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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질 아블로 브랜드 | 루이비통의 리더 버질 아블로가 보여준 ‘전공과 상관없이 성공하는법’ 최근 답변 11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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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8/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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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비통의 리더 버질 아블로가 보여준 '전공과 상관없이 성공하는법'
루이비통의 리더 버질 아블로가 보여준 ‘전공과 상관없이 성공하는법’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버질 아블로 브랜드

  • Author: 브랜드보이 Brand Boy
  • Views: 조회수 37,415회
  • Likes: 좋아요 1,370개
  • Date Published: 2021. 6. 1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sQhYVY1L41I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 이야기

2021년 11월 29일 오전 3시 30분경을 기억한다. 시대를 풍미한 패션 디자이너자 기업가의 갑작스러운 타계 소식이 전해진 날이었다. 그는 향년 41세로 세상을 떠나기엔 너무나도 젊은 피였으며, 사망에는 어떤 전조도 없었던 터라 모두가 충격에 빠졌고 모두가 애도했다.

‘그’의 이름은 버질 아블로(Virgil Abloh). 디자이너, 건축가, 브랜드의 디렉터, CEO, 스트리트와 럭셔리의 벽을 깨부수고 아름다운 영혼과 지혜를 통해 전 세계 크리에이티브와 팬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선물한 선각자다. 버질 아블로는 단순 패션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자신의 영향력을 펼쳤고, ‘기존의 것’을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오리지널리티’를 구축하였다.

왜 그가 특별했고, 왜 세상이 그에게 열광하였으며, 우리는 왜 그를 기억할까. 시카고 태생의 소년이 루이 비통 최초의 흑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약하기까지. 버질 아블로가 걸어온 길을 다시금 돌아본다.

| 유년기

1980년 가나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시카고 교외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버질 아블로(아버지는 페인트 회사를 운영하였고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그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는 대신 학업에 열중하였으며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건축을 공부, 2002년 위스콘신 대학에서 토목공학 학사 과정을 마치고 2006년 일리노이 공과대학에서 건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다. 전공이 패션은 아니지만, 어릴 적에는 어머니로부터 재봉을 배웠고, 일리노이 공과대학 시절에는 유명 블로그인 에서 패션과 디자인 주제의 글을 작성했다고.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 있던 패션이 결정적 한방을 통해 그의 인생 가운데에 자리하게 된다. 바로 네덜란드 건축가 렘 쿨하스를 접하게 된 것. 렘 쿨하스는 2003년 9월 미국 내 자신의 첫 건물을 일리노이 공과대학에 세우는데, 당시 그를 눈앞에서 생생히 목격한 버질은 2001년 프라다와 렘 쿨하스가 협업해 선보인 ‘프라다 에피센터 뉴욕’ 매장 에 한 눈에 반한다. 버질에게 있어 이는 패션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의 기틀이 되었고, 그 기점으로 버질의 패션 사랑이 펼쳐진다.

버질 아블로와 램 쿨하스

| 칸예 웨스트

칸예 웨스트는 학업에서 갓 벗어난 버질 아블로가 커리어를 시작하는 과정에 도움을 준 주요 인물 중 하나다. 버질이 시카고의 한 인쇄소에서 도안을 가지고 티셔츠를 제작하던 중 칸예 웨스트와 조우한 것은 유명한 일화. 소문에 의하면 버질은 위스콘신 대학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칸예의 매니저 존 모노폴리와 미팅을 가진다. 그렇게 인생을 바꿀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고, 석사 과정을 마친 후 본격적으로 칸예와 함께 걷기 시작한다.

2009년 버질 아블로와 칸예 웨스트는 나란히 럭셔리 패션 하우스 ‘펜디’에서 인턴십을 갖는다. (비록 입사 과정이 남들과 같았을 지는 의문이지만)둘은 실제 펜디 인턴과 동등한 대우 아래 일을 했는데, 월 500 달러(한화 약 60만 원)를 받고 상사에게 커피를 배달하며 럭셔리 패션 시장에서 실무 스킬을 익혀 나갔다. 당시 펜디의 CEO였던 마이클 버크가 “버질과 칸예가 스튜디오에 새로운 분위기를 가져다 주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라고 전했을 만큼 이들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던 바. 참고로 마이클 버크는 2012년부터 루이 비통의 CEO로 재직, 향후 버질 아블로를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앉히는데 큰 역할을 한다.

칸예 웨스트와 버질 아블로

같은 해, 돈 C(칸예 웨스트의 매니저이자 시카고의 스트리트웨어 디자이너)와 함께 미국 시카고에 패션 부티크를 오픈하기도 한다. 라 명명된 매장은 버질의 스타일을 전체적인 인테리어에 반영해 큰 주목을 모았으며 샤넬과 꼼 데 가르송부터 타카시 무라카미와 카우스까지, 여러 형태의 문화를 섞어내 당세 최고 하입을 자랑했다. 예컨대 여기서 ‘파이렉스 비전’이 첫 번째 컬렉션을 단독으로 선보였고, 제리 로렌조는 ‘피어 오브 갓’의 50장 한정 티셔츠를 출시한 바. 이상의 긴 말 생략하고, 는 소위 ‘좀 치는’ 이들의 멋있는 공간으로 명성을 날렸다.

