줄까 라고 섭섭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기쁘고 즐겁고 소망이 넘치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게 소망에 관한 질문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절망에 관한 질문을 하고 교회는 절망에 관한 대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소위 신앙에 성공을 했다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복을 받습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예 제가 기도를 많이 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예 제가 헌금생활을 잘 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예 제가 금식기도를 해서 우리 아들을 인류대학에 보냈습니다. 예 제가 기도를 해서 아무개 불치병을 고쳤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성도들이 서로 하는 말이 이런 말이고 강단의 설교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소망에 관한 이야기 즉 천국의 소망에 관한 이야기 영원한 생명의 소망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말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들은 소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절망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기도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기도하면 병이 낫고, 기도하면 성공을 해 이런 이야기는 소망을 주는 이야기가 아니고 절망을 주는 이야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기도해서 좋은 대학에 가는 사람은 백에 한 명, 천에 한명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서 서울대학에 갔다고 말하는 사람 한 사람을 제가 압니다. 공부를 잘 못했는데 특별히 수학에 약했는데 기도했더니 그날 수학문제가 아는 문제가 나왔더라는 것입니다. 그랬다고 제가 수험생들보고 야 아는 문제만 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해 그러면 돼 라고 말한다면 그 학생은 십중팔구 불합격할 것이 뻔합니다. 병이 들면 기도하면 다 나아 아무렇게도 살아도 돼 그렇게 말했다가 그 사람이 건강에 대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벌컥 병이 든다면 그 사람을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법칙으로 다스리시지 그 법칙을 깨고 초자연적으로 기적을 일으켜서 통치하시는 것을 극히 제한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을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우리가 기도만 하면 다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기 하시지 않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으실 것입니다. “브루스 올마이티“ 라는 영화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한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면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것도 있습니다. 사랑고백을 위해서 달빛이 더 빛나게 달이 더 크게 보이게 하니까 반대편에 사는 일본 사람들이 다 해일이 일어나서 죽게 됩니다. 복권을 사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다 들어주니까 복권 1등이 1,000원짜리가 되어버립니다. 만일 우리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살 수 있다면 기도하는 성도가 왜 사업이 망하고 기도하는 성도가 왜 병이 들고 왜 죽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질서의 법칙 가운데다가 이미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면 받을 복을 다 입력해 놓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행함도 다 자연적인 방법으로 응답을 하고 계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초자연적인 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다면 그 사람에게는 소망보다는 절망을 안겨주는 것이 됩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연의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망에 관한 이야기란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의 소망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줄 준비를 항상 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목적이 천국을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성공을 위해서 산다면 사람들이 이 세상의 성공에 대해서 물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소망에 관한 대답을 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온유와 두려움은 누구를 향한 온유와 두려움이냐에 따라서 해석을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온유와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경외로 해석을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고 대답하는 용어가 법정에서 쓰는 용어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그 한 구석에서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과거를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소망에 대해서 대답을 할 때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비위에 맞추기 위해서 사람들이 바라는 이 세상의 소망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정직한 답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에게 잘해주기 위해서 하늘나라의 복음 천국 복음을 전하지 않고 영원한 소망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바르게 전해야 될 것입니다. 3.선한 양심을 가지라. 오늘 본문 16절 말씀에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제일 우선이지만 이 세상을 살면서도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할 것입니다. 내가 저 친구 잘 아는데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 사람은 천국에 갈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어떻게 저런 사람이 다 천국에 간다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야 공의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렇게 세상을 산 사람을 천국으로 데리고 오실 수 있느냐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면서도 우리가 바르게 살지 못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하고 비웃을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고 거룩한 백성이냐 죄인들만 모아놓은 감옥 같다. 진짜 나쁜 사람들만 다 모여 앉아서 천국 운운 하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선한행위와 관계없이 천국의 가게 되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살지만 이런 비난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심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살아온 배경을 바탕으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양심들이 다 선한 양심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되고 훈련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하면서 비웃으면서 살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우리를 비웃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고 있습니다. 이 선한 양심대로 천국의 복음을 이야기 하고 천국을 목표로 사는 사람은 그 소망대로 영원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예수님은 이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메시야가 되십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참된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소망의 이유를 묻게 하고 그 물음에 정확한 답변을 할 수 있도록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가진 사람답게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양심을 따라 선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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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종말론 입문]

목 차

1. “종말론”, 개념과 그 변천

1.1. 종말론-다의적인 개념

1.2. “종말론” 개념의 전형적인 사용방식

1.3. 긴장상황들과 논점들

2. 나사렛 예수: “소망을 짊어지신 분”

2.1. “하나님 날”-먼 곳으로부터의 조망

2.2.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예고는 단순한 번개일 뿐인가?

2.3. 예수의 소망 가운데 무엇이 아직 더 남아 있는가?

2.4.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

2.5. 예수 그리스도: 마지막이요 장차 오실 분

3. 인간과 그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

3.1. 신학의 경계설정으로서의 종말론

3.2. 기독교 실존의 종말론적인 정립

3.3. 소망의 어둠속에서

3.4. 새로운 존재는 역사 속에서 빛을 발한다

3.5. 근본적인 종말론-새로운 지평을 갖는 신학

4. 소망의 하나님-미래의 힘

4.1. 목적 지향적 시작과 돌발적 시작

4.2. “역사”라고 하는 우주 속에서의 하나님

4.3. 기독교의 위기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소망

4.4. 종교적-정치적 행위이론으로서 종말론: 억눌린 자들의 해방에 대한 소망

4.5 발견의 맥락으로서의 “역사”

5. 소망 가운데 하나됨? 에큐메니칼한 관점

5.1 움츠러든 대화

5.2. 소망의 확신이 갖는 특징

5.3. 교회의 자기 이해를 재는 척도로서의 종말론

6. 교회생활 속에서의 소망

6.1. 지성적인 목회활동으로서 소망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

6.2. 죽음을 넘어서는 소망: “영혼불멸”? “죽은 자의 부활”?

6.3. 장차 오실 분의 언약

6.4. 치료로서의 정화?

6.5. 주의 만찬: 오실 그리스도를 선포

7. 개요: 종말론의 근본적 질문들

7.1. 신학적 구상들의 마찰면

7.2. 확인을 위한 질문

7.3. 무엇에 근거한 대답인가?

1. “종말론”, 개념과 그 변천

1.1. 종말론-다의적인 개념

“종말론”이라는 개념에 대해 신학계에서 어떤 의견 일치에 아직 이르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 문제와 답변의 윤곽이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1.2. “종말론” 개념의 전형적인 사용방식

“종말론”이라는 개년이 지향하고 있는 의미에는 세 가지의 방향이 있다. 첫 번째 종말론(Eschata)은 마지막 일들에 대한 가르침을 말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미래라고 하는 시간적인 전망을 암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의학의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런 의미의 종말론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의 믿음과 행위에 따라 심판하시면서 그들에게 최종적인 운명-육신의 죽음 이후의 영생과 영벌을 그려낸다. 이 종말론의 소재는 대부분 성경에서 온 것들이며, 사망, 부활, 심판 ,천국, 지옥 새 하늘과 새 땅 등이다. 영혼은 죽음을 통해서 육신과 분리된 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나간다는 영혼불멸설은 이 종말론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세계의 마지막을 장식할 최후심판은 구원받은 사람들과 멸망받은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갈라놓는다. 사람들에게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이 개념의 신학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기독교의 믿음을 가질 것인지, 아니면 죽음 저 편의 일은 알지 못한다는 인간적인 고백을 해야 할지 구분해야 한다.

두 번째 종말론은 역사신학으로서 역사의 마지막 목표를 지향하면서 역사를 궁극적으로 이해한다. 이 종말론은 미래는 비어 있는 시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표상과 기대, 완전히 변화된 세계에 대한 기독교의 믿음이 갖는 희망에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의 경험 세계를 넘어서는 일을 처음부터 포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망까지를 포기하지는 않고 신학적인 사고를 전개한다. 만일 역사를 최종적으로 마감하는 때인 종말이 역사로부터 형성된다면, 다시 말해서 마지막이 역사적인 사태 안으로 밀고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건 전개과정의 결과로서 이 모든 사건이 가지고 있는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마지막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소망을 통해서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역사의 목적이 된다. 이런 종말사적인 종말론은 역사의 일관성은 오직 끝없이 이어지는 변화를 통해서만 보장된다는 진보사상에 의해 동의를 받기 어렵다. 역사의 목적이라는 생각은 신학적인 가치를 갖게 되면서, 중요한 역사의 사건들이나 곧 내려질 결정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으로 설명된다. 이 종말론을 받치고 있는 것은 역사적인 삶을 포괄적으로 갱신하고 또 변화시키는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사조들이다. 이들을 움직이는 힘은 세계 속에서 기독교가 완성될 것에 대한 소망이다. 하나님은 인류와 역사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 많은 역사신학자들은 역사의 방향은 오직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에 제한되어 있으며, 이들은 성경에 근거해서 “시대의 징조”를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역사의 종말에 대한 다니엘서의 환상이나 요한계시록을 역사적인 사건들과 동일시한다.

