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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와 레마 의 차이 | [에스더권 선교사의 성경에세이] 레마의 말씀을 어떻게 받는 것일까? 로고스의 말씀과 레마의 말씀의 차이!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I (하나님의 음성듣기와 분별 7) 모든 답변

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로고스 와 레마 의 차이 – [에스더권 선교사의 성경에세이] 레마의 말씀을 어떻게 받는 것일까? 로고스의 말씀과 레마의 말씀의 차이!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I (하나님의 음성듣기와 분별 7)“?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sk.taphoamini.com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sk.taphoamini.com/wiki.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에스더권 선교사와 함께하는 ‘성경에세이’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5,374회 및 좋아요 323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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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더권 선교사 (멕시코 선교사, 예수사랑선교회 대표, 멕시코예수사랑교회 담임목사)
➤ 에스더권 선교사 저서 : 하나님의 선물, 방언의 숨겨진 비밀, 부탁합니다 제발! 자살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세대여 일어나라, 하늘의 청지기, 하나님의 치유, 신유의 숨겨진 비밀, 당신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외 다수
➤ 도서 구입 문의 : 도서출판) 십자가사랑 (010-2043-6515), http://www.crosslove.co.kr​​​​
➤ 예수사랑선교회 홈페이지 http://www.jesuslovemission.com​​​​
➤ 멕시코예수사랑교회 홈페이지 http://www.jesuslovechurch.or.kr​​​​
➤ 페이스북 : ‘에스더권’ (메일 : [email protected])
음악 Christian BGM 크리스찬 BGM
**********************************
( ‘성경’으로 하나님의 음성듣기, ‘레마의 말씀’은 어떻게 받는 것일까? )
예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성경에세이 섬김이, 멕시코 에스더권 선교사입니다.
오늘은 ‘로고스’의 성경말씀이 어떻게 각 개인에게 ‘레마의 말씀’으로 조명되는지에 대해 함께 나눠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로고스의 말씀인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에 인간의 인륜지대사가 다 녹아있습니다.
성경 안에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인도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종 성경 속의 이야기가 자신의 일처럼 와 닿지 않았을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현재 자신의 삶과는 동떨어진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이것이 기록된 ‘로고스의 말씀의 한계’이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성경을 묵상할 때 평상시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던 성경 구절이 강하게 각인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성경의 어떤 구절이 튀어나와 마음속에 쏙하고 들어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마치 사진을 보고 있는 것처럼 성경의 어느 장면이 선명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마음에 심겨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글자가 크게 확대되어 보이는 것과 같은 느낌도 받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때가 기록된 로고스의 성경 말씀이 레마의 말씀으로 조명되는 때입니다.
어떤 일을 결정해야 할 때 그 상황에 정확히 들어맞는 성경의 말씀이 불현듯 떠오르기도 합니다.
마치 성경말씀이 살아 움직여 내 영혼을 쪼개는 것 같은 신선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레마는 그 당시 자신에게 정확히 필요한 말씀일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는 ‘레마’의 위력이지요.
레마의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지와 생각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성령께서 성경 말씀을 레마로 계시해 주실 때, 그 음성이 성령께서 주신 것인지, 자신의 생각인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레마의 말씀의 근원은 우리의 영안에 내주해 계신 성령님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안에서 성경 말씀을 레마로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레마의 말씀은 성령님이 우리의 환경과 상황, 조건에 맞는 말씀을 주시기에 강한 충격으로 각인됩니다.
그리고 이 레마의 말씀은 성령님이 조명해 주신 말씀이기에 우리의 혼과 영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우리 마음과 생각과 감정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히 4:12).
그리고 성령님께로부터 비롯된 이 레마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는다면 우리가 순종하며 결단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반면 어떤 상황에서 레마가 아닌 자신의 생각 안에서 갑자기 성경구절이 떠올랐다면 이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옳고 선한 것이라면 순종하십시오.
그 일을 순종하는 아름다운 헌신과 결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내주하신 사람들에게 레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투영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모르는 사람과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실까요?
이들은 성령께서 그의 영안에 내주하시지 않거나, 내주해 계시더라도 육체의 소욕과 정욕이 너무 강해 성령께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도 말씀을 전달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들은 직접적으로 레마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영적인 상태와 수준이므로 주로 다른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합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야야 하시거늘 대답하여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행 9:10-12)
우리는 이러한 예화를 성경을 통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회심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까지 가게 됩니다.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 그는 예수님의 만나게 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듣게 됩니다(행 9:4).
예수님을 강력하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성령님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영적인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의 음성을 직접 듣을 수 있는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 전할 말씀을 대신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은 아니니아는 하나님의 말씀과 음성을 듣고 사울을 찾아갑니다.
회심전 사도 바울은 아니니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음성을 받았습니다.
아직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가 열려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하는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나 수준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아직 영적으로 미약하여 ‘레마’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 없는 자녀가 있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이럴 때 성령님은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회심전 사도 바울에게 아나니아를 보내신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통해 전달된 레마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을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현재 다른 사람을 통해 레마의 말씀을 받고 있는 상태라면, 이제부터는 성령님께 직접 레마를 받는 단계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을 읽어야 하며 말씀을 깊이 믿음 안에 넣는 묵상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 안에 로고스의 말씀을 저장해 놓는다면, 언제든, 어느 환경이든, 어떤 조건이든 상관없이 성령께서 레마의 말씀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삶을 조명하시며 인도하시며 동행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보다도 로고스와 레마의 말씀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로고스의 말씀을 통하지 않는 레마의 말씀만으로는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레마의 말씀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성령께서는 기록된 로고스의 성경말씀을 통해 조명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로고스의 말씀을 통해 영의 양식을 지속적으로 먹을 때, 성령님께서 자신에게 필요한 레마의 말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로고스의 밭에서 레마의 말씀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고스 성경과 레마로 말씀하시는 성령님이 함께 할 때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성경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축적되어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기를 소원하십니다.
오늘도 로고스의 성경이 레마의 말씀으로 심령을 뚫고 들어와 아름다운 열매로 맺어지기를 기도 드립니다.
꿀송이보다 더 단 레마의 말씀을 삶 가운데 경험하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로고스 와 레마 의 차이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로고스 (λόγος) 와 레마 (ῥῆμά) – Jesus4Today!

다만, 두 단어의 차이를 따지자면, ‘레마’는 일반적으로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을 가르키는 것이고 ‘로고스’는 듣는 자들에게 깨달음과 변화를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jesus4today.tistory.com

Date Published: 2/25/2021

View: 5363

[스크랩] 로고스와 레마 차이점 모음 – 다음블로그

헬라어원어사전을 보면, 로고스는 “생각의 표현”을 의미하며, 레마는 “말씀되어진 것, 또는 기록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경 상에서의 로고스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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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3/5/2021

View: 1177

“로고스”인 말씀과 “레마”인 말씀의 차이

또 하나는 「레마(rhema)」인데, 성경에는 「말씀」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두 단어는 약간 다르다. 「로고스」는 영원토록 정해진 것이며, 객관적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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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ch.kr

Date Published: 4/4/2021

View: 6884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는 무엇이며 성경말씀과 어떤 연관이 …

요한복음1장의 로고스는 별개로 인정하고, 다른 서신서나 복음서에서 사용하는 로고스와 레마는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또한 로고스는 변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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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0/13/2022

View: 4079

로고스(Logos)와 레마(Rhema) – 성서학연구소 BIBLIA

로고스는 제3자의 입장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지만 (개인의 의견이나 견해가 들어가 있지 않은 객관적인 전달자), 레마는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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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ia.co.il

Date Published: 10/8/2021

View: 6520

로고스와 레마,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 – Glory be to Lord

그렇기에 원어로 보지 않는 한 어떤 구절이 로고스이고 어떤 구절이 레마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신약에 331번 등장하는 로고스가 말, 말씀,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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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loryb2lord.org

Date Published: 7/17/2022

View: 5362

기타자료 – 레마와 로고스 – 예레미야 이단 연구소

(1)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데, 레마는 “나의 것이 된 말씀”(깨달아진 말씀)을 뜻한다는 주장이다. 가장 보편적인 견해가 이것인데, 소위 정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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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esearchheresy.com

Date Published: 4/19/2022

View: 6301

<서승원 박사 특별 기고> 로고스와 레마(1) : 칼럼 – 기독일보

따라서 “레마”가 “능력 있는 말씀”을 뜻한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로고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로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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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7/22/2021

View: 3973

로고스와 레마는 과연 다른 것일까? – 미주 크리스천 신문

로고스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고, 레마는 그 말씀을 읽는 가운데 내 영혼에 부딪혀 와서 어떤 감화와 감동을 주는 말씀이다. 즉 로고스인 말씀이 나의 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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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press.net

Date Published: 8/30/2022

View: 1906

로고스(Logos)와 레마(Rheemata). – 가톨릭정보 – 굿뉴스

정말 로고스와 레마가 차이점이 있을까? 성경 전체를 보면 로고스라는 단어는 약 1200 이상이 나온다. 레마는 요한복음에서는 단수로 나타나지 않고 복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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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aria.catholic.or.kr

Date Published: 8/16/2021

View: 7612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로고스 와 레마 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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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권 선교사의 성경에세이] 레마의 말씀을 어떻게 받는 것일까? 로고스의 말씀과 레마의 말씀의 차이!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I (하나님의 음성듣기와 분별 7)
[에스더권 선교사의 성경에세이] 레마의 말씀을 어떻게 받는 것일까? 로고스의 말씀과 레마의 말씀의 차이!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I (하나님의 음성듣기와 분별 7)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로고스 와 레마 의 차이

  • Author: 에스더권 선교사와 함께하는 ‘성경에세이’
  • Views: 조회수 5,374회
  • Likes: 좋아요 323개
  • Date Published: 2021. 7.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fLN1AM1PZ8

tajik

성도 -> 말씀(로고스) ->(내면화, 육신화, 체험화) -> 나에게 주어진 말씀(레마) -> 표적(세메이온)

->간증(Campassion)

하나님의 임재의 특성

=> 시간을 초월한다.

1. 하나님의 말씀에는 로고스와 레마가 있다.

2. 로고스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성경말씀이다.

3. 로고스를 통하여는 일반적인 은혜를 받는다.

4. 레마는 성경을 읽거나 듣거나 묵상중이거나 기도중이거나 어떠한 상황 중에서든지 간에 자기 자신을 향하여 확실하고도 명확하게 확신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음성이시며 계시 입니다.

5. 레마를 통하여서는 성령의 권능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며 개인적인 특별한 은혜와 체험적인 믿음과 주님을 영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성품과 행실과 인생이 혁신 됩니다.

로고스에서 레마로

2008. 1. 17 .John T. Lee

신약 성경에 로고스는 총 330회, 레마는 총 70회가 나타난다.