위 두 커다란 이야기는 칸예-버질 인연의 자그마한 부분에 불과, 2010년 버질은 칸예가 운영하는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기용되기에 이른다. 학창 시절부터 디제잉을 즐겼던 덕에 음악 자체에도 일가견 있었던 그는 조금은 무거울 수도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자리를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나아가 2011년에는 칸예 웨스트와 제이 지의 전설적인 합작 앨범 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활약(그래미 후보에 오르기까지 했다), 이는 더 큰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다.

| 패션

빈트릴(2010)

버질 아블로는 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자리하는 동시에 매튜 윌리엄스, 헤론 프레스턴, 저스틴 손더스 등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친구들과 한 팀을 이루고 꽤나 재미있는 패션 브랜드 사업 빈트릴(BEENTRILL)을 전개한다. 빈트릴은 과감한 그래픽과 로고 플레이로 무장하고 스트리트웨어 신에 파격적인 반향을 일으키게 되는데, 후디와 티셔츠 등이 높은 가격(품질에 비해)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렸으며, 그 인기는 2010년 브랜드 론칭 후 한 동안 꾸준히 지속됐다.

빈트릴의 빠른 성공에 있어 가장 큰 요인으로 ‘인플루언서 마케팅’이 꼽힌다. 칸예 웨스트, 드레이크, 리한나, ASAP 라키 등 유명 인사들이 너나 할 거 없이 빈트릴 아이템을 착용하고 등장한 바. 무엇보다 당시 ‘인스타그램’이 새로운 SNS로 부상하고 있었고, 이에 발맞춰 등장한 시의적절 인플루언서 마케팅은 브랜드가 뚜렷한 아이덴티티 없이 단기간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시가 되었다.

다만, 행복한 시간은 잠깐에 불과했다. 과도한 ‘인플루언서 마케팅’과 의존도 높았던 로고 플레이의 부작용이 금새 찾아온 것이다. 휘황찬란한 그래픽과 멋들어진 셀러브리티들의 착장이 어느새 지루해졌고,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 빈트릴은 그렇게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잊혀진다.

파이렉스 비전(2012)

빈트릴이 한창 흥행 가운데 있던 2012년, 버질 아블로는 자신의 첫 번째 단독 브랜드 파이렉스 비전(PYREX VISION)을 선보인다.

파이렉스 비전은 처음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원단을 선택해 패턴을 짜고 디자인을 더하는 대신, 40 달러짜리 폴로 랄프 로렌과 챔피온 데드 스탁에 커다란 PYREX 23 브랜딩을 프린팅하고 550 달러에 판매하는 방식이 전부였기 때문. 참고로 여기서 ‘PYREX’는 마약 제조에 흔히 사용되던 글라스 브랜드를, ’23’은 마이클 조던의 백 넘버를 표현한 것이다.

지드래곤이 착용한 파이렉스 비전

버질은 파이렉스 비전에 대해 “단지 젊음을 자극하고 지향하는 브랜드를 시작하고 싶을 뿐”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바람은 고스란히 반영되어 매일같이 새롭고 신선한 무엇인가를 찾는 ‘하입비스트’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분명 버질의 방식에 의문을 품고 ‘디자인이 아닌 사기’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지만, 상상도 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행보에 시장의 반응은 너무나도 뜨거웠고 제품은 출시 때마다 완판을 기록했다.

위 내용을 종합해 조금 더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면 파이렉스 비전은 브랜드보다 하나의 프로젝트에 가까웠다. 팬들이 언제나 새롭고 신선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 곳곳에서 터져 나온 비평가들의 격분을 마케팅으로 소화하고 데드 스탁 아이템을 14배 높은 가격에 팔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결과적으로 버질의 방식은 단 1년 만에 ‘대성공’으로 이어졌고, 파이렉스 비전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 2013년을 끝으로 역사 속에 자취를 감추게 된다.

오프 화이트(2013)

도약의 결과물이 2013년 밀라노를 거점으로 론칭한 오프 화이트(Off-White). 빈트릴, 파이렉스 비전에서 보여준 티셔츠 팔이를 넘어 마침내 시즌마다 컬렉션을 발표하는 하이 패션 신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민다.