다비(John nelson Darby, 1800-82)주의자들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하나님 역사의 우선적인 대상이면서 또한 도구로 본다. 역사신학이 제기하는 질문은 이렇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기대는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과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행동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역사신학은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당신 스스로를 계시하면서 또 목적을 설정하신다는 선-판단을 가지고 소망과 행동 사이에서 융합작업을 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사태의 진행과정에 포함되어짐으로써-“이생”뿐만 아니라, 자신의 조형능력을 통해서 개별적인 존재의 시간적 한계를 넘어서는 그런 종류의 삶에 참여하면서-비로소 생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세 번째 종말론은 근본적인 종말론(radikale eschatologie)으로 일컬어지는데, 일의 경과를 보면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알 수 있는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역사적인 사건과 동일시할 수 있는가? 근본적인 종말론은 이런 질문에서 시작한다. 이 종말론은 세계-구원의 합목적론과 이와 유사하면서 또한 하나님의 구원과 새로운 창조를 더 이상 소망하지 않고, 오히려 역학, 생동감, 변화의 능력 혹은 “최종적으로” 역사를 규정하는 결정들을 도래하게끔 하는 여러 가지 미래전망을 비난한다. 게다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입 밖에 내지 않는 태도를 비난한다. 종말론은 하나님이나 세계와 역사로부터, 그리고 역사의 변혁이나 새로운 시작으로부터도 결코 추리되어질 수 없는 전적인 타자를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장차 오실 분에 해당된다.

여기서 말하는 종말론은 더 나은 때나 마지막 일들을 앞서 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단히 효과적으로 현재를 인식하는데 이 종말론은 기여한다. 지금이라는 것은 무심코 미끄러져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에 직면해 “서 있다.” 말하자면 모든 시간은 영원에 부딪쳐 좌초하게 된다. 이 종말론은 “마지막 일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이 종말론은 더 이상 “일들”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모든 것을 철저히 의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전통만을 답습하는 습관적인 사고는 그러한 의심을 통하여 철저하게 단절된다. 이 종말론은 그 뿌리로부터 신학이고자 하며, 장차 오실 하나님만을 가리키면서 하나님을 진술하고자 한다(von Gott reden). 이러한 종말론이 말하려고 하는 모든 것 속에서 이 종말론은 스스로 받아들여지기만 하는 소망의 상징이 된다.

성경은 인간들의 모든 기대에 반대해서 인간들에 주어진 그 소망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물려받은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람들의 소망은,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의 소망이다(엡 2:12-13). 하나님께서 만나주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한다. 이 심판 속에서 하나님은 지금 있는 것과 앞으로 있을 것,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것을 알리는 그런 판단을 내리신다. 그 판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죽으심과 그의 사심 속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바와 똑같이 그렇게 이루어진다. 이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의 주제에 다시금 봉착하게 된다.

1.3. 긴장상황들과 논점들

가톨릭 신학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크게 외친 현대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마지막 일들에 대한 가르침”이 새롭게 숙고될 수 없었다. 신도들은 오직 영생을 소망하는 가운데 단순히 이생의 목적만을 추구할 뿐인 그 어떠한 역사관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 요구되었다. 종말론에 관련해서 본다면, 개신교 신학은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벌어진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논의를 통해서 그 감수성이 점점 더 예민해져서 혼돈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각심을 심어주기도 하는 안정치 못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세 번째 유형인 근본적 종말론은 60년대 중반의 상황에서 역사신학 때문에 독일 복음주의 신학에서 배제되었는데, 역사신학은 아메리카의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오래전부터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스 우어스 폰 발타자(Hans Urs von Balthasar, 1905-88)는 “종말론은 우리 시대의 신학에서 ‘악천후가 계속되는 지역’에 해당된다”고 서술했다.

지난 세기에는 적어도 세 번에 걸쳐 종말론의 악천후가 나타났다. 세기가 변화되는 시점에서는 소위 “철저한 종말론”은 이전의 기독교적인 진보주의에 반대하고 나섰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변증법적 신학”의 근본적인 종말론이, 기독교의 위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서 전환을 이루었다. 60년대에는 부활절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신학이 꽃을 피우고, 역사의 마지막이 고려되면서 역사는 새롭게 규정되었다. 신학사적이고 시대사적인 측면에서 기억되어야 하는 것은 종말론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질문 세 가지를 던진다. 신학은 외부의 영향을 통해서 추진되는가? 외부에서 가하는 추진력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이것들은 종말론의 지속적인 질문에 의해서 유지되는 역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2. 나사렛 예수: “소망을 짊어지신 분”

2.1. “하나님 나라”-먼 곳으로부터의 조망

발타자르는 19세기말 “자유주의 신학”의 문화적인 진보사상과 20세기초 등장한 철저한 종말론 사이의 충돌을 “문이 굳게 닫혀 있던 종말론의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업무 외 시간의 일을 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자유주의 신학자 가운데 대표적인 한 사람인 리츨(Albrecht Ritschl, 1822-89)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계의 마지막 목적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체라는 점에서 인류가 지향해야 할 의미로 이해되고, 또한 도덕적인 완성의 단계로 성숙해가는 인류가 도달해야 하는 목표로 사용되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이나 사회적인 단체들에 앞서서 인류의 발전을 책임져야 하는데, 이는 기독교만이 하나님의 듯을 전적으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은 하나님의 나라는 “내적으로 도래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인간의 영혼에 부어주시는 가운데 일어난다는 것이다.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 1865-1923)가 지적한 대로,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종말론의 문을 떠받치고 있는 뿌리가 말랐으므로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트뢸치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한 생각들을 가진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을 더 이상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자유주의 신학은 이러한 생각들을 인간존중을 위한 문화개발에 이용하였으며, 이런 노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가치를 갖는다.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상호작용 가운데 개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래는 인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진보에 대한 조망도로서 나타난다. 예수의 설교가 갖는 특징은 매우 임박해 있는 세계의 마지막에 대한 예수의 기대에 있었다. 멸망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 의하여 완성되어야 하는 것들은-그것들이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예비하거나 하나님 나라를 불러들이는데 사용되지 않는 한 – 더 이상 예수의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수의 설교를 이런 식으로 재발견하는 것은 20세기의 전환기에ㅐ 있는 신학과 교회에게 일종의 폭풍경보인가, 유리잔 속의 태풍일 뿐인가?

2.2.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예고는 단순한 번개일 뿐인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묵시문학적 성격을 요한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 1863-1914)는 1892년 “새로운 세상을 하나님의 통치에 두기 위해서 이 나라는 역사 안으로 들어와 마침내는 역사의 종지부를 찍고야 말 것이다”고 기술했다. 1906년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예수의 선포와 그의 삶의 위기들을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나라가 곧 도래하리라는 예수의 기대로부터 도출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해석을 “철저한 종말론(Konseqente Eschatologie)”라고 불렀다. 바이스와 슈바이처는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신학적인 진보사상에 이의를 제기했다(그밖의 다른 점에 있어서는 그들도 스스로 자유주의 신학에 속해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로부터 점점 성장해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으로 돌입해오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숙명적인 사건은 지금 막 임박해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세계멸망과 “임박한 재림기대”는 기독교 신학을 그 시작 단계에서부터 지금까지 자극해 왔다는 것이다. 철저한 종말론은 위기적인 분위기를 역사적으로 탑구하고난 뒤에 비로소 생겨난 결정체였다. 바이스와 슈바이처가 얻은 결론은 나사렛 예수가 가진 기대는 (그리고 일 세대 기독교의 기대 역시) 단순히 상상이라는 것이며, 오늘날의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수가 기대했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가 지연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생명을 내던지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강제로라도 불러들이고, 그렇게라도 해서 새로운 세상이 조속히 도래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도 이러한 기대에 대해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세계의 멸망과 재림기대를 포기하고 새로운 태도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든 기독교는 몇몇 불가능한 부분을 빼놓고는 자신의 성급한 기대를 전반적으로 수정했다. 그래서 기독교는 문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생존을 보장하는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렇게 볼 경우 기독교 신학은 예수의 좌절된 기대가 변형됨으로 해서 생겨난 것이 된다. 기독교 소망이 주는 긴장감이 점차적으로 풀어지게 된 사실은 수바이처 이래로 “재림지연”이라고 표현된다. 철저한 종말론에 대해서 가톨릭 신학자 알프레 르와시(Alfred Loisy, 1867-1940)는 아이러니한 표현으로 “예수는 나라를 예고했지만, 그 대신에 교회가 생겨났다”고 했다.

2.3. 예수의 소망 가운데 무엇이 아직 더 남아 있는가?

예수를 우리와 성정이 같으면서도 영웅적인, 적어도 모범적이라고 할 만한 인간으로 그렸던 18, 19세기의 예수전과 신약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졌던 예수의 모습은 바이스와 슈바이처에 의해 엄청나게 수정되었다. 루돌프 불트만(R. Bultmann)은 철저한 종말론이 예수가 갖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재발견함으로써 종말론을 신학의 주제로 다시 끌어들였다고 했다. 그러나 철저한 종말론은 나사렛 예수에게 접근하기는 했으나 만나는데 있어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바이스는 예수의 소망은 더 이상 오늘날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슈바이처는 예수의 소망과 우리의 기대 사이의 틈을 메우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양자는 본질적인 면에서 리츨과 트뢸치의 문화윤리적인 시각과 일치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기억하는 가운데 문화발전에 기여해서 인간성의 완성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철저한 종말론은 우리를 종말론으로 안내하기 보다는 종말론과 작별하게 한다.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의 우주적인 특징들, 즉 세계의 멸망과 그 이후에 있게 되는 새로운 창조 등과 같은 요소들은 간단히 제거되었다. 그 대신에 세계진화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불러들이고자-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하나님을 졸라서 새로운 세계를 도래시키고자- 온 생애를 바쳤던 예수는, 그 자신은 사라져갔지만, 그 메시지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슈바이처는 말한다. 예수는 소망을 짊어지고 있는 분인가, 라는 질문에 슈바이처는 잘못된 소망을 버려야만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예수처럼 소망할 수는 없지만, 예수의 정신 속에서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의 의미는 교양과 훌륭한 시민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의 태도로서의 소망의 근거가 된다고 선언했다.