헬라어 “로고스(logos)” 또는 “레마(rhema)”를 성경의 번역가들은 쉽게 ‘말씀(word))’로 번역하고 있다. 영어의 경우 ‘언어(language)’와 ‘말 또는 음(speech)’는 각각 ‘추상적, 심리적 언어’와 ‘구체적, 물리적 언어’로 분명히 구분된다. 그러나, 헬라어의 경우 ‘로고스’와 ‘레마’는 각각 ‘논리적, 객관적, 존재론적 언어’와 ‘현상(사건)적, 주관적, 체험론적 언어’로 굳이 구분할 수 있다. 즉, ’로고스‘는 ’논리(logic)‘에 어원을 두며, ’레마‘는 ’직접적인 언급이나 말씀하심(utterance 또는 speaking)‘에 어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하심(Speaking)이 돌에 새겨진 십계명과 같이 글로 새겨져 모든 사람들을 향해 펼쳐져 적용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성경(말씀)이라 한다면, ’레마‘는 그 로고스가 생명력을 가지고 개인의 삶 속에서 살아 나 직접 말씀하심으로써(Speaking), 이를 듣고 직접 삶에 적용하고 행동하도록 하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소유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로고스(written word )’ 즉, 흰 종이 위에 검게 새겨진 문자에 불과한 셈이다. 이는 마치 십계명의 돌판이 귀한 보물로서 유물함에 보관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레마.는 다르다. 사도행전 속의 사도들이나 집사들이 행동하고 있는 모티브가 바로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심(Speaking)의 ’레마‘에 있었던 것처럼, ’성경 속에 있더라‘ ’하나님이 말씀하셨더라‘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레마’의 수준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직접 말씀하시거나, 개인에게 체험되어져서 그 씌어진 성경 말씀의 의미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 말씀대로 움직이는 데 있는 것이다. 즉, 살아 움직이게 되는 ‘로고스’가 곧 ‘살아있는 말씀(Living Logos=Living Word)’으로서의 ‘레마’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오늘도 펼쳐든 성경이 ‘–더라’는 객관적 지식 수준의 ‘로고스’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시고 말씀하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는 주관적 체험과 행동의 수준 ‘레마’로 높여 가야 할 것이다.

http://blog.naver.com/anointmt/150003547764

“로고스”인 말씀과 “레마”인 말씀의 차이

신약에는 두 개의 「말씀」이라는 단어가 있다. 하나는 「로고스(logos)」인데 이것은 일반적인 말씀이다. 또 하나는 「레마(rhema)」인데, 성경에는 「말씀」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두 단어는 약간 다르다. 「로고스」는 영원토록 정해진 것이며, 객관적인 것이며, 즉 일반적으로 말하는 말씀이며, 기독교에서 말하는 말씀이다. 「레마」는 「로고스」보다 더 주관적이다. 우리는 신약 몇 군데에서 「레마」를 사용하여 설명한 곳을 인용할 수 있다.

마태복음 4장 4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이곳의 말씀은 「로고스」가 아닌 「레마」의 말씀이다. 우리가 보통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에는 「로고스」이지 「레마」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이것은 기록된 하나님 의 말씀이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로고스」―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우리에게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어느 어머니에게 「당신의 아들이 길에서 차에 치어 상처를 입고 거의 죽어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즉시 요한복음을 펴서 읽었다. 우연히 요한복음 11장 4절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매우 즐거워하며 평안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가서 보았을 때에 아들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로고스」이지 「레마」가 아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그녀에게 말씀하신 말씀은 아닌 것이다. 「로고스」와 「레마」는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전자는 성경 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후자는 즉석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이다.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다. 이곳의 말씀은 「레마」이지 「로고스」가 아니다. 이 말씀의 뜻은, 반드시 그리스도가 사람 안에서 말씀하셔야 비로소 사람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우리 많은 사람들이 외울 줄 알고 심지어 십 년 이십 년 동안을 외워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것은 「로고스」이다. 어느 날, 당신은 성경을 읽다가 예전과 다름을 느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세상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심을 느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들에게 독생자를 주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셨음을 느낀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그분을 믿는 「나」임을 느낀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멸망치 않고 「내」가 영생을 얻음을 느낀다. 이것이 「레마」이며 하나님의 말씀하심인 것이다. 이때에 당신은 믿음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구하여야 한다. 『하나님, 만일 당신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면 「레마」의 말씀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것은 「로고스」가 결코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로고스」는 일정한 효용이 있다. 「로고스」가 없으면 「레마」가 없다. 하나님의 모든 「레마」는 「로고스」에 근거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레마)이 되어야 비로소 당신이 믿을 수 있고 상황도 변하게 된다.

요한복음 6장 63절 :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유대에게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없었는가? 있었다. 구약의 계명을 유대인은 매우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소용이 없었다. 오직 주님이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만이 비로소 영이요 생명인 것이다. 「레마」만이 비로소 영이 요 생명이다.

마가복음 14장 72절 : 『닭이 곧 두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레마」)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 곧 「레마」를 상기했던 것이다. 「레마」는 그가 기억하고 있고 생각해 낼 수 있는 말씀이었다. 베드로는 거짓말을 했지만, 홀연히 「레마」 가 왔으며 주님의 그 한 구절의 말씀이 임했던 것이다. 「레마」는 주님이 일찍이 하셨던 말씀을 이제 다시 말씀하시는 것이다.

누가복음 1장 38절 :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이곳의 말씀도 「레마」이다. 여기는 하나님이 이사야 7장 14절에서 예언하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는 말씀이 아니라 천사가 특별히 마리아에게,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라고 한 말씀이다. 마리아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비로소 능력이 있었고 성취될 수 있었다.

누가복음 2장 29절 :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곳의 말씀도 「레마」이다. 원래 주 예수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시므온에게 있었는데, 그 내용은 「네가 주가 세운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날 시므온은 주 예수님을 보았고,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시므온에게는 주님의 「레마」가 있었으며, 이것은 성경의 몇 장 몇 절에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날 주님이 시므온에게 말씀하신 어떤 말씀인 것이다. 단지 성경 몇 장 몇 절의 말씀으로는 부족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만이 비로소 유용하다. 「레마」는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만진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한 것이고,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고 정결케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레마를 추구해야 하며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은 바로 이것을 의지하는 생활이다. 대체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셨고, 대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우 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날 기독교는 여전히 개인적인 계시의 기독교라는 것이다. 만일 주님이 사람 안에서 말씀하시지 않으면 기독교가 아니고 신약도 아니다.

누가복음 3장 2절 :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여기에서의 말씀도 역시 「레마」이다.

누가복음 5장5절 : 「시므온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여기의 「말씀」도 주님이 즉석에서 말씀하신 말씀이며 주님이 그 개인에게 하신 말씀이므로 「레마」이다. 주님이 성경 몇 장 몇 절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물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만일 오늘날 어떤 사람이 마태복음 14장 29절 말씀을 인하여 바다에 가서 바다 위를 걷는다면 반드시 물에 빠질 것이다. 이는 그것이 주님이 오늘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당시에 하셨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과거에 하신 말씀과 지금 하 신 말씀은 동일하게 능력을 갖고 있고 결코 변함이 없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에게 다시 한 번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가이다.

누가복음 24장 8절 : 『저희가 예수의 말씀(레마)을 기억하고』. 무엇이 「레마」인가? 「레마」는 말씀하신 것을 다시 말씀하시는 것이다. 「레마」는 간단히 말해서 주님이 거듭하시는 말씀이요 살아 있는 말씀이다.

사도행전 11장 16절 : 『내가 주의 말씀(레마)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는데 주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했고, 주님의 말씀이 베드로의 몸에 임했다. 베드로가 일부러 가서 생각하고 기억한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 다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우리가 줄곧 소중하게 여기는 한 가지 일은, 주님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주님은 성경에서 말씀하실 뿐 아니라, 바울에게 말씀하시고 요한에게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오늘 또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하심은 멈춘 적이 없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강단에 설 때마다 항상 「레마」가 있기를 소망한다. 만일 주님이 오늘 말씀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한편의 메시지를 전했는데도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신 때가 많다. 메시지가 틀린 것이 아니라, 그것은 주님의 일상적인 말씀이기는 하지만 주님의「레마」는 아닌 것이다. 교회 안에 한 가지 어려운 점은 바로 살아 있는 말씀이 없이 죽어 있는 말씀만이 있고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교통이 부족한채 사람의 전파만이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좋은 교리」 아래 죽어 있으니 얼마나 애석한가. 하나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에게 「레마」―오늘날 주님이 친히 하시는 말씀―를 주소서. 「레마」가 있어야만 우리는 성장할 수 있고 살아 있는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을 공급할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레마」이다.(워치만 니 전집 제2집 제14권, 제3장)

[출처] 로고스와 레마|작성자 woltari81

로고스와 레마

신약에는 두 개의 말씀이라는 단어가 있다.

하나는 로고스(logos)인데 이것은 일반적인 말씀이다.

또 하나는 레마(rhema)인데, 성경에는 말씀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두 단어는 약간 다르다.

로고스는 영원토록 정해진 것이며, 객관적인 것이며, 일반적으로 말하는 말씀이며, 기독교에서 말하는 말씀이다.

레마는 로고스보다 더 주관적이다.

우리는 신약 몇 군데에서 레마를 사용하여 설명한 곳을 인용할 수 있다.

마4;4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로고스가 아닌 레마의 말씀이다.

우리가 보통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에는 「로고스」이지 「레마」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이것은 기록된 하나님 의 말씀이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로고스 ;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우리에게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예)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어느 어머니에게 당신의 아들이 길에서 차에 치어 상처를 입고 거의 죽어가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녀는 즉시 요한복음을 펴서 읽었다.

우연히 요11;4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 라는 말씀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매우 즐거워하며 평안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가서 보았을 때에 아들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로고스이지 레마가 아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그녀에게 말씀하신 말씀은 아닌 것이다.

로고스와 레마는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전자는 성경 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후자는 즉석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이다.

롬10;17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말씀은 레마이지 로고스가 아니다.

말씀의 뜻은 ; 반드시 그리스도가 사람 안에서 말씀하셔야 비로소 사람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3;16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다.

어느 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성경을 읽다가 예전과 다름을 느꼈다.

하나님이 세상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심을 느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들에게 독생자를 주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셨음을 느낀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그분을 믿는 나임을 느낀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멸망치 않고 내가 영생을 얻음을 느낀다.

이것이 레마이며 하나님의 말씀하심인 것이다.

이때에 당신은 믿음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구하여야 한다.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면 레마의 말씀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로고스가 없으면 레마가 없다.

하나님의 모든 레마는 로고스에 근거한다.

요3;16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레마)이 되어야 비로소 당신이 믿을 수 있고 상황도 변하게 된다.

요6;6;3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없었는가? 있었다.

구약의 계명을 유대인은 매우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소용이 없었다.

오직 주님이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만이 비로소 영이요 생명인 것이다.

레마 만이 비로소 영이요 생명이다.

막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레마)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 레마를 상기했던 것이다.

레마는 그가 기억하고 있고 생각해 낼 수 있는 말씀이었다.