버질 아블로는 오프 화이트를 배경으로 곧잘 스트리트와 하이 패션을 연결해나간다. 건축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요소들을 적극 차용한 화살표 로고 및 사선 형태의 블랙&화이트 스트라이프 패턴을 초기 브랜드의 키 디자인으로 삼고, 코트와 블레이저부터 후디와 쇼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아이템 속에 주입해 넣었다. 특유의 오버사이징 실루엣에 다채로운 소재와 그래픽 등이 가미되어 탄생한 매 시즌 컬렉션은 어느 한 카테고리에 묶여있기보다 ‘오프 화이트’ 그 자체로 정의되었고, 런웨이 무대를 넘어 실제 우리의 일상복으로도 함께하게 된다. 오프 화이트를 논하는데 ‘협업’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가장 대표적으로 2017년부터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는 나이키가 있는데, 볼드한 헬베티카 레터링 및 레드 케이블 타이 등 기존 오프 화이트의 시그니처 디자인 미학으로 변주된 에어 조던 1과 에어 포스 따위를 통해 전 세계 스니커헤드를 열광케 하고 스니커 신에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다. 이 밖에도 버질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몽클레르, 크롬하츠, 챔피온, 스투시, 지미 추, 반스를 비롯해 리모와, 이케아, 도버 스트리트 마켓, 바이레도, 에비앙, 모엣 샹동 등 문화 전반의 브랜드들과 함께하며 ‘OFF-WHITE’ 인지도와 그 인기의 정점을 찍는다.

오프 화이트 x 나이키 <더 텐> 컬렉션

자크뮈스, 베트멍, 코페르니와 함께 2015 LVMH 프라이즈 결승에 진출한 바 있는 오프 화이트는 2021년에 이르러서 LVMH에 지분 60%를 내어준다. 오프 화이트는 그 사이 6년이라는 시간 동안 하이 패션 시장에서 스트리트 웨어의 미학을 아낌없이 뽐내온 바. 셰인 올리버의 HBA, 즈바살리아 형제의 베트멍을 제치고 여전히 굳건히 자리하고 있는 오프 화이트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에 있다.

루이 비통(2018)

2018년 3월의 어느 날, 버질 아블로는 인생 최고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바로 루이 비통 남성복 부문의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이 놀라운 소식은 루이 비통이 킴 존스와 함께 맛을 본 ‘스트리트웨어’를 진정 꽃피우고자 함을 시사하였고, 자연스레 패션 신 안팎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참고로 킴 존스는 ‘루이 비통 x 슈프림’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며, 버질 아블로는 ‘루이 비통 최초의 흑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하이 패션을 넘어 럭셔리가 스트리트웨어를 받아들였다. 그것도 가장 아이코닉한 브랜드 중 하나로 손 꼽히는 루이 비통이. 사실 버질 아블로의 럭셔리 시장 진출은 어느 정도 예상된 수순이기도 하였는데, 위에서 언급한 셰인 올리버와 즈바살리아 형제의 뎀나가 각각 헬무트 랑과 발렌시아가의 수장으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질의 전공이 패션이 아닌 건축이라는 점은 리스크 중 하나였고, 많은 이들이 기대와 함께 ‘과연 패션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이 루이 비통을 이끌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해 6월 버질 아블로의 데뷔작, 2019 봄-여름 맨즈 컬렉션이 파리 팔레 루아얄 정원에서 펼쳐졌다. 군더더기란 찾아볼 수 없는 화이트로 시작해 화려한 그래픽을 거쳐 강렬한 레드와 블루 등의 다채로운 컬러로 구성된 컬렉션은 그 즉시 떠돌던 우려의 목소리를 잠재웠다. 버질 아블로의 스트리트 미학으로 해석된 오버사이즈 실루엣이 베이직한 후디와 트라우저 등에 접목되고, 구조화되지 않은 블레이저와 유틸리티 베스트 등이 단숨에 눈길을 사로잡았으며, 기다란 체인 디자인을 채택한 가방과 알록달록한 스니커들에 시선이 쏠렸다. 이보다 성공적으로 끝날 수 없었을 컬렉션과 쇼는 버질 아블로가 칸예 웨스트를 부둥켜 안고 우는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기도, 그의 인스타그램에 게시된 ‘you can do it too…’로 전 세계 크리에이티브들에게 꿈과 용기를 선물해 주기도 하였다.

버질의 루이 비통은 그렇게 밝게 빛났다. 이후에도 스트리트웨어 아이덴티티는 물론, 꾸준히 건축에 대한 자신의 영감을 선보이며 매 시즌 필히 주목해야 할 남성복으로 정착하는데, 우리는 그가 선보인 컬렉션과 더불어 쇼 자체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를 고르자면 구름 그래픽과 커다란 오브제로 장식된 2020 가을-겨울 컬렉션이 있으며, 제임스 볼드윈의 에세이 <마을의 이방인>에서 테마를 가져온 2021 가을-겨울 컬렉션, 펑크 소울 그룹 ‘더 윈스톤즈’에 경의를 표하는 2022 봄-여름 컬렉션 ‘AMEN BREAK’가 뒤를 잇는다. 이들은 지금까지 버질이 선보여온 퍼포먼스 중 대표작으로 꼽히며, 그의 별명이 ‘밀레니얼 칼 라거펠트’로 지어지기에도 조금은 합당한 대목 중 하나다.