2.4.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

골고다 언덕 위에서 일어난 예수사건에서 역사적인 시각을 가지고는 하나님과 예수 사이에 일어난 일을 결코 파악할 수 없다. 철저한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정면으로 이르지 못하고 빗겨 지나갔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 예수의 소망은 하나님이 엄청난 규모로 세계 사건에 개입할 때만 성취될 수 있으며, 그의 선포는 확인될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은 슈바이처가 부인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종교적인 소망들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기대에 힘입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임하심을 선포함으로 해서 “소망을 짊어지신 분”이 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지만, 마침내는 그 죄를 떼어내고 제거하셨을 뿐만 아니라(요 1:29), 세상의 기대까지도 짊어지고 십자가로 가셨다. 이 소망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언덕에 매달려 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부활로부터 죄와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는 우리의 소망의 범위를 규정해준다고 결론지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고전 15:19). 바울은 단순히 “사후”에 대한 소망을 가지라고 격려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기독교적인 소망이 아주 철저하게 예수의 부활에 매여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과 함께 할 생명에 대한 약속에 해당된다. 따라서 부활은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갖는 총체적인 의미는 우리가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임을 당하신 예수를 판결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하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평가하신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을 인정하셨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멸망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희망이 되셨다는 사실이 거듭해서 강조되고 있다. 신약 전체의 증거에 따르면, 부활하신 분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새로운 모습을 갖는 실존이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긍정하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새로운 현-존재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긍정은 최종적이고 포괄적이어서 , 지금부터는 만약 하나님을 소망한다면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비껴 지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해되는 순간에 세상의 규준은 사라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육체에 따라서-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힌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그리스도 메시아를 바라보고 판단했던 사람은 사라지게 된다. 비어 있는 무덤은 그리스도는 시공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누구든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사람은 더 이상 그와 대립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 있게 된다. 그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다.

2.5. 예수 그리스도: 마지막이요 장차 오실 분

지금 “신약”이라는 본문 안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하나님과 하나 되심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빛나고 있다. 선포되어져야 하는 것은 예수의 죽음-인간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하나님에 의해서는 아주 다른 방법으로 판단되고 또 구원된 그 분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오실 자”로서의 자격을 그에게 부여하셨다.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은 그가 지금 현존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약성경은 “현-존재(Da-sein)”라고 말한다.

2.5.1. 기대하는 태도는 곧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요한 계시록 1:8에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요 장차 오실 자”라고 말하고, 건너서 18절에서는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쇄를 가졌노니”라고 말한다. 그는 오실 것이고 구원하시되 온전히 하나님의 방법과 방식으로 하실 것이다. 놀랍고 예측이 불가능하고, 또 우리를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방법으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그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읽혀져야 함과 동시에 점점 더 깊이, 그리고 심도 있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소망으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증거로서 읽혀져야 한다. 구원자로 오실 자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분명히 어떠한 구원이나 완성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하나의 스캔들이다. 만일 다른 구원자도 아닌 오직 그만이 구세주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 스스로가 구원받았고 또 스스로 구원자가 되신 그 방법 이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 인간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철저한 종말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임박한 재림기대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의 소망을 질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구원이 분명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될 경우, 우리는 구원을 기대해야만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이 소망이 지나친 요구를 하고 너무 피상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포기하고 예수께서 남겨놓으신 사랑의 흔적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소망을 상실한 모습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하나님의 행위를 부정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과의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그러나 소망은 어느 누구에게도 양도될 수 없을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즉 사망의 세력에 대한 그의 승리에 속한 것이다. 소망은 그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은사에 해당된다. 소망은 현재와 미래 사이를 다리를 놓아 연결시키지 않는다. 소망은 현재에 개입해서 하나님의 사역의 범위가 우리에게 인식되게끔 현재를 열어놓는다.

2.5.2. 마지막 때에 성령을 보내주심

예수께서 약속하신 영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가르쳤던 영이다. 인간에게 다가오는 영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에게 소망을 가져다주고, 또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기 때문에 소망의 은사로 이해된다. 예수의 현존재는 그가 기억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미래를 위한 보증이라고 말하고 있다(고후 1:22; 5:5, 롬 8:23). 성령은 소망의 은사로서 인간의 인식을 가능하게 해준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에게 충만히 임하게 되면, 그 결과로 인간은 스스로를 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또한 자기 스스로에 고착되지 않게 된다.

2.5.3. 기습적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

찰스 다드(Charles Harold Dodd, 1884-1973)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를 이미 실현된 종말론으로, 즉 이미 현실이 된 종말론으로서 해석했다. 다드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성취된 현실, 즉 완료형보다는 오히려 이곳에서 하나님의 실재하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는 이 땅위에서 그 현실적인 모습을 갖는 것으로서 선포된다. 인간들은 행동을 통해서 인정하든 혹은 거부하든 이 현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란 인간들이 지금까지 고대했던 하나님의 심판이자 구원으로서, 이는 예수의 선포와 더불어서 왔고 또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드는 무엇 때문에 영원과 함께 시간 안으로 진입해오는 -그렇다고 시간 속으로 사라져감도 없이- 사건을 “현실화된 종말론”이라고 명명했는가?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전 것”과 “이후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영원에 비추어볼 때, 아무런 차이를 갖지 않고 동일하게 여겨진다는 말이다. 이 말은 일종의 말장난과도 같은데, 왜냐하면 이 말을 통해서 종말론이 더 이상 미래와 상관없게 되어버리는 사실을 은폐시키기 때문이다. 다드는 플라톤주의에 의존해서 해석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차안과 피안이 시간과 영원으로 번역되고, 하나님의 힘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오심은 위기적인 경험으로, 마지막 일은 끊임없이 새롭게 일어날 수 있는 결정의 순간으로 전의된다.

다드는 “현실화된 종말론”을 말함에 있어서 우리가 극복해야 할 사건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방식과 방법대로만 움직여지고 또 현실화되는 그런 사건을 말했다. 다드의 종말론은 우리에게 익숙해진 시간표상에 의존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것, 즉 옛 것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난 새로운 것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 이 개념을 통해서 암시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측할 수 없고 또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어떻게 인간에게 다가오시는가에 대해서 설명하셨다. 예수께서는 인간들의 표상에 따른 모든 것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리신다. 기대는 오직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향해서만 향해져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는 우리로부터 자기 보호를 빼앗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경탄하게 한다. 오직 그러한 순간에만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는 골고다 언덕 위에서 비로소 계시되었다. 비유는 그의 죽음과 불가분 연결되었고, 십자가 아래서 비로소 들려졌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는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는 그의 죽음에 대한 선포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3. 인간과 그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문화개신교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신학”의 갈등은 폰 발타자르가 말한 두 번째의 악천후를 가져왔다. 세계사의 건설에 있어서 유럽의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졌다는 강박관념이나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은 이 악천후 속에서 사라져갔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루돌프 불트만,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등에 의하여 소위 “변증법적 신학”이 나타났다. 이들의 종말론은 근본적(radikal)이었다. 변증법적 신학은 오로지 하나님의 현실이 드러나기만을 기대하고자 했다.

3.1. 신학의 경계설정으로서의 종말론

칼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에서 말한다.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종말론일 뿐인 기독교는 전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그리스도와 관계하고 있다. 사망으로부터 새로운 삶으로 매순간마다 나타나지 않는 영은 성령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와 기독교 역사가 서로 충돌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당시 문화개신교주의 기독교에 대한 일종의 기습공격이었다. 바르트가 당시 문화개신교주의의 상식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성서적이고도 실제적인 그리고 새로운 성령 이해를 필요로 했다. 그는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트뢸취, 바이스, 슈바이처 등의 문화개신교주의만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당시 “하나님 나라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던 스위스의 종교 사회주의자들과 비슷한 노선을 취했다. 바르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파악하기도 쉽지 않고, 심지어 불가능한 것으로서-우리에게는 오직 소망의 형태로만 다가온다. 또 인간들은 하나님의 현실로서의 마지막에 대해 전혀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종말론과 관련해서 신학은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된다.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찬 진술을 하기 위한 개념적인 틀로서 시간과 영원의 관계를 다루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에 결코 손을 대지 않으신다. 그러나 당신께서 행위하실 때에는-다시 말하면, 언제나,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시기 때문에-끊임없이 손을 대신다. 이에 반해 우리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서 표상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본다면, 모든 것은 동등한 가치를 갖거나 혹은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약속된 존재인 우리는, 즉 하나님을 위하고 또 하나님의 보호 대상인 우리의 존재는 장차 분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가운데 영원과 시간의 관계를 전개시켰다. 신학적인 진술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한에서는 변증법적일 수밖에 없다. 영원은 시간의 끊임없는 연속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시간이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간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오실 분”이다. 이 계시는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끊임없이 미래적인 것으로 남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시간 계산으로는 결코 생각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초월하고 있는 그 무엇에 근거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시간의 절대 주권자인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항상 오시는 분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를 미래에 머물게 할 수도 없고, 또 그를 매개로 과거와 현재를 조망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끝나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자이신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신다.