베드로는 거짓말을 했지만, 홀연히 레마가 왔으며 주님의 그 한 구절의 말씀이 임했던 것이다.

레마는 주님이 일찍이 하셨던 말씀을 이제 다시 말씀하시는 것이다.

눅1;38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 가니라.

이곳의 말씀도 레마이다.

여기는 하나님이 사7;14 예언하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라는 말씀이 아니라 천사가 특별히 마리아에게,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라. 고 한 말씀이다.

마리아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비로소 능력이 있었고 성취될 수 있었다.

눅2;29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이곳의 말씀도 레마 이다.

원래 주 예수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시므온에게 있었는데, 그 내용은 네가 주가 세운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날 시므온은 주 예수님을 보았고,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시므온에게는 주님의 레마가 있었으며, 이것은 성경의 몇 장 몇 절에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날 주님이 시므온에게 말씀하신 어떤 말씀인 것이다.

단지 성경 몇 장 몇 절의 말씀으로는 부족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만이 비로소 유용하다.

레마는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만진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한 것이고,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고 정결케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레마를 추구해야 하며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은 바로 이것을 의지하는 생활이다. 대체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셨고, 대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날 기독교는 여전히 개인적인 계시의 기독교라는 것이다.

만일 주님이 사람 안에서 말씀하시지 않으면 기독교가 아니고 신약도 아니다.

눅3;2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여기에서의 말씀도 역시 레마 이다.

눅5;5 시므온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여기의 말씀도 주님이 즉석에서 말씀하신 말씀이며 주님이 그 개인에게 하신 말씀이므로 레마이다.

주님이 성경 몇 장 몇 절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물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만일 오늘날 어떤 사람이 마14;29 말씀을 인하여 바다에 가서 바다 위를 걷는다면 반드시 물에 빠질 것이다.

이는 그것이 주님이 오늘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당시에 하셨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과거에 하신 말씀과 지금 하 신 말씀은 동일하게 능력을 갖고 있고 결코 변함이 없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에게 다시 한 번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가이다.

눅24;8 저희가 예수의 말씀(레마)을 기억하고, 무엇이 레마인가?

레마는 말씀하신 것을 다시 말씀하시는 것이다.

레마는 간단히 말해서 주님이 거듭하시는 말씀이요 살아 있는 말씀이다.

행11;16 내가 주의 말씀(레마)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는데 주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했고, 주님의 말씀이 베드로의 몸에 임했다.

베드로가 일부러 가서 생각하고 기억한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 다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우리가 줄곧 소중하게 여기는 한 가지 일은, 주님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주님은 성경에서 말씀하실 뿐 아니라, 바울에게 말씀하시고 요한에게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오늘 또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하심은 멈춘 적이 없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강단에 설 때마다 항상 레마가 있기를 소망한다.

만일 주님이 오늘 말씀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한편의 메시지를 전했는데도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신 때가 많다.

메시지가 틀린 것이 아니라, 그것은 주님의 일상적인 말씀이기는 하지만 주님의 레마는 아닌 것이다.

교회 안에 한 가지 어려운 점은 바로 살아 있는 말씀이 없이 죽어 있는 말씀만이 있고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교통이 부족한 채 사람의 전파만이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좋은 교리 아래 죽어 있으니 얼마나 애석한가.

헬라어 신약 성경에서 주로 ‘말(또는 말씀)’을 뜻하는 낱말은 ‘로고스’와 ‘레마’의 두 가지인데, 전자는 신약 성경에 총 330회, 후자는 총 70회가 나타난다. 영어의 경우 ‘language’와 ‘speech’는 각각 ‘추상적, 심리적 언어’와 ‘구체적, 물리적 언어’로 분명히 구분되지만, 헬라어의 경우 ‘logos’와 ‘rhema’는 각각 ‘논리적, 객관적, 존재론적 언어’와 ‘현상(사건)적, 주관적, 체험론적 언어’로 대강 구분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신약 성경에 쓰인 330회의 ‘로고스’ 가운데서 한글 개역본(1938)이나 개역 개정판(1998)에서 ‘말(또는 말씀)’로 번역되지 않은 경우는 마 5:32, 벧전 3:15(‘연고’ 또는 ‘이유’); 마 12:36(‘심문’); 마 18:23, 25:19, 히 13:17(‘회계’ 또는 ‘결산, 청산’); 막 1:45, 행 10:29, 11:9, 14:25, 빌 4:15(‘일’); 막 2:2, 행 8:21, 고전 1:18(‘道’); 눅 1:4, 3:4(‘-바’); 눅 5:15, 7:17, 행 11:22(‘소문’); 눅 16:2(‘셈’); 눅 24:17(‘이야기’); 행 1:1(‘글’); 행 18:15(‘언어’); 행 19:38(‘송사’ 또는 ‘보고’); 고전 1:5(‘구변’ 또는 ‘언변’); 고전 14:19(‘한마디’); 골 2:23(‘모양’), 히 4:13(‘상관’ 또는 ‘결산’); 벧전 4:5(‘直告’); 벧후 1:19(‘예언’); 행 20:24(‘귀한 것’) 등 약 30군데이며, 또 70회의 ‘레마’ 가운데서 한글 개역본(1938)이나 개역 개정판(1998)에서 ‘말(또는 말씀)’로 번역되지 않은 것은 마 27:14(‘한마디’), 눅 2:15, 행 5:32, 10:37(‘일’) 등의 4군데뿐이다.

그리고 ‘말(또는 말씀)’이 ‘로고스’ 아닌 ‘레마’로 쓰인 약 60개의 문맥은 다음과 같다.

마 4:4, 12:36, 18:16, 막 9:32, 14:72, 눅 1:37, 38, 65, 2:19, 29, 50, 51, 3:2, 5:5, 7:1, 9:45, 18:34, 20:26, 24:8, 11, 요 3:34, 5:47, 6:63, 68, 8:20, 47, 10:21, 12:47, 48, 14:10, 15:7, 17:8(이상, 사복음서에 32군데), 행 2:14, 5:20, 6:11, 13, 10:22, 44, 11:14, 16, 13:42, 16:38, 26:25, 28:25(이상, 사도행전에 12군데), 롬 10:8, 17, 18, 고후 12:4, 13:1, 엡 5:26, 6:17, 히 1:3, 6:5, 11:3, 12:19, 벧전 1:25, 벧후 3:2, 유 1:17, 계 17:17(이상, 서신서와 계시록에 15군데)

물론, 거의 다 ‘말(또는 말씀)’로 번역된 이 두 개의 명사 ‘로고스’와 ‘레마’는 각각 그 동사 ‘레고’와 ‘레오’로 파생되며, 전자는 신약 성경에 1343회, 후자는 신약 성경에 24회 사용되고, 단순히 ‘말하다’의 뜻 외에 ‘이르다, 이야기하다, 칭하다, 표현하다, 명령하다, 지시하다, 규정하다’ 등의 뜻도 가진다.

한편, 마태복음(26:73)에서 ‘말소리(또는 억양)’를 뜻하던 헬라어 ‘랄리아’는 요한복음(4:42, 8:43)에서는 ‘이야기’의 뜻으로 쓰였고, 그 동사 ‘랄레오’는 신약 성경에 295회 쓰인 것이 거의 다 ‘많은 소리를 발하다’ 또는 ‘길게 이야기하다’의 뜻이다.

어쨌든, 성경에는 ‘사람의 말’이 거의 없고, ‘하나님의 말씀’(히, ‘다바르’, 394회)과 ‘그리스도의 말씀’(‘로고스’와 ‘레마’, 400회)이 대부분이며

[출처] 로고스와 레마|작성자 한나그 내용은 ‘생명의 말씀’(빌 2:16), ‘진리의 말씀’(엡 1:13), ‘구원의 말씀’(행 13:26), ‘화목의 말씀’(고후 5:19), ‘십자가의 말씀’(고전 1:18) 등이라 할 수 있다.

[출처] 로고스와 레마|작성자 한나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

헬라어 로고스(λόγος)와 레마(ρήμα)는 성경에서 ‘말씀’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 두 단어의 의미상 차이는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로고스는 “성경말씀”이며, 레마는 “깨달아진 성경말씀”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이것은 출처불명의 견해이다. 헬라어원어사전을 보면, 로고스는 “생각의 표현”을 의미하며, 레마는 “말씀되어진 것, 또는 기록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경 상에서의 로고스와 레마의 의미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먼저 로고스에 대해 살펴보자. 성경 상에 ‘말씀’이라고 번역되는 단어의 약 90% 이상은 로고스이다. 로고스라는 말의 의미는 헬라어 원어의 의미 그대로 “생각의 표현”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면 “하나님의 생각의 표현”이고, 예수님의 말씀(로고스)이면 “예수님의 생각의 표현”이며, 성령님의 말씀(로고스)이면 “성령님의 생각의 표현”이다. 즉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령님이 당신의 생각을 말씀으로 표현한 것이 로고스이다.

레마 역시 헬라어의 원어적 의미와 연관하여 생각하면 좋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로고스)이 성경으로 기록되어 전해지는 말씀이 레마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로고스)이며, 그 말씀(로고스)이 성경에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해지는 말씀은 레마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40일 금식 후에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마4:4)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로고스)이지만,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레마)를 사용한 것이며, 또한 본문에 나오는 “모든 말씀(레마)”은 예수님께서 레마로 주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상에서 로고스와 레마는 그 의미가 쉽게 구별되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성경해석 시에는 항상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출처 :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어린양의 아내)

글쓴이 : 선한 사마리아 원글보기 : 선한 사마리아

메모 :

“로고스”인 말씀과 “레마”인 말씀의 차이

“로고스”인 말씀과 “레마”인 말씀의 차이

신약에는 두 개의 「말씀」이라는 단어가 있다. 하나는 「로고스(logos)」인데 이것은 일반적인 말씀이다. 또 하나는 「레마(rhema)」인데, 성경에는 「말씀」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두 단어는 약간 다르다. 「로고스」는 영원토록 정해진 것이며, 객관적인 것이며, 즉 일반적으로 말하는 말씀이며, 기독교에서 말하는 말씀이다. 「레마」는 「로고스」보다 더 주관적이다. 우리는 신약 몇 군데에서 「레마」를 사용하여 설명한 곳을 인용할 수 있다.