그다음과 그다음만이 기대되던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는 2021년 11월 29일 세상을 떠난다. LVMH와 루이 비통이, 케어링과 구찌가 그를 추모했고 버질을 사랑하고 버질에게 사랑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각종 매체를 통해 애도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루이 비통은 이후 마이애미에서 22 가을-겨울 컬렉션을 다시금 조명한 쇼를 통해 버질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냈으며, 오프 화이트는 전 세계 일부 매장을 꽃으로 장식하였고, 우리는 천재적인 디자이너가 전했던 사랑의 메시지를 돼새긴다.

| 카피 혹은 샘플링?

버질 아블로의 디자이너 인생에 카피 이슈가 늘 꼬리표처럼 뒤를 따라다녔다. 심지어 ‘카피캣’이라 불렸을 만큼 말이다. 패션 고발 계정 @diet_prada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저격수’. 유명 디저이너들의 카피를 수면 위로 끌고 올라온 이들이기에, LVMH를 등에 업고 있어도 @diet_prada의 레이더망에 걸린 이상 논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비록 지금도 여전히 그가 카피켓이 맞다 아니다에 갑론을박이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의 논란을 절실히 부정해왔다. ‘훔치는 것’이 아니라 ‘리믹스’라 이야기하며. 여기서 우리는 버질의 디자인 정신 중심에 있던 ‘3% 접근법’과 ‘샘플링’에 집중해볼 필요가 있다.

오리지널에서 3%만 바뀌어도 새로운 오리지널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 ‘3% 접근법’이다. 이 방식은 ‘패션의 세계에 정말 새로운 것이 있을까?’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됐다. 실제로 버질은 유스 컬처를 기반으로 현시대 남성복의 기틀을 마련한 라프 시몬스로부터 큰 영감을 받으며 자신의 디자인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스스를 비유한 방법에 따르면, 버질 아블로의 스트리트웨어는 마르셀 뒤샹의 ‘샘’ 혹은 앤디 워홀이 선보인 ‘마릴린 먼로’와 ‘캠벨의 수프 캔’과 동일한 맥락이다. 단지 그 무대가 ‘패션’이었을 뿐. 버질 아블로는 기존에 존재하는 무엇인가에 3%의 해석을 가미하며 새로운 오리지널리티를 부여하였다.

뒤샹의 ‘샘’과 칸예 웨스트의 ‘MBDTF’

3% 접근법과는 별개로 우리는 그가 패션 대신 건축을 전공하고 디제잉을 하며 ‘샘플링’의 대가인 칸예 웨스트와 가장 친한 친구 사이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기존에 있던 곡의 일부 음원을 잘라내 새롭게 가공하고 배치하는 행위’를 일컫는 샘플링은 음악 시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법 중 하나다. 디제잉 속에 다양한 음악을 조합하고 칸예 웨스트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수행한 바가 있기에, 버질에게 이는 전혀 어색한 개념이 아니다. 단순히 직업이 뮤지션이 아닌 디자이너라고 샘플링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샘플링의 집합체인 MBDTF(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가 음악 시장에서 모두의 인정을 받는 힙합 앨범으로 위치하는데, 샘플링 요소가 가미된 오프 화이트 및 루이 비통 컬렉션이 패션 시장에서 기억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혹자는 ‘3% 접근법’이나 ‘샘플링’이 버질 아블로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낸 화려한 말장난이 아니냐고 말한다.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냐에 따라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주장이다. 버질 아블로가 다양한 곳에서 영감을 받고 있음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만, 그가 모든 영감의 원천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도 분명한 사실. 자칫 ‘무단으로 디자인을 뺏은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기에 이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 논쟁 거리 중 하나로 자리하고 있다.

마무리하며

2021년 11월 29일 오전 3시 30분경 버질 아블로는 세상을 떠났다. 패션과 음악, 디자인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그를 추모했다. 단순히 그의 성공적인 커리어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생전 내보인 무수한 사랑이 바로 주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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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질 아블로의 생각

스트릿 패션을 하이패션 반열에 올린 선구자

유럽계 명품 브랜드 역사상 최초 흑인 디자이너

타임지의 2018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

이 모든 수식을 가진 사람, 패션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Virgil Abloh)’이다. 버질 아블로는 정식으로 패션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 공부에 매진한 건축학도였다. 그런 그가 화려한 경력의 패션 디자이너들을 제치고 루이비통 아트 디렉터가 되었다. 패션계에 변화의 바람이 분 순간이었다. 전 세계 글로벌 브랜드는 그에게 열광했고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냈다.

혜성처럼 등장하여 역사를 만든 버질 아블로. 평범한 대학생이 어떻게 명품 브랜드의 수장까지 되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나는 이 글을 썼다. 다른 매체에서 자주 언급된 버질 아블로의 생애보다는 그의 디자인 철학과 패션 철학에 집중해서 조사했다. 두 가지는 엄연히 달라서 따로 살펴봐야 한다. 버질 아블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글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디자인 철학: Changing A Little

버질 아블로의 디자인 철학은, ‘조금만 바꾸기(Changing A Little)’이다. 그는 오리지널에서 3%만 바뀌어도 새로움이 탄생한다고 말했다. 대상을 적당히 자르고, 붙이고, 뒤집고, 해체하는 것만으로도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개념 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예술가 마르셀 뒤샹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대량 생산된 공산품을 예술로 다루었다. 남 성 소변기를 작품으로 출품한 ‘샘’이 대표적이다. 뒤샹은 물었다.