하나님의 삼위는 서로서로에 대한 살아 있는 관계 속에서 서로서로에 귀속되어 있다. 하나님의 행위에는 시작이 있고 지속성을 가졌고 마침내 그것은 목적에 도달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행위하시면서 우리에게 당신 스스로를 계시하셨고,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말씀하셨다. 이는 매우 포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고 보편적인 계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예수의 부활은 모든 인간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신학은 오직 그리스도 사건으로부터만 출발되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은 신학의 어떤 한 주제에만 머물 수가 없고, 오히려 신학을 전체적으로 포괄해야만 한다.

3.2. 기독교 실존의 종말론적인 정립

칼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루돌프 불트만 역시 종말론을 기독교 신학의 중심 뿌리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종말론은 바르트보다 더 근원적이었다. “현재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혹은 그를 선포하는 말씀과 만나게 됨으로써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세상과 역사는 그 마지막에 이르게 되고 또 신앙은 이미 새로운 피조물로서 탈세계화 되었기 때문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계시된 영원한 생명은 예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게 된다고 보았다. 그 사람에게는 구원이 현재가 된다. 즉, 종말론적인 “지금”이 된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자신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그 결과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항상 고수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사건은 결코 무효화시킬 수가 없다. 케리그마는 듣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써 저주는 끝을 맺었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고 해도, 그는 더 이상 죽음이 아닌 생명을 갖게 된다고 한다(비교; 요 5:24). 즉 케리그마가 우리 안에서 변화를 일으킨다고 한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종말론”이 계시자로서의 예수와의 만남 속에서 나타나는 구원의 현재성을 서술한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는 어떤 종류의 궁극적인 진술이나 생각, 그리고 표상도 더 이상 고려하지 않게 된다. 그러한 진술이 신약 안에서 발견되는 한, 불트만은 그것을 후세대에 의해 부가된 첨가물이라고 하면서 그것들을 절단해버렸다. 그의 견해에 따라 전통적인 교의학, 특히 종말론은 불필요한 것으로서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낡은 존재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서 불멸의 새 생명을 시작하게 하는 오직 신앙의 사건만이 “종말론적”이라 불리기에 적합하게 되었다.

불트만은 변증법적인 신학과 함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신앙의 본질을 소망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어떤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의 말씀이 궁극적으로 소망을 일깨우며 우리의 마음에 와 닿게 된다는 것, 이것은 불트만의 근본적인 종말론이 갖는 진리적인 요소이다. 불트만은 로마서 10: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니라”에 대해서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지막이 된 이래로 역사는 그 종말을 고했다”고 해석했다. 인간들이 세계를 좌지우지하기 위하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역사관, 또한 인간을 부자유스럽게 묶어놓은 역사관은 무너져내렸다. 은혜받은 자유, 이것은 불트만이 만물의 종말로부터 이끌어낸 공통분모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러시아 정교회 종교철학자 플로프스키(Georgij Florovsky, 1893-1979)은 “….마침내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탈역사화로 귀결될 뿐이다.”고 비판한다. 불트만은 인간을 역사의 주체로서 생각했고, 인간의 개인적인 행위의 자유는 완전하든가, 않으면 억압받고 있는 것으로 보기를 원했다. 이러한 비-우주적인 현재적 황홀(볼트만의, 탈세속화)는 그의 제자인 케제만(Ernst Kasemann, 1906- )의 공격점이 되었다. 케제만에 의하면, 자유와 소망이 우리 안이 아닌 우리 자신 밖에 기초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기술하는 작업은 필요하다. 이러한 기술 속에는 역사적인 회고나 앞날에 대한 예견의 형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바라볼 수 있는가하는 것이 언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피조물들의 탄식과 구원에 대한 간절한 고대(롬 8:22f)는 불트만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것들은 단지 인간세상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표현된 신화적인 언어로 여겨졌을 뿐이다.

3.3. 소망의 어둠속에서

프리드리히 고가르텐은 “종말론”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대규모로 매장되어 있는 무덤의 비석으로 간주하였으며, 이에 대해 특기할만한 신학을 남기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현대적인 인간”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역사를 마음대로 처리하고자 하기 때문이었다. 고가르텐은 순수한 소망을 하나님과 결합시키고자 했는데, 그러나 그것은 “불순한” 소망의 반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순수한 하나님을 가장 순수하게 소망하는 루터의 소망에 반해서 고가르텐은 이야기되어질 수 없는 것에 모든 기대의 내용을 귀속시키면서 부정신학(thologia negative)에서 소망의 길잡이를 찾는다. 그의 기독교 소망은 그것이 아무 것도 기대하고자 하지 않음으로써 깨끗하게 보존되는 순수한 태도가 된다.

3.4. 새로운 존재는 역사 속에서 빛을 발한다

폴 틸리히는 마지막 일들이나 마지막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가 아니라, 영원과 시간의 교점으로서의 마지막에 대해서 말했다. 틸리히에 따르면 마지막은 결정의 순간이 카이로스 안에 있는 시간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무조건자는 오직 카이로스 안에서만 그 모습을 나타낸다고 한다. 영원자가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것으로서의 종말론을 묻는 물음을 통해서 틸리히는 바르트나 불트만과 결합될 수 있었으며, 고가르텐과 마찬가지로 문화개신교적인 역사신학에 반대했다. 그러나 역사신학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 틸리히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의 생성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에 따르면 역사에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이전의 사건으로부터 나오고 또 나중 것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사건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그러한 단순한 사건은 유한한 것, 존재자라는 닫혀진 원 속에서 머물러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이 궤도가 무너지면서 비로소 새로운 것은 일어나고 무엇인가가 실제적으로 정립되어지며, 그것은 시공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즉 의미가 밝혀진다는 말이다. 이것이 틸리히가 말하는 종말론적인 카이로스이다. 카이로스는 초월과 역사의 접촉점을 형성하고 있다.

틸리히는 이런 생각을 통해서 시간 속애 영원이 퇴색되어 있다는 플라톤적인 사상세계를 떠났다. 또 그는 인간이 이상에 해 이끌려진다는 사상과 자신의 사상을 구별했다. 그리고 또 틸리히는 역사의 주체를 인간으로 보는 생각을 비판하면서 하나님을 그 행위의 주체로 이해하고자 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능성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가 할 수 있도록 보여주신 것을 움켜잡을 뿐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카이로스 안에서 만나게 된다. 그런데 틸리히는 이런 표현을 위해 존재론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존재는 존재자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시간 안으로 나타난다.”

‘조직신학’ 속에서 틸리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존재의 현시로 파악했다. 이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 안으로 오심은, 불트만의 해석과는 달리, 선포된 말씀을 듣는 행위의 일부에 속하는 미래적인 것과 동시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새로운 존재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단절하면서 시간 속에서 계시된 것으로 여겨졌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청교도 정신에 입각한 정치종교적인 전통 가운데 “명백한 숙명”이라는 한 요소를 형성해내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역적이고 문화적인 확장을 위해서 미국 국민을 선택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명백한 숙명”이라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런 생각을 통해서 미국에서 큰 영향력을 미쳤으며, 북미의 해방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3.5. 근본적인 종말론-새로운 지평을 갖는 신학

3.5.1. “종말론”은 특별히 무엇을 말해야만 하는가?

근본적인 종말론은 죽은 자의 부활과 최후 심판, 세계의 종말과 세계완성과 같은 주제들은 전혀 상술되어 있지 않고, 또는 철저하게 우회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 종말론은 “마지막 일들‘에 대한 가르침을 다른 언어를 매개로 해서 단순히 현재화시켰을 뿐이며, 하나님은 전적으로 다른 존재이고, 인간들의 소원과 열망, 그리고 이것을 통해 유지되는 기대를 가지고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그런 분으로 여긴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근본성의 배경에는, 하나님은 역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그분은 자연 속에서도 이곳에서도 계시지 않으신다는 인상을 가진다. 이것은 1차 세계대전이 안겨다 준 충격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3십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일어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유대인 집단학살 같은 대량학살의 결과는 이보다 더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유대인 철학자 엠마뉴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96)는 하나님의 정신이 역사 속에서 실현된다고 하는 기독교 역사철학의 헤겔적인 측면, “참된 것은 전체이다”는 주장과 맞서 싸웠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전적으로 초월해 계시면서도, 인간에게 다가오시되 자신의 주장과 명령을 가지고 오시며, 그것을 따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벤야민(Walter der Benjamin, 1892-1940)은 미래란 인류가 그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열려진 공간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적인 역사관을 수정하고자 했다. 그 이유는 바로 메시아적인 기대를 위해서 마르크스적 역사철학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한편 가톨릭 진영에서 칼 라너(karl Rahner, 1904-84)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사람들로 하여금 “마지막 일들”에 대한 사고를 전적으로 새롭게 전개하게 했다. 그에 의하면, 묵시문학은 종말론에 반대되는 형태로서, 현재를 규정하는 고정된 미래의 모습을 현재로 끌어들이고자 한다. 종말론은 이에 반해서 그리스도 역사를 시간적으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서의 미래와 관련해서 전개한다 하나님의 미래는 인간의 지식으로는 열리지 않는다. 마가복음 13:32절(하나님의 아들조차도 종말의 시와 때를 알지 못한다)이 이를 증거한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 되신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대로, 그는 길을 인도했고 스스로 그 길을 갔으며 우리에게 그 길을 계시해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이루셨던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안으로 인도되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종말론에만 해당되는 대상은 옛 것을 완전히 종결시키는 가운데 새로운 것을 만드시고, 이미 끝낸 것을 완성시키시며, 변형시키고 또 변화시키시면서 지양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장차 오실자로서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연합을 약속하셨고,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로서 만유 가운데 계시리라는 것을 우리가 소망하도록 하셨다. 이것을 말하기 위하여 종말론이 독립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끝으로 종말론은 삼위일체론을 위해서도 결코 포기되어질 수 없다.