마태복음 4장 4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이곳의 말씀은 「로고스」가 아닌 「레마」의 말씀이다. 우리가 보통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에는 「로고스」이지 「레마」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이것은 기록된 하나님 의 말씀이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로고스」―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우리에게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어느 어머니에게 「당신의 아들이 길에서 차에 치어 상처를 입고 거의 죽어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즉시 요한복음을 펴서 읽었다. 우연히 요한복음 11장 4절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매우 즐거워하며 평안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가서 보았을 때에 아들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로고스」이지 「레마」가 아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그녀에게 말씀하신 말씀은 아닌 것이다. 「로고스」와 「레마」는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전자는 성경 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후자는 즉석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이다.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다. 이곳의 말씀은 「레마」이지 「로고스」가 아니다. 이 말씀의 뜻은, 반드시 그리스도가 사람 안에서 말씀하셔야 비로소 사람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우리 많은 사람들이 외울 줄 알고 심지어 십 년 이십 년 동안을 외워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것은 「로고스」이다. 어느 날, 당신은 성경을 읽다가 예전과 다름을 느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세상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심을 느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들에게 독생자를 주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셨음을 느낀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그분을 믿는 「나」임을 느낀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멸망치 않고 「내」가 영생을 얻음을 느낀다. 이것이 「레마」이며 하나님의 말씀하심인 것이다. 이때에 당신은 믿음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구하여야 한다. 『하나님, 만일 당신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면 「레마」의 말씀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것은 「로고스」가 결코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로고스」는 일정한 효용이 있다. 「로고스」가 없으면 「레마」가 없다. 하나님의 모든 「레마」는 「로고스」에 근거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레마)이 되어야 비로소 당신이 믿을 수 있고 상황도 변하게 된다.

요한복음 6장 63절 :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유대에게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없었는가? 있었다. 구약의 계명을 유대인은 매우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소용이 없었다. 오직 주님이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만이 비로소 영이요 생명인 것이다. 「레마」만이 비로소 영이 요 생명이다.

마가복음 14장 72절 : 『닭이 곧 두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레마」)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 곧 「레마」를 상기했던 것이다. 「레마」는 그가 기억하고 있고 생각해 낼 수 있는 말씀이었다. 베드로는 거짓말을 했지만, 홀연히 「레마」 가 왔으며 주님의 그 한 구절의 말씀이 임했던 것이다. 「레마」는 주님이 일찍이 하셨던 말씀을 이제 다시 말씀하시는 것이다.

누가복음 1장 38절 :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이곳의 말씀도 「레마」이다. 여기는 하나님이 이사야 7장 14절에서 예언하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는 말씀이 아니라 천사가 특별히 마리아에게,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라고 한 말씀이다. 마리아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비로소 능력이 있었고 성취될 수 있었다.

누가복음 2장 29절 :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곳의 말씀도 「레마」이다. 원래 주 예수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시므온에게 있었는데, 그 내용은 「네가 주가 세운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날 시므온은 주 예수님을 보았고,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시므온에게는 주님의 「레마」가 있었으며, 이것은 성경의 몇 장 몇 절에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날 주님이 시므온에게 말씀하신 어떤 말씀인 것이다. 단지 성경 몇 장 몇 절의 말씀으로는 부족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만이 비로소 유용하다. 「레마」는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만진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한 것이고,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고 정결케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레마를 추구해야 하며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은 바로 이것을 의지하는 생활이다. 대체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셨고, 대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우 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날 기독교는 여전히 개인적인 계시의 기독교라는 것이다. 만일 주님이 사람 안에서 말씀하시지 않으면 기독교가 아니고 신약도 아니다.

누가복음 3장 2절 :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여기에서의 말씀도 역시 「레마」이다.

누가복음 5장5절 : 「시므온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여기의 「말씀」도 주님이 즉석에서 말씀하신 말씀이며 주님이 그 개인에게 하신 말씀이므로 「레마」이다. 주님이 성경 몇 장 몇 절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물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만일 오늘날 어떤 사람이 마태복음 14장 29절 말씀을 인하여 바다에 가서 바다 위를 걷는다면 반드시 물에 빠질 것이다. 이는 그것이 주님이 오늘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당시에 하셨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과거에 하신 말씀과 지금 하 신 말씀은 동일하게 능력을 갖고 있고 결코 변함이 없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에게 다시 한 번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가이다.

누가복음 24장 8절 : 『저희가 예수의 말씀(레마)을 기억하고』. 무엇이 「레마」인가? 「레마」는 말씀하신 것을 다시 말씀하시는 것이다. 「레마」는 간단히 말해서 주님이 거듭하시는 말씀이요 살아 있는 말씀이다.

사도행전 11장 16절 : 『내가 주의 말씀(레마)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는데 주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했고, 주님의 말씀이 베드로의 몸에 임했다. 베드로가 일부러 가서 생각하고 기억한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 다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우리가 줄곧 소중하게 여기는 한 가지 일은, 주님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주님은 성경에서 말씀하실 뿐 아니라, 바울에게 말씀하시고 요한에게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오늘 또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하심은 멈춘 적이 없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강단에 설 때마다 항상 「레마」가 있기를 소망한다. 만일 주님이 오늘 말씀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한편의 메시지를 전했는데도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신 때가 많다. 메시지가 틀린 것이 아니라, 그것은 주님의 일상적인 말씀이기는 하지만 주님의「레마」는 아닌 것이다. 교회 안에 한 가지 어려운 점은 바로 살아 있는 말씀이 없이 죽어 있는 말씀만이 있고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교통이 부족한채 사람의 전파만이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좋은 교리」 아래 죽어 있으니 얼마나 애석한가. 하나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에게 「레마」―오늘날 주님이 친히 하시는 말씀―를 주소서. 「레마」가 있어야만 우리는 성장할 수 있고 살아 있는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을 공급할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레마」이다.(워치만 니 전집 제2집 제14권, 제3장)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는 무엇이며 성경말씀과 어떤 연관이 있나요?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는 무엇이며 성경말씀과 어떤 연관이 있나요?

오늘은 다소간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혹 이 글이 어렵다고 느끼면 마지막 결론 부분만 읽어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 신학적인 의미가 신정통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신대원에 재학중일때도 이런 일이 발생하였지만 최근에 교계도 로고스와 레마를 신학적으로 뚜렷하게 구분 지으며 해석하고 있어서 당황하기도 하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정통신학은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을 할 경우도 있지만 별로 차이를 두지 않고 성경을 읽거나 묵상합니다. 로고스와 레마라는 단어를 신앙생활을 조금 깊게(?)한 신자들은 들어보았을 겁니다.

“로고스”는 헬라어로 이성. 숙고. 말씀등으로 표현 할 수 있으며, 요한복음 1장에서 요한이 로고스를 사용하여 예수님을 표현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로고스”를 사용할 당시 1세기 말기에는 헬라 철학자나 사상자들에게 매우 흥미진진하고 관심있는 단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로고스”가 세상을 창조하고 섭리하고 “로고스”를 통해서 진리를 알고 구원받는 사상이 지배하던 헬라문화와 영지주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레마”는 일반적인 말하다 라는 “레오”에서 나온 명사로 말씀을 의미하고 히브리어로는 “다바르”라는 단어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로고스”란 “이성”으로서 온 우주만물이 창조, 내재, 활동한다는 의미로서 헬라권에서 사용되었으며 이를 요한이 차용하여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특히 이방인인 헬라인과 로마인들에게 쉽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려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봅니다. 즉 “로고스”라는 비인격적인 존재를 예수라고 인정하고 칭한다는 것은 매우 놀랄만한 일이요. 아마 지금으로 말하자면 이단시비로 당장 몰릴 수 있는 단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인류 최초의 토착화요 상황화의 아버지라 부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는 순교자 유스니우스(저스틴 마터)가 최초로 “로고스”를 채용하여 철학을 기독교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논쟁의 쟁점은 이것이 아니라 레마(말씀)에 있습니다. 레마는 말씀으로 번역이 되어 많은 목회자들이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즉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며 레마는 “의미있는 깨달아진 나의 말씀”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레마로 받아 들이지 못하면 의미가 퇴색되거나 참그리스도인으로 보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것에 그 심각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레마의 의미를 정통적인 교회의 목회자들이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인데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여 사용한 사람들은 주로 오순절 계통의 교회, 로마 가톨릭, 지방교회와 신정통주자들이 사용하여 온 것입니다. 개신교중에서도 레마선교회에서 사용하여서 물의를 빚고 이단성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하면 아직도 깨어 나지 못하고 중생하지 못한 신자로 인식하는 것을 잘못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순절 계통의 교회가 방언을 못하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고 성령의 체험을 하지 못한 어리고 미숙한 신자로 간주하는 것과 동일한 이치입니다. 신정통주의자인 칼 바르트가 표현한 하나님의 말씀은 “is” (이다)가 아니라 “become”(되었다)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신정통주의 교회에서는 큐티(QT)를 유달리 강조합니다. QT가 나쁘거나 잘못 되었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배시에도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을 만나라는 표현을 기도중에도 설교시간에도 사용하는 것이 아닌 가 봅니다.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동안 이런 레마의 문제점을 무척 주의 깊게 의식하고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흥미있는 것은 이러한 발상이 이제는 정통적인 교회도 그 본래 의미를 잊은 채 레마를 느끼지 못하면 문제가 있는 것으로 오해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장의 로고스는 별개로 인정하고, 다른 서신서나 복음서에서 사용하는 로고스와 레마는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또한 로고스는 변하지 않지만 레마는 변할 수 있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으로 그 느낌과 생각이 치우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나치면 신비주의나 하나님과 인간이 합일할 수 있다는 잘못된 연합사상으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직통계시까지 주장하는 위험성을 내포할 수 있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고스와 레마의 문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자신의 친아버지로 자신이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관계없이, 법적으로 부자간의 관계는 변하지 않는 이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본인이 성경말씀을 깨달아 알던 모르던 그것은 본인의 문제입니다. 성경말씀이 이해가지 않는다고 하여 성경말씀이 아니라고하면 곤란합니다.

​내가 알던 모르던, 말씀이 이해가 되던지 안 되던지 상관없이, 성경 말씀은 성경말씀 자체로 존재합니다. 로고스나 레마같은 문제에 휘둘리거나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이해가 가지 않는 성경본문은 언제인가 신앙이 성숙하거나 좋은 신학서적을 읽으면 해결이 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하니님의 말씀에는 경중이 없습니다.

2011.12.22.

로고스(Logos)와 레마(Rhema)

로고스 Logos λόγος 와 레마 Rhema ῥῆμα

* 이 문제에 대해서는 두분의 목사님께서 물어봐주신 것인데, 그동안 제 게으름과 또 이 부분이 제 전공 분야와는 좀 거리가 먼 부분이 있어서 모른 척(?) 하고 있다가 다시한번 반복되는 요청에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로고스라는 말은 객관적이고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레마는 한 개인에게 전해져서 그에게 각인된 주관적인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 두 구분처럼 두개의 말을 잘 구별해 낸 것도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이 두개의 단어에 대한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간단하게 정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목회자들이 상식적으로 알아두면 어떨까하는 로고스라는 말이 기독교 세계에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단어로 받아들여지기 이전의 원래 의미에서부터 오늘날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의미에 이르기까지 어떤 식으로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변형되었는가를 개략적으로 한번 보겠습니다. 매우 짧으며 나름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로고스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원래 말하여 진 것 what is spoken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대해서 전해지는 전설, 속담, 교훈, 다른 사람에 대한 평판, 연설, 이야기 등을 가리키는 말이 로고스입니다. 레마라는 고대 그리스어는 무언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것 to state specifically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만 본다면,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는 그저 명확하게 이야기를 하였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로고스는 제3자의 입장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지만 (개인의 의견이나 견해가 들어가 있지 않은 객관적인 전달자), 레마는 말하고자 하는 사람의 의도나 의지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Happening/Fact(로고스)과 Interpretation(레마)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로고스라는 말은 법률이나 객관적인 지식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점차로 로고스는 레마에 비해서 더 이성적인 단어로 사용되게 되기 시작합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영향 (스토아 학파) 아래에 있었던 헬레니즘 문화권에서는 로고스라는 말이 우주적인 이성의 법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이 로고스는 학자들이나 법률가들, 그리고 신의 대리자들이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면서 소위 말하는 Hermes-Logos-Theory가 만들어집니다.