회화보다 정확한 사진기가 등장했고, 머리 위로는 비행기가 날아다닌다. 주변에는 품질 좋은 공산품이 넘쳐난다. 우리(예술가)는 저것들 보다 더 멋진 것을 만들 수 있는가. 이것들이 예술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예술이라고 흰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발라가면서 대단한 무언가를 창조해야 하는가. 레디 메이드(Ready-Made)를 달리 해석하면 그것도 예술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은가.

이미 만들어진 것에 유연한 시선과 생각을 더하는 행위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뒤샹은 시사했다. 뒤샹의 말에 따르면 기성복도 이미 존재하는 물건이다. 이것을 재치 있게 바라보는 상상력이 있다면 충분히 디자인적 가치를 지닐 것으로 버질 아블로는 생각했다.

ⓒPYREX VISION-23 via Tumblr

실제로 그러한 지 실험하고자 버질 아블로는 2012년에 ‘파이렉스 비전(Pyrex Vision)’을 설립했다. 그는 패션 브랜드 폴로와 챔피언의 철 지난 럭비 셔츠와 스웨트 셔츠를 헐값에 사들였다. 그리고 등판에 그가 좋아하는 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의 등번호 23과 Pyrex 스펠링을 커다랗게 프린트했다. 40달러에 사들인 그 옷들을 550달러에 판매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의 옷을 구매했다. 심지어 셀럽들도 자신들의 소셜 미디어 계정에 구매 인증을 했다. 대중은 익숙함에 새로움이 더해지니 그 물건이 가치 있다고 여겼다. 버질 아블로는 뒤샹이 옳음을 몸소 경험했다⑴.

오프 화이트

버질 아블로는 파이렉스 비전을 운영하며 패션에 확신을 얻었다. 그 경험을 확장하고자 2013년 스트릿 웨어 브랜드 ‘오프 화이트’를 세웠다. 오프 화이트는 기존의 스트릿 웨어 브랜드와 다른 방향성을 갖는다.

첫 번째, 고품질. 후드, 면바지, 티셔츠, 스웨트 셔츠 등의 스트릿 웨어는 대체로 젊은 세대가 입는다. 가격대가 합리적이며 그 가격대를 유지하려고 많은 브랜드가 소재의 품질을 타협한다. 그래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스트릿 웨어에 대한 기대치가 낮다. 그런데 티셔츠의 봉제, 로고 프린팅, 소재 품질이 압도적이면 어떨까. 마치 명품 브랜드처럼 말이다. 대중은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버질 아블로는 이를 의도했다. 서브 컬처의 대명사인 스트릿 웨어에 명품 브랜드의 고품질 정책을 차용함으로써, 스트릿 웨어의 고정관념을 깼다 ⑵ .

ⓒOff White

두 번째, 기존 디자인 차용. 오프 화이트에는 따옴표, 화살표, 대각 평행선의 시그니처 디자인이 있다. 따옴표는 문장에서, 화살표⑶는 이정표에서, 대각 평행선은 공사장 입간판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만큼 흔하다. 버질 아블로는 오프 화이트 제품 곳곳에 이 세 가지를 더했다. 단어를 강조한 따옴표는 말을 거는 느낌을 준다. 화살표와 대각 평행선은 무언의 신호를 보내는 듯하다. 로고 플레이를 하는 옷과는 달리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버질 아블로는 오프 화이트를 운영하면서 개인 협업 프로젝트를 지속해 나갔다. 나이키, 이케아, 맥도날드 등 글로벌 브랜드와 함께했는데, 그들의 제품에도 그의 상징적인 디자인을 적용하여 유쾌한 결과물을 만들었다. 진지함을 기피하고 가벼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팝아트스러운 그의 디자인은 패션의 주류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⑴파이렉스 비전은 퍼포먼스성 브랜드였다. 버질 아블로는 1년 후 파이렉스 비전을 접었다.

⑵시즌이 거듭될수록 떨어지는 품질로 논란이 잦다. 초심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⑶현재 오프 화이트는 화살표 로고를 사용하지 않는다. 두 손과 얼굴 모양의 로고로 바뀌었다.

패션 철학: For E veryone

버질 아블로는 어려서, 음악, 미술, 패션을 즐겼다. 이 셋의 공통점은 ‘포용’이다. 인류의 유산이기에 누구나 접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동네 친구들부터 전문직 종사자들까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스크린 프린트 샵에 모여서 티셔츠를 만들었다. 클럽에서는 무명 DJ이든 유명 DJ이든 다 같이 턴 테이블을 돌리며 음악을 즐겼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미술 작품은 다양한 신분을 가진 위인들이 남겼다. 그가 전공했던 건축도 마찬가지였다. 한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건축물은 특정인의 출입을 제한하지 않았다.