3.5.2. 구원사건과 구속사를 합하면 구속사가 되는가?

역사는 신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현재로부터 과거를 회상해보든가, 아니면 미래를 내다본다. 우리의 시간 인식은 우리에 의해 규정된 확실성의 중심으로서 우리가 현재를 확정한다는 사실에 의존되어 있다. 기독교 세계는 그리스도 사건 속에서 시간의 중심을 인식했다. 그의 오심은 기대나 준비의 시간이었고, 그의 이후의 모든 것은 나사렛 예수의 오심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 “이후”라는 것이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인가, 아니면 새롭고도 다른 시대, 아니면 성취된 기대의 시대인가? 이 질문은 종말론에서 매우 중요하다.

오스카 쿨만은 구속사적으로 사고를 전개해서, 하나님에 의해 예지된 직선적인 역사진행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실행시키시려는 것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런 견해를 근본적인 종말론에 대한 대안으로서 그리고 또한 철저한 종말론을 비판하면서 주장했다. “신약적인 관점에 따르면 구속사를 구성하는 모든 시기는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에 지향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사건을 전개시키는 이유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이 구원 사건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그 통치의 완성은 분명히 온다는 것은 이미 결정된 것이다. “결정적인 전투는 이미 승리했다. 그러나 승리는 확보했으나 전쟁은 언제인지 모르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결정적인 승리를 확보했음에도 전쟁은 왜 끝나지 않는 것인가? 시간은 왜 계속될 수 있는가?

우리가 구원과 역사와의 관계를 밝히려는 노력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그리스도의 외침에 부딪친다. 하나님의 행위는 역사 속에 은폐되어 있다. 시련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폐 속에 계신다는 사실로부터 일어나는 어려움이고 동시에 우리에게 언약으로 주어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로서 만유 위에 계신다면, 시련은 일시적인 것이 될 것이다.

3.5.3. 신학적 언어 비판으로서의 종말론

게어하르트 자우터의 종말론은 신앙의 소망에 속하는 것들의 윤곽을 그려준다. 종말론은 이에 대해 마지막 오실 자,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가운데 그에 대한 깊은 생각을 전개하면서 하나님의 약속과 더불어 시작된다. 이 소망은 인간의 표상능력을 매우 철저하게 옭아매고 또 소망과 절망 속에서 총체적으로 다시 말해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의미를 파괴하기도 하면서 인간을 규정하고 있는 세력과 대치하고 있는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인간들의 기대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에게로 방향을 돌리고, 그에게 대답하고 또 그에게로 나아가야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놀라운 일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과 구별되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우리의 눈에 참 인간으로 보이는 곳에서 참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종말론 속에서 말해질 수 있고 또 진술될 수 있는 모든 것과 관련해서 본다면, 종말론은 무엇이 진정 궁극적인 질문들인지를 묻도록 가르친다. 이 질문들을 통해서 생각은 시작되는데 왜냐하면 이 질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들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4. 소망의 하나님-미래의 힘

4.1. 목적 지향적 시작과 돌발적 시작

60년대에 나타난 종말론의 세 번째 악천후는 18, 19세기에서와 동일한 영역에서 일어났다. 철저한 종말론과 근본적인 종말론은 역사의 진보과정과 더불어 기독교의 완성을 기대하는 역사신학과의 논의를 전개했고, 역사신학은 기독교의 소망을 역사의 과정과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역사신학의 질문은 기독교 세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역사의 직선 코스에서 이탈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역사 속에서 나타나셔서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말씀하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당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특히 변증법적인 신학은 이것을 매우 강조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역사를 위임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들을 역사에게 내맡기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자유롭게 해서 역사를 극복하게끔 하셨다고 생각했다. 바르트는 인간의 자유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만을 따를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역사는 세계의 숙명으로 결정되었다고 했다.

종말론 이해에 새로운 의식변화가 일어났다. 종말론이 우리 인간들 모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을 다룸으로써 신학은 미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60년대 중반 미국으로부터 자연을 지배하는데 필요한 모든 문제들은 곧 해결될 것이고,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만한 사회적인 관계를 최종적으로 형성할 시간이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흘러나온 것이다. 그러나 매우 위협적인 미래는 도에 지나치게 문명화된 지구상의 도처에서 파괴된 환경과 자기 파괴라는 신호를 통해 나타났다. 우리가 매우 교만한 어조로 말하는 “세상”에서 “성장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유한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인간들은 내부로 향하는 목적지향적인 시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익숙해진 직관으로부터의 갑작스런 시작은 미학적인 혁명-세계를 새롭게 설명할 수 있는 혁명을 요구한다. 칼 라너는 “기독교의 신앙을 이해하고 또 신앙적인 진술을 제시함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미래적인 것… 시간적으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종말론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학은 특별한 시간 감각을 요구한다. 시간 감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시간을 주시고 이러한 시간을 위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시간을 열어놓으신 분에게로 향해야 한다. 시간 감각은 시간을 세우신 하나님의 오심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구약성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역사”를, 그것도 “창조로부터 인자의 오심에 이르기까지”의 하나님의 행위가 갖는 의미연관으로서의 역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폰 라트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일관성을 진술하기 위해서, 어떠한 편견에 매임이 없이 “구속사”라는 개념을 수용했다.

4.2. “역사”라고 하는 우주 속에서의 하나님: 기독교의 근거와 서구의 의미 상실에 대한 대답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기독교적 진리의 문제를 단순히 하나님에게 떠맡기지 않았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모두 그 내용과 진리를 고려해본다면, 피조물에 대한 통치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 스스로 오시게 되는 미래에 집착하고 있다.” 이 말은 인간들이 역사라는 범위 안에서 그리고 인간의 책임 속에서 진리의 문제에 대해 대답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라고 하는 것은 이미 예수께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셨을 때 계시되었다고 생각했다. 바로 여기에서 역사의 종말이 선취되어 일어났고, 이 선취된 내용에 근거해서 기독교 신앙의 진리가 논증될 수 있게 된다. 그는 변증법적 신학이 신앙이란 결코 논증되어질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신앙의 근거가 다만 주장되거나 요구되어지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어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한다. 판네베르크는 기독교 근거를 역사적인 논증에 의해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부활 신앙에 근거를 두는 기독교에 온 정성을 쏟으면서 이러한 위기들을 극복하고자 했다.

부활 사건은 그에 따르면 역사의식을 위한 세계와 시간의 변화의 당위성을 입증해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기서 역사의 마지막에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의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선취되어 일어났다(proleptisch). 다시 말해서 부활 사건 안에서 역사의 마지막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역사의 의미는 이곳에서 이미 선취되어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부활 사건은 그렇게 해서 역사의 전환점이자 핵심점이 된다. 종말은 부활 사건 속에서, 그것도 선취적으로, 역사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의 현존재는 십자가상에서 갑작스럽게 끝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당신의 생명 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완성된 것이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부활 사건 속에서 인간의 세계, 그리고 인간의 미래가 열려 있다는 사실이 발견될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예수의 부활 속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철저한 자기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을 돕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는 귀납적으로 앞 쪽을 향해 사유되어지는 보편사적인 틀에 인간학적인 근거가 서로 상응하고 있다. 이는 예측할 수 없이 열려진 상태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전진해 나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의 죽음으로 세상은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죽음이 생명에로 통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물론 십자가의 말씀(고전 1:18)은 역사적으로 확인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주장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것이 확인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람(롬 4:18)”으로 부르는 어리석음은 더 이상 아니게 된다. 이에 대해 판넨베르크는 기독교의 소망은 십자가에 달린 나사렛 예수에게 매달려 있을 수 없게 되며, 소망은 오히려 부활에 점화되어 골고다의 언덕의 의미를 밝혀주게 된다. 그는 모든 신학적인 질문에 “선취”라는 개념으로 대답했다. 그에게 종말론은 역사적인 의미 연관, 마지막으로는 보편사적인 의미 전체를 밝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는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그와 그의 메시지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현재가 되기는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이 방향 속에서 생각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그럴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오시는 그때에 비로소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소망하는 그것은 아직 열려져 있다.

4.3. 기독교의 위기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소망

몰트만은 신학을 신학에 대한 도전들에 대답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미래는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가 소망하는 그대로 살자.” “기독교 신학은 미래를 두고 이루어지는 투쟁에서 무엇을 제시해야만하고 또 무엇을 명령해야만 하는가?” 몰트만은 이 세 가지 주제를 60년대 초의 가열된 정치적, 정신적 상황 속으로 융해시켰다. “기독교 종말론의 근거와 결과에 대한 연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희망의 신학>에서 몰트만은 두 개의 신학적인 모퉁이 자료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는 소망의 뿌리가 구약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그의 발견이고, 다른 하나는 소망이 결정적으로 부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판넨베르크와 몰트만은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 서로 달랐지만, 종말론은 역사에서 도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몰트만의 역사신학적인 중심개념은 “언약”이었다. 몰트만이 하나님 나라를 규정하는 것은 정의와 평화였다. 하나님의 행위는 인간에 의해서 방해받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은 일종의 실재적인 유토피아의 윤곽을 그려 보이는 것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언약은 이제까지 죄인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이의제기로 이해되었다. 언약에 근거해서 산다는 것은 이러한 이의제기를 자기의 것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멸망받을 세계로 보내졌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그의 <희망의 원리>에서 “미래에게 있어서 세계는 열려진 과정이고, 바로 이 과정 속에서 구원과 멸망, 정의와 몰락이 전개된다”고 했다. 블로흐와는 달리 몰트만은 변화의 필연성은 고난 받는 자, 가난한 자, 권리를 박탈당한 자, 억압 받는 자들 속에서 이미 나타났다고 한다. 기독교 소망은 고난당하는 자들과의 행동을 통한 연대의식 속에서 보존될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점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신앙이 참되다고 입증하는 역사적인 장소가 되는 것이다.