헤르메스 Hermes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리스의 신으로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오가며 신들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전달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헬레니즘 신비주의자들은 로고스를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지식의 전달자로 받아들였고, 이와 같은 생각이 유대교에 심기워졌습니다.

로고스라는 말을 신학적인 의미로 처음 사용한 유대인은 필로 Philo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필로는 로고스를 유대교의 핵심단어로 차용하여서 사용하였는데, 스토아 학파들이 이해하던 우주적인 이성의 법이라는 말을 차용하여서 하나님의 판단 또는 하나님의 합리적 이성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말의 밑바탕에는 로고스라는 말이 하나님의 지혜의 완벽한 전형이라는 생각이 깔려있었습니다.

이런 기나긴 사유의 터널을 지나서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시기에 이미 헬라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던 시리아 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로고스라는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시키는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로고스와 레마,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

‘회개 후회 돌아옴의 차이‘에 이어 오늘은 로고스(λόγος)와 레마(ῥῆμα)에 대해 쓰려고 합니다. 신약성경은 두 단어 모두 큰 구별 없이, 말 혹은 말씀으로 번역합니다. 그렇기에 원어로 보지 않는 한 어떤 구절이 로고스이고 어떤 구절이 레마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신약에 331번 등장하는 로고스가 말, 말씀, 이야기, 진술 등을 뜻하는 광범위하고도 포괄적인 단어라면 70번 등장하는 레마는 ‘발언’을 뜻하는 구어(口語)입니다. 문제는 일부가 ‘로고스’는 성경에 적힌 일반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레마’는 내게 주는 특별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며 계시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레마를 통해 성령의 권능이 강력하게 역사하며 주님을 영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근거 없는 주장으로 교회를 미혹하며 혼탁 시킵니다. 몇 년 전 이런 주장을 하며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던 사람이 가는 곳마다 파탄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레마와 로고스가 들어간 모든 구절을 뽑아 비교 분석하였고 레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성경이 뒷받침되지 않는 주장임을 발견했었습니다.

물론 70번 나오는 레마 구절들을 읽다 보면 레마엔 로고스와는 다른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어떤 힘과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레마가 나오는 몇 유명 구절 중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레마) 살 것이라(마 4:4)’, ‘주의 말씀(레마)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눅 5:5)’, ‘내 말이(레마)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레마)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6)’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로고스가 나오는 331구절을 읽어보지 않기에 오는 착각일 뿐입니다. 로고스 구절들을 모두 읽어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로고스든 레마든 살아 움직이는 능력의 말씀임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오해는 그보다도 더 근본적인 어원을 무시한 탓일 것입니다. 여러 형태의 말(로고스) 중에서도 특별히 레마는 구어(口語)를 뜻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의 공식적인 ‘발언’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정도 차이를 갖고 로고스가 성경에 적힌 문자라면 레마는 살아서 움직이는 ‘로고스’, ‘성령으로 변화 받은 능력 있는 영의 언어’라고 까지 비약하는 건 미혹하는 영의 역사일 뿐입니다.

단 레마에 대해 연구하다 얻은 유익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마태복음 12장 36절 부분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레마)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로고스) 받으리니(마 12:36)”입니다. 이 구절을 그냥 ‘말’의 의미로 읽으면 보통 부담되는 구절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실없고 무익한 말을 많이 하나요. 영어로 직역하면 ‘하릴없는(idle)’인데, 이처럼 마음에도 없고 일없이 괜히 한 말까지도 심판 날에 심문받아야 한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레마’가 ‘발언’을 뜻한다는 걸 알자 이해가 됐습니다. 이 구절은 공식적으로 쓸데없는 발언 혹은 증언을 하는 경우이지 일상적인 경우를 말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시 주님께서 말씀하신 다음 구절에서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레마) 확증하게 하라(마 18:15-16)”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주님이 말씀하신 마태복음 12장 36절엔 레마와 로고스가 같이 쓰였다는 것입니다. 두 원어를 넣어서 36절과 37절을 직역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하릴없는 레마(말)를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해 로고스(심문으로 번역됨)를 줘야 하리라. 네 로고스(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로고스(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입니다. 즉, 사람들 앞에서(주로 공식적인) 하릴없는 발언이나 증언을 한 사람은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그것에 대해 말해야(변론 혹은 보고) 할 것입니다. 그 말에 따라 의롭다 함을 받을 수도 있고 정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레마만 특별한 계시의 말씀인 것처럼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레마)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2)”라는 침례 요한에게 말씀이 임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에 대한 다른 두 구절엔 레마가 아닌 로고스가 쓰입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로고스)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 10:35).” 한국어 번역이 이렇게 되어서 어감이 약간 다르게 느껴집니다. 영어로는 “If he called them gods, unto whom the word of God came, and the scripture cannot be broken;(요 10:35).” 누가복음 3장 2절은 “Annas and Caiaphas being the high priests, the word of God came unto John the son of Zacharias in the wilderness.” 입니다. 두 구절의 밑줄 친 표현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인데 예수님이 시편을 인용하신 구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말씀’을 오히려 로고스로 썼고, 침례 요한 부분은 레마로 쓰였습니다. 또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전 14:36)”며 따진 구절도 ‘로고스’가 쓰입니다. 영어로는 “What? came the word of God out from you? or came it unto you only?” 직역하면, “무엇이라? 너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나왔더냐? 아니면 너에게만 그것이 임했더냐?”입니다.

레마(ῥῆμα)와 로고스(λόγος)의 차이가 어떤 신비나 능력에 있지 않고 그저 상황에 맞게 쓰인 것뿐이란 걸 증명하는 좋은 방법은 아무래도 두 단어가 한 구절에 같은 용도로 쓰인 경우를 보는 걸 겁니다. 다음은 그런 경우의 몇 구절입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레마)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로고스)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 12:48).” 즉, 예수님의 그 당시 발언 혹은 증언을(레마) 받지 않았던 사람들은 곧 예수님이 한 그 말이(로고스)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을(레마) 할 때에 성령이 말씀(로고스)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42-44).” 이 구절에서 보면 오히려 레마는 베드로의 증언(발언)이었고 로고스는 그 내용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레마)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로고스)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16-19).” 로고스를 폄하하고 레마를 신비롭고 영화롭게 하려는 사람들은 아마도 엡 6:16-18절까지만 인용할 것 같습니다. 이 두 구절만 보면 마치 레마가 특별한 것 같지만 이어지는 19절까지 보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는 말씀으로는 ‘로고스’가 쓰였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더하고 빼고 뜻을 왜곡하는 일은 단 에덴동산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마지막 예로,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레마)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로고스)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히 12:18-19).” 이 구절에서도 레마와 로고스는 같은 의미지만 상황에 맞춰 쓰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말씀은(로고스)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란 구절은 레마가 아닌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그냥 흰 종이에 검은 글씨이고(그들의 말대로), 레마는 살아있는 로고스로서 능력 있는 말씀이란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지 잘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또한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로고스)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4).”에서도 청년들 안에 거한 로고스(말씀)로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하지 레마로 이겼다고 하지 않습니다. ‘로고스’는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요 1:1, 14)’을 칭하는 표현이기도 한데 이렇게 로고스를 무시하는 생각과 궤변이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이지 깊이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렇다고 ‘레마가 로고스보다 한 수 아래다’란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로고스는 살아 있는 말씀, 능력의 말씀이 아니라는 주장에 반론을 제시하다 보니 로고스에 치중해서 글을 쓴 것뿐입니다. 로고스든 레마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면 능력 있고 살아서 역사하는 말씀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저 허공에 흩어지는 말일 뿐입니다. 어떤 레마를 하든지 심판 날에 로고스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늘 깨어 기억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대하길 간구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서승원 박사 특별 기고> 로고스와 레마(1)

I. 들어가는 말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흔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른다. 히브리어 성경과 희랍어 성경에는 “말” 또는 “말씀”을 뜻하는 단어가 여러 가지 있지만 히브리어에 있어서는 그 대표적인 단어가 “다바르”이고 희랍어에 있어서는 “로고스”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목사님들 가운데는 희랍어성경에서 “로고스”와 “레마”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이분들에 의하면 “로고스”는 보통 말씀이고 “레마”는 “능력 있는 말씀”을 뜻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일반대학에서 희랍철학과 희랍어를 가르쳤고, 미국에 온 후로는 신학교에서 신학과 함께 히브리어와 희랍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는 필자는 가끔 학생들로부터 이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과연 어떤 목사님들의 주장대로 성경에서 “로고스”와 “레마”는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는가? 이러한 주장이 정당한지 정당하지 않은지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성경에서 이 두 말이 과연 그런 의미로 쓰였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우선 문제가 된 “레마”가 신약성경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본 후에 “로고스”에 대해서도 살펴보기로 한다. 별표가 붙은 구절은 두 번 나오는 경우이다.

II. 레마

1. 레마가 나오는 성결구절

마4:4; 12:36; 18:16; 26:75; 27:14; 막9:32; 14:72; 눅1:37,38,65; 2:15,17,19,29,50,51; 3:2; 5:5; 7:1; 9:45*; 18:34; 20:26; 22:61; 24:8,11; 요3:34; 5:47; 6:63,68; 8:20,47; 10:21; 12:47,48; 14:10; 15:7; 17:8; 행2:14; 5:20,32; 6:11,13; 10:22,37,44; 11:14,16; 13:42; 16:38; 28:25*; 롬10:8*,9,17,18; 고후12:4; 13:1; 엡5:26; 6:17; 히1:3; 6:5; 11:3; 12:19; 벧전1:25; 벧후6:2; 유17.

2. 레마의 의미의 구분

위의 구절들에서 “레마”가 지칭하는 바에 따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말씀의 뜻으로 쓰인 곳

마4:4; 눅1:37; 2:19; 3:2; 요3:34; 8:47; 17:8; 엡6:17; 히1:3; 6:5; 11:3; 12:19; 벧전1:25;

2). 예수님의 말씀의 뜻으로 쓰인 곳

마26:75; 27:14; 막9:32; 14:72; 눅2:50,51; 5:5; 7:1; 9:45; 18:34; 20:26; 22:61; 24:8; 요5:47; 6:63,68; 8:20; 10:21; 12:47,48; 14:10; 15:7; 행11:16; 10:17; 고후12:4 엡5:26.