음악도 미술도 패션도 그리고 건축도, 어느 한 계층만을 위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버질 아블로는 자신이 즐긴 인류의 유산으로부터 포용의 자세를 배웠다. 그래서 그는 패션을 업으로 삼을 때, 누구에게나 열린 패션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에서 썼듯이 파이렉스 비전과 오프 화이트가 그 시작이었다. 두 브랜드의 옷은 대부분 남녀 겸용이었다. 한 성별에 치우치지 않았다. 또한 버질 아블로는 사회 메시지를 담은 옷도 만들었다. 2017년 미국 워싱턴에서 여성 행진이라는 시위가 벌여졌다. 주최자들은 여성·성소수자 인권, 이민자 정책 개혁, 인종 차별, 노동 환경 문제 등을 제기했다. 버질 아블로는 예술가 제니 홀저와 Planned Parenthood 티셔츠를 제작하여 그들을 응원했다.

Planned Parenthood. ⓒHYPEBEAST

흑백논리로 구분 짓는 태도는 사회에서 금하는 추세였다. 누구든 평등한 대우를 받고, 소외를 당하지 않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 패션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변했다. 특히 명품 업계가 그러했다. 관계자들은 젊은 세대를 주목했다. 소득이 높아지면서 그들의 소비력이 시장 곳곳에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딱딱한 격식보다 편안함을 선호했고 윤리적으로 올바른 브랜드를 찾아다녔다. 젊은 세대를 먼저 차지한 브랜드가 업계를 주도할 것이 자명했다. 명품 브랜드 몇몇은 체질 개선을 감행했다. 그 첫 타자가 루이비통이었다.

버질 아블로의 루이비통 데뷔 무대. ⓒLVMH

루이비통은 버질 아블로의 행보를 눈여겨보았다. 그의 디자인 철학과 패션 철학은 젊은 세대를 포용하기에 알맞았다. 루이비통은 마침내 2018년에 버질 아블로를 아트 디렉터로 영입했다. 이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버질 아블로는 같은 해 6월 28일, 그의 데뷔 무대를 파격적으로 구성했다. 런웨이 컬러를 사회 소수자들을 상징하는 무지개색으로 꾸몄고, 17명의 흑인 모델을 포함하여 다양한 인종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무대에 세웠다. 런웨이 VIP석 절반을 패션 전공 학생 3,000명으로 채웠다. 쇼의 의상은 화려한 원단으로 제작된 옷들이 주를 이루었다. 피날레는 아름다웠고 세상은 버질 아블로의 등장에 환호를 보냈다.

2021년 11월 28일, 버질 아블로는 심장 혈관육종으로 눈을 감았다. 2019년에 병을 진단받았지만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 평소처럼 버질 아블로는 일에 몰두했다. 묵묵히 오프 화이트와 루이비통 그리고 LVMH의 브랜드를 책임졌다. 그는 오리지널의 일부를 바꾸어 전에 없던 가치를 창출했다. 그는 장르를 넘나들면서 만인이 즐길 수 있는 패션을 전개했다. 그의 디자인과 패션에는 무거움과 권위가 아닌, 재치와 평등이 숨 쉬었다.

이루어야 할 일이 많다며 늘 노력했던 버질 아블로는 그렇게 떠났다. 가까운 지인들과 가족들이 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그의 마지막은 평소처럼 차분했다. 버질 아블로가 이룬 업적은 짧지만 강렬했다. 그가 이룬 업적으로 패션은 전보다 밝아졌고 세대를 아우르게 되었다. 그렇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다. 버질 아블로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Rest In Peace. Virgil Abloh 1980 – 2021.

오프화이트의 수장, 버질 아블로의 시작과 현재

버질 아블로, 오프화이트 ‘버질 아블로’라는 브랜드

에디터 : 홍석우

2010년대 패션계의 가장 중요한 흐름은 언더그라운드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스트리트 패션(Street Fashion) 브랜드가 주류 패션계에 확실히 안착했다는 점이다. ‘하이엔드 스트리트웨어’를 이끈 수많은 브랜드가 당시를 기점으로 탄생했고 주목받았다.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뎀나 바살리아(Demna Gvasalia)의 베트멍(Vetements), 헬무트 랑을 되살린 후드바이에어(Hood by Air)의 셰인 올리버(Shayne Oliver), 한정판 스니커즈 붐을 이끈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와 아디다스가 손 잡은 이지(Yeezy), 그리고 버질 아블로(Virgil Abloh)의 오프화이트(Off-White™)가 대표적이다.

오프화이트(Off-White™)의 수장, 버질 아블로(Virgil Abloh).