몰트만은 “언약”을 아직 존재하지 않는 진리의 미래로부터 현실에 대해 이루어진 예고로서 이해하고 있다. “구원사건”은 그 의미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 또 기대지평을 열어주는 많은 역사 사건들이 서로 결합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판넨베르크는 이것으로부터 보편사적인 의미연관을 추론했지만, 몰트만은 미래지향적인 세력과 현실 안주적인 세력과의 대립 속에서 나타나는 역사의 의미통일이 새롭게 설정되는 사실을 보다 강조했다. “현존하는 것”에 대한 신학의 종말론적 영원한 저항은 바로 여기서부터 나타나게 된다. 신학의 기본 모습은, 그렇기 때문에, 압제와 소외로부터 출애굽적인의미를 갖는 “해방”이라 불려졌다. 해방이라는 것은 압도적인 힘을 가진 자와 압제자와 이기적인 사람들에 대한 저항을 통해서 정의되기 때문에 그것은 사회사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이 된다. 가톨릭 신학자로서 몰트만과 비슷하게 에른스트의 <희망의 원리>에 매료되었던 메츠(Johann Baptist Metz, 1928- )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인 예수의 숙명 속에 모든 인간들은 집합되었고, 보편적인 공동체를 형성한 것으로 보았다. 또 그는 성육신이라는 약속은, 그것이 인간의 가능한 범위 안에서, 고통 받는 자들을 옹호하는 노력을 통해서, 지켜져야 한다고 보았다.

4.4. 종교적-정치적 행위이론으로서 종말론: 억눌린 자들의 해방에 대한 소망

신학은 윤리를 위해서 종말론으로 시작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해방신학”은 이러한 측면을 공통분모로 삼을 수는 있으나, 그것들이 반드시 모두 같다고는 할 수 없다. “해방”은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한 소망의 메시지로 일컬어지게 되었고, 특히 이런 메시지를 위해서는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을 포함한 전통신학에서의 해방이 필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전통신학은 사회의 불의와 억압을 가져다주는 구조를 변경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신학적으로 정당화되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개념적으로만 본다면, 해방신학은 신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이론에 힘입고 있다. 이 이론은 역사는 변화의 과정으로서 기존사회와 반대세력을 통해서 추진되고 또 이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것이 나타나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미래로서 -이는 구티아레즈에게 있어서 추진력이다- 역사의 모든 순간들에 앞서 있고, 또 결코 어떤 상태와 동일하게 여겨질 수 없다고 간주되었다. 역사신학적인 종말론을 정치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여러 가지 사회사적인 상황에 따라서 매우 상이한 결론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신학은 서구신학이 상실했다고 하는 전체성과 보편성의 의미를 새로운 종말론의 도움으로 다시금 획득하려는 노력에 있어서는 일치하고 있다. 장차 임할 세계가 체험되는 조건은 오직 굶주림이 채워지고, 연대책임이 성취되고, 사회의 정의가 획득되고, 평화가 얻어질 수 있는 경우일 뿐이다.

“총체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그러한 구원 이해는 종종 신마르크스주의적인 또는 역사유물론적인 색채를 갖고 있으나, 신학적으로는 스스로가 성례전적인 행위에 근거한 것으로 보았다. 이 성찬식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구원을 가져다주는 분으로 나타나셨고, 또 이곳에서 인간의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또 보존된다고 한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미래이기 때문에 최선의 목표에 이르기 위한 초월적인 수단에 해당된다. 그렇게 되면 죄와 불행은 잘못된 것이고, 수정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새로운 인간들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게 된다. 상당히 높은 수위의 도덕적인 주장이 바로 이러한 생각과 결합되어 있다. 해방신학의 도덕적인 주장은 어떠한 이의제기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해방신학은 교회의 교리적 전통들을 성서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 하에서 새롭게 읽고 또 그것들을 “역사의 해방”을 위해서 해석하는 노력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주파수 대역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에반스(Evans)와 여성신학자 뤼더(Rosemary Radford Ruether)도 포함되어 있다. 해방신학은 유럽에서부터 점점 더 지구의 전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4.5. 발견의 맥락으로서의 “역사”

4.5.1. 위기 상황으로부터의 소망?

해방신학과 그 선구자들은 기독교 소망을 정치적으로 실현하고 보존하며 또 제시하는 개척자로 이해했다. 이제부터 종말론은 이미 경험되어 생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망의 실천을 위한 이론이 된다. 윌모어(Garaud S. Wilmore)의 견해에 따르면, 결국 기독교 소망은 그것이 세계가 처한 상태에 만족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다는 것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상황성은 이러한 염려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 이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불의와 불행, 동시대인들의 무수한 고통과 객관적인 절망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이해될 수 있고, 또 공감할 수 있는 흥분상태를 말한다. 예컨대 하나님의 정의는 사회 불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하고, 그의 보편성은 모든 불균형을 금하게 한다는 식이다. 계속되는 문화적인 변화를 고려해본다면 종교적인 전통들은 그 유용성이 검토되어야 하므로 여러 가지의 대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한 견해는 미국의 종교 다원주의에서 크게 성공했다. 유익을 가져다주는 미래의 이상 속으로 종말론이 옮겨간다면, 신학적인 정당화의 맥락의 한 부분으로서 그것은 의미를 잃게 된다. 만일 미래라는 이상과 종말론이 혼동된다면 발견의 맥락인 역사가 정당화된다. 이렇게 되면, 소망의 근거는 동기의 배경이 될 뿐이고, 소망의 근거는 진리에 대한 물음과는 무관하게 된다. 신학적 진술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의식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만 한다. 신학자들이 외부의 상황에 지나치게 자극을 받거나 민감해진다면, 신학적인 통전은 위협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4.5.2. 지식사회학적인 설명

지식사회학은 환경에 대한 인간들의 집단적인 태도로부터 “세계상”을 재구성한다. 소망이 집단적인 행위에 동기를 부여하는 요소로 나타나게 되면, 종말론과 윤리학은 용해되어 종말론은 녹아 없어질 위험에 처하게 된다. 지식사회학적인 관찰방식에 따르면, 철저한 종말론적인 입장은 세계변혁적인 경향을 갖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때 기독교는 신앙의 기대가 신속하게 변하는 사회 환경과 논의를 통해서 그 소망을 얻게 된다. 그러나 신학이 그런 방식으로 상황과의 관계로부터 설명되어져야 한다면, 신학은 스스로의 언어를 상실하게 된다.

역사신학으로 소망의 근거를 제시하는 작업은 마지막 일들에 대한 가르침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설명을 필요로 하는 성경구절들로부터 그 근거의 진술을 이끌어내는 것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된다면, 소망의 근거는 단순히 주장되어질 뿐이고 동시대인들과의 대화에서 설득력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은 세계를 위한 보다 더 나은 미래라는 지평에서 그들의 미래로부터,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기대하는 것으로부터 신학을 새롭게 근거짓고자 한다. 오메가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 소망의 유일한 근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런 소망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변증법적인 신학의 근본적인 종말론은 시대사적인 의미 연관 속에서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현상들”에서 시대 비판적인 동기를 찾는다. 마지막 일들에 대한 가르침은 30년 전쟁(1618-1648)의 유럽의 상황에서 정신적인 새로운 방향을 찾고자 했던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가득 찬 심판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연단과 인내를 갖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이 일으켜 세우는 것에, 즉 만일 끝내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 금방 절망에 빠지게 될 그것에 , 우리의 소망을 놓는 것을 막는다.

4.5.3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인식되는가?

하나님은 어찌해서 우리의 역사로부터, 즉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역사로부터 배제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기독교 신학은 이미 초기에 하나님의 “Okonomie”라는 개념을 가지고 그 특징을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Oikonomia”란 하나님의 은혜를 알리시고, 언약하신 것을 당신 뜻대로 이루시고, 또한 동시에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당신이 뜻하시는 대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지를 관철시키시고 실행하시는 것을 일컫는다. 언약은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히신 분의 부활에 걸려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를 묻고 또 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알려지지 않는다. “Okonomie”는 우리 삶의 근원이 되는 것,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고자 하시는 것에 대한 총개념이다. 하나님을 시공 속의 어떤 현상들 속에서 발견하려고 해서 안 되는 이유는 인간의 유한성, 세계를 충분히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의 제한된 능력에 있다.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행위가 무엇이었고, 무엇이며, 또 무엇일 것인가는 계산되어질 수 없고, 또 계산되어져서도 안 된다. 역사에 전념하고자 할 경우, 신학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9)는 말을 참고해야 한다. 드문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은 당신의 의도와 의지를 인간들이 인식하게끔 그렇게 당신을 나타내신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것을 항상 나중에 가서야 알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은 역사의 신학에 상관하고 있다.