3). 복음의 뜻으로 쓰인 곳

행5:20,32; 10:22,37,44; 11:14; 13:42; 롬10:8,9,18.

4). 사도와 선지자의 말의 뜻으로 쓰인 곳

그 외에 행26:25; 28:25에서는 “레마”가 사도바울의 말을 지칭하는데, 벧후3:2에서는 “레마”가 선지자들의 말을 지칭하는데, 그리고 유17에서는 사도들의 말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5). 인간의 말의 뜻으로 사용된 곳

마12:36; 18:16; 눅24:11; 행6:11,13; 16:38; 고후13:1.

이상의 다섯 가지 중에서 처음 네 경우에 사용된 “레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으므로 “레마”가 능력 있는 말씀의 뜻을 지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레마”가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이라는 의미로 쓰인 곳은 히1:3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레마” 다음에 “능력”이라는 말이 뒤따라 나온다.

하지만 문제는 마지막 5). 인간의 말의 뜻으로 사용된 곳의 경우처럼 “레마”가 사람의 말을 지칭하는데도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레마”가 좋지 않은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레마”가 마12:36에서는 “무익한 말”의 뜻으로 사용되고, 눅24:11에서는 “헛소리”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행6:11에서는 “신을 모독하는 말” 즉 “불경스런 말”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레마”가 “능력 있는 말씀”을 뜻한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로고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로고스”도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사람의 말을 지칭하는데도 사용 된다. 그리고 사람의 말을 지칭하는 경우 좋은 의미로도 쓰이지만 나쁜 의미로도 쓰인다. 예를 들면 딤후2:17에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짐과 같은데 . . .”에서 “말”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로고스”이며, 요한3서 8에서 “악한 말”에서도 “로고스”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레마”와 마찬가지로 “로고스”가 나쁜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III. 로고스

1. 로고스가 나오는 성경구절

마5:32,37; 7:24,26,28; 8:8,16; 10:14; 12:32,36,37; 13:19,20,21,22,23; 15:6,12,23; 18:23; 19:1,9,11,22; 21:24; 22:15,46; 24:35; 25:19; 26:1,44; 28:15; 막1:45; 2:2; 4:14,15,16,17, 18,19,20,33; 5:36; 7:13,29; 8:32,38; 9:10; 10:22,24; 11:29; 12:13; 13:31; 14:39; 16:20; 눅1:2,4,20,29; 3:4; 4:22,32,36; 5:1,15; 6:47; 7:7,17; 8:11,12,13,15,21; 9:26,28,44; 10:39; 11:28; 12:10; 16:2; 20:3,20; 21:33; 22:61; 23:9; 24:17,19,44; 요1:1,14; 2:22; 4:37,39,41,50; 5:24,38; 6:60; 7:36,40; 8:31,37; 8:43,51,52,55; 10:19,35; 12:38,48; 14:23,24; 15:3,20,*25; 17:6,14,17,20; 18:9,32; 19:8,13; 21:23; 행1:1; 2:22,40,41; 4:4,29,31; 5:5,24; 6:2,4,5,7; 7:22,29; 8:4,14,21,25; 10:29,36,44; 11:1,19,22; 12:24; 13:5,7,15,26,44,46,48,49; 14:3,12,25; 15:6,7,15,24,27,32,35,36; 16:6,32,36; 17:11,13; 18:5,11,14,15; 19:10,20,38,40; 20:2,7,24,32,35,38; 28:22; 롬3:4; 9:6,9,28; 13:9; 14:12; 15:18; 고전1:5,17,18; 2:1,4,13; 4:19,20; 12:8; 14:9,*19,36; 15:2,54; 고후1:18; 2:17; 4:2; 5:19; 6:7; 8:7; 10:10,11; 11:6; 갈5:14; 6:6; 엡1:13; 4:29; 5:6; 6:19; 빌1:14; 2:16; 4:15,17; 골1:5,25; 2:23; 3:16,17; 4:3,6; 살전1:5,6,8; 2:5,13; 4:15,18; 살후2:2,15,17; 3:1,14; 딤전1:15; 3:1; 4:5,6,9,12; 5:17; 6:3; 딤후1:13; 2:9,11,15,17; 4:2,15; 딛1:3,9; 2:5,8; 3:8; 히2:2; 4:2,12,13; 5:11,13; 6:1; 7:28; 12:19; 13:7,17,22; 약1:18,21,22,23; 3:2; 벧전1:23; 2:8; 3:1,15; 4:5; 벧후1:19; 2:3; 3:5,7; 요일1:1,10; 2:5,7,14; 3:18; 요삼10; 유15; 계1:2,3,9; 3:8,10; 6:9; 12:11; 17:17; 19:9,13; 20:4; 21:5; 22:6,7,9,10,18,19; 6:9;

2. 로고스의 의미의 구분

1). 하나님의 말씀의 뜻으로 쓰인 곳

마15:6; 막7:13; 눅5:1; 8:11,12,13,15,21; 11:28; 요5:38; 8:55; 10:35; 14:24; 15:3,20; 17:6,14,17,20; 행4:29,31; 6:2,4,7; 8:14; 10:36; 11:1; 12:24; 13:5,7; 13:44,46,48,49; 16:32; 17:13; 18:11; 롬9:6,9; 13:9; 고전14:36; 고후2:17; 4:2; 5:19; 6:7; 갈5:14; 빌1:14; 골1:25; 4:3; 살전2:13; 딤전4:5; 딤후2:9; 딛1:3; 2:5; 히4:12,13; 7:28; 12:19; 13:7; 약1:18; 벧전1:23; 2:8; 벧후3:5,7; 요일2:14; 계1:2,9; 17:17; 19:9,13; 20:4.

2).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뜻으로 쓰인 곳

마7:24,26,28; 8;8,16; 15:12,23; 19:1,11,22; 21:24; 24:35; 26:1,44; 막1:45; 2:2; 8:32,38; 9:10; 10:22,24; 11:29; 13:31; 14:39; 눅4:22,32,36; 5:15; 6:47; 7:7; 9:26,28,44; 10:39; 20:3,20; 21:33; 22:61; 24:19,44; 요2:22; 4:37; 요4:41,50; 5:24; 6:60; 7:36,40; 8:31,37; 8:43,51,52; 10:19; 12:48; 14:23,24; 18:9,32; 21:23; 행8:25; 14:3; 15:36; 19:10,20; 20:35; 롬15:18; 골3:16; 살전1:8; 4:15; 살후3:1; 딤전6:3; 히6:1; 요일1:10; 2:5; 계3:8,10; 21:5; 22:6,7,9,10,18,19.

3). 예수님을 지칭하는 경우

요1:1, 14; 요일1:1; 계19:13.

4). 성령님의 말씀의 뜻으로 쓰인 경우

고전2:13.

5). 복음의 뜻으로 쓰인 곳

13:19,20,21,22,23; 4:14,*15,16,17,18,19,20,33; 막16:20; 눅1:2,4; 행1:1; 8;4,21; 10:44; 11:19; 13:26; 14:25; 15:7; 16:6; 17:11; 18:5; 20:32; 고전1:18; 12:*8; 15:2; 갈6:6; 엡1:13; 6:19; 빌2:16; 4:15; 골1:5; 4:3; 살전1:6; 4:18; 딤전1:15; 3:1; 4:6,9; 딤후1:13; 2:11,15; 4:2; 딛1:9; 3:8; 히4:2; 5:11,13; 13:17,22; 약1:21,22,23; 벧전3:1,15; 요일2:7.

6). 천사의 말의 뜻으로 쓰인 곳

눅1:20,29; 히2:2.

7). 선지자의 말의 뜻으로 쓰인 곳

눅3:4; 요12:38; 15:25; 행15:15; 롬9:28; 고전15:54; 벧후1:19; 계1:3.

8). 예수님의 제자들의 말의 뜻으로 쓰인 곳

요17:20; 행2:22,40,41; 4:4; 5:5,24; 6:5; 13:15; 14:12; 20:2,7; 22:22; 고전2:4; 14:19; 고후1:18; 살전1:5; 살후2:15; 3:14; 계12:11.

9). 인간의 말의 뜻으로 쓰인 곳

마5:37; 10:14; 12:32,36,*37; 22:15,46; 5:36; 막7:29; 12:13; 눅12:10; 23:9; 24:17; 요4:39; 19:8,13; 행7:22,29; 15:24,27,32; 16:36; 18:14,15; 20:38; 롬3:4; 14:12; 고전1:5,17; 2:1,413; 4:19,20; *14:19; 고후8:7; 10:10,11; 11:6; 엡4:29; 5:6; 골2:23; 3:17; 4:6; 살전1:5; 2:5,13; 살후2:17; 딤전4:12; 5:17; 딤후2:17; 4:15; 딛2:8; 약3:2; 벧전3:1; 4:5; 벧후2:3; 요일3:18; 요삼10; 유15.

10). 기타의 의미로 쓰인 곳

마5:32; 18:23; 25:19; 28:15; 눅7:17; 16:2; 행1:1; 10:29; 11:22; 15:6; 19:38,40; 20:24; 롬14:12; 고전14:9; 빌4:15,17; 골2:23; 히4:13; 13:17.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레마”와 마찬가지로 “로고스”가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복음을 의미하는 말씀, 사도와 선지자의 말씀 그리고 인간의 말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로고스”가 “레마”보다도 더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의 10). 기타의 의미로 쓰인 곳에 열거된 성경구절들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마5:32와 행10:29에서는 로고스가 “이유”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고, 마18:23과 25:19에서는 “로고스” 가 “결말짓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쉰아이로” 와 함께 사용되어 “셈하다” 또는 “청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의미이지만 눅16:2와 히13:17에서는 “로고스”가 동사 쉰아이로 대신에 “주다” “지불하다” “상환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아포디도미” 와 결합하고 있다. 그리고 마28:15와 눅7:17와 행11:22에서는 “소문”이라는 뜻으로, 행15:6에서는 “일” 또는 “사건”이라는 뜻으로, 행19:38에서는 “소송”의 뜻으로, 행19:40에서는 “해명”의 뜻으로, 행20:24에서는 “가치”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전14:19에서는 “로고스”란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처음 것은 사람의 “말”을 의미하고 두 번째 것은 방언으로 하는 “말”을 의미한다. 빌4:15에서는 “거래” 또는 “용무”라는 뜻으로, 빌5:17에서는 “유익”이라는 의미로 쓰였고, 골2:23에서는 표시(sign)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레마”가 “말” 또는 “말씀” 이외의 뜻으로 쓰인 예는 신약성경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구약 창34:14에서 “레마”가 “말”이라기보다는 “일”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으나 이것은 예외에 속한다. 따라서 신구약을 막론하고 “로고스”가 “레마”보다 훨씬 많이 사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용범위도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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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사전에서

로고스 [그]Logos

로고스는 그리스어 ‘말하다’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즉 예수 그리스도 , 하느님 말씀, 만물을 이성 적으로 관철하여 지배하는 법칙(그리스 철학 ), 우주를 통일하는 이성 (理性),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말, 의미, 이유, 논리 등을 뜻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하느님은 로고스적 본질을 가진 분이시고, 로고스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서 생겨났다”고 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Logos)으로 세상 을 창조하셨다. 그러기에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은 곧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시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요한 1,14). 그리고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요한 1,1). 이상의 성서 구절에서 결국 말씀이란 하느님의 말씀 을 뜻하며, 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 를 뜻한다.