팝 음악계처럼 패션계에도 대중의 소비 심리에 최적화한 슈퍼스타들이 있다. 故 알렉산더 맥퀸과 마크 제이콥스, 톰 포드와 라프 시몬스, 최근의 알레산드로 미켈레와 고샤 루브친스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패션 디자이너가 웬만한 팝 스타 못지않은 인기와 영향력으로 트렌드를 이끈다. 음악가부터 예술가에 이르는 유명인사 친구를 가까이에 둔 버질 아블로 역시 스타 디자이너 범주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2014년 오프화이트 브랜드를 처음 선보인 이래, 가장 활발하게 영역을 넓힌 2017년 행보를 보면 그를 ‘패션 셀러브리티’로 재단할 수는 없다. 그는 무척 신중하게 자신의 영향력을 판단할 줄 안다. 패션 브랜드(오프화이트)와 버질 아블로라는 이름의 가치를 ‘따로 또 같이’ 끌어올리며, 독특한 위치의 컬트 레이블 디자이너에서 세계적인 패션 대가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버질 아블로의 시작

버질 아블로의 수많은 협업은 고급 기성복 업계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패션 학교에서 정석대로 패션을 배운 디자이너들과 시작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님은 아프리카 가나 출신으로, 버질 아블로 역시 가족과 함께 미국에 이민하여 일리노이주에서 자랐다. 일리노이 공과 대학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토목공학 학부에서 건축 석사 학위를 받은 그를 처음 대중이 각인한 사건은 2011년, 제이지(Jay-Z)와 카니예 웨스트가 합작한 음반의 아트 디렉터로 참여한 워치 더 쓰론(Watch the Throne)으로 그래미상 ‘베스트 레코딩 패키지’ 부문에 지명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카니예 웨스트는 대중과 타협하지 않은 불세출의 명반을 차례대로 공개했다. 버질 아블로는 카니예 웨스트의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로 참여한 작업에서 앨범 디자인은 물론 앨범이 나온 후 어떻게 대중에게 노출해야 하는지 도왔다. 카니예 웨스트와 작별 1년 후 시카고에 기반을 둔 하이엔드 스트리트웨어 파이렉스 비전(Pyrex Vision)을 설립하고, 수많은 사람이 이 브랜드의 충성도를 보인 시점에 불현듯 브랜드를 접고 다시 거점을 이탈리아 밀라노로 옮겨 2014년, 오프화이트를 열었다. 카니예 웨스트와 킴 카다시안, 비욘세 같은 거물이 오프화이트의 간결한 타이포그래피가 들어간 청바지와 밀리터리 재킷을 입었고, 출시와 동시에 영향력 있는 브랜드가 되었다.

© Off-White Spring/Summer 2017 campaign. Photographed by Piotr Niepsuj.

2017년에도 그 기조는 이어졌다. ‘브랜딩’ 관점에서 ‘현실 세계(오프라인)’에 소극적인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고, 영향력과 매출을 함께 올리기 위한 노력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라이프스타일 잡지 콤플렉스(Complex)가 주최하며 패션과 음악, 예술과 음식, 다양한 강연과 공연 등을 모은 컴플렉스콘(ComplexCon), 패션 전문 온라인 매거진 비즈니스오브패션(The Business of Fashion)이 업계 인사들을 초청하여 미래와 전망을 이야기하는 비즈니스오브패션 보이스(BoF’s Voices 2017)는 기성 패션계 최대 행사 ‘패션위크’와는 출발선이 달랐다. 이벤트의 ‘주체’가 다른 행사의 ‘관람객’이 되는 등 공급자(브랜드)와 사용자(소비자) 참여가 쌍방향적이며, 더 가까운 거리에 실재하고, 거대한 뮤직 페스티벌처럼 더 자유로운 분위기를 추구했다. 서구 문화권뿐만 아니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린 솔 DXB 2017 역시 큰 주목을 받았다(이 행사는 2012년부터 매년 열린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밀레니얼에게 손짓하다

© Nike Inc. c/o Virgil Abloh™ “Ten Icons”, 2017.

나이키(Nike)와 선보인 열 개의 상징적인 스니커즈 협업 ‘더 텐(The Ten)’ 컬렉션의 바이럴 마케팅은 작년 소셜미디어 브랜딩 사례 상위권에 있다. 세계 각국의 오프화이트 매장 계정은 열 족의 발매 모델마다 시차를 두고, 브랜드 해시태그와 원하는 사이즈를 ‘리포스트(Repost)’한 소비자에게만 당첨 기회를 주었다. 해당 도시 ‘오프라인’ 매장에서만 구매할 수 있다는 조건도 붙였다. 이제는 인스타그램 포스트 하나를 읽는 것조차 거부하는 밀레니얼 세대에게도 이 전략은 먹혀들었다. 웬만한 인터랙티브 마케팅에 꿈쩍도 하지 않는 이들이 수만, 아니 수십만 개를 리포스트했다. 2017년 가을, ‘오프화이트 나이키’가 소셜미디어를 뒤덮었다.