5. 소망 가운데 하나됨? 에큐메니칼한 관점

5.1 움츠러든 대화

이제까지 보아온 세 가지 종말론의 특징적인 모습들은 서로 병행되어 있기도 하고 대립되어 있기도 하며, 때로는 마찰하기도 한다. 최근의 역사신학은 교회들 간에 놓여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또 교회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함으로써 주목을 받고 있다. 해방신학은 이것을 목적으로 삼음으로써 독자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이 되기도 한다. 공동체의 생존을 염려하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신학은 “생각을 달리 하고 있는 사람들”과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심지어는 “아무런 신앙이 없는 사람들”과의 연정을 찾는다.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그를 믿는 신앙 속에서 자비로운 협력과 공존을 통해서 밝히 드러나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섬기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1954년 에반스턴에서 열린 제2차 에큐메니칼협의회 총회에서 “그리스도-세계의 소망”이란 주제는 개신교 안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그것은 인류가 안고 있는 시대적 과제와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며, 그 이후 종말론과 사회윤리학의 연결을 시도했지만 제한된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의 에큐메니칼 칙령은 상이한 신앙고백을 가진 기독교인들의 협력관계를 촉진하고자, 사랑과 소망을 보이기 위하여 관용할 것을 주창했다. 더욱이 “프라하의 봄”은 서유럽에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와의 새롭고 더욱 개방적인 관계의 소망을 불러 일으켰으나, 1968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 이에 반해서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는 많은 신학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당시에 비이성적이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람들로 여겨지던 종말론자들의 논쟁은 새로운 방향 정립을 시작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판단은 자신의 일체의 행위에 대해 이루어지는 반성에 근거해서는 도무지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신다. 바로 이 부분에서 종교개혁의 근본성은 형성된다.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사실에 일치한다.

5.2. 소망의 확신이 갖는 특징

가톨릭교회의 라칭어는 히브리서 11:1절은 “믿음은 소망하는 것의 근거이다”가 바른 번역이라고 했다. 이것은 믿음의 대상의 윤곽을 소망 가운데서 명시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라틴어 번역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는 아직 신플라톤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쓰인 헬라어 “hypostasis”는 어원적으로 “그 아래 서 있음”이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다. 그러면 “신앙은 바라는 것에 굳건하게 서 있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루터는 “hypostasis”를 “확신”으로 번역하면서 “믿음은 소망되는 것에 대한 확신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고 했다. 이것은 슐라이어마허의 천재적인 외침 “순간 속에 영원한 것, 그것이 바로 종교의 본질이다”는 말과 다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보충되어져야 하는 것, 아니 오히려 새롭게 시작되어야 하는 사실은 소망은 하나님에게 있는 우리의 생명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다. 아퀴나스(Thomas von Aquino,1225-74)는, 기독교 소망은 -기본도덕인 믿음과 사랑과 마찬가지로 –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사에 해당된다. 믿음과 소망은 균형이 개어져서는 결코 안 될 정도로 그렇게 균형이 잡혀 있어야만 한다. 가톨릭 전통에 널리 잘 알려져 있는, 소망을 덕으로서 기술하는 것은 윤리적인 지침을 열어준다. 그렇게 되면, 소망이 도덕적으로 간주됨으로 인해서 더 이상 은혜로 주어진 것이 아닌, 그런 결과로 귀결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믿음과 소망은 언약이라는 동일한 대상을 가지고 있다. 믿음과 신앙의 본질은 현재와 미래를 구별함으로써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다. 만일 믿음이 단지 현재와 소망이 오로지 미래와 연관짓는다면, 이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라칭어는 이러한 믿음의 특징 속에다 종교개혁의 신학을 수용함으로 시작된다. 생각해낼 수 없고 단지 기대되어질 뿐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행위가 갖는 특징은 “새롭다”는 것이다.

5.3. 교회의 자기 이해를 재는 척도로서의 종말론

신앙인들과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믿음이 없고 소망도 없는, 혹은 서로 다른 식으로 믿거나, 다른 식으로 소망하는 사람들과 일치를 위한 행위라는 전망 속에서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만물의 회복(행 3:21 참고)이라는 생각을 이에 대답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교회라는 존재는 불필요해진다. 왜냐하면, 이미 만물(인간 포함)은 구원을 받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말론의 과제는 우리 안에 있다고 해서 결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 그런 소망에로 부르는 것이다. 종말론은 설명이 요구되는 곳에서 설명을 주고, 그 요구가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서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연합적인 노력을 기울임에 있어서 종말론과 윤리학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이미 50년대의 중반에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어려움은 그 사이에 훨씬 늘어났고, 에큐메니칼 협의회 내에서는 그 정도에 있어서 이미 비판적인 단계에 도달했다.

6. 교회생활 속에서의 소망

지금까지 교회의 실천을 위한 종말론에서 소망을 구체화하기 위해 기울이는 몇 가지의 노력들을 살펴보았다. 소망의 이유를 설명하는 일이 오늘날 특별히 절실하게 나타나는 곳은 교회 행위가 갖는 통증부위이다. 교회의 삶과 행위 속에 있는 이런 문제들은 교회론 속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

6.1. 지성적인 목회활동으로서 소망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

1967년 미국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에서의 희망은, 하나님의 화해의 사역은 모든 인간의 삶과 그 환경을 포괄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서 그 완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종말론적인 이상과 그 이상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들은 더 나은 세계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도록 고무하고 있고, 세계로 하여금 마지막 심판과 구원을 준비하는데 사용되었다.

1975년 가톨릭 주교회의는 “우리의 소망”이라는 일종의 교리문답서를 결정했다.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소망의 말은 부활사건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모두의 미래를 말하고 있다.” 이런 식의 소망은 행위와 관계해서 다시금 중요하게 부각된다. 거의 10년이 지난 후 융엘(Eberhard Jungel)의 개신교회 신학위원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가 기독교 교회의 증거를 위해 갖는 의미”를 발표했으나, 내용은 가톨릭 주교회의의 신앙고백과 일치하고 있다. 이것은 칼 라너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데, 그 핵심은 고대교회 이래로 계속 전래된 신학적인 전통에 유래하고 또 그럼으로써 에큐메니칼한 결속을 인식하게 하는 견해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는 소망이 행위 속에서 성취된다고는 주장되지 않았다. 이것은 1세기 이래로 종말론을 동행한 딜레마에 해당된다.

6.2. 죽음을 넘어서는 소망: “영혼불멸”? “죽은 자의 부활”?

사망에 대한 고려는 삶을 다시 얻고서야, 만일 무한한 시간을 갖고 있다는 착각이 사라지게 된다면, 마침내 실재적이 된다. 이러한 자기정화는 그 어떠한 잘못된 소망으로 인해서 방해되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모든 소망은 만일 그것이 개인의 죽음을 넘어서 계속되는 삶과 행위의 의미연관에로 이끌어가지 않는다면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는 불멸사상의 처절한 싸움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 싸움은 교회적인 차원에서는 관철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동기: 그리스 철학의 유산과 영육의 철학적인 구별과 불멸론의 연결-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성서적인 기술은 인간의 자아의 지속적인 본질을 기술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사망은 마지막 원수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소망 속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한 존재에 대해서 죽을 수 있기 위하여 정복되어져야만 한다.

두 번째 논점은 인간의 정체성에 관련된다. 삶과 죽음이라는 불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옛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의미연관은 파괴되지 않았다. 죽는다는 것은 어떠한 통로를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종말에로 이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사망은 우리 안에 계셔서 하나님이 되시고, 또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는 순간에 끝나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행위로서 우리가 당하는 것은 우리에 의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라진다 해도 그럴 것이다.

끝으로 사망이 왕 노릇하는 그러한 세계에 익숙해지는 것은 서구문명의 신호로서 문화비판적인 관점에서 19세기에 관찰되었다. 저술가 쉬나이더(Reinhold Schneider, 1903-58)는 “부활신앙은 부활에 대한 바람을, 혹 그렇지 않다면 무에 대한 불안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도, 불안도 분명하게 이해되어지지 않는다”고 썼다. 영원한 안식과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고난으로부터의 구원”은 그에게 제거될 수 없는 모순으로 나타났다.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1804-72)와 마르크스(Karl Marx, 1818-83)는 기독교를 도피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정신병 의사인 마이어(Joachim Ernst Meyer)는 개신교 신앙을 가진 환자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 그 정도에 있어서 높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그리고 이것의 근원을 죽음은 이제까지 체험한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는 인상을 주는 신학이론에서 근원을 찾았다. 이런 현상에 대해 “교회 노이로제” 또는 “종말 노이로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 측에서는 죽은 자 역시 교회에 속해 있으며, 그들은 중보기도를 통해 교회의 삶 속에 계속 존재하고 있게 된다. 동방정교회에서의 예배의식은 전체 구원사를 포함하고 있고 하늘에서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다. 서방신학에서 개인 종말론과 사회 혹은 역사 종말론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교회의 행위 속에 독립되어 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사도신조에서 “육체의 부활”이라는 표현도 어떤 식으로든 기독교의 소망에 구속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석해야 한다.

6.3. 장차 오실 분의 언약

기독교 종말론의 경우 죽음을 넘어서 저편에 이르기까지 이르리라는 진술은 언제나 오늘을 위한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종말론은 말하고자 하는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죽은 뒤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무엇을 소망하도록 허락 받았는가? 혹은 그 이후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그 다음에 우리는 어디에 있게 되는 건가? 그리고 어떤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인가? 하는 등등의 질문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으로 오실 분으로 심판자요 구원자로 바라보는 종말론은 “언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리스도”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 질문함에 집중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타나야 할 모든 것을 성취하신다. 종말과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속에서는 동일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완전한 충만 속에서 구원을 가져오시기 때문이다.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다. 기독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종말론의 우주적이고 개인적인 측면은 서로 일치되고 있다. 바울은 죽음은 극복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우리에 의해서 극복되지 않는 마지막 원수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6.4. 치료로서의 정화?