가톨릭대사전 에서

[그]Logos

그리스도교와 고대철학 사이의 접촉을 담당한 중심적인 하나의 학문적 개념. ‘로고스’의 개념은 ‘말한다’는 그리스어로부터 나온 말인데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①

로고스는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정신활동을 가리켰으며,

레마는 가톨릭 사전에 없으므로 송두석님께서 올리신글을 빌려 봅니다.

레마 살아있는 말씀(추가) 작성자 송두석(pedro12) 번 호 151410 작성일 2010-03-11 오전 12:11:26 조회수 84 추천수 문자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온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께서 성경의 뜻(문자 뒤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성령을 통해 알려 주실 때 우리는 성경의 하느님 말씀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을 구할 때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이 성령의 빛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계시의 말씀이 다시 믿는 이에게 레마 로 들릴 때 믿는 이는 성경에 계시된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온전한 뜻 안에서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문자적인 지식에 의존하여 성경을 읽으면 의심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하느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모두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성령의 은총으로 깨닫게 될 때 , 성경은 우리를 위한 구원의 말씀이 되는 것이며 이러할 때, 성경의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그리스도를 성경에서는 말씀이라 칭함. 영어로는 대문자로 Word 라고 성경에 나올 때 바로 그리스도를 칭하는 것임)이 되는 것이지요. 교회란 죽어있는 제도나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부활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의 집합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주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면 우리는 교회의 지체가 되어서 교회를 구성합니다. 성령께서는 교회라는 건물이나 제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이루고 있는 믿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교리서에서 말하듯이 성령께서 알려 주셔야만 우리가 성경말씀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즉, 하느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하느님의 온전하신 뜻 안에서 알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지적인 노력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은총으로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교리서에서 믿을 교리로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믿을 교리입니다. ( 105) 하느님께서는 성경의 저자이시다. ( 107) 성경 저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것은 성령께서 주장하신 것으로 여겨야 한다. (108)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 죽은 문자로 머물지 않으려면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성경을 깨닫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셔야 한다. (111)성령을 통해 쓰여진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 129) 예형론(typologia)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비추어 구약성경을 읽는다. 이러한 예형론적 성경읽기는 구약성경의 고갈되 지 않는 내용을 명백히 드러낸다. 한편 신약성경 역시 구약성경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신약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으며, 구약은 신약 안에서 드러난다. (121)구약은 성경의 사라지지 않을 한 부분이다. 구약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책들이며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옛 계약은 결코 철회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123)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성경을 참된 하느님의 말씀으로 존중한다. 교회는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무효화하였다는 구실로 구약성경을 배척하려는 생각(마르치온 이단)을 항상 강력히 물리쳐 왔다. ( 1223) 구약의 모든 예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된다 송두석 형제님에게 감사하세요. 살롬.

로고스 [그]Logos그리스도교와 고대철학 사이의 접촉을 담당한 중심적인 하나의 학문적 개념. ‘로고스’의 개념은 ‘말한다’는 그리스어로부터 나온 말인데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① 그리스도교 신학 에선 삼위일체 의 제2위 곧 ‘예수’를 가리키며, ‘하느님의 말씀’을 뜻하고, ② 철학 적으로는 그리스철학의 경우, 만물을 이성 적으로 관철하여 지배하는 법칙, 스토아학파의 경우는 숙명적 필연적으로 사람을 지배하는 이법(理法) 즉 신을 말한다. 예를 들면, 헤라클레이토스의 우주의 모든 것을 지배 규제하는 우주이성(宇宙理性), 스토아학파의 우주혼(宇宙魂), 필로(Philo)의 신과 세계와의 중간체(中間體), 헤겔의 절대이념(絶對理念) 같은 것인데, 체제 속에 깃들이어 있는 이념이며, 그 체제를 뜻있는 것으로 하는 것이 바로 로고스이다. ③ 이성 적인 지능에서 출발하여 표현된 여러 활동을 통틀어 로고스라고 지칭한다. 말로써 표현된 의미개념, 이론 또는 사상내용을 가리키는 말인데, 때로는 유기적인 생명 또는 도덕 적인 태도 즉 그리스어 ethos와 대립되는 사상 혹은 이념의 범위 전체를 가리키는 적이 있고, ④ 일반적으로는 흔히 말 · 의미 · 이유 · 논리 · 이성 (理性) 따위를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로고스는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정신활동을 가리켰으며, 구약성서 의 ‘말씀’은 히브리어로 dabar이며, 이는 야훼 의 깊은 창조적 힘을 나타내는 낱말이며, 이스라엘 에서는 로고스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로고스 곧 말씀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을 풀이하는 로고스 그리스도론 (論)(Logos Christology)은 테르툴리아노 (Tertullianus)의 전개에 따르면, 생각하는 곳에 말씀(sermo)이 있고, 사려하는 곳에 이성 (ratio)이 있다. 이렇게 하느님 속에 이성 이 있고, 이성 에 말씀(sermo, Logos)이 갖추어져 있다. 하느님은 로고스적 본질을 가진 분이고, 로고스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에 옮기는 데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으며, 이리하여 일반적인 로고스론의 대주년(大周年, magnus annus)은 현세적인 반복 회귀(反復回歸)이지만, 로고스 그리스도론 에서는 절대 완성의 종말이 설파되고 있어 구세진리를 계시 하고 있다. (⇒) 그리스도론 개신교 창에서~

로고스(Logos)와 레마(Rheemata).

로고스는 딱딱한 말씀 즉 글이고, 레마는 살아있는,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성경은 로고스이다. 그리고 우리가 읽을 때에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깨달아 질때에 깨달아 진 그 말씀을 레마라고 한다고 한다.

좋은 설교를 하는 목회자는 딱딱한, 곰팡내 나는 로고스를 전하면 성도들이 다 자고, 부흥을 할 수 없다고 잔소리들을 한다.

깨달은 말씀, 성령께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레마를 전해야만 성도들의 영혼이 살아난다고들 한다.

이런 말들을 우리 선진들은 사자성어를 사용해서 적당한 표현을 했다.

言則是也

너의 말을 들어보니 너의 말이 맞다는 뜻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넘어가지 않는 성도들이 한명이라도 있을까?

과연 그런가?

한번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은가?

그러나 냄새가 난다.

지금까지 배운 신학의 바탕으로 조명해보면 위험성이 보인다.

정확하게 어디서 냄새가 나는가?를 알지는 못하지만 한번쯤 조사를 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바로 골든 클락이 쓴 “요한의 로고스(The Johannine Logos)”이다.

로고스와 레마가 틀리다는 사람들을 종합 분류를 해보았다.

로고스와 레마가 모두 “ㄹ”로 시작을 하니 같다고 주장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정말 로고스와 레마가 차이점이 있을까?

성경 전체를 보면 로고스라는 단어는 약 1200 이상이 나온다.

레마는 요한복음에서는 단수로 나타나지 않고 복수로만 나타나며 신약에서 복수의 형태로 약 60번 정도 나온다.

한번 연구를 해보았으면 한다.

만일 나의 말이 그럴듯 하기만 하면 로고스와 레마는 틀리다고 하시는 분들은 그만 그런 말을 멈추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레마선교회에서 레마를 부르짖으니 조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이 든다.

레마(Rheema 단수) 그리고 레마타 (Rheemata 복수)는 말씀 또는 말씀들, 일반적인 구어(口語)를 의미한다.

물론 로고스도 말씀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점이 있다고 부르짖는 목회자의 지도를 받은 성도들은 물어볼 것이다.

이 두 단어 Logos 와 Rheema가 의미에 있어서 동등한가, 아니면 서로 상반되는가, 아니면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단어인가?

어원을 연구하는 것으로 시작을 해보자.

레마는 라틴어 verbum과 영어 word와 똑같은 어근(Root)을 갖고 있다: eiroo, to say, speak, tell.

로고스는 신약에서 약 1200번 사용되었다; legoo, to say, speak, tell.

이 두 어근들은 사전적인 의미에 있어서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몇몇의 신학자들은 레마타와 로고스를 상반된 것으로 만들기를 원한다.

그 신학자들은 거의가 다 현대주의 신학자들이다.

정통주의 신학자, 특히 개혁주의 신학자들중에서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점을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조사를 요한복음의 구절들을 보면서 증명해보자

요한복음에서 로고스라는 단어를 구별해보면,

“ 로고스는 문장( a sentence), 명제, 교리, 그리고 지적이해를 요구하는 대상”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피할 길이 없다.

두 가지 예만 들어보도록 하겠다.

요한2:22절을 보면, 그의 사역의 초기에 성전을 청결케 한 후에, 유대 관원들의 도전을 받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대관원들에게 말을 한다.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일으키리라”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제자들도 당황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시자 제자들은 그 것을 기억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과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logos)을 믿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들이 믿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문장, sentence)을 믿은 것이다.

여기서 말씀은 곧 예수님이 하셨던 “이 성전을 허물라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그것을 다시 일으키리라”라는 문장을 믿은 것이다. 제자들은 그 문장들을 다시 기억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요2:22절에서 Logos는 a sentence라고 결론을 지을 수가 있다.

요한8: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진리(Logos)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 Rheemata)를 믿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믿은 하나님의 말씀(Rheemata)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logos)이다.

여기서 레마타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문장, sentense)임을 알 수가 있다.

레마타와 로고스는 동일하게 예수님께서 하신 sentense임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예로서

요12:47-48절의 말씀을 보면 레마와 로고스가 한 문장에서 함께 등장을 한다.

“예수님께서 부르짖어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나의 말을(rheemata)를 듣고 지키지 않을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rheemata)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이니 곧 나의 한 그 말이(logos) 마지말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로고스와 레마타(레마의 복수)가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확실히 볼 수 있다.

따라서 레마타는 절대로 오염된 인간의 언어, 깨달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레마타는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신적인 말씀이요,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이다.

“우리가 설교를 할 때에 로고스를 전해서는 안되고, 레마을 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 그렇다면 남들이 해석해놓은 헬라어 원본을 참조를 하고나서 확인을 하고 주장을 했으면 좋겠다.

왜냐?

비록 두 가지 예만을 들었지만 무려 1200개 이상의 예를 들어서 로고스와 레마가 같은 의미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증명이 되었다고 가정을 하고, 로고스와 레마를 분리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들이 하는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설교를 할 때에는 로고스를 전해서는 안되고, 레마를 전해야 한다”

이런 말들을 강대상에서, 신학교에서 당당하게 말을 한다고 한다면 …..