발매 시기에 맞춰서는 서울의 꼼데가르송 한남 매장을 비롯하여 런던과 뉴욕 등지의 주요 출시 매장을 방문하여 소비자들, 그리고 지역의 창작자들과 만나서 대담을 나누는 워크숍을 열었다. 지역 문화 단체들과 협력하여 패션과 예술, 음악과 설치 작업을 연결한 결과물을 선보이는 일종의 D.I.Y.(Do It Yourself) 워크숍이었다. 스니커즈 팬들과 대화하거나, 신발 밑창 옆면에 그들의 이름이나 별명을 직접 써주는 팬 서비스(?)도 했다. 루이비통의 남성복 디렉터 킴 존스(Kim Jones)나 일본 스트리트웨어의 대부 후지와라 히로시(Fujiwara Hiroshi), 21세기 최고의 팝 스타 비욘세(Beyonce) 같은 이들에게 ‘더 텐’ 스니커즈를 선물하며 전파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다.

‘오프화이트 제품에 달린 플라스틱 태그를 제거한 후 신어야 하는가?’처럼 사실 아무래도 좋을 문제까지 열성 팬 사이에 논쟁이 일어날 만큼, 나이키가 수시로 진행한 어떠한 협업보다도 커다란 화두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버질 아블로는 지금 젊은이들이 동경하는 요소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인스턴트 식품보다도 빠르게 식는 모바일 문화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지역 문화의 거점을 일구는 이들과 친구가 되고, 의미 있는 행사를 주최하며, 모바일 문화에 익숙하여 온라인 세상에 길든 미래 소비자들에게 참여 기회를 공유한다. 서울, 도쿄, 런던 등지의 백화점들에 있는 오프화이트 매장에서 이러한 이벤트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상업성이 짙게 깔린 채 ‘예술적으로’ 보이는 이벤트에 거부감을 지닌 이들도 존재하므로), ‘버질 아블로’라는 한 명의 창작자로서 참여하고, 참여를 유도한다.

© Social Studies Miami Pop-Up Workshop, Art Basel Miami, 2017. Images courtesy of Hypebeast.com.

이러한 연계는 탁월한 상승효과를 발휘하여 오프화이트를 모르던 이들조차 ‘독자적이고 독보적인 브랜드’라는 호감을 표하게 한다. ‘오프화이트는 ‘쿨(Cool)’해, 너도 하나 사 입어.’라는 1차원 광고가 아니다. 오프 화이트를 만드는 버질 아블로라는 ‘사람’이 벌이는 다양한 이벤트가 결국, 그 브랜드를 이야기한다. 기성 패션계가 불세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끌어들인 후 벌이는 전형적인 방식이 아니었다. 버질 아블로의 워크숍 프로젝트는 브라질 상파울루와 영국 런던, 미국 마이애미 아트 바젤(Art Bazel Miami) 등지에서 조금씩 이름을 달리하여 열었다. 브랜딩 에이전시 스와이프(SWYP)의 이근 디렉터는 버질의 방식을 두고 “앤디 워홀의 팩토리(Andy Warhol’s Factory)를 보는 것 같다.”고 평했다. 신선한 소통 방식과 브랜딩을 냉정하게 보면 이미 예술계가 행하던 형식(워크숍)을 빌렸지만, 스니커즈와 패션, 지역 문화와 결합하며 완전히 다른 결과물로 나왔고, 이제는 버질 아블로를 대표하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했다.

버질 아블로는 ‘무엇’인가?

© System Magazine No.10 Cover, Images courtesy of System Magazine.

원점으로 돌아와 그가 행한 작업을 브랜딩 관점으로 얘기해보자. ‘버질 아블로가 누구야?’가 아니다. ‘버질 아블로는 무엇인가?’이다. 2018년도 시스템 매거진(System Magazine) 10호의 표지 문구는 무척 시의적절하다. 버질 아블로가 패션계 혹은 패션계를 넘어서 벌인 다양한 프로젝트는 기성복 브랜드 ‘오프화이트’의 확장과도 연결되어 있지만, 버질 아블로라는 인물이 패션 브랜드 범주를 넘어선 ‘행위’ 자체에 더 많은 함의를 내포한다. 시스템 매거진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 대신, 버질 아블로로부터 파생한 ‘현상’들을 담기 위해 가장 어울리는 제목을 뽑았다.

© Off-White x IKEA collaboration bag from IKEA Art Event, 2017(Official Release will be 2019).

2018년에도 버질 아블로는 분주하다. 러시아 월드컵 시즌에 맞춰 새로운 나이키와 새로운 ‘스우시(Swoosh)’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2019년에 출시 예정인 가구 브랜드 이케아(IKEA)의 라이프스타일 오브제 제작을 마쳤다. 하이엔드 럭셔리에 맞춘 오프화이트를 사기 어려웠던 고객들을 위하여 ‘낫원스앤포올(Not Once and For All)’이라는 콘셉트의 캡슐 컬렉션도 오는 1월 중 출시한다(유명한 후드 파카의 가격대가 미화 100달러 남짓이다). 그는 패션 브랜드의 경영자로서 브랜드를 이끌며, 현대 예술과 건축에 탁월한 심미안을 지닌 사상가로서 제프 쿤스(Jeff Koons)같은 당대 예술가들과 담론을 논한다. 예상하지 못한 회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될 수도 있다. 심장이 뛰는 사람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기질의 브랜드가 탁월한 균형을 이루며 존재한다. 말 그대로 ‘Not Once and For Al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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