만일 죽음이 인생의 종국으로 간주되어질 경우에는 그 관점이 바꿔지며, 바로 여기서부터 인간의 숙명에 대한 질문, 즉 성취와 완성, 그리고 삶의 지속에 대한 물음이 생겨난다. 이것은 바로 신구교 간에 논란이 많은 연옥설의 핵심에 대한 질문과 같다. 죽음과 더불어서 이미 살았던 삶의 전체가 분명하게 되고 또한 삶은 그렇게 죽음 속에서 완성된다고 하는 전망은, 우리를 새롭고도 책임감 있는 삶으로 인도해준다고 융엘은 생각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들이 자기 자신과 죽음 저편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능동적으로 영향을 미치고자 했던 면죄부 판매와 관련하여 연옥에 대한 표상을 거부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 조항으로 맞선 것이다. 영생은 구원을 이룬 현재가 최종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며, 이것의 범위, 충만함, 그리고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는 때에 계시될 것이다.

6.5. 주의 만찬: 오실 그리스도를 선포

“그리스도 공동체”의 본질을 규정해주는 한 요소는 주의 만찬이다. 바로 이곳에서 지금까지 서술되었던 윤곽들의 대부분이, 심지어 종파 간에서도 합류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식탁에 모여든 교인들이 기억하며 생각하는 것은 이미 현존해 있는, 지속적인 하나됨이나 흠이 없는 전체가 아니다. 그들은 그 기억 속에서 하나님의 힘을 고대하고 있는데 바로 이 힘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고 있다. 인간들은 성찬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합병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기억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성찬 행위는 “마라나타(주여 오시옵소서)”라는 기대의 외침으로 이어지며, 여기에서 예수의 죽음의 선포는 그 목표에 이르게 된다.

성찬에 대해서 종말론적으로 다룬 처 번째 시도는 감리교 신학자 웨인라이트(Geoffrey Wainwright, 11936- )에 의해서 <성찬과 종말론>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성찬을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고 또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예료된 것으로 이해한다. 사도신조에서 보면, 죄의 용서는 생명을 주시고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대표하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시는 성령의 사역에 속해 있다. 하나님의 영을 통한 인간의 변화는 결코 개별적으로 만들어가는 개성화 그리고 내면화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거듭해서 강조되어야 하고 또 신학적으로 정당화되어야만 한다. “모든 사람들은 ….영혼이 완전히 영원한 존재에로 집중하는 시기인 또다른 미래를 두려워하고 있다.” 교회는 사람들의 기대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고 노력을 기울이는데 소망은 바로 이들과 교회를 결합시킨다.

7. 개요: 종말론의 근본적 질문들

7.1. 신학적 구상들의 마찰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말하기를 배웠던 그런 “나”에게 “삶의 마지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하려는 “나”의 정체성은 스스로에게 어떻게 이해되는가? 이에 대해 인간을 영원한 공동체 안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진술하는 종말론이 없다면, “나”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결합되어 있다는 대답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음을 전하는 형태인 성찬은, 파괴되었지만 하나님에 의하여 새로운 조직으로 일으켜지게 되어 완전히 다른 모습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달라진 “나”가 된다. 이러한 사실은 마지막 일들에 대한 가르침이 신학사의 골동품 창고 속에 파묻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근본적인 종말론은 마지막 일들에 관한 질문들에 대답하지 않고 소망이 오직 하나님에게 향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렇다고 마지막 질문들은 우리에게서 사라질 것인가? 역사신학적인 종말론은 그렇지 안ㄷ고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종말론의 세 가지 성격이 오실 분을 진술하거나 혹은 심지어 그 윤곽을 그려내는 방법과 방식에 있어서 대단히 상이해서 서로서로를 결합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라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은 종말 사건들을 마치 이미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한 걸음씩 뒤쫓아 가는 것에 일치한다. 근본적인 종말론에는 표현주의적으로 개인이 마치 번개를 맞듯이 그렇게 영원과 마주치게 되는 그 순간이 중요하다. 철저한 종말론은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들을 불러들이고자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외침과 간섭하심에 익숙해지는 가운데 단지 준비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역사적인 종말론은 긴장으로 가득찬 채 서로서로가 연결된 많은 장면들을 광범위하게 설명한다.

이렇게 상이한 언어적인 문제와 진술방식의 차이는 서로 결합될 수 없다. 종말론의 마찰적인 성격들은 마치 신학적으로 구속력 있는 가르침은 없고, 단지 많은 수의 종말론이 있을 뿐이라는 착각을 준다.

7.2. 확인을 위한 질문

이제까지 제기된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1. 예수그리스도께서 마지막이라고 불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예수 그리스도, “오실 분”은 어떤 존재로 기대되고 있는가?

3.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무엇이 바뀌었는가?

4.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세계를 위해서” 무엇을 소망해도 되는가?

5. “대상”과 ‘행위“로서의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 소망은 어떻게 정당화되어지는가?

6. 믿음과 소망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7. 소망과 행위는 서로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의미연관을 가진 공통분모를 보여주면 다음과 같다. 사실 이 공통분모라고 하는 것들은 다양한 음색을 지닌 각 종말론들의 불가피한 문제에 대한 통찰들의 차이, 초점이 서로 다른 문제제기, 그리고 분명하지 않은 관점들을 무시하고 있다.

-창조의 완성, 즉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로 시작한 것을 완성시키시고자 하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와 통치를 보편적으로 세우시고 이를 반대하는 모든 저항이 극복되었을 경우에 나타나게 될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신다.

-새로운 인간이 되고 또 인간은 영생으로 변화된다.

7.3. 무엇에 근거한 대답인가?

1. 종말론은 신학의 한 부문으로서 소망의 고백에 대한 여러 가지 사고경험들로 이루어져 있다. 소망은 우리가 이미 담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소망을 허락하시면서 미래를 주신다. 종말론은 소망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경탄을 멈추지 않게 하는데 사용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동시에 항상 소망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망 가운데 구원되었다”는 고백과 함께 그것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 종말론의 문제사는 항상 해명의 과정으로 때로는 고통스런 자기비판의 과정으로 입증되고 있다. 신약에서는 우연치 않게 소망 속에서 깨어 준비할 것을 권고하고 있고(살전 5:6; 벧전 1:13), 또한 자기 멋대로 이루어지는 기대에 취해 있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2. 소망의 이유에 대한 설명이 점점 더 많이 요구될수록 하나님의 언약을, 그가 약속하신 것과 그 약속이 주어진 방식과 방법을, 고수해야만 하는 이유는 더욱 분명해진다.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 즉 그에게서 일어나고 또 그를 통해서 일어난 모든 것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은 확증되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종일관 언약을 확인하시면서 또 언약을 주시는 가운데 행위하셨다. 바로 이 부분에서 종말론이 갖고 있는 여러 특성들 간의 대화의 필요성은 새롭게 나타난다. “언약”은 미래의 사건을 예측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일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장차 오실 자를 예고하는 것이지 앞 일을 미리 말하는 예언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사-종말론 안에서 언약은 마찬가지로 일종의 예고로서 이해되고 있지만, 그러나 보통은 하나님의 지시로서 이해된다. 근본적인 종말론은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역사-종말론이 하나님의 언약인 평화, 하나님의 나라, 의, 생명 등을 인간의 계획으로 간주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 이것들은 믿음으로 발견되고 그러므로 소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의미들을 포함해서 언약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약속이다. 종말론적 범주인 “언약”은 전체 신학의 가락을 바꾸어주는 듯이 보인다. 마치 악보상에는 변화가 없어도 새롭게 또는 다르게 들리게 되는 것이다.

3. 나사렛 예수를 만남으로써 변화될 수 있는 것들의 핵심은 “생각의 변화 내지는 세계관의 변화”이다. ‘세상의 형적이 사라지는’ 엄청난 충격을 동반하고 이루어지는 변형, 즉 로마서 12:2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생각의 변화는 우리의 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동시에 옛 사람은, 사라져가는 세상과 함께 죽는다(고후 4:16). 우리의 시각으로는 조망할 수 없을 정도로 연장된 현재가 아닌 실재적인 현재에서 자신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가련한 우리의 실재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파스칼은 “단순히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현재는 우리의 본질에 해당된다. 그 이유는 현재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품고 있는 바로 그 시간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스칼은 “우리는 결코 현재에 있지 않다”는 말에 놀라움 가운데서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므로 역사라는 공간을 피하시지 않는 하나님에 반해서 우리는 상황에 따라서 “역사 안으로‘ 혹은 ’역사 밖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가 마지막을 그 이전과 구분하고 나서 이러한 판별을 완결된 것으로 간주하는 가운데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곧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Eschatos(마지막)”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종말론은 있어야 한다. 여러 사고경험들-당신의 미래를 보여주시는 방법으로서의 하나님의 언약, 현재의 사건과 장차 일어나게 될 사건, 특히 소망이라는 믿음의 은사를 조직적으로 구성짓는 작업으로서의 종말론 등-과 뒤엉키는 것 등에 독자들이 숙달하게끔 도와주는 것이 바로 종말론 입문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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