레마와 로고스에 대한 오해가 이 지구 땅에 언제나 없어질는지는 모르지만….

120페이지 밖에 안 되는 책

“The Johannine Logos Gordon H. Clark The trinity Foundation”를 한번 사서 보고, 말하는 것도 지금 당장 우리가 죽을 것이 아니니니까 투자해 볼 만한다.

골든 H 클락은

로고스와 레마는 절대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얼마나 지루하게 잘 늘어놓았는지 모른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을 썻을 때에 골든 클락은 나이가 분명 70은 넘었을 것 같다.

잘 강조를 해놓았는지 모른다.

로고스와 레마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로고스는 딱딱한 말씀 즉 글이고, 레마는 살아있는,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읽을 때에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깨달아 질때에한다고 한다.좋은 설교를 하는 목회자는 딱딱한, 곰팡내 나는 로고스를 전하면 성도들이 다 자고, 부흥을 할 수 없다고 잔소리들을 한다.깨달은 말씀, 성령께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레마를 전해야만 성도들의 영혼이 살아난다고들 한다.이런 말들을 우리 선진들은 사자성어를 사용해서 적당한 표현을 했다.言則是也너의 말을 들어보니 너의 말이 맞다는 뜻이다.이런 말을 들으면 넘어가지 않는 성도들이 한명이라도 있을까?과연 그런가?한번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은가?그러나 냄새가 난다.지금까지 배운 신학의 바탕으로 조명해보면 위험성이 보인다.정확하게 어디서 냄새가 나는가?를 알지는 못하지만 한번쯤 조사를 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바로 골든 클락이 쓴 “요한의 로고스(The Johannine Logos)”이다.로고스와 레마가 틀리다는 사람들을 종합 분류를 해보았다.로고스와 레마가 모두 “ㄹ”로 시작을 하니 같다고 주장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다.정말 로고스와 레마가 차이점이 있을까?성경 전체를 보면 로고스라는 단어는 약 1200 이상이 나온다.레마는 요한복음에서는 단수로 나타나지 않고 복수로만 나타나며 신약에서 복수의 형태로 약 60번 정도 나온다.한번 연구를 해보았으면 한다.만일 나의 말이 그럴듯 하기만 하면 로고스와 레마는 틀리다고 하시는 분들은 그만 그런 말을 멈추었으면 좋겠다.그리고 어찌하든지 레마선교회에서 레마를 부르짖으니 조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이 든다.레마(Rheema 단수) 그리고 레마타 (Rheemata 복수)는 말씀 또는 말씀들, 일반적인 구어(口語)를 의미한다.물론 로고스도 말씀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그러므로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점이 있다고 부르짖는 목회자의 지도를 받은 성도들은 물어볼 것이다.이 두 단어 Logos 와 Rheema가 의미에 있어서 동등한가, 아니면 서로 상반되는가, 아니면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단어인가?어원을 연구하는 것으로 시작을 해보자.레마는 라틴어 verbum과 영어 word와 똑같은 어근(Root)을 갖고 있다: eiroo, to say, speak, tell.로고스는 신약에서 약 1200번 사용되었다; legoo, to say, speak, tell.이 두 어근들은 사전적인 의미에 있어서 거의 동일하다.그러나 몇몇의 신학자들은 레마타와 로고스를 상반된 것으로 만들기를 원한다.그 신학자들은 거의가 다 현대주의 신학자들이다.정통주의 신학자, 특히 개혁주의 신학자들중에서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점을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이 문제에 대한 조사를 요한복음의 구절들을 보면서 증명해보자요한복음에서 로고스라는 단어를 구별해보면,“ 로고스는 문장( a sentence), 명제, 교리, 그리고 지적이해를 요구하는 대상”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피할 길이 없다.두 가지 예만 들어보도록 하겠다.요한2:22절을 보면, 그의 사역의 초기에 성전을 청결케 한 후에, 유대 관원들의 도전을 받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대관원들에게 말을 한다.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일으키리라”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제자들도 당황하였다.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시자 제자들은 그 것을 기억하였다.그리고 그들은 성경과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logos)을 믿었다고 하였다.여기서 그들이 믿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문장, sentence)을 믿은 것이다.여기서 말씀은 곧 예수님이 하셨던 “이 성전을 허물라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그것을 다시 일으키리라”라는 문장을 믿은 것이다. 제자들은 그 문장들을 다시 기억한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요2:22절에서 Logos는 a sentence라고 결론을 지을 수가 있다.요한8: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진리(Logos)를 말씀하셨다.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 Rheemata)를 믿는다고 하였다.여기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믿은 하나님의 말씀(Rheemata)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logos)이다.여기서 레마타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문장, sentense)임을 알 수가 있다.레마타와 로고스는 동일하게 예수님께서 하신 sentense임을 알 수 있다.두 번째 예로서요12:47-48절의 말씀을 보면 레마와 로고스가 한 문장에서 함께 등장을 한다.“예수님께서 부르짖어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나의 말을(rheemata)를 듣고 지키지 않을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rheemata)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이니 곧 나의 한 그 말이(logos) 마지말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다.여기서 우리는 로고스와 레마타(레마의 복수)가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확실히 볼 수 있다.따라서 레마타는 절대로 오염된 인간의 언어, 깨달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레마타는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신적인 말씀이요,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이다.“우리가 설교를 할 때에 로고스를 전해서는 안되고, 레마을 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 그렇다면 남들이 해석해놓은 헬라어 원본을 참조를 하고나서 확인을 하고 주장을 했으면 좋겠다.왜냐?비록 두 가지 예만을 들었지만 무려 1200개 이상의 예를 들어서 로고스와 레마가 같은 의미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만일 증명이 되었다고 가정을 하고, 로고스와 레마를 분리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들이 하는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보면 알 수 있다.”우리가 설교를 할 때에는 로고스를 전해서는 안되고, 레마를 전해야 한다”이런 말들을 강대상에서, 신학교에서 당당하게 말을 한다고 한다면 …..레마와 로고스에 대한 오해가 이 지구 땅에 언제나 없어질는지는 모르지만….120페이지 밖에 안 되는 책“The Johannine Logos Gordon H. Clark The trinity Foundation”를 한번 사서 보고, 말하는 것도 지금 당장 우리가 죽을 것이 아니니니까 투자해 볼 만한다.골든 H 클락은로고스와 레마는 절대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얼마나 지루하게 잘 늘어놓았는지 모른다.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을 썻을 때에 골든 클락은 나이가 분명 70은 넘었을 것 같다.잘 강조를 해놓았는지 모른다. 레마와 로고스의 뜻에 차이가 있는가 말씀이란 단어에는 원어로 레마와 로고스가 있으며, 로고스는 일반적인 말씀, 레마는 깨닫은 말씀이라고 구분하여 가르치는 것을 듣은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고스를 깨닫았을 때에 레마를 받게 되는 것이니 모두 레마를 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어디서 이런 말을 듣거나 혹은 읽은 후에, 선한 뜻으로 사용하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깨닫아서 레마가 되도록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더 심각하게 들어가서, 자신은 레마의 영을 받았기에, 성경말씀을 다시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반 목회자나 선생들은 로고스 정도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자신은 레마의 수준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로고스 정도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자들은 성전 마당에 머물고 있는 정도이고, 레마를 깨닫은 자신은 성소 깊은 곳 즉 지성소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하는 사람들은 창세기와 요한 계시록을 건드리고, 원어를 많이 그럴듯하게 사용합니다.그러므로 많은 교인들과 심지어는 목회자들도 설득당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영적으로 신비한 것을 보여주고 은사를 받은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하고, 레마의 영을 받았다는 분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치유를 받은 것 같은 현상을 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성경 해석은 성경말씀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 것이 여럿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성구사전을 살펴보면서 레마와 로고스가 사용된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이들이 주장하는 것이 엉터리라는 것이 쉽게 알게되었습니다. 레마와 로고스가 신약에서 여러번 사용되었기에 모든 성구를 열거할 수 없지만, 몇개를 열거해봅니다. 레마를 사용한 구절들 : 마태복음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레마)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레마)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레마)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태복음 18: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레마) 증참케 하라 마태복음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레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가복음 9: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레마)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마가복음 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레마)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누가복음에 18번 사용 요한복음에 12번 사용 요한복음 10:21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레마)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사도행전 14번 사용 사도행전 6: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레마) 마지 아니하는도다 사도행전 16:38 아전들이 이 말로 (레마) 상관들에게 고하니 저희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로마서에 3번 사용 고린도 후서 2번 사용 고린도 후서 13:1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니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레마) 확정하리라 에베소서 2번 히브리서 4번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레마)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2: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레마)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베드로전서 2번 베드로후서 1번 유다서 1번 요한계시록 1번 이와같이 레마는 특정하게 깨닫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사람의 말 (심지어는 핍박하는 악한 자의 말, 교회에서 범죄하고 회개치 않는 자의 말도 레마로 사용됨) 등 일반적으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로고스를 사용한 구절 310번 이상 사용되었는데 너무 많아 옮기기가 어려우나, 하나님의 말씀, 사람의 일반적인 말로 사용되었고, 몇 군데에선 특정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예: 연고없이 (마 5:32 ), 회계하려 (마 18:23 ), 이 일을 의논하려 (행 15:6 ), 송사할 것이 있거든 (행 19:38 ),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 (빌 4:15 ), 야고보서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로고스) 온유함으로 받으라 (이 구절의 단어는 로고스보다는 레마가 사용되어야 하지 않는가 판단됩니다.) 결론적으로 로고스도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로고스나 레마나 일반적으로 말씀, 말의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수 있는데, 마치 말을 잘한다는 표현이나 언변이 좋다는 표현 달변이다라는 표현등으로 다양하게 우리가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2000년 후의 학자들이 말은 어떤 뜻이고 언변은 어떤 뜻이고 달변은 어떤 뜻이라고 마치 로고스와 레마를 구별하는 것 같이 주장하면, 우리들이 얼마나 한심한 표정으로 웃겠습니까? 우리 개인의 체험이나 논리를 비추어서 성경을 해석하고, 짜집기 하듯이 성경을 해석하면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원어를 사용할 때 나름대로 많은 연구가 있은 후에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의 말을 듣고서 혹은 어느 책에서 보고서 원어로 이것은 무슨 뜻이고, 저것은 이런 뜻이라고 옮기다가는 크게 실수하며, 하나님에게 큰 책망받을 수 있습니다. 아가페라는 단어도 흔히 잘못 사용하는 것을 듣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성경에서 사용하는 아가페에대한 개념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 단어를 구별해서 특정한 것에 사용했었던 것은 사실인데, 근본적으로 성경에서 사용한 아가페를 헬라사람들이 쓰던 뜻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이 말하면 큰 잘못입니다. 성경이 아가페라는 단어에 새로운 뜻을 주었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 (고전 13장) 레마와 로고스에 대한 저의 의견이 많은 도움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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